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 세속도사, 환대와 구원, 뜻밖의 회심, 감각의 제국, 다섯 가지 절대 법칙, 단순한 교회, 레미레자블, 자본론,



라인홀드 니버의 도덕적 사회와 비도덕적 사회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 1892–1971)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Moral Man and Immoral Society, 1932)**는 개인의 도덕성과 집단·사회·국가의 도덕성이 왜 서로 다르게 작동하는지를 설명한 그의 대표적인 책입니다. 이 책은 니버의 **기독교 현실주의(Christian Realism)**를 이해하는 중요한 출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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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책 제목의 의미

니버가 말하는 핵심은 단순히

“개인은 도덕적이고 사회는 악하다.”

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다음과 같은 역설입니다.

개인은 양심과 이성, 사랑과 자기희생을 통해 어느 정도 도덕적으로 행동할 수 있지만, 개인들이 집단을 이루면 집단의 이익과 권력 때문에 훨씬 더 이기적이고 공격적으로 행동하기 쉽다.

니버는 1932년에 이 책을 출간하면서 개인의 도덕성과 집단의 도덕성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를 분석했습니다.


2. 왜 개인은 도덕적인데 집단은 비도덕적인가?

니버의 논리를 간단히 도식화하면 이렇습니다.

개인

→ 양심
→ 공감
→ 이성
→ 자기희생
→ 타인의 입장 고려

그러나

집단

→ 집단 이익
→ 집단 정체성
→ 권력
→ 경쟁
→ 자기 집단의 정당화
→ 타 집단에 대한 배제

따라서 개인에게서는

“내가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해야 옳은가?”

라는 질문이 가능하지만,

집단에서는 쉽게

“우리 집단에게 무엇이 유리한가?”

라는 질문으로 바뀝니다.

니버가 특히 강조한 것은 **집단적 이기주의(collective egoism)**입니다. 사회적 집단은 개인보다 자기 이익을 도덕적으로 정당화하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3. 개인의 도덕성과 집단의 도덕성

개인 집단
양심의 영향을 받음 집단 이익의 영향을 받음
타인을 공감할 수 있음 타 집단을 경쟁자로 보기 쉬움
자기희생 가능 집단의 희생을 정당화하기 쉬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가능성 집단의 잘못을 정당화하기 쉬움
사랑과 용서가 가능 권력과 강제력이 작동
도덕적 설득이 어느 정도 가능 권력의 균형이 중요

따라서 니버에게 있어서 개인에게 적용하는 윤리와 사회·정치에 적용하는 윤리는 완전히 동일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그의 책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의식 가운데 하나입니다.


4. 니버가 자유주의적 낙관주의를 비판한 이유

니버는 당시의 진보적 자유주의와 사회복음주의가 인간의 이성과 교육과 설득을 지나치게 신뢰한다고 보았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에게 옳은 것을 가르치면 결국 사회가 변화할 것이다.”

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니버는 이렇게 질문합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 왜 자기에게 유리한 특권을 자발적으로 포기하겠는가?”

사회에는 단순한 도덕적 설득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이해관계와 권력의 구조가 있기 때문입니다. 니버는 이 때문에 사회정의에는 정치적 행동과 권력의 현실을 고려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5. 그래서 니버는 '권력'을 중요하게 본다

이 부분이 니버 사상의 매우 중요한 특징입니다.

그는 사회의 불의를 단순히

“사람들이 나쁘기 때문이다.”

라고만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죄 → 이기심 → 집단화 → 권력 → 특권 → 불의

라는 구조를 봅니다.

따라서 불의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도덕적 설득뿐 아니라 제도와 법, 정치적 권력의 견제가 필요합니다.

니버에게 정의란 단순한 개인의 착한 마음이 아니라 서로 다른 집단의 권력을 조정하고 제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6. 그런데 이것은 '사회는 완전히 악하다'는 뜻인가?

아닙니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니버의 주장은

“집단은 반드시 악하다.”

가 아니라,

집단은 개인보다 훨씬 더 쉽게 이기주의와 자기정당화에 빠진다.

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회에는 법·제도·견제·책임·권력분립·도덕적 지도력이 필요합니다.

니버의 현실주의는 인간의 죄성을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사회개혁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이 완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때문에 현실적인 정의를 추구해야 한다.”

는 것입니다.


7. 이것이 기독교 신앙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여기서 니버의 신학적 통찰이 나타납니다.

성경적으로 보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선 → 사랑 → 공감 → 자기희생

의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에게는 가 있습니다.

죄는 개인에게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과 제도 속에서도 작동합니다.

그래서 개인이 선한 사람이라고 해서 그 사람이 속한 조직까지 자동적으로 선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좋은 사람 + 좋은 사람 + 좋은 사람

이라고 해서

좋은 조직

이 자동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조직에는

권력·이익·경쟁·집단정체성·책임분산

이라는 새로운 요소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8. 교회에 적용하면 매우 중요한 통찰이 됩니다

니버의 이론은 교회에도 적용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 성도는 개인적으로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교회라는 집단이 되면

“우리 교회가 더 커져야 한다.”

“우리 부서가 더 인정받아야 한다.”

“우리 의견이 옳다.”

“저 사람보다 우리가 더 중요하다.”

라는 집단적 이익이 생길 수 있습니다.

따라서

개인의 경건함 ≠ 조직의 거룩함

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 지도자에게 상당히 중요한 교훈입니다.


9. 특히 '거룩'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최근 질문하신 **“수도원적 거룩과 세상 속의 거룩”**이라는 주제와 연결하면 니버의 통찰이 더욱 선명해집니다.

개인적 거룩

기도 → 말씀 → 회개 → 자기절제 → 사랑

입니다.

그러나 사회적 거룩은 여기에 더하여

정의 → 공정성 → 권력의 절제 → 약자 보호 → 책임 → 제도적 정직

을 요구합니다.

즉,

개인의 거룩만으로는 사회의 거룩이 완성되지 않습니다.

개인이 거룩해져야 하지만 동시에 거룩한 개인들이 거룩한 구조와 공동체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10. 니버 사상의 핵심을 한 문장으로

니버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를 가장 간단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개인은 자기 이익을 넘어설 수 있지만, 집단은 자기 이익을 도덕적으로 정당화하기 쉽다.”

그래서 사회를 변화시키려면

도덕성 + 사랑 + 정의 + 현실적인 권력의 이해

가 함께 필요합니다.


11. 성경적으로 평가하면

니버의 통찰은 성경의 인간론과 상당히 잘 만나는 부분이 있습니다.

예레미야 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로마서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마가복음 7:21–23

예수님은 인간의 마음에서 악한 생각과 여러 죄가 나온다고 말씀하십니다.

동시에 성경은 개인의 변화만이 아니라 공동체의 정의와 사랑을 요구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적 관점에서는

개인의 성화

내가 거룩해지는 것


공동체의 성화

우리의 관계와 공동체가 거룩해지는 것


사회적 책임

불의한 구조를 방치하지 않는 것

이 함께 가야 합니다.


핵심 도식

개인

양심 → 회개 → 사랑 → 자기희생 → 도덕적 인간

⬇️ 집단화

사회

이익 → 경쟁 → 권력 → 자기정당화 → 집단이기주의

⬇️ 그러나

기독교적 현실주의

죄의 인정 + 사랑의 실천 + 정의의 추구 + 권력의 견제

⬇️

“개인의 거룩에서 사회적 책임으로”

이것이 니버의 사상을 오늘날 교회와 성도의 삶에 적용할 때 가장 중요한 연결점입니다.

특히 니버의 책에는 “개인의 도덕성과 사회의 도덕성”, “특권계층과 노동계층의 윤리”, “정의를 위한 혁명과 정치적 강제력”, “정치에서 도덕적 가치의 보존” 등이 체계적으로 다루어져 있습니다.

원하시면 다음 단계로 **「니버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를 레위기 19장의 “거룩한 사회”와 연결하여, 개인의 거룩 → 교회의 거룩 → 사회의 거룩이라는 3단계 설교 구조**로 만들어 드릴 수 있습니다. 


첫째, 개인의 도덕적-사회적 행위는 사회집단-민족집단이건 인종집단이건 경제집단이건 간에-의 도덕적-사회적 행위와 엄격하게 구별되어야 한다. 
째, 이 구별은 순전히 개인적인 윤리로는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정치영역들을 정당화시켜준다.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라는 제목은 조야하게나마 의도적인 구별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 구별은 앞으로 다루게 될 문제에 대한 훌륭한 지침을 제공해준다.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1. 개요 

책 소개 : 1932년 출간된 라인홀드 니버의 저서로, 윤리학과 정치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고전으로 평가받는다. 

한 줄 소개 : 개인의 도덕성과 사회의 비도덕성 사이의 간극을 파헤치며, 정의로운 사회를 위한 현실적인 정치 전략을 모색한다.  

2. 저자 소개  
라인홀드 니버 (Reinhold Niebuhr, 1892~1971)는 미국의 저명한 신학자이자 윤리학자이다. 
예일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13년간 목사로 활동한 후 유니언 신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옥스퍼드, 컬럼비아, 하버드 등 유수 대학에서 명예 학위를 받았고, 에든버러 대학교에서 기포드 강연을 하기도 했다. 
그의 사상은 정치, 윤리, 신학 등 다양한 분야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대표 저서로는 《인간의 본성과 운명》 등이 있다. 
니버는 현실주의적 관점에서 인간의 한계와 사회의 복잡성을 강조하며, 이상주의적 접근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3. 책의 전체 흐름 

이 책은 크게 서론과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으며, 서론에서는 핵심적인 주장과 논의를 위한 주요 개념들을 제시한다. 

서론 : 개인의 도덕적 행위와 사회집단의 도덕적 행위 사이의 엄격한 구별을 강조하며, 순수한 개인 윤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정치 영역의 필연성을 주장한다.  

1부: 인간과 사회의 관계
: 인간 사회의 본질적인 문제와 구조를 탐구한다. 

1장: 인간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지성이나 도덕적 동기의 한계를 지적하고, 사회 통합을 위한 강제력의 불가피성을 강조한다.  

2장: 개인의 도덕적 자원인 이성과 도덕적 의무감의 역할을 분석하며, 이들이 사회 문제 해결에 기여할 수 있는 가능성과 한계를 탐구한다. 

3장: 개인의 종교적 자원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과, 종교적 이상주의가 가진 도덕적 힘과 정치적 무력함을 동시에 살펴본다.   

2부 : 도덕적 태도와 사회적 행동
: 여러 사회집단들의 도덕적 태도를 분석하고 정치적 해결책을 모색한다.  

4장 : 민족의 도덕적 특성을 분석하고, 민족 이기주의의 원인과 결과를 비판적으로 고찰한다.  

5장: 특권 계급의 도덕적 태도를 분석하며, 이들이 자신들의 특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위선과 자기기만을 폭로한다.  

6장: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윤리적 태도를 탐구하며, 도덕적 냉소주의, 평등주의적 이상주의, 그리고 혁명적 영웅주의가 결합된 복합적인 면모를 드러낸다.  

7장: 혁명을 통한 정의의 실현 가능성과 그 한계를 분석하며, 폭력 사용의 도덕적 정당성 문제를 심층적으로 다룬다. 

8장: 도덕적 가치의 보존을 위한 개인과 사회의 상호 관계를 강조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위한 정치적 힘의 역할을 고찰한다. 

9장: 결론에서는 개인의 도덕과 사회의 도덕 사이의 영원한 긴장을 인정하고, 양쪽 모두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끝맺는다.   

상세 요약  

서론: 니버는 개인의 도덕성이 사회집단의 도덕성과는 엄격히 구별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개인은 이타심과 정의감을 발휘할 수 있지만, 사회집단은 이기심과 권력 투쟁에 더 큰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개인의 윤리로는 사회의 복잡한 정치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지적하며, 개인의 도덕성과 집단의 도덕성 사이의 기본적인 차이를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1장: 이성, 양심, 도덕적 이상주의는 인간 사회를 정의롭게 만들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한계도 명확하다는 것을 지적한다. 인간의 지성과 선의는 사회적 갈등을 완화할 수 있지만, 자연적인 이기심과 욕망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다. 따라서 인간 사회는 필연적으로 강제력을 필요로 하지만, 이 강제력이 정의를 파괴할 수도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2장: 인간의 이성은 동료의 필요에 공감하고, 이타적 행동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지만, 그 범위에는 명확한 한계가 있다. 이성은 개인적인 관계에서는 효과적일 수 있지만, 대규모의 사회적 관계에서는 정의와 평화를 보장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인간의 사회적 충동은 이성에 의해 확장될 수는 있지만, 이 충동들을 집단의 모든 구성원에게 똑같이 적용하기는 어려우며, 이는 사회적 불평등의 한 원인이 된다.  

3장: 종교는 인간의 이기심을 억제하고 자애심을 증진하는 역할을 하지만, 동시에 자기중심적인 경향을 조장할 수도 있다. 종교적인 사랑은 모든 인간을 형제로 보도록 하지만, 집단 내 이기심의 힘을 약화시키지는 못한다. 종교적 이상은 개인적인 삶을 변화시키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사회적인 삶을 변화시키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4장: 민족의 도덕성은 개인의 도덕성과 유사한 한계들을 지니고 있다. 민족은 자기보존의 본능이 강하고,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하며, 종종 도덕적인 가치를 왜곡하여 자국의 이익을 정당화한다. 민족의 이기심은 민족 내부의 결속력을 강화하지만, 다른 민족과의 관계에서는 갈등과 불의를 초래한다.  

5장: 특권 계급은 자신들의 특권을 합리화하고 유지하기 위해 각종 논리를 동원하며, 자기기만과 위선에 빠지기 쉽다. 이들은 자신의 능력이 사회적 지위를 정당화한다고 믿거나, 혹은 질서와 전통이라는 명분 뒤에 숨어 자신들의 이익을 옹호한다. 특권 계급은 사회 정의를 추구하기보다는 현상 유지를 선호하는 경향을 보인다.  

6장: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도덕적 냉소주의와 이상주의가 혼합된 복잡한 도덕적 태도를 지닌다. 그들은 기존 질서의 위선과 불의를 꿰뚫어 보면서도,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강렬한 열망을 품고 있다. 프롤레타리아는 계급적 이기심과 국제주의적 이상주의 사이에서 갈등하며, 사회 변혁에 대한 열망과 현실적인 정치적 제약 사이에서 고뇌한다.  

7장: 혁명은 정의를 실현하는 한 방법이지만, 폭력과 강제력의 사용은 불가피하게 새로운 불의를 초래할 위험을 수반한다. 니버는 혁명이 갖는 도덕적 문제점을 인정하지만, 폭력의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을 경우 사회 변화를 위한 현실적인 방법이 없어지는 딜레마를 지적한다. 또한 인간의 이성과 양심의 한계로 인해 이상 사회의 건설은 영원히 불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8장: 정치에서 도덕적 가치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이성과 강제력 간의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시민들에게 정치 참여의 기회를 제공하지만, 권력 남용과 불의를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다. 따라서 정의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폭력을 최소화하고, 정치적 균형과 견제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국가의 이기심은 언제나 존재하므로, 이를 견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9장: 정치에서 도덕적 가치 보존을 위한 실천적인 방법들을 제시하면서, 내면적인 도덕과 외면적인 도덕, 이상주의와 현실주의 사이의 끊임없는 긴장 관계를 인정하고, 이러한 긴장 관계 속에서 균형을 유지하며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최종적으로 니버는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인간의 노력이 항상 불완전할 수밖에 없지만, 이상을 향한 끈임없는 노력 자체가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5. 핵심 개념 및 아이디어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개인은 이타심과 정의감을 발휘할 수 있지만, 사회집단은 이기심과 권력 투쟁에 더 큰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 개념은 개인 윤리와 사회 윤리 간의 간극을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는 주장을 나타낸다.  

이기심과 이타심의 역설: 이타적인 동기는 숭고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지만, 동시에 이기적인 동기가 사회에 필요한 역동성을 제공하기도 한다. 니버는 이 두 가지 충동이 인간 본성에 공존하며, 이들을 조화시키는 일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강제력의 불가피성: 인간 사회는 완벽하게 합리적이지 않으므로, 강제력은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정의를 실현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수단이다. 그러나 강제력은 항상 불의를 초래할 위험이 있으며, 따라서 강제력 사용을 최소화하고 윤리적 목적에 부합하도록 통제해야 한다.  

이성의 한계: 이성은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이기심, 무지, 그리고 사회적 편견의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이성을 맹신하기보다는 이성의 한계를 인정하고 현실적인 접근을 할 필요가 있다.  

위선과 자기기만: 특권 계급은 자신들의 특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때로는 의식적으로, 때로는 무의식적으로 자기기만과 위선을 저지른다. 이러한 위선은 도덕적 성장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다. 

집단적 이기주의: 개인의 이기심은 집단에 의해 강화되어, 집단 간의 갈등을 심화시킨다. 민족주의, 계급주의 등 다양한 형태의 집단 이기주의는 사회적 불의와 불평등을 야기하는 주요 원인이다. 

정의로운 사회: 니버는 평등한 정의를 사회의 궁극적인 목표로 설정하고,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정치적 전략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정의는 단순히 추상적인 이상이 아니라, 인간 사회의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원동력이 되어야 한다.  

평가 및 반응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는 출간 직후부터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호평
:  정치 현실주의의 고전: 현실적인 권력 역학을 강조하고 이상주의적인 접근의 한계를 지적하여, 정치 현실주의 학파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사회 윤리의 중요성 강조: 개인 윤리로는 해결할 수 없는 사회 구조적 문제에 대한 통찰을 제공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위한 집단적 노력의 필요성을 역설했다는 점에서 호평받는다. 

냉철한 분석: 도덕적인 위선과 자기기만을 폭로하고, 이상적인 목표가 인간 본성의 한계와 어떻게 충돌하는지를 보여주며, 인간 사회의 현실적인 측면에 대한 냉철한 분석을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비판
:  

비관주의: 인간의 본성과 역사를 지나치게 비관적으로 보고 있다는 비판이 있다. 인간 이성과 도덕의 잠재력을 과소평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엘리트주의: 역사의 진보를 위해 대중의 능력을 불신하고, 지적 엘리트의 역할을 강조한다는 비판이 있다. 인간의 집단적 행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비판도 있다.  

결정론적 관점: 역사를 경제적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는 결정론적 관점을 너무 강조했다는 비판도 있다. 이 주장은 인간의 자유 의지와 도덕적 선택의 중요성을 간과한다는 지적을 받는다.  

모호성: 때로는 자신의 주장을 지나치게 단정적으로 주장하고, 상충하는 주장들을 명확하게 정리하지 못한다는 비판도 있다.  

논란
:  

폭력의 정당화 가능성: 니버가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폭력의 가능성을 열어두면서 폭력을 정당화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겼다는 논란이 있다. 그는 무력과 폭력에 대한 도덕적인 판단을 일괄적으로 할 수 없다고 주장했지만, 결국은 상황에 따라 폭력도 허용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현실주의와 이상주의의 관계: 니버가 주장한 현실주의는 때로는 이상주의에 대한 반발로 이어지면서, 정의로운 사회를 위한 도덕적 노력의 의미를 퇴색시켰다는 비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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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자 — 도몬 후유지(童門冬二)

도몬 후유지(1927~2024)는 일본 도쿄 출신의 작가로, 도쿄도청에서 근무한 뒤 작가로 활동했습니다. 
행정 경험을 바탕으로 역사 속 지도자와 개혁가들의 리더십을 소설 형식으로 풀어낸 작품을 많이 썼습니다.

『불씨』는 1993년 한국에 소개된 뒤 20만 부 이상 판매되었고, 이후에도 기업소설의 고전으로 평가받았습니다.

도몬 후유지(童門冬二, どうもん・ふゆじ, 1927–2024)는 일본의 역사소설가이자 조직·리더십을 역사에서 풀어낸 작가입니다. 본명은 **오타 히사유키(太田久行)**입니다.

1. 어떤 사람인가?

  • 출생: 1927년 10월 19일, 도쿄
  • 사망: 2024년
  • 본명: 太田久行(おおた・ひさゆき)
  • 경력: 도쿄도청에서 근무하며 지사 비서, 홍보실장, 기획조정국장, 정책실장 등을 역임
  • 1979년 도쿄도청을 퇴직하고 전업 작가로 활동했습니다.

그의 독특한 점은 공무원으로 조직을 실제 운영해 본 경험을 역사소설에 접목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단순히 옛날 이야기를 쓰기보다 역사 속 인물의 리더십·조직관리·인간관계·개혁을 현대적으로 해석했습니다.

2. 핵심 주제

도몬 후유지가 평생 추구한 중심 주제는 한마디로

「역사에서 보는 조직과 인간」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역사적 인물 → 인간성 → 리더십 → 조직 → 개혁 → 현대인의 삶

따라서 그의 책은 역사책이면서 동시에 인간학·경영학·리더십 책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3. 대표적인 인물과 저서

그는 특히 다음 인물들을 많이 다루었습니다.

  • 우에스기 요잔(上杉鷹山) — 개혁과 지도자의 자세
  •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 — 장기적 리더십과 인내
  •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蔵) — 자기수양과 전략
  •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
  • 가쓰 가이슈(勝海舟)
  • 시부사와 에이이치(渋沢栄一) — 도덕과 경제의 조화
  • 나오에 가네쓰구(直江兼続)
  • 구로다 간베에(黒田如水)

대표작으로는 『소설 우에스기 요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경영학』, 『우에스기 요잔의 경영학』, 『미야모토 무사시의 인생훈』, 『시부사와 에이이치—인간의 초석』 등이 있습니다.

4. 목회·신앙의 관점에서 읽는다면

도몬 후유지의 역사관은 신앙교육에도 상당히 흥미롭게 연결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 사건

인물의 선택

인격과 가치관

공동체에 미친 영향

오늘 우리의 삶에 적용

특히 우에스기 요잔을 중심으로 보면
“지도자는 사람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개혁은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공동체를 살리는 리더의 덕목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또한 성경적 관점에서는 이를

인물 → 선택 → 성품 → 행동 → 공동체 → 역사

라는 구조로 발전시켜, **“역사에서 배우는 거룩한 리더십”**이라는 설교나 강의 주제로도 활용할 수 있습니다.

원하시면 다음 단계로 도몬 후유지의 대표작 『우에스기 요잔』의 줄거리와 핵심 교훈을 성경적 리더십·목회 리더십과 연결하여 자세히 정리해 드릴 수 있습니다. 

2. 『불씨』의 배경

이야기의 무대는 **18세기 후반 일본 에도시대의 요네자와번(米沢藩)**입니다.

당시 요네자와번은 심각한 재정난과 부채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가난과 무기력에 빠져 있었고, 관료들은 기존의 관습과 자기보호에 매달리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17세의 젊은 우에스기 시게사다(上杉重定) 계열의 번주 가문과 관련된 개혁의 역사적 인물로 우에스기 시게사다/시게요시가 아니라, 작품의 핵심 개혁가인 우에스기 요잔(上杉鷹山)**의 이야기가 중심이 됩니다. 특히 요잔은 실제 역사에서 요네자와번을 개혁한 인물로 유명합니다. 작품의 핵심은 바로 이 우에스기 요잔의 개혁 정신입니다. 

3. 줄거리

① 죽어가는 나라

요네자와번은 겉으로는 제도가 유지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재의 나라와 같은 상태였습니다.

  • 재정은 파탄 직전
  • 막대한 부채
  • 백성들의 가난
  • 관리들의 무사안일
  • 낡은 관습
  • 변화에 대한 두려움
  • 지도층의 자기보호

즉, 나라가 망해가는데도 아무도 근본적으로 바꾸려 하지 않는 상황입니다.

② 젊은 지도자의 등장

젊은 번주 우에스기 요잔은 이러한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는 먼저 자신부터 검소하게 생활하고, 낭비를 줄이며, 백성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개혁을 시작합니다.

중요한 것은 단순히 제도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③ 개혁에 대한 저항

개혁에는 강력한 반대가 나타납니다.

기존의 특권을 누리던 사람들에게 변화는 곧 자신의 이익을 잃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요잔은 다음과 같은 문제와 싸워야 합니다.

가난보다 더 무서운 것은 변화하지 않으려는 마음이다.

④ 작은 불씨를 붙이다

여기에서 제목인 **‘불씨’**가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처음부터 거대한 불을 일으키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의 마음에 작은 불씨가 생기고,
그 불씨가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고,
마침내 공동체 전체가 변화하는 것입니다.

책의 핵심적인 구조는

한 사람의 결단 → 작은 불씨 → 사람의 마음 변화 → 공동체의 변화 → 국가의 개혁

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⑤ 공동체 전체의 변화

요잔의 개혁은 농업·산업·교육·재정 등 여러 분야로 확대됩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지도자가 명령해서 사람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스스로 변화의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씨』는 단순한 역사소설이라기보다 리더십·조직개혁·공동체 변화에 관한 이야기로 읽힙니다. 

4. 『불씨』가 말하는 가장 중요한 교훈

① 큰 변화는 작은 불씨에서 시작된다

불씨 = 작은 희망 + 작은 실천 + 변화의 시작

처음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작은 행동이 공동체 전체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성경적으로 표현하면:

“작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는 것”
(갈 5:9)

따라서 교회에서도 거대한 프로그램보다 한 사람의 진실한 신앙과 작은 실천이 중요합니다.


② 지도자는 먼저 자신을 개혁해야 한다

요잔의 개혁은 다른 사람에게만 희생을 요구하는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지도자 자신이 먼저 검소하고 절제하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 지도력에서도 매우 중요한 원리입니다.

말 → 행동 → 본 → 영향력

말만 하는 지도자는 사람을 오래 움직이지 못하지만, 자신이 먼저 살아내는 지도자는 사람의 마음에 불씨를 붙입니다.


③ 사람을 바꾸려면 마음을 바꾸어야 한다

제도만 바꾸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 희망
  • 책임감
  • 자존감
  • 공동체 의식
  • 미래에 대한 비전

이 생겨야 합니다.

따라서 진정한 개혁은

제도개혁 → 사람개혁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 → 행동 → 문화 → 제도

로 이어져야 합니다.


④ 변화에는 반드시 저항이 따른다

개혁을 시작하면 반대가 생깁니다.

따라서 반대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개혁이 잘못되었다는 증거는 아닙니다.

오히려 기존의 이익과 관습이 강할수록 변화에는 더 큰 저항이 나타납니다.

중요한 것은 감정적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목적과 지속적인 실천으로 불씨를 지키는 것입니다. 

5. 『불씨』를 신앙적으로 읽으면

목사님께서 최근 계속 관심을 가지신 **‘거룩한 삶’**과 연결하면 『불씨』는 상당히 의미 있게 읽을 수 있습니다.

세상의 불씨

변화 → 개혁 → 희망 → 공동체

신앙의 불씨

말씀 → 회개 → 거룩 → 사랑 → 섬김 → 공동체의 변화

성경에는 이와 비슷한 이미지가 있습니다.

“내가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 이사야 49:6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 마태복음 5:14

그러므로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키려면 먼저 교회 안에 불씨가 살아 있어야 합니다.

 
6. 『불씨』와 거룩한 삶의 연결

특히 데살로니가전서의 말씀과 연결하면 아주 좋은 설교 주제가 됩니다.

『불씨』의 핵심

한 사람의 작은 개혁이 공동체를 변화시킨다.

기독교의 핵심

한 사람의 거룩한 삶이 가정과 교회와 세상에 영향을 준다.

데살로니가전서 4:3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즉,

거룩함 → 거룩한 행동 → 거룩한 영향력 → 공동체의 변화 라는 구조를 만들 수 있습니다. 

7.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불씨』는 “죽어가는 공동체를 변화시키는 것은 거대한 힘이 아니라, 한 사람의 결단에서 시작된 작은 불씨”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작품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신앙적으로 적용하면 “교회를 변화시키는 불씨는 프로그램이 아니라, 말씀대로 살아가는 한 사람의 거룩한 삶에서 시작된다.” 


하비 콕스(Harvey Cox)
세속 도시(The Secular City)

1965년에 출간되어, 현대 도시화와 세속화 속에서 기독교와 교회가 어떻게 존재하고 사역해야 하는가를 묻는 책입니다. 
콕스는 세속화를 단순히 “하나님을 떠나는 현상”으로만 보지 않고, 교회가 세상 속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새롭게 발견해야 하는 역사적 변화로 해석합니다.

책의 핵심 줄거리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교회는 세속 도시를 떠날 것이 아니라, 그 도시 한가운데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분별하고 참여해야 한다.”

콕스가 말하는 ‘세속 도시’는 단순히 종교가 없는 도시를 뜻하지 않습니다. 
현대 사회는 전통적인 종교 권위와 신성한 질서에서 점점 벗어나고 있으며, 인간은 현실의 역사와 사회를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 놓입니다. 

그가 책에서 다루는 중요한 흐름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세속화 — Secularization

콕스는 세속화와 세속주의를 구별합니다.

  • 세속화(secularization) : 사회가 전통적인 종교적 권위와 세계관으로부터 독립해 가는 역사적 과정
  • 세속주의(secularism) : 하나님이나 종교를 배제해야 한다는 하나의 이념

따라서 세속화 자체를 곧바로 “기독교의 죽음”으로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도시화 — Urbanization

현대인의 삶은 점점 도시를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도시는 다양한 인종과 문화, 다양한 종교, 이동성, 익명성, 빠른 사회 변화가 공존하는 공간입니다.

콕스는 특히 익명성(anonymity과 이동성(mobility)을 현대 도시의 중요한 특징으로 봅니다. 
그는 이것들을 단순한 악으로만 보지 않고, 도시에서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사회적 특징으로 분석합니다.  

 교회의 변화

콕스에게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변화하는 세상에서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는 교회가 과거의 사회 구조를 그대로 보존하려 하기보다, 하나님께서 역사와 사회의 변화 속에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를 분별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교회는 세상과 담을 쌓는 공동체가 아니라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활동에 참여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교회 안에만 계시지 않는다

『세속 도시』의 가장 중요한 신학적 주장 가운데 하나입니다.

콕스는 하나님의 활동을 교회와 종교 영역 안으로 제한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세속적인 사회와 도시의 변화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콕스 자신도 훗날 이 책의 핵심을 “하나님은 종교적인 영역뿐 아니라 세속적인 영역에도 현존하신다”는 방향으로 설명했습니다.  

『세속 도시』가 주는 7가지 교훈

 세상을 무조건 적으로 보지 말라

교회가 세상을 향해 “세상은 타락했으니 떠나야 한다.” 라고만 생각하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일을 발견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오히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 5:14)고 말합니다.

거룩은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는 것만이 아니라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께 속하여 사는 것입니다.

 
교회는 변화에 민감해야 한다

콕스는 교회가 과거의 형태를 무조건 보존하는 데 집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사회가 변화한다면 교회는 질문해야 합니다. 
“이 변화 속에서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 
따라서 교회는 변화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변화를 신학적으로 해석하고 복음적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신앙은 사적인 영역에 갇혀서는 안 된다

 신앙을 예배, 기도, 성경공부, 개인의 구원에만 제한하면 세속 도시의 현실을 외면하게 됩니다. 
 콕스의 관점에서는 기독교 신앙은 개인 → 공동체 → 사회 → 역사로 확장되어야 합니다. 
 가난, 정의, 인권, 도시 문제,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 역시 신앙의 영역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는 ‘기관’보다 ‘사람’이다

 교회 건물이나 제도 자체를 교회와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는가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본질을 건물 + 조직 + 제도 보다 사람 + 공동체 + 사명에서 찾아야 한다는 통찰을 줍니다.

 도시의 다양성을 선교의 기회로 보라

 현대 도시는 여러 문화와 민족이 만나는 장소입니다.  
 콕스의 도시 이해를 오늘날 이민교회에 적용한다면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도시는 선교의 장애물이면서 동시에 선교의 기회입니다. 
 특히 뉴욕 같은 다문화 도시에서는 한국인, 중국인, 히스패닉, 흑인, 백인, 다양한 이민 세대, 다양한 종교와 무종교인이 함께 살아갑니다.

교회가 이 다양성을 두려워하기보다 복음이 만나는 접촉점으로 볼 수 있습니다. 

 콕스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여기서 신학적으로 중요한 비판이 필요합니다. 
 콕스의 책은 매우 중요한 통찰을 제공하지만, 세속화를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평가할 위험도 있습니다. 
 성경은 세상을 무조건 긍정하지 않습니다. 
 요한일서 2: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합니다.

 따라서 성경적 균형은 세상을 사랑하되 세상의 죄를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즉,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지만 세상을 버리지 않는다.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에 동화되지 않는다.

 이것이 훨씬 성경적인 균형입니다. 

 『세속 도시』와 성경의 관계 
 콕스의 책을 성경적으로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은 구조가 가능합니다.

콕스의 질문 성경적 응답
세속화된 사회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
도시 속에서 어떻게 신앙을 유지할 것인가? 세상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말라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나님 나라를 증언하라
사회 변화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시대를 분별하라
세상과 어떻게 관계할 것인가? 사랑하되 죄에는 참여하지 말라
도시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섬기고 증언하고 정의를 행하라 

 ‘거룩’이라는 관점에서 읽으면

 ‘거룩한 생활’과 연결하면 『세속 도시』를 매우 유익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거룩을 단순히 “세상과 떨어져 있는 것”으로 이해하면 수도원적 거룩에 가까워집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거룩은 “하나님께 구별되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구조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거룩의 3단계 
  구별됨 — Separation
  죄와 우상과 불의에서 자신을 구별한다.

   ↓

  참여함 — Participation
 세상 사람들의 고통과 현실 속으로 들어간다.

  변화시킴 — Transformation
 복음으로 사람과 공동체를 변화시키는 일에 참여한다.

 이 점에서 콕스의 ‘세속 도시’는 오늘날 교회에 상당히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교회가 세상을 떠날 것인가, 세상에 동화될 것인가, 아니면 거룩함을 가지고 세상 속으로 들어갈 것인가?”

  성경적 답은 세 번째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민교회에 적용한다면  특히 이민교회에서는 『세속 도시』의 메시지가 상당히 현실적입니다. 
  과거 이민교회가 “우리 민족 + 우리 언어 + 우리 교회”라는 울타리를 중심으로 존재했다면, 
  세속 도시의 환경에서는 “우리 교회가 도시를 어떻게 섬길 것인가?”를 질문해야 합니다.

  따라서 이민교회의 방향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민교회  → 이민자의 상처를 치유하고  → 다음 세대를 세우며  → 도시의 약자를 섬기고 → 다문화 사회에 복음을 증언하고
   → 거룩한 삶의 모델을 보여주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 
  하비 콕스의 『세속 도시』의 핵심은 “세속화된 도시를 하나님이 없는 공간으로 보지 말고,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분별하여 교회가 세상 속으로 들어가 책임 있게 참여하라”는 것입니다.

  다만 성경적으로 보완하면, “세상으로부터 도피하지 말되 세상에 동화되지 말고, 거룩함을 가지고 세상 속으로 들어가 하나님 나라를 증언하라.”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환대와 구원

조슈아 W. 지프
‘환대와 구원’
‘믿음과 환대에 의한 구원’(Saved by Faith and Hospitality)

초기 기독교 서적인 ‘클레멘스 1서’에 나오는 이야기를 언급한다.
아브라함 롯 라합이 믿음과 환대를 통해 구원을 얻었다는 내용이다.
결코 우리가 환대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구원은 반드시 환대로 이어진다는 의미다.

오늘날 개인주의 시대에서 교회가 잃어버린 것이 있다면 타인을 향한 환대와 ‘손대접’일 것이다.

‘뜻밖의 회심’ 저자인 로자리아 버터필드는 기독교에 적대적이었고 레즈비언 공동체에 소속돼 있었던 사람이었지만, 복음을 따라 환대를 베풀었던 한 부부의 식탁 교제에 참여해 교류하면서 극적 회심을 경험했다.

