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치만 니 & 케네스 헤긴


케네스 헤긴, 그는 누구인가?

‘케네스 해긴’과 ‘말씀믿음 운동’의 이단성 

인물소개

레마 바이블 신학교와 케네스 해긴 미니스트리(Kenneth Hagin Ministries)의 설립자이다. 그는 17세 때 심장병과 불치의 혈액병에서 하나님의 치유를 받은 후, 약 70년간 현장에서 건강한 가운데 왕성하게 사역을 했다. 그는 “내 백성에게 믿음을 가르치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오클라호마 털사에약 11만 평에 이르는 레마 바이블 신학교(RBTC)를 세웠고, 52개국에서 활동하는 8만 명 이상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오늘날 케네스 해긴 미니스트리의 사역 범위는 전 세계적으로 퍼져있다. KHM의 라디오 프로인 「방송으로 듣는 믿음 세미나」(Faith Seminar of the Air)는 미국내 300개 이상의 방송국에서,그리고 인터넷으로는 전 세계에 걸쳐 방송되고 있다. 그 밖의 주요 사역들로는 월간 잡지 「믿음의 말씀」(The Word of Faith), 전국 순회 전도단,레마 성경신학교,레마 통신학교,레마 동문회,국제 레마 목회자협회,교도소 선교 등이 있다. 그는 2003년에 하늘나라로 떠났지만,그가 세운 신학교와 사역들은 지금도 전 세계의 믿음의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하고 있다.

Kenneth E. Hagin (1917-2003)

 

그는 현대 Word of Faith Movement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으며, 많은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참선지자로 여겨진다. 그는 1917년 Texas주 McKinney에서 미숙아로 출생했다. 심장이 약해서 16세에는 그 증상이 심각했는데. 환상과 기적을 경험하고 거듭난 크리스찬이 되었다 한다. 1934년 17세의 나이로 침례교인으로 사역을 시작, 37년 the Assemblies of God로 부터 자격을 얻어 목회활동을 시작한다. 1940년에서 50년까지 오순절 치유부흥 운동에서 일했다. 1963년에 지금의 단체를 구성. 1966년 오클라호마 털사로 이주했다. 2003년 9월 19일 사망한 뒤, 아들 (Kenneth Hagin, Jr.)과 손자 (Craig Hagi)가 대부분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다.

 

먼저, 그가 거듭났다고 주장하는 사건을 먼저 정리한다. 그는 세번의 죽음을 경험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1933년 4월 22일 저녁 7시 40분. 그는 사망했고, 지옥으로 갔다. “나의 속사람이 나의 몸에서 빠져나갔고 나의 죽은 몸은 누워있었다. 나는 내가 죽었다는 증거를 가지고 있다. 나의 심장은 멎었고, 맥박도 멈추었다. 지옥으로부터 올라오는 하나의 빛을 보았다. 나는 그 바닥에 닿을때에 어떤 영적인 존재로 의식이 있었다. 마침내, 지구위, 천국위로 부터 음성이 들려왔다. 나는 나의 입을 통해 나의 몸으로 다시 들어갔다.” “두번째는, 나는 나의 피가 돌지 않았고, 나의 발가락이, 다리가, 발목이, 무릎이, 엉덩이가, 위장이, 그리고 심장이 차례로 멈추었다. 나는 몸을 빠져나와 아래로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자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내 몸으로 다시 돌아왔다.” “세번쨰로 내 심장이 멈추었다. 나는 느낄 수가 있었다. ‘감사합니다, 하나님’이란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기도하기 시작했다. ‘내가 주꼐로 가오니 용서하소서 죄를 사하여 주소서’ 그때가 하나님의 자비로 거듭난 순간이었다.”

 

그가 거듭난 크리스찬이 되었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그리고 초기의 사역이 은사를 발휘하던 복음적 사역이었을 것이라는 짐작은 간다. 하지만, 한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그 환상에 대한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는 (육체가) 이미 죽었고, 지옥으로 내려갔는데, 즉 영이 육체의 바깥에 있는 동안에 거듭난 것이다. 그러면, 영이 몸을 떠난 뒤에도 거듭날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그것도 지옥으로 내려가다가 말이다. 석연치 않은 부분이다.

 

이 간증은 사실상 Word of Faith의 중요한 가르침이 되는데, 사람이 죽어서 지옥에서 거듭날 수 있다는 것이다. (몰몬교가 이러한 주장을 하고 있는데..) 그들은 예수님도 지옥에서 다시 거듭났다고 한다. ‘십자가상에서의 마지막 말씀인 “다 이루었도다”는 육체적인 업무를 마쳤다는 뜻이다. 즉, 죄에 대한 벌을 지불한 것에 불과하다. 예수가 죽자, 그의 영은 적에게 이끌려 지옥으로 내려갔고 그곳에서 사단을 이겨서, 거듭난 첫사람이 되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시다. 죄없는 예수님께서도 거듭날 필요가 있는지 의아하다.)

 

그는 어머니의 기도로 구원이 가능했다고 하는데, 사람들이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그것을 이룰 수 없다는 그들의 가르침과 연결이 된다. 재미있는 간증은, ‘내가 거듭날때에, 나와 어머니는 큰소리로 기도하고 있었는데, 우리집으로부터 2블럭정도나 자동차들이 줄을 지어 우리의 기도를 듣고 있었다.’고 한다.

 

그의 가르침은 사실상 그 앞세대인 William Kenyon과 유사한 점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는 자신의 가르침은 모두 예수님께로 부터 직접 오는 것이므로, 결코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McConnell은 Hagin의 문장과 Kenyon의 문장이 일치하는 예를 들어 (실제로 각각 반페이지 분량의 8가지 부분을 들며 거의 정확하게 일치함을 증거하고 있다.) Hagin이 그대로 복사하여 쓰고 있음을 입증한바 있다. (아니면, 예수께서 직접 Kenyon의 가르침을 Hagin에게 그대로 들려주었거나.)

 

이러한 현상은, 자신의 가르침에 대한 권위를 오직 예수님의 직접 계시임을 주장하는데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영향을 받았다는 인정을 할 수 없는 자가당착에 빠지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세월이 지나면 지날수록, 처음의 순수한 동기와 사역의 열정은 사라지게 되고, 아집과 거짓만이 남게 될 수 밖에 없다.

 

그는 자주 집회에서 사람들로부터 마귀를 쫒고나서, “지금 나는 예수님이 이곳에 서 계신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보니, 이곳의 그 누구도 예수를 본 사람이 없더군요. 듣지도 못했더군요.”라는 말을 자주 했다. 그는 설교시에도 예수님께서 직접 그 말씀을 다 들려주셔서 하신 말씀 그대로 전했다고도 말한다. 그러면서 성경에서는 볼 수 없었던 하늘의 비밀을 알려주셨다는 것이다. 그는 자주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께서는 그를 천국과 지옥을 방문할 수 있도록 인도하시기도 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난 기록을 몇가지 보자.

 

- 1952년 겨울에 부엌에 있는 그에게 예수님이 오셔서 사단과 마귀들에 대해 가르쳐주겠노라 하셨다. (제자들처럼, 사도들처럼 직접 예수님께로 배웠다는 것이다. 하지만, 신약성경은 분명하게 예수님이 아니라 성령께서 가르치신다고 명시되어 있다.)

- 1958년에는 예수님께서 나타나, 여기에 천사가 대기하고 있는데, 그가 원하는 물질을 가져오기 위해 그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한다. (예수님은 그에게 영적인 면만이 아니라 경제적으로 부유하게 해 줄 것이라 약속하셨다는 뜻이다.)

- 1959년 2월 팔꿈치 부상으로 병원에 있을때에도 예수님께서 그가 빨리 회복되어 사역에 임하게 하기 위해 직접 방문해주셨다고 주장한다.

- 또 예수님께서는 예언의 사역을 하라고 당부하셨는데, 2000년이 지난 지금, 정확하게 한명의 예언자 (자신)에게 계시록이후의 신적 계시가 내려졌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이 Hagin에게 말한 바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는 그들의 주장의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겠다.

- “성령께서 오셔서 나는 엎드렸다. 말을 탄 사람이 와서 나에게 두루마리를 주셨다. ‘미국은 마지막 부름을 받고 있다. 몇나라는 이미 마지막 부름을 받았다. 세상의 종말이 내 손에 있다.’ ‘초대교회처럼 교회들이 믾은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것보다 더 많은 권능과 징조와 경이가 있을 것이다. 더 많은 기적이 행해지며, 성령의 움직임을 받지않는 자들은 나를 만날 기회가 없을 것이다. 많은 이들이 거짓 선지자에게 속을 것이다.’ (적어도 마지막 구절만은 옳다.)

 

그가 묘사하는대로라면 예수님은 가끔은 맨발이셨고, 가끔은 로마샌달을 신고 계셨다. 키는 5-11 (177.5 cm ?). 몸무게는 180 (80 kg ?) 정도이시다. 예수님이 그 앞에 출현한 것이 사실이라고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가 만난 예수는 성경과는 다른 말을 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후에 맘을 바꾸셨거나, 아니면 그가 환상속에 만난 그 존재는 예수가 아니거나 둘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예수님께서 말하셨다. ‘내가 말하는 이 1,2,3,4 단계를 잘 따르기만하면 나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것이다.’ 소책자, ‘하나님과 함께 당신의 티켓을 쓰는 방법’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나에게 승리를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다. 그들의 티켓을 직접 사용해야한다.” (이 예수님은 우리가 알고, 믿고 있는 성경의 예수님이신가?)

 

여기서 실질적으로 Word of Faith의 주요 교리가 된 그의 가르침을 정리해보자.

-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육체적 죽음은 우리를 구원하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예수님의 육체적 죽음은 죄를 이길 수 없었고, 지옥에 가서 영적인 죽음을 한 후에야 가능했다. 예수님은 그때 거듭나셨다. 예수는 영적인 죽음을 맛보았다.

- 크리스찬은 나사렛 예수만큼이나 성육신한 존재다.

- 인간은 하나님과 동등하게 창조되었고, 어떤 열등한 존재로서의 의식없이도 하나님 앞에 서 있을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최대한 그와 동등하게 만드셨다. 믿는 이들은 그리스도다. 우리가 그리스도다.

- 우리도 그리스도인데, 예수 그리스도가 기적으로 그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입증한 것처럼, 우리도 그러한 기적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임을 입증할 수 있다.

 

성경 어디에고 예수님의 영적 죽음에 대한 말은 한곳도 없다. 그의 말은 우리가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동등하게 창조되었다고 믿는 것인데, 우리는 그리스도라 불리울 수도 없고,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올라갈 수도 없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위치에 닿고자함이 죄의 본질이며, 사탄의 본성이기도 하다. 미국의 개신교 방송채널로 알려진 TBN의 설립자도 동일한 주장을 한다. “우리는 작은 신(a god)이며, 그리스도이다.” (다소 개인적인 판단이지만, 이 채널의 방송은 보지 않을수록 더 좋을 것 같다.)

 

이전에도 지적했지만, Word-Faith란 의미는, 무엇이든 우리가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말하기만 하면, 모두 이루어진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것이 the Positive Confession Movement의 주된 관점이다. 이는 크리스찬 사이언스의 은사주의적 변형으로 볼 수 있다. (물론 그들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잠간 조엘 오스틴의 말과 유사한 아들 Hagin Jr.의 말을 보자. " 우리는 우리의 운명을 좌우할 입술을 가지고 잇다. 우리의 말로 우리는 살 수도 죽을 수도 있다." "만약 당신이 의심하면서 말을 한다면 당신은 잘못 발을 내디딘 것이고, 당신이 그렇게 잘못 움직일 때에, 하나님꼐서는 아예 움직일 수 없으시다. 당신이 바로 움직여야한다."

 

Charismatic Laughter 또는 Drunk in the Spirit이라고도 하는 시도를 그는 계속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를 들면, "10분의 메시지를 전한 다음, 성령의 모습중 하나인 "취함"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25분간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갑자기 웃고, 입김을 불고, 팔을 휘젓고, 마치 취한 사람처럼 보였다. 말을 하고 싶지만 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청중들도 따라서 웃기 시작했다. 취한 사람들처럼 바닥에 앉아서 뒹구는 사람도 있었다. 아들 Hagin Jr.가 아버지의 노트를 읽으려 했지만 하지 못했다. 다시 Hagin이 말을 시작하면서 이는 에스겔 3:16-27의 말씀이 성취된 것이라 했다. (어거지 해설이다)" 그의 집회를 참관했던 한 목사님의 증거다. 그리고 그는 자주 예배중에 하나님께서 박수를 칠 떄와 치지 말아야 할 때를 자신에게 직접 말씀하시기에, 그가 박수를 치라고 할 떄에만 박수를 쳐야한다고 자주 당부했다 한다.

 

그가 이루어놓은 업적을 정리한다. (자료제공연대에 따라 지금과 다를 수 있음)

Faith Seminar of the Air (1966년에 시작한 라디오 프로그램)

Rhema Radio Church ("너 나이 육십에 꼭 필요한 사업이 라디오와 문서사업"이라는 직접 음성을 듣고 시작했다함)

Rhema Bible Training Center (1974년 설립, 작은 대학 규모의 학교같은 곳)

1979 가을. The Healing School 시작

1995년 비디오 테잎 배포 시작

1996년 Rhema Praise라는 TV 프로그램 54개국 전파

1999년 40개국이 더 늘어남

책: 두 부자는 약 125권(성경공부교재 포함)을 서술. 5천 3백만부 발간

월간지: 540,000여부 배포

테이프 - 58,000여개의 테잎 배포

Rhema Correspondence Bible School: 6만 이상의 등록

Rhema Bible Training Center: 16500이상의 졸업생 배출

Rhema Bible Church: 아들 Hagin Jr.가 목회

 

그에 대한 비평서로는 D.R. McConneld의 "A Different Gospel과 Hank Hanegraff의 "Christianinity in Crisis"라는 책을 권하고 있고, Jeremy Reynalds의 "The Walking Wounded"도 도움이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하나남은 우리가 병약하지도 아프지도 않기를 원하시며, 우리의 긍정적인 말로 그리 할 수 있다고 말해왔는데, 60년동안 한번도 아프지 않았다고 말하던 그는 혈관에 관련된 지병으로 고통을 당하다가, 이 병으로 사망했다.

 

-자료출처- http://blog.Godpeople.com/kimjpact/?B002-1044


  
케네스 해긴(Kenneth Hagin, Sr., 1917∼2006?)은 오순절 지도자 중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다. 비록 그는 자신의 가르침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그의 가르침의 대부분은 케년(E. W. Kenyon, 1867∼1948)의 것을 거의 그대로 복사한 것이다.
맥코넬(D. R. McConnell)은 [다른 복음]이라는 책에서 이 모든 것에 대해 소상히 밝혀 놓았다. "해긴은 참으로 케년의 저술에서 글자 하나도 바꾸지 않고 그대로 베꼈으면서도 그것이 케년의 저술임을 전혀 밝히지 않았다. 사실 이것은 속임수일 뿐 아니라 범죄 행위이다."
 
케년은 침례교 목사로서 오순절 운동에 참가한 인물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라디오 설교 등을 통해 자기의 메시지를 잘 따르면 병과 마귀들을 완전히 제압할 수 있는 크리스천들이 생겨나게 된다고 주장했다. 사역의 초기에 케년은 감리교의 완전 성화 교리에 영향을 받았다. 1892년에 그는 에머슨 대학에 등록했는데 이 곳은 형이상학적이며 신비주의 사상과 행태 등으로 얼룩진 기관이었다. 그 대학의 에머슨 학장은 유일교 목사로서 결국 에디 부인이 만든 '크리스천 사이언스'(이단)에 합류하고 말았다. 그 외에도 에머슨 대학 출신 중 여러 명이 '크리스천 사이언스'로 넘어가 거기에서 많은 활동을 했다. 케년은 이들의 가르침에 동화되어 영적인 것이 육적인 것의 원인이 되며 긍정적으로 말을 하면 그대로 이루어진다고 가르쳤고 또한 신유나 기타 다른 기적들이 반드시 크리스천의 삶에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해긴은 케년으로부터 ‘긍정적 고백 이론’을 물려받아 현 시대 오순절·은사주의 안에 파급시켜 큰 영향을 미쳤다. [오순절·은사주의 백과 사전]은 이렇게 말한다.
 
"케년의 책들은 해긴, 코플랜드, 고셋, 캡스 등 ‘긍정적 고백 이론’을 가르치는 모든 이들에게 지침서가 되었다."
해긴은 그리스도의 육적 죽음이 우리의 죄를 제거하지 않았고, 그리스도의 영적죽음과 지옥에서의 투쟁이 죄를 제거했다고 엉뚱한 주장을 한다. 다시 말해 해긴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옥으로 보냄을 받아 그곳에서 사탄과 및 그의 마귀들과 투쟁을 벌이고 승리한 결과 다시 ‘거듭나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참으로 간과할 수 없는 이단 교리이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리스도의 속죄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받는다고 아주 명백하게 가르친다(행 20:28; 히 9:14; 10:10). 다시 말해 속죄는 갈보리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몸에서 자신의 영을 내놓으시며 돌아가셨을 때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요 19:30).
또한 예수님은 결코 거듭난 적이 없다. 거듭난다는 것은 길을 잃은 죄인들에게만 필요한 것이며 그분은 결코 길을 잃은 죄인이 아니셨다. 비록 예수님이 친히 자기 몸에 우리의 죄를 짊어지셨으나 그분은 결코 죄인이 아니셨다. 그분은 결코 지옥에서 사탄과 그의 마귀들에게 고통을 당하지도 않았다. 사실 성경은 사탄이 지옥에 있다거나 혹은 지옥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이제 곧 그는 천년 왕국이 시작될 때 1000년 동안 무저갱 즉 바닥 없는 구덩이에 갇히게 될 것이고(계 20:1∼3), 궁극적으로는 불호수에 내던짐을 당할 것이다(계 20:10). 또한 성경은 지금 이 시간에 사탄이 지옥의 권세를 잡고 있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또한 해긴은 크리스천도 예수님같이 하나님이 육체를 입고 나타나는 것이라는 매우 이단적인 교리를 가르친다. 이것은 참으로 무시무시한 이단 교리인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육체 안에 나타나신 하나님이며 영원토록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하지만 우리 신자들은 결코 전능하신 하나님이 육체를 입고 나타난 것이 아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구약 성경이 예언한 메시아임을 증명하기 위해 큰 기적과 이적을 행하셨다. 하지만 우리 크리스천들은 결코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그런 기적과 이적을 행할 수 없다. 스스로 큰 기적과 이적을 일으킬 수 있다고 장담하는 오순절 부흥사 가운데 단 한 명도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행한 적이 없다.
 
해긴은 또한 천사들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덟 번이나 환상 중에 나타나 자기를 지도했다고 주장한다. 그 중의 일곱 번째 환상은 1962년 12월 12일에 일어났다. 그는 예수님이 나타나서 모든 교단과 교회를 움직이사 그들이 다 구원받고 성령 침례를 받게 될 것을 자기에게 예언했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예수님이 자기에게 이 같은 종교 통합 운동에서 한 가지 역할을 맡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주장한다. 이 같은 예언은 이미 위글스워스가 두 플레시스에게 말한 적이 있으며, 현재 우리는 로마 카톨릭 교회와 많은 프로테스탄트 교단들의 연합 운동을 통해 이런 종교 통합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면서 이 예언이 실제로 이 세대에서 성취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같은 종교 통합 운동을 통해 이제는 오순절 성령 운동 연합 대회에 카톨릭 및 프로테스탄트들이 대거 참석하여 천주교 미사를 거행하는 일을 아주 쉽게 볼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이 같은 오순절·은사주의 종교 통합 운동이 진리의 성령께서 주관하는 운동이 아님을 성경을 통해 확신하고 있다.
 
해긴은 또한 건강·번영 복음을 확산시킨 장본인이다.
"구원과 마찬가지로 신유·건강도 이미 갈보리에서 다 이루어진 것이다. 이제부터 우리는 단순히 그것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하나님은 우리의 질병과 고통을 통해 영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신유와 축사를 통해 영광을 받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해긴의 주장은 그의 행적과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가 지난 60년 동안 한 번도 아픈 적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상 그는 여러 차례 심장병으로 고생했고 어떤 때는 한달 반이나 심장병으로 누워 꼼짝하지 못한 적도 있다. 한편 그는 건강·번영·축복 복음을 매우 강조해서 크리스천은 반드시 영적·재정적 번영을 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 번은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에게 나타나서 다시는 예전과 같이 부자가 되게 하거나 돈을 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그에게 딸린 천사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명령해서 필요한 것을 다 얻으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같은 주장에 근거하여 이제 크리스천들은 자기들의 원하는 바를 말로 표현하기만 하면 천사들이 그 모든 것을 가져다 준다고 그는 헛된 주장을 펴고 있다. 그래서 믿음·신유·번영 부흥사들은 한결같이 말의 능력 혹은 입의 능력을 강조하는 것이다. 말로 긍정적으로 구하기만 하면 다 이루어진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이 같은 말·믿음 이단교리는 현재 모든 오순절 교회 안에서 아주 확고한 교리로 자리잡고 있다.
 
다른 오순절 부흥사들의 집회와 마찬가지로, 해긴의 집회 역시 '영 안에서 죽는 현상'이 충만하게 나타난다. 한번은 소녀 하나가 영 안에서 죽음을 당해 무려 아홉 시간이나 움직이지 못했고 그의 동료들이 그녀를 움직이려 했으나 허사였다고 한다. 또 한번은 집회 도중 한 사람이 공중에 붕 뜨는 일이 발생했는데 해긴의 부인과 또 다른 두 사람이 과연 이 일이 주께로부터 온 것인지 의문을 품었다고 한다. 그러자 해긴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령을 주사 자기 손가락을 그 세 명의 이마에 대라고 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가 손가락을 대자 이 세 명은 곧바로 마룻바닥에 넘어져 마비가 되었고 일어나지 못했다. 마침내 그들이 해긴의 권능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임을 인정하자, 그는 다시 손가락을 그들의 이마에 댔고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일어났다고 한다. 해긴은 자기의 능력을 통해 한 여인이 공중에 붕 뜨는 일이 발생했다고 주장하였다.(공중부양은 심령술에서 나타나는 현상이지 참된 성령의 은사가 아니다). 또한 그는 자기가 천국과 지옥을 다 다녀왔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런 거짓·이단 교리를 가르치는 해긴은 최근 유행하고 있는 '웃음 부흥 운동'에서 핵심 역할을 하였다. 그는 '웃음 운동' 부흥사 하워드-브라운을 초청해서 집회를 열곤 했다. 1997년 10월 12일에서 24일 사이에 미주리 주 체스터필드에서 열린 웃음 부흥 집회는 비디오로 녹화되었는데, 그 비디오 테이프(맨 아래 표시 사이트 참조)를 보면 참으로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그 집회에서 벌어졌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거기에는 해긴과 그의 아들 그리고 케네스 코플랜드 등이 참가했다. 이 집회에서 해긴은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뱀처럼 혀를 날름날름 거리며 사람들을 향해 숨을 내쉬고 손으로 그들의 머리를 막 치면서 통로로 걸어갔다. 그러자 의자에 앉은 사람들이 막 쓰러지면서 자리에서 빠져 나와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넘어졌다. 여자들은 치마가 다 벗겨진 채 뒤로 넘어졌고, 미리 대기하고 있던 여자들이 뛰어 나와서 덮을 것을 가져다가 넘어진 여자들의 하체를 가렸다. 케네스 코플랜드와 해긴의 아들 역시 술 먹은 사람처럼 마룻바닥에서 구르며 소리를 지르며 아무 이유도 없이 웃어대기 시작했다. 비틀거리는 해긴을 부축할 의무를 지닌 해긴의 수행원 가운데 한 명도 술 취한 것처럼 하며 매력적으로 보이는 여인의 무릎 사이로 넘어졌다. 한 마디로 그 곳은 혼동과 혼돈의 장소였다. 술 취한 것 같은 해긴을 강대상으로 데려가기 위해 네 명의 남자 수행원이 필요했다.
 
참으로 해긴의 영향력은 대단했으며, 지금까지 수천 명의 학생들이 그가 운영하는 '레마 성경 훈련 센터'를 수료한 뒤 해긴과 같은 사역을 수행하기 위해 온 세상의 여러 곳으로 퍼져 나갔다. 그의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은 미국에서만 180여 개의 방송국에서 방송하고 있고 단파를 통해 전세계의 80여개 국에 방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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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믿음"(Word Faith) 운동
(이하 내용은 존 맥아더의 <무질서한 은사주의>와 마이클 호튼의 <미국제 복음주의를 경계하라> 중에서 발췌함)
‘믿음 운동’이라고도 알려진 ‘말씀 신앙 운동’ - 말씀, 믿음 공식, 믿음의 말씀, 긍정적 고백, 말하고 주장하기 또는 건강과 부요와 형통의 가르침 등 - 은 미신적이고 물질적인, 은사주의 운동의 한 갈래다.
 
케네스 해긴, 케네스 코플랜드와 글로리아 코플랜드, 로버트 틸턴, 프레드 프라이스, 찰스 캡스 등을 위시한 말씀 신앙 운동의 지도자들은 모든 신자에게 경제적 번영과 완벽한 건강을 약속한다. 그들은 그 정도 축복에 미치지 못하는 것들은 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주장한다(이것은 신약 성경의 가르침이 결코 아니다!).
 
말씀 신앙 운동의 신학은 기독교를 가장 저급한 인간 중심적 종교-기독교인 자신의 목적을 위해 신을 윽박지르고 꾀어 내고 조종하고 통제하고 이용할 수 있는, 일종의 부두교-와 하등 다를 것이 없는 체계로 바꾸어 놓았다.
해긴 등 말씀 신앙 지도자들은 신약적인 기독교의 핵심을 더렵혀 신자들의 초점을 건전한 교리,예배,봉사,희생,사역 등에서 멀어지게 하고 그 대신 약속된 경제적, 물질적 ‘축복’으로 옮겨 가게 한다. 그런 축복들은 말씀 신앙의 공식을 알고 따르는 이들에게, 하나님이 베푸실 것으로 기대되는 화물이다.
 
말씀 신앙에서는 신자들이 하나님을 이용하지만, 성경적 기독교의 진리는 그와 정반대로 하나님이 신자를 사용하신다. 하나님을 주님으로 믿는 것은 신앙이지만, 하나님을 자기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는 것은 주술(呪術), 즉 영적 테크놀로지이다.
말씀 신앙 운동의 하나님은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다. 말씀 신앙의 교리는 신자 개인을 하나님보다 위에 두고 하나님을 신자가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알라딘의 요술 램프에 나오는 거인이나 산타 클로스나 시종의 역할로 전락시킨다. 말씀 신앙 신도들에게 최고의 권위는 자기 자신이다. 이 운도의 지도자들은 노골적으로 신자들에게 작은 하나님처럼 행동하라고 가르치고 부추긴다. 말씀 신앙의 가르침에는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개념이 전혀 없다.
 
‘케네스 해긴’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한 번이라도 우리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게 된다면,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신자들은 아직 자신이 곧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신자의 정체가 바로 그것입니다. 신자가 곧 그리스도입니다...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화육(化肉)입니다”.
 
‘케네스 코플랜드’는 아담이 “하나님과 동급으로 창조되었다”고 가르친다. 즉 아담은 하나님의 복사판이라는 것이다. 아담은 하나님처럼 행동했고 아담이 말한 것은 이루어졌다. 아담이 사탄에게 무릎을 꿇고 사탄을 자기 위에 받들어 모셨을 때 하나님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른 하나님이 사탄을 받들어 모셨기 때문이다. 아담은 하나님과 동급으로 창조되었지만 반역을 저지르는 순간 하나님보다 아래 등급으로 떨어졌다.
코플랜드에 따르면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신자들이 다시 ‘하나님과 동급’으로 거듭날 수 있는 권리를 얻으셨다. 신자들은 하나님과 동급이기 때문에 지금 이 땅에서 축복(치유,구원, 경제적 축복, 육체적 축복, 가정적 축복...등)을 보장받는다고 가르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부분적으로만 하나님인 것이 아닙니다. 당신 전부가 하나님입니다. 당신은 당신 안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한 분 모시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해긴과 코플랜드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이다. 여러분들은 하나님들이다”
 
이런 식으로 말씀 신앙 전도자들은 하나님을 폐위시키고 그 자리에 신자를 즉위시켰다. 바로 이러한 기본적인 오류에서 그들의 거의 모든 다른 오류가 뒤따라 나온다.
그들은 사탄의 최초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갔다(창 3:4-5). 피조물이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생각은 과거나 지금이나 늘 사탄의 거짓말이었다. 사실 그것은 마귀 자신을 타락하게 한 바로 그 거짓말이었다(사 14:14)
 
말씀 신앙 운동의 예수님은 신약 성경의 예수님이 아니다. 말씀 신앙 전도자들은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해 죽으시기 위해 자신의 신성을 버리고 심지어 사탄의 본성까지 취하셨다고 말한다. 케네스 코플랜드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말을 했다. “왜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신 33년동안 공개적으로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선포하시지 않았는가?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 이 땅에 오시지 않았다. 그는 한 사람의 인간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이러한 예수님이 성육신 기간 동안 신성을 비우셨다는 (케노시스 신학으로 알려진) 개념은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에서 전개된 이단적인 주장이다. 그리스도가 자기를 비우신 것(빌 2:7)은 신적인 속성만을 사용하는 것을 보류하셨다는 뜻이지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니었다는 뜻이 아니다. 예수님의 신성의 변화는 예수님의 불변성 때문에 불가능하다(히 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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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심각한 이단 사상을 가진 해긴과 말씀 신앙 전도자들을 전혀 분별없이 추앙하고 따르는 자들은 어떤 자들이며, 그들은 과연 무엇을 추구하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
 
사랑하는 조국 교회들과 성도들이여,
정신차리고 이런 멸망케하는 허탄한 미혹에서 벗어나서 복음의 진리로 돌아갑시다!
 
(마 24:4-5, 24-25)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show)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성도들)도 (복음의 진리를 믿는 믿음에서 떠나도록) 미혹하리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살후 2:9-12) "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십자가복음)의 사랑을 받아들이지(믿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사 거짓말을 믿게 하심은 진리(복음)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출처: https://lake123172.tistory.com/2972 [목양연가(牧羊戀歌):티스토리]





워치만 니는 누구인가?


워치만 니(중국어 간체자: 倪柝声, 정체자: 倪柝聲, 병음: Ní Tuòshēng 니퉈성[*], 광둥어: ngai4 tok3 sing1 응아이 톡 싱, 1903년 11월 4일~1972년 5월 30일)는 20세기에 중국에서 사역했던 교회 지도자이자 그리스도인 교사였다.

그는 1922년에 푸저우(福州, Fuzhou)에서 지방 교회들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교회 집회들을 세웠다. 자신의 30여년의 사역기간 동안 니는 성경을 해석한 많은 책들을 출판했다. 그는 중국 전역에 교회들을 세웠고, 성경을 배우는 학생들과 교회 일꾼들을 위하여 많은 컨퍼런스를 개최했다. 이어진 중국 공산 혁명기간에 니는 자신의 신앙 때문에 박해받고 투옥되어 20년 동안의 자신의 남은 생애를 감옥에서 보냈다. 그는 2009년 7월 30일 뉴저지주 출신의 미국 국회의원인 크리스토퍼 H. 스미스(Hon. Christopher H. Smith) 의원에 의해 존경을 받았다.

가족과 유년 시절

워치만 니는 1903년 11월 4일 중국 세관(the Imperial Customs Service)의 존경받는 관원인 니원슈(倪文修)와 미국인들이 직원으로 근무하는 감리교 미션학교에서 뛰어난 학생이었던 린허핑(林和平) 사이에서 9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린허핑은 상해에 있는 중국인 서구 여학교(the Chinese Western Girls’ School)에서 영어를 배우기 위하여 잠시 머무는 동안 복음 전파자와 설교자로서 봉사하기 위해 의료분야에서의 잠재적인 경력을 포기한 젊은 여성인 위츠두(余慈度)를 만났다.[1] 워치만 니의 부모님 모두 감리교인이었기에, 그는 감리교 감독에 의해 유아 세례를 받았다.[2][3][4]

초기 학창 시절

워치만 니는 13살 때인 1916년에 푸저우(Fuzhou)에 있는 '교회 선교회'(the Church Missionary Society)가 운영하는 중학교에 들어감으로 서구식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그후 그는 푸저우에 있는 트리니티 칼리지 부속 중학교에 갔는데, 거기서 뛰어난 총명과 포부를 드러내었고 자신의 학급에서 꾸준히 일등을 유지했다.[1][5][6]

구원과 훈련

워치만 니가 17세인 1920년 봄에 도라 유는 푸저우에 있는 '천안당 교회'(天安堂, the Church of Heavenly Peace)[7] 예배당에서 열리는 열흘 간의 부흥 집회[8]에 연사로 초청되었다. 워치만 니 어머니가 이 부흥 집회에 참석한 후에, 그녀는 감동을 받아서 예전에 불공정하게 벌을 주었던 한 사건에 대하여 자기 아들에게 사과했다. 그녀의 이런 행위가 니를 아주 많이 감동시켰고, 니는 거기서 무슨 일이 발생하고 있는지 보기 위해 그 다음 날 복음 집회에 참석하기로 결심했다. 그 집회에서 돌아온 후에 니 본인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1920년 4월 28일 저녁에 나는 홀로 방 안에 있었다. 주님을 믿을 것인가 안 믿을 것인가의 문제로 인해 앉아도 불안하고 일어나도 불안했다. 처음에 나는 달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기도할 때 너무도 큰 나의 죄를 발견하게 되었고 오직 주 예수님만이 나를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을 보았다. 그때 나는 한면으로 주님의 두 손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보았고 또 한면에서는 주님께서 두 손을 내밀고 나를 환영하시며 내게, "나는 여기서 너를 받아들이려고 기다리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았다. 이러한 사랑이 나를 굴복시켰다. 이전에 나는 다른 사람이 예수 믿는 것을 비웃었다. 그날 저녁에 나는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은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눈물을 흘리며 죄를 자복하고 주님의 사하심을 구했다. 기도한 후에 나는 전에는 맛보지 못한 기쁨과 평강을 맛보게 되었다. 그 때 방 안에는 빛이 충만한 것 같았다. 나는 주님께 말했다. "오 주여, 당신은 나를 은혜로 대하셨습니다."

―워치만 니, 워치만 니의 간증

니는 트리니티 칼리지의 한 학생으로서 자신의 구원의 체험에 대해 동급생들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후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돌아온 후 곧 주님께서 내 몸에서 일하시는데 지장이 있는 것들을 해결했다. 또한 70명의 동급생들의 명단을 만들어 그들을 위해 매일 기도했다. 어떤 날에는 매일 한 시간씩 심지어 수업 중에도 그들을 위해 기도했다. 기회만 있으면 그들에게 주 예수님을 전했다... 주님의 은혜로 나는 매일 기도하기를 계속했고, 몇 개월 후에 70명 중 1명을 제외한 69명이 다 구원받았다.

―워치만 니, 워치만 니의 간증

니는 회심 후에 기독교 봉사자로서 훈련받기를 갈망했다. 그는 처음에 고등학생임에도 상해에 있는 도라 유가 세운 성경 연구소에 다녔다. 그러나 늦잠을 자는 것과 같은 나쁘고 게으른 습관 때문에 퇴학을 당했다. 니는 자신의 성격을 개선하려고 노력한 결과 영국 선교사인 마가렛 바버(和受恩; Margaret E. Barber) 자매와 가깝게 되었고, 그녀는 니의 교사와 조언자가 되었다.[9][10] 니는 영적인 도움을 얻으려고 매주 바버 자매를 방문했다. 바버는 니를 젊은 학습자로 취급하여 종종 엄격하게 훈육했다. 바버가 1930년에 죽었을 때, 자신의 모든 소지품들을 니에게 남겼다. 그는 이렇게 썼다.

우리는 복건(Fukien)에 있는 나성탑(羅星塔) 백아담(白牙潭(Lo-Hsing Pagoda)에 살던 바버 여사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큰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녀는 주님 안에서 매우 깊은 분이었으며, 그녀의 주님과의 교통과 주님에 대한 그러한 충성은 이 세상에서 발견하기가 힘들다고 생각한다.

―위트니스 리, 이 시대의 신성한 계시의 선견자 워치만 니

니는 바버 여사를 통해 디 엠 팬톤(D.M. Panton), 로버트 고벳(Robert Govett), 펨버(G.H. Pember), 제시 펜 루이스(Jessie Penn-Lewis), 어스틴 스팍스(T. Austin-Sparks) 그리고 다른 저자들의 저술을 접하게 되었다.[9] 이에 더하여 그는 존 넬슨 다아비(John Nelson Darby), 윌리엄 켈리(William Kelly), 맥킨토시(C.H. Mackintos) 같은 플리머스 형제회 교사들의 책들도 소장했다. 마침내 그의 개인 서재는 교회 역사, 영적인 성장, 성경 주석 등에 관한 약 3천 권이 넘는 책들로 가득 채워졌다. 그는 다양한 방법으로 부지런히 성경을 연구함으로 성경에 매우 익숙하게 되었다. 니는 사역의 초기 시절에 수입의 삼분의 일은 개인의 필요를 위해, 삼분의 일은 남을 돕기 위해, 나머지 삼분의 일은 영적인 책들을 사기 위해 사용했다고 말했다. 그는 책을 읽을 때 적절한 자료를 택하고, 이해하며, 분별하고, 기억하는 뛰어난 은사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한눈에 한권의 책의 요점을 쉽게 붙잡았다.[11]

결혼

니는 10대 때에 장핀훼이(Charity Chang)와 사랑에 빠졌다. 그들 두 가정 사이에는 삼대에 걸쳐 친교가 있었다. 니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장핀훼이는 그의 면전에서 예수를 조롱했다. 이것은 그를 괴롭혔다. 니는 많은 고심 끝에 그들의 관계를 끝낼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십 년 후, 장핀훼이가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주님께로 돌아왔다. 그녀는 1934년부터 상해 교회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했다.[6] 니가 항저우에서 4차 "이기는 자 집회"를 인도하고 있을 때 거기서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렸다. 장핀훼이는 자주 아픈 니를 돌보았고, 그가 투옥된 후에는 유일하게 그녀만 방문이 허락되었다. 그들은 자녀가 없었다.[6]

사역

워치만 니는 1936년에 한 무리의 동료 사역자들 앞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사역의 윤곽을 말했다.

그 때로부터 나는 하나님에 의해 고침받을 때까지 병으로 누워 있었다. 나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일의 종류에 대하여 더욱 분명하게 보게 되었다.

1. 문서사역: 내가 병이 나은 후 하나님께서 내게 알려주신 것은 그분이 내게 주신 사명은 성경 주해서 저술이 아니요, 일반적인 복음 전도도 아니요, 예언 해석도 아니요, 다만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을 전하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내가 쓴 모든 것은 오직 단 하나의 목적, 곧 독자들이 새 창조물 안에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고 그분의 손 안에서 쓸모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이제 나는 온 마음을 다하여 나의 저술들을 나의 독자들과 나 자신을 영원히 지켜주시는 하나님께 맡기며, 그분의 영이 나를 인도하여 그분의 모든 진리 안으로 들어가게 해 주시기를 원한다.

2. 이기는 자 집회: 하나님께서 나의 눈을 밝혀주사 각지 교회들 안에서 이기는 자들이 일어나 그분의 증인이 되게 하심을 보여 주셨다... 그러므로 매년 한 차례씩 이기는 자들의 집회를 열어 하나님이 내게 계시하신 말씀을 충심으로 전했다.

3. 지방 교회들을 세움: 주님께서 나를 불러 그분을 섬기게 하신 것은 부흥 집회를 열어 사람들이 성경의 교리를 더 많이 듣게 하라는 것도 아니고, 내가 위대한 복음 전파자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주님은 내가 한 지방 한 지방에 그분의 교회를 건축하여 그를 나타냄으로써 지방 교회들의 합일(合一)의 간증을 나타내며, 모든 성도들이 교회 안에서 분량대로 지체의 봉사를 하여 교회생활을 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개인의 승리 생활이나 영성을 추구하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의 단체로서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하나님 자신께 드리는 것이다.

4. 젊은이들을 훈련시킴: 만일 주님의 오심이 지체된다면, 반드시 청년들을 일으켜 다음 세대에도 계속 그의 간증을 잇게 하는 것이다... 나의 뜻은 하나의 신학교나 성경 학원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젊은 청년들이 단체생활을 하면서 한 면으로는 영적 생활을 훈련하고, 서로 상합하며 성경 읽기와 기도를 훈련하며 좋은 인성을 기르고, 또 한면으로는 어떻게 죄와 세상과 육체와 천연적인 생명과 그런 것들을 처리하는지를 배우는 것이다. 적당한 시기에 그들은 각 지방 교회로 돌아가서 성도들과 함께 교회 안에서 주님께 봉사하게 되는 것이다.

그 후에도 계속 내 마음에 눌림이 있었던 일은 대체로 이 네 가지가 포함된 것이었다.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린다.

―워치만 니, 워치만 니의 간증

니는 매우 이른 나이부터 저술과 출판을 시작했다. 그는 1923년에 '현재의 간증'(The Present Testimony)이라는 잡지를 펴내기 시작했고, 1925년에는 기독도보(The Christian)라는 또 다른 잡지를 시작했다. 니가 자신의 이름을 '니슈토'(Ni Shu-tsu)에서 '니토셍'(Ni To-sheng, 영어 번역은 Watchman Nee)으로 바꾼 시기도 1925년도였다. 니가 스물 한 살 때 중국에서 말레이시아 시티아원(Sitiawan, Malaysia)으로 이주하여 살고 있는 어머니를 방문하는 동안 그곳에 또 다른 지방 교회를 세웠다. 니는 1926년에 상해에 또 다른 지방 교회를 세웠고, 그곳은 중국에서 그의 사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1932년에는 지방 교회들로 모이는 니의 실행이 중국,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전역에 확산되었다. 그는 이것을 자신이 투옥될 때까지 유지했다.[1][6][12]

니는 1928년에 <영에 속한 사람>(The Spiritual Man)이라는 세권으로 된 책을 출판했다.[13] 니는 같은 해 2월에 상해에서 그의 첫번째 "이기는 자 집회"를 열었다. 1934년에 니는 "하나님의 중심성과 우주성이신 그리스도"와 "이기는 자들"을 주제로 한 특별 집회를 열었다. 니에 따르면, 이것이 그의 사역의 전환점이 되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교리와 지식으로부터 하나님의 중심성이요 우주성이신 그리스도라는 한 살아있는 인격으로 큰 전환을 가졌다."[1][6][14]

1934년에 니는 성경에 있는 교회는 결코 지역들로 나뉠 수 없고 어떤 가르침이나 교리에 근거하여 교단을 만들 수 없다고 하면서, 지방 교회들의 실행을 정의하고 설명하는 일련의 담화를 시작했다. 이러한 담화들은 마침내 <모이는 생활>(The Assembly Life)이라는 책으로 출판되었다. 같은 해 오월에 니는 위트니스 리를 격려하여 옌타이에서 상해로 이주하게 하여 자신과 이연여(Ruth Lee) 자매가 맡고 있던 니의 출판물을 편집하는 일에 합류시켰다.[1][6]

1938년에 니는 유럽 여행 중에 메시지를 전했는데, 이것은 후에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The Normal Christian Life)이라는 책으로 출판되었다.[4] 그가 돌아온 후에 그리스도의 몸에 관한 집회를 가졌다. 니에 의하면 이것이 그의 사역에서 두번째 전환이었다. 니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첫번째 전환은 그리스도를 안 것이고, 두번째 전환은 그분의 몸을 안 것이다. 그리스도를 안 것은 믿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의 절반일 뿐이다. 믿는 이들은 또한 반드시 그리스도의 몸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는 머리이시고, 그분은 또한 몸이시다."[1]

1939년에 니는 그의 둘째 남동생이 하던 기울어져 가는 제약회사 공장 운영에 관련되었다. 가족들의 압력을 마지못해 따른 것이지만, 니는 또한 이것이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극심한 가난과 고난으로 고통 당하던 자신의 많은 동역자들을 지원할 수 있는 기회라고 보았다. 니는 전반적인 공장 관리를 넘겨 받은 후, 그것을 재편성했고, 상해에 있는 다수의 지방 교회 구성원들을 직원으로 채용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상해 교회의 장로들 중 몇 명은 니가 사업에 연관된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이것은 니가 1942년에 그의 사역을 잠시 중단하게 만들었다. 얼마 후에 상해 교회는 집회를 중단했다.[1][6]

1945년 3월 6일에 니는 중경(Chongqing)으로 이주하여 그곳에 있는 공장을 감독했다. 거기서 그는 아가서에 관한 메시지들과 <교회의 정통>(The Orthodoxy of the Church)으로 출판된 계시록 2장과 3장에 관한 일련의 메시지들을 전했다. 1945년 9월 9일에 일본군은 중국을 포기하고, 제2차 중일전쟁은 끝났다.[6] 1946년에 왕포진(Peace Wang) 자매와 위트니스 리 형제는 거기서의 니의 문서 사역은 물론 상해 교회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일하기 시작했다. 니는 크리스천 일을 하는 자신의 동역자들을 위한 훈련을 실시하기 위하여 고령산(Kuling)에 12채의 목조 단층집을 구입했다. 1948년 4월에 상해 교회에 큰 부흥이 있었고 니는 거기서 자신의 사역을 재개했다. 그가 돌아왔을 때, 니는 하나님께 헌물을 드리듯이 사역을 위해 자신의 제약 공장을 내놓았다. 이것은 많은 형제 자매들에게 영향을 주어 그들 또한 자신들의 재산을 사역을 위해 다 내놓게 했다. 짧은 기간에 상해 교회는 1천명으로 증가했다.[1][6]

박해와 투옥

1949년에 중국 공산당이 출현한 후에 그리스도인들은 큰 박해를 받았다.[15] 또한 많은 외국 선교사들도 거짓 정죄를 받고 체포되었다. 강화된 선전 캠페인과 구금 위협을 통하여, 믿는 이들은 서로 밀고하도록 영향 받았다.[16][17][18]

1952년 4월 10일에 워치만 니는 만주(Manchuria) 공안 당국자들에 의해 상해에서 체포되어, 뇌물공여, 국가재산 절취, 조세 회피, 정부계약 사취, 정부의 경제 정보에 대한 불법 취득으로 기소되었다. 니는 또한 "재 교육" 되었다. 1956년 1월 11일에 지방 교회들 내의 동역자들과 장로들을 겨냥한 전국적인 소탕이 있었다. 일부는 노동 수용소에서 죽었고, 다른 이들은 무기 징역형을 언도 받았다. 1956년 1월 18일에 종교 사무국(the Religious Affairs Bureau)은 상해에 있는 난양 가(街)(Nanyang Road)에 위치한 교회 집회 장소에서 12일 간의 규탄 집회를 열었다. 그 규탄 집회에서 니를 반대하는 많은 참소들이 소개되었다.[19] 1956년 6월 21일에 니는 상해 고등 법정에 출두해서, 상해 교회 장로들에 의해 출교되는 선언이 있었고, 모든 혐의들에 대해 유죄가 인정되었다. 그는 노동 교화가 포함된 15년 형을 선고받았다. 처음에 그는 상해에 있는 틸랑퀴오 감옥(Tilanqiao Prison)에 수감되었고 후에 다른 장소로 옮겨졌다. 오직 그의 아내인 핀훼이 만이 그를 면회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1956년 1월 29일에 공안 당국이 난양로 건물을 접수했고, 많은 니의 동역자들이 체포되어 격리되었고, 워치만 니를 거부하도록 강요받았다. 왕포진(Peace Wang), 이연여(Ruth Lee), 유성화(Yu Chenghua) 등은 묵비권을 유지하며 감옥형을 언도받은 반면, 일부 동역자들은 워치만 니를 참소하는데 가담했다. 이런 일에 이어서 "반혁명분자 워치만 니"를 정죄하는 대규모 규탄대회가 전국에 걸쳐 개최되었다.[20][21]

투옥 후반기와 죽음

니가 1972년에 죽기 1년 전에 그의 아내인 핀훼이가 의자에서 넘어지는 사고와 고혈압으로 죽었다. 니는 그녀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 때 핀훼이의 큰 언니가 감옥에 있는 니를 돌보는 책임을 졌다.[22] 니는 1967년에 석방되기로 되어 있었으나 그가 1972년 5월 30일 죽기까지 감옥에 수감되었다.[23]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어떤 통지도 없었고, 장례식도 없었다. 그의 유품들은 가족이 감옥에 도착하기 전인 1972년 6월 1일에 소각되었다.[6]

니의 한 조카 손녀가 니의 유골을 가지러 갔을 때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1972년 6월에 우리는 농장으로부터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나는 큰 이모 할머니와 함께 농장으로 급히 갔는데, 그곳에 도착해서야 우리는 비로소 그들이 할아버지를 이미 화장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단지 그분의 유골 밖에 볼 수 없었다... 세상을 떠나기 전 그분은 베개 밑에 종이 한 장을 남겨 놓았는데, 그 위에는 매우 떨리는 손으로 적은 몇 줄의 글이 있었다. 할아버지는 그분의 일생 동안 그분이 죽기까지 붙잡았던 진리를 증거하길 원하셨다. 그 내용은 이러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죄인들을 속량하기 위해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다. 이것은 우주 가운데 가장 큰 진리이다. 나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죽노라. 니토셍." 농장 간부가 이 종이를 우리에게 보여 줄 때, 나는 이 글을 신속히 마음에 기억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할아버지는 돌아가셨지만, 그분은 죽기까지 충성하시고 피로 물든 면류관을 가지고 주님께로 가셨다. 비록 하나님께서, 그분이 살아서 그의 아내와 함께 있기를 바랐던 마지막 소원은 이루어 주시지 않았지만, 주님은 그분들이 주님 앞에서 재회하는 더 나은 것을 예비해주셨다.

