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설문(케네디 기독교 쇠퇴기, 오바마 이교도 성장기)


미국의 35대 대통령 J. F Kennedy 연설

1961년 1월 20일 제35대 대통령 취임 연설에서
“네 나라가 네게 무엇을 해줄수 있는가를 묻지 말고 네가 네 나라를 위해서 무슨 일을 할 수 있는가를 물어 달라”고 새로운 애국심을 촉구했다.



케네디 대통령은 그가 피살되기 전날 만찬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이 다음 역사의 심판대 앞에 설 때 다음 네 가지의 질문을 받게 될 것입니다.

첫째, 당신은 참으로 용감한 사람이었는가?

둘째, 당신은 참으로 현명한 판단력이 있는가?

셋째, 당신은 참으로 현명한 사람이었는가?

넷째, 당신은 참으로 헌신하는 사람이었는가?

우리는 이 네 가지 질문에 긍극적진 대답을 할 수 있도록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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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과학 칼럼

케네디 vs 오바마 그리고 창세기 1-11장

최우성 박사 (생리학, 창조과학선교회)

2012년 11월 6일 미국 대통령 선거결과 현 대통령인 버락 후세인 오바마 후보가 제 4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습니다.
득표율 50%란 결과가 보여주듯이 이번 선거로 사람들의 마음이 크게 나뉘어 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 나뉘어진 마음에는 경제적인 것도 있지만 낙태와 동성애 문제가 큰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기독교계에서는 오바마 대통령의 행동들에 크게 우려하는 사람들이 많고 이번 선거에 대해 크게 실망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는 기독교인이라고 스스로 말하지만 성경적인 가치들을 명백하게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그는 이슬람에 대해 아주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대통령이 그런 언행들을 해도 정치하는데 큰 문제가 되지 않을 토대가 이미 조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상황이 만들어지게 되었을까요?

1. 케네디 대통령 시절 - 기독교 쇠퇴기

자유주의의 상징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는 미국 제 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1961-1963년) 시절을 기점으로 미국의 공립학교는 큰 변화를 겪었다.

공립학교에서 기도와 십계명이 제거되고 점점 더 많은 기독교적인 활동과 정신이 제거되기 시작하였다.
이런 일들도 그냥 한 번의 결단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이런 변화의 토대가 1925년부터 쌓여왔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 토대는 성경을 반대하는 진화론이었다.
점점 세력을 키워 오던 진화론은 케네디 대통령 시절부터는 아예 공립학교에서 사람과 우주와 만물의 기원에 대한 유일한 설명으로 자리 잡았다.

이혼으로 인한 가정파괴는 성경을 떠난 결과다.

지금 미국에서 이혼율이 50%가 넘었지만 1960년 초반에만 해도 이혼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1960년대 말부터 갑자기 치솟기 시작한 이혼율이 1970년대 중반에는 두 배가 되었다.
왜 그랬을까? 바로 진화론 교육의 영향이었던 것이다.
1960년 초부터 진화론만 배웠던 세대가 결혼하였을 무렵부터 이런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아담은 하와를 처음 보았을 때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하면서 자기 생명처럼 사랑하였다.
이 가정이란 제도는 인류가 범죄하기 이전에 창조자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하나님의 창조 질서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짝 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다’고 하신 것이다.
그러나 성경과 반대되는 진화론만을 배운 사람들에게 이 성경 말씀은 더 이상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었다.
관습에 따라 결혼하였기 때문에 상황이 어렵게 되면 어렵지 않게 이혼을 결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지금은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이혼이 일반적인 문화가 되어버렸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것이 문화가 되었다는 말이다.

미국에서의 낙태도 진화론과 궤적을 같이하고 있다.
1960년대 말까지 미국에서 낙태는 거의 전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그 이후 급격하게 증가하여 1970년대 후반부터는 매년 약 100만 명의 생명들이 살해되고 있다.
진화론자들은 그 생명들이 사람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는데 그 근거로 독일의 진화론자 헥켈이 그린 동물들의 발생과정그림을 제시하였다.
진화가 사실이기 때문에 모든 동물들은 수정란에서 시작해서 자라는 과정에 진화의 과정을 반복하고 사람도 배아단계에서는 동물과 구별되지 않는다고 가르친 것이다.
그러나 100년 동안 사용된 이 그림은 거짓이란 사실이 일반 과학자에 의해 사진으로 증명되었다(1997년).

2. 오바마 대통령 시절 - 이교도 성장기

창조와 창조주를 제거한 세상은 이제 어떻게 변할 것인가?
표면적으로 교회는 존재했지만 1960년대부터 이미 마음속에서 창조자를 모시지 않는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란 다음 세대들은 점점 교회를 떠나기 시작하였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 두 세대 만에 그들의 구원자 하나님을 잊어버렸듯이, 그 다음 세대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배우지 못했을 뿐 아니라 더욱 깊숙이 들어오는 진화론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학교에서는 사실을 배우고 교회에서는 신화를 배운다고 느끼면서 자라났다.
성장기 때 그들은 자기들이 왜 교회 안에 있어야 하는지 이유를 전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성인이 되었을 때 교회를 떠나고 말았다(Ham & Beemer, Already gone, Master Books, 2009).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무주공산이 될 수 없다.
마음에 창조주가 없으면 반드시 사탄의 영이 그 마음을 차지한다.
마음을 비우고 자연과 합일하라는 뉴에이지의 한 형태인 요가가 학교에서 공공연하게 가르쳐지고 있다.
동양과 서양이 만난 뉴에이지는 진화를 전제하고 있다.
지난 2세대 동안 기초를 다져온 진화론 위에 자연스럽게 요가와 같은 이교도의 신앙행위가 모든 학생들에게 행해지고 있는 것이다.
창조주를 잃어버린 미국의 세대들은 이제 힌두, 불교, 이슬람 같은 새로운 종교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2009년 4월 13일자 뉴스위크(Newsweek)지 표지에는 까만 표지에 빨간 글씨로 “미국 기독교의 쇠퇴와 몰락(The Decline and Fall of Christian America)”이 십자가 모양으로 배열되어 있었다.

이 기사는 1990년부터 20년 동안 ‘자칭 크리스천’의 비율이 86%에서 76%로 떨어졌다고 전했다.
더 의미심장한 것은 하나님이 죽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많은 신들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이 기간에 무신론자 혹은 회의론자가 4배로 증가하였다.

성경에서 떠난 미국은 지금 무신론자를 포함해서 이교도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오바마 대통령은 2009년 1월 취임연설에서 아예 “미국은 더 이상 크리스천의 국가가 아니다”라고 선언을 했다.

911사건의 희생자들 옆에 대형 모스크가 들어설 수 있도록 도왔고, 자연스럽게 이어진 후속타가 동성결혼 찬성이었던 것이다.

3. 창세기 1-11장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할꼬?”(시 11:3).
교회 즉 예수 그리스도의 필요성은 창세기 1-11장에 있다.
거기에는 완전한 창조와 하나님의 자녀로 창조된 사람의 타락, 지구가 파괴 된 노아홍수의 심판, 언어 혼잡으로 뿔뿔이 흩어진 바벨탑 사건의 역사적 사실이 들어있다.
그 역사적 사실을 통해서만 한 혈통인 온 인류는 창조자이신 하나님만을 유일한 구원자로 필요로 하며, 아버지이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우리 교회는 케네디 대통령 시절부터 이 터전을 잃어왔고, 세상은 오바마 대통령 시절을 맞아 아예 그 터전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그 직접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학교에서는 진화론만을 사실로 가르치고 교회마저 이 진화론을 수용했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창조론들은 결국 진화를 사실로 수용한 결과물들이다.
이런 다양한 창조이론들을 들어보지 않은 크리스천이 없을 것이다.

여러 다른 창조이론들은 결국 “성경”을 부정하는 것이다!
우주의 역사는 하나 이상일 수 없으므로 성경도 사실이고 성경에 반하는 진화도 동시에 사실일 수 없다.
이 사실은 아주 중요하다.
지금 많은 크리스천들은 진화를 믿으면서도 하나님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부정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성경”인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지금 교회마저 진화론의 영향을 받아 믿음의 근본인 성경을 버리니 동성결혼까지도 수용하게 된 것이다.

결국 미국은 성경의 하나님을 버리게 되었다(Americans’ views of God shape attitudes on key issues, USA Today, 2010년 10월 7일).

진화론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진화를 받아들인 영국과 유럽의 교회는 이미 초토화 되었다.
미국 교회는 얼마나 남게 될까?
창세기 1-11장을 믿은 만큼 남게 될 것이다!

▲이메일 : mailforwschoi@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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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정부가 지금껏 비밀로 분류됐던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의 암살과 관련된 자료들을 공개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현재 생존해 있는 인물들의 이름과 주소를 제외하고 남은 모든 자료들을 공개하겠다고 말했다. 케네디 암살 관련 자료의 일부는 정부 기관들의 요청에 의해 아직 미공개 상태다.

이번에 공개된 2800개의 자료를 많은 사람들이 조사하고 있는 가운데 현재까지 밝혀진 것 중 가장 흥미로운 내용들만 모았다. 다만 이 자료에는 검증되지 않은 정보 보고들도 포함돼 있음을 주의할 것.

1. FBI도 음모론을 우려했다

케네디 대통령을 암살한 리 하비 오스왈드가 살해된 날 작성된 문서에서 J 에드거 후버 미 연방수사국(FBI) 국장은 음모론이 확산되는 것에 우려를 표했다.

"제가 우려하는 것은 대중에게 오스왈드가 진짜 암살자라는 것을 확신시킬 수 있는 무언가를 발표해야 한다는 겁니다." 문서에서 후버 국장은 이렇게 말했다.

2. 오스왈드는 KGB 요원과 대화한 적 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가 감청한 전화 통화를 바탕으로 작성한 문서는 오스왈드가 멕시코시티에 있는 러시아 대사관의 KGB 요원과 대화했었다고 추정한다.

문서는 1963년 9월 28일 오스왈드가 "KGB 요원으로 확인된" 발레리 블라디미로비치 코스티코프와 대화했다고 한다. 코스티코프는 "사보타주와 암살에 관련된" KGB의 부서에서 일했다 한다.

오스왈드는 나중에 러시아 대사관에 전화해 "엉성한 러시아어"로 "워싱턴의 전보에 관련돼 새로운 게 있느냐"고 물었다.

3. FBI는 경찰에 오스왈드를 보호하라고 경고했다

케네디 대통령을 총으로 쏘아 살해한 오스왈드는 곧바로 체포 후 기소됐다. 그러나 이틀 후 오스왈드는 댈러스 경찰서 지하에서 인근의 나이트클럽 주인인 잭 루비가 쏜 총에 맞고 사망한다.

오스왈드를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을까?

한 문서에 따르면 FBI는 댈러스 경찰에 오스왈드의 살해 위협에 대해 경고했다.

FBI 국장 J 에드거 후버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경찰서장에게 즉각 이를 알렸고 서장은 오스왈드가 충분한 보호를 받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았다."

4. 소련은 케네디의 죽음을 우려했다

몇몇 소련 관계자들은 지도자 없는 미국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지도자가 없는 상황에서 어떤 무모한 미국의 장성이 소비에트 연방에 미사일을 발사할지 모른다고 두려워 했다"고 한 문서는 기록했다.

또한 이 문서는 소련 측이 "대통령의 암살이 한 사람의 범행이 아니라고 확신"했으며 "여러명이 역할을 분담한, 세심하게 계획된 작전"이라고 여겼다고 한다.

5. 로버트 케네디의 '마릴린 먼로 자살 음모'

FBI는 케네디 대통령의 동생인 로버트 F 케네디 법무장관에게 그와 마릴린 먼로의 불륜 관계에 대한 주장을 담은 책이 나올 것이라고 경고했다.

1964년 7월 7일 FBI가 로버트 케네디에게 전한 편지는 '마릴린 먼로의 기이한 죽음'이라는 책이 로버트가 "먼로 씨와 깊은 관계에 있었다"고 주장할 것이라고 전한다.



FBI에 따르면 책의 저자는 마릴린 먼로가 "그(로버트)가 진지했다고 믿게 됐고" 로버트 케네디가 부인과 이혼하고 먼로와 결혼하겠다고 약속했음을 시사할 것이라 했다.

그러나 로버트 케네디가 이를 거부하자 먼로는 "그들의 관계를 폭로하겠다고 협박"했고 로버트의 대권 야망을 꺾겠다고 했다는 것.

FBI는 저자가 책에서 로버트 케네디가 먼로를 살해한 후 자살한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극단적인 수단"을 썼다고 주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FBI의 편지는 문제의 책이 먼로가 사망한 날 로버트 케네디가 그의 아파트에 있었다고 주장할 것이라고 귀띔했다.

