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순(유정선, 유정아 + 최규진목사)


《My 성경필사 & 간증문》

제 "유산"으론 남길 2가지,
첫번 째는 "성경필사"
둘번 째는 "간증문"입니다
지금 "성경필사"의 <이사야 50장>부분을 기록하며,구역을 완성하면 필사된 노트들을 먼저 제본하고,신약부분이 마치면 전부 합하여 제본할 계획~

또 며칠 전에 "간증문"을 완성하기 전에, 한 부분을 남겨두고, 우리가정의 "큰아들(사위)"인 자리를 채워지면 "간증문"이 완성되어 몇권들을 인쇄할 계획입니다

큰딸에게도 말없이, 이 두 가지"원하고 소원하는 것", 이 모드는 제 마음에 품고 기도하면서, 목사님께 고백합니다

또,"간증문"은 자세히 기록하여,자녀들(다음세대)에게 남길,제 인생(1954년~2023년),70년의 역사를 저의 역사만이 아닌,세계&우리나라까지 역사를 같이 살아온 과정을 기억대로 기록하고 엮은 "간증문"입니다.

<답신>

어려운 여건 속에서
신앙의 흔적을 새기며
후손들을 위한 믿음의 그루터기를
만드느라 수고가 많습니다.
주님은 아시지요
주님을 세밀하게 인도하십니다.
오늘도
믿음으로 승리하시기를............



화제의 인물 / 심규진박사(73년생 한동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화제의 인물 / 심규진박사(73년생 한동훈)

심규진, 沈揆珍, Kyu Jin Shim
출생 / 2. 28., 물고기자리, 말띠
소속 / IE대학교(Assistant Professor)
학력사항 / 2010~2013
미국 시라큐스대학교 Mass communication 박사

2008~2010
미국 미시간주립대학교 Telecommunication 석사

1997~2001
이화여자대학교 신문방송학 학사

경력사항
스페인 IE대학교 Business School Assistant Professor
2021.6~2021.12

여의도연구원 데이터랩 실장
2018.7~2021.6

오스트레일리아 University of Melbourne 전임교수 
2014.7~2018.6

Singapore Management University 조교수
2003.5~2007.11

미디어다음 뉴스파트장
2001.1~2003.4

CJB 청주방송 기자
“강남 신사 한동훈, 정치 카르텔에 맞서다”…그들이 열광하는 이유
- 2023. 12. 11.

심규진 스페인 IE대학 교수는 최근 펴낸 책 ‘73년생 한동훈’에서 다가오는 총선을 앞두고 급부상 하고 있는 한동훈 법무부 장관의 능력주의를 이렇게 설명한다. 2024년 총선에서 여당의 히든카드가 될 한 장관은 최근 압구정 현대고 동창인 배우 이정재씨와의 인연에서부터 관련 테마주의 급부상까지 연일 신드롬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그를 보면서 궁금증이 생긴다. 과연 무엇이 한동훈 신드롬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일까.

◆“보수가 한동훈에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11일 출판업계에 따르면 심규진 교수는 최근 저서인 ‘73년생 한동훈’을 통해 보수가 한동훈 장관에게 열광하는 이유를 조목조목 분석했다. 심 교수는 이 책에서 한 장관의 능력주의는 ‘세련됨’이라고 표현한답니다


그는 “한동훈이 쓰는 능력주의의 서사는 쿨하고 세련됐다는 차별화된 특징이 있다. 기존의 능력주의가 가지고 있는 촌스러운 짠내, 동정과 눈물을 요구하는 신파가 없다는 것”이라며 “강남 신사 스타일의 한동훈 장관은 감정에 호소하지 않고도 자신만의 능력으로 586 정치 카르텔의 부당한 탄압에 맞선다. 정적의 탄압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나서서 위엄을 지켜내는 모습을 대중에게 보여준 것”이라고 설명한다. 또 “이것은 정치적 계파나 특정 팬덤이 지켜준 것이 아니다며 오로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개인기, 즉 탁월한 전문성과 시대를 읽어내는 남다른 직관과 혜안으로 돌파한 것”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이 책은 윤석열 대통령과 한 장관의 관계를 과거 조선시대 태종과 세종의 정치적 관계에 빗댄다. 왕자의 난 등 손에 피를 묻혀가며 왕위에 오른 태종과 그런 태종과는 반대로 묵묵히 자신의 능력을 갈고 닦은 성군이었던 세종의 관계가 마치 두 사람과 같다는 것이랍니다

심 교수는 “한동훈은 최고 권력인 대통령과의 두터운 브로맨스 서사, 1970년대생의 젊음, 이준석이 보여줬던 어떤 말싸움에도 지지 않는 민첩한 언변, 오세훈처럼 신사 같은 매너와 태도, 그리고 홍준표와 같은 확고한 이념적 선명성과 대야투쟁력을 모두 겸비하고 있다”며 “586의 종교 전쟁은 이 정권에서 종식되어야 한다. 새로운 시대의 한동훈의 시대에는 좌도 우도 적어도 대한민국 체제 안에서 합의하고 설득되는 생산적인 정치가 열렸으면 하는 희망을 가져본다. 그리고 그 주역은 정말로 산업화 민주화 그 어느 쪽의 정치세력에게 빚도 한도 없는 한동훈이 유망하다고 보여진다”고 설명하고 있답니다

심 교수는 정치무대에 데뷔하기 전부터 비정치 계층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 한 장관의 팬덤에 대해 한국 정치사상 유례가 없는 현상이라고 표현한다. 그는 “결론적으로 계파정치와 팬덤정치를 거쳐온 한국 정치 지형은 이제 ‘능력주의’와 ‘실용주의’의 트렌드로 전환되는 시기라고 봐야 한다”며 “능력주의의 끝판왕 격인 한동훈이 귀족적 매력으로 단단한 팬덤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은 그의 정치적 스펙트럼이 다양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시에 팬덤 자체에 매몰되지 않을 만한 탄탄한 기본기를 갖춘 엘리트 관료의 정체성은 한동훈의 정치적 내구성을 가늠하게 하는 진정한 한 요소”라고 평가했습니다

이 책은 한 장관에 대한 분석 뿐만 아니라 현재 야당과 586 기득권 정치세력에 대한 냉정한 비판도 함께 담고 있답니다

심 교수는 “윤석열 대통령의 부인인 김건희 여사에 대한 혐오를 민주당 등 야권이 정치적 동력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고 비판한다. 
이 책에서 심 교수는 “소위 말해 페미니즘 팔이를 하는 좌파 여성 단체들이라면 정치적 영향력이 강한 여성이 성적으로 농락 당하고 정치적 희생양이 되는 그 억압의 근원과 역사적 기제를 모를 리 없거늘 그 어느 한 사람 이에 대해 문제 제기하고 나서는 사람이 없는 것”이라며 “어느 누구의 말대로 ‘진짜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라는 일갈을 던지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라고 말한답니다


또 “민주당보다 국민의힘이 도덕적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국민은 그다지 많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민주당의 억지에 끌려다니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의 소신과 권리를 스스로 피력하는 관료 정치인들의 모습을 매력 있게 보는 국민들은 많을 것이라는 점을 염두해 둬야 한다”며 “대중은 언제나 새로운 캐릭터와 새로운 이미지에 열광하기 때문이다.
 보수는 ‘눈치보고 계산하는’ 샌님형 보수에서 ‘당당하고 전투력 있는’ 화끈한 보수로서의 레토릭 강화에 주력해야 한다고 본다“고 내다봤답니다.

과거 여의도연구원 출신인 심 교수는 보수 여성 정치인에 대해 냉정한 판단도 내놓았다. 심 교수는 “보수 여성 정치인들이 서로 견제하고 각자도생하는 모습 말고, 댄스 여가수의 신구세대가 뭉친 ‘댄스 유랑단’처럼 서로의 목표를 격려하고 멘토와 멘티가 되어 고단함을 녹여주는, 여성 정치인만이 공감하는 지점들을 보여주면 어떨까”라며 “많은 여성들이 걸크러시에 열광한 이유를 정치에서 찾을 수 있다면, 그리고 여성 정치인들이 징징거리지 않고 자신만의 능력으로 인정받기 원하는 많은 여성들의 롤모델이 될 수 있다면 그 자체로 보수가 영역을 확장하는 솔루션이 정말로 될 수도 있지 않을까”라고 언급했답니다.

심 교수는 2014년 싱가포르 경영대학교와 호주 멜버른 대학교를 거쳐, 2022년부터 스페인 IE대학교에서 커뮤니케이션 및 디지털 미디어 조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신문방송학 학사와 미국 미시간 주립대학에서 텔레커뮤니케이션 석사, 시라큐스 대학에서 매스커뮤니케이션 분야 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난해 구절 및 용어에 대한 이해 / 모태신앙, 신접한 여인과 사무엘의 형상, 구약의 여호와 신약에서는 주,





성경의 난해구절들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성경에는 소위 "난해구절(뜻을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이라고 부르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39권)과 신약(27권)은 기록한 연대와 저자들이 다 다를지라도 모두 다 한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말씀들이 서로 짝을 이루어서(사 34:16) 우리로 하여금 충분히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게 합니다.
그래서 설사 우리가 몇몇 난해구절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우리가 온전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데에는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어떤 사람들은 난해구절들을 해석하려고 하는데, 그 노력은 우리에게 이로움 보다 해로움을 주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은 내용들을 이야기 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쉽게 분쟁을 일으키게 하기 때문입니다.

한가지 예를 들어보면,

창세기 4:12-15
12.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13. 가인이 여호와께 고하되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14.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시니라.

