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도



축도에서 성삼위의 순서를 본문과 달리 해도 되는가?



고린도후서 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찌어다.
May the grace of the Lord Jesus Christ, and the love of God, and the fellowship of the Holy Spirit be with you all.


예배의 마지막에 축도를 할 때에 축도 본문인 고린도후서 13:13의 성삼위 순서 즉 성자 성부 성령의 순서대로 하지 아니하고 성부 성자 성령의 순서로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먼저 들어서 하는 데 신학적인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다 같은 하나님의 본성을 가지면서 구별된 인격과 사역을 가졌다는 것(one substance in three persons)이 소위 ‘삼위일체’(三位一體)의 교리이지만, 기독교 신앙에 있어 중심주제는 말할 것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것은 구약과 신약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그 중심에 있으면서 통일성과 연속성을 가진 것으로써 잘 알 수가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구약과 신약은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과 증언, 약속과 성취라는 점에서 분명하다. 따라서 성부 하나님과 성령의 신분과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성 속에서 바로 이해되는 것이며, 그러한 구도(構圖: 성부의 성자 파송과 성자의 성령 파송)에서 볼 때 축도 본문에서의 성자의 은혜를 먼저 언급한 것은 신학적으로 합당한 것이다.


아론의 축복 기도
민수기 6:24-26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찌니라 하라.
"The LORD bless you and keep you;
the LORD make his face shine upon you and be gracious to you;
the LORD turn his face toward you and give you peace."


레위 사람의 주된 역할 중 하나는 하나님의 축복을 비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제사장이 축복할 말을 다음과 같이 정해 주셨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민 6:24-26).

   하나님은 사람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즉 영적, 정신적, 감정적, 물질적인 방법으로 축복하신다. 그러나 여기서의 초점은 사람을 말로 축복하는 것이다. 우리의 선한 말은 사람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은혜의 순간이 된다.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민 6:27)라고 하나님은 약속하셨다.

   우리가 일터에서 사용하는 말에는 축복하거나 저주하는 능력이 담겨 있으며 다른 사람을 세우거나 무너뜨리는 능력도 있다. 우리가 선택해 쓰는 말은 종종 우리가 깨닫는 것 이상의 권능을 발휘한다. 민수기 6장 24-26절에 나오는 축복의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실” 것이며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실” 것이며 “평안을 주실” 것이라고 선언한다.

   일터에서 우리가 쓰는 말이 다른 사람을 “지킬” 수 있다. 즉 안심시키고 보호해 주고 지원해 줄 수 있다. ‘만일 도움이 필요하다면 내게로 오세요. 나는 당신을 도울 것입니다.’ 우리는 은혜로 충만한 말을 할 수 있으며 상황을 더 나은 방향으로 반전시킬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우리 역할을 최소화시킴으로써 책임을 전가하는 대신에 오류에 대한 책임을 나누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말은 깨진 관계를 회복하고 화평을 가져올 수 있다. 예를 들어, “나는 우리 사이에 뭔가가 틀어졌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나는 다시 한 번 좋은 관계를 회복할 기회를 찾고 싶어요”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일을 하다 보면, 우리가 다른 사람을 대적하거나 비평하거나 꾸짖거나 때로는 심지어 벌을 줘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럴 때에도 우리는 문제가 된 행동만을 비난할 것인지 아니면 그 사람 전체를 정죄할 것인지를 선택할 수 있다. 반대로 다른 사람이 훌륭한 행동을 했을 때, 우리 평판이나 체면이 약간 구겨질 위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침묵을 지키는 대신 그들을 칭찬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무화과나무 비유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 예수님의 재림 시기에 대한 힌트

1. 무화과나무의 비유

무화과나무는 성경에 자주 언급되는 나무 중 하나다.
무화과나무의 열매인 무화과는 꽃이 피지 않아 ‘무화과(無花果)’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러나 알고 보면 꽃이 피지 않는 것이 아니라 열매 속에서 꽃을 피운다.
무화과를 은화과(隱花果)라고 부르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무화과나무에 대해 주목해야 할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시기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 많은 사람들이 재림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다.
성경은 재림 예수님께서 등장하시는 시기를 알 수 있는 징조로서 무화과나무 비유를 통해 명확히 알려주고 있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마태복음 24:32~33)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대화 중에 하셨던 말씀이다.
당시 대화의 주제는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의 징조’에 대한 것이었다(마태복음 24:3).
눈앞에 예수님을 두고 ‘주의 임하심’을 논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장차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인데 그때가 언제인가 하는 것이다.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의 가지가 연해지고 잎사귀를 낼 때 다시 올 것이다.”라고 답하셨다.

그렇다면 무화과나무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상징하며, 무화과나무의 가지가 연해지고 잎사귀를 내는 시기는 언제를 가리키는 것일까?
그 해답은 성경에서 찾을 수 있다.
먼저 무화과나무가 무엇을 상징하는지 살펴보자.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

예수님과 제자들이 베다니에서 출발하여 오는 길에, 예수님께서 배고픔을 느끼셨습니다. ···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거기에서 열매를 얻으려고 다가가셨습니다. 그러나 무화과는 없고 잎사귀만 무성할 뿐이었습니다. 그것은 아직 무화과가 열릴 때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다시는 아무도 네 열매를 먹지 못할 것이다”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들었습니다. ··· 아침에 지나가다가, 제자들이 무화과나무가 뿌리부터 말라 버린 것을 보았습니다.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선생님, 보세요! 저주하셨던 무화과나무가 말라 죽어 있습니다!”(쉬운성경 마가복음 11:12~14, 20~22)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화과나무의 잎들 아래서 쉬기도 하고, 그 열매를 날로 먹거나, 말려서 먹거나, 빵으로 만들어 먹기도 했다(요한복음 1:48, 사무엘상 25:18, 30:12).
무화과 열매는 의학적 효능이 있어 상처 치료제로도 사용되었다(열왕기하 20:7, 이사야 38:21).
그만큼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친숙한 나무였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에서 30년 이상 사셨다.
무화과나무의 열매가 언제 열리는지 모르실 분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가 되지 않아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여 죽게 하셨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에게 알려주고자 하신 뜻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화과나무와 관련한 또 다른 말씀을 보자.

예수님께서 이런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자신의 포도밭에 심었다. 그는 이 나무에서 열매를 얻으려고 왔으나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 종에게 말했다. ‘내가 삼 년 동안,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찾았는데,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이 나무를 찍어버려라. ···’ 종이 주인에게 대답했다. ‘주인님 ··· 내년에 ···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베어버리십시오’”
(쉬운성경 누가복음 13:6~9)

비유에서 무화과나무의 열매를 구한 사람이 있다.
그분은 3년 동안 열매를 얻으려고 기다렸으나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이에 종에게 무화과나무를 베어버리라고 말씀하셨다.
과연 무화과나무는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 유다 백성을 그 좋은 무화과처럼 좋게 여기겠다” (쉬운성경 예레미야 24:5)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비유 속 이스라엘에서 열매를 구한 사람은 예수님을 가리킨다.
예수님께서는 30세에 침례를 받으시고 운명하시기까지, 3년 동안 이스라엘 나라에 새 언약의 복음을 전파하셨지만, 이스라엘은 예수님을 배척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박으며 자신들이 얼마나 큰 죄를 짓고 있는지 알지 못한 채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라”고 호언했다(마태복음 27:25).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여 말라 죽게 하신 사건, 3년 동안 열매를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를 베어버리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배척한 이스라엘 나라의 심판을 예고하신 것이었다.

이스라엘의 멸망

베스파시아누스는 충분한 전투준비를 갖추고 ··· A.D. 68년에는 예루살렘 성새를 둘러싸고 공격할 체제를 거의 굳혔다. ··· 예루살렘 공략전이 시작되려 할 때 갑자기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졌다. ··· 네로가 ··· 자살로 30년의 생애를 끝마쳤다. A.D. 68년 9월 9일 새벽의 일이다. (베스파시아누스는) 군대를 철수하고 ··· A.D. 70년 ··· 예루살렘 공략전이 다시 시작되었다. 베스파시아누스제의 아들 티투스는 14군단을 이끌고 4월부터 9월말까지 격심한 공격을 퍼부었다. 이리하여 신전도 성벽도 도시도 다 불타버려 다만 기왓장과 흙덩이만 뒹굴 뿐이었다. ··· 포위공격되어 전사한 자가 110만, 포로 9만 7천이라 전해진다.(『대세계의 역사』, 삼성문화개발)

AD 68년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이 예루살렘으로 진격했다. 하지만 그해 네로 황제가 자살하자 로마에서는 후계자를 놓고 권력 투쟁이 벌어졌다. 예루살렘 진압은 잠시 주춤했다. 로마로 돌아간 베스파시아누스는 황제로 추대됐다. 그사이 예루살렘에 있던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을 기억하고 서둘러 예루살렘을 떠났다(누가복음 21:20~24).

2년 후인 AD 70년, 베스파시아제의 아들 티투스가 유다의 군사작전권을 갖게 됐다. 티투스가 이끄는 로마군단은 예루살렘성을 둘러싸며 완전 포위했다.

예루살렘에 갇힌 유대인들은 굶주림에 시달렸다. 어떤 이들은 허리끈과 구두를 벗겨 먹었다. 급기야 서로의 음식을 빼앗기 위해 야만적인 행동들도 일어났다.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예루살렘을 도망가는 사람들은 로마군에 잡혀 잔인한 죽임을 당했다. 약 6개월간의 포위 공격 끝에 예루살렘 성벽은 붕괴되고 말았다. 거룩한 성전은 화염에 휩싸였고 성전 기명들은 약탈당했다. 110만 명 사망, 9만 7천 명이 노예로 팔렸다. 독립 주권은 완전히 빼앗겨 버렸고, 나라 없는 유랑민으로 전 세계를 떠돌아다니는 입장이 되었다. 예수님께서 예언하신 대로 이스라엘은 메말라버린 무화과나무처럼 멸망한 것이다.

이스라엘의 독립

그 후 이스라엘 땅은 로마, 비잔티움, 무슬림, 십자군을 거쳐 다시 무슬림 세력인 맘루크와 오스만 튀르크가 지배했다. 유럽 열방에 흩어진 유대인들은 경제, 문화적으로 뛰어난 기지를 발휘했으나 ‘예수를 살해한 민족’이라는 꼬리표 때문에 차별과 박해의 대상이 됐다. 영국과 스페인에서는 아예 집단 추방을 당했고, 영국의 극작가인 셰익스피어의 작품에는 유대인이 간사하고 포악하고 욕심이 많은 사회집단으로 표현되었다. 유대인들은 유랑민으로서 누구의 보호도 받지 못하고 눈물과 설움의 시간을 보냈다.

그중에서도 1933년 1월 30일부터 시작하여 1945년 5월 8일에 끝난 ‘나치’의 6백만 유대인 대학살은 가장 잔혹한 사건이었다. 이 기간 동안 폴란드, 소련,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프랑스, 벨기에, 룩셈부르크, 이탈리아, 네덜란드, 노르웨이,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 그리스 등 유럽의 15개국에서 어린이 150만 명을 포함한 6백만 명의 유대인이 나치에 의해 학살되었다. 어떤 이는 기아와 질병으로 죽고, 어떤 이는 거리에서 교수대에 달리고, 어떤 이들은 가스실에서 집단으로 죽어갔다.

이 사건은 유대인들이 국가 건설만이 수난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해주었고, 유대인들의 마음을 요동치게 했다. 결국 고국 팔레스타인에 유대 민족국가를 건설하자는 시오니즘이 활발히 일어났다. 그리고, 1948년 5월 14일 유엔의 자유투표 결과가 발표됐다.

유대 민족의 역사적 권리와 국제연합 결의에 따라 팔레스타인에 유대국가를 수립하고 이를 이스라엘이라고 부를 것을 선포한다.(1948년 5월 14일 벤구리온 수상의 이스라엘 독립선언문 낭독)

1948년. 오랜 기간 동안 나라 없이 살던 민족이 건국을 이룬 기적적이고 역사적인 해다.
AD 70년 로마에 의해 멸망한 뒤 갖은 고생과 학대 아래 약 1900년 동안 세계를 유랑한 유대인들은 기적적으로 팔레스타인에 이스라엘 국가를 다시 건설했다.
주권을 빼앗긴 나라가 약 1900년 만에 나라를 재건한 예는, 인류 역사에서 그 어떤 나라에도 찾아볼 수 없다.
성경의 예언을 보면 이는 단순히 한 나라의 국권 회복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이루어진 역사였다.
이스라엘의 국권회복은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다시 오셨음을 전 세계에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워라. 가지가 연해지고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알지 않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내가 문 밖에 가까이 온 줄 알아라(현대인의성경 마태복음 24:32~33)

성경은 이스라엘을 무화과나무로 비유하고 있다(누가복음 13:7, 예레미야 24:5). 죽어버린 무화과나무가 연해지고 생명이 돋아날 때, 곧 무화과나무로 비유된 이스라엘이 독립하는 그때가 재림 그리스도께서 등장하시는 시기다.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재림 그리스도를 기다린다. 언제 오실까 하늘만 바라보던 기독교인들에게 재림 예수님은 이미 오셔서 우리의 마음문을 두드리고 계셨다. 그렇다면 1948년에 등장하신 재림 그리스도는 어떤 복음의 역사를 이루셨을까.

그분이 오시면 ···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다. 그분은 자기 생각대로 말씀하시지 않고 ··· 내가 말하는 것을 받아 너희에게 알려 줌으로써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요한복음 16:8~14)

재림 그리스도는 예수님께서 행하시고 교훈하신 새 언약의 진리를 가지고 인류를 가르치셨다. 새 언약의 진리는 성경 곳곳에 기록되어 있다(예레미야 31:31, 누가복음 22:20, 히브리서 12:24). 무화과나무의 비유에 따라 1948년에 새 언약의 진리를 전파하신 분을 찾아야 한다. 그분은 2천 년 전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신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참고자료>

  • 후스토 L. 곤살레스, 『간추린 교회사』, 세종문화사
  • ‘갖은 박해에도 선진국 반열···건국 자체가 기적인 이 나라’, 중앙일보, 2018. 5. 14.
  • 요세푸스, 『유대전쟁사』, 생명의말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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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예수님은 죄 없는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셨는지요?

마태복음 21:18-22 절에 나오는 예수님께서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시는 내용이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무화과나무는 "번영"과 "심판"을 상징하는 나무라고 합니다.
무화과나무는 유월절 즈음에 첫 열매를 맺는데 이 열매를 "파게(Phage)" 라고 합니다.
또는 "탁쉬"라고도 합니다.
이후에 열리는 열매를 "테에나(Thena)"라고 합니다.

파게라는 열매가 없으면 그 후에 반드시 맺혀야 할 열매 "테에나"를 얻지 못한다고 합니다.

마태복음 21:18-22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길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밖에 아무것도 얻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 지라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가로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리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무화과 나무를 저주한 시점이 열매를 맺는 여름이나 가을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십자가에 달리기 전 예루살렘에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후 베다니에서 하루 저녁 유하신 그 다음 날입니다.(마 21:1-17)
마지막 고난 주간의 둘째 날 아침에 다시 성으로 들어 오실 때(21:18) 무화과 나무 곁을 지나치시며 이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럼 그 때가 언제입니까?
유월절 며칠 전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양력 3월말 내지 4월 초순 경입니다.
무화과 나무가 도저히 열매를 맺을 절기가 아닙니다.
무화과나무는 3월에 잎이 나서 6월에 가야 열매를 맺습니다.
말하자면 무화과 나무 자체로선 아무 죄가 없었다는 뜻입니다.
또 예수님이 보이신 다른 모든 이적은 생명을 살리는 긍정적 성격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이 이적만은 유일하게 그 성격이 부정적이고 파괴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건은 해석하기가 조금 까다롭습니다. 