―워치만 니의 조카 손녀, "워치만 니: 이 시대의 신성한 계시의 선견자."

워치만 니의 사후에 니의 동료 수감자였던 우요치가 형기를 마치고 석방되어 니의 옥중 생활과 순교를 증언해 주었다. 우요치에 따르면 워치만 니는 신앙을 포기하면 석방해 주겠다는 중국 당국의 거듭된 회유에도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켰다.

신앙

니는 성경의 문자적 영감과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믿었다. 그는 또한 하나님께서 삼일, 즉 아버지, 아들, 영이시며, 셋은 구분되시지만, 완전히 하나이시고, 영원부터 영원까지 동시에 존재하시고, 서로 안에 상호내재하심을 믿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심지어 하나님 자신이시고, 인간의 생명과 신성한 생명 모두를 가지신 사람으로서 성육신하셨음을 믿었으며, 그분이 우리의 구속을 성취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음을 믿었고, 제 삼일에 죽은 자들로부터 몸을 입고 일어나셨음을 믿었으며, 하늘로 승천하사 보좌에 앉으시고 영광으로 관 쓰셨으며, 만유의 주가 되셨음을 믿었고, 그분을 따르는 모든 이들을 영접하고, 이스라엘을 구원하며, 이 땅 위에 그분의 천년왕국을 세우시기 위해 다시 오실 것을 믿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는 이들인 각 사람이 하나님에 의해 용서될 것이고, 그분의 구속하는 피에 의해 씻겨지고, 믿음으로 의롭게 되며, 성령에 의해 거듭나며, 은혜로 구원받는 것을 믿었다. 그러한 믿는 이들은 하나님의 자녀이고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임을 믿었다. 그는 또한 모든 믿는 이들의 운명이 그리스도의 몸이요 하나님의 집인 교회를 구성하는 한 부분이 되는 것을 믿었다.[6]

출판물

많은 청중들 앞에서 자주 말한 것에 더하여, 워치만 니는 여러 권의 저서들, 논문들, 서신들, 찬송들의 저자이었다. 그의 책의 대부분은 그가 메시지 전한 것을 집회 참석자들이 받아 적은 노트에 기초한 것이었다. 일부 책들은 이전에 정기 간행물로 출판된 메시지들로부터 편집된 것이다.

워치만 니가 쓴 영어로 된 책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The Normal Christian Life)이다. 이 책은 1938년부터 1939년의 유럽 여행 중에 그가 영어로 전한 담화에 기초한 것이다. 그는 거기에서 신약의 로마서에 대한 자신의 신학적인 견해를 피력했다.

워치만 니가 쓴 책 중에 널리 알려진 것들 중 일부는 다음과 같다.

  • 영에 속한 사람 (1928)
  • 우리의 위임에 관하여 (1939)
  • 아가서 강해 (1945)
  • 자아의 파쇄와 영의 해방 (1950)
  •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 (1957)
  • 좌행참 (1957)
  • 주여 이 사람은 (1961)
  •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1968)

워치만 니는 자신의 책을 출판했을 뿐 아니라 다른 영적인 출판물들도 자신의 영감 아래 영어에서 번역하여 출판했다. 그것들은 어스틴 스팍스(T. Austin-Sparks), 마담 귀용(Madame Guyon), 메리 맥도너우(Mary E. McDonough), 제시 펜 루이스(Jessie Penn-Lewis)와 일부 다른 이들의 저술을 포함한다.[24]

추가로 읽기

  • Chen, James. Meet Brother Nee(니 형제님과의 만남). Hong Kong: The Christian Publishers (1976).
  • Kinnear, Angus. Against the Tide(시류를 거슬러서). Eastbourne: Kingsway Publications (2005).
  • Laurent, Bob. Watchman Nee: Man of Suffering(워치만 니: 고난의 사람). Uhrichsville: Barbour Publishing (1998).
  • Lee, Witness. Watchman Nee: A Seer of the Divine Revelation in the Present Age(이 시대의 신성한 계시의 선견자-워치만 니). Anaheim: Living Stream Ministry (1991).
  • Lyall, Leslie. Three of China's Mighty Men(중국이 낳은 위대한 세 사람). London: Overseas Missionary Fellowship (1973).
  • Nee, Watchman. Watchman Nee’s Testimony(워치만 니의 간증). Hong Kong: Hong Kong Church Book Room (1974).
  • Sze, Newman. The Martyrdom of Watchman Nee(워치만 니의 순교). Culver City: Testimony Publications (1997).
  • Wu, Dongsheng John. Understanding Watchman Nee: Spirituality, Knowledge, and Formation(워치만 니의 이해-영성, 지식, 형성). Eugene: Wipf & Stock Publishers (2012).



워치만 니는 누구인가?

지방교회 이단에 관한 학술 자료(3)

  • 유동근 목사


워치만 니 사역의 가장 큰 문제점

⑴ 표절의혹 (allegation of plagiarism)

⑵ 삼분설의 위험성 (Danger of Trichotomy)
 

1948년에 Nee와 그의 동역자들이 더 이상 <영에 속한 사람>을 완전히 지지하지 않았지만, 그 생각의 틀은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Nee는 계속해서 ‘spirit’(본능, 직감)를 지나치게 강조하고 ‘soul’(합리성과 생각)을 경시했습니다. 그는 신자들에게 성경의 온전한 진리와 계시를 이해하기 위해 하나님이 창조하신 합리성과 마음을 사용하도록 격려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성과 마음을 인간의 기능으로 창조하셨지만, 오늘날에도 지방교회의 일부 신자들은 여전히 영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성경의 전체적이고 근본적인 진리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ibid p. 233
 

반지성주의

‘영’(성령이 아닌)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그가 회심한 지 불과 몇 년 후에 시작되었지만, 그는 전체 사역을 통해 그 주제를 가지고 갔고 <The Spiritual Man>은 그 주제에 대한 그의 고전적인 작품이었습니다. Nee가 ‘영/혼 분리’, ‘영 우월/혼 열등’의 원칙을 그의 핵심 신학적 개념으로 확고하고 극단적으로 붙잡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깊은 영향을 받았고 반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로 귀결되었습니다.
 

영은 가장 높고 몸은 가장 낮다 (Spirit is the Highest and Body the lowest)

워치만 니가 말했습니다: 사람의 세 가지 요소 중에서 영은 하나님과 결합 되어 가장 높은 것입니다. 몸은 물질계와 접하고 있는 가장 낮은 곳입니다. 그 둘 사이에는 혼이 있습니다... 사람의 영은 사람의 가장 고귀한 부분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가장 깊은 곳에 거합니다. 몸은 가장 낮고 밖에 남아 있습니다. 혼은 영과 육 사이에 거하며 둘 사이의 매개체입니다. 우리의 전체 존재 중 오직 한 부분, 즉 거듭난 영만이 성경을 공부할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성경을 대하기 위해 우리 존재의 다른 부분을 사용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별개의 일을 하는 것이며 그러한 활동은 하나님과 관련된 어떤 것도 만지지 못할 것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생각이나 지능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할 수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기 전에 이 영을 가져야 합니다.
 

Nee의 개념은 부흥 운동과 복음주의 운동이 뒤따른 18세기 ‘경건주의’ 운동에서 처음으로 계승되었습니다. 그리고 확실히 펜루이스(Penn-Lewis) 부인은 그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러나 교리적 극단으로 치우침으로써 성경적 진리에서 위험한 이단으로 표류할 위험이 있습니다. 처음에 Nee는 헌신에서 이런 종류의 영적 의도를 추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성경적 지침의 한계를 넘어서 그의 선구자들로부터 너무 멀리 갔고 영지주의(Gnosticism)의 영역에 떨어졌습니다. 사실 다른 사람들을 통제하는 그의 도구가 된 것은 Nee의 빗나감이었습니다.
 

'머리 지식' (Head Knowledge)

지방교회에서 ‘머리 지식’은 ‘영’에서가 아니라‘혼’에서 나온 ‘지식’을 의미하므로 버려야 합니다. 사실 우리 뇌의 사고 과정을 사용하지 않고 성경을 읽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실제로 마음과 생각, 앎과 행동, 추론과 지각은 항상 분리할 수 없고 기능적으로 통합되어 있습니다. 우열은 없고 다만 기능이 다를 뿐입니다. 인간의 영과 혼과 몸은 모두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창조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
 

성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가복음 12:30) 마음과 혼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지식과 생각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성경은 지식과 추론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은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합니다. 그러나 또한 추론(이해의 영역- 역자주)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리고 추론도 성령으로부터 옵니다.
 

바울은 “내가 기도하노니 너희 사랑을 지식과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깨끗하고 흠이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시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빌 1:9-10.) 그러므로 지식과 통찰과 비전은 분별에 필요한 전제 조건이며,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것은 Nee 사역 동안 상해교회(SCA) 내에서 전혀 불충분했습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선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베드로후서 1:5-6.)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굳건히 서서 진리의 허리띠를 허리에 두르라...” (엡 6:14.) 성경 진리에 대한 지식으로 우리의 허리를 묶지 않고 우리는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의 일부를 잃어버렸습니다.
 

워치만 니 부부

반합리주의가 파멸의 원인이었다 (Anti-rationality Was a Cause of Ruin)

Nee는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가르침을 받고 통제를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함부로 말하거나 함부로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지 않는 사람만이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들만이 머리를 대표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만이 형제자매들을 앞길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본성적으로 비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결코 권위를 맡기지 않으실 것입니다. 사람이 복종하려면 먼저 머리가 잘려야 합니다.
 

지방교회의 역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려는 깊은 헌신과 의지는 경이로운 것이었습니다. 당시 중국 본토에 7만 명 이상의 회원이 있던 거의 대부분의 지방교회들이 이에 포함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헌신하기 위해서는 Nee의 가르침을 따라야 했습니다. 그 결과 수많은 경건한 신자들의 ‘머리’가 자신의 생각이 없이 잘려 나갔습니다. 얼마나 비극적이고 위험한 일이었습니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호세아 4:6) 우리는 이 고통스럽고 끔찍한 교훈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반지성주의는 맹목적이 되게 한다 (Anti-intellectualism leads to Blindness)

1951년에 발행된 Nee의 잘못된 연설인 ‘나는 어떻게 돌아섰는가?(How did I Turn Around?)’는 지방 교회 지도자들에게 아무런 저항 없이 만장일치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인민의 입장을 따르는 것’을 극단적으로 강조한 것은 사실상 무신론 정부에 대한 무조건적 항복이었습니다. 여기에 심각한 도전이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완전한 진리를 말합니까? 아니면 인민의 입장 (‘People’s Standpoint’)을 보완할 필요가 있을까요? Nee가 체포된 후로 그 몇 년 동안 Nee의 심각한 실수를 지적하기 위해 일어선 인도자들이 있었다면, 상해교회(SCA) 신자들은 1956년 전시회(CEC) 동안 믿음을 뒤흔드는 폭풍으로부터 어느 정도 보호 받았을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그들 영적 인도자들도 세뇌당했고, 그들은 자신도 폭풍으로부터 보호할 수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믿음과 이성이 서로 반대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잘못된 생각입니다. 믿음과 생각이 합력하여 불합리한 이단과 싸우는 것입니다.

ibid. pp. 256-257 Chapter Eighteen: Issues Within SCA
 

⑶ 몸(지방교회)을 너무 높였다 (Too much Emphasize of the Body)
 

다가오는 보편 교회의 모델

지상의 모든 교회에서 중요한 과제 중 하나는 다른 교회와 적절한 위치와 관계에 자신을 배치하는 방법입니다. 기도회 중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연약함과 실패를 인정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SCA(상해 지방교회)가 성경대로 행하기에 가장 좋은 교회라고 믿었습니다. 그 강한 확신이 우리로 하여금 헌신적인 목회자들과 기독교인들을 SCA(상해교회)에 가입하도록 최선을 다해 설득하도록 이끌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The Union of the Church(교회의 연합)’ 또는 ‘The Church United(교회의 하나됨)’라고 미화했습니다.
 

1948년에 워치만 니는 전국 동역자 집회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루터는 그 시대의 사역자였습니다. 다비(Darby)는 또한 그 시대의 사역자였습니다. 각 시대마다 주님은 그분이 이루고자 하시는 특별한 일들이 있습니다. 그에게는 자신의 회복과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한 시대에 그분이 행하신 특별한 회복과 일이 그 ‘시대의 사역’입니다.
 

역사(work)의 원리는 동일합니다. 각처의 동역자들은 먼저 자신을 내어 드리고 머리 아래 두며 머리의 지시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주님이 하실 수 있고 그래야만 일이 진행됩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몸의 심판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모든 주요 결정과 지시는 몸의 손에 맡겨야 합니다... 장차 몸의 나타남은 오늘날 지방교회들의 간증의 본질에 의해 결정될 것입니다. 지방교회들은 장차 올 우주 교회의 모델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사역은 지방교회 안에서 그리고 지방교회를 위한 것입니다. ibid. pp. 246-247













아라비안나이트 천일야화




천일야화

아라비안 나이트 / 천일야화 / 해설 및 줄거리

해설


  "아라비안 나이트"는 "아라비안 야화", "아라비안 설화", "천일야화"라는 제목으로도 불리운다. 
세계문학사상 둘도 없는 기서로서 아라비아와 페르시아의
불가사의하고 신비로운 이야기로 엮어진 대설화집이다. 아라비안 나이트는 오래
전부터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려 왔는데 이처럼 종교와 인종 연령이나 시대
국가를 넘어서 수많은 사람들의 어린 시절을 꿈으로 아름답게 가꿔 주고 이처럼
다양한 세계를 여러 가지 수법으로 생생하게 그린 작품은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원본이 아라비아 인에 인하여 아라비아 어로 씌어진 것은 틀림없으나 어느
시대에 누구에 의해 쓰여진 것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이 책은 3세기부터 7세기에 걸친 페르시아의 사사니아 왕조 시대에 이 책의
일부분으로 추측되는 것이 창작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 후 페르시아가
아라비아인들에게 정복된 후 문학도 아라비아 인의 서고로 넘어가게 되었다.
14세기에 이르러 바그다드의 수도가 함락될 때까지는 아라비아 인들의 손에서
확고히 보존되고 그들의 소유물로서 한 편의 책으로 통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이야기의 배경이 되고 있는 무대는 고대 이집트를 중심으로 대서양과
소아시아 그리스 인도 중국까지 걸쳐 있으나 내용은 아라비아 인들 사이에서
전해지는 전설과 비유담 우화 교훈 등이 대부분이며 정통파 회교도의 세계관이
반영되어 있다.


  회교도들의 신앙의 대상은 알라와 마호메트에 있지만 또한 신에 의하여 창조된
것으로서 공기에서 나온 천사 대지가 낳은 인간 외에 불에서 나온 징이라는
일종의 마성을 지닌 존재를 믿고 있었다.


  징은 인간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때로는 인간과 결혼하는 일도 있으며
이 마성의 활약이 "아라비안 나이트"의 세계를 불가사의한 것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 징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이 있는 자는 교조 마호메트 외에는 옛날의
현자 솔로몬 왕이 있을 뿐이며 교황이라 할지라도 마호메트의 유물이나 솔로몬
왕이 남겨 놓은 반지의 힘에 의하지 않고서는 이것을 지배할 수가 없었다.
  "아라비안 나이트"는 그 후 많은 사람들의 손에 의하여 수정되었으나
17세기경까지는 유럽에 전해지지 않았다. 그 최초의 소개자는 프랑스의 동방학의
권위자 앙트와느 가랑이었다. 그가 대사 노완델 후작을 따라서 터키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주재하게 되었는데 그 후 소아시아 지방을 여행하면서
마호메트교도 사이에 전해지고 있는 이야기에 깊은 흥미를 느끼고 1704년부터
번역에 착수하여 17년 동안 12권의 책을 완성하였다.

처음 이 이국적 정서가 짙은 동방 이야기를 들은 프랑스 인들은 완전히
매혹되었다. 이렇게 현란한 설화가 세계의 다른 곳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놀라운 일이었다. 선녀 같은 미녀 램프 속에서 나오는 거인
불가사의한 마술사 거대한 루크 새의 알 보석의 계곡 선박에 박힌 못을
끌어당기는 자석의 섬 금과 은으로 만든 이슬람 궁정 동양풍의 호화로운 향연 등
모두가 경이로운 이야기들이었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당시 화제의 중심이 되었으며 나중에는 가랑이 쓰는 책의
출판을 기다리다 못해 애독자들이 심야에 그의 집 창문 앞에 모여서 신기한
아야기를 듣기 위해 일대 소동을 벌이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 후 각개 국어로 번역되어 유럽에 소개되자 단시일 내에 널리 애독되었으나
아라비아의 풍속과 습관 등에 대해서는 상당 부분이 와전되어 있었으므로 그
뒤로 많은 학자들이 이 책의 복원에 힘쓰게 되어 유사한 책들이 속출하였다.
유럽은 한때 "아라비안 나이트"의 시대가 된 듯하였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처음으로 문자화한 최초의 무명의 저자는 수많은 이야기를 우연히 수집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발단에서 출발한 일맥 상통한 이야기로 만들기에 힘썼다.
이야기의 발단은 이렇다.


  인자한 정치로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던 페르시아 왕 사리아르는 어느 날
사냥을 하러 나가고 없는 틈에 왕비가 흑인 노예와 음탕한 짓을 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격분하여 역시 부정한 아내를 가진 아우와 함께 여행을 떠났다. 도중에
징이 그의 아내를 두 겹의 철궤 속에 집어 넣고 일곱 개의 자물쇠로 잠가 놓아도
여자는 그것을 깨뜨리고까지 정부와 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음을 눈앞에서
보여 주었다. 왕은 모든 여자를 저주하게 되었다. 왕비와 노예를 죽인 뒤 세상의
부정한 여자를 근절시키기 위해 새로운 법령을 내렸다. 전국의 미인을 저녁마다
한 사람씩 수청을 들게 한 다음 날이 밝으면 사형에 처하였다. 피를 보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잔악한 생활이 3년 간이나 계속되었다.


  이 때문에 바그다드는 물론 국내의 구석구석까지 딸을 가진 부모는 극도의
공포에 떨게 되었으며 이 잔인한 국왕을 원망하게 되었다. 그 처형을 피하려고
국외로 도망하는 처녀들도 많았다. 이리하여 국내의 미녀가 전부 사라지게 되자
재상의 딸로 재색을 겸비한 미녀 세라자드는 자기의 아버지를 설득하여 왕의
폭행을 중지시킬 목적으로 자진하여 수청을 들 것을 결심하였다.


  세라자드는 자기의 동생 테니아사아르를 후궁으로 궁전에 동반하는 것을
조건으로 했다. 이튿날 사형 집행 한 시간 전에 국왕에게 청을 해서 이 세상과의
고별을 위해 데리고 온 자기 동생에게 이야기를 해 주게 되었다. 세라자드가
들려 주는 이야기는 대단히 흥미있는 것이었는데 제일 재미있는 곳에서
중지하였으므로 왕은 그 다음 이야기가 듣고 싶어 그때마다 사형 집행을
연기하도록 하였다.


  이 이야기가 천일 밤을 계속하자 왕은 세라자드의 지혜를 믿게 되어 관대하고
자혜로운 마음으로 변하여 세라자드를 왕비로 삼고 더욱 어진 정치를 베풀어
페르시아 왕국은 오래도록 번영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아라비안 나이트"에 실려
있는 이야기는 세라자드가 국왕과 동생에게 들려 주는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천일야화"라는 이름도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최초의
번역서인 가랑의 번역서가 수정되고 또한 콘스탄티노플에서 발견된 이집트
고초본에서 알려지지 않은 새 자료가 발견되어 첨가되었으며 아라비자의
원본이라는 신역도 나오는 사이에 유명한 동양학자이며 반생을 이집트에서 보낸
원레인과 바튼의 역서가 영국에서 간행되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레인은 문자화하기에 거북할 만큼 심각한 성 묘사의
장면을 생략하거나 애매하게 처리했으나 바튼의 한정판 16권 본은 이 점을
보완하였기 때문에 완전한 정본으로 통용되고 있다.

*왕비를 살린 천 하루 동안의 이야기*

《아라비안나이트》의 원래 제목은 아라비아 말로 '알프 라이라 와 라이라' 이다. 이것은 1001의 밤' 이라는 뜻으로 180여 편의 이야기가 1001일 밤 동안 계속되었기 때문에 붙은 제목이다. 이것을 우리말로 번역해서 '천일야화' 라고도 한다.

《아라비안나이트》는 한 사람이 쓴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많은 이야기들을 더 하고 빼고 하면서 오늘날 우리가 보는 이야기가 되었다. 이야기의 배경도 인도와 이란, 이라크, 시리아, 이집트 등 다양하다.

《아라비안나이트》는 정작 아랍 사람들에게는 관심을 끌지 못했다. 일반 서민들이 좋아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문학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단순히 할머니가 아이들을 잠재우기 전에 읽어 주는 옛날이야기 정도로 여긴 것이다. 특히 아랍의 지식인과 높은 계급 사람들은 이 책 속에 이슬람 종교에서 금지하는 말이나 내용이 담겨 있기 때문에 가치 없는 것으로 여겼다.

《아라비안나이트》가 아랍 지역을 벗어나 세계에 널리 알려진 것은 프랑스의 동양학자 앙투안 갈랑 덕택이다. 그는 1704년부터 1717년까지 《아라비안나이트를 12권으로 번역해서 출판했다. 이 번역서는 《아라비안나이트》 전체 이야기 가운데 3분의 1 정도만 담고 있지만 그 뒤 많은 번역본의 본보기가 되었다.

이 책의 바탕은 〈천일 하고도 하루 밤 이야기의 시작〉에서 비롯된다. 옛날 사산 왕국의 샤리야르 왕은 사마르칸트를 다스리는 동생 샤자만이 보고 싶어 곁에 오라 부르게 된다. 샤자만이 형에게 가는 도중 형에게 줄 선물을 잊어 다시 왕궁으로 돌아가게 되는데 마침 왕비가 왕궁 요리사와 함께 침실에서 다정하게 있는 것을 보고 두 사람을 죽인다. 그리고 다시 형을 만나러 발걸음을 옮긴다.

그런데 샤자만은 형수인 샤리야르 왕의 부인도 남편을 배신하고 신하와 놀아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사냥에서 돌아온 형 또한 이 사실을 알고 부정한 두 남녀를 죽인다. 동생 샤자만이 돌 아간 뒤 샤리야르는 여자들을 믿지 못하게 되어 매일 밤 처녀를 한 명씩 왕궁으로 불러 들여 하룻밤을 같이 보낸 뒤 다음 날 아침이면 죽이는 일을 3년 동안 계속한다. 도성 안에 처녀가 씨가 마르게 될 즈음 대신의 딸 세헤라자데가 스스로 왕비가 되겠다고 청하여 왕과 결혼한다. 결혼 첫날밤부터 세헤라자데는 여동생과 힘을 합쳐 재미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처럼 《아라비안나이트》는 죽음을 피하기 위해 꾀 많은 왕비 세헤라자데가 남편인 사산 왕국의 왕 샤리야르에게 밤마다 들려준 이야기 모음이다. 

* 지혜와 교훈이 담긴 이야기들*

이야기 모음집 《아라비안나이트》는 정확히 몇 편의 이야기로 이루어졌는지 헤아리기가 무척 어렵다. 이 책에 실린 것은 그 일부인데, 대체로 모험, 사랑, 기이함, 교훈 등을 담고 있다. 대표적인 몇 가지 이야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말하는 새> 이야기는 기이하다. 왕비의 언니들인 이모들의 질투 때문에 태어나자마자 버려진 왕자와 공주가 말하는 새의 도움으로 다시 친부모인 왕과 왕비를 만나게 되는 환상적인 이야기다. 불행했던 운명을 안고 살아야 했던 세 남매가 부모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은 용기와 우애 때문이었다. 오빠 바만과 파페즈가 말하는 새를 찾아 모험을 했을 때 돌이 되었던 것은 공포와 비웃음과 놀림을 참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페리자드는 뒤에서 어떤 소리가 나도 돌아보지 않아 말하는 새를 손에 넣고 돌로 변한 두 오빠까지 구하게 된다. 페리자드의 용기가 두 오빠를 구한 것이다. 이들 남매의 우애는 대단했다. 서로를 의지하며 무슨 일이든 함께 의논하고 행동했다. 그래서 늘 현명하게 일을 처리했으며 결국 친부모를 만나게 된 것이다.

〈알리 바바와 40명의 도둑〉 이야기도 신기할 따름이다. 40명의 도둑이 동굴에 숨겨 놓은 보물은 정말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열려라 참깨!' 하면 열리고 '닫혀라 참깨!' 하면 닫히는 동굴이 있었을까? 그것은 믿을 수 없을 만큼 환상적인 이야기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욕심 많은 형 카심과 착한 아우의 모습은우리 주위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러므로 매우 현실적인 이야기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하녀 마르자나와 같은 꾀 많고 부지런한 사람 덕분에 위험을 물리치고 불행을 막을 수 있었다는 사실에서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준다.

〈알라딘과 램프의 거인> 이야기도 환상과 교훈을 전달하고 있다. 가난한 알라딘은 못된 마법사의 부탁으로 동굴에 들어갔다가 마법의 램프를 얻게 된다. 주인의 말에 복종하는 램프의 거인 덕분에 알라딘은 부자가 되고 공주와 결혼한다. 하지만 마법사 때문에 큰 시련을 겪는다. 시련을 무사히 헤쳐 나간 알라딘은 행복과 불행을 모두 가져오는 마법의 램프를 바다에 버린다.

〈마법의 말> 이야기는 환상, 모험과 함께 사랑을 다루고 있다.

페르시아의 피로즈 샤 왕자가 인도인 마법사와 카슈미르 왕국 의 왕의 손아귀에서 사랑하는 벵골 왕국의 공주를 구하는 내용이 흥미진진하다. 다른 이야기들은 주인공이 왜 모험을 하게 되 는지가 분명하지 않다. 정해진 운명대로 주인공이 따라갈 뿐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는 모험을 하게 된 분명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사랑 때문이다. 사랑하는 공주를 찾아 피로즈 샤 왕자는 죽음을 무릅쓴다.

이처럼 《아라비안나이트》에는 생각지도 못한 사건들 속에 아슬아슬한 모험의 세계가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진다. 거기에는 착한 사람과 악한 사람 사이의 싸움이 있고, 그 싸움은 반드시 착한 사람, 사랑하는 사람의 승리로 끝난다.

1.알라딘과 요술램프: 가난한 고아 알라딘은 자신을 속여 동굴에서 마법의 램프를 가져오도록 하는 마법사를 만난다. 우연히 내면의 지니를 소환한 후 알라딘의 삶은 극적으로 변한다. 지니의 도움으로 그는 부자가 되어 공주와 결혼하게 된다. 그러나 마법사는 스스로 등불을 찾으러 돌아옵니다. 재치와 용기로 알라딘은 마법사를 물리치고, 램프를 구하고, 아내와 함께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2.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 평범한 나무꾼 알리바바는 40명의 도둑이 훔친 보물이 가득한 동굴을 발견합니다. 알리바바는 그의 영리한 하인 모르지아나의 도움으로 도둑들을 물리치고 보물을 지킵니다. 그러나 도둑들은 복수를 꾀하며 스릴 넘치는 대결로 이어진다. 용기와 교활함으로 알리바바와 그의 동료들은 도둑들을 물리치고 그들의 부와 안전을 확보합니다.

 

3.선원 신드바드 : 
신밧드는 위험한 모험으로 가득한 일곱 번의 항해를 시작합니다. 
거대한 새와 괴물 같은 바다 생물을 만나는 것부터 위험한 섬에서 살아남는 것까지, 신밧드의 회복력과 지략은 계속해서 시험을 받습니다. 
매 순간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신밧드는 각 여정에서 승리를 거두며 시련을 통해 얻은 부와 지혜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4.어부와 지니: 겸손한 어부가 우연히 병에서 강력한 지니를 풀어주었고, 죽임을 당하지 않으려면 그를 능가해야 합니다. 영리한 조작과 빠른 사고를 통해 어부는 지니를 속여 병에 다시 넣어 자신의 생명을 구합니다.

 

5.꼽추 이야기 : 
꼽추 이야기는 아라비안 나이트의 가장 유명하고 유머러스한 이야기 중 하나입니다. 
Shahryar 왕에 대한 Shahrazad의 이야기의 더 큰 프레임 내러티브 내의 등장 인물이 설명하는 것처럼 이야기 속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카마르 알 자만(Qamar Al-Zaman)이라는 꼽추는 하룻밤을 보낼 피난처를 찾기 위해 바그다드에 있는 재단사의 집을 방문합니다. 
그에게 알려지지 않은 재단사는 포목상, 약사, 이발사, 금세공인을 포함한 친구들을 초대하고 있습니다. 
저녁이 되면서 그들은 대화에 참여하고 음식과 음료를 즐기며 즐거운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나 꼽추가 농담을 하며 웃다가 자리에서 떨어져 우연히 살해당하면서 밤은 극적으로 변한다. 
꼽추의 죽음으로 인한 결과를 두려워하고 당황한 친구들은 시체 처리 계획을 세웁니다. 
그들은 꼽추의 시체를 부유한 유대인 의사의 집 밖에 두고 현장을 떠나기로 결정합니다. 
의사는 시체를 발견하고 즉시 당국에 의해 살인 혐의로 기소됩니다.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일행 각자가 증언을 위해 법정에 서게 되면서 코믹한 오해와 황당한 상황이 연이어 발생한다. 
결국 꼽추의 죽음에 관한 진실이 밝혀지고 무고한 의사는 무죄를 선고받습니다. 
" 꼽추 이야기"는 우정, 충성심, 충동적인 행동의 결과를 주제로 탐구하는 풍자적이고 가벼운 이야기입니다. 
재치 있는 대화, 기발한 줄거리, 인간의 어리석음을 유머러스하게 묘사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6.샤흐리아르 왕과 샤흐라자드의 이야기: 영리한 이야기꾼인 샤흐라자드는 샤흐리아르 왕과 결혼하고 매일 밤 그녀의 이야기로 그를 사로잡아 처형에서 자신을 구합니다. 1,001일이 넘는 밤 동안 샤흐라자드는 복잡한 이야기를 엮어 왕의 마음을 사로잡고 궁극적으로 그의 길을 바꾸어 두 사람 모두 행복한 해결을 이끌어냅니다.

 

7.바그다드 상인 알리 콰자의 이야기: 바그다드 상인 알리 콰자는 귀머거리이고 벙어리인 척하며 자신을 강탈하려는 도둑보다 한 수 앞섭니다. 교활함과 속임수를 통해 알리 콰자는 범죄자의 상황을 뒤집어서 그의 안전을 보장하고 그의 부를 보존합니다.

 

8. 포터와 바그다드의 세 여인 : 
겸손한 짐꾼은 바그다드에서 세 명의 영향력 있는 여성을 만나 그들의 매혹적인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삶과 인간 본성의 복잡성에 대한 통찰력을 얻습니다. 
"포터와 바그다드의 세 여인"은 아라비안 나이트의 더 큰 이야기 속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압둘라라는 이름의 겸손한 짐꾼은 무거운 짐을 지고 바그다드의 거리를 배회합니다. 
지치고 목마른 그는 휴식을 취하기 위해 웅장한 저택의 문을 두드립니다. 
놀랍게도 문은 그를 안으로 초대하고 그에게 음식과 음료를 제공하는 우아한 여성에 의해 열렸습니다. 그런 다음 압둘라는 세 명의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여성, 즉 샤흐라자드(Shahrazad), 둔야자드(Dunyazad) 및 그들의 어머니에게 소개됩니다. 문지기의 존재에 흥미를 느낀 이 여성들은 그와 대화를 나누고 그의 경험을 공유하도록 격려합니다. 밤이 깊어감에 따라 세 명의 여성은 차례로 압둘라에게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샤흐라자드는 금지된 사랑과 희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두냐자드는 회복력과 인내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그들의 어머니는 속임수와 배신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포터는 이 놀라운 여성들의 삶과 그들이 직면한 어려움에 대한 통찰력을 얻습니다. 그는 사랑, 충성심, 인간 본성의 복잡성뿐만 아니라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연결하는 스토리텔링의 힘에 대해 배웁니다. 저녁이 끝날 무렵 압둘라는 자신이 들은 이야기와 세 여성이 그에게 보여준 친절함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는 사회적 지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공통된 인간성을 공유하고 삶의 아름다움에 대한 깊은 인식을 공유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포터와 바그다드의 세 여인"은 연민과 이해, 그리고 스토리텔링의 변화시키는 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세 여성은 압둘라와의 만남을 통해 이야기로 압둘라를 즐겁게 해줄 뿐만 아니라 그에게 압둘라의 삶을 엿볼 기회도 제공합니다.

 

9.아부 하산, 피다위, 그리고 칼리프 하룬 알 라시드의 이야기

아부 하산의 잘못된 모험은 그를 부유한 상인으로 가장하게 만들었고, 이것은 그를 칼리프 하룬 알 라시드와 곤경에 처하게 합니다. 일련의 희극적인 오해와 불행을 통해, 아부 하산은 그의 곤경의 도전들을 탐색하고, 궁극적으로 해결과 구원을 찾습니다.

 

10.마법에 걸린 말

왕자는 날 수 있는 마법의 말을 받고 공주를 구하고 장애물을 극복하는 등 일련의 모험을 시작합니다.

 

11.검은 섬의 젊은 왕 이야기

어린 왕자는 사악한 마법사에 의해 검은 조각상으로 변신하고 결국 용감한 공주에 의해 풀려납니다.

 

12.흑단 말

마법의 흑단 말은 라이더를 특별한 여행으로 데려가 로맨스, 모험, 예상치 못한 운명의 반전으로 이어집니다.

 

13.아흐메드 왕자와 요정 페리바누의 이야기 

아흐메드 왕자는 요정 공주와 사랑에 빠지고 그녀의 결혼을 위해 어려운 일을 완수해야 합니다.

 

14.어부의 아들 이야기

어부의 아들은 마법의 물고기의 도움으로 바닷속에 숨겨진 보물을 발견하고 재산이 늘어납니다.

 

15.흑단 섬의 젊은 왕 이야기

젊은 왕은 사악한 마법사에 의해 개로 변신하고 저주를 풀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친절에 의지해야 합니다.

 

16.왕의 아들과 여자 구울 이야기

왕의 아들은 사막에서 여자 구울을 만나고 자신의 지능을 활용하여 그녀를 속이고 그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17.황동 도시 이야기

한 무리의 여행자가 황동으로 만들어진 신비한 도시를 발견하고 그 주민들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그 밖에도 아라비안나이트에는 다음의 제목으로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18.형벌을 받은 재상 이야기 19.와지르와 현자 두반의 이야기 20.남편과 앵무새의 이야기 21.마술사와 어부의 이야기 22.첫 번째 노인과 암사슴의 이야기 23.둘째 노인과 두 마리의 검은 개 이야기 24.어린 왕자와 사악한 마술사의 이야기 25.세 개의 사과 이야기 26.술탄과 그의 세 아들의 이야기 27.상인과 도둑의 이야기 28.세 번째 노인과 노새 이야기 29.칼리프 오마르 빈 알 카타브(Omar Bin Al-Khattab)의 이야기 30.세 달력 이야기 31.첫 번째 달력, 왕의 아들 이야기 32.두 번째 달력, 왕의 아들 이야기 33.시기하는 자와 시기받은 자의 이야기 34.세 번째 달력, 왕의 아들 이야기 35.조베이데 이야기 36.아메네의 이야기 37.땅사람 신바드 이야기 남편과 앵무새의 이야기 38.형벌을 받은 재상 이야기 39.검은 섬의 젊은 왕 이야기 40.세 개의 사과 이야기 41.누르 알 딘 알리(Nur al-Din Ali)와 그의 아들의 이야기 42.꼽추 처형 이야기 43.기독교 왕의 딸 이야기 44.미친 사람의 이야기 45.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왕자의 이야기 46.아버지를 사랑한 공주 이야기 47.죄수의 이야기 48.페르시아 의사의 이야기 49.시리아의 연인들의 이야기 50.부인과 문지기와 세 형제의 이야기





  줄거리


  알라딘의 램프
  아득한 옛날 중국 어느 도시의 한 재봉사의 집에는 알라딘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그는 어느 정도 나이가 들었는데도 어린애들과 어울려 놀기만 하고
도무지 일을 할 줄 모르는 게으름뱅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이것을 걱정한 나머지
병에 걸려 결국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어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죽은 아버지의
동생이라고 하는 낯선 사나이가 찾아와 알라딘에게 좋은 장사를 시켜 주겠다고
하였다. 사실은 삼촌이라는 것은 거짓말이었고 아프리카의 악명 높은 마술사로서
보물이 중국의 어느 위험한 지대에 있다는 것을 마법으로 알아 내고 이것을 얻기
위하여 알라딘을 이용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훌륭한
사업을 시켜 주겠다는 말을 듣고 대단히 기뻐하였으며 알라딘도 그 말에 속아
마술사의 목적지인 어는 높은 산봉우리까지 따라가게 되었다.


  그 사나이가 근처에 흩어져 있는 마른 나뭇가지와 잎에 불을 지르고 향을 던져
넣고는 몇 마디 주문을 외우자 연기가 사라지며 땅이 갈라지더니 그 속에 반지
한 개가 들어 있는 네모난 돌이 나타났는데 그 돌을 들어 보니 그 밑에 큰
구멍이 나타났다.


  알라딘은 마술사가 시키는 대로 그 구멍 안으로 내려가 그 아래에 놓여 있는
램프의 불을 끈 다음 기름을 쏟아 버리고 가지고 나오려고 하였으나 마술사는
그가 구멍에서 나오기 전에 그 램프만을 올려 달라고 하였다. 알라딘이 그
사나이의 행동이 의심스러워 나가서 주겠다고 고집하였더니 그는 화를 내며
구멍을 무거운 돌로 막아 버렸다.


  알라딘은 하는 수 없이 구멍 속 깊이 내려가 보았다. 그 밑바닥에는 뜰이
있었는데 그 곳에는 보석의 열매가 달린 과실나무로 가득했다. 그는 많은 보석
열매를 호주머니에 따 넣었다.


  그러나 다시는 밝은 세상에 나갈 길이 없다는 것을 깨닫자 슬픔에 빠졌다.
모든 화를 면하게 해 준다고 마술사가 구멍 밑으로 내려올 때 끼어 준 반지를
우연히 문지르게 되었다. 그 순간 이 신비스러운 반지의 종이 나타나 알라딘을
구출하여 주었으므로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가 가지고 돌아온 램프를 헝겊으로 닦다가 램프 속에서 거인이 나타난다는
사실도 자연히 알게 되었다. 그 거인을 불러 내어 무엇이든지 명령만 하며
소원대로 이루어졌다. 알라딘은 어머니와 행복하게 살게 되었다.


  어느 날 알라딘은 국왕의 딸 아루바슬을 보고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자기와는 너무도 큰 신분의 차이가 있었으므로 도저히 소원이 이루어질 수 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어떤 대신의 아들도 역시 왕녀를 사모하고 있었다. 그러나
알라딘이 용기를 내어 청혼했더니 왕은 흑인 노예 40명과 백인 노예 40명을
시켜서 보석을 담은 그릇 마흔 개를 선물로 보내면 딸과 결혼시켜 주겠다고
대답하였다.


  그리하여 알라딘은 램프의 거인에게 도움을 청했다. 국왕의 요구 이상으로
아름다운 선물과 찬란한 의복을 선물했고 알라딘이 성으로부터 나올 때 멋진
행렬이 있었는데 이런 것들은 전부 램프의 덕택이었다. 결국 알라딘의 소원이
이루어져 왕녀와 결혼하였고 램프의 거인이 만들어 준 훌륭한 궁궐에서 행복하게
살게 되었다.


  한편 아프리카의 마술사가 점을 쳐 보았더니 죽은 줄 알았던 알라딘이 아직도
살아 있으며 더구나 램프를 사용하여 행복한 생활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대단히 화가 나서 복수를 하려고 마음먹었다.


  불행하게도 알라딘이 사냥을 간 틈에 마술사에게 램프를 빼앗기게 되어 램프의
거인은 이제 마술사의 명령에 따라 왕녀와 궁궐을 고스란히 아프리카로 옮겨
가버렸다.


  알라딘이 사냥에서 돌아와 보니 궁궐과 왕녀가 없어졌으므로 반지의 종의 힘을
빌려 그것이 그를 속인 원수 같은 마술사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알라딘은 아프리카로 달려가 비밀리에 왕녀와 힘을 합하여 마술사를 독살해
버렸으며 램프도 다시 찾게 되었다.


  마술사의 아우도 또한 마술사였는데 알라딘에게 해를 입히려다가 램프의
거인에게 죽고 말았다.

  이리하여 알라딘과 왕녀는 궁전도 예전과 같은 자리에 옮기고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오래도록 행복한 생활을 보냈다고 한다.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

옛날 페르시아의 어느 도시에 두 형제가 살고 있었는데 형은 카심이었고 아우는 알리바바였다. 
그들의 아버지는 얼마되지 않은 유산을 두 형제에게 똑같이 나누어 주었는데 형은 재산을 독차지한 뒤 부잣집 과부를 아내로 맞이하여 부유한 상인이 되었으나 알리바바는 자기와 처지가 같은 가난한 여자를 아내로 삼아 가난하게 살면서 산에서 나무를 베어 그것을 말라빠진 세 마리의 노새의 등에 싣고 매일 도시에 나가 팔아 겨우 생계를 이어 가고 있었다.

어느 날 알리바바는 늘 하던 대로 산 밑에서 나무를 하고 있었는데 말을 탄 도둑들이 벌판을 건너 왔다. 
그는 무서워서 높은 바위 옆에 있는 나무로 올라가 몸을 숨기고 그들의 거동을 살피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40명이나 되었는데 그 곳에 도착하자 두목이 선두에 서고 각자 무슨 귀중한 물건이 들어 있는 듯한 자루를 한 개씩 들고 그의 뒤를 따랐다.
두목이 큰 바위 앞에 가서 "열려라 참깨!" 하고 외치자 큰 돌문이 활짝 열리고 도둑들이 모두 그 안으로 들어가고 돌문은 다시 닫혀 버렸다.
  
