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닫다(수니에미) συνίημι(마 16:12), 기노스코(γινώσκω) 행 8:30 / 성경공부 인도자를 위한 바른 성경 해석의 원칙들


가끔 성경을 읽은 후에 또는 설교를 듣고 "깨달았다!" 라고 말하는 경우에 과연 무엇을 깨달은 것일까?
많은 회의를 갖게 합니다.
왜냐하면 깨달았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예전의 행동과 언어와 습관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을 목격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적인 깨달음에 대해 묵상하는 동기가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16:12
그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 깨달으니라.

* συνίημι  4920

1. 깨닫다,  2. 이해하다,  3. 통찰하다

발음 / 수니에미(süniēmi) 
어원 / 미래 συνησω, 제1부정과거 συνῆ- κα, 제1부정과거 가정법 συνῆτε, συ- νῶσιν, 제2부정과거 명령 2인칭복수 σύνετε,
4862와 ἵημι ‘보내다’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깨닫다(마 13:13, 막 4:12, 롬 3:11), 이해하다(엡 5:17), 지혜가 있다(고후 10:12)
신약 성경 / 26회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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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 인도자를 위한 바른 성경 해석의 원칙들

성경이 우리에게 주어지기까지

성경 66권 중 구약의 39권은 그리스도시대 이전에 유대인들이 성경으로 확인(確因)한 것으로 대부분 히브리어(Hebrew Language)로 쓰였다. 구약 원문(原文)은 히브리어로 기록되었고 극히 일부분만이 아람어(Aramaic language)로 기록되었다. 또 신약 27권 중 21권은 그리스도의 부활 승천 후 ‘사도들이 쓴 편지’(The Apostles’ Letter)로 당대의 공용어(公用語) 중 하나인 헬라어(Greek language)로 기록됐다.  

구약은 모세를 비롯한 약 30명의 성경 기자가 ‘성령의 감동’을 받아 기록했고 신약은 약 10명의 기자가 기록했다. 성경의 원저자(原著者)이신 하나님은 다윗과 같은 왕으로부터 정치가, 정부 관리, 군대 장관, 제사장, 학자, 의사, 농부와 목자, 베드로 같은 보통 어부 출신들까지 각양각색(各樣各色)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사용하셨다.

이 같은 성경의 신비(神祕)는 66권이 ‘시대’와 ‘저자’와 ‘양식’(樣式)이 다른데도 그 내용은 완전 하나로 통일성(統一性)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성경의 원저자(原著者)가 한 분 하나님이심을 성경이 스스로 증거 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성경은 어떤 사람의 의도(意圖)나 고안(考案)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확실히 나타내 주고 있다. 성경은 영원히 변함없으신 하나님의 뜻과 계시(啓示)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성경 기록 연대(年代)는 구약이 기원전 1500년경부터 400년경까지 약 1100년에 걸쳐서 기록되었고, 신약은 기원후 50년경부터 100년경까지 약 50년에 걸쳐서 기록되었다. 그리하여 구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가 기록된 때로부터 신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이 기록되기까지는 약 1600년의 긴 기간이 걸렸다.

 성경 기록을 위해 하나님께서 긴 세월을 거치고 40여 명의 저자와 3대륙의 기록 장소들을 사용하신 목적은 모든 세대와 모든 시대의 환경을 초월해서 적용될 초세대적(超世代的), 초지역적(超地域的)인 말씀이 되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있었다. 그동안 성경 내의 수천 가지 예언이 정확히 이루어졌고 나머지도 장차 이루어질 것이다. (32,500여 약속, 초림 456번, 재림 1518번 예언) 그러므로 온 세상 책 중 성경만이 지상의 유일한 절대(絶對) 진리임을 나타내신 것이다.

성경 번역 약사(略史)

성경 번역은 애굽의 프톨레미 필라델푸스 왕(Ptolemy II Philadelphus, BC 309-246) 때 왕실의 도서관장 데메트리우스(Demetrius)가 헬라어로 번역된 유대인들의 율법이 별로 없다는 보고를 하자 구약을 헬라어로 번역하라는 지시를 내림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헬라어를 사용하는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의 유대인들은 히브리어를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구약 성경의 헬라어 번역은 유대인들에게 중요한 일이었다.

그래서 유대인 12지파에서 각 지파대로 6명의 랍비가 대표로 선출되어 모두 72명이 이집트의 수도 알렉산드리아로 모여 히브리어 두루마리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했다. 이렇게 번역된 이 최초의 번역 성경을 ‘70인경’(七十人經, Septuagint, LXX, Greek Old Testament)이라고 한다.

