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사르크스, 푸쉬케, 조에) / 사람(영 혼 육) Spirit. Soul. Body


생명(生命)

1. 육체적 생명(사르크스)

사르크스와 소마


2. 정신적 생명(푸쉬케)



3. 영원한 생명(조에)





사람(영 혼 육)


사람을 영혼과 육체로 구분하는 이분법 설명과 영과 혼과 육으로 구분하는 삼분법의 논쟁은 지금도 계속됩니다.
어느 것이 맞느냐고 묻는다면 두가지 모두 맞는다고 대답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이분법적 설명은 존재론적 분류
삼분법적 설명은 기능적 분류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기능적으로 영과 혼과 육의 기능은 분명하게 다릅니다.
이것은 누구나 다 동의할 것입니다.

존재론적으로는 육체는 분명히 육체로 드러납니다.
반면에 사람이 죽었을 때는 영혼이 육체에서 떠난 상태라고 합니다.
따라서 영혼과 육은 존재론적 설명이라고 하겠습니다.


영혼육(Spirit Soul Body) 3분설에 대하여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image and likeness) 창조하셨습니다(창 1:26).
삼위일체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하긴 어렵지만, 흔히 물의 3 상태에 비유하기도 하고(수증기, 물, 얼음) 시간의 3 개념에 비유하기도 하며(과거, 현재, 미래) 인간의 영혼육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사람에겐 영과 혼과 육이 있기에 셋이면서도 하나인 개념을 어렴풋이나마 납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영혼육이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는 없기에 이 개념도 독립적인 세 분이면서도 공존하는 한 분인 하나님을 설명하기엔 턱없이 부족합니다.

“오 주여, 신들 가운데 주와 같은 이가 없사오며 주께서 행하신 일들과 같은 일들도 없나이다(시 86:8). 하늘에서 누가 여호와와 비교될 수 있으리이까? 신들의 아들들 중에서 누가 여호와와 같으리이까?(시 89:6) 위로 하늘에나 아래로 땅에 주와 같은 하나님이 없나이다(왕상 8:23)”

비록 영혼육의 개념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온전히 설명하거나 이해할 수 없다 해도, 영어나 원어 성경에 영과 혼과 육에 해당하는 독립된 단어들이 나오는 건 사실입니다.

예전에 영혼육을 셋으로 나눠 생각하는 것은 이단이라고 쓴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한국어 성경은 ‘혼’, 즉 ‘soul(영), nephesh(히), psyche(헬)’에 해당하는 단어를 ‘영혼’ 혹은 목숨, 생각, 마음 등으로 번역했기에 ‘영혼’과 ‘육’으로 2분화 해야지 정통성을 인정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영혼육을 각각 나눠 표현합니다. “평강의 바로 그 하나님께서 너희를 온전하게 거룩히 구별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하나님께 기도하여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흠 없이 보존해 주시기를 구하노라(살전 5:23).” 또한, 영과 혼이 같이 나오는 구절이 성경 전체에 11번(나눔 및 분리를 뜻하는 11에 대해서는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인데, 이 구절들을 읽다보면 영의 역할이 있고 혼의 역할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레 20:6; 삼상 1:15; 욥 7:11; 사 26:9; 42:1; 57:16; 마 12:18; 고전 15:45; 살전 5:23; 히 4:12; 벧전 1:22). 

구약 성경에서 영을 지칭하는 히브리 단어는 ‘ruach(רוּחַ)’이며, 혼은 ‘nephesh(נֶפֶשׁ)’입니다. 히브리 언어엔 오히려 영과 혼은 있어도 거기에 대조해서 부를 수 있는 ‘육신’ 즉 ‘몸(육)’을 일컫는 단어는 없습니다. 영어 성경에서 ‘body(몸)’로 번역된 히브리 단어들을 찾아보면 다 제각각이기에 더 연구해보니, 히브리어는 몸의 한 부분을(배, 등, 뼈, 살, 창자 등등) 지칭하는 단어들만 있으며 그 단어들이 전체적인 ‘몸’을 의미하기도 합니다(몸에 대한 주석 링크는 여길 누르시고, 해당 설명만 발췌한 부분은 이 글 마지막에 덧붙입니다). 그래도 히브리어에서 ‘몸’과 가장 비슷한 단어를 뽑으라면, ‘고기 육(살)’을 뜻하는 ‘basar(flesh)’일 것 같습니다. 이에 비해 헬라어는 영과 혼뿐만 아니라 육(몸)을 지칭하는 확실한 단어가 있습니다. 신약에 영을 지칭하는 헬라어는 ‘Pneuma‘, 혼은 ‘Psyche‘, 육(몸)은 ‘Soma‘입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자연히 영혼육에 비유해서 나눠 생각해 볼 수 있는 내용이 꽤 나옵니다. 예를 들면, 지성소, 성소, 성막뜰로 나누어지는 모세의 성막입니다. 가장 깊은 곳에 안치된 지성소를 영, 성소를 혼, 성막뜰을 육에 비유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에 해당하는 지성소엔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한 번 들어갈 수 있으며 언약궤가 있습니다. 이 언약궤 안에 들어있던 증거판, 만나를 담은 항아리, 그리고 아론의 싹난 지팡이(히 9:4)도 영혼육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영이라면, 증거판은 혼, 만나 항아리는 육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죽은 나무 지팡이에서 싹이 트이는 것은 마른 뼈에 핏줄이 붙고 살이 붙는 성령의 역사로 느껴지기 때문이고, 증거판은 혼(의지, 자아, 생각)을 순종시켜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기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요 5:39, 빌 2:16). 그리고 만나를 담은 항아리는 주님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하늘에서 내려온 빵(bread) 즉 육으로(flesh) 생각됐습니다(요 6:33, 35, 48, 51, 58). 물론 이 부분은 개인마다 생각의 차이가 있을 터이니 제 생각만 맞다고 주장하는 건 아닙니다.

또한 모세의 성막에서 혼에 해당하는 성소에도 3개의 기구(촛대, 분향단, 진설병)들이 있는데 이 또한 영혼육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금촛대의 빛은 영에 비유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며(요 4:24) 곧 빛(light)이시기에 그분 안에는 전혀 어둠이 없고(요일 1:5) 새 예루살렘에서는 어린양께서 그 도시의 빛(light)이시기 때문입니다(계 21:23). 그리고 분향단은 혼을 뜻하는 기도(간청, 간구)라고 생각합니다. 요한 계시록에는 ‘기도(prayer)’란 단어가 3번 나오는데 금 분향단과 금향로 및 금 그릇에 담은 향과 연기에 비유됩니다(계 5:8, 8:3, 8:5). 또한 다윗은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 나의 손 드는 것이 저녁 제사 같이 되게 하소서(시 141:2)“라고 노래합니다. 진설병은 빵이기에 역시 육을 뜻합니다(요 6:33, 35, 48, 51, 58).

모세의 성막에서 육을 뜻하는 성막뜰에는 물두멍과 번제단 밖에 없기에 기구들을 영혼육으로 나누지는 못하지만 번제단에 드려지는 희생 제물들은 크게 3그룹으로 나뉩니다(희생 제물과 헌물에 차이에 대해서는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레위기의 5대 제사에 드리는 희생 제물들은 ‘소’와 ‘flock(양과 염소 떼)’ 아니면 ‘비둘기’에서 취합니다(은혜와 율법의 수 5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이 3그룹을 좀 더 세밀하게 나누면 소(Ox)는 숫소(bull)와 암소(heifer)로, 양(sheep)은 숫양(ram)과 암양(ewe)과 어린양(lamb)으로, 염소(goat)는 새끼염소(kid)나 어른 염소, 비둘기는 산비둘기(dove)와 집비둘기(pigeon)로 나눠집니다. 따라서 비둘기는 성령(마 3:16; 막 1:10; 요 1:32) 또는 신부를(아 2:14; 5:2; 6:9) 상징하기에 영에 비유할 수 있고 양과 염소는 혼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출 12:4절에 따르면 너희 혼의 수에 따라 양을 취하라고 되어 있고 벧전 2:25절엔 너희가 전에는 길 잃은 양 같았으나 이제는 너희 혼의 목자에게로 돌아왔다고 하며 민 15:27절은 어떤 혼이든 모르고 죄를 지었거든 암 염소를 제물로 바치라고 돼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소는 육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단 4:33, 5:21; 히 9:13). 이것 역시 제 생각만 옳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막에 이어 성경에 등장하는 주요 나무 3가지(올리브나무, 포도나무, 무화과나무)도 영혼육에 비유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올리브나무는 영을 뜻하는 기름, 포도나무는 혼(생명)을 뜻하는 포도주(피), 무화과나무는 육을 뜻하는 열매를 내니 말입니다. 또한 성경의 대표적인 3대 직분인 ‘선지자(대언자)’, ‘제사장’, ‘왕’도 순서대로 영혼육에 각각 비유될 수 있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영이 임해서 예언하거나 대언하는 사람들이며, 제사장은 희생 제물의 피로 백성들과 자신의 죄를 속죄하는 사람들이며, 왕은 백성들을 입히고 먹이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부활 및 영적 완전함을 의미하는 3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눌러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영이시지만 굳이 성부 성자 성령을 영혼육에 비유하자면, 성령은 영, 성부는 혼(자아 의지 생각 생명 마음), 성자는 육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은 셋째 하늘에 거하시며 거기에 ‘낙원’이 있습니다(눅 23:43; 고후 12:2-4; 계 2:7).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알았는데 그 사람은 십사여 년 전에 셋째 하늘로 채여 올라갔느니라…그가 낙원으로 채여 올라가서 말할 수 없는 말들을 들었는데 사람이 그것들을 말하는 것은 법에 어긋나느니라(고후 12:2-4).” 따라서 하늘도 성막처럼 셋으로 나눠진 걸 알 수 있으며 셋째 하늘이 영이라면, 둘째 하늘은 혼, 첫째 하늘은 육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또한 첫째 하늘은 공기권, 땅, 땅 밑(지옥) 셋으로 나뉘어 이 또한 영혼육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이 유업이요 약속의 땅이란 의미에서 영이라면 광야가 혼, 에굽은 육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다음은 이런 저의 생각을 도표로 만들어 정리한 것입니다.   

다음은 히브리어는 몸의 한 부분을(배, 등, 뼈, 살, 창자 등등) 지칭하는 단어들만 있으며 그 단어들이 전체적인 ‘몸’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주석에서 해당 부분만 발췌한 것입니다.






팀 켈러는 이 책에서 네 가지의 부활에 대해 설명한다.

첫째는 역사적 부활이다.

그는 특유의 논리적 접근을 통해 부활이 역사적 사실임을 증명한다.
부활이 역사적 사건이라고 증명된다고 해도 모든 사람들이 이성적으로 믿게 되는 것은 아니며, 그렇다고 부활을 맹신할 수도 없는 것임을 성경적 증거에 따라 설명해간다.
결국,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이성과 증거와 믿음이 어우러진 결과임을 이야기함으로 기독교 신앙이 결코 이성과 상반되지 않은 것임을 알려준다.

또한, 마틴 루터와 바울의 예를 통해, 부활의 역사성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임을 입증한다.
부활은 신자들에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힘을 제공해주고 그 힘은 어려운 순간에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능력으로 나타난다.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하는 연약한 바울이지만, 죽음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는 능력의 바울이 될 수 있는 비결은 바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부활의 역사성은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이다.

둘째는 그리스도의 부활은 지금 내 삶에 영향을 미치는 힘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리스도인에게 미래를 위한 소망(for the future)일 뿐 아니라 미래로부터 오는 소망(from the future)임을 이야기한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미래의 하나님 나라가 현재로 들어왔다고 말한다.

팀 켈러는 조지 래드가 말한 '미래의 현존'이라는 개념을 통해 부활과 하나님 나라를 설명한다.
부활은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여기서 시작되었다는 선언일 뿐 아니라,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이유임을 이야기하면서, 우리는 지금 하나님 나라의 식민지(연방)로 살고 있다고 말한다.

그 예로 프란시스 쉐퍼 부부의 라브리 사역을 소개한다.
죄악으로 깨어진 세상 속에서 라브리 공동체는 하나님 나라의 그림자로 존재했다.
성경적 가치를 충실히 고수하는 쉐퍼 부부였지만 그 집은 각종 미혼모들과 정신병자들 그리고 회의주의에 사로잡힌 청년들의 안식처였다.
명확한 진리를 가졌지만, 풍성한 사랑으로 사람들을 대했기 때문이다.
쉐퍼 부부의 아들인 프랭크 쉐퍼는 이렇게 전한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조목조목 하나님을 논증했지만 ... 어떤 말보다도 더 설득력 있었던 것은 두 분이 기꺼이 희생한 재물과 사생활과 시간이었다.
신변에 위협을 느낄 때도 있었고, 이용당해도 괜찮다는 생각은 늘 기본이었다."

부활은 우리가 미래에 맞아야 할 기다리는 소망이 아니라, 오늘 여기서 시작된 소망이며, 우리의 삶은 하나님 나라의 식민지(연방)와 하나님 나라의 예고편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오늘 우리의 삶을 천국의 시민으로 살아가게 한다.

셋째는 부활은 인격적 만남으로 확증된다.

예수님의 부활은 실제 사실이지만, 이것을 아는 것으로만 끝나서는 안 된다.
부활하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때 우리는 그분과 연합된 것을 알게 되고, 그때 비로소 우리들의 정체성이 뿌리부터 변화되기 시작한다.

팀 켈러는 마리아, 도마, 베드로같이 예수님의 부활을 인격적으로 만났던 사람들의 예를 통해 그리스도의 부활을 인격적으로 체험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 그 인격적 만남의 과정에서 예수님은 천편일률적으로 자신을 증명하지 않으시고, 마리아는 마리아에게 맞는, 도마는 도마에게 맞는 가장 필요한 만남으로 부활을 경험시켜 주셨다.

의심이 많은 도마에게는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옆구리에 넣어보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성경에는 도마가 손을 넣어보았다는 말이 없다.
손을 넣어보지 않고 도마는 예수님을 향해 신앙고백을 한다.
도마의 의심을 무너뜨린 것은 객관적 증거가 아니라, 도마의 의심을 잘 이해하고 그것을 해결해주려고 하신 마음 때문이다.
예수님은 도마가 그런 증거를 원한다는 것을 아셨다.
제자들 중에 누가 알려준 것이 아니다.
그의 마음속에 있는 냉소와 두려움 모두 안아주시고 받아주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도마가 느낀 것이다.

또 배신한 베드로에게는 스스로 깨닫도록 기다려주심으로 사랑을 확신시켜 주셨다.
예수님은 부활을 수학 공식처럼 증명해주시지 않고 내가 알 수 있는 방법으로 나에게 찾아오셔서 부활을 인격적으로 경험하게 하신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사랑의 추억이 있는 인격적 만남이다.

넷째는 부활은 삶의 각 영역의 문제들로 인한 두려움에 맞서게 한다.

부활은 우리 안에 있는 두려움을 직면하게 해주고, 두려움에 맞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준다. 팀 켈러는 현대에 만연하고 있는 인종 문제, 차별문제, 경제적 불균형, 성의 문제를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결시켜 문제를 바라보게 한다. 그리고 현대에 일어나는 많은 문제들의 해결책이 바로 성경 안에 있음을 증명한다.

팀 켈러가 제시하는 해결책은 반문화적인 대안 사회로서의 교회 공동체가 부활을 통해 회복하는 것이다.
정의가 실현되는 나라는 정의에 집중하는 나라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에 집중하는 나라이다.
그리고 너무 큰 거대 담론보다는 오늘 내가 지역사회를 위해 해야 할 일에 집중하는 것을 권한다.

참된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의 방식과는 다른 '거꾸로의 나라' 라고 할 수 있다.
연약한 자와 소외된 자 가난한 자들이 복을 받는 나라이다.
그래서 연약한 우리들에게 부활은 기쁜 소식이 된다.
우리가 사는 인생길에도 수많은 난관과 고통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을 생각하면 우리가 길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더 이상의 정죄가 없다는 것과 그 어떤 어둠도 우리를 이기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단순히 지식으로만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삶으로 또 사회적으로 풍성하게 적용시켜 준다.
두려움의 시간에 소망을 가질 수 있는 이유도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고 승리하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미래의 소망일 뿐 아니라, 장차 이루어질 미래의 현존으로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음을 선언하는 선포이다.

03-07-2021(주일) 오전 6:50

영혼(영혼)의 무게

존 맥두걸(1947년 ~, John A. McDougall)은 아일랜드 혈통의 미국의 의사, 작가, 기업가이다.
그는 퇴행성 질환은 동물성 단백질과 식물성 기름을 멀리하고, 채식과 감자, 쌀, 옥수수와 같은 녹말음식 섭취를 통해 치료될 수 있다는 주장으로 널리 알려져있다.
맥두걸은 식료품업체인 '맥두걸의 좋은 식품'의 공동 설립자이며 미국 책임있는의사회의 회원이다


맥두걸 박사는 영혼이 어느 정도의 질량을 가진 물체이며 질량보존의 법칙이 사람이 사망할 때도 적용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영혼이 빠져나간 만큼 무게를 측정하는 실험을 했다.
실험은 임종을 앞둔 환자들의 동의를 얻어 초대형 정밀 저울을 이용해 사망할 때의 무게를 측정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땀의 증발이나 체내 호흡으로 인한 수분 감소, 그 외 여러 가지 변수를 감안하여 진행된 실험을 통해 영혼의 무게가 약 21g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어 맥두걸 박사는 개 15마리를 대상으로 같은 실험을 한 후 “사람과 달리 개는 죽을 때 몸무게에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며 “개에게는 영혼이 없기 때문”이라고 발표했다.

이후 2007년 스웨덴의 한 연구팀이 맥두걸 박사의 실험 진위 여부를 검증하기 위한 실험을 시도했다.
정밀 컴퓨터 제어장치를 이용해 임종 시 일어나는 체중의 변화를 측정한 결과, 정확히 21.26214g의 차이가 난다는 것을 밝혀냈다.

영혼의 존재를 규명하고자 하는 노력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해부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그리스의 의사 헤로필로스(Herophilos)는 영혼을 찾기 위해 죄수 수백 명을 산 채로 해부했다고 전해진다.

대표적인 합리주의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Rene Descartes)도 영혼을 찾기 위해 죽은 사람을 해부한 적이 있다.
그는 멜라토닌 생성을 조절하는 뇌의 송과선에 영혼이 자리잡고 있다고 믿었다.


성경이 증거하는 영혼의 존재

성경 속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보면 인류가 그토록 규명하고자 했던 영혼에 대해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창세기 2:7)

생령, 즉 살아 있는 사람은 흙인 육체와 생기인 영혼의 결합체다.
생명의 수한이 다해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면 육체는 땅으로, 신적 존재인 영혼은 하나님께 돌아간다(전도서 12:7).
대다수의 사람들은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하지만, 육신의 죽음을 맞이한 이후 영혼은 또 다른 세계와 맞닥뜨리게 된다.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욥기 19:26) 

욥이 말한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는 존재가 무엇이겠는가?
영혼이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는 영혼의 존재를 인식하면서 영혼을 지으신 하나님을 찾고 믿어야 한다.
육신의 죽음 이후에 맞이할 영혼 세계의 삶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요한계시록 20:11~12)

육신의 죽음 이후, 인류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이 땅에 머무는 동안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 이유다.

영혼의 세계를 준비하는 삶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느냐는 것이다.
초대교회 사도들의 행적 속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사도들은 장차 가게 될 영혼 세계를 생각하며 진리 곧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삶을 살았다(베드로후서 1:13~14, 고린도후서 5:1~9).

그리스도의 복음이란 예수님께서 친히 가르치시고 분부하신 새 언약 유월절 규례를 가리킨다.


육에 속한 사람, 육신에 속한 사람, 영에 속한 사람
고린도전서 2:14-3:3


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16.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2.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3.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육에 속한 사람(The man without the Spirit)(natural man)
육신에 속한 사람(worldly)(men of flesh)
영에 속한 사람(spiritual man)

14. The man without the Spirit does not accept the things that come from the Spirit of God, for they are foolishness to him, and he cannot understand them, because they are spiritually discerned.
15. The spiritual man makes judgments about all things, but he himself is not subject to any man's judgment:
16. For who has known the mind of the Lord that he may instruct him?" But we have the mind of Christ.
1. Brothers, I could not address you as spiritual but as worldly--mere infants in Christ.
2. I gave you milk, not solid food, for you were not yet ready for it. Indeed, you are still not ready.
3. You are still worldly. For since there is jealousy and quarreling among you, are you not worldly? Are you not acting like mere men?



육(肉)에 속한 사람(NATURAL MAN)
프쉬키코스 안드로포스(ψυχικος  ανθρωπος)

성령의 인도보다 열정, 욕망, 욕구, 그리고 육의 감각에 영향을 받아 선택하는 사람. 그
러한 사람은 육체적인 것을 이해할 수는 있으나 영적인 것을 이해할 수는 없다.
모든 사람은 아담과 이브의 타락 때문에 육신에 속하며 필멸에 처해 있다.
육에 속한 사람이기를 그치기 위해서 각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하여 거듭 나야 한다.

고린도전서 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5591. 육에 속한 사람(프쉬키코스) ψυχικός, ἡ, όν 

1. 목숨에 관한.  2. 고린도전서 2:14.  3. 육체적인 것
발음 / 프쉬키코스[ psüchikŏs ]
어원/ 559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정욕의(약3:15), 육에 속한(고전 2:14, 유 1:19), 육의(고전 15:44, 46).
신약 성경 / 6회 사용

󰃨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 '육에 속한 사람'의 헬라어 '프쉬키코스 안드로포스'(*)는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빛과 진리를 받지 못하여 구원얻지 못한 자연인의 상태'를 가리킨다. 이들은 복음에 대한 이해가 저급한 수준에 있어서 감각적이고 이기적인 정신을 가지고 단조로운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이 용어가 신약성경과 교부 문헌에서는 성령과 초자연적인 세계와는 대조적인 자연 세계의 생명을 가리키는 말로 종종 사용되었다. 흠정역(KJV)에서는 이를 '자연인'(the natural man,KJV)으로 번역했는데, 자연인은 거듭나지 않은 생태적인 사람을 가리킨다. 그들은 성령의 일을 미련하게 보기 때문에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1:23). 그들은 아무리 지혜롭다 할지라도 오히려 그 지혜가 걸림돌이 된다.

󰃨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 헬라어 본문에는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가르'(*, '왜냐하면')가 있어서 본구절에 앞 구절의 이유가 됨을 나타낸다. '미련하게'의 헬라어 '모리아'(*)는 고대 헬라에서 신체적으로 둔하거나 장애가 있는 것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정신적인 우둔함을 의미한다. 거듭나지 않는 자연인은 모든 가치를 육체적 물질적 기준에서 평가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서 복음은 무익하고 무가치하다고 인식된다.

󰃨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 '영적으로라야'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뉴마티코스'(*)는 '영'(*, 프뉴마)의 부사형으로서 '복음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분변함이니라'의 헬라어 '아나크리네타이'(*)는 13절의 '분별하느니라'의 헬라어 '슁크리논테스'(*)와는 달리 법정 용어로서 진술을 듣기 전에 심문받는 것을 말한다. 이 단어가 원래 '검사한다', '시험한다'는 의미를 가졌으며 나중에는 '판단하다', '평가하다' 등의 뜻을 가지게 되었다. 바울은 육체에 속한 사람은 영적이 아님을 전제하고 성령의 일을 받아들이지도 못하고 이를 분별할 가치 기준도 가지지 못했다고 단언하고 있다.





육신(肉身)에 속한(CARNAL) 사르키노스(σάρκινος)

영적이지 않은 어떤 것, 특히 이 단어는 필멸의 것 또는 현세적인 것을 의미하는 데 사용되거나,
또는 세상적이며 육체적이며 육욕적인 것을 의미하는 데 사용할 수도 있다.

고린도전서 3: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4560. 육신에 속한 사람(사르키노스) σάρκινος, η, ον

1. 살로 된.  2. 육신에 속한
발음 / 사르키노스[ sarkinŏs ]
어원 / 456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육(肉)의(고후 3:3)
신약 성경 / 4회 사용


4559. 육신에 속한 사람(사르키코스)  σαρκικός, ἡ, όν  

1. 육체에 관한.  2. 지상적인.  3. 육으로 된.
발음 / 사르키코스[ sarkikŏs ]
어원/ 456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육신의(고전3:3, 9:11), 사람의(고전3:4), 육체의(고후1:12, 벧전2:11)
신약 성경 / 7회 사용


영(靈)에 속한(SPIRITUAL MAN) 프뉴마티코스(πνευματικος )


고린도전서 2: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4152. 영에 속한 사람(프뉴마티코스) πνευματικός, ἡ, όν 

1. 영에 관한.  2. 영으로 말미암은.  3. ㉠ 고전15:46. ㉡ 롬7:14
발음 / 프뉴마티코스[ pnĕumati-kŏs ]
어원 / 415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신령한(롬1:11, 벧전2:5), 영적인(고전2:13, 엡6:12)
신약 성경 / 26회 사용




󰃨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 '육에 속한 사람'과 대조적으로 '신령한 자'는 분명한 가치 기준이 있어서 판단의 주체자가 될수 있다. '신령한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뉴마티코스'(*)는 '육에 속한 사람'의 헬라어 '프쉬키코스'(*)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영에 속한 사람', '영적인 사람'으로 번역할 수 있다. '프뉴마티코스'는 성령께서 내주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Hodge).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사는 사람들은 모든 가치 기준이 영적이므로 하나님께로부터 온 계시(啓示)에 의존하여 판단한다. 그러므로 그의 판단은 정확하며 다른 사람의 판단을 받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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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수요성서학당 제1강 / 01-06-2021

첫 사람 아담과 마지막 아담(고린도전서 15:45∼47)

45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46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47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Ⅰ. 첫째와 마지막의 의미

첫 사람 아담과 마지막 아담이란 용어에서 과 마지막은 첫째 둘째 셋째와 같은 서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대표성을 말합니다. 
따라서 첫 아담은 처음 사람을 대표하는 아담입니다. 
마지막 아담은 마지막을 대표하는 아담 즉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세상은 서열에 관심을 갖습니다.
이러한 관심은 어려서부터 경쟁 구도 가운데서 성장하며 배웠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자녀들을 양육할 때 내 아들과 딸이 공부할 때 1등하는 것이 좋아요 아니면 10등하는 것이 좋아요. 
1등하는 것을 누구나 다 좋아합니다.
그런데 10등을 했다면 좀 더 열심히 공부해서 등수를 올려라! 이렇게 말합니다. 
본인은 1등을 한 번도 못했으면서 자식에게 1등을 요구하는 것은 "욕심(慾心)"입니다.

제가 목회자가 된 배경을 정리하려고 자서전을 정리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몇몇 목사님들과 함께 신앙생활을 했던 장로님과 권사님들에게 보냈습니다. 

그 내용의 일부를 소개합니다. 
제 이름은 "이승혁(李勝赫)" 입니다.
한문자의 의미는 이겨서 빛을 낸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지내온 삶을 회고하면 "이겨서 빛을 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과연 나는 어떤 삶을 살았는가?
이런 내용이었는데 제가 받은 내용 중에 "목사님께서 이제까지 저희들에게 본이 되신 것이 결코 실패한 삶이 아닙니다. 저희는 목사님이 그 자리에 지금도 있으면서 매일 오늘의 묵상을 받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에베소서 5: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NIV, For the fruit of the light consists in all goodness, righteousness and truth.
KJV, For the fruit of the Spirit is in all goodness and righteousness and truth.

킹 제임스 버전에서는 빛의 열매를 "성령의 열매"라고 번역합니다.
 즉 이겨서 빛을 낸다는 것을 물리적인 빛, 세상적인 빛으로만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번에 자서전 원고를 정리하면서 반드시 무슨 경쟁 구도에서 1등을 하기 때문에 이겨서 빛을 내는 것이 아니구나!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열매를 맺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흔들림이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도 빛이 되는 삶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Ⅱ. 사람의 의미

서양 철학의 아버지를 "탈레스"라고 합니다.
물론 탈레스 이전에도 철학자가 있었지만 탈레스를 서양 철학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유는 처음으로 "만물의 근원"이 무엇이냐?
만물의 근원을 아르케라고 합니다.

철학의 주제가 자연에서 사람에게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헬라 철학에서 시작합니다. 
그 이전에는 주된 관심이 자연계 즉 바람, 불, 물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것에 물음표를 던지면서 철학은 시작합니다. 
그러나 철학은 질문은 하였으나 아직도 명확한 대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성경에서는 한 단어로 설명합니다. 
“안드로포스(ἄνθρωπος. 444. anthrópos)” 
안드로포스는 인간 즉 사람이란 뜻입니다(a man, human, mankind).
안드로포스의 뜻은 “위를 바라보는 존재” 라고 합니다.

윌리암 피터(William Peter)라는 사람의 글에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소년이 길을 걷다가 5달러 지폐를 주웠습니다. 
그 돈으로 유리구슬을 구입했고 먹고 싶었던 알사탕도 사서 먹었습니다. 
그때부터 소년은 길을 걸을 때마다 길바닥만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일생동안 길바닥만 걷다보니 결국에는 그가 얻었던 것들은 단추 29,519개, 머리핀 54,172개, 동전 수백 개, 반짝이는 유리구슬,  옷핀 그리고 잡다한 것들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길바닥만 보고 걷던 습관 때문에 허리가 굽었다고 합니다.

