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자 루터의 반유대주의
프로테스탄트적 저항신학을 손에 들고 부패한 중세 가톨릭을 전복시켰다는 게 루터에 대한 대체적인 평가다.
그러나 루터의 고향 독일의 역사학자인 볼프강 비퍼만의 견해는 좀 다르다. 베를린 자유대학 교수인 그는 신간 '루터의 두 얼굴'(평사리)에서 종교개혁 500주년을 자축하는 동시대인들에게 찬물을 끼얹는다.
저자는 독일 개신교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를 국가주의, 국가가 주도하는 전쟁을 지지하는 주전(主戰)주의, 자본주의, 반유대주의, 반집시주의, 반페미니즘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그 뿌리를 루터에서 찾는다.
저자에 따르면 루터는 16세기 농민전쟁에서 제후들의 편에 섰다. 봉기한 농민들을 공격하라고 요구했고, 실제로 수천 명의 농민이 학살당했다.
1543년 출간된 루터의 저작 '셈 함포라스와 그리스도의 성에 관해'에서는 유대인을 "고삐 풀린, 나쁜 망나니로 이루어진
찌꺼기"라고 지칭하며 노골적으로 경멸한다. 또 다른 저작 '유대인과 그들의 거짓말에 관해'에서는 유대인의 종교 서적을 빼앗고,
그들의 회당을 불태우며, 재산은 몰수하자고 역설한다.
루터는 교황청의 폐습을 누구보다 앞장서 비판했지만, 정작 가톨릭의 마녀 미신은 극복하지 못한다. 그는 마녀를 '악마의 나쁜 창녀', '우유를 훔치고 악천후를 만들고 빗자루를 타고 다니는 존재'라고 묘사한다.
또한 "부인이나 처녀가 잘난 체할 때만큼 꼴사나울 때가 없다", "아내가 지닌 가장 위대한 명예는 언제나 남자들이
그녀에게서 태어난다는 것이다" 등 반페미니즘적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이에 대해 저자는 "루터는 여성들 안에서 오로지 가정주부와
어머니만을 보고 싶어 했다"고 꼬집는다.
저자는 이처럼 루터의 발언과 저작을 조목조목 분석한 뒤, 그의 유산을 무비판적으로 계승한 독일 교회의 흑역사를 재조명한다.
반기독교적인 나치가 등장할 때 교회가 이를 묵인하고, 유대인과 집시에 대한 박해에 침묵하는 죄를 짓지 않았느냐고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옮긴이 최용찬은 "비퍼만의 책은 독일 역사학자의 철저한 고증작업의 성과물인 동시에 독일 개신교도의 처절한 자기반성의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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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대주의(히브리어: אנטישמיות, 독일어: Antisemitismus)는 유대인들을 향한 차별과 증오를 말한다.
유럽 언어에서 대체로 "반셈족주의"로 불리나, 명칭과 조금 다르게 셈족 전체에 대한 혐오보다는 오직 유대인들만을 대상으로 한 혐오를 가리키는 말로 주로 쓰인다.[1]
반유대주의는 여러 형태가 있다. 개인적인 증오에서 홀로코스트와 포그롬 등 폭력적인 박해까지 여러 예가 있다. 긴 역사로 가장 오래된 증오라고 불리기도 한다.[2]
유럽 기독교인들이 유대인을 예수를 죽인 민족이라고 여기고, 고대교회 교부들은 유대인들을 위선자라고 부른 종교적 편견[3][4]이나 유대인들을 열등한 인종으로 보는 인종 차별이 반유대주의의 발단이 될 수 있다. 시온주의와 이스라엘을 반대하는 극우파, 근대 유럽의 사회주의[5]와 이슬람 급진주의에서도 반유대주의를 찾을 수 있다.
반유대주의의 첫 발생은 확실하지 않다. 베를린 자유대학교 페터 셰퍼(de) 교수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고대 이집트의 이야기를 다시 이야기 할 때 널리 퍼졌다고 주장했고 반유대주의는 이집트에서만 일어났다고 주장한다.[6] 가장 오래된 반유대주의의 흔적은 Agatharchides의 책에서 찾아볼 수 있다. 기원전 2세기당시 고대그리스의 역사가였던 그는 유대인들의 풍습은 어리석다고 조롱했고 안식일을 지내서 예루살렘이 침략받았다고 비꼰적 있다.[7]
또한 구약성서인 《마카베오기 제1권》에도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을 점령한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반유대주의정책이 언급되어 있다.[8]
서유럽의 유대인 박해
서유럽에서의 기독교 강제개종
유대인에 대한 핍박과 추방은 스페인, 포르투갈, 프랑스 등 기독교 국가를 중심으로 끊이지 않았다.
스페인은 유대인들에게 기독교로의
강제 개종 칙령을 내려 탄압하고 영구적으로 추방했고, 14세기 중엽부터 16세기까지 대부분의 독일 도시에서 유대인들은 공식적으로
추방을 당했다. 이러한 추방 외에도 기독교를 국가 종교로 표방한 서유럽의 유대인에 대한 대표적 박해 양상은 의식살인(de)유언비어[9], 성찬모독 비난, 탈무드 소각, 종교적 논쟁의 네 가지 형태로 일어났다.
이러한 박해의 양상으로 인하여 자연히 기독교에 대한 유대인들의 적대감은 깊어만 갔다.
동유럽으로의 이주
스페인의 유대인 박해는 전유럽에 유대인에 대한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서유럽에서조차 유대인들은 발붙일 곳을 얻지못했지만, 폴란드를 중심한 동유럽은 비교적 유대인들에게 관대하여 유대인들을 위한 새로운 보금자리 구실을 하였다.
18세기 중엽 전세계의 유대인 인구는 약 300만 가량이었고 이들 중 대부분은 동유럽에 편중되어 살게 되었다.
폴란드에는 주후 18세기 말 약 150만 명이나 되는 유대인들이 살았는데 폴란드가 붕괴되면서 이들은 러시아와 프로이센 그리고 오스트리아로 편입되었다.[10]
십자군 원정과 유대인
유대인들에
대한 통속적인 종교적 증오심을 교회가 공식적으로 주입하게 된 계기는 십자군 원정이었다.
1096년에 가톨릭 교회는 십자군 전쟁을 시작했다. 교황 우르반 2세는 무슬림 침략자들로부터 성지를 회복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군사들을 모집했다. 그런데 그들이 성지로 가는 도중에 만나는 유대인들을 무슬림처럼 취급하였다. 그러나, 십자군의 유대인 학살에
대하여 유대 공동체는 금욕적이고 냉정한 태도를 보였다. 유대인들은 십자군이 칼을 대고 제시하는 세례를 거부하면서 세례 받기보다는
율법대로 죽음을 감수하거나 아니면 집단 자살을 택했다. 십자군의 유대인들에 대한 만행은 십자군이 회복하고자 했던 성지 예루살렘에서
자행되었다. 십자군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 그들의 칼은 무슬림들은 물론 유대인들을 죽인 피로 물들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여, 우리는 당신을 찬양합니다!” 라는 노래를 부르면서 회당에 불을 질러 안에 있던 유대인들이 산 채로 불에 타 죽게
하였다.
[11]
루터의 반유대주의
동정적인 입장
마르틴 루터는
그리스도의 유대적 배경에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그것은
유대인의 잘못이 아니라, 그들에 대한 기독교인의 태도라고 지적했다. 선교적인 관점에서 교회가 같은 뿌리의 종교를 가진 유대인
형제들에게 너무도 악한 모습을 보이고, 오히려 그들을 핍박함으로 유대인들이 교회에 등을 돌리게 되었다고 반성하였다.
1523년
루터는 《예수는 유대인으로 나셨다 Dass Jesus Christus ein geborener Jude sei 》라는 도발적인
제목으로 논문을 발표하여 기독교인들의 사악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또한 유대인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만일 내가 유대인이었다면 이런 둔하고 버릇 없는 자들이 기독교 신앙을 규제하고 가르치는 것을 보면서 오히려
기독교인이 되기 보다는 차라리 암퇘지가 되기를 더 좋아했을 것이다. 우리는 몇몇 유대인들을 그들 조상이 가졌던 참 신앙으로 이끌어
줌으로써 그들을
돕기를 원한다.”[12]
그러나 루터는 1543년 1월 반유대주의로 급선회하는 《유대인들과 그들의 거짓말에 관하여 Von den Jüden und
jren Lügen》를 발표했다. 그는 이 저술에서 "유대인의 회당을 불지르고, 그들을 죽이고, 매장하고 회당을 무너뜨리고,
탈무드를 빼앗으라"고 주장하며 유대인 탄압을 선동했다. 루터의 이런 주장은 묻혀 있다가 19세기 초 반유대주의가 기승을 부리던
독일에서 기독사회당 (Christlich-soziale Partei) 대표인 아돌프 슈퇴커(Adolf Stoecker
1835-1909) 에 의해 널리 퍼졌고 나찌에게 파급되었다.[13]
드레퓌스 사건과 반유대주의
반유대주의가 최고조에 이르러 사회문제로 표출된 사건은 프랑스의 드레퓌스 사건 때였다. 1894년 드레퓌스는 증거가 없는데도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간첩으로 몰려 무기징역에 처해져 악마섬(Île du Diable)에 유배되었다. 반유대주의는 가톨릭 교회와 가톨릭 언론, 군부등을 중심으로 급속히 퍼졌다. 이에 에밀 졸라를 비롯한 지식인들의 격렬한 항의는 유럽에서 반유대주의의 심각성을 일깨웠고 이는 곧 오스트리아의 언론출신 유대인 테오도어 헤르츨의 시온주의 주창으로 연결됐다.[14]
홀로코스트
현대의 반유대주의
인종 학살극인
홀로코스트의 충격으로 유럽과 미국에서는 극소수의
극우 이외에는 반유대주의는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아직도 반유대주의가 강하게 남아있으며, 특히 이스라엘 국가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많은 팔레스타인인들에게서 크게 나타난다. 또
아마디네자드 이란 전 대통령이 이스라엘에 핵 미사일을 날리겠다고 공언할 만큼 특히 이슬람 종파 중 시아파에서는 극심한 반유대주의가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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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Antisemitism has never anywhere been concerned with anyone but Jews." 루이스, 버나드. "Semites and Antisemites" Archived 2011년 5월 14일 - 웨이백 머신, Islam in History: Ideas, Men and Events in the Middle East, The Library Press, 1973.
- Our common inhumanity: anti-semitism and history Archived 2019년 6월 30일 - 웨이백 머신 by Richard Webster (a review of Antisemitism: The Longest Hatred by Robert S. Wistrich, Thames Methuen, 1991
- 《세계종교사입문》/서울대학교 종교학과 종교사연구회/청년사
- 《이야기 교회사》/이성덕 지음/살림
- 근대 유럽의 사회주의자들은 유대인들을 부르주아 계급으로 이해하여 반대하였다. 물론 모든 유대인들이 자본가였던 것은 아니었다. 살림지식총서《유대인》/정성호 지음/살림
- Schafer, Peter. Judeophobia, Harvard University Press, 1997, p 208.
Flannery, Edward H. The Anguish of the Jews: Twenty-Three Centuries of Antisemitism. Paulist Press, first published in 1985; this edition 2004, pp.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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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는 루터의 반유대주의 글들을 굉장히 익숙해 했고 아주 존경했다.
'나의 투쟁(Mein Kampf)' 에서 히틀러는 루터를 독일의 가장 위대한 3명의 위인으로 칭송했다.
Frederick the Great 와 Richard Wagner와 함께. 1938년 11월9-10일 나찌는 Kristallnacht 지역에 유태인 학살을 시작했다.
그들은 독일에 있는 모든 유대인교회(synagogue)를 전부 파괴하고 35명의 유대인을 살해했다.
그리고 그 날의 학살은 마틴루터의 생일을 기념해서 했다고 발표한다.
마틴루터의 말기에 발행된 팜프렛의 그의 글 " Concerning the Jews and Their Lies" 에서 루터는 8가지 행동을 유태인들에게 행해야 한다고 발표했다.
1. Burn all synagogues
모든 유대인의 교회를 불태우라
2. Destroy Jewish dwellings
유대인의 거주지들을 파괴해라
3. Confiscate the Jews' holy book
유대인의 성경을 압수해라
4. Forbid rabbis to teach
랍비들이 가르치는 것을 금지하라
5. Forbid Jews to travel
유대인들의 여행을 금지하라
6. Forbid Jews to charge intereste on loans to non-Jews and confiscate Jewish property
유대인들이 비유대인들에게 돈을 빌릴때 이자를 금지하고 유대인의 재산을 압수해라
7. Force Jews to do physical labor
유대인들에게 육체적 노동을 시켜라
8. Expel the jews from provinces where Christians live
기독교인들이 사는 곳에서 유대인을 추방하라
마틴 루터 저-‘유대인과 그들의 거짓말’(Martin Luther, 1483-1546)에서
“그들이야말로 진정 거짓말쟁이요 피에 굶주린 개때들이다.