물론 결과적으로 따져서 질문자께서 해석하신 대로 성도가 신앙 생활의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 저주를 받게 된다는 뜻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의 모든 구절과 사건에 그런 원론적인 해석이 적용되지 않는 부분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그런 가장 기본적인 교훈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목적이었다면 구태여 이런 이상해 보이는(?) 기적까지 동원하실 필요는 없었을 것입니다. 

해석의 전제

예수님이 보이신 모든 이적은 그 하나하나마다 독특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각 이적의 의미를 정확히 알기 위해선 당시의 전후 상황을 잘 분석하여 전체 문맥과 연결하여 살펴 보아야 합니다. 이 사건 해석에 필수적으로 감안해야 할 몇 가지 참고 사항부터 먼저 정리해 보기로 합시다. 

우선 예수님이 무화과 나무가 이제 겨우 잎이 나기 시작했고 열매를 맺을 시점이 아니라는 것을 몰랐을 리는 없었을 것입니다. 알고서도 그 나무를 저주했다면 괜히 죄 없는 나무에다 당신이 시장하신 것을 화풀이 한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실제로 이 사건의 평행 구절인 마가복음 11:13에선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고 그 사실을 분명하게 기술해 놓았습니다. 그렇다면 본인의 시장했던 사정과는 상관 없이 그 이적을 통해 제자들에게 어떤 다른 가르침을 주시려는 목적이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렇다고 제자들에게 단지 신앙 생활에 열매를 잘 맺으라는 원론적 가르침을 주려 했다면 나중에 무화과나무가 마른 이유를 제자들에게 설명한 내용과 잘 일치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질문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고 믿음에 바탕을 둔 기도와 이 사건을 연결시켰습니다. 만약 성도가 열매를 맺지 못하면 심판 때에 저주를 받는다는 식의 해석으로 그쳐버리면  역설적으로 따져 어떤 결론에 이르게 됩니까?  성도가 믿음이 약한 기도를 해서 비록 비유이긴 하지만 무화과나무가 마르거나 산이 바다에 던지우는 식의 큰 이적이 일어나지 않는 것으로도 심판 받아야 한다는 말이 되어버립니다. 

무화과나무는 포도나무와 함께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과수 나무로 항상 이스라엘 백성 전부를 상징하는 의미로 쓰입니다. 대표적인 구절로 "옛적에 내가 이스라엘 만나기를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같이 하였으며 너희 열조 보기를 무화과나무에서 처음 맺힌 첫 열매를 봄같이 하였거늘 저희가 바알브올에 가서 부끄러운 우상에게 몸을 드림으로 저희의 사랑하는 우상같이 가증하여졌도다"(호9:10)를 들 수 있습니다. 물론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에서 보듯이 간혹 성도들 개인의 신앙 생활을 의미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의 무화과나무는 특정 개인과 연결해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므로 성도 개인의 성화와 관계 없이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전체의 영적인 상태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의미는 당신의 설명에 무화과나무 사건과 기도를 연결하셨듯이 반드시 기도와 연결되는 어떤 내용과 또 무화과 나무가 상징하듯이 이스라엘 전체의 어떤 영적 상태와도 관련 되는 내용 두 가지는 반드시 포함되어야 합니다.   

왜 예수님은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는가?

앞에서 해석의 두 가지 전제 조건을 살펴 보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왜 예수님이 죄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했는지 그 원인을 밝혀내지 않고는 정확한 뜻을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당시 마음을 감히 우리가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앞뒤 상황을 잘 살펴서 말씀과 연결해 보면 어느 정도 짐작할 수는 있습니다. 

앞뒤 문맥을 따져 본다는 것은 무화과나무 사건을 하나의 독립된 사건으로 보느냐 아니면 앞 뒤 사건과 종속된 사건으로 보느냐를 구분하는 것이며 또 그에 따라 뜻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독립된 사건으로 보면 몇 번 언급된 대로 신자의 신앙 생활에서 열매가 없는 것을 심판하신다는 원론적인 해석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성도 개인들의 믿음 생활에 열매가 없음을 상징하기 위해 잎만 있고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를 택한 것으로 그칩니다. 

그러나 이 사건을 시간별로 더 구체적으로 기록해 놓은 마가복음(11:12-25)을 보면 이 이적은 그 앞에 있었던 성전 청소 사건과 동일한 맥락에서 일어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 청소를 위해 성전으로 들어가는 날 아침에 나무를 저주하셨고 성전에 들어가 청소를 하신 후에 저물매 성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그 나무 앞을 지나갈 때에 베드로가 뿌리로부터 마른 것을 보고 왜 저주하셨는지 질문 했습니다. 무화과나무 사건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이틀에 걸쳐 진행되는 동안 그 사이에 성전 청소 사건이 삽입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럼 어떤 결론에 이르게 됩니까? 무화과 나무 사건은 별개의 독립된 사건이 아니라 성전을 청소한 사건의 의미를 더 구체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연출한 사건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21:13에서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시면서 성전을 청소하신 후에 다시 믿음에 바탕을 둔 능력 있는 기도에 관한 말씀으로 무화과나무 사건을 결론지으셨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당시의 상황을 한 번 재구성 해 봅시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입성 첫날 성전에 올라 가보고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어야 할 성전이 강도의 굴혈로 바뀌어져 있음을 보고 분노를 금치 못하셨습니다. 아마도 첫날 성으로 들어 가실 때나 성밖으로 유하러 베다니로 가실 때도 분명히 그 무화과나무를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밤새도록 이스라엘 백성들의 외식적인 종교 행위에 대해 너무나 안타까이 여기며 앞에서 예로든 호세아서의 말씀에 표현된 그런 하나님의 심정을 가지고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 날 아침에 무화과나무를 다시 보자 열매 없는 성전 제사의 종교행위를 비유하기에 적합한 상징물로 보고 저주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성전에 올라가 장사치들을 몰아 내셨고 그 후 셋째 날 아침에 그 의미를 제자들에게 풀어 주셨습니다.(참고로 마태복음은 바로 그 자리에서 잎이 마른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저자 마태는 자신의 복음서 전체에 사건의 연대기적 기록보다 구약의 율법과 연결된 사건의 의미를 기술하는 데 더 초점을 두었습니다. 따라서 이 사건의 전체적 순서는 마가복음을 따르는 것이 정확합니다.) 

성전과 무화과나무 

당시는 유대 각지와 이방 나라에 흩어졌던 유대인들이 절기 때마다 제사를 드리러 예루살렘 성전으로 일년에 몇 차레 모였습니다. 그래서 외국에서 온 유대인들이 성전세를 바칠 수 있도록 외국 화폐를 유대 화폐로 바꿔주는 환전상과 먼 여행 길에 희생제물을 갖고 올 수 없으므로 제물을 파는 장사치들이 있었습니다. 성전 뜰에서 그런 장사를 하기 위해선 대제사장의 허락을 받아야 했으므로 자연히 장사한 이익금의 일부를 뇌물로 바치게 되었고 또 폭리를 취해야 그런 뇌물 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전 장사치를 다 몰아낸 후에 성전에서 가르치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가로되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뇨"(마21:23)라고 따졌습니다. 성전에서 무슨 일을 하든 반드시 그들의 허락을 먼저 받아야 하는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성전 청소 사건으로 주수입원이 사라진 대제사장들과 그 권속들은 그 이후로 어떻게 하면 예수를 잡아 죽일까 모의하게 됩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무화과나무 사건 이후로는 줄곧 바리새인, 사두개인, 헤롯 당, 대제사장 그룹 등과 천국과 구원에 관한 논쟁을 벌이며 그들의 위선과 가식을 지적하고 야단치셨습니다. 마지막 고난 주간 내내 예수님은 형식적 기복신앙으로 바뀐 이스라엘의 영적상태에 대해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그런 가식적 종교의 중심지가 되어 아무 쓸모 없이 허울만 남게 된 성전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라고 성전 파괴를 예언합니다.(마24:1)  

성전에 제사 지내러 오는 유대인들은 흠이 있든 없든 무조건 제물만 바치면 하나님께 복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그들을 지도해야 할 영적인 지도자들조차 하나님의 신령한 일에는 아무 관심이 없고 자기들의 배를 채울 궁리만 했습니다. 로마 제국과 결탁하여 자기들 기득권을 유지하고 확대하기에 바빴고 성전에서 하는 모든 일들을 이권과 연결시켰습니다. 호세아 선지자가 탄식한 그대로 돈이 우상이 되었고 성전은 그 돈을 숭배하는 강도들이 우글거리는 소굴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사장들과 장사치들의 부정한 거래만 성행하는 성전 중심의 외식적 종교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고 오히려 하나님의 영원한 저주를 받는다는 것을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이적으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나아가 진정한 믿음에 바탕을 둔 능력 있는 기도는 찾아 볼래야 찾을 수 없고 단지 형식적이고도 문자적인 율법 준수와 성전 제사에만 매달려 있는 구약의 유대교로선 더 이상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수 없음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율법을 통한 인간적 공로가 아니라 십자가 복음에 드러난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 받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 사건을 풀어 설명한 마가복음의 기록에 따르면 성도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님을 믿는 믿음"(11:22)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온전한 믿음이 있다면 얼마든지 능력 있는 기도를 할 수 있고 제사장들이 강도의 굴혈로 바꿔 놓은 성전을 다시 기도하는 집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건물로서 성전은 없어져도 능력 있는 기도는 계속해서 성도들의 믿음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협의가 있거든 용서해 주라고 했습니다.(11:25) 유대종교 지도자들은 장사치들로부터 뇌물을 받았고 이권을 다스리는 권세로 가난한 자와 이방인들 위에 군림했습니다. 이에 반해 이제 복음 안에 믿음으로 들어오는 성도는 이웃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책임을 갖고 세상을 대하라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다시 말하면 무화과나무는 외식적 형식적 종교행위에 의존한 부패한 유대 종교와 강도의 굴혈로 바뀐 성전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이 영원토록 열매 맺지 못할 것이라고 저주한 까닭은 이제 곧 성전은 파괴 될 것이며 율법 시대는 끝이 나고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 복음의 시대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믿음으로 기도하면 얼마든지 능력 있는 열매를 맺을 것이며 특별히 이웃을 용서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말해 무화과나무의 이적 사건은 강도의 굴혈과 기도하는 집을 극명하게 대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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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심(마태복음 21:18-22)

방탕한 유대교들에 실물 교훈

형식적인 신앙의 실체 일깨우심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란 책을 쓴 버트란드 러셀은 영국이 낳은 유명한 철학자요 저술가였다.
그는 자신이 기독교인이 될 수 없었던 이유를 「예수님이 말 못하는 무화과 나무를 저주한 그 행위를 자기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비이성적 그리고 비윤리적 처사로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과연 러셀만 그렇게 생각할까?
우리 또한 이 본문을 대할 때 예수님은 왜 사람도 아닌 나무를 저주하여 뿌리까지 말라죽도록 하셨을까.

예수님은 유월절이 되어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계셨다.
베다니에서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다가 시장하신 지라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 나무 곁에 가시어 열매를 구했으나 그 나무는 잎만 무성 했지 열매가 없었다.
예수님은 그 열매 없는 나무를 저주하시고 그 길로 예루살렘 성전으로 들어가 성전을 깨끗하게 하시고 다시 성전 밖으로 나오셨다.

예수님이 본문에서 몰인정하게도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은 무화과 나무 자체를 저주하신 것이 아니었다.
이 열매 없는 나무에 대한 주님의 심판을 통해 외식과 형식주의에 빠져 있는 당시 유대교도들을 비유해서 책망하신 것이다.

무화과나무에 대해 저주함으로써 이스라엘에 끝내 열매를 맺지 못하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가의 저주받은 무화과와 같은 운명을 피할 수 없음을 두고두고 기억시키기 위한 실물교훈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끝내 이 경고를 무시하고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배척하고 십자가 위에 처형하지 않았던가.
그 죄의 대가는 무엇이었는가.
하나님이 보내신 그 독생자를 십자가 위에 처형한 대가는 로마 군대에 의해 철저하게 보상받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기사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인가.
잎은 무성하나 열매가 없는 나무 그것은 신앙의 모양은 있으나 신앙의 실재가 없는 오늘의 우리 크리스천의 모습이 아닐까.
우리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가까이 오시어 신앙의 실재인 그 열매를 요구하심을 기억해야 한다.

Ahiqar 史話(기원전 5세기의 것으로 확인됨)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 아들아, 너는 물가에 서 있으면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와 같다.
이제 주인은 그 나무를 베어 버려야 하게 되었다.
그 때 그 나무가 주인에게 말했다.
나를 옮겨 심어 주세요.
그 때에도 내가 열매를 맺니 못하거든 나를 베어버리세요.
그러나 그 주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네가 물가에 서 있으면서도 열매를 맺지 못했거늘 어찌 다른 장소에 옮겨진다고 열매를 맺겠는가?"

예수님은 이러한 民話를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이 민화에서는 무화과나무의 간청이 거부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인자가 곧 문 앞에 가까이 온 것으로 회개의 기회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συκῆ, ῆς, ἡ 스트롱번호 4808

1. 무화과나무.   2. 마 24:32. 3. 막 13:28
발음 [ sükē ]
어원  /  4810에서 유래
  • 1.  무화과나무, 마24:32, 막13:28, 눅13:6, 21:29, 요1:48, 약3:12, 계6:13.
  • 관련 성경무 / 무화과나무(마21:19, 요1:48, 계6:13).



무화과 나무는(συκιά) 이스라엘의 포도원 근처나 길가와 집뜰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무이다.
성경에는 무화과나무(Ficus carica)에 대한 언급이 자주 나타난다. 특히 예수님은 여러 비유와 예화들에 무화과 나무를 사용하셨다. 이 나무의 잎사귀는 매우 일찍 돋아 나므로 봄을 알리는 전령이라 할 수가 있다. 열매는 가을에 지는 넓은 잎사귀들 사이에서 여름 동안에 익는다. 무화나 나무는 이 무화과 위에 애굽 무화과(Ficus Sycomorus)가 있다.

예수님 시대의 무화과 나무는 이스라엘 전역에 유실수로 평범한 것이었습니다. 특별히 Bethphage(무화과 나무들의 집)이 위치한 예루살렘 근처는 더욱 그러했다.
무화과 나무는 히브리어로 "테에나"이며 헬라어로는 "수콘", 덜 익은 무화과를 "팍가"라는 말로 아2:13절에 사용되었다. 무화과 나무는 구약에서"테에나"로 23번, 신약에서 "수케"로 16번 언급되었습니다. 무화과 학명은 피쿠스 카리카(Ficus carica)입니다. 무화과 나무 열매는 즙이 많고 열매를 자르지 않으면 꽃을 볼 수 없도록 생겼다. 무화과는 둥근 종류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배와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다. 무화과 나무는 계절에 따라 일정하게 두 차례 열매를 맺는데 5,6월에 익는 일반적인 겨울 무화과가 있고 8,9월에 익는 여름 무화과가 있다. 매년 4월쯤 입이 나타나며 열매의 싹은 2월쯤 볼 수 있습니다. 팔레스틴에서는 1년에 9-10개월 이상 열매를 딸 수 있다는데 어린 무화과 나무는 겨울에 얼어죽어 첫 번째 열매는 딸 수 없다. 예수님 당시에는 여러 종류의 무화과 나무가 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무화과 나무는 더운 지방에서 무상한 커다란 잎사귀와 고마운 그늘을 제공해 준다. 우물 옆에 심겨진 무화과 나무를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올리부나 잡목, 그리고 감람 나무와는 달리 무화과 나무는 겨울이 다가오면 잎을 떨어진다. 그리고 다른 여러 낙엽송들이 봄철에 일찍이 생명의 신호를 보여주기 시작할 때도 무화과나무는 그 앙상한 가지를 여름이 오기 직전까지 하늘을 찌르고 있다. 그리고는 눈이 나고 봉우리가 터져 며칠만에 부드러운 잎이 나옵니다. 자연은 살인적인 밤의 추위는 지나가고 여름철이 왔다고 전해진다.