인간을 안드로포스라는 하는 것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첫째는 위를 바라보는 존재(호모 프로스팩투스, Homo Prospectus)
둘째는 희망하는 존재(호모 에스패란스, Homo Esperans)

우리들은 한국적 인간이라고 합니다(Homo Coreanicus)

* 참고 자료 : 인간에 대한 학명(學名)

호모 쿨투라(homo cultura) : 문화적 인간 
호모 코메르시움(homo commercium) : 교류하는 인간
호모 알테르나투스(homo alternatus) : 대안적 인간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is) : 손재주 있는 인간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 : 직립하는 인간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 : 지혜 있는 사람, 현명한 인간
호모 인사피엔스(homo insipiens) : 현명하지 않은 인간, 어리석은 인간
호모 라보란스(homo laborans) : 일하는 인간
호모 비블로스(homo biblos) : 기록의 인간
호모 비올로기쿠스(homo biologicus) : 생물적 존재로서의 인간
호모 아카데미쿠스(homo academicus) : 학문적 인간
호모 에스테티쿠스(homo aestheticus) : 미학적 인간
호모 아쿠아티쿠스(homo aquaticus) : 수중적 인간
호모 아르텍스(homo artex) : 예술인
호모 아토미쿠스(homo atomicus) : 원자 인간
호모 콘수무스(homo consumus) : 소비하는 인간
호모 컨버전스(homo convergence) : 융합형 인간
호모 쿠페라티부스(homo cooperativus) : 협동적 인간
호모 쿨투랄리스(homo culturalis) : 문화적 인간, 제도적 인간
호모 크레아투라(homo creatura) : 창의적 인간
호모 데멘스(homo demens) : 미친 인간, 광기의 인간
호모 듀플렉스(homo duplex) : 이중인, 이중적인 인간
호모 라피엔스(homo rapiens) : 약탈하는 사람
호모 엑세쿠탄스(homo executans) : 처형하는 인간
호모 팔락스(homo fallax) : 속이는 인간
호모 데지그난스(homo designans) : 디자인하는 존재
호모 드라마쿠스(homo dramaticus) : 드라마에 몰입하는 인간
호모 에콜로지쿠스(homo ecologicus) : 생태학적 인간
호모 에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 : 경제적 인간
호모 에로스(homo eros) : 성애적 인간
호모 에루디티오(homo eruditio) : 학습하는 인간
호모 에스페란스(homo esperans) : 희망하는 인간
호모 에티쿠스(homo ethicus) : 윤리적 인간
호모 엠파티쿠스(homo empathicus) : 공감하는 인간
호모 그라마티쿠스(homo grammaticus) : 문법적 인간
호모 루덴스(homo ludens) : 유희적 인간
호모 루두스(homo ludus) : 게임하는 인간
호모 마지쿠스(homo magicus) : 마술인
호모 파베르(homo faber) : 도구적 인간
호모 나랜스(homo narrans) : 이야기하는 사람
호모 네간스(homo negans ): 예 또는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인간
호모 로쿠엔스(homo loquens) : 언어적 인간, 말하는 사람
호모 부커스(homo bookus) : 책 읽는 인간
호모 캐리어스(homo carriers) : 매개체적 인간
호모 쿵푸스(homo kongfus) : 공부하는 인간
호모 날리지언(homo knowledgian) : 신지식인
호모 노에티쿠스(homo noeticus) : 모든 생명체를 사랑하는 인간
호모 나이트쿠스(homo nightcus) : 밤을 낮 삼아 활동하는 인간
호모 노부스(homo novus) : 새로운 인간(피조물이 아닌 인간)
호모 모벤스(homo movence) : 이동하는 인간, 적극적인 사람
호모 오일리쿠스(homo oilicus) : 석유 문명에 의존하는 존재
호모 이미지쿠스(homo imagicus) : 보아야 직성이 풀리는 인간
호모 휴리스틱쿠스(homo heuristicus) : 빠르고 쉽게 (의사)결정하는 인간
호모 노마드(homo nomad) : 유목하는 인간
호모 픽토르(homo pictor) : 기호의 인간
호모 폴리티쿠스(homo politicus) : 정치적 인간 
호모 프로그레시부스(homo progressivus) : 우주적 인간
호모 레시프로쿠스(homo reciprocus) : 호혜적 인간, 상호 의존하는 인간
호모 렐리기오수스(homo religiosus) : 종교적 인간
호모 렐리기우스(homo religius) : 종교적 인간
호모 스피리투스(homo spiritus) : 영혼인(靈魂人), 영적 인간
호모 레지스탕스(homo resistance) : 저항하는 인간
호모 사케르(homo sacer) : 벌거벗은 인간, 법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인간
호모 섹스쿠스(homo sexcus) : 몸으로 교감하는 사람
호모 포비아(homo phobia) : 동성애 공포증
호모 사커스(homo soccers) : 축구하는 인간
호모 소키에스(homo socies) : 사회적 인간
호모 심비우스(homo symbious) : 공생인(共生人), 더불어 사는 인간
호모 소시올로지쿠스(homo sociologicus) : 사회적 동물
호모 수페리오르(homo superior) : 초인, 영웅적 인간 

호모 테크니쿠스(homo technicus) : 기술적 인간
호모 워커스(homo Walkers) : (두 발로) 걷는 인간
호모 비아토르(homo viator) : 떠도는 인간
호모 자펜스(homo zappens) : 관심을 자꾸 옮기는 인간
호모 포에티쿠스(homo poeticus) : 시적인 인간
호모 그라피쿠스(homo graphicus) : 그림 그리는 인간
호모 무지쿠스(homo musicus) : 음악적 인간
호모 스투디오수스(homo studiosus) : 공부하는 인간
호모 포토쿠스(homo photocus) : 사진 찍는 인간 
호모 모빌리쿠스(homo mobilicus) : 휴대폰을 생활화한 인류
호모 무비쿠스(homo movicus) : 영화를 즐기는 인간
호모 미디어쿠스(homo mediacus) : 미디어적 인간
호모 비디오쿠스(homo videocus) : 비디오를 즐기는 인간
호모 사이버네티쿠스(homo cyberneticus) : 온라인에 연결된 인간
호모 서치쿠스(homo searchcus) : 검색형 인간
호모 인터넷티쿠스(homo interneticus) : 인터넷을 하는 인간
호모 텔레포니쿠스(homo telephonicus) : 전화하는 인간, 통신하는 인간 

- 출처 : https://leoedu.tistory.com/63 
- 참고 자료 출처 : https://moviemaker.tistory.com/72

철학자 키에르케골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란 작품에서 절망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말합니다. 
희망이 없는 인간은 곧 죽은 존재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누구나 죽어야 합니다. 
죽음 이후에 대해서는 대책이 없습니다. 
죽음 이후에 대책이 없다는 것은 결국 죽음 이후에는 소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죽음은 누구나 경험하는 것이지만 성도의 죽음은 귀중하게 보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주가 되신다는 것을 믿는 신앙으로 살다 신앙안에서 죽는다면 소망이 있다는 증거라고 하겠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장례문화를 새롭게 바꿔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그동안 관습처럼 진행하던 입관예배, 발인예배 그리고 하관예배라는 순서에 대해서 성경적인 사고를 가져야 합니다.

사람이 죽은 후에는 육체는 이미 흙과 같습니다. 
영혼은 이미 육체에서 떠나갔습니다. 
영혼이 없는 육체를 앞에 놓고 입관, 발인, 하관과 같은 예식을 진행하는 것이 과연 성경적이며 바람직한 신앙인가 깊이 성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제가 죽은 후에 가족들에게 부탁합니다.
입관, 발인, 하관과 같은 예배를 하지 말고 가족끼리 묘지에 가서 시신을 안장하고 마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되어 반드시 그렇게 하기를 부탁합니다.
죽은 시신을 앞에 놓고 예배하는 것이 비성경적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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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마음(빌립보서 2:5)

마음이란 신약의 언어 헬라어

1. 카르디아 : 마음, 심장
2. 프로네마 : 뜻, 의지, 생각, 목적

바울은 빌립보교우들에게 이 마음,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권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의 특징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어떻게 하면 우리가 이 마음을 가지고 살 수 있는 것인지 보겠습니다.

5절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헬라어 원문에는 “너희 안에 이 마음이 있게 하라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도 있는 것이다”로 되어 있습니다.
KJV은 그 원문 대로 번역되었고,
NIV는 너의 attitude가 그리스도 예수의 태도와 같아야 한다고 의역되어있습니다. 

본문에 마음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프로네마(φρονημα)입니다.
프로네마 뜻, 생각, 의지, 목적이 강조되는 마음이라는 단어입니다.

헬라어엔 마음이란 단어로 카르디아(καρδια)가 있습니다.
카르디아는 단순히 마음, 심장의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바울은 이런 두 단어의 의미 차이를 알고 의도적으로 프로네마를 사용했을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예수님의 마음에 대해 본문에서 두 가지 특징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자신을 낮추는 마음
둘째는 순종하는 마음

자신을 낮추는 마음

예수님은 하나님의 속성을 가지신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십니다.
그런 예수님이 사람으로 태어나신 것 자체가 자신을 낮추고 종이 되는 선택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으로 사시는 동안 하나님과 동등한 신분과 영광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사람으로 세상에서 사시는 동안 무시당하며 거의 밑바닥 험한 인생을 사셨습니다.
헤롯이 죽이려고 해서 피신 다니셨고, 청소년 시절은 목수인 아버지 요셉을 도와 육체 노동을 하셨고,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 사역하신 후엔 온갖 비난과 모욕을 당하다가 결국엔 모함으로 십자형을 받고 죽으셨습니다.
이것은 사람으로서 예수님에게도 힘든 인생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등한 예수님이 자신을 낮춰 사람이 되시고, 그 사람 중에서도 왕이나 귀족이 아닌 목수의 아들이 되어 다른 사람을 섬기시다가 마침내 자기 생명까지 내어주신 것을 생각할 때, 그런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하겠습니까?

세상에서 높아지려고 하지 말고 섬기는 자가 되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것은 곧 자신을 낮추고 섬기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섬기는 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더욱 종답게 살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죄인 된 속성 가운데 하나가 교만, 즉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높이려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생각하며 자신을 낮추고 섬기며 살기를 힘씁시다.
그것이 주님을 닮아가는 길입니다.

순종하는 마음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것은 하나님 뜻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를 지는 수모와 고통을 받으며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시지만 사람이 되셨기 때문에 사람의 연약한 특성을 갖게 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마 26:38).
그 때 예수님은 할 수 있다면 이 잔을 마시지 않고 피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도 십자가의 죽음은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가능하다면 피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죄인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그 길 밖에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원했고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 예수님은 육체적 고통은 물론 버림받았다고 느끼는 감정의 고통도 겪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받드신 하나님의 뜻은  죄인을 구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님 믿고 순종하면서 구원을 이루는 것이 곧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길입니다.
또한 나의 구원의 성취에서 한 걸음 더 나가 가족과 친구와 이웃에게 전도하고 예수 믿어 구원받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가족으로 서로 사랑하며 돕는 것도 하나님 뜻에 순종하는 것이며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시지만 자신을 낮추고 사람으로 태어나 종처럼 하나님을 섬기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대해서는 자유인이지만 하나님께 대해서는 종의 마인드, 종의 에터튜드(attitude)를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느 시대나 믿음으로 산 사람들은 예수 안에서 세상에 대해서는 죽었다고 믿고 살았습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잘 사는 것을 포기하고 대신 하나님 나라에서 복 받은 자가 되기를 더 소망했습니다. .

예수님의 낮아지심은 단지 겸손이라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속마음은 어떠하든 겉으로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높이면 겸손하게 보입니다.
인정받기 위한 전략으로 겸손한 척 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릅니다.
이런 마음으로는 종처럼 남을 섬기거나 죽는 자리까지 순종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낮아지심에 동참하려면 먼저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 교만한 마음이 근본적으로 변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람들의 태도는 아담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반항적이었습니다.
타락하기 이전 사람인 아담과 이브는 금지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노아 시대에 세상은 죄악으로 차고 넘쳤다고 나옵니다.
홍수 후에도 사람들은 하나님께 굴복하는 대신 바벨탑을 지어 저항했습니다(창 11:4).
가나안에 정착한 야곱의 후손 이스라엘백성들은 사사시대와 왕정시대에 걸쳐서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우상을 섬기며 살아갔습니다.
지금도 다수의 사람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서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 같습니다(롬 1:28).
예수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들도  순종하는 것을 힘들어하는 게 사실입니다.

히브리서11장엔 믿음의 사람들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순종한 것입니다.
마음으로 믿는 것으로 끝낸 게 아니고 믿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 혹은 지시를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노아는 방주를 만드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나 가나안으로 이주했습니다.
모세는 자신을 죽이려고 찾던 바로 왕 앞에 섰습니다.
여호수아와 가나안 백성들은 칠일 동안 여리고성을 돌았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믿음입니다.

궁휼히 여기는 마음 


본문에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우리가 본받아야 할 예수님의 마음 가운데 하나를 더 말하면 저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곤경에 처한 사람을 외면하지 않고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드러낼 때가 아직 아니라고 하시면서도 어머니의 부탁을 외면하지 않고 포도주가 떨어져 곤란하게 된 혼인 집을 도와주셨습니다(요 2장).
소문을 듣고 찾아온 병자들을 모두 고쳐주셨습니다(마 4:25).)
남성편력이 있던 사마리아여인과(요 4:10)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 온 여인을(요 8:11) 불쌍히 여기고 구원의 길로 인도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취급 당하던 세리, 거리의 여인도 친구처럼 대하며 그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고 구원의 길로 인도해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안에는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살 수 있는지 방법에 대한 설명은 없습니다.
적용차원에서 한 번 생각해봅시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 안에 있는 마음이 우리 안에도 생기겠습니까?

그 출발은 예수 믿고 거듭나는 것입니다.
거듭나서 새 마음으로 교체되고 성령께서 새 마음에 거하시며 감동받게 해주시면 예수님의 마음과 같아질 수 있습니다.

그 다음 매일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주님을 본받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앞서 마음이라는 단어에는 뜻, 생각, 의지, 목적이 담겨있다고 말했습니다.
평소에 예수님을 생각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예수님을 닮겠습니까?
닮겠다는 의지와 실천이 없이 어떻게 태도가 바뀌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이라면 죽기까지 순종하는 예수님을 닮는 것을 목적으로 삼지 않고 어떻게 홍수처럼 밀려오는 세상 유혹과 욕망을 이겨내겠습니까?

마음은 행동을 지배하고 행동은 삶의 내용을 결정하게 될 겁니다.
그러니 어떤 마음을 갖고 사느냐에 따라 인생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왔든 간에 오늘 이후부터는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인생을 살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바울 사도께서 강조한 예수님의 마음은 자신을 낮추는 마음, 순종하는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서로 서로 섬깁시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도와줍시다.
잃어버린 영혼을 주님께 인도하는 일에 참여합시다.
이렇게 살면 여러분도 행복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소망으로 세상을 이기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승리하는 삶의 주인공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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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란 구약의 언어 히브리어


1. 레브 / לֵבָב

2. 루아흐(영) 학개 1:14, 마음을 흥분시키다 즉 영을 각성시키다.

레브(명남)는 레바브(לֵבָב , 3824)의 한 형태이며, '내부인간, 마음 heart, 정신 mind, 이해력 understanding, 의지 will'를 의미한다.

레브의 실제적인 의미는 내부기관과 유사 신체기관을 말한다.
그러나 추상적인 의미에서 "마음"은 인간내부의 총체 혹은 영적인 본질에 대한 가장 풍부한 성경 용어가 되고 있다.
성경 문학에서 이 단어는 성경에서 실제로 인간의 모든 영적인 기능이 "마음"에서 기인되기 때문에 기능에 대한 가장 포괄적인 용어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영적인 인격 기능에 대한 가장 빈번한 용례이다.

본 항목에서 3820 레브와 3824 레바브를 다룬다.

구약성경에서 레브는 약 600회, 레바브는 약 250회 나온다.

לֵבָב  3824

1. 마음,  2. 혼, 3. 기분

발음 / 레바브(lêbâb) ]
어원 /  연계형 לְכַב, 어미활용 לְבַבְכֶם ,לְבָבִי, 복수 לְבָבוֹת, 대상28:9, 382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마음(창 20:5, 느 9:8, 겔 3:10), 심중(신 7:17, 9:4, 대상 29:18), 전심(왕상 14:8, 왕하 20:3), 성심(대상 12:38), 한마음(대하31:21, 시 86:11), 총명(욥 12:3), 낙심(사 7:4), 용맹(단 11:25), 가슴(나 2:5).
[동] 지혜있다(욥 34:34), 살피다(학 1:5), 알리다(창 31:26), 기억하다(학 2:18), 낙심하다(신 1:28), 명심하다(신 4:39), 깨닫다(대하 6:37), 결심하다(대하 30:19, 느 9:8), 위로하다(대하 32:6), 총명하다(욥 34:10).
구약 성경 / 252회 사용

3820 לֵב

발음 / 레브(lêb)
관련 성경 / 마음(창 6:5, 삼상 4:13, 시 61:2), 심중(신 29:19, 에 7:5), 숨(출 8:15), 콧김(출 15:8), 가슴(출 28:29), 감동(출 35:34), 간담(수14:8), 결심, 생각(삿 5:15, 시 33:11), 진심(삿 16:17), 기력(삿 19:5), 관념(삼상 4:20), 인심(삼하 15:13), 심장(삼하 18:14, 시 38:10), 염통(왕하 9:24, 시 45:5), 한마음(대상 12:38, 시 83:5), 성심(대상 29:9), 전심(대하 17:6, 시 119:10, 겔 44:5), 뜻(대하 24:4), 충심(시 34:18), 총명(욥 12:24), 지혜(욥 36:5, 잠 10:8, 전 1:17), 지식(잠 10:21), 의사(잠 18:2), 생각(잠 24:32), 명철(전 7:7), 지각(렘 5:21), 굳센 자(암2:16).

[동] 말하다(창 42:28), 간곡하다(창 50:21), 낙심하다(민 32:7),염려하다(삼상 9:20), 개의하다(삼상 25:25), 낙담하다(삼상 17:32, 겔21:15), 근심하다(삼하 7:27, 애 3:33), 상심하다(삼하 13:33), 깨닫다(왕상 8:47), 감동시키다(대하 30:12), 위로하다(대하 30:22), 주의하다(욥 1:8, 전 7:2), 담대하다(시 27:14), 살피다(시 48:13), 무지하다(잠 6:32), 간교하다(잠 7:10), 착심하다(잠 23:12), 진술하다(사 41:22), 기억하다(사 46:8), 낙심하다(렘 4:9).
[부] 다정하게(삿 19:3), 뜻대로(삼하 7:21, 대상 17:19), 담대히(렘 30:21).
구약 성경 / 599회 사용


율법서, 예언서, 시편은 종종 '마음'에 대해 언급한다.
이 단어의 어근은 아카드어, 앗시리아어, 이집트어, 우가릿어, 아람어, 아랍어, 후기 성경 히브리어에도 나온다.
상응하는 아람어 명사는 다니엘서에 7회 나온다.

'마음'(hear)t은 창세기 6:5에서 사람에 관한 언급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창세기 6:6에서는 하나님에 대하여 레브(לֵב )가 사용되었다.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레브는 몸의 기관을 가리키기도 한다.
"아론이 성소에 들어갈 때에는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기록한 이 판결 흉패를 '가슴' heart에 붙여..."(28:29),
"요압이...손에 작은 창 셋을 가지고...압살롬의 '심장' heart을 찌르니..."(삼하 18:14),
"내 '심장' heart이 뛰고..."(38:10).

레브는 어떤 것의 내부나 한가운데를 가리키기도 한다.
"...큰 물이 바다 '가운데' in the heart 엉기니이다"(15:8),
"...그 산에 불이 붙어 화염이 충천하고..."(4:11, KJV는 '하늘 한가운데' in the midest of heaven, RSV는 to the heart of heaven),
"너는 바다 '가운데' 누운 자 같을 것이요..."(23:34).

레바브30:14에서와 같이 겉 사람과 대조되는 속 사람에 대하여 사용될 수도 있다.
"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으리라"(30:14, 참조: 2:13),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레바브는 종종 강조를 위해 '영혼' soul과 함께 사용되기도 한다.
"또 마음을 다하고 '영혼' soul(한글개역 - 성품)을 다하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기로 언약하고"(대하 15:12, 참조,  대하 15:15).

네페쉬(영혼, 생명, 자아)는 KJV에서 15회, '마음'으로 번역된다.
모든 경우에 이 단어는 '속사람'을 나타낸다.
"대저 그 마음(네페쉬)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23:7).

레브는그 사람 자체 혹은 그 사람의 인격에 대해 사용되기도 한다.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기를..."(17:17),
"곧 내 마음이 지혜와 지식을 많이 만나 보았음이라"(1:16).

레브는 또한 이런 의미로 하나님에 대해서 사용된다: "내가 또 내 마음에 합하는 목자를 너희에게 주리니..."(3:15).

욕망, 성벽, 의지의 자리를 '마음'으로 표현할 수도 있다.
"바로의 마음이 완강하여..."(7:14),
"무릇 마음에 원하는 자는 그것을 가져다가..."(35:5, 참조: 35:21, 35:29),
"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진심으로 주를 찬송하고..."(86:12).

레브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이 의미로 사용된다.
"정녕히 나의 마음과 정신을 다하여 그들을 이 땅에 심으리라"(32:4).

두 사람의 '마음'이 서로 어울릴 때 그들은 동의한다고 한다.
"내 마음이 네 마음을 향하여 진실함과 같이 네 마음도 그러하냐"(왕하 10:15).
대하 24:4의 "요아스가 여호와의 전을 중수할 뜻을 두고..."에서 '뜻을 두고'는 히브리어로 '마음에 품다'라는 뜻이다.

 

'마음'은 감정의 자리로 생각된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6:5),
"...그가 너를 볼 때에 마음에 기뻐할 것이라"(4:14, 참조: 삼상 2:1).
즐거운 마음(16:25),
겁내는 마음(35:4),
떨리는 마음(삼상 4:13)들이 있다.

 

'마음'은 지식과 지혜의 자리로 간주되며 '정신, 지성'의 동의어로 생각되기도 한다.
'마음'이 '알다'라는 동사와 함께 나올 때 종종 이런 의미를 나타낸다.

"너는...마음에 생각하고..."(8:5, NASB는 '너는...마음으로 알고'),
"그러나 깨닫는(아는) 마음과...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29:4, KJV, RSV, 'mind').

솔로몬은 다음과 같이 기도했다.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왕상 3:9, 참조: 왕상 4:29).

기억은 마음의 활동이다.
"...그 말씀을 네 마음에 두라"(22:22).

'마음'은 양심과 도덕적 특성의자리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와 우리 주위의 세상의 계시에 어떻게 응답하는가?
욥이 대답한다: "...일평생 내 마음이 나를 책망치 아니하리라"(27:6).
이에 반하여, "다윗이...그 마음에 자책하고"(삼하 24:10).

마음은 인간 행위의 근원이다.
"...나는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렇게 하였나이다"(20:5, 참조: 20:6).
다윗은 '정직한 마음'으로 행하였고 히스기야는 '전심'으로 행했다.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청결한"(24:4) 사람만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

레브는 반항과 교만의 자리를 나타내기도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8:21)고 말씀하셨다.

두로왕도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다.
"...네 마음이 교만하여 말하기를 나는 신이라 내가 하나님의 자리 곧 바다 중심에 앉았도다..."(28:2).
그들은 모두 "죄가 마음 판에 새겨진"(17:1) 유다와 같이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지배하신다.

인간의 자연 그대로의 마음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유일한 소망은 하나님의 약속에 놓여 있다.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36:26).

그러므로 죄인들은 다음과 같이 기도한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51:10),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86:11).
또한 다윗은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마음을 감찰하시고 정직을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아나이다..."(대상 29:17)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승인을 구한다.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마음을 단련하소서"(62:2).

'마음'은 인간의 내적인 존재, 곧 그 자신을 대표한다.
마음은 그 자체로서 인간이 행하는 모든 것의 근원이다(4:4).
사람의 모든 생각, 욕망, 말, 행동들은 그의 내부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자기 자신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17:9).
사람이 자기 자신의 방식대로 행하기를 계속할 때, 그의 '마음'은 점점 더 완고해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의 마음에 할례를 행하여(마음의 부정함을 제거시켜) 그들이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도록 하실 것이다(30:6).

동의어 - (관련성구)

(990, 베텐) בֶּטֶן

몸, 배, 자궁
베텐은 '몸 body, 배 belly, 자궁 womb'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72회 나온다.

셈어 동족어에 의하면 이 단어의 기본적인 의미는 '내부' interior이다.
히브리어에서 이 단어는 '하복부'를 의미하며 아마르나 석판에서도 이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
그렇기 때문에 이 단어는 '여자의 자궁' woman's womb이나 '위' stomach를 가리키기도 하며, 혹은 비유적인 의미에서 인간의 육체적인 특성을 나타내는데 사용되기도 한다.
이 단어는 때로 병행되어 나오는 레헴(자궁 womb) 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의미를 지닌다.

에훗이 칼로 모압 왕 에글론의 베텐을 찔렀다는 언급은 시적인 정의(이야기 따위에서의 권선징악)의 특성을 암시해준다.
왜냐하면 충분히 만족해 있는 이 통치자, 즉 '매우 뚱뚱한 이 사람'은 희생자들의 노획물로 삶을 영위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베텐(beten)을 땅에 댄다는 것은 굴욕을 나타내는 것이다(참조: 44:25, 애굽의 부조와 아마르나 석판).

'모태에서부터'와 '베텐의 열매'라는 어구들은 관용어로서, 전자는 '나면서부터', 후자는 '몸에서 나온 것' 혹은 '자녀'를 나타낸다.

베텐은 지혜 문학에서 인간의 가장 깊숙한 곳을 표현하거나 욕망의 자리를 나타내기 위해 여러 번 사용되었다(참조: 15:35, 20:20, 18:8, 18:20 등). 이 단어는 총체적인 인간을 나타내기 위해 네페쉬(혼 soul)와 병행되어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런 언급들에서 '몸' body은 베텐의 내장(visceral) 성질을 나타내기에는 어감이 다소 흐릿한 번역이다(31:9, 44:25, 6:7).

하나님을 베텐(beten)과 관련지어 언급함으로써, 그가 태아를 만들고 형성하는 분이며(3:1-11, 31:18, 139:13, 1:5, 참조: 51:15), 어린 아이를 자궁에서 나오게 하시며(22:9, 46:3) 첫 순간부터 그 생명을 감독하시는 분(71:6, 49:1)임을 시사해 준다. 자궁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다(127:3, 참조: 7:13, 28:4, 28:11, 30:9). 그렇지만 악인은 '모태에서부터(메라헴)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밉베텐) ...거짓을 말하는도다'(58:3). 그리고 하나님은 간음한 여자의 자궁을 저주하신다(5:21).

아마도 신들이 모태에서부터 왕들을 불렀다고 하는 바벨론 사상에 대한 하나의 반론으로서, 이사야는 종을 만드시어 모태에서부터 그를 부르신 이가 바로 여호와였다고 선포한다(44:2, 44:24, 49:5).

 

동의어] (관련성구)

(2416, 하이) חַי

살아있는, 생존하여 있는

 

하이(형용사)는 하야(hy:j; , 2421: 살다)에서 유래했으며, '살아있는, 생존하여 있는 living, alive'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500회 나온다.

이 형용사는 종종 하나님에 대한 수식 형용사로 사용되고 있으며(3:10, 2:1, 42:3, 등), 또한 죽었거나 말라버린 것에 대조되는 사람, 동물, 채소에 대해서도 사용되고 있다. 복수어형은 흐르는 물 혹은 신선한 물을 묘사하고 있다(26:19, 14:5, 14:6, 19:17 등).

 

 

[동의어] (관련성구)

(3824, 레바브) לֵבָב 

내부인간, 마음, 정신, 의지

 

레바브(명남)는 레브(ble , 3820)와 동일하며, '내부 인간, 마음, 정신, 이해력, 의지'를 의미한다.

→ 3820 레브를 보라.

 

 

[동의어] (관련성구)

(3826, 립바) לִבָּה

마음 heart

 

립바(명여)는 레브(ble , 3820)의 여성형이며, '마음 heart'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7회 나온다.

립바는 마음이 정직한 것(125:4), 마음이 어두워지는 것(44:18), 마음이 악한 것(16:30)을 묘사한다. 하나님은 마음을 연단하고(17:3), 마음을 감찰하신다(7:9, 21:2). 하나님 앞에는 인생의 마음이 완전히 드러난다(15:11).

 

 

[동의어] (관련성구)

(4578, 메에) מֵעֶה

내부기관, 내장, 배, 창자

 

메에(명남)는 '내부기관, 내부에 있는 부분들, 내장, 배, 창자'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32회 나온다.

 

셋 혹은 네 가지 예외를 제외하고 이 명사는 사람, 즉 남성 및 여성과 연관되어 있다. 2회에 걸쳐 이 단어는 바다의 큰 고기와 관련되어 사용되며 그 고기의 배가 요나의 일시적인 바다 밑의 거주지였으며 그곳에서 요나는 기도하였다(2:1-2).

2회에 걸쳐 이 명사는 하나님의 감정과 연관된 구절에서 발견된다. "주의 열성(키나)과 주의 능하신 행동(게부라)이 이제 어디 있나이까 주의 베푸시던 간곡한 자비(하몬 메에카)와 긍휼(라하밈)이 내게 그쳤나이다"(63:15, 참조: 31:20, H19).

 

이 단어는 사람에 대해 사용되며 성별을 교차하여 사용한다. 이 단어는 남자에 쓰일 수 있다. 30:27(욥), 삼하 16:11, 삼하 17:12(다윗), 대하 21:19(여호람), 대하 32:21(산헤립), 15:4(아브라함).

다음의 구절에서 이 단어는 여자들을 언급한다. 71:6, 49:1(어미), 1:11(나오미), 25:23(리브가).

종종 여성을 언급할 때, 메에는 '자궁'을 의미하는 베텐과 병행된다.

 

이 단어가 사용되는 세 가지의 중요한 측면이 있다. 첫째,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 사용되어 사람의 내부기관, 창자, 위를 언급한다. 따라서 에스겔(3:3)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보여주신 두루마리(메에는 베텐에 병행함)를 먹고 '배'와 '창자'에서 소화시키라는 명령을 받았다(참조: 7:19, 네페쉬에 병행함). 대하 21:15(2회), 대하 21:18-19에서는 하나님께서 유다왕 여호람의 "창자"에 감염시키신 무서운 질병에 관한 언급이 있다. 이 질병은 어떤 종류의 복부질병으로, 아마 창자의 탈장 유무와 관련된 무서운 설사병이었음에 틀림없다.