이 말씀이 사람들에게 난해구절로 분류되는 것은, 당시에 첫 사람 아담과 하와 사이에서 아들들은 오직 가인과 아벨뿐이었는데, 가인이 아벨을 죽인 후에 하나님께 말한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누구냐라는 것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두고, 성경은 하나님의 족보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보에 속한 사람만 기록되었기 때문이라고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가인이 그같이 말한 것은 나중에 사람들이 더 많이 생겨났을 때를 염두에 두고 한 이야기라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처럼 성경에 명확히 기록되지 않은 내용들을 이야기 하다보면 사람들마다 의견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성경에 명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은 사람마다 쉽게 다른 생각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마다 의견이 다르다는 것은 언제든 분쟁할 수 있는(나뉘어 질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성경에 기록된 분명한 하나님의 뜻은 우리에게 "서로 분쟁하지 말라고 하신 것"인데, 성경에 명확히 기록되지도 않은 내용을 가지고 도리어 우리가 분쟁한다면(나뉘어 진다면) 분명 그것은 잘못된 일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6:3-5
3.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아니하면 
4. 저는 교만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5.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디모데후서 2:23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고린도전서 1:10-13
1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11.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서 너희에게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12. 이는 다름 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13.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뇨.

이 말씀과 같이 우리는 서로 분쟁이 없이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로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만일 우리가 분쟁한다면 우리는 영적인 사람이 아닌 여전히 육신에 속한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3:1-7
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2.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3.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4.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사람이 아니리요 
5.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7.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자라나게 하시는 오직하나님뿐이니라."

우리는 이 말씀에서 온전하신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울도 중요하지 않고, 아볼로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중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예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다른 것으로 분쟁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시에 성경을 상고하는 사람들에게 "성경은 나를 증거하는 책"이라고 하셨던 것처럼, 우리가 성경을 알고자 하는 목적은 "오직 예수님"이 되어야만 합니다.

요한복음 5:39-40
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로다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
40.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그러므로 굳이 난해구절들을 억지로 해석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대부분의 많은 말씀들을 통해서 충분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알 수 있고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족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예수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바로 이것을 알려주는 책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본 목적을 잊고 알기 어려운 것을 억지로 풀려고 한다면 아래와 같은 말씀들이 응할 수밖에 없습니다.

베드로후서 3:15-18
15.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16.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17.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18.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지어다."

요한계시록 22:18-19
18.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19.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이같이 성경은 우리가 범하지 말아야 할 "지경"이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생각이나 행동은 항상 하나님께서 정하신 지경을 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겸손입니다(약4:10). 그러므로 우리는 교만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겸손히 순종하므로 정하신 지경을 넘지 말아야 하고, 그래서 "오직 예수님만 자랑하는(갈6:13-14)"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되어야 하겠습니다.

출애굽기 19:12
너는 백성을 위하여 사면으로 지경을 정하고 이르기를 너희는 삼가 산에 오르거나 그 지경을 범하지 말지니 산을 범하는 자는 정녕 죽임을 당할 것이라."

고린도전서 4:6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

로마서 12:2-3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3.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고린도전서 1:26-31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30.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31.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진실로 우리의 자랑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입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모태신앙(母胎信仰)

디모데후서 1:2-5
2.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3. 나의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 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4.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5.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편지를 보낸 위의 내용을 통해서, 우리는 디모데가 (굳이 이야기 하자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소위 "모태신앙인(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는 바울이 그의 믿음은 외조모 로이스와 그의 어머니인 유니게 속에 있는 믿음이었다고 말하였기 때문인데, 아무튼 그래서 오늘은 사람들이 흔히들 이야기하는 "모태신앙"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합니다.

사실 사람이 태어나기 전부터 믿음을 가질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세례 요한이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다는 말씀은 있습니다;

누가복음 1:15
이는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세례 요한에 대해서는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하세요.
정말 세례 요한은 세례를 받으셨던 그 분이 메시아라고 확신하고 있었을까요?
세례 요한의 믿음도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어쨌든 오늘날의 우리들은 여러 가지 연구 결과들을 통해서 "태교"와 "조기교육"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꼭 어떤 연구 결과가 아니더라도 어른이 되면 뒤늦게 무엇을 배우고 익힌다는 것이 얼마나 어릴 때보다 힘든지 몸으로 실감하게 되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공부할 수 있을 때 더 열심히 공부하라는 소리를 어른들이 자주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도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기 때문에(전3:1-8) 그 때에 맞게 행동하는 것이 우리에게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청년의 때에 창조자를 기억하라고도 말씀하셨는데(전12:1-2), 사도 바울도 디모데에게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한다고 전했습니다.

디모데후서 3:14-17
14.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15.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그래서 우리는 할 수만 있으면 어려서부터 성경을 아는 것이 어른이 되어서 성경을 아는 것보다 나을 수 있기 때문에, 어린 아이들에게 성경을 알려주어 그들로 하여금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얻도록 도와주어야 하겠습니다.
모태신앙이 유익이 있다면 바로 이 부분일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 믿음의 가정 안에서 자연스럽게 예수님에 대해서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모태신앙인들 중에는 나중에 커서 믿음을 잃어 버리거나 믿음을 저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반대로 모태신앙인이 아님에도, 곧 나중에 예수님을 알게 되었어도 오히려 모태신앙인들보다도 더 열심히 예수님을 믿고,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통해서 모태신앙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지 모태신앙이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할 수 있는 특권과 같은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혈통이라는 것을 자부하고 자랑했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8:37-40, 43-45
37.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38.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
39.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어늘 40.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43.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45.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이같이 혈통으로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자신들의 아버지가 아브라함이라고 자랑하였지만,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현재 그들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하지 못하는 것으로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고 하셨고, 도리어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하셨습니다. 모태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장하여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면 그 사람이 과거에 모태신앙이었다는 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과거보다 현재가 중요합니다. 현재에 내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이지 과거에 내가 누구였는가가 현재의 나보다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겔33:10-16).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복음에서는 구약의 율법과 달리, 이제는 표면적(혈통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2:23-29
23.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24.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25. 네가 율법을 행한즉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한즉 네 할례가 무할례가 되었느니라
26.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제도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27.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의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판단치 아니하겠느냐
28.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29.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칭찬은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인정받고자 자신이 모태신앙이라는 것을 자신의 입으로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만일 자신이 모태신앙인이라는 것을 자랑하면서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한다면, 그러면 그는 예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고자 하는 모태신앙이 아닌 사람들보다 못한 사람이 되고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태신앙이든 아니든 그것은 순전히 개인적인 것임을 알아야 하고(자랑할 것이 못되고),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의 피로 하나가 된 사람들이기 때문에 누가 높고 낮은 자가 없이 다같은 한 형제요 자매라는 것(마 23:8, 12)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또한 우리는 오직 한 몸되신 예수님만을 위하는 각각의 지체들인 것도 알아야 하겠습니다(고전 12:12-27).

에베소서 2:11-13, 19-22
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신접한 여인이 죽은 사무엘을 불러 올리다

사무엘상 28장 11-15절 "11여인이 가로되 내가 누구를 네게로 불러 올리랴 사울이 가로되 사무엘을 불러 올리라 12여인이 사무엘을 보고 큰 소리로 외치며 사울에게 말하여 가로되 당신이 어찌하여 나를 속이셨나이까 당신이 사울이시니이다 13왕이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라 네가 무엇을 보았느냐 여인이 사울에게 이르되 내가 신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나이다 14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그 모양이 어떠하냐 그가 가로되 한 노인이 올라 오는데 그가 겉옷을 입었나이다 사울이 그가 사무엘인줄 알고 그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니라 15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불러 올려서 나로 분요1케 하느냐 사울이 대답하되 나는 심히 군급2하니이다 블레셋 사람은 나를 향하여 군대를 일으켰고 하나님은 나를 떠나서 다시는 선지자로도, 꿈으로도 내게 대답지 아니하시기로 나의 행할 일을 배우려고 당신을 불러 올렸나이다."

[1분요(紛擾)=어수선하고 소란스러움, 2군급(窘急)하다=일이 되어가는 형세가 꽉 막혀서 몹시 급하다.]

사무엘 선지자는 죽었고(삼상28:3), 블레셋 사람의 군대가 쳐들어 오는 다급한 상황(삼상28:4-5) 속에서, 사울왕은 신접한 여인을 찾아 죽은 사무엘을 불러 올려 도움을 얻으려고 하였습니다. 우선 신접한 여인이 불러온 사무엘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그 진위(眞僞)를 가려내기에 앞서서, 우리는 사울이 신접한 여인을 찾은 것부터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것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신명기 18장 9-14절 "9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너는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 것이니 10그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복술자1나 길흉을 말하는 자2나 요술하는 자무당3이나 11진언자4나 신접자5나 박수6나 초혼자7를 너의 중에 용납하지 말라 12무릇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이런 가증한 일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느니라 13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완전하라 14네가 쫓아낼 이 민족들은 길흉을 말하는 자나 복술자의 말을 듣거니와 네게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런 일을 용납지 아니하시느니라."

[1복술자=점을 치는 자, 2길흉을 말하는 자=운이 좋고 나쁨을 말하는 자, 3무당=귀신을 섬겨 길흉을 점치고 굿을 하는 자; 주로 여자 무당을 말함, 4진언자=주술하는 자; 주술이란 불행이나 재해를 막으려고 주문을 외거나 술법을 부리는 일, 5신접자=영매술자; 영매술이란 죽은 자와 산 자가 의사를 통하는 술법, 6박수=남자 무당, 7초혼자=죽은 사람의 혼을 부르는 자]

레위기 19장 31절 "너희는 신접한 자와 박수를 믿지 말며 그들을 추종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신접한 자와 박수와 같은 자들을 절대 용납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믿지 말라고도 하십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오직 예수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4장 9-12절 "9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10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12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아멘. 진실로 천하 인간에 구원이 되는 이름은 오직 예수의 이름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해서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로마서 10장 12-13절 "12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1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아멘. 이 말씀이 진리(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골3:17)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사울왕은 하나님으로만 구원을 삼지 않고 신접한 여인을 찾았는데, 이는 그가 하나님이 자신을 떠나서 대답지 않는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고, 신접한 여인을 통해서는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삼상28:15). 그러나 이 생각이 잘못된 생각입니다(렘6:19). 앞서 언급한 대로 오직 구원은 하나님께만 있기에사울왕은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오직 하나님께만 매달려야 했습니다(잠28:13, 대하7:13-16). 그러나 사울왕은 자신이 왕이 된 후부터 번번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온 것처럼, 또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서 신접한 여인을 찾아오고 말았습니다.

