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중간기


신구약 중간기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가?

구약의 마지막 책들과 그리스도의 출현 사이의 시간을 “신구약 중간기” (또는 “신구약 사이의 기간") 라고 부릅니다. 
이 기간 동안에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예언의 말씀이 없었기 때문에, "400년의 침묵기"라고 부릅니다. 
이 기간 동안에 팔레스타인의 정치적, 종교적, 사회적 분위기는 크게 바뀌었습니다. 
그때 발생한 일들의 대부분은 선지자 다니엘에 의해 예언되었습니다(다니엘 2장, 7장, 8장, 11장을 참조하고 역사적인 사건들을 비교해 보십시오).

이스라엘은 기원전 532-325년경에 페르시아 제국의 통치하에 있었습니다. 
페르시아인들은 유대인들이 거의 아무런 간섭을 받지 않고 그들의 종교를 유지하도록 허용하였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성전을 재건하고 그곳에서 예배하는 일도 허용했습니다(역대하 36:22-23; 에스라 1:1-4). 
이 기간은 구약 성경 시대의 마지막 100년과 중간기의 처음 100년을 포함합니다. 
폭풍이 몰려오기 전에 고요한 것처럼, 이 기간은 상당히 평화롭고 안락한 시기였습니다.

중간기가 시작되기 전, 알렉산더 대왕은 페르시아의 다리오 왕 Darius을 물리치고, 온 세계에 헬라제국의 통치를 확립하였습니다. 
알렉산더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생이었고 헬라 철학과 정치학을 잘 배웠습니다. 
그는 그가 정복한 모든 땅에 헬라 문화를 장려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 결과, 히브리어 구약 성경은 헬라어로 번역되었으며, 이로 인해 70인역이라는 헬라어 성경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구약 성경을 인용한 대부분의 구절은 70인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알렉산더는 유대인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긴 했지만, 여전히 헬라적 생활 방식을 강력하게 장려했습니다. 
헬라 문화는 매우 세속적이고, 인본주의적이며, 경건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이로부터 좋은 영향을 받지 못했습니다.

알렉산더가 죽은 후, 유대는 일련의 후계자들에 의해 통치되었으며, 셀루시드 왕조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Antiochus Epiphanes에 이르게 됩니다. 
안티오쿠스는 유대인들의 종교의 자유를 거부하였을 뿐만 아니라, 훨씬 더 악한 일을 행하였습니다. 
기원전 167년경 그는 합법적인 제사장직을 무너뜨렸으며, 불결한 동물들과 이교도 제단으로 성전을 더럽히고 모독했습니다(마가복음 13:14를 보면 미래에 비슷한 사건이 일어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안티오쿠스의 행동은 종교적인 강간과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마카비 형제들과 하스모니안 가문이 주도한 안티오쿠스에 대한 유대인의 저항으로 합법적인 제사장들이 회복되었고 성전이 복구되었습니다. 마카비 항쟁의 시기는 전쟁과 폭력과 내란의 시기였습니다.

기원전 약 63년 경 로마의 폼페이우스는 팔레스타인을 정복하고, 유대 전체를 시저의 통치 하에 두었습니다. 
로마 황제와 상원 의원에 의해 결국 헤롯이 유대의 왕이 되었습니다. 
로마 제국은 이스라엘에 세금을 부과하고 유대인들을 통제하며, 종국에는 메시아를 로마의 사형틀인 십자가에서 처형시켰습니다. 
이제 유대 지방에는 로마, 헬라, 히브리 문화가 혼합 되었습니다.

헬라제국과 로마제국의 점령 기간 동안 팔레스타인에서는 두 개의 중요한 정치적, 종교적 집단이 출현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구전을 통해 내려오던 전통을 모세 율법에 추가하였고, 마침내 자신들의 율법을 하나님의 율법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마가복음 7:1-23 참조).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종종 바리새인들의 가르침과 일치하였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공허한 율법주의와 긍휼의 마음이 부족한 것에 대하여 강력하게 비난하셨습니다. 
사두개인들은 귀족들과 부자들을 대표했습니다. 
산헤드린을 통해 권력을 행사하던 사두개인들은 구약에 속한 모세의 책들 외에는 모두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부활을 믿기를 거부했고, 헬라 사람들을 크게 동경함으로써 일반적으로 헬라 문화에 물들어갔습니다.

그리스도의 사역을 위한 무대를 준비하기 위하여 중간기에 일어난 사건들은 유대 백성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습니다. 유대인들과 다른 나라에서 온 이방인들 모두가 종교에 불만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이교도들은 다신론의 정당성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로마인과 헬라인은 이제 그들의 신화에서 벗어나 헬라어와 라틴어로 쉽게 읽을 수 있게 된 히브리어 성경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낙담했습니다. 다시 한번, 그들은 정복 당하고, 억압 받고, 더럽혀졌습니다. 소망은 거의 사라진 상태였고, 믿음도 바닥까지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그들과 그들의 신앙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메시아의 등장 밖에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메시아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여러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고 계셨습니다. 로마인들은 도로를 깔았고 (복음의 전파를 돕기 위해서), 모든 사람들은 공통의 언어인 코이네 헬라어 (신약성경을 기록한 언어)를 이해하고 있었고, 여행하기에 (복음을 더 편만하게 전파하는 것을 돕기 위해서) 불편하지 않은 자유와 평화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신약 성경은 유대인 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위한 소망이 어떻게 이르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분을 찾던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예언을 성취할 것을 인식하고 대망하였습니다. 로마 백부장, 지혜자들, 바리새인 니고데모의 이야기는 그 시대에 몇 가지 다른 문화권 출신의 사람들에 의해 예수님이 어떻게 메시아로 인식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중간기의 "침묵의 400년"은 지금까지 전해졌던 이야기 중에서 가장 위대한 이야기,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의해 깨어졌습니다.


신구약 중간사 개요

시작하는 말

‘신구약 중간사’(中間史, Intertestamental period)는 무엇이며, 어떤 의미가 있는가? 구약 말라기 선지자에서 신약 세례 요한의 등장 사이에는 400여 년이라는 간격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말라기를 읽고 마태복음을 펼친 독자는 순식간에 약 4세기를 뛰어넘는 셈이 된다. 그런데 성경만으로는 이 기간에 일어난 일을 알 수가 없다. 하나님은 ‘나의 사자’1)를 마지막으로 세례 요한 전까지 자신의 백성을 향해 침묵하셨다. 이 400여 년의 시간을 신구약 ‘중간사’(中間史) 혹은 ‘중간기’(中間期)라고 한다.

(1) 신약성경 이해의 첫 단추

신약성경은 많은 왕조(王朝)의 발흥과 쇠퇴를 단숨에 뛰어넘고 독자를 거대한 로마제국으로 안내한다. 독자들은 또 바리새인, 사두개인 등 구약에서 발견할 수 없는 유대교의 분파들을 만나게 되고 수전절(修殿節, Hanukkah) 같은 새로운 절기를 보게 된다. 분봉 왕, 회당 등 낯선 단어도 발견한다.  

이 때문에 성경 특별히 신약 이해에 있어 신구약 ‘중간사’에 대한 공부는 매우 중요하다. 그 시대의 역사와 문화의 배경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는 첫 단추가 된다. 레이몬드 설버그(Raymond F. Surburg)는 신구약 중간사의 의의와 중요성을 이렇게 말했다.

“중간사 기간에는 중요한 발전들이 있었다. 강대한 왕도들의 교체가 있었고 유럽의 판도가 두세 차례나 바뀌었으며 유럽과 아시아 국가들 사이의 국경선이 크게 변모하였고 새로운 문화들이 출현했다.2) 

또 복음서에서 우리는 산헤드린공회를 만나고, 장로들의 전통에 대해 읽으며, 서기관들의 활동을 대하게 된다. (중약)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은혜를 베푸셨을 때 팔레스타인은 유대와 사마리아와 갈릴리 이렇게 셋으로 분할되었다. 성경상의 이런 분할은 어떻게 유래되었는가?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이 신구약의 중간역사 때 있었던 유대인들의 지리와 역사와 종교적 발전을 연구할 때에 비로서 알 수 있다.”3)

그러나 ‘중간사’에 대한 연구는 쉽지 않다. 자료가 제한적이고 그마저도 불확실한 내용이 많다. H. 야거스마는 “이 기간의(편집자 주, BC 330년-AD 135년) 이스라엘 역사를 재구성하는 데 있어서 우리는 자주 상당히 많은 불확실한 것들과 가정들로 허덕이지 않으면 안 된다. (중략) 이 기간 에 이스라엘 역사의 학문적인 토론에 있어서 실제로 많은 점이 그 어떤 일치된 견해가 없다.”4)라고 어려움을 토로한다.

동시에 그는 ‘중간사’ 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들로 구약성경, 신약성경, 외경(外經, Apocrypha), 위경(僞經, Pseudographia), 필로의 저작, 요세푸스의 저작, 헬라와 라틴저작, 사해사본, 탈무드, 미드라쉬, 미쉬나 같은 랍비 문헌, 고고학의 증거 등을 말한다.

(2) 메시아를 보내시기 위한 준비 기간

신구약 ‘중간사’가 중요한 또 하나의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은 400여 년의 그 기간을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보내시기 위한 하나님의 예비적 차원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것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갈 4:4) 

성경은 ‘때가 차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다고 기록한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때가 찼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때’란 무엇인가? 약 400년 동안 어떤 일이 있었을까? 학자들은 중요한 몇 사건을 공통으로 언급한다.  

  ① 팍스 로마나(Pax Romana)

로마의 초대(初代) 황제 아우구스투스(Gaius Octavius Thurinus, BC 63-14 AD)부터 소위 ‘오현제(五賢帝)’5)라 불리는 다섯 명의 황제가 통치할 때까지의 약 200년간 계속된 로마의 평화를 뜻한다. 외국과 크고 작은 전쟁과 내부의 반란(叛亂) 등 군사적 충돌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로마제국(Roman Empire)이 영토 확장을 최소화하면서 상대적으로 평화를 누린 시기임은 분명하다.

로마제국은 이 기간 정복전쟁(征服戰爭)을 통해 영토를 넓히기보다 국경을 요새화해 수비하는 데 집중했다. 그에 걸맞게 군대를 재편하는데 공병(工兵)을 집중적으로 육성했다. 자연스레 보병(步兵)은 쇠퇴하게 된다. 육성된 공병은 로마의 토목공사 기술을 크게 발전시켰다. 이 기술을 토대로 만들어진 약 28만km의 잘 뻗은 도로는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을 탄생시켰다. 로마제국이 준비해 놓은 이 길은 사도 바울과 많은 전도자가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파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② 언어의 통일과 구약 70인 역 탄생

B.C. 336년 약관 20세의 한 젊은이가 암살된 아버지의 뒤를 이어 마게도냐(Macedonia) 도시국가 왕으로 등극했다. 그는 바로 그의 아버지필립 2세(Philip II, BC 382-336)가 한 번도 통합된 적이 없는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을 자신의 발아래 굴복시킨 전쟁 전문가였다.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은 반란을 일으켰다. 아버지 필립 2세는 암살당했고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젊은이는 반란군을 빠른 속도로 진압했다. 그리스 전역을 순식간에 장악한 그는 아버지가 맡았던 페르시아 원정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바로 알렉산더(Alexander III of Macedon, BC 356-323)였다. 그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순간이었다.

알렉산더는 마게도냐 사람이었으나 그리스의 문화를 존중했다. 이는 그의 스승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BC 384-322)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으로 알려진다. 알렉산더는 정복한 지역마다 자신의 이름을 딴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라는 도시를 세우고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를 융합한 헬레니즘(Hellenism) 문화를 탄생시켰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알렉산더를 정복자인 동시에 헬레니즘의 전파자로 기록한다.

본래 팔레스타인이나 지중해 연안은 아람어(‎Aramaic language) 등을 많이 사용했으나 알렉산더가 정복한 이후 헬라어(Greek language)를 세계공통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언어의 통일은 복음 전파에 큰 유익을 주었다. 김병국 교수는 “언어의 통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었는가 하는 것은 초기 기독교가 번성했던 지역과 헬라어가 공용어였던 지역이 거의 정확히 겹친다는 사실이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6)고 했다.

또 통일된 헬라어로 구약성경 ‘70인 역’(七十人譯, LXX, Septuagint)이 탄생했다. ‘70인 역’이란 이스라엘 12지파에서 6명씩 선정된 72명의 번역자가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성경이다. 그래서 70을 의미하는 라틴어 ‘셉투아진트’라 불리기도 하고 수비법에 따라 ‘LXX’(50+10+10)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70인 역’의 번역 작업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BC 285-247년경 이루어졌다.

이 ‘70인 역’ 구약성경은 초대교회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1세기는 유대인들조차 특별한 교육을 받지 못했을 경우 히브리어(Hebrew Language)를 알지 못했던 시대였다. 초대교회의 많은 구성원이었던 이방인들은 당연히 히브리어를 몰랐다. 만약 이 ‘70인 역’ 구약성경이 없었더라면 다수의 사람이 구약성경을 읽거나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편 헬라어는 지역과 계층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성경은 여러 헬라어 종류 중 가장 대중적이고 쉬운 편에 속했던 ‘코이네 헬라어’(Κοινὴ Ἑλληνική)로 기록되었다. 이 역시 복음이 대중적으로 전해지는 데 크게 기여한 요소였다. 하나님은 비록 침묵하셨으나 여전히 이같이 역사 속에 개입하셨고 그리스도를 보내실 ‘때’를 조성해가셨다.

1) 말라기의 뜻, 말라기가 고유 명사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2) 레이몬드 설버그,『신구약 중간사』(기독교문서선교회, 2004), 9.
3) 같은 책, 11.
4) H.야거스마,『신약배경사』(솔로몬, 2004), 19-20.
5) 오현제는 로마의 12대 황제인 네르바, 13대 트라야누스, 14대 하드리아누스, 15대 안토니우스, 16대 아우렐리우스를 말한다.
6) 김병국,『신구약 중간사 이야기』(대서, 2013), 34.

1.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멸망

사울, 다윗, 솔로몬이 40년씩 통치함으로 120년간 유지된 통일 왕국 이스라엘은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때에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로 양분된다.

폴 존슨는 이 남북분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르호보암은 무력으로 통일 왕국을 유지할 군사 수단과 방편이 없었고, 북쪽 지역 사람들은 독자 왕조를 세우면서 르호보암과 결별했다. 신(新) 아시리아제국(Neo-Assyrian Empire, BC 911-609)과 신(新) 바빌로니아제국(Neo-Babylonian Empire, BC 626-539) 이 연이어 부상(浮上)하는 시대에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이라는 작은 두 왕국은 각자 파멸을 향해 나아갔다.”1)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을 포함 19명의 왕이 다스리다 B.C. 722년 앗수르(Neo-Assyrian Empire)에 의해 영원히 멸망하고 남유다는 르호보암을 시작으로 20명의 왕이 통치하다 B.C. 586년 바벨론(Neo-Babylonian Empire에 나라가 망하게 된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는 크고 작은 이방의 침입을 받았으나 각각 앗수르와 바벨론에게 멸망하기 전까지 국가로서의 주권을 상실한 적은 없었다.

(1) 앗수르에 의한 북이스라엘의 멸망

BC 8세기 유프라테스(Euphrates)강을 넘어보지 못하고 번번이 실패했던 앗수르가 역사에 자신들의 이름을 새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제국 건설 중심에는 디글랏빌레셀 3세(Tiglath-Pileser III, BC?-727, 성경에는 ‘불’로 기록)라는 강력한 왕이 있었다. 존 브라이트는 그를 “앗시리아 역사에서 이 시대의 막을 열고 진정으로 제국을 창건한 인물로 매우 활기차고 유능한 통치자였다.”2)라고 평가한다. 폴 존슨은 디글랏빌레셀이 “호전적인 아시리아 민족을 제국주의자들로 바꾸어놓았다.”3)라고 했다.

앗수르가 점점 강성해지는 시기에 북이스라엘의 상황은 참혹했다. 왕위(王位)를 찬탈(簒奪)하기 위한 암살이 이어졌고 10년 사이에 다섯 명의 왕이 바뀌기도 했다. 북이스라엘의 16대 왕 므나헴은 앗수르가 침공하자 조공을 바쳐 왕좌를 지켰다. 요세푸스는 “므나헴은 앗수르군과 싸워서 이득이 될 게 조금도 없다고 생각하고 은 천 달란트를 주어 전쟁을 종식시켰다. 므나헴은 이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 각 사람당 인두세(人頭稅)를 50드라크마씩 내도록 강요했다.”4)고 한다.

므나헴에 이어 왕위에 오른 브가히야는 불과 2년 만에 부하 베가에 의해 암살을 당했다. 왕위에 오는 베가는 반(反) 앗수르 정책을 펼쳤다. 학자들은 베가의 반역이 친(親) 앗수르 정책에 대한 반기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게오르크 포어러는 “베가가 그의 선임자들과는 다른 정치를 시작했는데 여기에 베가를 살해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5)라며 “(친 앗수르 정책은) 오히려 백성들과 국가를 많이 손상시켰다.”6)라고 했다.

존 브라이트는 “다메섹의 왕 르신과 몇몇 블레셋인 군주들이 앗시리아에 대한 저항 세력을 조직하려다가 므나헴이 그들에게 합류하지 않으려는 것을 알고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그들의 계획에 호응할 것으로 생각된 베가를 밀어주었을 가능성이 있다.”7)고 했다. 베가는 다메섹의 왕 르신, 수리아(아람)와 동맹을 맺고 앗수르에 대항할 준비를 했다. 블레셋과 에돔도 동맹군에 합세했다. 동맹군은 남유다도 함께 하길 원했으나 유다는 이를 거절했고 그러자 동맹군의 칼이 유다를 먼저 겨눴다. 당시 유다의 왕은 아하스였다.

동맹군은 예루살렘을 포위했으나 생각만큼 빠르게 성을 정복하지 못했다. 아람과 다메섹은 성 인근의 도시와 수비대 정도만 무력화시킨 후 북이스라엘을 남겨두고 다메섹으로 돌아갔다. 아하스는 이스라엘을 꺾을 기회라고 생각해 남아있는 북이스라엘과 전투를 벌였지만 그러나 생각과 달리 전쟁에 대패하고 만다.

요세푸스는 “예루살렘 왕은 수리아 사람들이 귀국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스라엘 왕쯤이야 한 번 싸워 볼 만하다고 생각하고 군대를 성 밖으로 끌고 나와 대결하였다. 한바탕 접전을 벌였으나 그만 이스라엘 왕에게 패하고 말았다. (중략) 그날 이스라엘군에 의해 전사한 유대 군사가 120,000명이나 되었다.”8)고 기록했다.  

더 이상 왕권을 유지할 힘이 없었던 아하스는 성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금을 내어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 3세에게 바치면서 도움을 요청한다.(왕하 16:7,8) 디글랏빌레셀 3세는 그 길로 수리아를 공격해 초토화시킨 다음 다메섹을 점령하고 르신 왕을 죽였다. 또 다메섹 백성을 다른 곳으로 보내고 앗수르 인들을 다메섹으로 이주시켰다.(왕하 16:9)

이 와중에 북쪽 이스라엘에는 또 다른 변화가 찾아왔다. 호세아는 자신의 친구 베가를 살해하고 북이스라엘의 19번째 왕에 오르게 된다. 호세아는 티글랏빌레셀 3세가 죽고 살만에셀 5세(Shalmaneser V, BC ?-722)가 앗수르의 왕위에 오르자 바치던 조공을 중단하고 애굽에 도움을 요청한다. 존 브라이트는 이것을 자살 행위라고 표현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자살 행위였다. 이때 이집트는 대단치 않은 군소 국가들로 나뉘어 각축하고 있었기 때문에 누구를 도울 처지가 못 되었다.”9) 결국 호세아의 잘못된 판단은 역사가 그를 북이스라엘의 마지막 왕이라고 기록하도록 만들었다. 살만에셀 5세(Shalmaneser V, BC ?-722)가 침공해왔다. 이스라엘은 사마리아 성에서 약 3년을 버텼지만 결국 함락당했다. 사마리아를 함락한 살만에셀 5세에 이어 왕위에 오른 사르곤 2세(Sargon II, BC 765-705)가 북이스라엘을 철저히 짓밟았다.

폴 존슨은 “고고학 발굴 자료에서도 당시의 재앙을 확증해주는 증거가 충분히 나왔다. 사마리아 내의 왕실 구역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므깃도(Megiddo)는 완전히 무너졌고 무너진 건물 더미 위에 아시리아식 새 건물이 세워졌다. 하솔(Hazor)의 성벽도 무너졌다. 세겜(Shechem)은 완전히 초토화되었다.”10)고 했다.

이후 북이스라엘은 이방인들이 혼합되어 사는 지역으로 변했다. 앗수르는 바벨론과 구다와 아와와 하맛과 스발와임에서 사람을 옮겨다가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사마리아 여러 성읍에 거주하게 했다.(왕하 17:24)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그리고 남아있는 이스라엘은 이제 이방민족과 합쳐진 혼혈민족이 되고 말았다. ‘사마리아인’의 탄생이었다.

(2) 앗수르의 몰락과 바벨론의 급부상

앗수르의 전성기는 그리 길지 못했다. 앗수르는 속국들을 지나칠 정도로 강하게 다스렸다. 앗수르와 일대일로 맞설 나라는 없었으나 공공의 적에 대한 증오로 힘을 합칠 나라들은 있었다. 존 브라이트는 “속국들의 복종을 강요하여 끊임없이 목을 조였기 때문에 앗시리아를 증오하지 않는 나라가 거의 없었다.”11)고 했다. 앗수르의 몰락은 사르곤 2세, 산헤립(Sennacherib, BC 740-681), 에살핫돈(Esarhaddon, BC ?-669)에 이어 왕위에 오른 아슈르바니팔(Ashurbanipal, BC ?-627) 때에 본격화되었다.

아슈르바니팔의 형 샤마이 슘 우킨(Shamash-shum-ukin, BC ?-648)은 앗수르의 속국인 바벨론의 통치자였다. 샤마이 슘 우킨은 리디아, 시리아, 애굽 등과 연합전선을 펼쳐 앗수르를 압박했다. 아슈르바니팔은 연합군을 물리쳤고 이 과정에서 샤아미 슘 우킨은 사망했지만 앗수르는 많은 힘을 소진했다. 아슈르바니팔 사망 후 아들 신사르 이스쿤(Sinsharishkun, BC ?-626)과 이 와중에 반란자 아슈르 에텔 일라니(Ashur-etil-ilani, BC ?-627) 사이에 일어난 수년의 왕위 다툼은 앗수르의 쇠퇴를 가속화 시켰다.

바벨론은 다시 기회를 잡았다. 신(新) 바벨론의 창건자 나보폴라살(Nabopolassar, BC 658-605)은 B.C. 612년 니느웨를 공격해 3개월 만에 점령했다. 앗수르가 더 이상 버틸 수 있는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남은 앗수르 병력이 하란으로 도망가 항전을 펼쳤지만 바벨론은 가볍게 그들을 제압했다. 어떤 열방의 신(神)도 앗수르의 정복을 막은 적이 있었느냐고 큰소리 치던(사 36:18-20) 앗수르의 교만은 그렇게 꺾였다.

(3) 바벨론에 의한 남 유다의 멸망

BC 609년 애굽 왕 느고 2세(Necho II, BC ?-595)는 갈그미스(Carchemish)에서 최후의 항쟁을 펼치는 앗수르로부터 도움을 요청받는다. 바벨론의 급부상에 위기를 느낀 애굽은 앗수르를 돕기 위해 원정길에 오른다. 남유다의 16번째 왕 요시야가 애굽의 원정길을 막아섰다. 존 브라이트는 “요시야가 공식적으로 바벨론의 동맹국이 되었는지 아니면 독자적으로 행동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집트-앗시리아의 연합군이 승리하게 되면 이집트의 야심에 시달려야 했을 것이기 때문에 그는 그 연합군의 승리를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12)라고 했다.  

요시야는 애굽의 출정을 막기 위해 므깃도에서 전투를 벌였지만 패배하고 본인도 전사한다. 애굽은 서둘러 갈그미스로 향해 앗수르와 합류했으나 전쟁은 바벨론의 승리로 돌아갔다. 화가 난 애굽의 느고 2세는 애굽으로 돌아가며 요사야에 이어 왕위에 오른 여호아하스를 포로로 잡아 애굽으로 끌고 가면서 여호아하스의 형인 엘리야김을 여호야김으로 개명시켜 왕으로 앉혔다.

BC 605년 애굽의 느고는 2세는 다시 한번 갈그미스로 향한다. 이번에도 승자는 나보폴라살에 이어 왕위에 오른 바벨론의 느부갓네살(Nebuchadnezzar II, BC 634-562)이었다. 느부갓네살은 바벨론으로 돌아가며 유다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가는데 이때 다니엘과 세 친구가 끌려가게 된다. 유다 백성은 바벨론에 의해 세 차례에 걸쳐 포로로 끌려가고 세 차례에 걸쳐 귀환하게 되는데 그 서막이 시작된 것이다.

유다 멸망의 결정적 요인은 18대 왕 여호야김의 잘못된 판단이었다. BC 601년 바벨론은 애굽과 다시 한번 전쟁을 치르게 되는데 이 전투에서 애굽과 바벨론 모두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이때 여호야김은 바벨론을 배신하고 애굽과 손을 잡는다. 느부갓네살은 바벨론의 속국이었던 모압, 암몬, 아람 등을 이용해 유다를 치고 이 과정에서 여호야김이 죽는다. 이후 왕위에 오른 여호야긴은 느부갓네살에 의해 바벨론으로 끌려가는데 이것이 2차 포로였고 이때 에스겔 선지자가 포함되어 있었다. 한편 여호야긴은 바벨론으로 끌려가고 37년 만에 풀려나 죽을 때까지 좋은 지위를 누리며 살게 된다.(왕하 25:27-30)

여호야긴에 이어 왕위에 오른 시드기야는 바벨론에 항복하라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을 무시하고 바벨론에 반기를 든다. B.C. 587년 바벨론은 유다로 진격해 18개월 동안 예루살렘 성을 에워쌌다. 예루살렘성은 기근이 심해 양식이 떨어지는 지경에 이르렀다.(왕하 25:1-3) 더는 버틸 힘이 없었던 유다는 제대로 된 저항 한 번 해보지 못한 채 바벨론에 철저하게 짓밟힌다.

느부갓네살의 신복 시위대장 느부사라단(Nebuzaradan)은 성전과 왕궁을 불사르고 예루살렘의 모든 귀인의 집까지 불살랐으며 예루살렘 주위의 성벽을 헐고 백성들을 포로로 끌고 갔다.(왕하 25:8-11) 시드기야 왕은 두 눈이 뽑히고 사슬에 결박당해 바벨론으로 끌려갔다.(왕하 25:7) 시드기야는 죽는 날까지 감옥에서 나오지 못했다. 요세푸스는 시드기야가 죽자 바벨론은 거창하게 장례를 치러주었다고 전한다.13)

(4) 유대 땅에 남은 자들

바벨론은 유대 땅에 일부 백성들을 남겨두었다. 주로 가난한 농민들이어서 반역은 생각지도 못했다. 바벨론은 이렇게 남은 자들을 다스릴 총독으로 그달리야를 임명했다. 그달리야의 아버지 아히감은 예레미야의 목숨을 구해준 적이 있었다.(렘 26:24) 느부사라단은 예레미야에게 바벨론에서의 좋은 대우를 약속하며 동행하길 권했지만 예레미야는 거절하고 황폐한 유대 땅에 남았다.

바벨론 군대가 철수하자 바벨론 군대를 피해 도망쳤던 무리가 다시 돌아왔는데 그중 요세푸스가 사악하고 교활하다고 한 이스마엘이 총독 그달리야를 암살한다. 그달리야가 총독이 된 지 불과 2개월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바벨론의 보복이 두려웠던 유다 백성은 대부분 애굽으로 피신했다.(왕하 25:25,26) 이제 유다 땅은 텅 비어버렸다. 한편 애굽으로 내려갔던 일부 유다 백성 역시 약 5년 뒤에 애굽으로 쳐들어온 느부갓네살에 의해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비참한 결말을 맞이한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남쪽 유다가 바벨론으로 끌려간 기간을 130년 6개월 10일이라고 계산했다.14) 게오르크 포어러는 “주전 587년은 이스라엘의 삶에 있어서 가장 깊은 단절을 의미하였다. 그 뒤에 계속되고 있는 것은 이전에 있던 ‘이스라엘의 역사’와는 다른 의미 즉 이방 통치 아래 강한 종교적인 토대를 가지고 살아갔던 한 민족사를 의미한다.”15)라고 평가했다.

1) 폴 존슨,『유대인의 역사』(포이에마, 2014), 119.
2) 존 브라이트,『이스라엘의 역사』(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3), 368.
3) 폴 존슨,『유대인의 역사』(포이에마, 2014), 126.
4) 요세푸스,『요세푸스Ⅰ: 유대 고대사 』(생명의말씀사, 1987), 608.
5) 게오르크 포어러,『이스라엘 역사』(성광문화사, 1986). 202.
6) 같은 책, 202.
7) 존 브라이트,『이스라엘의 역사』(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3), 371.
8) 요세푸스,『요세푸스Ⅰ: 유대 고대사 』(생명의말씀사, 1987), 611.
9) 존 브라이트,『이스라엘의 역사』(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3), 376.
10) 폴 존슨,『유대인의 역사』(포이에마, 2014), 127.
11) 존 브라이트,『이스라엘의 역사』(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3), 429.
12) 같은 책, 445.
13) 요세푸스,『요세푸스Ⅰ: 유대 고대사 』(생명의말씀사, 1987), 646.
14) 같은 책, 651.
15) 게오르크 포어러,『이스라엘 역사』(성광문화사, 1986). 249.

3. 바벨론 멸망과 유대인 포로의 귀환

앗수르와 애굽을 누르고 패권을 차지한 바벨론 제국은 한 세기도 유지하지 못했다. 바벨론의 강력한 지도자 느부갓네살의 퇴장은 왕좌를 탐하는 이들의 죽고 죽이는 피바람을 불러왔기 때문이다.  

(1) 바벨론의 불안한 국내 정세

느부갓네살 사후 7년 동안 바벨론은 왕이 세 번이나 바뀌었다. 느부갓네살의 아들 아멜 마르둑((Amel-Marduk, BC 562-560, 성경에는 에윌므로닥으로 기록)은 왕위에 오른 지 2년 만에 매부인 네르갈 사르 우슬에게 살해된다. 네르갈 사르 우슬의 통치도 길지 못했다. 그는 4년 만에 죽게 되는 데 뒤이어 성인이 되지 않은 아들 라바시 마르둑(Labashi-Marduk)이 왕좌에 오른다. 미성년자 왕은 단 몇 개월 만에 반대파에 의해 숙청당한다. 라바시 마르둑을 제거한 이는 아람계 귀족 가문의 나보니두스(Nabonidus,  BC 555-539)였다.1)  바벨론 왕권은 이제 느부갓네살 가문에서 새로운 가문으로 넘어갔다.

(2) 종교를 둘러싼 갈등

왕이 된 나보니두스는 바벨론에 종교 갈등을 불러왔다. 자신의 어머니가 숭배하는 달의 신(神)인 신(sin)을 섬기는 신전을 세웠다. 느부갓네살 때부터 마르둑(편집자, 태양의 아들이라는 뜻)을 바벨론의 수호신으로 믿던 바벨론 사람들은 새로운 신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특히 마르둑 제사장들은 나보니두스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종교 문제로 결국에 나라는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나보니두스는 종교 생활을 위해 거처를 옮기고 그의 아들 벧 사르 우슬(Belshazzar, BC ?-539, 성경에는 벨사살로 기록)에게 왕위를 넘겼다. 문제는 바벨론에서 매년 열리는 신년 축제인 아키투(Akitu)가 나보니두스의 부재로 중단되었다는 점이다. 아키투는 바벨론 사람들에게 굉장히 중요한 의식이었다. 아키투의 중단은 나보니두스가 민심을 잃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나보니두스는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바벨론으로 돌아왔지만 그가 순탄하게 바벨론을 다스릴 수 있는 상황은 지나버렸다. 존 브라이트는 “바벨론은 사분오열되어 일개 지방 국가로 전락하였고 국가의 위기사태에 대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2)라고 했다.

(3) 고레스의 등장과 바벨론의 몰락

바벨론의 위협이 되는 존재는 이란 북서부에 자리했던 고대국가 메디아(Media, BC 727-549, 성경에는 메대)였다. 이들은 바벨론의 땅을 호시탐탐 노렸고 두 국가는 간헐적으로 충돌했다. 그런데 페르시아(Persia, 성경에는 바사)에 고레스(Cyrus II of Persia, BC 601-530)라는 강력한 지도자가 등장했다. 고레스는 메디아를 장악하고 근방의 국가들을 빠른 속도로 자신의 발아래 두기 시작했다.

그러자 나보니두스는 고레스를 겁내어 이집트, 리디아(Kingdom of Lydia,  about BC 1200-546)와 동맹을 맺지만 고레스는 리디아를 순식간에 제압했다. 고레스는 곧 바로 바벨론을 치지 않고 다른 쪽으로 영토를 확장했고 이전 어느 나라보다 훨씬 거대한 제국을 창건했다.3)

국력을 견고히 한 후 고레스는 바벨론으로 진격해왔다. 혼란한 바벨론은 고레스를 막을 힘이 없었다. 엘람 지방의 바벨론 장군 고브리아스(Gobryas)는 고레스에게 투항(投降)한 뒤 고국 바벨론에 칼을 들이밀었다.4) 나보니두스는 사력을 다해 바벨론을 지키려 했지만 때는 늦었다. B.C. 539년 고레스는 손쉽게 바벨론으로 입성했다.

한편 고레스는 메디아의 왕 아스티아게스의 외손자였다. 아스티아게스는 자기 딸 만다네(Mandane of Media, BC 584-559?)가 많은 양의 오줌을 누어 도시와 아시아가 잠기는 태몽을 꾼다. 마고스(magus, 메디아의 사제)들의 해몽을 듣고 겁이 난 아스티아게스는 만다네를 페르시아인과 결혼시켜 페르시아로 보낸다.  

그 후 딸 만다네를 보낸 첫해 아스티아게스는 또다시 만다네의 생식기에서 포도나무 한 그루가 자라 아시아를 뒤덮는 꿈을 꾼다. 아스티아게스는 만다네를 메디아로 불러들이고 심복 하르파고스(Harpagus)에게 자신의 딸 만다네가 자식을 낳으면 죽이라고 명령한다. 하지만 하르파고스는 아이를 살리게 되는데 그가 바로 고레스였다.5)

(4) 고레스의 관용정책

고레스의 정책은 피지배층을 강하게 억압하던 앗수르나 바벨론과는 달랐다. 고레스는 일찍이 바벨론으로 붙잡혀온 민족들을 고국으로 돌려보내고 그들의 종교도 인정했다. 특히 마르둑(Marduk)을 섬기는 제사 의식에 참여해 바벨론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이끌어냈다.

폴 존슨은 “고레스 통치 아래 페르시아 제국에서는 바벨론 제국의 통치자였던 아사리아나와는 전혀 다른 종교 정책을 썼다. 페르시아 제국의 권위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피정복민이 자신들의 민족 고유의 종교 신념을 추구하는 것을 기꺼이 허락했다.”6)라고 한다.

게오르크 포어러는 이렇게 말했다. “이는 굴복당한 이방 민족들의 운명이 행복할수록 자신들의 운명은 더 만족을 누린다는 관점이다. 억압보다 더 저항을 일깨우게 하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회유(懷柔) 이외에 어느 것도 그런 저항을 제거할 수 없다.”7) 

고레스는 이같이 각 나라의 정치적 독립은 허락하지는 않았으나 군주를 두고 행정 책임을 맡기는 등 당시로써는 파격적인 정책을 펼쳤다. 이러한 고레스의 피정복민 정책은 페르시아 치하의 국가들의 결속력을 높이며 성공을 거뒀다.

(5) 유대 포로의 귀환

하나님은 고레스 탄생 150년 전에 이사야를 통해 고레스의 등장을 말씀하셨고(사 45:1-8)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 생활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올 것을 알려주셨다.(렘 29:4-14) 말씀대로 고레스는 유다 백성의 귀환을 허락했고 성전을 다시 건축하도록 배려했다.(대하 36:22,23)  유다 백성은 세 차례에 걸쳐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는데 고국으로 귀환 역시 세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편집자, 유대인 역사가 폴 존슨은 스룹바벨 이전 예루살렘 재건 사업을 맡은 여호야긴의 아들 세스바살(세낫살)의 귀환을 1차 귀환으로 보고 스룹바벨을 2차, 에스라를 3차, 느헤미야를 4차 귀환으로 본다.)

B.C. 537년 스룹바벨, 학개, 스가랴 등이 중심이 된 1차 귀환을 시작으로 B.C. 458년, 에스라를 중심으로 한 2차 귀환이 B.C. 444년에는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한 3차 귀환이 이루어진다. 페르시아 즉 옛 바벨론 땅에 남아있기를 자처한 이도 많았다. 고국에 대한 열망이 적은 바벨론 포로 2세대들은 굳이 황폐한 땅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

‘유대인’이라는 말이 구약에 등장하지 않는 단어다. 바벨론이 유다 땅에서 붙잡아온 사람들을 다른 나라의 포로와 구분하기 위해 사용한 명칭이다. 바벨론 포로기부터 유대인은 특정 지역에서 통일된 사상과 관습을 가지고 살아가는 공동체로 보기 어려워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스라엘 밖 유대인은 증가했다. 이들을 흔히 ‘디아스포라’(그리스어로 흩어진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이스라엘을 떠난 유대인들을 통칭하는 말)라고 부른다.

1) 존 브라이트,『이스라엘의 역사』(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3), 483.
2) 같은 책 484.
3) 같은 책 485.
4) 같은 책 493.
5) 헤로도토스,『역사』(숲, 2009), 93-94.
6) 폴 존슨,『유대인의 역사』(포이에마, 2014), 151-152.
7) 게오르크 포어러,『이스라엘 역사』(성광문화사, 21986), 264.

4. 페르시아의 그리스 침공

제대로 된 시장 하나 없을 정도로 가난한 나라였던 페르시아(Persian Empire, BC 539-323)는 메디아와 바벨론까지 흡수하며 황금의 제국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페르시아는 바벨론에 의해 끌려온 포로들을 돌려보내는 지방화 정책을 펼쳤다. 속국을 혼혈족으로 만든 앗수르와 포로를 나라별로 구별해 강력한 중앙 집권화를 이룬 바벨론과는 분명 다른 정책이었다. 유대인 역시 세 차례에 걸쳐 본토로 귀환하게 된다. 물론 귀국을 희망하지 않는 자들은 계속해서 페르시아에 머물 수 있었다.

페르시아(성경에는 바사) 초대 왕 키루스 2세(성경에는 고레스) 이후 왕이 된 캄비세스 2세(Cambyses II, BC ?-522)는 이집트를 정복했다. 캄비세스 2세는 아들이 없는 상태에서 죽었고 새로운 왕으로 다리우스 1세(Darius the Great, BC 550-486)가 오르게 된다. 다리우스 1세의 아들이 에스더의 남편 크세르크세스(Xerxes I, BC 519-465, 성경에는 ‘아하수에로’)이다. 페르시아는 크세르크세스 치하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다고 알려진다.

(1) 실패한 페르시아의 그리스 침공

다리오 1세와 크세르크세스는 각각 두 차례와 한 차례 도합 세 차례에 걸쳐 그리스(Greece) 점령을 시도하지만 실패했다. 먼저 1차 침공은 BC 492년 다레이오스 1세는 마르도니오스를 사령관으로 삼아 육군과 해군을 지휘하여 그리스를 침공하게 했다. 그런데 변수를 만났다. 아토스 곶(Mount Athos)에서 폭풍을 만나 함대가 풍비박산 나버렸다.

역사가 헤로도투스(Herodotus, BC 484-425)는 “(함대는) 아토스 곶을 우회하려 했다. 그러나 그들이 우회하는 동안 도저히 손쓸 수 없는 맹렬한 북풍이 덮쳐 그들을 거칠게 때렸으며 수많은 함선이 아토스에 내동댕이쳐졌다. 300척의 함선이 침몰하고 2만 명 이상의 병사가 죽었다.”1)고 기록되어 있다. 이 와중에 육군은 브뤼고이족 이라는 트라게 부족에게 야습을 당해 많은 병사가 전사하고 말았다. 결국 페르시아는 제대로 된 전투 한 번 해보지 못한 채 병력을 철수해야 했다.

2년 뒤 다레이오스 1세는 다시 한번 전열을 정비하고 그리스 정복에 나섰다. 아테네(Athens)를 목전에 둔 마라톤 광야에 다다를 때까지 페르시아는 거침이 없이 방해요소들을 치고 전진했다. 그러나 치열했던 마라톤 광야에서의 전투(Battle of Marathon, BC 490)는 아테네의 승리로 돌아갔다. 전투의 정면 대결에서는 페르시아가 우세했으나 양측 날개에서는 아테네가 완승했다는 것이 헤로도투스의 기록이다.2)

헤로도투스에 따르면 마라톤 전투(Battle of Marathon, BC 490)에서 페르시아는 약 6,400명이 전사하고 아테네 측은 192명이 전사했다.3) 페르시아인들은 서둘러 배로 돌아와 아테네 군대보다 빠르게 아테네로 진격할 계획을 세웠지만 이마저도 아테네 군사들이 먼저 행동해 계획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페르시아는 2차 원정에서도 패했다.

다레이오스 1세의 1,2차 원정이 실패하고 뒤이어 왕위에 오른 크세르크세스는 2차 원정이 있은 지 10년 후인 BC 480년 3차 원정길에 오른다. 16만 명의 군사와 1,200여 척에 이르는 함대였다. 그야말로 대군이었다. 육지에서 페르시아의 압승이 이어졌다. 그런데 육지에서와 달리 해전에서 반전이 일어났다.

아테네는 지도자로 급부상한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cles, BC 524-459)의 지휘하에 페르시아의 2차 침공 이후 강력한 해군을 양성한 상태였다. 테미스토클레스는 페르시아의 해군을 살라미스섬 인근의 좁은 해협으로 유인해 대승을 거뒀다. 이것이 소위 세계 4대 해전 중 하나로 불리는 살라미스 해전(Battle of Salamis, BC 480)이고 아테네는 이 해전의 승리로 지중해의 강자로 군림하게 된다. 해전에서 완패한 페르시아는 승승장구하던 지상전에서도 잇따라 패배해 그대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세 번의 페르시아 그리스 침공은 이렇게 큰 상처만 남기고 막을 내렸다.

(2) 페르시아 그리스 침공 때의 유대인

페르시아의 초대 왕 키루스(고레스) 2세 때인 BC 537년 스룹바벨과 예수아를 중심으로 한 1차 포로귀환이 이루어진다.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 건축을 시작했다. 키루스 2세에 이어 왕에 오른 캄비세스(Cambyses II, BC ?-522)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후 페르시아와 그리스의 전쟁이 한창이었던 다레이오스 1세 때 학개와 스가랴 등이 대적자들의 방해로 잠시 중단되었던 성전재건 사업을 완수하게 된다. 에스더의 남편이었던 크세르크세스를 뒤이어 왕위에 오른 아닥사스다 1세(Artaxerxes I of Persia, BC ?-424) 때인 BC 458년 에스라를 중심으로 2차 포로귀환이 있었고 BC 444년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3차 포로귀환이 이루어졌다.

1) 헤로도토스,『역사』(숲, 2009), 572.
2) 같은 책, 612.
3) 같은 책, 613.

5. 알렉산더와 그리스제국

그리스(Greece)의 도시 국가들은 페르시아의 세 번에 걸친 침공을 막아냈다. 그중 아테네(Athens)는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cles, BC 524-459)의 지휘로 양성된 해군으로 살라미스 해전을 승리로 이끌며 도시 국가들 사이에서 강자로 부상했다.

(1) 펠로폰네소스 전쟁

그리스 도시 국가들은 페르시아의 침공에 대비하고 페르시아 치하의 그리스인을 해방한다는 명분을 앞세운 아테네를 중심으로 동맹을 형성했다. 동맹국들의 기금을 보관하는 금고가 델로스섬에 있다고 하여 ‘델로스 동맹’(Delian League)이라고 불렸다. 그러나 델로스 동맹은 오래가지 못했다. 자금을 보관하는 장소가 델로스섬에서 아테네로 옮겨졌고 동맹국 내의 아테네의 입김은 더욱 세졌다. 이로 인해 자연스레 여기저기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아테네가 도시 국가의 중심이 될 때부터 ‘델로스 동맹’이 체결되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탐탁지 않게 지켜보던 스파르타(Sparta)는 이들의 균열을 놓치지 않았다. 스파르타는 아테네에 반대하는 도시 국가들과 ‘펠로폰네소스 동맹’(Peloponnesian League)을 맺었다.

BC 431년 스파르타는 아테네에 대한 선제공격으로 ‘펠로폰네소스 전쟁’(Peloponnesian War, BC 431–404)을 일으켰다. 전쟁은 27년간 계속되었다. 스파르타는 페르시아까지 끌어들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하지만 27년의 전쟁은 실상 그들 중 누가 승자 패자라고 말하기 어려운 결과를 가져왔다. 따라서 그리스의 도시 국가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기점으로 급격하게 쇠락(衰落)했다.

 (2) 알렉산더의 등장

절대 강자가 없는 그리스 도시 국가의 패권은 스파르타에서 테베(Thebes)로 테베에서 마게도니아(Macedonia)로 넘어갔다. 마게도니아에 등장한 강력한 부자(父子)로 이제 그리스는 하나로 통합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역사가들이 전쟁의 천재라고 하는 필립포스 2세(Philippos Ⅱ or Philip Ⅱ, Philip of Macedon, BC 382-336)는 한 번도 통합된 적이 없었던 그리스 도시 국가들을 자신의 발아래로 굴복시켰다.

그런데 필립포스 2세의 전성기는 길지 못했다. 그는 페르시아 원정을 준비하던 중 암살(暗殺)당했다. 그리스 도시 국가들은 전쟁 전문가가 죽자 반란을 일으켰다. 펠로폰네소스 전쟁과 같은 혼란이 다시 한번 그리스 도시 국가에 찾아왔다.

이때 반전이 일어났다. BC 336년 필립포스 2세의 뒤를 이어 마게도니아 통치자로 등극한 약관 20세의 한 젊은이는 반란군들을 빠른 속도로 진압했다. 그리스 전역을 순식간에 장악한 그는 아버지가 맡았던 페르시아 원정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가 바로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 BC 336-323)으로 세계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순간이었다.

알렉산더는 다리오 3세(Darius III, BC 380-330, 페르시아 마지막 왕) 치하의 페르시아를 공격했다. 다리오 3세는 급히 도망쳤는데 알렉산더는 다리오 3세를 쫓지 않고 지중해와 소아시아 지역의 도시들을 하나하나 정복하기 시작했다. 그중 두로(Tyres)는 7개월 동안 결사 항전을 벌였지만 항복하지 않았다는 대가로 대학살을 당하고 말았다.

레이몬드 설버그는 “두로 성에 대한 공략은 7개월이 걸려 332년 8월에 함락되었고 이때 두로 사람 8천 명이 살육을 당했으며 3만 명이 노예로 팔려갔다.”1)고 했다. 이후 팔레스타인 블레셋의 가사, 시리아 등을 점령한 알렉산더는 다시 페르시아의 본토를 점령하고 명실상부 대제국의 대왕(大王)이 되었다.

(3) 알렉산더 대왕이 이룩한 대제국

알렉산더는 마게도니아 사람이었지만 그리스 문화를 존중했다. 이는 그의 스승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으로 알려진다. 알렉산더는 자신이 정복한 지역마다 자신의 이름을 딴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라는 도시를 세우고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를 융합한 헬레니즘(Hellenism)을 형성했다. 역사가들은 이런 알렉산더를 정복자인 동시에 헬레니즘 전파자로 기록했다.

본래 팔레스타인이나 지중해 연안은 아람어(‎Aramaic language) 등을 많이 사용했으나 알렉산더가 정복한 이후 헬라어(Greek language)를 공통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언어의 통용은 복음 전파에 큰 유익을 주었다. 김병국 교수는 “언어의 통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었는가 하는 것은 초기 기독교가 번성했던 지역과 헬라어가 공용어였던 지역이 거의 정확히 겹친다는 사실이 잘 말해주고 있다.”2)고 밝혔다.

1) 레이몬드 설버그,『신구약 중간사』(기독교문서선교회, 2004), 21.
2) 김병국 『신구약 중간사 이야기』(대서, 2013), 34.

6. 애굽 프톨레미 왕조와 유대인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III of Macedon or Alexander The Great, 356-323)이 이룩한 그리스제국(Greek Empire, BC 332-323)은 그리 길지 못했다. BC 323년 그는 삼십 대 초의 나이로 갑작스레 죽음을 맞이했다. 알렉산더가 후계자를 남겨놓지 않은 탓에 제국은 일대 혼란에 빠졌다. 대왕이 이루어놓은 제국을 서로 차지하려는 전쟁이 벌어졌다.  

(1) 분열된 그리스 대제국

알렉산더 대왕의 사후 그의 아내 록산나(Roxana, BC 340-310)에게서 유복자(遺腹子)로 아들이 태어났으나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장수들은 성년이 되기 전 록산나와 아들(Alexander IV of Macedon, BC 323-309)을 살해했다. 그리고 알렉산더 대왕의 부하 장군들이었던 프톨레미(Ptolemy Ⅰ Soter, BC 367-282), 카산드로스(Cassander, BC 355-297), 리시마코스(Lysimachus, BC 360-281), 셀류쿠스(Seleucus I Nicator, BC 358-281)는 동맹을 맺고 알렉산더 대왕을 뒤이어 그리스제국의 왕이 된 안티고누스(Antigonus I Monophthalmus, BC 382- 301, 알렉산더 부하 장군 중 한 사람)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프톨레미는 애굽, 카산드로스는 마게도니야, 리사마코스는 수리아, 셀류쿠스는 바벨론의 속국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왕가를 세웠다. 요세푸스는 “이들은 서로 세력 확장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았기 때문에 전쟁이 그칠 줄 모르고 계속되었다. 그 통에 모든 도시는 평온한 날이 없었고 수많은 사람이 비명에 죽어갔다.”1)고 했다.

(2) 애굽 프톨레미 왕조 지배하의 유대인

유대인들은 갈라진 왕국 중에서 먼저 애굽 프톨레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요세푸스는 프톨레미가 예루살렘을 정복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프톨레미는 예루살렘도 정복했는데 이 목적 달성을 위해 그는 거짓과 사기를 서슴지 않았다. 그는 안식일에 하나님께 제사 드릴 것처럼 가장 예루살렘에 들어온 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성을 점령했다. 유대인들은 방심하고 있다가 대항 한번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를 의심하지 않은 데도 원인이 있었으나 안식일은 안식과 쉼의 날이기 때문에 유대인은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었다. 프톨레미는 이렇게 예루살렘을 장악한 후에 잔인한 방법으로 폭정을 휘둘러 댔다.”2)

프톨레미는 약 10만 명의 유대인을 예루살렘에서 애굽으로 이주시켰다. 학자들은 이 당시 본토에 살던 유대인보다 팔레스타인 주변 밖에 사는 유대인들이 훨씬 많았을 것으로 본다. 특히 애굽에는 흩어진 유대인 중 가장 규모 있는 공동체를 형성했을 것으로 추측했다.

프톨레미 왕조는 점차 안정되기 시작했다. 레이몬드 설버그는 “프톨레미 왕조의 초기는 비록 그들의 개인적인 생활이 비도덕적이고 방탕했으나 애굽과 기타 속국들에 대해 절대적이고 무제한의 권력을 행사하는 유능하고 지각 있는 통치자들이 있었다. 프톨레미 왕조의 통치 동안에 애굽은 헬라문화권 세계 중에서 가장 중요한 지적인 중심지 중의 하나가 되었다.”3)고 했다.

비록 애굽의 지배는 받았으나 유대인들은 셀류쿠스 왕조(Seleucid Empire, BC 305-281)가 프톨레미 왕조를 애굽에서 몰아내기까지 약 120년간은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고 문화를 지킬 수 있었다. 하지만 두 왕조 사이의 전쟁으로 유대인들은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3) 구약 ‘70인 역’의 탄생

구약 ‘70인 역’(譯)이란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구약성경이다. ‘70인 역’에 대한 작업은 프톨레미 왕조의 두 번째 왕인 프톨레미 2세(Ptolemy II Philadelphus, BC 308/9-246) 때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이루어졌다. 이스라엘 12지파에서 6명씩 선정된 72명의 번역자가 작업했다. 70을 의미하는 라틴어 셉투아진트(Septuagint)라고 불리기도 하고 수비법에 따라 LXX(50+10+10)로 불리기도 한다.4)



‘70인 역’ 성경은 초대교회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헬라문화권에 살게 된 유대인들은 점차 히브리어를  잊어갔다. 그러기 때문에 1세기 때는 유대인조차 특별한 교육을 받지 못한 경우 히브리어를 알지 못했다. 초대 교회의 많은 구성원이었던 이방인들은 당연히 히브리어를 LXX Bible: Joshua, Egypt, late 2nd C. 몰랐다. 그러므로 만약 ‘70인 역’ 성경이 없었더라면 다수의 사람이 구약성경을 읽을 수도 없었고 이해도 못 했을 것이다.

1) 요세푸스,『요세푸스Ⅱ: 유대고대사』(생명의말씀사, 2006), 63.
2) 같은 책, 63-64.
3) 레이몬드 설버그,『신구약 중간사』(기독교문서선교회, 2004), 29.
4) 70인 역의 번역 동기와 배경에 대해서는 아리스테아스의 편지에 의존하는데, 이 기록의 신빙성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7. 셀류쿠스 왕조와 유대인

알렉산더 대왕의 사후 그리스제국은 여러 나라로 분열되었다. 유대인들은 분열된 나라 중 먼저 프톨레미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이 왕조 아래 약 120년을 지낸 유대는 프톨레미 왕조와 셀류쿠스 왕조 사이에 벌어진 갈등에 휘말리면서 다시 한번 큰 변화를 맞게 된다.

(1) 프톨레미 왕조에서 셀류쿠스 왕조로

셀류쿠스 왕조(Seleucid Empire, BC 305-281, 65-63)의 탁월한 왕으로 꼽히는 안티오쿠스 3세(Antiochus III the Great, BC 241-187)는 넓은 영토를 정복하고 부를 축적했다. 그는 BC 198년 파네아스 전투에서 프톨레미를 격파하고 유대 땅을 손에 놓는다. 당시 유대는 셀류쿠스의 편에서 프톨레미 군대를 몰아내는 데 힘을 모았다.

안티오쿠스 3세는 유대인들이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허락했고 다년간 세금 면제 및 도시와 예루살렘 성전 재건 등 파격적인 호의를 베풀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을 향한 이러한 셀류쿠스 왕조의 호의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2) 로마에 패배한 셀류쿠스

당시 셀류쿠스 왕조에는 한때 로마를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갔던 카르타고(Carthage)의 명장 한니발(Hannibal Barca, BC 247-183/181) 장군이 망명을 와 있었다. 반드시 로마를 쓰러뜨린다는 한니발의 평생 꿈 때문이었을까? 안티오쿠스 3세는 한니발의 격려를 받아 로마와 전투를 벌인다.

그러나 BC 190년 안티오쿠스 3세는 로마와의 전쟁에서 참패를 당하며 많은 영토를 빼앗겼다. 셀류쿠스 왕조는 일부 정복지를 포기한다는 조건에 합의했고 아들 안티오쿠스 4세를 볼모로 내어 주었다. 그뿐 아니라 엄청난 액수의 전쟁 배상금(賠償金)을 물어야 했다.(편집자, 5천 달란트부터 1만 5천 달란트까지 학자들 간에 액수 차이가 있다.)

전쟁 배상금 문제로 셀류쿠스 왕조는 피지배 계층 특히 유대인들에 대한 호의적인 태도를 거두었다. 제국 내에 있는 모든 신전(神殿)의 재산을 압류하는 과정에서 예루살렘 성전의 재산을 강탈했다. 레이몬드 설버그에 따르면 안티오쿠스 3세는 왕국의 남동부에 있는 한 신전의 재물을 압수하는 도중 살해당했다.1) 안티오쿠스 3세에 뒤이어 왕위에 오른 셀류쿠스 4세(Seleucus IV Philopator, BC 218-175) 역시 10여 년의 통치 끝에 암살당하고 말았다.

(3)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등극

셀류쿠스 4세가 죽자 로마에 볼모로 잡혀있던 그의 동생 안티오쿠스 4세(Antiochus IV Epiphanes, BC 215-164)가 돌아와 왕위에 올랐다. 레이몬드 설버그는 안티오쿠스 4세가 사악한 행위로 유명해졌는데 심상치 않은 정신착란으로 고생했다고 전한다.2) 흔히 안티오쿠스 4세는 현명한 신(혹은 신의 현현)이라는 의미의 ‘에피파네스’(Epiphanes)를 붙여 자신을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라고 했는데 당시 사람들은 미친 사람이라는 뜻의 ‘에피마네스’를 붙여 ‘안티오쿠스 에피마네스’라 부르기도 했다.