 

메에가 사용되는 둘째 측면은 남녀의 생식 기관을 언급하는 경우이다. 따라서 단순히 소화기관 이상의 것이 포함될 수 있다. 우리는 지금 남녀의 생식 기관, 즉 성 기관의 측면에서 고찰하고 있다(15:4, 25:23, 1:11, 삼하 16:11, 삼하 17:12, 대하 32:21, 48:19).

 

메에가 사용되는 셋째 측면은 감정의 자리를 나타내는 비유적이고 은유적인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앞에서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관련하여 언급하였다(63:15, 31:20).

따라서 이사야는 모압에 대하여 온몸(메에)과 마음(키르비)으로 떨며 슬퍼하였다(16:11).

예레미야는 소리쳐 "나의 고뇌여, 나의 고뇌여"라고 울부짖는다(4:19, "슬프고 아프다"). 예레미야 애가서의 기자는 유사한 감정을 표현한다(1:20, 2:11).

다윗은 하나님의 법을 자신의 "심중"에 숨긴다(40:8).

이 단어는 신부가 자신의 사랑하는 자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는데 사용된다(5:4).

말의 이러한 비유는 신약성경에로 확대되어 다음과 같이 쓰인다. "자비의...창자(스플랑크나)를 입고"(3:12), "그리스도 안에...무슨 창자와 자비가 있거든"(2:1, 한글개역 "무슨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신체기관에 관한 은유적 용법은 고대에서 더욱 일반적이었다. 히브리 사람들은 즐거움을 표현하는데 간장(카베드, 가끔 영광을 의미하는 카보드로 잘못 표기되기도 함)을, 애정에 대해서는 신장(켈라요트)을 애정과 심정에 대해서는 심장(레브)을, 자비에 대해서는 복부 기관(메임)을 사용한다(다양한 용어들을 참조). 영어에서 '심장'(heart)이란 단어는 이러한 표현의 대부분에 대해 사용되며 '심장'은 그러한 대부분의 말들에 대한 합당한 번역이 되고 있다. 물론 감정을 표현하는 신체 기관에 관한 히브리적 용법은 하등의 문제가 없다. 현대인들이 자비가 가슴에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성경도 역시 자비가 복부에 존재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히브리인들은 단순히 일반 언어 용법을 반영하고 있으며(유대인에 의하여 창안된 것이 아님), 따라서 정신적이고 감정적인 상태는 그 감정이 어떻게든 해서 영향을 미치는 기관에 의하며 묘사된다.

(참조: V. P. HAMILTON; BDB).

[동의어] (관련성구)

(5315, 네페쉬) נֶפֶשׁ

숨쉬는 존재, 영혼, 생명 등

 

네페쉬(명여)는 '숨쉬다, 원기를 회복하다'를 뜻하는 동사 나파쉬(vp'n: , 5314)에서 유래한 명사이며, '숨쉬는 것이나 호흡하는 존재(피조물), 영혼, 생명' 등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750회 나온다.

 

(a) 네페쉬는 사람이든 짐승이든 간에 육체를 살아 있는 존재로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단어는 어떤 경우에서(36:6) 소마(몸 body)로 번역되어질 수 있다. 네페쉬가 프쉬케로 번역되어 지면 프쉬케는 '넓은 의미에 있어서 인간의 생명적인 것을 의미하며'(G. Von Rad, Old Testament Theology 1, 1962, 153), 다른 말로는 살아 있는 것을 뜻하고 있다. 우리는 성경에서 '살아 있는 혼'이라는 말을 읽게 된다(1:20, RSV, living creatures). 죽어가는 자는 자기의영혼을 밖으로 불어내거나(AV 'gives up the ghost' 영혼을 포기한다. 참조: 15:9), 혹은 영혼을 쏟아 붓는다(2:12). 영혼은 죽는 자에게서 떠난다(35:18). 그러나 영혼(즉 생명)은 육체로 되돌아 올 수 있다(왕상 17:21). '영혼은 영혼으로'라는 것은 '생명은 생명으로'라는 것을 의미한다(21:23). 생명의 좌소로서의 피(Blood)는 실질적으로 '네페쉬'나 프쉬케와 동일할 수 있다(9:4 이하, 17:11, 17:14, 12:23). (G. Harder).

 

(b) "생물"(네페쉬 하이야)는 1:20에서 물에 사는 생명체 피조물에 대해1:24에서는 땅에 사는 동물에 대해, 2:7에서는 사람(개역: "생령")에 대해, 9:10에서는 새들과 땅에 사는동물에 대해, 9:16에서는 사람과 동물에 사용되었다. 동일한 용어가 '모든 생물', 그리고 '사람'에 대해 사용되었다. 이런 경우에 네페쉬 하이야라는 용어는 생명을 가지고 호흡하는 모든 살아있는 피조물을 의미한다.

그러나 동일 용어 '네페쉬 하이야'가 모든 생물에 사용되었다고 해서 모든 생물이 우리 인간과 같은 혼이나 영혼을 가졌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분명히 네페쉬의 기능과 능력에 있어서 곤충과 물고기의 네페쉬와 소, 말 등의 네페쉬와 사람의 네페쉬가 다른 것이다. 기계의 가치와 능력에 따라 장착되는 동력이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있다.

특히 인간적 존재는 본래부터 충동, 욕구, 소망, 의지를 포함하기 때문에 네페쉬는 그런 의미들로도 사용되었으며, 한 개인의 생명을 의미한다. 소생시키고 회복시키는 대상으로서 네페쉬는 영혼(soul)이라는개념과 생명 life이라는 개념을 모두 포함한다(R. V. Harris의 구약원어사전).

동물의 네페쉬와 사람의 네페쉬가 다른 것은 우선 하나님의 창조 행위에 대한 기사가 밝혀준다. 사람은 창조될 때 동물들과는 달리 생명의 숨(니셰마트 하임, 생명의 숨)을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것이다. 그래서 '네페쉬 하이야'가 된 것이다. 이는 사람의 네페쉬가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과 창조 의지에 의해 창조된 동물의 네페쉬와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람의 네페쉬와 동물의 네페쉬의 차이를 밝혀주는 또 하나의 성구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3:19-21을 보면 "19 인생에게 임하는 일이 짐승에게도 임하나니 이 둘에게 임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이의 죽음 같이 저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것이 헛됨이로다 20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 누가 알랴"

3:19에서 단지 한 사건, 즉 죽음이 사람과 짐승에게 똑 같이 찾아온다는 것, 3:20에서 '단 한 곳으로 간다는 것은 일종의 무덤을 가리킨다. 죽음이란 누구에게나, 인간이건 짐승이건 간에 예외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3:21에서 사람의 네페쉬와 동물의 네페쉬가 돌아가는 곳이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전도서에서는 루아흐[영]가 사용되었지만 문맥상 네페쉬[혼]를 의미한다). 일부 학자들이 3:21을 회의적으로 해석하지만 매우 분명하고 명확한 어투로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간다'고 말한다. 이 사실을 누가 알겠는가? 오직 하나님 선만이 아신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은 자는 이 사실을 안다. 그러면 솔로몬도 알고 있었다.

 

(c) 네페쉬는 자아 생명의 민감한 부분으로서 감정, 사랑(Cant. 1:7), 갈망(63:1), 기쁨(86:4)의 좌소를 의미한다. 이것은 어떤 것을 더 숙고해야 할 문제는 아니다. '영혼'은 그 생명의 운동과 감정의 여러가지 표현을 나타낸다. 영혼은 인간의 내적 능력을 결합한 요소이다. 따라서 "너의 영혼을 다하여"라는 말이 성립된다(13:3). 영혼의 내부에서 음식에 대한 욕망(12:20, 12:21), 육체의 욕망(2:24), 살인과 복수에 대한 갈망(27:12)이 거주하고 있다. 영혼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다. 즉 그것은 울고(119:28), 눈물을 흘리며(30:16), "오래" 참는다(6:11). 그러나 지식과 이해(139:14), 생각(삼상 20:4)과 기억(3:20)도 마찬가지로 영혼에 자리잡고 있다. "영혼"은 전 인격 곧 인간의 전 자아의 총체이다. 따라서 "영혼"은 의미상 "나 자신"또는 "네 자신"과 동일시 될 수 있을 정도이다(삼상 18:1). 2:7에서 네페쉬는 '사람' person, 혹은 '존재' being를 의미한다.

살아있는 피조물 역시 혼(soul)으로 묘사되어 질 수 있다. 집합적 의미에서의 살아있는 모든 것, 곧 모든 생물들(11:10). 율법에서 영혼(soul)이라는 말은 특별한 법규와 관련된 당사자를 의미한다(4:2, 5:1, 5:2, 5:4, 5:15). 사람들을 계수할 때 영혼들(souls)이라고 계수한다(1:5, 10:22). 구약성경이 죽은 사람을 가리켜 그 사람의 영혼이라 말하며 따라서 이러한 표현으로써 죽은 시체를 의미한다는 사실은 영혼이 몸과는 별개라는 개념 또는 죽을 때 영혼이 몸에서 분리된다는 개념에 구약성경이 전혀 친숙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지적해 주고 있다(6:6). (G. Harder)

 

 

[동의어] (관련성구)

(7307, 루아흐)  רוּחַ

숨, 바람, 영

 

루아흐(명여)는 루아흐(j'Wr , 7306: 숨쉬다, 불다)에서 유래했으며, 그 기본개념은 '움직이는 공기'이며 '숨(호흡), 바람, 영'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730회 나온다.

 

(a) 숨, 호흡 breath.

① 입의 숨: 15:30 하나님의 입'김'; 참조: 19:17 내 '숨'; 코의 숨 4:20 우리의 콧'김'(왕을 가리킴); 우상에 대하여 10:14 "그곳에 생기가 없다"는 것은 '호흡'이 없는 것을 가리킨다. 135:7, 51:17, 2:19.

② 명령적인 말, 루아흐는 입의 호흡 곧 말하는 것을 나타낸다. (1) 하나님의 명령, 33:6, 참조: 34:16. (2) 메시야 왕의 명령, 11:4.

③ 단순한 숨(인 말), 6:26, 16:3, 5:13.

④ 분노의 거친 콧 숨: (1) 하나님에 대하여, 15:8, 삼하 22:16, 4:9, 18:16, 30:28, 59:19. (2) 사람에 대하여, 25:4.

⑤ 생명의 표시와 상징, 6:17, 7:15, 7:22, "기식": 37:5, 37:6, 37:8, 37:9, 37:10, 37:14(숨 또는 영).

 

(b) 바람 wind.

① (하늘의) 바람 8:1, 15:10, 11:31, 왕상 18:45, 10:13, 51:16, 135:7, 13:15, 40:7, 참조: 26:13. 동풍 10:13, 14:21, 48:8, 18:17, 17:10, 19:12, 27:26, 4:8. 북풍 25:23. 해풍(서풍), 10:19. 낮의 바람, 3:8. 사방 바람, 49:36, 37:9, 8:8, 11:4, 2:10, 6:5. 광풍, 107:25. 광풍 148:8, 1:4, 13:11, 13:13, 55:9. 뜨거운 바람, 11:15. 바람의 인격화, 삼하 22:11, 18:11, 104:3, 참조: 4:19, 104:4.

② (바람의) 방향 quarter, 편 side. 42:16 (동)편; 42:17 (북)편; 42:18 (남)편; 42:19 (서)편; 대상 9:24 (동서남북) 사방; 52:23 사면.

③ 공기 air, 가스 gas, 26:18, 33:11.

④ 무익, 공허한 것. 7:7("호흡"), 나의 생명은 바람이다. 15:2("헛된 지식"). 바람의 지식은 헛된 지식이다. 41:29. "우상은 바람이요" 우상은 무익하거나 헛된 것이다. 1:14, 2:11, 2:17, 2:26, 4:4, 4:6, 6:9. 바람을 잡은 것은 무익하거나 공허한 것을 잡은 것이다. 참조: 1:7, 4:16, 5:15.

 

(c) 마음의 자세, 기질, 성질, 생기(활기, 기운), 기분, 감정, 정신.

① 정신, 생기, 왕상 10:5, 대하 9:4 숨을 더 쉴 수 없는 정신 상태, 곧 넋을 잃는 것을 뜻한다. 45:27, 15:19, 삼상 30:12 기운을 회복하는 것, 왕상 21:5 마음의 근심.

② 용기 courage. 5:1, 76:12(표준-군왕들의 "호흡"), 개역-방백들의 "심령". 19:3, 77:4, 142:4, 143:4, 2:11, 18:14.

③ 기(성)질, 기분, 특히 분노, 9:23, 8:3, 16:32, 참조: 25:28, 29:11, 15:13, 6:8, 7:9, 10:4.

④ 성마름(조급함)이나 참을성, 6:9. 참조: 2:7, 14:29, 32:18, 21:4, 7:8.

⑤ (번민하거나 근심하는, 불만하는) 마음, 기질. 41:8, 26:35, 54:6, 참조: 3:14, 6:4, 7:11, 삼상 1:15.

⑥ (압도당한, 꺾인) 마음, 기질. 21:7, 참조: 61:3, 15:4, 15:13, 17:22, 18:14, 143:7.

⑦ 기타 성질 및 성향, 충동적인 성질. 대상 5:26, 대하 21:16, 대하 36:22, 1:1, 1:5, 51:11, 1:14, 왕하 19:7 = 37:7, 14:24, 2:15, 2:16, 2:30, 5:14, 5:30(시기), 4:12, 5:4, 19:14, 28:6, 41:38, 17:27.

 

(d) 예언의 영. 27:18, 왕하 2:15, 왕하 2:9, 29:10(참조: 2:21, 15:12, 19:14). 깊이 잠들게 하는 영. 2:11, 13:2, 참조: 13:3.

 

(e) 생물의 영, 숨쉬는 존재.

① 하나님의 선물과 창조. 12:1, 27:3, 참조:42:5.

② 하나님은 영을 보존하신다. 10:12, 12:10, 16:22. 27:16, 16:2.

③ 그러므로 그 영은 하나님의 영이다. 6:3,

④ 영은 죽을 때에 떠난다. 78:39, 38:16(생명의 원리), 146:4, 104:29, 104:30, 17:1, 34:14(참조: 15절), 57:16, 8:8, 11:5, 3:21, 12:7, 31:6.

⑤ 육체를 떠난 영혼. 4:15.

 

(f) 하나님의 영, 곧 삼위일체의 제 3위인 성령.

① 대부분의 표현에서 여호와의 신(영)은 가장 완전한 그리스도교적 의미에서 성령이라는 것을 문맥이 명백히 입증하며, 신약성경의 유비(analagy)가 강하게 시사해준다(A. F. Kirkpacrich cambridge Bible. Psalms 11. P 293).

② 최초로부터 하나님의 루아흐는 하나의 실재 혹은 인격으로서 태초의 수면에 운행하셨다. 이는 성령께서 한 인격으로 창조 사역에 참여하셨음을 시사한다. 1:2. 참조: 11:17, 11:25.

③ 처음으로 다윗이 그를 "성령"이라고 지칭했다(51:11, 참조: 63:10-11).

④ 이사야는 그들 자신에게 영감을 주는 자로 생각하든지 아니면 동료 화자로 생각하든지 간에 메시야, "주 여호와께서 나와 그 신을 보내셨느니라"(48:16)를 인용하면서 그가 말할 때 그의 분명한 인격체를 말한다.

⑤ 하나님의 신의 역사는 창조 때에나(26:13)나 섭리에서(33:4, 104:30), 우주적이며, 중생에 있어서 구속적이다(11:9, 36:26-27). 하나님의 신은 신자를 지지하고 인도하기 위해 내주 하시며(9:20,143:10, 2:5), 지도권(11:25, 6:34, 삼상 16:13), 섬김(11:17, 6:34, 삼상 16:13), 섬김(11:17, 3:8, 7:12)을 위해 혹은 메시야(11:2, 42:1, 61:1)와 그의 백성들(2:28 [H 3:1], 32:15)에게 능력을 제공해 주기 위해 임하신다.

 

(g) 초자연적 존재, 천사 같은 존재.

① 악한 영. 삼상 16:14, 삼상 18:10, 삼상 19:9.

② 참소하는 큰 영. 왕상 22:21.

③ 바람이나 불을 천사로 삼음. 104:4(참조: 왕상 19:11-12).

(참조: BDB; TWOT).

 

[참고 - 루아흐(j"Wr , 7307). 바람 wind, 호흡, 숨 breath, 마음 mind, 영 spirit. 이 명사는 구약성경에서 387회 나오는데, 대개 여성형이다. 비록 몇몇 학자들은 이 단어가 라와흐(jw"r; , 7304, 넓다, 광범하다 be spacious, 원기를 회복하다 be refreshed)에서 파생한 것으로 보나(삼상 16:23, 32:20, 히필형 '헤리아흐': '기체를 호흡함으로써 지각하다', KB, p.877, 아래를 보라). 아인 모음(ayin-vowel) 어근 루흐(숨을 쉬다 to breathe)와 관계가 있는 어원 명사(primitive noun)로 보는 것이 가장 좋다(BDB, p.924), 참조, 레아흐(j'yre , 7381, 냄새, 향기 odor), 우가릿어 rh.

 

'루아흐'(헬라어 프뉴마)의 기본적인 개념은 '움직이는 공기' air in motion이다. 여기서 공기란 악어의 비늘 사이로 나올 수 없는 공기(41:16 [H8])로부터 한 바탕의 폭풍(25:4, 1:11 ASV, RSV)에 이르기까지의 공기를 가리킨다. '네 바람', 루호트는 세상의 네 방위를 기술한다(49:36, 37:9). 동물이든(7:15, 104:25, 29), 사람이든(42:5, 37:5) 혹은 양자 모두이든지(7:22-23) 생물에게 있어서 루아흐는 호흡을 가리킨다. 여기서 호흡은 흡입한 것일 수도 있고(2:24) 입술에 있는 것일 수도 있다(11:4, 9:18, 죽은 우상들과 대조, 10:14, 51:17). 하나님은 '루아흐'를 창조하신다. '하나님의(하나님으로부터 온) '루아흐'(영 spirit[S], 한글개역 "기운")가 오히려 내 코에 있느니라'(27:3).

 

호흡은 능력(왕상 10:5, 여기서 시바의 여왕은 '더 이상 '루아흐'가 없었다', 즉 그녀는 '숨을 쉬지 못했다', 압도당했다), 담력(2:11, 5:1, 이스라엘의 적들의 '영' spirit이 낙담했다), 가치(4:20, 여기에서 다윗 왕은 '우리 콧구멍의 호흡'[한글개역, "우리의 콧김"] 혹은 완전한 희망이었다고 언급한다-이 표현은 상용 애굽어 twn fnd.sn '그들의 코의 호흡'에서 차용한 것이다) 등의 의미를 함축한다. 하지만 거짓 선지자들은 '루아흐'(바람)가 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말씀이 없기 때문이다(5:13). 여기에서 '루아흐'는 '단순한 호흡'의 헛됨, 무익함이라는 의미를 함축한다(7:7, 41:29). 공기의 돌진, 어떤 사람의 코를 통해 나오는 거센 콧바람처럼 '루아흐'는 호전적인 감정(25:4)이나 분노의 감정(8:3, 29:11, ASV, RSV)을 뜻한다. 궁극적으로 호흡은 활동과 생명을 의미한다. 사람이 병들거나 쇠약할 때 그 '영'이 쇠한다(17:1). 그러나 그 영은 '두번째 바람'으로 되돌아 오며 그는 '소생한다'(15:19, 삼상 30:12, 참조, 45:27). 전 인류의 호흡(루아흐)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12:10, 42:5). 따라서 6:3은 RSV처럼 '내 영(하나님으로부터의 생기)은 영원히 인간 안에 거하지 아니할 것이다(70인역본을 따름). 왜냐하면 그는(필멸할) 육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날들(홍수까지)은 120년이 될 것이다'(참조, 34:14-15)라고 번역하는 것이 최상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경우에 그밖의 곳에서는 '루히'가 '나의 영' my spirit을 의미한다. 그리고 여기서 '거하다'로 번역된 단어는 많은 논란이 되고 있다. 스파이저(speiser)는 '인간에게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혹은 '인간을 보호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JBL 75:126-29).

 

그러나 인생의 독특한 성질은 물질적(육체적)인 것에 있지 않고 영적인 것, 즉 정신적이고 인격적인 것에 있다. 인간의 '호흡', '숨'은 하나님의 특별한 창조 활동에 의해 주어졌다(2:7, 1:2에 나오는 짐승들과 대조하라).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는 것은 인간의 내적 존재-이것은 삼위일체('우리', 1:26)의 뜻에 의하여 형성되었으며 다른 모든 생물을 다스리는 권한을 부여받았다(2:20)-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어 성경은 너의 마음, 즉 '루아흐' 속으로 들어오는 것들에 대하여 언급한다(11:5, 20:32). 다니엘의 아람어 성경도 완악해진 느부갓네살의 마음(ASV, spirit)에 대해 언급한다(5:20). 심지어 물리적인 경향을 지닌 동사 '리아흐'(냄새 맡다, 27:27)도 비유적인 의미를 함축한다. 실은 불에 '닿을'(ASV, '냄새 맡을' smelleth, 16:9) 때 끊어진다. 이 단어는 또한 정신적인 자각(앎)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기도 한다. 즉 하나님의 희생제사를 '받으실' 것이다(ASV 난외주는 smell[냄새맡다]이라고 표기함, 삼상 26:19). 사실상 구약성경의 희생제사의 목적은 '레아흐 한 니호아흐'(달콤한 향기 sweet savor), 즉 달래는 향기(8:21, NASB 'soothing aroma)를 드리는 것이며, 이것은 그리스도를 통한 화해의 속죄 개념으로 상징적, 예표적으로 지적된다. 나아가 명사 '루아흐'는 마음의 성향 혹은 태도를 묘사한다. 갈렘의 마음은 그의 불신실한 동료들의 마음과 달랐다(14:24, 참조, 산헤립의 영, 즉 왕하 19:7에 나오는 결심). 사람의 '루아흐'는 슬플 수도 있고(왕상 21:5), 압도당할 수도 있으며(77:3[H4]), 회개할 수도 있다(57:12). 사람의 '루아흐'는 '차가울'(억제될) 수 있고(17:27), 질투할 수도 있으며(5:14), 인내하거나 교만할 수도 있다(7:8). 사람의 지혜의 영으로 충만할 수도 있고(34:9) 매춘의 영으로 충만할 수도 있다(4:12).

 

끝으로, '루아흐'는 인간의 완전한 영적인 의식을 나타낸다. '내가 내 안에 있는 내 영으로(한글개역, "내 중심이") 주를 간절히 구하오리니'(26:9), 지혜로운 자는 '자기의 마음을 다시리며'(16:32, 참조, 5:20). '마음에 간사가 없다'(32:2). 구약성경은 일반적으로 인간을 하나의 전체로 다루긴 하지만(참조, 네페쉬 '영혼', 종종 단순히 '자아' self라고 번역된다) 또한 인간의 본질적인 이원론을 인정한다(A.B. Davidson, The Theology of the OT, p.202). 영과 육이 결합하여 '자아' self를 이루며, 따라서 인간은 한편으로는 '루아흐'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말해질 수 있지만, 또한 인간은 '네페쉬'이다(그러나 때때로 인간은 네페쉬를 소유하고 있다고 하며, 이 '네페쉬'는 죽을 때 인간의 몸에서 떠난다고 한다). '루아흐'는 그 몸의 니드네(칼질 sheath) 속에 담겨 있다(7:15, 아람어, 참조, 12:1). 몸은 죽을 대 티끌로 되돌아 가지만 불멸의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3:19, 12:7). 이와 관련하여 '루아흐'와 '네페쉬'는 여기서 분명히 '영혼' soul을 의미하며, 중복되는 경향이 있다(7:11, 26:9, 참조, 6:9, 21:4, RTWB,p.234). 이는 자유주의 신학과 다르다. 자유주의 신학은 '루아흐'를 '네페쉬' 안에서만 개별화되는 비인격적인 생명력으로 국한시키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자유주의 신학은 영혼이 몸과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즉 '루아흐' 혹은 '힘'(power)이 떠날 때(12:7) 사람은 존재하기를 그친다는 것이다(L. Kohler, old testament Theology, p.145, 이 주장은 Davidson, op. cit.,pp. 200-201에서 반박당한다). 그러나 '네페쉬'와 '루아흐' 양자 모두 죽을 때 몸을 떠날 것이며 몸에서 분리된 상태로 존재할 것이다(35:18, 86:13, 영혼이 그 몸으로 되돌아온다고 하는 드문 실례에 대해 왕상 17:22을 참조하라).

 

보다 더 높은 영역에서 '루아흐'는 초자연적인 존재, 천사같은 존재,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을 가리키기도 한다(삼상 16:23, NASB). 이러한 초자연적 존재의 기능은 계시 기능일 것이다(4:16[?], 참조, 1:9, 19[H1:9, 2:2, mal'ak, q.v.]. 또는 적당히 하나님께서는 천사들을 '루호트'(바람 winds, 104:4, '영들'이 아님, 1:7) 나불(참조, 왕상 19:11-12)로 이용하기도 하셨다. 사탄은 '참소하는 큰 영'이다(왕상 22:21). 다른 악한 영들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인간에게 임할 수 있다(삼상 16:14, 삼상 18:10, 삼상 19:9).

 

영적인 인격의 가장 두드러진 예는 하나님이시다(31:3). '루아흐'는 의미의 범위를 보여줄 수 있다. 하나님의 '호흡'(한글개역, "기운")은 강한 바람일 수도 있다(40:7, 59:19, 참조, 11:31). 주의 '영'은 단순히 활동적인 능력이나 분위기를 가리키기도 한다(40:13, "누가 여호와의 신을지도하였느냐", 혹은 '누가 여호와의 마음[의도]을 알았느냐', 70인역본과 고전 2:16도 마찬가지임). 하지만 대부분의 면에서 '루아흐 야훼'(YHWH, 여호와의 신)는 '가장 완전한 그리스도교적 의미에서' 성령이다는 것을 문맥이 입증해주며 신약성경의 유비(analogy)가 강하게 시사해준다(A. F. Kirkpatrick, Cambridge Bible, Psalms, Ⅱ, p.293). 최초부터 하나님의 '루아흐'는 '하나의 실재 혹은 인격처럼' 태초의 수면에 운행하셨다(1:2)(H. Schultz, Old Testament, Ⅱ, p.184), 여호와 및 모세의 임재와는 구별되며 여호와께서 광야에서 장로들에게 '임하게 하신' 그의 인도하시는 임재를 참조하라(11:17, 25). 처음으로 다윗이 그를 "성령"이라고 지칭했다(51:11[H13], 참조, 63:10-11). 그리고 이사야는 그를 자신에게 영감을주는 자로 생각하든지 아니면 동료 화자(speaker)로 생각하든지 간에 메시야, "주 여호와께서 나와 그 신을 보내셨느니라"(48:16)를 인용하면서 그가 말할 때 그의 분명한 인격체로 말한다.

 

하나님의 신의 역사는 창조 때에(26:13)나 섭리를 계속하심에 있어서(33:4, 104:30) 우주적이며, 중생(regeneration)에 있어서 구속적이다(11:19, 36:26-27), 하나님의 신은 신자를 지지하고 인도하기 이해 내주하시며(9:20, 143:10, 2:5), 지도권(11:25, 6:34, 삼상 16:13), 섬김(11:17, 3:8, 7:12)을 위해, 혹은 메시야(11:2, 42:1, 61:1)와 그의 백성들(2:18[H3:1], 32:15)에게 장차 능력을 제공해 주기 위해 임한다. - J. B. Payne.] (p.1322-1324*).

 

['루아흐'와 '네페쉬'의 차이점, '루아흐'는 인간의 이성적이고 영원한 생명의 원리이며, 이성, 의지, 양심을 소유하고 있다. '루아흐'는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에게 전해주며 고무적인 활력을 만들어낸다. 이 활력은 결국 개인적인 삶의 주체로서 인간의 '네페쉬'가 된다. 개개인에 독특한 인격은 인간의 정서와 욕구의 자리인 '네페쉬'에 원래부터 있다. '루아흐'는 그 자체내에 그 활력의 기반을 가지고 있는 생명령이다. '네페쉬'는 보다 주관적이고 조건부적인 생을 갖는다. 신약성경은 '프뉴마'(루아흐)와 '프쉬케'(네페쉬)를 분명하고 실질적으로 구별하는 것 같다. - G. L. Archer.](p.1324*).

 

 

[동의어] (관련성구)

(7308, 루아흐) רוּחַ

바람 wind,영 spirit

 

루아흐(명여, 아람어)는 히브리어 루아흐(j"Wr , 7307)에 해당하며, '바람 wind, 영 spirit'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11회 나온다.

 

(a) '바람'(2:35, 7:2).

(b) '영'

① 사람의 영(5:20, 7:15, 지식의 자리로서, 5:12, 6:4).

② 신의 영(4:5, 4:6, 4:15, 5:11, 5:14).

(참조: BDB; KB).

 

 

[동의어] (관련성구)

(7476, 라욘)  רַעְיוֹן

생각, 사고

 

라욘(명남, 아람어)은 히브리어 라욘(@/y[]r' , 7475)에 해당하며, '생각, 사고, 착상'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6회 나온다(2:29-30, 4:19, 5:6, 5:10, 7:28).

 

 

[동의어] (관련성구)

(7522, 라촌)  רָצוֹן

호의, 은총, 기꺼이 받아들임, 뜻, 의향

 

라촌(명남)은 라차(hx;r; , 7521)에서 유래했으며, '호의, 은총, 기꺼이 받아들임, 뜻, 의향'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56회 나온다.

 

라촌은 세 가지의 주요한 의미를 나타낸다.

