사도 바울의 인간관


창세기 2:21
여호와 하나님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본질(本質)


잠(3462)  יָשֵׁן 

1. 미완료형 יָשֵׁן       
2. 잠에 곯아 떨어지다, 3. 시편 44:24

발음 /  야센(yâshên) 
관련 성경 / 오래 살다(신 4:25), 오래다(레 13:11), 잠자다(시 13:3), 자다(왕상 19:5, 사 5:27), 잠들다(렘 51:39, 창 2:21), 주무시다(시44:23, 121:4).
구약 성경 / 25회 사용

깊은 잠(8639) תַּרְדֵּמָה 

1. 깊은 잠,  2. 창세기 2:21,  3. 창세기 15:12

발음  / 타르데마(tardêmâh) 
어원 / 729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깊은 잠(창 15:12, 욥 4:13).
구약 성경 / 7회 사용

아담을 만드신 후 잠을 재우셨다는 것은 아담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죽은 아담의 옆구리에서 갈빗대를 취하여 하와를 만드셨다.
십자가의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피를 흘리신 사건으로 신랑이 되신 예수님의 신부가 되는 교회를 세우신 것을 예표한다.

본질(本質)

라틴어 / 나투라(natura), 영어 / 에쎈스(essence)

한글사전 / 1. 본디부터 가지고 있는 사물 자체의 성질이나 모습.                 
                 2. 사물이나 현상을 성립시키는 근본적인 성질.               
                 3. 철학 실존(實存)에 상대되는 말로, 어떤 존재에 관해 ‘그 무엇’이라고 정의될 수 있는 성질.

기독교의 본질은 "예수" "십자가"

1. 자연인(自然人) / (Ψυχικὸς δὲ ἄνθρωπος)
-
φυσικό πρόσωπο

2. 성령인(聖靈人) / 프뉴마티코스(πνευματικὸς)
-
Άγιο πνεύμα

3. 세속인(世俗人) / 사르키노이스(σαρκίνοις)
-
κοσμικός

자연인(自然人)

육에 속한 사람(고린도전서 2:14)
-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현대인의 성경 /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은 하나님의 성령이 주시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적으로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일 뿐만 아니라 그들은 그것을 깨달을 수도 없습니다.

성령인(聖靈人)

신령한 사람(고린도전서 2:15)
-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현대인의 성경 / 적인 사람은 모든 것을 제대로 평가하지만 세상 사람은 그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합니다.

세속인(世俗人)


육신에 속한 사람(고린도전서 3:1-3)
-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현대인의 성경 /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적인 사람을 대하듯이 말할 수가 없어서 세속적인 사람,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를 대하듯 말합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젖을 먹이고 단단한 음식을 먹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그것을 소화시킬 능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직도 여러분은 세상 사람들처럼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시기와 다툼이 있는데 어찌 육적인 세상 사람들처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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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에 있는 자냐 영에 있는 자냐(롬 8:8-9)'의 기준은, 거듭났느냐 아니냐로 결정됩니다.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말한 육으로 난 것과 영으로 난 것의 기준(요 3:6)이나 천국 입성의 자격도, 성령으로 거듭났느냐 여부에 있습니다(요 3:5).

바울 사도가 에서(Esau)를 '육체를 따라 난 자'로, 야곱(Jacob)을 '성령을 따라 난 자'로 구분한 기준도 거듭남 이었습니다(갈 4:29).

영역본 성경은 거듭나지 못한 '육신에 속한 자'를 자연인(natulal man)이라 번역했고(고전 15:46),
윌리엄 쉐드(William G. T. Shedd, 1820-1894) 역시 그의 명저 "Sernons to the Natulal man"에서, 육신에 속한 자를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the natulal man)으로 풀이했습니다.

식품은 자연산 그대로가 좋지만, 사람은 아담으로부터 난 자연산 그대로는 부패하고 더럽습니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부정한 짐승의 상징으로 언급한 돼지는(마 7:6), 거듭나지 못한 유대인들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유대인처럼 율법에 완벽한 이들이 없다고 공인되던 시대에, 그들이 부정함의 상징이 된 것은 파격입니다.
이는 부정하고 정결함의 기준이 인간 윤리가 아닌 거듭남의 여부에 달려있음을 말해주며, 기독교 윤리의 코페르니쿠스적인 새 기준의 출현이었습니다.

성경이 육신에 있는 자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한 것도(롬 8:8),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은 행위 이전에 존재 자체로 하나님을 불쾌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를 미워한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라는(롬 9:11) 원천적 이유 외에, 성령을 따라 났느냐가 관건이었습니다.

이는 기독교 인간론이 행위론적(behavioral) 이전에 존재론적(ontological)이며 관계론적(relational)이라는 확증이며,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물이고 하나님 의존적인 존재라는 사실과 직결됩니다.

인간은 고결한 덕행자냐 아니냐를 불문하고, 존재론적(ontological)으로 다시 나지 않는 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썩은 오물은 그 악취와 추한 몰골만으로도 능히 사람을 불쾌하게 하듯,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존재 그 자체로 하나님을 불쾌하게 만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더 핑크(A. W. Pink, 1886-1952)가 "인간의 행위적인 죄는 부패한 인간 존재에서 나온 열매일 뿐, 하나님을 불쾌하게 만드는 근본 요인은 타락한 인간 존재 자체"라고 한 것은 올바른 지적입니다.

"인간은 교양이 있고 교육받고 세련되었고 종교적이기 조차 할지라도 그의 마음은 '심히 부패'하였다(렘 17:9).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행해지는 것은 하나도 없기에... 아담의 모든 후손들은 다 타락한 자들이고 인간의 존재의 모든 부분은 죄로 인해 오염돼 있다. ... 그의 성향은 변질되어 버려서 그는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을 사랑하고 사랑하시는 것을 미워한다.

그것은 몇 개의 잎사귀가 시들어버린 것이 아니라 나무 전체의 뿌리와 가지까지 썩어버린 것을 의미한다. ... 인간 안에는 그 존재의 근원과 기질 안에 본래부터 부패되고 원래 악마적인 것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죄는 그 열매에 지나지 않는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미워하심을 받을 뿐더러, 그 자신도 하나님을 본능적으로 싫어합니다.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롬 3:10)"는 말씀은 다만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소극적인 무관심(무지)을 넘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롬 1:28)' 의도적 반감을 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막 9:40)'는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며, 하나님에 대한 노골적인 적개심을 표하지 않는 단순 무관심자는 기독교의 적대자가 아니라는 낙관론을 폅니다.

그러나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마 12:30)"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사실 그들의 무관심은 포장된 적대감의 표출입니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우리 의식 세계는 자신이 싫어하는 것에 대해선 의도적으로 눈을 감는 속성이 있다고 합니다. 인간이 자기를 창조한 하나님께 대해 무관심(무지)으로 일관 할 수 없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는 이사야 선지자의 책망대로 미물 짐승보다 못합니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사 1:3)."

