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 환대와 구원, 뜻밖의 회심, 감각의 제국, 다섯 가지 절대 법칙, 단순한 교회, 레미레자블, 자본론,


환대와 구원

조슈아 W. 지프
‘환대와 구원’
‘믿음과 환대에 의한 구원’(Saved by Faith and Hospitality)

초기 기독교 서적인 ‘클레멘스 1서’에 나오는 이야기를 언급한다.
아브라함 롯 라합이 믿음과 환대를 통해 구원을 얻었다는 내용이다.
결코 우리가 환대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구원은 반드시 환대로 이어진다는 의미다.

오늘날 개인주의 시대에서 교회가 잃어버린 것이 있다면 타인을 향한 환대와 ‘손대접’일 것이다.

‘뜻밖의 회심’ 저자인 로자리아 버터필드는 기독교에 적대적이었고 레즈비언 공동체에 소속돼 있었던 사람이었지만, 복음을 따라 환대를 베풀었던 한 부부의 식탁 교제에 참여해 교류하면서 극적 회심을 경험했다.

복음전도가 잘 되지 않는 시대에 가장 효과적인 복음전도 방법도 바로 이웃에게 베푸는 환대와 손대접일 것이다.
그들과 친구가 되어보라.
우리의 우정과 섬김을 따라 복음이 흘러가게 될 것이다.
고립의 시대에 환대의 공동체는 외로운 시대에 가장 좋은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의 별명 중 하나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과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의 복음은 환대를 통해 흘러 들어갔다.

동성애 이슈가 중요한 화두로 떠오르고 동성애 찬반 논쟁이 치열하게 진행되는 오늘날, 한 레즈비언 교수가 자신의 파격적인 회심과 세계관의 변화를 진솔한 필체로 묘사했다.

저자는 이 책에서 회심 이전의 삶과 가치관을 밝힐 뿐 아니라 어떻게 성경에 관심을 갖고 되고 켄 목사 부부와의 지속적인 만남을 통해 내면에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 소상하게 얘기한다.

이후 교회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던 때와 교인들이 자기에게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세례를 받고 정식교인이 된 후 어떻게 신앙생활을 영위했는지, 그리고 그녀의 세계관에 지각변동이 일어난 과정을 진솔하게 진술하고 있다.

훗날 남편을 만나 가정을 이루고 목사 아내로서, 네 명의 아이를 입양하여 홈스쿨링하는 엄마로서, 그리고 손님대접을 주된 사역으로 삼고 살아가는 모습을 묘사한다.

이번에 출간된 확대개정판에는 저자의 회심에 결정적 역할을 한 켄 목사와 남편 켄트의 이야기, 저자의 공개편지 두 편, 그리고 궁금증을 풀어주는 질문과 응답이 부록으로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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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대와 구원' (조슈아 지프)

“교회가 진지하게 귀담아 들어야 할 매우 중요한 통찰력을 제공한 책이다.
본서의 주장은 단순하고 분명하다.
곧 그리스도인은 ‘환대’로써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좀 더 풀어서 설명하면, 구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무런 조건이나 자격 없이 전적으로 환대해주신 결과로 주어진 것인 것처럼, 우리 또한 타자를 차별 없이 환대함으로써 그 구원의 은혜에 참여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행위의 진정성은 타자에 대한 ‘환대’로 증명된다.”

기독교 영성 나아가 선교적 삶의 핵심을 관통하는 ‘환대’에 대해 이 책만큼 풍부한 지식과 통찰력을 주는 책은 없을 것입니다.
크리스천이 가야 할 환대의 길에 대한 분명한 이정표를 보게했고, 특히 저에게는 자신있게 환대에 대해 외칠 수 있는 용기와 설교해야 할 책임감을 주었습니다.

미국 트리니티복음주의신학대학원 신약학 교수인 조슈아 지프(Joshua W Jipp)가 저술했다.
원제목은 ‘믿음과 환대에 의한 구원’(Saved by Faith and Hospitality)이다.
종교개혁 전통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불편하게 들릴 수 있는 다소 도발적인 제목이다.
물론 당연하게도 저자는 소위 행위 구원론을 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환대에 기인한다는 사실과, 어떻게 이것이 사람의 환대를 이끌어내는지를 복음적으로 매우 탄탄하고 명쾌하게 정리한다.

지프 교수가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환대하셨다는 것은 복음 메시지의 핵심 중 핵심이다.
종교개혁의 칭의론도 아무 공로 없는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하나님의 자녀가 됐다는 것에 강조점을 둔다.
우리가 하나님의 넉넉한 품으로 환대를 받았다는 사실은 우리 신앙의 근본과도 같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그저 이 사실 앞에 감격하는 것에서 멈추고 마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한한 환대를 베푸셨다는 것이 함의하는 바가 무엇인지에까지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구약성경에서부터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땅에 들어오도록 환대받은 자들로 묘사된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땅은 하나님의 소유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약속한 땅을 분깃으로 내어 주신다.
그러므로 성도의 정체성은 광야의 나그네로서 하나님께 환대받은 자이다.
그리고 여기서 성도의 삶의 태도와 방식이 도출된다.

“셋째 해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 네 모든 소산의 십일조 내기를 마친 후에 그것을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 네 성읍 안에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신명기 26:12)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서 첫 소산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려 하나님의 환대 은혜에 대해 인정하고 감사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뿐만 아니라, 그 소산을 연약한 타자들과 나눌 것을 명령하신다.
하나님의 환대 때문에 구원받은 자들이 이제 환대를 베푸는 자들로 살아갈 것을 요구받는 것이다.

신약의 예는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환대의 실체로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사회의 아웃사이더들과 함께하기를 마다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즐거워하셨다.
심지어 그것이 사회문화적으로 또 종교적으로 터부시되는 일이었음에도 그 어떠한 비난도 예수님의 환대를 막지 못했다.
예수님은 기꺼이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로 불리셨다.
그리고 우리 또한 감히 예수님의 그 넉넉함 품에 안겨 있다.

물론 환대하는 삶으로의 부르심은 오늘날 우리에게 참 불편한 메시지임이 틀림없다.
무엇보다 환대하는 삶을 살아가고자 할 때 맞닥뜨리게 될 수많은 현실적 문제들이 우리 머릿속에 먼저 떠오르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현실이라는 장벽 앞에서 성경의 가르침은 슬쩍 뒤로하고 마는 것이 우리의 부족함이고 연약함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환대하는 삶으로 초대하실 뿐만 아니라 그런 일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도 주심을 믿어야 한다.
환대하는 삶으로의 전환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더 많이 경험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바로 환대의 근원이시기 때문이다.

교회는 유람선이 아니라 구조선이다.
유람선을 타고 가는 듯한 신앙생활에서 이제부터는 구조선을 타고 생명을 구원하는 구조대원의 역할을 바르게 감당해야 할 때가 되었다.
그러면 반드시 세상은 비난의 화살을 날리던 교회를 향하여 칭찬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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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회심(The Secret Thoughts of an Unlikely Convert)
로자리아 버터필드 지음



레즈비언의 삶을 버리고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온 페미니스트여성에 대한 간증이다.

오늘날 반동성애 운동이후에 그들을 돌보는 사역이 미흡한 가운데, 동성애자들을 교회와 개인이 어떻게 돌보고 이끌어야 하는지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게 해 주는 책이다.

동성애는 복음으로 극복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 책은 여러가지를 알게 합니다. 

1. 교회 밖에서 바라본 교회의 모습

2.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성도들은 어떤 자세로 그들을 대해야 하는가?

3. 성소수자들이 그들의 정체성과 그들의 공동체에서 느끼는 부분은 어떤 것인가?

4. 교회는 어떤 부분에서 교회 밖 사람들을 불편하고 갈등하게 하는가?

5. 복음을 통한 회심은 어떤 과정을 거치는가/


저자는 대학 부교수이자 종신교수 자격을 부여받은 엘리트 여성이고, 학과장을 맡는 동시에 성소수자 인식 개선에 앞장서는 역할을 맡고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레즈비언이자 사회운동가이기도 한 인물입니다.

여기까지 나열한 수식어 만으로도 그리고 그의 본인의 의견으로도 그가 얼마나 복음과 먼 인물인지를 짐작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그런 그에게 있어 기독교인들에 대한 인식은 상당히 확고하게 좋지 않았습니다.

내게는 기독교인들이 엉성한 사고의 소유자들처럼 보였다. 빈곤과 폭력, 인종차별과 같은 이 세상의 실제적인 문제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이 지닌 비현실적인 세계관이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책을 읽어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천박하다'라고 조롱하는 방식, 즉 토론을 심화시키고 풍요롭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둘러 종결시키기 위해서 막무가내로 성경책을 끌어들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이 걸핏하면 들먹이는 "성경말씀에 의하면"이라는 말은 정상적인 사고를 포기하라는 주문처럼 들릴 뿐이었다. 그 말이 나오면 영락없이 얼마 지나지 않아 대화가 파국을 맞았으니까. 그들이 자주 사용하는 캐치프레이즈나 상용어구들도 역겹기는 마찬가지였다. "예수님이 답입니다."라는 말을 들으면 지금도 뿌리 없이 서있는 나무를 보는 느낌이 든다.

답은 질문이 주어진 다음에 나오는 것이 정상이다. 질문에 대해서는 구체적이고 설득력 있는 답을내놓아야지 모든 것을 다 덮어버리는 포괄적인 말을 답이라고 내놓아서는 안 된다. "정말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이에요"라는 대답을 들을 때마다 십계명의 세 번째 계명(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을 어기는 짓거리, 또는 값싼 감상으로 뒤범벅된 너절한 감사카드를 보는 느낌이 든다. 
..(중략)..

그들이 반지성적인 사람들처럼 보인다는 것 외에 내가 기독교인들에게 느끼는 두려움이 한 가지 더 있었다.
..(중략)..

레즈비언들의 공동체는 내게 안전하고 안정된 보금자리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곳은 내가 가장잘 알고 아끼는 사람들이 속한 공동체 이기도 했다. 하지만 레즈비언 공동체가 다가오는 사람들을 팔 벌려 포용하고 환영하는 반면에 기독교인들의 공동체는 배타적으로 보였고(실제로 그런 경우도 많다) 쉽게 사람들을 정죄하려 들거나 냉소적이고 이질적인 요소가 그들에게 섞일까 봐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본문 p25-26)

 

이 부분을 읽으며 등골이 오싹하고 얼굴이 벌개져왔습니다. 아니라고 반문하고 픈 분들도 많으시리라 생각합니다. 우리 공동체는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싶으신 분들도 많으실 겁니다. 그렇지만 상처는 준 사람 기준이 아니라 받은 사람 기준으로 생각되어야 하듯, 교회 밖에서 바라보는 교회를 향한 시선은 우리 성도들이 분명히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이 글이 더 귀하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아니라고 말씀하고 계신 분께선 내가 최근에 반갑게 맞이하고 시간을 따로 내서 새로 방문한 이들의 이야기를 듣거나 방문한 기억이 있는지만 돌아봐도 답은 나올 것 같습니다. 기독교 진리는 배타적입니다. 왜냐하면 구원의 길은 오직 예수님 한 분 뿐이기 때문이고, 세상 종교가 말하는 어디에나 신이 있다는 범신론도, 선행으로 구원을 이룰 수 있다는 자력 종교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진리가 배타적이라고 해서 기독교인들이 그런 태도를 가져선 안될 것입니다.

 

안 그래도 복음은 친절하지도 듣기 좋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듣는 이가 스스로가 죄인임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복음의 씨앗이 어떻게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뿌려질 수 있을까요? 

그 단서를 저자가 복음을 받아들이게 된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과의 만남의 장면에서 찾아보고자 합니다.

시러큐스 개혁장로교회 담임목사 켄 스미스가 보낸 편지도 그런 편지들 가운데 섞여 내게 왔다. 그의 편지는 매우 친절한 어투로 나 자신도 간절히 대답하고픈 그런 질문들을 묻고 있었다. 당신은 투고에 실린 결론에 어떻게 이르게 되었는가? 당신은 자신의 의견이 옳다는 것을 어떻게 검증할 수 있는가? 당신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가? 켄 목사는 내 글의 근거가 되는 전제들을 더 깊이 연구해 보라고 권하고 있었다.
..(중략)..

전화상으로 얼마간 즐거운 대화를 나눈 후 그가 나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하지만 전화를 끊기 전에, 그때서야 생각이 났는지, 초면인 사람의 집으로 저녁 식사를 하러 오는 것이 부담스러우면 자신과 아내가 근처의 레스토랑으로 나가는 것도 좋다고 했다. 나는 그가 아주 사려 깊은 사람, 아니 거의 기사도를 따르는 사람처럼 여겨졌다.
..(중략)..

저녁으로 채식주의자를 위한 볶음요리를 준비했다는 플로이의 말을 듣고 얼마나 안도감을 느꼈었는지는 지금도 기억난다. (도덕적인 이유에서는 물론 건강상의 이유로 나는 채식을 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중략)..

꽤 더운 칠월 날씨였지만 두 사람이 에어컨을 틀지 않고 있었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나는 환경문제 전반에, 특히 오존층에 대해 관심이 많았는데 그들도 그런 것 같았다.)
..(중략)..

나는 그들과 친숙해지고 싶었지만 내 도덕적인 잣대들을 포기할 만큼은 아니었다. 레즈비언으로서의 내 정체성, 동성애 문화, 가치관들이 내게는 훨씬 더 중요했다. 삶의 경험뿐만 아니라 연구와 사유의 과정을 통해 나는 내가 지닌 문화, 가치들을 소유하게 되었다. 

내가 켄과 플로이를 보고 바로 마음에 들어했던 것은 그들이 그런 점에 민감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그 두 사람과 나는 명백한 차이점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들은 내가 빈 칠판 같은 상태로 그곳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내게도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와 견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였고, 대화를 하면서도 충분히 나를 존중해 주었다.
..(중략)..

켄과 플로이는 내가 어떤 인간인지 파악하려 들지 않았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내말을 경청해 주었다. 그들은 기독교인의 동정심을 가지고 이방인인 내게 다가오는 긴 여정을 시작하려 했다. 식사 중 그들은 내게 복음에 대해 말을 하지 않았고 식사 후에도 교회에 나오라는 말 같은 건 하지 않았다. 으레 나오리라 예상했던 말들이 나오지 않은 덕분일까 식사 후 켄이 나랑 계속 연락을 하며 지냈으면 좋겠다고 제안을 했을 때 나는 부담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본문 p36-37)

 

그런 부담감이 있는 것 같습니다. 교회 밖 사람이 교회 안 사람을 만날 때..

 

직접 경험해 본 경험에서 아니면 주변 사람들의 경험으로부터의 간접 경험에서든... 많은 사람들이 막연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무례함에 대한 혹은 쉽게 정죄함에 대한 그런 기억들이 차곡차곡 쌓여 무언가 다른 관점을 만들어내고 그 관점이 교회 안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되살아 나는.. 그런 모습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분들을 뵐 때마다 신앙인으로서 어떤 자세로 사람들을 대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고 스스로를 경계 하게 됩니다. 나의 섣부른 말이나 툭 던지는 멘트들이 누군가에게 평생에 걸쳐 복음을 접하는 데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이 되지는 않을까 하는..

 

그런 의미에서 켄 목사님과 플로이 사모님의 모습은 정말 성도들이 어떤 자세로 사람들을 대하고 신앙인이 어떤 겸손함과 예의를 가지고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좋은 모범이 되는 것 같습니다.

 

이 책에서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 부부와의 첫 만남에서 첫번째 식사를 위해 본인을 교회로 초청했다면 그 즉시 뺑소니를 놓고 다시는 그들을 만나지 않았을 거라는 말에서 느껴지듯 깊은 인내와 진심을 가지고 대해야 함을 배우게 됩니다.

 

그런 안정적이면서 상호 신뢰가 쌓인 관계가 구축된 이후 켄 목사님의 주도적인 복음 전파로 인해 저자가 변화된 것이 아님을 보게 됩니다. 물론 모든 관계, 모든 사람에 대해 동일하게 진행되리라 보는 것은 어렵지만, 그 관계를 통해 그리고 사람을 통해 하나님을 다시 바라보게 된 저자는 스스로 복음을 알아가기 시작합니다. 전 이 부분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인간관계에 의해 마지못해 걸음 하는 신앙생활은 그 나름으로도 가치가 있겠지만 쉽게 무너지거나 쉽게 변질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복음과 자신을 비교해 나가며 가치관의 갈등과 충돌을 느끼고 감수하고 싸우고 고민하는 가운데 얻은 복음과 믿음은 그 든든함이 분명 다름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고 앞서 얘기한것처럼 인간관계에 의해 마지못해 걸음 하며 시작한 신앙생활을 폄하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복음을 들을 수 있다면 분명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요지는 복음을 듣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그렇게 살기 위해서 겪는 변화들은 누군가가 대신해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그 치열한 싸움과 변화를 스스로 싸워냅니다. 그리고 힘들거나 무너질 때에는 섣부른 조언이 아닌 항상 옆에서 든든히 있어주고, 믿어주며, 기도해 주는 동역자들의 조언과 도움을 받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진정한 동역자이자 중보자들의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묻지도 않은 조언을, 특히 자신의 신앙 경험을 무조건적으로 진리라 믿으며 강요 아닌 강요를 하는 것은 정말 좋지 못한 자세입니다. 그런 모습은 중보 대상자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자칫 내 생각을 기준으로 그 사람을 통제하거나 조종하는 것으로 변질되기 쉽습니다.

 

저자는 자신의 변화를 드디어 느낄 정도로 자신이 변화되고 있음을 알아챕니다. 그러는 가운데 고민과 어려움이 있을 때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필요한 지식을 쌓기 위해 말씀을 읽고 책을 찾아 읽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선후가 바뀌긴 했지만, 뒤에 있는 내용을 인용하며 살펴보고자 하는 내용은 교회 밖의 사람이 복음을 통해 회심을 하면서 느끼는 교회의 모습이 얼마나 처참한지를 보고자 합니다.

성경에 묘사된, 그리고 내가 실제로 경험한 혹독한 회심의 과정을 고려할 때, 지금의 복음주의 문화가 정형화시킨, 믿음은 손쉬운 것이라는 생각들이 가져올 수도 있을 결과를 생각하면 두려운 마음이 든다. 내가 사는 지역만 해도 복음주의의 놀이공원이라 할 만한 지역이다. 이웃들 중 몇 집은 지역의 대형교회들에 출석하고 있는데 교회 안에 패스트푸드 식당들이 입점해 있고 유명한 커피 체인점들과 바람을 채운 거대한 고무 놀이기구들을 가져다 놓았다.
..(중략)..

릭 워렌 목사는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는 자신의 책에서 회심을 다음과 같이 고백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예수님, 제가 당신을 믿고 받아들입니다." 죄인들을 받아들이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 자신의 말에 믿음을 거는 행위는 사람들을 그릇된 희망의 함정에 빠지게 한다. 릭 워렌 목사가 사람들에게 구원을 보장하는 방식은 위험스러울 정도로 잘못된 것이다. 그는 계속 설명을 한다. "만약 당신이 신실하게 그 기돌르 드렸다면 이제 축하를 받을 차례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이 된 것을 환영합니다." 내 기도가 신실한지 여부를 내가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구원의 은혜는 구속할 자를 선택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 오래 참으시고 자신을 희생하시며 순종하신 구세주께 속한 것이다. 이렇게 큰 은총이 어떻게 내 신실함에 달려 있을 수 있겠는가? (본문 p 81-82)

교회는 편의와 새신자들에게 다가오기 쉽게 하기 위해 변하는 것은 찬성하지만, 그 본질을 위협할 정도가 된다면 그것은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성도들에게 그리고 새 신자들에게 분명히 알게 해야 합니다. 복음은 친절하지도 않고, 편하지도 않고, 쉽게 받아들여질 만한 내용도 아님을 말이죠.

복음은 듣는 이를 죄인이라 합니다. 당신이 틀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복음이 그토록 쉽게 받아들여진다? 전 그것은 위선이고 거짓이라 감히 표현하고 싶습니다. 


그런 가운데 저자에게 든 고민은 "왜 동생애가 죄인가?" 하는 부분이었습니다.

 

그걸 왜 죄인줄 모르지? 하며 분개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그 근거를 제시할 수 있는 성경 구절이 있는지 반문해 보고 싶습니다. 예전에 제가 아는 분에게 그 반문을 했더니 창세기에 나온 소돔과 고모라 멸망 사건을 예로 들었습니다. 이 책의 저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소돔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동성애를 응징하기 위해서라고 알고 이해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왜 그렇게 하셨는지에 대한 말씀이 있는 것을 이번에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에스겔서 16장

네 아우 소돔의 죄악은 이러하니 그와 그의 딸들에게 교만함과 음식물의 풍족함과 태평함이 있음이며 또 그가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주지 아니하며 거만하여 가증한 일을 내 앞에서 행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보고 곧 그들을 없이 하였느니라

 

소돔의 멸망은 동성애에 대한 응징이 아니라, 그들의 1) 교만함과 2) 풍족한 가운에서도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돕지 않고 3)가증한 일을 하였기 때문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네 아우 소돔이라 표현함으로 실상 이 구절의 대상이 이스라엘 민족에 대해 그들의 숨겨진 죄악을 지적하시는 도구로 이 예를 들었음을 알게 됩니다.

 

죄의 선 후 구조에 대해 저자는 아래와 같이 적고 있습니다.

자만, 부요, 도락에의 집중, 자비와 겸손의 부재. 이런 죄악들 자체에서 본질적으로 성적인 요소들을 찾아볼 수는 없다. 우리는 흔히 죄가 논리나 심리학에 의해 설명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성적인 죄가 성적인 혹은 감정적인 원인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가 지나치게 협소한 시각으로 성애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성적인 활동은 침대에서 벌어지는 일들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넓은 범위의 욕구들, 필요와 갈급함 등을 포함한다. 성애는 우리의 삶이 처해있는 상황의 원인이라기보다는 그 표현으로서, 근원이나 기원이라기보다는 결과에 가깝다. (본문 p74)

 

우리는 현상에 집중하는 그 에너지를 조금이나마 그 근원에 집중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동서애는 분명한 죄이지만, 동성애에 집중하기 앞서 그 근원에 무엇이 있는지를 바라보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 함께 보면 좋은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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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님 코끼리 만지는 격'이라는 속담이 있다. '코끼리'로 표상되는 대상의 전체를 보지 못하고 대상을 이루는 부분을 전체로 잘못 인식하는 경우를 빗댄 말이다. 어찌 보면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 '장님 코끼리 만지는 격'에 가까운지 모르겠다. 감각기관을 통해 대상을 인식하고 그로 인한 경험적 지식이 곧 우리의 세계관을 형성하니 말이다.

즉 감각 경험을 통해 받아들인 세계가 곧 우리가 바라보는 세계인 것이다. 이를 두고 칸트는, '인간은 감각과 오성을 통해 대상을 인식하고, 세계의 모든 대상은 인간이 가진 자발적인 인식 능력이 능동적으로 작용하여 구성해 낸 결과물들'이라고 했다. 결국 우리는 감각할 수 있는 세계만을 인식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감각할 수 없는 것은 우리에게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다니엘 키시'를 통해 본 뇌 가소성

 



지난 6월 5일 방송된 <신비한TV 서프라이즈>에서 생후 13개월에 안구를 적출해서 앞을 볼 수 없는 시각 장애인 다니엘 키시가 소개됐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마치 눈이 보이는 것처럼 요리를 하거나 자전거를 타는 등 일상생활에 불편함이 없어 보였다.
사전정보가 전혀 주어지지 않은 상태에서도 자신이 서 있는 장소가 어디인지 알았으며 근처에 어떤 건물이 있고, 요트가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도 알고 있었다.

다니엘 키시가 말하길, 그가 앞을 보는 방법은 자신이 혀로 내는 소리에 있다고 했다.
'딱딱' 소리를 내며 주변 사물에 부딪쳐 반사되는 음파로 대상을 구별한다는 것이다.
마치 초음파를 이용해 사물을 구별하는 돌고래와 박쥐처럼 말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음파는 사물이 멀리 있을수록 돌아오는 시간이 오래 걸리고 사물이 딱딱할수록 강도가 크게 느껴진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음파를 통해 사물을 구별한다는 것이 보면서도 잘 믿기지 않았다.
방송에서는 이를 과학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로어델러 박사가 다니엘 키시와 함께 실험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실험 결과 비시각장애인이 시각정보를 처리할 때 활성화되는 조거피질이 다니엘 키시의 경우 소리를 통해 활성화되었다.

소리를 통해 사물을 구분하는 것이 가능함을 입증한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다니엘 키시가 앞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의심했으나 그의 말은 진실이었다. 또한 누구라도 훈련을 반복하면 그와 같이 앞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현실에서 가능한 기적처럼 느껴졌다.

책 <감각의 제국>은 EBS 다큐프라임 <감각의 제국>을 책으로 엮은 것으로, 다니엘 키시와 같은 시각 장애인이 앞을 볼 수 있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시각장애인에게는 시각을 제외한 다른 감각이 발달했을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 같은 소리를 들려주더라도 다른 쪽 뇌의 활성이 더 강하거나 영역이 확장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은 거지요. 그런데 과학적으로 공간에 대한 정보를 가장 잘 담을 수 있는 곳은 시각피질입니다. 꼭 시각이라는 감각이 아니어도 시각피질은 공간 표상을 굉장히 정확하게 하는 곳이기 때문에 시각에 해당하는 정보를 처리하지 못하더라도 다른 감각을 이용해 공간 파악을 할 수 있는 겁니다." - 서울대학교 뇌인지과학과 이상훈 교수, 본문 105-106쪽

"인간은 매우 시각적인 동물입니다. 그래서 좁게는 약 40퍼센트 정도의 뇌가 시각 정보체계에 관여하고 있고요, 넓게는 60퍼센트 가까이 되는데, 선천적인 시각장애인의 경우에는 시각 정보 처리가 완전히 차단되어 있어서 체감각이나 청각으로 정보를 받아들였을 때조차도, 심지어 기억과제를 하고 있을 때조차도 시각피질이 매우 활성화된다는 보고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 서울대학교 뇌인지과학과 이상훈 교수, 본문 108쪽


일반적으로 시각 정보가 입력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볼 수 없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시각을 제외한 다른 감각을 통해 입력된 정보로도 시각피질이 활성화되고 공간을 표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뇌가 결핍된 감각을 채우기 위해 다른 감각 정보의 영역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책에서는 이를 '뇌 가소성'으로 설명한다. 뇌 가소성이란 '뇌가 생각과 활동을 통해 스스로의 기능과 구조를 변경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멀쩡한 성인의 눈을 가린 채 외부에서 들어오는 시각 정보를 완전히 차단하면, 뇌는 달라진 환경에 맞춰 스스로를 변화시킨다. 어떤 감각 하나가 차단되면 그 감각을 담당하던 뇌 영역이 다른 감각을 처리하기 시작하면서, 뇌가 영역을 재배치하는 것이다. 하지만 차단된 감각을 다시 열어 주면 뇌는 원상태로 돌아온다. 무엇을 감각하고 무엇을 감각하지 않느냐에 따라 수시로 뇌 지도가 달라진다. 감각은 어떤 식으로든 뇌에 흔적을 남기고, 그 흔적은 끊임없이 뇌를 바꾼다. - 본문 102쪽


우리 몸이 바뀐 외부 환경에 자연스럽게 적응할 수 있었던 것도 뇌 가소성 때문이었다. 우리가 무엇을 감각하느냐에 따라 뇌 지도가 수시로 달라지는 것이라면 더 이상 지능은 우리의 능력을 표상하는 기준이 되지 못한다.

또한 다양한 감각 경험을 통해 우리의 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은 현대인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긍정적인 감각을 경험함으로써 뇌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반면, 스트레스를 계속 받는 상황에서는 부정적인 감각을 경험함으로써 우리 뇌를 부정적으로 변화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감정, 감각의 언어

이 책은 우리의 감각이 공감이라는 능력을 갖게 함으로써 인류의 진화를 가능하게 했다고 본다. 공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감정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간이 느끼는 희로애락의 감정은 흔히 본능적인 것이라고 한다.

책에서도 감정을 '감각의 언어'라고 설명한다. 감정에 따라 신체감정지도가 달라진다는 것인데, '사랑과 행복이라는 감정을 느낄 때는 몸 전체의 감각이 증가했고,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느낄 때에는 발 부분이 차가워' 진 것을 통해 인간의 감정에 따라 몸의 감각이 변화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인간의 감정이 '감각의 언어'이고 타고난 본능이라면, 갓 태어난 아기는 물론이고 태아 역시 감정을 느낄 수 있을까? 책은 '수정 후 10주가 지날 무렵부터 태아는 감정을 느낄 수 있다'고 설명한다. 감각기관이 발달함에 따라 태아는 외부 자극에 반응을 나타내기 시작하고, 각각의 자극에 따라 다른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와이즈베리의 <퍼펙트 베이비>에 따르면, '엄마가 즐거워하면 태아는 힘차게 발을 차며 움직이고, 엄마가 슬퍼하면 태아의 발차기 횟수는 거의 절반으로 떨어진다'고 한다. 이를 통해 태아 역시 엄마의 감정 변화를 느끼는 것은 물론 이를 공유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인간은 태어나기도 전에 엄마 배 속에서부터 감각할 수 있고, 엄마의 다양한 감정 변화를 느끼며 엄마의 감정에 공감할 수 있다. 태아가 엄마의 목소리에 반응하는 줄은 알고 있었지만 엄마의 감정에 이처럼 공감할 수 있다는 사실은 놀라웠다. 그렇다면 공감도 감각처럼 본능적인 것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공감이 본능적으로 타고난 것이라면 왜 어떤 사람은 공감능력을 지닌 반면, 또 어떤 사람은 그렇지 못한 걸까?

인간의 천성, 공감 능력

우선 공감이란 무엇인지 그 의미부터 살펴보자.
공감이라는 뜻의 영어 단어 '엠퍼티(empathy)의 어원은 아인픨룽(Einfhlung)이란 단어는 아인('Ein, 안으로), 퓔룽(fuhlung, 느끼다)'라는 독일어에 기원을 둔 것으로, '타인의 마음, 타인의 감정, 타인의 현재 상태에서 그 사람이 하고 있는 생각을 내가 그 사람의 입장으로 들어가서 느끼고 지각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미국의 문화인류학자 로먼 크르즈나릭은 공감을 '다른 사람의 처지가 되어보고, 그들의 감정(정서적 측면)과 관점(인지적 측면)을 이해하고, 그 이해를 활용해 우리의 행동을 인도하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이를 통해 공감은 단순히 타인의 감정을 공유하는 것뿐만 아니라 타인이 처한 상황과 관점을 이해할 수 있는 해석이 동반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문가들은 이를 구분하여 전자를 정서적 공감 능력으로, 후자를 인지적 공감 능력으로 설명한다. 정서적 공감 능력은 무의식적인 것으로 타인의 고통을 느낄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이다. '측은지심(惻隱之心)'을 떠올리면 된다.