도둑들이 다 가버린 후 알리바바는 나무 위에서 내려와 돌문 앞에 서서도둑들이 그 문을 열 때 쓰던 말을 시험하려 보려고 "열려라 참깨!" 하고 외쳐 보았다.
과연 문은 활짝 열렸다. 
그가 어두컴컴한 동굴일 줄로만 알았던 그 안에는 밝고 넓은 방이 있었다. 
천정 구멍에서 햇빛이 환하게 비치고 있었는데 갖가지 음식과 값진 옷감과 금은 보석이 산처럼 쌓여 있었으며 돈이 든 자루도 헤아릴
수 없이 쌓여 있었다.

알리바바는 어떤 왕도 가지지 못한 많은 보물을 보고 이 동굴이 도둑들이 훔친 것을 오랫동안 쌓아 놓는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알리바바는 이 도둑들이 훔친 보화를 자기가 좋은 목적에만 쓴다면 약간 가져가도 나쁜 일이 아닐 거라고 생각하고 자기의 노새가 운반할 수 있는 만큼의 자루를 싣고 그 위에 나뭇가지를 올려 놓아 흔적이 나지 않게 감추었다. 
그리고는 "닫혀라 참깨!" 하고 소리치니 문은 그전과 같이 닫혀 버렸다. 
그는 집에 와서 놀라는 아내에게 신기한 모든 이야기를 들려 준 후 비밀로 할 것을 당부하였다.
아내는 대단히 기뻐하며 그 금화를 모두 세어 보겠다고 했지만 알리바바는 구덩이를 파고 묻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남편이 구덩이를 파는 사이에 보석이 몇 되나 되는지 보려고 근처에 사는 카심의 집으로 되를 빌리러 갔다.


  그러나 카심의 처는 알리바바가 가난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의 아내가
되로 달 만한 것이 있는지 호기심이 나서 되의 밑바닥에 쇠기름을 조금 발라
두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돌려받은 되의 밑바닥에 금화가 한 개 붙어 있었다.
이것을 발견한 알리바바의 형수는 '그들에게 되로 달 만한 금화가 있단
말인가?' 하고 질투가 일어났다. 그는 자기의 남편 카심이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남편에게 이제까지는 자기들이 부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알리바바는 돈을
계산하는데 되를 사용할 정도라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들은 카심은 깜짝 놀라서 그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설명해 달라고
재촉하였다. 그의 아내는 그 날 있었던 일들을 상세히 말하고 그 증거로 한 개의
금화를 보여 주었다. 카심은 부자 과부로 결혼한 후로는 알리바바를 동생으로
취급하지 않고 멀리하며 그를 미워하고 있었다. 그는 이 말을 듣고 한 달에 은화
한 푼도 가지기 어려운 동생이 갑자기 부자가 되었다는 말을 들으니 불같은
질투심이 일어나 그 날 밤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카심은 그 이튿날 먼동이 트기도 전에 알리바바의 집으로 달려가 아내에게서
들은 금화의 이야기를 하며 금화의 출처를 밝히지 않는다면 고소하겠다고 위협을
하였다.


  알리바바는 비밀로 감추고 있던 것을 들키고 말았으므로 하는 수 없이 형에게
전날의 모든 사실을 고백하고 자기 형제가 일평생 쓰고도 남을 만큼 많은 금화가
있으니 그것을 나누어 갖고 비밀을 지켜 달라고 애원하였다.


  그러나 욕심 많은 카심은 다음 날 아침 해가 뜨기도 전에 열 마리의 노새 등에
큰 상자를 올려 놓고 알리바바가 가르쳐 준 길을 떠나서 그 동굴 앞에 닿았다.
그리고 "열려라 참깨!" 하고 주문을 외치니 역시 문이 열렸다. 그는 재빨리 그
안에 들어가서 욕심껏 많은 양의 금화 자루를 꺼내어 싣고 문을 열려고 하였으나
깜박 그 암호를 잊어버리고 말았다. 참깨라고 하지 않고 "열려라 보리!" 하고
외쳤다. 그러나 무거운 문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는 위험을 느끼고 초조해져서
생각나는 곡식의 이름을 아는 대로 불러 보았으나 도무지 문이 열리지 않았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모든 보물을 내던지고 그 동굴 속에서 안절부절 하였다.
  낮이 되어 도둑들이 이 동굴로 돌아와 그는 꼼짝없이 살해당하고 말았다.
도둑들은 그의 보물 창고가 외부에 발견된 사실에 화가 나고 분해서 공범자에게
겁을 주기 위해 카심의 시체를 넷으로 찢어서 동굴 안의 좌우에 나누어 걸어
놓았다.


  알리바바는 날이 지나도 형이 돌아오지 않으므로 이상한 생각이 들어 세
마리의 노새를 몰고 산에 가서 돌문을 열고 보니 과연 짐작했던 대로였다. 그는
곧 넷으로 찢겨진 형의 시체를 노새 위에 싣고 보이지 않게 그 위에 나뭇가지를
덮고 다른 노새의 등에는 금화 자루를 가득히 싣고 어둠을 이용하여 형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카심의 집에 하녀로 있는 모르자나는 영리하고 지혜로운 여자였다.
그는 주인이 병으로 누워 있는 것같이 꾸미느라고 약방으로 약을 사러 다니며
이웃 사람들을 속였다. 그리고 가죽을 깁는 노인을 금화를 주어 매수한 후 눈을
가리고 집으로 데리고 와서 주인의 시체를 꿰매게 하였다. 그녀는 주인이 병으로
죽었다고 큰 소리로 통곡하여 감쪽같이 주인의 변사를 감추고 장사를 지냈다.
  알리바바는 얼마 후 형수의 집으로 살림을 옮기고 밤을 이용하여 금화도 전부
옮겼으며 형의 가게는 자기의 장남에게 관리하게 했다.


  한편 도둑들은 동굴의 시체가 없어진 것을 보고 놀라서 시체를 훔쳐간
사람을 찾을 목적으로 자기들 중에서 가장 용감한 사람을 나그네로 가장시켜
시내로 들여보냈다. 약 중대한 그 범인을 찾지 못할 때에는 목숨을 잃을
것이라는 무서운 조건도 붙였다. 변장한 도둑은 마을에 들어와서 우연히도 신
깁는 노인의 가게까지 오게 되었다. 노인은 아침 일찍 일어나서 큰 바늘을 들고
일을 시작하고 있었다. 이것을 본 도둑이 무심코


  "당신은 참 부지런하군요. 더구나 그런 나이에 눈이 참 밝으십니다" 하고
감탄하며 말을 건네자


  "나리는 잘 모르실 것입니다만 내가 이런 나이에 여기보다 더 어두운 곳에서
죽은 시체를 꿰맸다는 것을 아신다면 더욱 놀라시겠지요" 하고 자랑스러운 듯이
대답하였다. 이것을 들은 도둑이 깜짝 놀라며 그에게 말을 추궁하였다. 노인은
그제서야 비밀을 누설했다는 것을 깨닫고 얼버무리려 하였으나 도둑이 주는
금화에 매수되어 자기가 알고 있는 모든 사실을 고백하였다. 그러나 눈을 가리운
채 찢어진 시체가 있는 집으로 갔던 까닭에 카심의 집 위치는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도둑이 시키는 대로 처음에 하녀에게서 눈을 가리운 곳까지 가서 눈을
가린 채 도둑의 부축으로 하녀와 같이 걸었던 대로 걸었다.


  그래서 카심의 집 바로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도둑은 눈 가리개를 벗기기
전에 카심의 집 문에 분필로 표시를 해 두고는 기뻐하며 소굴로 돌아갔다.
  그런데 모르자나가 외출했다 돌아오는 길에 문에 그려진 이상한 표시를
보았다.


  '대체 이것은 무슨 표시일까?' 하고 궁금해 하다가 누군가 자기 주인을
해칠려고 계획한 일이라는 것을 알아채고 근처의 모든 집에 꼭 같은 표시를
해두었다.


  그날 밤 산에서 내려온 도둑들은 알리바바의 집을 발견한지 못한 채 그만
돌아가 버렸고 임무를 다하지 못한 도둑은 두목에게 피살되고 말았다.
  그러나 도둑들은 자신들의 안전 때문에 동굴의 침입자를 찾아내야 했으므로
도둑 한 명을 다시 시내로 들여 보냈다. 이번 도둑도 동료가 하던 방법으로
알리바바의 집을 찾아서 이번에는 아무도 모르는 곳에 빨간 표시를 해 두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모르자나 때문에 보기 좋게 실패하고 말았다. 두목은 용감한
부하를 두 사람이나 죽게 하고도 침입자를 찾지 못한 것을 분하게 여기고
이번에는 자기가 직접 그 약탈자의 집을 찾기로 하였다. 그도 역시 우연하게 그
신 깁는 노인을 이용하여 알리바바의 집을 찾아내고는 표식을 하는 대신 그
주위의 지리를 상세히 관찰하여 두었다.


  동굴로 돌아온 그는 19필의 노새와 큰 가죽으로 만든 38개의 독을 모아서 그
중 한 개에는 기름을 가득히 담게 하였다. 그는 알리바바의 집을 무난히 찾은 후
자기는 기름 장수인데 내일 시장에서 팔 기름을 노새에 싣고 왔으니 하룻밤 자고
갈 숙소를 빌려 달라고 간청하였다. 사람 좋은 알리바바는 도둑의 두목이라는
것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 그의 처지를 생각하고 쾌히 승락하였다. 그리고
알리바바는 손님을 위하여 성대한 만찬까지 베풀어 주었다.


  밤이 깊어져서 불이 꺼졌으므로 모르자나는 기름 장사의 기름을 얻으려고 뜰로
나왔는데 기름독 안에서


  "두목님 시간이 되었습니까?" 하는 말이 들려왔다. 영리하고 지혜로운
모르자나는 그 순간 음모를 알아차리고 알리바바의 일가와 자기 몸의 위험을
생각하여 떠들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고 마음먹고


  "아니 아직 때가 아니다. 좀더 기다려라" 하고 침착하고 낮은 소리로 독마다
돌아다니며 똑같은 말을 해 두었다. 그리고 재빨리 기름이 든 독에서 기름을
따라서 주전자에 가득히 담아 끓인 후 도둑들이 들어 있는 독의 뚜껑을 열고
하나씩 차례로 그 기름을 부었다. 독 속에 들어있던 도둑들은 소리도 못 지르고
전부 죽어 버렸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을 모르는 두목은 밤이 깊어 집안이 조용해졌을 때 몰래
뜰로 나와 자기의 계획을 실행하려고 부하들이 들어 있는 독의 뚜껑을 열고
  "나오너라. 때가 되었다"고 낮은 목소리로 말하였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제서야 놀라서 독 뚜껑을 모두 열어 보니 어느 놈이고 다같이 무서운 죽음을
당해 있었다. 두목은 자기의 계획이 실패했음을 알고 한시도 그 곳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다. 37명의 생명을 빼앗은 무서운 손이 언제 자기의 생명을
빼앗을지 몰라서 겁이 난 그는 곧 담을 넘어 도망쳐 버렸다.


  그러나 두목은 부하들의 원수를 반드시 갚겠다고 굳게 결심하였다.
  그 이튿날 아침 알리바바는 모르자나로부터 전날 밤에 일어났던 무서운
이야기를 듣고 깊은 감사를 표하였으며 그 보답으로 모르자나를 자유의 몸으로
풀어 주었다.


  알리바바의 집은 뒷마당이 넓었으므로 그 곳에 구덩이를 파고 도둑들의 시체와
독과 무기를 묻었다. 그리고 많은 노새는 모르자나를 시켜 몇 차례에 나누어
시장에 나가 팔았다. 그 후 몇 해 동안 알리바바의 집은 아무 근심없이
평화스럽게 지냈다.


  그간 도둑의 두목은 음침한 동굴 속에서 혼자 있으면서 부하들의 복수를 하지
않고는 그대로 있을 수가 없어서 시내로 들어와 동굴에서 가져온 옷감으로
포목점을 시작하였다. 그 상점은 알리바바의 아들이 보고 있는 상점의 바로 앞에
위치하고 있었다.


  도둑의 두목이 가게를 시작한 며칠 후에 알리바바와 자기 아들의 상점에 찾아
갔는데 그 때 두목이 그를 보고 말았다. 그 날부터 두목은 그의 아들에게
접근하여 특별한 친절을 보이며 때때로 자기 집으로 초대하여 식사도 같이하게
하였다. 알리바바의 아들은 두목의 호의에 답례하려고 자기의 아버지와 상의하여
그를 초대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두목은 소금을 친 음식을 먹지 않는다는 괴상한 주문을
하였다.


  모르자나는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예로부터 복수하려는 사람은
소금을 먹지 않는다고 했는데...' 하고 수상하게 생각하며 그 소금기가 있는
음식을 먹지 못한다는 손님을 보고 싶은 호기심이 일어나 음식 접시를 나르는
체하고 객실로 들어가 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손님은 교묘하게 변장한
도둑의 두목이었이며 주의해서 살펴보니 옷 속에 단도를 품고 있었다.
  모르자나는 주인에게 닥칠 위험을 직감하고 어떤 행동이든 취해야겠다고
결심하였다.


  그리고는 고향의 의복으로 화려하게 차려 입었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
페르시아로 잡혀와서 이 곳에서 노예가 되었던 것이다. 그녀는 객실로 들어가
주인에게 이 댁의 경사를 위하여 자기가 어렸을 때 배운 춤으로 귀한 손님을
환대하고 싶다고 청하였더니 모두들 대단히 기뻐하였다.


  그는 여러 가지 춤을 아름답게 추고 나서 단검을 빼어 들고 한 손으로는 북을
들고 구경꾼들에게 희사를 바라는 시늉을 하였다. 알리바바가 금화 한 개를 그
북위에 놓아 주니 그의 아들도 그렇게 했다. 이번에는 도둑이 품안에서 돈
주머니를 꺼내려 하였다. 순간 모르자나는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용기와 힘을
다하여 손님의 가슴에 단검을 푹 찔렀다. 이 광경을 본 알리바바는 부자는
놀라며 큰 소리로
  "이게 무슨 짓이냐?"
  "우리는 이제 파멸이다!" 하고 소리쳤다.


  그러나 그녀는 침착한 어조로
  "아닙니다. 주인님을 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사람을 잘 보십시오" 하고
죽은 손님의 옷을 헤치고 그 속에 숨겨져 있는 단도를 보이고 모든 음모를
밝혔다.


  알리바바는 뛰어난 기지로 자기들의 생명을 구해 준 모르자나의 은혜에
감격하여 그녀를 얼싸안으며
  "나는 너를 자유의 몸으로 풀어 주었다. 그러나 오늘부터는 우리집 며느리로
삼겠다"고 말하며 아들에게도 그녀와 부부가 되어 줄 것을 간곡히 권하였다.
아들도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즉석에서 승낙하였다. 전부터 그는 모르자나를
깊이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도둑의 두목을 뒷뜰에 그의 부하들과 똑같이 묻고 며칠 뒤에는
알리바바의 아들과 모르자나의 결혼식을 성대히 거행하였다.
  이웃 사람들은 그간의 사정을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단지 모르자나의
아름다운 성품을 귀하게 여기는 주인의 도량과 인품을 칭찬하며 이 결혼을
축복해 주었다.

알리바바는 1년 동안은 도둑의 동굴을 찾지 못했었다. 
아직도 어디엔가 도둑이 살아 남아 있는 것 같이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리바바는 그 해가 저물어 갈 무렵 몹시 가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말을 달려 그 동굴로 가 보았더니 두목이 상점으로 옷감을 운반한 이후 지금까지
아무도 온 자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제야말로 이 보물 창고의 비밀을
아는 사람은 단지 자기 한 사람뿐이며 그 속에 들어 있는 많은 재보를 전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기뻐하며 말로 운반할 수 있는 양의 금화 자루를 싣고
집으로 돌아왔다.

수년 후 그는 자기 아들로 동굴로 데리고 가서 모든 비밀을 가르쳐 주었고 아들은 그것을 자손에게 전해 주었다. 
자손들도 이 재산을 유익하게 사용하였다.
이리하여 알리바바의 자손들은 몇백 년 후대까지 행복하게 살아갈 수가 있었다고 한다.

  신드바드의 모험
  바그다드의 하룬 알 라시트 왕 시대에 히드바드라는 가난한 짐꾼이 살고
있었다. 몹시 더운 어느 날 무거운 짐을 지고 시내로 들어 가다가 어느 훌륭한
저택 옆에서 쉬고 있었다.


  그 집에서는 정원에 우거진 화초의 향기와 함께 아름다운 음악이 지저귀는
새소리와 함께 시원하게 들려왔다. 거기에 맛있는 음식 냄새까지 섞여와 성대한
주연이 벌어져있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그 집 주인이 누구인지 알고 싶은 호기심이 생겨 문 앞에 훌륭한 복장을
하고 서 있는 문지기에게 물어 보았다. 문지기는 그에게 바그다드에 살면서도
세계의 어느 곳이고 안 가본 데가 없는 유명한 항해자 신드바드의 집을
모르느냐고 도리어 반문하였다. 그러자 히드바드는 하늘을 쳐다보며 누구에게나
다 들릴 만큼 큰 소리로


  "전능하신 천지 만물의 조물주시여 신드바드와 나와는 어찌 이다지도 신분의
차이가 있습니까? 나는 매일매일 허덕이며 괴롭게 일을 해도 처자식에게
보리빵도 충분히 먹이지 못하고 있는 처지인데 그에게는 저렇게도 막대한 재물을
써 가면서도 항상 즐거운 날을 보내게 하시는지요. 왜 이다지도
불공평하십니까?" 하고 신세 타령을 하며 비관에 잠겨 있는데 하녀가 나오더니
주인이 부른다며 따라 오라고 하였다. 히드바드가 들어간 곳에는 산해 진미를
차려 놓은 식탁을 둘러싸고 여러 사람이 앉아서 호화로운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그는 불안에 몸을 떨면서 겨우 여러 사람에게 인사하였다.


  흰 수염을 길게 늘인 훌륭한 노신사인 신드바드는 그를 가까이 불러 앉히고
술을 부어 주며 환대하였다. 그가 식사를 다 끝마치자 이름과 직업을 묻고 방금
밖에서 한 말을 다시 한 번 자세히 들려 달라고 하였다. 그래서 히드바드는
너무나 지치고 피곤하여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을 했다며 무분별했음을
사과했다.

  신드바드는 자기는 그렇게 사리를 모르는 인간이 아니며 그러한 불평이
불쾌하지는 않지만 무언가 오해가 있으니 그것을 풀어 주겠다고 하였다. 자기가
이렇게 행복해진 것은 도저히 상상도 못할 만큼의 노고를 몇 년 동안이나 견디어
왔기 때문이며 그 이야기를 듣는다면 히드바드의 생각이 바뀌게 될 거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러한 재물을 얻게 된 일곱 번의 항해 중에 겪은 여러 가지의
모험담을 들려 주겠다고 하였다.

  제1항해
  신드바드는 원래 막대한 유산을 받았으나 방탕한 생활로 전부 탕진해 버리고
워낙 모험을 좋아했기 때문에 외국에 가서 장사나 해 볼 생각으로 항해를
결심하였다. 그들 일행은 페르시아 만을 지나 동인도를 향하여 항해를 시작했다.
하루는 배가 작은 섬의 기슭에 닿게 되었다. 그것은 섬이라고는 하나 해면에서
겨우 노출되어 있을 뿐인 푸른 풀밭과 같은 곳이었다. 선장이 그 섬에 내리고
싶은 사람은 상륙하여도 좋다고 하였으므로 신드바드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상륙하여 여행에서 지친 몸을 쉬고 있었는데 별안간 그 섬이 기우뚱하고
흔들리더니 그만 침몰하고 말았다.


  그들이 섬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은 실은 커다란 고래의 등이었다. 그는 미쳐
타고 온 작은 배에 뛰어오르지도 못하고 그 섬에서 불을 때기 위해 가지고 내린
나뭇가지에 의지하여 표류하다가 간신히 어떤 섬나라의 어진 왕에게 구조되었다.
  그는 섬나라를 떠날 때 왕에게서 많은 선물을 받았으며 귀국하는 도중에 그가
타고 온 배와도 만나게 되어 항해의 상품도 손에 들어오게 되어 막대한 재산을
갖게 되었다.

  그는 이야기를 다하고 나서 돈이 많이 든 주머니를 히드바드에게 주면서
내일도 자기의 모험담을 들으러 꼭 와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 다음 날 히드바드는 제일 좋은 옷으로 차려입고 관대한 이 여행가를
찾아갔다. 신드바드는 반가이 맞아 주었고 손님들이 다 도착하자 맛있는 음식과
함께 그의 제2항해의 모험담을 시작했다.

  제2항해
  항해 중 그는 과실나무가 무성한 어느 무인도에 상륙하여 술을 마시고
기분좋게 낮잠이 들었는데 그 사이에 배가 떠나고 말았다.


  그는 절망 끝에 순간 죽어 버리고 싶은 마음도 들었으나 어쩔 수 없이 모든
것을 신에게 맡기고 높은 나무에 올라가서 섬의 형태를 살펴보았다. 사방을
둘러보니 아득한 푸른 바다뿐인데 제일 먼저 눈에 뜨인 것은 먼 곳에 있는
이상하게 생긴 타원형의 흰 물체였다. 그가 가까이 가서 살펴 보니 높이가
상당하고 둥근 지붕처럼 생겼으며 아무리 찾아 보아도 문 같은 것은 없고
미끄러워서 위로 올라 갈 수도 없는데 그 주위를 걸어보니 약 50 걸음이나
되었다.


  이 때 갑자기 하늘이 먹구름에 덮인 듯이 캄캄해졌다. 이상해서 하늘을
쳐다보니 그것은 이 섬을 향하여 날아오는 무섭게도 큰 한 마리의 날짐승 때문인
것을 알고 그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그가 뱃사람들에게서 들은 적이
있는 루크라는 큰 새가 틀림없으며 정체를 알 수 없던 원으로 생긴 물체도 그
새의 알이었던 것이다.


  이 루크의 몸의 길이는 약 80 미터나 되는데 날개를 펴면 그 넓이가 100
미터나 되고 코끼리나 소를 마음대로 채가는 무서운 것이었다. 이 새는 내리더니
그 알 위에 앉았다.


  신드바드는 새가 앉기 전에 몸을 그 알 옆에 숨겼으므로 바로 그의 눈 앞에
새의 한쪽 발이 놓이게 되었는데 그것이 큰 나무통만 하였다. 그는 새의 발에
자기의 몸을 끈으로 매고 루크 새가 자기를 이 무인도에서 옮겨 줄 것이라
기대하고 하룻밤을 지냈다.


  그 이튿날 예측했던 대로 큰 새가 날아 갔는데 어찌나 빠른지 정신이 아찔할
정도였다. 새가 땅으로 내려가는 것 같아 재빨리 묵었던 끈을 풀자마자 루크
새는 무섭게 긴 뱀을 입으로 채 가지고 다시 날아가 버렸다.


  새가 그를 내려 놓고 간 곳을 사방이 병풍과 같이 깍아지른 듯한 높은 산으로
첩첩이 둘러싸여 있었으며 하늘을 찌를 듯이 높고 험해 도저히 그 골짜기에서
빠져 나갈 길이 없을 듯하였다. 골짜기를 걸어보니 다이아몬드가 흩어져 있는데
놀랄 만큼 큰 것도 있었다. 그는 대단히 기뻐하였지만 바로 건너편을 바라보니
무섭게 긴 뱀이 아가리를 벌리고 모여 있는데 그 중에서 제일 작은 것이
코끼리를 한숨에 삼킬 만큼 큰 것이었다.


  이것을 본 그는 그 섬을 떠나 이곳에 온 것을 후회하였다.
  이 뱀들은 낮에는 구덩이 속에 들어가 루크 새의 눈을 피하고 밤에만 활동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이 뱀을 피하기 위하여 밤이면 작은 동굴 속에 들어가 그
입구를 큰 돌로 가리고 지냈다. 그러나 뱀은 밤이 되면 그 주위를
'쉬-쉬-' 하고 소리를 내며 기어다녔기 때문에 무서워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하루는 너무나 피곤해서 밖에서 잠을 자고 있는데 돌연 큰 날고기 덩어리가
공중으로부터 떨어졌다. 보석 상인들이 독수리가 새끼를 가질 때쯤 되면 이
골짜기 근처에 와서 다이아몬드를 채집할 때 쓰는 방법으로 큰 고기 덩어리를 이
다이아몬드 골짜기 속으로 던지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다이아몬드가 고기
덩어리에 박히게 되면 크고 강한 이 곳의 독수리가 이 고기 덩어리를 채어서
그들의 둥우리로 돌아와 새끼 독수리에게 먹이려고 날아오게 된다. 그러면
상인들은 이것을 감시하고 있다가 곧 달려와서 그 어미 독수리를 쫓고 그 고기
덩어리에 박힌 다이아몬드를 떼어 가는 것이었다.


  신드바드는 이 방법을 이용하면 이곳에서 구출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것을
깨닫고 그 근처에 있는 수많은 다이아몬드 중에서도 가장 큰 것으로 골라서 그중
가장 큰 고기 덩어리에 자기 몸을 단단히 묶은 후 땅바닥에 누워 있었다. 잠시
후 한 마리의 큰 독수리가 그의 몸이 묶인 고기 덩어리를 물고 산봉우리에 있는
둥지로 날아갔다. 그러자 마침 그 곳에 대기하고 있던 보석 상인들에게 그는
무사히 구조되었다.


  신드바드는 놀라는 상인들에게 가지고 온 다이아몬드를 나누어 주고 자기의
모험담을 이야기하였다.

  그는 상인들과 같이 무사히 귀국한 후 가난한 사람들에게 이 항해에서 얻은
막대한 재물의 일부를 나누어 주고 자기도 행복한 생활을 하였다. 이 제2항해의
이야기가 끝나자 주인은 히드바드에게 또 많은 돈을 주며 다음 날도 와서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초청하였다.

  제3항해
  신드바드 일행은 폭풍우를 만나 항로에서 벗어나 어느 섬 근처를 표류하게
되었다. 그런데 선장은 그 섬에 상륙할 것을 꺼려하였다. 선장은 이 섬과 부근의
섬에는 전신에 털이 돋은 보기 흉한 야만인이 살고 있는데 그들이 습격해 올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난쟁이이지만 대항해서는 안 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메뚜기보다도 수가 많기 때문이며 만일 그들 중 한 사람이라도
죽인다면 일행을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죽여 버릴 것이라고 주의를 주었다.
  선장의 말이 끝나자 키가 2피트 가량 되는 빨간 털이 난 무서운 난장이들이
수를 헤아릴 수 없이 헤엄쳐 와 배 주위를 둘러싸고 놀랄 만큼 민첩한 행동으로
그 배를 빼앗아 다른 섬으로 가 버렸다.


  신드바드 일행은 하는 수 없이 이 섬에 내렸다. 일행은 이 곳에서 거대한
건물을 발견하고 가까이 갔다. 훌륭한 건축 양식으로 된 궁전이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넓은 실내에 인기척은 없고 눈에 띄는 것은
산더미같이 쌓인 해골과 수없이 놓여 있는 쇠꼬챙이였다.


  이 무서운 광경을 보고 겁에 질려 있을 때 요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키가
종려나무만큼 큰 검둥이 거인이 나타났다. 그는 이마 한가운데에 눈이 하나
있었으며 앞니는 길고 날카롭게 뾰죽이 나와 있었다. 윗입술은 가슴까지 쳐져
있었으며 귀는 코끼리 귀와 흡사한데 양 어깨를 길게 덮고 있었다. 손톱은
사나운 짐승과 같이 길고 날카롭게 구부러져 있었다.


  이 무서운 괴물을 본 일행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그들이 깨어났을 때에 괴물은 현관에 앉아서 그들을 자세히 들여다 보고
있었다. 괴물은 그 중에서 가장 통통한 선장을 참새를 잡듯이 한 손에 쥐고
꼬챙이에 꿰었다. 괴물은 선장을 불에 구워 먹고 난 후 우뢰와 같이 코를 골면서
잠들어 버렸다. 신드바드 일행은 처참한 공포 속에서 그 날 밤을 지새웠다.
이튿날 거인은 그들을 궁전 안에 두고 밖으로 나갔다.


  일행은 이 괴물을 죽이기로 협의하였다. 그 날 저녁 거인은 살이 많은
뱃사람을 잡아먹고 잠이 들어 버렸다. 괴물이 골아 떨어졌을 때 일행 중 용감한
10명의 뱃사람이 쇠꼬챙이를 불에 달궈 일제히 그 거인의 눈속 깊이 틀어박아
장님을 만들어 버렸다. 거인은 아픔을 견디지 못하여 무서운 괴성을 지르며
일어나 양손을 벌려 그들을 잡으려 하였으나 모두 재빠르게 도망쳐 버렸다.
뱃사람들은 곧 해안에 나와 흩어져 있는 배의 파편을 모아 세 사람씩 탈 수 있는
뗏목을 몇 개 만들었다.


  거인은 동이 트기도 전에 그와 똑같은 거인 두 사람을 데리고 왔으며 그
뒤에도 여럿이 계속 몰려 오는 것 같았다. 일행은 그 거인이 죽어 버리면 이
섬에 머무를 희망을 가졌으나 불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때를 놓치지
않고 각자 뗏목에 올라 바다로 저어 나갔다. 이것을 본 거인들은 큰 바위
덩어리를 끼고 허리까지 닿는 바다까지 쫓아와 바위덩어리를 뗏목을 향해
던졌다. 뗏목은 산산이 부서져 바다 속으로 가라앉고 신드바드의 뗏목만 모면할
수 있었다.


  이튿날 아침 일행은 표류하다 겨우 섬을 발견하고 그 곳에서 좋은 열매를 따
먹고 원기를 회복하였다. 그 날 저녁은 해변가에서 잠을 자게 되었는데 그
곳에서도 놀랄 만큼 커다란 뱀의 습격으로 잠을 깨었다.


  뱀은 한 사람을 통채로 삼켜 버리더니 그를 다시 토해내어 땅 위에 두드려
부셔서 먹기 시작하였다. 두 사람은 불쌍한 사나이의 뼈가 바스라지는 무서운
소리를 들으면서 정신 없이 도망쳤다.


  그 이튿날도 무서운 뱀을 보았다. 섬 가운데를 헤매다가 높은 나무 하나를
발견하고 그 날 저녁은 나무 위에서 뱀을 피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뱀은 그들의
뒤를 쫓아와 신드바드보다 아래 앉아 있던 한 사람을 발견하여 통채로 삼켜
어디론가 사라졌다. 신드바드는 자기도 동료들과 같은 죽음을 면할 수 없음을
깨닫자 두려움에 떨며 바다 속으로 몸을 던지려 했으나 끝까지 절망에 빠지지
않고 인간의 생명을 주관하는 신에게 그의 몸을 맡기기로 결심하였다.
신드바드는 그 나무를 중심으로 나뭇가지나 덩굴을 이용하여 몸을 은신할 수
있는 작은 방을 만들고 그를 위협하는 잔인한 운명을 모면하기 위해 힘과 지혜를
모아 노력하고 그 날 밤 덩굴 속에 숨어 있었다. 뱀은 전날과 똑같은 시각에
나타나 그 나무의 주위를 돌아다녔으나 신드바드를 발견하지 못했다. 뱀은 밤이
새도록 숨은 쥐를 망보고 있는 모양으로 대기하고 있다가 날이 밝자 어디론가
가버렸다.


  신드바드는 그 날도 절망하여 몸을 바다 속으로 던지려고 했다. 순간 멀리서
한 척의 배를 발견하였다.


  그 배는 이전에 그를 떨쳐 놓고 간 바로 그 배였다. 그는 그의 성품과 그
이익을 되찾고 무사히 귀국하게 되었다.

  이 날도 신드바드는 히드바드에게 많은 돈을 주고 다음 이야기를 들으러
오라고 하였다.

  제4항해
  이번 항해도 태풍을 만나 파선하여 몇 사람만이 겨우 어느 섬에 다다르게
되었다. 이 섬에는 사람 사는 곳이 있었다. 일행은 마을 가까이 갔다가 많은
흑인들에게 포위당하고 말았다. 흑인은 일행을 붙들어 각자 분배하여 집으로
돌아갔다.


  신드바드는 일행 다섯 사람과 함께 어느 집으로 붙들려 갔었는데 흑인은
그들에게 이상한 풀을 먹으라고 손짓하였다. 일행은 몹시 시장한 터여서 그것을
받아 먹었으나 신드바드는 무슨 흉계가 있을 것만 같아서 먹는 시늉만 하고
삼키지는 않았다.


  얼마 안 되어 일행은 정신을 잃고 혼수 상태에 빠졌다. 다음 흑인들은
야자씨 기름으로 조리된 쌀밥을 주었다. 흑인들이 그 풀을 먹인 것은
뱃사람들에게 이성을 잃게 하여 비참한 운명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게 함이었고 쌀밥을 준 것은 그들을 살찌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
흑인들은 식인종이었으므로 뱃사람들의 살이 오르면 잡아먹으려는 의도였다.
  여러 주일이 지났다. 흑인들은 가장 살찐 사람부터 잡아먹기 시작하였으나
신드바드만은 정신이 온전하여 죽음의 공포로 나날이 여위어 갈 뿐이었다.
  이렇게 신드바드가 쇠약해지는 병에 걸렸으므로 흑인은 그를 잡아먹는 것을
연기하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그는 자유로운 몸이 되어 나중에는 거의 감시조차 받지 않게
되었다. 신드바드는 기회를 보아 그 곳에서 탈출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는 8일 간의 여행 끝에 겨우 백인들이 산호초를 채취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구원을 청하였다. 백인들은 그들이 살고 있던 섬으로 그를 데리고 가서
왕을 만나게 해주었다. 그 섬나라는 인구도 대단히 많고 상업도 번창한 곳이었다.
이 곳은 고생만 연속하던 그에게 참으로 좋은 위안처였다. 도량이 넓은 왕은
그를 후대하였다. 왕은 그가 고향 생각을 잊고 오랫동안 자기의 영토에 머물도록
아름답고 부유한 궁녀와 결혼시켜 주었으므로 신드바드는 행복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신드바드는 고향이 그리워 기회만 있으면 본국으로 돌아가려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이 나라에는 야만적인 습관이 있었는데 부부 중 한 사람이 죽으면 그 나라의
법에 의하여 남편도 같이 매장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신드바드는 그 곳에서 가장 친한 친구가 그의 아내가 죽었을 때 아내의 시체와
함께 묻히는 것을 보았다.


  그 장례식은 마치 결혼식과도 같이 화려했다. 고운 옷을 입고 많은 보석으로
몸을 꾸민 시체를 뚜껑이 없는 관대 위에 실은 후 그 뒤에 남편을 선두로 많은
친척과 친구가 따랐다. 매장할 장소에 이르자 깊은 구덩이를 덮은 거대한 돌을
일으키고 시체를 눕힌 관대를 그대로 컴컴한 구덩이 속으로 내려 보냈다.
  그의 남편은 친척 친구들과 생이별을 하고 또 하나의 관대에 한 병의 물과
일곱 개의 작은 빵을 차려 놓은 위에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누웠다. 그리고
이것도 시체와 같이 그 구덩이 속으로 내려 보냈고 그 위를 무거운 돌로 덮자
의식은 끝났다.


  그런데 신드바드의 아내가 병으로 죽었다. 불행하게도 2주일 후에 그도 아내와
함께 매장되야 할 운명에 놓여졌다. 국왕은 모든 신하들과 국내의 명사들을
참가시켜 그 장의를 빛나게 하여 신드바드의 마음을 위로하려고 노력하였다.
  성대한 식이 끝나자 그 구덩이 속으로 내려가는 도중 위로부터 비치는
광선으로 그 구덩이 속의 윤곽을 대충 알게 되었는데 끝이 없는 동굴의 깊이는
약 50 길이나 되어 보였다. 신드바드는 가지고 온 빵과 물로 겨우 연명을 하고
있었다. 하루는 무슨 발소리를 들었다.

  그가 소리를 따라가니 짐승이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신드바드가 그 뒤를 쫓아가노라니 멀리 마치 별과 같은 빛이 보였다. 이 빛은
잘 보이지 않았으나 더욱 앞으로 가보니 좁은 바위 틈에서 비쳐 오는 빛이었다.
신드바드가 그 틈을 겨우 뚫고 나오니 바로 눈앞에 바다가 나타났다.
  신드바드는 이것을 보고 용기를 얻어 다시 동굴로 되돌아 가서 관대 위에 놓인
다이아몬드와 루비 금팔찌 등 손에 잡히는 대로 모아 가지고 해변 가까이
나왔다. 다행히도 신의 가호를 받아 지나가는 배에 구조되어 고향에 돌아왔다.
  신드바드는 묘지에서 가지고 온 보물로 더욱 부자가 되었다. 그는 사원의
유지와 빈민 구제를 위해서 재물을 아끼지 않고 기부하였다.

  제5항해
  신드바드는 다시 배를 한 척 준비하여 각 국의 상인들과 상품을 가득 싣고
출항하였다.


  긴 항해였다. 그들은 처음으로 무인도에 상륙하였는데 두 번째 항해에서 본
것과 같은 큰 루크 새의 알을 발견하였다. 그 알은 어미새가 부리로 깨기
시작하여 새가 곧 나올 것 같았다.


  신드바드는 상인들에게 건드리지 말라고 일러 두었으나 그들은 호기심에 차서
망치로 알을 깨뜨리고 새를 꺼내어 태워 버렸다.


  식사를 마치기 전 하늘 높이 두 뭉치의 큰 구름 덩어리가 나타났다. 선장은
경험에서 그 구름이 루크 새의 수컷과 암컷인 것을 알고 일행을 배에 오르도록
재촉하였다. 두 마리의 루크 새는 무서운 소리를 내며 가까이 오다가 알이 깨져
새끼가 없어진 것을 알고 더욱 억세게 날개를 쳤다. 루크 새는 그들이 날아오던
방향으로 사라졌으나 뱃사람들은 그들에게 닥쳐 올 것 같은 재난을 면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여 배를 저었다.


  얼마 안 되어 루크 새는 발톱 사이에 큰 바위 덩어리를 끼고 와서 공중을
한 바퀴 돌더니 배 위에 던졌다. 배는 이 돌에 맞아 산산이 박살나고 말았다.
신드바드는 배의 조각에 매달려 겨우 어느 섬까지 다달았으나 다른 사람들은
모두 익사하고 말았다.


  이 섬은 맛있는 열매가 많이 있고 나무도 무성하여 흡사 낙원 같았다.
신드바드가 좀더 걸어 들어가니 깨끗한 개울이 있었다. 시냇가에는 몹시 야위어
보이는 노인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신드바드는 가까이 가 인사를 하고 왜 그렇게 앉아만 있느냐고 물어 보자 그는
겨우 머리만 흔들고 자기를 업어서 건너편으로 옮겨 달라고 손짓을 하였다.
신드바드는 노인이 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이라 믿고 그를 업고 시내를
건넜다. 보기에는 아주 힘없이 보이던 늙은이는 날쌔게 신드바드의 어깨 위에
올라타더니 발로 목을 감고 힘껏 졸랐다.


  그는 정신을 잃고 기절했다. 이 고약한 노인은 그가 기절해도 목 위에 올라
타고 있었으며 그가 겨우 숨을 내쉬자 노인은 한 쪽 발로 그의 옆 배를 누르고
한 쪽 발로는 그를 걷어 차 억지로 일어나도록 했다. 그가 일어나자 노인은 나무
밑으로 가자며 열매를 따서 먹기 위하여 때때로 멈춰 있으라고 하였다. 노인은
종일 신드바드의 목을 감은 다리를 풀지 않았으며 잘 때에는 마찬가지였다.
신드바드는 어느 날 나무에서 떨어진 표주박을 발견하여 그 곳에 포도를 짜서
술을 만들었다. 그 술은 아주 훌륭해서 그에게 새로운 힘을 북돋아 주었다.
신드바드는 기분이 좋아서 노인을 업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즐겁게 놀았다.
노인은 그가 이전보다 가볍게 자기를 업고 다니는 것을 보고 이상스럽게
생각하며 자기에게도 좀 달라고 손짓하였다.

 노인은 그 술을 상당히 마시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신드바드의
어깨 위의 다리 힘이 풀렸다. 신드바드는 노인을 땅 위에 내던져 버렸다. 노인은
그대로 잠이 들어 움직이지 않았다. 신드바드는 얼른 큰 돌을 들어 노인을 때려
죽였다.


  신드바드는 노인에게서 해방된 기쁨을 안고 해변가로 걸어나왔다. 마침 물을
얻으려고 멈췄던 배에 구조되었다.


  이 배의 선원들은 그의 이야기를 듣고 그 괴물이 교살하려는 것에서 모면한
최초의 사람이라고 모두 놀라했다.


  이 노인은 한 번 붙잡아 자기의 마음대로 움직이게 된 사람은 죽을 때까지
절대로 놓지 않는다고 하며 이 섬은 그 괴물의 손아귀에 죽은 사람이 많기로
유명하다는 것이었다.


  이 뱃사람들은 대단히 그를 후대하여 주었으며 배에 탄 상인들과도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 항해하다 배는 항구에 닿았다. 그와 친밀한 상인이 큰 자루
하나를 소개하여 주었고 그들과 똑같이 행동을 취하고 만일 그들로부터 떨어지는
경우에는 생명이 위험하다고 주의를 주었다.


  신드바드는 항구 사람들을 따라 야자수 밀림까지 왔는데 그 나무들은 대단히
높고 미끄러워서 도저히 올라가 열매를 따기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 때 많은 원숭이 떼가 그들 일행을 보자 재빨리 나무의 맨꼭대기로
올라갔다. 같이 갔던 사람들의 나무 위에 있는 원숭이를 향하여 돌을 던졌다.
신드바드도 사람들을 따라 돌을 던졌다. 원숭이들은 대단히 성이 나 야자 열매를
일행을 향하여 던졌다.

  그들은 원숭이가 던진 구하기 어려운 야자 열매를 얻을 수가 있었다.
신드바드는 귀국 후 장사를 하여 막대한 이익을 얻을 수가 있었다. 그는 고향에
돌아와 이익의 1할을 자선 사업에 사용하고 피로한 심신을 쉬었다.

  제6항해
  신드바드는 다섯 번이나 조난을 당해 위험을 거듭하였으므로 친척과 친지들이
만류를 했지만 1년도 못 되어 다시 바다로 나갈 준비를 하였다.


  이번 항해는 선장과 도선사가 침로를 잘못 잡았다. 선장은 미친 사람처럼
탄식하며 스스로 자기의 머리를 쥐어뜯었다.


  신드바드가 이상히 여겨 그 까닭을 물었더니 배가 이 대양에서 가장 위험한
장소에 왔는데 빠른 조류가 배를 이끌고 있어 15분 후에는 그들이 바다 속으로
빠져 죽을 것이라고 말하며 모든 것을 단념하고 신에게 기도를 올리자고 하였다.
  배는 조류로 인해 평시에는 도저히 가까이 댈 수도 없는 산의 절벽까지 올라가
그 곳에서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그러나 일행은 생명과 식량 가장 중요한 물품은 구할 수 있었다. 산 중턱에는
난파선의 파편과 해골과 믿을 수 없이 많은 종류의 보물이 산같이 쌓여 있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이 곳에서는 많은 물이 바다로부터 컴컴한 동굴 속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그 동굴의 입구는 대단히 높고 넓었다. 또한 이 산의 돌은 수정과 루비와 여러
종류의 보석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었다. 이 곳에는 역청이 샘물과 같이 바다로
흐르는데 물고기가 그것을 먹으면 용연향이 되어 곧 토해 내었다. 물결이 이
용연향을 해변가로 밀어 붙여 수목이 그 곳에 자라나게 되어 있었고 자라는
나무는 대개가 가라목이었다.


  이 곳은 배가 일정한 거리 이내로 들어오면 바람과 파도 때문에 벗어나지
못하여 산으로 올라갈 수도 없고 바다로 피할 수도 없어 이 지역에서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신드바드의 일행은 이 산중턱의 해변가에서 나날이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상륙하였을 때에 그들은 있는 식량을 공평하게 분배하였기 때문에 각자 식량의
취급 여하에 따라 길게도 혹은 짧게도 살 수가 있었다.


  신드바드는 식량을 조절하여 가장 오래 살아남아 있게 되었다. 신드바드는
죽음을 각오하고 마지막으로 죽은 동료를 매장한 후 자기 손으로 자기의 무덤을
파 두었다.


  신드바드는 동굴로 흘러 들어가는 강가로 가보았다. 그는 이 곳에서 탈출할
방법이 없을 까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이 강은 땅 밑으로 흐르지만 반드시 출구가 있을 것이다. 뗏목을 만들어 흘러
가는 데까지 가 보자 어디든 사람 사는 곳이 있을 것이다. 만일 익사하는 경우가
있을지라도 죽는 방법이 달라지는 것뿐이다'


  그는 곧 큰 배 조각과 닻줄로 튼튼한 뗏목을 만들었다. 그리고 루비 에메랄드
용연향 수정 등이 가득한 상자와 값이 나갈 물품을 담은 자루를 싣고 신에게
그의 운명을 맡겼다.


  동굴 안은 컴컴하였으며 천정은 머리가 닿을 만큼 낮은 곳도 있었다. 가지고
온 식량도 도중에 전부 떨어져 정신을 잃어 버렸기 때문에 그 후의 일은 알 수가
없었다.


  신드바드가 정신을 회복하였을 때 그는 넓은 들판 위에서 많은 흑인들에게
둘려 싸여 있었다. 그들 중에 아라비아 어를 해독하는 흑인이 있었으므로 다행히
그로부터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이 나라의 주민인데 가까운 산에서 흘러내려오는 강물을 논에 담고
있을 때 신드바드의 뗏목을 발견하고 그 뗏목을 끌고 와 그의 정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신드바드에게서 놀라운 이야기를 듣고 왕에게 안내하여 주었다. 이
나라의 인도였다. 왕은 그에게서 진기한 모험담을 만족하게 듣고 그를
후대하였다.


  신드바드는 인도 왕으로부터 회교도의 지배자인 아라비아 왕에게 보내는
친선의 서한과 많은 보물을 전달할 것을 부탁하고서 귀국하였다.


  대교주인 국왕은 이 선물을 받고 그 나라의 이야기를 흥미있게 들은 후
신드바드에게 많은 선물을 주어 사람을 시켜 그의 집까지 보내 주었다.