성경이 하나님 무지(무관심)에 대한 인간의 변명이 심판 때에 그를 변호해주지 못할 것이라고 한 것은(롬 1:20), 그들의 숨겨진 적개심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직설 화법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을 심판받을 죄로 선언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살후 1:8)." 그들의 하나님 무지가 비의도적이고 소극적인 것이 아닌, 부러 잊으려는(willingly are ignorant, 벧후 3:5) 의도적인 것임을 명백하게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진주와 돼지 비유에서 사람이 진주를 던지면 돼지가 그것을 발로 밟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던져준 사람에게 덤비기까지 하는 것은(마 7:6),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무관심 뒤에 적개심이 도사리고 있음을 은유적으로 표현 한 것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 드러내는 사람들의 냉소와 무반응은, 사실은 하나님에 대한 숨겨진 적개심의 표출입니다. 복음 전도자나 설교자들이 전도를 녹록한 태도로 접근할 수 없게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육신에 속한 자들의 하나님에 대한 적개심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반감으로도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자신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감이 하나님을 미워한 데서 연유됐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 나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요 8:42)."

그는 세상이 제자들을 미워하는 이유 역시, 그들이 자신에게 속한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9).",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요 15:18)."

동생 아벨을 형 가인이 돌로 쳐 죽인 것은, 가인을 미워해서라기보다는 아벨이 믿는 하나님을 미워한 때문입니다. 동생의 제사는 받고 자신의 제사는 안 받는 하나님에 대한 적개심이, 동생을 향한 질투심으로 나타났습니다(창 4:3-8). 그리스도를 전하는 스데반에게, 유대인들이 귀를 막고 달려들어 돌로 쳐 죽인 것은 스데반이 전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적개심 때문이었습니다(행 7:57).

그리고 성경이 육신에 속한 자를 '육신을 좇는 자(롬 8:5)'로 지칭하는 것은, 그가 유별나게 저급한 육욕을 좇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타고난 본성에 충실한 거듭나지 못한 모든 자연인을 뜻합니다. 영적으로 죽은 자들은 신령한 것에 대한 감각과 갈망이 없기에 본성적인 것만을 쫓기 마련입니다.

마치 사자가 풀을, 돼지가 진주를, 까마귀가 깨끗한 고기를 좋아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창 8:7-9). 망령된 에서가 장자의 기업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먹는 것은(창 25:33-34), 영적인 것의 가치를 모르고, 땅의 것만 탐하는 거듭나지 못한 자의 속성을 드러낸 것입니다.

이어서 거듭나지 못한 자의 '육신의 생각'과 그것이 갖다 주는 '사망'에 대해 언급하고자 합니다. 성경이 육신의 생각이 사망이라고 한 것은(롬 8:6),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의 생각의 허망함(엡 4:17)과 거기에 따르는 심판을 말한 것입니다. 죄와 허물로 죽은 자들의(엡 2:1) 모든 생각은 죽음같이 허망하고, 그 허망한 생각이 그를 사망에 빠뜨립니다.

성경이 죄 된 행실을 죽은 행실과 동일시하고 있음도(히 6:1; 9:14) 같은 맥락이며, 그 생각의 내용은 선악을 불문합니다. 악하고 더러운 생각뿐만 아니라, 불쌍한 자들을 향한 선한 연민의 마음도 사망의 범주를 벗어나게 못합니다.

이는 그 선한 마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는 동기의 발로가 아닌, 자연인의 본성과 자기 의(義)의 발로에서이고, 선행의 원천적인 힘도 육신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선악을 불문하고 본능으로 행하는 모든 것을 멸망 받을 짓거리로 폄하합니다. "또 저희는 이성 없는 짐승 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유 1:10)."

계신대학원대학교 설립자 이병규 박사가 '짐승 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을 해석하여-유별나게 짐승 같은 추잡한 속성을 쫓는 것이 아닌-짐승과 같이 오관(五官)으로 느껴지는 본능 따라 행하는 자기 자랑, 자기중심, 자기만족을 위해 하는 것이라 하고, '이성'을, 중생한 영혼이 사용하는 선한 기관으로 풀이한 것은 적절합니다.

죄인은 악을 행하면서도 죄를 쌓을 뿐더러 선을 행하면서도 죄를 쌓습니다. 이는  그의 선행 동기가 자기 본성과 의의 구현에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롬 14:23)"고 한 것도 같은 관점입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참된 행위를, '성령으로 행하며 예수를 높이고 육체의 힘으로 하지 아니하는 것'이라 규정했습니다(빌 3:3). 이 기준에 맞출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거듭난 사람뿐입니다.

그러나 '육신의 생각'이, 다만 거듭나지 못한 자에게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거듭난 사람임에도 그 안에 남아있는 옛사람이 내는 생각도 육신의 생각입니다. 베드로가 분노하며 말고의 귀를 자른 것(마 26:51), 외식(갈 2:13-14), 십자가를 지실 예수님의 대업 앞에서 하나님의 일보다 사람의 일을 생각한 것(마 16:22-23) 역시 다 육신의 생각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심히 다투어 갈라선 것(행 15:39),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작정한 연보를 떼어먹은 것(행 5:1-10),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파당을 짓고 경쟁심과 교만에 빠진 것(고전 1:11-13)도 다 육신의 생각입니다.

그런 육신의 생각들로 인해 사망의 악취를 풍겨내며 타인을 실족케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거듭나지 못한 자들의 육신의 생각처럼 사망의 판결을 받게 하지는 않습니다. 거듭난 자들에게는 성화의 판결은 있겠지만 더 이상 칭의의 심판은 없기 때문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이 갖는 육신의 생각이 하나님과 원수 된다는 것도(롬 8:7) 말하고자 합니다. 죄로 죽은 인간은 본성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합니다(고후 10:5). 성경이 사람의 계획하는 바가 어릴 때부터 악하고(창 8:21), 마음의 생각이 항상 악하다(창 6:5)는 말은, 단지 인간은 어려서부터 도덕적으로 부패하다는 뜻이 아니라, 아담의 원죄를 유전 받은 인간은 날 때부터 하나님을 부인하고 대적하는 존재로 난다는 뜻입니다.

존 번연(John Bunyun, 1628-1688)도 같은 견해를 피력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원수가 되나니(롬 8:7; 골 1:21)'는, '본래 인간은 하나님에 대하여 원수이고 그의 마음에서 원수 된 자'라는 뜻이다."