(a) 첫번째로 이 단어는 하나님의 '은총' 혹은 '호의'(33:16, 60:10, 5:12, 30:6, 30:8 등). 또한 왕들(잠언에만 나옴, 14:35, 16:13, 16:15) 및 모든 사람들(10:32, 11:27 등)의 호의나 은총이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b) 둘째로 이 단어는 '기뻐함' 혹은 '받아들임'(28:38)이며, 항상 종교적혹은 제의적 의미로 사용된다.

라촌은 선물이나 희생 제물의 '허용할 수 있음' 혹은 '받아들임(열납)'을 묘사한다(1:3, 22:20, 56:7 등).

 

(c) 세번째 이 단어는 하나님 '뜻'과 같이 '뜻'이라는 특수한 의미에서의 '소원' desire, '기쁨' pleasure이다(10:11, 40:9 등). 더 많은 본문들이 사람의 '소원' desire 혹은 '뜻' will을 묘사한다(대하 15:15, 8:4 등).

야곱이 임종시에 한 축복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는 49:6에서 한가지 모호하고 난해한 용법이 나온다. 역본들은 독특한 독법으로 서로 다르게 번역을 하였다. KJV는 "자기네들 뜻대로 그들은 성벽을 파내려 갔다" in their selfwill they digged down a wall, AV는 "그들은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다" they hocked an ox, RSV는 "그들은 제멋대로 소들의 오금을 잘라 절름발이를 만든다" in their wantonness they hamstring oxen, JPS는 '그들은 그들의 뜻대로 소들의 발목 힘줄을 끊었다; in their self will they houghed oxen이라고 번역한다(한글개역, "그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KJV가 히브리 논문을 가장 정확히 따르는 것 같다.(W. White)

 

 

[동의어] (관련성구)

(7907, 셰크위) שֶׂכְוִי

하늘의 현상(모양), 총명, 깨달음

셰크위(명남)는 '하늘의 현상이나 모양'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38:36에서 1회 나온다: "가슴 속의 지혜는 누가 준 것이냐 마음 속의 총명은 누가 준 것이냐".

셰크위는 또 하나의 불가해한 단어 투호트와 함께 나란히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포웁(M. Pope, Job, in AB, pp. 302-303)과 울브라이트(W. F. Albright, YGC, pp. 246-47)가 논한 바 있다.

포웁(Pope)을 비롯한 몇몇 학자들은 이 단어가 수성(水星)을 뜻하는 콥트어(Coptic) 명칭과 관련되어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울브라이트(Albright)는 이러한 해석이 현대콥트어(Coptic) 학자들의 오류하고 선언한 다음 이 단어는 "선원" mariner, "어부" fisherman를 의미한다고 주장하였다. 병행한 이 두 단어를 투호트 항목에서도 논하였다. 투아흐를 보라. 한글개역은 본 단어를 "마음"으로, 투호트를 "가슴"으로 번역하였다(G. G. Cohen).

(참조: BDB; HE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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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4-20 오전 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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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넣으신으로, 사람이 생령이 되어 하나님의 사람으로 걸어 다녔고 말도 했다.

에스겔 37장

뼈들에게 인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니 뼈들이 움직였고 살과 힘줄이 생겼으나 그 속에 생기는 없었다. 그리하여 생기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여 이르기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 하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감으로 그들이 무덤에서 살아 나왔고, 하나님은 살아 나온 이들에게 하나님의 신을 부어줌으로 하나님의 신이 사람과 함께 살게 하셨다.

영혼육 이란?

사람의 육체(집) 안에는 생기와 신(영, 신령)이 있고, 또 혼(魂)이 있습니다.
혼은 육체를 돕고, 영은 혼을 돕습니다.
영(신령)은 떠날 수도 있고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곧, 영은 왕래할 수 있는 것이지요.

혼은 생기와 육체와 함께 있으며, 육체가 죽으면 혼은 떠나게 됩니다. 생기는 영과 혼이 아니며, 육체에 생명을 주는 것이고, 사는 힘입니다. 생기가 다 소모되어 육체 곧 집이 무너졌을 때는, 영과 혼이 사람에게서 살 수가 없으므로 떠나게 됩니다.  이때 영은 하늘로 가고 혼은 땅으로 갑니다.

영과 혼은 썩지 않는 불멸의 존재이나, 육은 썩어 흙으로 돌아가게 되지요. 영과 혼은 각각 두 가지가 있으니, 이는 두 가지 씨(하나님의 씨와 마귀의 씨)에 의해 달라지게 됩니다.

영은 눈에 보이지 않은 존재이기에 영의 집 즉 육체가 필요하게 되고, 이에 따라 하나님께 속한 사람과 마귀에게 속한 사람으로 분류됩니다.

하나님의 마지막 역사 계시록 성취 때에도 계시록 6장에서는 심판받아 멸망당하고, 8장, 9장, 12장에서 본바 사람이 1/3, 1/3, 1/3씩 다 죽게 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멸망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께 받은 생령이 죽음으로 육신만 있는 자들이 되겠지요. 이들도 에스겔 37장과 요한복음 5장같이 생기가 들어감으로 다시 살게 되고 하나님의 신을 받게 됩니다.

아담과 하와도 범죄로 인해 하나님이 떠나가시고 생령이 죽음으로 결과는 흙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오늘날 계시록 때에도 생령이 죽은 자들에게 계시 말씀인 생기와 하나님의 신이 들어감으로 다시 살게 됩니다. 이 생기는 계시록 2장에서 받은, 감추었던 만나 곧 계시록 10장의 생기 곧 계시 말씀으로 다시 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영과 함께하여 뼈 같은자가 아닌 하나님의 생기로 부활하는 자가 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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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육(靈魂肉)
- 영혼육에 대한 오늘의 묵상은 3월 2일(월) 함께 읽었던 데살로니가전서 5장에 소 소개된 말씀의 일부분입니다.

오늘 설교 본문으로 선택한 데살로니가전서 5:23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사람을 영적 존재라고 합니다.
영적 존재에는 “하나님” “천사” “사탄” “사람”으로 설명합니다.
영적 존재로서 하나님과 천사와 사탄은 육체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유일하게 육체를 갖는 영적 존재입니다.

영적 존재로서 사람은 영과 혼과 육으로 구분합니다.
영과 혼과 육은 모든 학자들이 인정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부분은 사람을 “육체”와 “영혼”을 갖는 존재로 “이분법(二分法)”으로 설명하는 이론과 “육”과 “혼”과 “영”으로 구분하는 “삼분법(三分法)”으로 설명하는 이론으로 소개됩니다.

이분법으로 주장하는 성경적 근거는 요한복음 3:6에서 찾아봅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영(靈)

이분법이 옳은가 아니면 삼분법이 옳은가 논쟁이 계속됩니다. 그러나 이분법과 삼분법은 논쟁하여 결정할 이론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분법이란 육체와 영혼으로 구분합니다. 이러한 주장은 존재론적 주장이라고 하겠습니다.

쉽게 설명하자면 죽음이란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영혼이란 영과 혼으로 영과 혼이 각기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은 함께 붙어서 다닙니다. 그러나 육체는 죽음을 통해서 육체만으로 존재한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영혼과 육체라는 이분법은 존재론적인 주장입니다.

삼분법이란 영과 혼과 육의 기능이 제각기 다르며 각기 고유의 기능을 갖는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삼분법이란 기능적 주장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육체의 기능은 감각적 기능입니다. 춥다 덥다 시원하다 이러한 느낌은 모두 감각적인 기능입니다. 영의 기능은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하나님의 영과 사람의 영이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기능을 갖습니다. 신앙이란 영역에서 살펴보면 사람만이 절대자와 소통하므로 사람은 종교를 갖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적인 영으로 기독교는 오직 하나님만이 사람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하나님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혼이란 생각하는 기능을 갖습니다. 사람을 생각하는 갈대라고 정의할 때에도 생각이란 기능은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에게서도 혼이 있기 때문에 동물들도 어느 정도 생각하는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참조, 히브리서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영(靈, Spirit, πνεῦμα)
혼(魂, Soul, ψυχὴ)
육(肉, Body, σῶμα)

♦ 3월 2일(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데살로니가전서 5:1∼28
♦ 묵상을 위한 주제 : 영과 혼과 몸(23절)
♦ 성구 :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사순절 제5일 아침을 맞이합니다.
오늘도 새 날을 맞이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며 감사합니다.
어제 밤에도 얼마나 많은 사건과 사고가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죽음의 문을 넘어갔습니다. 이런 와중(渦中)에도 이렇게 건강하게 아침을 맞이할 수 있는 은혜가 얼마나 귀하고 귀합니까?

건강(健康)이란 육체적인 것만 아니라 영(靈, Spirit, πνεῦμα)과 혼(魂, Soul, ψυχὴ)과 육(肉, Body, σῶμα)의 창조적 조화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창조적 조화란 최초의 사람 “아담”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셨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므로 하나님과의 건강한 관계는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창조적 조화는 하나님과의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죄가 인간에게 들어왔으므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적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죽음 이후에는 영생(永生)과 영벌(永罰)의 갈림길에서 영생(永生)의 자리를 확보한 것입니다.

영생의 자리를 확보하는 방법을 영과 혼과 육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어떻게 영과 혼과 육을 흠 없이 보존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히브리서 4:12)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경건의 훈련에 의해서 영과 혼과 육을 흠 없이 보존할 수 있습니다.

사람과 동물의 차이는 영(靈)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동물의 값은 죽었을 때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예를 들면 소고기 한 근의 가격과 돼지고기 한 근의 가격은 시장에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지만 사람의 고기는 시장에서 확인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판매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람과 동물의 가치는 고기 값이 아닙니다. 그 가치는 “영(靈)”에 있습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마태복음 16:26) 

사람의 목숨이 천하보다 값진 것은 동물의 고기 값보다 사람의 영(靈)의 가치를 그만큼 귀하게 인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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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인간은 영과 혼과 몸(관절과 골수)으로 구성돼 있다고 합니다. 몸이란 육신(肉體)을 뜻합니다. 사람들은 보통 영혼과 육신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영과 혼은 다릅니다. 그럼 인간의 영과 혼과 육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spirit

루아흐

프뉴마

마음

의지

고집

가슴

진리 

선장

사장

soul

네페쉬

프쉬케

생각

지성

관념

머리

지식

선원

운전사

body

바사르

사르크스

감각

감정

욕심

본능

자동차


Ⅰ. 영 (靈, Spirit)


a) 영은 반드시 존재합니다.


시편 143/4 그러므로 내 영이 내 안에서 쇠잔하며 내 안에 있는 내 마음이 절망하나이다.


잠언 17/22 즐거운 마음은 약과 같이 좋으나, 상한 영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


딤후 4/22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네 영과 함께 계시고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 지어다. 아멘


내 안에 또 다른 나인 내 영이 존재합니다.

영은 나의 가장 근원인 마음이자 의지입니다.

영은 육과 같이 별도의 인격체이며, 형태를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거듭난 성도의 영과 함께 하시며, 영이 살아난 사람은 자기 마음과 의지를 통제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통 영의 존재를 느끼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누구나 밤에 혼자 있으면 무서움을 느낍니다.

또한 예민한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누군가 자기를 보고 있다고 느낍니다.

이는 우리 영이 다른 영(마귀, 악령)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보통 눈으로 보이거나 귀로 들리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보고 들을 수 있는 세계는 전체 파장 중에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반사된 가시광선 영역으로 380~770nm(nanometers)입니다.

우리가 들을 수 있는 가청 주파수는 일반적으로 16Hz~20,000Hz 입니다.


우리가 볼 수 없는 밤에 고양이는 적외선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들을 수 없는 초음파로 돌고래는 대화합니다.

지금도 TV 전파가 공중에 떠 다니지만 TV가 없으면 우리는 볼 수 없습니다.

라디오 방송 또한 라디오가 있어야 들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단지 보이고 들리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존재가 없다고 부정하는 것은 비과학적인 생각입니다.



우리는 가끔 사진기에 영이 찍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필름의 감광물질이 우리가 볼 수 없는 파장에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요즘 유명 가수 녹음실에서 귀신 웃음소리가 들렸다고 화제가 되곤 합니다.

이 역시 현대의 첨단 녹음장비는 인간이 들을 수 없는 주파수를 녹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예민한 사람은 영을 보거나 영의 음성을 듣기도 합니다.



영의 사진이 찍히는 것을 심령 사진이라고 하는데 조작됐거나, 현상 인화 때 잘못됐거나, 착시에 의한 것도 있습니다.

사람 얼굴이나 옷 모양이 너무 또렷한 것은 가짜입니다.

영은 주로 흐릿하며, 얼굴 윤곽이 분명치 않고, 팔 다리가 없거나, 머리만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심령 사진 중 확실해 보이는 것만 모아 봤습니다. (다름 링크를 클릭하시기 바랍니다.)


심령 사진-1


심령 사진-2


누가 16/22 그러다가 그 거지가 죽었는데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의 품으로 옮겼고, 그 부자도 죽어서 장사되었더라.


원래 사람이 죽고 영이 분리되면 초혼하는 영들(천사 또는 마귀)이 와서 천국이나 지옥에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한 맺혀 죽은 영이나 갑작스런 사고로 죽은 영 중 일부는 이 세상에서 떠돌고 있습니다.

저는 이에 대해 사람들이 영적으로 무지에 빠지지 않도록 일부 영이 이 세상에 남겨졌다고 봅니다.

그러나 이들은 마지막 심판 때 불못의 형벌을 받게 될 것이므로 이들에게 심판이 면제된 것은 아닙니다.


계시록 20/13 바다도 그 안에 있던 죽은 자들을 넘겨주고 또 사망과 지옥도 그들 안에 있던 죽은 자들을 넘겨주니

그들이 각자 자기들의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으며  


이사야 11/9 그들은 나의 모든 거룩한 산에서 해치거나 파괴시키지 않으리니 이는 마치 물들이 바다를 덮음같이 세상이

주의 지식으로 충만할 것임이니라.


하박국 2/14 마치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땅이 주의 영광의 지식으로 가득 차리라.


마지막 때 사망과 지옥뿐만 아니라 바다에서도 죽은 자들을 내어 주는데, 성경에서 바다는 이 세상(땅)을 의미합니다.

귀신이 이 세상이 존재하는지에 대해 논란이 많지만 성경적으로도 이 세상에 죽은 사람의 영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귀신의 국어 사전적 의미는 죽은 사람의 영이지만, 개역한글 성경에서 귀신은 영문으로 마귀(devil) 또는 악령(evil spirit)

또는 '더러운 영'(unclean spirit)을 의미합니다.



마가 9/25 예수께서 무리가 함께 달려오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영'(foul spirit)을 꾸짖으시며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벙어리이며 귀먹은 영아'(dumb and deaf spirit), 내가 너에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와 다시는 들어가지 말라.”고

하시자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은 귀신 들린 자를 고쳐 주셨는데, '더러운 영'(foul spirit)을 꾸짖으셨습니다.

'벙어리이며 귀먹은 영'(dumb and deaf spirit)에게 명령하여 그에게서 나오고 다시는 들어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벙어리이며 귀먹은 영'(dumb and deaf spirit)은 마귀가 아니라 죽은 사람의 영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왜냐하면 영문 성경에서 마귀는 'devil'로 구분하고, 마귀는 장애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에 반해 마귀(devil)는 타락한 천사로, 사탄의 수하에 있는 악령이며, 하나님을 대적하고, 사람들을 타락시킵니다.

따라서 귀신과 마귀는 다르며, 이들 모두 사람에게 해를 끼치므로 악령 또는 더러운 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귀신은 주로 안개 낀 밤에 잘 나타나고 남자보다는 여자가 더 영적이기 때문에 잘 봅니다.

그들이 보는 귀신은 주로 희미하고 손과 발이 없는 경우가 많으며 얼굴윤곽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도 가끔 꿈에서 악령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거나 가위 눌림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러한 귀신이나 마귀가 다른 사람에게 들어오는 것을 '귀신들림 현상'이라고 합니다.

육신은 영의 집과 같아서 자신의 몸이 없는 영은 남의 몸에 들어가려는 습성이 있습니다.

방탕하고 음란한 마귀가 들어오면 나도 모르게 술이나 도박에 빠지게 되고 음란한 행동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갑자기 난폭해지거나 술이나 도박에 빠진다던지 음란한 행위를 서슴치 않는 경우 의심해 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귀신은 자신이 살았을 때 했던 것을 죽어서도 하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시어머니가 죽은 후 그 영이 며느리에게 들어 가서 동네 사람에게 반말을 하고, 액수까지 제시하며

돈을 갚으라고 독촉을 합니다.


특히 한 맺힌 귀신은 원인 모를 병을 주거나 정신병을 주기도 합니다.

무당들은 자원해서 이러한 귀신에 들려 예언을 하기도 합니다.

귀신은 시공을 초월할 수 있기 때문에 미래의 일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이러한 '신접 행위'(부리는 영들에게 묻는 것, 강신술)를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18/11 마술사나 부리는 영들에게 묻는 자나 박수나 강신술사를 너희 가운데서 보이지 않게 하라.


사람들은 조상들을 위해서 매년 제사를 드리지만 향불을 켜고 기다리면 조상 영은 오지 않고 대신 마귀가 옵니다.

왜냐하면 낙원에 있거나 지옥에 있는 영들은 함부로 이 세상에 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향 냄새를 맡고 찾아온 시커먼 마귀(타락한 천사)들이 와서 제사음식을 먹고 절을 하는 사람의 몸을 들락거립니다.

그래서 제사를 지내고 나면 몸이 축난다고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고전 10/20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방인들이 제사하는 것은 마귀들에게 하는 것이지, 하나님께 하는 것이 아니니라.

나는 너희가 마귀들과 교제하는 자들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아니하노라.


이러한 귀신이나 마귀로부터 괴롭힘을 당하지 않으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늘 말씀과 찬송과 기도의 은혜 가운데

거해야 합니다.

빛이 비추면 결코 어두움이 침입할 수 없습니다.

2000년 전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사역하실 때에도 많은 귀신과 마귀들을 내 쫓았습니다.


누가 10/17 칠십 명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마귀들도 우리에게 굴복하더이다, 하니


마가 9/29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이런 종류는 기도와 금식에 의하지 않고는 아무것으로도 내보낼 수 없느니라."


야고보서 4/7 그러므로 하나님께 복종하라.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희로부터 도망하리라.


만약 악령이 괴롭힌다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담대히 쫓아 내시기 바랍니다.




b) 영이 가진 속성



1. 영은 선하고 의로운 마음인 양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의 생각은 육신의 생각과는 다릅니다.

지하철에서 앉아 있는데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앞에 서면 영과 육의 마음이 싸웁니다.

육은 편한 것을 추구하기 때문에 모른 채 하고 자는 척 하려고 하지면 결국 양심에 찔려 일어나게 됩니다.

하지만 남을 돕거나 선한 일을 하면 마음에 뿌듯한 기쁨이 몰려옵니다.


로마서 2/15 이런 사람들은 또한 자기 양심이 증거하며 자기 생각들이 서로 고소하고 변명하는 가운데 자기 마음 속에

기록된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 보이느니라.


사도 바울은 인간의 마음에 십계명과 같은 율법이 새겨져 생각의 갈등을 일으키는데 이것이 양심이라 했습니다.

양심은 하나님이 주신 선하고 의로운 마음입니다.

그래서 거짓말이나 도둑질을 하게 되면 양심에 가책이 되고 심장이 뛰게 됩니다.

그러나 계속 악을 행하다 보면 양심히 무뎌져서 담대히 악을 자행하게 됩니다.


디도서 1/15 정결한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정결하나 더럽혀진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아무것도 정결한 것이 없고,

도리어 그들의 마음과 양심이 다 더럽혀져 있느니라.


딤전 4/2 이들은 위선으로 거짓말을 하며 자기 양심을 뜨거운 인두로 지진 자들이라.



2. 영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장합니다.


마태 4/4 그러나 주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느니라.’고 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예수님께서 사람이 빵(음식)만 먹고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진리 말씀은 내 영의 양식입니다.

따라서 진리를 듣지 못한 영은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고 흐물흐물하고 팔 다리가 없는 악령이 되곤 합니다.

육신은 나이가 먹으면 DNA 정보에 의해서 저절로 성장하지만, 영은 진리를 듣지 못하면 육신은 할아버지더라도

영은 어린아이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c) 영의 죽음



창세기 2/17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지 말라. 네가 거기서 나는 것을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아담과 이브를 창조한 하나님이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지 말라는 계명을 주셨는데 뱀(사탄)의 꼬임에

넘어간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의 계명을 불순종하고 선악과를 따 먹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는 날에 죽는다고 했는데 아담은 아주 오래 살았습니다.

그 때 죽은 것은 육이 아니라 영이었습니다.



인간은 영이 떠나면 육신이 죽듯이 하나님이 떠난 우리 영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하나님이 떠나면 내 영은 성장과 활동을 멈추고 잠자는 것 같은 상태로 지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 영이 있는 지조차 모르고 육신의 삶에 빠져 살고 있습니다.

영의 양심보다 육신의 본능이 강하기 때문에 영의 선한 목소리를 외면하고 육신의 본능대로 살게 됩니다.


마태 8/22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를 따르라. 그리고 죽은 자들로 그들의 죽은 자를 장사지내게 하라."고

하시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끊어진 사람은 살았다 해도 죽은 자와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죽은 자'(영이 죽은 자)로 그들의 '죽은 자'(육신이 죽은 자)를 장사지내게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범죄로 죽었던 내 영을 다시 살리는 것이 거듭남이며, 거듭남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사함 받으면 성령이 오셔서

죽었던 내 영을 살려 주시면서 이루어게 됩니다.



영이 죽은 상태에 있으면 아무리 하나님을 부르짖고 외쳐도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영이 죽은 사람은 마치 선장을 잃은 배와 같습니다.

목표를 잃고 파도에 휩쓸려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결국 암초에 부딪쳐 부서지고 말 것입니다.

영이 살아나면 더 이상 육신에 매이는 삶을 살지 않고, 육신을 주관하고 다스리며, 옳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d) 자발적 영적 체험의 위험성



사람은 누구나 미약하나마 예감이나 텔레파시, 초능력 등의 영적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요즘 뉴에이지 열풍이 불어서인지 명상, 요가, 기수련, 단전호흡, 마인드콘트롤, 최면 등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신비주의에 속하는 마법에서는 마귀를 불러내 마귀의 힘을 빌어 마법을 행하기도 합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정신집중을 통해 영적능력을 배양할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18/9~12 네가 주 너의 하나님께서 네게 주시는 땅으로 들어가거든 너는 그들 민족들의 가증함을 따라

행하는 것을 배우지 말 것이요, 자기 아들이나 자기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는 자나 점치는 자나 때를 살피는

자나 마법사나 무당이나 마술사나 부리는 영들에게 묻는 자나 마법사나 강신술사를 너희 가운데서 보이지 않게 할지니라.

이는 이러한 일들을 행하는 모든 자들이 주께 가증함이 되나니, 이러한 가증한 것들 때문에 주 너의 하나님께서 네

앞에서부터 그들을 쫓아내시느니라.


이러한 뉴에이지와 신비주의와 관련된 영화와 게임과 서적이 청소년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경에서 점 보는 것, 마법이나 마술, 무당행위, 강신술 등을 엄격히 금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진리를 외면하고 귀신 쫓음이나 병 고침, 예언, 방언 같은 영적 능력만 중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영적인 세계에 접근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요한 14/6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

아무도 없느니라.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가기 위한 유일한 문이자 길이십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인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함부로 영계에 접근했다가는 영계에 드글거리는 마귀나 귀신의 주관을 받을 확률이 높습니다.

실제로 단전호흡이나 기수련을 하다가 악령에 들려서 이상한 소리를 하는 사람이 종종 나옵니다.


딤전 4/1 이제 성령께서 분명히 말씀하시나니, 마지막 때에 어떤 자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들과 마귀들의

교리들을 따르리라.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하나님이 만드신 기독교와 사탄(마귀)이 만든 종교로 구분됩니다.

사탄 종교의 원류는 이집트와 바빌론으로 이곳에서 각종 신비주의와 사탄숭배와 여신숭배 등이 나왔습니다.

사탄 종교는 동양으로는 힌두교와 불교에 영향을 끼쳤고, 서양으로는 카톨릭과 프리메이슨(사탄숭배집단), 신비주의,

뉴에이지에 등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조금씩 다른 것 같지만 기본원리는 부처가 말한 것처럼 "누구나 성불하면 부처가 될 수 있다." 입니다.

누구나 노력해서 도를 깨달으면 자기 힘으로 신(하나님)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사탄이 품었던 교만한 마음이며 이로 인해 하늘에서 쫓겨났고, 땅에서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땅(세상)의 왕인 사탄은 지금은 하나님처럼 행세하지만 결국 영원한 지옥불(불못)에 들어가게 예정되어 있습니다.



야고보서 6/6 주의 목전에서 겸손하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히실 것이라.


이에 반해서 기독교는 자신이 죄인이고, 아무 것도 할 수 없 수 없는 미약한 존재임을 깨닫고, 진심으로 회개하며,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어리석어 보일지 모르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겸손하고, 애통해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를 찾으십니다.

내가 가진 모든 고집과 자만과 욕심을 버리고, 예수님께 모든 것을 믿고 맡길 때 주님께서는 우리를 깊히 사랑해 주시고,

거룩하게 하시며, 능력을 주시고, 영화롭게 하여 주실 것입니다.


Ⅱ. 혼(魂, soul)


시편 94:17
주께서 나의 도움이 되지 아니하셨다면 내 '혼'은 거의 적막 중에 거하였으리라.


누가복음 1:46~47
그때 마리아가 말하기를 "내 '혼'이 주를 드높이며 내 영이 하나님 내 구주 안에서 기뻐하였노라.


요한복음 12:27
이제 내 '혼'이 괴로우니 내가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시여, 이 시간으로부터 나를 구해 주소서.

그러나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이 시간까지 왔사옵니다.


혼은 나의 자아로, 영과 육의 다리 역할을 하며, 우리가 이성적 논리적으로 사고(思考)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곳입니다.

혼은 영으로부터 영감을 받거나 양심의 소리를 듣지만 이를 수용할 수도 있고 무시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느끼는 감정과 감각과 욕망은 육신에서 올라오며, 혼은 이를 받아들이지만 통제할 수 있습니다.

혼은 머리에서 일어나는 나의 생각이자 의식이자 기억이며, 학문을 탐구하게 하고, 문화와 예술을 지향합니다.


누가복음 16:27~28
이에 그가 이르되, 그러므로, 아버지여, 간구하오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으로 보내소서. 내게 다섯 형제가 있사오니 그로 하여금 그들에게 증거 하게 하여 그들 또한 이 고통 받는 장소로 오지 말게 하소서, 하거늘


인간은 혼이 있기에 본능에 따라만 사는 동물과 달리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고 본능을 억제할 수 있습니다.

영은 영적인 진리를 원하는데 반해 혼은 세상학문 즉 지식을 추구합니다.

우리는 학교를 다니거나 책을 읽음으로써 혼의 지적 욕구을 충족시켜 줍니다.

육신이 죽더라도 천국 또는 지옥에서 나의 자아라고 할 수 있는 의식 또는 기억은 유지되므로 혼은 소멸되지 않습니다.


베드로전서 1:9
이는 너희 믿음의 결과, 곧 너희 '혼'들의 구원을 받음이니라.


마태복음 10:28
또 너희는 몸은 죽일 수 있으나 '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차라리 '혼'과 '몸'을 모두 지옥에서 멸하실 수 있는 그분을 두려워하라.


사도행전 2:31
그가 미리 앞을 내다봄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하여 말한 것은, 주의 '혼'이 지옥에 버려지지 않았으며, 또 주의 육신도 썩어짐을 보지 아니하였다는 것이라.


문제는 영이 살아나기 전까지 우리는 혼으로 진리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성경 말씀을 그대로 믿기 힘든 것은 혼이 세상에 적합한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도 이 점 때문에 고생을 했는데 성경구절이 이해가 안가면 그대로 믿지 못하고 비유나 상징으로 풀이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비유라고 명시되지 않은 한 대부분 성경에 적힌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요한복음 20:29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도마야, 네가 나를 보았으므로 믿는구나. 보지 않고 믿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고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난 후에 제자 도마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말을 듣고 "내가 손가락을 주의 못 자국에 대어보고, 손으로 주의 옆구리에 넣어 보기 전에는 결코 믿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바로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손의 못 자국을 보이시면서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복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혼의 활동을 최대한 억제하고, 순수히 영(마음)으로 진리를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Ⅲ. 몸(육신, 肉身, body)


육신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가깝고 실제적인 나입니다.

육신은 영과 혼의 통제를 받지만 이를 거부하고 자기 마음대로 행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육신은 결국 늙고 병들어 죽기 때문에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고, 자손을 번식시키기 위한 본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육신은 종족보존과 삶을 위해 다음 세가지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a) 생존본능


생존본능은 살아 있는 동물이 죽지 않고 살려고 하는 본능입니다.

그래서 우린 굶어 죽지 않으려고 열심히 일하고, 사고 나지 않으려고 조심해서 운전합니다.

생존본능은 모든 동물들 속에 내재된 가장 큰 본능으로 사람들은 건강하게 오래 살려고 운동하고 보약을 먹습니다.

아프리카의 초식동물들은 언제 사자가 나타날 지 모르므로 불안한 마음에 항상 주위를 두리번거립니다.


자살하려는 사람들이 수 없이 실패하는 이유는 마지막 순간에 생존본능이 발동하기 때문입니다.

생존본능 때문에 우리에겐 항상 걱정 근심이 떠나지 않습니다.

회사에서 해고 당하지 않을 지, 교통사고 나지 않을 지, 도둑 맞이 않을 지, 큰 병 걸려서 죽지 않을 지 늘 불안합니다.

먹고 살기 바쁘고, 근심 걱정 때문에 영적인 일에는 신경 쓸 겨를이 없습니다.


마태 6/31~34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무엇을 입을까 하고 말하며 염려하지 말라.(이런 것들은

모두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에게 이런 모든 것이 필요한 줄 아시느니라.  

오직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해 주시리라.

그러므로 내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그 날의 재앙은 그 날로 충분하니라.”


이러한 인간의 사정을 예수님께서는 다 아시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채워 주신다고 하십니다.