  이야기가 끝나자 신드바드는 전날과 같이 히드바드에게 많은 돈을 주며
다음 날 그의 최후의 항해를 꼭 들어 달라고 당부하였다.

제7항해

그는 귀국하자 다시는 항해에 나가지 않겠다고 결심하였다. 
신드바드는 이제 나이도 많이 들었고 이제까지 겪어 온 위험한 일에 다시는 몸을 내던지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생을 편하게 보내고 싶은 생각을 갖게 되었다.
하루는 대교주로부터 사절이 왔다. 
인도 왕에게 답례로써 답서와 예물을 가지고 사절로 가 달라는 명이었다.

그는 대주교인 국왕에게 자기는 이후 일체 항해를 단념하였다고 말하였으나 국왕이 부탁하는 것을 거절할 수 없어 승낙하고 말았다.
신드바드는 인도에서 되도록 속히 사명을 마치고 돌아오려 하였다. 
인도 왕은 그에게 많은 선물을 주었으므로 곧 귀로에 올랐으나 불행히도 해적의 습격을 받았다. 
선원 중에는 저항을 하여 생명을 잃는 자도 있었고 남을 사람들은 먼
섬으로 끌려가 노예로 팔려 갔다.


  신드바드를 산 주인은 부자였으며 그를 후대하여 노예로서는 분에 넘치는
몸차림을 하여 주었다. 주인은 그에게 무엇을 할 줄 아느냐고 물었다. 신드바드가
상인이라고 하였더니 활을 쏠 줄 아느냐고 물었다. 그는 활 쏘는 것은 젊었을
때의 운동이었다고 말하였더니 주인은 만족한 듯 커다란 코끼리에 그를 태우고
활과 많은 화살을 싣고 밀림 속 깊이 그를 데리고 갔다. 큰 나무 밑에 가자
주인은 그에게 나무 위로 올라가라고 했다. 주인은 코끼리의 무리가 이 앞을
지나갈 때는 활로 쏘아 넘어지는 놈이 있으면 자기에게 곧 알려 달라 하고
음식물을 남겨둔 후 시내로 돌아가 버렸다.


  그 이튿날 새벽녘에 수많은 코끼리 떼가 몰려 왔다. 신드바드는 그 중 한
마리를 쏘아 넘어트렸는데 다른 놈들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이것을 보고하니 대단히 기뻐하며 그를 칭찬하여 주었다. 그들은 코끼리를
땅에 묻었는데 이것이 썩어버릴 때에 코끼리의 큰 상아를 뽑아 팔 계획이었다.
  신드바드는 이 일을 약 2개월 간 계속하였는데 어느 날 이상한 일이 생겼다.
  신드바드는 여전히 나무 위에서 망을 보고 있을 때 코끼리들은 그 나무 앞을
지나가려 하지 않고 멈춰 서서 무서운 소리를 지르며 신드바드가 은신하고 있는
나무 주위를 둘러쌌다. 코끼리의 수는 실로 헤아릴 수 없었다. 코끼리 무리는 긴
코를 공중으로 쳐들어 일제히 신드바드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이 광경을 보고
정신이 아찔했다.


  제일 커다란 코끼리가 나서서 코로 그 나무를 뿌리째 뽑아 땅 위에
넘어트렸다. 신드바드가 땅 위에 떨어지자 코끼리가 그의 몸을 코로 감아 자기의
등에 앉혔다. 신드바드는 마치 죽은 사람과 같았다. 그 코끼리가 선두에 서서
걸어가자 많은 수의 코끼리가 질서 있게 열을 지어 뒤를 따랐다.


  어느 지점에 도달하자 코끼리는 신드바드를 땅 위에 내려 놓고 어디론지
가버렸다.


  그는 얼마 동안 누워 있다 이상히 생각하여 주위를 살펴 보니 그 곳은 길고
넓은 언덕 위였는데 코끼리의 뼈와 상아로 덮여 있었다. 코끼리의 무덤이었다.
코끼리는 자기들을 죽이지 말라는 뜻을 알리기 위하여 신드바드를 이 곳까지
데리고 온 것이었다.


  이제 코끼리를 죽이지 않고도 상아를 얼마든지 손에 넣을 수 있는 장소를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신드바드는 하루를 꼬박 걸어 주인집에 돌아왔는데 주인은 그가 살아서 돌아온
것을 보고 대단히 놀랐다.


  그는 주인에게 모든 이야기를 전하고 코끼리를 타고 그 언덕까지 가서 많은
상아를 싣고 집으로 돌아왔다.


  주인은 그에게 코끼리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지금까지 그
밀림 속의 코끼리들은 많은 경고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노예를 매년 수없이
죽여 왔다. 그러나 신은 신드바드만은 사랑했음인지 코끼리들의 분노에 거슬리지
않고 기적적으로 살아나게 했다. 이것은 아마도 신이 그를 이 세상에서 더욱
유익하게 일을 시키려는 증거일 것이라고 하며 그 날부터 신드바드를 자유의
몸으로 하고 재산도 나누어 주며 친형제와 같이 지내게 되었다.


  신드바드는 위험한 바닷길을 피하고 낙타 대상에 합류하여 육로로 무사히
귀국하였다. 사절의 임무를 완수하여 국왕이 많은 보물을 주었으며 그 후로
바그다드를 떠나는 일이 없이 가족들과 행복하게 여생을 보냈다.
  신드바드는 그의 항해담을 다 마치고 히드바드를 향하여
  "저의 친구여! 당신은 내가 겪은 만큼 많은 고난을 당한 사람의 소문을
들었는지요. 내가 이러한 고생을 다하였으니 평화롭게 유쾌한 생활을 즐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요" 하고 말하였다.


  히드바드는 그의 손에 키스를 하고
  "저의 고생은 당신과는 비교도 안 됩니다. 당신은 행복하게 살아야 하며
재산도 이렇게 훌륭하게 사용하니 그 자격도 충분하고 남습니다. 영원히
행복하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신드바드는 다시 그에게 많은 돈을 주며 짐을 운반하는 일은 그만두고
앞으로는 자기의 식탁에서 식사를 함께 하자고 말하였다.


  그렇게 한 것은 히드바드가 뱃사공이던 신드바드를 친구로 사귀게 되는 것을
일생 동안 잊지 못할 기쁘고 당연한 일로 믿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1] Alf layla wa-layla/알프 라일라 와 라일라[2] 동서문화사 판본 기준. '위대한 왕'을 뜻하는 샤흐리야르로 표기된 버전도 있으며, 일본에서는 샤흐리야르 쪽을 정사로 친다.[3] 역시 동서문화사 판본 기준. 샤헤자만이나 샤흐즈만으로 되어 있는 책도 있다.[4] 혹은 당분간 보지 못할 아내가 그리워져서 다시 한 번 보려 했다고 한다.[5] 여담으로 후대의 이야기가 마구 뒤섞인 이상 실제 역사를 거론하는 것은 부적하겠지만, 사산조의 왕 중 '샤 자만' 이라든지 '샤 리아르' 비슷한 이름의 사람은 없다. 어거지로라도 때려 맞추라면 자마습(Djamasp, 재위: 496~498)과 샤흐르바라즈(Shahrbaraz, 재위: 629)가 있기는 한데 행적이나 연대 차이를 보면 도저히 형제일 수 없다. 게다가 자마습의 경우는 애초에 전대 샤한샤이자 형인 카바드 1세가 조로아스터교 사제들과 갈등을 빚다가 반란이 터져서 축출당하고 자신이 샤한샤가 되었다가 형이 탈출해서 군대를 끌고 와서 자기를 폐위하고 실명형에 처했으니 말이 안 되고 샤흐르바라즈의 경우, 본인도 사산 왕조 공위시대에 군대를 끌고 왕위를 차지한 찬탈자였던 데다 당시 사산 왕조는 대혼란기였기에 사방팔방에서 샤한샤를 자칭하는 호족들이 기어나오며 제국이 실시간으로 산산조각나는 상황이었으며, 본인도 반란을 진압하다가 전사하며 1년도 안 되는 재위기간을 마쳤으니 더 불가능하다. 또 형이 살아 있는 상황에서 왕이 된 사람도 몇 있지만 그때 '형'들은 암살당했다. 끽해야 실명이나 감금이었고 그때 이름이 영 달라서 끼워 맞추기 곤란하며 그냥 실제 사람의 이름만 붙인 가상의 사람으로 보는 게 편하다.[6] 이 여자가 하는 말이 상당히 흥미로운데 여자의 정절을 원하면 여자를 억누르지 않는 편이 좋을 것이라고 말한다. 본 작품이 선정성이 심한데다가 마누라를 폭행, 살해하는 이야기가 아무렇지도 않게 나옴을 생각하면 상당히 묘하다.[7] 1년은 52주. 1000일은 2년 9개월 28-29일 정도로, 대략 146-147주. 정상적인 임신 기간은 성교 시점으로 38주이고 3번의 임신 기간이면 도합 114주이므로, 1000일인 146-147주에서 임신기간을 빼면 32-33주가 남는다. 1일차에 임신하고 1000일차에 출산한다는 조건이면 38주 후 출산, 16주 후 임신, 38주 후 둘째 출산, 16주 후 임신, 그리고 출산이면 1000일이 채워진다. 16주이면 3달 2주 정도의 기간이며, 어차피 왕의 배우자라 수유는 유모가 전담하기에 모유수유를 할 필요도 없으니 1달 안에 임신해서 같은 연도에 두 아이를 출산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1000일 사이 임신과 출산 사이를 1-2달 사이로 줄여도 3명의 아이를 낳아 하나는 걷고 하나는 기고 하나는 갓난아이일 수 있다. 아이는 빠른 아이는 8개월차에 느린 아이여도 15개월이면 걷고 12개월 이전까지 보통은 기어다니므로, 1000일 사이에 걷는 아이, 기어다니는 아이, 갓난아이 셋이 생긴 건 있는 건 충분히 가능한 조건이다.[8] 물론 독실하거나 꼴통인 경우가 아니라면 위성TV를 통해 튀르키예 드라마, 영화나 레바논 뮤직비디오, 인도 드라마 등을 통해 이러한 장면들을 잘만 본다.[9] 기독교권 백인 국가들의 이미지가 강렬해서 그렇지 아랍 등 중동 국가들도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흑인들을 겨냥한 노예무역으로 악명이 높았다. 특히 과거 아랍 세력들에 의해 노예 무역과 전쟁, 침략, 이슬람 강제개종 등의 피해를 입었던 동아프리카와 서아프리카 지역의 흑인 국가 사람들에게 이집트, 알제리, 튀니지, 모로코, 리비아, 사우디아라비아, 오만, 이라크, 요르단, 시리아, 예멘, 레바논 등 북아프리카, 중동 아랍 국가들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보면 십중팔구 욕을 퍼붓거나 나쁘게 여길 정도이며, 일부 사람들은 아랍권과 정치적으로 적대관계에 있는 이스라엘과 미국을 옹호하기도 한다. 다만 아랍 이슬람 세력들의 침입을 받지 않았던 남아프리카 공화국이나 나미비아, 짐바브웨, 레소토 등 남아프리카 지역 흑인국가들의 경우 중동, 북아프리카 아랍 국가들과는 외교적으로 우호적이거나 반감이 동아프리카나 서아프리카 지역에 비해 약한 편이다. 여담으로 노예무역을 통해서 대량의 흑백혼혈이 양성된 아메리카, 유럽 등지와는 달리 중동은 흑백혼혈이 적은데 이는 남성 흑인 노예들은 거세하고 여성 흑인 노예들이 낳은 혼혈아는 바로 죽여버렸기 때문이다.[10] 갈랑 역본에서는 난교에 참여한 남성 노예들이 전원 흑인이었다고 하나, 원본에 가까운 버턴 역본에서는 샤 리아르의 아내를 노린 노예 10명의 경우 백인이었다고 한다. 왕비에게 총애를 받던 종마 역할만큼은 어느 역본을 막론하고 흑인으로 고정되어 있으며, 이 왕비 전용 노예는 갈랑 역본에서는 마수드, 버턴 역본에서는 사이드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샤 자만의 아내를 빼앗은 주방 노예 또한 흑인으로만 등장한다.[11] 이야기 중에 주인공 왕자의 편에 식인귀(구울)가 있는 이야기도 있는 점도 특이하다.[12] 단, 솔로몬 왕은 예언자이자 대마법사 명군으로 괜찮게 나온다. 애초에 솔로몬을 가장 중요한 25명의 예언자 중 하나로 묘사하는 이슬람교의 관점에 따라 솔로몬은 당연히 옹호해야지 격하할 수 없다.[13] 현재 이슬람 세계의 반지성주의, 금욕주의, 정체성 정치, 내세지향성은 19세기부터 영국, 미국석유 획득을 위해 와하비즘을 내세우는 사우디아라비아, 걸프 왕정 국가들을 후원하고 이 때문에 생긴 반발로 이집트, 이란, 인도, 북아프리카에서 살라피즘이 발생한 이후의 현상이다. 와하비즘은 주요 이슬람 문명권에서 소외받던 네지드 아랍인들과 베두인의 전투적 금욕주의의 영향이 짙게 깔려있다. 게다가 반서양, 반기독교를 내세우는 살라피즘은 역설적으로 독일, 러시아옥시덴탈리즘영국, 미국기독교 우파의 영향을 받았다.[14] 게다가 마지드 나와즈가 지적한 것처럼 19세기 이전까지 이슬람 세계에서는 LGBT혐오 정서가 존재하지 않았다.[15] 애초에 이슬람을 세운 아랍인은 그냥 아라비아의 유목민 수준에 불과했고 바로 옆동네이자 일찍이 정복한 사산 제국(페르시아)는 이때에도 이미 수천년의 역사와 높은 수준의 문화를 가진 선진국이었다. 오죽하면 이슬람교에서 그토록 떠받드는 샤리아도 사실은 동로마법과 페르시아 법을 참고해 만든 것이라고 한다.[16] 주인공은 분명 사산조의 왕인데 셰에라자드의 이야기 속에는 아랍이 중심이며 바그다드, 바스라, 다마스커스 같은 아랍 정복 이후의 도시나 하룬 알 라시드 같은 실제 역사의 사람들까지 등장한다.[17] 이스탄불 프랑스주재 대사로 15년간 근무하면서 오스만어와 아랍어를 익히고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이집트 등 아랍 지역 각지를 여행했다.[18] 그래서 아라비안나이트의 공간적 묘사는 10세기의 바그다드와 14세기 카이로보다 18세기 파리와 유사한 면이 보이기도 한다.[19] 리처드 버틴. 고산고정일 번역. (2010).: 아라비안 나이트 1. 동서문화사. p. 18[20] 아라비안 나이트와 반대로 여자에게 헌신하는 남자의 이야기들이 주 내용이다. 또한 페르시아가 배경이다보니 분위기 자체도 다른 편이며 아라비안 나이트의 신나는 주인공 굴리기와는 달리 전체에 걸쳐 순애물의 분위기다.[21] 그것과 마찬가지로 이쪽도 상당히 외설스러운 내용이 담겨 있다. 대표로 멀쩡한 남자가 벙어리인 척 연기하고 수녀원에 들어가 막내 수녀부터 수녀원장까지 동침하는 이야기가 있다.





신구약 중간기


신구약 중간기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가?

구약의 마지막 책들과 그리스도의 출현 사이의 시간을 “신구약 중간기” (또는 “신구약 사이의 기간") 라고 부릅니다. 
이 기간 동안에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예언의 말씀이 없었기 때문에, "400년의 침묵기"라고 부릅니다. 
이 기간 동안에 팔레스타인의 정치적, 종교적, 사회적 분위기는 크게 바뀌었습니다. 
그때 발생한 일들의 대부분은 선지자 다니엘에 의해 예언되었습니다(다니엘 2장, 7장, 8장, 11장을 참조하고 역사적인 사건들을 비교해 보십시오).

이스라엘은 기원전 532-325년경에 페르시아 제국의 통치하에 있었습니다. 
페르시아인들은 유대인들이 거의 아무런 간섭을 받지 않고 그들의 종교를 유지하도록 허용하였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성전을 재건하고 그곳에서 예배하는 일도 허용했습니다(역대하 36:22-23; 에스라 1:1-4). 
이 기간은 구약 성경 시대의 마지막 100년과 중간기의 처음 100년을 포함합니다. 
폭풍이 몰려오기 전에 고요한 것처럼, 이 기간은 상당히 평화롭고 안락한 시기였습니다.

중간기가 시작되기 전, 알렉산더 대왕은 페르시아의 다리오 왕 Darius을 물리치고, 온 세계에 헬라제국의 통치를 확립하였습니다. 
알렉산더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생이었고 헬라 철학과 정치학을 잘 배웠습니다. 
그는 그가 정복한 모든 땅에 헬라 문화를 장려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 결과, 히브리어 구약 성경은 헬라어로 번역되었으며, 이로 인해 70인역이라는 헬라어 성경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구약 성경을 인용한 대부분의 구절은 70인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알렉산더는 유대인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긴 했지만, 여전히 헬라적 생활 방식을 강력하게 장려했습니다. 
헬라 문화는 매우 세속적이고, 인본주의적이며, 경건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이로부터 좋은 영향을 받지 못했습니다.

알렉산더가 죽은 후, 유대는 일련의 후계자들에 의해 통치되었으며, 셀루시드 왕조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Antiochus Epiphanes에 이르게 됩니다. 
안티오쿠스는 유대인들의 종교의 자유를 거부하였을 뿐만 아니라, 훨씬 더 악한 일을 행하였습니다. 
기원전 167년경 그는 합법적인 제사장직을 무너뜨렸으며, 불결한 동물들과 이교도 제단으로 성전을 더럽히고 모독했습니다(마가복음 13:14를 보면 미래에 비슷한 사건이 일어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안티오쿠스의 행동은 종교적인 강간과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마카비 형제들과 하스모니안 가문이 주도한 안티오쿠스에 대한 유대인의 저항으로 합법적인 제사장들이 회복되었고 성전이 복구되었습니다. 마카비 항쟁의 시기는 전쟁과 폭력과 내란의 시기였습니다.

기원전 약 63년 경 로마의 폼페이우스는 팔레스타인을 정복하고, 유대 전체를 시저의 통치 하에 두었습니다. 
로마 황제와 상원 의원에 의해 결국 헤롯이 유대의 왕이 되었습니다. 
로마 제국은 이스라엘에 세금을 부과하고 유대인들을 통제하며, 종국에는 메시아를 로마의 사형틀인 십자가에서 처형시켰습니다. 
이제 유대 지방에는 로마, 헬라, 히브리 문화가 혼합 되었습니다.

헬라제국과 로마제국의 점령 기간 동안 팔레스타인에서는 두 개의 중요한 정치적, 종교적 집단이 출현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구전을 통해 내려오던 전통을 모세 율법에 추가하였고, 마침내 자신들의 율법을 하나님의 율법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마가복음 7:1-23 참조).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종종 바리새인들의 가르침과 일치하였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공허한 율법주의와 긍휼의 마음이 부족한 것에 대하여 강력하게 비난하셨습니다. 
사두개인들은 귀족들과 부자들을 대표했습니다. 
산헤드린을 통해 권력을 행사하던 사두개인들은 구약에 속한 모세의 책들 외에는 모두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부활을 믿기를 거부했고, 헬라 사람들을 크게 동경함으로써 일반적으로 헬라 문화에 물들어갔습니다.

그리스도의 사역을 위한 무대를 준비하기 위하여 중간기에 일어난 사건들은 유대 백성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습니다. 유대인들과 다른 나라에서 온 이방인들 모두가 종교에 불만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이교도들은 다신론의 정당성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로마인과 헬라인은 이제 그들의 신화에서 벗어나 헬라어와 라틴어로 쉽게 읽을 수 있게 된 히브리어 성경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낙담했습니다. 다시 한번, 그들은 정복 당하고, 억압 받고, 더럽혀졌습니다. 소망은 거의 사라진 상태였고, 믿음도 바닥까지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그들과 그들의 신앙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메시아의 등장 밖에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메시아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여러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고 계셨습니다. 로마인들은 도로를 깔았고 (복음의 전파를 돕기 위해서), 모든 사람들은 공통의 언어인 코이네 헬라어 (신약성경을 기록한 언어)를 이해하고 있었고, 여행하기에 (복음을 더 편만하게 전파하는 것을 돕기 위해서) 불편하지 않은 자유와 평화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신약 성경은 유대인 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위한 소망이 어떻게 이르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분을 찾던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예언을 성취할 것을 인식하고 대망하였습니다. 로마 백부장, 지혜자들, 바리새인 니고데모의 이야기는 그 시대에 몇 가지 다른 문화권 출신의 사람들에 의해 예수님이 어떻게 메시아로 인식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중간기의 "침묵의 400년"은 지금까지 전해졌던 이야기 중에서 가장 위대한 이야기,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의해 깨어졌습니다.


신구약 중간사 개요

시작하는 말

‘신구약 중간사’(中間史, Intertestamental period)는 무엇이며, 어떤 의미가 있는가? 구약 말라기 선지자에서 신약 세례 요한의 등장 사이에는 400여 년이라는 간격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말라기를 읽고 마태복음을 펼친 독자는 순식간에 약 4세기를 뛰어넘는 셈이 된다. 그런데 성경만으로는 이 기간에 일어난 일을 알 수가 없다. 하나님은 ‘나의 사자’1)를 마지막으로 세례 요한 전까지 자신의 백성을 향해 침묵하셨다. 이 400여 년의 시간을 신구약 ‘중간사’(中間史) 혹은 ‘중간기’(中間期)라고 한다.

(1) 신약성경 이해의 첫 단추

신약성경은 많은 왕조(王朝)의 발흥과 쇠퇴를 단숨에 뛰어넘고 독자를 거대한 로마제국으로 안내한다. 독자들은 또 바리새인, 사두개인 등 구약에서 발견할 수 없는 유대교의 분파들을 만나게 되고 수전절(修殿節, Hanukkah) 같은 새로운 절기를 보게 된다. 분봉 왕, 회당 등 낯선 단어도 발견한다.  

이 때문에 성경 특별히 신약 이해에 있어 신구약 ‘중간사’에 대한 공부는 매우 중요하다. 그 시대의 역사와 문화의 배경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는 첫 단추가 된다. 레이몬드 설버그(Raymond F. Surburg)는 신구약 중간사의 의의와 중요성을 이렇게 말했다.

“중간사 기간에는 중요한 발전들이 있었다. 강대한 왕도들의 교체가 있었고 유럽의 판도가 두세 차례나 바뀌었으며 유럽과 아시아 국가들 사이의 국경선이 크게 변모하였고 새로운 문화들이 출현했다.2) 

또 복음서에서 우리는 산헤드린공회를 만나고, 장로들의 전통에 대해 읽으며, 서기관들의 활동을 대하게 된다. (중약)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은혜를 베푸셨을 때 팔레스타인은 유대와 사마리아와 갈릴리 이렇게 셋으로 분할되었다. 성경상의 이런 분할은 어떻게 유래되었는가?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이 신구약의 중간역사 때 있었던 유대인들의 지리와 역사와 종교적 발전을 연구할 때에 비로서 알 수 있다.”3)

그러나 ‘중간사’에 대한 연구는 쉽지 않다. 자료가 제한적이고 그마저도 불확실한 내용이 많다. H. 야거스마는 “이 기간의(편집자 주, BC 330년-AD 135년) 이스라엘 역사를 재구성하는 데 있어서 우리는 자주 상당히 많은 불확실한 것들과 가정들로 허덕이지 않으면 안 된다. (중략) 이 기간 에 이스라엘 역사의 학문적인 토론에 있어서 실제로 많은 점이 그 어떤 일치된 견해가 없다.”4)라고 어려움을 토로한다.

동시에 그는 ‘중간사’ 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들로 구약성경, 신약성경, 외경(外經, Apocrypha), 위경(僞經, Pseudographia), 필로의 저작, 요세푸스의 저작, 헬라와 라틴저작, 사해사본, 탈무드, 미드라쉬, 미쉬나 같은 랍비 문헌, 고고학의 증거 등을 말한다.

(2) 메시아를 보내시기 위한 준비 기간

신구약 ‘중간사’가 중요한 또 하나의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은 400여 년의 그 기간을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보내시기 위한 하나님의 예비적 차원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것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갈 4:4) 

성경은 ‘때가 차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다고 기록한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때가 찼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때’란 무엇인가? 약 400년 동안 어떤 일이 있었을까? 학자들은 중요한 몇 사건을 공통으로 언급한다.  

  ① 팍스 로마나(Pax Romana)

로마의 초대(初代) 황제 아우구스투스(Gaius Octavius Thurinus, BC 63-14 AD)부터 소위 ‘오현제(五賢帝)’5)라 불리는 다섯 명의 황제가 통치할 때까지의 약 200년간 계속된 로마의 평화를 뜻한다. 외국과 크고 작은 전쟁과 내부의 반란(叛亂) 등 군사적 충돌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로마제국(Roman Empire)이 영토 확장을 최소화하면서 상대적으로 평화를 누린 시기임은 분명하다.

로마제국은 이 기간 정복전쟁(征服戰爭)을 통해 영토를 넓히기보다 국경을 요새화해 수비하는 데 집중했다. 그에 걸맞게 군대를 재편하는데 공병(工兵)을 집중적으로 육성했다. 자연스레 보병(步兵)은 쇠퇴하게 된다. 육성된 공병은 로마의 토목공사 기술을 크게 발전시켰다. 이 기술을 토대로 만들어진 약 28만km의 잘 뻗은 도로는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을 탄생시켰다. 로마제국이 준비해 놓은 이 길은 사도 바울과 많은 전도자가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파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② 언어의 통일과 구약 70인 역 탄생

B.C. 336년 약관 20세의 한 젊은이가 암살된 아버지의 뒤를 이어 마게도냐(Macedonia) 도시국가 왕으로 등극했다. 그는 바로 그의 아버지필립 2세(Philip II, BC 382-336)가 한 번도 통합된 적이 없는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을 자신의 발아래 굴복시킨 전쟁 전문가였다.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은 반란을 일으켰다. 아버지 필립 2세는 암살당했고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젊은이는 반란군을 빠른 속도로 진압했다. 그리스 전역을 순식간에 장악한 그는 아버지가 맡았던 페르시아 원정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바로 알렉산더(Alexander III of Macedon, BC 356-323)였다. 그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순간이었다.

알렉산더는 마게도냐 사람이었으나 그리스의 문화를 존중했다. 이는 그의 스승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BC 384-322)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으로 알려진다. 알렉산더는 정복한 지역마다 자신의 이름을 딴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라는 도시를 세우고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를 융합한 헬레니즘(Hellenism) 문화를 탄생시켰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알렉산더를 정복자인 동시에 헬레니즘의 전파자로 기록한다.

본래 팔레스타인이나 지중해 연안은 아람어(‎Aramaic language) 등을 많이 사용했으나 알렉산더가 정복한 이후 헬라어(Greek language)를 세계공통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언어의 통일은 복음 전파에 큰 유익을 주었다. 김병국 교수는 “언어의 통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었는가 하는 것은 초기 기독교가 번성했던 지역과 헬라어가 공용어였던 지역이 거의 정확히 겹친다는 사실이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6)고 했다.

또 통일된 헬라어로 구약성경 ‘70인 역’(七十人譯, LXX, Septuagint)이 탄생했다. ‘70인 역’이란 이스라엘 12지파에서 6명씩 선정된 72명의 번역자가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성경이다. 그래서 70을 의미하는 라틴어 ‘셉투아진트’라 불리기도 하고 수비법에 따라 ‘LXX’(50+10+10)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70인 역’의 번역 작업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BC 285-247년경 이루어졌다.

이 ‘70인 역’ 구약성경은 초대교회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1세기는 유대인들조차 특별한 교육을 받지 못했을 경우 히브리어(Hebrew Language)를 알지 못했던 시대였다. 초대교회의 많은 구성원이었던 이방인들은 당연히 히브리어를 몰랐다. 만약 이 ‘70인 역’ 구약성경이 없었더라면 다수의 사람이 구약성경을 읽거나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편 헬라어는 지역과 계층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성경은 여러 헬라어 종류 중 가장 대중적이고 쉬운 편에 속했던 ‘코이네 헬라어’(Κοινὴ Ἑλληνική)로 기록되었다. 이 역시 복음이 대중적으로 전해지는 데 크게 기여한 요소였다. 하나님은 비록 침묵하셨으나 여전히 이같이 역사 속에 개입하셨고 그리스도를 보내실 ‘때’를 조성해가셨다.

1) 말라기의 뜻, 말라기가 고유 명사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2) 레이몬드 설버그,『신구약 중간사』(기독교문서선교회, 2004), 9.
3) 같은 책, 11.
4) H.야거스마,『신약배경사』(솔로몬, 2004), 19-20.
5) 오현제는 로마의 12대 황제인 네르바, 13대 트라야누스, 14대 하드리아누스, 15대 안토니우스, 16대 아우렐리우스를 말한다.
6) 김병국,『신구약 중간사 이야기』(대서, 2013), 34.

1.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멸망

사울, 다윗, 솔로몬이 40년씩 통치함으로 120년간 유지된 통일 왕국 이스라엘은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때에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로 양분된다.

폴 존슨는 이 남북분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르호보암은 무력으로 통일 왕국을 유지할 군사 수단과 방편이 없었고, 북쪽 지역 사람들은 독자 왕조를 세우면서 르호보암과 결별했다. 신(新) 아시리아제국(Neo-Assyrian Empire, BC 911-609)과 신(新) 바빌로니아제국(Neo-Babylonian Empire, BC 626-539) 이 연이어 부상(浮上)하는 시대에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이라는 작은 두 왕국은 각자 파멸을 향해 나아갔다.”1)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을 포함 19명의 왕이 다스리다 B.C. 722년 앗수르(Neo-Assyrian Empire)에 의해 영원히 멸망하고 남유다는 르호보암을 시작으로 20명의 왕이 통치하다 B.C. 586년 바벨론(Neo-Babylonian Empire에 나라가 망하게 된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는 크고 작은 이방의 침입을 받았으나 각각 앗수르와 바벨론에게 멸망하기 전까지 국가로서의 주권을 상실한 적은 없었다.

(1) 앗수르에 의한 북이스라엘의 멸망

BC 8세기 유프라테스(Euphrates)강을 넘어보지 못하고 번번이 실패했던 앗수르가 역사에 자신들의 이름을 새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제국 건설 중심에는 디글랏빌레셀 3세(Tiglath-Pileser III, BC?-727, 성경에는 ‘불’로 기록)라는 강력한 왕이 있었다. 존 브라이트는 그를 “앗시리아 역사에서 이 시대의 막을 열고 진정으로 제국을 창건한 인물로 매우 활기차고 유능한 통치자였다.”2)라고 평가한다. 폴 존슨은 디글랏빌레셀이 “호전적인 아시리아 민족을 제국주의자들로 바꾸어놓았다.”3)라고 했다.

앗수르가 점점 강성해지는 시기에 북이스라엘의 상황은 참혹했다. 왕위(王位)를 찬탈(簒奪)하기 위한 암살이 이어졌고 10년 사이에 다섯 명의 왕이 바뀌기도 했다. 북이스라엘의 16대 왕 므나헴은 앗수르가 침공하자 조공을 바쳐 왕좌를 지켰다. 요세푸스는 “므나헴은 앗수르군과 싸워서 이득이 될 게 조금도 없다고 생각하고 은 천 달란트를 주어 전쟁을 종식시켰다. 므나헴은 이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 각 사람당 인두세(人頭稅)를 50드라크마씩 내도록 강요했다.”4)고 한다.

므나헴에 이어 왕위에 오른 브가히야는 불과 2년 만에 부하 베가에 의해 암살을 당했다. 왕위에 오는 베가는 반(反) 앗수르 정책을 펼쳤다. 학자들은 베가의 반역이 친(親) 앗수르 정책에 대한 반기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게오르크 포어러는 “베가가 그의 선임자들과는 다른 정치를 시작했는데 여기에 베가를 살해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5)라며 “(친 앗수르 정책은) 오히려 백성들과 국가를 많이 손상시켰다.”6)라고 했다.

존 브라이트는 “다메섹의 왕 르신과 몇몇 블레셋인 군주들이 앗시리아에 대한 저항 세력을 조직하려다가 므나헴이 그들에게 합류하지 않으려는 것을 알고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그들의 계획에 호응할 것으로 생각된 베가를 밀어주었을 가능성이 있다.”7)고 했다. 베가는 다메섹의 왕 르신, 수리아(아람)와 동맹을 맺고 앗수르에 대항할 준비를 했다. 블레셋과 에돔도 동맹군에 합세했다. 동맹군은 남유다도 함께 하길 원했으나 유다는 이를 거절했고 그러자 동맹군의 칼이 유다를 먼저 겨눴다. 당시 유다의 왕은 아하스였다.

동맹군은 예루살렘을 포위했으나 생각만큼 빠르게 성을 정복하지 못했다. 아람과 다메섹은 성 인근의 도시와 수비대 정도만 무력화시킨 후 북이스라엘을 남겨두고 다메섹으로 돌아갔다. 아하스는 이스라엘을 꺾을 기회라고 생각해 남아있는 북이스라엘과 전투를 벌였지만 그러나 생각과 달리 전쟁에 대패하고 만다.

요세푸스는 “예루살렘 왕은 수리아 사람들이 귀국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스라엘 왕쯤이야 한 번 싸워 볼 만하다고 생각하고 군대를 성 밖으로 끌고 나와 대결하였다. 한바탕 접전을 벌였으나 그만 이스라엘 왕에게 패하고 말았다. (중략) 그날 이스라엘군에 의해 전사한 유대 군사가 120,000명이나 되었다.”8)고 기록했다.  

더 이상 왕권을 유지할 힘이 없었던 아하스는 성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금을 내어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 3세에게 바치면서 도움을 요청한다.(왕하 16:7,8) 디글랏빌레셀 3세는 그 길로 수리아를 공격해 초토화시킨 다음 다메섹을 점령하고 르신 왕을 죽였다. 또 다메섹 백성을 다른 곳으로 보내고 앗수르 인들을 다메섹으로 이주시켰다.(왕하 16:9)

이 와중에 북쪽 이스라엘에는 또 다른 변화가 찾아왔다. 호세아는 자신의 친구 베가를 살해하고 북이스라엘의 19번째 왕에 오르게 된다. 호세아는 티글랏빌레셀 3세가 죽고 살만에셀 5세(Shalmaneser V, BC ?-722)가 앗수르의 왕위에 오르자 바치던 조공을 중단하고 애굽에 도움을 요청한다. 존 브라이트는 이것을 자살 행위라고 표현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자살 행위였다. 이때 이집트는 대단치 않은 군소 국가들로 나뉘어 각축하고 있었기 때문에 누구를 도울 처지가 못 되었다.”9) 결국 호세아의 잘못된 판단은 역사가 그를 북이스라엘의 마지막 왕이라고 기록하도록 만들었다. 살만에셀 5세(Shalmaneser V, BC ?-722)가 침공해왔다. 이스라엘은 사마리아 성에서 약 3년을 버텼지만 결국 함락당했다. 사마리아를 함락한 살만에셀 5세에 이어 왕위에 오른 사르곤 2세(Sargon II, BC 765-705)가 북이스라엘을 철저히 짓밟았다.

폴 존슨은 “고고학 발굴 자료에서도 당시의 재앙을 확증해주는 증거가 충분히 나왔다. 사마리아 내의 왕실 구역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므깃도(Megiddo)는 완전히 무너졌고 무너진 건물 더미 위에 아시리아식 새 건물이 세워졌다. 하솔(Hazor)의 성벽도 무너졌다. 세겜(Shechem)은 완전히 초토화되었다.”10)고 했다.

이후 북이스라엘은 이방인들이 혼합되어 사는 지역으로 변했다. 앗수르는 바벨론과 구다와 아와와 하맛과 스발와임에서 사람을 옮겨다가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사마리아 여러 성읍에 거주하게 했다.(왕하 17:24)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그리고 남아있는 이스라엘은 이제 이방민족과 합쳐진 혼혈민족이 되고 말았다. ‘사마리아인’의 탄생이었다.

(2) 앗수르의 몰락과 바벨론의 급부상

앗수르의 전성기는 그리 길지 못했다. 앗수르는 속국들을 지나칠 정도로 강하게 다스렸다. 앗수르와 일대일로 맞설 나라는 없었으나 공공의 적에 대한 증오로 힘을 합칠 나라들은 있었다. 존 브라이트는 “속국들의 복종을 강요하여 끊임없이 목을 조였기 때문에 앗시리아를 증오하지 않는 나라가 거의 없었다.”11)고 했다. 앗수르의 몰락은 사르곤 2세, 산헤립(Sennacherib, BC 740-681), 에살핫돈(Esarhaddon, BC ?-669)에 이어 왕위에 오른 아슈르바니팔(Ashurbanipal, BC ?-627) 때에 본격화되었다.

아슈르바니팔의 형 샤마이 슘 우킨(Shamash-shum-ukin, BC ?-648)은 앗수르의 속국인 바벨론의 통치자였다. 샤마이 슘 우킨은 리디아, 시리아, 애굽 등과 연합전선을 펼쳐 앗수르를 압박했다. 아슈르바니팔은 연합군을 물리쳤고 이 과정에서 샤아미 슘 우킨은 사망했지만 앗수르는 많은 힘을 소진했다. 아슈르바니팔 사망 후 아들 신사르 이스쿤(Sinsharishkun, BC ?-626)과 이 와중에 반란자 아슈르 에텔 일라니(Ashur-etil-ilani, BC ?-627) 사이에 일어난 수년의 왕위 다툼은 앗수르의 쇠퇴를 가속화 시켰다.

바벨론은 다시 기회를 잡았다. 신(新) 바벨론의 창건자 나보폴라살(Nabopolassar, BC 658-605)은 B.C. 612년 니느웨를 공격해 3개월 만에 점령했다. 앗수르가 더 이상 버틸 수 있는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남은 앗수르 병력이 하란으로 도망가 항전을 펼쳤지만 바벨론은 가볍게 그들을 제압했다. 어떤 열방의 신(神)도 앗수르의 정복을 막은 적이 있었느냐고 큰소리 치던(사 36:18-20) 앗수르의 교만은 그렇게 꺾였다.

(3) 바벨론에 의한 남 유다의 멸망

BC 609년 애굽 왕 느고 2세(Necho II, BC ?-595)는 갈그미스(Carchemish)에서 최후의 항쟁을 펼치는 앗수르로부터 도움을 요청받는다. 바벨론의 급부상에 위기를 느낀 애굽은 앗수르를 돕기 위해 원정길에 오른다. 남유다의 16번째 왕 요시야가 애굽의 원정길을 막아섰다. 존 브라이트는 “요시야가 공식적으로 바벨론의 동맹국이 되었는지 아니면 독자적으로 행동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집트-앗시리아의 연합군이 승리하게 되면 이집트의 야심에 시달려야 했을 것이기 때문에 그는 그 연합군의 승리를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12)라고 했다.  

요시야는 애굽의 출정을 막기 위해 므깃도에서 전투를 벌였지만 패배하고 본인도 전사한다. 애굽은 서둘러 갈그미스로 향해 앗수르와 합류했으나 전쟁은 바벨론의 승리로 돌아갔다. 화가 난 애굽의 느고 2세는 애굽으로 돌아가며 요사야에 이어 왕위에 오른 여호아하스를 포로로 잡아 애굽으로 끌고 가면서 여호아하스의 형인 엘리야김을 여호야김으로 개명시켜 왕으로 앉혔다.

BC 605년 애굽의 느고는 2세는 다시 한번 갈그미스로 향한다. 이번에도 승자는 나보폴라살에 이어 왕위에 오른 바벨론의 느부갓네살(Nebuchadnezzar II, BC 634-562)이었다. 느부갓네살은 바벨론으로 돌아가며 유다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가는데 이때 다니엘과 세 친구가 끌려가게 된다. 유다 백성은 바벨론에 의해 세 차례에 걸쳐 포로로 끌려가고 세 차례에 걸쳐 귀환하게 되는데 그 서막이 시작된 것이다.

유다 멸망의 결정적 요인은 18대 왕 여호야김의 잘못된 판단이었다. BC 601년 바벨론은 애굽과 다시 한번 전쟁을 치르게 되는데 이 전투에서 애굽과 바벨론 모두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이때 여호야김은 바벨론을 배신하고 애굽과 손을 잡는다. 느부갓네살은 바벨론의 속국이었던 모압, 암몬, 아람 등을 이용해 유다를 치고 이 과정에서 여호야김이 죽는다. 이후 왕위에 오른 여호야긴은 느부갓네살에 의해 바벨론으로 끌려가는데 이것이 2차 포로였고 이때 에스겔 선지자가 포함되어 있었다. 한편 여호야긴은 바벨론으로 끌려가고 37년 만에 풀려나 죽을 때까지 좋은 지위를 누리며 살게 된다.(왕하 25:27-30)

여호야긴에 이어 왕위에 오른 시드기야는 바벨론에 항복하라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을 무시하고 바벨론에 반기를 든다. B.C. 587년 바벨론은 유다로 진격해 18개월 동안 예루살렘 성을 에워쌌다. 예루살렘성은 기근이 심해 양식이 떨어지는 지경에 이르렀다.(왕하 25:1-3) 더는 버틸 힘이 없었던 유다는 제대로 된 저항 한 번 해보지 못한 채 바벨론에 철저하게 짓밟힌다.

느부갓네살의 신복 시위대장 느부사라단(Nebuzaradan)은 성전과 왕궁을 불사르고 예루살렘의 모든 귀인의 집까지 불살랐으며 예루살렘 주위의 성벽을 헐고 백성들을 포로로 끌고 갔다.(왕하 25:8-11) 시드기야 왕은 두 눈이 뽑히고 사슬에 결박당해 바벨론으로 끌려갔다.(왕하 25:7) 시드기야는 죽는 날까지 감옥에서 나오지 못했다. 요세푸스는 시드기야가 죽자 바벨론은 거창하게 장례를 치러주었다고 전한다.13)

(4) 유대 땅에 남은 자들

바벨론은 유대 땅에 일부 백성들을 남겨두었다. 주로 가난한 농민들이어서 반역은 생각지도 못했다. 바벨론은 이렇게 남은 자들을 다스릴 총독으로 그달리야를 임명했다. 그달리야의 아버지 아히감은 예레미야의 목숨을 구해준 적이 있었다.(렘 26:24) 느부사라단은 예레미야에게 바벨론에서의 좋은 대우를 약속하며 동행하길 권했지만 예레미야는 거절하고 황폐한 유대 땅에 남았다.

바벨론 군대가 철수하자 바벨론 군대를 피해 도망쳤던 무리가 다시 돌아왔는데 그중 요세푸스가 사악하고 교활하다고 한 이스마엘이 총독 그달리야를 암살한다. 그달리야가 총독이 된 지 불과 2개월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바벨론의 보복이 두려웠던 유다 백성은 대부분 애굽으로 피신했다.(왕하 25:25,26) 이제 유다 땅은 텅 비어버렸다. 한편 애굽으로 내려갔던 일부 유다 백성 역시 약 5년 뒤에 애굽으로 쳐들어온 느부갓네살에 의해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비참한 결말을 맞이한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남쪽 유다가 바벨론으로 끌려간 기간을 130년 6개월 10일이라고 계산했다.14) 게오르크 포어러는 “주전 587년은 이스라엘의 삶에 있어서 가장 깊은 단절을 의미하였다. 그 뒤에 계속되고 있는 것은 이전에 있던 ‘이스라엘의 역사’와는 다른 의미 즉 이방 통치 아래 강한 종교적인 토대를 가지고 살아갔던 한 민족사를 의미한다.”15)라고 평가했다.

1) 폴 존슨,『유대인의 역사』(포이에마, 2014), 119.
2) 존 브라이트,『이스라엘의 역사』(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3), 368.
3) 폴 존슨,『유대인의 역사』(포이에마, 2014), 126.
4) 요세푸스,『요세푸스Ⅰ: 유대 고대사 』(생명의말씀사, 1987), 608.
5) 게오르크 포어러,『이스라엘 역사』(성광문화사, 1986). 202.
6) 같은 책, 202.
7) 존 브라이트,『이스라엘의 역사』(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3), 371.
8) 요세푸스,『요세푸스Ⅰ: 유대 고대사 』(생명의말씀사, 1987), 611.
9) 존 브라이트,『이스라엘의 역사』(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3), 376.
10) 폴 존슨,『유대인의 역사』(포이에마, 2014), 127.
11) 존 브라이트,『이스라엘의 역사』(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3), 429.
12) 같은 책, 445.
13) 요세푸스,『요세푸스Ⅰ: 유대 고대사 』(생명의말씀사, 1987), 646.
14) 같은 책, 651.
15) 게오르크 포어러,『이스라엘 역사』(성광문화사, 1986). 249.

3. 바벨론 멸망과 유대인 포로의 귀환

앗수르와 애굽을 누르고 패권을 차지한 바벨론 제국은 한 세기도 유지하지 못했다. 바벨론의 강력한 지도자 느부갓네살의 퇴장은 왕좌를 탐하는 이들의 죽고 죽이는 피바람을 불러왔기 때문이다.  

(1) 바벨론의 불안한 국내 정세

느부갓네살 사후 7년 동안 바벨론은 왕이 세 번이나 바뀌었다. 느부갓네살의 아들 아멜 마르둑((Amel-Marduk, BC 562-560, 성경에는 에윌므로닥으로 기록)은 왕위에 오른 지 2년 만에 매부인 네르갈 사르 우슬에게 살해된다. 네르갈 사르 우슬의 통치도 길지 못했다. 그는 4년 만에 죽게 되는 데 뒤이어 성인이 되지 않은 아들 라바시 마르둑(Labashi-Marduk)이 왕좌에 오른다. 미성년자 왕은 단 몇 개월 만에 반대파에 의해 숙청당한다. 라바시 마르둑을 제거한 이는 아람계 귀족 가문의 나보니두스(Nabonidus,  BC 555-539)였다.1)  바벨론 왕권은 이제 느부갓네살 가문에서 새로운 가문으로 넘어갔다.