나아가 거듭나지 못한 자의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법(롬 8:7)'에 굴복할 수 도 없습니다. 이 하나님의 법은 단순히 율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고 구원 얻는 '믿음의 법(롬 3:27)'이 그 핵심이며, 오직 성령으로만 받아들여집니다(고전 12:3). 거듭나지 못한 자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일 뿐입니다(고전 2:9). 동물이 사람의 생각을 알 수 없듯, 성령 없는 자연인에게는 믿음의 법이 어처구니없게 보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전 2:9)." 오직 예수가 위하여 죽은 구원 예정을 받은 자, 곧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으로 거듭난 자만 예수 믿고 구원 얻는 도리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48).",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반면 영의 사람이 갖는 '영의 생각(롬 8:6)'도 있습니다. 이는 타계주의자들의 세속사를 초탈한 생각, 혹은 신비주의자들의 소위 탈혼(입신) 상태에서 나오는 계시 같은 것이 아닙니다. 이는 자연인의 본성에는 없는, 성령의 거듭남으로 우리 안에 부어진 하나님을 향한 생각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가 정의한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영적인 사람들이 이전에는 전혀 몰랐던 새로운 것을 영혼이 의식하게 되는 것은 결과적으로 마음에 전적으로 새로운 지각이나 감각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 참된 성도는 새로운 영적 지각과 감각의 원리가 생긴다, 그리고 참된 성도는 이 새로운 감각으로 영적이고 신령한 것들을 알게 된다."

존 오웬(John Owen, 1616-1683) 의 견해 역시 같은 취지로 보입니다. "영의 생각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마음 자세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는 유일한 마음 상태이다."

'영과 영의 생각'에 대한 그의 견해도 탁월합니다. "성경에서 영은 '성령(롬8:9)'이나 '성령에 의해 신자 속에 생성되는 새로운 영적 생명(요 3:6)'을 뜻한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영의 생각이란 '신자 속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영적 생명의 활동'을 뜻한다. 이 새로운 영적 생명은 신자가 영적인 생각을 하게하며 기뻐하게 한다. 회심하기 전에는 이런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불신자는 땅의 일들을 좋아하지만, 신자는 하나님의 일들을 우선시한다."

이렇게 성령으로 거듭나고 하나님과 화목한 영의 사람의 생각에는 생명과 평안이 깃들어 있습니다. 이는 마인드 콘트롤(Mind-Control)이나 종교 수양으로 만들어진 심리학적인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하나님과의 화평과 초자연적인 성령으로 말미암아 마음에 이루어진 하나님나라의 경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 5:1).",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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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령한 사람 (고린도전서 2:13~16)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성령을 받았느냐? 라는 질문은 그리스도인이 되었느냐? 아니면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했느냐? 하는 기준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이란 호칭은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에서 약 일년간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 후 복음을 믿고 삶이 변화된 사람들에게 처음 붇여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바로 영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을 가리켜 부르는 호칭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주위에는 영적인 삶이란 무엇인지 참된 영적인 삶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고 영적인 삶을 살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참된 영적인 삶을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떻게 하면 예수님처럼 현실에 확실하게 발을 딛고 살면서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영적인 사람이 될 수 있을까’하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예) 예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참된 영적인 삶이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질적인 삶을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완전히 기쁘시게 하고 영화롭게 해드린 유일한 분은 그리스도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이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닮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영적인 삶란 예수 그리스도를 철저히 닮아가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그리스도 중심의 종교입니다.
내가 성화된다는 것도 그리스도 중심이요 영적이라고 하는 것도 그리스도 중심이며 그리스도인의 삶 자체가 바로 그리스도 중심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1)고 고백했습니다.

바울은 참된 영적인 삶을 제대로 깨달은 분이었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한 순간부터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도록 일하고 계십니다.   
모든 여건을 통해 모든 방법을 통해서 역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화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 안에서는 이 순간에도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성품이 형성되고 있습니다. 이것을 신학에서는 거룩됨 또는 성화라고 부릅니다.
  
사람의 모습을 육에 속한 자 곧 육적인 사람(고전 2:14) 육신에 속한 자(고전 3:1) 그리고 신령한 자 곧 영적인 사람(고전 2:15)으로 말씀 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자연인) 고린도전서 2:14 / 불신자

육에 속한 사람(프쉬코스 데 안드로스)
새 생명을 얻지 못한 상태의 자연인(표준역)을 뜻하는 거듭나지 못한 사람 자연인(현대인의 성경)으로 영적이지 못한 사람(공동번역)으로 불신자에 해당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육적인 삶을 삽니다.
그러나 영적인 삶에 있어서는 영적으로 살고 있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육으로 한번 태어난 자연인은 영적인 진리를 잘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미련하게 보이며 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연인에케는 영적인 진리들이 바보처럼 우스꽝스럽게 보인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대해 사도 바울이 지적한 말씀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2:14 /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예수님께서도 니고데모에게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네가 한 번 더 태어나야 하겠다는 말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그 말씀이 이해가 안되어서 어머니의 배속에 들어 갔다 나와야 하느냐고 하였습니다.
한번 태어난 육신과 지성으로 한 차원 위인 영적인 것에 대해 이해를 하려니 안된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예수님을 찾아다닌 무리들이 그 전날 예수님께서 수 많은 사람을 먹이셨던 것 때문에 다시 찾아온 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썩을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썩지 않을 양식을 구하라”고 하셨습니다(요 6: 27).

예수님이 떡을 먹이신 것은 떡에 목적을 두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생명의 떡임을 알게 하려고 행하신 것입니다.
자연인은 예수를 믿고 성령으로 거듭나야 복음에 대해 이해가 가능해집니다.

예수님께서도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습니다(요 3:3).

따라서 안 믿는 사람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게 화를 내고 욕하는 것에 대해 속상해 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이해가 안되어서 그러는 것입니다.

육적인 사람의 본성은 자기 중심적입니다.
심지어 선한 일을 해도 그 안에 이기적인 동기가 숨어 있습니다.
자아가 마음 보좌에 앉아 있고 예수님은 그의 삶 밖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육적인 사람은 영적인 진리를 잘 받아들이지 않을 뿐더러 하나님의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고전 2:14). 
이것은 자연인이 무식하다는 소리가 아니라 영적인 것을 이해할 능력이 없다는 말입니다.
  
목사님이 기독교에 대한 강의를 하는데. 한사람이 자꾸 엉뚱한 질문을 해대고 반론을 하면서 강의를 방해하더랍니다.
그래서 참다 참다 “전공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핵공학이라고 하여서 “핵이 소금으로 만들어진 것을 아시요?” 했더니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린가 하고 의아해하더랍니다.
그래서 ’핵에 대해 전혀 모르는 내가 핵이 어쩌고 저쩌고 하면 얼마나 웃깁니까? 마찬가지로 기독교에 대한 것은 내가 전공했으니 내가 좀 얘기하게 놔두시오”라고 했더니 그 사람은 무안해서 그냥 나가버리고 말더랍니다.

육적인 사람 영적인 생명이 그 안에 없어 진리에 대하여 이해 할 수가 없습니다.

육신에 속한 자(세속인) 고린도전서 3: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육신에 속한 자(사르키노이스)는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이라고 하는 표현에서 보듯 성령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성숙하지 못한 신앙 때문에 성령에 사로잡혀 있지 않고 자연인의 본성에 더 지배 받아 육신적 기준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이들을 의미 한다고 봅니다.