이에 대해 소아정신과 전문의 김붕년 교수는 "유년기에 부모와의 정서적⋅감정적 교류로 타인의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뇌 발달이 이루어졌다면 그런 정서적 공감은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라고 설명한다. 반면에 인지적 공감 능력은 그 사람이 처한 상황과 입장을 이해하려고 노력함으로써 그 사람의 생각을 읽어내고, 표정을 통해 감정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책은 인간의 공감 능력과 뇌의 상관관계를 살펴보고자 짧은꼬리원숭이 실험을 소개한다. 실험의 내용은 '전운동 피질(행동을 계획하고 움직임을 실행하는 기능에 관여하는 뇌의 영역)의 신경세포에서 발생하는 전기 작용을 기록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실수로 실험실 연구원이 기록 장치를 끄지 않은 채 점심을 먹으러 갔고, 후식으로 한 연구원이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걸 본 원숭이는 움직임이 전혀 없었는데도 '(원숭이의) 전운동 영역의 뇌가 활성화'되었다.

움직임이 있어야 활성화된 영역이 사람의 표정과 행동을 눈으로 관찰하고 심리적으로 모방한 것만으로도 활성화된 것이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타인의 행동이나 의도, 감정을 머릿속에서 추측하고 모방하여 인간의 공감 능력을 담당하는 신경세포' 즉, 거울신경(mirror neurons) 때문이다.

거울 신경은 우리가 직접 행동을 행할 때에도 발화하지만 다른 사람이 그와 유사한 행동을 할 때도 발화하는 세포들이다. 이렇게 발화한 세포들은 뇌에서 감정을 담당하는 변연계(동기와 정서를 주로 담당하는 기관)를 자극해 다른 사람이 느끼는 감정까지 함께 느끼게 한다. 그러므로 거울신경은 타인의 마음이나 의도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데 매우 중요한 바탕이 된다. …… 그러나 거울신경이 제대로 발달하지 못하면 공감할 수 있는 기능 자체가 제대로 발달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폐 성향을 보이게 된다. 그렇게 되면 결국 타인과 나에 대한 감정적인 교류 자체가 어려워져 사회적⋅인지적인 발달이 이루어지지 못한다. - 본문 202쪽


이를 통해 공감 능력이란 거울 신경의 발달을 전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에게 공감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행동을 모방하는 '거울 신경 회로'와 타인의 감정을 인식하는 '측은지심 회로', 그리고 타인의 생각을 읽어낼 수 있는 '인지적 공감 능력 회로'의 세 가지 공감 회로가 필요한 셈이다. '인지적 공감 능력 회로'는 차치하고라도 뇌의 신경세포인 '거울 신경회로'와 무의식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측은지심 회로'는 타고난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공감은 인간이 가진 천성인 것이다.

공감 능력의 결여가 말해주는 것

하지만 자폐증 환자나 사이코패스의 경우에는 이러한 공감능력이 결여되어 있다. 자폐증은 병적인 문제로 인지적 공감능력이 결여된 반면, 사이코패스는 정서적 공감능력이 결여된 경우로 '뇌의 감정 스위치라고도 불리는 편도체의 발달이 저하'되어 있기 때문이다.

책에서는 '샐리&앤 테스트'라는 공감능력 테스트를 통해 아동의 인지적, 정서적 공감능력을 평가하고 9~10년 뒤 학교 폭력의 가해나 피해 여부를 조사한 결과를 보여준다. 4~5세에 인지적 공감능력의 결함이 있던 아이가 청소년기에 학교 폭력의 피해 학생이 되고, 정서적 공감능력이 결여되어 있던 아이는 10년 후 가해학생이 되는 경우가 통계적으로 많았다는 것이다.

인지적 공감능력이 부족한 경우 반복적인 사회성 훈련을 통해 타인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을 기르고 자신의 행동을 조절해 나갈 수 있지만, 정서적 공감능력은 어릴 적 애착관계 형성에서 비롯되기에 결여된 경우 촉진시키는 방법을 찾기 어렵다고. 다만 자신이 폭력을 휘두른 결과 상대방이 어떠한 피해를 입는지 명확히 알려줌으로써 자신의 행동을 억제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한다.

이를 통해 공감 능력의 결여는 개인의 사회성과 적응에도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사회적인 범죄를 야기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서 정서적 공감 능력은 부모와의 정서적⋅감정적 교류, 즉 부모와의 애착관계 형성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인간의 성장에는 결정적 시기가 있듯이 공감 능력 또한 적절한 시기에 자극을 받고 발달해야 하는 것이다. 부모의 양육 태도와 양육 환경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공감, 우리에게 필요한 것

앞서 앞을 보는 시각 장애인 다니엘 키시를 통해 우리는 감각할 수 없는 것조차 감각할 수 있음을 알았다. 이는 우리가 감각할 수 없는 세계의 존재 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직접 경험하지 않고도 타인의 상황이나 입장을 이해하고 타인의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공감 능력이 잘 말해준다. 우리는 타인에게 공감함으로써 우리가 직접 감각할 수 없는 세계와 마주할 수 있는 것이다. 공감은 우리 인간이 가진 최상위의 감각인 셈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 공동체는 공감 능력을 상실한 듯 저마다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다. 한쪽에선 신음하고 아파하는데도 다른 한쪽에선 귀를 막고 다른 이야기를 떠들고 있다. 책에서는 우리 인간에게 공감 능력이 있었기에 사회라는 공동체를 이루고 사회적인 연대와 협력을 통해 현재의 삶을 가능하게 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제라도 우리의 천성인 공감 능력을 회복해야 하지 않을까. 더 늦기 전에 말이다.

"공감한다는 것은 다른 누군가의 처지가 되어 보는 것입니다.
우리와 다른 사람의 눈으로, 배고픈 아이들의 눈으로, 해고된 철강노동자의 눈으로, 당신 기숙사 방을 청소하는 이민 노동자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우리는 공감을 장려하지 않는 문화에 살고 있습니다."
- 2006년 노스웨스턴대학교에서 오바마 연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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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이 핵무기 7200기를 갖고 있을 때 망하고 말았다.
북한이 핵을 보유한다고 하여 두려워할 것이 없다.
왜냐하면 공산주의는 무너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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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광은 인간관계를 지배하는 5가지의 법칙이라는 책을 썼다.

이 책에 나오는 5가지의 법칙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열정보존의 법칙이다.

내가 쏟아부은 열정은 열정의 양만큼 결국에는 자신에게 그대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둘째, 힘의 법칙이다.

힘이 있는 곳으로 사람이 모이고, 힘이 있는 자가 우위에 서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누구나 힘을 갖기 위해서 노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힘을 가지게 되는 그 순간부터가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내가 가진 힘보다 더 큰 힘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힘이 있을때 상대를 배려해 줄수 있는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셋째, 기브 앤 테이크의 법칙이다.

뿌린대로 거둔다는 것이다. 내 주변의 사람들과의 관계가 좋은 관계가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면 상대에게 조금이라도 더 주려고 노력해야 한다.

넷째, 습관의 법칙이다.

미국의 저명한 심리학자이자 철학자인 윌리엄 제임스는 말했다.

"생각을 조심하라. 왜냐하면 그것은 말이 되기 때문이다.

말을 조심하라. 왜냐하면 그것은 행동이 되기 때문이다.

행동을 조심하라. 왜냐하면 그것은 습관이 되기 때문이다.

습관을 조심하라. 왜냐하면 그것은 인격이 되기 때문이다.

인격을 조심하라. 왜냐하면 그것은 인생이 되기 때문이다"

습관은 인생이다. 좋지 못한 습관이 있다면 빨리 버리고, 좋은 습관이 있다면 더욱더 활성화 시키자.

다섯째, 위대함의 법칙이다.

인간의 내면속에 감추어진 그 크기를 알수 없는 능력있다. 물질적인 성공이 아니라 가치있는 인간이 되는 것에 중심을 두어야 한다.
사람이 엄청난 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물질적인 부를 추구할때가 아니라 진정 소중한 무엇을 지키기 위할 때가 더 많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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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교회

톰 라이너&에릭 게이거 「단순한 교회」 생명의말씀사 P. 88~89


“단순한 교회는 영적 성장의 단계를 통해 사람들을 활동하게 하는 간단하고 전략적인 과정을 염두에 두고 설계된 모임이다.”

이 정의 다소 무게가 느껴진다.
이 정의를 하나씩 살펴보자.

단순한 교회는 설계된다. 그 교회는 부주의하게 던져진 것이 아니다. 우연히 계획된 것도 아니다. 목회는 “단순한 우연” 이상을 행하는 것이다. 목회는 용의주도하게 고려된 것이다. 조직화되어 있고 조심스럽게 설계되어 있다.

또한 단순한 교회는 염두에 두고 설계된다.

단순한 교회의 설계는 무언가를 중점으로 이루어진다. 프로그램과 목회는 무언가를 중심 주제로 삼는다. 그들은 교회의 연중 행사표와 소책자에 연연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어떤 것을 염두에 두고 계획되어 있다. 그리고 그 어떤 것을 모호하고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다. 단순한 교회에서의 제자 사역을 위한 설계는 그 과정을 중심 주제로 삼는다.

단순한 교회는 간단하고 전략적인 과정을 염두에 두고 설계된다.
과정은 간단하다.
혼란스럽지 않고, 이해하기가 쉽다.
지도자들은 그것을 알고,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한다.
과정은 의도적으로 단순하게 유지된다.
늘어나지 않는다. 매달 바꾸지 않는다.

단순한 교회는 단순한 과정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복잡함을 좋아하지 않는다.
더 많은 프로그램들이 과정에 덧붙여지지 않는다.
그 교회는 다수의 새로운 프로그램들과 그것에 제시된 모델들을 거부한다.

과정이 방법(how)을 뜻하기 때문에, 그것은 또한 전략적이라 할 수 있다.
과정은 교회의 목적이나 비전에 매여 있다.
그 둘은 친밀하게 결합되어 있다.
과정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기 위한 실행을 목적으로 만들어진다.
과정은 사람들이 그것을 통해 활동하게 하기 위해 연속적으로 일어나도록 계획되어 있다.

단순한 교회의 과정은 사람들을 활동하게 한다.

단순하고 전략적인 과정은 활동을 추진한다.
과정은 논리적으로 흐른다.
그리스도와 교회에 끌리고, 애착이 가는 쪽으로 움직인다.
프로그램들은 이러한 활동을 진척시키기 위한 도구들로 사용된다.
그리고 단순하고 전략적인 과정을 통한 활동은 의도적이고, 의도된 최종 결과를 가진다.

단순한 교회의 과정은 영적 성장의 단계를 통해 사람들을 활동하게 하는 것이다.
그 목적은 영적 성장의 단계를 통해 사람들을 활동하게 하시는 하나님과 동반자가 되는 것이다.
변화된 삶은 핵심이며, 의도된 최종 결과다. 사람들 속에 형성된 그리스도가 그 목적이다.

단순한 교회는 사람들이 그들의 영적인 여정에서 각기 다른 단계에 있다는 사실과, 영적 성장이 하나의 과정이라는 사실을 이해한다. 그 교회는 영적 성장의 단계를 통하여 사람들을 활동하게 하시는 하나님과 동반자가 되도록 설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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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미제라블 : 은혜의 순간은 한 사람의 일생을 변화시킬 수 있다

[크리스찬북뉴스 칼럼] 자비(mercy)와 은혜(grace)

자비’와 ‘은혜’는 하나님의 속성을 의미하는 중요한 두 주제이다. 우리는 흔히 두 낱말을 동의어인 양 혼용할 때가 많다.

어떤 학자들은 구약에서는 ‘자비’란 말을 사용하고, 신약에서는 ‘은혜’란 말을 쓴다고 구분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자비’란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을 면제해 주는 것을 의미한다면, ‘은혜’란 받을 자격이 없는 선물을 주는 것을 뜻한다고 보면 된다.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 설명해 보자.

자비는 이삭의 심장에 꽂힐 칼을 막아준다.
은혜는 수풀에 걸린 숫양을 공급해 준다.

자비는 달려가 탕자를 용서한다.
은혜는 모든 좋은 것으로 잔치를 베푼다.

자비는 강도 만난 사람의 상처를 치료해 준다.
은혜는 그가 완전히 회복하는 데 필요한 경비를 모두 부담한다.

자비는 십자가에 달린 강도의 외침을 들어준다.
은혜는 그날에 낙원을 약속한다.

자비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 대가를 치른다.
은혜는 우리의 악함을 그리스도의 의로 덮어준다.

자비는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을 회심시킨다.
은혜는 그에게 사도가 되라고 외친다.

자비는 반역과 죄의 삶에서 존 뉴턴을 구한다.
은혜는 그를 목사가 되게 하고 시대를 초월한 찬송가의 저자가 되게 한다.

자비는 지옥에 이르는 문을 닫는다.
은혜는 천국에 이르는 문을 연다.

자비는 우리의 수고를 거부한다.
은혜는 우리가 수고하지 않은 축복을 더해준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 미제라블』에서 장발장은 프랑스 혁명기에 굶주린 가족을 먹이기 위해 빵 한 조각을 훔치다 잡혀 감옥에 갇히기 전까지는 선하고 겸손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19년 동안 복역하고 나온 그는 사회와 하나님을 향하여 원한과 분노를 품은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프랑스 동서부에 사는 일흔네 살의 미리엘 신부 역시 혁명기에 큰 고초를 겪은 사람이다.
유산 가운데 남아 있는 고가품이라곤 칼과 포크 여섯 벌, 국자 하나, 그리고 촛대 두 개가 고작이었다.
그러나 그는 곤궁한 자들에게 동정을 베풀고 겸손한 종으로서 그들을 섬겼다.

나흘 간의 자유를 누린 후 장발장은 이제 피로와 굶주림으로 절망적인 상태에 놓여 있다.
그는 미리엘 신부의 집 문 앞에 서 있다.
염치고 자시고 그 집을 여관으로 오인한 그는 뻔뻔스럽게 부엌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거기서 신부의 따뜻한 대접을 받고 당혹스러워한다.
그날 밤 모두 잠든 사이, 장발장은 19년 만에 처음 누워본 매트리스와 하얀 시트를 뒤로 한 채 몰래 귀한 은식기들을 배낭에 훔쳐넣고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이튿날 아침, 손에 수갑이 채워진 채 그 식기들은 자기가 얻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장발장을 보며, 신부는 헌병들에게 그의 말이 사실이라고 한다.

헌병들에게 장발장을 놓아달라고 하며, 신부는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다시 만나 반갑소. 그런데 내가 은촛대까지 함께 주지 않았소? 아마 200프랑은 족히 받을 수 있을 거요. 포크, 스푼과 함께 그것도 가져가시오.”

믿기 어렵다는 듯 장발장이 신부에게 묻는다.

“정말 나를 놓아 주시는 겁니까?”

신부는 그를 안심시키며 이렇게 덧붙인다.

“형제여, 떠나기 전에 여기 당신 촛대도 가져가시오. 그리고 절대 잊지 마시오. 이 돈을 정직한 사람이 되는 데 사용하겠다는 약속을 말이오….

장발장, 나의 형제여, 더 이상 악에 속하지 말고 선에 속하시오. 내가 당신에게서 산 것은 바로 당신의 영혼이오. 나는 그것을 가증스런 생각과 죽음의 영으로부터 이끌어내어 하나님께 드린다오.”

자신에게 주어진 은혜에 당혹감을 느낀 장발장은 자신의 영혼 안에 있는 어두움, 그리고 가슴속의 한을 관통하는 사랑의 강렬한 빛, 이 둘이 서로 대조되는 것을 본다.

“은혜의 빛이 그의 삶, 그의 영혼에 닿았다. 그에게 그것은 마치 천국의 빛으로 사탄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정말 그랬다.

“그는 더 이상 이전의 그가 아니었다. 그의 모든 것이 변화했다.” 그 신부는 “이 비참한 인간의 전 영혼을 장엄한 광채로 채웠다.”

그 사건이 있은 지 하루 만에 그는 범죄의 현장으로 돌아와서 “기도하는 모습으로 그 자애로운 신부의 집 문 앞, 어둠이 깔린 길에 무릎을 꿇었다.”

은혜의 순간은 한 사람의 일생을 변화시킬 수 있다. 아니, 그것은 영원을 변화시키고도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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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 일, 복… 한국교회 성도들의 세 가지 오해
한국교회 성도들에게는 크게 세 가지 혼동이 있다.
성경을 이렇게 오해하면 성도의 신앙 성숙이 대단히 어렵다.

사실 대단히 깊숙히 퍼져 있는 신앙적 혼란이고, 2천 년 기독교 역사와 관련이 있다고 보여진다.
그래서 이것은 비단 우리나라 교인들에게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신앙의 오해는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복, 이 세 가지다.
성도들이 이 문제로 혼란을 겪는 경우가 참으로 많다.
이래서 성경적 신앙의 성숙이 어려워진다.
그것은 결정론, 이원론, 그리고 무속신앙이다.

하나님의 뜻을 결정론으로 오해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을 이원론으로 오해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복을 무속적으로 오해하는 것이다.

첫째, 하나님의 뜻과 결정론의 오해

성경이 아닌 결정론으로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 하는 것이다.
이렇게 성경을 오해하면, 나의 인생 미래에 어떤 하나의 길을 하나님이 미리 정해놓으셨고, 그것을 보물찾기하듯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끊임없이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뜻을 찾으려고 애쓴다.

둘째, 하나님의 일과 이원론의 혼란

이원론은 고대 헬라의 영육 이원론에서 로마가톨릭의 성속 이원론으로 발전되어 왔다.
성도가 이원론으로 하나님의 일을 받아들이면, 교회 안의 일과 교회 밖의 일거룩한 일과 속된 일로 구분한다.
교회에서 하는 일은 거룩하고 가치 있으며, 세상에서 하는 일은 속된 일이라고 본다. 


셋째, 하나님의 복과 무속신앙적 경향

하나님의 복을 무속신앙으로 오해하는 경우는 한국교회에 아주 흔한 현상이다.
신자들이 나 혼자 복 받으려고 열심히 예수 믿는다.
그러면 그 성도에게는 두 가지가 없다.
믿음과 삶의 변화가 따로 가기에 삶의 변화인 성숙이 없다.
그는 나 혼자 복받는 것이 목표이므로 복의 통로가 되려는 생각이 아예 없다.

이런 세 가지 오해와 혼동으로 한국교회 성도들은 길을 잃은 상황이다.
이 혼란에서 벗어나 성경적 신앙으로 가려면 가이드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제럴드 싯처의 <하나님의 뜻>
브루스 월키의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인도>
레너드 맥컬리, 제람 바즈의 <인간 하나님의 형상>

이 세 가지 혼동은 마치 칡넝쿨같이 얽혀 있어, 현재 한국교회 신자들의 내면을 뒤죽박죽 만들고 어린아이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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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론(資本論)

애덤 스미스

자본: 정치경제학 비판
Das Kapital: Kritik der politischen Ökonomie,
Capital: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자본론(資本論, Das Kapital)은 카를 마르크스가 독일어로 집필하고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편집한 방대한 정치경제학 논문으로 1867년에 제1권이 출간되었다.

《자본론》은 주로 영국의 고전파 경제학 및 자본주의와 영국 사회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는데, 내용은 1859년 발간된 마르크스의 저서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다.

총 3권으로 구성되어 있고, 1권은 자본의 생산과정, 2권은 자본의 유통과정, 3권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총과정이 부제로 붙어 있다.
1권은 1867년에 나왔으며  2, 3권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마르크스의 유고를 모아 집필, 각각 1885년과 1894년 발간되었다.

국부론(國富論) / 칼 막스

애덤 스미스의 대표적인 저서이자 애덤 스미스 본인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도덕감정론보다 후세 사람들에게 더 각광을 받은 책.

원제는 《국부의 형성과 그 본질에 관한 연구(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이다.
일상 대화에서 원제를 말하기에는 원제가 꽤나 길기 때문에 일상 대화나 비격식적인 글에서는 국부론(國富論)으로 짧게 부르는 경우가 많다. 영어권에서도 The Wealth of Nations로 줄여서 부른다.

영국의 학자 애덤 스미스가 찰스 타운센드 공작의 아들을 개인과외하며 유럽 각지를 여행하고 1766년에 영국에 귀국한 뒤 1776년까지 10년간 커콜디에서 자신의 서재에 파묻혀 지내며 쓴 책이다. 사실 이 여행을 떠날 때까지만 해도 스미스는 경제학과는 거리가 먼 철학자였는데, 여행을 통해 경제학에 대한 관심과 식견을 가지게 되었다. 이 사실은 국부론의 초안을 작성할 때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도 드러난다.
"나는 요즘 시간을 때우려고 책을 한 권 쓰고 있다네."
이는 케인스가 막 경제학에 흥미를 붙일 무렵 친구에게 했던 말인 "어쩌면 나는 경제학에 소질이 있을지도 몰라."와 더불어 경제학 역사상 가장 겸손한 발언으로 손꼽힌다.

경제학을 잘 모르더라도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은 아는 사람이 많은데, 바로 이 《국부론》에서 나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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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래시스 요시히로 후쿠야마(Francis Yoshihiro Fukuyama, 1952. 10. 27 ~ )


The End of History and the Last Man
<역사의 종언과 최후의 인간>

헤겔 정치철학을 신봉하는 일본계 미국 학자이다.

<역사의 종언과 최후의 인간>에서 인간의 역사 과정은 두 가지 큰 힘의 상호 작용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첫번째 힘은, 부를 축적해 물질적인 욕구를 만족시키려는 인간의 합리적인 욕망이라는 힘이다.
두번째 힘은, 역사 진보 과정의 중요한 원동력으로서 헤겔이 ‘승인 받기 위한 투쟁’이다.

이것은 모든 인간이 자신의 본질이 자유롭고 도덕적인 존재임을 인정 받으려는 욕망이다.

이같은 결론은 이제 전세계가 자유민주주의라는 단일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통일되어 가는 상황에 있다는 것이다.
헤겔의 역사 개념이 이데올로기의 역사를 지칭하는 것인 만큼, 이제 대립된 이데올로기를 통일함으로써 역사의 종언을 선언한다는 것이 후쿠야마의 논지이다.

<트러스트>는 그 후속편 성격을 띠고 있는데, 그러한 사실은 이 책의 첫장 제목이 ‘역사의 종언을 맞이한 인간의 상황’이라는 데서 잘 드러난다. 이 책의 논지는 ‘한 국가의 복지와 경쟁력은 하나의 지배적인 문화적 특성, 즉 한 사회가 고유하게 지니고 있는 신뢰의 수준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신뢰에 바탕 두어야 사회 발전


후쿠야마는 고 제임스 콜맨의 ‘사회적 자본’이라는 개념을 사람들이 공통의 목적을 위해 단체와 조직 내에서 함께 일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이해하여 중시한다. 즉 개인 간의 관계가 신뢰에 바탕을 둔 사회는 발전과 번영을 구가한다는 주장이다.

후쿠야마가 이 책에서 주장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대단히 중요하다. 그는 개인의 자유와 존엄성을 중시하는 자유민주주의를 찬양하면서도, 개인의 이기심에 기초한 물질적 동인만으로는 사회가 발전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개인의 이익을 큰 집단의 이익에 종속시킬 수 있는가 여부와, 규범과 가치를 공유하는지 여부가 더욱 중요하고, 그 공유된 가치로부터 신뢰가 탄생하며 신뢰는 중요한 경제적 가치를 가진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한국과 중국은 근본적으로 신뢰가 낮은 저신뢰 사회이고, 일본과 독일은 고신뢰 사회이다. 한국이나 중국같이 가족 중심적인 사회는 근본적으로 가족 이외의 사람과 사회적 협동이 이루어지기 상당히 어렵다고 비판한다. 우리가 새겨들을 필요가 있는 지적이다. 한국에서 뇌물과 부패가 성행하고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우리 사회 제도에 대해 우리 스스로가 신뢰하지 못해 나타나는 현상이다. 공무원과 정치가를 신뢰하는 사회라면 뇌물을 흔히 주고받는 현상은 절대로 나타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후쿠야마의 이론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은 사회 발전의 동인을 신뢰에 너무 많은 무게를 실어주는 것 같다는 것이다. 그 자신이 인정하듯이 합리적 선택론에 기초한 이기심이 80%를 설명해 주는 고전경제학의 법칙을 무시할 수는 없다. 합리적 선택론이 사회를 설명해 주는 충분 조건은 아니더라도, 가장 중요한 조건이라는 점을 더욱 강조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인류가 물질적으로 발전해온 동인으로는 시장경제 체제가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구승회 박사의 번역은 대단히 수준 높은 것이어서, 독자들은 이 책이 번역한 것이라기보다는 애초에 우리 글로 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질지도 모른다. 단지 utility를 ‘효용’이 아니라 ‘유용성’으로, rational choice를 ‘합리적 선택’이 아니라 ‘이성적 선택’으로 번역한 것이 옥의 티로 남는다. 후쿠야마의 책은 오늘날의 선진 자본주의 국가가 가지고 있는 특성을 시장 경제와 자유민주주의라는 두 가지 축으로 잘 설명했다는 점에서 지성인의 필독서다.

욕구에 의한 역사의 발전

1. 더 잘려는 욕구
- 경제적 욕구

2. 인정 받으려는 욕구
-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장점이 많으나 시들어간다.
인민 대중을 인정하지 않고 간부들끼리만 잘 먹고 잘 살려고 한다.
- 자유민주주의는 약점이 많으나 발전하는 이유는 개인의 자유를 인정해 주기 때문에 발전할 수밖에 없다.


미국 스텐퍼드 대학교의 교수이며 철학자, 정치경제학자이다.
일본계 미국인 3세이다.
그는 이데올로기 대결의 역사를 자유주의와 공산주의의 프레임으로 설명하면서 "자유주의의 승리로 끝났다"고 평가한 《역사의 종언》으로 유명하다.

후쿠야마는 1989년 냉전이 종식되는 순간을 역사의 종말이라고 하였다.
그 근거로 이념적으로 헤겔이 말한 인간의 욕구에 대해서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는 일방적이 아니라 상호성이 보장될 때 충족할 수 있게 되는 것으로, 이를 가능케 하는 정치제도가 바로 민주주의 정치제도라고 보았고 이를 궁극적이고도 역사적으로 최종적인 정치 체제로 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역사적인 관점에서 냉전이라는 기간 동안 민주주의 체제는 파시즘과 공산주의 체제로부터 많은 투쟁을 거치면서 승리를 거머쥔 만큼 더 이상 민주주의 체제에 도전할 수 있는 이념과 철학 체계가 없다고 보았기 때문에 역사가 종말에 도달했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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쉐인 클레어본의 혁명적인 삶 이야기 / 쉐인 클레어본 <믿음은 행동이 증명한다>


무소유 공동체 심플웨이 설립자 쉐인 클레어본의 혁명적인 삶
나눔의 폭발적인 전염성을 삶으로 보여 주는 사랑의 급진주의자 이야기

"저항할 수 없는 믿음 혁명이 당신 안에서 시작되고 당신의 작은 사랑의 행동을 통해 온 세상을 덮게 될 것이다.
다시 크리스천으로 살기를 시작하자. 예수님이 용기를 주신다."


"쉐인 클레어본의 이 책은 새로운 세대의 신자들이 깨어나고 있으며, 다시 새롭게 복음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고 있음을 보여 주는 이 시대 최고의 증거다." (짐 월리스)

▲ <믿음은 행동이 증명한다> / 쉐인 클레어본 지음 / 배응준 옮김 / 아바서원 펴냄 / 400쪽 / 1만 6000원

자본, 폭력, 권력, 전쟁에 깊이 물들어 있는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의지를 찾지 못하는 오늘날 교회는 천국의 희망을 전하는 것으로 교회의 사명을 다한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 더불어 세상의 가치관을 복음 속에 버무려 넣어 세상 사람들에게 거북스럽지 않은 교회가 되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있다. 이런 교회의 틀 안에 있는 교인들은 나에게'만', 우리 가족에게'만' 복을 준다는 편안한 말씀을 듣기에 익숙해져 있을 뿐만 아니라,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만 알았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전혀 고민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뜻에 무뎌져 가는 교회와 성도들에게 행동하는 믿음을 보여 온 저자 쉐인 클레어본은 안전하고 편안한 복음이 아닌, 위험하고 불편한 복음을 이야기한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을 따르기로 결단했다면, 호불호에 따라 말씀을 선별해서 실천할 것이 아니라 삶 속에 그대로 말씀이 구현되어야 한다고 외친다. 말씀을 깨달았다면 그대로 실천해야 하는 단순한 원리에 순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말만 하는 전도자가 아니다. 그런 외침과 더불어 삶 속에서 말씀이 진실로 실현되는 것을 증언하며 살고 있다. 쉐인은 대학 시절 필라델피아 뒷골목의 노숙자들을 돕는 일을 시작으로, 인도 캘커타에서 테레사 수녀와 함께 나환자 돌봄 사역에 합류했으며, 9‧11테러 이후 미군의 폭격으로 부상당한 바그다드의 환자들을 치료하며 위로하기 위해 이라크를 방문하기도 했다. 또한 월스트리트 거리에서 희년 의식을 거행함으로 성경적 경제관을 외치기도 했다.

대학 졸업 후에는 무소유 공동체 '심플웨이'를 설립해서 노숙자들과 도심의 가난한 자들에게 음식과 의복을 제공하며 보육과 의료 혜택을 베풀며 그들의 신앙과 재활을 돕는 운동을 펼치고 있다. 이 공동체는 초대교회의 모습을 실현해 내며, 사랑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

이 책은 반쪽 복음을 넘어서서 믿고 깨닫는 대로 실천하는 믿음 이야기다. 말씀을 듣고도 편안함에 빠져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불편하고 부끄럽고 두렵게 하는 책이다. 말씀을 깨달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워하는 이들에게 믿음을 실천하게 도와주는 지침서다. 잠자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거부할 수 없는 혁명(Irresistible Revolution)', 믿음 혁명으로 초대하는 통렬한 외침이다.

쉐인 클레어본(Shane Claiborne) 

무소유 공동체 '심플웨이(Simple Way)' 설립자 쉐인 클레어본은 사랑의 근본적인 의미와 기독교의 뿌리를 찾아간다는 의미에서 스스로를 '평범한 급진주의자'라 칭하며, 죄로 인해 엉클어진 세상의 탄식에 귀 기울이고 그 탄식에 대한 대안을 적극적으로 만들어 내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는 대학 시절 어느 교수에게서 "세상이 네 영혼을 도적질하지 못하게 하라.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예수를 선택한다는 것이며, 목숨을 걸고 담대하게 어떤 것을 하겠다고 결단하는 것이다"는 이야기를 듣고 도전을 받아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 후 인도 캘커타로 가서 테레사 수녀와 함께 10주 동안 나환자들을 돌보면서 심령이 가난한 자들에게 임하는 천국을 보았고, 그들의 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

2003년 3월에는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평화봉사단원으로 일하며 폭격이 있었던 지역과 병원을 방문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과 함께 활동하고 예배했다.

또한 2004년에는 쓰나미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팀을 결성하여 태국 현장에서 사역했으며 저개발 국가의 수질 개선을 위한 '우물 파 주기 운동'과 인터넷 모금 운동인 '관계의 십일조 운동'을 통해 전 세계의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긍정적인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2011년 5월 케이티와 결혼하여 필라델피아에서 살고 있다.

심플웨이 리더이자 주목받는 설교자로서 평화, 사회 정의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활발히 전하며 여러 책을 집필했다.
대표 저서로 <행동하는 기도>(IVP 역간)가 있다.

