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잘 믿으시오! / 교회



예수를 잘 믿으세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빌립보서 3:7-8)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But whatever was to my profit I now consider loss for the sake of Christ.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What is more, I consider everything a loss compared to the surpassing greatness of knowing Christ Jesus my Lord, for whose sake I have lost all things.

성경에서 안다는 단어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구약 성경의 언어 히브리어는 "야다"
신약 성경의 언어 헬라오는 "기노스코"
안다는 것은 지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여자를 안다, 남자를 안다는 말은 여자와 남자와 경험이 있단는 것을 말합니다.
아는 것도 범위가 육체적인 것, 정신적인 것, 영적인 것 중에서 영적인 것에 대한 것을 말합니다.

빌립보서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Let this mind be in you, which was also in Christ Jes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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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코로나 시대, 한국교회가 나가야 할 3가지 방향

크리스천투데이
4~5분

정성욱 교수의 Engagement
복음에 강한 성숙한 교회로

1. 유기적 교회론 강화
2. 선교적 교회론 무장
3. 종말론 교회론 지향

2019년 말부터 거의 2년 반 동안 전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 팬데믹이 잦아들고 있다.
물론 아직도 코로나 확진자들이 나오고 있긴 하다.
하지만 크게 보아서 이제 포스트 코로나 시대가 도래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한민국은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도래와 함께 새로운 정치적 실험을 시작하고 있다.
지난 5년 간의 친사회주의적· 전체주의적 방향을 바로잡아 가고 있다.
그리고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 공고히 하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한국교회, 더 나아가 이민교회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성찰해야 한다.
필자는 앞으로 한국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세 가지로 정리해 보고자 한다.

첫째, 한국교회는 유기적 교회론(organic ecclesiology)을 강화해야 한다.

조직신학 교회론의 두 기둥은 조직적 / 제도적 교회론과 유기적 교회론이다.
조직적 / 제도적 교회론이란 교회의 건물, 직분, 회의, 부서 등 조직적이고 제도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교회론이다.

반면 유기적 교회론이란 교회의 공동체성, 생명의 흐름, 끈끈한 연합과 막힘이 없는 열린 소통, 서로에 대한 의존과 나눔과 참여를 강조하는 교회론이다.

안타깝게도 지난 140여 년 간 한국교회 역사는 조직적/제도적 측면이 유기적 측면을 억압하는 방향으로 전개돼 왔다.

코로나 팬데믹의 창궐은 조직적/제도적 교회론의 한계를 극명하게 드러냈다.
특별히 조직적/제도적 교회론은 대면 예배와 대면 사역이 이뤄질 수 없는 위기 상황을 효과적으로 타개할 방법을 제시해 주지 못했다.

팬데믹 기간 동안 온라인 예배와 비대면 사역이 주류를 이루면서 우리는 유기적 교회론의 중요성과 가치에 대해 새롭게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교회의 유기적 성격이 상대적으로 강했던 교회들이 팬데믹 시대 동안 생존과 성장을 구가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결국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교회론은 단순히 조직적/제도적 교회론으로의 회귀가 되어서는 안된다.
교회의 유기적 성격이 몇 배로 강화된 상태를 유지하면서, 조직적/제도적 교회론을 접붙이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다시 말하면 유기적 교회론이 교회의 본질적인 정체성을 규정해야 한다.

그리고 교회의 유기적 성격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교회의 조직적/제도적 성격이 봉사해야 한다. 교회의 본질은 건물이나, 직분이나, 부서나 회의가 아니다. 교회의 본질은 믿는이들의 공동체성,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흐름, 성도간의 끈끈한 연합과 막힘이 없는 열린 소통, 서로에 대한 의존과 나눔과 참여이다.

컴퓨터에 비유한다면 교회의 유기적 성격은 소프트웨어이고, 교회의 조직적/제도적 성격은 하드웨어이다.
아무리 하드웨어가 잘 갖춰졌다 하더라도 소프트웨어가 없으면 컴퓨터는 작동되지 않는다.

교회가 아무리 좋은 건물, 잘 정비된 직분, 탁월한 회의 준비와 분위기, 체계적인 부서들을 가졌다 해도, 교회의 유기적 성격이 약해지면 교회의 목적은 실현될 수 없다.

교회의 본질과 목적이 교회의 유기적 성격과 절대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모든 교회들은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그 인식에 기초해서 건강하고 성숙한 교회를 이뤄가야 한다.

둘째, 한국교회는 선교적 교회론(missional ecclesiology)으로 무장해야 한다.

선교적 교회론은 교회의 존재론이 선교지향적이란 확신에 기초해 있다. 오랜 세월 동안 선교는 교회가 실천하는 여러 기능들 중 하나로 여겨졌다.
하지만 지난 한 세대 동안의 깊은 연구를 통해 선교는 교회의 여러 사역들 중 하나이기 전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임이 드러났다.

그리고 삼위일체 하나님은 당신의 선교 사역을 위해 교회를 세우고, 교회를 세상으로 보내신다는 진리가 회복됐다.
다시 말하면 선교는 교회의 정체성과 존재 목적 자체라는 것이다.

물론 선교적 교회론에 대한 여러가지 비판들이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교회가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를 위해 이 세상에 보내어진 공동체(the sent community)라는 의식이 강한 교회일수록 건강하고 성숙한 교회로 자라난다는 사실이다.

선교적 교회로서의 의식이 약한 교회는 내부지향적인 근시안적 교회라는 한계를 넘어설 수 없다. 교회에 속한 성도들을 만족시키는 일에 집중하는 유람선적인 교회라는 틀을 벗어날 수 없다.

선교적 교회로서의 의식이 강한 교회만이 외부지향적인 영성을 가지고, 죽은 영혼을 살려내는 구원 공동체로서의 역할을 효과적으로 감당할 수 있다. 더 나아가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 거룩한 영적 싸움에 임하는 전투공동체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

오늘날 선교적 교회라는 의식이 약한 교회는 “나를 만족시키라”는 소비자 중심주의(consumerism)의 공격에 마구 흔들리는 연약한 교회로 남을 수밖에 없다.

주님께서 우리 각자를 당신의 몸된 교회의 지체가 되도록 부르실 때 주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희생하라”고 명령하신다. “나를 만족시켜라”는 이기적인 생각과 욕망을 버리지 못한 채 교회의 일원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런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교회는 그 존재 목적과 사명을 성취할 수 없는 역기능적 교회로 타락할 수 밖에 없다.

셋째는 한국교회는 종말론적 교회(eschatological church)를 지향해야 한다.

종말론적인 교회란 조만간 다시 오실 신랑을 맞을 준비를 신실하게 감당하는 교회를 말한다.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신 신랑을 간절히 기다리고 사모하는 교회를 말한다.
다시 오시는 신랑을 만날 날을 고대하면서 정절과 순결로 자신을 단장하는 교회를 말한다.
어둡고 두려운 종말론이 아니라 밝고 행복한 종말론으로 무장한 교회를 말한다.

코로나 팬데믹은 예수님 재림이 가까왔다는 분명한 징조였다. 코로나가 잦아들면서 최근 원숭이두창이라는 전염병이 창궐하기 시작했다. 주님은 당신의 재림 직전 “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부터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눅 21:11)”고 말씀하셨다.

여러 가지 징조들과 세계 선교의 현상황을 고려할 때 주님의 재림은 매우 가까이 왔다. 필자는 현재 우리가 “배교”의 시대(살후 2:3)를 살아가고 있다고 믿는다. 조만간 적그리스도가 등장하고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대환난의 시대가 시작될 것이다. 교회는 대환난의 시대를 믿음으로 통과해야 할 준비를 해야한다.

종말론적 의식이 강한 교회만이 이 시대를 이길 수 있다. 종말론적 의식이 강한 교회만이 신랑되신 주님의 거룩한 신부로 자신을 단장할 수 있다. 앞으로 한국교회는 종말론적 의식으로 무장된 주님의 참된 신부로 성숙해 가야 한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 한국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분명하다. 그것은 유기적 교회, 선교적 교회, 종말론적 교회라는 방향이다. 부디 성령께서 우리 조국교회와 이민교회들을 이 방향으로 이끌어 주시길 기도한다. 그리고 이 방향을 선택하는 교회들이 복음에 강한 성숙한 교회로 드러나게 되길 간절히 기도한다.

▲정성욱 교수.

美 덴버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교수
저서 <티타임에 나누는 기독교 변증>, <10시간 만에 끝내는 스피드 조직신학>, <삶 속에 적용하는 LIFE 삼위일체 신학(이상 홍성사)>, <한눈에 보는 종교개혁 키워드>, <한눈에 보는 종교개혁 키워드>, <한눈에 보는 십자가 신학과 영성>, <정성욱 교수와 존 칼빈의 대화(이상 부흥과개혁사)>, <한국교회 이렇게 변해야 산다(큐리오스북스)>, <밝고 행복한 종말론(눈출판그룹)>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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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학자가 본 한국교회 10년 “위기는 이제 시작이다”

윤화미
3~4분

역사상 유례없는 불확실성의 시대. 그리고 그 속에서 가파른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고 침체의 길로 빠져드는 한국교회의 위기는 이미 시작됐다. 미래학자가 진단하는 한국교회 위기와 30년 뒤 마주할 교회는 어떤 모습일지 들어봤다.
 

“한국교회, 잃어버린 10년이 다가온다”

성장기를 지나 쇠퇴기에 접어들어 ‘한국교회의 유럽화’ 위기가 확산되고 있는 지금, 한국교회를 향해 ‘10년 뒤 변화를 준비하라’는 미래학자의 예견은 제목만으로도 주목을 받는다.

아시아를 대표하는 전문 미래학자인 최윤식 박사가 한국교회의 위기와 미래를 진단한 책 <2020 2040 한국교회 미래지도>를 펴냈다.

미래학자이면서, 신학을 전공하고 사랑의교회 옥한흠 목사의 지도 아래 부목사로 사역한 경험도 있는 그는 이 책을 통해 한국교회를 향한 염려와 다가올 위기를 이야기하지만, 하나님이 분명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지혜도 함께 주신다는 점을 또한 강조한다.

16일 열린 신간 기자간담회에서 최 박사는 “전 세계적으로 거대한 변화들이 물밀듯이 밀려오는 이 시기, ‘불확실성만이 유일한 확실함’이라는 이 시기에 대한민국과 한국교회는 7년의 풍년과 흉년을 준비했던 요셉의 지혜가 절실하다”며 “책을 통해 한국교회 위기 대응에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전했다.

‘7년의 흉년’ 시작된 한국교회 위기의 모습은…

최윤식 박사가 예측하는 2020년 한국교회의 미래는 창세기 41장의 일명 ‘7년의 풍년과 7년의 흉년’ 시나리오다. 풍년과 같은 폭발적인 성장기를 거쳤던 한국교회가 이제는 대 흉년기를 맞으며 극심한 침체기로 접어들 것이란 분석이다.

먼저 최 박사는 외형적인 면에서 2050년한국교회 성도 수가 300만으로 급격하게 줄어들고, 저출산과 고령화 시대와 맞물려 주일학교 숫자는 대략 30~40만 명으로 추락, 교인 중 60~70% 이상이 은퇴자로 채워지게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로 인해 심각한 재정난과 교인 수의 감소로 개척교회가 교회 문을 닫는 상황이 속출하고, 교회 시장 법칙이 자리를 잡아 초대형 교회들만 살아남는 기형적인 목회 환경으로 전환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내부적으로는 시대 변화에 따라 변한 교인들의 신앙 모습이 교회가 맞닥뜨린 또 하나의 위기가 된다.
세계화 물결이 자본, 노동, 문화, 종교를 국경 없이 넘나들어 융합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새로운 사고와 가치관을 가진 변화된 교인들이 등장한다.

노마드교인, 코쿠닝 성도, 브랜드 교회, 다운시프트 신앙, 트랜스챤 등 이전에 보지 못한 성도의 새로운 라이프스타일과 가치관들의 등장이 바로 그것이다.

최 박사는 “지금의 한국교회는 외형적으로는 화려하지만 내부는 심각한 영양 실조에 걸린 상황이다.
복음의 열정은 시들고, 주일마다 외쳐지는 설교는 양적 성장을 위한 도구가 되었다”며 “교회가 근원적인 에너지를 상실해 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앞으로의 위기에 비하면 지금은 시작에 불과하다”며 “현재 위기가 지속되고, 뼈를 깎는 갱신이 없다면 두려운 미래가 올 가능성이 크다. 우리가 이 위기를 무시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직시해 근본적으로 대응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시대적 소명 감당하는 교회, 제2부흥기 이끈다”

벼랑 끝에 선 한국교회, 지금부터라도 위기를 준비하고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최 박사는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미래의 10년은 또 다른 제2의 부흥 기회가 될 수 있다”며 “위기에 대한 정확한 진단과 다양한 대책을 세워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
지금의 사람들이 그것을 원하고 있고, 그 전환점에 우리가 서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특히 한국교회가 성장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성전 건축 등 하드웨어에 대한 투자가 아닌, 사람과 소프트웨어에 집중하는 새로운 활로 모색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최 박사는 “성장 한계의 늪에 빠진 한국교회가 새로운 부흥의 파도를 타기 위해서는 영성의 수준을 높이고, 목회자의 자질을 높여 복음의 가치를 회복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새로운 시대에 위기를 감당하고 시대적 소명을 감당하는 교회는 하나님이 제2의 부흥기에 다시 일으키시지만, 그렇지 않은 교회는 소멸시킨다”며 “전환기에 많은 교회들의 영향력과 교세가 자연적으로 약화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최 박사는 그의 책을 통해 한국교회가 이 문제를 심각하게 인지하고 공론화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그는 “교단 차원에서 미래를 통찰하는 지혜를 가져서 교회가 미래에 갖춰야 할 시대적 소명은 무엇인지 연구하고, 목회자들에게 전수했으면 좋겠다”며 “기존의 리더십과 시스템 구조의 혁신부터 시작해 모든 신앙생활 방식이 새롭게 달라져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저자 소개 - 최윤식 박사

미국의 권위 있는 미래학 정규과정인 휴스턴대학교 미래학부에서 아시아인 최초로 학위를 받은 그는 4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아시아와 한국을 대표하는 전문 미래학자로 주목받고 있다. 현재 아시아미래인재연구소 소장, 아시아미래협회 회장, 전경련 최고위 과정(미래창조혁신) 및 전략포럼 주임교수로 활동 중이다.

또한 ‘소망과사랑의교회’ 담임목사로 사역하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한국교회의 미래 모델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저서로는 <2030년 부의 미래지도>, <2020 부의 전쟁 in Asia>, <그들과의 전쟁> 등이 있으며 <2030년 부의 미래지도>는 출간 이후 일본 아마존 종합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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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무너져야 할 것은 목사중심 신앙생활

구권효 기자는 12년째 뉴스앤조이에서 활동하고 있는 베테랑 기자다. 

기독교 독립언론사 뉴스앤조이가 지난 4월 30일 회복적 정의의 관점에서 교회에서 분쟁을 겪은 사람들이 어떻게 기존 교회를 떠나 새로운 신앙 공동체를 만들어가는지, 그 과정에서 기존 교회와 목사로부터 상처 입은 마음을 어떻게 회복하는지를 기록한 책 “교회를 떠나 교회가 되다”를 출판됐다.

저자인 구권효 기자는 언론이 분쟁 교회 사건을 다루는 방식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피해자의 마음에 집중하고자 회복적 정의를 고민하게 됐다고 말한다.

Q. 기획취재를 통해 바랐던 목적이 무엇인가?

세 가지다.
첫째, 교인들이 교회 분쟁을 겪을 때 언론 기사 중에 교인들의 마음에 집중한 기사는 별로 없다.
사건 초반에는 언론들이 교인들의 억울함이나 배신감을 성토하는 내용을 한두 문장 담긴 하지만 그 이후로는 대부분 소송으로 귀결된다. 그래서 결국 누가 졌고, 누가 이겼다는 소송의 결과만 보도되고, 소송이 끝나면 보도가 더 이상 안 나온다. 하지만 교인들의 상처받은 마음이 시간이 가거나 소송의 결과가 좋게 나온다고 해서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게 아니기 때문에 교회 분쟁 과정에서 어떤 감정이었고,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에 집중하고 싶었다. 나아가 새로운 공동체를 만든 이야기 있는데, 어떤 회복의 과정이 있었을지, 그렇게까지 상처받고 새로운 공동체를 또 세우게 된 그 과정에서 어떤 마음과 계기가 있었는지 궁금했다.

둘째는 교회 분쟁 원인은 담임목사 때문인 경우가 많은데 목사들이 그 무게를 잘 모르는 것 같다.
책에서 소개한 다섯 교회뿐만 아니라 사실 분쟁이 생긴 많은 교회에서 대부분 담임목사가 진심으로 엎드려서 사과하고, 거취를 교인들에게 맡기고, 자기 잘못에 대한 진정한 회개가 있었다면 사실 이렇게까지 되지 않았을 교회들이다. 책을 통해서 목사들이 경각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셋째는 분쟁도 한국교회의 역사다.
누군가는 지워버리고 싶은 것일지 몰라도 분쟁 교회의 역사도 한국의 역사라는 생각으로 시작했다.

Q. 기사로 이미 나온 내용들을 굳이 책으로 엮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

처음부터 책으로 낼 생각이긴 했다. 취재를 해보니까 시간이 가면서 교인들이 새롭게 세운 공동체에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왔는데, 새로 유입된 사람들이 이 교회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자세히 모르는 경우도 있었다. 사실 인터넷 기사를 찾아볼 수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책을 통해 그들한테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다른 분쟁 교회 교인들한테도 참고 자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책을 낸 것 같다.

Q. 서론에서 책의 취지를 “‘회복적 정의’의 렌즈로 교회 분쟁을 바라보려는 시도”라고 했다. 이러한 시도를 하시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언론이 빠질 수 있는 함정 중에 잘못한 가해자에게만 너무 집중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근데 정말 중요한 것은 가해자보다 피해자이지 않을까 싶다. 물론 가해자의 처벌도 굉장히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은 피해자의 회복에 있어서 필요조건이 될 수 있지만 충분조건이 되는 것 같지 않다. 따라서 보도할 때 누가 잘못했는지 밝히는 일도 기본적으로 하되 교인들의 마음과 상처와 피해의 회복을 놓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런 시도를 좀 남모르게 계속해 왔다. 2021년 12월에 발행한 “교회 성폭력 생존자의 오늘”이라는 시리즈가 역시 그런 취지였다. 앞서 언급했지만, 통상적으로 가해자가 교단으로부터 징계나 형사처벌을 받으면 사건이 끝났다고 여겨진다. 가해자 처벌은 사건의 끝이 아닌 오히려 피해자의 회복의 시작일 수도 있는데 거기에 대해서는 언론이 너무 무관심하다. 그래서 피해자의 회복에 집중한 내용을 담고 싶었고, 나름대로 남모르게 많은 노력을 했다. 이 책의 출판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생각한다.

  구 기자는 서문에서 "분쟁 교회의 역사 또한 한국교회의 역사"라며 분쟁 교회를 떠나 새로운 공동체를 세운 사람들을 통해분쟁 교회의 역사는 '욕(辱)의 역사'에서 '영(榮)의 역사'로 반전될 수 있다고 말했다. (사진=평화나무)

Q. 사건을 취재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과 가장 기억에 남는 혹은 인상 깊었던 점은 무엇인가?

전반적으로 인터뷰이(interviewee)들께서 말씀을 잘해주셔서 큰 어려움은 없었다. 과거의 상처들을 다시 꺼내서 보여주신 것에 대해서 지금도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간혹 과거 얘기는 하고 싶지 않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계셨는데 기자 입장에서 그런 반응들이 제일 어려웠던 것 같다. 책과 기사를 통해서 이미 밝혔지만 그걸 통해서도 교회 분쟁이라는 게 10년이 흐르고, 더 오랜 시간이 흘러도 그것을 직면하기 힘들 정도의 상흔을 남긴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인상 깊었던 점은 어느 교회의 분쟁과 회복에 관한 기사를 써서 교인들에게 보여드렸는데 기사를 보신 분들이 교회를 나오면서 생긴 트라우마가 치유가 된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본인들도 “우리가 하고 있는 게 진짜 옳은 길인가? 이게 맞는가?”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하셨던 것 같다. 그때 기자로서 보람을 느꼈다.

Q. 본인 스스로 교회를 떠나게 된 경험도 있고, 교회의 분쟁을 취재하면서 교회의 부정적인 모습을 많이 봤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독립언론사 기자로 오랜 기간 활동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은 무엇인가?

좀 쉽게 대답하자면 계속 ‘적’이 나온다. 해치웠나 싶으면 곧바로 ‘적’이 나와버리는 그런 상황이 반복되고, 계속해서 할 일이 생긴다.(웃음) 그런 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처리하면서 연차가 계속 쌓여가는 상황인 것 같다. 솔직히 말하면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Q. 교회에 일어나는 무언가를 보고 ‘할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교회에 대한 애정이 많다고 해석된다.

아니다. 잘못된 해석이다.(웃음) 애정보다는 당위성에 가까운 것 같다. “교회는 이래야 하는 것 아니야?”라는 생각이 있다. 그것을 다른 말로 애정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너무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자꾸 벌어지니까 “교회가 이러면 안 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원동력이라면 원동력인 것 같다.

Q. 서론에서 “분쟁의 역사 또한 한국교회의 역사다. 무너져야 할 것들은 무너질 테지만 그런 중에도 새롭게 일어나는, 기존의 교회와는 다른 새로운 교회의 모델이 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현재 한국교회에서 무엇이 무너져야 하고, 무엇이 새롭게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다소 납작한 표현인 것 같기는 하지만 한 가지만 뽑으라면 목사중심적인 신앙생활이 무너져야 하지 않겠나 생각한다. 목사를 과도하게 의지하고, 목사에게 과도한 권한을 주는 관행들이 실제로 권위적인 목회자를 만든다. 교인들도 권위의식이 없는 목사를 싫어한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신앙생활로부터 벗어나야 하지 않겠는가? 비록 가나안 교인이긴 하지만 나는 평등한 교회를 꿈꾼다. 목사 스스로 권위를 많이 내려놓는 것이 멋없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것을 너무 창피해하지 말고, 성도와 목회자는 똑같은 그리스도인이고, 기능이 다를 뿐이라는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어렴풋이 든다.

  구권효 기자는 교회에서 분쟁을 겪고 새로운 신앙 공동체를 세우고자 하는 시도는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교회에서 '목사중심의 신앙생활'이 무너지고, 목사와 교우 사이에 위계가 없는 '평등한 교회'가 세워지기를 꿈꾸고 있다. (사진= 평화나무)

Q. 한국의 여러 교회가 상처 입고 회복 중에 있는 교회들과 연대하고 지원하는 실질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잘 모르겠다. 굉장히 어려운 일인 것 같다. 하지만 이번에 책을 쓰면서 하나 배운 것은 회복의 모습이 다양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교회는 십수 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그 상처를 교인들 사이에서 꺼내보기 어렵고 힘든 정서가 있다. 반면에 어떤 교회는 1년밖에 안 지났는데도 너무 활기차고 그런 교회가 있다. 그러니까 고정 관념을 만드는 것은 굉장히 조심해야 하는 일이다. “교회 분쟁을 회복할 때는 이렇게 해야 합니다. 이런 정서를 가지셔야 합니다”라고 얘기하는 건 살짝 위험하다. 오답으로만 빠져들지 않는다면 교인들 스스로 회복하는 모습들을 살피는 게 중요하겠다.

또 한편으로는 제대로 된 컨설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분쟁 교회를 경험해 보신 많은 분들이 평소에는 교회 정관이 있는지도 모르다가 담임목사가 사고 친 그제야 정관 찾아보고 민주적인 교회운동 공부하면서 이게 아니었다는 걸 깨닫는다. 교회 분쟁에 관해 물어볼 데도 없고 잘 모르기도 해서, 컨설팅해 준답시고 돈 요구하고, 정답을 마치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 그런 ‘사짜’들이 많기 때문에 제대로 컨설팅해 줄 수 있는 기관과 사람들이 필요한 것 같다. 오답으로만 빠져들지 않을 정도만 체크해 주는 컨설팅은 필요하다.

Q.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독자들로부터 기대하는 변화나 개선점이 있다면 무엇인가?

얼마 전 뉴스앤조이의 요청으로 삼일교회에 다니셨던 권대원 집사님이 서평을 써주셨다. 그분은 전병욱 사건 때 앞장섰던 분이다. 그분의 서평을 보는데 내가 다 위로를 받고 ‘꿈보다 해몽’이었다. 권대원 집사님이 자신의 상황에 맞춰서 너무 잘 써주셔서 너무 감사했다. 교회 분쟁을 겪어본 사람들은 좀 남다르실 것 같다. 지금은 어떤 위치에서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고 계시는지 모르겠지만 책을 보시면 남다르게 다가오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분쟁이 일어나고 여러 모양으로 교회를 떠나서 새로운 공동체를 찾고 혹은 만들고 있는 분들에게 그러한 시도들이 잘못된 게 아니라는 것을 얘기해 주고 싶다. 그런 건 잘못된 게 아니다. 좀 더 하나님 앞에 올바른 교회를 만들어 가려는 그런 노력들은 굉장히 소중한 것이다. 설령 그게 잘되지 않을 수도 있고, 잘 모를 수 있지만 말이다.

Q. 마지막으로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어쩌다 보니 책을 몇 권 냈는데, “이게 발행할 만한 내용의 글인가? 그럴만한 책인가?”하는 생각에 항상 부끄러운 마음이 있고, 나무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한다. 그래도 이번에는 회사에서 함께 출판을 준비하면서 고생한 직원들도 있어서 책이 많이 팔렸으면 좋겠다. 많이 사주십사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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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위해 한국교회가 개혁해야 할 ‘5가지’

김두현 21C목회연구소 소장

교회를 세운다는 것은 두 트랙의 조화이다. 하나는 목회이고 다른 하나는 제도이다. 목회의 기능은 예배 전도 훈련 섬김 돌봄 기도 교육 교제 등을 원활하게 하는 것이다. 목회는 개인은 물론 모든 회중에게 유익을 주어 궁극적으로 주님의 교회를 잘 세우는 데 기여한다. 따라서 목회는 목양(牧羊) 활동이다. 목회자는 매년 목회 계획을 세워 교회의 기능이 활발하게 움직이도록 동기 부여를 한다.

그러나 목회를 개발하고 활성화하는 것만으로 교회가 바로 세워지지는 않는다. 제도가 잘못됐거나 오늘날 교회 현실과 맞지 않으면 교회 성장에 악영향을 끼친다.

나는 21C목회연구소를 통해 지난 21년 동안 교회를 세우는 목회 연구에 전념해 왔다. 목회자들에게 매주 강의를 하고 멘토가 돼 코칭을 하면서 실제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전문화된 목회 자료 개발에 힘써왔다.

전반적인 목회 프로세스를 질적으로 향상하는 데도 힘을 다해왔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여러 제도가 목회의 발목을 잡거나 걸림돌이 됐다. 한국교회가 미래로 나가기 위해선 지금부터라도 5대 제도 개혁이 이뤄지도록 힘을 모아야 한다.

첫째, 원로 제도

모든 교단이 시행하고 있는 교회 내 원로목사, 원로장로 제도는 변화돼야 할 우선순위에 해당한다. 한국교회 80% 이상의 작은 교회들은 원로 목사나 장로 제도가 별로 문제 되지 않는다. 그러나 나머지 20% 정도의 교회들은 원로 제도로 인해 교회의 본질이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다.

미래 한국교회를 위해 기득권 당사자들은 이제 과감한 결단을 보여야 한다. 은퇴하면 모든 직함을 내려놓는 것이 바람직하다.

빌립보서 2장 8절은 이렇게 선언한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를 따라 우리도 내려놓아야 한다.

둘째, 청빙 제도

목회 패러다임이 개척에서 청빙으로 변화되는 분위기 속에서 목사 청빙과 관련된 문제점들이 드러나고 있다. 심지어 청빙 이후 교회 내홍과 충돌, 성장 저하와 분열이 발생하는 교회들이 절반을 넘는다. 목사 청빙 제도에 혁신적이고 새로운 의식이 필요하다. 청빙 당사자 목사는 물론 청빙하는 교회 인사권자들 모두가 획기적인 대안을 만들어야 한다. 현 관행인 신문 광고, 이력서 제출, 설교 테스트, 연고주의는 탈피해야 한다. 대신 인재 양육 시스템 개발과 네트워크를 통해 개 교회에 맞는, 존경받는 목사를 공정 신뢰 섬김으로 모시는 풍토를 만들어야 한다.

셋째, 당회 제도

당회는 순기능일 때만 필요하다. 만일 당회의 신분 자리 권위가 사역보다 우위를 점하면 그 당회는 교회 성장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미친다. 한국교회 대부분 당회는 회의 정책 의결 중심이다. 당회원들은 교회 부흥을 위해 목회의 팀워크 증진과 사역의 선도자가 돼야 한다. 하지만 요즘엔 전도하거나 밤을 새우며 기도하고 죽기까지 충성하는 사명자들이 안타깝게도 사라지고 있다.

한국교회를 살리기 위해 당회 제도를 운용하는 교회들은 뼈를 깎는 희생이 필요하다. 더 나은 21세기 목회 환경을 위해 당회원 모두 새로운 각오로 사명을 다해야 한다.

넷째, 세습 제도

세습 혹은 대물림은 한국교회 중 0.1% 교회에만 해당하는 소수의 문제이다. 그런데도 한국교회 전체가 세습하는 것처럼 보이는 원인은 초대형 교회들의 책임의식 결여 때문이다. 한국교회의 70~80%는 자립의 위기에 놓여 있다. 교회가 크면 클수록 모든 일에 신중하고 롤 모델이 되도록 힘써야 한다. 따라서 중대형 교회들과 목사는 희생하는 각오로 후임 목회자 제도에 본이 돼야 한다. 절대로 비판받거나 악영향을 주는 교회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다섯째, 총회 제도

모든 한국 기독교 교단 총회는 정치를 위한 총회에서 교회를 세우는 총회로 탈바꿈해야 한다. 총회장과 임원을 뽑는 선거 중심이 아니라 실제적인 처치 플랜팅을 통해 교회 개척과 작은 교회 네트워크, 젊은 세대 목회자 지원, 비전과 정책 연구 발표, 교단 간 연합을 통한 혁신적 교회 세움 운동을 일으켜야 한다.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갱신이 필요한 것이다. 총회가 해야 할 최우선 사업은 교회 개척과 지원, 차세대 목회자 양성과 공공선의 영향력 확장이다.