놀랍게도 신접한 여인이 불러낸 죽은 사무엘은 사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무엘상 28장 17-19절 "17여호와께서 나로 말씀하신대로 네게 행하사 나라를 네 손에서 떼어 네 이웃 다윗에게 주셨느니라 18네가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치 아니하고 그의 진노를 아말렉에게 쏟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오늘날 이 일을 네게 행하셨고 19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너와 함께 블레셋 사람의 손에 붙이시리니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 군대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 붙이시리라."

그리고 정말 그의 말대로 사울과 그 아들들은 그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다 죽게 됩니다(삼상31:1-6). 어찌된 일일까요? 신접한 여인이 불러낸 사무엘은 정말 참 사무엘이 맞았던 것일까요? ...그러나 성경은 사울왕이 죽은 이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역대상 10장 13-14절 "13사울의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저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14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저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돌리셨더라."

다시 말해서 신접한 여인이 불러낸 사무엘의 말(예언)대로 사울이 죽었던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은 것과 하나님께 묻지 않고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저를 죽이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사울왕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고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한 일 자체가 도리어 그를 죽게 한 죄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로써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신접한 자에게 묻는 것을 결코 용납지 않으신다는 것을 다시 한번 우리 모두에게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니깐 만일 나타난 사무엘이 진짜였다면, 제일 먼저 하나님께 묻지 않고 신접한 여인을 찾아온 사울을 크게 책망했었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같은 사울의 죄를 통하여, 어떠한 일에도 (그 때가 아무리 다급한 순간이라도) 결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지 말아야 할 것을 교훈 받아야 하며, 오직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예수의 이름에만 있기 때문에, 반드시 우리는 예수의 이름을 힘입어 구원을 얻어야 할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20장 30-31절 "30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31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역대하 7장 13-16절 "13혹 내가 하늘을 닫고 비를 내리지 아니하거나 혹 메뚜기로 토산을 먹게 하거나 혹 염병으로 내 백성 가운데 유행하게 할 때에 14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찌라 15이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리니 16이는 내가 이미 이 전을 택하고 거룩하게하여 내 이름으로 여기 영영히 있게 하였음이라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 있으리라."

사도행전 4장 12절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신약성경에서 한 번도 여호와의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이유


시편 110편 1절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누가복음 20장 41-43절 "41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사람들이 어찌하여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42시편에 다윗이 친히 말하였으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43내가 네 원수를 네 발의 발등상으로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시편 118편 26절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

요한복음 12장 13절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요엘 2장 32절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사도행전 2장 21절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위의 구절들은 구약에 기록된 말씀들을 신약에서 인용(引用)한 구절들로서 서로 비교하기 좋게 모아놓은 것입니다. 서로 다른 점은 굵은 글씨로 표기하였습니다. 사실 이에 관해서는 이미 1. 하나님의 이름 "예수"에서 설명을 하였고, 저희 홈페이지에 게시된 글들 중에도 자주 언급된 부분이기도 합니다만, 우리의 구원과 관련된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기에 다시 한번 이 글을 통해서 또다시 밝히려고 합니다.

왜 신약(새 언약)에서는 구약(옛 언약)과 달리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단 한 번도 기록되지 않은 걸까요?

위의 말씀들과 같이 구약성경에 명확히 "여호와"라고 기록된 구절들조차도 그 구절들이 신약성경에서 인용될 때에는 ""라고 바뀌어 기록된 것을 알 수 있고, 아래의 말씀과 같이 문맥상으로는 분명 "여호와"인데 "주"라고 기록을 한 경우도 있습니다.

누가복음 5장 17절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나온 바리새인과 교법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하더라."

이 말씀에서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하였다고 하였으니, 여기에서 "주"는 "예수"가 아닌 "여호와"를 가리켜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에 대해 '번역의 문제'등과 같은 "언어와 관련된 것"으로 생각하거나, 사람들이 직접적으로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의 사용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생각을 하기 보다는, 구약(율법)에서 신약(복음)으로 넘어오면서 개혁되는 하나님의 큰 뜻을 올바르게 분별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하겠습니다.

오순절에 이 땅에 진리의 성령이 강림하신 당시에도 유대인들은 (여전히 구약시대와 마찬가지로) "여호와"가 ""인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나사렛 예수를 메시야로, 더더군다나 하나님으로는 전혀 인정을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 강림하신 진리의 성령께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통해서 각 나라의 방언으로 "예수"가 ""이신 것을 세계 각 지역에서 모인 유대인들에게, 그리고 오늘날 우리들에게까지 전하게 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행2장).

사도행전 2장 34-36절 "34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가로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35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36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찌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우리는 오순절에 예수님의 제자들을 통해 진리의 성령께서 선포하신 위의 말씀으로 인해, 나사렛 예수를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알고 시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위의 말씀에서 그동안 유대인들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시편 110편 1절의 말씀도 풀어주셨는데, 그것은 다윗이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라고 기록한 부분입니다. 이 부분이 유대인들에게 "난해구절"이 되는 것은, 유대인들에게는 오직 주는 여호와 한 분뿐이시기에 마치 다윗이 두 주가 있는 것처럼 기록한 것을 그들이 이해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만일 다윗이 말한 "내 주"가 여호와 외에 다른 주라면 그럼 그 "주"가 누구일까가 유대인들에게는 궁금한 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리의 성령께서는 다윗이 말한 "내 주"가 바로 "나사렛 예수"이신 것을 그들에게 알려 주신 것이고, 또한 시편 110편 1절의 말씀도 예수님의 제자들을 통해서 사도행전 2장 34절에서는 "주께서 내 주에게"라고 전하게 하시므로 서로 동급인 "같은 주"이신 것을 그들에게 알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후부터는 유대인에게도 그리고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다 "주 여호와"가 아닌 "주 예수"가 시인되어야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엘 2장 32절에 기록된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라는 말씀이 사도행전 2장 21절에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바뀌면서 여기에서 주의 이름은 "예수"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실로 진리의 성령이 아니고서는 결코 시인할 수 없는 일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왜냐하면 당시의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조상 대대로 알고 있었던 "주 여호와"를 "주 예수"로 바꾸는(개혁하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이 때문인지 오늘날까지도 대부분의 유대인(한자로는 猶太人유태인)들은 나사렛 예수를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진실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을 해야만 합니다(사55:7-9). 그리고 이 문제는 비단 유대인들에게만이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마찬가지여서, 이방인들도 자신들에게 존재하는 여러 많은 주(고전8:5)들을 없애고 오직 "예수"만 "주"이신 것을 믿음으로 시인해야만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을 통해서도,

로마서 10장 9-13절 "9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10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11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12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1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욜2:32)."

이 말씀과 같이 사람이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해야 구원을 얻는다고 하시면서, 또한 "두 주"가 아니라 "한 주"라고 하셨습니다.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라는 이 말씀은, "주 여호와"를 증거하시는 것이 아니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라고 하신대로, 오직 "주 예수"가 모든 사람의 주가 되신다는 것을 증거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5절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결국 신약의 예수와 구약의 여호와는 "같은 한 주, 곧 한 하나님"이신 것을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고전8:4-6). 그러므로 "주 여호와"를 "주 예수"로 바꾸는(개혁하는) 것은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결코 참람된 일(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요10:30-33) 도리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11절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진실로 이제는 "주의 이름은 예수"이며, 이 부분이 바로 왜 신약에서 "여호와"라는 이름이 단 한 번도 기록되지 않았는가를 알려주시는 대목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이제 한 주, 한 하나님이 되시는 "예수"의 이름만 불러야 하겠습니다. 이는 천하 인간이 구원을 얻을만한 이름은 오직 "예수"의 이름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4장 8-12절 "8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9...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10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12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아멘. 진실로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이름은 오직 "예수"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래의 스가랴의 예언의 말씀도 또한 "여호와"를 증거하려 한 것이 아니라, "예수"를 증거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스가랴 14장 7-9절 "7여호와의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 9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하나이실 것이요 그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며."

여호와의 아시는 한 날은, 이 어두운 세상에 참 빛되신 예수님(요8:12)께서 오시는 날이고, 그래서 예수님께서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되시사(계17:14, 계19:13-16), 예수님께서 홀로 하나가 되시며(요10:30), 예수의 이름이 홀로 한 이름(행4:12)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안타까운 것은 언제부터인지 사람들이 "예수를 주로 시인하라"는 말씀을 오해하여 예수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주님, 주여"라고만 하는 경우가 많은데(심지어는 여호와의 이름을 불러 기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앞서 설명을 한 대로 원래는 우리가 "예수"가 "주"이신 것을 믿고 시인한다면, 다시 말해서 "주 여호와"가 "주 예수"이신 것을 믿고 시인한다면, 기록된 말씀대로 "누구든지 주의 이름 곧 예수의 이름을 불러서 구원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직 예수의 이름만이 바로 우리의 구원의 이름이시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6장 24절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요한복음 20장 30-31절 "30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31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치매 예방



75세 미만이면 이 운동하라...치매 막는 ‘뇌 회춘 법 3가지’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치매는 한번 걸리면 회복이 힘들다. 최고의 치료법은 예방에 있다. 치매는 두뇌 기능 이상에 의해 발생하므로 두뇌 활성화를 통해 신경세포와 이들의 연결망인 신경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것이 치매 예방의 첫걸음이다. 뇌 조직이 굵어지면 노화와 치매에 저항성이 생기는 원리다. 매일 진료실에서 치매 환자를 살피는 정지향 이대서울병원 신경과 교수는 최근 조선일보 의학 전문 유튜브 콘텐츠 ‘이러면 낫는다’에 출연하여 치매를 예방하고 뇌 노화를 늦추는 뇌 회춘법을 소개했다.