심플웨이 홈페이지 www.thesimpleway.org


"이 땅의 크리스천들에게 각성제가 되어 줄 것이라 확신하는 책이다. 감히 성경 곁에 함께 두고 읽어야 할 또 한 권의 책으로 추천한다. 부디 스마트폰을 팔아서라도 사서 읽기를!" -김성수, 예드림교회 목사. 작은도서관 '호모북커스' 대표

"작금의 한국교회 상황을 마음속 부담으로 가진 자들이라면, 어떻게 예수를 진정으로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할지 고민하는 자들이라면, 이 책을 꼭 읽으라. 바다 건너에서 우리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믿음의 동지를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김형국, 나들목교회 대표 목사. <교회 안의 거짓말> 저자

"한국교회의 거듭된 삽질에 기독교인임을 반납하고 싶은 사람, 물 타지 않은 복음 그대로를 '래디컬'하게 전하고 살아야 한다고 믿는 사람, '허다한 무리'에 속하길 거부하고 예수가 간 좁은 길을 우월감 없이 가려는 사람이라면 닥치고 이 책을 읽으라. 그리고 여러분 하나하나가 우리 시대가 보길 원하는 겸손한 대안'들'이 되라. 교회에 희망이 없다고 하지 말라. 우리가 교회다." -박총, 작가. 도심형 재속재가수도원 '신비와저항' 원장

"그리스도께 무조건적으로 순종하려는 저자의 열정을 반만이라도 닮는다면, 오늘날 복음주의 운동은 엄청난 능력을 갖게 될 것이고, 우리는 이 깨어진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로날드 사이더, <가난한 시대를 사는 부유한 그리스도인> 저자

"이 책을 읽다 보면 나처럼 당신도 불편함을 느낄 것이다. 우리에게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이런 불편함이 필요하다." -브라이언 맥클라렌, <새로운 그리스도인이 온다> 저자

"당신이 쉐인을 안다면, 이 책의 페이지마다 소리치는 저항할 수 없는 그의 외침을 듣게 될 것이다. 당신이 쉐인을 모른다면, 페이지마다 담겨 있는 저항할 수 없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게 될 것이다." -레너드 스위트, <귀 없는 리더? 귀 있는 리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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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하지만 진정한 기도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이해하는 사람은 드물다. 크리스천은 기도가 무엇인지 묻고 깨달을 책임이 있다. 이에 대한 도움을 줄 R. C. 스프로울의 신간 ‘어떻게 기도할까?’가 15일 발간됐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예수님의 제자들조차 자신들의 기도생활이 미흡하다고 느껴 예수님께 도움을 청했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실제로 마태복음 6장을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께 기도하는 법을 알려달라고 요청하는 내용이 있다. 그리고 그 일을 계기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우리가 알고 있는 ‘주기도문’을 가르쳐주셨다.

오늘날의 일부 그리스도인들처럼 이 기도문을 기계적으로 암송하는 것은 결코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바가 아니었다. 저자는 주기도문이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할 때 실천해야 할 원리들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기도의 모델이라고 이야기한다. 또한 주기도문의 각 구절, 심지어 한 단어 한 단어까지 자세히 살펴보고 그 원리들을 찾아내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권면하신 것이 무엇이었는지 분명하게 가르쳐준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기도에 대한 도움을 요청한 까닭은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누리신 관계의 풍성함을 경험하고자 하는 갈망이었다. 따라서 이 책을 통해 주기도문의 문자적 의미를 넘어 예수님이 그 속에서 가르쳐주시는 진리들을 발견함으로써, 현대의 제자들 또한 더 풍성하고 깊은 하나님과의 동행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 책에서 R. C. 스프로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기도의 모델 주기도문이 자주 간과되고 오해되기 십상인 영적 훈련의 원리들을 담고 있는 보고임을 설명한다. 그는 먼저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할 기도의 예들을 보여준 다음, 한 구절 한 구절 주기도문을 파헤친다. 특유의 명료함으로 각 구절의 의미를 새롭게 조명할 뿐 아니라 한 발 더 나아가 주기도문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기타 주제들, 즉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뜻, 용서, 유혹 등에 대해 자세히 풀어준다. 또한 부록에서는 기도에 관한 여러 가지 질문과 답,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과 기도 간의 복잡한 신학적 관계에 대한 해결책을 제공한다.

결론적으로 R. C. 스프로울의 <어떻게 기도할까?>는 그리스도인 삶의 전 영역에 있어서 기도가 어떻게 기능해야 하는지 보여주는 책이다. 이 책을 통해 성도들은 하나님에 대해, 그리고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더 깊은 이해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추천글

R. C. 스프로울은 난해한 진리들을 명쾌하고 인상적이며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설명하는 데 천부적인 자질을 지녔다. 그는 주기도문을 가르치기에 이상적인 교사다. 왜냐하면 주기도문 자체가 ‘기도’라는 어려운 주제에 대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놀라울 정도로 간결하게 가르쳐 주신 하나의 심오한 교훈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우리 모두에게 크나큰 유익과 도움을 줄 것이다. - 존 맥아더 (그레이스 커뮤니티 교회 담임목사 / 『담대한 복음전도』 저자)

나는 R. C. 스프로울의 강의를 좋아하는데 이 책은 그의 목소리와 흡사하다. 놀랍도록 생생하게 진리를 꿰뚫는 바로 그것이다. 그의 뛰어난 인용솜씨와 목회감각에서 나온 지혜는 그의 강의를 듣는 것만큼이나 읽기 수월하게 만들어준다. (게다가 책이 짧아서 금상첨화다!) 스프로울은 간결하고 정확한 문장으로 성경말씀을 명료하게 해석해준다. 그는 중요한 것들, 즉 기도는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 역사에 대한 진리들을 간결하고 명료하게 전달하고 있으며 충분히 제대로 알고 있다. 말미에는 도움을 주는 질의응답까지 덧붙여져 있다. 이 책은 이제 명실공히 기도의 고전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것이다. - 마크 데버 (캐피털힐침례교회 담임목사)

R. C. 스프로울은 내가 처음으로 신학을 배운 선생님이다. 갓 믿은 신자로서 나는 그가 진행하는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Renewing Your Mind)’ 라디오 방송을 청취하면서 신학과 철학, 교회사에 대해 엄청나게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제 그는 <어떻게 기도할까?>를 통해 자신의 방대한 신학적, 철학적, 역사적 재능과 자원들을 기도라는 중대한 주제에 쏟아 붓고 있다. 이것은 워낙 중요한 주제인 만큼 잘 숙련된 선생의 손에 다루어져야 마땅하다. 그가 나에게 가르쳐준 다른 모든 것과 더불어,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의 우선순위를 배우는 데 그의 인도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더없는 특권이다. 이 짧은 책을 읽고 나면 당신 앞에 기도생활의 새로운 패턴이 펼쳐질 것이다. - 타비티 안야빌리 (케이맨 제도 그랜드 케이맨 제일침례교회 담임목사)

저자소개

R. C. 스프로울 - 개혁주의 신학계를 이끄는 저명한 신학자로 심오한 진리들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는 글과 강의로 유명하다. 또한 딱딱하게 들리던 성경 교리를 명쾌한 논리와 적절한 예화로 풀어, 성경 말씀이 주일 예배뿐 아니라 나머지 6일의 삶과 떨어질 수 없게 연결고리를 만들어준다.

낙스신학대학교 등 여러 주요 신학교에서 신학과 변증학 교수로 재직했으며 현재는 플로리다주에 위치한 세인트 앤드류 채플(St. Andrews Chapel)의 담임목사로서 말씀을 전하고 있다. 평신도 교육에 열정을 품고 70여 권의 책을 저술했으며, 리고니어 선교회와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Renewing Your Mind)’라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기독교의 진리를 일반인들에게 알리려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1994년 『크리스채너티투데이』의 비평가들이 뽑은 ‘신앙생활에 가장 큰 영향을 준 학자’ 3위에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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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존 프리처드/김홍일, 민경찬/비아/강도헌 편집위원

기도하는 인간(homo orans)

 

 

인간은 기도하는 존재이다. 인간으로 태어나 그가 종교가 있든 없든 기도 한 번 하지 않고 죽는 인간을 없을 것이다. 또한 기도는 그리스도교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종교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처럼 인간은 왜 기도하는 것일까? 여러 가지 관점에서 답을 찾을 수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느낌과 생각을 인간은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기도의 목적에 대해 기독교 영성가 오스왈드 챔버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기도의 목적은 이상적이지 않은 현실에서 하나님과 이상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자세를 취하는 것이다. 이곳에서의 현실은 우리에게 이상적인 조건을 제공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를 실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챔버스는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 것과는 먼 이상적이지 않은 현실이 주님과의 관계를 촉진시키고, 우리의 기도의 목적 또한 우리가 원하는 이상적인 현실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상적이지 않은 현실 속에서 실현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기도는 현실적이지만, 현실을 초월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꿈과 기도의 관계

 

요즘 교회에서는 현실을 초월하는 것에 대해 꿈과 비전이라는 단어들을 사용한다. 그래서 교파를 초월해 꿈과 비전이라는 단어는 오늘날 교회에서 매우 익숙한 단어들이다. 특히 청소년이나 청년들에게는 주요 설교 주제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필자도 과거 청년부를 지도할 때 꿈과 비전에 대해 많은 설교들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최근에 필자는 청년들에게 비전과 꿈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가 조심스럽고 꺼려진다. 금수저, 흙수저, 3포 세대, 4포 세대를 넘어 9포 세대라는 말까지 나오는 터라 말장난처럼 보일까봐 극도로 조심하고 있는 상황이다. 지금은 청년들 뿐만이 아니라 모든 세대가 미래에 대해 비전과 꿈을 가지기 보다는 불안감들이 감돌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이럴 때 청년들과 성도들에게 어떤 설교를 해야 할까? 믿음을 강조하면서 어떤 꿈과 비전을 제시할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지금 교회와 성도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초월은 물질적 어려움에서 벗어나 물질적 풍요를 원하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물질적인 초월이다. 그래서 이 시대의 기도 또한 개인의 필요와 욕구들을 채워 달라는 기도, 혹은 고통이나 물질적인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는 기도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물론 물질적 기도를 드리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모든 관심과 기도가 여기에 무게를 두고 거기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성경적으로 볼 때 미래가 그렇게 밝지 못하다.  

 

기도는 무엇인가?

 

종교학자들은 기도에 대해 인간의 욕망과 욕구에 대한 갈망이 기도의 출발이라고 말한다. 즉, 인간의 욕망과 욕구는 끝이 없기 때문에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이 기도를 하게 한다는 것이다. 둘째,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이 기도를 하게 한다고 말한다. 즉, 인간의 불완전함은 완전함을 추구하고, 인간의 유한함은 영원을 추구하게 하면서 종교와 기도가 발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 들이 과거에는 어떠했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이 시대의 교회들에게는 상당부분 맞는 말인 것 같다.

 

기독교 안에서 기도에 대한 정의는 단 한 가지가 아니다. 다양한 기도의 정의들은 기도의 의미를 더 풍성하게 해 준다. 그러한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라는 정의에 공감하고 있다. 그러한 가운데 기독교는 오랜 역사동안 다양한 하나님과의 대화 방법들을 발견하고 실천해 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기도의 정의, 기도의 방법들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재 삶의 시간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자리를 만들고 기도함으로 나아가야 한다.  

 

시작하기

 

본서는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1부의 주제는 ‘시작하기’이다. 그렇다 기도는 시작해야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기도의 필요성은 느끼고 있으나 막상 기도를 시작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본서는 기도를 시작하기 위해 먼저 삶의 속도를 늦추어라고 시작한다. 참된 기도(독백이 아닌 하나님을 만나는 기도)는 일상의 삶을 멈추고 하나님께 집중해야만 시작할 수 있다. 그래서 삶의 속도를 늦추어야 한다. 이때 기도의 길이, 기도의 질, 지식의 수준은 기도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러한 것들에 신경을 쓰는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 만남 보다는 자기 만족을 추구하기 쉽다. 시작하는 기도의 기도는 실재로 기도를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고, 자기의 솔직한 마음을 담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처음부터 하나님과 친밀한 사람은 없다. 기도를 지속함으로 친밀함은 발전하게 된다. 그러므로 어색하더라도 기도를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 먼저 기도를 위한 시간을 찾아라. 기도에 도움이 되는 음악, 성경본문, 그림(헤겔에 따르면 상징은 인간의 종교성을 충족시키기 위해 고안된 표현 형태이다. 이러한 상징에 집착하는 ‘상징주의’는 참된 영적 깨달음을 방해한다. 헤겔은 상징을 통해 얻어지는 상징적 지식과 하나님과 친밀한 만남을 통해 얻어지는 직접적 이해(통찰)를 날카롭게 구분한다. 그러나 상징자체를 부정하는 것 또한 ‘문자주의’의 위험을 안고 있다. 전문 독자라면 상징에 대한 헤겔의 견해를 두고 로마 가톨릭의 신학자 칼 라너, 개신교 신학자 폴틸리히, 그리고 고대 교부 아타나시우스의 상징에 대한 논의들을 참고하라. 칼빈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들을 활용하는 것에 대해 부정하지 않는다.) 등을 활용해도 좋다. 관건은 규칙성에 있다. 습관적으로 기도하는 것은 좋지 않지만, 기도가 습관이 되는 것은 중요하다.  

 

더 깊게 들어가기

 

2부는 ‘더 깊게 들어가기’이다. 기도가 습관이 되면서 영적인 성장이 일어나고 영적인 성장을 통해 기도의 방식도 성장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침묵을 통한 기도로 들어간다. 즉, 듣는 기도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 때 중요한 것은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깊이 들어가기 위해서는 깊이 들어가는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때 의식을 집중하여 응시하는 ‘관상’(관상에 대해 개신교는 약간의 오해가 있다. 뉴에이저들이 사용하는 기법이라 하여 이교도적 행위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이것은 오해다. 관상은 집중하여 응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시험 문제를 풀거나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집중하여 응시하는 것 또한 관상적 방법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관상에 대해 무조건적 반감은 자제가 필요하다.)적 자세를 통해 집중하는 것이 필요하다. 관상은 하나님을 향해 시선과 의식을 집중하는 것으로, 자기 집착에서 벗어나 하나님께로 집중하도록 인도한다.

 

여기서 깊은 기도에 대한 오해 또한 풀어야 한다. 깊은 기도에 들어가면 신비한 것을 보거나 체험하는 것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실재는 그렇지 않다. 깊은 기도로 들어가는 과정은 사막을 통과하는 것과 같다. 새로운 미지의 세계는 온갖 보화들로 가득차 있는 것이 아니라 황량한 사막과 같은 느낌을 받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황량함은 그곳에서 다가오시는 주님께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 요소이기도 하다. 하지만, 자칫 하면 지루함을 느끼게 되고 기도에 흥미를 잃을 수도 있는 기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다시 현실적이고 외적인 것들을 추구하는 삶으로 되돌아 갈 수 있음도 유념해야 한다. 그러나 이 시간들을 기도로 잘 극복해 나가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와 총명함을 통해 통찰력들이 생기게 된다. 이 때 중요한 것은 기도를 통해 깨달은 바들을 행동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계속해서 나아가기

 

3부는 ‘계속해서 나아가기’이다. 이 부분에서는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지금 기도에 대한 다양한 질문들을 던지고 거기에 대한 답들을 제시하고 있다. ‘과학 법칙이 지배하는 우주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요?’, ‘기도가 응답받지 못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나요?’, ‘기도할 때 별다른 느낌이 들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어떻게 해야 기도의 활력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등의 질문과 답을 소개한다.  

 

평생에 걸친 여정

 

인간을 구분하는 관점과 기준들은 매우 다양하다. 그중에서 필자는 본서를 읽으면서 ‘기도하는 인간’, ‘기도하지 않는 인간’으로 구분해서 생각해 보았다. 물론 기도에 대해 필요성을 못 느끼는 사람들은 여기서 배제된다. 기도의 필요성을 느끼면서도 기도하지 않는 인간이 왜 있을까? 분명 그들은 기도를 미루거나, 기도를 못하는 분명한 변명거리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본서를 읽어보라. 기도는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할 수 있는 것이다. 눈을 감고 할 수도 있고, 눈을 뜨고 할 수도 있다. 성경을 읽으면서도 할 수있고, 일을 하면서도 할 수 있다. 기도는 언제 어디에나 계시는 하나님을 향해 언제 어디에서나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고, 언제 어디에서나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평생동안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의 기도 생활은 평생의 여정임이 분명하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면 기도를 미루거나 생략하는 인간이 아니라 기도하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 본서는 기도의 큰 그림과 핵심을 어렵지 않게 안내해 주고 있다.  

 

존 프리처드 (John Pritchard) 


1948년생. 성공회 성직자이자 문필가. 옥스퍼드 세인트 피터 갈리지, 케임브리지 리들리 홀에서 공부한 뒤 1973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이후 지역 교회 사목 활동과 동시에 잉글랜드 성공회에서 진행하는 그리스도교 교육 활동과 관련하여 여러 직책을 맡았다. 2002년에는 주교 서품을 받았으며 2006년부터 2014년까지 옥스퍼드 교구의 주교로 활동했다. 현재 SPCK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성숙과 영성 생활을 돕는 다양한 저작을 썼으며 주요 저서로 『기도하는 법』How to Pray(2002), 『교회에 가다』Going to Church(2009) 등이 있다.   

   

출판사의 책소개

 

기도에 관한 입문서. 그리스도교 신앙생활의 알짬이라 할 수 있는 기도가 무엇인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살핀다. 어떻게 기도라는 여정을 심화시켜 나갈 것인지, 이때 우리가 갖추어야 할 것들은 무엇인지,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들은 무엇인지 찬찬히 설명한다. 부록으로는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시행하고 있는 기도의 종류를 소개하고 있으며 함께 읽을 만한 책들에 대한 역자의 해설을 수록했다. 기도라는 주제와 관련해 궁금한 이들, 기도의 삶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이들에게 도움을 주는 얇지만 단단한 입문서다.  

   

목차

 

들어가며

1. 시작하기

2. 더 깊게 들어가기

3. 계속해서 나아가기

해설 : 기도의 단계와 그리스도교 전통의 기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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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량 목회(自費糧, one's own expense), 자비량 선교


자비량 목회(自費糧, one's own expense)

교회의 목회, 교육, 전도, 선교 사역에 있어서 목회자 및 사역자가 교회나 해당 단체에 소속되거나 단독으로 활동할 때 어떠한 사례나 대가를 받지 않고 자신이 해결하는 방식을 말한다.
이와 반대되는 용어는 삯군 목회 또는 생계형 목회가 있다.

자비량(전문인) 선교사는 직업적 전문성, 사역적 전문성을 가져야 한다.

자비량 선교(tent-making mission)는 선교사 입국의 제한이나 선교지 상황의 어려움 따른 창의적 접근지역을 위해서 개발된 전략이다.
이는 전문인 선교라고도 할 수 있다.
미국전문인선교협의회는 “전문인 선교사는 자신의 기술이나 전문성을 소유하고 타 문화권에서 접근하여 거주하면서 현지인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삼는데 최우선권을 두며, 가능한 곳에서는 교회를 개척하고 견고하게 하는 그리스도의 증인이다.”라고 전문인 선교를 정의한다.

전문인 선교는 기본적으로 직업적 전문성과 사역적 전문성을 두 기둥으로 하고 있다.
직업적 전문성은 현재 자신의 직업을 복음 전도하는 일에 전략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사역적 전문성은 제자를 양육하여 교회를 개척하는 일, 제자를 양육하는 일 등 사역에 전문성을 개발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자비량(自備糧)

자기가 쓸 양식이나 물품을 스스로 갖춤, ‘자취’의 방언(함북)

자비량(自備糧, tent maker)

길을 떠날 때 자기가 직접 양식을 가지고 가거나 또는 그 양식.

 

자기 스스로 준비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교에서의 이 용어는 선교나 선교사에 붙여진용어이다.
자비량 선교사란 직업을 가진 선교사, 즉 다른 문화권 속에서 직업을 가지고 자신의 생활비를 벌면서 동시에 선교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들의 직업이 생활비를 벌기 위한 수단만은 아니다. 그들은 직업을 통하여 만나는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복음도 전하는 것이다. 이 일은 선교와 직업 모두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

즉, 하느님이 직업으로 자신을 부르고 인도했다는 확신이 필요하고 자비량 선교사가 되는 것은 마음의 원함만 가지고는 안된다. 자신이 타문화권 사역자로 부름을 받았다면, 그 문화로 부른 하느님의 인도하심을 증거로서 확증해야만 한다.

 

자비량 사역자(선교사)라는 말은 선교지에서 직업을 가지고 생활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섬겨 선교하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어왔다. 이 용어는 《사도행전》 18장 3절에서 장막 만드는 일을 하면서 선교사역을 했던 바울로의 예에서 연유한 것이다. 자비량 사역자는 사역을 하려는 목적으로 새로운 문화나 나라에서 일자리를 얻은, 이른바 이중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다.

 

 

< 사도행전 > 18장

 

1 그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2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3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4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

 

 

1 After these things Paul departed from Athens, and came to Corinth;

2 And found a certain Jew named Aquila, born in Pontus, lately come from Italy,

  with his wife Priscilla; (because that Claudius had commanded all Jews to depart from

  Rome:) and came unto them.

3 And because he was of the same craft, he abode with them, and wrought: for by their

   occupation they were tentmakers.

4 And he reasoned in the synagogue every sabbath, and persuaded the Jews and the

  Greeks.

 

 

< 고린도전서 > 9장

 

6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리가 없겠느냐

7 누가 자기 비용으로 군 복무를 하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열매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6 Or I only and Barnabas, have not we power to forbear working?

7 Who goeth a warfare any time at his own charges? who planteth a vineyard, and eateth

  not of the fruit thereof? or who feedeth a flock, and eateth not of the milk of the fl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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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비량 (自備糧/tentmaker)

* 자비량 목회자 (Tentmaking Pastor)

* 자비량 선교사 (Tentmaking Missionaries)

 

21세기 해외선교의 상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분석이 나옵니다.

첫째로, 인구성장과 다원화되는 사회의 변화를 생각한다면 복음을 받아야 할 사람들에 대해 선교사의 수는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둘째로, 목회자 선교사의 입국을 제한하는 폐쇄지역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셋째로, 종족과 문화적 장벽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넷째로, 늘어나는 선교자금의 문제가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뚫고 지속적이고도 적극적으로 해외선교를 섬길 바람직한 방안으로 자비량 선교가 제시되고 있습니다. 전 교인의 99.5%를 차지하는 평신도들이 동원되고 이들이 스스로 생활비를 벌어 자급하며 선교하는 평신도 자비량 선교가 활성화될 때, 이상의 문제들이 해결될 뿐 아니라 세계선교는 사도행전시대와 같은 새로운 물결이 일어날 것입니다.

 

 

자비량 선교

성경에서 '자비량'이라는 용어는 고린도전서 9:7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자비량'(self-supporting)이란 일군이 스스로 경비를 댄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자비량하는 수단으로 장막만드는 일(tent-making)을 하였다.
텐트 메이킹 미선 tent-making mission 을 물질 후원구조로 이해할 때 '자비량 선교'가 되며, 사역형태로 이해할 때 '전문인 선교'가 되는 것이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일군이 물질적 지원을 받을 권리가 있음을 알았지만, 자발적으로 자비량하며 복음을 전하기로 작정했던 것입니다. 관련된 주요 구절들은 살후 3:7-9, 사도행전 20:33-35절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자비량 선교를 한 이유를 정리해 보면,

첫째로, 복음의 신뢰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둘째로, 스스로 모범을 보이므로 개척된 교회들이 재정적으로나 영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하고자,

셋째로, 복음전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고,

넷째로, 직음을 통해 동질성을 가진 사람들을 이해하고 섬길 수 있으므로,

다섯째로, 그리스도인들이 일반직업에 종사한다는 이유로 영적 사역에 깊이 참여할 수 없다는 변명이 타당치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여섯째로, 새 신자들에게 근면한 노동으로 수익으로 곤경에 처해있는 그리스도인이나 비그리스도인을 도와야 한다는 점을 가르치고자, 일곱째로, 예수 그리스도께 빚졌다는 강한 채무의식 때문에, 여덟째로, 가장 큰 이유는 자비량하면서 선교하는 것이 예수님의 주는 정신, 선교정신에 부합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자비량 선교의 장점들

첫째, 평신도 자비량 선교사들은 우선 타문화권에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습니다.

둘째, 오늘날 목사나 선교사의 신분으로 들어갈 수 없는 어떤 나라에도 평신도 자비량 선교사들은 자유로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셋째, 막대한 선교비 문제가 없습니다.

넷째, 평신도 자비량 선교는 선교사 자원의 풍부함이 큰 장점입니다. 한국교회의 99.8%가 평신도들입니다.

다섯째, 평신도 자비량 선교사들은 투철한 신앙과 선교의 열정이 넘칩니다.

여섯째, 평신도 자비량 선교사는 자기 자신의 직업에서 얻는 성취감과 만족을 통해, 복음을 전하기 어려운 지역에서 사역의 실패로 겪는 좌절과 실망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일곱째, 평신도 자비량 선교사들은 민간 외교관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여덟째, 평신도 자비량 선교사들은 선교지에서 화해자요 중재자의 역할을 다양하게 감당할 수 있습니다.

아홉째, 평신도 자비량 선교사들이 부득이 귀국하게 되었을 때 이들은 본국에서도 훌륭한 지도자들이 되어 교회와 사회에 봉사할 수 있습니다.

열째, 유학생 선교사들의 경우 현지에서 공부하면서 현지인 학생들에게 선교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들이 학위를 받은 후 현지에서 직장을 얻어 선교할 경우 매우 이상적인 '장기 체류' 평신도 자비량 선교사가 될 수 있습니다.

 

평신도 자비량 선교사들의 직업별 유형

1. 파견근무
2. 의사
3. 고용인
4. 해외 청년 봉사단
5. 사업(자영업)
6. 교수
7. 외교관
8. 교사
9. 간호사
10. 성악가
11. 컴퓨터 프로그램어
12. 태권도 사범
13. 유학생
14. 이민
15. 단기선교사
16. 건축기사
17. 스튜디어스
18. 사진기술자
19. 약사
20. 목축업
21. 선원
22. 선장
23. 항해사
24. 이용사
25 . 미용사
26. 임상병리사
27. 조리사
28. 침술사
29. 사회복지 분야

이상의 예들은 모든 분야의 직업을 가진 분들이 선교사로서 소명을 받고 충분한 훈련만 받아 준비된다면 훌륭한 평신도 자비량 선교사들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동시에 21세기는 평신도 자비량 선교의 시대가 되리라는 비전을 보여줍니다.

한국에서 파송된 자비량 선교사 1639명을 직업별로 분류한 통계가 다음과 같았습니다.
(1)의료직
1)간호사 104명 6.34%,
2)의사 18명 1.09%,
3)임상병리사 3명 0.18%,
4)치과의사 2명 0.12%,
5)치과기공사 2명 0.12%,
6)한의사 3명 0.18%,
7)물리치료사 1명 0.06%,
약사 4명 0.24%,
약물치료사 1명 0.06%,

(2)교육직
1)유학생 633 38.6%,
2)어학연수 6명 0.36%,
3)교수 13명 0.79%,
4)교사 24명 1.46%,
5)대학강사 2명 0.12%,
6)대학사무원 3명 0.18%,
7)연구원 3명 0.18%,

(3)금융직
1)금융전문가 1명 0.06%,
은행원 7명 0.42%

(4)정부파견
1)외교관 44명 2.68%,
2)청년봉사단 15명 0.91%,
3)평화봉사단 1명 0.06%,

(5)일반직장 29명 1.78%(파견근무, 법률고문, 등)

(6)엔지니어 26명 1.76%(건축사, 건축업, 컴퓨터프로그래머, 토목기사, 자동차수리, 전자기사 등)

(7)스포츠 182명 11.06%(태권도, 합기도 등)

(8)사업 63명 3.77%, (무역업, 자영업, 농장, 사진현상소, 인쇄소, 재단사, 재봉사, 디자이너, 운전사, 미용사, 번역사, 상업 등)

(9)기타 448명 27.2% (사회사업, 취업이민, 배우자, 기타 등)

 

UBF의 자비량 선교 사례들

1. 파견근무 :
L 선교사는 대학시절에 성경 공부를 통해서 예수님을 영접하였고, 1987년에 H 중공업 뉴델리 지사 주재원으로 파견을 받았습니다. 그는 대학시절에 제자훈련을 받고 선교사명을 영접하였으며, 선교사 훈련을 받고 하나님께서 길 열어 주시기를 기다리며 준비하였습니다. 그러던 차에 상사 주재원으로 파견될 때 선교사로 임명을 받고, 처음 몇 개월간은 호텔에서 머물며 회사 일을 보았고, 근무 시간 후의 개인 시간에는 기도하며 인도 학생들에게 복음 전할 길을 찾았습니다. 주말이면 대학을 방문하여 학생들을 접촉하였고, 후에 가족이 오게 됨으로 개인 주택을 얻어 생활하면서 학생들을 가정으로 초대하여 좋은 관계성을 맺으며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믿음으로 회사일도 하니 회사 일도 좋은 성과를 거두어 계속 머물게 되었고, 본부의 인정을 받아 승진도 하였습니다. 그의 사역으로 지금은 150여명의 인도 대학생들이 매주일 모여서 함께 예배를 드리며 인도 대학선교에 동역하고 있습니다.

2. 의사 :
Y선교사는 대학 1학년 때 예수님을 영접하고 제자훈련을 받았으며 선교사명을 영접하고 길 열어 주시기를 기다렸습니다. 본국에서 의사요 교수로서의 안정된 직장과 삶을 버리고 1992년에 예수님의 사랑과 희생정신을 본받아 아프리카에 선교사로 나아갔습니다. 그는 한국정부에서 생활비를 보조받으며 우간다 병원에서 환자들을 진료하고, 의대생들을 가르치면서, 현지 대학생선교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을 가정에 초청하여 정기적으로 성경을 가르치고 함께 기도하기 시작한 결과 지금은 30여명의 학생들을 열매로 얻고 우간다 대학선교를 위하여 함께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에이즈 환자들이 많고, 신변의 위험이 있으나 예수님을 생각하고 순교정신으로 사명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는 매 주일 예배에서 설교도 하고, 학생들을 제자로 양육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본국의 선교후원단체의 지원으로 작은 병원을 세우고자 준비하고 있습니다.

3. 고용인 :
S 선교사는 대학에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선교사명을 영접한 후, 1991년에 대사관 행정보조 고용인으로, 아내는 가정부로 취업하여 몽골에 복음을 전하고자 선교사로 파송받았습니다. 그는 직장에서 근무하며 대학에서 몽골어를 공부하였고, 다른 동역자들과 함께 몽골 대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구약성경을 번역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150여명의 몽골 대학생들이 매 주일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있으며, 이들 중 수 십명의 제자들이 훈련을 받고 직접 현지 대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동역자들이 되었습니다.

4. 해외 청년 봉사단 :
A선교사는 대학시절에 예수님을 영접하고 선교사명을 영접하였으며, 선교사 훈련을 받고 선교사로 나갈 수 있는 길을 찾고 있는 중 한국 청년 해외 봉사단 모집에 응모하여 목공선생으로 스리랑카에 파견받게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목공선생으로 봉사단 일을 열심히 하면서 현지 대학생을 접촉하여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봉사단의 일은 일면 한국의 민간외교차원에서 개발도상국에 한국인들이 무임금(생활비는 한국정부가 감당함으로)으로 봉사하는 것이므로 현지인들로부터 좋은 영접을 받고 있습니다.