저들은 요망한 해석으로 성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변조하고 알아볼 수도 없게 만들어 놓았다.
저들의 매일 같은 한숨과 염원은 오직 구약의 에스더 시대에 저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 이방인들을 모조리 죽여 없애는 것이다...
아, 저들이 얼마나 에스더기를 사랑하는지 보라. 저들의 피로 사무친 원한에 그보다 더 어울리는 책도 없을 것이다..
해가 이 땅에 뜬 이래로 스스로를 신에 선택 받은 민족이라 자처하는 유대인만큼 피에 굶주리고 복수심에 들끓는 족속도 없을 것이다.
그들은 신의 이름으로 비유대인을 살인하고 절멸시켜야 한다고 믿고 있다. 저들이 기다리는 메시야란 것도 유대인을 위해 이방인을 말살하고 온 세상을 칼로 정복할 자에 지나지 않는다.
처음부터 저들이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그래왔듯이 저들은 오늘날도 똑같은 꿈을 꾸고 있다. 단지 힘이 모자라서 못하는 것 뿐이다...
그들의 저주받을 저 고리대금업을 보면 알 듯이 불신자의 금과 은으로 입에서 악취를 풍기는 그들보다
이 하늘 아래 더 탐욕스러웠고 또한 앞으로도 그럴 민족은 없을 것이다.
그들에게 인생의 유일한 목표는 재물을 모으는 것이다.
저들은, ‘메시야가 오면 온 세상의 금과 은을 빼앗아 유대인들에게 나누어 주리라’고 지껄인다.
그러므로 저들은 자기들의 그 끝없는 탐욕을 채울 수만 있다면 언제든 사악하게도 성서를 자기들 멋대로 왜곡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친애하는 기독교 형제들이여, 알지어다! 사탄 다음으로, 진정 유대인이고자 하는 유대인만큼
우리에게 위험하고 독소적이며 골수에 박힌 적개심을 품은 적도 없음을.저들 중에는 개나 소나 믿을만한 망령된 미신이나
관습의 노예가 된 자들이 있다.
그러므로 역사 속에서 저들은 우물에 독을 풀고 트렌트(Trent)나 바이진(Weiszensee)의 사건처럼 아이들을 훔쳐
흉악한 짓을 저지른다는 혐의를 받는 것이다.
물론 저들은 이를 부정한다.
어쨌든 사실여부를 떠나 나는 저들이 할 수만 있다면 공개적으로나 은밀하게 언제든지 이를 행동에 옮길 준비가 되어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사탄을 모르는 사람은 저들이 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왜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그토록 원한을 품고 있는지 어리둥절해 할 것이다.
따지고 보면 그들에게 좋은 일만 하는 우리에게 그들이 원한을 품을 이유도 없다.
그들은 우리나라에서, 우리들이 만든 집에서 살며 우리의 보호 아래 우리의 땅과 도로와 시장과 거리를 이용한다.
대공(大公)들과 정부가 입을 벌린 채 코를 고는 동안 유대인은 그들의 금고와 민중의 호주머니를 마음대로 도둑질한다.
이것이 스스로의 돈으로 피가 마를 때까지 착취당하고 결국은 거지꼴로 전락하는 게 아니라면 또 무엇이겠는가?
외국인인 그들은 분명 우리의 것을 가질 권리가 없으며 저들의 재산도 실은 모두 우리의 재산이다.
그들이 무슨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에게 유용한 것을 생산하는 것도 아니며 우리가 그들에게 돈을 기부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저들은 우리의 돈과 재물을 모조리 움켜쥐고 자기들이 유배생활을 하고 있다는 이 땅에서 주인 노릇을 하고 있다.
“저들의 탈무드를 보면 이방인이 이스라엘 민족을 죽이면 죄가 되도 이스라엘 민족이 이방인을 죽이면
죄가 되지 않는다고 랍비들이 말하지 아니하던가?
또 이방인과의 약속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하지 않던가?
그러므로 이방인의 돈을 도둑질하고 강탈하는 것은 (고리대금업으로 이미 하고 있듯이) 저들에겐 신에 대한 봉사인 셈이다...
그리고 그들이야말로 이 세상의 군주이며 이 세상 사람들은 그들의 종이요 가축일 뿐이다...
내가
보기에는 차라리 세편의 이솝 우화 속에 랍비들의 모든 탈무드 서(書)들보다 더한, 유대인은 절대로 깨닫지 못할 지혜가
담겨있다... 어쩌면 누가 나의 말이 너무 과하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실로 말을 아끼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그들이 그들의 회당과 학교에서 하는 기도 속에서 우리 고이들(Goyim)을 얼마나 저주하고
우리에게 악의를 품었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고리대금으로 우리의 돈을 강탈하고 온갖 부류의 야비한 술수를 부린다.
유대인을 사로잡고 있는 사탄이라면 모를까 그 어떤 외국인도 이런 짓을 하지 않았고 또 하지 않을 것이다...
유대인
중에서도 학식 높은 랍비였다가 신의 은총으로 기독교인이 된(어쩌다 한번 있는 일이지만) 부르겐시스(Burgensis)는
유대인들이 그들의 회당에서 우리에게 퍼붓는 끔찍한 저주들(라이라도 증언하듯이)을 보면 그들이 결코 신의 선민일 수 없다고
결론짓는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창녀의 아들이라 부르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를 간음녀로 부른다
- 사탄에 대적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이런 말을 입에 담는다.
우리는 우리의 아내를 저들이 성모 마리아에 대해 하는 것처럼 창녀라 부르지 않고 저들이 우리의 주님 그리스도에 대해
그러는 것처럼 후레자식이라 부르지 않는다.
우리는 그들을 저주하지도 않을뿐더러 그들의 육신과 영혼을 위해 기도하며 우리와 함께 살도록 허락해 준다.
우리는 저들의 아이를 훔쳐서 흉악한 짓을 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그들이 마시는 물에 독약을 풀지도 않고
그들의 피에 목말라 하지도 않는다...
자, 우리가 그들을 노예로 붙잡고 있다는 저들의 새빨간 거짓말을 보라! 예루살렘이 망한 것은 1400년 전이었고
그 동안 우리 기독교인은 세상 곳곳에서 유대인에게 고문당하고 핍박 받아왔다.
게다가 우리는 도대체 그 어떤 마귀가 이들을 우리나라에 데려다 놓았는지 모른다.
우리가 예루살렘에 가서 그들을 데려오지 않은 것은 분명하니 말이다!... 그렇다 우리는 그들을 인질로 붙잡아두고 있다.
마치 종살이를 하듯 나의 모든 것을 바쳐 내가 나의 류마티즘이니 자질구레한 질병이니 불운 따위를 붙잡아두려 하듯이 말이다!
나는 그들이 이 세상 모든 유대인들과 함께 그저 예루살렘에 머물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와 같이 절망적이고 사악하고 맹독적이며 악마적인 것이 지난 1400년 동안 우리의 역병이요 병균이요
불운이었던 유대인의 운명인 것이다... 자, 그럼 이 저주받고 거부당하는 유대민족을 어찌 해야 하나?
우리의 이웃으로 눈을 돌려 프랑스나 스페인, 보헤미아 등지에서 유대인들을 어떻게 처리했나를 보고 보편적인 지혜를 얻어야 할 것이다.
이들 나라에선 유대인이 고리대금으로 훔친 돈을 몰수하여 골고루 나누어 주는 대신 그들의 나라로부터 아예 추방시켜버렸다.
사람들이 얘기하듯이 유대인에 대한 신의 분노가 너무도 크기에 안일한 자비는 유대인을 더욱 간악하게 만들고
매질을 가해도 유대인은 조금만 나아질 뿐이다.
그러므로 모두 쫓아내어야 한다!... 우리의 돈으로 거부가 된 유대인들이 온 기독교국가들을 깔고 앉아
우리를 비웃고 조롱하고 스스로의 대담함에 깔깔거리는 꼴을 언제까지 보고 견딜 수 있단 말인가?...
신에게 분노의 심판을 받기는커녕 그들의 매부리코로 새끼돼지들 마냥 킁킁대는 유대인을 보면서
사탄과 그의 천사 암퇘지들은 또 얼마나 흥겨워할 것인가?” (Von den Juden und Ihren Luegen)
"어쩌면 부드럽고 온화한 기독교인들은 불쌍하고 핍박 받는 유대인들을 상대로 내가 너무 심하게 이들을 조롱하고
비아냥댄다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내 말을 들으라, 유대인과 같은 악마적인 족속을 조롱하기에 나는 너무 미약하고 저들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저들이야 말로 온갖 냉소와 조롱의 천재들이며 이 분야의 대가인 신을 섬기고 있다.
그 신이란 바로 사탄인 것이다... 내가 보기엔 구약성경만 보더라도 유대인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온갖 타락상과 악의에 찌든 불량배들이라는 증거는 충분하며 그 누구도 내 생각을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고리대금업, 간첩, 배신과 기만행위로 나라를 망치고 우물에 독약을 풀고 애들을 훔쳐가고,
한 마디로 온 세상에 퍼져 인간에게 해가 되는 갖은 못된 짓은 다 하는 족속인 것이다.”
(Vom Schem Hamphoras und vom Geschlecht Christi)
루터의 개혁은 인문주의적(르네쌍스에 의한 그레꼬 로망의 부활로 인간이 중심이 되는 인본주의적 사상)인 바탕을 깔고
인간중심 속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후에 인간중심인 동시에 사단중심적인 자유주의신학이 태어나는 빌미를 제공한 결과를 낳았으며
이를 토대로 한 진화론이 발생하도록 방치한 결과로 나타나도록 한 것이다.
루터의 개혁 이후에도 로마 카톨릭의 태양문화 중심은 그대로 프로테스탄트 개혁 교회 속에
그냥 잔존하게 되었으며 이것이 또한 개혁 교회의 전통이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루터에 의하여 개혁은 이루어졌지만 여전히 태양문화의 잔재는 아직도 이방교회 속에 남아 있다..
어쨌든 루터로 인하여 히틀러가 유대인을 위한 최종 해결책이라는 미친 생각을 갖기에 이르렀고 600만 대학살이라는
역사상 미증유의 사태를 불러오기에 이르게 한 것인바, 이는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인 진실이며 보다
또 하나의 명백한 역사적 증거인 것이다.
히틀러로 하여금 전대미문의 대 참살 혹은 살육게임 즉 홀로코스트를 연출하도록 한 동기 부여를 한 당사자가
바로 우리의 존경하는 개혁자인 마르틴 루터라는 사실은 참으로 안타깝고 놀라운 일이다.
그래서 역사는 루터를 '히틀러의 아비'라는 가장 잔인하고 치욕적인 오명을 그에게 안겨 주고 있으며
히틀러를 비난하듯이 그를 비난하고 공격하고 있다는 사실인데 과연 오늘날 교회에서 이러한 사실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런지?...
루터는 자신의 글 속에서 에스더서를 아주 좋아했음을 고백하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 나오는 아각(아말렉 족속)의 후예인 하만의 유태민족 말살에 대한 것을 그대로 추종하고자 욕망을 보여 주고 있는데
이로서 하만의 유대민족 말살의 사악함이 그대로 루터에 이어졌고 이는 다시 히틀러에 이어져 세기의 비극이 연출 된 것이다.
하만의 소원이 루터를 거쳐 히틀러에 의하여 완성을 보았으며 따라서 하만과 루터와 히틀러는
반유대주의 사상의 삼위일체가 된 셈이다..