FBI 요원들은 로버트 케네디가 "실제로는 마릴린 먼로가 자살한 날 아내와 함께 샌프란시스코에 있었다"고 썼다.

마릴린 먼로는 1962년 8월 36세를 일기로 로스앤젤레스에서 숨졌다. 시 검시관에 따르면 진정제 과용이 사인이었다.

6. 사설탐정들이 케네디를 염탐하려 했다

케네디가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 작성된 한 FBI 문서는 당시 상원의원이던 케네디를 염탐하려 했던 시도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문서는 "헐리우드의 고급 콜걸"이 프레드 오태쉬라는 사설탐정이 자신에게 접근해 케네디 상원의원과 "섹스 파티"의 연관에 대해 물었다고 FBI 요원에게 말했다고 한다.

또한 이 사설탐정은 콜걸에게 케네디의 "무분별한 발언"을 녹음하기 위해 "녹음장치"를 장착할 것을 제안했다고 한다.

콜걸은 이를 거부했고 어떠한 "무분별한 행동"도 없었다고 말했다.

7. 암살 직전, 한 영국 신문은 익명의 전화를 받았다

한 문서는 '캠브리지 뉴스'라는 영국 지역신문이 케네디 암살 25분 전, 미국에서 큰 사건이 벌어질 것이라는 익명의 전화를 받았다고 기술한다.

"전화를 건 사람은 캠브리지 뉴스 기자에게 큰 사건이 벌어질 테니 런던의 미국 대사관에 전화해야 한다고만 말하고는 끊었다"고 문서는 기록했다.

8. 피델 카스트로 암살 계획

쿠바의 지도자들을 암살하려는 계획을 담은 한 문서에는 주요 정부 관계자들을 "살해하거나 산채로 잡아오면" 최대 10만 달러의 현상금을 제시했다. 그러나 피델 카스트로에 대해서는 단 0.02달러의 현상금만 제시했다.


사진 출처, AFP

사진 설명,

피델 카스트로가 1959년 1월 독재자 풀헨시오 바티스타 정권을 무너뜨린 직후의 모습

그러나 다른 문서는 카스트로를 살해하는 데 대한 대가는 15만 달러였고 쿠바로부터 망명한 사람과 마피아 사이에 접촉이 있었다고 한다.

카스트로를 암살하기 위한 미국 정부의 방안 중에는 카스트로의 다이빙복을 병을 일으키는 박테리아로 오염시키는 것이나 그의 음식에 독을 넣는 것 등이 있었다.

9. 존슨 대통령은 KKK였나?

한 FBI 보고서는 케네디 대통령이 사망한 후 대통령 직을 수행한 린든 B 존슨 대통령이 백인 우월주의 단체인 KKK의 일원이었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한 정보원은 KKK가 "존슨 대통령이 정치 초년생 시절 텍사스에 있는 KKK 지부의 멤버였다는 문서화된 증거"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제시된 증거는 없었다.




깨닫다(수니에미) συνίημι(마 16:12), 기노스코(γινώσκω) 행 8:30


가끔 성경을 읽은 후에 또는 설교를 듣고 "깨달았다!" 라고 말하는 경우에 과연 무엇을 깨달은 것일까?
많은 회의를 갖게 합니다.
왜냐하면 깨달았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예전의 행동과 언어와 습관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을 목격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적인 깨달음에 대해 묵상하는 동기가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16:12
그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 깨달으니라.

* συνίημι  4920

1. 깨닫다,  2. 이해하다,  3. 통찰하다

발음 / 수니에미(süniēmi) 
어원 / 미래 συνησω, 제1부정과거 συνῆ- κα, 제1부정과거 가정법 συνῆτε, συ- νῶσιν, 제2부정과거 명령 2인칭복수 σύνετε,
4862와 ἵημι ‘보내다’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깨닫다(마 13:13, 막 4:12, 롬 3:11), 이해하다(엡 5:17), 지혜가 있다(고후 10:12)
신약 성경 / 26회 사용

성경을 읽으며 무엇을 깨닫는가?


사도행전 8:30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 깨닫느뇨?

* 깨닫느뇨(1097) γινώσκω  

1. 알다,  2. 신비를   3. 하나님을

발음 / 기노스코(ginōskō) 
관련 성경 / 알아보다(막 6:38), 알다(마 6:3, 12:5,7, 막 5:43, 8:17, 눅 20:19, 요 1:40), 알게 하다(마 9:30, 요 19:4), 알려지다(마 10:26, 눅12:2), 깨닫다(마 24:39, 막 5:29), 알리다(막 9:30, 요 7:17), 동침하다(마 1:25), 주다(막 4:11)
신약 성경 / 222회 사용

예수님과 이적의 사건들


오병이어의 이적

‘오병이어’는 번역 실수가 만든 기적?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
예수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여명을 먹이고도 남은 빵이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는 <신약성서>의 네 공관복음서에 모두 나오는 놀라운 이야기.

믿기 어려운 기적의 진실은 무엇일까?

1976년부터 예루살렘 히브리대학에서 성서학과 고대 셈어, 이집트학, 아시리아학을 공부하고 수메르어로 학위를 받은 뒤 10여년간 히브리대에서 가르쳤던 성서학의 국제적 권위자 조철수(60) 교수의 <예수 평전>은 눈이 번쩍 뜨이는 설명을 제시한다.

조 교수는 마르코 복음서 6장의 이 기적 이야기 일부를 이렇게 인용한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명령하여 각자 동료들끼리 풀밭에 앉게 했다. 백 명의 동료지간의 백부장과 오십 명의 동료지간의 오십부장이 끼리끼리 자리잡았다. 예수는 다섯 개의 빵과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하늘을 향해 쳐다보며 축복하고 빵을 떼어 그의 제자들에게 주며 그들 앞에 나누게 했다.”

공동번역 성서의 마르코 복음서는 이 가운데 ‘백명의~’ 부분을 이렇게 옮겨놓았다. “군중은 백 명씩 또는 오십 명씩 모여 앉았다.”
마태오나 루가 등 다른 복음서들에는 이들이 끼리끼리 모여 앉았다는 표현 자체가 아예 없다.
이 표현의 차이에 주목하라.


‘오병이어’는 번역 실수가 만든 기적?

조 교수가 인용한 마르코 복음서 내용은 자신이 따로 번역한 것이다.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신약성서 원문은 그리스어로 쓰여 있는 게 가장 오래된 사본이다.
그런데 이 그리스어 원본 자체가 번역본일 가능성이 높다.
원래 복음서나 사도들 편지는 히브리어나 아람어로 기록됐고 적어도 그 수십년 뒤에야 그리스어 본들이 만들어졌다.
히브리어와 아람어는 같은 계열이지만 그리스어는 전혀 다른 언어체계다.
따라서 아람어와 히브리어 텍스트들을 자신이 직접 번역한 조 교수의 인용문이 당시 이스라엘(유대)의 언어행위 실상과 사회상에 더 근접할 가능성이 높다.

조 교수는 1947년 발굴된 ‘사해 두루마리’ 등의 옛 전적들을 성서와 하나하나 대조하면서 예수의 실상을 재구성한다.

조 교수에 따르면 공관복음서에서 ‘오천 명’이라 옮긴 단어는 아람어 본(페시타) 신약성서에는 ‘오천’이라고만 돼 있다.
오천은 히브리어로 ‘아메쉐트 알라핌’이다.
그런데 이를 ‘하메쉐트 알루핌’으로 읽으면 ‘다섯 천부장’이라는 뜻이 된다.
당시 히브리어나 아람어에는 모음부호가 없었기 때문에 알라핌을 알루핌으로 읽는 식의 바꿔 읽기는 유대교 성서 해석에 종종 활용됐다. 따라서 오천을 오천명의 군중이 아니라 ‘다섯 천부장’으로 읽을 수 있다면 ‘백 명씩 오십 명씩’은 백부장, 오십부장으로 옮길 수 있다.
조 교수는 ‘빵을 먹은 이들이 다섯 천부장이었다’는 말은 백부장과 오십부장들이 참석한 그날의 특별한 만찬 의례에서 그들 가운데 다섯명의 천부장을 선출했다는 얘기고 예수가 그들에게 성찬의례를 베풀었다는 뜻이라고 풀이한다.
천부장들은 당시 예수가 한때 소속돼 있던 에세네파 공동체의 최고의결기관에서 재판관들과 사제장들, 부족장 등과 함께 그 조직 주요 구성원이었다.

사해 문헌 중의 에세네파 예식에 대한 규례들 중에도 “이스라엘의 천명의 장과 백 명, 오십 명, 십 명의 지도자와 재판관” 등이 재판 청문회에 참석한다는 내용들이 들어 있다. 나중에 에세네 공동체의 한계를 지적하며 떠나간 예수의 공동체 역시 성찬의례를 통해 다섯 천부장을 뽑고 그들이 열두 제자들 모임에 합류하는 좀더 발전된 상부조직을 갖게 된다. 열두 광주리의 12라는 숫자도 이스라엘 12지파, 12제자처럼 당시 사회의 현실을 반영하는 상징성을 갖고 있고, 메시아의 도래를 알리러 각지에 파견한 72제자의 72라는 숫자도 당시 천문관념에 따라 지파당 6명씩 배치한 결과로 읽힌다.

그렇다면 오병이어 기적의, 외딴곳 그 많은 군중을 어떻게 먹이느냐는 제자들 질문이나, 다 먹이고 남은 빵과 물고기가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는 복음서들 얘기는 오역을 그럴듯하게 포장하기 위해 후대에 추가되고 윤색된 내용일 가능성이 있다. 그날 성찬의례 참석자, 빵과 물고기를 단합과 사명과 정체성 확인 차원의 의례행위로 받아먹은 사람들은 예수 공동체의 소수 지도급 인사들이었다. 마르코 8장의 일곱개 빵으로 사천 명을 먹였다는 얘기도 일곱명의 원로들 모임에 합세할 네명의 천부장을 선출한 것으로 읽는 게 훨씬 더 설득력이 있다.

루가 6장의 “가난한 자는 복 받을 것입니다.
천국이 그들 것입니다”라는 예수의 말은 마태오 5장에서는 “마음으로 가난한 자는…”으로 돼 있다.
‘마음’의 히브리어는 ‘레브’다. 그런데 레브는 특정 맥락에서 모세 오경 또는 하느님의 말씀을 가리키는 ‘토라’의 은유적 표현으로도 사용된다. 따라서 ‘마음으로 가난한 자’라는 말은 토라 공부 때문에 가난한 자, “하느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는 데 전념하여 돈벌이에 급급하지 않아 구차한 삶을 사는 사람”을 뜻한다는 게 조 교수 풀이다. 따라서 ‘마음이 가난한 자’로 옮기는 건 의역이란다.

이런 식으로, 복음서들의 갖가지 치유기적의 의미, 두드리면 무엇이 열린다는 것인지, 첫째가 나중 되고 나중이 첫째 된다는 게 뭔지, 일 많이 하나 적게 하나 모두 같은 삯을 지불하는 포도밭 주인의 비유, 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가는지, 카이사르 것은 카이사르에게 주라는 건 무슨 의미인지, 왜 유다는 마지막 순간 예수에게 입 맞췄는지 등 성서 속의 많은 비유와 예화들이 전혀 새롭게 해석된다. 중요한 건 그것이 막연한 추론이 아니라 구체적인 문헌 근거들을 토대로 이뤄진다는 점이다.

사해문헌 중의 <하박국서 해석>엔 ‘진리’의 이름으로 불린 사제가 등장한다. 그는 이스라엘을 지배할 때 교만해져서 하느님을 떠났으며 재산 때문에 법규들을 배반하고 반동폭력배와 백성들의 재산을 훔쳐간 ‘악한 사제’로 로마 법정에 선동 혐의로 넘겨져 사형당한다. 조 교수는 그 사나이가 바로 예수라고 본다. 그를 악한으로 묘사한 하박국서 해석은 예수가 자신들을 배신했다고 본 이 해석서의 작성 주체인 에세네파의 시선이다.

바리새, 사두개는 물론이고 한때 자신이 그 사제요 교사로 복무했던 에세네파의 한계까지 과감하게 뛰어넘었고 결국 그 때문에 죽임을 당한 예수. 900쪽의 두툼한 <예수 평전>은 당대의 문헌자료들과 문화적 배경설명을 토대로 그 생애를 치밀하게 재해석한다.