예수는 믿는데 생각하고 사는 모습이 예수 안 믿는 것같은 사람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표준역)으로 아직도 영적인 신앙인이 아니기 때문에 영적인 사람에게처럼 말해봤자 못 알아들을 것이므로 그 수준에 맞게 말하겠다고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서신에서 사도 바울은 이야기합니다.

육신에 속한 자의 본성은 자아가 마음 중심에 자리잡고 예수님은 한편구석에 위치하고 있는 세속적인 사람(현대인의 성경)입니다.
  
거듭났다는 자체가 성화된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가끔 혼동되는데 거듭났다는 것은 영적으로 태어났다는 것이지 영적으로 성숙한 것은 아닙니다.
마치 아이가 태어났다는 것과 성인이 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육신에 속한 자의 특징은  미성숙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린 아이 다루듯이 잘 보살피고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또한 영적인 진리를 아직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잘 설명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교인들에 대해 질투심이 많고 잘 비판한다는 것입니다.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은 남에 대해 못마땅한 것이 많습니다.


신령한 사람(성령인) 고린도전서 2: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신령한 자(프뉴마티코스) 성령께서 내주 하시는 영적인 사람(공동번역 현대인의 성경) 성령으로 거듭난 새 생명의 사람 성령 충만한 사람마음의 중심 보좌에 주님을 모시고 섬기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어떡하든지 나 자신이 점점 없어지고 그 대신 예수님이 성령님이 점점 내 삶을 점령하시게 됩니다.
  
성령은 예수 믿는 사람에게 임합니다.

고린도전서 3: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 합니다.

그러나 내재하시되 얼마만큼 성령이 내 삶을 점령하셨는가는 또다른 이야기입니다.
만약 내 가슴 속에 질투,분노 욕심 등이 확 차 있다면 성령님이 눌려서 활동하시기 어려워집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를 믿자마자 마음속의 욕심,악독,분노,질투 같은 것을 자꾸 내버러서 비워 드릴 때 성령께서 더 강하게 역사하십니다

에베소서 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에게 성령이 임하십니다.
성령은 말씀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감화로 기록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씀만 철저히 알아도 성령의 뜻을 대부분 알 수가 있습니다.
말씀과 기도 외에는 신앙이 성장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신령한 사람 곧 영적인 사람은 진리릍 배우고 싶어할 뿐 아니라이해를 잘 합니다.
설교를 들은 후 그 설교가 귀에 쏙쏙 들어오며 참 좋은 것 배웠다고 기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설교자가 특별히 설교를 잘했기 때문이라기 보다 그 사람에게 들을 귀가 있기 때문입니다.
머리로 들은 것들이 금방 가슴으로 전해 집니다.
    
신령한 사람 영적인 사람은 또한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은 마음이 있습니다.
영적인 사람은 시간이 흐를수록 예수를 닮아갑니다.
그것은 지식이 늘어난다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예수를 닮는 것과 지식이 느는 것이 비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식이 는다고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은 마음을 갖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가야 할 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지식적으로 하나님 아는가 얼마나 봉사하고 있는가를 놓고 우리의 신령성을 가늠하시지 않습니다. 

평생 조용히 산골에 묻혀 살면서도 예수를 많이 닮아 신령성을 가진 사람이 기독교 역사에는 많이 있었습니다.
크게 이름 내며 일하지 않았어도 그저 자그마한 일이나마 예수님을 닮은 신앙으로 묵묵히 해내며 죽어간 사람들이 구석구석 많이 잇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모릍지라도 하나님은 그들을 기뻐하셨고 그들을 통해 영광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께 헌신(devotioo)하였나로 신령성의 척도틀 삼으십니다.
'헌신’(devotion)은 단순한 헌신이 아니라 헌신과 깊은 사랑이 합해진 상태를 말합니다.
나 자신을 바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자신을 바친다고 하는 것은 나의 재주와 찬송과 열정뿐 아니라 나의 고민과 슬픔도 바치는 것입니다.
찬송은 바치면서 고민은 내가 붇들고 있으면 온전한 헌신이 아닙니다.
제일 사랑하는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숨길 것 하나 없이 다 드리는 것 그것이 바로 헌신입니다.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얼마나 친숙한가 하는 친숙도로 하나님은 신령성을 판단하십니다. 
  
신령성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친숙합니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만큼 친숙한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신령성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과 친숙하며 하나님의 말씀과 친숙하며 하나님께 기도하기에 친숙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기에 친숙합니다.
하나님과 더 깊이 친숙할수록 아들이 아버지를 닮아가듯 하나님을 더 많이 닮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이 얼마나 예수님을 닮았는가 하는 것으로 신령성을 분별하십니다.
신령성은 주님을 얼마나 닮았는가 하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참된 사랑을 나누는 두 부부가 서로를 닮아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친숙할수록 부부는 더 깊은 사랑과 교제률 나누게 되며 마침내 얼굴과 식성과 성격까지 닮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말과 행동과 인격이 얼마나 예수님을 닮았나 하는 것으로 우리는 그가 신령성을 가졌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영적 신앙인인지 아닌지 또 어느 정도 영적인지 알아 보기릍 원한다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합니다.
내가 그 분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
여기서 ‘안다’고 하는 것은 막연히 상대방의 배경이나 현실을 아는 정도가 아니라 얼마나 친숙하게 상대방에 대해 아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분을 얼마나 사랑하는가?
스스로에게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많은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
새벽기도도 열심히히 다니고 성경공부를 열심히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열심인 사람일수록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느냐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의 마음 깊은 곳에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이 모든 것은 헛된 것입니다.

신령성은 얼마나 그분을 닮았는가입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닮고 딸도 어머니를 닯습니다.
아버지만큼 아들을 사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머니만큼 자기 딸을 사랑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아내는 남편을 알고 남편은 아내를 압니다. 부부 사이만큼 서로를 잘 알고 서로를 사랑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을 잘 알고 사랑한다면 알게 모르게 그 사람을 닮아가게 됩니다.
  
참된 영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예수님을 닮은 모습일 것입니다.
참된 영성이란 예수님을 닮아가는 데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영적인 사람 곧 신령한 사람은 성령에 감화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성령의 조명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는 보이는 세계가 모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압니다.
그는 보이는 세계 저 너머에 보다 본질적이고 궁극적이며 영원한 세계가 있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관한 일보다는 저 세상에 관한 일에 삶의 비중을 두고 힘을 쓰고 노력을 합니다.
한마디로 그는 이 세상 사람들이 가진 '육안'에 믿음의 눈인 '영안'을 하나 더 가진 사람입니다.

영에 속한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은 영적 분별력을 갖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이 세상과 저 세상,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구분합니다.
그는 이 세상 일을 멸시하거나 포기하지 않지만 거기에 얽매이거나 크게 영향 받지 않습니다.
세상일을 추구하거나 쾌락에 몰두하는 일이 하나님과 원수가 됨을 알기 때문에(약 4:4) 세상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삽니다. 