5. 사업(자영업) :
W 선교사는 한국과 중국이 수교도 되지 않은 때인 1988년부터 비지니스 비자로 여러 차례 정탐 여행을 하였으며, 한중 합작 회사운영을 하게 되어 사업 비자로 중국에 나아가 장기 체류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현지 대학생들과 개인적으로 사귐을 가지며 은밀하게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여러 처소에서 일대일 성경공부로 제자훈련을 하고 있는 중국 대학생들이 50여명에 이르렀습니다.

6. 교수 :
Z 선교사는 한국에서 대학원을 마친 후 일본에 유학생으로 나?【? 선교활동을 해왔습니다. 그곳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후에 현지 대학에서 교수 보조로서 일하면서 대학생 선교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평소에는 교수로서 강단에서 가르치고 일과 후와 주말에는 학생들을 아파트로 초청하여 성경을 공부시키며 제자 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7. 외교관 :
O 선교사는 대학시절부터 제자 훈련을 받았으며, 외무고시를 합격하여 외교관으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현지에서 훌륭한 외교관으로서의 공무를 수행하고 있으며, 일과 후와 주말을 이용하여 현지 대학생들을 만나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의 전도로 복음을 영접하고 제자가 되어 현지 대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열매들을 많이 얻었습니다.

8. 교사 :
A 선교사는 초등교사로서 러시아의 현지 한인학교 한국어 교사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녀는 훈련받은 선교사 후보생이었으며 교사 선교사로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얻고자 오랫동안 기도하며 찾고 있던 중에 정보를 얻어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9. 간호사 :
K 선교사는 선교사명을 영접하고 간호사로서 선교사로 나아갈 길을 찾는 중에 사우디에서 한국 해외 협력단을 통해서 간호사를 모집하는 기회에 한국에서의 안정된 직장을 사표내고 이곳에 지원하여 나아갔습니다. 병원에서 일하면서 환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으며, 외국에서 취업하여 온 간호사들을 그룹으로 매주 모여서 성경을 공부하며 복음을 심고 있습니다.

10. 성악가 :
C 선교사는 한국에서 대학 성악과를 졸업하고 독일에 유학생 선교사로 파송되었습니다. 그는 현지에서 성악을 공부하여 디플롬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현지 시의 오페라단에 단원으로 입단을 하여 활동하면서 현지 대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로 헌신하고 있습니다. 한국인 최초로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 전곡을 CD로 제작하였고, 독일내 14개 도시 순회 독창회도 열었습니다. 또한 독일어로 찬송가 테이프도 제작하여 보급하며 찬양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역도 감당하고 있습니다. 또한 성경의 본문을 중심으로 한 오페라를 직접 작사하여 오페사 공연을 통한 선교사역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습니다.

11. 컴퓨터 프로그램어 :
K 선교사는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캐나다에 나아가 현지 직장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컴퓨터 프래그러머로 일하면서 현지 대학생들에게 일대일 성경공부로 복음을 전하면서 제자양성을 하고 있습니다.

12. 태권도 사범 :
L 선교사는 태권도 사범으로서 현지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는 태권도 도장에서 제자들을 수련하면서 기도와 성경공부를 동시에 시키고 있습니다.

13. 유학생 :
C 선교사는 대학 1학년 때 대학생선교기관에서 성경을 공부하던 중 예수님을 영접하고 제자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선교 명령및 선교사들의 보고를 통해서 선교 사명을 영접하고 소명을 받았고, 77년부터 3년간 믿음과 제자양성 및 선교사 훈련을 받고, 1980년 1월 독일 Bonn대학으로 선교사 유학생으로 파송받았습니다. 이곳에서 공부하며 독일 대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50여명의 독일 학생들 가운데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사는 자들을 열매 맺었습니다. 그는 1985년에 약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고, 계속하여 독일 대학생 선교에 헌신하고 있습니다. 그는 독일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며 자연스럽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고, 처음에는 아파트에서 성경 공부를 시작했고, 지금은 건물을 세로 얻어서 활발한 복음 전파및 제자양성을 하고 있습니다.

14. 이민 :
L 선교사는 선교를 하기 위해서 1988년 가족과 함께 파라과이로 이민을 떠났습니다. 이를 위해 본국에서 안정된 직장을 버린 것은 물론입니다. 선교사로 파송을 받은 후 처음에는 언어를 습득하기 위해 학교에 들어가 공부하였고,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물질의 자립을 이루었습니다. 그후 농장을 만들어 목축을 하면서 현지 대학생 선교활동을 꾸준히 하고 있는데 지금은 20여명의 파라과이 대학생들이 꾸준히 함께 주일 예배를 드리며, 제자훈련을 받고 있습니다.

15. 단기선교사 :
방학을 이용하여 자비로 해외에 나가서 전도를 하거나 현지 선교사들을 돕는 학생들, 자원봉사로 해외에서 일정기간 봉사하는 의료팀들도 자비량 평신도 선교사의 유형에 속합니다.

 

평신도 자비량 선교에서 유의할 점

첫째, 자기 직업을 갖고 자립 생활을 하면서 선교를 해야 하는 직분이기 때문에 그만큼 굳은 신앙과 예수 그리스도의 헌신적인 삶을 배우는 준비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둘째, 평신도 선교사가 본국의 상사 주재원이거나 현지에 취업을 한 경우 등은 자기가 속해 있는 기관이나 회사에서 선교 활동을 반대할 수가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셋째, 파송교회 혹은 선교 기관에서는 평신도 선교사들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갖고 항상 형편을 살피며 기도 지원을 전폭적으로 해야 할 것이다.

넷째, 가능한 한 임지와 그 나라의 역사, 지리, 정치, 경제, 등에 관한 책들을 읽고 자료를 수집하는 것이 필요하다.

맺는 말

평신도 자비량 선교의 전망

크리스티 윌슨은 성경의 역사에서 하나님의 구속사에 쓰임 받은 사람들이 자비량하며 선교한 인물들이었다고 전제하면서 아담(에덴동산을 가꾸는 자)으로부터 그 예를 들고 있습니다.
평신도 자비량 선교사들은 하나님의 구속역사의 주변 인물들이 아니요, 중심줄기(main stream)에서 하나님께 쓰임 받은 인물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는 평신도 자비량 선교를 신학화하고 과감하게 도입하여 이를 실천함으로서 21세기의 세계 선교를 섬겨야 할 것입니다. 한국 교회의 1,200만 성도 중 수 백 만 명은 평신도 자비량 선교의 자원들이며, 선교사 후보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시대에 한국 교회를 통하여 이루고자 하시는 세계 선교의 장엄한 사역을 위하여 한국 교회가 평신도 자비량 선교를 활발하게 논의하고 실천해야 될 것입니다. 로럴드 알렌의 말로서 이 글을 맺습니다. "강력하고도 깊은 선교정신을 가진 남녀 평신도들을 선교사로 나가도록 독려하는 길 외에는 세계복음화를 성취할 다른 방법은 없다."

 


성서의 지명 / 갈릴리,



성서의 지명






갈릴리 어부들은 가난한 어부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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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 호수의 동편에 자리 잡은 엔게브 키부츠에 동유럽 러시아의 라트비아 출신의 한 어부가 살고 있었다. 그는 1920년대 이스라엘로 이민 와서 자신의 성을 ‘물고기’라는 뜻의 ‘눈’으로 바꿀 정도로 평생을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잡이로 일생을 살아왔습니다. 나이 일흔이 다 되어 은퇴할 무렵인 지난 1971년부터 그는 둘레가 66km나 되는 호수 변을 샅샅이 뒤지며 고대 항구들의 흔적을 조사하여 발표했습니다. 근 20년간의 직접 발로 뛰면서 연구한 그의 업적이 1992년에 출판됐을 때 모든 이들은 갈릴리 호수에 자그마치 16군데의 고대 항구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더욱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비록 그가 유대교인임에도 불구하고 신약성경의 복음서를 집중적으로 연구했고 나아가 ‘복음서에 나타난 고기잡이의 모습이 너무나도 자세하고도 정확했다’고 그는 고백 하므로서 성경의 이야기를 실제로 증명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세계 1차 대전 이후 형성된 양식비평을 포함한 최근의 성경 연구방법들은 대부분 복음서 내용의 신빙성에 이의를 제기했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예수를 직접 대면했던 제자들의 기억과 기록 능력에 의구심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도 베드로와 요한이 원래 ‘학문 없는 범인’이라고 조롱하기도 했다(행 4:13)는 것이다. 그러나 이 어부의 발견은 이들의 의구심을 부끄럽게 하였으며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성경의 상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일깨우는 것이었습니다.

 

그 일예로 당시 생선을 상당히 비싼 식품이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신약 시대 지중해 지역의 기본적인 식사는 올리브기름과 포도주를 곁들인 빵과 생선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자했던 갈릴리 호수 변의 한 어린아이의 도시락도 빵과 생선이었으며 예수님의 비유에서도 생선과 고기잡이가 자주 등장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더운 지역에서 싱싱한 생선은 항상 수요에 공급이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에 값이 비싼 편이었습니다. 교통이 발달되지 못한 당시 생선은 상품성을 높이기 위해 잡은 즉시 가공해서 보관해야만 상품성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대부분 소금에 절이거나 말리고 연기로 훈제를 했고 작은 생선으로는 젖을 담갔을 것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지역의 고고학 발굴에서 이탈리아 ‘쿠메’산 생선 젖이라고 기록된 항아리의 손잡이가 출토된 적도 있습니다. 국제무역을 통해 여러 유통단계를 거치는 생선의 값은 더욱 비쌌을 것입니다. 주후 1세기의 그리스의 역사가 플루타르크는 로마에서 훈제생선 한 수레의 가격이 ‘한 마리의 황소가 이끄는 양 100마리’와 맞먹는다고 기록도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신약시대 갈릴리 호수의 어부들은 값비싼 상품을 취급하는 고급 상인들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나아가 이들은 이방인들에 비해서 이윤을 더 얻을 수 있는 장점을 갖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음식율법인 카슈룻트(신 14:9-10)를 지키기 위해 지중해의 이방인 어부들보다는 갈릴리 호수의 유대인 어부들이 공급하는 생선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갈릴리의 어부들은 예루살렘 시장에서 생선을 팔기 위해 나흘 길을 마다 않고 판로를 개척했을 것이며, 유대인 특수 때문에 호황을 누렸을 것입니다. 따라서 갈릴리 호수에는 여러 군데에 항구가 발달되고 어업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갈릴리 호수의 대표적인 생선은 베드로 고기를 비롯해서 메기, 정어리, 잉어 등입니다. 정어리는 젖을 담그는데 오늘날까지도 대량으로 잡히며 한해 어획량의 절반인 1000톤을 차지합니다. 잉어는 정어리를 미끼로 해서 낚시로 잡으며 정어리와 베드로 고기는 그물을 이용해서 잡습니다. 베드로 고기는 지느러미가 빗같이 생겼다고 해서 아랍어로 ‘무슛트’로 불리는데 길이가 40센티미터까지 자라며 어미가 수정된 알을 입에 넣은 채 치어가 될 때까지 2-3주 동안 보호하는 독특한 습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 물고기는 히브리어로는 ‘물고기를 돌본다’는 의미로 ‘암눈’이라 불리웁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 베드로와 안드레, 그리고 빌립은 벳세다 출신입니다. 갈릴리의 벳새다는 분봉왕 헤롯 빌립이 주후 30년경 로마식 도시 ‘율리아스’로 재건했으며 수많은 갈릴리 사람들이 이곳으로 이주해왔습니다. 자연히 생선의 수요도 늘어났을 것이고 근처의 가버나움에는 대규모 시장이 형성됐을 것입니다. 실제로 벳새다를 발굴했을 때 한 저택에서 수많은 그물추와 낚시 바늘들이 발견됐습니다. 함께 출토된 로마산 고급 수입식기들을 통해서 이 집의 주인은 어업과 관련된 부유한 상인으로 추정되었습니다.

 

안드레, 빌립 등은 원래부터 헬라식 이름이며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헬라 사람들과 대화할 정도로 고급문화에 익숙한 자들이었습니다(요 12:20-21). 시몬 베드로는 전문적인 어부로서 동생 안드레는 물론이거니와 이웃 형제인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동업자로서 두 척의 배를 이용하여 조직적으로 고기를 잡았던 선주겸 어부입니다(눅 5:10). 야고보와 요한의 집에는 일당을 받고 일하는 품꾼들도 있었습니다(막 1:19-20). 이처럼 예수님의 제자들은 경제적으로 자립한 비교적 부유한 어부들로서 생업에 얽매이지 않고 언제든지 자유 의지대로 고기잡이를 떠나 예수의 제자가 될 수도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왜 자신의 활동 중심지를 벳새다에서 가버나움으로 옮겼을까요? 복음서에는 이 도시에 그의 처가가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갈릴리 호수 어업 현장에서의  사업장의 위치는 곧 경제적 이윤과 직결되는 것이었습니다.

티베리아스 북쪽 5km 지점에는 신약시대의 어촌 막달라가 있는데 헬라어 지명은 ‘생선 가공공장’이라는 뜻의 타리케아(Tarichea)입니다. 좀 더 높은 이익을 올리려는 어부들은 생선을 잡은 즉시 타리케아로 수송해서 소금에 절이거나 훈제가공용으로 넘겼을 것입니다. 벳새다의 어부들은 헤롯 빌립의 지배 하에 있었기 때문에 헤롯 안티파스의 관할인 타리케아로 생선을 수송하려면 가버나움 세관에서 막중한 통관세를 지불해야만 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시몬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은 어업의 근거지를 가버나움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가버나움은 타리케아와 같은 헤롯 안티파스의 영토이기 때문에 감세의 혜택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이러한 점을 생각하면서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에 대하여 설교를 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적대시 하였던 바리새인들중 특히 예루사렘의 제사장들의 입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을 하대하는 비꼬는 말을 진실인양 할고 배우지 못하고 가난한 제자라고 하는 설교를 하시는 목사님들도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도 다시한번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김성 교수의 글)


* 예수 당시의 갈릴리 상황 *

http://blog.daum.net/chakage2473/7150447


헤롯 대왕의 아들 안티파스가 만들어낸 작은 구리 동전들, 즉 예수와 그의 추종자들이 틀림없이 매일같이 갈릴리 마을의 큰 마당이나 시장에서 만지작거렸을 주머니 속의 동전들은 현대에 고고학 발굴이 진행되는 곳에서 흙을 체로 칠 때, 초록색과 회색이 어우러진 녹슨 금속 조각들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 동전들을 잘 씻은 후 자세하게 조사해보면, 최초의 교회가 맞붙어 싸웠던 강력한 정치적 상징들이 드러난다. 즉 동전 한쪽 면에는 종려나무 가지가 찍혀 있고(이스라엘 땅의 풍요로움에 대한 성서의 묘사를 상기시킨다), 또 다른 면에는 로마의 월계관이 찍혀 있는데(세계를 정복하는 티베리우스 황제의 권위와 위엄을 상징한다), 헤롯 안티파스가 발행한 이 동전들은 그 자신의 정치적 야심과 메시아에 대한 꿈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즉 대부분의 사람들이 양피지나 파피루스에 빽빽하게 잉크로 기록된 문장들을 통해서보다는 왕의 휘장에서 보다 분명하게 종교적이며 정치적인 선언을 읽을 수 있었던 시대에,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이용하는 동전에 안티파스가 그런 문양(紋樣)을 새겨 넣은 것은, 그가 로마 황제의 공식적 왕관(월계관)의 권위 아래 이스라엘의 이 부분을 소유한 당사자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알리기 위한 교활한 방법이었다.

비록 헤롯 안티파스가 복음서에서는 단지 잠시 나타났다 사라진 인물에 불과할지라도, 그가 갈릴리와 요르단 강 동쪽의 베레아 지역의 통치자로 등극하게 된 과정의 이야기는, 그의 경우처럼 드러나지 않았을 경우라면 아마도 잊혀져버렸을 헤롯 왕조의 음모와 로마의 궁정 정치가 어떻게 특정한 정치 경제적 상황을 만드는 데 역할을 맡았는지를 보여주는데, 세례요한과 예수 그리고 그들의 추종자들은 바로 그런 특정한 정치 경제적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안티파스는 헤롯 대왕의 여섯 번째 아들로서 기원전 20년경, 사마리아 귀족 출신의 말타스(Malthace)에게서 태어났으며, 아마도 그가 소년기에는 갈릴리 땅을 밟아본 적이 없었을 것이거나 혹은 그 주민들의 독특한 전통에 대해서는 평생동안 별로 잘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헤롯 왕가의 응석받이로 키워져, 예루살렘, 여리고, 마사다, 가이사랴 등지의 왕궁들 사이를 계속 왕복하다가, 열 살 정도가 되어서는 공식적인 교육을 받기 위해 로마로 보내졌다. 기원전 4년에 그의 아버지가 사망하고 이어서 그의 형 아켈라오에 맞서 대규모 폭동이 일어난 다음, 이스라엘의 정치적 사태가 그의 인생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은 그의 나이가 고작 열 여섯 살 때였다. 헤롯 왕의 유언에 대한 서로 다른 주장을 놓고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는 가운데, (또한 아켈라오가 유대 지역에 질서를 유지할 능력이 있는가에 대한 논쟁 가운데), 이 젊은 안티파스는 아우구스투스 황제 앞에서 대담하게도, 아켈라오나 그의 또 다른 형 빌립(Philip)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 선왕의 우선적 계승자로 인정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그 주장을 거절하고, 그 형제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결정한 채, 선왕의 왕국을 그 형제들 사이에 분할해줌으로써 유대의 정치적 판도를 바꾸어놓았다. 즉 큰아들 아켈라오는 "부족왕"(ethnarch), 혹은 수장으로 강등되어, 유대, 사마리아, 그 남부의 이두매를 통치하도록 허락받았다. 그 다음 빌립은 "분봉왕"(tetrarch) 혹은 지역 통치자라는 칭호를 받아, 골란니티스, 트라코니티스, 바타내, 파내스(지금의 골란 지역, 요르단과 이스라엘의 가장 북부 지역, 레바논의 가장 남부지역을 포함한다)를 할당받았다. 안티파스는 비록 가장 큰 야심을 품고 있었지만, 역시 분봉왕 칭호를 받아 베레아와 갈릴리 지역의 로마 속국 통치자가 되었다.

로마의 기준에 따르면, 안티파스의 몫은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통치 지역도 변두리 지역이며 지리적으로도 그 두 지역이 서로 상당히 떨어져 있고, 두 지역 어디에도 큰 도시가 없었으며,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지하자원도 없었고, 왕궁에 속한 대규모 농지도 없었다. 베레아는 요르단 강 동편에 그 강을 따라 북에서 남으로 길게 형성된 좁은 농지 지역으로서, 북부의 높은 지역으로부터 좁은 계곡들을 지나 뱀처럼 흐르는 요르단 강을 따라 메마른 요르단 계곡을 지나 사해 동부 해변으로 이어지는 지역이었다. 한편 훨씬 북쪽에 있는 갈릴리는 보다 비옥하고 게네사렛 호수 혹은 "갈릴리 바다"의 북부와 서부 해변 지역을 포함하고 있는데, 충분한 물과 어장(漁場)을 제공했다. 그러나 갈릴리의 북부 산악지역은 곡물 생산에 적합하지 않았으며, 억척스런 농민들만이 바위가 많은 고지에서 농사를 지었다. 갈릴리 남부지역에는 언덕들이 가파르지 않고 평지도 많아 대규모 농원에 적합했으며, 나사렛, 가나, 얍파, 나인 등지의 마을 농민들은 전통적인 농사법을 고수하면서 자신들의 소규모 포도원, 과수원, 가족용 채소밭을 가꾸었다. 100년이 넘도록 하스몬 가문과 헤롯 왕조의 관리들이 행정을 맡았음에도 불구하고, "고지대"(Upper) 갈릴리와 "저지대"(Lower) 갈릴리 모두의 주민들은 적어도 로마의 관점에서 보면 매우 뒤떨어진 상태였다. 그들은 외부인의 개입을 원망하는 미개한 변경 사람들이라는 평판을 받고 있었다. 요세푸스는 나중에 이 지역과 그 주민들에 대해 "갈릴리의 두 지역은 항상 적들의 침략에 저항했는데, 그것은 아이들부터 전쟁에 단련되었고 언제나 그 숫자가 많았기 때문이며, 시골 사람들조차 용기가 넘쳤다"고 표현했다.

안티파스는 재빨리 로마 스타일의 질서를 부과하고자 했다. 그의 첫 번째 조치는 현대적인 행정센터를 확립하여, 경찰력, 시장 감시원, 세금 징수원들을 쉽게 인근 마을에 파견할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갈릴리의 예전 행정수도였던 셉포리스가 최근의 폭동으로 인해 폐허가 되었기 때문에, 안티파스는 그 도시를 현대의 로마식 도시로 재건하여 왕궁, 국고(國庫), 문서보관소, 광장을 갖추도록 명령했다. 건축공사가 끝났을 때, 그는 예전의 주민들이 바루스의 군단병력에 의해 살해되거나 노예로 팔려나갔기 때문에, 충성스런 공무원들과 노동자들을 그 도시에 이주시켰다. 그는 이 새로운 도시를 '오토크라토리스'(Autocratoris)라 이름 붙였는데, 그 문자적인 뜻은 "제국의" 혹은 "황제에게 속한" 도시라는 뜻이다. 이 새로운 도시는 전망이 좋은 높이에 자리잡고 있어서, 주변의 마을들과 농경지에 둘러싸여, 갈릴리의 유일한 중심 도시로서 지역의 시장, 세금 보관, 군대 사령부의 기능을 결합한 도시가 되었다. 셉포리스에 대한 최근의 발굴을 통해 안티파스의 대규모 재건사업의 증거가 드러났는데, 그 거리와 광장, 로마식 대형극장을 포함하여 인상적인 공공 구조물을 보여준다. 이 때문에 요세푸스는 그 후 몇 십 년이 지난 다음에 이 도시를 "모든 갈릴리의 광채"라 불렀다. 그러나 셉포리스-오토크라토리스는 단지 장식으로서만 건축된 것이 아니었다. 새로 즉위한 분봉왕의 왕좌로서, 또한 안티파스가 어려서부터 존경하도록 배웠던 로마식 정부의 본부로서, 이 도시는 그 주변 농민들에 대한 끊임없는 감시와 세금 강화, 교역 확대를 통해 연간 수입을 극대화할 수 있는 유리한 장소였다.

셉포리스에서 동쪽으로 약 15마일 떨어진 갈릴리 해변가 성읍 막달라(성서전통에 따르면 막달라 마리아의 고향)에서 행해진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헤롯 왕족이 다스리던 갈릴리에서 적어도 어업 생산이 급증했었을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증거가 드러났다.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잡이하는 광경은 흔히 성경의 그림이나 교회학교 교재에서 어부가 홀로 노 젓는 작은 배 위에 서서 평화롭게 그물을 던지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지만, 갈릴리 어업의 규모와 목적은 안티파스 시대에 이르러 많은 변화를 겪었던 것으로 보인다. 수천 년 동안 갈릴리에서 고기잡이하는 일은 그 지역 농민들이 파종기와 수확기 사이의 중간에 비교적 한가한 때 했던 일이었다. 생선은 장거리 교역이 불가능했던 이유가 쉽게 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로마시대에 이르러서는 생선을 소금에 절이는 기술이 발전되어, 어업이 산업 규모로 발전하기에 이르렀다. 생산기술의 발전에 따라 시장이 커지게 되었고, 로마제국 전역의 도시인들이 맵고 냄새가 강한 '가룸' (garum)이라는 생선 소스와 생선의 머리와 몸통을 잘게 썰어 소금에 절인 스튜로 만든 '살사멘툼'(salsamentum)을 좋아하게 되었는데, 이 두 가지는 일상적인 조미료로서 매우 값비싼 것이 되었다.

안티파스의 시대에 이르러, 막달라는 어업의 중심지가 되어 흔히 "소금에 절인 생선의 성읍"이라 불려졌다. 따라서 예수 당시 갈릴리 바다의 어부들이 단지 노 젓는 작은 배 위에서 일하던 농민들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 어부들이 매일 잡아 올려야 했던 생선들의 엄청난 무게를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며, 또한 그 생선들을 막달라로 보내 소금에 절이고 눌러 발효시킨 후 맑게 하여 '가룸'과 '살사멘툼'으로 만들어 커다란 항아리에 담아 해외로 팔았던 과정을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처럼 어업이 하나의 산업으로 발전함에 따라, 몇몇 사람들은 많은 돈을 벌었지만 또 다른 사람들은 더욱 비참하게 되었다. 막달라의 발굴을 통해 그 성읍에서 비린내나는 일을 했던 건물들, 좁은 도로들, 저수조들이 드러났으며, 큰 저택에서는 그 주인이 자신을 부자가 되도록 만들어준 원천, 곧 배와 큰 물고기 모습을 자기의 저택 현관 바닥에 모자이크로 만들어 과시했던 모습도 드러났다.

그러나 어업의 발전만이 갈릴리의 농촌 풍경, 곧 올리브 과수원, 포도원, 채소밭, 농경지의 광경을 어지럽게 만든 것은 아니었다. 당시 대부분의 속국 왕들처럼, 안티파스 역시 그 지역을 더욱 생산적으로 만들기 위해 두 가지 방법에 의존했는데, 더욱 악랄하게 세금을 징수하고, 농민들을 동원하여 공공사업에 투입하고 자신의 개인 영지를 개간하도록 만들었다. 안티파스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서 갈릴리와 베레아에서 세금을 징수할 권리를 얻었는데, 이것은 요세푸스에 따르면, 매년 금(金) 200 달란트(약 9톤)를 얻을 수 있는 특권이었다. 물론 그의 영토에는 금광이 없었고, 단지 밀, 보리, 포도, 올리브, 채소와 가축만이 생산되었다. 따라서 그는 수확기에 모든 마을에 감시원, 세금 징수원, 군인들을 보내 자신의 몫을 확보했는데, 현대 학자들은 그가 대략 전체 생산량의 1/3을 챙긴 것으로 계산한다.  

그 이전에 갈릴리 지역이 멀리 있던 제국들 혹은 예루살렘에 기반을 둔 왕국들에 의해 통치되고 세금이 부과되었을 때에는, 세금 징수가 한결같지 않았었다. 그래서 좀더 독립적인 주민들은 헤롯 대왕 시절에 세금 징수원들이 갈릴리 지역에 도착하면, 폭력으로 맞서거나 산으로 도피하거나 했었다. 그러나 이제 안티파스가 갈릴리를 자신의 주요 수입원으로 간주하고, 갈릴리 중심부인 셉포리스-오토크라토리스에 그의 관리들이 상주(常住)하는 상황에서는, 세금 징수가 더욱 빈번해지고 무거워졌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복음서 안에는 세리, 현물세 징수원, 통행세 징수원, 장원(莊園)의 청지기, 그림자와 같은 "헤롯 당원"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런 역사적 인물들은 단순히 악당들로 무시할 수 없는 자들이었다. 왜냐하면 예수 당시에는 안티파스의 궁정과 밀접하게 연관된 관료체제가 더욱 커짐에 따라, 갈릴리의 거의 모든 농민 가족들이 빚더미에 올라앉게 되거나 알거지로 내몰리게 된 데에는 그 관료체제가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예수와 그의 갈릴리 이웃들과 친척들에게는 안티파스의 도시 건설 사업과 중과세가 단순히 그들의 생계에 대한 위협과 전통적 농경방식 및 어업방식에 대한 위협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갈릴리 사람들이 수백 년 동안 유지해왔던 마을 문화의 토대 자체를 허물어버리는 것이기도 했다. 최근에 로마가 지배하기 시작한 초기 시대의 갈릴리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 결과 그 지역의 거의 전부가 농경지였으며, 구릉지대와 계곡들마다 농민들과 목동들이 작은 밭과 목초지 안쪽으로 조잡한 돌집들을 짓고 마당들을 잇대어 작은 공동체들을 열 군데 정도씩 이루고 있어서, 아마도 전체적으로 200개의 공동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마을들 가운데 일부는 철기시대 이스라엘 국가가 생성될 때부터 존속해왔으며, 어떤 마을들은 비교적 훨씬 후대에 만들어졌는데, 모든 마을들이 매우 비슷한 구조로서 단순한 집들(집의 크기나 구조가 특별난 것이 거의 없다)과 혼합경제, 곧 밭농사와 가축 사육, 직물, 가죽, 토기 생산의 구조였다. 실제로 고고학적인 발굴조사 결과는 성경의 최초의 법령과 사회법규에 규정된 생활방식과 매우 흡사하다. 즉 가족과 친척 중심의 혈연 공동체들이 좀 더 큰 씨족과 지역의 부족들로 집단을 이루어 소규모 농경생활을 영위하였는데, 이것은 가뭄, 전쟁, 자연재해로 인한 흉작의 위험을 감수해야만 했던 생활방식이었다. 

이런 농경문화는 인류학자들과 사회학자들이 거의 모든 시대와 장소에 걸쳐 자세하게 연구한 바에 따르면, 단 하나의 목표를 갖고 있었는데, 그것은 조상들의 땅에서 가족이 생존하는 것으로서, 조상 대대로 내려온 옛 전통과 사회제도들을 간직하고 다음 세대에 충실하게 전수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우리가 복음서들, 랍비 문헌들, 그리고 요세푸스의 단편적 묘사들을 통해 얻은 증거들에 따르면, 갈릴리 사람들 역시 조상들의 전통을 열심히 고수했으며, 자신들이 이스라엘 백성의 구성원들로서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위대한 약속들의 상속자들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만일 그들이 자신들의 율법과 전통을 충실하게 지키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아지게"(창 22:17) 될 것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땅을 영원히 소유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들의 조상들의 율법, 곧 사회적 관계, 재산권, 개인 도덕, 축제일, 안식일, 안식년 등에 관한 율법은 앞서 말한 것처럼, 추상적인 종교적 도그마나 개인윤리의 기준이 아니었다. 그 율법들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와 지역 공동체들에게 현실적 헌법이며 행동강령과 지침을 제공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그것을 지키면 그들의 가족과 마을이 살아남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물리적인 상황의 도전 속에서도 번성할 수 있었던 것으로 믿어졌다.

여러 세기를 거치면서, 갈릴리의 주민들도 다른 지역의 주민들과 마찬가지로, 왕들과 그 관리들이 자신들에게 부과하는 무거운 짐을 점차 받아들이게 되었으며, 세금과 공물의 요구에 부응하고 자신들의 가족을 부양할 만큼 충분히 생산하게 되었다. 그러나 왕에게 바치는 세금만이 유일한 강제징수는 아니었다. 갈릴리의 주민들은 (이스라엘의 다른 지역 주민들 모두와 마찬가지로) 생산물의 상당부분을 제사장들에게 바치는 십일조로, 첫 열매의 헌물로, 그밖에 예루살렘 성전의 신성한 여러 기부를 위해 떼어놓도록 가르쳐졌다. 1세기에 이르러서는 모든 이스라엘 남자들이 성전을 위해 십일조 이외에도 매년 반 세겔을 바치도록 되어 있었는데, 주민들이 반 세겔의 동전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곡식이나 농산물과 교환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심지어 가뭄이나 병충해로 인해 수확이 대폭 줄어든 때조차도 세금 징수원들과 제사장을 대신하는 사람들이 모든 타작 마당과 올리브 기름을 짜는 곳에 나타나 자신들의 몫을 챙겨갔다. 만일 특정한 마을이나 지역의 농민들이 헤롯 왕족과 예루살렘 성전이 요구하는 세금을 기꺼이 바치지 않을 경우에는 그 처벌이 매우 엄했고 난폭했다.   