예수님은 4월 첫 주 동안에 싹이 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가르치셨는데 바로 그 때가 무화과 나무에서 생명의 첫 신호를 보여주는 시기이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마24:32) 이 말씀은 청중들이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이야기 였다.



예수를 믿고 변한 것이 무엇인가?




변하여 새사람 되라(사무엘상 10:6-8)


얼마전 새벽에 기도하던 중에 이런 음성이 들렸습니다.
네가 예수를 믿고 변한 것이 무엇이냐?
예수를 믿기 전과 후에 변한 것이 없습니다.
문제는 믿는다고 하면서도 바뀌지 않는 삶이 과연 믿는다고 말할 수 있는가? 

야채(식물)인간

아들이 사로고 뇌를 다쳐 식물인간이 되었는데 문병 온 어떤 사람이 얼굴 하나 가득 애처로운 표정을 지으며 “어쩌다 아드님이 야채 인간이 되었어요?”라고 어렵게 물어보더랍니다.
너무 어려우면 뭐라고 말하기가 어렵고 하던 말도 잘 안될 때가 있습니다.
날은 더워지고 있지만 우리의 마음은 눈꽃빙수처럼 시원한 여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박사보다 높은 자리 봉사

대학에 가서 4년동안 열심히 공부하면 학사가 되고, 대학원에가서 2-3년 공부하면 석사가 되고 그 위에 연구를 더 하면 박사가 됩니다. 그런데 그 박사가 끝이 아니랍니다.
박사 위에 더 공부를 해야 밥사가 된답니다.
누군가를 위해 밥을 한 그릇 대접하는 사람이 박사보다 높은 사람이랍니다.
그런데 밥사보다 높은게 감사랍니다. 하나님이 주신 복, 하나님께 받은 복을 감사하며 사는 사람이 박사, 밥사보다 높은 사람이랍니다. 그런데 감사보다 높은 것은 봉사랍니다.
내 손에 있는 것을 주머니에 넣지 않고 누군가를 위해 내 놓고 헌신하는 사람이 가장 큰 사람이랍니다.
밥도 사고, 감사도 하고, 봉사도하는 축복받은 하나님의 자녀, 주님의 제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라를 구한 기브아의 사울

기브아땅에서 농사하던 사울이란 사람이 일을 마치고 소를 몰고 돌아오는 길에 통곡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온 동네가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암몬사람 나하스가 이웃 마을 야베스 사람들의 오른 눈을 죄다 빼가겠다는 것입니다(11:2).
항복하고 섬기겠다는데도 듣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 이스라엘을 모욕을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사울은 저 깊은 곳으로부터 솟아오르는 분노를 느꼈습니다.
내가 여기 이렇게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가만히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자리에서 끌고가던 소 한 겨리를 때려 잡았습니다.
갈기갈기 찢어 각을 떴습니다.
핏물이 줄줄 흐르는 고깃덩어리를 사람들 손에 들려 이스라엘 모든 지역으로 보냈습니다.

 “누구든지 나와서 사울과 사무엘을 따르지 아니하면 그의 소들도 이와같이 하리라” (11:7)

이 소리를 듣고 온 이스라엘에서 330,000명이 모여들었습니다.
사울은 이들과 함께 일어나 암몬 진영으로 들어가 모두 쳐부수니 모두 도망가고 흩어져 “둘도 함께한 자가 없었다(11:11)”고 했습니다. 젊은 사울이 이스라엘을 암몬으로부터 지켜냈습니다.

이를 지켜본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야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웠습니다.
다윗과 솔로몬으로 이어지는 통일왕국시대를 열면서 그는 “나라를 새롭게 하자(11:14)”고 했습니다.

왕이 된 사울

사울은 키가 크고 준수한 젊은이였습니다.
그러나 시골에서 아버지를 도와 농사하던 사람입니다.
그가 왕이 된 것은 하나님의 선택이었습니다.

하루는 집에서 기르던 나귀가 없어졌습니다.
그 나귀를 찾으러 친구와 함께 나섰는데 아무리 찾아도 찾지를 못해 시간만 보냈습니다.
급기야 나귀는 고사하고 아들을 걱정할 아버지 생각에 그냥 돌아가려 하다가 선지자 사무엘을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말씀을 전하던 사무엘은 사울을 끌어안고 기도했습니다.
지금은 비록 나귀를 찾는 시골 젊은이지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어려움에 처한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크게 쓰임받는 지도자가 되라는 축복기로를 해 주었습니다.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크게 임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신 말씀이 “변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10:6)”는 것입니다.
이 한 마디의 기도와 축복이 나귀 찾던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였습니다.

변하여 새사람이 되리라

1) 사울

 

사울은 이스라엘 12족속 가운데 가장 작은 베냐민 족속입니다. 베냐민 족속 가운데서도 작은 집안 기스의 아들(9:21)입니다. 그러나 사무엘 선지자는 그를 하나님께서 정하신 왕으로 여겨 청한 자 중 가장 상석에 앉게 했습니다(9:22).

하나님은 나귀 찾아 산을 헤메던 사울을 불러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한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하여 쓰임 받는 일꾼으로, 쓰셔야 할 청지기로 부르셨습니다. 변하여 새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는 물고기 잡던 베드로를 불러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 반석위에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렇게 세우신 온 세계의 셀 수 없는 교회마다 사람으로 가득 채우셨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거듭나 변하여 새사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베드로가 성전에 들어가는 길에 38년 동안 앉아있어 걸어보지 못한 앉은뱅이를 만났습니다.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으켜 걷게 하였습니다. 변하여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식물인간이 채소인간 되는 것은 변하는 것 아닙니다. 식물인간이든, 채소인간이든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그 기쁨과 즐거움을 소리높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변화입니다.

 

2) 종교개혁 500주년

 

1,500년 된 교회는 더 이상 주님이 원하는 교회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으로 돌아가자, 주님께로 돌아가자, 교회로 돌아가자고 외치며 새로운 교회를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출발한 개신교회는 이제 500년이 되었습니다. 개혁 된지 500년 된 지금 교회의 모습은 과연 온전한가? 우리 스스로 돌아보고 반성하면서 소리 없는 종교개혁, 교회개혁, 신앙생활개혁을 이루어야할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나라를 새롭게 하자(11:14)

사울은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 하나님의 “나라를 새롭게 하자(11:14)”고 했습니다. 나라를 바꾸는 것은 흙을 퍼 나르는 것 아닙니다. 이땅 저땅을 바꾸자는 것도 아닙니다.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이 바뀌는 것입니다. 세상을 바꾸는 건 남쪽을 북쪽 되게 하는 것 아닙니다. 내가 바르게 돌아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새롭게 하는 것도 내가 주님 앞에 말씀 앞에 바로 서는 것입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며 앞으로 3달동안 바꿔봅시다. 거듭납시다. 새로워집시다. 오직 예수, 오직 말씀,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 남겨놓고 모두 다 바꿔봅시다. 하나님의 나라를 새롭게 하기 위하여 변하여 새 사람이 됩시다.

 

♥ 교회 명칭을 바꿉시다.

이름은 석자지만 그 석자 이름 안에 그 사람의 모습과 인격 성품이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거듭나 새로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우리교회 이름을 바꾸겠습니다. 기도하면서 좋은 이름을 지어보시기 바랍니다.

 

♥ 교회 조직을 바꿉시다.

500년 되어 움직여야 할 때 움직일 수 없이 녹슨 조직, 단단하게 굳어져 굽힐수도 늘릴 수도 없는 조직을 바꿉시다. 각 기관도 정비하고, 구역도 정비하고, 각 부서도 정비해서 하나님께서 마음껏 쓰시는 교회, 주님위해 마음껏 일하는 교회로 변하여 새 교회가 되어야겠습니다. 문고리를 잡고 자신도 안 들어가고 남도 못 들어가게 하는 그런 조직을 모두 떨쳐버리고 새 술을 담을 수 있는 새 부대로 변하여 새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 교회 예배를 바꿉시다.

주님께서는 예배도 중요하지만 형제가 마음 편하게 하나되는 것을 원하셨습니다. 형제와 불화한 것이 생각나면 예배를 중단하고라도 가서 화해부터 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는 하나님의 은혜와 주님의 사랑으로 형제자매,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의 예배입니다. 지역사회를 위하여 손을 펴고, 멀리 사마리아를 향하여 주의 사랑을 전하는 예배를 원하십니다. 시간 맞춰 모였다 흩어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오여 받은 은혜 나누는 것조차 예배의 일부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구덩이에 빠진 양을 건지는 것이 주일 성수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준삼아 예배를 회복하는 변하여 새사람 되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짧게는 1달, 길게보면 4달 혹은 5년, 더 길게보면 우리 교회의 역사가 모두 어렵고 힘든 시간들이었습니다. 이번 기회, 기왕에 넘어진 것 거저 일어나지 말고 뭔가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나는 계기가 되게 합시다. 암몬의 침입으로 이스라엘에 위기가 왔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울을 왕으로 세우고 암몬을 물리쳤을 뿐만 아니라 통일 왕국시대를 열어가는 계기로 삼았습니다. 변하여 새 사람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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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하여 새 사람이 되라(사무엘상 10:6∼19

      하나님께서 선택된 사람을

      변화시키시어 새사람이
      되게 하시려고,
      여호와의 신이 
      임하도록 하십니다.
 구약시대에 여호와의 신 즉 성령님이 임하는 일은 하나님에 의해 특별히 선택된 지도자에게 때와 필요를 따라 나타나는 현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된 사람을 변화시키시어 새사람이 되게 하시려고, 여호와의 신이 임하도록 하십니다.
 그러나 새사람이란 새옷을 입었거나 몸이 건강해졌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삼상 10:9에 하나님께서 새 마음을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예수 믿고 가장 중요한 것은 새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변화된 새사람이 웃사람입니다.
 저는 5·16 군사 쿠테타 후 가나안 농군학교에 가서 훈련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 때에 누구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경기도 광주 어느 부락에 늙으신 부모님께 불효하는 불량청년이 있었습니다. 농사를 돕지도 않고, 술먹을 돈만 달라고 떼를 씁니다. 온 동네사람들이 골치아픈 사람이라고 외면합니다.
 이 청년이 어찌어찌하여 가나안 농군학교에 가게 됩니다. 농군학교 가서 설립자인 김용기 장로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조용하면서도 힘있는 말씀에 첫시간부터 눈물을 흘립니다. 감화력이 대단했습니다.
 15년동안 훈련 중 술담배는 물론 끊고 변화되었습니다. 집에 돌아가 부모님께 용서를 빌고, 다음날 새벽부터 새벽예배에 갑니다.
 다른 사람보다 먼저 나가 새벽종을 치고 호야를 닦아 예배당에 불을 환하게 켜놓습니다. 품앗이를 하며, 열심히 일합니다. 부모님은 말할 것도 없고, 교회와 온 부락에서 모두 기뻐하며 칭찬합니다.
 하루는 아버지가 아들을 불렀습니다. 아들은 무릎을 꿇고 말씀을 기다립니다. 아버지가 “네가 가나안 농군학교 다녀온 후 새사람이 되어 내가 너무 기쁘다. 그래서 너에게 선물을 주려고 하니 무엇을 해줄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들은 “어머님과 아버님이 계시는데, 제가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만두세요”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아버지가 재차 묻자 아들은 “정 그러시면 제가 다녀온 농군학교에 다녀 오시죠”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나이가 많지만 아들의 요청에 어찌어찌하여 가나안 농군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아버지 역시 김용기 장로님의 말씀에 첫시간부터 눈물을 흘립니다.
 아버지가 졸업하는 날 아들이 찾아갔습니다. 졸업식장에 앉아계신 아버지와 목례인사를 했습니다.
 졸업식이 끝난 후 에서와 야곱처럼 달려가 아버지와 아들은 목을 껴안고 한참 울었습니다.
 한참 울다 아들이 말했습니다. “아버지, 젊은 사람들과 함께 훈련받으시느라 고생많으셨죠.”
 아버지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지금 아버지라고 했느냐?” “예 아버지”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버지는 “나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네가 내 아버지다” “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농군학교에 와서 배우고 보니 낳았다고 아버지가 아니라 먼저 변한 사람이 아버지더라.”
 먼저 변한 사람이 아버지요, 먼저 변화된 사람이 어른이요, 먼저 변화된 사람이 스승이요, 지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막 10:31에 먼저 된 자로서 나중되고, 나중된 자로서 먼저 될자가 많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나이, 지위, 계급, 재물 등으로 웃사람이 되지만, 성경적으로는 먼저 변화된 사람이 웃사람입니다.
 여우는 흰머리가 나도 착해지지 않는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사람도 흰머리가 나도 변하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제가 목회를 처음 시작했을 때가 생각납니다. 성도들은 목사님이라 부르면서 순종하는데, 가정에서는 교역자로 인정받기 힘들었습니다. 신학공부를 10여년 하고, 기도생활도 게을리 하지 않았으나, 변화되지 못했습니다.
 성자까지는 생각할 수도 없으나, 흉내라도 낼 수 있었으면 하고 그때부터 목회방향을 바꾸었습니다. 교회를 부흥시키고, 성전을 건축하려던 계획을 미루고 첫째 내 자신의 목회, 둘째 가정목회, 세번째 교회목회로 바꾸었습니다. 오직 자신의 변화를 위하여 기도하던중에 성경에 제시된 사랑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사랑의 은사도 받게 되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사랑이요, 은혜이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제가 결정한 것 중에 가장 잘한 것은 그때 목회방향을 바꾼 것이라 생각됩니다.
 웃사람은 변화되어 새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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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복음에 대한 반응이 다릅니다.
그런데 사무엘이 사울 왕에게 말한 것처럼 “변하여 새사람이 되리라”는 말씀이 사울 시대뿐 아니라 오늘날도 이뤄진다는 것을 믿는다면 많은 것이 변화될 것입니다.

빌립보 감옥의 간수,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변합니다.
사도행전 16장 31절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한 번 듣고 변화됐습니다.
여기뿐 아닙니다.
사도행전 8장 에티오피아 내시 간다게, 이 사람 어떻습니까? 빌립집사의 말을 듣고 한 번에 변합니다.

예수님을 만났던 사마리아 여인인 수가성 사람, 한 번 듣고 변합니다.
예수님을 많이 만난다고 해서 변하는 것이 아니라 단 한 번 만나도 아주 명확하게 변한다는 것입니다.
한 순간에 제대로 만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대해야 합니다.
“변하여 새사람 되는 기쁨”
이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예수님 만나고 변할 수 있습니까?
세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첫째, 핑계 대지 말아야 합니다.

바디매오가 하나님 앞에 이렇게 말했다고 가정해봅시다. 나는 너무 가난해, 너무 가난해서 돈 벌고 난 다음에 예수 믿어도 늦지 않아.
나는 지금 바빠, 이 일을 마치고 난 다음에 예수님 믿어도 늦지 않아.
이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기회는 흘러가는 것입니다. 잡을 수 없습니다.
기회가 왔다면 반드시 붙잡아야 합니다.

바디매오의 직업이 무엇입니까? 거지입니다.
거지가 수지맞는 날은 사람들이 많이 지나가는 날입니다. 만약에 바디매오가 구걸이 목적이었다면 이때가 가장 최상의 기회입니다.

예수님 다음번에 만나고 지금은 사람들에게 돈을 구하는 것이 우선순위로 생각했다면 여전히 그는 맹인이었을 것입니다.
내 인생도 이와 같습니다.