반면 그는 하나님이 요구하고 성령이 불러일으키는 거룩한 소욕에는 적극적입니다.
그는 '영원'과 비교하여 이 세상에서의 삶이 지극히 짧다는 것을 앎으로 이 세상에서의 삶을 '영원'을 위하여 과감하게 투자합니다.
그는 삶에 있어서 모든 일의 우선순위를 압니다.
그에게는 모든 일의 판단 기준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으므로 그의 판단은 정확하며 오류가 없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 만족할 만큼 실수 없이 사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로부터 지탄받고 비난받을 만큼 실수투성이의 삶은 살지 않습니다(15절).

영에 속한 신령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습니다.
신령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대속 교리와 가르침의 진정성을 압니다.
그의 가르침에 동조하고 굴복하며 순복하며 그 뜻에 따릅니다.
그에게는 그리스도의 내주하시는 영이 계시므로(롬 8:9) 그 영의 활동에 의하여 그는 그리스도의 생각을 알게 되며(11절) 그 뜻에 굴복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성이란 말은 성경에 없습니다.
신령함이 영성입니다.
신령한 사람으로서 참된 영성의 사람으로서 하나님께 영광돌리며 사명 감당하는 이 시대가 요구하는 그리스도인으로 무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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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영적인 사람인가?

들어가는 말 

우리의 몸을 축구 공으로 비유하여 보자 겉 가죽은 사람의 몸튜브는 혼공기는 영을 가리킨다.

또한 바울은 사람을 세 종류로 구분합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 세속인(고전 3:1-3)
육에 속한 사람, 자연인(고전 2:14)
영적인 사람, 거듭난 사람, 성령인(고전 3:1)

예를 들어 봅시다.

사람을 축구공으로 비유해 봅시다.
축구공의 겉가죽은 사람의 육체
축구공의 튜브는 혼
튜브안에 채워진 공기는 영이라고 하겠습니다.

육체라는 몸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을 보고, 느끼는 감각기관으로써 물질 세계를 접하고 있다.
혼은 육체의 다섯 가지 감각기관을 이용하여 물질 세계를 연구하고 사고하여 자기 자신을 표현하고 외부와 교류를 갖는 역할을 한다. 혼으로 들어가는 문은 상상, 의식, 기억, 사고, 감정이다. 

상상의 문(Imagination)은 육체의 시각에 해당되는 것으로서,  혼에 있어서 보는 눈과 같은 것이다.
의식의 문(Gate of Conscience)은 육체의 후각에 해당되며 혼이 선악의 존재를 구별하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기억의 문(Memory)은 청각에 해당되며 전에 들은 것을 혼이 재생하도록 한다.
이성(사고)의 문(Reason)은 미각에 해당되며 맛으로 음식을 비교하듯이 혼이 사실을 비교하게 해준다.
감정(애정)의 문(Affection)은 촉각에 해당되는데.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을 만져서 알 수 있듯이 혼이  느끼는 것이다.

"영"(spirit)은 "혼"(soul)과 "몸"(body)을 통하여  외부의 물질을 이해한다.
영의 감지능력은 영적인 것으로서, 믿음, 소망, 경배, 기도 등의 일을 한다.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는 인간의 영은 하늘로부터 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아담이 타락하자 죄는 영의 창문을 닫고 커텐을 쳐버렸으며 "영의 방"은 "죽음의 방"이 되어버렸다.
지금도 거듭나지 못한 영은 죽은 상태로 남아 있다.

성령의 능력으로 "빛"과 "생명"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생명이 그 방안에 거해야 빛과 생명으로 가득차게 될 것이다.
그때서야 비로소 우리는 왜 "자연인"이 "영적인 일"들을 이해할 수 없었는가를 알게 된다.
영적인 본성이 거듭나기까지는 영적인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자연인의 영은 어둠속에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의지(Will)"가 문 앞에 있다가 성령이 들어오려는 것을 방해한다.
성령이 그 사람의 "영"에 들어와  거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칼"인 "하나님의 말씀" 앞에 의지가 굴복해야만 한다.

 "선"과 "악"의 전쟁터는 인간의 "혼"이다. 성령이 사람의 "영"에 자리잡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성령은 "혼"과 "육"에도 접근해야 한다.
그 때까지는 사람이 성화될(Sanctified) 수 없는데, 이는  "거룩함"이라는 것은 영과 혼과 몸이 "성령으로 충만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건강한 혼과 영은 건강한 몸을 필요로 한다.
몸이 육신의 정욕으로 넘겨지거나  또는 심지어 몸을 쇠약하게 하는 지나친 금식으로  혼과 영이 함께 고통을 받으면 전체 인간이  영적으로 병들게 된다. 

이제 혼과 영이 몸을 떠나 뒤의 상태를 살펴보자 "부자와 나사로"에 관한 기사에서  우리는 지하 세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지하 세계"는 둘로 나뉘어져 있는데 그 사이는 건널 수 없는 구렁이 있으며 그것을 "끝없이 깊은   구렁"이라 한다. 이 곳은 악한 영들(마귀들)이 일시적으로 묶여 있을 곳이다. 그 곳의  왕은 "아폴루온(Apollyon)"인데 하나님께서 가두어 두셨다가 원하실 때에 천사를 시켜 잠깐 풀어 주실 것이다(계 9:1-11;17:8;20:1-3).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기 전에 죽은 의로운 사람들의 혼과 영은 "지하 낙원"에 있었다. 거기서 그리스도는 십자가 상에서 죽었던 "회개한 강도"를 만나셨다. 그리스도의 혼과 영은 그가 부활하신 날 지상으로 돌아 오셨으나 주님은 혼자 오신 것이 아니었다. 낙원에 있던  자들을 함께 데리고 올라오셨으며, 그후 낙원의 문은 잠그셨고 지금은 사망과 지옥의 열쇠를 갖고 계신다.(계 1:18) 여기에서 "사망"은 지하 세계의 "무덤"과 "하데스"를 나타낸다. 

그들은 몸을 입고 무덤에서 일어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한 첫 열매들로 주님과 함께 하늘로 올라갔다(마 27:52,53). 그들은 "셋째 하늘"로 올라갔는데, 그곳은 사도 바울이 갔던 곳이었다(고후 12:1-4).  바울은 그곳을 낙원이라 불렀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이후 죽은 모든 의로운 자들은 그곳으로 가서 "주와 함께" 있을 것이다(빌 1:23,고후 5:8). 

자신의 신부인 교회를 만나시려고 공중에 오실때 주님은 "셋째 하늘"의 낙원으로부터 이 의로운 혼들을 데려오실 것이다. 데살로니가전서 4:14에는 "예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을 우리가 믿는다면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예수 안에서 잠든 자들"도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땅으로 내려와 자신들의 몸을 되찾아 무덤에서 일어나서 "변화 받은 성도들"과 함께 올라가 공중에서 그리스도를 만날 것이다.

