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 / 대강절. 사순절(四旬節)과 부활절(復活節) 고난(苦難)



대강절(待降節)


대강절에 대한 바른 의미는 무엇인가?

 

교회에서 지키는 절기에는 주현절(Epiphany), 사순절(Lent), 오순절(Pentecost), 대강절(Advent) 등이 있거니와, 그 중 개신교회에서 가장 중요시되고 있는 절기는 대강절(또는 ‘대림절’, ‘강림절’로도 불림)이다. 그런데 이 대강절에 대한 정확한 의미와 그에 따른 바른 이해에 대한 약간의 논란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성탄절을 4 주간 앞두고 시작해서 지키는 ‘대강절’(待降節)은 문자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라는 뜻인데, 그 ‘오심’(降)이 무엇을 뜻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즉 그 논란은 그리스도의 성탄 즉 첫 번째 오심(성육신)을 기다리는 절기냐, 아니면 역사의 마지막에 오실 재림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지키는 절기냐 하는 것이다.

오늘날 대다수의 교회에서는 첫째의 의미 즉 예수께서 2000년 전에 이 땅에 나신, 곧 성육신 임마누엘의 역사적 사실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날로만 생각하고 지키는 것이 사실이다. 예배에 관한 많은 책이 그렇게 쓰고 있고, 많은 목회자들이 그렇게 설교를 하고 있다. 그리고 기독교 역사상으로도 약 1000년 동안은 그러한 뜻으로만 지켜 왔다. 그러나 그 후 12세기부터는 그것이 더 넓은 뜻으로 해석 적용되어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절기로까지 의미가 확대된 것이다. 따라서 로마 가톨릭교회의 라틴어 전례용어(典禮用語)에서는 그리스도의 초림(성탄)과 재림 두 사실을 모두 지키는 절기로 되어 있다. 즉 그리스도의 성탄으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시작된 것과, 앞으로 세상의 종말에 심판주로 재림하심을 기다리는 절기로 지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의 의미가 부여된 것으로는 그리스도께서 지상사역 마지막에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성령(보혜사)의 임재를 뜻하기도 하는 것이다. 즉 성령이 그리스도인들의 마음 속에 은혜로 임재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이러한 의미로까지 확대하면, 대강절은 과거의 역사로는 그리스도의 탄생(성육신)으로 오셨음을, 미래의 사실로는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오실 것을, 현재의 사실로는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이 그리스도인들의 마음 속에 계속적으로 임재하시는 것을 다 포괄하는 것이 되기도 한다. 이 대강절은 성탄절과 그 시기를 같이하는 것이, 마치 부활절을 전후하여 사순절과 오순절이 있는 것처럼, 성탄절의 의미를 더 깊게 해 주는 절기인 점에서 유사점을 가진다.

‘대강절’에 대한 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그 어원적인 고찰을 하는 것이 한 가지 참고가 될 수 있다. 대강절에 해당되는 영어의 Advent 는 라틴어 ad(to) 와 ventire(come) 의 합성어로서, 라틴어의 이 ventire (오다)가 역시 그리스도의 두 오심(ventire) 중에서 어느 하나를 가리키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다를 수밖에 없으나, 다만 현재로서는 앞에서 언급한 대로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에 다 관련된 것으로, 또 하나 더한다면 성령의 임재까지 확대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영어의 표기상의 차이로 보면, ‘the Advent’ 로 쓰면 그리스도의 초림을 나타내고, ‘Advent’로 쓰면 그리스도의 재림을 나타내는데 라틴어로는 후자에 해당된다.

끝으로 오늘날 우리가 대강절을 지키는 실제를 두고 생각할 때에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일은 그를 맞을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인데, 이러한 점에서는 재림에 더 무게가 실리고, 오심의 사실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점에서는 그리스도의 초림에 무게가 실릴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무엇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일은 과거에 일어난 사실에 대한 것으로서 미래의 사실에는 해당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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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四旬節) Lent

사순 시기(四旬時期) 

헬라어 Σαρακοστή(사라코페) 
라틴어 Quadragesima(콰드라제시마)
영어 Lent(렌트)

기독교에서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념하는 교회력 절기를 말한다.
즉 부활절을 경건히 준비하는 절기이다.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부활절 일자를 확정하며 확인한 절기이다.

사순절의 이름은 그리스어로 40을 의미하는 '테사라코스티'(Τεσσαρακοστή)의 번역 단어이다.
재를 머리에 얹거나 이마에 바르며 죄를 통찰하는 재의 수요일로 시작된다.

사순절 주간별 주제

예수님의 고난과 이를 대하는 성도의 참회를 뚜렷하게 하는 것들로 채워집니다.
각각의 단어는 라틴어 초입송의 첫 단어를 가리킨다.

독일 교회력에 따르면 여섯 번의 사순절 주일은 각각의 이름이 다음과 같이 전통적으로 불렀다(라틴어 명칭).


첫째 주일은 인보카비트(Invokavit)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시편 91:15)라는 뜻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첫째 주 -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유혹을 생각합니다.

인보카비트(Invokavit)인데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시 91:15)라는 라틴어의 처음 말이다.
즉 사순절은 주님께 기도하는 거룩한 절기이다



둘째 주일은 레미니스제레(Reminiszere)
“기억하옵소서.”(시편 25:6)라는 뜻

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있었사오니 주여 이것을 기억하옵소서.

둘째 주 -  죄를 물리치라는 명령을 생각합니다.

레미니스제레(Reminiszere)인데 “기억하옵소서.”(시 25:6)라는 뜻이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주님의 희생과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주신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기억해야 한다.



셋째 주일은 오쿨리(Okuli)
“나의 눈이 늘 주께 향하나이다.”(시편 25:15)라는 뜻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앙망함은 내 발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임이로다.

셋째 주 -  회개로의 요청을 생각합니다.

오쿨리(Okuli)인데 “나의 눈이 늘 주께 향하나이다.”(시 25:15)라는 뜻이다.
사순절에 우리의 눈은 항상 주님과 주님의 십자가를 향해 있어야 한다.


넷째 주일은 라에타레(Laetare)
“너희는 예루살렘과 함께 즐거워하라.”(이사야 66:10)는 뜻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여 다 그와 함께 기뻐하라 다 그와 함께 즐거워하라 그를 위하여 슬퍼하는 자여 다 그의 기쁨을 인하여 그와 함께 기뻐하라.

라에타레(Laetere)인데 “너희는 예루살렘과 함께 즐거워하라”(사 6:10)라는 뜻이다.
사순절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절제하면서 하늘의 기쁨을 맛보는 절기이다.


다섯째 주일은 유디카(Judika)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시편 43:1)라는 뜻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 경건치 아니한 나라에 향하여 내 송사를 변호하시며 간사하고 불의한 자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다섯째 주 - ‘장미 주일(Rose Sunday)’이라 불리기도 하며, 주일의 강조점이 죄인의 회개에서 그리스도의 치유 능력으로 바뀌기 때문입니다.

다섯째 주 - 치유와 회심을 생각합니다.

유디카(Judika)인데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시 43:1)에서 온 말이다.
우리는 언젠가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하는데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 부끄럽지 않도록 준비하는 기간이 사순절이다.




여섯째 주일은 종려주일(palmam sunday. 팔맘 선데이), 또는 고난 주일(Dominica Passionis. 도미니카 파시오니스)이다.

마태복음 21: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마가복음 11:10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요한복음 12:13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 경건치 아니한 나라에 향하여 내 송사를 변호하시며 간사하고 불의한 자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여섯째 주일 - 종려주일로 부활절을 미리 맛보는 주일입니다.

종려주일(Palmarum) 혹은 고난주일로서 이 주간은 모진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더욱 깊이 묵상하는 사순절의 절정이다. 우리는 사순절기간 동안 절제를 통한 경건의 훈련과 자신을 다 주신 주님의 베풂을 본받은 나눔의 실천으로 사순절을 뜻있게 보내야겠다.  




사순절은 이렇게
사순절의 의미
사순절을 뜻하는 영어 렌트 Lent는 고대 앵글로 색슨어 Lang에서 유래된 말로, 독일어의 Lenz와 함께 ‘봄’이란 뜻을 갖는 명칭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40일간의 기념일’이라는 뜻의 희랍어인 ‘테살코스테’를 따라 사순절로 번역합니다. 이는 부활 주일을 기점으로 역산하여 도중에 들어있는 주일을 뺀 40일간 주의 고난과 부활을 기념하고 묵상하며 경건히 보내고자 하는 절기입니다. 한편 40이란 수는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광야에서 시험받으신 일, 모세가 40일간 시내산에서 금식한 일,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까지의 40일 등과 같이 성경에 여러 번 고난과 갱신의 상징적 기간으로 등장합니다. 이에 고난 주간을 포함하여 그리스도께서 죄인 된 우리의 구속을 위해 수난을 당하신 사건에 담긴 구속사적 의의를 살펴보며 자신의 신앙을 재 각성하고자 40일간의 절제 기간을 갖는 것이 바로 사순절입니다.
 
사순절의 유래
사순절은 초대 교회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찢기신 살과 흘리신 피를 기념하던 성찬식과 주님의 수난에 동참하고자 행하던 금식으로부터 그 유래를 찾을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을 준비하기 위해서 금식을 행했는데, 초대 교회 성도들도 신앙의 성장과 회개라는 차원에서 구약의 유월절 만찬을 새롭게 해석하여 성찬식에 앞서 금식을 행하였습니다. 또한, 사순절이 끝나는 부활절에는 새로 영접되는 성도의 성례식을 행하였습니다.
 
사순절의 행사
사순절 행사로서의 금식은 수세기 동안 매우 엄격하게 지켜져왔습니다. 사순절의 식사로는 저녁 전에 한 끼 식사만이 허용되었으며, 물고기와 고기 등의 육류는 물론 우유와 달걀로 만든 음식까지도 금지되었습니다. 그러나 8세기 이후로 이 규정은 완화되기 시작하여 14세기에는 금식기도 대신에 절식 기도가 행해졌습니다. 그리고 15세기에 와서는 정오에 식사하는 것이 일반적인 종교 습관이 되었고, 저녁 시간에도 간단한 식사인 콜레이션 collation이 허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순절 기간 동안에 연극, 무용, 연애 소설 읽는 것과 같은 오락행위는 금지되었으며, 화려한 옷을 입거나 좋은 음식을 먹는 것 등의 호화 생활은 자제 되었습니다. 대신에 자선과 예배 참석, 기도 등이 권장되어졌습니다. 이후 1517년,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형식적이며 지나치게 많은 교회의 의식 절차는 폐지되었고, 이 과정에서 사순절과 관계된 많은 의식들도 간소화 내지, 폐지되어졌습니다. 그러나 이 기간을 회개의 시기로 지켰던 중세 교회의 사상은 여전히 받아들여져서 기념되고 있습니다.
 
 
금식 기도
금식은 사순절의 가장 중요한 관습이었습니다. 시기와 장소에 따라 금식의 기간과 엄격성의 정도에 차이는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구속 사역을 기념하는 하나의 관습이었습니다. 금식은 하늘나라의 백성됨을 감사하며 그 백성된 자로서의 삶을 돌이키게 하는 행위로써 초대교회 때부터 행해졌습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행해지는 이 금식 기도는 엄격했던 초기의 형태에서 많은 변화를 겪어 절식節食기도의 형태로 변모되어졌습니다.
 
구제와 선행
사순절에는 범죄한 인류를 위해 고난 받으신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의미에서 불우한 이웃을 구제했습니다. 특히 사순절에 행해지는 금식 기도를 통하여 불우한 이웃의 배고픔과 가난을 생각하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의 실천에 있음을 기억할 때,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사랑을 따라 이를 실천함은 성도의 마땅한 행위 중 하나라 말할 수 있습니다.
 
사순절은 이렇게
 
사순절은 자기 근신과 금식의 기간 즉, 영적 훈련의 기간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고난과 죽음으로 향해가는 순례의 여정으로, 자기 부인의 시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순절을 통해 자기 부인과 자신이 죽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 새벽기도에 잘 참여하겠습니다.
― 저녁예배에 성실히 참여하여 하나님을 예배하겠습니다.
― 성경말씀을 매일 읽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겠습니다.
― 하루 1끼 금식하며 기도하겠습니다.
― 가정예배를 드리겠습니다.
― 무절제한 소비를 하지 않겠습니다.
― 남을 속이거나 해하지 않겠습니다.
― 일상 속에서 절제하겠습니다. (금주, 금연 등)
― 이웃에게 사랑과 구제, 도움의 손길을 주겠습니다.
― 이웃과 다투며 분쟁하지 않겠습니다.
 
이 항목은 사순절 기간동안 하나님 앞에 드리는 믿음의 서약이 됩니다. 내가 지킬 수 있는 항목에 ∨표 해봅시다.
 
새벽기도에 잘 참여하겠습니다.
저녁예배에 성실히 참여하여 하나님을 예배하겠습니다.
성경말씀을 매일 1장 이상 읽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겠습니다.
주 1회 이상 금식하며 기도하겠습니다.
가정예배를 드리겠습니다.
무절제한 소비를 하지 않겠습니다.
남을 속이거나 해하지 않겠습니다.
일상 속에서 절제하겠습니다. (금주, 금연 등)
이웃에게 사랑과 구제, 도움의 손길을 주겠습니다.
이웃과 다투며 분쟁하지 않겠습니다.


사순절이 시작되면서 주현절은 마감한다. 그러기에 주현절의 길이는 최대 9주일부터 최소 4주일까지로 사순절의 출발점에 따라 일정치 않다. 주현절은 고정절기로 1월 6일부터 그 시작이 늘 일정하지만, 사순절은 해마다 달라지는 이동절기인 부활주일 날짜 확정에 따라 들쑥날쑥하기 때문이다. 사순절은 재의 수요일부터 부활절 전날까지로, 그 기간 중 6회의 주일을 뺀 40일 동안이다. 주일을 빼는 까닭은 예배의 전통에 따라 주일은 금식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부활절 계산법은 325년 니케아 회의에서 확정되었다. 동·서교회가 다른 날로 지키는 성탄절과 달리 부활주일은 세계교회가 일치하여 지키고 있다. 부활절기는 부활주일부터 성경강림주일 전날까지이다. 성령강림주일을 흔히 오순절이라고 하는 까닭은 부활주일부터 성령강림주일까지 날 수로 50일이기 때문이다.

사순절은 말 그대로 40일간을 뜻한다. 40일은 대략 1년 365일의 십일조에 해당하는 날 수로 6세기 그레고리우스 대제는 1년의 십분의 1을 하나님께 바치라고 가르쳤다. 사순절 기간은 처음에는 무덤에 머물던 40시간으로부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성경에서 40이란 숫자는 매우 중요한 의미로 사용된다. 예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40일(마4:2) 동안 광야에서 금식하시며 시험받으셨다. 우상의 권력과 맞서 싸우던 엘리야가 하나님과의 만남을 준비하는 시간도 40일(왕상19:8)동안 이었다. 요나가 니느웨성을 향해 선포한 40일(욘3:4)이란 기간은 하나님의 집행유예시간이었다. 또 노아가 겪은 40일(창7:17)간의 홍수는 인류에게는 심판의 깊은 밤이었으나 그에게는 구원의 새벽이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생활 역시 꼭 40년(신2:7)간이었다. 이 기간은 내내 고통스러웠으나 새 세상을 향한 해방의 행진기간이었다.

사순절을 수요일에 시작하는 까닭은 수요일은 예로부터 금요일과 함께 기독교의 금식일로 지켜왔기 때문이다. 이날부터 교회에서는 참회와 경건의 뜻하는 보라색으로 강단색을 장식한다. 재의 수요일에는 전 해의 종려주일에 흔들었던 나뭇가지를 태워 재로 만들었다가 머리에 뿌렸다고 전해진다. 초대 교회에서는 회개를 의미하는 표시로 재로 이마에 십자가를 긋고, 회개의 날을 선포하였다. 재는 다양한 뜻을 담고 있다. 먼저 재는 회개를 뜻한다. “굵은 베 옷을 입고 재 위에 앉으니라(시90:3).” 또한 재는 인생의 무상함을 상징한다.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시 90:3)”. 한편 재는 겸비함을 의미한다.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막기 위해 사정할 때에 자신을 겸손히 낮추었다.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 나라도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창 18:27)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희생을 기억하고 하루하루 대속의 은총에 감사하며 지내는 40일 간은 믿음의 순례기간이다.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은 이 날부터 부활절까지 욕망을 절제하고 일상생활 속에서 경건을 회복하는 신앙의 수련기간을 갖는다. 기독교 경건주의 전통은 영국의 청교도, 프랑스의 칼빈파인 위그노처럼 엄격한 금욕과 청빈을 강요하였다. 보기를 들어 하나님의 이름을 불경하게 부르는 일은 물론 안식일을 범하는 일, 댄스, 발레, 연극, 고리대금, 어음거래, 환금업, 연회와 술 취하는 일, 주사위 놀음, 호화롭게 옷 입는 일 따위를 금지하였다. 성경에서는 명확하게 지적하고 있지 않으나 신앙생활의 금지규칙으로 정하는 것을 ‘아디아포리즘’ 또는 ‘프레찌시스무스’라고 한다.

사순절의 경건생활은 일상의 쾌락과 관련하여 그 경건의 모습이 더욱 돋보인다. 그것은 일상의 습관을 ‘포기’하는 실천을 의미한다. 유럽과 남미의 세계적 축제인 카니발은 사순절의 전통과 관련 있다. 카니발은 해마다 11월 11일 11분에 시작한다. 한겨울 내내 축제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던 카니발은 재의 수요일을 이틀 앞두고 최절정에 이르게 된다. 로젠 윌요일에 최대의 성황을 이루는 카니발은 이날을 고비로 막을 내리면서 이튿날 화요일에는 사순절의 밤을 맞이한다. 가장 소란하고, 흥청대는 카니발과 가장 조용하고 경건한 재의 수요일은 이렇게 극적으로 대비되기 때문에 사순절의 의미를 더 구체적으로 실감시켜준다. 카니발은 이름 그대로 집에 저장해둔 고기를 먹어 치우는 전통 절기이다. 우리말로 사육제라고 번역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원래는 로마의 농업신 사투르누스의 축제였는데 나중에 기독교에서 받아들인 것이다.

사순절 기간의 경건생활 캠페인을 독일 개신교에서는 ‘일곱 주간의 포기’라고 부른다. ‘일용품-생명을 위한 수단’이란 주제로 벌이는 사순절 경건생활운동은 술은 물론 초콜릿 등 달콤한 군것질 금지, 육류 소비 축소, 텔레비전 오락 프로그램 시청 절제 그리고 과도한 취미생활과 고질적인 습관 중단 및 고치기에 힘쓰는 일이다. 독일 교회력에 따르면 여섯 번의 사순절 주일은 각각의 이름이 있다. 첫째 주일은 인보카비트(Invokavit)로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시편 91:5)라는 뜻이며, 둘째 주일은 레미니스제레(Reminiszere)로 “기억하옵소서.”(시편 25:6)라는 뜻이고, 셋째 주일은 오쿨리(Okuli)라고 하는데 “나의 눈이 늘 주께 향하나이다.”(시편 25;15)라는 뜻이다. 넷째 주일은 라에타레(Laetare)로 “너희는 예루살렘과 함께 즐거워하라.”(시편 66:10)는 뜻이며, 다섯째 주일은 유디카(Judika)로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시편 43:1)라는 뜻이다. 각각의 단어는 라틴어 초입송의 첫 단어를 가리킨다. 여섯째 주일은 종려주일, 또는 고난 주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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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四旬節. Lent)의 뜻 

‘사순절’ 기간은 부활주일 전 일부터 소급하여 40일 간의 기간으로 산정한 것인데, 속죄일로 명명된 재(灰)의 수요일(Ash Wednesday)을 첫째날로 시작된다.

사순절(四旬節. Lent)의 개념은 교회사적으로 오랜 기간의 변천 과정을 거쳐 확정된 것인데, 예수님의 40일 간의 광야의 금식과 시험을 받던 수난을 기억하고 그 정신에 동참하기 위하여 제정된 것이 직접적인 배경이었고, 모세의 시내산 40일 간 금식과 엘리야의 40일 간의 금식, 이스라엘 사람들의 40년 간의 광야생활 등이 간접적인 배경이 되어 부활절 전에 행해지는 40일 간의 금식과 기도하는 기간으로 일명 제기(齊期)라고도 하는 기간을 말한다.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사순절은 3세기까지 부활절을 예비하기 위한 금식기간은 대체로 2~3일을 초과하지 않았으나 40일 간을 가리키는 용어 ‘테사라코스테’라는 말의 최초 언급이 니케아 교회법(A.D 325. 교회법 5조)에 언급된 것에서 그 기간을 주목할 수 있는데, 본래는 실제 금식기간을 6주로 하여 주일을 제외하고 36일이었으나 여기에 4일을 추가하여 40일(四旬)이 되었고 ‘그레고리우스’ 교황 때부터 재(灰)의 수요일을 사순절의 시작 일로 잡아 엄격히 지켜왔다.

‘사순절’은 기독교 개혁 이전의 가톨릭 교회를 중심한 교회사적 절기로 볼 수 있는데 이 절기를 물리적인 답습(踏襲)으로 고행주의나 또는 금욕주의적인 발상에서 형식적인 재현을 위한 관점에서라면 하나님의 구속사와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와 은혜언약의 통전성(通典性)에서 볼 때 옳지 않다.

사순절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되새겨 동참하며 경건한 신앙생활을 위한 것이라면 물리적 상황적으로 지킬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대속적 고난의 참 정신을 실천적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해야 하고 이웃과 공동체에서 그 정신을 구현해야 한다.

기독인들의 전 삶이 사순절의 참 정신을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옳을 것인 바 특별히 절기화하여 그 정신을 재확인하고 영성을 가다듬을 수 있는 계기를 가진다는 의미는 큰 것이다.

그러나 형식주의에 입각하여 날수의 채움이나 고난을 형상화하여 프로그램화에 중점을 두고 절기의 내재적 정신을 찾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가해한 자를 원망 없이 용서하고, 인류의 사랑을 저버리지 않고, 고통을 참으시고 하나님의 뜻을 완성하신 십자가의 참 정신을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내 이웃에게 실천하는 것이 주님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순절은 십자가 정신에 참예하고 실천하는 영성을 일깨우는 은혜의 기회가 되기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부활절 후 40일  / 예수님의 승천일

부활절 후 40일째 되는 날은 "예수님의 승천일" 입니다.
이 날이 예수님의 승천일이 되는 이유는 아래의 말씀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 1-3절 "1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2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3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서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이 말씀에서와 같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과 함께 40일 동안 계셨다는 말씀으로 인해 오늘날까지 부활절 후 40일을 계수하여 그 날을 "예수 승천일"로 기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 9-11절의 말씀을 보면,

"9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10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 보고 있는데 흰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11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 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 올라가실 때 곧 승천하실 때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 주고 있는데요, 승천하신 것이 끝이 아니라 하늘로 올리우신 그대로 '다시 내려오실 것이다(=재림)'라는 약속 또한 우리에게 해주시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하늘로 올리우신(=승천하신) 예수님은 어디에 계시고 어떤 일을 하고 계실까요? 성경은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3장 22절 "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

히브리서 12장 2절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로마서 8장 34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 하시는 자시니라."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현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시고, 우리를 위하여 기도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참고 견딜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항상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해 주고 계십니다.

누가복음 22장 31-32절 "31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32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항상 우리를 위하여 기도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담대히 믿음으로 자신과 형제들을 굳게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뒤로 물러가지 말아야 할 것은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곧 다시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오셔서 우리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먼저 죽은 자들과 함께 공중으로 끌어 올려 예수님을 영접하게 하시고 그리고 항상 예수님과 함께 있게 하실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17절 "16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이 말씀이 "소망없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큰 소망이 됩니다. 예수님의 강림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던 날에 흰옷 입은 두 사람을 통해서 이미 말씀하셨던 내용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약속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이,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예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 끝까지 참고 견딜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생각에는 지금의 삶이 오래갈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모든 육체를 풀의 꽃으로 비유하셨습니다(벧전1:24-25).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조금만 참고 견디면 예수님께서 약속대로 반드시 강림하여 우리를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3장 11-13절 "11...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우리는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베드로전서 1장 7-9절 "7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8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9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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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사순절 7주간 기도학교

제1주 / 왜 기도하는가?

1)왜 기도하는가?
요일 5:14-15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기도는 신앙 생활의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요소입니다. 기도 생활에 승리하는 사람은 신앙
생활과 나아가서 인생을 승리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기도를 실패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응답받는 기도를 할 수 있을까요? 마음 문을 열고 다음의 말씀들을 살펴
보고 먼저 왜 기도해야 하는지를 알아 봅시다.

1. 기도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요 14:13-14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2. 하나님께서 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시 65:2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
3. 성도에게 영적 만족을 주기 때문입니다.
고후 3:5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
4. 성도의 영혼을 지켜 주기 때문입니다.
마 26: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5.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살전 5:16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
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제2주 / 무엇을 기도하는가?


약 4:2a-3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기도하는 시간은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입니다. 세상에서 사람을 만나 이야기할 때도 예의를 지켜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과 대화를 나눌 때에도 지켜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하나님과 대화할 때 어떤 것을 화제로 삼아야 할 것인가, 즉 무엇을 기도 할 것인가를 살펴봅시다. 하나님은 자녀의 바람직한 기도 제목에 기뻐 응답하십니다.

1.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마 6:9-10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2. 죄의 용서를 기도합니다.
죄를 고백하며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에서 실패한 일이 있으면 그 회복을 기도합니다.
마 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마 6:14-15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벧전 3:7
남편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3. 일용할 양식을 기도합니다.
이기적이거나 필요 이상의 것을 바라는 기도가 아니라 말 그대로 "일용할 양식"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기도입니다.
마 6:11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4. 성령 충만하심을 간구합니다.
하나님 뜻에 맞는 기도를 합니다.
요일 5:14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제3주 / 어떻게 기도하는가?


고전 14:40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

당신은 기도할 때 어떻게 기도하십니까?
기도할 때 우리는 몇 가지 절차를 꼭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절차를 기억하면 중언부언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에 너무 의지하면 자칫 형식적인 기도가 될 수도 있습니다.
"마음 없이 말로만 하는 기도보다 말은 없어도 마음을 드리는 기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1. 도의 순서 - ACTS
Adoration (찬양, 경배) -+
Confession (고백, 회개) +- 나 하나님
Thanksgiving (감사) -+
Supplication (간구) - 하나님 나
2. 하나님을 경배 (Adoration)
대상 29:11-12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3. 하나님께 죄를 고백 (Confession)
시 66:18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4. 하나님께 감사 (Thanksgiving)
빌 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5. 간구 (Supplication)
약 5:16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막 11: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외식하지 말라(마6:5) 열심히 간구하라(약5:16)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라(요일5:14-15) 쉬지말고(살전5:17)


제4주 / 누구에게 기도하는가?


마 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기도는 누구에게 하는가? 당연한 질문 같지만 하나님께 드려지지 않는 기도가 분명히 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먼저 확실하고 분명하게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듣고 계신다는 확실하고도 생생한 의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 기도할 때 하나님을 잊어 버리고 있다면 안타깝게도 그것은 이미 우리의 독백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1.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히 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2.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기도합니다.
엡 5 :20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히 4:14-16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딤전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3. 성령의 도우심으로 기도합니다.
롬 8:26-27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엡 6:18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유 1:20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제5주 / 언제 기도하는가?

언제 기도하는가?
시 5:3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그리스도인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하므로 생명의 양식을 얻을 수 있다.
날마다 일정한 시간을 경건의 시간으로 마련하여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를 계속해 나가야 한다.
당신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하여 일정하게 마련할 수 있는 시간은 언제인가? 아침인가? 낮인가? 혹은 저녁인가?

1. 일정한 시간을 정합니다.
각자의 사정에 따라 다를 수 있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날마다 일정한"시간을 정하는 것입니다.
사 40:30-31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 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2. 새벽 시간에 기도합니다.
막 1:35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시 46:5
하나님이 그 성중에 거하시매 성이 요동치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잠 3:9-10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3. 바쁜 시간을 피합니다.
요 4: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4. 계속적으로 기도합니다.
살전 5: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행 1:13
들어가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 베드로,요한,야고보, 안드레와 빌립,도마와 바돌로매,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셀롯인 시몬,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제6주 / 어디서 기도하는가?


마 6: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공부할 때 어디서 하면 효과가 좋습니까? 혼자서 하는 것이 좋습니까? 아니면 여럿이 함께 모여 하는 것이 좋습니까? 기도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과 은밀하게 만날 수 있는 곳을 찾으십시요. 거기서 하나님을 나 홀로 만날 수도 있고, 여럿이 함께 만날 수도 있습니다.
단, 다른 사람은 필요없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과 기도하는 사람만 있어야 합니다.

1. 홀로 기도할 수 있는 곳
행 16:25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행 10:9
이튿날 저희가 행하여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시간은 제 육시더라
단 6:10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2. 함께 기도할 수 있는 곳
행 1:13-14
들어가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 베드로,요한,야고보, 안드레와 빌립,도마와 바돌로매,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셀롯인 시몬,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행 21:5
이 여러 날을 지난 후 우리가 떠나갈새 저희가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거늘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눅 9:28
이 말씀을 하신 후 팔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3. 결론은


제7주 /  기도 응답의 확신
 
요 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1. 우리의 기도가 응답받는 이유
롬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2. 응답받는 기도의 조건
요일 3:22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롬 12:1-2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
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
별하도록 하라
마 18:19-20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마 15:27-28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3. 응답되지 않는 기도의 원인
잠 28:9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
약 4: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시 66:18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고난주간 일정
고난주간 묵상자료

(십자가의 길)

고난 주간은 “영적으로 성숙한 신앙생활”에 중점을 두고 맞이한 절기이기에 그 어느 해 보다도 의미가 있고 뜻이 있다고 봅니다. 이번 고난 주간에는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 고난 받으시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먼저 자신의 죄를 참회해야 하고, 하나님의 섭리에 감사하며, 영적으로 성숙한 삶을 살고자 하는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이 자료는 교우들이 고난의 한 주간을 살아가시면서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 행하신 한주간의 사역을 묵상하면서 의미 있게 보내고자 정성껏 준비된 자료입니다. 요일별로 자료를 읽고 묵상하시면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주님의 그 큰 은혜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제 1 일 (고난(종려)주일)
예루살렘 입성
(마21: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마21:1-11, 막11:1-11, 눅 19:28-40, 요12:12-19)

갈릴리와 베뢰아에서 전도 사역을 마치신 예수님은 유월절 행사에 참여키 위해, 그리고 구약 시대의 예언자인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슥9:9)대로 수난과 죽임을 당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향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평화와 겸손을 상징하는 나귀를 타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공공연히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지만 눈에 보이는 메시아 왕국을 세우실 것이라는 그릇된 기대를 갖고 있던 수많은 사람들은 주님의 뜻과는 다른 의미의 호산나(지금 곳 구원하소서)를 외치며 환호하였습니다.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신 예수님은 성전으로 가셔서 모든 것을 둘러보시면서 웅장하고 아름답게 장식된 성전 속에서 인간의 위선, 탐욕, 가증스러움, 이기주의의 죄악이 가득 차 있음을 보시게 됩니다. 예수님 앞에 보여진 가증스러움은 다음날 채찍을 드심으로 동안의 결과가 나타나게 됩니다.


1. 수난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음을 아시면서도 공공연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예수님의 믿음과 용기를 보면서 나의 믿음을 돌아 봅시다.
2. 오늘 주님께서 나와 나의 가정, 우리 교회에 찾아 오셔서 보신다면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


제 2 일 (월요일)
성전을 청결케 하심

(마21:12)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고”
(마21:12-17, 막11:15-19, 눅19:45-48, 요2:13-22)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도중에 길가에 잎사귀가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열매를 따먹고자 하였으나 얻지 못하시고 그 나무를 저주 하셨습니다. 이는 무화과로 상징되던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심판을 예고하는 행위였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는 명절 때 희생 제물에 필요한 짐승, 새, 포도주, 소금, 기름 등이 매매되고 있었고, 지역 화폐를 성전 화폐로 교환하여 주는 환전 행위도 성행하였습니다. 그래서 성전은 완전히 시장과 같은 장소가 되어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시장화 되어 버린 성전을 다시 기도와 예배의 경건한 장소로 바꾸시기 위해 매매하는 자들을 모두 내어 쫓으시며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 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막11:17)”라고 하셨습니다. 이 사건은 성령이 거하시는 전인 우리 자신과 주의 몸된 교회, 그리고 구원의 역사를 이루실 이 세상을 성결케 하시려는 주님의 계획 이셨습니다.



1. 나의 신앙은 잎만 무성하고 열매 없는 무화과 나무와 같지는 않습니까?
2. 하나님의 전을 참으로 기도하는 전으로 만들기 위해 나는 어떤 신앙의 태도를 가져야 할까요?


제 3 일 (화요일)
과부의 두 렙돈 교훈

(막12:43)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 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막12:41-44, 눅21:1-4)
서기관이 예수님을 찾아와 “계명 중에 첫째 되는 계명이 어떤 것이냐?”는 물음에 주님은 “첫째,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연보 궤를 대하여 앉으셔서 그들이 헌금하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때가 마침 유월절이라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또한 많이 헌금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때 두 렙돈(가장 작은 히브리 화폐단위)을 헌금하는 과부를 보시고는 제자들에게 이르시기를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 궤에 헌금한 모든 사람보다 많이 헌금 하였다”라고 칭찬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다른 사람들은 많이 있는 가운데서 일부를 하였지만 과부는 없는 가운데서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드렸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과부의 적은 헌금을 높이 평가함으로서 신앙의 핵심은 화려한 외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실한 중심과 순수한 본질에 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1.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헌금은 어떤 것일까요?
2. 다음 말씀을 다시금 묵상하여 보십시오
“많은 사람들은 물질로만 바쳤지만 그녀는 마음으로부터 바쳤습니다. 이는 습관을 좇아 드리는 것과 사랑으로 드리는 것의 차이입니다.”


제 4 일 (수요일)
한 여인의 헌신

(막14:8)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마26:6-13, 막14:3-9, 요11:45-53)

오늘은 베다니의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어 드린 사건이 있는 날입니다. 마리아는 자기가 하는 행동에 대해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걱정과 수치심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담하게 향유 한 병 모두를 예수님의 발에 부어 드렸습니다.(향유 한 병은 300데나리온의 값어치가 있는 것으로 노동자 한사람이 1년 동안 노동하여야 얻을 수 있는 금액) 그리고는 자기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렸습니다.
우리는 이 여인에게서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사랑의 충동을 보게 됩니다. 제자들의 불평과 비난 속에서도 예수님께 향한 마리아의 사랑은 그칠 줄 몰랐습니다. 이일을 주님은 칭찬하시며 복음이 증거 되는 곳마다 이일도 증거하라 하셨습니다.
우리도 마리아처럼 교만과 허울의 옷을 벗어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을 향한 믿음의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1. 내가 귀히 여기는 것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며 주님을 위하는데 헌신하는 마음으로 드릴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2.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하고 자신의 체면을 생각하여 주님의 일을 하는데 주저한 적은 없으시나요?
3. 마리아가 만일 향유값(1년 품삯)을 생각하고 망설였다면 주님의 장례를 준비하는 영광을 얻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나의 욕심 때문에 주님께 대한 봉사의 기회를 잃 어버린 적은 없나요?


제 5 일 (세족 목요일)
최후의 만찬

(막14:22-24) “··· 받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마26:17-30, 막14:22-25, 눅22:7-20, 요13:26-30)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 가룟 유다로부터 배반당하시던 날 밤에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식사를 나누고자 하였습니다. 이때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떠와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수건으로 닦아주었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행동은 종으로서 봉사하는 모습을 본으로 보여주심과 더불어 오늘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도 그같이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드셨습니다. 이때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 주심으로 십자가 위에서 자기 몸을 희생하여 온 인류의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 되실 것을 말씀으로만 아니라 실물 교육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잡히시기 직전 슬픔과 심한 고민에 빠진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면서 제자들에게 “깨어 함께 기도하자”고 몇 번이고 부탁하였지만 제자들은 잠만 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교회의 지체인 우리들 모두가 예수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며 깨어 있어 당신을 본받고 증언할 것을 원하십니다.



1. 나는 예수님과 함께 살겠노라 하면서 실제로는 제자들처럼 잠만 자고 있지는 않습니까?
2. 오늘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봉사 할 수 있는 길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구한 예수님의 기도와 나의 기도를 비교하여 보십시오.


제 6 일 (성 금요일)
십자가에 달리시고 운명하시다

(눅23:46)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
(마27:45-56, 막15:16-41, 눅23:44-49, 요19:28-30)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남김없이 자기를 바치는 사건이자 인류를 위한 대속의 사명을 온전히 이루는 사건이었습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말씀 일곱 가지를 명상함으로서 하나님의 섭리와 지극하신 사랑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1. (눅23:34)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십자가에 못을 박고 침밷고 창으로 찌른 자도, 능욕하고 저주하고 비웃던 자도, 우리 주님은 용서하셨습니다.
2. (눅23:43)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회개하는 죄인에게 하나님은 새로운 희망을 주십니다.
3. (요19:26-27)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
인간 사이에 있어야 할 돌봄과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4. (마27:46)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우리의 구원과 영생을 위한 예수님의 거룩한 절규입니다.
5. (요19:28) 내가 목마르다.
인간들의 사랑과 헌신과 충성을 요청하시는 갈증입니다.
6. (요19:30) 다 이루었다. 거룩한 희생으로 모든 죄를 속하였다는 하나님 어린양의 승리의 외침입니다.
7. (눅23:46)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며 살아오신 예수님의 삶의 결론입니다.


1. 용서함 받은 우리도 남을 용서하며 살아야 합니다.
2. 예수님의 제자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가야 하는 것을 아시나요?


제 7 일 (성 토요일)
무덤 속의 예수

(막15:46) “요셉이 세마포를 사고 예수를 내려다가 이것으로 싸서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어 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으매”
(마27:57-61, 막15:42-47, 눅23:50-56, 요19:38-42)

유대인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사람이자 산헤드린의 회원인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지금껏 주님을 향한 자신의 신앙을 노출시키지 않았으나 예수님의 죽음을 통하여 예언이 성취된 것과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이 바로 메시아라는 사실을 재차 확인하고는 자신의 높은 지위와 명예에 치명적인 손실이 가해질지도 모르는 행동을 담대히 행하였습니다.
즉 요셉은 모든 눈총을 무릅쓰고 자신을 예수와 가까운 자로 자처하며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인도 받아 자기를 위해 만들어 놓은 무덤에 장사지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덤에 계셨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가 다시 살아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처럼 죽었고 그리고 무덤속에 있었습니다.
예수님게서는 죽음을 이기시고 악을 물리치시기 위해 무덤에 묻히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덤의 어두움을 제거 하셨으며, 그 공포를 영원히 쫓아 버리셨습니다. 죽음이 그 쏘는 살로 그리스도를 상하게 했지만 부활하심으로 이제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죽음이 그 위력을 끼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1. 나는 남들이 주님을 외면할 때도 아리마대 요셉과 같이 용기 있게 주님을 찾고 따를 수 있나요?
2. 죽음이 있었기에 부활이 있었습니다. 무덤속에 장사 지내야 할 내 죄의 목록을 생각해 보세요.


제 8 일 (부활주일)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삶

(마28:5-6)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마28:1-7, 막16:1-13, 눅 24:25-35)

오늘은 우리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이자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신 가장 기쁜 날입니다. 금요일에 장사지낸바 되셨던 예수님은 3일 만에 다시 살아 나셨습니니다.
우리 교우들은 금년도 부활절을 맞이하여 하나의 절기로 지나쳐 보내지 마시고 부활을 자신이 새롭게 체험하며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삶을 살아가시기 원합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삶은;

1. 새 힘과 용기를 얻어 사는 삶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목격하고 절망과 실의에 빠져서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들은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 새로운 용기를 얻어 복음의 일군이 되었습니다.

2. 과거를 씻고 새 출발을 하는 삶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초대 교회 교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지금까지 숨고, 무서워하고, 절망에 빠졌던 과거를 떨쳐 버리고 새로운 각오로 출발하였습니다.

3. 참 생명을 발견한 삶을 살았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주검을 향하여 갔으나 생명을 발견하였습니다. 곧 시체를 향하여 올라갔으나 시체는 발견하지 못하고 빈 무덤과 생명이 가득찬 부활의 주님을 발견하였습니다.
4. 가치관의 전환이 일어났습니다.

삶에 있어서의 우선순위, 관심사가 내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바뀐 삶을 살아가는 삶을 말합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체험은 제자들이 지금껏 느껴 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열어 주었습니다. 부활절을 맞이한 우리 교우들은 한사람도 빠짐없이 부활의 주님을 만남으로 새로운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골로새서 3:1-2)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을 향하여

다가오는 이번 사순절은 우리에게 축복이 될까요?

- 요한 에른스트 폰 홀스트

The Crucified Is My Love: Morning and Evening Devotions for the Holy Season of Lent,
요한 에른스트 폰 홀스트,  무료 영문 전자책을 내려받으실 수 있습니다.

재의 수요일 아침

하나님의 어린 양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 1:29

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창세기 22:7-8) 선지자 이사야는 잃어버린 세상을 위한 희생제물로 주 하나님께서 준비하실 어린 양에 대해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53:6-9>)

세례 요한은 지금 비옥한 요단 골짜기에 서 있습니다. 그의 눈은 형형히 빛나고, 그의 가르침은 번개가 치듯 날카롭습니다. 각계각층의 사람들로 뒤섞인 무리들은 제자들에게 둘러싸인 요한의 설교를 듣고 있습니다.

요한은 갑자기 입을 다뭅니다.  당시에는 사람들에게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나사렛 예수가 군중들의 시야 앞으로 걸어옵니다. 요한은 그를 바라봅니다. 하나님의 영이 그 위에 임하셨고, 요한은 순전한 그 방랑자가 수천 년 동안 사모하며 기다리던 약속된 여호와의 종이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구세주임을 알아챘습니다.

이러한 인식에 압도된 요한은 다가오는 그 사람을 가리키며 중대한 말을 외칩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이 선포를 통해 요한은 가장 위대한 선지자로 일컬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심오한 말입니까! 요한은 예수님의 신성한 사명과 그분의 가장 깊은 본성, 또 그분의 뜻과 사역을 파악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천국이 활짝 열린 것을 알아보았습니다. 허나 인류의 죄악으로 인한 저주도 보았습니다.  요한은 그 저주가 이 한 사람의 어깨에 지워진 것을 보았습니다.  이분은 대속의 죽음으로 그 짐을 인류에게서 걷어 가셔서 몸소 지시고, 잃어버린 세상에 자유를 주시고 변화된 새 세상을 찾게 해 줄 분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예수님이 순전한 어린양이었습니다.  아무도 그를 어떤 죄명으로도 고발할 수 없으며,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친히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증언하셨습니다 (마태복음 3:17). 그는 또한 죽기까지 인내하는 어린양이셨으니, 곧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는 피를 흘리며 십자가에 달려 있는 동안 하나님께 자기의 원수들을 용서해 주시기를 기도하신 순한 어린양이셨습니다.   범사에 그는 하나님의 어린양, 거룩한 희생양이시니 그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온전해 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은 영원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시고 대속하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는게 마땅하지 않습니까? 감사하며 신실하게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그분의 고통과 죽음을 되새기며 기념하는 시간이 시작됩니다. 다가오는 이번 사순절은 우리에게 축복이 될까요? 이미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순절을 겪었고 또 얼마나 쉽고 가볍게 그것을 지나쳤습니까! 다가오는 이번 사순절이 우리가 맞이할 마지막 사순절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어린양 없이 죽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보호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옛 본성에서 나오는 모든 저항을 제압하시고 우리의 영원한 구원을 위해 이 사순절을 축복해 주시기를 빕니다.

재의 수요일 저녁

누가 세상의 죄를 없애는가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 1:29

요한의 이 증언은 복음 전체의 핵심이자 정점입니다. 복음의 심장이요 별입니다.  피비린내 나는 죽임에 의해 요한의 입은 폐쇄당했지만, 사도들은 더 더욱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이 사도들 또한 죽었으나 복음은 모든 세기에 걸쳐 울려 퍼지며 사도들을 거룩하게 합니다. 그리고 오늘날 주님의 교회가 성만찬으로 모일 때, 교회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을 바라보며 한 목소리로 노래합니다. "세상 죄를 짊어 지신 하나님의 어린양이여,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우리에게 평화를 내리소서!"

우리는 종종 우리 자신의 일과 근심, 고통때문에 짓눌릴 때가 있는데 만약 우리의 죄와 그로 인한 책임의 무게를 우리 스스로가 전적으로 감당해야 한다면 영원한 암흑에 처박히고 말 것입니다.  주님께서 찢기고 피나는 어깨로 골고다 언덕까지 지고 가신 십자가 나무는 심히 무거웠으나 저주받은 그 나무에 얹힌 보이지 않는 짐은 무엇과도 비할 수 없는 무게였습니다. 하나님의 어린양 위에 놓여진 것은 한 사람의 죄가 아니라 모든 인류의 죄, 곧 온 세상의 죄와 그 책임, 사형선고였습니다. 사순절은 우리에게 이 어린양을 바라보라고 권면하며, 요한의 “보라”는 간곡한 외침은 우리를 일깨웁니다. 

한때 광야에 있던 이스라엘 자손이 사나운 뱀에게 물렸을 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놋뱀을 올려다봤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짐을 지고 대속하신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을 바라볼 것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 더 충만하고 깊고 감사한 믿음으로 그분을 바라볼 것입니다. 그러자면 새롭고 순수한 눈이 필요합니다. 우리 마음의 중심, 가장 깊숙한 곳에서 구세주의 고통을 깨달아 이해하길 원한다면 이 새롭고 순수한 눈을 주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그런 눈과 영혼으로 고난당하시는 구세주를 바라보십시오. 어두운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죽음과 사투를 벌이며 핏방울을 쏟으시는 그분을 보십시오. 잔혹한 사형 집행인의 채찍질과 침 뱉음과 가시관을 침묵으로 견디며 재판장에 서신 주님을 보십시오.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 아래에 서십시오. 그리고 죽어가는 그분이 하시는 마지막 일곱 마디 말씀을 들으십시오. 상처받아 피로 얼룩진 머리, 극심한 고통으로 떨리는 팔다리, 눈물로 가득 찬 그분의 눈을 마주 하십시오.

더 깊이 들여다보십시오. 예수님의 마음, 아버지께 대한 그분의 순종,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연민. 그분의 마음은 산산이 부서져 숨을 거두시고 고개를 떨구셨습니다. 당신의 마음도 고통과 사랑으로 깨지고, 감사의 눈물이 넘칠 때까지 주님을 바라 보십시오. 이렇게 영혼으로 주님을 바라보고 마음에 품는 모든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큰 교회를 이 땅에 세우게 되며 그 교회는 장차 영광의 날에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이 어린양을 영광스럽고 영원한 교회의 왕으로 다시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런 후 교회는 새 언약의 예언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계 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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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사순절을 비롯한 교회력의 절기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고 있는 것은 20세기 후반에 일어나기 시작한 예배갱신운동과 교회력 복원과 관련되어 있다. 특히 가톨릭의 “예배복고운동”에서 시작된 예배갱신운동은 초대교회의 예배회복이라는 과제를 통해 개신교에도 많은 자극을 주었다. 문제는 문화적 흐름에 맞추려는 이 예배갱신운동을 계기로 중세로부터 내려오는 교회력에 따른 절기와 행사나 축제를 복원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는데 있다. 이 뿐만 아니라 절기나 행사에 상징적으로 사용되는 색의 선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교회 전통을 되살리려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이런 움직임은 특히 에큐메니칼(Ecumenical) 운동에 참여하는 교단의 실천신학자들 사이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들은 종교개혁이 교회력과 축일을 폐지한 것을 마치 어린아이를 목욕물과 함께 내어다 버린 것인 양 비유하기도 한다. 이들은 종교개혁이 중세의 예전과 교회력과 예배의식을 버린 것이 예배의 통전성을 훼손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런 ‘예배복고 운동가’들의 주도하에 중세의 전통을 다시 도입하여 예배를 활성화시키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는 것이다. 이 흐름에 따라 교회에서도 예배가 변화하면서 여러 가지 혼란을 불러왔기에, 지도자들은 이에 대한 분명한 목회적 지침과 방향 제시가 필요하다.

 

사순절에 대한 관심은 교회력과 절기의 전통을 되살리려는 보다 큰 움직임의 일환이다. 예배를 비롯해 기독교가 문화의 흐름에 대해 무관심하고 도외시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지나치게 문화에 적응하려는 경향도 마찬가지 위험이 있다. 이러한 극단을 오가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 예배에 관한 성경적이며 신학적 원리를 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 다음 글은 개혁주의 입장에서 보는 사순절에 대해 칼빈의 기독교강요, 개혁주의 신앙고백, 그리고 청교도 신학과 더불어 다수의 출판물과 인터넷 기사들을 참조하여 작성한 것이다.

 

1. 고대 교회의 교육중심의 사순절


고대 교회의 사순절은 세례식과 연관되어 있다. 세례를 받을 사람은 일정 기간 동안 기독교 신앙의 내용을 배운 후에 부활절 전날 저녁에 세례를 받았다. 그들은 3년 정도의 교육을 받은 후에 세례를 받고서 교회에 가입하였다. 그런데 그들은 세례를 받기 전에 금식하고 기도하면서 준비하였으며, 세례 받을 사람뿐 아니라 그들을 맞이할 교우들이 함께 금식하기도 하였다. 어떤 교회는 세례를 받기 전에 40시간 동안 금식하도록 하였다. 여기에서 사순절(quadragesima, ‘40번째’라는 뜻으로 ‘40시간’ 혹은 ‘40일’을 가리킴)이라는 말이 나왔다. 또 어떤 교회에서는 두 주간 동안 부분적인 금식과 기도로 준비하도록 하였다. 이들이 세례를 위한 교육을 받는데 있어 기간이나 방식이 달랐다는 것은 그에 대한 사도적인 전통이 부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양한 교육들이 있었지만, 부활절 때에 시행될 성례를 위하여 수제자들을 교육하고 금식과 기도로 준비함으로 그들은 사순절을 실행하였다.

 

이런 사순절이 고대 교회에서 정착된 것은 콘스탄티누스 황제(Flavius Constantinus, 재위 306-337)가 기독교를 공인한 313년 밀라노 칙령 이후의 일이다. 4세기의 교회들은 부활절 전의 일곱 주간 동안 매일 3시간의 세례를 위한 교육을 시켰는데, 기독교가 공인된 후에, 이런 시행은 제국의 전 지역으로 전파되었다. 325년에 열린 니케아 종교 회의에서는 사순절을 40일로 정하고 부활절에 있을 성례를 준비하도록 결정하였다. 이런 상황에 대해 모든 교회가 40일을 지킨 것은 아니고, 40일을 정하는 방식이 매우 다양했다. 어느 교회에서는 수난일 6주일 전부터 계산하기도 하였고, 또 어떤 교회는 8주일 전부터 금식을 하되, 토요일과 주일은 제외하고 일주일에 5일씩 금식이나 절식을 하였다. 또 다른 교회에서는 7주일 전부터 금식의 날로 정하고 그 사이에 있는 여섯 주일을 제외하여 40일을 맞추어서 시행하기도 하였다.

 

로마 교회의 '재의 수요일'로부터 시작되는 사순절

니케야 종교 이후로 정해진 사순절이 형식을 갖추고 모든 지역에서 실행된 것은 서로마 제국이 476년에 멸망하고 로마 교회가 교회와 세속의 모든 권리를 장악한 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로마 교회의 정치적인 기초를 놓았던 레오 대교황(Pope Leo I, 재위기간: 440-461)은 로마의 전통을 따라 주일을 제외한 6주일을 금식의 날로 정하여 36일을 지켰고, 7세기에 다른 교황이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the first day of Lent))부터 토요일의 4일을 더하여서 40일로 확정하였다. 동방 교회에서는 일곱째 주일 월요일부터 부활절 9일 전 금요일까지를 사순절로 지켰다. 동방 교회가 서방 교회보다 2일 먼저 시작하고 8일 먼저 끝났다. 동방 교회는 주일을 제외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방식으로 40일의 금욕 기간을 지킴으로 동서방교회가 공식적으로 사순절을 유지했다고 할 수 있다.

중세의 카니발 축제로서의 사순절

중세에서는 사순절이 게르만 족의 축제와 결합하면서 더 변질되기 시작했다. 해가 길어지는 시기에 그들은 3일 동안 사육제(謝肉祭, Carnival, ‘고기를 금한다’의 뜻)의 축제를 하고서 40일 동안 금욕하였다. 금욕의 방법도 지역마다 달랐다. 육류와 달걀은 금하고 빵만 먹는 지역이 있었고, 거기에 더하여 생선까지 허용하는 곳도 있었다. 또 다른 지역에서는 우유를 포함한 낙농제품의 모든 음식까지 금하기도 하였다. 또한 엄격한 금식을 행하기도 했지만, 낮에 한 끼만 먹고 절식하면서 기도하는 곳도 있었다. 이런 관습에 대해 사회학자들은 이러한 것이 춘궁기(春窮期)를 이기는 방식이었음을 설명한다. 사육제에서 큰 잔치를 하고 봄 농사를 준비하는데 처음 수확할 때까지는 먹을 것이 부족하기 때문에 절식을 하였고, 여기에다 종교적인 의미를 붙인 것이라는 것이다.

중세의 사순절은 고대 교회의 사순절에 비하여 매우 변질된 내용을 가졌다. 중세에서는 성례가 약해지면서 사회적 성격을 지닌 정교한 예식으로 발전하였고 따라서 이런 축제의 후에 있을 로마 가톨릭의 금식의 전통인 사순절 이후에는 사회적 범죄가 훨씬 더 기승을 부렸다. 개인이 하고 싶은 대로 범죄를 저지르다가 축제가 끝날 무렵 마지막 ‘재의 수요일(참회의 수요일)’에 이르러 성체성사(미사 중에 봉헌된 빵과 포도주가 축성 기도와 성찬 재정 말씀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몸과 피로 변화되는 거룩한 변화)를 통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죄책을 지울 절호의 기회를 갖는 시간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중세에서는 사순절이 시작하는 ‘재의 수요일’에 사람들은 이마에 재로 십자가를 그리면서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성당 앞에 나무 십자가를 세우고 자기의 죄를 써서 거기에 못 박기도 하였다. 수난의 금요일에 그 십자가를 짊어지고 행진하고 거기에 달려서 고통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 기간 동안에 수난극을 상연하였는데, 특히 예수님의 수난을 주제로 하는 연극을 상연하였다. 그들은 이런 행사들을 통해서 자기들이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기 공로를 가미한 미신적인 전통으로 자리를 굳힌 것이다. 사순절에 주님의 고난을 준비하고 참여한다고 하지만, 그들은 주님에게 초점이 맞추어진 것이 아니라 사람의 행위와 감정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주님의 수난을 기념하려고 금식한다고 하였지만, 사실은 자기들이 행하는 금식 자체가 강조되고, 수난극 자체가 강조되었다. 이것은 사람의 선행을 강조하려는 로마 교회의 신학과 직결되어 행위 구원까지 연관되어 진다고 할 수 있다.

종교개혁자들의 사순절 비판

1. 미신적 풍습에 대한 칼빈(Jean Calvin, 1509-1564)의 비판

사람의 전통이 아니라 오직 말씀만을 높였던 개혁자들은 사순절이 미신적이며 이방 풍속이 가미된 비신앙적인 실행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리스도를 따라서 고난에 동참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결코 주님의 고난에 동참함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람의 선행이 강조되었음을 칼빈은 지적하였다. 물론 고대 교회에서도 사순절을 ‘미신적으로 지키는 풍습’이 있어 왔다. 그들이 이렇게 해 왔던 것은 그들이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 특별히 봉사를 한다고 생각하였고, 그리스도를 거룩하게 모방하는 것이라고 하여. 지도자들이 이것을 권장하였기 때문이다. 칼빈이 성경대로 말하는 것처럼, 성경에 그리스도께서 금식하신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이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복음 선포를 시작하심으로써, 복음은 사람의 교훈이 아니고 하나님 나라에서 내려온 것임을 증명하시려는 것이었다(마 4:2, 기독교강요, 4권 12장 20절). 당시에 그리스도의 40일 금식을 모방하려는 것은 사람의 행위를 의지하는 일이기 때문에, 칼빈은 사순절 기간에 행하여지는 모든 것이 ‘미신적으로 지키는 풍습’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이런 실행이 하나님께서 주신 교훈을 믿지 않고, 사람의 행위를 의지함으로 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미신적이라고 평가했다. 칼빈은 다수의 고대 교부들을 인용하면서, 사순절에 대한 고대교회의 약점과 특별히 로마 교회의 그릇된 사순절 시행을 지적하였다. 그것은 사순절의 관행이 복음을 가리기 때문에, 그는 강력한 어조로 사순절 시행을 비판한 것이다.

2. 미사와 비슷한 실행에 대한 비판

중세 교회는 사순절 동안에 수난극을 상연하였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수난을 연극으로 재현한다는 것은 로마 교회의 미사와 맥락을 같이하는 전통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수난을 재현했다는 점에서 미사와 동일한 우상숭배이며 미신이라고 할 수 있었다. 로마 교회에서는 성찬의 떡과 잔이 사제가 축성(祝聖, consecratio)하는 순간에 실제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화체설(化體說, transubstantiation)을 가르쳤다. 그러나 개혁주의자인 칼빈은 로마 가톨릭의 화체설을 강력하게 비판하면서 “그들은 그리스도를 떡 속에 가둔다. 우리는 그와 반대로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끌어내리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신비는 천상적인 것이며, 그리스도와 우리가 연합되기 위해서 그를 지상에 끌어내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기독교강요, 4권 17장 31절). 로마 가톨릭에서 이야기하는 사순절은 그리스도를 떡 속에 가두고 기념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고, 성경적인 근거가 전혀 없다. 칼빈의 표현을 빌리면, 로마 교회의 사순절은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끌어내리는 신성모독의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에서 천주교에서 사순절을 미신적으로 지켜 나가는 것의 폐해를 지적한다. 그는 모든 종교적인 행위를 오직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해서 해야 하는데, 성경에는 사순절을 지키라는 규정이 없으므로, 이를 지키는 것은 성경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만든 미신적인 규례를 따르는 것이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그는 양심의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서 성경 가운데서 규정한 것만을 따라가야 한다는 양심의 자유를 분명하게 밝힌다.

3. 사순절 금식에 대한 비판으로 개혁의 기치를 든 츠빙글리(Huldrych Zwingli, 1484-1531)

1522년 3월 9일 츠빙글리는 당시의 취리히 시의 출판업자들과 함께 있었는데, 그들은 사순절 금식 전례를 깨고 소시지를 먹었다. 하루 종일 일해야 했기에, 그 벅찬 일을 감당하느라 스위스 소시지를 충분히 먹었다. 취리히 사제였던 츠빙글리는 그들의 행동을 묵과해 주었다. 사순절이나 금식 같은 인위적 절기 전통은 성경적인 타당성이 전혀 없기 때문이었다. 또한 성경이 신앙과 행습 문제에 있어 최종 권위이기에, 성경적인 바탕이 없는 사순절과 그 준수는 간과해 넘길 수 있는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한 달 후 츠빙글리는 [선택의 자유와 음식 고르기의 자유]에 관하여 설교했다. “...나는 사람들이 영원한 의에 도달하려 하기보다 더 악해져 가고 더 부패해져가는 시대의 위험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평민들은 사순절에만 참회를 하고 금식을 준수하고, 성찬을 하기만 하면, 일 년 내내 범사가 괜찮다고들 생각할 터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언제나 인식해야 하고, 우리의 삶은 경건해야 합니다. 우리가 금식철인 사순절 때에만 신경을 쓰면 충분하다고 생각할 때, 그것은 역행을 하는 셈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것에 대해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순절의 금식에 대하여 츠빙글리 중심의 취리히와 콘스탄츠의 가톨릭 주교단(Prince-Bishopric of Constance, 585년부터 1821년까지 존재함) 사이에 논쟁의 내용이 있다. 1522년 4월 7-9일 사흘간, (스위스-독일 국경도시인) 콘스탄츠의 주교가 보낸 대표단이 취리히에 도착하여 취리히의 사순절 금식 불이행 건을 놓고 시의 성직자들과 토론을 벌였다. 1522년 사순절 기간 중 츠빙글리는 사순절 육식금지 전통이 성경에 아무 근거가 없음을 보여 주는 설교를 했고, 이에 따라 그와 함께 했던 몇몇 형제들이 실제로 자유롭게 행동했다. 이것이 당국과의 갈등을 불러왔다. 콘스탄츠 주교는 강력한 대표단을 보내어 전통적인 금식을 준수할 것을 촉구했다. 츠빙글리 일동과 주교대표단은 취리히에서 만나 해당 이슈를 갖고 토론을 벌였다. 4월 9일, 행정관은 사순절 금식 준수 위반에 대한 금지 선언을 했고, 위반자는 처벌하겠다고 위협했다. 이에 대하여 츠빙글리는 4월 16일 자유로운 육식에 관한 논고로서 자기 방어를 했다. '선택과 음식의 자유'라는 이 논고는 그의 첫 저서이다. 그는 기본적으로, 이런 중립적 사안에 관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자유가 있고, 교회당국은 이 자유를 금할 어떤 권한도 없다는 사도바울의 입장을 취했다(고전 8:8; 10:25; 골 2:16; 딤전 4:1; 롬 14:1-3; 15:1-2),

이에 대하여 콘스탄츠 주교는 신성한 교회 규정을 방어해 달라고 권면하는 내용의 칙령을 5월 24일자로 취리히 시정부에 발부했으며, 이단적인 교리들의 확산을 막으라고 경고했다. 츠빙글리는 위기에 빠졌고, 거듭 암살협박을 받았지만, 용기를 잃지 않고 궁극적인 승리를 확신했다. 그러므로 사순절에 대한 논쟁이 츠빙글리의 취리히 개혁의 발단이 된 셈이다. 그는 성경을 붙들었고 콘스탄츠 주교는 전통의 우월성을 주장한 것이었다.

개혁교회의 절기에 대해 언급한 고백서들

초대 교회에서는 ‘주일’이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갖는 유일한 ‘날’의 개념이었으며, 구약의 절기와 같은 절기 예배는 없었다.
초대 기독교회에 주의 날에 예배를 제외하고는 특별한 공적 예배가 없었다.
주의 날에 예배와 아울러 주의 만찬(성찬)에 대한 절기적 기념이 있었지만, 다른 절기들은 없었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당시의 교회가 초대 교회와 멀어졌을 때, 그들은 주의 날에 있었던 많은 절기들을 폐지하려 했다.
1520년에 루터는 "주의 날이 유일한 절기의 날이어야 할 것인데"하고 애석해 했다.
칼빈이 1536년에 제네바에 도착했을 때, 그는 '주의 날이 유일한 절기의 날'이라는 것을 개혁의 초기부터 강조하였다.
네덜란드에서 1574년에 개최된 총회는 "성도들은 오직 주의 날만으로 만족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제2 스위스 신앙고백서(The Second Helvetic Confession, 1566) 

24장 거룩한 날들과 금식들과 음식들의 선택에 관하여

미신 : 우리는 유대인들의 종교적 관습과 미신을 인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느 한 날이 다른 날보다 더 거룩하다고 믿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생각에는 나머지 날들도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날들이기 때문이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가 지키는 것은 유대교의 안식일이 아니라 주일인 것이다.

그리스도와 성자(聖者)들의 절기들 : 만약 교회들이 기독교적 자유 안에서 주님의 탄생과 할례와 고난과 부활과 그 승천과 그의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 주신 일을 기억함으로 축하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인정하고도 남음이 있다.

즉 교리의 바른 내용을 이해하고 깨닫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절기로 표현하거나 또는 사람들과 성자들을 숭상하기 위한 절기들은 인정하지 않는다.
거룩한 날들은 십계명의 첫 번째 돌 판에 관계된 것으로 오직 하나님을 위한 날들인 것이다.
결국 절기와 성자들을 위해서 제정된 날들을 우리는 이미 없애버렸는바 이날들은 모순투성이요, 아무 쓸데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도저히 용인할 수 없다. 한편 우리는 적당한 시간과 장소에서 설교를 통하여 성자(선조들)의 회상을 사람들에게 권하는 것이 유익하고, 이 성자들의 모범된 삶을 모든 사람에게 권하는 것이 좋다고 고백한다.

금식 : 그리스도의 교회는 포식과 술 취함과 모든 종류의 탐욕과 무절제를 심하게 정죄하느니만큼 기독교적 금식을 우리 믿는 자들에게 강하게 권유한다.
그도 그럴 것이 금식이란 경건한 신앙인들의 금욕과 절제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요, 우리 육신의 돌봄과 징벌로서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꼭 필요한 일이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지며 육체는 그 연료를 빼앗기므로 더 자발적이고도 쉽게 성령께 순종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일에 관심하지 않는 사람들은 금식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은 하루에 한 번 정도 위장을 채우고 일정한 시간에 음식을 멀리하는 것으로 금식한다고 생각하고 이로써 하나님을 기쁘게 하며 선한 일을 성취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믿는 성도들은 금식함으로 기도를 더 잘 할 수 있고 덕목을 잘 실천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선지서들에서 우리가 읽을 수 있듯이 음식은 멀리하나 악행을 멀리하지 않았던 유대인들의 금식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공적인 금식과 개인적인 금식 : 금식에는 공적인 것이 있고 사적인 것이 있다.
교회가 박해와 환난과 역경 속에 있었던 고대 기독교 역사에는 공적인 금식들이 있었다. 이들은 함께 모여 새벽부터 저녁까지 금식하되 이 시간동안에 기도에 몰두하며, 하나님을 예배하고 회개에 힘쓴다. 이것은 애통함이나 다름없다. 이에 관하여 선지자들, 특히 요엘(2장)이 자주 언급하곤 하였다. 이와 같은 금식은 교회가 곤궁에 처할 경우, 오늘날에도 행해져야 한다. 한편 우리 각자는 성령으로부터 거리가 멀어졌다고 느껴질 때마다 개인적인 금식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렇게 할 때 우리 각자는 육체로부터 그 연료를 제거시키기 때문이다. 모든 금식은 자유롭고 자원하는 마음에서 행해져야 하고 겸허한 마음으로 행해져야 한다. 사람들의 칭찬과 호의를 얻기 위해서 금식이 행해져서는 안 되고, 금식함으로 의를 세우려는 의도는 더더욱 금물이다. 육체로부터 연료를 제거함으로 보다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고 기도에 전념하려는 것이 금식의 목적이어야 한다.

사순절(四旬節) : 사순절 때의 금식에 관하여는 고대 교부들의 글들이 증언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금식을 성도들에게 강요할 필요가 없고 그럴 수도 없다. 이미 초기에도 변질된 금식의 여러 형태와 관습이 있었다. 이 때문에 초기 교부인 이레니우스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어떤 이는 하루만 금식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어떤 이들은 이틀을, 어떤 이는 그 이상 혹은 40일간을 금식하라고 말한다. 금식에 대한 이러한 다양성은 우리 시대에 생긴 것이 아니라 벌써 우리 시대 이전에 생겼다. 내(이레니우스) 추측으로는 이것이(사순절 금식) 사도시대로부터 전승된 것(금식)을 무시하고 또한 소홀히 여기거나 무식함 때문에 다른 습관에 빠진 사람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그의 단편집 3,Ⅰ].

2. 츠빙글리 67개 신조(The 67 Articles, 1522)

음식을 금함에 대하여(Prohibition of Foods) : 24조: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명하시지 않은 것을 행할 의무가 없다. 그들은 아무 때나 어떤 음식이든 먹을 수 있다. 그러므로 치즈와 빵에 대한 로마 교황의 교서는 로마주의자들의 협잡(fraud)임을 배운다.

축제와 순례에 대하여(Of Festivals and Pilgrimages): 25조 : 절기와 장소가 그리스도에게 묶여 있는 것이지, 그리스도인들이 그것들에 속박된 것이 아니다. 이러한 점으로 부터, 그리스도인들을 절기와 장소에 속박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서 합법적인 자유를 강탈하는 것임을 우리는 배운다.

웨스트민스터 정치모범(Westminster, the Form of Church Government), "공적 예배의 날과 장소에 대하여"

복음 시대에는 성경이 그리스도인의 안식일인 주일을 제외하고는 어느 날도 거룩하게 지키라고 명령하신 적이 없다. 각종 절기들이라고 말하면서 지키는 행해지는 날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보장이 없으므로 우리는 지킬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당하는 여러 가지 특별한 경우에 그럴 이유와 기회가 백성들에게 주어질 때에 하루나 여러 날을 금식이나 감사 날로 구별하는 것은 합법적이요 필요한 것이다.

장로교회의 절기에 관한 대회와 총회

1556년 에딘버러(Edinburgh) 대회와 1577년 4월에 열린 총회에서는 공식적으로 부활절, 크리스마스 날과 그 이외의 다른 미신적인 절기 때에 성찬을 집례 하는 목회자에게와 강독하는 강독자에게 성직을 박탈하겠다는 조건으로 그러한 것을 시행하지 말 것을 경고하여야 한다고 규정했다.

1638년 글라스고우(Glasgow) 총회(11월 찰스 1세에 반발하여 국민적 저항으로 이어진 스코틀랜드의 총회)에서는, 교회의 다양한 절기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보증되지 않음으로 완전히 폐지되는 것을 좋다고 여겼으며, 그것들을 지키는 목회자들은 관원들에 의해서 징벌을 받는 것이 좋다고 명문화 하였다.

청교도들의 사순절 철폐

킬빈의 입장을 따라 청교도들은 당대의 로마 가톨릭 교회와 성공회에 남아 있던 인간들의 규례를 철폐해 나가는 일에 열심이었다.
그러므로 칼빈의 가르침을 따르고 청교도들을 존중하는 이들은 사순절을 지키며 이 기간 어떤 특정한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분명히 사순절 금식이라는 것은 불행하게도 그 전체가 헛된 거짓 금식에 불과함을 알았다.
교회들이 ‘재의 수요일’에 사순절 참회기간의 시작을 알리고, 금식과 (육식 등의) 절식을 알리며 14살 이상의 사람들은 육식이나 고기로 된 어떤 음식도 삼가게 하고, 18~60세 사람들은 그 날 그 날 의무적으로 금식하는 이런 행위에 대하여, 그들은 단호히 거부한 것이다. 개혁신앙의 근본적인 원칙은 오직 성경이 말하는 것에 근거해서만 교회의 여러 행위를 한다는 원칙이다.

17세기 영국의 청교도들은 명백한 성경적인 기초가 없는 기독교의 절기들을 거절하였다.
사순절의 여러 문제를 지적하고 그리스도인은 항상 십자가와 고난의 빛에서 살아야 한다는 루터의 말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사순절 기간을 지켜가는 루터파, 성공회와 오직 성경이 가르치는 방식에 의지해 예배와 교회의 모든 일을 하려던 청교도적 개혁교회가 이 지점에서 분명한 차이가 있다.

사순절에 대한 예수교 장로회 합동측 총회의 입장

현재에도 다수의 성경적이고 보수적인 교파와 교단들이 사순절을 지키지 않는다.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는 제84회 총회 결의를 통해 사순절 지키지 않기로 결정했다.
1998년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제83회 총회 보고서에는 '사순절을 교회의 절기로 지킬 것인가?' 라며 '사순절을 교회의 절기로 지키는 것은 마땅치 않는 일'이라고 했다.(제 83회 총회 보고서 p.369-420).

이듬해인 1999년 9월에 있었던 예장합동 제84회 총회에서는 로마 가톨릭에서 만들어낸 사순절을 개신 교회에서 절기로 지키지 않기로 결의했다. 제84회 총회보고서에 실린 관련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순절 문제에 대한 예장합동 제84회 총회 보고서

1. 사순절은 부활절 전날 밤까지 40일간 이어지는 로마교회가 정한 행사이다.

이 40일간에 로마교회는 금식을 하고 금식을 권장하고 또 음식을 제한해서 고기를 먹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사육제를 하고 고기를 많이 먹은 후, 고기 양을 점차 줄여가다가 고난 주간과 특히 금요일에는 완전히 고기를 금지하였다.

2. 종교개혁은 사순절을 완전히 폐지하였다.

칼빈은 사순절이 미신적으로 시행되고 공로를 세우며 금식이 하나님께 예배가 된다고 주장하고 실행하였기 때문에 완전히 폐지하였다(칼빈, 기독교강요 IV. 12).

3. 칼빈은 사순절 기간에 금식은 안 하는 것이 오히려 좋다고 하였다.

금식을 열심히 준수하면서 거짓되고 유독한 의견으로 부패시키는 것보다는 오히려 금식을 전혀 하지 않는 것이 훨씬 더 만족스럽다고 제시하였다(강요 IV, 12, 19).
하나님도 마음의 변화 없이 금식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신다고 성경대로 제시하였다.
그러므로 외식적인 금식은 가장 큰 혐오라고 제시하였다. 또 금식을 의무인 것처럼 엄격하게 지킴도 잘못이라고 지적하였다(강요 IV, 12, 20).

​4. 칼빈은 사순절을 미신적으로 지킴이 널리 퍼졌다고 개탄하였다.

 사순절을 지킴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로 착각하였고, 예수의 모본을 따르는 것으로 여겨 연례적으로 행한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주님은 모범을 위해 금식하지 않고 복음 선포의 장비로만 금식하였다고 칼빈은 제시하였다.
그러므로 주님이 반복적으로 금식하지 않았고, 구약에서 모세가 금식하였지만 선지자들이 그 모본을 따라서 금식하지 않았다고 지적하였다(강요IV, 12, 20).

​5. 사순절 기간에 로마교회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최고 예배가 고기를 금하는 것으로 여겨 고기는 금지시키고 다른 단 것들을 사제들과 평신도들이 먹었다.

오히려 더 성대히 고기와 다른 음식을 먹기 위해서 금식하였다고 칼빈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금식이 폐지되었다고는 칼빈이 결코 말하지 않고 재난의 때를 위해 기도할 때에 할 것으로 말하였다(강요 IV, 12, 17).

6. 우리 교회가 이 사순절을 교회의 경절로 채택하여 지키기로 하면, 우리도 로마교회처럼 사순절 기간에 금식을 해야 하고 또 고기를 그 기간에 먹지 않게 되며, 그러면 고기 먹는 것을 위해 사육제를 열 것이다. 그래서 많이 먹고 점점 줄이다가 완전히 금하는 일을 할 것이다.

7. 40일간에 걸쳐서 사순절 금식과 고기 금지 등을 하고 철야를 하게 되면, 신자들이 이런 경절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없게 되므로 양심이 심히 괴로움을 당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행사에 참가하면 정상적인 사업과 생산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어 참으로 많은 문제들이 발생할 것이다.
그러면 자연히 형식이 되고 외식적이 되어 로마교회처럼 절기를 지키는 일을 하게 될 것이다.

8. 사순절을 교회의 경절로 받아들여 지키게 되면, 로마교회가 지키는 많은 다른 교회 경절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대강절, 주의 현현절, 삼위일체 주간 등등 참으로 많은 절기들을 지키지 않을 수 없게 된다.