주님이 날 부르시는 타이밍을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만날 때는 내 인생의 중요한 일과 겹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업이 잘되거나, 예수님 만나러 갈 때 괜찮은 형제나, 자매를 만납니다.
꼭 그때마다 뭔가 잘됩니다.
보통 때는 이런 일도 없다가 갑자기 나타나서 오빠 커피 한 잔 안 사줄래? 이렇게 나옵니다. 이런 음성은 사탄의 음성을 듣기 바랍니다.
이것은 중요합니다.
고린도후서 6장 2절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할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지금,  지금입니다.
주님이 날 부르시는 타이밍을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 살 때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영적으로 귀중한 일이 있을 때 나는 핑계 대지 않겠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예배입니다.

평생 예배는 삶의 우선순위를 두겠습니다. 하는 사람은 언제나 영적 유익을 누립니다.
그런데 예배도 많고, 새벽부터 예배하고, 이 교회는 목사가 말씀도 많이 전하네, 그래서 여러 가지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는 사람, 꼭 보면 안 나왔을 때 교회가 부흥합니다.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언제나 예배를 사모하고 핑계 대지 않고 나아갈 때 주님이 만나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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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10:1~13

하나님의 메시지

 

 

오늘은 ‘하나님의 메시지’라는 제목으로 여러분과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서 1장부터 9장까지의 말씀들을 통해 우리에게 세 가지의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1) 한나의 흉년을 통한 메시지입니다.

2) 언약궤의 빼앗김을 통한 메시지입니다.

3) 사울의 잃어버림을 통한 메시지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메시지들이었습니까?

한나의 흉년을 통해서는 ‘사무엘’이라는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언약궤를 통해서는 ‘심판’이라는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사울의 이야기도 하나님이 주시는 메시지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흉년의 때, 빼앗긴 고통, 잃어버린 절망처럼 고난의 모습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겉모습만 보아서는 안됩니다. 그 속에 메시지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메시지를 주시기 위해서 흉년도 고통도 절망도 일으키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우리들에게 메시지를 주시는 것일까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메시지는 우리를 하나님의 방향으로 이끌어 주tl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건과 때를 일으키시고 그것들을 통해서 우리를 우리가 가야할 방향으로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신앙생활을 하시면서 어떤 메시지를 받으셨습니까?

어떤 방향으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이끌어 가려고 하시는지를 만나보셨습니까?

신앙의 초보일 때는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구하는 신앙’을 가집니다. 그러나 신앙이 성숙할수록 하나님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의 방향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은 어떤 메시지를 주시려는 것일까요?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세우시는 말씀입니다.

 

10장 전체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왕으로 세우시면서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하고 계십니다. 첫째가 기름부음입니다. 사무엘을 통해서 사울에게 기름을 부으셨습니다. 이것을 위해서 암나귀를 잃어버리게 하셨고, 사무엘에게로 이끄셔서 결국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게 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제비뽑기입니다. 모든 백성들 앞에서 지파 중에서, 가문 중에서, 남자 중에서 제비를 뽑게 하셨고 결국 사울이 뽑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왜 두 가지 방법을 모두 사용하시는 것일까요? ‘기름부음’은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를, ‘제비뽑기’는 ‘확실한 증거’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사울은 세우시면서 사울에게 ‘섭리’와 ‘증거’의 두 가지 방법 모두를 사용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두 가지를 통해서 하나님은 사울에게 너무나도 분명한 메시지를 주시는 것입니다.

 

너는 내가 세운 왕이다’라는 말씀이 아닐까요? 사울은 자기 힘으로 자기의 능력으로 세워진 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울은 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항상 기억해야 했습니다. 왜입니까? 그것이 사울은 하나님의 방향으로 이끌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잃어버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울은 방향을 잃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메시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1. 암나귀를 찾으리라

  

   네가 오늘 나를 떠나가다가 베냐민 경계 셀사에 있는 라헬의 묘실 곁에서 두 사람을 만나리니 그들이 네게 이르기를 네가 찾으러 갔던 암나귀들을 찾은지라’(2절)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서 사울에게 가장 먼저 주시는 말씀은 잃어버린 암나귀에 대한 것입니다. 암나귀를 다시 찾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왜 하나님은 잃어버린 암나귀에 대해서 다시 말씀해 주시는 것일까요? 암나귀는 그냥 암나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메시지를 통해 사울을 사무엘에게로 이끌었던 싸인이었기 때문입니다.

 

  < 여러분과 저의 신앙생활에도 하나님이 일으키셨던 어떤 일을 경험하고 하나님이 그 일 속에서 일으키셨던 싸인을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저와 아내는 무지개를 볼 때마다 하나님이 주셨던 싸인을 기억합니다. 제가 34살이 되어 교회 개척을 하면서 저희 부부는 사실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상태였습니다. 개척하자고 제안을 받았지만 그곳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어떤 상황인지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저 기도할 뿐이었습니다. 기도를 해도 확실히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불안한 마음이 커질 때쯤 하나님은 우리 부부에게 무지개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너무나도 선명한 무지개를 본 것입니다. 잊을 수 없는 것이었기에 아내는 안 입는 청바지로 가방을 만들고 그 가방에 무지개를 수놓아서 그때부터 들고 다녔습니다. 개척을 하고서 시간이 지나서 교인들이 아내가 초라한 가방을 들고 다니는 것을 보고서 물었습니다. ‘사모님, 가방하나 사드려요? 왜 맨날 그 가방만 들고 다니세요?’ 사람들이 보기에 초라한 것이었지만 우리 부부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싸인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서야 하나님께서 무지개 싸인을 주신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개척을 하면서 어렵고 힘든 일들이 많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 어린 나이에 교회 개척을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렵고 힘든 일이 닥칠 때마다 우리 부부는 무지개를 보면서 우리들의 개척에 계시는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을 묵상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엑 무지개 싸인을 주셨던 것입니다.  >

 

저는 사무엘의 이야기 속에 있는 ‘암나귀’가 바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무엘에게는 암나귀 사건이 그냥 쉽게 잊어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아니 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울이 꼭 기억해야 하고 붙들고 있어야 하는 하나님의 싸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바라볼 때마다 자신이 왕이 된 것에 분명한 하나님의 일하심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메시지가 그 속에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하셨다는 메시지입니다. 사울의 인생 속에 하나님이 하신 일이 암나귀 사건을 통해서 각인된 것입니다. 절대로 그 암나귀는 그냥 잊혀질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메시지를 사울에게 주시기 위해 다시 찾아주시는 것입니다. 그냥 암나귀가 아니라 하나님의 메시지이기 때문입니다. 사울이 붙들고 가야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2절 말씀에 ‘라헬의 묘실 곁에서 두 사람을 만나리라’는 말씀을 통해 메시지를 더욱 분명히 하시는 것입니다. 라헬의 묘실은 베냐민 지파에게는 기념비적 장소입니다. 창 35장을 보면 야곱이 베들레헴 에브랏으로 가는 도중에 라헬이 베냐민을 낳고 산고로 죽습니다. 그곳이 바로 라헬의 묘실이고 베냐민 지파가 태어나고 나중에 차지하게 된 땅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중요한 곳에서 사울은 알지 못하는 두 사람을 만나고 암나귀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암나귀를 찾으리라’는 말씀은 사울에게 주시는 분명한 하나님의 메시지였습니다. 사울이라는 청년을 하나님께로 이끄는 메시지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잊을 수 없는 2020년입니다. 코로나 19로 인해서 모든 것이 멈추어진 시간입니다.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우리 각자에게 그리고 도한 교회에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2. 떡 두 덩이를 그 손에서 받으리라

 

  네가 거기서 더 나아가서 다볼 상수리 나무에 이르면 거기서 하나님께 뵈려고 올라가는 세 사람이 너와 만나리니 하나는 염소 새끼 셋을 이끌었고 하나는 떡 세 덩이를 가졌고 하나는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가진 자라 그들이 네게 문안하고 떡 두덩이를 주겠고 너는 그 손에서 받으리라’(3~4절)

 

  오늘 두 번째 말씀을 읽으면서 오해 하나가 해결되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저에게 질문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목사님 하나님은 왜 다윗만 사랑하시고 사울은 그렇게 미워하셨나요?’라는 것입니다. 저도 역시 그렇게 생각한 적이 많습니다.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간음하고 우리아까지 죽인 다윗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다윗을 편애하신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 오해가 다 풀렸습니다. 하나님은 편애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공평히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아니 오히려 사울에게 더 큰 은혜를 주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볼 상수리 나무는 베냐민 사람들이라면 다 아는 나무라고 합니다. 벧엘로 가는 길에 있는 유명한 나무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하나님께 희생 제사를 드리러 올라가는 세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성경은 이들이 한 사람은 염소 새끼 셋을 이끌고, 한 사람은 떡 세 덩이을 가졌고, 한 사람은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가졌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예물은 왕께 드리는 예물,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을 의미합니다. 마치 동방박사 세 사람이 예수님께 드린 예물과도 비슷합니다.

 

  그런데 사울이 이런 예물을 가진 자들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하시고 그들이 떡 두덩이를 사울에게 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그들이 하나님께 드릴 예물 중에서 사울에게 떼어 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사울의 느낌을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사울의 느낌은 어떠했을까요? 하나님께 드릴 예물을 자신이 받았을 때의 느낌이 어떠했을까요? 좋기만 했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내가 받았구나...”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 저 역시 이런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성도들에게서 사랑을 받을 때입니다. 제가 받을 것이 아닌 데 큰 사랑을 받으면서 저도 사울처럼 느낍니다. 그 때마다 묵직한 감동이 찾아옵니다. 성도들이 준 것이지만 성도들의 손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것임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

 

 사울이 떡 두 덩이를 받는다는 말씀이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셨다는 고백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모두가 기억해야 할 말씀이 아닐까요? 사울만 떡 두 덩이를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부족한 자에게 사랑을 주시는 분입니다. 받을 자격이 있다고 여기는 자에게 주시는 사랑이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사울의 손에 떡 두 덩이를 주시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네가 부족하지만 내가 네 손을 붙들고 있다”는 메시지가 아니겠습니까?

 

 은혜에만 능력이 있습니다. 은헤는 우리를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합니다. 사울이 받은 떡 두 덩이의 은혜가 그것입니다. 그것이 항상 사울을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떡 두 덩이를 손에 들고서, 하나님께 받은 그 귀한 것을 받은 사람으로 살아가라는 하나님의 메시지이기 때문입니다.

 

 

 

 

 

3. 변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

 

 네게는 여호와의 신이 크게 임하리니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6절)

 

  암나귀를 찾고 떡 두덩이를 받은 사울이 하나님의 산에 이를 때에 일어난 일입니다. 사울이 여호와의 신을 입고 예언을 하며 변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이제는 누구를 만나고 누구를 사귀어야 합니까? 누구를 만나고 누구를 사귀어야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 신실한 사람들을 만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이제 사울은 암나귀 염려도 내려놓게 되었고, 떠 두 덩이로 영적 자존감도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은혜도 받고 체험도 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변한 새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무엇이 변한 새 사람입니까?

 

 ‘여호와의 신을 입고 예언을 하며 변한 새 사람’입니다. 결국 ‘변한 새 사람’이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은혜보다 체험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동행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은혜를 유지시키고, 체험을 지속하게 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지난 주간 누가복음 24장 48~49절을 묵상하면서 받은 말씀이 그것입니다.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증인의 삶을 당부하시면서 가장 중요한 것을 말씀하십니다.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라는 말씀입니다. 즉, 성령이 임하신 후에 증인의 삶을 시작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제자는 성령과 동행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은혜가 있어도, 체험이 있어도, 성령의 동행하심이 없으면 제자가 아니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울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그것입니다.

  새 사람은 변화된 사람, 즉 ‘이쉬 아헤르’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자각한 사람이란 뜻이다. 그래서 그 부르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중요한 특징이 있는 데 그것은 일을 잘하는 것이 아니라 부르신 분과의 동행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진짜로 일을 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쉬 아헤르’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메시지가 이것입니다. 사울에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울의 실패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주위 사람들입니다. 사울이 사귄 사람들, 만난 사람들이 어떠했습니까? 잘못되었습니다. 사울 주위의 사람들을 묘사한 성경 말씀을 읽어보면 사울 주위에는 귀족들 장군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사울은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을 가까이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사울이 잘못된 길을 갈 때 막아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도 함께 잘못된 길로 걸어가고 함께 망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무리 큰 은혜를 받아도 내 안에서 사라지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그러나 그 은혜를 나누어 보십시오. 더군다나 그 은혜의 깊이를 아는 사람과 나누어 보십시오. 더 큰 확신과 깊이가 더욱 크게 일어납니다.

 

  < 불 잘 붙은 장작불을 보십시오. 그러나 그 중에 하나를 꺼내놓아 보십시오. 금방 식어버립니다. 연기만 피우다가 꺼져버립니다. 그런데 불이 다 꺼져가는 숯불에 장작 하나를 놓아보십시오. 금방 새로운 불길이 치솟습니다. >

 

 하나님께서 왜 사울에게 ‘변하여 새 사람이 되라’는 메시지를 주시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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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 10:1 이에 사무엘이 기름병을 가져다가 사울의 머리에 붓고 입맞추며 이르되 여호와께서 네게 기름을 부으사 그의 기업의 지도자로 삼지 아니하셨느냐

삼상 10:2 네가 오늘 나를 떠나가다가 베냐민 경계 셀사에 있는 라헬의 묘실 곁에서 두 사람을 만나리니 그들이 네게 이르기를 네가 찾으러 갔던 암나귀들을 찾은지라 네 아버지가 암나귀들의 염려는 놓았으나 너희로 말미암아 걱정하여 이르되 내 아들을 위하여 어찌하리요 하더라 할 것이요

삼상 10:3 네가 거기서 더 나아가서 다볼 상수리나무에 이르면 거기서 하나님을 뵈오려고 벧엘로 올라가는 세 사람을 만나리니 한 사람은 염소 새끼 셋을 이끌었고 한 사람은 떡 세 덩이를 가졌고 한 사람은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가진 자라

삼상 10:4 그들이 네게 문안하고 떡 두 덩이를 주겠고 너는 그의 손에서 받으리라

삼상 10:5 그 후에 네가 하나님의 산에 이르리니 그 곳에는 블레셋 사람들의 영문이 있느니라 네가 그리로 가서 그 성읍으로 들어갈 때에 선지자의 무리가 산당에서부터 비파와 소고와 저와 수금을 앞세우고 예언하며 내려오는 것을 만날 것이요

삼상 10:6 네게는 여호와의 영이 크게 임하리니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

삼상 10:7 이 징조가 네게 임하거든 너는 기회를 따라 행하라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

삼상 10:8 너는 나보다 앞서 길갈로 내려가라 내가 네게로 내려가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리니 내가 네게 가서 네가 행할 것을 가르칠 때까지 칠 일 동안 기다리라

삼상 10:9 그가 사무엘에게서 떠나려고 몸을 돌이킬 때에 하나님이 새 마음을 주셨고 그 날 그 징조도 다 응하니라

삼상 10:10 그들이 산에 이를 때에 선지자의 무리가 그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영이 사울에게 크게 임하므로 그가 그들 중에서 예언을 하니

삼상 10:11 전에 사울을 알던 모든 사람들이 사울이 선지자들과 함께 예언함을 보고 서로 이르되 기스의 아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느냐 하고

삼상 10:12 그 곳의 어떤 사람은 말하여 이르되 그들의 아버지가 누구냐 한지라 그러므로 속담이 되어 이르되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느냐 하더라

삼상 10:13 사울이 예언하기를 마치고 산당으로 가니라

삼상 10:14 사울의 숙부가 사울과 그의 사환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디로 갔더냐 사울이 이르되 암나귀들을 찾다가 찾지 못하므로 사무엘에게 갔었나이다 하니

삼상 10:15 사울의 숙부가 이르되 청하노니 사무엘이 너희에게 이른 말을 내게 말하라 하니라

삼상 10:16 사울이 그의 숙부에게 말하되 그가 암나귀들을 찾았다고 우리에게 분명히 말하더이다 하고 사무엘이 말하던 나라의 일은 말하지 아니하니라

사막 지대에서 선교하시는 선교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선교사님이 사는 곳은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가 없는 불모지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선교사님의 사모님이 부엌 바로 뒤에서 아름다운 한 떨기의 꽃이 활짝 핀 것을 보고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했습니다. 도대체 이 기적이 어떻게 일어났을까 생각하다가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사모님은 설거지를 할 때마다 설거지한 물을 뒤뜰의 같은 장소에 매일 버리셨다고 합니다. 늘 같은 장소에 물을 주자 어느 순간 토양이 바뀌었고, 그곳에 한 씨앗이 바람에 날아와 떨어져서 어느 날 갑자기 자라기 시작하더니 드디어 아름다운 꽃을 피운 것입니다.

