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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사람이란 누구인가?
고린도전서 2:10~16
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11.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16.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하나님께 받은 것이 무엇인가요?
사도 바울 시대에도 그렇고 오늘날에도 ‘성령’님에 대한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성령 충만 대 성회, 폭포수 같은 성령을 경험하세요. 이 집회에서 성령 충만을 경험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령 충만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장소에서, 그곳에서 인도하는 누군가가 ‘성령’을 준다는 인상을 준다는 것입니다.
제가 너무 부정적인지 모르지만, 그 집회와 강사가 그래서 특별히 신령하다는 듯한 인상을 준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표현하기는 민망한
부분도 있는데, 마치 무당이 굿을 하며 선전하듯이, 점쟁이가 자신의 능력이 얼마나 되는지를 자랑하듯이, 무슨 부적을 써주는
스님이 영험하다든지.
제가 이렇게 표현한 것이 민망한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본문의 구절이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영적인 일’이 무엇인가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혹은 학교에서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이신 일입니다.
신앙의 본질을 흐트러뜨리는 일들은 하나님의 것을 영적으로 알려고 하지 않고 세상의 방법으로
알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누군가 대신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통하지 않고 조금
쉽게 알고자 하는 얄팍한 욕망은 아닐까요?
2천 년 전 초대교회에서 있었던 문제가 어떻게 우리와 이렇게 같은지, 종교개혁을 공부하며 그 시대의 개혁이 오늘의 개혁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과 1960년대 가장 강력하게 복음을 전했던 A. W. 토저의 책을 보면서 그 시대를 향한 예언자의 외침이
오늘날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교회도 너무 빈약하고 참 초라했던 때, 영성가였던 이용도 목사님의 삶과 설교가
어떻게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그렇게 적절하게 교훈이 되는지 말입니다.
한국교회 초대사에 영성가로 알려진 이용도 목사님이
1930년에 썼던 일기의 내용입니다.
현대의 교인은 ‘괴이한 예수’를 요구하매 현대 목사는 괴이한 예수를 전하다.
참 예수가 오시면 꼭 피살될 수밖에 없다.
참 예수는 저희들이 죽여 버리고 말았구나.
그리고 죄의 요구대로 마귀를 예수와 같이 가장하여 가지고 선전하는구나.
화 있을진저 현대 교회여!
저희의 요구하는 예수는 육(肉)의 예수, 영(榮)의 예수, 부(富)의 예수, 고(高)의 예수였고
예수의 예수는 영(靈)의 예수, 천(賤)의 예수, 빈(貧)의 예수, 비(卑)의 예수였나이다.
예수를 요구하느냐?
하나님의 아들을 찾으라,
인(人)의 예수 - 너희가 만들어 세운 예수 말고!
예수를 갖다가 너희 마음에 맞게 할 것이 아니라
너를 갖다가 예수에게 맞게 할 것이니라.
이용도 목사님의 일화입니다.
만주 용정에 신학교 동기이자 형 같았던 이호빈 목사님께서 목회하시던 교회에 초청을 받아 부흥회를
인도하게 되었답니다.
설교하기 전 준비 찬송을 하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이용도 목사님이 강단에 오르지 않는 겁니다.
그저 강단 중앙
의자에 쪼그려 앉아 기도만 합니다.
시간이 자꾸 지나 강사 목사님을 쳐다보았지만, 요지부동입니다.
그때 쪽지가 하나
올라왔습니다.
“형님, 오늘은 주님께서 말씀을 주시지 않네요.”
그래서 그날 저녁 그렇게 찬양만 하다가 사람들이 돌아갔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부터 강력한 성령님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했답니다.
주님이 주셔야 하는 것,
성령이 오셔야 하는 것,
이것이 복음의 이야기가 아닐까요?
쉐인 클레어본(Shane Claiborne)
저서 "믿음은 행동이 증명한다"
“우리가 가난한 사람을 도우면 사람들이 우리를 착하다 칭찬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처럼 살려고 하면 십자가에 매달 것입니다.”
영적인 흉내를 내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영적으로 산다는 것은 그렇게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여기서 “통달하신다”라는 말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신다’라는 말입니다.