그래픽=이철원

◇인지 활동과 운동이 치매 백신

정 교수가 추천하는 뇌 회춘 3대 축은 인지 활동, 운동, 마인드 다이어트다. 새로운 정보를 접하고 새로운 학습을 하는 것은 뇌신경 세포를 연결하는 신경 돌기 효율을 증가시켜 뇌를 싱싱하게 만든다. 정 교수는 “뇌의 기능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언어 능력 회로와 손 운동 관할 영역”이라며 “이 둘을 동시에 사용하는 활동이 뇌 기능을 크게 증진시킨다”고 말했다. 즉 손으로 새롭게 얻은 정보를 써보거나 그려 보라는 것이다. 정 교수는 “매일 신문을 보고 새로 접한 것을 누가, 무엇을, 어떻게 등 6하 원칙에 따라 손으로 직접 1000자 정도로 쓰는 것을 추천한다”며 “실제 인지 기능이 떨어진 환자를 대상으로 이런 천자 쓰기를 시도한 결과, 석 달 후에 천자 쓰기 그룹의 인지 기능이 월등히 좋아졌다”고 말했다. 아울러 주 2회 이상 여럿이 모여서 사회 활동을 하는 것이 인지 기능 향상에 매우 도움이 된다고 정 교수는 전했다.

뇌 회춘 둘째 축은 운동이다.
뇌 무게는 1.5㎏밖에 안 되지만 심장에서 박출되는 혈액의 25%가 뇌로 간다.
그만큼 뇌는 혈류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작동한다.
운동은 이런 뇌혈류를 증가시킨다.
75세 미만이라면 매일 150분 정도의 경보나 배드민턴 같은 중강도 운동이 권장된다.
한 번 할 때 15~20분 정도 운동을 지속해야 효과가 있다.
달리기 같은 고강도 운동은 하루 75분 정도면 충분하다.
80세 이상이거나 지병이 있다면 집 안에서 가볍게 걷는 운동이나, TV를 보면서 하루 두 번 정도 30분간 제자리걸음을 해도 도움이 된다고 정 교수는 전했다.
정 교수는 “국민체조 영상 등을 틀어 놓고 매일 체조나 스트레칭을 하는 것도 좋다”며 “운동할 때 영어 공부도 같이 하는 식으로 머리를 쓰면서 운동을 하면 총명함을 늘리는 데 최고 효과를 낸다”고 말했다.

◇고혈압, 고지혈증 줄이는 식단

뇌 회춘 셋째 축은 음식이다.
고혈압과 고지혈증을 줄여서 궁극적으로 치매를 예방하는 이른바 마인드(mind) 다이어트다.
이는 뇌혈관 동맥경화를 줄여서 뇌혈류 감소로 생기는 혈관성 치매를 막는다.
매일 아몬드, 호두와 같은 견과류 한 주먹, 채소 한 움큼, 들기름 한 스푼 먹기가 권장된다.
정 교수는 “빨간 육류 섭취를 주 2회 이하로 줄이고, 대신 가금류와 생선을 자주 먹는 게 좋다”며 “베리류 과일을 주 3회 이상 섭취하기를 권한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뇌는 근육과 같아서 많이 사용할수록 튼튼해지고, 신경세포 사이사이에 시냅스라는 돌기들이 촘촘히 연결되어, 나이 들어도 남아 있는 한 개가 일당백의 역할을 수행한다”며 “인생 말년으로 갈수록 삶의 목표가 줄어드는데 죽을 때까지 치매에 걸리지 않게 살아보자고 마음먹으면, 하루가 바쁘고, 삶도 풍요로워진다”고 말했다.



치매 막는 ‘마인드 다이어트’... 뇌건강 식단 9계명

입력 2023.06.07. 20:37업데이트 2023.11.30. 10:29
18
게티이미지뱅크

사과나 감자만 먹는 원 푸드(one food) 다이어트, 고기만 먹는 황제 다이어트, 공복 시간을 늘리는 간헐적 단식, 특정 시간대에만 식사를 하는 시간 제한 다이어트 등 그동안 수많은 다이어트가 나왔다. 모두 효율적으로 체중을 줄이거나 살을 안 찌게 하려는 게 목적이었다.

이런 체중 관리 일변도의 다이어트계에 새롭게 등장한 것이 있다. 인지기능 개선을 위한 마인드(MIND) 다이어트다. 살이 아니라 뇌 건강이 목표다. 마인드 다이어트는 이른바 지중해 식단과 심혈관 질환 예방을 위해 나온 다이어트 합작품이다.

2015년 미국 하버드대와 러시대 메디컬센터는 시카고 지역 은퇴자 커뮤니티와 노인 주거 단지를 대상으로 치매가 없는 노인 1000여 명을 최대 10년 동안 추적하면서 그들의 식사 패턴과 인지기능 변화의 관계를 추적했다. 어떻게 먹어야 치매가 덜 걸리는지를 본 것이다. 그 결과 마인드 다이어트를 적극적으로 실천한 노인은 하지 않은 사람에 비해 인지기능 저하 속도가 현저히 줄었다. 이후 마인드 다이어트 식단에 대한 연구가 줄을 이었고, 인지기능을 높이는 식단으로 전 세계적인 관심을 끌었다.

그래픽=이지원

마인드 다이어트 핵심은 야채와 채소, 통곡물, 생선 중심의 지중해식 다이어트와 심혈관 질환 예방을 위해 고기를 피하는 식단의 조합이다. 산화 스트레스와 염증을 줄여 뇌세포를 보호하는 비타민, 카로티노이드 및 플라보노이드가 풍부한 식품을 많이 먹어 뇌 염증을 줄이고, 동맥경화를 줄여서 뇌혈류량을 늘리자는 의도다.

구체적인 지침을 보면, 통곡물은 하루 3회 이상 섭취를 권한다. 야채는 하루 한 번 이상 먹고, 특히 녹색잎 채소는 일주일에 6회 이상 먹어야 한다. 견과류는 일주일에 5회 이상, 콩은 4회, 딸기나 블루베리 등 베리류 과일은 2회 이상, 닭고기 살 등 가금류는 2회 이상, 생선은 1회 이상 먹기를 권한다. 식물성 기름 올리브 오일은 자주 섭취하는 게 좋다.

섭취 자제를 촉구하는 기준도 있다. 기본적으로 지방질 고기 속 포화 지방과 한 번 튀겼다가 식은 트랜스 지방은 피해야 한다. 아울러 단맛의 가공 빵과 과자는 일주일에 5회 미만, 쇠고기, 양고기, 베이컨, 소시지 등은 4회 미만, 치즈와 튀긴 음식은 1회 미만으로 섭취하길 권한다. 버터와 마가린은 하루 한 티스푼 이내로만 먹어야 한다.

알코올 중에는 적당한 양의 와인이 인지기능을 올린다고 해서 추천됐다. 개인의 알코올 섭취 능력을 감안해야 하고, 하루 한 잔 이내 섭취를 권한다. 마인드 다이어트는 뇌졸중 같은 뇌질환이 이미 있는 사람에게도 인지기능 감소를 줄이는 효과를 낸다.

다만 마인드 다이어트 식단의 식재료는 주로 스스로 조리해서 먹어야 하는 것이기에 식사 준비 시간이 더 늘어날 수 있다. 외식을 자주 하는 사람들은 실천이 힘들 수 있다. 고령자 스스로 요리를 해서 먹는다면, 인지기능 개선 효과는 더 올라가기에, 자신의 취향에 맞게 조리법을 개발해 마인드 다이어트를 즐긴다면, 나이 들어도 좋은 기억력을 오래 유지할 수 있다고 영양 정신학자들은 말한다.

☞마인드 다이어트

마인드(MIND)는 지중해식 식단과 심혈관 질환 예방 식단으로 기억력이나 신경기능 저하를 늦추자는 뜻의 영어 약자 조합이다. 맨 앞의 M은 지중해식(Mediterranean)이고, 맨 뒤의 D는 딜레이(delay, 지연)를 의미한다. 나이 들수록 감소하는 인지기능을 체내 염증을 줄이고, 뇌혈류는 늘리는 식사를 통해 최대로 지켜보자는 목적으로 개발됐다.





하나님의 섭리(攝理) God's providence


하나님의 섭리(攝理) God's providence


성경에는 "섭리(攝理)"라는 단어가 없다.
섭리란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그 세상을 하나님이 의도하신대로 다스리시고 인도하신다는 뜻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드러난다.

예를 들면 누가복음 15장에 작은 아들은 자기가 상속받을 유산을 미리 요구하고 그 모든 것을 갖고 아버지의 집을 떠나려고 할 때 아버지가 타이르고 깨우쳐서 안 된다고 하시지 않았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요구할 때 왜 안 된다고 하지 않으셨나?

원래 인간(아담과 하와)은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을 떠나려는 강한 욕망을 이기느냐 이기지 못하느냐에 따라 그 삶이 결정될 것이다.

하나님의 의도
하나님이 주신 환경
하나님의 결정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잠언 16:33 /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섭리(Providence)는 "모든 피조물과 그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가장 거룩하고 현명한 그리고 능력있는 보존과 통치"를 의미한다(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 제11문).

만약 '창조'가 세상을 존재하게 한 신적 능력의 독특한 행사였다
'섭리'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 동일한 능력의 계속적인 행사를 통하여 자신의 뜻을 따라
1. 모든 피조물을 존재하게 하시고
2. 모든 사건을 친히 간섭하시며
3. 만물을 그 정한 목적에 따라 운행하시는 것을 말한다.

세상과 인간의 기원과 그 유지는 하나님의 힘에 의존한다. 
우주는 결코 그 자체의 힘에 의하여 존속하거나 운행될 수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계속적을 그 세상을 유지하시고 새롭게 하시며 질서를 주실 수 있다.

성경은 다음과 같은 영역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적인 통치를 가르치고 있다.
1. 우주 전체에 대하여(시 103:19, 엡 1:11)
2. 물리적 세계에 대하여(욥 37:15,10, 마 5:45)
3. 동물계에 대하여(시104:21, 28, 마 6:26)
4. 국가의 일에 대하여(욥 12:23, 행 17:26)
5. 인간의 출생과 삶의 방향에 관하여(삼상 16:1, 갈 1:15~16)
6. 인간 삶의 외적인 성공과 실패에 관하여(시 75:6~7, 눅 1:52)
7. 외관상 우연적이거나 사소한 일에 관하여(잠 16:33, 마 10:30)
8. 의인을 보호하심(시 4:8, 롬 8:28)
9. 하나님의 백성들의 필요를 채워 주심(창 222:8,14, 빌 4:19)
10. 기도에 응답하심(삼상 1:19, 마 7:7, 눅 18:7~8)
11. 악한 자를 벌하심(시 7:12~13, 시 11:6)

하나님의 이러한 통치의 범위는 우주적이다. 
가장 하찮은 일(마 10:29~31)과 우연으로 보이는 일(잠 16:33), 그리고 사람들의 악한 행실(행 14:16)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선한 행실(빌 2:13), 이 모두 하나님의 통제 아래에 있다. 