역사가 마틴 굿만(Martin Goodman)은 고고학적 증거들과 문헌상의 증거들을 토대로 당시 유대의 마을들에서 공동체가 해체되는 과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과정이었는지를 분석하였는데, 이것은 복음서들이 갈릴리의 경제적 상황을 묘사한 것과 끔찍할 만큼 똑같았다. 이스라엘 전역의 농업생산량은 아무리 작황이 좋은 해였다 해도 특별히 증가하지는 않았으며, 곡식 생산이 조금만 줄어도 수많은 농민들이 가족을 부양하고 동시에 세금을 납부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더욱 많은 농민들이 다음 해의 수확을 담보로 해서 곡식을 빌려야만 그 다음해까지 가족들과 가축들이 버틸 수 있었다. 실제로 랍비문헌들과 당시의 법적인 문서들에 나타난 증거들을 보면, 헤롯 왕족 시대를 거치면서 시골 농민들의 부채가 급증하였으며, 기댈 곳이 없던 농민들은 심지어 헤롯 왕족의 관리들과 제사장 귀족들로부터도 대부를 받으려 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처럼 임시방편으로 당장 구멍을 틀어막는 방법은 조만간 재앙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는데, 일단 농민들이 다음해의 수확 가운데 더욱 많은 부분을 떼어내어 빚을 갚기로 작정을 하면, 그 다음해에 더욱 큰 빚더미 위에 올라앉게 되기 마련이기 때문이었다. 농민들이 대부를 받기 위해 담보로 잡힐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토지뿐이었기 때문에, 그 부채를 갚지 못할 경우에는 그 가족이 오랜 세대를 거쳐 경작해왔던 그 토지를 빼앗기고 말았다. 수많은 경우에 이런 법적인 조치로 인해 한때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땅에서 자작농으로 살았던 농민들이 영원히 소작농으로 전락하여, 당시 급속하게 증가하던 귀족들의 대규모 농지에 빌붙어서 겨우 생계를 이어가게 되었다.

만일 성경의 율법이 엄격하게 집행되었다면, 이런 상황은 벌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신명기 15장 2절의 분명한 규정에 따르면, 매 7년마다 "이웃에게 돈을 꾸어 준 사람은 그 빚을 면제하여 주십시오. 주님께서 면제를 선포하였기 때문에 이웃이나 동족에게 빚을 갚으라고 다그쳐서는 안 됩니다"고 했기 때문이다. 레위기의 성결법전(Holiness Code)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왜 빚을 탕감해야 하며 재산권을 원 소유자에게 되돌려 주어야 하는지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유일한 진정한 소유주이며, "땅을 아주 팔지는 못한다. 땅은 나의 것이다. 너희는 다만 나그네이며, 나에게 와서 사는 임시 거주자일 뿐이다"(레 25:23). 그러나 헤롯 왕족 시대에 이 율법을 해석한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힘겹게 발버둥치는 농민들에게 꾸어 준 돈을 되돌려 받고 그 이자도 받아내기 위해, 이 명백한 율법규정을 우회할 방법을 찾아냈다. 랍비문헌에서 차압동의서(prosbul)로 알려진 이 계략을 종교 당국과 법 당국자들이 받아들임으로써, 개인 대출을 그 지역 법정에 등록한 경우에는, 심지어 안식년에 상환하도록 된 경우일지라도, 강제로 (법원을 통해 - 옮긴이) 상환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로 인해 대출이 더욱 쉬워짐에 따라, 부채와 차압의 위기는 더욱 심해졌다는 사실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다. 따라서 한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가족들, 씨족들, 부족들에게 적절하고 엄숙하게 분배했던 이스라엘의 마을들이 서서히 귀족 가문들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는데, 귀족들은 왕족들과 제사장 집단 혹은 유휴 동산을 많이 지닌 부자들에게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이런 현실은 안식일과 축제일에 정기적으로 읽던 율법 두루마리의 친숙한 출애굽 이야기와 가나안 정복 이야기를 완전히 뒤집어엎는 현실이었다. 이런 경제적 상황은 영적인 위기를 초래했다. 즉 이스라엘 전역에서 많은 농민들이 생계가 위협 당하게 되자, 왜 하나님께서는 이런 일이 벌어지도록 허용하시는가 하는 긴박한 물음에 직면하게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물음에 대해 종교의례적인 설명을 하여, 백성들의 당면 문제는 하나님의 심판으로서, 그들이 종교의례적 순결의 높은 수준을 유지하지 않았거나 레위기 법전에 명시된 십일조와 헌물을 제대로 온전하게 바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또 다른 사람들은 그들이 그토록 고통을 당하는 것을 귀신이나 악령의 조화 탓으로 돌렸는데, 민간전승에 따르면, 이들 귀신이나 악령은 타락한 천사들로서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탐욕과 분란, 불행을 가져오는 것을 기뻐한다고 했다.

그러나 또 다른 사람들은 폭력적인 보복에 대한 환상에서 위로를 찾았는데,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이런 모든 악을 씻어내고, 하나님께서 노아 홍수 당시에 보여준 것처럼, 부자들과 악한 자들, 우상숭배자들에게 벌을 내릴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 날이 오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단순하고 의로운 사람들에게 영원한 통치를 확립할 것이며, 이사야의 예언처럼, "천한 사람들이 주님 안에서 더없이 기뻐하며 사람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안에서 즐거워할 것이다. 포악한 자는 사라질 것이다. 비웃는 사람은 자취를 감출 것이다. 죄 지을 기회를 엿보던 자들이 모두 끝장 날 것이다"(사 29:19-20). 이런 사람들에게 심판의 날은 이미 지평선 위에 흐릿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그 이후의 사태는 갈릴리의 많은 사람들이, 다른 지역의 사람들처럼, 묵시문학 속에 그처럼 생생하게 예언된 사건들이 나타날 징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또한 그들은 그들 가운데 적어도 일부는 그 하나님의 복수를 지금이라도 피할 수 있으며 하나님 나라의 약속을 물려받을 수 있다고 설교한 예언자들의 음성에 진지하게 귀기울였다.


호슬리 &실버만, 2장에서

 

 

갈릴리(Galilee) 

 

 

 샤론의 백합 | 향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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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 동편에 잇는 남북 14마일 동서 9마일의 호수다.

(1) 구약에는 긴네렛(수13:27).

(2) 신약에서는 게네사렛(눅5:1).

(3) 갈릴리 바다, 디베랴 바다 (요6:1) 단지 바다(마4:18).

(4) 풍랑을 잔잔케 함(마8:26).

(5)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의 4제자를 이 바다에서 불렀다(마4:18).

(6) 이 바다에서 일곱 비유를 가르쳤다(마13:).

(7) 바다 위를 걸으심(마14:22).

(8) 부활 후에 이 바닷가에 나타나서 그물을 배 우편에 던지라 햐여 많은 고 기를 잡음(요21:). 예수님이 갈릴리 도에서 행한 24회 이적 가운데 18회를 이 바다에서 행하셨다.

갈릴리 바다가 특별히 유명한 이유는 예수님이 전도와 이적을 많이 행하셨고 다음은 바다의 수면이 지중해 보다 208미터나 낮은 점이다.

 

갈릴리 바다 위의 그리스도 : 이 작품에 보이는 격렬한 표현주의로 보아 이 그림의 작자는 최고로 재능이 풍부한 틴토레토의 정신적 후계자였던 엘 그레코라고 생각될 정도이다. 확실히 흑암의 하늘에 떠 있는 흰구름의 표현은 엘 그레코의 시정에 극히 유사하고 음화처럼 표현된 묵시록적 공간이 격정을 풍겨내고 있다.캔버스 117*168.5cm.

 

 

갈릴리(Galilee)

뜻:둥글다

1) 구약 시대에는 요단강 서쪽 팔레스틴의 북부를 보통 갈릴리라 하였다(수20:7,왕상9:11왕하15:29,대상6:26).


2) 이스라엘 백성이 처음 가나안에 들어왔을 때 스불론(수19:10-16)아셀 (수19:32-39)자손들이 제비를 뽑아 차지 하였으며 여러번 혈투를 하였지 만 가나안 족속을 완전히 물리치지 못하엿다(삿1:30-33,4,).


3) 예수님이 12제자중 11제자를 이곳에서 택하였다.


* 신약 시대에 팔레스틴을 3도로 나누어 갈릴리의 경게는 동은 요단강과 갈릴리해, 서는 지중해 남은 사라리아도, 서는 지중해 남은 사마리아도 서북은 베니게로서 남북이 50마일,동서가 25마일 내지 35마일로 북방은 산지가 많고 남쪽은 평원이다.

토지가 비옥하고 경치가 아름다우며 404개의 중소도시 및 촌락이 있다.

갈릴리는 예수님의 복음 선교 활동의 중심지 였다. 제자들도 대부분 이곳에서 부르심을 받았으며 베드로가 살던 집도 이곳 갈릴리 해변의 가버나움 마을이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시던 들판도 바로 갈릴리 호수의 북쪽 연안이었으며 유명한 산상보훈의 설교도 이곳 언덕 위에서 였다. 믿음이 부족했던 베드로가 풍랑 속에 빠진 것도 이 갈릴리 호수에서 였다. 해면보다 그 수면이 200m 나 낮은 갈릴리 호수. 평상시에는 잔잔하고 맑으나 때때로 큰 폭풍으로 성난 파도를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

예수님 당시의 갈릴리 호수 연안은 중요한 교통의 요지 이면서 아름다운 경치와 기름진 옥토를 갖고 있어서 주변 인구가 매우 많았다고 한다. 지금도 이곳은 바나나, 목화, 오렌지, 올리브 등 갖가지 농산물이 풍부하게 재배되고 있으며 갈릴리 호수의 물은 전 이스라엘 땅의 음료수는 물론 농업용수와 공업용수까지 대부분 충당하는 생명선이 되고 있다. 심지어 남쪽으로 360Km나 떨어져 있는 네게브 사막의 세데보케(Ssede Boque)까지 물을 공급해 준다. 호수에서 처음 시작되는 송수관은 큰 자동차가 드나들 정도로 크지만 점차 가늘어 지면서 흡사 사람 몸의 혈관처럼 이리 저리 연결되어 전 국토를 적셔 주는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낮은 갈릴리 호수, 바다의 수면보다 700피트 아래에 위치하며 이스라엘 북부 납달리 지파의 땅에 속한 이 담수호수는, 하프의 모양같이 생겼기에 히브리어로 키노르라 불리었고 이는 게네사렛의 어원이 되었다. 지난 25년 동안이나 주후 1세기의 갈릴리를 연구한 고고학자는, 최근에 와서 예수님 당시에 사용하던 배와 배를 고정시키기 위한 돌들과 파도를 막기 위해 항구에 쌓은 방파제(눅 8:23)들을 갈릴리에서 발견함으로써, 과거 초대교회의 역사를 고스란히 21세기의 문턱에 올려 놓았다. 예수님 당시 갈릴리는 수산업이 크게 번창한 곳으로서, 남방 출신인 가롯유다를 제외한 예수님의 제자 대부분이 어업에 종사했던 것만 보아도 이를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다. 


최근 고고학적인 연구에 따르면, 주후 1세기경의 갈릴리 호수내의 항구는 최소 15개나 되는데 그 중에 가버나움, 게네사렛, 막달라디베랴거라사 등 우리에게 친숙한 지명 모두가 항구에 속한 도시로 밝혀지게 됐다. 당시 갈릴리 호수를 중심으로 퍼져있는 여러개 항구들을 통해 많은 여행객들과 상인들이 배를 이용하여 동서편을 왕래하곤 했던 것이다. 로마시대 때에는 오늘날보다 갈릴리 호수의 수면이 약 4피트 정도가 더 낮았다고 전한다. 특히, 베드로와 안드레가 고기 잡던 곳으로서 가버나움 항과 막달라항 사이에 위치한 타브가 항구는 초대교회의 사적지로 아주 유명한 곳이다. 이 타브가에서 예수님은 '나를 따르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소명을 주셨고(막 1:17), 또 부활 후 이른 새벽에 이 항구에 나타나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으로 유명하다. 타브가란 헬라어로 '일곱개의 샘물'이란 뜻으로 이곳에 따뜻한 미네랄 온천이 솟아올랐기에 전통적으로 가버나움 출신의 어부들은 겨울철에 꼭 이곳에 와서 어업을 했다고 전한다. 따라서 이 타브가는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처음으로 만난 곳이고 부활 후에도 마지막으로 이곳에 와서 제자들과 조반을 먹었던 장소로 확증된다(눅 5:1-7; 요 21:1-8).

갈릴리의 예수님의 발자취

갈릴리 바다 주변은 온통 예수님의 발자취로 가득하다 . 예수님은 특별히 갈릴리 사람들에게 애착심을 가지셨다. '이방의 갈길리에 먼저 복음이 전해질 것을 암시한 이사야의 예언 (이사야 9:1)을 생각지 않는다고하더라도 공생애 이전의 삼십여 년의 세월을 보내신 갈릴리에 대한 예수님의 애착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 갈릴리를 답사하는 우리는 발걸음 하나마다 예수님을 생각지 않을 수 없었고 , 숨 한번 들이쉴 때마다 같은 공기를 숨쉬셨을 주님을 묵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

갈릴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은 그 때까지 세상에 존재하던 모든 복의 개념을 뒤집어 엎으시고 , 새로운 복의 나라를 선언하신 팔복산이다 . 이 곳은 산이라기 보다는 갈릴리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야트막한 구릉이다 . 예수님은 여기서 여덟 가지 복을 말씀하셨다 . 구릉 위에는 팔각형으로 된 교회가 있다 . 그리고 교회당 꼭대기에는 작은탑이 서있는데 , 이 교회를 설계한 이탈리아 건축가는 그 탑을 통하여 아홉 번째 복을암시하고자 했다고 한다 . 그가 생각한 아홉 번째 복은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라는 말씀이었다고 한다 . 그렇게 생각해 보면 팔복의 내용 전체가 아홉 번째 복에 귀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그내용 모두가 고난에 귀결되지 않는가 ? 그리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삶이야 말로 모든 복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다 . 작은탑이 교회 맨 꼭대기를 장식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 여겨졌다 . 그리고 그 고난의 십자가는 하늘을 향해 온 몸을 뻗치고 있는 것이다 . 오늘 우리 신앙의 마지막 표현은 바로 그 아홉 번째 복을 통해 드러난 그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팔복 교회의 아름답고 평화로운 정경을 뒤로 한 우리의 발걸음이 닿은 곳은 오병이어 교회였다 . 1930 년대 초에 독일 고고학 발굴팀은 갈릴리 바다의 북서쪽에 있는 다브가 (Tabgha)란 곳에서 매우 소중한 유적을 발굴했다 . 그것은 약 400 년경에 건축된 교회의 유적이었는데 , 그 교회는 아랍인에 의해 파괴되어 1000 년이 넘는 세월을 땅속에 묻혀 있었다 . 특이 이 유적이 의미가 있는 것은 그 교회 바닥에서 모자이크로된 오병이어 모자이크였다 . 그림은 두 마리의 물고기 사이에 둥근 떡들이 그려진 모습 이었다 . 독일 캐톨릭 교회는 발굴된 모자이크를 기념하고 보호하기 위해 그 위에 교회를 지었는데 , 이것이 오병이어 교회인것이다 . 교회당 안에서 우리 마음속에는2천년 전 어느날 예수님 앞에 둘러앉아 있었을 군중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 어린아이가 음식을 내놓을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았던 이기적인 사람들 , 그리고 떡과 고기를 받아먹은 후 배신하여 예수님을 떠난사람들,이런 식으로 우리는 그들을 비난해왔지만 , 그 보다 먼저 은총의 떡을 먹은 그들이 부럽다는 생각이 더 먼저 드는 것은 왜일까 ? 그들은 그래도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하루 종일 어두워질 때까지 말씀을 들었다. 그 사모함과 인내심만으로도 떡과 고기를 먹을 자격이 충분히 있다. 오늘날 예수님께로 잘 가지도 않고, 사모하지도 않으며, 짧은 한 시간 예배도 인내치 못하는 우리들에 비하면 충분히 자격이 있다. '주여 저희에게도 생명의 양식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한 후, 내려오는 길에 기념품 가게에 들러 모자이크가 그대로 새겨진 잔 두 개를 샀다. 집에 돌아올 때까지 그 잔을 깨지지 않게 보관하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지!

  오병이어 교회 근처에 우리를 붙들고 놓아 주지 않는 한 자그마한 교회가 있었다 . 검은색 돌로 지어진 이 작은 예배당은 베드로교회였다 . 교회 안에는 바닥에 넓은 바위가 눈에 들어온다, 안내인은 그 바위 위에서부활하신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가 있었다고 한다. 에수님과 베드로의 대화라기 보다는 예수님과 시몬의 대화였다고 하는 것이 더 옳겠지만, 시몬은 아직 제자답지 못한 불완전한 자연인의 모습을 암시하고, 베드로는 성숙한 예수님의 제자를 암시한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그날 바위 위에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었던 사람은 스승을 부인한 부끄러운 시몬이었던 것이다. 그 순간 그는 베드로라고 불리울 수 없었다. 그는 여전히 부족한 죄인 시몬일 따름이었다. 그리고 그 시몬은 오고 오는 모든 시몬들의 대표이다. 그와 예수님의 대화는 우리 모두와 예수님의 대화이다. 시몬이 예수님과 나눈 대화는 곧 우리가 예수님과 나눈 대화이다. 예수님은 영원한 질문을 던지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 질문 앞에서 숙연해진다. 사랑하지 않으시고 사랑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죽기까지 먼저 사랑하신 후 던지신 질문이기에 그 누가 이 질문 앞에 숙연하지 않겠는가? 우리 일행은 그 바위 앞에서 모두 2천년 전으로 돌아간 듯 숨죽인 채 깊은 묵상속으로 들어갔다, 과연 나는 그 질문에 진실된 사랑의 고백을 드릴 수 있는지? 그러나 예배당을 뒤로하고 나오면서 우리 마음이 어둡지 만은 않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사랑을 묻기 전에 제자들을 숯불가의 만찬으로 초청하셔서 사랑의 떡을 먹이셨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김운성 목사)

 

 

 갈릴리바다가 위치하고 있는 중앙계곡은 지형적으로 갈릴리바다 자체와 갈릴리바다 주변의 비옥한 계곡형 평원으로 나눌 수 있다. 갈릴리바다 주변의 계곡형 평원들은 갈릴리바다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벳세다평원, 갈릴리 바다의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게노사렛평원, 그리고 갈릴리 바다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야르묵-요르단평원 등이다.

 

1. 갈릴리바다

   동쪽으로는 바산고원, 서쪽으로는 하부 갈릴리산지로 둘러 싸여있는 갈릴리바다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큰 자연 담수호이다. 이곳은 일반 바다가 아닌 호수임에도 불구하고 바다라는 명칭이 붙게 된 것은 이스라엘에서의 바다 개념이 우리들이 알고 있는 일반적 바다와 다르기 때문이다. 즉 바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얌'은 바다와 호수의 구분 없이 많은 양의 물이 모여있는 곳을 의미한다. 솔로몬이 지은 성전 뜰에 있었던 물두멍을 '바다'라고 이름하였던 것도 이런 '얌'의 의미와 관련이 있다.(왕상 7:23) 갈릴리바다는 그 자체의 아름다움과 주변의 비옥한 해변으로 인하여 고대로부터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던 지역이다.

 

  (1) 갈릴리바다의 명칭

   역사적으로 갈릴리바다는 여러 가지 다른 명칭으로 지칭되었다. 신약성경에서도 갈릴리바다를 가리키는 데에 네 가지의 다른 이름이 사용되었다. 그 이름은 다음과 같다. 

     ㄱ) 갈릴리바다 (Sea of Galilee): 신약성경에서 이 바다는 주로 '갈릴리바다'라는 명칭으로 통용되었다. 이 명칭은 오늘날에도 기독교인 사이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는 명칭이다.

     ㄴ) 긴레렛바다 (Sea of Kinneret): 구약성경에서는 갈릴리바다를 '긴네렛'이라고 불렀다. 이

                            명칭은 현재 이스라엘에서 이 바다에 대한 공식 명칭이다. '긴네렛'이라는 

                            이름의 기원은 확실치 않다. 일부에서는 하프 모양을 띄고 있는 갈릴리바다와 연관

                            시키기도 하는데, 그것은 하프를 의미하는 히브리어가 '키노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다 정확하게는 갈릴리바다의 북서쪽 해안에 위치하였던 '키나로트'

                            라는 도시에서 기원된 것으로 보고 있다. 초기 이곳에는 뵈니게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그들은 '키나르'라는 신을 섬겼다.

     ㄷ) 디베랴바다 (Sea of Tiberias): 갈릴리바다의 또 다른 명칭은 '디베랴바다'이다. 이것은 

                            갈릴리바다의 서쪽 해안에 안티파스에 의하여 건설된 티베리아스'에서 기원된 

                            명칭이다. 안티파스는 당시 로마왕제였던 티베리우스의 이름을 빌어 이곳 이름을

                            붙였다. 신약성경 뿐 아니라 유대인 경전에서도 이곳을 '티베랴'라고 불렀으며,

                            오늘날 아랍사람들도 이곳을 '바하르 타바리아'라고 부르고 있다.

     ㄹ) 게네사렛바다 (Sea of Gennesaret): 신약성경에서 언급된 갈릴리바다의 네 번째 명칭은 

                           '게네사렛'이다. '게네사렛'은 '지방장관의 정원'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명칭은 갈릴리바다의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게노사르평원에서 연유된 명칭이다.  신약시대와 동시대인이었던 유대인 역사학자 요세푸스 역시 갈릴리바다를   '게네사렛'이라고 기록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갈릴리바다에 대한 여러 가지 명칭들은 이 바다를 둘러싸고 있는 지역이나 그 지역에 있었던 중요한 도시 이름들과 연관되어 있다. 헬라의 지리학자였던 스트라보(Strabo)는 갈릴리바다 남동쪽 야르묵강 근처에 위치하고 있었던 도시의 이름과 관련하여 이 바다를 '가다라'(Gadara)라고 명명한 적이 있다.

 

  

(2) 갈릴리바다의 지형

   갈릴리바다의 남북간 최장 길이는 21km이며, 티베리아와 막달라 근처에서의 동서간 폭은 각각 8km과 12km가 된다. 갈릴리바다 전체 면적은 약 165km2 이다. 갈릴리의 해수면은 지중해보다 210m나 낮다. 그러나 갈릴리바다의 해수면 높이는 계절과 년간 강우량에 따라 기복이 있다. 갈릴리바다의 수심은 가장 깊은 곳이 49m인데, 서쪽보다 동쪽이 더 깊으며 남쪽보다 북쪽이 더 깊다. 이것은 동쪽에 있는 골란고원의 경사면이 서쪽에 있는 갈릴리산지 경사면보다 더 가파르기 때문에 생긴 결과이다. 갈릴리바다의 전체 수량은 약 45억6천2백만m2에 달하고 있다.

   갈릴리바다로 유입되는 요단강을 비롯한 그 외의 다른 유입 물줄기들은 모두가 깨끗한 담수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릴리바다에는 약간의 염분이 포함되어 있다. 대략적으로 1리터의 물 속에 약 250-400mg의 염분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염분 농도는 건조기에는 조금 더 높아지고, 우기에는 낮아진다. 갈릴리바다 물에 포함된 염분은 바다 주변과 바다 밑바닥에 있는 광천수 샘들에서 나오는 염분성분 때문에 생긴 것이다. 그런 요인과 더불어 건조한 날씨로 인한 물의 증발도 염분 형성의 한 원인이 되고 있다. 현재는 이러한 샘들에서 나오는 염분을 갈릴리바다 속으로 유입되지 않도록 특별 수로를 만들어 갈릴리바다 아래 지역으로 빼내고 있다.

   갈릴리바다 주변지역은 언제나 인구가 밀집되어 있었다. 제2 성전시대 갈릴리 주변에는 어림잡아 50만 정도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갈릴리바다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게노사렛평원은 특별히 비옥한 땅으로 유명하였다. 요세프스의 기록에 의하면(유대전쟁사 3:7-8), 이곳은 비옥하고 좋은 토양 덕분으로 잘 맺지 못하는 과실이 없을 정도였으며, 주민들은 모든 종류의 작물을 재배하며 살았다. 이곳은 기후도 알맞아 많은 종류의 생물이 서식할 수 있었다. 이러한 자연의 놀라운 혜택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경쟁적으로 이 지역의 지배권을 차지하려고 노력하는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헬라시대와 로마시대에 갈릴리바다 근방에는 많은 도시들이 세워졌다. 바다 주변에서는 그리스와 로마식으로 지어진 궁전, 원형 경기장, 극장, 그리고 목욕탕의 유적들이 발견되었다. 가버나움, 타브가, 고라신, 아르벨, 벳세다, 수시타, 엘하마, 가다라 같은 도시들의 유적은 당시 이 지역이 얼마나 번창하였던 유대인 지역이었는가를 보여주는 역사적 유산들이다. 높은 문명 수준을 지녔던 헬라와 로마시대의 번영과 갈릴리바다 주변에서 꽃피었던 신약성경 및 초기 기독교의 역사, 그리고 탈무드와 같은 경전을 통하여 나타나고 있는 유대인의 영적 유산은 갈릴리바다 주변의 좋은 자연의 조건 속에서 크게 발전했음이 분명하다.

   갈릴리바다 주변은 300m 이상 되는 가파른 산지로 둘러 싸여 있어 마치 깊은 분지 속의 바다 같은 지형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산지의 급경사는 주변 산지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급작스러운 돌풍으로 바뀌게 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갑작스런 기상의 변화는 특히 헬몬산의 차가운 공기가 나무가 별로 없는 완만한 골란고원의 경사지를 거쳐 갈릴리바다까지 내려오는 과정에서 자주 일어난다. 이러한 돌풍현상은 오늘날도 자주 만나게 된다. 예나 지금이나 물을 크게 요동시키는 갑작스러운 폭풍은 어부와 바다를 항해하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위협적인 요소이다. 예수께서는 이런 돌풍으로 일어난 풍랑을 잔잔케 하신 기적을 보여주셨다.(마 8:26) 

   갈릴리바다에는 많은 종류의 고기들이 서식하고 있다. 울리는 소리를 내는 메기종류인 '바르부트'도 이곳에서 서식한다. 호수에서 서식하는 여러 종류의 고기를 잡아들이는 어업은 주변의 비옥한 평원에서 이루어지는 농업과 함께 이 지역의 중요한 경제적 수단이었다. 이러한 좋은 여건 때문에 고대로부터 사람들은 바다 가까운 주변 지역에 정착하게 되었다. 바다 물이 흘러나가는 출구 근처에서 발견된 인간의 두개골은 10만년전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것은 이 지역에서의 인간 거주가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신약성경과 유대인의 탈무드가 보여주는 것에 의하면, 헬라와 로마 통치시대에 갈릴리 해변가에는 많은 유대인 어부들이 정착하여 살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 역시 갈릴리 주변에서 바다를 배경으로 살았던 어부들이다. 바다에서 잡은 고기는 이곳에서 개발된 저장하는 방법에 따라 상품화되었고 이런 사업은 이 지역에서 크게 번성하였다. 특히 소금에 절여 말린 고기는 로마에까지 수출할 정도로 잘 알려졌었다.



히브리 사고의 원리 / 키아즘(Chiasm), 히브리 문장구조



히브리 사고의 원리

 

[제1원리] 키아즘(Chiasm), 히브리 문장구조로 성경을 해석하라.

 

 역사 속에서 성경을 연구하는 신학자들이나 설교자들은 신약 성경과 바울이 기록한 서실들에 대하여, 그 내용이 이해하기 어렵고 또한 그의 문장 표현력이 당시 전통적인 헬레니즘의 수사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때로는 중복되는 것이 많고 조잡스럽기까지 하다고 혹독한 비평을 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성경을 기록한 언어의 독특한 히브리 문장구조를 모르는 무지한 이방인의 시각을 가진 사람들의 편가에 불과하다. 만약 그들이 바울 서신에 나타난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들과 중복 표현된 부분들이 대부분 ‘교차 병행 구조’ 라고 부르는 히브리 문장구조의 형식인 히브리 사고방식을 가지고 기록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자신들의 무지에 대하여 인정하지 결코 그런 혹평을 가할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고 분석하여 해석하기 이해서는 성경을 기록한 히브리 사고를 가진 성경의 기자들이 사용한 히브리 문장구조의 틀을 먼저 배운 다음에 접근해야 한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사도 바울 이후에 유대인들이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상황에서, 헬라 사고의 문화권에 속해 있는 이방인의 신학자들이 자신들의 전통적인 헬레니즘의 사고방식인 수사학적 접근으로 바울 서신을 해석하여 왔기 때문에 본문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다가 이백여 년 전부터 예수를 믿기 시작한 유대인들에 의해서 자신들의 문학적인 시각을 회복하기 위하여 히브리 문장구조의 새로운 시각으로 성경에 접근하여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히브리 사고로 성경을 다시 해석하기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불분명하고 이해하기 어려웠던 많은 문제적이 해결되는 경험을 갖게 되었다. 이처럼 저자는 히브리 사고에 입각한 히브리 문장구조의 성경해석을 이 책에서 처음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제까지 성경해석의 본문의 개념을 도출하는 작업은 극히 일부분의 전문적인 학자들에게 해당되는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하지만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신약 성경에 나타난 대표적인 히브리 문장구조의 틀로 성경을 해석하는 과정을 체계화하고 시각화하여 성경의 원어를 모르는 사람들까지 쉽게 하나님의 말씀을 접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자 한다. 특별히 저자는 히브리 사고가 무엇인지를 누구나 알 수 있도록 정리하고 이를 토대로 히브리 문장구조로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까지 쉽게 설명할 것을 약속한다. 저자의 이러한 의도를 따라 이 책을 읽는 모든 사람들도 히브리 문장구조의 설교를 활용하는 계기가 될 것을 기대하고 이 책을 쓴다.