안티오쿠스 4세는 자신에게 상당량의 돈을 지불 한 레위 지파도 아닌 야손(Jason, 주전 174-172 제37대 대제사장, 셀류쿠스 지배 시 극악한 대제사장 중 하나)을 유대의 대제사장으로 임명했다. 이는 성직 매매가 시작된 순간이었다. 이후 메넬라우스(Menelaus)는 야손보다 더 많은 돈을 내고 야손의 자리를 빼앗았다. 이 같은 성직 매매는 이후 예루살렘 멸망까지 이어졌다.

(4)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유대인 박해

안티오쿠스 4세(에피파네스)는 프톨레미 왕조가 다스리는 애굽을 원했다. 그는 여러 차례 애굽과 전쟁을 했는데 두 번째 전쟁에서 유대 땅에 큰 변화가 찾아왔다. 안티오쿠스 4세가 전쟁 중 사망했다는 소문이 퍼졌고 메넬라우스에게 대제사장 자리를 빼앗긴 야손은 이 기회를 틈타 메넬라우스를 몰아내기 위한 반란을 일으켰다. 안티오쿠스 4세는 야손의 이 같은 행위를 반역으로 간주하고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진격해 피의 보복을 감행했다. 이때 성전의 기물을 약탈하고 인두세 성전세 등 다양한 명목의 세금이 과중하게 유대인들에게 부과되었다.

그리고 안티오쿠스 4세는 다시 애굽과 전투를 벌였으나 로마의 지원을 받은 애굽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굴욕을 맛본 안티오쿠스 4세는 본국으로 돌아가던 중 유대인들에게 여러 가지 명목을 씌워 분풀이를 시작했다. 안티오쿠스 4세에 의해 파견된 아폴로니우스와 2만 2천 명의 군대는 예루살렘에서 무차별의 대학살을 자행했다.

이들은 예루살렘 성벽을 파괴하고 ‘아크라’라는 요새를 세워 유대인을 감시했다. 존 브라이트는 아크라에 대해 “단지 군대 수비대가 주둔하고 있는 일개 성채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불쾌한 곳이었다. 그곳은 헬레니즘화 된 이교도들과 유대교를 배교 한 유대인들이 사는 하나의 식민지로 예루살렘 성벽에 둘러싸여 독자적인 체제를 갖추고 있었던 예루살렘 성안의 헬라인 도시 국가였다.”고 했다.3)

안티오쿠스 4세는 또 안식일 금지, 할례 금지, 율법서 소지 금지 등 유대인 신앙의 근간을 뿌리 뽑을 만한 내용의 칙령(勅令)을 내렸다. 그는 과거 로마에 볼모로 잡혀있으며 그리스 문화에 큰 감명을 받았는데 자신이 지배하는 나라를 헬라화 시키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이런 안티오쿠스 4세의 박해와 칙령과 헬라화 계획은 유대인의 반발을 샀다. 그럴수록 안피오쿠스 4세의 박해는 더 심해졌고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희생당한 이들은 대부분 ‘하시딤’(Hasidim) 사람들이었다. ‘하시딤’이란 ‘경건한 자들’이라는 뜻으로 유대의 헬라화, 성직 매매, 안티오쿠스 4세의 칙령에 반대했던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이 같은 상황에도 대제사장인 메넬라우스는 유대의 헬라화에 앞장섰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우스’(Zeus, 그리스 최고의 신)에게 돼지고기를 제물로 바치는 일도 벌어졌다. 그럴수록 하시딤은 선조들의 신앙의 도리를 고수하고 헬라화 정책에 반대했다. 이 같은 반대는 ‘마카베우스’(Maccabaeus)라는 가문의 주도하에 급물살을 타기 시작 급기야는 반란으로 이어졌다.  

1) 레이몬드 설버그,『신구약 중간사』(기독교문서선교회, 2004), 37.
2) 같은 책, 37-38
3) 존 브라이트,『이스라엘의 역사』(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3), 583.

8. 마카비의 반란(Maccabean Revolt, BC 167-160)

안티오쿠스 4세(이하 안티오쿠스)의 박해와 헬라화 정책은 유대인들과의 갈등의 골만 깊게 만들뿐이었다. 존 브라이트는 안티오쿠스가 강압적인 헬라화 정책과 박해로 유대인들을 굴복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그의 착각이었다고 지적한다.1)

(1) “왕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안티오쿠스의 헬라화 정책에 대한 반란은 한 제사장의 결단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안티오쿠스는 BC 167년경 예루살렘에서 24km 떨어진 예루살렘과 욥바 사이에 있는 모딘(Modein)이라는 지역에 자신의 신하를 보내 이방신(異邦神, 그리스 제우스 신)에게 제사를 지내라는 명령을 내렸다.

모딘(Modein) 지역 하스몬 가문(Hasmonean)의 유대인 제사장이었던 마타디아(Mattathias, BC ?-166)는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율법과 규례를 깨트리는 일을 금하고 계신다. 우리는 좌로나 우로 치우쳐 우리가 드릴 경배를 버리라는 왕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2)라며 왕의 명령을 단호히 거절했다. 그러자 한 유대인이 마타디아를 대신해 이방 신에게 제사 드리러 제단으로 나왔다. 이를 본 마타디아는 그를 죽이고 추종자들과 함께 안티오쿠스의 보복을 피해 험준한 산으로 숨었다.

이후 제사장 마타디아와 그의 추종자들은 안티오쿠스의 군대를 상대로 게릴라전을 펼치며 결사 항전을 벌였다. 레이몬드 설버그는 “그들은 숨어 있던 산에서 갑자기 튀어나와 인근의 작은 도시와 마을들을 급습하여 우상과 이방의 제단을 훼파하고 변절한 유대인들에게 강제로 할례를 행하하고 회당을 재건했다.”3)라고 말한다.

마타디아는 약 1년간 항전을 이끌다 BC 166년 사망했고 그의 다섯 아들 중 셋째아들 유다(Judas Maccabeus, BC ?-160)가 뒤를 이었다. 이 유다가 후대에는 ‘마카비’(Maccabee, 망치질하는 자)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졌는데 ‘마카비’는 ‘망치질하는 자’(혹은 쇠망치)라는 뜻으로 유다의 별명이었다.

(2) 마카비의 승리와 성전정화

마카비(Maccabees)는 반란군을 효과적으로 이끌었다. 게릴라 항전은 이들에게 계속된 승전보를 가져다주었다. 특히 사마리아 땅의 지도자인 아폴로니우스와 수리아의 지도자 세론을 차례로 격파한 사건은 유대인들의 사기를 크게 진작시키며 하시딤과 연합세력을 구축할 수 있게 되었다. 마침 안티오쿠스는 또 다른 전쟁을 위해 원정을 가 있던 터라 주력 병력을 마카비와의 전쟁에 투입할 수 없었다. 두 차례의 참패 소식을 들은 안티오쿠스는 부하 장군 중 한 사람인 리시아스(Lysias)에게 마카비의 반란군을 진압할 것을 명령했다.

리시아스(Lysias)는 그의 부하 니카놀과 게올기아스를 지휘관으로 삼고 보병 4만 6000명, 기병 7천 명을 이끌고 전쟁에 뛰어들었다. 그들 옆에는 반란군을 진압한 다음 노예로 팔겠다는 노예 상인들도 동행했다. 전쟁은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게릴라전에 능한 마카비의 승리로 끝났다. 마카비는 3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니카놀의 부대를 급습해 큰 피해를 주고 오히려 노예 상인들을 붙잡아 노예로 팔아버렸다.

(3) 또다시 혼란 속으로

니카놀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마카비는 그 길로 예루살렘으로 진격했다. BC 164년 기슬르월(유대력 9월, 그레고리력 11-12월) 25일 마침내 마카비 군대는 예루살렘 성전을 회복하고 하나님께 감격의 제사 드렸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이날을 ‘수전절’(修殿節, Hanukkah, 요 10:22)이라 부른다. 이들은 예루살렘 성전 모독을 끝낸 기념을 3년간 이어갔다.

그러나 평화도 잠시 예루살렘을 둘러싼 거센 공격이 다시 시작되었다. 리시아스는 다시 한번 마카비 군대와 전투를 벌였고 이 전쟁에서 마카비의 형제인 엘르아살(Eleazar Avaran, BC ?-162)이 사망하고 만다. 리사아스는 예루살렘을 포위해 마카비의 항복을 받아내려 했으나 때마침 상황이 복잡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리시아스는 안티오쿠스가 전쟁 중에 사망했고 후계자로 필립 장군을 임명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정복보다 권력이 먼저였던 리시아스는 유대인들에게 율법에 따라 하나님을 경배하는 권리를 보장하는 협정서를 내밀고 급히 본국으로 회군했다.

리시아스의 화해 정책을 두고 하시딤은 이를 반색했지만 마카비 군대의 입장은 달랐다. 결국 다수의 하시딤에 의해 화해 조약이 체결되었고 그로 인해 하시딤과 마카비 가문은 이후 각자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나 하시딤의 선택은 자신들과 마키비의 가문 둘 모두에게 좋지 않은 결과로 이어졌다.

안티오쿠스의 후계자로 로마에 볼모로 잡혀있던 데메트리오스 1세가 돌아와 왕위에 올랐다. 그는 리시아스를 죽이고 예루살렘의 대제사장으로 알키무스(Alcimus, High Priest of Israel for BC 162-159)를 세웠다. 알키무스는 예루살렘에서 60여 명의 하시딤을 죽였다. 이 일로 하시딤과 마카비 가문은 다시 뭉쳤다. 이들은 알키무스가 원군으로 요청한 시리아군과의 전투에서는 승리했으나 데메트리우스 1세가 예루살렘으로 보낸 지원군과의 전투에서까지 승리할 힘은 없었다. 유다 마카베오스는 결국 이 전투에서 BC 160년 장렬히 전사했다.(*) 글쓴 이 / 조믿음 기자

출처, http://www.bami.kr/news/view.html?section=1&category=153&item=&no=417 

1) 존 브라이트,『이스라엘의 역사』(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3), 584.
2) 레이몬드 설버그,『신구약 중간사』(기독교문서선교회, 2004), 46.
3) 같은 책, 47.

   < 편집자 주 > 이 글은 웹진 ‘바른 믿음’에 연재된 것을 본지에 맞도록 재편집한 것입니다. ‘바른 믿음’과 관련된 정보는 다음과 같습니다. (주)새길: 경기도 과천시 별양상가2로 14, 3층 314호 제호: 바른미디어 TEL: 050-6558-0253, FAX: 050-4092-0935, E-mail: bareunmedia@naver.com

< 유대 하스모니안 왕가, BC 140-37 > 각 이름 아래 연도는 재위 기간





신구약 중간시대란 무엇입니까?

신구약 중간기는 구약과 신약 사이의 기간으로 약 400년을 말한다. 이 시대는 신약성경이 기록된 배경과 맥락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이 기간 동안 유대인들은 그들의 신앙과 관습에 영향을 미치는 중대한 문화적, 정치적, 종교적 변화에 직면했습니다.

역사적 맥락

구약 시대의 끝

구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는 기원전 430년경에 기록되었습니다. 그 이후 히브리어 성경은 수세기 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군주제는 바빌론 유배를 시작으로 외국 제국의 통치 기간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이는 또한 성서 중간기에 전개될 복잡한 역학의 무대를 마련했습니다.

헬레니즘 영향의 부상

기원전 4세기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으로 그리스 문화는 급속도로 퍼졌다. 이 헬레니즘 영향은 유대를 포함하여 알려진 세계의 모습을 변화시켰습니다. 그리스어, 철학, 관습의 도입은 유대 민족에게 도전과 기회를 동시에 만들어 주었습니다. 일부는 이러한 새로운 아이디어를 받아들인 반면, 다른 일부는 저항하며 전통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마카비 반란

기원전 2세기에 유대인 인구는 셀레우코스 제국, 특히 안티오코스 167세 에피파네스 치하에서 박해를 받았습니다. 이로 인해 마카비 반란(기원전 160-XNUMX년)이 일어났고, 유다 마카베우스가 이끄는 유대인 전사들이 성공적으로 예루살렘을 되찾고 성전을 재헌납했습니다. 이 행사는 하누카 기간에 기념되며 비록 잠깐이기는 하지만 유대인 독립을 향한 중요한 전환을 의미합니다.

하스몬 왕조의 성립

마카베오 왕조의 성공으로 하스몬 왕조가 세워졌습니다. 이 지배 가문은 유대를 통치했지만 나중에는 갈등과 권력 투쟁에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통치는 신약 시대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같은 유대 민족 사이에 다양한 종파의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유대 종파의 발전

바리새인

바리새인들은 당시 가장 영향력 있는 유대인 집단 중 하나로 자주 언급됩니다. 그들의 초점은 율법과 구전 전통을 엄격히 준수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들은 죽은 자의 부활과 천사의 존재를 믿었기 때문에 다른 종파와 구별되었습니다. 그들의 가르침은 신약성서의 많은 가르침, 특히 예수님의 가르침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사두개인

바리새인들과는 대조적으로, 사두개인들은 특히 사제 계급 내에서 상당한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그들은 부활이나 내세를 믿지 않았고, 이는 종종 그들을 바리새인들과 불화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집단들 간의 신학적 차이점을 이해하면 신약에서 볼 수 있는 많은 대립을 명확히 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에센느

에세네파는 좀 더 금욕적인 그룹이었으며 종종 사해 두루마리와 관련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류 사회에서 물러나 기도와 성경 연구에 전념하는 공동 환경에서 살았습니다. 순결에 대한 강조와 다가오는 메시아에 대한 기대는 당시의 종교 풍경에 독특한 관점을 더해주었습니다.

로마 상황

로마 정복과 통치

기원전 1세기에 로마 제국은 유대를 정복하여 유대인의 경험에 새로운 복잡성을 더했습니다. 로마 통치는 유대인들 사이에 새로운 세금, 정치적 혼란, 억압감을 불러일으켰고, 이는 메시아에 대한 희망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로마의 권력에서 구원해 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로마 문화의 영향

로마가 확장되면서 로마 고유의 관습과 관행이 도입되었습니다. 다양한 종교의 철학, 문학, 관습을 포함하는 그리스-로마 문화가 유대 사회에 스며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문화적 혼합은 초기 기독교 운동으로 퍼져 복음이 공유되고 이해되는 방식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종교 문헌 및 문학

외경의 발전

신구약 중간기에 현재 외경이나 신명기로 분류되는 여러 책이 기록되었습니다. 이 본문은 히브리어 성경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당시 유대 민족의 생각과 신앙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합니다. 그들은 종종 예언, 지혜, 인류와 하나님의 관계와 같은 주제를 다룹니다.

칠십인역

히브리어 성경의 그리스어 번역본인 칠십인역은 기원전 3세기에 등장했습니다. 이 책은 디아스포라에 사는 유대인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었으며 유대 성경을 이방인 세계에 전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칠십인역은 많은 초기 기독교인들이 사용했던 것처럼 신약성경 기록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신약 시대로의 전환

기대의 시간

서기 1세기에 들어서면서 유대 민족은 기대감에 젖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로마 통치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메시아를 보내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기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과 기독교 전파를 위한 비옥한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예수의 초기 추종자들

예수와 그분의 추종자들의 가르침은 신구약 중간기에 배양된 기대와 믿음 위에 직접적으로 세워졌습니다. 그의 메시지는 사랑, 회개, 하나님의 왕국이라는 주제를 다루었습니다. 이 혁명적인 관점은 유대 공동체와 신앙을 탐구하는 이방인 모두의 추종자들을 끌어 모았습니다.

결론: 시대 간 연결

신구약 중간기는 신약성경의 배경을 형성하는 문화적, 종교적 정체성을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 시대의 사건, 갈등, 종파는 초대 교회가 어려운 세상에서 성장하고 자신을 정의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시대를 이해하면 역사를 통해 짜여진 신앙의 태피스트리를 상기시켜 주기 때문에 신약성서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깊어집니다.

Q. 신구약 중간기는 어떤 시대였나요?
A. 신구약 중간기는 구약과 신약 사이의 기간으로, 약 400년간 지속되며 중요한 역사적, 문화적 변화로 가득 차 있습니다.

Q. 신약을 이해하는 데 왜 신구약 중간기가 중요한가?
A. 이는 신약성서의 기록에 나타난 믿음과 관습에 영향을 준 종교적, 정치적, 문화적 배경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Q. 신구약중기에는 어떤 주요 사건이 일어났는가?
A. 주요 사건으로는 마카베오 반란, 하스몬 왕조의 등장, 바리새파와 사두가이파와 같은 다양한 유대 종파의 설립 등이 있습니다.

Q. 바리새인들은 누구였나요?
A. 바리새인들은 유대인의 율법과 구전 전통을 엄격하게 준수하는 것을 강조하는 유명한 유대인 종파로서 신약성서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Q. 헬레니즘은 유대 문화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A. 헬레니즘은 그리스어를 도입했습니다. 유대인 사회에 이러한 관습이 전파되면서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수용과 저항이 동시에 일어났습니다.

질문. 사해 두루마리는 무엇이었나요?
A. 사해 두루마리는 사해 근처에서 발견된 고대 유대인 문서로, 에세네파가 그들의 신앙과 관습을 반영하여 기록한 것으로 믿어집니다.

Q. 어떻게 로마의 통치가 유대에 영향을 미치다 신구약 중간기 동안이었나요?
A. 로마 정복은 정치적 억압, 무거운 세금, 문화적 영향력을 가져왔고, 이로 인해 많은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갈망하게 되었습니다.

Q. 칠십인역이란 무엇입니까?
A. 칠십인역은 히브리어 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으로, 디아스포라 유대인과 초기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질문. 신구약 중간기 동안 유대의 주요 종파는 무엇이었습니까?
A. 주요 종파에는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가 포함되었으며, 각각은 서로 다른 신앙과 관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Q. 메시아에 대한 기대가 신약성경을 어떻게 형성했습니까?
A. 유대인들 사이에 널리 퍼진 메시아에 대한 기대는 초대교회 기간 동안 예수님의 가르침이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전파되었는지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신구약 중간사 400년 요약(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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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yangmocsa 날짜22-04-26

본문

신·구약 400년 중간사 요약
• 제1장 페르시아의 유대 통치와 알렉산더 대왕의 등극(BC 539-332년)
• 제2장 초기 헬레니즘과 마카비 혁명(BC 332-160년)
• 제3장 하스몬 왕가 1(BC 160-67년)
• 제4장 하스몬 왕가 2(BC 67- 37년)
• 제5장 헤롯 왕의 유대 통치 1(BC 37-20년)
• 제6장 헤롯 왕의 유대 통치 2(BC 20-7년)
• 제7장 헤롯 왕의 유대 통치 3(BC 7-AD 6년)
• 제8장 헤롯 왕국의 분할과 제1차 로마 총독 시대(AD 6-41년)
• 제9장 헤롯 아그립바 1세의 통치 시대(AD 41-44년)
• 제10장 제2차 로마 총독 시대(AD 44-70년)

제 1 부 역사적 배경
1. 페르샤 통치 하의 유대인
북왕조에 속한 자들과는 대조적으로 남왕조에 속하였던 유대인들은 포로 기간 동안에 국제 결혼을 거부하고 이방세계 속에서도 구별된 공동체들을 형성함으로써 그들 특유의 동질성을 고수했다. 그들은 모세의 사상과 선지자들의 교훈, 특히 그 기간을 위하여 기록되어진 이사야의 교훈에 착념하여 그들의 행동규범을 삼고자 노력하였다.
이러한 종교 활동의 결과 하나님의 계시가 저장된 책을 수호하려는 조그마한 유대인의 핵심단체가 형성되었고, 그리하여 바벨론은 유대교의 사상을 유지하고 전파하는 중요한 중심지가 되었다.

B.C. 457년 에스라는 바벨론에서 되돌려 받지 못하였던 성전 기물들을 가지고 1,700명의 유대인과 함께 귀국하였다. 그는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유대인들이 이방인들과 가나안의 여자들과 통혼함으로써 모세의 율법을 범하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고, 제사장들을 설득하여 그들의 이방인 아내를 고향으로 보내는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후에 느헤미야는 똑같은 일을 다시 해야만 했다.

구약성경이 종결되었던 무렵(B.C. 400년경)까지 138년간 유대는 페르샤에 예속된 하나의 주였으며, 유대인들은 페르샤제국을 이루었던 128개 주 전역에 분산되어 살았다. 페르샤는 140년이 넘도록 세계를 제패한 국가였고, 그 가운데 유대인들이 가장 넓은 영역에서 관대한 처우와 흡족한 역할을 영위할 수 있었던 B.C. 5세기의 페르샤 왕들은 그의 통치 밑에서 예루살렘 성곽을 재건하였던 아닥사스다 1세와 단 일 년 동안 치리하였던 크세르크세스, 다리오 2세였다.

이미 바벨론의 통치시기에 유대인들은 옛날의 고전적 히브리어 대신에 제국 아람어를 사용하였다. 아람어는 바벨론의 산간 지방에서 사용된 셈족 언어이며 수리아족 방언이었고 히브리어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2. 알렉산더 대제와 유대인
알렉산더 대제의 부친인 마게도냐의 필립은 헬라 문화에 대한 상당한 긍지를 가졌고 그래서 그의 아들인 알렉산더를 심마쿠스라는 선생에게 맡겼고, 그는 알렉산더에게 호머의 일리어드를 알게 해 주었다. 알렉산더가 13세 되었을 때 위대한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스승이 되었고, 그는 그로부터 그리스 문학과 예술을 배우고 이해하게 되었으며 그리스 종교와 문화, 문명에 대한 대단한 존경심을 갖게 되어서 결국에는 헬레니즘의 사도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알렉산더는 약관의 나이에 아버지의 왕위를 계승하였고, 일 년에 걸쳐 그리스 여러 도시 국가들과 전쟁을 하여 그들의 항복을 얻어 냈다. 그는 페르샤군을 격퇴시키고 방향을 지중해의 동편 연안 도시들로 돌렸고, 시돈과 비블리스, 아라두스를 정복하였고, 7개월간의 전투를 거쳐 두로를 정복하였다.

알렉산더는 예루살렘을 정복하려던 중 당시 제사장이었던 야두아가 그를 맞아 그가 그리스 최초의 왕이 되어 페르샤 제국을 정벌하리라는 예언이 기록된 다니엘서의 구절들을 보여 주었고, 그는 이것이 자신에 대한 예언임을 믿게 되어, 이후 알렉산더는 유대인의 친구가 되었다. 332년 그는 애굽을 침략하였고, 331년에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를 설립했고 그곳에 동지중해의 상업적 대도시였던 두로를 능가하는, 그리스의 상업적 이익을 촉진시키는 훌륭한 항구를 설치하였다.

이전 페르샤의 모든 지역을 평정한 알렉산더는 동양과 서양의 사람들을 하나로 합하려는 그의 계획들을 진행시켰는데 그는 아시아에 유럽인의 식민지를 세우고 유럽에 아시아인의 식민지를 세워 서로 다른 민족 간의 국제결혼을 진작시킴으로써 이 계획을 실행하길 원했다.

알렉산더의 정복 사업이 가져다준 중요한 결과 중의 하나는 유대인의 광범위한 분산인데 이것은 기독교의 전파를 예비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알렉산더는 그가 설립한 많은 도시들에서 유대인들이 거주하도록 하는 호의를 보여 주었는데, 유대인은 중국에 이르는 아시아 전역에서 발견될 수 있었을 것이다.

3. 프톨레미 왕조와 유대인
B.C. 323년 알렉산더는 죽으면서 자기의 자리에서 제국을 통치하기에 충분한 나이의 계승자를 남기지 않았다. 그가 죽은 후 그 아내 록산나에게서 한 아들이 태어났지만 이미 그의 제국 안에는 그의 계승자가 되기를 원하는 많은 친가와 처가 사람들이 있었으며, 심지어 그가 장사되기도 전에 그의 왕국을 소유하고자 하는 자들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알렉산더의 후계자들은 그의 제국을 소유하기 위한 경합을 벌였다. 그 중에서 록산나와 그녀의 아들을 죽인 카산더, 그리고 리시마쿠스는 제 2의 알렉산더가 되려는 안티고누스의 음모를 분쇄하기 위한 동맹을 맺었다.

결국, 라구스의 아들인 프톨레미에게는 애굽이, 리시마쿠스에게는 수리아가, 셀류쿠스 니카터에게는 바벨론의 속주들이 할당되었다.

프톨레미는 B.C. 320 애굽을 침공하였고, 예루살렘은 안식일에 공격을 받아 저항 없이 정복당하였고, B.C. 315년에는 프톨레미의 적수인 안티고누스에게 넘어갔으나 가사 전투 이후에는 프톨레미가 다시 그것을 회복시켰다.

당시 프톨레미와 연합세력을 형성하였던 셀류쿠스는 스스로 바벨론의 군주가 되었다.

B.C. 312년은 유대인들 가운데 오랫동안 사용되었던 달력이 시작되는 셀류키드 제국의 개국을 맞았고, 301년의 입수스 전투에서는 안티고누스가 피살되어 프톨레미 1세가 팔레스틴을 장악하게 되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페르샤의 지배하에서 자유스럽게 생활하고 자기네의 종교와 문화적 전통을 행사하도록 허락받았던 것과 동일한 자치권을 누렸고, 중앙정부는 오직 세금징수에만 관여하였고 기타의 내정에는 간섭하지 않아, 대제사장은 페르샤의 통치하에서 행사하였던 그대로 지역사회의 일들을 관장하도록 허락받았다.

프톨레미 왕조의 통치 동안에 애굽은 헬라 세계의 가장 중요한 지(智)적인 중심지 중의 하나가 되었다. 애굽의 알렉산드리아는 학자들의 정착지이며 학문의 커다란 중심지가 되기 시작하여 박물관과 도서관 때문에 연구차 모여든 학생수가 14,000명을 넘은 적도 있다고 한다.

319년에서 198년까지 팔레스틴은 프톨레미 왕조의 지배하에 놓였다. 비록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고는 있었지만 애굽과 팔레스틴에서 살고 있던 유대인들에게는 이 시기가 좋은 기간이었지만 프톨레미 왕조와 셀류키드 왕조 사이의 계속된 전쟁의 와중에서 팔레스틴의 유대인들은 수난을 당하였다.

4. 셀류쿠스 왕조 하의 유대인
셀류키드 왕조의 시조는 알렉산더 대제의 장군들 중의 하나인 셀류쿠스 니카터였다. 그는 군사적인 정복에 의해 헬레스폰트와 지중해 연안에서 동쪽으로 인더스 강에 이르는, 이전 알렉산더 제국의 넓은 국토를 장악할 수 있었다.

321년에 그는 바벨론의 방백으로 임명되었으나 316년에 프리기아의 통치자인 안티고누스에 의해 축출되었으나 301년 입수스 전투 후에 다시 그는 수리아와 소아시아를 할당받았다. 이때부터 셀류키드 시대가 시작되었으며 마카비1서와 어떤 역사서들은 그들의 역사적 사건들을 이 기원에 따라서 연대를 계산하고 있다.

셀류쿠스 1세 이후 탁월한 셀류키드 왕조의 왕 중에 안티오쿠스 3세 황제가 들어간다. 팔레스틴은 198년 파네아스 전투를 통해 프톨레미 왕조의 통치에서 수리아의 셀류키드 왕조의 통치 밑에 예속되게 된다.

안티오쿠스의 초기 통치 기간에는 유대인들이 그들의 관습대로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며 세금을 징수당하지 않는 것을 포함하여 많은 특권과 호의를 누리며 번영하지만 이후 안티오쿠스가 로마군과의 서머나 전투에서의 패배로 인해 무거운 배상금을 부과 받게 되면서 나라 안의 모든 신전의 재산들과 예루살렘 성전의 재산까지 압류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유대인들과의 마찰을 빚게 되었다.

이것은 그 후 세류쿠스 4세의 통치 시기에도 동일했고, 셀류쿠스 4세를 이은 안티오쿠스 4세의 집정기에 이르러 절정에 이르게 된다.

안티오쿠스 4세는 전형적인 동양의 왕으로 행세하였으며 기만술과 가장함과 숙달된 통치를 행했다. 이 시기에 팔레스틴은 제사장직을 뇌물을 통하여 사들이는 이들이 발생했고, 안티오쿠스 4세의 헬라화에 적극적인 자들의 충성으로 인해 곳곳에 체육관과 경기장, 대중목욕탕 등이 생겨났다. 그러자 경건한 유대인들 사이에는 강한 반발심이 일어나게 되었다.

안티오쿠스 4세가 애굽과 전쟁을 수행하고 있을 동안, 뇌물에 의해 자신의 대제사장직을 상실한 야손은 무력으로 자신의 자리를 찾고자 했고, 이 보고를 접하게 된 안티오쿠스 4세는 격노하였고 군사를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진격하여 피의 보복을 자행하였다.

그는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 약탈을 했고, 황금제단과 모든 봉헌된 기명들과 기구들을 다른 보물들과 함께 노략하였다. 무거운 세금을 유대인들에게 부과하였고, 추수곡식의 삼분의 일, 추수 열매의 절반, 사해에서 얻어지는 소금에도 세금을 징수하였다.

안식일 준수와 할례의식, 부정한 음식의 금지와 같은 특징적인 유대인들의 관습들이 사형에 해당하는 죄목으로 금지되었고, 그리스 신과 여신들에 대한 숭배를 강요하였다.
유대인들은 환난의 때를 겪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힘과 잔학한 행위가 그들의 신앙을 꺾지 못하였고 그들은 이교의 헬레니즘이 감행한 맹공격에 끝까지 저항하였다.

이러한 반대 세력은 서기관들에 의해 형성되고 앞장 세워졌다. 그들은 정통적이고 율법적이며 매우 엄격하였고, 이 집단은 처음에는 소규모였으나 전국의 마을과 성읍들로 확산되었고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것을 의식적으로 회피했다. 그들은 점진적으로 유대인을 헬라화 하려는 움직임에 대한 강력한 반대세력이 되었고 반수리아적 활동을 격렬하게 전개했다.

하시딤, 즉 경건한 자 혹은 구별된 자로 알려진 바리새파는 바로 이 집단에서 형성되어 나왔고, 그들은 자신들의 종교를 위하여 기꺼이 핍박과 순교를 감내하였으며 선조들의 신앙의 도리를 고수하는데 충실하였다.

5. 마카비가(家) 통치 하의 유대인
헬라화 정책에 대한 유대인의 반대는 마침내 마카비 일가가 주도하는 공공연한 반란으로 발전되었고, 이 반란은 완전한 정치적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단호한 투쟁으로 격화되었다.

아스모니안 계열의 마타디아스는 이방신을 위한 제단에서 제사를 드리라는 명령을 받고 이에 불복하여 지방 수령을 죽이고 그의 아들과 함께 반란 운동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에 의해 시작된 이 독립 운동은 그의 사후 그의 아들들에 의해 계속적으로 이루어졌는데, 먼저 그의 아들 유다(마카비우스라는 별명을 가짐)에 의해 조직적이고도 광범위한 독립운동이 이루어졌다. 유다는 로마와의 평화 협정을 꾀하는 동시에 조직적인 군대를 조직하여 대항하였다. 그러나 그는 결국 2만의 보병과 2천의 기병을 갖춘 압도적인 수리아 병력과의 전투에서 전사하게 되고, 그의 자리는 동생 요나단이 맞게 되었다.

요나단은 게릴라전을 통해 예루살렘만을 남겨두고 중요한 요새를 하나씩 수리아군으로부터 탈환해 나갔고, 급기야 수리아로부터의 화친조약을 이끌어내기까지 했다.

그러나 요나단은 수리아 내의 분쟁이 요인이 되어 수리아 장군 트리포의 계략에 말려 무참하게 살해당하였고, 그의 형제 시몬이 그 뒤를 잇게 되었다. 시몬은 당시 강대국으로 급부상하고 있던 로마와의 평화 협정체결을 위해 사자를 파견하고, 유대 지방의 영토에 대한 완전한 통치를 확보하였다.

그러나 그도 역시 반역자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므로 마카비가의 다섯 형제의 영웅적인 헌신과 투쟁은 시몬의 죽음과 함께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6. 하스모니안 왕조 하의 유대인
시몬의 죽음 이후 살아남은 그의 아들 요한 힐카누스는 수리아가 정치적 혼란기를 맞은 틈을 타서 독립을 되찾고 나라를 통치하게 된다. 그는 주화에 자기의 이름을 새겨 넣은 최초의 유대 군주가 되었고, 정치적 견해 차이로 인해 하시딤들과 마찰을 가졌는데 이 과정에서 바라새, 사두개, 에세네 등의 분파가 생기게 되었다.

그가 죽은 이후 그의 아들 아리스토불루스 1세가 통치하면서 보다 더 친 헬라적인 정책을 폈고, 그의 사후 그가 생전에 구금시켰던 그의 동생 알렉산더 얀네우스와 결혼한 그의 아내 알렉산드라에 의해 알렉산더 얀네우스가 왕위를 이었고, 그에 의해 하스모니안 왕조 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지는 등 왕권이 절정에 달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통치 기간에 있었던 바리새인들의 반란과 반대세력들에 대한 무자비한 숙청으로 원성을 샀고, 결국 그는 죽으면서 자기 아내에게 바리새인들과 함께 할 것을 충고했다. 그의 뒤를 이은 그의 아내 알렉산드라는 친 바리새적인 정책을 폈고, 이로 인해 시몬의 통치 기간 중에 누렸던 행복하고 번영하는 시대를 회복할 수 있었다.

그녀의 뒤를 이은 사람은 그녀의 생전에 대제사장에 임명되었던 힐카누스 2세였지만 그는 권력을 찬탈하려는 알렉산드라의 아들 아리스토불루스 2세에게 패하게 된다. 그러나 이두매의 왕이었던 헤롯 대왕의 아버지 안티파터의 도움으로 반란을 진압하고 아리스토불루스 2세를 구금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계속된 알렉산드라의 아들들의 반란으로 인해 결국 로마에 도움을 요청하게 되고 이 일을 계기로 하여 로마는 팔레스틴에서의 정치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하스몬-왕조-가계도 (1)

7. 로마 통치 하의 유대인
유대의 역사에 있어 로마의 통치 기간은 B.C. 63년에 시작되어 A.D. 70년 예루살렘의 멸망과 성전의 파괴에서 끝이 난다.

로마의 통치 기간은 크게 다섯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두매 왕조, 첫 지방 총독, 아그립바 1세의 통치, 두 번째 지방 총독, 유대인의 반란으로 구분할 수 있다.

7.1. 이두매 왕조
프톨레미의 왕당파에 속했던 안티파터는 씨저의 호의를 얻어 유대의 총독이 되자, 그의 지위를 확고히 하고 자신의 아들인 파사엘을 유대군의 사령관으로, 헤롯은 갈릴리의 분봉왕으로 삼았다. 씨저의 사후 그들은 다시금 가이사(Cassius)에 협력하여 그의 호의를 얻게 되어 헤롯은 수리아 전역의 총독으로 임명 되었다가, 결국 로마의 도움을 받아 모든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B.C. 24년에 단독으로 유대의 왕이 된다.

7.2. 헤롯 대왕
왕이 된 헤롯은 로마에서 누가 실권을 행사하든지 로마에 충성하였고, 유대인에게 강하고 유력한 정부를 수립하였다. 악티움 해전 이후 헤롯은 자신의 가치를 인정해준 아우구스투스에게 충성하였고, 결국 팔레스틴 전역을 다스리는 왕이 될 수 있었다.

그는 반대자들을 치밀하게 제거하였고, 대부분의 산헤드린 공회원들도 그에 의해 제거 되었다.

헤롯은 그리스-로마 문화의 대단한 숭배자였고, 많은 건물들을 건축하였으며 특히 B.C. 20~19년에 그는 스룹바벨 성전이 주변의 새 건물들에 비해 퇴락하였다 하여 성전 재건에 착수하였다. 그는 11년간 평화를 구가하였으나 마지막 10년간은 다시 정권 쟁취를 위한 가족 내의 암투에 시달리게 된다.

그의 사후 그의 왕국은 그의 세아들, 아르켈라우스, 헤롯 안티파스, 헤롯 빌립에 의해 각각 분할되어 유대, 갈릴리와 베뢰아, 트라코니티스와 인근 지역으로 나뉘어 통치되게 된다.

7.3. 헤롯 대왕의 아들들
아르켈라우스는 유대와 사마리아, 이두매의 분봉왕으로 처음부터 호평을 받지 못해 자신의 통치 지역에서 일어난 폭동과 헤롯이 남긴 복잡한 문제들, 이혼한 여인과의 결혼 등으로 인해 혐오감을 샀고 결국 그는 로마인들에 의해 고울 지방으로 추방되게 된다.

헤롯 안티파스는 갈릴리와 베뢰아의 분봉왕이었고 신약에서 세례 요한과 관련되어 여러 번 언급되는 인물이다. 헤로디아와의 불법적인 결혼으로 인한 세례 요한의 지적으로 그를 투옥하고 참수한 인물이며 빌라도에 의해 보내진 예수님을 심문한 왕이기도 하다. 그는 권력욕에 의해 로마에 갔다가 오히려 왕위를 박탈당하고 추방된다.

헤롯 빌립은 갈릴리 동부와 남동부 지방의 분봉왕이었고, 헤롯의 세 아들 가운데 최상의 통치자였다.

7.4. 로마의 총독들
로마의 총독들은 주로 로마를 위한 재정 대리인이었고, 그의 직무는 로마 정부가 부과한 세금의 징수와 그곳에 주둔한 군대의 통솔, 그리고 중요한 사건의 재판 등이었다.
유대는 원로원에 속한 속주가 아니라 씨저에 속한 속주였기 때문에 징수된 세금은 직접 씨저에게 보내졌다. 많은 유대인들이 세금 징수에 종사했는데 이들은 어느 정도 더 징수하여 초과된 금액을 자신들이 가질 수 있었고, 외세에 협력하는 자들이라 하여 유대인들의 미움을 받았다.

7.5. 헤롯 아그립바 1세
헤롯 안티파스가 A.D. 39년 왕위를 박탈당하고 추방된 뒤에 그의 뒤를 이어 헤롯 아그립바 1세가 왕이 되었다. 그는 로마에서 투옥 되었다가 친분을 쌓았던 칼리굴라가 황제가 되면서 유대의 왕이 되었고, 특별히 바리새인들의 지지를 받았으며, 헬레니즘의 숭배자였고, 그리스 로마적 향락에 탐닉하였고, 결국 A.D. 44년 질병으로 인해 사망하게 된다.

7.6. 헤롯 아그립바 2세
아버지 헤롯 아그립바 1세의 뒤를 이은 그는 아버지의 영토가 아닌 레바논 지방의 콜키스 지역을 분배받게 된다. 그러나 네로에 의해 갈릴리 부근과 윗 요단을 포함하는 지역과 베뢰아의 율리아스란 도시를 다스게 된다. 사도 바울은 바로 그의 재판에 참석하게 된다.

7.7. 제2기의 총독들
A.D. 44~66년 사이에 팔레스틴의 총독들은 모두 7명으로 파두스, 알렉산더, 쿠마누스, 벨릭스, 베스도, 알비누스, 플로루스 등이다.

헤롯 아그립바 1세가 죽은 후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팔레스틴을 총독의 통치 아래 두었고 이 기간 동안은 대단한 고통과 압제의 날들이었다.
이 기간 동안 유대에는 세 부류의 적대적인 당파들이 있었는데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율법적인 생활에 보다 광적이었고, 열심당은 팔레스틴에서 로마를 축출하려 했다. 이 시기의 유대는 로마에 대한 반란과 사마리아인들과의 전투를 치렀으며, 로마와의 대대적이고도 피어린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7.8. 유대인의 반란(A.D. 66~70)
열심당의 혁명적인 활동의 결과 유대인들은 로마와 로마적인 모든 것에 반대하는 증오심을 갖게 되었고 결국 이것은 총독 플로루스의 통치시기에 터져 나오게 된다.
총독이 성전의 보물창고에서 일부를 약탈하자 유대인들은 이를 모욕으로 간주하였고, 헤롯 아그립바 왕의 중재 노력에도 불구하고 반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로마제국은 유대에서의 반란을 진압하고자 베스파시안 장군을 파견했지만 도중 네로의 사망으로 인해 그는 로마로 회군하여 황제가 되었고, 그 후 자신의 아들 티투스(Titus)에게 4개 군단을 맡겨 예루살렘으로 출정시켰고, 결국 4개월 만에 예루살렘은 함락되고 성전과 도시는 파괴되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유대교의 동질성 상실을 가져왔고, 성전 제사는 중단 되었으며 유대교의 영향력 있는 계급이었던 제사장직은 소멸되게 되었다. 또한 또 다른 영향력을 행사했던 산헤드린 역시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다시는 등장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후 다양한 독립 회복을 위한 시도들이 있었으나 모두 실패하게 되고 팔레스틴은 이교도가 번성하였고 팔레스틴 유대교는 1948년 이스라엘의 국가 건설 때까지 종식되게 되었다.

제 2 부 종교적 배경
1. 바리새파
바리새란 명칭이 최초로 사용된 때는 요한 힐카누스가 통치하였던 B.C. 135년이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바리새파의 유래를 그보다 훨씬 이전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들은 율법이 완전히 준수 될 때 메시야가 강림하시며 유대인들이 적국의 통치로부터 해방될 것이라고 가르쳤고, 자신들의 전 재산의 십일조와 이방인들이나 다른 파에 속한 평민들과의 교제를 거부했고 이방인들과의 통혼을 엄격하게 금지하였다.

이들은 자신들의 복장으로 다른 파와 구별하였는데 송아지 가죽으로 만든 경문이 이마와 손목에 매어졌고 경문의 가죽 주머니에는 “이스라엘아 들으라”는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이 적혀 있었고, 유대인의 거의 모든 계급에서 그 구성원을 취하였다.

바리새파 서기관들은 세대를 계승하면서 그들이 계발하고 전승시켜온 규례들이 준수되어야 한다는 극단적인 주장을 하였고, 사두개파와는 반대로 구전을 옹호하였다.
그들은 구약성경을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으로 받아들였으나 풍유적 해석법을 사용하여 그들의 전승까지도 구약과 동등하게 취급하였다.

신약성경에서 언급된 그들의 모습은 안식일을 준수하고, 길게 기도하며, 불필요한 십일조를 바치고, 자주 금식하며, 그들의 경문을 넓히고, 여러 가지 의식상의 결례를 많이 행하고 자만하며 탐욕스럽고, 시장에서 인사 받고, 랍비라 불리는 것을 좋아하며, 회당과 연회에서 스스로 상석에 앉고, 자기들처럼 행하지 않는 모든 사람을 경멸하는 자들로 나타나 있다.

2. 사두개파
사두개란 명칭의 기원에 대하여는 다양한 견해가 있으나 이들은 유대 종파들 가운데서 두 번째의 중요한 종파였다. 이들은 구전 율법을 주장하였지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유전은 용납하지 않았고, 육체의 부활과 영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

종종 이들에 대한 명칭은 외국의 사상을 좋아하고 보통의 유대인에 의하여 지켜지는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자들을 지적하는 자들을 일컫는데 사용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A.D. 60-70년 사이의 대제사장은 항상 사두개인이었으며 이들은 지배계급에 머물러 있었고, 성전을 본거지로 사용했다.

3. 에세네파
이들은 바리새파보다 더욱 극단적인 원래적 종파에 속하고 동양과 그리스의 철학의 영향으로 그 성격이 완만해졌다고 하는 마카비 시대보다 더 엄격했던 하시딤의 후예라는 견해도 있지만 요세푸스에 의하면 이들은 마카비가의 요나단의 때에 활동적이었다고 전해진다.

일들은 주로 금욕주의를 실천하고 성격상 은둔적인 종교집단이었다고 알려져 있고, 이들의 숫자는 예수님 당시 약 4천명 정도였으며, 예루살렘과 유대의 몇 마을, 사해의 서쪽 해안에 있는 엔게디에 주로 거주했다고 한다.

이 파에 가입하려는 자들은 이들이 세 개의 상징, 곡괭이와 앞치마, 흰 옷을 받아 1년간의 견습 기간을 거치고 다시 2년간의 견습을 통과한 후에 공동체원으로 인정받았다고 한다.

이들은 바리새인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외에는 그 어떤 왕도 인정하지 않았고, 대부분 독신생활을 했으며, 한 사람의 청지기에 의해 공동기금을 조성하여 생활하였다. 노예가 없었고 기름 붓는 일이 금지 되었으며 매 식사 전에는 찬물로 목욕을 해야 했고, 죽은 동물을 가까이 하지 않고 옷도 식물성 섬유로 된 옷을 입었다.

4. 열심당
이들은 공물이나 세금을 바치는 일이 참된 왕이신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라 하여 로마 황제에 대한 조공에 반대했다. 파이퍼(Robert Pfeiffer)에 의하면 “바리새파가 하시딤의 후예이듯이 열심당은 마카비 일파의 후예다”라고 한다.

이들은 마카비 일가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율법에 열심을 내었던 것을 본받았기에 열심당이라고 불려 졌고, 또한 하나님의 율법에서 떠난 이스라엘을 보며 하나님에 대한 열심을 보여준 비느하스(민 25:11)의 본을 좇는다고 믿었다.

이들은 A.D. 66-73에 있었던 전쟁에 매우 활동적이었으나 A.D. 73년 5월, 마사다의 마지막 요새가 함락되면서 그 활동의 종지부를 찍었다.

제 3 부 중간사 시대의 유대문헌
1. 히브리어 구약성경의 헬라어역
A.D. 1세기 경 애굽에는 거의 1백만의 유대인이 거주하였고, 알렉산드리아의 5개 구 가운데 2개 구가 유대인의 구역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들은 이곳에서 곧 팔레스틴에서 사용하던 아람어를 잊어버리고 대부분 헬라어를 사용하였다. 따라서 이들이 구약을 사용하게 될 경우 번역본이 필요했으며, 히브리어가 상용어로 살아있지 못하자 팔레스틴과 바벨론에서 아람어 탈굼역이 필요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애굽에 살던 유대인들은 헬라어역의 구약성경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들의 필요에 의해 탄생된 히브리어 구약의 헬라어 번역본인 70인경은 헬라화된 유대인 문학의 뛰어난 산물이라 할 수 있다.

70인경은 구약의 본문 비평에 있어 중요한데 이것은 70인경이 신약을 해석하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헬라어 구약성경은 신약의 저자들에 의해 채용된 사상의 세계와 어휘들을 제공해 주고 있다. 이것은 신약의 종교적인 용어들이 궁극적으로 헬라어 세계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라 70인경의 헬라어를 통해 전달된 구약의 히브리어에서 유래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2. 사해 동굴에서 발견된 문헌들
유대교와 기독교에 있어서 커다란 중요성을 지닌 놀랄 만한 고고학적 발견이 사해의 서안을 들어가는 계곡의 동굴들에서 있었는데, 각기 다른 다섯 곳에서 발견된 필사본들은 쿰란의 공동체 자체에 대한 환한 빛을 던져줄 뿐만 아니라 당시의 사고와 성경본문의 특성,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파하셨고 기독교회가 형성되었던 성경해석의 발생배경, 당시 역사의 다양한 면모들에 대한 가치 있는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다.

사해 두루마리란 용어는 1947년 이래로 사해의 몇 계곡에 위치한 동굴들에서 발견된 많은 문헌들을 말하는 포괄적인 명칭들인데, 사해에서 발견된 두 번째 자료의 무더기는 1951년 헤브론 동편의 사해로 들어가는 와디 다라야 지방의 한 곳인 무라바아트의 두 개의 동굴에서 발견되었다. 이들의 연대는 로마의 통치기간으로 올라가며 대부분 바르 코흐바에 의하여 일어났던 제 2의 유대인 반란과 관계있는 것들이다.

1962년에 예루살렘 구도시에 아랍인들이 여리고 북쪽으로 잘못 전해진 요단강의 절벽에 있는 한 동굴에서 문서들을 발견하였다는 사실에 미국동양연구학회가 근처의 동굴들을 탐사하여 발견한 아람어 파피루스의 연대는 B.C. 375~335년경으로 추정되고 있고 이것은 팔레스틴의 역사를 연구하는 역사학자들에게는 매우 의미 있는 일이었다.
현재 유용한 성문화된 자료의 상당수는 제1, 제4, 제11 동굴에서 발견된 것으로 제1 동굴은 최초의 두루마리들을 전해주었다.

또한 다른 쿰란의 동굴들은 성경적 자료들과 성경이 아닌 히브리어와 아람어 사본들 274개의 단편들을 전해주었다. 특히 제11 동굴은 현재 팔레스틴 고고학 박물관에 소장된 많은 단편들과 약간의 두루마리가 발견되었고, 150개의 시편 중 많은 것을 포함한 두루마리와 원 히브리 문자로 기록된 레위기 등이 발견 되었다.

3. 외경과 위경
구약의 외경은 길이와 주제, 표현방법이 각기 다양한 14권을 일컫는 것으로 많은 영어역 성경들이 수록한 외경의 순서는 흠정역(King James)의 번역자들이 익숙한 구약의 라틴어역을 따르고 있다.

유대인들은 두 개의 구약 정경, 곧 팔레스틴 사본(맛소라 사본을 따르는)과 알렉산드리아 사본(70인역을 따르는)을 가지고 있지만 알렉산드리아 유대인들이 외경 가운데 어떤 책도 정경으로 간주한 증거는 전혀 없지만 헬라어를 사용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아마 외경이 구약 정경의 일부를 형성하였다는 이유로 외경에 정경적 지위를 주었다.

70인경에서 외경에 속한 책들(에스드라 2서 제외)은 항상 정경적인 책들과 나란히 동일 계급으로 취급되었지만 전통적인 유대인이나 개신교 신자들은 외경 가운데 어느 한 책도 정경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종교개혁 시대에 있어 개신교와 로마 카톨릭은 외경에 대하여 서로 상이한 태도를 보였는데 트렌트 종교회의는 다양한 외경들의 정경성을 주장하였고 이것이 1870년 바티칸 회의에서 재확인된 바 있다.

그러나 루터는 외경 가운데 그 어떤 책의 정경성도 인정하지 않았으며, 단지 그것들을 모두 구분하여 구약과 신약 사이에 위치시키는 일을 단행하였다.

성경에서의 외경의 제거는 한 제네바 성경에서 외경을 생략시켰던 청교도의 영향으로 돌리고 있다. 그리고 1629년 흠정역의 어떤 판에는 외경이 없이 출판이 되었고, 1827년 이후 점차 외경은 무시되고 경시되어 왔다.

그러나 비록 외경이 영감된 정경의 일부는 아니라 할지라도 이 책들은 정치적인 면에서나 문학적, 역사적 면에 있어 대단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또한 외경들은 종교적인 측면에 있어서도 그리스도의 탄생을 전후한 세기들 동안에 있었던 유대인의 영적이며 철학적, 지적 생활에 대한 통찰력을 제시해 주고 있다.




제1장 신·구약 중간 시기

1. 중간 시기란 어떤 시기인가?

○ 이스라엘은 사사시대를 거쳐 세 왕이 통치하다가, 솔로몬 왕이 죽은 후 북왕국과 남왕국으로 분열되었다.

- 사사시대 → 통일왕국시대 → 분열 왕국시대

○ 북왕국은 B.C. 722년 당시 세력이 크던 앗수르에 멸망하여 그 백성들은 흩어졌고, 그 후 남왕국은 B.C. 586년 바벨론에게 함락되었다.

- 유다 시대 → 포로시대

○ 그 뒤 B.C. 536년 고레스 왕의 칙령에 따라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유대인을 이끌고 유다로 귀환하였다.

- 포로 귀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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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후 말라기로부터 마태 사이에는 400년 동안은 선지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신구약 중간 시기”.

- 그러나, 이 기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침묵하신 것은 아니다. 다니엘을 통해서 유다의 바벨론 포로와 메시아 탄생 사이의 수 세기에 걸쳐 일어날 일들에 대해 예언해 주셨다.

2. 중간시대의 중요한 변화

구분 시기 중간시대 이전 중간시대 이후
정치적 변화 바사(페르시아) 통치 로마 통치
사고적 변화 동양적 사고 서양적 사고
언어적 변화 히브리어 ⇨ 헬라어 ⇨ 아람어

3. 정치적 변화

(1) 바벨론 통치 : B.C. 612~536년

○ 느부갓네살 왕은 B.C. 606년 남왕국 유다를 정복

○ B.C. 586년에는 예루살렘 성전과 성벽을 불태워 파괴, 남왕국 완전 멸망

○ 그 후 유대인들은 70년간 포로생활(B.C. 606년 최초의 정복으로부터 70년, B.C. 586년으로부터는 50년간)

- 예루살렘 성전 대신에 회당을 만들어 회당에서 모이기 시작

회당은 나중에 예수님의 가르침의 장소가 되고(눅 4:15), 사도들의 복음 전파를 위한 전진기지로 이용됨(행 6:9 스데반, 행 9:20 바울).

- 바벨론에 끌려가 있는 동안 율법을 재해석하는 서기관 그룹이 생겨남.

○ B.C. 536년 어느 날 다니엘은 바벨론 벨사살 왕의 잔치에 부름 받았다. 그 자리에서 신비스러운 손에 의해 벽에 쓰인 글을 해독하였는데, 그날 밤 벨사살은 살해되었고, 바벨론 도성은 바사 군에게 함락.

(2) 바사(Persia) 통치 : B.C. 536~332년

○ 바사 왕 고레스는 B.C. 536년 유대인들에게 본국 귀환을 허락하는 칙령 선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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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1차 복귀 : B.C. 536년 스룹바벨 인도하에 42,360명 복귀

➡ B.C. 515년 예루살렘 성전 재건

② 2차 복귀 : B.C. 458년 에스라 인도하에 5,400명 복귀

➡ 율법 개혁운동

③ 3차 복귀 : B.C. 445년 느헤미야 인도 ➡ 이스라엘 성곽 재건

○ 바사 통치 중 B.C. 400년경 구약의 예언 종식, 400간의 중간기

○ 유대교의 발생

- 연혁 : 에스라의 율법 개혁운동 이후 유대교 발생

- 교리 : 모세오경을 신앙과 생활의 원리로 삼아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며 정교한 규칙 제정

- 유대주의(Judaism)의 세 기둥

① 정경(Cannon) : 교육의 내용

② 회당(Synagogue) : 교육의 환경

③ 랍비(Rabbis) : 교육의 주체

(3) 헬라 통치 : B.C. 332~167년

○ 알렉산더 대왕은 B.C. 333년 바사의 다리오Ⅱ세를 격퇴한 후 B.C. 332년 다시 바사 군 격퇴, 바사 붕괴

○ 헬라 통치 시의 업적

- 고대 세계에 70여 개의 상업도시들을 건설하고 그곳에 희랍인들을 이주시켜 희랍 문화를 전파.

∙ 유대인들도 분산시켜 버림(흩어진 유대인, Diaspora)

∙ 흩어진 유대인들은 그곳에서도 회당을 만들어 모여(행 13:5) 후에 바울 전도여행 시 복음전도의 거점.

- 헬라어가 고대사회에 넓게 확산되어 세계 공용어로 사용(코이네)

∙ 예수님 이후 복음의 확산 시 어느 나라 누구에게나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됨.

∙ 언어의 통일에 따라 구약성경은 헬라어로 번역되고(70인 역), 신약성경은 헬라어로 기록됨으로써 누구나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됨.

○ 알렉산더의 사망 이후 헬라 제국은 분열하게 되었고, 결국은 프톨레미(Ptolemy), 셀루커스(Seleucus) 두 장군에 의해 양분.

- 팔레스틴은 처음에는 애굽을 근거지로 한 프톨레미 왕조의 지배하에 있었으나, 나중에는 수리아의 다메섹을 수도로 정한 셀루커스 왕조에게 복속.

- 프톨레미 왕조의 지배하에 있을 때 유대인들은 평화를 누렸으나, 셀루커스 왕조(수리아)의 지배를 받으면서 고통받기 시작.

- 특히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여호와 예배를 폐하고 이방신 예배 강요

- 더욱이 제사장 ‘야손’이 황제에게 유대의 희랍화 운동을 하겠다는 약속과 돈을 들여 대제사장이 됨으로써 유대의 본격적인 희랍화 시작.

∙ 예루살렘 성전에 Zeus신상 세우고, 유대인들에게 성전 예배를 중지시켰으며 희랍 신에게 경배토록 강제

∙ 완전한 미의 조화는 육체미라고 하면서 할례 금지

∙ 안식일 금지, 성경 소지 금지

※ 성직자의 타락을 참으로 참담한 것.