그러나 아이러니(irony)한 건 유대인 학자들이 심혈을 다해 구약 성경을 번역해놓고 보니 ‘70인경’이 그들이 싫어하는 기독교인에게 좋은 번역 성경이 되어 오히려 기독교인들에게 외경(外經, Apocrypha)을 외의 적극적으로 환영받는 책이 되었다. 그리고 주전 90년 유대인 랍비들은 ‘얌니아회의’(Council of Jamnia, BC 90)에서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구약 39권을 정경(正經,  Canon)으로 확인했다.    

이 ‘70인경’의 언어와 메시지가 초기 기독교에 큰 영향을 끼치고 기독교 내로 헬라문화가 들어오는 통로가 된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사도들을 비롯한 초기 기독교인들은 이 ‘70인경’을 주로 사용했고 그 결과로 그들의 구약 인용(引用)은 대부분이 ‘70인경’에서 왔다. 결과적으로 ‘70인경’이 기독교 부흥에 크게 공헌하는 기독교인의 성경이 되고 말았으니 유대교 입장에서는 기막힌 일인 된 것이다. 그렇게 되니까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번역한 이 ‘70인경’을 버렸다.

다른 한편 신약성경은 주 후 397년 제3차 카르타고공의회(The Third Council of Carthage, 397)에서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신약 27권을 정경으로 확인했다. 오늘날까지 성경은 계속 각 종족의 언어들로 번역 중인데 세계성서공회연합회(United Bible Societies, UBS)의 2011년의 발표에 따르면 전 세계 인구가 사용하는 언어는 6,600개이다. 그중 구약과 신약이 모두 번역된 언어는 500개 미만이고 쪽 복음이라도 번역된 언어는 2,527개 언어이다.

성경은 영적 계기판(計器板)을 바로 보는데 필요한 몇 가지 원칙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이 원칙들은 성경 해석(解釋)과 이해(理解)에 필요한 기본원칙이다. 우리가 전자제품을 사면 따라 오는 사용설명서와 같다. 귀찮다고 설명서를 무시하고 마음대로 작동하면 제품의 기능을 다 사용할 수 없거나 아예 망가뜨리게 되는 것처럼 딱딱한 내용이지만 기본원칙이기에 익숙해질 때까지 따라야 유익하다.

그런데 기독교 이단(異端)들도 성경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기본원칙 즉 말씀을 벗어나(고전 4:6) 교주(敎主)의 가르침을 주장하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그래서 이단(異端)이란 정통(正統)과 끝이 다르다는 뜻이다. 이제 그 원칙들을 차례로 설명하겠다.

 1. 경외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대하라.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하기에 인간의 반응은 부차적이며 종속적(從屬的)이다.
인간이 복을 받기 위해서, 어떤 문제해결을 위해서 예를 들면 병 낫거나 혹은 삶이 잘 풀리기 위해 혹은 능력 받고 축복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창조주요 구속(救贖) 주시며 통치자이신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이해하며 경외(敬畏)하고 순종이 따라야 할 것이다. 성경은 수용자(受用者)인 인간이 중심이 아니라 계시자(啓示者)이신 하나님이 중심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해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마음을 읽고 깨닫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것이 성경을 맛보아 아는 것이다.(시 34:8) 

순종하지 않는 성경 지식은 오히려 당신을 넘어지게 하는 독이 될 수도 있다. 이에 관해 한 예를 들면 예수께서 영생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하우테 데 에스틴 헤 아이오니오스 조에 히나 기노스코신 세 톤 모논 알레디논 데온 카이 혼 아페스테일라스 예순 크리스톤.
αυτη δε εστιν η αιωνιος ζωη ινα γινωσκωσιν σε τον μονον αληθινον θεον και ον απεστειλας ιησουν χριστον


헬라어에 ‘안다’는 말은 ‘오이다’(οiδα)와 ‘기노스코’(γινώσκω)가 있다.
‘오이다’는 이성적(理性的) 이해의 의미이다.
‘기노스코는’ 전인적(全人的) 경험과 영성으로 전 존재를 다 안다는 의미이다.

예로서 내가 뉴스를 통해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활동을 알지만(오이다),
‘기노스코’의미로는 그분과 나는 서로 모르는 관계인 것과 같다.