더욱히 끔찍한 사실은 지금까지 개혁교회(프로테스탄트, 개신교) 안에 차지하는 루터의 영향력은 무시하지 못할 정도인지라
오늘의 교회는 대체신학 속에 살고 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며, 또한 루터의 이러한 반유대주의적인 태도는
지금까지도 교회로 하여금 유대인들의 반감을 사게 함으로써, 해서 유대인의 때가 도래한 오늘날에 있어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우리 이방인 교회에 커다란 짐과 장애가 되고 있다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며 또한 이는 유대인들에 대한
복음의 방해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루터의 불완전하고 임시 방편적인 개혁으로 인하여 오늘의 프로테스탄트 교회 또는 개혁교회 속에는
바빌론 이교사상(헬라철학과 로마주의)를 그대로 안고 있게 되었으며 더불어 교회의 예배 의식 제도 역시 사도교회와는
다른 비성경적인 모습을 보여 줄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이는 또한 오늘날 거듭난 유태인 형제들의 모임(메시아닉 쥬 교회 또는 유대인 크리스천 교회)과 그들의 예배를 보면
얼마나 이방인 교회안에 이교적 잔재가 남아 있으며 우리 이방인교회가 지금까지 성경속에 지시하고 계신 헤브라이즘적인 사상과 문화와 철학을 저버리고 이교적이며 태양문화적인 것에 몰두 해왔는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곡식가루가 거룩하니 떡덩이도 거룩한 것이며 뿌리가 거룩하니 그 가지 역시 거룩한 법이다.
그런데 거룩하지 않은(오염된 혹은 더러운) 곡식가루로 어찌 거룩한(정결한, 깨끗한) 떡덩이를 만들 수 있으며
그 뿌리가 거룩하지 않은데 어찌 가지가 거룩하겠으며 또한 거룩한 열매, 아름다운 열매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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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음식 중에 학세(Haxe)란 게 있다. 종교개혁 발상지 여행단과 함께 나는 지난주 ‘개신교의 성지’로 불리는 독일 비텐베르크에 도착하여 또 학세를 시켜먹었다.
본래는 슈바인학세(Schweinshaxe)라고 부르는데 우리는 그냥 “학세, 학세”라고 부른다. 우리가 흔히 먹는 돼지족발이라고 보면 된다. 학세는 피클, 맥주와 함께 독일식 삼합(三合)요리로 알려진 음식이다.
학세로
점심을 들고 비텐베르크의 그 유명한 시 교회를 방문했다. 성 마리아교회라고도 불리는 이 시 교회는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붙인
성교회와 함께 비텐베르크의 상징이자 ‘루터의도시’라고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는 시 교회에서 “내주는 강한 성이요”란
루터의 찬송가를 부르며 짧은 기도회를 가졌다. 함께 교회당을 둘러보던 모든 외국인들도 함께 찬송을 부르고 함께 기도를 드리는
모습이었다.
이 교회당은 루터가 수녀원에서 환속한 카탈리나 폰 보라와 결혼식을 올린 곳이다. 라틴어
미사를 폐지하고 독일어로 예배를 드린 최초의 교회이기도 하다. 부겐하겐이란 루터의 고해사제가 담임하던 이 교회에서 루터가
설교목사로 사역했던 곳이다. 루터와 그의 절친 멜랑히톤의 개혁사상을 그림으로 표현해 온 크라나흐의 유명한 제단화가 걸려있기도
하다.
그러니 이 시교회야 말로 개신교 1호 목사사모님이 탄생한 교회요, 최초로 개신교 예배가 시작된
곳이요, 비텐베르크에서 가장 오래된 예배당이니 기념비적인 교회라고 할 수 있다. 사실은 비텐베르크란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기도 하다.
시 교회를 나서면 루터와 멜랑히톤의 동상이 서 있는
마르크트 광장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이 도시를 찾아온 수많은 방문객들 틈으로 조용히 서명운동이
벌어지고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서명운동? 눈 여겨 보니 돼지가 문제였다.
우리가 기도회를 마치고 나온 시
교회당 건물에는 유대인을 돼지로 묘사하여 기분 나쁘게 풍자해 놓은 조각이 붙어 있으니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여 화해의
차원에서 이 돼지를 제거하자는 서명운동이었다. 교회당 건물에 돼지가 붙어 있는 줄은 나도 모르고 있다가 이번에야 알게 되었다.
독일에는 수십 개가 있다고 들었다. 이 교회당은 루터시대 훨씬 이전인 1300년대에 지어진 캐톨릭 성당이었으니 루터와 돼지는 사실
상관도 없다.
돼지는 어떻게 교회당 건물에 붙어 있게 되었을까? 캐톨릭 교회가 왕성했던 중세의 프랑스,
스페인을 중심으로 유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처형한 유대인들을 원수로 보았다. 그래서 유대인의 학대와 추방이 끊이지
않았다. 도시마다 유대인과 함께 어울려 사는 것조차 꺼려해 게토란 곳에 잡아넣기도 했다. 특히 11세기가 시작되면서 교황 우르반
2세가 총대를 메고 시작한 십자군 전쟁은 성지 예루살렘을 점령한 모슬렘들이 공격 타겟이었지만 무수한 유대인들도 함께 죽었다.
십자군에 의해 유대인들의 죽음도 피바다를 이뤘다. 14세기-16세기에 이르러 독일에서도 본격적인 유대인 학대와 추방이 시작되었다.
유럽에서 쫓겨난 유대인들이 발붙일 곳을 찾아 나선 곳은 동유럽. 특히 유대인 학대가 느슨했던 폴란드에 몰려든 것이다. 인류최대의
범죄자로 낙인찍힌 히틀러의 유대인 대량학살 홀로코스트의 무대가 폴랜드 아우슈비츠가 되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이처럼
유대인을 증오하던 캐톨릭교회의 유산으로 남아 있는 것이 바로 예배당의 돼지 조각이다. 이 암퇘지 조각은 우선 새끼 돼지들과
유대인들이 암퇘지 밑에서 젖을 빨며 누워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암퇘지 뒤에는, 돼지의 오른 다리를 들고, 꼬리를 잡고는,
자신들의 쉠함포라스(유대인들이 부르는 하나님의 이름을 비꼬기 위해 쓰는 표현, Shemhamphoras)를 발견하기 위해 어떤
중요하고 특별한 무언가를 읽는 것처럼 꼬리 밑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는 랍비를 조각해 놓은 것이다.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는 사람들이 나눠준 안내문에는 “이 조형물은 유대인들에게 모욕이 될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이 돼지의 젖을 먹고 그
엉덩이에 손을 대는 것같이 음란하게 묘사함으로 상식적인 예의에도 어긋난다. 이것은 음란하고 충격적인 반유대적 형상이며 위엄과
예의로 장식되어야 할 기독교 예배 장소에 대한 모욕”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반유대적이라고 손가락질을 당하고 있는 것은 비단 그 돼지조각뿐 만 아니라 종교개혁의 ‘주연배우’ 마르틴 루터도 마찬가지다.
루터는
기독교가 같은 종교를 가진 유대인 형제들에게 너무 악한 모습을 보이며 핍박하는 것을 반성하고 1523년 ‘예수는 유대인으로
나셨다’란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면서 기독교인들의 사악함을 비판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180도 돌변한 것이다. ‘유대인들과
그들의 거짓말’을 통해 유대인 탄압을 선동하고 나섰다는 것이다. 유대인 회당을 무너트리고 탈무드를 불태우라고 선동까지 했다는
루터는 결국 두 얼굴을 가진 배신자였다는 주장이 일기 시작했다. 루터가 세상을 떠난 지 약 200년이 지난 19세기 초 독일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알고 보니 캐톨릭 교회의 농간으로 밝혀졌다. 루터에게 배반의 칼을 맞은 캐톨릭 교회는
종교개혁이후 자체적인 내부 개혁운동에 착수했고 이때 등장한 급진적 ‘예수회’가 루터를 반유대주의자로 몰아가려 했다는 것이다. 결국
히틀러의 반유대주의 뿌리는 다름 아닌 루터였다는 음모론 때문에 죽은 몸이긴 했어도 살아 있을 때의 명예에 먹칠을 당한 억울한
루터. . .
광장을 지나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저들의 서명운동으로 드디어 시 교회의 돼지 조각은 철거될 수 있을까? 그리고 루터는 언제 반유대주의자란 누명을 벗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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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솔라 – 오직 성경 (1)
‘과거의 영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때로는 과거의 영광에 매여 있어 현실을 모른다는 부정적으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예전의 좋았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는 말입니다. 2017년은 크리스천들에게 있어 정말 중요한 ‘과거의 영광’을 생각나게 하는 해입니다.
바로 1517년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그 성교회 정문에 붙인 ’95개조 논제(반박문)’이 도화선이 된 종교개혁이 500주년을
맞는 해이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이 영광스러운 과거인 이유는 다른
무엇보다 그들이 주장했던 혹은 그들의 주장에 내재되어 있던 ‘다섯 솔라(Five Solas)’라 불리는 근본정신 때문입니다.
이는 그들이 만들어낸 개념이 아니라 성경에 명시된 혹은 내재된 분명하고 핵심적인 개념인데, 당시 잊혀졌거나 왜곡되었거나 의미가
퇴색된 것들을 바로 잡기 위해 강조한 것입니다. 다섯 솔라는 아래와 같습니다.
Sola Scriptura 오직 성경
Solus Christus 오직 그리스도
Sola Gratia 오직 은혜
Sola Fide 오직 믿음
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 영광
종교개혁 500주년인 2017년을 시작하면서 종교 개혁의 근본정신에 대해서 하나씩 살펴보고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첫 번째 정신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입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고백하는
우리의 믿음과 삶에 있어 성경이 유일한 최종 권위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유일한 최종 권위’입니다. ‘최종 권위’는 우리가
어떤 것을 판단하고 결정하고 행동하는 데 있어서 최종 결정권이 누구 혹은 무엇에 있느냐를 의미하는 것인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바로 그 최종 권위이자 유일무이한 권위라는 것이 종교개혁자들의 주장이었습니다.
당시의 교회가 성경의 권위를 완전히 부인했기 때문에 이런 주장이 나오고 개혁이 필요했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들이 성경과 ‘동등한’ 다른 권위도 인정했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교도권(magisterium)이라고 하는, 교황과 의회가 결정한 교회의 전통(가르침)이 성경과 동일한 권위를
가질 수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이런 믿음은 실제적으로는 성경의 권위가 다른 ‘보이는 권위’ 아래 놓여지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즉 성경의 권위를 겉으로 부인하지는 않지만 실제적으로는 부인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말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의 주장은 교회의 전통 등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들도 성경의 권위 아래 있어야 한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사실 교회의 전통도 오랜 기간
성령의 조명 아래 하나님의 백성들이 성경에 대해 치열하게 연구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불완전한 인간이 그러한 전통을
이어가면서 본질은 퇴색되고 변질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 전통 자체도 때로는 다시 성경으로 검증받고 재정립될 필요가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전통 자체가 성경과 같은 권위를 갖는다고 말한다면 이런 일이 불가능합니다. 교회의 믿음과 삶에서 최종
권위는 성경이고, ‘오직 성경’입니다. 이것이 종교개혁자들의 핵심 사상이고 그들이 목숨을 걸고 지키고자 했던 진리의 기초입니다.
‘오직 성경’은 오늘날의 크리스천들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자신을 종교개혁의 후손들이라고 하는 우리는 ‘오직 성경’의 정신을 어떻게 계승하고 있을까요? 안타깝게도
우리는 여러 면에서 이 정신과 멀어지고 당시 개혁이 필요했던 교회의 모습과 가까워진 것 같습니다.
첫째로 성경 자체와 멀어졌습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성경을 라틴어로만
읽게 했는데, 문제는 당시 라틴어는 이미 일반이 사용하지 않는 언어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라틴어를 배운 자들이 아닌 일반
성도들은 성경을 그림으로 보거나 사제들이 설명해주는 것을 들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성경을 라틴어가
아닌 당시의 일반 언어로 번역하는 일들이 종교 개혁을 전후로 일어나게 됩니다. 왈데시안(왈도파)은 이미 12세기에 신약 라틴
성경을 불어로 번역하는 일을 했습니다. 14세기에는 잘 알려진 위클리프가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였습니다. 마르틴 루터도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였습니다.
이들은 로마 가톨릭의 위협 아래서도 이런
일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정말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려면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을 말하는지 먼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설명이나 해석을 맹목적으로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베뢰아 사람들처럼 성경이 정말 그런지 스스로 읽고 묵상하고 연구해야 합니다. 이 일은 교회의 인도자들이나
성경 학자들만이 하는 일이 아닙니다. 모든 성도가 그렇게 해야 하는 일입니다.
오늘날의 많은 성도가 이 부분을 놓치고
있습니다. 과거의 성도들보다 우리는 성경에 훨씬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환경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보다 우리 삶에 더
가까이 또 깊이 들어와 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언제나 내 손이 닿을 곳에 있는 스마트폰이 그렇습니다. TV가 그렇습니다. 그런
매체들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되는 수많은 정보들이 그렇습니다. 성경 한 권을 손에 들기 위해 수많은 희생을 치렀던 과거 성도들에
비하면 우리는 너무나 좋은 환경에 있지만, 성경은 여전히 우리에게서 멀리 있습니다.