(2) 종교를 둘러싼 갈등

왕이 된 나보니두스는 바벨론에 종교 갈등을 불러왔다. 자신의 어머니가 숭배하는 달의 신(神)인 신(sin)을 섬기는 신전을 세웠다. 느부갓네살 때부터 마르둑(편집자, 태양의 아들이라는 뜻)을 바벨론의 수호신으로 믿던 바벨론 사람들은 새로운 신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특히 마르둑 제사장들은 나보니두스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종교 문제로 결국에 나라는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나보니두스는 종교 생활을 위해 거처를 옮기고 그의 아들 벧 사르 우슬(Belshazzar, BC ?-539, 성경에는 벨사살로 기록)에게 왕위를 넘겼다. 문제는 바벨론에서 매년 열리는 신년 축제인 아키투(Akitu)가 나보니두스의 부재로 중단되었다는 점이다. 아키투는 바벨론 사람들에게 굉장히 중요한 의식이었다. 아키투의 중단은 나보니두스가 민심을 잃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나보니두스는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바벨론으로 돌아왔지만 그가 순탄하게 바벨론을 다스릴 수 있는 상황은 지나버렸다. 존 브라이트는 “바벨론은 사분오열되어 일개 지방 국가로 전락하였고 국가의 위기사태에 대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2)라고 했다.

(3) 고레스의 등장과 바벨론의 몰락

바벨론의 위협이 되는 존재는 이란 북서부에 자리했던 고대국가 메디아(Media, BC 727-549, 성경에는 메대)였다. 이들은 바벨론의 땅을 호시탐탐 노렸고 두 국가는 간헐적으로 충돌했다. 그런데 페르시아(Persia, 성경에는 바사)에 고레스(Cyrus II of Persia, BC 601-530)라는 강력한 지도자가 등장했다. 고레스는 메디아를 장악하고 근방의 국가들을 빠른 속도로 자신의 발아래 두기 시작했다.

그러자 나보니두스는 고레스를 겁내어 이집트, 리디아(Kingdom of Lydia,  about BC 1200-546)와 동맹을 맺지만 고레스는 리디아를 순식간에 제압했다. 고레스는 곧 바로 바벨론을 치지 않고 다른 쪽으로 영토를 확장했고 이전 어느 나라보다 훨씬 거대한 제국을 창건했다.3)

국력을 견고히 한 후 고레스는 바벨론으로 진격해왔다. 혼란한 바벨론은 고레스를 막을 힘이 없었다. 엘람 지방의 바벨론 장군 고브리아스(Gobryas)는 고레스에게 투항(投降)한 뒤 고국 바벨론에 칼을 들이밀었다.4) 나보니두스는 사력을 다해 바벨론을 지키려 했지만 때는 늦었다. B.C. 539년 고레스는 손쉽게 바벨론으로 입성했다.

한편 고레스는 메디아의 왕 아스티아게스의 외손자였다. 아스티아게스는 자기 딸 만다네(Mandane of Media, BC 584-559?)가 많은 양의 오줌을 누어 도시와 아시아가 잠기는 태몽을 꾼다. 마고스(magus, 메디아의 사제)들의 해몽을 듣고 겁이 난 아스티아게스는 만다네를 페르시아인과 결혼시켜 페르시아로 보낸다.  

그 후 딸 만다네를 보낸 첫해 아스티아게스는 또다시 만다네의 생식기에서 포도나무 한 그루가 자라 아시아를 뒤덮는 꿈을 꾼다. 아스티아게스는 만다네를 메디아로 불러들이고 심복 하르파고스(Harpagus)에게 자신의 딸 만다네가 자식을 낳으면 죽이라고 명령한다. 하지만 하르파고스는 아이를 살리게 되는데 그가 바로 고레스였다.5)

(4) 고레스의 관용정책

고레스의 정책은 피지배층을 강하게 억압하던 앗수르나 바벨론과는 달랐다. 고레스는 일찍이 바벨론으로 붙잡혀온 민족들을 고국으로 돌려보내고 그들의 종교도 인정했다. 특히 마르둑(Marduk)을 섬기는 제사 의식에 참여해 바벨론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이끌어냈다.

폴 존슨은 “고레스 통치 아래 페르시아 제국에서는 바벨론 제국의 통치자였던 아사리아나와는 전혀 다른 종교 정책을 썼다. 페르시아 제국의 권위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피정복민이 자신들의 민족 고유의 종교 신념을 추구하는 것을 기꺼이 허락했다.”6)라고 한다.

게오르크 포어러는 이렇게 말했다. “이는 굴복당한 이방 민족들의 운명이 행복할수록 자신들의 운명은 더 만족을 누린다는 관점이다. 억압보다 더 저항을 일깨우게 하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회유(懷柔) 이외에 어느 것도 그런 저항을 제거할 수 없다.”7) 

고레스는 이같이 각 나라의 정치적 독립은 허락하지는 않았으나 군주를 두고 행정 책임을 맡기는 등 당시로써는 파격적인 정책을 펼쳤다. 이러한 고레스의 피정복민 정책은 페르시아 치하의 국가들의 결속력을 높이며 성공을 거뒀다.

(5) 유대 포로의 귀환

하나님은 고레스 탄생 150년 전에 이사야를 통해 고레스의 등장을 말씀하셨고(사 45:1-8)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 생활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올 것을 알려주셨다.(렘 29:4-14) 말씀대로 고레스는 유다 백성의 귀환을 허락했고 성전을 다시 건축하도록 배려했다.(대하 36:22,23)  유다 백성은 세 차례에 걸쳐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는데 고국으로 귀환 역시 세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편집자, 유대인 역사가 폴 존슨은 스룹바벨 이전 예루살렘 재건 사업을 맡은 여호야긴의 아들 세스바살(세낫살)의 귀환을 1차 귀환으로 보고 스룹바벨을 2차, 에스라를 3차, 느헤미야를 4차 귀환으로 본다.)

B.C. 537년 스룹바벨, 학개, 스가랴 등이 중심이 된 1차 귀환을 시작으로 B.C. 458년, 에스라를 중심으로 한 2차 귀환이 B.C. 444년에는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한 3차 귀환이 이루어진다. 페르시아 즉 옛 바벨론 땅에 남아있기를 자처한 이도 많았다. 고국에 대한 열망이 적은 바벨론 포로 2세대들은 굳이 황폐한 땅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

‘유대인’이라는 말이 구약에 등장하지 않는 단어다. 바벨론이 유다 땅에서 붙잡아온 사람들을 다른 나라의 포로와 구분하기 위해 사용한 명칭이다. 바벨론 포로기부터 유대인은 특정 지역에서 통일된 사상과 관습을 가지고 살아가는 공동체로 보기 어려워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스라엘 밖 유대인은 증가했다. 이들을 흔히 ‘디아스포라’(그리스어로 흩어진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이스라엘을 떠난 유대인들을 통칭하는 말)라고 부른다.

1) 존 브라이트,『이스라엘의 역사』(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3), 483.
2) 같은 책 484.
3) 같은 책 485.
4) 같은 책 493.
5) 헤로도토스,『역사』(숲, 2009), 93-94.
6) 폴 존슨,『유대인의 역사』(포이에마, 2014), 151-152.
7) 게오르크 포어러,『이스라엘 역사』(성광문화사, 21986), 264.

4. 페르시아의 그리스 침공

제대로 된 시장 하나 없을 정도로 가난한 나라였던 페르시아(Persian Empire, BC 539-323)는 메디아와 바벨론까지 흡수하며 황금의 제국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페르시아는 바벨론에 의해 끌려온 포로들을 돌려보내는 지방화 정책을 펼쳤다. 속국을 혼혈족으로 만든 앗수르와 포로를 나라별로 구별해 강력한 중앙 집권화를 이룬 바벨론과는 분명 다른 정책이었다. 유대인 역시 세 차례에 걸쳐 본토로 귀환하게 된다. 물론 귀국을 희망하지 않는 자들은 계속해서 페르시아에 머물 수 있었다.

페르시아(성경에는 바사) 초대 왕 키루스 2세(성경에는 고레스) 이후 왕이 된 캄비세스 2세(Cambyses II, BC ?-522)는 이집트를 정복했다. 캄비세스 2세는 아들이 없는 상태에서 죽었고 새로운 왕으로 다리우스 1세(Darius the Great, BC 550-486)가 오르게 된다. 다리우스 1세의 아들이 에스더의 남편 크세르크세스(Xerxes I, BC 519-465, 성경에는 ‘아하수에로’)이다. 페르시아는 크세르크세스 치하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다고 알려진다.

(1) 실패한 페르시아의 그리스 침공

다리오 1세와 크세르크세스는 각각 두 차례와 한 차례 도합 세 차례에 걸쳐 그리스(Greece) 점령을 시도하지만 실패했다. 먼저 1차 침공은 BC 492년 다레이오스 1세는 마르도니오스를 사령관으로 삼아 육군과 해군을 지휘하여 그리스를 침공하게 했다. 그런데 변수를 만났다. 아토스 곶(Mount Athos)에서 폭풍을 만나 함대가 풍비박산 나버렸다.

역사가 헤로도투스(Herodotus, BC 484-425)는 “(함대는) 아토스 곶을 우회하려 했다. 그러나 그들이 우회하는 동안 도저히 손쓸 수 없는 맹렬한 북풍이 덮쳐 그들을 거칠게 때렸으며 수많은 함선이 아토스에 내동댕이쳐졌다. 300척의 함선이 침몰하고 2만 명 이상의 병사가 죽었다.”1)고 기록되어 있다. 이 와중에 육군은 브뤼고이족 이라는 트라게 부족에게 야습을 당해 많은 병사가 전사하고 말았다. 결국 페르시아는 제대로 된 전투 한 번 해보지 못한 채 병력을 철수해야 했다.

2년 뒤 다레이오스 1세는 다시 한번 전열을 정비하고 그리스 정복에 나섰다. 아테네(Athens)를 목전에 둔 마라톤 광야에 다다를 때까지 페르시아는 거침이 없이 방해요소들을 치고 전진했다. 그러나 치열했던 마라톤 광야에서의 전투(Battle of Marathon, BC 490)는 아테네의 승리로 돌아갔다. 전투의 정면 대결에서는 페르시아가 우세했으나 양측 날개에서는 아테네가 완승했다는 것이 헤로도투스의 기록이다.2)

헤로도투스에 따르면 마라톤 전투(Battle of Marathon, BC 490)에서 페르시아는 약 6,400명이 전사하고 아테네 측은 192명이 전사했다.3) 페르시아인들은 서둘러 배로 돌아와 아테네 군대보다 빠르게 아테네로 진격할 계획을 세웠지만 이마저도 아테네 군사들이 먼저 행동해 계획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페르시아는 2차 원정에서도 패했다.

다레이오스 1세의 1,2차 원정이 실패하고 뒤이어 왕위에 오른 크세르크세스는 2차 원정이 있은 지 10년 후인 BC 480년 3차 원정길에 오른다. 16만 명의 군사와 1,200여 척에 이르는 함대였다. 그야말로 대군이었다. 육지에서 페르시아의 압승이 이어졌다. 그런데 육지에서와 달리 해전에서 반전이 일어났다.

아테네는 지도자로 급부상한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cles, BC 524-459)의 지휘하에 페르시아의 2차 침공 이후 강력한 해군을 양성한 상태였다. 테미스토클레스는 페르시아의 해군을 살라미스섬 인근의 좁은 해협으로 유인해 대승을 거뒀다. 이것이 소위 세계 4대 해전 중 하나로 불리는 살라미스 해전(Battle of Salamis, BC 480)이고 아테네는 이 해전의 승리로 지중해의 강자로 군림하게 된다. 해전에서 완패한 페르시아는 승승장구하던 지상전에서도 잇따라 패배해 그대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세 번의 페르시아 그리스 침공은 이렇게 큰 상처만 남기고 막을 내렸다.

(2) 페르시아 그리스 침공 때의 유대인

페르시아의 초대 왕 키루스(고레스) 2세 때인 BC 537년 스룹바벨과 예수아를 중심으로 한 1차 포로귀환이 이루어진다.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 건축을 시작했다. 키루스 2세에 이어 왕에 오른 캄비세스(Cambyses II, BC ?-522)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후 페르시아와 그리스의 전쟁이 한창이었던 다레이오스 1세 때 학개와 스가랴 등이 대적자들의 방해로 잠시 중단되었던 성전재건 사업을 완수하게 된다. 에스더의 남편이었던 크세르크세스를 뒤이어 왕위에 오른 아닥사스다 1세(Artaxerxes I of Persia, BC ?-424) 때인 BC 458년 에스라를 중심으로 2차 포로귀환이 있었고 BC 444년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3차 포로귀환이 이루어졌다.

1) 헤로도토스,『역사』(숲, 2009), 572.
2) 같은 책, 612.
3) 같은 책, 613.

5. 알렉산더와 그리스제국

그리스(Greece)의 도시 국가들은 페르시아의 세 번에 걸친 침공을 막아냈다. 그중 아테네(Athens)는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cles, BC 524-459)의 지휘로 양성된 해군으로 살라미스 해전을 승리로 이끌며 도시 국가들 사이에서 강자로 부상했다.

(1) 펠로폰네소스 전쟁

그리스 도시 국가들은 페르시아의 침공에 대비하고 페르시아 치하의 그리스인을 해방한다는 명분을 앞세운 아테네를 중심으로 동맹을 형성했다. 동맹국들의 기금을 보관하는 금고가 델로스섬에 있다고 하여 ‘델로스 동맹’(Delian League)이라고 불렸다. 그러나 델로스 동맹은 오래가지 못했다. 자금을 보관하는 장소가 델로스섬에서 아테네로 옮겨졌고 동맹국 내의 아테네의 입김은 더욱 세졌다. 이로 인해 자연스레 여기저기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아테네가 도시 국가의 중심이 될 때부터 ‘델로스 동맹’이 체결되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탐탁지 않게 지켜보던 스파르타(Sparta)는 이들의 균열을 놓치지 않았다. 스파르타는 아테네에 반대하는 도시 국가들과 ‘펠로폰네소스 동맹’(Peloponnesian League)을 맺었다.

BC 431년 스파르타는 아테네에 대한 선제공격으로 ‘펠로폰네소스 전쟁’(Peloponnesian War, BC 431–404)을 일으켰다. 전쟁은 27년간 계속되었다. 스파르타는 페르시아까지 끌어들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하지만 27년의 전쟁은 실상 그들 중 누가 승자 패자라고 말하기 어려운 결과를 가져왔다. 따라서 그리스의 도시 국가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기점으로 급격하게 쇠락(衰落)했다.

 (2) 알렉산더의 등장

절대 강자가 없는 그리스 도시 국가의 패권은 스파르타에서 테베(Thebes)로 테베에서 마게도니아(Macedonia)로 넘어갔다. 마게도니아에 등장한 강력한 부자(父子)로 이제 그리스는 하나로 통합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역사가들이 전쟁의 천재라고 하는 필립포스 2세(Philippos Ⅱ or Philip Ⅱ, Philip of Macedon, BC 382-336)는 한 번도 통합된 적이 없었던 그리스 도시 국가들을 자신의 발아래로 굴복시켰다.

그런데 필립포스 2세의 전성기는 길지 못했다. 그는 페르시아 원정을 준비하던 중 암살(暗殺)당했다. 그리스 도시 국가들은 전쟁 전문가가 죽자 반란을 일으켰다. 펠로폰네소스 전쟁과 같은 혼란이 다시 한번 그리스 도시 국가에 찾아왔다.

이때 반전이 일어났다. BC 336년 필립포스 2세의 뒤를 이어 마게도니아 통치자로 등극한 약관 20세의 한 젊은이는 반란군들을 빠른 속도로 진압했다. 그리스 전역을 순식간에 장악한 그는 아버지가 맡았던 페르시아 원정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가 바로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 BC 336-323)으로 세계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순간이었다.

알렉산더는 다리오 3세(Darius III, BC 380-330, 페르시아 마지막 왕) 치하의 페르시아를 공격했다. 다리오 3세는 급히 도망쳤는데 알렉산더는 다리오 3세를 쫓지 않고 지중해와 소아시아 지역의 도시들을 하나하나 정복하기 시작했다. 그중 두로(Tyres)는 7개월 동안 결사 항전을 벌였지만 항복하지 않았다는 대가로 대학살을 당하고 말았다.

레이몬드 설버그는 “두로 성에 대한 공략은 7개월이 걸려 332년 8월에 함락되었고 이때 두로 사람 8천 명이 살육을 당했으며 3만 명이 노예로 팔려갔다.”1)고 했다. 이후 팔레스타인 블레셋의 가사, 시리아 등을 점령한 알렉산더는 다시 페르시아의 본토를 점령하고 명실상부 대제국의 대왕(大王)이 되었다.

(3) 알렉산더 대왕이 이룩한 대제국

알렉산더는 마게도니아 사람이었지만 그리스 문화를 존중했다. 이는 그의 스승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으로 알려진다. 알렉산더는 자신이 정복한 지역마다 자신의 이름을 딴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라는 도시를 세우고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를 융합한 헬레니즘(Hellenism)을 형성했다. 역사가들은 이런 알렉산더를 정복자인 동시에 헬레니즘 전파자로 기록했다.

본래 팔레스타인이나 지중해 연안은 아람어(‎Aramaic language) 등을 많이 사용했으나 알렉산더가 정복한 이후 헬라어(Greek language)를 공통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언어의 통용은 복음 전파에 큰 유익을 주었다. 김병국 교수는 “언어의 통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었는가 하는 것은 초기 기독교가 번성했던 지역과 헬라어가 공용어였던 지역이 거의 정확히 겹친다는 사실이 잘 말해주고 있다.”2)고 밝혔다.

1) 레이몬드 설버그,『신구약 중간사』(기독교문서선교회, 2004), 21.
2) 김병국 『신구약 중간사 이야기』(대서, 2013), 34.

6. 애굽 프톨레미 왕조와 유대인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III of Macedon or Alexander The Great, 356-323)이 이룩한 그리스제국(Greek Empire, BC 332-323)은 그리 길지 못했다. BC 323년 그는 삼십 대 초의 나이로 갑작스레 죽음을 맞이했다. 알렉산더가 후계자를 남겨놓지 않은 탓에 제국은 일대 혼란에 빠졌다. 대왕이 이루어놓은 제국을 서로 차지하려는 전쟁이 벌어졌다.  

(1) 분열된 그리스 대제국

알렉산더 대왕의 사후 그의 아내 록산나(Roxana, BC 340-310)에게서 유복자(遺腹子)로 아들이 태어났으나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장수들은 성년이 되기 전 록산나와 아들(Alexander IV of Macedon, BC 323-309)을 살해했다. 그리고 알렉산더 대왕의 부하 장군들이었던 프톨레미(Ptolemy Ⅰ Soter, BC 367-282), 카산드로스(Cassander, BC 355-297), 리시마코스(Lysimachus, BC 360-281), 셀류쿠스(Seleucus I Nicator, BC 358-281)는 동맹을 맺고 알렉산더 대왕을 뒤이어 그리스제국의 왕이 된 안티고누스(Antigonus I Monophthalmus, BC 382- 301, 알렉산더 부하 장군 중 한 사람)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프톨레미는 애굽, 카산드로스는 마게도니야, 리사마코스는 수리아, 셀류쿠스는 바벨론의 속국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왕가를 세웠다. 요세푸스는 “이들은 서로 세력 확장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았기 때문에 전쟁이 그칠 줄 모르고 계속되었다. 그 통에 모든 도시는 평온한 날이 없었고 수많은 사람이 비명에 죽어갔다.”1)고 했다.

(2) 애굽 프톨레미 왕조 지배하의 유대인

유대인들은 갈라진 왕국 중에서 먼저 애굽 프톨레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요세푸스는 프톨레미가 예루살렘을 정복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프톨레미는 예루살렘도 정복했는데 이 목적 달성을 위해 그는 거짓과 사기를 서슴지 않았다. 그는 안식일에 하나님께 제사 드릴 것처럼 가장 예루살렘에 들어온 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성을 점령했다. 유대인들은 방심하고 있다가 대항 한번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를 의심하지 않은 데도 원인이 있었으나 안식일은 안식과 쉼의 날이기 때문에 유대인은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었다. 프톨레미는 이렇게 예루살렘을 장악한 후에 잔인한 방법으로 폭정을 휘둘러 댔다.”2)

프톨레미는 약 10만 명의 유대인을 예루살렘에서 애굽으로 이주시켰다. 학자들은 이 당시 본토에 살던 유대인보다 팔레스타인 주변 밖에 사는 유대인들이 훨씬 많았을 것으로 본다. 특히 애굽에는 흩어진 유대인 중 가장 규모 있는 공동체를 형성했을 것으로 추측했다.

프톨레미 왕조는 점차 안정되기 시작했다. 레이몬드 설버그는 “프톨레미 왕조의 초기는 비록 그들의 개인적인 생활이 비도덕적이고 방탕했으나 애굽과 기타 속국들에 대해 절대적이고 무제한의 권력을 행사하는 유능하고 지각 있는 통치자들이 있었다. 프톨레미 왕조의 통치 동안에 애굽은 헬라문화권 세계 중에서 가장 중요한 지적인 중심지 중의 하나가 되었다.”3)고 했다.

비록 애굽의 지배는 받았으나 유대인들은 셀류쿠스 왕조(Seleucid Empire, BC 305-281)가 프톨레미 왕조를 애굽에서 몰아내기까지 약 120년간은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고 문화를 지킬 수 있었다. 하지만 두 왕조 사이의 전쟁으로 유대인들은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3) 구약 ‘70인 역’의 탄생

구약 ‘70인 역’(譯)이란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구약성경이다. ‘70인 역’에 대한 작업은 프톨레미 왕조의 두 번째 왕인 프톨레미 2세(Ptolemy II Philadelphus, BC 308/9-246) 때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이루어졌다. 이스라엘 12지파에서 6명씩 선정된 72명의 번역자가 작업했다. 70을 의미하는 라틴어 셉투아진트(Septuagint)라고 불리기도 하고 수비법에 따라 LXX(50+10+10)로 불리기도 한다.4)



‘70인 역’ 성경은 초대교회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헬라문화권에 살게 된 유대인들은 점차 히브리어를  잊어갔다. 그러기 때문에 1세기 때는 유대인조차 특별한 교육을 받지 못한 경우 히브리어를 알지 못했다. 초대 교회의 많은 구성원이었던 이방인들은 당연히 히브리어를 LXX Bible: Joshua, Egypt, late 2nd C. 몰랐다. 그러므로 만약 ‘70인 역’ 성경이 없었더라면 다수의 사람이 구약성경을 읽을 수도 없었고 이해도 못 했을 것이다.

1) 요세푸스,『요세푸스Ⅱ: 유대고대사』(생명의말씀사, 2006), 63.
2) 같은 책, 63-64.
3) 레이몬드 설버그,『신구약 중간사』(기독교문서선교회, 2004), 29.
4) 70인 역의 번역 동기와 배경에 대해서는 아리스테아스의 편지에 의존하는데, 이 기록의 신빙성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7. 셀류쿠스 왕조와 유대인

알렉산더 대왕의 사후 그리스제국은 여러 나라로 분열되었다. 유대인들은 분열된 나라 중 먼저 프톨레미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이 왕조 아래 약 120년을 지낸 유대는 프톨레미 왕조와 셀류쿠스 왕조 사이에 벌어진 갈등에 휘말리면서 다시 한번 큰 변화를 맞게 된다.

(1) 프톨레미 왕조에서 셀류쿠스 왕조로

셀류쿠스 왕조(Seleucid Empire, BC 305-281, 65-63)의 탁월한 왕으로 꼽히는 안티오쿠스 3세(Antiochus III the Great, BC 241-187)는 넓은 영토를 정복하고 부를 축적했다. 그는 BC 198년 파네아스 전투에서 프톨레미를 격파하고 유대 땅을 손에 놓는다. 당시 유대는 셀류쿠스의 편에서 프톨레미 군대를 몰아내는 데 힘을 모았다.

안티오쿠스 3세는 유대인들이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허락했고 다년간 세금 면제 및 도시와 예루살렘 성전 재건 등 파격적인 호의를 베풀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을 향한 이러한 셀류쿠스 왕조의 호의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2) 로마에 패배한 셀류쿠스

당시 셀류쿠스 왕조에는 한때 로마를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갔던 카르타고(Carthage)의 명장 한니발(Hannibal Barca, BC 247-183/181) 장군이 망명을 와 있었다. 반드시 로마를 쓰러뜨린다는 한니발의 평생 꿈 때문이었을까? 안티오쿠스 3세는 한니발의 격려를 받아 로마와 전투를 벌인다.

그러나 BC 190년 안티오쿠스 3세는 로마와의 전쟁에서 참패를 당하며 많은 영토를 빼앗겼다. 셀류쿠스 왕조는 일부 정복지를 포기한다는 조건에 합의했고 아들 안티오쿠스 4세를 볼모로 내어 주었다. 그뿐 아니라 엄청난 액수의 전쟁 배상금(賠償金)을 물어야 했다.(편집자, 5천 달란트부터 1만 5천 달란트까지 학자들 간에 액수 차이가 있다.)

전쟁 배상금 문제로 셀류쿠스 왕조는 피지배 계층 특히 유대인들에 대한 호의적인 태도를 거두었다. 제국 내에 있는 모든 신전(神殿)의 재산을 압류하는 과정에서 예루살렘 성전의 재산을 강탈했다. 레이몬드 설버그에 따르면 안티오쿠스 3세는 왕국의 남동부에 있는 한 신전의 재물을 압수하는 도중 살해당했다.1) 안티오쿠스 3세에 뒤이어 왕위에 오른 셀류쿠스 4세(Seleucus IV Philopator, BC 218-175) 역시 10여 년의 통치 끝에 암살당하고 말았다.

(3)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등극

셀류쿠스 4세가 죽자 로마에 볼모로 잡혀있던 그의 동생 안티오쿠스 4세(Antiochus IV Epiphanes, BC 215-164)가 돌아와 왕위에 올랐다. 레이몬드 설버그는 안티오쿠스 4세가 사악한 행위로 유명해졌는데 심상치 않은 정신착란으로 고생했다고 전한다.2) 흔히 안티오쿠스 4세는 현명한 신(혹은 신의 현현)이라는 의미의 ‘에피파네스’(Epiphanes)를 붙여 자신을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라고 했는데 당시 사람들은 미친 사람이라는 뜻의 ‘에피마네스’를 붙여 ‘안티오쿠스 에피마네스’라 부르기도 했다.

안티오쿠스 4세는 자신에게 상당량의 돈을 지불 한 레위 지파도 아닌 야손(Jason, 주전 174-172 제37대 대제사장, 셀류쿠스 지배 시 극악한 대제사장 중 하나)을 유대의 대제사장으로 임명했다. 이는 성직 매매가 시작된 순간이었다. 이후 메넬라우스(Menelaus)는 야손보다 더 많은 돈을 내고 야손의 자리를 빼앗았다. 이 같은 성직 매매는 이후 예루살렘 멸망까지 이어졌다.

(4)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유대인 박해

안티오쿠스 4세(에피파네스)는 프톨레미 왕조가 다스리는 애굽을 원했다. 그는 여러 차례 애굽과 전쟁을 했는데 두 번째 전쟁에서 유대 땅에 큰 변화가 찾아왔다. 안티오쿠스 4세가 전쟁 중 사망했다는 소문이 퍼졌고 메넬라우스에게 대제사장 자리를 빼앗긴 야손은 이 기회를 틈타 메넬라우스를 몰아내기 위한 반란을 일으켰다. 안티오쿠스 4세는 야손의 이 같은 행위를 반역으로 간주하고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진격해 피의 보복을 감행했다. 이때 성전의 기물을 약탈하고 인두세 성전세 등 다양한 명목의 세금이 과중하게 유대인들에게 부과되었다.

그리고 안티오쿠스 4세는 다시 애굽과 전투를 벌였으나 로마의 지원을 받은 애굽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굴욕을 맛본 안티오쿠스 4세는 본국으로 돌아가던 중 유대인들에게 여러 가지 명목을 씌워 분풀이를 시작했다. 안티오쿠스 4세에 의해 파견된 아폴로니우스와 2만 2천 명의 군대는 예루살렘에서 무차별의 대학살을 자행했다.

이들은 예루살렘 성벽을 파괴하고 ‘아크라’라는 요새를 세워 유대인을 감시했다. 존 브라이트는 아크라에 대해 “단지 군대 수비대가 주둔하고 있는 일개 성채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불쾌한 곳이었다. 그곳은 헬레니즘화 된 이교도들과 유대교를 배교 한 유대인들이 사는 하나의 식민지로 예루살렘 성벽에 둘러싸여 독자적인 체제를 갖추고 있었던 예루살렘 성안의 헬라인 도시 국가였다.”고 했다.3)

안티오쿠스 4세는 또 안식일 금지, 할례 금지, 율법서 소지 금지 등 유대인 신앙의 근간을 뿌리 뽑을 만한 내용의 칙령(勅令)을 내렸다. 그는 과거 로마에 볼모로 잡혀있으며 그리스 문화에 큰 감명을 받았는데 자신이 지배하는 나라를 헬라화 시키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이런 안티오쿠스 4세의 박해와 칙령과 헬라화 계획은 유대인의 반발을 샀다. 그럴수록 안피오쿠스 4세의 박해는 더 심해졌고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희생당한 이들은 대부분 ‘하시딤’(Hasidim) 사람들이었다. ‘하시딤’이란 ‘경건한 자들’이라는 뜻으로 유대의 헬라화, 성직 매매, 안티오쿠스 4세의 칙령에 반대했던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이 같은 상황에도 대제사장인 메넬라우스는 유대의 헬라화에 앞장섰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우스’(Zeus, 그리스 최고의 신)에게 돼지고기를 제물로 바치는 일도 벌어졌다. 그럴수록 하시딤은 선조들의 신앙의 도리를 고수하고 헬라화 정책에 반대했다. 이 같은 반대는 ‘마카베우스’(Maccabaeus)라는 가문의 주도하에 급물살을 타기 시작 급기야는 반란으로 이어졌다.  

1) 레이몬드 설버그,『신구약 중간사』(기독교문서선교회, 2004), 37.
2) 같은 책, 37-38
3) 존 브라이트,『이스라엘의 역사』(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3), 583.

8. 마카비의 반란(Maccabean Revolt, BC 167-160)

안티오쿠스 4세(이하 안티오쿠스)의 박해와 헬라화 정책은 유대인들과의 갈등의 골만 깊게 만들뿐이었다. 존 브라이트는 안티오쿠스가 강압적인 헬라화 정책과 박해로 유대인들을 굴복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그의 착각이었다고 지적한다.1)

(1) “왕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안티오쿠스의 헬라화 정책에 대한 반란은 한 제사장의 결단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안티오쿠스는 BC 167년경 예루살렘에서 24km 떨어진 예루살렘과 욥바 사이에 있는 모딘(Modein)이라는 지역에 자신의 신하를 보내 이방신(異邦神, 그리스 제우스 신)에게 제사를 지내라는 명령을 내렸다.

모딘(Modein) 지역 하스몬 가문(Hasmonean)의 유대인 제사장이었던 마타디아(Mattathias, BC ?-166)는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율법과 규례를 깨트리는 일을 금하고 계신다. 우리는 좌로나 우로 치우쳐 우리가 드릴 경배를 버리라는 왕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2)라며 왕의 명령을 단호히 거절했다. 그러자 한 유대인이 마타디아를 대신해 이방 신에게 제사 드리러 제단으로 나왔다. 이를 본 마타디아는 그를 죽이고 추종자들과 함께 안티오쿠스의 보복을 피해 험준한 산으로 숨었다.

이후 제사장 마타디아와 그의 추종자들은 안티오쿠스의 군대를 상대로 게릴라전을 펼치며 결사 항전을 벌였다. 레이몬드 설버그는 “그들은 숨어 있던 산에서 갑자기 튀어나와 인근의 작은 도시와 마을들을 급습하여 우상과 이방의 제단을 훼파하고 변절한 유대인들에게 강제로 할례를 행하하고 회당을 재건했다.”3)라고 말한다.

마타디아는 약 1년간 항전을 이끌다 BC 166년 사망했고 그의 다섯 아들 중 셋째아들 유다(Judas Maccabeus, BC ?-160)가 뒤를 이었다. 이 유다가 후대에는 ‘마카비’(Maccabee, 망치질하는 자)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졌는데 ‘마카비’는 ‘망치질하는 자’(혹은 쇠망치)라는 뜻으로 유다의 별명이었다.

(2) 마카비의 승리와 성전정화

마카비(Maccabees)는 반란군을 효과적으로 이끌었다. 게릴라 항전은 이들에게 계속된 승전보를 가져다주었다. 특히 사마리아 땅의 지도자인 아폴로니우스와 수리아의 지도자 세론을 차례로 격파한 사건은 유대인들의 사기를 크게 진작시키며 하시딤과 연합세력을 구축할 수 있게 되었다. 마침 안티오쿠스는 또 다른 전쟁을 위해 원정을 가 있던 터라 주력 병력을 마카비와의 전쟁에 투입할 수 없었다. 두 차례의 참패 소식을 들은 안티오쿠스는 부하 장군 중 한 사람인 리시아스(Lysias)에게 마카비의 반란군을 진압할 것을 명령했다.

리시아스(Lysias)는 그의 부하 니카놀과 게올기아스를 지휘관으로 삼고 보병 4만 6000명, 기병 7천 명을 이끌고 전쟁에 뛰어들었다. 그들 옆에는 반란군을 진압한 다음 노예로 팔겠다는 노예 상인들도 동행했다. 전쟁은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게릴라전에 능한 마카비의 승리로 끝났다. 마카비는 3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니카놀의 부대를 급습해 큰 피해를 주고 오히려 노예 상인들을 붙잡아 노예로 팔아버렸다.

(3) 또다시 혼란 속으로

니카놀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마카비는 그 길로 예루살렘으로 진격했다. BC 164년 기슬르월(유대력 9월, 그레고리력 11-12월) 25일 마침내 마카비 군대는 예루살렘 성전을 회복하고 하나님께 감격의 제사 드렸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이날을 ‘수전절’(修殿節, Hanukkah, 요 10:22)이라 부른다. 이들은 예루살렘 성전 모독을 끝낸 기념을 3년간 이어갔다.

그러나 평화도 잠시 예루살렘을 둘러싼 거센 공격이 다시 시작되었다. 리시아스는 다시 한번 마카비 군대와 전투를 벌였고 이 전쟁에서 마카비의 형제인 엘르아살(Eleazar Avaran, BC ?-162)이 사망하고 만다. 리사아스는 예루살렘을 포위해 마카비의 항복을 받아내려 했으나 때마침 상황이 복잡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리시아스는 안티오쿠스가 전쟁 중에 사망했고 후계자로 필립 장군을 임명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정복보다 권력이 먼저였던 리시아스는 유대인들에게 율법에 따라 하나님을 경배하는 권리를 보장하는 협정서를 내밀고 급히 본국으로 회군했다.

리시아스의 화해 정책을 두고 하시딤은 이를 반색했지만 마카비 군대의 입장은 달랐다. 결국 다수의 하시딤에 의해 화해 조약이 체결되었고 그로 인해 하시딤과 마카비 가문은 이후 각자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나 하시딤의 선택은 자신들과 마키비의 가문 둘 모두에게 좋지 않은 결과로 이어졌다.

안티오쿠스의 후계자로 로마에 볼모로 잡혀있던 데메트리오스 1세가 돌아와 왕위에 올랐다. 그는 리시아스를 죽이고 예루살렘의 대제사장으로 알키무스(Alcimus, High Priest of Israel for BC 162-159)를 세웠다. 알키무스는 예루살렘에서 60여 명의 하시딤을 죽였다. 이 일로 하시딤과 마카비 가문은 다시 뭉쳤다. 이들은 알키무스가 원군으로 요청한 시리아군과의 전투에서는 승리했으나 데메트리우스 1세가 예루살렘으로 보낸 지원군과의 전투에서까지 승리할 힘은 없었다. 유다 마카베오스는 결국 이 전투에서 BC 160년 장렬히 전사했다.(*) 글쓴 이 / 조믿음 기자

출처, http://www.bami.kr/news/view.html?section=1&category=153&item=&no=417 

1) 존 브라이트,『이스라엘의 역사』(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3), 584.
2) 레이몬드 설버그,『신구약 중간사』(기독교문서선교회, 2004), 46.
3) 같은 책, 47.

   < 편집자 주 > 이 글은 웹진 ‘바른 믿음’에 연재된 것을 본지에 맞도록 재편집한 것입니다. ‘바른 믿음’과 관련된 정보는 다음과 같습니다. (주)새길: 경기도 과천시 별양상가2로 14, 3층 314호 제호: 바른미디어 TEL: 050-6558-0253, FAX: 050-4092-0935, E-mail: bareunmedia@naver.com

< 유대 하스모니안 왕가, BC 140-37 > 각 이름 아래 연도는 재위 기간





신구약 중간시대란 무엇입니까?

신구약 중간기는 구약과 신약 사이의 기간으로 약 400년을 말한다. 이 시대는 신약성경이 기록된 배경과 맥락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이 기간 동안 유대인들은 그들의 신앙과 관습에 영향을 미치는 중대한 문화적, 정치적, 종교적 변화에 직면했습니다.

역사적 맥락

구약 시대의 끝

구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는 기원전 430년경에 기록되었습니다. 그 이후 히브리어 성경은 수세기 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군주제는 바빌론 유배를 시작으로 외국 제국의 통치 기간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이는 또한 성서 중간기에 전개될 복잡한 역학의 무대를 마련했습니다.

헬레니즘 영향의 부상

기원전 4세기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으로 그리스 문화는 급속도로 퍼졌다. 이 헬레니즘 영향은 유대를 포함하여 알려진 세계의 모습을 변화시켰습니다. 그리스어, 철학, 관습의 도입은 유대 민족에게 도전과 기회를 동시에 만들어 주었습니다. 일부는 이러한 새로운 아이디어를 받아들인 반면, 다른 일부는 저항하며 전통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마카비 반란

기원전 2세기에 유대인 인구는 셀레우코스 제국, 특히 안티오코스 167세 에피파네스 치하에서 박해를 받았습니다. 이로 인해 마카비 반란(기원전 160-XNUMX년)이 일어났고, 유다 마카베우스가 이끄는 유대인 전사들이 성공적으로 예루살렘을 되찾고 성전을 재헌납했습니다. 이 행사는 하누카 기간에 기념되며 비록 잠깐이기는 하지만 유대인 독립을 향한 중요한 전환을 의미합니다.

하스몬 왕조의 성립

마카베오 왕조의 성공으로 하스몬 왕조가 세워졌습니다. 이 지배 가문은 유대를 통치했지만 나중에는 갈등과 권력 투쟁에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통치는 신약 시대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같은 유대 민족 사이에 다양한 종파의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유대 종파의 발전

바리새인

바리새인들은 당시 가장 영향력 있는 유대인 집단 중 하나로 자주 언급됩니다. 그들의 초점은 율법과 구전 전통을 엄격히 준수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들은 죽은 자의 부활과 천사의 존재를 믿었기 때문에 다른 종파와 구별되었습니다. 그들의 가르침은 신약성서의 많은 가르침, 특히 예수님의 가르침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사두개인

바리새인들과는 대조적으로, 사두개인들은 특히 사제 계급 내에서 상당한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그들은 부활이나 내세를 믿지 않았고, 이는 종종 그들을 바리새인들과 불화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집단들 간의 신학적 차이점을 이해하면 신약에서 볼 수 있는 많은 대립을 명확히 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에센느

에세네파는 좀 더 금욕적인 그룹이었으며 종종 사해 두루마리와 관련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류 사회에서 물러나 기도와 성경 연구에 전념하는 공동 환경에서 살았습니다. 순결에 대한 강조와 다가오는 메시아에 대한 기대는 당시의 종교 풍경에 독특한 관점을 더해주었습니다.

로마 상황

로마 정복과 통치

기원전 1세기에 로마 제국은 유대를 정복하여 유대인의 경험에 새로운 복잡성을 더했습니다. 로마 통치는 유대인들 사이에 새로운 세금, 정치적 혼란, 억압감을 불러일으켰고, 이는 메시아에 대한 희망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로마의 권력에서 구원해 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로마 문화의 영향

로마가 확장되면서 로마 고유의 관습과 관행이 도입되었습니다. 다양한 종교의 철학, 문학, 관습을 포함하는 그리스-로마 문화가 유대 사회에 스며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문화적 혼합은 초기 기독교 운동으로 퍼져 복음이 공유되고 이해되는 방식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종교 문헌 및 문학

외경의 발전

신구약 중간기에 현재 외경이나 신명기로 분류되는 여러 책이 기록되었습니다. 이 본문은 히브리어 성경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당시 유대 민족의 생각과 신앙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합니다. 그들은 종종 예언, 지혜, 인류와 하나님의 관계와 같은 주제를 다룹니다.

칠십인역

히브리어 성경의 그리스어 번역본인 칠십인역은 기원전 3세기에 등장했습니다. 이 책은 디아스포라에 사는 유대인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었으며 유대 성경을 이방인 세계에 전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칠십인역은 많은 초기 기독교인들이 사용했던 것처럼 신약성경 기록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신약 시대로의 전환

기대의 시간

서기 1세기에 들어서면서 유대 민족은 기대감에 젖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로마 통치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메시아를 보내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기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과 기독교 전파를 위한 비옥한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예수의 초기 추종자들

예수와 그분의 추종자들의 가르침은 신구약 중간기에 배양된 기대와 믿음 위에 직접적으로 세워졌습니다. 그의 메시지는 사랑, 회개, 하나님의 왕국이라는 주제를 다루었습니다. 이 혁명적인 관점은 유대 공동체와 신앙을 탐구하는 이방인 모두의 추종자들을 끌어 모았습니다.

결론: 시대 간 연결

신구약 중간기는 신약성경의 배경을 형성하는 문화적, 종교적 정체성을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 시대의 사건, 갈등, 종파는 초대 교회가 어려운 세상에서 성장하고 자신을 정의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시대를 이해하면 역사를 통해 짜여진 신앙의 태피스트리를 상기시켜 주기 때문에 신약성서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깊어집니다.

Q. 신구약 중간기는 어떤 시대였나요?
A. 신구약 중간기는 구약과 신약 사이의 기간으로, 약 400년간 지속되며 중요한 역사적, 문화적 변화로 가득 차 있습니다.

Q. 신약을 이해하는 데 왜 신구약 중간기가 중요한가?
A. 이는 신약성서의 기록에 나타난 믿음과 관습에 영향을 준 종교적, 정치적, 문화적 배경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Q. 신구약중기에는 어떤 주요 사건이 일어났는가?
A. 주요 사건으로는 마카베오 반란, 하스몬 왕조의 등장, 바리새파와 사두가이파와 같은 다양한 유대 종파의 설립 등이 있습니다.

Q. 바리새인들은 누구였나요?
A. 바리새인들은 유대인의 율법과 구전 전통을 엄격하게 준수하는 것을 강조하는 유명한 유대인 종파로서 신약성서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Q. 헬레니즘은 유대 문화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A. 헬레니즘은 그리스어를 도입했습니다. 유대인 사회에 이러한 관습이 전파되면서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수용과 저항이 동시에 일어났습니다.

질문. 사해 두루마리는 무엇이었나요?
A. 사해 두루마리는 사해 근처에서 발견된 고대 유대인 문서로, 에세네파가 그들의 신앙과 관습을 반영하여 기록한 것으로 믿어집니다.

Q. 어떻게 로마의 통치가 유대에 영향을 미치다 신구약 중간기 동안이었나요?
A. 로마 정복은 정치적 억압, 무거운 세금, 문화적 영향력을 가져왔고, 이로 인해 많은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갈망하게 되었습니다.

Q. 칠십인역이란 무엇입니까?
A. 칠십인역은 히브리어 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으로, 디아스포라 유대인과 초기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질문. 신구약 중간기 동안 유대의 주요 종파는 무엇이었습니까?
A. 주요 종파에는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가 포함되었으며, 각각은 서로 다른 신앙과 관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Q. 메시아에 대한 기대가 신약성경을 어떻게 형성했습니까?
A. 유대인들 사이에 널리 퍼진 메시아에 대한 기대는 초대교회 기간 동안 예수님의 가르침이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전파되었는지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신구약 중간사 400년 요약(1)

페이지정보

작성자 yangmocsa 날짜22-04-26

본문

신·구약 400년 중간사 요약
• 제1장 페르시아의 유대 통치와 알렉산더 대왕의 등극(BC 539-332년)
• 제2장 초기 헬레니즘과 마카비 혁명(BC 332-160년)
• 제3장 하스몬 왕가 1(BC 160-67년)
• 제4장 하스몬 왕가 2(BC 67- 37년)
• 제5장 헤롯 왕의 유대 통치 1(BC 37-20년)
• 제6장 헤롯 왕의 유대 통치 2(BC 20-7년)
• 제7장 헤롯 왕의 유대 통치 3(BC 7-AD 6년)
• 제8장 헤롯 왕국의 분할과 제1차 로마 총독 시대(AD 6-41년)
• 제9장 헤롯 아그립바 1세의 통치 시대(AD 41-44년)
• 제10장 제2차 로마 총독 시대(AD 44-70년)

제 1 부 역사적 배경
1. 페르샤 통치 하의 유대인
북왕조에 속한 자들과는 대조적으로 남왕조에 속하였던 유대인들은 포로 기간 동안에 국제 결혼을 거부하고 이방세계 속에서도 구별된 공동체들을 형성함으로써 그들 특유의 동질성을 고수했다. 그들은 모세의 사상과 선지자들의 교훈, 특히 그 기간을 위하여 기록되어진 이사야의 교훈에 착념하여 그들의 행동규범을 삼고자 노력하였다.
이러한 종교 활동의 결과 하나님의 계시가 저장된 책을 수호하려는 조그마한 유대인의 핵심단체가 형성되었고, 그리하여 바벨론은 유대교의 사상을 유지하고 전파하는 중요한 중심지가 되었다.

B.C. 457년 에스라는 바벨론에서 되돌려 받지 못하였던 성전 기물들을 가지고 1,700명의 유대인과 함께 귀국하였다. 그는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유대인들이 이방인들과 가나안의 여자들과 통혼함으로써 모세의 율법을 범하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고, 제사장들을 설득하여 그들의 이방인 아내를 고향으로 보내는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후에 느헤미야는 똑같은 일을 다시 해야만 했다.