복음전도가 잘 되지 않는 시대에 가장 효과적인 복음전도 방법도 바로 이웃에게 베푸는 환대와 손대접일 것이다.
그들과 친구가 되어보라.
우리의 우정과 섬김을 따라 복음이 흘러가게 될 것이다.
고립의 시대에 환대의 공동체는 외로운 시대에 가장 좋은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의 별명 중 하나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과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의 복음은 환대를 통해 흘러 들어갔다.

동성애 이슈가 중요한 화두로 떠오르고 동성애 찬반 논쟁이 치열하게 진행되는 오늘날, 한 레즈비언 교수가 자신의 파격적인 회심과 세계관의 변화를 진솔한 필체로 묘사했다.

저자는 이 책에서 회심 이전의 삶과 가치관을 밝힐 뿐 아니라 어떻게 성경에 관심을 갖고 되고 켄 목사 부부와의 지속적인 만남을 통해 내면에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 소상하게 얘기한다.

이후 교회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던 때와 교인들이 자기에게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세례를 받고 정식교인이 된 후 어떻게 신앙생활을 영위했는지, 그리고 그녀의 세계관에 지각변동이 일어난 과정을 진솔하게 진술하고 있다.

훗날 남편을 만나 가정을 이루고 목사 아내로서, 네 명의 아이를 입양하여 홈스쿨링하는 엄마로서, 그리고 손님대접을 주된 사역으로 삼고 살아가는 모습을 묘사한다.

이번에 출간된 확대개정판에는 저자의 회심에 결정적 역할을 한 켄 목사와 남편 켄트의 이야기, 저자의 공개편지 두 편, 그리고 궁금증을 풀어주는 질문과 응답이 부록으로 실려 있다.


'환대와 구원' (조슈아 지프)

“교회가 진지하게 귀담아 들어야 할 매우 중요한 통찰력을 제공한 책이다.
본서의 주장은 단순하고 분명하다.
곧 그리스도인은 ‘환대’로써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좀 더 풀어서 설명하면, 구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무런 조건이나 자격 없이 전적으로 환대해주신 결과로 주어진 것인 것처럼, 우리 또한 타자를 차별 없이 환대함으로써 그 구원의 은혜에 참여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행위의 진정성은 타자에 대한 ‘환대’로 증명된다.”

기독교 영성 나아가 선교적 삶의 핵심을 관통하는 ‘환대’에 대해 이 책만큼 풍부한 지식과 통찰력을 주는 책은 없을 것입니다.
크리스천이 가야 할 환대의 길에 대한 분명한 이정표를 보게했고, 특히 저에게는 자신있게 환대에 대해 외칠 수 있는 용기와 설교해야 할 책임감을 주었습니다.

미국 트리니티복음주의신학대학원 신약학 교수인 조슈아 지프(Joshua W Jipp)가 저술했다.
원제목은 ‘믿음과 환대에 의한 구원’(Saved by Faith and Hospitality)이다.
종교개혁 전통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불편하게 들릴 수 있는 다소 도발적인 제목이다.
물론 당연하게도 저자는 소위 행위 구원론을 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환대에 기인한다는 사실과, 어떻게 이것이 사람의 환대를 이끌어내는지를 복음적으로 매우 탄탄하고 명쾌하게 정리한다.

지프 교수가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환대하셨다는 것은 복음 메시지의 핵심 중 핵심이다.
종교개혁의 칭의론도 아무 공로 없는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하나님의 자녀가 됐다는 것에 강조점을 둔다.
우리가 하나님의 넉넉한 품으로 환대를 받았다는 사실은 우리 신앙의 근본과도 같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그저 이 사실 앞에 감격하는 것에서 멈추고 마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한한 환대를 베푸셨다는 것이 함의하는 바가 무엇인지에까지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구약성경에서부터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땅에 들어오도록 환대받은 자들로 묘사된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땅은 하나님의 소유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약속한 땅을 분깃으로 내어 주신다.
그러므로 성도의 정체성은 광야의 나그네로서 하나님께 환대받은 자이다.
그리고 여기서 성도의 삶의 태도와 방식이 도출된다.

“셋째 해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 네 모든 소산의 십일조 내기를 마친 후에 그것을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 네 성읍 안에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신명기 26:12)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서 첫 소산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려 하나님의 환대 은혜에 대해 인정하고 감사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뿐만 아니라, 그 소산을 연약한 타자들과 나눌 것을 명령하신다.
하나님의 환대 때문에 구원받은 자들이 이제 환대를 베푸는 자들로 살아갈 것을 요구받는 것이다.

신약의 예는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환대의 실체로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사회의 아웃사이더들과 함께하기를 마다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즐거워하셨다.
심지어 그것이 사회문화적으로 또 종교적으로 터부시되는 일이었음에도 그 어떠한 비난도 예수님의 환대를 막지 못했다.
예수님은 기꺼이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로 불리셨다.
그리고 우리 또한 감히 예수님의 그 넉넉함 품에 안겨 있다.

물론 환대하는 삶으로의 부르심은 오늘날 우리에게 참 불편한 메시지임이 틀림없다.
무엇보다 환대하는 삶을 살아가고자 할 때 맞닥뜨리게 될 수많은 현실적 문제들이 우리 머릿속에 먼저 떠오르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현실이라는 장벽 앞에서 성경의 가르침은 슬쩍 뒤로하고 마는 것이 우리의 부족함이고 연약함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환대하는 삶으로 초대하실 뿐만 아니라 그런 일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도 주심을 믿어야 한다.
환대하는 삶으로의 전환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더 많이 경험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바로 환대의 근원이시기 때문이다.

교회는 유람선이 아니라 구조선이다.
유람선을 타고 가는 듯한 신앙생활에서 이제부터는 구조선을 타고 생명을 구원하는 구조대원의 역할을 바르게 감당해야 할 때가 되었다.
그러면 반드시 세상은 비난의 화살을 날리던 교회를 향하여 칭찬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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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회심(The Secret Thoughts of an Unlikely Convert)
로자리아 버터필드 지음



레즈비언의 삶을 버리고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온 페미니스트여성에 대한 간증이다.

오늘날 반동성애 운동이후에 그들을 돌보는 사역이 미흡한 가운데, 동성애자들을 교회와 개인이 어떻게 돌보고 이끌어야 하는지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게 해 주는 책이다.

동성애는 복음으로 극복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 책은 여러가지를 알게 합니다. 

1. 교회 밖에서 바라본 교회의 모습

2.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성도들은 어떤 자세로 그들을 대해야 하는가?

3. 성소수자들이 그들의 정체성과 그들의 공동체에서 느끼는 부분은 어떤 것인가?

4. 교회는 어떤 부분에서 교회 밖 사람들을 불편하고 갈등하게 하는가?

5. 복음을 통한 회심은 어떤 과정을 거치는가/


저자는 대학 부교수이자 종신교수 자격을 부여받은 엘리트 여성이고, 학과장을 맡는 동시에 성소수자 인식 개선에 앞장서는 역할을 맡고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레즈비언이자 사회운동가이기도 한 인물입니다.

여기까지 나열한 수식어 만으로도 그리고 그의 본인의 의견으로도 그가 얼마나 복음과 먼 인물인지를 짐작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그런 그에게 있어 기독교인들에 대한 인식은 상당히 확고하게 좋지 않았습니다.

내게는 기독교인들이 엉성한 사고의 소유자들처럼 보였다. 빈곤과 폭력, 인종차별과 같은 이 세상의 실제적인 문제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이 지닌 비현실적인 세계관이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책을 읽어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천박하다'라고 조롱하는 방식, 즉 토론을 심화시키고 풍요롭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둘러 종결시키기 위해서 막무가내로 성경책을 끌어들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이 걸핏하면 들먹이는 "성경말씀에 의하면"이라는 말은 정상적인 사고를 포기하라는 주문처럼 들릴 뿐이었다. 그 말이 나오면 영락없이 얼마 지나지 않아 대화가 파국을 맞았으니까. 그들이 자주 사용하는 캐치프레이즈나 상용어구들도 역겹기는 마찬가지였다. "예수님이 답입니다."라는 말을 들으면 지금도 뿌리 없이 서있는 나무를 보는 느낌이 든다.

답은 질문이 주어진 다음에 나오는 것이 정상이다. 질문에 대해서는 구체적이고 설득력 있는 답을내놓아야지 모든 것을 다 덮어버리는 포괄적인 말을 답이라고 내놓아서는 안 된다. "정말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이에요"라는 대답을 들을 때마다 십계명의 세 번째 계명(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을 어기는 짓거리, 또는 값싼 감상으로 뒤범벅된 너절한 감사카드를 보는 느낌이 든다. 
..(중략)..

그들이 반지성적인 사람들처럼 보인다는 것 외에 내가 기독교인들에게 느끼는 두려움이 한 가지 더 있었다.
..(중략)..

레즈비언들의 공동체는 내게 안전하고 안정된 보금자리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곳은 내가 가장잘 알고 아끼는 사람들이 속한 공동체 이기도 했다. 하지만 레즈비언 공동체가 다가오는 사람들을 팔 벌려 포용하고 환영하는 반면에 기독교인들의 공동체는 배타적으로 보였고(실제로 그런 경우도 많다) 쉽게 사람들을 정죄하려 들거나 냉소적이고 이질적인 요소가 그들에게 섞일까 봐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본문 p25-26)

 

이 부분을 읽으며 등골이 오싹하고 얼굴이 벌개져왔습니다. 아니라고 반문하고 픈 분들도 많으시리라 생각합니다. 우리 공동체는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싶으신 분들도 많으실 겁니다. 그렇지만 상처는 준 사람 기준이 아니라 받은 사람 기준으로 생각되어야 하듯, 교회 밖에서 바라보는 교회를 향한 시선은 우리 성도들이 분명히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이 글이 더 귀하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아니라고 말씀하고 계신 분께선 내가 최근에 반갑게 맞이하고 시간을 따로 내서 새로 방문한 이들의 이야기를 듣거나 방문한 기억이 있는지만 돌아봐도 답은 나올 것 같습니다. 기독교 진리는 배타적입니다. 왜냐하면 구원의 길은 오직 예수님 한 분 뿐이기 때문이고, 세상 종교가 말하는 어디에나 신이 있다는 범신론도, 선행으로 구원을 이룰 수 있다는 자력 종교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진리가 배타적이라고 해서 기독교인들이 그런 태도를 가져선 안될 것입니다.

 

안 그래도 복음은 친절하지도 듣기 좋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듣는 이가 스스로가 죄인임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복음의 씨앗이 어떻게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뿌려질 수 있을까요? 

그 단서를 저자가 복음을 받아들이게 된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과의 만남의 장면에서 찾아보고자 합니다.

시러큐스 개혁장로교회 담임목사 켄 스미스가 보낸 편지도 그런 편지들 가운데 섞여 내게 왔다. 그의 편지는 매우 친절한 어투로 나 자신도 간절히 대답하고픈 그런 질문들을 묻고 있었다. 당신은 투고에 실린 결론에 어떻게 이르게 되었는가? 당신은 자신의 의견이 옳다는 것을 어떻게 검증할 수 있는가? 당신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가? 켄 목사는 내 글의 근거가 되는 전제들을 더 깊이 연구해 보라고 권하고 있었다.
..(중략)..

전화상으로 얼마간 즐거운 대화를 나눈 후 그가 나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하지만 전화를 끊기 전에, 그때서야 생각이 났는지, 초면인 사람의 집으로 저녁 식사를 하러 오는 것이 부담스러우면 자신과 아내가 근처의 레스토랑으로 나가는 것도 좋다고 했다. 나는 그가 아주 사려 깊은 사람, 아니 거의 기사도를 따르는 사람처럼 여겨졌다.
..(중략)..

저녁으로 채식주의자를 위한 볶음요리를 준비했다는 플로이의 말을 듣고 얼마나 안도감을 느꼈었는지는 지금도 기억난다. (도덕적인 이유에서는 물론 건강상의 이유로 나는 채식을 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중략)..

꽤 더운 칠월 날씨였지만 두 사람이 에어컨을 틀지 않고 있었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나는 환경문제 전반에, 특히 오존층에 대해 관심이 많았는데 그들도 그런 것 같았다.)
..(중략)..

나는 그들과 친숙해지고 싶었지만 내 도덕적인 잣대들을 포기할 만큼은 아니었다. 레즈비언으로서의 내 정체성, 동성애 문화, 가치관들이 내게는 훨씬 더 중요했다. 삶의 경험뿐만 아니라 연구와 사유의 과정을 통해 나는 내가 지닌 문화, 가치들을 소유하게 되었다. 

내가 켄과 플로이를 보고 바로 마음에 들어했던 것은 그들이 그런 점에 민감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그 두 사람과 나는 명백한 차이점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들은 내가 빈 칠판 같은 상태로 그곳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내게도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와 견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였고, 대화를 하면서도 충분히 나를 존중해 주었다.
..(중략)..

켄과 플로이는 내가 어떤 인간인지 파악하려 들지 않았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내말을 경청해 주었다. 그들은 기독교인의 동정심을 가지고 이방인인 내게 다가오는 긴 여정을 시작하려 했다. 식사 중 그들은 내게 복음에 대해 말을 하지 않았고 식사 후에도 교회에 나오라는 말 같은 건 하지 않았다. 으레 나오리라 예상했던 말들이 나오지 않은 덕분일까 식사 후 켄이 나랑 계속 연락을 하며 지냈으면 좋겠다고 제안을 했을 때 나는 부담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본문 p36-37)

 

그런 부담감이 있는 것 같습니다. 교회 밖 사람이 교회 안 사람을 만날 때..

 

직접 경험해 본 경험에서 아니면 주변 사람들의 경험으로부터의 간접 경험에서든... 많은 사람들이 막연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무례함에 대한 혹은 쉽게 정죄함에 대한 그런 기억들이 차곡차곡 쌓여 무언가 다른 관점을 만들어내고 그 관점이 교회 안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되살아 나는.. 그런 모습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분들을 뵐 때마다 신앙인으로서 어떤 자세로 사람들을 대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고 스스로를 경계 하게 됩니다. 나의 섣부른 말이나 툭 던지는 멘트들이 누군가에게 평생에 걸쳐 복음을 접하는 데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이 되지는 않을까 하는..

 

그런 의미에서 켄 목사님과 플로이 사모님의 모습은 정말 성도들이 어떤 자세로 사람들을 대하고 신앙인이 어떤 겸손함과 예의를 가지고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좋은 모범이 되는 것 같습니다.

 

이 책에서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 부부와의 첫 만남에서 첫번째 식사를 위해 본인을 교회로 초청했다면 그 즉시 뺑소니를 놓고 다시는 그들을 만나지 않았을 거라는 말에서 느껴지듯 깊은 인내와 진심을 가지고 대해야 함을 배우게 됩니다.

 

그런 안정적이면서 상호 신뢰가 쌓인 관계가 구축된 이후 켄 목사님의 주도적인 복음 전파로 인해 저자가 변화된 것이 아님을 보게 됩니다. 물론 모든 관계, 모든 사람에 대해 동일하게 진행되리라 보는 것은 어렵지만, 그 관계를 통해 그리고 사람을 통해 하나님을 다시 바라보게 된 저자는 스스로 복음을 알아가기 시작합니다. 전 이 부분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인간관계에 의해 마지못해 걸음 하는 신앙생활은 그 나름으로도 가치가 있겠지만 쉽게 무너지거나 쉽게 변질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복음과 자신을 비교해 나가며 가치관의 갈등과 충돌을 느끼고 감수하고 싸우고 고민하는 가운데 얻은 복음과 믿음은 그 든든함이 분명 다름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고 앞서 얘기한것처럼 인간관계에 의해 마지못해 걸음 하며 시작한 신앙생활을 폄하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복음을 들을 수 있다면 분명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요지는 복음을 듣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그렇게 살기 위해서 겪는 변화들은 누군가가 대신해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그 치열한 싸움과 변화를 스스로 싸워냅니다. 그리고 힘들거나 무너질 때에는 섣부른 조언이 아닌 항상 옆에서 든든히 있어주고, 믿어주며, 기도해 주는 동역자들의 조언과 도움을 받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진정한 동역자이자 중보자들의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묻지도 않은 조언을, 특히 자신의 신앙 경험을 무조건적으로 진리라 믿으며 강요 아닌 강요를 하는 것은 정말 좋지 못한 자세입니다. 그런 모습은 중보 대상자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자칫 내 생각을 기준으로 그 사람을 통제하거나 조종하는 것으로 변질되기 쉽습니다.

 

저자는 자신의 변화를 드디어 느낄 정도로 자신이 변화되고 있음을 알아챕니다. 그러는 가운데 고민과 어려움이 있을 때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필요한 지식을 쌓기 위해 말씀을 읽고 책을 찾아 읽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선후가 바뀌긴 했지만, 뒤에 있는 내용을 인용하며 살펴보고자 하는 내용은 교회 밖의 사람이 복음을 통해 회심을 하면서 느끼는 교회의 모습이 얼마나 처참한지를 보고자 합니다.

성경에 묘사된, 그리고 내가 실제로 경험한 혹독한 회심의 과정을 고려할 때, 지금의 복음주의 문화가 정형화시킨, 믿음은 손쉬운 것이라는 생각들이 가져올 수도 있을 결과를 생각하면 두려운 마음이 든다. 내가 사는 지역만 해도 복음주의의 놀이공원이라 할 만한 지역이다. 이웃들 중 몇 집은 지역의 대형교회들에 출석하고 있는데 교회 안에 패스트푸드 식당들이 입점해 있고 유명한 커피 체인점들과 바람을 채운 거대한 고무 놀이기구들을 가져다 놓았다.
..(중략)..

릭 워렌 목사는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는 자신의 책에서 회심을 다음과 같이 고백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예수님, 제가 당신을 믿고 받아들입니다." 죄인들을 받아들이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 자신의 말에 믿음을 거는 행위는 사람들을 그릇된 희망의 함정에 빠지게 한다. 릭 워렌 목사가 사람들에게 구원을 보장하는 방식은 위험스러울 정도로 잘못된 것이다. 그는 계속 설명을 한다. "만약 당신이 신실하게 그 기돌르 드렸다면 이제 축하를 받을 차례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이 된 것을 환영합니다." 내 기도가 신실한지 여부를 내가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구원의 은혜는 구속할 자를 선택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 오래 참으시고 자신을 희생하시며 순종하신 구세주께 속한 것이다. 이렇게 큰 은총이 어떻게 내 신실함에 달려 있을 수 있겠는가? (본문 p 81-82)

교회는 편의와 새신자들에게 다가오기 쉽게 하기 위해 변하는 것은 찬성하지만, 그 본질을 위협할 정도가 된다면 그것은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성도들에게 그리고 새 신자들에게 분명히 알게 해야 합니다. 복음은 친절하지도 않고, 편하지도 않고, 쉽게 받아들여질 만한 내용도 아님을 말이죠.

복음은 듣는 이를 죄인이라 합니다. 당신이 틀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복음이 그토록 쉽게 받아들여진다? 전 그것은 위선이고 거짓이라 감히 표현하고 싶습니다. 


그런 가운데 저자에게 든 고민은 "왜 동생애가 죄인가?" 하는 부분이었습니다.

 

그걸 왜 죄인줄 모르지? 하며 분개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그 근거를 제시할 수 있는 성경 구절이 있는지 반문해 보고 싶습니다. 예전에 제가 아는 분에게 그 반문을 했더니 창세기에 나온 소돔과 고모라 멸망 사건을 예로 들었습니다. 이 책의 저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소돔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동성애를 응징하기 위해서라고 알고 이해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왜 그렇게 하셨는지에 대한 말씀이 있는 것을 이번에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에스겔서 16장

네 아우 소돔의 죄악은 이러하니 그와 그의 딸들에게 교만함과 음식물의 풍족함과 태평함이 있음이며 또 그가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주지 아니하며 거만하여 가증한 일을 내 앞에서 행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보고 곧 그들을 없이 하였느니라

 

소돔의 멸망은 동성애에 대한 응징이 아니라, 그들의 1) 교만함과 2) 풍족한 가운에서도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돕지 않고 3)가증한 일을 하였기 때문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네 아우 소돔이라 표현함으로 실상 이 구절의 대상이 이스라엘 민족에 대해 그들의 숨겨진 죄악을 지적하시는 도구로 이 예를 들었음을 알게 됩니다.

 

죄의 선 후 구조에 대해 저자는 아래와 같이 적고 있습니다.

자만, 부요, 도락에의 집중, 자비와 겸손의 부재. 이런 죄악들 자체에서 본질적으로 성적인 요소들을 찾아볼 수는 없다. 우리는 흔히 죄가 논리나 심리학에 의해 설명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성적인 죄가 성적인 혹은 감정적인 원인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가 지나치게 협소한 시각으로 성애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성적인 활동은 침대에서 벌어지는 일들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넓은 범위의 욕구들, 필요와 갈급함 등을 포함한다. 성애는 우리의 삶이 처해있는 상황의 원인이라기보다는 그 표현으로서, 근원이나 기원이라기보다는 결과에 가깝다. (본문 p74)

 

우리는 현상에 집중하는 그 에너지를 조금이나마 그 근원에 집중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동서애는 분명한 죄이지만, 동성애에 집중하기 앞서 그 근원에 무엇이 있는지를 바라보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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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님 코끼리 만지는 격'이라는 속담이 있다. '코끼리'로 표상되는 대상의 전체를 보지 못하고 대상을 이루는 부분을 전체로 잘못 인식하는 경우를 빗댄 말이다. 어찌 보면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 '장님 코끼리 만지는 격'에 가까운지 모르겠다. 감각기관을 통해 대상을 인식하고 그로 인한 경험적 지식이 곧 우리의 세계관을 형성하니 말이다.

즉 감각 경험을 통해 받아들인 세계가 곧 우리가 바라보는 세계인 것이다. 이를 두고 칸트는, '인간은 감각과 오성을 통해 대상을 인식하고, 세계의 모든 대상은 인간이 가진 자발적인 인식 능력이 능동적으로 작용하여 구성해 낸 결과물들'이라고 했다. 결국 우리는 감각할 수 있는 세계만을 인식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감각할 수 없는 것은 우리에게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다니엘 키시'를 통해 본 뇌 가소성

 



지난 6월 5일 방송된 <신비한TV 서프라이즈>에서 생후 13개월에 안구를 적출해서 앞을 볼 수 없는 시각 장애인 다니엘 키시가 소개됐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마치 눈이 보이는 것처럼 요리를 하거나 자전거를 타는 등 일상생활에 불편함이 없어 보였다.
사전정보가 전혀 주어지지 않은 상태에서도 자신이 서 있는 장소가 어디인지 알았으며 근처에 어떤 건물이 있고, 요트가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도 알고 있었다.

다니엘 키시가 말하길, 그가 앞을 보는 방법은 자신이 혀로 내는 소리에 있다고 했다.
'딱딱' 소리를 내며 주변 사물에 부딪쳐 반사되는 음파로 대상을 구별한다는 것이다.
마치 초음파를 이용해 사물을 구별하는 돌고래와 박쥐처럼 말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음파는 사물이 멀리 있을수록 돌아오는 시간이 오래 걸리고 사물이 딱딱할수록 강도가 크게 느껴진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음파를 통해 사물을 구별한다는 것이 보면서도 잘 믿기지 않았다.
방송에서는 이를 과학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로어델러 박사가 다니엘 키시와 함께 실험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실험 결과 비시각장애인이 시각정보를 처리할 때 활성화되는 조거피질이 다니엘 키시의 경우 소리를 통해 활성화되었다.

소리를 통해 사물을 구분하는 것이 가능함을 입증한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다니엘 키시가 앞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의심했으나 그의 말은 진실이었다. 또한 누구라도 훈련을 반복하면 그와 같이 앞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현실에서 가능한 기적처럼 느껴졌다.

책 <감각의 제국>은 EBS 다큐프라임 <감각의 제국>을 책으로 엮은 것으로, 다니엘 키시와 같은 시각 장애인이 앞을 볼 수 있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시각장애인에게는 시각을 제외한 다른 감각이 발달했을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 같은 소리를 들려주더라도 다른 쪽 뇌의 활성이 더 강하거나 영역이 확장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은 거지요. 그런데 과학적으로 공간에 대한 정보를 가장 잘 담을 수 있는 곳은 시각피질입니다. 꼭 시각이라는 감각이 아니어도 시각피질은 공간 표상을 굉장히 정확하게 하는 곳이기 때문에 시각에 해당하는 정보를 처리하지 못하더라도 다른 감각을 이용해 공간 파악을 할 수 있는 겁니다." - 서울대학교 뇌인지과학과 이상훈 교수, 본문 105-106쪽

"인간은 매우 시각적인 동물입니다. 그래서 좁게는 약 40퍼센트 정도의 뇌가 시각 정보체계에 관여하고 있고요, 넓게는 60퍼센트 가까이 되는데, 선천적인 시각장애인의 경우에는 시각 정보 처리가 완전히 차단되어 있어서 체감각이나 청각으로 정보를 받아들였을 때조차도, 심지어 기억과제를 하고 있을 때조차도 시각피질이 매우 활성화된다는 보고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 서울대학교 뇌인지과학과 이상훈 교수, 본문 108쪽


일반적으로 시각 정보가 입력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볼 수 없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시각을 제외한 다른 감각을 통해 입력된 정보로도 시각피질이 활성화되고 공간을 표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뇌가 결핍된 감각을 채우기 위해 다른 감각 정보의 영역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책에서는 이를 '뇌 가소성'으로 설명한다. 뇌 가소성이란 '뇌가 생각과 활동을 통해 스스로의 기능과 구조를 변경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멀쩡한 성인의 눈을 가린 채 외부에서 들어오는 시각 정보를 완전히 차단하면, 뇌는 달라진 환경에 맞춰 스스로를 변화시킨다. 어떤 감각 하나가 차단되면 그 감각을 담당하던 뇌 영역이 다른 감각을 처리하기 시작하면서, 뇌가 영역을 재배치하는 것이다. 하지만 차단된 감각을 다시 열어 주면 뇌는 원상태로 돌아온다. 무엇을 감각하고 무엇을 감각하지 않느냐에 따라 수시로 뇌 지도가 달라진다. 감각은 어떤 식으로든 뇌에 흔적을 남기고, 그 흔적은 끊임없이 뇌를 바꾼다. - 본문 102쪽


우리 몸이 바뀐 외부 환경에 자연스럽게 적응할 수 있었던 것도 뇌 가소성 때문이었다. 우리가 무엇을 감각하느냐에 따라 뇌 지도가 수시로 달라지는 것이라면 더 이상 지능은 우리의 능력을 표상하는 기준이 되지 못한다.

또한 다양한 감각 경험을 통해 우리의 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은 현대인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긍정적인 감각을 경험함으로써 뇌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반면, 스트레스를 계속 받는 상황에서는 부정적인 감각을 경험함으로써 우리 뇌를 부정적으로 변화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감정, 감각의 언어

이 책은 우리의 감각이 공감이라는 능력을 갖게 함으로써 인류의 진화를 가능하게 했다고 본다. 공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감정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간이 느끼는 희로애락의 감정은 흔히 본능적인 것이라고 한다.

책에서도 감정을 '감각의 언어'라고 설명한다. 감정에 따라 신체감정지도가 달라진다는 것인데, '사랑과 행복이라는 감정을 느낄 때는 몸 전체의 감각이 증가했고,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느낄 때에는 발 부분이 차가워' 진 것을 통해 인간의 감정에 따라 몸의 감각이 변화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인간의 감정이 '감각의 언어'이고 타고난 본능이라면, 갓 태어난 아기는 물론이고 태아 역시 감정을 느낄 수 있을까? 책은 '수정 후 10주가 지날 무렵부터 태아는 감정을 느낄 수 있다'고 설명한다. 감각기관이 발달함에 따라 태아는 외부 자극에 반응을 나타내기 시작하고, 각각의 자극에 따라 다른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와이즈베리의 <퍼펙트 베이비>에 따르면, '엄마가 즐거워하면 태아는 힘차게 발을 차며 움직이고, 엄마가 슬퍼하면 태아의 발차기 횟수는 거의 절반으로 떨어진다'고 한다. 이를 통해 태아 역시 엄마의 감정 변화를 느끼는 것은 물론 이를 공유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인간은 태어나기도 전에 엄마 배 속에서부터 감각할 수 있고, 엄마의 다양한 감정 변화를 느끼며 엄마의 감정에 공감할 수 있다. 태아가 엄마의 목소리에 반응하는 줄은 알고 있었지만 엄마의 감정에 이처럼 공감할 수 있다는 사실은 놀라웠다. 그렇다면 공감도 감각처럼 본능적인 것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공감이 본능적으로 타고난 것이라면 왜 어떤 사람은 공감능력을 지닌 반면, 또 어떤 사람은 그렇지 못한 걸까?

인간의 천성, 공감 능력

우선 공감이란 무엇인지 그 의미부터 살펴보자.
공감이라는 뜻의 영어 단어 '엠퍼티(empathy)의 어원은 아인픨룽(Einfhlung)이란 단어는 아인('Ein, 안으로), 퓔룽(fuhlung, 느끼다)'라는 독일어에 기원을 둔 것으로, '타인의 마음, 타인의 감정, 타인의 현재 상태에서 그 사람이 하고 있는 생각을 내가 그 사람의 입장으로 들어가서 느끼고 지각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미국의 문화인류학자 로먼 크르즈나릭은 공감을 '다른 사람의 처지가 되어보고, 그들의 감정(정서적 측면)과 관점(인지적 측면)을 이해하고, 그 이해를 활용해 우리의 행동을 인도하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이를 통해 공감은 단순히 타인의 감정을 공유하는 것뿐만 아니라 타인이 처한 상황과 관점을 이해할 수 있는 해석이 동반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문가들은 이를 구분하여 전자를 정서적 공감 능력으로, 후자를 인지적 공감 능력으로 설명한다. 정서적 공감 능력은 무의식적인 것으로 타인의 고통을 느낄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이다. '측은지심(惻隱之心)'을 떠올리면 된다.

이에 대해 소아정신과 전문의 김붕년 교수는 "유년기에 부모와의 정서적⋅감정적 교류로 타인의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뇌 발달이 이루어졌다면 그런 정서적 공감은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라고 설명한다. 반면에 인지적 공감 능력은 그 사람이 처한 상황과 입장을 이해하려고 노력함으로써 그 사람의 생각을 읽어내고, 표정을 통해 감정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책은 인간의 공감 능력과 뇌의 상관관계를 살펴보고자 짧은꼬리원숭이 실험을 소개한다. 실험의 내용은 '전운동 피질(행동을 계획하고 움직임을 실행하는 기능에 관여하는 뇌의 영역)의 신경세포에서 발생하는 전기 작용을 기록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실수로 실험실 연구원이 기록 장치를 끄지 않은 채 점심을 먹으러 갔고, 후식으로 한 연구원이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걸 본 원숭이는 움직임이 전혀 없었는데도 '(원숭이의) 전운동 영역의 뇌가 활성화'되었다.

움직임이 있어야 활성화된 영역이 사람의 표정과 행동을 눈으로 관찰하고 심리적으로 모방한 것만으로도 활성화된 것이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타인의 행동이나 의도, 감정을 머릿속에서 추측하고 모방하여 인간의 공감 능력을 담당하는 신경세포' 즉, 거울신경(mirror neurons) 때문이다.

거울 신경은 우리가 직접 행동을 행할 때에도 발화하지만 다른 사람이 그와 유사한 행동을 할 때도 발화하는 세포들이다. 이렇게 발화한 세포들은 뇌에서 감정을 담당하는 변연계(동기와 정서를 주로 담당하는 기관)를 자극해 다른 사람이 느끼는 감정까지 함께 느끼게 한다. 그러므로 거울신경은 타인의 마음이나 의도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데 매우 중요한 바탕이 된다. …… 그러나 거울신경이 제대로 발달하지 못하면 공감할 수 있는 기능 자체가 제대로 발달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폐 성향을 보이게 된다. 그렇게 되면 결국 타인과 나에 대한 감정적인 교류 자체가 어려워져 사회적⋅인지적인 발달이 이루어지지 못한다. - 본문 202쪽


이를 통해 공감 능력이란 거울 신경의 발달을 전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에게 공감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행동을 모방하는 '거울 신경 회로'와 타인의 감정을 인식하는 '측은지심 회로', 그리고 타인의 생각을 읽어낼 수 있는 '인지적 공감 능력 회로'의 세 가지 공감 회로가 필요한 셈이다. '인지적 공감 능력 회로'는 차치하고라도 뇌의 신경세포인 '거울 신경회로'와 무의식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측은지심 회로'는 타고난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공감은 인간이 가진 천성인 것이다.

공감 능력의 결여가 말해주는 것

하지만 자폐증 환자나 사이코패스의 경우에는 이러한 공감능력이 결여되어 있다. 자폐증은 병적인 문제로 인지적 공감능력이 결여된 반면, 사이코패스는 정서적 공감능력이 결여된 경우로 '뇌의 감정 스위치라고도 불리는 편도체의 발달이 저하'되어 있기 때문이다.

책에서는 '샐리&앤 테스트'라는 공감능력 테스트를 통해 아동의 인지적, 정서적 공감능력을 평가하고 9~10년 뒤 학교 폭력의 가해나 피해 여부를 조사한 결과를 보여준다. 4~5세에 인지적 공감능력의 결함이 있던 아이가 청소년기에 학교 폭력의 피해 학생이 되고, 정서적 공감능력이 결여되어 있던 아이는 10년 후 가해학생이 되는 경우가 통계적으로 많았다는 것이다.

인지적 공감능력이 부족한 경우 반복적인 사회성 훈련을 통해 타인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을 기르고 자신의 행동을 조절해 나갈 수 있지만, 정서적 공감능력은 어릴 적 애착관계 형성에서 비롯되기에 결여된 경우 촉진시키는 방법을 찾기 어렵다고. 다만 자신이 폭력을 휘두른 결과 상대방이 어떠한 피해를 입는지 명확히 알려줌으로써 자신의 행동을 억제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한다.

이를 통해 공감 능력의 결여는 개인의 사회성과 적응에도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사회적인 범죄를 야기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서 정서적 공감 능력은 부모와의 정서적⋅감정적 교류, 즉 부모와의 애착관계 형성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인간의 성장에는 결정적 시기가 있듯이 공감 능력 또한 적절한 시기에 자극을 받고 발달해야 하는 것이다. 부모의 양육 태도와 양육 환경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공감, 우리에게 필요한 것

앞서 앞을 보는 시각 장애인 다니엘 키시를 통해 우리는 감각할 수 없는 것조차 감각할 수 있음을 알았다. 이는 우리가 감각할 수 없는 세계의 존재 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직접 경험하지 않고도 타인의 상황이나 입장을 이해하고 타인의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공감 능력이 잘 말해준다. 우리는 타인에게 공감함으로써 우리가 직접 감각할 수 없는 세계와 마주할 수 있는 것이다. 공감은 우리 인간이 가진 최상위의 감각인 셈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 공동체는 공감 능력을 상실한 듯 저마다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다. 한쪽에선 신음하고 아파하는데도 다른 한쪽에선 귀를 막고 다른 이야기를 떠들고 있다. 책에서는 우리 인간에게 공감 능력이 있었기에 사회라는 공동체를 이루고 사회적인 연대와 협력을 통해 현재의 삶을 가능하게 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제라도 우리의 천성인 공감 능력을 회복해야 하지 않을까. 더 늦기 전에 말이다.

"공감한다는 것은 다른 누군가의 처지가 되어 보는 것입니다.
우리와 다른 사람의 눈으로, 배고픈 아이들의 눈으로, 해고된 철강노동자의 눈으로, 당신 기숙사 방을 청소하는 이민 노동자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우리는 공감을 장려하지 않는 문화에 살고 있습니다."
- 2006년 노스웨스턴대학교에서 오바마 연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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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이 핵무기 7200기를 갖고 있을 때 망하고 말았다.
북한이 핵을 보유한다고 하여 두려워할 것이 없다.
왜냐하면 공산주의는 무너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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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광은 인간관계를 지배하는 5가지의 법칙이라는 책을 썼다.