항상 성경을 손에 들고 있고 읽고 다녀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다른 것들에 관심을 갖고 내 시간과 노력을 사용하는 만큼 성경을 읽고 배우는 일에 관심이 없다면
성경에서 내가 멀어져가고 있다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무언가 나의 삶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면 다른 무언가는 내 삶의
중심에서 자연스럽게 멀어집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는 성경이 중심에 있어야 합니다.
때로는 맘에 드는 저자들의 책을 읽는
것으로 성경 읽는 것을 완전히 대체하기도 합니다. 물론 좋은 책을 읽는 것은 좋은 일이고 권장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성경에 대한
책이 성경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와서 다른 사람에 대해서 말하면서 “누가 그러는데 걔는 이렇다더라”고
말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저 다른 사람의 말을 통해 알고 있는 사람을 마치 자신이 아는 사람처럼 말한다면 여러분은 그 사람의
말을 신뢰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말이 내가 아는 것을 검증하고 확인하는 역할을 할 수는 있지만, 그것으로 내가
누군가를 알아가는 것은 위험합니다. 성경을 읽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무엇보다 먼저 성경을 가까이하고 읽고 배워서 하나님을 알아가야 합니다.
둘째로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보다 전통을 먼저 생각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전통이라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자체가 권위가 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왜 그런 전통을 가지고 있는지
성경으로 분별하고 판단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하고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오직 성경’을 믿는 자들에게 있어 정상입니다.
그런데 때로는 이런 성경에 근거한
분별이나 판단이 ‘성경의 권위에 도전하는 일’로 치부되기도 합니다. 성경에 대한 과거의 해석이 지금에 와서는 성경과 같은 권위가 된
것입니다. 무엇이 성경이고 무엇이 전통인지도 구별하지 못하여 ‘성경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왜 토를 다느냐’는 식의 말을 쉽게
합니다. 비슷하게, 목사님의 말이 때로는 성경과 같은 권위를 갖기도 합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전달하는 한에서 권위가 있습니다. 교회의 전통도 말씀의 의미를 잘 반영하는 한에서 권위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이렇게
해”, “우리 목사님은 이렇게 가르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뒤에 마침표를 찍어서는 안 됩니다.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에 있는 것이지 다른 무엇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왜 우리 교회는 이렇게 하고 우리 목사님은 이렇게 가르치는지
성경으로 분별하고 성경으로 뒷받침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건전하고 올바른 성경해석에 근거하여 잘못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면
고칠 수 있는 겸손과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셋째로 성경이 우리에게 충분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포스트를 통해서 좀 더 자세하게 나누기를 원합니다.
새로운 한해를 시작하여 성경 읽기를
계획하는 분들이 많이 계실 것입니다. 혹은 반복된 실패로 인해서 계획을 세우는 것조차 조금은 두려운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성경을 펴 보십시오. 그 성경이 여러분의 손에 들어오기 얼마나 많은 희생이 있었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그 귀한 말씀을 당신이 이해할 수 있게 당신 가까이 두셨습니다. 그 말씀을 당신은 어떻게 대하고 계십니까?
다섯 솔라 – 오직 성경 (2)
종교개혁의 근본정신인 ‘다섯
솔라(Five Solas)’ 중 가장 기초가 되는 ‘오직 성경(Sola Scriptura)’에 대해서 지난 시간에 이어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오직 성경’을 강조했던 것은 그 당시의 교회가 성경 외의 다른 권위를 인정하면서 사실상 성경의 권위를
떨어뜨렸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의 우리도 비슷한 잘못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겉으로 말하는 것은 달라졌는지 모르지만 실제
우리의 모습은 개혁이 필요했던 그 당시의 모습과 비슷한 면이 많습니다.
첫째, 많은 성도가 성경을 멀리하고 있습니다.
그 어느 시대보다 성경은 가까운 곳에 있지만, 성도들의 마음에서는 멀어져 있습니다. 한구석에서 먼지가 쌓여가는 성경책은 하나님의
말씀이 성도들의 마음에서도 중심이 아닌 어느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음에 대한 상징적인 모습이 되었습니다.
둘째, 성경보다 전통을 우선시합니다. 전통은 어느새 성경의 완벽한 적용으로 인식되어 검증할 필요도 없고 검증해서도 안 되는 영역이 되었습니다. 실제로 성경과 같은 위치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셋째, 성경이 우리에게 충분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 부분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세 번째 순위로 언급하는 것이지만 어쩌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크고 보편적인 문제일 수 있습니다.
먼저 ‘성경이 충분하다’는 말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이 충분하다는 것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대한 해답이 성경에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즉, 차가 작동을 멈추면 매뉴얼을 보거나 자동차 전문가를 찾아가지 말고 성경책을 펴거나 교회 목회자를 찾아가라는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런 목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충분하다는 것은 영적인 의미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은 성경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 수 있는 유일하고 충분한 계시가 바로
성경입니다. 우리 인간이 어떤 존재이고, 어떤 문제가 있고, 어떻게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에 대한 유일하고 충분한 해답이
성경에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로서의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모든 가르침이 성경에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성경이 충분하다고 말할 때 의미하는 바입니다.
다윗은 하나님 말씀의 충분성에 대해서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시 19:7-9
[7]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8]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9]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살아납니다(벧전 1:23).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수 있는 자들도 변화됩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뜻에 대한 구체적이고
분명한 증언이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참된 지혜를 주고 기쁨을 줍니다. 밝게 보고 바른길을 갈 수 있게 합니다. 영원히
변하지 않고 믿을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성경입니다.
비슷하게, 사도 바울은 성경의 역할과 목적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딤후 3:16-17 [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우리에게
무엇이 옳은지 교훈하고 잘못할 때 책망하며 그것을 바로잡습니다. 그리고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도록 교육(훈련)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모든’ 선한 일을 할 수 있게 준비시킵니다. ‘선한 일’은 우리 기준에서의 ‘착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든 일을 말합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로서 우리가 창조 받은 목적이며 존재 이유입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라는 말입니다. 어떤 선한 일을 하는 데는 성경으로는 부족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선한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성경입니다. 따라서 성경으로 충분합니다.
이런 성경의 충분성은 오늘날 두 가지 측면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외면 받는 가르침이 되었습니다.
첫번째는, 성경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입니다. 말 그대로 성경의 충분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입으로 성경의 충분성을 부인하지는
않더라도, 복음 전도의 방법을 복음의 내용보다 더 강조하고 있는 풍토는 이런 문제를 단편적으로 드러내는 예입니다. 감동적인 음악이
있고 뜨거운 부르짖음이 있어야 영혼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성경 어디에서도 말하고 있지 않지만, 많은 교회가 그런 ‘방법’에
몰두하면서 정작 중요한 성경 자체의 메시지는 소홀히 합니다. 때로는 방법에 잘 맞지 않아서 메시지를 축소하거나 제외하기도 합니다.
죄와 심판에 대한 말씀은 아주 간단히 언급만 하거나 아예 말을 꺼내지도 않습니다. 은혜와 사랑, 위로의 메시지만을 복음이라고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영혼을 구원하기에 충분하다고 믿는다면 이런 타협은 불필요합니다. 올바른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좋은
방법에 대한 고민은 필요한 부분이지만, 결국 사람을 구원하고 변화시키는 것은 하나님 말씀의 능력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을 받은 자들로서 우리가 가진 최우선의 역할은 복음 자체를 올바르게 전하는 것입니다.
사실 좀 더 만연한 문제는 오늘날의
심리학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TV나 다른 매체에 등장하는 심리학의 전문가들은 그들의 이론이 과학인 듯이 말하고 사람들은 그들의
권위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 사회에 깊숙이 침투한 심리학은 자연스럽게 교회 안으로도 흘러들어와 하나의 ‘상식’이
되었습니다. 어느덧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이 분명히 말하고 있는 영역에서조차 심리학적인 해석과 해결책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단적인 예로, 성경은 인간이 가진 모든
문제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으로 우리 안에 있는 ‘죄성’을 지목합니다. 문제는 우리 안에 있고 해결책은 우리가 아닌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이 성경의 가장 핵심이 되는 메시지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심리학은 문제의 원인으로 사람을 지목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속해 있던 환경, 과거의 경험을 지목합니다. 내가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낮은
자존감이 문제라고 합니다.
어떤 관찰이나 실험의 결과는 객관적인
자료로서 의미가 있을 수 있지만, 문제는 그것들에 대한 분석과 해석입니다. 그들은 지극히 ‘인간 중심적인 전제’에 기초하여 보이는
것을 해석하고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과연 성경은 인간의 문제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어서 이런 심리학적인 해결책이 필요할까요?
성경은 인간 관계의 문제에 있어 부족한가요? 자녀 양육에 있어서도 부족하고 부부 관계에 있어서도 부족한가요? 우리가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가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게 하는데 성경은 충분하지 않은가요?
충분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목적 외에 ‘다른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면 성경은 우리 삶에 있어 충분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경 외의 다른
권위가 아니라, 성경이 (앞서 언급한 여러 분야를 포함하여) 우리 삶의 여러 부분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더 잘 알고
그에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성경이 충분하지만 결국 내 실제의 삶과는 거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문제입니다.
첫 번째 언급한 문제와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문제입니다. 성경이 ‘영적인 부분’에 있어 충분하다는 말을 매우 제한적으로 혹은
독립적으로 이해하는 문제입니다. 성경은 내가 나중에 죽어서 좋은 곳에 갈 수 있게 해주고 지금 힘들고 지칠 때 위로를 줄 수
있지만, 대부분 보통 나의 삶에서는 크게 관련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신앙과 삶이 별개여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삶에서 어떤 분별을 하고 결정을 할 때 중요한 것은 성경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조언, 사회적인 통념이나 관습, 문화입니다. 단지
결과적으로 효과가 있느냐 효율적이냐는 것도 결정의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앞서 저는 차가 고장 난 것을 예로 들어
성경이 우리 삶의 모든 부분에 대해 해답을 주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차가 고장 난 상황에서
성경은 나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언제는 육체로만 존재하고 언제는 영혼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시 차가 고장 난 상황을 생각해 보십시오. 당연히 매뉴얼을 찾아보고 내가 해결할 수 없다면 전문가를 찾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과정이 짜증 날 수 있고 불평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는 들을 사람이 없어도 욕을 할지 모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괜찮을까요? 상황이 그러니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모든 일에
감사하라고 말하고 선한 말을 하라고 명합니다. 차를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는 성경이 말하지 않지만, 그 상황에서 우리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어떻게 돈을 벌 수
있는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지만, 우리가 돈을 사랑해서는 안 되고 그 돈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말합니다.
구체적으로 누구와 결혼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성경은 침묵하지만 어떤 가정을 이루어야 하고 어떤 남편 혹은 아내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분명히 말합니다. 어떤 직장에서 일하는 것이 좋다는 말은 없지만 어떤 직장인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합니다. 성경이
우리 삶의 모든 부분에 대해 해답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모든 삶의 부분에 있어 어떤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모든 해답은 줍니다. 성경은 우리 실제 삶과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냥 예배당에 두고 다녀도 괜찮은 그런 책이 아닙니다. 언제나
내 삶에 영향을 끼칠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과 생각의 중심에 있어야 합니다.
‘오직 성경’ 정신은 종교 개혁의
핵심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자주 ‘성경으로 돌아가자’라는 말을 합니다. 그런 말이 그저 형식적인 슬로건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과거의 잘못을 잘 알면서 반복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정말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유일한 하나님의 계시로서의 성경의
권위와 충분성을 인정하고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습니다(히 4:12). 우리 삶에서 더욱
그러하기를 기도합니다.
다섯 솔라 – 오직 그리스도 (1)
Five Solas 다섯 솔라
Sola Scriptura 오직 성경
Solus Christus 오직 그리스도
Sola Gratia 오직 은혜
Sola Fide 오직 믿음
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 영광
종교 개혁자들의 다섯 솔라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서 시리즈를 통해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첫번째로는 ‘오직 성경(Sola Scriptura)’를 통해 성경이 우리의 최종 권위가
되어야 함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두 번째로 살펴볼 ‘솔라’는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입니다.