‘통달’이란 단어를 국어사전에서 보니까 ‘어떤 것을
막힘이 없이 환히 다 알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영어 성경에는 이 부분을 ‘search’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것은 ‘구석구석
다 검색해서 알아낸다’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어 인터넷에 엠파스나 네이버와 같은 search engine이 있습니다.
이것은
바다와 같은 인터넷을 샅샅이 이 잡듯이 뒤져서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정보를 찾아주는 검색 사이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가장 주목해 보아야 하는 것은 성령께서 ‘통달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라고 말씀합니다. 강력한 search engine을 가지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도록 우리를 인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어떤 부분에 어떻게 관여하시는지를 알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영적인 사람이 되어 갑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이 세상에 계실 때 우리에게 약속하신 부분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6~17절에서 예수님은 성령님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그럼 우리에게 궁금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깊은 곳에 무엇이 있을까요?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죄인 하나까지도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주신 ‘사랑’이 있습니다.
그 사랑은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다 기록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깊은 곳에 무엇이 있을까요?
‘거룩하심’입니다.
더러운 죄가 하나님 앞에서 대낮같이 드러납니다.
그 거룩하심 앞에서
우리의 존재가 순결해져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앞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머리를 들 수 없는 겸손함이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교만하게 머리를 뻣뻣하게 들고 있다면 하나님에 대하여 알고 있지 못하다는 증거입니다.
아니, 지식적으로는 알아도 영적으로 하나님을 깊이 알지 못한다는 증거입니다.
사도 바울이 주님을 영적으로 알게 된 후에 어떤 고백을 하나요?
빌립보서 3장 8절 말씀에서 그는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아는 특권을 누리게 된 후에 자신이 자랑스럽게 여기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쓰레기통에 버렸습니다.
“가장 귀한 것을 위해 가장 귀하지 않은 것을 버리는 것!”
이것이 영적인 일이 아닐까요?
"삶의 어떤 순간에도 하나님"
페리 노블(Perry Noble)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면 지옥에 간다고 말한다.
인생 최대의 문제점은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가장 시급한 문제는 잘못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상상 이상으로 사랑하시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만나면 말 그대로 십자가를 건너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아간다.
그런데 십자가 오른편으로 넘어가기만 하면 삶이 편해진다는 오해가 교회 안팎에 만연해 있다.
사람들은 크리스천이 완벽한 삶을 산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우리가 술 담배를 전혀 하지 않고 종일 찬양만 부르는 줄로 안다. 하지만 내가 20년 넘게 목회를 하면서 보니 십자가 저편만큼이나 이편에도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
그리스도를 만나면 죄의 형벌에서는 완전한 구원을 받지만, 죄의 효과에서는 벗어나지 못한다.
구원을 받은 뒤에도 우리는 스스로 죄를 짓고 남들의 죄에 상처를 입으며 여전히 이 망가진 세상에서 살아간다.
그리스도를 만나 십자가 너머로 건너간 뒤에 우리가 할 일은 완벽한 이미지를 가꾸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님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사실을 더 절실히 깨닫고 날마다 그분과 더 깊은 사랑에 빠져야 한다.
예수님은 아무런 문제점이 없는 완벽한 사람들과 동행하시지 않았다.
그분이 완벽한 사람들을 부르시지 않았는데 왜 우리는 그분의 몸에 완벽한 사람들만 가득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육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일
영적이라는 말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 충만해져서, 하나님과 함께 인격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성령께서 가능케 하시는 사역이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안에는 ‘영적’인 것과 ‘영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 사이에 혼동이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조금 더 명백하게 ‘육적인 사람’과 ‘영적인 사람’을 대비하여 말하는
듯합니다.
13~14절을 보세요.
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육적인 사람을 희랍어에서는 ‘프쉬키코스 안드로포스’라고 말하는데,
성경에서는 ‘영적인 사람’과 대조되는 개념입니다.
즉
감각적 성질, 자신의 욕구와 격정의 지배를 받는 사람입니다.
앞부분과 연결해서 보면 성령님을 모르기 때문에,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즉 구원받지 못한 자들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특징이 무엇인가요?