여러분! 한 순간에 인생이 바뀌는 것은 어렵다 할지라도 말씀과 기도를 가까이 하는 삶을 살게 되면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水滴穿石(수적천석)’이라는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물방울이 바위를 뚫는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이 매일 5분만이라도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한다면 그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그것이 5년 후, 10년 후, 15년 후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에 나오는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무엘에게 왕을 세워달라고 요청하여 하나님의 허락으로 왕을 세우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이스라엘의 왕을 세우는 중요한 과정이 세 가지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첫째, 사무엘 선지자가 사울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운 것(1절), 둘째는 사울이 제비뽑기로 모든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왕으로 뽑힌 것(21절), 셋째는 사울이 암몬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울을 지지하고 왕으로 세운 것입니다(11:15).

오늘 봉독해 드린 말씀은 이 세 과정 중에 사울이 기름부음을 받은 것, 하나님이 사울을 왕으로 택하신 증거로 보여 주신 세 가지 징조, 그리고 사울과 숙부(삼촌)와의 대화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기름 부음과 세 가지 징표를 받은 사울

사울은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구약 시대에 기름부음을 받는 사람은 세 종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왕이나 제사장 그리고 선지자입니다. 사울은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것입니다. 사무엘이 기름을 부었지만 실상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실행한 것입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기름을 붓고 하나님께서 그를 왕으로 세웠다는 세 가지 징조를 예고합니다. 그 중에 첫 번째와 두 번째 징조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사울은 라헬의 묘실 곁에서 두 사람을 만날 것인데 그들이 사울이 잃어버린 암나귀를 다시 찾았으며 사울의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는 아들을 걱정한다고 말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둘째, 사울은 다볼 상수리나무에서 벧엘로 올라가는 세 명의 순례자들을 만나게 될 텐데 그들은 각각 염소 새끼 셋, 떡 세 덩이,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가졌고 사울에게 문안하고 떡 두 덩이를 줄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연히 일어난 것처럼 보이는 이 두 가지 사건을 통해 사울은 사무엘의 기름 부음이 큰 의미가 있는 일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선 사울이 기름부음을 받은 일은 사무엘과 사울 두 사람 사이에 은밀히 이루어졌습니다. 여기에서 사울의 왕위 등극이 사람의 뜻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가운데 이루어졌다는 것을 보여 준 것입니다.

사무엘은 사울과 동행한 사환을 앞서 보내고 사울에게 기름을 부었으며(9:27), 사울 역시 사무엘에게 들은 이야기와 그와의 사이에 있었던 일을 숙부에게 비밀로 했습니다(16절). 이것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이스라엘 왕과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이스라엘 왕이 다르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징조가 이루어진 장소가 어디입니까?

삼상 10:2 네가 오늘 나를 떠나가다가 베냐민 경계 셀사에 있는 라헬의 묘실 곁에서 두 사람을 만나리니 그들이 네게 이르기를 네가 찾으러 갔던 암나귀들을 찾은지라 네 아버지가 암나귀들의 염려는 놓았으나 너희로 말미암아 걱정하여 이르되 내 아들을 위하여 어찌하리요 하더라 할 것이요

첫 번째 징조가 이루어진 장소는 라헬의 묘실 곁입니다. 라헬이 누구입니까? 야곱이 가장 사랑했던 아내가 라헬입니다. 그가 어떻게 죽었습니까? 베들레헴 길에서 막내아들 베냐민을 낳다가 죽었습니다. 난산을 한 것이지요. 그래서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베노니’라고 불렀습니다. ‘슬픔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후에 야곱이 ‘베냐민’(오른손의 아들)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이 베냐민 지파에서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을 배출하게 된 것입니다.

사울은 라헬의 묘실 곁에서 두 사람을 만납니다. 두 사람이 무슨 말을 합니까? “네 아버지가 잃어버린 암나귀를 찾았다. 아버지께서 집 나간 아들을 더 걱정하고 계신다.” 자기가 집을 나온 목적이 해결되었다는 소식과 아버지가 아들을 더 걱정하고 계신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입니다.

사람이 한 가지 징조만 가지고는 확신할 수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확실한 징조 또 한 가지를 준비하셨습니다.

삼상 10:3 네가 거기서 더 나아가서 다볼 상수리나무에 이르면 거기서 하나님을 뵈오려고 벧엘로 올라가는 세 사람을 만나리니 한 사람은 염소 새끼 셋을 이끌었고 한 사람은 떡 세 덩이를 가졌고 한 사람은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가진 자라

두 번째 징조도 구체적입니다. 장소가 어디입니까? 다볼 상수리나무가 있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을 뵈오려고 벧엘로 올라가는 세 사람을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한 사람은 염소 새끼 셋을 이끌었고, 또 한 사람은 떡 세 덩이를 가졌고 마지막 사람은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삼상 10:4 그들이 네게 문안하고 떡 두 덩이를 주겠고 너는 그의 손에서 받으리라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보여 주신 징조들은 아주 구체적입니다. 두리뭉실하게 징조를 가르쳐 준 것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시고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보여준 것입니다. 그런데 사무엘이 말한 두 가지 징조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 사울에게 세 가지 징조를 보여 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 땅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이뤄져 갑니다. 사울을 왕으로 택하신 이도, 왕으로 세워 가시는 이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 땅에서 자신의 욕심대로 자신의 뜻을 이뤄가려고 하면 안 됩니다. 오히려 겸손히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그분의 뜻을 이뤄가고자 조심스레 한 걸음씩 내딛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주저하며 미심쩍어 하는 자들에게 끊임없이 확신을 주고 격려하십니다. 바로 오늘도 하나님은 그런 그분의 백성들에게 다가오셔서 다양한 방법으로 믿음과 자신감을 불어 넣어 주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아름답게 성취되도록 역사합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어떤 방법으로 확신을 주시며 격려해 주십니까?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그 뜻을 이루고자 하신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에게 확신을 주시며 격려해 주실 줄 믿습니다.

새 사람이 된 사울

오늘 본문을 보면 세 가지 징조 가운데 특별히 세 번째 징조만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사울에게 생긴 변화를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울에게 새 마음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사울에게 크게 임하자 사울은 선지자의 무리와 함께 예언하였습니다. 사울의 변화가 너무나도 극적이고 예상치 못했던 것이어서 사람들은 눈 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보고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날 사울의 모습은 전에 알던 사울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울에게 새 마음을 주셨다고 하는데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성도의 내면을 변화시켜 그가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능력과 지혜를 공급해 주십니다.

사울이 어떻게 변화될 수 있었습니까?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삼상 10:6 네게는 여호와의 영이 크게 임하리니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

여기에서 ‘변하여’라는 말은 ‘하파크’라고 하는데 ‘돌다’(turn), ‘뒤집어엎다’, ‘바꾸다’는 뜻입니다. 하파크를 ‘변하여’라고 번역한 것은 “변화” 또는 “바뀜”을 의미한다는 점에 초점을 맞춘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크게 임하였습니다. 그래서 사울이 선지자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된 것입니다. 사울이 예언을 하며 선지자 무리와 함께 한 것은, 그가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을 선택하시고 그 사람의 내면까지 완전히 변화시킵니다.

삼상 10:9 그가 사무엘에게서 떠나려고 몸을 돌이킬 때에 하나님이 새 마음을 주셨고 그 날 그 징조도 다 응하니라

사울이 사무엘을 떠나려고 할 때 하나님이 그에게 새 마음을 주시면서 그의 변화는 시작되었습니다. 사울이 새로운 사람이 된 것은 사무엘이나 선지자 무리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한 것입니다. 사울의 공식적인 첫 모습은 ‘열국과 같은 왕’이 아니라 새 마음과 새 영을 받아 예언하는 ‘선지자 같은 왕’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사울이 성령의 감동으로 예언하는 것을 보고 놀라서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느냐?”라고 말했습니다. 사울의 변화에 대한 의혹과 놀라움을 표현한 이 말은 사울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열국의 경우와 같이 기름 부음이라는 외적 의식을 통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고 선지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 교회는 새로운 일꾼을 피택 하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일꾼을 원하십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스라엘 왕은 새 마음과 새 영으로 충만한 선지자 같은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에서 세워지는 일꾼들도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거나 새로운 환경을 만들고자 할 때 가장 중요한 요건은 ‘변화된 새 사람’입니다. 진정한 변화는 새 마음과 새 영을 위로부터 덧입을 때에만 비로소 가능합니다. 여러분이 그런 사람이 되기를 소원하십니까? 그러기 위해서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묵상하고 그분의 마음을 깨달아 순종하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영, 성령의 다스리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의 왕 되심을 인정할 때 비로소 ‘새로움’은 시작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울을 왕으로 세우시고 그에게 영으로 임하시고 신적인 능력을 부어 주셨습니다. 우리에게도 사명을 주신다면 그 일을 감당할 만한 능력을 주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실 것이니, 우리는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지혜롭게 침묵하는 사울

사울의 숙부는 사무엘이 사울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를 물었고, 사울은 자기가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 침묵은 사울의 성격을 그대로 반영한 것입니다. 그러나 문맥을 볼 때 그의 침묵은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사무엘은 초대받은 이들과 사울의 사환에게 사울의 기름 부음을 비밀에 부쳤습니다. 때가 되기 전까지는 이 일을 친척에게도 비밀로 해야 했기에 사울은 지혜롭고 겸손하게 침묵을 유지한 것입니다.

삼상 10:15 사울의 숙부가 이르되 청하노니 사무엘이 너희에게 이른 말을 내게 말하라 하니라

삼상 10:16 사울이 그의 숙부에게 말하되 그가 암나귀들을 찾았다고 우리에게 분명히 말하더이다 하고 사무엘이 말하던 나라의 일은 말하지 아니하니라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은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까지 묵묵히 기다려야 합니다. 사울은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때가 이루어지기까지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때를 잠잠히 기다린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인내가 필요합니다. 특히 주님의 뜻이 더디 이뤄진다고 느껴질 때 우리는 조급해지기 쉽습니다. 그리고 조급함이 계속되면 그 조급함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불신이나 절망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니 끝까지 인내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때에 이뤄집니다. 사울은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왕권은 아직 공표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하나님이 왕권을 선포해 주시기까지 참고 잠잠히 기다려야 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보다 앞서지 말아야 합니다. 조급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보다 앞서 가면 일을 엉망으로 만들기 마련입니다. 성도에게는 믿음의 침묵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가겠다는 겸손의 표현이며, 모든 일의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믿음의 고백인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매사에 하나님보다 한 발 뒤에서 하나님을 따라 가려고 애쓰고 계십니까? 살다 보면 자신이 주도적으로 나서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도 거기에 있는 것 같다는 생각에 서둘러 일을 진행해 조속히 해결하고 싶은 조급함이 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철저하게 경계해야 합니다. 조급함은 하나님보다 앞서려는 교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만사가 하나님의 뜻대로 이뤄지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완성하실 때까지 참고 인내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며 인내하는 동안 하나님은 이미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과정을 통해 우리의 겸손과 순종을 확인하십니다.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변화된 새사람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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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했으면 변하여 새사람이 되라! 다듬어져라!

회개 백날 하면 뭐 할 것인가?
밥먹듯 회개하고 금식하고 변하지 않는데 뭐하겠는가?
변해야 된다. 
변하지 않는 자는 세상 사람이다. 
말씀을 믿으면 변하게 되어 있다. 
지옥을 믿으면 죄를 끊게 되어 있다.

세례를 받고서도 세상구습을 끊지 못하고 사는데 그게 무슨 필요가 있는가?
교회다닌다고 새사람되는게 아니라 성령의 영감받고 순종해야 새사람이 된다.
예수믿었으면 새사람이 되어야 되고 많은 사람에게 칭찬들어야 된다.

주님은 죄를 싫어하신다. 
죄를 막 지을 때 성령께서 마음을 아프게 하신다. 
그때 회개하고 죄를 끊어야만 거듭나는 것이다.

세상 것을 탐하는 자는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하는 자다. 
그런 자는 주님의 속을 썩이는 자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속을 썩이는 자를 붙이셔서 연단시키는 것이다.

주님은 다듬어지지 않는 자는 쓰지 않는다(바닷가의 조약돌)

마태복음 3:8-9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요한복음 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에베소서 4:22-24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마가복음 1:4
세례 요한이 이르러 광야에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사무엘하 4:7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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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 사고(Biblical Thinking). 하나님의 관점(God's Eye View)



성경적 사고(Biblical Thinking)

- 성경적 사고란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생각을 바꾸면 언어가 바뀌고
언어를 바꾸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을 바꾸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이 비뀌면 운명이 바뀐다.
- 철학자 사무엘 존슨(Samuel Johnson. 1709-1784)

사무엘 존슨(Samuel Johnson, 1709년 9월 7일 ~ 1784년 12월 3일)
영국의 시인· 평론가이다.
후에 문학상 업적으로 박사 학위가 추증되어 ‘존슨 박사’라 불렀으며 17세기 이후의 영국 시인 52명의 전기와 작품론을 정리한 10권의 《영국시인전》은 만년의 대사업으로 특히 유명하다.
《워싱턴 포스트》는 지난 1000년 동안 최고의 업적을 남긴 인물 또는 작품 선정에서 그를 최고의 저자로 선정했다.
존슨은 학자· 문학자· 시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Talker Johnson’이라고도 불릴 만큼 담화의 명인이기도 하다.

사무엘 존슨의 열 가지 명언

1. 자신감은 큰일을 해내기 위한 첫 번째 필수 조건이다.

2. 여행에서 지식을 얻어 돌아오고 싶다면 떠날 때 지식을 몸에 지니고 가야 한다.

3. 지식이 없는 성실은 허약하고 쓸모없다. 성실이 없는 지식은 위험하고 두려운 것이다.

4. 사람은 자신이 읽고 싶은 책을 읽어야 한다. 우리들이 일거리처럼 읽은 책은 대부분이 몸에 새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5. 노력 없이 쓰인 글은 대게 감흥 없이 읽힌다.

6. 희망은 어떤 상황에서도 필요하다.

7. 작은 일에 거창한 말을 사용하는 습관은 피하라.

8.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적게 소비하라.

9. 나무를 보고 숲을 보지 않은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넓은 범위를 보는 데에 정신이 팔려 미래의 이익에만 시선을 빼앗기고 있으면 현재 모처럼 손아귀에 있는 기회는 고사하고 손에 들어오는 이익조차도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된다.
인생은 그렇지 않아도 짧은데 시간은 낭비한다면 더욱더 짧아진다.

10. 많은 시간을 소비하면서 인생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를 고민할 만큼 인생은 그리 길지 않다.