- 이러한 타락에 대해서는 진리에 근거해서, 그러나 가능한 한 평온한 방법으로 고쳐나가야 한다.

- 그러나 분명하게 시정해 나가야 한다.

- 여기에는 기도와 먼저 자기반성이 선행되어야 한다.

(4) 유다의 독립 : B.C. 167~63년

○ 이에 따라 유대에서는 헬라화 운동에 대항하여 전통적인 유대주의를 지켜나가기 위한 움직임이 벌어졌는데, 그것이 바로 핫시딤운동(Hasidim, 경건한 무리들)으로서 나중에 “바리새파”가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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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히 모딘 지역 마카비家의 제사장 ‘마타디아스’와 그의 5명의 아들, 유대인 청년들은 헬라화 정책에 반기를 들고 독립운동을 시도(이 시기를 “마카비 시대”라고도 함).

- B.C. 164년 유다 마카비는 예루살렘 성전을 빼앗아 Zeus신상 없애고 제사장을 데려다가 성전 성결 후 하나님께 봉헌

∙ 이때 성전에 촛불이 켜진 것을 기념해서 “빛의 축제라고 해서 「하누카 명절」을 지키게 됨.

∙ 이것이 신약시대의 수전절(修殿節, 요 10:22), 봉헌식의 기원

- 요나단 마카비 때 수리아와 평화조약 체결한 결과 유대의 종교적 자유 허락, 수리아는 요나단 마카비를 대제사장 및 유대 통치자로 인정

- 시므온 마카비 시절인 B.C. 142년경 정치적 독립 쟁취

○ 마카비 독립운동 뒤 3대 종파가 생겨나기 시작.

① 바리새파

- 에스라, 느헤미야 시대의 율법 개혁자들을 조상으로 하여, 유대교의 순수성을 보존하는 데 주력. 보수주의자.

- 희랍화에 대항하던 핫시딤의 후예로서, Pharises의 어원 자체가 “갈라진 사람들(Hellenism으로부터 갈라져 Hebraism 고수)

- 전체 구약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면서, 율법과 옛 유대의 전통, 많은 율례와 의식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

- 마카비의 독립운동에는 무관심하고, 예루살렘 성전 재건에 헌신

- 사회적 중간계층, 회당 중심

② 사두개파

- 솔로몬의 대제사장 사독(삼하 8:17)의 이름을 대제사장의 후예로 자처

- 종교적·정치적 자유주의 노선 ⇨ 헬라의 철학, 문화에 충성하고 헬레니즘에 대해 비교적 관용적인 태도를 나타내 유대인들의 미움 자초

- 모세 오경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면서, 서기관들의 율법해석을 불신. 바리새인들과 유대 전통에 반대

- 이해할 수 있는 것만을 믿으려는 경향을 나타내, 영혼불멸과 부활 및 천사와 마귀의 존재 부인

- 대제사장 등 상류 부유층, 성전 중심(성전 의식 강조)

③ 에세네파

- 금욕적이고 경건한 생활태도로 사해 서북 방면에 공동체 형성

- 주된 관심은 율법서(토라)와 종교서적의 연구, 해석

- 종말론적 사고가 팽배하여 광야생활

- 신조는 “선한 사회, 금욕, 명상, 노동, 독신생활”등

○ 시므온 마카비의 아들 요한 힐카누스가 죽자 정권투쟁으로 내분이 일어나, 수리아에 와 있던 로마 대제 폼페이우스에게 도움 요청하였으나, 폼페이우스는 B.C. 63년 유대로 진격하여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로마에 예속

- 마카비家의 힐카누스 2세를 유대의 왕으로 지목하였고, 이때 헤롯이 갈릴리 분봉왕에 오름.

(5) 로마 통치 : B.C. 63 ~ 신약시대

○ 로마에 의해 갈릴리 분봉왕에 오른 헤롯은 로마의 비위를 맞춰 힐카누스에 이어 결국 유대왕이 됨(B.C 37~4년).

- 예루살렘 성전 재건(헤롯 성전), 유대인의 경전과 의식 인정

- 그러나, 사마리아에 아구스도 황제 숭배 신전을 건축했고, 유다에 헬라 문화를 도입

- 이에 반발하여 열심당원 출현(현실 통치에 복종해야 한다는 바리새파와 견해차를 보여 분리)

- 예수님의 탄생 당시 왕위에 있으면서 2세 이하 영아 학살 명령.

○ 로마 총독의 통치

- 헤롯 대왕 사후 유대 왕국은 헤롯의 세 아들에 의해 분할

∙ 복음서에 가장 자주 언급되는 헤롯 안디바스는 갈릴리 지역을 통치한 헤롯 대왕의 아들(세례 요한 처형, 빌라도로부터 예수님을 이송 받음)

∙ 유대 ⇨ 아켈라오, 갈릴리 ⇨ 헤롯 안디바스, 북동부 ⇨ 빌립

(마 2:22) (마 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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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대의 아켈라오 사후 유대인들은 로마의 유대 관원의 이중적 수탈정책을 벗어나기 위해 로마에 대해 직접통치 요구하였고, 이에 따라 로마는 총독을 파견하여 직접 통치.

∙ 빌라도는 로마에서 파견된 유대 총독(눅 3:1~2)

- 많은 군사도로 건설

∙ 나중에 복음을 전하기 위한 복음의 고속도로화

○ 예수님은 로마의 가이사 아구스도의 통치 시, 헤롯 대왕 지배 시 탄생

○ 그 후 계속 로마의 통치를 받다가 66년 반란이 일어나 로마의 침공을 받고 70년에는 디도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 함락, 예루살렘 성 파괴(마 24:2).

4. 복음서의 배경

(1) 유대민족의 사회적 계층

① 「왕」과 「대제사장」

○ 제사장 마카비가 유대를 회복한 이후 제사장이 왕직을 겸직하였으나, 헤롯 이후 분리

- 헤롯은 이두메아 출신으로서 대제사장이 될 수 없었기 때문에 분리되게 되었으며, 따라서 헤롯은 대제사장 격하 정책을 폈다.

○ 대제사장은 민중의 정신적 대표자요, 산헤드린의 의장.

- “산헤드린”은 B.C. 196년 생김. 70인의 유대 장로(서기관, 바리새인, 사두개인)들로 구성된 종교재판 기구. 예수님을 심문하여 빌라도에게 넘긴 공회.

② 부 제사장(제1급의 제사장, 왕하 25:18))

○ 정치적, 경제적 富를 누림

※ 제사장의 세 종류

1) 대제사장

2) 부 제사장

3) 일반 제사장

③ 일반 제사장

○ 특권과 혜택은 없이 의무만 담당 (7,000명 정도)

○ 24 반열에 따라 반차가 정해져 있어서, 평소에는 각자 직업에 종사하다가 절기 때마다 자기 반차가 되면 예루살렘에 올라가 1년에 2주간씩 성전 봉사(눅 1:8, 9)

④ 서기관

○ 유대가 바벨론에 망해 포로로 끌려가 있을 때 형성. 율법적 지식으로 대제사장과 장로 단체에 영향력을 미치면서 사회세력으로 등장

○ 대부분 바리새파 출신, 존칭은 랍비(Rabby)

○ 율법 지식이 유대인의 일상생활에 본질적 요소였기 때문에 민중 사이에 폭넓은 세력을 형성하면서 일반적으로 존경을 받기는 했지만, 많은 시간을 율법의 세부사항에 대한 논쟁으로 허비.

(2) 유대의 종파들

① 바리새파

② 사두개파

③ 에세네파

④ 서기관

⑤ 열심당 : 모세 때처럼 신정정치가 이루어지기를 희망.

헬라어 “셀롯”의 번역(눅 6:15, 12제자 중 하나인 시몬도 열심당원 출신)

로마인들에 대해 폭력까지도 사용했던 헤롯의 정적.

일명 시카리이(자객들) - 단검 소지, 불시 공격 후 도망

⑥ 헤롯당 : 유대 분봉 왕과 정부 당국을 지지하면서 헤롯가가 집권하기를 희망. 예수님을 정치적인 반대세력으로 보아 배척(말 3:6)

(3) 사회적 배경들

○ 예수님 당시 팔레스타인은 경제적으로 큰 불황기

- 제국 신민의 2/3는 노예(6천만 명)

- 서민생활도 크게 빈곤

○ 관리들은 크게 부패

- 세리들은 사복을 채우기 위해 백성들에게 과중한 세금 부과, 차액을 착복

- 제사장들은 성전의 제사로부터 불공정하게 돈을 벌어들였다. 상인들을 성전에 들여 장사하게 하고 돈을 받기도 했다.

○ 지역적 갈등

- 팔레스타인은 세 지역으로 구분(이방, 사마리아, 유대)

- 사마리아인들은 앗수르가 B.C. 722년 북왕국 이스라엘 정복 후 이주정책, 혼혈 정책을 펼 때 이방인과 통혼, 혼혈인이 되어 유대인의 멸시를 받음.

하나님은 신·구약 중간기의 침묵 시기를 통해 메시아의 출현을 준비하셨다. 이렇게 예수님은 완전하게 준비된 세계에 임하셨다(갈 4:4, 5). 메시아를 갈망하는 정치적 상황, 예수님의 가르침의 거점이 된 회당 제도의 정착, 복음 전파를 위해 잘 닦인 도로, 전도의 언어적 장벽을 무너뜨린 언어의 통일, 복음을 받고자 했던 흩어진 Diaspora들. 적절한 준비는 보다 적은 시간 안에 보다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게 하였다.



신구약 중간기 역사 개요


Table of Contents

제2성전 시기(신구약 중간사) 역사 개요

기원전 1050년 사울이 이 왕이 된다. 40년 동안 통치한다. 그 뒤 유다 지파 출신인 다윗이 제2대 이스라엘 왕이 되어 역시 40년 동안 통치한다. 다윗과 우리의 아내 밧세바와 동침하여 낳은 아들은 죽고 두 번째 아들인 솔로몬이 다윗의 왕위를 물려받아 40년 동안 통치한다. 기원전 931년 솔로몬이 죽고 아들 르보호암이 이스라엘의 왕위를 물려받지만 강압적인 통치로 인해 북쪽의 열 지파가 여로보암을 왕으로 삼고 분리된다. 결국 이스라엘은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의 분단된 형태로 마지막까지 가게 된다. 북이스라엘은 기원전 722년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하고 남유다는 586년 앗수르를 멸망시킨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한다. 70년의 유배 생활을 끝내고 기원전 516년 솔로몬 성전에 이어 두 번째 성전인 스룹바벨 성전이 세워진다.

신구약 중간기를 제성전기로 부르는 이유는 중간기라는 명칭이 굉장히 모호하기 때문이다. 구약은 말라기로 끝이 나지만 실제 역사에서 말라기는 재건기 중간 어디쯤에 해당한다고 본다. 즉 연대기적으로 분다면 구약의 끝이 아닌 것이다. 이러한 모호함보다는 스룹바벨 성전이 지어진 이후를 중간기의 개념으로 받는 것이 훨씬 그 시대를 정의하기에 양호하기 때문에 학자들은 중간기보다는 ‘제2성전기’로 호칭하는 것을 좋아한다.

1. 헬라시대(The Greek Era)

  • B.C. 331-B.C. 143년까지의 약 190년의 시기

1) 알렉산더 시대 (B.C. 336-323)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돌아와 두 번째 성전을 지었을 때 세계 역사는 요동치고 있었다.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지만 페르시아는 곧 마케도니아 필립의 아들인 알렉산더가 일으킨 전쟁으로 인해 멸망당하게 된다. 알렉산더는 페르시아가 만들었던 거대한 제국의 중심을 근동에서 지중해로 옮겼다. 팔레스타인을 지나 이집트를 멸망시켰고, 페르시아와 인도 경계까지 정복해 나갔다. 그러나 그는 젊은 나이인 BC 323년, 33세에 요절했고, 결국 그의 제국은 세 제국으로 분열되었다. 시리아를 중심으로 셀레우쿠스 왕조가 형성되었고, 이집트를 중심으로 한 프톨레마이 왕조, 원래 본거지였던 마케도니아 지역은 리시마코스와 카산드로스가 나누어 통치하게 된다.

2) 톨레미(프톨레미) 왕조 시대(B.C. 301-200)

팔레스타인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왕조는 톨레미 왕조와 셀류쿠스 왕조이다. 팔레스타인을 중심으로 위로를 셀류쿠스 왕조가 통치했고, 아래로 이집트 지역은 톨레미 왕조가 통치했다. 두 왕조는 지역적으로 경계를 이루고 있었고, 두 왕조의 야망에 의해 끊임없이 전쟁을 치렀다. 이러한 두 왕조 사이에 자리한 팔레스타인은 피해를 볼 수밖에 없었고, 나라 전체가 전쟁터로 변하기 일쑤였다. 알렉산더 대왕 사후 약 100년 동안 톨레미 왕조가 안정적으로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아마 이 시가가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안정적이고 행복한 시기였을 것이다.

BC 312년 톨레미는 많은 유대인들을 이집트에 새로 건설된 알렉산드리아로 이주시킨다. 유대인 회당이 만들어지고 심지어 유대인 밖에 성전이 지어진다. 후에 이 성전은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유대인들에 의해 파괴당한다. 이때 히브리어로된 구약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 인경(LXX)이 만들어진다. 70인의 학자에 의해 번역되었다 하여 70인 역, 또는 70 인경으로 불린다. 70 인경 번역 이야기가 담겨있는 곳은 가톨릭 성경 구약 외경인 ‘아리스테아스 편지’에 있다. 식민 시민으로서 조공을 바쳤으나 제사장에 의해 유대인 고유의 통치권이 상당히 부여되었으며, 중대한 사건이 아닌 이상 유대인 자치법에 의해 결정되었다.

3) 셀류쿠스 왕조 시대(B.C. 198-167)

이러한 평화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두 왕조를 서로의 땅을 넓히기 위해 자주 충돌했다. 5번 정도의 큰 전쟁이 있었고, 결국 기원전 198년 팔레스타인 지역을 설류쿠스 왕조에 편입시킨다. 이것으로 팔레스타인은 새 주인을 모시게 되었다. 유대인들은 전쟁 초기는 톨레미 왕조에 우호적 있지만 말기에는 셀류쿠스 왕조를 돕게 된다. 그 덕분인지 셀류쿠스 초기에는 우호적으로 유대인을 대했고, 적지 않은 자유도 보장받았다. 그러나 그러한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기원전 190년 안티오쿠스 3세는 로마와 벌린 서머나(Smyrna) 전투에서 크게 패하게 된다. 서머나 전쟁은 로마와 한니발 장군과의 전쟁이었다. 한니발이 패함으로 안티오쿠스는 큰 부담을 안게 된다. 그 여파로 타우러스 산맥(the Taurus Mountains) 서쪽에 위치한 소아시아 지역을 로마에게 빼앗긴다. 금 5,000달러라는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여 재정상으로도 큰 타격을 받는다. 안티오쿠스는 열악한 재정을 만회하기 위해 팔레스타인 지역에 힘에 부치는 세금을 부과한다. 이때 예루살렘 성전에 보관하던 많은 보물들까지 탈취한다. 그래도 이때까지만 해도 견딜 만 했다. 정말 심각한 상황은 다음 통치자에게 일어난다.

안티오쿠스 3세가 살해당하고 그의 장남이었던 안티오쿠스 4세가 왕으로 등극한다. 그는 유대를 헬라화 시키기 위해 강압적으로 유대인들을 대하기 시작한다. 그는 가장 먼저 사독 가문의 제사장이었던 오니아스 3세(OniasⅢ)를 파문시킨다. 오니아스 3세의 파문 뒤에는 시리아파(셀류커스왕조)와 이집트파(톨리미 왕조)의 정치적 이견으로 인한 갈등이 존재한다. 왕조가 바뀌면서 시리아파는 득세하게 되고 이집트 파는 위축되었다. 시리아파는 이집트파였던 오니아스 3세를 처리할 기회를 잡은 것이다. 시리아파는 안티오쿠스 4세에게 충성을 맹세하면서 아니아스 3세를 처리해 달라고 청을 한다. 문제는 오니아스 3세는 사독 계열의 합법적인 제사장이었기 때문에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다. 안티오쿠스 3세는 비교적 온화한 정책을 폈기 때문에 오니아스를 내버려두었다. 그러나 아들인 안티오쿠스 4세는 달랐다. 기회를 엿보던 시리아파는 안티오쿠스 3세가 외국에 나가 있는 동안 아들에게 뇌물을 바치고 충동질해 오니아스 3세를 대제사장직에서 파면시킨 것이다.

시리아파 지도자였던 시몬은 자신의 동생인 야손을 대제사장으로 임명한다. 야손은 안티오쿠스 3세와 결탁하여 예루살렘을 헬라적으로 재정비한다. 안티오쿠스 4세의 지원을 등에 업고 야손은 시몬은 예루살렘에 경기장을 세우고, 유대인들에게 헬라풍의 옷을 입게 한다. 이러한 변화를 지켜보던 정통 유대인들과 하시딤과 경건한 유대인들은 위기의식을 느끼게 된다. 아론이 자손, 특히 사독의 제사장들만이 대제사장이 될 수 있다는 사고 체계를 전복시킨 그들을 그대로 둘 수는 없었다. 그러나 비록 헬라인에 의해 대제사장이 되기는 했지만 야손은 정통파였기에 불만은 있었지만 함부로 행동할 수 없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메넬라우스라는 유대인이 토비야 가문보다 더 많은 뇌물을 바치고 대제사장이 된 것이다. 메넬라우스와 그를 따르던 자들은 안티오쿠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더욱 헬라의 문화를 정착시키려 했고, 정통파를 핍박하기 시작한다.

야손파와 메델라우스파의 그리고 정통 유대인파들간의 긴장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다 안티오쿠스가 이집트 원정에서 전사하게 된다. 소문을 전해 들은 야손과 추종들자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와 메넬라우스를 몰아내기 위해 반란을 일으킨다 그러나 안티오쿠스는 죽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집트를 거의 정복할 뻔했지만 로마가 이집트를 돕는 바람에 실패하고 다시 돌아간다. 이집트 원정의 실패와 로마의 패창을 지켜보던 안티오쿠스 4세는 제국을 정신적으로 통일해야한다는 강박감에 사로잡힌다. 자신이 세운 메넬라우스를 몰아내려 했던 유대인들을 반란세력으로 보고 그들에게 철저히 복수할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긴다. 먼저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야손을 추방하고 다시 메넬라우스를 대제사장직에 복귀시킨다. 자신의 군대를 풀어 닥치는 대로 유대인들을 학살한다. 성전의 기구들을 끌어내 가져가 버린다. 반항하는 유대인들을 잔혹하게 죽이고, 유대교 전통을 뿌리째 뽑으려고 한다.

먼저 희생 제사를 중단시킨다. 또한 할례를 받지 못하고, 안식일을 지키지 못하게 막는다. 심지어 토라를 찢어 불사른다. 유대인들에게 돼지고기를 억지로 먹이게 하며, 곳곳에 우상을 세워 제사를 드리게 한다. 그의 파괴적 행동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유대인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던 성전 뜰에 제우스 신상을 세우고 경배하게 한다. 심지어 자신의 형상을 만들어 놓는다. 수많은 사람들이 반항했고, 반항한 자들은 지체 없이 죽였다. 에피파네스 4세는 유대교 자체를 말살시키려 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외경인 마키 1서와 2서에서 어느 정도 읽을 수 있다.

2. 저항과 독립(B.C 162-64)

*마카비(Maccabee) 혁명은 셀류쿠스 왕조 시대 안에 있지만 독립했던 하스몬 왕조와 함께 묶는 것이 선명해 보인다.

1) 마카비(Maccabee) 혁명

순교를 당하거나 예루살렘을 떠나는 등의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던 유대인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하게 된다. 그 유명한 마카비 혁명이 시작된 것은 예루살렘이 북서쪽에 자리한 모데인이란 마을이었다. 시리아의 한 관리가 이곳에 찾아와 이교 제사를 강요했다. 이 대 다섯 아들을 둔 마타티아스(Mattathias, 한글성경은 ‘맛다디아’로 번역, 이곳에서 마카비라는 이름이 생긴다)라는 제사장이 명령을 거절했을 뿐 아니라 헬라 관리와 배교자들을 죽여버린다. 그리고 산으로 도망친다. 산으로 도망친 그들은 정통을 지키려는 수많은 유대인들을 만나게 되고 그곳에서 하나의 세력을 형성하게 된다.

마카비 혁명

저항운동은 마타티아스(Mattathias)의 세 아들인 마카비(대장쟁이)라는 별명을 가진 유다와 요나단, 그리고 시몬에 의해 계속하여 이어간다. 기원전 165년 12월 25일 그들은 성전을 회복하고 예배를 다시 드리게 된다. 정확히 성전이 더럽혀진 3년 후이다. 이때를 기념하여 하누카, 또는 빛의 절기로 알려진 수전절이 생겨난다.(요 10:22) 도중에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사망하고 안티오쿠스 5세가 등극한다. 나이가 어렸던 탓에 리시아스가 섭정하면서 기원전 162년 유대인들에게 절기를 자유롭게 지킬 수 있도록 허락한다. 리시아스는 그것뿐 아니라 유대인의 호감을 사기 위해 메넬라우스를 죽인다. 핫시딤은 정치적이 목적이 없었기 때문에 더 이상 저항하지 않는다. 그러나 유다는 정치적 독립을 위해 전쟁을 시도하지만 참패하고 자신도 죽임을 당한다. 다메트리우스 1세가 지배하면서 아론 계열의 알키무스를 대제사장으로 임명한다. 그러나 그도 얼마 가지 않아 죽게 된다. 그 후 예루살렘은 무려 7년 동안 대제사장이 없는 공백 상태가 된다.

유다가 죽자 형제인 요나단이 뒤를 이었다. 셀류쿠스 제국은 이때 한참 세력다툼 중이었다. 더메트리우스 1세와 알렉산더 발라스가 충돌한 상태였다. 요나단은 알렉산더 발라스를 지지했다. 결국 승리는 알렉산더 발라스에게 돌아갔고, 덕분에 요나단은 발라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게 된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알렉산더 발라스는 기원전 152년 요나단을 유대의 지도자 대제사장으로 임명하고 만다. 정통 유대교를 신봉했던 하시딤과 경건한 유대인들을 큰 충격에 빠지게 된다. 전쟁으로 인해 손에 피를 묻힌 그가 대제사장이 된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었다. 이것을 참다못한 수많은 유대인들이 마키비 가문에 분노를 갖게 되었고, 예루살렘을 등지게 된다. 이때의 적지 않은 사람들이 사막이나 시골에 내려가 자기들만의 공동체를 만들어간다. 학자들은 쿰란 공동체가 이때 만들어지지 않았는가 조심스럽게 추측한다.

이때 안티오쿠스 4세의 아들을 자칭하던 자기 일어나 알렉산더 발라스를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한다. 자신을 더메트리우스 2세로 명명한다. 그는 다시 안티오쿠스 6세와 세력다툼을 하게 된다. 안티오쿠스 6세를 지지하던 트리포는 시시각각 세력을 확장하며 데메트리우스 2세를 지지하던 요나단을 죽여 버린다.(기원전 143년) 요나단의 뒤를 이어 시몬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그는 더메트리우스 2세에게 세금 면제와 유대인들의 독립을 요구한다. 오니아스 3세 이후 유대는 정통적인 제사장이 아닌 사람들이 대제사장이 되었고, 지도자와 대제사장을 겸직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시몬은 주전 134년 자신의 사위였던 프톨레미에게 살해당한다. 시몬을 대신해 그의 아들 힐카누스가 대제사장이 된다.

2) 하스몬 왕조(B.C134-63)

‘하스몬’이란 용어는 하스몬(Hasmon)가에 속했던 마타디아스와 그의 아들들의 가족명에서 유래한 것이다. 마카비는 마타디아스에서 유래한 것으로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말한다. 하스몬 왕조로 불린 이유는 70여 년 동안 정치적인 독립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요한 힐카누스Ⅰ세(Hyrcanus Ⅰ, B.C. 134-104)

아리스토불루스 Ⅰ세(Aristobulus Ⅰ, B.C. 104-103)

알렉산더 얀네우스(Alexander Jannaeus, B.C. 103-76)

살로메 알렉산드라(Aalome Alexandra, B.C. 76-67)

요한 힐카누스 Ⅱ세(Hyrcanus Ⅱ, B.C. 67-66)

아리스토불루스 Ⅱ세(Aristobulus Ⅱ, B.C. 66-63)

요한 힐카누스Ⅰ세(Hyrcanus Ⅰ, B.C. 134-104)

요한 힐카누스 1세 시절 잠시 속국이 되었지만 주전 129년 로마 원로원의 인준을 받아 독립국이 된다. 힐카누스 1세는 어느 정도 안정이 되자 곧바로 영토 확장에 나선다. 팔레스타인 남부에 자리한 이두메 지역을 점령하고 그들에게 강제로 할례를 시킨다. 이 사건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유대인들은 할례를 받지 않거나 율법을 지키지 않거나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들을 개처럼 취급했다. 그런 그들을 개종시키려 했다는 것은 굉장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힐카누스의 이러한 행동은 후에 이두메 출신의 헤롯 안티파터가 큰 저항 없이 팔레스타인을 지배하게 된다. 힐카누스는 다시 북쪽으로 진군하여 사마리아를 점령한다. 그곳에 있던 그리심 성전을 파괴해 버린다. 그러나 그는 정통파 유대인들에게 결코 환영받지 못했다. 사독 가문이 아니었기 때문 정통적 의미에서 대제사장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 친권력자들은 사두개파가 되고 율법을 경건하게 추구했던 이들은 바리새파가 되어 완전히 구분된다. 사두개인들은 제사장 그룹과 지도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바리새파는 경건한 핫시딤들이었으며 전통적인 신앙관과 율법을 지키려는 열정을 가진 자들이었다.

아리스토불루스 Ⅰ세(Aristobulus Ⅰ, B.C. 104-103)

경건한 평민이 다수를 차지했고, 일부 레위인과 제사장들이 참여한 바리새파는 두 가지에 반대했다. 하나는 힐카누스가 대제사장 자격이 없다는 것과 다윗이 후손이 아님에도 왕이 된 것에 대한 반발이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아리스토불루스 1세(B.C. 103)가 돼서야 왕의 칭호를 사용한다. 아리스토불루스 1세는 유대인이었지만 헬라 문화를 사랑했고, 친헬라적(나중에는 로마적)이었던 사두개인들을 지원했다. 더욱 큰 문제는 그가 어머니와 동생 안티고누스를 살해하는 일에 관여한 것이다. 이러한 성향과 사건들은 경건한 정통파 유대인들에게 혐오와 적대감을 갖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알렉산더 얀네우스(Alexander Jannaeus, B.C. 103-76)

그가 죽고 그의 아들 알렉산더 얀네우스가 왕과 대제사장의 자리를 물려받는다. 그런데 그는 즉위하면서 자신의 동생 아리스토불루스의 미망인과 결혼한다. 그로 인해 바리새인들은 격한 분노에 휩싸였고, 잠잠해서는 안된다는 위기감을 불러일으켰다. 왜냐하면 그는 비정통적이지만 분명히 대제사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대제사장이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을 저지른 것이다. 그는 거리끼지 않고 ‘왕’의 칭호를 사용했다.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모든 주화에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자신이 왕임을 새겨 놓았다. 그는 전혀 종교적이지도 않았고, 대제사장직을 혐오하는 것 같은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장막절에 제단에 부어야 할 전제를 땅에 의도적으로 쏟아 버린다. 그 모습을 바라본 백성들은 제사에 사용하기 위해 가져왔던 시트론이란 나무를 그에게 던지며 분노했다.

화가 난 그는 군대들에게 명령하여 많은 유대인들을 성전 뜰에서 살해한다. 결국 내전이 발발하게 되고 6년이나 지속된다. 그는 자신에게 반항하는 800명 정도의 유대인들을 십자가형에 처하는 악랄한 인간이었다. 그러나 그는 죽으면서 아내에게 바리새파와 화해하고 친하게 지내도록 충고한다. 당시 바리새파는 특정한 집단을 이룬 것은 아니었지만 서로 공유된 교리적 관점과 경건 습관으로 인해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고, 여론을 형성하기까지 했다.

살로메 알렉산드라(Aalome Alexandra, B.C. 76-67)
Salome Alexandra
요한 힐카누스 Ⅱ세(Hyrcanus Ⅱ, B.C. 67-66)
아리스토불루스 Ⅱ세(Aristobulus Ⅱ, B.C. 66-63)

알렉산더 얀네우스가 죽자 그의 첫째 아들인 요한 힐카누스 2세가 이어받는다. 그러나 그의 동생 아리스토불루스는 사두개파의 지지를 받았을 뿐 아니라 정치적 야망이 있었다. 그의 어머니가 죽자는 그는 즉시 행동을 개시한다. 자신을 따르는 군대를 동원하여 그의 형인 힐카누스 2세를 여리고 근처에서 격퇴시킨다. 아리스토불루스는 기원전 66부터 63년 동안 왕과 대제사장이 된다. 하스몬 왕조는 갑자기 몰락한다. 동생에게 쫓겨난 힐카누스는 이두메의 총독으로 있던 헤롯 안티파터(Antipater, 헤롯 대왕의 아버지)의 충동질로 전쟁을 일으킨다. 힐카누스는 아라비아 통치자인 아레타스 3세의 도움을 받아 아리스토불루스는 공격한다. 팔레스타인 상황을 지켜보던 로마가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폼페이는 스카우루스(Scaurus) 장군을 보내 처리하도록 한다. 그러나 뒤로는 아리스토불루스의 뇌물을 받고 그를 후원하고 있었다. 잘못하면 오히려 아리스토불루스의 음모에 당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 폼페이는 자신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을 공격하고 점령해 버린다.

로마 황제 가시사의 지지와 권위를 받던 폼페이우스(Pompeius) 장군은 미드리다테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다. 기원전 63년 미드리다테스를 다시 반격을 시도하지만 결국 패하고 자결함으로 본도(Pontus) 지방은 폼페이우스 장군의 영향 아래 떨어진다. 폼페이우스 장군은 십 대 때부터 아버지를 도와 전쟁에 참여했으며 공격적이고 잔인한 장군이었다. 기원전 77년 전직 집정관이었던 레피두스가 일으킨 반락을 진압하는 것을 비롯해 마리우스파의 잔당 세르토리우스를 진압하기를 자청하기까지 한다. 그때 나이 겨우 29살이었다. 기원전 72년 집정관이 되었다. 집정관에서 물러난 기원전 67년 로마의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해적 토벌대 사령관에 취임한다. 보수적인 원로원 의원들은 쉽게 허락하지 않았지만 결국 승낙을 얻게 된다.

폼페이우스(Pompeius) 

그는 뛰어난 전술과 지휘로 3개월 만에 로마 근처의 대부분의 해적들을 소탕해 버린다. 이러한 인기와 신임을 통해 폼페이우스는 최고의 절대 사령관이 되고 연장되는 해운까지 얻는다. 결국 소아시아를 지배하던 미트라다테스와 전쟁을 했던 것이다. 시리아를 거쳐 곧바로 유다로 들어가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결국 유다는 시리아 소속의 로마 속국이 된 것이다. 후에 폼페이우스는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쳐들어오는 카이사르와 전쟁에서 패하여 이집트로 도주한다. 그러나 기원전 48년 9월 29일 자신의 58번째 생일날 자신의 군사들에게 배반당해 죽고 시체가 바다에 던져진다. 제2성전기 문헌인 <솔로몬의 시편>에서 폼페이우스를 암시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을 당한다는 기록이 있다. 이렇게 하여 힐카누스는 다시 대제사장으로 임명되고 유대 분봉왕이 된다. 이렇게 하여 하스몬 왕조는 막을 내리고, ‘왕’도 사라지게 되고 로마의 속국이 된다. 이제 로마의 치하에서 헤롯의 가문이 팔레스타인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3. 로마 시대(BC 63-AD135)와 헤롯 왕조

이두매인(Idumea)

헤롯가문은 아이러니하게 유대인들이 아닌 이두매인들이다. 이두메인들은 야곱의 형이었던 에서의 후예인 에돔족속을 말한다. 이두매는 ‘에돔 사람의 땅’이란 뜻이다. 사해 남쪽과 동쪽에 걸쳐있다. 이곳을 페트라지역이라 부른다. 에돔은 붉다는 뜻이다. 유다지파 남쪽에 위치한 시므온 지파와 지척이며 대부분 유대인들과 원수지간이었다. 그들은 바벨론 침공 때 함께 멸망당했지만 잔존 세력들이 남아 계속하여 에돔 사람들로 역사에 남았다. 마카비 시대에 이두메인들은 마카오에게 참패를 당한다. 요세푸스는 후에 요한 하르카누스 1세가 모든 이두메 사람들을 정복한 후 할례를 받는 조건으로 남아 있게 했다. 유대인 여인들과 섞이면서 반은 에돔 족속이고 반은 유대인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이두매인들이었다. 그들은 유대인들에게 심한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고, 때로는 복수심을 품기도 했다. 겉으로는 유대인의 범주 안에 들었지만 유대인들은 이두매인들을 열등한 민족으로 하대했다.

헤롯 안티파터 1세(Antipater, B.C. -45)

헤롯 안티파스 2세(Antipas)

헤롯 대제(Herod the Great, B.C. 73- B.C. 4)

헤롯 아켈라오(B.C. 23 – A.D. 18)

본디오 빌라도(A.D. 26-36)

헤롯 안티파스(B.C. 3 – A.D. 39)

헤롯 빌립1세( -34)

헤롯 아그립바1세(A.D.37 – 44)

1) 헤롯 안티파터(Antipater)

특이하게도 하스몬 왕조의 역사에 말기에 갑자기 이두메 사람인 헤롯 안티파터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힐카누스 1세에 의해 이두메 사람들이 할례를 받았다는 이야기 외에 등장하지 않다 갑자기 등장하여 하스몬 왕조의 몰락에 일조한다. 아마도 헤롯 안티파스가 등장하기 전까지 이두메 지역은 거의 소외되거나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는 변방으로 머물러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헤롯 안티파터는 동생 아리스토불루스 Ⅱ세 때문에 피난중이었던 힐카누스 2세를 충동질한다. 무능하고 유약했던 헬라누스는 안티파터에게 속아 자신의 동생을 로마의 힘을 빌어 몰아낸다. 그러나 결국 자신도 아무런 이득도 취하지 못하고 하스몬 왕조는 몰락하고 대신 헤롯 안티파터가 대시 팔레스타인을 지배하고 만다. 안티파터는 교활하고 잔인했다. 안티파터는 초기에 폼페이우스를 절대적으로 지지했다. 그러나 기원전 48년 폼페이우스가 몰락하자 즉각 카이사르(Caesar)에 충성을 바친다. 지극히 정치적이고 교활했던 그는 카이사르에게 가서 자신의 왕관을 바치고 죽여 달라고 한다. 그러자 카이사르는 다시 그의 왕관을 머리에 씌우고 일으켜 준다.

안티파터로 인해 카이사르는 팔레스타인 지역뿐 아니라 디아스포라 유대인에게도 강력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입지에 서게 된다. 카이사르는 안티파터를 활용하기로 하고, 즉각 그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고 유대의 총독으로 임명한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결코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유대인들이 무시하는 이두메인이라는 점이 가장 컸고 또한 과도하게 로마를 등에 업고 활개 쳤기 때문이다. 기원전 47년 그는 유대의 지방행정관으로 임명되었고, 25살이던 자신의 아들 헤롯을 갈릴리 총독로 임명한다. 기원전 44년 카이사르가 죽자 카이우스(Cassius)가 시리아 총독이 되어 유대에 과도한 세금을 거두어 들인다. 결국 안티파터는 43년 독살되고 만다.

헤롯 안티파스 2세(Antipas)

2) 헤롯대제(Herod the Great, B.C. 73/43- B.C. 4)

헤롯 대왕의 이야기는 아버지를 암살한 자들을 처형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후 하스몬 왕가의 공주였던 미리암과 결혼한다. 미리암이 청혼한 것으로 나오지만 헤롯이 강제로 청혼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당시 헤롯은 도리스라는 부인과 3살 된 아들 안티파스(자신의 아버지와 동명)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을 버리고 마리암과 결혼하여 유대인들의 호의를 사려했다. 기원전 42년 드디어 로마의 정치 내전이 막을 내린다. 권력을 잡은 안토니(Antony)는 안티파터의 두 아들 파사엘(Phasael)을 유대의 통치자로 헤롯을 갈릴리의 통치자(분봉왕, tetrachs)로 임명한다. 이들의 중요한 임무는 로마가 파르티아를 상대로 한 전쟁에서 실패해 손해를 본 것에 대한 자금 조달이었다. 갈릴리에서 폭동이 일어난 것을 이러한 이유 때문으로 보인다.

기원전 40년, 파르티아인들은 팔레스타인 지역을 침략한다. 아리스토불로스 2세의 아들 안티고누스도 자신의 왕좌를 다시 찬탈하기 위해 이들과 함께 한다. 이들은 예루살렘 포위하였고, 붙잡혔지만 곧 자살한다. 그러나 헤롯은 가족들을 마사다 요새에 숨기고 로마로 피신한다. 로마에 달려간 헤롯은 곧바로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를 접견한다. 그들은 헤롯을 원로원에 소개했고, 원로원은 헤롯에게 유대의 왕으로 임명된다.(B.C 40) 헤롯은 안토니가 지원한 로마의 군대를 이끌고 37년에서 3년 동안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결국 안티고누스를 죽인다. 드디어 그 유명한 헤롯 대왕의 통치가 시작된 것이다. 헤롯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다. 로마의 옥타비아누스와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가 손을 잡고 자신을 적지 않게 힘들게 했기 때문이다. 헤롯의 클레오파트라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없었다. 잘못하면 자신이 겨우 붙잡은 권력도 모두 놓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기원전 31년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와의 악티움 전쟁에서 패함으로 해결되었다.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가 있는 이집트로 피신하고 만 것이다.

헤롯은 두 고래 싸움에 새우처럼 위기에 모면했지만 나바테아와의 전쟁을 핑계로 전쟁에 안토니우스를 돕지 않았다. 전쟁이 끝났을 때 헤롯은 다시 옥타비아누스가 있던 도로스 섬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이곳에서 헤롯 안티파터가 카이사르에게 왕관을 내려놓은 것과 비슷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이야기는 안티파터가 아니라 헤롯 대제가 원형인 듯하다.] 그는 옥타비아누스에게 자신의 왕관을 내려놓고 안토니우스를 도운 것을 사죄하고 같이 동맹하고 싶다고 제안한다. 옥타비아누스 입장에서 헤롯은 교활했지만 많이 유용한 존재였다. 겉으로는 기꺼이 받아 들였고 헤롯의 충성도 진심인 것처럼 인정했다.

헤롯의 통치는 이전의 헬라시대와 하스몬 왕조 시대와는 상당히 달랐다. 일단 헤롯은 유대인은 아니지만 유대적이었다. 그러나 우월한 입지를 가지지 못한 열등한 민족이었다. 완전한 헬라나 로마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유대인도 아니었다. 이러한 애매한 헤롯 가문은 유대인에게 잘 보이기 위한 노력을 하는 동시에 혐오했다. 헤롯 가문이 양가적 성향은 헤롯 안티파스 2세에서 극에 이른다. 그는 이전세대보다 더 심한 헬라화 정책을 편다. 그는 이방인에게는 이방인처럼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행동했다. 그는 자신의 입지를 위해 힐카누스의 손녀 마리암네(Mariamne)와 결혼함으로 유대인들에게 환심을 사려했다. 또한 기원전 20년 스룹바벨 성전은 보수하고 증축하여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화려하고 거대한 성전을 만든다. 유대인들은 이것을 ‘헤롯 성전’으로 불렀다. 제자들 예수님께 성전을 가리키며 자랑스러워할 만큼 유대인들에게 자부심을 주었다.

이두메인이었기 때문에 왕은 될 수 있었으나 대제사장은 겸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대제사장의 위상을 낮추기 위해 몇 가지를 고안해 낸다. 먼저 대제사장직의 세습을 철폐하고 자신이 임명한 사람만이 대제사장을 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평생직이 아니라 일정한 기간만을 할 수 있도록 기한제로 바꾸었다. 이로인해 자신에게 이로운 사람이나 뇌물을 주는 세속적인 대제사장이 선출되게 된다. 헤롯 대제는 유난힌 건축사업에 몰두했다. 예루살렘 성전을 비롯해 갈릴리 해변을 정비하고 카이사랴라 명명한다. 사막의 요새인 마사다를 재정비하고, 사바스테에 있는 고대 사마리아 도시들을 등을 건축한다.

정치적으로도 유대인들의 권력을 축소시키기 위해 산헤드린 공의회를 축소시키고 헬라주의자들을 중심한 왕실 고문단을 세운다. 또한 세습된 귀족신분까지 공을 세운 사람들로 대체한다. 강력한 중앙집권적 관료체제를 만들어 모든 행정과 권력을 자신의 손을 거치도록 만들었다. 예루살렘에 거대한 극장을 세우고, 들에는 원형극장을 건설했는데, 이것은 로마 황제를 기리기 위한 것이었다. 요세푸스는 헤롯이 5년을 주기로 행사를 치르게 함으로 유대인들에게 자신들이 주인은 로마 황제임을 각인시키려고 했다. 그렇게 해야만 로마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은 자신의 자리가 정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헤롯은 유대인들을 잘 이해하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그는 로마적이면서 동시에 유대적이고 싶었다. 이러한 딜레마는 자신의 동상을 세우려는 이들을 지원함으로 경건한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헤롯의 말년은 치욕의 시간이었다. 첫 번째 아내인 미리암을 기원전 30년 경에 간통죄를 뒤집어 씌워 처형하고 그의 장모까지 죽인다. 그의 숙부였던 요셉도 함께 처형한다. 사실이었는지 확인할 수 없지만 그의 아들들이 자신을 독살하고 왕위를 차지하려는 음모를 꾸몄다고 하여 몇 명의 아들을 처형한다. 이러한 상황들은 헤롯이 얼마나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고전 분투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정통 유대인이 아니었으며, 로마의 권력 다툼으로 인해 자신의 자리를 지켜야 했고, 수많은 정적들을 대적하기 위해 노심초사했다.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 아내와 주변의 사람들, 심지어 아들들까지 죽여야만 했던 것이다. 기원전 4년 그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 죽는다. 그는 자신의 유언을 통해 자신의 영토를 세 명의 아들에게 주었다. 아켈라오는 자신이 통치하던 전 영토를, 안티파스에게는 갈릴리와 뵈레아를, 빌립1세에게는 갈릴리 북쪽과 동쪽인 골란과 베타니아, 트라크노파스를 주었다. 그러나 그의 유언은 단지 유언일 뿐이었다.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투누스를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세 아들 누구도 아버지가 받았단 ‘왕’의 칭호를 받지 못했다.

우리는 종종 헤롯 대왕이 예수님의 탄생과 맞물려 일어나 유아학살 사건의 장본인 것처럼 말하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다. 또한 시기적으로도 맞지 않다. 예수님은 B.C. 4년에 태어난 것이라면 헤롯 대제는 유아학살의 장본인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해가 그가 죽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곧바로 학살 사건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적어도 2년 정도가 흘렀음을 암시한다. 즉 그의 죽은 사후에 학살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또 하나의 난제는 당대의 어느 기록물에도 유아학살사건이 기록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심지어 헤롯 대제를 원수처럼 여기는 요세푸스까지도 기록하지 않았다. 아마도 유아학살사건은 후대에 사건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제 팔레스타인 통치는 헤롯의 아들 헤롯 아켈라오에게 넘어간다.

3) 헤롯 아켈라오(B.C.23/4 – A.D. 18/6)

헤롯 대왕이 죽자 헤롯의 여러 아들들은 마음이 급해졌다.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로마의 연줄을 찾고 대려고 했다. 또 하나의 문제가 발생한다. 헤롯의 통치를 반대했던 유대인의 대표단들도 로마로 향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분명 이두매인이 아닌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왕이 되기를 갈망했을 것이다. 유대인 대표단은 그렇게 되지 못할 경우 로마의 직접 통치를 바랬다. 그러나 결국 그들의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헤롯 대왕의 아들 헤롯 아켈라오가 유대 땅의 통치자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아켈라오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자신을 반대했던 자들을 잔인하게 보복한다. 이 사건은 예수님의 비유 속에 종종 등장한다.(눅 19장)

아켈라오는 신약 성경의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요셉이 이집트에서 돌아올 때 아켈라오가 왕이 된 것을 알고 갈릴리로 간다. 요셉은 아켈라오가 아버지였던 헤롯 대왕과 별반 다르지 않았고 교활하고 잔인한 것을 소문을 통해 이미 접한 것으로 보인다. 아켈라오가 분봉왕으로 있을 때 갈릴리에서 폭동이 일어난다. 그는 무자비하게 3천명이 넘는 사람들을 학살한다. 그로 인해 사마리아를 비롯한 통치지역 전반에서 그에 대한 거센 항의가 일어나고 로마에 항의서를 보낸다. 결국 아켈라오는 기원후 6년 로마는 그를 직위를 박탈당한다. 이렇게 하여 헤롯의 가문은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하게 된다. 팔레스타인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헤롯 아그립바가 유대의 왕으로 3년(기원후 41-44) 정도 통치한 것을 제외하고는 로마의 속국으로 남게 된다. 아켈라오는 폐위되어 갈릴리오 유폐되어 18년 죽임을 당한다. 그 후, 신약 성경에 등장한 그 유명한 빌라도(A.D. 26-36)가 유다의 총독으로 오게 된다.

4) 헤롯 안티파스(B.C. 4 – A.D. 39)

헤롯 안티파스에게는 갈릴리와 요단동편 계곡이 주어진다. 요단강 서남부지역은 로마 직할이 되어 로마에서 파송된 총독들이 통치한다. 예수님이 심문을 받을 때 빌라도가 헤롯에게 보낸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예수님은 갈릴리 출신이었고, 사건은 빌라도 관할인 예루살렘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빌라도는 예수의 심문을 피하고 싶었지만 간교한 헤롯 역시 예수를 사건이 일어난 예루살렘, 즉 빌라도에게 다시 보내 버린다. 로마의 총독이 유대를 다스리면서 몇 가지 변화가 일어났다.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었고, 로마 군인들은 성전에 함부로 드나들 수 없었고, 특히 군기를 가지고 들어갈 수는 없었다. 들어가려면 반드시 군기를 내려놓고 가야했다. 산헤드린 공의회도 사법권이 주어지지 않아 형집행은 로마 총독에게 위임해야 했다. 예수님이 산헤드린의 가결에도 불구하고 사형을 당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은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데려가 사형을 언도해 달라고 부르짖은 것이다. 빌라도는 잔인하고 간교했다. 그는 유대인들의 항거를 폭력으로 억압하려 했으며, 그들의 종교를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한 번은 갈릴리 순례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의를 드릴 때 혁명자들로 의심하고 그들은 잔인하게 학살한다.(막 15:7, 27)

안티파스는 무려 43년을 갈릴리를 통치한다. 그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도시를 건설하여 티베리아(Tiberiras, 성경은 디베랴)로 부른다. 이곳은 원래 공동묘지였으나 안티파스는 무척 마음에 들어 무덤을 모두 제거하고 도시를 건설한 것이다. 유대인들은 부정하게 여겨 싫어했다. 경건한 유대인들을 이곳에 거주하기를 싫어했고, 가까이 가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안티파스는 이복동생인 헤로데의 아내 헤로디아를 아내로 삼았다. 성경은 헤로디아가 그의 친동생인 빌립으로 소개한다. 이 부분은 비평적으로 다루어져야할 부분이다. 다른 동생 헤로데가 있었는지, 아니면 빌립의 어린 시절 이름이었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아마 정치적인 목적으로 그랬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왜냐하면 헤로디아는 헤롯 대왕과 마리암의 손녀이기 때문이며, 헤롯에게 처형당한 아리스토불루스의 딸이었다. 안티파스의 아내는 친정인 다마스쿠스 왕국으로 추방된다. 분노한 다마스쿠스 왕은 과거의 사위였던 안티파스를 공격하여 그에게 쓰라린 패배를 안겨준다. 안티파스와 헤로디아 사이에 딸 살로메가 태어난다. 헤롯 안티파스의 생일 살로메가 춤을 춘 대가로 세례요한의 목을 요구하게 된다. 헤로디아는 간교하면서도 권력욕으로 가득했다. 그는 세례요한 비판을 넘기지 못하고 적당한 기회를 포착하고 죽인 것입니다.

안티파스는 세례요한으로 인해 폭동이 일어날 것을 염려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를 경계했다. 비록 헤로디아의 간청이기는 했지만 한편으론 이번 기회에 세례요한을 죽일 수 있는 기회로 본 것이 틀림없다. 수많은 사람들이 세례요한을 따랐고, 그의 한 마디 한 마디가 강력한 힘을 발휘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완전히 세족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예수님의 활동이 알려지자 세례요한이 다시 살아났다고 두려워했기 때문이다.(막 6:14-16) 그는 예수님의 기적을 듣고 보고 싶어 했고, 결국 마지막 심문을 받을 때도 기적을 일으켜보라고 종요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헤롯 앞에서 아무 말도, 아무 행위도 하지 않으신다. 결국 심심해진 헤롯은 다시 빌라도에게 돌려보낸다. 예수님은 헤롯 안티파스를 ‘여우’(눅 13:32)라 불렀다.

안티파스의 추락은 참으로 어이없는 것이었다. 헤로디아는 남편에게 소영주로 있지 말고 진정한 ‘왕’의 칭호를 받으라고 한다. 아마도 한 두 번 간청한 것은 아닌 듯하다. 결국 안티파스는 당시 황제였던 칼리쿨라에게 ‘왕’의 칭호를 달라고 부탁하지만 오히려 칼리쿨라의 의심을 받아 갈리아로 추방 당하고 만다.(39년)

5) 헤롯 빌립2세(Herod Phillip)

헤롯의 아들인 빌립 1세는 분봉왕이 아니다. 성경은 그가 헤로디아의 첫 남편이었고, 안티파스의 이복 동생으로 나온다. 그가 헤롯 안티파스의 이복 동생인 것을 감안할 때 아마도 그의 다른 이름은 헤로데였고, 헬로디아가 그의 아내였을 것이다. 살로메 역시 헤롯 안티파스의 딸이기보다 빌립의 딸일 가능성도 적지 않다. 만약 그렇다면 왜 헤롯 안티파스가 빌립의 아내를 취했으며, 빌립은 별다른 저항도 없이 자신의 아내를 형에게 주었을까? 단지 추즉에 불과하지만 안티파스와 빌립 사이에 모종의 밀의(密議)가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빌립에 대한 이야기는 성경에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빌립2세 역시 그다지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골란 지역과 베다니 지역의 분봉왕이 된다. 그는 로마 황제의 초상을 화폐에 새긴 첫 번째 유대인 군주였다. 갈릴리 북쪽은 유대인들이 드물어 영향력이 많지 않았다. 별다른 사건 없이 그는 34년에 후손도 없이 세상을 뜬다.

6) 헤롯 아그립바1세(A.D.37 – 44)

헤롯 대왕의 손자다. 야고보를 죽이고 베드로를 감옥에 가둔 헤롯이다.(행 12장) 예수님의 생애는 어릴 시절 헤롯 대왕, 어린 시절은 헤롯 아켈라오, 공생애 기간은 헤롯 안티파스가 있었다. 사도행전이 시작되면 아그립바 1세와 아그립바 2세가 등장한다. 누가는 그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아 충으로 죽었다고 말한다. 아그립바는 로마에 머물며 칼리쿨리의 호의를 얻는데 성공한다. 칼리쿨라는 37년 그에게 필립이 다스렸던 갈릴리 북동쪽을 선물한다. 그리하여 그 지역은 다시 헤롯 가문의 수중에 들어온다. 2년 후인 39년에는 안티파스가 다스리던 갈릴리 근방까지 아그립바에게 주어진다. 41년에는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이두메 지역까지 주어짐으로 다시 할아버지인 헤롯 대왕의 때의 모든 영토를 아그립바가 관활하게 된다.

그런데 칼리쿨라는 아그립바에게 예루살렘 성전 안에 자신의 동상을 세우라고 명령한다. 만약 그렇게 될 경우 죽음까지 불사한 유대인들이 폭동을 일으킬 상황까지 갈 수 있었다. 그러나 41년 칼리쿨라가 암살되고 클라우디우스가 황제로 등극한다. 다행히 클라우디우스는 자신의 동상을 세우라고 명령하지 않았다. 아그립다는 유대인들에게 적지 않은 칭송을 받았는데, 그가 경건한 유대인처럼 대부분의 율법을 지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대의 역사가들은 그가 유대인들 앞에서만 그렇게 했을뿐 헬라인들에게는 헬라인처럼 행동했다고 서술한다. 누가는 그가 연설을 하면서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아 충(蟲)으로 인해 죽었다고 말한다.(행 12장) 그가 죽자 그의 아들 아그립바 2세에게 통치권이 넘어가지 못하고 시리아 식민지로 떨어진다.

7) 헤롯 아그립바2세(A.D.27 – 100)

바울을 심문한 헤롯이다. 성경은 헤롯이라 하지 않고 바로 아그립바로 부른다.(행25-26장) 헤롯 아그립바 1세의 아들이며, 헤롯 대왕의 증손자이다. 정식 이름은 아르쿠스 율리우스 아그립바2세(Marcus Julius Agrippa II, A.D. 27-100)이다. 일반적으로 헤롯 아그립바 2세(Herod Agrippa II)로 부른다. 아버지 아그립바 1세가 죽었을 때 그의 나이는 고작 17세였다. 로마가 그에게 아버지의 뒤를 잇지 못하게 막은 이유는 어린 나이 때문일 수도 있다.

50년 칼키스(Chalcis)지역의 왕이었지만 후에 갈릴리 지방의 분봉왕이 된다. 누이였던 베니게와 근친상간을 범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유대인들에게 미움을 받았다. 바울이 가이샤랴에 구금되어 있을 때 베스도에게 문안하러 가서 바울을 대면한다. 바울의 변명을 듣고 아무 죄가 없다고 선언했지만 가이사에게 호소하여 로마로 보낼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헤롯 가문의 마지막 왕이었다. 후에 팔레스타인을 통치하지는 못했지만 예루살렘의 성전에 관한 문제는 자신이 관할했다. 심지어 자신이 대제사장이 되어 유대인들의 미움거리가 되었다. 예루살렘 멸망 후 로마에 돌아가 행정관으로 살다 100년 경에 죽었다고 전해진다.

지금까지 신구약 중간기 또는 제2성전기로 알려진 시기를 살펴봤습니다. 이 부분은 신약 성경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역사적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개론적인 부분이라도 알고 있는 것이 매우 유용합니다.

중간기 이전의 구약 성경의 전체적인 역사 개요는 아래의 링크글을 참조 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표적


이적, 기적, 기사, 표적에 대한 이해 
______________이적, 기적, 기사는 표적의 대명사이다.

성경은 이적과 기적과 기사 그리고 표적으로 가득하다.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초인간적인 놀라운 행적으로 병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는 등의 사건 그리고 자연계에서 벌어지는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물 위로 걷는다든가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사건 등을 이적, 기적, 기사라고 하고 이것들은 메시아적 증거로서 표적이라고 한다.

영어 성경은 이적과 기사를 Wonder로, 기적을 Miracle로 번역했고 표적은 sign이라고 번역했다. 
한글 성경은 헬라어 세메이온(σημειόν)을 이적 또는 표적이라고 번역했고, 
테라스(τέρας)를 기적이라고 번역해서 혼선 양상을 보인다. 

이적, 기적, 가사는 테라스(τέρας)로 번역해야 하고 세메이온(σημειόν)표적으로 번역해야 구분이 될 것이다.

“표적”이란 히브리어로 ‘오트’(תוא)이고, 헬라어는 쎄메이온(σημεῖον)이며 영어로는 ‘사인’ (sign)으로 ‘표시’, ‘징조’, ‘증표’ 등의 뜻을 가진다. 
표적을 둘로 나누어 본다면 초인간적 행사를 이적 기적이라 하고 초자연적 행사를 이적 기사라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적이나 기적이나 기사는 표적(sign, σημεῖον)의 다른 명사들이다. 
그래서 히브리어에서는 이적, 기적, 기사, 표적이 ‘오트’(תוא)로 통일된다.

요한복음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라는 일곱 개의 대표적 표적이 나타난다.

①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표적(요 2:1~11)

② 가버나움에서 죽어가는 고관의 아들을 고치신 표적(요 4:46~54))

③ 베데스다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표적(요 5:1~9)

④ 디베랴 바다 건너편에서 오병이어로 5,000명의 무리를 먹이신 표적(요 6:1~15))

⑤ 디베랴 바다에서 물 위를 걸으신 표적,(요 6:16~21)

⑥ 실로암에서 날 때부터 장님이었던 사람의 눈을 뜨게 해주신 표적(요 9:1~12)

⑦ 베다니에서 죽은 지 사흘 된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요 11:1~44)

이 표적의 의미가 무엇인가?