‘기노스코’에 상응하는 히브리어 ‘야다’(Yadah) 동사는 부부의 성적 연합을 의미한다.(창 4:1) 따라서 부부간에 서로 ‘안다’는 것은 육체적이고 심리적이고 영적인 연합을 말한다. 그러므로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하여 전 인격으로 연합하고 교제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개념이다. 즉 아는 것이 믿는 것이고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永生)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는 죽은 자요 살았으나 생명이 없는 자이고 하나님을 ‘아는 자’ 곧 하나님을 ‘믿는 자’는 영생을 소유한 사람이다. 죽어서만 영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시간이 영생의 시간이며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시간부터 영생이 천국까지 계속되는 것이며 천국에서도 영원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체험해서 영생을 얻고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선교하는 삶으로 살지 않으면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고 알아도 단지 지식일 뿐이다.

18세기 영적 대각성 운동을 이끈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는 디모데전서 1:17 말씀을 읽던 중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말씀을 강렬하게 체험했고 이 체험은 에드워즈 개인에게만 아니라 개 교회 그리고 전 사회를 진정한 부흥의 불길과 거룩한 개혁으로 이끌어갔으며 사회 구석까지 이른바 각성의 불길로 번졌고 윤리적 차원에서도 성결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한 사람의 하나님 임재(臨在) 체험은 세상과 역사를 바꾸는 불씨가 되었다.  

‘인간 중심’의 성경 이해는 종종 ‘하나님의 주권’을 인간의 선택(選擇)이나 수용(受容)에 좌우되는 것처럼 오해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선 인생은 처음부터 끝까지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바르게 듣고 이해하며 믿고 영광 돌리는 것이 성도의 마땅한 의무이다. 인간의 복과 보상과 대가를 먼저 생각하고 성경에 접근하는 것은 운동선수가 먼저 열심히 훈련해서 실력 쌓을 생각은 않고 시합 후 받을 상금부터 계산하는 것보다 더 잘못된 생각이다.

왕의 명령을 어명(御命)이라 했다. 어명이면 사약(死藥)이라도 받아먹고 죽어야 했다. 성경은 사람의 손으로 쓴 일반 책과 달리 전지전능하신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책이므로 하나님을 대하는 경건한 마음으로 읽고 배우고 따라야 한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고 공부할 때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 성경을 펼쳐야 한다.(신 31:9-13) 우리는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삼상 3:9) 사무엘처럼 말씀을 듣고 순종하기 위해 성경을 대해야 할 것이다.

2. 성경 저자의 기록 목적을 이해하라.

물을 담을 목적으로 만든 컵으로 전화를 하려고 하면 되지 않는 것처럼 성경도 성경을 기록한 목적대로 이해하고 읽어야 한다. 디모데후서 3:15-17에 성경 전체의 목적들을 명시하고 있다.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성경의 목적은 첫째, 성경을 통해 구원받고 둘째, 삶의 변화를 받아 셋째,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해 구원을 받았고 예수를 닮아가며 선한 일을 행하기 위해서 준비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선한 일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심판받아 지옥 갈 영혼을 예수께 인도하는 일이다. 이보다 더 급하고 중요한 일은 없다.(마 16:26) 

이상의 세 가지 ‘구원 얻는 생명 문제’, ‘구원받은 후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삶 문제’,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사명 문제’가 성경 이해의 기본(基本, basic)이다. 그러므로 이 같은 성경 이해의 기본을 놓치고 성경을 대하는 것은 알맹이를 놓치고 껍데기 붙잡는 우(愚)를 범하는 것이고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다.  

성경은 또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는 구속사(救贖史)이기에 이 같은 눈으로 성경을 보지 않으면 성경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즉 성경은 복음(예수 그리스도)을 증거 하는 선교의 책이다. 그래서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모든 성경에서 ‘선교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롬 16:25,26)  예수를 영접하고 구원받은 자는 누구나 하나님께 나아가 산 제사 드리는 예배자로 사는 것처럼 예수를 구주로 믿는 순간부터 누구나 만인의 제사장으로 영적 군사로 복음 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그리고 성경의 각 권마다 그 목적과 의도를 파악하고 누구를 대상으로 기록되었는지 바로 이해해야 한다.(요일 5:13) 예를 들면 열왕기나 역대기는 얼핏 보면 중복된 내용이 많아 필요 이상으로 역사서가 두꺼운 느낌이지만 역대기는 열왕기의 단순한 중복이 아니고 기술 관점(觀點)이 다른 것이다. 열왕기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선지자(先知者)의 관점에서 기록하고 있는 반면에 역대기는 제사장의 관점에서 기록하고 있다. 그리하여 열왕기에는 하나님의 공의와 성결로 인간의 죄악상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반면에 역대기는 인간의 패역(悖逆)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믿는 자를 구속하시는 구속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와 함께 성경을 읽는 가운데 결국 성경이 나를 연구하고 변화시키도록 말씀이 주인이 되도록 끊임없이 나를 부인하고 비워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과 행동을 다스릴 모든 원리를 성경에서 발견해야 한다.(살전 4:1-12, 5:12-22)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을 통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완전 무장을 할 수 있다.(시 19:7,8, 딤후 3:16,17) 하나님 말씀 자체에 힘과 생명력이 있기에 우리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 힘을 성경에서 얻어야 한다.  