장 칼뱅은 이렇게 말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그분의 교회 안에서 지배권을 갖고, 그분의 말씀을 통해 교회를 다스리시는 것을 가로막아서는 안 된다. 교회를 그리스도가 아니라 자기에게 이끄는 자들은 신의를 저버리고 마땅히 존중해야 할 결혼 관계를 해치는 셈이다.”

어떤 제도든 그것은 교회를 세우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교회를 해쳐서는 절대 안 된다. 더 나은 미래의 한국교회를 위해 우리에게 익숙해진 5대 제도들을 과감하게 버리고 주님이 명령하시고 사도들이 이행한 사도행전 교회의 처치 플랜팅을 본받자. 그리하여 한국교회를 살리고 세우는 일에 목숨을 다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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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오늘 우리가 회개해야 할 것들

보통 회개를 무언가 잘못을 뉘우치는 감정 정도로 생각하지요.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회개(metanoeō)는 잘못 가던 길에서 돌아서는 것을 뜻합니다.
내가 가는 길이 낭떠러지라면 누가 그 길을 계속하려 하겠습니까? 내가 가는 길이 지옥으로 떨어지는 길목이라면 누가 그 길을 고집하겠습니까? 인간의 눈은 보이는 욕망만 보고서 좇아가지요. 바로 그 길을 성경에서는 넓은 길로 묘사하고 있지요. 하지만 그것은 죽음의 길, 사망의 길이라고 하지요. 그런 길에서 돌아서서 생명의 길로 나가는 게 회개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기 전 700여 년 전의 선지자인 이사야는 그런 예언을 선포했지요.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사 40:3)." 거기에서 너희란 하나님께 선택받은 이스라엘 민족을 말하지요.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길을 닦도록 한 것이지요. 그만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걷도록 촉구한 것이지요. 왜냐하면 그 길이 생명의 길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그 말씀이 700여 년 뒤에 세례요한이 똑같이 선포하지요.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다(요 1:23)." 세례요한은 그만큼 알고 있었던 것이지요.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이 있다면 그것은 주님의 길을 곧게 하는 것, 그를 위해 광야 빈 들에서 외친다고 말이지요. 그래서 그는 그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하라'고 목소리를 높였지요. 그가 외친 회개가 무엇입니까? 옷이 두 벌 있는 자, 옷이 많은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주는 게 회개라고 했지요. 또 먹을 게 있는 자, 먹을 것을 쌓아 놓고 사는 자도 먹을 게 없는 자에게 나눠 주는 것, 그것이 회개라고 했지요. 세리들에게는 또 뭐라고 합니까? 부과된 세금 이외에는 더 거두지 않는 게 진정한 회개의 삶이라고 하지요. 군인들은 또 무슨 회개를 요청합니까? 사람을 강탈하지 말고,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아는 것이 진정한 회개의 삶이라고 했지요.

우리는 알지요. 그것이 인간의 천성으로 되는 게 아님을 말이지요. 오직 그의 심령 속에 죄와 거짓을 몰아내신 예수 그리스도가 자리 잡고 있어야 그 삶이 가능함을 알고 있지요. 그래서 세례요한도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에 불과할 뿐, 그분 예수 그리스도는 외치는 소리를 넘어 삶을 회개시키는 주체임을 밝히고 있지요.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그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줄 것이라고 말이지요. 나는 비록 회개의 촉매제 역할만 할 뿐, 그분 예수 그리스도는 진정한 회개의 주체임을 밝힌 것이지요.

사실이 그렇지요. 그 어떤 유능한 목사나 선교사가 와서 회개하라고 외쳐도, 그 삶을 회개하며 사는 게 그분의 설교나 권면으로 되는 것인가요? 아니지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영, 성령께서 그 마음을 움직여 주셔야 가능한 것이지요. 왜냐하면 성령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가 어긋난 길을 갈 때마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 곁에서 간구하고 계시고(롬 8:26) 우리를 생명과 진리의 길로 이끄시는(요 16:13) 분이기 때문이지요. 그분께 인생의 항로를 내어 맡기는 자들은 참생명의 길을 걷게 되지요.

천지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

아테네 입구에 들어선 바울의 심령이 격분했지요. 그곳 시가지에 온통 우상이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들은 여러 석상을 만들어 놓고 신으로 섬기고 있었지요. 마치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기 전의 아브라함과 같은 처지였지요. 그도 아버지 데라를 따라 우상의 도시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을 조각하던 석공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 돌을 깎아 여러 형상의 우상을 만들던 아브라함이 무엇을 느꼈을까요? 그 석상을 사 가는 사람들을 보고 비웃지 않을까요? 왜 저들은 내가 만든 이 돌 형상을 신으로 떠받드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말이지요. 이게 무슨 말을 하는지, 이게 무슨 냄새를 맡기나 하는 것인지, 이게 무슨 귀가 있어서 듣기나 하는 것인지(시 115:6) 하고 말이지요.

그건 우리가 생각해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절에 가면 기가 막힌 형상으로 된 조각상들이 있지요. 나무로 혹은 돌로 된 조각상들 말이지요. 또 무당집에 가면 대부분 무엇을 꽂아 놓고 있나요? 대나무로 된 깃대지요. 그것들이 무슨 신이냐며, 그것들이 무슨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것이냐며, 그것들이 사람의 심령을 감찰할 수 있는 것이냐며 그냥 무시해 버리지 않습니까?

하지만 종교 연구가들은 그런 이야기를 하지요. 갖가지 나무와 돌로 된 조각상 앞에 사람들이 빌고 빌면 그 마음에 귀신의 영이 자리 잡게 된다고 말이지요. 그건 부적만 해도 마찬가지지요. 중국에서 들여오는 300원짜리 부적이 우리나라에서는 돈 있는 사람들에게 1억도 가고, 10억도 가지 않습니까? 그 종이쪽지 하나가 무슨 영험한 힘을 발휘하겠습니까? 그걸 부적이라 믿고 빌고 비는 사람들의 심령에 귀신의 영이 자리하기 때문이지요. 문제는 그 돌이나 나무 조각상이 아니라, 부적이 문제가 아니라, 그 대나무 깃대가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의 심령이요, 그 속에 역사하는 귀신과 거짓의 영이 문제지요.

바울이 아테네 입구에서 격분했던 게 바로 그 때문이지요. 그렇다고 바울이 그것들을 부수고 깨트리고 목을 쳤던 것은 아니지요. 왜냐하면 그것들을 부순다고 한들 귀신의 영이 그 속에 깃든 것도 아니고, 그 속에 있다가 없어지는 게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것보다는 그것들을 신으로 믿고 섬기고 있는, 악한 영을 섬기고 있는 사람들의 심령 상태를 바르게 회개시키면 모든 문제가 풀린다는 걸 알고 있었지요. 그래서 유대인의 회당과 토론장 아고라에서 쾌락과 금욕주의에 빠져 있는 사람들과 이야기했지요. 그 주된 내용은 바로 예수와 부활, 곧 죄와 사망과 어둠의 영을 깨트리시고 이 땅에 영원한 생명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이었지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마음 문을 연 것은 아니었지요. 하지만 아테네 사람들은 새로운 종교에 호기심이 있었던 까닭에, 바울을 데리고 논쟁의 종결지를 뜻하는 아레오바고로 갔지요. 그곳에서 그의 이야기를 더 듣고자 함이었지요. 그곳에서 바울은 우선 세 가지를 전했다고 했지요. 첫째, 하나님은 천지 만물의 주인이시기에, 사람으로 손으로 지은 형상이나 신전 안에 갇혀 계신 분이 아니다. 인간의 손으로 만든 형상이나 건물 안에 제한당하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둘째, 하나님은 무엇이 부족한 신이 아니기에 인간의 손으로 섬김 받기를 원하거나 적선받기를 원하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 셋째, 하나님은 아담을 흙으로 빚으시고 그 갈비뼈를 통해 하와를 만드사, 그 후손으로 모든 혈통을 잇게 하셨지만 그들이 죄를 범하자, 그들을 모두 흩으셨고 그들의 수명도 120세로 정하셨다고 했지요. 왜냐하면 유한함을 아는 인간만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실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분은 다른 신들처럼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삶에 함께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마 1:23)이라고 밝히고 있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회개를 촉구

오늘은 그 다음 부분으로, 바울이 그들에게 연이어 증언하는 내용입니다. 가장 큰 골자는 그것이지요. 하나님은 너희들이 섬기는 그런 신과는 다른 분이요, 하늘과 땅 모든 만물의 주인이시기에, 사람이 새긴 조각이나 형상에 비길 수 있는 분이 아니다, 그렇기에 너희들이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넘어가셨을지(hyperoraō) 모르지만 이제는 너희가 그분을 소개받고 알게 되었으니, 다 명하여 회개하도록 하셨다는 것이지요.

더욱이 그 증거도 확실하다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정한 사람 곧 예수 그리스도로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확고히 하고 계시고 그것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이니, 그것이 곧 모든 사람들에게 보증이자 곧 신실이다 하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지요. 차를 사도 보험을 드는 것은 사고에 대한 예방 차원이 제일의 목적이지요. 바울이 아테네 사람들에게 이야기한 것도 그 부분이지요. 머잖아 온 세상을 공의로 심판할 날이 올 것인데, 그날에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은 죄와 사망을 깨트리고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는 것뿐이다, 그것보다 더 확실한 보증도 없고 그것보다 더 신실한 게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테네 사람들이 해야 할 게 있다면 그분 앞에 나아와 회개하는 것뿐이라고 설득력 있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지요.

오늘 이 아테네 사람들은 분명 하나님 아버지를 참된 주님으로 모시고 살지 못한 것을 회개해야 하지요.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그들의 무지에 대해서 내버려 두실지 몰라도, 이제는 아는 이상 눈감아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회개하는 자만이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촉구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건 마치 아이들을 대하는 부모의 심정과 같지요. 제 아이들이 지금도 어린데, 더 어렸을 적에 무심코 어린이집에서 남의 물건을 가지고 올 때가 있었지요. 그런데 그게 잘못인지 모르고 가져왔었죠. 그때는 저와 제 아내가 용서해 주었지요. 하지만 그게 잘못된 것이니 다음부터 가져와서는 안 된다고 주의를 줬고 다음에 한 번 더 가져왔을 때는 단단히 혼을 내 준 적이 있었지요.

그게 가벼운 이야기인 것 같지만 그것이 영원한 천국과 지옥으로 나뉜다는 생각을 하면 아찔한 것 아닙니까? 인생의 참된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모를 때는 그냥 넘어갈 수 있다지만, 내 인생의 참된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안다면 그때부터는 그 하나님 앞에 나아와 회개의 삶을 바르게 살아가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도바울이 아테네 사람들에게 깊이 이야기하는 게 그것입니다. 그렇다고 그 이야기를 자기 감정에 치우쳐 했겠습니까? 아니지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그들에게 권면했겠지요. 그렇게 했기에 그들 중에 아레오바고 관리인 디오누시오와 디마리라 하는 여자와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었다고 밝혀 주고 있지요. 단지 바울 자신의 말로 했다면 결코 그런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겠지요.

한국교회, 오늘 우리가 회개해야 할 것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회개해야 할 것은 없을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야 자신의 유한함을 알고 주님 앞에 나아와 회개하면 되겠지요. 우리가 그런 사람들을 위한 매개체로, 촉매제로 쓰이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이사야처럼, 세례요한처럼, 주님을 위한 길을 닦는 통로로 쓰이길 원하고 있는지, 아니면 이 세상 풍조에 휩쓸려 살아가고 있는지 점검하시길 바랍니다.

그것이 첫 번째 우리가 회개해야 할 부분이지요.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지으신 목적이 있지요. 그것은 우리를 통해 찬양과 영광을 받기 위함이시지요.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는 길은 입술로 찬양하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으로 그분의 길을 닦는 통로가 되는 데 있지요. 그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쓰임 받는 것이지요. 그것은 내게 주어진 일을 박차고 모두가 선교사가 되라는 뜻이 아니지요. 지금 주어진 일을 통해 복음 전도자, 복음 증거자가 되라는 것이지요. 어떻게요? 내 삶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주는 거울로 살면 됩니다. 그것 하나면 우리는 충분히 하나님께 찬송하는 삶이 되고, 복음을 위한 손과 발이 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회개해야 할 부분이 있다면 뭘까요? 그것은 징계에 관한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의 상을 엎으시고(요 2:15) 호된 야단을 친 적이 있으시죠. 오늘날로 말하면 교회를 다니는 이유가 자신의 상품을 팔기 위한 거래 수단쯤으로, 자신의 정치적 욕망을 이룰 수 있는 목적쯤으로, 그밖에 내가 죽어 어디에도 갈 데 없다면 그래도 천국이라는 보증수표를 얻고자 하는 이유 등으로 교회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그들의 상을 엎으셨지요. 오늘 우리들은 마음의 일그러진 형상들을 갈아엎는 회개를 해야 되겠지요? 그런 징계를 촉구하시는데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렵니까?

사실 한국교회에 징계가 사라져 버린 지 오래지요. 장로나 권사나 집사나 일반 교우들이 잘못을 해도 징계를 하지 못하지요? 이유가 뭘까요. 징계를 하면 그 즉시 다른 교회로 떠나 버리기 때문이고, 교인들은 '이 교회만 있는 줄 아냐, 얼마든지 나를 받아 줄 교회가 널려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징계를 못하지요. 어디 그뿐입니까? 자신의 심장을 때리는 채찍과 같은 말씀보다는 축복, 성공, 건강 강좌 같은 설교만 좋아하는 쪽으로 변질돼 있지요. 설교 말씀을 통해 심장을 때리는 것은 귀를 가려서 듣지요. 어떻게 그런 교회에 주님께서 살아 계실 수 있다고 말하겠습니까? 어떻게 그런 교회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교회라면 초대교회의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예수 그리스도가(계 2:1) 이미 떠난 지 오래겠지요. 겉으로는 교회인 듯하나 거기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떠났고 거기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떠난 교회 말이지요.

그분이 질책하시는 징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주보 뒷면에도 기록한 바 있지만, 며칠 전에 우리 교회에 나온 교우 한 분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지요. 그분의 지난 삶은 죄와 폭력으로 얼룩진 삶이었지요. 젊어서는 스스로 띠고 다녔지만 늙어서라도 하나님 앞에 나왔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런 차원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회개하길 원하시는 부분이 무엇인지 그 음성을 들을 수 있지요? 이 세상의 성공이 성공이 아니고 실패가 실패가 아니니, 이 세상 것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오직 저 영원한 하늘 생명을 바라보도록(골 3:1) 촉구하는 그분의 음성이지요? 이 세상에서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해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그가 교인이 되면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만든다면(마 23:15)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그런 음성이지 않을까요? 겉으로만 교회에 소속돼 있는 선데이 크리스천 집사요 장로요 권사로 살지 말고, 오직 속사람을 새롭게 하여 온전한 크리스천으로 살라는, 주님의 음성이지 않을까요?

오늘은 사순절 셋째 주일이지요. 주님께서 왜 우리를 위해 십자가 고난을 지셨나요? 주님께서 왜 우리를 위해 당신의 생명을 갈기갈기 찢으셨나요? 우리에게 저 영원한 생명, 천국을 허락하기 위함인 줄 믿습니다. 그 생명은 교회에 속해 있는 목사요, 장로요, 권사요, 집사라는 직함으로 얻는 게 아니지요. 그 생명은 예수의 심장을 가진 이들만 누릴 수 있는 것이지요. 죄송하지만, 오늘 우리가 함께 예배를 드려도 그분의 심장이 없는 이들은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반대로 이 세상에서 보잘것없어도,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비록 초라해도, 그분의 심장을 지니고 사는 자는 오늘 죽어도 천국에 입성할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얻은 자라면, 그분이 질책하시는 징계의 소리를 귀담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에게 향한 회개의 촉구, 그리고 여러분에게 향한 회개의 촉구에 귀 기울이시길 바랍니다. 우리 생명은 아침에 내렸다가 사라지는 안개와 같은 것(약 4:14)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생명의 코끝의 호흡(눅 12:20)을 주관하고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 때문입니다.

그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생명을 찢으셨습니다. 그분 앞에 부끄럽지 않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십시다. 우리가 아무리 발버둥치고 애써도 그분이 우리의 모든 것을 닫아 버린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열면 닫을 자가 없고, 닫으면 열 자가 없는 분(계 3:7)이 바로 그분이지요. 그렇기에 이 시간 욕망의 영에 붙잡혀 살아왔던 것, 거짓과 불의의 영, 미혹의 영에 이끌려 왔던 것,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고 선량한 일(신 6:18)보다는 나 보기에 좋은 길만 택하여 살아왔던 모든 것들을 회개하며 새롭게 결단하도록 하십시다. 그리하여 오늘 당장 하나님께서 내 코끝의 호흡을 거두어 가신다 해도 천국으로 입성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고 계시는 하나님. 비록 아테네 사람들이 하나님을 천지의 주인이신 줄 모르고 살 때는 넘어갔을지 모르지만, 이제는 알게 되었을 때는 결코 넘어가는 하나님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죄악도 마찬가지인 줄 압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것 같지만, 내가 내 인생의 주인 행세를 할 때가 많았음을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소유, 물질, 재산, 자녀들, 재능들, 그 모든 것들을 내가 주인인 줄 알고 허세를 부려왔습니다. 저 영원한 하늘나라보다 이 땅의 것에 집착하며 더 성공하기 위해 몸부림쳐 왔습니다. 오! 주님. 그 모든 것들이 실은 하나님을 떠난 우상들이오니, 이 시간 내 마음속에서 그것들을 지울 수 있게 도우시옵소서. 이제부터는 나 보기에 좋은 길을 택하여 사는 게 아니라 오직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고 선한 길을 택하여 사는 당신의 종들이 되겠습니다. 우리 교회가 사람도 건물도 초라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떠나지 않는, 마지막 때에 칭찬받는 교회가 되게 하시옵소서. 이를 위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의 심장을 지니며, 손과 발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주는 거울로 살게 하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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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가 고치고 개혁해야 할 것


김명혁 목사(강변교회 원로, 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

첫째, 주일예배 시간에 드럼과 각종 악기로 연주하는 시끄러운 음악을 오르간과 피아노 위주의 경건한 음악으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둘째, 주일 오후 예배를 주일 저녁 예배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주일 하루를 거룩하게 지키는 ‘주일성수’를 회복하는 것이다.
 
셋째, 현세적인 성공과 축복 중심의 메시지를 십자가 중심의 복음적 메시지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넷째, 현세적이고 정치·경제·문화적인 관심으로부터 종말적이고 내세적인 천국에 대한 관심으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신약과 초대교회 성도들의 우선적인 관심이었다.
 
다섯째, ‘빛과 소금’이라는 말을 ‘소금과 빛’으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현상으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순서를 바꾸는 것이고 암암리에 자기 부정과 희생보다는 자기 긍정과 현현을 바라는 인간적인 발상이라고 생각한다.
 
여섯째, ‘묵상 기도’라는 말을 ‘묵도’ 라는 말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주님과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옳지만 기도를 묵상으로 하는 것은 옳지 않다. 느헤미야가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했다”(느 2:4)고 했다.
 
일곱째, 화려한 예배를 드리면서 진리의 깃발을 휘날리는 것을 긍휼과 은혜와 용서와 사랑의 손길을 펴는 것으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진리 이전에 은혜가 충만했고(요 1:14), 제사 이전에 긍휼을 원하셨고(마 9:13), 원수를 사랑하라고 명하셨기 때문이다(마 6:44). 이것을 성 프랜시스와 손양원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이 지적하며 실천했다.
 
여덟째, 나의 옳음을 강조하고 나와 다른 상대방의 그름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위선과 교만과 분열의 자세를 이단이 아닌 다양한 모든 교회와 모든 신자들을 품으려는 온유와 겸손과 연합의 자세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십자가가 이룬 것이 바로 화해와 연합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한경직 목사님과 정진경 목사님이 강조했다.
 
아홉째, 너무 부해지고 강해지고 커지려고 하는 욕망을 가난해지고 약해지고 작아지려는 소원으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주님과 사도 바울과 성 프랜시스와 손양원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이 지닌 모습이었다. 또한 이것이 교회가 세상과 친근해지는 비결이기도 하다. 교회와 교회당을 무한대로 대형화하려는 것을 중단하고 이제는 가난하고 약하고 작은 교회들과 연대하며 격려하는 것이 필요하다.
 
열째, 과시적인 행사 위주에서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제사 위주의 삶과 사역으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주님과 선배들의 가르침대로 살지 못하는 우리들의 이기적이고 정욕적이고 위선적이고 과시적이고 배타적인 죄를 진솔하게 뉘우치면서 회개하는 상하고 통회하는 눈물의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 이것이 다윗과 사도 바울과 길선주 목사님과 이기풍 목사님과 이성봉 목사님과 김치선 목사님 등이 지녔던 제물 된 삶이었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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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빙(Wellbeing)의 삶에서 조심해야!

하나님은 신명기(申命記)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서 어떻게 복된 삶을 살 수 있을지 구체적으로 명령하셨다. 언약 백성은 언약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면 복을 누릴 수 있다. 말씀대로 행하면 복을 받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과 같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크게 번성할 수 있었다(신 6:1-3). 실제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잘 모르지만 신명기 6장 10-11절에서 그들의 삶을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향하여 네게 주리라 맹세하신 땅으로 너를 들어가게 하시고,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하시며,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차지하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차지하게 하사, 네게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신 6:10-11)

“크고 아름다운 성읍”은 오늘날 빌딩 숲으로 뒤덮인 현대 도시를 생각나게 한다.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은 오늘날 ‘LED Ultra Super HD 초슬림형 TV’와 ‘최신 스마트 폰’과 ‘고급 냉장고’와 ‘편리한 식기 세척기’, ‘예쁘고 고급스런 식기 세트’로 가득한 부요한 삶을 떠올리게 한다. 그들이 “파지 아니한 우물”은 많은 수입을 창출하는 IT사업이나 높은 수입을 보장하는 직장을 비유한다.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소유해 “배불리” 먹는 삶은 너무 많이 먹어 비만을 걱정해야 할 정도의 부유한 삶을 암시한다. 우리가 기대하고 바라는 복지국가의 웰빙(Wellbeing)의 삶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노예로 살다가 40년 동안 척박한 광야의 삶을 뒤로하고 가안 땅에서 그야말로 환상적인 삶, 젖과 꿀이 흐리는 땅의 복을 누렸다. 이 복은 그들 스스로 얻은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으로부터 공짜로 받은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야 할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너는 조심하라”(신 6:12)는 경고였다. 복지국가와 웰빙의 삶을 살 때 조심해야 하다는 것이다. 할아버지 세대가 광야에서 고생하며 살 때에는 특별히 조심할 것이 상대적으로 적었을 것이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주시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으며 살아야 했던 시대는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고 기도하였지만, 풍요의 땅 가나안에는 그런 기도가 필요 없다고 느낄 수 있다. 그러기에 조심해야 했던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보면 언제나 “......번성할수록......범죄......”(호 4:7) 했다. 

조심하다(솨마르. 8104) [ shâmar ]  שָׁמַר

1. 지키다.  2. 동산을 지키다. 3. 창 30:31.
발음 [ shâmar ]
구약 성경  / 411회 사용

이스라엘 백성이 조심하며 지켜야 할 것은 다음 네 가지였다.
첫째, ‘여호와를 잊지 않는 것’(12절)
둘째,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13절)
셋째,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지 다른 것으로 맹세하지 않는 것’(13절)
넷째, ‘다른 신들을 따르지 않는 것’(14절)

웰빙의 삶에서 지켜야 하는 구체적인 지침이었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복지국가의 부요를 누리고 있는 상황에 매우 시의적절한 경고가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이 주신 물질적인 부요가 오히려 영적인 빈곤을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럴 때 조심해야 하는 데 한국교회와 성도들은 이 점에서 얼마나 조심하고 있을까? 

혼합주의에 빠지지 말아야!

‘조심하다’(shamar)라는 단어는 ‘울타리를 쳐 지키다’라는 뜻이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 스스로 가나안 땅의 세속 이방 신들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울타리를 쳐 지켜야 했다.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에(in the world) 있으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게(not of the world) 살기 위해서는 울타리를 세워야 했다.
그러면 하나님을 잊지 않고 그분을 경외하며 그 분의 이름으로 확신 있는 삶을 살며 다른 신들을 섬기지 않는 삶을 살도록 조심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바울의 말을 빌리면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롬 12:2).
그렇게 분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나님이 그 방법을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셨다.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신명기 6장 4-6절의 말씀이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신 6:4-6)

그 유명한 ‘쉐마’ 구절이다. 성인 유대인이면 아침과 저녁으로 매일 이 구절을 암송해야 했다. 제2차세계대전 중 수용소 가스실에서 죽어갈 때도 유대인들이 암송했다는 구절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오직 하나님만 사랑해야 했다. 그것도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적당히 이방 신들과 하나님 사이에 양다리를 걸칠 수 없다. 이 명령은 하나님의 백성에겐 기본이며 가장 중요하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어 나오는 말씀을 보면 알 수 있다.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6절)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곧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연애하는 남녀를 생각해 보자. 한 사람이 연애편지를 받으면 그의 편지를 가슴에 품고 다닌다. 읽고 또 읽어 머리에 암송할 정도가 된다.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방의 말을 소중하게 여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마음에 새기다”라는 말은 본래 “마음 위에 두다”라는 단어를 의역한 것이다. ‘새기다’고 번역한 성경은 중국어 외에는 찾을 수 없다. 그렇지만 나쁜 번역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는 것은 읽고 묵상하는 것과 암송을 생각하게 한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암송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해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 곧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암송하는 삶, 그것이 바로 조심하는 삶이다.

  만약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과 그 분의 말씀에 대한 관심이 점점 줄어들게 된다면 세상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는 ‘혼합주의’(syncretism)에 빠질 것이다. 다른 종교도 포용하는 관용(tolerance)의 자세를 취하게 될 수 있다. 만약 부모세대가 이 부분에서 무너지기 시작한다면 심각한 문제를 낳게 된다. 오직 하나님만 섬기고 사랑해야 하는데, 세속적인 가치와 매력을 따라가면서 점점 영적인 가난에 빠져들어 갈 것이다. 하나님과 세상을 겸하여 섬기는 혼합주의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 올곧게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대!

한국교회의 쇠퇴는 위에서 언급한 부분과 무관하지 않을까? 만약 부모세대가 이 부분에서 실패했다면 다음세대는 희망이 없다. 물질적으로 번성하지만, 영적으로는 빈곤에 처할 수 있다. 성경의 역사는 그것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사사 시대로 돌아가 보자.    

“......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삿 2:7-10)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시대! 상상할 수 없다. 출애굽 다음세대가 어떻게 이렇게 한 세대 만에 영적으로 몰락할 수 있단 말인가? 부모세대가 도대체 어떠했기에 자녀세대에 이런 처참한 상황이 도래했단 말인가? 부모세대는 웰빙의 시대에 조심하지 않았고 하나님만 섬기지 않고 세속적 성공을 추구하며 다른 신들을 쫓아가며 혼합주의에 빠졌음에 틀림이 없다. 그들의 삶과 자녀들의 학벌과 직장은 대단했고 소위 성공가도를 달렸을지 모르지만, 영적으로는 매우 가난하고 빈약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 결과는 고스란히 다음세대에 나타났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대가 나타난 것이다. 
  이런 사사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이 지금 현재 유럽 교회와 미국에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다. 한국에도 그런 조짐이 벌써 시작되었다. 부모세대의 세속적 삶이 자녀들에게 영향을 미쳐 점점 다음세대가 힘을 잃고 있다. 다음세대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한다. 다음세대가 하나님을 떠나고 있는 것이다.  


다음세대를 위한 신앙교육의 부재

하나님만 섬기지 않고 세속을 겸하여 섬기는 부모세대는 신명기 6장 7-9절을 말씀도 실천하지 않았을 것이다.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신 6:7-9)

  언약의 말씀을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쳐야 했다. 하나님은 언약의 복을 부모뿐 아니라, 자녀에게도 약속하셨기 때문에 그것을 자녀에게 열심히 가르쳐야 했다. 이스라엘 백성은 말씀을 손목에 매고 눈 사이에 붙여 표로 삼았다. 이것을 ‘테필린(Teffilien)이라고 부른다. 손목에 성경 구절이 쓰인 밴드를 감았는데 이것이 자신을 위한 것이라면, 이마에 붙인 성경구절을 담은 자그마한 상자는 다른 사람을 향한 말씀의 선포라고 볼 수 있다. 집 문설주의 성경구절이 가족 식구들을 위한 것이라면 바깥문의 성경구절은 가족 이외의 다른 사람을 향한 선포였다. 이렇게 부지런히 성경 말씀을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했다. 좀 유별나다 싶을 정도다. 
  그러나 가나안에 들어갔던 이스라엘 백성이 웰빙의 삶을 살게 되었을 때 자녀들에게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치지 않았다. 유일하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가나안의 다른 신들을 사랑하기 시작하니, 자녀에게 신앙교육을 할리가 없다. 결국 부모의 신앙이 나태해 지고 나약해 지자, 자녀들에게 신앙을 전수하는 것도 소홀히 하게 되어 다음세대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사사 엘리이다. 그는 자신의 가정에서 자녀들을 신앙으로 바르게 양육하지 않았다. 엘리는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앙훈련을 시키지 않았다. 자녀들을 하나님보다 귀하게 여긴 결과였다. 사랑해야 할 대상이 하나님보다 자녀였던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쫓아가던 방식 그대로 엘리도 걸어갔던 것이다. 혼합주의에 빠진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 사랑해야 할 명령을 잊어버리고 실천하지 않음으로 그는 아들도 잃고 자신도 비참한 최후를 맞이해야 했다. 하나님의 성직자가 이 정도였다면 보통 사람들은 어떠했을까?

  언약의 자녀를 신앙으로 양육하는 일은 선택 사항이 아니라 필수이다. 웰빙의 삶을 살아가는 부모세대인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 부모는 혼합주의에 빠지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사랑해야 한다. 성경 말씀을 소중히 여기고 그분을 배우며 그분이 행하신 일을 예배로 찬양해야 한다. 그런 부모세대는 자녀에게 하나님과 그 말씀을 부지런히 교육한다. 신앙적으로 조심하는 삶을 살기 위해 자녀의 신앙교육은 꼭 해야 할 일이다. 하나님이 경배를 받으실 유일한 분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가르쳐야 한다. 