하나님 없이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치는 말로 하지
않습니다.
지혜가 필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지혜를 넘어선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합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만 분별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의 특징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성령께서 하시는 일들이 어리석게 보입니다.
육적인 사람들에게는 세상의 욕심과
육혹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는 것이 어리석게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이 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모릅니다.
지난해 알래스카에 가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한국에서 온 신혼부부가 당한
비참한 소식입니다.
앵커리지 인근 바다는 밀물과 썰물이 있습니다.
그런 바다의 갯벌에는 먹을 것이 많지요.
한국에서 온 사람들에게
갯벌에 펼쳐진 커다란 조개를 마음껏 주울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매력적인 일이겠습니까?
물이 들어오는 시간이 순식간이기 때문에 함부로 들어가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신혼부부가 갯벌에서 조개를 잡다가 그만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고 말았습니다.
매력적인 일이 눈에 보이면 지켜야 할 것들이 우습게 보이는 모양입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말을 우리가 잘 듣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육적인 눈으로만 세상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영적인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별이 되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14절)
언젠가 이 부분을 묵상하며 적었던 글이 있습니다. 좋은 예가 될 듯하네요.
고린도전서 2장 후반부에서 사도바울의 이야기를 유진 피터슨은 메시지 성경에서 이렇게 풀어쓰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아는 것은, 책을 읽거나 학교에 다녀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직접 배웠기 때문입니다. 영에 속하지 않은 사람은
본질상 하나님의 영의 선물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영을 알 수 있는 통로는 영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과 우리의 영은 막힘없이
서로 통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을 가졌습니다."
영적이다!
이 말은 때로 ‘우리가 이해하기 힘들다!’라는 말일 수도 있죠.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이 우리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미국신학교 이사회에 참석했을 때 케노샤라는 지역에 사는 한인 가정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미국에 이민 와서 어느 정도
성공도 하고 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가정입니다.
그래서 14년 전 한국에서 온 한 가정을 열심히 전도했답니다.
그러다 보니
미국에 온 첫해 절에서 운영하는 수련회에 참석하고 온 아이들이 바로 교회 수련회를 가게 되었고 혼란스러웠죠.
계속해서 전도하는 이
가정 때문에 새로 이사 온 한국 분은 이렇게 말을 했답니다.
"나는 교회는 안 다녀 혹시 아이 아빠가 목사가 되면 그 교회나 다닐까?"
그런데 어제 끝까지 신앙을 갖지 않은 그 사람이 식사를 도우려 함께 하게 되었고, 또 자연스럽게 전도하는 분위기가 되었죠.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도저히 목회는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한 말이었는데, 그 집 아기 아빠가 지금 신학을 공부하며 목회를 준비하고
있네요.
제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자매님! 당신 한 사람을 위해 저분이 목회를 하게 되었네요. 14년 전 한 그 말을 잘 지키세요."
참으로 신기하죠.
그때 상황을 모면하려고 한 말을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구원하시려는 계획 말입니다.
그분이 왜 목회를 하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어쩌면 하나님의 계획 속에 한 사람을 향한 사랑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의 이야기가 그런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의 이야기는 영으로 보이는 것과 이해되는 것이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가 영의 눈을 들어보며, 나 하나를 위해 일하시는 세밀한 하나님의 손길도 경험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 세상에 일어나는 육적인 일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영적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영에 속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됩니다.
영분별은…
이제 중요한 문제가 남게 됩니다.
우리가 세상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기 위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하는데 어떻게 분별하느냐는 것이죠.
신앙생활의 영역에서 가장 어려운 일 중의 하나가 ‘분별’입니다.
오늘 본문 15~16절을 보세요.
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16.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참 오해하기 쉬운 부분입니다.
대개 영적이라는 사람들이 하는 말입니다.
2천 년의 기독교 역사 가운데 모든 이단이 주장하는 것이 “영적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 많은 사람이 판단할 근거가 없기에 맹목적으로 따라가기도 합니다.
지난해 또 한 번 세상을 현혹시킨 여자 선지자가 있습니다.