구약성경이 종결되었던 무렵(B.C. 400년경)까지 138년간 유대는 페르샤에 예속된 하나의 주였으며, 유대인들은 페르샤제국을 이루었던 128개 주 전역에 분산되어 살았다. 페르샤는 140년이 넘도록 세계를 제패한 국가였고, 그 가운데 유대인들이 가장 넓은 영역에서 관대한 처우와 흡족한 역할을 영위할 수 있었던 B.C. 5세기의 페르샤 왕들은 그의 통치 밑에서 예루살렘 성곽을 재건하였던 아닥사스다 1세와 단 일 년 동안 치리하였던 크세르크세스, 다리오 2세였다.

이미 바벨론의 통치시기에 유대인들은 옛날의 고전적 히브리어 대신에 제국 아람어를 사용하였다. 아람어는 바벨론의 산간 지방에서 사용된 셈족 언어이며 수리아족 방언이었고 히브리어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2. 알렉산더 대제와 유대인
알렉산더 대제의 부친인 마게도냐의 필립은 헬라 문화에 대한 상당한 긍지를 가졌고 그래서 그의 아들인 알렉산더를 심마쿠스라는 선생에게 맡겼고, 그는 알렉산더에게 호머의 일리어드를 알게 해 주었다. 알렉산더가 13세 되었을 때 위대한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스승이 되었고, 그는 그로부터 그리스 문학과 예술을 배우고 이해하게 되었으며 그리스 종교와 문화, 문명에 대한 대단한 존경심을 갖게 되어서 결국에는 헬레니즘의 사도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알렉산더는 약관의 나이에 아버지의 왕위를 계승하였고, 일 년에 걸쳐 그리스 여러 도시 국가들과 전쟁을 하여 그들의 항복을 얻어 냈다. 그는 페르샤군을 격퇴시키고 방향을 지중해의 동편 연안 도시들로 돌렸고, 시돈과 비블리스, 아라두스를 정복하였고, 7개월간의 전투를 거쳐 두로를 정복하였다.

알렉산더는 예루살렘을 정복하려던 중 당시 제사장이었던 야두아가 그를 맞아 그가 그리스 최초의 왕이 되어 페르샤 제국을 정벌하리라는 예언이 기록된 다니엘서의 구절들을 보여 주었고, 그는 이것이 자신에 대한 예언임을 믿게 되어, 이후 알렉산더는 유대인의 친구가 되었다. 332년 그는 애굽을 침략하였고, 331년에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를 설립했고 그곳에 동지중해의 상업적 대도시였던 두로를 능가하는, 그리스의 상업적 이익을 촉진시키는 훌륭한 항구를 설치하였다.

이전 페르샤의 모든 지역을 평정한 알렉산더는 동양과 서양의 사람들을 하나로 합하려는 그의 계획들을 진행시켰는데 그는 아시아에 유럽인의 식민지를 세우고 유럽에 아시아인의 식민지를 세워 서로 다른 민족 간의 국제결혼을 진작시킴으로써 이 계획을 실행하길 원했다.

알렉산더의 정복 사업이 가져다준 중요한 결과 중의 하나는 유대인의 광범위한 분산인데 이것은 기독교의 전파를 예비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알렉산더는 그가 설립한 많은 도시들에서 유대인들이 거주하도록 하는 호의를 보여 주었는데, 유대인은 중국에 이르는 아시아 전역에서 발견될 수 있었을 것이다.

3. 프톨레미 왕조와 유대인
B.C. 323년 알렉산더는 죽으면서 자기의 자리에서 제국을 통치하기에 충분한 나이의 계승자를 남기지 않았다. 그가 죽은 후 그 아내 록산나에게서 한 아들이 태어났지만 이미 그의 제국 안에는 그의 계승자가 되기를 원하는 많은 친가와 처가 사람들이 있었으며, 심지어 그가 장사되기도 전에 그의 왕국을 소유하고자 하는 자들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알렉산더의 후계자들은 그의 제국을 소유하기 위한 경합을 벌였다. 그 중에서 록산나와 그녀의 아들을 죽인 카산더, 그리고 리시마쿠스는 제 2의 알렉산더가 되려는 안티고누스의 음모를 분쇄하기 위한 동맹을 맺었다.

결국, 라구스의 아들인 프톨레미에게는 애굽이, 리시마쿠스에게는 수리아가, 셀류쿠스 니카터에게는 바벨론의 속주들이 할당되었다.

프톨레미는 B.C. 320 애굽을 침공하였고, 예루살렘은 안식일에 공격을 받아 저항 없이 정복당하였고, B.C. 315년에는 프톨레미의 적수인 안티고누스에게 넘어갔으나 가사 전투 이후에는 프톨레미가 다시 그것을 회복시켰다.

당시 프톨레미와 연합세력을 형성하였던 셀류쿠스는 스스로 바벨론의 군주가 되었다.

B.C. 312년은 유대인들 가운데 오랫동안 사용되었던 달력이 시작되는 셀류키드 제국의 개국을 맞았고, 301년의 입수스 전투에서는 안티고누스가 피살되어 프톨레미 1세가 팔레스틴을 장악하게 되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페르샤의 지배하에서 자유스럽게 생활하고 자기네의 종교와 문화적 전통을 행사하도록 허락받았던 것과 동일한 자치권을 누렸고, 중앙정부는 오직 세금징수에만 관여하였고 기타의 내정에는 간섭하지 않아, 대제사장은 페르샤의 통치하에서 행사하였던 그대로 지역사회의 일들을 관장하도록 허락받았다.

프톨레미 왕조의 통치 동안에 애굽은 헬라 세계의 가장 중요한 지(智)적인 중심지 중의 하나가 되었다. 애굽의 알렉산드리아는 학자들의 정착지이며 학문의 커다란 중심지가 되기 시작하여 박물관과 도서관 때문에 연구차 모여든 학생수가 14,000명을 넘은 적도 있다고 한다.

319년에서 198년까지 팔레스틴은 프톨레미 왕조의 지배하에 놓였다. 비록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고는 있었지만 애굽과 팔레스틴에서 살고 있던 유대인들에게는 이 시기가 좋은 기간이었지만 프톨레미 왕조와 셀류키드 왕조 사이의 계속된 전쟁의 와중에서 팔레스틴의 유대인들은 수난을 당하였다.

4. 셀류쿠스 왕조 하의 유대인
셀류키드 왕조의 시조는 알렉산더 대제의 장군들 중의 하나인 셀류쿠스 니카터였다. 그는 군사적인 정복에 의해 헬레스폰트와 지중해 연안에서 동쪽으로 인더스 강에 이르는, 이전 알렉산더 제국의 넓은 국토를 장악할 수 있었다.

321년에 그는 바벨론의 방백으로 임명되었으나 316년에 프리기아의 통치자인 안티고누스에 의해 축출되었으나 301년 입수스 전투 후에 다시 그는 수리아와 소아시아를 할당받았다. 이때부터 셀류키드 시대가 시작되었으며 마카비1서와 어떤 역사서들은 그들의 역사적 사건들을 이 기원에 따라서 연대를 계산하고 있다.

셀류쿠스 1세 이후 탁월한 셀류키드 왕조의 왕 중에 안티오쿠스 3세 황제가 들어간다. 팔레스틴은 198년 파네아스 전투를 통해 프톨레미 왕조의 통치에서 수리아의 셀류키드 왕조의 통치 밑에 예속되게 된다.

안티오쿠스의 초기 통치 기간에는 유대인들이 그들의 관습대로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며 세금을 징수당하지 않는 것을 포함하여 많은 특권과 호의를 누리며 번영하지만 이후 안티오쿠스가 로마군과의 서머나 전투에서의 패배로 인해 무거운 배상금을 부과 받게 되면서 나라 안의 모든 신전의 재산들과 예루살렘 성전의 재산까지 압류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유대인들과의 마찰을 빚게 되었다.

이것은 그 후 세류쿠스 4세의 통치 시기에도 동일했고, 셀류쿠스 4세를 이은 안티오쿠스 4세의 집정기에 이르러 절정에 이르게 된다.

안티오쿠스 4세는 전형적인 동양의 왕으로 행세하였으며 기만술과 가장함과 숙달된 통치를 행했다. 이 시기에 팔레스틴은 제사장직을 뇌물을 통하여 사들이는 이들이 발생했고, 안티오쿠스 4세의 헬라화에 적극적인 자들의 충성으로 인해 곳곳에 체육관과 경기장, 대중목욕탕 등이 생겨났다. 그러자 경건한 유대인들 사이에는 강한 반발심이 일어나게 되었다.

안티오쿠스 4세가 애굽과 전쟁을 수행하고 있을 동안, 뇌물에 의해 자신의 대제사장직을 상실한 야손은 무력으로 자신의 자리를 찾고자 했고, 이 보고를 접하게 된 안티오쿠스 4세는 격노하였고 군사를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진격하여 피의 보복을 자행하였다.

그는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 약탈을 했고, 황금제단과 모든 봉헌된 기명들과 기구들을 다른 보물들과 함께 노략하였다. 무거운 세금을 유대인들에게 부과하였고, 추수곡식의 삼분의 일, 추수 열매의 절반, 사해에서 얻어지는 소금에도 세금을 징수하였다.

안식일 준수와 할례의식, 부정한 음식의 금지와 같은 특징적인 유대인들의 관습들이 사형에 해당하는 죄목으로 금지되었고, 그리스 신과 여신들에 대한 숭배를 강요하였다.
유대인들은 환난의 때를 겪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힘과 잔학한 행위가 그들의 신앙을 꺾지 못하였고 그들은 이교의 헬레니즘이 감행한 맹공격에 끝까지 저항하였다.

이러한 반대 세력은 서기관들에 의해 형성되고 앞장 세워졌다. 그들은 정통적이고 율법적이며 매우 엄격하였고, 이 집단은 처음에는 소규모였으나 전국의 마을과 성읍들로 확산되었고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것을 의식적으로 회피했다. 그들은 점진적으로 유대인을 헬라화 하려는 움직임에 대한 강력한 반대세력이 되었고 반수리아적 활동을 격렬하게 전개했다.

하시딤, 즉 경건한 자 혹은 구별된 자로 알려진 바리새파는 바로 이 집단에서 형성되어 나왔고, 그들은 자신들의 종교를 위하여 기꺼이 핍박과 순교를 감내하였으며 선조들의 신앙의 도리를 고수하는데 충실하였다.

5. 마카비가(家) 통치 하의 유대인
헬라화 정책에 대한 유대인의 반대는 마침내 마카비 일가가 주도하는 공공연한 반란으로 발전되었고, 이 반란은 완전한 정치적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단호한 투쟁으로 격화되었다.

아스모니안 계열의 마타디아스는 이방신을 위한 제단에서 제사를 드리라는 명령을 받고 이에 불복하여 지방 수령을 죽이고 그의 아들과 함께 반란 운동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에 의해 시작된 이 독립 운동은 그의 사후 그의 아들들에 의해 계속적으로 이루어졌는데, 먼저 그의 아들 유다(마카비우스라는 별명을 가짐)에 의해 조직적이고도 광범위한 독립운동이 이루어졌다. 유다는 로마와의 평화 협정을 꾀하는 동시에 조직적인 군대를 조직하여 대항하였다. 그러나 그는 결국 2만의 보병과 2천의 기병을 갖춘 압도적인 수리아 병력과의 전투에서 전사하게 되고, 그의 자리는 동생 요나단이 맞게 되었다.

요나단은 게릴라전을 통해 예루살렘만을 남겨두고 중요한 요새를 하나씩 수리아군으로부터 탈환해 나갔고, 급기야 수리아로부터의 화친조약을 이끌어내기까지 했다.

그러나 요나단은 수리아 내의 분쟁이 요인이 되어 수리아 장군 트리포의 계략에 말려 무참하게 살해당하였고, 그의 형제 시몬이 그 뒤를 잇게 되었다. 시몬은 당시 강대국으로 급부상하고 있던 로마와의 평화 협정체결을 위해 사자를 파견하고, 유대 지방의 영토에 대한 완전한 통치를 확보하였다.

그러나 그도 역시 반역자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므로 마카비가의 다섯 형제의 영웅적인 헌신과 투쟁은 시몬의 죽음과 함께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6. 하스모니안 왕조 하의 유대인
시몬의 죽음 이후 살아남은 그의 아들 요한 힐카누스는 수리아가 정치적 혼란기를 맞은 틈을 타서 독립을 되찾고 나라를 통치하게 된다. 그는 주화에 자기의 이름을 새겨 넣은 최초의 유대 군주가 되었고, 정치적 견해 차이로 인해 하시딤들과 마찰을 가졌는데 이 과정에서 바라새, 사두개, 에세네 등의 분파가 생기게 되었다.

그가 죽은 이후 그의 아들 아리스토불루스 1세가 통치하면서 보다 더 친 헬라적인 정책을 폈고, 그의 사후 그가 생전에 구금시켰던 그의 동생 알렉산더 얀네우스와 결혼한 그의 아내 알렉산드라에 의해 알렉산더 얀네우스가 왕위를 이었고, 그에 의해 하스모니안 왕조 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지는 등 왕권이 절정에 달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통치 기간에 있었던 바리새인들의 반란과 반대세력들에 대한 무자비한 숙청으로 원성을 샀고, 결국 그는 죽으면서 자기 아내에게 바리새인들과 함께 할 것을 충고했다. 그의 뒤를 이은 그의 아내 알렉산드라는 친 바리새적인 정책을 폈고, 이로 인해 시몬의 통치 기간 중에 누렸던 행복하고 번영하는 시대를 회복할 수 있었다.

그녀의 뒤를 이은 사람은 그녀의 생전에 대제사장에 임명되었던 힐카누스 2세였지만 그는 권력을 찬탈하려는 알렉산드라의 아들 아리스토불루스 2세에게 패하게 된다. 그러나 이두매의 왕이었던 헤롯 대왕의 아버지 안티파터의 도움으로 반란을 진압하고 아리스토불루스 2세를 구금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계속된 알렉산드라의 아들들의 반란으로 인해 결국 로마에 도움을 요청하게 되고 이 일을 계기로 하여 로마는 팔레스틴에서의 정치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하스몬-왕조-가계도 (1)

7. 로마 통치 하의 유대인
유대의 역사에 있어 로마의 통치 기간은 B.C. 63년에 시작되어 A.D. 70년 예루살렘의 멸망과 성전의 파괴에서 끝이 난다.

로마의 통치 기간은 크게 다섯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두매 왕조, 첫 지방 총독, 아그립바 1세의 통치, 두 번째 지방 총독, 유대인의 반란으로 구분할 수 있다.

7.1. 이두매 왕조
프톨레미의 왕당파에 속했던 안티파터는 씨저의 호의를 얻어 유대의 총독이 되자, 그의 지위를 확고히 하고 자신의 아들인 파사엘을 유대군의 사령관으로, 헤롯은 갈릴리의 분봉왕으로 삼았다. 씨저의 사후 그들은 다시금 가이사(Cassius)에 협력하여 그의 호의를 얻게 되어 헤롯은 수리아 전역의 총독으로 임명 되었다가, 결국 로마의 도움을 받아 모든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B.C. 24년에 단독으로 유대의 왕이 된다.

7.2. 헤롯 대왕
왕이 된 헤롯은 로마에서 누가 실권을 행사하든지 로마에 충성하였고, 유대인에게 강하고 유력한 정부를 수립하였다. 악티움 해전 이후 헤롯은 자신의 가치를 인정해준 아우구스투스에게 충성하였고, 결국 팔레스틴 전역을 다스리는 왕이 될 수 있었다.

그는 반대자들을 치밀하게 제거하였고, 대부분의 산헤드린 공회원들도 그에 의해 제거 되었다.

헤롯은 그리스-로마 문화의 대단한 숭배자였고, 많은 건물들을 건축하였으며 특히 B.C. 20~19년에 그는 스룹바벨 성전이 주변의 새 건물들에 비해 퇴락하였다 하여 성전 재건에 착수하였다. 그는 11년간 평화를 구가하였으나 마지막 10년간은 다시 정권 쟁취를 위한 가족 내의 암투에 시달리게 된다.

그의 사후 그의 왕국은 그의 세아들, 아르켈라우스, 헤롯 안티파스, 헤롯 빌립에 의해 각각 분할되어 유대, 갈릴리와 베뢰아, 트라코니티스와 인근 지역으로 나뉘어 통치되게 된다.

7.3. 헤롯 대왕의 아들들
아르켈라우스는 유대와 사마리아, 이두매의 분봉왕으로 처음부터 호평을 받지 못해 자신의 통치 지역에서 일어난 폭동과 헤롯이 남긴 복잡한 문제들, 이혼한 여인과의 결혼 등으로 인해 혐오감을 샀고 결국 그는 로마인들에 의해 고울 지방으로 추방되게 된다.

헤롯 안티파스는 갈릴리와 베뢰아의 분봉왕이었고 신약에서 세례 요한과 관련되어 여러 번 언급되는 인물이다. 헤로디아와의 불법적인 결혼으로 인한 세례 요한의 지적으로 그를 투옥하고 참수한 인물이며 빌라도에 의해 보내진 예수님을 심문한 왕이기도 하다. 그는 권력욕에 의해 로마에 갔다가 오히려 왕위를 박탈당하고 추방된다.

헤롯 빌립은 갈릴리 동부와 남동부 지방의 분봉왕이었고, 헤롯의 세 아들 가운데 최상의 통치자였다.

7.4. 로마의 총독들
로마의 총독들은 주로 로마를 위한 재정 대리인이었고, 그의 직무는 로마 정부가 부과한 세금의 징수와 그곳에 주둔한 군대의 통솔, 그리고 중요한 사건의 재판 등이었다.
유대는 원로원에 속한 속주가 아니라 씨저에 속한 속주였기 때문에 징수된 세금은 직접 씨저에게 보내졌다. 많은 유대인들이 세금 징수에 종사했는데 이들은 어느 정도 더 징수하여 초과된 금액을 자신들이 가질 수 있었고, 외세에 협력하는 자들이라 하여 유대인들의 미움을 받았다.

7.5. 헤롯 아그립바 1세
헤롯 안티파스가 A.D. 39년 왕위를 박탈당하고 추방된 뒤에 그의 뒤를 이어 헤롯 아그립바 1세가 왕이 되었다. 그는 로마에서 투옥 되었다가 친분을 쌓았던 칼리굴라가 황제가 되면서 유대의 왕이 되었고, 특별히 바리새인들의 지지를 받았으며, 헬레니즘의 숭배자였고, 그리스 로마적 향락에 탐닉하였고, 결국 A.D. 44년 질병으로 인해 사망하게 된다.

7.6. 헤롯 아그립바 2세
아버지 헤롯 아그립바 1세의 뒤를 이은 그는 아버지의 영토가 아닌 레바논 지방의 콜키스 지역을 분배받게 된다. 그러나 네로에 의해 갈릴리 부근과 윗 요단을 포함하는 지역과 베뢰아의 율리아스란 도시를 다스게 된다. 사도 바울은 바로 그의 재판에 참석하게 된다.

7.7. 제2기의 총독들
A.D. 44~66년 사이에 팔레스틴의 총독들은 모두 7명으로 파두스, 알렉산더, 쿠마누스, 벨릭스, 베스도, 알비누스, 플로루스 등이다.

헤롯 아그립바 1세가 죽은 후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팔레스틴을 총독의 통치 아래 두었고 이 기간 동안은 대단한 고통과 압제의 날들이었다.
이 기간 동안 유대에는 세 부류의 적대적인 당파들이 있었는데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율법적인 생활에 보다 광적이었고, 열심당은 팔레스틴에서 로마를 축출하려 했다. 이 시기의 유대는 로마에 대한 반란과 사마리아인들과의 전투를 치렀으며, 로마와의 대대적이고도 피어린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7.8. 유대인의 반란(A.D. 66~70)
열심당의 혁명적인 활동의 결과 유대인들은 로마와 로마적인 모든 것에 반대하는 증오심을 갖게 되었고 결국 이것은 총독 플로루스의 통치시기에 터져 나오게 된다.
총독이 성전의 보물창고에서 일부를 약탈하자 유대인들은 이를 모욕으로 간주하였고, 헤롯 아그립바 왕의 중재 노력에도 불구하고 반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로마제국은 유대에서의 반란을 진압하고자 베스파시안 장군을 파견했지만 도중 네로의 사망으로 인해 그는 로마로 회군하여 황제가 되었고, 그 후 자신의 아들 티투스(Titus)에게 4개 군단을 맡겨 예루살렘으로 출정시켰고, 결국 4개월 만에 예루살렘은 함락되고 성전과 도시는 파괴되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유대교의 동질성 상실을 가져왔고, 성전 제사는 중단 되었으며 유대교의 영향력 있는 계급이었던 제사장직은 소멸되게 되었다. 또한 또 다른 영향력을 행사했던 산헤드린 역시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다시는 등장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후 다양한 독립 회복을 위한 시도들이 있었으나 모두 실패하게 되고 팔레스틴은 이교도가 번성하였고 팔레스틴 유대교는 1948년 이스라엘의 국가 건설 때까지 종식되게 되었다.

제 2 부 종교적 배경
1. 바리새파
바리새란 명칭이 최초로 사용된 때는 요한 힐카누스가 통치하였던 B.C. 135년이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바리새파의 유래를 그보다 훨씬 이전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들은 율법이 완전히 준수 될 때 메시야가 강림하시며 유대인들이 적국의 통치로부터 해방될 것이라고 가르쳤고, 자신들의 전 재산의 십일조와 이방인들이나 다른 파에 속한 평민들과의 교제를 거부했고 이방인들과의 통혼을 엄격하게 금지하였다.

이들은 자신들의 복장으로 다른 파와 구별하였는데 송아지 가죽으로 만든 경문이 이마와 손목에 매어졌고 경문의 가죽 주머니에는 “이스라엘아 들으라”는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이 적혀 있었고, 유대인의 거의 모든 계급에서 그 구성원을 취하였다.

바리새파 서기관들은 세대를 계승하면서 그들이 계발하고 전승시켜온 규례들이 준수되어야 한다는 극단적인 주장을 하였고, 사두개파와는 반대로 구전을 옹호하였다.
그들은 구약성경을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으로 받아들였으나 풍유적 해석법을 사용하여 그들의 전승까지도 구약과 동등하게 취급하였다.

신약성경에서 언급된 그들의 모습은 안식일을 준수하고, 길게 기도하며, 불필요한 십일조를 바치고, 자주 금식하며, 그들의 경문을 넓히고, 여러 가지 의식상의 결례를 많이 행하고 자만하며 탐욕스럽고, 시장에서 인사 받고, 랍비라 불리는 것을 좋아하며, 회당과 연회에서 스스로 상석에 앉고, 자기들처럼 행하지 않는 모든 사람을 경멸하는 자들로 나타나 있다.

2. 사두개파
사두개란 명칭의 기원에 대하여는 다양한 견해가 있으나 이들은 유대 종파들 가운데서 두 번째의 중요한 종파였다. 이들은 구전 율법을 주장하였지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유전은 용납하지 않았고, 육체의 부활과 영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

종종 이들에 대한 명칭은 외국의 사상을 좋아하고 보통의 유대인에 의하여 지켜지는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자들을 지적하는 자들을 일컫는데 사용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A.D. 60-70년 사이의 대제사장은 항상 사두개인이었으며 이들은 지배계급에 머물러 있었고, 성전을 본거지로 사용했다.

3. 에세네파
이들은 바리새파보다 더욱 극단적인 원래적 종파에 속하고 동양과 그리스의 철학의 영향으로 그 성격이 완만해졌다고 하는 마카비 시대보다 더 엄격했던 하시딤의 후예라는 견해도 있지만 요세푸스에 의하면 이들은 마카비가의 요나단의 때에 활동적이었다고 전해진다.

일들은 주로 금욕주의를 실천하고 성격상 은둔적인 종교집단이었다고 알려져 있고, 이들의 숫자는 예수님 당시 약 4천명 정도였으며, 예루살렘과 유대의 몇 마을, 사해의 서쪽 해안에 있는 엔게디에 주로 거주했다고 한다.

이 파에 가입하려는 자들은 이들이 세 개의 상징, 곡괭이와 앞치마, 흰 옷을 받아 1년간의 견습 기간을 거치고 다시 2년간의 견습을 통과한 후에 공동체원으로 인정받았다고 한다.

이들은 바리새인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외에는 그 어떤 왕도 인정하지 않았고, 대부분 독신생활을 했으며, 한 사람의 청지기에 의해 공동기금을 조성하여 생활하였다. 노예가 없었고 기름 붓는 일이 금지 되었으며 매 식사 전에는 찬물로 목욕을 해야 했고, 죽은 동물을 가까이 하지 않고 옷도 식물성 섬유로 된 옷을 입었다.

4. 열심당
이들은 공물이나 세금을 바치는 일이 참된 왕이신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라 하여 로마 황제에 대한 조공에 반대했다. 파이퍼(Robert Pfeiffer)에 의하면 “바리새파가 하시딤의 후예이듯이 열심당은 마카비 일파의 후예다”라고 한다.

이들은 마카비 일가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율법에 열심을 내었던 것을 본받았기에 열심당이라고 불려 졌고, 또한 하나님의 율법에서 떠난 이스라엘을 보며 하나님에 대한 열심을 보여준 비느하스(민 25:11)의 본을 좇는다고 믿었다.

이들은 A.D. 66-73에 있었던 전쟁에 매우 활동적이었으나 A.D. 73년 5월, 마사다의 마지막 요새가 함락되면서 그 활동의 종지부를 찍었다.

제 3 부 중간사 시대의 유대문헌
1. 히브리어 구약성경의 헬라어역
A.D. 1세기 경 애굽에는 거의 1백만의 유대인이 거주하였고, 알렉산드리아의 5개 구 가운데 2개 구가 유대인의 구역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들은 이곳에서 곧 팔레스틴에서 사용하던 아람어를 잊어버리고 대부분 헬라어를 사용하였다. 따라서 이들이 구약을 사용하게 될 경우 번역본이 필요했으며, 히브리어가 상용어로 살아있지 못하자 팔레스틴과 바벨론에서 아람어 탈굼역이 필요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애굽에 살던 유대인들은 헬라어역의 구약성경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들의 필요에 의해 탄생된 히브리어 구약의 헬라어 번역본인 70인경은 헬라화된 유대인 문학의 뛰어난 산물이라 할 수 있다.

70인경은 구약의 본문 비평에 있어 중요한데 이것은 70인경이 신약을 해석하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헬라어 구약성경은 신약의 저자들에 의해 채용된 사상의 세계와 어휘들을 제공해 주고 있다. 이것은 신약의 종교적인 용어들이 궁극적으로 헬라어 세계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라 70인경의 헬라어를 통해 전달된 구약의 히브리어에서 유래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2. 사해 동굴에서 발견된 문헌들
유대교와 기독교에 있어서 커다란 중요성을 지닌 놀랄 만한 고고학적 발견이 사해의 서안을 들어가는 계곡의 동굴들에서 있었는데, 각기 다른 다섯 곳에서 발견된 필사본들은 쿰란의 공동체 자체에 대한 환한 빛을 던져줄 뿐만 아니라 당시의 사고와 성경본문의 특성,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파하셨고 기독교회가 형성되었던 성경해석의 발생배경, 당시 역사의 다양한 면모들에 대한 가치 있는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다.

사해 두루마리란 용어는 1947년 이래로 사해의 몇 계곡에 위치한 동굴들에서 발견된 많은 문헌들을 말하는 포괄적인 명칭들인데, 사해에서 발견된 두 번째 자료의 무더기는 1951년 헤브론 동편의 사해로 들어가는 와디 다라야 지방의 한 곳인 무라바아트의 두 개의 동굴에서 발견되었다. 이들의 연대는 로마의 통치기간으로 올라가며 대부분 바르 코흐바에 의하여 일어났던 제 2의 유대인 반란과 관계있는 것들이다.

1962년에 예루살렘 구도시에 아랍인들이 여리고 북쪽으로 잘못 전해진 요단강의 절벽에 있는 한 동굴에서 문서들을 발견하였다는 사실에 미국동양연구학회가 근처의 동굴들을 탐사하여 발견한 아람어 파피루스의 연대는 B.C. 375~335년경으로 추정되고 있고 이것은 팔레스틴의 역사를 연구하는 역사학자들에게는 매우 의미 있는 일이었다.
현재 유용한 성문화된 자료의 상당수는 제1, 제4, 제11 동굴에서 발견된 것으로 제1 동굴은 최초의 두루마리들을 전해주었다.

또한 다른 쿰란의 동굴들은 성경적 자료들과 성경이 아닌 히브리어와 아람어 사본들 274개의 단편들을 전해주었다. 특히 제11 동굴은 현재 팔레스틴 고고학 박물관에 소장된 많은 단편들과 약간의 두루마리가 발견되었고, 150개의 시편 중 많은 것을 포함한 두루마리와 원 히브리 문자로 기록된 레위기 등이 발견 되었다.

3. 외경과 위경
구약의 외경은 길이와 주제, 표현방법이 각기 다양한 14권을 일컫는 것으로 많은 영어역 성경들이 수록한 외경의 순서는 흠정역(King James)의 번역자들이 익숙한 구약의 라틴어역을 따르고 있다.

유대인들은 두 개의 구약 정경, 곧 팔레스틴 사본(맛소라 사본을 따르는)과 알렉산드리아 사본(70인역을 따르는)을 가지고 있지만 알렉산드리아 유대인들이 외경 가운데 어떤 책도 정경으로 간주한 증거는 전혀 없지만 헬라어를 사용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아마 외경이 구약 정경의 일부를 형성하였다는 이유로 외경에 정경적 지위를 주었다.

70인경에서 외경에 속한 책들(에스드라 2서 제외)은 항상 정경적인 책들과 나란히 동일 계급으로 취급되었지만 전통적인 유대인이나 개신교 신자들은 외경 가운데 어느 한 책도 정경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종교개혁 시대에 있어 개신교와 로마 카톨릭은 외경에 대하여 서로 상이한 태도를 보였는데 트렌트 종교회의는 다양한 외경들의 정경성을 주장하였고 이것이 1870년 바티칸 회의에서 재확인된 바 있다.

그러나 루터는 외경 가운데 그 어떤 책의 정경성도 인정하지 않았으며, 단지 그것들을 모두 구분하여 구약과 신약 사이에 위치시키는 일을 단행하였다.

성경에서의 외경의 제거는 한 제네바 성경에서 외경을 생략시켰던 청교도의 영향으로 돌리고 있다. 그리고 1629년 흠정역의 어떤 판에는 외경이 없이 출판이 되었고, 1827년 이후 점차 외경은 무시되고 경시되어 왔다.

그러나 비록 외경이 영감된 정경의 일부는 아니라 할지라도 이 책들은 정치적인 면에서나 문학적, 역사적 면에 있어 대단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또한 외경들은 종교적인 측면에 있어서도 그리스도의 탄생을 전후한 세기들 동안에 있었던 유대인의 영적이며 철학적, 지적 생활에 대한 통찰력을 제시해 주고 있다.




제1장 신·구약 중간 시기

1. 중간 시기란 어떤 시기인가?

○ 이스라엘은 사사시대를 거쳐 세 왕이 통치하다가, 솔로몬 왕이 죽은 후 북왕국과 남왕국으로 분열되었다.

- 사사시대 → 통일왕국시대 → 분열 왕국시대

○ 북왕국은 B.C. 722년 당시 세력이 크던 앗수르에 멸망하여 그 백성들은 흩어졌고, 그 후 남왕국은 B.C. 586년 바벨론에게 함락되었다.

- 유다 시대 → 포로시대

○ 그 뒤 B.C. 536년 고레스 왕의 칙령에 따라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유대인을 이끌고 유다로 귀환하였다.

- 포로 귀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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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후 말라기로부터 마태 사이에는 400년 동안은 선지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신구약 중간 시기”.

- 그러나, 이 기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침묵하신 것은 아니다. 다니엘을 통해서 유다의 바벨론 포로와 메시아 탄생 사이의 수 세기에 걸쳐 일어날 일들에 대해 예언해 주셨다.

2. 중간시대의 중요한 변화

구분 시기 중간시대 이전 중간시대 이후
정치적 변화 바사(페르시아) 통치 로마 통치
사고적 변화 동양적 사고 서양적 사고
언어적 변화 히브리어 ⇨ 헬라어 ⇨ 아람어

3. 정치적 변화

(1) 바벨론 통치 : B.C. 612~536년

○ 느부갓네살 왕은 B.C. 606년 남왕국 유다를 정복

○ B.C. 586년에는 예루살렘 성전과 성벽을 불태워 파괴, 남왕국 완전 멸망

○ 그 후 유대인들은 70년간 포로생활(B.C. 606년 최초의 정복으로부터 70년, B.C. 586년으로부터는 50년간)

- 예루살렘 성전 대신에 회당을 만들어 회당에서 모이기 시작

회당은 나중에 예수님의 가르침의 장소가 되고(눅 4:15), 사도들의 복음 전파를 위한 전진기지로 이용됨(행 6:9 스데반, 행 9:20 바울).

- 바벨론에 끌려가 있는 동안 율법을 재해석하는 서기관 그룹이 생겨남.

○ B.C. 536년 어느 날 다니엘은 바벨론 벨사살 왕의 잔치에 부름 받았다. 그 자리에서 신비스러운 손에 의해 벽에 쓰인 글을 해독하였는데, 그날 밤 벨사살은 살해되었고, 바벨론 도성은 바사 군에게 함락.

(2) 바사(Persia) 통치 : B.C. 536~332년

○ 바사 왕 고레스는 B.C. 536년 유대인들에게 본국 귀환을 허락하는 칙령 선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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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1차 복귀 : B.C. 536년 스룹바벨 인도하에 42,360명 복귀

➡ B.C. 515년 예루살렘 성전 재건

② 2차 복귀 : B.C. 458년 에스라 인도하에 5,400명 복귀

➡ 율법 개혁운동

③ 3차 복귀 : B.C. 445년 느헤미야 인도 ➡ 이스라엘 성곽 재건

○ 바사 통치 중 B.C. 400년경 구약의 예언 종식, 400간의 중간기

○ 유대교의 발생

- 연혁 : 에스라의 율법 개혁운동 이후 유대교 발생

- 교리 : 모세오경을 신앙과 생활의 원리로 삼아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며 정교한 규칙 제정

- 유대주의(Judaism)의 세 기둥

① 정경(Cannon) : 교육의 내용

② 회당(Synagogue) : 교육의 환경

③ 랍비(Rabbis) : 교육의 주체

(3) 헬라 통치 : B.C. 332~167년

○ 알렉산더 대왕은 B.C. 333년 바사의 다리오Ⅱ세를 격퇴한 후 B.C. 332년 다시 바사 군 격퇴, 바사 붕괴

○ 헬라 통치 시의 업적

- 고대 세계에 70여 개의 상업도시들을 건설하고 그곳에 희랍인들을 이주시켜 희랍 문화를 전파.

∙ 유대인들도 분산시켜 버림(흩어진 유대인, Diaspora)

∙ 흩어진 유대인들은 그곳에서도 회당을 만들어 모여(행 13:5) 후에 바울 전도여행 시 복음전도의 거점.

- 헬라어가 고대사회에 넓게 확산되어 세계 공용어로 사용(코이네)

∙ 예수님 이후 복음의 확산 시 어느 나라 누구에게나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됨.

∙ 언어의 통일에 따라 구약성경은 헬라어로 번역되고(70인 역), 신약성경은 헬라어로 기록됨으로써 누구나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됨.

○ 알렉산더의 사망 이후 헬라 제국은 분열하게 되었고, 결국은 프톨레미(Ptolemy), 셀루커스(Seleucus) 두 장군에 의해 양분.

- 팔레스틴은 처음에는 애굽을 근거지로 한 프톨레미 왕조의 지배하에 있었으나, 나중에는 수리아의 다메섹을 수도로 정한 셀루커스 왕조에게 복속.

- 프톨레미 왕조의 지배하에 있을 때 유대인들은 평화를 누렸으나, 셀루커스 왕조(수리아)의 지배를 받으면서 고통받기 시작.

- 특히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여호와 예배를 폐하고 이방신 예배 강요

- 더욱이 제사장 ‘야손’이 황제에게 유대의 희랍화 운동을 하겠다는 약속과 돈을 들여 대제사장이 됨으로써 유대의 본격적인 희랍화 시작.

∙ 예루살렘 성전에 Zeus신상 세우고, 유대인들에게 성전 예배를 중지시켰으며 희랍 신에게 경배토록 강제

∙ 완전한 미의 조화는 육체미라고 하면서 할례 금지

∙ 안식일 금지, 성경 소지 금지

※ 성직자의 타락을 참으로 참담한 것.

- 이러한 타락에 대해서는 진리에 근거해서, 그러나 가능한 한 평온한 방법으로 고쳐나가야 한다.

- 그러나 분명하게 시정해 나가야 한다.

- 여기에는 기도와 먼저 자기반성이 선행되어야 한다.

(4) 유다의 독립 : B.C. 167~63년

○ 이에 따라 유대에서는 헬라화 운동에 대항하여 전통적인 유대주의를 지켜나가기 위한 움직임이 벌어졌는데, 그것이 바로 핫시딤운동(Hasidim, 경건한 무리들)으로서 나중에 “바리새파”가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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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히 모딘 지역 마카비家의 제사장 ‘마타디아스’와 그의 5명의 아들, 유대인 청년들은 헬라화 정책에 반기를 들고 독립운동을 시도(이 시기를 “마카비 시대”라고도 함).

- B.C. 164년 유다 마카비는 예루살렘 성전을 빼앗아 Zeus신상 없애고 제사장을 데려다가 성전 성결 후 하나님께 봉헌

∙ 이때 성전에 촛불이 켜진 것을 기념해서 “빛의 축제라고 해서 「하누카 명절」을 지키게 됨.

∙ 이것이 신약시대의 수전절(修殿節, 요 10:22), 봉헌식의 기원

- 요나단 마카비 때 수리아와 평화조약 체결한 결과 유대의 종교적 자유 허락, 수리아는 요나단 마카비를 대제사장 및 유대 통치자로 인정

- 시므온 마카비 시절인 B.C. 142년경 정치적 독립 쟁취

○ 마카비 독립운동 뒤 3대 종파가 생겨나기 시작.

① 바리새파

- 에스라, 느헤미야 시대의 율법 개혁자들을 조상으로 하여, 유대교의 순수성을 보존하는 데 주력. 보수주의자.

- 희랍화에 대항하던 핫시딤의 후예로서, Pharises의 어원 자체가 “갈라진 사람들(Hellenism으로부터 갈라져 Hebraism 고수)

- 전체 구약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면서, 율법과 옛 유대의 전통, 많은 율례와 의식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

- 마카비의 독립운동에는 무관심하고, 예루살렘 성전 재건에 헌신

- 사회적 중간계층, 회당 중심

② 사두개파

- 솔로몬의 대제사장 사독(삼하 8:17)의 이름을 대제사장의 후예로 자처

- 종교적·정치적 자유주의 노선 ⇨ 헬라의 철학, 문화에 충성하고 헬레니즘에 대해 비교적 관용적인 태도를 나타내 유대인들의 미움 자초

- 모세 오경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면서, 서기관들의 율법해석을 불신. 바리새인들과 유대 전통에 반대

- 이해할 수 있는 것만을 믿으려는 경향을 나타내, 영혼불멸과 부활 및 천사와 마귀의 존재 부인

- 대제사장 등 상류 부유층, 성전 중심(성전 의식 강조)

③ 에세네파

- 금욕적이고 경건한 생활태도로 사해 서북 방면에 공동체 형성

- 주된 관심은 율법서(토라)와 종교서적의 연구, 해석

- 종말론적 사고가 팽배하여 광야생활

- 신조는 “선한 사회, 금욕, 명상, 노동, 독신생활”등

○ 시므온 마카비의 아들 요한 힐카누스가 죽자 정권투쟁으로 내분이 일어나, 수리아에 와 있던 로마 대제 폼페이우스에게 도움 요청하였으나, 폼페이우스는 B.C. 63년 유대로 진격하여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로마에 예속

- 마카비家의 힐카누스 2세를 유대의 왕으로 지목하였고, 이때 헤롯이 갈릴리 분봉왕에 오름.

(5) 로마 통치 : B.C. 63 ~ 신약시대

○ 로마에 의해 갈릴리 분봉왕에 오른 헤롯은 로마의 비위를 맞춰 힐카누스에 이어 결국 유대왕이 됨(B.C 37~4년).

- 예루살렘 성전 재건(헤롯 성전), 유대인의 경전과 의식 인정

- 그러나, 사마리아에 아구스도 황제 숭배 신전을 건축했고, 유다에 헬라 문화를 도입

- 이에 반발하여 열심당원 출현(현실 통치에 복종해야 한다는 바리새파와 견해차를 보여 분리)

- 예수님의 탄생 당시 왕위에 있으면서 2세 이하 영아 학살 명령.

○ 로마 총독의 통치

- 헤롯 대왕 사후 유대 왕국은 헤롯의 세 아들에 의해 분할

∙ 복음서에 가장 자주 언급되는 헤롯 안디바스는 갈릴리 지역을 통치한 헤롯 대왕의 아들(세례 요한 처형, 빌라도로부터 예수님을 이송 받음)

∙ 유대 ⇨ 아켈라오, 갈릴리 ⇨ 헤롯 안디바스, 북동부 ⇨ 빌립

(마 2:22) (마 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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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대의 아켈라오 사후 유대인들은 로마의 유대 관원의 이중적 수탈정책을 벗어나기 위해 로마에 대해 직접통치 요구하였고, 이에 따라 로마는 총독을 파견하여 직접 통치.

∙ 빌라도는 로마에서 파견된 유대 총독(눅 3:1~2)

- 많은 군사도로 건설

∙ 나중에 복음을 전하기 위한 복음의 고속도로화

○ 예수님은 로마의 가이사 아구스도의 통치 시, 헤롯 대왕 지배 시 탄생

○ 그 후 계속 로마의 통치를 받다가 66년 반란이 일어나 로마의 침공을 받고 70년에는 디도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 함락, 예루살렘 성 파괴(마 24:2).

4. 복음서의 배경

(1) 유대민족의 사회적 계층

① 「왕」과 「대제사장」

○ 제사장 마카비가 유대를 회복한 이후 제사장이 왕직을 겸직하였으나, 헤롯 이후 분리

- 헤롯은 이두메아 출신으로서 대제사장이 될 수 없었기 때문에 분리되게 되었으며, 따라서 헤롯은 대제사장 격하 정책을 폈다.

○ 대제사장은 민중의 정신적 대표자요, 산헤드린의 의장.

- “산헤드린”은 B.C. 196년 생김. 70인의 유대 장로(서기관, 바리새인, 사두개인)들로 구성된 종교재판 기구. 예수님을 심문하여 빌라도에게 넘긴 공회.

② 부 제사장(제1급의 제사장, 왕하 25:18))

○ 정치적, 경제적 富를 누림

※ 제사장의 세 종류

1) 대제사장

2) 부 제사장

3) 일반 제사장

③ 일반 제사장

○ 특권과 혜택은 없이 의무만 담당 (7,000명 정도)

○ 24 반열에 따라 반차가 정해져 있어서, 평소에는 각자 직업에 종사하다가 절기 때마다 자기 반차가 되면 예루살렘에 올라가 1년에 2주간씩 성전 봉사(눅 1:8, 9)

④ 서기관

○ 유대가 바벨론에 망해 포로로 끌려가 있을 때 형성. 율법적 지식으로 대제사장과 장로 단체에 영향력을 미치면서 사회세력으로 등장

○ 대부분 바리새파 출신, 존칭은 랍비(Rabby)

○ 율법 지식이 유대인의 일상생활에 본질적 요소였기 때문에 민중 사이에 폭넓은 세력을 형성하면서 일반적으로 존경을 받기는 했지만, 많은 시간을 율법의 세부사항에 대한 논쟁으로 허비.

(2) 유대의 종파들

① 바리새파

② 사두개파

③ 에세네파

④ 서기관

⑤ 열심당 : 모세 때처럼 신정정치가 이루어지기를 희망.

헬라어 “셀롯”의 번역(눅 6:15, 12제자 중 하나인 시몬도 열심당원 출신)

로마인들에 대해 폭력까지도 사용했던 헤롯의 정적.

일명 시카리이(자객들) - 단검 소지, 불시 공격 후 도망

⑥ 헤롯당 : 유대 분봉 왕과 정부 당국을 지지하면서 헤롯가가 집권하기를 희망. 예수님을 정치적인 반대세력으로 보아 배척(말 3:6)

(3) 사회적 배경들

○ 예수님 당시 팔레스타인은 경제적으로 큰 불황기

- 제국 신민의 2/3는 노예(6천만 명)

- 서민생활도 크게 빈곤

○ 관리들은 크게 부패

- 세리들은 사복을 채우기 위해 백성들에게 과중한 세금 부과, 차액을 착복

- 제사장들은 성전의 제사로부터 불공정하게 돈을 벌어들였다. 상인들을 성전에 들여 장사하게 하고 돈을 받기도 했다.

○ 지역적 갈등

- 팔레스타인은 세 지역으로 구분(이방, 사마리아, 유대)

- 사마리아인들은 앗수르가 B.C. 722년 북왕국 이스라엘 정복 후 이주정책, 혼혈 정책을 펼 때 이방인과 통혼, 혼혈인이 되어 유대인의 멸시를 받음.

하나님은 신·구약 중간기의 침묵 시기를 통해 메시아의 출현을 준비하셨다. 이렇게 예수님은 완전하게 준비된 세계에 임하셨다(갈 4:4, 5). 메시아를 갈망하는 정치적 상황, 예수님의 가르침의 거점이 된 회당 제도의 정착, 복음 전파를 위해 잘 닦인 도로, 전도의 언어적 장벽을 무너뜨린 언어의 통일, 복음을 받고자 했던 흩어진 Diaspora들. 적절한 준비는 보다 적은 시간 안에 보다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게 하였다.