에세네 ‘사해 두루마리’ 다양한 성서 해석 근거로

1947년 사해 북서쪽 쿰란의 계곡 언덕에서 잃어버린 염소를 찾던 두 젊은 양치기가 동굴 속의 항아리에서 일곱 개의 양피지 두루마리를 발견했다.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발견’으로 일컬어졌던 ‘사해 두루마리’들은 11개 동굴에서 모두 813가지가 나왔다. 이 가운데 223개가 히브리 성경 사본들이며, 나머지는 외경들과 공동체 규례, 법규, 예언서 등을 해석한 해석서, 종교절기에 관한 지침서와 감사 시편 등이었다. 대부분이 히브리어로 씌어졌고 96개 문서는 아람어, 7개가 그리스어 문서였다. 히브리 성경 사본 중 82개가 모세 오경 사본이었고 예언서 사본 41개 중 21개가 이사야 사본이었다. 하지만 온전한 것은 12개 정도.

에세네 ‘사해 두루마리’ 다양한 성서 해석 근거로

국내 유일의, 그리고 세계 11번째 앗시리아학 학위 소지자 조철수 교수에 따르면, 매년 100여개의 관련논문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사해문헌의 작성자들은 엣세네파 사람들. 1세기의 유대 역사학자 요세푸는 기원전 150년부터 서기 70년까지 유대 지방에는 바리새와 엣세네, 사두개라는 세 주요 분파가 있었다고 기록했다. 사두개는 사제들과 그 친인척 등으로 구성된 상류 기득권층으로 로마 제국 체제에 적극 가담한 자들이었고, 바리새는 전통적인 모세 법규에 집착하면서 사회참여를 주장한 타협적 중산층 지식계급이었다. 1세기께 형성된 랍비 유대교는 바리새의 후예들이다. 바리새를 비판한 엣세네는 종말론에 입각해 메시아가 도래할 새 세상을 꿈꾸는 신흥 자치공동체 세력. 이밖에 로마정권에 무력으로 저항한 열심당과 예수를 메시아로 믿은 예수 공동체 등이 등장해 첨예하게 충돌한 당시 이스라엘은 몹시 혼란스러웠다. 일제 패망 뒤에도 외세의 영향이 지속되고 있는 한반도 상황과도 닮은 점이 많다.

항상 그리스나 로마 등 외세와 결탁하면서 모세 오경의 내용을 글자 그대로 지키려 했던 사두개. 서기 2세기 저항세력을 격파한 로마는 유대인들의 예루살렘 입성을 막았고 성전이 없어진 상황에서 사두개도 사라졌다. 그리하여 유대교는 사제 없는 종교가 됐다.

토라에 집착하면서도 사제계층과 권력층에 반발한 바리새들은 1세기 말 모세 법규를 그대로 지키려는 샴마이파와 개혁적인 힐렐파로 나뉜다.

재산을 공동관리하며 가난한 삶을 찬양했던 내세적·자립적 공동체를 여러 도시들에 세웠던 엣세네 사람들은 로마 네로 황제의 폭정에 항거해 들고 일어선 서기 66년의 열성파 유대인들의 독립항쟁에 합세했다. 그러나 처절했던 마짜다(마사다) 항전으로도 널리 알려진 그 저항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진 엣세네들은 배우고 가르치던 두루마리들을 근처 동굴들에 숨기고 피신했다. 그렇게 해서 살아남은 것이 사해 두루마리다.

앞서 기원전 7년 12월 1일 태생일 가능성이 높은 예수는 20대에 엣세네파 사제가 됐고 개혁적인 바리새의 힐렐파 신조를 많이 받아들였다. 예수 공동체는 그러나 엣세네파의 율법주의를 거부하고 불치의 병자나 불구자, 무식쟁이들을 과감하게 받아들이는 등 기성체제 전반에 반기를 들었고 사랑과 평화를 설파했으며, 혈연·지연 중심의 민족종교 틀을 넘어 믿음에 바탕을 둔 신앙공동체로서 보편종교를 지향했다. 이 혁명적 행보는 사두개와 바리새, 엣세네파에게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으며, 결국 그들은 예수 제거를 공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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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오병이어의 기적(五餠二魚─奇蹟)은[1]예수의 기적 가운데 하나로, 예수가 한 소년으로부터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취하여 5천 명의 군중을 먹였다는 기적을 가리킨다.[2] 간단히 오병이어라고도 한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빵과 물고기를 취하여 군중을 먹인 예수의 두 기적들 가운데 하나로, 마르코의 복음서 8장과 마태오의 복음서 15장에는 이와 유사하지만 다른 기적이 서술되어 있다.

    본문

    5,000명의 군중을 먹이신 기적인 이 기적은 신약성서사복음서에 모두 등장하는데, 각각 다음과 같다.

    의미

    가난한 이들에 대한 예수의 지극한 마음을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마르코의 복음서에서 이르기를 예수께서는 가난한 이들을 보면서 불쌍히 여기셨다고 말하는데, 이는 "장이 끊어질 것처럼 고통스럽다"라는 뜻을 가진 '스플랑크니조마이'를 옮긴 것이다. 로마제국, 로마제국의 간접통치자인 헤로데 왕실, 예루살렘 성전 제사장 세력들의 수탈 때문에 굶주리는 불쌍한 민중들의 처지를 헤아리면서 예수는 무척 마음이 쓰렸던 것으로 의미된다.

    유사한 기적

    빵과 물고기를 취하여 군중을 먹인 다른 유사한 기적으로서 4,000명의 군중을 먹이신 기적이 있으며 다음 복음서들에 있으며 루가복음과 요한복음에는 없다.

    • 마르코복음 8장 1~9절
    • 마태오복음 15장 32~39절

    이 기적에서 예수는 군중에게 빵 일곱 개와 작은 물고기 몇 마리를 취하여 군중을 먹이는 기적을 보이셨다.[3]

    각주

  2. 한자적인 해석 그 자체로는 빵(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이지만, 당시에는 실제로 빵과 물고기가 쓰였다.
  3. John Clowes, 1817, The Miracles of Jesus Christ published by J. Gleave, Manchester, UK, page 109
  4. John Clowes, 1817, The Miracles of Jesus Christ published by J. Gleave, Manchester, UK, page 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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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프스 트라이얼(A. Scopes Trial)
하나의 기적을 믿으면 또 하나의 기적을 믿기도 쉽다.

성경은 예수님이 행하신 놀라운 기적들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오병이어의 기적이다.
이 기적은 마태복음 14:13∼21, 누가복음 9:10∼17, 요한복음 6:1∼13 등 4복음서에 모두 기록이 될 정도로 복음서의 저자들이 아주 중요하게 다룬 사건이다.

떡은 아주 어린아이의 한 끼 식량이고, 놀랍게도 그 어린아이는 그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자기의 도시락을 예수님께 드렸다. 기적은 여기서부터 시작이 되었다. 이 아이가 예수님께 드린 보리떡은 히브리어로 ‘마슈나’다. 이 떡은 일반적으로 사람이 아닌 짐승이 먹는 것이었다. 그리고 두 마리의 물고기를 드렸는데 이 고기는 ‘이크수스’다. 갈릴리 호수에서 어부들은 잡은 고기를 추려서 큰 고기는 집으로 가져가고 너무 작아서 먹을 수 없는 것은 해변에 버리는데 그 고기가 바로 ‘이크수스’다. 이 아이가 드린 물고기는 바로 ‘이크수스’다. 떡 중에 가장 하급의 떡 ‘마슈나’, 물고기 중에 너무 작은 물고기 ‘이크수스’였다.

아마 어린아이가 예수님을 따라가서 말씀을 듣겠다고 하니까 부모가 해변에 다니며 버린 고기를 주워다가 도시락을 싸 주었는지 모르겠다. 그것을 아이는 예수님께 드렸다. 그것이 5천명을 배부르게 먹게 하고 열두 광주리가 남았다. 가장 작은 것으로부터 가장 큰 기적이 일어났다. 

헌신이 기적

예수님께 드리는 헌신 위에 하나님의 기적이 임했다. 예수님 앞에 소년의 정성으로 1인분의 도시락이지만, 그것을 드렸을 때 많은 생명에게 유익하게 쓰였다. 우리에게 무엇이 있는가? 크고 작고, 많고 적고의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에게 무엇이든지 드리기만 하면 가장 유익하고, 가치 있게 사용된다. 예수님께 드리는 작은 헌신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한 사람의 헌신을 통해서 위대한 일을 이루실 수 있다. 보리떡 다섯 개, 생선 두 마리가 주님의 손에 들어갔을 때 그것은 5천명을 먹이고도 남았다. 무슨 뜻인가? 작지만, 보잘것없지만 예수님께 온전히 헌신하면 이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문제는 내가 온전히 헌신하는 데 있다. 자기의 것을 모두 주님께 드리는 데 있다. 그러면 결국 자기도 살고 다른 사람도 사는 것이다.

자기의 희생과 봉사가 없이 다른 사람을 구할 수 없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나 보고 기대하기 전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찾고 생각해 보아야 한다. 아이는 특별한 것을 드린 것이 아니다. 그저 자기가 가지고 있던 것을 드린 것 뿐이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이 무슨 특별한 것이 아니다. 그저 우리에게 있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드리는 것을 요구하신다. 시간, 달란트, 지식, 물질, 무엇이든지 있는 그대로를 온전히 드리면 된다. 주님을 위하여 드릴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는가? 내게 주신 물질이 있는가? 하나님이 내게 주신 물질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시기를 바란다.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땀 흘리게 하셨고 그 대가로 내게 주신 물질들을 귀하게 사용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시기를 바란다. 나를 위해서도 선용해야 하지만, 특별히 ‘하나님께서 지금 원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갖고 있는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을 하자.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날 것이다. 내게 무슨 재능이 있는가? 그 재능을 주님을 위하여 ‘필요하시다’ 할 때에 드리자. 미미한 재능이지만 하나님은 크게 사용하셔서 많은 사람들에게 크게 유익을 주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오병 이어의 기적에는 헌신이 있었다. 좋은 것은 아니지만 있는 그대로 주님 앞에 드렸다. 그냥 믿고 드릴 때 기적이 임한다.

감사가 기적

오병이어의 기적에는 감사가 있었다.
감사할 때 기적이 일어났다.
기적은 적은 것이라도 하나님을 향해 감사할 때 일어난다.

마가복음 6:41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시매. 

예수님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하늘을 우러러 보시며 감사기도를 드렸다.
어떻게 보면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늘을 우러러 감사기도를 드리셨다.

이 때에 기적이 일어났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감사로부터 시작되었다.
지금 우리의 생활이 길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는가?
생활이 온갖 흑암과 공허와 환난이 나를 둘러싸고 있는가?
그로 인하여 삶이 답답한 환경에서 몸부림치고 있는가?
그럴수록 하늘을 향해 감사하기 바란다.
그러면 기적이 일어난다.
감사와 불평은 자신에게 달려 있다.
하지만 감사할 조건이 수두룩해도 감사하지 않는다.
그렇게 불평만 하면 계속 불평할 일만 생긴다.
그러나 원망스럽고 괴로워도 감사하기 시작하면 감사의 조건이 얼마든지 생기게 된다.

마태복음 25: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있는 것 까지도 빼앗기리라.

지금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하나님을 향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 감사 위에 하나님의 기적적인 축복이 임할 것이다.

순종이 기적

오병이어의 기적에는 믿고 따르는 순종이 있었다.
어린 소년의 순종이 있었다.
제자들의 찾음에 자신이 갖고 있었던 것을 예수님께 드리는 순종이 있었다.
기적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리고 제자들의 믿음의 순종이 귀했다.

마가복음 6:39-40
제자들에게 명하사 그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시니 떼로 백 명씩 또는 오십 명씩 앉은지라.

주님은 제자들에게 명령하셨다.
제자들로 하여금 사람들이 제대로 무리를 지어 앉도록 질서를 위해서 잘 정리시키셨다.

어떤 제자들은 어떻게 처리할까 두려워했을지 모른다.
‘도대체 어떻게 하시려고 할까?’ 하는 의아심이나 궁금함 말이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이 무엇인가를 하실 것을 믿었다.
엄청난 일을 이루실 줄로 믿고, 그들은 그 일을 순종하여 자신들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다.
하나님은 이런 바탕 위에서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신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작은 헌신과 믿음의 순종을 기다리신다.
시도하는 사람을 통해 축복의 역사가 일어난다.
희생하는 사람을 통해 축복의 역사가 일어난다.
주님의 축복을 통해 축복의 역사가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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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성에 '바늘 귀'는 실재했을까?



예루살렘 성에 '바늘 귀'는 실재했을까?