하나님의 선하신 통치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인간 스스로의 행동과 자연적인 재난, 그리고 사탄의 행위일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통치하고 계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 에스더서의 분명한 메시지이다.
  하나님의 명시적인 뜻에 반역하여 일어나는 일일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그 일에 대한 자신의 뜻을 이루어 가신다(엡 1:11). 인간의 악행을 사용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시다(창 50:20, 행 2:23). 물론 하나님의 주권 하에서 인간이 범죄할지라도 하나님이 죄의 조성자는 아니시다(약 1:13~17). 하나님은 항상 죄의 심판자이시다.
  하나님은 악을 허용하시나(행 14:16), 그 악을 악으로 벌하신다(시81:11~12, 롬 1:26~32). 하나님은 악으로부터 선을 이끌어 내시며(창 50:20, 행 2:23, 행 4:27~28, 고전 2:7~8), 그 악을 통하여 사랑하는 자들을 훈련하시고 연단 시키신다(마 4:1~11), 히 12:4~14). 그리고 어느 날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그 모든 악으로부터 완전히 구원하실 것이다.(계21:27, 22:14~15).

  섭리의 교리는 우리가 결코 그 어떤 맹목적인 힘(운명, 우연 등)에 사로잡히지 않으며,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음을 알게 한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실상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사랑이기에 우리로 하여금 더욱더 하나님을 의지하고 복종하며 늘 기뻐하도록 하는 새로운 설교와도 같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 심음과 거둠의 법칙

모든 일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는 사실이 사람들에게 오해와 혼란을 불러 일으키곤 합니다.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주관하시고 섭리 가운데 다스리스는데 우리가 무엇인가를 할 필요가 있는가라는 의문을 갖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오해는 결국 믿음의 행위나 전도나 기도 등에 미온적인 태도를 갖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동을 통해 섭리하시고, 하나님의 섭리가 이루어지는 방편으로 우리의 기도를 활용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행동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심음과 거둠의 법칙을 만들어 두셨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두게 됩니다. 육체를 위해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둡니다. 물론 인생사가 꼭 심는대로 거둬지는 것은 아닙니다. 열심히 일을 해도 가난하게 사는 사람이 있고, 빈둥대도 편하게 먹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육체로 심고 썩을 것을 거둔다는 법칙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영적인 것을 심고 영원한 곳에서 누릴 영광을 얻게 된다는 데에도 변함이 없지요. 따라서 인간은 어떠한 형태로든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합니다. 어떤 일에 대해서는 이 세상에서 열매를 따기도 하고, 또 어떤 문제에 대해서는 죽음 이후에 열매를 따기도 할 뿐, 심는대로 거둔다는 법칙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6장에서 사도 바울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당장 열매가 안 보여도 때가 되면 열매를 거둘 날이 온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적극적으로 선을 행해야 합니다.

2. 결과를 위해 필요한 것, 행동

요셉의 일생은 하나님의 섭리를 설명하는 좋은 예가 됩니다. 그러나 심은 대로 거둔다는 측면에 있어서도 그의 일생은 좋은 예가 될 수 있습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결국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그의 형제들은 그의 앞에 와서 머리를 조아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오래전에 이미 그의 꿈을 통해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것이 실현된 것이었습니다. 그를 통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배양하시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결정은 변화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형제들의 행동과 그 결과를 유심히 보면, 하나님의 섭리대로 모든 것이 진행되면서도, 인간은 각자의 행동에 책임을 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르우벤은 장자였지만 아버지 야곱의 첩인 빌하와 통간을 하여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습니다. 르우벤 지파는 결국 장자권을 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12지파 중 가장 먼저 멸망하는 운명을 맞아야 했습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잔인하게 피의 복수를 함으로써 아버지를 곤궁으로 내몰았습니다. 그들은 그로 인해 지파끼리 모여 살지 못하고 다른 지파들 사이에 흩어져서 사는 운명을 맞이해야 했습니다. 또한 요셉의 형들은 동생인 요셉을 시기하여 살해음모를 꾸몄습니다. 반면 요셉은 많은 고난을 받았지만, 결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고 사람들을 해치는 일도 범하지 않았습니다. 결과적으로 요셉은 형들 위에 우뚝 서며 11번째 아들임에도 장자권을 얻게 되지만, 형들은 동생 앞에 찾아와 절을 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각자의 인간 행동에 대한 책임 역시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야곱과 에서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로마서 9:13에 보면 하나님께서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심지어 그것은 야곱과 에서가 아직 태어나기 전에 결정된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행위로 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대로 야곱이 택정된 것이지요. 그러나 야곱과 에서의 행위를 보면 여전히 각자가 심은 대로 거두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에서는 육체의 것만 소중히 여기고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을 무시하는 자였습니다. 반면 야곱은 이기적이고 욕심많은 부정적인 성정을 가졌지만, 하나님을 몹시 갈망하는 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갈망하는 야곱의 영적 심음을 영적 거둠으로 갚으시기도 하셨던 것입니다.

에스더서에는 하나님이란 단어가 전혀 등장을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기도라는 단어도 등장을 하지 않지요. 그래서 에스더서는 정경에서 빠질 위험에 처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에스더서는 하나님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어도 개인과 역사를 주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너무도 잘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보존하고 지키시려는 하나님의 섭리는 이스라엘이 아닌 페르샤에서도 여전히 이행되고 있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유대인을 멸족시키려 했던 하만은 자신이 만든 교수대 위에 매달리는 형벌을 당하게 됩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법칙이 여전히 유효한 것이지요.

심음과 거둠의 법칙은 성경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도 얼마든지 발견되어 집니다. 담배를 피우면 폐암에 걸리고, 탄 음식을 습관처럼 먹으면 대장암에 걸리며, 바이러스에 노출되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아파야 합니다. 이것은 성도라고 하더라도 여전히 피해갈 수 없는 법칙입니다. 신앙 생활에 있어서도 심음과 거둠의 법칙은 극명합니다. 말씀을 늘 접하는 사람은 말씀을 더 많이 알 수밖에 없고, 기도를 옳게 많이 하는 사람은 그만큼 하나님의 임재를 깊이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 안에서 선을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악을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픔이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을 선한 길로 인도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섭리 안에서 각자가 걸어야 하는 행로는 각자의 선택과 행동에 따라 달라집니다.

3. 가장 확실한 신앙 행동, 기도

성경은 하나님의 계획이 일정하게 고정되어 있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뜻은 결코 변화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또한 성도가 기도할 것을 명하며, 믿음의 기도가 결과를 바꿔놓을 수 있음을 명백히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명령하시며 또한 기도가 가치가 있는 것임을 보여 주신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의 기도를 수단으로 활용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4:14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행하신다 약속하셨습니다. 마태복음 7:7은 구하면 주실 것이요 찾으면 찾아낼 것이고 두드리면 열릴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야고보서 4:2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밝히고 있으며, 요한복음 16:2는 구하면 받을 것이고, 그로 인해 기쁨이 충만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시기 위해서 다양한 수단들을 활용하십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진공 상태에서 이뤄지지 않고, 피조물들과의 협력을 통해 이뤄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에 보존과 통치 뿐 아니라 협력이라는 주제를 아예 따로 넣는 학자들이 있는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주님의 섭리를 이루시기 위해 사용하시는 가장 중요한 협력 수단은 바로 성도들의 기도입니다. 물론 기도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섭리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어가는 과정에 성도들과 협력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음이 이유들로 인해 우리가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1)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기를 원하십니다.

2) 기도를 통해 우리와 깊이 교제하기를 원하십니다.

3)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기를 원하십니다.

4)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원하십니다.

4. 믿음과 기도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

성경은 구약과 신약에서 모두 기도가 하나님의 행동 방식을 변화시키는 행위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열재앙과 홍해가 갈라지는 놀라운 기적들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멸시하는 언행들을 서슴치 않았습니다. 입만 열면 원망투성이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분노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그들을 멸하겠다고 선언하신 적이 있으십니다. 그때 모세는 백성들에게 화를 내리지 말아달라고 기도를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게서는 뜻을 돌이키셔서 그 백성에게 벌을 내리지 않으십니다 (출 32:14).

역대하 7:14는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백성이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듣고 용서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의 약속을 주십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일 1:9) . 우리가 자백하면 하나님께서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자백하지 않으면 용서가 보장되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지요.

예수님께서는 고향 나사렛을 찾아가 말씀도 전하시고 치유도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소수의 병든 사람을 치료하는 것 외에는 하실 수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오락가락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과 기도라고 하는 행동을 통해서 일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앙의 행동이 행해지는 곳에서 일을 하시기 원하시는데, 그런 행동있는 신앙이 나사렛에서는 결여되었기 때문에 예수님도 일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 없음으로 인해 “amazed” 되셨습니다. 믿음이 너무 없어서 깜짝 놀라신 것이지요.