신구약 중간기 역사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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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성전 시기(신구약 중간사) 역사 개요

기원전 1050년 사울이 이 왕이 된다. 40년 동안 통치한다. 그 뒤 유다 지파 출신인 다윗이 제2대 이스라엘 왕이 되어 역시 40년 동안 통치한다. 다윗과 우리의 아내 밧세바와 동침하여 낳은 아들은 죽고 두 번째 아들인 솔로몬이 다윗의 왕위를 물려받아 40년 동안 통치한다. 기원전 931년 솔로몬이 죽고 아들 르보호암이 이스라엘의 왕위를 물려받지만 강압적인 통치로 인해 북쪽의 열 지파가 여로보암을 왕으로 삼고 분리된다. 결국 이스라엘은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의 분단된 형태로 마지막까지 가게 된다. 북이스라엘은 기원전 722년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하고 남유다는 586년 앗수르를 멸망시킨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한다. 70년의 유배 생활을 끝내고 기원전 516년 솔로몬 성전에 이어 두 번째 성전인 스룹바벨 성전이 세워진다.

신구약 중간기를 제성전기로 부르는 이유는 중간기라는 명칭이 굉장히 모호하기 때문이다. 구약은 말라기로 끝이 나지만 실제 역사에서 말라기는 재건기 중간 어디쯤에 해당한다고 본다. 즉 연대기적으로 분다면 구약의 끝이 아닌 것이다. 이러한 모호함보다는 스룹바벨 성전이 지어진 이후를 중간기의 개념으로 받는 것이 훨씬 그 시대를 정의하기에 양호하기 때문에 학자들은 중간기보다는 ‘제2성전기’로 호칭하는 것을 좋아한다.

1. 헬라시대(The Greek Era)

  • B.C. 331-B.C. 143년까지의 약 190년의 시기

1) 알렉산더 시대 (B.C. 336-323)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돌아와 두 번째 성전을 지었을 때 세계 역사는 요동치고 있었다.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지만 페르시아는 곧 마케도니아 필립의 아들인 알렉산더가 일으킨 전쟁으로 인해 멸망당하게 된다. 알렉산더는 페르시아가 만들었던 거대한 제국의 중심을 근동에서 지중해로 옮겼다. 팔레스타인을 지나 이집트를 멸망시켰고, 페르시아와 인도 경계까지 정복해 나갔다. 그러나 그는 젊은 나이인 BC 323년, 33세에 요절했고, 결국 그의 제국은 세 제국으로 분열되었다. 시리아를 중심으로 셀레우쿠스 왕조가 형성되었고, 이집트를 중심으로 한 프톨레마이 왕조, 원래 본거지였던 마케도니아 지역은 리시마코스와 카산드로스가 나누어 통치하게 된다.

2) 톨레미(프톨레미) 왕조 시대(B.C. 301-200)

팔레스타인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왕조는 톨레미 왕조와 셀류쿠스 왕조이다. 팔레스타인을 중심으로 위로를 셀류쿠스 왕조가 통치했고, 아래로 이집트 지역은 톨레미 왕조가 통치했다. 두 왕조는 지역적으로 경계를 이루고 있었고, 두 왕조의 야망에 의해 끊임없이 전쟁을 치렀다. 이러한 두 왕조 사이에 자리한 팔레스타인은 피해를 볼 수밖에 없었고, 나라 전체가 전쟁터로 변하기 일쑤였다. 알렉산더 대왕 사후 약 100년 동안 톨레미 왕조가 안정적으로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아마 이 시가가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안정적이고 행복한 시기였을 것이다.

BC 312년 톨레미는 많은 유대인들을 이집트에 새로 건설된 알렉산드리아로 이주시킨다. 유대인 회당이 만들어지고 심지어 유대인 밖에 성전이 지어진다. 후에 이 성전은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유대인들에 의해 파괴당한다. 이때 히브리어로된 구약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 인경(LXX)이 만들어진다. 70인의 학자에 의해 번역되었다 하여 70인 역, 또는 70 인경으로 불린다. 70 인경 번역 이야기가 담겨있는 곳은 가톨릭 성경 구약 외경인 ‘아리스테아스 편지’에 있다. 식민 시민으로서 조공을 바쳤으나 제사장에 의해 유대인 고유의 통치권이 상당히 부여되었으며, 중대한 사건이 아닌 이상 유대인 자치법에 의해 결정되었다.

3) 셀류쿠스 왕조 시대(B.C. 198-167)

이러한 평화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두 왕조를 서로의 땅을 넓히기 위해 자주 충돌했다. 5번 정도의 큰 전쟁이 있었고, 결국 기원전 198년 팔레스타인 지역을 설류쿠스 왕조에 편입시킨다. 이것으로 팔레스타인은 새 주인을 모시게 되었다. 유대인들은 전쟁 초기는 톨레미 왕조에 우호적 있지만 말기에는 셀류쿠스 왕조를 돕게 된다. 그 덕분인지 셀류쿠스 초기에는 우호적으로 유대인을 대했고, 적지 않은 자유도 보장받았다. 그러나 그러한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기원전 190년 안티오쿠스 3세는 로마와 벌린 서머나(Smyrna) 전투에서 크게 패하게 된다. 서머나 전쟁은 로마와 한니발 장군과의 전쟁이었다. 한니발이 패함으로 안티오쿠스는 큰 부담을 안게 된다. 그 여파로 타우러스 산맥(the Taurus Mountains) 서쪽에 위치한 소아시아 지역을 로마에게 빼앗긴다. 금 5,000달러라는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여 재정상으로도 큰 타격을 받는다. 안티오쿠스는 열악한 재정을 만회하기 위해 팔레스타인 지역에 힘에 부치는 세금을 부과한다. 이때 예루살렘 성전에 보관하던 많은 보물들까지 탈취한다. 그래도 이때까지만 해도 견딜 만 했다. 정말 심각한 상황은 다음 통치자에게 일어난다.

안티오쿠스 3세가 살해당하고 그의 장남이었던 안티오쿠스 4세가 왕으로 등극한다. 그는 유대를 헬라화 시키기 위해 강압적으로 유대인들을 대하기 시작한다. 그는 가장 먼저 사독 가문의 제사장이었던 오니아스 3세(OniasⅢ)를 파문시킨다. 오니아스 3세의 파문 뒤에는 시리아파(셀류커스왕조)와 이집트파(톨리미 왕조)의 정치적 이견으로 인한 갈등이 존재한다. 왕조가 바뀌면서 시리아파는 득세하게 되고 이집트 파는 위축되었다. 시리아파는 이집트파였던 오니아스 3세를 처리할 기회를 잡은 것이다. 시리아파는 안티오쿠스 4세에게 충성을 맹세하면서 아니아스 3세를 처리해 달라고 청을 한다. 문제는 오니아스 3세는 사독 계열의 합법적인 제사장이었기 때문에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다. 안티오쿠스 3세는 비교적 온화한 정책을 폈기 때문에 오니아스를 내버려두었다. 그러나 아들인 안티오쿠스 4세는 달랐다. 기회를 엿보던 시리아파는 안티오쿠스 3세가 외국에 나가 있는 동안 아들에게 뇌물을 바치고 충동질해 오니아스 3세를 대제사장직에서 파면시킨 것이다.

시리아파 지도자였던 시몬은 자신의 동생인 야손을 대제사장으로 임명한다. 야손은 안티오쿠스 3세와 결탁하여 예루살렘을 헬라적으로 재정비한다. 안티오쿠스 4세의 지원을 등에 업고 야손은 시몬은 예루살렘에 경기장을 세우고, 유대인들에게 헬라풍의 옷을 입게 한다. 이러한 변화를 지켜보던 정통 유대인들과 하시딤과 경건한 유대인들은 위기의식을 느끼게 된다. 아론이 자손, 특히 사독의 제사장들만이 대제사장이 될 수 있다는 사고 체계를 전복시킨 그들을 그대로 둘 수는 없었다. 그러나 비록 헬라인에 의해 대제사장이 되기는 했지만 야손은 정통파였기에 불만은 있었지만 함부로 행동할 수 없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메넬라우스라는 유대인이 토비야 가문보다 더 많은 뇌물을 바치고 대제사장이 된 것이다. 메넬라우스와 그를 따르던 자들은 안티오쿠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더욱 헬라의 문화를 정착시키려 했고, 정통파를 핍박하기 시작한다.

야손파와 메델라우스파의 그리고 정통 유대인파들간의 긴장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다 안티오쿠스가 이집트 원정에서 전사하게 된다. 소문을 전해 들은 야손과 추종들자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와 메넬라우스를 몰아내기 위해 반란을 일으킨다 그러나 안티오쿠스는 죽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집트를 거의 정복할 뻔했지만 로마가 이집트를 돕는 바람에 실패하고 다시 돌아간다. 이집트 원정의 실패와 로마의 패창을 지켜보던 안티오쿠스 4세는 제국을 정신적으로 통일해야한다는 강박감에 사로잡힌다. 자신이 세운 메넬라우스를 몰아내려 했던 유대인들을 반란세력으로 보고 그들에게 철저히 복수할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긴다. 먼저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야손을 추방하고 다시 메넬라우스를 대제사장직에 복귀시킨다. 자신의 군대를 풀어 닥치는 대로 유대인들을 학살한다. 성전의 기구들을 끌어내 가져가 버린다. 반항하는 유대인들을 잔혹하게 죽이고, 유대교 전통을 뿌리째 뽑으려고 한다.

먼저 희생 제사를 중단시킨다. 또한 할례를 받지 못하고, 안식일을 지키지 못하게 막는다. 심지어 토라를 찢어 불사른다. 유대인들에게 돼지고기를 억지로 먹이게 하며, 곳곳에 우상을 세워 제사를 드리게 한다. 그의 파괴적 행동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유대인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던 성전 뜰에 제우스 신상을 세우고 경배하게 한다. 심지어 자신의 형상을 만들어 놓는다. 수많은 사람들이 반항했고, 반항한 자들은 지체 없이 죽였다. 에피파네스 4세는 유대교 자체를 말살시키려 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외경인 마키 1서와 2서에서 어느 정도 읽을 수 있다.

2. 저항과 독립(B.C 162-64)

*마카비(Maccabee) 혁명은 셀류쿠스 왕조 시대 안에 있지만 독립했던 하스몬 왕조와 함께 묶는 것이 선명해 보인다.

1) 마카비(Maccabee) 혁명

순교를 당하거나 예루살렘을 떠나는 등의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던 유대인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하게 된다. 그 유명한 마카비 혁명이 시작된 것은 예루살렘이 북서쪽에 자리한 모데인이란 마을이었다. 시리아의 한 관리가 이곳에 찾아와 이교 제사를 강요했다. 이 대 다섯 아들을 둔 마타티아스(Mattathias, 한글성경은 ‘맛다디아’로 번역, 이곳에서 마카비라는 이름이 생긴다)라는 제사장이 명령을 거절했을 뿐 아니라 헬라 관리와 배교자들을 죽여버린다. 그리고 산으로 도망친다. 산으로 도망친 그들은 정통을 지키려는 수많은 유대인들을 만나게 되고 그곳에서 하나의 세력을 형성하게 된다.

마카비 혁명

저항운동은 마타티아스(Mattathias)의 세 아들인 마카비(대장쟁이)라는 별명을 가진 유다와 요나단, 그리고 시몬에 의해 계속하여 이어간다. 기원전 165년 12월 25일 그들은 성전을 회복하고 예배를 다시 드리게 된다. 정확히 성전이 더럽혀진 3년 후이다. 이때를 기념하여 하누카, 또는 빛의 절기로 알려진 수전절이 생겨난다.(요 10:22) 도중에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사망하고 안티오쿠스 5세가 등극한다. 나이가 어렸던 탓에 리시아스가 섭정하면서 기원전 162년 유대인들에게 절기를 자유롭게 지킬 수 있도록 허락한다. 리시아스는 그것뿐 아니라 유대인의 호감을 사기 위해 메넬라우스를 죽인다. 핫시딤은 정치적이 목적이 없었기 때문에 더 이상 저항하지 않는다. 그러나 유다는 정치적 독립을 위해 전쟁을 시도하지만 참패하고 자신도 죽임을 당한다. 다메트리우스 1세가 지배하면서 아론 계열의 알키무스를 대제사장으로 임명한다. 그러나 그도 얼마 가지 않아 죽게 된다. 그 후 예루살렘은 무려 7년 동안 대제사장이 없는 공백 상태가 된다.

유다가 죽자 형제인 요나단이 뒤를 이었다. 셀류쿠스 제국은 이때 한참 세력다툼 중이었다. 더메트리우스 1세와 알렉산더 발라스가 충돌한 상태였다. 요나단은 알렉산더 발라스를 지지했다. 결국 승리는 알렉산더 발라스에게 돌아갔고, 덕분에 요나단은 발라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게 된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알렉산더 발라스는 기원전 152년 요나단을 유대의 지도자 대제사장으로 임명하고 만다. 정통 유대교를 신봉했던 하시딤과 경건한 유대인들을 큰 충격에 빠지게 된다. 전쟁으로 인해 손에 피를 묻힌 그가 대제사장이 된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었다. 이것을 참다못한 수많은 유대인들이 마키비 가문에 분노를 갖게 되었고, 예루살렘을 등지게 된다. 이때의 적지 않은 사람들이 사막이나 시골에 내려가 자기들만의 공동체를 만들어간다. 학자들은 쿰란 공동체가 이때 만들어지지 않았는가 조심스럽게 추측한다.

이때 안티오쿠스 4세의 아들을 자칭하던 자기 일어나 알렉산더 발라스를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한다. 자신을 더메트리우스 2세로 명명한다. 그는 다시 안티오쿠스 6세와 세력다툼을 하게 된다. 안티오쿠스 6세를 지지하던 트리포는 시시각각 세력을 확장하며 데메트리우스 2세를 지지하던 요나단을 죽여 버린다.(기원전 143년) 요나단의 뒤를 이어 시몬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그는 더메트리우스 2세에게 세금 면제와 유대인들의 독립을 요구한다. 오니아스 3세 이후 유대는 정통적인 제사장이 아닌 사람들이 대제사장이 되었고, 지도자와 대제사장을 겸직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시몬은 주전 134년 자신의 사위였던 프톨레미에게 살해당한다. 시몬을 대신해 그의 아들 힐카누스가 대제사장이 된다.

2) 하스몬 왕조(B.C134-63)

‘하스몬’이란 용어는 하스몬(Hasmon)가에 속했던 마타디아스와 그의 아들들의 가족명에서 유래한 것이다. 마카비는 마타디아스에서 유래한 것으로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말한다. 하스몬 왕조로 불린 이유는 70여 년 동안 정치적인 독립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요한 힐카누스Ⅰ세(Hyrcanus Ⅰ, B.C. 134-104)

아리스토불루스 Ⅰ세(Aristobulus Ⅰ, B.C. 104-103)

알렉산더 얀네우스(Alexander Jannaeus, B.C. 103-76)

살로메 알렉산드라(Aalome Alexandra, B.C. 76-67)

요한 힐카누스 Ⅱ세(Hyrcanus Ⅱ, B.C. 67-66)

아리스토불루스 Ⅱ세(Aristobulus Ⅱ, B.C. 66-63)

요한 힐카누스Ⅰ세(Hyrcanus Ⅰ, B.C. 134-104)

요한 힐카누스 1세 시절 잠시 속국이 되었지만 주전 129년 로마 원로원의 인준을 받아 독립국이 된다. 힐카누스 1세는 어느 정도 안정이 되자 곧바로 영토 확장에 나선다. 팔레스타인 남부에 자리한 이두메 지역을 점령하고 그들에게 강제로 할례를 시킨다. 이 사건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유대인들은 할례를 받지 않거나 율법을 지키지 않거나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들을 개처럼 취급했다. 그런 그들을 개종시키려 했다는 것은 굉장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힐카누스의 이러한 행동은 후에 이두메 출신의 헤롯 안티파터가 큰 저항 없이 팔레스타인을 지배하게 된다. 힐카누스는 다시 북쪽으로 진군하여 사마리아를 점령한다. 그곳에 있던 그리심 성전을 파괴해 버린다. 그러나 그는 정통파 유대인들에게 결코 환영받지 못했다. 사독 가문이 아니었기 때문 정통적 의미에서 대제사장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 친권력자들은 사두개파가 되고 율법을 경건하게 추구했던 이들은 바리새파가 되어 완전히 구분된다. 사두개인들은 제사장 그룹과 지도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바리새파는 경건한 핫시딤들이었으며 전통적인 신앙관과 율법을 지키려는 열정을 가진 자들이었다.

아리스토불루스 Ⅰ세(Aristobulus Ⅰ, B.C. 104-103)

경건한 평민이 다수를 차지했고, 일부 레위인과 제사장들이 참여한 바리새파는 두 가지에 반대했다. 하나는 힐카누스가 대제사장 자격이 없다는 것과 다윗이 후손이 아님에도 왕이 된 것에 대한 반발이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아리스토불루스 1세(B.C. 103)가 돼서야 왕의 칭호를 사용한다. 아리스토불루스 1세는 유대인이었지만 헬라 문화를 사랑했고, 친헬라적(나중에는 로마적)이었던 사두개인들을 지원했다. 더욱 큰 문제는 그가 어머니와 동생 안티고누스를 살해하는 일에 관여한 것이다. 이러한 성향과 사건들은 경건한 정통파 유대인들에게 혐오와 적대감을 갖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알렉산더 얀네우스(Alexander Jannaeus, B.C. 103-76)

그가 죽고 그의 아들 알렉산더 얀네우스가 왕과 대제사장의 자리를 물려받는다. 그런데 그는 즉위하면서 자신의 동생 아리스토불루스의 미망인과 결혼한다. 그로 인해 바리새인들은 격한 분노에 휩싸였고, 잠잠해서는 안된다는 위기감을 불러일으켰다. 왜냐하면 그는 비정통적이지만 분명히 대제사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대제사장이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을 저지른 것이다. 그는 거리끼지 않고 ‘왕’의 칭호를 사용했다.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모든 주화에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자신이 왕임을 새겨 놓았다. 그는 전혀 종교적이지도 않았고, 대제사장직을 혐오하는 것 같은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장막절에 제단에 부어야 할 전제를 땅에 의도적으로 쏟아 버린다. 그 모습을 바라본 백성들은 제사에 사용하기 위해 가져왔던 시트론이란 나무를 그에게 던지며 분노했다.

화가 난 그는 군대들에게 명령하여 많은 유대인들을 성전 뜰에서 살해한다. 결국 내전이 발발하게 되고 6년이나 지속된다. 그는 자신에게 반항하는 800명 정도의 유대인들을 십자가형에 처하는 악랄한 인간이었다. 그러나 그는 죽으면서 아내에게 바리새파와 화해하고 친하게 지내도록 충고한다. 당시 바리새파는 특정한 집단을 이룬 것은 아니었지만 서로 공유된 교리적 관점과 경건 습관으로 인해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고, 여론을 형성하기까지 했다.

살로메 알렉산드라(Aalome Alexandra, B.C. 76-67)
Salome Alexandra
요한 힐카누스 Ⅱ세(Hyrcanus Ⅱ, B.C. 67-66)
아리스토불루스 Ⅱ세(Aristobulus Ⅱ, B.C. 66-63)

알렉산더 얀네우스가 죽자 그의 첫째 아들인 요한 힐카누스 2세가 이어받는다. 그러나 그의 동생 아리스토불루스는 사두개파의 지지를 받았을 뿐 아니라 정치적 야망이 있었다. 그의 어머니가 죽자는 그는 즉시 행동을 개시한다. 자신을 따르는 군대를 동원하여 그의 형인 힐카누스 2세를 여리고 근처에서 격퇴시킨다. 아리스토불루스는 기원전 66부터 63년 동안 왕과 대제사장이 된다. 하스몬 왕조는 갑자기 몰락한다. 동생에게 쫓겨난 힐카누스는 이두메의 총독으로 있던 헤롯 안티파터(Antipater, 헤롯 대왕의 아버지)의 충동질로 전쟁을 일으킨다. 힐카누스는 아라비아 통치자인 아레타스 3세의 도움을 받아 아리스토불루스는 공격한다. 팔레스타인 상황을 지켜보던 로마가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폼페이는 스카우루스(Scaurus) 장군을 보내 처리하도록 한다. 그러나 뒤로는 아리스토불루스의 뇌물을 받고 그를 후원하고 있었다. 잘못하면 오히려 아리스토불루스의 음모에 당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 폼페이는 자신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을 공격하고 점령해 버린다.

로마 황제 가시사의 지지와 권위를 받던 폼페이우스(Pompeius) 장군은 미드리다테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다. 기원전 63년 미드리다테스를 다시 반격을 시도하지만 결국 패하고 자결함으로 본도(Pontus) 지방은 폼페이우스 장군의 영향 아래 떨어진다. 폼페이우스 장군은 십 대 때부터 아버지를 도와 전쟁에 참여했으며 공격적이고 잔인한 장군이었다. 기원전 77년 전직 집정관이었던 레피두스가 일으킨 반락을 진압하는 것을 비롯해 마리우스파의 잔당 세르토리우스를 진압하기를 자청하기까지 한다. 그때 나이 겨우 29살이었다. 기원전 72년 집정관이 되었다. 집정관에서 물러난 기원전 67년 로마의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해적 토벌대 사령관에 취임한다. 보수적인 원로원 의원들은 쉽게 허락하지 않았지만 결국 승낙을 얻게 된다.

폼페이우스(Pompeius) 

그는 뛰어난 전술과 지휘로 3개월 만에 로마 근처의 대부분의 해적들을 소탕해 버린다. 이러한 인기와 신임을 통해 폼페이우스는 최고의 절대 사령관이 되고 연장되는 해운까지 얻는다. 결국 소아시아를 지배하던 미트라다테스와 전쟁을 했던 것이다. 시리아를 거쳐 곧바로 유다로 들어가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결국 유다는 시리아 소속의 로마 속국이 된 것이다. 후에 폼페이우스는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쳐들어오는 카이사르와 전쟁에서 패하여 이집트로 도주한다. 그러나 기원전 48년 9월 29일 자신의 58번째 생일날 자신의 군사들에게 배반당해 죽고 시체가 바다에 던져진다. 제2성전기 문헌인 <솔로몬의 시편>에서 폼페이우스를 암시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을 당한다는 기록이 있다. 이렇게 하여 힐카누스는 다시 대제사장으로 임명되고 유대 분봉왕이 된다. 이렇게 하여 하스몬 왕조는 막을 내리고, ‘왕’도 사라지게 되고 로마의 속국이 된다. 이제 로마의 치하에서 헤롯의 가문이 팔레스타인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3. 로마 시대(BC 63-AD135)와 헤롯 왕조

이두매인(Idumea)

헤롯가문은 아이러니하게 유대인들이 아닌 이두매인들이다. 이두메인들은 야곱의 형이었던 에서의 후예인 에돔족속을 말한다. 이두매는 ‘에돔 사람의 땅’이란 뜻이다. 사해 남쪽과 동쪽에 걸쳐있다. 이곳을 페트라지역이라 부른다. 에돔은 붉다는 뜻이다. 유다지파 남쪽에 위치한 시므온 지파와 지척이며 대부분 유대인들과 원수지간이었다. 그들은 바벨론 침공 때 함께 멸망당했지만 잔존 세력들이 남아 계속하여 에돔 사람들로 역사에 남았다. 마카비 시대에 이두메인들은 마카오에게 참패를 당한다. 요세푸스는 후에 요한 하르카누스 1세가 모든 이두메 사람들을 정복한 후 할례를 받는 조건으로 남아 있게 했다. 유대인 여인들과 섞이면서 반은 에돔 족속이고 반은 유대인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이두매인들이었다. 그들은 유대인들에게 심한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고, 때로는 복수심을 품기도 했다. 겉으로는 유대인의 범주 안에 들었지만 유대인들은 이두매인들을 열등한 민족으로 하대했다.

헤롯 안티파터 1세(Antipater, B.C. -45)

헤롯 안티파스 2세(Antipas)

헤롯 대제(Herod the Great, B.C. 73- B.C. 4)

헤롯 아켈라오(B.C. 23 – A.D. 18)

본디오 빌라도(A.D. 26-36)

헤롯 안티파스(B.C. 3 – A.D. 39)

헤롯 빌립1세( -34)

헤롯 아그립바1세(A.D.37 – 44)

1) 헤롯 안티파터(Antipater)

특이하게도 하스몬 왕조의 역사에 말기에 갑자기 이두메 사람인 헤롯 안티파터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힐카누스 1세에 의해 이두메 사람들이 할례를 받았다는 이야기 외에 등장하지 않다 갑자기 등장하여 하스몬 왕조의 몰락에 일조한다. 아마도 헤롯 안티파스가 등장하기 전까지 이두메 지역은 거의 소외되거나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는 변방으로 머물러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헤롯 안티파터는 동생 아리스토불루스 Ⅱ세 때문에 피난중이었던 힐카누스 2세를 충동질한다. 무능하고 유약했던 헬라누스는 안티파터에게 속아 자신의 동생을 로마의 힘을 빌어 몰아낸다. 그러나 결국 자신도 아무런 이득도 취하지 못하고 하스몬 왕조는 몰락하고 대신 헤롯 안티파터가 대시 팔레스타인을 지배하고 만다. 안티파터는 교활하고 잔인했다. 안티파터는 초기에 폼페이우스를 절대적으로 지지했다. 그러나 기원전 48년 폼페이우스가 몰락하자 즉각 카이사르(Caesar)에 충성을 바친다. 지극히 정치적이고 교활했던 그는 카이사르에게 가서 자신의 왕관을 바치고 죽여 달라고 한다. 그러자 카이사르는 다시 그의 왕관을 머리에 씌우고 일으켜 준다.

안티파터로 인해 카이사르는 팔레스타인 지역뿐 아니라 디아스포라 유대인에게도 강력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입지에 서게 된다. 카이사르는 안티파터를 활용하기로 하고, 즉각 그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고 유대의 총독으로 임명한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결코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유대인들이 무시하는 이두메인이라는 점이 가장 컸고 또한 과도하게 로마를 등에 업고 활개 쳤기 때문이다. 기원전 47년 그는 유대의 지방행정관으로 임명되었고, 25살이던 자신의 아들 헤롯을 갈릴리 총독로 임명한다. 기원전 44년 카이사르가 죽자 카이우스(Cassius)가 시리아 총독이 되어 유대에 과도한 세금을 거두어 들인다. 결국 안티파터는 43년 독살되고 만다.

헤롯 안티파스 2세(Antipas)

2) 헤롯대제(Herod the Great, B.C. 73/43- B.C. 4)

헤롯 대왕의 이야기는 아버지를 암살한 자들을 처형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후 하스몬 왕가의 공주였던 미리암과 결혼한다. 미리암이 청혼한 것으로 나오지만 헤롯이 강제로 청혼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당시 헤롯은 도리스라는 부인과 3살 된 아들 안티파스(자신의 아버지와 동명)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을 버리고 마리암과 결혼하여 유대인들의 호의를 사려했다. 기원전 42년 드디어 로마의 정치 내전이 막을 내린다. 권력을 잡은 안토니(Antony)는 안티파터의 두 아들 파사엘(Phasael)을 유대의 통치자로 헤롯을 갈릴리의 통치자(분봉왕, tetrachs)로 임명한다. 이들의 중요한 임무는 로마가 파르티아를 상대로 한 전쟁에서 실패해 손해를 본 것에 대한 자금 조달이었다. 갈릴리에서 폭동이 일어난 것을 이러한 이유 때문으로 보인다.

기원전 40년, 파르티아인들은 팔레스타인 지역을 침략한다. 아리스토불로스 2세의 아들 안티고누스도 자신의 왕좌를 다시 찬탈하기 위해 이들과 함께 한다. 이들은 예루살렘 포위하였고, 붙잡혔지만 곧 자살한다. 그러나 헤롯은 가족들을 마사다 요새에 숨기고 로마로 피신한다. 로마에 달려간 헤롯은 곧바로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를 접견한다. 그들은 헤롯을 원로원에 소개했고, 원로원은 헤롯에게 유대의 왕으로 임명된다.(B.C 40) 헤롯은 안토니가 지원한 로마의 군대를 이끌고 37년에서 3년 동안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결국 안티고누스를 죽인다. 드디어 그 유명한 헤롯 대왕의 통치가 시작된 것이다. 헤롯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다. 로마의 옥타비아누스와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가 손을 잡고 자신을 적지 않게 힘들게 했기 때문이다. 헤롯의 클레오파트라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없었다. 잘못하면 자신이 겨우 붙잡은 권력도 모두 놓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기원전 31년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와의 악티움 전쟁에서 패함으로 해결되었다.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가 있는 이집트로 피신하고 만 것이다.

헤롯은 두 고래 싸움에 새우처럼 위기에 모면했지만 나바테아와의 전쟁을 핑계로 전쟁에 안토니우스를 돕지 않았다. 전쟁이 끝났을 때 헤롯은 다시 옥타비아누스가 있던 도로스 섬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이곳에서 헤롯 안티파터가 카이사르에게 왕관을 내려놓은 것과 비슷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이야기는 안티파터가 아니라 헤롯 대제가 원형인 듯하다.] 그는 옥타비아누스에게 자신의 왕관을 내려놓고 안토니우스를 도운 것을 사죄하고 같이 동맹하고 싶다고 제안한다. 옥타비아누스 입장에서 헤롯은 교활했지만 많이 유용한 존재였다. 겉으로는 기꺼이 받아 들였고 헤롯의 충성도 진심인 것처럼 인정했다.

헤롯의 통치는 이전의 헬라시대와 하스몬 왕조 시대와는 상당히 달랐다. 일단 헤롯은 유대인은 아니지만 유대적이었다. 그러나 우월한 입지를 가지지 못한 열등한 민족이었다. 완전한 헬라나 로마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유대인도 아니었다. 이러한 애매한 헤롯 가문은 유대인에게 잘 보이기 위한 노력을 하는 동시에 혐오했다. 헤롯 가문이 양가적 성향은 헤롯 안티파스 2세에서 극에 이른다. 그는 이전세대보다 더 심한 헬라화 정책을 편다. 그는 이방인에게는 이방인처럼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행동했다. 그는 자신의 입지를 위해 힐카누스의 손녀 마리암네(Mariamne)와 결혼함으로 유대인들에게 환심을 사려했다. 또한 기원전 20년 스룹바벨 성전은 보수하고 증축하여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화려하고 거대한 성전을 만든다. 유대인들은 이것을 ‘헤롯 성전’으로 불렀다. 제자들 예수님께 성전을 가리키며 자랑스러워할 만큼 유대인들에게 자부심을 주었다.

이두메인이었기 때문에 왕은 될 수 있었으나 대제사장은 겸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대제사장의 위상을 낮추기 위해 몇 가지를 고안해 낸다. 먼저 대제사장직의 세습을 철폐하고 자신이 임명한 사람만이 대제사장을 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평생직이 아니라 일정한 기간만을 할 수 있도록 기한제로 바꾸었다. 이로인해 자신에게 이로운 사람이나 뇌물을 주는 세속적인 대제사장이 선출되게 된다. 헤롯 대제는 유난힌 건축사업에 몰두했다. 예루살렘 성전을 비롯해 갈릴리 해변을 정비하고 카이사랴라 명명한다. 사막의 요새인 마사다를 재정비하고, 사바스테에 있는 고대 사마리아 도시들을 등을 건축한다.

정치적으로도 유대인들의 권력을 축소시키기 위해 산헤드린 공의회를 축소시키고 헬라주의자들을 중심한 왕실 고문단을 세운다. 또한 세습된 귀족신분까지 공을 세운 사람들로 대체한다. 강력한 중앙집권적 관료체제를 만들어 모든 행정과 권력을 자신의 손을 거치도록 만들었다. 예루살렘에 거대한 극장을 세우고, 들에는 원형극장을 건설했는데, 이것은 로마 황제를 기리기 위한 것이었다. 요세푸스는 헤롯이 5년을 주기로 행사를 치르게 함으로 유대인들에게 자신들이 주인은 로마 황제임을 각인시키려고 했다. 그렇게 해야만 로마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은 자신의 자리가 정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헤롯은 유대인들을 잘 이해하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그는 로마적이면서 동시에 유대적이고 싶었다. 이러한 딜레마는 자신의 동상을 세우려는 이들을 지원함으로 경건한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헤롯의 말년은 치욕의 시간이었다. 첫 번째 아내인 미리암을 기원전 30년 경에 간통죄를 뒤집어 씌워 처형하고 그의 장모까지 죽인다. 그의 숙부였던 요셉도 함께 처형한다. 사실이었는지 확인할 수 없지만 그의 아들들이 자신을 독살하고 왕위를 차지하려는 음모를 꾸몄다고 하여 몇 명의 아들을 처형한다. 이러한 상황들은 헤롯이 얼마나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고전 분투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정통 유대인이 아니었으며, 로마의 권력 다툼으로 인해 자신의 자리를 지켜야 했고, 수많은 정적들을 대적하기 위해 노심초사했다.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 아내와 주변의 사람들, 심지어 아들들까지 죽여야만 했던 것이다. 기원전 4년 그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 죽는다. 그는 자신의 유언을 통해 자신의 영토를 세 명의 아들에게 주었다. 아켈라오는 자신이 통치하던 전 영토를, 안티파스에게는 갈릴리와 뵈레아를, 빌립1세에게는 갈릴리 북쪽과 동쪽인 골란과 베타니아, 트라크노파스를 주었다. 그러나 그의 유언은 단지 유언일 뿐이었다.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투누스를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세 아들 누구도 아버지가 받았단 ‘왕’의 칭호를 받지 못했다.

우리는 종종 헤롯 대왕이 예수님의 탄생과 맞물려 일어나 유아학살 사건의 장본인 것처럼 말하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다. 또한 시기적으로도 맞지 않다. 예수님은 B.C. 4년에 태어난 것이라면 헤롯 대제는 유아학살의 장본인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해가 그가 죽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곧바로 학살 사건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적어도 2년 정도가 흘렀음을 암시한다. 즉 그의 죽은 사후에 학살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또 하나의 난제는 당대의 어느 기록물에도 유아학살사건이 기록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심지어 헤롯 대제를 원수처럼 여기는 요세푸스까지도 기록하지 않았다. 아마도 유아학살사건은 후대에 사건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제 팔레스타인 통치는 헤롯의 아들 헤롯 아켈라오에게 넘어간다.

3) 헤롯 아켈라오(B.C.23/4 – A.D. 18/6)

헤롯 대왕이 죽자 헤롯의 여러 아들들은 마음이 급해졌다.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로마의 연줄을 찾고 대려고 했다. 또 하나의 문제가 발생한다. 헤롯의 통치를 반대했던 유대인의 대표단들도 로마로 향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분명 이두매인이 아닌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왕이 되기를 갈망했을 것이다. 유대인 대표단은 그렇게 되지 못할 경우 로마의 직접 통치를 바랬다. 그러나 결국 그들의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헤롯 대왕의 아들 헤롯 아켈라오가 유대 땅의 통치자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아켈라오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자신을 반대했던 자들을 잔인하게 보복한다. 이 사건은 예수님의 비유 속에 종종 등장한다.(눅 19장)

아켈라오는 신약 성경의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요셉이 이집트에서 돌아올 때 아켈라오가 왕이 된 것을 알고 갈릴리로 간다. 요셉은 아켈라오가 아버지였던 헤롯 대왕과 별반 다르지 않았고 교활하고 잔인한 것을 소문을 통해 이미 접한 것으로 보인다. 아켈라오가 분봉왕으로 있을 때 갈릴리에서 폭동이 일어난다. 그는 무자비하게 3천명이 넘는 사람들을 학살한다. 그로 인해 사마리아를 비롯한 통치지역 전반에서 그에 대한 거센 항의가 일어나고 로마에 항의서를 보낸다. 결국 아켈라오는 기원후 6년 로마는 그를 직위를 박탈당한다. 이렇게 하여 헤롯의 가문은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하게 된다. 팔레스타인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헤롯 아그립바가 유대의 왕으로 3년(기원후 41-44) 정도 통치한 것을 제외하고는 로마의 속국으로 남게 된다. 아켈라오는 폐위되어 갈릴리오 유폐되어 18년 죽임을 당한다. 그 후, 신약 성경에 등장한 그 유명한 빌라도(A.D. 26-36)가 유다의 총독으로 오게 된다.

4) 헤롯 안티파스(B.C. 4 – A.D. 39)

헤롯 안티파스에게는 갈릴리와 요단동편 계곡이 주어진다. 요단강 서남부지역은 로마 직할이 되어 로마에서 파송된 총독들이 통치한다. 예수님이 심문을 받을 때 빌라도가 헤롯에게 보낸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예수님은 갈릴리 출신이었고, 사건은 빌라도 관할인 예루살렘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빌라도는 예수의 심문을 피하고 싶었지만 간교한 헤롯 역시 예수를 사건이 일어난 예루살렘, 즉 빌라도에게 다시 보내 버린다. 로마의 총독이 유대를 다스리면서 몇 가지 변화가 일어났다.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었고, 로마 군인들은 성전에 함부로 드나들 수 없었고, 특히 군기를 가지고 들어갈 수는 없었다. 들어가려면 반드시 군기를 내려놓고 가야했다. 산헤드린 공의회도 사법권이 주어지지 않아 형집행은 로마 총독에게 위임해야 했다. 예수님이 산헤드린의 가결에도 불구하고 사형을 당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은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데려가 사형을 언도해 달라고 부르짖은 것이다. 빌라도는 잔인하고 간교했다. 그는 유대인들의 항거를 폭력으로 억압하려 했으며, 그들의 종교를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한 번은 갈릴리 순례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의를 드릴 때 혁명자들로 의심하고 그들은 잔인하게 학살한다.(막 15:7, 27)

안티파스는 무려 43년을 갈릴리를 통치한다. 그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도시를 건설하여 티베리아(Tiberiras, 성경은 디베랴)로 부른다. 이곳은 원래 공동묘지였으나 안티파스는 무척 마음에 들어 무덤을 모두 제거하고 도시를 건설한 것이다. 유대인들은 부정하게 여겨 싫어했다. 경건한 유대인들을 이곳에 거주하기를 싫어했고, 가까이 가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안티파스는 이복동생인 헤로데의 아내 헤로디아를 아내로 삼았다. 성경은 헤로디아가 그의 친동생인 빌립으로 소개한다. 이 부분은 비평적으로 다루어져야할 부분이다. 다른 동생 헤로데가 있었는지, 아니면 빌립의 어린 시절 이름이었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아마 정치적인 목적으로 그랬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왜냐하면 헤로디아는 헤롯 대왕과 마리암의 손녀이기 때문이며, 헤롯에게 처형당한 아리스토불루스의 딸이었다. 안티파스의 아내는 친정인 다마스쿠스 왕국으로 추방된다. 분노한 다마스쿠스 왕은 과거의 사위였던 안티파스를 공격하여 그에게 쓰라린 패배를 안겨준다. 안티파스와 헤로디아 사이에 딸 살로메가 태어난다. 헤롯 안티파스의 생일 살로메가 춤을 춘 대가로 세례요한의 목을 요구하게 된다. 헤로디아는 간교하면서도 권력욕으로 가득했다. 그는 세례요한 비판을 넘기지 못하고 적당한 기회를 포착하고 죽인 것입니다.

안티파스는 세례요한으로 인해 폭동이 일어날 것을 염려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를 경계했다. 비록 헤로디아의 간청이기는 했지만 한편으론 이번 기회에 세례요한을 죽일 수 있는 기회로 본 것이 틀림없다. 수많은 사람들이 세례요한을 따랐고, 그의 한 마디 한 마디가 강력한 힘을 발휘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완전히 세족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예수님의 활동이 알려지자 세례요한이 다시 살아났다고 두려워했기 때문이다.(막 6:14-16) 그는 예수님의 기적을 듣고 보고 싶어 했고, 결국 마지막 심문을 받을 때도 기적을 일으켜보라고 종요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헤롯 앞에서 아무 말도, 아무 행위도 하지 않으신다. 결국 심심해진 헤롯은 다시 빌라도에게 돌려보낸다. 예수님은 헤롯 안티파스를 ‘여우’(눅 13:32)라 불렀다.

안티파스의 추락은 참으로 어이없는 것이었다. 헤로디아는 남편에게 소영주로 있지 말고 진정한 ‘왕’의 칭호를 받으라고 한다. 아마도 한 두 번 간청한 것은 아닌 듯하다. 결국 안티파스는 당시 황제였던 칼리쿨라에게 ‘왕’의 칭호를 달라고 부탁하지만 오히려 칼리쿨라의 의심을 받아 갈리아로 추방 당하고 만다.(39년)

5) 헤롯 빌립2세(Herod Phillip)

헤롯의 아들인 빌립 1세는 분봉왕이 아니다. 성경은 그가 헤로디아의 첫 남편이었고, 안티파스의 이복 동생으로 나온다. 그가 헤롯 안티파스의 이복 동생인 것을 감안할 때 아마도 그의 다른 이름은 헤로데였고, 헬로디아가 그의 아내였을 것이다. 살로메 역시 헤롯 안티파스의 딸이기보다 빌립의 딸일 가능성도 적지 않다. 만약 그렇다면 왜 헤롯 안티파스가 빌립의 아내를 취했으며, 빌립은 별다른 저항도 없이 자신의 아내를 형에게 주었을까? 단지 추즉에 불과하지만 안티파스와 빌립 사이에 모종의 밀의(密議)가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빌립에 대한 이야기는 성경에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빌립2세 역시 그다지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골란 지역과 베다니 지역의 분봉왕이 된다. 그는 로마 황제의 초상을 화폐에 새긴 첫 번째 유대인 군주였다. 갈릴리 북쪽은 유대인들이 드물어 영향력이 많지 않았다. 별다른 사건 없이 그는 34년에 후손도 없이 세상을 뜬다.

6) 헤롯 아그립바1세(A.D.37 – 44)

헤롯 대왕의 손자다. 야고보를 죽이고 베드로를 감옥에 가둔 헤롯이다.(행 12장) 예수님의 생애는 어릴 시절 헤롯 대왕, 어린 시절은 헤롯 아켈라오, 공생애 기간은 헤롯 안티파스가 있었다. 사도행전이 시작되면 아그립바 1세와 아그립바 2세가 등장한다. 누가는 그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아 충으로 죽었다고 말한다. 아그립바는 로마에 머물며 칼리쿨리의 호의를 얻는데 성공한다. 칼리쿨라는 37년 그에게 필립이 다스렸던 갈릴리 북동쪽을 선물한다. 그리하여 그 지역은 다시 헤롯 가문의 수중에 들어온다. 2년 후인 39년에는 안티파스가 다스리던 갈릴리 근방까지 아그립바에게 주어진다. 41년에는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이두메 지역까지 주어짐으로 다시 할아버지인 헤롯 대왕의 때의 모든 영토를 아그립바가 관활하게 된다.

그런데 칼리쿨라는 아그립바에게 예루살렘 성전 안에 자신의 동상을 세우라고 명령한다. 만약 그렇게 될 경우 죽음까지 불사한 유대인들이 폭동을 일으킬 상황까지 갈 수 있었다. 그러나 41년 칼리쿨라가 암살되고 클라우디우스가 황제로 등극한다. 다행히 클라우디우스는 자신의 동상을 세우라고 명령하지 않았다. 아그립다는 유대인들에게 적지 않은 칭송을 받았는데, 그가 경건한 유대인처럼 대부분의 율법을 지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대의 역사가들은 그가 유대인들 앞에서만 그렇게 했을뿐 헬라인들에게는 헬라인처럼 행동했다고 서술한다. 누가는 그가 연설을 하면서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아 충(蟲)으로 인해 죽었다고 말한다.(행 12장) 그가 죽자 그의 아들 아그립바 2세에게 통치권이 넘어가지 못하고 시리아 식민지로 떨어진다.

7) 헤롯 아그립바2세(A.D.27 – 100)

바울을 심문한 헤롯이다. 성경은 헤롯이라 하지 않고 바로 아그립바로 부른다.(행25-26장) 헤롯 아그립바 1세의 아들이며, 헤롯 대왕의 증손자이다. 정식 이름은 아르쿠스 율리우스 아그립바2세(Marcus Julius Agrippa II, A.D. 27-100)이다. 일반적으로 헤롯 아그립바 2세(Herod Agrippa II)로 부른다. 아버지 아그립바 1세가 죽었을 때 그의 나이는 고작 17세였다. 로마가 그에게 아버지의 뒤를 잇지 못하게 막은 이유는 어린 나이 때문일 수도 있다.

50년 칼키스(Chalcis)지역의 왕이었지만 후에 갈릴리 지방의 분봉왕이 된다. 누이였던 베니게와 근친상간을 범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유대인들에게 미움을 받았다. 바울이 가이샤랴에 구금되어 있을 때 베스도에게 문안하러 가서 바울을 대면한다. 바울의 변명을 듣고 아무 죄가 없다고 선언했지만 가이사에게 호소하여 로마로 보낼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헤롯 가문의 마지막 왕이었다. 후에 팔레스타인을 통치하지는 못했지만 예루살렘의 성전에 관한 문제는 자신이 관할했다. 심지어 자신이 대제사장이 되어 유대인들의 미움거리가 되었다. 예루살렘 멸망 후 로마에 돌아가 행정관으로 살다 100년 경에 죽었다고 전해진다.

지금까지 신구약 중간기 또는 제2성전기로 알려진 시기를 살펴봤습니다. 이 부분은 신약 성경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역사적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개론적인 부분이라도 알고 있는 것이 매우 유용합니다.

중간기 이전의 구약 성경의 전체적인 역사 개요는 아래의 링크글을 참조 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표적


이적, 기적, 기사, 표적에 대한 이해 
______________이적, 기적, 기사는 표적의 대명사이다.

성경은 이적과 기적과 기사 그리고 표적으로 가득하다.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초인간적인 놀라운 행적으로 병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는 등의 사건 그리고 자연계에서 벌어지는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물 위로 걷는다든가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사건 등을 이적, 기적, 기사라고 하고 이것들은 메시아적 증거로서 표적이라고 한다.

영어 성경은 이적과 기사를 Wonder로, 기적을 Miracle로 번역했고 표적은 sign이라고 번역했다. 
한글 성경은 헬라어 세메이온(σημειόν)을 이적 또는 표적이라고 번역했고, 
테라스(τέρας)를 기적이라고 번역해서 혼선 양상을 보인다. 

이적, 기적, 가사는 테라스(τέρας)로 번역해야 하고 세메이온(σημειόν)표적으로 번역해야 구분이 될 것이다.