“자칭 선지자”입니다.
아무리 봐도 무당 같은데 말입니다.
영적이라고
주장하고, 또 하나님께로부터 계시를 받았다고 하니 사람들이 쉽게 판단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아주 중요한 근거가
있습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영적인 것의 기준은 우리가 알아들을 수 없는 모호한 이야기들이 아니라 아주 명백하게 하나님의 마음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홍혜선 자칭 전도사의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대한민국에 12월 14일 오전 4시 30분에 전쟁이 일어날 것이므로 피신하자는 것입니다.
미국에 있는 누군가의 집이 노아의 방주가
될 것이니, 그곳으로 피신하자는 것입니다.
전쟁이 일어나는데 자기 혼자 살기 위해 한국을 떠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 있는
것인가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조국과 가정을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요?
그렇게 영적이라고 생각하면서 ‘노아의 방주’란 단지 이생의 목숨을 건지는 것인가요?
참으로 신기한 말을 합니다.
땅굴을 부정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말입니다.
어떻게 땅굴의 존재로 인간의 구원이
좌우됩니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념이 있고, 조국이 있지만 어떻게 공산주의자들은 용서받지 못하고 지옥에 가야 합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인가요?
영적인 것처럼 보이는데 주님의 마음이 없다면, 하나님의 영이 아닌 것이 분명하지 않나요?
매번 이야기하지만,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치시면서 돈을 요구한 적이 있으신가요?
삭개오의 집에 방문하셔서, 회당장의 딸을
고치시고, 돈을 요구하신 적이 있으신가요?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왜 이렇게 무지한가요?
영적인 것을 영적으로 분별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인격적이지 않기 때문에 누군가의 말에 쉽게 놀아나는 것은 아닌가요?
바울은 로마서 8장 9절에서 분명하게 말합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한, 로마서 8장 15절에서도 다시 말합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養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이전에 우리가 살펴보았던 ‘육에 속한 사람’이 감각적이고, 육신적이고, 욕망적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본성의 지배를 받기 때문입니다. 이와 반대로 ‘신령한 자’는 영적인 사람인데, 성령을 받아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성령의 지배를 받을 수 있을까요?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셔야 합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더러운 곳에 거하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구원받은 거듭난 성도들을 향해 말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이 거룩한 성전임을 알지 못하느냐?”
구원받은 자의 진정한 고백이 있을 때,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십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성령님을 초청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하는 말입니다. 성령님은 인격적이십니다. 우리 속에
들어오실 수도 떠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일에 대하여 인격적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영적인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성령님을 초청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주사 세상을 ‘판단하고 분별’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그렇게 하나님께 신실한 사람들이 변하는 것을 봅니다.
어떻게 그렇게 훌륭한 사역자가 욕심이 생길 수 있는가?
어떻게 그렇게 자기중심적일 수 있는가?
이유가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영이 떠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사람이 되면 성령이 떠나간 사람들에 대하여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담대해야 합니다. 영적으로 분별하여 하나님의 마음이 아닌 것을 명확히 해야 합니다.
이것은 ‘비난’과 다른 것입니다.
진리를 말하는 것과 비난하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단순한 비난은 상처로 사람을 아프게 하고 죽이게 하지만, 성령님께서 깨닫게 하시는 아픈 지적은 죽은 살을 제거하고 새살을 돋게
합니다. 그러므로 비난이 있는 곳에는 어둠과 죽음이 지배하지만, 성령님께서 임하시는 곳에는 새로운 생명을 향한 창조적 아픔이 있을
뿐입니다.
오늘 중요한 말씀이 있죠?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15절)
이것은 교만이 아니라 오직 성령님께만 판단을 받겠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세상의 정욕과 사탄의 유혹에 쉽게 흔들리지 않겠다는 다짐입니다. 적어도 성도라면 이런 자신감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도’가 무엇입니까? 목사의 말을 따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다른 성도의 말을 따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성도와 목사에게 돈으로 사기를 당하고, 어떻게 그렇게 쉽게 성적인 유혹에
넘어갑니까? 하나님의 마음이 아닌 육신의 소욕으로 접근하는 데 말입니다.
