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루터 킹의 비폭력 저항의 메시지





김영호 목사
    ( 역사신학 교수, 미동부크리스천 아카데미 원장, 1983년 설립)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당시 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백인들의 차별과 멸시를 받는 세대에 훅인으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백인들과 흑인들의 동등한 법적 사회적 평등과 인권회복의 실현을
전심 전력을 다해 부르짖고 활동하면서 그 수단으로 폭력과 증오범죄가 난무하던 시기에  ‘비폭력
저항운동’과  ‘원수까지 사랑 운동’을 앞장 서서 할 수 있었던 배경과  그런 특이한 메세지의 원동력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를 살펴보자.
 
자료를 찾아보면 그도 예외 없이 어린시절 흑인 어린이라고 차별과 멸시를 받았었다. 킹이 옆집의
백인 쌍둥이 형제와 놀려고 하자 그 형제의 어머니가 “넌 검둥이니까 검둥이들 하고 놀아 !”라고 했고,
킹은 울면서 집으로 돌아왔더니 어머니가 어린 킹을 달래면서 왜 흑인이 차별받게되었는가 그리고
인종차별을 이겨내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한다.
 
심지어 대학시절에 더 심각한 일을 당하였다. 그가 친구들과 식당에서 식사를 하러 갔었는데
백인 식당 주인이 “ 흑인 새끼한테는 음식 안 팔아 !”라며 총을 쏘며 난동을 피워, 경찰이 도착했지만
백인 손님들은 침묵을 지켰다. 몇몇 백인 대학생들이 증언하기로 했지만 KKK등 백인 우익/ 과격단체
들이 압력을 넣는 바람에 증언하는 것을 취소하는 아픈 경험을 했다고한다.
 
이와 비슷한 인종 차별을 당한 것으로 인해 목사가 된이후 인종차별이 반 인륜적이며 성경말씀과
하나님 뜻에 어긋남에 근거하여 인권회복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목사가 되기전 킹은 가정의 유산인 기독교 신앙과 훈련과 부모님 특히 3대째 침례교 목사인 아버지
마틴 루터 킹 시니어의 삶을 통한 기독교 지도자가 되는 가르침에 큰 영향을 받았다.1) 백인 경찰의
인종차별에 당당하고 논리적으로 항의하는 부친의 실천은 어린이였던 루터 킹에게 ‘옳지 않은 것을
보면 굴종하거나 침묵하지 말고 항의 한다’,는 가르침을 주었다. 백인 경찰이 부친에게 “어이, 꼬마
운전면허증 보여줘”라고 하자, “꼬마는 여기 있는 아들입니다. 면허증 여기 있습니다”라고 대꾸하였고,
그 말을 듣고 경찰은 자신의 무례함을 부끄럽게 여겨서 슬거머니 물러났다고 한다. 2)실제전국유색인지위향상협회(NAACP) 애틀랜타 지부장을 맡고 있던 부친은  자랑스런 흑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자주 강조하였고, 비열하고 이중적인 백인에게 당당하게 맞서라고 가르치며 본을 보였다.
3) 1935년 종교개혁 유적지를 둘러보면서 미국의 교계와 사회를 개혁하려면  본래의 이름 마이클보다는
개혁의 선봉자였던 ‘Martin Luther’가 더 좋겠다고 생각하고 본인의 이름을  Martin Luther King Sr.로하고
아들 이름도 Martin Luther King Jr.로 바꾸어 불의앞에 ‘Here I stand !’ 라고 외치며 종교개혁을 이뤄낸
루터의 삶과 정신을 이어 받게 하였다.
 
두번 째로 킹 목사에게 큰 영향을 끼친 이는  미국 사회복음의 아버지로 불리는 Walter Rauschenbusch
(1861-1918)였다.복음의 사회성과 물질성에대한 강조는 이후 킹의 사회운동에 기반을 제공해 주었다.
그는 “사회정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곳에 하나님 나라가 있을 수 없고 사회를 구원하지 못하는 그리스도교는 진정한 의미에서 예수의 가르침에  충실했다고 할 수 없다.내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봉사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고 봉사하는 것이다”라고 가르쳤다.
 