“표적”이란 히브리어로 ‘오트’(תוא)이고, 헬라어는 쎄메이온(σημεῖον)이며 영어로는 ‘사인’ (sign)으로 ‘표시’, ‘징조’, ‘증표’ 등의 뜻을 가진다. 
표적을 둘로 나누어 본다면 초인간적 행사를 이적 기적이라 하고 초자연적 행사를 이적 기사라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적이나 기적이나 기사는 표적(sign, σημεῖον)의 다른 명사들이다. 
그래서 히브리어에서는 이적, 기적, 기사, 표적이 ‘오트’(תוא)로 통일된다.

요한복음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라는 일곱 개의 대표적 표적이 나타난다.

①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표적(요 2:1~11)

② 가버나움에서 죽어가는 고관의 아들을 고치신 표적(요 4:46~54))

③ 베데스다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표적(요 5:1~9)

④ 디베랴 바다 건너편에서 오병이어로 5,000명의 무리를 먹이신 표적(요 6:1~15))

⑤ 디베랴 바다에서 물 위를 걸으신 표적,(요 6:16~21)

⑥ 실로암에서 날 때부터 장님이었던 사람의 눈을 뜨게 해주신 표적(요 9:1~12)

⑦ 베다니에서 죽은 지 사흘 된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요 11:1~44)

이 표적의 의미가 무엇인가?

성경에 나타난 구속사적 표적들을 살펴보자.

첫째는 이스라엘 구원의 언약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표적

지팡이로 뱀을 만들어 보이시는 일, 모세의 손에 문둥병을 발하게 하셨다가 다시 치유하시는 일 등이 약속을 이행하시겠다는 하나님의 표적인 것이다. 임마누엘 하나님의 언약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사인이다.

둘째는 무흠하신 속죄의 어린 양이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표적

메시야가 성령으로 잉태되고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게 하시고 성령세례를 받게 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속죄 양으로 오신 메시아이심을 나타내는 표적이다(사 7:14). 예수 그리스도의 무죄하심과 속죄주의 자격을 나타내는 사인이다.

셋째는 기적을 통해 천국을 보이시는 성령님의 능력의 표적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의 권능을 따라 나타나는 치유사역과 초자연적 기적 등은 바로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나타내는 표적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님을 통해 만물을 회복하고 우리를 천국으로 초대하시는 메시아인 증거의 사인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주님에 의한(by Jesus), 주님에 대한(of Jesus), 주님을 위한(for Jesus) 표적을 탐욕에 의하여 인간의 욕망을 채우는 표적으로 오인하게 되었다.

오병이어의 표적이 있은 뒤에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질문했다. 모세는 만나를 통해 먹을 것을 제공하는 표적을 보였는데 예수는 무슨 표적을 보이겠는가? 라고 질문하게 된다. 유대인들이 주님을 따른 것은 경제적 해결이나 정치적 이슈로 표적을 구했음을 스스로 자인하는 장면이다

그 증거로 주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을 때 주님을 따르는 무리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때 주님께서 그들을 보면서 말씀하셨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나를 증거하는)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이 땅의)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 6:26)라고 하셨다.

주님은 정치적이고 탐욕적인 표적을 추구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진정한 표적이 무엇인가를 선포하셨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마 12:39~40))

주님은 이미 자신에 대한 표적으로 많은 이적 기사를 통해 주님이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이심을 나타내 보이셨다. 그러나 깨닫지 못하고 육신의 욕망을 채우고자 하며 이 땅의 표적만을 구하는 저들에게 요나의 표적을 통해 종말론적 구속자로 오시는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증거하신 것이다. 요나의 표적이 주님 자신을 증거하는 모형으로서의 진정한 표적이라는 것을 알려주신 것이다. 그러나 깨달을 수 있는 귀 있는 자만이 알 수 있었다.

바울사도께서는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선포했다.

“유대인은 (땅의)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땅의)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표적과 지혜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고전 1:22~23).

성경에 나타나는 이적 기사의 표적의 목적이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에 예언한 메시아요 구세주라고 표식인데 이것을 모르는 군중들에게 바울 사도께서는 하나님이 보내신 진정한 표적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인을 구원하시는 구세주이심을 선포하신 것이다.


이적(異蹟), 기적(奇蹟)과 표적(表蹟)의 차이점

이적, 표적, 기사

이 세 가지는 성경에서 거의 동일한 의미로 쓰이지만, 약간의 차이가 있다.

'이적'(異蹟)은 상식적이고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이거나 초이성적인 비상한 사건(일)을 가리킨다.

② '표적'(表蹟, sign)은 초자연적 능력에 의해 외부로 나타난 현상을 말한다. '표징'과 동의어로 쓰인다. 표적은 이적을 실현하는 자의 신분과 그 이적이 뜻하는 바를 밝히는 데 목적이 있다(막16:20; 행14:3).

'기사'(奇事, wonder)는 기이하고 경이로운 일 또는 장래 일에 대한 징조나 암시를 가리킨다(시 106:22; 단 6:27; 마 24:24). 
놀라운 일을 경험한 자의 입장에서 나타낸 표현으로, 주로 그 사건의 신비성에 강조점을 둔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적, 표적, 기사 (교회용어사전 : 교회 일상, 2013. 9. 16., 가스펠서브)

이적(異蹟), 기적(奇蹟)과 표적(表蹟)의 차이점

1. 표적(Sign)이나 이적(Wonder), 또는 기적(Miracle)은 주로 같은 상황에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행적을 다루는 4복음서에서 이 용어들은 거의 비슷한 용어처럼 등장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적과 기적은 비슷한 말로서 놀라운 행적을 묘사하는 용어지만 표적은 그렇지 않습니다.

2. 이적이나 기적은 놀라운 일(Wonder), 보통 인간이 할 수 없는 일, 또는 자연법칙을 넘어서는 초자연적인 일(Miracle)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집트에서 10가지 재앙을 내리신 일이나, 여호수아가 전쟁 때 태양을 멈추게 한 일, 또는 예수님께서 소경의 눈을 뜨게하고, 빵 5덩이와 물고기 2마리로 5000명을 먹이신 일과 같은 일들은 모두 "기적" 또는 "이적"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적이나 기적을 행하는적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신성, 놀라우신 위엄 등을 나타내기 위한 것입니다.

3. 그러나 표적(Sign)은 좀 다릅니다. 표적은 그것을 행하는 사람이 말하려는 것을 증명하는 도구입니다. "표적"은 헬라어로 "세메이온", 영어로 "sign"이라고 하는데, 이는 "표시", 또는 "징조"로 이해할 수 있는 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말씀하시거나 주장하실 때에 표적을 통해서 그 말씀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증거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이적이나 기사를 통해서 표적을 나타내실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막 16:16)이하에 나오는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과, 독을 마셔도 해를 입지 않는 일, 또는 병자들에게 안수하여 치유하는 일들은 이적인 동시에 "표적"이라고 불려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성령께서 복음 전도자의 말이 진리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 나타나는 표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출4장)에도 이러한 예가 나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이집트로 보내려고 했지만, 모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보소서! 그들이 나를 믿지도 아니하고 내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리니, 그들이 말하기를 '주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출4:1)." 모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보내셨다는 증거를 요구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은 막대기로 뱀을 만들어 보이셨고, 모세의 손에 문둥병을 발하게 했다가 다시 치유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두 가지 이적들을 자신이 모세를 보내셨다는 "표적"으로 제시하셨습니다.

그러나 표적 중에는 이적이나 기사가 아닌 것도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안식일은 "표적"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것은 "이적"이나 "기적"에 속하지 않습니다(겔 20:20).

표적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표적은 바로 "치유"의 표적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메시야로 오실 때에, 그 분이 메시야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왕의 표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오셨을 때 백성들은 어떻게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것을 알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께서 행하시는 표적을 통해서 알 수 있었습니다.

"그때에 소경의 눈이 뜨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뚫리리라. 그때에 절름발이가 사슴처럼 뛰고,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라. 광야에는 물이 솟아 나오며 사막에는 시내가 흐르리라"(사35:5-6).

"내가 잃어버린 자를 찾을 것이요, 쫓겨났던 자를 다시 데려오고 상한 자를 싸매 주며 병든 자를 강건케 해 주리라. 그러나 나는 살지고 강한 자를 멸할 것이며 심판으로 그들을 먹이리라"(겔34:16).

이 모든 예언들은 메시야께서 오실 때에 일어날 일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사역을 하시는 동안에 그렇게 많은 치유를 행하셨던 것입니다.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러한 표적을 보고서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거부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표적은 후에 사도들에게 이어졌는데, 이는 "사도들의 표적"이라고 부릅니다는(고후12:12). 이러한 표적은 이 일을 행하는 자들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라는 것을 보여주는 성령의 표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고출처 : 바이블나라


표적 : 세메이온 se-meion(표시, 표적)​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세메이온은 세마(%361 : 표시, 예고)에서 유래했으며, 세마와 함께 '징조, 표시'를 의미하며, 다음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a) 이 단어는 사람이 특정한 사람이나 사물을 인식하는 '표적' sign, 확신 시키는, 확증하는, 증명하는 '특징', '표' mark 혹은 '표', '증거' token를 의미한다. 호머의 작품에서 이 단어는 병의 징후, 짐승의 냄새, 배의 깃발, 희생 제물로 바칠 짐승임을 보증해주는 표시, 통치자의 왕관, 반지의 인장, 방패에 있는 문장, 양 떼에 찍은 소인 등을 나타낸다.

(b) 이 단어는 다가올 사건을 알리는 '징조' foretoken, 혹은 '전조' omen을 의미한다.

(c) 세메이온에 놀라움의 성격이 있을 때 이 단어는 "기적의 표적"(miraculous sign)의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이 단어는 사물의 자연적 진행과는 모순되는, 신 혹은 기적을 행하는 자가 행한 '기적'(miracle)을 뜻하기도 한다.

이 단어는 주전 2세기의 저술(Polyb. 3, 112, 18)에서 처음으로 나오는 어구 세메이가 카이 테라타(표적들과 기사들)에서 발견된다.

2. 70인 역본의 용법.

명사 세메이온은 70인 역본에서 약 120회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오트의 역어이며, 이 히브리어처럼

​(a) '표적' sign, '특징', '표' mark, '징후' token.

(b) '기적의 표적' miraculous sign, '기적' miracle을 의미한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세메이온은 신약성경에서 77회 나온다.

(a) ①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세메이온은 어떤 사람을 알아 볼 수 있는(눈에 보이는)표시 sign이다. 예를 들면, 마 26:48에서 배신자가 성전 파수꾼에게 예수님을 넘겨 줄 때의 입맞춤(사전에 합의한 표시임) 혹은 눅 2:12에서 갓 태어난 구세주임을 지적해주는 말구유("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에 대해 1Q 27Ⅰ1:5; 출 3:12; 삼상 2:34; 삼상 14:10를 참조하라)가 세메이온이다.

경고의 '징조' omen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보내시며, 대개 우주적 성질을 띠며, 역사의 종말을 알리는 것이다(막 13:4; 눅 21:7). 혹은 인자의 임하심과 세상의 끝(세대의 완성)에 징조가 있다(마 24:3). 이때 "메시야의 발자국"과 함께(m. sota 19:15) 전쟁의 무질서와 기근, 온역, 지진이 있으며 "무서운 일과 하늘로서 큰 '징조'"(눅 21:11)가 있을 것이며, "일월성신에 '징조'"가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구약성경의 영향이다(참조: 막 13:24이하와 병행 구에서 사 13:10; 사 34:4과 행 2:19에 인용된 요엘 3:3). "여호와의 날"에 수반하는 현상은 마지막 때의 세대에게 경고의 표시로서 삽입 적이고 법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의 표적"은 이해되지 않는다(마 16:3). 파루시아의 중대한 시점은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나타나는 것인데(마 24:30), 이것은 완성을 가리키며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으며, 또 다니엘이 밤에 이상 중에 본 종말론적 심판관의 도래 및 즉위와 관련된다(단 7:13이하; 슥 12:10-14). 예수님 자신이 이스라엘 가운데서 "비방을 받는 표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세움 받는다. 예수님의 사역은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드러낼 것이며, 이 마음들은 그들 자신의 종말론적 운명을 결정할 것이다.

② 세메이온, 하나님의 주권의 은혜로운 의를 드러내고 믿음을 전제로 하는 능력의 역사(뒤나미스)인 예수님의 치유의 기적과는 대조되어,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세주 혹은 선지자임을 확증해주는 기적들을 가리킨다. 이러한 표적들은 믿음을 일깨우기 위해 의도되며(참조: 출 4:1-9), 간청된다. 기 보다는 강력히 요구되거나 촉구된다.

지팡이를 뱀으로 변하게 한 기적이 한 예이다(출 3:12; 출 4:1-5; 출 7:8이하); 애굽의 재앙들도 하나님을 지시하는 표적들이다(출 7:3; 출 10:2; 신 7:19; 신 26:8; 참조: 행 7:36). 유대 전쟁 이전에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심을 증명하려는 의도에서 "자유의 표적들"을 약속하면서 나타났다(요세푸스 B.F.ⅱ259: Ant. xx. 168). 이들이 약속한 기적들의 상징적인 특징은 모세나 여호수아의 행위들과 일치한다는 것이었다(참조: Ant. xx. 97.과 수 3:7; xx. 169이하와 수 6:8이하). 그러나 요세푸스는 그들을 사기꾼이라고 비난하였다(Ant. xx. 167; B.J.ⅱ259-61). 막 13:22과 마 24:24은 거짓 선지자들과 메시야들에 대해 경고한다. 그들은 심지어 택함 받은 백성까지도 속이려고 큰 표적들과 이적들을 일으킬 것이다(참조: 신 13:1-4). 그들의 활동무대는 광야이다(마 24:26; 참조: B.J.ⅱ259).

예수님은 "하늘로서 (즉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표적"을 행하라는 요구를 강력하게 거부하신다(막 8:11이하; 마 16:1; 눅 11:16; 참조: 마 12:38); 이 요구는 단지 패역한 세대의 믿음의 결핍을 드러낼 뿐이다(막 8:12; 마 16:4; 마 12:39). 마 12:39; 마 16:4; 눅 11:29에 따르면 이 세대는 오직 "요나 선지자의 '표적'"밖에 받을 것이 없다. 이것은(Q에 따르면) 이방의 도시 니느웨에서 요나의 성공적인 회개에의 요청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스라엘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하여 회개하여야만 한다는 것이다(마 12:41; 눅 11:32).

마 12:40에 따르면 물고기에 의해 기적적으로 구조된 것이 이 "요나의 표적"이며 따라서 인자가 "땅 속에" 있는 것, 즉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가리킨다. 아마도 이 해석은 눅 11:30에도 적용될 수 있으며(요나는 니느웨에게 표적이 되었다). 요한복음에서는 나흘 만에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일이(요 11:39) 요나의 표적 대신 나온다. 마지막으로 헤롯 안디바는 예수님에게서 (확증해주는) 표적을 헛되이 기대했다(눅 23:8). 마 4:1-11 병행구의 마귀의 요구들도 표적을 요구한 것으로 이해되며, 예수님에게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도전한 것도 역시 마찬가지다(막 15:30 병행구).

폭풍을 꾸짖으시고, 물 위를 걸으시고, 소량의 떡으로 많은 무리를 먹이신 것과 같은 기적들은 출 14-16과 관련이 있으므로 확증의 표적이라는 인상을 불러일으킬 수 있겠지만, 그러한 기적들은 도움을 주시는 자비의 행위로 묘사된다(막 4:38이하; 막 6:34, 막 6:50이하). 마가복음의 끝맺음 부분에서 예수님께서는 신자들에게 기적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약속하시는데, 이 기적들은 제자들이 보고하였고 교회에서 은사들 가운데서 나타났다(막 16:17; 참조: 눅 10:17-19; 고전 12:4이하, 고전 12:28이하). 그러한 기적들은 선포를 눈에 보이도록 확증하기 때문에 "표적들"이라 불리 운다.(막 16:20).

③ 비록 요한도 역시 표적들과 표적에 대한 요구에 포함되어 있는 본질적인 문제들을 인식하지만(요 2:18, 요 2:23; 요 4:48; 요 6:2, 요 6:14, 요 6:30)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적들을 세메이아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기적들을 통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고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그의 사명을 드러내시기 때문이다(요 2:11; 요 20:30이하). 세례(침례)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하지 않은 반면에(요 10:41), 많은 위대한 표적들이 예수님의 활동을 특징짓는다(요 3:2; 요 7:31; 요 9:16; 요 11:47; 요 12:37). 부활하신 예수님의 나타나심도 이와 유사하게 이해되어야 한다(요 20:30). 요한복음의 기적들은 기적 자체를 넘어 종말론적 구세주를 지시하며(요 6:14; 요 7:31; 요 12:18), 그에 대한 믿음을 가져오는 것이다(요 2:11, 요 2:23; 요 4:53; 요 9:35; 요 11:47이하; 요 20:30이하); 그러나 이 믿음은 피상적이거나 자기중심적인 채로 남아있기도 하고(요 4:48; 요 6:14, 요 6:30) 거부되기도 한다(요 12:37, 요 12:39).

그리고 예수님이 일개 사기꾼이라는 확신을 표적들이 항상 제거할 수는 없었다(요 11:47이하, 신 13:1-4을 따름). 따라서 표적이 의미하는 것, 즉 기적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며, 그의 "팔"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역사하신다는 것이 간과된다(요 12:37이하, 사 53:1의 인용; 참조: 요 5:20, 요 5:36; 요 9:3이하; 요 17:4). 표적들을 해석하는 구절들을 제쳐놓더라도 요한은 표적들의 확증하는 능력을 각각의 특성들로써 설명하는데, 그것의 목적은 모세, 엘리야, 엘리사의 기적들 같은 고전적인 실례들을 무색케 하는 것이다(참조: 요 2:1-11; 요 4:46-54; 요 5:1-7과 왕상 17장; 왕하 5장, 요 6:9과 왕하 4:42이하, 요 6:31과 출 16:4, 출 16:13-15). 요 2:11; 요 4:54에서 시작된 표적의(단속적인) 계수는 모세(출 4:8)와 엘리야(왕상 17장)의 처음 두 표적을 상기시킨다. 이러한 관점에서 고찰하면 이 표적들은 요한의 신학과 일치하고 빈틈을 드러내지 않는다.

④ 사도행전도 역시 예수님과 사도들의 기적들을 확증하는 표적으로 이해하지만 실제로 예수님의 표적에 대해서는 뒤나메이스라는 용어가 더 많이 사용되고 또한 세메이아 카이 테라타(표적과 기사)에 부가되어 나타나기도 한다(행 2:22; 행 8:13). 자주 사용된 "표적과 기사"라는 어구는 두 표현 사이의 차이점이 모호해져서 "기사와 표적"이라는 순서도 역시 가능하다(행 2:22, 행 2:43; 행 6:8; 행 7:36).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유대인들 가운데서 그를 통하여 행하신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그들 앞에 "입증되셨다"(행 2:22). 이 표적들의 계시적·도구적 성격은 선교사역의 이상에 기초하며 모세를 향하여 있으며, 연속성을 위해 의도되어 있다.

모세는 "애굽과 홍해와 광야에서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으니" 하나님 자신과 같이 임하는 선지자임을 지적하는 것이다(행 7:36이하): 하나님께서 이 선지자에게 능력을 부여하셔서 보내셨기 때문에(신 18:15) 하나님은 또한 예수님을 합법적으로 인정하는 표적의 근원이시다. 표적과 기사들은 사도들에 의해(행 2:43; 행 5:12), "집사" 스데반에 의해(행 6:8), 빌립에 의해(행 8:6; 행 8:13), 바울과 바나바에 의해(행 14:3; 행 15:12) 행해졌다. 비록 하나님 자신께서 사도들의 표적들에서 역사하시지만 행 4:30에 따르면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표적을 행한다(참조: 행 3:6과 행 2:21이하). 높임 받으신 그리스도로서 예수님은 그의 사자들을 통하여 치유하시고(행 9:34), 따라서 예수님 자신이 그를 선포하는 말씀의 진실됨을 확증하신다(행 14:3). 이 표적들은 말씀을 위하여 있는 것이다. 앉은뱅이를 고친 일(행 3:1-8)은, 심지어 적대자들까지도 시인하였으며, 그들이 말에 따르면 예루살렘의 모든 거민에게 알려진 표적으로서(행 4:16), 말씀 선포의 진실 됨에 관한 문제를 야기 시킨다.

이 표적들은 사람들을 믿음으로 인도하며(행 8:6; 참조: 행 9:35, 행 9:42) 시몬 마구스의 마술을 패배 시킨다(행 8:13). 그러나 이 표적들은 애굽의 술사들에 대한 모세와 아론의 승리 같은 단순한 시위적인 기적들도 아니고(참조: 출 7:1-13), 응징의 기적들도 아니며(행 5:1-11은 세메이온을 사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치유이다(행 4:22; 행 9:32-42). 욜 2:30을 인용한 행 2:19에서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는 실로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세메이아)"로 보완된다. 여기서 세메이아는 아마도 예수님과 사도들의 기적을 가리키는 것 같다. 행 15:12에 언급된 "표적과 기사"는 바울과 바나바의 이방인 가운데서 성공적인 선교사역을 가리킨다.

(b) ① 바울에게 세메이온은 서신을 끝맺을 때 자신의 서명과 같은 (외적) '표시'이기도 하다(살후 3:17). "할례의 표"는 아브라함을, 믿는 이방인들의 조상으로 만든 "믿음의 의의 인"이다(롬 4:11).

②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지만(고전 14:22) 믿지 아니하는 자들은 그것을 하나님에 의해 유발된 의사소통으로 인식하지 못하며(참조: 고전 14:21에 인용된 사 28:11), 그것을 조롱함으로써 그들 자신의 완악함과 구제할 도리가 없는 절망적인 상태를 드러낸다.

③ 마지막으로 세메이온은 임박한 구속과 하나님의 활동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기적'일 수 있다. 바울은 "표적을 구하는 것"을 유대인의 종말론적 기대의 특징으로 간주한다(고전 1:22); 십자가의 선포를 받아들이는 것은 헬라인들이 지혜를 사랑하는 것 만큼이나 똑같이 거리끼는 것이 된다(참조: 막 8:11이하). 고후 12:12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 가운데서 그를 통하여 행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참된 사도의 표"라고 말한다. 그 표들은 바울이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열등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러한 자기 평가는 어리석은 짓이다(고후 12:11), 왜냐하면 이 표들은 성령의 능력으로 바울 사도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복음의 진실을 증거하고 복음 선포자를 정당화 시켜준다. 사도의 표는 카리스마적인 기적들뿐만 아니라 회중들의 삶 가운데서 나타나는 성공적인 선교사역을 가리키기도 한다(참조: 고후 3:2).

적그리스도가 나타날 때 기적을 수반할 것이다. 바울은 신 13:1-4을 따라서 그런 기적들을 "거짓 '표적'과 기사"라고 부른다(살후 2:9). 교회의 분당은 믿음을 시험하는 역할을 할 수 있으므로 필요한데, 그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종말론적으로 상징적인 특성을 가진다(고전 11:18이하).

히 2:4에 따르면 예수님의 선포와 그의 최초의 경청 자들의 선포는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성령의 나눠 주신 것"으로 증거 되었다(참조: 행 2:22).

(c) 요한계시록 기자는 통렬한 묵시적 표적들을, 즉 극적인 사건들을 가져올 상징적으로 의도된 하늘의 장면들을 본다. 즉 초승달 위에 있는 한 여자(계 12:1), 그녀의 대적자 용(계 12:3), 일곱 대접을 가진 천사들(계 15:1)이다. 이 표적들은 또 기적적인 일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마지막 때에 거짓 선지자들이 이 기적적인 일들을 행하여 사람들이 "짐승"을 섬기도록 유혹한다(계 13:13, 계 13:14; 계 19:20). 이 짐승에게서 나온 영들도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종말론적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은다(계 16:14).(O. Betz).

(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K. H. Rengstorf; O. Hofius).






4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이적들

예수님은 우주만물에 대한 주권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에 확신을 주고자 이적을 행하셨다. 
이적이란 단순이 크고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의지로 진행되어오던 자연 질서를 잠시 중단하시고, 인간의 구원을 위한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각 때에 필요한 놀라운 일을 보여 주심으로써 우리의 신앙의 표적이 되는 것만이 참 이적이다. 
이처럼 이적의 진의를 모르게 되면 단지 기복적 입장에서 이적을 위한 이적만을 요구하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사탄의 간계에 의한 이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미혹되는 경우도 많이 있다. 
4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이적을 정리에 보면 다음과 같다.


이적

장소

특징

말씀

육체적 질병 치유

문등병자

갈릴리 지방

병자를 향한 주님의 연민이 강조됨

마8:2,3 막1:40-42

눅5:12,13

백부장 하인

가버나움

이방인의 믿음이 두드러짐

마8:5-13 눅7:1-10

베드로 장모의 열병

가버나움

베드로의 장모가 치유된 직후 예수님 일행을 섬김

마8:14-15,막1:30- 31 눅4:38-39

중풍병자 치유

가버나움

친구들의 믿음과 우정, 열정이 강조되고 주님의 능력

마9:2-7 막2:3-12

눅5:18-25

혈루병 앓는 여자

가버나움

예수님을 향한 여인의 간절한 심정

마9:20-22

막5:25-29

눅8:43-48

두 소경

가버나움

자신의 믿음대로 치유 받음

마9:27-31

한쪽 손 마른 자

갈릴리 회당

안식일의 논쟁 야기

마12:10-13,막3:1-5

눅6:6-10

바디매오와 다른 한 소경

여리고

끈질긴 요청으로 치유 받음

마20:29-34

막10:46-52

눅18:33-43

귀먹고 벙어리 된 자

갈릴리 호수 근방

치유과정에서 예수님의 친밀한 동작이 두드러짐

마15:29-31

막7:31-37

뱃새다의 소경

뱃새다

두 번 안수하고 고치심

막8:22-26

수종병 환자

-

바리새인 집에서 안식일에 치유하심

눅14:1-6

열 나병병자 치유

사마이라와 갈릴리 사이

치유된 자 중 한명만 예수님께 찾아옴

눅17:11-19

귀 잘린 말고

겟세마네 동산

원수까지도 고쳐주심

눅22:50-51

왕의 신하의 아들

가나

보지 않고도 말씀으로 고침

요4:46-54

베스다 못가의 병자

예루살렘

오래된 질병 고치심

요5:1-9

나면서 소경된 자

예루살렘

나면서 된 병자도 고치심

요9:1-41

정신적질환치유

두 귀신들린 자

거라사

돼지 떼 몰사 사건

마8:28-34,막5:1-15

눅8:27-35

귀신들린 벙어리

가버나움

바리새인들 비방

마9:32-34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자

갈릴리 지방

바리새인들 비방

마12:22 눅11:14

가나안 여자의 딸

두로

이방인도 치유하심

마15:21-27

막7:24-30

간질 하는 소년

변화산 근처

아비의 믿음을 보고 치유해주심

마17:14-18,막9:17-29,눅9:38-43

회당의 귀신들린 자

가버나움

귀신들이 예수님을 알아봄

막23:26 눅4:33-35

꼬부라져 펴지 못하는 여인

-

18년된 귀신을 단숨에 쫓으심

눅13:11-13

자연현상에대한 이적

풍랑을 잔잔케 하심

갈릴리 호수

자연에 대한 통제 능력

마8:23-27

막4:37-41

눅8:22-25

오천명을 먹이심

갈릴리 호수가

이적의 능력과 사랑의 조화

마14:15-21

막6:35-44

눅9:12-17

요6:5-13

물 위를 걸으심

갈릴리 호수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입증하심

마14:25 막6:48-51

요6:19-21

사천명을 먹이심

갈릴리 호수

이적의 능력과 사랑의 조화

마14:21 막6:48-51

물고기 입에서 돈을 꺼냄

가버나움

제자들에게 전능하심 입증

마17:24-27

무화과나무를 마르게 하심

예루살렘

심판의 능력을 암시

마21:18-22

막11:12-26

많은 물고기를 잡게 하심

갈릴리 호수

주안에서만 삶의 풍요가 있음이 보여짐

눅5:1-11

물로 포도주를 만드심

가버나움

예수님의 첫 이적으로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기 원하심

요2:1-11

부활후 많은 물고기를 잡게 하심

갈릴리 호수

제자들에게 확신을 주시기 위한 이적

요21:1-11

사망의기적

야이로의 딸

가버나움

죽음을 잠으로 묘사하심

마9:18-25

막5:22-42

눅8:41-56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

나인

살리시는 능력

눅7:11-15

나사로

베다니

죄인에 대한 사랑하심

요11:1-44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7가지 표적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신성을 증거하는 7가지 대표적인 기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은 이 기적들을 단순한 이적이 아니라 "표적(σημεῖον, 세메이온)", 즉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드러내는 표징으로 기록하였습니다.
각 표적은 예수님의 신성과 구원의 사역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1.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심 (요 2:1-11)

1) 표적의 의미: 예수님은 새로운 언약을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첫 번째 기적으로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셨습니다.

이 기적은 새 언약의 시작과 풍성한 은혜를 상징합니다.

2) 주요 구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요 2:4)

설명: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이 십자가에서 완성될 것임을 암시하시면서도, 결국 기적을 행하십니다.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요 2:11)

설명: 예수님이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분 이심을 보여줍니다.

2. 왕의 신하의 아들을 말씀으로 고치심 (요 4:46-54)

1) 표적의 의미: 믿음은 보지 않고도 신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왕의 신하의 아들을 멀리서 말씀만으로 고치심으로써,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는 능력 을 보이셨습니다.

이는 믿음이란 눈에 보이는 증거 없이도 예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것 임을 가르쳐 줍니다.

2) 주요 구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요 4:48)

설명: 예수님은 사람들의 신앙이 기적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참된 믿음 이어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요 4:50)

설명: 왕의 신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의심 없이 믿었습니다.

믿음은 눈으로 확인한 후에가 아니라, 먼저 믿고 신뢰하는 것 입니다.

3. 베데스다 연못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심 (요 5:1-15)

1) 표적의 의미: 예수님은 우리를 회복시키시는 분입니다.

이 표적은 예수님이 육체적 연약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혼을 회복시키시는 분이심을 나타냅니다.

또한, 안식일에도 하나님은 역사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2) 주요 구절: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요 5:6)

설명: 예수님은 단순히 병을 고치는 것 이상으로,

병자의 내면의 상태를 회복시키는 데 관심이 있으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요 5:8)

설명: 예수님의 말씀에는 회복과 능력이 있으며, 순종하는 자에게 치유와 변화가 일어납니다.

4. 오병이어로 5천 명을 먹이심 (요 6:1-15)

1) 표적의 의미: 예수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생명의 떡입니다.

이 기적은 예수님이 참된 생명의 떡 이심을 보여줍니다.

또한, 작은 것이라도 예수님의 손에 맡겨질 때 기적이 일어난다는 교훈을 줍니다.

2) 주요 구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 6:35)

설명: 예수님은 단순한 빵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 이심을 나타냅니다.

5. 물 위를 걸으심 (요 6:16-21)

1) 표적의 의미: 예수님은 두려움을 이기게 하시는 분 입니다.

예수님은 자연의 법칙을 초월하시며, 인생의 폭풍 속에서도 함께하시는 분이십니다.

2) 주요 구절: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요 6:20)

설명: 예수님이 폭풍 속에서도 함께하시며,

우리의 두려움을 평안으로 바꾸시는 분 이심을 보여줍니다.

6. 날 때부터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심 (요 9:1-41)

1) 표적의 의미: 예수님은 우리의 영적 눈을 뜨게 하시는 빛입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눈뿐만 아니라, 영적인 눈을 뜨게 하시는 분입니다.

맹인은 예수님을 점차 깨달아 가며 신앙을 고백하게 됩니다.

2) 주요 구절: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요 9:5)

설명: 예수님은 단순한 시각 회복이 아니라,

죄로 인해 영적으로 눈먼 인류에게 빛을 주시는 분이심을 선포하십니다.

“이르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요 9:38)

설명: 맹인은 점진적으로 예수님을 깨닫고 마침내 참된 믿음을 고백합니다.

7. 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리심 (요 11:1-44)

1) 표적의 의미: 예수님은 부활과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이 기적은 예수님이 생명의 주관자이심을 보여주며,

부활의 능력을 선포하는 가장 중요한 기적입니다.

2) 주요 구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요 11:25)

설명: 예수님은 단순히 기적을 행하는 분이 아니라,

자신이 곧 부활과 생명 자체 이심을 선포하십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요 11:43)

설명: 예수님의 한 마디에 죽은 자가 살아납니다.

이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 생명이 있음을 증거하는 사건입니다.

결론 : 요한복음의 표적이 주는 메시지

1번째 표적 : 예수님은 새로운 언약을 주시는 분 입니다.

2번째 표적 : 믿음은 보지 않고도 신뢰하는 것 입니다.

3번째 표적 : 예수님은 우리를 회복시키시는 분 입니다.

4번째 표적 : 예수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생명의 떡 입니다.

5번째 표적 : 예수님은 두려움을 이기게 하시는 분 입니다.

6번째 표적 : 예수님은 우리의 영적 눈을 뜨게 하시는 빛 입니다.

7번째 표적 : 예수님은 부활과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이 표적들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시며,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심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4복음서의 내용에서 볼 수 있는 시간 

구약시대에는 태양과 달의 변동으로 대략의 구분으로 시간을 표시했다.
그 후 신구약 중간시대를 거쳐 페르시아, 헬라, 로마와 접촉을 가지면서 현재와 비슷한 24시간제 시간 구분 개념이 통용되게 되었다. 

그러나 유대인은 로마식과 달리 새벽 6시를 0시로 기준하였다. 

신약 4복음서는 요한복음이 기록된 연대를 A.D.90-100년경으로 보고 있다. 

이때에는 이미 유대인들은 로마의 속국이 되어 히브리 시간 제도가 현재와 같은 24시간제를 사용하였다. 

그래서 마태, 마가, 누가복음의 세 복음서는 유대식 시간을 기준으로 보아야 하고 요한복음은 현재와 같은 시간제로 보아야 그 당시 시간을 혼동하지 않는다.

요한복음 

  공관복음 

    시 간 

       성 경 

제5시

  제0시

오전6시  

    요19:14

제9시

제3시

오전9시

    마20:3

제10

제4시

오전10시

    요1:39

제12시

제6시

오전12시

    마20:5

제3시

제9시

오후3시

    마20:5

제5시

제11시

오후5시

    마20:6

제6시

제12시

오후6시

    요4:6

제7시

제1시

오후7시

    요4:52

이렇게 시간을 비교하여 보면 도움이 될 것 같다. 
특히 요한복음 4장의 수가성 여인이 물을 길러 갔던 시간을 유대식으로 보아 낮12시로 보고 있는데, 이것은 저녁 6시로 보아야 타당할 것이다.










금식






금식이 왜 효과가 있을까요?

기도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금식이 얼마나 강력한지 알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를 그토록 강력하게 만드는 식사를 거른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단식투쟁의 한 형태일까요? 원하는 것을 얻을 때까지, 파랗게 질릴 때까지 숨을 쉬지 않는 버릇없는 아이처럼 하나님을 협박하는 것일까요? 분명히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금식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금식을 자랑하지 말 것에 대한 몇 가지 중요한 지침을 주셨지만, 예수님의 마음에는 주님과 대화하는 사람들이 때때로 금식을 했다는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금식에 낯설지 않았습니다. 구약 성경에는 금식에 대해 여러 번 언급되어 있습니다.

금식에 대한 히브리어 단어

오늘날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금식을 생각할 때 자동적으로 대속죄일인 욤 키푸르를 생각할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금식에 대한 첫 번째 모호한 언급입니다. 저는 그것이 실제로 "금식"이라고 말하지 않기 때문에 모호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이 새해를 위한 깨끗한 출발을 구하면서 스스로를 “괴롭게”( ענה – תענו 아나-타아누)하도록 요구합니다(레 16:29). 그 명령에 순종하는 한 가지 쉬운 방법은 한동안 음식과 물을 먹지 않고 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오늘날까지 매년 행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는 자에게 가까이 계시며(사 66:2), 금식은 겸손한 마음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금식(צום 쫌)에 대한 실제 단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사사기 20장 19-28절의 심각한 위기의 때에 나옵니다. 혼란스러운 부분은 17장에서 한 남자가 거짓말을 하고 그의 어머니의 것을 도둑질을 하는데 그의 어머니는 그를 훈계하는 대신에 축복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상황은 급속히 악화되고, 죄악은 통제 불능 상태가 되어 성경에서 가장 끔찍한 집단 강간 이야기로 확대됩니다. 이 사건들은 지파들 사이에 격렬한 싸움으로 이어졌고, 그 결과 한 지파 전체가 거의 전멸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기도의 능력이 크게 향상되어야 함을 감지하고 금식을 기도에 추가했습니다.

그것은 효과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금식할 때 영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아주 잘 묘사한 것처럼, 육과 영 사이에는 끊임없는 싸움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어느 부름에 순종해야 할 지를 결정을 내림으로써 이를 조절합니다. 인간으로서 우리는 마음과 몸과 영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 없으면 영적으로 죽은 것입니다. 우리는 육신의 욕망에 휘둘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의 육체는 우리 자신과의 관계 및 자연적인 육체적 갈망을 따릅니다. 억제하지 않으면 이기적이고 심지어 파괴적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정신은 우리의 몸을 지배할 수 있으며, 우리의 영은 하나님과 직접 교통하는 동안 다른 사람들과 세상과 의미 있게 관계할 수 있는 능력을 줄 수 있습니다.

금식하게 되면, 우리는 육신과의 강력한 유대를 의도적으로 약화시키고 하나님과의 관계, 영과 영의 관계를 강화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교환입니다. 우리는 적게, 그분은 더 많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늘 좋은 거래일 것입니다.

금식은 육체의 볼륨을 낮추고 영의 볼륨을 높이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권위와 명료함과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얻습니다.

그것은 마치 성령님이 춤추시며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모든 가구를 방의 가장자리로 옮기거나, 후식을 위한 더 많은 자리를 남기기 위해 주메뉴 코스를 덜 먹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적게, 그분은 더 많게 하는 것입니다. 드와이트 엘 무디의 삶에 지속적인 변화를 일으키게 했던 사람이 언젠가 그에게 말했습니다: “세상은 아직 하나님께서 완전히 헌신된 사람을 그분이 어떻게 하실지 알지 못한다네.” 우리가 전심으로 예수님을 따르기로 하고 그분에게 우리를 변화시키시고 사용하시도록 허락할 때, 우리는 그분이 우리를 죽이기 시작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벗기고 죽이고 정결케 하는 이 과정은 하나님의 성도들에게 익숙한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를 통해 역사하시는 그의 능력을 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금식은 우리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에 따라 이 과정에 기꺼이 참여하여 우리의 삶에서 더 많은 자유를 성령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다양한 종류의 금식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고기와 좋은 음식과 포도주를 먹지 않았으며 나중에 다니엘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알리기 위해 특별히 금식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참으로 놀라운 응답을 받았습니다! "다니엘 금식"법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인터넷에서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에스더는 유대 공동체 전체가 삼일 동안 모든 음식과 물을 완전히 금식하도록 인도하여 재앙에서 기적적으로 회복되었습니다. 멸망의 위기에서 구출된 유대 민족은 오히려 자유와 은총을 얻었고 많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능력을 보고 그들과 합류했습니다. 하지만 음식과 물을 모두 금식하는 것은 극단적인 것입니다. 최대 3일 동안만 수행해야 합니다.

물과 주스만 있으면 음식 없이 최대 40일을 버틸 수 있습니다. 성경에 이것에 대한 몇 가지 예가 있지만 처음부터 바로 깊이 들어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일주일에 하루는 식사를 거르거나 금식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이 좋습니다. 욤 키푸르(대속죄일)에서 어떤 사람들은 아침부터 밤까지 금식하는데, 유대인들은 해가 질 때부터 해 질 때까지 금식하는 것을 선호합니다.

각각의 금식은 다르지만 하나님은 각각의 금식을 존중하십니다.

꼭 음식이어야 할까요?

오늘날 우리는 페이스북과 소셜 미디어나 초콜릿이나 설탕, 텔레비전을 금식하는 사람들에 대해 자주 듣습니다. 이러한 형태의 자기 희생에 유익이 있을까요?

우리 육체가 필요로 하는 음식을 멀리하는 것은 몸을 상하게 하므로  음식은 당연한 선택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절망과 의존, 괴로움과 굴복의 필요한 지점으로 인도합니다. 우리는 또한  설탕, 소셜 미디어, 그리고 다른 것들에 너무 의존하게 되어, 그것들을 삼가는 것이 매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중독이 되고, 하나님 대신에 위로를 얻기 위해 이런 것들에 의존하는 습관이 생깁니다. 

1958년 2월 9일 데이비드 윌커슨 목사는 텔레비전을 팔기로 결정했습니다. 하루 일과가 끝날 때쯤 그는 그저 몇 시간 동안 티비를 시청하곤 했지만, 하나님께서 그에게 대신 그 시간을 달라고 요청하고 계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월커슨은 TV를 판매용으로 내놓았습니다. 처음 30분 이내에 판매되지 않으면 거래가 종료될 것이지만 29분에 판매되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서서히 기도로 그 시간을 보내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것은 쉽게 오지 않았고, 처음에는 종종 꽤 오랜 시간이 지나면 갇힌 자신을 발견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점차 주님과 함께 하는 특별한 밤 시간에 점점 더 익숙해졌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음성에 더욱 귀를 기울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뉴욕의 갱단들을 섬기는 마음을 주신 것은 자기 희생의 그 소중한 시절 기간이었습니다 - 1950년대에 그 일은 마음이 약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결과 수백명의 갱단원, 중독자, 매춘부들이 그의 사역을 통해 주님을 알게 되었고, “틴 챌린지”가 탄생하여 전 세계의 수천 명이 메시아 안에서 자유를 찾도록 도왔습니다. 그의 놀라운 책, 십자가와 스위치블레이드( The Cross and the Switchblade)에서 전체 이야기를 읽을 수 있습니다. 그는 뉴욕 타임스퀘어에 교회를 세웠고 그 교회는 이곳 이스라엘에 자매 교회와 더불어 틴 첼린지의 지부인 "베이트 니짜혼(בית ניצחון 승리의 집)"을 설립했습니다. 아비와 같은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곳에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한 시골 목사가 기도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텔레비전을 팔았기 때문입니다!

키이스 그린과  리처드 웜브랜드와 같은 영적 지도자들도 밤 시간의 기도에 능력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윌커슨이 주님과 함께한 시간은 한밤중이었고 또한 그린과 웜브랜드는 우리 몸이 잠을 자고 싶을 때 기도하는 것이 큰 가치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것은 육신과 싸우는 또 다른 형태의 금식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간절한 기도를 하시는 투쟁을 보지만 제자들은 그들 자신에 대해 동일한 통제력을 갖고 있지 못 했음을 봅니다. 마음에는 원이었지만 육신이 약했습니다. 우리의 육체적인 필요를 거절하는 금식은 우리 중 누구에게도(심지어 사도들도) 자연스럽게 오지 않지만, 우리 모두가 성장할 수 있는 어떤 것입니다.

금식할 때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

예수님께서 경고하셨듯이, 우리가 우쭐거리며, 금식하는 것을 자랑하게 되면 그것은 우리의 모든 자기 희생을 무효화 시키는 것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금식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와 유사하게 이사야서 58장에서 보면, 이기적으로 가난한 사람 돌아보기를 거부한다면, 우리가 스스로 정당화하는 금식은 역효과를 내게 됩니다. 우리는 금식하기 전에 내 마음이 하나님 앞에 올바른지 확인해야 합니다. 시작하기 전에 우리 죄에 대해 하나님께 조명해 주시길 간구하면서 회개와 고백에 약간의 시간을 들이는 것이 좋습니다. 그 장의 뒷부분에서 이사야는 계속해서 금식의 맥락에서 안식일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집중하고 그분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육적인 방종과 자기 만족을 거부하는 또 다른 기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금식 생활을 하라고 도전하십니다.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려놓는 자기 희생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나는 내 기쁨이 아닌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기꺼이 내 시간을 드리고 있습니까?

우리는 강제로 또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금식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자유 의지와 금식에 대한 열망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사울 왕이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지 않고 자신의 인간적 문제를 강요하며 원하는 결과를 얻으려 했던 비참한 금식의 잘못을 주목하는 것도 지혜로운 일입니다(삼상 14:24-45).

나는 내 뜻과 상충될지라도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을 원하는가?

겸손과 회개하는 마음이 없으면 금식은 무의미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의로운” 사람과 죄인에 대해 말씀하신 이야기에서 이것을 볼 수 있습니다(눅 18:9-14). 
금식이 반드시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올바른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아니면 다이어트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종류의 육체의 억제와 금욕에도 적용됩니다. 
나는 내 의로움은 내 희생이 아니라 예수님의 희생에서 나온다는 것을 겸손하게 인정할 수 있을까요?

금식은 영적인 혼란을 느끼고 있거나, 하나님과 더 나은 관계를 구하거나, 어떤 문제에 대해 하나님의 생각을 구하고 있거나, 곤경에 처해 돌파구가 필요한 경우에 매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종종 금식에 대한 두려움은 금식 자체보다 더 나쁩니다. 따라서 원수가 두려움으로 당신을 막게 하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의 방식에 겁먹지 마십시오. 
자신에게 적합한 단식을 선택하고 자신의 속도로 진행하십시오. 
목표를 설정하고 결심을 하고, 마음을 준비하고, 그리고 자신만의 계획을 세우십시오. 
결과가 즉시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지만 포기하지 마십시오! 
쉽지는 않지만 단 몇 분의 기도 후에 허덕이고 있는 겟세마네에 있는 제자들과 데이비드 윌커슨을 기억하십시오. 
금식 생활 방식에는 시간과 연습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이 여정에서 당신이 성장하도록 도우실 것입니다. 
당신은 평생 이같이 말하게 될 것입니다: 

"주여! 저는 더 적게, 주께는 더 많이 있기를 원합니다(저는 쇠하고 주님은 흥하시기를 원합니다)!"

요한복음 3:30
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He must become greater; I must become less.

아필쇠미 타필흥왕(我必衰微 他必興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