이 책에 나오는 5가지의 법칙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열정보존의 법칙이다.

내가 쏟아부은 열정은 열정의 양만큼 결국에는 자신에게 그대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둘째, 힘의 법칙이다.

힘이 있는 곳으로 사람이 모이고, 힘이 있는 자가 우위에 서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누구나 힘을 갖기 위해서 노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힘을 가지게 되는 그 순간부터가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내가 가진 힘보다 더 큰 힘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힘이 있을때 상대를 배려해 줄수 있는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셋째, 기브 앤 테이크의 법칙이다.

뿌린대로 거둔다는 것이다. 내 주변의 사람들과의 관계가 좋은 관계가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면 상대에게 조금이라도 더 주려고 노력해야 한다.

넷째, 습관의 법칙이다.

미국의 저명한 심리학자이자 철학자인 윌리엄 제임스는 말했다.

"생각을 조심하라. 왜냐하면 그것은 말이 되기 때문이다.

말을 조심하라. 왜냐하면 그것은 행동이 되기 때문이다.

행동을 조심하라. 왜냐하면 그것은 습관이 되기 때문이다.

습관을 조심하라. 왜냐하면 그것은 인격이 되기 때문이다.

인격을 조심하라. 왜냐하면 그것은 인생이 되기 때문이다"

습관은 인생이다. 좋지 못한 습관이 있다면 빨리 버리고, 좋은 습관이 있다면 더욱더 활성화 시키자.

다섯째, 위대함의 법칙이다.

인간의 내면속에 감추어진 그 크기를 알수 없는 능력있다. 물질적인 성공이 아니라 가치있는 인간이 되는 것에 중심을 두어야 한다.
사람이 엄청난 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물질적인 부를 추구할때가 아니라 진정 소중한 무엇을 지키기 위할 때가 더 많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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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교회

톰 라이너&에릭 게이거 「단순한 교회」 생명의말씀사 P. 88~89


“단순한 교회는 영적 성장의 단계를 통해 사람들을 활동하게 하는 간단하고 전략적인 과정을 염두에 두고 설계된 모임이다.”

이 정의 다소 무게가 느껴진다.
이 정의를 하나씩 살펴보자.

단순한 교회는 설계된다. 그 교회는 부주의하게 던져진 것이 아니다. 우연히 계획된 것도 아니다. 목회는 “단순한 우연” 이상을 행하는 것이다. 목회는 용의주도하게 고려된 것이다. 조직화되어 있고 조심스럽게 설계되어 있다.

또한 단순한 교회는 염두에 두고 설계된다.

단순한 교회의 설계는 무언가를 중점으로 이루어진다. 프로그램과 목회는 무언가를 중심 주제로 삼는다. 그들은 교회의 연중 행사표와 소책자에 연연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어떤 것을 염두에 두고 계획되어 있다. 그리고 그 어떤 것을 모호하고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다. 단순한 교회에서의 제자 사역을 위한 설계는 그 과정을 중심 주제로 삼는다.

단순한 교회는 간단하고 전략적인 과정을 염두에 두고 설계된다.
과정은 간단하다.
혼란스럽지 않고, 이해하기가 쉽다.
지도자들은 그것을 알고,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한다.
과정은 의도적으로 단순하게 유지된다.
늘어나지 않는다. 매달 바꾸지 않는다.

단순한 교회는 단순한 과정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복잡함을 좋아하지 않는다.
더 많은 프로그램들이 과정에 덧붙여지지 않는다.
그 교회는 다수의 새로운 프로그램들과 그것에 제시된 모델들을 거부한다.

과정이 방법(how)을 뜻하기 때문에, 그것은 또한 전략적이라 할 수 있다.
과정은 교회의 목적이나 비전에 매여 있다.
그 둘은 친밀하게 결합되어 있다.
과정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기 위한 실행을 목적으로 만들어진다.
과정은 사람들이 그것을 통해 활동하게 하기 위해 연속적으로 일어나도록 계획되어 있다.

단순한 교회의 과정은 사람들을 활동하게 한다.

단순하고 전략적인 과정은 활동을 추진한다.
과정은 논리적으로 흐른다.
그리스도와 교회에 끌리고, 애착이 가는 쪽으로 움직인다.
프로그램들은 이러한 활동을 진척시키기 위한 도구들로 사용된다.
그리고 단순하고 전략적인 과정을 통한 활동은 의도적이고, 의도된 최종 결과를 가진다.

단순한 교회의 과정은 영적 성장의 단계를 통해 사람들을 활동하게 하는 것이다.
그 목적은 영적 성장의 단계를 통해 사람들을 활동하게 하시는 하나님과 동반자가 되는 것이다.
변화된 삶은 핵심이며, 의도된 최종 결과다. 사람들 속에 형성된 그리스도가 그 목적이다.

단순한 교회는 사람들이 그들의 영적인 여정에서 각기 다른 단계에 있다는 사실과, 영적 성장이 하나의 과정이라는 사실을 이해한다. 그 교회는 영적 성장의 단계를 통하여 사람들을 활동하게 하시는 하나님과 동반자가 되도록 설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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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미제라블 : 은혜의 순간은 한 사람의 일생을 변화시킬 수 있다

[크리스찬북뉴스 칼럼] 자비(mercy)와 은혜(grace)

자비’와 ‘은혜’는 하나님의 속성을 의미하는 중요한 두 주제이다. 우리는 흔히 두 낱말을 동의어인 양 혼용할 때가 많다.

어떤 학자들은 구약에서는 ‘자비’란 말을 사용하고, 신약에서는 ‘은혜’란 말을 쓴다고 구분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자비’란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을 면제해 주는 것을 의미한다면, ‘은혜’란 받을 자격이 없는 선물을 주는 것을 뜻한다고 보면 된다.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 설명해 보자.

자비는 이삭의 심장에 꽂힐 칼을 막아준다.
은혜는 수풀에 걸린 숫양을 공급해 준다.

자비는 달려가 탕자를 용서한다.
은혜는 모든 좋은 것으로 잔치를 베푼다.

자비는 강도 만난 사람의 상처를 치료해 준다.
은혜는 그가 완전히 회복하는 데 필요한 경비를 모두 부담한다.

자비는 십자가에 달린 강도의 외침을 들어준다.
은혜는 그날에 낙원을 약속한다.

자비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 대가를 치른다.
은혜는 우리의 악함을 그리스도의 의로 덮어준다.

자비는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을 회심시킨다.
은혜는 그에게 사도가 되라고 외친다.

자비는 반역과 죄의 삶에서 존 뉴턴을 구한다.
은혜는 그를 목사가 되게 하고 시대를 초월한 찬송가의 저자가 되게 한다.

자비는 지옥에 이르는 문을 닫는다.
은혜는 천국에 이르는 문을 연다.

자비는 우리의 수고를 거부한다.
은혜는 우리가 수고하지 않은 축복을 더해준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 미제라블』에서 장발장은 프랑스 혁명기에 굶주린 가족을 먹이기 위해 빵 한 조각을 훔치다 잡혀 감옥에 갇히기 전까지는 선하고 겸손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19년 동안 복역하고 나온 그는 사회와 하나님을 향하여 원한과 분노를 품은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프랑스 동서부에 사는 일흔네 살의 미리엘 신부 역시 혁명기에 큰 고초를 겪은 사람이다.
유산 가운데 남아 있는 고가품이라곤 칼과 포크 여섯 벌, 국자 하나, 그리고 촛대 두 개가 고작이었다.
그러나 그는 곤궁한 자들에게 동정을 베풀고 겸손한 종으로서 그들을 섬겼다.

나흘 간의 자유를 누린 후 장발장은 이제 피로와 굶주림으로 절망적인 상태에 놓여 있다.
그는 미리엘 신부의 집 문 앞에 서 있다.
염치고 자시고 그 집을 여관으로 오인한 그는 뻔뻔스럽게 부엌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거기서 신부의 따뜻한 대접을 받고 당혹스러워한다.
그날 밤 모두 잠든 사이, 장발장은 19년 만에 처음 누워본 매트리스와 하얀 시트를 뒤로 한 채 몰래 귀한 은식기들을 배낭에 훔쳐넣고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이튿날 아침, 손에 수갑이 채워진 채 그 식기들은 자기가 얻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장발장을 보며, 신부는 헌병들에게 그의 말이 사실이라고 한다.

헌병들에게 장발장을 놓아달라고 하며, 신부는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다시 만나 반갑소. 그런데 내가 은촛대까지 함께 주지 않았소? 아마 200프랑은 족히 받을 수 있을 거요. 포크, 스푼과 함께 그것도 가져가시오.”

믿기 어렵다는 듯 장발장이 신부에게 묻는다.

“정말 나를 놓아 주시는 겁니까?”

신부는 그를 안심시키며 이렇게 덧붙인다.

“형제여, 떠나기 전에 여기 당신 촛대도 가져가시오. 그리고 절대 잊지 마시오. 이 돈을 정직한 사람이 되는 데 사용하겠다는 약속을 말이오….

장발장, 나의 형제여, 더 이상 악에 속하지 말고 선에 속하시오. 내가 당신에게서 산 것은 바로 당신의 영혼이오. 나는 그것을 가증스런 생각과 죽음의 영으로부터 이끌어내어 하나님께 드린다오.”

자신에게 주어진 은혜에 당혹감을 느낀 장발장은 자신의 영혼 안에 있는 어두움, 그리고 가슴속의 한을 관통하는 사랑의 강렬한 빛, 이 둘이 서로 대조되는 것을 본다.

“은혜의 빛이 그의 삶, 그의 영혼에 닿았다. 그에게 그것은 마치 천국의 빛으로 사탄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정말 그랬다.

“그는 더 이상 이전의 그가 아니었다. 그의 모든 것이 변화했다.” 그 신부는 “이 비참한 인간의 전 영혼을 장엄한 광채로 채웠다.”

그 사건이 있은 지 하루 만에 그는 범죄의 현장으로 돌아와서 “기도하는 모습으로 그 자애로운 신부의 집 문 앞, 어둠이 깔린 길에 무릎을 꿇었다.”

은혜의 순간은 한 사람의 일생을 변화시킬 수 있다. 아니, 그것은 영원을 변화시키고도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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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 일, 복… 한국교회 성도들의 세 가지 오해
한국교회 성도들에게는 크게 세 가지 혼동이 있다.
성경을 이렇게 오해하면 성도의 신앙 성숙이 대단히 어렵다.

사실 대단히 깊숙히 퍼져 있는 신앙적 혼란이고, 2천 년 기독교 역사와 관련이 있다고 보여진다.
그래서 이것은 비단 우리나라 교인들에게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신앙의 오해는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복, 이 세 가지다.
성도들이 이 문제로 혼란을 겪는 경우가 참으로 많다.
이래서 성경적 신앙의 성숙이 어려워진다.
그것은 결정론, 이원론, 그리고 무속신앙이다.

하나님의 뜻을 결정론으로 오해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을 이원론으로 오해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복을 무속적으로 오해하는 것이다.

첫째, 하나님의 뜻과 결정론의 오해

성경이 아닌 결정론으로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 하는 것이다.
이렇게 성경을 오해하면, 나의 인생 미래에 어떤 하나의 길을 하나님이 미리 정해놓으셨고, 그것을 보물찾기하듯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끊임없이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뜻을 찾으려고 애쓴다.

둘째, 하나님의 일과 이원론의 혼란

이원론은 고대 헬라의 영육 이원론에서 로마가톨릭의 성속 이원론으로 발전되어 왔다.
성도가 이원론으로 하나님의 일을 받아들이면, 교회 안의 일과 교회 밖의 일거룩한 일과 속된 일로 구분한다.
교회에서 하는 일은 거룩하고 가치 있으며, 세상에서 하는 일은 속된 일이라고 본다. 


셋째, 하나님의 복과 무속신앙적 경향

하나님의 복을 무속신앙으로 오해하는 경우는 한국교회에 아주 흔한 현상이다.
신자들이 나 혼자 복 받으려고 열심히 예수 믿는다.
그러면 그 성도에게는 두 가지가 없다.
믿음과 삶의 변화가 따로 가기에 삶의 변화인 성숙이 없다.
그는 나 혼자 복받는 것이 목표이므로 복의 통로가 되려는 생각이 아예 없다.

이런 세 가지 오해와 혼동으로 한국교회 성도들은 길을 잃은 상황이다.
이 혼란에서 벗어나 성경적 신앙으로 가려면 가이드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제럴드 싯처의 <하나님의 뜻>
브루스 월키의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인도>
레너드 맥컬리, 제람 바즈의 <인간 하나님의 형상>

이 세 가지 혼동은 마치 칡넝쿨같이 얽혀 있어, 현재 한국교회 신자들의 내면을 뒤죽박죽 만들고 어린아이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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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론(資本論)

애덤 스미스

자본: 정치경제학 비판
Das Kapital: Kritik der politischen Ökonomie,
Capital: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자본론(資本論, Das Kapital)은 카를 마르크스가 독일어로 집필하고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편집한 방대한 정치경제학 논문으로 1867년에 제1권이 출간되었다.

《자본론》은 주로 영국의 고전파 경제학 및 자본주의와 영국 사회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는데, 내용은 1859년 발간된 마르크스의 저서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다.

총 3권으로 구성되어 있고, 1권은 자본의 생산과정, 2권은 자본의 유통과정, 3권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총과정이 부제로 붙어 있다.
1권은 1867년에 나왔으며  2, 3권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마르크스의 유고를 모아 집필, 각각 1885년과 1894년 발간되었다.

국부론(國富論) / 칼 막스

애덤 스미스의 대표적인 저서이자 애덤 스미스 본인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도덕감정론보다 후세 사람들에게 더 각광을 받은 책.

원제는 《국부의 형성과 그 본질에 관한 연구(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이다.
일상 대화에서 원제를 말하기에는 원제가 꽤나 길기 때문에 일상 대화나 비격식적인 글에서는 국부론(國富論)으로 짧게 부르는 경우가 많다. 영어권에서도 The Wealth of Nations로 줄여서 부른다.

영국의 학자 애덤 스미스가 찰스 타운센드 공작의 아들을 개인과외하며 유럽 각지를 여행하고 1766년에 영국에 귀국한 뒤 1776년까지 10년간 커콜디에서 자신의 서재에 파묻혀 지내며 쓴 책이다. 사실 이 여행을 떠날 때까지만 해도 스미스는 경제학과는 거리가 먼 철학자였는데, 여행을 통해 경제학에 대한 관심과 식견을 가지게 되었다. 이 사실은 국부론의 초안을 작성할 때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도 드러난다.
"나는 요즘 시간을 때우려고 책을 한 권 쓰고 있다네."
이는 케인스가 막 경제학에 흥미를 붙일 무렵 친구에게 했던 말인 "어쩌면 나는 경제학에 소질이 있을지도 몰라."와 더불어 경제학 역사상 가장 겸손한 발언으로 손꼽힌다.

경제학을 잘 모르더라도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은 아는 사람이 많은데, 바로 이 《국부론》에서 나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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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래시스 요시히로 후쿠야마(Francis Yoshihiro Fukuyama, 1952. 10. 27 ~ )


The End of History and the Last Man
<역사의 종언과 최후의 인간>

헤겔 정치철학을 신봉하는 일본계 미국 학자이다.

<역사의 종언과 최후의 인간>에서 인간의 역사 과정은 두 가지 큰 힘의 상호 작용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첫번째 힘은, 부를 축적해 물질적인 욕구를 만족시키려는 인간의 합리적인 욕망이라는 힘이다.
두번째 힘은, 역사 진보 과정의 중요한 원동력으로서 헤겔이 ‘승인 받기 위한 투쟁’이다.

이것은 모든 인간이 자신의 본질이 자유롭고 도덕적인 존재임을 인정 받으려는 욕망이다.

이같은 결론은 이제 전세계가 자유민주주의라는 단일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통일되어 가는 상황에 있다는 것이다.
헤겔의 역사 개념이 이데올로기의 역사를 지칭하는 것인 만큼, 이제 대립된 이데올로기를 통일함으로써 역사의 종언을 선언한다는 것이 후쿠야마의 논지이다.

<트러스트>는 그 후속편 성격을 띠고 있는데, 그러한 사실은 이 책의 첫장 제목이 ‘역사의 종언을 맞이한 인간의 상황’이라는 데서 잘 드러난다. 이 책의 논지는 ‘한 국가의 복지와 경쟁력은 하나의 지배적인 문화적 특성, 즉 한 사회가 고유하게 지니고 있는 신뢰의 수준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신뢰에 바탕 두어야 사회 발전


후쿠야마는 고 제임스 콜맨의 ‘사회적 자본’이라는 개념을 사람들이 공통의 목적을 위해 단체와 조직 내에서 함께 일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이해하여 중시한다. 즉 개인 간의 관계가 신뢰에 바탕을 둔 사회는 발전과 번영을 구가한다는 주장이다.

후쿠야마가 이 책에서 주장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대단히 중요하다. 그는 개인의 자유와 존엄성을 중시하는 자유민주주의를 찬양하면서도, 개인의 이기심에 기초한 물질적 동인만으로는 사회가 발전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개인의 이익을 큰 집단의 이익에 종속시킬 수 있는가 여부와, 규범과 가치를 공유하는지 여부가 더욱 중요하고, 그 공유된 가치로부터 신뢰가 탄생하며 신뢰는 중요한 경제적 가치를 가진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한국과 중국은 근본적으로 신뢰가 낮은 저신뢰 사회이고, 일본과 독일은 고신뢰 사회이다. 한국이나 중국같이 가족 중심적인 사회는 근본적으로 가족 이외의 사람과 사회적 협동이 이루어지기 상당히 어렵다고 비판한다. 우리가 새겨들을 필요가 있는 지적이다. 한국에서 뇌물과 부패가 성행하고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우리 사회 제도에 대해 우리 스스로가 신뢰하지 못해 나타나는 현상이다. 공무원과 정치가를 신뢰하는 사회라면 뇌물을 흔히 주고받는 현상은 절대로 나타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후쿠야마의 이론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은 사회 발전의 동인을 신뢰에 너무 많은 무게를 실어주는 것 같다는 것이다. 그 자신이 인정하듯이 합리적 선택론에 기초한 이기심이 80%를 설명해 주는 고전경제학의 법칙을 무시할 수는 없다. 합리적 선택론이 사회를 설명해 주는 충분 조건은 아니더라도, 가장 중요한 조건이라는 점을 더욱 강조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인류가 물질적으로 발전해온 동인으로는 시장경제 체제가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구승회 박사의 번역은 대단히 수준 높은 것이어서, 독자들은 이 책이 번역한 것이라기보다는 애초에 우리 글로 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질지도 모른다. 단지 utility를 ‘효용’이 아니라 ‘유용성’으로, rational choice를 ‘합리적 선택’이 아니라 ‘이성적 선택’으로 번역한 것이 옥의 티로 남는다. 후쿠야마의 책은 오늘날의 선진 자본주의 국가가 가지고 있는 특성을 시장 경제와 자유민주주의라는 두 가지 축으로 잘 설명했다는 점에서 지성인의 필독서다.

욕구에 의한 역사의 발전

1. 더 잘려는 욕구
- 경제적 욕구

2. 인정 받으려는 욕구
-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장점이 많으나 시들어간다.
인민 대중을 인정하지 않고 간부들끼리만 잘 먹고 잘 살려고 한다.
- 자유민주주의는 약점이 많으나 발전하는 이유는 개인의 자유를 인정해 주기 때문에 발전할 수밖에 없다.


미국 스텐퍼드 대학교의 교수이며 철학자, 정치경제학자이다.
일본계 미국인 3세이다.
그는 이데올로기 대결의 역사를 자유주의와 공산주의의 프레임으로 설명하면서 "자유주의의 승리로 끝났다"고 평가한 《역사의 종언》으로 유명하다.

후쿠야마는 1989년 냉전이 종식되는 순간을 역사의 종말이라고 하였다.
그 근거로 이념적으로 헤겔이 말한 인간의 욕구에 대해서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는 일방적이 아니라 상호성이 보장될 때 충족할 수 있게 되는 것으로, 이를 가능케 하는 정치제도가 바로 민주주의 정치제도라고 보았고 이를 궁극적이고도 역사적으로 최종적인 정치 체제로 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역사적인 관점에서 냉전이라는 기간 동안 민주주의 체제는 파시즘과 공산주의 체제로부터 많은 투쟁을 거치면서 승리를 거머쥔 만큼 더 이상 민주주의 체제에 도전할 수 있는 이념과 철학 체계가 없다고 보았기 때문에 역사가 종말에 도달했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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쉐인 클레어본의 혁명적인 삶 이야기 / 쉐인 클레어본 <믿음은 행동이 증명한다>


무소유 공동체 심플웨이 설립자 쉐인 클레어본의 혁명적인 삶
나눔의 폭발적인 전염성을 삶으로 보여 주는 사랑의 급진주의자 이야기

"저항할 수 없는 믿음 혁명이 당신 안에서 시작되고 당신의 작은 사랑의 행동을 통해 온 세상을 덮게 될 것이다.
다시 크리스천으로 살기를 시작하자. 예수님이 용기를 주신다."


"쉐인 클레어본의 이 책은 새로운 세대의 신자들이 깨어나고 있으며, 다시 새롭게 복음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고 있음을 보여 주는 이 시대 최고의 증거다." (짐 월리스)

▲ <믿음은 행동이 증명한다> / 쉐인 클레어본 지음 / 배응준 옮김 / 아바서원 펴냄 / 400쪽 / 1만 6000원

자본, 폭력, 권력, 전쟁에 깊이 물들어 있는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의지를 찾지 못하는 오늘날 교회는 천국의 희망을 전하는 것으로 교회의 사명을 다한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 더불어 세상의 가치관을 복음 속에 버무려 넣어 세상 사람들에게 거북스럽지 않은 교회가 되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있다. 이런 교회의 틀 안에 있는 교인들은 나에게'만', 우리 가족에게'만' 복을 준다는 편안한 말씀을 듣기에 익숙해져 있을 뿐만 아니라,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만 알았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전혀 고민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뜻에 무뎌져 가는 교회와 성도들에게 행동하는 믿음을 보여 온 저자 쉐인 클레어본은 안전하고 편안한 복음이 아닌, 위험하고 불편한 복음을 이야기한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을 따르기로 결단했다면, 호불호에 따라 말씀을 선별해서 실천할 것이 아니라 삶 속에 그대로 말씀이 구현되어야 한다고 외친다. 말씀을 깨달았다면 그대로 실천해야 하는 단순한 원리에 순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말만 하는 전도자가 아니다. 그런 외침과 더불어 삶 속에서 말씀이 진실로 실현되는 것을 증언하며 살고 있다. 쉐인은 대학 시절 필라델피아 뒷골목의 노숙자들을 돕는 일을 시작으로, 인도 캘커타에서 테레사 수녀와 함께 나환자 돌봄 사역에 합류했으며, 9‧11테러 이후 미군의 폭격으로 부상당한 바그다드의 환자들을 치료하며 위로하기 위해 이라크를 방문하기도 했다. 또한 월스트리트 거리에서 희년 의식을 거행함으로 성경적 경제관을 외치기도 했다.

대학 졸업 후에는 무소유 공동체 '심플웨이'를 설립해서 노숙자들과 도심의 가난한 자들에게 음식과 의복을 제공하며 보육과 의료 혜택을 베풀며 그들의 신앙과 재활을 돕는 운동을 펼치고 있다. 이 공동체는 초대교회의 모습을 실현해 내며, 사랑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

이 책은 반쪽 복음을 넘어서서 믿고 깨닫는 대로 실천하는 믿음 이야기다. 말씀을 듣고도 편안함에 빠져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불편하고 부끄럽고 두렵게 하는 책이다. 말씀을 깨달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워하는 이들에게 믿음을 실천하게 도와주는 지침서다. 잠자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거부할 수 없는 혁명(Irresistible Revolution)', 믿음 혁명으로 초대하는 통렬한 외침이다.

쉐인 클레어본(Shane Claiborne) 

무소유 공동체 '심플웨이(Simple Way)' 설립자 쉐인 클레어본은 사랑의 근본적인 의미와 기독교의 뿌리를 찾아간다는 의미에서 스스로를 '평범한 급진주의자'라 칭하며, 죄로 인해 엉클어진 세상의 탄식에 귀 기울이고 그 탄식에 대한 대안을 적극적으로 만들어 내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는 대학 시절 어느 교수에게서 "세상이 네 영혼을 도적질하지 못하게 하라.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예수를 선택한다는 것이며, 목숨을 걸고 담대하게 어떤 것을 하겠다고 결단하는 것이다"는 이야기를 듣고 도전을 받아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 후 인도 캘커타로 가서 테레사 수녀와 함께 10주 동안 나환자들을 돌보면서 심령이 가난한 자들에게 임하는 천국을 보았고, 그들의 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

2003년 3월에는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평화봉사단원으로 일하며 폭격이 있었던 지역과 병원을 방문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과 함께 활동하고 예배했다.

또한 2004년에는 쓰나미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팀을 결성하여 태국 현장에서 사역했으며 저개발 국가의 수질 개선을 위한 '우물 파 주기 운동'과 인터넷 모금 운동인 '관계의 십일조 운동'을 통해 전 세계의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긍정적인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2011년 5월 케이티와 결혼하여 필라델피아에서 살고 있다.

심플웨이 리더이자 주목받는 설교자로서 평화, 사회 정의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활발히 전하며 여러 책을 집필했다.
대표 저서로 <행동하는 기도>(IVP 역간)가 있다.

심플웨이 홈페이지 www.thesimpleway.org


"이 땅의 크리스천들에게 각성제가 되어 줄 것이라 확신하는 책이다. 감히 성경 곁에 함께 두고 읽어야 할 또 한 권의 책으로 추천한다. 부디 스마트폰을 팔아서라도 사서 읽기를!" -김성수, 예드림교회 목사. 작은도서관 '호모북커스' 대표

"작금의 한국교회 상황을 마음속 부담으로 가진 자들이라면, 어떻게 예수를 진정으로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할지 고민하는 자들이라면, 이 책을 꼭 읽으라. 바다 건너에서 우리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믿음의 동지를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김형국, 나들목교회 대표 목사. <교회 안의 거짓말> 저자

"한국교회의 거듭된 삽질에 기독교인임을 반납하고 싶은 사람, 물 타지 않은 복음 그대로를 '래디컬'하게 전하고 살아야 한다고 믿는 사람, '허다한 무리'에 속하길 거부하고 예수가 간 좁은 길을 우월감 없이 가려는 사람이라면 닥치고 이 책을 읽으라. 그리고 여러분 하나하나가 우리 시대가 보길 원하는 겸손한 대안'들'이 되라. 교회에 희망이 없다고 하지 말라. 우리가 교회다." -박총, 작가. 도심형 재속재가수도원 '신비와저항' 원장

"그리스도께 무조건적으로 순종하려는 저자의 열정을 반만이라도 닮는다면, 오늘날 복음주의 운동은 엄청난 능력을 갖게 될 것이고, 우리는 이 깨어진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로날드 사이더, <가난한 시대를 사는 부유한 그리스도인> 저자

"이 책을 읽다 보면 나처럼 당신도 불편함을 느낄 것이다. 우리에게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이런 불편함이 필요하다." -브라이언 맥클라렌, <새로운 그리스도인이 온다> 저자

"당신이 쉐인을 안다면, 이 책의 페이지마다 소리치는 저항할 수 없는 그의 외침을 듣게 될 것이다. 당신이 쉐인을 모른다면, 페이지마다 담겨 있는 저항할 수 없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게 될 것이다." -레너드 스위트, <귀 없는 리더? 귀 있는 리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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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하지만 진정한 기도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이해하는 사람은 드물다. 크리스천은 기도가 무엇인지 묻고 깨달을 책임이 있다. 이에 대한 도움을 줄 R. C. 스프로울의 신간 ‘어떻게 기도할까?’가 15일 발간됐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예수님의 제자들조차 자신들의 기도생활이 미흡하다고 느껴 예수님께 도움을 청했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실제로 마태복음 6장을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께 기도하는 법을 알려달라고 요청하는 내용이 있다. 그리고 그 일을 계기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우리가 알고 있는 ‘주기도문’을 가르쳐주셨다.

오늘날의 일부 그리스도인들처럼 이 기도문을 기계적으로 암송하는 것은 결코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바가 아니었다. 저자는 주기도문이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할 때 실천해야 할 원리들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기도의 모델이라고 이야기한다. 또한 주기도문의 각 구절, 심지어 한 단어 한 단어까지 자세히 살펴보고 그 원리들을 찾아내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권면하신 것이 무엇이었는지 분명하게 가르쳐준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기도에 대한 도움을 요청한 까닭은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누리신 관계의 풍성함을 경험하고자 하는 갈망이었다. 따라서 이 책을 통해 주기도문의 문자적 의미를 넘어 예수님이 그 속에서 가르쳐주시는 진리들을 발견함으로써, 현대의 제자들 또한 더 풍성하고 깊은 하나님과의 동행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 책에서 R. C. 스프로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기도의 모델 주기도문이 자주 간과되고 오해되기 십상인 영적 훈련의 원리들을 담고 있는 보고임을 설명한다. 그는 먼저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할 기도의 예들을 보여준 다음, 한 구절 한 구절 주기도문을 파헤친다. 특유의 명료함으로 각 구절의 의미를 새롭게 조명할 뿐 아니라 한 발 더 나아가 주기도문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기타 주제들, 즉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뜻, 용서, 유혹 등에 대해 자세히 풀어준다. 또한 부록에서는 기도에 관한 여러 가지 질문과 답,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과 기도 간의 복잡한 신학적 관계에 대한 해결책을 제공한다.

결론적으로 R. C. 스프로울의 <어떻게 기도할까?>는 그리스도인 삶의 전 영역에 있어서 기도가 어떻게 기능해야 하는지 보여주는 책이다. 이 책을 통해 성도들은 하나님에 대해, 그리고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더 깊은 이해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추천글

R. C. 스프로울은 난해한 진리들을 명쾌하고 인상적이며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설명하는 데 천부적인 자질을 지녔다. 그는 주기도문을 가르치기에 이상적인 교사다. 왜냐하면 주기도문 자체가 ‘기도’라는 어려운 주제에 대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놀라울 정도로 간결하게 가르쳐 주신 하나의 심오한 교훈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우리 모두에게 크나큰 유익과 도움을 줄 것이다. - 존 맥아더 (그레이스 커뮤니티 교회 담임목사 / 『담대한 복음전도』 저자)

나는 R. C. 스프로울의 강의를 좋아하는데 이 책은 그의 목소리와 흡사하다. 놀랍도록 생생하게 진리를 꿰뚫는 바로 그것이다. 그의 뛰어난 인용솜씨와 목회감각에서 나온 지혜는 그의 강의를 듣는 것만큼이나 읽기 수월하게 만들어준다. (게다가 책이 짧아서 금상첨화다!) 스프로울은 간결하고 정확한 문장으로 성경말씀을 명료하게 해석해준다. 그는 중요한 것들, 즉 기도는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 역사에 대한 진리들을 간결하고 명료하게 전달하고 있으며 충분히 제대로 알고 있다. 말미에는 도움을 주는 질의응답까지 덧붙여져 있다. 이 책은 이제 명실공히 기도의 고전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것이다. - 마크 데버 (캐피털힐침례교회 담임목사)

R. C. 스프로울은 내가 처음으로 신학을 배운 선생님이다. 갓 믿은 신자로서 나는 그가 진행하는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Renewing Your Mind)’ 라디오 방송을 청취하면서 신학과 철학, 교회사에 대해 엄청나게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제 그는 <어떻게 기도할까?>를 통해 자신의 방대한 신학적, 철학적, 역사적 재능과 자원들을 기도라는 중대한 주제에 쏟아 붓고 있다. 이것은 워낙 중요한 주제인 만큼 잘 숙련된 선생의 손에 다루어져야 마땅하다. 그가 나에게 가르쳐준 다른 모든 것과 더불어,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의 우선순위를 배우는 데 그의 인도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더없는 특권이다. 이 짧은 책을 읽고 나면 당신 앞에 기도생활의 새로운 패턴이 펼쳐질 것이다. - 타비티 안야빌리 (케이맨 제도 그랜드 케이맨 제일침례교회 담임목사)

저자소개

R. C. 스프로울 - 개혁주의 신학계를 이끄는 저명한 신학자로 심오한 진리들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는 글과 강의로 유명하다. 또한 딱딱하게 들리던 성경 교리를 명쾌한 논리와 적절한 예화로 풀어, 성경 말씀이 주일 예배뿐 아니라 나머지 6일의 삶과 떨어질 수 없게 연결고리를 만들어준다.

낙스신학대학교 등 여러 주요 신학교에서 신학과 변증학 교수로 재직했으며 현재는 플로리다주에 위치한 세인트 앤드류 채플(St. Andrews Chapel)의 담임목사로서 말씀을 전하고 있다. 평신도 교육에 열정을 품고 70여 권의 책을 저술했으며, 리고니어 선교회와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Renewing Your Mind)’라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기독교의 진리를 일반인들에게 알리려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1994년 『크리스채너티투데이』의 비평가들이 뽑은 ‘신앙생활에 가장 큰 영향을 준 학자’ 3위에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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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존 프리처드/김홍일, 민경찬/비아/강도헌 편집위원

기도하는 인간(homo orans)

 

 

인간은 기도하는 존재이다. 인간으로 태어나 그가 종교가 있든 없든 기도 한 번 하지 않고 죽는 인간을 없을 것이다. 또한 기도는 그리스도교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종교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처럼 인간은 왜 기도하는 것일까? 여러 가지 관점에서 답을 찾을 수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느낌과 생각을 인간은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기도의 목적에 대해 기독교 영성가 오스왈드 챔버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기도의 목적은 이상적이지 않은 현실에서 하나님과 이상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자세를 취하는 것이다. 이곳에서의 현실은 우리에게 이상적인 조건을 제공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를 실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챔버스는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 것과는 먼 이상적이지 않은 현실이 주님과의 관계를 촉진시키고, 우리의 기도의 목적 또한 우리가 원하는 이상적인 현실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상적이지 않은 현실 속에서 실현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기도는 현실적이지만, 현실을 초월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꿈과 기도의 관계

 

요즘 교회에서는 현실을 초월하는 것에 대해 꿈과 비전이라는 단어들을 사용한다. 그래서 교파를 초월해 꿈과 비전이라는 단어는 오늘날 교회에서 매우 익숙한 단어들이다. 특히 청소년이나 청년들에게는 주요 설교 주제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필자도 과거 청년부를 지도할 때 꿈과 비전에 대해 많은 설교들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최근에 필자는 청년들에게 비전과 꿈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가 조심스럽고 꺼려진다. 금수저, 흙수저, 3포 세대, 4포 세대를 넘어 9포 세대라는 말까지 나오는 터라 말장난처럼 보일까봐 극도로 조심하고 있는 상황이다. 지금은 청년들 뿐만이 아니라 모든 세대가 미래에 대해 비전과 꿈을 가지기 보다는 불안감들이 감돌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이럴 때 청년들과 성도들에게 어떤 설교를 해야 할까? 믿음을 강조하면서 어떤 꿈과 비전을 제시할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지금 교회와 성도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초월은 물질적 어려움에서 벗어나 물질적 풍요를 원하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물질적인 초월이다. 그래서 이 시대의 기도 또한 개인의 필요와 욕구들을 채워 달라는 기도, 혹은 고통이나 물질적인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는 기도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물론 물질적 기도를 드리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모든 관심과 기도가 여기에 무게를 두고 거기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성경적으로 볼 때 미래가 그렇게 밝지 못하다.  

 

기도는 무엇인가?