9. 사순절과 다른 절기들을 로마교회의 습관대로 지키게 되면, 많은 신자들이 혼란을 겪게 되고, 마침내 이럴 바에는 이 모든 것의 원형이며 모(母)교회인 로마교회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제103회 총회에서는 제84회 총회결의를 재확인하여 이 용어의 사용을 금하고 찬송가 교독문의 사순절 교독문은 사순절을 제하고 사용하도록 결의 하였다.

종교개혁이 폐지한 사순절을 우리 한국교회가 로마교회로부터 받아서 부활시키고 지킬 필요가 전혀 없다.
사순절은 한국교회가 교회 경절로 받아서 될 일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고난주간을 오래도록 지킴으로 주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을 은혜롭게 시행해 왔다.

오늘의 교회와 사순절 절기

사순절을 절기로 지키는 예전을 중요시하는 교단도 있고, 특정 기독교 미디어도 공공연히 이 절기를 지킨다.
재의 수요일에 죄 목록을 작성하고 태운 후, 그 재로 이마에 십자가를 긋는다.
이것은 제 2계명에도 이탈된다.
사순절은 결국 로마 가톨릭의 길을 걷는 것이다.
이 기간에 선한 뜻에서 자신을 절제의 시간에 머물고자 하는 진정한 기독교회들도 많다.
또 그런 분들과 여전히 우정을 같이 하지만, 개혁신학을 추구한다면 사순절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근래에 많은 교회들이 로마 가톨릭 교회를 본받아 고난 주간과 더불어 사순절을 지키고 있다.
기독교 서점가에서 봄철 베스트셀러는 ‘사순절에 대한 묵상’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이야기하되 사순절 기간에 사람의 감성에 호소하는 책들이 기독교 서점에서 가장 잘 팔리고 있다.
수난 주간에 상영되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Passion of Christ)”는 중세의 수난극 전통을 할리우드식으로 각색한 영화이다.
감독인 멜 깁슨(Mel Gibson)은 보수적인 로마 교회 신자로 마리아의 시각에서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신 마지막 12시간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고 그는 그 영화로 막대한 돈을 벌었다.

어떤 교회는 교회에서 단체로 그 영화 전체를 관람하는 것으로 수난 주간 집회를 하기도 한다.
이것은 개혁교회가 무엇인지 구별하지 못하는 이들의 모습이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는 것처럼 죽으신 날을 기념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주님께서는 성찬을 행하여서 주님의 수난을 기념하라고 하셨으므로 우리는 성찬에서 주님의 수난을 기념해야 하고, 또한 주님께서 죽으신 그 주간과 금요일을 경건하게 지내는 것이 좋다.

그러나 그것에서 더 지나쳐 수난의 40일을 지키려는 것은 성경적인 근거나 이에 유추하여 믿음으로 시행해왔던 교회사적인 근거도 없다.

주님께서는 생명의 말씀의 교훈으로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시려고 하는데, 사순절을 자신의 의를 위해 사용한다는 것은 복음의 근본을 허무는 매우 비성경적인 행위이다.

한국교회가 전통적으로 지켜온 고난주간을 그대로 지키는 것이 유익하다고 할 수 있다.
20세기 후반 가톨릭의 영향으로 일어난 “예배갱신운동”의 영향이 지금까지도 크게 작용하는 상황이다.
그들이 강조하는 사순절을 비롯하여 교회의 절기를 규정한 교회력은 성경적 근거가 약하다.
역사적으로 볼 때에 4세기 이후에 비로소 제정되어 중세를 거쳐 체계화되었다.
교회력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일 년 주기로 재연하는 예배와 축제적 관습을 통해 신앙을 강화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다양한 문화와 종교와 뒤섞이면서 이교화되고 미신화되는 폐단이 계속 싹터왔다.
종교개혁자들이 사순절 뿐 아니라 교회력 자체를 철폐한 것은 그것이 비성경적이며, 이교적 요소와 미신화로 인한 폐단을 지속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을 경계하며 우리는 성경과 성경의 올바른 이해와 적용으로 돌아가야 한다.

사순절에 대한 성경적인 입장

교회가 사순절을 지키는 것은 성경적인 믿음의 실행이 아니다.
잘못된 전통으로 내려온 사순절을 지정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며 이를 좇는다는 것 자체가 사람의 생각의 발상이며, 이는 하나님의 일과는 무관한 사람의 일에 불과하다.

사순절을 지키면서 과연 성도들이 성경의 의도를 따라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려는 진정한 마음이 있을까?
성도들이 하루를 금식함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을 경험하는 것보다, 금식 후에 또 배고픈 배를 채우기 위해서 먹고 즐기는 것에 무슨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교회가 사순절에 따라 그때만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게 하며 여기에 참여하게 하려는 것에 대하여, 특별히 지도자들은 그 비성경적인 그릇됨을 말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바른 가르침이 있어야 한다.
개혁주의자들은 그 어디에도 교회가 절기 속에 있어야 할 것을 말하지 않았으며, 반대로 교회가 절기를 지키는 행위에 대하여 심각한 우려를 표하며 금하여 왔었다.
왜냐하면 개혁신앙 선배들은 이 사순절 시행이 ‘그리스도에 반(反)’하는 것으로 얼마나 불신앙인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것은 사순절에 그리스도가 받은 고난을 재현하며 이를 통해서 경험해 보려고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난은 자기 백성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죄인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신 것이었다. 그리스도가 받으신 이 고난은 누가 함께 받아보고자 해서 받을 수 있는 고난이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께서만 받으실 수 있는 고난이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난을 우리도 받아보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인이 받는 고난이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제자라는 이유로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비난을 받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의를 보여주셨지만, 그러나 죄로 가득 찬 사람들은 하나님의 의를 거부하고 배척하였고, 이것이 예수님을 십자가의 죽음에까지 가게 하였다. 우리는 사순절 행사로 우리의 경건의 의를 세우고 증명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의로 오심으로 세상으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고 미움을 받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고로 그리스도를 미워하는 세상으로부터 그들도 함께 미움을 받는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받는 고난이다.

그리스도인은 주되신 그리스도께서 주신 십자가의 복음과 부활의 복음을 전하는 자이다.
이는 그리스도인은 오직 그리스도만을 말하여 드러낼 자라는 것이다.

골로새서 1:24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일꾼으로서 교회를 위해서 겪는 복음 전파의 사역과 관련하여, 그리스도인들도 바울처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해 겪게 되는 고난이 따름을 말씀했다.
그리스도인이면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한 하나님의 후사로서 그리스도가 받은 영광을 받기 위하여 그와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것은 사순절과 같은 인위적인 행사를 만들고 그 행사에 참여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나무 십자가를 만들어 등에 져보고 나무에 묶여 보기도 하고, 못에 박혀 보기도 한다고 해서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다.
사순절이란 이런 특정한 기간에 그리스도의 고난을 느껴보고 체험해 보고자 할 것이 아니라, 날마다 하나님께서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신 일을 말하여 우리의 주가 되신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온 세상에 믿는 자들의 생명의 주가 되심이 선포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다.
우리는 매일 매순간 오직 우리의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도록 권면 받고 있다(히브리서 12:5).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사는 삶은 사순절의 행사로서가 아니라, 우리의 매일의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골로새서 3:16-19
“그러므로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아무도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를 이유로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 그가 그 본 것에 의지하여 그 육신의 생각에 따라 헛되이 과정하고,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

사순절은 ‘절기’로 ‘꾸며낸 겸손’과 ‘과장’의 내용을 가지고 있다.
사순절을 지키지 않는다고 아무 것도 하지 말자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일정한 기도 기간을 만들어서 날마다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기 위해 새벽기도를 체질화 하기, 인터넷이나 컴퓨터 게임이나 TV 시청하는 시간을 없애기, 회개 운동, 소외된 이웃 돌보기 등에 더욱 역점을 두는 기회로 활용할 수 있다.
나아가 복음을 전하고 세상의 구원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와 빛이 될 수 있는 기회로 활용한다면 더욱 보람 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오늘을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끝까지 사랑하되, 잘못된 가치관과 인생관에 좌우되지 말고, 십자가 사랑의 신앙 회복, 경건과 기도의 생활화, 나눔 운동의 확산, 사랑을 기반으로 한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기회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모든 우리의 시간을 항상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은혜 안에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고난을 생각하며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속되었다는 감사와 감격의 마음으로 살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며, 동시에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이 약동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마땅한 삶이다.

이것은 어떤 정해진 특별한 절기에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 믿고 거듭난 이후 우리는 항상 그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 나라 시민의 삶이다. 이것이 성경적인 신앙, 곧 개혁신앙을 가진 믿음의 선배들이 강조하며 주장한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삶 가운데, 십자가와 부활의 은혜 안에서 매일 살아가기 때문에 어떤 특별한 절기를 지킬 이유가 없는 것이다.

사순절 뿐 아니라, 신앙생활 방식 중 성경에 명확한 근거가 없는 것들은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개발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항상 명확한 성경적 근거가 있고, 믿음의 유추에 따라 집약되는 것들과 교회사의 올바른 이해와 성경적인 교리에 합당한 도리를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력이 넘치는 풍성한 신앙생활을 하는 신앙생활만이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이다.


부활절(復活節)

부활절은 예수께서 십자가형을 선고받고 나무 십자가에 못 박힌 날로부터 3일째 되는 일요일에 부활한 것을 기념하는 기독교의 최대 축일이자 서구권 국가들의 연중 최대 명절이다.



고난(苦難)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태 16:24, 마가 8:34, 누가 9:23)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태 10:38)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누가 14:27)

2022년 고난주일을 맞이하며(4월 10일) 고난주간을 시작합니다(4월 11일-16일).
고난이란 의미를 생각합니다.
신앙생활은 고난을 즐길 줄 아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태 16:24, 마가 8:34, 누가 9:23)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태 10:38)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누가 14:27)

그럼에도불구하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을 싫어합니다.
고난은 특별한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누에고치에서 나오는 나방은 아주 작은 구멍을 비집고 나온다.
그 구멍의 지금은 2mm가 채 안 된다고 한다.
작은 구멍으로 나온 나방은 불과 몇 시간 뒤에 어른 나방으로 되고, 또 며칠이 지나지 않아 알을 낳는다.
생물학자 한 사람은 이 사실을 매우 눈여겨보았다.
작은 구멍으로 나오는 나방이 딱하기도 하고 또한 신기하기도 해서 나방에 대한 새로운 실험을 시도했다.
학자는 특별히 제작한 가위로 구멍의 크기를 3mm, 4mm, 5mm, 6mm 정도 되도록 넓혀 주었다.
그리고 각각의 구멍으로 나오는 나방에 대해 유심히 관찰하고, 그 내용을 기록하였다.
학자의 예상대로 더 큰 구멍을 통해 나온 나방들의 크기가 더 컸다.
하지만, 몇 일이 지나자 놀랄 만한 결과가 나왔다.
더 큰 구멍에서 나온 나방들은 작은 구멍에서 나온 나방보다 성장속도가 더디었으며, 날지도 못했고, 심지어는 알도 낳지 못하는 것이었다.
결국, 더 큰 구멍에서 나온 나방은 덩치만 큰 쓸모 없는 나방이 되어버린 것이다.
학자는 보고서를 통해 작은 구멍으로 나온 나방은 그 고통과 인내의 과정을 통해 건강해 지며 이러한 과정을 거쳐야만 보다 성숙해질 수 있다고 결론 내었다.
그리고,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행위는 결국 크고 쓸모 없는 나방을 만들었다고 기록했다.

사람들은 역경을 피해 편한 길로 가려 하거나 변화를 피해 현실에 안주하려 한다.
역경과 변화는 인간의 본성에 있어 힘든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에고치의 사례처럼 역경과 고통 없이는 훌륭한 나방이 될 수 없듯이, 우리들 삶에 있어 역경과 고통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기 위한 하나의 꼭 필요한 과정인 것이다.
이러한 역경과 고통은 우리를 보다 강하게 만들어 또 하나의 도약을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역경이 두려운가?
변화를 거부하는가?
당신에게 다가온 역경과 변화를 훌륭한 성장의 과정으로 보는 것이 중요하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는 말이 있다.
당신에게 다가온 역경을 슬기롭게 극복하는 것, 당신의 성공에 한 발짝 더 다가설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우리의 삶은 시련과 고통 속에서 생활하고 있다.
행복하기만 한 사람은 결코 없다.
자연의 순리에 적응하며 고통 속에서 삶의 가치를 찾아야 한다.

 

어떤 여인의 책상 위에 여러 개의 누에고치가 놓여있었다.
그 누에고치 가운데 이미 누에나방이 나온 고치도 있고 그렇지 않은 고치도 있었다.
그런데 이 누에고치들을 보고 있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은 누에나방이 나온 고치에는 신기할 정도로 작은 구멍이 뚫어져 있었다는 점이다.
이 여인은 그 작은 고치의 구멍을 보면서 '어떻게 이렇게 작은 구멍으로 저런 큰 누에나방이 나올 수 있을까?' 하고 호기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무리 봐도 그 작은 구멍으로는 도저히 누에나방이 나올 수가 없어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한 마리의 누에나방이 작은 구멍을 만들어 나오고 있었다.
구멍이 너무 작아 도저히 나올 것 같지 않은데 누에나방은 긴 시간을 통해 갖은 몸부림을 치며 용케도 나오고 있었다.
여인은 누에나방이 작은 구멍을 통해 세상에 첫발을 내딛는 것을 지켜보다가 왠지 가엾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른 누에나방이 세상에 편하게 나오도록 도와주기 위해 가위로 누에고치의 구멍을 크게 만들어 주었다.
그러자, 다른 누에나방은 날개가 찢기는 등 갖은 고통을 당하며 누에고치에서 겨우 빠져나오는데 반해, 가위로 크게 구멍을 내준 고치에서 나온 나방은 아무런 상처 없이 쉽게 나와 아름다운 날개를 펄럭였다.
이를 보고 여인은 자기가 한 일을 스스로 잘 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잠시 뒤에 벌어진 상황은 전혀 다른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작은 구멍을 통해 힘들게 비집고 겨우 세상으로 나온 나방은 한 마리 한 마리씩 날개를 치며 공중으로 훨훨 날아오르는데, 가위로 구멍을 뚫어준 고치에서 쉽게 나온 나방은 날개를 푸드득 거리다가 날지 못하고 그만 비실비실 책상위를 돌더니 지쳐서 잠잠해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이 과정을 끝까지 지켜본 여인은 누에나방은 작은 구멍으로 나오며 애쓰는 동안 힘이 길러지고 물기가 알맞게 마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날게 되지만, 그 과정을 겪지 않고 나온 나방은 순간적으로 편하게 나오긴 했지만 나를 수가 없다는 이치를 크게 깨달았다고 한다. 이 내용은 '카프만' 부인이 쓴 "광야의 샘"이라는 책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우리들 사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온갖 고통과 산전수전을 겪은 사람은 어떠한 험한 세상에서도, 어떠한 역경과 어떠한 고난이 닥치더라도 이에 굴하지 않고 꿋꿋이 잘 이겨나가고 즐겁게 살아가지만, 그렇지 않고 온실 속에서 자란 화초같이 어려움이 없이, 크게 부족함이 없이 살아온 사람은 작은 시련에도 쉽게 좌절하고 쉽게 무너지고 쉽게 포기해 버리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이 살아가는데 겪게 되는 각종 고통과 좌절, 역경과 온갖 슬픔들이 오히려 연단이 되고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한 반석이 됨을 잊지말고 시련을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아 잘 대처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야고보서 1:1


자기 부인(Self Denial)과 자기 십자가(Self Cross)

마태복음 16:13-24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질문했다.
“세상의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질문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질문이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다” 라고 고백했다.
베드로의 고백을 듣고 예수님은 베드로를 칭찬한 후, 처음으로 자신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내가 예루살렘에 가서 장로들과 제사장들과 서기관에게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 날 것이라”(21절)
베드로는 ‘주여 그리 마옵소서’ 재빨리 대답했다.
주님은 그를 ‘사탄’이라 부르며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라고 말씀 하시고(23절),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라고 하셨다(24절).

‘자기부인’과 ‘자기십자가’는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용어이지만 너무 익숙해서 깊이 생각하지 않고 막연히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누군가 ”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가 무슨 뜻입니까?” 라고 물으면 구체적으로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하나님의 생각’을 하지 않고 ‘사람의 생각’을 한다고 책망하셨다.
그렇다면 ‘자기부인과 자기 십자가’는 ‘사람의 생각’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기 부인 (Self Denial)

자기부인은 ‘자기 생각과 뜻’의 부인이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을 핏방울 같이 흘리시며 기도하셨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이어서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셨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마 26:39)
우리가 주를 따르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생각과 뜻’을 포기해야 한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인데 선택의 기준은 내가 아닌 주님이다.
한번은 예수님의 제자 시몬 베드로가 밤새도록 바다에서 그 물질을 했으나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명하시기를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셨다.
베드로는 자기를 부인하는 고백을 한다.
“선생님, 우리가 밤이 맞도록 수고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리이다.”(눅 5장)
베드로는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았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이사야 55:8-9)

자기 부인을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육의 사람을 부인하고 영의 사람이 되라!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롬 8:5-6)

육의 사람은 삶의 목적과 동기가 세상이 되어, 세상적인 방법으로 세상의 것을 위해서는 사는 사람이다.
영의 사람은 하늘의 것을 위하여 하늘의 방법대로 사는 사람을 말한다.
“자기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자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갈 6:8)

(예화) 워치만니를 찾아와서 계단식 논의 맨 위쪽 주인인 그리스도인의 갈등에 대한 답변

둘째, 겉사람을 부인하고 속사람을 다듬어라!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겉사람이란 죽어 흙으로 살아질 수밖에 없는 육의 사람을 말하고, 속사람이란 예수를 믿음으로 중생한 영의 사람을 말한다. 보이는 겉사람은 계속 낡아지나 보이지 않은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

(예화) 육체의 질병에 시달려야 했던 어느 여인의 고백

셋째, 옛사람을 부인하고 새사람이 되라!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2-24)

바울은 우리의 거듭난 상태를 의복과 비유를 하여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사람을 입으라고 했다. 냄새 나는 옛 옷을 입은 상태에서 새 옷을 입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예화) 어느 설교자의 고민

자기 십자가
(Self Cross)

자기 십자가는 자기 부인으로 인한 십자가이다.

‘No Cross, No Crown’이라는 말이 있다.
십자가 없이는 부활의 영광도 없다는 뜻이다.

우리는 부활의 영광만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십자가의 고난을 간과할 때가 많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다.
부활이란 다시 사는 것인데, 다시 살기 위해서는 먼저 죽어야 하지 않겠는가!
죽지 않고 살려니까 그것이 문제이다.
또한 자기 잘못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나 어려움을 ‘자기 십자가’라고 해서는 안 된다.
믿음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나 어려움이 바로 자기 십자가 이다.

베드로는 이를 ‘믿음의 시련’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벧전 1:6-7)

영국의 신학자 사무엘 루터포드 (Samuel Rutherford)는 “새에게서 그 날개는 무거운 것이나 그것 때문에 날아가고, 배는 그 돛이 무거우나 그것 때문에 간다.” 했다.

유태인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유태인을 지키는 것고 한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요, 구원을 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다.(고전 1:18)

자기 십자가를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고난 (Passion)의 십자가

십자가는 고난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습관적으로 십자가와 연관 짓는다.
자식이 사고를 치면 ‘자기 십자가’, 남편이 바람을 피워도 ‘자기 십자가’, 사업이 망해도 ‘자기 십자가’, 시험이 떨어져도 ‘자기 십자가’라고 한다.
자신의 잘못이나 무지로 인한 고난을 ‘자기 십자가’라고 착각해서는 안된다.
십자가는 믿음과 연관된 고난이다.
자신의 죄 때문에 받는 고난은 ‘회개’해야 할 일이지, ‘자기 십자가’라고 합리화해서는 안된다.

“너희 믿음의 시련은 불로 연단하여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벧전 1:7)

믿음의 시련이란?
믿음대로 살다가 받는 고난이고, 믿음을 지키려다 받는 고난이며, 믿음을 전파하다 받는 고난이 ‘자기 십자가’이다.

(예화) 주일 성수를 위하여 주일 날 가게 문을 닫아야 헀던 상인의 고백

(예화) 이비인후과 의사의 고민

둘째, 사랑 (Love)의 십자가

십자가는 사랑을 의미한다.
예수께서는 ‘고난의 십자가’를 ‘사랑의 십자가’로 승화시켰다.

구약에는 613가지의 계명이 있다.
하지 말라는 것 365개, 하라는 것 248개이다.
하지 말라는 것을 하면 ‘적극적인 죄’ (Commission)이고, 하라는 것을 하지 않으면 ‘소극적인 죄’ (Omission)이다.
이것을 요약한 것이 10계명이고, 10계명의 요약은 마태복음 22:36-40절의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다.
위로는 ‘하나님 사랑’, 옆으로는 ‘이웃 사람’이다.
‘사랑’이 ‘지상최대의 계명’ (The Great Commandment)이다.
사랑의 척도는 희생에 있다.

사랑에는 4 종류가 있다.
남녀의 사랑인 에로스,
친구의 사랑인 펠레오,
부모의 사랑인 스톨케
하나님의 사랑인 아가페

아가페 사랑은 절대적이며 무조건적인 자기희생의 사랑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다.

(예화) 배우자를 찾는 젊은이 '믿음만 좋으면...'

셋째, 사명 (Mission)의 십자가

십자가는 사명을 의미한다.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이제 다 이루었다’(It is finished)라고 하셨다.
아버지께서 주신 사명을 다 이루신 것이다.
예수께서 3일 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 부탁하신 말씀이 마태복음 28장 18-20절이다.
이를 ‘지상최대의 위임’(The Great Commission)이라고 한다.
보통 ‘The Great Commission’을 ‘지상최대의 명령’이라고 번역하지만, 정확한 뜻은 ‘위임이고 위탁’이다. Com+mission은 ‘함께'(Com)와 ‘사명’ (Mission)의 합성어이다.

‘Mission’에는 ‘사명과 선교’라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곧 선교이다.
주께서 우리에게 사명을 맡기시면서,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니라’(마 28:20) 이것이 ‘Commission’의 진정한 의미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선교의 사명을 위임 받았다.
따라서 교회는 ‘선교공동체’로 거듭나야 한다.
교회가 선교적이 아니면, 선교의 적이 될 수 있다.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다.
자기 부인에 대해서 3가지를 말씀 드렸고, 자기 십자가에 대해서 3가지를 말씀 드렸다.
오늘의 말씀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사는 것이 그리스도’ (빌 1:21)라고 했다.

지금은 교회력으로 사순절 기간을 지나고 있다. 사순절 (Lent)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묵상하며,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자기 자신이 죽는 것을 배우는 절기이다. ‘사순’ (四旬)이란 40일을 뜻하는 말로 근신과 금식으로 자기 절제를 하는 기간이다. 사순절은 ‘재의 수요일’ (Ash Wednesday)에 시작하여 부활절까지 주일을 뺀 40일간이다.
재의 수요일 전날을 불어로 ‘마디그라’ (Mardi Gras)라 부르며, 이는 ‘뚱뚱한 화요일’ (Fat Tuesday)이란 뜻으로 ‘영양보충’하는 날이다. 안타깝게도 호주에서는 ‘마디그라’가 ‘퀴어 (Queer) 축제’로 의미가 변질되었다.
사순절 기간에 철저한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지는 영성으로 충만하여 영광스러운 부활의 아침을 맞이할 수 있기를 바란다.

영혼의 닻과 돛

히브리서는 히브리인들, 즉 유대인에게 보낸 서신이다. 신약성경 중에 유일하게 저자가 누구인지 모른다. 저자에 대하여 여러 사람이 언급되고 있지만 정확한 근거가 없다. 당시 기독교는 정치적으로는 로마의 박해를 받았고, 종교적으로는 유대교의 박해를 받고 있었다. 히브리서는 박해를 받고 있는 유대인인 신자들에게 인내하며 믿음을 지킬 것을 권면하고 있다. 히브리서 내용은 초대교회 당시 기독교 유대인들을 향한 복음의 메시지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옛 언약의 모형들을 열거하면서 새 언약의 주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완성한 분이시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히브리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의미를 가장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성경에 종종 ‘반차 (班次)’란 용어가 등장한다. 아론의 반차, 멜기세덱의 반차가 그것이다. 개역개정판에는 반차라는 단어는 히브리서에만 5번 등장한다. (히 5:6,10, 6:20, 7:11,17) 사전을 찾아보면 반차 (班次)의 동의어는 계열 (系列)이다. 멜기세덱은 창세기 14장에 처음 등장한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과 가족들을 구하기 위하여 318명의 군사를 이끌고 가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주고 아브라함은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친다. 히브리 기자는 멜기세덱이 ‘하나님의 아들을 닮아 항상 제사장으로 있고’ (히 7:3), ‘예수님이 멜기세덱의 계열을 따른 제사장 (히 5:6, 7:17)’이라고 기록했다.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는 ‘멜기세섹의 반차’의 의미는 육신의 혈통이 아닌 영적 혈통이란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셔서 십자가의 제단 위에, 제물이 되시고, 제사장이 되셔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여 주셨다.

로댕은 단테의 신곡을 읽고 감동을 받아 ‘생각하는 사람’을 만들었다. 원래는 지옥의 문 윗부분에서 지옥문을 통과하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고뇌하는 작은 형상이었다. 그것을 1888년에 독립된 작품으로 크게 만들어, 1904년 살롱에 출품하고부터 유명해졌다. 전신 근육의 긴장에 의하여 격렬하게 고뇌하는 마음의 움직임을 응결시켰다. 단테의 신곡에 지옥문에는 이런 글이 쓰여 있다. “여기에 들어오는 자, 일체의 희망을 버려라”. 지옥이란 더 이상의 희망을 품을 수 없는 곳이다.

시편 107편에는 인생을 항해로 비유하는 구절이 나온다. 세상의 바다는 순풍에 돛단 것 같이 순조롭지가 않다. 높은 파도, 강한 바람, 예측할 수 없는 날씨 등으로 곳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목적지가 없는 배는 표류하지만, 목적지가 있는 배는 항해한다. 우리의 배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시인은 그곳을 ‘소원의 항구’ (시 107:30)라고 표현하고 있다. 우리는 ‘소원의 항구’를 향하여 낮에는 돛을 높이 올려 전진하고, 밤에는 닻을 깊이 내려 휴식한다. 닻과 돛은 항해의 필수품이다.

나는 1979년 4월 17일에 입대했다. 군 생활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그때쯤 큰형님에게서 편지가 왔다. 그는 해병대 장교 출신이다. 자신의 군 생활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어느 추운 겨울에 출항하기 위해 닻을 올리던 중 줄이 풀리면서 닻이 바다 속으로 떨어졌다. 모두가 난감해 하고 있을 때, 부대원 중 한명이 차가운 겨울 바다로 뛰어 들어 줄을 연결한 후, 닻을 올리고 출항할 수 있었다.

히브리서 기자는 소망을 ‘영혼의 닻’이라고 했다. 닻의 기능은 배를 정박하게 한다. 파도가 치고 물결이 출렁일 때, 닻을 깊이 내린 배는 흔들릴 수는 있지만 파도에 쓸려가지 않는다. 쉼 없는 거센 물결과 바람 앞에서 단단히 뿌리내리는 균형과 절제와 안정의 추이다. 항구에 돛을 내린 배는 안전하지만, 배는 정박하기 위해서 만들지 않았다. 배는 돛을 올리고 출항해야 한다. 순풍에 돛을 올리면 빠르게 앞으로 나갈 수 있지만, 역풍에도 삼각돛은 전후의 압력 차이로 전진할 수 있다. 밤이 되면 닻을 내려 정박해야 하고, 낮이 되면 돛을 올려 항해해야 한다. 세상의 바다에서 소망이 ‘영혼의 닻’이 되고, 소망이 ‘영혼의 돛’이 되어, ‘소망의 항구’를 향하여 오늘도 믿음으로 항해하자.

종교개혁과 3명의 사람

종교개혁 당시 독일에 루터가 있었다면, 스위스에는 ‘츠빙글리’가 있었다. 츠빙글리는 루터의 95개 조문과 비슷한 67개 개혁안을 내놓고, 취리히 시는 그의 주장을 받아들여 개혁이 시작되었다. 그는 루터보다 더 근본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연합을 위해 두 사람이 독일에서 만난 적이 있다. 대부분의 의견은 일치하였으나, 성찬에 관한 이견(異見)으로 서로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된다. 가톨릭의 화체설 (Transubstantiation)애 반대는 했지만 루터는 ‘공재설’ (Consubstantiation)을 주장하고, 츠빙글리는 ‘기념설’ (Memorialism)를 주장했다. 연합을 상징하는 성찬식이 개신교 최초의 분열의 원인이 되었다. 개혁의 2세대인 칼빈은 두 사람의 의견을 절충하여 ‘영적 임재설’ (Spiritual Presence)을 내놓았다.

첫째, 마르틴 루터 (Martin Luther, 1483~1546)

루터는 독일 아이스레벤에서 태어났다. 그는 법률가가 되라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1505년 5월부터 법학 공부를 시작했다. 하지만 약 2달 뒤, 고향인 만스펠트에서 에르푸르트로 돌아오는 길에 그의 옆으로 천둥번개가 떨어졌다. 루터는 번개가 떨어지자 큰 두려움에 떨며 “성 안나여, 나를 살려주소서. 내가 수도사가 되겠나이다”라고 서원했다. 이후 아버지와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어거스틴 수도원에서 신학을 공부하게 된다.

훗날 루터는 비텐베르크 대학교의 교수로서 종교개혁을 일으킨 역사적인 인물이 되었다. 루터는 로마 가톨릭교회에 부패와 잘못된 교황의 권위에 항거하여,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리를 논박하고, 성서가 지니고 있는 기독교 신앙에서의 최고의 권위와 그리스도에 대한 오직 믿음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통한 구원을 강조하였다.

루터는 16살 아래인 카타리나 폰 보라와 결혼했다. 루터가 개혁이 너무 힘들어 절망하고 있을 때이다. 카타리나가 소복을 입고 루터에게 갔다. 누가 죽었냐고 물으니 하나님이 죽었다고 했다. “어떻게 하나님이 죽을 수 있냐”고 화를 내자, “당신이 풀 죽어 있는 모습을 보니 분명 하나님은 죽으신 것이 분명하다”고 했다. 이후 루터는 ‘살아계신 하나님’ (living God)이란 표현을 의도적으로 많이 사용했다.

둘째, 울리히 츠빙글리 (Ulrich Zwingli, 1484~1531)

츠빙글리는 스위스의 종교개혁자이다. 그는 루터와 더불어서 종교 개혁의 양대산맥이다. 츠빙글리의 신학의 핵심은 성경이다. 그 권위는 어떠한 종교회의나 교부들의 주장보다도 더 높다고 했다. 1506년 로마 가톨릭교회의 사제로 서품을 받았으며, 글라루스의 성직자가 되어 부임하였다. 10년 동안 사목 활동을 하면서 헬라어를 공부, 희랍과 고대 로마의 철학자, 시인, 웅변가, 저술가에 대해 배웠다. 이 기간에 인문학자이자 성직자인 에라스무스와 서신을 교환하며 우정을 쌓았으며,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1519년, 츠빙글리는 취리히에 있는 그로스뮌스터 교회로 사역지를 옮겼다. 그로스뮌스터 교회에서 목회사역을 하던 츠빙글리는 어거스틴과 바울 신학을 독학했고, 종교개혁의 길을 걸어갔다. 1522년, 츠빙글리는 그의 사상이 함축적으로 요약된 ‘67개 신조’를 작성했고, 다음해인 1523년 1월 29일 취리히에서 공개토론을 개최하여 ‘67개 신조’를 중심으로 로마 교회의 부정과 부패를 비판했다. 그는 두 차례나 군종 사제로 이탈리아에 갔다. 전쟁의 비인간적인 모습을 체험을 바탕으로 용병제도를 반대했다.

츠빙글리는 성서주의 영향 때문에 그가 주도했던 종교개혁은 보다 급진적인 것이었다. 루터가 개인의 신앙 양심에 근거했다면, 츠빙글리는 사회제도의 개혁을 추진하였다. 특별히 그는 용병제도를 반대하였다. 스위스 용병은 용감하기로 정평이 났었다. 아직도 바티칸 근위병은 스위스에서 책임을 지고 있다. 그는 인문주의자요, 성서학자이며, 프로테스탄트요, 진보주의자였으며, 애국자였다. 츠빙글리는 인생의 황금기인 47세에 전사하고 개혁의 바통을 다음세대에게 넘겼다.

셋째, 존 칼빈 (Jean Calvin, 1509~1564)

칼빈은 프랑스 ‘피카르디’에서 태어났다. 칼빈의 호칭을 ‘존 칼빈’ 혹은 ‘장 칼뱅’ 등으로 부른다. 영어로 ‘존 칼빈’이고 불어로 ‘장 칼뱅’이다. 루터나 츠빙글리보다는 한 세대 후배이다. 그의 아버지는 칼뱅이 로마 가톨릭 교회 신부가 되기를 원했으나, 로마 가톨릭 교회와의 갈등 속에서 아들에게 법학으로 진로를 바꾸길 권했다. 그는 파리에서 문학과 고전을 공부했고 신학공부도 마쳤다. 1532년에는 부르주에서 법학 박사 학위도 받았다.

그가 쓴 ‘기독교 강요’는 종교 개혁에 큰 사상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개신교의 영원한 고전으로 남아 있다. ‘기독교 강요’는 1535년에 완성됐고, 칼빈은 프랑스의 국왕 프랑수아 1세에게 헌정했다. 이 작품으로 인해 칼빈은 종교개혁의 주도적인 신학자가 됐다. 기독교 강요는 단순히 기독교의 핵심 진리를 요약하고 교리화하기 위해 쓴 것이 아니다. 그의 저작 동기 속에서는 사람들이 성경을 바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함이었다.

그는 프랑스를 떠나 제네바에 머물게 된다. 파렐은 칼빈에게 제네바의 종교개혁에 동참하자고 부탁했다. 칼빈은 조용히 공부를 하고 싶다고 했지만 ‘파렐’은 칼빈을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오히려 그렇게 도망치면 하나님의 저주가 임할 것이라고 압박했다. 결국 칼빈은 제네바에 남아 종교개혁을 돕게 된다. 칼빈은 프랑스 출신이지만 스위스 제네바의 종교개혁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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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nt originally was established for new Christians, those who experienced a call. They were to spend 40 days and 40 nights preparing for their baptism. If at the end they still wanted to follow Jesus, then on Easter Eve they would be baptized as the sun was rising in the east, signaling the new day, the new era, inaugurated because of the Resurrection.

사순절은 원래 부르심을 경험한 새로운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세워진 절기였다. 그들은 그들의 세례식을 위해서 40일 주야를 보내는 것이었다. 만약 그들이 그 40일의 기간 끝에 여전히 예수님을 따르기로 헌신한다면, 부활절 저녁에 그들은 세례를 받을 수가 있었다. 마치 해가 동쪽에서 뜨듯 새로운 날, 새로운 시대를 상징하며 부활로 인해 새 시작을 선언하듯 말이다.



I am sure it had a powerful significance for them, to have prepared for their vocation as Christians the same way Jesus prepared for His vocation as the Messiah: 40 days of introspection and self-examination.

저는 이러한 사순절이 새 그리스도인들에게 자기성찰과 자기점검의 40일을 이겨내신 메시야 예수님과 같이 동일한 방법으로 분명한 소명을 준비할 수 있게 한 중대한 의미였을 것을 확신합니다.



Later the church used the 40 days as a time of renewal for those who were already Christians, because at a certain point everyone in the empire...was baptized as infants. So the time of Lent was used as a time of renewal and recommitment to the Christian life, examining our lives in light of the One we are supposed to follow.

훗날 교회는 그 40일의 새로운 날의 시간을 새 그리스도인이 아닌 기존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사용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시점의 로마황제 시대 모든 사람들은 유아기때에 세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순절의 기간은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따라야 할 빛 가운데서의 삶인지를 점검하는 새로움과 재헌신의 시간으로 사용되어진 것입니다.

(Mark Trotter, Collected Ser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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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력의 연속성과 불연속성

이 글은 한국교회와 역사 (제4호: 2010 여름호), 한국교회와 역사연구소 (소장: 이상규), pp. 52-89에 발표되었습니다. .-코닷-



 

▲ 이기업 목사고신대학교 신학과(B.A.)
고신대학교 신학대학원(M.Div.)
보스톤 대학교 대학원 예배학(S.T.M.)
고든-콘웰 신학대학원 구약학(Th.M.)
시카고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대학원
구약학 박사과정 (Ph.D.) 코스웤 전, 미국 시카고 개혁교회(CRC교단) 담임목사
현, 한국동남성경연구원
현, 대학교회 담임목사

들어가면서

교회가 교회력/예배력 (the Church Calendar)[1]을 지킨다고 할 때, 그것은 절기들을 지킨다는 의미와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교회는 무슨 (what) 절기들을 지켜야 하는가? 언제 (when) 그 절기들을 지켜야 하는가? 각각의 절기는 얼마 동안 (how long) 지켜져야 하는가? 그리고 교회력 안에 있는 이 절기들은 상호 어떤 관계 (what relationship)가 있는가 아니면 별개의 것인가? 이런 질문들은 교회력에 대한 신학적 이해 또는 예배학적 이해와 예배학적 실천의 문제를 결정하는 방향타 (a rudder)와 같은 것이다.

본고는 예배학의 원리와 배경에 대한 이해가 약한 현대교회에 적절한 기여가 되었으면 하는 목적으로 쓴다. 왜냐하면 한국 교회가 교회력을 지킨다고 해야 할지, 교회력을 지키지 않는다고 해야 할 지 그 행태가 매우 모호하기 때문이다. 어떤 절기는 지키고 있으나 어떤 절기는 명칭조차 들어본 적이 없는 문외한적 태도를 보인다. 한국교회가 지키는 절기는 매우 “선택적” (selective)이라고 말할 수 있다.[2] 거기에는 신학적 이유나 원리 또는 예배학적 근거에 의한 ‘선택적 지킴’ (selective observance)이 아니라, 예배학적 지식에 대한 무지를 바탕으로 몇 가지 절기들을, ‘불완전하게’ 형성된 어떤 전통을 따라서, 선택하여 지킨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각 절기들과의 상관관계는 있는지, 있다면 어떤 방식 안에서 교회력 안에 있는 절기들이 상호 연관되어 있는지 알고 있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각 절기는 얼마 기간 동안 지켜야 하는 지 전혀 모르는 것 같다.

이러한 이유는 한국교회에서 예배학을 공부한 분들이 많지 않다는 것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한국보수교단의 신학교 안에서 설교학 교수들은 많으나 예배학 교수는 찾아보기가 매우 힘들다. 자연히 목회자 후보생들이 실천신학의 분과 안에서 목회행위의 핵심 행위들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설교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과 더불어, 설교학은 그러한 보편적 인식 안에서 중요한 것으로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예배학에 대한 관심과 인식은 매우 약한 것이 현실이다. 설사 개인적이고 부분적인 관심이 있다고 하더라도 배움의 환경이 되지 못하고 있다. 누구나 예배 (liturgy)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으면서 예배학 (liturgics)에 대한 인식과 환경은 따라주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모습들이 한국에서 예배학에 대한 인식과 이해가 약한 현상적인 이유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더 깊은 이유는 역사적인 이유에서 찾아보아야 한다. 종교개혁은 예배의 개혁이라는 말이 기억난다. 카톨릭의 예배의 ‘신비’를 걷어내는 과정에서 ‘오직 성경’ (sola scriptura)이라는 구호 아래서 예배 안에서 말씀 (설교)에 대한 위치는 ‘비대한’ 반면, 예배학 (예전, liturgy)에 대한 관심은 빈약하기 짝이 없다. 어린 아이의 기저귀를 갈 때, 사용한 기저귀만 버리면 되는데, 기저귀를 차고 있는 아이까지 버린 격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양태는 교회당의 건축구조 안에서도 잘 반영되어 있다. 소위 ‘큰 (대) 강대상’ 과 ‘작은 (소) 강대상’ 이라는 명칭이다. 소위 우리가 부르는 큰 강대상은 설교를 위한 가구이고 작은 강대상은 성찬을 위한 가구의 명칭이다. 그 위치도 상하 종속관계를 보여주는 구조 안에 위치되어 있었고 크기도 차이가 있었던 적이 있었다.

따라서 본고에서 필자는 예배학에 바탕을 둔 교회력 (예배력)에 대한 이해 증진을 위해 지면이 허락하는 한, 교회력의 역사적 기원과 발전 과정에 대한 이슈를 다루고자 한다. 특히 예배력의 연속성과 불연속성 (the Church Calendar in Continuity and Discontinuity)의 관점에서 그것을 논하고자 한다.

I. 교회력의 기초 (The Foundational Event of the Church Calendar)

교회와 기독교 신앙의 기초는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다. 주님의 교회는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신앙 고백 위에 세워져 있다. 특히 부활 사건은 기독교 신학과 신앙의 주된 이슈 일뿐만 아니라, 예배력의 형성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진원지 역할을 역사적으로 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어떤 방식 안에서 역사적으로 교회력에 영향을 주었고, 그 교회력이 어떻게 발전해왔는지 살피는 것은 교회력의 기원과 발전에 관한 역사를 살피는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연대기적으로 신약 성경에서부터 초대교회까지의 초기 문헌들을 중심으로 그 발전과정을 역사적으로 먼저 고찰하고자 한다.

1. 첫 번째 부활 사건 (The First Easter Event)[3]

그리스도께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고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그의 제자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신 때가 “안식 후 첫 날”[4] (“the first day of the week,” 마 28:1; 막 16:9; 눅 24:1; 요 20:1)이었다. 바로 “그 날” (evn auvth/| th/| h`me,ra| 눅 24:13)에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은 자신을 나타내셔서 성경을 풀어 주시고,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셨다 (요 24:13-35).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은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요 20:19) 제자들의 모임에 나타나셨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요 20:21)는 파송의 말씀을 주셨다. 부활하신 주님은 보냄을 받은 제자들이, 주께서 맡기신 사역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도록 하기 위해 “성령을 받으라” (요 20:22)는 말씀을 주셨다. 그로부터 “여드레를 지나서”[5] (meqV h`me,raj ovktw. 요 20:26) 도마가 함께 있을 때, 그 제자들의 모임에 다시 나타나셨다. 여기서 도마에게 ‘영광스런’ 십자가의 상처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면서,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요 20:27)는 말씀을 통해서 도마는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요 20:28)는 신앙고백을 하게 됨으로 도마의 의심을 믿음으로 바꾸어 주셨다.

반복적으로 ‘안식 후 첫 날’에 제자들의 모임에 부활의 주님은 자신을 드러내셨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 제자들의 모임의 시간이 ‘믿는 자들의 모임일’ 즉 교회의 회집의 날이 될 것을 암시적으로 보여주셨다 (결과적으로 볼 때). ‘안식 후 첫 날 저녁에’ (요 20:19) 보이셨던 모습과 ‘여드레를 지나서’ (요 20:26), 다시 보이신 장면에서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은 별 차이가 없다. 그러나 여드레 후에 도마가 있는 가운데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셨을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2가지 포인트를 보여주셨다.[6] 첫째는 크리스천 의식 공동체 (the Christian ritual assembly)의 중심에 있는 ‘십자가’를 그의 영광스런 상처를 통해 보여주신 것이며, 둘째는 도마로부터 믿음을 요청함으로 예수님은 이 제자들, 곧 믿음의 공동체가 모이는 집회 (assembly)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암시적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동시에 이 날은 시간의 경과와 함께 믿음의 공동체가 모이는 회집의 날 (assembling day)이 되게 된다.

사도들은 ‘안식 후 첫 날’에 부활의 주님이 제자 공동체에 임재해 주신 그 반복적 행위를 통해, 점차 ‘그 주간의 첫째 날’ (the first day of the week)에 대한 중요성을 포착해간다. 이 날은 결국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과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제자들의 기억과 부활하신 주님의 임재가 연결되었다.”[7] 즉 이 날은 부활하신 주님의 임재와 믿음의 공동체와의 결합이다.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 후, 약 55-57년경에 쓴 고린도전서에서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를 위한 연보를 ‘매주 첫날’ 모임, 즉 매주의 첫날에 반복적인 모임 (the weekly reunion)과 연결하고 있다 (고전 16:2). 이어서 부활 후 61-63년경에 쓴 사도행전에서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행 20:7)라고 기록함으로 매주의 첫 날에 집회가 상례화 (conventionalization) 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거기에는 떡을 떼는 것 (the breaking bread)과 말씀의 강론 (a lengthy sermon)이 있었다.

물론 ‘안식 후 첫 날’ (the first day of the week)이라는 표현은 유대식 날의 계수 방식 (the Jewish method of counting)이었다. 이 개념은 당시의 교회들에서 유일한 개념이었다. 이 날에 대한 새로운 개념이 부활 후, 95년경에 쓰여진 요한계시록에서 등장한다. 그것은 ‘주의 날’ (evn th/| kuriakh/| h`me,ra ¡°On the Lord's Day¡±)이라는 개념이다 (계 1:10).[8]

유대인의 안식일 (Sabbath)과 그리스도인의 일요일 (Sunday)의 개념과 신학은 많은 점에서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있다.[9] Sunday와 Sabbath에 대한 이해와 실천의 방식은 지역과 교회구성원 (이방인과 유대인)의 성분에 따라서 종교문화적으로 구분 또는 혼용이 병행되어오다가 1세기 말까지 Sunday와 Sabbath의 구분이 완결되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그 증거를 Ignatius of Antioch (ca. 107)로부터 찾아 볼 수 있다. 그는 Sunday의 준수를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표식 (sign)으로 이해했다:

Those who used to live according to the old order of things have attained to a new hope and they observe no longer the Sabbath but Sunday, the day on which Christ and his death raised up our life.[10]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들의 Sabbath와는 다른 날과 다른 방식으로 차별화하여 Sunday를 지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총독 플리니 (Pliny the Younger, 61 AD~ca.112 AD)가 트라얀 황제에게 보내는 한 편지 (112년)에서 그가 체포한 그리스도인들이 일요일을 어떤 방식으로 지켰는지에 대한 비교적 상세한 정보를 간접적으로 전달해주고 있다:

Pliny the Younger, then governor of Bithynia, says that the Christians he had arrested claimed that their entire fault or error was to have gathered regularly before dawn on a set day in order to join in singing a hymn to the Christ as to a god.[11]

여기서 Pliny가 언급한 ¡°on a set day¡±는 Sunday를 의미했다. 우리는 또한 Pliny의 언급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집회는 일요일 새벽 전에 발생했고 거기에서 그들은 ‘한 신’ (a god)으로서 그리스도께 찬송을 불렀다는 것을 전한다.

플리니의 간접적인 증언으로부터 약 50년 후에, 저스틴 (Justin)은 Sunday 집회에 대한 최초의 직접적 묘사 (165)를 비교적 자세하게 증언하고 있다:

On the day named after the sun, all who live in city or countryside assemble in the same place, and the memoirs of the apostles or the writings of the prophets are read¡¦. The reason why we all assemble on Sunday is that it is the first day: the day on which God transformed darkness and matter and created the world, and the day on which Jesus Christ our Savior rose from the dead.[12]

저스틴의 글에서 우리는 당시 도시나 시골의 그리스도인의 집회에 같이 모인 사람들은 모두 사도들의 가르침에 대한 기억과 선지자들의 글들을 읽었다는 것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일요일 집회의 주된 한 내용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었다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들이 일요일에 모인 이유를 하나님이 어둠과 물질을 변형시켰고 세계를 창조하셨으며, 그 날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난 날이기 때문이라고 저스틴은 설명한다.

그리스도인들의 Sunday 집회가 시간적 측면에서 규칙적으로, 그리고 내용적 측면에서 성찬, 찬송, 말씀과 함께 내실 있는 모습으로 발전되어 가는 과정에 있었을지라도 그들의 Sunday 집회는 아직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Sunday가 아직 공휴일이 아니었던 시절에 조차도 모든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그 날에 모였었다. 우리는 3세기 중반의 Teaching of the Apostles 로부터 그러한 사실을 찾아 볼 수 있다:

Make not your worldly affairs of more account than the word of God; but on the Lord’s day leave everything and run eagerly to your Church; for she is your glory. Otherwise, what excuse have they before God who do not assemble on the Lord’s day to hear the word of life and be nourished with the divine food which abides for ever?[13]

여기서 주의 날에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두고 다른 세속적인 일을 하지 말며, 주의 날에 모든 일을 제쳐두고 교회에 갈 것을 권고한다.[14] 그리고 주의 날에 영생하도록 하는 신적 양식인 생명의 말씀을 듣는 것을 최고의 것으로 여겼다는 사실을 증거한다.

아직 당시에는 일요일이 공휴일이 아니었기에 주의 날에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일을 제쳐두고 회집을 한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는 것임에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의 신실한 행위는 마침내 순교자를 발생하게 만들었다. 당시로서는 그것이 불법집회이었기 때문이다. 304년 2월 12일, 아누리누스 총독 앞에 불법집회에 참가한 31명의 남자들과 18명의 여자들이 잡혀오게 되었다. 이들에 대한 공적인 고소는 로마제국의 칙령에 불복종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공적인 고소가 이루어졌을 때, 사투르니누스 (Saturninus) 라는 성직자는 “우리는 주의 날을 기념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를 위한 법입니다”라고 증거했다. 자기 집에서 그리스도인의 집회를 가졌던 에메리투스 (Emeritus)라는 사람은 이와 유사한 것을 말했다: “예 우리가 주의 날을 바로 나의 집 안에서 기념했었습니다. 우리는 주의 날을 기념하는 것 없이 살 수가 없습니다” (“Sine dominico non possumus”)라고 증언했다. 그리고 빅토리아 라는 한 소녀는 “저는 그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라고 자랑스럽게 선언했다. 이 사건이 바로 “일요일을 위한 순교자들” (martyrs for Sunday)로 불리어지는 아비티나의 순교자들 (the martyrs of Abitina; near Medjez el-Bab in Tunisia)의 증언이다.[15]

이 사건은 아직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공인되기 이전의 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기록한 “아비티나의 순교자들의 문서” (The Acts of the Martyrs of Abitina)는 박해의 시기가 끝나가고 있을 즈음, 교회는 이미 “일요일에 대한 성례전적 실체” (the sacramental reality of Sunday)를 인식했다. 즉 그리스도인들에게 일요일은 종교문화적으로 거룩한 삶의 초점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심각한 고난에서조차도 이 날을 큰 기쁨을 누리는 날로 인식하며, 파악했다는 것을 보여준다.[16]

이러한 시대가 지나서 콘스탄틴이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 (313)한 이후에 다가온 평화의 도래는 로마 제국의 법들이 일요일에 대한 경의를 표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콘스탄틴의 혼합주의 (Constantine’s syncretism)적 행태가 나타난다. 그는 태양에 대한 제의 (cult)와 그리스도에 대한 예배를 동시에 강화시키는 것에 모두 충실했다. 그는 태양신과 그리스도를 위해 일요일을 공휴일로 제정함으로써 둘 다를 영화롭게 했다. 그에게 일요일은 ‘태양의 날’ (the day of the sun)이었고 동시에 ‘그리스도의 날’ (the day of Kyrios Christ)이었다.[17]

321년 3월에 제정된 일요일에 관한 당시의 한 법에 따르면, ‘태양을 위한 이 존엄한 날’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아야 했으며, 관리나 모든 시민들 그리고 모든 장인들도 쉬어야 했다: “All judges and the people of the towns and all craftsmen are to remain at rest on the venerable day of the sun.”[18]

그리고 321년 7월에 부가적으로 제정된 또 다른 한 법에 따르면, 태양신을 위한 경배의 날로 알려진 태양의 날 (the day of the sun)에 재판과 논쟁과 같은 것들로 채워지는 것은 적합한 행위가 아닌 것으로 여겼다. 대신에 이 날에 노예를 석방하고 해방시키는 적합한 날로 여겼다:

[J]ust as it was unbecoming to fill the day of the sun, ‘renowned for the worship paid to him,’ with trials and disputes, so on the contrary it was fitting to make this a day for manumitting and emancipating slaves.[19]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지나오면서, 니케아 공의회 (the Council of Nicaea)의 전날에 비로소 그리스도인의 일요일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성례전’이 집례 되는 집회의 날로 공적으로 확정되었다.[20] 이 날은 매일의 업무를 제쳐두는 방식 안에서 축제의 날로 지켜졌다. 그리고 이어지는 세기들의 공의회들 (the councils)에서 일요일의 안식에 관한 법을 통과시켰으며, 그리고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집회에 참여할 의무를 상기시키게 되었다.[21] 이어지는 공의회들은 그리스도인의 일요일의 본질적 특징인 ¡°빛의 날, 기쁨의 날, 죽은 자로부터 부활의 날¡°[22]에 다른 어떤 것을 부가시키지 않았다. 그리고 ¡°이 날은 사람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 살아난 자들에게 속한 날이었다.¡° [23] 즉 부활이 이 날의 핵심 키워드이다.

2. 주간 예배력의 확장: 수요일과 금요일 (Wednesday and Friday in Extension of Weekly Cycle)

부활 사건 (the first Easter event)은 ‘주의 날’ (the Lord’s day)라는 매주 규칙적인 주간 예배의 날 (weekly worship cycle)을 형성했을 뿐만 아니라, 최초의 부활 사건 직전의 1주간 안에 일어났던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의 역사적 행위들에 대한 것도 함께 서서히 기념하는 방식으로 확장되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의 전통을 따라서 그 주간에 이틀을 금식의 날로 구별하였다. 유대인들은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을 했다 (Did. 8:1; Tertullian, de Orat. 19; de Fejun. 2).

3세기 중반까지, 역사적 이유로 인해 매주 이틀을 특별한 날로 제정하게 되었다. 그 날들은 수요일과 금요일이었다. 이것은 바리새인 (the hypocrites)의 위선적인 금식일인 월요일과 목요일과 의도적으로 차별화하기 위한 것으로 보여진다.[24] 다음 세기에 Shepherd of Hermas, Clement of Alexandria, 그리고 Tertullian은 수요일과 금요일을 ¡°stational [days]¡±로 불렀고 ¡°days of fasting and penitential prayer¡±로 여겼다.[25] 동방에서 2세기에 부활절 시즌 (the great fifty days) 이외의 모든 수요일과 금요일에 금식을 했으며, 서방에는 ‘stations’으로 알려진다.[26] 수요일과 금요일의 기도 모임은 점차 개인적 성격에서 공동체적 성격으로 바뀌게 되었다. 하지만 지역에 따라 모임의 성격이 조금씩 차이가 난다. Alexandria에서 5세기 중반에 ‘무 (無) 성찬집회’ (an aliturgical assembly)가 있었는데, 성찬 (Eucharist)이 없는 모임이었으며, 대신 성경본문들이 읽혀졌고 교사들이 그 본문들을 해석했으며, 이 모임에는 헌물 (offering)이 없이 진행되었다. 역사가 Socrates of Constantinople (c. 380~?)의 Historia Ecclesiastica에 따르면, 는 Origen이 썼던 많은 주석들이 수요일과 금요일 집회들을 위해 사용되었다고 증언한다.[27] 그러나 예루살렘과 갑바도기아 (Cappadocia) 교회들과 같은 아프리카 교회들은 수요일과 금요일에 성찬을 집례했다.

수요일이 주간 집회일로 제정된 것은, 이 날이 제자들이 주님을 배신한 날이며, 금요일은 주님의 십자가에 죽으신 날이기 때문이다 (Didascalia 21). 그러므로 주일 뿐만 아니라 수요일과 금요일 모임도 그리스도중심적 날들 (Christological days)로 모였고, 그리스도 중심의 주간 예배 모임 (Christological, weekly worship cycle)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것에 대해 Epiphanius (413)가 3세기의 Didascalis Apostolorum (Teaching of the Apostles)를 재언급한다:

¡°Wednesday and Friday are spent fasting until the ninth hour, because when Wednesday was beginning the Lord was arrested, and on Friday he was crucified.¡±[28]

Sub-conclusion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교회력과 공적인 예배모임의 시작을 위한 예배학적 효시가 된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이었다.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은 그리스도인의 말씀의 예배와 성찬의 예배를 내용으로 하는 그리스도인의 예배의 날이 되었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Sabbath와 연속성과 차별성을 드러내면서 그리스도인의 고유의 예배의 날이 되는 전통을 형성하게 되었다. 아울러 그 주간의 수요일과 금요일의 예배 모임으로까지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로서 한주간의 예배사이클 (the weekly worship cycle)이 완성되게 되었다. 부활의 날 (Easter)은 결국 주간 예배 모임 (weekly worship cycle)을 완성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주일 중심의 예배력을 생성했다. 더 나아가 이것은 자연스럽게 1년 후의 부활의 날을 기념하는 연간 예배 모임 (annual worship cycle)을 형성하게 된다. 매 주일은 작은 부활절 (a little Easter)이며, 부활절 (Easter)은 큰 주일 (the great Sunday)이다. 부활절을 중심으로 뒤로 회고하면서 사순절의 절기가 형성된다. 부활절을 중심으로, 앞으로 성령강림절이 이어진다. 사순절-부활절-성령강림절이라는 예배력의 큰 사이클 (부활절 사이클)을 형성하게 된다. 이 부활절 사이클은, 대강절-성탄절-주현절로 이어지는 교회력의 또 다른 사이클이 성탄절 사이클과 불연속성을 가진다. 그러면서 동시에 2개의 사이클은 연속성 안에서 대강절-성탄절-주현절-사순절-부활절-성령강림절로 이어지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중심으로 형성된 그리스도 중심의 6대 교회력의 절기를 형성한다. 이들 그리스도 중심의 6대 절기는 교회력 안에 있는 각각의 절기들이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연결된 연속성을 보여준다.[29]

II. 교회력의 필요성: 왜 교회력을 지켜야 하는가?

왜 교회력을 예배를 통해 지켜야 하는가? 이것에 대한 논의를 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구약에서의 절기를 제정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구약성경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구원역사에 대한 그 사건들 (the salvific events)을 시간과 공간이라는 역사세계 안에서 행하셨다.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행하신 일과 그 행하심을 통해 그 분의 성품을 계시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행동 계시와 말씀 계시를 통해 그분의 구원역사의 드라마를 보여주셨다. 이 드라마의 한 장면마다 그 분께서 행하신 일들을 잊어버리지 말고 기억하도록 하셨다. 그들 자신만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후손들에게 영원히 가르치고 교훈하여 ‘영원한 규례’로 삼게 하셨다 (예: 출 12:14).

기억한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적으로 알고 있고 생각하고 있다는 소극적인 기억이 아니다. 그것은 과거 구원역사를 현재적으로 재현하면서 기억하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적으로 과거 사건을 기억 할 뿐만 아니라, 미래적 구원의 소망을 품도록 하여 언약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시공간이 변하더라도 계속된다는 것을 보여주시고자 한 것이 그분의 절기 제정에 대한 중요한 한 가지 의도이다. 이러한 현재적 기억은 과거에 역사하신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임재의 재현이며, 미래에 있을 동일한 그 하나님의 임재를 현재로 소급하여 소망하고 확신하는 믿음 행위이다. 이것은 변화무쌍한 세계에 살아가며, 신실함이 없는 인생에게는 무한한 유익이다. 이런 기억이 바로 하나님께서 언약백성에게 제정해주신 절기들이다. 이 절기들은 모두가 경건과 제사 (예배) 그리고 축제와 나눔을 포함한다. 언약 백성들의 경건한 삶과 드림과 헌신의 예배 그리고 축제의 누림은 과거만의 단회적 사건이 아니라, 세대를 걸쳐서, 현재적 재현을 통해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임재의 현재성을 확인하고 미래에도 현재적 소망과 확신으로 소급하는 믿음의 기억행위이다. 이런 점에서 이 기억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기억상실증’에 쉽게 걸리는 인간에게 ‘영적인 트라마’ (spiritual trauma)와 같이 잊지 말고 영원히 기억해야 할 하나님의 의미 있는 ‘충격요법’과 같다.

이 기억행위가 절기로 표현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제정해주신 절기들은 다음과 같다.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오순절, 나팔절, 속죄일, 그리고 초막절 (장막절, 수장절)이다. 절기는 ‘성회’를 의미한다. 이 가운데 유월절/무교절 (étACM;h; gx;ä), “맥추절” (^yf,ê[]m; yrEäWKBi ‘ryciQ'h; gx;Û), 수장절 (‘@sia'h'( gx;Û)은 이스라엘 3대 절기이다 (출 23:14-19). 3대 절기의 시작인 유월절/무교절은 구원에 대한 감사의 절기이며, “맥추절” (밭의 첫 열매)과 수장절(연말 밭의 추수)은 수확의 열매에 대한 소출로 드리는 감사절기이다. 그래서 이 3대 절기들은 감사의 축제의 절기이다.

구약의 절기가 구약 백성들에게 과거에 행하신 하나님의 구원 역사 대해서 현재 기억을 통해서 감사의 응답의 표시를 매년 규칙적으로 지켰듯이 신약의 백성인 교회도 그리스도의 과거 구속 역사를 ‘기억과 기대’를 통해서 현재 규칙적으로 신약의 절기들을 지켜야 한다. 이것이 교회력이며, 예배력이다. 교회력은 그리스도의 구속 역사에 대한 현재적 재현을 예배를 통해 표현하는 예배 월력 체계이다. ‘기억과 기대’에 대한 더 정확한 신약적 이해를 위해 아남네시스와 프로렢시스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1. 아남네시스 (anamnesis)와 프로렢시스 (prolepsis)[30]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는 인간이 시간 개념을 아주 잘 설명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시간은 직선적이지만 과거에 대한 회고와 미래에 대한 기대를 현재 안에서 소급적으로 통합함으로 시간은 ‘능동적’ 현재가 될 수 있다. 특히 과거와 미래의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특별히 우리의 예배 안에서 현재화 된다.

과거는 “능동적 행위로서” ‘기억’ (아남네시스)하는 방식 안에서 현재가 된다. 예배에서 기억한다 (remember; remembrance)는 것은 단순히 정신적 과정 (a mental process)가 아니라, 의식적 과정 (a ritual process)을 의미한다. 성례전 (the Eucharist)에서 우리가 예수님을 기억한다고 할 때, 그것은 그 분에 대해 잠잠히 생각하는 것 (thinking)으로 기억함이 아니라, 그 분께서 하신 것을 행함 (doing)으로 기억하는 것이다. 즉 떡과 잔을 취하는 것 (Taking bread and the cup), 축사하는 것 (Giving thanks over them), 떡을 떼는 것 (Breaking the bread), 그리고 분배하는 것 (Giving the bread and cup). 이런 기억하는 행위는 명상 (cogitation)을 통한 기억함이 아니라, 행위 (doing)를 통한 기억이다. 이런 종류의 기억행위가 헬라어로 ‘아남네시스’ (anamnesis)이다. 그래서 성례전을 통한 과거 사건에 대한 기억은 여기서 ‘먹고 마시는’ 행위를 통해서 현재화하는 것이다.

또한 미래가 현재화된다. 헬라어 ‘프로렢시스’ (prolepsis)는 ‘미리 앞당겨 취하는 것’ (to take beforehand)을 의미한다. 이것의 통상적 동의어는 ‘기대하는 행위’ (anticipate)이다. 이것은 미래에 실제로 일어날 행위나 사건이 미리 현재 여기서 우리의 경험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의미한다. 프로렢시스는 하나님의 미래 행위를 우리의 현재 안으로 가져오는 행위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통해서 만들어진 성령 하나님의 선물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히 시간적으로 그리고 예수님께만 한정된 의미로서 과거사건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의 미래라는 시간과 사건이 우리에게 현재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의 부활하심으로 나도 부활한 자가 되었다. 그러나 종국적 성취는 미래에 부활의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를 따라서 교회인 우리도 영화로운 부활의 몸으로 변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부활은 미래의 현재화를 위한 기억행위 또는 기대행위이다 (The Resurrection is a proleptic event).

이런 기억 및 기대 행위와 교회력과 관련하여 말할 때, 교회의 절기들, 특히 그리스도 중심의 절기들 (성탄절 사이클과 부활절 사이클 안에 있는 여섯 절기들)은 과거에 일어났던 것 또는 미래에 일어날 것이라고 결연하게 믿는 것을 현재적 경험 안에서 축하하고 즐기는 “기억하는” (아남네시스) 그리고 “기대하는” (프로렢시스) 예배학적 절기들이다. 예배학적 생생한 행위적 ‘기억과 기대’ (아남네시스와 프로렢시스)는 하나님의 구속행위에 대해 언약백성의 영적인 “치매현상” (dementia) 또는 “기억상실” (amnesia)을 예방할 수 있다. 예배적 기억과 기대 행위는 과거에 대한 단순한 회상이나 미래에 대한 막연한 바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격과 사역에 대한 언약백성의 믿음 행위이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한 “재방송”이 아니라 새로운 공간과 시간과 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사랑에 대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언약 공동체가 행하는 ‘창의적 기억/기대 행위’ 이다.

요컨데, 그리스도의 과거 구속 사역을 ‘기억과 기대’를 통해 현재적으로 재현 또는 구현하는 것이 아남네시스와 프로펲시스의 개념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구속 행위는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낮아지심과 높아지심으로 표현되었다.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은 성탄절 사이클의 3절기인 대강절, 성탄절, 주현절이라면, 그리스도의 높아지심은 부활절 사이클의 3절기인 (사순절), 부활절, 성령강림절에서 표현되었다. 그리스도의 낮아지심과 높아지심은 그리스도 중심의 6대 절기의 예배에서뿐만 아니라, 모든 예배에서 내려오는 요소와 올라가는 요소인 예배 순서와 형식을 형성하게 된다. 이것이 예배에서 하나님과 언약 백성 상이의 커뮤니케이션이다.

2. 카타바시스 (catabasis)와 아나바시스 (anabasis)[31]

예배의 본질은 독백 (monologue)이 아니라, 쌍방의 대화 (dialogue)이다. 즉 예배에 참여하는 두 인격체의 “대화적 행위”를 의미한다. 예배 인격체는 예배를 받으시는 삼위하나님과 예배를 드리는 그의 백성인 사람이다. 이 두 인격체 사이에서 예배 가운데 일어나는 일체의 의미 있는 인간행위 (actus humanus)들은 모두가 예배적 행위이다.

예배에 있어서 이 두 측면에서 일어나는 행위를 “카타바시스와 아나바시스”라고 부른다. 카타바시스 (Catabasis: God’s Decent to Man)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내려오심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행위를 의미한다. 이 구원은 하나님의 계시 행위로 구현되었다.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시 행위는 말씀과 행위로 나타났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구속하시기 위해 말씀 계시를 주시고 그리고 실제 행동으로 성취하셨다. 한마디로, 카타바시스는 하나님의 ‘아래를 향한’ (downward) 행위이며, 구원론적 행위 (divines salvific action)이다.

반대로 아나바시스 (Anabasis: Man’s Ascent to God)는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응답행위를 의미한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행위를 받아들임으로 인간 내적 행위인 믿음과 외적 응답 행위인 예배 행위가 발생한다. 즉 아나바시스는 인간의 ‘위를 향한’ (upward) 행위이며, 예배적 행위 (human liturgical action)를 의미한다.

카타바시스와 아나바시스는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이 둘은 하나의 통일체이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구원론적 통일체’ (salvific unity)이며, ‘예배학적 통일체’ (liturgical unity)이다. 물론 이 말은 신적인 행위가 부족하여 인간의 행위로 완성되고 보충되어야 된다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행위는 그 자체로 충분하다. 어떤 인간의 어떤 행위로도 하나님의 존재를 규정할 수는 없다. 우리가 예배적 영광 (human liturgical doxa)을 돌리지 않더라도 그 분은 스스로 신적 존재론적 영광 (divine ontological doxa)을 가지고 계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예배자로 부르셔서 교회를 삼으셨다. 이 구원론적이고 예배학적 통일체가 된 교회 공동체의 예배 안에서 의미 있는 다양한 방법과 상징과 언어와 표현들로 구현된다. 이런 점에서 예배는 매우 신학적이라고 할 수 있다. 공예배는 바로 이러한 신학적 미학을 담고 있다.

결국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존재하는, 하향의 카타바시스와 상향의 아나바시스의 커뮤니케이션은 예배의 정의가 무엇인지, 우리가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할지 많은 아이디어를 제공해준다. 그리고 이것은 예배의 두 방향과 요소를 결정하고 규정한다.[32]

Sub-conclusion

아남네시스와 프로렢시스가 예배력을 지키는 이유에 대한 개념이라면, 카타바시스와 아나바시스는 하나님의 구속행위에 대한 언약백성의 응답행위의 개념이다. 예배력을 왜 지켜야 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과거 구속행위를 기억 (anamnesis)하고 미래 구속행위를 기대 (prolepsis)하는 현재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응답행위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행위는 자기 백성을 향한 내려오심과 올라가심의 사역으로 표현되었다. 예배도 결국 내려오심 (Catabasis)과 올려드림 (Anabasis) 사이의 신인 쌍방의 행위 (divine-human reciprocal action)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기억과 기대 안에서, 그리고 아래를 향한 신적 행위와 위를 향한 인간적 행위가 예배 안에서 표현되되, 특히 일정한 예배력 안에서 구현되어야 한다. 주님의 교회는 어떤 절기들을 지켜야 하며, 그 절기에 합당한 예배를 어떤 방식 안에서 교회력을 지켜야 하는가?

III. 교회력의 구성: 무슨 교회력을 지켜야 하는가?

현대교회가 지키고 있는 절기들을 여기서 개괄적으로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현대 교회가 지키는 교회력 또는 예배력의 구성은 크게 3가지 (3Cs)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는 기독론적 절기 (Christological Feast)요, 둘째는 시민 기념일 (Civil Holiday)이며, 그리고 셋째는 교회 기념/강조일 (Church Emphatic Day)이다. 기독론적 절기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 (사역)을 기초로 해서 지키는 절기로서 전통적 의미에서 지키는 교회력의 예배절기이다. 시민 기념일은 국가공휴일이나 국가적 차원에서 기념하는 사건이나 그러한 기념일에 교회가 예배를 드리며 지키는 것을 가리킨다. 그 예로써, 신년예배, 독립기념일 (광복절), 어린이 주일, 어버이 주일 등이다. 그리고 교회 기념/강조일은 교회가 특별한 날을 기념하고 신학적 의미나 정신 그리고 헌신과 헌금을 강조하여 현재의 삶에서 구현하기를 원하여 지키는 날이다. 예컨데, 선교주일, 교회설립기념일, 종교개혁주일, 교단창설기념주일, 추수감사주일, 교육주일, 장애인주일 등이다.

은밀한 의미에서 교회가 지키는 절기를 예배를 통해 누리는 월력 (calendar) 시스템을 교회력/예배력이라고 할 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을 기억하고 기념하며, 축하하는 것을 통해, 그 구속사역의 신학적 의미와 신앙적 의미를 현재적 교회적 삶에 적용하고자 하는 그리스도 중심절기들 (Christo-centered Worship Seasons)을 의미한다.

그리스도 중심의 예배력 (교회력)에는 두 개의 사이클이 있다. 성탄절 사이클과 부활절 사이클이다. 성탄절 사이클은 대강절 (Advent)로 시작하여 성탄절 (Christmas)과 주현절(Epiphany)로 이어지는 3개의 절기들이다. 그리고 부활절 사이클은 사순절 (Lent)로 시작하여 부활절 (Easter)과 성령강림절 (Pentecost)로 이어지는 3개의 절기이다. 각 사이클은 한 개의 준비의 절기와 두 개의 축제의 절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성탄절 사이클에서 시작의 절기인 대강절과 부활절 사이클에서 시작의 절기인 사순절은 각 사이클의 축제의 절기들을 지키기 위한 준비의 절기이다. 그래서 대강절과 사순절은 이어지는 축제의 절기들을 위한 ‘준비의 절기’ (A Preparatory Season)라고 부르며, 각 사이클에서 준비의 절기에 이어지는 두 개의 절기들은 ‘축제의 절기’ (Festival Season)라고 부른다. 즉 성탄절 사이클에서 준비의 절기인 대강절이 지나면, 이어지는 성탄절과 주현절은 성탄절 사이클의 축제의 절기들이다. 그리고 부활절 사이클의 준비의 절기인 사순절이 지나면, 이어지는 부활절과 성령강림절은 부활절 사이클에서 축제의 절기들이다. 그러므로 교회력은 ‘준비와 누림 (축제)’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준비와 누림의 반복적인 그리스도 중심의 6대 절기를 연속적으로 표현하면, 대강절à성탄절à주현절à사순절à부활절à성령강림절로 이어진다.[33]

지금까지 우리는 위에서 성탄절 사이클과 부활절 사이클로 구성되어 있는 그리스도 중심의 6대 절기를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 이제 여기서 우리는 이 절기들과 두 사이클이 어떤 역사적 과정 안에 생성했는지, 즉 그 역사적 기원 및 발전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성탄절 사이클 (Christmas Cycle)

성탄절 사이클은 준비의 절기인 대강절에 시작되어 축제의 절기인 성탄절과 주현절로 이어진다.

(1) 대강절 (Advent)

대강절의 기원은 전적으로 서방교회의 전통이다. 대강절의 첫째 주일은 서방교회에서 그해의 교회력의 시작으로 고려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항상, 모든 지역에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34] 가울 (Gaul)에서 Hilary of Poiters (d. c. 367)의 증거와 스페인 (Spain)에서 the Councils of Saragossa (380)에 따르면, 대강절은 주현절을 위한 3주간의 준비의 과정이었다. 5세기와 6세기에 이 3주간의 대강절 기간은 성탄절이 되기 이전의 40일까지 길어지게 되었다. Bede는 ‘ante natale Dei’ (“before God’s birth”)에 Egbert와 Cuthbert가 40일 동안 금식했다고 기록한다 (HE 3.27, 4.30). 원래 로마에서 성탄절 하루 전 1일만 금식했다 (Filastrius of Brescia, Div. Haer. 149; CSEL 38. Cf. Augustine, Ep. 65). The Orthodox Church 의 대강절은 11월 15일에 시작하며, 성탄절을 위한 준비의 금식 절기로 지킨다. 그 기간은 약간의 변천을 겪으면서 Gregory the Great가 4주간으로 확정했다.[35] 대강절이 서방교회에서 동방교회로 발전되었으나, 성탄절의 축제의 절기를 위한 준비의 절기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2) 성탄절 (Christmas)

성탄절이 처음으로 언급된 것은 “Chronography of 354”[36] 에 의해서이다. 성탄절과 주현절은 기원과 발전의 역사[37] 안에서 상호 중첩되어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이 정도로 언급하고 다음 항목인 주현절에 대한 언급에서 계속할 것이다.