 

  그러나 죽은 "악한 자"의 혼은 계속 "지하 세계"의 "한 부분"인 지옥에  갇혀 있다가, 두 번째 부활이 이루어질 때에야  땅으로 돌아와 자신들의 몸을 다시 입고 "큰백보좌 심판석" 앞에서 심판 받게 된다. 그들은 그 심판에서 "둘째 사망"의 선고를 받게 되며, 그 의미에서  그들은 다시 죽어서 육신을 잃게 되며, 몸에서 이탈된 혼은 불못에 던져져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 가운데서 고통을 받게 된다. 혼은 불에 타지 않으므로 악한자의 혼은 불못(둘째 사망)에 던져져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 가운데서 고통을 받게 된다. 혼은 불에 타지 않음으로, 악한 자의 혼은 글자 그대로 영원히 불 가운데  있게 된다.

 

땅이 "불로써 타버리면(Renovated)" 사탄을 비롯한 하늘의 모든 "악한 권세들"은 갇히게 될 것이며 그때 하늘은  반란을 일으켰던 모든 악한 영들로부터 "깨끗하게" 될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사람은 타락이전의 아담의 상태로 회복되며 자연계와 영의 세계 사이를 나누고 있던 "휘장"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2. 들어가는 말

 

 교회(모임체)에서는 "영적인 사람"은 그것을 알지만 영적인 사람이 아닌 사람은 이것을 모른다고 하면서 성별되어있는 채  회자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보다 더 잘못된 생활을 하면서 당당할까?  왜 그들은 비성경적인 사업과 비리와 사회의 비난을 받으면서도 영적인 사람으로 허세를 부리며 허풍를 떨까? 많은 의문이 난다. 하여, 성령이 가르쳐주시는대로 "영적인 사람"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하자!

 

 1)  『사람의 일을 그 사람 안에 있는 사람의 영이 아니면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이 아니면 아무도 모르느니라』(고전 2:11).

 

  (1)  영에는 세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의 영이며, 세 번째는 더러운 영, 즉 사탄의 영이다. 성경은 또 짐승에게도 영이 있다고 말씀한다. 『사람의 영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영은 땅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누가 알리요?』(전 3:21). 이렇게 보면, 이 우주에는 네 가지 유형의 영이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지만, 짐승은 영적인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육체적인 필요를 충족하고 자신의 몸이 편안하기만 하면 나머지는 운명에 맡긴 채 행복할 수 있느냐 하면, 절대로 그렇지가 않다. 그것은 인간이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짐승은 육신적인 욕구만 충족하면 그것으로 충분히 행복하다. 인간도 육신을 갖고 태어났지만, 그것이 타고난 모든 요소의 핵심이 될 수 없다.

육신이 인간이 타고난 모든 요소의 핵심이 될 수 없다는 것은 그것이 죽어 썩으면 벌레들의 밥이 된다는 것을 알기에, 육신만이 아닌 다른 무엇인가를 위해서도 살려고 한다는 것을 보면 자명하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기에 그 중심에 영이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인간은 육신의 필요를 충족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만족할 수가 없으며, 인간은 그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영적인 필요를 충족해야만 비로소 행복을 느낀다. 인간은 육신을 위하여 밥만 먹으면 되는 존재가 아니다. 그러나 짐승은 밥만 먹으면 한없이 행복하다. 인간은 육신을 위해 밥을 먹지만, 영에게도 무엇인가를 먹여야만 비로소 행복을 느낀다.

 

  (2)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도 새들은 갖가지 아주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인간과 짐승들 사이에 완전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느냐 하면, 결코 그게 아니다. 아무리 훈련을 잘 시키고 아무리 집에서 함께 산다고 해도 인간과 짐승들 사이에는 어딘가 건널 수 없는 간격이 있기 마련이다.

이 틈은 인간이 영적인 존재인데 반하여 짐승들은 그렇지가 않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생기는 간격이며, 이 간격은 도저히 뛰어 넘을 수 없는 틈이다. 그래서 짐승은 사람의 일을 결코 알 수가 없다. 사람의 일은 사람의 영이 아니면 결코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짐승이 사람의 일을 알려면 사람의 영을 소유해야만 한다. 그것이 만일 가능하다면 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이 아니면 인간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인간이 하나님의 일을 알려면 하나님의 영을 소유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다행히도 하나님께서는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을 소유할 수 있도록 해놓으셨다.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새 생명을 얻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하나님의 영을 넣어 주시는 것이다. 구원받은 우리는 세상의 영을 버리고 하나님의 영을 받았다. 구원받은 우리들에게 이처럼 하나님의 영을 넣어 주시는 까닭이 무엇인가?

 

 2)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 (12절).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12절).

 

   (1)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을 받도록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 말은, 우리가 새롭게 태어나면, 전에는 알지 못했던 무엇인가를 알게 된다는 뜻이다. 우리가 거듭나지 못했을 때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조차도 알지 못했고,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창조하셨다는 사실도 몰랐으며,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나에게 진리를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도 몰랐고, 그분께서 거룩하신 분이며, 진실하시며, 신실하시다는 사실들, 그 어느 것도 알지 못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거듭나지 않고는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었다. 도무지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는 명철이 터럭만큼도 없었으며, 하나님께서 내 인생에 어떻게 개입하시는가에 대해서 눈꼽만치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은 말할 것도 없으려니와, 마귀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마귀가 얼마나 막강한 힘을 갖고 있는지도 알 길이 없다. 그러나 거듭나고 구원받은 우리는 이제 이러한 모든 것들에 대해서 잘 알게 되었다. 어떻게?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을 받았기 때문이다.

 

  (2)  하나님께로부터 온 이 영은 삼위일체의 한 분이신 인격적인 성령, 그분을 지칭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분”이 아니라 “그것”(it)으로 표현되는 “영” 그 자체를 의미하기도 한다는 것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시거니와』라고 말씀하고 있는 로마서 8:16에서 성령을 대문자 “Spirit”로 표기하여 인격적인 분으로서의 그분을 나타내고는 있지만, “성령이 친히”에서 “Spirit himslef”가 아니라 “Spirit itself”로 표기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성령 그분 자신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성령 그것 자체가”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경우에는 성령님을 인격적인 분으로서의 성령님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역사하심, 또는 성령님의 영향력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처럼 “그것”으로 표현되는 하나님의 영을 소문자로 표기한 곳도 성경에는 나온다. 출애굽기 31:3,4이나 출애굽기 35:31,32에 보면 『하나님의 영으로 그를 충만케 하시어 지혜와 명철과 지식과 온갖 솜씨로 정교한 기술을 고안하여 금과 은과 놋으로 일하게 하시며』에서 하나님의 “영”을 소문자 “spirit”로 표기하고 있다.