 

종교학자들은 기도에 대해 인간의 욕망과 욕구에 대한 갈망이 기도의 출발이라고 말한다. 즉, 인간의 욕망과 욕구는 끝이 없기 때문에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이 기도를 하게 한다는 것이다. 둘째,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이 기도를 하게 한다고 말한다. 즉, 인간의 불완전함은 완전함을 추구하고, 인간의 유한함은 영원을 추구하게 하면서 종교와 기도가 발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 들이 과거에는 어떠했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이 시대의 교회들에게는 상당부분 맞는 말인 것 같다.

 

기독교 안에서 기도에 대한 정의는 단 한 가지가 아니다. 다양한 기도의 정의들은 기도의 의미를 더 풍성하게 해 준다. 그러한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라는 정의에 공감하고 있다. 그러한 가운데 기독교는 오랜 역사동안 다양한 하나님과의 대화 방법들을 발견하고 실천해 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기도의 정의, 기도의 방법들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재 삶의 시간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자리를 만들고 기도함으로 나아가야 한다.  

 

시작하기

 

본서는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1부의 주제는 ‘시작하기’이다. 그렇다 기도는 시작해야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기도의 필요성은 느끼고 있으나 막상 기도를 시작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본서는 기도를 시작하기 위해 먼저 삶의 속도를 늦추어라고 시작한다. 참된 기도(독백이 아닌 하나님을 만나는 기도)는 일상의 삶을 멈추고 하나님께 집중해야만 시작할 수 있다. 그래서 삶의 속도를 늦추어야 한다. 이때 기도의 길이, 기도의 질, 지식의 수준은 기도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러한 것들에 신경을 쓰는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 만남 보다는 자기 만족을 추구하기 쉽다. 시작하는 기도의 기도는 실재로 기도를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고, 자기의 솔직한 마음을 담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처음부터 하나님과 친밀한 사람은 없다. 기도를 지속함으로 친밀함은 발전하게 된다. 그러므로 어색하더라도 기도를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 먼저 기도를 위한 시간을 찾아라. 기도에 도움이 되는 음악, 성경본문, 그림(헤겔에 따르면 상징은 인간의 종교성을 충족시키기 위해 고안된 표현 형태이다. 이러한 상징에 집착하는 ‘상징주의’는 참된 영적 깨달음을 방해한다. 헤겔은 상징을 통해 얻어지는 상징적 지식과 하나님과 친밀한 만남을 통해 얻어지는 직접적 이해(통찰)를 날카롭게 구분한다. 그러나 상징자체를 부정하는 것 또한 ‘문자주의’의 위험을 안고 있다. 전문 독자라면 상징에 대한 헤겔의 견해를 두고 로마 가톨릭의 신학자 칼 라너, 개신교 신학자 폴틸리히, 그리고 고대 교부 아타나시우스의 상징에 대한 논의들을 참고하라. 칼빈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들을 활용하는 것에 대해 부정하지 않는다.) 등을 활용해도 좋다. 관건은 규칙성에 있다. 습관적으로 기도하는 것은 좋지 않지만, 기도가 습관이 되는 것은 중요하다.  

 

더 깊게 들어가기

 

2부는 ‘더 깊게 들어가기’이다. 기도가 습관이 되면서 영적인 성장이 일어나고 영적인 성장을 통해 기도의 방식도 성장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침묵을 통한 기도로 들어간다. 즉, 듣는 기도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 때 중요한 것은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깊이 들어가기 위해서는 깊이 들어가는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때 의식을 집중하여 응시하는 ‘관상’(관상에 대해 개신교는 약간의 오해가 있다. 뉴에이저들이 사용하는 기법이라 하여 이교도적 행위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이것은 오해다. 관상은 집중하여 응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시험 문제를 풀거나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집중하여 응시하는 것 또한 관상적 방법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관상에 대해 무조건적 반감은 자제가 필요하다.)적 자세를 통해 집중하는 것이 필요하다. 관상은 하나님을 향해 시선과 의식을 집중하는 것으로, 자기 집착에서 벗어나 하나님께로 집중하도록 인도한다.

 

여기서 깊은 기도에 대한 오해 또한 풀어야 한다. 깊은 기도에 들어가면 신비한 것을 보거나 체험하는 것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실재는 그렇지 않다. 깊은 기도로 들어가는 과정은 사막을 통과하는 것과 같다. 새로운 미지의 세계는 온갖 보화들로 가득차 있는 것이 아니라 황량한 사막과 같은 느낌을 받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황량함은 그곳에서 다가오시는 주님께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 요소이기도 하다. 하지만, 자칫 하면 지루함을 느끼게 되고 기도에 흥미를 잃을 수도 있는 기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다시 현실적이고 외적인 것들을 추구하는 삶으로 되돌아 갈 수 있음도 유념해야 한다. 그러나 이 시간들을 기도로 잘 극복해 나가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와 총명함을 통해 통찰력들이 생기게 된다. 이 때 중요한 것은 기도를 통해 깨달은 바들을 행동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계속해서 나아가기

 

3부는 ‘계속해서 나아가기’이다. 이 부분에서는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지금 기도에 대한 다양한 질문들을 던지고 거기에 대한 답들을 제시하고 있다. ‘과학 법칙이 지배하는 우주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요?’, ‘기도가 응답받지 못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나요?’, ‘기도할 때 별다른 느낌이 들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어떻게 해야 기도의 활력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등의 질문과 답을 소개한다.  

 

평생에 걸친 여정

 

인간을 구분하는 관점과 기준들은 매우 다양하다. 그중에서 필자는 본서를 읽으면서 ‘기도하는 인간’, ‘기도하지 않는 인간’으로 구분해서 생각해 보았다. 물론 기도에 대해 필요성을 못 느끼는 사람들은 여기서 배제된다. 기도의 필요성을 느끼면서도 기도하지 않는 인간이 왜 있을까? 분명 그들은 기도를 미루거나, 기도를 못하는 분명한 변명거리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본서를 읽어보라. 기도는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할 수 있는 것이다. 눈을 감고 할 수도 있고, 눈을 뜨고 할 수도 있다. 성경을 읽으면서도 할 수있고, 일을 하면서도 할 수 있다. 기도는 언제 어디에나 계시는 하나님을 향해 언제 어디에서나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고, 언제 어디에서나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평생동안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의 기도 생활은 평생의 여정임이 분명하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면 기도를 미루거나 생략하는 인간이 아니라 기도하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 본서는 기도의 큰 그림과 핵심을 어렵지 않게 안내해 주고 있다.  

 

존 프리처드 (John Pritchard) 


1948년생. 성공회 성직자이자 문필가. 옥스퍼드 세인트 피터 갈리지, 케임브리지 리들리 홀에서 공부한 뒤 1973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이후 지역 교회 사목 활동과 동시에 잉글랜드 성공회에서 진행하는 그리스도교 교육 활동과 관련하여 여러 직책을 맡았다. 2002년에는 주교 서품을 받았으며 2006년부터 2014년까지 옥스퍼드 교구의 주교로 활동했다. 현재 SPCK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성숙과 영성 생활을 돕는 다양한 저작을 썼으며 주요 저서로 『기도하는 법』How to Pray(2002), 『교회에 가다』Going to Church(2009) 등이 있다.   

   

출판사의 책소개

 

기도에 관한 입문서. 그리스도교 신앙생활의 알짬이라 할 수 있는 기도가 무엇인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살핀다. 어떻게 기도라는 여정을 심화시켜 나갈 것인지, 이때 우리가 갖추어야 할 것들은 무엇인지,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들은 무엇인지 찬찬히 설명한다. 부록으로는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시행하고 있는 기도의 종류를 소개하고 있으며 함께 읽을 만한 책들에 대한 역자의 해설을 수록했다. 기도라는 주제와 관련해 궁금한 이들, 기도의 삶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이들에게 도움을 주는 얇지만 단단한 입문서다.  

   

목차

 

들어가며

1. 시작하기

2. 더 깊게 들어가기

3. 계속해서 나아가기

해설 : 기도의 단계와 그리스도교 전통의 기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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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자에게 필요한 30가지 영적기초(탐 크라우터)

책소개

탁월한 예배 컨설턴트 탐 크라우터가 들려주는 예배의 마음가짐과 태도에 관한 책이다. 이 책은 형식으로서의 예배를 뛰어넘어, 삶으로 드리는 예배의 다양한 가치를 간결하고도 명확하게 풀어내고 있다. 예배의 근간이 되는 개인 신앙에서부터 성품 훈련과 공동체에 이르기까지 핵심적인 기본 진리들을 제시하고 있으며 하나님과 친밀감, 예수님의 성품 닮기, 하나 됨’이라는 세 가지의 큰 틀 안에서 예배의 마음을 배울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 책을 통해 화려한 음악적 기술을 추구하기에 앞서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진정한 예배자’의 모습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책요약

예배란 음악적 완성이나 무대 위의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에서 흘러나오는 삶의 열매임을 강조한다.

예배자는 먼저 구원에 대한 확신 위에 서서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친밀함을 누리는 사람이며, 성령을 의지해 자신의 재능이 아닌 하나님의 임재를 드러내는 자이다. 그러한 예배자는 겸손과 순종, 거룩함과 감사의 태도로 삶과 예배가 분리되지 않도록 살고, 개인 사역자가 아니라 교회의 지체로서 공동체와 리더십을 존중하며 팀 안에서 섬김과 화합을 이루어 간다.

또한 예배 사역을 취미가 아닌 부르심으로 받아들이고 성실한 준비와 훈련, 시간과 약속을 지키는 책임 있는 자세로 재능을 청지기처럼 관리하며, 사람의 인정이나 무대의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유일한 목표로 삼는다. 결국 참된 예배자는 비교와 경쟁을 내려놓고 삶 전체를 예배로 드리며, 쉼과 균형 속에서 지속적으로 성장해 가는 사람이라는 것이 이 책이 말하는 예배자의 영적 기초이다.

목차

1부 예배자는 하나님과 친밀감을 누려야 한다

1. 하나님은 친밀한 관계를 갈망하신다

2. 당신의 신앙은 ‘말’인가, ‘삶’인가?

3. 우리는 모두 죄인이다

4. 다시 주님 앞으로 나아가라

5. 하나님의 사랑은 값없는 선물이다

6. 삶에서 행하는 우상 숭배를 멈추라

7.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하라

8. 당연한 것을 기적으로 여기라

9. 날마다 새로운 감격을 누리라

10. 모든 것으로 주님을 예배하라

2부 예배자는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야 한다

11. 성품은 영혼 깊이 스며들어 있다

12. 온유함이 곧 강함이다

13. 성실은 의무다

14. 정직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15. 절제할 때 자유로워진다

16. 감사를 표현하라

17. 겸손에는 영광이 뒤따른다

18. 올바르고 경건한 선택을 하라

19. 인내는 과정이다

20. 성품 테스트를 통과해야 한다

3부 예배자는 하나되는 삶을 추구해야 한다

21. 가상세계에서 탈출하라

22. 서로의 필요를 받아들이라

23. 권위에 순종하라

24. 자기 의견만 고집하지 말라

25. 긍정적인 부분만 보려고 노력하라

26. 서로 격려하라

27. 부정적으로 말하지 말라

28. 서로 용납하라

29. 의리를 지키라

30. 하나 됨을 이루기 위해 힘쓰라


















성경적 인간관 / 호모 모벤스(Homo Movence), 호모 아니말 폴리티쿰 에스트(Homo animal politicum est), 호모 베네디켄스(Homo benedicens), 호모 로쿠엔스(Homo Loquens), 호모 스피리투스(Homo Spiritus),


성경적인 복

 1. 영의 복 - 사랑
 2. 혼의 복 - 양심
 3. 육의 복 - 건강  

성경적인 인간이란 영 혼 육의 조화를 갖춘 존재 

어느 나라에 나이가 많아 후계자를 정해야 하는 왕이 있었습니다.
왕은 사람들의 정직함을 시험하기 위해 특별한 방법을 씁니다.
“빈 화분(Empty Pot)” 

  • “가장 아름답게 키운 사람을 왕으로 세우겠다”

  • 1년 뒤, 모든 아이들이 화려한 꽃이 없는 화분을 들고 궁전에 옵니다.
    단 한 아이만 빈 화분을 들고 옵니다.
    그는 씨앗이 자라지 않아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고 솔직하게 말합니다.
  • 왕은 그 아이를 보고 말합니다. 
    “바로 이 아이가 정직한 사람이다.”

  • 결국 왕은 그 아이를 후계자로 선택합니다.  

    결과보다 중요한 것은 정직함,  속일 수 있는 상황에서도 진실을 말하는 용기
  • 지도자가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은 성실, 정직, 지혜
  • 서양 우화와의 비교 (이솝식 구조) 

    서양 우화에도 비슷한 구조는 있지만 강조점이 조금 다릅니다. 

     이솝 우화: “거짓말하는 목동과 늑대”   “정직한 나무꾼” 

     공통점 :  도덕적 교훈 (Moral lesson),  왕, 권력자 대신 자연 또는 상황이 시험

     차이점  :  서양 우화는 보통 행동의 결과(보상/처벌) 중심

  •                  동아시아 설화는 인격의 진실성 자체 중심
  • 성경적 “정직” 개념과 비교

    성경에서는 정직이 단순한 “거짓말 안 함”보다 훨씬 깊습니다.

    1. 하나님 앞의 진실성

    • “사람 앞”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마음”
    • 외적 결과보다 내면의 중심(heart)

    예 :  사무엘상 16:7 /  “사람은 외모를 보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신다” 

    2. 꽃씨 이야기와 다른 점

    항목 꽃씨 설화 성경
    평가 기준      정직한 행동       하나님과의 관계
    초점   사회적 검증        영적 중심
    보상     왕의 선택        하나님의 인정
    문제 해결    실패 = 정직      실패 = 회개와 은혜  

    3. 성경적 관점에서 재해석하면  이 이야기는 이렇게 바뀝니다:

    • “정직해서 왕이 선택했다” → 성경
    • “정직해도 실패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음을 본다”

    즉, 성경은  결과보다 “진실 + 은혜 + 관계”까지 포함 

    • 유교 윤리 : “관계와 조화 속에서의 정직”
    • 그리스· 로마 윤리 : “이성과 덕(virtue)으로서의 정직”
    • 성경 윤리 : “하나님 앞에서의 진실함(절대 기준)” 

    유교 윤리 : “관계 속 진실”

    유교

    • 핵심 : 인(仁), 예(禮), 효(孝), 의(義)
    • 정직 = “사실 그대로 말함”보다 관계를 깨지 않는 진실
    • 특징 :
      • 직언보다 “조화 유지”
      • 상하 관계 고려 (부모, 군주, 공동체)
      • 때로는 “침묵”도 윤리적 선택

    결론 / 정직 = 관계를 보존하는 방향의 진실 

    그리스· 로마 윤리 : “이성과 덕의 정직”

    그리스·로마 윤리

    • 핵심: logos(이성), arete(덕), 자연법
    • 대표 사상:
      • 아리스토텔레스: 덕 윤리
      • 스토아 철학: 이성에 따른 삶
    • 정직 = 이성적으로 올바른 말과 행동

    특징 :

    • 감정보다 이성 우선
    • 사회보다 “개인 덕성” 강조
    • 진실은 “합리성”으로 판단

     결론 :
     정직 = 이성에 일치하는 덕성  

    성경 윤리 : “하나님 앞에서의 진실”

    성경

    • 핵심 :
      • 하나님은 진리 자체 (요 14:6)
      • 거짓은 단순 오류가 아니라 “죄”
    • 정직 = 하나님 앞에서 숨김 없는 상태

    특징 :

    • 인간 관계보다 “하나님 기준” 우선
    • 외적 행동보다 “마음 중심” 강조
    • 진실은 상대적이 아니라 절대적 기준

     결론 :
    정직 = 하나님 앞에서의 투명성 

    결정적 차이 한 문장 정리

    • 유교 → “관계가 깨지지 않는가?”
    • 그리스·로마 → “이성이 맞는가?”
    • 성경 →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가?” 
    • 유교 : 사회/관계
    • 그리스· 로마 : 이성/논리
    • 성경 : 하나님/절대 진리

     정직의 방향

    • 유교 : 조화 중심 정직
    • 그리스·로마 : 덕 중심 정직
    • 성경 : 존재 중심 정직

    거짓의 의미

    • 유교 : 관계 파괴 위험
    • 그리스· 로마 : 비이성적 행위
    • 성경 : 죄 / 하나님과 단절 

    세 체계 모두 “정직”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다릅니다:

    • 유교는 “사회적 정직”
    • 그리스·로마는 “철학적 정직”
    • 성경은 “신학적 정직”


    Homo Universalis 
    1. 발음

    • 라틴어식 : 호모 우니베르살리스
    • 영어권에서는 보통 호모 유니버설리스에 가깝게 발음합니다.
    • 한국어 표기 : 호모 우니베르살리스(Homo Universalis)

    2. 단어의 뜻

    Homo = 인간, 사람
    Universalis = 보편적인, 전체를 아우르는, 여러 분야에 걸친

    따라서 Homo Universalis는 문자적으로  “보편적 인간”, “다방면의 인간”, “여러 영역에서 탁월함을 추구하는 인간”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르네상스, 15–16세기
    “만능인(萬能人)”, 즉 르네상스의 인간형 호모 우니베르살리스(Homo Universalis)을 대표하는 인물로 평가됩니다.

     왜 ‘만능인’이라고 하는가?

    다 빈치는 한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라 서로 다른 영역을 연결하여 탐구한 사람이었습니다.

    분야 다 빈치의 활동
     미술       《모나리자》, 《최후의 만찬》
     해부학      인체의 근육·뼈·장기 등을 직접 관찰하고 그림으로 기록
    공학      비행기·헬리콥터·전차·다리 등의 설계 구상
     과학      빛, 물, 지질, 천체 현상 등을 연구
    수학      기하학과 비례 연구, 《비트루비우스적 인간》
    건축      도시계획과 건축 설계
    유체역학      물의 흐름과 소용돌이 연구
    자연학      식물·동물·지질의 구조 관찰
    무대예술      궁정 축제와 공연의 무대장치·연출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 ‘연결하는 사람’

    다 빈치의 진정한 특징은 지식의 양보다 관찰 → 질문 → 연결 → 표현의 방식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는 새의 비행을 관찰하면서 단순히 “새가 어떻게 나는가?”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새의 날개 → 공기의 움직임 → 인간의 비행 → 비행기계라는 식으로 서로 다른 영역을 연결했습니다. 
    그래서 다 빈치의 노트에는 미술과 해부학, 수학과 기계공학, 자연관찰과 철학이 한꺼번에 등장합니다. 

    《모나리자》와 해부학이 연결되어 있다

    다 빈치는 훌륭한 화가가 되기 위해서도 인간의 몸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시체를 해부하고 근육과 뼈의 구조를 연구했습니다. 
    그 결과 그의 인체 그림은 단순한 미술 작품이 아니라 해부학적 관찰 기록이 되었습니다. 
    즉, 과학이 미술을 도왔고, 미술이 과학적 관찰을 정밀하게 만들었습니다.  

    다 빈치의 유명한 특징

    그의 수첩에는 완성된 논문보다 끝없이 이어지는 질문이 많습니다.

    • 왜 물은 소용돌이를 만드는가?
    • 새는 어떻게 나는가?
    • 빛은 어떻게 움직이는가?
    • 사람의 미소는 어떤 근육의 움직임에서 생기는가?
    • 심장은 어떻게 피를 움직이는가?
    • 인간은 어떻게 날 수 있는가?

    따라서 다 빈치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어는 ‘천재’보다 ‘호기심’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적· 교육적으로 적용한다면

    “하나님이 주신 지혜는 한 영역에 가두어 두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하여 세상을 더 깊이 이해하도록 사용해야 한다.”

    특히 성경 공부에서도 비슷한 원리를 적용할 수 있습니다. 
    성경 본문 → 원어 → 역사 → 문맥 → 신학 → 인간의 삶 을 서로 연결하면 
    단순히 성경구절을 암기하는 것을 넘어 본문 전체를 보는 눈이 생깁니다.

    그래서 다 빈치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많이 배운 사람이 아니라, 모든 것을 서로 연결하여 보려고 했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 
    다윗 고대 이스라엘, BC 10세기경  

    A man after God's own heart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성경적으로 가장 대표적인 표현입니다. 
    다윗을 가리킬 때 사용됩니다.   
    “a man after my own heart”
    “내 마음에 맞는 사람” — 사도행전 13:22  

    표현 분석 
    a man -  한 사람 
    after -  ~을 따라, ~에 맞는 
    God's own heart -  하나님 자신의 마음

    따라서 직역하면
    “하나님 자신의 마음을 따라가는 사람”,
    의미상으로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입니다. 

    여성까지 포함한 일반적인 표현 
    A person after God's own heart
    →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는 표현은 성경에서 특히 다윗을 가리킬 때 사용됩니다. 

    히브리어 표현

    사도행전 13:22에서 구약의 다윗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ἄνδρα κατὰ τὴν καρδίαν μου
    andra kata tēn kardian mou
    “내 마음에 맞는 사람 / 내 마음을 따른 사람”

    그 배경이 되는 히브리어 표현은 사무엘상 13:14입니다.

    אִישׁ כִּלְבָבוֹ
    ʾîš kilĕbābô
    이쉬 킬레바보

    • אִישׁ (ʾîš, 이쉬) = 사람, 남자
    • כְּ־ (kə-, 케-) = ~처럼, ~에 따라
    • לֵבָב (lēbāb, 레바브) = 마음, 내면, 생각, 의지
    • וֹ (-ô) = 그의

    따라서 직역하면:

    אִישׁ כִּלְבָבוֹ = “그의 마음에 따른 사람”

    즉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2. 핵심 성구 — 사무엘상 13:14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령하신 것을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왕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느니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다윗을 선택하신 이유가 다윗이 완전한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윗도 큰 죄를 범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중심에는 하나님을 향한 회개와 순종과 신뢰가 있었습니다.


    3. 신약에서 명확하게 해석됨 — 사도행전 13:22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헬라어:

    εὗρον Δαυὶδ τὸν τοῦ Ἰεσσαὶ, ἄνδρα κατὰ τὴν καρδίαν μου, ὃς ποιήσει πάντα τὰ θελήματά μου.

    특히 핵심은:

    ἄνδρα κατὰ τὴν καρδίαν μου
    안드라 카타 텐 카르디안 무
    = “내 마음에 따른 사람”

    그리고 이어지는 말이 더욱 중요합니다.

    ὃς ποιήσει πάντα τὰ θελήματά μου
    = “그가 나의 모든 뜻을 행할 것이다.”

    따라서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은 단순히 착한 사람이나 종교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인 이유

    ① 하나님을 인생의 중심에 두었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 시편 16:8

    ②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골리앗 앞에서 다윗은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했습니다.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 사무엘상 17:45

    ③ 죄를 지었을 때 회개했습니다. 
    밧세바 사건 이후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받았을 때 다윗은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 사무엘하 12:13

    ④ 하나님의 뜻을 자기 뜻보다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음에도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을 존중했습니다. 

    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교제하기를 원했습니다.

    시편 전체에서 다윗의 마음이 잘 나타납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뜻을 행하기를 내가 원하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 시편 40:8  

    “마음”이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히브리어 לֵבָב (lēbāb)은 단순히 감정을 뜻하는 “마음”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לֵב / לֵבָב은 사람의 생각· 의지· 감정· 판단· 내적 중심을 포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는 말은 “하나님과 감정이 잘 맞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의 내면의 중심이 하나님을 향하고, 그의 생각과 의지와 행동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 
    이라는 뜻에 가깝습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은 죄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사랑하고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께 돌아오며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삶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완전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중심을 가진 사람” 입니다.

    그리고 이 주제에서 매우 중요한 성구가 있습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 사무엘상 16:7

    여기서 “중심”은 히브리어 לֵבָב (lēbāb, 레바브)와 연결됩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사람의 외적인 성공보다 그 사람의 중심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입니다.










    고린도전서 2–3장의 인간 이해를 헬라어로 정리하면 세 가지 유형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1. 육체적인 사람(사르키노스. 사르키코스) 
    — σάρκινος / σαρκικός
    (sarkinos / sarkikos)

    worldly 세속인.      flesh 육체인.                          carnal 육체의, 육체인 

    spiritual 신령한.   spiritual men 신령한 사람.        spiritual 영적인 

    고린도전서 3: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NIV / Brothers, I could not address you as spiritual but as worldly--mere infants in Christ.
    NASB / And I, brethren, could not speak to you as to spiritual men, but as to men of flesh, as to infants in Christ.
    KJV /And I, brethren, could not speak unto you as unto spiritual, but as unto carnal, even as unto babes in Christ.
     

    고린도전서 3:3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You are still worldly. For since there is jealousy and quarreling among you, are you not worldly? Are you not acting like mere men?
    for you are still fleshly. For since there is jealousy and strife among you, are you not fleshly, and are you not walking like mere men?
    For ye are yet carnal: for whereas there is among you envying, and strife, and divisions, are ye not carnal, and walk as men?

    2. 자연인(푸키코스 안드로포스) 
    — ψυχικός ἄνθρωπος
    (psychikos anthrōpos)

    고린도전서 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NIV / The man without the Spirit does not accept the things that come from the Spirit of God, for they are foolishness to him, and he cannot understand them, because they are spiritually discerned.
    NASB / But a natural man does not accept the things of the Spirit of God, for they are foolishness to him; and he cannot understand them, because they are spiritually appraised.
    KJV / But the natural man receiveth not the things of the Spirit of God: for they are foolishness unto him: neither can he know them, because they are spiritually discerned

    3. 성령의 사람(프뉴마티코스) 
    — πνευματικός
    (pneumatikos)

    고린도전서 2: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NIV / The spiritual man makes judgments about all things, but he himself is not subject to any man's judgment
    NASB / But he who is spiritual appraises all things, yet he himself is appraised by no one.
    KJV / But the natural man receiveth not the things of the Spirit of God: for they are foolishness unto him: neither can he know them, because they are spiritually discerned



    육체적인 사람 — σάρκινος / σαρκικός (sarkinos / sarkikos)

    • σάρξ (sarx) = 육체, 타락한 인간 본성
    • σαρκικός (sarkikos) = 육체에 속한, 육신 중심의 사람

    의미

    • 성령보다 본능·욕망·자기중심성이 지배하는 상태
    • 믿음이 있어도 성숙하지 못한 상태를 가리키기도 함 (고전 3:1)

    특징

    • 분열, 시기, 다툼 (고전 3:3)
    • 인간적 기준으로 판단
    •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 욕구 중심

     자연인 — ψυχικός ἄνθρωπος (psychikos anthrōpos)

    • ψυχή (psychē) = 혼, 생명, 자연적 자아
    • ψυχικός (psychikos) = 혼적, 자연 상태의 사람

    의미 (고전 2:14)

    • 성령이 없는 자연적 인간 상태
    • 영적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

    특징

    • 하나님의 영적 일을 “어리석게” 여김
    • 영적 분별 능력 없음
    • 이성·감정 중심의 삶

     성령의 사람 — πνευματικός (pneumatikos)

    • πνεῦμα (pneuma) = 영, 성령
    • πνευματικός (pneumatikos) = 성령에 속한 사람

    의미

    • 성령에 의해 지배·인도되는 사람
    • 영적 진리를 분별하는 상태 (고전 2:15)

    특징

    • 하나님의 뜻을 분별함
    • 영적 통찰력
    • 십자가 중심의 삶
    • 공동체를 세움

    핵심 구조 (고린도전서 기준)

    유형  헬라어       중심 원리
       육체인          사르키코스 / σαρκικός             육신(sarx)
      자연인            프쉬키코스 / ψυχικός             혼(psychē)
    영적인 사람        프뉴마티코스 / πνευματικός           성령(pneuma)  

    한 줄 요약  

       사르키코스 σαρκικός
     :  육체 중심의 타락한 인간  
       프쉬키코스 ψυχικός   :    성령 없는 자연적 인간 
       프뉴마티코스 πνευματικός :  성령으로 사는 영적 인간



    “산다(삶)”의 성경적 의미는 단순히 생물학적으로 존재하는 상태(숨 쉬고 움직임)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주어지고 유지되는 생명을 뜻합니다. 성경은 “삶”을 여러 층위로 구분해서 설명합니다.


    1. 구약: “살다” = חָיָה (chayah)

    히브리어 חָיָה (하야, chayah) 는 “살다, 살아있다, 회복되다”라는 의미입니다.

    • 단순 생존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언약적 생명
    • 하나님과 연결될 때 “참된 삶”이 시작됨

    예:

    • “너희는 살리라”(에스겔 37장 – 마른 뼈 환상) → 단순 생존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임하는 삶
    • 신명기 30:19
      → “생명과 사망 중에서 생명을 택하라”

    👉 구약에서 삶 = 하나님께 붙어 있는 상태


    2. 신약: 두 가지 “삶”

    (1) βίος (bios) – 생존적 삶

    • 음식, 돈, 시간, 생활 방식
    • “먹고 사는 삶”

    예: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은 먹고 마실 것”(마 6:31)

    👉 bios = 생활 수준의 삶


    (2) ζωή (zōē) – 영원한 생명

    • 단순 생존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 자체
    • 요한복음 핵심 개념

    요한복음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한복음 10:10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

    👉 zōē = 하나님과 연결된 영적 생명


    3. 바울 서신: “사는 것 = 그리스도”

    바울에게 삶은 “존재 방식”이 아니라 인격적 중심입니다.

    빌립보서 1:21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 삶 =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시는 상태


    4. 요한신학: “참된 삶 = 하나님 안에 거함”

    요한일서 5:11-12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이것이라”

    👉 핵심 구조:

    • 생명 = 관계
    • 관계가 끊어지면 “죽음” (영적 상태)

    5. 성경적 결론 (핵심 3가지)

    ① 삶은 “존재”가 아니라 “관계”

    • 하나님과 연결됨 = 살아 있음
    • 끊어짐 = 죽음 (영적 의미)

    ② 삶은 “소유”가 아니라 “받음”

    • 내가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

    ③ 삶의 중심은 “나”가 아니라 “그리스도”

    • 성경적 삶 = 자아 중심 → 그리스도 중심 이동 

    한 줄 정리

     성경에서 “산다”는 것은 단순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연결되어 그분의 생명(ζωή)을 누리며 사는 상태입니다.  

    1) 육체적 삶 (Natural / Fleshly Life)

    헬라어로는 주로 두 축이 나옵니다.

    • σάρξ (sarx, 육체)
      단순한 “몸”이라기보다 타락한 인간성 전체를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 ψυχικός (psychikos, 혼적인/자연적)
      바울 문맥에서는 “성령 없이 사는 인간 상태”를 의미합니다.

     핵심 특징

    • 본능, 욕망, 생존 중심
    • 하나님 인식이 제한됨
    • 시간·물질 중심 세계관

     예 :  “ψυχικὸς ἄνθρωπος” (고전 2:14) =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

     2) 영적 삶 (Spiritual Life)

    헬라어 중심 축은 다음입니다.

    • πνεῦμα (pneuma, 영)  하나님의 생명 원리

    • πνευματικός (pneumatikos, 영적인 사람)  성령에 의해 지배받는 인간

     핵심 특징

    • 성령(Πνεῦμα Ἅγιον)의 인도
    • 말씀 인식 능력 회복
    • 하나님 중심 해석 구조

     예 :  “ὁ πνευματικὸς ἀνακρίνει πάντα” (고전 2:15)
              → 영적인 사람은 모든 것을 분별한다  

    3) 부활 생명 (Resurrection Life)

    여기가 신약에서 가장 “종말론적·존재론적” 단계입니다.

    • ζωὴ αἰώνιος (zōē aiōnios, 영생)   단순히 “시간이 긴 생명”이 아니라 질적으로 다른 생명

    • ἀνάστασις (anastasis, 부활)  죽음을 통과한 생명 형태

    • 요한의 핵심 표현: ζωὴ ἐν τῷ υἱῷ (아들 안의 생명)

     핵심 특징

    • 죽음을 이미 통과한 생명
    • 현재 경험 + 미래 완성 구조 (already / not yet)
    • 그리스도와의 연합 존재

     예 :  “ἐγώ εἰμι ἡ ἀνάστασις καὶ ἡ ζωή” (요 11:25)

     4) 3단계 구조 정리 (핵심 비교)

    영역 헬라어 중심 생명의 상태 중심 원리
    육체적 삶 σάρξ / ψυχικός 타락한 자연 상태 자아·본능
    영적 삶 πνεῦμα / πνευματικός 성령 지배 상태 하나님 인식
    부활 생명 ζωὴ αἰώνιος / ἀνάστασις 새 존재 상태 그리스도 연합

    5) 핵심 신학 포인트 (중요)

    이 구조에서 중요한 건 “단계 상승”이라기보다:

     존재의 질이 바뀌는 것입니다.

    • 육체 → 영적 삶: 통제 주체가 바뀜 (σαρξ → πνεῦμα)
    • 영적 삶 → 부활 생명: 존재 방식 자체가 바뀜 (시간적 생명 → 영원한 생명)

    2026년 6월 29일<월> 

    신명기 10:8
    그 때에 여호와께서 레위 지파를 구별하여 여호와의 언약 궤를 메이며 여호와 앞에 서서 그를 섬기며 또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게 
    하셨고 그 일은 오늘날까지 이르느니라.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게 하셨고" 라는 말씀에서 '축복하는 인간'을 소개

    호모 베네디켄스(Homo benedicens) 축복하는 인간 

    “축복하는 인간”은 문맥에 따라 여러 방식으로 라틴어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가장 자연스러운 표현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Homo benedicens / 
    축복하는 인간 
     homo : 인간 
     benedicens : 축복하는, 축복을 말하는

     
    가장 고전적이고 자연스러운 표현 

    Homo benedictionis /  
    축복의 인간
      축복을 지닌 사람, 축복의 존재라는 의미가 강함 

    Homo benedicens aliis / 
    다른 이를 축복하는 인간  

     축복 행위를 더 분명히 강조  

    Homo benedicens(
    호모 베네디켄스)  
    철학적 표현처럼 쓰고 싶다면

    • “인간은 축복하는 존재이다”
      Homo est benedicens.

    “정치적 동물(Animal politicum)”처럼 짧고 상징적인 표어 느낌으로는 Homo benedicens 가 가장 적합합니다.

    호모 베네디켄스(Homo Benedicens) 
    축복하는 인간 

    Homo : 인간, 사람 
    Benedicens := 축복하는, 복을 비는 (benedicere 「축복하다」의 현재분사)

    Homo Benedicens는 문자적으로 "축복하는 인간", "축복하며 살아가는 존재로서의 인간 *이라는 의미입니다.

    성경적 관점에서 인간은 하나님께 복을 받고(창 1:28), 또한 다른 사람을 축복하도록 부름받은 존재입니다. 

    "너는 복이 될지라" (창세기 12:2)

    이러한 의미에서 Homo Benedicens

  • 하나님께 받은 복을 이웃에게 흘려보내는 인간
  • 말과 삶으로 축복을 선포하는 인간
  • 저주보다 축복을 선택하는 인간이라는 신학적 의미를 담을 수 있습니다.

    호모 말레디칸스(Homo maledicens) 저주하는 인간 

    • Homo : 인간, 사람
    • maledicens : 저주하는, 악담하는 (동사 maledicere, "저주하다, 악담하다"의 현재분사)

     말레디칸스(Maledicans)
     Homo maledicens는 직역하면 "저주하는 인간", "악담하는 인간"이라는 뜻입니다.