“예배 열심히 드리고 착하게 살면 그리스도인다워진다.”
“독서를 많이 하고 이것저것 배우면 똑똑해진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살다 보면 이전보다 나은 삶을 살게 된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믿고 있는 대표적인 신념들이다.
과연 우리는 ‘정말로’ 변화되고 있는 것일까?
아마도 그렇다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왜 답이 없고 변화하는 것이 그토록 어려운지 답답해하지만, 사실 문제의 근원은 바로 자신의 생각에 있다.
생각하는 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삶은 절대 바뀌지 않는다.
한국교회는 그동안 전도와 선교, 헌신 등에 대해서는 수없이 강조해 왔지만 정작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다.

그리고 그로 인해 제대로 생각할 줄 모르는 그리스도인, 아무 생각 없는 ‘무개념’, ‘무분별’ 교인을 양산해낸 것은 아닐까?
그로 인해 우리는 ‘개독교’라는 비판과 함께 ‘안티기독교 현상’이라는 엄청난 대가를 톡톡히 지불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창조 - 타락 - 구속’이라는 관점에서 성경적 사고방식이란 과연 무엇인지 파헤친다.

‘노답청춘’을 위한 성경적 사고방식 입문서다.
성경적 사고방식의 중요성을 깨닫고 변화를 위한 결단과 훈련을 시작하도록 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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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없이 말씀을 읽고 보아도 왜 우리 삶에는 변화가 없을까?
성경대로 산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어려운 상황에 부딪쳤을 때 나오는 행동과 문제 해결방식은 그 사람의 평상시 사고방식을 보여준다.

일본의 어느 경건하다고 소문났던 여인의 이야기
입을 열면 언제나 주여, 감사합니다!
어느 날 외출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요란한 불자동차 소리가 들렸다.
주여 감사합니다!
그런데 자기 집에 가까왔을 무렵 자기 집에서 불이 났다는 것을 알고는 그 자리에 주저 앉으며 이렇게 소리쳤다고 합니다.
"아이구 맙소사 왜 하필이면 내 집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각을 바꿔라”
<성경대로 생각하라>의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각의 방식이 완전히 바뀔 때 삶의 변화가 가능하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알고 그의 거룩한 생각으로 전환될 때 자신을 바꿔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인 랄프 카이퍼는 한쪽 눈에만 약간의 시력이 남은 선천성 시각장애인으로, 그 자신이 말씀대로 사는 능력을 경험한 성경적 사고방식의 증인이다.

시각 장애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주변 사람들도 그의 삶에 비관적인 의견을 내놓았지만, 그는 길바닥에 쓰러져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고 한다면 하나님이 자신이 이끄실 거라 믿었다.

자신의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고 하나님 말씀의 관점대로 삶을 바라본 그의 생활방식이 이 책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베드로의 넘치는 자신감의 비밀은 무엇이었나?

바울, 예레미야, 욥, 가나안 여인, 모세, 베드로, 솔로몬 등 성경 속 인물들이 어떠한 사고방식으로 각각의 상황을 해석하고 결정했는지 표본으로 제시한다.

바울은 ‘현실을 뛰어넘는 진짜 긍정의 힘’의 주인공으로 대표된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바울의 넘치는 자신감 속엔 ‘이유 있는 긍정’이 숨어 있다.

“바울의 긍정적 사고 아래에는 헛된 희망이나 어리석은 교만, 소망 없는 자의 두려움 따위가 없다.
그의 긍정적 사고 아래에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있다.
그는 구원자이신 그리스도의 실재를 붙잡음으로 긍정적으로 사고한다”고 기술했다.

바울은 이러한 긍정의 힘으로 개인적 제약을 이길 힘, 자신을 대적하는 사람들을 사랑하기에 충분한 은혜, 임박한 죽음에 직면한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분노한 예레미야를 바꾼 건 바로 ‘말씀’

또 한 명의 주인공 예레미야는 ‘상처를 평안으로 바꾸는 관점의 변화’를 이룬 사람이다.

예레미야는 스스로 하나님이 자신에게 무관심하다고 느끼며 깊은 상처를 받았다. 화가 나서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심판과 회개의 메시지를 전했지만, 변한 건 없다.

이스라엘 백성은 끝없이 예레미야를 분노케 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원수들, 심지어 하나님까지도 도저히 참을 수 가 없었다. 비통한 심정이었다.

예레미야의 마음을 ‘비통’에서 ‘기쁨’으로 바꾼 것은 단 한가지,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성경에서 예레미야는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렘15:16)라고 말한다.

그가 ‘먹은’ 말씀이 어떤 내용인지는 성경에 나오지 않지만, 그 말씀이 그의 생각과 관점을 통째로 바꾼 것은 분명하다.

저자는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먹었다’.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읽는가? 단순히 눈으로 글씨만 읽는가? 아니면 말씀을 충분히 알고 이해해 자기 것으로 만드는가? 말씀을 ‘먹는다’는 건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에 영향을 받는다는 뜻이다. 예레미야가 말씀을 먹었을 때 그의 삶에 변화가 일어났다”고 설명했다.

“그리스도를 배우고 연구하라”

저자가 말하는 성경적 사고의 시작은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을 보는 것이다. 자기에게 집중하는 삶을 끝내고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을 시작하는 것이다.

이 책은 성경을 읽어 아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고 깨닫고 순종하는 삶을 강조한다.

저자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 ‘배워야’ 한다. 그러려면 먼저 그리스도께 순복하고,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 말씀을 연구하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우리 주님은 ‘나를 발견하고 나에게 배우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대로 행하여 보라. 주님 품이 집처럼 편안해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은 ‘성경적인 생각을 실천하라’는 제목으로
△장애물 앞에서 내 생각 항복시키기
△예수님의 세심한 사고방식 배우기
△일곱 가지 그리스도의 마음 품기
△성경적인 생각을 삶에 적용하기 등이 제시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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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 사고, 성경적 성품, 성경적 인격”

칼빈은 정말 능력있는 신학자입니다. 그의 모든 사고와 생각은 언제나 성경과 함께 갑니다. 칼빈의 중요하다 싶은 모든 말들은 전부 성경 구절들로 뒷받침되어 있습니다. 성경 말씀이 그대로 인용되거나, 성경 구절들이 괄호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신학은 반드시 성경으로부터 나와야 함을 칼빈의 「기독교강요」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경 구절을 제시하지 못하는 신학자들의 말은 그 자신의 사색입니다. 신학 이론은 언제나 성경의 강물에 젖어서 나와야만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그 신학자의 이론이 그 자신과 독자들의 신앙과 영혼에 해악을 미칩니다.

정독하다가 잠시 멈추어둔 서철원 박사님의 저술 「교의신학전집」의 특징도 중요한 모든 부분마다 관련 성구들이 풍성하게 괄호안에 표기되어 있었습니다. 서 박사님의 모든 신학 사고가 성경의 물줄기 속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물줄기 근처에 단 일초도 가보지 못하고 탄생한 이론이다 싶은 것 하나를 최근에 보았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의 피로 우리의 죄(받아야 할 형벌)를 해결하시었고, 명확한 성경적 근거도 없는 아담이 못 지킨 율법을 예수께서 준수하시어 하나님 백성의 생존 권리(의)를 얻어 우리에게 주었다는 이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의의 전가 교리"

거창하게 많은 신학자들의 논문과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읽어서 얻는 힘으로 신앙을 이해하고 가르치는 것을 모르고, 이전의 신학자들이 만든 교리와 사상을 따라 신앙을 이해하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이 교리는 아주 그럴싸합니다.
그 사람들은 이 교리를 수용하지 않으면, 기독교의 '정감록'을 모르는 얼뜨기라는 식으로 떠들어 댑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방식에 관한 내용은 신구약 성경의 중심입니다.
기독교는 창조주가 자기를 배반하여 저주받아 죽은 자기 백성을 다시 회복하고 살려서 자신의 본래의 창조경륜을 이루어 내는 종교입니다.
창조주가 죄로 잃어버린 자기 백성을 되돌리는 방법은 오직 흠 없으신 피의 속죄였습니다.

죄의 종이 되어버린 타락한 자기 백성 가운데서 피 흘림의 속죄로 죄를 배상할 자질을 가진 사람은 단 한 사람도 나올 수가 없습니다.
모두가 날 때부터 죄인이고, 모두가 그릇 행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여 버려진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창조주는 스스로 인간이 되어 자기 백성의 죄를 배상하는 제물이 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성자 하나님이 친히 사람이 되어 속죄의 피를 흘리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성령께서 특별하신 역사하심으로 아담의 죄를 전가 받지 않은 한 완전한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성자 하나님께서 그 죄 없는 사람을 자신과 연합(위격적 통일)시키심으로 완전한 사람-완전한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성육신 자가 이 땅에 우리의 죄를 위해 오셨습니다.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성육신 자가 자기 백성들을 위해 자기의 피로 하나님께 죄를 배상하심으로서 자기 백성을 구원해 내신다고 가르칩니다. 모든 구약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성육신 자가 피 흘려서 자기 백성의 죄를 사하고, 자기 백성의 의가 되시어 구원을 주신다고 예언하였습니다.

율법과 복음에 대한 가장 권위 있는 계시 해설자 사도 바울도 오직 그리스도가 자기의 피로 우리의 죄를 씻음이 우리의 의라고 선언했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믿음 안에서 피 흘리신 하나님의 성육신 자와 연합됨이 우리에게 의를 얻게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롬 5:9)

피 흘리기 위해 오신 하나님의 성육신 자가 아담이 못한 율법준수를 성공하여 우리에게 하나님 백성으로 살 수 있는 권리(의)를 얻어 줄 것을 암시하는 말씀을 신.구약에서 단 한 줄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사변적인 교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미쳤습니다. 계속 미친 듯이 그것만 주장하나, 모든 내용들이 전혀 성경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습니다. 항상 누구도 이 같은 주장을 했다! 라는 인간의 사설들뿐입니다.



성경이 묻어나지 않는 신학 이론은 사람의 사변입니다. 「기독교강요」를 보니, 칼빈은 언제나 성경입니다. 그의 모든 것이 성경입니다. 칼빈은 하나님의 성육신 자의 피 흘리심으로 우리의 죄를 씻어주심이 우리의 의라고 하였습니다. 피 흘리신 그 분과 믿음으로 연합되어 전가되는 예수의 의로 우리도 의롭다하심을 얻는다고 합니다. 그의 모든 말들은 언제나 성경으로 뒷받침 됩니다.

“그러므로 ‘의롭게 한다.’는 뜻은 고소를 당한 사람에 대해서, 마치 그의 무죄가 확정된 것같이, 그 죄책이 없다고 무죄 석방을 선고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중재로 의롭다고 하시므로 하나님의 이 사면은 우리 자신의 무죄가 확증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셨기 때문이며, 그 결과로 우리 자신은 의로운 사람이 아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다.” (기독교강요, 3.11.3)

“사도행전 13장에 있는 바울의 설교에 이런 말이 있다.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행 13:38-39). 여기에 보면 죄의 용서를 말한 후에, 그에 대한 해석으로 의롭다고 인정한다는 말을 한다. 의롭다고 인정하는 것을 분명히 죄의 사면으로 해석하며, 의롭다함을 율법의 행위에서 분리시키고 있다. 의롭다함은 순전히 그리스도의 은혜이며 그것은 믿음에 의해서 받는다고 한다.” (기독교강요, 3.11.3)

“누가가 보고한 것을 보면, 바울은 설교를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행 13:38-39)는 말로 끝맺는다. 바울은 죄의 용서와 의를 연결하여, 둘이 똑같다는 것을 보여 준다.” (기독교강요, 3.11.22)

칼빈은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죄를 사하였음을 강조했습니다. 결코 그리스도의 율법준수나 어떤 행위가 우리에게 의를 주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되고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된다고만 했습니다. 칼빈은 성경이 가르치지 않는 내용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이 말하지 않는 것은 사색하고 이론으로 만드는 일은 칼빈에게 혐오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칼빈은 오직 성경대로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우리를 의롭게 만든다고 가르쳤습니다.


서철원 박사도 칼빈과 동일하게 그리스도가 흘린 피가 우리의 죄를 사하였고, 그리스도를 믿음다는 믿음 고백을 통해 우리가 의롭다하심을 얻는다고 설명합니다. 성경의 강물 속에서 헤엄치면서 신학을 세우는 분들은 다릅니다. 이전 사람들이 만든 교리로 신학하는 것과 성경으로만 신학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하나님과 마귀가 여기서 갈라집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죄를 무효화하였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이 믿음을 고백하는 죄인들의 의가 된다. 하나님의 아들의 속죄사역으로 이룬 죄용서를 믿음으로 고백하는 죄인에게 전가하여 그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신다 (롬 5:8-10).” (서철원, 교의신학전집 5: 구원론, 122)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을 의롭다고 하신다. 부름 받은 자들을 그냥 의롭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믿음을 고백하게 하셔서 의롭다고 하신다. 단지 주 예수를 믿는 믿음 때문에 (롬 3:21,22) 그들을 그리스도에게 연합된 자들로 보신다. 그리스도에게 연합된 자들이므로, 그가 당한 모든 고난과 행한 것을 부름 받음 자들이 당한 것으로 보고 그리스도와 일치시켜서 의롭다고 하시는 것이다. 곧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이루신 죄용서를 죄인들에게 적용하여 그들을 의롭다고 하신다.” (서철원, 교의신학전집 5: 구원론, 113)

“의롭다 하심은 예수 믿음에 근거해서 죄를 용서하여 무죄하다고 선언하심이다. 믿음고백에 죄용서와 의롭다 하는 선언이 온다. 칭의는 단지 주 예수를 믿는다는 믿음고백에 대한 하나님의 무죄선언이다. 따라서 법정적이지 도덕적일 수 없다.” (서철원, 교의신학전집 5: 구원론, 29)


오직 성경으로만 신학해야 합니다. 명확하게 근거로 제시할 수 있는 성경의 단 한 줄을 찾지 못하는 이론은 하나님의 진리를 훼방하는 거짓 사상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뒷받침하는 명확한 성구 하나를 찾지 못할 수가 없습니다. 특히 우리의 구원에 관하여서는 ...

성경! 성경! 성경!

언제나 최고의 권위와 기준은 성경입니다. 청교도 운동, 은사운동, 신사도운동, 1차 대각성 운동, 2차 대각성 운동, 그 무엇이건 성경의 지지를 받지 못하면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절대로 어닙니다. 에드워즈, 존 오웬, 리차드 박스터, 로이드 존스, 그 누구라도 성경의 말씀과 다른 이론이나 주장으로 큰일을 이루었으면, 예외 없이 광명의 천사이고 거짓 선생입니다.

성경을 사랑하십시오. 모든 사고와 이해를 성경 속에서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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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대림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육신을 입고 오심, 그리고 훗날 천사 장의 나팔 소리와 호령으로 이 땅에 임하실 재림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대림절(Advent)은 손님을 기다린다는 의미가 있는데, 여기서 손님은 당연히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뜻합니다. 우리는 공항이나 기차역에서 손님을 기다릴 때, 온 마음을 다하여 손님을 기다립니다. 이유는 기다리는 손님을 놓치지 않고, 실수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연말이 되면, 세상은 추수감사절로 시작하여 성탄절에 이르기까지 주님을 기다리지 않고, 사람들이 서로 즐거워하며 보내는 시간으로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연말은 일 년 중 거룩함과 세속적 사고가 가장 강하게 충돌하는 시기가 되었습니다. 추수감사절이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제정되었고, 성탄절이 주님의 오심을 기념하고 찬양하는 절기인데, 세속적 개념이 기독교적 두 절기를 침해하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거룩함보다 세속적 사고가 더 세상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참으로 많습니다.