다시 한 번 요한복음 14장 16~17절 말씀에 주목하십시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입니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오늘 본문 13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현재 고린도 교회가 처한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는 ‘분열’입니다. 이 문제의 근원이 무엇일까요? 신령한 판단이 아니라 사람의 판단 때문이라는 것이죠.
사람의 판단은 자기 기준에 의해 정죄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기준에 의해 자신을 드러내려는 이기심과 교만입니다. 육적인 판단은 남을 배려하기보다는 자신의 이기심을 충족시키려고 합니다. 이것이 분열의 가장 큰 원인입니다.
‘영적인 것’이 무엇일까요?
성령이 가르치시는 것을 아는 것,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가 흔히 착각하는 것은 ‘신앙적 열심’을 영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제가 만나 교회에서 지난 일들을 생각하며 깨닫게 된 것이 있습니다.
교인들과 장로님들을 설득해야겠다고, 가르쳐야겠다고,
변화시켜야겠다고 생각했던 적이 많습니다.
그런데 가르치고 변화시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런 생각의 깊숙한 곳에는 내가 ‘힘’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목회를 하면서 가장 편안했던 때가 언제인가를 생각해 보니, 제가 약하고 힘들 때였던 것 같습니다.
목사인 제가 누구를 이해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교인들이 저를 이해하고 도와주려고 할 때 말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영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것 같지 않나요? 이 세상은 절대로 ‘힘’ ‘정의와 공평’의 논리로 하나 된 적이 없습니다.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또 하나의 힘의 원리가 작용했을 뿐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신령한 자의 마음은 ‘하나 됨’에 있습니다. 신령한 사람은 신령한 것을 생각하며 신령한 시각으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받은 자라야 그리스도인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 보면,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로마서 8장 9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선포하였습니다.
마음속에 성령님이 계신 사람이라야 신령한 사람이 되고, 신령한 생각을 합니다. 신령한 사람들이 모여야 분열이 치유됩니다. 성령님의 역사는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입니다. 12절의 말씀을 보세요.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영을 가진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은 ‘은혜’를 압니다.
여러분은 경험하듯이 어린아이들은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을 기가 막히게 압니다. 이것은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아는
것입니다. 괜히 달라고도 안 하는데 미운 사람이 있고, 그냥 마구 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지식의
차원이 아니라 마음의 문제인 것을 아시지요.
우리가 하나님께 영을 받으면 마음이 압니다. 가슴으로 믿어지기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고 용서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열린 가슴은 다른 사람을 향해서도 열리게 됩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보혜사 성령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고 가르치실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속에
계실 때, 비로소 은혜를 은혜로 알게 됩니다. 여러분의 삶의 모든 것이 은혜로 고백되기 시작할 때, 신령한 것이 여러분 속에
존재합니다.
여러분은 여름이 되면 가장 싫은 것이 무엇인가요?
더위죠?
더운 것이 은혜라는 것을 아시나요?
그 더위가 없으면 우리는 다 굶어 죽습니다.
더위가 있어야 가을의 감사가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더위를 불평하지 않습니다.
불평하는 사람들은 늘 불평하고, 늘 사람들이 맘에 들지 않는데, 성령님이 마음속에 계신 사람은
늘 감사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누리는 그 많은 것이 여러분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온 것임을 고백하는 사람들의 겸손이야말로 신령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당하는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를 보는 사람이야말로 신령한 것이 가득한 사람입니다.
모든 것이 허무하고 고통스럽게 느껴지십니까?
이제는 하나님이 여러분의 아바 아버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에서 아바 아버지로 고백되기를 바랍니다.
아바 아버지께서 여러분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감사로 고백되기를 원합니다.
오스카 로메로의 본을 따라
Óscar Arnulfo Romero y Galdámez
(오스카르 아르눌포 로메로 이 가르다메스)
1917년 8월 15일 ~ 1980년 3월 24일 (62세)
우편 폭탄 테러의 희생자로서 살바도르 성인의 순교를 되돌아보다.