예수가 살던 시대의 예루살렘 성에 '바늘 귀'라 불리는 성문이 실재했을 것이라는 생각은 아주 오랜 전부터 있어 왔다.
다른 성문보다 매우 작기에 '바늘 귀'라 불린 암문(혹은 개구멍)이 존재했으리라는 생각은 사실 그럴싸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에 덧붙여진 말들도 그럴듯했으니, 그 문의 크기는 사람은 여하히 통과할 수 있지만 낙타의 경우는 짊어진 물건을 모두 내려놓고 알몸뚱이가 되어야만 겨우 통과할 수 있는 정도라는 것이었다.
만일 그렇다면 이 말은 앞에서 인용한 마태복음의 문장을 쉽게 이해시킬 수 있다.
그 문장 다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제자들이 듣고 몹시 놀라 이르되,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마태복음 19: 23-25)*

 * 이 문장은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도 실려 있는데, 내용은 거의 같다.

아울러 이렇게 보면 위 예수의 말은 매우 설득력 있는 주문이 된다.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으나 재물에 대한 욕심으로 가기가 힘들니 그 욕심을 모두 내려놓으라는 말이 성립되기 때문이다.(부자를 폄훼하는 것은 아니지만, 9원을 가진 자가 10원을 채우기 위해 가난한 자의 1원을 뺏는다는 인식은 동서가 비슷하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하면 이것은 어불성설이며 본말 또한 전도돼 있다.

'바늘 귀'는 통과할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그 욕심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예수가 강조하고자 한 것은 낙타의 통과 여부가 아니라 그 낙타에 실린 재물이었을 터, 하지만 그림에서 보다시피 부자는 자신의 욕심을 버리지 않는다.
그저 짐을 잠시 내려놓았다 다시 싣는 수고가 뒤따랐을 뿐이다.
예수가 원한 것은 분명 이런 형태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문의 통과 주체는 사람이지 낙타가 아니다.
사람이 욕심을 버리는 게 중요하지 낙타 등 위의 수하물을 내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런 의미를 몰랐는지, 아니면 알고도 모른 척 밀어붙인 것인지 역대로 천국을 갈망하는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벽에서 아래와 같은 '바늘 귀'들을 찾아냈다. 물론 역사적 근거는 없는 것들이다.(굳이 장소를 명시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오해

성경이 기록된 사건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은, 막연히 성경의 내용을 상상하는 것과는 분명 큰 차이가 많다. 이스라엘에서 성경 현장학습을 인도하면서, 자주 받는 질문들과 오해들이 있는데, 그 중에 몇 가지를 간추려 여기에 소개한다.

바늘 귀 (the eye of a needle)

마태복음 19:24절에 예수님은 “낙타가 바늘 귀(the eye of a needle)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는 말씀을 하셨다. 여기에서 성전으로 들어가는 여러 문 가운데 ‘바늘 귀’라는 문이 있다는데 그 문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을 받고 한다.

그런 문은 없다. ‘바늘 귀’ 문은 예전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다. 일부 설교자들은 ‘바늘 귀’ 문을 말하면서, 낙타가 성전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지고 있던 모든 짐을 내리고 무릎을 꿇어야만 들어가는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모든 짐을 내리고, 겸손하게 무릎을 꿇어야만 들어갈 수 있다고 설교한다고 한다.

예수님 당시 헤롯 성전 뜰로 들어가는 몇 개의 문이 있었으며, 지금도 그 문의 흔적은 찾을 수 있다. 남쪽에서 성전 뜰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은 훌다 문(the gate of Hulda)이 있다. 훌다 문은 삼중 문(triple gate-위의 사진)과 이중 문(double gate)을 가리킨다. 삼중 문은 성전 남쪽의 동쪽에 있었는데, 주로 입구로 이용되었고, 이중 문은 성전 남쪽의 서쪽에 있었는데, 출구 또는 상을 당한 가족의 성전 입구로 이용되었다.

서쪽에서 성전 뜰로 들어가는 두 개의 통로인 로빈슨 아치(Robinson’s arch- 아래 사진)와 윌슨 아치(Wilson’s arch-사진)가 있었다. 윌슨 아치는 성전과 예루살렘의 서쪽 언덕에 위치한 헤롯 궁, 대제사장의 주거지, 상위 계층의 생활 근거지를 서로 연결했던 통로로써 왕, 대제사장 및 상위 계층이 주로 이용했던 통로였다.

그리고 북쪽 베데스다 연못 근처에서 성전 뜰로 들어가는 문이 있었는데, 이 문은 요한복음 5:2절에 양문(Sheep gate)으로 기록되었다. 성경 어디에도 ‘바늘 귀’ 문은 없다. ‘바늘 귀’ 문은 15세기 이후부터 설교자들을 통해 강단에서 선포되어 온 대표적인 허구에 속한다. ‘바늘 귀 문’은 없다고 이야기해 주어도 여전히 반신반의한다.

대제사장 발목에 맸다는 끈

유대 월력으로 일곱 번째 달, 제 십 일은 대속죄일 (욤 키푸르)이다. 이 날은 대제사장이 자신의 죄와 백성들의 죄를 사하기 위하여 속죄 의식을 행하는 날이다 (레 23:27-32). 대제사장이 속죄 의식을 위하여 지성소로 들어갈 때, 그의 발목에 끈을 맸다는데, 끈을 맨 이유는 대제사장이 죽으면 끌어내기 위한 것이라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히브리어 성경, 신약 성경, 사해 문서, 요세푸스의 기록, 교부들의 기록, 미쉬나, 탈무드 어디에도 대제사장의 발목에 끈을 맸다는 기록은 없다.

이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13세기 유대인 조하르(Zohar)의 기록에서 찾아볼 뿐이다. 조하르는 이렇게 말하였다. “대제사장의 발목에 금으로 된 줄을 묶어 두었는데, 이는 그가 지성소에서 죽었을 경우, 그를 끌어내기 위한 것이다.” 조하르는 그리 신뢰할 유대 학자가 아니다. 발목에 끈을 맸다는 것은, 레위기 16:3-4절에 기록된 지성소로 들어가는 대제사장의 예복에 위반될 수 있다: 아론이 성소로 들어오려면 수송아지로 속죄 제물을 삼고 수양으로 번제물을 삼고 거룩한 세마포 속옷을 입으며 세마포 고의를 살에 입고 세마포 띠를 띠며 세마포 관을 쓸지니 이것들은 거룩한 옷이라 물로 몸을 씻고 입을 것이며. 일부 기독교 학자들은 출애굽기 28:35절 과 히브리서 9:7절 을 주석하면서 조하르의 글을 인용하기도 한다. 특히 히브리서 9:7절에서 요한 길(John Gill)은 조하르의 글을 소개하며 이렇게 주석하였다: “유대인들은 말하기를, 대제사장이 지성소로 들어갈 때, 그의 발에 끈이나 가죽 띠를 묶어 두었는데, 이는 대제사장이 지성소에서 사망하게 되면, 그를 끌어내기 위함이다. 다른 제사장이 지성소로 들어가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었기 때문에 대제사장이 죽으면 누구도 대제사장의 속죄 의식을 대신할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하르나 요한 길이 말하는 대제사장의 발목에 끈을 맸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이것 역시 설교자들의 대표적인 허구에 속한다.

만약 대제사장이 속죄 의식을 행하다 지성소에서 죽는 일이 발생하면 대제사장의 직무를 대신할 제사장은 있었다. 누가복음 1:8절의 세례 요한의 부친 사가랴는 ‘그 반열의 차례대로 제사장의 직무를 하나님 앞에 행할 쌔 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제비를 뽑아 주의 성소에 들어가고’라는 말씀이 있다. 만약 지성소에서 대제사장이 죽으면, 그의 발목에 맨 끈을 당기므로 시신을 끌어낸 것이 아니라 대제사장의 직무를 대행할 사람이 지성소로 들어가 대제사장의 시신을 끌어내는 것이다. 허구는 또 다른 허구를 만들어 낸다. 그러면,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이상해 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인 YHWH를 기록하는 서기관

성경의 소중한 사본이 대량으로 발견된 쿰란 유적지를 여행할 때, 간혹 서기관들에 대한 질문을 받곤 한다. 서기관들이 성경을 필사하면서, 하나님의 이름 YHWH을 기록할 때마다 붓을 꺾어 버리고 새로운 펜을 사용하였으며, 온 몸을 정결케 하는 정결 의식 또는 손을 씻은 후에 기록했다는 말이 있는데, 사실인가라는 질문을 받는다. 이것 역시 사실이 아니다. 유대인들의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드러내기 위하여 서기관들의 열심을 강조한 말이기는 하지만, 붓을 버리고 새 붓을 사용했다거나 목욕을 한 후에 다시 기록하기 시작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서기관(sofer)을 뜻하는 히브리어는 소페르이다. 소페르는 세다(count)를 뜻하는 사파르(safar)에서 온 단어이다. 서기관이란 말은, 서기관이 성경을 필사할 때, 자신이 기록한 단어를 정확하게 셌던 것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한다. 서기관이 사본의 글자 수를 세었던 것은, 사본의 원본 글자 수와 자신이 기록한 글자 수를 세므로 정확하게 기록했는지를 판단했기 때문이다.

▲기브온.
기브온 위에 멈췄던 태양

기브온(사진)은 예루살렘 다윗성에서 북서쪽 약 5-6마일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솔로몬의 일천 번제에 대한 배경과 여호수아 10장에 기록된 이스라엘 백성들과 아모리 족속들 간의 전쟁에 대한 배경을 살펴 보면서 여호수아의 기도를 묵상할 때가 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신 때가 이렇게까지 없었는데, 당일 여호수아의 기도는 이랬다: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할 찌어다 (수 10:12). 일부 목회자들은 여호수아의 태양이 멈추게 된 기도와 열왕기하 20:10-11절에 기록된 히스기야의 기도로 해가 10도 뒤로 물러간 배경을 이야기하면서, 나사(NASA) 과학자들이 잃어버린 하루를 찾았다고 말하는데 그것이 사실이냐고 묻는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강조하고 싶을 지라도, 나사(NASA) 과학자들이 잃어버린 하루를 찾았다는 잘못된 정보를 인용해 가며 하나님의 능력을 강조하는 것은 옳지 않다. 성경에서 잃어버린 하루를 찾기 위한 노력은 NASA가 존재하기 이전에도 있었다.

그러나 본문에서 이것은 생각해 볼 수 있다. ‘태양은 기브온 위에, 달은 아얄론 골짜기 위에 머무르라’는 여호수아의 기도에서, 기브온은 아얄론 골짜기의 동쪽에 있다. 다시 말하면, 기브온은 태양이 뜨는 동쪽에, 그리고 아얄론 골짜기는 태양이 지는 서쪽에 있다. 그리고 태양과 달은 하늘에 같이 떠 있었는데, 이런 일이 일어날 시간은 점심 때도 저녁 때도 아닌 아침 시간이다. 여호수아는 이른 아침에 태양이 여전히 기브온 위에 있고, 달은 서쪽 아얄론 골짜기에 있을 때에 아모리 족속들과 전쟁을 시작하면서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하였다.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할 찌어다 (수 10:12).



영의 눈을 열어주소서



열왕기하 6:8-17

8 시리아 왕이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고 있던 무렵이다. 그가 신하들과 은밀하게 의논하며 이러이러한 곳에 진을 치자고 말하였다.
9 그러자 하나님의 사람이 이스라엘 왕에게 사람을 보내어, 시리아 사람들이 거기에 진을 칠 곳이 이러이러한 지역이니, 그 곳으로 지나가는 것은 삼가라고 말하였다.
10 이러한 전갈을 받은 이스라엘 왕은, 하나님의 사람이 자신에게 말한 그 곳에 사람을 보내어, 그 곳을 엄하게 경계하도록 하였다. 그와 같이 경계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11 이 일 때문에 시리아 왕은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신하들을 불러모아 추궁하였다. “우리 가운데서 이스라엘 왕과 내통하는 자가 없고서야,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이냐?”
12 신하 가운데서 한 사람이 말하였다. “높으신 임금님,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에는 엘리사라는 예언자가 있어서, 임금님께서 침실에서 은밀히 하시는 말씀까지도 다 알아서, 일일이 이스라엘 왕에게 알려 줍니다.”
13 시리아 왕이 말하였다. “그가 어디에 있는지, 가서 찾아보아라. 내가 사람을 보내어 그를 붙잡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그 예언자가 도단에 있다고 왕에게 보고하였다.
14 왕은 곧 그 곳에 기마와 병거와 중무장한 강한 군대를 보내어서 밤을 틈타 그 성읍을 포위하였다.
15 하나님의 사람의 시종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 보니, 강한 군대가 말과 병거로 성읍을 포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시종이 엘리사에게 와서 이 사실을 알리면서 걱정하였다. “큰일이 났습니다. 선생님,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16 엘리사가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그들의 편에 있는 사람보다는 우리의 편에 있는 사람이 더 많다.”
17 그렇게 말한 다음에 엘리사는 기도를 드렸다. “주님, 간구하오니, 저 시종의 눈을 열어 주셔서, 볼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그러자 주님께서 그 시종의 눈을 열어 주셨다. 그가 바라보니, 온 언덕에는 불 말과 불 수레가 가득하여, 엘리사를 두루 에워싸고 있었다.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고 문제와 어려움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문제들과 위기를 만나지만 그 문제들과 위기를 바라보는 시각이 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기 전에는 그런 문제와 위기와 어려움을 만나면 두려워하고, 염려하고, 걱정하며 절망하지만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지고 영적인 눈이 열려 믿음의 눈으로 문제와 위기, 어려움을 보면 더 이상 두려움과 근심 걱정으로 흔들리지 않고 담대함으로 감당해 나가게 됩니다.