 (3) 주현절 (Epiphany)

대강절이 서방교회의 전통인 반면, 주현절은 동방교회의 기원을 갖는다. 성탄절과 주현절은 부분적으로 동지점 (the winter solstice)과 연결된 이방인의 축제의 컨텍스트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방인의 축제를 대체하기 위한 시도들이 있어왔다. 그리스도인이 로마에서 성탄절을 지켰다는 첫 번째 증거가 나타나기 80년 전인 274년에, 12월 25일은 ‘태양의 생일’ (Natalis solis invicti)을 지키는 날로 확정되었었다 (in the Chronograph of 354).[38] 그리고 이집트와 아라비아에서 1월 6일은 태양신인 Aion과 그리스신화에서 포도주의 신인 Dionysus (Epiphanius AH 51.2; GCS 31.284)의 동정녀 탄생 (the virgin-birth of Aion/Dionysus)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신들이 사람들에게 자신을 나타내는 전설과 관련되어 있다.  Pliny the Elder는 Dionysus에 말하기를 물로 포도주로 바꿈으로 그 날에 그의 임재를 드러냈다고 언급한다 (Natural History 2.106, 31.13).[39]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12월 25일과 1월 6일은 모두 Julian calendar에서 Nisan 14일에 주님의 수난 (the Lord’s Passion)에 대한 실제 날짜로 고정하기 위한 시도로부터 계산된 날들이다. 서방에서 Hippolytus와 Tertullian에 의해 받아들여진 날은 3월 25일이며, the older Asian recension of the calendar는 4월 6일이었다.[40]

그것들의 기원이 무엇이든지, 성탄절과 주현절은 4세기에 폭넓게 지켜졌는데, 이것은 의심 없이 당대의 기독론적 논쟁들과 Arianism에 대한 논쟁의 필요성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41] 주현절은 그리스도의 출생 사건 (Christ’ nativity)에 대한 축하와 그리스도의 세례와 가나에서 첫 번째 기적을 기념하는 절기였다 (John Cassian, Conferences 10.2; PL 49.821).[42]

Epiphany라는 이름이 헬라어 기원을 가리킨다고 할지라도, 그것에 대한 명백한 언급은 c. 361에 Gaul에서 지킨 것이다 (Ammianus Marcellinus’s History 21.1).[43] 여기서 지킨 것에 대한 내용은 거의 확실하게 예수님의 출생 사건 (the nativity)이었다. Egeria[44]의 증언도, 예루살렘에서 주된 내용은 예수님의 출생에 제한된 것이었고, 예수님의 세례와 가나에서 기적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25.6-12)고 전한다. 그러나 동방에서 45년을 보냈고 이 45년 기간 가운데 베들레헴에서 24년을 보냈던 Jerome (d. 420)은 예수님의 세례가 주된 내용이었다고 증언한다 (Comm. In Ezek. 1.1; PL 25.17). 그러나 그의 죽음의 때까지 서방의 기원을 갖는 성탄절은 동방으로 소개되었다. 386년까지는 Antioch (Chrysostom, in diem natalem, PG 49.351)으로, 370년까지 Cappadocia (Gregory of Nyssa, in diem luminum, ed. Jaeger, 9.221)로, 그리고 380년까지 Constantinople (Gregory Naz., Orat. 38)로 성탄절이 전래되었다.[45] 이 사실은 동방의 주현절과 서방의 성탄절이 상호 교류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 인해 다소 복잡한 양상으로 발전된다.

서방의 성탄절에 대한 최초의 언급이 354년이고 동방의 주현절이 360년까지는 Gaul에서 이미 형성된 전통이었다면, 즉 거의 동시적 기원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주현절이 성탄절보다 일찍 시작된 것으로 본다면, 어떤 경우이건 그것은 니케아 공의회 (325)보다 이전일 수는 없다.[46]

주현절의 동방 기원과 달리, 성탄절은 서방에서 기원되었는데, 로마라기 보다는 북아프리카에서 일 것이다. Donatists는 그밖에 모든 사람과 달리 Epiphany의 절기를 추가하지 않았다 (Serm. 202; PL 38.1033)고 어거스틴은 412년에 호소한다.[47] 이 사실은 성탄절이 Donatists schism의 년도인 311년 전에 북아프리카에서 폭넓게 기념되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당시 주현절은 최근에 더해졌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비록 주현절이 Leo의 시기까지 잘 확립되었을지라도, 로마에서 5세기 초까지는 기념되어오지 않았던 것 같다 (Coeburgh, R. Ben, 1965, pp. 304ff). Gaul과 Spain에서 그리고 심지어 north Italy에서 그것은 더 일찍 알려졌다.  거기서 그것은 동방박사의 경배 사건 (the adoration of the Magi), 예수님의 세례 사건 (our Lord’s baptism), 그리고 가나 혼인 잔치의 기적 사건 (the miracle at Cana)에 대한 3중적인 기념이었다. (Paulinus of Nola, Poema 27; PL 61,649), 반면 로마에서 동방박사 (the Magi)는 주현절의 유일한 주제가 되어온 것 같다.[48]

원래 기원과 그 내용에 있어서 주현절과 성탄절의 ‘결합적인 축제’ (unitive festival)이었던 것이 동방과 서방에서 다른 방식으로 나누어진 것 같다: 서방의 성탄절은 예수님의 출생의 축일인데, 동방의 성탄절은 여기에다 동방박사의 경배 사건 (the adoration of the Magi)을 추가했다; 동방의 주현절은 동방에서 주님의 세례에 대한 기념이고 서방에서 주현절은 동방박사의 방문 사건 (the visit of the Magi)이 기념된다.[49] 그리고 나서, 다른 두 개의 주제가 주현절과 결합되었다. 즉 주님의 세례와 가나 혼인잔치가 서방에서 주현절 이후의 Sundays에 기념된다. 비잔틴 예배 (The Byzantine liturgy)에는 가나에 대한 언급이 없다. 혼인 이미지 (nuptial imagery)는 세례에 대해 사용된다.[50] 여기서 우리는 요한복음 2장의 가나혼인잔치의 주제가 주현절에 포함되었다는 것이 매우 흥미롭고 의아하다. 가나혼인잔치의 주제가 주현절에 포함된 것은 주현절과 동일한 날인 1월 6일에 대한 발생한 이방종교의 절기의 종교문화적인 현상에 대해 변증적으로 대체하려는 의미인 것 같다. 앞서 언급한대로 이집트와 아라비아에서 주현절의 날인 1월 6일은 Aion/Dionysus와 연결되어 있었다. Pliny the Elder의 증언에 따르면, Dionysus가 물을 포도주로 바꾼 이 날에 자신의 임재를 드러냈다고 말한다. 이것이 가나혼인잔치의 장면과 일치한다. 그래서 이방종교의 종교문화 안에 있는 물을 포도주로 바꾼 사건과 신의 임재 사건, 이 두 사건들이 관련된 1월 6일에 주현절이라는 절기로 기독교화 (Christianization)하면서 가나혼인잔치의 주제가 주현절에 들어오지 않았다 생각된다.

동방에서, 갑바도기아 교부들은 일찍이 주현절을 세례를 위한 표준일로 삼았다. 반면 서방에서는 비록 Leo가 성탄절에 그 주제에 관해 설교했을지라도, 적어도 Leo의 시기까지는 세례가 결코 그 때 집례되지 않았다. 그러나 동방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Gaul에서 성탄절/주현절은 세례의 시즌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Gaul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그것에 대한 준비의 40일 기간에 대한 언급을 듣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51]

2. 부활절 사이클 (Easter Cycle)

부활절 사이클은 준비의 절기인 사순절을 포함한다. 그리고 이 준비의 절기를 이어서 2개의 축제의 절기인 부활절과 성령강림절이 이어진다.

초대교회는 한 개의 절기만을 가졌다: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에 기초한 주간과 연간의 유월절 (the weekly and annual Pesach)이다. 4세기에 이르러서 주님의 오심에 대한 절기가 생성된다.[52]

2세기 전까지 부활절 (Easter)의 날을 계산하는 2가지 방법이 있었다. 소아시아 교회들 (The Churches of Asia Minor)은 Nisan, 14일의 유대인의 유월절 (the Jewish Passover)의 날을 기독교화 (Christianizing) 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날에 그들의 금식을 멈추었다. 다른 지역의 교회들은 부활절을 Nisan, 14일 다음 일요일 (the “first day of the week”)에 지켰다. 로마교회 (The Roman Church)는 후자를 따랐다. 3세기 시작부터는 이것이 모두를 위한 하나의 표준 전통이 되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Nisan월의 음력 14일이 양력의 어느 날에 떨어지는 지를 계산하는 데는 차이점들이 있었다. 니케아 공의회 (the Council of Nicaea, 325)에서 모든 교회들은 Alexandrian 계산법을 따를 것을 촉구했다. 그래서 이후부터는 부활절은 춘분점 (the spring equinox: 3월22일과 4월 25일 사이) 이후 첫 번째 보름달 (the first full moon) 직후의 일요일에 지켜졌다.

적어도 3세기 시작부터, 부활절의 축제는 50일 (Pentekoste)의 기간 동안에 계속 지켜졌다. 그러나 특별한 지킴으로 특징지어지는 50일째 그 자체였다는 것은 단지 4세기부터이다. 이 동일한 기간에 “the sacred triduum (the Great Three Days; 성 [聖] 목, 금, 토요일)이 출현했고 얼마 후에 전체로서 Holy Week (수난주간, the passion week)가 시작되었다.

부활절 축제는 초기부터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기억하는 날들에 금식으로 준비되었다. 이 금식은 비교적 빨리 사순절 (Lent)의 40일 전 기간 동안까지 확장되었다. 그래서 사순절은 부활절을 위한 준비의 시간이 되었다.

(1) 사순절 (Lent)

사순절 (Lent)은 라틴어로 Quadragesima이며, 헬라어로는 Tessarakoste라고 불리어진다. 이 절기는 기본적으로 금식과 세례를 위한 준비 기간으로 지켜졌다. 사순절의 ‘40일’의 수 (number)는 광야에서 예수님의 금식의 길이에 의해 결정되었다.[53]

사순절의 길이는 어떻게 40일의 기간을 계산하는지에 따라서 매우 다양하다.[54] 예를 들면 Sunday가 제외되든지, 아니면 Saturday와 Sunday가 제외되든지, 아니면 Good Friday와 Holy Saturday 또는 Holy Week 전체가 제외되든지 했다. 그 시작과 마침 그리고 기간에 있어서도 다양한 변화과정의 역사를 갖는다. 1세기의 사순절은 40시간 동안 그리스도 무덤 속에 있었다고 믿어지는 기간을 의미했다. 그 후에 40시간이 연장되어 6일 (Holy Week)이 되었다. 6일은 다시 6주간으로 늘어났다. Athanasius는 월요일에 시작하여 Holy Week (the Great Week)[55]를 포함하는 6주를 주장했다. 반면 50년 후에 Egeria는 예루살렘에서 사순절은 the Great Week를 포함했고 8주간 계속되었다. 왜냐하면 토요일과 일요일이 금식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27:1).[56]

서방전통에서 40일의 사순절은 Ash Wednesday로부터 계산되어 Holy Week를 포함하며, 일요일은 제외된다. 반면 동방전통에서 사순절은 (재의 수요일) 직전 월요일에 시작하여 종려주일 (Palm Sunday) 직전 금요일까지로 나아가며, Holy Week을 제외하고 그 사이의 모든 일요일들을 포함한다. 그리고 마지막 한 주간은 “Cheesefare Week”[57]라고 불리는 부분 금식주간이 이어진다. 서방에서처럼, 사순절 (Lent, the Great Fast)은 준비의 금식절기 (a pre-Lenten season)라는 공통점은 있지만 실제로 그 기간은 5주간이다.

니케아공의회 (325)에서 사순절의 기간은 40일 (6주)로 확정되었다. 그 시작 시점은 ‘재의 수요일’ (Ash Wednesday)이다. 재의 수요일은 부활절로부터 역산하여 산출할 수 있다. 이 날로부터 일요일을 제외한 부활주일 직전 토요일까지 40일간이다. 일요일은 금식일에서 제외하기 때문이다.  일요일은 작은 부활절이기 때문에 서방 전통은 금식일에서 제외했고 반면 동방은 포함시켰다. 동방과 서방에서 사순절의 절기는 모두가 공히 금식으로 부활절을 준비하는 준비의 절기라는 것에는 일치한다.

(2) 부활절 (Easter)

사도시대부터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부활을 매주 일요일에 기념했다. 연간 축제 (the annual celebration)로서 부활절은 유대인의 유월절 (Jewish Passover)이 그러한 것과 같았다. 부활절은 그리스도인의 유월절 (Christian Pascha)이었다. 부활절은 크게 The Easter Vigil (부활절 전야제), The Easter Triduum (부활절 직전 3일), Easter Day/Season (부활절)으로 구성된다. 여기서 우리는 The Easter Vigil과 The Easter Triduum만 논할 것이다. 부활절 자체에 대한 것은 이미 앞에서 충분히 논의되어 왔기 때문이다.

초기 문헌들은 부활절 기념은 하루, 이틀, 또는 그 이상의 엄격한 금식의 형태를 본질적으로 취한다. 그리고 이것은 성찬으로 마무리되는 기도를 위한 야간 집회 (a nocturnal assembly for prayer)로 이어진다. 3세기의 Teaching of the Apostles[58]에 따르면, 부활절 기념에 대한 초기의 묘사를 발견할 수 있다:

On the Friday and on the Sabbath fast wholly, and taste nothing. You shall come together and watch and keep vigil all the night with prayers and intercessions and with reading of the Prophets, and with the Gospel and with Psalms…until the third hour in the night after the Sabbath; and then break your fasts…. And then offer your oblations; and thereafter eat and make good cheer, and rejoice and be glad, because the earnest of our resurrection, Christ, is risen. And this shall be a law to your for ever, unto the end of the world.[59]

여기서 우리는 the Easter Vigil의 기본적 요소들은 금식, 믿음의 공동체의 회집, 심야기도 (prayer vigil), 구약과 신약성경의 읽기, 봉헌, 식탁의 교제, 부활의 기쁨 안에서 누린다.[60]

그리고 The “Easter Triduum” (or “paschal triduum”)이 부활절을 지키는 또 다른 한 축으로 여겨왔다. 4세기 말에 Ambrose는  “sacred triduum” (triduum sacrum)이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가 “suffered and rested and rose” (et passus est, et requievit, et resurrexit)[61]의 행위를 가리킨다. 후에 어거스틴은 “the most holy triduum of the crucified, buried., and risen Lord” (sacratissimum triduum crucifixi, sepulti et ressuscitati)으로 불렀다.[62] The Easter triduum은 예루살렘 교회의 예배에서 그 기원을 갖는다. 그 증거를 우리는 Egeria의 증언에서 찾는다. Egeria[63]가 381-384년에 예루살렘으로 순례자로 참여한 후, 남긴 Egeria’s Travels 후기에 기록되어 있다. Holy Thursday, Good Friday, Holy Saturday, 그리고 나서 50일간의 the Great Fifty (부활절 시즌)가 the “great Sunday”로 불려지는 부활주일에 시작된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승천일 (Ascension)에 대한 부분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승천 사건은 부활 사건과 성령강림 사건 사이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활절 절기는 7주간 동안의 축제 기간이다. 부활절 여섯째 주일이 포함된 그 주간의 목요일이 그리스도의 승천일 (the Day of Ascension of the Lord)이다. 승천하신 목요일이 부활주일로부터 40일째 되는 날이다 승천절에 대한 교회사적인 최초의 언급은 닛사의 그레고리 (Gregory of Nyssa)가 388년에 한, 설교에서 나타난다 (Jean Danielou). 그리고 ca. 420-430년에 예루살렘에 그것이 받아들여졌다.[64]

우리는 승천의 날인 목요일에 주로 예배가 없기 때문에, 그 다음 이어지는 부활절 일곱째 주일을 승천주일 (Sunday of Ascension)로 지킨다. 또한 부활절 마지막 일곱번째 주간으로서, 승천 주일이 있는 그 한 주간 전체를 승천절 (Season of Ascension)로 지킬 수 있다. 승천절은 마침은 곧 부활절의 절기의 마침을 의미한다.

 (3) 성령강림절 (Pentecost)

50일간의 부활절은 교회력 가운데 가장 오래된 절기이다. 이것은 무교병 절기 (the Feast of Unleavened Bread)로부터 초실절/맥추절 (the Feast of First Fruits)까지의 7주간의 유대인의 오순절 (the Jewish feast of Pentecost)에 상응하는 절기이다. 50일간의 부활절에 기간의 일요일들에 대해, Athanasius의 서신들은 실제로 그것을 “magna dominica” (the great Sunday)라고 부른다. 이 날에는 금식이나 무릎을 꿇는 행위도 이 기간 허용되지 않았다 (Tertullian, de Cor. 3.4; Egeria, 41; Nicaea, Can. 20).[65] 성령강림절은 바로 이러한 부활절의 연장선상에 있는 축제의 절기로 지켜졌다.

사실 성령강림절은 일종의 “요약적인 시기” (a summarizing occasion)이지, 새로운 시작의 시기 (an inaugural occasion)는 아니다. 이 말의 의미하는 바는 예수님의 고난 (사순절), 부활 (부활절), 승천 (승천일) 그리고 약속의 성령님을 보내주신 사건을 일련의 부활절의 사이클의 연속적인 절기를 마무리하는 ‘날’ (day)의 개념이지, 새로운 ‘절기’ (season)의 개념이 담긴 날은 아니다.[66]

그리스도의 승천일 10일 후인, 이어지는 주일이 바로 성령강림주일 (the Day of Pentecost)이다. 성령강림주일은 부활주일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이다. 승천절기가 부활절 절기 (Season)의 마침이라면, 성령강림주일은 부활절 사이클 자체를 닫는 축제의 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 중심의 6대 연속절기는 대강절-성탄절-주현절-사순절-부활절-성령강림절의 절기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서 승천절이 왜 없는가? 승천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교회력에서 누락 또는 약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승천절을 지키지 말아야 하는지 덜 강조된 것은 아닌지 의구심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리는 대강절-성탄절-주현절의 세 절기를 일컬어 ‘성탄절 사이클의 절기들’이라고 불러왔다. 그리고 사순절-부활절-성령강림절의 세 절기를 ‘부활절 사이클의 절기들’이라고 불러왔다. 각 사이클의 명칭은 그 사이클에서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핵심 사건인 성탄하심과 부활하심을 근거로 하여 교회력의 사이클의 명칭을 형성한다. 즉 성탄절 사이클과 부활절 사이클로 대표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부활사건과 승천사건은 각각 독립된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임에는 틀림없으나, 이 사건을 연속적인 사건으로 보면서 승천은 부활에 대한 광의의 신학적 개념에 포함시키는 것이 교회력의 신학적 의도인 것 같다. 이 신학적 의도가 교회력의 두 사이클에서 신학적으로 체계화 된 것이 절기 명칭에 대한 예배력 또는 예배신학의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승천 사건을 기념하는 승천절의 명칭이 그리스도 중심의 6대 연속적 절기의 이름 안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하여서 승천절을 지키지 말아야 한다거나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승천절은 부활절의 여섯째 주일이 포함된 그 주간의 목요일이 부활 후 40일째 되는 날이기에 승천절을 부활절 절기가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부활절 일곱째 주일을 승천주일로 교회력은 명칭을 부여하여 지켜오고 있다.

요셉 웨버 (Joseph Weber)는 “부활과 승천은 일종의 두 단계의 로케트이다”고 말한 적이 있다.[67] 이 의미는 부활은 예수님의 몸이 땅으로부터 로케트가 분출되는 것이며, 이어지는 승천은 로케트가 대기 바깥으로 발진하여 나가는 것으로 보았다. 즉 이 비유는 연속성이 강조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가지신 생명과 몸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부활생명/몸과 승천생명/몸은 동일한 영화로운 생명/몸이다. 그리고 구속 사역의 측면에서 볼 때, 부활은 승천이 의미하는 왕으로서 영광 안에서 승귀를 통한 통치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왜냐하면 부활은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승리하신 왕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승천 사건 자체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 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이것이 교회력에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중심의 두 사이클인 성탄절 사이클과 부활절 사이클 안에 있는 6대 교회력 절기 안에 승천절이 명시적으로 포함되지 않는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실천적으로 그리고 실제적으로, 우리는 부활절의 사이클 안에서 부활절의 축제의 정서와 신학 안에서 승천절을 지킴이 옳다고 할 수 있다.

3. 평상절; 성장절; 녹색절 (Ordinary Time of Growth)[68]

“평상절”에는 7개의 축제가 기념된다. 그 가운데 3개는 대부분의 전통들에서 공통적인 것들이다 (the Universal Feasts): the Transfiguration of the Lord, the Triumph of the Cross, and the Feast of Dedication. 그리고 나머지 4개는 서방교회에 해당된다 (the Western Feasts): the Trinity, Corpus Christi, the Sacred Heart of Jesus, and Christ the King.[69]

그러나 평상절은 절기의 개념은 아니다.[70] 서론에서 언급한 대로 교회력의 절기의 개념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부활절 사이클과 성탄절 사이클 안에 있는 6개 절기를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평상절은 절기의 개념이 아니다. 하지만 이 시기는 6대 절기들을 통한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과 인격을 기초로 해서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성장을 도모하는 것을 강조하는 적절한 시즌이다.

Sub-conclusion

교회력은 2개의 사이클인, 부활절 사이클과 성탄절 사이클 안에 그리스도 구속 사역 중심의 6대 절기를 포함한다. 그것은 대강절, 성탄절, 주현절, 사순절, 부활절, 성령강림절로 구성진다. 이 6개의 절기의 발생과 성장과정의 역사는 지역과 전통과 시기에 따라 매우 다른 모습과 복잡한 양상으로 발전되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사이클은 한 개의 준비의 절기와 두 개의 축제의 절기들을 가진 교회력 시스템으로 귀착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나오면서

전통은 만들어져 왔고 전통은 또한 만들어져 가야 한다. 교회력의 영역도 예외가 아니다. 현대 한국교회는 교회력에 대한 전통이 제대로 형성되어 있지 않다. 특히 한국보수교단의 교회는 불완전하게 형성된 교회력의 전통 안에서 절기들을 “선택적으로” 지켜오고 있다. 그러나 교회력은 그 성격상 선택적 지킴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연속적 누림의 체계이다.

이런 점에서 예배학에 대한 신학적 훈련과 연구가 강화될 필요가 있다. 이것이 선행될 때, 건강한 예배학의 전통이 세워질 수 있다. 이 전통을 세우기 위한 연구 자료들이 개신교에, 특히 보수 교단의 개신교에 예배학적 유산이 빈약하다.  타 전통들 안에 쌓여 있는 1, 2차 자료들을 발굴하고 개혁 신학에 입각한 자료비평을 거쳐 예배력에 대한 진일보된 전통을 세워나가야 할 것이다. 그것을 위한 중요한 원리가 있다면, 교회력의 기초가 된 부활 사건을 바탕으로 한 주일 (the first day of the week) 중심의 신학[71]과 그리스도 중심의 구속 사역[72]에 바탕을 둔 예배력에 대한 전통을 세워나가야 할 것이다.

[1] 교회력 또는 예배력에 대한 영어 명칭은 다양하게 사용해오고 있다: the Christian Year/Calendar, the Church Year/Calendar, the Liturgical Year/Calendar 등이다.

[2] 한국교회가 지키는 절기들이 ‘선택적’이라고 본고에서 필자가 언급할 때, 그 이유는 (1)성탄절>(2)부활절>(3)성령강림절>(4)사순절>(5)대강절>(6)주현절이라는 ‘우선 순위도’ 안에서 절기들이 주로 지켜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1)번 방향 쪽으로 갈수록 익숙해져 있고 (6)번 방향 쪽으로 갈수록 낯선 절기일 것이다. 적게는 앞의 (1)번과 (2)번 절기만을 선택적으로 지킬 수도 있고, 많이 지킨다면 (1)번~(4)번까지의 절기가 선택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3] 이 섹션의 내용 전개에 있어서 필자는 A. G. Martimort의 The Liturgy and Time, The Church at Prayer vol. IV, eds. by Aimé Georges Martimort et als. (Collegeville, Minnesota: The Liturgical Press, 1983), 11-16에 있는 제1장 “Sunday and the Week”의 History of Sunday의 내용을 요약적으로 설명함으로, 그에게 빚지고 있다. 그러나 많은 부분에서 본고의 논지 전개를 위해 필요한 필자의 논평과 아이디어가 반영되어 있다.

[4] 마태복음 28:1절의 헬라어 본문은 각각 한 개의 시간의 종속절과 주절로 구성되어 있는데, 여기사용된 종속절의 헬라어 본문은 VOye. de. sabba,twn( th/| evpifwskou,sh| eivj mi,an sabba,twn h=lqen로 묘사했는데, 한글 개역개정판 성경은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 날이 되려는 새벽에’로 번역했다. 특히 ‘안식 후 첫 날’ (eivj mi,an sabba,twn)에 해당되는 부분을 대부분의 영어성경은 ‘the first day of the week’ 으로 번역했다 (KJV, NASB, NIV etc.). ‘the first day of the week’에 해당되는 헬라어를 마가복음 16:9절에는 prw,th| sabba,tou 으로 사용했다. 누가복음 24:1절과 요한복음 20:1절에서는 mia/| tw/n sabba,twn 을 사용했다. ‘안식 후 첫날’과 ‘그 주간의 첫날’로 번역되는 것은 헬라어 sa,bbaton 이 ‘안식일’ (Sabbath)과 ‘주간’ (week)이라는 2가지 의미를 모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즉 안식일한 주간의 촛점으로 보는 유대인들에게는 2가지 의미가 모두 가능했다.

[5] meqV h`me,raj ovktw. (lit., ¡°after eight days¡±)을 NIV는 “a week later” 으로 번역했다. 일요일에 대한 또 다른 명칭들 가운데 하나가 ‘the eighth day’라는 표현이 있는데, 하지만 여기서 ‘여드레 후’가 시간적으로 일요일을 가리키는지는 분명치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활의 주님이 ‘일주일 후’에 제자공동체에 다시 나타나셨다는 뉘앙스를 전달하고 있다.

[6] A. G. Martimort, I. H. Dalmais, and P. Jounel, The Liturgy and Time, The Church at Prayer vol. IV (Collegeville, Minnesota: The Liturgical Press, 1983, 12-13.

[7] Ibid., 13. 그리고 부활에 대한 기념 (commemoration) 위에 서서히 다른 구속 사건들이 예배학적 기념 절기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즉 승귀 (높아지심)의 구속 사역적 테마 (the salvific theme)에 포함된 부활, 승천, 성령강림 같은 사역들과 낮아지심의 구속 사역적 테마 안에 있는 성육신, 고난, 죽으심이 절기화된다.

[8] ‘주의 날’에 대한 명칭은 헬라어를 사용하는 교회들에서 두루 사용되었다. 그리고 이것의 라틴어 형태의 명칭으로서 (Vul: in dominica die), 서방교회에서는 “dominicus dies” 라고 일컬어져 사용되었다. 그리고 이 명사는 곧 사라져버렸고 형용사만 남게 되었다. 이 형용사가 다시 명사가 되어 사용되었다 (dominica). 그래서 이 단어가 라틴계의 언어들에서 dimanche, domenica, domingo (“Sunday”) 라는 말들을 생성하게 만들었다.

[9] 본고는 안식일과 일요일 (주일)의 관계에 대한 페이퍼가 아니기에 본고의 목적과 지면의 한계 때문에 여기서는 언급을 생략한다.

[10] Ignatius of Antioch, Ad Magnesios 9, ed. P. Th. Camelot (SC 10; 2nd ed., Paris: Cerf. 1951), 102-103, recited from The Liturgy and Time, 14, n., 5.

[11] Pliny the Younger, Epistolarum lib. 10, 96; cited in W. Rordorf, Sabbat et Dimanche 79; cited in The Liturgy and Time, 14 (italics mine).

[12] Justin, Apologia I 67, 3 and 7, ed. L. Pautigny (Textes et Documents; Paris: Picard, 1904), 143, cited in Liturgy and Time, 14, n., 8.

[13] Didascalia Apostolorum 23, trans. R. Hugh Connolly, Didascalia Apostolorum (Oxford; Clarendon Press, 1929), 124, cited from The Liturgy and Time, 15, n., 9.

[14] 주의 날에 다른 세속적인 일을 중단하는 안식의 행위는, 이 날을 지키는 실천적 측면에서, 유대인들의 Sabbath와 그리스도인들의 Sunday 사이의 어떤 연속성 (continuity)을 암시한다. 비록 서로 다른 날로, 다른 방식으로 지키는 불연속성 (discontinuity) 또는 단절성 (disconnection)이 있을지라도, Sabbath의 정신 (mentality)이 Sunday에 반영되어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구약 율법과 신약의 복음과의 관계 안에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날의 지킴에 대한 이러한 실천의 방식 (연속성과 불연속성)은 후에 (325년) 로마에서 이방 종교의 태양숭배일과 그리스도인의 일요일 사이에서도 발견된다 (본고의 각주 17번을 참고하라).

[15] Bibliographia hagiographica Latiana, no. 7492; text cited in Rordorf, Sabbat et Dimanche, 109; recited from The Liturgy and Time, 15, n., 10.

[16] Didascalia Apostolorum cited from The Liturgy and Time, 15, n., 11.

[17] Constantine’s syncretism에 관하여, H. Stern, Le calendrier de 354 (Institut Francais de Beyrouth, Bibliotheque archeologique et historique 55; Paris: Geuther, 1953), cited from The Liturgy and Time, 15, n., 12를 보라.

[18] Codex Jusinianus lib. 3, tit. 12, 2; ed. Kruger (Berlin: Weidmann, 1877[1926]), 127; Eusebius, Vita Constantini 4, 18 (PG 20:1165), cited in Rordorf, ibid., 111-113; recited from The Liturgy and Time, 15, n., 13.

[19] J. Gaudemet, “La législation religieuse de Constantin,“ in Revue d’histoire de l’Eglise en France 33 (1947), 43-47; cited The Liturgy and Time, 16, n., 14

[20] The Liturgy and Time, 16.

[21] 예컨데, the Councils of Agade (506), can. 47, ed. C. Munier (CCL 148:212), and Orleans (511), can. 26, ed. C. de Clercq (CCL 148A:11): cited from The Liturgy and Time, 16, n., 15.

[22] Abu’l Barakat, La lampe des tenebres, in W. Riedel, Die Kirchenrechtsquellen des Patriarchats Alexandrien (Leipzig : A. Deichert, 1900), 44; cited from The Liturgy and Time, 16, n., 16.

[23] St. Athanasius, De sabbato et circumcision 5 (PG 28:140), cited from The Liturgy and Time 16, n., 17.

[24] Didache 8:1, 2 in Huub van de Sandt and David Flusser, The Didache: Its Jewish Sources and its Place in Early Judaism and Christianity (Fortress, Minneapolis, 2002), 12.

[25] A. G. Martimort, The Liturgy and Time, 26.

[26] Dom Gregory Dix, The Shape of the Liturgy (Norfolk: Biddles Ltd., 2007), 342.

[27] Socrates, Historia Ecclesiastica 5, 22 (PG 67: 636-637), cited from The Liturgy and Time, 26.

[28] St. Epiphanius, De fide 22, ed. K. Holl (GCS 37), 522; see A. Jaubert, La date de la cène (Etudes bibliques; Paris: Gabalda, 1957), 88, recited from The Liturgy and Time, 26, n., 47.

[29] 우리는 이 6대 절기들에 대해서는 본고의 마지막 섹션인 “III. 교회력의 구성”에서 다룰 것이다.

[30] Laurence Hull Stookey, Calendar: Christ’s Time for the Church (Nashville: Abingdon Press, 1996), 29-33을 보라.

[31] Michael Kunzler, The Church’s Liturgy (New York: Continuum, 2001), 1-166를 보라.

[32] 현대교회는 예배의 순서를 지나치게 편의성과 작위적으로 만들고 있다. 우리는 카타바시스와 아나바시스의 관점으로 예배순서와 예배 요소를 점검하고 인식함으로 우리의 예배가 더욱 의미 있는 예배형태가 되기를 소망한다.

[33] 그리스도 중심의 두 개의 사이클 안에 있는 6개 절기가 끝나면, Ordinary Time of Growth이 이어진다. 이 시즌은 “평상절” 또는 “성장절”로 부를 수 있다. 그리고 이 시기의 교회력의 사용 색깔은 녹색 (Green)이기 “녹색절”이라고도 부를 수 있다. 그러나 평상절은 교회력의 명칭은 아니다.

[34] 종종 예배력 (the church calendar)과 일반력 (the civil calendar)이 일치했기에, 희랍 정교회에서는 9월 1일이 한 해의 시작이었으며, 1751년 이전에 잉글랜드에서는 3월 25일이 한 해의 시작이었다. 왜냐하면 이 날이 수태고지 (the Annunciation)의 날이며, 이 날이 예수님이 잉태된 날로 보았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서 12월 25일이 예배력의 시작의 날이 되었었다. 그러나 현대 교회력은 일반력의 시작과 달리 대강절을 한 해의 교회력의 시작 시점으로 고려한다: Laurence Hull Stookey, Calendar: Christ’s Time for the Church (Nashville: Abingdon Press, 1996), 180, n., 1을 보라. 그리고 대표적으로, The Revised Common Lectionary (1992)은 대강절의 교회력의 시작이라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35] The Study of Liturgy, 468을 보라.

[36] ‘Chronography of 354’는 ‘Calendar of 354’로도 불리어지는 이 사본은 Valentius라는 부유한 한 로마 그리스도인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http://en.wikipedia.org/wiki/Chronography_of_354 (retrieved on 6-25-2010).

[37] 성탄절과 주현절의 상관관계에 대한 역사에 관하여 Michael Kunzler, The Church’s Liturgy (New York: Continuum, 2001), 418-421을 보라.

[38] Thomas J. Talley, The Origins of the Liturgical Year (Collegeville, Minnesota: The Liturgical Press, 1986), 88; The Study of Liturgy, 466; The Liturgy and Time, 78.

[39] Peter G. Cobb, “I The History of the Christian Year,” in The Study of Liturgy, 446-448.

[40] Ibid.

[41] Ibid.

[42] Ibid.

[43] The Liturgy and Time, 79.

[44] Egeria 또는 Aetheria 는 Gallaeci/Gallic 여인으로서, 그녀는 약 381-384년에 예루살렘을 순례자로 방문하여 당시 예루살렘의 예배적 상황과 문화에 대한 기록을 남겼고 오늘까지 전한다.

[45] Peter G. Cobb, “I The History of the Christian Year” in The Study of Liturgy, 466-468을 보라.

[46] The Liturgy and Time, 79.

[47] Peter G. Cobb, “I The History of the Christian Year” in The Study of Liturgy, 467.

[48] Ibid.

[49] Ibid.

[50] Ibid.

[51] Ibid.

[52] The Liturgy and Time, 78

[53] Coptic sources in fact suggest the fast was originally related, not to the Pascha but to Epiphany. See T. J. Talley, Origins, 189ff.

[54] Peter G. Cobb, 465를 보라.

[55] Holy Week (Latin: Hebdomas Sancta or Hebdomas Maior, “Greater Week”; Greek: Megale Hebdomas)은 사순절 마지막 한주간과 부활절 직전 한 주간을 의미한다. 이 한 주간의 매일은 각각의 명칭이 있다. 그들은 Palm Sunday (종려주일), Holy Monday, Holy Tuesday, Holy Wednesday, Holy Thursday (또는 Maundy Thursday), Good Friday, Holy Saturday이다. 특히, Maundy Thursday, Good Friday, Holy Saturday를 포함하는 3일을 “Easter Triduum” (또는 “paschal triduum,” “sacred triduum,” “holy triduum”)이라 부른다.

[56] Peter G. Cobb, 465.

[57] ‘Cheesefare Week’ 또는 Maslenitsa (Russian: Ма́сленица, Ukrainian: Ма́сляниця, Belarusian: Ма́сьленіца)는 Butter Week, Pancake week, or Cheesefare Week로도 알려져 있다. 이 주간은 사순절 (the Great Fast)의 일곱 번째 주간인 마지막 한 주간을 의미한다. Maslenitsa 는 서방교회의 Carnival에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http://en.wikipedia.org/wiki/Cheesefare_Week (retrieved on 6-26-2010).

[58] Didascalia Apostolorum (“Teaching of the Apostles”)는 예루살렘 공의회 (행 15:1-29)에서 사도들에 의해 작성된 것으로 주장하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것이 실제로는 3세기의 작품이라는 것에 동의한다.

[59] Ch. 21. The Text in Didascalia et Constitutiones Apostolorum, ed. F. X. Funk, I (Paderborn: Schöningh, 1905), 288; trans. R. Hugh Connolly, Didascalia Apostolorum (Oxford: Clarendon Press, 1929), 189, recited from The Liturgy and Time, 36, n., 7.

[60] The Liturgy and Time, 36.

[61] St. Ambrose, Ep. 23, 13 (PL 16:1030), recited from The Liturgy and Time, 47, n., 29.

[62] St. Ambrose, Ep, 54, 14 (PL 33: 215). Cited in Cantalamessa, ibid. 192; recited from The Liturgy and Time, 47, n., 30.

[63] Egeria’s Travels, trans. John Wilkinson (London: SPCK, 1971), 125ff. and passim. Cited by Cantalamessa, ibid., 170-177; cited from The Liturgy and Time, 47, n. 32.

[64] The Liturgy and Time, 60.

[65] Peter G. Cobb, “I. The History of the Christian Year,” 463.

[66] 한 때에는 이 날을 새로운 절기 (season)의 시작으로 보아서 “성령 강림절 주간 (“Whitsuntide”; 성령강림주일부터 1주일 또는 그 주간의 처음 3일) 또는 “성령강림절” (“the Season of Pentecost”)로 이해된 적이 있으나, 지금은 성령강림일 (the Day of Pentecost;) 또는 성령강림주일(Whitsunday)로 지킨다. 이러한 이해는 초기 교회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그 해의 부활절 축제의 절기를 닫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이 용어를 “성령강림절”로 부르는 것에 더 익숙해져 있다. 아마 대강절, 성탄절, 주현절, 부활절, 사순절 등 교회의 절기가 “~절” (節)로 부르는 것에 익숙해져 이 날에 대해 습관적으로 교회력의 명칭으로 사용해온 것 같다. 성령강림절이라고 부르기보다 성령강림일 또는 성령강림주일로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한 명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언어가 사회적 습관 (언어의 사회성)에 따라 용어의 전환이 일어난다고 고려한다면, 그것은 일반명사화 된 표현으로서 성령강림절이라고 부를지라도 그 의미하는 바가 성령님이 강림하신 주일로서 날의 개념으로 이해하면 무방할 것이다.

[67] Laurence Hull Stookey, Calendar: Christ’s Time for the Church, 67.

[68] 본고의 각주 33번을 참고하라.

[69] A. G. Martimort, The Liturgy and Time, 97-107를 보라.

[70] 이점에서 ‘삼위일체주일’ (Trinity Sunday)도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행위와 무관한 절기이다. 이것은 조직신학적인 개념에 기초한 삼위일체론적 신론을 강조하는 신학이 반영된 ‘절기’이다. 다시 말해서 ‘구속 사건’ (the salvific event)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구속자의 인격’ (the triune divine person)에 바탕을 둔 것이라는 점에서 차별성이 있다.

[71] 예를 들면, 승천일 (Ascension)이 목요일이지만, 이어지는 다음 주일이 부활절 일곱 번째 주일로서 승천기념주일로 지키는 것이 주일 중심의 예배력이라고 할 수 있다.

[72] 예를 들면, 이미 언급한대로 ‘삼위일체 주일’은 교리적 강조의 의미 안에서 형성된 것이며, 그리스도의 사역에 바탕을 둔 것은 아니다. 굳이 이 날을 지킨다면 지킬 수도 있겠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교회력은 아니다 (참고: 본고의 각주 70번을 보라). 그리고 “평상절” (Ordinary Time of Growth)도 그리스도 중심의 구속 사역에 바탕을 둔 절기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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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는 위험한 기회


"위기(危機)"는 "위험한 기회(機會)"일까?

위기(危機/ 위캐할 위, 클 기) = 위험(危險. 위태할 위, 험할 험) + 기회(機會. 틀 기, 모일 회)


위기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위기라는 단어는 그리스어 동사 “크리노(krino)“에서 파생되었는데, “나는 판단하고 선택한다”를 의미한다.
이 개념은 서로 다른 관점과 기회를 마주해야 하는 선택이나 순간을 암시한다(오니스, 1900).
위기는 사람과 환경 사이의 자연적인 항상성 과정으로 간주할 수 있다.
“저울의 무게를 바꾸거나” 또는 틀을 다시 연결하여 균형을 이룬다.

κρίνω 스트롱번호 2919

1. 나누다.  2. 판단하다. 3. 결정하다
발음 [ krinō ]
관련 성경  /  고발하다(마5:40, 고전6:6), 비판하다(마7:1), 심판하다(마19:28, 눅19:22, 요3:17, 계18:8), 정죄받다(눅6:37), 판단하다(요8:16, 롬2:1), 다스리다(눅22:30), 심판받다(요3:18, 벧전4:6, 계20:12), 재판하다(요18:31), 결의하다(행3:13, 21:25), 작정하다(행20:16, 고전2:2, 딛3:12), 심문받다(행23:6, 24:21, 25:20), 판단받다(롬3:4, 고전11:32), 정죄하다(롬14:22), 결심하다(고후2:1).

위기는 기회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위기는 자신에게 새로운 형태의 적응과 변화를 만들어 낼 가능성을 제공할 수 있다.

사람이나 가족의 기능을 구별하는 것은 위기가 없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대처해 왔는가 하는 점이다.
또한, 이러한 위기가 어떻게 개인과 가족의 성장과 발전에 기여했는지 살펴볼 수 있다.
또한, 본성 때문에 위기 발생 시 자신에게 너무 과하게 작용하여 해를 끼칠 수 있는 사건들도 있다.

인간 위기의 유형

자신의 삶 전반에 걸쳐, 각각의 사람은 자신이 다른 방식으로 분류할 수 있는 일련의 비판적인 순간에 직면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이런 중요한 순간을 두 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 규범적 (예측): 정상적인 생활주기(life cycle)와 예측(결혼, 직업이나 집을 구하는 것, 은퇴 등)
  • 비규범적 (비예측): 하나 이상의 사건에 의해 야기되는 상황, 예측할 수 없는, 우발적인, 예기치 못한 위기를 말한다. 이런 사건은 갑자기 발생하기 때문에 즉각적인 대응이 필요하다.

그래서, 사람이나 가족의 위기는 예측할 수도, 예측할 수 없을 수도 있지만 모두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들이 일으킨 문제는 해결하기는 매우 어렵다.

정신건강에 관한 한, 어떤 위기의 결과는 같지만, 개인적인 경험은 다양하다.

무엇이 위기를 결정하는가?

우리는 자신만의 세계 속에서 개인적인 위기를 겪는 고립된 사람이 아니다. 이러한 위기의 진화를 결정하는 요소를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 위기를 촉발한 사건의 심각성
  • 가족 자원: 유연한 역할, 사회경제 및 기능적 특성, 보살핌, 정서적 지원…
  • 사회적 지지: 가족, 친구, 공동체 또는 어떤 해로운 영향을 최소화하도록 도울 수 있는 다른 사람.

이러한 위기를 다른 초점을 사용하여 설명하려는 다양한 이론이 있다. 이 이론에는 생명 사건 이론, 인지이론, 수습기제(Coping Mechanisms)의 이론 그리고 과거 사건 재활성화 이론이 있다.

노박(1978, 슬라이케 인용, 1996)은 위기를 초래할 수 있는 사건의 확률은 여러 가지 요인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시사했다. 여기에는 위기가 발생하는 순간, 강도, 지속시간 그리고 개인의 발전을 방해하는 정도가 포함된다.

인간: 회복력 있는 종

인간은 태초부터 끊임없이 계속되는 전쟁과 거대한 위기, 재난 및 폭력으로부터 끊임없이 회복하려고 노력해왔다. 위기는 흔적을 남기고 대대로 전해진다.

위기는 우리의 마음과 감정에 지속해서 영향을 미친다.

왜 몇몇 사람은 위기에 심각한 영향을 받지 않고 어떤 사람은 위기를 경험할까? 그 이유는 정신 건강에서 가장 큰 문제 중 하나인 만성과 관련이 있다. 즉, 누군가의 삶에서 가장 중대한 사건의 반복은 물론, 사건을 다룰 말한 자원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모든 위기는 삶의 교훈이다

위기를 경험 한 모든 사람은 자신의 삶에 대한 교훈을 얻는다. 교훈은 의식적으로 처리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사람의 ‘각본’에 일부가 된다.

카플란은 위기 발생 후 처음 3일 동안에 관하여 글로 썼다. 카플란은 위기에 대한 설명과 함께 어떻게 조합되는지와 위기가 인지적 기능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조사했다. 다이레그로브도 이 주제에 대해 글을 썼다. 그는 이러한 요소의 조합이 다른 사람의 적응기제 변화를 설명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우리는 이러한 결정적인 순간의 인상을 어떻게 흡수하는지가 마침내 미래의 삶의 “각본”에 투영된다. 우리가 느끼는 것과 사건이 의미하는 것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나중에 새롭고 더 긍정적인 교훈으로 인상을 바꿀 수 있다.

이러한 위기 이후에 사람의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되는 여러 가지 방법은 일반화된 부정적 각본을 만드는 것을 어렵게 한다. 어떤 주어진 위기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판단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누군가 위기에 처했을 때, 우리는 그들을 희생자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위기의 ‘희생자’는 사건을 처리하고 그들의 삶을 계속 이어가야 한다. 희생자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는 위대한 생존자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위기"란 예기치 않은 상황에서 발생하는 어려움과 불안정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위기는 개인, 사회, 국가의 모든 수준에서 언제든지 닥칠 수 있으며, 인간은 이를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흔히 “위기는 위험한 기회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위기가 단지 위험하고 부정적인 상황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새로운 기회가 숨겨져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오늘은 위기의 본질과 그 속에 숨겨진 기회의 의미를 살펴보고, 이를 어떻게 극복하고 기회로 전환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한다.

첫째, 위기는 기존의 방식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중요한 순간이 될 수 있다.

위기 상황에 처했을 때, 우리는 평소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예를 들어, 경제적 위기가 닥쳤을 때 사람들은 자신들의 소비 습관이나 재정 관리 방식을 재고하게 된다.
이는 단지 손실을 줄이는 것을 넘어 새로운 전략을 수립하고 더 나은 방법을 모색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는 더 성숙한 사고를 하게 되고, 앞으로의 선택에 있어서 더 현명해질 수 있다.

둘째, 위기는 변화의 촉매제가 된다.

많은 혁신과 발전은 위기 속에서 이루어진다. 기술 발전의 역사만 보더라도, 전쟁이나 경제적 불황과 같은 위기 상황에서 새로운 기술과 아이디어가 탄생한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2차 세계대전 동안 급격히 발전한 항공기 기술과 컴퓨터 과학은 평화 시기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와 마찬가지로, 위기는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며, 이는 개인적이든 사회적이든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

셋째, 위기는 인내와 용기를 시험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위기 상황에서는 쉽게 좌절하거나 포기하기 쉽다. 하지만 이를 극복해 내는 과정에서 우리는 더욱 강인해지고, 그로 인해 더 큰 성취를 이루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성공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에서 큰 위기를 맞닥뜨렸을 때 이를 어떻게 극복했느냐가 성공의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말한다.

위기 속에서 자신을 되돌아보고, 새로운 도전을 받아들여 나아가는 용기는 결국 그 사람을 더 나은 곳으로 이끌게 된다.

물론, 위기가 언제나 기회로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기 위해서는 적절한 대처 능력과 긍정적인 사고방식이 필요하다. 무작정 위기를 지나치게 낙관적으로만 바라본다면 오히려 더 큰 실패를 초래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위기를 냉철하게 분석하고, 그 상황 속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위기는 위험한 기회다”라는 말은 단순한 위로의 말이 아니라 현실적인 조언이라는 것이다. 위기는 언제나 위험과 기회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위험을 어떻게 다루고, 그 속에서 기회를 발견하느냐이다.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은 결국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으며, 이를 통해 우리는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나에게 닥쳐오고 있는 위기를 어떻게 관리하고 대처해 나아갈 것인가 고민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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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10가지 방법


기회는 ‘위기의 탈’을 쓰고 찾아오고, 위기도 ‘기회의 탈’을 쓰고 찾아온다. 기회와 위기는 손등과 손바닥 차이다. 언제든 기회가 위기가 될 수 있고, 위기가 기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성공은 수없이 반복되고 쌓여온 시행착오의 산물이다.
인생은 긴 여행이다. 가다보면 비도 만나도 눈도 만나고 벼락이 내리치는 길을 아슬아슬하게 걸어가기도 한다.
수많은 위기와 맞닥트리고 극복하며 나아가야 한다. 이렇게 드라마틱한 순간이 있어야 인생에 묘미가 있다. 너무 평탄하면 무미건조하고 재미가 없다. 당시에는 힘들어도 지나고나면 내 삶에 피가 되고 살이 된다.
지금 힘들고 고통스럽더라도 잘 견디고 이겨내면 분명 좋은 날이 온다. 그러니 힘들더라도 절대 포기하지 말고, 희망을 잃지 말고 용기를 내자. 위기는 얼마든지 기회로 바꿀 수 있다. 짧은 인생, 후회없이 화끈하게 살아보자!

1.누구든 원망하지 마라
사람들은 회피 본능이 있다. 일이 잘못된 탓을 다른 사람에게 돌린다. 그러면서 미워하고 원망한다. 그전에 했던 말 한 마디, 행동 하나하나까지 끄집어 낸다. 한 번 원망하기 시작한면 끝이 없다. 다른 사람을 탓하고 원망한다고 해서 손해가 만회되는 것도 아니다. 문제의 근원이 당사자인 나한테 있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더 현명하다.

2.자책에 빠져있지 마라
인간은 시련 앞에 맥없이 무너지는 약한 존재다. 살다보면 내 뜻대로 안 될 때가 있다. 위기는 또 다른 기회이고, 실수는 큰 자산이다. 후회와 반성은 뼈져리게 하되 짧은 것이 좋다. 그래야 다시 시작할 수 있고, 다시 일어설 수 있다. 자책을 오래하면 깊은 절망의 수렁에 빠지고, 영영 나오지 못할 수도 있다.


3.문제의 원인을 분석하라
원인없는 결과는 없다. 실패한 이유와 원인을 철저하게 따지고 분석해야 한다. 그래야만 어디서 잘못됐는지 찾아낼 수 있다. 대강대강 대충대충 넘기면 같은 문제가 반복될 수 있다.

4.현실을 냉정하게 받아들여라
지금 닥친 상황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다. 자꾸 과거로 돌아가서 생각한다고 현실이 바뀌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현실을 냉정하게 인정하고 다음을 준비하는 것이다.

5.죽겠다는 소리를 내지 마라
위기 상황이 되면 모든 게 어렵고 힘들다. 이럴 때 한숨만 쉬고 죽는 소리만 하면 상황은 더 나빠지게 된다. 처지를 비관하고 한탄만 하다가는 더 많은 것을 잃는다.
일시적인 동정은 받을 수 있어도 사람들의 믿음과 신뢰가 깨진다. 상황은 나쁠지언정 그것을 밖으로 자꾸 표출하지 말고 의연하게 대처하자.



6.조급하면 실수한다는 걸 알아라
마음이 급하면 실수하기 마련이다. 한가지 일에 집중하기 어렵고 이 일을 하다가도 저 일이 생각나고 걱정된다. 생각이 방황하면서 이 일과 저 일로 옮겨다닌다. 그러면 어떤 일도 제대로 할 수 없다.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되기는 커녕 오히려 집중을 방해하고 계획을 세우기가 힘들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을 새겨보자.

7.내가 처한 상황을 파악하라
같은 상황이 반복되지 않으려면 자신을 바로 알아야 한다. 내가 이루고 싶은 목표는 무엇인가? 그것을 위해 나는 무엇을 했는가? 그 과정에서 실수나 문제는 없었는가? 또 내 능력은 어느 정도인가? 등등. 스스로에게 ‘나는 누구인가?’ 질문을 던지고 대답해 보자. 그냥 생각만 하지 말고 메모를 하면 지금 내 위치 파악을 하는데 도움이 된다.

8.포기하지 말고 용기를 내라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감을 잃으면 안 된다. 그것마저 없으면 앞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한 번 포기하면 절대 일어설 수 없다. 힘들 때일수록 더 용기를 내야 한다. 인생이란 용기에 따라서 펴질 수도 움츠려 들 수도 있다. 용기만 있다면 아무리 거센 폭풍이 밀려와도 헤쳐나갈 수 있다. 그러니 절대 포기하지 말고 희망을 잃지 말 것이며 더 용기를 내자.


9.책 속에서 성공사례를 찾아라
뻘 속에 진주가 묻혀 있다면, 책 속에는 길이 있다. 먼저 실패를 극복하고 성공한 사례를 찾아보자. 성공사례만 봐서는 큰 도움이 안 된다. 나와는 환경도 다르고 모든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실패를 연구하는게 더 건설적이다. 실패는 하나의 과정일 뿐 실패가 아니기 때문이다. 실패를 연구해야 나에게서 부족한 점을 미리 찾아 보완할 수도 있다.

10.성공한 모습을 상상하고 행동하라
모든 계획의 최종 목표는 ‘성공’이다. 물론 성공을 위해서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시련과 고난이 닥치면 의연하게 헤쳐나가야 한다. 그러면 어느 순간 목표에 다가서게 되고 그토록 원하던 꿈도 이루어지게 된다. 그 모습만 생각해도 저절로 힘이 날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목표를 바로 앞에 두고 포기한다. 꿈을 이루는 길은 오직 하나 그것이 ‘현실’이 되는 것임을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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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를 기회로, 실패를 성공으로 만드는 4가지 비결

과거에 겪고 보지 못한 위기이다. 팬데믹(세계적 유행병)은 언제 끝날 줄 모르고 경제는 침체(recession)를 넘어 공황(depression)으로 갈 것이라는 암담한 소식이 들린다. 더 큰 문제는 이런 글로벌 위기가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전염병과 잘 싸우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소비가 죽은 탓에 장사가 하나도 되지 않고 있다. 매출이 반토막 난 자영업자들이 즐비하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코로나로 인해 글로벌 공급망이 마비되면서 대기업 수출길이 막히고 더불어 대기업에 납품하는 기업들은 고사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기업이 무너지면 직장이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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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느 때보다 ‘위기’와 ‘실패’라는 단어가 글 안에, 입 속에 넘쳐나고 있다. 이럴 때 개인은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까? 사람마다 상황이 다르고 맥락이 다르기에 정답은 없다. 그렇다고 당황한 채 아무런 계획 없이 멍하니 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 위기를 기회로, 실패를 성공으로 바꿀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나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위기 때마다 책에서 답을 찾으려고 노력해 왔다. 모두에게 적용된다고 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나에게는 매우 큰 도움이 되었다. 위기와 실패 속에서 꼭 읽었으면 하는 책 한 권을 소개하고자 한다. 바로 도리스 컨스 굿윈의 <혼돈의 시대 리더의 탄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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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의 시대 리더의 탄생>는 미국의 4명의 위대한 대통령(링컨, 시어도어 루스벨트, 프랭클린 루스벨트, 린든 존슨) 이야기가 나온다. 퓰리처상과 링컨상 등을 수상한 도리스 컨스 굿윈 전 하버드 대학교수의 작품 <혼돈의 시대 리더의 탄생>은 리더십을 50년 가까이 연구한 대가의 책답게 4명의 대통령의 삶이 놀라운 통찰과 더불어 서사스럽게 펼쳐진다. 

<혼돈의 시대 리더의 탄생>은 3부로 되어 있는데 1부는 4명의 대통령의 야망과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어떻게 준비했는지, 3부는 대통령 재임 시 역사적 사건을 어떠한 리더십으로 해결했는지가 나온다. 

지금 소개할 내용은 2부이다. 2부는 4명의 대통령의 위기, 실패, 역경, 고난 등을 어떻게 극복했는지가 진지하게 서술되어 있다. 최악의 상황을 최선으로 바꾸는 4명의 대통령의 모습을 통해 현재의 위기와 실패를 기회와 성공으로 바꿀 수 있는 힌트를 얻었으면 좋겠다.


 1. 자살 직전까지 간 링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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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듯한 자기계발로 극복하다.

링컨은 대통령이 되기 전 자신의 정치 생명을 걸어 추진한 일리노이주 공공사업이 급작한 불황으로 완전히 망해버리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한다. 더불어 결혼 직전까지 간 연인과 파혼까지 하게 된다. 자신의 꿈과 삶이 거의 동시에 무너지자 링컨은 심한 우울증에 시달린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숨이 붙어 있는 가장 불행한 사람입니다. 지금 내 마음이 모든 인간 가족에게 균등하게 분배된다면 이 땅에서 유쾌한 표정을 지을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겁니다. 내가 앞으로 지금보다 더 나아질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영원히 낫지 못할 거라는 불길한 예감마저 듭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계속 사는 건 불가능합니다. 죽지 않으면 낫겠지요.” - <혼돈의 시대 리더의 탄생> p. 185~186

링컨의 친구들은 링컨이 자살할까 봐 걱정해 링컨의 방에서 칼과 면도칼 심지어 가위까지 없앴다고 한다.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대통령 1위를 자랑하는 그가 자살을 생각했다니. 그만큼 당시의 위기는 링컨에게 절체절명이었다. 링컨은 이 상황을 어떻게 극복했을까?

링컨은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자기 자신을 0에서부터 다시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5년 동안 미친 듯한 자기계발을 수행한다. 독서하고 공부하고 경험하기를 쉬지 않았다. 그는 40에 가까운 나이였지만 온 집중을 다해 학습했고 다시 시작한 변호사의 일도 예전보다 더 열정적으로 수행했다.

“순회 재판을 통해 일반적인 변호사 업무와 한계를 넘어서는 학문을 공부할 기회를 얻은 것이다. 그는 철학과 천문학, 자연과학과 정치경제, 역사와 문학, 사학과 연극을 공부했다. 수학적 정리와 증명을 학습하는 데도 힘썼다. 그는 피곤해 죽을 지경까지 수학을 파고들었고 마침내 유클리드 기아학을 거의 완전히 익혔다고 자랑스레 주장할 수 있는 수준까지 올라왔다.” - <혼돈의 시대 리더의 탄생> p. 196~197

자실 직전까지 갔던 링컨은 자신의 온 열정을 다한 자기계발을 통해 우울증을 극복할 수 있었고 변호사로서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떠났던 정계에 다시 진출할 수 있었다. 그의 자기계발 습관은 그가 명성이 높아지고 대통령이 됐을 때조차 지속되어 결국 노예제도를 폐지하는 역사적 위업을 달성하는 초석이 되었다. 

    195page<혼돈의 시대 리더의 탄생> 195page

2. 하루에 어머니와 아내를 동시에 잃은 시어도어 루스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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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는 새로운 도전으로 재도약의 길을 열다.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그날의 아픔을 제대로 이해하는 이가 있을까? 49세이던 어머니가 장티푸스로 세상을 떠나고 그로부터 12시간이 지나지 않아 사랑하는 아내마저 세상을 떠났다. 하루에 어머니와 아내가 동시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시어도어는 그날 일기에 “빛이 내 삶에서 사라졌다. 이제부터 내 삶에는 기쁨도 슬픔도 없다.”라고 썼다고 한다.

사악한 운명으로 극심한 충격을 받은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어떻게 이 위기를 극복하였을까? 그는 일단 장소를 옮겼다. 어려서부터 병약해 육체적인 활동보다 독서에 치중했던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엘리트 출신의 동부의 교양인이었다. 하지만 그는 서부의 카우보이가 되었다. 목장에서 말을 몰고 사냥을 하고 거친 카우보이들과 동료애를 나누었다. 그는 인생 최악의 상황을 새로운 도전으로 극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심지가 잘린 초도 아니었고, 정치를 완전히 포기하지도 않았다. 서부로 멀찌감치 물러나 자연 세계에서 부드러운 향유를 탐닉한 것이 아니라 불굴의 도전을 감행하며 자신을 시험하고 있었다. 그런 시험을 통해 그는 상심한 마음과 두려움을 마주하며 자신에 대한 확신을 되찾고 진정한 빛과 인도자와 리더가 되는 미래에 대한 자신감을 어떻게든 되살려낼 수 있었다.” - <혼돈의 시대 리더의 탄생> p. 234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훗날 끊임없이 새로운 도전을 했던 당시를 ‘교육적으로 가장 중요한 자산’이라고 말했다. 절망적인 위기가 그에게 결국 인생의 자산이 된 것이다. 2년 동안의 생활은 루스벨트를 교양있는 동부인과 불굴의 서부인이 결합된 존재로 부각시켜 주었고 이후 그는 그 이미지에 맞게 전쟁에서는 불굴의 용기로 앞장선 장군의 모습으로 영웅이 되었고 통치에서는 여러 이해관계를 잘 융합시킨 위대한 대통령이 되었다.

    234page<혼돈의 시대 리더의 탄생> 234page

3. 갑자기 하반신 마비가 온 프랭클린 루스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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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빌딩에 올인하다.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썰매타기, 스케이팅, 낚시 등을 즐기는 건장한 청년이었다. 하지만 그는 척수성 소아마비 증세로 갑자기 하반신 마비가 걸리게 된다. 지금도 그렇지만 우리가 바라는 리더의 모습은 무엇인가? 올곧은 자세로 강인하고 정력적인 모습이 아니던가. 하지만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평생 휠체어에 앉아 다른 사람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정치 생명은 끝난 듯했다.

하지만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하반신이 마비되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특유의 낙천적인 기질로 자신의 위기를 기회로 바꾸기로 했다. 타인에게 의지해야 한다면 진짜 의지할 수 있는 정치적 팀을 결성한 것이다. 

“프랭클린은 요양하며 회복하던 7년 동안 충성스런 개인적인 팀을 조직했다. 엘리너 루스벨트, 루이스 하우, 마거리트 미시 르핸드가 포함된 미정통적인 팀은 부분의 합을 넘어, 루스벨트 몸의 일부가 됐다. 그들은 루스벨트의 마비로 인한 위축을 최소화하는 역할을 해냈다. 에이브러험 링컨과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중대한 시련을 겪은 후에 어떻게 기운을 되찾고 다른 사람으로 태어났는지에 대해 이미 앞에서 보았다. 스스로 시련을 이겨낸 그들과 달리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척수성 소아마비라는 너무도 심각한 상황에 처했던 까닭에 체력과 정신력을 회복하려고 싸우면서도 타인에게 전적으로 의존해야 했다.” - <혼돈의 시대 리더의 탄생> p. 294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자신의 멤버들이 자신들의 목적을 이룰 수 있도록 자신의 온 힘을 다했다. 동시에 그들은 혼자 설 수 없었던 루스벨트를 일으켜 세워 역사상 처음으로 휠체어에 탄 대통령이 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이렇게 다른 사람의 도움을 잘 받는 능력이 있었던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당시 미국 최악의 위기였던 대공황에서도 잘 발휘도 초당파적인 협력을 이끌어 내어 결국 공황을 벗어날 수 있었다. 

    310page<혼돈의 시대 리더의 탄생> 310page

4. 심장마비로 모든 것을 잃은 린든 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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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저한 자기반성으로 재기에 성공하다.

린든 존슨은 어떤 정치인들보다도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최고 수준의 근면성, 조직을 이해하는 능력, 목적 지향적인 태도, 식을 줄 모르는 야망은 린든 존슨을 어디에서나 성공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그에게도 시련이 닥쳐온다. 

46세 나이로 미국 상원 역사상 최연소 다수당 대표 등극해 정점을 달리고 있는 그때에 심장마비로 쓰러지게 된다. 그리고 모든 것을 잃을 처지에 놓이게 된다.

“존슨은 깊은 우울증에 빠졌고 심지어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며 한탄하는 듯했다. 자신이 올랐던 언덕에서 너무도 급격히 떨어진 탓에 낙담의 깊이가 더한 것은 당연했다. 그가 소중히 여기던 모든 것, 예컨대 현재의 성취와 미래의 야망이 모두 위태로워졌다. 존슨의 상태는 심장마비 이후에 흔히 나타나는 우울증의 정도와 확연히 달랐다. 조지리디의 표현을 빌리면 ‘그는 그냥 누워 있을 뿐이었다. 전혀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우리 곁에 존슨을 대신한 것이 있지만 그저 기계 덩어리인 것 같았다.” - <혼돈의 시대 리더의 탄생> p. 353

하지만 린든 존슨은 자신을 여전히 기다리는 시민들의 열렬한 반응을 본 후 생각을 고쳐 먹기 시작한다. 병상에 있으면서 그는 자신의 과거를 철저히 반성하기 시작했다. 린든 존슨에게는 2가지 큰 문제가 있었다. 첫째는 자신의 몸을 너무 혹사했다. 휴식은 없었고 술과 커피를 달고 살았다. 갑자기 주어진 휴식으로 릴랙스 할 수 있었고 식습관을 변화시켰다. 그리고 자신을 너무 몰아세우지 않기로 한다. 둘째는 너무 목표지향적이다 보니 주변인들을 다치게 했다. 사람보다 목표가 먼저였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떨어져 나갔다. 린든 존슨 이런 자신의 비인격적인 모습을 철저히 반성하게 된다.

철저한 자기반성으로 환골탈태한 린든 존슨은 그 후 매우 진보적인 의제를 주도했으며 결국 시민권을 신장하는 역사적 대업을 이루게 된다.

    355page<혼돈의 시대 리더의 탄생> 355page

퓰리쳐상 수상 작가의 책이라 원서는 너무나 좋은 영어공부 자료

위기와 실패가 우리를 엄습해 올 때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4명의 대통령은 결국 위기를 기회로, 실패를 성공으로 만들었다.

우울증에 자살까지 생각했던 링컨은 자신의 암흑기를 미친듯한 자기계발로 이겨냈다. 하루에 어머니와 아내를 잃은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끊임없는 새로운 도전으로 두려움을 이겨내고 불굴의 용기를 얻게 되었다. 갑자기 하반신 마비로 홀로 걸을 수조차 없게 된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다른 사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불리한 상황을 역이용해 비전을 함께 품을 팀을 결성했다. 함께 할 때 강해지는 법이다. 심장 마비로 모든 것을 잃을 뻔했던 린든 존슨은 위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하였고 뼈저린 반성으로 환골탈태해 그저 잘 나가는 리더에서 위대한 리더로 올라설 수 있었다.

나는 <혼돈의 시대 리더의 탄생>의 2부를 읽으면서 니체의 명언이 떠올랐다.

나를 죽이지 못한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

부디 당신의 위기가 기회가 되고 당신의 실패가 성공이 되기를 간절기 기원한다. 4명의 대통령의 삶이 당신의 역경 극복을 도와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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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ἄνθρωπος) = 위(ἀνά) + 얼굴(πρόσωπον)



인간(ἄνθρωπος) 욥기 7:1-10


  1. 에 사는 인생에게 힘든 노동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그의 이 품꾼의 과 같지 아니하겠느냐
  2. 종은 저녁 그늘을 몹시 바라고 품꾼은 그의 삯을 기다리나니
  3. 이와 같이 내가 여러 달째 고통을 받으니 고달픈 밤이 내게 작정되었구나
  4. 내가 누울 때면 말하기를 언제나 일어날까, 언제나 밤이 갈까 하며 새벽까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는구나
  5. 내 살에는 구더기와 흙 덩이가 의복처럼 입혀졌고 내 피부는 굳어졌다가 터지는구나
  6. 나의 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니 희망 없이 보내는구나
  7. 생명이 한낱 바람 같음을 생각하옵소서 나의 눈이 다시는 행복을 보지 못하리이다
  8. 나를 본 자의 눈이 다시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고 주의 눈이 나를 향하실지라도 내가 있지 아니하리이다
  9. 구름이 사라져 없어짐 같이 스올로 내려가는 자는 다시 올라오지 못할 것이오니
  10. 그는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겠고 자기 처소도 다시 그를 알지 못하리이다.

인간(ἄνθρωπος)”이라는 단어는 "위(ἀνά)"와 "얼굴(πρόσωπον)"의 합성어 입니다.
“얼굴을 들어 위를 바라보는 존재, 하늘을 바라보며 걷는 존재, 하나님을 향하여 서 있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얼굴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며 사는 존재입니다.
얼굴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지 않는 사람은, 사람이라는 허물만 입었을 뿐 사람이 아닙니다.
짐승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사는 것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께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죄이기 때문입니다.

안드로포스의 의미는 두 가지다.
위를 바라보는 존재.
희망을 가진 존재이다.

​사람은 위에 계신 하나님 창조주를 경외할 때만이 희망을 갖게 한다.
덴마크가 낳은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이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이라고 하였다.

​희망이란 어떤 일을 이루고자 하거나 그걸 얻고자하는 바람이며 좋은 일이 오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그래서 병든 사람은 건강을 희망하고 고시생은 합격을 희망하고 가난한 사람은 부자 되기를 희망한다.
모두다 행복하기를 기대한다.
행복이란 심신의 욕구가 충족된 상태이다.
누가 그리고 그 무엇이 우리 인간의 심신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가.
지식이 많은 사람은 번뇌도 많다.
재벌도 불편한 인간관계로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세계적 명성을 얻었던 배우 마릴린먼로도 남모르는 자기만의 번뇌를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으로도 마음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한다.
세상에 있는 것들은 바닷물과 같다 마실수록 갈증을 느낄 뿐이다.

​우리를 행복하게 하실 분이 계신다.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조건 없는 성부하나님의 사랑이 이 세상에 보내신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온갖 불행의 원인인 죄악을 십자가에서 흘린 피로써 대속하셨다.
거역할 수 없는 주님의 은혜만이 사람을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켜 준다.

​이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깨닫게 하신분이 성령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창조주이시며 인간의 영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길 잃은 양이다.
희망이 없다.

​자기를 공격하는 사자와 대항해서 싸울 능력도 없고 멀리 내다보지도 못하는 근시안을 가졌기에 홀로 살아가지 못한다.
그래서 양에게는 반드시 목자가 있어야 한다.
우리 인간은 유약한 양에 불과한 존재이다.
자기 힘의 한계상황에서 두려워 떤다.
이런 인생들이기에 위를 바라봐야 한다.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
미국 메사추세츠주 플리머슨에 있는 청교도 기념탑에는 믿음(Faith)에서 자유, 교육, 법, 도덕이 나온다고 새겨 놓았다.
US달라에는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In God we trust)고 새겨넣고 있다.
그들은 1620년 9월 7일 102명이 천주교도인 영국 메리여왕의 박해를 피해 신대륙에 정착하고 희망을 하나님께 둠으로 새역사를 시작했다.
하나님만이 흑암에서 광명을 얻게 하시는 희망의 근원이시다.

​예수 안에 있는 자만이 새로운 피조물이다.
그리스도인은 땅에서 살아도 하늘의 법을 따라 사는 천국시민이다.
하늘의 법은 생명의 법이요 또한 사랑의 법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사람의 생명을 사랑한다.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만이 안드로포스이다.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때에 희망의 해가 된다.

​우리 모두 희망찬 새해가 보장되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자.
하나님은 우리 안에 소원을 두시고 자기의 기쁘신 뜻대로 행하시고 이루신다.



골로새서 3:1-2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의 것을 생각하고 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뜻대로 사는 것 역시 결코 작은 죄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당신 한 분만 바라보며 살게 하신 이유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참된 소망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체스터턴(G. K. Chesterton)이라는 작가는 “용서란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며, 믿음이란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이며, 소망이란 도저히 가망이 없는 상황에서 희망을 갖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도무지 희망이 없는 상황에서 소망을 갖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을 떠난 죄악 된 세상으로부터 희망을 얻기는커녕 너무나 자주 실패와 좌절과 슬픔을 경험합니다.
마음에 채웠던 것들과 사람들로 인해 치유 받을 수 없을 것 같은 아픔과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소망이 아닌 절망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런 우리를 향해 “이제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위의 것들을 추구하십시오. 여러분은 지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지 말고 위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십시오.”라고 외쳤습니다(골 3:1-2).

​세상에 소망을 두지 말라고 외칩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을 위해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다 부활하신 주님처럼 하늘의 것을 추구하라고 외쳤습니다.
하나님을 추구하라고 외쳤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류의 유일하고 참된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하늘을 바라보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 한 분만 바라보며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목적대로 존재하고 있습니까?

세계 2차 대전 당시 한 유대인 랍비가 아들과 함께 집단 수용소(收容所)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1944년의 추운 어느 겨울 날, 그는 아들을 데리고 수용소 건물 한쪽 구석으로 갔습니다.
어렵게 구한 버터 한 조각을 진흙으로 만든 주발에 넣고 거기에 심지를 꽂은 뒤 불을 붙였습니다.
그리곤 아들에게 “사람은 밥을 먹지 않아도 3주간을 살 수 있다. 물을 마시지 않고도 3일을 버틸 수 있다. 그러나 소망이 없으면 단 하루도 살 수 없단다. 어둠을 밝히는 이 불이 곧 희망이다. 우리는 살아 계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가져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패트릭 휴(Patrick John Hughes)는 아들이 태어나면, 두 세 살 때부터 함께 뒷마당에서 미식축구나 야구를 해야겠다는 꿈을 가졌었습니다.

​아들이 크면 유명한 대학의 미식축구 팀에 들여보낼 꿈도 가졌었습니다.
그러나 아이가 태어났을 때, 담당의사는 아이가 절대 그렇게 되지 못할 것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선고를 내렸습니다.
실제로 아들(Patrick Henry Hughes)은 날 때부터 앞을 보지도, 걷지도 못했습니다.
부모는 절망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왜 굳이 우리여야 합니까?”라고 원망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아들의 몸을 정상적인 사람들과 같게 만들려는 시도를 포기했습니다.
인류의 유일하고 참된 소망이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는 부모의 기도 속에 어려서부터 음악에 대한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삶이 하나님의 깊은 관심 속에 진행되고 있음을 자각했습니다.
대학에 진학한 뒤에는 밴드의 트럼펫 연주자가 되었습니다.
행진을 할 때면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휠체어에 앉은 채로 탁월한 연주 실력을 뽐냈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삶에 찾아온 죽음 같은 절망을 하나님의 은혜로 극복한 그는 ABC방송의 “Home Makeover”라는 프로그램과 자신의 책 “나는 가능성이다.”(I Am Potential)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전하고 있습니다.

​파라과이의 한 의사는 군사 정권에 인권이 유린당한 사실에 대해 정부를 강력히 비난했습니다.
경찰은 그에 대한 응징으로 그의 십대 아들을 체포했습니다.
고문 끝에 죽였습니다.
분노한 마을 사람들은 대규모의 집회를 계획했습니다.
그때 그는 다른 데모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발가벗겨진 채 전기 충격과 담뱃불과 폭력으로 만신창이가 된 아들의 시신을 그대로 사람들 앞에 공개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피로 물든 매트리스 위에 놓인 아들의 시체 주변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데모였습니다.
사람들이 군사 정권의 만행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바로 이렇습니다.
“Goddamn”이라는 욕은, 불공평을 경험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해 “고통을 당해야 하는 건 내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다”라고 하는 원망과 저주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하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발가벗겨지고 채찍과 창 자국이 선명한 그대로 예수께서 매달렸던 십자가는, 세상의 온갖 잔인한 폭력과 불의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또한 불공평한 세상에 하나님의 희생적인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지 보여 주고 있습니다.