    비슷한 표현으로는 

       Homo maledicus -  저주를 잘하는 사람, 악담하는 사람 
       Homo exsecrans - 저주를 퍼붓는 인간 (exsecrari -  몹시 저주하다)

    철학적 인류학적 개념어처럼 사용하려면 Homo maledicens가 가장 자연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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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모 모벤스(Homo Movence) 움직이는 인간, 이동하는 인간 

  • Homo : 인간, 사람
  • Movens : 움직이는, 이동하는 (movere - 움직이다에서 유래)

  • 적극적인 사람이라고도 한다.
    그 이유는 고도로 발달한 정보화 사회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새로운 개념의 인간

    인간을 단순히 생각하는 존재(호모 사피엔스)로만 보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화하며 새로운 환경을 개척하는 존재
    로 이해할 때 사용됩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의미로 자주 사용됩니다. 

    신체적으로 움직이는 인간 
    걷고, 여행하고, 탐험하는 존재  

    사회적으로 이동하는 인간 
    직업, 지역, 계층, 문화 사이를 이동하며 살아가는 존재 

    디지털 시대의 유동적 인간 
    인터넷과 모바일 기술을 통해 언제 어디서나 연결되고 이동하는 현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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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모 아니말 폴리티쿰 에스트(Homo animal politicum est) 인간은 정치적 동물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Aristotle(아리스토텔레스)의 유명한 말입니다.

    라틴어 번역

    Homo animal politicum est.
    (호모 아니말 폴리티쿰 에스트)

    • Homo = 인간
    • animal = 동물, 생명체
    • politicum = 정치적인
    • est = ~이다

    고전적으로는 다음 표현도 자주 사용됩니다.

    Homo est animal politicum.
    (호모 에스트 아니말 폴리티쿰)  

    영어 번역

    Man is a political animal.

    Human beings are political animals.

    현대 영어에서는 두 번째 표현이 더 자연스럽고 포괄적으로 쓰입니다. 

    그리스어 표현

    아리스토텔레스의 Politics 에 나오는 표현 

    ὁ ἄνθρωπος φύσει πολιτικὸν ζῷον
    (ho anthrōpos physei politikon zōon)

    직역하면,  “인간은 본성상 정치적 존재이다.”

    여기서 “정치적”은 단순히 정당· 권력을 뜻하기보다,
    공동체 속에서 관계를 맺고 질서를 이루며 살아가는 사회적 존재라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

    (Man is by nature a political animal.)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서 유래한 것 
    그리스어 '조온 폴리티칸((zoon politikon. ζῷον πολιτικόν)을 라틴어로 옮긴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저서 정치학에서 인간은 혼자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공동체(가정, 마을, 국가)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사회적 존재라고 보았습니다.

    여기서 politicum(정치적)은 오늘날의 정당 정치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 1. 공동체를 이루고
  • 2. 법과 질서를 세우며
  • 3. 선과 정의를 추구하고
  • 4. 서로 소통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본성을 가리킵니다.
  • 따라서 이 문장은 단순히 "인간은 정치에 관심이 많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은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도록 창조된 사회적 존재이다." 라는 철학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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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人間에 대한 여러가지 표현 : 호모(homo)


    호모 에라티쿠스(Homo erraticus)
    오류를 범하는 인간 
    착각하는 인간이

    우리가 끊임없이 인지적 오류(cognitive error)를 범한다는 인류학적, 심리학적 해석에서 나온 개념이다.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지혜로운 인간이라면, 호모 에라티쿠스(Homo erraticus)
    실수하고, 착각하고, 오류를 범하는 인간을 말합니다.

    이 개념은 현대 심리학, 뇌과학, 행동경제학에서 유의미하게 다뤄지고 있어요. 
    대표적인 학자 대니얼 카너먼댄 애리얼리, 리처드 탈러 등이 언급한 인간의 비합리적 선택과 자기기만이 바로 이 개념을 뒷받침하고 있어요.

    인간이 범하는 대표적 착각들

    착각 1. 나는 항상 이성적인 결정을 내린다

    현실 : 대부분의 결정은 감정과 직관에 의해 내려지죠. 하버드대의 제럴드 잘트만 교수는 소비자의 95%가 무의식적으로 구매 결정을 한다고 밝혔어요.

    착각 2. 나는 남들보다 똑똑하다
    현실 : 다수의 사람들이 자신을 평균 이상이라 착각하는 더닝 크루거 효과에 빠져 있어요. 운전, 지능, 외모, 도덕성까지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이 평균 이상이라고 믿고 있죠. (실제론 절반은 평균 이하인데도!)

    착각 3. 내 기억은 정확해
    현실 : 기억은 사실보다 느낌에 더 가깝죠. 심리학자 엘리자베스 로프터스는 우리가 기억을 새롭게 창작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실험을 통해 증명했어요.

    착각 4. 나는 공정한 사람이다
    현실 :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타인을 판단하게 되죠. 특정 성별, 외모, 직업군에 대해 선입견을 갖는 건 보편적인 인지 오류라 할 수 있어요. 이걸 인정하지 못하는 순간, 우리는 공정이라는 착각 속에 머무르죠.

    확증 편향 (Confirmation Bias)
    자신이 믿고 싶은 정보만 수용하고, 반대되는 정보는 무시하는 경향을 말하죠. 정치 성향에 따라 같은 뉴스도 다르게 해석하는 사람들을 예로 들 수 있죠.

    대표성 휴리스틱 (Representativeness Heuristic)

    사람이나 사건을 특정 고정관념에 따라 판단하는 오류를 말하는데요. 정장을 입은 사람은 똑똑해 보인다 등을 예로 들 수 있죠.

    기억 왜곡 (False Memory)

    존재하지 않았던 일을 마치 있었던 것처럼 믿는 현상을 말하는데요. 예를 들어 가족여행에서 웃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울고 있었다. 이러한 왜곡을 이야기하는 것이죠.

    자기기만 (Self-deception)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진실을 외면하는 현상을 말하는데 나는 항상 최선을 다해왔다 라는 말 뒤에 숨겨진 회피 같은 것을 

    예로 들 수 있죠.
    가용성 휴리스틱 (Availability Heuristic)
    기억 속에 잘 떠오르는 정보일수록 더 중요하다고 믿는 오류를 말하죠. 뉴스에서 사고 소식을 자주 보면 세상이 더 위험하게 느껴지죠.

    왜 인간은 착각하도록 설계되었을까?  착각은 나쁜 것일까?

    왜 인간은 착각하도록 설계되었을까?
    놀랍게도 착각은 진화의 산물이죠. 인간의 뇌는 생존을 위해 빠른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어요. 즉, 뇌는 정확한 정보보다 빠른 반응을 더 우선시하죠. 그 결과로 우리는 오류를 감수하고서라도 신속하게 상황을 해석하게 되는데요.
    예: 수풀에서 바스락 소리가 난다. 맹수인지 아닌지 정확히 파악하느라 고민하다간 이미 잡아먹혔을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종종 착각하면서도, 그 착각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어요.

    착각은 나쁜 것일까?
    호모 에라티쿠스는 결코 부정적인 개념만은 아니죠. 착각은 인간이 삶을 견디는 방법이기도 하죠. 사랑은 착각이고, 꿈도 착각인데요. 그런 착각이 있었기에 예술이 탄생하고, 문명이 발전해 온 것이죠. 누군가가 "난 위대한 작가가 될 거야!"라는 믿음을 착각이라 치부했다면, 우리는 헤밍웨이도, 박완서도 만날 수 없었을지 몰라요.

    착각은 창조적 오차다.
    완벽하지 않기에 우리는 상상할 수 있어요. 오류 덕분에 우리는 진보할 수 있죠.

    우리는 모두 착각하며 살아간다
    그 사람은 날 좋아하는게 분명해
    이번엔 꼭 성공할 거야
    나는 착각하지 않아
    이 모든 말속에 착각이 있어요. 그러나 그런 착각들이 우리 삶을 의미 있게 만들죠. 호모 에라티쿠스는 약하지만, 동시에 가장 인간답다 할 수 있죠.

    생각보다 더 착각하는 당신, 호모 에라티쿠스의 함정

    여러분은 자신이 꽤 객관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나요? 혹은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이성적이야 라고 믿고 있나요?
    놀랍게도, 인간은 자신이 착각에 빠졌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살아가죠. 심지어 나는 착각하지 않아 라고 믿는 그 순간조차 우리는 이미 깊은 착각의 함정에 빠져 있어요. 여러분은 생각보다 훨씬 더 착각하고 있어요. 우리는 모두 호모 에라티쿠스(Homo erraticus) 오류를 범하는 인간이기 때문이죠.


    호모 에라티쿠스, 착각하는 인간의 정체
    호모 에라티쿠스는 인간의 실수와 오류를 뜻하는 용어로, 우리가 끊임없이 비합리적 판단을 내리고 있음을 상징하는 개념이죠.

    인류는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을 호모 사피엔스 지혜로운 인간이라 불러왔지만, 실제로 우리는 지혜보다 착각에 가까운 선택을 더 자주 하죠. 왜일까? 우리의 뇌는 정교한 슈퍼컴퓨터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수많은 인지적 편향(cognitive bias)과 심리적 오류로 뒤덮여 있어요.

    우리는 왜 이렇게 착각에 취약할까?
    인간의 뇌는 정확성보다 생존과 효율을 우선시하죠. 정확하게 판단하는 데 10초가 걸리는 것보다, 빠르게 대충 추측하는 데 2초가 걸리는 편이 더 생존에 유리했기 때문이죠. 그 결과, 뇌는 정보를 자동으로 단순화하고, 익숙한 것에 더 높은 신뢰를 부여하죠. 이로 인해 다음과 같은 경향이 생기는데요.

    정보의 왜곡  :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기억의 재구성 : 현실보다 감정에 따라 재해석된 기억.
    자기 확신의 함정 : 틀린 정보에도 자신 있게 이게 맞아!라고 말한다.
    즉, 우리의 뇌는 진실보다 편안함을 택하는 습관을 갖고 있어요. 그리고 그게 바로 착각의 함정이죠.

    착각의 비용은 생각보다 크죠. 인간의 착각은 개인의 실수에 그치지 않아요
    정치 : 확증편향은 사회의 양극화를 심화시키죠.
    경제 : 투자의 판단 오류는 금융 위기를 부르기도 하죠.
    의료 : 의사의 고정관념이 오진으로 이어질 수 있어요.
    일상 : 연인의 말 한마디를 곡해해 관계가 틀어지기도 하죠.
    우리는 착각이라는 단어를 가볍게 여기지만, 실상은 삶의 모든 결정에 스며든 구조적인 맹점이라 할 수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착각은 사라지지 않을까?
    놀랍게도, 착각은 인간 삶의 동력이 되기도 하죠. 착각이 없다면 인간은 너무 무기력해지죠.

    예를 들어, 나는 언젠가 성공할 수 있어 라는 긍정 착각이 도전하게 만들고, 그 사람은 나를 좋아할 거야라는 희망적 착각이 사랑을 만들며, 이번엔 달라질 거야 라는 자기기만이 다시 시작할 힘을 주죠. 착각은 불안한 현실을 견디는 심리적 완충 장치이자, 생존에 유리한 판타지이기도 하죠.

    착각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있을까?
    완벽히 벗어날 순 없지만, 자각하고 경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달라질 수 있어요.
    자주 의심하기 "혹시 내가 지금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라고 스스로 질문해 보면 좋을 듯해요.
    타인의 시선 받아들이기 비판은 불편하지만, 객관성의 출발점이 되죠.
    정보의 다양성 확보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정보만 보지 말고, 불편한 진실에도 눈을 돌려야 해요.
    느리게 판단하기 뇌의 자동 반응을 멈추고, 천천히 생각하라. 인지적 지연(Cognitive Delay)은 오류를 줄이죠.


    호모 에라티쿠스를 자각하면 얻는 것들

    겸손해진다
    자신이 늘 옳지 않음을 인정할 수 있게 되죠

    타인을 더 이해하게 된다
    상대의 판단도 착각일 수 있음을 알기에 분노가 줄어들죠.

    비판적 사고가 자란다
    내 생각이 틀릴 수도 있다는 가정은 지적 성장의 출발점이죠.

    창의성과 연결된다
    착각을 허용하는 마인드는 고정관념을 깨고 새로운 연결을 만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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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모 로쿠엔스(Homo Loquens) 언어적 인간 

    희랍의 철학자 소크라테스

     Loquens(로쿠엔스) : "말하기" 라는 뜻

    인간은 언어적 본능을 갖고 있다.
    이를 두고 사람을 호모 로쿠엔스(Homo loquens)라고 한다.

    세계적 인문학자 스티븐 핀컨은 사람의 언어본능은 후천적인 것이 아니라 원초적 본능이라고 했다.
    몸으로 교감하는 호모섹스쿠스(Homo Sexcus)와 함께 인간이 살아가는 기본이라는 인식이다.

    언어적 본능을 극대화시키고 있는 것이 휴대폰이다.
    덩달아 발달한 것이 말을 축약한 모바일 문자이다.
    언어를 통한 소통은 음성통화에서 문자메시지로, 다시 SNS메신저로 진화하고 있다. 머지않아 서로 휴대전화로 연결만 되면 말을 하지 않아도 뇌파로 상대의 의사를 알 수 있는 시절이 올지도 모른다.
    최근 미국에서 유행하고 있는 모바일 메신저 Yo는 그러한 세태를 잘 반영하고 있다.

    요즘은 스마트폰이 대세이다.
    움직이면서도 모든 정보를 실시간으로 검색하고 소통하며 기록으로 남겨둘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첨단이 오히려 화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세상의 모든 비밀이 비밀이 아닌 시대가 돼 편리하게 이용한 것이 부메랑이 돼 족쇄로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데칼트(René Descartes, 1596. 3. 31-1650. 2. 11)는 회의론을 대표하는 철학자입니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인간은 그 집에 거주한다." 
    (Die Sprache ist das Haus des Seins.)

    하이데거는 인간이 단순히 언어를 사용하는 존재가 아니라, 언어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 존재를 드러내는 존재라고 보았습니다.

    의미

    • 집은 사람이 거주하는 공간입니다.
    • 언어는 인간의 생각과 삶, 존재가 머무는 공간입니다.
    • 우리는 언어를 통해 자신을 이해하고, 타인과 관계를 맺고, 세상을 해석합니다.

    예를 들어,

    • "사랑"이라는 단어가 없다면 사랑에 대한 이해도 매우 제한될 수 있습니다.
    • "죄", "은혜", "구원", "믿음"과 같은 신앙의 언어가 있을 때 우리는 그 의미를 더 깊이 생각하고 경험할 수 있습니다.

    신앙적 관점

    성경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증언합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창 1:3)

    또한 사도 요한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요 1:1)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말씀과 언어를 통해 하나님을 알고, 자신을 알고, 세상을 이해합니다. 
    그래서 신앙의 언어는 단순한 표현 수단이 아니라 존재와 믿음을 형성하는 통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는 말은 
    "사람은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 안에서 생각하고, 이해하고, 살아간다."

    신앙적으로는 
    "어떤 말씀 안에 거하느냐가 어떤 존재로 살아가느냐를 결정한다."


    어려운 시대를 살았던 어르신들에게는 언어에 대한 공통적인 이해를 갖고 있다는 유머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용변이 급하여 화장실을 찾아가서 화장실 문을 두드렸더니 그 안에 대답에 따라 그 사람의 직업을 알게 한다는 아주 우스운 이야기입니다.

    "예, 들어오세요!"
    - 비서라고 합니다.

    "통화중!"
    - 전화 교화원이라고 합니다.

    "오라잇!"
    - 버스 안내양이라고 합니다. 

    "올라갑니다!" "내려갑니다!"
    - 엘리베이트 안내양입니다.

    "아멘! 할렐루야!"
    - 목사라고 합니다.

    "믿습니까?" "믿으면 아멘"
    - 부흥사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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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모 스피리투스(Homo Spiritus) 성령인



    저자 정보 

    데이비드 R. 호킨스
    호킨스 박사
    는 영적으로 진화한 의식 상태 및 참 나로서의 신의 현존의 각성이라는 주제에 관한, 국제적으로 명성이 높은 저자이며 강사이다.
    그의 강연과 저서들은 과학자이자 의사였던 저자에게 일어난 대단히 진보한 영적 앎의 상태에 대해, 이해 가능하며 명료한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독특한 것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그의 초기 3부작에서는 보통의 에고 상태에서 에고의 소멸에 이르기까지에 관해 묘사하고 있으며, 이 책 『호모 스피리투스』는 완결편에 해당한다.

    앞서 나온 두 책, 『의식혁명』(마더 데레사에게서 상찬을 받기조차 했던)과
    『나의 눈』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으며 외국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적으로 읽히고 있다.
    3부작의 출간에 앞서 의식의 본성 Nature of Consciousness에 대한 연구가 선행되었으며, 이는 인간 역사상 처음으로 진실과 거짓을 식별할 수 있는 수단을 드러내준 방법이라는 측면에서 성취를 이뤘다.

    작품의 중요성은 《뇌/마음 회보Brain/Mind Bulletin》에서, 그리고 ‘과학과 의식에 관한 국제회의’와 같은 곳에서 인정받았으며, 운동역학 테스트에 관한 세미나와 워크숍은 옥스퍼드 포럼을 포함한 미국 전역과 세계의 다양한 기관, 단체, 영적 회의, 교회 모임 등에서 수차례 열렸다. 숱한 영적 진실이 설명의 부족으로 인해 오랜 세월 동안 오해받아온 것을 관찰해온 호킨스 박사는 매달 하루 종일 하는 세미나를 열고 있으며 이는 비디오로 기록되고 있다. ‘깨달음에 이르는 길의 스승’으로 불리는 호킨스 박사의 평생에 걸친 작업의 전체적 목적은 의식의 진화라는 측면에서 인간 경험을 재맥락화하고, 생명과 존재의 토대이자 계속적 근원인 내재적 신성의 표현들로서의 마음과 영, 양자에 대한 이해를 통합시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진화한 영적 신인류 ‘호모 스피리투스(Homo Spiritus)’의 탄생과 전망에 대한 감동적인 비전을 제시하는 영적 교사로서 헌신하고 있다.

    호킨스 박사의 모든 저서의 서두와 말미를 장식하는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Gloria in Excelsis! Deo!)”이라는 진술은 그 봉헌을 나타낸다.

    옮긴이 백영미
    서울대 간호학과를 졸업했으며,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마더 데레사의 단순한 길』 『히말라야에서 만난 성자』 『죽음 너머의 세계는 존재하는가』 『감각의 박물학』 『황금 두루마리의 비밀』 등이 있다.

    데이비드 호킨스 박사의 저작을 차례로 읽고, ‘더이상 세상을 향해 화낼 일이 없어지는’ 체험을 하면서부터 박사의 저작물을 번역하고 출판하는 일에 헌신하고 있다.
    미국 세도나에 거주하는 호킨스 박사와의 감동적인 만남을 갖기도 했다.

    Publisher Description

    이 책은 <의식혁명>에서 <나의눈>으로 이어지는저자의 초기3부작 완결편이다.
    저자는 인간의식 진화과정을 짚어가며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체계적으로 제시한다.
    또한 구도자들과 행한 폭넓은 질의응답을 통해 영적수행 여정에서 품게되는 질문에 대한 명쾌한 답과 실용적인 지침을 제공하고 있다.

    이 책은 인류 전체 의식수준이 부정성의 190에서 긍정의 207로 도약한 지금, 생명출현에서부터 영적깨달음과 에고의 초월에 이르기까지진화를 거듭해온 의식토대 및 본질을 되짚어본다.
    또한 내재와 초월을 넘어선 깨달음의 나, 무한한 나에 이르는 질의 응답을 통해 영적 신인류에 대한 전망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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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안드로포스. anthrōpŏs)  ἄνθρωπος, ου, ὁ 스트롱번호 444

    1. 인간.   2. 강 막 9:31.  3. 마 4:19
    발음 [ anthrōpŏs ]
    어원 /  435와 ὤψ ‘안색’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사람(마 4:4, 막 1:17, 고후 4:16), 남(6:31, 마 7:12), 인자(마 8:20, 막 2:28, 눅 1:25), 인간(행 4:12), 범인(행 4:13, 고전 15:32).
  • ἄνθρωπος (Anthrōpos)

    ‘사람, 인간’을 뜻하는 단어
    성경 전반에 걸쳐 인류 전체를 대표하거나 개인을 가리킬 때 널리 사용됩니다. 
    이 단어는 인간 존재의 연약함과 존엄함을 동시에 담고 있습니다.

    • 헬라어 원어 : ἄνθρωπος
    • 발음 : Anthrōpos(안드로포스)
    •  : 사람, 인간, 인류

    성경 구절 예시

    마태복음 4:4
    οὐκ ἐπ’ ἄρτῳ μόνῳ ζήσεται ὁ ἄνθρωπος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묵상 포인트

     “육신을 넘어, 말씀으로 살아가는 존재인 인간”

    ‘안드로포스’는 단순한 생물학적 존재로서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존재로서의 인간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물질만으로 만족할 수 없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야 함을 성경은 반복하여 강조합니다. 
    인간의 본질, 정체성, 구원의 필요성을 이해하는 데 중심이 되는 단어입니다.

     

  • 하나님의 사람(man of God)
    ανθρωπος θεος(anthropos theos. 안드로포스 데오스)

    -또 아버지는 아들에게 심판하는 권위를 주셨는데, 이것은 아들이 사람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요 5:27)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And He gave Him authority to execute judgment because He is the Son of Man.
    και εξουσιαν εδωκεν αυτω και κρισιν ποιειν οτι υιος ανθρωπου εστιν.

    구약의 하나님의 사람(the man of God)을 히브리어로 אִישׁ אֱלֹהִים ['ı̂ysh 'ĕlôhı̂ym ; 이쉬 엘로힘]이라고 하는데 
    이쉬는 '남자, 남편, 사람'이라는 뜻의 남성 명사형 단어이고 엘로힘은 하나님이라는 뜻의 남성 복수형 명사입니다. 
    그러므로 직역하면 하나님-사람입니다. 

    신약에서도 하나님의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이여, 그대는 이러한 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힘을 다해 추구하십시오(딤전6:11)." 
    이 구절의 하나님의 사람(man of God)을 헬라어로 ανθρωπος θεος [anthropos theos ; 안드로포스 데오스]라고 합니다. 
    데오스는 하나님을 뜻하며 안드로포스는 '남자, 남편'이라는 뜻의 ανηρ [aner ; 아네르]와 '얼굴, 표정'이라는 뜻의 ωψ [ops ; 옵스]가 합성된 남성 명사형 단어입니다. 

    따라서 헬라어 어원으로 본 사람은 하나님의 얼굴을 가진 남자이며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으로 채워짐으로써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의도대로 하나님을 표현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에서 그분과 하나되어, 그 결과 하나님을 표현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신격에 있어서 사람-하나님이 되지는 못하지만 인성에 있어서 하나님-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신 분이 사람의 아들이신 주 예수님이십니다.  
    그 분은 완전한 하나님(complete God)이시며 온전한 사람(perfect man)이십니다. 


    안드로포스 - 위를 바라보는 존재

    헬라어에서 사람을 안드로포스(νθρωπο)라고 하는데 그 의미는 위를 바로본다는 뜻이다. 
    사람은 위로 보고 걷는 동물다. 
    지상의 모든 동물들이 땅(아래)을 보고 살고 있는데 유독 사람만이 위를 보도록 되어 있다. 
    이것은 성경적인 의미로는 동물은 땅에 속하나 인간은 하늘에 속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위를 바라보는 존재, 하늘에 속한 존재, 영원에 속한 존재, 영적인 존재, 이것이 인간의 본질이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태초의 사람이다. 아담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의미한다.

    히브리어 아담의 뜻은 땅 색깔을 상징하는 붉은색인 에돔에서 왔다. 
    이스라엘 성지를 여행하다보면 실지로 에서의 후손들이 사는 에돔지역은 땅 색깔이 구리색을 띤 붉은 갈색이다. 
    사람은 흙에서 만들어진 존재다. 
    하나님은 흙으로 아담을 만들었다. 
    그래서 사람은 죽으면 결국 흙으로 돌아간다. 
    결국 허무하고 연약한 존재가 사람이라는 뜻이다.

    신앙은 무엇일까? 
    한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복잡하지만 신앙은 복잡하지 않다. 
    신앙은 지극히 단순하다. 
    즉 위를 바라보는 것이다. 
    이 땅의 연약한 인간이 높고 높은 영원한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 신앙이다. 
    그래서 신앙이란 천상의 비밀을 아는 거창한 것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를 깨닫는데서 시작한다. 
    하나님 앞에서 흙과 같은 존재,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깨달을 때 위를 향해서 하늘을 쳐다볼수 있는 희망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다.

    파스칼은 「팡세」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않고서는 내가 누구인지를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또한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고는 필연적으로 불안할 수밖에 없고 허무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사람은 땅을 바라보고 사는 존재가 아니다. 
    사람은 하늘을 쳐다보고 사는 존재다. 하늘을 향해 늘 갈급해하고 목말라하는 갈망하는 존재다.

    미국 메사추세츠주 플리머슨에 있는 청교도 기념탑에는 믿음(Faith)에서 자유, 교육, 법, 도덕이 나온다고 새겨놓았다. 
    미국돈 US달라에는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In God trust) 라고 기록하고 있다. 
    미국인들은 돈을 믿는 것이 아니라 물질을 주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청교도들은 희망의 땅 신대륙을 발견했지만 신대륙이라는 희망을 주신 하나님께 소망을 둠으로 새시대 새역사를 만들었다.

    안드로포스의 의미는 두 가지다. 
    하나는 위를 바라보는 존재(Homo sursum aspiciens)
    다른 하나는 희망을 가진 존재(호모 에스페란스)

    돼지를 비록한 짐승은 땅을 바라보고 산다. 
    짐승은 땅에 것만 주면 만족한다. 
    그러나 인간은 위를 바라보고 살아야 한다. 
    땅에것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다. 
    인간은 땅에 것이 아닌 희망을 먹어야 만족 할수 있다.

    덴마크의 신존주의 철학자 키에르 케고르는 ‘절망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다.

    지금 이 시대는 절망의 늪에 허우적 거리고 있다. 
    이 땅의 젊음이들이 죽음에 이르는 절망에 빠져있고 많은 소시민들이 빚더미속에서 절망에 빠져있다.

    결국 희망이 이 시대를 살리고 희망이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리는 것이다. 
    정치란 바르게 세상을 다스린다는 것인데 바르게 다스리는 것이 무엇일까?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고 우리시대에 희망을 주는 것이다.

    사르트르(J.P.Sartre)의 「구토」라는 소설에는 로캉 땡이라는 역사학자가 나온다.

    그의 연구과제는 18세기의 어떤 후작의 일생을 연구 조사 한 것이었다. 
    로캉 땡은 열심히 그의 행적과 유물과 후손을 찾아 헤매다가 갑자가 "그가 누구냐?" 보다도 "내가 누구냐?" 라는 것에 부딪치게 된다. 
    자신이 누구냐도 파악하지 못한 주제에 전세기의 후작이 누구이며 그의 삶의 근원이 무엇이가를 연구한다는 것이 얼마나 우습고 공허한 일인가를 깊이 느끼게 된다.

    그러자 그만 자신이 하는 일이 지겹고도 불쾌한 일이 되고 만다. 
    여기에 이르자 로캉 땡은 인생의 모든 것에서 심한 구토를 느끼기 시작한다.

    물론 그것은 사상적 정서적 구토였다. 
    아름다운 꽃도 그 본질을 생각하게 되면 결코 아름다운 것이 되지 못한다. 
    자기를 사랑한다는 아내의 말도 그 본질을 따져본다면 한결 같이 동물적 본성이나 착오일 뿐이다.

    예쁜 여인의 얼굴도 추한 구멍들의 집합으로 보여 구토를 느끼게 된다. 
    정치도 구토를 느낀다. 
    이 모든 세상은 이 모든 세상을 본질적으로 생각할 때 모든 것이 다 무의하고, 무의미하기 때문에 추하고 두렵고 불안한 것이 되고 만다. 그리하여 결국 그의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해 구토를 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결국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라는 본질에 대한 무의미와 혐오, 그것이 실존주의자 사르트르가 ‘구토’로 표현한 말이다.

    사람은 빵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다. 
    위를 바라보는 존재이면서 희망을 가진 결코 가볍지 않는 존재가 사람이다. 
    잠시 구름이 지나가는 하늘을 바라본다. 오늘 따라 하늘이 고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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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착각하는 인간: 호모 에라티쿠스 Homo Erraticus

    “착각하는 인간”이라는 표현으로 호모 에라티쿠스(Homo Erraticus) 를 말한다면, 이것은 정식 인류학 용어라기보다 철학적·문화비평적 조어(造語)에 가깝습니다.

    라틴어를 보면:

    • Homo = 인간
    • Erraticus = 방황하는, 흔들리는, 오류를 범하는, 불안정한

    그래서 전체적으로는:

    “끊임없이 착각하고 흔들리며 오류 속을 살아가는 인간”

    이라는 뜻에 가깝습니다.

    이 표현은 현대 인간을 설명할 때 자주 사용되는 여러 개념과 연결됩니다.

    • Thinking, Fast and Slow 에서 말하는 인지 편향
    • Daniel Kahneman 의 “인간은 합리적 존재가 아니라 오류를 반복하는 존재”라는 통찰
    • Cognitive Bias
    • Confirmation Bias
    • Self-Deception

    전통적인 인간 정의들과 비교하면 더 선명해집니다.

    표현 의미
    Homo sapiens 지혜로운 인간
    Homo faber 도구 만드는 인간
    Homo economicus 경제적 계산 인간
    Homo ludens 놀이하는 인간
    Homo religious 종교적 인간
    Homo erraticus 착각하고 흔들리는 인간

    흥미로운 점은 성경도 인간을 상당히 비슷하게 묘사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 “사람의 마음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하였다”
    •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었다”
    •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

    이런 구절들은 인간을 단순한 “이성적 존재”보다,
    오히려:

    • 자기 자신을 오해하고
    • 욕망에 의해 왜곡되며
    • 진실보다 익숙한 환상을 붙드는 존재

    로 바라봅니다.

    히브리적 관점에서는 특히 “죄”를 단순한 도덕 위반보다:

    • 방향 상실
    • 길 잃음
    • 표적에서 벗어남

    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런 점에서 “Erraticus”라는 표현과 닿아 있습니다.

    즉:

    인간은 정보를 몰라서만 틀리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 욕망과 두려움 때문에 스스로를 속이는 존재다.

    라는 통찰입니다.







    인간(ἄνθρωπος) 욥기 7:1-10


    1. 에 사는 인생에게 힘든 노동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그의 이 품꾼의 과 같지 아니하겠느냐
    2. 종은 저녁 그늘을 몹시 바라고 품꾼은 그의 삯을 기다리나니
    3. 이와 같이 내가 여러 달째 고통을 받으니 고달픈 밤이 내게 작정되었구나
    4. 내가 누울 때면 말하기를 언제나 일어날까, 언제나 밤이 갈까 하며 새벽까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는구나
    5. 내 살에는 구더기와 흙 덩이가 의복처럼 입혀졌고 내 피부는 굳어졌다가 터지는구나
    6. 나의 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니 희망 없이 보내는구나
    7. 생명이 한낱 바람 같음을 생각하옵소서 나의 눈이 다시는 행복을 보지 못하리이다
    8. 나를 본 자의 눈이 다시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고 주의 눈이 나를 향하실지라도 내가 있지 아니하리이다
    9. 구름이 사라져 없어짐 같이 스올로 내려가는 자는 다시 올라오지 못할 것이오니
    10. 그는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겠고 자기 처소도 다시 그를 알지 못하리이다.

    인간(ἄνθρωπος)”이라는 단어는 "위(ἀνά)"와 "얼굴(πρόσωπον)"의 합성어 입니다.
    “얼굴을 들어 위를 바라보는 존재, 하늘을 바라보며 걷는 존재, 하나님을 향하여 서 있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얼굴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며 사는 존재입니다.
    얼굴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지 않는 사람은, 사람이라는 허물만 입었을 뿐 사람이 아닙니다.
    짐승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사는 것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께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죄이기 때문입니다.

    안드로포스의 의미는 두 가지다.
    위를 바라보는 존재.
    희망을 가진 존재이다.

    ​사람은 위에 계신 하나님 창조주를 경외할 때만이 희망을 갖게 한다.
    덴마크가 낳은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이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이라고 하였다.

    ​희망이란 어떤 일을 이루고자 하거나 그걸 얻고자하는 바람이며 좋은 일이 오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그래서 병든 사람은 건강을 희망하고 고시생은 합격을 희망하고 가난한 사람은 부자 되기를 희망한다.
    모두다 행복하기를 기대한다.
    행복이란 심신의 욕구가 충족된 상태이다.
    누가 그리고 그 무엇이 우리 인간의 심신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가.
    지식이 많은 사람은 번뇌도 많다.
    재벌도 불편한 인간관계로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세계적 명성을 얻었던 배우 마릴린먼로도 남모르는 자기만의 번뇌를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으로도 마음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한다.
    세상에 있는 것들은 바닷물과 같다 마실수록 갈증을 느낄 뿐이다.

    ​우리를 행복하게 하실 분이 계신다.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조건 없는 성부하나님의 사랑이 이 세상에 보내신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온갖 불행의 원인인 죄악을 십자가에서 흘린 피로써 대속하셨다.
    거역할 수 없는 주님의 은혜만이 사람을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켜 준다.

    ​이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깨닫게 하신분이 성령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창조주이시며 인간의 영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길 잃은 양이다.
    희망이 없다.

    ​자기를 공격하는 사자와 대항해서 싸울 능력도 없고 멀리 내다보지도 못하는 근시안을 가졌기에 홀로 살아가지 못한다.
    그래서 양에게는 반드시 목자가 있어야 한다.
    우리 인간은 유약한 양에 불과한 존재이다.
    자기 힘의 한계상황에서 두려워 떤다.
    이런 인생들이기에 위를 바라봐야 한다.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
    미국 메사추세츠주 플리머슨에 있는 청교도 기념탑에는 믿음(Faith)에서 자유, 교육, 법, 도덕이 나온다고 새겨 놓았다.
    US달라에는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In God we trust)고 새겨넣고 있다.
    그들은 1620년 9월 7일 102명이 천주교도인 영국 메리여왕의 박해를 피해 신대륙에 정착하고 희망을 하나님께 둠으로 새역사를 시작했다.
    하나님만이 흑암에서 광명을 얻게 하시는 희망의 근원이시다.

    ​예수 안에 있는 자만이 새로운 피조물이다.
    그리스도인은 땅에서 살아도 하늘의 법을 따라 사는 천국시민이다.
    하늘의 법은 생명의 법이요 또한 사랑의 법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사람의 생명을 사랑한다.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만이 안드로포스이다.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때에 희망의 해가 된다.

    ​우리 모두 희망찬 새해가 보장되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자.
    하나님은 우리 안에 소원을 두시고 자기의 기쁘신 뜻대로 행하시고 이루신다.



    골로새서 3:1-2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의 것을 생각하고 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뜻대로 사는 것 역시 결코 작은 죄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당신 한 분만 바라보며 살게 하신 이유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참된 소망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체스터턴(G. K. Chesterton)이라는 작가는 “용서란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며, 믿음이란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이며, 소망이란 도저히 가망이 없는 상황에서 희망을 갖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도무지 희망이 없는 상황에서 소망을 갖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을 떠난 죄악 된 세상으로부터 희망을 얻기는커녕 너무나 자주 실패와 좌절과 슬픔을 경험합니다.
    마음에 채웠던 것들과 사람들로 인해 치유 받을 수 없을 것 같은 아픔과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소망이 아닌 절망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런 우리를 향해 “이제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위의 것들을 추구하십시오. 여러분은 지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지 말고 위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십시오.”라고 외쳤습니다(골 3:1-2).

    ​세상에 소망을 두지 말라고 외칩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을 위해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다 부활하신 주님처럼 하늘의 것을 추구하라고 외쳤습니다.
    하나님을 추구하라고 외쳤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류의 유일하고 참된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하늘을 바라보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 한 분만 바라보며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목적대로 존재하고 있습니까?