삶이란 건 어차피 고통인데 내일 일까지 불안해 하고 걱정하지 말고, 오늘에 충실하라고 하십니다.

이 얼마나 명쾌하고 속 시원한 말씀입니까?


아무리 잘 먹고 잘 살고 안전하고 편안하게 살아도 모든 인간은 결국 늙어 죽는 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먹고 사는데만 연연하다 허무하게 살다 간 인생은 동물의 삶과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생존본능에 얽매어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놓쳐서는 안되겠습니다.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은 내가 이 세상을 사는 목적을 아는 일입니다.




b) 생식본능


모든 동물은 결국 죽기 때문에 생식활동을 통해 자손을 번식시켜서 종족을 보존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것을 생식본능이라고 합니다.

연어는 힘들게 태평양을 가로 질러 강물을 거슬러 올라와 알을 낳고는 죽습니다.

허망한 생각이 들지만, 연어가 알을 낳고 죽는 이유는 이제 할 일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비해 포유류가 새끼를 낳고도 오래 사는 이유는 새끼에게 젖을 먹이고 키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성이 50대가 되어서 폐경기가 되면 골다공증, 성인병, 각종 암 발병 확률이 몇 배나 높아지며, 노화도 촉진됩니다.

이는 생식을 위한 역할 기간이 끝났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이처럼 우리 육신으로서의 인간은 정해진 본능대로 살다 가는 비참한 존재입니다.


인간은 때가 되면 결혼을 해서 자식을 낳고 키우면서 보람을 느끼며 삽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환갑잔치에 가득 모인 아들 딸 손자 며느리 사위를 보면서 이제 할 일을 다 했다며 흐뭇해 합니다.

종죽보존을 위한 생식본능 때문에 남자는 성욕이 강하고, 여자는 모성애가 강합니다.

그런데 건전하게 사용되야할 성이 쾌락을 위한 도구로 잘못 사용돼 성매매, 원조교제, 강간 같은 사회 문제를 낳고 있습니다.


마태 5/2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그의 마음에 그녀와 더불어 이미

간음하였는니라.


예수님께서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으면 간음한 것이나 다름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남자가 여자를 보면 성욕을 느끼는 것은 남자의 본능인데 어쩌란 말입니까?

이는 우리가 육신의 눈으로 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며, 성령으로 온전히 거듭나 영의 눈으로 보면 예쁜 여자도

구원받아야 할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로 보입니다.

여성을 인격체로 보지 않고 성적 대상체로 보기 때문에 성희롱이나 성매매 같은 문제가 끊이지 않는 것입니다.




c) 쾌락추구본능 (쾌락을 추구함)



감정이란 육신이 외부의 자극이나 호르몬 분비에 대응해 표출하는 다양한 심리적 육체적인 반응입니다.

육신은 기쁨, 슬픔, 미움, 욕심, 의심, 시기, 질투, 불안, 두려움, 좋아함, 싫어함, 부끄러움 등의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좋은 물건을 보면 갖고 싶은 욕심이 나고, 사촌이 땅 사면 배 아프고(시기), 슬픈 영화를 보면 눈물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러한 육신의 감정은 자극 받기를 원합니다.


사람들은 기쁨을 자극받기 위해 코미디나 각종 쇼 프로그램를 봅니다.

사람들은 불안과 두려움을 싫어하면서도 불안과 두려움을 자극받기 위해 공포영화를 봅니다.

청소년들은 노여움과 파괴욕구를 자극시킬 수 있는 폭력적인 컴퓨터 게임이나 전자 오락에 열중합니다.

젊은이들은 감정적으로 흥분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비트가 강한 댄스음악이나 롹음악을 귀청이 떠나가도록 듣습니다.


이렇게 감정이 자극 받기를 원하는 것은 뇌신경을 자극해 도파민을 분비하기 위해서입니다.

도파민은 신경전달 물질로 뇌 활동을 활발하게 해주고, 기분을 좋게해서 행복감을 느끼게 합니다.

인위적으로 도파민을 분비시킬 수도 있는데 달고 기름진 음식, 커피, 술, 담배, 마약 등을 섭취하면 됩니다.

피곤할 때 커피를 마시면 정신이 번쩍 들고 기분이 좋아지지만 많이 마시면 중독되거나 심장에 좋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술과 담배를 통해 불안한 마음을 달래고, 기분을 좋게 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약물은 건강에 해로울 뿐 아니라 도파민 분비가 약물에 의존하게 되고, 점점 더 많은 양이 필요해져서

각종 중독에 빠지게 합니다.

따라서 술, 담배, 마약 등에 중독되면 건강을 크게 상하면서도 내 힘으로 끊기 힘든 것입니다.



사랑을 할 때도 도파민이 작용합니다.

이성에 매력을 느끼면 가슴이 뛰고 얼굴이 붉어지는데 이는 도파민이 분비되기 때문입니다.

성행위 시에도 도파민과 아드레날린과 성 호르몬 등이 분비돼 황홀한 감정을 느끼게 해 줍니다.

그런데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라도 2~3년 이상 만나게 되면 권태기에 빠지는데 이는 서로의 자극에 익숙하고 무뎌져서

더 이상 도파민이 분비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장 건전하게 도파민을 분비하는 방법은 운동을 통해서입니다.

걷기나 달리기, 자전거 타기 등의 운동을 하면 상쾌한 기분이 느껴집니다.

일 중독에 빠진 사람은 일에 너무나 열중한 나머지 일을 할 때 도파민이 분비돼 의욕과 성취감을 느끼게 되고,

휴일에 일을 쉬면 오히려 마음이 불안하고 삶의 의욕을 잃게 되므로 자진해서 직장에 나가게 됩니다.



도파민은 우리 생활에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도파민이 부족하면 무력증이나 파키슨병을 앓게되고, 너무 많으면 조울증이나 정신분열증을 앓게됩니다.

그러나 육신은 이를 통제할 능력이 없어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이 좋아지기 위해서라면 모든 희생을 감수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쥐의 뇌에 전기장치를 해놓고 스위치를 누르게 하니까 스위치를 누르면 전기자극으로 도파민이 분비되면서 뇌에

짜릿한 쾌감이 느껴지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결국 쥐는 자신이 죽을 때까지 스위치를 눌렀습니다.

인간도 쾌락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희생하는데, 며칠동안 PC방에서 게임만 하다 죽은 사람이 이에 해당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뇌를 즐겁게 하기 위해서 인생을 산다고 할 수 있고,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도파민을 분비하기

위해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 육신은 감정이나 감각이나 약물로 뇌신경이 자극돼 도파민이 분비되어 짜릿하고 황홀하고 기분 좋기를 원하는데,

이를 '쾌락을 추구함'이라고 합니다.


도박(복권, 경마)이 중독성이 강한 이유는 육신의 거의 모든 감정이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도박을 하면 불안, 두려움, 기쁨, 희열, 슬픔, 노여움, 욕심 등의 감정이 작용하며, 뇌가 짜릿한 자극을 받습니다.

컴퓨터 게임도 박진감과 폭력성이 강하고, 우월감과 성취감을 느끼게 하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중독성이 높습니다.

마약이나 담배, 술의 중독성은 말 할 필요도 없고, 이들은 특히 건강까지 크게 해칩니다.



담배 피우는 사람에게 왜 담배를 못 끊냐고 물어 보면 담배를 안 피우면 머리가 안 돌아간다고 합니다.

이는 도파민 분비가 이미 니코틴에 의지해 담배를 안 피우면 두뇌 회전이 안되고, 의욕이 안 생기기 때문입니다.

사람마다 취미가 다른 것은 뇌가 특정한 행위나 약물에 반응해 도파민을 분비하기 때문입니다.

도파민 분비가 성행위에 의존도가 높은 사람은 음란물을 즐겨 보거나 결혼하고 나서도 바람을 피게 됩니다.


육신의 쾌락은 통제되지 못할 때 각종 집착과 중독에 빠지게 되고, 결국 우리를 파멸로 인도하게 됩니다.

또한 사회에서 발생하는 거의 모든 악이 욕심과 쾌락이 통제되지 못할 때 발생합니다.

최근 금융 연체자가 많아진 이유 중 하나는 여자는 사치와 허영에, 남자는 술 값과 유흥비에 지출하는 등 욕망과 쾌락을

향한 육체적인 욕구를 스스로 억제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요일 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신의 정욕과 안목(眼目)의 정욕과 인생의 자랑이 다 아버지에게서 나지 아니하고

세상에서 났음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사라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토록 거하느니라.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은 모두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인생의 자랑입니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사탄이 인류를 타락시키기 위해 쥐고 있는 세상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내게 진정한 기쁨과 유익이 되지 못하고, 허무하고 허탈한 마음만 남을 뿐입니다.

이 세상도, 육신의 정욕도 시간이 지나면 없어지지만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만이 영원히 남게 됩니다.


로마서 8/13 너희가 육신을 따라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나 성령을 통하여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


역사적으로 제국이 멸망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국민이 성적타락이나 음주, 폭력 등의 쾌락에 빠져 기강이 해이해지고,

근면 성실히 일하기 보다 한탕주의나 불로소득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육신의 정욕대로 살면 죽을 수밖에 없지만 성령을 통하여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산다고 하였습니다.

쾌락을 원하는 육신이 스스로 쾌락을 절제할 수는 없습니다.


진리 말씀으로 죽었던 내 영이 살아나서 쾌락을 원하는 육신을 절제시키고, 영적인 것을 추구한다면 영혼의 구원을 받을

뿐만 아니라 육신도 깨끗하고 성실하게 살 수 있습니다.


Ⅳ. 결론(結論)


전도서 12:8,
헛되고 헛되도다. 전도자가 말하노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솔로몬은 이스라엘 최고 전성기 때의 왕으로서 온갖 부귀영화를 누렸습니다.

그는 지혜와 지식을 추구하였으나 오히려 근심이 많아지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쾌락을 위하여 웃음과 희락의 나날을 보냈고, 사업을 크게 하여 엄청난 재물을 모았고, 술로써 방탕한 삶을 살아보았고, 수많은 궁녀와 성적 유희를 누려 보았습니다.


베드로전서 1:24,
이는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사람의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며, 풀은 마르고 꽃은 져도 주의 말씀은 영원토록 남아 있음이라. 이것이 너희에게 복음으로 전해진 말씀이니라.


하지만 욕심과 쾌락은 언제나 만족되지 못하고, 나이가 들어 흰머리가 나고 주름살이 생기면서 본능에만 얽매어 살다 가는 지독한 인생의 허무를 깨달은 것입니다.

욕심과 쾌락을 추구할수록 몸과 마음은 황폐해지고, 결국 얻는 것은 병들고 죄악에 물든 육신입니다.


그리하여 솔로몬은 재앙이 다가오거나 아무 즐거움이 없다고 하기 전에 젊은 날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충고합니다.


시편 144:3~4,
주여,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알아 주시나이까!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존중하시나이까? 사람은 헛것과 같고 그의 날들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나이다.


사람은 20세를 넘으면 성장이 멈추고, 생성되는 세포보다 죽는 세포가 많아짐으로써 노화가 진행됩니다.


나이가 들어 주름살이 늘어나고, 흰 머리가 나며, 병에 시달리고, 기력이 쇠약해지면서 처량한 생각이 들 것입니다.


이를 감추기 위해 보톡스 주사를 맞고, 머리를 염색하지만, 면역력이 떨어지고, 시력이 감퇴되며, 이가 빠지고, 뇌세포가 파괴되는 것은 막을 수 없습니다.


고린도후서 4:16,
이런 까닭에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라. 오히려 우리의 겉 사람이 썩어질지라도 우리의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지나니.

남성은 중년이 되어 사회적으로 소외되거나 건강을 잃으면 우울증에 걸립니다.
여성은 집안 식구로부터 소외되거나 폐경기가 찾아오면 우울증에 걸립니다.
그러나 우리 육신이 늙고 병들어도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내 속사람인 영이 진리 말씀으로 날로 새롭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세상보다 훨씬 아름답고 영원하며 기쁨이 넘치는 세계인 천국에 갈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전도서 12:1,
너는 이제 젊은 날, 곧 재앙의 날이 이르기 않고 "나에게는 즐거움이 없다."고 말할 해가 가까워 오기 전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우리 인생 70~80년은 아이를 잉태한 산모의 10개월과 같습니다.

엄마가 아이를 위해 좋은 생각을 하고, 좋은 음악을 들려주고, 영양을 잘 섭취한다면 건강한 아이가 나올 것입니다.

그러나 엄마가 매일 담배 피고, 술 먹고, 스트레스 받고, 화를 내면 기형아나 미숙아가 태어날 확률이 높습니다.

이와 같이 내 인생 동안에 소중한 내 영을 잉태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영을 위해 산다면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제 '내가 왜 사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에 답하실 수 있을 겁니다.

우리 육신은 잘 먹고, 잘 살며, 결혼해서 자식을 낳아 키우면서 행복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내 혼은 지식을 구하고 예술을 추구하며, 사회적으로 성공하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진짜 나인 내 영을 위해서 사는 것이고,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아 천국에 이르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6:31,
그들이 말하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안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하니라.


왜냐하면 우리가 보는 세계는 잠깐 동안 존재할 뿐이지만, 우리가 믿는 보이지 않는 세계는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잘 살아도 내 영이 사(死) 후 심판을 받아 고통스러운 지옥에 거한다면 영원히 후회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진 고귀한 인간이 본능에 따라 동물처럼 살다가 가는 것은 너무 비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현명한 사람의 마음은 오른편(영적)에 있고, 어리석은 자의 마음은 왼편(육적)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 4:18,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보이는 것들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들이라. 이는 보이는 것들은 잠깐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들은 영원하기 때문이라.

요한계시록 14:11,
그 고통의 연기가 영원무궁토록 올라가리라. 그 짐승과 그의 형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시편 49:20,
사람이 존귀에 처해 있어도 깨닫지 못하면 멸망하는 짐승들과 같도다.

전도서 10:2,
현명한 사람의 마음은 그의 오른편에 있으나 어리석은 자의 마음은 그의 왼편에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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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과 혼은 어떻게 다른가? 7가지 차이점 (上)


한글성경을 읽다보면 영, 심령, 혼, 영혼, 마음 등의 단어들이 나옵니다.

이 5가지 단어들은 모두 같은 것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아니면 서로 다른 것일까요?

이에 대한 답은 인간의 구조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인간의 구조에 대한 견해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인간을 "영+육"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요3:6)

둘째는 인간을 "영+혼+몸"으로 보는 견해이지요. (살전5:23)

A. 육으로 난 것은 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이니

B. 너희 온 이...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 요한복음 3:6, ⓑ 데살로니가전서 5:23

첫째는 인간을 둘로 나눈다고 해서 "이분론",

둘째는 인간을 셋으로 나눈다고 해서 "삼분론"이라고 합니다.

어떤 분들은 이분론이 맞다, 삼분론이 맞다 하며 싸우지만

사실은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위에서 보았듯이 두 가지 모두 성경에서 말씀하는 사실이니까요.

둘 다 맞습니다.

크게 나누면 "영+육"으로 나눌 수 있고,

좀더 자세히 나누면 "영+혼+몸"으로 나눌 수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보겠습니다.

영, 심령, 혼, 영혼, 마음은 같은 것인가? 서로 다른 것인가?

일단 한글성경과 원어성경(헬라어, 히브리어)을 대조해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영 = 심령

혼 = 영혼

원어성경에서는 동일한 하나의 단어를

한글성경에서는 때에 따라 두 가지 단어로 번역한 것이지요.

영어성경까지 포함해서 표로 만들어보자면...

한글 성경

(개역)

영어 성경

(KJV)

헬라어 성경

(신약)

히브리어 성경

(구약)

영 (=심령)

spirit

프뉴마 (πνεῦμα)

루아흐 (ר֫וּחַ)

혼 (=영혼)

soul

프쉬케 (ψυχή)

네페쉬 (נֶ֫פֶשׁ)

표1_ 원어성경과 영어성경에서 영과 혼의 명칭

이번에는 "마음"에 대해서 알아볼까요?

간단하게 말하자면 "마음 = 혼(영혼)"입니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일반적으로 우리가 인식하는 마음은 혼(영혼)의 기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성경을 읽다보면

문맥상 영혼(혼)을 마음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경우가 상당히 많습니다.

이것을 대표적으로 가장 잘 보여주는 예가 중국어성경이지요.

중국어성경 중 가장 널리 사용되는 화합본(和合本)을 보면

영혼(혼)이 "마음(心)"으로 번역된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따라서 다음처럼 정리할 수 있습니다.

영 = 심령

혼 = 영혼 = 마음

그런데 문제는 이 다음입니다.

영과 혼은 같은 것인가? 서로 다른 것인가?

오직 이분론만 맞고 삼분론은 틀렸다고 믿는 분들은

영과 혼이 서로 같은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즉 "영 (심령) = 혼(영혼) = 마음"이라는 거지요.

영과 혼이 다르다고 한다면 이분론이 깨진다고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영과 혼이 같은 것이라면

굳이 다음과 같이 성경에서 영과 혼을 나누어 열거할 필요가 없었겠지요.

A. 너희 온 과 몸이...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B. 하나님의 말씀은...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C. 나의 지은 그 이 내 앞에서 곤비할까 함이니라.

ⓐ 데살로니가전서 5:23, ⓑ 히브리서 4:12, ⓒ 이사야 57:16

또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으로 하는 기도에 대해 성경은 말하기를...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고린도전서 14:14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으로 기도하면

자신의 영은 기도하지만

자신의 마음(혼)은 기도를 이해할 수 없어

영의 기도에 동참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즉 성경은 영과 마음(혼)을 서로 다른 것으로 설명합니다.

이제까지 살펴본 내용들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영 ≠ 혼

영 = 심령

혼 = 영혼 = 마음


그렇다면 인간의 영과 혼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1) 첫번째 차이점은 지음받은 재료입니다.

사람의 은 흙으로 지음받은 에서 나왔고,

사람의 은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으로부터 나왔습니다.

먼저 사람의 영이 성령으로부터 나왔다는 사실은

다음 말씀으로 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A. 육으로부터 태어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부터 태어난 것은 영이니

B.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늘

하물며 영들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하지 않겠느냐

ⓐ 요한복음 3:6, ⓑ 히브리서 12:9

* 위 성구들은 한글성경의 애매한 번역과 오역을 원어성경 기준으로 수정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혼이 흙으로 지음받은 육에서 나왔다는 것은

좀 생소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보통 혼을 '비물질적인 정신'으로만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 성경적인 근거 >

그러나 사람의 혼이 흙으로 지음받은 육에 속한다는 사실은

다음 성구에 잘 나와있습니다.

첫 사람 아담은 살아있는 혼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예수님)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먼저는...혼적인 사람(아담)이요, 그 다음에 영적인 사람(예수님)이니라.

첫 사람(아담)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예수님)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고린도전서 15:45-47

* 위 성구들은 한글성경의 오역과 의역 부분을 원어성경 기준으로 수정한 것입니다.

위 성구는 혼의 사람 아담과 영의 사람 예수님을 비교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혼적인 사람흙에 속한 자이고 영적인 사람은 하늘에서 난 자라 했습니다.

따라서 혼은 땅 곧 흙에서 나온 것이요,

영은 하늘로부터 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혼이 땅의 흙으로부터 나왔다는 것은

혼도 몸(body)처럼 흙으로 지음받은 육의 일부라는 의미입니다.

< 자연적인 근거 >

따라서 "육에서 난 것은 육"이라는 요3:6 말씀처럼

사람의 몸과 얼굴이 육신의 부모를 닮듯이

사람의 마음(혼)도 육신의 부모를 닮습니다.

후천적인 영향을 배제하고도

사람의 타고난 성격, 지능, 예술적 감각 같은 혼(마음)의 특성이

자기 육신의 부모를 닮는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

혼이 육에서 나왔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혼이 육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육신의 부모를 닮는 것이지요.

< 과학적인 근거 >

이번에는 좀더 과학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사실 위에서 말한 성경적인 근거와 자연적인 근거만으로도 충분하지만

어디까지나 참고한다는 의미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최근 뇌과학이 눈부시게 발전하면서

뇌와 마음(혼)과의 연관성이 많이 밝혀졌습니다.

물론 이 분야에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훨씬 많지만

대략적인 뇌지도는 완성이 되었습니다.

그림1_ 정신활동과 뇌지도

실제로는 [그림1]처럼 단순하지 않습니다만

분명한 것은 우리의 마음(혼)이 정신적인 활동을 할 때

반드시 뇌에서 그에 따른 물질적인 활동이 동반된다는 점입니다.

어떤 정신 활동을 하느냐에 따라

그 정신활동을 담당하는 각각의 뇌 부위에서

뇌세포의 전기신호와 시냅스간의 네트워크 형성,

신경전달물질의 분비와 작용이 일어납니다.

이러한 각각의 정신활동과 관련 뇌 부위를

시각적으로 볼 수 있도록 하는 검사가 있습니다.

functional MRI라는 검사인데 약칭으로 fMRI라고 합니다.

몇가지 fMRI의 실제 사용 예를 들자면...

그림2_ 왼쪽은 통증을 느낄 때 활성화되는 뇌 부위, 오른쪽은 공감할 때 활성화되는 뇌 부위

그림3_ 지능을 관장하는 뇌 영역

그림4_ 기쁨, 행복, 사랑, 슬픔, 분노 등의 감정에 관여하는 뇌신경섬유들

이처럼 음악을 들을 때 활성화되는 뇌 부위와

공부를 할 때 활성화되는 부위,

어떠한 감정을 느낄 때 활성화되는 부위가 각각 다릅니다.

따라서 어떤 특정 뇌 부위가 손상되게 되면

그 뇌 부위가 담당하는 정신활동이 고장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뇌경색으로 베르니케 영역(그림1)이 손상되면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은 잘 하는데

상대방의 말은 들어도 잘 이해를 하지 못하게 됩니다.

반대로 브로카 영역(그림1)이 손상되면

상대방의 말은 잘 듣고 이해해도

거기에 따른 답변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됩니다.

또한 전에는 점잖고 예의발랐던 사람이 사고로 인해

이성과 절제, 분별, 양심의 기능을 담당하는 전두엽이 손상되자

욕망을 절제하지 못하고 걸핏하면 욕설을 내뱉고

비윤리적인 행동을 일삼게 된 사례도 있습니다.

우울증 환자에서는

신경전달물질 중 하나인 세로토닌이 매우 감소해 있는데

이 세로토닌 수치를 높여주는 약(SSRI)을 복용하면

우울증 증상이 호전되게 됩니다.

이러한 사례들은

마음(혼)의 정신적인 활동이

뇌의 물질적인 활동에 기반을 두고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증거들입니다.

반면에 사람의 영이나 성령님,

천사, 사단과 같은 영들의 정신활동은

뇌와 같은 물질(육체)에 기반을 두지 않고 영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지금까지 알아본 내용을 정리하면

사람은 크게 으로 나눌 수 있으며

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것을 그림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림5_ 인간의 구조

이러한 구조를 이해한다면

사람을 "영+육"으로 나누는 이분론이나

"영+혼+몸"으로 나누는 삼분론이

서로 모순되지 않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오해를 피하기 위해 잠깐 육(flesh)에 대해 부연 설명하자면...

성경에서 "육"은 문맥에 따라 다음 3가지 의미 중 하나로 사용되는데

이 글에서는 주로 ②번의 의미로 사용하였습니다.

① 인간의 죄성 (롬8:6~7)

② 영과 대비되는, 물질로 지음받은 몸과 혼(마음)을 포함하는 개념 (창6:3, 고후3:3, 골2:18)

③ 정신을 제외한, 순수한 몸만을 가리키는 개념 (시84:2, 엡2:11)

※ 육 = 육신 = 육체 = 삵스(σάρξ, 헬) = 바사르(בָּשָׂר, 히)

(2) 영과 혼의 두번째 차이점은 지음받은 시기입니다.

사람의 은 각자 출생 시에 태중에서 지음받지만,

사람의 은 모두 태초에 이미 지음을 받았습니다.

앞에서 혼(마음)의 정신적인 활동은

뇌의 물질적인 활동에 기반을 두고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혼은 하나님께서 태중에 우리의 뇌를 지으시면서 같이 형성됩니다.

그러나 영은 우리 몸이 어머니 뱃속에 형성되기 전,

더 나아가 태초에 이미 지음을 받았습니다.

이에 대한 성경적인 근거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A. 여호와는 영이 유여하실찌라도 오직 하나를 짓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지으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니라.

B.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그 때에 새벽 별들이 함께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쁘게 소리하였었느니라.

ⓐ 말라기 2:15, ⓑ 욥기 38:4-7

위의 말라기 말씀(A)은

자기 아내를 두고 바람을 피거나 새 장가를 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꾸짖으면서

첫 사람 아담에게 오직 하나의 아내만 주신 이유

(경건한 가정을 통해 경건한 자손을 얻기 위함)를 설명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구에는 영의 창조시기에 대한 단서도 들어있습니다.

바로 "여호와는 영이 유여하실찌라도 오직 하나를 짓지 아니하셨느냐"라는 대목인데요,

히브리어 성경을 직역하면

"그(여호와)에게는 영이 남아있었지만 하나만 짓지 아니하셨느냐"

(וְלֹא־אֶחָד עָשָׂה וּשְׁאָר רוּחַ לֹו)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이 태초에 남녀를 지으실 때,

아담에게 여러 명의 아내를 지어주기에 충분한 인간의 영들을 가지고 계셨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단 한 명의 아내, 하와만을 지어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하와를 지으시기 전에

이미 모든 인류의 영들을 창조해 놓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뿐 아니라 위의 욥기 말씀(B)을 통해서도

인간들의 영이 창조된 시기를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욥38:4~7은 하나님께서 땅의 기초를 놓을 때의 일을 기록한 것으로

땅의 기초를 놓은 시점은 창조 첫째날 또는 그 전입니다.

그리고 이때 "새벽 별들"과 "하나님의 아들들"이 기뻐 찬양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분명 별들은 넷째 날 지음을 받았고,

사람의 육신은 여섯째 날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창조의 첫째 날, 땅의 기초를 놓을 때

기뻐 찬양했던 "새벽 별들"과 "하나님의 아들들"은 과연 누구일까요?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새벽 별들"은 천사들이요

"하나님의 아들들"은 미리 지음을 받은 인간의 영들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땅의 기초를 놓기 전에

인간의 영들을 미리 창조해 놓으신 것이지요.

< 천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아닌 이유 >

그런데 가끔 이 욥기서의 "하나님의 아들들"이 천사들을 의미한다는

비성경적인 주장을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주장이 비성경적인 이유는

히1:5에 하나님께서는 단 한 번도

천사들에게 아들이라 부른 적이 없다고 명백하게 밝히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히1:14에 천사들의 위치는

구원받은 성도들을 섬기며 부림을 당하는 종이라고

확실하게 천사들의 지위에 대해 선을 그어 주셨습니다.

유1:6에는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나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들을 섬기는 종의 위치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을 높여 "하나님과 비기리라(사14:14)"했던 타락한 천사들의 욕망은

지금도 여전히 사그라들지 않고

어리석은 신자들을 미혹하여

천사의 지위를 하나님 자리까지는 아니지만

하나님의 아들 자리까지 높이도록 하는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일부 세대주의자들이나 일부 킹제임스성경 유일주의자들이

이런 사단의 속임수에 미혹되어

욥기서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בְנֵי־ הָֽאֱלֹהִים֙)"은

천사들을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우습게도 정작 킹제임스 성경에서는

한번도 "하나님의 아들들(베네 하엘로힘)"을 천사로 번역한 적이 없고

오히려 그분들이 변개된 성경이요 사탄의 성경이라고 주장하는 NIV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을 천사라고 번역합니다.

이뿐 아니라 이들은

창6장의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했다"는 말씀을

천사들이 인간 여자와 정을 통하여 낳은 자식이 네피림이라는 식으로 해석합니다.

이는 전형적인 다신교인 그리스 신화의 신들이

인간 여자와 정을 통해 영웅을 낳는다는

비성경적이고 이교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인간들처럼 육체를 가지지 못하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지도 못하는

사탄의 로망이 담긴 꿈같은 이야기이지요.

이런 모든 거짓 교리의 뿌리는 에녹서라는 위경(거짓 성경)입니다.

이 에녹서에는 비성경적이고 반성경적인 내용들이 가득해서

정상적인 신앙인이라면 에녹이 쓴 책이 아니라

사탄에 의해 쓰여진 책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에녹서의 많은 반성경적인 내용들 중 예를 들자면

하나님께서 천지창조하실 때 하늘을 일곱 층으로 만드셨는데

그 중 둘째 층에 아프로디테, 다섯째 층에 제우스, 여섯째 층에 헤르메스를 두었다고 합니다.

희한하지요.

에녹서가 에녹이 쓴 책이 맞다면 노아 홍수 이전에 쓰여진 책인데

그리스 신화의 신들 이름이 나오다니요.

아니, 그 이전에 그리스 신화가 짬뽕되어 있는 책을

성경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즉 에녹서는 그리스 신화가 광범위하게 퍼지던

헬레니즘 시대 이후에 만들어진 책으로

유다서에도 인용되었던 에녹의 전승을 살짝 끼워넣어

마치 에녹이 쓴 것처럼 조작된 책입니다.

하지만 당시 기독교로 개종하고 나서도 성경에 무지하고

여전히 그리스 신화적 사고방식에 젖어있던

어중간한 신자들에게 에녹서의 내용이 잘 먹혔던 것 같습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신들이 인간 여자와 정을 통해

영웅을 낳는다는 사고방식에 익숙해져 있다보니

천사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육체를 가진 천사들이 인간 여자와 정을 통해

네피림을 낳는다는 에녹서의 내용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 것이지요.

그러다 보니 뛰어난 능력을 가진 천사들을

인간보다 뛰어난 하나님의 아들들로 숭배하는 천사숭배 이단이

골2:18 말씀처럼 초대교회에 유행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히브리서는 이러한 잘못된 가르침을 박살내기 위해

천사는 절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히1:5)

구원받은 성도들을 섬기는 종일 뿐이며

육체가 아닌 영(히1:14)이라고 못을 박은 것입니다.