  3. 성경을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이해하라.

성경 계시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과 인내심으로 마치 어머니가 어린아이에게 말과 걸음마를 가르치듯 그 진리의 뜻을 점진적(漸進的)으로 넓혀가고 있다. 예수를 증거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곧 하나님의 계시인데 하나님의 계시는 완전하나 인간의 인식 능력의 한계로 하나님은 그의 계시를 한 시대의 한 사람에게 전하지 않고 점진적 계시를 하셨다.

그러므로 성경 계시의 특성에는 내용의 통일성(統一性)과 함께 계시 전달 형식과 방법에는 계시의 점진성(漸進性)이 있다. 이는 마치 창세기라는 시발역(始發驛)으로부터 요한계시록이라는 종착역(終着驛)까지 놓여있는 선로(線路)와 같다. 그러므로 성경은 나눌 수도 없고 한 권이라도 떼어놓을 수도 없다. 우리가 66권의 성경 전체의 핵심을 잘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뼈대 있는 신앙이 되어서 견고하게 설 수가 있는 것이다.

성경의 원저자(原著者)는 하나님이시다. 또 그분은 성경 안의 모든 사건과 역사의 주관자(主管者)이시고 집행자(執行者)이시다. 그러므로 그분의 성품(性稟)을 잘 이해하는 것이 성경 각 권을 이해하는데 지름길이다. 왜냐면 그분의 성품과 뜻과 권세와 영광은 영원히 변치 않기 때문이다.(약 1:17) 구약 노아시대 때 물로 심판하신 하나님은 신약시대 현장에 간음한 여인을 정죄하지 않으신 그 예수님과 똑같으신 분이시다.

그런데 우리가 구약의 하나님은 무서운 하나님으로 느껴지고 신약의 예수님은 한없이 자비로우신 하나님으로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계시의 시간의 차이 때문이다. 구약은 계시의 실체인 예수 그리스도와 눈에 보이지 않은 형이상학적인 진리를 모형으로 보여주는 계시 방법이 필요한 시대여서 우상숭배라는 죄의 삯은 사망임을 보여주기 위해 돌로 쳐 죽이는 것이다.(레 20:2) 그리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은 장수, 건강, 부귀, 자손의 번영 등으로(신 28장) 눈에 보이게 계시하셨다.

그러나 계시의 실체인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육신을 입고 오셔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성도의 내세 존재를 분명히 계시하셨기에 그 후로는 복음을 위해 바울처럼 처자식 없고 핍박받고 순교 당하는 것까지 영원한 축복과 면류관으로 드러내신 것이다.(딤후4:8) 

성경을 처음 대하는 초신자들이 구약을 읽을 때 어려워하고 “이스라엘 역사 이야기가 지금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고 하며 구약을 이스라엘 역사 이야기로 간주하여 멀리한다. 하나님은 구약과 신약을 합쳐 한 권의 성경을 우리에게 주셨다. 하나님은 원래 언어가 필요 없으신 분이시다. 그러나 인간들이 알아볼 수 있는 문자가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계시할 수 없다.  

그리고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이 왕 되신 신정국가(神政國家)의 본이 되어 만방에 복음을 전파할 목적으로 한 민족을 먼저 택하셨다.(출19:5,6) 그 민족이 이스라엘 백성이고 성경의 저자이신 하나님은 그 민족이 사용하는 언어를 사용하여 구약을 기록하게 하셨다.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실 때 당신의 형상으로 지었기에 인간의 인격을 존중하신다. 그래서 인간과 대화하시며 그분의 뜻을 계시하셨다.