한국교회는 이 점에서 어떤가?
우리교회 다음세대가 가야할 길은 이상이 없나?
더 구체적으로 우리 아이가 가야 할 길에는 이상이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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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와 무교 


무교를 단지 원시적인 종교로 단정해 버릴 수는 없다.
그 이유는 무가(巫歌)는 오랜 역사 속에서 타종교와 통속문학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고 축적된 무당의 노래이며 결코 그 원래의 것을 보존하고자 했던 노력을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무교가 주술신앙(呪術信仰)일 뿐 교리도 윤리도 없기 때문이다.
무교는 단지 타종교와 혼합하여 신령한 요소들을 그대로  흡수해서 자기의 것으로 만들 뿐 발전된 교리나 윤리를 갖지 않는다.
이와 같이 무교는 타종교와 대중문학을 흡수해서 발전되었으며, 또 그 반대로 타종교와 전통문학에 많은 영향을 끼친 현대적 감각을 가진 역사적으로 축적된 종교이다. 이런 맥락에서 무교의 발전은 불교와 기독교의 발전과 무관하지 않다. 한국 전통사상과 한국문화를 지배해온 종교는 무교였으며 지금도 그렇다. 이 때문에 무교의 발전을 이해하려면, 다양한 전통 한국문학의 장르에 대한 훌륭한 지식이 필요하며, 무가의 역사와 전통문학과의 관계를 추적해야 한다.

무교는 중국의 영향을 받기 이전 시대 특히 제정일치 시대에는 대중 종교로서의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삼국사기와 삼국 유사에 무당 비슷한 인물들이 고구려, 백제, 신라의 기록에서 거듭 등장하고 있고, 유동식은 1450여년전 신라시대의 화랑도에서 이미 무교의 큰 영향을 발견하고 있다. 원래는 무교가 이들 삼국의 주요한 세계관 이였다. 그러나 무교는 불교, 유교, 도교와 같은 중국문화의 소개로 변화를 겪게 되었다. 그 때부터 무교는 점차 하류계층의 종교로 자리를 잡게 되었고, 계층에 관계없이 여인들의 종교가 되었다. 이는 불교가 성행하던 고려 시대만 하더라도, 단군신화나 팔관회(고려 때 해마다 대궐 안에서 동짓달이면 여러 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큰 규모의 의식)를 통해서 볼 수 있듯이, 무교가 민중생활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 후 이조선의 유교정책의 영향으로 무교는 하류층의 민간신앙으로 전락되었다. 이와 같이 무교는 민간신앙이 되어 한국의 종교적 바탕 또는 정신적 바탕이 되어 외래 종교를 받아들이는 근저를 이루게 되었다. 그리고 불교, 유교, 기독교와 같은 대 종교들도 이 무교신앙의 바탕 위에 세워지게 되었다. 유동식은 한국에서 기독교 신앙이 쉽게 수용되는 이유와 기독교신앙이 기복신앙으로 흐르는 이유 그리고 교역자들이 무당적인 중재역할을 하게 된 이유를 여기서 찾고 있다.
* 자료 출처 / 유동식. {한국종교와 기독교} 대한기독교서회, p. 15-39

이와 같은 이유들 때문에 왈러벤(B. C. A. Walraven)은 한국 무교를 원시 종교로 보지 아니하고 오랜 역사 속에서 복잡하게 얽히고 혼합 발전된 종교라고 말한다.
그는 무교의 역사적 발전을 무가의 변천을 통해서 살필 수 있다고 믿는다.
무가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큰 변화를 겪어왔고, 그 시대 시대의 영향들을 흡수하여 왔다는 점이 자료들을 통해서 입증된다는 것이다. 무가가 역사 속에서 수정되지 않은 채 수세기에 걸쳐서 변함없이 전래되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오히려 금세기에 수집된 무가는 역사적 변화를 더욱 뚜렷하게 입증할 뿐이라고 말한다.

왈러벤은 현금의 무가의 문학 형식이 이조선 후기에 등장한 대중문학에 영향을 받고 있으며, 18세기에 유행하기 시작한 통속문학의 영향은 무가의 형태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고 말한다. 무가의 제문(祭文), 제문구조, 주제들이 이들 문학의 구조와 유사할 뿐 아니라, 무가의 형식이 새로운 통속문학의 등장과 그 영향 아래서 크게 변화를 겪어왔음을 입증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무가에서 일부 설화 주제들과 또 이들 주제들의 일부 연관성은 상당히 오랜 고대의 것일지 모르나, 무가와 설화문학의 다양한 양식사이의 관계는 무가의 형태가 시대와 함께 변천되어 왔음을 분명히 보여 준다고 확신한다. 심지어 현대 무가조차도 외부 영향에 개방적이며, 본래 양식을 보존하려는 흔적을 찾을 수 없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무가는 역사적 상황에 영향을 받아왔기 때문에, 무가가 무당의 직접적인 신앙의 표현일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왈러벤은 무가의 역사가 무당의 역사와 한국 사회와의 관련성을 암시한다고 믿는다. 무당이 18세기와 그 이후의 통속문화의 요소들을 상당히 흡수하였다는 사실이 단순하고 무식한 농부들과 어부들이 아닌 사회의 중간계층인 하급 공무원들과 관리들의 문화가 무당에까지 침투될 수 있는 채널이 있었다는 것을 입증한다는 것이다. 대개는 광대가 여기서 중간 기능을 수행하게 되었다. 그래서 광대는 사회의 상류계층에 무교적 요소들을 상향전달함으로서 판소리 창작에 공헌하였을 뿐 아니라, 그 요소들을 하향전달하였다. 광대로부터 상류계급의 문화적 요소들을 빌린 무당은 차례로 일반 대중사이에 이 문화를 전파하는 데 공헌하였다는 것이다.

이제 무교는 종교 혼합주의의 관점에서 이해될 것이 아니라, 한국인 심성에 흐르는 또 오랜 역사 속에서 한국문화를 지배해온 무교신앙이란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타 종교나 통속 문학에서 신령에 관한 부분을 받아 들여 무가를 발전시켰거나 그 시대적 상황을 표출하였다 하더라도 교리도 윤리도 없는 무교는 여전히 주술신앙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을 무교의 변증법적 발전으로 보기 어렵다.
따라서 무교가 타 종교나 문학에서 받은 영향보다는 타 종교에 끼친 영향 특히 기독교에 미친 영향에 관심을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B.C.A. Walraven, Muga: The Songs of Korean Shamanism].



파스칼의 하나님(요한복음 17장)



파스칼의 하나님


하나님이 만드신 공백

제우스와 님프인 플루토(Pluto)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었던 탄탈로스(Tantalos)는 신들의 총애를 받아 올림포스에 초대되어 그들과 어울리는 특권을 누리곤 했다. 
그러나 그는 점차 오만해지더니 신들의 식탁에서 그들만 먹는 불사의 음료인 넥타르(nectar)와 불사의 음식인 암브로시아(ambrosia)를 훔치기도 하고 신들에게 들은 비밀을 인간에게 발설하기도 했다. 
결국 신들의 미움을 받게 된 그는 벌로 지하세계의 가장 밑에 있는 나락의 세계인 타르타로스(Tartaros)에 떨어지게 되었다. 
제우스는 탄탈로스를 타르타로스의 한 연못에 박힌 말뚝에 묶어 놓았다. 
물은 탄탈로스의 턱까지 차올랐지만 그가 고개를 숙여 목을 축이려 하면, 순식간에 물이 빠져 바닥이 드러나 물을 마실 수 없었다. 
그의 머리 위로 열매 가득한 가지가 드리워 있지만 언제나 배가 고팠다. 
이유인즉 열매를 따먹으려고 손을 뻗는 순간, 바람이 불어 가지를 멀리 밀어내었기 때문이었다. 
탄탈로스는 풍성한 물과 음식물을 바로 옆에 두고도 영원히 갈증과 기아의 고통에 시달렸다.

탄탈로스의 이야기는 신의 영역까지 침범하려는 인간의 '휴브리스(hubris)'에 대한 형벌 이야기다.
그리스어 휴브리스는 ‘오만'을 뜻한다.
뱀의 유혹에 빠져 아담이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했던 그 욕망의 근저에는 오만 혹은 교만이 있었다. 
그러나 과연 그 욕망을 채울 수 있는가?
손으로 움켜 쥔 모래처럼, 잡으려 하면 멀리 도망가 버리는 것이 욕망이다.
자신의 마음 속에 난 욕망의 구멍을 욕망으로 메우려 하는 이들은 일상을 지옥으로 사는 것이다.

프랑스의 수학자였던 파스칼(Blaise Pascal)은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이 만드신 하나의 공간이 있다. 공백이 있다”고 했다.
그의 말대로 인간 속에는 하나님이 만드신 공간, 텅 빈 공백이 있다.
사람들은 이러한 텅 빈 공(空)을 채우기 위해 세상의 온갖 것으로 쏟아 붓고 채우려 든다.
그러나 채워지지 않는다.
채워질 수가 없다. 
하나님의 자리인데, 어떻게 세상의 것으로 채울 수 있겠는가?
그렇게 채우려 하면 할수록 그 공은 더욱 허해진다.
이 공간을 채우려고 사람들은 스스로 갈증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것이다. 

큰 고통 중의 하나가 육신의 갈증이라 하는데, 그것보다 더 근원적인 갈증은 영혼의 갈증이다.

아모스는 장차 종말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영적 갈증의 시대가 올 것을 예언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 8:11). 

전도서 기자는 그 텅 빈 마음의 공간은 모든 강물이 바다로 흘러들어가도 바다를 채우지 못하듯 채울 수 없는 공간, 끝없는 욕망의 공간이라 했다.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강물은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전 1:7-8).

프랑스의 철학자인 카뮈(Albert Camus)는 “우주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가르쳐 주는 것은 거대한 고독 뿐”이라고 말했다. 
그 바닥을 드러내지 않는 고독을 메울 수 있는 것은, 그 끝없는 욕망을 채울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의 보이는 것에는 없다. 그것은 마음속에 있다. 하나님을 품은 마음속에만 있다.

내려놓는 충만함과 비움으로 채워지는 역설의 복음만이 가없는 우리의 영적 갈증을 채워 줄 수 있다.
이 역설의 복음은 이 땅의 복음이 아니다.
천상의 복음이다.
타르타로스와 같은 생의 우물에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생수를 길은 후 오욕(汚辱)에 찌든 물동이를 버려야 해갈되는 은총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파스칼이 말한 우리의 마음 속, 하나님이 만드신 공간은 이 허허로운 세상에서 당신의 현존으로 꽉 채워 그 충만함으로 살라고 우리에게 허락하신 최상의 선물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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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이  죽은 후 그의 옷 안쪽에 그가 꿰매 놓은 신앙고백문이 발견됩니다.
파스칼이 1654년 11월 23일 밤 10시 30분부터 12시 30분 사이에 불같은 성령의 감화를 받은 경험을 기록한 을 양피지와 종이에 쓴 내용이었습니다.
이때 파스칼의 나이는 서른 한 살이었습니다.

파스칼이 이때 경험한 구체적 상황을 우리는 알 수 없으나 매우 신비한 시간이었음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파스칼은 이때의 감격의 순간을 놓칠세라 종이에 적고 양피지에 정서하여 평소에 자주 입고 있던 옷의 안쪽에 바늘로 꿰매어 깊이 간직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아무에게도 공개하지 않았고 파스칼이 죽은 뒤 비로소 이 메모가 발견되었습니다.
약 600여자 정도가 되는 짧은 신앙고백은 뜨거운 확신과 기쁨에 찬 감동이 서려 있습니다.
두 시간여의 짧은 시간을 통하여 파스칼의 온 삶은 새롭게 변화되었고 새로운 영적 능력과 소명을 가진 사람으로 전혀 다르게 태어났습니다.

"불! 성령의 불!" 로 시작되는 그의 신앙고백
전율이 이는 파스칼의 순결한 신앙고백
죽을 때까지 옷 속에 꿰매어 간직한 그 순수함

지금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아직도 보관되어 있다고 하는 그의 심장고백

파스칼의 호심경(Pascal's talisman)으로 불리는이 신앙고백문...그의 믿음을 생각합니다.

불!(Fire!)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삭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철학자와 학자의 하느님이 아닙니다.

 
확신,
확신,
감격,
기쁨,
평화.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그리고 너의 하느님.
너의 하느님은 나의 하느님이 되리라.

 
하느님 이외에 이 세상과 온갖 것에 대한 일체의 망각.
하느님은 오직 복음서에서 가르치신 길에 의해서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인간 영혼의 위대함이여.
의로우신 아버지,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습니다.

 
기쁨,
기쁨,
기쁨,
기쁨의 눈물.

 나는 당신에게서 떠나 있었습니다.
생수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버렸습니다.
이제 나는 영원히 당신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느님과 당신이 보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
나는 당신을 저버리고, 피하고, 부인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이제 나는 절대로 당신에게서 떠나지 않겠습니다.
당신은 오직 복음서를 통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일체의 모든 것을 기쁘게 포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나의 지도자에게 전적인 순종.
이 땅에서의 잠깐의 노력을 통해 얻는 영원한 기쁨.
나는 당신의 말씀을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아멘.


어쩌면 지상에서 가장 뛰어났던 천재 수학자요 물리학자인 블레즈 파스칼(Pascal, Blaise 1623.6.19~1662.8.19).
그가 남긴 수학원리와 공식과 정의와 도식 그리고 물리학의 원칙 등은 지금도 과학과 건축과 현대기계의 발명 등의 모든 분야에 있어서 널리 응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파스칼은 동시에 깊은 신앙인이었습니다.

그가 죽은 후 그의 신앙 고백문을 친지들이 펴내어준 유명한 명상집 '팡세'(Pensées,"생각"이라는 뜻)는 몇 세기가 지나도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깊고도 맑은 청정한 샘물같은 영성의 어울어짐이 있습니다.

유명한 시인 엘리어트(T.S. Eloite)의 말처럼 파스칼은 과학자였지만 사실은 가장 위대한 수도사로 살아간 사람이었습니다.

특히 수학자로서 확률 부분에 대단한  공헌을 남긴 그는 흥미롭게도 신앙에 대해서도 의심과 불신으로 신앙을 거부하는 이들에게  구원 문제에 확률 개념을 적용한 '파스칼의 내기'를 제시한 바가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크리스천이 되기로 선택한 사람들이 손해볼 것은 무엇인가?
설사 그가 죽어서 하나님도 없고, 그의 믿음이 헛된 것이었다라고 판명되더라도 그는 잃을 것이 없다.
사실상, 그는 믿지 않는 친구들보다 더 행복하게 산 사람이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도 계시고, 천당과 지옥이 있다면 그는 천국을 얻을 것이고, 그의 무신론자 친구들은 지옥에서 모든 것을 잃을 것이다...'

그런데 파스칼 그 자신은 이런 확률에 의지해서 신앙생활을 했던 것이 아니라 성령충만의 간증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불같은 성령체험의 감동을 마지막 병으로 시달리면서도 은혜 가운데 지켜나갔습니다.

 

파스칼 (Pascal, Blaise) [1623.6.19~1662.8.19]
프랑스의 수학자 ·물리학자 ·철학자 ·종교사상가.
국적 : 프랑스
활동분야 : 과학, 철학
출생지 : 프랑스 오베르뉴 클레르몽페랑
주요저서 : 《팡세》(1670)


오베르뉴 지방의 클레르몽페랑 출생. 3세 때 어머니와 사별하고 소년시절에 아버지를 따라 파리로 왔다. 학교교육은 받지 않았으나 독학으로 유클리드기하학(幾何學)을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16세에 《원뿔곡선 시론(試論)》을 발표하여 당시의 수학자들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사영기하학(射影幾何學)에서 나오는 《파스칼의 정리》는 이 시론에 포함되어 있다. 1604년 아버지와 함께 루앙으로 옮겨, 세무장관이던 아버지가 하는 일의 능률을 높이기 위하여 계산기를 고안, 시작(試作)하였다.

루앙에 있을 때 얀센주의의 신앙혁신운동(信仰革新運動)에 접하여 최초의 회심을 경험하였으며, 같은 시기에 토리첼리의 실험을 행한 이래, 진공(眞空)에 관한 문제, 유체정역학(流體靜力學)에 관한 문제에 흥미를 가졌고, 마침내 《진공에 관한 신실험(新實驗)》을 발표하였다. 1647년 질병의 진단을 받기 위해 파리로 돌아와, 그 무렵 귀국 중에 있던 R.데카르트의 방문으로 서로 만나게 되었다. 이듬해 처남 페리에에게 부탁한 퓌드돔 산정(山頂)의 실험에 의해 대기의 압력을 확인하였다.

1651년 아버지가 죽은 후 여동생 자클린이 포르 루아얄 수도원으로 들어간 것과는 달리, 파스칼은 로아네스공(公), 슈발리에 드 메레 등과 친교를 맺고 사교계에 뛰어들어 인생의 기쁨을 추구하였다. 노름에서 딴 돈을 공정하게 분배해주는 문제에서 확률론을 창안하여, 《수삼각형론(數三角形論)》 및 그 《부대논문(附帶論文)》을 썼다. 파스칼은 이 논문으로 수학적귀납법의 훌륭한 전형(典型)을 구성하였으며, 수의 순열 ·조합 ·확률과 이항식(二項式)에 대한 수삼각형의 응용을 설명하였다. 또 물리실험의 결과를 《유체의 평형》 《대기의 무게》라는 두 논문으로 정리하였다. 초등 물리학에서 나오는 ‘파스칼의 원리’는 《유체의 평형》 속에 포함되어 있다.

1654년 여름부터 사교계에 대한 혐오감이 점점 싹텄고, 11월 23일 깊은 밤, 결정적인 회심의 환희를 체험하고 포르 루아얄 수도원의 객원(客員)이 되었다. 이 점은 수녀인 여동생 자클린에게서 입은 감화가 컸다고 한다. 《죄인의 회심에 대하여》 《초기의 그리스도 신자와 오늘의 그리스도 신자의 비교》 《요약(要約) 예수 그리스도전》 등의 소품은 바로 그 무렵의 저작이다. 또 포르 루아얄 데샹에서는 《드 사시씨(氏)와의 대화》를 남겼다.

당시 프랑스의 가톨릭교회 내에서는 정치적 주도권을 쥐고 있던 예수회와 포르 루아얄에 모인 얀센파 사이에 신학상의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기 시작했는데, 파스칼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 논쟁에 말려들었다. 그는 《시골 친구에게 부치는 편지(프로뱅시알)》라는 제목의 서한체(書翰體)의 글을 익명으로 속속 간행하여 예수회 신학의 기만을 폭로하는 한편, 그 오만불손한 윤리를 공격하였다. 1656년 1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18편의 서한문을 발표하였다. 파스칼은 이 서한문에서 구사한 경쾌하고 솔직한 표현에 의해 프랑스어에 새로운 문체(文體)를 도입한 결과가 되었다.

1658년 우연한 동기에서 사이클로이드 문제를 해결하고 적분법(積分法)을 창안해 냈다. 《사이클로이드의 역사》 《삼선형론(三線形論)》 《사분원(四分圓)의 사인론[正弦論]》 《원호론(圓弧論)》 《사이클로이드 일반론》 등 일련의 수학논문 속에 그 이론이 나타나 있다. 그 외에도 《기하학적 정신에 대하여》 《설득술(說得術)에 대하여》 《질병의 선용(善用)을 신에게 비는 기도》 등의 소품을 쓴 것도 그 무렵의 일이다. 《그리스도교의 변증론(辨證論)》을 집필하기 위하여, 단편적(斷片的)인 초고를 쓰기 시작하였으나 병고로 인하여 완성하지 못한 채, 39세로 생애를 마쳤다. 사망 후 그의 근친과 포르 루아얄의 친우들이 그 초고를 정리 ·간행하였는데, 이것이 《팡세 Pens暴es》의 초판본(1670)이다.

 

파스칼(Pascal)

"수학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 될 뻔한 사람."

이 말은 파스칼이라는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이며 문학자이며 철학자를 이야기할 때 가장 잘 나오는 말이다. 이 사람의 어릴 적의 천재성은 수학계의 왕자라는 가우스를 오히려 능가할 정도이다. 만일 파스칼이 좀더 건강한 신체와 강인한 신경을 가진 사람이었다면, 지금의 수학상의 여러 가지 업적들은 파스칼의 이름이 붙어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허약하고, 심약한 사람이었고, 오늘날에는 수학자로 알려지기보다는 "팡세"라는 책과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는 말로 유명한 철학자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이 글에서는 그의 여러 가지 업적을 사전 식으로 열거하는 것은 피하고, 어릴 적의 천재성을 비롯한 유명한 몇 가지 일화들을 중심으로 수학자로서 그를 소개하고자 한다.

 

[타고난 어린 천재]

파스칼은 1623년 프랑스의 오베르뉴 지방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수학에 비상한 능력을 보였다. 어릴 때부터 허약했던 그는 과로하지 않도록 집에만 갇혀 있었다. 그리고, 파스칼의 아버지는 아들의 교육에 매우 신중해서, 너무 빠른 시기에 아이의 머리 속에 기성 지식을 채워 넣는 것은 좋지 않으므로, 먼저 파스칼의 눈을 자연 속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에다 돌리기로 하고, 라틴어와 그리스어는 파스칼이 12세가 될 때까지, 수학과 과학은 15세가 될 때까지 가르치지 않으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교육 방침이 적절했던지 자라면서 파스칼은 모든 현상에 흥미를 나타내었다. 그런데, 학습에서 수학을 배제시킨 것이 오히려 소년 파스칼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켜 가정교사에게 기하학의 특성에 관하여 질문을 하고 노는 시간을 아껴서 수학 공부를 하는 등 수학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특히 12세 때 삼각형의 내각이 180도라는 것을 어떠한 기존 기하학의 학습 없이 혼자서 발견해서 아버지를 놀라게 했다. 이 일로 파스칼의 아버지는 파스칼에게 유클리드의 "원론"의 복사본을 주고, 수학공부를 계속하도록 격려하였다.

그 이후 청소년기의 파스칼의 수학적인 성취는 놀라운 것이었다. 13세 때 파스칼의 삼각형이라고 알려진 수의 피라미드를 발견하였다. 14세 때 파스칼은, 나중에 프랑스 학술원이 된 프랑스 수학자 단체의 매주 한 번 모이는 모임에 참여하였다. 16세 때 그는, 데카르트가 소년의 작품으로 도저히 믿을 수 없고, 아버지의 것임이 틀림이 없다고 추측한, 원추 곡선에 관한 작은 논문에서 중요한 정리를 발표했다. 파스칼의 정리라고 알려진 이 정리는 "한 원뿔 곡선에 내접하는 6각형의 대변의 교접은 동일 직선 위에 있다"라는 것이며, 사영 기하학의 기본 정리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17세 때, 그는 원뿔 곡선에 관한 한 논문에서 이 정리를 이용하여 400개의 명제를 유도하였다. 18세 땐가 19세 때에는 최초의 계산기를 발명하였는데, 그것은 르왕에서 정부의 회계감사를 하고 있었던 부친을 돕기 위하여 고안되었다. 21세 때 기압에 관한 토리첼리의 책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의 비범한 재능을 물리학에 사용하기 시작한 결과 유체의 압력과 부피에 관한 "파스칼의 법칙"이 오늘날 고등학교에서 물리를 배우는 모든 학생에게 알려지고 있다.

사람을 주눅들게 하는, 그의 12살부터 20대 초반까지의 업적은 마치 진정한 천재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 같다.

[마차 사고]

파스칼이 "수학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 될 뻔한 사람"이라는 별명이 붙게 만든 것은 그의 허약한 체질과 약간은 광적인 종교적 명상이었는데, 1650년에 이르러 급기야 수학과 과학의 연구를 중단하기에 이른다.
파스칼이 이런 종교적 명상에 빠져 든 것은 17세기의 시대 상황과도 관계가 깊다.
이 시기는 유럽에서 기독교의 여러 종파가 생겨나고, 서로 격투를 벌이던 시기였다.

어쨌든 그 후 3년 간 연구를 중단했던 파스칼은 다시 수학으로 돌아온다.
이 시기에 그는 "수삼각형론"을 저술하였고 유체의 압력에 관한 여러 실험을 행하였으며, 페르마와 서신 왕래를 통하여 확률의 수학적 이론의 기초를 세우는데 노력했다.

그런데, 다시 수학적인 재능을 꽃피우려는 그 순간에, 그를 수학에서 완전히 떠나게 만드는 사건이 일어났다.
1654년 말 그는 사두마차를 타고 달리고 있었는데, 말의 고삐가 풀려 버렸다.
선두의 말은 뉘일르의 다리 난간으로 돌진했으나, 다행히 그는 가죽끈이 끊어지는 바람에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이처럼 행운으로 참변을 면하였다는 사실은 파스칼처럼 신비주의적 기질을 가진 사람에게 병적인 자기 분석을 하도록 부추겼고, 그는 이 사건을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서 몸을 빼라는 하늘의 경고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는 조그만 양피지 조각에 신비적인 신앙의 감정을 써서 이후부터 그것을 몸에서 떼지 않고 지니고 다녔으며, 신학의 문제에 더욱 집착하게 되었다. 거기다가 만년에는 못을 박은 벨트로 몸을 감고, 육체를 괴롭히거나 자신의 신앙심이 충분히 경건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팔꿈치로 벨트를 때렸다고 한다.

[위대한 치통]

운명의 마차 사고 이후에 파스칼은 자기의 구원과 인간의 비참함에 관한 문제에 대해 몰두하면서 죽을 때까지 단 한번을 제외하고는 수학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단 한번 파스칼을 수학의 세계로 잠시 돌아오게 한 것은 다름 아닌 지독한 치통이었다.
요즘이야 치과에서 간단히 치료를 받으면 되는 일이지만, 그 때 당시의 치과는 병원이 아니라 거의 대장간 수준이었다.
심약한 파스칼이 이발사의 핀셋에 치아를 맡기지는 않을 테고, 그냥 치통을 견디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어쨌든, 치통으로 밤잠을 못 이루던 어느 날(1658년) 밤에 파스칼은 사이클로이드를 생각하면서 고통을 잊으려고 했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이런 것을 생각하면 치통에 두통까지 생길 일이지만, 그는 이런 것을 생각하면서 고통이 사라지는 것을 경험했다고 한다.
그는 이것을 영혼의 일을 제쳐놓고 사이클로이드의 일을 생각해도 된다는 하늘의 계시라고 해석하고 생각을 진행시켰다.

8일간을 사이클로이드 문제에 몰두한 결과, 그에 관한 많은 중요한 문제를 푸는 데 성공하였다.
이 일은 인류 역사상 '치통'이 수학에 공헌한 처음이자 마지막 사건이다.

여기서 잠깐 사이클로이드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하자.
그림 3과 같은 곡선을 사이클로이드(cycloid)라고 부르는데, 원이 직선 위를 구를 때 원 위의 한 점의 자취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수학적·물리학적 특성을 매우 많이 가지고 있는 이 곡선은 미적분학의 초기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갈릴레오는 이 곡선에 관심을 보인 최초의 사람으로 그것을 다리의 아치에 이용되도록 추천한 바 있다. 곧 바로 그 곡선의 한 아치 아래 면적이 구해졌고 접선을 작도하는 방법이 발견되었다. 이러한 발견으로 인하여 수학자들은 여러 가지 직선을 축으로 하여 사이클로이드의 한 아치를 회전시켜서 얻어진 회전체의 표면적과 체적에 관한 문제를 고찰하게 되었다. 그러한 문제들은 도형의 중심에 관한 다른 문제들과 마찬가지로 파스칼에 의해서 풀렸고, 약간의 결과가 다른 수학자들에게 난제로서 제시되었다. 파스칼의 풀이는 미적분학 이전의 불가분량법에 의하여 이루어졌고 오늘날 미적분학 강의 접하는 많은 정적분 계산과 동등하였다. 사이클로이드는 많은 매력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고 또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켜서 '기하학의 헬레네', '분쟁의 씨'라고 불린다.

 

[도박꾼의 하찮은 질문]

시간적인 순서로 따지면 마차 사고 이전에 있었던 일이다. 메레(Chevalier Mere)라는 유능하고 경험이 많은 도박꾼이 있었는데, 그는 이전까지 '득점의 문제'에 대한 그 때까지의 추론이 도박을 하면서 관찰한 자신의 경험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득점의 문제'란 일정한 점수를 따면 끝내기로 하고 도박을 시작했는데, 중간에 갑자기 그만두어야 할 때, 어떻게 판돈을 나눌 것인가에 관한 문제이다. 자기 일인 도박에 충실했던 메레는 좀 더 판돈을 공정하게 나누기 위해서 파스칼에게 이것을 질문했다. 종교적인 명상에 집착한기 시작했던 파스칼이 이 문제에 어떻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파스칼은 페르마와 서신 왕래를 통해서 서로 각기 다른 방법으로 이 문제를 풀었다. 두 사람이 1654년에 주고받은 편지는 파스칼과 페르마가 확률이라는 수학적 이론을 건설하는데 동등하게 기여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파스칼과 페르마는 1654년의 역사적인 서신 왕래에서, 세 사람 이상의 경기자가 있는 경우의 판돈 분배와 서로 다른 기술을 가진 두 경기자의 경우에 판돈을 분배하는 것과 같은, 득점의 문제와 관련된 다른 문제도 고려했다. 이 것을 계기로 확률에 대한 수학적인 이론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순수하게 우연한 상황에 적용시킬 수 있는 합리적인 법칙들을 확립하는 확률에 대한 수학적 이론을 수학자들이 발달시킬 수 있었다는 사실을 매혹적이며 동시에 약간은 놀랍다. 우수한 연구소에서 시행된 실험들과 매우 신뢰받는 보험회사들의 존재 및 사업과 전쟁에서 병참술에 의해서 입증된 것과 같이, 이 분야는 비실용적인 것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확률론에 대해서, 프랑스의 저명한 수학자 라플라스는, "비록 이 학문이 분명히 비천한 도박에 대한 고찰과 함께 시작되었지만, 이 학문은 인간 지식의 가장 중요한 분야 중 하나로 승화되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정작 확률의 수학적 이론의 최초의 개척자인 파스칼은 '득점의 문제'가 가지고 있는 이런 중요성을 알지 못했던지, 이 일에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있다. "이러한 사소한 일을 취급한다는 것은 번거롭다. 하지만 사소한 일을 갖고 놀 시간은 있다."