(물론 가끔 천사가 아브라함과 롯에게 나타났던 것처럼

육적인 모습으로 나타날 수는 있지만

성경 전체를 놓고 보면 특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잠시 그런 모습을 가졌을 뿐이지

근본적으로 천사나 사단은 영적인 존재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욥38:7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은 천사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미리 창조하신 인간의 영들이며,

"새벽 별들"이 천사를 의미한다고 봐야 합니다.

실제로 계시록 12:3-4를 보면 천사들을 "하늘의 별들"로 비유했습니다.

어떤 분은 "새벽 별들"이 그리스도를 의미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당시 직접 창조를 행하시는 주체였지,

옆에서 구경하며 찬양하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요1:1-18).

또한 "새벽 별"이라는 단수가 아니라

"새벽 별들"이라는 복수로 표현했으므로

그리스도가 아니라 천사들을 말한다고 봐야합니다.

(3) 세번째로 인간의 영과 혼은 본성이 다릅니다.

사람의 에는 죄성있지만,

사람의 에는 죄성없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처음 사람을 지으실 때에는

영과 혼 모두 선하게 지음을 받았고 죄성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부터입니다.

아담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을 때

인간의 영은 성령에게서 나온 존재라

성령께서 죄를 지으실 수 없듯이

하나님을 거스려 선악과 따먹기를 원치 않았으나,

인간의 혼은 육체에 속하여 육체의 영향을 받는지라

먹음직하고(육신의 정욕),

보암직하고(안목의 정욕),

지혜롭게 할만큼(이생의 자랑) 탐스러운 선악과를 먹기로 결정합니다.

이러한 영과 육의 상반된 본성의 충돌이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

기도하지 않고 쿨쿨 자던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에도 잘 나타납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은 원하나 이 약하도다.

마태복음 26:41

* 위 성구는 한글성경의 오역을 원어성경 기준으로 수정한 것입니다.

영은 선하여 하나님 뜻대로 살길 원했으나

혼이 육적인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여

예수님을 배반하고 도망간 제자들처럼,

아담 하와의 영도 하나님 뜻대로 살길 원했으나

혼이 육적인 유혹에 굴복하여 선악과를 따먹습니다.

결국 선악과를 따먹은 후

아담, 하와의 영은 선악과 먹기를 원치 않았지만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는다는 것이 하나님과의 언약이었기 때문에

바로 사망하게 되었고,

아담, 하와의 육(혼과 몸)은 바로 죽진 않았지만

결국 사망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또한 선악과를 따먹은 후

영은 본성의 변화 없이

죽어서 모든 기능이 정지되버리는 걸로 끝났지만,

육(혼과 몸)에는 선악과로 인해 죄성이 생겨나고

대대손손 전인류의 혼과 몸에는 죄성이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다들 알다시피 신학적으로는 이것을 "원죄"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고 영접할 때

우리 영과 혼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예수님께서 밤중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듯이

먼저 죽었던 영이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요3:3~7).

은 위의 마26:41 말씀처럼

죄성이 없고 오직 하나님의 선한 뜻만을 구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의 (마음)에는

보혈와 진리로 거룩해진 새사람(엡4:24)의 인격이 자리를 잡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기존에 인간의 혼에 박혀있던 죄성 자체가 사라지지는 않으며

이를 성경에서는 옛사람(엡4:22)이라 부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의 혼에는

새사람의 인격과 옛사람의 인격(죄성)이 공존하게 되므로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평생 새사람과 옛사람의 싸움이 있게 됩니다.

A.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B.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 딤모데전서 6:12 ⓑ 에베소서 4:22-24

(4) 영과 혼의 네번째 차이점은 사역성입니다.

사람의 은 오직 성령님에게만 사용되지만,

사람의 성령님에게도, 악령에게도 사용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사역성이란

"어떤 존재가 인간의 영이나 혼을 사용할 수 있느냐"는 의미이며,

"어떤 존재"란 성령님과 악령(마귀) 둘 중 하나를 말합니다.

< 인간의 영의 사역성 >

인간의 영은 오직 성령님만이 사용할 수 있으며,

사단은 절대 인간의 영을 이용할 수도 건드릴 수도 없습니다.

그 이유는 위에서 말했듯이

인간의 영은 온전히 성령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존재라

본질과 본성 자체가 선하고 죄를 지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영은 죽었으면 죽었지,

살아서 마귀에게 이용당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천사의 영이나 인간의 육처럼

하나님께서 별도로 지으신 피조물은

선하게 지음받았지만

본질적으로는 가치중립적이라

자유의지에 따라 얼마든지 범죄하고 타락할 수 있습니다.

마귀가 인간의 영을 건드리거나 이용하지 못한다는 것은

다음 말씀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요한일서 5:18

위의 말씀에서 "하나님께로서 난 자"란

거듭난 자의 속에 있는 새사람,

또는 새사람의 인격으로 살아가는 자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또한 우리 영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를 사단이 만지지도 못한다 하셨으니

"성령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우리의 영"은

더더욱 사단이 건드리지도 이용할 수도 없는 게 당연하지요.

이렇듯 거듭난 사람의 영은

철저히 성령님과 연합되어,

오직 성령님만 사용하시며,

언제나 성령님과 함께 움직입니다.

< 인간의 혼의 사역성 >

반면에 예수 믿고 거듭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의 혼(마음)은 마귀에게 사로잡혀 이용당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였던 베드로조차 그 혼(마음)이 사단에게 사로잡혀

예수님께 십자가에서 죽지 마시라고 간청했다가

"사단아, 물러가라"는 주님의 꾸지람을 듣습니다(마16:23).

베드로의 혼이 사단(악령)에게 이용당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 베드로는 불과 몇 분 전만 해도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으로 예수님께 칭찬받았습니다.

게다가 예수님께서 이 고백은 혈육에서 난 것이 아니요

하늘 아버지께서 알게 하신 것이라 하셨으니(마16:17)

방금 전까지 베드로의 혼(마음)은 성령에 감동된 상태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믿는 자라 할지라도

인간의 혼성령님께 사용될 수도 있고 악령에게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 올바른 사역성의 관계 >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른 사역성의 관계는

성령께서 인간의 영을 다스리시고,

인간의 영은 혼을 다스리고, 혼은 몸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께서 인간의 영을 통해

인간의 육(혼과 몸)을 온전히 다스리는 것이

정상적인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삶이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됨을 나타내는 증거입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로마서 8:14,16

위의 로마서 말씀을 정리하면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된 증거이며,

자녀됨의 증거인 성령의 인도는

반드시 우리 영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죽었던 영이 다시 살아나지 않으면

(성령의 인도를 받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를 볼 수도, 들어갈 수도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요3:3~7).

(5) 다섯번째로 영과 혼의 차이점은 인식의 방법입니다.

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인식하지만,

에 대해서는 간접적으로 인식합니다.

요즘 들어 점점 영,혼,몸의 삼분설을 깨닫고 전하는 분들이 많아지고 있어

참으로 반가움을 느낍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아직까지는 대부분

영과 혼이 서로 별개의 자아를 가지고 있음을 잘 모릅니다.

그래서 보통 영과 혼을 별개의 자아로 보기보다는

하나의 자아 안에서 영과 혼이 각각 맡고 있는 기능이 다른 것으로 봅니다.

예를 들면 혼은 지성(知)과 감정(情)과 의지(意) 등의 기능을

영은 양심과 하나님을 인식하고 교제하는 기능을 담당한다고 보는 식입니다.

일부 맞는 점도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틀립니다.

우리 영과 혼은 각각 별개의 자아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혼도 지(知), 정(情), 의(意)를 가지고 있지만

우리 영도 혼과는 별개의 지, 정, 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영이 죽어있기 때문에

혼의 자아만 가지고 살아가지만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사람은 영이 살아났기 때문에

영의 자아와 혼의 자아, 두 개의 자아를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이건 옛사람, 새사람의 개념과는 좀 다릅니다.)

많은 이들이 오해하는 것처럼 한 자아 안에서 영과 혼이 기능을 나눠가진 것이 아니라

영과 혼이라는 두 개의 개별적인 자아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한 존재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처럼 두 가지 차원의 자아가 한 존재를 이루는 인간의 특성은

오직 영만을 가지고 있는 천사나

육(혼+몸)만을 가진 짐승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특성입니다.

이는 모든 피조물 중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이 별개의 자아를 가지면서

동시에 한 존재이신 하나님의 특성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인간에게도 나타난 것입니다.

또한 온 세상의 피조물 중 인간만 유일하게

영계에 속한 영과 물질계에 속한 육이 결합되어 하나의 존재를 이루는 피조물이기 때문에

영계를 컨트롤 할 수 있는 영의 자아와

물질계를 컨트롤 할 수 있는 혼(육)의 자아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성경 말씀을 통해

영과 혼이 한 자아 안에서의 기능적 구분이 아니라

각각의 자아, 각각의 지정의를 가지고

개별적으로 활동할 수 있다는 증거를 확인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혼이 지,정,의를 가지고 있는 거야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니

"영이 혼과는 별개의 자아, 별개의 지,정,의를 가지고 독자적인 활동을 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겠습니다.

A. 내가 만일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B.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그 때에 새벽 별들(천사들)이 함께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인간의 영들)이 다 기쁘게 소리하였었느니라.

ⓐ 고린도전서 14:14 ⓑ 욥기 38:4-7

A는 영의 "기도"에 대한 성구이고,

B는 영의 "찬양"에 대한 성구입니다.

"기도와 찬양"은 인격(자아)의 필수 요소인

지,정,의가 종합적으로 어우러져 이루어지는 행위이므로,

영이 혼(마음)과는 상관없이 별개로 기도하는 경우와(A)

영이 아직 혼이 지음받기도 전에

하나님의 창조 역사를 보며 기뻐 찬양하는 모습은(B)

인간의 영이 혼과는 별도의 자아를 가졌음을 보여주는 뚜렷한 증거입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론 충분한 증명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분명 있을 것이기 때문에

한 가지 예를 더 들어보겠습니다.

내(바울)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 같이 이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전서 5:3~5

이게 무슨 내용이냐면 고린도 교회에

계모인지 친모인지는 모르겠지만 자기 어머니랑 간음한 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고린도 교회가 얼마나 타락하고 죄에 무디어졌는지

이런 자를 쫓아내지 않고 방치했습니다(고전5:1~2).

사도 바울이 이런 고린도 교회를 책망하면서

이때 영의 세계에서 벌어진 조치들을 알려준 것입니다.

이 고린도전서를 기록할 당시 사도 바울의 몸은

지금의 튀르키에(터키)에 해당하는 소아시아 지역에 있었습니다.

고린도가 있는 그리스 땅과는 바다 하나를 사이에 둔 먼 지역이었습니다.

이처럼 육으로는 사도 바울과 고린도 교인들이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영으로는 이들이 함께 만나 모임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이 영들의 모임에서 바울과 고린도 교인들은

어머니와 간음한 자를 재판하고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 추방하여 사탄에게 내어주는 실질적인 조치를 취합니다.

너무 대조적이지요.

고린도 교인들의 육(몸+혼)은 간음한 자를 싸고 돌았지만

그들의 영은 반대로 간음한 자를 사탄에게 던져줬으니 말입니다.

이를 통해 영의 자아와 혼의 자아는 서로 별개로서

정반대의 행동을 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 교인의 영들이 간음한 자를 사탄에게 내어준 과정을 잘 살펴보면

바울의 영과 함께 모여 영들끼리 회의와 의논을 거쳐 이런 결론을 냈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영의 독자적인 기도와 찬양만으로는

영과 혼이 서로 별개의 자아를 가진다는 근거로 충분치 않다 생각하는 분들도

이것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믿는 자의 영들이 자신의 혼과는 별개로 함께 모여 대화도 하고 의논을 하며

회의를 통해 합의된 결론을 도출해낸다는 것은

온전한 지,정,의를 갖춘 독립된 자아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알 수 있는 사실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영의 자아가 혼의 자아와 별개로 활동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우리 혼(마음)이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인들은 사도 바울이 말해주기 전까지

자신의 영들이 바울의 영과 함께 모여 서로 의논하고

간음한 자를 사탄에게 내어줬음을 몰랐던 것입니다.

앞에서 인용했던 성구들(고전14:14,욥38:4~7)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혼과 별개로 영이 방언으로 하는 기도는 혼(마음)이 그 의미를 인식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창조 역사를 직접 목격했던 영의 기억을 우리 혼(마음)은 인식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도출해낼 수 있는 결론은 하나입니다.

영이 다시 살아난 신자라 하더라도

우리 인식의 주체, 인식의 창구는 영이 아니라 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혼을 인식하는 방법과 영을 인식하는 방법에 차이가 발생합니다.

앞에서 혼은 직접적으로, 영은 간접적으로 인식한다고 했습니다.

우리 자아는 영의 자아혼의 자아, 이렇게 두 개인데

인식의 창구는 혼의 인식 단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혼의 자아는 혼의 인식과 본체가 같아서

직접적으로 인식할 수 있지만

영의 자아는 혼의 인식과 본체가 다르기 때문에

유일한 인식의 창구인 혼을 통해 간접적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영의 인식이 직접 열리는 경우는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시는 특수한 경우에 한정됩니다.

이건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으로 이루어지는 일로서

우리가 어떻게 인위적으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사모한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어떤 특별한 영적인 훈련을 통해 가능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혼으로 영의 자아를 인식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 믿고 거듭난 사람의 혼 속에는

영의 자아를 인식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에스겔서를 보면 우리가 믿고 거듭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들을 말씀해주셨습니다.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옛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새 마음)을 줄 것이며

내 영(성령)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에스겔 36:26~27

그 선물들은 바로 ① 새 영② 새 마음, ③ 성령님입니다.

여기서 새 영은 믿는 자의 거듭난 영이며

새 마음이란 성령의 역사로 우리 혼 가운데 생겨난 새 사람의 인격으로서​

성령에 감동된 마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새 영, 새 마음, 이 셋은 모두 한 마음, 한 뜻이므로

우리가 영을 직접적으로는 인식할 수 없지만

우리 혼 속의 새 마음을 통해 성령님과 영의 마음을 간접적으로 인식할 수 있습니다.

밤하늘에 달이 떠서 잔잔한 호수에 비치면

직접 하늘을 보지 않아도 간접적으로 호수에 비친 달을 볼 수 있듯이

우리가 영을 직접적으로는 인식할 수 없지만

영의 마음이 혼에 비춰진 새 마음을 통해 영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새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새 마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 있는 마음입니다.

좀더 단순하게 말한다면

새 마음곧 믿음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요한복음 7:37~39

위 성구에서는 예수님을 믿을 때 받는 것으로 성령만 언급되었지만

실제로는 위의 겔36:26~27 말씀처럼

성령님과 ② 거듭난 새 영, ③ 새 마음을 함께 받는 것입니다.

이처럼 새 마음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생겨난 마음이기 때문에

새 마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 존재하는 마음입니다.

즉, 새 마음은 성령에 감동된 마음이며 믿음의 마음입니다.

따라서 영을 인식하는 것은 특별한 은사를 받은 소수의 사람만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진정으로 거듭난 자라면 누구나 영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거듭났다면 자기 속에 생겨난 믿음의 마음, 곧 새 마음을 분명히 인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새 마음은 영의 자아가 혼에 반영된 마음이기 때문에

새 마음을 인식하는 것이 곧 영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영의 인식은 새 마음을 통해 간접적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새 마음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른 글에서 좀더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반대로 우리의 영은 우리 혼을 어떻게 인식할까요?

우리 영은 혼의 모든 생각과 사정을 손바닥 보듯이 훤히 알고 인식합니다.

다음 성구들이 이것을 잘 증거해줍니다.

A.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spirit)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B. 사람의 영(spirit)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느니라.

ⓐ 고린도전서 2:11, ⓑ 잠언 20:27 (개역성경의 영혼은 오역이므로 영으로 수정)

우리 혼이 영을 직접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성령에 감동된 새 마음을 통해 간접적으로 인식하는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영이 자신의 혼을 거의 직접적으로 인식하듯이 파악할 수 있음'을 알려주지만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지는 설명해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게 가능한 이유를 나름대로 짐작해볼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짐작하기로는 아마도...

영의 자아가 혼의 자아보다 존재의 격이 높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예시로서 조금 적절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비슷한 사례가 있습니다.

정신 질환 중에 해리성 정체 장애라는 것이 있는데

보통 다중 인격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 사람이 여러 인격을 가지고 있는 경우인데

이 인격들이 다 동등한 것이 아니라 상위 인격과 하위 인격으로 나뉘기도 합니다.

상위 인격은 하위 인격들이 하는 말과 행동들을 다 인식하고 파악하지만

하위 인격은 상위 인격의 말과 행위를 인식하지 못합니다.

물론 이것은 병적인 경우이긴 하지만

원리적으로는 영과 혼의 인식과 격의 차이와 관련해 참고할 만합니다.


(6) 영과 혼의 여섯번째 차이점은 구원의 보장성입니다.

의 구원은 한번 구원 영원구원이지만,

의 구원은 구원 상실이 가능합니다.

성경을 자세히 읽고 깊이 묵상하시는 분들은

아마 다들 한번쯤 구원의 보장성에 대해 고민해보셨을 것입니다.

(구원의 보장성이란

한번 얻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는가? 없는가?라는 의미입니다.)

이쪽을 읽어보면 한번 구원 영원구원이 맞는 것 같고

다른 쪽을 읽어보면 구원 상실이 맞는 것 같고...

지금까지 위에서 설명한 영과 혼의 차이점 5가지를 몰랐을 때는

당연히 헷갈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영과 혼을 뚜렷하게 구별할 수 있는 상태에서 성경을 읽어보면

성경은 구원의 보장성에 대해 헷갈리거나 고민할 필요가 없도록

너무나 선명하고 뚜렷하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글성경으로 읽다보면 다소 헷갈릴 수 있습니다.

한글성경은 "영"과 "혼"을 원어성경대로 일관성 있게 번역하지 않았고

영혼, 혼, 영, 심령 등의 여러 용어로 번역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원어성경에 "영"이라고 되어있는데 혼(영혼)으로 번역하거나

원어성경의 "혼"을 영으로 번역한 오류들도 종종 있습니다.

따라서 이제부터 나오는 성구들은 원어성경에 맞게

"영" 또는 "혼"으로 바르게 교정하여 인용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한글성경의 심각한 번역 오류 하나를

바로 잡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이건 번역 오류라고 하기보다는

차라리 성경을 뜯어고쳤다고 말하는 게 어울릴 정도로

심각한 오류입니다.

원어성경의 구절을 아예 삭제하고

번역자가 새롭게 창작한 엉뚱한 내용으로 대체했기 때문입니다.

혹시나 오해할까봐

미리 말씀드리자면 저는 개역(개정)한글성경을 사랑하고

굉장히 우수하면서도 아름답게 번역된 성경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글에서 인용하는 성구들도 모두 개역성경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지적하고자 하는 심각한 번역 오류는

개역(개정)성경을 깎아내리거나 부정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영의 구원혼의 구원을 바로 구별하려면

먼저 거의 창작 수준으로 대체된 개역성경의 이 성구가

바르게 번역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 그러면 문제의 성구를 보겠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중, 주인의 다시 오심을 준비하지 않고

술친구들과 함께 방탕한 생활을 하던 악한 종에 대한 심판의 말씀입니다.

이 악한 종은 불신자가 아니라 믿는 자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자신의 주인이라 고백하는 자였고,

주인(예수님)이 다시 올 것도 믿었기 때문입니다(마24:48).

다만 조금 늦게 오실 거라 생각했을 뿐입니다.

이 악한 종이 어떤 심판을 받게 되는지 마24:51에 나옵니다.

한글성경과 영어성경 2가지(KJV, NASB), 원어성경을 차례대로 비교해보겠습니다.

A.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B. And shall cut him asunder, and appoint him his portion with the hypocrites...

C. And will cut him in pieces and assign him a place with the hypocrites...

D. καὶ διχοτομήσει αὐτὸν, καὶ τὸ μέρος αὐτοῦ μετὰ τῶν ὑποκριτῶν θήσει...

ⓐ 개역한글성경, ⓑ KJV, ⓒ NASB, ⓓ 헬라어성경

일단 한글성경(A)과 영어성경(B,C)만 비교해봐도 꽤 차이가 크지 않습니까?

한글성경에서는 악한 종을 엄히 때린다는 정도로만 번역했지만

영어성경에서는 악한 종을 토막토막 잘라버린다고(cut asunder / cut in pieces)

무시무시한 번역을 했습니다.

단순히 두들겨 맞는 것과 토막살인 당하는 것은 상당한 차이가 있지요.

어떤 번역이 맞을까요?

어느 번역이 헬라어 원문에 가까운 번역일까요?

영어번역도 사실 정확한 번역은 아니지만

그래도 한글성경보다는 원문에 가깝습니다.

그렇다면 헬라어 원문을 한번 번역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려운 문법 구조를 가진 문장도 아니고

쉽게 단어 하나하나 해석해갈테니

혹시 헬라어를 모른다고 긴장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καὶ(그리고) διχοτομήσει(둘로 쪼개어 자를 것이다) αὐτὸν(그를),

καὶ(그리고) τὸ(the) μέρος(한 부분을) αὐτοῦ(그의)

μετὰ(with, ~과 함께) τῶν(the) ὑποκριτῶν(외식자들) θήσει(둘 것이다)

자, 그럼 위의 해석들을 문장으로 만들어 보겠습니다.

문장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바로 앞뒤의 내용을 붙입니다.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그를 둘로 쪼개어 자르고,

그의 한 부분을 외식자들과 함께 둘 것이다.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악한 종을 두 토막으로 쪼개서

그 중에 한 부분을 외식자들이 가는 곳에 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외식자들이 가는 곳은 어디일까요?

바로 앞장인 23장에 예수님께서 그곳이 어디인지 말씀해 두셨습니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마태복음 23:29~33

외식자들이 가는 곳, 그 곳은 바로 지옥입니다.

예수님을 자기 주인이라 고백했고

예수님의 다시 오심도 믿었지만

정작 믿음의 길을 걷지 않았던 악한 종,

그는 결국 주인에 의해 두 토막으로 쪼개어져

그 중 한 부분이 지옥에 던지운 것입니다.

이와 동일한 말씀이 눅12:46에도 나오는데

이걸 보면 악한 종의 한 부분이 던져지는 곳은 지옥임이 더 확실해집니다.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이 종의 주인이 이르러

그를 둘로 쪼개어 자르고 그의 한 부분을 불신자들과 함께 두리니

누가복음 12:46

* 이 성구는 개역한글성경의 오역을 원어성경대로 바르게 수정한 것입니다.

불신자들이 가는 곳은 당연히 지옥이니까요(계21:8).

"영의 구원"과 "혼의 구원"을 구별하지 못한다면

도무지 이 성구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이러한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지옥이든 천국이든 온전한 채로 다 가는 거 아냐?

둘로 쪼개서 그 중 하나만 지옥에 보낸다는 게 무슨 말이야?'

이처럼 성경 말씀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사람들 속에 마치 상식처럼 깔려있는 한 선입관 때문입니다.

'인간의 영, 혼, 몸(또는 영과 육)은 절대 나누어질 수 없다'는 선입관이지요.

물론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영, 혼, 몸으로 지으셨으니

당연히 우리가 영, 혼, 몸 전체의 온전한 구원 받기를 원하십니다.

바울도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너희의 모든 부분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데살로니가전서 5:23

* 이 성구는 개역한글성경의 애매한 번역을 원어성경에 기초하여 수정한 것입니다.

자, 이 성구는 불신자들에게 한 말이 아닙니다.

이미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교인들에게 한 말씀이지요.

이들에게 바울은 무어라고 말합니까?

"너의 영, 혼, 몸 모든 부분이 흠없게 보전되리라"인가요?

아니면 "영, 혼, 몸 모든 부분이 흠없게 보전되길 원하노라"입니까?

이 두 문장은 상당히 비슷해보이지만

그 의미에 있어서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납니다.

전자라면 모든 믿는 자는 무조건

영, 혼, 몸 전부의 구원이 보장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후자에는 믿는 자라고 해서 무조건

영, 혼, 몸 전부의 구원이 보장되는 게 아니라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후자를 말합니다. 이게 성경의 진리입니다.

예수 믿는 자라고 해서

영, 혼, 몸 전체의 구원이 보장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납득한다면

예수님을 주로 고백했던 악한 종,

예수님의 재림을 믿었던 악한 종이 두 토막이 나서

그 중 한 부분이 지옥에 던지운다는 말씀이 이해가 될 것입니다.

물론 아직까지는 인용한 성구들이 적어서

납득하지 못하는 분들이 많으리라 생각됩니다.

'그저 성경의 극히 일부 한두 성구를 꿰어맞춰 궤변을 늘어놓는 것은 아닌가?' 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성경 곳곳에서

어떻게 이 사실을 증거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A.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

B.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 마태복음3:10, 누가복음3:9 ⓑ 마태복음7:19

여기서 나무는 믿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믿는다고 해서 다 좋은(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니지요.

그렇다면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신자는 어떤 심판을 받게 되느냐?

도끼로 둘로 쪼개어 뿌리는 남겨두고

뿌리 위쪽의 둥치, 가지 등은 모두 지옥 불에 던진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이 사실이 중요했으면

복음서에서 3번이나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악한 종을 둘로 쪼개어 그 중 한 부분을 지옥에 던진다는 말씀 또한

복음서에서 2번이나 반복됩니다(마24:51, 눅12:46).

즉 믿는 자라도 참된 믿음의 열매를 맺지 않는 자들은

영, 혼, 몸의 온전한 구원을 얻지 못하고

둘로 쪼개어져 그 중 한 부분이 지옥불에 던져진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도 동일한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시편 50:22

이 말씀 역시 믿는 자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하지만

삶으로는 온갖 죄악을 저지르는 자들에게 하신 경고입니다(시50:16~21).

"만약 네가 끝까지 회개치 않으면 내가 너를 (둘로) 찢어버리겠다."

복음서의 말씀처럼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뜻은 통합니다.

구약성경에는 실제로 이 경고의 의미를 담은 언약의 예식이 나옵니다.

바로 짐승들을 둘로 쪼개어 놓고 그 사이를 걸어서 통과하며

하나님과 언약하는 예식입니다.

아브라함도 이 언약의 예식을 했고(창15:9~17),

예레미야서에도 이 언약의 예식이 나옵니다(렘34:18).

이 언약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만약 내가 이 언약을 어긴다면

나도 이 짐승들처럼 둘로 쪼개어지는 형벌을 받을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 믿음의 언약을 맺은 백성이

믿음에서 떠날 경우 받게 될 최후의 심판을 보여주는 예표입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악한 종처럼 둘로 쪼개어질 것이란 의미입니다.

마지막으로 결정타입니다.

이 성구 역시 앞서 인용한 마24:51의 번역 오류와 같은 케이스입니다.

성경번역자들이 원어성경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을 쏙 빼고 번역해버린 것이지요.

요한계시록 21장 8절 말씀입니다.

한글성경을 보면

두려워하는 자, 믿지 않는 자, 흉악한 자, 살인자,

행음자, 술객, 우상숭배자, 거짓말 하는 자들이

불지옥에 던지운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원어성경을 보면

한글성경에는 빠져있는 부분이 나옵니다.

이 누락된 부분을 포함시켜 제대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그들의 한 부분(μέρος)이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들어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요한계시록 21:8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읽을 때

여기 나오는 8종류의 지옥가는 사람들을 보통 불신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은 모두 신자입니다.

불신자라면 존재 전체가 지옥에 들어가지

한 부분만 쪼개어져 지옥에 던지우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들은 마태복음에 나오는 악한 종처럼

예수님을 믿었지만 믿음의 길에서 떠나 살다가

마지막 심판 때 둘로 쪼개어져 그 중 한 부분이 지옥에 던지우는 자들입니다.

게다가 보십시오.

마24:51의 악한 종 비유에서 지옥에 던지우는 한 부분도 μέρος(메로스),

계21:8에 나오는 8종류 사람들의 지옥가는 한 부분도 μέρος(메로스)란 단어를 사용합니다.

즉 계21:8 말씀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악한 종의 마지막(마24:51, 눅12:46)을

한 번 더 확증해주는 성구인 것입니다.

예수 믿는 자는 무조건

영, 혼, 몸 전체의 온전한 구원이 보장된다는 선입견을 버리지 않으면

도무지 이 성경말씀들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한글성경의 경우처럼

아예 성경을 뜯어고쳐 번역하는 이런 참사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믿음과 무관한 삶을 살아가는 자들,

교회에서의 모습과 세상에서의 모습이 너무 다른 자들,

이들의 마지막 심판 때

둘로 쪼개어져 지옥에 던지운다는 한 부분은 과연 무엇일까요?

다음 말씀들에 잘 나와 있습니다.

A.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주었으니

이는 [육]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

B.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으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이니라

ⓐ 고린도전서 5:5 ⓑ 베드로전서 4:6

* 개역성경의 육신, 육체 등의 단어들은 원어성경에 기초하여 "육"으로 통일했습니다.

위의 A 성구는 고린도교회의 교인들 중

자신의 어머니와 음행했던 자에 대한 심판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누가 봐도 명백한 죄악 가운데 계속 머무르며

끝까지 돌이키지 않는 자는

육을 사단에게 내어주어 멸하지만

영은 구원을 얻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어떤 분들은 이렇게 이해합니다.

육을 멸한다는 것은 육을 지옥보낸다는 것이 아니라

회개시키기 위해 육이 병들어 죽게 만든다는 뜻이 아니냐?

물론 성경에는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알렉산더와 후메내오의 경우처럼 징계를 받고 회개하여

더 이상 주의 일을 훼방하지 못하도록

사단에게 내어주는 경우입니다(딤전1:20).

그러나 위의 A 성구는 이 경우와 다릅니다.

목적이 분명하게 나와있기 때문입니다.

주 예수의 날에 "​​영이 구원받도록" 하기 위함이라고요.