    세계 2차 대전 당시 한 유대인 랍비가 아들과 함께 집단 수용소(收容所)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1944년의 추운 어느 겨울 날, 그는 아들을 데리고 수용소 건물 한쪽 구석으로 갔습니다.
    어렵게 구한 버터 한 조각을 진흙으로 만든 주발에 넣고 거기에 심지를 꽂은 뒤 불을 붙였습니다.
    그리곤 아들에게 “사람은 밥을 먹지 않아도 3주간을 살 수 있다. 물을 마시지 않고도 3일을 버틸 수 있다. 그러나 소망이 없으면 단 하루도 살 수 없단다. 어둠을 밝히는 이 불이 곧 희망이다. 우리는 살아 계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가져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패트릭 휴(Patrick John Hughes)는 아들이 태어나면, 두 세 살 때부터 함께 뒷마당에서 미식축구나 야구를 해야겠다는 꿈을 가졌었습니다.

    ​아들이 크면 유명한 대학의 미식축구 팀에 들여보낼 꿈도 가졌었습니다.
    그러나 아이가 태어났을 때, 담당의사는 아이가 절대 그렇게 되지 못할 것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선고를 내렸습니다.
    실제로 아들(Patrick Henry Hughes)은 날 때부터 앞을 보지도, 걷지도 못했습니다.
    부모는 절망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왜 굳이 우리여야 합니까?”라고 원망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아들의 몸을 정상적인 사람들과 같게 만들려는 시도를 포기했습니다.
    인류의 유일하고 참된 소망이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는 부모의 기도 속에 어려서부터 음악에 대한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삶이 하나님의 깊은 관심 속에 진행되고 있음을 자각했습니다.
    대학에 진학한 뒤에는 밴드의 트럼펫 연주자가 되었습니다.
    행진을 할 때면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휠체어에 앉은 채로 탁월한 연주 실력을 뽐냈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삶에 찾아온 죽음 같은 절망을 하나님의 은혜로 극복한 그는 ABC방송의 “Home Makeover”라는 프로그램과 자신의 책 “나는 가능성이다.”(I Am Potential)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전하고 있습니다.

    ​파라과이의 한 의사는 군사 정권에 인권이 유린당한 사실에 대해 정부를 강력히 비난했습니다.
    경찰은 그에 대한 응징으로 그의 십대 아들을 체포했습니다.
    고문 끝에 죽였습니다.
    분노한 마을 사람들은 대규모의 집회를 계획했습니다.
    그때 그는 다른 데모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발가벗겨진 채 전기 충격과 담뱃불과 폭력으로 만신창이가 된 아들의 시신을 그대로 사람들 앞에 공개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피로 물든 매트리스 위에 놓인 아들의 시체 주변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데모였습니다.
    사람들이 군사 정권의 만행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바로 이렇습니다.
    “Goddamn”이라는 욕은, 불공평을 경험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해 “고통을 당해야 하는 건 내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다”라고 하는 원망과 저주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하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발가벗겨지고 채찍과 창 자국이 선명한 그대로 예수께서 매달렸던 십자가는, 세상의 온갖 잔인한 폭력과 불의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또한 불공평한 세상에 하나님의 희생적인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지 보여 주고 있습니다.

    절망과 고통과 비극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그런 우리에게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큰 소망이십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어렵고 힘겹고 절망적인 상황에 던져진다 할지라도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죄와 허물을 사하시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그것을 통해 존재 목적대로 살 뿐 아니라, 참된 소망까지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죽을 수도 없는 상황에서 소망마저 잃어버린 욥은 하나님께 입을 열어 자신의 아픔을 고백했습니다(욥기 7:1-6). 

    ​“이 땅에 사는 인생에게 힘든 노동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그의 날이 품꾼의 날과 같지 아니하겠느냐 종은 저녁 그늘을 몹시 바라고 품꾼은 그의 삯을 기다리나니 이와 같이 내가 여러 달째 고통을 받으니 고달픈 밤이 내게 작정되었구나 내가 누울 때면 말하기를 언제나 일어날까, 언제나 밤이 갈까 하며 새벽까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는구나 내 살에는 구더기와 흙 덩이가 의복처럼 입혀졌고 내 피부는 굳어졌다가 터지는구나 나의 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니 희망 없이 보내는구나”

    여기서 “노동”은 “군대, 전쟁, 부역” 등의 뜻으로, 징집된 군인이 무거운 고역을 의무적으로 감당할 수밖에 없듯, 인간 역시 고통스러운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의미입니다.
    당시 그의 온몸은 구더기와 먼지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피부는 짓무르기 일쑤였습니다.
    하루아침에 열 명의 자녀를 잃어버린 그의 심적 고통은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컸습니다.
    거기다 그는 마치 주인이신 하나님에게 고용되어 하루의 노동 곧 고난을 묵묵히 감당해야만 하는 “품꾼”과 같은 처지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에게 고난은 필연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품꾼이 종일 밤이 오기를 기다리듯, 하루속히 고난이 끝나기를 소망했습니다.
    한편, “내가 여러 달 째 고통을 받으니”를 직역하면 “내가 무익한 달들을 부여받았다”(I have been allotted months of futility : NIV)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닥친 고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러 가지로 노력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재산과 소유는 여전히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자녀들을 낳을 가능성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육체의 질병은 더욱 가중되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믿었던 친구들마저도 자신에게 등을 돌린 채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고난이라는 벽에 부딪혀 지나간 날들은 마치 열매 없는 나무 같았습니다. 또 그에게는 전신에 퍼진 피부병으로 인해 고민하며 뒤척일 수밖에 없었던 밤도 안식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밤은 휴식과 평안의 시간입니다. 잠은 하루 동안의 피로와 고통을 풀어주는 묘약(妙藥)입니다. 그리고 낮 시간의 대부분을 친구들과 변론하면서 보내느라 심신이 지쳐 있었을 뿐 아니라, 추한 자신의 몰골을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 속히 밤이 오기만을 기다렸을 욥에게 있어서 밤과 잠은 누구보다 간절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질병은 밤이면 더욱 기승을 부렸습니다. 악화된 몸은 온통 구더기와 먼지로 뒤덮였습니다. 피부는 아물었다 터지기를 반복했습니다. 순간순간 “내가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영적 회의와 갈등이 물밀 듯 밀려왔습니다. 당연히 간절히 기다리던 밤을 불면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있어서 밤은 더 큰 형극의 시간이었습니다. 그의 노력은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한 채, 세월만 덧없이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더 나아질 수 있다는 소망보다는, 무엇도 기대할 수없는 절망이 그의 삶의 대부분 아니 전부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고통이 줄어들거나, 고쳐질 가능성이 전혀 없는 질병처럼 우리를 우울하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것들은 고난을 당하는 자들이 처음 고난이 시작될 때 가졌던 꿋꿋함과 정력을 다 부식시켜버립니다. 희망을 송두리째 빼앗아갑니다. 깊은 절망에 빠뜨립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이러한 상황이 주어진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나한테는 결코 이러한 일들이 주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부인하시겠습니까?

    처음에는 그(James I. Packer)의 병명을 찾아내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여러 가지 약을 써 보았지만 자주 부작용을 일으켰습니다. 한 해, 두 해가 지나면서 그는 자주 열병과 만성적 관절통과 극도의 피로에 시달렸습니다. 가장 나쁜 것은 우울증이었습니다. 끝없는 절망감을 느낀 그는 “주여! 어찌하여 저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때 “손에 붙잡은 것을 놓아라.”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즉시 “손에 붙잡은 것을 놓으라니요? 무엇을 놓으란 말씀이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돌아봤습니다. 그는 그동안 다섯 아이들 모두에게 수준 높은 학업 성취와 교양을 요구해 왔습니다. 자녀 교육에 관한 책을 썼습니다. 잡지 편집 일을 도와주었습니다. 교도소 전도 집회를 지원했습니다. 교회에서 봉사도 하고, 학교의 이사직도 맡고 있었습니다. 정말로 많은 일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여기까지 생각한 그는 자신의 우울증의 가장 큰 원인이 하나님에 대한 오해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은 저 멀리 계신 신비로운 분이고, 그분께 인정받으려면 끊임없이 열심히 일해야 한다.”라고 믿었음을 인정했습니다. 상담을 통해 자신의 영적 완전주의 때문에 자신을 자꾸 정죄하면서 스스로 고통을 받아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반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내면의 고통을 통하여 자신에게 사랑과 은혜를 부어 주시기를 원하셨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 깨달음을 통해 자신의 행위가 아니라 자신의 모습 그대로를 받아 주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둔 그는 마음의 평안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프리셉트 국제본부 창설자인 케이 아더(Kay Arthur)는 “온 몸이 쑤시는데다가 속까지 메스꺼워 이불 속에서 한참을 뒹굴었던 적이 있다.
    그러나 감옥에 갇혀 있는 중국의 가정 교회 동역자들을 떠올리니 나는 편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그들의 고통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았다.
    고통을 몸소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법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고해와 같은 인생을 사는 동안 생각지도 못했던 수없이 많은 고난을 당합니다.

    ​그 중에는 이해되지 않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고난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주어진 고난은 사명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난에는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이 있습니다. 세상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욥의 고난을 통해서 우리의 경험과 지식과 역사를 근거로 갖게 된 왜곡된 신개념을 버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 배울 수 있습니다. 왜곡된 신개념을 버렸을 때 하나님과 얼마나 친밀한 관계를 회복할 수 있으며, 얼마나 큰 축복을 받을 수 있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인생들은 하나님의 눈을 피해 어디로도 피할 수 없습니다. 기차가 철로 위에 놓여 져 있을 때 가장 안전하게 운행될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 품안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소망이 끊어져 버린 것 같은 절망적인 상황에 놓이게 된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붙잡은 손만큼은 절대로 놓지 않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이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금까지 자신의 형편을 비관하고 친구들에게 험한 말을 퍼부어 대던 욥이 드디어 하나님을 향해 말문을 열기 시작합니다. 7-10절입니다.

    “내 생명이 한낱 바람 같음을 생각하옵소서 나의 눈이 다시는 행복을 보지 못하리이다 나를 본 자의 눈이 다시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고 주의 눈이 나를 향하실지라도 내가 있지 아니하리이다 구름이 사라져 없어짐 같이 스올로 내려가는 자는 다시 올라오지 못할 것이오니 그는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겠고 자기 처소도 다시 그를 알지 못하리이다”

    여기서 “바람”은 짧은 기간을 상징함과 동시에 허무와 덧없음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병을 고칠 수 없다고 판단한 욥은 죽음만이 그것을 모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한편, 우리는 본 절에서부터 욥의 변론의 분위기가 전환되고 있음을 간과하지 말아야합니다. 즉, 6:1-7:6까지는 친구들을 상대로 했던 욥의 변론이 본 절에서부터는 하나님께로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잃어버린 것들을 회복할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는 상황에 사로잡혔습니다. 끝없는 절망의 심연으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영적, 육적 생명이 위급해 질수록 재난이 닥친 이후로 줄곧 갈망해 왔던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신뢰도 희박해져 갔습니다. 마치 독백처럼 하나님을 향해 “하나님! 사람은 세상에 잠시 머물다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죽으면 다시는 이 세상으로 돌아올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더 이상 찾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비천합니다. 오늘 있다 내일 죽을 수밖에 없을 만큼 연약합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의 적수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을 살 만한 존재도 못됩니다. 거기다 고난 중에 있는 저는 하나님의 어떤 관심도 부담스럽습니다. 그러니 저를 그냥 내버려두십시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세상 그 무엇도, 심지어 죽음이라는 절망조차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자녀들을 끊어놓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일시적으로만 존재하는 분이 아닙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게 존재하십니다. 변함이 없으십니다. 우리 인간이 감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지혜로우십니다. 사랑은 한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의 유일하고 참된 소망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을 놓지 말아야합니다. 다른 것들은 다 놓을지라도 하나님만큼은 절대로 놓아서는 안 됩니다.

    일시적인 것들에 마음을 빼앗겼던 어리석음을 회개하고 하나님을 구해야합니다. 시인은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나는 도다,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62:5, 146:5)라고 고백했습니다. 지헤자는 “악인은 그의 환난에 엎드러져도 의인은 그의 죽음에도 소망이 있느니라”(잠14:32)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모든 경우 우리의 소망이신 하나님 한 분만 붙잡고 있습니까?

    탁월한 신학자 윌리엄 바클레이는 우리가 세상을 사는 동안 많은 것을 잃어버리게 되지만, “참을성과 이성과 소망”만큼은 절대로 잃어버리지 말아야한다고 말했습니다.
    참지 못하면 반드시 후회할 때가 있습니다.
    명료한 이성은 혼란한 세상에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비결입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롬 8:24)라는 말씀대로, 소망은 우리를 하나님의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투르니에의 신앙 간증집듣는 귀”라는 책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있습니다.

    ​금술 좋기로 소문난 투르니에의 부부가 그리스로 휴가를 떠났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의 아내는 거기서 갑자기 심장마비를 일으켜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죽기 직전, 그의 아내는 평화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를 쳐다보며 “여보! 오늘 천국에 도착하면 먼저 가 계신 시부모님을 만나 정말 즐거운 것 같아요.”라고 말했습니다.
    순간, 그는 아내가 죽음을 마치 기차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가 사랑하는 가족들을 재회하는 것처럼 태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보고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아내를 보낸 후 그의 믿음은 점점 더 강해졌습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에 대한 믿음이 강해질수록 각종 근심과 걱정으로부터 해방되는 놀라운 자유를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아내와 육체적으로만 결혼한 부부였던 것이 아니라 아내의 소망과 믿음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있었던 것을 알게 되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므로 죽음 같은 절망이 밀려온 순간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놓지 마십시오. 인간(ἄνθρωπος)으로 사십시오.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지으신 목적대로 존재할 뿐 아니라, 참된 소망을 회복시켜 주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까지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소망하며  축복합니다.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 : 지혜있는 사람 - 인간의 學名

    현생인류를 지칭하는 學名이다. 유인원과 구분되는 특징은 도구를 사용하고, 말을 하며,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호모 사피엔스의 조상은 크로마뇽 인으로 직립보행을 했으며, 불을 사용했고, 언어와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호모 루덴스(homo ludens) : 놀이하는 사람

    네델란드 역사가 호이징아(Johan Huizinga)가 저서 <호모 루덴스>(1938)를 통해서 제창한 개념이다. 호이징아는 문화 속의 놀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놀이를 통해서 문화가 발생한다고 하여 기존의 주장을 뒤집었다.


    호모 로쿠엔스(Homo Loquens) : 말하는 사람

    소크라테스(Socrates) - 인간은 말하는 동물이다.

    호모 폴리티쿠스(Homo Politicus) : 정치적인 사람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 인간은 도시국가(Polis)에서 나서 도시국가(Polis)에서 죽는다.

    호모 날리지언(Homo Knowledgian) : 신지식인

    창의적이고 미래 지향적이며 실용적인 지식인

    1) 지식사회와 지식경제를 능동적으로 이끌 수 있는 지식 마인드
    2) 정보기술 능력과 관찰, 추론, 통합의 사고력
    3) 전문성과 보편성의 조화시킬 수 있는 능력
    4) 세계 다양한 문화에 대한 안목

    호모 파베르(Homo Faber) : 만드는 사람

    호모 에렉투스
    (Homo Erectus) : 직립하는 사람

    호모 하빌리스
    (Homo Habilis) : 손재주 있는 사람


    현대의 글로벌 사회와 디지털 환경 속에서 인간을 설명하는 개념으로 **호모 모벤스(Homo Movens)**가 점점 더 중요하게 논의되고 있습니다

    호모 섹스쿠스(Homo Sexcus)
    : 몸으로 교감하는 사람

    호모 텔레포니쿠스(Homo Telephonicus)
    : 전화하는 인간 
    휴대 전화가 없으면 생활하는데 불편을 느끼는 현대인의 모습을 빗대어 표현

    호모 에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 : 경제적 인간
    미래의 이익을 위해 순간의 격정을 억누르고 냉정하게 계산하는 근대인








































    조란 맘다니 최연소 뉴욕주 시장 11월 4일 당선



    '30대 진보' 맘다니 뉴욕시장 당선…美최대도시 첫 무슬림 시장(종합)

    6월 美민주당 예비선거서 '거물' 쿠오모 꺾고 '이변 예고'

    임대료·보육료 등 생활비 문제해결 집중…'좌파 포퓰리즘' 비판도

    뉴욕시장 당선 후 기뻐하는 조란 맘다니

    [AFP=연합뉴스. 재판매 및 DB 금지]

    (뉴욕=연합뉴스) 이지헌 특파원 = 30대 진보 정치인이자 인도계 무슬림인 조란 맘다니(34) 뉴욕주 의원이 4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시장으로 당선됐다. 무슬림이 미국 최대 도시인 뉴욕의 시장으로 당선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날 투표 종료 후 개표가 진행 중인 가운데 개표 초반인 미 동부시간 오후 9시 37분 AP통신이 맘다니 후보가 승리했다고 보도했다.

    무명에 가까웠던 정치 신인 맘다니 후보는 지난 6월 뉴욕시장 예비선거에서 거물 정치인 앤드루 쿠오모 전 뉴욕주지사를 꺾는 정치적 이변을 연출하고 민주당 후보로 선출됐다.

    인도계 무슬림인 맘다니는 고물가에 시달리는 뉴욕 시민들의 생활 형편을 개선하는 데 중점을 둔 공약을 내걸어 진보세력의 부상을 대변하는 아이콘이 됐다.

    뉴욕시가 임대료 관리 권한을 가진 '임대료 안정화 아파트'의 임대료 동결을 비롯해 최저임금 인상, 무상버스, 무상보육 확대 등이 그가 내건 핵심 공약이었다.

    공약 실현을 위한 재원은 부유층 증세를 통해 마련하겠다고 공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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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욕시장 당선 후 기뻐하는 조란 맘다니

    [로이터=연합뉴스. 재판매 및 DB 금지]

    이 같은 그의 공약은 버니 샌더스 연방 상원의원(버몬트·민주),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 연방 하원의원(뉴욕·민주)이 이끄는 미국 민주사회주의자 진영의 전폭적인 지지를 끌어냈다.

    반면 공화당이나 재계에서는 이를 '좌파 포퓰리즘'으로 칭하는 등 강한 비판이 나왔고, 민주당 주류 세력인 중도파에서조차 그의 정책이 급진적이라는 우려가 제기됐다.

    이 때문에 민주당의 공식 후보임에도 불구하고 당내 주류 인사들이 그에 대한 공식적인 지지 목소리를 내는 데 신중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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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앤드루 쿠오모 전 뉴욕주지사

    [AP=연합뉴스. 재판매 및 DB 금지]

    이런 분위기 속에 당내 경선 탈락했던 쿠오모 전 뉴욕주지사는 무소속으로 본선 출마를 강행해 커티스 슬리워 공화당 후보와 함께 3자 대결 구도를 형성했다.

    그러나 캐시 호컬 뉴욕주지사와 하킴 제프리스 민주당 하원 원내대표 등 민주당 내 중도파 주요 인사들이 높은 생활비 문제 대처에 공감을 표하고 맘다니에 지지를 표명하면서 우군이 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선거 기간 내내 '맘다니 대 쿠오모'의 1대 1 양자 대결 구도로 가야만 맘다니를 낙선시킬 수 있다며 '반(反) 맘다니' 단일화를 공공연하게 촉구하기도 했다.

    이후 무소속 출마했던 에릭 애덤스 뉴욕시장은 중도 사퇴 후 쿠오모 후보 지지를 선언했으나, 슬리워 후보는 트럼프 대통령과 공화당 안팎의 사퇴 기대에도 불구하고 선거를 완주했다.

    한편 트럼프 대통령은 맘다니를 '공산주의자'로 규정하면서 "맘다니가 당선된다면 뉴욕시는 경제·사회적으로 완전한 재앙이 될 것"이라며 그가 당선되면 뉴욕시에 대한 연방 자금 지원을 중단할 것이라고 말해 향후 갈등을 예고한 상태다.


    ▲ 조란 맘다니 뉴욕시장 당선인

    30대 진보 정치인이자 인도계 무슬림인 조란 맘다니(34) 뉴욕주 의원이 4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시장으로 당선됐습니다.

    무슬림이 미국 최대 도시인 뉴욕의 시장으로 당선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이날 투표 종료 후 개표가 진행 중인 가운데 개표 초반인 미 동부시간 오후 9시 37분 AP통신이 맘다니 후보가 승리했다고 보도했습니다.

    무명에 가까웠던 정치 신인 맘다니 후보는 지난 6월 뉴욕시장 예비선거에서 거물 정치인 앤드루 쿠오모 전 뉴욕주지사를 꺾는 정치적 이변을 연출하고 민주당 후보로 선출됐습니다.

    인도계 무슬림인 맘다니는 고물가에 시달리는 뉴욕 시민들의 생활 형편을 개선하는 데 중점을 둔 공약을 내걸어 진보세력의 부상을 대변하는 아이콘이 됐습니다.

    뉴욕시가 임대료 관리 권한을 가진 '임대료 안정화 아파트'의 임대료 동결을 비롯해 최저임금 인상, 무상버스, 무상보육 확대 등이 그가 내건 핵심 공약이었습니다.

    공약 실현을 위한 재원은 부유층 증세를 통해 마련하겠다고 공언했습니다.

    이 같은 그의 공약은 버니 샌더스 연방 상원의원(버몬트·민주),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 연방 하원의원(뉴욕·민주)이 이끄는 미국 민주사회주의자 진영의 전폭적인 지지를 끌어냈습니다.

    반면 공화당이나 재계에서는 이를 '좌파 포퓰리즘'으로 칭하는 등 강한 비판이 나왔고, 민주당 주류 세력인 중도파에서조차 그의 정책이 급진적이라는 우려가 제기됐습니다.

    이 때문에 민주당의 공식 후보임에도 불구하고 당내 주류 인사들이 그에 대한 공식적인 지지 목소리를 내는 데 신중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 당내 경선 탈락했던 쿠오모 전 뉴욕주지사는 무소속으로 본선 출마를 강행해 커티스 슬리워 공화당 후보와 함께 3자 대결 구도를 형성했습니다.

    그러나 캐시 호컬 뉴욕주지사와 하킴 제프리스 민주당 하원 원내대표 등 민주당 내 중도파 주요 인사들이 높은 생활비 문제 대처에 공감을 표하고 맘다니에 지지를 표명하면서 우군이 됐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선거 기간 내내 '맘다니 대 쿠오모'의 1대 1 양자 대결 구도로 가야만 맘다니를 낙선시킬 수 있다며 '반(反) 맘다니' 단일화를 공공연하게 촉구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무소속 출마했던 에릭 애덤스 뉴욕시장은 중도 사퇴 후 쿠오모 후보 지지를 선언했으나, 슬리워 후보는 트럼프 대통령과 공화당 안팎의 사퇴 기대에도 불구하고 선거를 완주했습니다.

    한편 트럼프 대통령은 맘다니를 '공산주의자'로 규정하면서 "맘다니가 당선된다면 뉴욕시는 경제·사회적으로 완전한 재앙이 될 것"이라며 그가 당선되면 뉴욕시에 대한 연방 자금 지원을 중단할 것이라고 말해 향후 갈등을 예고한 상태입니다.

    (사진=AP, 연합뉴스)



    우간다 태생, 남아시아계, 무슬림 … 최연소 뉴욕시장 당선된 조란 맘다니는 누구인가?


    사진 출처, Reuters

    사진 설명, 조란 맘다니는 뉴욕시 최초의 이슬람교도, 남아시아계 시장이다
      • 기자, 나다 타우피크 & 레이첼 헤이건
      • 기자, BBC News

    • 2025년 11월 5일


    4일(현지시간) 치러진 뉴욕 시장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 조란 맘다니(33)가 당선됐다. 뉴욕시 역사상 최초의 이슬람교도이자 남아시아계 시장이며, 100여 년 만의 최연소 시장이다.

    이번 선거는 전례 없는 관심을 모았다. 뉴욕주 하원의원인 맘다니는 올해 초까지만 해도 거의 무명에 가까운 후보였으나, 여론조사를 거듭하며 선두로 치고 나갔다.

    그의 당선은 미국 진보 진영의 중대한 분기점이자, 뉴욕시 정치 지형이 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탄이다.

    앞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유권자들에게 맘다니를 뽑으면 안 된다고 촉구하며 자신을 오랫동안 비판해온 앤드루 쿠오모 전 뉴욕주지사를 지지하기까지 했다. 쿠오모 후보는 민주당 경선에서 패배한 뒤 무소속으로 출마한 상태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3일 저녁 '트루스 소셜'을 통해 "쿠오모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지금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면서 "그에게 표를 던지고 그가 일을 잘 해내길 바라는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그는 그럴 능력이 있지만, 맘다니는 아니다!"

    한때 뉴욕주 정계의 거물이었던 쿠오모는 현직 대통령의 이 미적지근한 지지에 대해 "그는 나를 지지하는 게 아니라, 맘다니에 반대하는 것"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여당인 공화당의 커티스 슬리와 후보에 대해서도 "그에 던지는 표는 … 결국 맘다니에게 표를 주는 것"이라며 지지를 거부했다. 슬리와 후보는 최종 3위로 선거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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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간다에서 뉴욕 퀸스까지

    아프리카 우간다 캄팔라에서 태어난 맘다니는 7세 때 가족과 함께 뉴욕으로 이주했다. 브롱크스 과학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메인주 소재 보든대학에서 아프리카학을 전공했다. 대학 재학 중 '팔레스타인 내 정의를 위한 학생회' 캠퍼스 지부를 공동 설립하기도 했다.

    이 밀레니얼 세대 진보주의자는 다문화 도시인 뉴욕에서의 자기 뿌리를 이번 선거에서 적극 활용했다. 파키스탄과 인도 일부 지역에서 사용되는 공용어인 우르두어로만 제작된 선거 운동 영상을 게시하기도 하였는데, 인도 발리우드 영화 장면을 삽입하기도 했다.

    스페인어로 이야기하는 홍보 영상도 찾아볼 수 있다.

    맘다니의 아내는 시리아 출신으로 뉴욕 브루클린에 거주하는 예술가 라마 두와지(27)로, 두 사람은 데이팅 앱 '힌지'를 통해 만났다고 한다.

    맘다니의 어머니 미라 나이어는 유명한 영화감독이며, 아버지 마흐무드 맘다니는 컬럼비아 대학의 교수다. 부모 모두 하버드 대학 출신이다.

    사진 출처, Reuters

    사진 설명, 부모(미라 나이어, 마흐무드 맘다니)와 아내 라마 두와지와 함께 있는 맘다니의 모습

    맘다니는 자신은 시민들을 위한 후보, 조직가라고 말한다.

    뉴욕주 의회 프로필에는 "영화, 랩, 글쓰기 등 삶에서 여러 필연적인 전환점을 맞이했다"면서 "그러나 그를 절망이 아닌 행동으로 이끈 건 언제나 조직화의 힘이었다"고 적혀 있다.

    정계 입문 전에는 주거 상담사로 일하며 퀸즈 지역의 저소득층 주택 소유자들이 강제 퇴거 위기에 맞서 싸울 수 있도록 도왔다.

    한편 그는 자신의 신앙도 선거 운동 중 뚜렷하게 드러냈다. 정기적으로 이슬람 사원을 방문하기도 하고, 뉴욕의 생활비 위기를 주제로 한 우르두어 선거 운동 영상을 제작하기도 했다.

    올봄 유세 현장에서는 "우리는 이슬람교도로서 공개 석상에 선다는 것은 때로 그늘 속에서 찾을 수 있는 안전함을 포기한다는 의미임을 알고 있다"고 발언한 바 있다.

    사회 정의 단체 'DRUM'의 정치 책임자인 자그프리트 싱은 BBC와의 인터뷰에서 "현재 시장 선거에 출마한 후보 중 내가 진정으로 관심 있는 문제들을 아울러서 대표하는 후보는 맘다니뿐"이라고 말했다.

    맘다니의 '더 저렴한 도시' 투쟁

    맘다니는 미국에서도 물가가 가장 비싼 도시인 뉴욕의 유권자들이 현재 민주당에 바라는 것은 생활비 부담 완화라고 말한다.

    그는 최근 한 행사에서 BBC에 "뉴욕 시민 4명 중 1명이 빈곤 상태이며, 매일 밤 50만 명의 아이들이 배고픈 채 잠이 든다"면서 "그리고 궁극적으로 뉴욕시는 이 도시를 특별하게 만드는 가치를 잃을 위험에 처해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공약을 제시했다:

    • 시 전역의 무료 버스 운행
    • 월세 동결 및 태만한 임대인에 대한 규제 강화
    • 생활비 부담 완화를 위한 시 소유 식료품점 체인 운영
    • 생후 6주~5세 아동을 위한 보편적 보육 서비스 제공
    • 월세 안정화 및 노조 건설 주택 공급량 3배 확대

    아울러 부동산 소유주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도록 "대대적으로" 시장실을 개편하고, 저소득층을 위한 영구 임대 주택도 확충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맘다니는 이러한 공약을 시각적으로 강렬하게 표현하며 입소문을 탔다. 임대료 동결을 극적으로 표현하고자 대서양에 뛰어들기도 하고, 식량 불안정 문제를 강조하고자 지하철에서 라마단 금식을 어기는 퍼포먼스도 선보이기도 했다.

    예비선거 며칠 전에는 맨해튼 전역을 걸으며 유권자들과 셀카를 찍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실제로 뉴욕시의 생활비 부담을 낮출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다만 이러한 야심 찬 공약에 회의적인 이들도 있다.

    뉴욕타임스는 이번 시장 예비선거에서 누구도 지지하지 않으며 후보자들을 전반적으로 비판했다. 맘다니의 정책은 "특히 뉴욕시가 직면한 도전 과제에 부적합하다"며 "도시 운영상 불가피한 절충 상황을 종종 무시한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그의 임대료 동결 정책은 결국 주택 공급 감소로 이어질 것으로 전망했다.

    짧은 정치 이력에 대한 의구심

    쿠오모를 비롯한 인사들은 맘다니는 시 예산 1150억달러(약 166조원), 공무원 30만 명이 넘는 이 거대 도시를 이끌기에는 검증되지 않았고, 지나치게 급진적이라고 말한다.

    거액 후원자, 빌 클린턴과 같은 중도 성향 지지자들의 지원을 받는 쿠오모 후보는 경험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하며 "경험, 역량, 업무 수행 능력과 더불어 트럼프, 연방 정부, 주 의회를 다루는 법 등은 (뉴욕 시장의) 기본 자질"이라면서 "나도 현장에서 배우는 게 좋다고 생각하지만, 뉴욕 시장 자리는 누군가가 현장에서 배우는 자리가 아니"라고 일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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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출처, Shutterstock

    사진 설명, 민주당 후보 경선에 출마한 9명의 후보가 지난 6월 4일 열린 후보 토론회에서 발언하는 모습

    하지만 정치 전략가인 트립 양은 "경험"이 반드시 현재의 정치판을 뒤흔드는 요소는 아니라면서 맘다니가 승리하든 아니든, 그의 선거운동은 그 자치로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을 해냈다고 설명했다.

    "맘다니는 자원봉사자 수만 명, 개인 기부자 수십만 명의 지지를 받으며 선거 운동을 펼쳤다. 뉴욕 지역 민주당 예비선거에서 이처럼 많은 자원봉사자가 참여하고, 풀뿌리 열기가 뜨거운 사례도 매우 드물다"는 것이다.

    맘다니 지지자인 록마니 라이는 "그는 우리를 이해한다. 우리 같은 사람이다. 우리 커뮤니티, 즉 이민자 커뮤니티 출신"이라고 강조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이슈

    미국 내에서도 주민 구성이 다양한 뉴욕 퀸스 잭슨 하이츠의 공원에서 최근 열린 맘다니 선거 유세 행사에서는 아이들이 그네를 타고 뛰어놀고, 라틴 음식 판매상들은 아이스크림과 간식을 팔고 있었다.

    여러모로 뉴욕시의 다양성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다양성은 다수의 민주당원들은 뉴욕의 가장 큰 자산으로 꼽는 요소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도시도 인종적, 정치적 긴장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맘다니는 자신이 매일 이슬람 혐오적인 위협에 시달리고 있으며, 일부는 가족까지 노리기도 했다고 말한다. 경찰은 이러한 위협에 대한 증오 범죄 수사를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맘다니는 BBC와의 인터뷰에서 인종 차별은 미국 정치에서 무엇이 망가졌는지 잘 보여주는 지표라면서, "도널드 트럼프의 재선을 허용한" 민주당을 비판하며 "그들이 누구이든, 어디에서 왔든 간에" 노동 계층을 대변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편 이스라엘-가자 전쟁에 대한 후보들의 입장 역시 유권자들의 관심을 끈 쟁점이었을 것이다.

    맘다니는 팔레스타인을 강력하게 지지하고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비판하며 민주당 주류와 대립하고 있다. 그는 국제 인권법을 위반하는 이스라엘 정착촌과 연계된 뉴욕 자선단체들의 면세 혜택을 중단하는 법안을 발의하기도 했으며, 이스라엘의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가 체포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여러 차례 언론 인터뷰에서 유대인 국가로서 이스라엘의 존재권을 지지하는지 질문 받을 때마다 "나는 종교 등의 기준으로 시민권에 서열이 있는 국가를 지지하는 데 불편함을 느낀다. 우리 미국에서 그러하듯, 평등이 어디서나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내 신념"이라는 답을 내놓았다.

    또한 뉴욕에는 반유대주의를 위한 자리는 없다고 주장하며, 자신이 당선되면 증오 범죄 퇴치 예산을 증액하겠다고 덧붙였다.

    반면 쿠오모는 자신을 "이스라엘 열성 지지자이며 그 점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한다.

    여러모로 현재 뉴욕 민주당원들이 직면한 이러한 쟁점들은 사실 민주당이 앞으로 여러 선거 및 그 이후 계속 맞닥뜨릴 과제와 다르지 않다. 그렇기에 이번 경선의 결과는 민주당의 방향과 트럼프 대응 방식을 가늠하게 하는 중요한 지표로서 전국적인 분석 대상이 될 것으로 보인다.




    조란 맘다니 프로필 나이 가족 국적 학력 최초 무슬림 최연소 뉴욕 시장 당선 지지율 트럼프

    핫라인데일리 2025. 11. 5. 14:54

    2025년 11월 4일 미국 뉴욕에서는 역사적인 장면이 연출됐습니다.

    인도계 무슬림 출신이자 30대 진보 정치인 조란 맘다니 후보가 뉴욕시장에 당선되며 뉴욕 정치 지형에 엄청난 변화의 바람을 일으킨 것입니다.

    무슬림이 뉴욕시 시장에 오른 것은 역사상 처음이며, 이민자 출신 30대 시장이라는 점에서도 큰 상징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오늘은 많은 분들이 궁금해하는 조란 맘다니의 인생 이야기부터 정책, 당선 과정, 정치적 의미까지 자세하고 쉽게 정리해드리겠습니다.

    조란 맘다니 프로필

    새 시대의 아이콘 조란 맘다니는 누구인가

    조란 맘다니는 1991년 우간다 캄팔라에서 태어났습니다.

    학자와 영화감독 부모 아래에서 자라며 어릴 때 미국으로 이주했고, 뉴욕 브롱스 과학고등학교를 거쳐 보든 칼리지를 졸업했습니다.

    정치인이 되기 전에는 뉴욕에서 주거권 운동가로 활동하며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대변했고, 랩 음악 프로듀서로도 활약했습니다.

    그는 2020년 뉴욕 주하원의원 선거에서 현역 의원을 꺾으며 정치에 입문했고, 이후 재선에 성공하며 진보 정치의 차세대로 떠올랐습니다.

    강력한 사회 개혁 의지를 가진 인물로 젊은 세대의 지지를 빠르게 얻어왔습니다.