절망과 고통과 비극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그런 우리에게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큰 소망이십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어렵고 힘겹고 절망적인 상황에 던져진다 할지라도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죄와 허물을 사하시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그것을 통해 존재 목적대로 살 뿐 아니라, 참된 소망까지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죽을 수도 없는 상황에서 소망마저 잃어버린 욥은 하나님께 입을 열어 자신의 아픔을 고백했습니다(욥기 7:1-6). 

​“이 땅에 사는 인생에게 힘든 노동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그의 날이 품꾼의 날과 같지 아니하겠느냐 종은 저녁 그늘을 몹시 바라고 품꾼은 그의 삯을 기다리나니 이와 같이 내가 여러 달째 고통을 받으니 고달픈 밤이 내게 작정되었구나 내가 누울 때면 말하기를 언제나 일어날까, 언제나 밤이 갈까 하며 새벽까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는구나 내 살에는 구더기와 흙 덩이가 의복처럼 입혀졌고 내 피부는 굳어졌다가 터지는구나 나의 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니 희망 없이 보내는구나”

여기서 “노동”은 “군대, 전쟁, 부역” 등의 뜻으로, 징집된 군인이 무거운 고역을 의무적으로 감당할 수밖에 없듯, 인간 역시 고통스러운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의미입니다.
당시 그의 온몸은 구더기와 먼지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피부는 짓무르기 일쑤였습니다.
하루아침에 열 명의 자녀를 잃어버린 그의 심적 고통은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컸습니다.
거기다 그는 마치 주인이신 하나님에게 고용되어 하루의 노동 곧 고난을 묵묵히 감당해야만 하는 “품꾼”과 같은 처지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에게 고난은 필연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품꾼이 종일 밤이 오기를 기다리듯, 하루속히 고난이 끝나기를 소망했습니다.
한편, “내가 여러 달 째 고통을 받으니”를 직역하면 “내가 무익한 달들을 부여받았다”(I have been allotted months of futility : NIV)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닥친 고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러 가지로 노력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재산과 소유는 여전히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자녀들을 낳을 가능성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육체의 질병은 더욱 가중되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믿었던 친구들마저도 자신에게 등을 돌린 채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고난이라는 벽에 부딪혀 지나간 날들은 마치 열매 없는 나무 같았습니다. 또 그에게는 전신에 퍼진 피부병으로 인해 고민하며 뒤척일 수밖에 없었던 밤도 안식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밤은 휴식과 평안의 시간입니다. 잠은 하루 동안의 피로와 고통을 풀어주는 묘약(妙藥)입니다. 그리고 낮 시간의 대부분을 친구들과 변론하면서 보내느라 심신이 지쳐 있었을 뿐 아니라, 추한 자신의 몰골을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 속히 밤이 오기만을 기다렸을 욥에게 있어서 밤과 잠은 누구보다 간절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질병은 밤이면 더욱 기승을 부렸습니다. 악화된 몸은 온통 구더기와 먼지로 뒤덮였습니다. 피부는 아물었다 터지기를 반복했습니다. 순간순간 “내가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영적 회의와 갈등이 물밀 듯 밀려왔습니다. 당연히 간절히 기다리던 밤을 불면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있어서 밤은 더 큰 형극의 시간이었습니다. 그의 노력은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한 채, 세월만 덧없이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더 나아질 수 있다는 소망보다는, 무엇도 기대할 수없는 절망이 그의 삶의 대부분 아니 전부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고통이 줄어들거나, 고쳐질 가능성이 전혀 없는 질병처럼 우리를 우울하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것들은 고난을 당하는 자들이 처음 고난이 시작될 때 가졌던 꿋꿋함과 정력을 다 부식시켜버립니다. 희망을 송두리째 빼앗아갑니다. 깊은 절망에 빠뜨립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이러한 상황이 주어진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나한테는 결코 이러한 일들이 주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부인하시겠습니까?

처음에는 그(James I. Packer)의 병명을 찾아내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여러 가지 약을 써 보았지만 자주 부작용을 일으켰습니다. 한 해, 두 해가 지나면서 그는 자주 열병과 만성적 관절통과 극도의 피로에 시달렸습니다. 가장 나쁜 것은 우울증이었습니다. 끝없는 절망감을 느낀 그는 “주여! 어찌하여 저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때 “손에 붙잡은 것을 놓아라.”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즉시 “손에 붙잡은 것을 놓으라니요? 무엇을 놓으란 말씀이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돌아봤습니다. 그는 그동안 다섯 아이들 모두에게 수준 높은 학업 성취와 교양을 요구해 왔습니다. 자녀 교육에 관한 책을 썼습니다. 잡지 편집 일을 도와주었습니다. 교도소 전도 집회를 지원했습니다. 교회에서 봉사도 하고, 학교의 이사직도 맡고 있었습니다. 정말로 많은 일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여기까지 생각한 그는 자신의 우울증의 가장 큰 원인이 하나님에 대한 오해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은 저 멀리 계신 신비로운 분이고, 그분께 인정받으려면 끊임없이 열심히 일해야 한다.”라고 믿었음을 인정했습니다. 상담을 통해 자신의 영적 완전주의 때문에 자신을 자꾸 정죄하면서 스스로 고통을 받아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반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내면의 고통을 통하여 자신에게 사랑과 은혜를 부어 주시기를 원하셨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 깨달음을 통해 자신의 행위가 아니라 자신의 모습 그대로를 받아 주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둔 그는 마음의 평안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프리셉트 국제본부 창설자인 케이 아더(Kay Arthur)는 “온 몸이 쑤시는데다가 속까지 메스꺼워 이불 속에서 한참을 뒹굴었던 적이 있다.
그러나 감옥에 갇혀 있는 중국의 가정 교회 동역자들을 떠올리니 나는 편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그들의 고통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았다.
고통을 몸소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법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고해와 같은 인생을 사는 동안 생각지도 못했던 수없이 많은 고난을 당합니다.

​그 중에는 이해되지 않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고난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주어진 고난은 사명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난에는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이 있습니다. 세상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욥의 고난을 통해서 우리의 경험과 지식과 역사를 근거로 갖게 된 왜곡된 신개념을 버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 배울 수 있습니다. 왜곡된 신개념을 버렸을 때 하나님과 얼마나 친밀한 관계를 회복할 수 있으며, 얼마나 큰 축복을 받을 수 있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인생들은 하나님의 눈을 피해 어디로도 피할 수 없습니다. 기차가 철로 위에 놓여 져 있을 때 가장 안전하게 운행될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 품안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소망이 끊어져 버린 것 같은 절망적인 상황에 놓이게 된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붙잡은 손만큼은 절대로 놓지 않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이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금까지 자신의 형편을 비관하고 친구들에게 험한 말을 퍼부어 대던 욥이 드디어 하나님을 향해 말문을 열기 시작합니다. 7-10절입니다.

“내 생명이 한낱 바람 같음을 생각하옵소서 나의 눈이 다시는 행복을 보지 못하리이다 나를 본 자의 눈이 다시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고 주의 눈이 나를 향하실지라도 내가 있지 아니하리이다 구름이 사라져 없어짐 같이 스올로 내려가는 자는 다시 올라오지 못할 것이오니 그는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겠고 자기 처소도 다시 그를 알지 못하리이다”

여기서 “바람”은 짧은 기간을 상징함과 동시에 허무와 덧없음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병을 고칠 수 없다고 판단한 욥은 죽음만이 그것을 모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한편, 우리는 본 절에서부터 욥의 변론의 분위기가 전환되고 있음을 간과하지 말아야합니다. 즉, 6:1-7:6까지는 친구들을 상대로 했던 욥의 변론이 본 절에서부터는 하나님께로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잃어버린 것들을 회복할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는 상황에 사로잡혔습니다. 끝없는 절망의 심연으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영적, 육적 생명이 위급해 질수록 재난이 닥친 이후로 줄곧 갈망해 왔던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신뢰도 희박해져 갔습니다. 마치 독백처럼 하나님을 향해 “하나님! 사람은 세상에 잠시 머물다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죽으면 다시는 이 세상으로 돌아올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더 이상 찾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비천합니다. 오늘 있다 내일 죽을 수밖에 없을 만큼 연약합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의 적수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을 살 만한 존재도 못됩니다. 거기다 고난 중에 있는 저는 하나님의 어떤 관심도 부담스럽습니다. 그러니 저를 그냥 내버려두십시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세상 그 무엇도, 심지어 죽음이라는 절망조차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자녀들을 끊어놓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일시적으로만 존재하는 분이 아닙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게 존재하십니다. 변함이 없으십니다. 우리 인간이 감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지혜로우십니다. 사랑은 한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의 유일하고 참된 소망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을 놓지 말아야합니다. 다른 것들은 다 놓을지라도 하나님만큼은 절대로 놓아서는 안 됩니다.

일시적인 것들에 마음을 빼앗겼던 어리석음을 회개하고 하나님을 구해야합니다. 시인은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나는 도다,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62:5, 146:5)라고 고백했습니다. 지헤자는 “악인은 그의 환난에 엎드러져도 의인은 그의 죽음에도 소망이 있느니라”(잠14:32)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모든 경우 우리의 소망이신 하나님 한 분만 붙잡고 있습니까?

탁월한 신학자 윌리엄 바클레이는 우리가 세상을 사는 동안 많은 것을 잃어버리게 되지만, “참을성과 이성과 소망”만큼은 절대로 잃어버리지 말아야한다고 말했습니다.
참지 못하면 반드시 후회할 때가 있습니다.
명료한 이성은 혼란한 세상에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비결입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롬 8:24)라는 말씀대로, 소망은 우리를 하나님의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투르니에의 신앙 간증집듣는 귀”라는 책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있습니다.

​금술 좋기로 소문난 투르니에의 부부가 그리스로 휴가를 떠났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의 아내는 거기서 갑자기 심장마비를 일으켜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죽기 직전, 그의 아내는 평화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를 쳐다보며 “여보! 오늘 천국에 도착하면 먼저 가 계신 시부모님을 만나 정말 즐거운 것 같아요.”라고 말했습니다.
순간, 그는 아내가 죽음을 마치 기차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가 사랑하는 가족들을 재회하는 것처럼 태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보고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아내를 보낸 후 그의 믿음은 점점 더 강해졌습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에 대한 믿음이 강해질수록 각종 근심과 걱정으로부터 해방되는 놀라운 자유를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아내와 육체적으로만 결혼한 부부였던 것이 아니라 아내의 소망과 믿음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있었던 것을 알게 되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므로 죽음 같은 절망이 밀려온 순간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놓지 마십시오. 인간(ἄνθρωπος)으로 사십시오.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지으신 목적대로 존재할 뿐 아니라, 참된 소망을 회복시켜 주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까지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소망하며  축복합니다.



라틴어 3대 명언 -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카르페 디엠(Carpe diem), 아모르 파티(Amor Fati)



라틴어 3대 명언 
1.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2. 카르페 디엠(Carpe diem)
3. 아모르 파티(Amor Fati)


최근에 전한길쌤 영상을 보고 메멘토 모리, 카르페 디엠, 아모르 파티 라는 라틴어 문장에 대해 알게되었습니다. 되게 좋은 뜻이고 정말 죽을때까지 이 세가지를 꼭 실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여러분들과 공유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죽음을 잊지마라

로마시대에서 유래된 말이라고 합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개선장군에게 노예들이 '메멘토 모리'를 외친다고 합니다.

즉, 겸손함을 가지라는 뜻입니다. 결국 개선장군도 한낯 인간에 불과하고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경각시키는 것입니다.


또한 개선장군에서 수여되는 관에 이런 문구가 써있었다고 합니다.

Memento mori
그대는 죽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Memento te hominem esse
그대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명심하라!
Respice post te, hominem te esse memento
뒤를 돌아보라, 지금은 여기 있지만 그대 역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라는 말은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많은 의미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태어난 어떤 생물이든 죽게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수명이 길어졌다고는 하지만 영원히 살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영원히 산다는 게 좋은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아무리 큰 성공을 이뤘다고 해도, 아무리 큰 돈을 벌었다고 해도 결국 우리는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노력하지 말라는 말은 아닙니다. 매사 겸손해야 내가 성취해낸 성공, 경제적 자유를 오래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겸손하지 못해 재산을 모두 날리고 집안이 풍비박산되는 일이 흔치 않게 일어나는 이유가 겸손하지 않고 자만하기 때문입니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



오늘을 즐겨라 (Seize the day)

여러분들은 오늘을 살고 계신가요?

한때 욜로라는 말이 유행했었습니다.YOLO, You Only Live Once.

당신은 오직 한번만 산다. 저성장 시대로 접어들면서 불안해지고 불확실성이 커진 시대에 오늘 펑펑 쓰고 살자라는 의미로 퇴색된 말입니다. 사실은 Carpe Diem과 매우 비슷한 말이 욜로(YOLO)입니다.

말 그대로 나는 이번 생을 한번만 살 수 있으므로 살고 있는 지금 당장을 감사해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돈을 펑펑쓰고 살아라라는 뜻이 아닙니다.(일종의 마케팅 전략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저는 최근에 이 카르페 디엠이라는 문장을 알게 되고 나서 내가 지금 살아있음에, 내가 일할 수 있음에, 이렇게 글을 쓸 수 있음에 감사함을 많이 느끼고 있습니다.

오늘을 즐기고, 지금 이 순간에 살아있음에 감사하는 자세가 바로 카르페 디엠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모르 파티(Amor Fati)



운명을 사랑하라

아모르 파티하시면 가수 김연자분을 많이 떠올리실 겁니다. 이 때문에 아모르 파티라는 말이 유행하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의 운명은 모두 다릅니다. 어떤 분은 경찰관일을 하시기도, 어떤 분은 대기업에 종사하기도, 어떤 분은 자영업을 하시기도 합니다. 왜 그 일을 하게 되었는지는 자신이 목표한 것도 있겠지만 어느정도 운명이 정해져있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저는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운명을 바꾸는 것도 운명인 것이지요. 결국 우리는 각자의 위치에서 내가 할수 있는 것들에 최선을 다하며 나로써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게 아모르 파티입니다.

남들이 살아가는 것에 질투하지 않고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을 사랑하고 내가 처한 환경을 사랑하는 겁니다. 그래서 아모르 파티(운명을 사랑하라)라는 말이 나온 게 아닐까 싶습니다.

저는 이 세가지 말들 메멘토 모리, 카르페 디엠, 아모르 파티를 꼭 노트에 매일 쓰고 있습니다. 항상 겸손하고, 지금 바로 이 순간에 집중하며 살고, 나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도 메멘토 모리, 카르페 디엠, 아모르 파티 이 세가지 말들을 하루 한번씩 나에게 소리내어 말해보시길 바랍니다. 인생을 대하는 자세하 달라집니다.

은혜(恩惠) 예화(例話)


은혜(恩惠)

1. 히브리어

헨 : 자비함, 즉 주관적으로 호의, 은혜, 또는 객관적으로(아름다운) 은총, 은혜(로운), 즐거운, 현숙 한, 사랑스러운.

토브 : 넓은 의미에서 선하다(또는 잘되다, 타동사로 선을 행하다, 선하게 하다, - 더 낫다(더나은 일 을 행하다), 기쁘게 하다, 선하다(선을 행하다, 선히 여기다)

라하밈 : 죄사함을 말하는데(출 34:6), 긍휼, 사랑, 호의 자비, 애정 등 표현.

2. 헬라어

카리토 :  은총을 베풀다, 크게 호의를 가지다, 축복을 하다.

카리스 : 긍휼, 은혜로운 행위, 선물, 애정스러움, 기쁨을 주는 것

* 기쁨(카라) - 은혜(카리스) - 은사(카리스마)

3. 한자

베풀어 주는 혜택, 고마움.

은혜에 대한 성구

1. 은혜란 무엇인가?

삼하 15:25 - 여호와의 인도가 은혜
시 5:12 - 호위하는 것
행 20:24 - 복음
갈 1:15 - 하나님께서 부르신 것이 엡2:8 - 거저 받은 것이 은혜
벧전 1:7-10 - 구원이
벧전 3:7 - 생명의 은혜

2. 은혜는 누가 주는가?

왕상 3:6 - 주께서
출 33:19 - 하나님께서
요 1:17 -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후 1:2 -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살후 2:16)
시 90:17 - 하나님께서
롬 12:6 - 은사를 받게 됨

3. 은혜의 가치 평가

행 15:11 - 은혜로 구원얻음
롬 3:24 - 의롭게 함
롬 4:16 - 후사가 됨
롬 5:17 - 생명의 왕 노릇함
고전 15:10 -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대로
고후 9:14 - 모든 사람이 사모하는 것

4. 은혜를 받은 자세

욥 33:26 -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가
시 31:19 - 주께 피하는 자
잠 3:34 - 겸손한 자에게
잠 14:9 - 정직한 자가
롬 5:20 - 죄를 인식함으로
히 4:16 - 보좌앞을 담대히 나아감으로
벧전 1:13 - 은혜를 바라므로

가장 큰 은혜는 "겸손(謙遜)"


인도의 철학자 브하그완은 겸손은 용기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며 자신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높이는 것이라 합니다. 

겸손은 약자가 아니라 강한자가 가진 “Self-Control” 능력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낮추는 것이 “겸손”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나를 낮추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겸허입니다. 
겸손은 상대를 존중함으로 나를 세우는 것입니다. 
즉 다름을 인정할 줄 아는 올바른 지성, 상대가 가진 장점을 장점으로 볼 줄 아는 안목과 인격적 여유, 상대에게서 배울 것을 찾고 배우려는 자세처럼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 바로 진정한 겸손인 것입니다. 

겸손은 그렇게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할 줄 아는 성숙한 인격의 표현인 것입니다.

겸손은 그렇게 배움의 지경을 넓히고 관계를 발전시키는 엄청난 힘을 제공하며 자신을 성장시키고 환경을 바꾸며 나를 세우는 힘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강한 당신, 용기 있는 당신, 인격적으로도 성숙한 당신에게서 드러나는 당신의 겸손이 당신을 세우고 당신의 성공 여정에 힘을 더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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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Humility)

-앤드류 머레이(Andew Murray) 저. 번역 이득환.

저자 앤드류 머레이는 1928년 남아프리카에서 태어났고 9세에 영국의 아버딘으로 유학의 길을 떠나 십대에 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후 네덜란드의 우크레흐트에서 신학을 공부하여 20세 되던 해에 남아프리카 부롬폰테인 교회의 담임 목사가 되었습니다.
볼체스터, 케이프타운, 웰링턴에서도 다년간 목회를 하였고 그 밖에 선교, 교육 분야에 정통한 인재였다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앤드류 머레이는 이 책 외에도 수많은 경건 서적들을 남겼는데 심오함과 평이함, 실제성을 두루 갖춘 그의 책들을 읽고 영적인 도움을 얻은 사람의 수는 헤아릴수도 없을 것입니다.

제 1 장 피조물의 영광인 겸손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의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더라."(계 4:10,11)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에게는 한가지 목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인간을 자신의 영광과 완전함에 참여하는 존재로 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은 세상에 자신의 사랑과 지혜와 능력을 보이시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피조물 안에 자신을 계시하고자 하셨고, 그리고 그 피조물을 통해서 세상에 자신을 계시하고자 하셨습니다. 피조물과의 인격적 교제를 통해 하나님 자신의 선(goodness)과 영광(glory)을 나타내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피조물인 인간이 스스로 선과 영광을 소유할 수 있거나 임의로 사용할 수 있는 어떤 권한을 부여받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선(goodness)과 영광(glory)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만이 주권적으로 주실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분이시며,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는 분입니다. 그 모든 만물은 하나님 안에 존재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는 영원토록 동일한 것이고 그 관계는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진실하게 능력으로 만물을 창조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언제나 진실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의 근원을 돌아 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는 자신에게 있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것임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영원한 축복과 행복을 위하여 현재는 물론 영원토록 하나님이 거하실 수 있도록 자신을 빈 그릇과 같이 비우는 일입니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거하시고 자신의 능력과 선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삶은 그저 한 순간만 주어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계속적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겸손은 삶 가운데서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할 때 가능한 영역입니다. 본빌작인 면에서 볼 때 겸손은 우리가 가장 우선적으로 추구해야 할 의무인 동시에 최고의 축복입니다. 겸손이야말로 모든 축복의 뿌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만한 것과 더불어 겸손의 상실은 모든 죄와 악의 뿌리가 됩니다. 교만으로 말미암아 지금은 이미 타락해 버린 천사들은 자기 만족을 추구하고 불순종했기 때문에 빛으로부터 바깥 어두운 곳으로 쫓겨나게 된 것입니다. 뱀이 교만-그의 교만함은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의 독을 우리의 최초의 부모라 할 수 있는 아담과 하와를 향하여 내쉴 때, 그들 또한 그들의 높은 지위를 잃고 멸망으로 내던져졌습니다. 그래서 결국 인간은 넘어지게 된 것입니다. 하늘 위에서나 땅 아래서나 교만과 자기를 높이는 것은 지옥의 저주에 들어가는 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로 다시금 인간이 하나님과 원래의 진실한 관계를 누리기 위해 상실된 겸손을 회복시킬 만한 수단은 아무 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겸손을 회복할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예수님께서 이 땅 위에 겸손을 가져다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그 겸손의 영광에 참여케 하셨고, 겸손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본래 하늘에 계신 분이었으나 자신을 낮추사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주님은 하늘에서도 겸손을 소유하셨고, 그가 이 땅으로 내려온 것도 그분의 성품이 겸손하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님은 이 땅 위에 겸손을 가져다 주셨고 "자신을 낮추사 죽기까지 복종"(빌 2:8)하셨던 것입니다. 겸손으로 인하여 그의 죽음은 가장 귀한 것이 되었고, 또 그 겸손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속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겸손으로 말미암아 주시는 구원은 단지 생명과 죽음의 관계를 넘어서 예수님 자신의 근본적인 속성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겸손은 우리가하나님과 관계를 맺는데 토양과 뿌리를 제공하는 것이고, 그의 구속의 역사를 가능케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완전한 겸손의 삶으로 인간의 운명을 담당하셨고 그의 구원의 계획을 성취하셨습니다. 그의 겸손이 곧 우리의 구원이고, 그의 구원이 곧 우리의 겸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의 삶은 죄악에서 옮기웠다는 증표를 지녀야 할 뿐 아니라, 원래의 상태(original sin)를 회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맺는 하나님과의 관계와 사람과의 관계 모두는 겸손을 통해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러한 것이 없이는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거할 수도 없고, 성령의 은혜와 능력도 경험할 수 없게 됩니다. 또한 이러한 것이 없이는 신앙이나 사랑 가운데 거할 수도 없고, 기쁨과 삶을 살아갈 힘도 얻을 수가 없게 됩니다. 겸손이야말로 은혜가 뿌리내리는 유일한 토양입니다. 우리의 모든 흠과 부족함들은 우리에게 겸손함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겸손은 다른 사람들과 잘 지낼 수 있도록 하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관계에 있어 근본된 뿌리가 됩니다. 오직 겸손만이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태도를 갖게 하고, 하나님을 모든 일을 행하시는 분으로 인정하도록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성적(reason)인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이 이성으로 인해 우리가 실재의 본성과 하나님의 명령의 명백한 필요를 알아갈수록 우리가 더욱더 전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순종을 향한 하나님의 요구는 그동안 교회에서 그렇게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교회가 겸손의 본질과 중요성을 올바로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겸손은 인간인 우리가 스스로 취하여 하나님께 내어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부으시는 것입니다. 겸손이란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며 오직 하나님만이 모든 것이 되시고 우리가 모든 것이 되시는 분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것이 소중히 간직해야 할 귀한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인간은 그의 의지와 뜻과 정성을 다해 겸손해야 하며 하나님의 생명과 영광이 그에게 역사하여 채워지도록 그릇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야 그는 겸손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가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위치를 내어 드리는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거룩함을 추구했던 초대 교회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겸손은 뛰어난 신앙을 나타내 주는 표증이었습니다. 그러나 종종 겸손에 대해 그렇게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교회의 가르침과 모본에 있어 겸손에 정당하게 부여되어야 할 중요성이 제대로 인식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생각 때문에 이 진리-겸손-를 소홀히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천사들과 예수님 그리고 하늘에 있는 성도들이 거룩한 자가도될 수 있도록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바로 겸손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 가장 중요한 징표는 겸손이라고 할 수 있고, 인간이 축복을 받는 비결 또한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 모든 우선권을 내어 드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심에서 우러난 온유와 겸손이야말로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랫동안 주님의 온유와 겸손에 관해서 전혀 아는 것이 없으면서도 스스로 주님을 알고 있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나의 생각에 동의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라고 봅니다. 이러한 겸손은 절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특별한 소망과 기도, 믿음과 그 믿음의 실천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을 연구해보면,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겸손에 관하여 매우 강조하시면서 자주 가르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겸손에 관한 주님의 가르침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 또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교만은 우리의 본성이며, 교만만큼 더럽고 다루기 어려워서 우리의 통찰을 흐리는 것이 없다고 하는 사실을 인정합시다.
이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잠잠히 그리고 끝까지 기다립시다. 그러면 우리 자신이 겸손을 얻기에 얼마나 부족하고 연약한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런 다음 우리의 영혼이 그리스도의 겸손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채워질 때까지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하여 공부합시다. 우리가 교만으로 인해 넘어지고 지쳐서 더이상 우리의 힘으로는 그 교만을 떨쳐 버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그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놀라운 생명의 은혜를 한없이 부어 주실 것을 믿고 나아갑시다.

마가복음 7:22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도적질

κλοπή, ῆς, ἡ 스트롱번호2829

1.

도둑질

2.

마15:19

3.

막7:21.

발음 [ klŏpē ]
어원
2813에서 유래

뜻풀이부

  • 1.
    도둑질, 마15:19, 막7:21.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도둑질(마15:19, 막7:21).

ὑπερηφανία, ας, ἡ 스트롱번호5243

1. 오만. 2. 거만. 3. 자랑
발음 [ hüpĕrēpha- nia ]
어원 / 5244에서 유래

뜻풀이부
  • 1. 오만, 거만, 자랑, 막 7:22.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교만(막 7:22).

간음
μοιχεία, ας, ἡ 스트롱번호3430
1.

간음

2.

마15:19

3.

막7: 21

발음 [ mŏichĕia ]
어원
3431에서 유래

뜻풀이부

  • 1.
    간음, 마15:19, 막7: 21, 요8:3.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간음(마15:19, 요8:3), 음란(막7:21), 음행(갈5:19).

탐욕

πλεονεξία, ας, ἡ 스트롱번호4124

1.

탐심

2.

탐욕

3.

눅12:15

발음 [ plĕŏnĕxia ]
어원
4123에서 유래

뜻풀이부

  • 1.
    탐심, 탐욕, 눅12:15, 롬1:29, 고후9:5.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탐욕(막7:22, 롬1:29, 벧후2:14), 탐심(눅12:15, 골3:5, 벧후2:3), 억지(고후9:5).


고르반(2878) [ kŏrban ] κορβᾶν 스트롱번호2878

1. 고르반.  2. 예물. 3. 막 7:11.
발음 [ kŏrban ]
어원  /  히브리어 7133에서 유래

뜻풀이부
1. 고르반, 예물, 막 7:11.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성전고(마 27:6), 고르반(막 7:11).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

- 직역하면 '나로 인해 당신이 유익을 얻게 될 그 무엇'이란 뜻이다.
즉 자식이 부모에게 봉양하고자 할 때 그것이 그 부모에게 상당한 도움을 줄 수 있는어떤 선물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말은 부모를 농락하고 속이는 파렴치한 변명임을 곧 알게된다.

고르반(*, 코르반).

- 이 말은 히브리어 '코르반'(*)의 음역(音譯)으로서 구약 시대의 제사장 전승을 통해 그 뜻을 알수 있는데, 그 뜻은 '하나님께 드림' 곧 '하나님께 바치는 물건'을 가리키는 매우 신앙적 의미였었다(레 2:1, 4, 12).
마가는 본서의 이방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서 이러한 음역과 더불어 설명구까지 첨가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 말을 헬라어로 번역할 때는 '도론'(*), 즉 '선물'이라는 뜻으로 표기한다.
또 본문 내용과 비슷한 시기의 것으로 보이는 유대인의 납골당(納骨堂)의 비문(碑文)에서 같은 형태의 용법이 발견되었다.
즉 '...하나님께 드린 예물...'이라는 표현이다(J.A. Fitzmyer, Derrett).
물론 예수 당시의 이 말이 순전히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기위해 사용된 것은 아니었다.
당시 '장로들의 유전'을 따르는 사람들이 부모에게 해야 할 봉양 의무를 하나님께 대신했다는 변명의 뜻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즉 장로들의 유전은 자식이 부모에게 드려야 하는 의무를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말하기만 하면 더 이상 부모에게 할 의무가 없어진다고 가르쳤다.
때문에 그들은 부모 공경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위한 구실로 장로들의 유전(遺傳)을 이용했다.
또 '고르반'은 일종의 맹세문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그들이 가진 물건올 하나님께 드릴 것이라고 선언함으로써 그 물건에 대한 소유권을 부모를 위시한 모든 타인으로부터 제한시킬 수가 있었다.
이 '고르반' 맹세는 비록 모세의 또다른 계명(부모 공경 둥)을 파기하는 일이 있어도 반드시 시행되어야만 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이 같은 '맹세'는 실제로 성전에 물건을 바쳐야 한다는 '강제 규정'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 맹세자는 '고르반'된 물건을 일부만 성전에 헌납하고(아예 헌납치 않는 수도 있음) 자기 자신을 위해 사용해도 무방했던 것이다.
결국 장로들의 유전은 많은 재물을 갖고 있으면서도 부모에게 나누어주지 않으려는 불효자들의 기만적인 행위를 정당화 시켜주는 구실을 한 것이다.
한편 후대 랍비들은 이러한 규정의 불합리성을 지적하여 '미쉬나'(Mishnah)에 고르반을 빌미로 부모 공양을 등한히해서는안 된다고 못박고 있다.
그러나 예수 당시에는 아직 그 조항이 제정되지 않았으며 심지어 극단적인 유대주의자는 부모 공경보다 하나님께 대한 맹세를 더 중하게 여겨 고르반의 폐단을 계속 고집하였다고 한다.



베드로전서 5:5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 본절에서는 '장로'를 1절에서 처럼 굳이 '직분자'로 해석하거나, '젊은 자'(*, 네오테로이)를 '성직자'나 '집사'들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네오테로이'가 성경에서 직분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절의 '장로'는 단순히 '연장자'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Kelly, stibbs, Blum). 젊은 사람들이 연장자에게 순복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마땅한 질서이다. 한편 '허리를 동이라'의 헬라어 '엥콤보사스데'(*)는 '옷 입다'라는 의미로 노예들이 주인을 시중들기 위하여 앞치마를 두르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예수께서 수건으로 앞을 두르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을 상기시키는 권면으로(요 13:14 - 17) 겸손히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 본절은 잠 3:34(LXX) 의 인용으로 겸손해야 하는 이유이다. 젊은 자들이 장로들에게 겸손해야 하는 이유는 교만한 자는 하나님이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들에게 은혜를 주시기 때문이다. '대적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안티탓세타이'(*)는 군대를 배치시킬 때 사용하는 군사 용어였다(Caffin).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의뢰하지 않고 교만하여 자기의 능력만을 믿는 자들을 대적하셔서 파멸시키신다. 반면에 겸손하여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자에게는 은혜를 허락하신다.


ὑψηλοφρονέω 스트롱번호5309

1.

교만하다

2.

거만하다

3.

딤전6:17.

발음 [ hüpsēlŏphrŏ- nĕō ]
어원
5308과 5424의 합성어에서 유래

뜻풀이부

  • 1.
    교만하다, 거만하다, 딤전6:17.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마음을 높이다(딤전6:17).


겸손

ταπεινοφροσύνη, ης, ἡ 스트롱번호5012

1.

겸손

2.

겸양

3.

행20:19

발음 [ tapĕi- nŏphrŏsünē ]
어원
5011과 5424의 어간의 합성어에서 유래

뜻풀이부

  • 1.
    겸손, 겸양, 행20:19, 엡4:2, 빌2:3, 골3:12.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겸손(행20:19, 엡4:2, 벧전5:5, 빌2:3, 골2:18).


ταπεινός, ἡ, όν 스트롱번호5011

1.

낮은 지위의

2.

비굴한

3.

겸손한

발음 [ tapĕinŏs ]
어원
불확실한 어원에서 파생

뜻풀이부

  • 1.
    낮은 지위의, 천한, 보잘것없는, 눅1: 52, 롬12:16, 고후7:6, 약1:9.
  • 2.
    [감정의 상태나 사고방식에 있어서]
    • a.
      [나쁜 의미] 비굴한, 비열한, 고후10:1.
    • b.
      [좋은 의미] 겸손한, 겸비한, 마11: 29, 약4:6, 벧전5:5.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겸손한(마11:29, 약4:6, 벧전5:6), 비천한 (눅1:52, 고후7:6), 낮은(롬12:16, 약1:9), 유순 한(고후10:1).

φρήν, φρενός, ἡ 스트롱번호5424

1.

생각

2.

이해

3.

고전14:20.

발음 [ phrēn ]
어원
복수 αί φρένες, φράω ‘고삐를 매다’에서 유래

뜻풀이부

  • 1.
    생각, 이해, 고전14:20.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지혜(고전14:20).

제 2 장

구속의 비밀인 겸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으심이라."(빌 2:5,7-8)

어떤 나무든지 근본된 뿌리를 따라 자라게 마련입니다. 즉 그 나무가 존재하는 모든 기간동안 나무의 씨가 처음 가졌던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아담과 그의 후손인 우리 인간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는 이 진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의 필요성과 본질을 잘 설명해 줍니다.

옛 뱀-그는 교만으로 인해 하늘에서 쫓겨난 천사로서 그의 본성은 교만으로 가득차 있습니다-이 하와의 귀에 유혹의 말을 속삭일 때, 그의 말들은 지옥의 독을 품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그 뱀의 말을 듣고,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선악을 분별할 수 있다고 하는 욕심에 넘어 갔을 때 지옥의 독이 그녀의 영혼과 생명 속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교만이라고 하는 독은 우리에게 영원한 행복을 가져다 줄 축복받은 겸손과 하나님에 대한 의지(dependence)를 파괴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로 말미암아 그녀 자신은 물론 그녀에게서 말미암을 모든 후손은 죄로 인하여 부패하게 되었고, 교만이라고 하는 사단의 독에 의해 인간의 본성이 끔찍한 죄와 저주로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이 겪고 있는 이 모든 불행은 우리 인간들 모두 안에 잠재해 있는 교만에 그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나라들간의 모든 전쟁과 피흘림, 모든 이기주의와 고통, 모든 욕망과 시기, 그리고 모든 상한 마음과 아픔의 삶, 매일 겪는 불행들은 모두 교만의 결과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이 필요한 것도 바로 이 교만 때문입니다. 교만으로 인해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구속(redemption)입니다. 우리 가운데 들어오 교만의 본성과 권세를 알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더 그리스도의 구속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사단이 우리의 삶에 던져 놓은 교만의 권세는 원래는 지옥에 속해 있던 것이며, 모든 영역을 통하여 막강한 권세로 우리의 매일의 삶에 영향을 미칩니다. 사람들은 그것으로 그 권세로 인해 고통스러워 하고, 두려워 하며, 때로는 투쟁하기도 하며, 그것을 멀리 쫓아 내어 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교만의 권세가 어디서, 그리고 누구에게서 기인하는지를 여전히 알지 못합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교만으로 인해 무척 고통스러워 하지만 어디서, 어떻게 그 교만을 극복할 수 있을지를 알지 못합니다.

교만은 우리의 내적인 삶에서 뿐만 아니라 외적인 삶에 있어서도 강한 영적인 권세를 갖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우리의 교만을 고백해야 하고, 통회해야 하며 교만이 사단에게서 말미암은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교만을 극복하여 떨쳐 버리도록 인도할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오직 하나님의 어린양의 구속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놀라운 영적 권세 아래로 우리를 인도할 것입니다. 이기심과 교만에 대한 부질없는 싸움은 교만의 뒤에 감추어진 어두움의 권세와 싸우는 것처럼 그렇게 부질없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우리에게서 말미암지 않은 권세와 생명을 깨닫고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단과 그가 심어 놓은 교만을 떨쳐 버리기 위해 하나님의 어린양이 부으시는 하늘에 속한 겸손입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죄의 권세를 알기 위해 "첫째 아담"과 그의 타락을 보았던 것처럼 또한 우리는 교만했던 자신을 극복하여, 또다시 교만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겸손의 생명을 주시는 "둘째 아담"에 대해서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아담에게서 생명을 얻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었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더 정확한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골 2:7)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게 하심"(골 2:19)으로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굳게 잡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생명, 즉 인간의 본성을 입고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구속은 우리가 서고 자라야 할 뿌리입니다. 그 생명은 이 땅 위에서 사역하시고 부활하셔서 지금도 능력으로 우리 안에 역사하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해야 할 한가지 일은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났고, 오늘의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그 생명을 연구하고 알며, 더 나아가 그 생명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 생명은 우리가 전인격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여서 소유하게 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가 어떠한 분인가를 올바로 이해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과연 무엇이 그분을 그리스도가 되게 하는지를 잘 이해하여야 하며, 그리고 또 우리의 구속주가 되신 그리스도의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성품이 무엇인가하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만 합니다.

이러한 물음에 대해 답은 오직 '겸손' 그 한가지뿐입니다. 자신을 비우고 인간이 되신 성육신이야말로 하늘에 속한 겸손이 아니라 무엇이겠습니까? 종의 형상을 입고 오신 이 땅에서의 그의 삶은 겸손이 아니라 무엇이겠습니까? 그리고 "자기를 낯추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이야말로 진정한 속죄가 아니겠습니까? 또한 하늘로 올리우심과 그 영광은 보좌 앞과 영광의 관을 쓰신 주님께 마땅히 올려져야 할 겸손의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겸손히 행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가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나서 이 땅위에서 살아가신 것, 그리고 그가 십자가 위에서 죽은 것과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시어 보좌 위에 앉히신 모든 것이 그의 겸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본성을 입으신 하나님의 겸손인 것입니다. 주님은 죄를 이기고 우리를 구원하시며 섬기기 위해 온유와 친절함으로 옷입으셨고 영원한 사랑으로 자신을 겸손케 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겸손케하심이 그리스도를 모든 사람의 보혜사와 종이 되게 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의 보혜사이고 종이시며, 앞으로도 겸손의 표상이 되실 것입니다. 보좌 위에 앉으셔서까지도 주님은 온유하고 겸손하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십니다.

겸손이 나무의 뿌리라고 한다면, 겸손의 본질이 모든 가지와 잎, 그리고 열매에서 나타아냐 할 것입니다. 겸손이 예수님의 삶이 우리에게 주는 은혜의 전부이고 가장 요한 것이며 속죄의 비밀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영적인 삶을 유지하는 힘 또한 우리 안에 그 겸손의 은혜를 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찬양하는 것은 바로 그의 겸손 때문이며, 우리가 주님께 구하는 것도 바로 겸손입니다. 겸손은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늘 겸손으로 사셨던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는 일에 소홀히 했을 때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력하고 열매가 없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스도인들이 겸손을 구하지 않을 때 구원의 기쁨이 식어지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자신을 죽기까지 복종하는 겸손을 구해야 합니다. 겸손은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사람들의 영광을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는 것입니다. 또한 겸손은 하나님이 우리의 삶의 전부가 되시도록 자신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기고 주님만을 높여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삶의 기쁨보다도 겸손을 구하고, 그것이 우리의 삶에 임하는 것을 환영한다면, 그 때에야 비로소 교회가 세상을 이길 소망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르심을 입은 성도인 우리들에게서 하나님의 어린양의 온유함과 자신을 낮추심이 얼마나 나타나고 있습니까? 우리가 얼마나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그들의 필요와 느낌, 연약함들에 대해 무관심한가를 생각해십시오. 또한 정직과 고결함이라는 이름 하에 우리가 얼마나 많이 우리의 이웃들을 성급하게 판단하고 정죄하는지, 그리고 쉽게 화를 내고 그들의 마음에 쓴뿌리를 주며 이간질하는지를 곰곰히 생각해 보십시오. 그 모든 것들은 교만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교만은 오로지 자신만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사단에게서 오는 교만은 거의 모든 곳에서 살며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만일 성도인 우리의 삶이 예수님의 겸손에 영원토록 입도함을 받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오! 내 안에 예수님의 겸손이 가득차 있고, 우리의 삶에 예수님의 겸손이 넘쳐 흐른다면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 속에 그리스도의 삶 가운데 보여졌던 그러한 겸손이 없음을 정직히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우리가 교만하여서 겸손이 없음을 인정하고, 주님께 겸손을 구할 때에야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이 진정으로 어떠한 것인지를 느끼기 시작할 것입니다.

성도여! 그리스도의 겸손을 배우십시오. 겸손이야말로 구속의 근저에 감춰진 비밀입니다. 날마다 더욱더 이 겸손에 깊이 잠기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심을 전심으로 믿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 곧 우리가 겸손함을 배워 갖추도록 우리의 온 삶을 주님께 내어 맡기십시다. 구원이 그러하듯이 겸손 또한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제 3 장

예수님의 삶에 나타난 겸손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 22:27)

요한복음에서 우리는 주님의 내면 생활을 엿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종종 자신과 아버지(God the Father)와의 관계를 말씀하셨고, 자신이 인도함을 받는 근원과 행하는 권세에 대해 자신이 영적으로 자각하고 있다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비록 성경에 '겸손'이라고 하는 말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고 하여도 주님의 겸손하심이 성경에 드러나 있다고 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미 겸손이라고 하는 이 은혜가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을 버리신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이 우리의 전부가 되시도록 삶 전체를 그분께 내어 드리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우리는 하늘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땅에서는 인간이셨던 예수님에게서 완전한 복종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존귀와 영광을 오직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 18:14)라는 말씀이 자신에게 해당되는 말씀이라고 자주 가르치셨습니다. 성경에 기록된대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빌 2:8-9)을 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아버지와 자신과의 관계를 말씀하시면서 계속 자신을 가리켜 "아니요"(not, nothing)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음을 주의깊게 살펴보십시오. 그리스도와 자신의 관계를 "내가 아니요"(not I)라고 표현했던 바울의 표현은 사실은 예수님께서 자신과 아버지와의 관계를 가리켜 여러번 말씀하시던 표현이었습니다.

"아들이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나니"(요 5:19)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요 5:41)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요 6:38)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요 7:16)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로라"(요 7:28)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요 8:42)

"나는 내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나"(요 8:50)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라"(요 14:10)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요 14:24)

우리는 이러한 말씀들을 통해 예수님의 삶과 사역의 진정한 뿌리가 무엇인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위의 말씀들을 보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분의 위대한 능력의 구속의 역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이 말씀들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리스도의 마음이 어떠하셨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들은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셨고 지금도 교통하시는 구속의 본질과 생명력이 무엇인지를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아무것도 아니었고 오직 하나님만이 전부였습니다. 그리스도는 자신 안에서-그리스도 안에서-아버지께서 역사하시도록 그의 모든 의지와 능력을 전부 아버지께 내어 드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전 사역과 가르침을 통하여 자신의 능력과 의지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내가 한 것이 아니요,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 나는 아버지께서 역사하시도록 내 자신을 내어드렸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뜻에 따르고 복종하는 철저한 자기 부인만이 완전한 평화와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길이란 것을 아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드렸지만 결국 잃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의 겸손을 존귀하게 하사 그의 영광의 오른손으로 그리스도를 높이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낯추셨고, 항상 하나님이 그 앞에 계셨으므로 사람들 앞에서도 겸손할 수 있다는 사실을 또한 아셨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의 겸손이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께 자신을 복종하여, 주위의 사람들이 그에게 어떠한 태도를 보이더라도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시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이 더욱 영향력을 끼치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온 영과 뜻과 성품이 겸손으로 가득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이 은혜에 동참할 수 있는 자로 부르셨기 때문에 우리도 겸손의 은혜를 누릴 수가 있습니다.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며 단지 하나님께서 가득 채우시도록 비워져 있는 그릇일 뿐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구주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고 진정한 자기 부정인 것입니다. 또한 자신의 소욕은 어느 한 순간이라도 허용되어서는 안되며, 모든 소욕을 버리고 예수님께 늘 순응해야 합니다. 다시말하면 하나님이 전부가 되시도록 우리 스스로 우리 속에 무엇인가를 채우지 않고 아무것도 행치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진정한 겸손의 뿌리와 본질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겸손이 그렇게 피상적이고 무력한 것은 우리가 겸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함이요, 진정한 겸손을 찾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온유하고 겸손했는지를 배워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진정한 겸손이 어디에서 나며, 또 그 힘이 어디에서 나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진정한 겸손은 하나님께서 만유의 주로 우리 가운데 역사하신다는 것과, 우리가 하나님께 완전히 복종하고 의지해야 하는 것, 그리고 우리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생각하며 우리 임의대로 행치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아는 지식에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시고 나누어주신 그 생명은 우리의 죄와 우리 자아를 죽임으로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얻어지는 생명이 너무나 높은 곳에 있는 것이어서 우리가 다다를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오히려 그러한 이유 때문에 더욱 그 생명을 얻고자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안에 거하시는 분이 바로 온유하시고 겸손하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겸손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그 생명을 얻기를 원하신다면 만유의 주되시는 하나님의 본질에 관한 거룩한 지식의 비밀을 알고자 노력하십시오. 이 비밀은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지혜와 능력과 선하심을 나타내시도록 예수님께서 자신을 단지 빈 그릇으로, 통로로 내어드리는 바로 그 사실입니다. 이 일에는 모든 만물이 증인이며, 모든 사람 특히 하나님늬 모든 자녀들이 그 증인입니다. 모든 덕과 은혜의 근원, 그리고 모든 신앙과 진정한 예배의 근원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스스로 가진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은혜를 주시도록 겸손히 하나님께 머리를 숙여 경배 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겸손은 그가 하나님을 생각할 때 순간적으로 떠오른 일시적인 감정이 아니었습니다. 겸손은 그의 전 삶 속에 가득차 있던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가 아버지와 가졌던 관계와 마찬가지로 사람들 앞에서도 겸손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사랑하셨던 인간들을 위한 하나님의 종으로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예수님은 사람들의 종이었고,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랑의 역사를 이루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한번도 자신의 존귀하게 되는 것을 구하지 않으셨고, 그의 능력을 자신을 나타내기 위한 도구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하여 역사하시도록 삶을 내어드렸습니다.

형제여! 자매여! 당신은 겸손의 옷을 입으셨습니까? 당신의 매일 매일의 삶을 살펴 보십시오. 예수님께 물어보십시오. 친구들과 세상을 향해서도 물어 보십시오. 그리고당신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겸손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드리십시오. 이전까지 결코 맛보지 못했던 하늘의 축복이 겸손을 통하여 우리 안에 임할 것입니다.


제 4 장

예수님의 가르침에 나타난 겸손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

배우라"(마 11:29)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도리어 섬기려 하고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마 20:27-28)

우리는 이미 예수님의 삶에 나타난 겸손을 살펴 보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삶 속에서 그의 마음이 겸손으로 가득차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서 어떻게 겸손이 나타나는지를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을 잘 살펴보면 그는 사람들이, 특히 그의 제자들이 자신과 같이 겸손한 자가 되기를 얼마나 원하셨던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겸손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들을 단순히 인용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주의깊게 그 말씀들을 살펴 볼 것입니다. 이것은 그가 얼마나 자주 그리고 얼마나 간절하게 겸손에 관한 것들을 가르치셨는지 그 이유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 것들을 살펴보는 것이 겸손에 관한 그의 가르침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줄 것입니다.

1. 예수님의 사역이 어떻게 시작되는지를 살펴보십시오. 산상수훈 중 팔복에 관한 설교에서 그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3, 5)

하나님의 나라에 관해 처음 선포하신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문이 무엇인지를 밝히 알 수 있습니다.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천국은 주어지는 것이며, 또한 마음이 온유하여 자신의 욕심을 따라 아무것도 구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땅이 기업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축복은 자신을 낮추는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겸손은 이땅의 삶에서 뿐만 아니라 천국에서도 축복을 얻는 비결인 것입니다.

2.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 11:29)

예수님은 자신을 선생이라 칭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그에게서 배우고 본받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가르치신 것은 온유와 겸손이었습니다. 우리는 오직 온유와 겸손 가운데서우리 영혼의 참된 안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겸손은 우리에게 있어 진정한 구원의 요소인 것입니다.

3. 제자들은 천국에서 누가 가장 큰 자가 될 것인가를 놓고 심한 말다툼을 벌였습니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예수님께 묻기로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한 어린아이를 불러 그들 중에 세워 놓으시고 말씀하시기를, "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 18:3-4)고 하셨습니다. 천국에서 큰 자라 칭함을 받는 자의 특징은 과연 무엇일까요? 답은 오직 하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것입니다. 천국에서 얻는 가장 큰 영광과 천국에서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 그리고 은혜 중에 가장 놀라운 은혜는 바로 겸손입니다.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이가 가장 큰 자니라."(눅 9:48)

4. 세베대의 아들들이 예수님께 와서 천국에서 누가 주의 오른편과 왼편에 앉을 것인가를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이 아버지의 손에 달려 있으며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예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질문을 하거나 요구해서는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생각은 겸손의 세례를 받을 준비된 잔이 되어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겸손은 천국에서 오신 그리스도의 진정한 증표이며, 겸손은 천국에서도 우리의 영광을 재는 기준이 될 것입니다. 가장 겸손한 자가 하나님께 가장 가까운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교회 안에서는 겸손한 자가 가장 존귀한 자입니다.

5. 군중들과 제자들을 향해 바리새인들의 높은 지위를 탐하는 것에 관해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한 번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리라."(마 23:11)고 말씀하셨습니다. 겸손은 하나님 나라의 영광에 이르는 유일한 사닥다리입니다.

6. 또 다른 경우를 봅시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청함을 받아 가셨을 때, 상좌에 앉으려는 사람들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눅 14:1)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 14:11) 이밖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자신을 낮추는 것이 높임을 받는 비결입니다.

7. 바리새인들과 세리에 관한 비유를 말씀하신 예수님은 누가복음 18:14에서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성전에서 예배할 때나 하나님의 임재하심 앞에서 깊고 진실한 겸손을 충만치 못한 모든 것은 무가치한 것들입니다.

8.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요 13: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계명의 권위와 모범, 그리고 예수님의 모든 생각들과 순종하신 모습들을 볼 때 겸손은 제자도에 있어 가장 근본적인 요소임을 우리는 잘 알 수 있습니다.

9. 최후 만찬 석상에서조차 제자들은 누가 가장 큰 자인가의 문제를 놓고 다투었습니다.(눅 22:26-27)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라고 말씀하시며 그들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걸으신 길, 우리를 위하여 열어 놓으신 길은 겸손에 의한 길이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능력도 바로 겸손에 의한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기꺼이 모든 사람의 종이 되게 하는 것은 바로 겸손에 의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교회에서 겸손에 관한 설교를 거의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겸손을 삶으로 행하는 사람도 찾아보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자신에게 겸손이 부족함을 느끼고 하나님 앞에 통곡하는 자의 기도도 별로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왜일까요? 예수님의 겸손을 따르는 사람의 수가 적다고 하여 하는 말이 아닙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의 겸손을 배우고 따르기 위해 열심으로 기도하고 노력하는 사람조차 찾을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조차 겸손을 찾아 볼 수가 없음은 우리 모두가 안타까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너희 중에서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모든 성도가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알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신실한 청지기와 참된 종의 특징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신실한 종은 주인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헌신하며, 어떻게 하면 주인을 기쁘시게 할까를 깊이 생각을 합니다. 또한 신실한 종은 자신의 것이 아닌 주인의 번성함과 존귀, 행복을 즐거워 합니다. 언제나 그런 신실한 종들은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종이라는 이름은 곧 영광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으로 자신을 내어 드리는 것이 우리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가를 알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주님의 섬김으로 인해 우리에게 영적인 자유가 주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죄와 이기심으로부터의 자유가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겸손의 다른 면에 관하여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서로가 서로를 섬기도록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이 진리를 마음 속에 받아들일 때, 주님의 그 섬김의 능력이 우리의 삶 속에 축복의 영향력을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죄와 이기심으로부터의 새롭고 완전한 자유인 것입니다. 겸손으로 인한 자유는 처음에는 잘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안에 교만이 완전하게 뿌리 뽑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는 결코 아무것도 아니고, 그것은 곧 피조물의 영광이며, 예수님의 정신이며, 하늘의 기쁨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심지어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들조차 도 섬겨야 하는 섬김의 도를 전심으로 받아 들일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이러한 섬김의 도 위에 서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성화(sanctification)이고, 새로운 마음으로 겸손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공부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 22:27)라고 하는 예수님과 더불어 은혜를 나누고, 깊은 영적 교제를 나눈다면, 너무 낮은 자리라 하여 처하지 못할 자리는 없을 것이며, 또 아무리 머리를 굽히고 굽혀도 지나친 일이 아닐 것입니다.

형제여! 자매여! 여기 지극히 높은 영적인 삶에 이르는 길이 있습니다. 낮은 자의 자리에 거하십시오, 할 수만 있다면 더 낮은 자의 자리에 거하십시오! 이것이 예수님께서 천국에서 위대한 자가 되어 주님의 보좌의 우편과 좌편에 앉기를 원했던 그의 제자들에게 늘 하신 말씀입니다. 높아지고자 구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을 낮추고 겸손하여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종이 되고자 노력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함 분이십니다.

물이 낮은 곳으로 흘러가듯이, 우리가 자신을 낮추고 마음을 비운다면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과 능력을 우리 마음 속에 흘려 보내 주셔서 우리를 높이시고 축복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겸손해지고자 노력해야 하고, 그렇게 겸손한 자가 높아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입니다. 하난님께서는 놀라운 능력과 사랑으로 겸손한 자를 높이실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겸손과 온유가 우리에게서 고상함과 대담함, 그리고 남자다운 용기를 앗아갈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서는 겸손이 가장 고상한 성품임을 믿어야 합니다. 만일 겸손이야말로 천국의 왕이 보여준 하늘의 정신이며, 진정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일이라는 것을 올바로 이해하게 된다면 그들은 자신을 겸손케 하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고자 할 것입니다. 겸손은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기쁨과 영광으로 나아가는 길이며, 그분의 능력이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통로입니다.

온유하시고 겸손하셨던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이르는 길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겸손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할 때까지 그 말씀을 계속 묵상합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겸손입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약속해 보여 주신 것들을 반드시 우리에게 주신다고 하는 것과 자신의 성품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실 것을 믿읍시다. 온유하시며 겸손하신 예수님께서는 그와 같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자에게 들어와 거하실 것입니다.

제 5 장 예수님의 제자들에게서 보여지는 겸손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주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 것이니라"

(눅 22:26)

우리는 예수님의 인격과 가르침에 나타난 겸손을 공부했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이 택하여 세우신 열두명의 동역자들에게서 보여지는 겸손을 살펴 보도록 합시다. 겸손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제자들과 그리스도를 비교해 본다면 겸손이 어떠한 것인가를 더욱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고, 나아가 그들에게 있어 오순절 사건이 얼마나 놀라운 변화였는가를 분명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또한 사단이 인간에게 불어 넣은 교만에 대해 승리하신 그리스도의 완전하신 겸손에 우리도 실제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의 가르침을 인용하면서 제자들이 얼마나 겸손이라는 은혜를 누리지 못했음을 몇몇 기록을 통해 보았습니다. 한번은 그들이 그들 중에 누가 가장 큰 자인가 하고 말다툼을 벌였습니다. 그러는 중에 또 한번은 세베대의 아들들이 그들의 어머니와 함께 예수님께 나아와 장차 올 하나님의 나라에서 그들 중 하나는 우편에, 나머지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 달라고 청탁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후 최후의 만찬석상에서도 그들중 누가 과연 우두머리인가를 놓고 말다툼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주님 앞에서 항상 겸손함을 갖추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5:8)라고 고백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폭풍우가 치는 가운데서 주님 앞에 나와 엎드려 경배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가끔씩 보여지는 겸손의 모습들이 그들의 고질적인 습관들을 버리게 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들의 고질적인 습관이란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겸손에 관하여 제자들의 모습을 살펴보는 것은 겸손의 중요한 의미들을 우리에게 가져다 줄 것입니다.

첫째, 우리는 열정적이고 활동적으로 사역을 하지만 겸손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안타까운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에게는 늘 예수님 곁에 있고 싶은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하는 사실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믿었고, 그를 사랑했으며 그가 가르치는 모든 계명에 순종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떠날 때에도 그들만은 예수님을 떠나지 않고 함께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위해 죽을 각오도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모습들의 이면에는 그들 자신조차도 의식하지 못했던 어두움의 권세가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들 안에 자리잡고 있던 어두움의 권세는 구세주되신 예수님의 권능을 전파하기 위해 증인들이 되기 전에 제거되어야만 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은사들은 많지만 정작 겸손의 은혜가 결핍된 교수와 목회자, 사역자, 그리고 선교사와 교사들을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전달해주는 통로로 쓰임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시험이 닥쳐올 때 그들에게는 겸손의 은혜를 지키려는 노력이 미미해서 그 특징이 거의 보이지 않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이 겸손은 가장 중요하고 높은 은혜 가운데 하나라는 교훈을 확인시켜 줍니다.
겸손은 가장 얻기 어려운 것 중에 하나이고, 우선적으로 가장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 중에 하나이기도 합니다.
겸손은 성령님께서 충만하게 임재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하실 때에만 능력 가운데 얻을 수 있는 은혜인 것입니다.

둘째, 우리는 외적인 가르침과 개인적인 노력으로는 교만을 이길 수도 없으며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갖출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3년 동안 예수님의 학교에서 훈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가르친 가장 중요한 것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마 11:29)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겸손 뿐이라는 것을 처음에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바리새인과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 앞에서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써 놀라운 겸손으로 사셨을 뿐만 아니라 그의 삶의 깊은 비밀을 말씀하셨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막 10:45),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 22:27)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그들도 자신의 본을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당시에는 그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최후의 만찬석에서도 제자들 사이에는 그들 중 가장 큰 자가 누구인가에 관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확실히 그들은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굳게 다짐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헛수고였습니다.



겸손이란 무엇입니까?

겸손은 자신의 한계와 약점에 대한 인식을 키우고 그에 따라 일하는 사람에 의한 인간의 미덕입니다. 겸손은 자부심과 반대되는 가치입니다.

겸손의 의미는 어원 적 기원과 관련이 있습니다.
따라서이
단어는 라틴어 humilĭtas 에서 유래하며 , 이는 '육지'를 의미 하는 근원 부식 에서 유래합니다.
따라서 세 가지 감각이 나타납니다.

가치로서의 겸손,
사회 경제적 기원으로서의 겸손,
복종으로서의 겸손.

가치로서의 겸손

가치로서 겸손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사람의 질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각 사람이 "땅에서"올 때마다 동등한 존엄성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이 마지막 의미는 겸손을 겸허 의 미덕과 관련된 태도로 만듭니다 .

겸손은 경제적 또는 사회적 지위와 무관 한 인간의 자질이 될 수 있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누구보다 위나 아래에 있다고 주장하지는 않지만 모든 사람이 평등하며 모든 존재가 같은 정도의 존엄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겸손이 사람으로서의 존엄성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에 겸손하다는 것은 자신이 굴욕을 당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겸손의 가치는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됩니까?

예를 들어

다른 사람에게 실수를 인정하는 것은 겸손의 행위입니다. 겸손하게 행동하는 사람에게는 우월한 복합물이 없으며 다른 사람들의 성공과 업적을 끊임없이 상기시킬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주변 사람들을 짓밟 기 위해 그것들을 사용하는 것이 훨씬 적습니다.

겸손하게 일하는 사람은 자신의 행동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그는 발육, 오만 및 자부심을 거부하고 겸허, 절제 및 구속과 같은 가치를 행사하는 것을 선호합니다.

겸손의 특성

미덕으로서 겸손은 행동에 명백한 특성이 있습니다.
이러한 특성 중 일부는 다음과 같습니다.

모든 주제의 평등과 존엄성 이해; 일과 노력의 가치 평가; 자신의 미덕을 존중하면서 인식하기; 자신의 한계 인식하기;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기; 친밀감으로 표현하기; 겸손하고 단순하고 구속력있는 행동; 수평 적 관점에서 사회적 관계를 인식하기; 듣기 다른 사람들에게 의견을 고려하고 진정으로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십시오.

경제적 근원으로서의 겸손

가난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의 경제적 입장은 종종 겸손이라는 단어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겸손한 사람은 자원이 거의없고 번영 할 기회가없는 가정에서 온 사람입니다.

예를 들어, "Juan은 겸손한 원산지"라는 표현은 경제적 자원이 거의없는 가정에서 태어났다는 의미입니다.

복종으로서의 겸손

특정 상황에서 겸손은 더 높은 사례의 권위에 복종하거나 항복하는 사람의 태도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종교에서 복종은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과 그분의 뜻에 복종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겸손하게 행동한다는 것은 또한 수장이나 경찰 당국 앞에서 오만한 태도를 피하고 오히려 준수를 선택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서의 겸손

기독교 교리에 따르면, 겸손은 하느님 앞에서, 그분의 우월과 완전성 앞에서, 그리고 존재의 은혜를 주신 분이 그분이라는 것을 충분히 인식해야하는 선덕 한 태도입니다.

따라서, 기독교에서 겸손은 인생의 신비에 앞서 자신의 작은 것을 인식하고, 모든 인간의 동등한 존엄성을 받아들이고, 선하고 유쾌하며 완전한 것으로 인정 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서는 다음과 같이 조언합니다.

"베드로전서 5:5. 하나님은 교만에 저항하고 겸손에 은혜를 베푸시 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겸손을 베푸십시오 ."

그러므로 겸손은 인간이 하느님의 눈에 모두 동등하다는 것을 이해하도록 양심을 요구합니다. 사실, 그리스도교 교리에서 겸손의 가장 큰 예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성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당신 안에 하나님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을 하나님과 동등하게 생각하지 않고 대신 박탈하는 것으로 생각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있는이 느낌이 종의 형태를 취했습니다. 남자처럼되었습니다. 더욱이, 인간의 상태에있을 때, 그는 자신을 낮추고, 죽음에 순종하며,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했습니다. ” 빌립보서 2:5-8.






겸손은 절대적 진리를 부인하면서 자신의 생각이 절대 진리라고 아무도 말할 수 없다는 상대주의적 태도가 아닙니다.
그리고 인간 능력으로는 절대 진리를 알 수 없다고 회의하면서 아는 체하는 회의론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겸손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성경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베드로전서 5:5)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누가복음 14:11)

하나님은 겸손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 겸손은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에 대한 복종으로 시작합니다.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마태복음 10:24)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베드로전서 5:6)

2. 겸손은 예수님이 받으신 것보다 더 나은 대접을 받으려 하지 않습니다.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마태복음 10:25)

그러므로 겸손은 악을 악으로 갚지 않습니다.
이것은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누리는 삶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 . .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베드로전서 2:21-23)

3. 겸손은 진리를 주장합니다.

하지만 논쟁을 좌지우지하거나 논쟁에서 이김으로써 자아를 자랑하려고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에 대한 섬김과 상대방에 대한 사랑으로 진리를 주장합니다.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고린도전서 13:6)
내가[예수]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 . . 두려워하지 말라. (마태복음 10:27-28)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고린도후서 4:5)

4. 겸손은 모든 지식과 믿음이 은혜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압니다.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고린도전서 4:7)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야고보서 1:21)

5. 겸손은 실수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비판을 수용하고 이를 통해 배웁니다.

그러나 또한 하나님이 인간에게 신념을 허용하셨고 때로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기 원하신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고린도전서 13:12)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 (잠언 12:15)
우리는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들을 권면하거니와. (고린도후서 5:11)

6. 겸손은 우리 삶이 수증기와 같으며, 하나님이 우리 죽음의 때를 결정하고, 우리의 모든 업적을 주관한다는 것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야고보서 4:13-16)

1908년에 영국의 작가 G.K. 체스터톤은 오늘날에는 완전히 그 모습을 다 드러내고 있는 미숙한 문화 포스트모더니즘이 태동하기 시작하는 모습을 목격하고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천박한 상대주의"(마이클 노박의 표현을 빌리자면)의 한 표징은 인간의 확신에 대해 "오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매도하고 인간의 의심에 대해서는 "겸손"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다는 것입니다.

체스터톤은 이러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습니다.

오늘날 겸손이 잘못된 위치에 자리하게 되었다.
이는 참으로 불행스러운 일이다.
겸손은 더이상 야망 혹은 야심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사용되지 않는다.
이제 겸손은 확신에 반대되는 개념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어 버렸다.
전에는 결코 그러하지 아니하였다.
인간은 자신에 대해서는 의심해야 하지만 진리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되었었다.
하지만이제는 정확히 그 반대로 되어버렸다.
오늘날 인간은 자신이 확신하지 말하야 하는 부분 - 자기 자신- 에 대해서는 확신을 가진다.
그리고 그가 분명히 의심하지 말아야 하는 부분 - 하나님의 이성(신적 이성) 등 - 에 대해서는 의심한다.
오늘날의 시대에 새롭게 등장한 회의론자들은 너무나 겸손해서 그가 무언가를 배울 수 있는지조차 의심한다...우리 시대의 전형적인 겸손이 있는데, 고행을 통해 덕을 쌓으려는 격렬한 노력보다 실제로 더 독성이 강한 겸손이 되어 버렸다. 예전의 겸손은 인간이 자신의 노력에 대해 의심하게 만들어 그 사람으로 하여금 더욱 열심히 하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새로운 겸손은 인간이 자신의 목표에 대해 의심하게 만들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전혀 일하지 않게 만든다... 우리는 정신적으로 너무 겸손해서 구구단을 믿지 못하는 인간들을 만들어내는 길 위에 서 있다. (Orthodoxy [Garden City, NY: Doubleday and Co., 1957], pp. 31-32)

우리는 가장 최근에 이러한 겸손을 목격한 바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구원받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확신을 표현하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사람들의 분노에서 그러한 겸손의 실상을 목도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이런 확신에 대한 세상의 가장 일반적인 반응은 바로 그리스도인들은 거만하다는 것입니다. 현대 시대의 겸손은 절대로 "불이야!" 라고 외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연기가 세탁 건조기에서 나오는 수증기일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만약 겸손이 미숙한 회의론의 상대주의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렇다면 겸손은 과연 무엇일까요? 이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베드로전서 5:5),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누가복음 14:11) 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겸손에 대해 적어도 다섯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1. 겸손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아래에 자신을 종속시키는 느낌으로 시작됩니다.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마태복음 10:24).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베드로전서 5:6).

2. 겸손은 예수님께서 누리셨던 것보다 더 나은 대접을 바라는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마태복음 10:25). 그러므로 겸손함은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지된 권리에 바탕을 둔 삶이 아닙니다. "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베드로전서 2:21-23)

3. 겸손은 논쟁을 주도하거나 논쟁에서 이기는 것으로 자아를 높히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섬기며 상대방을 사랑하기 위해 진리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고린도전서 13:6). "내가 [예수님]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두려워하지 말고" (마태복음 10:27-28).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고린도전서 4:5).

4. 겸손은 모든 아는 것과 믿는 것을 위하여 은혜에 의존하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고린도전서 4:7). "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in humility) 받으라" (야고보서 1:21).

5. 겸손은 자신이 틀릴 수도 있음을 알고, 비판을 고려하고 그로부터 배웁니다;

그러나 또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확신을 허락해 주신 것과 다른 이들을 설득하도록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고린도전서 13:12).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 (잠언 12:15). "우리는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들을 권면하거니와" (고린도후서 5:11).



포대 만드는 사람(희랍의 민화)
그리스 민담

  1. “다리 위에 놓고 올 수가 없어서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글쎄, 포대 만드는 사람이 다리에 가까이 오더니 ‘지난 수년 동안은 눈을 뜬 채 이 다리를 건넜으니 오늘 한 번만은 눈을 감고 건너봐야겠군’이라고 말하면서 눈을 감고 다리를 건너는 바람에 이 자루를 보지 못하고 건넜답니다. 그리고 발을 헛디딜 뻔하기도 했답니다.”

    “아이고, 저 못난 사람을 어쩌면 좋은가! 정말로 들어오는 복도 제대로 못 받고 발로 걷어차는구먼!”

    다음 날이 되자 왕은 포대 만드는 사람을 불러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 너는 어째서 그렇게도 생각이 없느냐! 잘난 척하고 떡과 거위를 팔아먹었으니 너는 그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몰랐을 것이다. 내가 너를 부자로 만들어주려고 그 속을 금화로 가득 채워놓았었다. 그리고 이 바보 같은 녀석아, 어제는 또 왜 눈을 감고 다리를 건너서 내가 너를 위해 놓아둔 금화가 든 돈 자루도 못 보고 지나갔단 말이냐?”

    “임금님, 제 잘못이 아닙니다. 제 운명이 그런 것을 어찌합니까?”

    그 다음에 왕은 사람을 시켜 음식점 주인을 불러오게 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쁜 놈 같으니라고! 너는 어째서 이 사람에게 그렇게 못되게 굴었느냐? 떡과 거위에 금화가 든 것을 알았으면 적어도 그중 반은 포대 만드는 사람에게 돌려주지 않고 더러운 음식과 마른 빵만 주어 보냈느냐? 당장 돌아가서 한 푼도 빠짐없이 금화를 전부 이리 가지고 오너라. 그 금화는 내가 저 사람에게 보낸 것이다.”

    음식점 주인은 집으로 가서 금화를 가지고 왔습니다. 왕은 그 금화를 포대 만드는 사람에게 주면서 말했습니다.

    “너 스스로가 네 운명의 샘을 막았고 나는 너 몰래 막힌 샘을 뚫어주려고 했다. 그러나 너의 어리석음 때문에 그마저 할 수가 없었다. 자, 이제 이 금화를 받아 가지고 편안하게 살면서 그 노래만은 더 이상 부르지 않도록 해라.”

    포대 만드는 사람은 왕에게서 금화를 받아 그 돈을 밑천으로 후에 장사꾼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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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마을에 밀가루 포대를 만드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매일 똑같은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의 가사는 아주 단순하여 "내가 막아버렸지!" 라고 하였다.
하루는 임금님이 그 가게에 들어가서 묻기를 "왜 자네는 항상 같은 노래만 부르는가?"
그러자 그 포대 만드는 사람은 "예, 그것은 제가 너무 가난하여 날마다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왜 나는 이렇게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려달라고 기도했지요. 그런데 어느 날 밤에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 하나님이 인도하는 아주 넓은 광야로 나갔는데 그 광야에는 수 많은 샘물들이 솟아나고 있었지요. 그런데 샘물 앞에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있었습니다. 내 이름이 적힌 샘물을 찾았는데 내 샘에서는 물이 조금씩 솟아나고 있었습니다. 나는 샘물의 구멍을 넓게 뚫어주면 샘물이 많이 솟아날 것이라 생각하고 주위에 긴 장대를 가져다가 샘물을 마구 쑤셨습니다. 그러자 처음에는 샘물이 솟구치더니 그 다음에는 아예 물이 솟아오르지 않았지요. 천사가 말하기를 샘물이 솟아나는만큼 세상에서 재물을 얻는다고 합니다. 결국 내가 내 샘물을 막아버렸기에 내 신세 한탄을 하며 이런 노래를 부릅니다."

어진 임금님은 포대만드는 사람에게 신하를 시켜  그 날 저녁 빵 한 덩어리를 보냈습니다.
궁궐에서 보낸 떡을 받은 포대만드는 사람은 우리 식구가 다섯 명인데 떡 한덩어리로는 끼니를 채울 수 없다는 생각에 근처 제과점을 찾아가서 궁궐에서 임금님이 보낸 빵인데 이 빵을 받고 마른 빵을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자 빵집 주인은 한 바구니의 빵을 주었습니다.

그 다음 날 임금님이 그 가에 앞을 지나는데 여전히 같은 노래를 부릅니다.
이상하구나!
아직도 부족한가?

그 다음에는 거위요리를 접시에 담아 보냈습니다.
일을 마치고 좁은 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그 다리 위에 금화를 담은 자루를 놓아두고 기다렸습니다.
그러자 포대만드는 사람은 몇 십년을 건넜던 다리인데 눈을 감고 건너야지 하며 눈을 감고 다리를 건너가므로 금화를 담은 자루를 신하가 다시 궁궐로 가져왔습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

중종조의 명신으로 성격이 온건 겸허했고 특별히 청백리로 유명했던 반석평(潘碩枰 1472-1540)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원래 남의 집 종으로 태어난 사람이다.
인간이로되 인간 취급을 못받으며 살도록 운명지어진 사람이란 말이다.
그러나 그는 세상 만 사람이 자기를 멸시하고 짓밟는다할지라도 자기 자신은 기어이 스스로를 키워야한다고 결심하고 어려서부터 악착스럽게 자신의 인격적인 성장과 학문적인 성장을 위하여 남모르는 수고를 거듭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에게 새 삶의 기회를 주시는 분이시다.
문자 그대로 주경야독으로 모든 것을 극복해 가면서 익힌 그의 실력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된 주인 이 참판아무 조건없이 그의 종 문서를 불태워 종의 신분에서 해방시켜 주면서 아들없고 재산 없는 어느 양반집 수양아들이 되도록 주선해 주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예전엔 감히 엄두조차 낼 수 없었던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고 그 결과 그는 당당하게 급제하여 출세가도를 달리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형조판서로까지 승진했다.

어느날이다.
그가 한양 거리를 지나다가 옛 주인 이 참판의 아들 이오성(李五成)이 거지 몰골을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즉시 그 사람에게 큰 절을 하며
"어르신 저를 몰라모시겠습니까? 저는 당신의 종 반석평이라는 놈이올시다"라고 했다.
백주 대낮 한양 대로에서 형조판서 대감이 거지같은 사람앞에 넙죽엎드려 이런 말을 하고 있으니 어찌 예사로운 일이겠는가?

그당시 관례에 의하면 자기의 옛 신분을 밝힌다는 것은 곧 지금까지의 피 눈물로 샇아올린 자기의 모든 특권을 박탈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뿐만아니라 그는 기군망상(欺君罔上)했다는 죄명을 뒤집어쓰고 온갖 고초를 겪어야 하고 아울러 즉각 옛날의 신분으로 환원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어찌 그만한 사리를 모를 사람인가?
그러나 그는 모든 것 이전에 은혜부터 갚아야한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뒷날 이 엄청난 반 대감의 인격에 감동한 고관들의 주선과 임금의 특별한 배려로 그의 사표는 반려되었고 오히려 그가 추천한 이 오성이 사옹원 별좌라는 벼슬을 얻게 되었다는 미담이 우리 역사 속에 기록되어 있다.

어떻한 상황에 처해서도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자기를 애써 키우며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 받은 바 은헤에 보답하기 위하여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는 그의 삶과 인격을 통하여 우리는 에수님에게서 느낄 수 있는 멋진 영적 향취를 맡을 수 있다.