만약 이 근친상간한 자의 육을 멸하는 것이

단지 회개시키기 위한 징계의 목적이었다면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육을 멸하여 이 주 예수의 날에 구원얻게 하려 함이라"

징계의 목적은 영과 육의 온전한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에서 육을 멸한다는 것은

단순히 징계 차원이 아니라

육을 영원히 지옥에 던진다는 의미로 봐야 합니다.

이번에는 B 성구를 보겠습니다.

B 성구에서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다고 했는데

이 죽은 자들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좀 논란이 있습니다.

바로 앞장인 벧전 3장에 나오는

노아 홍수 때 끝까지 불순종하다가 죽은 신자들의 영인지,

아니면 예수님을 믿는다 하나 죽은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들인지...

둘 중 뭐가 맞는지 확실하진 않지만

한 가지만큼은 확실합니다.

B 성구의 "죽은 자들"이란

마24장의 악한 종처럼 실패한 신앙인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의 영은 하나님처럼 영생하면서 심판의 대상이 되지 않지만,

육은 일반적인 사람처럼 심판과 처벌을 받는다는 것이

B 성구의 내용입니다.

A와 B, 두 성구를 정리해보면

아무리 타락한 신자라 해도

영만큼은 심판을 받지 않고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반면에 믿는 자라 할지라도

육은 심판을 받고 지옥에 던져 멸해질 수 있음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마24장의 악한 종이

둘로 쪼개어져 그 중 한 부분이 지옥에 던지울 때

지옥에 던져지는 부분이 무엇이고,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부분은 무엇인지

이제 우리는 말 할 수 있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둘로 쪼개어져

지옥에 던지우는 부분은 (혼 + 몸)이고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부분은 입니다.

공연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영과 육(혼+몸)의 온전한 구원입니다.

이 글을 읽고 계신 모든 분들이

주 예수의 날에 영과 육(혼+몸)의 온전한 구원 받으시길

진심으로 소원합니다.

영지주의처럼 육은 무조건 악하니

무조건 멸해진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도 분명히 우리에게

주 예수의 날에 영, 혼, 몸의 온전한 구원 받길 원한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살전5:23).

다시 하던 이야기로 돌아와서...

믿는 자라 할지라도

죽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자,

믿음에서 떠나 끝까지 돌이키지 않는 자는

영은 구원받지만 육은 지옥에 던지운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육은 [몸 + 혼]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즉, 믿는 자의 육이 지옥에 던지울 수 있다는 말은

믿는 자의 몸과 혼이 지옥에 던지울 수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12제자들을 모아놓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은 죽여도

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마태복음 10:28

* 개역(개정)성경의 "영혼"이라는 표현은 원어성경에 기초하여 "혼"으로 통일했습니다.

이 말씀은 불신자들에게 한 말이 아닙니다.

믿는 자들, 그 중에서도 특별히 뽑은 12사도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권세자들을 두려워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해라."

그리고 믿는 자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하는 근거로

"하나님은 능히 너희 몸과 혼을 지옥에 멸하실 수 있기 때문"이라 하셨습니다.

즉, 믿는 자라도

만약 세상 권세자들을 두려워하여

믿음을 버리고 배도한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몸과 혼을 지옥에 멸하시리라 경고하신 것입니다.

여기서도 보면

[영과 혼과 몸]을 지옥에 멸하신다고 했습니까?

아니면 [혼과 몸]을 지옥에 멸하신다고 했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세상 권세자를 두려워하여 믿음을 떠난 자조차도

지옥에 멸해지는 대상에 "영"은 빠져 있습니다.

[혼과 몸]만 지옥에 멸해집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나 어떻게 타락했다 할지라도

그가 과거에 진정으로 예수님을 영접하고

죽었던 영이 다시 살아나는 거듭남이 있었다면

영만큼은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혼과 몸은 지옥에 멸해지겠지만요.

이 글의 주제가 영과 혼의 차이를 비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영의 구원과 혼의 구원의

"보장성" 차이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영의 구원은 한번 구원 영원구원이고

육의 구원은 구원상실이 가능함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를 본 글의 주제에 맞게 표현하자면

[영의 구원]은 한번 구원 영원구원이고

[혼의 구원]은 구원상실이 가능하다고 말 할 수 있겠습니다.

혼은 육에 포함되는 것이니까요.

혼의 구원상실에 대한 성구를

몇 개만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혼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로마서 2:9~10

* 개역(개정)성경의 오역(영)은 원어성경에 기초하여 "혼"으로 수정하였습니다(9절).

여기서 선을 행한 자는 믿음의 삶을 산 사람이며,

악을 행한 자는 믿음을 버리고 떠난 자를 말합니다.

세상 윤리나 도덕적인 삶, 또는 율법의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들 각자에게 어떻게 보응하시느냐?

악을 행한 자는 "그의 "에게 환난과 곤고로 갚으시고

선을 행한 자는 "그 사람"에게 영광과 존귀로 갚습니다.

갚아주는 대상에 차이가 있지요?

후자는 "사람"인데 전자는 ""입니다.

이는 악을 행한 자라 할지라도

그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거듭남이 있었던 자라면

영만큼은 확실하게 구원받기 때문에

""만을 심판의 대상으로 콕 집어 말씀하신 것입니다.

A.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B. 너희의 인내로 너희 을 얻으리라

ⓐ 마태복음 24:13, ⓑ 누가복음 21:19

* 용어 혼동을 피하기 위해 개역성경의 "영혼"을 "혼"으로 통일하였습니다.

위의 두 성구는 서로 다른 듯 하지만 실은 같은 말씀입니다.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A 성구와 B 성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며칠 전

이 세상의 종말에 있을 일들에 대해 말씀하신

동일한 설교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러나 이 동일한 설교를

마태와 누가라는 각기 다른 저자가 쓰다보니

내용은 같은데 구성이나 표현이 조금씩 다릅니다.

이 두 성구의 바로 앞에는

마지막 때 성도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인해 미움을 받고

서로 잡아 고발하고

부모 형제가 핍박에 넘겨준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하신 말씀이

바로 위 성구들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끝까지 견디는 자가 구원받는다고 하셨고,

누가복음에서는 너희의 인내로 너희 "혼"을 얻으리라 하셨습니다.

조금씩 다른 이 표현을 하나로 종합하면 이렇습니다.

마지막 때 많은 신앙 핍박과 환난을 당할텐데

이 핍박을 끝까지 인내하며 견디는 자라야

""의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거꾸로 생각해보면 무섭습니다.

핍박을 끝까지 견디지 못하고

예수님을 향한 믿음을 버리고 떠나면

""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말과 같기 때문입니다.

즉, 혼이 지옥간다는 말입니다.

혼의 구원상실에 대한 말씀으로 볼 수 있습니다.

모든 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범죄하는 그 이 죽으리라.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의에서 떠나서 범죄하고

악인의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대로 행하면...

그 행한 의로운 일은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범한 허물과 그 지은 죄로 인하여 (이) 죽으리라

만일 악인이 그 행한 악을 떠나

법과 의를 행하면 그 을 보전하리라.

에스겔 18:4,24,27

* 용어 혼동을 피하기 위해 개역성경의 "영혼"을 "혼"으로 통일하였습니다.

에스겔 18장은 도입 부분부터

대전제를 하나 깔고 시작합니다.

바로 모든 혼이 하나님께 속했으니

범죄하는 혼은 죽으리라는 대전제입니다.

그리고 이 대전제 아래, 에스겔 18장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① 의인이라 할지라도

의의 길에서 떠나 죄의 길로 가면

죽을 것이요,

② 반대로 악인이라 할지라도

악을 버리고 의의 길에 서면

그 혼은 구원받는다.

사실 ②번이야 너무 당연한 말이고,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①번입니다.

하나님을 신실하게 따르던 의인이라 할지라도

의의 길, 곧 믿음의 길을 떠나면

"죽으리라"하신 말씀.

무엇이 죽는다는 말씀일까요?

단순히 육신의 목숨이 끊어지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육신의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오는 것이니까요.

에스겔 18장의 대전제가 범죄자의 ""이 죽으리라는 것,

그리고 ②번에서 회개한 악인의 ""이 보전되리라 하신 것을

종합해보면 답이 나옵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던 의인이라 할지라도

믿음의 길을 버리고

죄의 길에서 끝까지 돌이키지 않는다면

그의 ""이 죽는다는 말씀입니다.

좀더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면

그의 혼이 구원을 잃고 지옥간다는 말씀입니다.

영과 혼의 여섯번째 차이점, 결론입니다.

한번 구원 영원 구원이지만,

구원 상실가능합니다.

따라서 나중에 천국에 가면

두 종류의 사람들로 나타나게 됩니다.

영혼몸의 온전한 구원을 받은 자들과

영만 천국에 오고, 혼과 몸은 지옥불 속에서 고통당하는 자들로요.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이 하나 생길 수 있습니다.

영은 천국에, 혼과 몸은 지옥불 속에 있는 자들의

자아 인식은 어떻게 되느냐 하는 점입니다.

천국과 지옥을 동시에 인식하게 되는 걸까요?

온탕과 열탕을 동시에 인식하는 것 같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에 대한 답은

영과 혼의 다섯번째 차이점인

인식 방법의 차이에 있습니다.

우리가 인지하는 인식은 곧 혼의 인식이기 때문에

혼은 직접적으로 인식하지만

영은 혼을 통해 간접적으로만 인식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영은 천국에, 혼과 몸은 지옥에 간 사람은

따로 천국에 있는 영을 인식할 수 없습니다.

영과 분리가 되었으니까요.

오직 혼으로 지옥만을 인식할 뿐입니다.

다만 살아 생전 한때나마

영을 간접적으로 인식했던 기억들,

예를 들자면 기도하고 찬양하며 은혜받았던 기억들,

말씀 들으며 감동하고 도전받았던 기억들,

전도하며 기뻐했던 기억들 정도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좀더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자면

영은 천국에, 혼과 몸이 지옥가는 사람들은

그냥 이 땅에서의 내 인식, 내 기억 그대로 지옥간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이땅에서 살 동안에는 가끔씩이나마

영을 간접적이라도 인식했지만

죽어서 지옥에 가면 이제 그나마도 전혀 없습니다.

오직 지옥만 인식할 수 있을 뿐이지

한 때 내 영이었던 존재가 거하는 천국은

전혀 인식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혼과 몸은 지옥에 던지우고 홀로 천국에 온 영들은 마냥 좋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영과 혼의 일곱번째 차이점 끝부분에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잠깐 여담이지만,

가끔 히브리어나 헬라어를 잘 몰라도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는 한번 구원 영원 구원인 부분과

구원상실이 가능한 부분이 있다는 걸 깨닫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구원불변인 부분과 구원상실 가능한 부분은 무엇인지

계속해서 성경을 통해 찾아나가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성경과 동떨어진 주관적인 결론을 내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주관적인 결론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영혼몸의 본체는 천국가고

범죄한 행위(또는 기능)만 지옥간다라는 논리입니다.

이러한 논리를 펴는 이유는

영과 육이 절대 분리될 수 없다는 고정관념에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주장은 두 가지 이유로 비성경적이고 반성경적입니다.

첫째, 성경은 앞에서 인용된 여러 성구들을 통해

영과 육(혼, 몸)이 분리되는 경우가 있음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성경 어디에도

영과 육이 절대 분리될 수 없다는 말씀은 나오지 않습니다.

실제로 사람이 죽을 때에 우리 몸과 혼이 분리되는 자연계시만 봐도

영혼몸의 분리가 절대 불가능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영혼몸의 전인적인 구원을 추구하라고 말씀하지만

예전에 거듭남의 체험이 한번 있었다고

영혼몸의 전인적인 구원을 무조건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둘로 쪼개어져 지옥에 던지울 수 있음을 여러 차례 경고합니다.

둘째로 다음 성경말씀이

인간의 본체는 무조건 천국가고

행위(기능)만 분리되어 지옥간다는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합니다.

(너희 중에) 강한 는 삼오라기 같고 그의 행위는 불티 같아서

함께 탈 것이나 끌 사람이 없으리라

이사야 1:31

이사야 1장에 나오는 말씀인데

위 말씀은 불신자들에게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 하신 말씀입니다.

이들은 월삭과 안식일을 지키며 각종 성회에 참석하며

무수한 송아지, 염소, 양으로 제사를 드렸던 자들입니다(사1:11~13).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철저히 자신이 주인된 삶을 살며

온갖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하신 경고의 말씀입니다.

"너희 중에 어떤 강한 라 할지라도 지옥불에 탈 것이요,

그의 행위도 영원히 같이 타리라."

참된 믿음을 버리고 패역한 길로 간 자들은

행위만 분리해서 지옥불에 태우는 것이 아니라

그의 본체(혼과 몸)도 행위와 함께 영영히

지옥에서 불타며 고통당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는 자의 본체는 무조건 천국가고 행위(기능)만 따로 분리해서 지옥 보낸다는 주장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영과 혼은 어떻게 다른가? 7가지 차이점 (下)


(7) 영과 혼의 일곱번째 차이점은 구원의 여정입니다.

의 구원은 믿음의 시작이지만,

의 구원에는 믿음의 시작 믿음의 결국(끝)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믿음의 「시작」과 「결국」에 대해 많은 말씀들이 나옵니다.

그 중에 우리 믿음의 「시작」과 「결국」이

우리 영과 혼의 구원에 어떻게 연결되는지

잘 설명해주는 대표적 성구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A.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B. 믿음의 결국(끝) 곧 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 요한복음 3:5~7, ⓑ 베드로전서 1:9

* 용어 혼동을 피하기 위해 개역성경의 "영혼"을 "혼"으로 통일하였습니다.

우리 믿음의 시작거듭남입니다.

위의 A 성구는 우리 믿음의 시작인 거듭남(다시 태어남)이

죽었던 영이 다시 살아나는 것, 곧 영의 구원임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니고데모가 이러한 거듭남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고

육적인 고정관념에 갇혀 거듭남에 대해

"엄마 뱃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는 걸 말합니까?"라고

엉뚱한 소리를 해대자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설명해주신 것입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육체가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 아니라

죽었던 영이 성령으로 다시 생명을 얻고

새롭게 태어난다는 말이다."

우리 믿음의 시작영의 구원이 핵심이며,

이 영의 구원은 불변입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 믿음이 시작되는 시점에​

우리 혼과 몸의 구원도 함께 시작됩니다.

겔36:26을 보면 우리 속에 새(거듭난) 영을 주실 때

새 마음(혼)도 같이 주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우리 믿음이 시작될 때

영의 구원과 동시에 혼의 구원도 시작됨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고전6:19에

"우리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거듭난 자들은 영과 혼뿐 아니라

몸도 구원받은 상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영의 구원과 함께 시작된

혼과 몸의 구원이 영원한 불변으로 확정되는 때는

우리 믿음의 결국(τέλος, 끝) 시점입니다.

위의 B성구에서 말하는 믿음의 「결국(끝)」이란 시점은

이 땅에서 우리의 믿음이 마무리 되는 때,

곧 이생의 삶이 끝나는 시점을 말하며

이때 우리 혼의 구원최종적으로 확정됩니다.


정리합니다.

이 땅에서의 우리 믿음의 삶은 시작과 끝이 있고

믿음의 시작에 우리의 영, 혼, 몸이 모두 구원을 받습니다.

이 믿음의 시작 시점에

영의 구원영원한 불변으로 확정되었고

혼과 몸은 구원을 받았지만 다시 잃어버릴 수도 있는 상태입니다.

혼과 몸의 구원영원한 불변으로 확정되는 때

바로 믿음의 결국(끝) 시점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결국(끝)은 곧 혼의 구원이라 말씀하셨고(B)

온갖 환난 중에도 끝까지 견디는 자라야

혼의 구원을 얻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마24:13, 눅21:19).

따라서 성경은 우리의 구원에 대해

"구원을 받았다, 얻었다"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구원을 이루라,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가라"고 말씀하기도 합니다.

즉 우리에게는 이미 받은 구원받을 구원,

이렇게 두 종류의 구원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A.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B.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C. 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 엡2:8, ⓑ 빌2:12, ⓒ 벧전2:2

이제까지 설명한 영, 혼, 몸의 구원의 여정을 잘 이해했다면

받은 구원이 무엇인지,

받을 구원은 무엇인지 쉽게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받은 구원이란

믿음의 시작 시점에 우리 영, 혼, 몸이 구원받은 것을 의미하고

받을 구원이란

믿음의 결국(끝) 시점에 혼과 몸의 구원영원한 불변으로 확정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 그럼 이제부터는

믿음의 결국(끝) 시점에

영, 혼, 몸의 온전한 구원을 받는 자와

영은 구원받았지만 혼과 몸의 구원을 잃어버린 자가

영원한 천국과 지옥에 이르기까지

영, 혼, 몸 각각이

어떠한 여정을 거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조금 돌아가는 것 같지만)

영계(영적인 세계)의 구조에 대해 좀 더 디테일한 이해가 필요하기 때문에

우선은 영계의 구조에 대해 잠깐 설명하고 넘어가겠습니다.

그림5_ 영계와 물질계의 구조

하나님이 처음 창조하신 세계는 크게 하늘과 땅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하늘과 땅)를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1

그런데 여기서 하늘과 땅을 좁게 보면

지구(땅)와 지구를 둘러싼 대기권+우주(하늘)로 볼 수 있겠지만

넓게 보면

물질계(우주) 전부를,

하늘영계(영의 세계)를 가리킵니다.

굳이 창조된 순서를 따지자면

영계가 먼저 창조되었고, 그 다음에 물질계가 창조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다음 욥기서 말씀에 잘 나와있습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그 때에 새벽 별들(천사들)이 함께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인간의 영들)이 다 기쁘게 소리하였었느니라

욥기 38:4,7

하나님께서 우주(물질계)를 창조하시던 첫날에

이미 영적인 존재들인 천사와 인간의 영들이 있어

물질계의 창조를 보며 하나님을 찬양했던 모습을 보면

물질계가 창조되기 전에 영계가 먼저 창조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하늘(영계)과 땅(물질계)을 창조하시고 난 다음

얼마 후에 영계(하늘)에 큰 사건이 하나 터집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천사들 중에

상당한 지위와 실력을 가진 한 천사가 있었는데

이 천사는 아침의 아들 "헬렐"이라 불리는 천사였습니다(사14:12).

헬렐은 '빛나는 자'라는 뜻으로

한글성경에서는 이 헬렐을 '계명성'으로 번역했습니다.

라틴어성경에서는 우리에게 익숙한 '루시퍼'로 번역되었지요.

(어떤 이들은 루시퍼의 타락 전 이름이 루시엘이고 타락해서 루시퍼가 되었다 주장하지만

이는 전혀 성경적 근거도 없고 사실이 아닙니다.

오히려 타락 전 이름이 라틴어식으로 루시퍼이고 타락 후 이름이 사탄입니다.)

성경에는 특정 천사의 이름이 나오는 경우가 매우 드물며

오직 가브리엘, 미가엘, 헬렐, 이 셋의 이름만 나옵니다.

(그룹 천사나 스랍 천사는 천사의 종류이지 천사 개인의 이름은 아닙니다.)

가브리엘은 하나님의 뜻을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천사로서

다니엘과 마리아에게 나타났던 천사이며

미가엘은 천사들의 군대장관을 맡고 있는 천사입니다.

헬렐은 이들과 함께 성경에 이름을 올릴 정도의

상당한 급이 있는 네임드 천사였던 것이지요.

성경에서는 종종 하나님을 빛으로 비유하는데(요일1:5, 계22:5)

헬렐이라는 이름의 뜻이 '빛나는 자'이니

얼마나 이 헬렐이라는 천사가 하나님의 영광에 가까운 천사였는지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랬는지 이 헬렐은 '하나님과 비기리라' 하는 교만한 마음을 품었고

결국 자신을 따르던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께 대해 반역을 일으키고 타락해버렸습니다.

A. 너 아침의 아들 헬렐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밑(무저갱)에 빠치우리로다.

B. 한 큰 붉은 이 있어, 머리가 7이요 뿔이 10이라...

그 꼬리가 하늘 별 1/3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 이사야 14:12~15, ⓑ 요한계시록 12:3~4

* 개역한글성경에 '계명성'으로 번역된 것은 원어성경대로 '헬렐'으로 표기하였습니다.

위의 A성구는 헬렐이 하나님을 반역했던 사건에 대한 말씀이며

B성구는 헬렐(큰 붉은 용)이 혼자서만 하나님을 대적한 게 아니라

하늘의 천사들(별) 중 자신을 따르던 천사들을 규합해서

단체로 반역을 일으켰던 사실을 알려줍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늘에 있던 수많은 천사들 중

헬렐을 따르던 천사가 3분의 1이나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대적하고 반역했던 헬렐은

타락 이후 더 이상 '헬렐'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지 않습니다.

대신에 우리에게 상당히 익숙한 그 이름,

바로 "사탄"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게 되었습니다.

이 사탄과 그 졸개들은 자신들의 반역으로 그치지 않고

아담과 하와를 타락시켜서

온 인류를 죄와 사망 가운데 빠뜨리게 됩니다.

따라서 영계에서는 새로운 공간이 창조될 필요성이 생기게 됩니다.

사탄과 그 졸개들을 징벌할 공간,

또 범죄한 인간들의 사망 이후

그들의 영혼을 징벌할 공간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저주를 받은 자들

나를 떠나 마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마태복음 25:41

그래서 새롭게 생겨난 영계의 영역은

바로 "음부"라고 불리는 공간입니다.

성경에서는 이 음부를 기존의 하늘(영계)과 땅(물질계)과 구별하기 위해

"땅 아래"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다음 성구들이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A. 하늘에 있는 자들과 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B. 하늘 위에나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이가 없더라

ⓐ 빌립보서 2:10, ⓑ 요한계시록 5:3

따라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를

크게 로 나누면 영계물질계(우주)로 나눌 수 있고

으로 나누면 하늘(영계1)과 (물질계)과 땅 아래(영계2)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림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은 구조입니다.

그림6_ 영계와 물질계의 간략한 구조

그렇다면 영계는 "하늘"과 "땅 아래(음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는데

이 두 구역에 대한 세부구조를 좀더 살펴보고자 합니다.

일단 성경을 보면 여러 종류의 하늘들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A.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B.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 왕상8:27, 대하2:6, 6:18 ⓑ 느혜미야 9:6

그러면 하늘에는 총 몇 종류의 하늘이 있을까요?

사도 바울의 다음 체험담을 보면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14년 전에 그가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고린도후서 12:2,4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를 쓰기 14년 전에

셋째 하늘, 곧 낙원을 다녀온 사실을 말했습니다.

이 낙원은 어떤 곳인지,

셋째 하늘 위에 혹시 그 이상의 하늘이 또 있진 않은지,

다음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23:43

위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기 전에

자신의 좌우편에 못박혔던 강도들 중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한 강도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따라서 이 낙원, 곧 셋째 하늘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승리하시고 올리우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바로 그 하늘을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마가복음 16:19

즉 셋째 하늘인 낙원은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하늘이요

그 우편에 예수님께서 앉아계신 하늘입니다.

천군천사들이 그 앞에 모여 시립하며

하늘의 어전회의가 열리는 곳입니다.

욥기 1장, 열왕기상 22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어전회의가 열리는 곳,

에스겔이 환상 중에 본 영광스러운 하나님 보좌가 있는 하늘도

바로 이곳, 셋째 하늘(낙원)입니다.

이처럼 지존하신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곳이 셋째 하늘(낙원)이니

당연히 이 이상의 하늘이 없음은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하늘에는

첫째, 둘째, 셋째 하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렇다면 첫째 하늘과 둘째 하늘은 무엇일까요?

일단 셋째 하늘이 가장 높은 차원의 하늘이니까

첫째 하늘은 가장 낮은 차원의 하늘이라고 유추할 수 있겠지요.

우리가 쉽게 인식할 수 있는...

바로 우리가 늘 접하고 보는 물질계의 하늘,

지구를 둘러싼 대기권과 우주 공간을 첫째 하늘이라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둘째 하늘은 무엇일까요?

성경을 보면 특이하다고 해야 할지,

상당히 흥미로운 공간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A.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B.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

C. 그 때에 너희가... 공중 군대의 지배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 엡6:12, ⓑ 계12:9, ⓒ 엡2:2

* C 성구는 원어성경의 의미를 보다 정확하게 살리기 위해 개역한글성경과 조금 다른 단어를 선택했습니다.

이 공간은 때로는 하늘(A)이라고 불리지만

동시에 땅(B)이라고도 불립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 속성을 동시에 만족하는 표현으로

때로는 공중(C)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이 둘째 하늘이

물질계(땅)와 겹쳐있는 영계(하늘)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렇게 둘째 하늘의 명칭은 하늘, 땅, 공중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지만

위의 3성구를 종합해보면 공통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바로 사탄과 그의 졸개들이 근거지로 삼고 상주하는 공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공간에 사탄과 그 군대들만 활동하는 것은 아닙니다.

천사들의 적극적인 활동 무대이기도 한 공간입니다.

이러한 둘째 하늘의 모습은 다음 말씀들에서 잘 드러납니다.

A. 바사(페르시아) 왕국의 군주가 21일 동안 나(가브리엘)를 막았으므로

내가 거기 바사 왕국의 (마귀)군대장관들과 함께 (대치하며) 머물러 있더니

가장 높은 (천사)군대장관 중 하나인 미가엘이 와서 나를 도와주므로 이제... 왔노라

B. (엘리사가)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저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 단10:13~14, ⓑ 왕하6:17

* A 성구는 좀더 의미를 명확하게 하고자 개역개정판의 "왕들, 군주"를 "군대장관"으로 번역했습니다.

위의 A 성구는 다니엘이 금식기도를 시작한 첫날에

하나님께서 다니엘의 기도를 듣고 응답을 주시고자 가브리엘을 보냈지만

가브리엘이 바사(페르시아) 지역을 담당하던 사탄 군대들의 저항에 막혀

21일 동안이나 다니엘에게 가지 못하고 지체하게 된 사건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미가엘과 그 군대를 원군으로 보내 도우신 덕분에

가브리엘은 21일만에 사탄 군대의 저지선을 뚫고

다니엘에게 와서 하나님의 메세지를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페르시아 지역을 담당하는 마귀군대가 가브리엘 천사와 싸웠던 21일간의 전투도

지원군으로 미가엘 천사군대가 도착해서 악령들의 군대를 제압한 전투도

모두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에서 벌어진 일들입니다.

이러한 전투들이 벌어진 영적 세계가 바로 "공중"이라 불리는 둘째 하늘입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사탄의 군대들이 근거지로 삼고 상주하는 곳이

이 둘째 하늘(공중)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A 성구를 통해서 둘째 하늘의 특징을 한 가지 더 알 수 있습니다.

바로 둘째 하늘이란 영적 공간은 마치 동전의 앞뒷면처럼

물질계와 겹쳐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둘째 하늘(공중)에 상주하는 사탄의 군대들이

지구(물질계)의 지역별로 담당 구역이 나뉘어 있다는 걸 통해 알 수 있습니다.

A 성구에는 페르시아 제국을 담당하는 사탄의 군대만 나오지만

몇 절 뒤(단10:20)를 보면 헬라 제국을 담당하는 사탄의 군대들도 등장합니다.

즉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이 지구(물질계)의 지역별로 담당하는 사탄의 군대들이 있어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페르시아 제국, 헬라 제국은 오래 전 제국들이라 실감이 잘 안날지도 모르니

이렇게 설명해보겠습니다.

현재도 사탄의 군대들이 한국 주둔군, 일본 주둔군, 미국 주둔군, 독일 주둔군...

이런 식으로 체계를 갖추어 움직이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분들은 잠깐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여러분 눈에는 보이지 않겠지만 여러분 주위의 공간에는

한국 사탄군에 소속된 악령들이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혹시 그 중 몇마리가 오늘 여러분 속에 이미 들락날락 했을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둘째 하늘(공중)이란 공간은 물질계와 동떨어져서 멀리 있는 영계가 아니라

물질계와 지리적으로 시간적으로 겹쳐있는 공간입니다.

다만 우리 육체의 눈으로는 물질계만 볼 수 있기 때문에

겹쳐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일 뿐입니다.

B성구는 둘째 하늘(공중)이 단순히 사탄과 그 군대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천군천사들의 적극적인 활동 무대이기도 함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조금 더 설명을 하자면

엘리사 선지자 당시 아람 나라의 군대가 북이스라엘을 자주 침공하였는데

그때마다 엘리사가 적절히 조언을 한 덕분에 아람 나라는 번번이 실패하게 됩니다.

이에 아람 나라가 엘리사를 잡고자

엘리사가 머물던 성에 군대를 보내어 포위하니

엘리사의 사환이 이를 보고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엘리사의 기도를 듣고 사환의 눈을 열어

물질계와 겹쳐있지만 평소 육체의 눈에 보이지 않는 둘째 하늘을 보여줍니다.

불말과 불병거를 탄 천사들이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러싸고 호위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둘째 하늘(공중)이라는 공간은

물질계인 땅과 지리적으로나 시간적으로 겹쳐있기 때문에

땅으로 불리기도 하며(계12:9),

사탄과 그 군대가 근거지로 삼고 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천사들이 활발하게 작전을 수행하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둘째 하늘에서는 A성구에 나타난 것처럼

사탄과 악령들, 천사들과 인간의 영들 사이에

매일 치열한 영적 전투와 성령님의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이제는 다음 그림이 왜 이렇게 구성되는지

잘 이해하실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붉은 점선으로 표시된 땅과 파란 점선으로 표시된 하늘이

왜 둘째 하늘(공중) 부분에서 겹치는지요.

그림5_ 영계와 물질계의 구조

그럼 이제 성경에서 종종 "땅 아래"로 표현되는

음부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음부는 다음 3가지 영역으로 나누어집니다.

옥 / 불못 / 무저갱

먼저 각각의 영역에 대해 간단히 설명을 하자면,

[옥]은 영혼몸의 온전한 구원에 실패한 신자의 "영"이

이생의 삶이 끝날 때 들어가는 곳입니다.

[불못]은 영혼몸의 온전한 구원에 실패한 신자의 "혼"과

불신자의 "혼"이 가는 곳입니다.