마태복음 14장은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어오신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을 본 베드로는 자신도 물 위를 걷고 싶다는 요청을 했고, 그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물위를 걸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위에 있던 모든 제자들로 하여금 물 위를 걷게 하실 수 있었지만, 베드로에게만 그 혜택을 주셨습니다. 오직 베드로만 주님께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혈루증으로 12년을 고통받던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나음을 얻으리라는 믿음으로 나음을 얻었고, 백부장은 시공을 초월하여 역사하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믿었으므로 예수님을 집으로 모시지 않고도 자신의 종이 치유되는 기적을 맛보았습니다. 예수님 앞에 나아오고 치유를 받지 못한 사람이란 도무지 없었습니다. 반면 예수님을 믿지 못하거나 구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치유함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치유하시기 원하실 때, 하나님께서 고치실 수 있다는 믿음과 고쳐주기를 간청하는 기도도 함께 원하십니다. 즉 목적을 원하시면서 수단도 함께 원하시는 것이지요. 기도는 하나님의 목적이 우리의 삶에 이루어지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간구하라고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결국 기도는 하나님께서 행하시기로 하신 일을 변경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의 기도를 통해 일하시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목적이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모세의 기도를 통해 백성들을 멸하지 않으신 것 역시, 모세의 기도에 의해 하나님의 뜻이 변경되었다기 보다는 모세의 기도를 통해 백성들을 용서하시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 정확한 것입니다. 다만 인간의 입장에서는 하나님께서 마음을 변경시킨 것으로 보이므로 성경에 그렇게 기록된 것 뿐입니다. 그것을 어려운 말로 신인동형론이라고 부릅니다. 인간이 알아듣기 쉬운 방식으로 설명을 하신 것이지요.

5. 기도보다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

우리를 당황스럽고 낙심되게 만드는 것은 우리의 기도대로 되지 않을 때가 많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런 일은 우리만 경험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의 잔을 피하게 해달라 세 번이나 기도했지만, 결국 십자가에 달리셔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야 모든 인류가 구원받는 궁극적 선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통해 그러한 아버지의 뜻에 전적으로 동의하였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그의 질병을 고쳐달라 세 번이나 기도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고 하는 말씀을 주시면서 바울의 질병을 그대로 남겨 두셨습니다. 그 질병으로 인해 사도바울은 엄청난 기적들을 행하면서도 자고하지 않고 겸손히 주님을 섬길 수 있었습니다. 치유의 능력이 자신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잊지않게 하는 역할을 그 질병이 해주었던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기도를 통해 스스로의 질환이 하나님의 은혜로 남겨진 것임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기도도 우리의 뜻대로 응답이 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기도응답에는 Yes, No, Wait의 세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는 주로 Yes를 원합니다. 그러나 No나 Wait 역시 하나님의 선하신 응답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실 기도에 대해 응답이 No일 경우가 더 멋진 응답일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지성을 뛰어 넘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보다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도에 대한 응답이 속히 오지 않는다 할지라도 낙심도 말고, 쉬지도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알 수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나면 응답이 No라 할지라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또한 응답이 되지 않는 기나긴 Wait의 시간 동안 우리는 하나님과의 친밀함이라고 하는 기도 본연의 목적을 이룰 수가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를 통해 우리와 아름다운 교제를 나누기 원하시며,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이루어 가시는데 우리를 파트너로 세우시기 원하십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섭리에 우리가 중요한 일부가 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배려입니다. 그 위대하고 아름다우신 초대에 우리는 어떻게 응하고 있습니까?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기독교신앙은 천지만물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음을 고백한다.
창세기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시작된다.
예배마다 외우는 사도신경에도 천지의 창조주인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만유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기독교신앙의 첫째 조항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주만물을 창조했다는 신앙도 중요하지만 그것 못지 않게 중요하거나 어쩌면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계를 친히 섭리하신다는 신앙이다.

섭리란 무엇인가?
섭리를 막상 정의해 보라고 하면 잘 못한다. 중국에서 강의를 하니 '섭리'라는 말자체가 없다. 중국사람에게 없는 단어이다. 섭리란 삼위일체 하나님이 그가 지으신 모든 세계를 그가 계획하신 목적에 이르도록 그의 주권과 사랑과 지혜와 권능과 공의로 계속하여 보존하시고 다스리시고 인도하시는 행위를 가르키는 말이다. 섭리란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존재가 창조의 목적에 이르도록 친히 당신의 주권과 사랑과 지혜와 능력과 공의로 계속하여 보존하시고 다스리시고 인도하신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섭리의 신앙이다.

'섭리'라는 말은 성경에는 나오지 않는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신앙은 완전히 성경적인 신앙이다. 사람은 옛날부터 이 세상이 어떻게 운행되며 어떤 원리에 의해 다스려지는가 하는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물음에 대해 여러가지 대답들을 제시해 왔다.

그 중 하나가 '이신론'이라 불리는 것이다. 이신론은 신이 이 세상을 창조하기는 했으나 창조한 후에는 세상에 대해 더이상 상관하지 않으며 관심도 가지지 않고 이 세상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면 이 세상은 어떻게 운행되어 가느냐 하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때 세상에 부여하신 원리에 의해 운행된다는 것이다. 세상을 다스리는 신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원리가 곧 신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신론이다. 이신론의 '이'자는 둘 이가 아니라 이치 이(理)이다. 원리에 의해 다스려지는 것이지 신이 이세상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이신론이다. 이신론은 세상이 자체의 원리에 의해 돌아가기에 하나님이 설 자리가 없다.

세상이 어떻게 운행되며 어떤 원리에 의해 다스려지는가 하는 다른 하나의 대답은 숙명론이다. 숙명론은 세상만사 세상자체의 인과율, 원인과 결과의 법칙에 의해 다 결정되어 있다는 사고이다. 숙명론이 우리가 말하는 예정론이 아닌가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둘은 전혀 다른것이다. 예정론은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고 안받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안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 예정론이다. 숙명론은 세상 자체의 인과율에 의해 모든것이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그곳에도 하나님이 끼여들 여지가 없다. 예정론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말하기에 완전히 다른 것이다.

또 다른 하나의 대답은 우연론이다. 우연론은 이 세상이 어떤 일정한 목표나 방향을 향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법칙에 의해 지배되는 것도 아니라 그저 순간순간의 우연에 의해 이끌려 진다는 주장이다. 그밖에도 이세상은 악이 지배하거나 악신에 의해 다스려진다고 보는 악지배론도 있다. 이런 4가지 사고들은 서로 다른것이지만 공통점은 다같이 하나님이 간섭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세상자체의 원리, 자체의 인과율, 우연, 악이 지배하는 세상이라는 사고들에는 하나님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 그 모든 주장들은 거짓된 것이다.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신앙

성경은 이러한 4가지 이론들을 일시에 거부하는 섭리신앙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하나님이 모든것을 창조하시고 모든것을 존재하게 하시고 모든것을 다스리시고 모든것을 창조의 목적에 이를때까지 친히 인도하시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섭리신앙이기에 앞서 말한 모든 사고는 잘못된 것이라는 것이다.

욥기 33장 4절은 "하나님의 영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를 지으셨을뿐만 아니라 우리가 계속해서 살아있게 하시는 이도 하나님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느헤미야 9장 6절은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라고 말하고 있다. 지으시기만 하고 너희들이 알사서 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계속 살아있는 것과 보전되는 것은 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것이다. 히브리서 1장 3절에서도 만물을 붙드는 것은 주님이라고 증거하고 있고, 사도행전 17장 28절에서는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고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이세상 만물을 단지 존재하게 하시고 살아 움직이게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것을 세상자체에 맡겨놓지 않으시고 간섭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시편 103편 19절을 보면 "호와께서 그의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의 왕권으로 만유를 다스리시도다"라고 하신다. 역대상 29장 12절은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물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사람을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 한사람 한사람에 대해 무관심하시며 각자가 가는대로 내버려두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시편 113편 6-9절을 보면 시편기자는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가난한 자를 먼지 더미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더미에서 들어 세워 지도자들 곧 그의 백성의 지도자들과 함께 세우시며 또 임신하지 못하던 여자를 집에 살게 하사 자녀들을 즐겁게 하는 어머니가 되게 하시는도다 할렐루야"라고 말씀하고 있다. 시편 146편 6-9절을 보면 "여호와는 천지와 바다와 그 중의 만물을 지으시며 영원히 진실함을 지키시며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정의로 심판하시며 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이시로다 여호와께서는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는도다 여호와께서 맹인들의 눈을 여시며 여호와께서 비굴한 자들을 일으키시며 여호와께서 의인들을 사랑하시며 여호와께서 나그네들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들의 길은 굽게 하시는도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외에도 성경은 기쁨을 주시는 이도 하나님이시고, 위로도 주시는 이도 하나님이시고, 힘을 주시는 이도 하나님이시고, 복을 주시는 이도 하나님이시고, 단잠을 주시는 이도 하나님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사도바울은 당대의 숙명론자들이라 할수 있는 스토아 학파들과 우연론자라 할수 잇는 에피쿠르스 학파사람들이 우글거리는 아테네에서 그들에게 정면으로 맞서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증언했다. 사도행전 17장 24절에는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이라고 했으며, 25절 뒤에는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라고 했으며, 26절에는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라고 함으로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과 흥망성쇠 또한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는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렇듯 하나님은 그가 지으신 세상만물을 그가 계획하신 목표에 이르도록 주권적인 사랑과 지혜 능력 공의로 계속해서 보존하시고 다스리며 인도하신다는 것을 믿고 고백하는 것이 섭리신앙이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섭리신앙과 어긋나는 언어과 행동은 삼가해야 한다. 예를 들면 '팔자소관'이라는 말이 있다. 예수믿는 사람도 별생각없이 그렇게 말하는데 우리가 할 말이 아니라 숙명론자들이나 사용할 말이다. 결코 숙명론자가 될수없는 우리가 쓸 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팔자에 따라 사는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계획에 따라 사는 사람이다. 앞으로 '팔자소관'이라는 말은 우리입에서 일체 사라져야 한다. 또 '재수가 있다, 없다' 라든가 '운이 좋았다, 나빴다'는 말을 사용해서도 안된다. 그런 말들은 우연론자들이 할수 있는 말로서 우연론자가 될수 없는 우리들이 사용할수 있는 말이 아니다. 섭리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에게 '재수'니 '우연'이니 하는 말은 모순된것이다. 우리는 재수가 좋아서 존재하거나 운이 나빠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속에 살아왔고 지금 이자리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경우에 할수 있는 유일한 말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합니다"라는 말 밖에 없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고 감사할수 밖에 없는 일들이다.