 

[천재의 비극]

지금까지 그의 어릴 때의 천재성과 몇 가지 사건들 그리고, 확률의 창시와 관련된 중요한 일화를 중심으로 파스칼의 수학적인 업적을 살펴보았다. 이젠 그의 죽음으로 가는 과정을 이야기할까 한다. 파스칼이 치통에 시달렸던 1658년에 그는 생애 중 가장 심하게 앓았다. 끊임없는 두통 때문에 거의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였고, 이전보다 훨씬 고통스럽게 4년을 지냈다. 1662년 6월, 자기 부정의 행위로써, 그는 천연두에 걸린 가난한 가족에게 자기 집을 내주고 시집간 누이 집에 들어갔다. 같은 해 8월 19일, 그의 고통에 찬 생애는 경련 발작으로 막을 내렸다. 39세의 나이로 죽은 것이다. 사체 해부 결과 위장과 몇몇 중요 기관이 정상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뇌에 중요한 외상이 있었음이 밝혀졌다.

대부분의 천재들은 천천히 그 재능을 꽃피운다. 이를테면 뉴턴, 오일러, 아인슈타인은 모두 신동이 아니었다. 그들은 수학에서조차 다른 학생들보다 특별히 뛰어나지는 않았다. 신동으로 태어나서 일생 동안 비상한 능력을 유지하면서 많은 업적을 남긴 드문 경우는 아르키메데스나 가우스 정도를 들 수 있다. 그는 분명히 재능만으로 따진다면, 아르키메데스나 가우스와 같은 수준의 천재였지만, 두 거인들이 일생을 건강하게 살면서 지속적으로 많은 업적을 남겼던 것에 반해서, 그는 일생을 고통 속에 살면서 아깝게 자신의 수학적 천재성을 낭비해 버렸다. 그는 분명 "수학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될 뻔한 사람"이었다.

파스칼은 도박이 열리는 많은 파티에 참석했으며, 불행히도 이런 생활방식에 마음을 빼앗기게 되었다.

그러나 1654년 마차가 튕겨 나가는 사고로부터 간신히 목숨을 건지는 일이 발생했다. 이때, 그의 말은 죽었으나 그 자신은 무사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생명을 보존케 하셨음을 확신하고, 그 당시 생활방식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그때, 즉, 31세부터, 39세에 죽을 때까지 그는 오직 한가지 소망을 가지고 살았다.

 그 소망은 사람들의 생각을 구원자이신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께 다시 돌아온 그 당시에 파스칼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확신! 기쁨! 평화!' '나는 하나님 이외에는 세상과 모든 것을 다 잊는다...'

'나는 나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나 자신을 전적으로 복종시킨다.'

 

파스칼은 생애 마지막 몇 년 동안 종교적 저술에 헌신하였다. 그는 'Provincial Letters'로 알려진 그 유명한 18개로 구성된 편지를 썼다. 그 편지들은 비평가들에 의해 현대 프랑스 산문의 시초로 간주된다. 파스칼은 또한 탁월한 저서 팡세(불어로 '사상'을 뜻함)를 저술하였다. 팡세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그 자신의 신념에 대해 논한 책이다.

파스칼은 인간은 자신의 지혜로는 완전한 지식에 도달할 수 없음을 인정하였다.

그는 기록하기를 '믿음은 감각적으로 알 수 없는 것들을 알게 해 주며, 그것은 나타난 사실과 모순되지 않는다' 라고 하였다. 또한 그는, 하나님은 단순한 창조자 이상이심을 알았다. 즉, 그분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며, 또한 개개인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시며, 기독교인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 위로의 하나님이심을 깨달았다.

파스칼은 구원문제에 확률의 개념을 적용한 '파스칼의 내기'라는 것으로 유명하다.

파스칼의 내기는 다음과 같이 쉽게 풀이된다. '크리스천이 되기로 선택한 사람들이 손해볼 것은 무엇인가? 설사 그가 죽어서 하나님도 없고, 그의 믿음이 헛된 것이었다라고 판명되더라도 그는 잃을 것이 없다. 사실상, 그는 믿지 않는 친구들보다 더 행복하게 산 사람이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도 계시고, 천당과 지옥이 있다면 그는 천국을 얻을 것이고, 그의 무신론자 친구들은 지옥에서 모든 것을 잃을 것이다.'

죽음이 임박했을 때, 파스칼은 기록하기를 '나는 나를 위해 고통받고 죽으신 나의 구원자를 향해 팔을 펼치고 있다.'

파스칼은 파리에서 1662년 8월 19일에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부단히 병고에 시달린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이 헌신된 크리스천은 과학, 수학 및 문학에 지대한 발자취를 남기고 갔다.

(Ann Lamont, Creation ex nihilo Vol. 20 No. 1) 

 

 

파스칼의 신앙고백

1654년 11월 23일 저녁 10시 30분, 그는 불의 놀라운 체험을 했다. 이때 파스칼의 나이는 서른 한 살이었다. 파스칼이 이때 경험한 구체적 상황을 우리는 알 수 없으나 매우 신비한 시간이었음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파스칼은 이때의 감격의 순간을 놓칠세라 종이에 적고 양피지에 정서하여 평소에 자주 입고 있던 옷의 안쪽에 바늘로 꿰매어 깊이 간직해 놓았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아무에게도 공개하지 않았다. 파스칼이 죽은 뒤 비로소 이 메모가 발견되었다. 이 메모는 지금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약 600여자 정도가 되는 짧은 신앙고백은 뜨거운 확신과 기쁨에 찬 감동이 서려 있다. 두 시간여의 짧은 시간을 통하여 파스칼의 온 삶은 새롭게 변화되었고 새로운 영적 능력과 소명을 가진 사람으로 전혀 다르게 태어났다. (박철수 저 -파스칼의 생애와 사상에서)

 

< 파스칼의 생애 >

1623년 6월 19일, 프랑스의 오베르뉴 주 클레르몽에서, 세무관리인 아버지 에티엔느 파스칼과 어머니 앙트와네트 베공 사에에서 태어남. 1639년 발표. 3년간의 연구 끝에 계산기를 제작함.

1646년 새로이 종교에 눈을 떠 이른바 '제 1의 회심'에 이르었다.

논문;

(1663년 출판),

(1665년에 출판)






파스칼의 내기(Pascal’s Wager)를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 수 있다. 파스칼의 내기는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다. 매우 복잡한 문제라는 것을 인식하면 우리의 지성을 자극하는 현명한 도전이 될 수 있겠지만, 많은 이들이 오해하는 것처럼 파스칼의 내기를 단순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우리를 오도할 수 있다는 우려를 갖게 한다.

파스칼의 ‘팡세’(Pensées)의 내용을 직접 인용하자면, 그 내기는 이런 것이다.

“신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느 쪽을 택해야 할까?
여기서 우리의 이성은 선택에 별 도움을 주지 못한다. … 신의 존재와 부재라는 극단 사이에 놓인 무한한 거리에 대한 도박이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어느 쪽을 고를 것인가? 이성으로는 … 신의 존재나 부재 중 어느 것도 입증할 수 없다. … 둘 중 하나는 ‘반드시’ 골라야 한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다. 내기는 이미 시작된 것이다. 뭘 고를 것인가? … 무엇을 선택하든 ‘이성’은 거의 상관하지 않는다. 반드시 골라야 하므로 고른 것이기 때문이다 … 당신의 ‘행복’은 어떻게 될까?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고르면 어떤 득실이 있는지 계산해보자. … 만일 하나님이 있다면 당신은 모든 것을 얻고, 만일 하나님이 없다 해도 손해볼 것은 없다. 그러므로 주저하지 말고 하나님이 있다는 것에 모든 것을 걸라. … 이 내기에서 잃을 수 있는 가능성은 유한하지만, 무한히 행복한 삶을 얻을 수 있는, 즉 이득을 얻을 수 있는 기회는 무한하다. … 무한성을 취할 가능성이 있고 질 가능성은 유한하기만 하다면 우물거리지 말고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


득실 가능성이 동일한 어떤 도박에서 만일 유한한 것을 걸고 이김으로써 무한성을 취할 수 있다면, 우리가 주장하는 명제는 말할 수 없이 중요하고도 명백하다. 이는 어떤 사람이든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진리다.


단순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우리를 오도할 ‘파스칼의 내기’


흔히들 생각하듯 파스칼의 내기를 단순한 것이라고 이해하면 우리는 잘못된 길로 인도될 수 있다. 왜 그럴까?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 즉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라는 것이 우리를 압도하는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보지 않고도 우리가 스스로 선택하여 가질 수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기 때문이다. 파스칼의 내기에서는 ‘하나님이 정말 존재하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라고 한다. 하나님 자신이 ‘실제’가 아닌 하나의 가능성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파스칼의 내기 식으로 사고하면, 우리는 자연을 관찰할 때나 못 박히고 다시 사신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의 이야기를 들을 때에도 우리에게 확신을 주는 아름답기 그지없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한다. 파스칼의 내기는 그런 상황에서도 우리에게 ‘반드시 하나는 골라야 해,’ ‘하나님을 선택해’라고 촉구한다. 하지만 이는 당신에게 확신을 주고 당신을 사로잡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에 내리는 선택이 아니다. 


성경에 의하면 이런 식으로 선택하는 것은 구원 얻는 믿음이 ‘아니다.’ 초자연성이 배제된,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일 뿐이다. 흔히 우리가 잘 모르는 것에 끌리는 이유는 그것으로 인해 지금 내가 누리는 행복이 증대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이다. 하지만 구원 얻는 믿음은 그런 것이 아니다. 구원 얻는 믿음의 뿌리는 우리의 이성과 존재를 초월하는 하나님을 목도하고 그분을 조금이나마 경험하는 데 있다. 성경에 의하면, 살아있는 믿음은 거듭남이라는 기적을 통해 죽어있는 영혼 속으로 불어 넣어진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요일 5:1). 이것이 바로 믿음이 세워지는 방식이다.


이러한 거듭남이 없으면 우리는 그저 육(肉, flesh)이요, 인간이요, 자연인에 불과한 존재일 뿐이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 3:6).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께 굴복할 수 없고(롬 8:7),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다(롬 8:8).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일들을 어리석게만 본다(고전 2:14).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4).


그러므로 구원을 얻는 믿음이 세워지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회개함을 주셔야 한다.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딤후 2:25). 다시 말해 하나님이 영적으로 죽은 자들을 다시 살게 해주셔야 한다는 뜻이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엡 2:5).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벧전 1:23) 된 이 거듭남은 하나님의 영광에 관한 지식의 빛을 비춰준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 4:6).


초자연적으로 주어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영적으로 보는 것이 구원 얻는 믿음의 기반이다. 우리의 눈으로 하늘의 태양을 보듯, 마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를 압도한다.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입에 넣었을 때 그 맛을 거부할 수 없듯,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목도하면 그 아름다움을 거부할 수 없다.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을 즐기는 것처럼 우리의 눈이 열려 우리에게 확신을 주며 우리를 사로잡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봄으로써 우리가 가장 좋아하고 사랑하는 대상이 하나님이 되면, 우리는 그분을 즐거워하게 된다.


그러므로 파스칼의 내기를 흔히들 생각하듯 단순하게 대하면 이 내기는 우리를 잘못된 길로 인도하고 말 것이다. 파스칼의 내기 식으로 사고하는 것은 우리가 그저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믿기로 결심하기만 하면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만든다. 우리에게 확신을 주고 우리를 사로잡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거나 체험하지 않고도 말이다. 성경이 분명히 말하고 있듯, 그것은 구원을 얻는 믿음이 아니다.


복잡함으로 인해 우리에게 지적 도전을 주는 ‘파스칼의 내기’


사실 파스칼 자신도 위와 같은 오류를 인지하고 있었다. 파스칼은 내기의 상대방이 이렇게 반응할 것이라 예상했다.


“그래요, 인정합니다. 그래도 카드 앞면을 볼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나요?” (아마도 성경과 기타 등등을 의미하는 것일 거다.) “날 보세요. 손이 묶였고 입도 막혔습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강제로 내기를 해야 하는 상황이에요. 자유가 없어요. ‘속박된 상황이에요. 그래서 믿을 수가 없네요. 이제 나에게 뭘 하게 할 건가요?’”


파스칼의 대답은 이렇다.


“무슨 말인지 잘 알겠소. 하지만 적어도 당신에게는 믿을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아시기 바라오. 이성으로 인해 여기까지는 왔지만 여전히 믿을 수는 없소. 하나님에 관한 증거를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감정을 계속 억누르는 것을 통해 당신 자신을 설득하도록 계속 애쓰시오. 믿음을 얻고 싶소? 하지만 어찌 해야 할지 모르겠소? 당신의 불신앙을 고칠 수 있는 치유책을 찾고 싶소? 당신처럼 한때 속박되었던 사람들로부터 배우시오. 자신의 모든 소유를 걸었던 사람들로부터 배우시오. 그들은 당신이 찾고자 하는 그 길을 알고 있소. 그들은 당신이 치유받고 싶어하는 바로 그 병을 치유받은 자들이라오.”


팡세의 간결함으로 인해 우리는 불신앙에 대해 파스칼이 어떤 “치유책”을 제공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의 대답의 요지는 당신이 이미 믿는 것처럼 가정하고 신앙의 여정을 시작하면 그 확실함을 모두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이 생긴다는 것이다.


“단언컨대 … 이 여정에서 한 걸음씩 뗄 때마다 분명히 얻는 것은 많고, 잃을 것은 전혀 없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고, 결국에는 이 내기에서 당신이 전혀 값을 지불하지 않고도 확실하고도 영원한 무언가를 골랐다는 걸 깨닫게 될 것이다.”


하지만 파스칼이,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기적이 일어나기 때문에(벧전 1:23) 하나님의 말씀에 네 자신을 헌신하여 거듭남의 기적을 추구하라는 말을 하려고 했던 것일까? 내 생각엔 아닌 것 같다. 파스칼은 로마 가톨릭의 성례주의(sacramentalism)에 여전히 갇혀 있었고, 그로 인해 전혀 다른 길을 제시한 것이다. 그는 진지한 신앙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자신이 믿는 것처럼 생각하고 성수(聖水)를 받고, 미사를 드리는 등”의 일을 한 사람들의 길을 따르라 말한다. “이렇게만 해도 자연스럽게 믿게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좋은 가르침은 아니다. 하지만 파스칼의 내기 자체는 그 복잡함으로 인해 우리에게 지적 도전을 준다. 우리가 직면한 도전은 이제 성수나 미사를 통해 믿음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라기보다는 영원한 것들이 위험에 처해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구원 얻는 믿음 없이 살 수 없다. 이는 단순한 내기로 다룰 문제가 아니다. 구원 얻는 믿음은 복음에 나타난 바 우리를 사로잡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미리 맛보고, 그의 아름다우심에 대해 확신을 얻고 그것에 압도당한 채로, 불가항력적으로 이끌려 그리스도의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원제 : Pascal’s Wager: Misleading, But Challenging


A: 신을 믿어야 할지 망설이는 이들에게 ‘팡세’의 저자 블레즈 파스칼(1623~1662)은 내기(betting·베팅)로 결정하라고 권유한다. 파스칼은 이미 16세 나이에 원추곡선 기하학 공식을 발표한 천재였으며 산술삼각형, 압력의 원리, 적분법, 확률 이론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베팅

그가 살던 시대는 근대철학과 근대과학의 태동기로 기독교 신앙을 비이성적이라고 무시하는 경향이 짙어지던 때였다. 파스칼은 도박을 좋아하던 그의 친구들에게 믿음을 갖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임을 설명할 수 있는 논증을 구상한다. 일반인들에게는 형이상학적으로 신의 존재를 논증하는 일이 너무 어렵기 때문이었다. 손익을 따지려는 인간의 본성을 감안할때 거부감 없는 내기 방식이 적절해보였다.

이병철(1910~1987) 삼성그룹 회장이 암투병으로 세상을 떠나기 불과 한달 전 24가지 질문을 남겼다. 그는 ‘정말 신은 존재하는가’ ‘사후에 인간의 영혼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 무신론자들은 “죽으면 끝”이라고 말하지만 인생의 종착지에 선 사람은 신과 영혼, 천국의 존재에 대해 깊이 고민하는 것은 당연하다.

파스칼은 확률 이론의 거장답게 신의 존재 유무와 이에 대한 인간의 믿음 유무가 만들어내는 4가지 경우의 수를 비교했다(표 참조). 그리고 인간에게 가장 합리적인 선택은 무엇인지 설명한다. 인간은 죽음을 피할 수 없기에 죽음 이후의 영생과 영벌의 문제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생전에 “신의 존재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 이 둘 중에서 반드시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경우의 수’로 본 하나님의 존재

<표>에서 ①은 ‘내가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사후에 하나님이 존재하는 경우’다. 이 선택은 가장 큰 이익을 가져다준다. 믿음을 통해 영생과 무한한 행복을 얻기 때문이다. ②는 ‘내가 믿었지만, 사후에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인데, 이 선택은 약간의 이익을 가져온다. 신자는 경건의 유익, 도덕적인 삶을 통해 마음의 평안과 주위 사람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③의 경우는 ‘내가 믿지 않았는데, 사후에 신이 존재하는 경우’다. 이 선택은 가장 큰 손실을 가져온다. 불신을 선택한 대가는 영원한 지옥형벌이다. ④는 ‘나도 믿지 않고, 사후에 신도 존재하지 않는 경우’로 아무런 이익도 손실도 없다.

인간의 선택과 행동은 이익과 손실을 동반한다. 하나님을 믿기로 한 선택은 가장 큰 이익(영생)을, 불신앙을 선택한 경우에는 ‘무한대 손실’이라는 가장 큰 손해(영벌)를 얻게 된다. 그래서 샤르트르와 같은 무신론 철학자도 만일 신이 존재한다면, 신의 존재 유무에 대한 믿음이 사람에게 엄청난 차이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을 인정했다.

내기 논증의 교훈, 믿음의 습관

프랑스 사회학자인 루시앙 골드만(Lucien Goldman, 1913~1970)은 저서 ‘숨은 신’에서 ‘파스칼의 내기’에 참여하는 것이야말로 유한자인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으로 평가했다. 영국의 인류학자인 메리 더글라스(Mary Douglas)는 파스칼의 내기 논증이 신의 존재를 논증하는 것이 아니라, 신이 있다는 것을 믿고 살겠다는 습관의 결정에 대한 것으로 이해했다.

파스칼이 내기 논증을 통해 강조한 것은 습관의 중요성이다. 신의 존재를 믿기로 결정했다면 믿음을 실천하고 사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은 이들에게 은총을 선물로 주실 것이다.

파스칼의 내기 논증은 인간의 합리적 선택이론과 수지타산의 원칙을 신앙의 영역으로 확장한 것으로 단순하지만 사람을 설득하는 힘이 있다. 내기 논증은 도박사처럼 수지타산을 따지는 이들에게 안성맞춤의 전도전략이다. 인생의 유한성을 자각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주시는 영생과 영벌을 고려하게 하는 확률 논증이기도 하다.

믿음, 수지타산이 맞는 선택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하나님을 믿기로 결정한 이유가 고상하지 않아도 괜찮다. 파스칼은 하나님을 믿을지 말지 고민하는 이들에게 손익 계산을 따지는 본성에만 충실하더라도,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선택이 가장 큰 이익을 가져다주기에 주저없이 하나님을 믿으라고 제안한다.




파스칼은 근대 과학과 근대 철학의 여명기에 비교적 짧은 생애를 살았다.
그는 기독교를 멸시하는 풍조를 기독교 신앙에 대한 존경심으로 돌려놓겠다는 원대한 목적을 품고 약 7년간 이 책을 썼다.
유고작인 ‘팡세’는 갈대처럼 연약한 인간의 유한성을 통찰한 기독교 실존주의 사상의 백미이자 믿어야 할 이유를 잘 설명한 기독교 변증의 고전이다.

파스칼(Blaise Pascal: 1623~1662/39세로 요절)은  팡세’(Pensee: 불어로 생각이란 뜻)의 저자
프랑스가 자랑하는 천재 수학자, 물리학자, 철학자, 신학자로 불리는 다재다능, 박학다식의 표상이라고 합니다.
파스칼은 말년에 “나의 이성을 십자가에 못박았더니 살아계신 하나님께로의 순종이 내게 임하옵나이다"는
요지의 위대한 고백을 하였다고 합니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 라는 명제로 인간의 고독한 실존을 갈파한 철학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수상록인 “Pensee”처럼 많이 읽힌 책이 드물기도 하지만 이해하기 난해한 책 역시 드물다는 평가가 많다.
팡세”하면 떠오르는 구절은 ‘클레오파트라(Cleopatra)의 코가 한치만 더 낮았더라면 지구의 온 표면이 변했을 것이다” 라는 것이 연상되기 마련인데 원래 다음 구절 중 따온 일부라고 합니다:
나로서는 무엇인지 모르는 것, 그 하찮은 것이 모든 땅덩어리를, 황후들을, 모든 군대를, 온 세계를 흔들어 움직이는 것이다.
클레오파트라의 코, 그것이 조금만 낮았더라면, 지구의 모든 표면은 변했을 것이다."
‘팡세’의 제1부는 하나님이 없는 무신론자의 비참을 논하고, 제2부는 하나님과 함께 있는 인간의 행복을 말하고 있다고 합니다.

파스칼의 신학은 철저하고 신비적인 체험신앙인데 그는 고백하기를 “나의 하나님은 철학자의 하나님, 과학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파스칼은 인간이란 ‘생각하는 갈대’라고 정의하고 있다고 합니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기 때문에 ‘이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이 나를 무섭게 만든다’고 독백하는데 인간은 신(神)을 찾아가는 존재라고 피력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는 인간을 세 부류로 구분하였다고 합니다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

첫째는
을 발견하고 섬기는 사람이다.
(을 찾아내고 섬김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 시냇가 심은 씨앗-나무)

둘째는
을 발견하지 못하고 을 추구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을 구하려고 한편 애쓰지만 결국 세속에 찌들어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 가시덤불 위에 던져진 씨앗)

셋째는
을 발견하려고도 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그냥 살아가는 사람이다.”
(을 구하지도 않고 발견하지도 않고 세상적 가치관의 타성에 젖어 그냥 무위도식하며 살고 있는 사람들/ 길가에 던져진 씨앗)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을 뿐이다.
하나는 자기를 죄인이라고 자백하는 의인(義人)이 있고,
또 하나는 스스로가 죄가 없다고 생각하며 스스로 의인(義人)으로 여기는 죄인(罪人)이 있다”

파스칼은 “인간은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간구하는 존재”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제외하고는 모든 종교를 거부한다고 선언한 그는 다음과 같이 위대한 고백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구주에게 두 손을 내민다.
그는 4천년 동안 예언되어 오다가 예언된 시기와 예언된 모든 사정 밑에서 나를 위해 죽고자 땅에 오셨다.”

그리고 나와 영원히 결합되리라는 희망을 가지며 조용히 그의 은혜로써 죽음을 기다린다”
라는 고백 속에서 인간세상의 물질만능, 권력욕과 명예욕과 인정중독의 굴레 속에 살다 보면 세속적 염증과 함께 영적 갈증이 생기는 것이 당연한 귀결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인간은 하나의 연약한 갈대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자연 중 가장 약한 존재이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하는 갈대이다.
그를 무찌르기 위해 전우주가 무장할 필요는 없다.
한 줄기의 증기, 한 방울의 물만으로도 그를 죽이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우주가 그를 무찌른다 해도 인간은 자기를 죽이는 자보다 고귀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가 반드시 죽어야만 한다는 사실과 우주가 자기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알지만, 우주는 그것을 전혀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존엄성은 그의 사고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사고에 의해서 스스로를 높여야 한다.
우리가 모두 채울 수 없는 공간이나 시간에 의해서가 아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잘 사고하기에 힘써야 한다.
이것이 바로 도덕의 근본이다.”
<Blaise Pascal의 "팡세" 중에서>

파스칼이 34세 되던 해인 1654년 11월 23일 저녁 10시 30분에서 12시 30분 사이에 그는 하나님의 임재하심 속에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체험하였다고 합니다.
이 날의 체험이 그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고 하는데, 그가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의 기도를 읽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 갑자기 그리스도의 불꽃같은 임재가 방을 가득히 채웠다고 합니다.
그는 그때의 감격을 양피지에 간결하게 기록하고는 맨 위에 빛으로 둘러싸인 십자가를 새겨 넣었으며 그리고는 그 양피지를 코트 안쪽에 꿰매 놓았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8년 후인 1662년 그가 죽은 후에 그 양피지가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
불>
철학자의 하나님이 아니다. 과학자의 하나님도 아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확신, 확신, 느낌, 기쁨, 평안,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하나님 외에 세상과 다른 모든 것의 망각.
기쁨, 기쁨, 기쁨, 기쁨의 눈물”

<
예수 그리스도>
나는 그분을 떠나고, 그분에게서 도망하고, 그분을 부인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다.
이제는 절대로 그분을 떠나지 않으리라.
복음서에서 가르치는 방법으로만 우리는 그분을 붙든다.
전적인 포기이지만, 달콤한 포기.
예수 그리스도 나의 인도 자에 대한 전적인 순종
지상에서 하루를 정진하는 동안 누리는 영원한 기쁨


 

1. 아브라함의 하나님과 철학자의 하나님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며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고 있는 기술 문명과 수많은 지식을 바탕으로 그 어느 시대보다 인간을 폭넓고 깊게 이해하고 있는 현대의 학문들 앞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요?
현대 사회의 놀라운 업적들에 비추어볼 때 수천 년 전 유대 땅의 하나님을 이야기하는 그리스도교는 현대인들에게 구시대의 유물처럼 여겨지곤 합니다. 
폴 틸리히는 이러한 현대의 세태 속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재해석하여 현대인들에게 해명하기 위해 노력한 신학자입니다.
특히 그는 신학과 철학 사이를 중재하는 ‘철학적 신학’을 주장하였습니다.

틸리히는 그의 신학을 ‘경계선 상에 위치한 신학’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인간의 이성에 대한 신뢰와 신을 향한 믿음은 오랜 세월 동안 서로 대립하곤 하였습니다.
이 대립은 철학과 신학 사이의 갈등으로 흔히 표출되었습니다. 

중세기에는 신앙을 그리스 철학으로 증명하려던 신학자들의 노력이 있었지만, 그 이후의 철학은 신학에서 독립하여 철학만의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철학자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틀 속에 얽매이지 않고 그들의 진리를 찾아 나섰으며, 신학에서 역시 철학적 설명에 의존하지 않고 성경의 계시만으로 하나님을 이해하려는 철저하게 보수주의적인 신학자들도 있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 파스칼을 들 수 있습니다.
그는 철학자, 수학자인 동시에 신실한 그리스도인이기도 하였지만 철학과 자신의 신앙을 분명하게 구분 지었습니다.
다음은 그가 말년에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고 남긴 말입니다.

 

 수학자의 신이 아니었고, 철학자의 신이 아니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었다.
그리고 나의 하나님이었다.


그러나 틸리히가 보기엔 신앙의 내용은 좀 더 책임 있게 고찰되어져야 하였습니다.
신앙은 그 시대의 문화적, 역사적 상황 속에서 이해되어지고 표현되어져야 하며 인간의 실존적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틸리히는 ‘대답하는 신학’을 강조하였습니다.
신학은 철학적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제시함으로써 실존적 물음들을 해결하여한 한다는 것입니다.

 

파스칼에 반대하여 나는 말하고자 합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과 철학자의 하나님은 같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한 인격이시며 또한 한 인격으로서의 자신의 부정입니다.

틸리히는 ‘궁극적 관심’이라는 개념을 통해 모든 종류의 종교와 철학이 문제 삼고 있는 절대적인 것에 관한 의문을 설명합니다. 그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자신의 마음과 정성을 다하고 자신의 전존재를 바쳐서 찾으려는 삶의 의미와 방향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궁극적 관심’입니다. 인간이 이 궁극적 관심에 사로잡힌 상태일 때 그는 그것을 종교상태에 있다고 말합니다. 종교가 발견하고자 하는 ‘신’이란 ‘인간의 유한성에 내포된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신의 호칭은 각각의 종교마다 다르지만, 그 용어가 가리키고 있는, ‘인간이 거기서 삶의 가치를 찾으려는 그 무엇인가’가 바로 그 종교들의 신이 되기 때문입니다.

틸리히는 신을 ‘존재자체(Being-itself)’라고 진술하였습니다.

신을 묘사하는 여러 가지 진술들 가령,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와 같은 설명들은 그 표현들이 아무리 위대하다 하더라도 신에 대한 부분적이고 상징적인 진술밖에 할 수 그러나 ‘존재자체’라는 표현은 말 그대로 존재에 관한 모든 것을 포괄하며, 그 모든 것들을 뒷받침 할 수 있는 진술입니다.

그에 의하면 신은 세계의 본체이고 세계는 신의 몸이며, 신은 다른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자기원인적인 존재일 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자들을 존재하게 하는 근거가 됩니다.
신은 마치 새가 날아가고 있는 하늘이나, 물고기가 헤엄치고 있는 물과도 같은 존재인 것입니다.
또한 신은 존재자체이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가까운 것보다 더 가까이 있으며, 우리가 우리에게 현실적인 것보다 더 근원적으로 현실적인 존재입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비그리스도교적인 범신론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틸리히는 그의 신론을 스피노자적인 범신론과 분명하게 구분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존재는 절대적 초월 자체이다.”
(Sein ist das transcendens schlechthin).