세번 째로 킹의 사상체계를 뒤흔들어 놓은 것은 하워드대학 학장 Mordecai W. Johnson(1891-19760)
박사의 강의를 통해 인도 Mahatma Gandhi(1869-1948)의 비폭력평화주의를 배운 것이었다.간디를
공부하면서 킹은 “산상수훈에 기록된 예수의 ‘비폭력 저항’이라는 메시지가 개인에게만 아니라 인종 및 국가 관계에서도실현가능한 사회적 역량이다”라고 굳게 믿게되었다. 이 영향에 힘입어  1954년
보스톤대학 기독교 윤리학박사과정을 끝내면서 킹은 “사회정의를 추구하는 피억압 대중이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비폭력적인 저항’이라고 다짐하게 되었다.  킹은  간디의 후계자 네루의
초청으로 1595년 2월 3일부터 3월 18일까지 인도여행을 하였다.  간디의 발자취를 따라 뉴델리거리를 걸어보고, 인도의고질적인 계급사회를 폭력을 사용치않고도 간디의 정신으로 개선해나는것을 확인하고 킹 은 다음과 같이 자신의 입장을공개적으로 밝혔다.

                  “인도에 다녀온이후, ‘비폭력 저항’이야말로 억압된 민중이 정의회복,
                    만인평등과 인간의 존엄성을 되찾기위한 투쟁을하여 좋은 결과를
                  가져 오는 최선책임이라는 나의 확신이 더욱 궁굳어졌습니다.간디는
                  스스로의 삶을 통해 우주의 도덕적체계에 전해져 내려오는 보편적 원칙이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우리는 만유인력의 법칙을
                  벗어날 수 없듯이 그 원칙에서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극심한 인종차별과 폭력과 혐오범죄 난무 시기에  이 난제해결위해 고심하던 킹 목사가  위와 같은  교계 안팎의
선두 지도자들의 지식과 가르침에 큰 영향을 받은 사실이나 그의 삶의 배경과  가장 어려울 때  그가내린 결단의
원동력은  살아계셔서 역사를 주관하시고 억압받던 백성의 울부짖음을 들어시고 마침내 꿀과 젖이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신 능려자 하나님을 확실하게  의지하는 믿음과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에서 나왔음이 분명하다.
 
Paul Tillich가 1950년 예일대 강연, ‘존재로의 용기’’(The Courage to Be)에서 “참되고 강력한 용기는 하나밖에
없는 자기 생명을 던질 수 있는 진리와 그 대상을  만났을 때 생긴다”고 했는데  마틴 루터 킹 목사는 폭력은 ‘비폭력저항’으로, 증오문제는 ‘ 원수까지 사랑’으로, 인종 차별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만민평등’으로
해결 할 수 있다는 진리를 하나님말씀과 예수님의  산상설교와 십자가에서 찾았기에 죽음을 두려워 하지않고
흑인만이 아니라 차별받는 모든 ‘작은 자’들을 위해 투쟁해 마침내 승리하여, 1964년 7월 인종, 민족, 종교, 남녀
등의 차이에 따른 차별을 불법화한 미국 인군권법이 제정되었던 것이다.
 
킹 목사가  28세의 청년목사로 몽고메리에서 인종차별하는 버스의 승차거부 운동을 하다가 감옥에서 쓴
다음의 옥중설교의 내용을 또박또박 읽 보면 그의‘비폭력 저항’과 ‘원수까지 사랑’의 원동력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음과 예수님의 십자가 신학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그대를 사랑하리라 우리 집에
 폭탄을 던지고 우리 아이들을 위협해도
 그대를 사랑하리라

  한 밤중에 우리 마을을 습격하여
우리를 때려서 반 쯤 죽여 놓아도
그대를 사랑하리라 

그러나 우리 대장은 예수시오
우리의 깃발은 하나님이시니
결국 어느날인가 사랑이
승리하고 말 것이다

우리의 승리는 우리 흑인만의
승리가 아니라 전 세계에서 차별 받고 사는
모든 작은 자들의 승리이므로 우리는 실제
이중의 승리를 거두게 되고 말것이다 “

어떻게 폭력을 휘두르는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 라는 물음에

킹 목사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하는 일 없이 원수사랑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십자가상의 자기를 저주한 자에게
‘아버지시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일을 알지 못함이니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그들에 대한 용서와 그 극진한
사랑을 우리도 따라야한다고 생각을 바꾸면
우리를 해친 원수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구원받아야 할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고 우리를 일깨웠다

킹 목사는 예수님 말씀과 삶을 생명을 내놓고 따른 신실한 제자였고 우리 모두를 향하여
폭력은 ‘비폭력’으로,
증오는 ‘원수
까지의 사랑실천’으로,
인종차별은 ‘하나님 앞에서 만민평등’으로
승리하라고 가르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