상당수의 우연론자들이 빠질수 밖에 없는 길인 쾌락주의 또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섭리신앙과는 조화할수 없다. 사람의 일정한 목표도 삶의 법칙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그때그때 최대한의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현명한 삶으로 여겨질지 모른다. 그래서 옛날 에피쿠르스 학파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쾌락주의에 빠졌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계획하신 영원히 복된 삶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는 신앙인이기에 순간순간의 무절제한 쾌락추구는 단호히 배제해야 한다. 우리는 영원한 복락의 삶을 향하여 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우리에게 약속된 삶이다.

마찬가지로 무당을 불러 푸닥거리로 악귀를 내쫓겠다고 하는 행위는 말할것도 없고, 점이나 토정비결을 보러 다니는 것은 결단코 그리스도인들이 할 일이 아니다. 그리고 신앙의 탈을 쓰기는 했지만 사실은 점치는 행위나 다름없는 예언기도를 받겠다고 여기저기 쫓아다니는 일은 섭리주이신 하나님을 모독하거나 우리의 삶을 온전히 하나님의 섭리에 맡기지 못하는 불신앙적인 행위임을 알아야 한다.

섭리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언제 어디서 무슨일을 하든지,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만사가 내뜻대로 되든지 안되든지, 장래일을 알지못하든 상관없이 언제나 옳으시고 선하신 하나님에 대한 흔들리지 않은 신뢰속에서 평안함을 누리고 승리하는 삶을 살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것이 기독교신앙이고 섭리신앙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법 4가지

그런데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일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인도이다. 우리의 삶을 하나님이 목적하시는 곳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몇가지 방법을 이해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신학자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법을 4가지로 정의했다. 허락, 방해, 방향, 결정이다.

1. 허락

하나님께서는 어떤때는 우리가 하는 일을 하는대로 허락하심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우리가 가는 길과 하는 일이 하나님이 뜻하신바와 일치할때는 그대로 내버려 두신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로 가기에 허락하신다는 말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인도하는 방법이다. 하나님의 이러한 인도방법을 안다면 만사가 내가 원하는대로 순조롭고 형통할때 내가 잘하는 것이라고 교만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이 허락하셔서 그런것이라는 겸손함과 모든것을 하나님께 감사를 돌리는 믿음의 자세를 가지게 된다. 하나님이 허락하심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것을 모르면, 잘되면 자기가 잘나고 잘해서 그런것이라고 교만해지기 쉽다. 사람은 교만해지면 하나님을 잊어버린다. 그래서 하나님은 교만을 가장 싫어하신다.

2. 방해

하나님은 어떤때는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을 막으심으로서 우리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로 인도하시기도 한다. 잘생각해 보니 이것이 제일 좋고 기도해 보아도 좋은것 같아도 그것으로 가는데 하나님이 막으신다.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안된다. 할수없이 갈수있는 다른 길로 가면 된다. 하나님이 다 막으셔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로 가도록 모는 것이다. 방해도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법이다. 예를 들면 사도바울이 아시아에서 선교하려고 애를 썼는데 길이 다 막혔다. 성령께서 길을 막았다. 마게도니아 사람이 환상중에 나타나 와서 도와달라고 하는 것을 보고 성령의 지시하심으로 깨닫고 마게도니아로 간다.

그래서 유럽전체가 복음화되는 유럽선교의 길을 연 것이다.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신것이다. 하나님은 그것을 위해 다른데로 가는 길을 막으셨다. 하나님의 이러한 인도방법을 이해한다면 무엇이 우리뜻대로 되지않을때 좌절하고 원망하고 하나님을 의심하고 버리지를 앓고,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 보다 하고 하나님의 뜻을 다시 생각하고 내가 가야할길을 보여달라고 기도하게 되고 그럼으로 응답을 받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로 감으로 형통의 역사가 일어난다. 이러한 하나님의 인도방법을 알면 실패해도 낙심하지 않는다.

3. 방향

어떤때는 하나님이 기뻐하셔서 허락하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좋지못한 일임에도 막지 않으시고 내버려 두셔서 마지막에 그 결과를 하나님이 원하시는데로 방향을 바꾸어 놓으셔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더 큰일을 이루는 방법으로 인도하신다. 그것을 방향이라고 한다.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요셉이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팔았다. 하나님이 좋은 일이라고 허락하신 것이 아니다. 나쁜일임에도 하나님이 막지도 방해하지도 않으셨다. 그렇게 함으로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고 7년간의 기근에 잘 대비하여 애굽의 백성을 살리고 인근의 백성들도 살리고 아버지와 집안형제를 살리는 역사를 이루었다. 하나님은 이렇게도 인도하신다.

이러한 하나님의 인도방법을 이해할때 이세상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부조리와 악때문에 분노하고 하나님이 계신지 안계신지 의심하지 않게된다. 도대체 왜 하나님은 저런 악당을 안데려가시고 내버려두시는가, 하나님은 무엇을 하시는가, 저렇게 착한 사람이 고생을 당하게 내버려 두시는가 하고 이 세상의 악과 불의와 부조리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고 의심할수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방법을 이해한다면 이 세상에 난무하는 악과 부조리에도 불구하고 기다릴수가 있다. 하나님이 더 크신 선을 이루려고 하시는구나 하며 참고 기다릴수 있다. 이러한 섭리신앙이 없으면 세상이 조금만 어둡고 어지롭고 잘못되면 금방 왜 그런가 불평하고 원망하고 의심하게 된다. 세상이 뒤숭숭해도 하나님을 믿고 기다리게 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하나님의 인도방법을 이해하는 것이다.

4. 결정

하나님이 근본적으로 우리를 향하신 목적이 있다.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안에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다. 이제 우리가 신앙의 양심을 가지고 판단하고 자유롭게 행동한다. 그러한 자유로운 행동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큰결정은 변함이 없다. 하나님의 이러한 인도방법을 받아들이면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 예수안에서 얻는 선물이 자유함이다. 진리가 너희들을 자유케 하리라고 하셨다. 다는 아니지만 늦게 예수믿은 사람을 보면 예수믿기전에는 자기 멋대로 살다가 예수믿고 작은것 하나도 자기마음대로 못한다. 어떤 넥타이를 매고 나갈까 또는 오늘 점심은 무엇을 먹을까 같은 것도 반드시 기도하고 묻는다.

그렇게 까지 할 것 없다. 그런것은 우리 구원과 아무 상관없다. 그런것들은 마음대로 하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다. 우리가 마음대로 하지만 구원못받게 하지는 않으신다.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결정은 이미 이루어지신 것이고 그 은혜안에서 자유함을 주신것이다. 서울에서 부산가는 KTX를 탔다. 그러면 기차안에서 앞으로 가든 뒤로 가든 기차는 여전히 부산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다. 아무리 기차가는 방향과 반대편 좌석에 앉아도 부산에 간다. 하나님이 이미 우리를 천국가는 기차를 태워주셨다. 기차안에서 마음대로 자유롭게 다니라는 것이다. 기차안에서 마음대로 왔다갔다 한다고 내리라 하고 바깥으로 던지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지금까지 잘되던 일이 갑자기 안될때

이러한 하나님의 인도 섭리를 믿는다면 우리는 어떤일을 바라거나 행할때라도 그 일때문에 조바심내거나 불안할 필요가 없다. 일이 뜻대로 안된다고 낙심하거나 죄절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인내할수 있다. 주위에서 옳지못한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의심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더 큰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기를 기다릴수 있게 된다. 섭리신앙은 비록 지금 내가 이해할수 없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만사는 하나님에게 달려있고 하나님은 언제나 변함없이 선하시고 지혜로우시고 능력있으시고 공의로운 분이고 지금 일이 내뜻대로 안되는 것은 내뜻이 하나님의 뜻에 함당하지 않거나 아니면 하나님이 더 좋은 것을 주시려고 하신다는 것을 믿을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섭리신앙이고 그런 섭리신앙을 가진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수 있다.

어떤 신학자는 "그리스도인이라 함은 사건들의 이해되지 않음을 견딜수 있음을 의미한다"고 정의했다. 의미심장한 말이다. 그리스도인이란 뭔가하면 사건들이 이해되지 않은 일들이 일어나는데 어떤 사건은 우리도 이해하지만 어떤 사건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사건들의 이해되지 않음을 견딜수 있음을 의미한다.

딸이 셋이 있고, 48세에 얻은 늦둥이 아들이 있다. 아들이 어렸을때 즐겨하던 장난은 차를 타면 차창을 열고 닫는 버튼을 누르며 장난하는 것을 좋아했다. 차만 타면 장난한다. 어느날 보니 장난을 치다가 창을 열고 몸이 절반이 나가있었다. 그 다음부터는 아들이 장난치기 전에 운전석에 있는 잠금버튼을 누른다. 그러면 아들이 아무리 버튼을 만져도 창이 꼼짝도 않는다. 아들은 아무리 버튼을 눌러도 창이 움직이지 않자 나중에는 짜증이 나서 버튼을 두들기고 운다. 그것을 보면서 섭리신앙을 다시 생각했다.

우리도 살다보면 지금까지 잘되던 일이 갑자기 안될때가 있다. 갑자기 왜 그런지 이해할수 없다. 그런데 잘 움직이든 창이 갑자기 움직이지 않는 뒤에는 아들을 보호하려는 아버지의 사랑이 있다. 그냥 내버려 두면 무슨 화를 당할지 모르니 아들을 보호하려니 창이 움직이지 못한다. 우리도 만사형통하다 보면 교만해져서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브레이크 고장난 기관차 처럼 무슨 사고가 날지를 모르기에 미리 하나님이 브레이크를 걸어주신다.

그럴때는 하나님의 뜻과 다르게 살아온 것이 아닌가, 내가 지금 해온일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법이 아닌것이 아닌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기에 뭔가 손을 쓰신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수 있다. 그런 생각을 하게 하는 것이 섭리신앙이다. 우리는 역경속에서 오히려 하나님께 돌아서고 하나님을 생각해야 한다. 너무 만사형통하면 하나님을 다 잊어버린다. 그것이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잊어버리지 않도록 신앙의 길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도록 하나님이 붙들어 주시는 것이다. 요즘에 사업이 잘안되거나, 갑자기 집안의 우환이 겹치고, 뜻하지 않는 일이 일어나 속이 상한 분들은 그 뒤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과 더 큰 하나님의 선한 계획이 있음을 믿고 위로받고 힘을 내기 바란다.