존재는 인간과 무관하게 절대적 초월의 영역에 속한다.
그러나 인간이 존재하는 한 존재와 무관할 수는 없다.
존재는 언제나 인간에게 가장 가까이 있다.
존재는 언제나 인간에게 말을 걸어오면서 인간이 사유함으로써 응답하기를 기다린다.
인간이 그 말에 응답하지 않는 한 존재는 절대적 초월 자체이다. 따라서 “존재는 절대적 초월 자체”라는 명제는 인간에게 말을 걸어오는 존재에 인간이 사유함으로써 응답하는 공속사건(서로에게 속하는 사건)이 일어날 때 비로소 존재가 인간에게 자기를 건네준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절대적 초월자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가까이에서 자신을 계시하면서 말을 걸어오고 있지만 인간이 응답하지 않는 한 하나님은 절대타자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사유하는 믿음을 통해 응답할 때 계시는 사건이 되고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신을 건네주신다.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신을 건네주시고 인간이 믿음으로 응답함으로써 새로운 존재가 되는 사건을 철학적으로 체계화한 이론이다.
그리고 이런 체계화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와 인간의 이해이다.
그리고 계시에 대한 이해는 성령의 영감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 책의 목표는 계시와 해석이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에 근거한다는 전제에서 계시의 필연성에 대한 철학적 근거와 계시에 대한 해석학적 방법론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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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Grace)


은혜는 공로 없이 받는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은혜(Grace)'란 말을 많이 접하게 된다.
흔히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감명 받았을 때 “은혜 많이 받았다”고 말하고, 초신자들에게는 “은혜 받아야 된다”고 권념한다.
여기서 은혜를 받았다는 것은 ‘기쁘다, 감동되었다, 찔렸다, 깨달았다’는 등의 상태를 은혜 받은 것으로 본다.
또는 교회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면 은혜스럽게 넘어가자고 말한다.
여기는 ‘이해와 사랑’이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한편 성령의 은사와 은혜를 혼동하기도 한다.
은혜와 은사를 혼동해 은사를 받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했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은사는 은혜의 부산물이지 은혜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은혜란 도대체 무엇인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죄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은혜는 절대적 주권자인 하나님께서 그의 선택한 백성들에게 베푸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의미하며, ‘은총·자비·인자·인애’ 등으로도 표현된다.
구약성경에서 은혜를 의미하는 단어는 ‘헤세드’와 ‘’이 있는데, 헤세드는 불변의 사랑(인자), 언약적 사랑을 뜻하고 헨은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에게 베푸는 과분한 호의(렘 31:2)를 뜻한다.
이중 헤세드는 구약의 은혜 개념에 기초하며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의 동기를 말한다(시 136:1-). 

신약성경에서 은혜는 ‘카리스’로 단어적 의미는 ‘매력을 느끼게 된 상태나 기뻐하게 된 상태’에 대한 것이었으나, 나중에는 ‘친절한, 예의바른, 관대한 처분’ 등의 사상을 띤 의미로 사용됐다.
신약시대에는 보다 발전하여 구체적으로 ‘은총이나 혜택’을 나타나게 되었다.
신약성경에서 카리스는 ‘하나님의 사랑’(아가페)라는 용어와 결합되어 나타난다. 

구약에서 은혜는 하나님의 선의와 사랑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는 반면에 신약에서는 구약적 의미뿐만 아니라 구원이란 말의 동의어로 나타난다.
즉 신약의 은혜 개념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메시지의 근간을 이루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적 활동(성육신-생애-고난-죽음-부활-승천)을 통해 인간에게 은혜를 계시한다.
그래서 성경에서 ‘은혜’란 말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 히브리서는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이 보여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인류를 위한 은혜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예수의 성육신은 은혜의 최고 절정

예수는 성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로서 잃어버린바 된 자들을 찾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던 것이다.
이것이 은혜의 참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새로운 언약(은혜 언약)이 시작되었다.
죄 가운데 있어 멸망할 수밖에 없는 우리를 위해 예수님을 보내주신 것이 은혜이며, 그를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게 하신 것도 하나님의 은혜다. 

인간은 죄로 인해 하나님의 은혜를 잃게 되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공로를 통해 그 깨졌던 관계를 다시 회복하는 것이 구속의 은혜인 것이다.
거듭남과 세례를 받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에게 들어오게 된 상태를 은혜라고 정의할 수 있다. 

한편 은혜는 인간 자신이 스스로의 노력이나 의지로 성취할 수 없는 구원과 성화를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다.
즉 은혜는 인간이 마땅히 받아야 되는 것이 아니며 보상으로 주어진 것도 아니다.
은혜는 찾아오는 자를 향해 주시는 사랑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직접 찾아오셔서 베풀어주시는 희생적인 사랑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절정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자신을 버리셨다는 것이다.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은혜로 인해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다고 에베소서 2장 8절에 말씀하고 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은혜를 받는 통로와 종류

은혜는 특별은혜일반은혜로 구분된다.

특별은혜는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푸시는 은혜를 말하고, 일반은혜는 모든 사람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베푸시는 자연적 축복을 말한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는 어떻게 받을 수 있을까? 

교회는 구원에 필요한 은혜를 성도들에게 주기 위한 기관이다.
먼저 기록된 성경 말씀을 통해 말씀을 읽고 깨달았을 때 은혜를 누릴 수 있다.
그리고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는데, 예배는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또한 성찬과 세례를 통해 은혜를 베푸시는데 성찬과 세례에 동참한다는 것은 구원의 은혜에 동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삼위일체로 나타나는데 성부 하나님의 은혜는 은혜의 근원으로서 말씀을 선포하시며, 성자 그리스도의 은혜는 성부 은혜의 전달통로로서 죄악에 빠진 인간을 구속하시며, 은혜의 영이신 성령은 은혜를 선포하고 구속받은 성도를 감화 감동케 하여 주신다.

하나님의 은혜
- 성부 하나님의 은혜는 창조질서 속에 내포된 근원적인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축복의 세계가 열리고 구원이 사람에게 주어지게 되는 하나님의 선물을 뜻한다.

그리스도의 은혜
- 하나님의 사랑을 실제화 시킨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다.
즉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의 성육신과 사람들을 위해 죽음의 고난을 당했다는 사실 자체가 은혜의 최고 표현이다.

성령의 은혜
- 성령의 은혜는 주님을 섬기는 다양한 형태의 직책(은사)으로 나타나며, 그 은혜는 개인의 이익보다는 교회공동을 위한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혹은 믿음을 받거나 기적을 행하는 능력, 말씀을 전하는 능력, 방언의 능력 등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부르심을 입었으며(갈 1:15), 의롭다 하심을 입고(롬 3:24), 거룩함을 입는 것이다(롬 6:14).
또한 영원한 위로와 소망을 갖게 된 것도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며(살후 2:16), 끝까지 견딜 수 있는 힘을 갖게 된 것도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딤후 2:1). 

율법과 은혜의 관계

은혜를 말하기 위해서는 율법을 짚고 넘어갈 수밖에 없다. 율법은 행위를 강조하여 선행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가르치는 반면에 은혜는 인간의 공적 없이 값없는 믿음을 기반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게 하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또한 율법은 하나님의 완전한 의의 표준이지만 인간으로서는 도달할 수 없는 표준이다. 은혜는 어떠한 기준이나 노력 없이도 믿음으로 죄인을 의롭게 해주며 죄에서 구원해 준다. 즉 은혜는 어떤 일체의 공로를 배제하며, 받을 만한 아무런 가치도 없는 사람이 대가 없이 분에 넘치게 받는 선물이다. 
일반적으로 율법이 구약의 중심개념이라면 은혜는 신약의 중심개념으로 알려져 있다. 즉 '구약시대를 율법시대'로 예수 그리스도 이후 시대 곧 '교회시대를 은혜시대'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은혜는 신약시대부터 생겨났다고 봐야 되는가에 대해 성경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류 및 우주만물을 창조하실 때부터 주어졌다. 아담 이후 지금까지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있다.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은혜를 거절하였을 때에 ‘더하여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과 언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출애굽과정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출15:13, 18:9), ‘주께서 행하심대로 다 준행하리이다’라고 맹세함으로서 은혜 아래 있던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에 얽매이게 되었다(출19, 24장). 

그렇다고 율법과 은혜는 전혀 다른 대립적 개념이 아니다. 단지 외형상 다른 형태를 취할 뿐 율법의 중심사상도 사실상 은혜와 같이 사랑, 긍휼이지만 영적 지적 성숙도가 낮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하나님의 계시를 완전히 드러낼 수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기 위해 엄격한 형태의 금기식 율법을 주었으며, 율법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본질적 방편이 아니었다. 율법이 다스렸던 구약시대에도 은혜는 존재했다. 
한편 ‘은혜’를 신약성경의 핵심내용으로 정착시킨 사람은 사도 바울이다. 은혜의 개념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울 서신과 히브리서를 읽는 것이 중요하다.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

구약적 은혜의 개념은 은혜의 실상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는 완전한 형태로 드러나기보다는 신약적 은혜의 그림자 역할을 하였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류 창조에서부터 나타난다. 먼저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는 것 자체가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 안타까워 하와를 주신 것도 은혜에 속한다. 인류 구원을 위해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의 흔적들은 다음과 같다. 

① 아담에게 가죽옷을 입힌 은혜
금단의 열매인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인해 애굽에서 추방된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은 나뭇가지 옷을 대신에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입히셨다(창3:21). 거친 환경 속에 살아갈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나타내는 사건인 동시에 예표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서는 피흘림이 반드시 있어야 됨을 나타낸다. 

② 가인에게 보호 표를 주신 은혜
제사 문제로 동생 아벨을 죽인 형 가인에 대해 하나님은 긍휼을 베풀어 가인에게 보호의 징표를 주어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셨다(창4:15). 이것은 죄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죄악된 인간들에게 사랑과 구원의 밧줄을 던지시고 계심을 엿볼 수 있다. 

③ 에녹에게 주신 승천의 은혜
아담의 7대 손인 에녹은 당시 사람들과 달리 하나님과 끊임없는 교제를 통해 아담이 상실한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간 경건한 생활을 했다(창5:21-24).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가 회복되는 곳에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이 있다는 사실을 예표적으로 제시하고 있으며, 에녹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죽지 않고 변화 승천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④ 노아 홍수심판과 구원의 은혜
노아 때 세상은 죄악으로 관영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선포되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도덕적이고 신앙적으로 온전히 살고자 했던 믿음의 사람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구원의 방주를 지을 수 있는 사명을 받게 되었다(창6:8-22). 구원의 방주 속에 들어간 노아와 그 가족은 대홍수 심판을 모면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다. 

⑤ 아브라함을 찾으신 소명의 은혜
하나님은 갈대아 우르에 있던 아브라함을 먼저 찾아 부르시고, 열국의 아비로서 생육과 번성의 축복을 약속하셨다. 아브라함이 가는 곳이 어디든 간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고 하나님의 친구라는 칭함을 받는 은혜를 받았다(약2:23).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이 구원을 받은 것은 율법이 아닌 은혜로 ‘하나님을 온전히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말하고 있다. 

⑥ 모세의 출애굽 사건과 율법 은혜
모세를 부르셔 민족을 구원하는 사명을 맡기시고,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탈출했을 때 그들을 인도하고 구원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과 은혜를 선택하게 하셨을 때, 그들은 자신들을 구원하고 인도한 은혜 대신 율법을 선택하는 잘못을 저질렀지만 여전히 은혜 아래 있었다. 

⑦ 죄악된 백성을 성결케 하는 성막 은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증거의 장막인 성막을 만들게 하셨다.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피의 제사를 통해 죄악된 백성의 죄를 속죄하고 정결케 하는 곳을 주셨다. 만일 성막이 없었다면 이스라엘 백성이 죄를 속죄할 방법은 없었다. 또한 성막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로써 하나님의 구속사업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⑧ 사사시대에 이스라엘을 통치한 은혜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 민족은 통치자가 없이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살아갔다. 그러나 범죄 함으로 인해 이방민족의 지배를 당하게 됐고, 죄에 대한 회개를 통해 그들을 구원할 사사를 보내주셨다. 사사시대는 하나님의 은혜로 통치되던 시대였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영원한 통치자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신들을 지켜줄 왕을 요구했다(삼상8장). 

⑨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은혜 
말씀이 육신 되어 낮아지신 예수 그리스도는 실체화된 하나님의 은혜이며,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하신 것도 하나님의 은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림이 없었다면 인류는 죄와 사망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을 수 없었다. 

은혜의 사역 - 구원 · 성화 · 소명

은혜의 중요한 사역은 성도의 구원과 성화, 하나님의 나라 사역을 위한 소명을 불어넣는다.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 자체이지만 역사로 나타날 때는 인간에게 자비로운 도움을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힘이나 능력이다.
은혜의 능력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불화를 극복하고, 인간 영혼의 파멸을 회복시킨다.

1. 구원의 사역 - 죄악된 인간을 의롭게 하시고 구원하신다

하나님의 은혜는 죄를 사하게 하고 의롭다 함을 얻게 하며 구원을 이루게 하는 역사를 한다. 즉 인간 스스로의 능력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기에 하나님은 은혜의 실체인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를 믿기만 하면 죄악된 인간도 구원받을 수 있게 하셨다. 
행 15:11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딛 3:7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2. 성화의 사역 - 구원받은 성도가 성화될 수 있도록 돕는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성도는 믿음을 견고하게 할 수 있으며 신앙적 성숙을 이룰 수 있게 된다. 즉 은혜는 구원 사역뿐만 아니라 성도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이룰 수 있도록 때를 따라 돕는 역사를 계속한다.

히 4: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딤후 2:1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고”

3. 소명의 사역 - 특별한 직무를 맡기고 능력을 공급한다

은혜는 성도를 부르시고 택하셔서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특별한 직무를 맡긴다.
바울도 사도로 임명을 받고 복음을 이방인에게 전하도록 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
비록 복음을 전파에 부적합하고 무가치한 존재라고 생각하지만 은혜는 그 직무를 완수할 수 있도록 영적 도덕적 능력을 공급한다.
이러한 일은 사도들에게 부여된 것이 아닌 교회의 성도들에게서 활용될 수 있는 다양한 재능인 은사가 주어진다. 

고린도전서 15:9-10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은혜에 대한 잘못된 견해

사람들은 은혜 받는 것을 기복적인 신앙이나 그릇된 생각에서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어떤 조건이나 단서가 붙는 것이 아니며, 물질적인 것도 아닌 모든 인류에게 값없이 주시는 구원이란 선물이다. 또한 은혜는 죄의 용서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지 무법을 허용하는 것도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사업이 잘되고 부자로 사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어떤 사람이 사업을 할 때 다른 사람들이 손해를 보았는데 본인은 동일한 사업에서 특별한 이익을 얻은 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이기적인 욕심을 만족해 주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구원과 연관된 것으로 어려운 일이 닥치고 힘들다고 해서 은혜가 떠났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은혜 받으면 어떤 잘못을 저질러도 무관하다 

|일부 사람들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므로 우리가 어떻게 살든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은혜는 죄를 짓도록 허용하거나 경건하게 살아야 할 우리의 소명을 짓밟도록 허용하는 허가증이 아니다. 즉 우리가 은혜로 구원을 받았지만 죄인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성화의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선행을 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구원)는 선한 일을 하거나 종교적 행사에 참여하고,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등 공로에 따라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롬 11:6, 딛 3:5).
은혜는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인간의 노력이 아닌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있다(롬 4:4, 엡 2:8-9).

은혜 받으면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

모든 일은 은혜가 해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그저 은혜가 역사하는 대로 따라가면 될 뿐 아무 일(성화의 삶을 살고자 하는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무책임한 사고방식이다.
인간의 모든 행위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다면 인간은 아무 것도 내세울 것이 없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명분으로 하여 인간에게 부여된 신앙적 책임까지 부정되어 버린다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자유의지, 즉 하나님의 은혜의 근본을 부정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은혜 받아도 율법은 철저히 지켜야 된다

은혜로 구원을 받지만 율법을 완전히 지킴으로써 그 구원을 보존해 나가야 한다는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기는 하지만 궁극적인 구원은 행위에 의해 결정된다고 믿는다.
갈라디아 교회에서 많이 나타난 잘못된 생각으로 사도 바울은 이 문제를 지적하기 위해 갈라디아서를 기록했다.






개혁자 루터의 반유대주의 / 다섯 솔라




개혁자 루터의 반유대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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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테스탄트적 저항신학을 손에 들고 부패한 중세 가톨릭을 전복시켰다는 게 루터에 대한 대체적인 평가다.

그러나 루터의 고향 독일의 역사학자인 볼프강 비퍼만의 견해는 좀 다르다. 베를린 자유대학 교수인 그는 신간 '루터의 두 얼굴'(평사리)에서 종교개혁 500주년을 자축하는 동시대인들에게 찬물을 끼얹는다.

저자는 독일 개신교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를 국가주의, 국가가 주도하는 전쟁을 지지하는 주전(主戰)주의, 자본주의, 반유대주의, 반집시주의, 반페미니즘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그 뿌리를 루터에서 찾는다.

저자에 따르면 루터는 16세기 농민전쟁에서 제후들의 편에 섰다. 봉기한 농민들을 공격하라고 요구했고, 실제로 수천 명의 농민이 학살당했다.

1543년 출간된 루터의 저작 '셈 함포라스와 그리스도의 성에 관해'에서는 유대인을 "고삐 풀린, 나쁜 망나니로 이루어진 찌꺼기"라고 지칭하며 노골적으로 경멸한다. 또 다른 저작 '유대인과 그들의 거짓말에 관해'에서는 유대인의 종교 서적을 빼앗고, 그들의 회당을 불태우며, 재산은 몰수하자고 역설한다.

루터는 교황청의 폐습을 누구보다 앞장서 비판했지만, 정작 가톨릭의 마녀 미신은 극복하지 못한다. 그는 마녀를 '악마의 나쁜 창녀', '우유를 훔치고 악천후를 만들고 빗자루를 타고 다니는 존재'라고 묘사한다.

또한 "부인이나 처녀가 잘난 체할 때만큼 꼴사나울 때가 없다", "아내가 지닌 가장 위대한 명예는 언제나 남자들이 그녀에게서 태어난다는 것이다" 등 반페미니즘적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이에 대해 저자는 "루터는 여성들 안에서 오로지 가정주부와 어머니만을 보고 싶어 했다"고 꼬집는다.

저자는 이처럼 루터의 발언과 저작을 조목조목 분석한 뒤, 그의 유산을 무비판적으로 계승한 독일 교회의 흑역사를 재조명한다. 반기독교적인 나치가 등장할 때 교회가 이를 묵인하고, 유대인과 집시에 대한 박해에 침묵하는 죄를 짓지 않았느냐고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옮긴이 최용찬은 "비퍼만의 책은 독일 역사학자의 철저한 고증작업의 성과물인 동시에 독일 개신교도의 처절한 자기반성의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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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대주의(히브리어: אנטישמיות, 독일어: Antisemitismus)는 유대인들을 향한 차별과 증오를 말한다.

유럽 언어에서 대체로 "반셈족주의"로 불리나, 명칭과 조금 다르게 셈족 전체에 대한 혐오보다는 오직 유대인들만을 대상으로 한 혐오를 가리키는 말로 주로 쓰인다.[1]

반유대주의는 여러 형태가 있다. 개인적인 증오에서 홀로코스트포그롬폭력적인 박해까지 여러 예가 있다. 긴 역사로 가장 오래된 증오라고 불리기도 한다.[2]

유럽 기독교인들이 유대인을 예수를 죽인 민족이라고 여기고, 고대교회 교부들은 유대인들을 위선자라고 부른 종교편견[3][4]이나 유대인들을 열등한 인종으로 보는 인종 차별이 반유대주의의 발단이 될 수 있다. 시온주의이스라엘을 반대하는 극우파, 근대 유럽의 사회주의[5]와 이슬람 급진주의에서도 반유대주의를 찾을 수 있다.

반유대주의의 첫 발생은 확실하지 않다. 베를린 자유대학교 페터 셰퍼(de) 교수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고대 이집트의 이야기를 다시 이야기 할 때 널리 퍼졌다고 주장했고 반유대주의는 이집트에서만 일어났다고 주장한다.[6] 가장 오래된 반유대주의의 흔적은 Agatharchides의 책에서 찾아볼 수 있다. 기원전 2세기당시 고대그리스의 역사가였던 그는 유대인들의 풍습은 어리석다고 조롱했고 안식일을 지내서 예루살렘이 침략받았다고 비꼰적 있다.[7]

또한 구약성서인 《마카베오기 제1권》에도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을 점령한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반유대주의정책이 언급되어 있다.[8]

서유럽의 유대인 박해

서유럽에서의 기독교 강제개종

유대인에 대한 핍박과 추방은 스페인, 포르투갈, 프랑스 등 기독교 국가를 중심으로 끊이지 않았다. 스페인은 유대인들에게 기독교로의 강제 개종 칙령을 내려 탄압하고 영구적으로 추방했고, 14세기 중엽부터 16세기까지 대부분의 독일 도시에서 유대인들은 공식적으로 추방을 당했다. 이러한 추방 외에도 기독교를 국가 종교로 표방한 서유럽의 유대인에 대한 대표적 박해 양상은 의식살인(de)유언비어[9], 성찬모독 비난, 탈무드 소각, 종교적 논쟁의 네 가지 형태로 일어났다. 이러한 박해의 양상으로 인하여 자연히 기독교에 대한 유대인들의 적대감은 깊어만 갔다.

동유럽으로의 이주

스페인의 유대인 박해는 전유럽에 유대인에 대한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서유럽에서조차 유대인들은 발붙일 곳을 얻지못했지만, 폴란드를 중심한 동유럽은 비교적 유대인들에게 관대하여 유대인들을 위한 새로운 보금자리 구실을 하였다. 18세기 중엽 전세계의 유대인 인구는 약 300만 가량이었고 이들 중 대부분은 동유럽에 편중되어 살게 되었다. 폴란드에는 주후 18세기 말 약 150만 명이나 되는 유대인들이 살았는데 폴란드가 붕괴되면서 이들은 러시아와 프로이센 그리고 오스트리아로 편입되었다.[10]

십자군 원정과 유대인

유대인들에 대한 통속적인 종교적 증오심을 교회가 공식적으로 주입하게 된 계기는 십자군 원정이었다. 1096년에 가톨릭 교회는 십자군 전쟁을 시작했다. 교황 우르반 2세는 무슬림 침략자들로부터 성지를 회복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군사들을 모집했다. 그런데 그들이 성지로 가는 도중에 만나는 유대인들을 무슬림처럼 취급하였다. 그러나, 십자군의 유대인 학살에 대하여 유대 공동체는 금욕적이고 냉정한 태도를 보였다. 유대인들은 십자군이 칼을 대고 제시하는 세례를 거부하면서 세례 받기보다는 율법대로 죽음을 감수하거나 아니면 집단 자살을 택했다. 십자군의 유대인들에 대한 만행은 십자군이 회복하고자 했던 성지 예루살렘에서 자행되었다. 십자군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 그들의 칼은 무슬림들은 물론 유대인들을 죽인 피로 물들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여, 우리는 당신을 찬양합니다!” 라는 노래를 부르면서 회당에 불을 질러 안에 있던 유대인들이 산 채로 불에 타 죽게 하였다. [11]

루터의 반유대주의

동정적인 입장

마르틴 루터는 그리스도의 유대적 배경에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그것은 유대인의 잘못이 아니라, 그들에 대한 기독교인의 태도라고 지적했다. 선교적인 관점에서 교회가 같은 뿌리의 종교를 가진 유대인 형제들에게 너무도 악한 모습을 보이고, 오히려 그들을 핍박함으로 유대인들이 교회에 등을 돌리게 되었다고 반성하였다.

1523년 루터는 《예수는 유대인으로 나셨다 Dass Jesus Christus ein geborener Jude sei 》라는 도발적인 제목으로 논문을 발표하여 기독교인들의 사악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또한 유대인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만일 내가 유대인이었다면 이런 둔하고 버릇 없는 자들이 기독교 신앙을 규제하고 가르치는 것을 보면서 오히려 기독교인이 되기 보다는 차라리 암퇘지가 되기를 더 좋아했을 것이다. 우리는 몇몇 유대인들을 그들 조상이 가졌던 참 신앙으로 이끌어 줌으로써 그들을 돕기를 원한다.”[12]

루터의 만년

표지, Wittenberg 1543년 1월

그러나 루터는 1543년 1월 반유대주의로 급선회하는 《유대인들과 그들의 거짓말에 관하여 Von den Jüden und jren Lügen》를 발표했다. 그는 이 저술에서 "유대인의 회당을 불지르고, 그들을 죽이고, 매장하고 회당을 무너뜨리고, 탈무드를 빼앗으라"고 주장하며 유대인 탄압을 선동했다. 루터의 이런 주장은 묻혀 있다가 19세기 초 반유대주의가 기승을 부리던 독일에서 기독사회당 (Christlich-soziale Partei) 대표인 아돌프 슈퇴커(Adolf Stoecker 1835-1909) 에 의해 널리 퍼졌고 나찌에게 파급되었다.[13]

드레퓌스 사건과 반유대주의

nowiki  드레퓌스 사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반유대주의가 최고조에 이르러 사회문제로 표출된 사건은 프랑스의 드레퓌스 사건 때였다. 1894년 드레퓌스는 증거가 없는데도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간첩으로 몰려 무기징역에 처해져 악마섬(Île du Diable)에 유배되었다. 반유대주의는 가톨릭 교회와 가톨릭 언론, 군부등을 중심으로 급속히 퍼졌다. 이에 에밀 졸라를 비롯한 지식인들의 격렬한 항의는 유럽에서 반유대주의의 심각성을 일깨웠고 이는 곧 오스트리아의 언론출신 유대인 테오도어 헤르츨시온주의 주창으로 연결됐다.[14]

홀로코스트

nowiki  홀로코스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현대의 반유대주의

인종 학살극인 홀로코스트의 충격으로 유럽과 미국에서는 극소수의 극우 이외에는 반유대주의는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아직도 반유대주의가 강하게 남아있으며, 특히 이스라엘 국가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많은 팔레스타인인들에게서 크게 나타난다. 또 아마디네자드 이란 전 대통령이 이스라엘에 핵 미사일을 날리겠다고 공언할 만큼 특히 이슬람 종파 중 시아파에서는 극심한 반유대주의가 나타나고 있다.


  1. 각주


  2. "Antisemitism has never anywhere been concerned with anyone but Jews." 루이스, 버나드. "Semites and Antisemites" Archived 2011년 5월 14일 - 웨이백 머신, Islam in History: Ideas, Men and Events in the Middle East, The Library Press, 1973.

  3. Our common inhumanity: anti-semitism and history Archived 2019년 6월 30일 - 웨이백 머신 by Richard Webster (a review of Antisemitism: The Longest Hatred by Robert S. Wistrich, Thames Methuen, 1991

  4. 《세계종교사입문》/서울대학교 종교학과 종교사연구회/청년사

  5. 《이야기 교회사》/이성덕 지음/살림

  6. 근대 유럽의 사회주의자들은 유대인들을 부르주아 계급으로 이해하여 반대하였다. 물론 모든 유대인들이 자본가였던 것은 아니었다. 살림지식총서《유대인》/정성호 지음/살림

  7. Schafer, Peter. Judeophobia, Harvard University Press, 1997, p 208.

  8. Flannery, Edward H. The Anguish of the Jews: Twenty-Three Centuries of Antisemitism. Paulist Press, first published in 1985; this edition 2004, pp.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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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는 루터의 반유대주의 글들을 굉장히 익숙해 했고 아주 존경했다.

'나의 투쟁(Mein Kampf)' 에서 히틀러는 루터를 독일의 가장 위대한 3명의 위인으로 칭송했다. 

Frederick the Great 와 Richard Wagner와 함께. 1938년 11월9-10일 나찌는 Kristallnacht 지역에 유태인 학살을 시작했다. 

그들은 독일에 있는 모든 유대인교회(synagogue)를 전부 파괴하고 35명의 유대인을 살해했다. 

그리고 그 날의 학살은 마틴루터의 생일을 기념해서 했다고 발표한다. 





 


마틴루터의 말기에 발행된 팜프렛의 그의 글 " Concerning the Jews and Their Lies" 에서 루터는 8가지 행동을 유태인들에게 행해야 한다고 발표했다. 


1. Burn all synagogues 

모든 유대인의 교회를 불태우라

2. Destroy Jewish dwellings

유대인의 거주지들을 파괴해라

3. Confiscate the Jews' holy book

유대인의 성경을 압수해라

4. Forbid rabbis to teach

랍비들이 가르치는 것을 금지하라

5. Forbid Jews to travel

유대인들의 여행을 금지하라

6. Forbid Jews to charge intereste on loans to non-Jews and confiscate Jewish property

유대인들이 비유대인들에게 돈을 빌릴때 이자를 금지하고 유대인의 재산을 압수해라

7. Force Jews to do physical labor

유대인들에게 육체적 노동을 시켜라

8. Expel the jews from provinces where Christians live

기독교인들이 사는 곳에서 유대인을 추방하라


마틴 루터 저-‘유대인과 그들의 거짓말’(Martin Luther, 1483-1546)에서   

“그들이야말로 진정 거짓말쟁이요 피에 굶주린 개때들이다. 

저들은 요망한 해석으로 성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변조하고 알아볼 수도 없게 만들어 놓았다.

저들의 매일 같은 한숨과 염원은 오직 구약의 에스더 시대에 저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 이방인들을 모조리 죽여 없애는 것이다...  

아, 저들이 얼마나 에스더기를 사랑하는지 보라. 저들의 피로 사무친 원한에 그보다 더 어울리는 책도 없을 것이다..

해가 이 땅에 뜬 이래로 스스로를 신에 선택 받은 민족이라 자처하는 유대인만큼 피에 굶주리고 복수심에 들끓는 족속도 없을 것이다.  

그들은 신의 이름으로 비유대인을 살인하고 절멸시켜야 한다고 믿고 있다. 저들이 기다리는 메시야란 것도 유대인을 위해 이방인을 말살하고 온 세상을 칼로 정복할 자에 지나지 않는다.

처음부터 저들이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그래왔듯이 저들은 오늘날도 똑같은 꿈을 꾸고 있다. 단지 힘이 모자라서 못하는 것 뿐이다...  

그들의 저주받을 저 고리대금업을 보면 알 듯이 불신자의 금과 은으로 입에서 악취를 풍기는 그들보다 

이 하늘 아래 더 탐욕스러웠고 또한 앞으로도 그럴 민족은 없을 것이다. 

그들에게 인생의 유일한 목표는 재물을 모으는 것이다.  

저들은, ‘메시야가 오면 온 세상의 금과 은을 빼앗아 유대인들에게 나누어 주리라’고 지껄인다.

그러므로 저들은 자기들의 그 끝없는 탐욕을 채울 수만 있다면 언제든 사악하게도 성서를 자기들 멋대로 왜곡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친애하는 기독교 형제들이여, 알지어다! 사탄 다음으로, 진정 유대인이고자 하는 유대인만큼 

우리에게 위험하고 독소적이며 골수에 박힌 적개심을 품은 적도 없음을.저들 중에는 개나 소나 믿을만한 망령된 미신이나 

관습의 노예가 된 자들이 있다. 