 

 히브리 사람들에 의해 기록된 신구약 성경이 갖고 있는 다양한 문학적인 운율과 구조의 독특성은 오래 전부터 학자들에 의해 연구되었다. 이렇게 정리된 히브리 문장구조의 성경 해석할 수 있는 보편적인 원리들이 이 책을 읽는 목회자들에 의해서 신구약 성경 적용하여 설교로 선포될 것이다. 이제 이 책을 통해서 이방인들의 사고를 가지고 있는 우리도 히브리 사고에 입각해서 하나님이 말씀을 기록하실 때의 본래의 의도와 사상을 전체적으로 조감해 볼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이 히브리 문장구조의 성경해석의 원리는 성경 해석학에 있어서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될 것이 틀림없다. 우리는 신약 성경의 바울 서신뿐만 아니라 계시록과 사복음서 및 공동 서신들을 넘어 구약의 모든 내용을 포함하여 특히 시문학의 범주에 속한 말씀을 가지고 히브리 문장구조로 적용하는 설교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교회가 낳은 세계적인 신학자인 풀러 신학대학원의 김세윤 교수는 “주기도문 강해”에서 히브리 문장 구조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마태복음의 주기도문은 매우 치밀한 히브리 문학 구조 속에 담겨 있습니다. 특별히 마태는 히브리 문장 구조의 특성을 좇아 본문을 문장의 가장 핵심이 되는 중앙에 해당하는 위치에 구성하고 있습니다. 왜 마태는 주기도문을 산상 수훈의 핵심 중의 핵심에 위치하도록 구조하고 있는 것일까요? 마태는 이러한 문학적 구조를 통해서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요? 마태가 히브리 문장 구조의 틀을 통해서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를 기록한 것은 우리로 하여금 주기도문의 중요한 내용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마태복음의 문장 구조 자체가 우리에게 이 주기도문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모종의 암시를 미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주기도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청원과 마지막 송영이 짝을 이루고 있는데, 우리는 이것을 인클루지오(Inclusio) - 앞과 뒤의 문장의 일치(짝) - 라고 합니다. 마태가 기록한 주기도문은 이러한 히브리 문장 구조를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김세윤 교수가 주기도문을 강해하는 처음 부분에 히브리 문장구조의 틀을 자세히 설명한 것은, 그것이 우리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를 바로 이해하고 해석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러한 히브리 문장 구조의 원리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성경을 정확히 해석할 수 없을 것이다. 저자가 이 책에서 정의한 ‘히브리 문장구조’ (Chiasm)라는 용어는 이 부분을 연구한 많은 학자들은 ‘교차 병행 구조’라고 언급하고 있다는 것을 먼저 밝힌다.

 

 1. 히브리 사고의 시작, 히브리 문장구조

 

 히브리 사고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 히브리 문장구조를 설명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저자는 알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성경에 나타난 예를 들어 설명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저자는 먼저 히브리 문장구조의 특징을 설명하고 난 다음에 성경의 구체적인 예를 들어 쉽게 설명하는 방법으로 이 글을 진행할 것이다. 히브리 문장구조는 히브리 문학에서 나타나는 문장의 기본적인 형태로 성경의 한 문장 안에서 각 단어가 교차적으로 배열되어진 것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이 분야에 많은 연구를 한 일랜드(Yelland)는 그의 책에서 “히브리 문장구조란 글의 후반부가 전반부에 관해서 도치되고 평형을 이루는 구정을 말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것을 교차 병행 구조라고 부르는 병행적인 형태나, 혹은 반의적인 형태로 기록된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한편 히브리 문장의 원리인 교차 구조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 요소가 나타나는데 이는 역(반의)과 편행이다. 하지만 모든 문장마다 역에 해당하는 반의가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후반부는 전반부에 관해 서로 반의적일 수도 있고, 또는 서로 보충적인 수도 있다. 이는 히브리 문장이 기본적으로 구절, 문장 또는 문장 구조의 전체 내용 중에서 단어나 혹은 생각들이 도치되어 나타나는 병행 구조이기 때문이다.

 

 히브리 문장구조의 가장 간단한 예는 아래에 나타난 구조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구약 성경에는 이런 교차 구조의 요소가 풍부하게 존재한다,. 이 구조는 첫 줄과 마지막 줄이 서로 대응되고, 둘째와 마지막 전의 요소가 대응한다. 이러한 형태는 히브리 문장에서 짧은 길이에서부터 몇 문장, 그리고 심지어 성경의 각 권의 전체의 시작부터 끝ㄲ지 나타나기도 한다. 이런 복잡한 구조는 문법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구조나 성경을 기록한 저자의 의도에서도 조직적으로 언제나 심미적 표현에 집중하게 한다. 히브리 문장의 교차 구조를 이루는 평가 기준은 도치 순서, 병행, 그리고 중심부이다.

 

 히브리 문장구조가 점점 연구되고 발전되면서 다양한 형태의 교차구조를 언급하고 있다. 교차 구조의 종류는 형태에 따라 다음과 같이 연구한 학자가 붙인 이름을 따라 다르다. 그 구체적인 이름을 살펴보면 에파노도스(epanodos), 또한 내향적 병행구조(introverted parallelism) 확대된 내향구조(extended introversion), 집중 구조(concentrism), 키 구조 (the chi-form), 페리스트로페(palistrophe), 봉투구조(envelope conetruction), 델타구조(the delta-form), 반복구조(recursion) 등의 여러 가지 으름으로 불리고 있다. 이 모든 형태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은 교차구조가 두 부분으로 구성되고 후반부가 전반부의 거울상을 가지는 것이다. 그리고 교차구조는 강조하려는 내용을 중심부에 위치시키며, 다른 부분은 병행적인 틀로 배치되어 이를 보충 설명하는 문장의 구조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히브리 문장구조는 이렇게 다양한 방법으로 발전하여 왔다.

 

 지금까지 설명한 내용을 간단한 것부터 성경을 통하여 예를 들어 보자.

 

예) 마가복은 2장 27절

  A 안식일은

   B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B` 사람이

  A`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

 

예) 마태복은 7장 6절

  A 거룩한 것을 게에게 주지 말며

   B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B` 돼지들이 진주를 발로 밟고

  A` 개들이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이 글에서 마태복음의 기자는 히브리 문장구조를 기록하면서 마지막 요소와 문장의 중앙으로부터 처음이 서로 내용상 그것이 설명되어 있고, 마찬가지로 중간은 중간끼리 서로 같은 내용이 설명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한편 마가복음에서는 동일한 단어가 교차적으로 나타나지만, 마태복음에서는 유사한 단어가 역으로 나타난다.

 

 아래의 시편에서 히브리 문장구조는 조금 독특하게 병행되어 있다.

 

 그는 너를 도와 주시고 / 성소에서             도와주시고 / 붙드시며

              시온에서 / 그는 너를 붙드시며       시온에서 / 성소에서

       그는 기억하시며 / 네 모든 소제를         기억하시며 / 원하노라

           너의 번제를 / 받으시기를 원하노라       번제를  / 소제를

      그는 너를 주시고 / 너의 마음대로              주시고 / 이루시고

      너의 모든 도모를 / 그는 이루고                도모를 / 마음대로

  우리가 개가를 부르며 / 당신의 구원 안에서         부르며 / 세우리니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 우리 기를 세우리니       이름으로 / 구원 안에서

 

 위 문장의 시편 20편 2-5절에서 보면 명사와 동사가 쌍으로 도치되어 히브리 문장구조로 병행되고 있다. 시편의 저자는 히브리 문장에서 두 문단끼리 서로 쌍을 이루어 명사와 명사가 서로 병행되어 있고, 동사와 동사가 서로 도치되어 교차하고 있다. 만약 이러한 교차와 도치 구조로 배치된 것을 모르고 해석하게 되면 엉뚱한 방행으로 설교할 가능성이 높다.

 

 예) 시편 135편 15-18절

 

   A 열방의 우상은 은금이요

    B 사람의 수공물이라

     C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D 눈이 있어도 듣지 못하며

      D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C` 그 입에는 아무 기식도 없나니

    B` 그것들을 만든 그들은 그것들과 같고

   A` 그들의 신뢰를 그것들에 두는 그들과 같도다

 

 예) 골로새서 3장 3-4절

 

  A : 이는 너희가 죽었고

   B : 너희 생명이

    C : 감추어져 있음이니라

     D : 그리스도와 함께

      E : 하나님 안에서 

     D` : 그리스도께서

    C` : 나타나실 때

   B` : 너의 생명이

  A` :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이 구절은 A B C D-E-D` C` B` A`의 대칭적 구조로 병행을 이루고 있다. 바울은 이 문장의 중앙으로부터 시작하여 밖으로 확산되면서 서로의 관계를 보완하는 대칭적 히브리 문장구조를 사용하였다. 우리가 이 문장을 가지고 짧은 메시지를 만든다고 한다면 다음과 같이 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이 문장 구조의 중심 주제를 제목으로 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E)라고 말하는 것은 본문의 교차대친 구조를 적용해 보면, ‘그리스도와 함께’ (D-D`)라고 선언하고 있다. 이런 신비한 영적인 연합은 복음 안에서 ‘감추어진 것으로’ (C) 이것은 그리스도계서 ‘나타나실 때’ (C`)에 ‘우리의 생명’ (B-B`)도 함께 나타날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이런 일은 ‘우리가 죄로 인해 죽었고’ (A) 다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스러운 주인공으로 나타날 때 (A`)만 가능하게 된다. 이상에서 히브리 문장의 교차 구조를 따라 본문 그대로 간단하게 저자는 설교로 적용해 보았다.

 

예) 로마서 2장 12-15절

 

 A(12)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B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B`(13)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A`(14)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15)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병하며

 

 이 구절은 A B-B` A` 의 교차 병행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12절에서 두 개의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전체가 언급되어 있고, 이것은 대칭적인 교차 구조를 가지고 13-15절에서 각각 율법에 관해 변증하는 내용을 볼 수 있다.

 

 예) 디모데전서 1장 19절

 

  A 믿음과

   B 착한 양심을 가지라

   B`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A`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 하였느니라

 

예) 갈라디아서 2장 7–8절

 

 A 도리어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기고

  B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이 한 것을 보고

  B`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A`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예) 고린도후서 1장 3절

 

  A 찬송하리로다 하나님을

   B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시오

   B` 자비의 아버지시오

  A`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오

 

예) 로마서 11장 21-23절

 

 A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 즉

  B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C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D 엄위를 보라

    D`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C`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B`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A` 저희도 믿지 아니하는데 거하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얻으리니 이는 저희를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이상의 성경의 예들은 모두 교차 구조에 대해서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2. 히브리어, 히브리 문장구조

 

 히브리 문장구조란 용어는 고대의 수사학적인 용어로 일부 사용되다가 르네상스 이후에 널리 퍼지기 시작하였다. 히브리 문장구조는 특히 구약 성경에 많이 나타나며, 다른 히브리어(셈어) 문서들에서도 같은 패턴의 히브리 문장구조로 언급되어지고 있다. 이 분야를 연구한 독일 신학자 룬드(Lund)에 의해서 신약 성경에도 히브리 문장구조가 나타난다고 발표하였다. 이때부터 시작하여 히브리 문장구조의 연구는 활발하게 진행되어 현재까지 왔다고 볼 수 있다. 한편 히브리 문장구조의 형태는 나름대로 연구한 신학자들에 의해 다른 이름의 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이런 일은 아직까지 히브리 문장구조의 형태가 발전하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저자는 보고 있다. 하지만 이제부터 저자가 모든 용어를 통일하여 히브리 문장구조 즉 키아즘이라고 부를 것이다. 비록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부르지만 그 내용적인 의미는 거의 같기 때문이다.

 

 히브리 문장구조는 몇 가지 특징적인 형태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성경에 가장 많이 나타나는 교차구조라고 부르는 A B – B` A` 의 현태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시편 8편 3-4절에 잘 나타나 있다. 이 형태는 신구약 성경에 가장 많이 나타나는 형태로, 앞에 나와 있는 내용이 다시 뒤에서 대칭적 구조를 가지고 같은 의미를 반복할 뿐 아니라 부연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이런 대칭 구조는 히브리 문장의 대표적인 형태로 우리가 이런 구조를 모르면, 문장의 내용이 단순히 긴 것으로만 이해할 수 있고 복잡한 문장 구조로만 받아들여 서로 연관성이 없이 해석하고 설교할 수 있는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다. 이처럼 우리가 신구약 성경의 히브리 문장구조의 핵심이 되는 교차 병행구조를 모르면 말씀을 바르게 해속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히브리어 문장구조의 틀

 

 키아즘(Chiasm) 즉 히브리 문장 구조한 용어는 고대의 수사학적인 용어로 일부 사용되다가 르네상스 이후에 널리 퍼지기 시작하였다. 키아즘에 해당하는 병행 구조는 많은 구약성경과 다른 히브리어(셈어) 문서들에서 언급되어지고 있다. 이는 독일신학자 룬드(Lund)에 의해서 신약성경에 나타난 것이 제시되었으며 히브리 민족(셈어족)으로부터 서장으로 문화적인 유산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독일 신학자 바레이는 히브리 별행 구조로부터 자신의 병행 구조를 세웠으며, 그는 신약성경에 있는 문학적인 구조의 형태를 분류하였다. 그는 키아즘을 연구하고 결론 내리기를 도치구조(Inversion)형태야 말로 성경에서 발견되는 가장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구조라고 말했다. 초기 키아즘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히브리 문장 병행 구조’가 학자들에 따라 약간씩 의미가 다른 여러 가지의 용어로 다음과 같이 사용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히브리 병행 구조를 연구한 신학자들의 분류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그들이 연구한 이름은 대침구조, 도치 병행구조(Inverted parallelism), 내향적 병행구조(Introverted parallelism), 회귀구조(regression), 원격 병행구조(봉투 구조, envelope figure), 대응구조(correspondence)등 여러 가지로 연구한 학자들마다 다른 이름으로 자신의 책에 붙였다.

 

 한편 ‘히브리 문장구조’는 그 이름에 따라 다음과 같은 형태를 갖는다. 예를 들어 우리가 키아즘의 ‘대칭구조’라고 말하는 것은 가장 기초적인 AB-A`B`의 구조의 현태를 가지고 있다. 이는 신구약 성경에 가장 많이 나타나는 형태로 앞에 나와 있는 내용이 다시 뒤에서 대칭적 구조를 가지고 같은 의미를 반복할 뿐 만 아니라 부연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이런 ‘대칭병행구조’는 히브리 문장의 대표적인 형태로 우리가 이런 구조를 모르면 문장의 내용이 단순히 긴 것으로만 이해할 수 있고, 복잡한 문장 구조로만 받아들이는 관계로 서로의 연관성이 없이 해석되고 설교될 수 있는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신구약 성경의 히브리 문장구조의 핵심이 되는 히브리 문장구조인 ‘병행 구조’를 모르면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책은 키아즘의 기본적인 형태부터 시작해서 복잡한 내용들조차 히브리 문장구조로 인해 하나님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처음부터 차근 차근 쉬운 구조부터 복잡한 구조까지 하나씩 배우면 여러분도 성경의 전문가가 될 것을 기대해도 좋다.

 

시편을 예로 들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예) 시편 8편 3-4절

 

3절  A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B  주의 하늘과

     A` 주의 베풀어 두신         B`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4절  A  사람이 무엇이관대        B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A` 인자가 무엇이관대        B`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시편 기자는 독특한 히브리 문장구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우주와 사람이 어떤 존재가 가치가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A의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셨다는 것에 대하여 A`는 주께서 이 땅에 베푸신 하늘과 별들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4절에 가면 사람과 인자가 병행되고 있고 주께서 생각하고 권고하는 것이 키아즘이 되어 반복적인 설명을 하고 있는 히브리 문장구조를 살펴볼 수 있다.

 

  3. 히브리 문장구조 – 키아즘의 역사

 

 17세기부터 산발적이기는 하지만 몇 명의 신학자들에 의해서 히브리 문장구조의 현태에 관한 연구는 간간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연구는 대개 성경의 원어에 관심이 있는 몇 사람으로 그들은 히브리 문장구조의 현태 정도 찾는 것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 관련된 학자들은 대부분 히브리 문장구조의 형태를 찾는데 있어서 바울 서신과 복음서에 집중하는 정도였다. 그들의 문제점은 자신들이 히브리인이 아니기 때문에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배워서 문장의 구조를 연구하는 수준에 있어 아주 초보적인 단계로 접근한 한계가 분명하였다. 그들의 접근방법도 대부분 전통적 방법을 히브리 문장구조에 익숙한 유대인들의 책을 통해서 적용하는 정도였다. 그러므로 히브리 문장구조의 형태 연구는 역사적으로 세 시기로 분류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초기 교부시대, 종교 개혁시대, 그리고 근대와 현대에 이르는 연구로 구분한다.

 

 키아즘에 대한 관심이 17세기가 되면서 증폭되어 독일과 영국 신학자들에 의해서 히브리 문장구조에 대한 과학적 연구가 시작되었다. 초대교회 역사가인 요세푸스(Josephus)는 구약 성경에 대해서 나름대로 구분하여 춥애굽기 15장, 신명기 32장의 모세의 노래가 “운문 절”의 형태로 기록되어 있고, 다윗의 시편들이 “여러 종류의 운문”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하여 어거스틴과 동시대를 살았던 제롬(Jerome)도 유사한 말을 했다. 그렇지만 히브리 문장구조에 대하여 연구한 학자들은 이것들이 단순히 히브리 문학의 시 형태라고만 보면서, 이런 키아즘은 그리스와 로마의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히브리인들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문장 구조라고 말했다.

 

 어거스틴(Augustine)도 수사학의 교사로서 성경의 문체에 대해 연구하였다. 그는 특별히 구약의 예언서들과 바울 서신에 관심을 가졌다. 한편 제롬도 히브리적인 문장 구조에 많은 관심을 가졌으며, 그는 특히 바울 서신 중에서 디도서 1장 12절, 고린도전서 15잘 33절, 사도행전 17장 28절 등을 깊이 연구했다. 그렇지만 초대교부들은 주로 성경 안에서 이러한 히브리적인 문장구조를 찾으려는 노력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았다. 그 가운데 오리겐(Origen), 크리소스톰(Chrysosto)과 락탄티우스(Lactantius)도 같은 입장을 취하였다. 이런 현상은 초대 교부들이 주로 우리와 같은 이방인의 시각으로 성경을 처음으로 설교하는 입장에서 당연한 결과로 보여 진다. 그 이유는 그들 스스로가 히브리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히브리적인 문장 구조에 무지한 결과로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교부인 오리겐이 이방인의 시각으로 설교하면서 최초로 영해라고 알려진 알레고리로 해석을 시도한 것에 대하여, 우리는 쉽게 그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무지했던가를 유추할 수 있다.

 

콘스탄틴(Constantine)시대에 교회는 만개한 그리스 문화에 동화되어 점차 수사적 방법론의 사조에 밀려 히브리 문장구조의 연구가 점점 더 사라지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르네상스 시대 전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다가 르네상스에 의해 성경에 기록된 히브리 문장구조의 연구가 주로 독일 신학자들에 의해서 관심을 가졌다. 특별히 독일의 로이흐린(Reuchlin)과 종교 개혁자인 루터(Luther)가 히브리 문장구조에 깊은 관심을 두고 연구했다. 하지만 그들이 관심을 갖는 것과 히브리 문장구조를 아는 것에는 많은 제약이 있었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 히브리 문장구조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었거니와 그 어떤 책에도 소개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사운데도 에라스무스(Erasmus)는 신약 성경을 히브리 문장구조를 연구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새로운 흥미를 불러 일으켰다.

 

 근대에 와서 블래스(Blass)는 신약 성경에서 바울 서신은 다른 성경들과 구분되어 문장의 구조에서 독특한 히브리 리듬이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광범위한 형태의 바울 서신의 히브리 문장구조 연구는 요하네스 바이스(Johannes Weiss)에 의해서이다. 그는 히브리 문장구조를 연구한 결과 바울 서신들이 눈이 위함이 아니라 귀를 위하는 문체임을 발견하였다. 특히 바이스의 공헌은 바울의 설교가 병행요소를 많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복음서의 연구에 있어서 저스틴마티(Justin Marty)는 히브리 성경과 헬라의 그리스 회상록을 비교하여 많은 차이점이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 후 마틴 알버츠(Martin Albertz)는 성경은 문학 작품의 일반적인 역사 즉 양식사에 포함 될 수 없다고 했다.

 

 한편 그때까지 만해도 그들이 신약성경에서 헬라어의 수사학 양식의 관점을 가지고 관찰해도 히브리 문장구조(chiasmus)라고 알려진 문학 양식에 관한 연구가 발견되지 않았다. 이 특수한 문학적 양식은 성경 사전에 의하여 “내향적 병행구조”라고 불리 운다. 이것은 브리그(Briggs)와 몰튼(Moulton)의 작품에서 언급되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체계화 작업은 정통 유대인으로 신학자였던 로우스(Lowth)에 의해서 히브리 문장구조의 비약적인 발전과 함께 설교에 적용하게 되었다. 로우스는 신약성경이 전총적인 헬라 문화뿐만 아니라 히브리어의 유산이 함께 융화되어 있다고 했다. 이때부터 우리는 지금까지 전통적인 해석 방법의 헬라의 수사학을 배제하고 히브리어 즉 유대인의 문학 양식인 병행 구조를 현대까지 발전시킴으로 성경 이해에 대한 진일보하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에 나타나는 병행 구조는 그것이 산문이던 운문이던 간에 히브리 문장 구조의 핵심임을 알아야 한다.

 

 계속해서 히브리 문장구조인 키아즘에 관해서 유대인으로 16세기의 드로시(De Rossi)의 작품 ‘눈의 빛’(Meor Enajim)에서 최초로 성경에 나타난 내용을 중심으로 발표되었다. 그는 이 책에서 과거 교부들에 의해 간헐적으로 히브리 문장구조에 대하여 언급 되어왔던 것들과 비교하여 볼 때 획기적인 적용으로 볼 수 있다. 한편 벵겔(J.A.Bengel)dl 1742년에 저술한 주석에서 이 구조에 대해 언급 및 활용되고, 그가 처음으로 병행 구조(chiasmus)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벵겔은 사상이나 용어의 ‘병행 구조’뿐만 아니라, 아직까지 아무도 발견하지 않은 ‘교대 병행 구조’(alternating parallelism)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그는 구체적인 예로 로마서 3장 9절 – 4장 12절을 7개의 부분으로 병행 구조로 배열하고 중심에 3장 22절의 믿음이라는 단어를 배치하였다.

 

 키아즘의 비약적인 발전은 1752년 영국에서 유대인으로 기독교 신학자였던 로버트 로우스(Robert Loeth)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히브리인의 거룩한 시”라는 제목으로 일련의 강의를 시작했다. 이것이 현대적 히브리 문장구조라고 불리는 병행구조 연구의 본격적인 장이 마련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로우스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많은 부분이 히브리 문장 병행구조라는 히브리 시의 리듬의 본질을 발견한 공로가 있다. 그는 히브리 문장구조를 다음과 같이 “각 주기 안의 구성 요소간의 어떤 동일성, 닮음, 관계성으로, 같은 주기의 구성 요소들이나 줄 들 안에서, 어떠한 규칙들에 의해서 상호 간에 일 들이나 단어들이 대답되어지는 것이다”라고 정의했다. 그는 더 발전시킨 히브리 문장 병행구조를 동의적(synonymous, gradational : 눅 1:46-47), 반의적(antithetic, opposite : 잠 27:6), 종합적(synthetic, construction: 시 19:7-9)으로 세분화한 신학자로 기록된다. 이러한 많은 예들이 로우스(Robert Lowth)의 저작인 “이사야서의 새로운 번역”에 아주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일련의 일들은 그가 히브리 문장 구조에 익숙한 유대인이기 때문에 되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때부터 히브리 문장구조는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했다. 정작 로우스의 책이 세상에 나온 것은 독일 학자인 믹카엘리스(J. D. Michaelis)에 의해 수정 보완되어 1758년과 1761년에 각각 출판되었다.

 

 그들의 공로로 인해 우리는 히브리 문장 병행구조의 분야에 기초적인 토대가 마련되었다. 여기서 우리가 어떻게 로우스에 의하여 키아즘이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는가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로우스가 유대인 신학자이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점이다. 우리는 로우스의 절대적인 도움으로 히브리 문장구조에 대한 비약적인 발전과 아울러 더 많은 연구에 획기적인 계기가 되었던 점을 주목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대인 신학자들인 랍비들이 성경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원리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런 그의 유대적인 배경이 이방인 신학자들의 책상에서 성경을 연구한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가 자기 민족이 구약성경을 해석하던 원리들을 가지고 신구약 성경을 히브리적인 문장구조에 관심을 가지고 적용했기 때문에 키아즘의 비약적인 방전이 가능했다고 보면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유대인인 로우스가 기독교 신학자로 히브리 문장 구조의 핵심을 알게 된 것은 아주 우리에게 무척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때부터 그의 유대적인 배경에 입각한 해석학의 적용으로 다른 신학자들이 히브리 문장구조인 ‘교차 병행구조’에 대한 연구의 꽃을 피우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로우스의 연구를 이어 받은 영국의 존 제브(John Jebb)는 1820년에 발표된 “거룩한 문학”(Sacred Literature)에서 로우스가 말한 동의적 병행을 “같은 어원의 병행구조”(coganate parallelism)로 대치할 것을 주장했다. 또한 그는 로우스에 의해 제안된 세 가지 종류 외에 한 가지를 추가하여 이것을 “내향적 병행 구조”(introversion, introverted parallelism)라고 명명한 것이 그의 중요한 공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종의에 의하면 키아즘은 “시의 문장 가운데에 그 줄이 얼마이든 간에 처음이 끝과 병행하고, 두 번째가 마지막 전 것과, 이런 식으로 계속되어져서, 밖에서 안 쪽 중심으로 들어가는 모양”이라고 말했다. 그는 시편 135편 15-18절을 예를 들어 설명하였다. 그는 이 원리를 더욱 발전시켜 병행원리를 구약에서 신약으로 확대 적용하여 많은 문장들을 문단이나 연으로 집단화 하였다.

 

 한편 로우스는 줄 만으로의 병행 구조를 다룬 반면, 독일신학자 제브는 병행조를 긴 본문 부분에도 적용한 것이 공헌이라 하겠다. 계속해서 제브는 “앞에서 열거한 각 형태는 많은 부속 변형과 상호 결합이 존재하며, 여러 절들이 여러 가지 형태로 상호 결합되며, 분위기가 상호 문장에 생기를 띠게도 하며, 사고의 흐름을 특수하게 부각시키기도 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 외에도 병행 구조에는 여러 가지의 변형 형태가 존재하며 각 줄들은 2행 배열, 3행 배열, 4행 배영 또는 그 이상의 형태를 가진다고 하였다. 그는 이 구조를 취급하는데 있어서 American Standard Bible을 사용하였다. 따라서 제브는 실로 키아즘을 대중화시키는 일에 선구자로 간주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영국의 토마스 보이스(Thomas Boys) 목사는 1824년 그의 저서 “Tactica Sacra”와 1825년의 “Key to the Book of Psalms”에서 도치 순서(inverted order)에 관하여 연구한 것을 발표하였다. 보이스는 이러한 형태인 도치 순서 병행은 히브리인의 문학작품, 대화, 토의 등에서 두루 발견된다고 하였다. 보이스는 제브의 ‘내향적 병행구조’란 용어를 버리고 “대응(correspondence)”란 용어를 사용하였는데, 그 이유는 이러한 현상들이 줄들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문장이나 책 전체에도 적용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즉 병행 구조의 한계를 더욱 확장시켜 같은 문단에서 각 대응되는 줄들 간, 뿐만 아니라, 전체 문단 간에서도 이와 같은 상호 대응이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그는 모든 구조를 분류하면서 1) 교대적인 2)내향적인 3) ‘교대적인 + 내향적인’ 결합형의 형태로 분류하였다.

 

 스코틀랜드의 신학자인 존 포비스(John Forbes)는 1854년에 “성경의 대칭적 구조”(The Symmetrical Structure of Scripture)를 출판하여 신구약에 나타난 도치 구조를 찾아냈으며, 그의 책에는 로우스와 벵겔과 보이스 및 제브를 자주 인용하였다. 또 다른 스코틀랜드 학자인 윌리엄 밀리간(William Milligan)은 요한계시록을 연구하여 그의 저술에서 도치 순서 구조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렇지만 그는 제브나 포비스가 사용한 용어들은 사용하지 않고, 단지 “도치 병행 구조”라는 단어만 사용했으며 이러한 구조에 관해 확실한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1908년에 룬드(Nils Wilhelm Lund)가 1942년에 그의 박사학위 논문인 “Chiasmus in the New Testament”를 시작으로 이에 관련된 여러 눈문들을 다수 발표하였다. 그는 1922년에 옥스퍼드 대학 출판부에서 벌린저(E.W.Bulliger)의 감수 아래 “동료성경(The Companion Bible)”을 출간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도치 구조’를 많이 적용해서 발전시켰다. 하지만 이 책은 세대주의 입장에서 편집되어 많은 오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참고로 할 때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또한 1978년에 웰치(John W. Welch)가 “Chiasmus in Antiquity”라는 책을 통하여 그 간의 동 분야에서 이룩한 업적들을 전체를 종합해서 모았으며 여기에 자신의 연구를 포함시켜 편집 발표하였다.

 

4. 단문, 히브리 문장구조의 종류

 

 아래의 분류는 단문의 경우 나타나는 키아즘 병행구조에 적용된 기본적인 분류이다. 정말 히브리 문장구조에는 확실히 절과 간 사이에 병행구조가 있다. 여기서 각 문장의 단락들은 그 글의 중심 문단으로부터 서로 병행하고 대칭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신학자들은 이러한 대칭에 대해서 병행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문장 구조의 병행은 많은 다양성과 등급이 있다. 그렇지만 히브리 문장구조는 여러 가지의 기본적인 형태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러므로 히브리 문장 구조는 아래의 여러 가지 구조들이 교차 병행되어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생하게 구성되어 있다. 히브리 문장구조는 이 몇 가지 기본적인 병행에서 파생되어 다른 여러 가지의 다양한 병행 구조가 포함된다. 우리가 히브리 문장 구조의 기본적인 형태를 알고 있으면 성경에 나와 있는 다른 형태의 것들은 어렵지 않게 적용할 수 있다. 이제 우리가 병행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이는 병행되고 있는 내용과 단어 사이에 어떤 관계로 설명하는 가에 대한 문제이다.

동의적 병행

 

 근대의 최초로 유대인 신학자가 된 로우스는 정의하기를 히브리 문장 병행 구조로 대응하는 곳에 묘사된 단어는 서로 차이가 있어도 실제로 그 의미는 같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좀 더 쉽게 설명하면 문장의 서로 대응되는 병행구조는 같은 의미를 가지나 반복을 피하고 좀 더 이해를 돕기 위하여 동일한 의미를 가진 다른 용어를 사용해서 구체적인 뜻을 설명한다. 따라서 어떤 문장에서 한 주제가 정해지면 그 전체 또는 일부가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는 다른 용어로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단어는 서로 다르지만 그 뜻은 동일한 어원(cognate)이라는 용어가 더 적합하다고 제시했다. 하지만 후대의 이 분야를 깊이 연구한 신학자들은 같은 개념이 점진적으로 상승 또는 하강한다는 의미에서 동의적 병행을 점진적 병행(gradational)이라는 단어가 더 적합하다고 하였다.

 

동의적 병행이 되는 시편에서 그 예를 살펴보자.

 

예) 시편 8편 4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니이까

 

  사람과 인자 그리고 생각과 권고가 서로 동의적으로 병행되고 있다. 시편이나 잠언은 이런 동의적 병행이 많이 나타나는데 그 이유는 같은 문장을 단순히 반복하는 것보다 그 뜻을 더 분명하고 강조하는데 동의적 문장이나 단어를 통해서 표현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히브리 문장구조에서 동의적인 병행은 단순한 반복을 피하고 하나님께서 그 사실을 강조하고 각인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가장 많이 쓰이는 형태의 문장이다. 특히 어떤 사실을 말하고 우리로 하여금 그 의미를 잘못 이해하지 않도록 다시 한 번 동의적인 표현을 써서 그 뜻을 분명히 하기 위한 히브리 문장구조가 가지고 있는 특징이라 말할 수 있다.

 

가장 단순한 히브리 문장구조를 통해서 다시 한 번 동의적 병행을 살펴보자.