그런 믿음의 모습, 믿음의 눈을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사람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본문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을 침략하려는 계략을 미리 알아 방어하게 하는 엘리사 선지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아람(시리아) 왕이 엘리사를 죽이기 위해 기마와 병거로 중무장한 강한 군대를 보내어 엘리사가 사는 성읍을 겹겹이 포위합니다.

14절입니다. “왕은 곧 그 곳에 기마와 병거와 중무장한 강한 군대를 보내어서, 밤을 틈타 그 성읍을 포위하였다”

아침에 일어나 그 상황을 본 엘리사의 시종은 15절에 이젠 꼼짝없이 죽게 되었다고 두려워하며 엘리사에게 그 상황을 전합니다.
“큰일이 났습니다. 선생님,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그런데 똑같은 상황을 본 엘리사는 16절에 “두려워하지 말아라. 그들의 편에 있는 사람보다는 우리의 편에 있는 사람이 더 많다” 라고 시종을 안정시킵니다.

이 두 사람이 똑같은 상황을 보고 전혀 다른 말과 태도를 보인 이유는 엘리사의 사환은 육의 눈으로 앞에 보이는 위기만 보았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아람(시리아) 나라의 병거들과 창검들과 포위하고 있는 군사들만 본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영의 눈으로 자신을 보호하고 있는 하나님의 불 말과 불 병거를 타고 하늘의 군대를 본 것입니다.
17절 “그가 바라보니 온 언덕에 불 말과 불 수레가 가득하여 엘리사를 두루 에워싸고 있었다”

우리가 문제 속에서, 풍랑 속에서 담대할 수 있고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은 바로 이 영적인 눈이 열려야 합니다.
언제 이런 영적인 눈은 기도할 때 열립니다.
17절 “그렇게 말한 다음에 엘리사는 기도를 드렸다. 주님 간구하오니 저 시종의 눈을 열어 주셔서 볼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그러자 주님께서 그 시종의 눈을 열어 주셨다”기도할 때 눈이 열렸습니다.
영적인 눈이 열리자 시종은 시리아 군대와는 비교할 수 없는 엘리사가 본 불 말과 불 병거를 거느린 하나님의 군대를 시종도 보았습니다. 성읍을 둘러싼 시리아 군대를 보고 기겁하여 이제 죽었다고, 큰일이 났다고 두려워하고 걱정하던 시종이 영적인 눈이 열려 하나님의 군대를 본 후에 시리아 군대가 눈앞에 있고 포위를 하고 있는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문제가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자녀 된 우리에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염려하지 말라 라고 얼마나 많이 말씀하고 계십니까?
신앙의 눈이 열려야 합니다.
영적인 눈이 열려야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해야 할 기도는 “하나님, 나에게 영적인 눈을 열어 주시옵소서”
“믿음의 눈으로 문제와 상황을 볼 수 있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도우시는 능력의 손길을 보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영적인 눈이 열리면 하나님의 위대하심, 전능하심, 사랑하심을 보게 되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자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상속, 하늘의 상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보게 됩니다. 그래야 어떠한 상황에서도 두려움으로 인간적이고 불신앙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영적인 눈이 열려 이 땅과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한 천국이 보이고 끔찍한 죄의 심판이 있는 지옥이 보일 때 복음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볼 수 있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큰 그림을 볼 수 있을 때 인내함, 담대함, 순종함, 기뻐함, 희생함을 감당할 수 있는 참된 믿음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두려움과 걱정 근심, 분노와 짜증, 답답함이 내 안에 있습니까?
영적인 눈이 닫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보이지 않고 문제만 보일 때 불안과 두려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엘리사의 기도처럼 신앙의 눈으로 모든 상황을 담대함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내 눈을 열어 보게 하소서(시편 119:17-24)

17. 주의 종을 후대하여 살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주의 말씀을 지키리이다
18.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
19. 나는 땅에서 객이 되었사오니 주의 계명을 내게 숨기지 마소서
20. 주의 규례를 항상 사모함으로 내 마음이 상하나이다
21. 교만하여 저주를 받으며 주의 계명에서 떠나는 자를 주께서 꾸짖으셨나이다
22. 내가 주의 증거를 지켰사오니 훼방과 멸시를 내게서 떠나게 하소서
23. 방백들도 앉아 나를 훼방하였사오나 주의 종은 주의 율례를 묵상하였나이다
24. 주의 증거는 나의 즐거움이요 나의 모사니이다 

성경을 수 백번 읽은 어느 권사님께서 성경을 읽어도 도대체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다고 안타까워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다른 책을 그만큼 읽었으면 내용의 거의 암기할 수 있었을텐데 도대체 읽을 때마다 새롭다고 합니다.

성경을 읽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그 내용이 처음부터 하나님에게 속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지혜에 속한 광대한 진리요, 깊은 진리요, 놀라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 내용이 크고 깊기 때문에, 인간의 지혜와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는 겁니다.
완전히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그렇다고 똑똑한 사람은 이해할 수 있고 무식한 사람은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런 방식으로 어렵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이기 때문에 인간의 지혜로는 이해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라고 말했습니다(요 6:60).
그 때 예수님께서는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요 6:61, 63).

성경이 가르치는 바는 우리가 스스로 알 수 없는 구원의 지식이요 신령한 지식입니다.
우리의 이 육신의 눈과 이성의 빛만으로는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말씀을 읽고 이해할 수 있으려면 먼저 하나님이 우리 눈을 밝혀주시고 우리 눈을 열어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읽기는 읽어도 이해하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눈을 열어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 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말씀을 읽고 깨달을 수 없다

시편 119편의 기자는 이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상당한 식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진 신학자이며, 경건한 사람이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이 정도의 수준에 이른 사람이라면 그는 언제든지 자신이 말씀을 열어 읽기만 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통달할 것으로 생각하기 쉬울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말하기를,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고 간구하였습니다. 단순히 거듭난 사람이라고 해서 척척 알아지고 다 깨달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내용들을 조금 알고 있다고 해서 말씀에 감추인 모든 기이한 것들을 볼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계속 해서 ‘내 눈을 열어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 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참으로 고귀한 것이지마는, 이 말씀을 읽을 때에 얼마든지 읽기만 하고 깨닫지는 못한 채 지낼 수 있습니다. 그러면 헛일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 눈에서 비늘이 벗겨지게 하시기 전에는 우리는 본질상 하나님께 속한 일들에 대하여 눈이 멀어 있다”(시편 119편 설교 중에서). 약간의 빛을 받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여전히 더욱 많은 빛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눈을 활짝 열어주실 때에 우리가 이전에 보지 못했던 더 크고 놀라운 것들을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진리는 영적 진리이기 때문에 육신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죄로 인해 우리의 마음이 어두워졌고, 우리의 눈이 어두워졌고, 우리의 영적 이해력이 깨어지고 말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새로운 생명을 주시고, 새로운 생명에 걸맞은 영적 시력과 하나님의 지혜를 이해할 수 있는 정신을 하나님이 회복시켜 주시기 전에는 안 됩니다. 

우리의 눈을 열어주시고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빛을 주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 16:13). 영적인 것은 영적인 것으로라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소경에 불과합니다.

내 눈을 열어주소서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면서 살 수 있으려면, 먼저 눈이 열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볼 수 있는 눈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제 성경이 이토록 고귀한 말씀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우리의 기도는 이제 ‘하나님, 이 성경 말씀을 읽을 수 있도록, 정말 그 뜻을 하나하나 바로 알고 늘 우리 마음에 새기고, 그 말씀의 인도와 보호를 받으면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복된 길을 늘 잘 걸어갈 수 있도록, 제 눈을 열어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으려고 하기 전에, 말씀을 묵상할 때에, 설교를 준비하거나 설교를 하거나 들으려고 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지혜와 지식으로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없으므로, 우리는 성경을 읽거나 설교를 들을 때마다, ‘주여, 제가 읽고 있는 이 말씀을 좀 더 잘 깨달을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저를 이 말씀으로 가르쳐 주시옵소서’ 하고 전심으로 기도합시다. 조지 휫필드는 그의 일기에서, “나는 가능하면 한 절이나 한 단어를 읽을 때마다 기도했다. 말씀은 참으로 내 영혼에 고기요 음료였다. 매일 위로부터 새로운 생명과 빛과 능력을 공급받았다.”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그래야 이 복된 말씀이 우리에게도 복된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기도와 갈망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영광스럽고 놀랍고 기이한 것을 좀 더 보고자 하고 알고자 하는 소원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기이한 것들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하나님의 법의 기이한 것들로 가득합니다. 하나님에 관한 진리와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람이 죄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으며, 그가 어떻게 십자가에서 단번에 드리신 제사로 우리 죗값을 치르신 것과, 그 그리스도와 우리가 어떻게 믿음으로 연합하여 죄사함을 받을 수 있는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는 주의 법의 기이한 것으로 가득합니다. 이 모든 것들은 성령으로가 아니면 깨달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법의 기이한 것을 바로 알지 못하고는 진리를 알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은 우리 눈이 열려서 성경의 말씀을 읽고 깨달을 때에만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와 같이 매일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주의 종인 저에게 주의 은혜를 거두지 마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저는 주의 종이오니, 제 생명을 붙들어주셔서, 제가 사는 동안에 은혜를 주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우리가 사는 동안 하나님의 선하신 은혜 아래 거하면서 살게 해주시고, 우리 눈을 열어주셔서, 사는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밝히 보고 잘 깨달아 알아서, 사는 동안 그 말씀을 지키면서 살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탈무드의 이야기

어느 젊은이가 유명한 랍비를 찾아와서 "만일 나에게 하나님을 보여주신다면 나는 당장 하나님을 믿겠습니다"
이렇게 간청했습니다.
랍비는 그 젊은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온 후에 높은 하늘에서 빛나는 태양을 가리키며 "저 태양을 두 눈으로 똑똑히 쳐다보시오"
그러자 젊은이는 "아니, 저렇게 빛나는 태양을 어떻게 두 눈을 뜨고 쳐다볼 수 있습니까?"
이때 랍비는 젊은이에게 "이보게 젊은이 하나님의 만드신 저 태양도 쳐다볼 수 없으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보겠다고 하는가?"
랍비는 젊은이의 교만과 어리석음을 깨우쳤다고 합니다.

제가 그 젊은이와 같은 생각을 가졌던 때가 있었습니다.
모태 신앙으로 태어나서 태어나기 전에 아들이면 하나님께 바쳐서 목회자로 세우라고 부모님들의 서원에 의해서 일찍부터 목회자가 되어야 한다는 신앙의 분위기 가운데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젊은 혈기가 왕성하던 때 문득 "정말 하나님이 계시다면 한 번 만나달라고 떼를 쓰며 삼각산 승리기도원에서 삼일을 금식하며 기도할 때 마지막 삼일이 되던 날에 갑자기 나를 지배하는 생각은 '나와 같은 더럽고 추한 죄인이 어찌 거룩하고 존귀한 하나님을 보겠다고 하느냐?' 이런 마음을 갖게 되어 그 밤에 많이 울었습니다.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아침을 맞이할 때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신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영의 눈이 열리는 것일고 하겠습니다.
영의 눈이 열리지 않으면 일생동안 아니 몇 대째 예수를 믿어도 그것은 종교생활에 익숙한 것입니다.
영적 생활의 즐거움을 누리려면 반드시 영의 눈을 열어야 합니다.

어떻게 영의 눈을 열 수 있을까요?

첫째,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육신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일상생활에서 늘 부딪치는 문제들입니다.
이러한 부딪침 때문에 더 좋은 것, 더 맛있는 것, 더 멋있는 것을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이란 우선순위가 중요합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생각해야 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물질이 육신이 먼저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6:19~22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눈을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은 몸의 등불이라고 하셨습니다.
세상 물질만 사랑하고 욕심으로 가득찬 사람은 미래를 볼 줄 모르고 영안이 밝을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선입견이나 교만, 증오심을 버려야 마음의 눈이 밝아집니다.