성경에 나타난 구속사적 표적들을 살펴보자.

첫째는 이스라엘 구원의 언약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표적

지팡이로 뱀을 만들어 보이시는 일, 모세의 손에 문둥병을 발하게 하셨다가 다시 치유하시는 일 등이 약속을 이행하시겠다는 하나님의 표적인 것이다. 임마누엘 하나님의 언약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사인이다.

둘째는 무흠하신 속죄의 어린 양이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표적

메시야가 성령으로 잉태되고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게 하시고 성령세례를 받게 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속죄 양으로 오신 메시아이심을 나타내는 표적이다(사 7:14). 예수 그리스도의 무죄하심과 속죄주의 자격을 나타내는 사인이다.

셋째는 기적을 통해 천국을 보이시는 성령님의 능력의 표적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의 권능을 따라 나타나는 치유사역과 초자연적 기적 등은 바로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나타내는 표적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님을 통해 만물을 회복하고 우리를 천국으로 초대하시는 메시아인 증거의 사인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주님에 의한(by Jesus), 주님에 대한(of Jesus), 주님을 위한(for Jesus) 표적을 탐욕에 의하여 인간의 욕망을 채우는 표적으로 오인하게 되었다.

오병이어의 표적이 있은 뒤에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질문했다. 모세는 만나를 통해 먹을 것을 제공하는 표적을 보였는데 예수는 무슨 표적을 보이겠는가? 라고 질문하게 된다. 유대인들이 주님을 따른 것은 경제적 해결이나 정치적 이슈로 표적을 구했음을 스스로 자인하는 장면이다

그 증거로 주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을 때 주님을 따르는 무리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때 주님께서 그들을 보면서 말씀하셨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나를 증거하는)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이 땅의)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 6:26)라고 하셨다.

주님은 정치적이고 탐욕적인 표적을 추구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진정한 표적이 무엇인가를 선포하셨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마 12:39~40))

주님은 이미 자신에 대한 표적으로 많은 이적 기사를 통해 주님이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이심을 나타내 보이셨다. 그러나 깨닫지 못하고 육신의 욕망을 채우고자 하며 이 땅의 표적만을 구하는 저들에게 요나의 표적을 통해 종말론적 구속자로 오시는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증거하신 것이다. 요나의 표적이 주님 자신을 증거하는 모형으로서의 진정한 표적이라는 것을 알려주신 것이다. 그러나 깨달을 수 있는 귀 있는 자만이 알 수 있었다.

바울사도께서는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선포했다.

“유대인은 (땅의)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땅의)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표적과 지혜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고전 1:22~23).

성경에 나타나는 이적 기사의 표적의 목적이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에 예언한 메시아요 구세주라고 표식인데 이것을 모르는 군중들에게 바울 사도께서는 하나님이 보내신 진정한 표적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인을 구원하시는 구세주이심을 선포하신 것이다.


이적(異蹟), 기적(奇蹟)과 표적(表蹟)의 차이점

이적, 표적, 기사

이 세 가지는 성경에서 거의 동일한 의미로 쓰이지만, 약간의 차이가 있다.

'이적'(異蹟)은 상식적이고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이거나 초이성적인 비상한 사건(일)을 가리킨다.

② '표적'(表蹟, sign)은 초자연적 능력에 의해 외부로 나타난 현상을 말한다. '표징'과 동의어로 쓰인다. 표적은 이적을 실현하는 자의 신분과 그 이적이 뜻하는 바를 밝히는 데 목적이 있다(막16:20; 행14:3).

'기사'(奇事, wonder)는 기이하고 경이로운 일 또는 장래 일에 대한 징조나 암시를 가리킨다(시 106:22; 단 6:27; 마 24:24). 
놀라운 일을 경험한 자의 입장에서 나타낸 표현으로, 주로 그 사건의 신비성에 강조점을 둔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적, 표적, 기사 (교회용어사전 : 교회 일상, 2013. 9. 16., 가스펠서브)

이적(異蹟), 기적(奇蹟)과 표적(表蹟)의 차이점

1. 표적(Sign)이나 이적(Wonder), 또는 기적(Miracle)은 주로 같은 상황에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행적을 다루는 4복음서에서 이 용어들은 거의 비슷한 용어처럼 등장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적과 기적은 비슷한 말로서 놀라운 행적을 묘사하는 용어지만 표적은 그렇지 않습니다.

2. 이적이나 기적은 놀라운 일(Wonder), 보통 인간이 할 수 없는 일, 또는 자연법칙을 넘어서는 초자연적인 일(Miracle)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집트에서 10가지 재앙을 내리신 일이나, 여호수아가 전쟁 때 태양을 멈추게 한 일, 또는 예수님께서 소경의 눈을 뜨게하고, 빵 5덩이와 물고기 2마리로 5000명을 먹이신 일과 같은 일들은 모두 "기적" 또는 "이적"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적이나 기적을 행하는적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신성, 놀라우신 위엄 등을 나타내기 위한 것입니다.

3. 그러나 표적(Sign)은 좀 다릅니다. 표적은 그것을 행하는 사람이 말하려는 것을 증명하는 도구입니다. "표적"은 헬라어로 "세메이온", 영어로 "sign"이라고 하는데, 이는 "표시", 또는 "징조"로 이해할 수 있는 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말씀하시거나 주장하실 때에 표적을 통해서 그 말씀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증거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이적이나 기사를 통해서 표적을 나타내실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막 16:16)이하에 나오는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과, 독을 마셔도 해를 입지 않는 일, 또는 병자들에게 안수하여 치유하는 일들은 이적인 동시에 "표적"이라고 불려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성령께서 복음 전도자의 말이 진리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 나타나는 표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출4장)에도 이러한 예가 나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이집트로 보내려고 했지만, 모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보소서! 그들이 나를 믿지도 아니하고 내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리니, 그들이 말하기를 '주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출4:1)." 모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보내셨다는 증거를 요구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은 막대기로 뱀을 만들어 보이셨고, 모세의 손에 문둥병을 발하게 했다가 다시 치유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두 가지 이적들을 자신이 모세를 보내셨다는 "표적"으로 제시하셨습니다.

그러나 표적 중에는 이적이나 기사가 아닌 것도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안식일은 "표적"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것은 "이적"이나 "기적"에 속하지 않습니다(겔 20:20).

표적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표적은 바로 "치유"의 표적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메시야로 오실 때에, 그 분이 메시야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왕의 표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오셨을 때 백성들은 어떻게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것을 알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께서 행하시는 표적을 통해서 알 수 있었습니다.

"그때에 소경의 눈이 뜨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뚫리리라. 그때에 절름발이가 사슴처럼 뛰고,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라. 광야에는 물이 솟아 나오며 사막에는 시내가 흐르리라"(사35:5-6).

"내가 잃어버린 자를 찾을 것이요, 쫓겨났던 자를 다시 데려오고 상한 자를 싸매 주며 병든 자를 강건케 해 주리라. 그러나 나는 살지고 강한 자를 멸할 것이며 심판으로 그들을 먹이리라"(겔34:16).

이 모든 예언들은 메시야께서 오실 때에 일어날 일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사역을 하시는 동안에 그렇게 많은 치유를 행하셨던 것입니다.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러한 표적을 보고서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거부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표적은 후에 사도들에게 이어졌는데, 이는 "사도들의 표적"이라고 부릅니다는(고후12:12). 이러한 표적은 이 일을 행하는 자들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라는 것을 보여주는 성령의 표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고출처 : 바이블나라


표적 : 세메이온 se-meion(표시, 표적)​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세메이온은 세마(%361 : 표시, 예고)에서 유래했으며, 세마와 함께 '징조, 표시'를 의미하며, 다음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a) 이 단어는 사람이 특정한 사람이나 사물을 인식하는 '표적' sign, 확신 시키는, 확증하는, 증명하는 '특징', '표' mark 혹은 '표', '증거' token를 의미한다. 호머의 작품에서 이 단어는 병의 징후, 짐승의 냄새, 배의 깃발, 희생 제물로 바칠 짐승임을 보증해주는 표시, 통치자의 왕관, 반지의 인장, 방패에 있는 문장, 양 떼에 찍은 소인 등을 나타낸다.

(b) 이 단어는 다가올 사건을 알리는 '징조' foretoken, 혹은 '전조' omen을 의미한다.

(c) 세메이온에 놀라움의 성격이 있을 때 이 단어는 "기적의 표적"(miraculous sign)의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이 단어는 사물의 자연적 진행과는 모순되는, 신 혹은 기적을 행하는 자가 행한 '기적'(miracle)을 뜻하기도 한다.

이 단어는 주전 2세기의 저술(Polyb. 3, 112, 18)에서 처음으로 나오는 어구 세메이가 카이 테라타(표적들과 기사들)에서 발견된다.

2. 70인 역본의 용법.

명사 세메이온은 70인 역본에서 약 120회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오트의 역어이며, 이 히브리어처럼

​(a) '표적' sign, '특징', '표' mark, '징후' token.

(b) '기적의 표적' miraculous sign, '기적' miracle을 의미한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세메이온은 신약성경에서 77회 나온다.

(a) ①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세메이온은 어떤 사람을 알아 볼 수 있는(눈에 보이는)표시 sign이다. 예를 들면, 마 26:48에서 배신자가 성전 파수꾼에게 예수님을 넘겨 줄 때의 입맞춤(사전에 합의한 표시임) 혹은 눅 2:12에서 갓 태어난 구세주임을 지적해주는 말구유("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에 대해 1Q 27Ⅰ1:5; 출 3:12; 삼상 2:34; 삼상 14:10를 참조하라)가 세메이온이다.

경고의 '징조' omen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보내시며, 대개 우주적 성질을 띠며, 역사의 종말을 알리는 것이다(막 13:4; 눅 21:7). 혹은 인자의 임하심과 세상의 끝(세대의 완성)에 징조가 있다(마 24:3). 이때 "메시야의 발자국"과 함께(m. sota 19:15) 전쟁의 무질서와 기근, 온역, 지진이 있으며 "무서운 일과 하늘로서 큰 '징조'"(눅 21:11)가 있을 것이며, "일월성신에 '징조'"가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구약성경의 영향이다(참조: 막 13:24이하와 병행 구에서 사 13:10; 사 34:4과 행 2:19에 인용된 요엘 3:3). "여호와의 날"에 수반하는 현상은 마지막 때의 세대에게 경고의 표시로서 삽입 적이고 법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의 표적"은 이해되지 않는다(마 16:3). 파루시아의 중대한 시점은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나타나는 것인데(마 24:30), 이것은 완성을 가리키며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으며, 또 다니엘이 밤에 이상 중에 본 종말론적 심판관의 도래 및 즉위와 관련된다(단 7:13이하; 슥 12:10-14). 예수님 자신이 이스라엘 가운데서 "비방을 받는 표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세움 받는다. 예수님의 사역은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드러낼 것이며, 이 마음들은 그들 자신의 종말론적 운명을 결정할 것이다.

② 세메이온, 하나님의 주권의 은혜로운 의를 드러내고 믿음을 전제로 하는 능력의 역사(뒤나미스)인 예수님의 치유의 기적과는 대조되어,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세주 혹은 선지자임을 확증해주는 기적들을 가리킨다. 이러한 표적들은 믿음을 일깨우기 위해 의도되며(참조: 출 4:1-9), 간청된다. 기 보다는 강력히 요구되거나 촉구된다.

지팡이를 뱀으로 변하게 한 기적이 한 예이다(출 3:12; 출 4:1-5; 출 7:8이하); 애굽의 재앙들도 하나님을 지시하는 표적들이다(출 7:3; 출 10:2; 신 7:19; 신 26:8; 참조: 행 7:36). 유대 전쟁 이전에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심을 증명하려는 의도에서 "자유의 표적들"을 약속하면서 나타났다(요세푸스 B.F.ⅱ259: Ant. xx. 168). 이들이 약속한 기적들의 상징적인 특징은 모세나 여호수아의 행위들과 일치한다는 것이었다(참조: Ant. xx. 97.과 수 3:7; xx. 169이하와 수 6:8이하). 그러나 요세푸스는 그들을 사기꾼이라고 비난하였다(Ant. xx. 167; B.J.ⅱ259-61). 막 13:22과 마 24:24은 거짓 선지자들과 메시야들에 대해 경고한다. 그들은 심지어 택함 받은 백성까지도 속이려고 큰 표적들과 이적들을 일으킬 것이다(참조: 신 13:1-4). 그들의 활동무대는 광야이다(마 24:26; 참조: B.J.ⅱ259).

예수님은 "하늘로서 (즉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표적"을 행하라는 요구를 강력하게 거부하신다(막 8:11이하; 마 16:1; 눅 11:16; 참조: 마 12:38); 이 요구는 단지 패역한 세대의 믿음의 결핍을 드러낼 뿐이다(막 8:12; 마 16:4; 마 12:39). 마 12:39; 마 16:4; 눅 11:29에 따르면 이 세대는 오직 "요나 선지자의 '표적'"밖에 받을 것이 없다. 이것은(Q에 따르면) 이방의 도시 니느웨에서 요나의 성공적인 회개에의 요청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스라엘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하여 회개하여야만 한다는 것이다(마 12:41; 눅 11:32).

마 12:40에 따르면 물고기에 의해 기적적으로 구조된 것이 이 "요나의 표적"이며 따라서 인자가 "땅 속에" 있는 것, 즉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가리킨다. 아마도 이 해석은 눅 11:30에도 적용될 수 있으며(요나는 니느웨에게 표적이 되었다). 요한복음에서는 나흘 만에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일이(요 11:39) 요나의 표적 대신 나온다. 마지막으로 헤롯 안디바는 예수님에게서 (확증해주는) 표적을 헛되이 기대했다(눅 23:8). 마 4:1-11 병행구의 마귀의 요구들도 표적을 요구한 것으로 이해되며, 예수님에게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도전한 것도 역시 마찬가지다(막 15:30 병행구).

폭풍을 꾸짖으시고, 물 위를 걸으시고, 소량의 떡으로 많은 무리를 먹이신 것과 같은 기적들은 출 14-16과 관련이 있으므로 확증의 표적이라는 인상을 불러일으킬 수 있겠지만, 그러한 기적들은 도움을 주시는 자비의 행위로 묘사된다(막 4:38이하; 막 6:34, 막 6:50이하). 마가복음의 끝맺음 부분에서 예수님께서는 신자들에게 기적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약속하시는데, 이 기적들은 제자들이 보고하였고 교회에서 은사들 가운데서 나타났다(막 16:17; 참조: 눅 10:17-19; 고전 12:4이하, 고전 12:28이하). 그러한 기적들은 선포를 눈에 보이도록 확증하기 때문에 "표적들"이라 불리 운다.(막 16:20).

③ 비록 요한도 역시 표적들과 표적에 대한 요구에 포함되어 있는 본질적인 문제들을 인식하지만(요 2:18, 요 2:23; 요 4:48; 요 6:2, 요 6:14, 요 6:30)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적들을 세메이아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기적들을 통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고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그의 사명을 드러내시기 때문이다(요 2:11; 요 20:30이하). 세례(침례)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하지 않은 반면에(요 10:41), 많은 위대한 표적들이 예수님의 활동을 특징짓는다(요 3:2; 요 7:31; 요 9:16; 요 11:47; 요 12:37). 부활하신 예수님의 나타나심도 이와 유사하게 이해되어야 한다(요 20:30). 요한복음의 기적들은 기적 자체를 넘어 종말론적 구세주를 지시하며(요 6:14; 요 7:31; 요 12:18), 그에 대한 믿음을 가져오는 것이다(요 2:11, 요 2:23; 요 4:53; 요 9:35; 요 11:47이하; 요 20:30이하); 그러나 이 믿음은 피상적이거나 자기중심적인 채로 남아있기도 하고(요 4:48; 요 6:14, 요 6:30) 거부되기도 한다(요 12:37, 요 12:39).

그리고 예수님이 일개 사기꾼이라는 확신을 표적들이 항상 제거할 수는 없었다(요 11:47이하, 신 13:1-4을 따름). 따라서 표적이 의미하는 것, 즉 기적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며, 그의 "팔"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역사하신다는 것이 간과된다(요 12:37이하, 사 53:1의 인용; 참조: 요 5:20, 요 5:36; 요 9:3이하; 요 17:4). 표적들을 해석하는 구절들을 제쳐놓더라도 요한은 표적들의 확증하는 능력을 각각의 특성들로써 설명하는데, 그것의 목적은 모세, 엘리야, 엘리사의 기적들 같은 고전적인 실례들을 무색케 하는 것이다(참조: 요 2:1-11; 요 4:46-54; 요 5:1-7과 왕상 17장; 왕하 5장, 요 6:9과 왕하 4:42이하, 요 6:31과 출 16:4, 출 16:13-15). 요 2:11; 요 4:54에서 시작된 표적의(단속적인) 계수는 모세(출 4:8)와 엘리야(왕상 17장)의 처음 두 표적을 상기시킨다. 이러한 관점에서 고찰하면 이 표적들은 요한의 신학과 일치하고 빈틈을 드러내지 않는다.

④ 사도행전도 역시 예수님과 사도들의 기적들을 확증하는 표적으로 이해하지만 실제로 예수님의 표적에 대해서는 뒤나메이스라는 용어가 더 많이 사용되고 또한 세메이아 카이 테라타(표적과 기사)에 부가되어 나타나기도 한다(행 2:22; 행 8:13). 자주 사용된 "표적과 기사"라는 어구는 두 표현 사이의 차이점이 모호해져서 "기사와 표적"이라는 순서도 역시 가능하다(행 2:22, 행 2:43; 행 6:8; 행 7:36).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유대인들 가운데서 그를 통하여 행하신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그들 앞에 "입증되셨다"(행 2:22). 이 표적들의 계시적·도구적 성격은 선교사역의 이상에 기초하며 모세를 향하여 있으며, 연속성을 위해 의도되어 있다.

모세는 "애굽과 홍해와 광야에서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으니" 하나님 자신과 같이 임하는 선지자임을 지적하는 것이다(행 7:36이하): 하나님께서 이 선지자에게 능력을 부여하셔서 보내셨기 때문에(신 18:15) 하나님은 또한 예수님을 합법적으로 인정하는 표적의 근원이시다. 표적과 기사들은 사도들에 의해(행 2:43; 행 5:12), "집사" 스데반에 의해(행 6:8), 빌립에 의해(행 8:6; 행 8:13), 바울과 바나바에 의해(행 14:3; 행 15:12) 행해졌다. 비록 하나님 자신께서 사도들의 표적들에서 역사하시지만 행 4:30에 따르면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표적을 행한다(참조: 행 3:6과 행 2:21이하). 높임 받으신 그리스도로서 예수님은 그의 사자들을 통하여 치유하시고(행 9:34), 따라서 예수님 자신이 그를 선포하는 말씀의 진실됨을 확증하신다(행 14:3). 이 표적들은 말씀을 위하여 있는 것이다. 앉은뱅이를 고친 일(행 3:1-8)은, 심지어 적대자들까지도 시인하였으며, 그들이 말에 따르면 예루살렘의 모든 거민에게 알려진 표적으로서(행 4:16), 말씀 선포의 진실 됨에 관한 문제를 야기 시킨다.

이 표적들은 사람들을 믿음으로 인도하며(행 8:6; 참조: 행 9:35, 행 9:42) 시몬 마구스의 마술을 패배 시킨다(행 8:13). 그러나 이 표적들은 애굽의 술사들에 대한 모세와 아론의 승리 같은 단순한 시위적인 기적들도 아니고(참조: 출 7:1-13), 응징의 기적들도 아니며(행 5:1-11은 세메이온을 사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치유이다(행 4:22; 행 9:32-42). 욜 2:30을 인용한 행 2:19에서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는 실로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세메이아)"로 보완된다. 여기서 세메이아는 아마도 예수님과 사도들의 기적을 가리키는 것 같다. 행 15:12에 언급된 "표적과 기사"는 바울과 바나바의 이방인 가운데서 성공적인 선교사역을 가리킨다.

(b) ① 바울에게 세메이온은 서신을 끝맺을 때 자신의 서명과 같은 (외적) '표시'이기도 하다(살후 3:17). "할례의 표"는 아브라함을, 믿는 이방인들의 조상으로 만든 "믿음의 의의 인"이다(롬 4:11).

②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지만(고전 14:22) 믿지 아니하는 자들은 그것을 하나님에 의해 유발된 의사소통으로 인식하지 못하며(참조: 고전 14:21에 인용된 사 28:11), 그것을 조롱함으로써 그들 자신의 완악함과 구제할 도리가 없는 절망적인 상태를 드러낸다.

③ 마지막으로 세메이온은 임박한 구속과 하나님의 활동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기적'일 수 있다. 바울은 "표적을 구하는 것"을 유대인의 종말론적 기대의 특징으로 간주한다(고전 1:22); 십자가의 선포를 받아들이는 것은 헬라인들이 지혜를 사랑하는 것 만큼이나 똑같이 거리끼는 것이 된다(참조: 막 8:11이하). 고후 12:12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 가운데서 그를 통하여 행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참된 사도의 표"라고 말한다. 그 표들은 바울이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열등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러한 자기 평가는 어리석은 짓이다(고후 12:11), 왜냐하면 이 표들은 성령의 능력으로 바울 사도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복음의 진실을 증거하고 복음 선포자를 정당화 시켜준다. 사도의 표는 카리스마적인 기적들뿐만 아니라 회중들의 삶 가운데서 나타나는 성공적인 선교사역을 가리키기도 한다(참조: 고후 3:2).

적그리스도가 나타날 때 기적을 수반할 것이다. 바울은 신 13:1-4을 따라서 그런 기적들을 "거짓 '표적'과 기사"라고 부른다(살후 2:9). 교회의 분당은 믿음을 시험하는 역할을 할 수 있으므로 필요한데, 그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종말론적으로 상징적인 특성을 가진다(고전 11:18이하).

히 2:4에 따르면 예수님의 선포와 그의 최초의 경청 자들의 선포는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성령의 나눠 주신 것"으로 증거 되었다(참조: 행 2:22).

(c) 요한계시록 기자는 통렬한 묵시적 표적들을, 즉 극적인 사건들을 가져올 상징적으로 의도된 하늘의 장면들을 본다. 즉 초승달 위에 있는 한 여자(계 12:1), 그녀의 대적자 용(계 12:3), 일곱 대접을 가진 천사들(계 15:1)이다. 이 표적들은 또 기적적인 일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마지막 때에 거짓 선지자들이 이 기적적인 일들을 행하여 사람들이 "짐승"을 섬기도록 유혹한다(계 13:13, 계 13:14; 계 19:20). 이 짐승에게서 나온 영들도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종말론적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은다(계 16:14).(O. Betz).

(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K. H. Rengstorf; O. Hofius).






4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이적들

예수님은 우주만물에 대한 주권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에 확신을 주고자 이적을 행하셨다. 
이적이란 단순이 크고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의지로 진행되어오던 자연 질서를 잠시 중단하시고, 인간의 구원을 위한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각 때에 필요한 놀라운 일을 보여 주심으로써 우리의 신앙의 표적이 되는 것만이 참 이적이다. 
이처럼 이적의 진의를 모르게 되면 단지 기복적 입장에서 이적을 위한 이적만을 요구하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사탄의 간계에 의한 이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미혹되는 경우도 많이 있다. 
4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이적을 정리에 보면 다음과 같다.


이적

장소

특징

말씀

육체적 질병 치유

문등병자

갈릴리 지방

병자를 향한 주님의 연민이 강조됨

마8:2,3 막1:40-42

눅5:12,13

백부장 하인

가버나움

이방인의 믿음이 두드러짐

마8:5-13 눅7:1-10

베드로 장모의 열병

가버나움

베드로의 장모가 치유된 직후 예수님 일행을 섬김

마8:14-15,막1:30- 31 눅4:38-39

중풍병자 치유

가버나움

친구들의 믿음과 우정, 열정이 강조되고 주님의 능력

마9:2-7 막2:3-12

눅5:18-25

혈루병 앓는 여자

가버나움

예수님을 향한 여인의 간절한 심정

마9:20-22

막5:25-29

눅8:43-48

두 소경

가버나움

자신의 믿음대로 치유 받음

마9:27-31

한쪽 손 마른 자

갈릴리 회당

안식일의 논쟁 야기

마12:10-13,막3:1-5

눅6:6-10

바디매오와 다른 한 소경

여리고

끈질긴 요청으로 치유 받음

마20:29-34

막10:46-52

눅18:33-43

귀먹고 벙어리 된 자

갈릴리 호수 근방

치유과정에서 예수님의 친밀한 동작이 두드러짐

마15:29-31

막7:31-37

뱃새다의 소경

뱃새다

두 번 안수하고 고치심

막8:22-26

수종병 환자

-

바리새인 집에서 안식일에 치유하심

눅14:1-6

열 나병병자 치유

사마이라와 갈릴리 사이

치유된 자 중 한명만 예수님께 찾아옴

눅17:11-19

귀 잘린 말고

겟세마네 동산

원수까지도 고쳐주심

눅22:50-51

왕의 신하의 아들

가나

보지 않고도 말씀으로 고침

요4:46-54

베스다 못가의 병자

예루살렘

오래된 질병 고치심

요5:1-9

나면서 소경된 자

예루살렘

나면서 된 병자도 고치심

요9:1-41

정신적질환치유

두 귀신들린 자

거라사

돼지 떼 몰사 사건

마8:28-34,막5:1-15

눅8:27-35

귀신들린 벙어리

가버나움

바리새인들 비방

마9:32-34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자

갈릴리 지방

바리새인들 비방

마12:22 눅11:14

가나안 여자의 딸

두로

이방인도 치유하심

마15:21-27

막7:24-30

간질 하는 소년

변화산 근처

아비의 믿음을 보고 치유해주심

마17:14-18,막9:17-29,눅9:38-43

회당의 귀신들린 자

가버나움

귀신들이 예수님을 알아봄

막23:26 눅4:33-35

꼬부라져 펴지 못하는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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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년된 귀신을 단숨에 쫓으심

눅13:11-13

자연현상에대한 이적

풍랑을 잔잔케 하심

갈릴리 호수

자연에 대한 통제 능력

마8:23-27

막4:37-41

눅8:22-25

오천명을 먹이심

갈릴리 호수가

이적의 능력과 사랑의 조화

마14:15-21

막6:35-44

눅9:12-17

요6:5-13

물 위를 걸으심

갈릴리 호수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입증하심

마14:25 막6:48-51

요6:19-21

사천명을 먹이심

갈릴리 호수

이적의 능력과 사랑의 조화

마14:21 막6:48-51

물고기 입에서 돈을 꺼냄

가버나움

제자들에게 전능하심 입증

마17:24-27

무화과나무를 마르게 하심

예루살렘

심판의 능력을 암시

마21:18-22

막11:12-26

많은 물고기를 잡게 하심

갈릴리 호수

주안에서만 삶의 풍요가 있음이 보여짐

눅5:1-11

물로 포도주를 만드심

가버나움

예수님의 첫 이적으로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기 원하심

요2:1-11

부활후 많은 물고기를 잡게 하심

갈릴리 호수

제자들에게 확신을 주시기 위한 이적

요21:1-11

사망의기적

야이로의 딸

가버나움

죽음을 잠으로 묘사하심

마9:18-25

막5:22-42

눅8:41-56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

나인

살리시는 능력

눅7:11-15

나사로

베다니

죄인에 대한 사랑하심

요11:1-44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7가지 표적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신성을 증거하는 7가지 대표적인 기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은 이 기적들을 단순한 이적이 아니라 "표적(σημεῖον, 세메이온)", 즉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드러내는 표징으로 기록하였습니다.
각 표적은 예수님의 신성과 구원의 사역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1.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심 (요 2:1-11)

1) 표적의 의미: 예수님은 새로운 언약을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첫 번째 기적으로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셨습니다.

이 기적은 새 언약의 시작과 풍성한 은혜를 상징합니다.

2) 주요 구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요 2:4)

설명: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이 십자가에서 완성될 것임을 암시하시면서도, 결국 기적을 행하십니다.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요 2:11)

설명: 예수님이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분 이심을 보여줍니다.

2. 왕의 신하의 아들을 말씀으로 고치심 (요 4:46-54)

1) 표적의 의미: 믿음은 보지 않고도 신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왕의 신하의 아들을 멀리서 말씀만으로 고치심으로써,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는 능력 을 보이셨습니다.

이는 믿음이란 눈에 보이는 증거 없이도 예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것 임을 가르쳐 줍니다.

2) 주요 구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요 4:48)

설명: 예수님은 사람들의 신앙이 기적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참된 믿음 이어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요 4:50)

설명: 왕의 신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의심 없이 믿었습니다.

믿음은 눈으로 확인한 후에가 아니라, 먼저 믿고 신뢰하는 것 입니다.

3. 베데스다 연못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심 (요 5:1-15)

1) 표적의 의미: 예수님은 우리를 회복시키시는 분입니다.

이 표적은 예수님이 육체적 연약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혼을 회복시키시는 분이심을 나타냅니다.

또한, 안식일에도 하나님은 역사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2) 주요 구절: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요 5:6)

설명: 예수님은 단순히 병을 고치는 것 이상으로,

병자의 내면의 상태를 회복시키는 데 관심이 있으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요 5:8)

설명: 예수님의 말씀에는 회복과 능력이 있으며, 순종하는 자에게 치유와 변화가 일어납니다.

4. 오병이어로 5천 명을 먹이심 (요 6:1-15)

1) 표적의 의미: 예수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생명의 떡입니다.

이 기적은 예수님이 참된 생명의 떡 이심을 보여줍니다.

또한, 작은 것이라도 예수님의 손에 맡겨질 때 기적이 일어난다는 교훈을 줍니다.

2) 주요 구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 6:35)

설명: 예수님은 단순한 빵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 이심을 나타냅니다.

5. 물 위를 걸으심 (요 6:16-21)

1) 표적의 의미: 예수님은 두려움을 이기게 하시는 분 입니다.

예수님은 자연의 법칙을 초월하시며, 인생의 폭풍 속에서도 함께하시는 분이십니다.

2) 주요 구절: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요 6:20)

설명: 예수님이 폭풍 속에서도 함께하시며,

우리의 두려움을 평안으로 바꾸시는 분 이심을 보여줍니다.

6. 날 때부터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심 (요 9:1-41)

1) 표적의 의미: 예수님은 우리의 영적 눈을 뜨게 하시는 빛입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눈뿐만 아니라, 영적인 눈을 뜨게 하시는 분입니다.

맹인은 예수님을 점차 깨달아 가며 신앙을 고백하게 됩니다.

2) 주요 구절: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요 9:5)

설명: 예수님은 단순한 시각 회복이 아니라,

죄로 인해 영적으로 눈먼 인류에게 빛을 주시는 분이심을 선포하십니다.

“이르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요 9:38)

설명: 맹인은 점진적으로 예수님을 깨닫고 마침내 참된 믿음을 고백합니다.

7. 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리심 (요 11:1-44)

1) 표적의 의미: 예수님은 부활과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이 기적은 예수님이 생명의 주관자이심을 보여주며,

부활의 능력을 선포하는 가장 중요한 기적입니다.

2) 주요 구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요 11:25)

설명: 예수님은 단순히 기적을 행하는 분이 아니라,

자신이 곧 부활과 생명 자체 이심을 선포하십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요 11:43)

설명: 예수님의 한 마디에 죽은 자가 살아납니다.

이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 생명이 있음을 증거하는 사건입니다.

결론 : 요한복음의 표적이 주는 메시지

1번째 표적 : 예수님은 새로운 언약을 주시는 분 입니다.

2번째 표적 : 믿음은 보지 않고도 신뢰하는 것 입니다.

3번째 표적 : 예수님은 우리를 회복시키시는 분 입니다.

4번째 표적 : 예수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생명의 떡 입니다.

5번째 표적 : 예수님은 두려움을 이기게 하시는 분 입니다.

6번째 표적 : 예수님은 우리의 영적 눈을 뜨게 하시는 빛 입니다.

7번째 표적 : 예수님은 부활과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이 표적들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시며,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심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4복음서의 내용에서 볼 수 있는 시간 

구약시대에는 태양과 달의 변동으로 대략의 구분으로 시간을 표시했다.
그 후 신구약 중간시대를 거쳐 페르시아, 헬라, 로마와 접촉을 가지면서 현재와 비슷한 24시간제 시간 구분 개념이 통용되게 되었다. 

그러나 유대인은 로마식과 달리 새벽 6시를 0시로 기준하였다. 

신약 4복음서는 요한복음이 기록된 연대를 A.D.90-100년경으로 보고 있다. 

이때에는 이미 유대인들은 로마의 속국이 되어 히브리 시간 제도가 현재와 같은 24시간제를 사용하였다. 

그래서 마태, 마가, 누가복음의 세 복음서는 유대식 시간을 기준으로 보아야 하고 요한복음은 현재와 같은 시간제로 보아야 그 당시 시간을 혼동하지 않는다.

요한복음 

  공관복음 

    시 간 

       성 경 

제5시

  제0시

오전6시  

    요19:14

제9시

제3시

오전9시

    마20:3

제10

제4시

오전10시

    요1:39

제12시

제6시

오전12시

    마20:5

제3시

제9시

오후3시

    마20:5

제5시

제11시

오후5시

    마20:6

제6시

제12시

오후6시

    요4:6

제7시

제1시

오후7시

    요4:52

이렇게 시간을 비교하여 보면 도움이 될 것 같다. 
특히 요한복음 4장의 수가성 여인이 물을 길러 갔던 시간을 유대식으로 보아 낮12시로 보고 있는데, 이것은 저녁 6시로 보아야 타당할 것이다.










금식






금식이 왜 효과가 있을까요?

기도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금식이 얼마나 강력한지 알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를 그토록 강력하게 만드는 식사를 거른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단식투쟁의 한 형태일까요? 원하는 것을 얻을 때까지, 파랗게 질릴 때까지 숨을 쉬지 않는 버릇없는 아이처럼 하나님을 협박하는 것일까요? 분명히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금식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금식을 자랑하지 말 것에 대한 몇 가지 중요한 지침을 주셨지만, 예수님의 마음에는 주님과 대화하는 사람들이 때때로 금식을 했다는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금식에 낯설지 않았습니다. 구약 성경에는 금식에 대해 여러 번 언급되어 있습니다.

금식에 대한 히브리어 단어

오늘날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금식을 생각할 때 자동적으로 대속죄일인 욤 키푸르를 생각할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금식에 대한 첫 번째 모호한 언급입니다. 저는 그것이 실제로 "금식"이라고 말하지 않기 때문에 모호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이 새해를 위한 깨끗한 출발을 구하면서 스스로를 “괴롭게”( ענה – תענו 아나-타아누)하도록 요구합니다(레 16:29). 그 명령에 순종하는 한 가지 쉬운 방법은 한동안 음식과 물을 먹지 않고 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오늘날까지 매년 행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는 자에게 가까이 계시며(사 66:2), 금식은 겸손한 마음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금식(צום 쫌)에 대한 실제 단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사사기 20장 19-28절의 심각한 위기의 때에 나옵니다. 혼란스러운 부분은 17장에서 한 남자가 거짓말을 하고 그의 어머니의 것을 도둑질을 하는데 그의 어머니는 그를 훈계하는 대신에 축복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상황은 급속히 악화되고, 죄악은 통제 불능 상태가 되어 성경에서 가장 끔찍한 집단 강간 이야기로 확대됩니다. 이 사건들은 지파들 사이에 격렬한 싸움으로 이어졌고, 그 결과 한 지파 전체가 거의 전멸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기도의 능력이 크게 향상되어야 함을 감지하고 금식을 기도에 추가했습니다.

그것은 효과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금식할 때 영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아주 잘 묘사한 것처럼, 육과 영 사이에는 끊임없는 싸움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어느 부름에 순종해야 할 지를 결정을 내림으로써 이를 조절합니다. 인간으로서 우리는 마음과 몸과 영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 없으면 영적으로 죽은 것입니다. 우리는 육신의 욕망에 휘둘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의 육체는 우리 자신과의 관계 및 자연적인 육체적 갈망을 따릅니다. 억제하지 않으면 이기적이고 심지어 파괴적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정신은 우리의 몸을 지배할 수 있으며, 우리의 영은 하나님과 직접 교통하는 동안 다른 사람들과 세상과 의미 있게 관계할 수 있는 능력을 줄 수 있습니다.

금식하게 되면, 우리는 육신과의 강력한 유대를 의도적으로 약화시키고 하나님과의 관계, 영과 영의 관계를 강화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교환입니다. 우리는 적게, 그분은 더 많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늘 좋은 거래일 것입니다.

금식은 육체의 볼륨을 낮추고 영의 볼륨을 높이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권위와 명료함과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얻습니다.

그것은 마치 성령님이 춤추시며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모든 가구를 방의 가장자리로 옮기거나, 후식을 위한 더 많은 자리를 남기기 위해 주메뉴 코스를 덜 먹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적게, 그분은 더 많게 하는 것입니다. 드와이트 엘 무디의 삶에 지속적인 변화를 일으키게 했던 사람이 언젠가 그에게 말했습니다: “세상은 아직 하나님께서 완전히 헌신된 사람을 그분이 어떻게 하실지 알지 못한다네.” 우리가 전심으로 예수님을 따르기로 하고 그분에게 우리를 변화시키시고 사용하시도록 허락할 때, 우리는 그분이 우리를 죽이기 시작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벗기고 죽이고 정결케 하는 이 과정은 하나님의 성도들에게 익숙한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를 통해 역사하시는 그의 능력을 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금식은 우리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에 따라 이 과정에 기꺼이 참여하여 우리의 삶에서 더 많은 자유를 성령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다양한 종류의 금식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고기와 좋은 음식과 포도주를 먹지 않았으며 나중에 다니엘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알리기 위해 특별히 금식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참으로 놀라운 응답을 받았습니다! "다니엘 금식"법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인터넷에서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에스더는 유대 공동체 전체가 삼일 동안 모든 음식과 물을 완전히 금식하도록 인도하여 재앙에서 기적적으로 회복되었습니다. 멸망의 위기에서 구출된 유대 민족은 오히려 자유와 은총을 얻었고 많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능력을 보고 그들과 합류했습니다. 하지만 음식과 물을 모두 금식하는 것은 극단적인 것입니다. 최대 3일 동안만 수행해야 합니다.

물과 주스만 있으면 음식 없이 최대 40일을 버틸 수 있습니다. 성경에 이것에 대한 몇 가지 예가 있지만 처음부터 바로 깊이 들어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일주일에 하루는 식사를 거르거나 금식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이 좋습니다. 욤 키푸르(대속죄일)에서 어떤 사람들은 아침부터 밤까지 금식하는데, 유대인들은 해가 질 때부터 해 질 때까지 금식하는 것을 선호합니다.

각각의 금식은 다르지만 하나님은 각각의 금식을 존중하십니다.

꼭 음식이어야 할까요?

오늘날 우리는 페이스북과 소셜 미디어나 초콜릿이나 설탕, 텔레비전을 금식하는 사람들에 대해 자주 듣습니다. 이러한 형태의 자기 희생에 유익이 있을까요?

우리 육체가 필요로 하는 음식을 멀리하는 것은 몸을 상하게 하므로  음식은 당연한 선택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절망과 의존, 괴로움과 굴복의 필요한 지점으로 인도합니다. 우리는 또한  설탕, 소셜 미디어, 그리고 다른 것들에 너무 의존하게 되어, 그것들을 삼가는 것이 매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중독이 되고, 하나님 대신에 위로를 얻기 위해 이런 것들에 의존하는 습관이 생깁니다. 

1958년 2월 9일 데이비드 윌커슨 목사는 텔레비전을 팔기로 결정했습니다. 하루 일과가 끝날 때쯤 그는 그저 몇 시간 동안 티비를 시청하곤 했지만, 하나님께서 그에게 대신 그 시간을 달라고 요청하고 계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월커슨은 TV를 판매용으로 내놓았습니다. 처음 30분 이내에 판매되지 않으면 거래가 종료될 것이지만 29분에 판매되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서서히 기도로 그 시간을 보내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것은 쉽게 오지 않았고, 처음에는 종종 꽤 오랜 시간이 지나면 갇힌 자신을 발견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점차 주님과 함께 하는 특별한 밤 시간에 점점 더 익숙해졌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음성에 더욱 귀를 기울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뉴욕의 갱단들을 섬기는 마음을 주신 것은 자기 희생의 그 소중한 시절 기간이었습니다 - 1950년대에 그 일은 마음이 약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결과 수백명의 갱단원, 중독자, 매춘부들이 그의 사역을 통해 주님을 알게 되었고, “틴 챌린지”가 탄생하여 전 세계의 수천 명이 메시아 안에서 자유를 찾도록 도왔습니다. 그의 놀라운 책, 십자가와 스위치블레이드( The Cross and the Switchblade)에서 전체 이야기를 읽을 수 있습니다. 그는 뉴욕 타임스퀘어에 교회를 세웠고 그 교회는 이곳 이스라엘에 자매 교회와 더불어 틴 첼린지의 지부인 "베이트 니짜혼(בית ניצחון 승리의 집)"을 설립했습니다. 아비와 같은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곳에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한 시골 목사가 기도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텔레비전을 팔았기 때문입니다!

키이스 그린과  리처드 웜브랜드와 같은 영적 지도자들도 밤 시간의 기도에 능력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윌커슨이 주님과 함께한 시간은 한밤중이었고 또한 그린과 웜브랜드는 우리 몸이 잠을 자고 싶을 때 기도하는 것이 큰 가치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것은 육신과 싸우는 또 다른 형태의 금식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간절한 기도를 하시는 투쟁을 보지만 제자들은 그들 자신에 대해 동일한 통제력을 갖고 있지 못 했음을 봅니다. 마음에는 원이었지만 육신이 약했습니다. 우리의 육체적인 필요를 거절하는 금식은 우리 중 누구에게도(심지어 사도들도) 자연스럽게 오지 않지만, 우리 모두가 성장할 수 있는 어떤 것입니다.

금식할 때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

예수님께서 경고하셨듯이, 우리가 우쭐거리며, 금식하는 것을 자랑하게 되면 그것은 우리의 모든 자기 희생을 무효화 시키는 것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금식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와 유사하게 이사야서 58장에서 보면, 이기적으로 가난한 사람 돌아보기를 거부한다면, 우리가 스스로 정당화하는 금식은 역효과를 내게 됩니다. 우리는 금식하기 전에 내 마음이 하나님 앞에 올바른지 확인해야 합니다. 시작하기 전에 우리 죄에 대해 하나님께 조명해 주시길 간구하면서 회개와 고백에 약간의 시간을 들이는 것이 좋습니다. 그 장의 뒷부분에서 이사야는 계속해서 금식의 맥락에서 안식일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집중하고 그분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육적인 방종과 자기 만족을 거부하는 또 다른 기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금식 생활을 하라고 도전하십니다.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려놓는 자기 희생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나는 내 기쁨이 아닌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기꺼이 내 시간을 드리고 있습니까?

우리는 강제로 또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금식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자유 의지와 금식에 대한 열망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사울 왕이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지 않고 자신의 인간적 문제를 강요하며 원하는 결과를 얻으려 했던 비참한 금식의 잘못을 주목하는 것도 지혜로운 일입니다(삼상 14:24-45).

나는 내 뜻과 상충될지라도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을 원하는가?

겸손과 회개하는 마음이 없으면 금식은 무의미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의로운” 사람과 죄인에 대해 말씀하신 이야기에서 이것을 볼 수 있습니다(눅 18:9-14). 
금식이 반드시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올바른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아니면 다이어트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종류의 육체의 억제와 금욕에도 적용됩니다. 
나는 내 의로움은 내 희생이 아니라 예수님의 희생에서 나온다는 것을 겸손하게 인정할 수 있을까요?

금식은 영적인 혼란을 느끼고 있거나, 하나님과 더 나은 관계를 구하거나, 어떤 문제에 대해 하나님의 생각을 구하고 있거나, 곤경에 처해 돌파구가 필요한 경우에 매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종종 금식에 대한 두려움은 금식 자체보다 더 나쁩니다. 따라서 원수가 두려움으로 당신을 막게 하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의 방식에 겁먹지 마십시오. 
자신에게 적합한 단식을 선택하고 자신의 속도로 진행하십시오. 
목표를 설정하고 결심을 하고, 마음을 준비하고, 그리고 자신만의 계획을 세우십시오. 
결과가 즉시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지만 포기하지 마십시오! 
쉽지는 않지만 단 몇 분의 기도 후에 허덕이고 있는 겟세마네에 있는 제자들과 데이비드 윌커슨을 기억하십시오. 
금식 생활 방식에는 시간과 연습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이 여정에서 당신이 성장하도록 도우실 것입니다. 
당신은 평생 이같이 말하게 될 것입니다: 

"주여! 저는 더 적게, 주께는 더 많이 있기를 원합니다(저는 쇠하고 주님은 흥하시기를 원합니다)!"

요한복음 3:30
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He must become greater; I must become less.

아필쇠미 타필흥왕(我必衰微 他必興旺)







한국교회의 방향을 위하여



1884년 선교사 두 사람이 제물포 항으로 입국한 이후 급성장한 교회의 부흥과 발전은 세계적인 놀라운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급성장한 교회는 성경적인 가르침과 생활 보다는 전통적인 기복사상에 편승하여 예수 믿음을 물질화 하였다.

한국교회의 문제점을 진단하다


최근 한국교회 내 여러 문제점들이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세습부터 여성 문제, 재정비리와 학력위조와 같은 세속화 문제까지. 한국교회와 한국사회가 꼭 검토해야 할 주제를 제안하며 담론의 장을 제공하는 ‘청어람 ARMC’의 양희송 대표와 여성 신학을 바탕으로 한국교회에서 발생하는 여성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내고있는 실천여성회 ‘판’의 최은영 공동대표에게 한국교회의 문제점과 한국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성에 대해 들어봤다.


 

Q 자기소개 부탁드린다
양희송 대표(이하 양 대표): 2005년부터 12년간 기독교 대중들을 대상으로 인문사회, 예술들에 대한 강좌를 진행하고 있는 ‘청어람 ARMC’의 대표로 있다. 한동대에서는 2004년부터 2011년까지 7년간 기독교 세계관을 가르쳤었다.


Q 현재 바라보는 한국 교회 내 문제점은 무엇이라 생각하는지
양 대표: 문제는 많다. 한국 개신교는 교단도 여러 가지고 하나로 딱 묶여서 통제가 되는 조직이아니기 때문에 사건사고는 여러 곳에서 발생할 수 있다. 단시간에 사고를 줄이고 대응하는 것도 구조적으로 쉽지 않다. 성직주의, 성장주의, 승리주의 이 세 가지 큰 틀에서 한국교회 내 문제를 구조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입장이다.


Q 교회의 세습이 이뤄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양 대표: 구조적인 배경이 있을 수 있다. 세습은 중, 대형교회에서 많이 일어나고 있는데 1980년대 이후 대형교회에서 전반적으로 세대교체에 실패하고 있다. 세습반대운동연합 자료에 따르면 공식적으로 300여 개의 교회가 세습을 진행했다. 대형교회가 세습이 아니고서는 자신들 조직을 이어나갈 수 없게 됐다고 본다. 전임목사와 후임목사의 분열이 일어나는 등 세대교체에 실패한 대형교회들이 위협을 느끼고 세습을 해야겠다는 판단에 이르는 것 같다.
또한 민주적으로 의사결정을 하고 교회 운영 자체에 권한이 분산되고 합리적인 조직 운영이 이뤄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목회자 중심으로 교회운영이 이뤄진 성직주의와 같은 이유도 있다. 목회자에 과도한 카리스마를 부여하고 그걸 당연하게 생각하다 보니 권한, 권위를 가진 목사가 없는 교회를 상상할 수가 없는 거다. 후임자를 들이는 것으로 해결이 안 된다고 봐서 아들이나 사위 등 친인척을 들여 현재 만들어 놓은 구조를 가능한 변화시키지 말고 최대한 유지하자는 생각이 목회자와 성도들 안에서도 공유되고 있는 것 같다.


Q 세습의 문제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양 대표: 신학적인 측면에서 비판하자면 기본적으로 교회가 혈연공동체가 아니고 언약공동체라는 점에서 혈연으로 목사직을 승계하는 것이 옳지 않다. 역사적인 측면에서 보면, 11세기 무렵 서양에서 기독교 국가체제가 이뤄지고 난 후 성직자들 친인척들이 중요한 교회 직책 등을 독식한다. 혈연중심의 족벌체제를 만들어가는 것은 중세교회에서도 금지를 했고 종교개혁을 촉발했던 선례가 있다. 한국교회의 세습은 중세의 종교개혁을 촉발시켰던 상황과 굉장히 흡사하다. 그런 면에서 개신교인으로서 경각심을 가져야 할 굉장히 중요한 이유가 있다.


Q 세습의 해결방안으로는 무엇이 있을지
양 대표: 세습과정에서 나타나고 있는 양상을 보면 대형교회들은 자기 덩치를 주체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일 세대 목회자들이 성장시켜놓은 것들 다음 세대로 넘겨주지 못하고 세대교체에 거의 다 실패하고 있다. 그 덩치를 분할하거나 쪼개서 적정한 규모로 나누는 것이 유력한 대안이지 않을까.
Q 교회 내 여성 문제들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양 대표: 역사적으로 기독교 교회 안과 서양 역사적으로 남성 중심적인 사회 분위기가 고착되고 그것이 신앙의 이름으로 정당화한 사례가 무수히 많이 등장했다. 성경이나 기독교 신앙이 오·남용되는 사례는 무수히 많았다. 여성에 대해서도 오남용들이 일어났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여성의 권리, 존재를 두드러지게 보호하고 높게 끌어올리는 모습을 상당히 많이 볼 수 있다. 특별히 신약의 예수님의 태도나 초대교회 공동체 내 여성들의 역할은 당대 문화에 비춰볼 때 굉장히 전향적이다. 기본적으로 기독교 신앙은 남녀차별없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로의 소중함을 훼손하는 것을 어느 방식으로도 용납하지 않고 보호해야 하는 것이 기본원칙이다. 지금 사회에 와서는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잘못된 것을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한국의 주요 교단에서 여성의 권리를 억압적으로 바라보는 현실이다. 여성 목사 안수를 인정하지 않는 것에 비판적인 입장이다. 여성 목사안수가 되는 교단에서도 여성 목사의 자리가 제대로 확립돼있는가에 대해서도 갈 길이 먼 사안이라고 생각한다. 세월의 변화에 발맞춰가면서 자기 변신을 모색할 때가 아닌가 싶다.


Q 교회 내 여성 문제 해결방법은 무엇이 있을지

양 대표: 일차적으로 공부하는 게 필요하다. 정확하게 어떤 맥락에 이야기들이고, 이 이야기가 역사 속에서 어떻게 흘러왔는가, 문제를 바라보는 주요한 입장이나 시각은 어떤 것이 존재했는가. 사전학습 없이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페미니즘을 들여다보고 공부하는 것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한국 개신교나 교회가 페미니즘에 썩 친화적인 공간이 아니기 때문에 기독교인의 입장에서는 더 잘 공부할 필요가 있다. 교회 안에 맥락이나 조건과 연관 지어 페미니즘을 바라보면 좋겠다. 여러 강연을 듣거나 페미니즘 관련한 개론서나 고전서를 읽으며 공부하고, 독서모임을 하는 것도 도움이 될 것 같다.
적어도 대학 이상의 지성인의 취급을 받는 사람들이라면 대화와 학습이라는 과정을 기본적으로 전제하고 어떤 사안을 들여다보는게 필요하지 않나. 전투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은 대학생 이상 글을 읽고 합리적 사고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우선적인 태도는 아니지 않는가 싶다. 어떤 종류의 사회적 이슈들을 들여다보고 이해하고 토론하고 하는 방식으로 대하는 마음의 여유가 필요할 것 같다.
교회 안에서 문제 되는 사안은 말도 못 꺼내게 하는데 그것은 해결책이 아니다. 우리 때는 포스터 모더니즘은 말도 못 꺼내게 했다. 반기독교적이라고. 그런 방식은 비판적 사고를 할 겨를 없이 모르면서 반대하거나 모르면서 찬성하는 맹목적인 방식의 대립밖에는 안 만들어진다. 꺼내 놓고 토론을 해야 각각의 논점에 대한 합리적인 대화가 가능하다.
이슈에 대해서 가로막는 방식의 대응은 문제를 다루는 것은 초보적이고 효과적이지 않은 전략이라고 생각한다. 이야기 자체를 못 하게 하는 것으로 해결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목소리를 내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덮어놓는 것이 아니라 꺼내서 이야기를 해가며 풀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Q 교회 내에서 여성 문제를 말하기 어려운 분위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양 대표: 교회가 지적 자신감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본다. 교회에서 많이 하는 말이 사람들이 이런 것에 노출되면 신앙에 위험이나 위협이 있다고 얘기하는데 그것은 성도를 스스로 판단할 수 없고, 비판적인 능력을 키울 수 없는 존재로 만드는 거다. 그건 종교개혁의 가르침과 전면으로 위배되는 거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할 때 성직주의에 대해 강력하게 비판한다. 우리가 교황이나 사제에 의존해서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모든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직접 나아갈 수 있고 그렇게 해야 한다가 개신교 정신이다. 성직자가 중심에 서서 의식을 지배하는 것을 배격해야 한다는 것이 마틴 루터의 입장이고 개신교의 출발이다. 계속 대화, 토론, 공부, 학습을 이야기하는게 개신교적 신앙이 확립될려면 이것들이 필요하다. 사제의 이야기를 열심히 듣고 순종하는 태도가 중요한 게 아니고 자기 스스로 깨우치고 학습하려는 태도가 확보되지 않으면 개신교적 신앙은 불가능하다. 한국교회에 여러가지 많은 문제에 이유가 있지만 그 밑바닥에는 개신교적 특성을 잃어버린 것, 성직자에 순종하는 것을 신앙의 최우선적 미덕이라고 만들어버린 문제가 가장 크다.
Q 재정비리, 학력위조 등과 같은 세속화는 원인과 해결 방향성은?
양 대표: 일반론적 차원에서도 세속화를 비판적으로 볼 수 있지만 교회가 스스로 중요하다는 생각하는 가치가 정립이 안 되고 있는 문제가 있다. 기독교 신앙에 무엇이 중요한가. 교인 수가 많은 것이 중요한가. 큰 건물을 갖는 것 무엇이 중요한가. 예수 따라 산다는 결단이 아니라 남들이 인정해주는 것, 사람들에게 존재가치를 인정받고 싶어 한다. 교회가 내보여야 할 가치에 대해서는 불분명하고 다른 것들로 존재가치를 인정받으려고 하는 것이 세속화 현상 원인으로 볼 수 있다. 교회 본질이 뭔지 생각할 필요가 있겠다.

실천여성회 ‘판’ 의 최은영 공동대표

 

Q 실천여성회 ‘판’에 대한 소개 부탁드린다
최은영 대표(이하 최 대표): 1980년대에 조직된 ‘한국여신학자협의회’라는 기독여성단체가 있다. 우리는 대전지역내 신학전공자들이 모여 지회 형태의 ‘대전여신학자협의회’라는 이름으로 2000년에 출발했다. 2014년에 여신학자라는 명칭이 갖는 벽으로 모임에 들어오기를 부담을 느끼는 분들이 계셔서 부담을 줄이고 일반기독여성들의 참여를 증진시키고자 실천여성회 ‘판’으로 이름을 변경했다. 판은 여성 신학을 바탕으로 교회와 사회의 성 평등, 정의, 평화에 대한 독서모임, 공개강좌개최 등의 활동을 한다.
Q 교회 내에 페미니즘과 여성 신학이 대두되고 있다. 어떤 활동이나 이야기들이 이뤄지고 있나
최 대표: 사실 한국에는 1980년대부터 여성신학이 들어왔다. 1980,1990년대부터 선배여성신학자들이 꾸준히 번역, 저술해오고 했지만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최근에 사회적으로 페미니즘이 대두되면서 여성 신학이 주목받게 됐다. 여러 강좌를 열거나 여성 신학을 배우는 단체들이 늘고 있다. 교회내 여성차별적인 부분에 대해 이야기에 대한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예전보다 관심은 늘었지만 대부분의 교회에서 여성 신학, 페미니즘적으로 성서읽기에 대해 들어보기 어렵다. 교회 내에 여성 문제에 대한 큰 변화도 없다.