이처럼 소문자로 표기한 “영”은 하나님의 영의 영향력, 또는 그분이 행하시는 사역 자체를 의미한다. 고린도전서 2:12에서도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을 소문자로 표기하고 있거니와, 이것은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거듭난 사람들에게 인격체이신 성령님으로 오셔서 인도하시기도 하지만, 능력의 “영”을 주셔서 그 영향력으로 지혜를 깨닫도록 하시기도 한다.

캠벨주의자들은 인격적인 분으로서의 성령님을 인정하지 않고 어느 경우에나 성령은 하나의 “영향력”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한 인격체이신 것을 부정하고 하나의 에너지적 존재로 간주하는 배교자들의 발상이다. 성령님은 인격체이시며, 또 사역을 행하는 영향력이시다.

 

 3)  영적인 일들을 영적으로 비교 (13절).

 

『또한 우리가 그것들을 말하되 인간의 지혜가 가르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성령께서 가르치시는 말로 하나니 영적인 일들을 영적으로 비교하여 말하느니라』(13절).

 

『성령께서 가르치는 말』이란 곧 성경 말씀을 의미한다. 나블레 고블레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이나 지껄이는 은사주의자들이 환각 속에서 들었다고 곧잘 주절대는 그런 말이 아니라 성령님께서는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신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방언이 아니라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분명한 말로 말을 한다.

 

『영적인 일들을 영적으로 비교하여 말하느니라.』 이 구절은 꼭 배워두어야 할 말씀이다. 영적인 일들이란 영적인 성경 말씀들을 의미한다. 이것은 바로 앞에서 『또한 우리가 그것들을 말하되 인간의 지혜가 가르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성령께서 가르치시는 말로 하나니』에서 “성령께서 가르치시는 말”이 곧 성경을 의미한다는 데서 자명하다. 이처럼 영적인 일들에 관해서 말씀하는 성경은 영적으로 말씀하는 성경으로 비교해 보아야 이해할 수가 있다. 다시 말해서, 말씀은 말씀으로 비교될 때 그 말씀의 온전한 뜻이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들을 육신적이거나 인간의 지혜에서 나온 세상적인 지식에 비추어서 이해하려고 하면, 아무리 해도 이해될 수가 없는 것이다.

 

 4)  자연인은 영의 일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14절)

 

『그러나 자연인은 하나님의 영의 일들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일들이 그 사람에게는 어리석게 여겨지기 때문이요, 또 알 수도 없나니 이는 그 일들이 영적으로만이 분별되기 때문이니라』(14절).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자연인 그대로 내팽겨쳐진 사람이다. 따라서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일들을 알 수도 없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무지하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들이 모두 어리석게만 보인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영의 일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들은 사람의 일을 이해하지 못하는 짐승들이나 마찬가지다.

한편, 거듭났다고 해서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하나님의 영의 일들을 받아들이느냐 하면, 결코 그렇지가 않다.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육신적인 사람은 자연인이나 마찬가지로 성령의 일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성령을 따르지 않으면 그 사람은 성령의 일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이런 사람들은 여전히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다. 『육신을 따르는 사람들은 육신의 일들을 생각하나 성령을 따르는 사람들은 성령의 일들을 생각하느니라』(롬 8:5).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은 구원받지 못한 “자연인”과 구별되어야 하지만, 성령을 따르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자연인이나 마찬가지다.

 

 5)  영적인 사람은 판단하나 (15절)

 

 『영적인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15절).

 

   (1)  꼭 기억해 두어야 할 위대한 구절이다. “영적인 사람”이란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을 말한다.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는 지혜를 소유한다.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하나님의 영을 받고 하나님의 영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이 자신에게 무어라고 지껄여도 거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기 때문이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지혜나 인간의 생각으로 무엇을 판단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올바르게 판단하는 사람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인간의 생각으로 자신에게 이러쿵 저러쿵 판단하려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반면에 그리스도인은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판단해서도 안된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가치 기준은 오직 성경 말씀에 있기 때문에 사람의 생각으로 함부로 형제를 판단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판단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도 판단받지 않을 것이라』(마 7:1). 『그런즉 우리가 더 이상 서로를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형제들 앞에 거치는 것이나 방해물을 놓지 아니하였는지 판단해야 하리라』(롬 14:13).  

 

   (2) 『판단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도 판단받지 않을 것이라.너희가 판단하는 그 판단으로 너희도 판단받을 것이며, 너희가 재는 그 자로 너희도 다시 측정을 받으리라. 어찌하여 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생각지 못하느냐? 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도 ‘네 눈에서 티를 빼내 주마.’라고 네 형제에게 말할 수 있느냐?』(마 7:1-4) 


   ① 이 구절 역시 많은 기독교인들의 입에서 회자되는 말로써, 누가 누군가를 판단한다고 생각되면 즉시 이 구절을 들고 나와 “네 눈에서 들보를 먼저 빼내라.”고 말한다. 물론 이 구절은 어느 시대 누구에게나 미덕으로 사용될 수 있는 구절이다. 우리는 남을 함부로 비판하고, 함부로 공격해서는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도 그러한 잘못을 저질렀을 수 있고, 또 저지를 가능성이 충분히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구절을 지나치게 적용하려는 사람들은 진리를 가지고 오류를 판단하는 것조차 “비판”이라고 생각하여, 스스로의 무지를 정당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그리스도인들은 판단할 수 있다. 만약에 우리가 판단할 수 없다면 어떻게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그 사람이 구원받지 못했다는 판단하에, 적어도 그 사람이 구원받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판단”하에 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또 오류에 빠진 사람을 진리로 바로 잡으려면 그 사람의 오류를 “판단”해야 하며, 누군가에게 지식을 전달하거나 교육할 때 그들의 잘못을 “판단”해야만 그들을 올바로 가르칠 수 있다. 특별히 영적인 문제에 있어서 “판단”은 더욱 명확하게 행해져야 하는데, 그것은 고린도전서 2:15의 말씀 때문이다. 『영적인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고전 2:15). 영적인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다. 그는 판단하여 사람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해 주어야 한다.

 

   ② 마태복음 7:1의 말씀과 고린도전서 2:15의 말씀이 서로 상충이 되는 것은 우리가 마태복음 5장에서 살펴보았듯이 이 두 말씀이 서로 다른 경륜(또는 세대)에서 사용되기 때문이다. 즉 고린도전서 2:15의 말씀은 교회 시대의 성도가 행해야 할 말씀이고, 마태복음 7:1은 왕국 시대의 백성들이 행해야 할 말씀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도 함부로 비판만 해서는 안될 것이다.

고린도전서 2:15의 전제는 “영적인 사람”이다. 자신이 영적인 사람이 아니라면 그는 함부로 판단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육신적인 판단은 또 다른 판단을 낳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3장에서 육신적인 판단을 금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자신을 영적인 상태, 즉 성령충만한 상태로 유지하여 모든 것을 올바로 판단하는 가운데, 진리를 전파해야 한다. 절대진리, 즉 하나님의 말씀의 잣대로 모든 것을 과감히 판단하라.  