오늘날의 교회에서도 많이 들을 수 있는 표현이고 여러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종교 개혁자들이 주장했던 ‘오직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는 오직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시다’라는 의미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죄인인 인간이 나가기 위해서는 중보자가
필요합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제사장들이 그런 일을 했습니다. 물론 그들과 그들이 하던 일은 실체가 아닌
그림자였습니다.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제사장으로서 완전한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갈 수 있습니다. 특별히 히브리서 말씀은 이 부분에 대해서 매우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히 4:14-16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 7:23-25 [23] 제사장 된 그들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으로 말미암아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 [24]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장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느니라 [25]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사도 바울은 예수님만이 오직 유일한 중보자라는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못 박아 말합니다.
딤전 2:4-5 [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뭐, 그런 당연한 것을 새삼스럽게…’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지만,
당시의 상황을 생각해 보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이 당연한 진리가 당시의 교회에서는 심각하게 훼손되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단번에
드리신 영원한 제사는 성례라는 이름으로 반복되었습니다. 그 성례를 집행하는 성직자들이 사실상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 역할을
했습니다. 위대한 성인들의 ‘여분의 공적’을 통해 연옥에 있는 영혼이나 산 사람들이 당해야 하는 형벌을 면제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며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면죄부(면벌부 혹은 대사부)’라는 것을 발행하여 판매하였습니다. 위대한 성인들 또한 중보자인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로서 우리에 대해 더 잘 말해줄 수 있는 공동 중보자의 위치에 올랐습니다.
당시 교회는 “예수는 중보자가 아니다.”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실제로 그들에게 있어 예수님은 중보자로서 ‘부족’했고 그래서 다른 중보자들, 눈에 보이거나 혹은 더 좋은 중보자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부분, 특별히 면죄부를 마르틴 루터는 비성경적이라 생각하고 ’95개조 반박문’을 통해 그것에 대해 논쟁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이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그건 그 당시 교회, 가톨릭 얘기지 우리와는 별로 상관없는 얘기 아닌가?’
안타깝게도, 오늘날 우리와도 상관이 있습니다. 사실 지금은 어느 때보다
다시 한번 ‘오직 그리스도’라는 진리를 강하게 선포해야 할 때입니다. 두 가지 측면에서 ‘오직 그리스도’라는 진리가 무너진 모습이
교회 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오직 그리스도는 아니다.’는 생각이 교회 안에 들어왔습니다.
오늘날의 사회가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가치가 있습니다. ‘다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너와 내가 다르고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 간의 ‘차이’는 서로 ‘다름’이지 누군가가 ‘틀림’은
아니기에 그 차이는 존중을 받아야 하고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차이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고 사회의 질서를
무너뜨리지만 않는다면 말입니다.
좋은 가치관입니다. 하지만 절대적인 가치관은 아닙니다. 최소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그렇게 되어서는 안됩니다. ‘오직 성경’이 최종적인 권위라면, 이런 좋은 가치관도 성경의 권위 아래에 있어야
합니다. 위에 언급한 다원주의적 가치관은 기본적으로는 성경의 지지를 받는 좋은 가치관이지만, ‘다름’과 ‘틀림’을 나누는 기준은
사회 질서, 개인의 행복추구권이 아니라 하나님,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야 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교회 안에 다원주의적 가치관이 잘못 적용되어
종교다원주의로 이어지고 있는 부분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치게 편협하고 배타적인
태도라고 생각하고 그리스도가 아니어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은 사랑이셔서 결국은 누구도 지옥에 보내지 않으시고
천국으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어떤 목회자는 하나님을 뭐라고 부르든 (하나님, 하느님, 부처님, 알라, 천지신명 등등)
신실하게 그 신을 섬기고 최선을 다해 살면 누구나 천국에 갈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사람이 천국에 가고 안가고는 하나님께서
결정하실 일이기 때문에 나는 모른다. 나는 다만 예수님을 믿어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믿는 것뿐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갈 수 있지만 예수님께 가는 길은 많다.”고 모호하게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탄절에 스님을
초대해서 강론을 듣게 하는 목사는 ‘대인배’로 사람들의 추앙을 받습니다. “결국 모든 종교는 하나다.”를 외치며 다른 종교와의
화합을 추구합니다.
다른 종교를 믿는 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문제는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세상 밖에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위해 성경에서 말하는 진리를 바꾸거나 축소하거나 감추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사람에 대해서는
당연히 배타적인 태도를 가져서는 안 되지만 진리는 당연히 배타성을 지닙니다. 진리는 진리가 아닌 것을 포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리스도’가 맞는다면 그리스도가 아닌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틀린 것입니다.
바울은 누구보다 복음에 열정이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는 놀라운 유연성을 보여줍니다.
고전 9:20-22
[20]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21]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22]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사람들에 대해서 그들을 얻기 위해 바울은 여러 다른 모습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복음 자체의 메시지에 대해서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갈라디아 지역에서 전해지던 ‘그리스도+무엇’의
복음에 대해 ‘다른 복음’이라고 하면서 그런 복음은 없다고 강력하게 말했습니다(갈 1:6~9). ‘다른’ 복음은 ‘틀린’ 복음이고
그런 복음은 복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복음을 전하면 누구라도 저주를 받아야 한다고 선포하기까지 했습니다. 그가 편협한
사람이어서 그랬던 것이 아닙니다. 진리의 기준을 사람이 아닌 하나님에게 두었기 때문에(갈 1:10), ‘그것도 괜찮다.’라고는
말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다른 해석의 여지를 두지 않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베드로도 다른 사도들과 함께 담대하게 ‘오직 그리스도’를 선포하였습니다.
행 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이 말씀을 진리라고 믿는다면 어떻게 우리의 머리로 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해서 다른 구원자(중보자)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가 되십니다.
모두가 모든 면에 있어서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사회에서 ‘오직’이라고 말하는 것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
배타적이지 말아야 하는 것도 옳은 일입니다. 하지만 진리는 진리로서 선포되어야 합니다. 사랑으로 진리를 말해야 합니다.
다음 시간에는 좀 다른 측면에서 어떻게 ‘오직 그리스도’가 성도들의 삶 속에서 무너져 있는지 살펴 보겠습니다.
다섯 솔라 – 오직 그리스도 (2)
Five Solas 다섯 솔라
Sola Scriptura 오직 성경
Solus Christus 오직 그리스도
Sola Gratia 오직 은혜
Sola Fide 오직 믿음
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 영광
지난 시간에 이어 ‘오직 그리스도’가 오늘날 교회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오직 그리스도’는 그리스도 만이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라는 의미입니다. 이 단순하고도 분명한 성경의 진리가 오늘날에는 두 가지 면에서 무너져가고 있습니다. 첫째는 ‘오직 그리스도’는 아니다는 생각입니다. 그리스도 외의 중보자가 있음을 많은 교회가 직간접적으로 때로는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그리스도 자체보다는 그리스도의 사역과 역할에 대한 오해와 공격입니다.
‘오직 그리스도’가 말하는 예수님의 역할은 ‘중보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게 하십니다. 예수님을 통해서만 죄로 깨졌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과 원수인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롬 5:10-11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11]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가 되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막는 죄의 문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습니다. 의롭다고 선포되는 칭의
때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 후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매일의 삶에서 범하는 죄는 여전히 하나님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 관계가 끊어지지는 않지만, 관계의 친밀함, 다른 말로 하면 교제에는 문제가 생깁니다. 그때도 역시 중보자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요일 2: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예수님이 우리의 유일한 중보자시다는 말은 이런 의미입니다. 구원의 시작에서 끝까지 예수님은 중보자가 되십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런 예수님의 역할에 대한 오해가 있고 그 오해가 실제 삶에도 큰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을 그저 내가 죽으면 좋은 곳(천국)으로 갈 수 있게 해주시는 분으로만 이해하는 경우입니다.
예수님을
죄인과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가 아니라 죽음 이후에 만나는 천국의 문지기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믿는’ 이유는
마치 파스칼의 내기이론에 따르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손해 볼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진짜 계신다면 지금
예수님을 믿어 두면 나중에 죽어서 천국에 갈 테니 좋습니다. 혹시 하나님이 없더라도 지금 내가 크게 손해 볼 것은 없습니다.
그러니 그냥 믿는다고 말합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예수님의 역할에 대한 이런 오해는 실제 삶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주일에 교회에 가고 헌금을 하고 하는
것으로 내 할 일은 끝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이 세상에 대한 내 가치관을 근본적으로 바꾸거나 할 이유는 없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나 추구하는 것 중에 죄와 관련된 것이 있더라도 큰 문제는 아닙니다. 그것을 예수님이 대신 담당하셔서 천국에 갈 수 있게
해주신 것이고 난 그 예수님을 믿고 있으니까요.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역할을 이렇게 제한해 두고 “내가 당신을 믿고 죽음 이후의 삶을 맡겼으니, 지금 내 삶에는 관여하지 마시오.
혹시 내가 힘들면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은 괜찮지만,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고는 하지 마시오.”라고 말합니다. 영원한 삶과 이
땅에서의 삶, 영적이 일과 육적인 일, 신앙과 삶이 철저히 분리됩니다.
구원과
믿음에 대한 심각한 오해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저 예수님이 존재함을 인정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단지 존재에 대한
인정이라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믿음은 관계에 있어서의 신뢰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그 믿음은 삶을
바꿉니다. 야고보가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말한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약 2:17). 행함이 없는,
즉 삶을 달라지게 하지 않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도 그가 단지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믿었다거나
하나님에 대해서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분에게 자신의 삶을
맡겼습니다. 단지 죽고 나서의 삶이 아니라 이 땅에서의 삶도 맡겼습니다. 그 확실한 증거로 아브라함은 자신의 아들까지도 믿음으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약 2:21; 히 11:17~19).
예수님을
믿는 것은 지금의 문제 없는 내 삶에 ‘플러스알파’로서 혹은 보험으로서 예수님을 두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내 삶에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고 그에 대한 유일한 해결이 예수님이심을 인정하고 겸손히 그분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
치명적인 문제는 우리가 죽으면 지옥에 가게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것도 문제이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의 문제입니다. 창조주이며 주권자,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우리가 배반했습니다. 반역했습니다. 등을 돌렸습니다. 그에
대한 결과로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가 되신 것입니다. 단지 지옥 갈 사람을 천국으로 갈 수 있게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수를
자녀가 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사망의 권세 아래 있던 자들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되게 하셨고 예배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은 좋은 것이고 이 땅을 사는 우리에게 소망이 됩니다. 하지만 그것이
좋은 이유는 그곳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볼 것이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면서 의도하신 아름다운 관계 속에 거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이런 일을 하셨다고 믿는다면, 우리 오늘의 삶을 하나님과 관계없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을 그저 내가 이 땅에서 살 때 나에게 도움을 주는 분으로 이해합니다. 첫 번째와는 전혀 다른 쪽의 극단입니다. 지금 나의 삶과 예수님을 매우 밀접한 관계에 놓지만 어떤 식으로 관계가 있는지에 대해서 오해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예수님을 나에게 복을 주거나 화를 면하게 해주는 존재로만 생각합니다. 마치 우리 조상들이 이미 죽은 조상들을 잘 모시면
복을 받고 화를 면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지극 정성으로 조상들을 모셨던 것과 비슷합니다. 혹은 어떤 자연의 신이 노해서 내가
화를 입지 않도록 하거나 이미 당하고 있는 화를 멈추기 위해 신을 달래주는 일을 했던 것과도 비슷합니다. 단지 그런 대상이
‘예수님’ 혹은 ‘하나님’으로만 바뀐 것 뿐입니다.
예수님을
이런 분으로 이해하면 중요한 것은 얼마나 내가 하는 일이 잘 풀리고 자녀가 성공하고 부모님이 건강할 것이냐는 것입니다. 내가 잘
되는 것이 곧 내가 예수님을 ‘잘’ 믿고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혹시 잘 안 풀리는 일이 있다면 뭔가 내 공적이 부족하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나 열심히 예수님을 섬기느냐는 것입니다. 뭔가를 열심히 해서 신에게 좋은 ‘점수’를 얻는
것이 중요한 일이 됩니다. 혹은 신의 심기를 건들지 않아서 내가 무슨 해를 입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좀
더 현대적으로, 요즘에는 세상에서 말하는 심리학에 예수님을 슬쩍 끼워 넣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통해 자존감을 높이고 과거의
트라우마를 극복합니다. 가정 문제, 직장 문제, 학교 문제 등에도 심리학이 제시하는 해법에 예수님이 살짝 얹혀 있습니다.