Q 한국교회 내의 여성 문제에 대해 어떤 것들이 있는지
최 대표: 이전에는 7~80% 정도가 여성일 정도로 여성이 많았다면 지금은 여성들이 교회를 많이 떠나고 있는 추세다. 과거에는 그때의 순종과 헌신이 굉장히 자연스러웠다. 지금은 부정적으로 보기만은 어렵지만, 여성들이 고정적인 성 역할에 맞춰진 어르신들이 하던 주방봉사나 허드렛일 등을 도맡으면서 여성들이 남아있기를 힘들어한다. 교회 내에서 목회자들이나 소위 당위원들이 관심을 많이 가져야 하는데 여전히 이전 것을 고수하면서 젊은이들과 여성들을 탓하는 분위기의 문제도 있다.
또한 목회자의 성폭행, 성범죄의 문제와 성서와 교회 전통을 가지고 와서 그 잣대로 성서에 나오는 여성에 대해서 차별적인 언급이 통용되는 것처럼 얘기하는 것과 대표적인 교단에서 여성 목사 안수가 이뤄지고 있지 않는 등의 여성차별 문제가 있다. 한 사례로 우리 회에 연락이 온 20대 여성분이 있었다. 목사님이 설교 중에 여성을 비하하는 듯한 발언과 여성 혐오까지는 아니여도 여성 차별적인 언사, 비유들이 많이 나오는 거다. 그 부분에 대해서 얘기를 하면 은혜를 못 받았다 믿음이 없는 거다, 왜 목사님 말에 딴지를 거냐 식의 답변을 들은 후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믿음이 없는 건가. 잘못 생각하는 것인가에 대한 자괴감, 죄의식을 가지게 됐다고 했다. 여성 목회자 같은 경우 어른들을 대상으로 목회하기 원하고 역량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이라는 이유로 어린이부서들을 맡기도 한다. 의결기구에는 여성들이 들어가지 못하는 위계적이고 수직적인 관계들도 교회 내에 문제들로 볼 수 있다.


Q 교회 내 여성차별의 원인은 무엇에 있다고 생각하는지
최 대표
: 유교, 가부장적인 사회 분위기가 교회 내에도 영향을 준다. 성서해석의 문제도 있다. 성서에 아담과 하와 창조 구절에서 어떤 이들은 여성이 죄를 이 땅에 가져왔고 여성은 남성의 갈빗대로 만들어진 부차적인 존재라고 얘기하며 여성을 부정적 존재로 바라본다. 창세기 1장 27절에 대한 남성과 여성, 여기에는 어떠한 순서상의 차별도 역할상의 차별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후 2장과 3장에 나오는 하와에 대한 여성신학적 해석을 통해 여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져다 준다. 바울 성서에 여성은 잠잠하라라는 구절 등 여성차별적인 몇몇 언급으로 인해 교회와 사회는 영향받았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많다. 과거 서구 제국주의는 자연을 인간에게 위임하셨다라는 성서 구절을 뒷받침으로 자연개발을 강행했다. 이 구절은 자연과 인간을 동반적인 관계로 바라보지 인간이 더 위계적인 존재로 얘기하는게 아니다. 한쪽만의 시선으로만 바라보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여성신학도 마찬가지다. 여성의 눈으로 본다는 것이 여성우월주의를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보지 못했던 하나님의 원래 뜻을 같이 고민하고 좀 더 근본적으로 확장해 바라보자는 것이다.
올해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면서 오직 성서로 돌아갈 것을 얘기하는데 자칫 문구에 갇혀 다른 것을 보지 못할 수가 있다. 성서를 문자적으로만 해석하면 외국인, 장애인, 여성, 동성애에 대한 차별과 혐오가 있다. 노예계급제도에 대한 옹호도 있고. 문자적으로만 이해 하기엔 지금 사회적 상황과 너무 괴리가 있다. 문자주의적 해석이 아니라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 역사비평적, 공시적인 해석이 필요하다. 성경에 써있으니까 반대해야 한다 등의 지엽적인 사고가 아닌 시대적 상황을 보면서 역사비평적으로 하나님의 정의의 관점에서 성서를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시대주체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는 공시적인 해석을 해야 한다. 본문자체는 그대로이지만 그 본문을 누구의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지배자의 눈으로 볼지 약자의 눈으로 볼지. 성서에 대한 질문을 가지면서 해석하고 성서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Q 교회 내 여성차별의 해결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최 대표
: 남성과 여성이 대립각으로 가는 것은 반대한다. 페미니즘이 한국 사회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한 것에 과격한 면들의 영향도 있다고 생각한다. 서로 공존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게 중요할 것 같다. 갈라디아서 3장 28절 속 초대교회 당시에 읽혀진 바울의 선언을 보면 남녀가 같고 유대인이나 헬라인이 같고 종과 주인이 같다고 말한다. 바울의 평등 선언이고 초대교회 당시 세례식에서 읽혔다고 한다. 이 선언은 당시 시대의 상황을 살펴봤을 때 혁명적인 선언이다. 성서 내에 그런 신앙고백을 통해서 상대를 존중하고 있다. 성서에서는 여성들이 부각되지 않지만 약자, 소수, 여성의 시각으로 성서를 읽고 교회내에 자연스럽게 있었던 남성 위계적인 문화를 바꿔 가는 시도를 계속해야 할 것 같다. 개인 모두가 평등하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엄하게 만들어진 존재인데, 서로를 존중하지 않고 차별을 이어가는 교회 내, 그리고 사회적으로 존재하는 시선들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



한국교회의 당면과제와 대처방안

오늘날 한국교회가 당면한 과제를 크게 교회 안과 밖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내부적 과제로는 탈교회 현상, 교회 분쟁, 인구 고령화 문제, 저출산과 다음세대를 포함하는 교인수 및 신학교 지원자 감소, 이단 문제 등이 있다. 외부적 과제로는 개정사학법, 이슬람 스쿠크, 종교인과세, 포괄적차별금지법, 그리고 코로나 팬데믹과 기후위기로 인한 환경문제 등이다. 어떻게 하면 한국교회가 당면한 과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까?

첫째, 한국교회 보수 연합기관이 하나 되어야 한다. 
현재 ‘문화전쟁’을 치르며 ‘갈등공화국’이라 불리는 한국 사회 속에서 종교는 ‘사회통합’에 공헌해야 한다. 레이 달리오는 중도층이 없고, 이념이 양극화돼 갈등이 심화되는 현상을 한 사회가 쇠락하는 과정이라고 했다. 한국교회 보수 연합기관은 화해, 상생, 연대, 평화라는 가치의 문화를 형성하고 연합된 모습을 보여주며, 사회통합에 기여해야 한다.

둘째, 이중언어와 다중언어를 구사해야 한다. 
교회 내 문제를 다룰 때는 종교적·교리적 언어를 사용하지만, 교회 밖 문제는 그러한 언어를 번역하여 공론장의 언어로 표현해야 한다. 이것이 이중언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나아가 모든 과제들을 신앙의 문제로 단순하게 환원하기보다는 각각의 문제를 깊이 연구하고, 다차원적이며 입체적으로 보는 훈련이 필요하다. 이것이 다중언어를 구사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다.

셋째, 공론장의 소통방식인 대화와 토론하는 법에 익숙해져야 한다. 
공론장은 소수가 독점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곳이 아니라 민주적이며, 열린 대화의 장이다. 더욱이 객관적 사실보다는 개인적 감정과 신념에 호소하는 탈진실 시대와 자신이 기존에 믿는 바에 부합하는 정보만을 받아들이는 확증편향적 분위기 속에서, 타인의 의견을 경청하는 동시에, 정확한 데이터와 사실에 기반해 자신의 의견을 설득력 있고 합리적으로 표출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넷째, 인문학적·사회과학적 소양을 길러야 한다. 
과거 과제들이 주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차원이었다면, 지금은 주로 문화 사상, 제도, 법 등과 관련된 문화적 차원이라는 특징을 보인다. 따라서 현상을 분석하고 이해하는 사회과학과 인간의 삶과 의미를 성찰하는 인문학의 소양을 동시에 키워, 기독교 사상과 다양한 학문들과의 만남을 시도하는 다학제적 대화 훈련이 필요하다.

다섯째, 미래지향적인 비전과 상상력이 필요하다. 
보수교단은 복음화 의제, 진보교단은 인간화 의제에 주로 관심을 가진다. 각 진영마다 의제로 삼고 있는 담론만을 되풀이하지 말고, 양극화를 극복하고, 사회를 통합하며, 도덕적 결속력과 안정화를 제공할 수 있는 미래지향적인 비전과 상상력을 한국교회와 한국 사회에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여섯째, 윤리적 성찰을 수행해야 한다. 
레슬리 뉴비긴과 리차드 마우는 현대 사회에 필요한 기독교인의 덕목을 ‘겸손한 자신감’이라고 했다. ‘겸손’과 ‘자신감’ 모두 중요한 덕목이지만, 방점은 ‘겸손’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재 한국교회는 한국 사회에서 신뢰를 잃어버리고, 윤리적 기반을 상실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교회 안을 성찰하는 윤리적 작업이 반드시 수행돼야 한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 한국교회의 당면과제를 끌어안고, 내가 먼저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하면서 당면과제와 그 대처 방안을 실천, 실행하길 기대한다. 그리하여 다시 한 번 한국 교계와 사회에서 인정받고, 선도하는 우리 총회와 한국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한국교회 검진 결과, “지식· 실천 간 괴리 있으나 희망도 있다”

한국교회가 위기라는 말이 십수 년째 꾸준히 나오고 있지만 정작 그 원인을 명확히 짚는 이들은 드물다. 교회 관련 사건·사고를 다룬 보도나 통계 자료, 설문조사 결과에 따라 문제를 단편적으로 분석하는 경우가 잦아서다. ‘일부 교회와 개별 목회자가 문제’란 시선도 종합적인 판단을 어렵게 만드는 한 요인이다.

교회는 건물이 아닌 성도의 공동체다. 특별히 각 구성원이 그리스도로 한 몸 된 공동체다. 책은 한국교회란 한 몸에 드러난 문제의 근본 원인을 밝히기 위해 종합건강검진을 시도한 결과를 담았다. 한국교회 환부에 현미경을 들이댄 이들은 기독교 비영리연구기관 목회데이터연구소다. 연구소는 이를 위해 2022년 12월부터 올해 2월까지 2년여간 성도(성인, 청소년)와 담임목사, 선교사와 일반 국민 1만2303명이 온라인과 모바일로 설문을 진행했다.

교회 내부 상황 파악을 위해 연구소는 교회 사역을 5개 분야로 세분화해 분야별 설문을 진행했다. 종교교육학자 마리아 해리스의 이론에 따라 이들이 구분한 5개 사역은 예배·교육·친교·봉사·선교다. 이들 분야의 현상을 정밀 분석하기 위해 전·현직 신학 교수와 목회자, 선교사로 구성된 전문가 자문단도 꾸렸다.

조현삼 한국기독교연합봉사단 단장이 2015년 네팔 신두파초크 지진 피해 지역에서 이재민에게 쌀을 나눠주고 있다. 국민일보DB

공저자로 참여한 자문단은 교회의 5개 핵심 사역을 2가지로 분류한다. 예배와 교육, 친교는 교회 내부를 위한 ‘내적 사역’으로, 선교와 봉사는 교회 담장을 넘어서는 ‘외적 사역’으로 본다.

결론부터 말하면 한국교회는 내적 사역엔 강세를 보이는 데 비해 외적 사역엔 다소 소극적이다. 성도와 목회자 모두 국내외 선교나 대사회 봉사에 이견이 없지만 이를 실천한 경험은 응답에 비해 낮았다. ‘사회봉사 활동 의향’을 물었을 때 성도의 73.9%가 ‘있다’고 답했지만 ‘출석 교회 사회봉사에 관심 있다’고 답한 성도는 53.7%에 그쳤다.


목회자 역시 교회가 속한 ‘지역의 어려운 사람을 돕는 문제’에 70.5%가 ‘관심이 많다’고 답했지만 ‘지역 사회 봉사를 핵심 사역으로 인식한다’에 수긍한 비율은 이보다 22.3%나 낮은 48.2%였다. ‘사회봉사를 위한 전략을 수립했다’고 답한 목회자는 36.3%로 더 낮았다. 사회봉사에 있어 교회의 인식과 실천 간 괴리가 적잖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여기엔 ‘인적·재정적 여유가 있으면 해도 되지만 여유가 없으면 굳이 안 해도 된다’(성도 57.6%, 목회자 38.4%)거나 ‘교회는 영적 기관이므로 사회봉사와는 관련이 적다’(성도 12.6%, 23.1%)는 인식이 교회 내 꽤 퍼져있다는 점도 한몫한다. 하지만 예수는 제자들에게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고 권했다.

선교의 경우는 이에 관심이 있는 성도(35.7%)보다 물질로 후원하는 성도(43.0%)가 더 많았다. 세계 복음화란 당위성에 공감해 금전적 후원은 하지만 관심이나 참여까지는 이어지지 않는 것으로 분석된다.


저자들은 이들 현상의 주요 원인을 ‘사회적 책임에 대한 목회자의 설교 부족’으로 꼽는다. 설교를 통한 인식 변화를 묻는 말에 성도들은 ‘성경과 교리를 더 잘 알게 됨’(68.6%)과 ‘삶의 지침을 얻음’(67.5%) 순으로 응답했다. ‘사회 정의’(43.0%)나 ‘환경 문제’(35.5%)에 대한 관심은 후순위로 밀렸다.

부정적 소견만 나온 건 아니다. 한국교회 성도는 ‘예배·설교로 변화된 삶을 살겠다고 다짐’(88.8%)하고 ‘예배에서 깨달은 내용을 주중에서 실천하려고 노력’(84.3%)하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주 1회 오전 예배(온라인 포함) 참석 비율도 79.2%로 다른 종교에 비해 높다. 설교 수용도와 예배 참여도가 높은 만큼 말씀의 씨앗을 성실히 뿌린다면 교회 부흥뿐 아니라 사회 변화를 기대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균형 있게 실천할 때 교회의 미래가 있다’는 원론적 결론이지만 이를 실증적이고 객관적으로 입증했다는 데 이 책의 가치가 있다. 


오늘 한국교회에 닥친 위기의 실체

한국교회가 최근 급격한 교세 감소로 위기감이 고조되는 가운데 특히 대형 교단들의 사정이 더 심각해 보인다. 예장 통합이 9월 총회를 앞두고 교세 통계를 발표했는데 지난해 말 기준 전체 교인 수가 230만 2천여 명으로 1년 만에 5만6천여 명이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통합 측의 교인 수는 2012년 281만 명대에서 2013년 280만 명대로 소폭 줄었다가 2014년에 281만 명대를 회복했다. 하지만 그 이후 줄곧 내리막길을 걸어 지난해까지 10년간 50만8천여 명이나 줄었다.

합동 측의 경우도 통합 측의 추세와 비슷할 것으로 보인다. 합동 측은 공식적인 교세 통계를 9월 총회 때 발표하기 때문에 아직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지난해 자료(2021년 기준)만 보면 그 전해보다 9만여 명이나 감소했다.

주요 교단의 통계 지표는 한국교회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를 그대로 보여준다. 여타 교단들의 사정도 이와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심각성이 있다. 한국교회는 부흥·성장세가 최고조에 달했던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까지 1천2백만 성도를 헤아렸으나 이런 추세로 가다간 교세가 곧 반 토막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교인은 갈수록 줄어드는 데 교회 수는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통합 측의 경우만 봐도 교회 수가 2012년 8,417개에서 계속 늘어 지난해 9,476개를 기록했다. 10년 사이 1,059개 교회(+12.6%)가 증가한 것이다. 목사 수도 같은 기간 16,853명에서 22,180명으로 5,327명(+31.6%)이나 늘었다.

교인은 줄어드는 데 목사 수가 늘어나고 교회까지 많아지는 건 한국교회만의 독특한 현상이다. 좋게 보면 교회의 사회 저변 확대 측면에서 선택의 폭이 넓어지는 것이겠지만 긍정적으로만 볼 일이 아니다. 교인 없는 교회가 늘어나는 건 그만큼 많은 교회가 존립 위기에 놓여있다는 뜻이다.

한국교회의 역사는 이제 채 140년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한때 수백 수천 년의 역사를 지닌 서구교회로부터 부러움과 찬사의 대상이 됐다. 영적인 열정으로 이룬 부흥·성장이었기에 영적인 불이 꺼진 지 오래된 서구교회 인사들이 거꾸로 한국교회를 배우러 오는 일까지 있었다. 오늘 세계 10대 대형 교회가 한국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자랑거리였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이런 눈부신 번영이 영구히 갈 것으로 믿었던 믿음에 균열이 가고 있다. 한국교회에도 바야흐로 ‘버블(거품) 꺼짐’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문이 완전히 닫힌 서구교회와 비교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은 아니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그들과 똑같은 전철을 밟게 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엄습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한국교회는 위기를 위기로 여기지 않는 분위기다. 코로나19 팬데믹 때는 이 시기가 지나고 나면 괜찮아지겠지 하더니 일상회복이 되고 나서는 내 교회는 그런대로 괜찮지 않은가, 또는 내 교회만 아니면 괜찮다는 인식에 머물러 있다. 안일해 보이는 이런 인식에 많은 목회자들이 젖어있는 이유는 위기인 건 알겠는데 그렇다고 그걸 벗어날 방법도 묘안도 떠오르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래서인지 각 교단마다 위기 극복을 위해 애를 많이 쓰고 있다. 통합 측은 9월 총회를 명성교회에서 개최하기로 결정하면서 총회 기간중에 목사·장로 1만명이 참석하는 ‘영적 대각성 집회’를 열기로 했다. 합동 측도 ‘샬롬부흥’을 기치로 전도, 다음세대, 출산장려 등 현안과 미래를 대비하는 사역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러나 주요 교단들이 침체 상태에 있는 교세 회복을 위해 나름대로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그 처방이 주효할지는 미지수다. 한국교회에 닥친 오늘의 위기가 그동안 대규모 영성집회나 전도운동을 벌이는 데 소홀해서였을까. 그보다는 더 근본적인 원인이 있지 않은가 하는 점이다.

전도를 아무리 많이 해도 한 쪽으로 들어온 교인들이 다른 문으로 빠져나가는 데는 방법이 없다. 저출산이란 사회 구조적인 벽을 탓해 봐야 소용이 없다. 그럼 교회를 떠나 ‘가나안’(안나가) 상태에 머물러 있는 약 30%의 성도들은 누구 탓인가.

세상 사람들은 목회자와 성도들의 드러난 행실로 교회를 평가한다. 그들 눈에 비친 교회와 기독교인의 모습이 세상과 별 차이가 없거나 그보다 더 못하기에 비난과 조롱을 쏟아내는 거다.

그런데 예전에 교회를 비판하는 게 신앙이 없는 세상 사람들 몫이었다면 지금은 교회를 떠난 교인들의 비난이 더 신랄하다. 그래서 더 쓰리고 아픈지 모르겠다. 이는 교회와 세상의 경계가 없어진 데서 온, 즉 교회의 세속화가 가져온 필연적인 결과물이다.

성경은 “소금이 맛을 잃으면 길바닥에 버려져 사람들 발아래 밟히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이는 교회가 교회다움을 잃는 것에 대한 주님의 냉철하신 경고다. 오늘 한국교회에 닥친 위기의 실체에 대해 명확하게 지적한 말씀이란 점에서 한국교회가 깊이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한국 교회, 문제는 무엇일까? (#탄핵을 앞두고)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걱정하고 있다. 교회가 세상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걱정한다.

심지어 교회를 향한 실망과 적대감이 교회 안에서 일고 있다. 같이 신앙생활을 했던 많은 지체들이 교회를 등지고 떠났다.

하지만 다들 문제의 심각성을 말할 뿐 신학적인 분석을 하지 않는 것 같아 부족하지만 글로 정리해 보고자 한다.

내가 생각하는 한국 교회의 문제는 사회와의 괴리이다.

교회의 가르침과 주장 그리고 정치적 언행, 문화까지 모두 사회와 너무 동떨어져 있다. 친한 목사님 한 분이 목회를 그만두고 일반 직장에 취업하셨다. 큰 매장의 관리자로 들어갔는데 일하는 어린 친구들이 하나 같이 경계했다고 한다. 이전에 함께 일했던 크리스쳔들이 하나 같이 비상식적이고 이기적이어서 목사였던 사람이 오자 더욱 경계했던 것이다. 왜 사회의 일반적 상식과 동떨어진 신자가 많아질까? 아니 왜 교회는 갈수록 세상보다 못하게 보이는 걸까?

이 문제의 본질에는 한국 교회가 너무 구원에만 집중한 문제가 자리잡고 있다.

특별히 구원이 지옥을 떠나 천국을 보장받는 권리로 전해지다 보니 신자들은 구원을 세상과의 분리로 쉽게 이해했다. 구원이 죄인을 불러 의로 이끄는 하나님의 행위라는 측면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던 것이다. 성도들은 점점 현실을 등지고 천국을 향해 나아갔지만 도리어 교회는 현실에 빠져들고 있었다. 성도의 우매화와 목회자의 세속화가 함께 만난 현상이 오늘날 전광훈 목사와 사랑제일교회이다. 이런 현상 속에 지적인 성도들은 신앙이 자신의 현재 삶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그릇된 교회가 아니라 진리 자체에 대한 회의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결국 교회는 이 현상을 정치의 우경화나 목회자의 일탈 정도로 정리해서는 안 된다. 다시 한 번 복음의 의미와 신학적 정립이 있어야 이 문제는 해결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떻게 구원의 편중화에서 벗어나 균형잡힌 교회가 될 수 있을까?

첫째, 복음이 어떻게 삶과 구분되면서 동시에 연결되는지를 신학적으로 정립해야 한다.

이 문제는 교회사에서 줄곧 제기되어왔던 주제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이 개념을 일반계시와 특별계시의 구분으로 정립했다. 하나님은 세상과 교회를 구분하여 다루신다. 하나님 나라는 교회이지 세상이 아니다. 하지만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 오늘날 교회의 문제들은 이 구분을 혼동한 데서 비롯된다. 나라를 교회로 만들거나 구원을 현실문제의 해결책으로 보는 것이다. 교회는 세상과 다르며 구원은 현실문제의 직접적 해결이 아니다(구원이 곧 세상의 복이 아니다). 그렇다면 구원과 교회는 우리 삶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 구원은 한 개인을 죄에서 해방시켜 참된 것을 사랑하고 거짓을 버리게 한다. 이렇게 죄에서 벗어난 신자는 사회의 일원으로 돌아가 의로운 삶을 문화적으로 드러낸다. 이 패러다임의 확장이 바로 교회이다. 건강한 교회 공동체는 한 지역 사회의 허물을 바꾸어 선한 문화를 이끌어낸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움을 이 땅에 직접 보여준다. 초대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보여주었다. 이 땅의 나라보다 훨씬 탁월하고 아름다운 공동체를 보고 불신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국민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또한 하나님 나라의 높은 윤리가 한 사회의 거짓된 문화를 돌아보게 하는 선한 영향력을 끼쳤다. 에베소 도시에 전방위적으로 일어났던 탈우상화가 그러한 실례이다.

둘째, 구원의 적용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실행되어야 한다.

한국 성도들은 그동안 교회 안에서 큰 은혜를 받았다. 교회 안에 영적 에너지가 가득했다. 그런데 그 에너지를 어디로 표출해야 할지를 몰랐다. 보통 이 에너지를 한국 교회는 전도와 외연확장에 소진했다. 그렇게 다른 사람들로 채워지면 건물을 세우느라 에너지를 소진했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다. 나라는 모든 국민의 삶의 총합과 같다. 나라경제가 수출에만 전념한다고 경제가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영적 은혜를 외부 사람들을 전도하는 데만 집중했다. 공동체는 커갔지만 모여서 실제 사랑을 어떻게 실천해야 할지는 몰랐다. 처음 올 때 반겼던 교회는 정작 새가족반이 끝나고나면 정착하기 힘든 공동체가 된다. 교회 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기준은 그렇게 까다로우면서 교회 밖의 학생들에게는 그냥 장학금을 나눠준다. 교회 안에 있는 병자는 내버려두고 교회 밖에 있는 호스피스 시설에서 봉사를 한다. 나는 구제라는 개념이 성경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받는 사람은 구제를 하나님이 주신 특권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특별한 희생을 받는 것으로 여긴다. 이제 교회도 구제가 아니라 교인들의 복지를 생각할 때가 됐다. 세상이 줄 수 없는 삶의 마지노선을 교회가 보장하겠다는 약속을 해야 한다. 이런 적극적 시도를 통해 교인들이 사랑의 실천을 할 수 있는 길을 교회가 열어주어야 한다. 이런 사랑의 실천이 실제로 이루어질 때 교회는 하늘과 땅을 잇는 공간이 된다. 이러한 실천이 없다면 교회는 하늘에만 존재하게 된다. 바로 이런 하늘의 사다리가 사라지면 교회는 반사회적이고 비상식적인 집단으로 변질된다. 교회 안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일에 열심인 신자가 국가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복지에 예산을 쓰는 것에 분노한다. 교회와 사회를 분리해서 보는 것이다. 교회 안에 사회의 모습이 회복되어야 한다. 그래야 교회 역시 사회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장로교의 정치체계는 대의 민주체제이다. 칼빈은 가장 바람직하다고 여긴 정치체계를 교회의 정치 체계로 끌어왔다. 교회라는 사회에서 한 성도가 잘 훈련받고 자라나야 한다. 그래야 잘 자라난 성도가 사회에 나가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시민이 될 수 있다.

탄핵이라는 비상한 시기를 지나고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 국민들이 교회를 향한 탄핵을 앞두고 있기도 한 것 같아 마음이 씁쓸하다. 하지만 여전히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신자들이 많다고 믿는다. 다만 교단과 영향력 있는 목회자들이 올바른 물꼬를 터주길 바랄 뿐이다.



한국교회, 이제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상)

최윤식 소장
~3분

          ▲최윤식 소장ⓒ데일리굿뉴스

현재 한국교회는 2가지의 급격한 변화에 직면했다. 하나는 한국교회와 성도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급격한 변화의 파도’다. 다른 하나는 한국교회 자체의 ‘급격한 쇠퇴기 시작’이라는 변화다. 

한국교회는 성장의 정체, 성장의 멈춤을 지나, 급격한 ‘쇠퇴기 시작’이라는 새로운 국면으로 진입 중이다. 무언가 잘 되는 상황에서 거대한 변화를 맞닥뜨려도 불안한데, 한국교회처럼 쇠퇴가 시작되는 상황에서 맞이하는 거대한 변화는 공포 그 자체다.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아직도 위기감이 부족하다. 성장이 멈춘 것은 알지만, 급격한 붕괴는 자신의 목회 기간에는 일어나지 않을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한국교회가 성장이 멈춘 원인을 외부의 공격이나 일부 목회자나 대형교회의 일탈에서 찾는다. 저출산 같은 외부적 환경 즉 사회의 심각한 변화와 세계적 경기침체의 물결에서 찾는다. 한 마디로, ‘내 잘못’은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 교회’ 때문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런 생각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급격한 침몰은 도둑처럼 찾아 올 것이다. 

위와 같은 요인들이 한국교회의 쇠퇴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위기의 근본적 원인은 아니다. 진정한 원인은 한국교회 내부, 우리 안에 있었다. 

미국교회의 예를 들어 보자. 한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교회는 1970년도를 정점으로 심각한 영적인 침체로 접어들었다. 

그 보고서가 밝힌 영적 침체의 원인은 “1970년대의 미국교인 가운데 20%는 전혀 기도하지 않으며, 25%는 전혀 성경을 읽지 않으며, 30%는 교회 출석을 정기적으로 하지 않으며, 50%는 교회 주일 학교에 출석하지 않으며, 60%는 저녁예배에 불참하며, 70%는 선교헌금에 동참하지 않으며, 80%는 각종 기도회에 불참하고, 90%는 가정 예배를 드리지 않으며, 95%는 전도하지 않는다”였다.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고, 성도가 성도답지 못하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기도하지 않으며, 성경을 읽지 않으며, 교회 출석을 정기적으로 하지 않으며, 저녁예배에 불참하며, 선교헌금에 동참하지 않으며, 각종 기도회에 불참하고, 가정 예배를 드리지 않으며, 전도하지 않는다’이다. 이것이 우리의 진정한 현실이다. 한국교회 쇠퇴의 진정한 이유다. 

외부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감지하기 쉽지만, 자신의 내부 깊숙한 곳에서 일어나는 변화들은 ‘등잔 밑이 어둡다’는 옛말처럼 감지하기 쉽지 않다. 

필자가 미래학을 공부하면서 깨달은 것은 국가든 조직이든 그것을 쌓아 올리는 것은 오랜 시일이 걸리지만, 무너지는 것은 한 순간이고, 급작스럽게 이뤄진다는 것이다. 오랜 시간 동안 공들여 세워놓은 유럽의 교회들이 무너지는 것도 한 순간이었다. 

역사도 교훈한다. 한 나라의 패망, 한 기업의 멸망의 진정한 원인은 내부에 있었다. 교회도 예외는 아니다. 서서히 성장했으니, 서서히 무너질 것이라는 생각은 ‘심각한 착각’이다. 

영국 일간신문인 데일리 텔레그라프 (Daily Telegraph)는 2000~2002년까지 영국교회의 예배 참석자가 10만 명이 줄었다고 했다. 단 3년 만에 영국 전체 출석교인의 8%가 줄어든 셈이다. 한 번 무너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다. 우리의 무너짐이 외부의 공격과 외부 환경의 변화 때문이라는 것도 착각이다. 진짜 원인은 우리 안에 있다. 

미래를 연구하는 미래학자로서, 한 가지 희망적인 이야기를 한다면, “지금이라도 우리에게 들이닥친 현실을 직시하고 이미 온 위기나 앞으로 다가올 잠재적 위기들을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한다면, 쉽지는 않아도 위기를 극복할 방법과 지혜를 배울 수 있다”이다. 

성경을 연구하는 학자로서, 한 사람의 목회자로서 소망적인 이야기를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한국교회를 아직도 버리지 않으셨다”이다. 우리가 바라는 치유와 회복, 그리도 다시 부흥하는 미래는 가만히 앉아 있는다고 그냥 주어지는 않는다. 

이는 성경의 가르침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성경은 분명히 약속한다. 우리가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직시하고, 다시 되돌아가면, 다시 회복될 수 있다. 

앞을 내다보는 일은 어렵다. 필자가 비록 미래학(Future Studies)을 전공하면서 미래를 예측하는 기술들을 배웠지만, 인간이 미래를 정확하게 예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미래가 불투명하고, 캄캄할 때는 ‘약속의 말씀’을 믿고 나가야 한다.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계 2:5) “우리가 우리의 행위들을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애 3:40)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호 6:1~2). 



한국교회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이야기


어떻게 나의 삶을 설계할 것인가?

한국교회의 모순들과 어려움을 해결하려면 판 자체를 바꾸어야 한다. 질서 구조 등을 바꿀수 있다. 무인가 신학교 정리하면 종교 탄압으로 몰린다. 김영삼 정부시절에 시도하자고 했지만 정치적 부담으로 실패했다. 현재 신학교가 220개가 있다.

내가 정리할 수 있는 힘만 있다면 먼저 목사들을 62세 은퇴시키겠다. 나이가 들면 창조적인 것이 나오지 않고 과거를 가지고 이야기 한다. 또한 현직 목회자중에서 자질과 함량 미달하는 이들을 퇴출시키겠다. 그리고 10년간 신학생 뽑지 않을 것이다. 소수의 정예화된 목회자들로 교회를 새로짜면 지금보다 더 희망적이지 않을까? 그런데 이런 방식들은 현실 가능성이 전혀 없다.

한국교회를 개혁해야한다. 그런데 막상 생태계, 시스템을 바꾸려면, 기존의 이해관계가 너무 복잡하고 기득권으로 인해서 바꾸기 어렵다. 틀을 바꾸기가 대단히 어렵고, 7-8년 후에 망하는 것이 좋을지 모른다. 우리는 이미와 아직 사이에 산다. 악은 자기 증식의 성질을 가지고 있기에, 악과 부조리가운데에는 교회가 세워지지 않는다. 이런 악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는 어렵다. 알곡과 가라지가 섞여있다. 종말에 이르기까지 내버려두도록 한다. 따라서 악을 다 걷어내려는 것은 교만의 형태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가 교회를 위한 부름이 있다. 기독교를 통해서 입신양명을 위해서 신학교에 온 자들은 나가야 한다.

악과 싸우기 위해서 신학교에 왔다. 목회자다운 목회자가 나와서 목양을 하고, 지역사회와 호흡하는 교회가 전국에 수천개가 세워져야 한다. 100-300명 정도의 교회가 전국에 수천개가 있는 생태계를 그린다. 대형교회를 해체하고. 한 사람 한사람이 정말 변화하는 것이다.

거시 담론이나 구조에 함몰되어 있다보면 개개인이 가진 가치와 능력을 간과할 수 있다. 한사람이 깨어나고 변혁되고 준비되면 한 사람이 일으킬 수 있는 파도가 더 강하고 클수 있다. 10년 후를 바라볼 때, 신실하게 준비가 되면, 여러분이 일으킬 수 있는 폭과 강도와 범위가 생각보다 더 클수가 있다.

새물결프러스 출판사가 6년이 되었다. 서구권의 좋은 책들이 나오고 있고, 거기는 정직성을 가지고 출판하는 현실에서 시작했다. 책은 일반적으로 이천권이 팔리면 본전이다. 그런데 신학책이 나오면 오백권 팔리면 맥시멈이다. 첫해 사억팔천적자 이후 삼억, 이억 순으로 적자가 줄었다. 그런데 너무 어렵다고 해서 질을 낮추었다. 그러나 한 사람이 적지않는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다른 출판사들에서 자기들의 책을 내는 형태가 부끄럽다고 한다. IVP가 90-2000년을 지나면서 스피릿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다시 두꺼운 책을 내고 있다.

한사람이 가치를 가지고 그 길을 가준다면, 그리고 서로 네트워킹이 되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변화들이 일어날 수 있다. 한국 교회는 판을 바꾼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작은 희망은 여러분 자신들이다. 기성의 요구대로의 길들려진 목사가 아니라 그것을 의심하고 불편해하고 다른 방식으로 상상하는 한 사람이 준비되는 것이 필요하다. 의외로 한 사람때문에 변화가 일들이 일어난다.

기본적인 목회자의 소양 네 가지를 나누고 싶다.

첫째는 신학의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조직신학서론에서 종말론까지 50개 타이틀로 세분화시켜서 각 주제별로 강의안 없이 자기 프레임으로 두 시간이상 설명할수 있어야 한다. 성서신학은 66권마다 최소 두-세시간씩 각 권의 신학을 자기 프레임을 가지고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성경신학적인 한 주제를 가지고 창-계시록을 관통하면서 최소 50개의 이슈를 설명할수 있어야 하는 눈이 있어야 한다. 초대 교회사 현대교회사에서 흐름을 차고 있어야 한다.

신학교에서의 준비와 함께 십년은 숨어서 계속해서 공부를 해야 한다. 이슈가 생길때 응답해야 한다. 성경을 나름대로 현장에서 필요한만큼 요리할수 있어야 한다. 성경을 보는 눈을 키워라.

둘째는 인문학적 소양을 키워야 한다: 문학 사회학 철학 사회 경제학 공부가 필요하다. 현대예언자는 사회학쪽에서 나온다. 상식적인 이야기를 할수 있는 정도 즉 교회밖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알아들을수 있는 정도는 되어야 한다. 타종교인들이 기독교에 요구하는 것이 통찰력있는 상식적인 이야기이다.

프란체스코 교황이 한 이야기는 불평등을 해소해야 한다는 것이다. 피케트의 21세기 자본에서 지난 15년간 세계의 세금을 통계로 처리했다. 우리는 그런 작업은 아니고 단지 불평등을 적시하면 된다. 인류가 어떻게 공공선을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지를 공감하고 상식적인 노력한다.

셋째는 역사의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 너무 근시안적이다. 눈앞에 이익에 너무 집착하고 있다. 넓은 시각이 필요하다. 지난 60년, 백년안에 한국사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한국교회의 공과에 대해서 바르게 보고, 한국사회와 교회를 함께 고려하면서 책임있는 삶을 살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서북청년단을 한경직 목사는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해방공간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가? 강준민 목사가 이승만 등을 높이고 있다. 전두환 장군을 위한 기독교의 조찬 기도회의 역사등을 알아야 한다. 역사의 지식이 없으니, 부화뇌동하거나 휩쓸려 간다. 고난과 한과 아픔의 역사에 대해서 역사 인식이 교회에 필요하다.

네째로는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깊은 기도의 경험이 없다: 하나님의 심장이 없다. 하나님의 슬픔과 애통함을 경험하고 배우는 체현하는 기도가 없다. 기도하면서 단지 능력만을 구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진리와 진실의 길을 갈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나와야 한다. 전혀 새로운 패러다임과 가치관을 가지고 10년에 300명만 등장하면 나비효과가 될 수 있다. 판을 못바꾸는 현실에서 신학생들이 꿈이고 미래이다. 한국교회의 미래이다.

종교개혁제 기념특강이 진행되고 있다.

이후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다.

한국교회의 개혁의 핵심이 무엇인가? 목사들의 문제가 무엇인가?

첫째는 목사들의 질이 너무 떨어진다. 두번째로는 시민종교의 포로가 되어 있다. 교회가 속해있는 문화에 노예가 되어 있다. 체제를 위한 봉사자가 된다. 자본주의 등의 이데올로기에 노예가 되었다. 세번째로는 개교회주의가 문제이다.

또한 한국교회의 문제 핵심은 목사들이 질이 너무 떨어진다. 새물결프러스의 책의 구독자 절반은 성도들이다. 목사와 신학도들은 어렵다고 한다. 성도들의 학력이 높다. 그런데 목사가 설교권을 독점하고 있다. 권리에 준하는만큼의 책무, 성실함과 충성심 등이 필요하다. 한국교회의 리더쉽 부실에 설교도 부실하고, 세상을 통전적으로 보는 해석학적인 능력도 부족하다. 과도한 종교적 권력을 행사한다. 장로들의 문제도 있다. 돈이 많은 사람이 장로가 된다. 한국사회에서 돈을 버는 것은 첫째 뛰어난 아이디어 아니면 둘째는 독종이어야 한다. 부실한 인격과 삶을 가지고 있다. 이런 리더쉽이 체제옹호적인 교회가 되게 한다. 교회 구성의 문제이다.

오늘까지 산 것보다 두 세배는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민화 교인들로 만든다. 갈급한 영혼들과 대화하고 교회밖의 지성들과 함께 대화하고 끌어들일수 있는 목사가 되기 위해서 지적인 능력을 두 세배는 끌어올려야 한다. 목사와 전도사 질이 너무 낮다. 가나안 성도들의 평가이다.

다른 질문; 가난한 자들과 우는 자들과 함께 하길 원한다. 역사 의식, 이념측면 등의 문제가 있다. 탈북자들을 섬기기를 원하는데, 대상자들이 보수화된다. 이때 어떤 입장이 필요한가?

하나님의 나라의 중요한 도구가 정치이다. 그런데 정치는 동시에 사탄적 속성을 가진다. 정사와 권세라는 영적 실체가 있다. 천사의 세계에서 강력한 지위를 가지고 국가와 대륙, 제도 단위내에서 활동하는 영들이다. 하나님에 대해서 자율성을 추구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사탄성으로 나타난다. 정사와 권세에 포섭되었기에 근본적으로 자율성을 추구한다.

교회는 모든 정부에 대해서 비판적 거리두기를 해야 한다. 사탄성에서 정도의 문제가 있다. 예언자적 비판 정신을 가져야 한다. 근거는 첫째 정부가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하는가? 하나님의 샬롬을 더 실현하는가?(복지), 사회적 약자에 대해서 누가 더 배려하는가? 현 정부는 사회적 약자를 너무 학대한다. 한국교회의 7-80%가 이런 정권을 지지한다. 한국개신교가 시민종교의 포로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음은 신학적 기준이 필요하다.

탈북자 문제에서 깨닫는 것은 사람은 안변한다는 것이다. 탈북자들이 북한 체제안에서 일평생 보고 들은 것이 기존에 질서와 체제에 순응하고 정당화하는 것이다. 힘있는 자들의 편에서 생각하고 발언하는 습관이 들었다.

다른 질문: 목회자의 질적 향상이 필요하다. 부교역자로서 사역할 때 질적 성장의 시간이 있는가? 그렇지 않으려면 투잡을 가지고 준비해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동기부여가 약하지 않는가? 동기부여와 모델들이 있어야 하겠다.

강의자는 총신 87회다. 그런데 장신 출신들은 통합의 안정된 시스템에서 무난한 분위기라고 하고, 총신은 현실에 대한 분노와 변화를 이야기한다. 현실적인 문제가 있다. 투잡한다고 공부하나? 생계, 사역 걱정 없는 상황에서 많은 시간을 독서에 투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잠을 줄인다. 작년 봄에 교단탈퇴한다(합동). 강력한 동기는 하나님을 깊이 만나야 한다. 하나님이 가져오시는 미래를 보아야 한다. 한국사회에 한반도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보아야한다. 그것이 가장 강력한 동기이다. 내가 생각하는 것과 하나님이 꿈꾸는 세상과 차이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오늘날의 교회 리더쉽의 영성은 하나님의 심장을 경험해야 한다. 하나님의 깨진 심장을 경험한다.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미래를 본다. 내가 보는 미래는 무엇인가? 영적인 세계에서 보는 것은? 하나님께서 한국땅에 세우시는 교회가 있다. 하나님 편에서 목말라하는 교회가 있다. 정말 깊이 있는 성경해석이 있는 교회, 지성적인 세상과 의사소통이 되는 교회, 사회정의에 대한 헌신된 교회, 하나님의 깊은 마음을 배우고 본받는 교회, 이런 것들이 균형잡힌 교회를 세우기 원한다. 조각난 교회가 아니라. 한 리더쉽 아래서 조화를 이루는 교회가 필요하다.

그런 말씀의 사역자들이 나오면 지금 10대들 가운데서 특별한 자들을 일으킬 것이다. 세월호 사건이 나면서 10대들의 의식이 바뀌고 있다. 한국교회와 민족에게 통일과 같은 기회를 주실려고 한다. 준비하는 마음이 있으면 현실이 된다. 선배 세대의 생태계, 엄청난 불평등의 생태계, 종교적 탐욕의 생태계의 노예가 되어서 생존만을 꿈꾸면, 하나님이 가지고 오시는 미래는 우리 것이 아니다.




안명준 교수 | 한국교회의 신학적 문제점 


안명준(安明俊, 1955- ) 
독립운동가 안봉순 선생의 손자이며, 중앙대학교 전기공학과 졸업, 합동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석사M.Div., 미국 리폼드신학교 신학석사〔Th.M.〕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신학석사〔Th.M.〕남아공 프레토리아대학교 교의학 전공 철학박사〔Ph.D.〕칼빈의 해석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평택대학교 신학부 교수로 재직하며 조직신학을 가르치고 있다. 
세계개혁신학회(IRTI) 한국대회 준비위원과 요한 칼빈 탄생 500주년 기념사업회 실행위원장,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사업회 실행위원장을 역임했다. 
2019년 개혁교회 종교개혁 500주년 공동위원장을 맡고 있다. 현재 한국장로교신학회 회장으로 있다.

한국교회의 신학적 문제점

오늘날 무엇이 문제인가?


오늘날 한국교회 문제의 중심에는 잘못된 신학의 목사가 있다.

시작하는 말

현 한국교회는 위기에 있다. 80년대의 풍성한 은혜의 시대를 보내고 이제 교회 존립(存立) 기반이 흔들리고 있다. 큰 도시의 대형교회들을 제외하면 소형교회들 태반은 여러 모양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런 모습은 최근 주 5일 근무제에 그 분명한 대안을 갖지 못하면서 더욱더 흔들리고 있다. 본 논문의 목적은 현재 크게 두드러진 한국교회의 문제점들에 대해 신학적 관점에서 살펴보는 것이다. 중요 내용의 범위는 한국교회의 신학적인 문제점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그 문제점에 대한 구체적인 해결책은 다루지 않았다.  

I. 한국교회의 신학적 문제점

최근 미국의 한 기독신문사는 목회자들이 생각하는 교회의 문제점을 조사했다. 물론 미국이었지만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들이 문제점으로 삼는 주된 것들은 지나친 교회 성장주의, 목회자들의 세속화와 탈선 그리고 윤리 의식의 실종(失踪)으로 보았다. 한국교회의 신학적인 문제점들 가운데 먼저 극단적 이원론(二元論)을 다루려고 한다.

(1) 극단적 이원론(二元論)

한국교회의 신학적 문제로 먼저 극단적 이원론(二元論, dualism)을 들을 수 있다. 이원론은 일반적으로 근본적인 실재를 서로 대립하는 두 개의 것으로 주장하는 이론이다. 손봉호(孫鳳鎬, 1938- ) 교수는 이원론 정의를 “일반적으로 현실 전체 혹은 어떤 특정한 현실의 근본적인 기원을 서로 동등한 두 가지의 원칙에서 찾으려는 견해를 말한다.”라고 한다.

이원론이란 용어는 영국 동양학자 토마스 하이드(Thomas Hyde, 1636-1703)가 ‘고대 페르시아인 종교의 역사’(Historia religionis Veterum Persarum, 1700)라는 책에서 ‘선의 원리’와 ‘악의 원리’가 영구히 대립(對立)하는 종교체계를 이원론이라는 말로 부른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대표적 형태는 플라톤(Plato)의 이데아계(idea, 靈知界)와 감성계(현상계)에서 잘 나타난다. 그의 작품 ‘티메우스’(Timaeus)는 기독교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 책은 우주론 요약으로 세상은 ‘데미우르게’(Demiurge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하며 혼돈된 물질 위에 형상의 패턴을 복사(複寫)했다고 한다.

플라톤은 주장하기를 학문은 ‘일시적인 것과 유한한 것’, ‘항상 변하는 것과 결코 영원한 것’이 아닌 것을 다루기 때문에 그것은 정확하게 진실이 될 수 없으며 우리 눈에 보이는 세계는 한 영원하고 참된 것의 복사(複寫)요 상(像)이라고 한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플라톤의 사상이 유한(有限)과 무한(無限)의 차이를(the difference between the finite and the infinite)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사상은 서구의 철학사를 흘러 교부(敎父)들, 쯔빙글리, 칼빈, 그리고 키에르케고르 그리고 칼 바르트에서 변증신학으로 꽃을 피운다. 그는 이원론 사상을 설명하기를 “보이는 것들은 복사(複寫)나 유사(類似)한 것이지 그 자체가 영원한 것들이 아니다.”라고 한다.(All visible things are the copy and likeness, not the eternal things themselves. Timaeus 29c)

결국에 플라톤은 철저한 이원론 즉 실제와 현상, 이데아와 감각적인 대상, 이성과 지각, 영혼과 육신에서 전자가 후자보다 더 우월하다. 그의 이러한 사상은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철학자요 신학자였던 필로를 통해 클레멘트, 오리겐, 어거스틴 등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플라톤은 또 인간의 영혼의 불멸성(不滅性)을 주장하는데 후에 기독교 신학자들이 플라톤의 이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특히 해석적 관점에서 볼 때 알렉산드리아학파와 교부들은 플라톤의 이원론에 근거하여 성경을 알레고리 방법으로 해석했다.  

서구 철학의 이원론은 대표적으로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의 ‘정신과 물체’에 대한 그의 이해에서 철저하게 나타난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이 종교에서는 ‘빛과 어두움’, ‘선과 악’에서 나타난다.

기독교의 여러 개념이 또한 이원론적 대립의 구도로 이해되는 부분이 있다. 예를 들면 ‘천국과 지옥’, ‘육과 영’,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 등이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있다고 하여 기독교를 이원론의 종교라고 볼 수는 없다. 손봉호 교수는 기독교는 이원론을 주장하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의 절대 주권’ 사상은 이원론의 유혹(誘惑)을 물리치는 강한 무기라고 말한다.

초기 한국교회는 경건하고 헌신 된 선교사들을 통해 ‘건전한 신학’과 ‘경건한 신앙’을 이어받게 되었다. 이들을 통해 신학교가 세워지고 목회자가 배출되면서 한국교회는 일제(日帝)의 핍박과 6.25사변(事變)의 아픔을 이겨냈다. 그리고 80년대 한국은 고속 경제성장(經濟成長)으로 교회는 물질적 풍성함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격동기의 시련 과정을 통해 한국교회는 민족적 고통과 정치적 억압의 시대에 ‘현세와 내세’라는 도식의 이원론으로 빠져들었고 경제적 풍성함과 사회적 윤리적 자유의 시대를 맞이해서는 ‘교회와 세상’이라는 도식(圖式)의 이원론으로 빠져들고 있다.

‘현세와 내세’라는 구도에서는 기도와 기도원 그리고 치료의 은사와 신비주의의 강조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교회와 세상’이라는 구도에서는 지상 교회 내에서 특별은총(特別恩寵)의 충만함을 강조하였고 일반은총(一般恩寵)의 영역으로서 세상에서는 특별은혜의 적용이 미약했다. 전자의 경우 초월적이며 종말론적 이원론이 강했으나 후자는 점차로 영역적 이원론으로 변화하게 되었다. 결국에 한국은 수직적 신앙의 형태에서 수평적인 신앙의 형태로 점진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이런 모습은 한국교회의 개인 구원을 중시한 보수적인 신앙과 사회구원을 주장한 진보적 신앙이 구원을 어떻게 이해하는 그 방식에서 분명하게 나타나며 또 교회가 외형적 모습을 중시하며 그 숫자로 많은 성장을 강조하는 오늘날의 목회신학에서 잘 나타난다. 따라서 한국 목회자들의 책임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런 극단적 이원론적 사고의 수정 없이는 참된 목회나 성도들 교육이 바르게 이뤄질 수 없다.  

또 한국교회는 극단적 이원론으로 인해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의 종말론적인 실현을 이 땅에서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교회 안에서는 천국이지만 교회 밖에서는 비(非) 천국인 장소로 인식하고 기독교인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삶의 모범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기독교를 지나치게 이원론적으로 강조한 결과 성도들로 이 세상에서 적응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렸다. 즉 성도들은 자신이 출석하는 지역교회에 지나치게 비중을 둠으로써 그들이 사회에서 균형 있는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

(2) 로마 가톨릭교회로 복귀하는 현상

두 번째 오늘날 한국 개신교의 문제는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 의식(儀式)으로의 복귀(復歸) 현상이다. 모든 교회가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오직 말씀’,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을 강조했던 종교개혁자들의 정신에서 조금씩 이탈하는 모습을 여러 면에서 볼 수 있다. 한국교회의 이런 문제점을 논하기 전에 먼저 로마 가톨릭교회가 교회의 본질에서 어떻게 벗어났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키프리안(Cyprian, 210-258)은 성례전(聖禮典, Sacrament)을 강조하면서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동일시하는 유형적 조직체로서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회론에 기초석(基礎石)을 놓았다. “교회를 어머니로 가지지 않은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실 수 없다.”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또 “주교(主敎)로부터 분리되는 자는 교회로부터 분리된다.”라고 주장했다. 심지어 그는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라고 말했다.

어거스틴(Augustine of Hippo, 354-430)은 도나투스(Donatus Magnus, ?-355)와 논쟁을 통해 교회의 본질을 강조했다. 특히 예정론(豫定論, Predestination)의 입장에서 교회를 택함을 받은 자들의 단체 곧 하나님의 영(靈)을 받음으로 참된 사랑이라는 성품을 갖춘 성도의 무리로 생각하였다.

중세시대에 ‘교회’와 ‘국가’는 백성들을 다스리기 위한 하나님의 두 권세로 보았으며 교회를 더 상위에 두었다. 후에 그레고리 2세(Pope Gregory II, 669-731)는 성직자들의 권위를 더욱 강화하고 로마 가톨릭교회 교황의 권위를 더 강화했다. 그리하여 성직자들을 평신도와 분리된 계급으로 주장했다. 그리하여 그들만이 성도들의 구원을 얻는 데 있어서 주도적인 역할을 교회 안에서 실행했다.

또 로마 가톨릭교회는 자신들의 교회가 지상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로 착각하고 조직화 된 지상 교회를 강조했다. 결국에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교회와 성직자들에게 큰 역할을 둠으로써 교회와 성직자들의 권위를 더욱 강화시켰다. 이것은 분명 성경에서 벗어난 교회관이었다.

이와 유사하게 오늘날 한국교회 지도자들 역시 교회관에 있어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중세시대의 교회는 근본적으로 성직자들의 독점적(獨占的) 영역이었다. 그들은 교회 사역의 주인(主人)으로서 실질적인 권위를 가졌고 말씀의 권위보다는 교회의 전통(傳統)과 기구적인 교회 제도 그리고 외형적인 면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 역시 독재적(獨裁的)이며 카리스마(charisma, 권위적) 목회자들이 큰 교회를 맡고 있다. 이들의 지나친 카리스마의 남용은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오늘날 한국 대교회 목회자들의 권위는 로마 교황의 권세와 견줄 만도 하다. 이런 목회자들의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권위를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교회의 머리 되신 주님의 권위는 사라지고 말씀과 함께 역사하시는 성령 하나님은 소외되고 있다.

로마 가톨릭 신학자 한스 큉(Hans Küng, 1928- )은 성령은 로마 교회와 사제들에게 제한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권위가 앞세워진 유형 교회에서 성령의 생명력 있는 역사는 자리를 잡지 못할 것이다. 지금 한국교회는 말씀의 권위 즉 복음의 권위를 바르게 시행해야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권위적이며 독재적인 목회자들은 교회의 내적이며 영적인 면의 강조보다 외형적인 요소와 조직과 행정 등 제도적인 요소들을 강조한다. 외형적인 요소의 강조는 결과적으로 인간적인 행위가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만든다. 교회의 구성원들이 이런 행위와 외형적인 노력에 신경을 더 쓰게 된다.  

하나님 앞에서 ‘오직 은혜’를 강조하며 감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개혁자들의 정신과는 달리 인간의 외형적 행위에 강조가 심해지는 한국교회의 모습은 중세의 로마 가톨릭교회를 연상케 한다. 중세에 로마 가톨릭교회가 형식과 인간의 행위를 강조하는 것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形像)과 질료(質料)의 개념에서 영향을 받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 신학 때문이었다.

그의 신학의 중심사상인 “은총은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완성한다.”라는 말은 로마가톨릭 신학의 핵심이 되었다. 그는 어거스틴의 은총론에 근거해 하나님이 인간의 회심의 원동력이라고 말했으나 은혜를 받아들이는 데는 인간의 자유의지(自由意志)를 강조했다. 따라서 후에 로마가톨릭에 구원에 있어 공로(功勞) 사상을 제공해 주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구원을 ‘말씀’과 ‘은혜’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다.

이 같은 중세의 로마 가톨릭교회의 문제점들은 오늘날 한국교회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바로 이런 인간의 열심과 봉사를 강조함으로써 그런 외형적인 요소들을 신앙의 열매와 기준으로 삼는 경향을 보이는 점이다. 특히 세속의 문화와 물질주의에 영향을 받은 한국교회는 인위적인 교회의 행사와 외형적인 행위의 표출을 벗어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는 개혁자들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또 로마 가톨릭교회는 사도 베드로의 후계권을 주장함으로써 비역사적이며 비성경적인 교황권의 강화로 인해 개혁자들의 비판을 받았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의 일부 대형교회에서 담임 목사가 자기 아들에게 변칙적인 방법으로 자신이 섬기던 교회의 담임 목사직을 물려주는 후계 문제는 교회론의 심각한 변질을 보여주는 실례이다. 로마 가톨릭교회가 주장하는 사도 베드로의 후계권을 신학적으로 비판했던 개혁자들의 우려와 비판의 소리가 이들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3) 교회의 외형적 대형화

또 다른 한국교회의 문제점은 교회의 외형적(外形的) 대형화(大型化)를 지적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한국의 모든 대형교회가 다 잘못되었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아니다. 큰 교회로서 말씀을 올바르게 전파하고 성례전(聖禮典)과 올바른 치리(治理)를 시행하며 그리고 평신도에 대한 철저한 제자훈련을 통해 성경적인 교회를 이룩하는 교회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한국교회는 세속적이며 또 인위적인 방법으로 교회를 외형적으로 대형화하려는 노력이 지속적(持續的)으로 시도되어왔다. 그러나 말씀의 굳건한 기초 없이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형제에 관심 없이 거대한 외형적 조직체로서 대형교회의 모습은 미래 한국 개신교의 장래에 심히 우려되는 바이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의 대형교회들은 여러 모양으로 많은 문제점을 표출하고 있다. 이 모습들은 사회에서도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런 대형교회의 출현은 먼저 목회자들이 외형적 성장에만 치중한 목회 철학에서 비롯된 것이다. 목회자들이 지나치게 교회를 외형적인 성장에 목표를 둔 것이다. 특히 로버트 슐러(Robert Harold Schuller, 1926-2015)의 영향으로 성장한 어떤 초대형 교회는 많은 목회자의 꿈이 되었다. 그래서 학자들 가운데 오늘날 한국교회에 교회 성장이라는 새로운 신화가 존재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 교회 성장론(Church growth)의 대가 맥가브랜(Donald Anderson McGavran, 1897-1990)의 ‘교회 성장이론’ 역시 한국교회의 대형화에 이론적 영향을 주었다. 이런 영향들은 결국 교회의 본질에 대한 목회자들의 인식에 많은 변화를 주었다. 즉 교회의 본질적이며 영적인 면보다는 외형적이며 형식적인 면에 더 많은 강조를 두게 되어 결국 초대형교회의 탄생을 보게 되었다. 또 한국교회의 대형화는 결국 미국의 상업주의와 실용주의 철학이 스며든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결국 초대 한국교회의 순수했던 모습과 개혁자들이 주장했던 올바른 교회의 본질에서 멀어지고 있다.(각 교파의 세계 최대 교회가 대부분 한국에 몰려 있다.) 