- 미셸 랍슬리
이 글은 플라우 출판사의 영적 안내 시리즈 중 《구속의 스캔들 :하나님이 가난한 자를 해방하고 죄인을 구원하며 나라를 해방할 때》 (한국어 미발간)의 서문입니다.
오스카 로메로에 관한 나의 견해는 내가 겪은 인생 행로에 의해 형성되었다.
1980년 3월 24일 미사를 집전하던 로메로가 총격을 당했을 때 나는 로메로와 다른 많은 종교 지도자들처럼 불의에 항거하는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추방되어 전면이 남아프리카 공화국 영토에 완전히 둘러싸인 작은 산악 왕국 레소토에 살고 있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아파르트헤이트라는 합법화된 인종차별 정책을 시행했던 나라다.
유엔은 아파르트헤이트를 반인도적 범죄라고 선언했고, 국제 기독교 사회는 이를 이단이나 어긋난 교리라고 했지만, 남아공은 여전히 아파르트헤이트가 신성한 기독교적 정책이라고 강조했다.
로메로처럼 나도 어릴때부터 예수님을 따르려는 소망을 품었다.
열일곱 살에 나는 뉴질랜드를 떠나 호주로 가서 성공회 사제직 훈련을 시작했고 성공회 수도회인 신성 선교 협회에도 가입했다.
수도회는 1973년에 나를 남아프리카로 파송했다.
그곳에 도착하면 나는 세 부류의 사람들과 만나게 되리라 상상했다.
억압받는 이들과 억압하는 이들 그리고 내가 속하게 될 세 번째 부류인 ‘사람’.
그러나 나는 내가 원하지 않더라도 내 피부색이 나를 압제자 집단의 일부로 만든다는 불쾌한 현실에 먼저 눈뜨게 됐다.
남아프리카에 도착한 날, 나는 사람이 아닌 백인이 되었다.
미셸 랍슬리
1976년 9월 나는 남아프리카에서 추방되었다. 불과 3개월 전인 6월 16일 경찰과 군인들이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총을 쏘기 시작했다. 이것이 내 인생의 본질을 바꾸어놓았다.
로메로 대주교에게 전환점은 1977년 3월 12일 발생한 루틸리오 그란데 신부의 암살이었다. 로메로는 이렇게 말했다. "죽은 루틸리오의 누워있는 모습을 보면서 ‘그가 자신이 행한 일 때문에 죽음을 당했다면 나 역시 같은 길을 걷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로메로 대주교와 달리 나는 정치적 해방 운동에 참여하기로 했다. 하지만 나도 로메로처럼 오직 내 혀만을 유일한 무기로 사용하였다. 내게 해방 투쟁에 참여한다는 것은 기본 인권을 위해 투쟁하는 유색인들과의 연대에서 나의 인간성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거리에 어린이들의 피가 쏟아진 직후, 나는 성공회 대학생들의 대표 사제로 선출되었고 어린이 살해와 만연한 구금과 고문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로메로의 암살 소식에 나는 멈춰 서서 내 행동이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될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 전 세계에서 정의를 위해 비슷한 투쟁을 하는 신앙인들도 분명 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하지만 로메로의 말과 증거는 그런 생각을 뛰어넘어 우리가 직면한 상황에 예수님의 말씀을 더욱 분명하고 담대하게 적용할 수 있는 용기와 결단을 주었다. 1982년 마세루에서 남아공 군대의 총격으로 42명이 사망한 대학살이 일어났다. 그 당시 나는 그곳에 없었지만 몇 명의 교회 관계자를 통해 내가 그 학살의 표적 중 한 명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아파르트헤이트를 종식시키고 어린이들이 안전하게 자고 일어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서약했던 때였다.
남아공 정부의 암살 대상자 목록에 들어있던 나는 하루 24시간을 무장 경찰과 함께 짐바브웨에서 수 년간 살아야 했다. 그곳에서 넬슨 만델라가 석방된지 3개월이 지난 1990년 4월, 나는 두 권의 종교 잡지 속에 숨겨진 폭탄을 우편으로 받았다. 그 폭발로 인해 두 손과 한 눈을 잃었고 고막은 산산조각 났다.