    진보 바람을 일으킨 공약, 생활비 위기 해결 집중

    맘다니 당선인이 내세운 핵심 메시지는 명확했습니다.

    지금의 뉴욕은 서민이 감당하기엔 너무 비싸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정책을 공약했습니다.

    첫째 임대료 안정화 아파트 임대료 동결

    둘째 무상 버스 도입

    셋째 무상 보육 확대

    넷째 최저임금 인상

    다섯째 부유층 증세를 통한 재원 마련

    특히 주거비와 교통비를 포함한 생활비 부담을 해결하겠다는 방향은 젊은 층과 서민층의 폭발적인 공감을 얻었습니다.

    뉴욕의 생활비 위기는 심각한 사회 문제로 자리 잡고 있었기에 이 공약은 많은 시민들에게 매우 현실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지지율 1퍼센트에서 일으킨 돌풍, 뉴욕시장 당선까지

    2025년 뉴욕시장 선거는 올해 미국 정치에서 가장 흥미로운 승부 중 하나였습니다.

    맘다니 후보는 민주당 예비선거에서 앤드루 쿠오모 전 뉴욕주지사를 꺾으며 전국적 주목을 받았습니다.

    당시 지지율이 1퍼센트에 불과했던 그가 돌풍을 일으킨 것만으로도 정치권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본선에서도 경쟁은 치열했습니다.

    쿠오모 전 주지사는 무소속으로 출마했고, 공화당의 커티스 슬리워 후보까지 가세하며 삼파전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생활비 해결 메시지와 젊은층 중심의 강력한 지지 세력, 그리고 버니 샌더스와 오카시오코르테스 등 진보 진영의 전폭적인 지원이 힘을 보태면서 결국 승리를 확정지었습니다.

    특히 중도파였던 오바마 전 대통령과 클린턴 전 대통령까지 지지를 선언하면서 맘다니의 당선을 굳히는 결정적 계기가 됐습니다.

    맘다니, 트럼프 정면 충돌 논란의 중심에 서다

    맘다니의 당선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가 바로 트럼프 대통령과의 충돌입니다.

    선거 내내 트럼프 대통령은 맘다니를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하며 뉴욕에 대한 연방 지원 중단까지 언급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공격은 오히려 젊은층과 진보 진영의 반발을 일으키며 맘다니에게 유리하게 작용한 것으로 분석됩니다.

    그는 트럼프의 비난에 대해 자신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노동자와 서민을 위한 정치인일 뿐이라고 맞받아쳤습니다.

    이 장면은 많은 미국 시민들에게 인상 깊은 장면으로 남았습니다.

    조란 맘다니 뉴욕의 새로운 시대 열다

    조란 맘다니의 의미 뉴욕은 새로운 시대를 선택했다

    맘다니의 당선은 단순히 시장 한 명의 등장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는 미국 정치에서 다음과 같은 여러 상징성을 동시에 갖는 인물입니다.

    첫째 뉴욕 최초의 무슬림 시장

    둘째 아시아계 시장

    셋째 30대 시장

    넷째 이민자 출신 지도자

    다섯째 민주사회주의자 정치인의 본격적인 약진

    그의 등장은 뉴욕뿐 아니라 미국 전체 진보 정치의 방향성을 바꾸는 중요한 흐름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맘다니 당선인은 말했습니다.

    모든 뉴욕 시민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도시를 만들겠다.

    이제 뉴욕은 새로운 선택을 했고, 그 변화의 중심에는 조란 맘다니가 서 있습니다.









    스타인메츠(전기기술자) 워치만 니 & 케네스 헤긴


    찰스 스타인메츠 Charles Proteus Steinmetz
    1865년 4월 9일 - 1923년 10월 26일
    분야 : 전기공학, 수학, 발명  
    소속 : General Electric(GE)
    대표 업적 : 교류(AC) 전력 시스템의 수학적 해석과 발전에 크게 기여 


    스타인메츠는 교류 전기회로를 수학적으로 분석하는 방법을 발전시켰습니다. 오늘날 전기공학에서 사용하는 복소수·페이저를 이용한 교류 회로 해석의 발전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스타인메츠가 유명해진 일화


    거대한 발전기가 고장 났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기술자들이 오랫동안 원인을 찾지 못하자 스타인메츠가 발전기를 살펴본 뒤, 특정 부분에 분필로 표시하고 “여기를 16인치 정도 옮기면 된다”

    수리 후 발전기가 정상적으로 작동했고, 스타인메츠가 보낸 청구서에는 큰 금액 $10,000이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자세한 항목을 요구하자 분필로 표시하는 데 $1, 어디에 표시해야 하는지 아는 데 $9,999. 라는 식의 일화로 전해집니다.

    다만 이 이야기는 여러 변형이 존재하는 전설적인 일화이므로, 실제 역사적 사실로 그대로 단정하기보다는 “전문지식의 가치”를 보여주는 일화로 사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같은 것을 보아도 모든 사람이 같은 것을 보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성경의 “보는 것”과 “깨닫는 것”이라는 주제와 연결할 수 있습니다.

     








    케네스 헤긴, 그는 누구인가?

    ‘케네스 해긴’과 ‘말씀믿음 운동’의 이단성 

    인물소개

    레마 바이블 신학교와 케네스 해긴 미니스트리(Kenneth Hagin Ministries)의 설립자이다. 그는 17세 때 심장병과 불치의 혈액병에서 하나님의 치유를 받은 후, 약 70년간 현장에서 건강한 가운데 왕성하게 사역을 했다. 그는 “내 백성에게 믿음을 가르치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오클라호마 털사에약 11만 평에 이르는 레마 바이블 신학교(RBTC)를 세웠고, 52개국에서 활동하는 8만 명 이상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오늘날 케네스 해긴 미니스트리의 사역 범위는 전 세계적으로 퍼져있다. KHM의 라디오 프로인 「방송으로 듣는 믿음 세미나」(Faith Seminar of the Air)는 미국내 300개 이상의 방송국에서,그리고 인터넷으로는 전 세계에 걸쳐 방송되고 있다. 그 밖의 주요 사역들로는 월간 잡지 「믿음의 말씀」(The Word of Faith), 전국 순회 전도단,레마 성경신학교,레마 통신학교,레마 동문회,국제 레마 목회자협회,교도소 선교 등이 있다. 그는 2003년에 하늘나라로 떠났지만,그가 세운 신학교와 사역들은 지금도 전 세계의 믿음의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하고 있다.

    Kenneth E. Hagin (1917-2003)

     

    그는 현대 Word of Faith Movement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으며, 많은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참선지자로 여겨진다. 그는 1917년 Texas주 McKinney에서 미숙아로 출생했다. 심장이 약해서 16세에는 그 증상이 심각했는데. 환상과 기적을 경험하고 거듭난 크리스찬이 되었다 한다. 1934년 17세의 나이로 침례교인으로 사역을 시작, 37년 the Assemblies of God로 부터 자격을 얻어 목회활동을 시작한다. 1940년에서 50년까지 오순절 치유부흥 운동에서 일했다. 1963년에 지금의 단체를 구성. 1966년 오클라호마 털사로 이주했다. 2003년 9월 19일 사망한 뒤, 아들 (Kenneth Hagin, Jr.)과 손자 (Craig Hagi)가 대부분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다.

     

    먼저, 그가 거듭났다고 주장하는 사건을 먼저 정리한다. 그는 세번의 죽음을 경험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1933년 4월 22일 저녁 7시 40분. 그는 사망했고, 지옥으로 갔다. “나의 속사람이 나의 몸에서 빠져나갔고 나의 죽은 몸은 누워있었다. 나는 내가 죽었다는 증거를 가지고 있다. 나의 심장은 멎었고, 맥박도 멈추었다. 지옥으로부터 올라오는 하나의 빛을 보았다. 나는 그 바닥에 닿을때에 어떤 영적인 존재로 의식이 있었다. 마침내, 지구위, 천국위로 부터 음성이 들려왔다. 나는 나의 입을 통해 나의 몸으로 다시 들어갔다.” “두번째는, 나는 나의 피가 돌지 않았고, 나의 발가락이, 다리가, 발목이, 무릎이, 엉덩이가, 위장이, 그리고 심장이 차례로 멈추었다. 나는 몸을 빠져나와 아래로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자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내 몸으로 다시 돌아왔다.” “세번쨰로 내 심장이 멈추었다. 나는 느낄 수가 있었다. ‘감사합니다, 하나님’이란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기도하기 시작했다. ‘내가 주꼐로 가오니 용서하소서 죄를 사하여 주소서’ 그때가 하나님의 자비로 거듭난 순간이었다.”

     

    그가 거듭난 크리스찬이 되었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그리고 초기의 사역이 은사를 발휘하던 복음적 사역이었을 것이라는 짐작은 간다. 하지만, 한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그 환상에 대한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는 (육체가) 이미 죽었고, 지옥으로 내려갔는데, 즉 영이 육체의 바깥에 있는 동안에 거듭난 것이다. 그러면, 영이 몸을 떠난 뒤에도 거듭날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그것도 지옥으로 내려가다가 말이다. 석연치 않은 부분이다.

     

    이 간증은 사실상 Word of Faith의 중요한 가르침이 되는데, 사람이 죽어서 지옥에서 거듭날 수 있다는 것이다. (몰몬교가 이러한 주장을 하고 있는데..) 그들은 예수님도 지옥에서 다시 거듭났다고 한다. ‘십자가상에서의 마지막 말씀인 “다 이루었도다”는 육체적인 업무를 마쳤다는 뜻이다. 즉, 죄에 대한 벌을 지불한 것에 불과하다. 예수가 죽자, 그의 영은 적에게 이끌려 지옥으로 내려갔고 그곳에서 사단을 이겨서, 거듭난 첫사람이 되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시다. 죄없는 예수님께서도 거듭날 필요가 있는지 의아하다.)

     

    그는 어머니의 기도로 구원이 가능했다고 하는데, 사람들이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그것을 이룰 수 없다는 그들의 가르침과 연결이 된다. 재미있는 간증은, ‘내가 거듭날때에, 나와 어머니는 큰소리로 기도하고 있었는데, 우리집으로부터 2블럭정도나 자동차들이 줄을 지어 우리의 기도를 듣고 있었다.’고 한다.

     

    그의 가르침은 사실상 그 앞세대인 William Kenyon과 유사한 점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는 자신의 가르침은 모두 예수님께로 부터 직접 오는 것이므로, 결코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McConnell은 Hagin의 문장과 Kenyon의 문장이 일치하는 예를 들어 (실제로 각각 반페이지 분량의 8가지 부분을 들며 거의 정확하게 일치함을 증거하고 있다.) Hagin이 그대로 복사하여 쓰고 있음을 입증한바 있다. (아니면, 예수께서 직접 Kenyon의 가르침을 Hagin에게 그대로 들려주었거나.)

     

    이러한 현상은, 자신의 가르침에 대한 권위를 오직 예수님의 직접 계시임을 주장하는데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영향을 받았다는 인정을 할 수 없는 자가당착에 빠지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세월이 지나면 지날수록, 처음의 순수한 동기와 사역의 열정은 사라지게 되고, 아집과 거짓만이 남게 될 수 밖에 없다.

     

    그는 자주 집회에서 사람들로부터 마귀를 쫒고나서, “지금 나는 예수님이 이곳에 서 계신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보니, 이곳의 그 누구도 예수를 본 사람이 없더군요. 듣지도 못했더군요.”라는 말을 자주 했다. 그는 설교시에도 예수님께서 직접 그 말씀을 다 들려주셔서 하신 말씀 그대로 전했다고도 말한다. 그러면서 성경에서는 볼 수 없었던 하늘의 비밀을 알려주셨다는 것이다. 그는 자주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께서는 그를 천국과 지옥을 방문할 수 있도록 인도하시기도 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난 기록을 몇가지 보자.

     

    - 1952년 겨울에 부엌에 있는 그에게 예수님이 오셔서 사단과 마귀들에 대해 가르쳐주겠노라 하셨다. (제자들처럼, 사도들처럼 직접 예수님께로 배웠다는 것이다. 하지만, 신약성경은 분명하게 예수님이 아니라 성령께서 가르치신다고 명시되어 있다.)

    - 1958년에는 예수님께서 나타나, 여기에 천사가 대기하고 있는데, 그가 원하는 물질을 가져오기 위해 그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한다. (예수님은 그에게 영적인 면만이 아니라 경제적으로 부유하게 해 줄 것이라 약속하셨다는 뜻이다.)

    - 1959년 2월 팔꿈치 부상으로 병원에 있을때에도 예수님께서 그가 빨리 회복되어 사역에 임하게 하기 위해 직접 방문해주셨다고 주장한다.

    - 또 예수님께서는 예언의 사역을 하라고 당부하셨는데, 2000년이 지난 지금, 정확하게 한명의 예언자 (자신)에게 계시록이후의 신적 계시가 내려졌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이 Hagin에게 말한 바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는 그들의 주장의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겠다.

    - “성령께서 오셔서 나는 엎드렸다. 말을 탄 사람이 와서 나에게 두루마리를 주셨다. ‘미국은 마지막 부름을 받고 있다. 몇나라는 이미 마지막 부름을 받았다. 세상의 종말이 내 손에 있다.’ ‘초대교회처럼 교회들이 믾은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것보다 더 많은 권능과 징조와 경이가 있을 것이다. 더 많은 기적이 행해지며, 성령의 움직임을 받지않는 자들은 나를 만날 기회가 없을 것이다. 많은 이들이 거짓 선지자에게 속을 것이다.’ (적어도 마지막 구절만은 옳다.)

     

    그가 묘사하는대로라면 예수님은 가끔은 맨발이셨고, 가끔은 로마샌달을 신고 계셨다. 키는 5-11 (177.5 cm ?). 몸무게는 180 (80 kg ?) 정도이시다. 예수님이 그 앞에 출현한 것이 사실이라고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가 만난 예수는 성경과는 다른 말을 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후에 맘을 바꾸셨거나, 아니면 그가 환상속에 만난 그 존재는 예수가 아니거나 둘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예수님께서 말하셨다. ‘내가 말하는 이 1,2,3,4 단계를 잘 따르기만하면 나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것이다.’ 소책자, ‘하나님과 함께 당신의 티켓을 쓰는 방법’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나에게 승리를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다. 그들의 티켓을 직접 사용해야한다.” (이 예수님은 우리가 알고, 믿고 있는 성경의 예수님이신가?)

     

    여기서 실질적으로 Word of Faith의 주요 교리가 된 그의 가르침을 정리해보자.

    -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육체적 죽음은 우리를 구원하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예수님의 육체적 죽음은 죄를 이길 수 없었고, 지옥에 가서 영적인 죽음을 한 후에야 가능했다. 예수님은 그때 거듭나셨다. 예수는 영적인 죽음을 맛보았다.

    - 크리스찬은 나사렛 예수만큼이나 성육신한 존재다.

    - 인간은 하나님과 동등하게 창조되었고, 어떤 열등한 존재로서의 의식없이도 하나님 앞에 서 있을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최대한 그와 동등하게 만드셨다. 믿는 이들은 그리스도다. 우리가 그리스도다.

    - 우리도 그리스도인데, 예수 그리스도가 기적으로 그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입증한 것처럼, 우리도 그러한 기적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임을 입증할 수 있다.

     

    성경 어디에고 예수님의 영적 죽음에 대한 말은 한곳도 없다. 그의 말은 우리가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동등하게 창조되었다고 믿는 것인데, 우리는 그리스도라 불리울 수도 없고,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올라갈 수도 없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위치에 닿고자함이 죄의 본질이며, 사탄의 본성이기도 하다. 미국의 개신교 방송채널로 알려진 TBN의 설립자도 동일한 주장을 한다. “우리는 작은 신(a god)이며, 그리스도이다.” (다소 개인적인 판단이지만, 이 채널의 방송은 보지 않을수록 더 좋을 것 같다.)

     

    이전에도 지적했지만, Word-Faith란 의미는, 무엇이든 우리가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말하기만 하면, 모두 이루어진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것이 the Positive Confession Movement의 주된 관점이다. 이는 크리스찬 사이언스의 은사주의적 변형으로 볼 수 있다. (물론 그들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잠간 조엘 오스틴의 말과 유사한 아들 Hagin Jr.의 말을 보자. " 우리는 우리의 운명을 좌우할 입술을 가지고 잇다. 우리의 말로 우리는 살 수도 죽을 수도 있다." "만약 당신이 의심하면서 말을 한다면 당신은 잘못 발을 내디딘 것이고, 당신이 그렇게 잘못 움직일 때에, 하나님꼐서는 아예 움직일 수 없으시다. 당신이 바로 움직여야한다."

     

    Charismatic Laughter 또는 Drunk in the Spirit이라고도 하는 시도를 그는 계속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를 들면, "10분의 메시지를 전한 다음, 성령의 모습중 하나인 "취함"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25분간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갑자기 웃고, 입김을 불고, 팔을 휘젓고, 마치 취한 사람처럼 보였다. 말을 하고 싶지만 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청중들도 따라서 웃기 시작했다. 취한 사람들처럼 바닥에 앉아서 뒹구는 사람도 있었다. 아들 Hagin Jr.가 아버지의 노트를 읽으려 했지만 하지 못했다. 다시 Hagin이 말을 시작하면서 이는 에스겔 3:16-27의 말씀이 성취된 것이라 했다. (어거지 해설이다)" 그의 집회를 참관했던 한 목사님의 증거다. 그리고 그는 자주 예배중에 하나님께서 박수를 칠 떄와 치지 말아야 할 때를 자신에게 직접 말씀하시기에, 그가 박수를 치라고 할 떄에만 박수를 쳐야한다고 자주 당부했다 한다.

     

    그가 이루어놓은 업적을 정리한다. (자료제공연대에 따라 지금과 다를 수 있음)

    Faith Seminar of the Air (1966년에 시작한 라디오 프로그램)

    Rhema Radio Church ("너 나이 육십에 꼭 필요한 사업이 라디오와 문서사업"이라는 직접 음성을 듣고 시작했다함)

    Rhema Bible Training Center (1974년 설립, 작은 대학 규모의 학교같은 곳)

    1979 가을. The Healing School 시작

    1995년 비디오 테잎 배포 시작

    1996년 Rhema Praise라는 TV 프로그램 54개국 전파

    1999년 40개국이 더 늘어남

    책: 두 부자는 약 125권(성경공부교재 포함)을 서술. 5천 3백만부 발간

    월간지: 540,000여부 배포

    테이프 - 58,000여개의 테잎 배포

    Rhema Correspondence Bible School: 6만 이상의 등록

    Rhema Bible Training Center: 16500이상의 졸업생 배출

    Rhema Bible Church: 아들 Hagin Jr.가 목회

     

    그에 대한 비평서로는 D.R. McConneld의 "A Different Gospel과 Hank Hanegraff의 "Christianinity in Crisis"라는 책을 권하고 있고, Jeremy Reynalds의 "The Walking Wounded"도 도움이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하나남은 우리가 병약하지도 아프지도 않기를 원하시며, 우리의 긍정적인 말로 그리 할 수 있다고 말해왔는데, 60년동안 한번도 아프지 않았다고 말하던 그는 혈관에 관련된 지병으로 고통을 당하다가, 이 병으로 사망했다.

     

    -자료출처- http://blog.Godpeople.com/kimjpact/?B002-1044


      
    케네스 해긴(Kenneth Hagin, Sr., 1917∼2006?)은 오순절 지도자 중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다. 비록 그는 자신의 가르침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그의 가르침의 대부분은 케년(E. W. Kenyon, 1867∼1948)의 것을 거의 그대로 복사한 것이다.
    맥코넬(D. R. McConnell)은 [다른 복음]이라는 책에서 이 모든 것에 대해 소상히 밝혀 놓았다. "해긴은 참으로 케년의 저술에서 글자 하나도 바꾸지 않고 그대로 베꼈으면서도 그것이 케년의 저술임을 전혀 밝히지 않았다. 사실 이것은 속임수일 뿐 아니라 범죄 행위이다."
     
    케년은 침례교 목사로서 오순절 운동에 참가한 인물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라디오 설교 등을 통해 자기의 메시지를 잘 따르면 병과 마귀들을 완전히 제압할 수 있는 크리스천들이 생겨나게 된다고 주장했다. 사역의 초기에 케년은 감리교의 완전 성화 교리에 영향을 받았다. 1892년에 그는 에머슨 대학에 등록했는데 이 곳은 형이상학적이며 신비주의 사상과 행태 등으로 얼룩진 기관이었다. 그 대학의 에머슨 학장은 유일교 목사로서 결국 에디 부인이 만든 '크리스천 사이언스'(이단)에 합류하고 말았다. 그 외에도 에머슨 대학 출신 중 여러 명이 '크리스천 사이언스'로 넘어가 거기에서 많은 활동을 했다. 케년은 이들의 가르침에 동화되어 영적인 것이 육적인 것의 원인이 되며 긍정적으로 말을 하면 그대로 이루어진다고 가르쳤고 또한 신유나 기타 다른 기적들이 반드시 크리스천의 삶에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해긴은 케년으로부터 ‘긍정적 고백 이론’을 물려받아 현 시대 오순절·은사주의 안에 파급시켜 큰 영향을 미쳤다. [오순절·은사주의 백과 사전]은 이렇게 말한다.
     
    "케년의 책들은 해긴, 코플랜드, 고셋, 캡스 등 ‘긍정적 고백 이론’을 가르치는 모든 이들에게 지침서가 되었다."
    해긴은 그리스도의 육적 죽음이 우리의 죄를 제거하지 않았고, 그리스도의 영적죽음과 지옥에서의 투쟁이 죄를 제거했다고 엉뚱한 주장을 한다. 다시 말해 해긴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옥으로 보냄을 받아 그곳에서 사탄과 및 그의 마귀들과 투쟁을 벌이고 승리한 결과 다시 ‘거듭나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참으로 간과할 수 없는 이단 교리이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리스도의 속죄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받는다고 아주 명백하게 가르친다(행 20:28; 히 9:14; 10:10). 다시 말해 속죄는 갈보리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몸에서 자신의 영을 내놓으시며 돌아가셨을 때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요 19:30).
    또한 예수님은 결코 거듭난 적이 없다. 거듭난다는 것은 길을 잃은 죄인들에게만 필요한 것이며 그분은 결코 길을 잃은 죄인이 아니셨다. 비록 예수님이 친히 자기 몸에 우리의 죄를 짊어지셨으나 그분은 결코 죄인이 아니셨다. 그분은 결코 지옥에서 사탄과 그의 마귀들에게 고통을 당하지도 않았다. 사실 성경은 사탄이 지옥에 있다거나 혹은 지옥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이제 곧 그는 천년 왕국이 시작될 때 1000년 동안 무저갱 즉 바닥 없는 구덩이에 갇히게 될 것이고(계 20:1∼3), 궁극적으로는 불호수에 내던짐을 당할 것이다(계 20:10). 또한 성경은 지금 이 시간에 사탄이 지옥의 권세를 잡고 있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또한 해긴은 크리스천도 예수님같이 하나님이 육체를 입고 나타나는 것이라는 매우 이단적인 교리를 가르친다. 이것은 참으로 무시무시한 이단 교리인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육체 안에 나타나신 하나님이며 영원토록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하지만 우리 신자들은 결코 전능하신 하나님이 육체를 입고 나타난 것이 아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구약 성경이 예언한 메시아임을 증명하기 위해 큰 기적과 이적을 행하셨다. 하지만 우리 크리스천들은 결코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그런 기적과 이적을 행할 수 없다. 스스로 큰 기적과 이적을 일으킬 수 있다고 장담하는 오순절 부흥사 가운데 단 한 명도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행한 적이 없다.
     
    해긴은 또한 천사들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덟 번이나 환상 중에 나타나 자기를 지도했다고 주장한다. 그 중의 일곱 번째 환상은 1962년 12월 12일에 일어났다. 그는 예수님이 나타나서 모든 교단과 교회를 움직이사 그들이 다 구원받고 성령 침례를 받게 될 것을 자기에게 예언했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예수님이 자기에게 이 같은 종교 통합 운동에서 한 가지 역할을 맡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주장한다. 이 같은 예언은 이미 위글스워스가 두 플레시스에게 말한 적이 있으며, 현재 우리는 로마 카톨릭 교회와 많은 프로테스탄트 교단들의 연합 운동을 통해 이런 종교 통합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면서 이 예언이 실제로 이 세대에서 성취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같은 종교 통합 운동을 통해 이제는 오순절 성령 운동 연합 대회에 카톨릭 및 프로테스탄트들이 대거 참석하여 천주교 미사를 거행하는 일을 아주 쉽게 볼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이 같은 오순절·은사주의 종교 통합 운동이 진리의 성령께서 주관하는 운동이 아님을 성경을 통해 확신하고 있다.
     
    해긴은 또한 건강·번영 복음을 확산시킨 장본인이다.
    "구원과 마찬가지로 신유·건강도 이미 갈보리에서 다 이루어진 것이다. 이제부터 우리는 단순히 그것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하나님은 우리의 질병과 고통을 통해 영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신유와 축사를 통해 영광을 받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해긴의 주장은 그의 행적과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가 지난 60년 동안 한 번도 아픈 적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상 그는 여러 차례 심장병으로 고생했고 어떤 때는 한달 반이나 심장병으로 누워 꼼짝하지 못한 적도 있다. 한편 그는 건강·번영·축복 복음을 매우 강조해서 크리스천은 반드시 영적·재정적 번영을 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 번은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에게 나타나서 다시는 예전과 같이 부자가 되게 하거나 돈을 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그에게 딸린 천사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명령해서 필요한 것을 다 얻으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같은 주장에 근거하여 이제 크리스천들은 자기들의 원하는 바를 말로 표현하기만 하면 천사들이 그 모든 것을 가져다 준다고 그는 헛된 주장을 펴고 있다. 그래서 믿음·신유·번영 부흥사들은 한결같이 말의 능력 혹은 입의 능력을 강조하는 것이다. 말로 긍정적으로 구하기만 하면 다 이루어진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이 같은 말·믿음 이단교리는 현재 모든 오순절 교회 안에서 아주 확고한 교리로 자리잡고 있다.
     
    다른 오순절 부흥사들의 집회와 마찬가지로, 해긴의 집회 역시 '영 안에서 죽는 현상'이 충만하게 나타난다. 한번은 소녀 하나가 영 안에서 죽음을 당해 무려 아홉 시간이나 움직이지 못했고 그의 동료들이 그녀를 움직이려 했으나 허사였다고 한다. 또 한번은 집회 도중 한 사람이 공중에 붕 뜨는 일이 발생했는데 해긴의 부인과 또 다른 두 사람이 과연 이 일이 주께로부터 온 것인지 의문을 품었다고 한다. 그러자 해긴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령을 주사 자기 손가락을 그 세 명의 이마에 대라고 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가 손가락을 대자 이 세 명은 곧바로 마룻바닥에 넘어져 마비가 되었고 일어나지 못했다. 마침내 그들이 해긴의 권능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임을 인정하자, 그는 다시 손가락을 그들의 이마에 댔고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일어났다고 한다. 해긴은 자기의 능력을 통해 한 여인이 공중에 붕 뜨는 일이 발생했다고 주장하였다.(공중부양은 심령술에서 나타나는 현상이지 참된 성령의 은사가 아니다). 또한 그는 자기가 천국과 지옥을 다 다녀왔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런 거짓·이단 교리를 가르치는 해긴은 최근 유행하고 있는 '웃음 부흥 운동'에서 핵심 역할을 하였다. 그는 '웃음 운동' 부흥사 하워드-브라운을 초청해서 집회를 열곤 했다. 1997년 10월 12일에서 24일 사이에 미주리 주 체스터필드에서 열린 웃음 부흥 집회는 비디오로 녹화되었는데, 그 비디오 테이프(맨 아래 표시 사이트 참조)를 보면 참으로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그 집회에서 벌어졌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거기에는 해긴과 그의 아들 그리고 케네스 코플랜드 등이 참가했다. 이 집회에서 해긴은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뱀처럼 혀를 날름날름 거리며 사람들을 향해 숨을 내쉬고 손으로 그들의 머리를 막 치면서 통로로 걸어갔다. 그러자 의자에 앉은 사람들이 막 쓰러지면서 자리에서 빠져 나와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넘어졌다. 여자들은 치마가 다 벗겨진 채 뒤로 넘어졌고, 미리 대기하고 있던 여자들이 뛰어 나와서 덮을 것을 가져다가 넘어진 여자들의 하체를 가렸다. 케네스 코플랜드와 해긴의 아들 역시 술 먹은 사람처럼 마룻바닥에서 구르며 소리를 지르며 아무 이유도 없이 웃어대기 시작했다. 비틀거리는 해긴을 부축할 의무를 지닌 해긴의 수행원 가운데 한 명도 술 취한 것처럼 하며 매력적으로 보이는 여인의 무릎 사이로 넘어졌다. 한 마디로 그 곳은 혼동과 혼돈의 장소였다. 술 취한 것 같은 해긴을 강대상으로 데려가기 위해 네 명의 남자 수행원이 필요했다.
     
    참으로 해긴의 영향력은 대단했으며, 지금까지 수천 명의 학생들이 그가 운영하는 '레마 성경 훈련 센터'를 수료한 뒤 해긴과 같은 사역을 수행하기 위해 온 세상의 여러 곳으로 퍼져 나갔다. 그의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은 미국에서만 180여 개의 방송국에서 방송하고 있고 단파를 통해 전세계의 80여개 국에 방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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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씀 믿음"(Word Faith) 운동
    (이하 내용은 존 맥아더의 <무질서한 은사주의>와 마이클 호튼의 <미국제 복음주의를 경계하라> 중에서 발췌함)
    ‘믿음 운동’이라고도 알려진 ‘말씀 신앙 운동’ - 말씀, 믿음 공식, 믿음의 말씀, 긍정적 고백, 말하고 주장하기 또는 건강과 부요와 형통의 가르침 등 - 은 미신적이고 물질적인, 은사주의 운동의 한 갈래다.
     
    케네스 해긴, 케네스 코플랜드와 글로리아 코플랜드, 로버트 틸턴, 프레드 프라이스, 찰스 캡스 등을 위시한 말씀 신앙 운동의 지도자들은 모든 신자에게 경제적 번영과 완벽한 건강을 약속한다. 그들은 그 정도 축복에 미치지 못하는 것들은 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주장한다(이것은 신약 성경의 가르침이 결코 아니다!).
     
    말씀 신앙 운동의 신학은 기독교를 가장 저급한 인간 중심적 종교-기독교인 자신의 목적을 위해 신을 윽박지르고 꾀어 내고 조종하고 통제하고 이용할 수 있는, 일종의 부두교-와 하등 다를 것이 없는 체계로 바꾸어 놓았다.
    해긴 등 말씀 신앙 지도자들은 신약적인 기독교의 핵심을 더렵혀 신자들의 초점을 건전한 교리,예배,봉사,희생,사역 등에서 멀어지게 하고 그 대신 약속된 경제적, 물질적 ‘축복’으로 옮겨 가게 한다. 그런 축복들은 말씀 신앙의 공식을 알고 따르는 이들에게, 하나님이 베푸실 것으로 기대되는 화물이다.
     
    말씀 신앙에서는 신자들이 하나님을 이용하지만, 성경적 기독교의 진리는 그와 정반대로 하나님이 신자를 사용하신다. 하나님을 주님으로 믿는 것은 신앙이지만, 하나님을 자기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는 것은 주술(呪術), 즉 영적 테크놀로지이다.
    말씀 신앙 운동의 하나님은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다. 말씀 신앙의 교리는 신자 개인을 하나님보다 위에 두고 하나님을 신자가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알라딘의 요술 램프에 나오는 거인이나 산타 클로스나 시종의 역할로 전락시킨다. 말씀 신앙 신도들에게 최고의 권위는 자기 자신이다. 이 운도의 지도자들은 노골적으로 신자들에게 작은 하나님처럼 행동하라고 가르치고 부추긴다. 말씀 신앙의 가르침에는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개념이 전혀 없다.
     
    ‘케네스 해긴’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한 번이라도 우리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게 된다면,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신자들은 아직 자신이 곧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신자의 정체가 바로 그것입니다. 신자가 곧 그리스도입니다...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화육(化肉)입니다”.
     
    ‘케네스 코플랜드’는 아담이 “하나님과 동급으로 창조되었다”고 가르친다. 즉 아담은 하나님의 복사판이라는 것이다. 아담은 하나님처럼 행동했고 아담이 말한 것은 이루어졌다. 아담이 사탄에게 무릎을 꿇고 사탄을 자기 위에 받들어 모셨을 때 하나님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른 하나님이 사탄을 받들어 모셨기 때문이다. 아담은 하나님과 동급으로 창조되었지만 반역을 저지르는 순간 하나님보다 아래 등급으로 떨어졌다.
    코플랜드에 따르면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신자들이 다시 ‘하나님과 동급’으로 거듭날 수 있는 권리를 얻으셨다. 신자들은 하나님과 동급이기 때문에 지금 이 땅에서 축복(치유,구원, 경제적 축복, 육체적 축복, 가정적 축복...등)을 보장받는다고 가르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부분적으로만 하나님인 것이 아닙니다. 당신 전부가 하나님입니다. 당신은 당신 안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한 분 모시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해긴과 코플랜드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이다. 여러분들은 하나님들이다”
     
    이런 식으로 말씀 신앙 전도자들은 하나님을 폐위시키고 그 자리에 신자를 즉위시켰다. 바로 이러한 기본적인 오류에서 그들의 거의 모든 다른 오류가 뒤따라 나온다.
    그들은 사탄의 최초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갔다(창 3:4-5). 피조물이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생각은 과거나 지금이나 늘 사탄의 거짓말이었다. 사실 그것은 마귀 자신을 타락하게 한 바로 그 거짓말이었다(사 14:14)
     
    말씀 신앙 운동의 예수님은 신약 성경의 예수님이 아니다. 말씀 신앙 전도자들은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해 죽으시기 위해 자신의 신성을 버리고 심지어 사탄의 본성까지 취하셨다고 말한다. 케네스 코플랜드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말을 했다. “왜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신 33년동안 공개적으로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선포하시지 않았는가?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 이 땅에 오시지 않았다. 그는 한 사람의 인간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이러한 예수님이 성육신 기간 동안 신성을 비우셨다는 (케노시스 신학으로 알려진) 개념은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에서 전개된 이단적인 주장이다. 그리스도가 자기를 비우신 것(빌 2:7)은 신적인 속성만을 사용하는 것을 보류하셨다는 뜻이지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니었다는 뜻이 아니다. 예수님의 신성의 변화는 예수님의 불변성 때문에 불가능하다(히 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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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처럼 심각한 이단 사상을 가진 해긴과 말씀 신앙 전도자들을 전혀 분별없이 추앙하고 따르는 자들은 어떤 자들이며, 그들은 과연 무엇을 추구하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
     
    사랑하는 조국 교회들과 성도들이여,
    정신차리고 이런 멸망케하는 허탄한 미혹에서 벗어나서 복음의 진리로 돌아갑시다!
     
    (마 24:4-5, 24-25)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show)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성도들)도 (복음의 진리를 믿는 믿음에서 떠나도록) 미혹하리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살후 2:9-12) "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십자가복음)의 사랑을 받아들이지(믿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사 거짓말을 믿게 하심은 진리(복음)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출처: https://lake123172.tistory.com/2972 [목양연가(牧羊戀歌):티스토리]





    워치만 니는 누구인가?


    워치만 니(중국어 간체자: 倪柝声, 정체자: 倪柝聲, 병음: Ní Tuòshēng 니퉈성[*], 광둥어: ngai4 tok3 sing1 응아이 톡 싱, 1903년 11월 4일~1972년 5월 30일)는 20세기에 중국에서 사역했던 교회 지도자이자 그리스도인 교사였다.