[무저갱]은 인간이 가는 곳이 아니라

타락한 천사인 악령들이 갇히는 곳입니다.

모든 악령들이 다 가는 것이 아니라

타락한 천사들에게조차 하나님께서 넘으면 안되는 선을 정해주셨는데

그 선을 넘어버린 악령들을 가두고 처벌하는 곳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에 대한 성경 근거들을 살펴보겠습니다.

A. 저(그리스도)가 또한 영으로 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B.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C.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즉

가로되 군대라 하니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 벧전3:19~20, ⓑ 눅16:22~24, ⓒ 눅8:30~31

[옥]

앞에서 영혼몸의 온전한 구원을 얻지 못한 자라도

영만큼은 구원받는다고 했기 때문에

신자가 죽을 때 온전한 구원에 실패한 성도의 영이

낙원이 아닌 음부에 들어간다는 점이 의아하게 생각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와 간통했던 고린도 교인에 대해

"육신은 멸하고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전5:5)

하신 말씀을 보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실패한 신자의 영은 육신의 죽음 이후 곧바로 낙원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장차 예수님의 재림 때에야 비로소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전까지 실패한 신자의 영이 대기하는 곳이 있으니

바로 그 곳이 음부 중에 이라는 구역입니다.

위의 A 성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영으로 음부의 구역 중 하나인 "옥"에 내려가셔서

실패한 신자들의 영에게 복음 전하셨음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이 "옥"은 비록 실패한 신자라 하더라도

그 영이 불못에서 고통 당하지 않도록 해주시는

하나님의 배려가 느껴지는공간입니다.

실패한 신자들의 영은 죽음 이후 음부의 옥에 머무르다가

마지막 심판 때에 옥에서 나와 천국(새 하늘과 새땅)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반면에 영혼몸의 온전한 구원을 받은 신자

육신의 죽음 이후 영과 혼이 바로 낙원(셋째 하늘)으로 들어가고,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신령한 몸을 입고 영광스러운 부활을 하게 됩니다.

[불못]

B 성구는 거지 나사로와 홍포 입은 부자에 대한 말씀입니다.

홍포 입은 부자가 죽은 이후 음부로 끌려가

불꽃 중에 고통을 당합니다.

이곳은 실패한 신자들의 혼과 불신자들의 혼이

마지막 심판 전까지 함께 고통당하는 공간으로서 바로 불못입니다.

이 불못은 다른 말로 "사망"이라고도 불립니다.

성경에는 사망을 첫째 사망과 둘째 사망으로 나누는데

첫째 사망은 마지막 심판 전까지

실패한 신자와 불신자의 임시로 고통당하는 불못이며

둘째 사망은 마지막 심판 이후

이들의 부활한 영원히 고통당하는 불못입니다.

(계20:13~14)

이 불못들이 바로 지옥입니다.

[무저갱]

이번에는 음부의 마지막 구역, 무저갱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무저갱은 사람이 가는 곳이 아니라

타락한 천사인 악령들 중에서도 죄질이 나쁜 것들이 갇혀 징계를 받는 곳입니다.

그래서 위의 C 성구에서 귀신들린 자 속에 들어있던 악령들이

벌벌 떨면서 예수님께 제발 무저갱만은 들어가라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드린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군대 귀신들은 무저갱으로 들어가느니

차라리 돼지떼 속에 들어가기를 택합니다.

귀신(악령)들에게는 무저갱에 떨어져 당하는 고통이

얼마나 큰 두려움과 공포가 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무저갱에는

음부의 다른 구역인 옥이나 불못과 구별되는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옥이나 불못은 한번 들어가면

마지막 심판인 백(white)보좌 심판 때까지 절대 나올 수 없지요.

그러나 무저갱은 중간에 나올 수 있습니다.

물론 무저갱에 갇힌 악령들이 제멋대로 빠져나올 수 있는 건 아니고

가끔 하나님께서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무저갱을 열어

그 안에 갇힌 악령들이나 사탄을 꺼내어 세상에 풀어놓는 경우가 있습니다.

실제로 요한계시록을 보면 이러한 경우가 2번 나옵니다.

i) 다섯번째 천사가 나팔을 불 때(계9:1~11)

무저갱을 열어 황충으로 비유되는 탐욕의 영들을 꺼내 온 세상에 풀어놓습니다.

ii) 예수님이 재림하여 지상강림하실 때

사탄을 잡아 무저갱에 천년 동안 가두어 놓셨다가

천년왕국 끝에 사탄을 다시 꺼내어 세상에 풀어놓으십니다.

정리하자면, 무저갱은 사람이 가는 곳이 아니라

악령들 중에서도 죄질이 나쁜 악령들을 가두는 곳이며,

하나님께서는 가끔 필요에 의해

무저갱에 가둬둔 악령을 꺼내어 지상에 풀어놓기도 하십니다.

이제 영계의 구조에 대해 대략적인 설명을 마쳤으니

지금부터는 영,혼,몸의 온전한 구원을 받은 신자와 받지 못한 신자가

각각 천국과 지옥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먼저 영,혼,몸온전한 구원을 받는 신자 여정입니다.

그림7_ 영혼몸의 온전한 구원을 받는 신자의 여정

이들은 이생의 삶을 마칠 때

이 몸으로부터 분리되어 낙원(셋째 하늘)으로 들어가고

흙으로 돌아갑니다.

이후에 예수님 재림하실 때

이들의 혼과 영은 신령한 몸을 입고 영광스러운 부활을 하게 됩니다.

이를 계시록에서는 첫째 부활이라고 칭합니다(계20:4~6).

이들 중 예수님 재림하실 때까지 살아남은 자들의 경우에는

위 그림에서 몸의 죽음과 분리 과정이 생략되고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바로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어

공중으로 들림받고 재림하신 주를 영접하게 됩니다.

A.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 순식간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B.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 고전 15:51~52, ⓑ 살전 4:13~17

이후 이들은

신자들을 양과 염소로 나누는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마25:31~46)

양으로 분류되고

예수님의 재림 이후 이 땅에 세워지는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예수님과 함께 천년 동안 왕노릇하게 됩니다. (계20:4)

이 천년왕국이 끝나면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은 불에 풀어져 사라지고

성도들은 주와 함께 영원한 천국, 곧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게 됩니다.

여기에서 성도들은 각자 기업을 받아

영원히 예수님과 함께 왕노릇하며 왕 같은 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하게 됩니다.

죽음이나 질병, 아픔, 눈물, 미움이 없는 주의 나라에서

영원히 기쁨과 행복을 누리며 사랑과 감사와 찬송으로 살게 됩니다.

◆ 다음으로 영혼몸 온전한 구원 실패한 신자 여정을 보겠습니다.

그림8_ 온전한 구원에 실패한 신자의 여정

이들은 이생의 삶을 마칠 때 영, 혼, 몸이 각기 분리되어

흙으로 돌아가고,

음부 불못으로,

음부으로 들어갑니다.

예수님 재림 때까지 살아남은 자들의 경우에는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염소로 판정되어

이러한 결과를 맞이하게 됩니다.

예수님 재림 이후 지상에 이루어지는 천년왕국 기간 동안

이들의 혼과 영은 계속 음부의 불못과 옥에 머무릅니다.

천년왕국이 끝나면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불에 풀어져 사라지고

"흰 보좌 심판"이 벌어지는데

이들은 이때가 되서야 영원한 몸을 입고 부활하게 됩니다. (계20:11~15)

여기서 잠깐!

예수님의 재림 때 있는 "그리스도의 심판"이 신자들을 대상으로 한 심판이었다면

천년왕국 이후에 있는 "흰 보좌 심판"은 불신자들과 온전한 구원에 실패한 신자들이 대상입니다.

이처럼 마지막 때의 심판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믿는 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그리스도의 심판"이 먼저이고

불신자낙오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흰 보좌 심판"이 나중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서리요.

베드로전서 4:17~18

심판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하나님의 집, 곧 신자들을 대상으로 한 심판이 먼저이고

복음에 불순종하는 자들을 대상으로 한 심판이 나중이라는 말씀입니다.

전자가 바로 신자들을 양과 염소로 나누는 "그리스도의 심판"이고,

후자가 바로 "흰 보좌 심판"입니다.

이 "흰 보좌 심판"에 참예하는 자들의 부활은

영혼몸의 온전한 구원 받은 자들의 첫째 부활 이후 천년 뒤에 이루어지므로

둘째 부활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이들이 부활하여 입은 몸은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받을 수 있는 내구도를 갖춘 몸이지만

첫째 부활한 성도들의 몸처럼 영광스러운 생명의 몸은 아닙니다.

지옥의 불못, 즉 둘째 사망 아래 영원히 고통받을 몸과 혼이기 때문에

이 흰 보좌 심판에 참예하는 자들은

비록 부활했음에도 불구하고 "죽은 자들"이라고 불립니다(계20:12).

이 둘째 부활의 모습이 계20:13에 디테일하게 설명되어 있는데

다음 3군데에서 각각 죽은 자를 내어놓습니다.

[ 바다사망음부 ]

① 여기서 바다는 지구의 물로 된 바다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심판의 불에 완전히 녹아지고 풀어져 생긴(벧후3:10~12, 계20:11)

원소의 바다입니다.

즉 "물질계"라 할 수 있지요.

이 원소의 바다에서 죽은 자을 구성하여 내놓습니다.

② 그리고 사망이란 음부의 불못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바로 다음절(계20:14)을 보면 사망은 불못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음부의 불못에서 내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예, 죽은 자들의을 내어놓습니다.

③ 마지막으로 죽은 자를 내어놓는 음부는 무엇일까요?

앞에서 음부의 불못은 이미 나왔고

음부의 무저갱은 악령들만 있는 곳이니

당연히 음부의 옥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예, 마지막으로 음부의 옥에서 죽은 자들의을 내어놓습니다.

이렇게 이들의 영, 혼, 몸은 각각 음부, 사망, 바다에서 나와

다시금 하나가 되어 "흰 보좌 심판대"에 서게 됩니다.

이게 바로 둘째 부활입니다.

흰 보좌 심판에서는 두 종류의 책이 이용됩니다.

하나는 생명책이고 다른 한 종류는 행위책들입니다. (계20:12)

생명책은 한 권으로서

이 안에 영원한 생명을 얻는 자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은 자들은 다 지옥불에 던지웁니다. (계20:15)

그리고 흰 보좌 심판에 선 자들 중 이 생명책에 기록된 영들은

이 때 구원을 얻어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지만

이들의 몸과 혼은 분리되어 지옥불에 던지우게 됩니다.

행위책은 여러 권입니다.

여러 권인 이유는 지옥불에 던지우는 모든 사람마다

각자에게 해당하는 행위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각자마다 당할 지옥불 고통의 강도는

이 행위책에 기록되어 있는 죄들의 양과 죄질에 따라 결정됩니다. (계20:12)

그렇다면 영만 구원받은 사람의 경우

그 영이 천국(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간 후의 삶은 어떨까요?

계시록 21~22장을 보면 새 하늘과 새 땅의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새 예루살렘 성이 있는데

천국은 크게 이 새 예루살렘 성 안과 성 바깥으로 나누어집니다.

성 안에는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

곧 영혼몸의 온전한 구원을 받은 자들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계21:25~27)

그리고 계22:15에 '개, 술객, 행음자, 살인자, 우상숭배자, 거짓말쟁이'로 표현된

영만 구원받은 자들은 성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성 바깥에 거주하게 됩니다.

영혼몸의 온전한 구원을 받은 자들은

성안과 성밖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습니다. (계21:25~27)

영혼몸의 온전한 구원을 받고 성 안에 거주하는 이들은

크든 작든 다 상급을 받습니다.

심지어 작은 자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대접한 자는

결단코 그 상을 잃지 않는다 하셨으니 (마10:42)

영혼몸의 온전한 구원을 받을 정도의 사람이라면

아마 상급을 받지 못하는 이는 없을 것입니다.

반면에 영만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온 자들에게는

어떠한 상급도 없습니다.

가끔 혼동하는 분들이 많은데

구원과 상급은 서로 다른 개념입니다.

쉽게 말해서 구원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라면

상급은 구원받은 자가 천국에서 얻을 기업과 영광을 의미합니다.

"똑같이 영혼몸의 온전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각자가 받는 상급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이 상급을 "영광"으로 표현하기도 하는데

해와 달과 별의 영광이 서로 차이 나듯이,

그리고 별들도 서로 그 영광의 차이가 있듯이

부활한 자의 영광도 서로 차이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벧전1:7, 고전15:40~41)

따라서 천국에서 어떤 이는 해와 같이 빛나는 영광을 가진 자가 있는 반면

어떤 이는 반딧불이와 같이 미미한 별빛과 같은 영광을 가진 자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만 간신히 구원을 받아 천국에 들어온 자들은

아예 그 어떠한 영광도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 설명하듯이

상급으로서의 영광은 신령한 몸으로의 부활을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영만 구원얻은 자들의 부활한 몸은 지옥에서 불타고 있으니

이들에겐 어떠한 영광도 있을 수 없는 것이지요.

오히려 몸과 혼도 없이 영만 달랑 있으니

영광은 커녕 마치 벌거벗은 것과 같은 부끄러움과 후회만 있을 뿐입니다.

(계3:18, 계16:15, 고전3:15)

또한 누가복음 19장의 열 므나 비유에서는

상급을 "다스리는 권세"로 표현합니다.

비유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한 주인이 종 열을 불러 한 사람 당 한 므나씩 나눠줍니다.

주인은 먼 나라에 가서 왕위를 받아온 뒤에

종들을 불러 각자 장사하여 남긴 므나를 계산합니다.

이 때 다음 세 종류의 종이 있었습니다.

① 한 므나로 10 므나를 남긴 종

② 한 므나로 5 므나를 남긴 종

③ 한 므나로 아무 것도 남기지 않은 종

여기에서 ①, ②번 종은 영혼몸의 온전한 구원을 받은 성도이고

③번 종은 영만 간신히 구원받은 신자입니다.

여기서 주인의 판결은

영만 간신히 구원받은 자 ③에게는 어떠한 상급도 주지 않고

오히려 있는 것마저 빼앗습니다.

그러나 온전한 구원을 받은 자 ①, ②에게는 상급을 주되

차등을 두어 지급합니다.

10 므나를 남긴 종에게는 10 고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시고

똑같은 자본을 가지고 5 므나 남긴 종에게는 5 고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십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다음 두 가지입니다.

▶ 첫째, 온전한 구원을 얻은 성도가 천국에서 받는 상급(기업)에는

예수님과 함께 왕노릇하며 다스리는 권세가 있으며

이 왕의 권세는 사람마다 많고 적음의 차이가 있다.

▶ 두번째, 영만 구원을 얻은 자에게는 어떠한 상급도 없다.

그렇다면 혹시 이런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 대접한 것도 다 상급이 있다고 하셨는데 (마10:42)

영만 구원 받은 자들이라 하더라도

한때 믿음으로 살며 주님 나라 위해 헌신했던 자들이 받을 상은 어떻게 되는지?

실제로 사울 왕 같은 경우 나중에 타락하긴 했지만

초반에는 성령 충만하여 하나님께 헌신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솔로몬 왕 같은 경우도 성경을 3권이나 기록했으며

하나님을 위해 성전을 건축했으나

후에 음행과 우상숭배에 빠져 배도의 길로 간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들뿐 아니라 교회의 역사와 현재 우리 시대를 둘러봐도

초창기에는 성령의 사람으로 많은 영혼들을 구원하며 주를 위해 뜨겁게 충성했지만

후에 타락하여 음행과 물욕, 권력욕에 빠지거나 배도의 길로 간

무수한 신앙선배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이 비록 훗날에 타락했을지라도

한때 주님 나라와 몸된 교회를 위해 헌신했던 공로에 대한 상급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이에 대한 답은 에스겔서에 나옵니다.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의에서 떠나서 범죄하고

악인의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대로 행하면 살겠느냐?

그 행한 의로운 일은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범한 허물과 그 지은 죄로 인하여 죽으리라

에스겔 18:24

예, 그렇습니다.

훗날에 타락하여 믿음의 길에서 떠난다면

이전에 그가 주를 위해 했던 어떠한 헌신도 기억되지 못합니다.

영만 간신히 구원받는 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는 과거의 헌신과 수고에 대한 어떠한 상급도 없습니다.

그건 그냥 모두 잊혀지고 그에게는 없었던 일이나 마찬가지가 됩니다.

혼과 몸이 영원히 지옥에서 고통받는 것은 더 이상 말할 것도 없지요.

이건 솔로몬이라 해도 예외가 아닙니다.

성경을 3권이나 썼다고 해서 봐주시지 않습니다.

끝까지 우상숭배에서 돌이키지 않았다면

솔로몬은 그의 수고와 헌신에 대한 어떤 보상이나 정상참작 없이

그의 혼과 몸은 영원히 지옥불 가운데 고통당할 뿐입니다.

따라서 냉수 한잔의 수고에도 상급이 있다는 마태복음 말씀은

끝까지 인내하며 예수 믿음 가운데 거하여

영혼몸의 온전한 구원을 받은 자들에게 해당하는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땀 한 방울, 눈물 한 방울의 지극히 작은 수고까지도

절대 잊지 않으시고 영원한 상급으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위의 에스겔 18:24 말씀은 굉장히 무서운 말씀이지만

반대로 이 성구의 바로 앞에는

우리에게 놀라운 소망을 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나 악인이 만일 그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

내 모든 율례를 지키고 법과 의를 행하면

정녕 살고 죽지 아니할 것이라

그 범죄한 것이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 행한 의로 인하여 살리라

에스겔 18:21~22

내가 과거에 어떤 더러운 죄 가운데 있었다 할지라도

회개하고 돌이켜 예수 그리스도의 주인 되심 가운데 들어온다면,

내 인생의 마지막 결론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이라면

과거의 모든 추악하고 더러운 죄들,

정말 생각하기도 싫은 인생의 흑역사들,

이 모든 것들이 영원한 그 나라에서 하나도 기억되지 않으며

나를 조금도 정죄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A.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B.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 히브리서 8:12, ⓑ 시편 103:12

그렇습니다.

우리의 앞에 놓인 길은 "All or None"입니다.

모든 것을 얻든지, 모든 것을 잃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혼과 몸도 지옥가고 어떠한 상급이나 정상참작도 없이 영원히 고통 당하든지,

아니면 모든 죄와 허물이 주의 피로 씻은 바 되어 기억되지 않고

영원히 영혼몸의 온전한 구원과 상급을 누리며 살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칭찬은 단 하나도 없이 하나님의 진노와 책망만 당하는 부활을 하든지

점도 없고 흠도 없이 오직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는 부활을 하든지 (벧후3:14)

둘 중 하나입니다.

계시록의 여러 교회들처럼 칭찬과 책망을 겸하여 받는 것은

이 땅에서 아직 이생의 삶을 살아가는 자들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아직 돌이킬 수 있는 희망이 있고,

또 믿음을 잃고 타락할 가능성이 공존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칭찬과 책망을 겸하여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생의 삶이 끝나고 이미 모든 것이 결정된 후에는

오직 칭찬만 받느냐, 오직 책망만 받느냐, 둘 중 하나입니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신자의 인생은 다음 둘 중 하나로만 결론지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보혈 안에서 발견되느냐?

예수님의 피 밖에서 발견되느냐?"


이제 결론입니다.

구원을 잃어버림, 즉 구원상실에 대해 이야기하면

흔히 나오는 반론이나 오해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러나 반론에 대해서는 여기서 굳이 다루지 않겠습니다.

이미 지금까지 이 글에서 제시한 여러 성경 근거들이 있고

이 외에도 구원상실을 증거하는 성경 말씀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물론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에 대해서도 여러 성경 근거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설령 구원상실영원구원, 이 두 가지가 모순되어 보인다 할지라도

일단은 둘 다 맞다고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게 먼저입니다.

그 다음에야 이게 왜 논리적으로 모순이 아닌지

성경을 통해 연구하는 것이 올바른 신앙의 자세이지요.

여기에 영과 혼의 차이점에 대한 이해가 더해진다면

자연스럽게 구원상실과 영원구원 사이의 모순은 해결됩니다.

이미 성경은 뚜렷하게 영의 구원은 영원한 구원으로

육, 곧 몸과 혼의 구원은 잃어버릴 수 있다고

여러 곳에서 직설적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까지 이러한 성경구절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구원상실과 영원구원, 둘 중에 하나만 맞다는 프레임에 빠져있었고

또 영과 혼의 차이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들 중에는

'한번 구원 영원구원'만을 강조하는 장로교의 비중이 높습니다.

심지어 원래 교리 상으로는 구원 상실을 강조해야 하는 감리교나 순복음교회들조차도

실제 목회 현장에서는 '한번 구원 영원구원'으로 가르치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니 많은 이들에게 '구원 상실'이란 개념이 익숙치 않은지라

뒤늦게 성경을 통해 구원 상실을 깨닫고 나서도

이를 잘못 이해해서 엉뚱한 길로 빠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 구원 상실을 적극적으로 가르치는 교파에서는

영원한 구원을 부정하기 위해

은혜의 뿌리가 되는 하나님의 주권과 예정, 택하심조차 부정하다보니

'구원 상실' 교리까지 왜곡된 방향으로 나가게 됩니다.

따라서 이번 결론 부분에서는

먼저 구원상실에 대한 오해들을 바로잡고

그 후에 영, 혼, 몸의 온전한 구원을 받는 길에 대해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 구원상실에 대해 이야기하면

가장 처음 나오는 반응들 중 하나가

"그거 행위구원 아니냐?"라는 말입니다.

이 정도만 들어도 무슨 말인지 바로 알아듣는 분도 있겠지만

혹시 이게 무슨 소리냐 싶은 분들을 위해 간단하게 설명하겠습니다.

일단 '행위구원'이란 인간의 행위와 노력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이는 전형적인 타종교의 구원관인데

기독교의 구원관은 철저히 오직 믿음, 오직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엡2:8~9).

혹시 '믿음 반 + 행위 반'으로 구원받는다고 한다면

이것도 행위구원의 한 종류로서 명백한 이단입니다.

따라서 구원상실을 행위구원으로 몰아간다는 것은

구원상실이 잘못된 이단적 주장이라 비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들은 구원상실을 행위구원이라고 비판할까요?

바로 구원을 잃어버리는 이유가 잘못된 행위 때문이라고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행위 때문에 구원을 잃는다고 한다면

결국은 행위가 구원을 결정짓는 것이니 이는 행위구원이고

오직 은혜로 구원 받는다는 성경의 진리에 어긋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들의 생각과 달리

실제로 구원을 잃는 이유는 행위 때문이 아니라 믿음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듯이 믿음을 떠났으니 구원을 잃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상실이 행위구원이라는 주장은 오해에서 비롯된 착각입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구원 받음이 하나님의 은혜이듯이

믿음을 떠나 구원을 잃는 과정 또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구원 상실 자체가 은혜라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구원을 잃는다는 건 정말 최악의 일이지요.

다만 행위로 따지자면 진작에 구원 잃고 지옥에 떨어짐이 마땅한 자가

오직 하나님의 긍휼로 오래 참으심 가운데

기다려 주시고 또 기다려 주시니 은혜라는 의미입니다.

◆ 또 구원 상실에 대한 흔한 착각 중의 하나가

구원 상실은 하나님의 주권을 부정한다는 주장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택하심도 하나님의 주권이지만 버리심 또한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성경에는 끝까지 돌이키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버리시겠다고 한 말씀이 수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한다 하는 많은 이들이

어리석게도 택하심의 주권만 인정하고 버리심의 주권은 철저히 부정합니다.

자신의 취향과 인간의 얄팍한 논리를 따라

체리 피킹하듯이, 부페에서 자기 먹고 싶은 것만 쏙쏙 골라오듯이

버리심의 주권에 대한 말씀에는 눈을 흐리게 뜨고

택하심의 주권만 인정하는 반쪽짜리 주권을 붙들고 있으면서

자신들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믿는다 하니

정말 어리석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버리심조차 우리의 행위로 좌우되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은 우리에게 큰 은혜입니다.

어떤 이들은 버리심에 대해 착각하기를

'우리가 죄를 지으면 구원을 잃었다가

회개하고 의를 행하면 다시 구원을 회복했다가

또 죄 지으면 구원을 잃었다가 의롭게 살면 회복했다가

또 구원을 잃었다가 회복했다가... 함이 평생 반복되는 것이냐?' 묻습니다.

이는 버리심의 기준과 시기가 하나님의 주권이 아닌

그때 그때 우리의 행위에 달려있다고 생각해서 벌어진 오해입니다.

또 하나님의 버리심에 대한 성경 말씀들을 잘 몰라서 하는 착각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단번에 구원받았듯이 이후의 버리심도 단번에 이루어집니다.

'버렸다 건졌다 버렸다 건졌다...' 이런 식으로 오락가락 하지 않습니다.

다음 히브리서 말씀이 이것을 잘 보여줍니다.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계속해서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히브리서 10:26~27

* 원어 성경의 현재분사 시제의 의미가 보다 잘 반영되도록 수정하였습니다.

이는 버리심에 대한 말씀입니다.

한 번 하나님께서 버리시면 다시 돌이킬 길이 없고

오직 심판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버리심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베드로후서 3:15

하나님의 버리심은 결코 가볍게 결정되지 않습니다.

다시 돌이킬 수 없는 단번의 버리심이기 때문에

정말로 오랜 기다림과 참으심 뒤에 버리기로 결정하십니다.

사랑과 긍휼로 때론 꾸짖으시고 때로는 달래주시며

때로는 징계하시고 넘어지면 다시 일으켜주심 가운데

돌이킬 수 있는 수많은 기회들을 주십니다.

만약 하나님의 버리심이 우리 행위에 달려있다면

끝까지 버림받지 않고 버텨낼 수 있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없습니다.

우리 행위를 보면 버림받아도 진작에 수도 없이 버림받아야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주권으로 오래 참으시며 버리지 않고 붙잡아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기로 정하신 때까지 끝내 돌이키지 않는다면

반드시 버리시고 이를 다시 뒤집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버리심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이번에는 어떻게 해야 혼과 몸의 구원을 잃지 않고

영, 혼, 몸의 온전한 구원에 이를 수 있을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구원상실을 깨달은 분들 중에 자신은 행위구원이 아니라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행위구원자처럼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다보면 어느 순간 구원의 은혜와 감격은 다 메말라버리고

자기 힘과 노력으로 안간힘을 쓰고 몸부림치다 점점 지쳐갑니다.

이들은 보통 이렇게 믿습니다.

"구원은 행위가 아닌 오직 믿음으로 받는 것이지만

믿음은 행위로써 증명되어진다."

이 말은 반은 맞지만 반은 틀린 말입니다.

야고보서 2장 말씀처럼

믿음행위로써 보여질 수는 있지만

행위로써 증명되어질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혹시 "그게 그거 아니냐? 말장난 하는 거냐?" 하실지 모르겠지만

이 두 가지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라는 말처럼

(믿음은 행위로써) '보여진다'와 '증명된다'의 차이가

결국 추구하는 방향을 다르게 만들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행위로써 증명될 수 없음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가

바리새인들의 외식입니다.

이들은 평생 수많은 종교적 행위들을 했고

심지어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너희는 왜 금식 기도를 하지 않느냐고

행위 없음을 비판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행위는

자신들의 믿음이 참되고 살아있는 믿음인지 증명하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얼마나 열심히 헌신하는 성도님들이 많습니까?

그러나 그 행위들이 자기 의와 자기 열심에서 나오는지

아니면 정말 믿음으로 주님 은혜에 감격되어 나오는 행위인지

그 행위들만으로는 증명하기 어렵습니다.

이걸 이해하면 당장 눈에 보이는 행위보다는

그 행위를 하게 만드는 믿음에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그러나 행위로써 믿음을 증명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되면

자기 믿음을 증명하기 위한 행위에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행위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야고보서 2장 말씀처럼 믿음은 행위로 보여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씨뿌리는 비유에서처럼

땅속에서 씨앗이 밑으로는 뿌리를 내리고 위로는 줄기를 뻗는 모습이

땅밖으로 줄기가 나오기 전까지는 보이지 않듯

때로는 내면에서 싹트고 성장하는 믿음이

아직 행위로 나타나지 않는 순간들도 분명 있습니다.

따라서 행위는 어디까지나 완벽하진 않지만

자신의 믿음을 점검할 수 있는 여러 방법들 중 하나 정도로 생각해야지

자신의 믿음을 증명하는 절대적인 방법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러지 않으면 말로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행위로 자기 믿음을 증명하려 애쓰며

행위에 집착하는 자가 됩니다.

​그 결과 은혜에서 떨어져 점점 메말라가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이들은 행위를 자신의 믿음과 동일시 하다보니

자신이 구원을 잃을지 얻을지 여부를 따질 때에

늘 자신의 행위에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이 경우 보통 두 가지의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① 자신의 열심과 행위에 만족하며 이 정도면 구원 얻기에 충분하리라 생각하거나

② 구원을 얻기에 자신의 행위가 부족하지 않나 끊임없이 불안해합니다.

이 두 가지 상태를 냉탕과 온탕 오가듯 오락가락 합니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보셨으면 합니다.

여기에 은혜가 끼어들 자리가 어디 있습니까?

종교적 열심과 행위가 많아도 은혜가 사라져버린 그에게

과연 영, 혼, 몸의 온전한 구원이 있을까요?

믿음이 아닌 행위에 초점을 맞추는 자에게 생기는 안타까운 일입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계시록의 7교회에게 하신 말씀을 보면

계속 '네 행위를 안다' 하시고 행위로 판단하시는데

결국 믿음은 행위로 따지는 것이 맞지 않냐?"

그러나 계시록의 7교회 부분을 제대로 읽는다면

오히려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번째 나오는 에베소 교회만 봐도 그렇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참으로 훌륭한 행위들을 많이 했습니다.

수고하며 인내하고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않고 거짓 선지자를 밝혀내고

주의 이름을 위해 견디고 게으르지 않았습니다(계2:2~3).

​*자료 출처 / 영과 혼은 어떻게 다른가? 7가지 차이점 (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