선입견은 마치 색안경과 같습니다.
파란 안경을 쓰면 파랗게 보이고 빨간 안경을 쓰면 빨갛게 보이는 것처럼, 마음 속에 이미 들어와 있는 다른 사상이나 자기 나름의 어떤 철학 사상이 틀어 박혀 있으면 그것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바로 보고 영안이 열리기 위해서는 선입견도 교만과 증오심도 버려야 합니다.

둘째, 회개하고 거듭나야 합니다.

우선순위가 결정된 후에는 우선순위를 항상 유지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춰야 합니다.
이 조건을 갖추지 못하면 또다시 예전의 생활을 그리워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전에 좋던 것 이제는 값없다!
이렇게 찬송을 부르기 위해서 항상 회개하고 거듭난 상태를 유지해야 합니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하고 박사 학위를 많이 가졌다 할지라도 회개하고 그 영혼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을 바로 볼 수가 없습니다.

마태복음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봅니다.
죄가 마음에 가득한 사람은 아무리 똑똑해도 아무리 일류 학교를 나왔어도 바로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예수의 피로 죄사함 받고 거듭나게 될 때에 영의 눈이 밝아져서 바로 볼 수가 있습니다.

셋째, 바른 자리에 서야 합니다.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높은 데 올라가야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맑은 날 산꼭대기에 올라가면 온 시내를 멀리까지 다 볼 수 있는 것 같이, 심령이 맑고 죄악의 구름과 안개가 다 벗겨져 나가야 다른 사람이 능히 볼 수 없는 것을 멀리 바라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바른 자리가 어디 일까요?
산에 올라가야 합니까?
높은 건물에 올라가야 합니까?

마태복음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넷째, 성령님의 도움으로 보아야 합니다.

사도행전 19:2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믿음이란 눈에 안 보이지만 보이는 것과 똑같이 생각하고 나가는 것입니다.
지금 눈앞에 안나타났지만 바라는 것들의 실상을 보는 것 같이 믿고 나가는 것입니다.

"저의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 하는 이것이 우리의 진정한 기도가 되어야합니다.

에베소서 1:18~19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하나님 안에서 나를 새롭게 하고 새로운 눈으로 바라봐야 되겠습니다.
주님은 우리 마음의 눈을 밝히사 마음의 신령한 눈을 떠서 더 근본적이고 신비한 것을 알아가게 하십니다.
영안이 열리면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부르심의 소망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미래에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소망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님 안에서 나를 부르시는 소망이 무엇인지 알면 행복해 집니다.

"하나님이 나를 왜 세상에 보내셨나? 나를 왜 자녀 삼아 주셨나? 그리고 지금 내게 바라시는 소망이 무엇인가?" 여기에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를 부르신 분명한 목적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시고, 하나님 나라에 참여할 수 있게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소망을 갖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낙심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나에 대해서 소망을 갖고 계시는데 내가 나에 대해서 절망하는 것은 죄입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큰 능력 안에서 죄와 죽음을 이기고, 근심과 염려를 이기고, 영적전쟁에서 승리할수있는 큰 능력을 주님이 주셨습니다.
영안이 열리어 주님이 이미 주신 능력을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스런 자녀로 소망을 갖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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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眼)


1. 육안(肉眼)

불교(佛敎)에서 이르는 오안(五眼)의 하나.
육신(肉身)에 갖춰진 안구(眼球)
안경(眼鏡)을 쓰지 않은 천생(天生)의 시력(視力). 맨눈
눈으로 보는 표면적(表面的)인 안식(眼識).

2. 심안(心眼)

마음속으로 사물(事物)을 꿰뚫어 보는 힘. 또는 그 작용(作用).

3. 영안(靈眼)

신령한 세계를 볼 수 있는 눈

눈은 신체의 한 부분일 뿐이지만 육체의 눈이 밝고 어두움에 따라 온 몸이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눈은 몸의 등불이라고 한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성하다(마태복음 6:22-23)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하와가 선악과나무를 “보암직하고”(창세기 3:6)
“보암직하고”란 ‘눈이 추구하는’ 뜻이다.
즉, 욕망을 가지고 대상을 바라보았다는 뜻이다.

“眼目의 情慾”에서 “정욕(epithumia)”은 사물에 대한 탐욕을 뜻한다.
의지의 모든 결정, 그리고 심지어 가장 좋고 가장 숭고한 인간의 감정과 능력들까지도 이 탐욕의 포로가 된다.
하와의 눈이 밝아 진 것은 금지된 것을 탐욕스런 눈초리로 보게 되었다는 뜻이다.

아무리 훌륭한 자질을 지녔다 해도 시각과 청각을 마음대로 사용한다면, 심령이 왜곡되게 마련이다.
육신의 눈과 영의 눈은 따로 분리된 것이 아니다.
상호 긴밀한 관계에 있다.
인간은 “바라봄으로 변화된다.
바라보는 대상과 그 내용에 따라 인품은 꼴 지어진다.
그래서 관상학에서 몸은 1천 냥, 눈은 900냥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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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눈을 열어주소서(열왕기하 6:14-19)

눈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육신의 눈
둘째, 지식의 눈
셋째, 영적인 눈

기독교인들의 관심은 영적인 눈이 열리는 것이다.

엘리사 선지자 시대에 아람 나라는 강대국이 자주 이스라엘 지경을 침범해 오고는 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아람의 침략은 패배로 돌아갔습니다.
그것은 사전에 정보가 누설되어 이스라엘 편에서 벌써 침략할 루트를 알고 사전에 차단하고 있거나 군사를 매복하고 있음으로 번번이 패전으로 끝났던 것입니다.
 
아람 왕은 대단히 화가 나서 말하기를 ‘분명, 우리 편 중에 스파이가 있어서 적과 내통하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당장에 그 스파이를 찾아내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그러자 어느 신하가 말하기를 ‘왕이여.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에는 엘리사라는 선지자가 있어서 우리 나라의 모든 것을 손바닥 보듯이 다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왕이 침실에서 한 이야기라도 다 알고 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다시 말하면, 엘리사의 영적 레이더에 다 걸리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보고를 받은 왕은 기가 막힙니다.
아무리 국가의 1급 비밀이라도 환히 들여다보고 있는 한 결코 전쟁에 승리할 수 없는 줄 알고 왕은 우선 엘리사라는 선지자를 체포하리라고 결심을 하고 막강한 군사를 엘리사가 있는 도단이라는 작은 성으로 보내서 한 밤 중에 감쪽같이 몇 겹으로 포위를 했습니다.
마침내 아침이 훤히 밝았습니다.
선지자의 종이 아침 일찍이 일어나 하품을 하며 무심코 성 아래를 보다가 기절초풍을 했습니다.
 
아람나라의 군대가 성을 몇 겹으로 포위한 채, 무시무시한 창검을 번뜩이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종은 허겁지겁 주인 엘리사에게 쫓아와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지금 아람 군대가 우리를 포위하고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화급하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조금도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고 ‘두려워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저희와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지금 종의 눈에는 자기 나라 군대는 성을 지키는 몇 백명의 중대 병력이나 있을까, 가장 막강한 아람 군대의 수만의 군대와는 감히 비교도 안됩니다.
답답합니다.
엘리사가 이제는 노망이 들었습니까?
그 때, 엘리사가 종의 이러한 의심에 가득한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종의 눈에서 의심의 비늘이 벗기어지더니 영안이 열리었습니다.
 
열린 영안의 눈으로 성을 내려다보니 하나님의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성과 엘리사의 집을 옹위하고 하고 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엘리사는 다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시여. 저 아람 군대들의 눈을 어둡게 하소서.’ 그러자 아람 군대들의 눈들이 어두워졌습니다.
엘리사는 군인들 앞에 나아가 말하기를 ‘여러분, 이곳은 길도 아니요. 성도 아니 내가 인도하는 대로 따라 오라’고 하자, 군대가 저를 따라 이스라엘의 당시 수도인 사마리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아람 군대는 꼼짝없이 독 안에 든 쥐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큰 근심에 빠졌던 이스라엘 왕은 신이 나서 당장에 그 모든 군대를 몰살을 시키려고 했지만 엘리사가 만류하고 오히려 떡과 물을 주어 먹게 하고 돌려보냈습니다.
원수를 먹이고 마시우게 한 것입니다.
그러자, 혼줄이 난 아람 군대는 엘리사가 생존해 있는 동안에는 감히 침범하지 않았다고 23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선으로 악을 갚으니 그 사랑 앞에 녹아지는 것입니다.
여하튼 우리는 오늘 본문을 읽으면 너무나 멋지고 놀라워 감동이 큽니다.
 
이처럼 영안이 열리는 것은 신앙생활의 큰 힘이요, 승리의 비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 중에 영안이 닫히어서 하나님이 아무리 은혜를 주시려 하시거나 경고를 하시어도 깨닫지 못합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매를 들고 때리셔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더 큰 매를 자초합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유황불로 멸망할 때 아브라함은 영안이 열리어 그 사실을 알았으나 롯은 세상의 욕심에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다가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만났습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영안이 열리며 예수님을 보고 고꾸라지며 변화되었으나 사도행전 9:7절에 보면 같이 동행하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였다고 했습니다.

죽음의 유형지 밧모섬에서 사도 요한은 영안이 열리면서 신령한 하늘의 세계와 미래 세계에 대한 환상을 볼 수 있었으나 많은 죄수들은 자기들이 처한 절망적인 상황만 보다가 죽어갔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역사하시고 계시는 데 세상의 욕심에 영안이 닫히어 보지 못한다면 얼마나 답답한 노릇입니까?
여러분은 영안이 열린 자와 닫힌 자 중에 어디에 속한 자입니까?
여러분은 모두 영안이 열린 자가 됨으로 하나님의 세계, 하나님의 경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볼 수 있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어떻게 해야 믿음의 눈, 영안이 열릴 수가 있을까?
 
말씀의 눈을 열어라!

성경을 통하여 세상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약속인 말씀을 통해서 보는 자들이 되는 것

하나님의 약속은 성경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세계, 하나님의 뜻을 잘 모르지만 한가지 분명히 아는 것은 하나님은 성경의 약속대로 반드시 시행하시는 분이시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의 눈을 통해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세계와 하나님의 뜻을 봅니다.
우리는 영안이 확 열리어서 천사의 모습이나 마귀의 모습은 보지 못할지라도 오직 한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반드시 성경의 약속대로 시행한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고아 2,000명을 기적 가운데 먹여 살린 죠지물러에게 어느 분이 묻기를 ‘어떻게 그런 엄청난 일을 할 수 있었습니까?’하는 질문을 받고 대답하기를 ‘성경의 약속대로 믿은 데 있습니다.
나는 평생에 성경을 백 회 통독했습니다.
그러나 한번도 싫증이 난 일이 없습니다.
읽을 때마다 새로워졌고 읽을 때마다 힘을 얻고 희망을 얻었습니다.
성경은 믿는 자에게 약속대로 이루어 주는 책입니다.
이것은 나의 54년간의 경험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고 처음 3년간은 성경을 안 읽었습니다.
그때 나는 신자로서의 기쁨도 사명도 느끼지 못하는 죽은 크리스천이었습니다.
나는 그 2-3년 간을 잃어버린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의 눈으로 하나님의 세계와 하나님의 뜻과 인도를 바라볼 수 있는, 영안이 열린 자가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의 눈을 열어라
 
기도의 눈을 통해서 하나님의 세계와 뜻을 보는 것입니다.
성경의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인 반면, 기도는 그 약속을 붙잡고 드리는 청구요, 요청입니다.
즉, 성경은 약속의 보물창고라면 그 창고를 여는 열쇠는 기도인 것입니다.
우리가 신용카드를 가지고 있으면서 믿음으로 쓰지 못하고 굶거나 물건을 못 산다면 얼마나 어리석겠습니까?
그러므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 그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하나님의 경고와 인도히심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깊은 기도생활 중에 하나님의 거룩한 손길을 볼 수 있었고 가뭄 속에서도 미래의 큰비를 보는 믿음의 눈을 가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엘리사는 기도하는 자였기에 하나님의 천군 천사가 보호하는 것을 볼 수 있는 영안이 있었던 것입니다.
기도하는 자에게 믿음의 눈이 열립니다.
그러나 기도에 게을리 하면 이상하지요, 그나마 있던 믿음까지 약해지고 하나님의 세계와 그 뜻에 대해서 보지 못하는 지경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꾸준히 기도하여야 합니다.
그럴 때에 영적 세계를 보는 믿음의 눈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응답으로 바꾸는 기도는 적어도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합니다.