이런 대형교회로 인한 가장 큰 피해자는 주변의 소형교회들이다. 대형교회는 주변의 소형교회 존폐(存廢)에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 대형교회는 카리스마적인 당회장과 함께 최신의 모든 시설을 갖추며 교회 프로그램의 풍성함과 전문 교육자를 통한 봉사 그리고 교회 버스운영을 통하여 많은 성도를 예배당으로 끌어모았다.  

이런 결과가 나약한 작은 교회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 많은 초년의 교역자들에게 목회에 대한 희망을 꺾어 버렸고 기독교 공동체의 일치성에 크게 손상을 가져왔다. 따라서 대형교회의 출현으로 한국교회 생태계에 지각 변동을 일으켰으며 수백 명의 목회자와 수천 명의 장로와 권사들이 함께 모여 봉사하는 초대형교회가 있게 되었다.

많은 대도시의 대형교회들의 경우에 수만 명의 성도를 가지며 거액의 헌금이 모이며 사회적 유명인사들이 교회를 매워가면서 교회의 문제점은 바로 담임 목회자의 힘 있는 모습 속에서 나타나고 있다. 또 대형교회가 보여준 문제점은 재벌 기업을 닮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대형교회 목사들은 재벌 기업의 왕 회장처럼 행세한다고 한다. 겸손하고 섬기는 종의 모습은 사라지고 지배하고 명령하는 과거 교황과 같은 권위적 변형된 성직자의 모습은 한국교회의 미래를 어둡게 한다.

루터가 이런 잘못된 로마 가톨릭교회 성직자들의 문제점들을 바로 고쳤던 것을 다시 한번 되새길 필요가 있다. 얼마 전 한국의 어떤 대기업에서 누가 왕 회장의 후계자가 되느냐가 온 여론을 시끄럽게 뒤흔들었다. 이런 현상이 서울의 몇몇 대형교회에서 최근에 시끄럽게 기독교계와 일반 매스컴에 공개되었다. 교회의 담임목사의 아들이 대를 잇는 세습문제의 부작용이 언론에 보도되었다.

이런 절차는 아들의 목회철학과 인격에 대한 철저한 검증이 없이 또 교인들의 동의가 합법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에서 위로부터 내려오는 강한 카리스마로 처리하게 된다. 어떤 학자들은 몇몇 대형교회에서 나타나는 목회자 세습(世襲)이 한국교회의 물량주의와 잘못된 소유의식에서 비롯된 것이고 비판했다.

이제 기존의 대형교회 지도자들은 교회의 성장과 발전에 급급하지 말고 이 시대에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도구로서 겸허하게 욕심을 버리고 모든 교회의 권세(權勢)를 주님께 맡겨야 한다. 아울러 우리 모두 기존의 대형교회를 검증하고 감시하고 비판하지 못한 책임을 느껴야지 않겠는가? 이것은 대형교회에 대한 간섭이 아니라 한국교회의 공동체를 회복하는 데 있어 절실한 과제이며 그리스도의 몸으로 구성된 유기체로서 교회에 대한 사랑이다.  

성도들이 대형교회에 출석하는 것이 특별한 권리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이웃의 어려운 교회에 대한 책임과 가난한 이웃에 대한 구제와 봉사 그리고 부패한 사회 속에서 참된 성도의 삶을 실천하기 위한 그리스도 군사의 훈련장으로 삼아야 한다. 대형교회의 목회자가 사회에서 명예와 권위를 입는 것이 아닌 철저한 자기반성과 그리스도의 참된 사랑을 나누며 자신의 사사로운 생각을 버리며 주님의 참된 뜻을 실현하는 종으로서 모범을 보여야 한다.

(4) 개교회주의

한국교회는 그 저변에 개교회주의(個敎會主義)라는 사상으로 교회의 성장 신화를 이룩해 왔다. 그러나 지금의 시점에서 지나친 잘못된 개교회주의를 해체하고 기독교의 보편성(普遍性)과 통일성(統一性)을 추구해야 할 시대적 사명을 갖게 되었다.

개교회주의란 무엇인가? 주님의 교회로서 보편성과 통일성 그리고 우주적인 참된교회를 추구하지 않고 오직 유형적 교회로 자신의 지(支) 교회의 외형적 성장만을 목표로 두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런 한국교회의 개 교회주의가 나타난 배경에 대하여 어떤 학자들은 네비우스 방법의 부정적인 면이 바로 개 교회주의를 낳았다고 한다.

초기 한국교회가 외부의 도움 없이 스스로 경제적으로 독립하기 위하여 사용된 이런 네비우스 방법은 개 교회의 발전에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 이런 면은 물론 잘못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자신의 교회만의 독립과 성장이 지상명령이나 되듯이 지나치게 될 때 타 교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또 개교회주의는 잘못된 교파의식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자신이 속한 교단의 강조와 타 교단에 대한 지나친 경쟁으로 기독교의 공동체 의식이 사라졌다. 이런 문제는 노회나 총회에서 타(他) 교단과의 교회의 통일과 협력을 이룩하지 못한 결과이다. 외국과는 달리 한국처럼 교파의 벽이 높아서 그 누구도 그것을 허물지 못할 정도이다.

이런 개교회주의는 자신의 교회만을 성장시키려는 세속적 사고에 집착할 때 더욱더 심하다. 교인의 숫자만 많고, 건물을 크게 짓고, 헌금이 풍성한 그런 교회관을 목표로 할 때 발생한다. 이런 교회관으로 성장한 교회는 총회나 어떤 단체의 의견도 듣지 않으며 심지어 자신들의 교회가 하나의 큰 독자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고 여긴다. 이런 교회는 기존의 교회의 법을 어기고 비상식적이며 비윤리적으로 방법으로 교회를 움직이게 한다. 이런 사상에는 교회의 종말론적이며 보편적 교회관이 사라지게 된다.  

개 교회주의의 심각한 원인 중에 근본적인 것은 지나친 무자격 목회자의 과잉 배출이다. 현 한국과 미주의 각 교단 신학교와 신학대학원에서 졸업하는 신학생은 정확한 통계를 알 수 없으나 상상을 초월한다. 따라서 많은 목회자가 서로 심한 경쟁을 해야 하는 결과를 만들었다.

어떤 학자는 그 나라의 젊은 종교인들이 지나치게 많아지면 나라가 부정적인 면도 많이 나타난다고 밝히고 있다. 그런 이유는 사회적 활동과 봉사를 한창 할 나이에 비생산적이며 정적인 삶에 많은 에너지를 쓰기 때문에 국가적인 손실이 커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티베트와 같이 승려가 지나치게 많은 나라가 대표적이라고 말한다. 한국의 개교회주의 문제점은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

첫째, 개교회주의는 기독교의 본질을 훼손시킨다. 

주위의 주님의 형제 교회들을 같은 공동체로 보지 못하고 교회들을 지나치게 경쟁적으로 보며 교회의 통일성과 협력을 파괴한다. 이런 결과는 이단을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게 하며 기독교가 감당하는 사명을 효과적으로 실천하지 못하게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순교자의 피로 탄생한 기독교 교회의 권위를 추락시킨다.

둘째, 지나친 개교회주의는 독선과 아집으로 빠져 극단적으로 흐를 때는 이단으로 빠지기 쉽다.

특히 개 교회주의 속에서 강한 카리스마가 교회에 미칠 때는 이미 노회와 총회 그리고 교계의 올바른 조언을 더이상 듣지 않는다. 지난 과거를 보면 이단들이 어떻게 거대한 모습으로 형성되었는지 고찰하면 이런 개 교회주의는 심각한 문제이다.  

셋째, 개교회주의는 성도들을 교회에만 묶어 놓아서 사회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 그리고 봉사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못하게 한다.

성도의 신앙생활의 영역이 교회 영역에 한정되어 역동적인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하지 못하고 지역적이며 현세적이며 형태적으로 흐르게 한다. 개교회주의의 사고는 하나님에 대한 봉사가 오직 개교회에만 국한되어 아브라함 카이퍼가 주장한 사회, 문화, 정치, 경제, 교육 등등에서 하나님의 영역 주권의 실현을 보지 못하게 한다.

자신의 대형교회를 사임하고 학교를 빌려서 예배를 드리는 김동호 목사는 한 일간지에 이렇게 말한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너무 교회만을 위해 살아왔어요, 그러다 보니 교회 일만 열심히 하고 사회에는 적응하지 못하는 이상한 종교인도 생겼지요. 건실한 사회인 특히 다른 사람을 위한 삶을 사는 지도자를 양성하는 데 교회의 역할을 집중해야 합니다.” 그의 말은 한국교회 성도들이 개교회주의에 묶여 사회에서 문화적인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점을 정확하게 지적하는 말이다.

(5) 한국교회의 무속적 요소들

현재 21세기 한국 사회는 무속(巫俗)으로 어울려진 희귀한 문화 현상을 보이고 있다. 심지어 세계적인 예술인 백남준의 예술이 샤머니즘(shamanism)과 통한다는 논의가 일고 있다. 우리 사회는 무속이 마치 오늘날 미풍양속인 것처럼 우리 고유의 전통문화로 우리의 시선을 속이고 있다. 이런 모습들은 국제회의 및 제 의식 그리고 대중매체를 통한 전파에서 찾아볼 수 있다.

몇 년 전 유네스코 한국위원회가 주최한 샤마니즘 국제대회에서 학자들이 샤만 유산의 마지막 발견이 한국에 있음을 직시하면서 한국의 샤마니즘의 보존을 위한 연구가 심도 있게 발표되었다. 과거 역사 속에서 무속으로 종교화된 한민족 삶이 포스트모던(postmodernism) 시대에 새로운 문화를 입고 서서히 부활하고 있다.  

안타까운 현실은 한국의 사회단체가 행사에서 진혼(鎭魂)굿이 자연스럽게 수행한다고 한다. 또 최근에는 일간지들이 미신(迷信)을 조장하는 무속인 광고를 여과 없이 자유롭게 싣는다. 심지어 휴대전화나 무선 인터넷 서비스를 통한 무속인들의 활동은 어떤 상담자보다 인기가 대단하다. 서울 강남의 어떤 동네는 무속 왕국으로서 심지어 신세대까지 무속인들이 공략하는 모습이 매스컴을 통해 방송됐다. 무속(巫俗)이 판치는 한국 사회에서 교회는 미신(迷信)을 타파하고 사람들로 참된 진리를 바라보게 하며 참된 하나님을 믿도록 역할을 할 시대가 되었다.

샤마니즘(shamanism)에서 ‘샤만’은 시베리아 퉁그스족 언어 ‘saman’(주술사)에서 유래했는데 무녀(巫女), 예언자(豫言者), 의사(醫師)를 뜻한다. ‘샤만’의역할은 병마를 축출하고 재난과 불행을 예방하는데 주목적이 있다. 결국에 제사의식(祭祀儀式)의 실리 본위의 원시적 종교형태이다. 한국 무속(巫俗)의 기원이 언제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아주 오랜 고대사회 때부터 한민족의 주요한 신앙형태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학자들에 의하면 국조(國祖) 단군(檀君)이 무당(巫堂)이라는 설도 있다. 무속이 문헌상에 분명히 나타나는 것은 삼국시대로 김대문에 의하면 신라 2대 왕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은 왕호(王號)이자 무칭(巫稱)을 의미하며, 이 외에도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단편적으로 백제, 고려의 왕들이 무당을 이용한 기록이 있다. 이같이 한민족의 오랜 역사를 가진 무속은 오랜 세월의 흐름에도 한때 멸종한 듯하다가 최근에 한국의 불황과 직업의 불안정 속에서 대다수 사람과 특히 신세대 젊은이들 속에서 그 전성기(全盛期)를 누리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한국교회는 이런 무속(巫俗)이 난무하는 시대 속에서 이런 무속적 요소들로부터 자유로운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런 요소는 전도(傳道)에서 나타난다. 전도할 때 기독교를 기복(祈福) 종교로 오해시켜서는 안 된다. “예수 믿고 복 받으세요.”라는 말을 흔히 듣는데 이 말은 오해의 소지가 많다. 마치 기독교가 물질적인 축복을 제공하는 샤마니즘 종교로 인식되기 쉽다.

성경이 말하는 전도 내용은 예수를 믿으면 죄를 용서함을 받고 구원을 받으며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과 나 사이에 올바른 관계가 형성되어 이웃과 사회를 향한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하여 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구호의 무속적인 위험은 예수를 믿는 것이 물질적인 축복과 정비례한다는 믿음이다. 한때 유행한 ‘삼박자 구원’처럼 예수를 잘 믿으며 잘 살고 내 영혼이 매사에 잘된다는 의미로 된다는 것이다.

결국에 이런 신앙은 현세(現世) 중심의 기복(祈福) 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종류의 축복을 강조하는 신앙은 예수를 믿기 때문에 따라오는 영혼의 투쟁, 질병을 통한 하나님의 섭리, 가난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찾아볼 수 없다. 영적이며 종말론적인 신앙을 강조한 바울의 경우는 오히려 반대로 고난의 모습들이 더 많이 나타난다.

어떤 교회는 그 사역이 성령의 역사와 샤마니즘적 형태와 차이점이 힘들 정도다. 성령 하나님은 생명의 하나님으로서 인격적이시며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시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카리스마를 강조하는 교회에서는 주로 성령은 병을 고치며 신비한 은사를 제공하는 영적인 기능을 담당하는 분으로만 이해한다.    

무당의 역할이 병든 자를 고치는 주된 임무와 마찬가지로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병을 고치는 일에만 제한하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성령이 오셔서 이 세상에서 역사하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제한하는 것이 된다. 이런 성령 하나님의 제한은 성령의 충만함이 인격적이며 형제를 사랑하고 사회를 위한 봉사로 이어지는 것을 망각(妄覺)하게 한다.

교회에서 봉사하는 일을 기복적(祈福的) 신앙으로 강조하는 경향이 많다. 이런 배경은 목회자가 건전한 신학을 알지 못하는 데서 기원한다. 만일 어떤 성도가 교회에서 물질적 드림이나 봉사의 일을 통해 하나님의 ‘물질 축복’이 자신을 위해 임한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기복신앙(祈福信仰)에 가깝다.

아무 조건(條件) 없이 감사한 마음으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게 참된 헌신(獻身)이다. 어떤 대가(代價)를 기대하고 자연에 속한 물질을 드린다면 로마 가톨릭교회의 실수를 다시 반복하는 것이요 제물을 통해 현세에서 복을 얻으려는 무속적 기복신앙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과 봉사는 하나님의 은혜(恩惠)에 감사를 표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한 일이다.

(6) 목회자 윤리의 실종

한국의 많은 목회자가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獻身)과 기도 그리고 설교와 심방을 통하여 나타난 그들의 삶에 대하여 존경을 받아 왔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최근 지면에 쓰기 민망할 정도로 목회자 윤리(倫理)가 붕괴(崩壞)되고 있다. 기독교는 윤리에서도 성경을 기반으로 하는 최고의 윤리 종교이다. 따라서 목회자는 지도자로서 윤리의 모범이 되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오늘날 목회자 가운데 하나님의 선택 도구로 자신의 사명을 망각하는 이들이 많이 있다.  

최근 언론이 나타난 목회자의 윤리문제와 관련된 대표적인 사례를 보면 목회자의 윤리의 심각성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 몇 년 전 부천에서 자신의 교회가 부흥되지 않는다고 자신이 사는 이웃집들에 방화를 저질은 목회자가 있었으며,
  • 일만 악의 뿌리가 되는 돈에 노예가 되어 노름에서 번 돈을 주지 않는다고 채무자의 손을 자동차 바퀴로 밟은 목회자가 있었고,
  • 산업금융채권 위조단을 만들어서 개척교회를 세우며 좋은 일에 쓰겠다고 말한 모 신학교의 부학장이 있었으며,
  • 몇몇 목회자들로 만으로 구성된 교회가 교회 재정 사용을 문제 삼아 자기들의 공동체에 속한 한 목회자의 아내를 집단 살해하고 오랜 동안 시신을 부활시키려고 소동을 일으킨 목회자들이 있었으며,
  • 평소 지역 주민에게 존경받고 참신했던 목회자가 빚을 갚기 위해  외설적인 비디오를 제작하여 판매하려다가 적발된 일이 있었다.

이런 일들은 목회자 윤리의 전형적인 사례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목회자의 윤리의 심각성은 바로 성적타락에서 심각성이다. 사람들은 이 시대를 감각(感覺) 시대라고 부른다. 다른 말로 감성(感性) 시대라는 말이다. 그 대표적으로 감각적 성(性)의 드러남이 현대사회의 큰 특징이다. 한가지 예를 들면 결혼 전 성(性) 경험은 해마다 그 비율이 올라가고 있다.

국내 모 대학생들의 순결(純潔) 의식 조사에서 절반 이상이 혼전순결을 안 지켜도 문제가 없다는 것으로 나타났다. 남학생이 여학생보다도 성욕이 강하다는 것에 반대하는 의견이 더 많이 나왔다. 이런 조사에서 보듯이 이제 젊은이들 사이에 기존의 성윤리(性倫理)가 다 무너지고 있다. 젊은이들 가운데 인생을 쾌락적(快樂的)으로 즐기고 보자는 사고(思考)로 전환 되고 있다.  

사회는 사회대로 많은 인터넷 음란(淫亂) 사이트가 극성을 부리고 있다. 무작위로 수시로 많은 사람에게 매일 공격적으로 이 메일(e-mail)로 음란물(淫亂物)을 전송하고 있다. 심지어 청소년들의 이 메일에까지 보내고 있다. 이런 가운데 바로 성적인 탈선의 문제는 이제 목회자들에게 예외가 될 수 없게 되었다.

기독교 여성상담소에 따르면 1998년 7월부터 2000년 10월까지 교회 내 성폭력 건은 51건이었으며 이중 목회자 관련 성폭력(性暴力)은 46건으로 나타났다. 한국성폭력상담소 1999년 통계에서도 성직자 관련 성폭력 신고 건은 모두 32건이다. 하지만 감추어지고 알려지지 않는 성폭력의 특성을 고려할 때 목회자의 이성(異性) 문제는 너무나 심각한 상태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 목회자가 이성(異性)과 불미스러운 문제로 교회로부터 사임을 강요당하거나 교회를 떠나는 일이 이제 비일비재하다는 사실이 이 같은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성적 타락은 목회자에게 치명적인 것으로 성(性) 개방 시대에 목회자의 윤리 의식에 대한 철저한 교육과 검증 그리고 철저한 책임이 요구되고 있다.

또 목회자의 탈선은 교회 재정(財政) 관리 문제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최근 미국의 복음주의 학자가 한국에서 열린 세계 복음주의 신학회에서 발표하는 내용 중에 미국의 대형교회의 목회자들 역시 고액(高額)의 사례비를 받고 있다고 비판했다.

최근의 한 언론에 보도된 바에 의하면 한국의 어는 초대형 교회의 목회자는 연 1억 정도의 십일조를 교회에 헌금한다고 한다.(연간 수입이 10억이라는 말 – 편집자) 요즘 한국 어떤 목회자는 조용한 사임이나 퇴임을 조건으로 교회와 거액을 협상하는 실정이다. 교회 재정과 관련해 어떤 목회자는 교회 재정을 개인 용도로 사용하고 심지어 성도들의 헌금까지 부당한 방법으로 횡령(橫領)한다고 한다.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을 유혹하는 또 다른 것은 명예(名譽)에 대한 욕망이다. 무슨 협의회 회장이니 노회장이니 총회장이니 하는 명예의 타이틀에 목매는 목회자들이 많다. 그 명예의 직함보다는 섬기는 리더로서 봉사하는 종으로서 그 사역을 모든 사람의 추천과 자신의 헌신 된 마음으로 그런 일을 한다면 너무나 아름다울 것이다.

그러나 그런 명예가 걸린 일에 서로 하려고 세상 술수와 야비한 방법을 쓰고 그것도 돈을 뿌리며 상대 후보와 깨끗하지 못한 경쟁을 통해 선거에 이기려는 현상은 목회자의 윤리에 심각한 병리(病理)이다. 최근 어떤 교단에서는 제비뽑기를 통하여 총회장을 선출했다. 이것은 학자들이 오래전부터 주장해 왔던 것으로 한국교회의 장래를 희망으로 이끌 수 있는 좋은 사건이다.

또 최근 한국교회는 목회자들이 지나치게 권위(權威)를 주장한다는 비난의 여론이 높다. 목회자들 역시 개 교회에서 지나친 자신의 권위를 강조하지 말고 평신도에 대한 배려와 그들이 개 교회에서 받은바 은사를 충분하게 사용하여 주님의 교회를 바르게 성장하는데 도와주어야 한다.

교회는 목회자가 왕 같은 지위를 행사하는 곳이 아니다. 손봉호 교수는 대형교회의 목회자들이 대부분 목에 힘을 너무 준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그렇지 않은 분은 많지 않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목회자의 윤리에 대해 몇 가지의 좋은 조언을 한국교회에 남겼다. 한국복음주의 협의회와 한국기독교총연맹의 목회자 윤리 강령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특별한 부름을 받아 하나님 백성에게 그의 말씀을 가르치고 그 말씀대로 살도록 지도하는 사명 받았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자신이 먼저 하나님 말씀을 올바로 알아야 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는 데 있어 모든 성도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 스스로 지키지 않는 가르침은 위선이요, 성도들의 성화와 복음전파에 큰 방해가 된다.

2. 한국교회 문제 극복을 위한 과제

▸ 한국교회는 잘못된 극단적 이원론의 세계관을 버리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과 분리되어 내세에 가는 곳이 아니라 바로 이 땅 위에서 종말론적으로 실현되어가는 과정임을 교회에서 주장해야 한다. 세상에서 도피하거나 적당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성경적 기독교 세계관에 근거한 문화의 개혁자로서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강조해야 한다.  

▸ 잘못된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이제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은혜가 강조되며, 오직 주님의 권위, 말씀의 권위, 성령님의 권위가 시행되어야 할 것이다. 지나친 목회자의 카리스마와 맹목적 권위보다는 목회자의 참된 기능과 평신도들 은사에 따른 교회 지체로서의 참여가 요구된다. 이렇게 될 때 한국교회는 오늘날의 문제점들을 극복할 것이다.

▸ 한국교회가 지금과 같은 모습의 대형교회를 선호하고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실현에 걸림돌이 될 것이다. 우리 모두 대형교회가 참다운 교회의 모습을 되찾고 올바른 교회의 사명을 감당하도록 감시와 철저한 비판이 필요하다. 이런 사역을 통하여 약화 일로에 있는 한국교회에 새로운 성령의 역사와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질 것이다.

▸ 과거 한국교회는 개 교회주의의 긍정적인 면을 통해 교회에 대한 사랑과 기도 헌신과 봉사를 통하여 교회를 성장시켰다. 그러나 지금의 시점에서 개 교회주의는 기독교의 연합성과 통일성을 간과하여 지나치게 세속적인 모습으로 변해 버렸다. 이런 잘못된 개 교회주의 사고를 과감하게 떨쳐 버리고 모든 교회는 주님의 교회라는 사고의 실현화가 요구되고 있다. 이런 일을 통해 한국교회는 올바른 말씀의 적용과 성령이 하나로 매는 역사를 통하여 새롭고 건전하게 성숙해질 것이다.

▸ 한국교회는 샤머니즘의 요소들을 스스로 버릴 때가 되었다. 과거 경제적 어려운 시대에 기복적 물질의 풍성함에 대한 강조는 사람들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기복적인 강조는 기독교의 본질을 흐리게 한다. 한국교회는 성경대로 축복을 바르게 가르쳐야 한다. 성령 하나님에 대해, 교회에 대해, 예배에 대해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올바른 신학을 가르쳐야 한다.

▸ 또 현세 중심적 구원의 축복은 이제 수정되어야 한다. 참된 축복은 그리스도를 통해 점진적으로 완성되어 가는 것이지 현세에 결코 완전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쳐줘야 한다. 우리가 사는 이곳은 완성된 천국이 아니기 때문이다.  

▸ 이젠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은 자신을 돌아보고 올바른 목회자 윤리에 대한 의식이 먼저 새롭게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이 일관된 지적이다. 목회자는 신앙과 윤리가 조화를 이루어 타의 모범을 보이며, 비성경적 권위주의를 탈피해야 하며, 주의 종으로서 청지기 의식을 가지며, 영성뿐 아니라 전인격의 수양도 필요하다. 복음전파에 헌신한 바울을 보면서 다시 한번 윤리가 무너져 가는 이 시대 속에서 목회자 윤리의 회복을 위한 성령의 역사를 기대해 본다.

마치는 말

한국교회의 신학적 문제점들은 다양한 한국적 상황에서 형성되었다. 또 현대의 세속적 사상에 의해 교회가 변질이 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한국교회 역시 중세의 로마 가톨릭교회의 전철을 많이 닮아 가는 현상은 한국교회가 성경에서 점점 벗어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한번 한국교회는 성경의 권위를 지키며 신학과 목회가 성경으로 검증받아 참된 교회를 위한 올바른 신학의 모습을 되찾아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의 신학적 문제점은 이제 그 극복의 과제를 남겨 두고 있다.(*) 글쓴 이 / 안명준 교수(평택대 조직신학) 출처 : https://godpeople.or.kr/mopds/34033



오늘날 무엇이 문제인가?

한국교회의 신학적 문제점

안명준 교수(평택대 조직신학)

1. 서론

현 한국교회는 위기에 있다. 80 년대의 풍성한 은혜의 시대를 보내고 이제 교회의 존립의 기반이 흔들리고 있다. 큰 도시의 대형교회들을 제외하면 태만의 소형교회들은 여러 모양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런 모습은 최근 주 5일 근무제의 실시를 앞두고 그 분명한 대안을 갖지 못하면서 더욱더 흔들리고 있다. 본 논문의 목적은 현재 크게 두드러진 한국교회의 문제점들에 대하여 신학적 관점에서 찾아보는 것이다. 중요 내용의 범위는 한국교회의 신학적인 문제점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그 문제점에 대한 구체적인 해결책은 다루지 않았다.

I. 한국교회의 신학적 문제점

최근 미국의 한 기독신문사는 목회자들이 생각하는 교회의 문제점들을 조사하였다. 물론 미국이었지만 우리 나라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들이 문제점으로 삼는 주된 것들은 지나친 교회성장주의, 목회자들의 세속화와 탈선, 그리고 윤리의식의 실종으로 보았다. 한국교회의 신학적인 문제점들 가운데 먼저 극단적 이원론을 먼저 다루려고 한다.

1) 극단적 이원론

한국교회의 신학적 문제로 먼저 극단적 이원론을 들을 수 있다. 이원론(dualism)은 일반적으로 근본적인 실재를 서로 대립하는 두 개의 것으로 주장하는 이론이다. 손봉호 교수는 이원론에 대한 정의로 “일반적으로 현실 전체, 혹은 어떤 특정한 현실의 근본적인 기원을 서로 동등한 두 가지의 원칙에서 찾으려는 견해를 말한다”라고 한다. 이원론이라는 용어는 영국의 동양학자 토마스 하이드 (Thomas Hyde)가 『고대 페르시아인의 종교의 역사』(Historia religionis Veterum Persarum, 1700)라는 책에서 선의 원리와 악의 원리가 영구히 대립하는 종교체계를 이 말로 부는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형태는 플라톤의 이데아계(영지계)와 감성계(현상계)에서 잘 나타난다. 그의 작품 Timaeus은 기독교에 큰 영향을 줬다. 이 책은 우주론에 대한 요약으로, 그는 세상은 Demiurge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 하며, 혼돈된 물질 위에 형상의 패턴을 인쇄했다고 한다. 플라톤은 주장하기를 학문은 일시적인 것, 유한한 것, 항상 변하는 것, 결코 영원한 것이 아닌 것을 다루기 때문에 그것은 정확하게 진실이 될 수 없으며, 보이는 세계는 영원하고 참된 것의 하나의 복사요, 하나의 상(像)이다라고 한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플라톤의 사상이 유한과 무한의 차이를(the difference between the finite and the infinite) 말하고 있다. 이 사상은 서구의 철학사를 흘러서 교부들과 쯔빙글리, 칼빈, 그리고 키에르케고르, 그리고 칼 바르트에서 변증신학으로 꽃을 피운다. 그는 이원론 사상을 설명하기를 보이는 것들은 복사나 유사한 것이지, 그 자체가 영원한 것들이 아니다(All visible things are the copy and likeness, not the eternal things themselves, Timaeus 29c)라고 한다.

결국 플라톤은 철저한 이원론(실제와 현상, 이데아와 감각적인 대상, 이성과 지각, 영혼과 육신)에서 전자가 후자 보다 더 우월하다. 그의 사상은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철학자요 신학자였던 필로를 통하여 클레멘트, 오리겐, 어거스틴등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플라톤은 영혼의 불멸성을 주장하는데 후에 기독교 신학자들이 플라톤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특히 해석적 관점에서 볼 때 알렉산드리아학파와 교부들은 플라톤의 이원론에 근거하여 성경을 알레고리 방법으로 해석했다.

서구 철학에서는 이원론이 대표적으로 데카르트의 정신과 물체에 대한 그의 이해에서 철저하게 나타난다. 그리고 종교에서는 빛과 어두움, 선과 악에서 나타난다. 기독교의 여러 개념들이 이원론적 대립의 구도로 이해되는 부분이 있다. 예를 들면 천국과 지옥, 육과 영,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나라 등이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있다고 하여 기독교를 이원론의 종교라고 볼 수는 없다. 손봉호 교수는 기독교는 이원론을 주장하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 사상은 이원론의 유혹을 물리치는 강한 무기라고 말한다.

초기 한국교회는 경건하고 헌신된 선교사들을 통하여 건전한 신학과 경건한 신앙을 받게 되었다. 이들을 통하여 신학교가 세워지고 목회자가 배출되면서 한국교회는 일제의 핍박과 6 25 전쟁의 아픔을 이겨내었다. 80년대 한국은 고속 경제성장으로 인해 교회는 물질적 풍성함을 누리게 되었다. 격동기의 시련 과정을 통하여 한국교회는 민족적 고통과 정치적 억압의 시대에 세상과 내세라는 도식의 이원론으로 빠져들었고, 경제적 풍성함과 사회적, 윤리적 자유의 시대를 맞이해서는 교회와 세상이라는 도식의 이원론으로 빠져들고 있다. 전자의 구도에서는 기도와 기도원 그리고 치료의 은사와 신비주의의 강조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후자의 구도에서는 지상 교회 내에서 특별은총의 충만함을 강조하였고, 일반은총의 영역으로서 세상에서는 특별은혜의 적용이 미약하였다. 전자의 경우 초월적이며 종말론적 이원론이 강했지만, 후자는 점차적으로 영역적 이원론으로 변화하게 되었다. 결국 수직적 신앙의 형태에서 수평적인 신앙의 형태로 점진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예를 들면 이런 모습은 한국교회의 개인의 구원을 중시한 보수적인 신앙과 사회구원을 주장한 진보적 신앙이 구원을 어떻게 이해하는 그 방식에서 분명하게 나타났으며, 교회가 외형적 모습을 중시하며 그 숫자적으로 많은 성장을 강조하는 오늘날의 목회신학에서 잘 나타난다. 따라서 한국목회자들의 책임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런 극단적 이원론적 사고의 수정 없이는 참된 목회나 성도들의 교육이 이루어 질 수 없다. 한국교회는 극단적 이원론으로 인해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의 종말론적인 실현을 이 땅위에서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교회 안에서는 천국이지만 교회 밖에서는 비 천국인 장소로 인식하고 기독교인들이 삶의 모범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기독교를 지나치게 이원론적으로 강조한 결과 성도들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적응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린다. 즉 성도들은 자신이 출석하는 지역교회에 지나치게 비중을 둠으로써 그들이 사회에서 균형 있는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

2) 로마 카톨릭교회로 복귀하는 현상

오늘날 한국 개신교의 문제점 중에 하나가 바로 중세 로마 카톨릭교회로 복귀하는 현상이다. 모든 교회가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오직 말씀,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을 강조했던 종교개혁자들의 정신에서 조금씩 이탈하는 모습을 많은 면에서 볼 수 있다.

한국교회의 문제점을 논하기 전에 먼저 로마 카톨릭교회가 교회의 본질에서 어떻게 벗어났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키프리안은 성례전을 강조하면서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를 동일시하는 유형적 조직체로서 로마 카톨릭교회의 교회론에 기초석을 놓았다. 교회를 어머니로 가지지 않은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실 수 없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주교로부터 분리되는 자는 교회로부터 분리된다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심지어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extra ecclesiam nulla salus)라고 말하였다. 어거스틴은 도나투스와 논쟁을 통하여 교회의 본질을 강조하였다. 특히 예정론의 입장에서 교회를 택함 받은 자들의 단체 곧 하나님의 영을 받음으로 참된 사랑이라는 성품을 갖춘 성도의 무리로 생각하였다. 중세시대에 교회와 국가는 백성들을 다스리는 위한 두 권세로 보았으며, 교회를 더 상위에 두었다. 후에 그레고리 2세는 성직자들의 권위를 강화시키고 로마 교회의 교황의 권위를 더 강화시켰다. 성직자들은 평신도와 분리된 계급으로 주장하였다. 그들만이 성도들의 구원을 얻는데 있어서 주도적인 역할을 교회 안에서 실행하였다. 로마교회는 자신들의 교회가 지상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로 착각하고 조직화된 교회를 강조하였다. 결국 중세 로마카톨릭교회는 구원을 교회와 성직자들에게 큰 역할을 둠으로써 교회와 성직자들의 권위 강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은 교회관에 있어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중세시대의 교회는 근본적으로 성직자들의 독점적 영역이었다. 그들은 교회 사역의 주인으로서 실질적인 권위를 가졌고, 말씀의 권위 보다는 전통과 기구적인 제도 그리고 외형적인 면을 강조하였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독재적이며 카리스마적인 목회자들이 큰 교회를 맡고 있다. 지나친 카리스마의 남용은 많은 문제점을 야기 시킨다. 그런 지도자들의 권위는 로마 교황의 권세와 견줄 만 하다. 이런 목회자들의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권위를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의 권위는 사라지고, 말씀과 함께 역사하시는 성령 하나님은 소멸할 것이다. 한스 큉은 성령은 로마 교회와 사제들에게 제한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권위가 앞세워진 유형교회에서 성령의 생명력 있는 역사는 자리를 잡지 못할 것이다. 지금 한국교회는 말씀의 권위 즉 복음의 권위를 바르게 시행해야 할 것이다.

권위적이며 독재적인 목회자들은 교회의 내면적이며 영적인 면을 강조하기 보다는 외형적인 요소와 조직과 행정 등 제도적인 요소들을 강조한다. 외형적인 요소의 강조는 결과적으로 인간적인 행위가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만든다. 교회의 구성원들이 이런 행위와 외형적인 노력에 신경을 더 쓰게 된다. 하나님 앞에서 오직 은혜를 강조하며 감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개혁자들의 정신과는 달리 인간의 외형적 행위에 강조가 심해지는 한국교회의 모습은 중세의 로마 교회를 연상케 한다. 중세에 로마 카톨릭교회가 형식과 인간의 행위를 강조하는 것들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과 질료의 개념에서 영향을 받은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 때문이었다. 그의 신학의 중심사상인 “은총은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완성한다”(gratia non tollit naturam, sed perficit)라는 말은 로마카톨릭신학의 핵심이 되었다. 그는 어거스틴의 은총론에 근거하여 하나님이 인간의 회심의 원동력이라고 말했으나 은혜를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였다. 따라서 후에 공로 사상을 제공해 주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구원을 말씀과 은혜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다.

중세의 로마 카톨릭교회의 문제점들은 오늘날 한국교회에서도 나타난다. 바로 이런 인간의 열심과 봉사를 강조함으로써 그런 외형적인 요소들을 신앙의 열매와 기준으로 삼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세속의 문화와 물질주의에 영향을 받은 한국교회는 인위적인 교회의 행사와 외형적인 행위의 표출을 벗어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는 개혁자들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로마 카톨릭교회는 베드로의 후계권을 주장함으로써 비역사적이며 비성경적인 교황권의 강화로 인하여 개혁자들에 의해서 비판을 받았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의 대형교회에서 담임 목사가 자신의 아들에게 변칙적인 방법으로 물려주는 후계 문제는 교회론의 심각한 변질을 보여주는 실례이다. 로마 교회가 주장하는 베드로의 후계권을 신학적을 비판하였던 개혁자들의 소리가 오늘날 우리에게 들리지 않고 있다.

3) 교회의 외형적 대형화

한국교회의 문제점들 가운데 하나로 교회의 외형적 대형화를 지적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한국의 모든 대형교회들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라는 것은 아니다. 큰 교회로서 말씀을 올바르게 전파하고, 성례전과 치리를 바르게 시행하며, 그리고 평신도에 대한 철저한 제자훈련을 통하여 성경적인 교회를 이룩하는 교회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한국교회는 세속적이며 또 인위적인 방법으로 교회를 외형적으로 대형화하려는 지속적인 시도가 있어 왔다. 말씀의 굳건한 기초 없이,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형제에 대한 관심이 없이 거대한 외형적 조직체로서 대형교회의 모습은 미래 한국 개신교의 장래에 심히 우려되는 바이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의 대형교회들은 여러 모양으로 많은 문제점을 표출하고 있다. 이 모습들은 한국교회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못하며 한국사회에서도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대형교회의 출현은 먼저 목회자들이 외형적 성장에만 치중한 목회철학에서 비롯된 것이다. 목회자들이 지나치게 교회를 외형적인 성장에 목표를 둔 것이다, 특히 로버트 슐러(Robert Schuller)의 영향으로 성장한 어떤 초 대형교회는 많은 목회자들의 꿈이 되었다. 그래서 학자들 가운데서는 오늘날 한국교회에 교회성장이라는 새로운 신화가 존재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 교회 성장이론의 대가인 맥가브랜(Donald A. McGavran)의 교회 성장이론 역시 한국교회의 대형화에 이론적 영향을 주었다. 이런 영향들은 결국 교회의 본질에 대한 목회자들의 인식에 많은 변화를 주었다. 교회의 본질적이며 영적인 면보다는 외형적이며 형식적인 면에 더 많은 강조를 두게 되어 결국 초 대형교회의 탄생을 보게 되었다. 한국교회의 대형화는 결국 미국의 상업주의와 실용주의 철학이 스며들인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결국 한국 초대 교회의 순수했던 모습과 개혁자들이 주장했던 올바른 교회의 본질에서 멀어지고 있다.

이런 대형교회로 인하여 가장 심한 피해를 입은 곳은 다름 아닌 주변의 소형교회들이다. 대형교회는 주변의 소형 교회의 생존에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 대형교회는 카리스마적인 당 회장과 함께 최신의 모든 시설을 갖추며, 교회 프로그램의 풍성함, 전문 교육자를 통한 봉사, 그리고 교회 버스운영을 통하여 많은 성도들을 예배당으로 끌어 모았다. 이런 결과가 나약한 교회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 많은 초년의 교역자들에게 목회에 대한 희망을 꺾어 버리게 하였고, 기독교 공동체의 일치성에 크게 손상을 가져오게 되었다. 따라서 대형교회의 출현으로 한국 교회의 생태계에 지각 변동이 왔으며 수백 명의 목회자들과 수천 명의 장로와 권사들이 함께 모여 봉사하는 초 대형교회가 있게 되었다.

많은 대도시의 대형교회들의 경우에 수만 명의 회원을 가지며, 거액의 헌금이 모이며, 사회적 유명인사들이 교회를 매워가면서 교회의 문제점은 바로 담임 목회자의 힘있는 모습 속에서 나타나고 있다. 대형교회가 보여준 문제점은 재벌 기업을 닮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대형교회 목사들은 재벌 기업의 왕 회장처럼 행세를 한다고 한다. 겸손하고 섬기는 종의 모습은 사라지고 지배하고 명령하는 권위적 변형된 성직자의 모습은 한국교회의 미래를 어둡게 한다. 바로 루터가 이런 잘못된 로마 카톨릭교회의 성직자들의 문제점들을 바로 고쳤던 것을 다시 한번 되새길 필요가 있다. 얼마 전 한국의 어떤 대기업에서 누가 왕 회장의 후계자가 되느냐가 온 여론을 시끄럽게 뒤흔들었다. 이런 현상이 서울의 몇몇 대형교회에서 최근에 시끄럽게 기독교계와 일반 매스컴에 공개되었다. 교회의 담임목사의 아들이 대를 있는 세습문제의 부작용이 언론에 보도되었다. 이런 절차는 아들의 목회철학과 인격에 대한 철저한 검증이 없이 또 교인들의 동의가 합법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에서 위로부터 내려오는 강한 카리스마로 처리하게 된다. 어떤 학자들은 몇몇 대형교회에서 나타나는 목회자 세습이 한국교회의 물량주의와 잘못된 소유의식에서 비롯된 것이고 비판한다.

이제 기존의 대형교회 지도자들은 교회의 성장과 발전에 급급하지 말고 이 시대에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도구로서 겸허하게 욕심을 버리고 모든 교회의 권세를 주님께 맡겨야 한다. 우리 모두는 기존의 대형교회를 검증하고 감시하고 비판하지 못한 책임을 느껴야하지 않을까? 이것은 대형교회에 대한 간섭이 아니라 한국교회의 공동체를 회복하는데 있어서 절실한 과제이며 그리스도의 몸으로 구성된 유기체로서 교회에 대한 사랑이다.

성도들이 대형교회에 출석하는 것이 특별한 권리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이웃의 어려운 교회에 대한 책임과 가난한 이웃에 대한 구제와 봉사 그리고 부패한 사회 속에서 참된 성도의 삶을 실천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군사의 훈련장으로 삼아야 한다. 대형교회의 목회자가 사회에서 명예와 권위를 입는 것이 아닌 철저한 자기 반성과 그리스도의 참된 사랑을 나누며, 자신의 사사로운 생각을 버리며 주님의 참된 뜻을 실현하는 종으로서 모범을 보여야 하지 않을까?

4) 개 교회주의

한국 교회는 그 저변에 개 교회주의라는 사상으로 교회의 성장 신화를 이룩해 왔다. 그러나 지금의 시점에서 지나친 잘못된 개 교회주의를 해체하고 기독교의 보편성과 통일성을 추구해야 할 시대적 사명을 갖게 되었다.

개 교회주의란 무엇인가? 주님의 교회로서 보편성과 통일성 그리고 우주적인 참된교회를 추구하지 않고 오직 유형적 교회로서 지 교회의 외형적 성장만을 목표로 두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런 한국교회의 개 교회주의가 나타난 배경에 대하여 어떤 학자들은 네비우스 방법의 부정적인 면이 바로 개 교회주의를 낳았다고 한다. 초기 한국교회가 외부의 도움 없이 스스로 경제적으로 독립하기 위하여 사용된 이런 네비우스 방법은 개 교회의 발전에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고 본다. 이런 면은 물론 잘못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자신의 교회만의 독립과 성장이 지상명령이나 되듯이 지나치게 될 때 타 교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또 개 교회주의는 잘못된 교파의식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자신이 속한 교단의 강조와 타 교단에 대한 지나친 경쟁으로 기독교의 공동체 의식이 사라졌다. 이런 문제는 노회나 총회에서 타교단과의 교회의 통일과 협력을 이룩하지 못한 결과이다. 외국과는 달리 한국처럼 교파의 벽이 높아서 그 누구도 그것을 허물지 못할 정도이다. 이런 개 교회주의는 자신의 교회만을 성장시키려는 세속적 사고에 집착할 때 더욱더 심하다. 교인의 숫자만 많고, 건물을 크게 짓고, 헌금이 풍성한 그런 교회관을 목표로 할 때 발생한다. 이런 교회관으로 성장한 교회는 총회나 어떤 단체의 의견도 듣지 않으며 심지어 자신들의 교회가 하나의 큰 독자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고 여긴다. 이런 교회는 기존의 교회의 법을 어기고 비상식적이며 비윤리적으로 방법으로 교회를 움직이게 한다. 이런 사상에는 교회의 종말론적이며 보편적 교회관이 사라지게 된다. 개 교회주의의 심각한 원인 중에 근본적인 것은 지나친 무자격 목회자의 과잉 배출이다. 현 한국과 미주의 각 교단 신학교와 신학대학원에서 졸업하는 신학생은 정확한 통계를 알 수 없지만 상상을 초월한다. 따라서 많은 목회자들이 서로 경쟁을 심하게 해야하는 결과를 만들어 내었다. 어떤 학자들은 그 나라의 젋은 종교인들이 지나치게 많아지면 나라가 부정적인 면도 많이 나타난다고 밝히고 있다. 그런 이유는 사회적 활동과 봉사를 한창 할 나이에 비생산적이며 정적인 삶에 많은 에너지를 쓰기 때문에 국가적 손실이 많다라는 것이다. 따라서 티베트와 같이 승려가 많은 나라가 대표적이라고 말한다.

한국의 개 교회주의 문제점은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 첫 번째 개 교회주의는 기독교의 본질을 훼손시킨다. 주위의 주님의 형제 교회들을 같은 공동체로 보지 못하고 교회들을 지나치게 경쟁적으로 보며 교회의 통일성과 협력을 파괴 시킨다. 이런 결과는 이단을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게 하며, 기독교가 감당하는 사명을 효과적으로 실천하지 못하게 한다.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순교자의 피로 탄생한 기독교 교회의 권위를 추락시킨다.

두 번째 지나친 개 교회주의는 독선과 아집으로 빠져 극단적으로 흐를 때는 이단으로 되기 쉽다. 특히 개 교회주의 속에서 강한 카리스마가 교회에 미칠 때는 이미 노회와 총회 그리고 교계의 올바른 조언을 더 이상 듣지 않는다. 지난 과거를 보면 이단들이 어떻게 거대한 모습으로 형성되었는지 고찰하면 이런 개 교회주의는 심각한 문제이다.

세 번째 개 교회주의는 성도들을 교회에만 묶어 놓아서 사회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 그리고 봉사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못하게 한다. 성도의 신앙 생활의 영역이 교회 영역에 한정되어 역동적인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하지 못하고 지역적이며 현세적이며 형태적으로 흐르게 한다. 개 교회주의의 사고는 하나님에 대한 봉사가 오직 개 교회에만 국한되어 아브라함 카이퍼가 주장한 사회, 문화, 정치, 경제, 교육 등등에서 하나님의 영역 주권의 실현을 보지 못하게 한다. 자신의 대형교회를 사임하고 학교를 빌려서 예배를 드리는 김동호 목사 는 한 일간지에 이렇게 말한다. “그 동안 한국 교회는 너무 교회만을 위해 살아 왔어요, 그러다 보니 교회 일만 열심히 하고 사회에는 적응하지 못하는 이상한 종교인도 생겼지요, 건실한 사회인, 특히 다른 사람을 위한 삶을 사는 지도자를 양성하는 데 교회의 역할을 집중해야 합니다.“ 그의 말은 한국교회 성도들이 개 교회주의에 묶여 사회에서 문화적인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점을 정확하게 지적하는 말이다.

5) 한국교회의 무속적 요소들

현재 21세기의 한국사회는 무속으로 어울려진 희귀한 문화현상을 보이고 있다. 심지어 세계적인 예술인 백남준의 예술이 샤마니즘과 통한다는 논의가 일고 있다. 우리사회는 무속이 마치 오늘날 미풍양속인 것처럼 우리 고유의 전통문화로 우리의 시선을 속이고 있다. 이런 모습들은 국제 회의 및 제 의식 그리고 대중매체를 통한 전파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몇 년 전 유네스코 한국위원회가 주최한 샤마니즘 국제대회에서 학자들이 샤만 유산의 마지막 발견이 한국이 있음을 직시하면서 한국의 샤마니즘의 보존을 위한 연구가 심도 있게 발표되었다. 과거 역사 속에서 무속으로 종교화된 한민족 삶이 포스트모던 시대에 새로운 문화를 입고 서서히 부활하고 있다. 안타까운 현실은 한국의 사회 단체들의 행사에서 진혼굿이 자연스럽게 수행한다고 한다. 또 최근에는 일간지들이 미신을 조장하는 무속광고를 여과 없이 자유롭게 싣는다. 심지어 휴대전화나 무선 인터넷 서비스를 통한 무속인들의 활동은 어떤 상담자 보다도 인기가 대단하다. 서울 강남의 어떤 동네는 무속왕국으로서 심지어 신 세대까지 무속인들이 공략하는 모습이 매스컴으로 통하여 방송되었다. 무속이 판치는 한국사회에서 교회는 미신을 타파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참된 진리를 바라보게 하며, 참된 하나님을 믿도록 역할을 할 시대가 되었다.

샤마니즘(Shamanism)에서 샤만이란 말은 시베리아의 퉁그스족의 언어인 saman(주술사)에서 유래했는데 무녀 예언자 및 의사를 뜻한다. 만주족의 살만과 인도의 sramana(산스크리트어로 승려)은 동일 계열의 어원으로 알려졌다. 샤만의 역할은 병마를 축출하고 재난과 불행을 예방하는데 주목적이 있다. 결국 현재적인 실리 본위의 원시적 종교형태이다. 한국 무속의 기원이 언제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아주 오랜 고대사회 때부터 한민족의 주요한 신앙형태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학자들에 의하면 국조 단군이 무당이라는 설도 있다. 무속이 문헌상에 분명히 나타나는 것은 삼국시대로서, 김대문에 의하면 신라 2대왕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은 왕호(王號)이자 무칭(巫稱)을 의미하며, 이 외에도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단편적으로 백재, 고려의 왕들이 무당을 이용한 기록이 있다. 이와 같이 한민족의 오랜 역사를 가진 무속은 오랜 세월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한때 멸종한 듯 하다가 최근에 한국의 불황과 직업의 불안정 속에서 대다수 사람들과 특히 신세대 젊은이들 속에서 그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한국교회는 이런 무속이 난무하는 시대 속에서 이런 무속적 요소들로부터 자유로운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런 요소는 전도에서 나타난다. 전도에 있어서 기독교를 기복적인 종교로 오해시켜서는 안된다. 예수 믿고 복 받읍시다 라는 말을 흔히 듣는데 이 말은 오해의 소지가 많다. 마치 기독교가 물질적인 축복을 제공하는 샤마니즘적종교로 인식되기 쉽다. 성경이 말하는 내용은 예수를 믿으면 죄를 용서받고 구원을 받으며 하나님과 나 사이에 올바른 관계가 형성되어 이웃과 사회를 향한 하나님의 나라의 건설을 위하여 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구호의 무속적인 위험은 예수를 믿는 것이 물질적인 축복과 정비례한다라는 믿음이다. 예수를 잘 믿으며 잘 살고 내 영혼이 매사에 잘된다는 의미로 된다는 것이다. 결국 이런 신앙은 현세 중심적 기복 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종류의 축복을 강조하는 신앙은 예수를 믿기 때문에 따라오는 영혼의 투쟁, 질병을 통한 하나님의 섭리, 가난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찾아 볼 수 없다. 영적이며 종말론적인 신앙을 강조한 바울의 경우는 이런 모습들이 오히려 더 많이 나타난다.

어떤 교회들은 성령의 역사와 샤마니즘적 형태와 차이점이 힘들다. 성령 하나님은 생명의 하나님으로서 인격적이시며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시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카리스마를 강조하는 교회에서는 주로 성령은 병을 고치며 신비한 은사를 제공하는 영적인 기능을 담당하는 분으로만 이해한다. 무당의 역할이 병든 자를 고치는 주된 임무와 마찬가지로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병 고치는 일에만 제한 시킨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성령이 오셔서 이 세상에서 역사하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제한하는 것이 된다. 이런 성령 하나님의 제한은 성령의 충만함이 인격적이며 형제를 사랑하고 사회를 위한 봉사로 이어지는 것을 망각하게 한다.

교회에서 봉사하는 일을 기복적 신앙으로 강조하는 경향이 많다. 이런 배경은 목회자가 건전한 신학을 알지 못하는데서 기원한다. 만일 어떤 성도가 교회에서 물질적 드림이나 봉사의 일을 통하여 하나님이 물질적 축복이 자신을 위하여 임한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기복신앙에 가깝다. 아무 조건 없이 감사한 마음으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참된 헌신이다. 어떤 대가를 기대하면서 자연에 속한 물질을 드린다면 로마 카톨릭교회의 실수를 다시 한번 하는 것이요 제물을 통하여 현세에서 복을 얻으려는 무속적 기복신앙이다. 하나님에게 드리는 것과 봉사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를 표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건설을 위한 일이다.

6) 목회자의 윤리의 실종

한국의 많은 목회자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과 기도, 그리고 설교와 심방을 통하여 나타난 그들의 삶에 대하여 존경을 많이 받아 왔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최근 몇 년 사이에 지면에 쓰기 민망할 정도의 목회자의 윤리적 붕괴를 맞이하고 있다.

기독교는 성경을 기반으로 하는 최고의 윤리적인 종교이다. 따라서 목회자는 지도자로서 윤리의 모범자가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목회자 가운데 하나님의 선택의 도구로 자신의 사명을 망각하는 이들이 많이 있다.

최근 언론이 나타난 목회자의 윤리적 문제와 관련된 대표적인 사례를 보면 목회자의 윤리의 심각성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몇 년 전 부천에서 자신의 교회가 부흥되지 않는 다고 자신이 사는 이웃집들에 방화를 저질은 목회자가 있었으며, 일만 악의 뿌리가 되는 돈에 노예가 되어 노름에서 번 돈을 주지 않는다고 채무자의 손을 자동차 바퀴로 밟은 목회자가 있었고, 산업금융채권 위조단을 만들어서 개척교회를 세우며 좋은 일에 쓰겠다고 말한 모 신학교의 부학장이 있었으며, 몇몇 목회자들로 만으로 구성된 교회가 돈의 사용에 문제를 삼아 자기들의 공동체에 속한 한 목회자의 아내를 집단 살해하고 오랫동안 시신을 부활시키려고 소동을 일으킨 목회자들이 있었으며, 평소 지역 주민에게 존경받고 참신했던 목회자가 빛을 갚기 위해 외설적인 비디오를 제작하여 판매하려다가 적발된 일이 있었다. 이런 일들은 목회자 윤리의 전형적인 사례로 볼 수 있다.

먼저 목회자의 윤리의 심각성은 바로 성적 타락에서 심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사람들은 오늘날의 시대를 감각의 시대라고 부른다. 다른 말로 감성의 시대라고도 불리 운다. 대표적으로 감각적 성의 드러남이 현대사회에 두드러진 특징이다. 한가지 예를 들면 결혼전 성 경험은 해마다 그 숫자가 올라가고 있다. 국내 모 대학생들의 순결의식 조사에서 절반 이상이 혼전순결을 안 지켜도 문제가 없다는 것으로 나타났다. 남학생이 여학생보다도 성욕이 강하다는 것에 반대하는 의견이 더 많이 나왔다. 이런 조사에서 보듯이 이제 젊은이들 사이에 성 윤리는 무너지고 있다. 젊은이들 가운데 인생을 쾌락적으로 즐기고 보자 라는 사고로 전환 되고있다. 많은 인터넷 음란사이트들이 극성을 부리고 있다. 무작위로 수시로 많은 사람들에게 매일 공격적으로 이 메일로 전송하고 있다. 심지어 청소년들의 이 메일까지 보내고 있다. 바로 성적인 탈선의 문제는 이제 목회자들에게 예외가 될 수 없게 되었다. 기독교여성상담소에 따르면 98년 7월부터 2000년 10월까지 교회 내 성폭력 건은 51건이었으며, 이중 목회자 관련 성폭력은 46건으로 나타났다. 한국성폭력상담소 99년 통계에서도 성직자 관련 성폭력 신고 건은 모두 32건이다. 하지만 감추어지고 알려지지 않는 성폭력의 특성을 고려할 때 목회자의 이성문제는 위험수위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이성문제로 교회에서 사임을 강요당하거나, 교회를 떠나는 일이 이제 비일비재하다는 사실이 이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성적타락은 목회자들에게 치명적인 것으로 성 개방 시대에 목회자의 윤리 의식에 대한 철저한 교육과 검증 그리고 철저한 책임이 요구되고 있다.