 

시편 19편 2절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말한다

 

 본문은 내용적으로 볼 때 병행되는 단어들이 서로 동의적이다. 다른 예로는 시 21:1-2; 24:3-4; 107:1, 사 55:6-7 등을 예시하였다. 동의적 병행은 성경에서 가장 많이 나타나는 히브리 문장구조의 형태로 보면 된다. 우리가 동의적 병행의 구조를 보면 하나님께서 좀 더 구체적으로 그 단어와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비슷한 단어나 같은 의미의 단어를 통해서 강조하고 반복할 때 많이 쓰이는 히브리 문장구조의 가장 일반적인 패턴이다.

 

반의적 병행

 반의적 병행은 문장 구조 안에서 서로 두 줄이 병행이 되고 있으나 서로 간에 단어나 감정이 반대로 되는 경우를 말한다. 한편 히브리 문장구조에서 반의적 병행 구조를 자주 사용하는 덧은 바로 반대적인 개념을 언급하기 때문에 다른 해석이 없어도 성경을 읽는 사람이 쉽게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흰색과 검은색을 대조하여 그 차이를 설명하기 위하는 것과 같다. 아래의 잠언에 나타난 반의적 병행은 서로 반대적인 의미로 설명하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은 쉽게 그 의도를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그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주로 잠언에서 하나님께서 자주 쓰는 방법으로 동의적 병행과 아울러 반의적 병행은 매우 중요한 히브리 문장구조의 형태이다.

 

잠언에 나타난 반의적 병행의 형태의 예를 살펴보자.

 

예) 잠언 27장 6 - 7절

 

친구의 통책은 충성에서 말미암은 것이나

원수의 자주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

배부른 자는 꿀이라도 싫어하고

주린 자에게는 쓴 것이라도 다니라

 

 본문은 서로 대칭되는 단어와 내용이 서로 반대가 되는 단어를 통해서 히브리 문장구조의 반의적 병행의 패턴을 잘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면 친구와 원수가 서로 반의적으로 병행이 되고 있고, 더 발전하여 친구는 충고할 때 충성된 마음으로 시작하지만, 원수의 가식적인 사랑의 행동은 거짓에서 출발하는 것이라고 반의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계속해서 배부른 자와 주린 자가 반의적으로 병행이 되고 있고, 꿀과 쓴 것이 반의적으로 병행되어 그 의미가 너무도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런 예들은 잠언에 주로 많이 나타나고 있는데 더 연구하고 싶으면 잠언 10장 1, 7절과 29장 26절 그리고 시편 20장 7 - 8절에서 찾아보기 바란다.

 

종합적 병행

 

 키아즘은 근대에 와서 유대인 신학자 로우스에 의하면 히브리 문장구조인 병행 구조가 건축물의 형태와 유사하다고 하였다. 그 이유는 단어와 단어, 문장과 문장사이에 동의적 병행이나 반의적 병행이 직접 존재하지 않지만, 본문의 전체 문장과 각 부분들의 주제를 더 분명하게 보여주기 위해서 구조의 형태에서 서로 대칭 및 동질적으로 종합적인 내용으로 병행의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명사는 명사에게, 동사는 동사로, 의문사는 의문사로, 구성 요소들은 구성 요소들에게, 반대는 반대로, 질문은 질문으로 등 유사성이나 동일성이 상호간에 종합적인 형태로 병행이 되는 형태를 말한다. 히브리 문장 구조에서 종합적 병행을 통해서 성경을 쉽게 이해하도록 배려하기 위함이다. 우리가 아래의 예를 보면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종합적 병행에 대한 예를 시편에서 살펴보자.

 

예) 시편 1편1절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죄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않지 아니하고

 

 본문은 단어나 동사가 직접 대칭은 되지 아니하나 비유적이거나 은유적인 같은 사상을 가지고 전개됨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시편 기자는 어떤 점진적인 병행과 종합적인 병행을 동시에 히브리 문장 구조를 사용하여 좀 더 쉽게 이해할 구 있도록 돕고 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복 있는 사람이 어떤 상태에서 살아야 하는지를 실제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고 더 나아가 죄인의 길에 서지도 아니하고 오만한 자리에 앉지 않는다는 행동의 동사를 통해서 복 있는 자가 어떤 자리에 있는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시편 기자는 복 있는 사람은 어떤 자리에 있는가에 따라 그곳이 복된 자리가 될 수도 있지만, 어떤 자리는 죄와 악인들이 있는 복 없는 자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 있는 자는 악인과 죄인 오만한 자들이 아닌 의인들의 자리에 있을 때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설명을 히브리 문장구조에서 종합적인 병행을 통해서 설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말 술 먹는 자리는 복 있는 자리라고 할 수 없고 은혜 받는 자리가 복 있는 가리라는 사실을 시편기자는 너무도 경험적으로 알고 있기에 고백하고 있다. 물론 시편 1편은 복 있는 사람과 복 없는 사람 즉 의인과 악인에 대한 종합적인 병행을 통해서 설명하고 있다.

 

교차적 병행

 

 교차적 병행은 제브에 의해 내향적 병행구조(introverted parallelism)로 제시된 4번째 구조이다. 교차적 병행은 대칭적 병행구조라고도 말하는데 이는 문장에서 줄이 아무리 길더라도 글의 중심에서부터 시작하여 첫 줄이 마지막 줄과 병행이 되고 둘째 줄은 마지막 전 줄과 병행이 되고 그런 식으로 전체가 배열되는 형태를 말한다. 키아즘은 신구약 성경을 기록하고 있는 이러한 ‘히브리 문장 병행구조’를 CHIASMUS(키아스무스, synchysis, epanodos)라고 히브리 문장구조를 연구한 신학자들이 불러왔다. 저자는 히브리 문장구조에 해당하는 이러한 형태를 ‘히브리 문장구조’ 즉 키아즘(chiasm)란 용어로 통일한다. 주님께서 저자에게 키아즘이라는 한 가지 형태의 히브리 문장구조만 배운 것이 아니라 히브리 사고의 전반적인 내용을 배웠기 때문에 이렇게 종합해서 키아즘 프리칭이라는 책을 쓸 수 있는 큰 축북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히브리 문장구조는 문장에 나타나는 글의 형태를 통해서 저자의 의도를 쉽게 파악할 수 있다. 키아즘 병행구조는 신구약 성경에 적용할 수 있는 히브리 문장구조의 핵심적인 원리가 된다. 따라서 히브리 문장구조의 원리는 성경의 모든 문장에 망라해서 적용되고 있다. 실제로 우리가 이상의 히브리 문장 병행구조를 모르면 성경을 정확히 해석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한글 성경은 번역에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병행구조의 원리는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교차적 병행구조는 우리가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예) 마태복음 6장 24절

 

A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B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B`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A`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본문은 A에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고 언급하면서 A`는 구체적인 설명의 형태로 한 사람은 우리로 적용하고 두 주인은 하나님과 재물이라고 정확한 해석을 하고 있는 형태가 교차적 병행구조의 키아즘이다. 실제로 우리가 키아즘을 모르면 두 주인이 정확히 무엇인가를 고민할 수 밖에 없다고 선언하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든지 재물을 섬기든지 하는 존재이지 둘 다 섬길 수 없도록 지음 받았다고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존재를 섬길 것인지를 선택해야 하는데 주님은 하나님을 섬길 것을 암시적으로 압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키아즘의 형태인 교차적 병행은 가장 많이 나오는 형태로 긴 문장이 아닌 짧은 문장에서 즐겨 쓰는 방법이다.  

 

마태복음에서 우리는 또 다른 예를 살펴보자.

 

예) 마태복음 10장 16절

 

A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B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고다

 B`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A`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위에 나타난 예를 보면 AB-B`A`로 기록하고 있는 교차적 병행구조를 볼 수 있다. 이러한 현태는 성경에 가장 많이 나타나는 히브리 문장 구조 형태에서 찾을 수 있다. 또한 이러한 병행 구조는 성경해석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에 해당한다.

 

교대적(alternating) 병행

 

 교대적 병행은 전반부의 내용이 그대로 후반부에서 같은 순서로 전개되는 것을 말한다. 이런 히브리 문장 병행구조 형태의 문장이 반복되면서 성경의 저자가 자신의 의도를 자연스럽게 그 뜻을 밝힘으로 이 본문을 해석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다르게 해석하는 실수를 막고자 함이다. 예를 들어 성경의 저자는 교대적 병행의 구조를 통해서 자신이 A라고 말한 것은 A`라는 의도의 뜻이기 때문에 다른 의미로 해석하지 말라는 적용된 설교의 문장구조이다. 그러므로 히브리 문장구조에서 교대적 병행의 짝을 찾으면 무엇을 설교할 것인지를 저자 자신이 분명하게 말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엉뚱한 내용으로 설교할 수 없게 해준다.

 

이제 우리는 교대적 병행구조의 예를 살펴보자.

 

예) 마태복음 6장 34절

 

 A 그러므로 내일 일을

  B 염려하지 말라

 A` 내일 일은 내일

  B` 염려할 것이요

 

 교대적 문장구조는 병행이 나타날 때 같은 순서로 반복되어 설명하는 수순을 따라 기록된다. 본문은 짧지만 AB-A`B` 교대적 병행구조로 되어있다. 다시 말해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일이기에 내일 것까지 오늘 가져다가 염려하는 어리석은 일을 반복하지 말라는 교훈을 강조하고 있다.

 

또 다른 예를 계속해서 살펴보자.

 

예) 에베소서 1장 15절

 

A 주 예수 안에서

 B 너희의 믿음과

A` 모든 성도를

 B` 향한 사랑을

 

 본문은 아주 단순한 문장이기는 하지만 AB-A`B` 교대적 병행구조를 볼 수 있다. 이제 우리는 누가복음에 나타난 교대적 병행구조의 예를 살펴보자.

 

 예) 마태복음 7장 7 - 11절 [기도의 명령]

 

A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B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C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요

 

A`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B` 찾은 이가 찾을 것이요

  C`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라

 

 이 문장의 예는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내용으로 ABC-A`B`C`의 순서로 교대적 병행구조로 본문이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저자는 몇 가지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첫째로 이 본문은 앞에 등장하는 ABC의 문장과 A`B`C`의 교대적 병행구조가 단순히 강조하기 위한 서술인가 아니면 그 이상의 다른 의미의 설명인가 하는 문제이다. 둘째로 이 본문이 기도에 대한 약속인데 같은 내용을 다른 내용으로 설명하는 것인가 아니면 전혀 다르게 표현한 기도의 점층적 표현인가 하는 문제이다. 실제로 이 본문은 히브리 문장구조의 키아즘의 진수를 알려주는 기법으로 우리가 이 패턴을 잘 이해하면 다른 성경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먼저 ABC는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불변적인 약속임과 동시에 히브리 문장구조에서 명령형 동사로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명령형 동사는 히브리 문장구조에서 아주 독특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명령형 동사가 하나님께서 약속한 말씀이라고 할지라도 그 명령의 약속대로 순종할 것을 전제함과 동시에 순종할 때 그 말씀이 실행이 되도록 결정해 놓았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말씀을 백번 천 번 암송하고 가슴에 품고 있어도 이 말씀은 아무런 일을 할 수 없다. 그 이유는 히브리 사고에서 명령형 동사는 순종할 때 일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직접 그 기도하라는 약속을 붙잡고 기도하는 그 시간이 바로 하나님께서 직접 그 기도를 응답하시는 타이밍이다. 하나님은 기도에 대해서 순종에 대해서 믿음에 대해서 아는 것에는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으신다. 도리어 우리가 기도할 때, 순종할 때, 믿음의 반응을 할 때 일을 시작하신다. 그것이 명령형 동사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의 실행 원칙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기도하는 자를 찾으시고 그 사람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역을 진행하신다. 이 원칙은 히브리 사고의 명령형 동사가 가지고 있는 전제이며 원칙이다. 이 원칙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변할 수 없는 진리이다.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하는 사실은 ABC가 주님께서 보편적인 모든 사람들에게 약속하는 명령형 약속이라는 사실이다. 실제로 ABC 단계는 기도와 응답에 대해서 약속하는 명령일 뿐 응답 자체는 A`B`C`의 단계에서 우리 자신이 기도할 때 성취되는 응답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히브리 문장구조에서 ABC가 보편적인 기도하라는 명령의 약속일 뿐이다. 이 단계에서는 기도의 능력이나 응답이 있을 수 없다. 기도의 응답은 A`B`C`의 단계에서 그 약속의 말씀을 믿고 실천하는 자들이 경험하는 세계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것이 본문의 히브리 문장 교대구조를 통해서 주님께서 가르쳐 주고자 하는 분명한 목적이다. 이 본문은 성경 각권을 다룰 때 마태복은 키아즘 편에서 아주 자세히 언급할 것이다.

 

교대적 병행구조의 예를 하나 더 살펴보자.

 

예) 고린도전서 3장 6-7절

 

 A 나는 심었고

  B 아폴로는 물을 주었으되

   C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느리라

 

A` 그런즉 심는 이나

 B`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C`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분쟁은 언급하고 해결하려는 과정에서 일어난 분쟁의 원인을 근본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본문의 핵심 키아즘 구조이다. 고린도 교회에 일어난 분쟁의 원인은 제일 먼저 지도자들에 대한 왜곡에서 시작된 것을 바울은 잘 알고 있었다. 이 교회를 개척한 바울을 지지하는 바울파가 득세했고, 그 다음은 초대교회의 정신적 지주인 베드로를 지지하는 베드로파가 도전했고, 바울을 이어 목회학 아볼로를 지지하는 아볼로파가 만만치 않았고, 마지막으로는 예수를 믿기 때문에 자신은 누구의 파도 아닌 그리스도파라고 만날 때마다 큰 파벌 싸움이 있었던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바울은 이 분쟁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고 히브리 문장구조인 교대적 병행구조를 가지고 한 방에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관점에서 출발하고 있다.

 

 바울은 A에서 나무로 고린도 교회의 개척을 비유하면서 자신은 심었을 뿐인데 그 심었다는 의미를 A`에서 심은 자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설명하고 있다. 바울이 자신을 지지하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교회의 지도자인 목회자의 위치가 어떤 존재인지를 스스로가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선언하고 있다는 점이다. 많은 교회가 지도자의 문제로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현 시대의 상황에서 본문에서 바울 자신이 자신의 존재의 위치를 부정하는 것은 목회자의 현재의 위치가 어떤 모습인지를 깨닫고 적용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복적인 관계를 설명하는데 완벽한 샘플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지도자란 자리의 문제가 아니고 역할의 문제만 있다는 인식이 고착화된다면 많은 교회의 자리의 갈등이 해결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바울은 계속해서 B에서 아볼로를 지지하는 성도들을 향해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나, B`에서 설명하기를 물주는 이도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대단한 존재가 결코 아니라 바울 자신처럼 아볼로도 아무 것도 아니라고 선언하는 키아즘 구조인 것이다. 지도자가의 자기 부인은 오늘날 메가톤급 교회의 목회자가 하나님의 위치처럼 높아진 상황에서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하고 깨닫게 하는 고백이 아닐 수 없다. 교회의 지도자는 단지 심는 일과 물주는 일의 역할만 존재하고 결국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설명은 오늘날 우리 교회의 모순을 단번에 해결할 수 있는 원리가 아닌가 여겨진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모든 갈등과 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결정문을 선언하는 히브리 문장 교대적 병행구조를 보여준다. 바울은 C에서 ‘오진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였으니’라는 선전포고 같은 말씀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다. 바울은 여기서 오직이라는 유일무의한 단어를 선포하고 있는데 이 단에서 반발하거나 거부할 자가 없어야 한다는 경고적인 말씀이다. 오직 고린도 교회가 성장하고 자라는 것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이고, 또한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이지 그 어떤 개인의 교회가 될 수 없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바울은 C`에서 오직 고린도 교회를 자라게 하신 이는 하나님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말씀은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뿐 그 누구도 교회의 주인이 될 수 없다는 의미이다. 교회의 성도인 양떼도 주님의 양이지 그 어떤 지도자나 목회자의 양이 될 수 없고, 교회 자체도 하나님만이 주인이라는 선언적인 병행구조의 설명이다. 이런 사실을 망각하고 그 어떤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자리에 앉은 것은 사탄적인 발상이라고 주님은 말씀하고 계신다. 결국 바울은 심는 자나 물을 준 자는 하나님께 그 행한대로 상급을 받을 뿐, 이 땅의 그 어떤 목회자라고 할지라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설명하였다.(고전3:8)

 

5. 장문, 히브리 문장구조의 형태

 

순차적 병행

 

 순차적 병행은 저자가 신구약 성경에서 제일 먼저 발견한 히브리 문장구조의 형태이다. 또한 저자는 히브리 문장구조의 전체를 키아즘(Chiasm)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통일시켜 신학적으로 처음으로 붙여 말하는 것이다. 저자가 보기에 순차적 병행구조는 헬라 사고에 익숙한 사람들이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문장구조임에 틀림없다. 지금까지는 그 어떤 사람도 성경이 히브리 문장구조로 병행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가장 쉬운 구조조차 설교로 발전시키지 못했던 것이다. 저자도 키아즘을 배우고 설교에 적용하고 가르치면서 마지막까지 풀리지 않았던 것이 바로 순차적 병행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키아즘을 연구하면 할수록 지금까지의 병행적 분류로 해결할 수 없는 본문이 많다는 것에 대한 문제에 봉착했다. 그러다가 순차적 병행 문장으로 설명한 본문이 있다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발견했다. 그 후 신구약 성경 가운데 순차적 병행이 많이 있을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본문의 병행구조들을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발견은 저자가 우직스럽게 성경 본문만을 붙잡고 한길만을 걸어온 것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의 결과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히브리 문장구조에서 순차적 병행은 긴 본문 안에서 각 절 별로 병행적 구조가 같은 패턴으로 계속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A 와 A`가 순서적으로 설명되어지고 계속해서 B 와 B`의 패턴으로 C C`, D D`로 연속적으로 설명되어지는 구조이다. 이런 구조는 헬라 사고에 익숙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만들어진 특별한 구조임을 저자가 찾아낸 원리이다. 순차적 병행구조는 이야기 형태의 글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짧은 본문만 가지고 키아즘의 형태를 찾았다면, 긴 본문에서 순차적 병행구조로 접근할 때 전체적 내용이 한눈에 들어오는 병행구조라는 사실이다. 앞으로 이런 예들은 이 책에서 많이 접하겠지만 이렇게 글로 설명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점을 인식해 주면 좋겠다.

 

 히브리 문장구조의 순차적 병행은 지금까지 획일적인 형태만을 고집한 사람들의 선입관을 깨고 새롭게 성경을 접근하고 해석할 수 있는 획기적인 틀을 마련해주었다는 점이다. 저자는 이런 히브리 문장구조의 형태를 새롭게 분류하여 키 구조와 브이 구조로 구분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성경이 히브리 문장구조로 되어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의 문제를 알아야 한다. 이는 성경이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그 시대에 주신 설교의 현태를 가진 문장의 형태로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볼 때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라는 문장으로 우리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이미 성경 자체가 하나님에 의해서 해석되어진 말씀으로 받아야 한다. 그러면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은 무조건 해석하고 주석해서 오늘날의 환경에 적용을 덧붙여 설교한 모든 행위에 대하여 다시 한 번 되물어 보아야 마땅하다. 지금까지 수천 년간 설교해 온 것을 정당화하는 것이 마땅한가 말이다. 저자는 이제부터 히브리 문장구조를 이해한 목회자는 자신의 의지를 따라 해석한 설교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설교한 문장구조를 가지고 선포하는 자리로 돌아와야 한다는 믿는다.

 

히브리 문장의 키(X, Chi) 구조

 

 히브리 문장구조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는 교차병행구조라는 부르는 키 구조이다. 이 형태는 신구약 성경의 많은 분량이 키 구조의 형태라고 보면 틀림없다. 이것은 히브리 문장에서만 나타나는 형태로 다른 언어에서는 그 유래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만약 우리가 이런 히브리 문장구조로 글을 쓰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성경을 번역해보면 이런 구조로만 번역이 가능하게 되어 히브리 문장의 형태로 글이 구성된다. 성경이 이런 형태로 기록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의 형태로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기록된 글이기 때문에 필연적인 결과였다. 결국 이런 히브리 문장구조의 형태는 하나님의 사고로만 기록할 수 있는 유일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설교 형식의 문장에서는 반복과 점층적인 상승과 설명이 필수적인 것이기 때문에 이런 히브리 사고의 문장 구조가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키 구조의 예들은 앞에서 많이 언급했고 앞으로도 성경의 각권에 나타나는 예들을 구체적으로 제시할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히브리 사고의 문장의 현태가 나올 때 해석자가 가장 주의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망각하면 그는 설교자의 자격이 없다. 키 구조의 해석은 이미 성경 자체가 해석적인 문장의 구조로 설명을 하고 있기 때문에, 해석자는 그 구조의 분석만 잘해도 이미 설교의 내용은 다 준비된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이렇듯 키 구조의 형태는 우리가 많은 실습을 통해 습관적으로 찾을 수 있는 준비가 되어야 한다. 저자는 이 책을 읽는 모든 분들이 히브리 문장구조의 키 구조에 전문적인 안목의 사람이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히브리 문장의 순차적 구조(V구조)

 

 브이 구조의 히브리 문장구조는 저자가 새롭게 찾아낸 히브리 문장구조의 틀이다. 저자는 브이 구조를 키 구조에 넣기 보다는 너무 다른 형태이기 때문에 새로운 히브리 문장구조 안에 배치하였다. 특히 브이 구조는 순차적 병행이라는 이름으로 저자가 분류하였다. 물론 브이 구조는 키 구조의 형태에서 변형된 것으로 헬라 사고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친숙한 히브리 문장구조이다. 이는 저자가 십년동안 키아즘 즉 히브리 문장구조를 연구하면서 찾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의 결과하고 고백하고 싶다. 이런 형태는 앞으로 설교자가 앞 뒤 문장의 형태를 잘 보면 찾을 수 있는 원리이다. 정말 좋은 설교자가 되길 원하면 이런 브이 형태의 키아즘을 찾으면 된다. 한편 브이 구조의 설교의 형태는 실제로 헬라 사고의 문장에 길들여진 우리에게 익숙한 문장의 구조이기 때문에 우리가 더욱더 쉽게 친숙할 수 있다.

 

  브이 구조의 형태의 문장은 아주 단순하게 성경의 기록자가 한 문장을 설교하고 바로 다음 문장에 연속해서 자신의 해석을 달아 놓은 형태이기 때문에 찾기도 쉽고 접근하기도 쉬운 글이 분명하다. 이방인의 문장의 사고에도 아주 숙달된 문장으로 우리가 좀 더 찾기 쉬운 것이 특징이다. 브이 구조의 문장 형태는 특별히 논리성이 강한 서신서에 가장 두드러진 현상이라고 보면 된다. 그 이유는 서신서가 주로 내러티브 문장이 아닌 서술적인 문장으로 된 설교의 형태이기 때문에 이런 구조로 작성할 때 좀 더 쉽게 이 편지를 읽어주고 들려주고 이해하는데 훨씬 더 효과적인 문장의 형태이기 때문이다.    

 

 브이 구조의 키아즘의 해석은 키 구조의 해석보다는 우리에게 좀 더 친숙하고 익숙한 형태로 접근할 수 있다. 성경의 기록자가 이미 설교로 해석해서 적어 놓았기 때문에, 설교자가 억지로 해석하려고 애쓰지 않고도 쉽게 설교할 수 있는 형태이다.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은 브이 구조만 찾으면 이미 성경의 원저자가 기록해 놓은 순서대로 설교의 뼈대가 완전하게 있기에 우리가 억지로 해석하려고 힘쓸 필요가 없이, 설교자는 그 내용의 순서를 따라 잘 적용하여 설교하면 될 수 있다. 이번에 저자는 이 책에서 성경 전체를 통해 브이 구조의 형태의 설교를 많이 접하게 되고 익숙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정말 특이한 점은 브이 구조가 다시 키 구조의 문장 형태로도 도치된다는 사실이다.

 

이제 브이구조의 본문을 가지고 그 예를 살펴보자.

 

예) 눅 16장 17-31정

 

A(19절) 한 부자                   A`(20절) 한 거지 나사로

B(22절) 그 부자의 죽음            B`(22절) 그 거지도 죽음

C(23절) 그 부자가 음부에서 고통   C`(23절) 그 거지는 아브라함의 품에 있음

D(24절) 아버지에게 처음으로 간구  D`(25절) 하늘 아버지의 대답

E(27절) 또 다른 간구(영혼구원)    E`(29절) 하늘 아버지의 또 다른 대답

                     F(29,31절)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들으라

 

 본문은 히브리 문장의 순차적 구조를 가장 명확하게 보여 준다. 비록 히브리 문장의 순차적 구조를 전혀 모르는 사람조차 저자가 작성한 본문의 구조만 보아도 하나님께서 이 본문을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특히 본문은 처음에는 두 사람의 대칭적 관계를 대비하면서 말씀하고자 하는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면, 중반부에 가면서 천국과 지옥의 병행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도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후반부에서는 한 부자와 주님의 대화를 통해서 이 땅의 사람들을 구원하는 방법에 대한 이여기로 마무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렇듯 히브리 문장의 순차적인 구조는 도표로 표현되고 그 주제나 제목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하나님께서 무엇을 의도하고 말씀하고자 하는 내용이 무엇인지를 이것을 보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알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는 것이 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순차적 병행구조를 모르고 읽거나 설교하면 그 내용이 명확히 드러나지 않을 가능성이 너무 크다는 사실이다. 결국 히브리 문장구조의 원리를 알고 어떤 구조인가를 아는 것은 하나님의 의도하신 말씀의 핵심을 한 눈에 파악하는 것이 키아즘의 특징이라 말할 수 있다. 이 본문은 누가복음 키아즘 편에서 아주 자세히 다룰 것이다.

 

6. 히브리 문장구조의 성경 해석 및 적용

 

 히브리 문장구조의 ‘키아즘의 병행구조’는 현 시대에서 보면 비효율적이고 문장이 너무 복잡하게 보일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이것을 가볍게 취급하고 간단히 넘길 문제가 아니다. 특별히 히브리 문장구조가 이렇게 독특한 양식을 갖고 있는 것은, 성경을 읽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기억하기 쉽고 강렬한 인상을 심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는 문서가 발달하였으나 그 당시는 구전 문화로 모든 것이 구전에서 구전으로 전해진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이런 당시 문화적인 역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히브리 문장 구조는 아주 독특한 특성을 가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히브리 문장구조는 그 특성상 한번 들으면 쉽게 잊어버릴 수 없는 구조로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그 이유는 당시 히브리인들에게 성경은 모든 사람등의 필수적인 법과 질서를 가진 경전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히브리 문장 구조를 모르면 본문을 정확히 해석할 수 없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하나님께서 직접 해석해 놓은 책 성경

 

 하나님께서는 각 시대의 형편을 따라 시대에 맞게 적용해서 히브리 기록자들을 통해서 직접 설교한 본문을 기록한 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이다. 따라서 성경은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신 설교의 기록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의지를 따라 단어와 문장을 잘못 해석하는 일은 더 이상하면 안된다. 물론 목회자 자신도 이런 설교를 하는 것을 조심하고 또한 설교를 듣는 청중들도 인위적인 설교를 더 이상 용납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제부터 지향해야 할 설교를 더 이상 용납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제부터 지행해야 할 설교는 하나님께서 직접 작성하는 히브리 문장구조를 따라 충실히 전달하는 역할을 해야 마땅하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직접 말씀하신 설교를 제쳐두고, 자기의 신학의 틀을 가지고 전통적인 방법으로 설교하는 것은 자신도 괴롭고 듣는 사람도 괴로운 일이기 때문에 더욱 곤란하다. 그러면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신 설교의 원고를 가지고 설교자인 우리가 현 시대의 쉬운 언어로 적당한 예화를 삽입하여 잘 전달하는 순간,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설교 가운데 자신도 느끼고 듣는 사람들도 공통적으로 경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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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2:5-11

5-11절은 키아즘(Chiasm)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키아즘 구조란 헬라어 알파벳의 X를 크히(Chi)라고 읽는데서 나왔는데, A-B-C-B’-A’로 짝이 맞는 구조를 말합니다.
C를 중심으로 좌우가 짝(연관, 관계)이 맞는 것인데, 하나님의 창조 디자인, 구속 디자인, 성막 디자인이 모두 키아즘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DNA와 RNA구조도 키아즘 구조로 되어 있으며, 우리 인체가 좌뇌는 목아래 우측을, 우뇌는 목아래 좌측와 연결되어 있는 것도 키아즘 구조입니다.

5절(A) - 6절(B) - 7절(C) - 8절(D) - 9절(C’) - 10절(B’) - 11절(A’)

 A. 5절 너희 안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

   B. 6절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을 사양.

      C. 7절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심

             D. 8절 사람의 모양으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십자가)

      C'. 9절 하나님께서 그분을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심

  B'. 10절 하늘과 땅과 땅 아래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심.

A'. 11절 모든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 시인.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돌림.

8절의 십자가(Stauru) 사건이 전환점(turning point)되어, 5-7절은 점차 낮아지심(descending), 9-11절은 점차 회복되심(ascending)되는 키아즘 구조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자신을 비우시고 낮아지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시는 “겸비kenosis=emptify”의 모습이며, 하나님께서는 역으로 예수님의 모든 것을 회복하셔서 이전 영광보다 나중 영광이 더욱 크시게 하십니다. 세 단계 낮아지심과 세 단계 영광받으심이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렇게 짝을 맞추어 성경을 읽으면 초대교회 때부터 이단으로 규정된 가현설(Decetism, 예수님의 신성만 인정하고 인성은 가까라는 것)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빌 2:7-8에 예수님은 자기를 하나님의 본체로부터 비었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하신 예수님은 가짜 예수라는 몰몬교 및 사신(신은 죽었다) 신학 및 자유신학이 큰 잘못을 저지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본체(Morphe)를 포기하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낮아지시고 비우셔서 성육신하신 것을 하나님께서 회복시켜(glorification) 더 높은 영광으로 승천하시고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계시다가 재림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을 키아즘 구조를 염두해 두고 읽으시면 난해구절이 해결되고 성경의 문서설이나 고등비평의 위험성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6절의 원문을 다시 번역하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므로 하나님과 동등됨을 탈취물로 여기지 않으셨으나.” 예수님께서는 본래 하나님과 동등되신 분이시지, 그분의 선행에 대한 보상으로 그것을 얻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비우셨다는 말은 그분의 신성(神性)을 포기하셨다는 뜻이 아니고, 그분께서 신적 속성들의 사용을 일시적으로 보류하셨다는 뜻입니다. 비천한 베들레헴 짐승 밥통(구유 manger)에서 사람으로 출생하셨고, 인간 부모 밑에서 30년 동안 조용하게 순종하며 사셨고, 공적인 전도 사역을 하실 때에도 죄인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가난한 생활을 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입니다(요 1:14). 마침내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는데 이것이 예수님의 놀라운 겸손입니다.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죽기까지 아버지께 겸손하게 복종하셨던 것입니다.

9-11절은 인간 예수님의 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입니다. 예수님의 신성(神性)은 성육신 이전이나 이후나, 부활 전이나 부활 후나 변함이 없으시지만, 그분의 인성(人性)은 부활 전과 후에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후에 지극히 크신 영광 곧 신성의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딤후 2:11-12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님과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노릇할 것”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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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십일조(말라기 3:10)


말라기 3:10 / 온전한 십일조(콜 함마아셀) all the tithes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Bring the whole tithe into the storehouse, that there may be food in my house. Test me in this," says the LORD Almighty, "and see if I will not throw open the floodgates of heaven and pour out so much blessing that you will not have room enough for it.