그러나 추수감사절과 대림절, 성탄절은 모두 하나님 말씀인 성경에 기초하고 있고, 이는 연말에 세속적 사고가 아니라, 하나님 백성이라도 성경을 토대로 연말을 맞이하고, 하나님 주시는 새로운 한 해를 맞아야 한다는 도전입니다. 연말에 세속적 사고가 더 강해짐은 그만큼 기독교인이 성경적 사고를 더 강하게 지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하나님을 믿는 우리 자녀들조차 연말을 세속적으로 보내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시간이 갈수록, 세속적 사고가 더 굳어져 감에 있습니다.

작고 연약하지만, 우리라도 연말을 성경적 사고로 살아가며, 성경적 사고로 새해를 맞이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주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에 주님의 말씀과 은혜에 깊이 집중해야 하고, 주님의 오심이 바로 나를 위해 오셨음을 확신하며 연말을 보내야 합니다. 그렇게 성경적 사고로 연말과 새해를 맞이할 때, 하나님께서 때마다 일마다 우리를 가르쳐주시고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며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올해 연말을 성경적 사고로 보내야 세속적 사고를 이길 수 있고, 마침내 우리는 물론 우리 자녀들의 장래가 더 밝아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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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하나님의 계시로 신실히 믿는 이들은 성경을 설명하려 할 때 성경의 네 가지 속성들을 주목해왔는데, 그 네 가지는 필요성, 권위, 명료성, 충분성입니다. 이 네 가지는 성경 밖에서 설정한 속성이 아니라 성경 자체가 지닌 속성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을 설명하려 할 때 성경 계시에 의존하여 생각해야 합니다. 인간의 의지와 자율성까지도 계시 의존적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 계시나 하나님의 권위로부터 독립적인 인간 이성은 인간의 견해를 만들 뿐 사람들이 찾는 확실성은 만들지 못하기 때문에 믿음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초월적인 하나님 안에서 인간의 합리성의 기초를 세워 줍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에 따라 움직이는 우주를 만드시고 또한 붙드시고 다스리십니다. 신자가 할 일은 진리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를 인정하고 그 진리 안에서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적인 인간의 자율성을 가정(假定)하기 때문에 창조와 타락과 구속에 대한 바른 해석이 필요합니다.

성경의 권위는 성경의 필요성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신자는 성경이 믿음과 행위의 문제에 있어서 오류가 없는 유일한 권위라고 믿습니다. 이러한 성경의 권위는 성경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는데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또한 성경이 명료하다는 것은 성경의 메시지가 분명하다는 뜻이지 모든 부분이 다 분명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성경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해하기 쉬운 분명한 구절로부터 불분명하고 어려운 구절이 해석되기 때문에 성경은 스스로를 해석하여 신자가 하나님께 대하여 무엇을 알아야 하고, 어떻게 순종하여 살아야 하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신자를 인도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성경의 충분성은 성경이 하나님의 특별계시에 대한 완성된 작품이라는 뜻입니다. 즉 성경 66권이 완성된 정경이기 때문에 거기에 추가할 다른 계시나 예언이나 가르침이 필요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사이비 종파에서는 성경 이외에 성경적 권위를 갖는 어떤 예언이나 이상이나 계시나 가르침에 성경과 동일한 권위를 부여하려고 합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기독교가 많은 실수도 하였고 부족한 점도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르게 믿고 순종하는 것을 통해 그릇된 것을 깨우치고 인간 사회를 증진시킬 수 있었습니다. 역사와 문명의 흥망성쇠의 과정에서 성경은 신자들의 마음과 지성에 그 자리를 유지해 오면서 하나님 대신에 사람을 궁극적 권위자로 높이려는 모든 형태의 지식에 반대합니다.

죄의 특징은 끊임없이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려고 하기 때문에 인간의 문명과 지식과 사상까지도 하나님을 거역하는 경향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성경은 모든 시대와 어느 곳에서도 사람들에게 생활 방식에서뿐만 아니라 사고방식에서도 회개하라고 촉구합니다.

회개란 가던 길이 잘못된 줄 알고 그 길에서 돌이켜 바른 길을 가는 것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인간이 걸어가야 할 길을 보여주셨는데 그 길이 아닌 다른 길을 가다가 그 길이 잘 못된 길임을 깨닫고 돌이켜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길로 가는 것을 회개라고 합니다. 회개란 심정적인 뉘우침이나 후회하는 마음이나 자기의 잘못을 슬퍼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것들과 아울러 잘못된 모든 생활 방식에서 돌아서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결단뿐만 아니라 바른 길로 걸어가는 행위가 계속되어져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온전한 회개가 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온전한 회개란 하나님께서 그 회개를 받아주셔야 비로소 온전한 회개가 될 수 있습니다. 자기 나름대로는 가던 길이 잘못된 줄 알고 죄를 고백하며 통회하고 돌아서서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신 길로 간다고 해도 그것이 바른 회개가 아닐 수가 있습니다.

신명기 1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가데아 바네스에서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 먼저 정탐꾼을 보내고 그 후에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가나안에 못 들어가겠다고 한 사건을 회상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시고 출애굽 1세대 중에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모두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니 방향을 돌려 홍해 길을 따라 광야로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은 회개하였습니다.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사오니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올라가서 싸우리이다.”(신 1:41) 하지만 이스라엘이 회개를 하였는데 하나님께서 그 회개를 받아주시지 않았습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말씀하시기를 올라가서 그 땅을 차지하라고 하셨을 때, 그들은 먼저 정탐꾼을 보내어 알아보자고 하였습니다. 정탐을 한 결과 가나안은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임을 확인하고도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을 악평하는 본심을 드러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며 그들은 가나안에 못 들어가고 그들이 걱정하던 그들의 자녀들은 들어가게 한다고 하시며 홍해 길을 따라 광야로 들어가라고 하시자 태도를 바꾸어 회개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올라가지 말라고 하셨지만 그들은 경솔히 올라갔다가 참패를 당했습니다. 죄를 지었어도 회개를 하면 용서를 해 주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길입니다.

그러나 회개가 하나님을 인간의 뜻대로 조종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이란 회개나 기도나 예배나 헌금이나 그 어떤 선한 일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자기의 뜻을 관철시키는데 이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고집대로 회개하였고, 회개하였으니까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대로 올라가서 싸우겠다고 고집하며 경솔히 행동하였습니다. 회개나 예배나 기도나 물질을 드리는 것이나 모든 선한 일을 명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계명과 법을 정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계명과 법 위에 계시다는 사실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계명과 법 앞에 인간과 하나님이 동등하다고 오해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이란 하나님의 마음에 들게 하도록 정하신 방법들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그 법을 이용해서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이용하는데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들이 바로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계명과 법과 질서와 규례와 명령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명하신 율법을 생각할 때는 그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야 하는데, 율법을 생각할 때는 언제나 그 율법 배후에 하나님의 언약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율법이란 언약 백성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임과 동시에 언약 백성의 의무 규정입니다.

언약을 전제하지 않거나 이해하지 못하고 율법을 이야기하면 율법은 의미가 없어지고 형식적이 되고 율법주의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하나님의 언약을 생각할 때는 그 언약의 배후에 하나님의 구원 행위가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시내산 언약에는 출애굽이라는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 행위의 배후에는 하나님 자신이 계십니다.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사랑의 하나님께서 언약 백성들을 돌보시고 그 언약의 책무에 관계된 모든 계명과 규례들을 제정하셨습니다.

신약적으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말씀과 언약과 구원행위와 하나님 자신까지를 포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께서 계시고 그 안에 구원의 역사가 있고 새 언약이 있으며 율법의 모든 것이 성취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성경 계시의 큰 그림을 통해서 구체적인 말씀과 사건을 보아야 바르게 볼 수 있습니다. 예배와 은사와 십일조와 선교와 믿음에 관한 그 어떤 것이라도 이 관점에서 보는 안목과 사고방식을 가져야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 특히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교조주의 적인 것으로 취급하게 된 것은 성경 계시의 이런 큰 그림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지킬 때 마치 머리카락을 쪼개듯이 율법을 해석하고 적용하여 율법에 많은 것을 첨가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데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구체적인 말씀을 살필 때 그 구체적인 말씀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언약을, 그 언약 배후의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를, 그 구원의 행위 배후에 계신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살피는 것이 우리의 사고방식이 회개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호 4:6, 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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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 사고를 하는 사람이 되라

직장에 다닐 때의 일이다.
한 사람은 항상 상사의 뜻이 무엇인가를 염두에 두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일을 하였기 때문에 야단을 맞았고 다른 사람은 항상 ‘상사의 뜻’이 무엇인가를 염두에 두고 일을 하였기 때문에 번번히 칭찬을 받았다.
둘 다 업무 수행 능력은 비슷했지만 어떤 관점에서, 무엇을 기준으로 일을 하느냐의 차이로 인해 유능한 사원과 무능한 사원으로 구분된 것이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어떤 일을 결정할 때 내 중심이냐, 하나님 중심이냐라는 구분만 분명히 하여도 우리는 많은 좋은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신앙 성장은 이런 죄, 저런 죄 한 두 가지를 회개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우리의 사고 방식, 가치관, 세계관이 성경적으로 바꾸어져야 한다.

신앙 생활을 오래 한 사람과 대화를 나누다가도 어떤 특정한 주제에 대해 말하는 것을 보면 전혀 성경과는 상관 없는 말을 하는 것을 많이 본다.
이것은 사고가 아직도 세상적인 가치관에 젖어있다는 증거이다.
결혼, 자녀 교육, 재정 등 등. 이런 주제에 대해 성경적인 견해나 가치관을 분명하고 명확하게 가진 신자들이 많지 않다.

그렇게 오랫동안 교회 다니고, 성경 공부, 말씀 공부, 이런 훈련, 저런 훈련을 많이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적, 인본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말씀 묵상을 통해 자신의 관점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꾸는 훈련을 쌓지 않았기 때문이다.
말씀을 통해 자신의 가치관을 성경적 가치관으로 바꾸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세상적 가치관은 소유, 군림, 눈에 보이는 것, 물량, 업적, 과시를 중시한다.
그러나 성경적 가치관은 소유 보다는 관계, 군림 보다는 섬김, 눈에 보이는 것 보다는 보이지 않는 영적 가치, 물량이나 업적 보다는 마음의 동기, 과시 보다는 은밀하게 하는 것을 중시한다.

그러나 교회도 세속화 되다 보니 세상적인 성공을 영적 부요로 착각하여 신자들도 자연스럽게 물들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7).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상적 가치관에 의해 '자기 뜻'을 정해 놓고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왜 하나님이 기도 응답하지 않느냐고 의아해 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말씀 묵상을 통해 끊임 없이 자신의 사고방식을 하나님의 그것으로 바꾸어 가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뜻을 잘 알고 또한 잘 순종하는 사람이 된다.

이 내용은 ‘묵상 기도’에 있는 내용이다.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사람으로 성장해 간다.

-자신의 좁은 틀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는 자가 된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 생각보다 깊고 높다.
개인의 직접적인 필요 위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놓치기 쉽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 55:8-9).

말씀 묵상을 통해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에 항상 개방적인 자세가 되어 있을 때 우리가 생각지도 못했던 하나님의 높은 뜻을 알 수 있다.

-진정한 인도와 안내의 원천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알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내 생각, 내 방법으로 하여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그르치기 쉽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벧전 4:11).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 10:2-3).

일반적으로 사람의 생각은 추리와 경험에 의해 얻어진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 처하면 과거의 경험과 논리를 바탕으로 일을 처리하기 쉽다.
“아, 과거에 이런 예가 있었죠.
그때 이렇게 처리했으니 지금도 이렇게 처리하면 되겠죠”
“그렇지, 지난 번에 이런 일이 있었지.
난 그때 이렇게 처리했지.
이번에도 이렇게 처리하면 되겠군”
이처럼 사람은 전례에 따라 생각하고 처리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전통이 생기고 소위 말하는 교단의 “법”이 생긴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이와 다른 경우가 많다.
가능하면 전례를 따르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범사에 하나님을 의지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5-6).

그렇다고 모든 것을 이런 식으로 하라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자율과 전례에 지나치게 매이다 보면 정작 중요한 하나님의 뜻을 놓치기 쉽다는 말이다.

-믿음이 자란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말씀을 그냥 많이 읽더라도 믿음이 자란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는 한계가 있다.
숲의 모습을 제대로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무 하나하나를 살피듯 중요한 구절 하나 하나를 꼭꼭 씹어서 먹을 때 우리의 신앙이 균형 있게 건강하게 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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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미 테니(Tommy Tenney) - 하나님의 관점(God`s eye view)


   

 

God`s Eye View Worshiping Your Way To A Higher Perspective (Hardcover)

토미 테니Tommy Tenney - 하나님의 관점(God`s eye view)

하나님의 관점을 갖기까지 예배하라
산을 모래더미로 만들겠는가, 사람을 메뚜기로 만들겠는가?
"올려다 볼 것인가? 내려다 볼 것인가?"

당신이 하나님의 관점을 갖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상상할 수 있는가?
비행기를 타고 창공에 올라 지상에 있는 것들을 내려다 본 적이 있는가?
똑같은 사물들이지만 무엇이든 작게 보이게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당신이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관점을 갖게 되면 당신의 인생을 둘러싼 모든 문제들도더 이상 당신을 제압하지 못하게 된다. 예배는 하나님을 확대시키고 당신의 문제들은 힘을 잃게 만들기 때문이다. 토미 테니는 예배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관점을 가질 수 있다고 선포한다. 당신이 인생의 골짜기에 묶여서 살고 있다면 예배하라.
당신이 예배하는 순간 그분이 당신을 높이 들어 올리실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관점으로 당신의 인생을 보게 될 것이다.
관점의 변화가 일으킬 놀라운 결과에 주목하라.

■ 책 속으로

사실 당신은 찬양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녹여서 하나님이 당신의 요구 사항을 들어주시도록 애쓸 때가 종종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당신의 하늘 아버지는 당신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려는 의도가 전혀 없으시다. 하나님은 당신과의 만남을 충분히 연장하고 싶으실 뿐이며 응답을 주는 대신 당신의 열정과 예배를 받고 싶어 하신다. 하나님은 당신의 열정을 원하신다. 세속적인 관점에서는 종종 하늘 아버지께서 상당히 바쁘거나 우리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다시 기도할까? 아버지의 은혜와 임재를 구하며 끈질기게 사랑 고백을 할까? 하나님은 사람의 긍정을 기다리고 계신다. "네, 늦지 않았다면 저는 당신을 구할 것입니다."(사 26:9를 보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에 대해 이야기하셨다.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라 너희 중에 아비 된 자가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10-13)

만약 우리가 버릇없이 하나님의 부엌에 난입해서 "아빠 내 몫을 주세요. 지금 당장 약속하신 유산을 주세요."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런 식의 요구에는 지상에 있는 부모들에게나 천국에 있는 아버지에게나 잘 통하지 않는 것 같다.  - 본문 중에서(109~110p)

하나님의 관점, 사람의 관점(The Perspective of God, The Perspective of Man)
야고보서 4:14

하나님의 관점은 "무한자(The Unlimited)의 관점"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은 "영(Spirit)의 관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관점을 갖기까지 예배하여야 함을 선포하는 것이 본문 야고보서 4:14절의 "관점(Perspective)"의 메시지입니다.
관점에 따라 우리는 두 가지를 스스로에게 자문(自問)할 수 있습니다.
"산을 모래더미로 만들겠는가? 사람을 메뚜기로 만들겠는가?"
겸손한 마음으로 무한자이시며 영이신 하나님을 올려다 볼 것인가?
아니면 유한자이며 안개에 불과한 인간의 관점에서 내려다 볼 것인가?
누구든지 하나님의 관점을 갖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그 결과는 상상을 초월한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을 갖는다는 것을 감히 상상으로 추측해본다면, 비행기를 타고 저 높은 창공위로 올라 지상에 있는 것들을 내려다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도록 하기 위해 사도 야고보는 "우리의 인생"을 "잠깐 보이다가 사라질 안개"에 비유를 했습니다.
오래전에 지혜의 왕 솔로몬은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잠 27:1)고 경고한 바 있습니다.
종들을 거느리고 수많은 낙타 떼를 소유하며 모든 것이 탄탄대로(坦坦大路)처럼 보이는 그 순간이라 할지라도 오늘 혹은 내일, 혹은 그 어느 날에 갑자기 강도의 습격을 받을 수 있으며, 원하지 않는 허리케인이나 질병 혹은 불의의 사고, 그 외에도 무수한 돌발적 상황들이 엄습해올 수 있습니다.
똑같은 사물들이지만 관점(觀點)에 따라 무엇이든 작게 보이기 마련입니다.
무엇이든 쉽게 보이기 마련입니다.
마찬가지로 인생이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관점을 갖게 되면 그 인생을 둘러싼 모든 문제들은 인생을 오그라들게 만드는 불리한 조건으로서 더 이상 제압하지 못하게 됩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확대시키고 그 당사자들을 괴롭히던 문제들은 힘을 잃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둘러싼 문제를 크게 세 가지로 압축한다면 :

1. 시험(Test)
2. 위탁(Commitment)
3. 잠시(Transitory)


축복의 통로, 은혜의 통로였던 요셉은 그가 하나님의 관점으로 모든 것을 제압하고 마침내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최고의 자리에 우뚝 서기까지 13년이란 인생시험을 견뎠습니다.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위대한 성군 다윗도 마침내 하나님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평정하기까지는 14년의 인생시험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이들은 동일하게 하나님을 향하여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관점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지금 당신이 인생의 골짜기에 묶여서 살고 있다면 요셉처럼, 다윗처럼 무한자이시며 영이신 하나님께 예배하십시오.
당신이 하나님이 찾으시는 참 예배자가 되어 예배하는 순간, 전능의 왕 하나님은 당신을 반드시 높이 들어 올리실 것입니다.(벧전 5:6). 그리고, 하나님의 관점으로 당신의 인생을 보게 될 것입니다. 