물론
이런 일들이 전혀 의미가 없고 예수님이 하시는 일도 아니라는 말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이런 것을 원하시지 않는다는
말도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이런 복을 누릴 수 있고 궁극적으로 이런 문제의 유일한 해결도 예수님이십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되면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가 아니라 우리가 원하는 것들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가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끌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우리 삶을 통해서 이루시게 하시는 것이지, 단지 내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실존하지도 않는) 램프의 요정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이십니다. 그것이
‘오직 그리스도’의 의미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역할을 제한하거나 혹은 역할을 바꾸는 것은 우리가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내가
원하는 예수님을 섬길 수는 없습니다. 다 그렇지는 않을지 몰라도 조금씩은 우리에게 이런 모습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알게 모르게
우리는 세상의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에 예수님을 상관없는 분으로 여기고 있는 곳은 없는지, 혹 잘못된 목적으로
예수님을 ‘이용’하고 있는 부분은 없는지 우리 삶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다섯 솔라 – 오직 은혜
Five Solas 다섯 솔라
Sola Scriptura 오직 성경
Solus Christus 오직 그리스도
Sola Gratia 오직 은혜
Sola Fide 오직 믿음
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 영광
종교 개혁의 다섯 솔라 중 ‘오직 성경’과 ‘오직 그리스도’에 이어 ‘오직 은혜’에 대해서 살펴보기 원합니다.
‘오직 은혜’는 간단히 말해서 죄인인 인간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하다는 의미입니다.
다른 ‘솔라’들과 마찬가지로 ‘오직’이라는 부분이 중요합니다. 종교 개혁 당시의 교회가 성경의 권위를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오직’ 성경의 권위만을 인정하지는 않았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중보자로서의 역할을 부인하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을
그리스도와 비슷한 위치에 올려둔 것이 문제였습니다. 구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것을 부인했던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거기에 무엇이 더해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는 통로’로서의 성례 참여나 부족한 공로를 채워 면벌을
가능하게 하는 면벌부(면죄부) 판매 등 다양한 이슈가 있지만 공통적인 것은 구원을 위해 인간의 입장에서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공로가 있어야 궁극적인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 당시 교회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이렇게 은혜와 공로가 함께 일할 수 있다는 가르침에 대해 성경은 정확히 반대로 말합니다.
롬 11:6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은혜이거나
아니거나입니다. 은혜인 것은 맞지만 그래도 이런 것은 우리가 해야 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은혜가 맞는다면 오직 은혜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래서 당시 종교 개혁자들은 교회에 대해서 ‘그렇지 않다. 구원은 오직 은혜로만 되는 것이다.’를 외쳤던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이었기 때문입니다.
엡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딛 3: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행 15:11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우리가 어떤 자들인지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오직 은혜’일 수밖에 없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먼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거룩하고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또한, 자존하시고 자족하신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그런 분이 우리를 구원하셔야만 하는
어쩔 수 없는 이유나 필요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있어야만 존재하거나 만족하실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있어야만 영광을 받으실 수 있는 분도 아닙니다.
그럼, 우리는 어떤 자들인가요?
구원받기 전 우리가 어떤 상태에 있었는지를 생각해 보면 왜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한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은혜 외에 우리 쪽에서의 어떤 공로가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에서 3장의 중반까지 사도 바울은 모든 인류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이유를 밝히고 결론적으로 이렇게 선포합니다.
롬 3:9-12
[9]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성경이
모든 사람을 ‘죄인’이라고 말할 때 의미하는 바가 이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중립적인 죄인이 아닙니다. 죄도 범하지만 선도 행하는
그런 자들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소극적인 죄인도 아닙니다. 어쩌다 보니 죄를 범했지만, 여전히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과 함께 있고
싶어 하는 그런 자들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우리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는 우리가
‘죄인’인 상태를 곧 하나님과 ‘원수’ 된 상태라고 말합니다(롬 5:10).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원수와 친구 외에도 수많은 관계가
가능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편에 있지 않으면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원수이고
반역자입니다. 에베소서 2장 3절은 우리의 상태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엡 2: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입니다. 영적으로 하나님의 입장에서 봤을 때 모든 사람은 “허물과 죄로 죽은
자”입니다(엡 2:1). 생명이 없는 자의 특징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영적으로 그런 존재입니다. 우리가
이런 상태인데 어떻게 우리 입장에서 하나님을 향한 ‘한 걸음’을 내디딜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럴 능력도
우리에게 없고 그럴 의지도 없습니다. 그런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면, 우리가 무엇을 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 자명합니다.
우리가 먼저 무엇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시작하셨고 하나님께서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구원은 은혜의 선물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보나, 인간 편에서 보나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여야만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기독교를 다른 모든 종교와 구분 짓습니다.
어떤 종교가 되었듯 공통적인 메시지는 ‘너희의 최선을 다하라. 그럼 뭔가 너희에게 좋은 것이 있을 것이다.’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다릅니다. 우리는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가 할 수 없으니 내가
해주겠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어 주신 은혜의 선물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무엇을
더할 필요도 없고 더할 수도 없습니다. 오직 은혜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오직 은혜’를 말할 때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몇 가지 있습니다.
1. ‘오직 은혜’라고 말할 때 우리는 우리가 자격이 없는 자들임을 인정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호의를 은혜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학교에서 100m 달리기 경주를 하는데,
1등 한 사람에게 공책 세트를 주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공책 세트를 받은 학생이 그것에 대해서 크게 감사하며 어쩔 줄
몰랐을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정당하게 자신이 노력한 것의 대가를 받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1등 한 학생에게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노트북을 주었다고 해봅시다. ‘뭐 대단한 것 했다고 이런 것까지 줄까?’라고 생각할 수는
있지만, 여전히 자신이 노력한 대가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수억 원하는 아파트를 주면 어떨까요? 믿기 힘든 상황이고 정말 감사한
마음이 들겠지만, 여전히 자신이 노력한 것에 대한 대가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만약 2등 한 학생이 아파트를 받았는데 1등 한
자신이 노트북을 받았다면 당장에 항의를 할 것입니다.
자격
있는 자에게 아무리 큰 호의가 주어져도 그것은 은혜가 아닙니다. 더 나아가서, 받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가 조금이라도 먼저
고려되면 그것은 은혜가 아닙니다. 우리가 오직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말은 우리가 정말로 자격이 없고 우리의 어떠함이 은혜를 받는 데
있어 전혀 영향을 주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마치 내가 대단해서 은혜 받고 구원을 받은 것처럼 자랑할 수 없습니다. ‘오직
은혜’의 의미를 제대로 안다면 하나님 앞에서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2. ‘오직 은혜’는 또한 은혜를 베푸는 것은 100%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찌나 ‘공의’를 좋아하는지, 때로는 은혜와 공의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좋은
예를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0장 1절에서 16절에 나오는 포도원 품꾼들의 비유입니다. 한 포도원 주인이 추수할
때가 되어 품꾼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아침부터 와서 일한 품꾼도 있었고 일이 끝날 때가 다 되어서야 와서 일한 품꾼도 있었습니다.
주인은 나중에 온 일꾼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먼저 온 자들에게도 약속했던 대로 한 데나리온을 주었습니다.
‘당연히’
먼저 온 자들이 불평하며 원망합니다. 어떻게 더 수고한 우리도 똑같이 한 데나리온만 받느냐는 것입니다. 아마 (우리를 포함해서)
이 비유를 듣는 사람들은 모두 이들과 같은 생각일 것입니다. 주인이 잘못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주인이 묻습니다.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눅 20:15)
은혜를
공정하게 베풀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은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은혜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받는 사람이 고려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공정은 받는 사람을 고려해서 그에 합당하게 대우하는 것입니다. 둘은 그 영역이 다릅니다.
은혜는 베푸는 사람의 주권적인 선택입니다. 여러분이 아프리카에서 한 아이를 입양하는 것을 보고 제가 ‘어떻게 다른 아이들은 다
내버려 두고 한 아이만 입양할 수 있습니까? 은혜롭지 못합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은혜는 베푸는 사람의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은혜를 입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입니다. ‘오직 은혜’의 의미를 제대로 안다면 하나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3. ‘오직 은혜’는 우리가 얻은 것이 가치 없는 것임을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직접 가치를 지불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가치 없게 여기는 경향이 있어서 구원에 대해서도
조금은 그런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믿으면 은혜로 구원을 준다니 손해 볼 건 없네’라는 생각으로 믿는다고도 말하고
그런 식으로 복음을 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구원은 그렇게 취급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이 은혜의 선물인 이유는 그것이
값어치가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 힘으로는 절대로 지불할 수 없을 정도로 값비싸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인간들에게 수치와 고통을 당하시고 죽으셔야만 했습니다. 무한한 가치를 지닌 것이 우리가 은혜로 얻은 구원입니다. ‘오직 은혜’의
의미를 제대로 안다면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 놀라운 성경의 진리는 우리를 한없이 낮아지게 하고 한없이 감사하게 하고 한없이 찬양하게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이 은혜에 반응하고 계십니까? 한 찬송가 가사처럼 온 세상의 내 것이라도 이 은혜를 다 갚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내가 가진 무엇이 아니라 바로 ‘나’입니다. 은혜받은 자로서 더욱 은혜에 합당하게 생활하여 이
놀라운 은혜를 세상 가운데 더욱 아름답고 가치 있게 선포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다섯 솔라 – 오직 믿음
Five Solas 다섯 솔라
Sola Scriptura 오직 성경
Solus Christus 오직 그리스도
Sola Gratia 오직 은혜
Sola Fide 오직 믿음
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 영광
다섯 솔라가 모두 서로 연관되어 있지만,
특별히 ‘오직 은혜’와 ‘오직 믿음’은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습니다. 어느 하나를 설명하면서 다른 하나를 언급하지 않기가 사실상
불가능할 정도입니다. ‘오직 은혜’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오직 믿음’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오직 믿음’이라고 말한다면 당연히
‘오직 은혜’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 칼럼을 통해서 우리는 왜 구원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선물일 수밖에 없는지, 그리고 그 안에 내포된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해 봤습니다. 간단히
정리하면, 구원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은혜의 선물일 수밖에 없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완전한 분이셔서 우리를 구원하셔야만 하는 어쩔
수 없는 이유가 하나님께 있지 않습니다. 그런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은 은혜로밖에 설명할 수 없습니다. 둘째로 우리는
구원에 있어서 완전히 무능합니다. 무언가를 할 수도 없고 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우리가 아닌
다른 누군가, 즉 하나님께서 해주셨다는 말이고, 그것이 곧 은혜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또한 1) 우리가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는 자이며 2) 은혜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으로 주어진 것이고 3) 우리가 받은 구원이 헤아릴 수 없는
가치를 가진 것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럼 ‘오직 믿음’이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오직 은혜’가 구원의 동기와 동력에 대해서 말한다면, ‘오직 믿음’은 구원의 수단 혹은 도구에 대해서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구원의 유일한 동기와 동력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가 실제로 역사하는 유일한 수단은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는 그 은혜로 인해 믿음을 ‘통해서’ 구원 받습니다(엡 2:8).
앞선 글에서 몇 차례 언급되었던 것처럼,
당시 교회는 이 부분에 있어 굉장히 모호한 (그래서 잘못된) 가르침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인간에게 달려 있다고
주장했던 펠라기우스의 주장을 그대로 반복하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은 교리를 전파 했습니다. 당시 교회는 죄와
벌을 분리하면서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죄 사함은 받아도 그에 대한 벌은 남아 있어 선행(성사, 성지
순례 등)으로 그것을 갚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 그것을 갚지 못하면 연옥에서 남은 벌을 받고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했고, 면죄부는 그런 노력이나 고행을 ‘헌금’으로 빠르게 대체할 수 있는 방법이었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은
했지만, 그 ‘은혜’를 받기 위한 모든 노력을 사람이 해야 했던 것입니다. ‘칭의’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공로에 기초해서
죄인을 의롭다고 선포하시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 하나님의 도우심 가운데 최선을 다해 의롭게 되어가는 과정이 되었습니다.
이런 가르침에 성실하게 그리고 정직하게 임했던 사람이 마르틴 루터였습니다.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에 최선을 다했지만, 로마서 1장 17절은 그에게 언제나 무거운 짐이자 두려움이었습니다.
롬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그가 배운 것은 어떻게든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가 되어야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만족하게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의’는 곧 그를 심판하는
하나님의 공의였습니다. 루터는 더욱 구원을 위해 열심을 냈지만 그럴수록 좌절과 절망은 커졌습니다. 모든 것이 달라진 것은 그가 ‘하나님의 의’가 단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완전한 의일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믿는 자에게 주시는’ 그리스도의 의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였습니다. 그가 가장 강력하게 ‘오직 믿음’을 외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은 기독교의 핵심이고 기독교를 가톨릭뿐 아니라 다른 모든 종교와 구분하는 기준이 됩니다. 모든 종교는 인간의 노력과 성취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직 믿음’의 교리는 어떤 식으로도 우리의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는 데 도움을 주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 죄인인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성경은 “전혀 없다.”고 답합니다.