* 반석평(潘碩枰, 1472년 ~ 1540년 6월 24일)
조선의 문신이다.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공문(公文), 호는 송애(松厓)이다.
1507년(중종 2년) 문과에 급제하여 충청도관찰사, 공조판서, 한성부판윤, 형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장절(壯節)이다.


가두리 꿩사냥 (은혜. 사랑)

수꿩은 어느 한 산에 한 마리 밖에 살지 않는다. 일부다처이긴 하지만 자신이 행세하는 영역 밖에 사는 남의 각시 꿩들을 넘보거나 추파를 던지는 법이 없다. 이렇게 남녀유별하다 하여 시어(詩語)에서 꿩을 덕조(德鳥)라 곧잘 읊었던 것이다.
만약 바람기 있는 암컷이 옆산의 남의 서방 꿩에 추파를 던지는 일이 있으면 수놈끼리 피투성이의 결투를 벌인다. 어느 한쪽이 죽거나 두 마리 다 죽거나 하는 사생 결단이지, 약세라 하여 도중에 도망치거나 하는 법이 없다 한다.
옛날 무신들이 머리에 꿩깃을 꽂고 다닌 이유는 바로 사생 결단하는 수꿩의 용기를 숭상하고 본뜨기 위한 것이라 한다. 또한 자신이 활동하고 지배하는 영역을 보호 사수하는 영역 감각이 대단한 속성도 무신이 꿩깃을 꽂고 다니게 한 요인이라고도 한다. 옛 병법에 보면 수꿩이 지배하는 영역 그대로를 요새화하면 난공불락이라 하여 치성(雉城)들을 많이 쌓고 있기도 하다.
꿩이 우리 한국인의 인상에 좋게 아로새겨진 데는 그 밖에 강인한 모성애 때문이기도 하다.
산불 속에서 제 새끼가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으면 그를 구하러 날아들어 타 죽거나 알을 품고 있는 중에 산불이 나면 불에 타 죽을지언정 날아가지 않는다는 것은 알려진 꿩의 습성인 것이다.
뿐만 아니다. 은혜를 입으면 보은한다는 새로도 알려져 있다. 구렁이한테 감겨 죽어가고 있던 꿩을 살려준 한 서생에게 그 꿩이 죽음으로써 보은한 설화에서 치악산(稚岳山)이란 산 이름과 상원사(上院寺)가 연기(緣起)되고 있다.
그런 꿩을 가로 세로 겨우 7-8 미터 남짓한 방에 가두어놓고 석궁을 쏘아 살생하는 가두리 꿩사냥이 성행하고 있다 한다.
장마가 지면 길에 나다니는 벌레를 밟더라도 죽이지 않게 하고자 오합혜(五合鞋)라는 느슨하게 삼은 짚신을 신고 나들이했던 우리 선조요, 피를 빠는 이를 잡더라도 죽이지 않고 보살통(菩薩筒)이라는 대통에 담아 나뭇가지에 매어두었을 만큼 살생에서 초연한 조상들이었다. 그 후손들의 동물 학대가 이 지경에 이르고 보니 충격이 더 크다. 짐승을 가두어 놓고 쏘는 가두리 사냥을 한 사람은 아마도 우리 역사에서 연산군 밖에 없었을 것이다.
당시 사냥을 삼가하길 상소하는 소문에 보면, 짐승은 가두어 놓고 쏘지 않으며, 불을 지르거나 물을 등지게 하고서 몰지 않으며, 새끼와 더불어 있으면 쏘지 않으며, 쫓겨가다가 지쳐 도망치기를 멎고 돌아보고 서 있으면 쏘지 않으며, 떼지어 있으면 놀라게 하여 분산시킨 다음 한 마리만 쫓는 것이 엽도(獵道)라고 했으니 너무나 인간적인 사냥 정신이 우리에게 계승돼 있음을 알 수 있다. 한데도 하필이면 온 세상이 자연 환경과 동식물 보호에 눈을 벌겋게 뜨고 있는 이 시점에 그 못된 짓을 자행하다니 말이다.

배은망덕(背恩忘德)

날씸한 몸매를 자랑하는 방아깨비는 유난히 벗겨져 있고 고지새라는 새는 별나게 심술 궂은 부리를 지니고 있다.한편 개미의 허리는 끊어질 듯이 잘록하지 않은가?서로 아무런 상관도 없을 것 같은 이들의 모습을 연관지어 엮어 낸 전래의 고담 하나가 있다.
한 여름 내내 일만 하고 있는 개미가 불쌍하다고 생각한 동물이 있다. 방아깨비와 물가에서 물고기 잡아 먹고 사는 고지새가 바로 그들이다 그들은 개미를 꼬드겨 여름철의 낭만을 함께 즐겨보자고 유혹한다.
남의 호의를 너무 무시하는 것도 옳은 일은 아닌 것 같아 개미가 흔쾌히 승락하고 함께 즐길 요량으로신나게 물가로 달려 갔다.
경망스러운 방아깨비가 선뜻 나서며 자기가 우선 솜씨를 보여 고기 한마리를 멋있게 잡아ㅗ겠노라고 큰소리치더니 첨벙 물속으로 뛰어 든다.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큼직한 메기가 입을 벌려 삼켜버리는 것이 아닌가?
친구가 순간적으로 물고기 밥이 되고 말았으니 남아있는 둘의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개미는 발만 구르고 안타까와 하는데 고지새는 메기를 찾아 천벙지축 날뛰더니 마침내 놈을 찾은 모양이다.
잽사개 물속으로 뛰어들어 순건적으로 메기를 물고 나오는 것이 아닌가?
시간을 지체하면 친구가 죽는다.
고지새는 급히 그 예리한 부리로 메기의 배를 갈라 방아깨비를 구출한다. 여부없이 요나 신세가 된 방아깨비는 메기 뱃속에서 나오면서 어깨를 으쓱하더니
" 야, 내가 잡은 물고기 좀 좌 크지?이 녀석 잡느라고 놈의 뱃속에 들어가 땀을 꽤나 흘렸지"라고 말한다.
친구를 구하기 위하여 필사의 노력을 기울였던 고지새는 너무 어이가 없다.
[은혜를 베풀적엔 그 은혜를 구하지 말라]는 식의 교훈은 아예 들어 본 적이 엇는 고지새가 아니던가? 메기를 제가 잡았노라고 기고 만장한 상대를 보고 어찌 그 입이 튀어나오지 않겠는가?
터무니 없는 자랑을 계속하는 방아깨비의 엄행과 묘한 앙상불을 이루는 고지새의 입술이 어찌나 우스운지 개미는 웃고 또 웃다가 허리가 끊어질 지경에 이르렀다.
어울러 고지새의 튀어나온 부리는 그대로 귿어 버렸는데 하나님은 남의 공을 제것이라고 설치는 공짜 근성의 얌체 방아깨비가 하도 얄미워서 그 이마를 홀랑 벗겨 버리고 말았다는 이야기다.

받은 은혜 때문에

중국 춘추 전국시대를 대표할만한 영웅으로 오자서(俉子胥,B.C.? -485)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초나라 평왕의 충신으로 못난왕과 간신의 흉계에걸려 목숨을 잃은 오사(俉奢)의 둘째아들이다.
이에 평왕은 자서마저 죽이기 위하여 그를 잡아주는 사람에게는 5만석의 곳식을 주고 오늘날 장관에 해당하는 상대부 벼슬을 주겠다고 선언했다.
이런 오자서가 요행으로 소관이라는 국경 검문소를 벗어나려면 눈앞에 놓인 강을 무사히 건널수가 있었다.
갈대밭이 숨어서 물안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그는 한 어부의 도움으로 강을 무사히 건널수가 있었다.
자서는 자기의 생명을 구해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차고 있던 전가의 보도를 그 노인에게 끌러 주었다.
어부는 한사코 받기를 거절하면서 내 듣건데 당신을 잡아 바치면 초나라 임금이 5만석의 곡식과 상대부의 벼슬을 준다고 합디다.
그 엄청난 상급도 초개같이 여기고 당신을 도망시켜 주었는데 어찌 이따의 칼을 받겠소라고 말한다.
자서가 어옹을 떠나면서 만약 뒤쫓아 오는 군사가 있거들랑 이몸의 종적을 누설하지 말아주시오 한마디 당부를 했다.
이 말을 들은 어부는 난 순수한 마음으로 그대를 구했는데 그대는 아직 나를 믿지 못하니 그대가 붙들리면 당장 나를 의심하지 않겠소?
내 당장 이 자리에서 당신의 의심을 풀어 주리다 하더니 곧장 물속으로 뛰어들어가 죽어버리고 말았다.

뒷날의 일이다.
자서는 오나라의 왕 함려에게 발탁되어 초나라를 쑥밭으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깨끗히 복수한다.
이어서 그는 망명생활을 할 때 자기를 괴롭힌 정나라마저 징벌하기위하여 군대를 그리로 향했다.
약소국 정나라로써는 국가 존망의 위기를 당한것이다.
이에 정나라 왕은 만알 오자서를 자기 나라에서 물러가게 한다면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그 사람과 함께 나라를 다스리겠노라고 선언했다.

어느 날이었다.
정나라에 초라한 어부 한사람이 자기가 오자서의 군대를 돌아가게 하겠노라고 나섰다.
예날 악저땅에서 오자서를 구출해 주고 죽은 그 노인의 아들이었다.
그는 오자서를 찾아가 지난날의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를 봐서라도 정나라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사정했다.
이에 남다른 의리의 사나이 오자서는 즉각 군사를 거느리고 정나라에서 철수했고 그 노인의 아들은 사방 백리의 땅의 주인이되어 살았다고 하는 중국 고사가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사죄의 은혜를 주님으로부터 받았다.
그런데 바로 그 사람들이 어찌된 일인지 자기들에게 잘못을 범한 사람들을 용서하는 일에는 지극히 인색하지 않은가?

성경은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라."(골 3:13)

주인을 위해 은혜를 베푼 사나이

중국 전국시대의 사람이다.
제나라 맹상군은 후세사람들로부터 멋진 인생을 산 사람으로 널리 공인받고 있다.

이조시대의 고가사로 맹상군가라는 것이 있다.
거기  "천추전 존귀키야 맹상군만 하랴마는..." 이라는 구절이 등장할만큼 만복을 두루 갖춘 사람이란 말이다.
이런 맹상군도 자기가 거느린 3,000명의 식객을 치다꺼리하기가 무척이나 힘들었던 모양이다.
당면한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고민하던 그는 이 문제의 타개책으로 자기의 식량이 나오는 설(薛)지방 사람들로 부터당연히 받아야 할 권리가 있는 돈을 받아야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이 일을 풍환이라는 종에게 맡겼다.

맹상군의 명을 받고 출발하기에 앞서 풍환은 사명을 완수하고 돌아올 때 사가지고 올만한 것이 없는가를 맹상군에게 물었다.
이때 맹상군은 집안에 없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상관이 없다고 했다.

목적지에 도착한 풍환이 주임에게 빚진 사람들의 생활을 살펴보니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에 풍환은 맹상군의 이름으로 그들의 빚을 모조리 탕감해 주고 말았다.
빈손으로 돌아온 풍환을 보고 화가난 맹상군이 불쾌한 표정으로 힐책을 하는데 풍환은 태연하게 말했다.

"제가 목적지에 도착하여 그 사람들에게 돈을 받으면 무엇을 사가지고 돌아올까 궁리해 보니 이 집에 없는 것이라곤 오직 의 하나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의를 구하다 보니 결국 불쌍한 사람들의 빚을 다 탕감해 주게 된 것입니다. 결국 저는 만금을 주고 정의를 사가지고 왔으니 주인을 위해서는 이보다 더 잘한일이 없다고 믿습니다." 라고 넉살좋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 일이 있은지 얼마후 맹상군은제나라왕의 미움을 사서 정승자리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3천명의 식객들은 자신들의 보신을 위하여 뿔뿔히 흩어졌고 그는 결국 자기 몸뚱아리 하나 안심하고 맡길만한 곳이 없는 처량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때 풍환은 주인을 설지방으로 인도했다.
맹상군은 거기서 의외의 환대를 받았고 아울러 설지방을 근거지로 하여 다시 멋지게 기사회생함으로써 그의 진면목을 온 천하에 과시하게 되었다.

마태복음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억지로 의를 사서 누렸던 맹상군의 복보다 더 엄청난 복을 하나님으로 부터 받아 누릴 수 있음을 말슴하고 있다.

기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지름 길

의학공부를 하는 한 미국의 여대생이 있었다.
대학 3학년 때 우연히 마약과 접하게 되었다.
그래서 피곤할 때 마다 마약을 복용하곤 했는데 나중엔 그것이 습관이 되어 버렸다.
인턴 과정, 레지던트 과정을 거쳐서 의사로 일하면서도 매일 마약을 복용했다.
그것을 복용하지 않으면 환자를 진료할 수 없을 정도가 되어 버린 것이다.
나중에 그 사실이 직장 동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할 수 없이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는데 마약을 살 수 없는 가난뱅이가 되어버리자 절망에 빠지게 되었다.
그래서 자신의 의지로 마약을 끊어보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다했지만 허사였다.

그러던 어느 날 비오는 날 저녁에 자살을 결심하고 비를 잔뜩 맞으면서 뚝 옆의 저수지로 나아갔다.
뚝 위에 올라서서 여태껏 한번도 불러본 적이 없는 하나님을 향해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오! 하나님,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나를 구해 주시옵소서.

비를 맞으면서 아주 간절하게 뜨겁게 기도를 했다.
그런데 갑자기 머리위가 뜨거워지면서 전신에 그 뜨거움이 전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양 어깨를 짓누르고 있던 무거운 짐을 누군가가 양 손으로 거두어 가는 느낌을 받았다.
순간 그녀는 날듯이 가벼워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하나님을 찬양하고 자살할려는 마음을 돌이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는 그 후로 깨끗이 마약을 끊어버렸고 지금은 마약과 알콜 중독으로 삶을 포기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고 있다고 한다.

옛것을 완전히 벗어 버리는 일은 내 의지로 할 수 없고 오직 성령의 도우심으로만이 가능하다.
그 도우심을 얻기 위해서는 기도하는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주께서 나를 쓰시고 계심이 가장 큰 은혜이다

내 육신에 근거한 이기주의 때문에 대가 지불하기를 거절하는 사람들에게는 주께서는 이렇게 경고하신다.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었으면 무엇으로 짜게하리요 땅에도 거름에도 쓸데없어 내어 버리느니라.(눅 14:34-35)

자신이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사실보다 더 큰 비극이 어디 있겠는가?
어느 부인이 있었는데 그녀는 거의 정신병원에 입원해야 할 정도로 정신적으로 상처를 아주 심하게 입은 상태였다.
그런데 그 부인이 그렇게 된 이유가 있었다.
남편과 참 의가 좋았는데 어느날 부부 싸움을 하다가 남편이 대드는 부인을 보고 화가나서 무심코 한 말이 이유였다.
그말은 바로 "너 같은 사람은 아무 쓸모짝에도 없어"였다.
그래서 미치기 시작한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고 계신다.
그런데 어느날 내가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고 그 앞에서 둔감한 존재가 되어 그분의 소리에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는 자가 된다면 하나님께서는 "나는 더 이상 너를 사용할 수 없다"고 선언하신다.

하나님께 더 이상 쓸모 없는 자가 된다 것,이것이 우리에게 두려움이 돼야 한다.

사람들은 나를 공부 많이 한 사람으로 인생의 길에서 비교적 성공한 사람으로 평가할지는 모르나 나를 만드신 하나님께서 나를 향해
"너는 더 이상 나를 위해 필요한 존재가 아니다. 너는 나에게 쓸모 없는 사람이다"라고 하신다면 얼마나 큰 비극인가?

우리는 구원 받은 백성이기에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사랑의 댓가를 치르기를 거절해서도 안되고 두려워해서도 안된다.
주께서 나를 쓰시고 계심이 가장 큰 은혜임을 명심하자.

하나님의 보상

초기 영국의 케스, 교단에서 가장 위대한 성경 교사들 중의 하나였던 웹피플이라는 성직자는 젊은이였을 때 해변에 갔다가 그가 극진히 사랑하는 자녀들 중의 하나를 갑자기 잃었다.

장례식에서 돌아오자 이 충격을 받은 아버지는 서재에서 무릎을 꿇고 이 슬픔의 시간에 하나님의 은혜가 족하게 해주실 것을 간구하였다. 그러나 아무런 위로가 마음에 찾아오지 않았으며 계속 눈물을 흘렸다. 하나님의 말씀조차 그에게 아무 소식을 전해주지 않았다.

얼마가 지난 후 벽난로 위에 길게 내려진 이 말씀을 맺힌 눈물을 통해서 다시 읽었다.
처음으로 그는 대문자로 인쇄된 한 단어를 주목하게 되었다.
“족하다(is sufficient)"그는 성별된 눈으로 읽었다.
그리고 외쳤다.

“주여, 나를 용서하소서.
나는 당신의 은혜가 내게 족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당신은 언제나 내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셨읍니다.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나는 족한 은혜를 인하여 당신께 감사드리며 그것을 이제 1제 것으로 삼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적절할 뿐만 아니라 필요한 때를 위해 유용하다.
우리는 은혜를 구할 필요가 없다.
은혜는 이미 주어졌으며 우리가 받아들일 때에 머물게 된다.
이 언급이 얼마나 웅대하며 그 범위가 얼마나 넓은가!

실패한 결혼, 마음에 들지 않는 직장, 무정한 가정, 육체의 연약함과 고통, 선교 생활의 압박감, 압도해 오는 비애 중에도 은혜는 족하다.

우리의 무능력이 하나님의 족한 은혜를 붙들게 하는 원인이 된다면 이는 위장된 축복들인 것이다.

손때 묻은 벽돌 한장

레이몬드 릴리라는 난폭하고 악한 흑인 청년이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목사는 거치장스럽고 꼴보기 싫은 존재이기에 목사를 때려 죽이겠다는 결심을 하고 벽돌을 한장 싸들고 교회에 들어갔다.
목사는 그것도 모르고 열심히 설교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성령은 말씀을 통하여 릴리 청년의 마음을 다루시는 것이었다.
드디어 벽돌로 목사의 머리를 치겠다고 들어간 그는 그것으로 자기의 마음을 치게 되었고 그 자리가 릴리 청년이 거듭나서 하나님을 발견한 놀라운 은혜의 자리가 되었다.

수년 후에 세계의 최대 자선병원인 시카고의 쿡크 카운티병원에는 가난한 가운데 질병에 시달리거나 죽어가는 수천의 사람들을 헌신적으로 돌보는 목사가 한명 있게 되었다.

이 흑인이야말로 '선한 사마리아의 흑인 릴리 목사'로 불리운 과거의 릴리 청년이었던 것이다.

릴리 목사가 하늘 나라에 간 장례식의 예배당에는 손때가 묻은 벽돌 한장이 전시되어 보는 사람마다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고 한다.
괴롭건 즐겁건 어느 때나 자기와 같은 살인자를 구원하시고 은혜 주신 것이 너무나 고마워, 레이몬드 릴리가 밤마다 어루만지며 그 위에 눈물을 떨어뜨리며 붙들고 기도하던 그 벽돌이었던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안락의자에 앉아서 애독하는 잡지를 펼쳐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는다고 가정합시다.
한창 흥미가 절정에 달해 있는데, 그만 “다음 호에 계속”이란 문구가 나오면 얼마나 안타깝고 실망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다음 호에 계속”이란 말이 큰 기쁨을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그 예입니다.

스펄젼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주님의 자비와 사랑이 계속되고, 또 계속된다는 것을 기억하면 마음에 얼마나 큰 위로가 될까?
오랜 순례의 생활을 통해 경험한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은 이제 거의 다 쓰여진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는 끝없이 엮어진 줄과 같고, 끝을 모르는 강물과 같고, 끝없이 돌아가는 바퀴와 같고, 영원한 별빛과 같다.
옛날 베들레헴 아기 예수에게 비쳤던 별이 그때로 없어진 것이 아니고, 미래에 언젠가는 우리를 주님께 인도할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책으로 기록한다면, 그것은 속편이 끝없이 나오는 만년 연재물에 해당되는 것이다.”

크리스챤 생활이 재미있는 것은, 날이 갈수록 새로운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과거에 경험했습니까?
다음에도 계속될 것입니다.
구원의 축복을 경험했습니까?
다음에도 계속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도 다음에 계속될 것입니다.

또 큰 위로가 되는 것은, 심령에 고통을 주는 것들은 이번 호에서 끝나고, 다음 호에는 계속 안된다는 것입니다.

어느 찬송 시인이 쓴 대로 “점차로 영광만이”남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늘의 광휘를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영원이 있습니다.
하늘의 광채들은 “다음 호에 계속”될 것입니다.

값싼 은혜

독일의 신학자인 본 훼퍼는 당시 독일 교회의 연약해진 원인과 독일 교회의 능력과 사회를 향한 영향력의 상실 원인을 말하면서
이는 교회가 .값싼 은혜, 개념에 집착해 있었기 때문이다”고 했습니다.

본 훼퍼는 '값싼 은혜'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회개 없는 용서.
삶을 바꾸지 않고 용서만 가르치는 것, 고백이 없는 세례, 참된 신앙의 고백이 없이 의식에만 참여하려는 것, 교제가 없는 성찬, 하나님과 나 사이의 진정한 교제는 강조되지 않고 성찬이라는 형식만 강조되는 것, 십자가 없는 은혜, 희생이 없는 제자도, 그리스도를 따라가기를 원하고 축복 받기를 원하지만 희생을 거부하고 있는 성도들, 생활이 없는 그리스도, 삶이 없는 그리스도, 이것이 바로 값싼 은혜이다”고 그는 비판했습니다.

“그날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이것은 행위로 구원받는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반드시 행함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 앞에 자신을 점검합시다.

나의 생활 속에 이런 행함이 있습니까?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삼았다면 참으로 내 삶 속에 이러한 행위가 나타나고 있습니까?
나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가?
누가 나에게 어떠한 신앙 사상을 가져와서 나를 미혹하거든 우리는 이 말씀을 가지고 그들을 점검해야 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가?


주여 나를 도우소서

이번 걸프전쟁관련 사진 중에서 한 전투병 철모에 쓰인 [주여 나를 도우소서]라는 글귀가 눈길을 끈다 인간은 누구든지 죽음의 분위기를 느끼게되면 하나님을 찾게 된다.

임사호천(臨死呼天)이란 말이 바로 그것이다.
임사호천(臨死呼天) 이란 "죽음에 임하여 하나님(하늘)을 찾는다"는 뜻이다.                   

臨  :  임할                      
死  :  죽을
呼  :  부를
天  :  하늘 천 

이 세상에서 가장 심각한 형편에 처한 사람은 바로 죽음 직전에 처한 사람이라 할 것이다. 
이처럼 죽음 직전에 처한 이의 가장 절실한 욕구는 좀 더 사는 일일 것이다.
목숨을 이어갈 수 있다면 그 무엇을 희생해서라도 그 길을 찾으려 하는 것이 살아있는 생명체의 본능이고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이 죽음을 피할 수 없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삶의 막다른 골목에서 사람은 어머님을 찾게 된다.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을 찾게 된다.  

"하나님, 살려 주세요. 살려 주시면 무슨 일이라도 하겠습니다" 라는고백은 절대절명의 사람에게서 나올 수 있는 가장 비장한 고백이요, 절규다. 그야말로 생사문제가 아니고는 좀처럼 들을 수 없는 말이기도 하다. 

죽음앞에서 이제까지의 삶이 한순간에 무너지고 마는 경우도 있다.  
반면에 죽음앞에서 그 신념이 더욱 강해지는 경우도 있다. 
민족의 위기에 직면하여 "이 민족을 멸하시려면 차라리 저를 죽여 주십시요." 라고 절규하던 구약의 모세와 신약의 바울의 위대한 민족혼. 

혹독한 고문을 당하며 죽음앞에서 충심을 변치 않고 더욱 강해지는 사육신들. 
노량해전의 결전을 앞두고 "이 원수들을 모조리 무찌를 수 있다면, 이 한몸 죽어도 여한이 없겠나이다."라고 다짐하든 충무공 이순신.

  "나는 내 조국을 위해 바칠 수 있는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음을 안타까워 한다."라고 부르짖던 미국 독립운동의 젊은 투사.

  "예수께서는 내 한평생 84년 동안에 나를 한번도 모른다고 하시지 않았는 데, 내가 어찌 그 분을 모른다고 부인하랴." 하며 순교의 제단에 몸을 던진, 소아시아 지방 에베소교회의 감독이었던 폴리갑 선생 등은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이나 신앙을 고수한 좋은 본보기라 하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처형이라는 비참한 사형방법에 의해 죽음의  고통으로 다가가시며,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나의 하나님이시여, 나의 하나님이시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말이다.

하나님에게서 버림받는 고통을 가장 극렬하게 표현한 말씀이다.
예수님의 이 절규는 머리에 가시관, 양손과 양발에 못박힘이라는 육신적인 고통을 포함하겠지만, 그 보다도 하나님으로 부터 버림받는 영적, 정신적인 고통의 극치를 잘 보여주신다 하겠다.

 임사호천으로 가장 재미를 본 사람은, 예수님 곁에서 함께 죽어가던 강도 일것이다.  
고통속에 숨져가시는 예수님을 향해 " 당신의 나라가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해 주소서"라는 신앙의 고백으로 인해, 예수님으로 부터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는 확답을 받았으니 말이다. 비록 인생의 마지막을 보내는 죽음앞에 직면하여,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찾는 이들을 하나님께서는 꼭 기억하시고 구원(救援)의 자비와 은총을 베풀어 주실 것이다.


 

찬송가 405장의 작사자 존 뉴톤도 임사호천의 대상자다.
그는 아프리카노예상 이었는데 바다 한가운데서 큰 풍량을 만나 죽음을 느끼자 하나님을 찾았고 회개하는 가운데 살아났다.
이후 그는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전도자의 삶을 살았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와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그는 2절에서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한다.

다윗도 찬양한다. [내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시103:4).



잊어버린 만나

한 100여 년 전에 영국의 한 청년이 속도가 매우 느린 증기선을 타고 미국으로 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닷새나 걸리는 여행 길에 돈이 없었기 때문에 식당에서 밥을 사먹지 않고 건빵이나 치즈를 먹으면서 고생을 했습니다. 미국 대륙에 가까이 오면서 식당 앞을 지날 때 맛있는 음식을 보자 견딜 수가 없어서 자기도 모르게 식당
에 들어가서 밥을 한 끼 먹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돈이 없어 미안하다고 이야기 했는데 그 식당 주인은 그에게 무슨 말을 하느냐며 이미 당신의 선표 가운데 식사 대금이 치뤄져 있다고 말했습니다. 선표에 이미 닷새 동안 풍성하게 먹을 수 있는 식사비가 포함이 되어 있는데도 그 청년은 무지해서 그냥 건빵만 먹고 고생을 하면서
왔습니다.
우리들의 생활 가운데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비해 놓으신 풍성한 하늘의 만나를 날마다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 특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굶주리면서 건빵만 씹는 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는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엡 2:19)


한밤중에 일어난 화재

헬름시에서 어느 날 큰 불이 일어났다.
동네 사람들은 랍비의 지휘에 따라 열심히 불을 끄고 있었다. 그 불은 한 30채 가량의 가옥을 태우고는 가까스로 동네 사람들의 힘에 의하여 진화되었다.
사람들이 겨우 숨을 돌리고 둘러앉아 쉬고 있자니 랍비가 말하였다.
"이 불은 하나님께서 내리신 은총일 거요. 우리들은 행운이었소."
동네 사람들은 놀랬다.
"도대체 하나님의 은총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만약에 불이 안 났더라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이 깜깜한 한밤에 어떻게 불을끌 수가 있었단 말이오."


*보호받는 작은 새

마르틴 루터는 어느날 저녁 작은 새 한마리가 나무가지에서 자고 있는 것
을 보고 "이 작은 새는 이미 저녁 먹이를 마치고 자려는 중인데 참으로 저
의 잠자리는 안전하구나! 저는 내일 아침에 먹을 것에 대하여서도 걱정하는
것이 없고 내일밤 잠자리에 대하여서도 아무 염려가 없구나! 저는 다윗처
럼 전능하신 자의 보호 아래 그 몸을 맡기고 아무 염려없이 작은 가지에서
자는 것으로 만족한다.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모욕하는 작은새가 아닌
가"고 하였다는 것이다.
루터는 작은 새 한마리를 보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고 새를 보호하
시듯 자녀들을 또한 보호하시는 하나님께 감사 드렸다고 한다.

*은혜를 갚을 줄 아는 사람이 되자

내 육신에 근거한 이기주의 때문에 대가 지불하기를 거절하는 사람들에게는 주께서는 이렇게 경고하신다.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었으면 무엇으로 짜게하리요 땅에도 거름에도 쓸데없어 내어 버리느니라](눅14:34-35)
자신이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사실보다 더 큰 비극이 어디 있겠는가? 어느 부인이 있었는데 그녀는 거의 정신병원에 입원해야 할 정도로 정신적으로 상처를 아주 심하게 입은 상태였다. 그런데 그 부인이 그렇게 된 이유가 있었다. 남편과 참 의가 좋았는데 어느날 부부 싸움을 하다가 남편이 대드는 부인을 보고 화가나서 무심코 한 말이 이유였다.
그말은 바로 "너 같은 사람은 아무 쓸모짝에도 없어"였다.
그래서 미치기 시작한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고 계신다. 그런데 어느날 내가 하나님앞에서 범죄하고 그 앞에서 둔감한 존재가 되어 그분의 소리에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는 자가 된다면 하나님께서는
"나는 더 이상 너를 사용할 수 없다"고 선언하신다. 하나님께 더 이상 쓸모 없는 자가 된다 것,이것이 우리에게 두려움이 돼야 한다.
사람들은 나를 공부 많이 한 사람으로 인생의 길에서 비교적 성공한 사람으로 평가할지는 모르나 나를 만드신 하나님께서 나를 향해
"너는 더 이상 나를 위해 필요한 존재가 아니다. 너는 나에게 쓸모 없는 사람이다"라고 하신다면 얼마나 큰 비극인가?
우리는 구원 받은 백성이기에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사랑의 댓가를 치르기를 거절해서도 안되고 두려워해서도 안된다.

*보은(報恩) 하는 마음

보스톤 해변가에서 일어난 일이다. 매일 같은 시간이면 똑같은 일이 계속 되풀이되었다. 한 노인이 싱싱한 새우가 가득 담긴 통을 들고 어김없이 같은 시간에 나타나는 것이었다.
갈매기들이 금방 친구를 알아채고 그의 발 아래 모여들었다. 일부 갈매기들은 용감하게도 그의 어깨 위에 앉기도 하였다. 새우를 갈매기들에게 나누어주는 동안 노인의 얼굴에서는 환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갈매기들은 고급 요리를 그야말로 마음껏 먹었다.
사람들은 놀라서 매일의 이 광경을 바라보곤 하였다.
많은 이들이 분을 내며“비싼 새우를 새들에게 낭비하다니 너무하다.”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사실을 알고 나서는 반응이 달라졌다.
그 노인은 제2차 세계 대전 때 미국군의 유명한 해군 장군이었다. 그런데 독일군이 어뢰를 발사하여 그의 배를 격침시켰다. 이에 그와 부하 일부만이 구명정에 간신히 올라탈 수 있었다. 그들은 그 구명정 위에서 뜨거운 태양과 폭풍과 식량의 어려움을 당하며 몇 날을 보내었다. 부하들은 한 명씩 죽어가기 시작하여 장군을 비롯한 몇 명만 살아 남게 되었다. 마침내 장군도 정신이 희미해지면서 쓰러지고 말았다. 굶주림으로 죽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런데 누워 있는 순간 바로 옆에 작은 흰 물체가 안경을 통해 눈으로 들어왔다. 그것은 갈매기였다. 그런데 그 갈매기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떨리는 힘없는 손을 천천히 뻗쳐 갈매기를 잡았다. 그 갈매기는 몇 시간 수명을 더 연장하도록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였고 그 몇 시간은 그가 섬을 발견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는 그 섬에서 안전을 찾고 생명을 부지할 수가 있었다. 이제 사람들을 보스톤의 갈매기들에게 값비싼 식사를 대접하는 것에 대해서 그 장군을 비난하지 않게 되었다.
장군의 행동은 겸손하게 감사를 표현한 단순한 행동이었음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새우 한 조각 조각마다 하나님과 갈매기에 대한 '감사'의 표시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 헤드 쉬링크(Headshrink)

세상에는 하나님 앞에서 잘난 사람들이 참 많이 있다. 그 사람들은 능히 하나님이 없어도 잘 살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그 잘난 사람들은 자신들의 머리를 자신의 하나님으로 삼으면서 자기로부터 차 하나님을 축출해 버렸다.
자기 마음대로 인생을 살겠다는 의지의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에게 찾아온 불청객이 있다. 그것은 ㅂ로 고독과 번민, 절망과 무기력이 찾아와 그들의 하나님같은 머리는 너무 복잡하게 얽혀버리고 만 것이다.

그런데 요즘 그 잘난 사람들이 정신과 의사를 찾는 일이 빈번해졌다고 한다. 그 이유는 터질 것 같은 머리 때문이라고 하는데 정신의학 용어로 말하면 쉬링크(Shrink)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 쉬링크라는 말은 "오그라들다""줄이다" 또는 "비운다"라는 뜻을 갖고 있는데 바로 정신과 병원을 찾는 이유는 머리를 좁히기 위해서, 머리를 비우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 쉬링크라는 말은 남미 페루에 살고 있는 지바로라는 종족이 여러 가지 약품을 사용하여 죽은 사람의 두개골을 줄이는 기술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것을 헤드 쉬링크라고 했는데 그 말을 정신과 용어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현대에 살고 있는 잘난 사람들의 머리가 복잡해 지고 고민거리로 비대해지면 터질 것 같은 그들의 머리를 비원주는데 그것을 줄여서 쉬링크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정신과 의사를 영어로 "헤드 쉬링커(Headshrinker)"라고 하는데 말 그대로 "골 비우는 사람", "골빈 사람 만드는 사람"이라는 뜻이 된다.
골이 꽉찬 사람에게 가서 골을 비워달라고 하고 있으니 그 사람들이 무슨 방법으로 꽉찬 골을 비울 수 있겠는가? 그야말로 골빈 사람이 될려면 한 번에, 완벽하게 할 수 있고 재발을 방지할 수 있는 처방까지 내릴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앞으로 가는 길밖에 없다.
예수를 믿어 그 분을 내 왕좌에 모시고 그 분의 뜻대로 살아간다면 밝고 명랑한 삶을 회복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아니겠는가?


*예수

남북 전쟁이 끝난 수년 후 일리노이주의 어떤 농부는 테네시주 내시빌에 있는 군인묘지를 가끔 방문하면서 일년에 한번씩 묘를 돌보고 꽃을 심는 등 헌신적 노력을다했다. 어떤 사람이
"아들의 묘인가?"고 물어 보았더니,
"아닙니다. 그는 바로 우리 마을에 살았어요. 남북전쟁이 일어났을 때 나는 일곱명의 아이가 있었고 처는 허약했습니다. 나 없이는 농장을 경영할 수 없고 식구가굶주림에 허덕일 것이 두려워 징병을 기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들은 그 때
문에 공포에 싸였으며 내가 출두해야 할 바로 그날 이웃에 사는 소년이 찾아와서 나를 대신하여 싸움터에 나가겠다고 제의하면서 그는 아무도 돌볼 사람이 없으니 나를대신해 가는 것이 좋을 것이라 말했습니다. 기어이 그는 출전하여 치카만카에서 부상하여 이곳 병원에서 죽었습니다. 이것이 그의 묘지요."라고 대답하였다. 그리고서
는 묘석에다 그의 손가락을 잘라 쓴 거칠은 비명 "그는 나를 대신하여 죽었노라"를가리키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셨고, 나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이다.(엡 5:2)


*자비

대단히 짧은 기간이지만 남북전쟁 중 링컨 대통령만큼 너그러움을 자주 베풀어 준통치자는 역사상 없었다.
대부분의 범죄자들은 군기를 어긴 자들이었다. 이러한 모든 공소는 지난 2년 동안의 전투 결과로 링컨은 이 문제를 세심히 연구하였다. 이러한 공소 전문(전문)은 국방성에 수백통이나 서류로 철되어 있었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누구 누구의 처형을 중지하라."
이 모든 공소는 그의 부하 특히 국방부 장관이 도울 것을 거절한 후 마지막으로링컨에게 의뢰되어 오는 것이었다.
링컨의 변명은 이러한 것이었다.
"나도 확실히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만약 내가 전선에 있다면 총을 버리고 도망칠는지 모르지."
"하루종일 어려운 일에 시달리다가 사람의 생명을 구한다든가 혹은 용서를 한다
는 일을 발견하면 그것은 나에게 평안한 기분을 주는 것입니다."
"펜을 약간 움직이면 사람을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할 때 인간을 죽이게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여러분들은 알지 못할 것입니다."
총살형을 선도당한 외아들의 늙은 아버지가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찾아왔다.
링컨 대통령은 늙은이에게 붓틀러 장군으로부터 온 전문을 보았다. 그 전문의 내용은,
"군대의 규율을 완전히 파괴한 이자에 대한 군법회의의 판결에 간섭하지 않으시기를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이 전문을 읽고 난 늙은이는 그 자리에 주저 앉아서 울었다. 갑자기 링컨은 펜을들어 다음과 같이 썼다.
"붓틀러 사령관에게, 욥 스미스는 나로부터 명령이 있을 때까지 총살하지 마시오."
그의 아버지는 안절부절하였다. 다음 명령이 내리면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하고물었다. 링컨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당신과 나와는 잘 아는 사이가 아닙니다. 그러나 당신의 아들은 나로부터 총살의명령이 내려질 때까지 죽음을 당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는 므두셀라(노아의 홍수이전 사람으로 969세까지 산 사람, 창세기 6장 25절 참조)보다 더 오래 살 것입니다."
입초근무 중 졸았던 탓으로 수감된 윌리암 스캇트라는 젊은이가 있었다. 순시를하는 도중 링컨 대통령은 그를 보자 인자한 태도로 그에게 말을 걸었다.
"아들아, 너는 총살 당하지 않을 것이다. 네가 일어나 있을 수 없다고 말한 것을나는 믿는다. 그러나 너 때문에 나는 퍽 골머리를 앓았지. 내가 알고자 하는 것은네가 어떻게 하여 나의 빚을 갚을 것인가 하는 것일세." 크게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는 이 젊은 병사는, "저당으로 666달러 정도면 갚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아니, 그럴 필요는 없어. 병사로서 너의 임무를 완수하면 그 빚은 갚게 되는 거야."라고 링컨은 말하였다.
주님의 은혜를 잊지않는 성도는 주님이 주신일에 충성된자이다.
(역대하 39:9, 시 78:38)


하나님

연소한 동방의 어떤 임금은 현명하고 선량한 왕이 되리라 마음먹고 신의 뜻을 받들어 백성을 다스리려 하였다.
그는 온 나라의 현인을 모아 "모든 지혜를 책에 기록하라."고 명령하여 그것을 스스로 읽고 어떻게 하면 나라를 잘 다스릴 것인가를 배우리라 생각하였다.
현인들은 이 힘드는 사업에 착수하여 30년 후에 그 일을 끝내었다.
5,000여권의 책을 실은 긴 낙타의 대열이 궁전에 도착하자 "임금님, 여기에 모든 지혜가 가득 차있습니다."라고 현인들은 그들의 힘들인 결과를 제시하였다.
그러나 벌써 중년에이른 왕은 많은 직무와 계획에 파묻혀 정신을 차리지 못할 형편이었으며 그 일을 거의 잊어버리고 있었다.
"나는 너무 바빠서 이 많은 책을 전부 읽을 수 없다. 도로가져가서 분량을 축소시켜 오너라."라고 말하였다.
책의 분량을 줄이는데 15년이란 긴 세월이 걸렸다.
현인들은 자랑스럽게 500권의 책을 왕에게 가져가니 왕은
"아직도 많아. 50권이면 족하다."라고 말하였다.

대부분의 현인들은 지루하고 힘드는 일에 지쳐 죽어갔고 그들의 계승자가 10년을더 소모하여 줄인 50권의 책을 왕에게 바쳤다. 그러나 지금에는 왕도 늙고 피로하였기에 "너희들은 그것을 한 권으로 요약하라."
5년 후 고귀한 노력의 결정인 한 권의 책을 왕에게 진정하러 왔을 때 이미 때가늦어 왕은 죽음에 처해 있었다.
하나님에 관한 진리와 하나님이 왜 우리를 만드셨나를 스스로 알 수 있을 만한 지능과 학식을 갖출 만큼 시간을 넉넉히 가진 사람은 거의 없다. 그래서 그는 우리에게 독생자(독생자)를 주셨다.


함께하시는 하나님

전도자 요한 웨슬레의 'The best of all is God is with us.'
즉 '가장 최선의것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이다.'라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고 지금 이 시간이 최선의 시간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기에 어떤 상황이든 우리에게는 최선의 시간이고 최대의 행복입니다.
현재가 언제나 극적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엠마오로 가는 두제자와 동행했던 것처럼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눈에 보이는 이상으로 더 확실하게우리의 식탁에 같이 앉아 주시고 우리의 침상에 같이 누워 주십니다.

주님이 우리와함께 하신다는 이 사실보다 더 중대하고 귀한 일은 없습니다. 2차 대전 때에는 많은전쟁의 신화들이 있습니다. 프랑스의 어느 항구에 영국군 수 십만 명이 후퇴를 할
때 그 부근의 독일군들이 집결해 있는 항구에는 대풍랑이 일어났습니다. 거기서 불과 얼마 안 되는 부근이었습니다. 그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잔잔해서 수 십만 명의영국군이 무사히 후퇴할 수 있었답니다. 훗날 기록을 보면 영국군들은 주일에 모여서 '하나님이여, 독일군에게서 우리들을 지켜 본국으로 무사히 돌아가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수 1:9)


*생명을 지키시는 주님

어느 날 영국 궁성 앞에 요란스러운 교통 정리가 있었습니다. 하얀 장갑을 낀 교통 순경이 오는 차량을 전부 스톱시켰습니다. 통행인도 전부 스톱이 되었습니다.
자전거와 오토바이를 타고 가던 사람들도 발을 내려놓고 어떤 행렬이 지나가는가를기다렸습니다. 틀림없이 영국 여왕의 행렬일 것이라며 여왕을 구경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이윽고 그 행렬이 지나가는데 어미 오리가 열 마리의 새끼 오리를 데리고 아장아장 천천히 지나갔습니다. 오리들이 지나가게 하기 위해서, 왕의 행
렬처럼 그것을 보호하기 위해서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 이렇게 많은 차가 스톱을해야 되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우리의 위험한 것을 피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보호하지 않겠습니까?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들의 백합화를 보라고 말씀하신 주님이 어찌하여 우리를 보호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십니다. 하나님이우리를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적입니다.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해야 합니다. 리빙스턴은 자기 생애의 전기를 쓰면서 '천직을 다 할 때까지 죽지 않는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그렇습니다.우리는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는 시간 동안은 아무도 죽일 수가
없습니다. 저는 그것을 절대적으로 믿고 있습니다.얼마나 많은 죽음 속에서 주님이저를 건져 주셨던가? 저는 이 말을 깨달았습니다. 천직을 다할 때까지는 죽지 않습니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사르지도 못하리라(사 43:2)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 6:26)



*승부의 미학

가을하늘이 높아지고 구름빛이 솜털처럼 아름다워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이런 계절을 가을이라고 부른다.
가을에 생각나는 것은 빼놓을 수 없는 시골 국민학교 운동회이다.
서울이라고 하는 삭막한 공간에 살면서부터 그런 낭만적인 추억들이 사라진 지 오
래됐다.
문득 야구장으로 가고 싶은 생각이 나의 발길을 끌었다. 아직도 스포츠를 사랑하
는 팬들은 여전했다. 전과는 달리 질서의식이 많이 발전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어린
아이를 데리고 구경을 온 부부도 아이가 버리는 휴지에 까지 신경을 쓰고 있었다.
질서정연하게 줄을 서서 표를 사려고 기다리는 사람들의 얼굴에선 느긋한 행복감마
저 엿보였다. 어렵사리 표를 사가지고 스탠드에 가서 앉았다.
경기가 시작이 되면서부터 열기는 달아 오르기 시작했다.
경기하는 팀은 모두 프로팀이었고 그 팀마다 자기들이 소속되어 있는 지방명칭이
붙어 있었다. 관중들은 제각기 자기 도에 소속된 팀을 응원하기에 정신이 없었다.
정작 운동하는 선수들보다 응원하는 사람들이 더욱 열기를 올렸다.
어깨가 빠져라고 피칭한 공을 힘껏 타자가 쳤다.
백구가 하늘 높이 치솟았다.
관중들은 일제히 환성을 올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불행히도 공은 파울이 되어
홈런이 되지 못했다. 이번에는 숨을 죽이고 있던 상대편 관중석에서 함성이 터져나
왔다.
승부의 세계는 어디까지나 이성이 접근할 수 없는 감정의 세계임을 다시 한번 확
인할 수 있었다.
다혈질 관중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심판에게 항의를 하기도 했다.
어떤 관중은 열광한 나머지 웃저고리를 훌덕 벗어버리고 관중의 앞에 나와 응원을
지휘하기도 했다.
땀을 흘리며 선전하는 선수들에게 격려 대신 비방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피쳐 힘내라. 베터푸어(타자 바보)다"
흥분된 군중들은 모두얼굴에 핏대가 서 있었다.
야구란 참으로 재미나는 운동임을 알았다. 마치 인생처럼 엎치락 뒤치락의 연속이
었다.
이사후에 점수를 내기도 하고 끝까지 추적을 하여 역전극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좋은 공을 골라서 치고자 하는 타자의 예리한 눈동자, 어찌하든 교묘한 방법으로
공을 던져 타자를 무력하게 하고자 하는 투수의 몸부림, 그리고 한 발짝이라도 앞으
로 나가보고자 애쓰는 주자의 안간힘, 도루를 시도하다가 허무하게 아웃당하는 도루
꾼들, 이 모든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인생의 희노애락을 한눈에 보는 것 같아 가슴
이 뭉클해진다.
지역감정으로 들끓던 야구경기가 끝났다.
열을 올리던 관중들도 선수들도 모두 허탈함을 공감하는 순간이 왔다.
열기오른 관중석에는 홈런의 아름다운 환상만이 바람에 날려 딩굴고 있었다.
운동장 한모퉁이에서는 이긴 선수들이 진편의 감독과 코치를 헹가래치고 있었다.
운동의 유종의 미가 저런 것이구나 하는 흐뭇함이 가슴에 와 닿았다.
"승부의 미학이여 모든 선수들에게 큰 축복 있을지어다"
사람들이 다 떠나간 후 마지막으로 터벅 터벅 걸어나왔다.
내 머리속으로 다시 시골 학교 운동자에서 있었던 운동회의 모습이 아름답게 떠올
랐다.

*기독교 신자 증가*
<1>
우리나라가 기독교를 처음으로 받아들이고 10년 후인 1895년에 전국의 신도 수는
746명이었던 것이 1년 후인 1896년에 8,496명, 1900년에는 18,081명으로 급속도로
증가되었으며 현재 한국교회의 신도 수는 약 960만명에 달하고 있어 기독교 전래
근 100년 동안 무려 10,000배가 훨씬 넘는 세계적인 증가율을 나타내고 있다.
(전요섭(백승교회 목사), 평신도 교육에 있어서 그룹 방법에 관한 연구. 석사학
위논문: 총신대학 대학원, 1985년.P.10)

<2>
1900년에 전 인구의 0.9%가 신자였으며 1910년에는 1.62%, 1920년에는 1.72%,
1930년에는 1.93%, 1940년에는 2.13%, 1950년에는 4.1%, 1960년에는 6.4%, 1980년
에는 22.6%로 나타났다.
(전요섭(백승교회 목사), 평신도 교육에 있어서 그룹 방법에 관한 연구. 석사학
위논문: 총신대학 대학원, 1985년. P.10)


*사랑과 정성이 결여된 카드

카드 동서 비교
우리 한국의 연하장(年賀狀)이나 크리스마스 카드에 인쇄된 글귀는 천편일률적이다. 근하신년(謹賀新年)이나 축성탄(祝聖誕), 그리고 그 말의 영어 표현인 뉴 해피 이어나 메리 크리스마스가 고작이다. 그러기에 자기 감각에 맞는 그림이나 디자인 위주로 카드를 고른다. 한데 미국 사람들 카드 고르는 걸 보면 카드에 적힌 글귀의 내용이 자기가 보내고 싶은 사람에게 들어맞은 사연인가 여부로 선택을 한다. 그만큼 카드에 적힌 글귀가 다양하고 세분화돼 있으며 개성적이다. 우리 나라처럼 천편일률적으로 단조롭지가 않다.
병원에 있는 친지에게 보내는 글귀, 외국에 가 있는 친지에게 보내는 글귀, 일선에 가 있는 친지에게 보내는 글귀, 선물이나 호의에 사의를 표하는 글귀 등 내용이 다양하게 유형화돼 있어 자기의 사연에 맞는 글귀를 고른다. 생일 축하 카드만 하더라도 아버지가 딸에게, 할머니가 손자에게, 약혼자로부터 미래의 아내에게, 제자가 옛날 소학교 스승에게, 심지어는 '다섯 살 맞는 딸에게'라고 세분돼 있기도 하다.
이런 우스갯 이야기를 외지에서 본 적이 있다. 한 아가씨가 가게에 들어 '오로지 당신에게만(Only to you).....' 하는 글귀의 카드만을 수십 장 골라 사자, 가게 주인이 "얼마나 많은 오로지 당신입니까" 하고 감탄하는 그런 내용의 것이었다. 그걸 받아든 놈팡이들은 오로지 자기에게만.... 하고 오금을 저리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번져가는 복제문화(複製文化)의 희극을 보는 것 같다.
물론 단조로운 우리 한국의 카드보다는 편리하다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활자로 사연을 유형화시킨 데다가 자신의 사인 하나만으로 복제 사연을 사유화한 것에 불과하기에 인간미가 결여된다. 보내지 않고 또 받지 않은 것보다는 나을 것이나 이렇게 인간의 사연이나 인정이 복제화돼 나간다면 세상 살 맛이 자꾸 반감돼 나가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든다. 이렇게 사연이 세분화돼 나간다면 앞으로는 "당신과 만나게 되어 세상을 다시 사는 느낌입니다"느니, "다음 데이트가 기다려집니다", 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내여, 당신의 사랑과 헌신을 마음으로부터 감사드립니다"라고 인쇄된 카드가 나오게 될 것이요, 이런 은밀한 사적인 사연을 복제화된 카드로 받아들었을 때 액면대로의 정감이 전달될 리도 만무하다. 아무나 사 입을 수 있는 기성복 사입듯 상품화된, 그래서 퇴색된 정감밖에 느끼지 못할 것이다.
올해 나온 연말연시 카드는 예년에 비겨 사연이 다소 다양화됐다고 한다.
하지만 복제문화의 통폐는 면할 수 없는 것이다. 짤막한 사연일망정 친필로 쓰는 작은 정성을 잊지 말았으면 싶다.



* 개국과 의료.교육사업의 윤허

기독교가 전래된 19세기 중엽의 한국 정세는 국내적으로 대원군과
민비, 개화파와 보수파의 대립 갈등으로 정치가 난마와 같이 엉크러
진 상태이었고, 대외적으로는 쇄국 정책이 무너지면서 1876년 일본과
의 수호조약이 체결됨을 계기로 뒤이어서 미국과 영국, 러시아,프랑스
등 여러나라와도 교섭을 개시하여 은둔국의 고립은 깨어지고 밀려드
는 열강의 세력을 응대하기에 힘겨운 처지에 있었다,
일본 세력의 진출에 대하여 보수파의 반항으로 일어난 사건이 임오
군란(壬午軍亂)이었고 친일 개화파의 쿠데타가 갑신정변(甲申政變)
이었다. 당시의 우리나라는 정치는 물론 경제,사회,문화 등 모든면
에 숨막힐 정도로 앞길이 막혀있는 정세이었다.
그러면서도 그 틈바구니를 뚫고 새로운 기운을 불러 일으키고자 혼신
의 몸부림이 일어나 있었음도 부인하지 못한다.
개국은 되었지만 이것이 곧 기독교 선교를 위한 허락은 아니었다.
1882년 5월 22일 체결된 한미수호조약 내용에 있어서도 한국 공개항
(共開港)에서 민주시민의 교역권, 거주권, 등을 인정하는 최혜국 대우
를 보장하고 있기는 하지만 기독교 선교에 관하여는 전혀 언급이 없는
것이다. 다만 문화관계의 조항 속에 (양국의 생도가 서로 왕래하면
서 언어와 문화를 합습협력하므로 화목과 우의를 돈독히하자)라고 있
는것이 고작이었다.
한미조약 조항중에 한국 정부가 가장 좋아한 내용은 제1조에서
(미합중국은 한국의 정치적독립과 영토적 보장을 아끼지 아니한다)
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외구세의 침투가 극심한 시기이었느고로 이조
항으로 미국으로 부터의 후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H.B.Hulbert,American Policy in the Case of Korea, The New York
Times,March 5,1916.
1883년 11월 체결된 한영수호조약에는 서양인들은 그들 사이에서 종
교예식을 거행할 수 있다고 하는 조문이 삽입되었다. 이는 기독교 선
교를 바라보는 진일보의 상황이었으며 한국정부는 비록 제한된 지역
내이기는 하였지만 외국인의 신앙 행위를 인정한 셈이 돼버리고 말았
다.
1884년 6월 24일, 일본에 주재하고 있은 미국인 감리교 선교사 매클
레이 (Rebert S. Maclay) 목사는 서울을 방문하였을 때 김옥균을 통
하여 고종을 알현하였으며 7월 3일 [한국내에서 학교와 병원사업을해
도 좋다]고 하는 윤허를 받았다. (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
rld, Vol,Lx No 8, 1895,P289).
이때 학교와 병원사업만이 허락된 것은 기독교의 종교적 요소가 아닌
서양의 문명적 요소의 수입만을 희망한 사정을 알게하고도 남는다.김
옥균도 그러한 방향으로 원하였던 모양으로 [세밀한 내용의 결정은없
었으나 곧 사업에 착수해도 좋다]고 하는 자신의 의견을 첨부하였다.
(R.S Maclay, Korea's Permit to Christianity, The Missionary Rev-
iew of the World,Vol 9.No 8, 1895,P287)
매클레이 목사는 일본으로 돌아간 즉시로 미국 감리교 외지선교본부
를 향하여 희망에 찬 서신을 발송하였다. [먼저 의료사업과 교육사업
부터 시작합시다. 제반 사정을 미루어보눈대로 한국에서의 기독교 선
교 사업은 성공을 거두게될 것은 확실합니다]라고 하였고 [학교사업
은 대환영을 받을 것이며 병원사업이야말로 시급한 요구입니다] 라고
하여 조속히 선교사업을 개시해달라고 촉구하였다.
(Annual Report of the Missionaut Society of the Methodist Episc-
opal Church for 1884,PP 204-205) 이어 한국주재 미국 푸우트 (Luc-
us H.Foote)공사도 본국 국무장관에게 [매클레이 박사가 떤나후에 고
종 국왕의 말씀을 들어 보는대로 학교와 병원을 세우는데 지장이 없
을 것이며 은연중에 장려하겠다는 뜻까지 보이셨습니다.]라고 보고하
였다. (감리회보, 1934년 6월 10일부, P6)
오랫동안 위험을 무릅쓰고 목숨을 걸고 박해와 싸운 수많은 성직자
와 성도들의 눈물과 땀과 피의 대가가 이제서야 이루지기 시작하였다.
그동안 1세기가 넘는 기간에 천주교의 가시밭의 길이 있었으며 피어
린 순교의 죽음이 뒤따랐으며 또한 프로테스탄트 선교 선구자들의 희
생과 한국인 개척 전도자들의 대담하고 충성스러운 헌신의 노력이 있
었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거꾸로 가는 시계

이른 새벽에 인근 공원이나 약수터나 운동장에 나가보면 직립(直立)해서 걷는 사람 틈에 역립(逆立)해서 걷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앞으로 걷는 사람 틈에 뒷걸음질로 걷은 사람을 흔히 볼 수 있다. 왜 사람은 역립해 걸어선 안 되며 뒷걸음질해서 안 될 게 뭐냐 하는 이 세상의 상식에 대한 반역의 성토장만 같다. 그러하듯이 시계바늘도 오른쪽으로만 돌라는 법이 어디 있는가.
시계가 생긴 이래 수백 년 동안 오른쪽으로만 돌아 클라크와즈(clockwise:시계방향)란 말까지 생겨나기까지 했는데, 왼쪽으로 돌린대서 무슨 큰 이변이라도 생긴다는 말인가.
아프리카 대륙의 끝 케이프타운은 남반구에 위치하고 있다. 그곳 중앙공원에 구경갔을 때 훌륭하게 만들어놓은 석조(石造)태양시계를 볼 수가 있었다.
그것을 보고 놀란 것은 시계의 문자판에 3시가 왼쪽에 있고 9시가 오른쪽에 있었다. 곧 시계바늘이 왼쪽으로 돌게 돼 있는 거꾸로 가는 시계였다. 따지고 보면 당연한 이치가 아닐 수 없다. 이 세상 최초의 시계는 해시계였을 것이다. 적도의 북쪽에 위치한 북반구에서는 해가 동쪽에서 떠 남쪽으로 돌기에 가운데 꽂아 놓은 해시계의 막대그늘이 오른쪽으로 돌지만, 남반구에서는 북쪽으로 돌기에 그늘이 왼쪽으로 돈다고 한다. 나팔꽃 줄기도 북반구에서는 오른쪽으로 감아 도는데 남반구에서는 왼쪽으로 감아 돈다고 한다. 그렇다면 오른쪽으로 도는 시계는 이 지구의 절반에 불과한 북반구문명의 소산일 뿐이다. 만약 거꾸로 도는 시계를 만들어 남반구에 팔아먹는다면 일확천금 할 것이 아닌가.
역시계(逆時計)는 비단 남반구에 들어맞는 논리만은 아니다. 모든 육상경기, 빙상경기, 사이클, 모터 경기가 왼쪽으로 돌고 야구 베이스도 왼쪽으로 돌게 돼 있다. 사람이 맨 첫발을 디딜 때 본능적으로 왼발부터 나오며, 말이나 자전거나 오토바이를 탈 때도 왼쪽에서 탄다.
자동차 운전석이 왼쪽인 것도 인간의 좌향(左向)능동성과 무관하지가 않다. 바구니를 짜거나 뜨개질을 할 때도 왼쪽으로 얽고 짜나가며 맷돌을 갈때도 왼쪽으로 돌린다.
고스톱의 화투놀이도 짝을 왼쪽으로 돌린다. 시계도 왼팔에 차고 반지도 왼손가락에 끼지 않는가. 인간의 활력원인 심장이 왼쪽에 붙어 있어서인지 좌향이 우향보다 능동적이다. 시계만이 오른쪽으로 도는 것은 그래서 불합리하다 할 수가 있다.
또한 역시계의 심리적 효과도 대단하다. 늙은이에게는 젊음으로 역행하고 싶은 잠재의식을 충족시켜주고, 젊은이들에게는 획일적이고 보수적인 체제에 대한 반항과 반골심리를 충족시켜준다. 여성에게는 남성우위 사회에 대한 반감을, 억눌린 사람은 억누르는 사람에 대한 배리감을 이 역시계가 대행, 위안시켜준다. 어린이들에게는 마냥 요정의 나라 시계만 같아 신나게 해주고.
얼마 전 누군가가 거꾸로 가는 시계를 발명해냈다는 신문보도가 있었다. 올림픽에 밀어닥칠 남반구 주민들에게는 더 말할 나위가 없겠고, 더우기 이 역시계의 논리와 심리학이 잘 먹혀 든다면 관광상품으로도 각광받을 받을 만하다.
다만 역행은 시계 정도에서 그쳐야지 정치나 경제나 문화나 도의나 양식 같은 것까지 역행해서는 물론 안될 일이지만.

*생각의 중요성

옛날 바닷가에 어떤 사람이 살았다. 그는 해오라기와 친하게 되어 그가 바닷가에 나가기만 하면 날아와서 어깨나 손위에 앉곤 했다. 그는 그 해오라기 얘기를 아내에게 했다. 아내는 그 해오라기 한 마리를 잡아오라고 하였다. 잡아올 마음을 먹고 이튿날 바닷가에 나갔더니 해오라기는 한 마리도 날아오지 않았다. 이것은 그에게 해오라기를 잡으려는 기심(機心)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심이란 이렇게 겉으로는 아닌 체하면서 속으로 품고있는 사심(邪心)이다.
예로부터 조류(鳥類)는 인간의 기심에 예민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 강남(江南)의 아파트촌인 압구정동(狎鷗亭洞)은 세조(世祖) 쿠데타의 공신(功臣)이요 벼슬밭에서 영화를 누렸던 권신(權臣) 한명회(韓明澮)의 정자 이름에서 비롯된 동명이다. 그는 벼슬에 욕심없이 강촌(江村)에 은퇴해 산다는 허울을 위해 이 강변에다 갈매기와 친한다(狎鷗)는 뜻으로 압구정을 짓고 아호(雅乎)도 기심을 잃은 노인이라 하여 `망기노(忘機老)'라고 자칭하였다. 하지만 기심에 예민한 갈매기는 이 정자를 피해 날았던 것 같으며, 뜻있는 선비들은 친할 `압(狎)'이 아니라 짓눌러버릴 `압(押)'구정으로 불러 내렸던 것이다.
병자호란 때 인질로 잡혀갔던 소현세자(昭顯世子)따라 우리 나라에 온 굴씨(屈氏)라는 궁녀(宮女)가 있었다. 한국 땅에서 살다 죽은 이 굴씨는 휘파람으로 온갖 새를 불러들이고, 불러들인 새를 손가락 끝으로 마음대로 다루어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사람들이 별다른 비결이라도 있는가고 물으면, 기심없는 천진(天眞)한 경지에 들면 새는 사람을 피하지 않는다고 대견스럽지 않게 대꾸하곤 했다.
한말, 헌종(憲宗)-철종(哲宗)-고종(高宗) 3대를 거쳐 어전에서 판소리를 읊었던 이날치(李捺致)라는 명창(名唱)이 있었다. 이 명창의 새 타령을 들은 일이 있다는 시인(詩人) 임규(林圭)는 이렇게 적어 남기고 있다. `어릴 적 고향인 익산(益山) 근처 심곡사(深谷寺)에서 이날치의 새 타령을 들은 일이 있는데 그가 새 소리를 낼 때마다 뻐꾹새인지 뭔지는 알 수 없으나 많은 산새들이 날아 들어 그를 에워싼 것을 보고 무척 신기하게 생각했었다'고-.
신앙이나 예술이나 수양에서 기심을 잃은 신묘한 경지에 이르면 새와 사람 사이에 격의가 증발해 버리는 것일까-. 그렇다면 새가 사람을 보고 피하는 것은 권욕(權慾)이며 이욕(利慾), 명욕(名慾), 음욕(淫慾)..., 위선, 시기, 모략, 음모...등 온갖 잡심이 범벅이된 것을 꿰뚫어 본 때문일까-. 그렇다면 도시에서 새가 사라지는 현상은 비단 공해만도 아닌 범람하는 기심 때문이었을까-

사랑 병

다정(多情)도 병이라는데 하물며 지나친 너무 사랑이 병이 안 될 수 없다.
고려의 칠현(七賢)으로 손꼽히는 이인로(李仁老)의 '파한집(破閑集)'에 이런 이야기가 적혀 있다.

남주락적(南州樂籍)에 군수로 와 있던 사나이가 임기가 끝나 그곳에서 사랑에 빠진 기첩(妓妾)과 이별하게 되었다.
너무 사랑했던 터라 기첩은 오로지 임만을 사랑할 수 있게끔 아무 누구도 자신을 유혹할 수 없게 해놓고 떠나라고 안달을 했다.
그리고 촛불을 건네주며 자신의 사타구니를 비롯하여 유방이며 얼굴이며 온몸을 어느 한군데 남기지 않고 화상을 입힐 것을 애원했고 또 그렇게 상처를 입혔다.

'너무 사랑'이 가공할 피학증(被虐症)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본다.

가극(歌劇)으로도 곧잘 상연되고 있은 12세기의 엘로이즈아벨라르의 너무 사랑도 병이 되고 있다.
아이까지 낳았는데, 그것만으로 사랑을 충족 못 해 엘로이즈는 아벨라르를 거세시켜가면서까지 사랑을 독점하고 있다.
이들은 그 후 수도승과 수도녀가 되어 사후 나란히 매장되고 있다.

근년에 인상적이던 너무 사랑병으로 '인형의 집'의 주연으로 유명해진 여배우 리브 아르망과 명감독 잉그마 버그만의 격렬한 사랑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러시아와 스웨덴 사이에 위치한 연중 겨울인 불모의 무인도에 단 둘이만을 위한 집을 짓고 도피, 서로에게 상처를 입혀 가면서까지 사랑을 했다.

"외계로부터 문을 닫고 친구도 친척도, 그리고 과거며 추억이며 두 사람의 관계를 위협하는 어떤 것으로부터도 결별, 행복과 소유욕을 충족하려 했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요, 각기 "고독을 슈트케이스에 담아 들고....."

이별의 길을 떠나가고 있다.
너무 사랑이 중증이 되면 별의별 변태로 다 나타난다.

변태에까지는 이르지 않았더라도 '너무 사랑(too much loving)증후군'에 시달리는 여성이 적지않다.
지금 미국에서는 '너무 사랑하는 여인들'이라는 이 증후군을 다룬 책이 40주간 베스트 셀러로 2백만 부를 돌파하고 있다.

알콜중독증이나 마약중독증 환자수 이상으로 많은 여인이 이 너무 사랑중독증에 시달리고 있으며 웬만한 도시에는 '너무 사랑하는 여인들의 모임' 이 없는 도시가 없을 정도라 한다.

이 너무 사랑병의 원인은 결손가정-부모가 없거나 부모 중 어느 한쪽이 없이 자랐거나, 부모가 있더라도 화목하지 못하고 서로 싸우거나 주정이 심하고 노름으로 지새우는 등의 가정에서 가족애 없이 자란 여인들일수록 이 증후군에 걸리기 쉽다 한다.
너무 사랑병 환자는 버림받는다는 것이 최대의 불안이기에 사랑하는 대상을 잡아두기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그러기에 피학으로 자신을 불쌍하고 가련한 존재로 만들려 하기도 하고 지성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신체적으로 결함이 있는 상대를 그 결함을 미끼로 잡아두고 채워지지 않는 공백을 채우려 들기도 한다. 헌신적일수록 아름답다는 사랑도 한계가 있는 것이 되니 무상하다.

한계애정량(限界愛情量)의 무게를 재는 저울이라도 없는 것일까.


향기나는 미끼

깊은 사색의 글을 많이 남긴 알랭의 글 가운데 이런 것이 있다.

한 노파가 바람에 꺾여진 꽃가지를 세워 받침대를 대고서 실로 묶어주는 것을 창 너머로 본다.
꺾어진 꽃가지를 묶어준다 해서 살아날 리는 없다.
하지만 그 노파는 꽃의 생사문제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아니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않고 묶어주고 있다는 편이 옳을 것이다.
알랭은 꽃나무를 의인화(擬人化)하여 거기에 인간성을 투사하지 않을 수 없는 인간의 오묘한 심성을 보아낸 것이다.

꽃이나 나무 같은 식물(植物)에 투사되는 이 같은 인간주의 플랜트와 휴머니즘을 합자(合字)하여 플랜튜머즘이라는 말을 만들고 있다. 그 인간주의가 벌레나 새나 짐승에 투사되었을 때는 애니멀류머니즘이 되고 물론 사전에는 없는, 자신의 사색을 위해 자신만이 쓰는 말이다.

수년 전 미국 중부의 과수원업계에서 가지가 지탱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사과를 열리게 하는 것은 인간의 욕심을 위해 사과나무를 학대하는 일이라 하여 자숙하는 운동이 벌어진 일이 있었다. 이때 플랜튜머니즘이라는 말을 찾아내어 쓰고 있는 것을 보았다.

'대지(大地)'의 작가 고(故)펄 벅 여사에게 한국 여행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것을 물었을 때의 대답이 생각난다.
소달구지에 짚단을 싣고 소를 모는 한 농부가 역시 짚단을 가득 지게에 지고 가는 장면을 보았을 때라 했다.
등짐을 소달구지에 얹고 갈 수도 있을 텐데, 소의 노력(勞力)을 감안하여 굳이 지고 가는 그 농부의 애니멀류머즘을 예리하게 보아낸 것이다. 그 등짐을 얹어서 소가 힘이 들지, 안 들지는 별개의 문제다. 더 힘이 들 것이라는 인간의 마음이 그 얼마나 아름답느냐는 것이다.

황희(黃喜)정승이 길을 가다가 밭을 갈고 있는 두 마리의 소를 보고 농부를 불러 어느 소가 더 밭을 잘 가느냐고 물었을 때 귀엣말로 대답했다는 고사(故事)는 널리 알려져 있다. 소가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리는 없다. 하지만 어느 한쪽의 소를 불쾌하게 하고 싶지 않은 애니멀류머니즘의 아름다운 발로를 그에서 보는 것이다.
근대화는 이 같은 아름다운 심성마저 미이라처럼 말라비틀어지게 하고 있는 것 같다.
플래스틱으로 꿈틀거리는 가짜 미끼를 만들고 고기에게까지 사기치는 것도 뭣한데, 이제 멀리까지 향기를 풍기게 하여 고기떼를 유인하는 가짜 미끼가 나왔다고 한다. 고기에게 사기를 치건 말건 낚아올리는 결과 측면에서 피장파장 아니냐고 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고기 입장에서 보면 죽고 사는 중대사인데 사기까지 당해가며 죽는다는 것이 너무너무 억울하여 얼마나 사람을 원망하겠는가.
낚시는 본질적으로 사기이긴 하지만 유혹하는 먹이쯤은 실물이게 하는 것이 애니멀류머니즘이 아닐까 싶다.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원격탐사(遠隔探査)기술이라는 것이 있다.
가시광선,적외선, 마이크로파에 의한 사진 촬영등에 의하여 원격 대상물의 정보를 수집하여 해석하고 거기 필요한 정보를 읽어 내는 것이다.

최근에는 레이더와 같은 별도의 파장 영역을 사용하여 지하의 사물이나 인간의 눈으로 본 것과는 다른 실물의 정확한 실체를 밝히는 기술로 까지 발전했다.

1981년의 일이다.

미국의 우주 왕복선 콜롬비아호는 원격 탐사기구를 사용하여 사하라 사막 지하에서 옛날에 흘렀던 큰 강을 발견했다.
이로써 그곳이 지금은 50년에 한번 비가 올까 말까하는 지역이지만 옛날에는 비가 많이 왔고 사람들이 모여 문화생활을 하던 곳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이 결론은 땅 밑에 감추어져 있던 하상을 실제로 발굴해 봄으로써 사실이라는 것이 고고학적으로 명백히 증명이 되었다.
발굴된 지하의 하상에서 달팽이 껍질이 발견되고 손도끼를 위시하여 석기시대의 유물이 상당수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금은 그 기술이 얼마나 발달이 되어 있겠는가?

오늘날의 고고학계는 이 원격탐사기라는 첨단 기술을 사용하여 우리가 미처 상상할 수 없는 실적을 올리고 있다.

여기 고대인의 무덤이 있다고 가정을 하자.
그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 가를 알기 위하여 구태여 삽질을 할 필요가 없다.
그들이 이 원격 탐사기술을 이용하여 고분속에 있는 물건들을 소상히 아는 것은 초보적인 기술에 속하고 그 고분벽화의 완전한 모습까지도 구경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그림을 그린 물감의 재료가 무엇이라는 것도 확연히 알 수 있다고 한다.
이제는 남의 눈을 피하기 위하여 땅에 보물을 숨긴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시대가 온 것이다.
이런 사정이니 적국의 땅속에 무기가 얼마나 어떻게 숨겨져 있으며 그것의 용도가 무엇이라는 것을 아는 것은 쉬운일인 것이다.
못난 인간들의 기술로도 이 정도의 경지에까지 도달했다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게서 우리의 영적인 내면세계를 완벽하게 통찰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는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내면 세계를 완벽하게 보이고 있는 상대를 향하여 거짓을 늘어놓고 도는 겉다르고 속다른 짓을 한다는 것은 어리석고 가소로운 일인 것이다.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외식을 보시고 그렇게도 심한 반응을 보이신 이유를 우리는 이런 관점에서 알 수 있는 것이다.
20세기의 마지막 10년을 살면서 원격탐사의 기술까지 알고 있는 우리들이다.
우리의 중심을 환하게 살피고 계시는 하나님앞에서 보다 솔직하고 겸손한 자세로 살아야 할 것이다.

예레미야 17:10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세상을 사는 지혜

백이(伯夷)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은나라 말기와 주나라 초기에 살았던 사람이다. 그는 원래 숙제와 함께 고죽국의 왕자였다. 그런데 부왕이 죽으면서 동생에게 왕위를 물려주자 숙제는 그 자리를 형에게 양보했다. 백이또한 부왕의 유지를 어길 수 없다고 끝내 사양하자 둘은 함께 왕위를 버리고 주나라 문왕의 신하가 될 요량으로 중국땅을 밟았다.
그러나 그 당시 중국의 상황은 문왕이 죽고 그 아들 무왕이 군사를 일으켜 포악무도한 은나라 주왕을 멸하고 중국 천하를 통치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런 일들이 모두 옳지 않다고 통박한 다음 자기네는 주나라 영향권 밖에서 살겠다고 수양산으로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으며 생활했다는 인물이다.
그는 참다운 임금이 아니면 섬기지 않고 진정한 벗이 아니면 사귀지 않으며 악인이 있는 조정에서는 함께 벼슬하지 않을뿐만 아니라 아예 그들과 더불어 말도 하지 앟았다. 이런 그였기에 비록 제후들이 정중하게 초대하는 글을 보내와도 받기를 거절했다. 제후들이 더러운 존재라고 단정했기 때문이다. 고고한 선비의 자존심을 지키고자 했을 것이다.
한편 유하혜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더러운 임금을 부끄러워 하지않고 작은 벼슬이라고 하찮게 여기지도 않았으며 관직에 나아가면 능력껏 소신대로 이를 처리해 나갔다. 이런 사람이기에 버림을 받아도 원망치않고 가난을 부끄러워하지도 않았던 것이다.그는 종종 "나는 나, 너는 너다,네가 비록 내 곁에서 벌거벗고 있다고 한들 자네가 어찌 나를 더럽힐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곤 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그에게 실제로 닥친 것이다.
심하게 폭풍우가 몰아치던 밤이었다. 폭유로 인하여 집이 허물어져 버린 옆집의 젊고 예쁜 과부가 혼자사는 그의 방문을 두드렸다. 유하혜는 즉시 방문을 열어주었고 둘은 한 방에서 지냈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 모종의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세번이나 벼슬길에 올랐는데 높은 지위에 앉았다고 즐거워하는 법이 없었고 낮은 지위에 앉았다고해서 원망하는 일도 없었다.그는 그저 자기가 맡은일에 최선을 다했고 부지런히 살았다.