폭탄이 터졌을 때 나는 하나님께서 나의 시련에 함께 하고 계시며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께서도 내가 겪는 일을 이해할 것이라고 느꼈다. 전 세계 사람들의 기도와 사랑은 하나님께서 그 폭발을 죽음에서 생명을, 악에서 선을 이끌어 내는 구속의 도구로 쓰시게 했다.
그 당시, 로메로의 모범이 다시 한번 내게 강하게 다가왔다. 나는 그가 총에 맞기 직전 제단에서 했던 마지막 말을 기억했다. “인류를 위하여 제물로 바쳐진 이 몸과 육체가 자양분이 되어 그리스도께서 하신 대로, 우리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이 백성에게 정의와 평화가 임하도록 우리의 몸과 피를 고난과 고통에 바치게 하여 주소서."
로메로 대주교가 죽음을 당하기 며칠 전에 했던 한 인터뷰에서 나는 특별한 도전과 영감을 받았다. 그는 자신을 죽일 사람이 누구든 이미 용서 받았다는 사실을 알기 바란다고 말했다. 나는 지금까지도 1990년 4월에 내게 폭탄을 보낸 이가 누군지 모른다. 그러나 그 사람이 자신이 저지른 일로 지금까지 죄의 포로로 있다면 내가 가진 열쇠로 그를 풀어 주리라.
나의 회복과 남아프리카 공화국 사람들에 대한 성찰을 통해 기억치유 협회(Institute for Healing of Memories) 가 설립되었다. 이 비정부 기구의 국제적 작업의 일환으로 나는 2016년 11월, 이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세상의 구세주(El Salvador)라는 이름을 가진 오스카 로메로의 나라를 처음으로 방문했다. 살바도르 사람들의 치유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2016년, 모든 성인의 축일에 산살바도르에 있는 진리와 기억의 벽 앞에서 열린, 수 만명의 살바도르 내전 실종자와 사망자를 위한 세계교회 추도식에 참여했다. 그리고 오스카 로메로의 무덤과 그의 암살과 순교가 일어났던 곳에 무릎을 꿇었다.
비극적이게도, 구세주의 땅은 여전히 거대한 사회적 폭력과 불평등이 만연하다. 그러나 로메로의 증언은 살아있다. 엘살바도르 성공회의 호세 오스발도 로페즈는 다음과 같이 썼다.
로메로의 생애와 행적을 통해 나는 예수께서 친히 엘살바도르 한 가운데를 지나셨고, 로메로는 한 사람이자 목회자로서 삶의 모범을 보임으로 분명하고도 강한 메시지를 우리에게 남겼다고 확신합니다. 로메로는 내게 단순한 목회적 모델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기독교인으로서 사회적, 구조적 불의에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라고 요구하는 엄청난 도전입니다. 불의에 대해 비난만 하라고 하는게 아닙니다. 그보다는 내 주변 사람들을 사랑하라고 강력하게 부릅니다. … 형제자매들을 사랑함으로써 로메로를 본받을 뿐 아니라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게 예수님과 함께 할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이 땅에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일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인류라는 가족의 치유에 겸손하게 이바지할 길을 찾는 과정에서 오스카 로메로의 삶과 유산에서 계속 영감을 얻을 것이다. 그가 이 책을 통해 의에 주리고 목마른 다른 세대에게도 같은 일을 할 수 있기를 바라며 기도한다. 당신이 열린 마음으로 이 책을 읽는다면 정의와 모두를 위한 하나님의 꿈에 참여하겠다는 믿음과 헌신이 더욱 깊어질 것이라 의심치 않는다.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원래 병약했고 학교도 12살 때까지만 다녔다고 한다. 이후에는 목수 일을 배우는 등 노동자로 일하다가 신학교에 입학, 사제의 길을 걷게 된다. 이후 유럽에 유학하기도 하면서 자신의 고향에서 오랫동안 사목했고, 알콜 중독자의 재활을 지원하는 등 일반적인 사제의 길을 걸었다.