사도 바울이 기록한 로마서는 이런
성경적인 복음에 대한 가장 분명한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로마서는 모든 인류에게 암울한 소식을 전하며 시작합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고 그 행한 대로 보응을 받게 될 것입니다(롬 2:6; 3:9~18). 누구도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변명할 수
없습니다. 누구도 하나님의 기준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롬 3:19~20).
“하지만 이제는!”
감사하게도 로마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가장 암울했던 소식은 그 깊은 골짜기만큼 더욱 기쁜 소식으로 대체됩니다.
롬 3:21-22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율법을 최선을 다해 지킨 자가 아니라
‘모든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의가 미칩니다. 바울은 27절에서 다시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단지 혹은 오히려]
믿음의 법으로니라.”라고 강조하고, 28절에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라고 결론 내립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스스로 의롭게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의는 ‘일하지 않고 얻은
의’고(롬 4:4~5), 다른 말로 하면 ‘믿음에서 난 의’입니다(롬 9:30). ‘작은 로마서’라고 불리는 갈라디아서에서도
바울은 동일하게 말합니다.
갈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당연한 얘기지만, 사도 바울만 이렇게
가르쳤던 것은 아닙니다. 사도 요한도 다른 무엇을 통해서가 아니라 ‘믿는 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말했습니다(요
1:12~13). 사도 베드로도 믿음이 궁극적으로 얻게 될 구원으로 우리를 이끌 것이라 말했고(벧전 1:5, 9), 구원받은
자들에 대해서 ‘믿는 자’ 그리고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벧전 2:7; 벧후
1:1).
예수님의 가르침도 다르지 않습니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이 말씀들에 어떤 종교적 행위나 율법에
대한 순종을 구원의 근거나 수단으로 끼워 넣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에 올라간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를 통해서 스스로 의롭게
될 수 있다고 믿는 자를 경고하셨습니다(눅 18:9~14). 의로운 행위를 해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하는 자가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하는 자는 겸손히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자, 곧 믿는
자입니다.
이런 ‘오직 믿음’의 가르침은 다음의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직간접적으로 의미합니다.
1. 행함이 구원(칭의)에 어떤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앞서 언급한 성경의 말씀들을 보면 행함과 믿음을 분명하게 구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은 곧
행함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말일 뿐 아니라, 행함이 구원에 어떤 영향도 주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사역에 기초하여 믿는 자들을 의롭다고 선포하시는데, 그 의에 우리의 행함이 무엇을 더하거나 빼지 못합니다.
비교적 의롭게 산 사람이라도 더 의롭게 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의에는 차별이 없고 완전합니다. 모두가 자격이 없고,
모두가 은혜로, 믿음을 통해, 의롭다 하심을 받습니다.
2. 믿음이 구원의 동기 혹은 조건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때로 어떤 분들의 간증을 들어보면 믿음이라는
‘행위’로 구원을 받은 것 같습니다. 마치 내가 믿어 줬으니까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실 수 있었다는 식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또
그런 식으로 복음을 전하기도 합니다. 아닙니다. 성경이 ‘구원받는 믿음’에 대해서 말할 때는 언제나 수단이지 동기나 조건이
아닙니다. 만약 우리의 믿음이 구원의 동기가 되고 조건이 된다면, 우리는 믿은 것에 대해서 자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구원에 대해서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은혜로 시작하셨고 은혜로 완성하시는 것이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3. 구원받는 믿음에는 행위가 따라오지만, 믿음에 어떤 행위가 따라와야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비슷하게 들리지만, 전혀 다른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믿는 자를 의롭다고 칭하실 때, 하나님 보시기에 그가 얼마나 의로운 삶을
살았는지 혹은 앞으로 얼마나 의로운 삶을 살 것인지는 전혀 고려되지 않습니다. 조금이라도 그렇다면 우리는 행위로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100% 행함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이나 50% 혹은 그 이하 1%의 행함이라도 필요하다는 말이나 결과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결국, 믿음으로만 구원받을 수 없다는 말이고 최종적으로는 행함이 있어야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어느 정도의 행함이든지 그것을 ‘통해서’ 즉, 행함을 수단으로 구원받을 수 없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렇다고 행함 자체가 무의미하거나 선택
사항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과 행함이 전혀 무관한 것도 아닙니다.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은 아니지만, 진정 구원받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행함으로 그 믿음이 진실임을 증명하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는 이에 대해 아주 분명하게 말합니다.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을 구원하지 못하는 믿음이라고 말합니다(약 2:14). 이 말을 바꾸면 구원하는 믿음은 행함이 있는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야고보는 또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아무 유익이 없는 것, 죽은 것, 헛된 것이라고 합니다(약 2:16, 17, 20). 행함이 그
믿음이 참된 것임을 입증하기 때문입니다(약 2:24).
바울도 갈라디아서에서 믿음에 행위를 더해
구원을 얻는다는 가르침에 대해 격렬하게 반대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떤 선한 삶도 의미가 없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믿는 자들의 믿음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갈 5:6)이기 때문에 그들은 삶에서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고
말했습니다(갈 5:22~23). 예수님도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마 7:16)라고 하시며,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라고
선포하심으로 구원받는 참된 믿음이 무엇인지 가르치셨습니다. ‘오직 믿음’은 믿음의 열매로서의 행함을 부정하거나 간과하지 않습니다.
그 믿음은 우리를 심판에서 건져낼 뿐 아니라 과거의 행실에서도 건져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그 아들을 닮아가게 하는 일도 시작하십니다. 더욱 그 아들의 모습을 닮아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 그것이 구원의
목적이며 삶의 목적입니다.
구원에 있어서 ‘오직 믿음’의 진리는 믿는 자로 하여금 계속해서 하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오직 믿음’은 우리 안에 선한 것이 없고 우리 안에 자랑할 것이 없음을 보게 합니다. 내가 뭔가 잘한 것 같고 내가 뭔가 이뤄낸 것 같아 우쭐해지고 교만한 마음이 싹트려 할 때 이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엡 2:8-9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갈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그리스도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우리가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빌 3:3). 우리가 더욱 그에 합당한 백성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다섯 솔라 – 오직 하나님께 영광
Five Solas 다섯 솔라
Sola Scriptura 오직 성경
Solus Christus 오직 그리스도
Sola Gratia 오직 은혜
Sola Fide 오직 믿음
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 영광
‘다섯 솔라’ 시리즈의 마지막인 ‘오직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라틴어를 좀 더 정확하게 번역하면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 혹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고 어떻게 행동하는지는 차치하고, 최소한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
중에 “나는 내가 제일 중요해. 나는 나를 위해서 살아. 하나님의 영광은 나하고 관계없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를 전제로 하고 있고, 그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모든 일을 하시며 우리에게도 그것을
요구하신다는 것은 성경에서 우리가 놓칠 수 없는 분명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시작에서부터 하나님께서 계시고 그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고 선포합니다(창 1:1). 누구도 아무런 의미나 목적 없이
무언가를 만들지 않습니다. 더구나 인격체이신 하나님께서 또 다른 인격체인 인간을 창조하셨다면, 거기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는 것이
당연합니다. 창조의 목적은 시편을 비롯한 다른 말씀들에서 계속해서 나오는데, 이사야서에서는 특별히 하나님 스스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 43:7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도 동일합니다. 구원은 마치 ‘재창조’와 같아서, 성경은 구원을 새로운 창조로 말하기도 하고 창조에 사용된 언어를 그대로 구원에 적용하여 사용하기도 합니다.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엡 2:8-10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렇기 때문에 구원의 목적도 창조의 목적과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는 구원 받았습니다.
벧전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래서 성경은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이렇게 명령합니다.
시 96:1-3 [1]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지어다 [2] 여호와께 노래하여 그의 이름을 송축하며 그의 구원을 날마다 전파할지어다 [3] 그의 영광을 백성들 가운데에, 그의 기이한 행적을 만민 가운데에 선포할지어다
고전 6: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전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모든 것을 해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일관된
가르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개혁 당시의 가톨릭 교회도 하나님의 영광을 표면적으로 부정하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문제는,
그들의 가르침과 실천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가려져 있었고 다른 것들이 영광을 (하나님과 함께) 얻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교회의
믿음과 삶에 있어 가장 높은 권위의 자리에 하나님의 말씀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교황과 의회가 결정한 전통이 함께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죄인인 인간 사이의 중보자는 오직 그리스도이신데, 마리아나 다른 성인들, 사제들이 중보자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통해서 받을 수 있는 구원인데, 우리가 무언가를 거기에 더해야 하고 더할 수 있다고 가르쳐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가르침과 실천에는 공통으로 하나님과 그분께서 하시는 일에 사람과 사람의 행위가 더해져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결과적으로는 하나님 외에 다른 무엇이 함께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외쳤던 ‘오직’은
이런 것들을 바로 잡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마땅한 영광을 돌려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이쯤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이토록 중요한 ‘하나님의 영광’이란 무엇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요?
먼저,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완전하고, 다른 피조물과는 구분되고, 무한히 위대하신 하나님의 속성이 드러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완전하고 구분되며 무한히 위대하신 속성, 즉 하나님의 ‘하나님이심’을 우리는 ‘거룩이라고 말하고, 그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겉으로 표현되는 것을 ‘영광’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잘 드러난 말씀은 이사야 6장 2~3절입니다.
사 6:2-3 [2]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3]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스랍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그분을 ‘거룩하다’고 선포했고, 온 땅에 충만한 그분의 거룩하심을 ‘영광’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어떤 면이 겉으로 드러나면 그것이 영광보다는 수치가 될 수 있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면에서 완전하시고 무한히 위대하시기 때문에 그분의 어떠하심이 드러나는 것은 언제나 그분께 영광이 되는 일입니다.
결국, 우리 입장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혹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어떠하심이 ‘잘’ 혹은 ‘그대로’ 드러나게 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고 말씀에 따라 모든 것을 하는 것이 그렇게 하는 일입니다. 다른 무엇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만이
중보자가 되신 것을 인정하고 그리스도께만 나아가는 것이 그렇게 하는 일입니다. 구원에 있어서 내가 무엇을 하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은혜로 믿는 자에게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 구원임을 인정하는 것이 그렇게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주권자시고, 하나님이 구원자시고,
하나님이 심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성경, 오직 그리스도,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을 주장하는 것은 그것이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 있음을 분명하게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오늘날에 적용할 때, 두 가지 주의할 점을 말씀드리기 원합니다.
첫째는, (당연한 얘기지만) 하나님이 아닌 다른 대상에게 영광을 돌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성취에 도취하여서 마치 내가 모든 것을 이뤄낸 것처럼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감사를 표하고 그들의 공로를
인정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궁극적으로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사실 이것은 말만 그렇게 한다고 해결되는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우리 생각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
아름다움, 위대하심을 맛보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더 말씀을 배우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안다면 그분께서 우리를 통하여 일하신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특권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중 단 하나라도
‘내가’ 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모든 영광은 ‘당연히’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합니다.
두 번째는, 마치 우리가 무언가를 성취해서 얻어낸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것, 쉽게 말해 “하나님 덕분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아주 틀린 것은 아니고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약간은 생각의 방향을 바로 잡을 필요가 있습니다.
핵심은
우리가 무엇을 해냈느냐, 성취했느냐가 아닙니다. 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잘’ 드러나셨냐가 핵심입니다. 내가 더 높은
자리에 오르고,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잘 드러났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 것이고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영광을 받으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직장에서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이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참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 고백을 듣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니가 거기까지 가려고 얼마나 아부를 떨고 돈을 갖다
바쳤는지 내가 아는데…’라는 생각이 든다면 어떨까요? 아무리 잘 포장해서 말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났다고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직장에서는 말단 사원의 자리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라도 눈속임으로 일하지
않고 주께 하듯 최선을 다한다면 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입니다. 병에 걸려서 죽어가는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늘나라의 소망 가운데 기뻐할 수 있다면 하나님은 분명 영광
받으십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이루었느냐, 앞으로 무엇을 이룰 것이냐가 아니라, 지금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모습을
드러내고 있느냐입니다.
시리즈를 마무리하면서, 우리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해보길 원합니다. “내 생각, 말, 삶에서 하나님은 바르게 드러나고 계신가? 나를 통해 보여지는 하나님의 모습은 왜곡되어 있지 않은가?”