우리는 이 두 사람의 생애를 보면서 깨닫는 바가 있다.
백이의 삶을 보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회칠한 무덤을 연상하게 된다.
유하혜의 일생을 통해서는 자기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며 정정당당했던 용감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바울은 말했다.
세상이 악하고 더럽다고 부정적인 자세를 지닌 사람들을 향하여 그런 사람들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다"(고전 5:10)고,
지구를 떠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신도 그와같이 부패한 인간임을,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는 자는 나 외에는 모두 죄인이요 부정한자라고 떠들며 백이와 같이 산에 들어가 고사리나 캐먹고 사는 못난 바보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더러운 세상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 세상속에서 살아가는 내 마음을 보시는 것이다.

*가인의 마음

내 인격속에는 가인과 같은 마음은 없는지? 우리는 가인을 악한 사람이고 아벨을 좋은 사람이라고 인식하며 산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의 마음은 언제나 아벨과 같이 선한 의로움만 갖고 있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러한 소망은 희망일뿐 내면에 잠겨 있는 또 다른 내 속에는 추악한 가인의 속성을 갖고 살아간다.
즉, 우리의 인격속에 아벨과 가인의 피가 공존하여 흐르고 있으며 마음속에 있는 가인과 아벨의 두마음이 내 자아를 지배하려고 서로 싸우고 있다.
아벨의 마음만 갖고 살고 있는 줄 알았던 내 속에 가인의 피가 흐르고 있고 또 내마음을 지배하고 있음을 인하여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두려움을 느낀다.
얼마전 지존파라고 하는 악당들이 세상에 등장했다. 사람들은 그들을 향하여 침을 뱉고 인간의 탈을 쓰고 어찌 그럴 수가 있느냐고 이구동성으로 소리쳤다. 그러나 그렇게 욕하고 흥분하는 우리들의 마음속에도 그들과 같은 적개심과 살의가 가득하다면 감히 누가 그들을 향하여 돌을 던질 것인가?
가인의 마음은 지금도 우리들의 마음에서 꿈틀거리고 있다.
간음한 여인을 끌고 온 유대인들이 예수님앞에서 분노하지만 그들의 내면에도 간음의 욕구가 잠재되어 있음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스스로 돌을 버리고 물러갔던 것이 아니겠는가?
율법으로 잘 포장된 그들의 마음속에는 온갖 더러움이 있었던 것을 그들은 순간 알았을 것이다.
그 누구도 간음한 여인에게 돌을 던질 수 없음을 알고 돌아섰던 군중들의 마음에도 가인의 마음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바울은 자신의 마음에서 가인의 마음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행함이라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속에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바울도 그렇게 자신의 이중성을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렇다 이렇게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가인의 마음을 인하여 근심하고 탄식하는 자가 영혼이 건강한 자라 할 것이다.
가인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그 마음에 이끌려 사는 자들은 이미 자신의 상태를 알지 못하는 심각한 병세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건강한 사람은 애통해 한다. 가인의 마음이 내 속에서 꿈틀대지 않도록 몸부림을 친다. 그리고 자신의 힘없음을 깨닫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으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고 주와 함께 동행하기를 힘스게 된다.
나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가인을 이기기 위한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하나님께 의미있는 존재다.

에베레스트 산은 해발 약 8,000미터라고 한다.그리고 필리핀 해구는 수심이 약 8,000미터정도이다,만일 잠수부가 지구상에서 가장 낯은 곳에서 가장 높은 곳을 몰 수 있다면 그 16키로에 달하는 관경은 사람이 정상 위치에서 볼 수 있는 것과 엄청나게 차이가 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태양 위에서서 지구를 볼 수 있다면 아마도 지구가 당구공처럼 표면이 밋밋할 것은 분명하다 그 위치에서는 에베레스트 산이나 깊은 해구나 문제가 될 수가 없다. 지구상에서 문제가 되는 그것들이 우주에서 볼때는 아무런 문제점이나 차이점이 없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에베레스트 산처럼 큰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필리핀 해구와 같이 낮은 사람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때 그러한 차이점들은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아무 차이점이 없이 다만 그저 인간일 분이다.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중요한 것은 심령이 가난한 것이다.

*고자질하는 양심(죄책감)

19세기 미국의 작가 애드가 엘렌 포우는 그의 작품 [고자질하는 양심]의 주인공을 통하여 죄책감으로 고통당하는 인간의 양심을 생생히 묘사하고 있다. 그 주인공은 아무도 모르게 사람을 죽여 자기 집 지하실에 묻었는데, 이상하게도 죽은 사람의 심장 고동 소리가 그의 귀에 똑똑히 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간담이 서늘해졌으며 온몸은 식은 땀으로 촉촉히 젖었다. 귀를 막아도 잠을 자도 계속 들려오는 그 섬뜩한 고동치는 소리를 피할래야 피할 길이 없었다.
마침내 그는 그 소리가 지하실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라 자신의 가슴에서 울려 나오는 자기 심장의 고동소리인 것을 깨닫는다. 용서받지 못한 죄책감의 피할 수 없는 고통을 묘사한 것이다.

양심은 헬라어로 인데, 이는 사람이 자기와 함께 나누는 지식, 즉 자아 의식 이라는 의미이다. 세상사람 모두를 속일수는 있어도 자신의 양심은 속일수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사람이 죄짓고는 못산다. 해결치 못한 죄책감은 병을 불러 온다.

*양심

한 여인이 빨간 차만 보면 두드러기가 나는 것이었다. 길을 가다가도 빨간 색의 차만 보면 온 몸에 두드러기가 나는 것이다. 병원에 가도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후에 결국 그 원인이 밝혀졌는데, 신혼 초에 남편이 징집갔을 때 외간 남자와 불륜 관계를 맺었다. 물론 관계는 그 한번으로 끝났고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 후 그 일이 마음에 걸리었지만 흐르는 시간 속에 그일을 잊으려고 애를 썼다. 이제 어느 정도 그 일이 무마되고 마음속에서 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빨간 차면 보면 두드러기를 일으키는 정신 신체 상관성 질환(psycho- somatic- illness)나타난 것이다. 현대인의 앓고 있는 질병의 85%가 정신 신체 상관성 질환이라고 한다.

*사(私:사사로이 할 사,간통할 사)와 사(邪:간사할 사,희롱할 야,)

私는 곧 邪와 통한다.
邪는 곧 악(惡)한 것이다.
우리의 눈에 손가락 하나를 갖다대면 앞이 보이지 않는다.우리의 마음에 사(私)라고하는 검은 그림자가 도사리고 있을 때 우리는 사물을 바라보는 눈이 완전히 흐려지고 만다.
독선,아집,자만,이기,독단등은 私에서 생기는 악한 종자들이다.

*맑음의 상징

풀잎에 맺힌 아침 이슬,
구름한 점 없는 파란 하늘,
바위틈에서 솟아나는 맑은 물
시냇물에 깨끗히 씨기운 하얀 조약돌,
갓난아기의 티없이 영롱한 눈동자,
깊은 산속의 하얀 눈,
그리고 남의 고통을 보고 눈물 흘리는 깨끗한 눈이다.

*용모의 美(외형)

용모의 미는 품성의 미에 뒷받침되고, 외형의 아름다움은 정신의 아름다움을 지녀야만 올핸 생명과 향기를 발할 수 있다.

*마음

마음은 매우 깊은 우물과도 같다. 바닥에 있는 두터운 침전물은 보통 눈에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거기에 그런 것이 있으리라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하지만 격렬한 감정이라는 바람에 의해 그 우물이 휘저어질 때, 너무나도 보기 흉하고 지독한 냄새가 나는 오물이 깊은 밑바닥에서 솟아 올라 표면에 나타난다. 분노, 미움, 시기, 질투, 육욕,잔인함, 복수,등 심지어 살인까지 나타난다. 그러한 가장 민감한 순간들마다 악을 행할 수 있는 우리의 잠재 가능성에 소스라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마음의 문

유명한 예술가 홀맨 헌터라고 하는 분이 성경 말씀을 기초로 '세상의 빛'이라는 제목의 성화를 그렸습니다. 그 성화에 보면 예수님께서 굳게 닫힌 문 밖에서 한편에는 등불을 들고 다른 한편 손으로는 계속 문을 두드리는 모습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심령의 문밖에서 회개하기를 기다리는 모습입니다. 그리스도는 여러 가지 모양으로 인간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십니다. 어떤 때는 양심을 통하여 어떤 때는 이성을 통하여서 때로는 경험을 통해서 슬픔, 기쁨 등, 때로는 친구의 권면을 통해서 혹은 책을 통해서 방송을 통해서 인간의 문을 두드리십니다.
그 그림을 자세히 보면 문의 바깥에는 손잡이가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 문 밖에는 손잡이가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스스로 열어야 하며 다른 이가 열 수 없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마음 문의 주인은 우리 각자 자신입니다. 주님의 문 두드리시는 음성을 듣고 그 문을 열어서 주님께서 마음 속에 들어오시어 자신과 같이 먹고 마시는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열쇠는 내게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주님께서 문을 두드리나 열지 않고 그대로 있으면 멸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멸망의 책임도 우리들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마음에 계시는 에수님

소련의 쟈부르스키라고 하는 청년은 군인이었습니다. 그는 깡패 출신의 포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를 믿고 새사람으로 변화되자, 소련사회에서 예수를 믿는 것은 손해밖에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만나는 사람마다 예수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한 번은 군대 상관이 그를 불러서 회유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만 부인하면 계급도 올려주고 돈도 벌 수 있게 해 주겠다고 제의했지만 쟈부르스키는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 상관이 쟈부르스키를 불러놓고 자기의 과거 경험담을 털어 놓았습니다.
“우리 부대에 너와 비슷한 사람이 한 사람 있었지. 그는 목에 십자가를 항상 걸고 다녔어. 내가 한번은 그를 불렀네. 그리고 둘이서 이야기를 오래 했다네. 이야기를 다 끝마치자 그 친구는 목에 걸고 있던 십자가를 끌러 탁자 위에 놓더니 다시는 십자가를 목에 걸지 않겠다고 하더군. 그리고는 공산당 입당원서를 달라고 하더니 거기에 자기 이름을 쓰고 공산당에 입당했다네. 그 후로 아주 자랑스러운 공산당원이 되었다네 "
상관의 설득은 달콤했습니다. 그러나 쟈부르스키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사실 저도 목에 건 십자가를 벗어 놓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런 십자가에 계시지 않고 제 마음에 계시는데 어떻게 합니까? 저도 예수님을 탁자 위에 올려 놓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그렇게 하면 제 생명에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며 제 마음을 칼로 도려내는 일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목에 건 십자가는 탁자 위에 올려 놓을 수 있어도 내 마음에 계시는 예수님을 탁자 위에 올려 놓을 수는 없습니다.”


*벌금

어느 유대인 회사에서 유대인 사원을 고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원이 회사의 돈을 가지고 도망쳤다. 유대인 사장은 성을 내어 경찰에 신고하려 했다. 그 회사의 간부가 유대인 변호사에게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고 상담을 청하였다.
번호사는 "정말로 돈을 가지고 도망쳤는지 아닌지 확인해 보는 것이 좋겠오. 만일그가 정말로 돈을 가지고 도망을 쳤다 하더라도 법망에 걸려서 그가 기소된다면 반드시 감옥에 들어가지 않으며 안되오. 그런데 이것은 유대인다운 방식이 아니오."라
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가 감방에 들어가 버리면 돈을 돌려 받을 수 없다. 유대의 법률로는어떤 사람이 돈을 훔쳤다고 할 때 그 사람은 감옥에 가지 않고서 돈을 돌려주어야만
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를 찾아내서 감옥에 집어넣느니 보다는 먼저 돈을 돌려받고 거기에 벌금을 물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유대인 사회에서는 가령 "어떤 사람이 백만원을 훔친 경우, 랍비의 재판에 걸려유죄가 되고 벌금을 가하여 백십만원을 갚아주라는 판결이 내려졌다고 하자. 그 사람이 그 백십만원을 돌린 후에는 그는 전혀 전과가 없고 결백한 사람과 같아진다.
도난당한 쪽에서 저 놈은 돈을 훔쳤다는 따위의 말을 하면 욕을 한쪽이 나빠진다.
벌금은 대체로 20퍼센트 이상이지만 여기에는 엄밀한 규칙이 있다. 이를테면 무엇을 훔쳤느냐 하는데 따르기도 하고, 그것을 사용하고 돈을 벌 수 있었다든가, 밤에훔쳤다든가, 낮에 훔쳤다든가, 아침에 훔쳤다든가 하는 갖가지 조건에 의하여 등급이 달라진다. 탈무드에서는 말을 훔쳤을 경우 벌금은 굉장히 높은 것으로 되어 있다. 말을 사용하여 돈을 벌 수가 있고 도난당한 쪽은 몹시 곤란해지기 때문이다. 요즘으로 치면트럭이겠는데, 이경우는 4백 퍼센트 가량의 벌금을 받는다. 일반적으로 나귀쪽이 말보다 벌금이 싸다. 말 쪽은 순종을 잘해서 훔치기가 쉽기 때문이다.
훔친 사람의 입장도 참작된다. 굶주리고 있는 사람이라면 20퍼센트 정도의 싼 벌금이 된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벌금이나 돈을 지불치 않는다든가 금리를 물지 않는다든가하면 노동으로 지불해야만 했다. 최악의 경우는 감옥에 집어넣게 되지만 감옥에 집어넣는다고해서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 유대인의 사고방식이다.


*비밀

영원한 비밀이란 없다. 흔히 우리는 여러 사람이 알아서는 안될 이야기를 남의 귀에 가까이 대고, "너에게만 알려주는 것이니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말라"고 하는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렇게 해서 한 사람에게만 이야기한 것이 얼마 안 가서 여러
사람이 다 알게 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다.
서기 25년 경 중국의 후한시대에 양진이라는 학문이 깊고 인격이 높은 훌륭한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이 태수라는 벼슬자리에 있을 때였다.
어느 날 밤, 관하의 어떤 관리가 찾아와서 전에 신세를 많이 입었으니 그 사례를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돈을 내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뇌물을 가져온 것이다.
그러자 양진은 그 돈을 받을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완강히 사절했다. 뇌물을 가온 관리는 난처하게 되었다. 그는 다시 양진에게 돈을 받도록 권하면서 다음과 같이말했다.
"지금 밤도 깊은데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 어서 받아 두십시오."
이 말을 들은 양진은 조용하게 그러나 힘있게 저 유명한 양진의 사지, 즉 "하늘이알고, 땅이 알고, 그대가 알고, 내가 안다"는 말을 하고 끝내 그 뇌물을 받지 않고그대로 돌려보냈다.
뇌물을 가지고 온 관리의 말과 같이 두 사람만이 아는 일이라고 좋지 않은 일을
알면서 할 것이 아니다. 더우기 이 양진의 교훈에서 중요한 것은 "나도 안다"고 하는 말이다. 이 "나도 안다"는 말은 다시 말해서 양진의 건전한 자세를 이름이다.
이러한 양심적인 양진은 점점 높은 벼슬자리로 승진되었다. 그러나 양진은 그 고결한 성품 때문에 환관들의 미움을 샀다. 환관들은 양진에게 뇌물을 주고 마음대로하려고 했으나 그가 말을 듣지 않으므로 결국은 모략으로써 그를 관직에서 추방하였
다.
그 당시 많은 백성들이 분개한 것은 물론이려니와 양진이 죽었을 때, 그의 청렴결백하고 덕이 높은 데 감탄하여 천하의 명사들이 구름과 같이 모여들어 그의 장례를성대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이상하게도 어디서인지 큰 새 한마리가 그의 무덤앞에날아와서 절을 하고 눈물을 흘렸다고 전한다.


*사랑

문학은 허구의 세계를 그리지만 그것이 인간현실의 재현일 수 있기 때문에 강한호소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작품속의 인물은 곧 현실의 우리의 분신이기도 한 것이다.
첫째, 전당포이다. 이 할멈은 무고한 피해자지만 그 비정하고 다대한 착취를 통하여 결국 타인으로 하여금 보복을 단행하게 유도하므로 해서 피해자학 이론이나 사회윤리학으로 볼 때 "범죄유발범"이다. 흔히들 이 노파와 같은 인간을 수전노나 황금의 노예라 하지만 바울 사도는 "우상숭배자"라고 규정했다. 왜냐하면 그런 자들은
다만 황금을 자기의 유일한 절대 주인 또는 절대 가치(목적)로서 경배하는 종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라스꼴리니꼬바"라는 허무사상에 사로잡힌 청년 법학도이다. 그는 사회의 부정을 시정하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수단도 허용된다는 허무주의적 초인사상을대표하는자이다. 그는 인간을 범인과 비범인, 즉 평범한 인간과 천재적인 두 인간군으로 나누고 범인은 기존도덕과 법률에 복종할 의무가 있으나 비범인은 그러한 도
덕과 법률을 초월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고 확신하고 전체의 행복을 위해서라면소수의 희생은 불가피하며 마땅히 허용되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기 때문에 비범인 자신은 사회의 기생충과도 같은 노파를 살해할 권리가 있으며 이 권리행사는정당하다는 이론이다. 그러나 실상 노파를 살해한 직후 그는 자기 철학과 행위간에
극심한 갈등을 통감하게 된다. 그는 지나친 피해의식과 영웅주의에 사로 잡힌 돈키호테식 과대망상 주의자이며 그런 유형을 우리는 오늘날 소위 인질범들에게서 쉽게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셋째로 이기적이고 현실적 향략주의자인 "스비드리가일로프"와 쇼냐의 아버지인 "마르멜라도프"이다. 전자는 자기처를 독살시키고 하녀를 능욕하여 자살케 하고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으나 결국 자살로 막을 내리며 후자는 딸의 몸을 팔아서까지술을 마시는 비열한 위인이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도 섹스와 알콜이 난무하는 소
돔의 거리와 그것만을 탐닉하고 기생하는 지저분한 군상들을 얼마든지 발견할 수있다.
네번째는 크리스찬 "쇼냐"이다. 그녀야말고 작가가 창조한 사랑과 희생의 화신이며 구원의 여상이다. 빈곤과 불행한 가족에게는 희생의 제물이요 살인한 청년에게는사랑의 천사이다. 실로 이것은 허무주의와 무신적 철학에 대한 신앙의 승리이며 사랑의 쾌거이자 작가 자신의 창작 의도였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너를 향하여 내가 뿌리는 사랑과 희생과 봉사야말로 너 뿐아니라, 나, 그리고 우리 전체까지 포괄하여 전인적 구원을 가능케 하는 신앙의 묘약인 것이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고전 13:15)


* 성실

무슨 일에나 진실성을 가지고 임해야 한다. 비록 장난일지라도 그것이 진실일 때와 같은 성의로 해야 한다.
일찌기 공자도 어린이들이 노는 자리를 지나다가 그 아이들의 진실된 놀이 모양에다소 무례한 짓이 있었으나 감탄했다고 하였거니와 이와 비슷한 어사 박문수에 관한이야기가 있다.
박문수는 영조때의 이름난 암행어사로서 신분을 감추고 팔도를 두루 순회하면서군수와 그 밖의 지방관리들의 어질고 우둔함과 민정을 잘 살펴서 정치에 크게 공을끼친 사람이다.
언젠가 박어사가 남도 지방을 암행할 때의 일이다.
어떤 마을에 닿아 서당을 찾아가서 구경을 하고 있는데, 때마침 수십명의 아이들이 "원님놀이"를 하고 있었다. 박어사가 유심히 보니, 한 아이가 군수로 뽑혀서 상좌에 앉아 있었다.
그 아이는 자못 엄숙한 태도로 좌우에 두 아이를 관졸처럼 세워 두고 있었다. 그리고 어떤 아이 하나가 그 앞에 나와서 공손하게 절을 한 뒤 하소한다.
"군수님, 저는 지금 제가 갖고 있던 새를 놓쳤습니다. 어떻게 하면 붙잡을 수 있겠습니까?"
이 말을 들은 박어사는 대단히 흥미있는 놀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속으로 내가만약 저런 하소연을 받으면 어떻게 할까를 곰곰히 생각하면서 군수된 아이의 대답을기다렸다. 이윽고 이 하소연에 군수된 아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새를 놓쳤다. 그 새는 산으로 도망갔을 것이 틀림없으니, 너는 지금 새를 감추고있는 산을 잡아오너라!" 하고 영을 내렸다. 이 말을 들은 박어사는 무릎을 탁 치면서 기뻐했다. 뿐만 아니라 군수놀이 하는 그 아이 앞에 나아가서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칭찬을 해 주었다. 그런데 그 아이는 정색을 하면서 큰 소리로, "이 웬놈이 함부로 관청에 들어가서 군수를 모욕하느냐? 이놈들아! 이자를 포박해
서 옥에 가두어라!" 하고 관졸들에게 명령했다.
그러자 관졸이 된 아이들이 달려와서 박어사를 잡아 뜰 한 모퉁이에 있는 뒷간에가두었다. 박문수도 비록 아이들의 장난이지만, 그 하는 짓이 하도 진지해서 조금도나무랄 생각이 없어 몹쓸 냄새가 나는 뒷간에서 참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는지 아까 군수가 되었던 아이가 박문수를 찾아와서 공손하게 절을 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까는 무례한 짓을 해서 죄송합니다. 실은 저희들이 원님놀이를 하였는데, 비록놀이 일지라도 태도를 진실하게 하는 버릇을 길러 뒷날 법을 그대로 엄수해야 하겠기에 존장을 이런 누추한 곳에 가두었던 것입니다."하고 빌었다.
박어사는 그 모습이 또한 진지한데 더욱 감탄해서 그 아이를 자기 친자식처럼 기르기로 결심하고 교육시켰다. 박문수가 본 대로 그 아이는 뒷날 정승자리에 오르기까지 한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
어려서부터 하는 짓이 남다른 데가 있어서 박어사의 눈에 들었고, 그 뒤 더욱 노력해서 크게 성공한 것이었다.


* 술

<탈무드>에는 이와 같은 이야기가 있다. 노아가 포도나무를 심으려 하는데(창 9:20-27)사탄이 찾아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하고 물었다. 노아는 "포도나무를 심지요"하고 대꾸했다. 사탄은 다시 "포도란 어떤 나무지요?"하고 물었다. 노아는 "포도는 과일인데 아주 달고 또 적당한 신맛을 가지고 있오. 그리고 이것을 발효 시키면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술이라는 것이 된다오."했다. 그러자 사탄은 "그렇게도좋은 것이라면 나도 거들기로 하지요."했다. 노아는 사탄을 고맙게 여겼다.
사탄은 양, 사자, 돼지, 원숭이를 끌고 와서 죽이고 그 피를 밭에 흘려서 비료로했다. 그렇게 하여 자란 그 포도 열매로 술을 담갔다. 그리고 나서 노아가 술을 마셨더니 먼저 양처럼 약해지고, 좀더 마시니 사자처럼 강해지고, 좀더 마시니 돼지처럼 더러워지고, 좀 더 마시자 원숭이처럼 떠들고 돌아다녔다.
하나님께서 가장 의인이라고 하신 노아까지도 이와같은 상태가 되었는데 만일 인간이 마시면 어떤 일이 되는지 알리라. "술이 들어가면 비밀은 나간다."


* 인간

블란서 태생 과학자이며 소설가였던 야달베르트 폰 사밋소의 "페어테 슐레밀"이란소설이 있다.
어느 항구에서 "슐레밀"은 회색 외투를 걸친 사나이를 만난다. 그 사나이는 얇은주머니에서 쌍안경도 꺼내고 양탄자도, 승마용 말도 꺼내는 것이었다. 사나이는 "슐레밀"에게 다가와서 "당신의 그림자와 이 마법의 주머니와 바꾸자"는 흥정을 제의했다. 가난에 시달리던 슐레밀은 얼떨결에 승낙을 하고 만다. 사나이는 "슐레밀"의 그
림자를 익숙한 솜씨로 돌돌 말아 주머니에 넣고 훌쩍 떠나 버린다. 정신을 차려 숙소로 돌아오는 도중 "슐레밀"의 그림자를 어떻게 했느냐고 묻는 노파나 여인네와 꼬마들의 의혹과 놀림 때문에 곤욕을 치르어야 한다. 그는 곧 그림자를 판 자기의 어리석은 행위를 후회한다. 두문불출 방에 처박혀 밤에는 사십 자루의 촛불을 방 전체
에 켜 놓고도 도무지 안정을 느끼지 못한다. 그는 몇 번이나 아름다운 여인의 사랑을 받았으나 그림자의 비밀이 탄로되어 실연의 고배를 마셔야 한다. 그는 그림자야말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고귀한 것임을 깨닫고 무슨 댓가를 치르더라도 그림자를 되찾으려 한다.
허나 악마는 그림자를 돌려주는 대신 이번에는 그의 영혼을 요구한다. 그는 줄곧비웃고 유혹하는 악마의 간계에 말려들지 않으려고 마법 지갑을 던져버린다. 그리고광산으로 들어가 고된 노동을 통하여 번민으로부터 해방받으려 한다. 우연히 그는마법의 장화를 사게 된다. 그는 거리를 단축하는 신비의 장화를 신고 이집트의 피라
밋을 보고 구라파와 아시아를 두루 다니며 자연의 연구에 몰두하게된다. 그리고 끝에는 친구 "사밋소"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대 나의 벗이여,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살고자 한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그림자를, 그다음에 돈을 사랑하여야 합니다."
"슐레밀"이 팔아버린 그림자, 그리고, 이내 자기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다시 찾으려고 애를 쓰나 영원히 찾을 수 없었던 그림자, 그것이 없음으로 해서 인간 사회에서 백안시 당하고 사랑의 저버림을 당하는 그 그림자는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그림자란 직접 접촉할 수 없는 것이나 우리 인간 본연의 소유물인 것이다. 가지고 있을
때는 그다지 의미가 없는 것 같으면서도 그것이 없어지면, 그것을 무시하면 아쉽고절실하게 필요해지는 것이 세상에는 흔히 있다. 그것은 조국일 수도 있으며 신앙이며 양심이며 눈물일 수도 있다.


*인생

어떤 배가 항해를 계속하고 있을 때 바람이 불고 물결이 높아지며 폭풍우가 일어나 배는 항로를 벗어나고 말았다.
아침이 되니 바다도 고요해지고 어느 아름다운 섬이 곁에 있었다. 배의 닻을 내리고 잠깐 쉬기로 했다. 그 섬에는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 흐느적거리고 맛있어 보이는열매가 달린 나무들이 아름답게 늘어져 있었으며 새들이 지저귀고 있었다. 다섯 명씩 일행이 되어 나뉘었다.
첫째 일행은, 그들이 섬에 간 새에 순풍이 불어 배가 떠나 버릴지도 모르므로 섬이 아무리 아름다울지라도 우리의 목적지로 빨리가고 싶다고 하면서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배에 남았다.
둘째 일행은, 서둘러 섬에 상륙하여 향기로운 꽃냄새를 맡고 녹색 나무 그늘 아래에서 맛있는 열매를 따먹고 원기를 회복하자 곧 배로 돌아왔다.
셋째 일행도 상륙했으나 너무 지나치게 오래 섬에 있었기 때문에 만약 순풍이 일면 배가 출항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헐레 벌떡 돌아왔으므로 소지품을 잃어버리기도 하고 그들이 애써 잡아 놓았던 배의 좋은 자리도 잃고 말았다.
네째 일행은 순풍이 불어 선원들이 닻을 감아올리는 것을 보았지만 아직 돛이 달리지 아니했다는 둥 선장이 자기들을 남겨두고 출항할 까닭이 없다는 둥 갖가지 구실을 붙여서 계속 섬에 남아 있었다. 그러다가 막상 정말로 배가 항구를 떠나 가려하는데 문득 정신이 들어 황급히 헤엄쳐 뱃전에 올랐기 때문에 바위나 배둘레 같은
데서 몸을 다쳐 그 상처는 항해가 끝날 때까지 낫지 않았다.
다섯째 일행은 너무 먹고 지나치게 들떠 출항할 때 배에서 울리는 종소리조차 듣지 못했다. 그 때문에 숲속에 있는 맹수에게 잡아 먹히고 더러는 독이 든 열매 따위로 병에 걸려서 전멸해 버렸다.
독자라면 어느 일행에 속했을 것인지 잠깐 생각해 보기 바란다.
이 이야기 중에 나오는 배는 인생에 있어서 선행을 상징하고 있다. 섬은 쾌락을상징하고 있다. 첫 일행은 살아가면서 조금도 쾌락을 맛보려 하지 않았다. 둘째 일행은 쾌락에 조금은 젖었지만 자기들이 배를 타고 목적지에 닿지 않으면 안된다는의무를 잊지 않았다. 세째 일행은 지나치게 쾌락에 젖지 않고 돌아오기는 했으나 역
시 좀 애를 먹었고 네째 일행도 돌아오기는 했으나 돌아오는 것이 늦었으므로 목지에 오기까지 상처가 아물지 않았다. 그러나 인간이 떨어지기 쉬운 것은 다섯째 일행이다. 평생 허영 뿐인 것만을 위해 산다든지 장래일을 잊어버린다든지, 달콤한 과일 속에 독이 들어있는 것을 모르고 먹기도 한다.


*인형-마음속이 비어 있는 사람의 비유

중국의 고전인 대학이라는 책 속에 있는 이야기이다.
문장이 어려서 여러 어린이들과 책상을 나란히 하고 공부할 때이다. 바로 어린이들이 가장 기뻐하는 정월 명절이 가까왔을 무렵이었다.
문장은 명절 때의 여러 가지 재미있는 일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공부 시간에도 글에는 마음이 쏠리지를 않았다. 그저 즐거운 놀이나 그밖의 맛있는 음식을 먹는 일을 마음 속으로 이리저리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선생이 가르치는글이 귀에 들어갈 리가 없었다.
선생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자기가 가르친 글을 알고 있는 지를 묻는 일이 가끔있었다. 이 날도 전례에 따라 그렇게 하려고 우선 종이에다 큰 글자를 하나 써서 여러 어린이들에게 보였다. 그것은 바로 쉴 휴자였다.
선생은 쉴 휴자를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었다.
"쉰다는 뜻의 글자인데, 어째서 이 글자를 쉴 휴라고 하는지 알겠느냐! 왼쪽의 인변은 사람이라는 뜻의 글자고, 그리고 바로 오른쪽의 글자는 나무라는 글자이다. 이두 글자를 합친 모양이 다름 아니라, 사람이 나무 그늘에서 쉬고 있는 것이 된다."
선생이 "알겠느냐?"하고 되묻는 말에 모두 알아 들었노라는 표정이었으나 그중 문장만은 아무런 반응이 없다. 선생은 휴자를 크게 쓴 종이를 감추고 문장 앞에 가서방금 가르친 글자를 써 보라고 했다. 그러나 문장은 손에 붓을 든 채 움직일 줄을몰랐다. 선생은 문장을 보고 물었다.
"왜 쓰지 않느냐?"하고 말하자, 문장은,
"모르겠습니다."하고 대답할 뿐이었다.
"아니, 지금 막 내가 큰 종이에다 써서 보여준 것을 보지 않았느냐?"하고 선생이묻자, 문장은,
"아니올시다."하고 고개를 흔든다. 선생은 다시,
"뭣이! 보지 않았다고? 그럴 리가 있느냐? 너는 보았으나 잊은 것이 아니냐?"
하고 말했으나, 문장은 여전히 "아니 못 보았습니다."하고 말했다. 선생은 화를 내면서,
"거짓말을 하지 말아라. 내가 지금 종이에 쓴 근자를 보일 때, 너도 다른 아이들과 같이 이쪽을 보았는데"하고 곧 말을 이어서 다른 어린이들을 향해서 물었다.
모두들 "네 그렇습니다."하고 대답했다. 선생은 다시 엄숙한 어조로, "얘, 문장아, 보았으나 잊었다고 한다면 몰라도, 보고서도 안 보았다고 하면 거짓
말을 하는 것이 되니 그것은 나쁜짓이 된다."하고 말했다. 그러나 문장은 역시,
"아니예요. 보지 않았어요."하면서 울고 있었다.
문장이 억울하다는 듯이 흐느껴 울고 있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선생은 무엇인가 깨달은 듯이,
"응, 알았다. 보기는 했는데 보이지를 않았구나. 그럴 수도 있는 일이다. 너는 글자를 향해서 보고는 있었으나, 머리속에는 딴 생각을 했으니 글자가 보이지 않았던모양이다."
이 말을 듣자 문장은 울음을 그치고 선생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러자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래, 너는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눈만 돌리고 마음을 딴데 파는 것은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은 마치 마음이 없는 인형과 같으니라."
문장은 이때부터 공부할 때, 정신을 다른데 파는 일이 없었다.



지성이면 감천

옛날에 덕망이 높은 한 승려가 있었다.
불량한 아들 때문에 속을 썩고 고생을 하던 어떤 아버지가 그 스님을 찾아가 아들의 교육을 부탁하였다.
그는 그 아들이 도무지 아비의 말을 듣지 않을 뿐 아니라 매사에 어긋나기만 하니 자기로서는 도저히가르칠 수가 없다고 하면서 집에 와서 침식을 같이 하며 그 아들로 하여금 듣고 보고 깨닫는 가운데 스님의 감화를 받아서 사람이 되게 하여 달라고 부탁하였다.

스님은 생각끝에 그 부탁을 받아들이고 이제 그 고약한 소년과 같은 방에서 기거하게 되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한 주일이 가고 두 주일이 갔다.
처음 하루 이틀은 제법 얌전하게 굴던 그 소년은 또 다시 나쁜 짓만 골라서 하고 조금도 뉘우치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지만 스님은 그에게 단 한 마디의 꾸중도 하지 않았다.

두 달의 세월이 흘렀으나 역시 아무런 변화도 없고 스님은 그대로 침묵을 지켰을뿐이다.
그 불량자의 아버지도 차차 스님의 무관심에 대해 의심 뿐 아니라 불만을품기도 하였다.

그러는 가운데 기약한 3개월이 지났다.
이제 이 스님은 그 집을 떠나 절간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었다.
불량자 아들은 꾸중만 매일 들으리라 생각했다가 뜻밖에도 잔소리 한 마디 듣지 않은 사실을 한편 다행하게 생각하고 한편 의아스럽게 여겼다.

그래서 그날은 특별히 밖에도 나가지 않고 떠나가는 스님을 전송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스님은 현관에 앉아 신발을 신게 되었는데, 그는 그 불량자 더러 신들매를 좀 매줄 수 없겠느냐고 하였다.
그 소년은 작별하는 이 마당에 그만한 봉사야 못하랴 생각하고 허리를 구부려 스님의 신들매를 매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손등이점점 뜨거워지지 않겠는가?
소년은 놀라 스님의 얼굴을 쳐다 보았다.
그의 두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고 있었다.
손등에 떨어진 것은 스님의 눈물이었다.
석 달 동안 그 불량한 소년에게 단 한 마디의 꾸중도 하지않은 그였으나 얼마나 밤낮으로 그 어린 놈을 생각하였으면 이별의 자리에서 그처럼 눈물이 쏟아졌겠는가?

손등에 쏟아진 그 눈물 때문에 이 불량자는 뉘우치고 삶의 바른 길을 걷는 새 사람이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을 흔하게 쓰기는 하면서도 이 말의 진실함을 철저하게 믿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모든 일에 있어 훌륭한 방법이다.
방책을 아무리 열심히 강구하여도 정성이 부족하면 뜻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이 만고불변의 진리라고믿는다.

신변의 위험이 겁이 나서 예수가 누군지를 모른다고 잡아뗀 베드로를 돌아다 보는예수를 한번 상상해 보라.그와 시선이 마주쳤을 때 베드로는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하시던 말씀이 생각나서 밖으로 나가 통곡하며 울었다. 돌아다
보는 스승의 정성어린 눈길을 상상할 수 있다. 그 눈초리에 베드로도 감격하였으리라. 술책이나 권모는 사람의 참 마음을 움직이지는 못한다. 오직 지극한 정성만이사람의 중심을 변화시킬 수 있다.
인간의 정성이 하나님의 마음도 움직일 수 있다면 어느 인간의 마음이 지극한 정성에 감격하지 않을 것인가?

처세(處世)

"좋은 단지를 가지고 있으면 그날 중에 사용하라. 내일이면 깨져 버릴지도 모른다."

"정직한 자는 자기 욕망을 지배하지만 정직하지 않은 자는 욕망에 지배당한다."

"타인의 자비로 사느니 보다는 가난한 생활을 하는 편이 좋다."

"남 앞에서 부끄러워 하는 사람과 자기 앞에서 부끄러워 하는 사람 사이에는 큰거리가 있다."

"세상에는 도를 넘으면 안 되는 것 여덟이 있다. 여행, 여자 친구, 부, 일, 술,수면, 약, 그리고 향료이다."

"세상에는 지나치게 많이 쓰면 안 되는 것 셋이 있다. 빵의 누룩, 소금, 망설임이다."

"단지 안에 들어간 한 개의 동전은 시끄럽게 소리를 내지만 동전이 가득찬 단지는조용하다. "

"전당포는 과부가 가진 물건을 저당 잡으면 안된다. 여자나 아이가 가진 물건을저당 잡아도 안된다."

"명성을 구하여 달리는 자는 명성을 따라 잡지 못한다. 그렇지만 명성으로부터 피해 달리는 자는 명성에 붙잡히게 된다."

"물건을 취하지 않은 도둑은 자기를 정직하다고 생각한다."

"결혼의 목적은 기쁨, 회장자의 목적은 침묵, 강의의 목적은 듣는 일, 사람을 방문할 때의 목적은 일찍 도착하는 일, 가르치는 일의 목적은 집중, 금식의 목적은 있는 돈으로 자선하는 일."

"인간에게는 요긴한 부분 여섯이 있다. 그 중 셋은 자신이 지배할 수 없지만 셋은인간의 힘으로 아무렇게나 되는 부분이다. 눈, 귀, 코가 전자고 입, 손, 발이 후자다."

"당신의 혀에게 <나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하는 말을 힘을 다해 가르치라."

"장미꽃은 가시틈에서 자란다."

"공짜로 처방전을 쓰는 의사의 충고를 듣지 말라."

"항아리를 보지 말고 속에 들어있는 것을 보라." (신 10:17, 욥 34:19)

"나무는 그 열매로 알려지고 사람은 일로 말미암아 평가된다."(마 7:15-20, 눅 6:43,44)

"어린 오이를 보아도 그 오이가 장차 맛있게 될지 어떨지 모른다."

"행동은 말보다도 소리가 크다."

"남이 자기를 칭찬하게는 하여도 자기 입으로 자기를 칭찬하지는 말라."

"위대한 사람이 손아래 사람의 말을 듣고, 노인이 젊은 사람의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는 세상은 복될 것이다."

"노화를 재촉하는 네 가지 원인 --- 두려움, 노여움, 아이, 그리고 악처."

"사람의 마음을 가라앉히는 세 가지 --- 명곡, 조용한 풍경, 향기"

"사람에게 자신을 가지게 하는 세 가지 --- 좋은 가정, 좋은 아내, 좋은 의복"

"자선을 행하지 아니하는 인간은 아무리 굉장한 부자라도 맛있는 요리가 차려진식탁에 소금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자선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에는 네 가지 유형이 있다.

1.  자진해서 물건이나 돈을 사람에게 주지만 남이 돈이나 물건을 주는 것은 기뻐하지 않는다.
2. 남이 자선을 행함을 바라지만 자기 자신은 자선 따위를 베풀려 하지않는다.
3. 자기도 기꺼이 자선을 하고 남도 자선을 베풀 것을 바란다.
4. 자기도자선을 좋아하지 않고 남이 자선을 베푸는 것도 싫어한다.

첫째 유형은 질투가 깊고,
둘째 사람은 자기를 비하하고 있으며,
셋째 사람은 선한 사람,
넷째 유형은 완전한 악인이다."

"한 자루의 양초로 많은 양초에 불을 붙여도 처음 양초의 빛은 약해지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칭찬하시는 세 가지 일"
1. 가난한 사람이 물건을 보았을 때 그것을 임자에게 돌려 주는 일.
2. 부자로서남몰래 자기의 수입의 10퍼센트를 가난한 자에게 주는 사람.
3. 도시에 살고 있는독신자로서 죄를 범하지 않는 사람.

"일생에 한번 오리와 닭을 한껏 먹고 다른 날은 굶주리는 것보다는 평생 파만 먹고 있는 편이 낫다."

"자기 보존은 다음 세 가지 경우를 제외하고 온갖 것에 우선한다. 단, 다음 세 가지 경우에는 자기를 버리고 목숨을 버리는 편이 좋다."

1. 남을 죽일 때,
2. 불륜한 성관계로 들어갈 때,
3. 근친상간을 할 때

"상인이 해서는 안되는 일"
1. 과대선전을 하는 일,
2. 매점매석을 하는 일,
3. 계량을 속이는 일.

"단 과일에는 그만큼 벌레도 많이 먹고,"
"재산이 많으면 근심도 많고, 여자가 많으면 그만큼 꾸지람도 많고, 하녀가 많으면 그만큼 풍기도 문란하고,"
"사환이 많으면 집의 물건도 많이 도둑을 맞고,"
"스승보다 깊이 배우면 일생은 보다 풍요해지고,"
"명상에 더 오랜 시간을 내면 지혜도 보다 늘고,"
"사람을 만나 유익한 말을 들으면 좋은 길이 열리고, 자선을 보다 많이 베풀면 평화가 찾아온다."
"발가벗지 말라, 다른 사람들이 다 입었을 때는,"
"입지 말라, 남들이 다 발거벗을 때에는. 서지 말라, 남들이 다 앉아 있을 때에는앉지 말라, 남들이 다 서 있을 때에는. 웃지말라, 남들이 다 울고 있을 때에는 . 울지 말라, 남들이 다 웃고 있을 때에는."


세계 3대 단편작가 하면 "안톤 체홉", "모파상", "에드가 알란 포우"를 손꼽는데"체홉"의 "카멜레온"이라는 작품은 "카멜레온"이라는 제목 그대로 주위상황에 민감하게 변화하는 "오츄멜로프" 서장의 무기력한 인간성을 익살스럽게 묘사하고 있다.
새 외투를 입은 경찰서장 "오츄멜로프"가 광장을 지나다가 마침 개에게 손을 물려서 피를 흘리며 개를 닥달하는 귀금속 상인 "흐류겐"을 만난다.
진상을 알아 본 서장은 개주인을 찾아 손해 배상을 받음은 물론 개를 풀어 놓은과실을 엄중히 다스려야겠다고 거듭 강조한다. 그런데 이때 모여든 군중들 틈에서 "저 개는 장군 댁의 것이다."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자 경찰서장은 갑자기 태도를 달리하여 피해자를 향해 "자네가 못에 찔려 가지고 연극을 하는게 아니냐"고 욕설을
퍼붓는다. 이때 곁을 따르던 순경이 "저 개는 장군 댁의 개가 아닌것 같습니다."말하자 서장은 되받아 "글쎄 나도 알고 있어. 장군 댁의 개는 이보다 훨씬 큰 사냥개야"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군중 속에서 "아닙니다. 저 개는 틀림없이 장군 댁의 것입니다."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자 서장은 순경에게 "자네 이 개를 장군 댁에 끌고
가 보이게. 내가 발견하여 보낸거라고 말하게나. 잊지말고." 그런데 이 때 장군 댁의 요리사가 그 광경을 보고 "우리 집엔 이 따위 개는 없습니다."고 내뱉는다. 화가난 서장은 "이 따위 떠돌이 개를 당장 처치해 버려라."고 고함을 친다. 그런데 그요리사는 "서장님, 그러나 이 개는 장군님의 동생이 데리고 온 개입니다."라고 말하고 지나가려 했다. 지금까지 호통을 치던 서장은 갑자기 정색을 하며 "그럼 장군의동생께서 오셨단 말인가? 자네가 끌고 가게. 개에겐 아무 이상이 없으니까"
그 요리사는 개를 데리고 가고 서장은 "흐류겐"을 혼내줘야 겠다고 위협하며 다시 가던 길을 간다.
사람을 물어뜯은 개 한 마리를 두고 소신껏 추궁하지 못하는 경찰서장 "오츄멜로프"의 서글픈 상황 --- 여기에 관료주의 사회의 부조리가 있고 병폐가 매사에 직위와 권위를 민감하게 의식한 나머지 전전 긍긍하여 주변 정세부터 살펴야 하는 소시
민적 서글픈 현상, 이것은 "오츄멜로프"서장의 경우만은 아닐 것이다.
"상전들아 저희에게 공갈을 그치라."(엡 6:9)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 20:26)


*탐욕

<아메리카의 비극>하면 아마 대부분 생소하겠지만 영화화된 <젊은이의 양지>하면누구나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몽고메리 크리프트를 생각하며 기억을 새롭게 할 것이다.
원래 <아메리카의 비극>은 신문기자 출신 작가 드라이저(Theodore Dreiser, 1871-1945)의 역작인데 그는 물질문명을 유일한 가치로 추구하는 일단의 미국 현대사회와
그 사회에서 빚어지는 갖가지 저속한 인간생활 저변의 예리하게 파헤치므로 급속한산업 사회와 비인간화 현상이 심각해 가는 현대와 현대인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준문제작가인 것이다.
주인공 "크라이드.그리피스"는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청년이다. 그의 유일한 소원은 호화로운 옷과 맛있는 음식과 멋있는 자동차였다.
국민학교 졸업 후 약방점원을 거처 호텔급사가 된 그는 돈이 생기는 대로 유흥에써버렸다.
어느 날 남의 자동차를 훔쳐 아가씨들과 드라이브를 즐기고 돌아오는 길에 사람을치어 죽이게 되고 멀리 부자인 친척을 찾아간다. 교양은 없으나 어엿한 청년인 그는친척의 배경을 이용 상류자제들과 어울리게 되고 부호의 딸을 유혹하여 결혼까지 약속받게 된다.
그러나 그에게는 동거해 온 여공이 있었다. 더구나 그녀는 임신까지 했다.
이 여공만 없어지면 하고 열망하던 그는 결국 그녀를 유인하여 죽게 만들었다. 행복은 이제 눈 앞에 왔는데 그를 기다리는 것은 싸늘한 전기의자였던 것이다.
첫째, 이기심의 문제이다. "너를 죽여서까지라도 나만 행복할 수 있다면 그 길이선이다."라는 극단적 상대주의자가 소설속의 "크라이드.그리피스" 뿐이겠는가? 인간의 이기심은 그것이 현대에 와서만 특별히 문제시된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 어느시대보다도 가장 탁월하고 숭배 할 만한 기술 과학 시대를 창조한 현대인들이 왜 인
간 내심에서 이기심만은 축출해 내지 못하느냐 이 말이다.
때문에 치유가 요원한 이기심은 인간의 원죄와 숙명과도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둘째로 탐욕의 문제이다. 탐욕은 저급한 가치관을 낳게 된다. 지금 모든 사람의두뇌를 벅차게 점유하고 있는 사상은 황금만능과 물질지상주의이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야고보서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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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 (2)

지금으로부터 수 백년 전 불란서에는 부유하고 욕심많은 귀족이 살고 있었다. 그는 그의 재산을 안전하게 하기 위하여 성의 구석진 곳 아무도 모르는 밀실에 숨겼다
. 밀실에 이르는 통로는 깊숙하고 협소하였다. 그리고 입구에는 철문이 출입을 제한하고 이 문은 닫힐 때면 저절로 잠기었다.여기서 여러해 동안 이 수전노는 아무도모르게 돈을 만지작 거리며 말할 수 없는 행복감을 느끼었다.
어느 날 그가 소유하고 있는 땅에 예속되어 억압과 착취에 허덕이는 농민들로부터징수한 소작료의 돈주머니를 밤이 되기를 기다려 밀실 금고로 가져가 언제나 하듯이돈을 만지작 거리며 돈더미를 즐겁게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방을 나오려고 열쇠를찾으니 열쇠를 바깥에 두고 온 것을 알고 공포에 떨지 않을 수 없었다. 문은 잠겼으
니 그는 분명히 갇혀 있는 죄수와 같았다. 아무리 외치고 두드려도 그 방은 견고하여 소리나 빛이 외부와 차단되어 있기 때문에 누구도 그의 갇힘을 알고 달려와 구해줄 사람은 없었다. 그의 집안 사람들은 그의 갑작스러운 실종을 이상스럽게 생각하고 이 신비스러운 사건을 해결하려 애썼으나 결국 그는 누군가에 유괴되어 살해당했
다고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
수개월이 지난 뒤 먼 마을에 사는 자물쇠 만드는 어떤 노인이 백작의 실종을 듣고 30년 전에 그가 특수한 자물쇠를 고안하여 달아 준 희귀하게 만든 견고한 방을 회상하였다. 그 노인이 백작 친척의 안내로 간 그 밀실은 여전히 잠겨 있었으며 방안에는 백작의 부패한 사체가 돈더미 위에 발견되었으며 그 광경으로 미루어 보아 그
의 단말마의 괴로움을 짐작할 수 있었다. 재물에 대한 욕심은 많은 불행을 가져다 준다.



* 허사가

어렸을 적에 부흥회에 가보면 모두가 흥분의 도가니 속에서 잔치라도 하는 기분인데, 풍채도 좋고 목청 한번 시원한 이성봉 목사님이 허사가를 한 바탕 불러 제끼면살맛이 저절로 솟아나는 느낌이다.

세상 만사 살피니 참 헛되구나.
부귀공명장수는 무엇하리오.
고대광실 높은 집 문전옥답도
우리 한 번 죽으면 일장의 춘몽.

일생일귀 북망산 불귀객이 되니
일배 황토 가련코 가이 없구나.
솔로몬의 큰 영광 옛말이 되니
부귀영화 어디가 자랑해 볼까?

추조중의 만월대 영웅의 자취
석양천에 지난 객 회고의 눈물
반월산성 무너져 여우집 되고
자고새가 울 줄을 뉘 알았으랴.

일생 백 년 산대로 슬픈 탄식뿐
우리 생명 무언가 운무로구나.
그 헛된 그림자 지남 같으니
부생낭사 헛되고 또 헛되구나.

홍안소년 미인들아 자랑치 말고.
영웅호걸 열사들아 뽐내지 말라.
유수같은 세월은 널 재촉하고
저 적막한 공동묘 널 기다린다.

한강수는 늘 흘러 쉬지 않건만
무정하다 이 인생 가면 못오리.
서시라도 고소대 한 번 간 후엔
소식조차 막연해 연년 춘색 오건만
어이타 인생 한 번 가면 못오니 한이로구나.
금일 향원노던 객 내일 아침에
청산 매골 마른 뼈 한심하고나.
요단 강물 거스릴 용사 있으며
서산낙일 지는 해 막을 자 있나.
하루 가고 이틀 가 홍안이 늙어
슬프도다 죽는 길 뉘 면할소냐.

토지 많아 무엇해 죽은 후에
삼척 광주 일장지 넉넉하오며
의복 많아 무엇해 나 떠나갈 때
수의 한 벌, 관 한 개 족치 않으랴,

땀 흘리며 애를 써 모아 논 재물
안고 가나 지고 가나 헛 수고로다.
빈 손 들고 왔으니 또한 그 같이
빈 손 들고 갈 것이 명백치 않나.

모든 육체 풀같이 썩어 버리고
그의 영광 꽃같이 쇠잔하리라.
학문도 지식도 그러 하리라.
인간 일생 경영이 바람잡일 뿐
우리 희망 무엔가 뜬 세상 영화
분토 같이 버리고 주님 따라가
천국낙원 영광 중 평화의 생애
영원무궁하도록 누리로다.



* 혀


"유대인 둘이 모이면 세 사람 몫의 의견이 나온다."는 속담이 있다. 유대인에게질문을 하면 질문으로 돌아온다고 할 만큼, 그들은 호기심이 강하다. 아뭏든 유대인만큼 매우 수다스러운 민족도 다시 없으리라. 이 경구는 <탈무드>에 나오는 말인데 주전(B.C.) 5백년부터 주후(A.D.) 5백년까지사이에 연 수만명의 랍비가 토의한 과정이나 결과가 수록된 이 성전은 혼자서는 한평생 걸려도 읽을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양이 돼버렸다고 하겠다.
그래서인지 <탈무드>에는 입에 관한 경구가 많다.
"부주의하게 이야기 하지 말아라."
"비밀을 흘리고 다니지 말아라."
"잘 들으라."따위들이다.
유럽의 한 유대인 거리에 수다스런 남자가 살고 있었다. 그는 이야기를 청산유수처럼 잘하며 상대에게는 말 참견할 틈을 주지 아니했다.
한번은, 이 남자가 이웃 도시의 유대인 거리에 와서 랍비를 찾아보고 이렇게 말했다. "우리 읍의 랍비님이 선생님의 욕을 했답니다."
"그럴 리가 없다! 그럴 리가 없다!" 랍비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몇 번이고 뇌까렸다.
"아니죠. 나는 이 귀로 분명히 들었습니다요."남자도 질세라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럴 리가 없다! 무엇보다 자네가 거기에 있었다면 그 랍비는 한 마디도 꺼낼 수가 없었을게 아니냐?" 이스라엘 사람들의 농담이다.
"입을 다물 줄 모르는 사람은 문이 닫히지 않는 집과 같다."


*능력본위


생긴 대로 살아가고, 꾸밈새 없이 지낸다는 것은 한결 마음이 편한 일이다.
누구나 생긴 것 이상을 드러내 보이려고 억지 춘향식으로 꾸미고자 하고, 때로는그로 말미암아 무리한 짓도 하게 된다. 남이야 뭐라고 하든 자기 소신대로 행하고,누가 뭐라고 하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꾸준히 해 나가는 것이, 되지도 않는 일을 억지고 꾸미려는 것보다 한결 훌륭한 일이다.
다시 말하면 농사를 짓는 것이 제격에 맞는 사람이 장사를 하려다 실패하게 되고,또 그와 유사한 경우를 보게된다.
옛부터 우리나라 속담에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지, 갈잎을 먹으면 떨어진다."는말이 있다.
이 경우에 알맞는 고대 그리스의 예화가 있다.
철학자 디오게네스와 아리스팁푸스는 같은 시대의 사람이었으나, 두 사람의 성격은 판이하게 달랐다.
디오게네스는 세상 사람들이 거지라고까지 할 만큼 겉치레가 허술할 뿐만 아니라
먹는 음식도 변변치 않은 반면에, 아리스팁푸스는 사치를 좋아했다. 그는 자기 신분에 넘칠 정도로 매사에 호화스럽게 하느라고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기가 일쑤였다.
어느 날, 디오게네스는 자기가 먹을 야채에 묻은 흙을 털고 있으려니까 때마침 아리스팁푸스가 지나가고 있었다. 디오게네스는 빈둥빈둥 놀면서도 늘 사치를 좋아하는 아리스팁푸스를 충고하려고 생각했다.
"자네도 나처럼 이런 야채를 먹는 정도로 만족한다면 쓸데없이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면서 굽실거릴 필요가 없을 걸세." 하고 넌지시 말을 걸었다.
이 말에 아리스팁푸스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자네야 말로 나처럼 사람들과 잘 사귀는 기술을 배웠다면 시시하게 야채의 흙이나 털고 있지 않아도 됐을 걸세."



*작별인사

그는 굉장히 오랜 여행을 하고 있었으므로 피로에 지치고 굶주리고 목이 바싹바싹말라 있었다. 사막을 오랫동안 걸어서 간신히 나무가 자라고 있는 곳으로 나왔다.
나무 그늘에서 쉬면서 익은 과일로 굶주림을 채우고 그 곁의 물을 마시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는 계속 여행하기 위하여 다시 출발해야만 했다.
그는 이 나무에 크게 감사하여 "나무여, 굉장히 고맙다. 나는 어떻게 네게 보답하면 좋을까? 네 열매가 달도록 원한다고 해도 이미 네 열매는 충분히 달다. 상쾌한나무 그늘이 있기를 원한다고 해도 이미 너는 그것을 가지고 있다. 새삼 너를 자라게 하기 위하여 충분한 물이 있기를 원한다고 해도 이미 물의 혜택도 충분히 받고있다. 너를 위하여 내가 원할 수 있는 것은 네가 할 수 있는데로 많은 열매를 맺어열매가 많은 나무가 되어 너같이 아름답고 훌륭한 나무가 자라도록 원할 수 밖에 없구나."했다.
당신이 작별하는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원할 때 그 사람이 훨씬 슬기있게 되기를원해도 이미 충분히 풍부하고, 사람들에게 환영받는 선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여도이미 충분히 선한 사람일 때 당신은 "당신의 아이가 당신과 같이 훌륭한 사람으로자라기를!"하고 축원하는 것이 제일 슬기롭다.



* 광고

오늘의 사회에서는 광고를 할 때 거짓말을 하지 못하도록 규제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동차, 맥주, 또는 담배 등 오늘날 범람하고 있는 광고를 보고 있으면반드시 바른 정보만을 전하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예를 들면, 한 상품 측이 다른 상품보다 좋다고 일컫지만 반대로 또 다른 한 상품의 광고를보면 또 같은 말을 하고 있다.
그리고 상품과는 관계없는 포장이나 도안도 퍽 많이 사용되고 있다. 더구나 오늘날에도 그같은 일은 예삿일처럼 되어 좋은 판매방법이라고 말해지고 있다. 예를 들면, 미국의 담배광고를 보면 아름다운 처녀가 자동차 안에서 담배를 맛있게 피우는 장면이 나온다. 물론 여기서 거짓말을 하고 있을 리야 없겠지만 실제 담배를 피우는
사람에게 그 처녀는 아무 관계가 없다.
탈무드에서는 이와같은 판매방법을 금하고 있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사람을속이고 있다고 할 수가 있다.
탈무드에서는 소를 팔 때에 실제 빛깔과 틀리게 색칠하는 것을 금하고 있으며, 또갖가지 도구류에 색칠하여 새 것으로 보이게 하는 것도 금하고 있다.
말하자면 속일 목적으로 그것에 색칠하는 일을 금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곳에 노예가 있는데 그 노예가 먼저 머리에 물을 들이고 얼굴에 화장을 하고젊게 보이게 하고서 자기를 사가는 이를 속였다는 실예가 있다. 또 과일가게에서 신선한 과일을 묵은 과일 위에 얹어 놓고 파는 것도 안 된다고 한다.
또 탈무드에서는 건물의 안전 규명에 있어서 이를테면 처마의 길이를 제한하고,발코니 기둥의 굵기에 이르기까지 매우 자세히 알려주고 있다. 노동시간을 초과해서 사람을 부려서는 안된다고 되어있는데 예를 들면, 과일을 따는 노동자를 고용하는 경우 그 노동자가 어느 정도 과일을 손에 쥐고 먹는 것을 금할 수는 없다고 하였
다.
또 탈무드에서는 상품을 팔 때 그 물건과 틀리는 이름을 붙이는 것을 금하고 있었다.
오늘날 미국의 광고에서는 킹 사이즈라든가 풀야드라든가 하는 과대한 말이 사용되고 있다. 풀야드라고 하지만 그것은 한 야드밖에 안 되므로 그런 말은 일찍부터금지되어 있었다.


* 꿈

20C미국의 극작가 유진 오닐(Eugene oneill; 1888-1955)의 <지평선 저 너머>는 꿈과 이상과 행복이 한데 어우러진 지평선 건너 편을 동경하면서 젊은 가슴에 꿈과 이상을 가지면 인생에 있어서 얼마나 뜻깊은 일인가라는 사실을 묘사해주고 있다.
이 희곡의 중요한 등장인물은 안드류와 로버트 형제, 그리고 이 두 사람의 애인루우스라는 여성이다. 로버트는 농가의 자식이면서도 시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어릴적부터 병약한 몸으로 늘 저 산너머에는 얼마나 아름다운 것들이 많을까하고 미지의 나라를 동경하는 것이다. 청년이 되어서도 그는 늘 책을 벗삼으며 항상 꿈을 그
리며 지냈다. 그러나 형 안드류는 그와 정 반대의 성격으로 건실한 인간이며 땅을사랑하는 선천적인 농부였다. 이렇게 두 형제는 성격이 달랐으나 어릴 때부터 다투거나 싸움을 모르고 지냈다.
루우스는 가까운 농장의 딸로서 아름답고 건강하였으나 그저 교양이 없는 평범한처녀에 불과했다. 형 안드류는 일찍부터 그녀를 사랑하고 앞으로 결혼할 심산이었고그녀도 그러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로버트와 루우스는 결합하게 된다. 로버트는 지평선 너머로여행을 떠나기 전날 밤 루우스를 만나 사실은 자기형 보다 더 그녀를 사랑해 왔다고고백하면서 형과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아달라고 말한다. 그러자 그의 시적인 말에감동된 루우스는 "내가 진정 사모해 온 분은 당신의 형이 아니라 당신입니다. 부디
떠나지 말고 제 곁에 있어 달라"고 애원한다. 여기에서 로버트는 자기가 동경하던미와 행복이 멀리 가지 않아도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구나 생각하면서 여행을 중단하고 결혼할 것을 약속한다. 일이 여기에 이른 사실을 알게 된 형 안드류는 깊은 절망에 빠져 주위의 만류도 뿌리치고 로버트가 타려던 배를 타고 떠나버린다.
이리하여 조그마한 운명의 장난으로 시인인 로버트가 농장을 맡게 되고 농부인 안드류가 선원이 되었으니 이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로버트는 농장경영에 완전히 실패하고 빈곤의 구렁텅이에 빠져 고생 끝에 폐병을 앓게 된다. 고달픈 생활과 더불어루우스의 아름다움도 퇴색되었고 감정마저 말라버린 것 같았다. 형 안드류 또한 배
에서 내린 후 사업에 실패하고 황금만을 추구해 온 지난 날의 생활이 무의미했음을절감하게 된다. 이렇게 처절한 비극의 종장에 가서야 로버트는 병상을 뛰쳐나와 태양이 솟아오르는 것을 바라보면서 "이제 나에게도 행복이 찾아왔다. 자유를 얻게 된다. 영원히 자유로워진다."외치면서 숨을 거둔다.
꿈은 인생을 키우는 양식이다. 로버트의 실패와 폐병과 죽음의 비운 --- 그것은벌써 그가 꿈을 묻어버리는 순간부터 시작된 재앙이었다. 교양없고 경박스러운 루우스야말로 로버트의 꿈을 산산히 부셔버렸던 유혹자였다.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하느니라."(잠 29:18)


*남자

유대인은 극단에 치우치는 것을 싫어한다.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 빛과 어두움 등대립되는 것을 만드신 것은 인간이 언제나 대립하는 것을 갖추고 있음을 보이기 위해서 였다고 생각된다.
인간은 언제나 두 대립하는 것 사이에 살아가며, 두 대립되는 것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한 쪽에 치우치지 않도록 균형을 잡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남자 안에도 남자의 늠름함과 여자의 상냥함이 공존하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상적인 남성이란 남자의 강함과 여자의 상냥함을 겸비하고 있는 자다."



* 돈

돈을 잘 쓴다는 것은 결코 낭비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돈을 쓸 데에 인색해하는 것도 좋은 일이 아니다. 돈을 쓸 때에 생각해야 할 기준은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하나의 예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옛날 어떤 부잣집에 머슴살이를 하면서 돈을 탐낸 사람이 있었다.
자기는 아무리 해도 돈을 잘 벌 수가 없는데, 주인되는 사람은 하는 일마다 돈벌이가 되는 것을 매우 신기하게 생각했다. 어느 날 머슴은 주인에게, "주인님, 어찌하면 돈을 벌 수가 있습니까?"하고 물으니 주인은 머슴에게 이렇게말했다.
"그것을 말로 하기보다는 실제로 몸소 해야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머슴은 어떻게든지 가르쳐 달라고 했다. 주인은 머슴을 뜰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그곳에는 깊은 우물이 있었고, 그 옆에는 능수버들이 늘어져 있었다.
주인은 머슴에게 그 버드나무로 올라가라고 했다. 머슴은 좀 무서운 생각이 들었으나 돈버는 방법을 알고 싶은 욕심으로 주인이 하라는 대로 그 버드나무 위로 올라갔다. 그러자 주인은 머슴에게 그 버드나무 가지에 매어달리라고 했다.
머슴은 심신이 떨렸다. 그것은 그 바로 밑은 깊은 우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가지를 잡고 떨어지지만 않으면 우물에 빠지지 안겠기에 역시 주인이 하라는 대로했다.
두 손으로 버드나무 가지를 꼭 잡고 늘어진 머슴에게 이번엔 버드나무 가지에서한 손을 떼라고 했다. 조금 있다가 주인은 나머지 한 손마저 놓으라고 했다. 머슴은그것만은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하면 우물에 떨어질 테니까 말이다.
주인은 그제서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보게 돈을 벌려거든 돈을 쓸 줄 알아야 하는데, 돈을 쓸 때마다 지금 버드나무가지를 잡은 마지막 손을 뗄 때의 조심스러운 태도, 바로 그대로 해야 하네."


* 돈 (2)


사람이 권력을 가진 자, 높은 지위에 있는 자를 존경할 때에는 그 사람은 칭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가 가진 권력이나 지위에 대해서 경의를 표하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언젠가 두 사람의 남자가 랍비에게 상담을 하러 찾아왔다. 한 사람은 마을에서 제일 가는 금력가이고 다른 하나는 가난뱅이였다. 두 사람은 대기실에서 기다리게 되었는데 부자 쪽이 조금 앞서 도착했으므로 랍비실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는 한 시간이 되어서야 방에서 나왔다. 가난뱅이 남자가 그 뒤를 이어 들어갔다. 상담은 단 5
분만에 끝났다.
"랍비님! 부자의 경우는 선생님께서 한 시간이나 걸리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단 5분이 걸렸습니다. 이래도 공평하다고 하시겠습니까?" 가난한 남자는 항의했다.
랍비는 즉시 이렇게 말했다.
"자자, 내 아들아, 그대의 경우는 가난한 걸 이내 알았네. 그러나 부자의 경우 마음이 가난한 것을 알기 전까지 한 시간이 걸린거라네." "돈있는 사람을 칭찬하는 것은 사람으로서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칭찬하고있는 것이다."


*돈 (3)


유대인은 천주교도처럼 육체에 특별히 높은 지위를 주지 않는다. 천주교에서는 육체는 육욕의 원천이며 따라서 육체는 죄많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유대인은육체를 정신을 담는 그릇이므로 소중히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지만 육체, 그자체가 죄가 죄를 범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돈에 대한 유대인의 태도 역시 마찬가지다. 돈은 그 자체로는 좋은 일도 나쁜 일도 할 수 없다. 그런데 천주교도는 언제나 돈을 악이라고 생각하여 죄많은 것이라고해왔다.
이런 견해는 유대인에게 있어서는 인간이 자신없음으로 밖에 생각할 수 없다. 육체나 돈이 인간보다 위에 있다고 여기고 육체나 돈이 인간을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르지만 지나치게 두려워할 것은 못된다.
"돈은 좋은 사람에게는 좋은 것을 가져오고 나쁜 사람에게는 나쁜 것을 가져온다."


*돈 (4)

매춘은 "세계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직업"이라고 말하고 있다. 성경을 읽어도 매춘부는 자주 등장하며 또 중세의 유대인 거리에는 매춘부가 많았었다. 하긴 오늘날에 와서 유대인은 애쓴 보람이 있어서 모두들 제법 넉넉하게 살아가고 있으므로 유대인 매춘부를 만나는 일은 꽤 어려울른지도 모른다.
매춘부의 얼굴에 침을 뱉았을 때 그 여자가 "어머나, 비가 오네요."라고 말하는것은 무슨 뜻이냐면 매춘부는 돈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한다는 뜻이겠다. 비단매춘부가 아니더라도 이 세상에는 돈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든지 한다고 하는 위인들이 있다.
이것은 우회적으로 하는 얘기지만, "예컨대 누군가에게 5백원을 주고 얼굴에 침을뱉아 놓고 "비가 뿌렸다."고 한다면 "그렇군, 비가 뿌렸군."할 사람이 있겠는가?
만일 이 5백원이 5십만원이었다면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매춘부 얼굴에 침을 뱉으면 그 여자는 비가 온다고 한다."

*맛의 성격

맛은 그 성격상 두 가지로 구별된다. 그 하나는 생리적인 조건에 의해 크게 죄우되는 생리적인 맛과, 생리적인 것과는 별반 관계가 없이 감정적인 조건에 좌우되는 정서적인 맛이 그것이다.
맛을 짠맛, 단맛, 신맛, 쓴맛 네 가지로 나눈다면 짠맛과 단맛은 생리적인 맛이요, 신맛과 쓴맛은 정서적인 맛이다.
생리적인 맛이란, 땀을 많이 흘리거나 핏속의 염분이 모자란 듯하면 염분이 많은 음식이 당기고, 또 노동을 많이 하고 나면 핏속의 당분이 감소 단 것이 먹고 싶고 당기는 것처럼 핏속의 염분이나 당분의 농도에 따라 그 기호가 크게 달라진다.


*순결

어떤 남자가 어떤 처녀와 깊은 사랑에 빠졌다. 남자가 병이 들었다. 의사가 와서"이건 당신의 상사(상사)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병이 든 것으로 그 여성과 성적인 교섭을 가지면 반드시 낫는다."고 했다.
남자는 랍비한테 가서 의사로부터 이렇게 이야기를 들었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상담을 했다. 랍비는 결코 그와 같은 일을 가지면 안된다고 했다.
그러나 만일 여성이 그의 병을 고치기 위하여 나체로 그의 앞에 서 있어 그가 자신의 울적한 마음을 걷어낼 수 있음으로 해서 병이 나으면 어떻겠느냐고 물으니 랍비는 그것 역시 안된다고 했다. 그러면 그녀와 담 너머로 마주 보고 이야기를 하면어떻겠느냐고 물으니 랍비는 그것도 안된다고 했다.
물론 탈무드에서는 이 여성이 기혼자였는지 혹은 독신자였는지 밝혀져 있지는 않다. 그러나 그 남자와 다른 여러 사람이 랍비에게 어째서 당신은 그처럼 강경히 모든 일에 반대하느냐고 물었다.
"인간은 순결한 것이 아니면 안되고 만일 사람이 깊은 사랑에 빠졌다고 하여 금새성 교섭을 가질 수 있게 되면 사회의 질서는 지켜질 수 없다."고 랍비는 대답했다.



*성결

프랑스 작가 <아나톨 프랑스>의 단편 중에 "성모의 마술사"라는 작품이 있다. 어떤 보잘 것 없는 마술사가 있었다. 그 이름은 <바르나베>인데 여러가지 재주와 마술사로서 이 도시 저 도시를 유랑하며 힘겹게 살아간다.
어느 날 그는 어떤 수도승을 만나 자기도 날마다 성모를 찬양하며 순결하게 살고싶으니 허락해 달라고 간청한다. 그가 수도원에 들어가 보니 모두들 성모를 섬기기위해 자기 재능과 기술과 지식을 다투어 뽐내고 있었다. 원장은 성모의 미덕을 다룬책을 편찬하고 어떤 수도사는 익숙한 솜씨로 그 논문을 송아지 가죽에 베끼고 또 다
른 수도사는 거기에 섬세한 성화를 그리고, 또 어떤 수도사는 석상을 다듬고 있는것이었다.
여기에서 <바르나베>는 자기의 무지함과 무력함에 서글픔을 느낀다.
"모두들 성모님께 사랑을 바치고 있는데 나는 뭐람." 백방으로 자기 할 일거리를찾아 보았으나 매일 더욱 슬퍼질 따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온 천하를 얻은 듯 기뻐하며 예배당으로 뛰어갔다. 그때부터그는 매일 대부분의 시간을 예배당 안에서 보냈다. 그는 이제 슬퍼하거나 한탄하지도않았다. 다른 수도사들이 이상스럽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호기심에 가득찬 수도사들은 예배당 문틈으로 들여다 보며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바르나베>가 성모의
제단 앞에서 꺼꾸로 선 자세로 두발로 여섯 개의 공과 12자루 비수를 가지고 마술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모를 위해 단지 자기가 가진 유일한 재주를 부리고 있었던 것이다.
고참 수도사들은 그가 성모를 모독한다고 소리쳤다. 원장은 그가 순진하기는 하지만 아마 정신이 이상해진 것이라 생각했다. 그들은 우격다짐으로 <바르나베>를 끌어내려고 했다. 그러나 그 때 제단의 성모께서 내려와 푸른 만또 자락으로 마술사의
이마에서 방울져 내리는 땀을 씻어 주는 것을 보았다. 그 때 원장은 바닥에 엎드리며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다."라고 말한다.