원래는 상당히 보수적인 인물이었다. 그가 1977년 대주교가 되었을 때는 군사정권 측에서 환영했을 정도로 사회정의운동에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같은 사제이며 친구로 농민운동을 하던 그란데 신부가 암살당한 사건을 계기로 반 독재운동에 가담하였다..[2] 이후 1979년 쿠데타로 들어선 엘살바도르의 독재 정권에 항거하여 빈곤층을 돕고 인권침해를 고발했다. 그러다 1980년 프로비덴시아 병원 경당에서 미사 성찬기도 중 무장괴한 4명에게 저격을 받아 암살당했다.피격 직후 사진(노약자 클릭 주의) 당시 독재정부가 그의 죽음에 개입했지만, 사후 30년이 지나 2009년에야 엘살바도르 정부가 이 사실을 인정하였다. 독재정권이 무너졌기 때문에 인정도 가능했다.
사실 로메로 주교가 처음부터 진보 성향은 아니었다. 그는 본래 전통주의자였고, 독재정권의 무자비한 인권 탄압에 그리스도인으로 인권을 옹호했을 뿐, 해방신학과는 거리가 있던 보수적인 주교였다. 일례로, 로메로 주교는 해방신학의 오류를 교리적으로 반박하는 임무를 맡은 오푸스 데이의 성 십자가 사제회와 교류하며 영적 도움을 받았다. 그가 순교한 날 아침에도 오푸스 데이 협력 사제 모임에 참가한 후 미사 집전 중에 피격을 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순교 후에 해방신학 추종자들이 자신들의 이미지를 덮어씌운 것이다. 그 결과 이젠 그가 해방신학의 아이콘처럼 인식되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
이런
이유로 진작에 시성이 되어야 했지만, 해방신학 추종자들이 이를 자신들의 교리를 정당화하는 데 악용할까 우려한 교황청에서 이를
늦춘 것이다. 인권 탄압에 저항하는 것은 가톨릭에서는 보수건 진보건 당연한 일이다. 이를 두고 소련을 위시한 공산진영에 맞서는
것은 장려하면서, 반공을 명분으로 자국민을 탄압한 남유럽(예: 프랑코 치하의 스페인)과 중남미 국가의 군부 독재정권에 대해서는
소극적이었던 20세기 천주교회의 이중적인 모습을 드러낸 것이라는 비판, 지적을 받기도 한다. 물론 프랑코 정권 문제는, 스페인
극좌파들에 의해 저질러진 옥석을 가리지 않는 무차별 교회 탄압과 학살 문제도 함께 고려해야 할 일이다. 장례식장에 신자들 25만
명이 운집했는데 폭탄 테러와 총격전이 벌어져 40명이 죽었음 역시 비극이었다.
그의 오랜 친구이자 동료였던 그레고리오
로사 차베스 신부가 2017년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엘살바도르 천주교회 사상 첫 번째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다. 그는 1992년
엘살바도르의 오랜 내전을 종식시키는 과정에 기여했으며, 추기경이 된 2017년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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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청 시성성 장관 안젤로 아마토 추기경이 집전한 오스카 로메로의 시복 미사, 2015년 5월 23일 |
그리하여 2015년 2월 3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로메로 대주교의 죽음을 순교로 선포함에 따라 시복시성에 가속도가 붙었다.[6] 마침내 동년 5월 23일 시복식이 거행되었다. 엘살바도르의 수도 산살바도르의 살바도르 델 문도 광장에서 거행된 이번 시복 미사는 교황을 대리한 교황청 시성성 장관 안젤로 아마토 추기경이 집전했으며, 30만 명이 넘는 군중이 운집해 로메로 대주교의 시복을 기념했다. 축일은 3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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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니 애플시드- 비어리 훌리엇영적 각성운동이 미국 전역을 휩쓸고 있었던 1829년 무렵, 오하이오주에 있는 맨스필드에서 한 설교자가 청중들을 향해 도전의 말씀을 전하며 누군가를 찾았다. 존 채프만의 실제적인 삶에 대해서 더 알고 싶으신 분은 하워드
민스(Howard Means)가 지은 Johnny Appleseed: The Man, the Myth, the American
Story (Simon and Schuster, 2011)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이 글은 하워드 민스의 연구의 바탕 아래
쓰여졌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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