최근 미국의 복음주의 학자가 한국에서 열린 세계 복음주의 신학회에서 발표하는 내용 중에 미국의 대형 교회의 목회자들 역시 고액의 사례비를 받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최근의 한 언론에서 보도 된 바에 의하면 한국의 어는 초대형 교회의 목회자는 연 1억 정도의 십일조를 교회에 헌금한다고 한다. 요즘 한국의 어떤 목회자들은 교회를 조용한 사임을 조건으로 또는 퇴임하는 조건으로 거액을 협상하는 실정이다. 교회 재정과 관련하여 어떤 목회자들은 재물에 대한 욕심으로 교회의 공금을 개인적인 용도로 자기가 사용하고 심지어 성도들의 헌금까지 부당한 방법으로 이용한다고 한다.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을 유혹하는 또 다른 것은 명예에 대한 시험이다. 무슨 협의회 회장이니 노회장이니 총회장이니 하는 명예의 타이틀에 목매는 목회자들이 많이 있다. 그 명예의 직함 보다는 섬기는 리더로서, 봉사하는 종으로서 그 사역을 모든 사람들의 추천과 자신의 헌신된 마음으로 그런 일을 한다면 너무나 아름다울 것이다. 그러나 그런 명예가 걸린 일에 서로 하려고 세상적인 방법을 쓰고, 그것도 돈을 뿌리며, 상대 후보와 깨끗하지 못한 경쟁을 통하여 선거에 이기려는 현상은 목회자의 윤리에 심각한 병리가 있는 것이다. 최근 어떤 교단에서는 제비뽑기를 통하여 총회장을 선출하였다. 이것은 학자들이 오래 전에 주장해 왔던 것으로 한국교회의 장래를 희망적으로 이끌 수 있는 좋은 사건이다.

최근 한국 교회는 목회자들이 지나치게 권위를 주장하고 있다고 한다. 목회자들 역시 개 교회에서 지나친 자신의 카리스마를 강조하지 말고 평신도에 대한 배려와 그들이 개 교회에서 받은바 은사를 충분하게 사용하여 주님의 교회를 바르게 성장하는데 도와주어야 한다. 교회는 목회자의 왕적인 기능을 감당하는 기관이 아니다. 손봉호 교수는 대형교회의 목회자들이 대부분 목에 힘을 너무 준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그렇지 않은 분은 많지 않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목회자의 윤리에 대하여 몇 가지의 좋은 조언을 한국교회에 남겼다. 한국복음주의 협의회와 한국기독교총연맹에 의하여 공식으로 결정된 목회자 윤리 강령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부름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에게 그의 말씀을 가르치고 그 말씀대로 살도록 지도하는 사명을 받았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자신이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알아야 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는데 있어서 모든 성도들에게 모범이 되어야 한다. 스스로 지키지 않는 가르침은 위선이요, 성도들의 성화와 복음전파에 큰 방해가 된다.”

3. 한국교회의 신학적 문제점의 극복을 위한 과제

한국교회는 잘못된 극단적 이원론의 세계관을 버리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 사상을 강조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위에서 분리되어 내세에 가는 곳이 아니라 바로 이 땅위에서 종말론적으로 실현되어가는 과정임을 교회에서 주장해야 한다. 이 세상을 도피하거나 적당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성경적 기독교 세계관에 근거한 문화의 변혁자로서 사는 크리스천의 삶을 말해야 한다.

잘못된 중세 로마 카톨릭교회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 이제 한국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가 강조되며, 오직 주님의 권위, 말씀의 권위, 성령님의 권위가 시행되어야 할 것이다. 지나친 목회자의 카리스마와 맹목적 권위를 강조하기 보다는 목회자의 참된 기능과 평신도들의 은사에 맞는 교회의 참여가 요구된다. 이렇게 될 때 한국교회는 오늘날의 문제점들을 극복할 것이다.

한국교회가 지금과 같은 모습의 대형교회를 선호하고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의 실현에 걸림돌이 될 것이다. 우리 모두 대형교회가 참다운 교회의 모습을 되찾고 올바른 교회의 사명을 감당하도록 감시와 철저한 비판이 필요하다. 이런 사역을 통하여 약화되어 가는 한국교회에 새로운 성령의 역사와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질 것이다.

과거 한국 교회는 개 교회주의의 긍정적인 면을 통하여 교회에 대한 사랑과 기도 헌신과 봉사를 통하여 교회를 성장시켰다. 그러나 지금의 시점에서 개 교회주의는 기독교의 연합성과 통일성을 간과하여 지나치게 세속적인 모습으로 변해 버렸다. 이런 잘못된 개 교회주의 사고를 과감하게 떨쳐 버리고 모든 교회는 주님의 교회라는 사고의 실현화가 요구되고 있다. 이런 일을 통하여 한국 교회는 올바른 말씀의 적용과 성령이 하나로 매는 역사를 통하여 새롭고 건전하게 성숙해 질 것이다.

한국교회는 샤마니즘의 요소들을 스스로 버릴 때가 되었다. 과거 경제적 어려운 시대에 기복적 물질의 풍성함에 대한 강조는 사람들이 받아 들였다. 그러나 기복적인 강조는 기독교의 본질을 흐리게 한다. 한국교회는 성경적인 축복을 바르게 가르켜야 한다. 성령 하나님에 대하여, 교회에 대하여, 예배에 대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올바른 신학을 가르켜야 한다. 또 현세 중심적 구원의 축복은 이제 수정되어야 한다. 참된 축복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성되어지는 것이지 현세에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 다는 것을 알려줘야 한다. 우리가 사는 이곳은 완성된 천국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젠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은 자신을 돌아보고 올바른 목회자 윤리에 대한 의식이 먼저 새롭게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지적이다. 목회자는 신앙과 윤리가 조화를 이루어 타의 모범을 보이며, 지나치게 비 성경적인 권위주의를 탈피해야 하며, 주의 종으로서 청지기 의식을 가지며, 영성 뿐만 아니라 전인격의 수양도 필요하다. 복음 전파에 헌신한 바울을 바라보면서 다시 한번 윤리가 무너져 가는 이 시대 속에서 목회자의 윤리의 회복을 위한 성령의 역사를 기대해 본다.

4. 결론

한국교회의 여러 신학적 문제점은 다양한 한국적 상황에서 형성되었다. 또 현대의 세속적 사상에 의해서 교회가 변질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한국교회 역시 중세의 로마 카톨릭교회의 전철을 많이 닮아 가는 현상은 한국 교회가 성경에서 점점 벗어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한번 한국교회는 성경의 권위가 실시되며 신학과 목회가 성경으로 검증 받아 참된 교회를 위한 올바른 신학의 모습을 되찾아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의 신학적 문제점은 이제 그 극복의 과제를 남겨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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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교회의 외형적 대형화

또 다른 한국교회의 문제점은 교회의 외형적(外形的) 대형화(大型化)를 지적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한국의 모든 대형교회가 다 잘못되었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아니다. 큰 교회로서 말씀을 올바르게 전파하고 성례전(聖禮典)과 올바른 치리(治理)를 시행하며 그리고 평신도에 대한 철저한 제자훈련을 통해 성경적인 교회를 이룩하는 교회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한국교회는 세속적이며 또 인위적인 방법으로 교회를 외형적으로 대형화하려는 노력이 지속적(持續的)으로 시도되어왔다. 그러나 말씀의 굳건한 기초 없이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형제에 관심 없이 거대한 외형적 조직체로서 대형교회의 모습은 미래 한국 개신교의 장래에 심히 우려되는 바이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의 대형교회들은 여러 모양으로 많은 문제점을 표출하고 있다. 이 모습들은 사회에서도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런 대형교회의 출현은 먼저 목회자들이 외형적 성장에만 치중한 목회 철학에서 비롯된 것이다. 목회자들이 지나치게 교회를 외형적인 성장에 목표를 둔 것이다. 특히 로버트 슐러(Robert Harold Schuller, 1926-2015)의 영향으로 성장한 어떤 초대형 교회는 많은 목회자의 꿈이 되었다. 그래서 학자들 가운데 오늘날 한국교회에 교회 성장이라는 새로운 신화가 존재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 교회 성장론(Church growth)의 대가 맥가브랜(Donald Anderson McGavran, 1897-1990)의 ‘교회 성장이론’ 역시 한국교회의 대형화에 이론적 영향을 주었다. 이런 영향들은 결국 교회의 본질에 대한 목회자들의 인식에 많은 변화를 주었다. 즉 교회의 본질적이며 영적인 면보다는 외형적이며 형식적인 면에 더 많은 강조를 두게 되어 결국 초대형교회의 탄생을 보게 되었다. 또 한국교회의 대형화는 결국 미국의 상업주의와 실용주의 철학이 스며든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결국 초대 한국교회의 순수했던 모습과 개혁자들이 주장했던 올바른 교회의 본질에서 멀어지고 있다.(각 교파의 세계 최대 교회가 대부분 한국에 몰려 있다.) 

이런 대형교회로 인한 가장 큰 피해자는 주변의 소형교회들이다. 대형교회는 주변의 소형교회 존폐(存廢)에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 대형교회는 카리스마적인 당회장과 함께 최신의 모든 시설을 갖추며 교회 프로그램의 풍성함과 전문 교육자를 통한 봉사 그리고 교회 버스운영을 통하여 많은 성도를 예배당으로 끌어모았다.  

이런 결과가 나약한 작은 교회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 많은 초년의 교역자들에게 목회에 대한 희망을 꺾어 버렸고 기독교 공동체의 일치성에 크게 손상을 가져왔다. 따라서 대형교회의 출현으로 한국교회 생태계에 지각 변동을 일으켰으며 수백 명의 목회자와 수천 명의 장로와 권사들이 함께 모여 봉사하는 초대형교회가 있게 되었다.






한국교회 성도들의 핵심적 문제점은?

위로받는 믿음에서 씨름하는 신앙으로

이병주 변호사 | 입력 : 2014/09/13 [05:54]



이 글은 이병주 변호사(기독법률가회 실행위원, 국제국장)가 인문학 서평 사이트인 아포리아 홈페이지(바로가기)에 2014년 8월 25일 올린 칼럼입니다. 주제는 매우 무겁습니다. 길을 잃은 양 같은 한국교회 평신도의 현주소를 그리고 있습니다. 

내용도 그렇습니다. 평신도의 위로받는 신앙의 ‘과잉’과 ‘왜곡’을 질책합니다. 그러면서 씨름하는 신앙, 세속과 싸우는 믿음으로 나가야 할 당위성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주제는 무거운데 글이 매우 따스합니다. 사회와 교회의 급진적 변화를 바라는 조급함에 대해서는 시간의 무게감을, 교회안에 안주하는 개인적 차원에 머무르는 신앙에 대해서는 ‘자기부인’과 ‘자기 십자가’의 참 가치를 역설하며 아주 천천히 독자를 설득해 갑니다.

참고로, 이 변호사가 주장하는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는 일부에서 말하는 ‘자아의 죽음’이나 ‘자기부인, 자아 파쇄’ 와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이 변호사의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는 교회나 목회자를 위한 종교적 희생, 선교사급의  ‘헌신’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세속화된 평신도의 실체와 교회안에 안주하며 머무르려는 죄악된 자기에 대한 부인을 하고, 사회적 차원으로 씨름하는 믿음의 십자가를 지라는 견지에서의 ‘자기 부인’입니다. A4 용지 23페이지에 이르는 원 글을 3차례로 나눠 연재합니다. 이 글의 저작권은 아포리아측에 있습니다. [편집자주]
 
   

 
 


[이병주 칼럼]: 길을 잃은 양들, 한국교회 평신도의 현주소
 
1. 평신도의 믿음 - 위로받는 믿음 vs. 씨름하는 믿음
우리 평신도들의 믿음에는 ‘위로받는 믿음’과 ‘씨름하는 믿음’이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위로받는 믿음’에서 시작해서 ‘씨름하는 믿음’으로 나아갑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개신교) 평신도들 신앙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점은 ‘위로받는 믿음’만을 구하고 ‘씨름하는 믿음’을 찾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점 또한 ‘위로받는 믿음’만을 가르치고 ‘씨름하는 믿음’을 가르치지 않거나 가르칠 능력이 없다는 점으로 느껴집니다.
 
‘위로받는 믿음’은 거친 세상의 풍파 속에 갇혀서 절망하는 인간을 보며 슬퍼하고 손을 내밀어 구원해 주는 예수님의 사랑을 표현합니다. ‘씨름하는 믿음’은 그렇게 구원된 사람을 십자가(十字架)와 자기부인(自己否認)의 길로 이끌어, 여전히 풍파가 이는 세상의 압도적인 힘과 가치관에 휩쓸려 살아가지 않도록 믿는 사람의 팔과 다리와 머리의 힘줄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 주는 예수님의 ‘더 큰’ 사랑을 표현합니다. 그러니 위로받는 믿음은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 평안히 누워 쉼을 누리는 기독교인의 모습을, 씨름하는 믿음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 일어서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자기의 인생을 씨름하며 살아가는 기독교인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만일 우리들의 신앙이 계속 위로받는 신앙에서 시작하여 위로받는 신앙만을 반복하여 추구하는 상태로 머물러 있게 된다면, 한국 교회는 (완전히 망하지는 않겠지만) 생기와 자부심과 존경을 잃고 제 때에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처럼 시들어갈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겨우 백수십년의 역사밖에 갖지 않은 젊고 팔팔한 한국 기독교가 이대로 시들어 버린다면 우리도 억울하고 하나님도 억울합니다. 수많은 문제점과 스캔들과 답답함과 분열과 지리멸렬과 압도적인 이기주의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에는 아직도 이제 막 구원받은 사람들의 감격과 기쁨의 에너지가 강력하게 살아있습니다. 이 강력한 믿음의 에너지가 안타깝게도 지금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을 타고 ‘세상이 주는 평안’을 추구하는』 ‘위로만 받으려는 믿음’의 울타리, ‘위로받는 믿음’의 감옥(監獄)에 갇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교회의 에너지가 강력하니 그것이 왜곡되게 발현되는 이기적 양상도 강력하고 폭발적입니다. 잘못된 방향으로 묶이고 갇혀 있는 신앙 에너지의 해방(解放)이 필요합니다. 우리들의 신앙이 ‘위로만 받는 신앙’에서 ‘씨름도 하는 신앙’으로 방향을 전환할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 믿음과 교회의 자랑과 자부심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는, 목회자들뿐만 아니라, 그동안 가만히 있었던 평신도들 입장과 관점에서의 적극적인 고민과 토론과 연구와 행동이 필요합니다. 그 이유는 첫째 한국교회의 평신도들이 계속하여 위로만 받는 신앙을 추구한다면 목회자 등 교회 지도자들이 그 어떤 노력을 한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고, 둘째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한국교회의 평신도들이 세상 속에서 ‘씨름하는 신앙’의 구체적인 모습과 내용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목회자와 신학자들이 그것을 대신 만들어내기가 어렵기 때문이며, 셋째 목회자들만이 주도하고 평신도들은 수동적으로 따라가기만 하는 사제주의적 신앙생활의 행태는 확실히 성경의 가르침에도 맞지 않고 개신교(프로테스탄트)의 출발 이념에도 맞지 않으며 현실세계의 신앙적 조건에도 맞지 않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2. 평신도 신앙의 현실 분석 - ‘위로받는 믿음’의 과잉(過剩)과 ‘씨름하는 믿음’의 결핍(缺乏)
 
2.1. 평신도 신앙의 두 국면(Phase) – ‘만나는 신앙’과 ‘살아가는 신앙’
⓵ 평신도 믿음 생활의 첫 번째 국면 (1st Phase) - 고독한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는 신앙
세상은 거칠고 악하고, 인간은 연약하고 또 이기적입니다. 그래서 인생은 고독하고 힘듭니다. 무한 경쟁의 세상은 사람들을 이리저리 몰아대면서, 삶을 고통스럽게 만듭니다. 삶의 고통과 고독은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삶의 고통을 좀 더 솔직하게 직면하고, 부유한 사람은 삶의 고통을 세상의 자랑으로 덮어버리려고 하지만 이것도 만족이 불가능한 쉬지 않는 갈증에 지나지 않습니다. 연약하고 불완전한 인간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습니다. 사람들은 술집에서 노래방에서 끊임없이 인생의 고독과 고통에서 자기를 구원해줄 ‘사랑’을 애타게 노래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에게도 다른 사람을 구원해 줄만한 실력이 없습니다. 모두가 다른 사람의 완전한 사랑을 받고 싶어 하지만, 누구도 다른 사람을 완전히 사랑해 줄 능력이 없습니다. 결국 모든 사랑 노래는 오히려 「오지 않는 사랑」의 안타까움과 「떠나버린 사랑」의 슬픔만을 애절하게 노래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사람에게 위로받기를 원하지만, 온전한 위로를 받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물론 우리는 서로 해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돕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수시로 우리를 더 힘들게 합니다. 거칠고 차가운 눈초리가 난무하는 세상에서 뜻이 통하는 친구들과 나누는 다정한 시간과 부모 자식 간의 살가운 보살핌, 그리고 부부간 남녀 간의 친밀한 동행관계가 없다면 사람은 아예 숨을 쉬고 살아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우정과 애착관계는 영원하거나 온전하지 않고, 마치 양날의 칼처럼 우리를 심하게 할퀴고 넘어지게 하기도 합니다. 가장 강력한 사랑의 원천이자 인생의 존립 자체를 가능하게 만드는 가족관계는 동시에 인생의 가장 깊고 오래가는 상처들을 만들어내는 갈등과 고통의 생산 공장(工場)이기도 합니다. 같은 뜻으로 통하여 서로를 기뻐하던 동료와 동지들도 시간이 흐르면 점점 뜻이 갈라져 부딪치고 싸우는 비난과 논쟁의 대상으로 변합니다. 내가 극도로 힘들어지면 다정한 친구들도 나를 도와줄 능력이 없고, 친구가 극심하게 힘들 때 우리는 벗에게 손을 내어줄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는 우리가 넘어지고 부러지고 무너질 때, 우리를 도와주고 우리를 일으켜 세워줄 힘이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바로 이 때에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만나고 성령을 경험합니다. 고독한 인생의 실존(實存)이 하나님을 만나서 ‘위로받은 믿음’은 ‘(세상에서) 죽었던 내가 (믿음으로) 살아나는’ 감격과 기쁨을 줍니다. 더 이상 사람에게서 불완전한 위로를 받으려고 애쓰고 기댈 필요가 없어집니다. 하나님에게로 나와서 강력한 평안과 위로를 받을 수 있다는 자신감과 해방감을 줍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서 위로받는 믿음은 우리 믿음의 출발점이 되고, 우리가 교회로 모이는 이유가 됩니다.

하나님을 만나서 위로받는 믿음의 분량은 첫 만남의 일회적 감격과 기쁨만으로 충분하지가 않습니다. 고독하게 살아가던 인생의 기간과 무게만큼 상당기간 반복적인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야만 우리 인생의 깊고 누적된 고독과 상처가 치유를 받고 건강한 영혼을 회복할 수 있게 됩니다. 처음 믿음을 가진 후 초심자 시절 몇 년 동안 우리가 전혀 지루해 하지 않고 (미친 듯이) 열심히 예배와 기도와 성경 말씀에 매달리는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떡을 먹는 것보다 말씀을 먹는 것이 더 달콤합니다. 이 기간 중 우리는 세상에 있어도 우리의 마음은 세상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감격만이 중요하고 세상이야 어찌되었든지 별 상관이 없다는 생각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나와 세상은 간 곳이 없고 구속(救贖)한 주(主)만 보이는’ 우리 신앙의 첫 번째 국면(1st phase)입니다(찬송가 288장).
 
⓶ 평신도 믿음 생활의 두 번째 국면 (2nd Phase) - 믿는 자로 세상에서 다시 살아가는 신앙
이제 하나님을 알고 믿음으로 많은 위로를 받은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어도 세상에서 먹고는 살아야 합니다. 혼자서도 먹고 살아야 하고 가족이 생기면 먹고 사는 부담이 더 커집니다. 원하는 학교에도 진학해야 하고 취직도 해야 하고 장사도 해야 하고 주변 사람들과 경쟁도 해야 하고 직장에서 승진도 해야 합니다. 거룩한 일에 바치는 시간보다 세상에서 먹고사는 일에 바치고 투자하는 시간이 훨씬 많습니다. 그러지 않고는 나와 내 가족의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평신도의 인생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믿음의 일에 집중하려고 세상의 직업을 버리고 목회자의 길을 걷는 분들의 인생이 여기에서 갈라집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면 목회자들도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교단이 사실상 무력화된 한국의 개신교회에서는 취직을 하든지 개척을 하든지 자기 개인의 책임으로 됩니다. 이 지점에서 갈라졌던 목회자의 삶과 평신도의 삶은 의도와는 달리 다시 만나게 됩니다. 분명히 다른 점도 있고 분명히 비슷한 점도 있습니다. 목회자의 삶에서도 거룩한 것에 세속적인 것이 달라붙고 평신도의 삶에서도 세속적인 것에 거룩한 것이 연결됩니다. 그 나타나는 모습의 선후는 다릅니다. 그 본질이 다른지 비슷한지는 차분히 연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세상에 나갑니다. 변한 사람이 되어 변하지 않은 인생을 살아갑니다. 이제는 ‘세상도 돌아오고 나도 돌아온 상태에서 구속한 주님을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평신도 신앙의 두 번째 국면(2nd phase)입니다. 이제 믿음의 황홀경은 지나갔습니다. 온탕과 냉탕을 오고갑니다. 신앙의 상태가 좋아졌다 나빠졌다 합니다. 세상과 교회 사이에서 끼어 삽니다. 말씀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떡도 있어야 삽니다.
 
믿는 사람이 되고 나서 세상의 일을 하면, 안 믿을 때보다는 덜 고독하고 더 평안하고 안정감이 생기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인생의 고통과 고독과 풍파는 다시금 믿는 사람에게도 어김없이 닥칩니다. 우리를 괴롭히고 몰아대는 세상은 믿기 전이나 믿은 후에나 변함이 없고, 연약하고 이기적인 우리의 기질도 믿기 전이나 믿은 후에나 큰 차이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은 후에도 세상과 부딪히고 아내와 싸움질을 하고 자녀들을 몰아대고 친구와 직장의 동료와 세상의 정적(政敵-정치적 반대파)들을 미워하고 감정적으로 대립합니다.

믿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덜 힘들기도 하지만, 믿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더 한심하기도 합니다. 믿기 전의 인생은 고통스러웠지요. 믿은 다음의 인생도 비슷하게 고통스럽습니다. 믿기 전의 인생은 고독했습니다. 믿은 후의 인생도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을 빼놓고는) 거의 고독합니다. 믿기 전의 세상은 우리에게 가혹했습니다. 믿은 후의 세상도 우리에게 여전히 냉정합니다. 믿기 전의 나는 불안하고 위험했습니다. 믿은 후의 나도 불안하고 위태롭습니다. 뭔가 ‘바뀐’ 것은 분명한데 세상의 풍파와 인생의 힘겨움은 별로 변하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믿기 전에도 사는 것은 매우 힘들지만 믿은 후에도 사는 것은 아주 힘이 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만나 ‘위로받는 믿음’이 죽을 때까지 지속적으로 필요합니다. 이것이 없이는 우리가 살아가기가 어렵습니다. 믿기 전에도 눈물을 흘렸고, 믿을 때에도 눈물을 흘렸지만 믿은 뒤에도, 아주 오래 믿은 후에도 우리는 눈물을 흘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믿는 이들에게는 바로 이 ‘위로받는 믿음’의 간증이 차곡차곡 쌓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칠고 악한 세상 속에 사는 연약하고 불완전한 인간에게 ‘위로받는 믿음’은 믿음의 시작이자 필수적인 실존적 믿음의 원천으로 됩니다. 지금 아무리 한국교회가 욕을 먹어도, 지난 백 수십 년간 땀과 기도와 헌신으로 쌓아올린 한국교회(개신교)에는, ‘망국(亡國)과 식민지와 분단과 전쟁과 독재와 가난’이라는 인간사(人間事)의 모든 괴로움을 한데 모아서 극단적으로 고통스러웠던 우리 현대사(現代史)와 동행하면서, 그 속에서 무너지고 넘어지고 쓰러지고 절망하고 지치고 몸부림치며 울부짖는 수많은 사람들의 손을 잡아주고 눈물을 닦아주고 하나님을 아는 기쁨으로 인생을 감당하게 해 준 ‘위로받는 믿음’의 위력과 공덕(功德)이 있습니다. ‘위로받는 믿음’의 일탈이나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신앙의 출발점이자 기반(base)인 ‘위로받는 믿음’ 그 자체를 경시하거나 부정하게 되면, 우리의 믿음은 너무 건조(dry)해 지고 물이 빠진 시들은 가지처럼 에너지를 잃고 비틀거릴 가능성이 있습니다. 자, 이 점을 분명히 해두고! 이제 ‘위로받는 믿음’의 지나친 반복과 재생으로 인한 왜곡과 부작용에 대한 검토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2.2. ‘위로받는 믿음’의 과잉으로 인한 왜곡
 
⓵ – ‘세상의 위로’를 구하는 평신도 신앙
모든 좋은 것에는 악이 달라붙습니다. 의도적인 잘못이 있든지 의도적인 잘못이 없든지, 우리를 살리는 좋은 것은 잠시 긴장을 푸는 사이에 나와 우리를 죽이는 악을 만들어냅니다. 항생제는 바이러스로부터 우리 몸을 지켜주지만, 너무 많은 항생제는 우리 몸의 면역체계를 무너뜨립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위로받는 믿음’은 그 속성상 ‘하나님’과 ‘나’와의 만남이라는 개인적(個人的) 성격을 강하게 가집니다. 세상에서 무너진 사람이 믿음으로 다시 살아나 하나님의 품에 안긴 아이처럼 위로를 받는 우리 믿음의 첫 번째 국면(1st phase)에서는 당연히 ‘위로받는 믿음’의 개인적 요소가 절대적입니다. 마땅히 믿음의 젖을 먹고 믿음의 걸음마를 배우고 서서히 믿음의 이유식(離乳食)을 먹고 세상으로 나갈 준비를 하는 기간이 필요합니다. 어린 아기에게 세상에 나가서 돈을 벌어오라거나 세상과 삶의 부조리와 싸우라는 것은 비현실적이고, 어린 아이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얘기해도 도대체 무슨 얘기인지 알아먹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제 믿음을 가지고 다시 세상으로 나아가 세상 속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는 평신도 믿음의 두 번째 국면(2nd phase)이 문제로 됩니다. 믿는 자의 인생도 힘겨우므로 믿음을 가진 후에도 ‘위로받는 신앙’이 계속 필요하다는 점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습니다. 문제(問題)의 핵심은 이 단계에서도 우리들 평신도 신앙의 대부분은 ‘위로받는 믿음’만을 끊임없이 반복하여 구하는 무한재생(repeat)의 양상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유아기(幼兒期)를 지나면 믿음을 가지고 세상에 나가서 세상의 물결에 맞서 씨름하고 싸워야 하는데, 믿음의 청장년기(靑壯年期), 믿음의 성년기(成年期)에도 싸우지는 않고 자꾸 세상에 얻어맞고 돌아와 하나님께 위로해 달라고만 합니다. 여기에서 아름답고 좋은 ‘위로받는 믿음’의 남용과 오용으로 인한 문제점과 신앙의 왜곡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위로받는 믿음’만을 계속 추구하면, 우리 평신도들이 신앙으로 구하는 위로의 내용이 갈수록 그 질(質)이 떨어지고 세상적인 가치로 가득 채워지게 됩니다. 사람이 처음 하나님을 만날 때 평신도 믿음 생활의 첫 번째 국면에서 얻는 위로(慰勞)는 『하나님의 존재』 그 자체입니다. 이 위로에는 한 사람 인생의 고통과 고독 그 전부의 중량이 담겨 있습니다. 마치 ‘존재(存在)’의 혁명과도 같습니다. 이 위로는 고상하고 거룩하고 아름답고 결정적입니다. 이 구원의 위로에는 인생의 세세한 내용과 요구와 이익이 별로 끼어들지 않습니다. 이것이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아름다운 첫사랑입니다.
 
이제 평신도 믿음 생활의 두 번째 국면에서는, 이 위로의 내용에 조금 변화가 생깁니다. 믿음으로 살아난 사람이 다시 세상에 나가서 남들과 똑같이 일하고 먹고 가르치고 다투면서 살아갑니다. 믿음은 결정적인 약이지만 만병통치약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취직과 학업과 직장과 사업과 사회생활과 건강상으로 여전히 힘들고 답답하고 어려운 일들을 경험합니다. 아버지(하나님)가 없었을 때에는 혼자서 울고 몸부림쳤었는데 이제 믿을만한 아버지가 있으니 교회로 와서 기도를 하면서 이 세상적 어려움들에 대한 하나님의 위로를 구합니다. 믿음을 시작한 처음에는 세상의 것들을 허무하게 여기고 하나님만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서서히 세상의 것들을 다시 찾아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에게 구합니다. ‘취직과 성적을, 재물과 안정을, 직장과 사업의 성공’을. 어떤 사람은 노골적으로, 그리고 어떤 사람은 조심하면서, 그리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고 하면서...
 
솔직하게 말해서, 우리가 아무리 어마어마한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우리 삶의 현실적 실존적 과제들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와 기도하고 구하는 것 자체를 비난하기는 어렵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고상하고 우아하고 (다소 가식적인) 기도만 하고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정색을 하고 따져 보아야 할 문제는, 과연 ‘우리의 현실적 과제와 세상적 소망에 대한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셔야 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기도를 하는 것은 우리의 자유(自由)이지요. 기도를 들어주시고 말고는 하나님의 자유(自由)입니다.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필요가 없는 것에, 우리가 매달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억지로 끌어오려는 것은 어리석고 잘못되고 참람한 것입니다. 이 질문은 우리들이 교회와 신앙모임과 개인기도의 시간에 수없이 반복해서 물어보는 것이지만, 사실 그 대답은 성경에 거의 100% 분명(分明)하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의 모든 영광을 버리고 십자가에서 비참한 사형수로 돌아가시게 한 하나님께서, 그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리의 세상적 성공과 자랑과 명예에 대한 요구를 무조건 들어주실 필요나 의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세상에서 분투하고 실패하고 갈등하고 싸우고 좌절하고 다치고 아프다가 병들어 죽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이 직면할 현실(現實)입니다. 하나님의 힘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리가 이 일들을 회피할 수 있다는 생각은?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이것은 조금 어렵고 빡빡한 얘기지만, 원칙적으로 ‘믿음은 믿음이고 취직은 취직’이며 ‘믿음은 믿음이고 성적은 성적’이며, ‘믿음은 믿음이고 생업은 생업’입니다. 하나님의 전지전능이 ‘나’를 위해서 동원되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믿는 사람이 눈물로 기도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특정한 일자리에 믿는 사람을 취직시켜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 많이 하고 신앙 좋은 사람이라고 해서 좋은 성적을 받고 세상과 직장에서 잘 풀리게 만드셔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착하고 봉사하는 기독교 신자라고 해서 그가 대통령과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기도록 밀어주셔야 하는 것도 물론 아닙니다.
 
세상의 사적 경제생활과 공적 사회정치생활에는 각각 그 자체의 고유한 작동원리와 운동법칙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에 따라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고 짧게 기도를 하고는 곧바로 세상에 나가 세상의 법칙에 따라 내 팔과 내 다리와 내 머리를 쓰면서 착실하게 일을 해야 합니다. 일의 산출물이 많거나 성과가 좋으면 감사하고 일의 산출물이 적거나 성과가 좋지 않으면 감당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열심히 일하고, 사회의 구조적 잘못은 집단적으로 다투고 고쳐야 합니다. ‘결과가 좋은 것-세상의 자랑이 많아지는 것’은 원칙적으로 하나님의 축복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이 조심하라고 경계하신 세상 사랑(‘the boasting of what you have and what you do’-요한일서 2:16-17)으로의 유혹입니다.

‘결과가 안 좋은 것-세상의 자랑이 적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나 무관심의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의 정신(spirit)에 더 가까이 다가가게 하는 가난한 사람의 복(누가복음 6:20)입니다. 서점의 기독교 코너에 넘쳐나는 축복과 성공의 간증 스토리들은 대부분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의 뜻을 구하는’ 스토리가 아니라 ‘먼저 자기 나라와 자기의 뜻을 구하는’ 성공담들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일을 위하여 나를 세상 속에 높이 들어 올리셨다.’는 주장은 대부분 거짓말이거나 자기기만입니다. 미안하지만, 쓰는 사람도 거짓이고 파는 사람도 거짓이고 사는 사람도 거짓입니다. 그냥 ‘내가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갔다’ ‘내가 열심히 일을 해서 돈을 많이 벌었다’라고 얘기하는 것이 솔직하고 정확합니다. 내가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해서 좋은 대학에 갔고 열심히 교회 봉사해서 사업에 성공했다는 것은 기독교신앙의 간증이 아니라 성공신앙의 간증입니다.
 
기독교인이건 기독교인이 아니건, 주어진 사회와 인생의 조건에서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애를 쓰는 것, 우리가 좋은 학교에 가고 좋은 직장을 얻고 경제적으로 성공을 이루고 사회적 명예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인지, 그것을 금지하고 억제하는 것이 가능한지, 또 그것을 억제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사람은 그것을 원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경계하신다는 것’, 이 문제에 대한 ‘사람의 이해관계와 하나님의 이해관계가 다르다’는 것까지는 알 것 같습니다.

‘인간의 자유’와 ‘하나님의 자유’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세상적 성공과 안정을 바라고 기도하는 것은 어느 정도 우리의 자유이고, 그런 기도들을 무시하거나 무관심하거나 배척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자유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자유롭게 해방시켜 주셨던」 ‘위로받는 믿음’의 시작이, 그 과잉된 재생반복을 통하여 거꾸로 「우리가 하나님을 세상적 욕망에 비끄러매어 끌어당기려는」 ‘위로받는 배신(背信)’으로 끝날 수 있습니다. 저를 비롯해서 세상의 모든 진지하고 착한 기독교 평신도들은 이 점을 심각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우리가 잘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만만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2.3. ‘위로받는 믿음’의 과잉으로 인한 왜곡
 
⓶ – ‘세상과 화합(和合)하는 평신도 신앙’
‘위로받는 믿음’의 과잉(過剩)은 우리의 신앙을 ‘하나님을 만나는 거룩한 위로’에서 ‘하나님께 구하는 세상적 위로’로 변질하게 만들었습니다. 평신도 믿음의 첫 번째 국면(1st phase)의 위로는 ‘세상의 헛됨을 알고 하나님을 구하는 것’이었는데, 두 번째 국면(2nd phase)의 위로는 ‘세상의 헛된 것을 하나님께 구하는 것’으로 역전되어 버렸습니다.
 
이것이 자연스럽고 논리필연적으로 세상과 완벽하게 일치하고 화합하는 기독교 신앙, 세상에 대해서 아무런 긴장과 갈등도 느끼지 않는 평신도의 신앙을 만들어냅니다.
 
첫 번째 위로에서는 하나님과 세상이 혁명적으로 대립하였는데, 두 번째 위로에서는 하나님과 세상이 사이좋은 동맹관계로 변했습니다. 마치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것 같은, 아니 정확하게 말한다면 포도주가 물로 변하는 것 같은 놀라운 기적입니다. (이것은 신학적인 차원이 아니라, 평신도의 체감적 신앙 차원에서의 진술입니다.) 이 기적의 결과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우리가 세상을 따라 구하는 모든 것들’ 사이에 존재했던 긴장은 거의 다 해소되어 버립니다. 한량이 없으신 하나님의 ‘사랑’이 이것을 가능하게 한다는 오해가 일어나고, 여기에 ‘축복’이라는 단어가 주문(呪文)처럼 사용됩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자 우리가 세상에서 구하는 모든 것, 즉 사적·경제적 생활영역에서의 성공과 공적·정치적 생활영역에서의 성공, 좋은 점수와 진학과 좋은 직장에의 취직과 경제적 성공과 사회적 성공과 명예와 권력은 모두 갈등 없이 우리의 기도 제목이 되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축복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믿는 자들이 물질적 성공을 누리고 세상의 큰 사람이 됩니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아주 교묘하고 정교한 개념조작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세상의 영광을 구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하여 세상의 영향력을 추구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 신앙과 세상을 믿는 맘몬 신앙의 완벽한 통일이요 일치요 화합이요 통합이요 화목이 이루어집니다. 우리 신앙의 이러한 변질과 왜곡에 대한 책임은 첫째 ‘입으로 시인하고 마음으로 믿어 구원을 받았어도’ 여전히 남아있는 우리 평신도들의 이기적인 본성과 연약한 종교성 탓일 것이고, 둘째는 이러한 이기심과 종교성을 방조·조장해온 한국 교회와 강단의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과 기독교의 이 완벽한 통일을 가로막는 단 하나의 장애(障碍)는, ‘세상의 형통 때문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 ‘세상의 형통 때문에 하나님을 덜 열심히 믿는 것’입니다. 이 장애를 피하는 것은 일차원적으로 간단합니다. 세상의 형통을 누려도 계속 하나님을 믿고 교회를 열심히 다니기만 하면 됩니다. 이것은 쉽고 논리적으로도 자연스럽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세상의 축복을 받았으니 하나님께 감사하고 더 열심히 하나님을 믿고 전도하고 구제하고 봉사하지 않을 이유도 없습니다. 조금 시니컬하게 말한다면 ‘하나님이 1등, 세상이 2등’이라고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해서 순서만 바꾸지 않으면 안전합니다.
 
정의(definition)가 모호하고 열린 개념(open concept)인 ‘축복(祝福)’이라는 말은 블랙홀(Back Hole)처럼 하나님과 세상, 기독교의 믿음과 세속적 욕망을 모두 빨아들여 뜨거운 열로 용해시키고 하나로 합일시켜 버립니다. 이렇게 보면 얼핏 이상해 보이는 일들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사모하고 자랑하는 사람들이 한국경제의 성장이라는 축복의 주역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초상화를 모시고 찬양하는 예배를 드리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어쨌든지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기독교 지도자들이 한국경제의 축복을 자랑하며 자본주의를 절대시하는 것도, 경제성장에 더 초점을 두는 보수정당을 격렬하게 지지하는 것도 같은 맥락의 일입니다. 개별 교회가 누리는 인적·물적 성장과 성공의 영적 축복은 세상에서 사람들이 누리는 물질적·사회적 성장과 성공이라는 경제적 정치적 축복과 다분히 닮은꼴입니다. 기독교를 탄압하지만 않으면, 교회가 이 세상의 권력과는 싸울 일이 없습니다. 독재정권이라도 기독교의 활동과 선교와 전도에 협조적이기만 하면 이 세상의 권력을 축복하고 격려하고 친근하게 동맹하고 동행합니다.
 
이상합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상해야 합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처형했는데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세상을 이렇게 편안하게 사랑해도 되는 것은 이상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더러 자기를 부인하고 각자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하셨는데, 기독교를 탄압하지 않는 대한민국에서 뭐 우리가 지고 갈만한 마땅한 십자가가 없습니다. (이것은 평신도 신앙에 관한 진술입니다.) 교회 일에 열렬히 봉사하는 것, 믿는 일에 최대한의 시간을 내는 것, 이 정도가 그나마 쓸 만한 질 만한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해서, 이것은 믿는 자로서 그렇게 힘든 일은 아닙니다. 교회 일 믿는 일에 열심을 내는 것은 주고받는 기브 앤 테이크(give and take) 식의 계산으로도 우리에게 별로 손해가 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화합하는 믿음은 예수님과 성경의 어려운 말씀들을 모두 쉽게 만들어서 희석해 버립니다. ‘회개하라’는 말씀은 불신자에서 돌이켜 예수님을 믿으라는 의미로만 해석합니다. ‘하나님나라’는 ‘믿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 즉 교회당’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니 교회를 다니기만 하면 됩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요한일서의 말씀은 ‘세상을 너무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제한해석하고 조금씩 자제하면 됩니다. 이건 너무 쉽습니다. 믿음이 이 정도로 편안한 일이라면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매달려 온갖 수모와 고통을 받으면서 피를 흘리며 돌아가셔야 했는지 조금 억울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과 세상의 완벽한 일치와 화합, 세상과 갈등하고 긴장하지 않는 편안한 믿음은 성경이 가르쳐주는 기독교 신앙의 내용이 아닙니다. 세상과 화합한 믿음은 세상의 길에서 돌이켜 ‘회개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추구하지 말라’는 성경의 말씀(요한일서 2:16-17)도 진지하게 따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일보다는 자기를 인정받고 싶어 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기보다는 자기의 십자가를 벗어버리려는 소원을 갈구합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그 믿음에는 무슨 실질적인 내용물(內容物)이 별로 들어있지 않습니다.
 
이렇게 얘기한다고 해서, ‘우리가 세상의 일들, 세상의 가치들에 대한 집착과 욕망을 완전히 벗어나서 살 수 있다, 완전히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긴장(緊張)이 필요(必要)하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법칙과 원리에 적응해서 따라 살면서도 하나님의 원리와 법칙으로 그것을 재해석하고 부대낌을 경험하며, 세상이 주는 시험을 하나님의 원리로 받아넘기고, 힘을 내서 반격하여 다투는 믿음의 씨름과 긴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우리 믿음은 맛을 잃은 소금처럼 땅에 떨어져 밟히게 될 것입니다. 아니 이미 세상과 너무 일체화된 기독교, 세상의 가치와 사이좋은 동맹관계를 맺은 우리 한국 교회(개신교)는 벌써 세상에 의해 고통 받는 사람들, 세상에 대해서 고민하는 사람들로부터 욕을 먹고 배척을 당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탄압을 받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회개를 요구하는 상황입니다. 지금 우리 개신교 평신도들은 잘못을 저지른 일부 교회의 목사님들 때문에 억울하게 욕을 먹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동안 가지고 살아온,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과 일체화된 우리 자신의 평신도 신앙 때문에 스스로의 책임과 잘못으로 욕을 먹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위로를 구하는 평신도 신앙, 세상과 화합하는 평신도의 믿음은 다음으로 ‘교회의 울타리에 갇힌 평신도 신앙’과 ‘세상일에 무관심한 평신도 신앙’을 만들어냅니다. 이 일들은 서로 무관하거나 상충되는 것 같지만, 논리적으로 오히려 긴밀하게 상호 연결되어 있습니다. ‘세상의 위로를 구하는 신앙’이 평신도의 발걸음을 주로 교회로 이끌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세상의 가치와 화합하는 신앙’은 평신도들로 하여금 세상과 갈등하면서 씨름할 만한 일 자체가 없어지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니까 평신도들은 세상에서 딱히 할 만한 신앙적 활동이란 것이 없어지고, 자신의 신앙적 열정을 교회 봉사에만 집중하게 됩니다.
 
세상과 화합하는 신앙은 또한 ‘신앙과 세상의 대립과 갈등, 인생과 믿음의 모순과 긴장’에 관한 평신도의 신앙적 고민을 없애거나 편안하게 만들어 줍니다. ‘거룩함’은 세상에 없고 세상과 구별된 ‘교회’에만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열심히 믿는 사람은 액면(額面)상 교회의 일만 생각하고 세상의 일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이 초월한 듯한 태도를 보이게 됩니다. 이것은 참 묘(妙)합니다. 세상을 무시(無視)하는 것과 세상에 항복(降伏)하는 것이 서로 아귀를 맞춘 듯이 딱 들어맞기 때문입니다. 신앙과 인생의 통합이라는 숙제가 이상한 세트(set) 메뉴로 달성됩니다. ‘성(聖)과 속(俗)의 외면적 단절(斷絶)을 통한 내면적 통합(統合)’이라는 모습으로.[계속]


















각 교단의 구원론





“인공지능”을 영어로 표현하는 방법

  1. Artificial Intelligence (인공지능)
  2. AI (약어) 

1. Artificial Intelligence

“Artificial Intelligence”는 인간의 사고, 학습, 문제 해결 능력을 컴퓨터 프로그램이나 시스템이 수행하도록 하는 기술이나 연구 분야를 설명합니다. 
이 분야는 기계 학습, 자연어 처리, 로봇 공학 등 다양한 하위 분야를 포함합니다.

  • “Artificial intelligence is transforming industries by automating tasks.” 
    (인공지능은 작업 자동화를 통해 산업을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 “Many companies are investing in artificial intelligence to improve efficiency.” 
    (많은 기업들이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인공지능에 투자하고 있습니다.)

2. AI

“AI”는 “Artificial Intelligence”의 약어로, 기술적인 대화나 문맥에서 자주 사용됩니다.

  • “AI is used in virtual assistants like Siri and Alexa.” (AI는 Siri와 Alexa와 같은 가상 비서에서 사용됩니다.)
  • “The development of AI has raised ethical concerns.” (AI의 발전은 윤리적 문제를 야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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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인공지능)의 대답 

한국의 주요 개신교 교단은 크게 장로교와 감리교로 나뉘며, 각 교단은 예정론과 중생, 은혜, 믿음 등 성경의 여러 요소들을 강조하는 방식에서 차이를 보입니다. 

장로교는 하나님의 주권과 예정론을 강조하며,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로 이루어진다고 봅니다. 

감리교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책임적인 응답을 강조하며, 구원받는 과정에서 중생과 성화를 중요시합니다. 

침례교는 침례를 성화의 상징으로 보고 신자의 침례를 강조하며, 각 교단은 구원의 과정과 성격에 대한 다양한 강조점을 가집니다. 

1. 장로교 (개혁주의 전통)
  • 핵심 강조점 : 하나님의 절대 주권, 예정론, 믿음을 통한 구원 
  • 구원론의 특징 :
    • 하나님의 주권 : 인간의 모든 행동과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의해 결정된다고 믿습니다.
    • 예정론 :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사람을 미리 정해 놓으셨다고 믿으며, 이를 받아들입니다. 
    • 믿음과 은혜 : 인간의 믿음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에 대한 반응으로 이해됩니다.
    • 종파의 다양성 : 장로교는 한국에서 가장 많은 교단 수를 차지할 정도로 다양하며, 각 교단마다 강조점은 조금씩 다를 수 있습니다. 
2. 감리교 (웨슬레 전통)
  • 핵심 강조점 : 
    인간의 자유 의지와 책임, 중생과 성화, 은혜와 성결한 삶
  • 구원론의 특징 :
    • 자유의지 강조 : 인간에게는 하나님께 반응할 수 있는 자유 의지가 있으며, 구원을 위한 노력을 할 수 있다고 봅니다.
    • 중생과 성화 :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거듭나는 중생 경험과 함께, 점진적인 성결의 삶(성화)을 중요시합니다.
    • 모든 사람을 위한 은혜 :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으며, 인간의 응답을 통해 구원이 실현됩니다.
3. 침례교 
  • 핵심 강조점 : 신자(믿음으로)의 침례, 구원과 성화를 위한 헌신
  • 구원론의 특징 :
    • 신자 침례 : 유아 세례를 부정하고, 신앙고백을 한 성인 신자만이 침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구원과 헌신의 상징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 성경 중심 : 성경을 권위의 최고 원천으로 삼고, 구원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따릅니다.
4. 기타 교단 
  • 루터교 :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 즉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 성결교 : 
    성결의 은혜와 성령 충만을 강조하며, 성화된 삶을 통해 구원의 확신을 얻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강조합니다.

  • 순복음교회 (기하성, 기하성): 
    성령의 은사, 성령 충만, 기적적인 치유 등을 강조하며, 신앙 체험을 중요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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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론에 대한 각 교파별 입장

"이순신 장군은 천국에 갔는가?"

이순신 장군(1545-1598)이 살았던 16세기는 한국에 기독교가 전래되기 이전 시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접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이에 대해 개신교 각 교단은 서로 다른 신학적 입장을 보입니다. 

예장 합동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의 입장

명확한 부정적 입장 : "천국에 가지 못했다"

1. 신학적 근거

이신칭의(以信稱義) - 오직 믿음

개신교에서 주로 사용하는 신학적 용어로 죄인이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고 칭함을 받으며,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죄를 없애기 위해 이 땅에 메시아로 오셨고, 그 죄 사함의 사건을 믿는 자가 그 '믿음'만으로 은혜를 받아 구원된다

칼빈주의 5대 교리 (TULIP)

하나님의 절대주권으로 선택하심은 항상 유효하고 불가항력적 은혜이며, 예정된 성도에게만 주시는 불가항력적인 구원의 은혜를 체계화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장로교회의 신앙고백서가 완성되었으며, 칭의-성화-영화의 구원관을 신조로 하고 있다

2. 성경적 근거

로마서 3:28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요한복음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사도행전 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3. 교리적 입장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

성부 하나님의 계시, 성자 하나님의 구속, 성령 하나님을 통한 거듭남이 가장 큰 골자

복음주의 핵심

"바울은 믿음에 율법준수를 더함으로 완전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오직 주 예수와 그의 구원사역을 믿음으로만 완전한 구원을 받는다"

행위구원론 거부

개신교에서는 이신칭의론에 따라 별도의 행위 없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사람들을 위해 못박혀 죽음을 믿음으로서 모든 죄가 용서되었으며, 어떠한 형태로든 드러나는 행위는 구원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고 가르친다

4. 이순신 장군에 대한 적용

  1. 복음에 대한 무지 : 16세기는 한국에 복음이 전해지기 전이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알 기회가 없었음
  2. 믿음의 부재 :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개인적 믿음과 신앙고백이 없었음
  3. 도덕적 행위의 한계 : 아무리 뛰어난 도덕성과 애국심도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음
  4. 예정론 :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택함받은 자가 아니었다면 구원받을 수 없음

5. 예장 합동의 공식 입장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이 예장 합동의 확고한 교리적 입장입니다. 
따라서 이순신 장군의 도덕적 탁월함에도 불구하고 천국에 가지 못했다고 봅니다. 

침례교 (Baptist)

엄격한 부정적 입장

  • 핵심 : 성인의 명확한 신앙고백과 침례를 중시
  • 특징 : 개인의 자발적 믿음을 강조하므로 예장 합동보다도 더욱 엄격
  • 결론 : 이순신의 구원을 부정

순복음교회 (오순절교)

부정적이지만 성령의 역사 강조

  • 핵심 : 성령의 초자연적 역사를 중시
  • 특징 : 성령의 특별한 역사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음
  • 결론 : 원칙적으로는 부정적이나 성령의 신비한 역사에 대해서는 유보적

루터교 (Lutheran)

상대적으로 유연한 입장

  • 핵심 : 루터파는 성서의 권위를 가장 높이 보지만 성서와 충돌하지 않는 이상 전통을 일부 인정한다
  • 특징 :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대해 상대적으로 열린 자세
  • 결론 : 명확히 부정하지는 않으나 회의적

감리교 (Methodist)

상대적으로 긍정적 입장

  • 핵심 : 선행 은총(先行 恩寵)이란 믿음보다 앞서서 타락한 인간에게 임하여 있는 하나님의 은총을 의미한다
  • 특징 : 하나님의 보편적 은혜를 강조
  • 결론 : 선행 은총을 통한 구원 가능성을 열어둠

성결교 (Holiness)

중간적 입장

  • 핵심 : 감리교에서 파생된 성결 운동의 영향
  • 특징 : 성화를 강조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복음주의 입장
  • 결론 : 원칙적으로는 부정적이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는 유보적

성공회(Anglican)

중도적 입장

  • 핵심 : 가톨릭과 개신교의 중간적 위치
  • 특징 : 세례성사를 죄의 용서와 구원에 필요한 성사로 보고 있다
  • 결론 : 하나님의 은혜의 다양한 방식을 인정하는 경향

개신교 교단별 입장 요약표

교단 이순신 구원 가능성 엄격도 핵심 근거
예장 합동 확실히 불가능 ⭐⭐⭐⭐⭐ 칼빈주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침례교 확실히 불가능 ⭐⭐⭐⭐⭐ 성인 침례, 개인 신앙고백
순복음교 🔺 원칙적 불가능 ⭐⭐⭐⭐ 성령의 초자연적 역사
성결교 🔺 원칙적 불가능 ⭐⭐⭐ 복음주의 + 성화 강조
루터교 🔺 회의적 ⭐⭐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
성공회 🔺 유보적 ⭐⭐ 중도적 입장
감리교 가능성 있음 선행 은총, 보편적 은혜


예장 합동 입장의 신학적 일관성

1. 종교개혁 정신의 계승

로마서 1장 17절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의가 믿음을 통해 성도들에게 아무런 공로 없이 주어졌다는 성경의 진리

2. 성경의 권위

성경의 진리성, 회심의 중요성, 그리스도의 십자가, 선교의 절박성을 핵심으로 하는 복음주의 신앙

3. 교회의 사명

이순신 같은 위인도 복음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했다는 것은 오히려 복음 전파의 시급성과 중요성을 강조하는 근거가 됨

결론

예장 합동을 중심으로 한 보수적 개신교의 입장은 명확합니다:

"이순신 장군은 아무리 뛰어난 도덕성과 애국심을 가졌어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했다"

이는 감정적 판단이 아닌 성경적 원칙에 기반한 신학적 결론이며, 동시에 모든 사람에게 복음이 전해져야 하는 이유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른 개신교 교단들도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대부분 이와 유사한 입장을 취하며, 오직 감리교만이 선행 은총 교리를 통해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예외적 입장을 보입니다.

참고 자료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 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
  • 개신교 구원론 관련 신학서적
  • 각 교단 공식 교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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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와 개신교의 구원관

기독교의 핵심은 구원관 또는 구원론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함이니라(눅 19:10)”고 말씀했다. 
기독교 역사에서는 구원론이 성경의 가르침으로부터 떠남으로서 교회는 타락의 길을 가게 되었다. 
타락이 극에 달했던 16세기 초에 종교개혁이라는 역사적 대사건이 발생하게 된 것도 신약성경적인 구원론의 회복을 위함이었다. 
당시 종교개혁의 기치는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이었는데, 이것이 바로 로마 가톨릭교회의 비성경적이고 탈성경적인 구원론에 대한 도전이었다(<한국 침례교의 신학적 특성>, 침례신학대학교, 107쪽).

신약성경에서 교회란 말은 영적으로 거듭난 구원받은 성도들을 지칭하는 것이지, 교회 건물이나 구원받지 못한 가짜 교인들의 집단을 가리키지 않는다. 
기독교의 핵심은 구원관이므로 여기서는 천주교의 구원관과 국내 주요 개신교파의 구원관 그리고 성경적인 구원관에 대해 알아 보자.

먼저 신약성경에 나오는 성경적인 구원관에 대해 살펴 보자. 신약성경적인 용어로 ‘구원받는 것’은 죄와 죽음과 지옥에서 의와 영생과 천국으로 구원받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도 친히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고 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것이 영원한 멸망인 지옥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인 영생을 얻는 구원받는 방법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교만하여,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예수님을 믿어야만 된다는 생각을 거절하기 일쑤다. 때문에 그들은 이 단순한 구원의 길 대신 다른 많은 대용품을 만들어냈으며 이 대용물들은 수많은 사람들을 영원한 파멸로 이끌어갔다. 구원에 관한 이와 같은 잘못된 생각들에 대해 성경은 다음과 같이 논박한다.

(1) 자기가 선택하는 어떤 종교를 진실히 믿고 실천한다 해서 결코 구원받을 수 없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게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 4:12)”.

(2) 하나님의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받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을 온전히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0)”.

(3) 선행을 한다고 해서 구원받을 수는 없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 3:5)”.

(4) 세례나 침례가 구원의 수단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침례)를 주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니(고전 1:17)”. 복음은 기쁜 소식이며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세례(침례)에 의해서가 아니라 복음을 믿는 것에 의해서이다. 십자가에 달린 강도는 세례(침례)를 받지 않았지만 구원받았다(눅 23:42,43).

(5)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모두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구원받지 않았으면서도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

이상의 사항들 외에도 세상에는 구원에 관한 잘못된 개념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그것들 모두가 상기의 사항들처럼 구원을 얻는 것을 돕는다는 생각에, 인간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행위에 불과한 것들이다(<성경은 해답을 가지고 있다>, 헨리 M. 모리스, 전도출판사, 95~97쪽).

상술한 것처럼 성경적인 구원관에 대해 살펴 보았다. 이제 천주교의 구원관에 대해 알아 보자. 천주교인들에게 있어 구원이란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영접함으로 오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구원이란 영세(세례)로부터 시작해서 계속적으로 유지해야 하는 교회와의 관계에 의존하는 길고 긴 과정인 것이다. 그들의 구원은 성례들, 고해성사, 선행, 연옥에 들어가서 자신의 죄들과 다른 사람들의 죄들로 인하여 받은 고난들, 연옥에서의 고통을 감해 주는 면죄부 그리고 거의 끝도 없는 미사들, 심지어는 자신이 죽은 후에도 드려야 하는 묵주 기도에 참여하는 것이 곧 구원인 것이다(<짐승 위에 탄 여자>, Dave Hunt, 도서출판 누가, 19쪽).

지난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로마 가톨릭교회가 구원을 주는 복음이 아니라 가짜 복음이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구원받지 못하고 상실된 사람들이란 것을 깨달은 가톨릭 사제들이었다. 통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는 관계를 갖지 못하고 교회에 속박되어 버리는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교회의 규정을 잘 따르면, 결국 교회가 천국으로 이끌어 줄 것만 기대했다.