온전한(3605) כֹּל 

1. 전체,  2. 모두,  3. 온통

발음 / 콜(kôl)
어원 / 3634에서 유래
구약 성경 / 5408회 사용

* 3634. כָּלַל 

1. 완성하다,  2. 왕관을 쓰다

발음 / 카랄(kâlal)
관련 성경 / 온전하게 하다(겔 27:4, 11).
구약 성경 / 2회 사용

1. (동사) 완성하다, 성취하다, 숙달시키다, 완전히 하다, 겔 27:4,11
2. (동사)  왕관을 쓰다, 왕관을 씌우다.

십일조(4643) מַעֲשֵׂר  

1. 십분의 일,   2. 십일조,  3. 열번째

발음 / 마아셀(maʽăsêr) 
어원 / 624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십일조(민 18:21, 대하 31:6, 느 10:37), 십분지 일(겔 45:11, 14).
구약 성경 / 32회 사용

(명사) 남성  - 십분의 일, 십일조, 열 번째, 창 14:20, 신 14:23, 28,  26:12, 느 10:37

* 6240. עָשָׂר 
1. 열,  2. אַחַד עָשָׂר

발음 / 아사르(ʽâsâr) 
구약 성경 / 337회 사용

뜻풀이부

1. 수사, 남성 열 [다른문자와 함께 사용].
a. 수사, 남성   [주]אַחַד עָשָׂר, 열하나, אַרְבָּעָה עָשָׂר: 열넷. שִׁשָּׁה עָשָׂר: 열여섯.

온전한 십일조
전체에 대한 1/10 이라는 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온전한 십일조는 10/10 모두가 하나님의 것이라고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1/10이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가장 작은 것 즉 최소한의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전체를 바칠 수 없는 이 세상에 속한 아주 연약한 질그릇과 같은 인생이 1/10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통로가 되는 것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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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십일조가 무엇인지 알려면 ​먼저 성경에 나오는 온전(穩全)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성경의 "온전"이란 티끌만큼도 죄가 없는 무흠한 상태를 온전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누구도 온전할 수 없는 죄인이며 오직 하나님만이 죄가 없어 "온전"하십니다.
예수께서도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 하시며 하나님께서는 죄 없는 온전하신 분임을 말씀 하셨습니다.

"온전"에 대한 성경 말씀입니다.

​히브리서 12:2.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베드로전서 5:10.  그리스도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너희를 친히 "온전케"하시며

데살로니가전서 5: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잠언 20:7.  온전하게 행하는 자가 의인이다.

누가복음 6:40.   무릇 온전하게 된 자는 그 선생(그리스도)과 같으리라.

히브리서 10:14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온전한 십일조"란 흠 없고 죄 없는 제물을 뜻하며 그리스도를 뜻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했다고 꾸짖으셨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건강한 양과 소와 물질의 십일조를 드리지 않아서 하나님께서 십일조를 도적질했다고 꾸짖으셨을까요?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드리지 않는 제물은 받지 않으십니다.

"소를 잡아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고 어린 양으로 제사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꺽음과 다름이 없고"(사 66:3)
그리스도가 담기지 않은 제물을 꾸짖으셨습니다.

말라기 3:7-11을 살펴보며 도적질한 십일조가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7.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열조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도다"

​핵심은 "내게로 돌아오라"입니다.
물질의 십일조를 내면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은 예수를 믿는 방법 뿐이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바울도 믿음의 선진들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갔다고 말하고 우리도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신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라고 말합니다(히 12:2)

구약의 이스라엘도 믿음의 선진들을 따라 장차 오실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십일조와 헌물을 드렸다면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의 행위에는 철저했으나 제물의 참뜻인 예수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도가 없는 헛된 제물로 헛된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 돌아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말라기를 통해 십일조의 참뜻인 예수를 믿고"내게로 돌아오라"고 명령 하신 것입니다. 

8.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하나님께서는 십일조와 헌물을 도적질했다고 하십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이스라엘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이렇게 죽으실 것이다"라는 믿음으로 짐승을 죽여 제사를 드리고 십일조와 헌물을 드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제사장들은 그리스도가 빠진 헛된 제물을 드리며 행위에만 열중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빠진 예물은 하나님께서 결코 받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향해 하나님의 것인 그리스도를 도적질했다고 꾸짖으신 것입니다.

​"도적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를 영어로 번역하면 '커버"(COVER)라고 합니다.
커버(COVER)는 "덮다""감추다"라는 뜻 외에"속이다"라는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즉, 제사장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일조와 헌물이 나타내고 있는 그리스도를 "덮고,감추고,행위에만 매달리게 하여 헛된 제물을 드린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행위에는 철저했습니다.
그들은 막대기 아래로 지나가는 양들 중 열 번째 양이나 소를 가져갔을 것입니다.
이 제물은 우열을 교계하거나 바꾸지 못합니다(레 27:32-33).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더러운 떡'"눈먼 희생'"병든 것' "흠있는 것으로 사기하여 내게 드리는 것' "토색한 물건'과 "저는 것"(말 1:7-13)

이렇게 책망하시고 저주하신 이유는 제물이 예표하는 그리스도를 덮고 감추고 훔치고(토색) 눈먼 희생에만  열심을 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향해'십일조 도적'이라고 저주하셨습니다.
구약시대가 끝나고 그리스도가 밝히 드러난 오늘날도 십일조에 나타난 예수를 카바(COVER)하여 덮어버리고, 십일조를 돈으로 요구하는 자들은 십일조 도적들입니다.

9.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그리스도를 도적질하고 행위에만 열중한 육적 이스라엘은 늘 가뭄과 흉년에 시달리고 외세의 침입으로 포로로 끌려다니는 등,저주를 받았으며 끝내는 오신 그리스도마저 죽이고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창고" "나의 집에 양식""하늘 문을 열고""복"의 뜻이 무엇인지도 살펴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창고"와 "나의 집"은 하나님 나라를 비유로 말씀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양식"은 무엇일까요? 
예수께서 "양식"에 대해 말씀하신 것을 찾아 보고 하나님의 양식이 무엇을 뜻하는지 살펴봅시다.

예수께서는 사마리아를 지나가시다가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 간 사이에(요 4:8)물을 길러 나온 사마리아 여자에게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내시고 믿게 하셨습니다(요 4:26).
이때 제자들이 돌아와 먹을 것을 드리며 "랍비여 잡수소서"라며 음식을 권하자 예수께서는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요 4:32)라고 하셨습니다.

​어리둥절한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4:34)

즉, 하나님이 받으시는 양식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오르셔서 몸찟고 피흘려 성도들을 구원하시는 것이며 이로 말미암아 구원 받은 성도들을 양식이라고 표현하신 것입니다.
인간들이 양식을 모아 창고에 저장하듯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나의 집" "창고"인 하늘 곳간에 모으는 일을 하십니다.
즉,구원 얻은 성도들을 양식이라는 비유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하늘 문을 열고 쌓을 곳이 없도록 붓는 복"

하늘 문이 무엇일까요?
하늘 문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있는 문이며 천국의 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예수를 통해서만 들어갑니다.
하늘 문은 천국 열쇠를 가지신 예수입니다.
믿음의​ 선진이며 신약성도를 상징하는 야곱은 꿈에 하늘에 닿은 사닥다리를 보았습니다(창 28:12)
즉, 예수를 본 것입니다.
야곱은 예수를 보고 하늘 문이라고 고백했습니다(창 28:17)
즉 예수님이 하늘 문입니다.
예수께서도 야곱이 본 사닥다리가 자신임을 말씀하셨습니다(요 1:51)

즉, 하늘 문인 예수를 통해서 쌓을 곳이 없도록 "복"을 주시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늘 문을 열고 내리는 하늘 보화는 물질이 아니라 구원의 복입니다.
구원보다 더 큰 복이 무엇이겠습니까?

​복음에 눈이 가려진 삯군들은 온전한 십일조를 내면 쌓을 곳이 없도록 돈을 부어주신다며 신도들을 기복신앙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삯군들에게 미혹된 신도들은 구원의 복이 얼마나 귀하고 큰 것인지 모르고 물질 복을 좇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이란 모든 것을 다 팔고 목숨까지 바쳐서라도 소유해야하는 값진 진주인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신도들은 재물복을 받으려 십일조에 열심을 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본체이시며 성경의 주인이신 예수께서는 단 한번도 물질 복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모든 것을 더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하나님나라에 들어 갈 수 있는 십자가의 의를 구하는 것이 먼저라고 말씀하시고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고 하시며 세상 복을 좇지 말라고 하셨으며 또한 물질에 대해서는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를 먹이고 입히시는데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라고 말씀하시며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1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황충을 금하여 너희 토지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성경에 나오는"황충"은 하나님과 성도들을 대적하는 마귀,사단을 뜻합니다.
그리고 "토지,"밭.은 마음 밭인 심령을 뜻합니다.
또 소산과 과실(열매)는 심령에 맺힌 믿음의 열매를 뜻하며(요 15:16)
포도나무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라고 말씀하신 예수를 가리키는 비유입니다.
또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는 성도들이 천국에 이르기 전에는 결단코 실족하여 떨어지지 않게 지키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12. "너희 땅이 아름다와지므로 열방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땅은 세상의 땅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아름다운 땅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며 가나안 땅, 궁극적으로는 천국을 뜻합니다.
예수님과 성도들이 거하는 천국이 얼마나 아름다울지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옥에 떨어진 수많은 사람들은 천국에 있는 성도들을 "복되다"할 것입니다.

​말라기서는 구약의 마지막 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보내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말라기를 통하여 십일조에 담겨진 온전한 제물이신 예수를 믿고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강조하시는 말씀이 바로 말라기 3:7-12입니다.

선지자 말라기가 말하는 온전한 십일조오직 죄 없이 온전하신 예수그리스도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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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기서에 나타난 십일조에 대한 책망은 표면적으로는 수입의 십일조를 하지 않은 것에 대한 책망인 것 같지만 포괄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대한 불경건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온전히 경배하지 않는 태도에 대한 책망이다.

수입의 십일조를 하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으로 보았겠지만 더욱 큰 도둑질은 하나님을 온전히 경배하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태도였다. 하나님을 온전히 경배하지 않으므로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 하는 신앙에서 파생되어 나온 열매가 온전한 수입의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말라기 3장 9절에 보면 온 나라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였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가 수입의 십일조를 하지 않았다기보다는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가 하나님을 온전히 경배하지 않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율법주의와 형식주의와 관습주의에 빠져서 하나님을 온전히 경배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탄식의 소리다. 말라기 3장 10절을 보면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고 말씀한다.

온전한 십일조는 문자 그대로 수입의 온전한 십일조를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선적으로 요구하시는 것은 수입의 온전한 십일조 이전에 하나님을 온전히 경배하는 관계를 요구 하신다. 즉 하나님을 온전히 경배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 열매로 수입의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복”에 대한 해석도 성경 전체가 말하고 있는 복의 개념에서 해석을 해야 할 것이다. 성경 전체가 말하는 복의 개념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가지므로 공급받게 되는 그리스도의 생명의 풍성함을 가리킨다. 10절에서 말하는 “양식”도 결국은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생명의 양식이라고 말씀하신 바로 그 진리의 말씀으로 연결해야 한다. 시험해보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하나님이 정말 물질적 축복을 주는지 아니 주는지 시험해보라는 그런 취지로만 해석을 하면 온전한 해석이 되지 못한다. 하나님은 자신을 온전히 경배하고 온전히 사랑하므로 온전한 수입의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는 자에게 복을 주신다.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복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이 땅의 물질세계에서 얻는 복이다. 두 번째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복이다. 이 영원한 복은 구체적으로 인간의 언어로는 설명이 곤란하지만 한마디로 말한다면 하나님 자신이 곧 궁극적 복의 핵심이 된다. 이 땅에서 얻는 물질적 축복은 하나님을 온전히 경배 하면서 수입의 온전한 십일조를 드린다 할지라도 받을 수도 있고 받지 못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고난의 과정을 지나게 하면서 그 고난의 과정을 통해서 인격을 다듬어서 성품의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쪽에서는 성품의 열매 없이 물질의 복을 누리는 것보다는 물질이 빈곤한 과정을 통해서라도 성품의 열매를 맺도록 하는 것이 목표다. 빈곤한 과정의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의 요구에 잘 순응하여서 성품의 열매를 맺는다면 하나님은 얼마든지 물질로도 복을 주실 수 있으실 것이다. 이렇게 이 땅에서 누리는 물질의 복은 받을 수도 있고 받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복은 하나님을 온전히 경배하는 자에게 반드시 주어지게 된다. 하나님께서 원래 받고 싶은 온전한 십일조는 눈에 보이는 물질 이전에 하나님의 백성들 자신이다. 원래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져야 하는 헌물인데 대신하여 표면적으로 수입의 십일조로 구별하여 드리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언제나 흠 없고 점 없는 제물을 원하신다. 그런데 사람은 죄로 인하여 그렇지 못하다. 사람 스스로는 하나님께 온전한 제물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죄 있는 사람을 대신하여 드려진 제물이 그리스도 예수다. 그러므로 수입의 십일조를 드릴 때는 먼저 그리스도 예수로 충만한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그리스도 예수로 충만히 채워진 자기 자신과 함께 그 표징으로 수입의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진짜 양식이 되시는 그리스도 예수로 가득 찬 성도들로 성전이 가득 채워지기를 바라신다. 하나님을 시험해보라는 말씀은 정말 그러한지 아니한지 테스트 해보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을 온전히 경배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복되게 하실 것에 대한 확신과 신뢰를 가지라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정말 그런지 아니 그런지 실험해보라는 의미는 충분한 해석이 될 수가 없다. 그런 해석들이 지난날 한국교회에 기복신앙을 낳게 한 원인중의 하나가 되어 오지 않았는가? 정말 그리스도 예수로 충만하고 하나님을 온전히 경배하고 온전히 사랑한다면 바로 그것 자체가 곧 복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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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십일조란 어떤 것인가요?


성도의 생활은 감사하는 생활이 특징이다. 성도에게는 구원의 은혜와 일상생활에서 베푸시는 은혜에 대한 감사로 범사가 감사의 대상이 된다. 마음속에서 느껴지는 감사는 보통 몸을 드리는 것과 물질을 드리는 것을 통해 밖으로 표현이 된다. 물질을 드리는 것의 대표적인 것은 십일조이다. 그래서 성도들은 당연히 십일조 생활을 해야 하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온전한 십일조의 액수를 정하는 과정에 있어서는 모든 수입의 십일조를 드릴 것인가, 필요 경비를 제외한 순수입의 십일조를 드릴 것인가. 손해를 보는 경우에도 십일조를 해야 하는가 하는 등의 여러 가지 관련된 문제들로 인해 어려움을 겪을 때가 있다.

이제 무엇이 온전한 십일조인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1. 십일조의 기원

고대 이집트나 시리아를 중심한 많은 나라들에서는 국민들에게 정치적인 성격의 십일조를 요구했다. 사무엘 선지자의 예언을 보면, 이스라엘 왕들도 왕실을 유지하기 위해 국민들에게 십일조를 요구했던 것으로 보인다(삼상 8:15, 17). 현재에도 우리나라나 다른 여러 나라들은 부가가치세 등에서 보는 것과 같은 정치적 세금 형태의 십일조를 여전히 국민들에게 부과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명령하고 있는 십일조란, 재산이나 소득의 십분의 일을 종교 기관이나 종교적 목적을 위해, 또는 기업(재산이나 직업)이 없는 레위인(목회자)들을 부양하기 위해 바치는 것을 의미한다.

십일조에 관한 규정은 광야에 머물고 있던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여러 하나님의 계명들과 함께 처음으로 등장한다(민수기 18장과 레위기 27장). 그리고 가나안을 눈앞에 둔 여리고 맞은편에서 다시 한 번 십일조에 대한 계명이 반복된다(신명기 14, 26장). 하지만 십일조 제도는 이미 오래 전부터 시행되고 있었다. 아브라함은 전쟁에서 노획한 전리품 중에서 십분의 일을 제사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는 사람인(히 7:1) 살렘 왕 멜기세덱에게 드렸다(창 14:20). 이 전통에 따라 야곱도 벧엘에서, 모든 소득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릴 것을 서약했다(창 28:22).

십일조는 신약 시대에도 계속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십일조 제도가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무관하게 행해지는 것을 안타까워하시면서,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지니라”(눅 11:42)고 십일조를 지칭해서 말씀하셨다. 이것은 십일조 제도가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함께 지켜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신 것이었다. 그러나 죄로 어두워진 사람들은 심지어 우상에게까지 십일조를 바쳤다(암 4:4). 또 부패한 대제사장의 탐욕 때문에 가난해진 제사장들은 백성들에게서 강제로 십일조를 강탈하다가 예수님께로부터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 23:23, 33 참조)라는 책망을 듣기도 했다.

초대교회 이후부터는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군이 저 먹는 것을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마 10:10), “일군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눅 10:7), “누가 자비량 하고 병정을 다니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실과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때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고전 9:7)고 하신 말씀들을 근거로 해서, 드려진 십일조를 목회자의 생활비를 충당하는 데 아무런 이의 없이 사용을 해왔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예에서 보는 것 같이, 일부의 사람들은 자기의 생활비를 스스로 마련하는 경우도 없지는 않았다.

2. 십일조의 종류

성경에는 다음 세 가지 경우의 십일조를 바치도록 명령되어 있다.
그러나 이 세 종류의 십일조는 모두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께 드려진 것이기 때문에, 셋으로 나눌 수 없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1)  땅의 소산과 육축의 십일조(레위기 27:30~33)

모든 소유가 하나님의 것임을 표하고, 또 늘어나는 소득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임을 표하는 십일조이다. 땅에서 추수한 곡식과 나무에서 수확한 열매의 기름을 하나님께 십일조로 바쳤다. 만일 이것을 속하려면, 그것의 가격에 오분의 일을 더해야 했다. 소나 양은 막대기 아래로 지나는 열 번째 것으로 십일조를 드렸다. 십일조의 성물로 정해진 소나 양은 어떠한 경우에도 다른 것으로 바꿀 수 없었다. 만일 바꾸게 되면, 둘 다 거룩하게 여겨져 일체 속할 수 없도록 했다. 이 십일조는 신 26:1~15에 나오는 첫 이삭을 드리는 명령과 동일하게 여겨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미 족장 시대부터 이러한 십일조가 드려졌다고 할 수 있다.

십일조는 반드시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예루살렘)에서 바치고 먹어야 했다. 따라서 멀고 행로가 어려울 경우에는 그것을 돈으로 바꾸고, 예루살렘에 가서는 그 돈으로 다시 마음에 드는 것을 구하여 바쳤다.

2) 레위인을 위한 십일조(민수기 18:21~32)

가나안에 들어 간 이후, 모든 지파들에게는 땅이 분배되었다. 그러나 레위인에게는 예외적으로 땅을 분배하지 않고, 전적으로 성전의 일만을 맡게 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른 지파의 사람들이 십일조를 드려 레위인의 생활을 책임지도록 했다. 레위인은 땅의 소유주이시며 땅의 소산을 주시는 하나님을 대표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이 십일조도 결국은 하나님께 드리는 십일조였다. 한편, 레위인은 자기들이 받은 십일조 중에서 다시 십분의 일을 구별하여 제사장들에게 바쳤다.

3) 가난한 자를 위한 십일조(신명기 14:28~29)

매 삼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일조를 드려 저축하였다가,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 성중에 우거하는 고아와 과부들을 배부르게 하는 데 사용한 십일조이다. 매 삼년마다 가난한 자를 위한 별도의 십일조를 했는지, 아니면 다른 두 해의 십일조 중에서 일정량을 모아두었다가 가난한 자들을 돌보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3. 십일조의 목적

십일조의 목적은 앞에 말한 십일조의 종류에서 잘 드러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가진 모든 소유물이 하나님의 것임을 깨닫게 하기 위해, 소득의 증가가 하나님의 복에 의한 것임을 깨닫게 하기 위해, 종교적 일에만 전념하는 레위인의 생활을 유지하게 하기 위해, 그리고 소득도 돌볼 사람도 없는 가난한 사람들을 돌아보게 하기 위해 십일조를 명령하셨다. 그러나 이러한 목적들은 하나님의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도록 하기 위한 것, 즉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확인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소유물을 사용하게 하려는 한 가지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십일조를 전혀 드리지 않거나,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 심각한 책망과 저주가 뒤따르게 된다(말 3:8, 9). 반면에,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반드시 그 소유의 복을 넘치도록 주실 것임에 대한 확신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말라기 선지자의 입을 통해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암 3:10)고 말씀하셨다.

4. 온전한 십일조

온전한 십일조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모든 헌금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액수보다는 그 정신에서 찾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의도가 빠진 십일조는 온전한 십일조가 될 수 없다.
십일조에는 반드시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 베풀어 주신 복에 대한 감사, 내리신 명령에 대한 즐거운 순종이 배어 있어야 한다.

자원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드리는 자세 또한 온전한 십일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께서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7)

온전한 십일조는 정해진 액수대로 하는 십일조여야 한다.
자기 소유와 소득의 십분의 일이 그 정해진 액수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의 삶은 과거와는 달리 정해진 액수를 계산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이런 경우에는 세금이나 공제금을 포함하여 필요 경비를 제외한 순수입의 십일조를 하면 무난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정해진 액수를 계산할 때, 무엇보다 먼저 우리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임에 유념을 해야 한다.

십분의 일뿐만 아니라 십분의 십 전체가 하나님의 것이다.

십분의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최소한의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십분의 일을 계산하기 어려울 때에는 십분의 일 이상이라도 드리겠다는 넉넉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래서 십분의 이를 드리겠다는 목표를 가져 볼 수도 있다.
이런 자세를 갖는다면, 손해를 보는 경우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생각에서 조금도 부담을 갖지 않고 일정액의 십일조를 드릴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액수의 세밀한 계산은 정확한 순종의 믿음에서 나오기보다 인색함에서 비롯되는 것이 대부분임을 쉽게 경험하고 있다.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는 생활은 복을 받기 위한 조건이라기보다, 성도가 해야 할 마땅한 본분이다.

성도는 십일조를 통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는 믿음을 확인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이웃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야 한다.
그리고 자원하는 즐거운 마음으로, 정해진 액수의 온전한 십일조를 드림으로써, 예수님을 기쁘시게 했던 과부의 두 렙돈 같은 십일조가 되게 해야 한다.
우리는 십일조가 어떻게 사용되는가에 대한 관심으로 자신의 역할을 계산하기에 앞서서, 하나님의 것을 마땅히 하나님께 드린다는 생각을 가져 한다.
십일조를 드린 사람에게 쌓을 곳이 없도록 복을 주시지 아니하나 시험하여 보라고까지 함에야, 어찌 십일조 생활을 주저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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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십일조의 정신

 

① (8절)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 (메시지성경) “정직한 일부터 시작하여라. 정직한 자들은 하나님의 것을 훔치지 않는다. 그러나 너희는 날마다 내 것을 훔친다. 너희가 묻는다. ‘저희가 어떻게 주님의 것을 훔쳤단 말씀인가요?’ 십일조와 헌물이다!” 하나님께서 책망하시는 말씀에 대해 또다시 반항하며 항변한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드러내는 신앙의 척도는 물질(돈, 보화)이다. ‘척도(scale, 尺度)’는 자로 재는 길이의 표준이나 평가하고 측정하는 기준을 말한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준행하는 삶의 바로미터다. ‘바로미터(barometer, 기압계)’는 사물의 수준이나 상태를 측정하는 기준이다. “네 보물이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6:21)” 하나를 보면 열을 알 듯 물질을 어디에 사용하는지 보면 무엇을 섬기며 사는지 알 수 있다.

 

② (마23장23절)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 구약의 십일조에 관한 신약의 유일한 말씀이다.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외식을 책망하시며 십일조의 정신을 ‘정의, 긍휼, 믿음’이라고 하셨다. ‘정의(正義)’는 정직한 계산이다. 십일조의 정신은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정직한 고백이다. 땅은 하나님의 것이기에 땅에서 거둔 소산물도 하나님의 소유다. 삶에서 누리는 생명과 건강, 물질과 자녀는 하나님의 선물 곧 은혜의 결과물이다. 이 고백 위에 감사와 기쁨으로 자원하여 드리는 예물이 십일조를 비롯한 하나님께 드리는 봉헌물이다.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모든 피조물이 가져야 할 마땅한 자세다. 말라기 시대 신앙인들과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의 공통점은 형식적인 십일조를 드리면서 여전히 물질을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말라기가 하나님의 것을 마치 제 것처럼 여기는 부정직한 행위를 불의한 도둑질로 정죄하고, 하나님께 돌이키는 회개의 조건으로 온전한 십일조를 제시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③ (9절)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 (메시지성경) “지금 너희와 너희 모두가 저주 아래 있는 것은, 너희가 내 것을 훔쳤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온 세상과 모든 인류에게 일용할 양식을 허락해주셨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서 왜 한해에 수십 만 명이 굶어 죽게 내버려 두실까? 오늘날 빈익빈 부익부의 경제 양극화로 인한 절대 빈곤의 원인은 일용할 양식을 베푸시는 하나님 탓이 아니다. 일용할 양식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필요이상의 것을 추구하는 탐욕에 빠져 있는 사람들 때문이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만물은 우리의 필요를 채우기에는 충분하지만 인간의 탐욕을 채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까닭이다. 하나님께서는 일용할 양식을 채울 수 있을 만큼을 충분한 양식을 인류에게 허락하셨다. 다만 타인의 일용할 양식을 빼앗아 이기적인 욕심을 채우는 탐욕으로 인해서 세상은 빈곤과 가난으로 신음하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자신을 위해 일용할 양식을 구할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얻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마땅하다. 이것이 십일조의 두 번째 정신인 ‘긍휼’이다.

 

 

3. 하나님의 명예를 건 보증

 

① (10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 예수께서 말씀하신 십일조의 세 번째 정신은 ‘믿음’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말씀대로 준행하는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반드시 축복으로 보답하신다는 언약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다. 성경은 말씀대로 준행하는 삶에 따라오는 하나님의 축복을 누누이 강조한다. 온전한 십일조는 말씀대로 준행하는 삶의 척도다. 이 말씀을 근거로 십일조를 단지 물질적인 축복의 수단으로 오해해선 안 된다. 이 언약이 전하는 본뜻은 하나님께서 만복의 근원 되시고 만물의 주관자이심을 뚜렷하게 증거 하시는 말씀이다. 이는 하나님의 통치에 최우선 과제를 두고 사는 이들에게 만물의 주관자가 친히 약속하는 확실한 보증(保證, guarantee)으로 읽어야 한다. 기독교는 언약의 종교다. 언약을 준행하면 그 언약대로 축복하시는 약속 위에 세워진 신앙이다. 구약과 신약, 지난 이천년 동안 이 약속은 수많은 삶에서 성취되고 이루어져왔다. 이 사실을 믿지 못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명예를 걸고 친히 보증하신다.

 

② (11절~12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황충을 금하여 너희 토지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열방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6:33)” 예수께서도 삶의 우선순위를 하나님의 통치에 두고 사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을 친히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확언하셨다. 말라기 시대의 신앙인들과 예수님 시대의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문제는, 십일조를 드리면서도 삶의 우선순위를 하나님보다 물질에 두고 살았다.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에 대한 바리새인의 태도에서 속내가 드러난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눅16:13~14)” 그들은 십 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고, 나머지 열의 아홉은 자신의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해서 부의 축적을 스스로 정당화하면서 삶의 목적을 물질적인 부요에 두고 살았다. 십일조를 물질적 축복의 수단으로 오해하는 건 그들의 오류를 반복하는 일이다.

 

③ 「강단과 목회」, <온전한 십일조의 정신>, 김명섭, 2021년 9‧10월호에서 인용.

▶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23:23)”는 예수님의 선명한 가르침 앞에서 십일조에 대한 논란은 일말의 여지없이 종결된다. 하지만 오늘날 십일조에 대한 논쟁에서 자주 언급되는 ‘교회의 부요가 교회의 타락을 부추겼다’는 비판을 뼈아프게 반성해야 한다. 한국교회가 철저한 십일조로 인해 크고 강한 교회가 되었지만 동시에 오만과 타락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날이 선 비난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교회 재정에 대한 건전성과 투명성을 철저하게 재고하고 재정립하는 데 더 힘써야 한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에게 십일조가 복이 아니라 도리어 화가 되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십일조를 안 드린 것이 아니라 십일조의 정신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나의 처소에서 명한 나의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의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스스로 살찌게 하느냐(삼상2:29)” 제사장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거룩하게 드려진 제물을 사리사욕의 수단으로 남용했다. 이러한 종교지도자들의 타락은 성경 속에만 나오는 추태가 아니다. 십일조를 온전하게 구별하여 드리는 것만큼 하나님께 바쳐진 십일조를 온전하게 선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십일조의 준수와 더불어 십일조의 정신을 온전하게 실천하는 자리까지 성숙해야 한다. 그때야 비로소 온전한 십일조로 하나님의 통치를 삶에서 체험하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축복의 주인공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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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는 십일조를 드려야 하나님의 도움과 복을 받는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십일조를 드리고 정의와 긍휼과 믿음도 가져야 된다고 말씀하셨다.

믿음이 없는 십일조나 정의가 없는 십일조가 아니라, 정의롭고 올바른 물질로 드리는 온전한 십일조라야 복이 된다.
그래서 아무리 수가 많다 할지라도 십일조 안 드리는 성도보다는, 수가 적어도 전 성도가 하나님 앞에 시간의 십일조, 재능의 십일조, 물질의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중요하다.

로마의 신학자 성 어거스틴은 “하나님께서는 성경 말씀에 기록된 대로 온전한 십일조와 헌물을 통해서 그의 자녀를 복되게 하신다”라고 말했다.
하나님 앞에 십일조를 안 드리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 세상 마귀 사탄의 탐욕과 욕심의 자녀가 된다. 하나님의 자녀는 반드시 하나님 앞에 감사할 줄 알아야 된다.

영국의 역사학자 토마스 풀러도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복을 받기에 합당하지 않다”고 말했다. 세금을 안 내고 등록금을 안 내고 자기 의무를 지키지 않은 학생은 아무리 공부를 잘 해도 명단에서 빠지는 것처럼, 하나님의 복의 반열에서 빠지게 되고 이탈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나는 교회 성도다”라고 주장하고 하나님께 아무리 기도하고 부르짖고 외쳐도, 허공에 소리 지르는 것과 같다.

자기 의무를 다하지 않는 자와 하나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 하나님께 드릴 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것이다. 자기 혼자만을 위한 부는 복이 되지 않는다. 정직하고 깨끗한 부자가 하나님 앞에 복 받고 사람에게 칭찬 받는다.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이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을 주는지 안 주는지 시험하라고 하셨다. 온전한 십일조를 가지고 자기 마음대로 쪼개서 선교비 쓰고 구제하고 밥 사먹고 혼자서 인심 쓰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십일조는 손대면 안 된다. ‘성물’, 즉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께 드리는 십일조가, 억지로 마지못해서가 아닌 온전한 것이 되어야 한다.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서 받는 복이 진짜 복이 된다. 하나님이 복되게 하셔야 그 사람의 재물이나 재능 등이 진정한 복이 되는 것이다.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온전한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려야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