1. 기도하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약속을 찾아야 하고 그것을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2. 기도의 저해요소인 죄책감이나 근심, 염려, 낙심을 하나님께 맡기어야 합니다.
3. 기도의 응답을 받으려면 응답되어진 사실을 상상하며 그대로 될 줄로 믿으면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치유의 빛」의 저자 아그네스센포오드 여사에게 어느 부인이 상담하기를 ‘내 아이는 아주 삐뚤어 가고 있습니다.
남들이 자기를 싫어한다고 오해하여 점점 우울해지고 반항적으로 되어 감으로 점점 짜증이 나게 만들고 있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대답해 주기를 ‘이제부터 기도해 보세요. 기도를 하되 이렇게 해보세요. 밤에 그 아이가 잠들었을 때에 그 아이 위에 두 손을 얹고 그 아이가 앞으로 명랑하고 사랑스러우며 너그러운 아이가 되어 있는 모습을 눈앞에 그리면서 믿고 기도해 보세요.’라고 했습니다.
 
그 부인은 이 방법대로 한 달 동안 기도했습니다.
한 달 후에 연락이 오기를 ‘그 기도가 효과가 있었어요.
나는 한평생 그런 것을 본 적이 없었어요.
그 아이는 명랑해졌고 자신감이 생기었고 내게도 대단히 다정하게 대합니다.’라고 기뻐했고 2년 후에는 다시 연락이 오기를 그 아이는 행복감에 젖어 있고 훌륭한 신자가 되었다고 고백하더랍니다.
 
약속의 말씀을 믿음으로 붙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응답되어진 사실을 바라보면서 기도하심으로 응답의 기쁨을 맛보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행함의 눈

행함의 눈이란 말씀대로 믿고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이 있다는 증거로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며 동시에 말씀대로 행할 때에 온전한 믿음으로 인정하시고 그 믿음 위에 친히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세 친구에게 큰 위기가 왔습니다.
간악한 왕 느브갓네살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화형을 시키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왕은 그들을 유혹하기를 ‘너희들이 이제라도 내가 만든 신상에게 절하면 살려주겠다.’고 합니다.
 
세 친구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다가 죽느냐? 아니면 우상에게 절하고 목숨을 부지하느냐?’는 심한 갈등으로 고민하다가 마침내 결단하여 외치기를 ‘왕이 우리를 불 속에 던진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를 구해 주지 않으실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우상숭배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이 보호해 주셔서 전혀 불에 타지 않는 기적을 나타내셨습니다.
 
강대국 아람 나라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에 걸렸을 때에 엘리사의 초라한 초막으로 찾아왔습니다.
그러면 엘리사가 특별안수를 해주는 것이 예의입니다.
그런데 전혀 내다보지도 인사를 하지도 않은 채 하인을 시켜서 명령하기를 ‘요단강에 가서 일곱번 몸을 담그라.’고 했습니다.
이런 터무니없는 처방을 받고 나아만 장군은 처음에는 화를 몹시 냈으나 나중에는 모든 자존심을 벗어 던지고 무조건 물 속에 일곱번 들어갈 때에 문둥병이 깨끗이 고침받는 기적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신애성구공예사 대표 이희재 장로님의 간증에 의하면 4․19 혁명 이후에 사업이 크게 망해서 빚덤이 위에 앉게 됨으로 6남매가 굶기를 떡 먹듯이 하게 되고 설상가상으로 어머니인 이초운 권사님이 병들어 돌아가시는 큰 비극 속에서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삼각산에 올라가서 죽든 살든 간절히 기도하기를 며칠 동안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홀연히 “일어나라.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었습니다.
 
그런 음성을 세 번 듣고 힘을 얻은 다음에 다시 집에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충성을 다하기 시작했습니다.
주일성수, 십일조, 맡은 일에 충성 등, 몇 년 동안 여전히 빚덤이 위에서 아무 증거, 아무 환상, 아무 음성이 없을지라도 무조건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계속 충성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10년이 지난 어느 날부터 하나님이 길을 열어 주시기 시작하는 데 놀라운 정도였고 나중에는 70평의 공장이 240평이 되고, 다시 700평이 되는 축복의 역사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말씀의 눈, 기도의 눈, 행함의 눈에 의해 영안이 열리어서 하나님의 세계와 그 뜻, 그 인도하심을 볼 수 있는 자들이 됨으로 늘 승리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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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의 눈을 뜨게 하는 심청전의 이야기

고전소설 심청전(沈淸傳)에 보면 심봉사가 등장합니다.
심봉사의 본명은 ‘심학규’로 양반 집에 태어나 과거시험에도 합격을 했으나 곧 눈이 멀어 관직을 받지 못하고 몰락한 양반으로 살게 됩니다.
사람들은 이 비참한 양반 심학규를 본명 대신 심봉사라 부릅니다. 

옛날에는 시각장애인들을 ‘봉사’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심봉사의 딸 심청이가 천하의 효녀에요.
그래서 공양미 300석을 바치면 아비의 눈을 뜰 수 있다는 말에 청나라 상인들에게 자신을 팔아 인당수 바닷물에 풍덩 빠집니다.
심청이는 지극한 효성 때문에 복을 받아 왕비가 되고 딸을 만나러 온 아버지 심봉사는 결국 눈을 뜨게 됩니다.

육신의 눈을 뜨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가를 교훈하는 이야기라고 하겠습니다.

마음의 눈을 뜨게하는

눈은 사물을 보게 합니다. 또 어디로 가야할지, 가지 말아야 할지를 알려줍니다. 차를 탈 때도, 음식을 먹을 때도, 문화생활을 할 때도 눈이 있기에 풍성하게 누릴 수 있습니다.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눈은 우리가 태어날 때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선물입니다. 개인적으로 눈을 통해 누린 복이 참으로 많습니다. 어릴 적 2.0이나 되는 엄청난 시력으로 남들이 보기에 기이한 경험도 했습니다. 운동장 끝에 있는 글씨를 읽었을 정도니 내가 생각해도 대단했습니다. 물론 지금은 안경을 사용해야 앞에 있는 글씨도 정확하게 봅니다. 그래서 눈이 가져다 준 선물이 너무 고맙게 느껴지고, 잘 관리하지 못함에 대해 아쉬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육신에 참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손은 손대로, 발은 발대로 그리고 눈은 눈대로 다 소중하고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역할 역시 각자의 자리에 따라 의미가 있습니다.

발이 있기에 어느 곳이나 다닐 수 있습니다. 손이 있기에 식생활의 자유로움을 누릴 수 있습니다. 눈이 있기에 아름다움을 볼 수 있고 위기를 분별하여 피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눈은 창조의 영광을 가까이 인식하게 해줍니다. 그러므로 볼 수 있음에 대한 감사가 늘 넘쳐야 하고 보지 못하는 이에 대한 배려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볼 수 있음이 중요한 것은 단지 보기 때문이 아닙니다.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볼 수 있다고 아무것이나 본다면 그것은 눈을 주신 이의 뜻을 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보지 말아야 할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의 삶을 건강하게 만드는 일이 아니라 더욱 부패하게 만드는 모습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의하지 않으면 보는 것이 재앙이 될 수 있습니다.

백화점에 가면 그 화려함이 우리의 눈을 사로잡습니다. 더구나 명품 코너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습니다. 더 아름답고 더 멋지게 그리고 더욱 폼 나게 살고 싶은 인간의 마음을 자극하게 하는 제품들이 진열되어 있기에 쉽게 발을 옮기지 못합니다. 눈이 그 곳에 고정돼 있기 때문입니다. 눈이 우리의 삶을 움직이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눈에 우리의 삶을 모두 내주어서는 안 됩니다. 눈을 잘 제어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눈 때문에 패가망신에 이르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육신의 눈에 해당되는 것만이 아닙니다. 육신의 눈이 중요하다면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더욱 중요한 것은 바로 영적인 눈입니다. 육신의 눈으로 보이지 않는 영적인 눈이 그리스도인에게는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 개의 눈을 가진 존재입니다.

영의 눈을 뜨게 한 엘리사와 게하시의 이야기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육적인 눈과 영적인 눈의 차이를 보여주는 사건이 있습니다.
엘리사의 비서인 게하시의 이야기입니다.
엘리사를 죽이려는 아람 왕의 군사 앞에 게하시는 두려운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때 엘리사는 게하시의 눈을 열어 하나님의 군사들을 보여 주었습니다.
게하시는 육신의 눈으로 보이지 않았던 하나님의 군사들이 이스라엘을 둘러싸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게하시는 육신의 눈으로 보았던 불레셋의 군대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육신의 눈으로 보았을 때 절망적인 삶이 영의 눈으로 보았을 때 자신감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는 영의 눈은 바로 믿음의 눈입니다.
믿음의 눈을 가진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모습은 삶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전혀 다른 반응을 합니다.
믿음은 눈은 그리스도인의 특권입니다.
믿음의 눈은 육신의 눈으로 보지 못하는 일을 경험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눈을 가지고 있는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 모릅니다.

믿음의 눈이 주는 특권은 세상을 이기는 힘을 공급받습니다.
세상의 가치에 함몰되지 않습니다.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을 이길 힘을 얻습니다.
믿음의 눈을 가질 때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바라보고 자신의 소명을 발견합니다.
보이는 환경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일을 이룹니다.

믿음의 눈은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넣는 일과 같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믿음의 눈입니다.
믿음의 눈이 사라지고 이성의 눈만이 가득하면 하나님의 일을 감당 할 수 없습니다.
나는 믿음의 눈으로 살고 있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서 불행한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아무튼 이 심청전 이야기를 꺼낸 것은 그 시대에 이렇게 아픈 사람, 앞 못 보는 사람이 너무 많았고, 특히 사랑하는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려는 간절한 딸의 소망이 얼마나 귀한지 이야기 하고 싶어서입니다.

여러분, 오늘날에도 심봉사처럼 눈 먼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혹시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도 꼭 눈을 떠야 합니다. 그렇다고 여러분에게 공양미 300석을 교회에 바치라든지 인당수에 뛰어들라 소리는 하지 않겠습니다. 왜요? 우리가 떠야 할 눈은 ‘육신적인 눈’이 아니라 ‘영적인 눈’이기 때문입니다. 다같이 옆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기 바랍니다. “눈이 참 아름다우십니다!” 이번에는 반대편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기 바랍니다. 

“영적인 눈도 참 아름다우십니다!” 여러분이 만약 육신의 눈을 뜨기 원하신다면 안과를 찾아가 개안수술(요즘 수술 참 쉽습니다)을 받든지, 공양미 300석을 바치든지 하면 되겠지요. 하지만 성경은 우리의 육신적인 눈을 뜨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적인 눈, 즉 영안(靈眼)을 뜨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뇌성마비 중증장애를 앓아서 몸도 비틀어지고 말도 제대로 못하지만 아름다운 믿음의 시를 써서 유명한 송명희 시인은 <참 소경>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참 소경이 누구인가 세상을 못 보는 사람인가? 아니라 아니라 주님을 못 보는 사람 아닌가! 당신은 당신은 소경이 아닌가!

육신의 눈이 어두워 세상을 못 보는 사람이 아니라 멀쩡하게 눈을 뜨고 있지만 주님도 못 보고 영적인 세계를 보지 못하는 그가 진짜 소경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육신적인 눈보다 영적인 눈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체의 눈을 떠서 세상을 밝히 보기 위해 투자하고 노력할 것이 많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영적인 눈을 뜨기 위해 우리는 어떤 일을 해야 하며 어떤 노력을 바쳐야 하는가? 오늘부터 2013년 다섯 번째 시리즈 설교로 <열어주소서!>라는 말씀을 다섯 번에 걸쳐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으로 <내 눈을 열어주소서!>라는 제목으로 어떻게 하면 우리의 영안을 밝히 뜰 수 있는가 말씀을 나누려 합니다. 아무쪼록 오늘의 말씀을 통해 저와 여러분의 영안이 밝히 떠져 영적인 신비의 세계를 환히 볼 수 있는 복된 시간이 될 수 있기 바랍니다.

❚내 눈을 열어주소서!

제일 먼저 왜 성경이 그토록 우리의 영적인 눈이 밝히 떠져야 한다고 말씀하는지 이유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우리가 영안이 떠져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래야 하나님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또 영안이 떠져야 하나님의 말씀이 밝히 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이 그것을 말씀합니다. 시편 119편은 자그마치 176절이나 되어서 성경에서 가장 절수가 긴 시편인데 이 176절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내용이라서 사람들이 ‘말씀 시편’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 시편인 119편 17~18절에서 시인은 무엇을 특별히 간구하고 있습니까?