그러므로 역사 속에서 저들은 우물에 독을 풀고 트렌트(Trent)나 바이진(Weiszensee)의 사건처럼 아이들을 훔쳐 

흉악한 짓을 저지른다는 혐의를 받는 것이다. 

물론 저들은 이를 부정한다. 

어쨌든 사실여부를 떠나 나는 저들이 할 수만 있다면 공개적으로나 은밀하게 언제든지 이를 행동에 옮길 준비가 되어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사탄을 모르는 사람은 저들이 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왜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그토록 원한을 품고 있는지 어리둥절해 할 것이다.  

따지고 보면 그들에게 좋은 일만 하는 우리에게 그들이 원한을 품을 이유도 없다. 

그들은 우리나라에서, 우리들이 만든 집에서 살며 우리의 보호 아래 우리의 땅과 도로와 시장과 거리를 이용한다. 

대공(大公)들과 정부가 입을 벌린 채 코를 고는 동안 유대인은 그들의 금고와 민중의 호주머니를 마음대로 도둑질한다. 

이것이 스스로의 돈으로 피가 마를 때까지 착취당하고 결국은 거지꼴로 전락하는 게 아니라면 또 무엇이겠는가?  

외국인인 그들은 분명 우리의 것을 가질 권리가 없으며 저들의 재산도 실은 모두 우리의 재산이다. 

그들이 무슨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에게 유용한 것을 생산하는 것도 아니며 우리가 그들에게 돈을 기부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저들은 우리의 돈과 재물을 모조리 움켜쥐고 자기들이 유배생활을 하고 있다는 이 땅에서 주인 노릇을 하고 있다.  

“저들의 탈무드를 보면 이방인이 이스라엘 민족을 죽이면 죄가 되도 이스라엘 민족이 이방인을 죽이면 

죄가 되지 않는다고 랍비들이 말하지 아니하던가? 

또 이방인과의 약속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하지 않던가?  

그러므로 이방인의 돈을 도둑질하고 강탈하는 것은 (고리대금업으로 이미 하고 있듯이) 저들에겐 신에 대한 봉사인 셈이다...

 그리고 그들이야말로 이 세상의 군주이며 이 세상 사람들은 그들의 종이요 가축일 뿐이다...  

내가 보기에는 차라리 세편의 이솝 우화 속에 랍비들의 모든 탈무드 서(書)들보다 더한, 유대인은 절대로 깨닫지 못할 지혜가 담겨있다... 어쩌면 누가 나의 말이 너무 과하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실로 말을 아끼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그들이 그들의 회당과 학교에서 하는 기도 속에서 우리 고이들(Goyim)을 얼마나 저주하고 

우리에게 악의를 품었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고리대금으로 우리의 돈을 강탈하고 온갖 부류의 야비한 술수를 부린다.  

유대인을 사로잡고 있는 사탄이라면 모를까 그 어떤 외국인도 이런 짓을 하지 않았고 또 하지 않을 것이다... 

유대인 중에서도 학식 높은 랍비였다가 신의 은총으로 기독교인이 된(어쩌다 한번 있는 일이지만) 부르겐시스(Burgensis)는 유대인들이 그들의 회당에서 우리에게 퍼붓는 끔찍한 저주들(라이라도 증언하듯이)을 보면 그들이 결코 신의 선민일 수 없다고 결론짓는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창녀의 아들이라 부르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를 간음녀로 부른다

 - 사탄에 대적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이런 말을 입에 담는다. 

우리는 우리의 아내를 저들이 성모 마리아에 대해 하는 것처럼 창녀라 부르지 않고 저들이 우리의 주님 그리스도에 대해 

그러는 것처럼 후레자식이라 부르지 않는다.  

우리는 그들을 저주하지도 않을뿐더러 그들의 육신과 영혼을 위해 기도하며 우리와 함께 살도록 허락해 준다. 

우리는 저들의 아이를 훔쳐서 흉악한 짓을 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그들이 마시는 물에 독약을 풀지도 않고 

그들의 피에 목말라 하지도 않는다...  

자, 우리가 그들을 노예로 붙잡고 있다는 저들의 새빨간 거짓말을 보라! 예루살렘이 망한 것은 1400년 전이었고 

그 동안 우리 기독교인은 세상 곳곳에서 유대인에게 고문당하고 핍박 받아왔다.

게다가 우리는 도대체 그 어떤 마귀가 이들을 우리나라에 데려다 놓았는지 모른다. 

우리가 예루살렘에 가서 그들을 데려오지 않은 것은 분명하니 말이다!... 그렇다 우리는 그들을 인질로 붙잡아두고 있다.

마치 종살이를 하듯 나의 모든 것을 바쳐 내가 나의 류마티즘이니 자질구레한 질병이니 불운 따위를 붙잡아두려 하듯이 말이다!

나는 그들이 이 세상 모든 유대인들과 함께 그저 예루살렘에 머물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와 같이 절망적이고 사악하고 맹독적이며 악마적인 것이 지난 1400년 동안 우리의 역병이요 병균이요 

불운이었던 유대인의 운명인 것이다... 자, 그럼 이 저주받고 거부당하는 유대민족을 어찌 해야 하나?

우리의 이웃으로 눈을 돌려 프랑스나 스페인, 보헤미아 등지에서 유대인들을 어떻게 처리했나를 보고 보편적인 지혜를 얻어야 할 것이다.  

이들 나라에선 유대인이 고리대금으로 훔친 돈을 몰수하여 골고루 나누어 주는 대신 그들의 나라로부터 아예 추방시켜버렸다.

사람들이 얘기하듯이 유대인에 대한 신의 분노가 너무도 크기에 안일한 자비는 유대인을 더욱 간악하게 만들고 

매질을 가해도 유대인은 조금만 나아질 뿐이다.  

그러므로 모두 쫓아내어야 한다!... 우리의 돈으로 거부가 된 유대인들이 온 기독교국가들을 깔고 앉아 

우리를 비웃고 조롱하고 스스로의 대담함에 깔깔거리는 꼴을 언제까지 보고 견딜 수 있단 말인가?...

신에게 분노의 심판을 받기는커녕 그들의 매부리코로 새끼돼지들 마냥 킁킁대는 유대인을 보면서 

사탄과 그의 천사 암퇘지들은 또 얼마나 흥겨워할 것인가?” (Von den Juden und Ihren Luegen)

"어쩌면 부드럽고 온화한 기독교인들은 불쌍하고 핍박 받는 유대인들을 상대로 내가 너무 심하게 이들을 조롱하고

비아냥댄다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내 말을 들으라, 유대인과 같은 악마적인 족속을 조롱하기에 나는 너무 미약하고 저들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저들이야 말로 온갖 냉소와 조롱의 천재들이며 이 분야의 대가인 신을 섬기고 있다.  

그 신이란 바로 사탄인 것이다... 내가 보기엔 구약성경만 보더라도 유대인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온갖 타락상과 악의에 찌든 불량배들이라는 증거는 충분하며 그 누구도 내 생각을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고리대금업, 간첩, 배신과 기만행위로 나라를 망치고 우물에 독약을 풀고 애들을 훔쳐가고, 

한 마디로 온 세상에 퍼져 인간에게 해가 되는 갖은 못된 짓은 다 하는 족속인 것이다.” 

(Vom Schem Hamphoras und vom Geschlecht Christi)


루터의 개혁은 인문주의적(르네쌍스에 의한 그레꼬 로망의 부활로 인간이 중심이 되는 인본주의적 사상)인 바탕을 깔고

 인간중심 속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후에 인간중심인 동시에 사단중심적인 자유주의신학이 태어나는 빌미를 제공한 결과를 낳았으며 

이를 토대로 한 진화론이 발생하도록 방치한 결과로 나타나도록 한 것이다.

루터의 개혁 이후에도 로마 카톨릭의 태양문화 중심은 그대로 프로테스탄트 개혁 교회 속에 

그냥 잔존하게 되었으며 이것이 또한 개혁 교회의 전통이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루터에 의하여 개혁은 이루어졌지만 여전히 태양문화의 잔재는 아직도 이방교회 속에 남아 있다.. 


어쨌든 루터로 인하여 히틀러가 유대인을 위한 최종 해결책이라는 미친 생각을 갖기에 이르렀고 600만 대학살이라는 

역사상 미증유의 사태를 불러오기에 이르게 한 것인바, 이는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인 진실이며 보다 

또 하나의 명백한 역사적 증거인 것이다. 

히틀러로 하여금 전대미문의 대 참살 혹은 살육게임 즉 홀로코스트를 연출하도록 한 동기 부여를 한 당사자가 

바로 우리의 존경하는 개혁자인 마르틴 루터라는 사실은 참으로 안타깝고 놀라운 일이다. 

그래서 역사는 루터를 '히틀러의 아비'라는 가장 잔인하고 치욕적인 오명을 그에게 안겨 주고 있으며 

히틀러를 비난하듯이 그를 비난하고 공격하고 있다는 사실인데 과연 오늘날 교회에서 이러한 사실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런지?... 

루터는 자신의 글 속에서 에스더서를 아주 좋아했음을 고백하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 나오는 아각(아말렉 족속)의 후예인 하만의 유태민족 말살에 대한 것을 그대로 추종하고자 욕망을 보여 주고 있는데 

이로서 하만의 유대민족 말살의 사악함이 그대로 루터에 이어졌고 이는 다시 히틀러에 이어져 세기의 비극이 연출 된 것이다. 

하만의 소원이 루터를 거쳐 히틀러에 의하여 완성을 보았으며 따라서 하만과 루터와 히틀러는 

반유대주의 사상의 삼위일체가 된 셈이다..

  

더욱히 끔찍한 사실은 지금까지 개혁교회(프로테스탄트, 개신교) 안에 차지하는 루터의 영향력은 무시하지 못할 정도인지라 

오늘의 교회는 대체신학 속에 살고 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며, 또한 루터의 이러한 반유대주의적인 태도는 

지금까지도 교회로 하여금 유대인들의 반감을 사게 함으로써, 해서 유대인의 때가 도래한 오늘날에 있어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우리 이방인 교회에 커다란 짐과 장애가 되고 있다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며 또한 이는 유대인들에 대한 

복음의 방해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루터의 불완전하고 임시 방편적인 개혁으로 인하여 오늘의 프로테스탄트 교회 또는 개혁교회 속에는 

바빌론 이교사상(헬라철학과 로마주의)를 그대로 안고 있게 되었으며 더불어 교회의 예배 의식 제도 역시 사도교회와는 

다른 비성경적인 모습을 보여 줄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이는 또한 오늘날 거듭난 유태인 형제들의 모임(메시아닉 쥬 교회 또는 유대인 크리스천 교회)과 그들의 예배를 보면 

얼마나 이방인 교회안에 이교적 잔재가 남아 있으며 우리 이방인교회가 지금까지 성경속에 지시하고 계신 헤브라이즘적인 사상과 문화와 철학을 저버리고 이교적이며 태양문화적인 것에 몰두 해왔는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곡식가루가 거룩하니 떡덩이도 거룩한 것이며 뿌리가 거룩하니 그 가지 역시 거룩한 법이다.

그런데 거룩하지 않은(오염된 혹은 더러운) 곡식가루로 어찌 거룩한(정결한, 깨끗한) 떡덩이를 만들 수 있으며 

그 뿌리가 거룩하지 않은데 어찌 가지가 거룩하겠으며 또한 거룩한 열매, 아름다운 열매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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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음식 중에 학세(Haxe)란 게 있다. 종교개혁 발상지 여행단과 함께 나는 지난주 ‘개신교의 성지’로 불리는 독일 비텐베르크에 도착하여 또 학세를 시켜먹었다. 

 

본래는 슈바인학세(Schweinshaxe)라고 부르는데 우리는 그냥 “학세, 학세”라고 부른다. 우리가 흔히 먹는 돼지족발이라고 보면 된다. 학세는 피클, 맥주와 함께 독일식 삼합(三合)요리로 알려진 음식이다.

 

학세로 점심을 들고 비텐베르크의 그 유명한 시 교회를 방문했다. 성 마리아교회라고도 불리는 이 시 교회는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붙인 성교회와 함께 비텐베르크의 상징이자 ‘루터의도시’라고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는 시 교회에서 “내주는 강한 성이요”란 루터의 찬송가를 부르며 짧은 기도회를 가졌다. 함께 교회당을 둘러보던 모든 외국인들도 함께 찬송을 부르고 함께 기도를 드리는 모습이었다.

 

이 교회당은 루터가 수녀원에서 환속한 카탈리나 폰 보라와 결혼식을 올린 곳이다. 라틴어 미사를 폐지하고 독일어로 예배를 드린 최초의 교회이기도 하다. 부겐하겐이란 루터의 고해사제가 담임하던 이 교회에서 루터가 설교목사로 사역했던 곳이다. 루터와 그의 절친 멜랑히톤의 개혁사상을 그림으로 표현해 온 크라나흐의 유명한 제단화가 걸려있기도 하다.

 

그러니 이 시교회야 말로 개신교 1호 목사사모님이 탄생한 교회요, 최초로 개신교 예배가 시작된 곳이요, 비텐베르크에서 가장 오래된 예배당이니 기념비적인 교회라고 할 수 있다. 사실은 비텐베르크란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기도 하다.

 

시 교회를 나서면 루터와 멜랑히톤의 동상이 서 있는 마르크트 광장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이 도시를 찾아온 수많은 방문객들 틈으로 조용히 서명운동이 벌어지고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서명운동? 눈 여겨 보니 돼지가 문제였다.

 

우리가 기도회를 마치고 나온 시 교회당 건물에는 유대인을 돼지로 묘사하여 기분 나쁘게 풍자해 놓은 조각이 붙어 있으니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여 화해의 차원에서 이 돼지를 제거하자는 서명운동이었다. 교회당 건물에 돼지가 붙어 있는 줄은 나도 모르고 있다가 이번에야 알게 되었다. 독일에는 수십 개가 있다고 들었다. 이 교회당은 루터시대 훨씬 이전인 1300년대에 지어진 캐톨릭 성당이었으니 루터와 돼지는 사실 상관도 없다.

 

돼지는 어떻게 교회당 건물에 붙어 있게 되었을까? 캐톨릭 교회가 왕성했던 중세의 프랑스, 스페인을 중심으로 유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처형한 유대인들을 원수로 보았다. 그래서 유대인의 학대와 추방이 끊이지 않았다. 도시마다 유대인과 함께 어울려 사는 것조차 꺼려해 게토란 곳에 잡아넣기도 했다. 특히 11세기가 시작되면서 교황 우르반 2세가 총대를 메고 시작한 십자군 전쟁은 성지 예루살렘을 점령한 모슬렘들이 공격 타겟이었지만 무수한 유대인들도 함께 죽었다. 십자군에 의해 유대인들의 죽음도 피바다를 이뤘다. 14세기-16세기에 이르러 독일에서도 본격적인 유대인 학대와 추방이 시작되었다. 유럽에서 쫓겨난 유대인들이 발붙일 곳을 찾아 나선 곳은 동유럽. 특히 유대인 학대가 느슨했던 폴란드에 몰려든 것이다. 인류최대의 범죄자로 낙인찍힌 히틀러의 유대인 대량학살 홀로코스트의 무대가 폴랜드 아우슈비츠가 되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이처럼 유대인을 증오하던 캐톨릭교회의 유산으로 남아 있는 것이 바로 예배당의 돼지 조각이다. 이 암퇘지 조각은 우선 새끼 돼지들과 유대인들이 암퇘지 밑에서 젖을 빨며 누워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암퇘지 뒤에는, 돼지의 오른 다리를 들고, 꼬리를 잡고는, 자신들의 쉠함포라스(유대인들이 부르는 하나님의 이름을 비꼬기 위해 쓰는 표현, Shemhamphoras)를 발견하기 위해 어떤 중요하고 특별한 무언가를 읽는 것처럼 꼬리 밑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는 랍비를 조각해 놓은 것이다.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는 사람들이 나눠준 안내문에는 “이 조형물은 유대인들에게 모욕이 될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이 돼지의 젖을 먹고 그 엉덩이에 손을 대는 것같이 음란하게 묘사함으로 상식적인 예의에도 어긋난다. 이것은 음란하고 충격적인 반유대적 형상이며 위엄과 예의로 장식되어야 할 기독교 예배 장소에 대한 모욕”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반유대적이라고 손가락질을 당하고 있는 것은 비단 그 돼지조각뿐 만 아니라 종교개혁의 ‘주연배우’ 마르틴 루터도 마찬가지다.

 

루터는 기독교가 같은 종교를 가진 유대인 형제들에게 너무 악한 모습을 보이며 핍박하는 것을 반성하고 1523년 ‘예수는 유대인으로 나셨다’란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면서 기독교인들의 사악함을 비판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180도 돌변한 것이다. ‘유대인들과 그들의 거짓말’을 통해 유대인 탄압을 선동하고 나섰다는 것이다. 유대인 회당을 무너트리고 탈무드를 불태우라고 선동까지 했다는 루터는 결국 두 얼굴을 가진 배신자였다는 주장이 일기 시작했다. 루터가 세상을 떠난 지 약 200년이 지난 19세기 초 독일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알고 보니 캐톨릭 교회의 농간으로 밝혀졌다. 루터에게 배반의 칼을 맞은 캐톨릭 교회는 종교개혁이후 자체적인 내부 개혁운동에 착수했고 이때 등장한 급진적 ‘예수회’가 루터를 반유대주의자로 몰아가려 했다는 것이다. 결국 히틀러의 반유대주의 뿌리는 다름 아닌 루터였다는 음모론 때문에 죽은 몸이긴 했어도 살아 있을 때의 명예에 먹칠을 당한 억울한 루터. . .

 

광장을 지나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저들의 서명운동으로 드디어 시 교회의 돼지 조각은 철거될 수 있을까? 그리고 루터는 언제 반유대주의자란 누명을 벗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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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솔라 – 오직 성경 (1)

 ‘과거의 영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때로는 과거의 영광에 매여 있어 현실을 모른다는 부정적으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예전의 좋았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는 말입니다. 2017년은 크리스천들에게 있어 정말 중요한 ‘과거의 영광’을 생각나게 하는 해입니다. 바로 1517년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그 성교회 정문에 붙인 ’95개조 논제(반박문)’이 도화선이 된 종교개혁이 500주년을 맞는 해이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이 영광스러운 과거인 이유는 다른 무엇보다 그들이 주장했던 혹은 그들의 주장에 내재되어 있던 ‘다섯 솔라(Five Solas)’라 불리는 근본정신 때문입니다. 이는 그들이 만들어낸 개념이 아니라 성경에 명시된 혹은 내재된 분명하고 핵심적인 개념인데, 당시 잊혀졌거나 왜곡되었거나 의미가 퇴색된 것들을 바로 잡기 위해 강조한 것입니다. 다섯 솔라는 아래와 같습니다.

Sola Scriptura 오직 성경
Solus Christus 오직 그리스도
Sola Gratia 오직 은혜
Sola Fide 오직 믿음
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 영광

종교개혁 500주년인 2017년을 시작하면서 종교 개혁의 근본정신에 대해서 하나씩 살펴보고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첫 번째 정신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입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고백하는 우리의 믿음과 삶에 있어 성경이 유일한 최종 권위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유일한 최종 권위’입니다. ‘최종 권위’는 우리가 어떤 것을 판단하고 결정하고 행동하는 데 있어서 최종 결정권이 누구 혹은 무엇에 있느냐를 의미하는 것인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바로 그 최종 권위이자 유일무이한 권위라는 것이 종교개혁자들의 주장이었습니다.

당시의 교회가 성경의 권위를 완전히 부인했기 때문에 이런 주장이 나오고 개혁이 필요했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들이 성경과 ‘동등한’ 다른 권위도 인정했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교도권(magisterium)이라고 하는, 교황과 의회가 결정한 교회의 전통(가르침)이 성경과 동일한 권위를 가질 수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이런 믿음은 실제적으로는 성경의 권위가 다른 ‘보이는 권위’ 아래 놓여지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즉 성경의 권위를 겉으로 부인하지는 않지만 실제적으로는 부인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말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의 주장은 교회의 전통 등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들도 성경의 권위 아래 있어야 한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사실 교회의 전통도 오랜 기간 성령의 조명 아래 하나님의 백성들이 성경에 대해 치열하게 연구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불완전한 인간이 그러한 전통을 이어가면서 본질은 퇴색되고 변질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 전통 자체도 때로는 다시 성경으로 검증받고 재정립될 필요가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전통 자체가 성경과 같은 권위를 갖는다고 말한다면 이런 일이 불가능합니다. 교회의 믿음과 삶에서 최종 권위는 성경이고, ‘오직 성경’입니다. 이것이 종교개혁자들의 핵심 사상이고 그들이 목숨을 걸고 지키고자 했던 진리의 기초입니다.

‘오직 성경’은 오늘날의 크리스천들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자신을 종교개혁의 후손들이라고 하는 우리는 ‘오직 성경’의 정신을 어떻게 계승하고 있을까요? 안타깝게도 우리는 여러 면에서 이 정신과 멀어지고 당시 개혁이 필요했던 교회의 모습과 가까워진 것 같습니다.

첫째로 성경 자체와 멀어졌습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성경을 라틴어로만 읽게 했는데, 문제는 당시 라틴어는 이미 일반이 사용하지 않는 언어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라틴어를 배운 자들이 아닌 일반 성도들은 성경을 그림으로 보거나 사제들이 설명해주는 것을 들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성경을 라틴어가 아닌 당시의 일반 언어로 번역하는 일들이 종교 개혁을 전후로 일어나게 됩니다. 왈데시안(왈도파)은 이미 12세기에 신약 라틴 성경을 불어로 번역하는 일을 했습니다. 14세기에는 잘 알려진 위클리프가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였습니다. 마르틴 루터도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였습니다.

이들은 로마 가톨릭의 위협 아래서도 이런 일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정말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려면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을 말하는지 먼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설명이나 해석을 맹목적으로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베뢰아 사람들처럼 성경이 정말 그런지 스스로 읽고 묵상하고 연구해야 합니다. 이 일은 교회의 인도자들이나 성경 학자들만이 하는 일이 아닙니다. 모든 성도가 그렇게 해야 하는 일입니다.

오늘날의 많은 성도가 이 부분을 놓치고 있습니다. 과거의 성도들보다 우리는 성경에 훨씬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환경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보다 우리 삶에 더 가까이 또 깊이 들어와 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언제나 내 손이 닿을 곳에 있는 스마트폰이 그렇습니다. TV가 그렇습니다. 그런 매체들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되는 수많은 정보들이 그렇습니다. 성경 한 권을 손에 들기 위해 수많은 희생을 치렀던 과거 성도들에 비하면 우리는 너무나 좋은 환경에 있지만, 성경은 여전히 우리에게서 멀리 있습니다.

항상 성경을 손에 들고 있고 읽고 다녀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다른 것들에 관심을 갖고 내 시간과 노력을 사용하는 만큼 성경을 읽고 배우는 일에 관심이 없다면 성경에서 내가 멀어져가고 있다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무언가 나의 삶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면 다른 무언가는 내 삶의 중심에서 자연스럽게 멀어집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는 성경이 중심에 있어야 합니다.

때로는 맘에 드는 저자들의 책을 읽는 것으로 성경 읽는 것을 완전히 대체하기도 합니다. 물론 좋은 책을 읽는 것은 좋은 일이고 권장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성경에 대한 책이 성경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와서 다른 사람에 대해서 말하면서 “누가 그러는데 걔는 이렇다더라”고 말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저 다른 사람의 말을 통해 알고 있는 사람을 마치 자신이 아는 사람처럼 말한다면 여러분은 그 사람의 말을 신뢰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말이 내가 아는 것을 검증하고 확인하는 역할을 할 수는 있지만, 그것으로 내가 누군가를 알아가는 것은 위험합니다. 성경을 읽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무엇보다 먼저 성경을 가까이하고 읽고 배워서 하나님을 알아가야 합니다.

둘째로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보다 전통을 먼저 생각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전통이라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자체가 권위가 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왜 그런 전통을 가지고 있는지 성경으로 분별하고 판단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하고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오직 성경’을 믿는 자들에게 있어 정상입니다.

그런데 때로는 이런 성경에 근거한 분별이나 판단이 ‘성경의 권위에 도전하는 일’로 치부되기도 합니다. 성경에 대한 과거의 해석이 지금에 와서는 성경과 같은 권위가 된 것입니다. 무엇이 성경이고 무엇이 전통인지도 구별하지 못하여 ‘성경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왜 토를 다느냐’는 식의 말을 쉽게 합니다. 비슷하게, 목사님의 말이 때로는 성경과 같은 권위를 갖기도 합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전달하는 한에서 권위가 있습니다. 교회의 전통도 말씀의 의미를 잘 반영하는 한에서 권위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이렇게 해”, “우리 목사님은 이렇게 가르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뒤에 마침표를 찍어서는 안 됩니다.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에 있는 것이지 다른 무엇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왜 우리 교회는 이렇게 하고 우리 목사님은 이렇게 가르치는지 성경으로 분별하고 성경으로 뒷받침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건전하고 올바른 성경해석에 근거하여 잘못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면 고칠 수 있는 겸손과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셋째로 성경이 우리에게 충분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포스트를 통해서 좀 더 자세하게 나누기를 원합니다.

새로운 한해를 시작하여 성경 읽기를 계획하는 분들이 많이 계실 것입니다. 혹은 반복된 실패로 인해서 계획을 세우는 것조차 조금은 두려운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성경을 펴 보십시오. 그 성경이 여러분의 손에 들어오기 얼마나 많은 희생이 있었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그 귀한 말씀을 당신이 이해할 수 있게 당신 가까이 두셨습니다. 그 말씀을 당신은 어떻게 대하고 계십니까?



다섯 솔라 – 오직 성경 (2)

종교개혁의 근본정신인 ‘다섯 솔라(Five Solas)’ 중 가장 기초가 되는 ‘오직 성경(Sola Scriptura)’에 대해서 지난 시간에 이어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오직 성경’을 강조했던 것은 그 당시의 교회가 성경 외의 다른 권위를 인정하면서 사실상 성경의 권위를 떨어뜨렸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의 우리도 비슷한 잘못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겉으로 말하는 것은 달라졌는지 모르지만 실제 우리의 모습은 개혁이 필요했던 그 당시의 모습과 비슷한 면이 많습니다.

첫째, 많은 성도가 성경을 멀리하고 있습니다. 그 어느 시대보다 성경은 가까운 곳에 있지만, 성도들의 마음에서는 멀어져 있습니다. 한구석에서 먼지가 쌓여가는 성경책은 하나님의 말씀이 성도들의 마음에서도 중심이 아닌 어느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음에 대한 상징적인 모습이 되었습니다.

둘째, 성경보다 전통을 우선시합니다. 전통은 어느새 성경의 완벽한 적용으로 인식되어 검증할 필요도 없고 검증해서도 안 되는 영역이 되었습니다. 실제로 성경과 같은 위치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셋째, 성경이 우리에게 충분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 부분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세 번째 순위로 언급하는 것이지만 어쩌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크고 보편적인 문제일 수 있습니다.

먼저 ‘성경이 충분하다’는 말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이 충분하다는 것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대한 해답이 성경에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즉, 차가 작동을 멈추면 매뉴얼을 보거나 자동차 전문가를 찾아가지 말고 성경책을 펴거나 교회 목회자를 찾아가라는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런 목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충분하다는 것은 영적인 의미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은 성경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 수 있는 유일하고 충분한 계시가 바로 성경입니다. 우리 인간이 어떤 존재이고, 어떤 문제가 있고, 어떻게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에 대한 유일하고 충분한 해답이 성경에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로서의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모든 가르침이 성경에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성경이 충분하다고 말할 때 의미하는 바입니다.

다윗은 하나님 말씀의 충분성에 대해서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시 19:7-9 [7]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8]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9]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살아납니다(벧전 1:23).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수 있는 자들도 변화됩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뜻에 대한 구체적이고 분명한 증언이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참된 지혜를 주고 기쁨을 줍니다. 밝게 보고 바른길을 갈 수 있게 합니다. 영원히 변하지 않고 믿을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성경입니다.

비슷하게, 사도 바울은 성경의 역할과 목적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딤후 3:16-17 [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우리에게 무엇이 옳은지 교훈하고 잘못할 때 책망하며 그것을 바로잡습니다. 그리고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도록 교육(훈련)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모든’ 선한 일을 할 수 있게 준비시킵니다. ‘선한 일’은 우리 기준에서의 ‘착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든 일을 말합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로서 우리가 창조 받은 목적이며 존재 이유입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라는 말입니다. 어떤 선한 일을 하는 데는 성경으로는 부족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선한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성경입니다. 따라서 성경으로 충분합니다.

이런 성경의 충분성은 오늘날 두 가지 측면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외면 받는 가르침이 되었습니다.

첫번째는, 성경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입니다. 말 그대로 성경의 충분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입으로 성경의 충분성을 부인하지는 않더라도, 복음 전도의 방법을 복음의 내용보다 더 강조하고 있는 풍토는 이런 문제를 단편적으로 드러내는 예입니다. 감동적인 음악이 있고 뜨거운 부르짖음이 있어야 영혼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성경 어디에서도 말하고 있지 않지만, 많은 교회가 그런 ‘방법’에 몰두하면서 정작 중요한 성경 자체의 메시지는 소홀히 합니다. 때로는 방법에 잘 맞지 않아서 메시지를 축소하거나 제외하기도 합니다. 죄와 심판에 대한 말씀은 아주 간단히 언급만 하거나 아예 말을 꺼내지도 않습니다. 은혜와 사랑, 위로의 메시지만을 복음이라고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영혼을 구원하기에 충분하다고 믿는다면 이런 타협은 불필요합니다. 올바른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좋은 방법에 대한 고민은 필요한 부분이지만, 결국 사람을 구원하고 변화시키는 것은 하나님 말씀의 능력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을 받은 자들로서 우리가 가진 최우선의 역할은 복음 자체를 올바르게 전하는 것입니다.