유명한 오라토리오 ‘메시아’를 작곡한 헨델은 악보의 끝에 “S. D. G.”라는 약어를 기록했습니다. “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입니다. 우리 삶의 매 순간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 우리 삶의 끝에 “S. D. G.”라는 세
글자를 힘차게 외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두 가지 방법 (슥 14:16-21)
오늘은 스가랴서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연속극에서 마지막 장면은 매우 중요합니다. 마지막 장면을 아슬아슬하게 만들면 다음 주에 어떤 내용이 나올까 궁금해하며 보게 됩니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이 시원찮게 끝나면 그 다음 주는 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장면이 어떻게 끝나느냐에 따라서 다음 회 연속극의 시청률이 달라집니다.
스가랴서의 마지막 부분에서 스가랴 선지자는 독자에게 강한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의 사명은 우선적으로 성전을 재건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백성들이 16년 동안이나 성전을 짓지 못하고 있자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가 등장한 것입니다. 그들은 백성들에게 “너희를 위해서는 살만한 집을 짓고 성전은 짓지 않는 것이 옳은 것인지 생각해보라”고 말했습니다. 자기의 소위를 살펴보라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유다 백성들을 격려하여 성전을 짓는 것이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의 일차적인 사명이었습니다. B.C. 520년에 두 선지자가 예언을 시작해서 4년이 지난 B.C. 516년에 성전이 완공되었습니다. 이 성전을 스룹바벨 성전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으로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의 사명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스룹바벨 성전의 완공은 연속극 한편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이번 회가 끝나고 또 다음 회를 기대하게 하는 것입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스룹바벨 성전이 완공되면 그 성전에 만국의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서게 되실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아시는 한 날, 즉 새로운 시대가 시작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 시대를 메시아시대 혹은 신약시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신약시대에 관한 예언은 그리스도 예수님의 초림으로 시작되어 재림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종말론적인 용어로는 “already but not yet”이라고 합니다.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스가랴 14장이 예언하고 있는 메시아시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면 완성될 것입니다. 결국 스가랴 선지자는 신약시대가 되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신 목적을 달성하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신 근본 목적은 인간의 존재 목적과 동일합니다.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사 43:7).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신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1647년 영국에서 재정된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의 첫 번째 질문이 ‘인간의 최고 목적은 무엇입니까?’입니다. 이것에 대한 답은 ‘인간의 최고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로 모이는 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십니까? 우리가 자식들을 키우면서 자식들이 부모와 함께하는 것을 즐거워하고 기뻐하면 얼마나 기분이 좋습니까? 하지만 연락도 하지 않고 부모에게는 관심도 가지지 않는다면 속상하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하나님도 우리를 통해 영광 받으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메시아시대가 되면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하여금 두 가지 방법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Ⅰ.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 4:23).
구약시대는 제사시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만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메시아시대가 되면서 유대인뿐만이 아니라 이방인들도 예루살렘이 아닌 모든 곳에서 아버지께 예배함으로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구약의 제사는 그림자이고 신약의 예배는 실체입니다.
구약의 제사는 민족적인 제한이 있지만 신약의 예배는 민족적인 제한이 없습니다. 구약의 제사는 예루살렘이라는 장소의 제한이 있지만 신약의 예배는 그런 제한이 없습니다. 어디서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는 오실 메시아를 바라보면서 드렸지만 신약의 예배는 이미 오신 메시아를 기념하면서 드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구약의 제사와 신약의 예배는 아주 다른 것입니다.
스가랴 14장 16~19절까지는 신약의 예배에 관해 네 가지 측면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열국 중에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숭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슥 14:16).
첫째, 예배의 대상이 누구냐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당연한 진리를 우리가 실천하지 않습니다. 특히 한국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 외에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명절만 되면 제사를 드리지 않습니까? 여호와 하나님만이 예배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고 우상숭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귀신은 우리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없고 살아있는 사람이나 죽은 사람도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명절만 되면 드리는 제사는 죽은 사람에게 예배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제사상을 차리면 죽은 조상이 와서 밥을 먹는 것이 아니라 귀신들이 모여드는 것입니다. 돌아가신 분이 무슨 밥을 먹습니까? 밥은 살아계실 때 대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명절에 아무리 모든 친척, 가족들이 연합해서 핍박한다 할지라도 제사는 지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 친척 중에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지 얼마 안 되었는데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시누이가 제사를 지내야 된다고 압박하자 초신자니까 어쩔 수 없이 제사를 지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제사 지내고 두 가지 어려움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첫째,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죽을 뻔했고 둘째, 이웃집에 갔다가 개에게 물려서 병원신세를 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다시는 제사를 지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고 합니다. 불신자가 제사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상관하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성도들이 제사를 지내는 것은 하나님께서 몹시 싫어하시고 강한 징계를 내리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번 명절에는 제사를 지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 징계를 자초합니까?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명절만 되면 고생을 많이 하시는데 영적으로 싸워야 합니다. 귀신들은 우리가 강하게 나가면 물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타협하고 자꾸 뒤로 물러가면 귀신들은 더욱 우리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사 지내라고 압박하는 어르신이 계셔도 나는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할 수 없다고 강하게 이야기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저희 큰 집이 오랫동안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런데 제가 예수님을 믿고 큰 집에 전화했더니 그날 밤 형수가 꿈을 꿨답니다. 길 양쪽으로 한쪽에는 절이 있고 한쪽에 교회가 있었는데 절의 스님들이 목탁을 치면서 우리가 졌다고 하자 교회의 목사님이 어서 오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 이후 큰 집도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신앙적으로 강하게 나가면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고 귀신들도 물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예배의 주체에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들도 다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열국 중에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숭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슥 14:16).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열국은 이방인입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남은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도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는 주체가 된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유대인들만 예배를 드렸는데 신약시대에는 이방인들도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또 이것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천국에 올라가게 되면 완성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7장 9~10절은 천국에서 이 예언이 완성된 것을 보여줍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계 7:9~10).
천국은 예배의 장소이며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장소입니다. 천국에서는 족속과 방언을 가리지 않고 각 나라에서 나온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여호와의 영광과 어린양의 은혜를 찬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행하신 일들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것이 예배의 내용이 된다는 것입니다. 스가랴 14장 16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했는데 유대인에게는 일곱 절기가 있습니다.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오순절, 나팔절, 속죄일, 장막절. 장막절과 초막절은 같은 것입니다. 초막절은 7월 15일에 시작되는데 7일 동안 원두막을 짓고 원두막에서 사는 것입니다. 원두막에 들어가 7일을 지내고 8일째 되는 날 거룩한 성회로 모이는 것인데 초막절은 왜 지키는 것이냐?
레위기 23장 41~43절에 그 이유가 나옵니다. 초막절은 지금 우리가 잘 먹고 잘 살지만 과거에 애굽의 노예였던 우리를 하나님께서 건져주셨다는 것을 기억하는 절기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편안한 집에서 살고 있지만 과거 40년 동안 광야를 방황하면서 장막에 거하며 살았다는 것을 기억하기 위해 7일 동안 원두막을 짓고 거하는 것입니다.
초막절은 애굽의 노예생활로부터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신 것과 광야 생활 가운데 보호하시고 축복하신 것을 기억하면서 지키는 절기인 것입니다. 이처럼 메시아시대의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가 2000년 전에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를 지옥과 영원한 멸망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악한 마귀의 권세에서 우리를 풀어 주신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것을 기억하고 광야 같은 세상에서 지금까지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신 것에 감사하는 것이 예배의 내용인 것입니다.
넷째, 예배의 상벌을 하나님께서 보장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에게 현세에도 복을 주시고, 내세에도 복을 주시지만 그렇지 않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벌을 내리신다는 것입니다.
“애굽 사람이나 열국 사람이나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의 받을 벌이 이러하니라” (슥 14:19).
어떤 분은 이 구절이 예수님의 재림 이후 천년왕국에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저는 천년왕국을 믿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이 구절은 천년왕국이나 천국이 아닌 교회시대를 말하는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않는다는 것은 예배를 드리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며 결국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신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축복이지만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심판과 멸망입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구원받습니다. 하지만 믿지 않으면 구원이 아닌 저주와 멸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이중구조입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요 3:18).
예배 생활에 성공하는 사람은 복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아주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주일이 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려야겠다는 생각으로 예배를 정성스럽게 드리십시오.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기 때문에 정성으로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보시고 우리를 축복해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 예언이 실현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예배의 대상은 여호와 하나님이시고, 예배의 주체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도 포함되고, 예배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가 과거에 행해주신 일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것이며,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상이 있는 것입니다. 창조주요 구원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성도의 특권이고 영예며 축복입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Ⅱ. “성결”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그 날에는 말 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 여호와의 전에 모든 솥이 제단 앞 주발과 다름이 없을 것이니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솥이 만군의 여호와의 성물이 될 것인즉 제사 드리는 자가 와서 이 솥을 취하여 그 가운데 고기를 삶으리라 그 날에는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가나안 사람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슥 14:20~21).
말씀을 보면 여호와께 성결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너는 또 정금으로 패를 만들어 인을 새기는 법으로 그 위에 새기되 여호와께 성결이라 하고 그 패를 청색 끈으로 관 위에 매되 곧 전면에 있게 하라” (출 28:36~37).
구약시대에 오직 대제사장만이 머리에 쓰는 관이 있었는데 이 관 앞에 정금에다 여호와께 성결이라고 새겨서 매달았습니다. 그러면 이 관을 쓴 사람이 대제사장인 것을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말 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된다는 것입니다. 말 방울은 말의 목에 달아 말이 움직일 때마다 소리가 나게 한 것인데 이것의 의미는 천하고 보잘 것 없는 것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고 기록된다는 것입니다. 솥도 마찬가지로 여호와의 성전에서 사용되는 솥만 성물이었는데 메시아 시대가 되면서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솥이 다 성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히 여겨졌던 제단 앞에 피를 담는 주발 또한 성물이 된다고 했습니다.
성물이라던가 성결이라는 것은 윤리적이고 도덕적으로 흠이 없다는 의미도 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따로 구별되어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같은 그릇이라도 하나님께서 쓰시면 거룩한 그릇이고, 사람이 쓰면 거룩하지 않은 그릇입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구약시대에는 대제사장이나 제사장과 같은 사람들만 하나님께 구별되어 사용되었지만 메시아시대에는 천하게 여김을 받았던 사람들도 구별되어 거룩하게 쓰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는 종교개혁가인데 스가랴 14장 14절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신약시대가 되면 제사장과 평신도의 구별이 없어지고 모든 신자가 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하게 된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구별되어 쓰임 받는 사람에 대해서 민족적, 지역적, 교육적, 신분적 차별이 없어지게 되고 아무리 천하고 더러운 존재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구원받으면 하나님께 구별되어 쓰임 받는 거룩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통해 이 원리를 실제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 사두개인, 랍비 등 거룩한 척하고 누구보다 의롭다고 생각했던 자들에게 회칠한 무덤과 같은 존재라고 말하였습니다. 하지만 창녀로 살던 여인이 회개하여 예수님을 믿고 따르자 거룩한 여인이라고 한 것입니다. 또 남편이 여섯 번이나 바뀐 여인도 예수님을 만나서 거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백성들을 갈취하던 세리 마태도 예수님을 만나 자신의 것을 다 내놓는 거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절대 불가능했던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유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방인 중에서도 아주 먼 곳의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런 우리도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께서 구별하여 거룩한 존재가 되었으니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수종들고 영광을 돌리도록 구별된 사람입니다. 이것이 거룩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쓰시겠다고 하면 “예”라로 대답하고 달려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는데 “왜 부르십니까?” 이렇게 대답하는 사람은 거룩한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거룩한 사람은 주님께서 쓰시겠다고 하면 아낌없이 드리는 사람입니다.
사람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이 없습니다.
출세하는 것이 사람의 목적이 아닙니다.
돈을 버는 것도 사람의 목적이 아닙니다.
돈, 건강, 인기, 명예 이런 것들은 다 살아가는 수단이지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 한마디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 사람은 자신의 존재 목적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첫째,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함으로 영광을 돌릴 수 있고 둘째, 하나님께 구별되어 하나님의 일에 헌신함으로써 거룩한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을 믿습니다.
스가랴 14장에서는 두가지 표현이 중요합니다.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열국 중에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숭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슥 14:16).
누구에게 숭배합니까? 여호와께 숭배합니다. “그 날에는 말 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 (슥 14:20).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으면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됩니다. 스가랴 마지막 장을 보면서 우리 마음에 두 표현 ‘여호와께 숭배’와 ‘여호와께 성결’이 강하게 새겨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