우리의 위대한 종교개혁자 칼뱅 선생은 이런말을 했다. "번영할때에는 감사한 마음을, 역경속에서는 인내를, 미래에 관해서는 염려로 부터의 놀라운 자유를 얻게하는 것"이라고 섭리신앙의 요점을 정리했다. 참 작절한 정리이다. 번영할때는 자기가 잘나서 그런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로 허락하심으로 그런것으로 믿고 감사할줄 알고, 역경속에서는 하나님의 더 크고 좋은 계획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 뜻이 나타나도록 기다리고 인내하고, 미래는 우리가 알지못하는 세상이기에 아주 불안해진다. 그러나 미래의 염려로 부터 놀라운 자유를 얻게 해주는 것이 섭리신앙이다. 그 보다 1,500년전에 사도 베드로가 베드로전서 5장 7절에서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고 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이 돌보고 계신다. 돌보고 계시지 않는 것 같아도 돌보고 계신다. 염려하지 말고 모든것을 하나님에게 맡기고 늘 순종과 평안함 가운데 사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고 그렇게 우리를 해주는 것이 섭리신앙이다.

전도서 11장 5절을 보면 "바람의 길이 어떠함과 아이 밴 자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지를 네가 알지 못함 같이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네가 알지 못하느니라"이라고 했다. 뒤집어 말하면 우리가 알지못해도 하나님은 만사를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간다고 하신다. 이사야서 55장 8절에는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했다. 본문 말씀에서 사도바울은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라고 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길은 우리의 길과 다르다고 했다. 하나님의 판단은 우리 생각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은 모든 일을 선하게 아름답게 이루어가고 계심을 믿으라고 하신다. 신명기 32장 4절은 "그는 반석이시니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라고 말한다.

이수영 목사의 몇가지 경험을 통한 '섭리신앙' 적용

1. 군대경험

군대생활을 공군에서 했다. 공군장교는 4년 복무로 길었다. 그럼에도 공군장교로 간 것은 학과 4년 선배가 공군장교로 입대하여 공군사관학교에서 교관으로서 철학을 가르쳤다. 그가 제대할때 내가 군대에 가야 할 때가 되었다. 선배는 내가 공군에 오면 자신의 자리에 오면 된다고 했다. 4년이라는 시간이 길어도 전공과목을 생도들에게 가르치고 대학원을 다니면 절대 손해보는 것이 아니라 이익이라는 말에 넘어가 공군에 들어갔다.

군대에 들어가서야 군대보직이 선배가 결정하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공군사관학교에서 교관이 되려면 교육특기를 얻어야 한다. 다행히 교육특기를 받고 2달간 공군대학에서 교육장교로서 전문훈련을 받고 공군사관학교 배속이 되었다. 학교내 교수부로 발령나면 선배와 같이 가르칠수가 있었는데 생도전대에 발령이 났다. 생도들의 생활훈련과 군사훈련을 담당하는 곳이다. 직함은 군사훈련 교관으로 생도들과 4년간 연병장에서 뛰게 되자 앞이 캄캄해졌다.

더구나 입대한 68년에는 1.21사태가 있었다. 그래서 공군역사상 최고의 고된 훈련을 받았다. 공군장교 입대 몸무게 한계가 53키로인데 53.5키로로 입대한 약한 몸으로 훈련받기가 힘이 들었다. 교관을 시작했는데 대통령 특명으로 전군정예화를 위해 공군에도 공수훈련과 유격훈련을 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차출되어 실미도로 유명한 오류동 공군정보부대에서 훈련을 받고 부대에 돌아와 생도들을 훈련시켰다. 엄청난 훈련을 받자 세상이 무서운것이 없어졌다. 내성적이고 부끄러움을 잘타는 성격인데 매일 연병장에서 수백명 생도들에게 호령하고 굴리고 뛰게했다.

당시에는 너무 힘들었지만 지나고 나서 돌이켜 보니 그 일을 통해 몸이 건강해지고 매사에 자신감이 생겨 어떠한 역경도 정면돌파할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성도들을 훈련시키면서 많은 사람앞에 서서 이야기하는 훈련을 동시에 받았다. 돌이켜 보면 목사를 만들려고 하나님이 그런 경험을 미리하게 하신 것이다. 처음에는 일이 안되고 뒤틀리는 것 같지만 하나님은 그런것을 통해서도 더 큰일을 계획하시고 우리를 더 귀하게 쓰시려고 한다는 것을 확신하게 하는 경험이다. 당장 어려운일이 생기고 귀찮은 일이 생기고 힘들다고 해도 잘 견디면 하나님이 크게 쓰실날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2. 장신대 교수 경험

장신대에서 교수생활 16년을 했다. 군대에 있을때는 엄하고 무서운 교관이었다. 그때 얻은 교육철학은 교육자는 학습자가 학교문을 나가기 전에 학생으로 부터 평가를 받고 칭찬을 받고 인기를 얻으려고 하면 교육자로서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교육자에 대한 진정한 평가는 학습자가 졸업한 이후에 주어지는 것이다. 유학을 마치고 신학교에 학생들을 가르쳤다. 군대에서 얻은 교육철학으로 신학생들을 가르치니 인기가 없었다. 더우기 운동권 학생들을 반대해여 운동권들의 공격을 받았다. 장신대 16년간이 즐겁기 보다는 운동권 학생들과 싸우면서 보냈다.

돌이켜보니 이러한 장신대 16년 경험이 하나님이 준비하신 것이다. 연단시킨 것이다. 새문안교회에서의 목회를 위해 연단시킨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새문안교회에서 가보니 쉽지 않았다. 공군사관학교 교관으로서의 훈련경험과 장신대에서 교수하면서 싸웠던 경력이 없었다면 새문안교회 목회가 힘들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새문안교회 힘든 목회를 잘견디기 위한 훈련을 하나님께서 시키셨다는 생각이 든다.

3. 실패의 경험

제 자랑이 아니라 제가 각종시험에서 떨어져 본적이 없다. 그런데 운전면허 시험에서 떨어졌다. 운전을 못해서가 아니라 너무 잘했다. 그런데 앞에서 긴장하여 헤매는 아주머니에게 훈수하다가 괘심죄로 떨어진 것이다. 실패라는 것은 한번도 겪어보지 않아 떨어지니 기분이 이상했다. 시험장을 나오며 문득 생각나는 것은 "네가 실패한 사람들의 마음을 아는가" 하는 음성이 들렸다. 교회와서 생각해보니 교회안에도 실패를 겪은 사람이 많았다. 목회를 하려면 실패자들의 마음을 이해하는것이 필요할텐데 모르고 있었다. 그때서야 그것도 목회위해 준비하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4. 암의 경험

1997년 대장암 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1년을 쉬면서 항암치료를 받았다. 대장암으로 판정받는 순간 "왜 접니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이때까지 하나님이 하지말라시는 것을 안하고 반듯하게 살아왔는데 왜 내가 암이 걸려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장신대 교수생활을 하면서 아쉬운것은 신학대학 교수가 기도하고 성경을 볼 시간이 없었다. 너무나 가르쳐야 할 과목과 강의시간이 많었다. 주당 25시간을 가르쳤다. 그래서 3시간 이상을 잘수 없을 정도였다. 교수중 어떤 분은 설교하다가 "죄를 안지고 감옥에 갔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감옥에 가면 남는게 시간이니 기도하고 성경보겠다는 것이다. 나도 같은 심정이었다. 그런데 암걸리고 1년동안 투병하다보니 시간이 남았다. 눈뜨면 기도하고 성경보고 기도하고 그자리에서 잠들고 깨면 기도하고 성경읽었다. 기도하고 성경읽기 위해 감옥가고 싶다는 것이 이루어졌다.

그러다가 큰 은혜를 받았다. 하나님이 암에 걸리게 하신 이유를 알았다. 다른것이 아니라 육심의 암을 통해 내속에 숨어있는 영적인 암을 발견하게 하셨다. 당시에 동료교수중에 저에게 불편하게 하는 교수가 있었는데 용서를 해야지 하는데 사실은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하고 있었다. 학생들에게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설교하면서 나는 동료교수를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하고 있는 것이 내속에 숨어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눈뜨는 첫시간에 그분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하게 되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이 말씀은 그렇지만 실제는 어떻게 할수 있겠는가 했던것이 가능해졌다. 내힘으로는 안되는데 셩령님이 원수를 사랑하게 해주고, 가장 미워하는 사람을 위해 가장 많이 기도하게 하는 은혜를 체험하니 얼마나 기쁘고 감격스러운지 모른다. 놀라운 은혜였다.

그 이후로 암은 아무나 걸리는 것은 아니다. 진짜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사람이 암이 걸리며, 암은 은혜받는 기회라고 늘 간증한다. 저는 암이 안걸리면 큰일날뻔 했다고 고백한다. 그렇다면 영적인 암을 숨기고 목사로서 살았을 것이 아닌가. 암이 걸린것이 목회에도 도움이 됐다. 목회지로 나오니 교인중에 암에 걸린 사람이 많다. 중환자는 수술실에 들어가기전에 기도하는데 암이 걸려 사색이 된 교인에게 가서 위로할말이 별로 없다. 저도 몇년전에 암에 걸려 수술을 했다며 깊은 은혜를 받을 기회이니 감사하라.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는줄 알라고 하면 사색이 된 교인들의 입이 벌어지고 화색이 돌며 할렐루야 하며 수술실에 들어간다. 그런분들을 위로하고 목회하라고 암이라는 훈련을 시켜주신 것을 깨닫게 된다.

뒤돌아보면 우리의 삶은 다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인도하신 삶이다. 우리의 삶의 어느 한순간도 하나님이 한눈팔거나 내버려두신 순간이 없다.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으신 하나님이 우리를 항상 선한 길로 인도하심을 굳게 믿으라. 그래서 늘 감사와 기쁨과 순종으로 가득한 삶을 사시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