사실 좀 더 만연한 문제는 오늘날의 심리학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TV나 다른 매체에 등장하는 심리학의 전문가들은 그들의 이론이 과학인 듯이 말하고 사람들은 그들의 권위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 사회에 깊숙이 침투한 심리학은 자연스럽게 교회 안으로도 흘러들어와 하나의 ‘상식’이 되었습니다. 어느덧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이 분명히 말하고 있는 영역에서조차 심리학적인 해석과 해결책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단적인 예로, 성경은 인간이 가진 모든 문제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으로 우리 안에 있는 ‘죄성’을 지목합니다. 문제는 우리 안에 있고 해결책은 우리가 아닌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이 성경의 가장 핵심이 되는 메시지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심리학은 문제의 원인으로 사람을 지목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속해 있던 환경, 과거의 경험을 지목합니다. 내가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낮은 자존감이 문제라고 합니다.

어떤 관찰이나 실험의 결과는 객관적인 자료로서 의미가 있을 수 있지만, 문제는 그것들에 대한 분석과 해석입니다. 그들은 지극히 ‘인간 중심적인 전제’에 기초하여 보이는 것을 해석하고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과연 성경은 인간의 문제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어서 이런 심리학적인 해결책이 필요할까요? 성경은 인간 관계의 문제에 있어 부족한가요? 자녀 양육에 있어서도 부족하고 부부 관계에 있어서도 부족한가요? 우리가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가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게 하는데 성경은 충분하지 않은가요?

충분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목적 외에 ‘다른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면 성경은 우리 삶에 있어 충분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경 외의 다른 권위가 아니라, 성경이 (앞서 언급한 여러 분야를 포함하여) 우리 삶의 여러 부분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더 잘 알고 그에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성경이 충분하지만 결국 내 실제의 삶과는 거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문제입니다. 첫 번째 언급한 문제와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문제입니다. 성경이 ‘영적인 부분’에 있어 충분하다는 말을 매우 제한적으로 혹은 독립적으로 이해하는 문제입니다. 성경은 내가 나중에 죽어서 좋은 곳에 갈 수 있게 해주고 지금 힘들고 지칠 때 위로를 줄 수 있지만, 대부분 보통 나의 삶에서는 크게 관련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신앙과 삶이 별개여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삶에서 어떤 분별을 하고 결정을 할 때 중요한 것은 성경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조언, 사회적인 통념이나 관습, 문화입니다. 단지 결과적으로 효과가 있느냐 효율적이냐는 것도 결정의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앞서 저는 차가 고장 난 것을 예로 들어 성경이 우리 삶의 모든 부분에 대해 해답을 주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차가 고장 난 상황에서 성경은 나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언제는 육체로만 존재하고 언제는 영혼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시 차가 고장 난 상황을 생각해 보십시오. 당연히 매뉴얼을 찾아보고 내가 해결할 수 없다면 전문가를 찾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과정이 짜증 날 수 있고 불평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는 들을 사람이 없어도 욕을 할지 모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괜찮을까요? 상황이 그러니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모든 일에 감사하라고 말하고 선한 말을 하라고 명합니다. 차를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는 성경이 말하지 않지만, 그 상황에서 우리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어떻게 돈을 벌 수 있는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지만, 우리가 돈을 사랑해서는 안 되고 그 돈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말합니다. 구체적으로 누구와 결혼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성경은 침묵하지만 어떤 가정을 이루어야 하고 어떤 남편 혹은 아내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분명히 말합니다. 어떤 직장에서 일하는 것이 좋다는 말은 없지만 어떤 직장인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합니다. 성경이 우리 삶의 모든 부분에 대해 해답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모든 삶의 부분에 있어 어떤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모든 해답은 줍니다. 성경은 우리 실제 삶과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냥 예배당에 두고 다녀도 괜찮은 그런 책이 아닙니다. 언제나 내 삶에 영향을 끼칠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과 생각의 중심에 있어야 합니다.

‘오직 성경’ 정신은 종교 개혁의 핵심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자주 ‘성경으로 돌아가자’라는 말을 합니다. 그런 말이 그저 형식적인 슬로건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과거의 잘못을 잘 알면서 반복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정말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유일한 하나님의 계시로서의 성경의 권위와 충분성을 인정하고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습니다(히 4:12). 우리 삶에서 더욱 그러하기를 기도합니다.


다섯 솔라 – 오직 그리스도 (1)


Five Solas 다섯 솔라

Sola Scriptura 오직 성경
Solus Christus 오직 그리스도
Sola Gratia 오직 은혜
Sola Fide 오직 믿음
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 영광

종교 개혁자들의 다섯 솔라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서 시리즈를 통해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첫번째로는 ‘오직 성경(Sola Scriptura)’를 통해 성경이 우리의 최종 권위가 되어야 함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두 번째로 살펴볼 ‘솔라’는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입니다. 오늘날의 교회에서도 많이 들을 수 있는 표현이고 여러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종교 개혁자들이 주장했던 ‘오직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는 오직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시다’라는 의미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죄인인 인간이 나가기 위해서는 중보자가 필요합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제사장들이 그런 일을 했습니다. 물론 그들과 그들이 하던 일은 실체가 아닌 그림자였습니다.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제사장으로서 완전한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갈 수 있습니다. 특별히 히브리서 말씀은 이 부분에 대해서 매우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히 4:14-16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 7:23-25 [23] 제사장 된 그들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으로 말미암아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 [24]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장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느니라 [25]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사도 바울은 예수님만이 오직 유일한 중보자라는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못 박아 말합니다.

딤전 2:4-5 [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

‘뭐, 그런 당연한 것을 새삼스럽게…’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지만, 당시의 상황을 생각해 보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이 당연한 진리가 당시의 교회에서는 심각하게 훼손되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단번에 드리신 영원한 제사는 성례라는 이름으로 반복되었습니다. 그 성례를 집행하는 성직자들이 사실상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 역할을 했습니다. 위대한 성인들의 ‘여분의 공적’을 통해 연옥에 있는 영혼이나 산 사람들이 당해야 하는 형벌을 면제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며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면죄부(면벌부 혹은 대사부)’라는 것을 발행하여 판매하였습니다. 위대한 성인들 또한 중보자인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로서 우리에 대해 더 잘 말해줄 수 있는 공동 중보자의 위치에 올랐습니다.

당시 교회는 “예수는 중보자가 아니다.”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실제로 그들에게 있어 예수님은 중보자로서 ‘부족’했고 그래서 다른 중보자들, 눈에 보이거나 혹은 더 좋은 중보자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부분, 특별히 면죄부를 마르틴 루터는 비성경적이라 생각하고 ’95개조 반박문’을 통해 그것에 대해 논쟁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이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그건 그 당시 교회, 가톨릭 얘기지 우리와는 별로 상관없는 얘기 아닌가?’
안타깝게도, 오늘날 우리와도 상관이 있습니다. 사실 지금은 어느 때보다 다시 한번 ‘오직 그리스도’라는 진리를 강하게 선포해야 할 때입니다. 두 가지 측면에서 ‘오직 그리스도’라는 진리가 무너진 모습이 교회 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오직 그리스도는 아니다.’는 생각이 교회 안에 들어왔습니다.

오늘날의 사회가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가치가 있습니다. ‘다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너와 내가 다르고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 간의 ‘차이’는 서로 ‘다름’이지 누군가가 ‘틀림’은 아니기에 그 차이는 존중을 받아야 하고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차이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고 사회의 질서를 무너뜨리지만 않는다면 말입니다.

좋은 가치관입니다. 하지만 절대적인 가치관은 아닙니다. 최소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그렇게 되어서는 안됩니다. ‘오직 성경’이 최종적인 권위라면, 이런 좋은 가치관도 성경의 권위 아래에 있어야 합니다. 위에 언급한 다원주의적 가치관은 기본적으로는 성경의 지지를 받는 좋은 가치관이지만, ‘다름’과 ‘틀림’을 나누는 기준은 사회 질서, 개인의 행복추구권이 아니라 하나님,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야 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교회 안에 다원주의적 가치관이 잘못 적용되어 종교다원주의로 이어지고 있는 부분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치게 편협하고 배타적인 태도라고 생각하고 그리스도가 아니어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은 사랑이셔서 결국은 누구도 지옥에 보내지 않으시고 천국으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어떤 목회자는 하나님을 뭐라고 부르든 (하나님, 하느님, 부처님, 알라, 천지신명 등등) 신실하게 그 신을 섬기고 최선을 다해 살면 누구나 천국에 갈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사람이 천국에 가고 안가고는 하나님께서 결정하실 일이기 때문에 나는 모른다. 나는 다만 예수님을 믿어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믿는 것뿐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갈 수 있지만 예수님께 가는 길은 많다.”고 모호하게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탄절에 스님을 초대해서 강론을 듣게 하는 목사는 ‘대인배’로 사람들의 추앙을 받습니다. “결국 모든 종교는 하나다.”를 외치며 다른 종교와의 화합을 추구합니다.

다른 종교를 믿는 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문제는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세상 밖에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위해 성경에서 말하는 진리를 바꾸거나 축소하거나 감추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사람에 대해서는 당연히 배타적인 태도를 가져서는 안 되지만 진리는 당연히 배타성을 지닙니다. 진리는 진리가 아닌 것을 포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리스도’가 맞는다면 그리스도가 아닌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틀린 것입니다.

바울은 누구보다 복음에 열정이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는 놀라운 유연성을 보여줍니다.

고전 9:20-22 [20]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21]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22]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사람들에 대해서 그들을 얻기 위해 바울은 여러 다른 모습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복음 자체의 메시지에 대해서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갈라디아 지역에서 전해지던 ‘그리스도+무엇’의 복음에 대해 ‘다른 복음’이라고 하면서 그런 복음은 없다고 강력하게 말했습니다(갈 1:6~9). ‘다른’ 복음은 ‘틀린’ 복음이고 그런 복음은 복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복음을 전하면 누구라도 저주를 받아야 한다고 선포하기까지 했습니다. 그가 편협한 사람이어서 그랬던 것이 아닙니다. 진리의 기준을 사람이 아닌 하나님에게 두었기 때문에(갈 1:10), ‘그것도 괜찮다.’라고는 말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다른 해석의 여지를 두지 않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베드로도 다른 사도들과 함께 담대하게 ‘오직 그리스도’를 선포하였습니다.

행 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이 말씀을 진리라고 믿는다면 어떻게 우리의 머리로 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해서 다른 구원자(중보자)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가 되십니다. 모두가 모든 면에 있어서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사회에서 ‘오직’이라고 말하는 것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 배타적이지 말아야 하는 것도 옳은 일입니다. 하지만 진리는 진리로서 선포되어야 합니다. 사랑으로 진리를 말해야 합니다.

다음 시간에는 좀 다른 측면에서 어떻게 ‘오직 그리스도’가 성도들의 삶 속에서 무너져 있는지 살펴 보겠습니다.


다섯 솔라 – 오직 그리스도 (2)

Five Solas 다섯 솔라

Sola Scriptura 오직 성경
Solus Christus 오직 그리스도
Sola Gratia 오직 은혜
Sola Fide 오직 믿음
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 영광

지난 시간에 이어 ‘오직 그리스도’가 오늘날 교회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오직 그리스도’는 그리스도 만이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라는 의미입니다. 이 단순하고도 분명한 성경의 진리가 오늘날에는 두 가지 면에서 무너져가고 있습니다. 첫째는 ‘오직 그리스도’는 아니다는 생각입니다. 그리스도 외의 중보자가 있음을 많은 교회가 직간접적으로 때로는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그리스도 자체보다는 그리스도의 사역과 역할에 대한 오해와 공격입니다.

‘오직 그리스도’가 말하는 예수님의 역할은 ‘중보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게 하십니다. 예수님을 통해서만 죄로 깨졌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과 원수인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롬 5:10-11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11]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가 되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막는 죄의 문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습니다. 의롭다고 선포되는 칭의 때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 후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매일의 삶에서 범하는 죄는 여전히 하나님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 관계가 끊어지지는 않지만, 관계의 친밀함, 다른 말로 하면 교제에는 문제가 생깁니다. 그때도 역시 중보자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요일 2: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예수님이 우리의 유일한 중보자시다는 말은 이런 의미입니다. 구원의 시작에서 끝까지 예수님은 중보자가 되십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런 예수님의 역할에 대한 오해가 있고 그 오해가 실제 삶에도 큰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을 그저 내가 죽으면 좋은 곳(천국)으로 갈 수 있게 해주시는 분으로만 이해하는 경우입니다.

예수님을 죄인과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가 아니라 죽음 이후에 만나는 천국의 문지기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믿는’ 이유는 마치 파스칼의 내기이론에 따르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손해 볼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진짜 계신다면 지금 예수님을 믿어 두면 나중에 죽어서 천국에 갈 테니 좋습니다. 혹시 하나님이 없더라도 지금 내가 크게 손해 볼 것은 없습니다. 그러니 그냥 믿는다고 말합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예수님의 역할에 대한 이런 오해는 실제 삶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주일에 교회에 가고 헌금을 하고 하는 것으로 내 할 일은 끝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이 세상에 대한 내 가치관을 근본적으로 바꾸거나 할 이유는 없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나 추구하는 것 중에 죄와 관련된 것이 있더라도 큰 문제는 아닙니다. 그것을 예수님이 대신 담당하셔서 천국에 갈 수 있게 해주신 것이고 난 그 예수님을 믿고 있으니까요.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역할을 이렇게 제한해 두고 “내가 당신을 믿고 죽음 이후의 삶을 맡겼으니, 지금 내 삶에는 관여하지 마시오. 혹시 내가 힘들면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은 괜찮지만,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고는 하지 마시오.”라고 말합니다. 영원한 삶과 이 땅에서의 삶, 영적이 일과 육적인 일, 신앙과 삶이 철저히 분리됩니다.

구원과 믿음에 대한 심각한 오해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저 예수님이 존재함을 인정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단지 존재에 대한 인정이라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믿음은 관계에 있어서의 신뢰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그 믿음은 삶을 바꿉니다. 야고보가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말한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약 2:17). 행함이 없는, 즉 삶을 달라지게 하지 않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도 그가 단지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믿었다거나 하나님에 대해서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분에게 자신의 삶을 맡겼습니다. 단지 죽고 나서의 삶이 아니라 이 땅에서의 삶도 맡겼습니다. 그 확실한 증거로 아브라함은 자신의 아들까지도 믿음으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약 2:21; 히 11:17~19).

예수님을 믿는 것은 지금의 문제 없는 내 삶에 ‘플러스알파’로서 혹은 보험으로서 예수님을 두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내 삶에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고 그에 대한 유일한 해결이 예수님이심을 인정하고 겸손히 그분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 치명적인 문제는 우리가 죽으면 지옥에 가게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것도 문제이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의 문제입니다. 창조주이며 주권자,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우리가 배반했습니다. 반역했습니다. 등을 돌렸습니다. 그에 대한 결과로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가 되신 것입니다. 단지 지옥 갈 사람을 천국으로 갈 수 있게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수를 자녀가 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사망의 권세 아래 있던 자들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되게 하셨고 예배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은 좋은 것이고 이 땅을 사는 우리에게 소망이 됩니다. 하지만 그것이 좋은 이유는 그곳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볼 것이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면서 의도하신 아름다운 관계 속에 거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이런 일을 하셨다고 믿는다면, 우리 오늘의 삶을 하나님과 관계없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을 그저 내가 이 땅에서 살 때 나에게 도움을 주는 분으로 이해합니다. 첫 번째와는 전혀 다른 쪽의 극단입니다. 지금 나의 삶과 예수님을 매우 밀접한 관계에 놓지만 어떤 식으로 관계가 있는지에 대해서 오해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예수님을 나에게 복을 주거나 화를 면하게 해주는 존재로만 생각합니다. 마치 우리 조상들이 이미 죽은 조상들을 잘 모시면 복을 받고 화를 면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지극 정성으로 조상들을 모셨던 것과 비슷합니다. 혹은 어떤 자연의 신이 노해서 내가 화를 입지 않도록 하거나 이미 당하고 있는 화를 멈추기 위해 신을 달래주는 일을 했던 것과도 비슷합니다. 단지 그런 대상이 ‘예수님’ 혹은 ‘하나님’으로만 바뀐 것 뿐입니다.

예수님을 이런 분으로 이해하면 중요한 것은 얼마나 내가 하는 일이 잘 풀리고 자녀가 성공하고 부모님이 건강할 것이냐는 것입니다. 내가 잘 되는 것이 곧 내가 예수님을 ‘잘’ 믿고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혹시 잘 안 풀리는 일이 있다면 뭔가 내 공적이 부족하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나 열심히 예수님을 섬기느냐는 것입니다. 뭔가를 열심히 해서 신에게 좋은 ‘점수’를 얻는 것이 중요한 일이 됩니다. 혹은 신의 심기를 건들지 않아서 내가 무슨 해를 입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좀 더 현대적으로, 요즘에는 세상에서 말하는 심리학에 예수님을 슬쩍 끼워 넣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통해 자존감을 높이고 과거의 트라우마를 극복합니다. 가정 문제, 직장 문제, 학교 문제 등에도 심리학이 제시하는 해법에 예수님이 살짝 얹혀 있습니다.

물론 이런 일들이 전혀 의미가 없고 예수님이 하시는 일도 아니라는 말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이런 것을 원하시지 않는다는 말도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이런 복을 누릴 수 있고 궁극적으로 이런 문제의 유일한 해결도 예수님이십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되면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가 아니라 우리가 원하는 것들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가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끌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우리 삶을 통해서 이루시게 하시는 것이지, 단지 내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실존하지도 않는) 램프의 요정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이십니다. 그것이 ‘오직 그리스도’의 의미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역할을 제한하거나 혹은 역할을 바꾸는 것은 우리가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내가 원하는 예수님을 섬길 수는 없습니다. 다 그렇지는 않을지 몰라도 조금씩은 우리에게 이런 모습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알게 모르게 우리는 세상의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에 예수님을 상관없는 분으로 여기고 있는 곳은 없는지, 혹 잘못된 목적으로 예수님을 ‘이용’하고 있는 부분은 없는지 우리 삶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다섯 솔라 – 오직 은혜

Five Solas 다섯 솔라

 

Sola Scriptura 오직 성경

Solus Christus 오직 그리스도

Sola Gratia 오직 은혜

Sola Fide 오직 믿음

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 영광

종교 개혁의 다섯 솔라 중 ‘오직 성경’과 ‘오직 그리스도’에 이어 ‘오직 은혜’에 대해서 살펴보기 원합니다.

‘오직 은혜’는 간단히 말해서 죄인인 인간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하다는 의미입니다. 다른 ‘솔라’들과 마찬가지로 ‘오직’이라는 부분이 중요합니다. 종교 개혁 당시의 교회가 성경의 권위를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오직’ 성경의 권위만을 인정하지는 않았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중보자로서의 역할을 부인하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을 그리스도와 비슷한 위치에 올려둔 것이 문제였습니다. 구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것을 부인했던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거기에 무엇이 더해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는 통로’로서의 성례 참여나 부족한 공로를 채워 면벌을 가능하게 하는 면벌부(면죄부) 판매 등 다양한 이슈가 있지만 공통적인 것은 구원을 위해 인간의 입장에서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공로가 있어야 궁극적인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 당시 교회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이렇게 은혜와 공로가 함께 일할 수 있다는 가르침에 대해 성경은 정확히 반대로 말합니다.

롬 11:6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은혜이거나 아니거나입니다. 은혜인 것은 맞지만 그래도 이런 것은 우리가 해야 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은혜가 맞는다면 오직 은혜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래서 당시 종교 개혁자들은 교회에 대해서 ‘그렇지 않다. 구원은 오직 은혜로만 되는 것이다.’를 외쳤던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이었기 때문입니다.

엡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딛 3: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행 15:11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우리가 어떤 자들인지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오직 은혜’일 수밖에 없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먼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거룩하고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또한, 자존하시고 자족하신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그런 분이 우리를 구원하셔야만 하는 어쩔 수 없는 이유나 필요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있어야만 존재하거나 만족하실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있어야만 영광을 받으실 수 있는 분도 아닙니다.

그럼, 우리는 어떤 자들인가요? 구원받기 전 우리가 어떤 상태에 있었는지를 생각해 보면 왜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한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은혜 외에 우리 쪽에서의 어떤 공로가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에서 3장의 중반까지 사도 바울은 모든 인류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이유를 밝히고 결론적으로 이렇게 선포합니다.

롬 3:9-12 [9]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성경이 모든 사람을 ‘죄인’이라고 말할 때 의미하는 바가 이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중립적인 죄인이 아닙니다. 죄도 범하지만 선도 행하는 그런 자들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소극적인 죄인도 아닙니다. 어쩌다 보니 죄를 범했지만, 여전히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과 함께 있고 싶어 하는 그런 자들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우리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는 우리가 ‘죄인’인 상태를 곧 하나님과 ‘원수’ 된 상태라고 말합니다(롬 5:10).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원수와 친구 외에도 수많은 관계가 가능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편에 있지 않으면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원수이고 반역자입니다. 에베소서 2장 3절은 우리의 상태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엡 2: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입니다. 영적으로 하나님의 입장에서 봤을 때 모든 사람은 “허물과 죄로 죽은 자”입니다(엡 2:1). 생명이 없는 자의 특징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영적으로 그런 존재입니다. 우리가 이런 상태인데 어떻게 우리 입장에서 하나님을 향한 ‘한 걸음’을 내디딜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럴 능력도 우리에게 없고 그럴 의지도 없습니다. 그런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면, 우리가 무엇을 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 자명합니다. 우리가 먼저 무엇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시작하셨고 하나님께서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구원은 은혜의 선물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보나, 인간 편에서 보나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여야만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기독교를 다른 모든 종교와 구분 짓습니다. 어떤 종교가 되었듯 공통적인 메시지는 ‘너희의 최선을 다하라. 그럼 뭔가 너희에게 좋은 것이 있을 것이다.’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다릅니다. 우리는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가 할 수 없으니 내가 해주겠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어 주신 은혜의 선물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무엇을 더할 필요도 없고 더할 수도 없습니다. 오직 은혜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오직 은혜’를 말할 때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몇 가지 있습니다.

1. ‘오직 은혜’라고 말할 때 우리는 우리가 자격이 없는 자들임을 인정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호의를 은혜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학교에서 100m 달리기 경주를 하는데, 1등 한 사람에게 공책 세트를 주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공책 세트를 받은 학생이 그것에 대해서 크게 감사하며 어쩔 줄 몰랐을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정당하게 자신이 노력한 것의 대가를 받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1등 한 학생에게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노트북을 주었다고 해봅시다. ‘뭐 대단한 것 했다고 이런 것까지 줄까?’라고 생각할 수는 있지만, 여전히 자신이 노력한 대가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수억 원하는 아파트를 주면 어떨까요? 믿기 힘든 상황이고 정말 감사한 마음이 들겠지만, 여전히 자신이 노력한 것에 대한 대가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만약 2등 한 학생이 아파트를 받았는데 1등 한 자신이 노트북을 받았다면 당장에 항의를 할 것입니다.

자격 있는 자에게 아무리 큰 호의가 주어져도 그것은 은혜가 아닙니다. 더 나아가서,  받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가 조금이라도 먼저 고려되면 그것은 은혜가 아닙니다. 우리가 오직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말은 우리가 정말로 자격이 없고 우리의 어떠함이 은혜를 받는 데 있어 전혀 영향을 주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마치 내가 대단해서 은혜 받고 구원을 받은 것처럼 자랑할 수 없습니다. ‘오직 은혜’의 의미를 제대로 안다면 하나님 앞에서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2. ‘오직 은혜’는 또한 은혜를 베푸는 것은 100%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찌나 ‘공의’를 좋아하는지, 때로는 은혜와 공의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좋은 예를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0장 1절에서 16절에 나오는 포도원 품꾼들의 비유입니다. 한 포도원 주인이 추수할 때가 되어 품꾼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아침부터 와서 일한 품꾼도 있었고 일이 끝날 때가 다 되어서야 와서 일한 품꾼도 있었습니다. 주인은 나중에 온 일꾼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먼저 온 자들에게도 약속했던 대로 한 데나리온을 주었습니다.

‘당연히’ 먼저 온 자들이 불평하며 원망합니다. 어떻게 더 수고한 우리도 똑같이 한 데나리온만 받느냐는 것입니다. 아마 (우리를 포함해서) 이 비유를 듣는 사람들은 모두 이들과 같은 생각일 것입니다. 주인이 잘못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주인이 묻습니다.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눅 20:15)

은혜를 공정하게 베풀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은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은혜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받는 사람이 고려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공정은 받는 사람을 고려해서 그에 합당하게 대우하는 것입니다. 둘은 그 영역이 다릅니다. 은혜는 베푸는 사람의 주권적인 선택입니다. 여러분이 아프리카에서 한 아이를 입양하는 것을 보고 제가 ‘어떻게 다른 아이들은 다 내버려 두고 한 아이만 입양할 수 있습니까? 은혜롭지 못합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은혜는 베푸는 사람의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은혜를 입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입니다. ‘오직 은혜’의 의미를 제대로 안다면 하나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3. ‘오직 은혜’는 우리가 얻은 것이 가치 없는 것임을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직접 가치를 지불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가치 없게 여기는 경향이 있어서 구원에 대해서도 조금은 그런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믿으면 은혜로 구원을 준다니 손해 볼 건 없네’라는 생각으로 믿는다고도 말하고 그런 식으로 복음을 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구원은 그렇게 취급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이 은혜의 선물인 이유는 그것이 값어치가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 힘으로는 절대로 지불할 수 없을 정도로 값비싸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인간들에게 수치와 고통을 당하시고 죽으셔야만 했습니다. 무한한 가치를 지닌 것이 우리가 은혜로 얻은 구원입니다. ‘오직 은혜’의 의미를 제대로 안다면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 놀라운 성경의 진리는 우리를 한없이 낮아지게 하고 한없이 감사하게 하고 한없이 찬양하게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이 은혜에 반응하고 계십니까? 한 찬송가 가사처럼 온 세상의 내 것이라도 이 은혜를 다 갚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내가 가진 무엇이 아니라 바로 ‘나’입니다. 은혜받은 자로서 더욱 은혜에 합당하게 생활하여 이 놀라운 은혜를 세상 가운데 더욱 아름답고 가치 있게 선포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다섯 솔라 – 오직 믿음


Five Solas 다섯 솔라

Sola Scriptura 오직 성경
Solus Christus 오직 그리스도
Sola Gratia 오직 은혜
Sola Fide 오직 믿음
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 영광

다섯 솔라가 모두 서로 연관되어 있지만, 특별히 ‘오직 은혜’와 ‘오직 믿음’은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습니다. 어느 하나를 설명하면서 다른 하나를 언급하지 않기가 사실상 불가능할 정도입니다. ‘오직 은혜’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오직 믿음’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오직 믿음’이라고 말한다면 당연히 ‘오직 은혜’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 칼럼을 통해서 우리는 왜 구원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선물일 수밖에 없는지, 그리고 그 안에 내포된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해 봤습니다. 간단히 정리하면, 구원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은혜의 선물일 수밖에 없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완전한 분이셔서 우리를 구원하셔야만 하는 어쩔 수 없는 이유가 하나님께 있지 않습니다. 그런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은 은혜로밖에 설명할 수 없습니다. 둘째로 우리는 구원에 있어서 완전히 무능합니다. 무언가를 할 수도 없고 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우리가 아닌 다른 누군가, 즉 하나님께서 해주셨다는 말이고, 그것이 곧 은혜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또한 1) 우리가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는 자이며 2) 은혜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으로 주어진 것이고 3) 우리가 받은 구원이 헤아릴 수 없는 가치를 가진 것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럼 ‘오직 믿음’이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오직 은혜’가 구원의 동기와 동력에 대해서 말한다면, ‘오직 믿음’은 구원의 수단 혹은 도구에 대해서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구원의 유일한 동기와 동력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가 실제로 역사하는 유일한 수단은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는 그 은혜로 인해 믿음을 ‘통해서’ 구원 받습니다(엡 2:8).

앞선 글에서 몇 차례 언급되었던 것처럼, 당시 교회는 이 부분에 있어 굉장히 모호한 (그래서 잘못된) 가르침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인간에게 달려 있다고 주장했던 펠라기우스의 주장을 그대로 반복하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은 교리를 전파 했습니다. 당시 교회는 죄와 벌을 분리하면서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죄 사함은 받아도 그에 대한 벌은 남아 있어 선행(성사, 성지 순례 등)으로 그것을 갚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 그것을 갚지 못하면 연옥에서 남은 벌을 받고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했고, 면죄부는 그런 노력이나 고행을 ‘헌금’으로 빠르게 대체할 수 있는 방법이었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은 했지만, 그 ‘은혜’를 받기 위한 모든 노력을 사람이 해야 했던 것입니다. ‘칭의’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공로에 기초해서 죄인을 의롭다고 선포하시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 하나님의 도우심 가운데 최선을 다해 의롭게 되어가는 과정이 되었습니다.

이런 가르침에 성실하게 그리고 정직하게 임했던 사람이 마르틴 루터였습니다.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에 최선을 다했지만, 로마서 1장 17절은 그에게 언제나 무거운 짐이자 두려움이었습니다.

롬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그가 배운 것은 어떻게든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가 되어야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만족하게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의’는 곧 그를 심판하는 하나님의 공의였습니다. 루터는 더욱 구원을 위해 열심을 냈지만 그럴수록 좌절과 절망은 커졌습니다. 모든 것이 달라진 것은 그가 ‘하나님의 의’가 단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완전한 의일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믿는 자에게 주시는’ 그리스도의 의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였습니다. 그가 가장 강력하게 ‘오직 믿음’을 외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은 기독교의 핵심이고 기독교를 가톨릭뿐 아니라 다른 모든 종교와 구분하는 기준이 됩니다. 모든 종교는 인간의 노력과 성취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직 믿음’의 교리는 어떤 식으로도 우리의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는 데 도움을 주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 죄인인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성경은 “전혀 없다.”고 답합니다.

사도 바울이 기록한 로마서는 이런 성경적인 복음에 대한 가장 분명한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로마서는 모든 인류에게 암울한 소식을 전하며 시작합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고 그 행한 대로 보응을 받게 될 것입니다(롬 2:6; 3:9~18). 누구도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변명할 수 없습니다. 누구도 하나님의 기준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롬 3:19~20).

“하지만 이제는!”

감사하게도 로마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가장 암울했던 소식은 그 깊은 골짜기만큼 더욱 기쁜 소식으로 대체됩니다.