17 주의 종을 후대하여 살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주의 말씀을 지키리이다 18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아마도 시인은 지금 좀 힘든 상황에 처해있는 모양입니다. 건강에 문제가 생겼든지 가정이나 물질에 문제가 생겼든지 뭔가 어려움이 겪고 있는데 시인은 하나님이 저를 후대하시고 이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그런데 그냥 해결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좀 특별한 이유가 있어요. “주의 말씀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간구합니다. “주님! 제 눈을 열어주세요. 그래서 주의 율법, 주님의 말씀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해주세요!”라고 말입니다. 발음은 본토발음이 아니더라도 용서하고 들으세요. 영어성경인 NIV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Open my eyes that I may see wonderful things in your law

제가 굳이 영어성경을 인용하는 이유는 영어로 볼 때 좀 더 느낌이 와 닿기 때문입니다. 그대로 직역하면 “제 눈을 열어주세요! 제가 당신의 율법에서 원더풀 한 것, 놀라운 것, 신기한 것을 볼 수 있게 말입니다.” 느낌 알지요? 확 와 닿지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영적인 눈을 꼭 떠야 하는 이유는 그 영안이 떠져야 하나님이 보이고, 예수님도 보이기 때문입니다. 송명희 시인의 시처럼 주님을 보지 못하는 눈뜬 소경이 너무 많습니다. 남편에게 자녀에게 주변 사람에게 아무리 예수님이 있다, 하나님이 계신다 해도 못 믿는 것은 그들의 육신적인 눈은 멀쩡한데 아직 영안이 가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가 필요한 거에요. 그게 지식으로도 안 되고 노력으로 안 되거든요. “하나님! 어리석은 제 눈을 떠서 하나님을 보게 하신 것처럼 저 영안이 가려진 제 남편, 자식, 저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해주세요.” 이렇게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영안이 뜨여야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에서 그야말로 원더풀한 것, 놀랍고 신기한 것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이미 영안이 열려서 하나님을 보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잖아요? 그래서 교회를 다니는데 문제는 아직도 영안이 밝히 열리지 않아서 말씀을 보아도 잘 깨닫지 못하고 말씀을 들어도 느낌이 확 와 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이 벳세다라는 곳에 가셨을 때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데려와 고쳐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주님이 맹인 손을 붙잡고 마을 밖으로 나가 눈에 침을 뱉고 안수하십니다. 더럽게 웬 침이냐? 약이라고 발라주신 것이냐? 아마도 무슨 상징적인 행위겠지요.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이 안수하신 후 그 맹인에게 이렇게 물으신 것입니다. “무엇이 보이느냐?”(23절) 그랬더니 맹인이 대답합니다. “사람들이 보이는데 또렷하진 않고 희미하게 윤곽만 보여서 마치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 같습니다.” 아직 눈이 완전히 떠지지 않아서 그렇지요. 보이긴 보이는데 아직 희미합니다. 

그러니까 희미하게 윤곽만 보이고 사람이 나무 걸어가는 것처럼 보이는 겁니다. 우리가 혹시 이렇지 않습니까? 교회는 다니고 예수는 믿어서 보이긴 보이는데 아직 영안이 환하게 열리지 않았다면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보이기는 보여요. 하나님도 보이고 예수님도 보이는데 또렷하게 환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남들한테도 “이거다!” 하고 확신을 가지고 말하지 못해요. 그러니 신앙생활에 확신도 적고 전도도 잘 안 되는 것입니다. 게다가 말씀을 보고 들으면 좀 알 것은 같은데 아직 그렇게 뚜렷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 말씀이 원더풀하다? 시편 19:10에 “주의 말씀을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하고 그 맛이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다고 했는데 그 맛이 뭔지, 그 놀랍고 짜릿한 느낌이 뭔지 잘 모르고 사는 것이지요. 그런데 주님은 다시금 그 맹인에게 안수하십니다. 그러고 나니 맹인이 비로소 모든 것을 밝히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25절). 이것은 정말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도 이 맹인처럼 또 한 번의 안수가 필요합니다. 성령으로 안수 받아야 합니다. 말씀의 능력으로 안수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비로소 우리의 영적인 눈이 환히 열려서 말씀이 또렷이 보이고 말씀의 능력이, 그 놀라운 말이 확 느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얼마 전 곧 임직을 받을 피택자 중 한 분이 이런 얘기를 해요. “목사님! 요즘 제가 참 즐겁습니다. 피택자 교육을 ‘세게’ 받아서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는데 어, 정말 말씀이 보이기 시작하고 막 느낌이 오기 시작하네요.” 그렇습니다. 영안이 열리기 시작한 겁니다. 

영적인 눈이 열리니 전에도 많이 읽고 들은 말씀이지만 그야말로 말씀이 새롭게 느껴지고, 느낌이 확 와 닿고, 정말 원더풀, 놀랍고 짜릿한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도 다 이런 경험을 해야 합니다. 교회를 오래 다녔는데도 말씀이 아직 원더풀 하게 깨달아 지지 않는다, 짜릿한 느낌이 없다고 한다면 참 불행한 일입니다. 속히 우리의 영안이 떠지기 바랍니다. 크게 밝게 떠져서 하나님의 말씀이 그야말로 내 속에서 막 살아 움직이고 역사하고 말씀 때문에 놀랍고 짜릿하고 뜨겁고 이런 경험을 다 할 수 있는 여러분 되기 바랍니다.

❚사명을 보게 하소서!

한 가지만 더 얘기합시다. 우리의 영안이 열리면 하나님을 보게 되고, 말씀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게 참 중요하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의 영안이 열리면 또 한 가지의 놀라운 일이 생긴다고 말씀합니다. 그것은 “영안이 열리면 사명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사도 바울 이야기입니다.

사도 바울이 사울이었을 때 그는 율법에 미쳐서 예수장이들을 미워하고 다 박멸하기로 마음먹습니다. 그래서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데반 집사를 돌로 쳐 죽일 때 옷을 맡아 기꺼이 증인이 되고, 나중에는 아예 머나먼 다메섹까지 쫓아가 그곳에 있는 예수장이들을 다 잡아들이려 하지요. 그런데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그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주님은 박해자 사울에게 나타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행 9:4) 하시는데 그 순간 사울은 눈이 멀게 됩니다. 

사흘 동안 다메섹의 한 집에서 보지도 먹지도 못하고 있던 사울에게 주님은 아나니아라는 제자를 보내십니다.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가서 말씀을 선포하는 순간 사울의 눈에서는 비늘 같은 것이 떨어져 나가 다시 보게 되고 그 즉시 세례를 받고 그 때부터 박해자 사울이가 복음을 위해 목숨 거는 사도 바울이 된 것입니다. 물론 이 때 사울이 다시 뜬 것은 육신의 눈입니다. 그런데 육신의 눈이 떠지는 동시에 그의 영적인 눈도 뜨게 된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의 눈에는 비늘이 껴있었습니다. 

율법과 유대교라는 비늘이 껴있으니 영안이 닫혀서 예수님을 못 보다가 이제 그 비늘이 떨어져 나가고 영안이 뜨이니 주님을 보게 된 것이지요. 뿐만 아닙니다. 그는 지금까지 보지 못하던 자신의 사명을 보게 됩니다. 지금까지 율법을 수호하는 것이 자기 사명인 줄 알았는데 영안이 열리니 내 진짜 사명은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증거하는 일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영안이 열리면 사명이 보인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 눈에는 혹시 어떤 비늘이 껴있는지요? 먹고 사는 것 걱정, 내 삶, 내 가정, 내 가족만 보고 있으면 그것이 비늘이 되어 우리 눈에 끼어서 영안을 가리게 됩니다. 그러면 사명은 안 보이고 나만 보이고, 내 생각과 내 고집만 보이게 됩니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 혹시 이런 말 들어보셨습니까? 이 ‘뭐’에 해당되는 말이 뭔지 아시지요? 동물 이름입니다. 이 말이 강단에서 쓰기 힘든 속된 말이라 이렇게 넘어가지만 그래도 꼭 맞는 말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이 말은 내 마음이 닫히고 눈이 닫히면 꼭 그 수준밖에는 안 보인다는 뜻입니다. 눈은 그 사람의 수준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어요. 어떤 교회가 건축을 잘 하고 나서 본당에 뭘 들여놓을 것인지 의논하다가 싸움이 났답니다. 싸우는 이유는 이겁니다. 본당에 오르간을 들여놔야 하느냐, 피아노를 들여놔야 하느냐? 우리 교회처럼 오르간 피아노도 다 들여놓으면 안 싸웠을 텐데 아마 좀 작은 교회였나 봐요. 그 교회에 음악을 좀 아는 사람 둘이 있는데 한 사람은 누가 뭐래도 교회는 오르간이다 고집하고 또 한 사람은 아니다 좋은 피아노가 있어야 한다 고집하니 싸움이 난 것입니다. 

우리가 들으면 참 우스운 일이지만 두 사람은 서로 음악수준이 높네 낮네 싸우다가 교회 전체가 오르간 파와 피아노 파로 나누어 지금도 목숨 걸고 싸우고 있는 모양입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길까요? 바로 눈 때문입니다. 시야입니다. 시야가 좁아져요. 육신적인 눈만 뜨고 영적인 눈을 못 뜬 게지요. 이 경우는 내 음악지식이 육신의 눈이 되는 겁니다. 믿음의 눈이 열리고 영적인 눈이 열리면 누가 보인다고 했습니까? 하나님부터 보이고 예수님부터 보이지요. 그러면 하나님이 뭘 원하실까? 

주님은 뭘 원하실까? 이것부터 봐야하지 않습니까? 하나님한테 오르간이냐 피아노냐 그것이 뭐 그리도 중요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찬양받으시는데 오르간으로 찬양 드리든, 피아노라 드리든 하나님이 그걸 따지시겠습니까? 하나님께 정말 중요한 것은 교회의 화평입니다. 그런데 영적인 눈이 안 열리니 알량한 작은 음악지식 가지고 그렇게 다투는 것이지요. 영안이 열리지 않으면 자신만 크게 보입니다. 교회는 작게 보입니다. 자기 지식과 주장만 보이고 하나님은 안 보입니다. 이 모든 것보다 오직 하나님이 보이고, 하나님의 뜻이 보이고,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명과 책임을 볼 수 있는 영안이 뜨이길 축원합니다.

❚볼 수만 있다면!

중학생 때 영어시간에 읽은 글 하나가 너무 제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헬렌 켈러가 쓴 “3일 동안만 볼 수 있다면”이라는 짧은 글입니다. 그녀는 태어난 지 19개월 만에 열병을 앓아 보지도 듣지도 못하고 따라서 말도 못하게 된 3중장애를 가졌지만 훌륭한 교육자이며 저술가가 되었습니다. 헬렌 켈러가 위대한 사람이 되도록 도운 설리반 선생님도 유명하지요. 이 글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만약 내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유일한 소망이 하나 있다고 하면 그것은 죽기 전에 꼭 3일 동안만 눈을 뜨고 보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사흘간 볼 수 있다면 첫날에는 나를 가르쳐 준 설리번 선생님의 얼굴을 바라보겠습니다. 그리고 산으로 가서 아름다운 꽃과 풀과 빛나는 노을을 보고 싶습니다. 둘째 날엔 새벽에 일찍 일어나 먼동이 터오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저녁에는 영롱하게 빛나는 하늘의 별을 보겠습니다. 셋째 날엔 아침 일찍 큰 길로 나가 부지런히 출근하는 사람들의 활기찬 표정을 보고 싶습니다. 점심때는 아름다운 영화를 보고 저녁에는 화려한 네온사인과 쇼윈도의 상품들을 구경하고 저녁에 집에 돌아와 사흘간 눈을 뜨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싶습니다.”

헬렌 켈러는 육신의 눈이 먼 사람입니다. 아름다운 세상도 못 보고 사랑하는 부모님이나 선생님 얼굴도 볼 수 없는 시각장애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육신의 눈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세상의 아름다움을 더 잘 느낄 수 있었습니다. 더욱이 영적인 눈은 그 누구보다 환히 열려서 하나님을 보고 감사할 수 있는 신앙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헬렌 켈러와 달리 너무 멀쩡한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눈을 가지고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세상만 봅니까? 나만 보입니까? 지금까지 받은 은혜 못 보고 없는 것, 부족한 것, 원망 불평거리만 보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환하게 보이고, 말씀이 놀랍게 보이고, 내게 주신 사명이 확실하게 보이십니까? 불평 원망보다 감사의 제목이 보이십니까? 다시 한 번 주님께 간구하기 바랍니다. “하나님, 내 눈을 열어주소서! 그래서 그 환한 눈으로 주님을 확실히 보고 주의 일을 확실히 하게 하옵소서!” 이렇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