*진정한 명예

세상 살면서 이기고 또 이긴 사람이 있다. 조선왕조 말기 우리네 대부분이 깊은 역사의 잠을 자고 있을 때 유달리 일찍 세상을 향하여 눈을 뜬 사람이 있었다. 그는 과거에 합격하기 전에 벌써 영어를 배웠던 사람으로써 미국이 우리와 가까히 지낼 때 친미파의 주동인물이 되었고, 세상이 변하여 러시아의 발언권이 강해지자 어느새 러시아어를 구사하며 친러파의 중심인물이 되더니,노일 전쟁으로 일본이 승리하자 이번엔 유창한 일어를 앞세워 친일파의 거두가 되고 이어서 국무총리까지 역임한 사람이다.
그후 우리나라가 일본의 손으로 넘어갈 때였다.그는 서슴없이 일본인이되어 그 나라 귀족으로 둔갑했고 마침내 후작이라는 작위까지 받았다. 어찌 이기고 또 이기기만 계속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바로 이 완용(1858-1926)이라는 사람의 얘기다
그런데 신가한 것은 우리들 어느 누구도 그를 생의 승리자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삶의 방향 설정이 잘못된 것이요 생을 통틀어 결산할 때 결단코 승리의 팡파르를 울릴 수 없는 일생을 살았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생각의 중요성

옛날 바닷가에 어떤 사람이 살았다. 그는 해오라기와 친하게 되어 그가 바닷가에 나가기만 하면 날아와서 어깨나 손위에 앉곤 했다. 그는 그 해오라기 얘기를 아내에게 했다. 아내는 그 해오라기 한 마리를 잡아오라고 하였다. 잡아올 마음을 먹고 이튿날 바닷가에 나갔더니 해오라기는 한 마리도 날아오지 않았다. 이것은 그에게 해오라기를 잡으려는 기심(機心)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심이란 이렇게 겉으로는 아닌 체하면서 속으로 품고있는 사심(邪心)이다.
예로부터 조류(鳥類)는 인간의 기심에 예민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 강남(江南)의 아파트촌인 압구정동(狎鷗亭洞)은 세조(世祖) 쿠데타의 공신(功臣)이요 벼슬밭에서 영화를 누렸던 권신(權臣) 한명회(韓明澮)의 정자 이름에서 비롯된 동명이다. 그는 벼슬에 욕심없이 강촌(江村)에 은퇴해 산다는 허울을 위해 이 강변에다 갈매기와 친한다(狎鷗)는 뜻으로 압구정을 짓고 아호(雅乎)도 기심을 잃은 노인이라 하여 `망기노(忘機老)'라고 자칭하였다. 하지만 기심에 예민한 갈매기는 이 정자를 피해 날았던 것 같으며, 뜻있는 선비들은 친할 `압(狎)'이 아니라 짓눌러버릴 `압(押)'구정으로 불러 내렸던 것이다.
병자호란 때 인질로 잡혀갔던 소현세자(昭顯世子)따라 우리 나라에 온 굴씨(屈氏)라는 궁녀(宮女)가 있었다. 한국 땅에서 살다 죽은 이 굴씨는 휘파람으로 온갖 새를 불러들이고, 불러들인 새를 손가락 끝으로 마음대로 다루어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사람들이 별다른 비결이라도 있는가고 물으면, 기심없는 천진(天眞)한 경지에 들면 새는 사람을 피하지 않는다고 대견스럽지 않게 대꾸하곤 했다.
한말, 헌종(憲宗)-철종(哲宗)-고종(高宗) 3대를 거쳐 어전에서 판소리를 읊었던 이날치(李捺致)라는 명창(名唱)이 있었다. 이 명창의 새 타령을 들은 일이 있다는 시인(詩人) 임규(林圭)는 이렇게 적어 남기고 있다. `어릴 적 고향인 익산(益山) 근처 심곡사(深谷寺)에서 이날치의 새 타령을 들은 일이 있는데 그가 새 소리를 낼 때마다 뻐꾹새인지 뭔지는 알 수 없으나 많은 산새들이 날아 들어 그를 에워싼 것을 보고 무척 신기하게 생각했었다'고-.
신앙이나 예술이나 수양에서 기심을 잃은 신묘한 경지에 이르면 새와 사람 사이에 격의가 증발해 버리는 것일까-. 그렇다면 새가 사람을 보고 피하는 것은 권욕(權慾)이며 이욕(利慾), 명욕(名慾), 음욕(淫慾)..., 위선, 시기, 모략, 음모...등 온갖 잡심이 범벅이된 것을 꿰뚫어 본 때문일까-. 그렇다면 도시에서 새가 사라지는 현상은 비단 공해만도 아닌 범람하는 기심 때문이었을까-

*사슴 뿔

이솝 우화에 나오는 사슴의 뿔 이야기를 잘 아실 겁니다. 아름다운 뿔을 가진 사슴이 늘 그 뿔을 자랑했는데. 어느날 사자에게 쫓김을 받게 되었습니다. 죽을 힘을 다해 도망쳤는데 그만 나뭇가지에 뿔이 걸려 오도가도 못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는 것이 그 내용이지요.
평소에는 아름다와 보이고 자랑거리가 되어도 정작 중요한 문제에 부딪혀서는 아무런 도움도 못 주는 것, 아니 오히려 거추장스럽기만한 것, 이런 것들에 일생을 걸려는 분들이 너무나 많더군요.



* 진정한 만족

<벤허>를 읽어 보면 동방 박사 세 사람에 대해 재미있게 묘사를 했는데 하나는 철학을 대표하는 사람이요, 또 하나는 윤리를 대표하는 사람이요, 다른 하나는 종교를대표하는 사람으로 나옵니다. 참을 찾고, 선을 찾고, 미를 찾고, 즉 인간의 진선미를 찾아 땅끝까지, 세상 끝까지 가보았습니다. 인간의 철학과 종교, 윤리가 추구하
는 꼭대기까지 가 보니까 거기에서 구세주를 만나야 할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습니
다. 구세주는 사랑인데, 그 사랑은 재능이 아니라 인격이었습니다. 그래서 별의 안내를 받아서 예수님을 만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썬다싱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죽어버리겠다고 하며 죽음이냐 하나님이냐의 양자택일을 놓고 기도하다가 십자가를 짊어지신 예수님이 나타나심을 보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열심으로 구하면 의에 주리고목마르게 됩니다. 진실로 주의 뜻을 구하고 주님의 뜻에 순종하기를 원하고 주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사모하면 배가 불러집니다. 물 한 컵 정도로 조금만 얻는것이 아니라 오아시스 같은 생수의 홍수를 만나게 됩니다. 우리가 부족함이 없게 되
는 것은 예수를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도덕을 추구하고, 철학을 추구하고, 종교를 추구하고, 열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묻고 물으면 예수를 발견하게 되어 거기서 만족함을 얻게 됩니다. '내가 주 안에서 쉴 때까지 내게 평안이 없었나이다'는
말처럼 진정한 만족은 그리스도 안에서 얻게 됩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니라(요 3:13-15)



시기심에서 해방

헬라의 민화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올림픽 경기에서 월계관을 차지한 일등선수의 기념비를 세워 놓았습니다.
그 라이벌 선수가 밤마다 몰래 가서 그 기념비를부수려고 끌로 그것을 쪼았습니다.
며칠 밤을 몰래 가서 그것을 쪼았는데 마지막 밤에는 그 기초를 다 쪼았습니다.
그래서 그 기념비가 넘어지는 바람에 자기가 죽었습니다.

시기라는 것도 다른 사람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죽이는 것입니다.
잠언 14장 30절에는 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를 썩게 한다고 했습니다.

시기는 가시와 같아서 뻗치는 곳마다, 손이 닿는 곳마다 남을 상하게 하고 자기도 상하게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이 사회를 해롭게 하는 것입니다.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가시가 뻗치면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다른 사람이 잘되고 행복해지는 것마다 배가 아프면 어떻게 살아 갑니까?
다른 사람이 잘될 때마다 기뻐하는사람은 기뻐할 조건이 많아지지만 다른 사람이 잘될 때마다 배가 아픈 사람은 잘 되지 못합니다.

성경을 보면 요셉의 형제가 요셉을 시기해서 못된 짓을 했고, 하만이 모르드개를잡아 죽이려고 시기하다가 오히려 자기가 그 장대에 매어달려 죽었습니다.
어린이들의 세계에 시기가 있고, 여인들의 세계에 시기가 있고, 학생들의 세계에 시기가 있고, 사업하는 사람들의 세계에 시기가 있고, 예술계. 정치계. 학계에 시기가 있습니다.

종교계는 어떻습니까?
제가 목사지만 종교계에 너무 시기가 많고 너무 질투가 많습니다.
시기는 가장 원시적 감정이며 천한 감정입니다.
이 시기에서 해방받기 위해 어떤 사람에 대한 시기가 생길 때, 시기 발언을 하고 싶을 때, 시기를 보복하는 행동을 하고 싶을 때, 주님께 그것을 가지고 가서 고침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것이 습관이 되고 품성이 되고 나중에는 그것을 이기게 됩니다.

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의 썩음이니라...악인은 그 환난에 엎드러져도 의인은 그 죽음에도 소망이 있느니라(잠 14:30, 32)

보라 의인이라도 이 세상에서 보응을 받겠거든 하물며 악인과 죄인이리요(잠 11:31)

구습을 벗자

어느 마을 골목에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가구두를 수선하며 늘 앉아 있었습니다.
제가 구두를 수선하면서 그 할아버지와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언제부터 구두 수선을 하고 있었느냐고 물었더니 할아버지는 일생 동안 다른 직업은 가져본 적이 없었다고 대답했습니다.
일제 시대에도 구두 수선을 했으며 전쟁이 나자 그 할아버지는 구두 통을 들고 다니면서 만주까지 가서구두 수선을 해주었다고 합니다.
전쟁이 끝나고 38선을 넘어올 때에 다른 사람들은모두 고생을 했지만 그 할아버지는 구두 수선하는 기술 때문에 고생을 안했답니다.
전쟁 중에도 구두를 닦는 사람이 있더랍니다.
그래서 한번도 다른 일을 해 보려고생각하지도 않았고 지금까지 그 직업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할아버지에게는 한 가지 불만스러운 것이 있었습니다.
만일 다른 일을 했더라면 훨씬 더 잘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 고향에서 같이 38선을 넘어온 사람이 있었는데 자기처럼 무식하고 아무 것도 하는 일이 없어서 처음에는 자기 밑에서 조수 노릇을 하다가 그것도 기술이 없어서 나가서 거리에서 치약도 팔고치솔도 팔고 수건도 팔고 하더니 구멍 가게를 빌리고 나중에는 도매 상점을 하고지금은 아주 부자가 되었답니다.
한 사람은 구두 수선하는 할아버지이고 한 사람은 백만 장자가 되었습니다.
그 할아버지가 그때 그 구두 통에다 마음을 두지 않았더라면, 차라리 보따리 장수가 되었더라면 큰 부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을 텐데할아버지는 구두 통 하나에 자기의 전생애를 다 걸었기 때문에 평생 구두 짓는 일을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하겠습니까?
믿는 사람을 중심으로 생각해봅시다.
우리는 지금 살고 있는 궤도가 있습니다.
아기가 어머니 배 속에 들어 있을 때 그 아기는 '아! 여기는 따뜻하고 좋다.'고 이렇게 어머니의 배꼽에 탯줄을대고 있으면 얼마든지 먹을 것도 주고 아무런 노력을 안해도 얼마든지 잘살 수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 아기가 어머니의 배 속에서 밖으로 나오려고 할 때는 굉장한 고통이 있습니다.
아기가 밖으로 나올 때 얼마나 깜짝 놀랐겠습니까? 그러나 아기는 고통과 진통을 겪지 않으면 살 수 없습니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찐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에베소서 4:20-24)




무한대의 밀도

우리의 최초의 힘은 인력(人力)이었습니다.
거기에다가 마력(馬力)이라고 하는 가축의 힘을 빌려서 노동력을 얻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화력(火力)이라는 것이 생겼습니다.
온천 지대에 가면 온천 물을 가지고 밥을 끓여 먹고 난방을 합니다.
물질이라고 하는 것은 그 밀도가 무한합니다.

중성자 별에 갈 것 같으면 찻숟갈만한 물질이 10억 톤의 무게와농도를 가질 수 있고, 온도는 1억 도가 넘는 그런 물체가 있다는 발표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보다 밀도가 훨씬 더 높은 것으로 블랙 홀이라는 별들의 무덤이 있습니다.
그처럼 전파나 광선이나 중력을 모조리 흡수해 버리고 아무 것도 통과가 안 되는 무한 밀도의 물질이 있다는 말을 읽어 본 일이 있습니다.

물질의 세계 속에 이렇게 무한한 밀도가 있다고 하면 정신계의 세계에는 더 무한한 에너지가 잠재적으로 감추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활용을 못한 많은 에너지가 있습니다.

여러분과 저의 비상한 힘을 이 시대가 필요료 하고 있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신념의 힘이나, 양심의 힘이나, 정신의 힘이나, 지식의 힘이나, 돈의 힘이나, 몸의힘은 너무나 작아서 하나님의 놀라운 목적을 이루기에는 너무 부족합니다.
우리에게는 여러 가지 힘이 필요합니다.
마치 자기의 힘만으로 뛰어가는 사람과 자동차를 타고 가는 사람이 다르듯이 자기 자신만의 힘으로 사는 사람은 큰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힘에 의해서 사는 사람과 자기힘의 극한에 의해서 사는 사람은 태평양을 뛰어가는 사람과 비행기를 타고 가는 사람과의 차이만큼 다른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힘이 필요합니다.
굉장한 힘이 필요합니다.
옥스포드 대학이 기독교 학교로 변했던 때와 같은 특수한 힘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그 힘은 성령께서 주시는 힘입니다.
그 성령의 능력을 활용할수 있는 기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음대로 성령이 쓸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나로 말미암아 말과 일이며 표적과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롬 15:18)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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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 사람을 찾습니다
어느날 이솝의 주인이 말했다.
"얘, 이솝아 , 목욕탕에 가서 사람의 많은지 보고 오너라"
이솝은 목욕탕으로 갔다. 그런데 목욕탕 문 앞에 끝이 뾰족한 큰 돌이 땅바닥에 박혀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목욕탕으로 들어갔던 사람이나 목욕하고 나오는 사람 모두가 그 돌에 걸려 넘어질 뻔 하였다. 어떤 사람은 발을 다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코가 깨질 뻔 했다.
"에잇, 빌어먹을!"
사람들은 돌에 대고 욕을 퍼부었다. 그러면서도 누구 하나 그 돌을 치우는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도 한심하지, 어디, 누가 저 돌을 치우는가 지켜봐야지'
이솝은 목욕탕에서 그것만 지켜보고 있었다.
"에잇! 빌어먹을 놈의 돌멩이!"
여전히 사람들은 돌에 걸려 넘어질 뻔하고는 욕설을 퍼부으며 지나갔다.
얼마 후에 한 사나이가 목욕을 하러 왔다. 그 사나이도 돌에 걸려 넘어질 뻔 하였다. 이솝은 여전히 그 사나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웬 돌이 여기 박혀 있담!"
그 사나이는 단숨에 돌을 뽑아냈다. 그리고 손을 툭툭 털더니 목욕탕 안으로 들어갔다.
이솝은 그제야 일어서더니 목욕탕의 사람수를 세어보지도 않고 그냥 집으로 달려갔다.
이솝은 주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 선생님, 목욕탕 안에 사람이라곤 한 명밖에 없습니다."


♥ 준비된 사람
성 구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막 1:3)
요한 웨슬리는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증조할아버지도 목사님인 뼈대있는 신앙의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가 태어난 영국은 당시 국교도 즉 지금의 성공회와 청교도사이에 싸움이 벌어져 뒤숭숭하였고 사회에는 술취함, 싸움질, 도박, 도적질, 자살등이 마치 전염병처럼 퍼지고 있었습니다. 신앙은 도리어 미신처럼 여겨지고 각처에서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심지어 교회의 지도자들까지도 사람들을 회개시키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도리어 사람들에게서 재물을 빼앗아다가 자기들 배를 채우는 일에만 바빴습니다. 이렇게 암울한 시대에 하나님께서 복음진리를 전파할 사람으로 요한 웨슬리를 예비하셨습니다. 하지만 웨슬리가 처음부터 뜨거운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옥스퍼드 대학에 들어갈때까지 습관적인 신앙생활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밤 숨이 막힐 정도로 코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얼마후에는 목구멍에서 직접 입으로 피를 토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일이 밤마다 계속되다시피 하였습니다. 그의 육신이 쇠약해지고 극심한 궁핍을 겪게되자 아버지처럼 훌륭한 목사가 되겠다던 그의 어릴적 서원이 생각나서 회개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옥스퍼드 대학의 성경공부 모임을 요한 웨슬리가 주관하게 되었고 모임은 날로 성장했습니다. "우리 대학교 안에 불이 붙었다. 성경말씀을 글자 그대로 실천하는 학생들이 생겨났다. 그들이야말로 메도디스트들이다." 메도디스트(methodist)는 감리교도라는 뜻으로 요한 웨슬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것들을 그대로 따라서 사는 사람들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이렇게 생성된 것이 '감리교'입니다. 한국도 많은 사회혼란과 불황을 겪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암울한 시대에 빛을 전하는 등불을 세우시길 원합니다. 그리고 당신이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할 복음의 주역입니다. 당신이 하나님께 드린 서원이 있는지 곰곰히 생각해 보시는 하루가 되시기 바랍니다.


♥ 사람다운 사람
새 학기가 시작되던 날 어느 사립학교 선생님들은 교장선생님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존경하는 선생님께!
"나는 죽음의 포로 수용소에서 살아 남은 생존자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나는 인간으로서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끔찍한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보았습니다.

'전문기술을 습득한' 공학도들에 의하여 만들어진 가스실!
'전문교육을 받은' 의사들의 실험대상이 되어 독살된 어린아이들!
'전문훈련을 받은' 간호원들에 의하여 무참히 살해되는 유아들!
'고등 교육과 대학 교육을 받은' 사람들에 의하여 총살당한 후 화장되는 여인들과 젖먹이들!

"그래서 나는 교육에 대하여 큰 회의를 품고 있습니다.
"존경하는 선생님, 한가지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선생님께서 가르치시는 어린아이들로 하여금 사람다운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교육시켜 달라는 것입니다. 선생님께서 가르치신 아이들이 머리 좋은 괴물이나, 전문기술을 습득한 미치광이나, 아이히만과 같이 전문교육을 받은 살인마가 되어서는 결코 안되겠다는 것입니다.
"읽기도 중요하고, 쓰기도 중요합니다. 계산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어린이들로 하여금 사람다운 사람이 되도록 도와주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


♥ 가장부유한 사람은
인간은 배우는 동물이다. 요람에서 무덤에 갈 때까지 인간은 배워야 한다. 특별히 인간은 감사의 철학을 배워야 한다.
"행복은 감사 속에 있고 감사는 만족 속에 있으며, 만족의 나무에 감사의 꽃이 피고, 감사의 꽃에 행복의 열매가 열린다"는 말이 있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흐믓한 정신적인 만족감이다. 그래서 인간이 행복하기를 원하시는 주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통하여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라고 가르치신 것이다.
우리는 유대인의 다음 명언을 마음에 새길 필요가 있다.
(1) 이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은 누구인가?
- 모든 사람에게 항상 배우는 사람이다.
(2)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누구인가?
- 자기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다.
(3) 이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은 누구인가?
- 자기가 가진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자기의 가진 것에 대하여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 중심이 선 사람
"중심이 딱 선 사람은 어떤 소리를 해도 홀리지 않지만,
중심이 서지 않은 사람은 늘 망상 속에 있으니 걸리게 돼요.
같은 꽃을 보고도 한숨 지으며 눈물 뿌리는 사람이 있고,
웃고 노래하는 사람도 있잖아요. 그렇다고 노래하는 꽃,
눈물뿌리는 꽃이 따로 있나요?
자기 마음을 중심으로 세계가 벌어지는 것이지요."
- 서화동의《산중에서 길을 물었더니》중에서 -
* 중심이 선 사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바람이 불어도, 눈보라가 쳐도 흔들림 없이 제 길을 갑니다. 일희일비(一喜一悲)하는 것은
중심이 서 있지 않음의 증거입니다.


♥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행위는 타인을 위로한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우리는 타인의 말을 들어줌으로써 그를 최고의 상태에 이르게 할 수 있다.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 사람과 그 말을 진지하게 들으려는 사람,
이 두 사람의 만남은 말하자면 하나의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어쩌다 운좋게 이루어진 것으로서, 미처 기대하지도 못했던 기분좋은 사건이다.
- 피에르 쌍소의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중에서 -
*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 사람과 들어주는 사람의 만남을 하나의 사건이라 표현하는 것이 결코 과하게 들리지 않습니다. 인생 길을 걷는 행로 중에 마음이 통하는 사람 하나 만나기가 결코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것은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진심을 믿고 사랑한다는 것이며, 그만큼 자기 인생의 그릇을 풍요롭게 채워간다는 뜻도 됩니다.

♥ 감사할 줄 아는 사람
유대인들 사이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명언 중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은 누구인가? 모든 사람에게 늘 배우는 사람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누구인가? 자기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은 누구인가? 자기가 가진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이다." 만족은 감사를 낳습니다. 우리가 모든 일에 감사하며 산다면 우리의 삶이 이토록 메마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너무 큰 일에만 감사하려 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 속에서 만족을 느낄 수 있으며, 감사할 수 있습니다. 쌀 한 톨을 만들려면 일곱 근의 땀을 흘려야 한다는 뜻의 일미칠근(一米七斤)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무심코 흘리고 또 전혀 아까워 하지도 않는 쌀 한 톨을 보면서도 우리는 그 쌀을 위해 땀흘린 수많은 손길들을 기억하며 감사할 줄 알아야겠습니다. "주님, 저희로 감사에 예민한 사람들 되게 하시옵소서. 감사치 않고는 하루도 살 수 없는 사람들이 되게 하시옵소서."

♥ 살아있는 사람은
하늘을 나는 새를 보세요.-죽은새는 날지 못합니다.
빨갛게 물들은 단풍을 보세요.-죽은 나무는 물들지 않습니다.
어항속의 열대어를 보세요.-죽은 물고기는 헤엄치지 못합니다.
달리는 말의 힘찬 모습을 보세요.-죽은 말은 달리지 못합니다.
어린아이의 건강한 웃음을 보세요-죽은 사람은 웃지 않습니다.
저 노란 국화화분을 보세요 -죽은 국화는 꽃피지 않습니다.
400개나 달린 배나무를 보세요-죽은 배나무는 열매맺지 못합니다.
살아 있는 것은 한결같이 움직이는 것이고,
죽어 있는 것들은 한결같이 묵묵부동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체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로 살아 있으면 움직이고 꿈틀대며 활동을 하지만 죽어있다면 활동이 없는 시체입니다.
사람이 살아있다는 말은 일을 한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살아있다는 말은 기상(뜻)이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살아있다는 말은 희망이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살아있다는 말은 기쁨이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살아있다는 말은 미래가 있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일을 하지 않고, 의미없이 살며, 희망이 없으며, 기쁨이 없는 사람은 살았으나 산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 마음이 가난한 사람(돈 물질 마음 가난)
어느 날 두 사람의 남자가 랍비에게 상담을 하러 찾아왔다.
한 사람은 그 마을에서 가장 돈이 많은 부자이고 다른 한 사람은 대단히 가난한 사람이다. 돈이 많은 부자가 가난한 사람보다 몇 분 먼저 왔기 때문에 차례가 되어 먼저 방에 안내되었다. 상담시간은 대단히 오래 걸려서 한 시간 이상이나 지체한 다음 가난한 사람의 차례가
되어 방에 안내되었다. 그런데 그 상담은 불과 5분만에 끝나고 말았다.
가난한 사람은 내심 분개하였다. 아무리 돈이 없는 사람이라고 이렇게 차별대우를 할 수 있는가? 돈이 많은 부자에게는 성의를 다해서 한 시간 동안이나 상담에 응해 주고 나는 가난뱅이라고 적당히 하는 것 이 아닌가? 이 눈치를 챈 랍비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돈이 많은 사람은 그만큼 마음이 가난하니 그 가난한 마음을 채워주기 위해서는 시간이 더 걸리는 법일세.` 돈을 천시하거나 경원시하지도 않지만 돈만을 추구할 때에 인간은 그 마음이 빈약해질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교훈하기 위한 이야기다.

♥ 열심히 하는 사람이
어느 교회에서 제일 잘 달리고 골프 잘 치고 사업 열심히 하는 사람이 건강진단을 받았는데, 의사가 `과로하지 말고 사업도 좀 쉬고 건강에 유의하시오`라고 말했다. 간염 증세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은 의사의 진단을 무시하고 5년간을 바쁘게 지냈다.
그리고 다시 진단을 받으러 갔더니 의사가 말하기를 `이젠 먹고 싶은 것 다먹고 운동하고 싶은 것 마음대로 하시오`라고 하였다. 그는 기분이 좋아서 그대로 시행했다. 그러나 그는 그로부터 26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간염이 간암으로 악화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면 안된다.

♥ 무지한 사람의 근심
어느 영국 사람이 대서양을 건너서 뉴욕으로 가는 여객선을 타고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에게는 식사 시간이 되면 한 가지 걱정거리가 생겼다. 다른 사람들은 식당에 들어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는데, 그는 가진 돈이 없기 때문에 음식을 사 먹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혼자 슬그머니 갑판으로 나와서 싸가지고 온 비스켓과 치즈를 먹곤 하였다. 이렇게 며칠이 지났는데, 이제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허기진 상태가 되었다.
어느 날 선장은 식사시간만 되면 혼자 갑판 위에 앉아 있는 그에게 `왜 당신은 식사시간만 되면 여기서 비스켓만 잡수십니까?`라고 물었다. 그는 `선장님, 저에겐 식당에 가서 음식을 사 먹을 돈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라고 힘없이 대답하였다.
그 때에 선장이 하는 말이 `당신이 이 배를 탈 때 사둔 승선비 속에는 이미 식사대금이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음놓고 가서 잡수십시요`라고 알려주었다. 그제야 비로소 그는 식당을 이용했고 겨우 한끼의 음식을 먹으니 미국에 도착하였다.


♥ 야망에 불타는 사람의 사다리
겸손이라는 것은 처음에는 야망에 불타는 사람의 사다리이다.
사다리를 올라가면 얼굴을 위로 향해 올려보지만 그러다가도 막상 꼭대기에 다 오르고 나면 단번에 사다리에 등을 돌려버리고 더 높은 구름을 쳐다보며


♥ 새벽기도를 사랑하는 사람들
오늘 새벽도 설레임을 안고 새벽 기도회를 인도한다. 늘 만나는 얼굴인데도 반가운 얼굴들이요 새벽마다 만나는 얼굴들 인데도 늘 신선하고 아름다운 얼굴들이다.
목사는 새벽 기도를 드리는 성도의 모습에서 참으로 많은 은혜를 받게 된다.
늘 보이는 얼굴 중에 안보이는 성도가 있으면 마음이 무겁다.
그러나 새벽 기도회에서 새로운 얼굴을 대할 때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목회를 할수록 새벽기도회에 대한 애착이 더욱 깊어져 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새벽기도회 예배를 마치고 성도의 가정들을 위하여 기도하기 위해 교 적부를 뒤적이는 기쁨 역시 너무도 크다. 사진이 없는 성도는 눈을 감 고 기도하고 사진이 있는 성도는 사진을 보면서 기도한다. 가끔 어려운 일로 고생을 하고 있는 성도의 얼굴을 보노라면 안타까운 생각 때문에 마음이 아파 온다.

♥ 귀중한 사람
어떤 사람이 자기의 목숨이 위험한 것을 무릎쓰고 물에 빠진 아이를 건져 구해 주었다. 소년은 그 사람에게 "선생님, 나를 구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소년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천만에! 다만 한가지만 언제나 기억하고 살기를 바란다. 너는 어떤 사람이 자기의 목숨을 모험해 가면서도 구해낼 만한 가치 있는 사람인 것을 잊지 말고 살아 다오."
그렇다! 당신은 하나님이 독생자를 희생하시면서 까지 구해 주실만 한 귀중한 사람
인 것을 잊지 말라.

♥ 월요일을 기다리는 사람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혹시 주위에 자신의 일을 사랑하면서 에너지가 넘쳐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본 적은 없는가? 이런 사람은 자신의 직장에 대해서 끊임없이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월요일을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의 주위에는 전부 재미있는 일로만 가득 차 있어 주위 사람들도 그런 열성스런 분위기에 동화된다. 자신의 가슴속에 가장 가까이 있는 분야, 즉 당신이 품고 있는 열정, 소망, 흥미에서부터 시작하라. 그런 분야의 일을 하고 어떻게 돈을 벌지는 다음에 생각하라.
- 로빈 쉬어러의 《더이상 우울한 월요일은 없다》중에서 -
* 살다보면 온갖 고통과 번뇌, 없는 사람 없습니다. 다만 그것들은 다스리지 못해 자기도 남도 해치는 독(毒)으로 만드는 사람과, 자기 안에서 잘 다스리고 녹여 향기(香氣)로, 활력(活力)으로, 삶의 에너지로 만드는 사람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 향기, 그 활력과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은 월요일도 화요일도, 좋은 일도 궂은 일도 다 즐겁습니다.

♥ 어떻게 사람은 사람만 낳을까
어떻게 사람은 사람만 낳고 돼지는 돼지만 낳을까.그 이유는 각 생물마다 자신의 독특한 정보를 DNA라는 물질에 갖고 있기때문이다.DNA는 뉴클레오티드란 구성단위가 길게 연결돼 있는 거대한 분자인데 여기에는 염기의 종류에 따라 ATCG라는 네가지가 있다.이 네 종류의 뉴클레오티드가 일정한 순서로 배열돼 생물에게 필요한 모든 정보를 전달하게 된다.마치 자음과 모음을 일정한 순서로 배열해 「나는 너를 사랑해」라는 의사를 전달하는 것과 같다.팩시밀리는 「나는 너를 사랑해」라는 편지를 보내게 되면 기계가 글씨를 전자파로 바꿔 상대편 팩시밀리에 전송한 후 정해진 코드대로 바꿔 「나는 너를 사랑해」라는 글로 인쇄한다.
오직 정보만 전달될 뿐 실제로 아무런 물질을 받는 것은 아니다.많은 사람들이 DNA가 생명인줄 착각하고 있다.그러나 DNA는 글씨와 같이 정보만 갖고 있는 죽어 있는 화학물질에 불과하다.그러므로 DNA는 살아 있는 세포속에서만 그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우연히 A­T­C­G뉴클레오티드가 합성,결합된들 무의미하다는 것이다.팩시밀리가 있고 편지를 쓸 사람이 있어야 「나는 너를 사랑해」란 문장이 의미가 있듯이 생명을 만드시고 모든 정보를 기록하신 하나님과 생물이 존재할 때 DNA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사람의 몸은 75조개의 세포로 구성돼 있으며 한 개의 세포속에 저장된 정보를 인쇄하면 1천쪽짜리 1천권정도에 해당된다.그러나 이 정보가 2m정도밖에 안되는 DNA에 모두 저장돼 있으며 46개의 염색체로 나뉘어 실패처럼 감겨 작은 세포속에 저장돼 있다.
만약 우리 몸에 있는 모든 세포의 DNA를 한 줄로 연결하면 적어도 1천5백억㎞에 달하며 이는 지구를 3천5백만번 돌 수 있는 엄청난 길이인 것이다.이러한 엄청난 정보를 가진 인간이 우연히 진화됐다는 가설은 참으로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동안 수많은 우려와 경고에도 불구하고 일부 과학자들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생명의 신비한 모든 정보를 갖고 있는 DNA를 마음대로 조작,실험을 해 왔다.결국 양을 복제하는데 성공,세상을 놀라게 하더니 급기야 원숭이의 복제까지 성공했다.동일한 기술로 인간의 복제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생명을 위해 모든 정보를 기록해 놓은 유전자조작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파괴하는 행위로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요 죄악인 것이다.뿐만 아니라 어떤 종류든 생물의 복제는 궁극적으로 생태계를 파괴할 수 있으며 인간의 복제는 인간의 윤리를 파괴하고 말 것이다.
인간의 이기적인 목적에 의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을 마음대로 복제하고 이용한다면 미인을 다량 복제해 상품화하는 등 인간의 존엄성은 곧 무너지게 될 것이다.인간의 복제는 사회구조를 근본적으로 파괴할 것이다.
남녀 관계없이 원하는 형질의 인간을,심지어 자기자신을 마음대로 복제할 수 있게 된다면 결혼의 존엄성및 부모와 자녀의 관계 등 기존의 사회를 받치고 있던 가장 중요한 기본단위인 가정이 파괴되고 이는 결국 총체적인 사회의 파괴로 이어지고 말 것이다.

♥ 잘못한 사람을 칭찬하기

남아프리카의 바벰바 부족사회에서는 반사회적인 범죄행위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고 니다.
행여나 그런 일이 일어날 경우 그들은 우리와는 달리 상당히 흥미로운 의식으로 죄를 저지른 사람을 계도한다고 합니다. 만일 누군가 규범에 어긋난 행위를 저지르면 그 부족원을 마을 한가운데에 세우고 모든 부족원이 모여듭니다.
모여든 부족원들은 잘못한 그 부족원을 둥그렇게 에워싸고 차례로 돌아가면서 가운데 세워진 부족원이 그동안 베풀었던 선행을 하나씩 말합니다. 그의 건설적인 능력과 선행, 친절한 행위 등이 빠짐없이 열거됩니다.
반면 그에 대한 불만이나 무책임하고 반사회적 행위에 대한 비판은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 부족원 전체가 잘못을 저지른 그 부족원의 칭찬거리를 다 찾아내면 의식이 끝나게 되고 즐거운 축제가 벌어집니다.
그리고 잘못을 저지른 부족원은 다시 부족의 일원으로 환영받으며 되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심판은 잘못을 저지른 부족원의 자존심을 최대한 살려주면서 그로 하여금 부족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살도록 만드는 효과를 갖게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는 상대방의 약점에 대해 그것을 가만 두려 하지 않습니다. 제대로 용서할 줄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잘못에 대해 솔직하게 시인하고 진심으로 사과하며 용서를 빌면 그것을 받아주는 관용과 아량이 필요한데 그렇지가 못합니다.
진심어린 회개와 용서는 이 사회를 건강하게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하다보니까 사람들은 점점 자신의 과오를 은폐하려 하고 흠이 드러날까봐 노심초사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이 사회는 위선과 거짓,독설과 정죄만이 난무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정직하길 원하십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볼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마 5:8).
손이 깨끗한 자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시 24:3∼4).
우리는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의 교훈을 잘 새겨야 합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심판해야 할 자리에서 행해진 예수님 말씀의 울림이 모인 사람들의 손에서 돌을 버리게 하였습니다.
우리 모두 이런 사회를 만들어 갑시다. 내가 심판과 정죄의 자리가 아닌, 용서와 사랑의 자리에 설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롬 12:17) 선으로 악을 이기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롬 12:21).

♥ 꿀벌형 사람이 되자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이 남긴 말 중 사람을 곤충으로 비유해서 한 얘기가 있다.그는 이 세상에는 거
미형의 사람,개미형의 사람,꿀벌형의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첫째로 거미형의 사람은 ‘있어서는 안될 사람’이라고 했다.거미는 일도 안하고 잠만 자다가 남의 피를 빨아먹는다.
베이컨은 이런 사람을 가리켜 ‘이기주의 인간’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둘째로 개미형의 사람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을 사람’,즉 있으나마나 한 사람을 가리킨다고 했다. 개미는 부지런하고 단결심도 강하지만 어디까지나 자기들끼리 잘 뭉친다는 것이다.따라서 베이컨은 개미와 같은 사람을 ‘개인주의 인간’이라고 지적했다.

세번째로 베이컨은 꿀벌형의 사람은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강조했다.꿀벌은 조직력도 강하고 부지런하다.열심히 꿀을 만들어 자기들도 먹지만 대부분 주는 삶을 산다는 것이다.베이컨은 이런 사람을 가리켜 ‘이타주의 인간’이며 사회 곳곳에 이러한 꿀벌형의 사람이 꼭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기독교인이라면 과연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생각해볼 말이다.

♥ 영적인 사람
A.W. 토저; "영적인 사람"
진정으로 영적이라는 것은 어떤 특별한 갈망이 있는 것을 말한다.
이 갈망은 생명을 주게 하며 또 절제하고자 하는 깊이 내재한 심오한 소원이다.
영적인 사실에 있어서 어느 것이 중요한지 순서를 결정하기는 어렵지만 편의상 아래와 같이 구분하기로 하자.
1. 첫째의 갈망은 행복해지려는 것보다는 거룩하고자 하는 것이다.
2. 자신에게는 일시적으로 불명예나 손실이 올지라도 자기의 생애를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받으시기를 원하는 사람은 영적인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3. 영적인 사람은 자기의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기 원하는 사람이다.
4. 또한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보시는 견해대로 보는 그리스도인은 영적인 사람이다.
5. 영적인 사람은 잘못 살아가기 보다는 바르게 죽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6. 한편 진정으로 영적인 사람은 자기가 큰 댓가를 치뤄도 다른
사람이 성장하며 믿음에서 진보되기를 바란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우리 자신 가운데에서 성령께서 역사하셔야만 되어진다.
아무도 스스로 영적인 사람이 될 수는 없으며 오직 성령께서 자유롭게 움직이시어야 영적인 스리스도인을 만드실 수 있는 것이다.

♥ 가장 선한 사람
가브리엘 마즈세르의 희곡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매혹적인 젊은 여성이 누구의 눈에도 신통치 않은 못난 남자하고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남자는 모두가 자기를 멸시하는데 뭇 남자들의 우상같은 존재인 그 여자가 자신과 결혼해 준 사실을 고맙게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열등 의식으로 인해 그 여자의 결혼의 동기를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그 여자에게 고통을 주고 싶다든지 꼬집어 주고 싶다든지 하는 야릇하고 못된 심정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이를 안 아내는 그 열등 의식을 고쳐 주려고 했습니다. 남편의 열등감을 고쳐 보려는 선의를 지닌 것입니다. 그녀는 자기 자신도 남편과 마찬가지로 열등감이 있음을 나타냅니다. 순수한 사랑이 거부당하는 수모와 열등감과 불만을 남편에게 보입니다.

이런 방법으로 남편의 열등감을 고척 보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남편은 아내가 열등감이 있는 척하여 자신을 고치려고 하는 것을 보고 그 아내를 천사처럼 생각하기보다는 그 순수한 사랑을 학대하고 짓밟고 모욕했습니다. 결국 거듭되는 악순환 속에서 아내는 나갈 길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다른 남자에게 도망을 가 버린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한 편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인간의 선의지(善意志)라는 것에는 한계가 있으며 이기적인 것임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편에서 볼 때에는 어떠한 사람의 선도 자랑할 만한 것이 되지 못합니다. 성경은 인간의 선이란 때묻은 의복과 같다고 했습니다.

또 의인은 한 사람도 없으며 만물 중에 가장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톨스토이는 제일 흉악한 사람은 자기를 악하지 않고 선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적당하게 악한 사람은 내가 별로 악하지는 않지만 별로 선하지도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성자들은 '아 ! 나는 죄인의 괴수다. 오 ! 괴로운 사람이다'라고 하며 참회록을 씁니다. 이 말만 보더라도 자기 마음이 착하다고 거들먹거리는 인간일수록 착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 18 13,14)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 : 15)


♥ 감사하는 사람 더 좋은것 받음
영국에 대설교가 스펄젼 목사는 이런 말을 하였다.`촛불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전등불을 주시고 전등불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달빛을 주시고, 달빛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햇빛을 주고 햇빛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촛불도 전등불도 달빛도 필요없는 영원한 천국을 주신다`고 했다.

♥ 그늘이 되어 주는 사람
지친 자, 목마른 자, 상처 입은 자, 눈물 흘리는 자, 병든 자, 가난한 자들이 나에게 와서 안식할 수 있도록 그늘이 되어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인류는 예수님 안에서만 진정한 쉼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의 욕망으로 인하여 힘들고 지친 자가 되었으니 누가 우리에게 와서 쉴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먼저 쉼을 얻어야만 다른 사람들이 내게로 와서 쉼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쉼의 통로가 막히는 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안식만을 구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나를 버리면 누구든 내게 와서 쉼을 얻고 내게서 흘러나오는 예수님의 생수를 먹고 마시며 안식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참된 쉼을 가져 상처 입은 자, 고통받는 자, 병든 자에게 그늘이 되어 예수님의 나라를 일으켜야 할 것입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 4:18,19).

♥ 향기나는 사람
사모님이 치자향 가득한 화분 한 개를 사오셨습니다.
차에 화분을 싣고 다니는 사람이 특별히 깎아줘서 싸게 사셨다는데 과연 그향기가 진하고 다른 냄새들을 압도하였습니다. 그동안 쾌쾌한 꼬랑내만 나던 사무실이 일순간 항기가 진동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압도하는 향기가 있는가 하면 어떤 꽃의 향기는 있는듯 없는듯 은은합니다.
그러나 그 꽃을 치우면 단번에 향기가 사라진 것을 알 수 있는 그런 꽃의 향기도 있습니다. 주로 동양란과 같은 기품 있는 꽃들입니다.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많은 사람들이 치자향처럼 압도하는 향기로 단번에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유명인이 되기를 원하고 불철주야 노력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훌륭한 일을 했어도 그것을 드러내지 않고 겸허하게 자신을 낮추며, 남을 비방하지 않으면서 성실한 자세로 삶을 사는 그런 동양란 같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제 책상에는 동양란 한 촉이 있습니다.
언제 그 기품있는 향기를 줄 것이지 기약이 없지만
이놈을 볼 때마다 오래 참고 때를 기다려 꽃 한송이 향기 한줄기 줄 그날을 기다리는 인내를 배웁니다.
"가라사대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마가복음 7:20)
어느 유명한 대학에 소아마비로 큰 불편을 겪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학생은 공부도 잘 할 뿐 아니라 항상 명랑하고 자신감에 차 있었습니다. 어째서 이토록 쾌활하고 자신감이 넘치게 사는지 그 비밀을 말해달라는 물음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소아마비가 내 마음까지 파고든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사지는 멀쩡한데 마음의 병,영혼의 병을 앓고 있어서 주위를 괴롭히는 사람도 많습니다. 육신의 장애는 자기만 불편한 것으로 끝나지만 영혼의 장애는 자기는 편할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에게 피해와 상처를 줍니다. 그런 사람이 건강한 육신과 그럴 듯한 학력으로 중요한 위치에 올라서면 그 피해는 더 큽니다. 썩은 오물이 풍기는 악취는 바람 불고 씻으면 없어지지만 인격이 풍기는 악취는 잘 지워지지도 않고 오랫동안 괴롭힙니다. 지금 내게서 나오는 향기는 어떤가요.

♥ 성공하는 사람들의 습관
본문:열왕기하 2:1∼14
“엘리사가 가로되 당신의 영감이 내게 갑절이나 있기를 구하나이다”(열왕기하 2:9)

누구나 성공을 꿈꾸며 그 꿈을 실현하려고 노력합니다. 서점에서는 성공이란 주제의 다양한 책들이 팔리고 있으며 성공은 아직도 많은 이들에게 흥미있는 이야깃거리이며 실제로 영화나 드라마의 주제이기도 합니다.텔레비전 다큐멘터리 ‘성공시대’를 즐겨 보는 이들도 많습니다. 다른 사람의 성공 드라마를 통해 감동과 도전을 받는 것입니다.
한동안 스티븐 코비의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이란 책이 유행했었습니다. 지난 내용이지만 다시 한번 서재에서 꺼내 목차를 찾아보았습니다. 그 7가지 습관이란 주도적이 되라,목표를 확립하고 행동하라, 소중한 것부터 먼저 하라, 상호이익을 추구하라, 경청한 다음에 이해시켜라, 시너지를 활용하라, 심신을 단련하라 등입니다.
‘글로벌리더십센터’에서는 성공에 이르기까지의 주요 특징을 다음과 같이 크게 6가지로 요약하였습니다. 특징 1,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 특징 2,적극적 사고의 소유자이다. 특징 3,항상 개방된 마음과 자세를 가지고 있다.특징 4,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특징 5,남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사람들이다. 특징 6,성공의 미래 자화상을 가지고 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에도 엘리사의 예를 통해 성공자의 특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그 첫번째 특징은 ‘더불어’입니다(1절).“엘리야가 엘리사와 더불어?” 엘리사는 계속하여 엘리야와 함께 했습니다. 그의 능력을 사모하였기 때문입니다.이처럼 ‘더불어’의 습관은 성공자의 특징입니다.혼자서 승리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군가 함께 도와주기 때문입니다.
두번째 특징은 끈기입니다. 엘리사는 길갈과 벧엘과 여리고 등을 쫓아다니며 엘리야와 함께 했습니다. 그 끈기와 열심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당신을 떠나지 않겠나이다” 2절과 4절,6절에 계속하여 나오는 말입니다. 그는 목표를 이루기까지 끈기있게 엘리야를 따랐습니다. 쉽게 포기하지 않는 습관, 성공자의 특징입니다.
세번째 특징은 목표가 분명합니다. “당신의 영감이 갑절이나 내게 있기를 원하나이다”(9절).엘리사는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상당수가 대화에서나 그 삶에,그 행동에 목표가 없는 것을 봅니다.“원하나이다” 내게 분명한 목표가 있습니까? 성공자가 될 것입니다.
네번째 특징은 과감한 결단입니다. 엘리야가 떠난 후 엘리사는 자기 옷을 잡아 둘로 찢었습니다. 옷은 신분의 상징입니다. 또 자신의 습관이며 살아온 방식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겉옷을 주웠습니다.그러므로 자신의 옷이 필요없었습니다.오늘도 예전의 습관을 그대로 가지고서 새사람 되기를 희망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과감한 결단이 있습니까? 분명 성공자가 됩니다.
기도: 세상에서 성공자 되려는 사람이 많습니다.우리들은 주 안에서 진정한 성공자가 되길 간절히 원합니다.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으로 터를 닦은 사람들
빅톨 위고는 영국은 두 개의 책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세익스피어의 저서이고 하나는 성경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참으로 이상한 책입니다. 빅토리아 여왕은 성경대로 통치하겠다고 약속했었는데 64년의 재위 기간 동안 찬란한 대영 제국을 건설했습니다. 독일에서도 마틴 루티가 종교 개혁을 해서 성경을 서민들의 손에 나누어 준 후부터 독일국민들이 깨기 시작했습니다. 독일의 유명한 기라성 같은 역사의 인물들도 종교 개혁 이후, 성경이 서민들의 손에 들어간 이후에 나타났습니다. 이런 것은 제가 학생 운동을 하면서도 느끼는 일입니다. 국민학교밖에 안 나온 여자라도 성경의 교양이 몸에 배면 생각하는 것이나 말하는 것이 무르익습니다. 지식만 백과 사전처럼 집어넣은 대학을 나온 사람과는 다릅니다. 성경만으로 기본 교양을 갖출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성경을 보면 사람이 변합니다. 이것은 통계적인 진리입니다. 성경으로 되를 닦고 교양을 쌓은 사람들은 다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딤후3:16)

♥ 섬을 사랑하는 사람
섬을 사랑하는 사람 (The man who loved Island ) E.H. 로렌스 여기에 나오는 주인공은 고독을 즐기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돈을 모아서 섬을 삽니다. 그 섬에 가서 사는데 그 섬에서도 만족을 얻지 못해서 그 섬을 팔고 다른 섬을 삽니다. 이섬, 저 섬, 옮겨 다니다가 결국에는 정신이상자가 되고 만다는 이야기입니다.

♥ 주님께 무관심한 사람
*어느날 워싱톤에 있는 어느 교회 목사관에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평소 교회를 잘 출석하지 않던 교인의 전화였습니다.
그는 0목사님, 이번 주일에 대통령이 우리 교회 예배에 참석한다는 소문이 사실입니
까?0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목사님은 0아직 확실하진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예배에 참석하셔서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0라고 대답했습니다
-전화를 건 그 사람은 예수님에 대해선 관심이 없었고 대통령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 신을 만날 수있는 사람
어떤 젊은이가 늙은 율법학자에게 물었다. `선생님! 아주 궁금한 것이 있어 그러는데, 질문해도 좋겠습니까?`
늙은 율법학자가 흔쾌히 대답했다. `좋아, 뭐든 물어보게나.` `선생님, 옛날의 그 황금시절에는 사람들이 그들의 눈으로 신을 보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신과 만났으며 신은 땅위를 걸어다녔다고 합니다.
신은 그들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불렀으며 사람들은 신과 매우 가깝게 지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요` 왜 신은 땅을 버렸는가요? 왜 신은 이제 땅위를 걷지 않는가요? 왜 신은 몸부림치는 사람들의 손을 잡아 주지 않는 걸까요?` 늙은 율법학자가 대답했다.
`이보게 젊은이! 신은 아직도 도처에 있다네. 그런데 사람들이 그를 볼 수 있을만큼 낮게 구부리는 법을 잊어서 그렇다네.`

♥ 꿀벌형 사람이 되자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이 남긴 말 중 사람을 곤충으로 비유해서 한 얘기가 있다. 그는 이 세상에는 거미형의 사람,개미형의 사람,꿀벌형의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첫째로 거미형의 사람은 ‘있어서는 안될 사람’이라고 했다.거미는 일도 안하고 잠만 자다가 남의 피를 빨아먹는다.베이컨은 이런 사람을 가리켜 ‘이기주의 인간’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둘째로 개미형의 사람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을 사람’,즉 있으나마나 한 사람을 가리킨다고 했다. 개미는 부지런하고 단결심도 강하지만 어디까지나 자기들끼리 잘 뭉친다는 것이다. 따라서 베이컨은 개미와 같은 사람을 ‘개인주의 인간’이라고 지적했다.
세번째로 베이컨은 꿀벌형의 사람은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강조했다. 꿀벌은 조직력도 강하고 부지런하다. 열심히 꿀을 만들어 자기들도 먹지만 대부분 주는 삶을 산다는 것이다. 베이컨은 이런 사람을 가리켜 ‘이타주의 인간’이며 사회 곳곳에 이러한 꿀벌형의 사람이 꼭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기독교인이라면 과연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생각해볼 말이다.

♥ 마음으로 포기한 사람
나치 독일의 박해하에 놓였던 유대인 수용소에서 일어난 사실들을 목격하고 그것을 기록
했던 플랭클 박사는 그의 저서 `의미를 찾는 인간의 탐색`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있
다.
`마음으로 포기한 사람은 몸도 곧 쇠약해졌다. 그러나 소망을 가진 사람은 어려운 처지에
상관없이 자신은 물론 절망에 허덕이는 다른 사람들까지 격려하며 몸과 마음이 함께 건
강해져서 끝까지 살아 남을 수 있었다.`

♥ 꿈을 품은 사람들
윌리엄 페더가 쓴 글 가운데 재미있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소년 시절에 5달러 짜리 지폐를 길어서 주웠습니다. 어릴 때 5달러짜리 지폐를 주웠으니 얼마나 기분이 좋았겠습니까? 그러니까 그것에 중독이 되어서 길바닥만 보고 다녔습니다. 일생 동안 길에서 물건을 줍는 데에 전생애를 소모했습니다. 그가 주운 것을 보면 단추가 29,519개, 머리 핀이 54,172개나 되었고 수천 개의 동전도 길에서 주웠습니다. 그런 것들을 줍느라고 그는 일생 동안 하늘이나 푸르름을, 지상의 꽃과 새와 자연과 아름다움을 볼 기회가 없었다고 합니다. 일생이 차단되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곧 넝마주이 인생을 산 사람입니다. 넝마주이는 꿈이 없습니다. 이와 같은 인생을 사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일렉산더 대왕은 더 이상 정복할 땅이 없어서 통곡을 했습니다. 그는 사회 구조 속에서 20프센트에 속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영토이든지 정신 세계이든지 간에 미지의 땅을 정복하고 개척하는데 전생애를
보냈습니다.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이 뉴 프론티어 정신을 이야기했지만 그것은 알렉산더 대왕이 이미 강조했던 것입니다. 그는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뉴 프론티어 정신을 일생의 비젼으로 삼았습니다. 그의 꿈은 온 세계가 질서를 지켜서 공존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전쟁을 했지만 전쟁을 위한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세계 질서를 확립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33살에 죽었지만 그는 거의 종교적인 사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꿈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징기스칸도 영토욕에 광분한 사람이 아니라 종교가였습니다. 종교적 동기로 세계를 정복하려고 했습니다. 나폴레옹에 대해서도 여러가지로 말을 합니다만 그에게는 이글대는 꿈이 있었습니다. 프랑스인들은 나폴레옹에게 절대 권위를 부여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꿈은 유럽의 통일이었습니다. 새 평화와 질서를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몇 년을 두고 싸우기만 하니까 유럽을 정복해서 질서를 확립하고 살기좋은 유럽으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는 지금도 유럽의 정치. 경제. 사상계의 거의 신화적인 존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끝내는 정치범이 되고 말았지만 철인 나폴레옹은 꿈의 사람, 비젼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온 인류에게 최대의 행복을 가져다 주기 위해서는 굉장히 큰 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럽의 조그마한 힘들이 비슷비슷해지면 싸움이 되니까 훨씬 초인적인 힘을 만들어 빠른 시일 안에 정복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사명은 불모지에 가서 작전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헐벗고 굶주린 3만의 군대 앞에서 영광과 부가 있는 불모의 땅으로 가자고 했습니다. 그때 3만의 군대는 나폴레옹을 생명을 걸고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군대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그는 거의 신과 같은 지휘관이었습니다. 그의 꿈은 유럽에 자유와 평등과 우애와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평범한 군인이 아니었습니다. 비젼이 있고 꿈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군인이 되든지 정치가가 되든지 이런 위대한 꿈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골3:1,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


♥ 기도의 사람
유다왕 히스기야는 기도의 사람이었읍니다. 그는 혹독한 상황에 직명했을 때, 그것을 하나님 앞에 펼펴 놓았읍니다(왕하19:14-). 열왕기하 18장 17절에서 우리는 앗수르 왕 살만에셀 휘하의 다르단과 랍사리스와 랍사게에 대해 읽게 됩니다. 그들은 와서 히스기야에게 가장 무시무시한 위협을 퍼부어댔읍니다. 그들은 많은 나라들이 앗수르를 대적하려 했으나, 모두
멸절되었다고 했읍니다. 그들은 모든 민족들이 그들의 신들을 가지고 있지만, 그 어느 하나도 앗수르의 진군을 막지 못했다고 했읍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히스기야에게 그가 믿는 신을 의지하는 것보다 항복하는 편이 낫다는 것이었읍니다(왕하18:17-35).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히스기야는 기도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구출된 것이 왕하19:35절에 기록되어 있읍니다.
모든 위대한 사람들이 바로 히스기야처럼 했읍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말했읍니다. "만일 내가 나보다 더 위대하고 강하신 그 분의 도움이 없이는, 이 높은 직책을 결코 이행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바보일 것입니다."
1914년부터 1918년까지의 세계1차 대전 중에, 한 군사회의가 있었읍니다.
총사령관인 프랑스의 군인 포쉬(Ferdnand Foch)원수는 그곳에 없었읍니다. 그를 잘 알고 있는 한 사람이 말했읍니다. "나는 어디로 가면 그를 찾을 수 있을지 알 것 같읍니다." 그리고는 그는 그들을 조그만 황폐된 예배당으로 인도했읍니다. 그곳에서 포쉬 장군은 제단 앞에서 기도하고 있는 것이었읍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영국군 제8군 사령관으로서, 북 아프리카 작전을 지도한 몽고메리 원수는, "매일 밤 나는, 내가 나의 장병들을 패배하지 않게 하기를 기도했읍니다"고 말했읍니다.
우리가 삶에 있어서 그토록 자주 실패하는 까닭은, 우리 스스로가 일을 처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그렇듯 자주 좌절하는 이유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 그것을 처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찬송가에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기도함으로써 하나님께 맡기라고 말해 줄 때, 그 찬송은 옳은 것입니다.
만일 우리들이 가장 강력한 세력과 권력을 임의대로 할 수 있는 데도 결코 그것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이 있음을 안다면, 우리는 그를 매우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우리들이 만일 결코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들이 하고 있는 일이 바로 그 같은 일일 것입니다.
매일 아침 우리는 그날 그날을 위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도 늙은 영국의 장군 애스틀리(Jacob Astley) 경이 전투에 앞서서 "주님은 제가 오늘 얼마나 분주할 것인지를 알고 계시나이다. 제가 만일 주님을 잊어버리고 있다고 해도, 주님은 저를 잊지마옵소서"하고 기도드린 것처럼 그도드릴 시간은 있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들이 어떤 특별히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해야 한다든가, 어떤 곤란한 과업에 직변한다든가, 어떤 특별히 강한 유혹을 극복해야 하는 곤경에 부딪쳤을 때, 우리는 언제나 그것에 관해 하나님께 아뢰어야 합니다...
기도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던 어떤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신앙 깊은 한 친구가 그에게 말해 주었읍니다. "잠시 앉아서 의자 하나를 자네 맞은 편에 가져다 놓고, 하나님께 그 의자에 앉아 계시는 것으로 생각하면서 정말로 그분과 이야기해 보라." 그는 일생 동안 그렇게 했습니다. 그 후 그가 죽었을 때, 그가 침대 옆에 빈 의자를 끌어다 놓고 있는 것을 밝견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들이 히스기야처럼 언제나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잊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일이라도 할 수 있게 될 힘을 발견케 될 것입니다.

♥ 꿈꾸는 사람
본문:창세기37:5∼8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고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창세기 37:5)

세계적인 베스트 셀러인 ‘갈매기의 꿈’은 많은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안겨줍니다. 작품 속의 주인공 갈매기 조나단은 동료 갈매기들과 함께 바닷가의 쓰레기더미와 선창가의 고깃배 주위를 맴돌면서 먹다버린 빵조각을 먹으려고 서로 다투는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조나단은 먹기 위해 사는데 싫증이 났습니다. 그는 하늘 높이 날아오르고 싶었습니다. 그는 부모와 형제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혼자 하늘을 나는 연습을 시작했습니다. 이윽고 갈매기 조나단은 피나는 노력과 눈물겨운 인내로 하늘 높이 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작가 리처드 버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가장 높이 나는 새가 가장 멀리 본다”
우리의 인생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일상적인 삶에서 탈출하여 좀더 멀리 바라볼 수 있다면,그리고 인생의 분명한 꿈과 목표를 가지고 살아간다면 똑같은 시간이지만 그 시간의 질은 분명히 다를 것입니다.
요셉은 꿈의 사람입니다. 요셉은 두 가지 꿈을 꾸었습니다. 먼저는 밭에서 곡식을 묶는데 요셉의 단은 일어서고 형제들의 단은 요셉의 단을 둘러서서 절하는 꿈이었고, 다음은 해와 달과 11개의 별이 요셉을 향하여 절하는 꿈이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요셉이 스스로 꾼 꿈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요셉의 미래를 보여주시는 계시적인 꿈이요, 예언적인 성격의 꿈입니다. 그러나 이 꿈은 요셉의 생애에 엄청난 영향을 주게 됩니다.
그러면 일반적으로 꿈이 있는 사람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을까요?
첫째로, 꿈이 있는 사람은 위대한 기회를 붙잡을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언제나 기회가 찾아오고 준비된 사람은 그 기회를 움켜잡습니다. 요셉은 비록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있었지만 그에게 찾아온 기회를 잘 활용함으로써 술을 맡은 관원장의 천거로 바로의 꿈을 해석해줄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둘째로, 꿈이 있는 사람은 게으르고 나태한 삶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요셉은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팔려갔지만 거기서 성실하고 열심히 일함으로써 주인의 눈에 들고 그 집의 모든 재산과 하인을 관리하는 총무의 직임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셋째로, 꿈이 있는 사람은 작은 실패에도 좌절하지 않습니다. 험한 파도가 능숙한 어부를 만들어가듯이 꿈꾸는 사람은 오히려 실패와 시련을 인생의 좋은 연단의 기회로 삼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하루 아침에 노예로 전락해버린 것은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요셉은 그런 가운데서도 성실히 그 종의 임무를 다하고 결국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어서 자기 일가족과 많은 사람을 기근에서 구해내게 됩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주신 꿈을 붙들고 그 꿈을 이루어나가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이런 사람과 사랑을 하세요
만남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과 사랑을 하세요.
그래야 행여..당신에게 이별이 찾아와도 당신과의 만남을 잊지 않고 기억해 줄테니까요...

사랑을 할줄 아는 사람과 사랑을 하세요. 그래야 행여..익숙치 못한 사랑으로
당신을 떠나보내는 일은 없을테니까요...

무언가를 잃어본 적이 있는 사람과 사랑을 하세요. 그래야 행여..무언가를 잃어버릴 때가 와도 잃어버린다는 것의 아픔을 알고 더 이상 잃어버리고 싶지 않을 테니까요...

기다림을 아는 이와 사랑을 하세요. 그래야 행여..당신이 방황을 할때
그저 이유없이 당신을 기다려줄테니까요... 슬픔을 아는 이와 사랑을 하세요.
그래야 행여..당신이 슬퍼질때 당신의 슬픔을 함깨 해줄수 있을테니까요...

항상 가까이에 있어줄 수 있는 사람과 사랑을 하세요. 그래야 행여..어느때 갑자기 보고 싶어지더라도 뛰쳐나가 만날 수 있을테니까요...
가슴이 따뜻한 이와 사랑을 하세요.
그래야 행여..가슴이 시린 겨울이 찾아와도 그대의 따뜻한 가슴에 몸을 녹일 수 있을테니까요...
진실된 사람과 사랑하세요.
그래야 행여..그대 나의 거짓된 모습을 보더라도 그대의 진실로 나를 감싸줄테니까요...

진실로 자신의 모든 것을 사랑해 줄 수 있는 이와 사랑하세요.
그래야 행여..당신의 한 모습이 나빠보이더라도 사랑하는 이의 다른 모습을 보며 감싸안을 수 있을테니까요...
그리고 진실로 진실로 자기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이와 사랑하세요.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남 또한 사랑할 줄 안데요...


♥ 사람들이 싫어하는 방
'샘미 모리스'(Sammy Morris)는 아프리카에서 미국으로 유학을 간 학생이었다. 그가 인디애나 업랜드에 있는 테일리 대학교에 처음 도착했을 때 '어떤 방을 배정 받기를 원하는가'라고 학장이 물었다. 그때 그는 '아무도 가기 싫어하는 방을 나에게 주십시오'라고 대답하였다. 후에 학장은 그 사실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그때 나는 눈에 눈물이 가득한 채로 돌아서서 과연 나는 어느 누구도 하기 싫어했던 일을 기꺼이 했던 적이 있는가?'하고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한다.

♥ 정말로 성숙한 사람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가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친구의 집을 찾아갔다. 때마침 친구는 집에 없고 집안 일을 책임지는 하인이 대신해서 그를 맞아주었다. 하인은 조금만 기다리면 주인이 돌아올 거라며 그를 거실로 안내했다.
그가 소파에 앉자 하인은 따뜻한 홍차 한 잔을 내왔다. 하인이 건넨 쟁반에는 기다리는 동안 간단히 읽을 만한 책 한 권까지 곁들여 있었다. 작은 배려에 감동한 그는 가벼운 고갯짓과 눈웃음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 후 하인은 하던 일을 끝마치려는지 부엌으로 들어가 버렸다. 한참을 기다렸지만 주인은 돌아오지 않았다. 남의 집 거실에 혼자 앉아 있는 자신의 모습이 머쓱해진 셰익스피어는 차라도 한 잔 더 얻어마실 생각에 부엌으로 갔다.
그런데 부엌문을 연 순간 그가 발견한 것은 아무도 없는 부엌에서 혼자 양탄자 밑을 청소하고 있는 하인의 모습이었다. 그곳은 누가 일부러 들춰보기 전까지는 아무도 더러운지 깨끗한지를 알 수 없는 그런 곳이었다. 그런데도 하인은 누가 뒤에서 보는 것도 아니고 주인이 억지로 시킨 것 같지도 않은데 혼자 콧노래를 불러가며 양탄자 밑을 닦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발견한 순간 셰익스피어는 젊은 사람들로부터 인생의 성공 비결이 무어냐는 질문과 누구로부터 가장 큰 영향을 받았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이렇게 말하곤 했다.
“혼자 있을 때에도 누가 지켜볼 때와 다름없이 행동에 아무런 변화가 없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무슨 일에서나 성공할 수 있는 사람이고 내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다.”


♥ 신들린 사람들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가장 충격적인 말씀이 있다. 유대 종교층을 향해 '뱀의 자식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의 짓을 한다(요8:44)고 하셨다. 신약 성경을 읽으면 인류를 두 가지 영족으로 구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영을 받은 자녀와 사단의 영을 받고 그 권세와 지배하에 있는 사람이다(요일5:19). 과학 시대 사람들은 신들렸다는 사실을 싫어한다. 인간에게 영이 있다는 사실도 거부하고 있다. 그러나 크리스찬이 된다는 사실은 우리 속에 사단의 영을 몰아내고 예수의 신 곧 성신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크리스찬은 신들린 사람들이다. 도덕심, 종교심을 가지고 예수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신에 철저히 들려야 한다. 성령 충만이란 말은 공기나 물이 채워지는 것 같은 물리 개념이어서 그보다는 성신들렸다는 말이 더 적합하다.
요새 신들린 현상이 도처에 나타나 문외한들이 유명한 음악가나 문인 화가들의 신이 들려서 갑자기 베에토벤을 치고 램브란트를 그리고 밀톤처럼 글쓰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악령의 장난인 듯하다. 예수신이 들려야 예수처럼 생기고 예수처럼 살 수 있다.

♥ "삼"을 심는 사람들
성 구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마 24:14)
산삼은 아무데서나 자라지 않습니다. 산삼의 붉은 꽃씨를 까먹은 까치의 똥이 산 속 어디엔가 뒹굴다가 햇볕이 많은 양지도 아니고 햇볕이 너무 없는 음지도 아닌 곳에서 산삼으로 다시 피어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산삼이 신묘한 약효를 지녔는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산삼을 캐러 다니는 사람들을 ?심마니?라 부릅니다. 그런데 이렇게 산삼을 캐는 심마니와 다른 심마니들도 있습니다. 농사를 뜻하는 "농"자를 앞에 붙인 "농심마니"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이들은 삼을 캐러 다니는 게 아니라 삼을 뿌리러 다닙니다. 심마니가 수백 년 묵은 산삼을 캐러 다니는데 반해, 농심마니들은 수백 년 뒤의 후손들을 위해 삼의 씨앗을 심고 다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귀한 분을 통해 존귀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그분의 진가를 알지 못하는 불신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끝이 오기까지 산삼의 씨를 뿌리는 농심마니처럼 복음의 씨를 뿌려야 합니다. 그래서 구석구석 후세들의 가슴속에 흐를 생명의 씨앗을 심어야 합니다.


♥ 성공하는 사람의 7가지 특징
미국의 대중 연설가 나폴레옹 힐(Hill)은 성공하는 사람의 7가지 특징을 말한 적이 있다. 성공한 사람의 공통적인 특징 7가지는
첫째, 자기 확신, 신념이 있는 사람,
둘째, 창의력이 있는 사람
셋째, 위대한 상상력을 지닌 사람,
넷째, 열심을 품고 사는 사람
다섯째, 자기에게 주어진 연단을 잘 견뎌낼 수 있는 사람,
여섯째, 집중적인 노력을 하는 사람,
일곱째,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 사는 사람,
이 중에 세 가지 정도 적어도, 성실하게 노력하는 사람이 성공했음을 알려 주고 있다. 주어진 능력을 성실하게 활동하지 못할 때 그는 실패자로 전락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 기도의 사람들
그리스도를 무엇보다도 귀하게 여겼던 마퀴스 디렌티가 한번은 사환 아이에게 “삼십 분이 지나면 나를 불러 달라”고 말하고는 골방에 들어가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그 사환 아이가 문틈으로 그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어찌나 거룩하고 성스럽게 보였던지 그는 시간이 훨씬 지나도록 이를 알리기를 주저했다. 그의 입술은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3시간 반이 지난 후에 시간이 다 되었다고 신호를 했다. 그때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하는 소리가. “벌써 30분이 다 되었느냐”는 것이었다. 브레이너드 감독은 매일 5시간을 기도와 말씀을 묵상함으로 보냈다. 헨리 해블록경은 항상 매일 새벽의 두 시간을 하나님과 보냈다. 야영이 6에 시작되면 그는 4시에 일어나 기도를 했다. 얼 케언즈는 매일 6시에 일어나 성경공부와 기도로 시간을 보내고 8시 40분의 가정 예배에 임했다.

♥ 만나고 싶은 사람
하루에 만나
일상을 이야기 하고 싶은 사람이 있고...

일주에 한번 만나
연극을 관람하고 싶은 사람이 있고...

한달에 한번을 만나
음주를 함께하고 싶은 사람이 있고...

게절에 한번 만나
여행을 함께 가고 싶은 사람이 있고...

일년에 한번 만나
가치관을 점검하고 싶은 사람이 있고...

십년에 한번 만나
강산의 변화를 느끼고픈 사람이 있고...

삼십년 후에 한번만 만나
주름진 모습에서 살아온 발자취를 유추해 보고픈 사람이


♥ 사람에 대한 깊은 사랑
사람에 대한 겸손, 나눔과 깊은 사랑은 남을 위한 배려보다 먼저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사람에 대한 깊은 사랑을 발견할 때 우리는 삶의 귀중함과 풍부함을 발견한다. 사람들에 대한 배려는 사람들의 됨됨이 그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지 우리가 바라는 그들의 됨됨이를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에 대한 깊은 사랑은 그들을 다른 사람으로 다시 만들기를 구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에 대한 깊은 사랑은 살아 움직이는 부드러움이고 친절함이다. 무관심이나 잔인함을 없애는 것이다. 가혹과 증오가 제거된다. 대신 자비와 자선과 관용의 정신이 있다. 우리 주변이 우리의 배려 대상이다. 우선 마음이 끌리는 대로 하고 그 다음 이성을 따르도록 하라. 우리의 마음이 우리의 머리를 주장하도록 하라. 사랑이 없는 이성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 거기에는 삶이 없기 때문이다. 사랑만이 이성을 따르는 삶을 가능하게 한다. 머리가 마음을 주장하면 이성은 외롭다. 그러나 마음이 머리를 주장할 때, 삶은 풍성하고 값지게 된다. 우리 안에 있는 남을 위한 배려를 발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배려를 알게 되며, 하나님의 배려를 알게 되면 우리 자신의 남을 위한 배려도 알게 된다. 우리의 남을 위한 배려는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배려를 발견하도록 도와주시는 방법이다.

♥ 사람다움을 지켜야
본문 : 출애굽기 21;12∼17
“사람을 후린 자가 그 사람을 팔았든지 자기 수하에 두었든지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라”(출 21;16)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태도와 마음은 우리가 훈련해야 할 것 가운데서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나는 이 문제에서 몇 점이나 되는지 생각해보십시오(10점,30점,50점,70점,90점).
오늘 우리가 묵상하는 말씀에는 죽어 마땅한 죄 네 가지가 나옵니다. 첫번째는 사람을 쳐 죽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예외가 있습니다. 정당방위이거나 살해 동기가 없이 우발적으로 사람을 죽였으면 우선은 도피성으로 피할 수 있습니다. 도피성이란 실수로 살인이 일어난 경우에 개인적인 복수를 피할 수 있도록 마련한 곳입니다.
죽을 죄 두번째는 ‘짐짓 모살한 경우’입니다. 계획적으로 사람을 죽인 것을 말합니다. 첫번째 경우가 순간적인 충동이나 격정에 휩싸여 저지른 열광적인 살인이라면 두번째는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서 일을 저지르는 냉정한 살인입니다. 계획적으로 살인했을 때는 도피성으로 도망했다고 해도 끌어내어 죽일 수 있습니다.
세번째 죽을 죄는 부모공경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부모를 치거나 저주하는 것은 죽을 죄입니다. 우리는 십계명에서 부모공경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부모공경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저주한다는 것은 저주의 내용이 실제적으로 사람에게 미치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모든 형태의 부정적인 말이 최악의 상황으로 강도높게 표현된 것을 저주라고 하지요. 나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를 저주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죽을 죄 마지막은 사람을 ‘후리는’ 행동입니다. 요즈음 말로 유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납치해서 파는 인신매매도 같은 죄입니다. 유괴는 사람을 물건으로 취급한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서 사람은 가장 고귀하고 사랑스런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는 말입니다. 유괴나 인신매매 등은 이를 정면으로 대항하는 행동입니다. 특히 어린이 유괴는 더할 수 없이 악한 일입니다. 자기 방어 능력이 없는 순진한 존재를 악용하는 것이니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서 가장 무서운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사람을 배려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오늘 말씀에서 들어야 하겠습니다.

♥ 시험이란 사람을 속이는 것
시험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을 속이는 것이다. 우리는 속아서 시험에 빠진다. 그런 까닭으로 우리는 깨어 있어야 되겠다.
시험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항상 기억할 것은 우리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심히 약하다고 하는 사실이다. 스스로 섰다고 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하는 것이 그 말이다.
시험에는 강한 사람이 없다. 베드로가 담대히 예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이 주님을 모른다고 할지라도 저는 절대로 주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 주님을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라고 말했지만, 정작 시험 장소에 갔을 때 베드로는 그만 약해졌다.
세 번이나 주를 모른다고 말했다. 이렇게 인생은 죄에 대하여, 시험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약할 뿐더러 또한 사람은 그 육신 가운데 약한 부분이 있다.
가령 예를 들면 어떤 이는 특별히 폐가 약하고, 어떤 이는 심장이 약한 것 같이, 우리의 성격 가운데도 누구든지 약점 한 가지씩은 있는 것이다.
에서 같은 사람은 특별히 먹는 데 약점이 있었고, 노아 같은 사람은 술 같은 것을 마시는데 약점이 있었으며, 솔로몬 같은 사람은 특히 정욕 방면에 약점이 있었는가 보다.
이와 같이 사람 사람마다 특별히 자기의 약점이 있다. 서양 속담에 "사람마다 지옥에 내려가는 사닥다리가 각각 있다"는 말이 있다. 사람마다 각각 어떤 점에서는 조금 잘못하면 지옥으로 미끄러져 내려가는 사다리를 가지고 다니는 것이다.
내가 어떤 방면에 특별히 약점이 있는가 스스로 살피어 특별히 조심해서 유혹에 들지 않도록 힘을 써야 되겠다.