 

  (3)  『그런즉 우리가 더 이상 서로를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형제들 앞에 거치는 것이나 방해물을 놓지 아니하였는지 판단해야 하리라』(롬 14:13).

『우리가... 서로를 판단하지 말고 ...것이나 ...아니하였는지』, 그 일을 판단해야 한다고 말씀한다. 쉽게 말해서, 사람을 판단하지 말고 어떤 “것,” 즉 “일”을 판단하라는 말씀이다. 우리가 판단해야 할 “것”으로는 가령, 『형제들 앞에 거치는 것이나 방해물을 놓지 아니하였는지』 하는 것들이다. 형제들 앞에 방해물을 놓아 그들이 실족하기라도 한다면 당신은 이에 대해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해명해야 할 것이고 이로 인해서 진땀을 흘려야 할 뿐더러 당신에게 돌아오는 상은 없다. 당신은 이것을 결코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6)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각을 가졌느니라 (16절)

 

『누가 주의 생각을 알았다고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각을 가졌느니라』(16절).

 

   (1)  당신이 구원받고 성령님께서 당신 안에 들어오시면, 당신이 그리스도와 동일한 생각을 하도록 그분께서 인도해 주신다. 당신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때, 당신은 주님께서 생각하시는 것과 똑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는 말이다. 『너희 안에 이 생각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도 있는 생각이라.』(빌 2:5)고 성경은 말씀한다.

거듭난 사람에게 성령님께서 들어오시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와 똑같은 생각과 마음을 가져야 하고, 주님께서 보시는 대로 보아야 하며, 지난날의 생각과 안목은 모두 버려야 한다. 『너희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써 변화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롬 12:2). 그런데, 그리스도의 생각을 갖고는 있으면서도 그리스도의 생각을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생각대로 행하지 않는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로마서 12:2를 보라. 『너희는 이 세상과 일치하지 말고 너희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써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입증하도록 하라.』고 성경은 명령하고 있다.

 

   (2)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생각을 가졌다. 그러나 그 생각을 행동으로 나타내어 입증할 수 있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이런 사람은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써 변화를 받은” 사람이 아니라 단지 그리스도의 생각을 머리 속으로 상상만 하고 있는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생각을 갖고 그 생각대로 행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머리 속으로 생각만 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은 구원받고 생각할 수 있는 두뇌를 되돌려 받은 것이 아니라 마음이 새롭게 회복된 사람들이다. 새롭게 된 마음으로 변화되어 그리스도의 생각과 똑같은 생각대로 살아가는 데에 대해서 겁먹을 필요는 하나도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영이 아니라 능력과 사랑과 건전한 생각의 영이라.』(딤후 1:7)고 말씀하고 있지 않은가!

 

 

3.  마치는 말

 

 1) 『너희는 이 세상과 일치하지 말고 너희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써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입증하도록 하라』(롬 12:2).

『이 세상과 일치하지 말고...』.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어려운 문제가 이것이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답게 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바로 세상 문제다. 마귀가 그리스도인에게 제공하는 가장 큰 걸림돌이 이것이고, 여기에 걸려 넘어져 세상과 일치하게 하려는 것이 마귀의 유일한 목표다. 당신이 비록 그리스도인이지만 세상과 일치하려고만 한다면 마귀는 당신에게 거의 모든 것을 제공할 것처럼 유혹해 온다.

당신이 세상에 일치하기만 하면 당신에 대하여 마귀가 할 일은 그것으로 종결되어 임무 끝이다. 그러나 당신이 세상과 일치하지 않고 있는 한 마귀는 당신에 대한 자신의 일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신에 대한 공략을 계속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이 그리스도인에게는 최대의 골칫거리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무슨 일이 있어도 세상과 일치하려고 하지 않는 바람에 박해를 받고 고문당하고 끝내는 순교까지 당하고 만 초기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처하였던 갖가지 상황을 책을 통해 읽고 연구하면 할수록 그들이 안고 있던 큰 문제가 무엇이었는지 더욱 여실히 발견되는데, 이른바 “인류에 대한 증오심”이라는 문제가 그것이었다. 초기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로마 측과는 사이좋게 지내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는데, 바로 이것 때문에 그들은 죽임을 당했던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몸을 산 제물로 드려야 마땅한 이유는 롬 11:36이었다. 모든 것이 그분께로부터 나온다는 사실, 이것이 헌신해야 하는 첫 번째 합당한 사유였다. 우리의 몸을 산 제물로 드려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12:1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셨다. 이것이 헌신해야 하는 두 번째 정당한 사유다.

그리고 그 세 번째 합당한 이유가 여기 2절이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 이것이 당신의 몸을 산 제물로 드려야 하는 정당한 사유인 것이다. 이 세 번째 이유를 분명히 알기 위해서라도 당신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당신은 확실하게 찾아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려야 하는 합당한 이유는 이렇게 세 가지로 집약된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는 사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자비를 베푸셨다는 사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어떻게 하기를 원하시는지 분명한 뜻을 갖고 계시다는 사실, 이 세 가지가 당신의 헌신을 요구할 수 있는 정당한 근거인 것이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롬 12:2).

당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세 가지 뜻이 모두 개진되고 있다.

선하신 뜻(good will)
기뻐하시는 뜻(acceptable will)
온전하신 뜻(perfect will)

하나님의 뜻은 선하라 선하게 행하라

첫 번째는 그릇되게 행하여 죄를 짓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선하라, 선하게 행하라,” 이것이 하나님의 첫 번째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누구도 그릇되게 생각하고 죄 짓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어떤 뜻을 갖고 계실 때, 그 뜻의 첫 번째는 언제나 “선하라.”는 것, 이것이다.

 

하나님의 두 번째 뜻은 선한 행동

당신이 덮어놓고 어떤 “선한 행동”을 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과연 그것을 기뻐하시느냐 하는 것은 완전히 별개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은 당신이 생각했던 것과는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그러므로 당신은 어떤 “선한 행동”을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인가를 먼저 정확하게 헤아려 알고 난 다음에 그 선한 일에 착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당신이 아무리 많은 선행을 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에 부응하는 것이 아니었다면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전혀 평가되지 않을 터인즉, 당연히 그에 대한 상도 없다.

​하나님의 세 번째 뜻은 온전하신 뜻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선하기를 바라시고 선한 행동을 하기 바라신다.
그래서 당신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행이 무엇일까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고 선한 일이라도 어떤 선한 일을 해야만 주님께서 기뻐 받으실까를 정확하게 알기 위해 성경을 읽고 하나님의 말씀들을 상고하면서 기도하고 묵상한다.
그런 다음 당신은 마침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알게 되고 그 뜻에 따라 행동한다.
따라서 당신이 행한 모든 선한 것들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에 온전히 부합된다.
이것이 바로 당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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