    그는 1922년에 푸저우(福州, Fuzhou)에서 지방 교회들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교회 집회들을 세웠다. 자신의 30여년의 사역기간 동안 니는 성경을 해석한 많은 책들을 출판했다. 그는 중국 전역에 교회들을 세웠고, 성경을 배우는 학생들과 교회 일꾼들을 위하여 많은 컨퍼런스를 개최했다. 이어진 중국 공산 혁명기간에 니는 자신의 신앙 때문에 박해받고 투옥되어 20년 동안의 자신의 남은 생애를 감옥에서 보냈다. 그는 2009년 7월 30일 뉴저지주 출신의 미국 국회의원인 크리스토퍼 H. 스미스(Hon. Christopher H. Smith) 의원에 의해 존경을 받았다.

    가족과 유년 시절

    워치만 니는 1903년 11월 4일 중국 세관(the Imperial Customs Service)의 존경받는 관원인 니원슈(倪文修)와 미국인들이 직원으로 근무하는 감리교 미션학교에서 뛰어난 학생이었던 린허핑(林和平) 사이에서 9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린허핑은 상해에 있는 중국인 서구 여학교(the Chinese Western Girls’ School)에서 영어를 배우기 위하여 잠시 머무는 동안 복음 전파자와 설교자로서 봉사하기 위해 의료분야에서의 잠재적인 경력을 포기한 젊은 여성인 위츠두(余慈度)를 만났다.[1] 워치만 니의 부모님 모두 감리교인이었기에, 그는 감리교 감독에 의해 유아 세례를 받았다.[2][3][4]

    초기 학창 시절

    워치만 니는 13살 때인 1916년에 푸저우(Fuzhou)에 있는 '교회 선교회'(the Church Missionary Society)가 운영하는 중학교에 들어감으로 서구식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그후 그는 푸저우에 있는 트리니티 칼리지 부속 중학교에 갔는데, 거기서 뛰어난 총명과 포부를 드러내었고 자신의 학급에서 꾸준히 일등을 유지했다.[1][5][6]

    구원과 훈련

    워치만 니가 17세인 1920년 봄에 도라 유는 푸저우에 있는 '천안당 교회'(天安堂, the Church of Heavenly Peace)[7] 예배당에서 열리는 열흘 간의 부흥 집회[8]에 연사로 초청되었다. 워치만 니 어머니가 이 부흥 집회에 참석한 후에, 그녀는 감동을 받아서 예전에 불공정하게 벌을 주었던 한 사건에 대하여 자기 아들에게 사과했다. 그녀의 이런 행위가 니를 아주 많이 감동시켰고, 니는 거기서 무슨 일이 발생하고 있는지 보기 위해 그 다음 날 복음 집회에 참석하기로 결심했다. 그 집회에서 돌아온 후에 니 본인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1920년 4월 28일 저녁에 나는 홀로 방 안에 있었다. 주님을 믿을 것인가 안 믿을 것인가의 문제로 인해 앉아도 불안하고 일어나도 불안했다. 처음에 나는 달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기도할 때 너무도 큰 나의 죄를 발견하게 되었고 오직 주 예수님만이 나를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을 보았다. 그때 나는 한면으로 주님의 두 손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보았고 또 한면에서는 주님께서 두 손을 내밀고 나를 환영하시며 내게, "나는 여기서 너를 받아들이려고 기다리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았다. 이러한 사랑이 나를 굴복시켰다. 이전에 나는 다른 사람이 예수 믿는 것을 비웃었다. 그날 저녁에 나는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은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눈물을 흘리며 죄를 자복하고 주님의 사하심을 구했다. 기도한 후에 나는 전에는 맛보지 못한 기쁨과 평강을 맛보게 되었다. 그 때 방 안에는 빛이 충만한 것 같았다. 나는 주님께 말했다. "오 주여, 당신은 나를 은혜로 대하셨습니다."

    ―워치만 니, 워치만 니의 간증

    니는 트리니티 칼리지의 한 학생으로서 자신의 구원의 체험에 대해 동급생들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후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돌아온 후 곧 주님께서 내 몸에서 일하시는데 지장이 있는 것들을 해결했다. 또한 70명의 동급생들의 명단을 만들어 그들을 위해 매일 기도했다. 어떤 날에는 매일 한 시간씩 심지어 수업 중에도 그들을 위해 기도했다. 기회만 있으면 그들에게 주 예수님을 전했다... 주님의 은혜로 나는 매일 기도하기를 계속했고, 몇 개월 후에 70명 중 1명을 제외한 69명이 다 구원받았다.

    ―워치만 니, 워치만 니의 간증

    니는 회심 후에 기독교 봉사자로서 훈련받기를 갈망했다. 그는 처음에 고등학생임에도 상해에 있는 도라 유가 세운 성경 연구소에 다녔다. 그러나 늦잠을 자는 것과 같은 나쁘고 게으른 습관 때문에 퇴학을 당했다. 니는 자신의 성격을 개선하려고 노력한 결과 영국 선교사인 마가렛 바버(和受恩; Margaret E. Barber) 자매와 가깝게 되었고, 그녀는 니의 교사와 조언자가 되었다.[9][10] 니는 영적인 도움을 얻으려고 매주 바버 자매를 방문했다. 바버는 니를 젊은 학습자로 취급하여 종종 엄격하게 훈육했다. 바버가 1930년에 죽었을 때, 자신의 모든 소지품들을 니에게 남겼다. 그는 이렇게 썼다.

    우리는 복건(Fukien)에 있는 나성탑(羅星塔) 백아담(白牙潭(Lo-Hsing Pagoda)에 살던 바버 여사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큰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녀는 주님 안에서 매우 깊은 분이었으며, 그녀의 주님과의 교통과 주님에 대한 그러한 충성은 이 세상에서 발견하기가 힘들다고 생각한다.

    ―위트니스 리, 이 시대의 신성한 계시의 선견자 워치만 니

    니는 바버 여사를 통해 디 엠 팬톤(D.M. Panton), 로버트 고벳(Robert Govett), 펨버(G.H. Pember), 제시 펜 루이스(Jessie Penn-Lewis), 어스틴 스팍스(T. Austin-Sparks) 그리고 다른 저자들의 저술을 접하게 되었다.[9] 이에 더하여 그는 존 넬슨 다아비(John Nelson Darby), 윌리엄 켈리(William Kelly), 맥킨토시(C.H. Mackintos) 같은 플리머스 형제회 교사들의 책들도 소장했다. 마침내 그의 개인 서재는 교회 역사, 영적인 성장, 성경 주석 등에 관한 약 3천 권이 넘는 책들로 가득 채워졌다. 그는 다양한 방법으로 부지런히 성경을 연구함으로 성경에 매우 익숙하게 되었다. 니는 사역의 초기 시절에 수입의 삼분의 일은 개인의 필요를 위해, 삼분의 일은 남을 돕기 위해, 나머지 삼분의 일은 영적인 책들을 사기 위해 사용했다고 말했다. 그는 책을 읽을 때 적절한 자료를 택하고, 이해하며, 분별하고, 기억하는 뛰어난 은사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한눈에 한권의 책의 요점을 쉽게 붙잡았다.[11]

    결혼

    니는 10대 때에 장핀훼이(Charity Chang)와 사랑에 빠졌다. 그들 두 가정 사이에는 삼대에 걸쳐 친교가 있었다. 니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장핀훼이는 그의 면전에서 예수를 조롱했다. 이것은 그를 괴롭혔다. 니는 많은 고심 끝에 그들의 관계를 끝낼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십 년 후, 장핀훼이가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주님께로 돌아왔다. 그녀는 1934년부터 상해 교회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했다.[6] 니가 항저우에서 4차 "이기는 자 집회"를 인도하고 있을 때 거기서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렸다. 장핀훼이는 자주 아픈 니를 돌보았고, 그가 투옥된 후에는 유일하게 그녀만 방문이 허락되었다. 그들은 자녀가 없었다.[6]

    사역

    워치만 니는 1936년에 한 무리의 동료 사역자들 앞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사역의 윤곽을 말했다.

    그 때로부터 나는 하나님에 의해 고침받을 때까지 병으로 누워 있었다. 나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일의 종류에 대하여 더욱 분명하게 보게 되었다.

    1. 문서사역: 내가 병이 나은 후 하나님께서 내게 알려주신 것은 그분이 내게 주신 사명은 성경 주해서 저술이 아니요, 일반적인 복음 전도도 아니요, 예언 해석도 아니요, 다만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을 전하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내가 쓴 모든 것은 오직 단 하나의 목적, 곧 독자들이 새 창조물 안에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고 그분의 손 안에서 쓸모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이제 나는 온 마음을 다하여 나의 저술들을 나의 독자들과 나 자신을 영원히 지켜주시는 하나님께 맡기며, 그분의 영이 나를 인도하여 그분의 모든 진리 안으로 들어가게 해 주시기를 원한다.

    2. 이기는 자 집회: 하나님께서 나의 눈을 밝혀주사 각지 교회들 안에서 이기는 자들이 일어나 그분의 증인이 되게 하심을 보여 주셨다... 그러므로 매년 한 차례씩 이기는 자들의 집회를 열어 하나님이 내게 계시하신 말씀을 충심으로 전했다.

    3. 지방 교회들을 세움: 주님께서 나를 불러 그분을 섬기게 하신 것은 부흥 집회를 열어 사람들이 성경의 교리를 더 많이 듣게 하라는 것도 아니고, 내가 위대한 복음 전파자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주님은 내가 한 지방 한 지방에 그분의 교회를 건축하여 그를 나타냄으로써 지방 교회들의 합일(合一)의 간증을 나타내며, 모든 성도들이 교회 안에서 분량대로 지체의 봉사를 하여 교회생활을 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개인의 승리 생활이나 영성을 추구하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의 단체로서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하나님 자신께 드리는 것이다.

    4. 젊은이들을 훈련시킴: 만일 주님의 오심이 지체된다면, 반드시 청년들을 일으켜 다음 세대에도 계속 그의 간증을 잇게 하는 것이다... 나의 뜻은 하나의 신학교나 성경 학원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젊은 청년들이 단체생활을 하면서 한 면으로는 영적 생활을 훈련하고, 서로 상합하며 성경 읽기와 기도를 훈련하며 좋은 인성을 기르고, 또 한면으로는 어떻게 죄와 세상과 육체와 천연적인 생명과 그런 것들을 처리하는지를 배우는 것이다. 적당한 시기에 그들은 각 지방 교회로 돌아가서 성도들과 함께 교회 안에서 주님께 봉사하게 되는 것이다.

    그 후에도 계속 내 마음에 눌림이 있었던 일은 대체로 이 네 가지가 포함된 것이었다.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린다.

    ―워치만 니, 워치만 니의 간증

    니는 매우 이른 나이부터 저술과 출판을 시작했다. 그는 1923년에 '현재의 간증'(The Present Testimony)이라는 잡지를 펴내기 시작했고, 1925년에는 기독도보(The Christian)라는 또 다른 잡지를 시작했다. 니가 자신의 이름을 '니슈토'(Ni Shu-tsu)에서 '니토셍'(Ni To-sheng, 영어 번역은 Watchman Nee)으로 바꾼 시기도 1925년도였다. 니가 스물 한 살 때 중국에서 말레이시아 시티아원(Sitiawan, Malaysia)으로 이주하여 살고 있는 어머니를 방문하는 동안 그곳에 또 다른 지방 교회를 세웠다. 니는 1926년에 상해에 또 다른 지방 교회를 세웠고, 그곳은 중국에서 그의 사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1932년에는 지방 교회들로 모이는 니의 실행이 중국,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전역에 확산되었다. 그는 이것을 자신이 투옥될 때까지 유지했다.[1][6][12]

    니는 1928년에 <영에 속한 사람>(The Spiritual Man)이라는 세권으로 된 책을 출판했다.[13] 니는 같은 해 2월에 상해에서 그의 첫번째 "이기는 자 집회"를 열었다. 1934년에 니는 "하나님의 중심성과 우주성이신 그리스도"와 "이기는 자들"을 주제로 한 특별 집회를 열었다. 니에 따르면, 이것이 그의 사역의 전환점이 되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교리와 지식으로부터 하나님의 중심성이요 우주성이신 그리스도라는 한 살아있는 인격으로 큰 전환을 가졌다."[1][6][14]

    1934년에 니는 성경에 있는 교회는 결코 지역들로 나뉠 수 없고 어떤 가르침이나 교리에 근거하여 교단을 만들 수 없다고 하면서, 지방 교회들의 실행을 정의하고 설명하는 일련의 담화를 시작했다. 이러한 담화들은 마침내 <모이는 생활>(The Assembly Life)이라는 책으로 출판되었다. 같은 해 오월에 니는 위트니스 리를 격려하여 옌타이에서 상해로 이주하게 하여 자신과 이연여(Ruth Lee) 자매가 맡고 있던 니의 출판물을 편집하는 일에 합류시켰다.[1][6]

    1938년에 니는 유럽 여행 중에 메시지를 전했는데, 이것은 후에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The Normal Christian Life)이라는 책으로 출판되었다.[4] 그가 돌아온 후에 그리스도의 몸에 관한 집회를 가졌다. 니에 의하면 이것이 그의 사역에서 두번째 전환이었다. 니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첫번째 전환은 그리스도를 안 것이고, 두번째 전환은 그분의 몸을 안 것이다. 그리스도를 안 것은 믿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의 절반일 뿐이다. 믿는 이들은 또한 반드시 그리스도의 몸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는 머리이시고, 그분은 또한 몸이시다."[1]

    1939년에 니는 그의 둘째 남동생이 하던 기울어져 가는 제약회사 공장 운영에 관련되었다. 가족들의 압력을 마지못해 따른 것이지만, 니는 또한 이것이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극심한 가난과 고난으로 고통 당하던 자신의 많은 동역자들을 지원할 수 있는 기회라고 보았다. 니는 전반적인 공장 관리를 넘겨 받은 후, 그것을 재편성했고, 상해에 있는 다수의 지방 교회 구성원들을 직원으로 채용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상해 교회의 장로들 중 몇 명은 니가 사업에 연관된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이것은 니가 1942년에 그의 사역을 잠시 중단하게 만들었다. 얼마 후에 상해 교회는 집회를 중단했다.[1][6]

    1945년 3월 6일에 니는 중경(Chongqing)으로 이주하여 그곳에 있는 공장을 감독했다. 거기서 그는 아가서에 관한 메시지들과 <교회의 정통>(The Orthodoxy of the Church)으로 출판된 계시록 2장과 3장에 관한 일련의 메시지들을 전했다. 1945년 9월 9일에 일본군은 중국을 포기하고, 제2차 중일전쟁은 끝났다.[6] 1946년에 왕포진(Peace Wang) 자매와 위트니스 리 형제는 거기서의 니의 문서 사역은 물론 상해 교회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일하기 시작했다. 니는 크리스천 일을 하는 자신의 동역자들을 위한 훈련을 실시하기 위하여 고령산(Kuling)에 12채의 목조 단층집을 구입했다. 1948년 4월에 상해 교회에 큰 부흥이 있었고 니는 거기서 자신의 사역을 재개했다. 그가 돌아왔을 때, 니는 하나님께 헌물을 드리듯이 사역을 위해 자신의 제약 공장을 내놓았다. 이것은 많은 형제 자매들에게 영향을 주어 그들 또한 자신들의 재산을 사역을 위해 다 내놓게 했다. 짧은 기간에 상해 교회는 1천명으로 증가했다.[1][6]

    박해와 투옥

    1949년에 중국 공산당이 출현한 후에 그리스도인들은 큰 박해를 받았다.[15] 또한 많은 외국 선교사들도 거짓 정죄를 받고 체포되었다. 강화된 선전 캠페인과 구금 위협을 통하여, 믿는 이들은 서로 밀고하도록 영향 받았다.[16][17][18]

    1952년 4월 10일에 워치만 니는 만주(Manchuria) 공안 당국자들에 의해 상해에서 체포되어, 뇌물공여, 국가재산 절취, 조세 회피, 정부계약 사취, 정부의 경제 정보에 대한 불법 취득으로 기소되었다. 니는 또한 "재 교육" 되었다. 1956년 1월 11일에 지방 교회들 내의 동역자들과 장로들을 겨냥한 전국적인 소탕이 있었다. 일부는 노동 수용소에서 죽었고, 다른 이들은 무기 징역형을 언도 받았다. 1956년 1월 18일에 종교 사무국(the Religious Affairs Bureau)은 상해에 있는 난양 가(街)(Nanyang Road)에 위치한 교회 집회 장소에서 12일 간의 규탄 집회를 열었다. 그 규탄 집회에서 니를 반대하는 많은 참소들이 소개되었다.[19] 1956년 6월 21일에 니는 상해 고등 법정에 출두해서, 상해 교회 장로들에 의해 출교되는 선언이 있었고, 모든 혐의들에 대해 유죄가 인정되었다. 그는 노동 교화가 포함된 15년 형을 선고받았다. 처음에 그는 상해에 있는 틸랑퀴오 감옥(Tilanqiao Prison)에 수감되었고 후에 다른 장소로 옮겨졌다. 오직 그의 아내인 핀훼이 만이 그를 면회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1956년 1월 29일에 공안 당국이 난양로 건물을 접수했고, 많은 니의 동역자들이 체포되어 격리되었고, 워치만 니를 거부하도록 강요받았다. 왕포진(Peace Wang), 이연여(Ruth Lee), 유성화(Yu Chenghua) 등은 묵비권을 유지하며 감옥형을 언도받은 반면, 일부 동역자들은 워치만 니를 참소하는데 가담했다. 이런 일에 이어서 "반혁명분자 워치만 니"를 정죄하는 대규모 규탄대회가 전국에 걸쳐 개최되었다.[20][21]

    투옥 후반기와 죽음

    니가 1972년에 죽기 1년 전에 그의 아내인 핀훼이가 의자에서 넘어지는 사고와 고혈압으로 죽었다. 니는 그녀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 때 핀훼이의 큰 언니가 감옥에 있는 니를 돌보는 책임을 졌다.[22] 니는 1967년에 석방되기로 되어 있었으나 그가 1972년 5월 30일 죽기까지 감옥에 수감되었다.[23]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어떤 통지도 없었고, 장례식도 없었다. 그의 유품들은 가족이 감옥에 도착하기 전인 1972년 6월 1일에 소각되었다.[6]

    니의 한 조카 손녀가 니의 유골을 가지러 갔을 때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1972년 6월에 우리는 농장으로부터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나는 큰 이모 할머니와 함께 농장으로 급히 갔는데, 그곳에 도착해서야 우리는 비로소 그들이 할아버지를 이미 화장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단지 그분의 유골 밖에 볼 수 없었다... 세상을 떠나기 전 그분은 베개 밑에 종이 한 장을 남겨 놓았는데, 그 위에는 매우 떨리는 손으로 적은 몇 줄의 글이 있었다. 할아버지는 그분의 일생 동안 그분이 죽기까지 붙잡았던 진리를 증거하길 원하셨다. 그 내용은 이러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죄인들을 속량하기 위해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다. 이것은 우주 가운데 가장 큰 진리이다. 나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죽노라. 니토셍." 농장 간부가 이 종이를 우리에게 보여 줄 때, 나는 이 글을 신속히 마음에 기억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할아버지는 돌아가셨지만, 그분은 죽기까지 충성하시고 피로 물든 면류관을 가지고 주님께로 가셨다. 비록 하나님께서, 그분이 살아서 그의 아내와 함께 있기를 바랐던 마지막 소원은 이루어 주시지 않았지만, 주님은 그분들이 주님 앞에서 재회하는 더 나은 것을 예비해주셨다.

    ―워치만 니의 조카 손녀, "워치만 니: 이 시대의 신성한 계시의 선견자."

    워치만 니의 사후에 니의 동료 수감자였던 우요치가 형기를 마치고 석방되어 니의 옥중 생활과 순교를 증언해 주었다. 우요치에 따르면 워치만 니는 신앙을 포기하면 석방해 주겠다는 중국 당국의 거듭된 회유에도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켰다.

    신앙

    니는 성경의 문자적 영감과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믿었다. 그는 또한 하나님께서 삼일, 즉 아버지, 아들, 영이시며, 셋은 구분되시지만, 완전히 하나이시고, 영원부터 영원까지 동시에 존재하시고, 서로 안에 상호내재하심을 믿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심지어 하나님 자신이시고, 인간의 생명과 신성한 생명 모두를 가지신 사람으로서 성육신하셨음을 믿었으며, 그분이 우리의 구속을 성취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음을 믿었고, 제 삼일에 죽은 자들로부터 몸을 입고 일어나셨음을 믿었으며, 하늘로 승천하사 보좌에 앉으시고 영광으로 관 쓰셨으며, 만유의 주가 되셨음을 믿었고, 그분을 따르는 모든 이들을 영접하고, 이스라엘을 구원하며, 이 땅 위에 그분의 천년왕국을 세우시기 위해 다시 오실 것을 믿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는 이들인 각 사람이 하나님에 의해 용서될 것이고, 그분의 구속하는 피에 의해 씻겨지고, 믿음으로 의롭게 되며, 성령에 의해 거듭나며, 은혜로 구원받는 것을 믿었다. 그러한 믿는 이들은 하나님의 자녀이고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임을 믿었다. 그는 또한 모든 믿는 이들의 운명이 그리스도의 몸이요 하나님의 집인 교회를 구성하는 한 부분이 되는 것을 믿었다.[6]

    출판물

    많은 청중들 앞에서 자주 말한 것에 더하여, 워치만 니는 여러 권의 저서들, 논문들, 서신들, 찬송들의 저자이었다. 그의 책의 대부분은 그가 메시지 전한 것을 집회 참석자들이 받아 적은 노트에 기초한 것이었다. 일부 책들은 이전에 정기 간행물로 출판된 메시지들로부터 편집된 것이다.

    워치만 니가 쓴 영어로 된 책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The Normal Christian Life)이다. 이 책은 1938년부터 1939년의 유럽 여행 중에 그가 영어로 전한 담화에 기초한 것이다. 그는 거기에서 신약의 로마서에 대한 자신의 신학적인 견해를 피력했다.

    워치만 니가 쓴 책 중에 널리 알려진 것들 중 일부는 다음과 같다.

    • 영에 속한 사람 (1928)
    • 우리의 위임에 관하여 (1939)
    • 아가서 강해 (1945)
    • 자아의 파쇄와 영의 해방 (1950)
    •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 (1957)
    • 좌행참 (1957)
    • 주여 이 사람은 (1961)
    •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1968)

    워치만 니는 자신의 책을 출판했을 뿐 아니라 다른 영적인 출판물들도 자신의 영감 아래 영어에서 번역하여 출판했다. 그것들은 어스틴 스팍스(T. Austin-Sparks), 마담 귀용(Madame Guyon), 메리 맥도너우(Mary E. McDonough), 제시 펜 루이스(Jessie Penn-Lewis)와 일부 다른 이들의 저술을 포함한다.[24]

    추가로 읽기

    • Chen, James. Meet Brother Nee(니 형제님과의 만남). Hong Kong: The Christian Publishers (1976).
    • Kinnear, Angus. Against the Tide(시류를 거슬러서). Eastbourne: Kingsway Publications (2005).
    • Laurent, Bob. Watchman Nee: Man of Suffering(워치만 니: 고난의 사람). Uhrichsville: Barbour Publishing (1998).
    • Lee, Witness. Watchman Nee: A Seer of the Divine Revelation in the Present Age(이 시대의 신성한 계시의 선견자-워치만 니). Anaheim: Living Stream Ministry (1991).
    • Lyall, Leslie. Three of China's Mighty Men(중국이 낳은 위대한 세 사람). London: Overseas Missionary Fellowship (1973).
    • Nee, Watchman. Watchman Nee’s Testimony(워치만 니의 간증). Hong Kong: Hong Kong Church Book Room (1974).
    • Sze, Newman. The Martyrdom of Watchman Nee(워치만 니의 순교). Culver City: Testimony Publications (1997).
    • Wu, Dongsheng John. Understanding Watchman Nee: Spirituality, Knowledge, and Formation(워치만 니의 이해-영성, 지식, 형성). Eugene: Wipf & Stock Publishers (2012).



    워치만 니는 누구인가?

    지방교회 이단에 관한 학술 자료(3)

    • 유동근 목사


    워치만 니 사역의 가장 큰 문제점

    ⑴ 표절의혹 (allegation of plagiarism)

    ⑵ 삼분설의 위험성 (Danger of Trichotomy)
     

    1948년에 Nee와 그의 동역자들이 더 이상 <영에 속한 사람>을 완전히 지지하지 않았지만, 그 생각의 틀은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Nee는 계속해서 ‘spirit’(본능, 직감)를 지나치게 강조하고 ‘soul’(합리성과 생각)을 경시했습니다. 그는 신자들에게 성경의 온전한 진리와 계시를 이해하기 위해 하나님이 창조하신 합리성과 마음을 사용하도록 격려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성과 마음을 인간의 기능으로 창조하셨지만, 오늘날에도 지방교회의 일부 신자들은 여전히 영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성경의 전체적이고 근본적인 진리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ibid p. 233
     

    반지성주의

    ‘영’(성령이 아닌)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그가 회심한 지 불과 몇 년 후에 시작되었지만, 그는 전체 사역을 통해 그 주제를 가지고 갔고 <The Spiritual Man>은 그 주제에 대한 그의 고전적인 작품이었습니다. Nee가 ‘영/혼 분리’, ‘영 우월/혼 열등’의 원칙을 그의 핵심 신학적 개념으로 확고하고 극단적으로 붙잡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깊은 영향을 받았고 반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로 귀결되었습니다.
     

    영은 가장 높고 몸은 가장 낮다 (Spirit is the Highest and Body the lowest)

    워치만 니가 말했습니다: 사람의 세 가지 요소 중에서 영은 하나님과 결합 되어 가장 높은 것입니다. 몸은 물질계와 접하고 있는 가장 낮은 곳입니다. 그 둘 사이에는 혼이 있습니다... 사람의 영은 사람의 가장 고귀한 부분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가장 깊은 곳에 거합니다. 몸은 가장 낮고 밖에 남아 있습니다. 혼은 영과 육 사이에 거하며 둘 사이의 매개체입니다. 우리의 전체 존재 중 오직 한 부분, 즉 거듭난 영만이 성경을 공부할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성경을 대하기 위해 우리 존재의 다른 부분을 사용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별개의 일을 하는 것이며 그러한 활동은 하나님과 관련된 어떤 것도 만지지 못할 것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생각이나 지능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할 수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기 전에 이 영을 가져야 합니다.
     

    Nee의 개념은 부흥 운동과 복음주의 운동이 뒤따른 18세기 ‘경건주의’ 운동에서 처음으로 계승되었습니다. 그리고 확실히 펜루이스(Penn-Lewis) 부인은 그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러나 교리적 극단으로 치우침으로써 성경적 진리에서 위험한 이단으로 표류할 위험이 있습니다. 처음에 Nee는 헌신에서 이런 종류의 영적 의도를 추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성경적 지침의 한계를 넘어서 그의 선구자들로부터 너무 멀리 갔고 영지주의(Gnosticism)의 영역에 떨어졌습니다. 사실 다른 사람들을 통제하는 그의 도구가 된 것은 Nee의 빗나감이었습니다.
     

    '머리 지식' (Head Knowledge)

    지방교회에서 ‘머리 지식’은 ‘영’에서가 아니라‘혼’에서 나온 ‘지식’을 의미하므로 버려야 합니다. 사실 우리 뇌의 사고 과정을 사용하지 않고 성경을 읽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실제로 마음과 생각, 앎과 행동, 추론과 지각은 항상 분리할 수 없고 기능적으로 통합되어 있습니다. 우열은 없고 다만 기능이 다를 뿐입니다. 인간의 영과 혼과 몸은 모두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창조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
     

    성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가복음 12:30) 마음과 혼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지식과 생각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성경은 지식과 추론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은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합니다. 그러나 또한 추론(이해의 영역- 역자주)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리고 추론도 성령으로부터 옵니다.
     

    바울은 “내가 기도하노니 너희 사랑을 지식과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깨끗하고 흠이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시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빌 1:9-10.) 그러므로 지식과 통찰과 비전은 분별에 필요한 전제 조건이며,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것은 Nee 사역 동안 상해교회(SCA) 내에서 전혀 불충분했습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선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베드로후서 1:5-6.)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굳건히 서서 진리의 허리띠를 허리에 두르라...” (엡 6:14.) 성경 진리에 대한 지식으로 우리의 허리를 묶지 않고 우리는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의 일부를 잃어버렸습니다.
     

    워치만 니 부부

    반합리주의가 파멸의 원인이었다 (Anti-rationality Was a Cause of Ruin)

    Nee는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가르침을 받고 통제를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함부로 말하거나 함부로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지 않는 사람만이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들만이 머리를 대표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만이 형제자매들을 앞길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본성적으로 비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결코 권위를 맡기지 않으실 것입니다. 사람이 복종하려면 먼저 머리가 잘려야 합니다.
     

    지방교회의 역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려는 깊은 헌신과 의지는 경이로운 것이었습니다. 당시 중국 본토에 7만 명 이상의 회원이 있던 거의 대부분의 지방교회들이 이에 포함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헌신하기 위해서는 Nee의 가르침을 따라야 했습니다. 그 결과 수많은 경건한 신자들의 ‘머리’가 자신의 생각이 없이 잘려 나갔습니다. 얼마나 비극적이고 위험한 일이었습니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호세아 4:6) 우리는 이 고통스럽고 끔찍한 교훈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반지성주의는 맹목적이 되게 한다 (Anti-intellectualism leads to Blindness)

    1951년에 발행된 Nee의 잘못된 연설인 ‘나는 어떻게 돌아섰는가?(How did I Turn Around?)’는 지방 교회 지도자들에게 아무런 저항 없이 만장일치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인민의 입장을 따르는 것’을 극단적으로 강조한 것은 사실상 무신론 정부에 대한 무조건적 항복이었습니다. 여기에 심각한 도전이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완전한 진리를 말합니까? 아니면 인민의 입장 (‘People’s Standpoint’)을 보완할 필요가 있을까요? Nee가 체포된 후로 그 몇 년 동안 Nee의 심각한 실수를 지적하기 위해 일어선 인도자들이 있었다면, 상해교회(SCA) 신자들은 1956년 전시회(CEC) 동안 믿음을 뒤흔드는 폭풍으로부터 어느 정도 보호 받았을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그들 영적 인도자들도 세뇌당했고, 그들은 자신도 폭풍으로부터 보호할 수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믿음과 이성이 서로 반대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잘못된 생각입니다. 믿음과 생각이 합력하여 불합리한 이단과 싸우는 것입니다.

    ibid. pp. 256-257 Chapter Eighteen: Issues Within SCA
     

    ⑶ 몸(지방교회)을 너무 높였다 (Too much Emphasize of the Body)
     

    다가오는 보편 교회의 모델

    지상의 모든 교회에서 중요한 과제 중 하나는 다른 교회와 적절한 위치와 관계에 자신을 배치하는 방법입니다. 기도회 중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연약함과 실패를 인정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SCA(상해 지방교회)가 성경대로 행하기에 가장 좋은 교회라고 믿었습니다. 그 강한 확신이 우리로 하여금 헌신적인 목회자들과 기독교인들을 SCA(상해교회)에 가입하도록 최선을 다해 설득하도록 이끌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The Union of the Church(교회의 연합)’ 또는 ‘The Church United(교회의 하나됨)’라고 미화했습니다.
     

    1948년에 워치만 니는 전국 동역자 집회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루터는 그 시대의 사역자였습니다. 다비(Darby)는 또한 그 시대의 사역자였습니다. 각 시대마다 주님은 그분이 이루고자 하시는 특별한 일들이 있습니다. 그에게는 자신의 회복과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한 시대에 그분이 행하신 특별한 회복과 일이 그 ‘시대의 사역’입니다.
     

    역사(work)의 원리는 동일합니다. 각처의 동역자들은 먼저 자신을 내어 드리고 머리 아래 두며 머리의 지시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주님이 하실 수 있고 그래야만 일이 진행됩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몸의 심판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모든 주요 결정과 지시는 몸의 손에 맡겨야 합니다... 장차 몸의 나타남은 오늘날 지방교회들의 간증의 본질에 의해 결정될 것입니다. 지방교회들은 장차 올 우주 교회의 모델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사역은 지방교회 안에서 그리고 지방교회를 위한 것입니다. ibid. pp. 246-247














    목사 / 이원상. 이승혁.


    이원상(李元祥)목사



    이원상 목사 목사님은 미국 워싱턴 지역 한인교회 목회의 중요한 지도자 가운데 한 분으로, 특히 기도·제자훈련·심방·선교·다음세대 사역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원상 목사 약력

    • 1937년 중국 만주 산성진에서 출생
    • 한국으로 이주한 뒤 경산에서 성장
    • 계명대학교 철학과 졸업
    • 경북대학교 대학원 철학 석사
    • 평산교회에서 전도사로 목회 경험
    • 1968년 미국 댈러스신학교 유학
    • 이후 미국에서 신학과 목회를 준비
    • 1977년 12월 와싱톤중앙장로교회 제2대 담임목사로 부임
    • 1977~2003년 약 26년간 담임목회
    • 은퇴 후 원로목사로 섬김
    • 영국 Wales Evangelical School of Theology에서 목회 리더십 연구로 Ph.D.
    • 2013년 PRASSION International을 창립하여 기도와 선교 사역을 계속함
    • 2016년 12월 79세로 소천

    특히 기억할 만한 목회

    이원상 목사님이 와싱톤중앙장로교회에 부임했을 때는 교회가 분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당시 예배 인원이 약 30~50명 정도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목사님은 새벽기도와 말씀 중심의 목회를 통해 교회를 다시 세워 나갔습니다.

    그의 목회철학을 몇 가지로 정리하면:

    ① 기도하는 목회자
    → 사람의 방법보다 하나님께 무릎 꿇는 목회

    ② 말씀을 가르치는 목회자
    → 성경강해와 말씀에 기초한 신앙교육

    ③ 제자를 세우는 목회자
    → 새신자 교육, 제자훈련, 전도훈련

    ④ 사람을 돌보는 목회자
    → 심방과 중보기도를 통한 목양

    ⑤ 선교하는 목회자
    → 교회가 선교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강조

    ⑥ 다음세대를 세우는 목회자
    → 영어목회와 청소년·어린이 사역을 통해 이민 2세대의 신앙 계승을 중요하게 여김.

    특히 이원상 목사님의 목회를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무릎으로 목회하고, 말씀으로 성도를 세우며, 선교로 교회의 사명을 감당한 목회”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가 26년간 목회한 와싱톤중앙장로교회는 이후 크게 성장했고, 2003년에는 미국 내 52,333개 개신교회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13개 ‘모범 교회’ 중 하나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이승혁(李勝赫)목사
    Pastor Victor S Lee

    1949. 10. 16 - 현재

    대광고등학교 졸업
    숭실대학교 철학과 졸업(BA)
    장로회 신학대학 신대원 졸업 (M Div)

    1984. 4. 5. 울산노회 목사 안수 
    2000년 7월 4일 뉴욕 이주
    2000. 7. 뉴욕우리교회 개척
    2001. 뉴욕 나사렛교단 목사 인준
    2010. 한인교회(이문구목사)와 우리교회 합병(이승혁목사)
    2011. 뉴욕 나사렛교회
    2019. 파트리스교회 설립(온라인교회)
    공동 담임 / 이승혁. 최우섭. 황선민
    2022. 이호승목사 주일 설교
              황선민목사 수요 성서마당
              이승혁목사 새벽 기도회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뉴욕 파트리스교회의 이승혁 목사가 있습니다. 
    미주 한인교회 주소록에는 파트리스교회 담임목회자 이승혁으로 등록되어 있으며, 
    주소는 46-41 204 St., #2FL, Bayside, NY 11361로 나옵니다

    뉴욕 교차로 교회 광고에는 파트리스교회의 공동담임목사 이승혁 목사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당시 예배 장소는 Flushing의 동서데이케어 센터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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