롬 3:21-22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율법을 최선을 다해 지킨 자가 아니라 ‘모든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의가 미칩니다. 바울은 27절에서 다시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단지 혹은 오히려] 믿음의 법으로니라.”라고 강조하고, 28절에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라고 결론 내립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스스로 의롭게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의는 ‘일하지 않고 얻은 의’고(롬 4:4~5), 다른 말로 하면 ‘믿음에서 난 의’입니다(롬 9:30). ‘작은 로마서’라고 불리는 갈라디아서에서도 바울은 동일하게 말합니다.

갈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당연한 얘기지만, 사도 바울만 이렇게 가르쳤던 것은 아닙니다. 사도 요한도 다른 무엇을 통해서가 아니라 ‘믿는 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말했습니다(요 1:12~13). 사도 베드로도 믿음이 궁극적으로 얻게 될 구원으로 우리를 이끌 것이라 말했고(벧전 1:5, 9), 구원받은 자들에 대해서 ‘믿는 자’ 그리고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벧전 2:7; 벧후 1:1).

예수님의 가르침도 다르지 않습니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이 말씀들에 어떤 종교적 행위나 율법에 대한 순종을 구원의 근거나 수단으로 끼워 넣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에 올라간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를 통해서 스스로 의롭게 될 수 있다고 믿는 자를 경고하셨습니다(눅 18:9~14). 의로운 행위를 해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하는 자가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하는 자는 겸손히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자, 곧 믿는 자입니다.

이런 ‘오직 믿음’의 가르침은 다음의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직간접적으로 의미합니다.

1. 행함이 구원(칭의)에 어떤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앞서 언급한 성경의 말씀들을 보면 행함과 믿음을 분명하게 구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은 곧 행함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말일 뿐 아니라, 행함이 구원에 어떤 영향도 주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사역에 기초하여 믿는 자들을 의롭다고 선포하시는데, 그 의에 우리의 행함이 무엇을 더하거나 빼지 못합니다. 비교적 의롭게 산 사람이라도 더 의롭게 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의에는 차별이 없고 완전합니다. 모두가 자격이 없고, 모두가 은혜로, 믿음을 통해, 의롭다 하심을 받습니다.

2. 믿음이 구원의 동기 혹은 조건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때로 어떤 분들의 간증을 들어보면 믿음이라는 ‘행위’로 구원을 받은 것 같습니다. 마치 내가 믿어 줬으니까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실 수 있었다는 식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또 그런 식으로 복음을 전하기도 합니다. 아닙니다. 성경이 ‘구원받는 믿음’에 대해서 말할 때는 언제나 수단이지 동기나 조건이 아닙니다. 만약 우리의 믿음이 구원의 동기가 되고 조건이 된다면, 우리는 믿은 것에 대해서 자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구원에 대해서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은혜로 시작하셨고 은혜로 완성하시는 것이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3. 구원받는 믿음에는 행위가 따라오지만, 믿음에 어떤 행위가 따라와야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비슷하게 들리지만, 전혀 다른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믿는 자를 의롭다고 칭하실 때, 하나님 보시기에 그가 얼마나 의로운 삶을 살았는지 혹은 앞으로 얼마나 의로운 삶을 살 것인지는 전혀 고려되지 않습니다. 조금이라도 그렇다면 우리는 행위로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100% 행함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이나 50% 혹은 그 이하 1%의 행함이라도 필요하다는 말이나 결과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결국, 믿음으로만 구원받을 수 없다는 말이고 최종적으로는 행함이 있어야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어느 정도의 행함이든지 그것을 ‘통해서’ 즉, 행함을 수단으로 구원받을 수 없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렇다고 행함 자체가 무의미하거나 선택 사항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과 행함이 전혀 무관한 것도 아닙니다.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은 아니지만, 진정 구원받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행함으로 그 믿음이 진실임을 증명하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는 이에 대해 아주 분명하게 말합니다.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을 구원하지 못하는 믿음이라고 말합니다(약 2:14). 이 말을 바꾸면 구원하는 믿음은 행함이 있는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야고보는 또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아무 유익이 없는 것, 죽은 것, 헛된 것이라고 합니다(약 2:16, 17, 20). 행함이 그 믿음이 참된 것임을 입증하기 때문입니다(약 2:24).

바울도 갈라디아서에서 믿음에 행위를 더해 구원을 얻는다는 가르침에 대해 격렬하게 반대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떤 선한 삶도 의미가 없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믿는 자들의 믿음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갈 5:6)이기 때문에 그들은 삶에서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고 말했습니다(갈 5:22~23). 예수님도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마 7:16)라고 하시며,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라고 선포하심으로 구원받는 참된 믿음이 무엇인지 가르치셨습니다. ‘오직 믿음’은 믿음의 열매로서의 행함을 부정하거나 간과하지 않습니다. 그 믿음은 우리를 심판에서 건져낼 뿐 아니라 과거의 행실에서도 건져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그 아들을 닮아가게 하는 일도 시작하십니다. 더욱 그 아들의 모습을 닮아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 그것이 구원의 목적이며 삶의 목적입니다.

구원에 있어서 ‘오직 믿음’의 진리는 믿는 자로 하여금 계속해서 하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오직 믿음’은 우리 안에 선한 것이 없고 우리 안에 자랑할 것이 없음을 보게 합니다. 내가 뭔가 잘한 것 같고 내가 뭔가 이뤄낸 것 같아 우쭐해지고 교만한 마음이 싹트려 할 때 이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엡 2:8-9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갈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그리스도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우리가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빌 3:3). 우리가 더욱 그에 합당한 백성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다섯 솔라 – 오직 하나님께 영광


Five Solas 다섯 솔라

Sola Scriptura 오직 성경
Solus Christus 오직 그리스도
Sola Gratia 오직 은혜
Sola Fide 오직 믿음
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 영광

‘다섯 솔라’ 시리즈의 마지막인 ‘오직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라틴어를 좀 더 정확하게 번역하면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 혹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고 어떻게 행동하는지는 차치하고, 최소한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 중에 “나는 내가 제일 중요해. 나는 나를 위해서 살아. 하나님의 영광은 나하고 관계없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를 전제로 하고 있고, 그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모든 일을 하시며 우리에게도 그것을 요구하신다는 것은 성경에서 우리가 놓칠 수 없는 분명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시작에서부터 하나님께서 계시고 그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고 선포합니다(창 1:1). 누구도 아무런 의미나 목적 없이 무언가를 만들지 않습니다. 더구나 인격체이신 하나님께서 또 다른 인격체인 인간을 창조하셨다면, 거기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는 것이 당연합니다. 창조의 목적은 시편을 비롯한 다른 말씀들에서 계속해서 나오는데, 이사야서에서는 특별히 하나님 스스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 43:7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도 동일합니다. 구원은 마치 ‘재창조’와 같아서, 성경은 구원을 새로운 창조로 말하기도 하고 창조에 사용된 언어를 그대로 구원에 적용하여 사용하기도 합니다.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엡 2:8-10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렇기 때문에 구원의 목적도 창조의 목적과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는 구원 받았습니다.

벧전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래서 성경은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이렇게 명령합니다.

시 96:1-3 [1]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지어다 [2] 여호와께 노래하여 그의 이름을 송축하며 그의 구원을 날마다 전파할지어다 [3] 그의 영광을 백성들 가운데에, 그의 기이한 행적을 만민 가운데에 선포할지어다
고전 6: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전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모든 것을 해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일관된 가르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개혁 당시의 가톨릭 교회도 하나님의 영광을 표면적으로 부정하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문제는, 그들의 가르침과 실천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가려져 있었고 다른 것들이 영광을 (하나님과 함께) 얻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교회의 믿음과 삶에 있어 가장 높은 권위의 자리에 하나님의 말씀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교황과 의회가 결정한 전통이 함께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죄인인 인간 사이의 중보자는 오직 그리스도이신데, 마리아나 다른 성인들, 사제들이 중보자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통해서 받을 수 있는 구원인데, 우리가 무언가를 거기에 더해야 하고 더할 수 있다고 가르쳐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가르침과 실천에는 공통으로 하나님과 그분께서 하시는 일에 사람과 사람의 행위가 더해져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결과적으로는 하나님 외에 다른 무엇이 함께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외쳤던 ‘오직’은 이런 것들을 바로 잡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마땅한 영광을 돌려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이쯤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이토록 중요한 ‘하나님의 영광’이란 무엇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요?

먼저,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완전하고, 다른 피조물과는 구분되고, 무한히 위대하신 하나님의 속성이 드러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완전하고 구분되며 무한히 위대하신 속성, 즉 하나님의 ‘하나님이심’을 우리는 ‘거룩이라고 말하고, 그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겉으로 표현되는 것을 ‘영광’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잘 드러난 말씀은 이사야 6장 2~3절입니다.

사 6:2-3 [2]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3]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스랍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그분을 ‘거룩하다’고 선포했고, 온 땅에 충만한 그분의 거룩하심을 ‘영광’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어떤 면이 겉으로 드러나면 그것이 영광보다는 수치가 될 수 있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면에서 완전하시고 무한히 위대하시기 때문에 그분의 어떠하심이 드러나는 것은 언제나 그분께 영광이 되는 일입니다.

결국, 우리 입장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혹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어떠하심이 ‘잘’ 혹은 ‘그대로’ 드러나게 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고 말씀에 따라 모든 것을 하는 것이 그렇게 하는 일입니다. 다른 무엇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만이 중보자가 되신 것을 인정하고 그리스도께만 나아가는 것이 그렇게 하는 일입니다. 구원에 있어서 내가 무엇을 하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은혜로 믿는 자에게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 구원임을 인정하는 것이 그렇게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주권자시고, 하나님이 구원자시고, 하나님이 심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성경, 오직 그리스도,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을 주장하는 것은 그것이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 있음을 분명하게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오늘날에 적용할 때, 두 가지 주의할 점을 말씀드리기 원합니다.

첫째는, (당연한 얘기지만) 하나님이 아닌 다른 대상에게 영광을 돌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성취에 도취하여서 마치 내가 모든 것을 이뤄낸 것처럼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감사를 표하고 그들의 공로를 인정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궁극적으로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사실 이것은 말만 그렇게 한다고 해결되는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우리 생각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 아름다움, 위대하심을 맛보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더 말씀을 배우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안다면 그분께서 우리를 통하여 일하신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특권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중 단 하나라도 ‘내가’ 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모든 영광은 ‘당연히’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합니다.

두 번째는, 마치 우리가 무언가를 성취해서 얻어낸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것, 쉽게 말해 “하나님 덕분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아주 틀린 것은 아니고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약간은 생각의 방향을 바로 잡을 필요가 있습니다.

핵심은 우리가 무엇을 해냈느냐, 성취했느냐가 아닙니다. 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잘’ 드러나셨냐가 핵심입니다. 내가 더 높은 자리에 오르고,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잘 드러났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 것이고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영광을 받으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직장에서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이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참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 고백을 듣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니가 거기까지 가려고 얼마나 아부를 떨고 돈을 갖다 바쳤는지 내가 아는데…’라는 생각이 든다면 어떨까요? 아무리 잘 포장해서 말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났다고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직장에서는 말단 사원의 자리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라도 눈속임으로 일하지 않고 주께 하듯 최선을 다한다면 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입니다. 병에 걸려서 죽어가는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늘나라의 소망 가운데 기뻐할 수 있다면 하나님은 분명 영광 받으십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이루었느냐, 앞으로 무엇을 이룰 것이냐가 아니라, 지금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모습을 드러내고 있느냐입니다.

시리즈를 마무리하면서, 우리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해보길 원합니다. “내 생각, 말, 삶에서 하나님은 바르게 드러나고 계신가? 나를 통해 보여지는 하나님의 모습은 왜곡되어 있지 않은가?” 유명한 오라토리오 ‘메시아’를 작곡한 헨델은 악보의 끝에 “S. D. G.”라는 약어를 기록했습니다. “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입니다. 우리 삶의 매 순간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 우리 삶의 끝에 “S. D. G.”라는 세 글자를 힘차게 외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두 가지 방법 (슥 14:16-21)

오늘은 스가랴서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연속극에서 마지막 장면은 매우 중요합니다. 마지막 장면을 아슬아슬하게 만들면 다음 주에 어떤 내용이 나올까 궁금해하며 보게 됩니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이 시원찮게 끝나면 그 다음 주는 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장면이 어떻게 끝나느냐에 따라서 다음 회 연속극의 시청률이 달라집니다. 

스가랴서의 마지막 부분에서 스가랴 선지자는 독자에게 강한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의 사명은 우선적으로 성전을 재건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백성들이 16년 동안이나 성전을 짓지 못하고 있자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가 등장한 것입니다. 그들은 백성들에게 “너희를 위해서는 살만한 집을 짓고 성전은 짓지 않는 것이 옳은 것인지 생각해보라”고 말했습니다. 자기의 소위를 살펴보라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유다 백성들을 격려하여 성전을 짓는 것이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의 일차적인 사명이었습니다. B.C. 520년에 두 선지자가 예언을 시작해서 4년이 지난 B.C. 516년에 성전이 완공되었습니다. 이 성전을 스룹바벨 성전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으로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의 사명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스룹바벨 성전의 완공은 연속극 한편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이번 회가 끝나고 또 다음 회를 기대하게 하는 것입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스룹바벨 성전이 완공되면 그 성전에 만국의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서게 되실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아시는 한 날, 즉 새로운 시대가 시작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 시대를 메시아시대 혹은 신약시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신약시대에 관한 예언은 그리스도 예수님의 초림으로 시작되어 재림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종말론적인 용어로는 “already but not yet”이라고 합니다.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스가랴 14장이 예언하고 있는 메시아시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면 완성될 것입니다. 결국 스가랴 선지자는 신약시대가 되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신 목적을 달성하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신 근본 목적은 인간의 존재 목적과 동일합니다.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사 43:7).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신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1647년 영국에서 재정된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의 첫 번째 질문이 ‘인간의 최고 목적은 무엇입니까?’입니다. 이것에 대한 답은 ‘인간의 최고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로 모이는 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십니까? 우리가 자식들을 키우면서 자식들이 부모와 함께하는 것을 즐거워하고 기뻐하면 얼마나 기분이 좋습니까? 하지만 연락도 하지 않고 부모에게는 관심도 가지지 않는다면 속상하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하나님도 우리를 통해 영광 받으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메시아시대가 되면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하여금 두 가지 방법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Ⅰ.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 4:23). 

구약시대는 제사시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만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메시아시대가 되면서 유대인뿐만이 아니라 이방인들도 예루살렘이 아닌 모든 곳에서 아버지께 예배함으로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구약의 제사는 그림자이고 신약의 예배는 실체입니다. 

구약의 제사는 민족적인 제한이 있지만 신약의 예배는 민족적인 제한이 없습니다. 구약의 제사는 예루살렘이라는 장소의 제한이 있지만 신약의 예배는 그런 제한이 없습니다. 어디서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는 오실 메시아를 바라보면서 드렸지만 신약의 예배는 이미 오신 메시아를 기념하면서 드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구약의 제사와 신약의 예배는 아주 다른 것입니다. 

스가랴 14장 16~19절까지는 신약의 예배에 관해 네 가지 측면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열국 중에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숭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슥 14:16). 

첫째, 예배의 대상이 누구냐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당연한 진리를 우리가 실천하지 않습니다. 특히 한국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 외에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명절만 되면 제사를 드리지 않습니까? 여호와 하나님만이 예배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고 우상숭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귀신은 우리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없고 살아있는 사람이나 죽은 사람도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명절만 되면 드리는 제사는 죽은 사람에게 예배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제사상을 차리면 죽은 조상이 와서 밥을 먹는 것이 아니라 귀신들이 모여드는 것입니다. 돌아가신 분이 무슨 밥을 먹습니까? 밥은 살아계실 때 대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명절에 아무리 모든 친척, 가족들이 연합해서 핍박한다 할지라도 제사는 지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 친척 중에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지 얼마 안 되었는데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시누이가 제사를 지내야 된다고 압박하자 초신자니까 어쩔 수 없이 제사를 지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제사 지내고 두 가지 어려움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첫째,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죽을 뻔했고 둘째, 이웃집에 갔다가 개에게 물려서 병원신세를 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다시는 제사를 지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고 합니다. 불신자가 제사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상관하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성도들이 제사를 지내는 것은 하나님께서 몹시 싫어하시고 강한 징계를 내리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번 명절에는 제사를 지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 징계를 자초합니까?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명절만 되면 고생을 많이 하시는데 영적으로 싸워야 합니다. 귀신들은 우리가 강하게 나가면 물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타협하고 자꾸 뒤로 물러가면 귀신들은 더욱 우리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사 지내라고 압박하는 어르신이 계셔도 나는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할 수 없다고 강하게 이야기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저희 큰 집이 오랫동안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런데 제가 예수님을 믿고 큰 집에 전화했더니 그날 밤 형수가 꿈을 꿨답니다. 길 양쪽으로 한쪽에는 절이 있고 한쪽에 교회가 있었는데 절의 스님들이 목탁을 치면서 우리가 졌다고 하자 교회의 목사님이 어서 오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 이후 큰 집도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신앙적으로 강하게 나가면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고 귀신들도 물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예배의 주체에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들도 다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열국 중에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숭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슥 14:16).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열국은 이방인입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남은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도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는 주체가 된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유대인들만 예배를 드렸는데 신약시대에는 이방인들도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또 이것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천국에 올라가게 되면 완성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7장 9~10절은 천국에서 이 예언이 완성된 것을 보여줍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계 7:9~10). 

천국은 예배의 장소이며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장소입니다. 천국에서는 족속과 방언을 가리지 않고 각 나라에서 나온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여호와의 영광과 어린양의 은혜를 찬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행하신 일들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것이 예배의 내용이 된다는 것입니다. 스가랴 14장 16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했는데 유대인에게는 일곱 절기가 있습니다.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오순절, 나팔절, 속죄일, 장막절. 장막절과 초막절은 같은 것입니다. 초막절은 7월 15일에 시작되는데 7일 동안 원두막을 짓고 원두막에서 사는 것입니다. 원두막에 들어가 7일을 지내고 8일째 되는 날 거룩한 성회로 모이는 것인데 초막절은 왜 지키는 것이냐? 

레위기 23장 41~43절에 그 이유가 나옵니다. 초막절은 지금 우리가 잘 먹고 잘 살지만 과거에 애굽의 노예였던 우리를 하나님께서 건져주셨다는 것을 기억하는 절기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편안한 집에서 살고 있지만 과거 40년 동안 광야를 방황하면서 장막에 거하며 살았다는 것을 기억하기 위해 7일 동안 원두막을 짓고 거하는 것입니다. 

초막절은 애굽의 노예생활로부터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신 것과 광야 생활 가운데 보호하시고 축복하신 것을 기억하면서 지키는 절기인 것입니다. 이처럼 메시아시대의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가 2000년 전에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를 지옥과 영원한 멸망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악한 마귀의 권세에서 우리를 풀어 주신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것을 기억하고 광야 같은 세상에서 지금까지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신 것에 감사하는 것이 예배의 내용인 것입니다. 

넷째, 예배의 상벌을 하나님께서 보장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에게 현세에도 복을 주시고, 내세에도 복을 주시지만 그렇지 않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벌을 내리신다는 것입니다. 

“애굽 사람이나 열국 사람이나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의 받을 벌이 이러하니라” (슥 14:19). 

어떤 분은 이 구절이 예수님의 재림 이후 천년왕국에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저는 천년왕국을 믿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이 구절은 천년왕국이나 천국이 아닌 교회시대를 말하는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않는다는 것은 예배를 드리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며 결국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신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축복이지만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심판과 멸망입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구원받습니다. 하지만 믿지 않으면 구원이 아닌 저주와 멸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이중구조입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요 3:18). 

예배 생활에 성공하는 사람은 복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아주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주일이 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려야겠다는 생각으로 예배를 정성스럽게 드리십시오.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기 때문에 정성으로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보시고 우리를 축복해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 예언이 실현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예배의 대상은 여호와 하나님이시고, 예배의 주체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도 포함되고, 예배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가 과거에 행해주신 일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것이며,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상이 있는 것입니다. 창조주요 구원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성도의 특권이고 영예며 축복입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Ⅱ. “성결”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그 날에는 말 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 여호와의 전에 모든 솥이 제단 앞 주발과 다름이 없을 것이니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솥이 만군의 여호와의 성물이 될 것인즉 제사 드리는 자가 와서 이 솥을 취하여 그 가운데 고기를 삶으리라 그 날에는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가나안 사람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슥 14:20~21). 

말씀을 보면 여호와께 성결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너는 또 정금으로 패를 만들어 인을 새기는 법으로 그 위에 새기되 여호와께 성결이라 하고 그 패를 청색 끈으로 관 위에 매되 곧 전면에 있게 하라” (출 28:36~37). 

구약시대에 오직 대제사장만이 머리에 쓰는 관이 있었는데 이 관 앞에 정금에다 여호와께 성결이라고 새겨서 매달았습니다. 그러면 이 관을 쓴 사람이 대제사장인 것을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말 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된다는 것입니다. 말 방울은 말의 목에 달아 말이 움직일 때마다 소리가 나게 한 것인데 이것의 의미는 천하고 보잘 것 없는 것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고 기록된다는 것입니다. 솥도 마찬가지로 여호와의 성전에서 사용되는 솥만 성물이었는데 메시아 시대가 되면서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솥이 다 성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히 여겨졌던 제단 앞에 피를 담는 주발 또한 성물이 된다고 했습니다. 

성물이라던가 성결이라는 것은 윤리적이고 도덕적으로 흠이 없다는 의미도 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따로 구별되어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같은 그릇이라도 하나님께서 쓰시면 거룩한 그릇이고, 사람이 쓰면 거룩하지 않은 그릇입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구약시대에는 대제사장이나 제사장과 같은 사람들만 하나님께 구별되어 사용되었지만 메시아시대에는 천하게 여김을 받았던 사람들도 구별되어 거룩하게 쓰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는 종교개혁가인데 스가랴 14장 14절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신약시대가 되면 제사장과 평신도의 구별이 없어지고 모든 신자가 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하게 된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구별되어 쓰임 받는 사람에 대해서 민족적, 지역적, 교육적, 신분적 차별이 없어지게 되고 아무리 천하고 더러운 존재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구원받으면 하나님께 구별되어 쓰임 받는 거룩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통해 이 원리를 실제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 사두개인, 랍비 등 거룩한 척하고 누구보다 의롭다고 생각했던 자들에게 회칠한 무덤과 같은 존재라고 말하였습니다. 하지만 창녀로 살던 여인이 회개하여 예수님을 믿고 따르자 거룩한 여인이라고 한 것입니다. 또 남편이 여섯 번이나 바뀐 여인도 예수님을 만나서 거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백성들을 갈취하던 세리 마태도 예수님을 만나 자신의 것을 다 내놓는 거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절대 불가능했던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유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방인 중에서도 아주 먼 곳의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런 우리도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께서 구별하여 거룩한 존재가 되었으니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수종들고 영광을 돌리도록 구별된 사람입니다. 이것이 거룩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쓰시겠다고 하면 “예”라로 대답하고 달려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는데 “왜 부르십니까?” 이렇게 대답하는 사람은 거룩한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거룩한 사람은 주님께서 쓰시겠다고 하면 아낌없이 드리는 사람입니다. 


 사람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이 없습니다. 
출세하는 것이 사람의 목적이 아닙니다. 
돈을 버는 것도 사람의 목적이 아닙니다. 
돈, 건강, 인기, 명예 이런 것들은 다 살아가는 수단이지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 한마디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 사람은 자신의 존재 목적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첫째,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함으로 영광을 돌릴 수 있고 둘째, 하나님께 구별되어 하나님의 일에 헌신함으로써 거룩한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을 믿습니다. 

스가랴 14장에서는 두가지 표현이 중요합니다.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열국 중에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숭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슥 14:16). 

누구에게 숭배합니까? 여호와께 숭배합니다. “그 날에는 말 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 (슥 14:20).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으면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됩니다. 스가랴 마지막 장을 보면서 우리 마음에 두 표현 ‘여호와께 숭배’와 ‘여호와께 성결’이 강하게 새겨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 자료(주제 중심) / 안식일과 주일,


안식일과 주일(골로새서 2: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Therefore do not let anyone judge you by what you eat or drink, or with regard to a religious festival, a New Moon celebration or a Sabbath day.

폄론(貶論)이란 단어가 사용된 한글 개역 성경을 검색하면 3구절이 소개됩니다.
먼저 "폄론(貶論)" 이란 단어를 살펴보겠습니다.

폄론(貶論) :  낮출 폄(貶) - 떨어트릴 폄, 논할 론(論)
남을 깎아 내려 헐뜯음. 또는 그런 말.

다른 말로 폄훼(貶毁) : 낮출 폄(貶), 헐 훼(毁)


(역사적 교훈과 예화)
재건교회 성도들의 경우 - 주일에 예배를 위하여 토요일에 교회에 와서 철야를 하고 주일 예배를 마친 후 다시 주일에 철야를 한 후 월요일 새벽에 집으로 돌아가는 아주 열성적인 성도들이 있었다.
이러한 영향을 받은 장로교회에서 주일에 물건을 구입하지 말라, 돈을 사용하지 말라고 극단의 주장을 가르쳐 왔다.

그러나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나?

창세기 2:2-3 / 안식일의 의미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그 일곱째 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안식하셨음이니라

출애굽기 20: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신명기 5:15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느헤미야 13:22
내가 또 레위 사람들에게 몸을 정결하게 하고 와서 성문을 지켜서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라 하였느니라 내 하나님이여 나를 위하여 이 일도 기억하시옵고 주의 크신 은혜대로 나를 아끼시옵소서.





안식일을 지키라 - 에례미야 17:21, 22, 24, 27


골로새서 2: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디모데전서 5:13

또 저희가 게으름을 익혀 집집에 돌아 다니고 게으를뿐 아니라 망령된 폄론을 하며 일을 만들며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하나니

요한삼서 1:10
이러므로 내가 가면 그 행한 일을 잊지 아니하리라 저가 악한 말로 우리를 망령되이 폄론하고도 유위부족하여 형제들을 접대치도 아니하고 접대하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어 쫓는도다.




인터넷 설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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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머



잠시 여유를 가지고 미소 짓기 위한 유머

"그대의 마음을 웃음과 기쁨으로 감싸라.
그러면 인체에 해로움을 막아주고 생명을 연장시켜 줄 것이다."
셰익스피어

웃으면 스트레스가 줄어들게 될 것이고, 그로 인해 더욱 건강해질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안전 운전자

어떤 가족이 승용차를 몰고 고속도로를 달리는데 경찰이 차를 세웠다.
운전자가 경찰에게 물었다.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요"
경찰이 웃음을 띠며 말했다.
"아닙니다. 선생님께서 안전하게 운전을 하셔서 '이달의 운전자'로 뽑히셨습니다.
축하합니다.
상금이 500만원인데 어디에 쓰실 생각입니까?"

운전자가 기뻐하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우선 운전면허를 따는 데 쓰겠습니다."
그러자 옆자리에 있던 아내가 황급히 말을 잘랐다. "아, 신경 쓰지 마세요. 저희 남편이 술 마시면 농담을 잘해서요" 


이발소

한 외국인이 충청도 지방을 여행하다 이발소에 들렀다.
영어를 한마디도 못하는 이발사는 외국인이 들어오자 당황하며 안절부절 못했다.
어색한 침묵이 이어지는 가운데, 어떻게 인사할까 망설이며 식은땀을 흘리던 이발사는 그냥 우리말로 인사를 건네기로 마음을 먹고는, 용기 내어 이렇게 인사를 했다.

"왔슈?"

외국인은 이발사가 서투른 영어로 '뭘 보느냐(What see you)"고 묻는 줄 알고 앞의 거울을 가리키며 말했다.

"미러(Mirror)"

그러자 이발사는 잘 알았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외국인은 머리를 깎는 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

한참 후 눈을 뜬 외국인.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며 외쳤다.

"오 마이 갓!"

그 이발사는 외국인이 머리를 밀라는 줄 알고, 그의 머리를 몽땅 밀어버렸던 것이었다..;;



점을 빼니

숫자 4.5와 5가 있었다.
5보다 낮은 4.5는 항상 5를 형님으로 모시며 깍듯하게 예의를 차리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 그렇게 예의 바르던 4.5가 5에게 반말을 하며 거들먹거렸다.
그 모습을 본 5가 화를 내며 말했다.
"너 죽을래? 어디서 감히!"
그러자 4.5가 째려보면서 대답했다.
"까불지 마! 나 점 뺐거든!"



면접

어떤 회사에서 신입사원 면접을 보고 있었다.

면접관 : 다음 사람! 자네는 특기가 뭔가?
지원자1: 네, 저는 하늘을 날 줄 압니다.
면접관 : (어이없어 하며) 그만 나가 보게!
그런데 그 입사 지원자는 '네.'하고는 창문 밖으로 날아가 버렸다.

면접관은 너무나 놀란 나머지,
앞으로는 함부로 사람 말을 무시하지 않기로 했다.

면접관 : 다음 사람! 자네는 특기가 뭔가?

지원자2 : 저는 개와 이야기를 할 줄 압니다.
면접관은 또다시 기가 막혔지만, 아까 하늘을 나는 사람을 봤기 때문에
꾹 참으며 말했다.
면접관 : 어디 해 보게
그러자 입사지원자는 데리고 온 개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지원자2 : 뽀삐, 벽을 영어로 뭐라고 하지?
개 : 월(wall)~ 월(wall)~!
지원자2 :  그럼 중세 봉건시대의 최고 권력자는 누구야?
개 : 왕(王)~ 왕(王)~!

이 상황을 어이없는 표정으로 지켜보던 면접관.
그럼 그렇지 어떻게 개와 정상적으로 이야기를 할 수 있겠냐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면접관 : 이만 나가 보게!

그러자 입사 지원자2와 같이 나가던 개가 하는 말.

" (고개를 갸웃거리며) 왕이 아니라 임금인가? " 

그것도 모름?

아들과 어머니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어머니가 말했다.
"얘야! 남들은 달에도 간다고 하는데, 우리도 뭔가를 해 보면 어떨까?
언젠가 우리도 우주선을 만들어 태양에 가보는 건 어때? "
그러자 아들이 말했다.
"에~이. 어머니 그건 불가능해요! 태양이 있는 곳으로 500마일 가까이까지 가면  모든 것이 다 타서 바삭바삭해진단 말이에요"

이 말을 듣고 어머니가 하는 말.

"이런 바보야. 밤에 가면 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