가톨릭 교리에 의하면, 구원이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게되는 기정 사실이 아니라 교회에 복종하여 선행을 계속하고 의식을 계속 지킴으로 얻어지는 한 과정이다. 당시 성경적 복음을 믿게 된 개혁자들은 자신이 구원받은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 사실을 기뻐하였으며, 그들은 구원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행 20:24)을 전파하였다. 그 결과 그들은 파문과 핍박을 당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순교를 당했다(앞의 책, 269쪽).

한편, 가톨릭에서는 신약성경 야고보서에 나오는 말씀인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17)”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약 2:24)” 등을 인용하면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며 반쪽 믿음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얼핏 일리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 나오는 행함은 구원의 조건이나 방법이 아니라, 구원의 결과로 나타나는 행함이다.

다시 말해 신자가 진실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으면 다른 사람에게 그 사실을 입증할 선행이 따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디도서 3장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 3:7)” 그리고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딛 3:8)”에 해당하는 것이다(<이렇게 구분된다>, 윌리암 맥도날드, 전도출판사, 17~18쪽).

신약성경에는 약 150문단이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받는다’고 말하고 있다. 이 ‘구원’은 서두에 언급한 대로 신약성경적인 용어로, 사람의 영혼이 지옥에서 천국으로 영생을 얻는 구원을 의미한다. 그리고 신약성경에 많이 나오는 ‘구원’이란 단어가 항상 ‘영혼 구원’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구원이 ‘구출, 안전, 온전함’ 등을 의미하는 일반적인 용어인 경우도 적지 않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 20장 37절에 “바울이 백부장과 군인들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라고 쓰여 있다. 이 구절에 나오는 구원이란 단어는 바울과 그 일행들이 지중해의 바닷물에 빠져 죽는데서 건짐 받는 것을 표현하는데, ‘구원’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이 구절은 앞뒤 문맥을 보지 않더라도 ‘영혼의 구원’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물에서 건짐 받는 구출’임을 바로 알 수 있다.

하지만 전후 문맥이나 상황을 살피지 않을 경우, 구원이란 단어가 영혼의 구원인지 아닌지 쉽게 분간하기가 어려운 구절도 있다. 예컨대 빌립보서 1장 19절에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라고 쓰여 있다. 여기서 바울은 ‘구원’이란 단어를 자신이 갇혀있는 로마 감옥에서의 석방과 관련하여 사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 나오는 ‘구원’은 바울 자신의 ‘영혼의 구원’을 말한 것이 아니고 감옥으로부터의 ‘석방’을 말한다.

그리고 빌립보서 2장 12절에는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쓰여 있다. 여기에 나오는 구원은 빌립보 교회에서 발생한 분쟁에 관한 문제의 해결을 의미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두렵고 떨림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나오는 구원도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영혼의 구원’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빌립보 교회에서 발생한 분쟁에 대한 ‘문제의 해결’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에 나오는 ‘구원’이란 단어의 의미는, 주로 문맥이 그 의미를 결정한다고 볼 수 있다. 때문에 신약성경에 ‘구원’이란 단어가 나올 때는 그 구절과 관련된 이웃하는 문맥과 나아가 더 넓은 문맥을 신중히 비교해서 올바른 해석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잘못된 해석으로 인하여 성경과 하나님이 모순되는 것처럼 착각할 수도 하고, 또 자의적인 해석과 억지 해석을 주장함으로써 큰 오류에 빠져 기독교 이단이나 사이비로 변질되는 경우도 발생하는 것이다(성경은 해답을 가지고 있다, 106쪽).

상술한 바와 같이 천주교의 구원관은 오직 가톨릭교회를 통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으며, 또 신자들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선행을 실천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 외에도 구원받기 위해서는 세례를 비롯한 각종 성사를 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천주교는 은혜에 의한 믿음으로 얻는 구원이 아닌 행위에 의한 다른 복음을 전하는 거짓 교회이다. 사도 베드로는 다른 복음인 거짓 교리를 전하는 거짓 교사들을 이단이라고 말했다(벧후 2:1). 그러므로 천주교회의 평신도들은 정신을 차리고 다른 복음을 전하는 거짓 교사인 천주교 사제들에게 더 이상 속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제 국내 주요 개신교파인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순복음교의 구원론에 대해 알아 보고자 한다. 거기에 앞서 구원과 관련하여 국내 개신교계의 현황에 대해 살펴 보자. 예나 지금이나 국내 주요 개신교파나 교단 내에서는 구원받지 않은 가짜 신자들이 부지기수다. 생명의 말씀사 대표이며 장로교단의 목사인 김창영 교수는 자신의 저서에서 언급하기를 “국내 교회에는 짝퉁 구원이 판을 치고 있다. 교회에 다니고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짝퉁으로 믿는 교인들이 많으며 한국교회에는 구원이 사라지고 있다”고 말했다(<구원 받음>, 김창영, 생명의 말씀사, 20~21쪽). 이처럼 국내 개신교에는 구원받지 않은 신자들로 이루어진 비성경적인 가짜 교회들이 부지기수다.

더욱이 국내 주요 개신 교파와 교단 내에서는 구원도 받지 않고 목회를 하는 목사들도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 주요 교파의 16명 목사와 신학대 교수들이 집필한 저서에서도 언급하기를 “국내에 자신의 개인의 구원에 대한 확신도 없는 목사들이 의외로 많은 것을 보게 된다. 이들은 신학교를 졸업한 뒤 마치 운전 면허증을 취득하듯이 강도사 고시, 목사 고시를 보고, 그 다음 절차에 의해 목사 안수를 받는데 안타깝게도 자신은 구원의 확신도 없는 경우가 많다. 이런 자들이 목회를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먼저 구원의 확신부터 점검해야 한다”고 말했다(<교회 개척>, 목회와 신학 편집부, 두란노 아카데미, 105쪽). 이처럼 이런 가짜 목사들이 존재하는 교회도 바로 가짜 교회인 것이다.

국내뿐만 아니라 서구의 개신교회도 구원받지 못한 수많은 목사들이 목회를 하고 있다. 교회 개척 분야의 탁월한 이론가이며 강연가인 대린 패트릭은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기를 “오늘날 안타깝게도 개인적으로 구원도 못받은 자들이 목회를 하려고 애쓰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 목사와 교회 개척자가 무조건 다 그리스도인일 것이라는 생각은 위험하다. 구원받지 않고도 예언하고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기적을 행할 수도 있다(마7:21~23). 거듭나지 못한 목사의 말로도 슬퍼지만 그를 따르는 교인들의 말로는 훨씬 심각하다”고 했다(<교회 개척자>, 대린 패드릭, 복있는 사람, 35~39쪽).

그리고 19세기의 세계적인 복음전도자로 널리 알려진 찰스 스펄전은 그의 유명한 저서인 ‘목회자 후보생들에게’라는 책에서 여러 번 반복해서 목사들에게 경고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목사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무엇보다 먼저, 자신이 구원의 확신을 가진 ‘거듭난 자’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설교자 가운데 가짜 목사들이 많은데 그들은 교인들에게 지옥을 피하라고 소리쳐 놓고 자신은 지금 지옥에 있다”고 했다(<목회자 후보생들에게>, 찰스 스펄전, 생명의 말씀사, 21쪽). 이처럼 스펄전은 설교하는 목사들 가운데 거듭난 체험이 없는 가짜 목사들이 많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국내 주요 개신교파의 구원관에 대해 알아 보자. 개신교는 천주교와는 달리 교파마다 교리와 신조 등에 차이가 많다. 구원론에 있어서도 그러한데, 예컨대 감리교는 구원론에 있어 칼빈주의를 따르지 않고 알미니안주의를 따른다. 여기서 칼빈주의란 하나님이 믿을 자들을 택한다는 주의이며, 알미니안주의란 사람이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택한다는 주의이다. 이에 따라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의 여러 교파들은 구원론에 당면하여 장로교회와 개혁교회 등은 칼빈주의를 따르고 감리교회와 성결교회, 순복음교회 등은 알미니안주의를 따르고 침례교회는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를 절충한 구원론을 가지고 있다.

그럼 먼저 국내 개신교인의 약 70%를 차지하고 있는 국내 최대의 교파인 장로교의 구원관에 대해 살펴 보자. 국내의 장로교는 구원론에 있어 칼빈의 예정론을 따른다. 칼빈의 예정론이란 “하나님께서 창세 이전에 구원받을 자들 미리 택해 놓았다”는 교리이다. 그래서 장로교회에 다니는 모태교인이나 일반 교인들은 하나님이 자신을 구원받을 자로 미리 택했다고 믿고, 또한 택함을 받았기 때문에 장로교회에 다닌다고 믿고 있다.

물론 ‘예정론’도 성경적이며 틀린 말은 아니다. 하나님의 ‘예정하심’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이며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이다. 그렇지만 인간의 편에서는 하나님의 예정하심도 있어야 하고, 또한 영적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각 개인 스스로의 의지적 결단에 의해 복음을 받아들이는 ‘믿음’도 요구된다.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나서 믿은 뒤 거듭나게 되면, 나중에서야 비로소 이 두 가지, 곧 은혜와 믿음이 함께 역사했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구원받음, 86쪽).

이러한 ‘은혜와 믿음’의 두 가지 역사에 대한 가장 부합되는 성경말씀은 에베소서 2장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여기에서 은혜는 하나님의 주권이자 소관이며, 믿음은 인간의 주권이며 소관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성경은 하나님의 예정하심과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른 믿음을 모두 언급하고 있으므로, 한쪽만 옳다고 지나치게 주장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장로교는 불신자를 위한 복음집회를 따로 갖지 않는다. 하지만 성경에는 불신자를 위한 복음집회가 분명히 언급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행13:42~49, 살전1:8). 장로교 외에 다른 교파인 침례교나 감리교 그리고 초교파적인 세계적인 복음전도자들은 복음집회를 통해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해왔다. 예컨대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나 침례교 계통의 찰스 스펄전과 빌리 그레이엄 그리고 초교파적인 디엘 무디 등의 복음전도자들은 교회 내에서뿐만 아니라 야외에서나 큰 광장이나 체육관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복음집회를 통해 복음을 전했다.

그러나 장로교는 초창기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교회 안팎으로 ‘복음전도집회’라는 것이 없었다. 장로교에 있어서 ‘전도’라는 의미는, 일반적으로 목사들이 교인들에게 믿지 않는 사람들을 교회당에 데리고 오라는 뜻으로 통하고 있다.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위 ‘총동원전도주일’이라는 것도 교인들로 하여금 사람들을 강권하여서라도 자기네 교회당으로 데리고 오라는 의미인 것이다.

리하여 총동원전도주일에 불신자들이 교인들을 따라 교회에 나갔을 때, 목사들은 설교를 통해 ‘영혼 구원에 관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으면 복을 받고 병 고침을 받고 사업이 잘된다는 기복 신앙을 대개 전한다. 그리고 총동원전도주일이 아닌 평상시에도 장로교 목사들은 예배, 즉 설교시간에 전하는 말씀내용이 주로 자기네 교인들을 대상으로 하여 교훈적인 말씀을 전한다.

이러한 경우, 자기네 교인들은 목사의 설교 내용이 자신들을 위한 가르침인 것을 알지만, 처음 교회에 참석한 거듭난 체험이 없는 사람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설교 내용을 알게 모르게 자신들에게 적용하게 된다. 그리하여 시간이 지나다 보면 중생이나 구원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 교회의 교인이 되어 기독교 신자인양 착각하면서 교회생활을 해 나가는 것이다.

한편, 장로교 헌법에는 교인의 정의를 “교인은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믿는 자들인데 그리스도인이라 부른다”라고 쓰여 있다(<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헌법>, 173쪽, 한국장로교 출판사). 거듭난 신자들의 입장에서 이러한 장로교 교인의 정의를 살펴 볼 때 여기에 나타난 심각한 오류를 보면서 경악을 금할 수가 없다. 상술한 것처럼 장로교는 ‘삼위일체를 믿는 자들을 교인’이라고 정의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가톨릭 신자들도 삼위일체를 확실히 믿고 있고, 기독교 이단 종파들 중에서도 일부는 삼위일체를 믿고 있다. 그렇다면 장로교인이나 가톨릭교인나 그런 기독교 이단 종파나 무엇이 다를 바가 있는가.

장로교 헌법을 만든 사람들은 현직목사 외에도 장로교 목사자격증을 가진 교수나 신학박사들이 대부분이다. 이런 사람들이 ‘교인의 정의’를 단지 삼위일체를 믿는 자들이라고 정의를 내렸으니 정말 기가 찰 일이며, 이들이 과연 신학교수나 신학박사가 맞는지 그 자격이 의심스러울 정도다. 명색이 장로교의 최고 연구진들이 이 모양이니 한국 장로교도 문제가 삼각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람들 역시 중생이 의심되는 지도자들이며, 교인들 또한 그런 자들에게 배우고 있느니 ‘중생’과는 거리가 멀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대부분의 장로교인들의 ‘중생 체험의 실종’과 함께, 왜 장로교에 ‘복음집회’가 존재하지 않고 또한 교인들 가운데 ‘중생의 체험’에 관한 질문에 대해서는 대부분 입을 열지 않거나, 또는 엉뚱한 답변을 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는 것이다. 대체로 장로교인들은 교회 집회에 빠지지 않고 잘 다니고 봉사도 하며 십일조도 잘 내고 직분도 잘 감당하면서 교회생활을 잘 하면 죽어서 천국에 가지 않겠느냐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이 거듭난 체험이 있는지 없는지, 즉 “영적 출생의 여부”에 따라 천국과 지옥이 결정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국내의 장로교인들은 장로교 헌법에 나타나 있는대로 삼위일체를 믿기만 하면 장로교인이 되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장로교 헌법에 따라 비성경적인 교리를 전하는 영적으로 소경된 인도자인 목사의 말을 믿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리고 올바른 복음의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는 성경에서 직접 해답을 찾거나, 아니면 구원의 진리를 제대로 전하는 성경적인 교회를 찾아야만 올바른 복음을 깨닫고 거듭나서 천국에 들어 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장로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장로교 헌법에 나타나 있는 장로교인이 되기를 거부하고, 성경에 나타나 있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감리교의 구원관에 대해 살펴 보자. 감리교는 18세기 초에 영국의 존 웨슬리와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영국 국교회의 개혁 운동으로 시작되었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는 거듭나는 체험을 통하여 구원의 확신을 가진 뒤 수많은 사람들에게 ‘중생의 복음’을 전했다. 감리교 초창기에 웨슬리와 그의 추종자들은 ‘개인 영혼구원’을 우선시하고 그 다음으로 ‘삶의 실천’을 내세웠다. 그러나 그의 사후에는 그 순서가 점점 뒤바뀌어 오늘날에는 영혼구원보다 타 종파와의 에큐메니칼 운동이나 사회구원에 더욱 무게가 실리고 있는 실정이다.

국내의 감리교회도 상기와 같이 개인의 영혼 구원보다는 사회 구원쪽으로 흐르고 있는 실정이다. 국내 기독교 대한 감리회의 ‘교리와 장정’ 책에는 구원과 그리고 선행에 대하여 서술해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이 책에는 “구원은 개인의 구원뿐만 아니라 역사와 사회를 성화시키는 데까지 이르러야 한다”고 적혀 있다(<교리와 장정>, 기독교대한감리회, 33쪽). 이 문구에서 구원을 사회 성화와 연관시킨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믿음을 증명하는 선행은 성화의 과정 안에서 구원의 완성을 위해 작용한다”고 쓰여 있다(앞의 책, 33쪽). 여기서도 선행과 구원을 연관시킨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문구의 내용은 불신자나 초신자뿐만 아니라 교인들이 읽더라도, 도대체 구원의 진리가 무엇인지 쉽게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야 말로 비성경적인 문구이며 애매모호하기 짝이 없는 것을 알 수 있다.

존 웨슬리는 구원의 확신을 가진 뒤 영국을 비롯하여 독일 아일랜드 등 수많은 나라를 직접 순회하면서 수십 년간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러나 오늘날 감리교는 변질되어 존 웨슬리가 깨달은 복음의 진리를 감리교 교인들은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거듭나지 못한 가짜 목사들에게 속아 종교생활을 하고 있다. 이러한 거짓 지도자들은 그들의 헌법과 교리에 따라 교인들에게 내세에 대한 막연한 기대보다는 현세에서의 적극적인 삶과 사회구원을 강조하며 엉터리 복음을 전하고 있다. 국내 감리교의 평신도들은 더 이상 가짜 복음에 속지 말고 존 웨슬리가 믿고 전한 올바른 구원의 복음으로 되돌아 가야 할 것이다.

다음, 성결교의 구원관에 대해 살펴 보자. 성결교는 19세기 말에 미국에서,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의 완전주의적 입장과 성결운동을 강조하며 생겨난 교파이다. 국내의 성결교는 구원론에 있어 감리교와 순복음교회처럼 알미니안주의적인 입장을 취하고, 신학에 있어서는 초창기부터 늘 보수적, 수구적, 배타적인 입장을 견지해 왔다.

전통적으로 국내 성결교의 신학적 정체성에 나타난 사상으로는 ‘사중복음’을 들 수 있다. 그것은 곧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네 가지이다. 이 사중복음은 원래 19세기 말에 미국의 심슨이나 다른 부흥사들이 사회복음 운동에 반대하여 일어난 미국교회의 일종의 쇄신운동이며 미국 성결운동에서 강조했던 내용이었다. 이것이 한국 성결교에서도 창립 당시부터 줄곧 강조되어 오면서 성결교회의 신학적 정체성이 되어 왔다(<한국개신교 주요교파 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29쪽).

성결교에서는 다른 교파와 달리 사중복음인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네 가지를 중요시 하며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사중복음은 비성경적이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오직 한 가지, ‘구원의 복음’에 대해서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에베소서 1장 13절에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라고 적혀 있다. 이와 같이 누구나 구원의 복음을 깨닫고 믿어 천국가는 것이며, 복음은 몇 가지 종류가 아닌, 이 ‘구원의 복음’ 한 가지 밖에 없다. 그 외에는 모두 가짜요 거짓 복음인 것이다. 따라서 성결교회에서 강조하는 ‘사중복음’은 비성경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갈라디아서 1장에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갈1:7)”고 씌어 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교회의 신자들에게 다른 복음, 즉 가짜복음에 현혹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 구원의 복음은 “구원받고 천국가느냐, 구원 못받고 지옥가느냐”와 관련이 있다. 그러나 성결교의 사중복음 가운데 ‘성결· 신유· 재림’은 천국 지옥과는 무관하며, 그것은 일종의 기독교 교리 가운데 일부에 해당하는 것이지 구원의 복음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따라서 사중복음은 비성경적인 용어일 뿐만 아니라 가짜복음인 것이다.

다음, 침례교의 구원관에 대해 살펴 보자. 침례교의 기원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유럽의 재침례파와 17세기 영국의 회중교회의 분파인 청교도주의로부터 침례교가 시작된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한국에는 1889년 캐나다 선교사 말콤 펜윅에 의해 침례교가 전래되었다. 현재 한국에는 기독교한국침례회, 대한기독교침례회, 한국성서침례회, 대한선교침례회연합회 등 4개의 교단이 있다. 이 가운데 기독교한국침례회의 교단이 가장 규모가 크다.

침례교는 구원론에 있어서, 초창기에는 알미니안주의를 지지하는 일반침례교와 극단적 칼빈주의를 따르는 특수침례교로 양분되었다. 그러다가 18세기 말에 온건한 칼빈주의를 토대로 한, 복음주의 침례교 교리가 나타나 일반침례교와 특수침례교가 통합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침례교는 일반적으로 다른 교파보다는 확실한 구원관을 갖고 있으며, 중생에 대해서도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컨대 침례교는 지역교회마다 ‘회원권 제도’라는 것이 있다. 회원권이란 교회의 회원이 되는 자격으로서 반드시 갖추어야 할 조건이다. 그 첫째 조건이 중생인데, 즉 “오직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한 증거를 주는 자만이” 회원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것은 침례교가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 ‘구원’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침례교는 각 나라나 지역이나 심지어 개교회의 목사마다 구원관이 다른 경우도 많다. 마찬가지로 국내의 침례교도 개교회의 목사의 구원관이나 복음에 대한 교리가 비성경적일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므로 영적 분별력이 약한 교인들은 그릇된 목사를 따라 사망의 길로 갈 수도 있는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으므로 이런 목사를 믿지 말고 성경을 믿어야 할 것이다.

다음, 순복음교의 구원관에 대해 살펴 보자. 한국의 순복음교회는 오순절교회의 한 교파로 1928년 미국 선교사 럼지에 의해 시작되었는데, 그녀는 1933년에 한국에 최초의 오순절교회를 설립하였다. 그 후 1953년 서울에서 교단이 창립되면서 순복음 신학교가 처음 설립되고, 1960년대에는 여러 오순절 계통의 교단들이 한국에서 활동하였다. 국내 오순절 계통의 최대 교단인 ‘기독교대한하나님의 성회’는 1981년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의 ‘이단 시비문제’로 인해 총회측과 순복음측으로 분열되었다.

당시 조용기는 “조상숭배 문제, 성령세례 문제, 환상과 방언, 축복과 구원 등”과 관련하여 예장통합으로부터 ‘이단 시비문제’가 발생했다. 그 때 순복음측은 사태가 여의치 않자 조용기를 중심으로 하여 ‘예수교대한하나님의 성회’라는 새로운 교단을 만들었다. 이렇게 두 교단으로 분리되었다가 1991년 ‘기독교대한하나님의 성회’라는 명칭으로 다시 통합되었다(한국 개신교 주요교파 연구, 247쪽).

구원론에 있어서 오순절교는 감리교와 성결교처럼 알미니안주의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나 오순절교의 구원의 교리는 ‘회심과 성령세례’를 별도로 구분시켜 회심 후에 성령세례를 따로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복음주의자들은 회심과 성령세례를 동일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순절교와 큰 차이가 있다. 또한 오순절교는 침례교나 장로교와는 달리, 구원을 영혼의 구원뿐만 아니라 전인적인 구원이라 하여 질병의 치유까지 포함시켜 놓아, 복음적인 기독교 교리와는 동떨어진 비성경적인 구원관을 갖고 있다(앞의 책, 233쪽) .

그리고 오순절계통의 교인들은 사도시대의 ‘방언 등 표적의 은사’가 모든 시대에도 계속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초기 교회시대 이후, 속사도들이나 그리고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나 20세기 이전의 세계적인 전도자들은, “방언이나 기타 표적은 초기 기독교의 표적이며 일시적인 현상이었으며, 표적의 은사는 성경의 정경이 완성되기 전에 이미 활동이 멈추었다”고 말하고 있다(분파주의, 엔드류 스텐하우스, 전도출판사, 106쪽). 그러므로 순복음교인들은 교회사와 성경적인 구원론을 제대로 파악하여 방언이나 병고침이나 성령세례 등을 구원받은 증거인 것처럼 주장하는 거짓 교사들에게 속지 말아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천주교와 개신교와 성경적인 구원관에 대해 살펴 보았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신자들에게 “가톨릭교회에 소속되어 있지 않으면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다(가톨릭교회교리서 846조)”고 겁을 주며 위협하고 있다. 이처럼 가톨릭은 자기네 교회 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비성경적인 구원론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적인 구원은 가톨릭교회에 소속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는 관계를 맺는 것이다. 천주교 평신도들은 더 이상 가톨릭의 비성경적인 구원 교리에 속지 말아야 할 것이다.

상술한 것처럼 국내의 여러 개신교파와 교단들도 각기 저마다의 구원론을 갖고 있다. 그리하여 신학적으로 또는 지식적으로 자기네 교단의 구원론만이 올바른 교리인 것처럼 주장한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교파들이 율법이나 계명이나 자기네 교단 교리를 지킬 것을 강조하면서, 열심히 교회생활을 하면 천국에 갈 수 있고, 또한 십일조와 각종 헌금을 바치면 하나님께 축복을 받는다는 기복신앙의 비성경적인 말만 되풀이 하고 있다. 이제 국내의 개신교인들도 더 이상 이런 거짓 목자들의 말에 속지 말고, 성경적인 올바른 구원관을 갖고 이런 거짓 목자들을 척결하고 대적해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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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론 - 교회와신앙


3-6절 구원론

구원론에서 정통 개신교회는 내 죄를 대속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이신칭의(以信稱義), 이신득구(以信得救), 이신득의(以信得義) 사상을 전제로 한다.
 

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사역

인간의 구원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으로 말미암는다. 타락한 인간을 향한 구원 계획은 성부 하나님에 의하여 세워졌다. 이에 따라 성부는 성자 하나님을 이 땅에 보내셨다. 그리고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신인(神人)으로서 구속 사역을 이루셨다. 그러한 구속 사역의 효과를 인간들에게 직접적으로 적용하는 이가 성령 하나님이시다.
 

나. 구원의 성격

우리가 얻는 구원의 성격은 사람이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의가 주입되어 그 존재가 순식간에 완벽해지는 개념이 아니다. 사람은 여전히 죄인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인정받아 구원에 이르는 것이다.
 

한편 칭의를 말할 때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 경우도 의가 주입되는 개념은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의(그분의 십자가의 희생과 순종으로 이룬 의)가 믿는 사람에게 그대로 전해짐으로 인해, 죄인인 여부나 어떤 공로와 상관없이 누구든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칭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에서 사람은 결코 자랑할 것이 없고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에 감사해야 할 따름이다. 물론 구원받은 성도는 영적으로 구원받은 상태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이 세상에서 성화의 길을 걸어가게 되며,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는 부활의 몸을 입고 완전한 구원에 이르게 될 것이다.
 

다. 구원의 서정에 대한 각 교단의 견해

구원의 서정을 말할 때 용어에 대한 확실한 이해가 필요하다.

소명: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으로의 부르시는 사건

회심(신앙): 하나님을 믿지 않던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이켜 참 신앙을 가지는 것

회개: 회심과 관련한 회개는 단회적이다. 구원받은 성도는 생활의 회개가 반복적으로 요구된다.

중생: 죄인의 영혼이 성령을 통해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사건

칭의: 죄인이었던 사람이 죄 사함 받고 의롭다 칭하심을 받는 것

양자: 죄인이었던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로 여김을 받는 것

성화: 성도가 실생활에서 거룩함을 점차적으로 이뤄가는 것

견인: 구원받은 성도의 구원이 유지되는 것

영화: 궁극적 구원의 상태, 구원의 완성
 

1) 로마가톨릭교회

로마가톨릭의 구원관은 성례전과 관련되어 있다. 첫째는 영혼이 거듭나는 세례, 둘째는 세례받은 사람이 성령의 은사를 받는 견진, 셋째는 그 안에서 성찬의 떡을 뗌을 통해 그리스도의 살과 피 자체를 나누는 성만찬, 넷째는 그것에 의해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혜택이 세례받은 후 정도를 벗어난 사람들에게 시여되는 회개, 마지막은 죽음을 앞둔 사람을 준비시키고 그의 남은 죄를 깨끗하게 하는 종유식이다.
 

로마가톨릭 교회의 구원의 서정은 3단계 혹은 4단계로 요약 가능하다.

① 3단계: 구원의 준비단계--> 칭의--> 선행에 의한 공로 만족

② 4단계: 충족은혜--> 주입은혜--> 협력은혜--> 연옥 혹은 천국
 

충족은혜는 교회 밖에서 들어온 신자가 세례를 받기에 흡족한 은혜가 되게 하는 초보적인 은혜를 의미한다. 주입은혜는 하나님의 은혜로 과거의 죄를 사함 받고 양자로 칭함 받는 은혜를 의미한다. 이 주입은혜는 성례와 고백성사를 통해 점차적으로 채워진다. 협력은혜란 하나님의 은혜로 양자 된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와 협력하여 선행을 쌓아가야 한다. 선행이 없는 대죄는 주입은혜를 상실할 수 있다. 연옥은 이 세상에서 사함 받지 못한 죄를 마저 처벌받는 곳이다. 이 곳에서 죄를 해결하고 천국으로 올라간다.

이는 한마디로 행위 구원관이다. 정통 개신교회는 위와 같은 로마가톨릭교회의 구원관에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2) 루터파

신앙이 구원의 순서에 있어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리고 회심이 중생보다 앞서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사람의 응답에 강조점을 둔 것이다. 루터파의 경우도 알미니우스주의처럼 인간의 구원이 상실될 가능성을 인정한다. 루터파 구원의 서정 중 또 다른 특징은 성화가 따로 없다는 것이다. 성화는 칭의에 포함된 개념으로 본다.

소명-> 조명-> 회심-> 중생-> 신앙-> 칭의-> 신비적 연합-> 갱신-> 보존-> 영화
 

3) 칼빈주의

칼빈주의는 절대 예정, 제한 속죄, 견인을 전제로 구원의 서정을 전개한다. 그러나 그 보수성의 차이에 따라 학자마다 순서에 약간씩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회심이나 신앙보다 중생을 앞에 두는 공통점이 있다. 이는 절대 예정과 무조건적 선택에 기초하여 믿음도 하나님이 믿도록 해주셔야 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 일반적 견해: 소명-> 중생-> 회심(회개와 신앙)-> 칭의(양자)-> 성화(견인)-> 영화

* 하지(A. Hodge)의 견해: 소명-> 중생-> 신앙-> 그리스도와의 연합-> 회개 -> 칭의-> 양자-> 성화-> 성도의 견인

* 벌콥(Louis Berkhof)의 견해: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 외적 소명-> 중생과 유효적 소명-> 회심-> 신앙-> 칭의-> 성화-> 성도의 견인

* 아브라함 카이퍼의 견해(A. Kuyper): 중생-> 소명-> 칭의-> 신앙-> 성화

* 박형룡의 견해: 소명-> 중생-> 회심-> 신앙-> 칭의-> 양자-> 성화-> 견인-> 영화
 

4) 웨슬리-알미니우스주의

예지예정(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의 신앙과 순종을 미리 예견하심을 통해 이뤄진다고 보는 견해)과 보편속죄(하나님의 선행 은혜에 대해 응답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얻음. 그런데 인간의 태도 여하에 따라 구원이 변할 가능성도 인정함)를 전제로 한 구원의 서정이다. 웨슬리-알미니우스주의 신학에서 구원의 서정은 다음과 같다.

선행 은총의 역사-> 회개를 포함한 믿음-> 칭의-> 신생(중생)-> 성화-> 완전 성화-> 영화
 

라. 칼빈주의 구원관

1) 칼빈주의 5대 강령

칼빈주의 5대 강령에 의하면 칼빈주의의 구원관을 대략 짐작할 수 있다.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강조하여 구원관도 절대 예정을 전제로 전개된다.

①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여 자기 능력으로는 구원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②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의 의지와 관계없이 된다. 하나님은 당신의 의지대로 신자들을 무조건 선택하신다.

③ 제한 속죄(Limited Atonement): 그리스도는 영원 전부터 선택된 사람들만을 위해 죽으셨다.

④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able Grace): 구원으로 선택된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항거할 수 없이 그 은혜를 입게 된다.

⑤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Saints): 하나님이 한번 선택하신 사람은 궁극적 구원에 이르기까지 이끌어 주신다.
 

2) 회심보다 앞서는 중생
 

칼빈주의는 구원의 서정에서 중생이 회심 앞에 온다고 본다. 예정으로 선택받은 택자에게 성령이 임하셔서 그를 중생시키시고, 믿고 회개하게 하시고, 구원으로 이끄신다는 것이다. 이처럼 중생이 회심보다 앞에 놓이는 이유는 구원이 사람의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주권에 의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반면 대부분의 비 칼빈파 교단들은 회심을 중생 앞에 둔다.
 

3) 인간의 선택과 유기

절대 예정을 전제로 구원받을 자에 대하여 하나님은 무조건적으로 선택(Election)하신다. 이는 미리 구원받을 자와 구원받지 못할 자를 정하신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도 이 선택받은 사람들만을 위함으로 제한적이다. 그리고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은 유기(Reprobation)되었다. 유기된 자들은 결코 구원받을 수 없다. 이 이론은 ‘이중예정’이라고도 한다.
 

4) 칼빈주의 구원관의 변화

칼빈주의 5대 강령에 기초한 교리들은 많은 반론을 낳았으며 후대에 이르러서는 칼빈주의의 변화로까지 이어졌다. 특별히 미국의 대각성운동을 전후하여 ‘제한 속죄’를 완화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등장하였다. 곧 누구든지 믿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 이런 흐름의 대표적인 실례가 미국 북장로교단이 1903년에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개정판>을 발표한 모습에서 드러난다. 개정의 내용은 선택과 유기의 이중예정의 문구를 매우 부드럽게 완화하고, 성령의 사역과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구원을 원하심(선교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조항을 추가하였다. 이와 같이 칼빈주의의 완화된 경향을 일컬어 ‘온건 칼빈주의(Sober Calvinism)’, ‘수정 칼빈주의’라고 부른다. 오늘날 세계의 대다수 장로교회와 칼빈주의 신학을 받아들이는 일부 침례교회 등 여러 교단들이 이런 온건한 경향을 수용하고 있다. <pp. 참조> 한국 장로교단 중에는 통합, 백석, 고신 등이 이 문서를 채택한다. 수정하지 않은 1647년의 초판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을 그대로 지지하는 교단은 합동, 합신 등이다. 특정 교단의 색채를 따지지 않더라도 칼빈주의 교단이라고 하면서 선교나 교회에서의 봉헌과 섬김, 성화의 삶을 강조한다면 온건 칼빈주의적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알미니우스주의이면서도 전적인 타락이나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다면 개혁적 알미니우스주의(Reformed Arminianism)라고 할 수 있다.
 

마. 오늘날의 알미니우스주의
 

17세기의 초창기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은 대륙의 칼빈주의자들에 의해 탄압을 받았다. 그래서 많이 위축된 상태로 있어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미니우스주의를 표방한 침례교회들이 세워지기도 했다. 그러던 중 18세기에 이르러 알미니우스의 사상은 영국의 웨슬리에 의해 받아들여지며 큰 발전을 이루게 된다. 그렇다고 웨슬리가 알미니우스의 사상을 그대로 차용한 것은 아니다. 알미니우스주의의 예지예정과 보편구원의 개념을 받아들이고 칼빈주의의 제한 속죄를 거부하지만, 그렇다고 전면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 타락 등 일정 부분을 수용하기도 한다. 그래서 웨슬리의 신학을 알미니우스주의라 하지 않고 웨슬리-알미니우스주의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웨슬리의 구원관은 알미니우스주의와 칼빈주의의 중간에 서 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오늘날 알미니우스주의를 표방하는 교회는 미국 등 서구의 침례교회와 회중교회, 오순절 계통 교회에서 많은 데, 그렇다고 17세기의 구(舊)알미니우스주의를 고집하는 곳은 거의 없다. 대부분 타교파의 좋은 점을 편견 없이 받아들이기를 꾀한다. 그래서 웨슬리주의는 물론 칼빈주의까지 폭넓게 흡수한 면모를 보이고 있다. 알미니우스주의가 배척을 받던 시절 그들은 결국 율법주의로 흘러가고 말 것이라는 부정적 시각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알미니우스주의에는 그런 면모는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건전한 복음주의적 경향이 두드러진다. 물론 일부는 자유주의로 흘러간 경우도 있고, 또 한편 너무 세속화한 모습도 있다.
 

칼빈주의 입장에서 알미니우스주의는 천주교와 다를 바 없는 행위구원론 주장자들로 매도된다. 반면 알미니우스주의와 비칼빈파 입장에서 칼빈주의는 하나님을 무자비한 폭군으로 여기도록 하는 결정론적 이론이며, 전도와 선교마저도 필요 없도록 한다고 매도된다. 두 진영은 그런 비난들에 대해 여러 가지 논리로 방어하는 입장이지만, 상대방은 그 논리를 잘 수긍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는 서로 간 신학적 견해 자로 인함일 뿐 양자간의 신앙이 달라서는 결코 아니라고 할 것이다. 칼빈주의도 신앙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고백하며 전도와 선교의 필요성을 부르짖는다. 알미니우스주의도 신앙으로는 인간의 한계를 절감하며 하나님의 주권을 깊이 고백한다. 결국 각자 주장하는 강조점은 달라도 믿음 안에서는 이미 한목소리를 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서로 간 장점들을 바라보며 좋은 점을 존중하고 인정함이 바람직하다고 할 것이다. 서로 간 약점만 바라보면 반목과 분쟁만 있을 뿐이다. 오늘날 두 진영은 도르트회의 때의 갈등을 뒤로하고, 시대의 변화에 따라 상호 포용과 관용의 길로 나아가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기도 하다.
 

바. 웨슬리-알미니우스주의 (Wesleyan Arminianism) 구원관
 

1) 구원을 위한 예비 은총으로서의 ‘선행 은총(先行恩寵, Prevenient Grace)’
 

웨슬리는 ‘이신칭의’와 ‘만인구원(Salvation for All)’, 곧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 원하신다(딤전 2:4)는 말씀을 기본 전제로 구원론을 전개한다. 그러면서 선행은총을 말한다. 선행은총이란 먼저 주어지는 은총(grace that goes before)을 뜻한다. 즉, 우리가 구원받기 전 죄인일 때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는 하나님의 은총이다(롬 5:8). 이는 모든 사람에게 값없이 골고루 주시는 만인을 위한 은총(Universal Grace)이다. 타락한 사람은 선을 행할 능력이 없지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구원에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을 허락하시는데, 이 선행은총에 응답할 때 성령을 통해 구원으로 인도받는다.
 

2) 자유의지와 신인 협동
 

칼빈에게 하나님의 은혜는 제한적이고 특수한 데 비해, 웨슬리는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이지만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선행은총에 의해 부분적으로나마 회복된 자유의지(혹은 생래적 양심: 양심이 선행은총으로 구원의 부름에 응답할 수 있을 만큼 회복된 상태)를 가지게 되었기에 구원의 부름에 응답할 능력이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칼빈주의에서는 구원이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주어지므로 인간에게는 구원의 책임이 없으나, 웨슬리 신학에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거나 거역하는 것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지게 된다. 이는 곧 하나님의 은총과 자유의지 사이의 조화를 말하는 것으로서 '복음적 신인 협동설'(Evangelical Synergism)이라 부른다.
 

일각에서는 신인 협동이라는 단어를 하나님과 사람이 절반씩 나누어 협력한다거나, 하나님 100%, 사람 100% 등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웨슬리의 관점은 구원의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으되 사람은 그에 응답하는 구조이므로 하나님의 은혜가 전적으로 강조된다. 곧 인간의 의지가 성령의 역사에 수동적으로 협동함으로써, 하나님의 주도적인 은혜의 역사에 전적으로 이의 없이 협동하는 것을 말함이다. 웨슬리에 의하면 구원은 결국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다. 다만 인간 편에서는 하나님의 그 큰 은혜를 받아들이는 믿음의 응답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은 물에 빠진 사람이 구조해 주는 사람의 손을 꽉 잡는 것에 비유될 수 있다.
 

3) 칭의 이전의 회개를 포함한 믿음
 

웨슬리에 의하면 ‘믿음은 구원의 문(door) 이요, 회개는 구원의 현관(porch)이요, 성결(성화)은 구원의 안방’이다. 칭의의 유일한 조건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믿는 믿음이다. 그런데 이 믿음은 반드시 회개를 포함하는 것이어야만 한다. 이 교리는 회심의 체험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합당한 믿음을 소유한 사람은 칭의를 얻는데, 칭의는 또한 새로운 탄생(신생, 중생)을 동반한다.
 

4) 신생(중생)
 

웨슬리는 설교에서 중생(regeneration)이란 단어보다 새로운 출생이란 의미인 ‘신생(the new born)’이나 ‘다시 태어남(be born again)’을 즐겨 사용하였다. '칭의'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적인 변화라면 ‘신생’은 인간 전인의 실제적인 변화이다.
 

웨슬리는 중생의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첫째 죄악에서 벗어나 깨끗하고 경건한 삶인 성결을 위해서는 먼저 거듭나야만 한다. 둘째 거듭나지 않고는 하나님과 교류할 수 없기 때문에 진정한 구원을 위해 필요하다. 셋째 중생은 천국에서는 물론 이 세상에서도 사랑과 기쁨이 충만한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하다.
 

또 한편 웨슬리는 중생의 표적을 세 가지로 봤는데 그것은 믿음, 소망, 사랑이다. 중생한 사람의 삶에는 믿음, 소망, 사랑의 열매가 맺힌다.
 

5) 성화(Sanctification)와 그리스도인의 완전(Christian Perpection)
 

중생(신생)이 다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한다면 성화는 실제적인 삶의 성장이라는 것에 의미가 있다. 중생한 신자는 어린아이 모습에 머무르지 않고 성장해야 마땅하다. 이 성화는 개인의 노력으로 되지 않고, 오직 성령의 도우심과 공급하시는 능력을 통해 가능한 것이다. 성령과 동행할 때 성화는 점차적으로 이뤄지며, 경우에 따라서는 순간적으로 완전에 이르기도 한다. 그러므로 웨슬리는 모든 신자가 완전 성화를 신앙생활의 목표요 이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완전 성화에 이르러야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아니다. 신자는 이미 칭의의 단계에서 구원받았기 때문이다. 칭의를 받은 신자는 자기의 삶 속에서 구원의 행복을 누리는 성화의 길(구원의 안방에서의 삶), 즉 실제적인 구원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성화에는 단계와 정도 차가 있기는 하다.
 

웨슬리는 소수의 사람에게 해당하는 일이지만 신자가 성령의 인도를 따라 성화의 삶을 살 때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는 완전 성화에 이를 수도 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이것은 신적 거룩이나 천사의 거룩 같은 것이 결코 아니다. 인간의 연약함을 전제로 한 제한된 완전이다. 완전 성화에 이른 신자는 하나님을 향한 마음과 행동에 온전히 순수함을 가지며,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을 그리스도를 모방함으로 되찾아 죄를 극복하고, 사랑을 실천하며,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고 영광 돌리는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사. 구원의 수단에 대한 견해들
 

구원의 수단이 무엇이냐에 대한 견해에 따라 그 교단이 추구하는 구원관이 명확히 드러나기도 한다.

① 로마가톨릭: 믿음 외에 수단만으로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본다. 곧 교회가 제공하는 세례와 성찬 그리고 여러 성사를 수납함을 통해서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② 루터교회: 믿음을 통한 수단을 말한다. 곧 믿음을 고백하는 신자가 세례와 성찬을 수납함을 통해 구원 얻는다고 한다.

③ 칼빈주의: 수단이 없는 믿음을 전제로 한다. 유효한 은혜(구원에 이르게 하는 특별한 은혜)에 의해 구원 얻는다.

④ 웨슬리-알미니우스주의: 수단이 없는 믿음을 전제로 한다. 일반적 은혜(선행 은총)를 받아들임으로 구원을 얻는다.
 

아. 구원론 이단들

① 펠라기우스: 사람은 믿음만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고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는다. 그리스도는 하나의 모범일 뿐이다.

② 안식교: 토요일 안식일 준수와 여러 가지 율법적 조항을 지켜야만 한다고 가르친다.

③ 여호와의 증인: 공로 사상이 강하다. 행위의 비중에 따라 내세의 위상이 결정된다.

④ 류광수: 그리스도의 속죄는 죽어야만 할 인간을 대신한 죽음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이 사탄에게 속전을 치르는 행위(사탄 배상설)로 이해한다.

⑤ 예정론을 전면 부정하는 경우: 정통 개신교회는 예정론에 대한 견해차가 있을 뿐 예정론을 거부하지는 않는다. 칼빈주의는 절대 예정을 지지하며, 비 칼빈주의 진영에서는 예지 예정을 지지한다.

⑥ 기타: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통한 구원을 부인하는 자들, 성령의 구원 사역을 부인하는 자들, 자기나 특정 단체를 일컬어 믿거나 가입하여야만 구원받는다고 하는 자들, 공로 구원을 강조하며 금전을 내게 하거나 억지로 헌신을 강요하는 자들은 모두 이단이다.
 

자. 구원론 이단의 특징들
 

① 이신칭의 사상을 거부하거나 제한한다.

② 지나친 방종이나 지나친 율법주의 경향이 있다.

③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거부하거나 왜곡, 혹은 제한한다.

   * 그리스도께서 죄인인 나를 위해 대신 죽으셨다는 형벌 대속 사상을 거부 혹은 제한한다.

   *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을 거부 혹은 제한한다.

   * 기성교회의 방법은 구원에 이르기에 부족하며 자기들에게만 구원이 있다고 주장한다.

   * 특별한 지식을 가져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

   * 특별한 구호나 내용을 입으로 말해야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

   * 구원을 위한 의가 사람에게 주입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 사탄 배상설을 주장한다.

④ 특정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부족한 구원 사역을 완수하는 자라고 말하기도 한다.

⑤ 세속적 구원에만 치중하든지 내세적 구원에만 치중하든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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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장로교 신학자들의 학파별 구원론 비교연구



2015년 5월 30일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에서 한국복음주의조직신학회(회장 한상화 박사) 제30차 정기논문발표회가 개최됐다. 이날 조봉근 박사(광신대)는 ‘칼빈과 한국장로교회의 학파별 구원론에 관한 비교연구’라는 제목의 발제를 했다. 본 기사는 크리스천투데이 이대웅 기자가 정리한 내용이다. < 편집자 >

먼저 조봉근 박사는 발제 취지를 이렇게 밝혔다. “오늘 한국장로교회는 칭의(稱義) 교리만 지나치게 일방적으로 강조하고, 초기 부흥사들에 의해 깊은 논의와 여과 없이 값싼 구원의 은혜가 성도들에게 단순하게 전달되어 ‘성화(聖化) 없는 칭의(稱義)’가 당연시되어 왔다. 또한 칭의와 성화에 대한 이원론적(二元論的) 해석으로 ‘복음과 율법’ ‘믿음과 행위’를 분리(分離)하는 현상을 유발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므로 오늘날 한국교회 성도들 신앙생활에서 발생하는 이 같은 여러 병리적 현상들은 교회가 성경대로 기독교의 구원교리(救援敎理)를  바로 가르치지 못한데도 원인이 있음을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조 박사는 장로교 뿌리인 칼빈의 구원론 핵심에 대해 ‘그리스도와의 연합이요 이로 말미암아 동시적으로 주어지는 이중(二重) 은혜가 바로 칭의와 성화’라며 “우리는 칭의와 성화의 불가분리(不可分離的)의 유기성(有機性)과 성령 사역의 동시 발생 현상을 함께 이해하고, 칼케돈 신조의 ‘칭의와 성화는 반드시 서로 구별돼야 하지만 서로 혼동되거나 분리되어는 안 된다.’는 원칙에 준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조 박사는 “존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 제3권에서 칭의와 성화의 관계에 대해 당시 ‘칭의와 성화’ 이 둘을 동일시(同一視)한 오시안더(Andreas Osiander, 1498-1552, 독일, 루터란)의 주장을 비판하면서 ‘둘은 분리되지 않지만 구별되어야 한다.’고 말했다.”며 “죄의 흔적들이 의인들 속에도 항상 남아 있다는 것이 경험에 의해 아주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의인들의 칭의는 삶의 새로움(성화)을 향한 개혁과는 전적으로 구별돼야 한다는 것이다.”라고 했다. “칼빈은 ‘이중적 은총’은 인정하지만(칭의와  성화 구별) ‘이중적 의’(칭의와 성화 동일시)는 허용하지 않았다.”고도 했다.

 이렇게 서론을 전개한 후 한국 장로교회 신학자들의 학파별 ‘구원론’을 차례로 짚어 나갔다. 조 박사는 “장로교 보수교단의 박형룡, 박윤선, 김영한 학파는 주로 칼빈과 개혁주의 구원론을 따르고 있지만, 진보 교단의 이종성, 김재준 학파는 주로 칼 바르트와 자유주의자들의 구원론을 옹호하고, 한철하 학파의 경우 칼빈과 웨슬리의 구원론을 모두 수용하고 있다.”고 요약했다.

 1. 박형룡, 박윤선의 구원론

– 칭의와 성화는 구별되나 서로 혼동되거나 분리될 수 없다. –

(1) 박형룡(朴亨龍, 1897-1978)

구체적으로는 먼저 죽산 박형룡에 대해 “교의신학과 성경주석의 상호 비교를 통해 구원의 서정으로서 ‘소명-중생-회심-신앙-칭의-수양-성화-견인-영화’의 9가지 순서로 논하는 것이 합당하고, 칭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기초로 죄인에 관한 율법의 주장이 만족된 것을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재판 행위’라 정의했다.”고 소개했다.

성화에 대해서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핫지, 벌코프의 정의를 인용해 “성령께서 의롭다 함으로 죄인을 죄의 더러움에서 구출하시고, 그의 온 성질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갱신하시며, 그로 하여금 선한 일을 행할 만하게 하시는 은혜롭고 계속적인 공작이다.”라고 했다.

조 박사는 “죽산 박형룡은 ‘성화는 칭의와 나눌 수 없이 연결되고 둘이 결코 분리(分離)되지 않지만 반드시 구별(區別)되어야 하며, 성화를 칭의와 혼동(混同)하는 것은 성경을 생각 없이 읽는 사람들이 자주 범하는 과오’라는 칼빈의 입장을 취했다.”며 조 박사 자신을 비롯해 김길성, 권호덕, 강웅산, 유태화, 유창형 등 죽산 학파들은 모두 칼빈과 개혁신학자들의 구원론을 주장하고 있다고 했다.

(2) 박윤선(朴允善, 1905-1988)

정암 박윤선의 구원론은 “칭의는 법정 용어로 범죄자가 법적 선언에 의해 옳게 여김 받는 것을 의미한다.”고 정의하면서 이 경우 정암은 “그 죄인이 옳게 여김을 받는 것은 자신에게 의(義)가 전혀 없어도 성립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나님이 그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의(義)에 참여한 자라고 법적으로 선언하신다.”고 주장했다. 성화에 대해서는 “성령께서 신자로 하여금 점차 거룩해지도록 하는 역사이고 단번에 이뤄질 사건이 아니라 계속 성취해 나아가는 과정이다.”고 했다.

또 칭의와 성화의 관계에 대해서는 “칭의는 성화보다 논리적으로 우선(于先)하며 칭의는 객관적으로 죄인 밖에서 실현되지만 성화는 주관적으로 그의 실생활에 성취된다. 칭의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는 믿음과 함께 느껴지는 사죄 받은 평안함이고, 성화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거룩해지려는 소원과 행동(行動)의 계속’이다.”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정암은 “칼 바르트가 ‘칭의와 성화는 서로 독립된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이뤄지는 한 화해운동(和解運動)의 양면(兩面)이다.’라고 한 것은 잘못된 성화론 이라며 강하게 비판했다.”고 했다. 조 박사는 신복윤, 안명준, 김재성, 이승구, 김병훈, 변종길, 유해무, 박영돈, 이신열 등 정암 학파 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칼빈과 개혁주의 구원론을 주장한다고 했다.

2. 김재준, 이종성의 구원론

 조 박사는 춘계 이종성의 특징을 ‘통전적 신학’, 장공 김재준의 특징을 ‘보편 구원론’이라고 하고 김균진 구원론에 대해서는 ‘보다 포괄적인 통전적신학’(Holistic Theology)이라고 요약했다.

(1) 이종성(李鍾聲, 1922-2011)

조 박사는 “춘계(春溪)는 칭의를 의인(義認, 의롭다고 인정함)이라 번역했고, ‘의인 교리가 인간의 측면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한 루터의 말을 인용했다.”며 “의인 교리는 루터로 시작해 모든 개혁자들에 의해 강조됐으며 종교개혁의 불변의 유산으로 보수되고 있다.”고 했다.

이종성이 성화에 대해서는 “믿음을 가진 신자들 생활의 종합적 과정이고 신(神) 자신이 성령을 통해 죄인인 사람과 하나가 되어 그 죄인이 그 자리에서 신처럼 거룩하게 되고 그 거룩함을 통해 그가 있는 현실 자체를 거룩하게 하는 사건을 뜻한다.”고 했다.

조 박사는 “춘계는 신앙의 성립이 ‘의인과 성화’를 동시에 체험할 때 가능하다고 했고, ‘칭의와 성화가 유리(遊離 따로 떨어짐) 된다면 신앙이 성립할 수 없다’고 하면서 바르트가 ‘직설법과 명령법이 하나를 이루고 있다’고 한 말에 대해 ‘바로 이 점을 지적해서 하는 말인 것 같다.’고 했다”며 “다시 말해 춘계는 칼빈보다 바르트의 논법을 따르고 그의 구원론은 바르트의 선택론이 핵심을 이루며, 개혁신학자들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중심 교리가 크게 부각되지 않았고 다원주의 양상을 띠면서 뚜렷한 자기신학의 색깔이 없는 ‘백과사전적 종합신학’, ‘백화점식 나열신학’, ‘집대성신학’이라 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조 박사는 “김명용, 윤철호, 현요한 등 춘계학파는 대부분 이 통전적 신학의 경향을 따르고 있으나, 최윤배의 구원론은 분명 칼빈과 마르틴 부처의 구원론을 설명하고, 황승룡은 찰스 핫지와 안토니 후크마, 존 머리 등 여러 개혁신학자들의 구원론을 인용해 그의 구원론을 전개하고 있다.”고 했다.

(2) 김재준(金在俊, 1901-1987)

장공(長空) 김재준의 구원론과 관련해서는 “초기에는 기독교의 구원론을 일단 수용했으나 후기에 가서 완전히 ‘보편 구원론’에 빠졌고, 제자들 역시 칼빈의 구원론에 관한 논문이나 책을 별로 쓰지 않았다.”며 “오늘날에도 김재준 학파의 후예들은 대부분 비교종교학의 상대주의 입장에 서 있고, 특히 종교보편주의 이론을 전개 중인 김경재뿐 아니라 오영석, 김균진의 경우도 한국적 민중신학의 범주 안에 안주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3) 김균진(金均珍, 1944- )

조 박사는 “특이하게도 연세대에서 오랫동안 조직신학을 가르쳤던 김균진은 ‘기독교 조직신학’ 제3권에서 놀랍게도 약 230면이나 할애하여 ‘신앙, 칭의, 성화, 하나님의 은혜’를 비교적 세밀하게 논술했고, 전통적 개혁신학자들처럼 ‘칭의와 성화의 관계’를 깊이 다루고 있다”며 “그는 칭의와 성화의 관계에 대해 ‘하나님의 구원 사건이 가진 두 가지 다른 차원으로 하나님의 낮추심이 칭의라면 이로 말미암은 인간의 높임은 성화’이고, ‘둘은 결코 나뉠 수 없으며 칭의의 진실성 여부는 성화의 열매에서 증명되고, 성화의 열매는 궁극적으로 사랑의 행위에 있다.’며 전통적 바르트주의 입장을 뛰어넘어 오히려 칼빈에게 접근하고 있는데 이는 보수적 한국장로교회의 토양에 크게 영향을 입은 결과일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김균진의 뿌리가 되는 바르트 신학에 대해 그는 “외형적으로 칼빈의 성화론과 유사해 보이지만 본질적으로 다르다.”며 “바르트는 칭의와 성화를 하나로 본 것이며 칭의 속에서 성화를 보고 성화 속에서 칭의를 보고 있어 사실상 둘을 구별할 수 없다.”고 밝혔다.

(4) 한철하, 김영한

 한철하(韓哲河, 1924-2018)는 구원론에 있어 죄 사함과 회개를 강조하고 칼빈처럼 신앙을 조리 있게 설명하면서 도표를 통해 ‘죄 사함 → 칭의 → 화목’과 ‘회개 → 중생 → 성화’를 균형 있게 해설했으며, 그의 학파인 한상화는 칼빈과 웨슬리의 성화를 비교하면서 웨슬리가 말한 완전성화의 의미를 변증하고 있다.

김영한(金英漢, 1946-  )은 루터의 의인(칭의)론은 칼빈보다 부각됐고 칼빈의 성화론은 루터보다 더 개진됐음을 말하면서 “바르트의 구원론은 보편구원론의 위험성을 갖고 있다.”고 규명하고 있다고 논증했다.

결론

조 박사는 “루터의 이신칭의 교리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공로주의(功勞主義) 구원관을 비판하면서 주창(主唱) 된 구원론 기초 교리로서 이 대원칙에 벗어나는 듯 보이는 야고보서를 복음적 서신이 못 된다고 생각하기도 했다.”며 “그러나 칼빈은 ‘그리스도와의 연합교리’에서 칭의와 더불어 성화교리의 근간(根幹)을 재발견하여 루터보다 더 철저한 성경관을 토대로 칭의와 성화를 동시에 강조했다.”고 했다.

 조 박사는 “후대의 칼 바르트도 루터의 입장에서 완전히 탈피하지 못해 영감론과 성령론을 깊이 인식하지 못했고 오직 포괄적인 기독론적 해석으로 일관할 뿐 아니라 양태론적 유니테리안 입장으로 나갔다.”며 “더욱이 그의 기독론(화해론)은 일반 역사에서의 기독론과 전혀 다른 실존적 역사 이해와 해석으로 말미암아 결국 WCC의 발기자(發起者)가 됐으며 칭의와 성화를 바르게 구별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