관점의 변화, 관점의 전환점(Turning Point of Perspective)이 일으킬 놀라운 결과에 주목하십시오.
사실 당신은 찬양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녹여서 하나님이 당신의 요구사항을 들어주시도록 애쓸 때가 종종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당신의 하늘 아버지는 당신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려는 의도가 전혀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당신과의 만남을 충분히 연장하고 싶으실 뿐이며 응답을 주는 대신 당신의 열정과 예배를 받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열정을 원하십니다.
'세속적인 관점(Secular Perspective)'에서, '사람의 관점(Perspective of Humans)'에서 종종 하늘 아버지께서 상당히 바쁘시거나 우리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다음과 같은 스스로의 시험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다시 기도할까? 아버지의 은혜와 임재를 구하며 끈질기게 고백을 할까?' 

명심하십시오. 하나님은 사랑의 긍정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학자 이사야는 우리에게 명쾌한 기도응답의 최고의 롤 모델을 제시했습니다.
"네, 늦지 않았다면 저는 주님을 간절히 구할 것입니다."(사 26:9) 

잠시 있다 사라질 안개가 어리석은 자만에 빠지면 마치 거대한 언덕처럼 오래 견딜 것처럼 보이는 희망의 큰 탑을 세우게 됩니다.
그러나 지난 세월 동안 그의 영혼에게 많은 재물을 약속하신 분이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을 결코 들어보지 못했습니까? 

"이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내가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리라."(눅12:20) 오늘 밤에 내 영혼을 찾으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우리 인생을 재조명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4:14) 

시험을 만나도 하나님의 관점에서, 인생을 살아도 하나님의 위임받은 청지기(Steward)라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인생이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 하여도 잠시 있다 사라질 안개임을 직시하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관점의 변화, 관점의 전환점을 맞이하므로 "놀라운 결과(Amazing Prospect)"로 이끄시는 하나님을 체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삶과 사건과 세상 바라보는 법

관점을 디자인하라(개념확장판).  박용후 | 쌤앤파커스 | 296쪽 | 16,000원

의식하든 않든, 자신만의 관점 있어
어떤 관점이냐에 따라 우리 삶 달라
사람이 자신의 관점 바꿀 수 있을까

스토아 학파의 대표적 철학자인 에픽테토스는 이런 말을 했다.
“인간은 일어난 사건 때문이 아니라 그 사건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각 때문에 괴로운 것이다.”

사람은 사물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다.
시각장애인이 아니면, 사람이 바라보는 것은 똑같다.
사물이든 사건이든, 똑같은 시각으로 바라본다.

문제는 똑같이 바라보았지만, 서로의 이야기가 다르다는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똑같은 것을 바라보지만, 자기만의 관점만을 가지고 바라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자신만의 관점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 관점은 우리가 시간을 어떻게 투자해야 하고, 돈을 어떻게 사용할지 등에 대해 영향을 미친다.
재능을 어떻게 활용하고, 관계를 어떻게 해 나가는지에 대해서도 영향을 미친다.

곧 우리가 어떤 관점을 가지고 살아가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이 달라진다. 이런 측면에서 어떤 관점을 가지고 살아가느냐는 너무나 중요하다.

사람이 가진 관점을 바꿀 수 있을까? 바꿀 수 있다고 자신이 있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 피와이에이치 박용후 대표다.

박용후 대표는 <관점을 디자인하라>는 책을 5년 전 이미 출간했다.
그런데, 출간 이후 변하지 않은 것과 변한 것 사이에 있는 것들을 새롭게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간 바뀐 생각을 기반으로, 들어내고 걸러내고 바로잡아 오늘의 관점으로 다시 책을 손보고 <관점을 디자인하라> 개념확장판을 내놓았다.

보통은 ‘개정판’이라고 명명하는데, 관점 디자이너라 ‘개념확장판’이라는 낯선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대한민국 첫 ‘관점 디자이너’ 박용후
돈 아닌 꿈 이루고 싶은 이들 함께해
1년에 20번 월급받는 사람으로 관심

저자는 대한민국 1호 ‘관점 디자이너’이다. 그를 수식하는 별명이 수없이 많지만 그는 다른 무엇보다 국내 유일의 ‘관점 디자이너’로 불리기를 원한다.

‘관점 디자이너’로서 그는 유독 ‘착한 기업’의 성장을 도와 함께 성공하는 일을 보람으로 삼는다. 돈을 벌고 싶어하는 사람들과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꿈을 이루고 싶어하는 사람들과 일을 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조직에 깊숙이 몸담지 않는다. 한 곳에 오래 머물면, 매 순간 새로 디자인되어야 할 관점이 고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약속한 목표에 도달한 순간까지만 함께한다는 원칙으로 계약직 신분을 유지하는 대신, 얽매이지 않는 자유를 누린다. 그 결과 그는 ‘한 달에 13번 월급받는 사람’로 알려지면서 대중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고, 그 숫자는 현재 20번으로 불어났다.

고정적으로 출근할 곳은 없지만, 세상 어느 곳이라도 스마트폰과 노트북만 있으면 다양한 사람과 자유롭게 접속할 수 있다. 어디든 남다르고 창의적인 그의 행복한 일터가 된다.

그는 ‘기업체에서 가장 초청하고 싶은 강사’로 손꼽히는 사람이 되어 다양한 청중들과 부지런히 만나며, 그들로부터 매일 새로운 관점을 얻고 있다.

사람들은 대부분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같은 영화와 같은 책을 봐도, 제각기 다른 이야기를 한다. 같은 사건을 경험하고도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분명히 존재하는데도 우리가 미처 듣지 못하는 것, 보지 못하는 것, 느끼지 못하는 것들이 너무 많다. 저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고, 들리지 않는 것들을 듣고, 느껴지지 않는 것들을 느낄 수 있는 비결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바로 다른 관점을 갖는 것이다.

관점 바꾸면, 다른 게 보이기 시작해
고정관념, 신체 능력까지 틀에 가둬
당연함 부정하고, 질문 던져야 바꿔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해석하는 방식이 달라지고 전혀 다른 결과에 다다른다. 사람들 사이에서 발견되는 능력의 차이는 바로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았느냐?’에서 기인한다.

관점을 바꾸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생수와 김치를 사 먹는 것이 언제부터 당연해졌는지 기억할 수 있는가? 아마도 선뜻 말하지 못할 것이다.

그 이유는 바로 ‘시나브로’, 즉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조금씩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시나브로 바뀌는 세상을 읽어내는 힘도 바로 통찰을 이끌어내는 ‘관점’에 있다. 당신이 지금까지의 삶과 다른 인생을 살고 싶다면, 이제 그 도구의 해답은 ‘관점’이다.”

사람이 관점을 바꾼다고 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관점을 바꾸는데 있어 가장 큰 장애가 되는 것이 두 가지 있다.

첫째, 고정관념이다.

고정관념은 우리의 의식만을 가두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체적인 능력까지 관념의 틀 속에 가둔다. 우리에게는 무한한 능력이 있는데도, ‘나는 안 돼’라는 고정 관념에 갇히면 절대 성공하지 못한다.

그래서 저자는 내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을 뒤흔들라고 말한다. 자신을 수시로 재조립해 변화의 바람에도 제 가치를 해내는, 그래서 아무도 당신을 대체하지 못하는 명품이 되라고 말한다.

둘째, 당연함이다.

‘당연’이란 무엇인가? 보편화된 관점이다. 이것은 어떤 시대에 사는가, 어디에 사는가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당연함’이라는 우물에 갇히면, 우물 밖 세상을 모르고 살아갈 수도 있다. 그래서 저자는 당연함에 질문을 던지라고 이야기한다. 당연한 것을 부정하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한다. “지금은 당연하지 않지만 미래에 당연해질 것들을 찾아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 현재의 당연함 속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미래를 바라보고 미래에 당연해 질 것에 집중해야 한다. 지금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부정하는 특별한 생각이 미래를 바꾼다.”

저자는 누구든지 제2의 스티브 잡스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었던 것은 남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보고 고정관념을 탈피했기 때문이다. 당신이 관점을 바꾼다면 당연함과 관성에 빠져 사는 것이 아니라 당연함을 부정하고 본질을 파악해 새로운 습관이나 관성을 만들어 낸다면, 누구라도 제2의 스티브 잡스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미세한 생각의 흐름을 읽어내고 그 본질을 파악함으로써, 당신의 관점을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사람, 같은 상황, 같은 사물일지라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고 생각이 달라진다. 행동이 달라지고 결과까지 달라진다.

그러니 남들은 당연히 이렇게 생각할 일을 저렇게도 생각해 보라. 남들이 보지 않는 것을 보고, 남들이 생각하지 않은 것을 생각하라.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라. 다른 사람과 다른 관점으로 사물을 바라보라. 그러면 놀라운 미래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하나님 자녀들, 하나님의 관점 가져야
하나님과 사람 관점은 하늘과 땅 차이
남다른 관점 바라보면 미래의 주인공
하나님 관점 보면 하나님나라 주인공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들은 남다른 관점도 가져야 하지만, 더 중요한 관점을 가져야 한다. 그 관점은 하나님의 관점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나의 관점인 하나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사건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나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사람들의 관점은 폭이 좁을 때가 많다. 한 면만 보고 한 방향을 볼 때가 많다. 또한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을 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면 폭넓고 깊게 볼 수 있다. 다른 면을 볼 수 있다.

필자는 사람의 관점과 하나님의 관점의 차이는 땅에서 바라보는 것과 하늘에서 바라보는 것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땅에서 바라보면, 내 눈앞에 들어오는 것만 볼 수 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이 커 보인다.

하지만 하늘에서 이 땅의 것을 바라보면 어떤가? 전체가 보인다. 땅에서 볼 때는 그렇게 커 보이던 것이, 하늘에서 보면 작아 보인다. 땅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하늘에서는 보인다.

이것이 하나님의 관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관점으로 자신의 삶을 바라보아야 한다. 사건과 세상을 바라보아야 한다.

남다른 관점으로 바라보면 미래의 주인공이 될 수 있지만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영원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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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주요 당선 공약




미국의 오지에도 무궁화 꽃이..

제 12회 :  미 합중국 제 47대 대통령 “도날드 트럼프 “ 당선

선거 당일 밤 로스앤젤리스 시각  11시30분 “트럼프” 당선자는 승리를 선언하고 지지자들에게 인사했다. 

대통령을 지내고 한 텀을 쉬고(?) 다시 승리로 돌아왔다.
트럼프의 승리는 상대당 (민주당)과의 싸움이 아니었고 정치적 부패와의 어려운 싸움이었다.

 수많은 기소와 재판 그리고 목숨까지 건 힘겨운 싸움이었지만 결국 승리했다.

그는 하늘이 그의 생명을 연장해 준 이유가 미국을 다시 재건하라는 뜻으로 안다고 말했다.


트럼프 주요 당선 공약

1. 미국 역사상 최대규모의 불법 이민자 추방 진행
2. 국경 장벽 설치
3. 출생 시민권 종료
4. 난민 정착정책 일시 중단
5. 멕시코 마약 카르텔을 외국 테러 조직으로 지정
6. 중국산 상품에 60% 추가 관세 부과
7. 미국기업의 중국 투자금지(vice versa)
8. 소득세율 감세
9. 법인세율 감세
10. 중국인의 미국 내 토지 매입 금지 조치
11. 기업구제금융 금지
12. 우크라이나 전쟁 종료
13. 세계 보건기구 탈퇴?
1.4 베테랑 노숙자 완전 종식
15. 교육부 폐지?
    - 홈스쿨링 자녀 보유 시 1인당 1만 달러 면세 제공?
16. 공립학교 내 기도 및 기타 종교활동 활성화
17. 조 바이든과 그의 가족을 쫒을 특별 검사 임명
18. 마약 판매 시 사형
19. 아동 성범죄자 사형 구형
20. 청소년 범죄자 처벌 강화
21. 경찰관 권한 강화
22. "남성"과 "여성"만을 미국정부가 인정하는 유일한 성별로 설정
23. 트랜스젠더 여성 여성스포츠 참여 금지
24. 군대 내 트젠 금지
25. 부모 동의 없이 미성년자에게 성전환수술 시 모든 의료전문가는 중범죄에 해당하도록 법 변경
26. 공립학교 내 "전통적인 핵가족" 성역활 장려
27. 공립학교 내 lgbtq 교육 프로그램 종료
28. 대통령이 불량 공무원을 해고 시킬 수 있는 권한 부여
29. 연방직원에게 공무원 시험 합격 요구
30. 매년 연방 정부 예산 삭감?
31. 파리 기후 협정 탈퇴
32. 전기자동차 의무 제거
33. 해상 풍력 에너지 개발 중단
34. 전략 석유 비축량 "즉시" 채우기
35. 새로운 전력망 시스템 현대화 및 구축




미국은 아직 건재하고 자유우방을 위해 책임있는 일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미국과 자유 우방을 위해 그의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이제는 치유의 시간이다.
정치적 부패에 의해 분열된 국민의 양극화를 치유하고 무너진 신뢰를 찾는일이 필요하다.

용서는 있지만 죄는 물어야 할 것이며 불법적 행위들은 제 자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

경제를 살리고 에너지 산유국으로 미국의 과거로 되 살리는 일이 급선무이다.

수 많은 불법 입국자들의 운명과 경제적 어려움으로 길가로 몰린 저소득 국민들의 어려움을 돌봐야 한다.

자유우방은 오늘의 승리를 같이 기뻐 할 것 이다.
이제 미국을 재 건설하는 마음으로 국민들은 한 마음으로 뭉쳐야 한다.
하늘이 도와 오늘의 승리를 가져오듯 미국은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야 한다.
트럼프 가족과 미국위에 하느님의 은혜가 가득하길 빈다.
God Bless America!
(11. 06.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