♥ 한 사람이 주신 선물
본문: 롬 5:14-15
지난 4월 5일 2001년 프로 야구가 시작되었습니다. 특별한 것은 이번 개막경기에는 애덤 킹이라고 하는 9살 난 소년이 시구를 하였습니다. 이 소년은 1995년 미국으로 입
양되어 간 아이인데 태어날 때부터 열 손가락이 붙어서 손가락을 펼 수 없었고, 다리가 썩고 뼈가 굳어지는 병에 걸렸습니다. 부모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우리나라의 의학으
로는 더 이상 길이 없어 몸부림치다가 혹시 미국으로 가는 길이 열려서 거기서 어떤 의학적 혜택을 받으면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여 고아원에 버렸는데 로버트 킹이라고 하는 미국의 젊은 부부가 이 아이를 입양하였습니다. 이 부부는 자기의 아이가 세 명이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손가락이 다 붙어있고 걷지도 못하고 너무 너무 불쌍한 이
아이를 보고 사랑하는 마음이 들어서 입양하고 치료를 받게 하였습니다. 몇 번의 수술을 거쳐 손가락을 분리하는데 성공을 했고 다리도 절단을 하고 더 이상 썩지 않게 하였
으며 장애인들이 다니는 학교가 아니라 일반 학교를 보내었습니다. 이 아이가 밝게 자라났고 하루에 두 시간씩 의족을 끼고 양아버지에게 코치를 받으면서 야구를 했습니다.
이것도 매우 아름다운 이야기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아무 소망 없고 머리에서 발끝까지 성한 곳이 없는 죄악으로 가득 찬 우리 인간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밝고 건강하고 희망이 넘치고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하신 것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본래 우리 인간은 죄인입니다. 시편 51편은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리가 태어나면 바로 물로 가듯이 우리 인간은 태어나면 바로 죄악으로 달려갑니다.
이 죄악된 길에서 우리의 죄를 씻어주시고 변화시켜 거룩한 길, 믿음의 길, 신령한 길로 나아갈 수 있게 하신 것은 온전히 주님의 은혜인줄 믿습니다.
♬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놀라와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
죄악의 길에서 떠나서 하나님 앞에 이 놀라운 은혜를 받은 것을 생각하면 너무도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 인간의 가장 큰 축복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세상의 어떤 재물이나 부귀가 아니라 죄 사함과 영생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에게 생명이요 힘이요 능력이 되는 줄 믿습니다.
백여 년 전 우리 나라는 우상숭배와 온갖 미신이 가득하였고, 무지하였고 말할 수 없는 가난 가운데 살아가던 절망의 땅이었고 저주의 나라였습니다. 몇 천년 동안 임금으로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우상 앞에 끊임없이 빌고 빌어 보았지만 이 나라는 병들었고 하나의 소망도 없던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종들을 이 땅 위에 보내 주셨습니다. 선교사들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이 나라는 아침해가 떠올랐습니다. 저주와 불행이 떠나갔습니다. 지하자원이나 많은 농토를 가지고 여러가지 좋은 조건을 가진 나라들이 잘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부터 선물 받은 개인이나 가정이나 민족이 잘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은혜에 감사하며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고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굳센 믿음 위에 서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십자가의 보혈의 은혜가 샘물처럼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 누가 훌륭한 사람인가?
임금으로부터 거대한 자기의 석상을 세우라는 지시를 받은 석공이 있다. 그로서는 일생 일대의 영광이다. 그러나 그는 바로 그날부터 엄청난 고민에 사로잡힌다. 오늘날 같은 대형 기중기가 없던 시절이다. 엄청난 크기의 입상을 세우려면 몇 개 부분으로 나누어 조각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들을 성공적으로 조립할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밤낮없이 고민하던 석공의 발길이 어느 날 바닷가를 찾았다. 적당한 자살 장소를 물색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무심한 어린이 몇이 자기 곁에서 모래장난을 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무심코 그들을 바라보던 석공은 순간 벼락을 맞은 것 같은 감동에 사로잡혀 한달음에 석상을 세울 현장에다 세운 다음 석공은 그것을 완전히 흙으로 덮어 버렸다.
이렇게 하여 마치 신라시대 왕릉과도 같이 둥글게 구릉을 이룬 곳 정상에서 또 다시 석상의 몸통 부분을 조각했고 그것을 파묻혀 있는 다리 윗 부분과 연결했다. 그리곤 다시 전과 같은 요령으로 흙으로 파묻어 버렸다. 다음, 같은 방식으로 석상의 두부를 조각하여 몸체 위에 조립한 그는 지금까지 덮어 두었던 흙을 모두 치워버렸다. 그렇게 하니 거기 우람한 임금의 석상이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가. 석공은 해변가 코흘리개 어린이들에게서 배워 마침내 이 거대한 작품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이다.
햇병아리 첼리스트 피아티로르스키가 첫 연주회를 가졌다. 바로 그날 그는 흥분을 주체할 수 없었다. 세계 정상의 첼리스트인 카잘스가 청중석 맨 앞자리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 더 잘하려고 하면 동티 나기 쉬운 법이 아니던가. 그 날의연주는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신기한 사실은 연주회가 끝나자 카잘스가 열렬한 박수를 보내 주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날 이후 그는 카잘스의 정성어린 보살핌을 입어 마침내 세계 정상의 첼리스트가 되었다.
뒷날 서로 흉허물없는 사이가 된 피아티고르스키가 카잘스에게 그 옛날 자기에게 보내 준 까닭모를 박수의 이유를 물었다. 이에 카잘스는 그때 당신은 이렇게 첼로를 잡고 이렇게 활을 놀려 바로 이 음을 낸 적이 있소. 그런데 난 그때까지 바로 그 음을 내지 못해서 괴로워하고 있었다오. 나는 당신의 연주를 통하여 그 음을 내는 방법을 배웠기 때문에 그렇게 미친 듯이 박수를 쳤던 거요. 나는 누구를 막론하고 나에게 가르침을 준 사람은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내 스승으로 생각한다오. 그래서 그날 이후 나는 당신을 내 스승같이 생각하고 도왔던 것이오라고 말했다.
`너희는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라` (고전 14:31)


♥ 꿈 해몽한 사람
*어느 책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곳에 해몽을 잘하기로 소문난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 소문을 들은 어떤 사람이 사실은 꿈을 꾸지도 않았으면서 찾아가 꿈을 꾼 것처럼 해몽을 부탁했습니다.
0간밤에 돼지꿈을 꾸었는데 무슨 뜻인가0고 했더니 해몽하는 사람이 하는 말이 오늘 중으로 맛있는 음식을 선사 받아서 잘 먹을 꿈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생각치도 않았던 출가한 딸이 찾아오면서 맛있는 음식을 가져 왔더라는 것입니다. 며칠후 다시 찾아갔습니다. 있었던 일을 얘기하고 다시 돼지꿈을 꾸었노라고 했더니 이번엔 좋은 양복을 얻어 입겠다고 해몽해 주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친척되는 사람이 양복을 한 벌해 주어서 잘 입게 되었습니다.
다시 찾아갔습니다. 이번에도 돼지 꿈을 꾸었노라니까 그는 머리를 흔들더니 이번엔 크게 다칠 염려가 있으니 조심하라는 해몽을 해 주었습니다.
두번씩이나 맞았던 점으로 미루어 조심하느라 외출도 삼가고 방에 누워만 있었는데 갑자기 땅이 흔들리더니 선반위에 올려놓은 물체들이 떨어지는 바람에 머리를 다쳤습니다.
기이하고 이상해서 그를 찾아가 사연을 전부 이야기하고 연유를 물었습니다.
해몽자의 대답인즉 첫번째 돼지가 꿀꿀거리는 것은 배가 고파서 그러는 것이니 밥을 얻어먹게 되고, 배가 부른 다음에도 꿀꿀거리는 것은 잠자리가 불편해서 그러는 것이니 잠자리를 마련해 주게 되고, 배부르고 잠자리 편한데도 꿀꿀거리게 되면 매밖에 맞을 게 있겠는가?하는 말이었습니다.
= 세상 이치도 다 이와같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먹고 싸고 입고 그리고 꿀꿀거리는 것으로 그 생애가 일관된다고 하면 무슨 의미가 있고 보람이 있고 가치가 있겠습니까?
신기루를 잡는 것처럼 언젠가는 무슨 일이 되겠지 개천에 물이 흐르겠지 하고 기다리기만 한다면 그 인생이 얼마나 피곤하고 힘이 들겠습니까?

♥ 구원받을 뻔한 사람들
어린이들이 하는 농담 중에 “죽을 뻔한 것이 좋으냐. 살 뻔한 것이 좋으냐.”고 묻는다.
성급한 어린이는 생각도 없이 살 뻔한 것이 좋다고 대답한다. 그것은 살 뻔하였으나 아쉽게 죽은 사람이다. 바울이 아그립바 왕에게 예수님에 관하여 설명하자 그가 거의 그리스도인이 될 뻔하였다고 했다. 이는 영적으로 무척 아쉬운 일이었다. 믿을 뻔한 것은 소용이 없다. 못 믿을 뻔했어야 한다. 말구유의 아기를 못찾을 뻔했어야지 찾을 뻔했었다면 안 된다.
그런데 성경에 구원받을 뻔했으나 구원받지 못한 안타까운 사람들이 노아의 방주를 지은 목수들이다. 길이는 300규빗, 넓이는 50규빗, 높이가 30규빗으로 3층으로 지었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었겠는가. 그뿐인가. 요즘처럼 기계가 발달한 때가 아니니 산에서 나무 를 찍어 내려와 다듬는 데서부터 운반하는 데까지, 또는 그것을 잘라서 판자를 만들고 조립 하고 또 물이 새지 않도록 역청을 칠했으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었겠는가.
그러나 그 많은 사람들은 방주에 들어가 보았을런지는 모르나 아무도 구원받지 못했다. 다 구원받을 뻔한 사람들 뿐이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교회건축에 참여하고 교회 강대상 밑에 까지 가 보았으나 구원과는 먼사람들로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수없이 여러 번 들었으나 아그립바 왕처럼 거의 구원받을 뻔하였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대통령에 당선될 뻔했다
해도 당선이 아니면 낙선이요. 될 뻔한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10년, 20년 동안 교회에 나가 구원받을 뻔했다면 그보다 안타까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 평강의 왕 예수 그리스도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평강의 왕이며 구주로 영접하는 자에게 주시는 샬롬이다. 평강의 왕은 온전한 인간이시며 하나님과 하나이신 분이다. 그분은 완전한 인격자로 우리가 나라마다 그분에게 자리를 내어 드리면 그분은 우리를 온전하게 만드신다. 개인 차원에서 평화란 성취를 의미한다. 평화롭게 죽는 것은 성취된 삶을 산 것이며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을 이루었다는 의미이다.
평화는 평안이며 걱정이 없는 상태이다. 하나님께 대하여 평화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완전하게 실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공이란 우리가 삶의 마지막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의 뜻을 성취한 것,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우리 스스로 달성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은혜와 복 주심이 필요하다. 그보다 날마다 하나님의 임재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샬롬은 하나님의 은사이며 오직 그분의 임재를 통해서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샬롬이시며 또한 샬롬을 전파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샬롬을 가능하게 하셨으며 십자가의 보혈로 샬롬을 이루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평강의 왕으로서 우리의 성공과 실패를 돌보고 계신다. 모세가 아론에게 제사장직을 물려줄 때 하나님의 영광스런 복 주심의 기도가 있었으며 이스라엘 민족에게 이렇게 선포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민 6:24∼26).
하나님의 복, 보호, 임재, 은혜, 평강…. 이 모든 것이 성취를 이루며 완전함을 이룬다. 그것이 성공이다. 그 외 다른 어떤 것도 결국은 실패다.

♥ 빛의 사람으로
40년 전 링글린 브러더즈 서커스단이 뉴욕 공연을 할때였습니다.
공연중 갑자기 정전이 됐습니다.
1분 간 이었지만 관중들은 모두 숨을 죽이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무대에서는 조련사가 호랑이 네 마리의 재주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철창 속이니까 관중에게는 위험이 없었으나
캄캄한 데서 조련사가 호랑이의 공격을 받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 걱정이었습니다.
장내가 물을 끼얹은 듯이 고요하고
캄캄한데 무대에서는 조련사의 챠찍소리와 호랑이의 동작을 지시하는 명령이 조금도 흐트러짐없이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불빛이 다시 켜지자 관중들은 모두 일어서서 박수를 보냈습니다.
뒤에 기자회견이 열리자 조련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둠속에서도 호랑이들은 나를 잘 봅니다. 내가 호랑이를 못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게 해서는 안됩니다.
마치 어둠 속에서도 밝은 빛 속에 있듯이 행동해야 합니다."
조련사가 어둠 속에서도 호랑이를 여전히 제압하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어둠 속에서도 빛의 사람으로 행동했기 때문입니다.
빛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이 사랑의 빛,진리의 빛, 평화의 빛,생명의 빛을 나타낼 때 자랑스런 그리스도인이 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며,이 땅에 천국을 건설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하늘 본향에서도 많은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 사람 예수
(딤전 2:5)
조병수 교수
손톱사이마다 까맣게 때 낀 어린아이들의 조막손을 매만지며 이마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귓바퀴 뒤로 곱게 빗겨주시며 쓰다듬던 예수는 사람이셨다.
때 구정물에 찌든 꾀죄죄한 옷에서 비린 냄새가 물씬 풍겨나는 갈릴리 아이들을 그대로 덥석 안아주신 예수는 사람이셨다. 사람 예수는 아이들, 이방 여자, 따돌림당하는 세리들, 살이 썩어 문드러지는 문둥병자, 가난한 사람들, 바리새인, 어부들, 청년, 마음이 상한 사람들, 아이의 죽음 앞에서 통곡하는 사람들, 누구든지 가리지 않고 만나주셨다. 예수는 사람들을 물리칠 줄 몰랐다.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온 몸에 힘이 모조리 빠져나간 고통스러운 상태에
서도 강도에게 하늘의 소망을 말해주셨다. 사람 예수의 중심에는 연민과 동정이 있다.
늦은 밤 대화를 신청한 바리새인을 앉혀놓고 참된 생명이 무엇인지 조목조목 가르쳐주신 예수는 사람이셨다. 사람 예수는 이야기를 그칠 줄 몰랐다. 회당에 들어가면 회당에서, 바닷가에 서면 바닷가에서, 산에 올라가면 산에서, 집안에 앉으면 집안에서 어느 곳이든지 사람들이 있는 곳이면 예수께는 말할 수 없는 장소가 아닌 곳이 없었다. 왁자지껄한 잔치자리에서 이런 사람들 저런 사람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며 이야기하기를 좋아하셨던 예수는 사람이셨 다. 예수는 하늘에 나는 새, 들녘에 피는 꽃, 씨뿌리는 사람, 양치는 목자, 혼인잔치, 포도원, 맷돌질하는 것, 반죽덩어리, 하인들의 모습, 전쟁하러 나간 왕, 모래와 반석에 지은 집... 사람들 사이에는 일어나고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이야기의 소재로 삼았다.

예수의 이야기 속에서는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아들을 위하여 흥겨운 풍악이 울리고,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처녀들이 혼인잔치에 들어가지 못하여 문을 두드리며 슬피 우는 소리가 들리고, 자기만을 위하여 창고를 짓고 모든 수확물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흐뭇해하다가 하룻밤에 목숨을 잃는 어리석은 부자의 모습이 나오고, 일하러 간다 안 간다 하며 아버지의 속을 썩이던 아들들의 괘씸한 행동이 나온다. 사람들의 시시콜콜한 일상생활을 들먹거리는 것처럼 보이는 예수의 이야기 속에는 놀라운 진리가 들어있다. 예수는 인생사에 관하여 말하는 듯 싶더니 어느새 하나님의 나라에 관하여 말씀하신다.

웃는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 하나님의 뜻이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나는 것을 보고 기뻐하며 웃던 사람 예수. 울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인간적인가? 나사로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앞뒤 안 가리고 달려갔을 때 우르르 몰려나와 슬피 우는 그의 누이동생이며 이웃집 여자들 앞에서 그냥 눈물을 쏟으신 사람 예수. 태양 아래 걷고 걸어 더 이상 한 걸음도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죽음처럼 무거운 몸을 주체할 수 없어 우물곁에 그대로 주저앉은 사람 예수.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고난의 처절함을 영혼과 육체로 느끼며 잔이 옮겨지기를 피땀으로 기도하신 사람 예수. 예수는 사람이셨다. 예수는 참으로 사람이셨다. 예수는 우리와 똑같이 영혼과 육체를 가지신 인간이셨다. "그는 육체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셨다" (딤전 3:16). 예수는 참 사람이기에 하나님을 향하여 완전한 희생물이며 인간을 위하여 완전한 대언자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참 사람 이신 예수에게서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완전한 희생물을 발견하시고, 사람들은 참 사람이신 예수에게서 자신들의 문제를 표현하는 완전한 대언자를 발견한다. 만일 예수께서 사람이 아니었다면 우리에게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딤전 2:5).

돌짝길에 상하고 흙탕물에 더럽혀진 제자들의 발을 씻기기 위해 그 귀하신 손을 아끼지 않고 내미신 예수, 베데스다 못에 반평생을 불구의 몸으로 누워 불신과 원망으로 얼룩진 영혼을 자비로운 눈으로 바라보신 예수, 그 예수는 사람이셨다. 오늘도 부드러운 손과 자비로운 눈을 가지신 사람 예수께서 어루만지시도록 죄악으로 때묻은 육체와 영혼을 나는 내놓는다.

♥ 혼돈을 만든 사람
의사와 건축가와 정치인이 누구의 직업이 더 오래되었는지 서로 토론하고 있었다. 의사는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이 아담의 갈비뼈로 하와를 창조했으므로 자기의 직업이 가장 오래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건축가는 하나님이 혼돈에서 천지를 창조하셨으므로 자기의 직업이 더 오래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정치인이 질세라 말했다. '그렇다면, 혼돈은 누가 만들었다고 생각하시오?'

♥ 귀중한 사람
어떤 사람이 자기의 목숨이 위험한 것을 무릎 쓰고 물에 빠진 아이를 건져 구해
주었다. 소년은 그 사람에게 "선생님, 나를 구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소년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천만에! 다만 한가지만 언제나 기억하고 살기를 바란다. 너는 어떤 사람이
자기의 목숨을 모험해 가면서도 구해낼 만한 가치 있는 사람인 것을 잊지 말고 살아
다오."
그렇다! 당신은 하나님이 독생자를 희생하시면서 까지 구해주실 만한 귀중한 사람
인 것을 잊지 말라.

♥ 개만도 못한 사람~
별로 쓸데(?)도 없는 개를 사람들은 어찌 그리 좋아하는지요?
특히 서양 사람들이 개를 좋아함은 유별납니다.
우리 교회 목사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전에 목사님이 애완견을 기른적이 있었는데 한번은 개가 병이나서 동물병원
에 데려갔더니 입원을 시키랍디다. 의료보험도 안되니 하루에 2만원씩이나
드는데, 입원을 시키자니 지금도 돈이 없어서 입원을 못하는 교인들도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떠올라 망설이다가 결국은 개를 입원을 시키고 말았답니
다. 꼬리를 축 늘어뜨리며 평소에 반짝이던 눈이 게슴츠레해진채 죽어가는
모습을 도저히 볼 수가 없더랍니다.
그렇지만 실상은 개를 길러본 사람이면 그 이유를 다알 수 있습니다.
개를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것을요...
개가 어떻게 주인에게 사랑을 받게 되는지요?
아무데나 똥싸고 오줌싸고 아직 펴보지도 않은 신문 물어뜯어 놓고, 새 신발
까지도 물고가 뜯어 놓는데 말입니다.
직장에서 시달리다 지쳐서 집에 돌아옵니다.
누가 제일 먼저 달려나와 반기나요?
여우같은 마누라는 이웃집에 마실가서 코빼기도 안보이지요...
토끼같던 애들은 컴퓨터 오락하느라고 정신없지요...
그런데 개는 재빨리 쫓아나와 팔딱팔딱 뛰고 데구르르 구르고 뒷발로 벌떡
일어서서 앞발을 번쩍쳐들고는 핵핵거리며 좋아합니다.
주인이 즐거울때는 개의 발쳐든 모습이 "할렐루야~"로 보이지만,
스트레스 팍 받아 우거지상일때는 아양을 떠는 개를 발길로 걷어 찹니다.
깨갱거리며 물러섰던 개는 자존심도 없는지 잠시후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다시 슬며시 다가와 꼬리를 흔들며 옆에와서 앉습니다.
개는 주인에게 충성하고 늘 복종합니다. 병들었을때도 주인을 보면 축쳐진
꼬리를 흔들지요. 힘없이...
이것이 개가 사랑을 받은 비결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늘 보셨으니 목사님도
개를 동물병원에 입원을 시킬 밖에요.
우리는 개에게서 무언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개가 잘나서 주인에게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주인을 잘따르며 순종을 잘하
며 잘 섬기기때문임을 요...

요 12: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그런데 사람은 요...
웬 자존심이 그리 강한지... 목에 기브스한 사람도 허다하고
잘난 사람이 어찌 그리 많은지... 불복종하고 들여 받기를 잘합니다.
그 상대가 비록 하나님일지라도...
개만도 못한 사람입니다. (개하고 달리기 해서 진 사람~)
개같은 사람입니다. (개하고 달리기해서 똑같이 꼴인한 사람~)
개를 기르시는 분들이여...
개가 사랑받는 비결을 배우십시요.
개를 따라하십시요.
하나님께 사랑받으실 것입니다.
개따라 하기~
시이~ 작
멍멍~


♥ 감사할 줄 아는 사람

유대인들 사이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명언 중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은 누구인가 ? 모든 사람에게 늘 배우는 사람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누구인가 ? 자기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은 누구인가 ? 자기가 가진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이다."
만족은 감사를 낳습니다. 우리가 모든 일에 감사하며 산다면 우리의 삶이 이토록 메마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너무 큰 일에만 감사하려 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 속에서 만족을 느낄 수 있으며, 감사할 수 있습니다. 쌀 한 톨을 만들려면 일곱 근의 땀을 흘려야 한다는 뜻의 일미칠근(一米七斤)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무심코 흘리고 또 전혀 아까워 하지도 않는 쌀 한 톨을 보면서도 우리는 그 쌀을 위해 땀흘린 수많은 손길들을 기억하며 감사할 줄 알아야겠습니다.
"주님, 저희로 감사에 예민한 사람들 되게 하시옵소서. 감사치 않고는 하 루도 살 수 없는 사람들이 되게 하시옵소서."
감사하며 지내십니까 ? 그렇다면 그것은 당신의 삶이 그만큼 풍요롭다는 증거입니다.
행복은 감사 속에 있고 감사는 만족 속에 있으며, 만족의 나무에는 감사의 꽃이 피고 감사의 꽃에서 행복의 열매가 열린다.


♥ 별것 아닌 사람들
링컨이 꿈속에서 겪은 일.그가 대집회 강연을 하려고 안으로 들어가는데 『링컨도 별것 아니군』라는 사람들의 비난이 들려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그런데 곧 이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그는 마음의 상처를 극복할 수 있었다.

『나는 별것 아닌 사람들을 좋아한다.그래서 이렇게 별것 아닌 사람을 많이 만들지 않았겠니? 다만 별것 아닌 사람들이라도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충성을 다할 때 그 별것 아닌 사람에게 나머지 별것 아닌 사람들을 맡기게 된단다』
하나님께서는 「미련하고 약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고 강한 것들 」을 부끄럽게 하신다(고린도전서 1:27).

♥ 쓸모없는 사람을 만드는 쉬운 방법
사나운 산돼지로 인해 사람들이 많은 피해를 보게 되었습니다.
숙련된 사냥꾼을 동원해 산돼지를 잡으려 했지만 번번히 실패로 끝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한 노인이 산돼지를 잡으러 간다고 산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두 달 후 노인은 산돼지를 찾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사람들이 놀라서 어떻게 산돼지를 잡았느냐고 묻자 노인은 "산돼지가 음식을 구하는 곳을 찾아서 곡식을 계속 뿌렸더니 산돼지들은 별 노력없이 공짜로 곡식을 먹게 된 것을 깨닫고
날마다 그 곳으로 모이게 되었지요.
그래서 그 옆에 함정을 파 놓아 잡았습니다"
쓸모없는 사람을 만드는 가장 쉬운 방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공짜 심리를 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땀을 흘려 얻은 대가야말로 참 기쁨의 소산이 아닐는지요

♥ 감사가 있는 사람
무말랭이처럼 말라 비틀어진 육체를 지니고 언제나 휠체어에 앉은채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구 게리그병(Lou Gehrig, 근육무력증)이라는 불치의 병에 걸린 사나이다. 겨우 20세가 되던 해에 의사로부터 이 병에 걸렸다는 통고와 함께 앞으로 1,2년 이상 살지 못할것이라는 의학적인 사형선고까지 받았던 사람이다.
천우신조랄까. 죽음의 선고가 있은 지 무려 4반 세기이상을 더 살고 있긴 하지만 1985년에는 또다시 페렴에 걸려 기관지 절개수술을 받아 말하는 기능까지 상실하고 말았다. 우리가 이런 상황에 처해 있다고 한번 상상을 해보자. 그 불행과 고통을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표현해야 할까.
당사자인 호킹박사의 시간과 역사라는 책을 대하면 유달리 농도 짙은 감사가 처음부터 끝까지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감격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우선 우리가 통상 머리말이라고 부르는 부분을 그는 `감사의 말`이라는 제목 하에 기술하고 있다. 어찌 색다르다 하지 않을 수가 있으리. 그뿐만이 아니다. 글이 전개되어 가면서 그는 계속하여 자기의 행복을 고백하고 타인에 못지않은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에 부단히 감격하고 있다.
호킹은 만인이 공감할 수밖에 없는 엄청난 불행의 요건을 남달리 많이 지니고 있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히려 인생을 긍정적으로 이해하며 보다 적극적이고 활발한 삶의 자세로 감사가 넘치는 생을 살고 있다. 이런 정신적인 자세가 아니라면 그가 어찌 그렇게 불편한 몸을 이끌고 우리나라까지 와서 강연을 하겠다는 엄두인들 내었겠는가. 호킹이 남달리 값지고 성공적인 삶의 주인 공으로 활약하고 있는 동인은 곧 감사로 충만한 정신자세 때문이 아니겠는가고 생각해 본다.
흔히 그는 `현대의 살아 숨쉬고 있는 전설적인 인물`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그리고 `시공의 마술사`, `아인슈타인에 버금가는 이론 물리학자`라는 평가도 받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기에 그는 나이 겨우 32세게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또 학문적인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영국왕립협회의 회원이 되는 영광을 안을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현재 케임브리지 대학의 루카스 수학교수로서 뉴턴의 영예를 계승하고 있다. (감사)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시 50:14-15)


♥ 감사가 있는 사람
무말랭처럼 말라 비틀어진 육체는 지니고 언제나 휠체어에 앉은 채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루 게리그병(근육 무력증)이라는 불치의 병에 걸린 사람이다. 겨우 20세가 되던 해에 읫로부터 이 병에 걸렦다는 통고와 함께 앞으로 1,2년 이상 살지 못할 것이라는 의학적인 사형선고까지 받았던 사람이다.
천우신조(天佑神助)랄까. 죽음이 선고가 있은지 무려 4반세기 이상을 살고 있긴 하지만 1985년에는 또 다시 폐렴에 걸려 기관지 절개 수술을 받아 말하는 기능가지 상실하고 말았다. 우리가 이런 상황에 처해 있다
고 한 번 상상해 보자. 그 불행과 고통을 도데체 어떤 방법으로 표현해야 할까?
당사자인 호킹(Howking,1942 - )박사의 "시간과 역사"라는 책을 대하면 유달리 농도 짙은
감사가 처음부터 끝까지 가득차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감격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우선 우리가 통상 머리말이라고 하는 부분을 그는 "감사의 말"이라는 제목하에 기술하고 있다. 그의 글이 또한 전개되어 가면서 그는 계속하여 자기의 행복을 고백하고 타인에 못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에 부단히 감격하고 있다.
호킹은 만인이 공감할 수밖에 없는 엄청난 불행의 요건을 남달리 많이 지니고 있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히려 인생을 긍정적으로 이해하며 ㅂ다 적극적이고 활방한 삶의 자세로 간사가 넘치는 삶을 살고 있다.
이런 정신적인 자세가 아니라면 그가 어찌 그렇게 불편한 몸을 이끌고 우리나라까지 와서 강연을 하겠다
는 엄두인들 내겠는가?
호킹은 남달리 값지고 성공적인 삶의 주인공으로 활약하고 있는 원인은 곧 감사로 충만한 정신자세 때문이 아니겠는가고 생각해 본다.
흔히 그는 현대의 살아 숨쇠는 전설적인 인물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그리고 "사공의 마술사""아인슈타인에 버금가는 이론 물리학자"라는 평가도 받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기에 그는 나이 겨우 32세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또 학문적인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영국왕립협회의 회원이 되는 영광을 안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현제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루카스(Lucasian)수학교수로서 뉴턴의 영예를 계승하고 있다.

건강, 지위, 재산, 가문, 학벌, 건전한 가족운 등 남이 부러워할 만한 여건들을 한 몸에 독차지하고서도 불평 불만에 사로잡혀 찌들고 비뚤어진 삶을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런 사람은 천당에 옮겨다 놓아도 거기에서도 불평거리를 찾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천구 에서도 지옥의 삶을 살수밖에 없을 것이다.
남이 보기에 아무리 고통스러워 보이는 삶의 여건을 지니고 있다고 할지라도 호킹박사와 같이 본인의 기본적인 자세만 제대로 갖추고 있다면 감사가 충만한 생애를 살아갈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는 것이 인간임을 우리는 새삼스럽게 재음미해 보아야 한다.
성경은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편50:14-15)라고 말씀하고 아울러 범사에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골3:15)고 당부하고 있다.

♥ 게으른 사람에게는 후회가 따른다
어느 농장 주인의 딸이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다.그 사실이 알려진 후부터 가축들은 불안과 공포에 떨었다.반드시 누군가가 희생양이 되어 잔칫상에 올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동물들은 회의를 열어 이 농장에서 주인에게 가장 필요하지 않은 존재가 희생제물이 되기로 했다.먼저 황소가 나섰다.“나는 주인님이 농사를 짓는데 기여하고 있다” 이번에는 개가 말했다.
“도둑을 누가 막는가.내가 짖어대면 도둑이 도망간다” 고양이도 큰 목소리로 외쳤다.“나는 곡식을 훔쳐 먹는 쥐를 잡는다” 닭도 목을 길게 뽑으며 자랑했다.“주인에게 새벽을 알리고 아침 식탁의 달걀을 제공하는 일을 누가 하는가” 그러나 한 동물만은 말 한마디 못한 채 눈물만 떨구고 있었다.그것은 바로 게으른 돼지였다.
이 사회와 가정에 쓸모가 없는 인생은 비참하다.게으른 사람은 절대로 남을 위해 봉사할 수 없다.게으른 사람에게는 항상 후회가 따를 뿐이다.



♥ 한 사람의 믿음
미국의 자동차 왕 헨리 포드는 80세 생일 잔치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소감을 말했습니다. "내가 살아오는 동안, 나는 허황된 계획을 꾸민 적도 있었고, 실현 불가능한 꿈을
가진 때도 있었소. 그러나 아내는 한 번도 불평을 하지도,
의심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언제나 나를 믿어주었답니다.
오늘의 내가 있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렇게 나를 믿어준 아내의 덕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가장 큰 기쁨이지요."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기를 믿어주는 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든든한 일입니다.
당신을 언제나 믿어주고 있는 분이 계십니다.
그 사실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 감사를 잊지 않는 사람
물에 빠져 죽게된 사람을 머리칼을 잡아 끄집어내 살려주었더니 다른 사람은 메달을 달아주며 칭찬하는데 살아난 사람은 그때 머리칼이 아파서 혼이 났다고 두고두고 원망하더랍니다.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수는 돌에 새긴다"는 말대로 은혜를 잊기가 쉽습니다.
미국 오하이오주 Springfield에 있는 위튼벌그 대학에서는 34년 전에 200달러를 갚지 못했던 학생한테서 백만불을 기부받은 일이 있는데 그 분은 대 Power회사의 사장인 Dr.Stanley Hanley입니다. 그가 성공한 것은 바로 이 감사를 잊지 않는 성품때문일 것입니다.
"기도와 감사함으로 깨어있으라"(골로새4:2)고 성경은 말씀했습니다. "제일 가르치기 어려운 수학문제는 우리가 받은 축복을 세어보는 문제이다"라는 서양격언이 있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사람에게 기쁨을 줍니다.

♥ 소명받은 사람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출애굽기 3:12)
기독교 신앙인은 두 번 태어납니다. 자연인으로서 몸으로 태어나는 것 한번,그리고 물로 세례를 받으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두번째 태어납니다. 그런데 한번 더 태어나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는 것입니다. 누구나 자기 마음대로 태어날 수 없습니다. 영원한 고향으로부터 이 세상에 보냄을 받았습니다. 보내주신 분의 심부름을 온 것입니다. 그런데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이 심부름을 왔는지조차 헷갈리기도 하고 무슨 심부름을 하는지도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무엇을 이루시려는지를 깨닫는 것은 인생의 최고 목표이겠습니다. 두려움과 걱정이 앞선 모세에게 하나님은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에겐 걱정도 두려움도 없습니다. 실패도 없습니다.


♥ 세 종류의 사람
현세에는 약 60억의 사람들이 살고 있으나 실상은 세 종류의 사람이 살고 있는데 곧 없어야 할 사람과, 있으나 마나한 사람과, 있어야 할 사람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보면 강도는 없어야 할 존재요, 제사장과 레위인은 있으나 마나한 존재요, 사마리아인은 꼭 있어야 할 존재이다.
여기에 대한 기준은 자신이 세우는 것이 아니라 이웃에 대한 관계를 통하여 결정된다. 때로는 사회적인 공헌도를 기준으로 결정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결국 내 이웃을 내 몸 같이 얼마나 사랑하고 있느냐에 따라 사는 삶의 모습이 결정할 것이다.


♥ 성경은 사람의 마음을 바꾼다
영국왕 제임스 1세는 킹 제임스성경을 번역한 독실한 신자였다.그는 작은 범죄도 엄하게 다스렸다.그런데 한번은 암스트롱이라는 좀도둑이 양을 훔치다 붙잡혀 사형선고를 받았다.암스트롱은 사형을 피하기 위해 한 가지 묘안을 짜낸 후 간수를 불렀다.
“나는 어차피 죽을 몸,마지막으로 성경을 읽고 싶소.임금께 내 뜻을 전해주시오” 제임스 1세는 그 소식을 듣고 대답했다.“참 기특한 죄인이로군.
그에게 성경을 주어라.그리고 성경을 모두 읽은 후에 사형을 집행하라” 암스트롱은 그날부터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1년이 지나도 사형을 집행할 수가 없었다.그는 하루에 딱 한절씩만 성경을 묵상했다.성경의 절수가 무려 3만 1102절이니 그것을 모두 읽으려면 80년 이상이 필요했다.제임스 1세는 그를 풀어주며 말했다.“집에 가서 성경을 읽어라” 암스트롱은 그 후 새사람이 돼 봉사의 삶을 살았다.


♥ 감사하는 사람 더 좋은 것 받음
영국에 대설교가 스펄젼 목사는 이런 말을 하였다.`촛불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전등불을 주시고 전등불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달빛을 주시고, 달빛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햇빛을 주고 햇빛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촛불도 전등불도 달빛도 필요 없는 영원한 천국을 주신다`고 했다.

♥ 지혜로운 사람
성 구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 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히 2:18)
미국 오클라호마 에이다의 제일침례교회에서 열린 부흥회 때 한 시각장애인 복음가수가 들려준 간증 한 토막이다. "열 살 때 아버지와 사냥을 가게 됐어요. 그날은 주일이었어요. 어머니는 우리에게 주일 예배 드릴 것을 권유했습니다. 아버지는 '주일 한 번 어긴다고 그리 걱정할 것은 없어.'라고 말했어요. 우리는 사냥터에서 토끼 한 마리를 발견했지요. 아버지는 저를 남겨두고 급히 토끼를 뒤쫓았습니다. 그리고 나무 사이에서 어른거리는 한 물체를 발견하고 총의 방아치를 당겼어요. 제 머리카락을 토끼의 꼬리로 착각한 것입니다. 그날부터 저는 시력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가족은 이 일로 모두 구원을 받았어요. 제 눈을 잃고 그대신 구원을 받았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사탄은 항상 "딱 한 번인데 뭘 "이라는 말로 사람을 유혹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그 실수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삶의 지혜를 얻는다.

♥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본문: 사도행전2:43-47절
오늘 본문의 말씀은 초대교회의 출발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를 보여주는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형성된 초대교회가 점차 성도수가 많아짐에 따라 새로운 교회의 체제와 질서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 질서는 인위적인 방법이 아닌 성령의 인도하심과 감동에 따라, 자발적이면서도 풍성한 사랑의 마음으로 이루어지는 아름다운 공동체가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공동체의 구심점은 당연히 그리스도이시며,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몸이 만들어지는 모습이 참으로 귀하게 보입니다. 이것은 구원을 이루며 교회를 형성하기 위하여 역사하는 성령의 놀라운 이끄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이미 앞의 42절의 "서로 교제하며" 부분을 여러 차례에 걸쳐 다루면서 어느 정도는 충분하게 전해드렸으므로, 앞부분은 대강 정리만하고 주로 47절 하반절에 중심을 두고 오늘과 다음 시간에 걸쳐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1. 사람마다 두려워 하였습니다.(43절상)
여기서의 "사람마다"는 뒤에 나오는 45절의 "각 사람"이나 47절의 "구원 받는 사람"과는 대조적으로 믿지 않는 자들을 말합니다. 그들이 두려워 하였다는 것은 무섭다는 의미의 두려움이 아닌 경외심에서 나오는 두려움입니다. 이 두려움은 그들이 보거나 듣지도 못했던 일들이 자기들의 눈 앞에서 일어나는 실질적인 현상들로 인하여 생겨진 것입니다.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에 대한 내용은 그 다음 구절들의 모든 것을 다 포함한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특히 사도들을 통하여 일어나는 기사와 표적은 능히 그들에게 놀라움과 두려움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2.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습니다(43절하).
사도들에게서 나타나는 기사와 표적은 그들의 사도성을 증명하기 위하여 주신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가운데서 일어나는 표증입니다. 이 표증들은 성령의 역사로 주어지는 것으로 세상의 그릇된 사단의 세력의 영에 사로잡혀 나타나는 그것들과 전혀 다른 것으로, 사도들에게서 나타나는 기사와 이적은 성령에 사로잡힌 사도들에게 부활의 주께서 함께 하고 계심을 보여주기 위하여 일어나는 특별한 현상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 곧 복음을 증거하기 위하여 당대의 사도들에게 주어졌던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 12절에서 말하기를, "사도의 표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함이라."라고 했습니다.

3. 그들은 주 안에서의 ‘한 몸 사상’을 가지고 사랑의 교제를 나누었습니다.(44-47절)
이 부분에 대해서는 그 동안 충분히 앞에서 다뤘으므로 여기서는 간략하게 요점만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믿는 사람들이 함께 모였습니다.
- 이것은 초대교회의 하나됨, 곧 통일성을 우리에게 전달해주는 귀중한 것입니다. 이들은 가정을 버리거나 만사를 제쳐두고 모여서 공동체 생활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서로를 세워주면서 하나가 되어 주님의 일을 위하여 모인 것입니다.
(2)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했습니다.
- 이 부분은 사도행전 4:34,35절을 보면 보충설명이 됩니다.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줌이러라."
(3) 각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었습니다.
- "각 사람의 재산을 팔아서"라는 구절이 주는 의미는 그들의 영적 일체감이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면서 한 몸을 이루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것은 이미 주 안에서 한 몸을 이루는 영적인 깊은 이해와 자기 발전적 신앙사상에서 나온 것이며, 자기 것을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고 한 몸을 이루는 모든 지체들을 돌보고자 하는 공동체적 사랑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우리 기독교인들이 깨닫고 배워야 할 너무나 귀중한 본보기입니다. 우리는 주 안에서 한 몸을 이루는 지체인지라, 영적으로 하나면 육적인 필요도 채워주기 위하여 주변의 성도를 먼저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부유한 성도는 가난한 성도를 찾아 섬기고, 경제적으로 조금이라도 안정적이고 여력이 있는 교회는 교단이나 교파와 관계없이 이웃의 작은 개척교회들을 협력해야 할 것입니다.
(4) 날마다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 이들이 모임의 장소가 없어서 성전에 모인 것이 아닙니다. 또한 유대인들의 전통을 지키기 위하여 성전에 모인 것도 아닙니다. 전통적인 유대인들과 논쟁하기 위하여 모이는 것도 아닙니다. 이들은 성전에 나오는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파하였으며, 찬양하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종교적 관습에 따라 습관적으로 모였지만,초대교회 성도들은 성령에 감동되고 이끌리어 자발적으로 모였습니다.
(5) 성찬과 애찬을 했습니다.
- 이들은 어느 한 집을 선택하여 사랑으로 서로를 섬기며 음식을 먹으며 교제를 나누었으며, 이 애찬에는 주님을 기억하여 기념하는 성찬이 따랐습니다.
(6)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 하나님을 찬미함은 구원받은 자의 감격스런 기쁨에서 나오는 당연한 것입니다.
(7)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습니다.
- 이 부분이 오늘날의 한국교회의 성도가 된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부분입니다. 세상의 소금이 되고 빛이 되어 살라는 주님의 명령과 같은 분부는 도무지 우리의 가슴에서 흐려진지 오래고, 지금은 오히려 세상사람의 비난의 대상이 교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아,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요.
저는 목사로서 저 자신부터 자성하는 마음으로,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의 모습을 잠시 살펴 보려 합니다. 지금 우리 한국교회는 결코 적지 않은 교회들에서 목회자와 성도 간의 갈등으로 서로가 너무나 많은 마음에 상처를 주고 받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의 원인에 대하여 단적으로 이것이다 말하기는 어려운 복합적인 요인들이 많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목회자의 바르지 못한 목회관과 그릇된 세속적인 욕심과 왜곡된 교회관 등으로 인하여 발생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이런 모습은 오로지 주님만 바라보며 성도들을 사랑으로 섬기는 신실한 목회자들과 이제 막 개척을 하면서 영적인 투쟁을 하는 초년 목회자들에게 힘을 잃게 만들고, 목회자를 존경하던 성도들의 가슴에 가시를 꽂는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도 엄청난 장애가 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들을 성토하며 교회 밖에까지 알리며 떠드는 일도 또한 부끄러운 일입니다. 소리를 높여 외치는 자들의 심정은 이해가 되나, 그들 또한 자칫 옳은 것을 주장한다는 명목 아래 자기도 모르게 자기 의를 내세우게 되고 상대를 정죄하는 죄를 범하게 되며, 교계를 더욱 혼란스럽게 할 수 있다는 것도 명심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들 중에는 자신이 교회를 개척하여 섬기는 일에 참으로 자기의 모든 정열을 다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에까지 알려질 정도로 큰 교회로 성장시켰다고 자기 스스로 여길 것입니다. 하지만, 만일에 그가 그렇게 자기 공로를 생각한다면 그는 아주 큰 착각을 한 것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것이며, 주께서 부흥시킨 것입니다. 다만 그 목사는 주님의 도구로 성도를 섬기도록 보냄 받은 자에 불과합니다. 무엇보다도 그 교회가 부흥되기까지는 성령의 역사가 있었으며, 성도들의 눈물과 피흘림이 있었음을 그는 기억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더욱 우리를 답답하게 하는 것은 사실상 그들 목사들도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을 향하여 성토해도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도 사랑한다고 강단에서 수 십년 동안 외쳐대던 바로 그 성도들 앞에서 자기의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빌어야 한다고 말하렵니다. 또한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께 가엾은 그 목회자와 그 교회 성도들을 위하여 그저 기도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주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목회자가 성도들 앞에서 자기의 허물을 스스로 들추어 용서를 비는 것은 부끄러움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도를 존중히 여기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설교를 잘하고 심방을 잘하는 목회자보다 자기의 잘못을 하나님과 성도들 앞에서 솔직하게 인정하고 고쳐나가는 그런 목회자를 우리 주님과 성도들은 지금 필요로 여깁니다.

♥ 고독한 사람들
고독은 대용품에 의존하여 사는 삶에서 오는 영혼의 영양 실조다.
슬픈 일은 많은 사람들이 대용품으로 만족하고 있다는 것이다.
. 저들은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기쁨을 주실 때 저들은 여흥으로 만족한다.
. 저들은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평강을 주실 때 저들은 수면제를 먹으며 만족한다.
.
저들은 하나님께서 가치있는 것을 주실 때 저들은 가격으로 만족한다.
. 저들은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풍성한 삶을 주실 때 저들은 희롱으로 만족한다.
. 저들은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그의 자녀가 되기를 원하실 때 저들은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 은혜 받은 사람의 특징
본문: 고린도후서 12; 1∼10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10절)

여러 사람들이 은혜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쉽게 짜증내거나 낙심하고 어려워지면 불평을 입에 달고 다닙니다. 또 은혜받았다고 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높이기보다 자기 자랑만 하는 사람도 있고 대접받고 인정받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은혜받은 사람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겸손입니다. 오늘 성경에서 바울은 자신이 경험한 영적 체험을 조심스럽게 소개합니다. 셋째 하늘까지 이끌려 올라간 놀라운 영적 체험을 했습니다(2절). 그러나 이 체험을 소개하면서 ‘무익하나마’ 자랑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부득불(하는 수 없이) 자랑한다고 합니다(2절). 매우 사려 깊은 태도이며 겸손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은혜 받으셨습니까? 그렇다면 더욱 겸손하시기 바랍니다.
진실합니다. 6절에 “내가 참말을 하노라”고 하였습니다. 가끔 부흥회 때 설교나 간증을 들어보면 진실하지 못하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진실을 말해도 은혜가 될 텐데 왜 꾸며서 설교하고 간증할까? 안타깝습니다. 어느 분이 신문 칼럼에 그리스 여행 다녀온 이야기를 적었습니다. 파르테논 신전의 조각 이야기를 하면서 “신들이 보고 있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같은 이야기가 피터 드래커의 책에 예화로 소개된 적이 있습니다. 은혜 받으셨습니까? 진실하기 바랍니다. 우리가 앞에 불렀던 찬송 518장에 5절 가사를 덧붙인다면 “진실하기 원합니다.진심으로”입니다.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돈을 모으는 능력,외국어 구사 능력 혹은 사람 잘 사귀는 능력이 아닙니다. 바울은 고난의 가시가 자신에게 남아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머무르게”(9절) 하려는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들였습니다. 나는 약합니다. 그러나 은혜받은 사람들은 언제나 주님의 능력이 붙들어줍니다. 은혜 받으셨습니까? 월드컵 시즌의 유행어처럼 권면하고 싶습니다.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
어느 순간에도 기쁨이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약한 것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도 기뻐한다고 했습니다(10절). 은혜받은 사람이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은혜받은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 기쁨이 있습니다. 웃음이 있습니다. 감사가 있습니다. 은혜받았다고 하면서도 얼굴을 늘 찡그리고 다니는 사람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은혜받으셨습니까? 기뻐하십시오.

네 종류의 사람

감사할 것이 100이고, 불평할 것이 200일 때 우리는 네 종류의 사람을 만납니다.

1. 불평할 것 200을 생각하면서 감사할 것은 깡그리 잊어버리는 사람.
아마 60% 이상은 그런 사람인 것 같습니다.
일반적인 사람의 모습입니다.

2. 불평할 것 200에서 감사할 것 100을 제하고 100 전도만 불평하는 사람.
이런 사람도 30% 이상은 될 것 같습니다.
이런 분들은 조금 나은 분들입니다.

3. 불평할 것 200이 있어도 감사할 것 100은 아예 따로 떼어놓는 사람.
이 사람은 기본적인 감사가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4. 불평할 것 200은 작게 생각하게 감사할 것 100은 크게 생각하는 사람.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은 모두 네 번째 종류의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불평할 것은 10분의 1로 생각하고, 감사할 것은 10배로 생각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러면 불평할 것은 20이 되고, 감사할 것은 1000이 될 것입니다.
그 정도로 살면 대략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산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
창 45:3-11, 고전 15:35-38, 42-50, 눅 6:27-38

신앙생활을 처음 하는 분들을 위하여 요셉에 대한 이야기를 간략하게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요셉은 야곱의 열두 아들 중, 열한번째로 태어났습니다.
위의 열번째까지 형들은 다른 어머니가 낳은 자식들이고, 자기와 동생 베냐민은 '라헬'이라고 하는 야곱의 두번째 부인이 낳은 자식들입니다.
야곱은 이 두번째 부인을 사랑했고, 자연히 그 아들인 요셉을 다른 열 아들보다 더 사랑했습니다.
그러자 위의 열 형들은 요셉을 미워하고 시기했습니다.
거기에다가 요셉은, 이상한 꿈을 꾼 다음에 형들에게 들려주는데, 그 꿈 이야기가 형들을 기분 나쁘게 하는 내용들이었습니다.

어느 날, 요셉은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양을 치는 형들에게 도시락을 갖다 주게 됩니다.
그동안 벼르고 있던 형들이, 요셉이 나타나자 그를 죽이기로 모의를 합니다.
그러나 르우벤이 말리고 유다가 말리는 바람에 죽음은 면하고 애굽 상인에게 팔려가는 신세가 됩니다.

몇 사람을 거쳐 요셉은 애굽 왕실의 경호실장인 보디발의 집 종이 됩니다.
그러나 거기서도 요셉은 죽을 고비를 겪게 됩니다.
성실한 요셉이 보디발의 눈에 들어 그 집 총무가 되는 행운을 얻었으나, 보디발의 아내에게 모함을 받아 철창 신세를 지고 죽을 날을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는 바로의 꿈을 해몽해 주는 기회를 얻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일약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이 때 중동 지방에 가뭄이 들었습니다.
대단한 가뭄이었습니다.
애굽은 요셉의 지혜로 양식이 비축되어 있어서 염려가 안 되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부모와 형제가 있는 유대 나라는 먹을 양식이 없어서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가야만 했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아버지의 명령을 받고 애굽으로 양식을 사러 갑니다.
거기에서 그들은 요셉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네 보통 사람 같으면, 원수를 갚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요셉에게 주어졌던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하나님께로부터 쓰임을 받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원수를 갚을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를, 용서와 사랑을 실천하는 기회로 바꾸었던 것입니다.
그가 원수를 갚았더라면, 일순간은 승리의 쾌감을 누렸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곧 자기는 물론이요, 그의 가족 모두가 멸망하는 슬픔을 맛보아야만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하나님의 사람이었고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진정한 승리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형들을 용서함으로써, 그는 믿음의 승리를 하게 되었고, 그의 가족 모두를 살리는 대승리를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편 그렇게 함으로써 그동안 여러번 죽음의 구렁텅이에서 요셉을 건져내 주시고, 지혜를 주셔서 나라를 잘 다스리게 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을 했던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 사랑에 보답하는 길은, 물질을 드리는 것도 아니요, 교회 안에서 큰 소리를 치는 것도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용서와 사랑의 삶, 곧 화목을 도모하는 일인 것입니다.


덕을 세우는 사람

힘과 슬기,덕 이 세 가지는 우리 인간에게 있어 소중한 보화이며 그 중에 가장 으뜸은 덕이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다 덕장이 되려 하고 덕의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지만 덕스럽다는 평판은 듣지 못한 채 인생을 마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삼국지에 등장하는 조조 같은 사람은 천하의 재주와 지혜,학식과 문무를 다 겸했지만 덕장이라는 소리를 듣지 못했고 농민의 아들 유비 현덕은 배운 것도 많지 않고 힘도 남보다 세지 못했으나 모든 사람들에게 덕장이라는 칭호를 받으며 존경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무엇이 사람을 덕스럽게 만들며 또 사람을 부덕하게도 만드는 것일까요.

에베소서 4장 25절 이하를 보면 사람을 부덕하게 만드는 것 세 가지가 지적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가면
둘째는 분노
셋째는 더러운 말

첫째 가면에 대하여 생각하여 보십시다.

사람들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말을 합니다. 돈을 벌고 명예,지위를 차지하는 데 있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면 언제 돈을 벌고 지위를 차지할 수 있느냐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 사람을 썩게 만들고 타락하게 하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잠언에 “적은 소득이 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낫느니라”고 했습니다. 모든 거짓과 속임수는 결국 그 사람을 가면의 장본인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아무리 교회의 직분을 가진 자라 하더라도 덕을 세우지 못하면 무가치한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둘째로 사람을 부덕의 사람으로 떨어뜨리는 것은 분노인 것입니다.

성경에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분을 안내고 살 수는 없습니다. 사소한 시비로,사소한 이해타산으로,다른 사람이나 자기 자신의 과오 때문에 분을 낼 때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재빨리 풀어버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빠른 시간내에 분을 풀어버리지 아니하면 결국은 마귀가 틈을 타고 그 사람 마음속에 들어와 그 사람으로 하여금 더 큰 죄를 짓게 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사람을 부덕하게 만들어버리는 것은 더러운 말인 것입니다.

성경에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더러운 말이란 건전하지 못한 말을 두고 하는 동시에 남에게 해가 되는 말을 뜻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남을 해치는 말들을 남발함으로써 점점 부덕한 사람이 되고 기피의 인물로 전락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덕스럽게 만드는 요소가 몇 가지 더 있습니다.

첫째는 진실입니다.
이웃에게 진실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웃에게 진실하려면 우선 자기 자신에게 진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 진실하지 않고는 남에게 진실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둘째는 공헌입니다.
성경은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고 하였습니다. 도적질하는 사람은 자기 생활을 전적으로 남에게 의지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남이 땀흘려 가꾼 곡식을 순식간에 가로채는 것입니다. 덕을 세우는 덕인이 되려면 우선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스스로 자기 생활을 지탱해 나가야 하고 그 다음에는 남의 생활에 보탬을 주는 구제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 덕스럽게 만드는 요소는 선한 말입니다. 사람이 선한 말을 아니하고 살면 마음에 녹이 슬고 입에 좀이 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남을 꼬집는 말,해치는 말,할퀴는 말,짓밟는 말들을 골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무례한 말,무익한 말,무가치한 말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또 누구를 만나든지 그 사람의 복을 비는 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느 때든지 감사의 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 상한 자에게 위로의 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힘없는 자에게 격려의 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신 명령이요 특권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덕을 갖추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계십니까.

가장 기다려지는 사람

얼마 전에 바보처럼 살다가 돌아가신 한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바보처럼 가장 좋은 옷을 입을 수 있었는데 소매가 닳아빠진 옷을 입었고, 가장 멋진 자동차를 탈수 있었는데 버스를 타거나 남의 차를 빌려 타곤 했습니다.

외아들에게 교회를 물려주라는 권유를 물리치고 그 아들을 외국으로 쫓아버렸고, 한참 후배들이 통일운동을 한다면서 북한을 제집처럼 마음껏 들락날락할 때도 그분은 "고향에 못간 많은 실향민을 두고 나만 어찌 고향에 가겠는가?"고 하며 바보처럼 그분은 한번도 고향 땅을 밟아보지 못하고 천국 본향으로 가셨습니다.

그분은 웅변도 몰랐고, 쇼맨십도 없었고, 그저 예수님처럼 살려고 노력하셨습니다.
이 바보 같은 목사님의 이름은 바로 한경직 목사님입니다.

이 기다림의 계절에 다시 한번 얼마 전 돌아가신 한경직 목사님이 그리워집니다.
그분이 가졌던 마음의 깊은 평화를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러한 내면의 깊은 평화를 가져야 인생의 풍랑을 잠재울 수 있지 않겠습니까?
금년에는 엄청난 테러와 그로 인한 보복전쟁이 있었습니다.
섬뜩하지 않습니까?
무너진 건물의 잔해와 찢긴 시신 사이에서 사단은 이를 드러내고 웃고 있을 겁니다 이 전쟁과 폭력을 어떻게 끝낼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원수 사랑이 길이라고 하십니다. 원수 사랑이 무엇일까요? 힘이 있을 때 그 힘을 자제하거나 포기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힘이 있으면 그 힘을 과시하고 싶고 그 힘 앞에 벌벌 떨면 쾌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학벌에 신경 쓰고, 연줄에 신경 쓰고, 힘이 있다는 곳으로 사람들이 몰립니다. 그처럼 힘의 논리로 살아가면 우리 속에 어둠의 힘은 커지고 영혼은 뒤틀리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힘이 있는 곳으로 몰리기보다 힘이 없는 곳을 찾아가기를 원하십니다. 또한 힘을 얻으면 그 힘으로 다른 사람을 섬겨서 평화를 추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한경직 목사님이 칭송 받는 이유는 힘이 있어도 그 힘을 선하게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싸움은 내 욕망을 위해 손해보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생깁니다. 남을 생각지 않는 이기주의와 독점욕은 우리 속에 어둠을 키우는 평화의 적입니다. 그러므로 진정 평화를 원한다면 내 욕망을 조금 덜어내고 이웃 사랑을 실천하며 손해보는 삶을 연습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평화 없는 세상이라고 느끼신다면 그런 세상에서 평화의 길을 걷기로 작정해보지 않겠습니까? 지금은 길이 없어 보여도 내가 평화의 길을 걷다 보면 반드시 그 길은 생길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길은 그렇게 생긴 것 아니겠습니까? 그처럼 평화의 길을 걷기로 새롭게 작정하는 사람이 바로 오늘날 성탄절에 가장 기다려지는 사람이 아닐까요?

거듭난 사람의 증거
- 바로 설수 있는 사람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요한복음  17:15∼17.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시편 119:11.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베드로전서 1:15.

어느날 어떤 목사가 한 탄광촌에 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진귀한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갱도 입구에 있는 시커먼 땅 위에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흰 꽃이 피어 있는 광경이었습니다.
너무나 신기해서 한참 동안 그 꽃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목사는 문득 다음과 같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래, 이 꽃은 표면이 무척 매끄러워. 그래서 어떤 먼지도 앉을 수 없었던 거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석탄 가루가 날리는 탄광촌보다 더 시커먼 곳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늘 깨끗함을 유지하며 살 수 있습니다.
세상의 것들과 적당히 타협하지 마십시오.
만약 당신이 세상의 것들과 타협하기 시작한다면 세상은 자신의 색깔로 당신을 시커멓게 물들일 것입니다.

“주님, 세상은 저희에게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라고 유혹합니다. 그러나 때마다 진리의 말씀을 저희에게 먹이시사 저희로 곁길로 가지 않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남을 행복하게 해주는 사람

사람 앞에 서기만 하면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얼굴이 홍당무가 되는, 부끄러움과 수줍음을 잘 타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이런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그는 친구도 없고 남의 집에도 가지 못하고 늘 외롭게 지냈습니다.

그는 "이렇게 소심하게 살면서 평생을 나약하게 보낼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한 번뿐인 인생을 스스로 만들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과감하게 자신을 알리기로 결심했습니다.
먼저 만나는 사람에게 미소를 머금고 인사부터 하고는 상대편을 칭찬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은 멋있는 분이군요."
"참 아름답게 보입니다." 이런 말에 그를 만나는 사람마다 행복해했고, 좋아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는 적극적인 사람으로 변모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사람을 감동시키는 영국의 달변가요, 시인이요, 극작가인 버나드 쇼입니다.
상대를 행복하게 해주면 자신이 달라집니다.

사람의 약속...하나님의 약속

어느 젊은이가 시골에서 무작정 상경했다고 합니다.
아무것도 없고 아는 집도 없고 해서 주일학교를 다니던 기억을 더듬어 교회로 찾아가 잠을 잤습니다.
저녁이면 교회에서 자고 낮이면 구걸을 하기 때문에 이 친구의 별명은 성씨를 따서 "박거지"라고 불렀습니다.
교회에서 잠을 잤기 때문에 새벽기도는 자연히 드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교회에서는 부흥집회가 있었고 교회를 짓기 위하여 작정헌금을 하였습니다.
가만히 보니 자기 옆에 앉아 계신 장로님이 1,500만원을 작정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청년이 생각하기를 장로님은 교회에 일주일에 몇 번 나오시지도 않았으면서 1,500만원을 하였는데 나는 이곳에서 매일 잠을 잤으니 2,000만원 정도는 해야겠다고 2,000만원을 별 의무 없이 적어냈습니다.
적어내고서는 한동안 까맟게 잊어버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몇 개월이 흐른후 새벽기도 때 갑자기 마음속에 충격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목사님의 설교에 성령이 마음을 움직여 주신 입니다.
'하나님께 약속한 것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청년은 목사님을 찾아갔습니다
"목사님, 그 작정한 것을 돌려줄 수는 없겠습니까?"
"글쎄 사람의 약속은 파기하거나 조정할 수는 있겠으나 하나님과의 약속은 지켜야지요."
그 청년은 한참을 깊이 생각한 후에 입을 열었습니다.
"목사님, 오늘부터 제가 고물을 주워 팔아 헌금을 하겟습니다.
작정한 헌금액이 되면 저에게 알려주십시요."
이 청년은 그날부터 고물을 주어 모았습니다.
그렇게 줍다보니 차츰 고물장사에 눈을 떠 1년 반만에 약속한 금액의 작정헌금을 드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 이를 지켜보던 장로님이 이 청년을 후원하여 공부를 시켜주었고, 지금은 어느 교회의 목회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공부 못 하는 사람들의 20가지 특징

1. 시험발표가 나야 공부한다.(보통때는 엄두가 나지 않는다.)
2. 계획만 잘 세운다.(고치기도 여러번 고친다.)
3. 공부하기전 할 일이 참 많다.(특히,책상정리)
4. 처음에 책상에서 하다가 갑자기 상을 펴더니 침대에 눕고 그러다 잔다.
5. 1시간 공부하고 3시간 쉰다.
6. 시험발표나면 해야지 하고서 막상 발표나면 자포자기한다.
7. 잘 세운 계획만으로 흡족해한다.
8. 동태를 살피고 동지를 찾는다.(같이 포기하자는 속셈)
9. 조금 자고나서 해야지 하고 막상 자고 일어나면 해가 중천에 떠있다.
10. 밤샘을 철썩같이 믿는다.
11. "공부하고 자야지"가 아니라 "좀 자고나서 해야지"라고 다짐한다.
12. 두꺼운 책은 베게하기에 좋다
13. 오색찬란한 필기노트(보는 것만으로도 뿌듯)
14. 시험기간만 되면 평소 관심없던 국민좌담이나 시사프로그램 같은게 무지하게 재미있다.
15. 책상에 필기 복사물만 그득히 쌓여있다.
16. 기적을 믿는다.
17. 머리는 좋지만 안해서 못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18. 시험후 점수를 매기지 않는다.
19. 공부는 못해도 인간성은 캡이라고 생각한다.
20. 시험성적 발표후 다음에는 정말 열심히 공부하겠다고 마음먹는다.


♥ 사람은 사람대로 맛과 멋을 지닌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북으로 160㎞쯤 떨어진 산자락에 ‘엘불리’라는 식당이 있다.엘불리는 전세계의 내로라하는 미식가들이 군침을 삼키는 식당으로 명성이 나있다.4월부터 6개월 동안만 영업을 하는가 하면 규모는 50명 정도의 음식 준비만 가능할 만큼 작다.

엘불리의 명성은 규모나 위치 때문이 아니라 주방장인 페란 아드리아의 조리솜씨 때문이라고 한다.미식가들은 그가 만드는 요리를 맛보기 위해 2개월 전부터 예약을 하고 기다린다.페란 아드리아야말로 맛 하나로 엘불리를 세계의 명소로 만든 사람이다.
사람은 사람대로,공동체는 공동체로서의 맛과 멋을 지닌다.맛잃은 소금은 버림받고 사람들에게 짓밟힘을 당한다는 것이 예수의 가르침이다.제 아무리 크고 화려한 식당도 음식맛이 떨어지면 한산하기 이를 데 없다.지금 우리에겐 맛과 멋을 만드는 제2,제3의 페란 아드리아가 필요하다.서툰 요리사들이 요리를 망치기 전,그래서 식당이 문을 닫기 전에 주방장부터 바뀌어야 한다.

♥ 두 사람의 이웃

어느 동네에서 차에 짐을 잔뜩 싣고 그 동네를 떠나 어디론가 이사 가는 사람이 있었다.
식구들을 다 이끌고 다른 동네로 떠나는 그는 이렇게 말했다. `
이 동네는 사람 살 곳이 못됩니다. 이 동네 사람들은 모두 무식하고 가난하고 예절도 모르고, 욕심은 맣고, 싸움질만 하고 그래서 우리는 생각다 못해 이 동네를 떠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 다른 한 사람은 식구들을 데리고 그 동네로 이사해 들어 온다. 역시 차에 짐을 싣고 그 동네를 떠나간 그 사람이 살던 집을 사서 그리고 이사를 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 동네 사람들이 가난하고, 무식하고, 많이 앓기도하고, 불행하게 산다는 소문을 듣고, 그들의 이웃이 될까 하여 이 동네로 이사오기로 하였습니다.
나는 우리 식구들과 함께, 힘자라는 데까지 그들을 도와 볼까 합니다.`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
 히브리서 11: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초대 교부 중에 크리소스톰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로마 황제가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포기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를 포기하지 못한다고 맞섰습니다.
결국 그는 황제의 명령으로 체포되었습니다.
황제가 신하에게 말했습니다.
"크리소스톰을 독방에 집어 넣어라. 아무와도 대화하지 못하도록 말이다."
그러자 그 신하가 대답했습니다.
"황제님, 크리소스톰은 기독교인입니다."
그 말에 황제는 화를 내며 "기독교인이라는 게 어쨌단 말이냐! 빨리 집어 넣어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신하는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황제님은 모르십니까? 예수 믿는 사람은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합니다. 만일 그 사람을 감옥에 혼자 가두어 놓으면 기도하는 시간이 많아졌다고 오히려 기뻐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데 예수 믿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와서 같이 이야기한답니다. 그래서 싱글벙글 웃으면서 하루 종일 중얼대지요. 그러니까 혼자 두게 되면 오히려 그에게 잘해주는 셈이 되지요."
황제는 더욱 화가 났습니다.
"그러면 그를 극악 무도한 죄인들이 있는 감옥에 집어넣어라."
신하는 또 다시 고개를 흔들며 말했습니다.
"그것은 더더욱 안 됩니다. 그는 오히려 전도할 기회를 얻었다고 매우 좋아할 것입니다. 그 극악 무도한 죄인들이 그를 통해 기독교인이 되면 어쩌시렵니까?"
극도로 화가 난 황제가 소리쳤습니다.
"그러면 그놈을 내어다 목을 쳐라."
그러자 신하는 더욱 난감하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황제님, 모르시는 말씀입니다. 저 기독교인들의 가장 큰 상급은 순교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저자들 중에 목 베임을 당하려 나올 때 우는 사람을 볼 수 없지요. 오히려 얼굴에 광채가 나고 기뻐합니다."
"그러면 그를 어떻게 해야 좋단 말이냐?"
참으로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들임을 이 이야기를 통하여 느낄 수가 있습니다.
오늘도 오직 믿음으로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이 되어 힘있게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
잠언 21:1-6

저자는 20장 전체에서 하나님의 진리 가운데서 실망하지 말고 오직 선행과 의를 계속적으로 추구해 나가도록 권고하였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 장에서는 악인과 의인의 행실의 특징을 대조적으로 비교, 서술함으로써 실제적인 삶 속에서 지혜자가 취해야 할 삶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 의와 공평을 행하는 사람

윌리암 바클레이는 '의'란 사람과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져야 할 것을 드리는 것이라고 정의 합니다.
윤동주의 시처럼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는 마음과 행동'도 어떤 의미에서 이것과 일맥상통한다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자연히 공평이 뒤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공평을 무조건적 평등, 차별없는 평등으로 이해하는데, 이것은 무리한 이해라 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사는 사회에서 공평은 '정의'를 전제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마땅히 받아야할 사람이 받고 주어야 할 사람이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이 공평과 의를 상실했을 때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바리새인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원하신 것도 義와 信과 仁의 실천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이스라엘 평민들과 더 깊은 유대 관계를 가지고 그들을 사랑과 공평으로 지도하길 원하셨고 지도자로서의 모범을 보이시길 원하셨지만 그들은 개인적인 기득권을 누리는데 만족하며 즐거워하였을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로부터 공동체의 비극이 시작됨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2. 겸손한 사람

교만한 자는 그의 교만에 의하여 자신의 도덕적 눈멂을 선언합니다.
그의 눈이 높은 것은 그의 안에 있는 빛이 어두워졌다는 것이고, 자신의 실제 모습을 전혀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하나님이 계실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여기에는 죄에 대한 고백도 없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순종도 없습니다.

3. 거짓없는 사람

하나의 거짓은 다른 거짓을 낳으며, 작은 거짓의 성공은 또 다른 거짓을 연속적으로 낳게 되고, 더 큰 거짓으로 인도하여 물방울이 점점 커지나 막이 엷어져 터지듯이 터지고 나면 모든 것은 사라집니다.
이러한 자들은 죽음을 구합니다.
속이는 사람들은 서로에게서 배웁니다.
그것을 당한 사람은 보복을 합니다.
그는 상대방에게 자기가 당한것과 동일한 또는 그 이상의 속임수를 쓰지 않는 한 만족을 모릅니다.
성공은 수많은 모방자를 만들어 냅니다. 속이고 속는 것이 역전되어 속은 자가 속이고 속인 자는 속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은 마음을 날마다 새롭게 하며, 의와 공평을 행하고, 겸손하고, 거짓을 행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축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 (예레미아 5:1)

지금 정치개혁을 하라는 국민의 소리가 드높다.
낙천, 낙선운동이라는 형태로 나타난 시민운동은 낡고 부패하고 줜워주의적인 정치를 타파하고 깨끗하고 민주적인 정치, 저비용 고효율의 정치를 하라는 국민의 요구요, 그것은 이제 시대의 대세가 되고 있다.

국민의 그런 요구를 받고 있는 사람이 누군가.
바로 정치권이요, 그 주에서도 정치지도자들이다. 그들이 답해야 할 당사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을 부르는 국민의 소리는 높건만 정작 답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시민운동에 대하 지도자들은 공감을 표가혹 취지 수용의 뜻을 밝혔다. 그러나 아직은 그럼 말만 있을 분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고치겠다는 방안을 내놓는 사람은 없다.
자기들이 공천을 주고 감투를 씌원준 정치인들이 부패, 저질, 불성실 등을로 시민운동의 배척대상이 되고 있는 사실 자체에 대하 보스들은 스스로 낯을 붉히고 책임을 통감해야 할텐데, 이런 반성의 빛을 보이는 사람도 없다.
정치지도자들은 시민운동을 이용하거나 회피하려 해서는 안 된다. 국민하나의 위선이요, 이중적 형태이다. 지도자란 희생과 헌신을 통해 국민에게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한다.


가장 완벽한 사람

한 사역자가 한번은 누구를 가장 완벽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슬픈 일이든 기쁜 일이든 간에 그것이 친절하고 지혜로우신 하나님 아버지의 손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하고 한결 같은 마음으로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사람의 기적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다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고린도후서 5:17-18).

나는 내게 문제들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문제를 통해서만 기적을 일으키시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문제는 하나님의 위대한 가능들이 숨겨진 기회인 것이다.

당신의 문제는 무엇인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당신은 새 사람이다.
하나님은 모든 문제를 통해서 기적을 행하신다는 것을 명심하라.

소중한 한사람

하나님은 한사람을 통해서도 세상을 움직이게 하신다.
한 사람이 믿음으로 바로 설 때 세상은 환경이 바뀌고 운명도 바뀐다.

1809년 2월 12일 켄터기의 산골에서 아브라함 링컨이 탄생하는 순간 미국의 역사는 바뀌고 있었다.
바로 그 시간에 흑인이 해방되고 노예제도가 폐지되는 기운이 싹 텃던 것이다.

성 어거스틴이 방탕에서 회개하던 그 시간,바로 그 시간이 전유럽이 변화하는 순간이었다.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 때 바로 그 순간에 이미 기독교의 역사는 바뀌고 있었다.
요한 웨슬레가 은혜를 받던 그 순간, 그때 영국이 구원받는 순간이었다.한사람은 이렇게 소중한 존재다.
그래서 한 생명은 천하보다 귀하다고 말씀하셨다.


자신을 낮추는 사람

매년 방학이 되면 정신여고 틴 라이프 중창단이 미주 지역을 순회하며 연주 활동을 벌이곤 했습니다.
오래 전 인솔자와 함께 중창단이 미국을 방문하여 고등학교, 교회, 대학들을 순방하며 연주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단원은 모두 15명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연주가 끝나고 다른 곳으로 이동을 하기 위해 차를 타야 할 시간만 되면, 학생들이 앞을 다투어 차 있는 데로 뛰어가 서로 먼저 차 안으로 들어가려고 다투기까지 하는 모습을 그날 동행했던 장로님 한 분이 지켜보고 있다가 인솔자에게 물었습니다.

“왜 저 학생들은 차를 탈 때마다 앞을 다투어 뛰어갑니까?”

인솔자의 대답은 자동차의 좌석이 열두 좌석밖에 안 되기 때문에 세 명은 차 바닥에 엎드려야 하는데 서로 먼저 타서 엎드리기 위해 그런다는 것이었습니다.
궁금해진 장로님이 직접 차 있는 데로 가서 확인해 보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먼저 뛰어간 두 여학생이 바닥에 엎드려 있었습니다.
그 장면은 상상할 수도 없는 감동적인 장면이었습니다.
그 날 그 장로님은 정신여고의 중창단을 위하여 15인승 봉고차를 선물로 사주었습니다.
그것은 엎드리고 얻은 선물이었습니다.

자신이 지닌 위치나 소유나 입장을 내세워 엎드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고넬료보다 더 위대한 조건들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낮추고 엎드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넘치는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어리석은 사람

15.어리석은 사람
성경엔 달란트 비유라는 것이 있다.
복받은 두 사람이 등장한다. 자기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한 사람이다. 저주 받은 한 사람도 있다.
구변 좋고, 논리 정연한 똑똑한 사람이지만 자기 맡은 일을 다하지 못한 사람이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둔하고 어리석어 보여도 자기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 이상으로 값진 인생은 없는 것이다.
우선 놀고나서 일하라고 하는 사람,
쉬어가며 일해야 한다고 하는 사람,
자기 맡은 일에 부지런히 할 필요없고 적당히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
일을 해봐야 별것 없다고 말하는 사람,
주의 일 한다고 무슨 뾰쪽한 수가 있느냐고 빈정거리는 사람,
어뜻 보면 똑똑하고 합리적인 사람으로 보일지는 모르나 자기 자신을 근본적으로 망치고 있는 어리석은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부지런해도 자기가 해야할 일에 대하여 부지런하지 못한 사람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남의 일 비판하고, 남의 일 간섭하는 데 부지런한 사람도 그렇다.
남의 다리 부지런히 긁어보았자 내 다리는 항상 가려운 것이다.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바로 값진 인생을 사는 사람일 것이다.

필요한 사람이라는 느낌의 돌쩌귀

자기가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라고 느끼는 감정의 돌쩌귀는 인생에 있어 매우 중요한 돌쩌귀입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고립될 때 문제에 빠집니다.
의기 소침, 편집증, 정신분열, 강간, 자살, 그리고 기타 여러 가지 불안증세는 고립감이 육체적, 정신적 건강에 대해 파괴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1분 경영자」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모든 경영자들에게 매일 최소한 1분 동안 고용인들과 함께 그들이 하고 있는 일들에 관해 대화를 나누며 그들을 격려하라고 권장하고 있습니다.

매일 단지 1분 간입니다.
만약 그런 일이 매일 일어난다면 많은 회사들에서 어떤 놀라운 일들이 벌어질까요?
그것은 고용인들에게 자신이 필요한 사람이며, 점차 자동화되어 가는 작업 환경 속에서도 자신들이 인정받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격려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돌쩌귀에 기름을 칩시다.
매일 다른 이들을 격려하기 위해 한두 가지 일을 시작합시다.
그것이 음식이든, 전화든, 편지든, 카드든, 1분 간의 감사의 말이든,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오늘 당장 그 일을 합시다.
누군가 참을성을 발휘하고 있거든, 그를 칭찬합시다.
누군가 일을 철저히 하고 있거든, 그를 격려합시다.

거듭난 사람

미국에 있는 어떤 자매가 변화된 모습으로 자신의 가정을 살펴보니 남편은 여전히 세상의 쾌락을 좇고 있었다고 한다.
TV프로도 세속적인 것만 좋아하더라는 것이다.
사실은 그 자매도 전에는 그런 프로를 좋아했었지만 이제는 설교가 나오는 프로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
이렇게 변화된 자매의 모습을 본 남편은 빈정거렸다.

“당신, 완전히 돈 사람 같군. 술이나 담배도 안하고 바가지도 안 긁고 욕도 안하고 이젠 하루 종일 기도하고 성경만 읽네. 그러고도 얼굴엔 늘 기쁨이 가득하니 미쳐도 제대로 미쳤군 그래.”

주일이 되어 성경을 들고 집을 나서면 남편과 시누이들이 비웃었다.

“아니, 성경은 왜 가지고 가? 교회에 가면 목사님이 읽어 주시는데 뭐하러 귀찮게 성경을 가지고 가?”

미국의 교회 목사님들은 성경 말씀보다는 정치, 경제, 교육, 문화 등의 세상적인 말을 더 많이 하고, 또 성도들은 그런 말만 듣고 성찬만 행하면 다 구원받고 천국에 가는 줄로 알고 있으니 얼마나 속이 답답한 일인가?

거듭나기 전의 자매 모습도 물론 이들과 같았지만, 이제 은혜를 받고 나니 이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이웃에게도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마음이 불길같이 일어났다.

그래서 마리아가 주의 발아래 앉아 말씀을 듣던 것처럼, 복 있는 사람이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처럼, 그 자매님은 말씀을 즐거워하고 가까이 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거듭난 사람으로서의 증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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