성경의 주류(主流)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역사의 흐름이다. 구약은 오실 메시아를 예언적이고 예표적으로 내다보았고 신약은 구약의 예언대로 오신 메시아를 증거 하고 있다. 그러므로 항상 예수님이 역사의 중심인 동시에 성경의 중심이다. 그는 하나님 자신이시고 또 계시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라고 말씀하셨다.(요 5:39) 

이렇게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성경을 이해한다는 것은 또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 전체를 염두에 두고 이해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어린양이 되신 메시아로서의 고난의 주도 보아야 하지만 우리를 날마다 승리하게 하시는 우리와 함께하시는 위대하신 능력의 임마누엘 되신 하나님으로 그리고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실 왕으로서의 메시아도 동시에 믿음으로 보아야 한다.

구속(救贖)이 성경의 중요한 대 주제임이 분명하나 그것이 모든 것을 다 포괄하는 주제는 아니다. 모든 것을 포괄하는 주제는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영광’이다. 하나님의 영광 안에 구속도 포함되고 대계명(The Great Commandment), 대사명(The Great Commission), 천사와 사탄에 대한 계획, 천년왕국에 대한 계획, 심판과 지옥,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계획도 모두 포함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성경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적으로 계시하기에 해석도 또한 그리스도 중심으로 해야 한다.

구약은 율법을 통하여 만왕의 왕(King of Kings)이 오셔야 할 필요성을 말하며 계속해서 “왕이 오신다!”고 증거 했고 신약은 복음으로 왕이 오심으로 이루어진 소식 “왕이 오셨다!”(마 1:1) 그리고 “왕이 다시 오신다!”(계 22:20)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初臨) 사역(구원)에 근거하여 재림(再臨) 약속(완성)을 기다리며 말씀을 지키며 살도록 하셨다. 또 우리는 왕의 명령인 대사명(선교)을 준행하는 왕의 증인이 되어 왕과 함께 왕의 나라를 확장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경의 진리는 하나이다. 우리가 다시 오실 주님을 대망하고 믿는 것처럼 구약은 메시아로 오실 주님의 그림자(예표)를 보고 믿었다. 구약의 성도들은 보지 못한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았고(요 8:56) 우리도 보지 못한 오신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았다. 도마는 보고 믿었으나 우리는 보지 않고도 믿으니 도마보다 더 복된 자들이다.(요 20:29) 

구약과 신약은 사람이 구분한 것이지 그 내용은 연속적(連續的)이며 그리스도로 일관되어있다. 구약의 성도가 믿었던 구세주 메시아를 우리는 지금 믿고 있고 또 그들이 대망(大望)한 재림의 주(主)를 우리도 믿고 전파하면서 기다리고 있다.(유 1:15,16, 요 8:56, 시 22-24편 참고)

4. 성경으로 성경을 이해하라.

하나님은 위대한 설계자시며 창조자로서 다양한 재료들로 성경이란 웅장한 건물을 지으셨다. 따라서 성경의 각 부분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성경의 한 부분을 볼 때 동시에 다른 부분과의 연결 속에서 보아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해야 한다. 성경 각 부분의 유기적(有機的) 통일성은 신약과 구약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씨가 자라서 떡잎을 나고 줄기와 가지와 잎이 생긴 다음 꽃을 피우고 마침내는 열매를 맺는 것처럼 신구약 말씀은 전자제품의 기술이 개발되고 신기술이 개발되면 과거의 제품은 생산하지 않은 그런 발전이 아니라 유기적 생명체로서의 진전인 것이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 1:1,2)

이처럼 성경 전체적으로 알지 못하면 마치 장님이 코끼리 발목 잡고 발목을 코끼리로 생각하는 것과 같은 오류(誤謬)를 범할 수 있다. 우리 몸 각 부분이 한 몸을 이루듯 성경 각 권이 한 성경을 이루기에 성경 전체의 맥락 속에서 각 권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면 해석이 되어야 할 본문을 어떻게 하면 전체의 구조 속에서 파악할 수 있는가?  

먼저 평행구조와 내용을 찾아야 한다. 예를 들면 히브리서 7:20의 “또 예수께서 제사장 된 것은 맹세 없이 된 것이 아니니”라는 이 말씀에서 멜기세덱에 관한 이해는 그 평행구조의 창세기 14장과 시편 110:4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班次)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에서 찾을 수 있다.

많은 성경 구절이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그렇게 어려운 성경 말씀을 성경의 다른 구절이 설명해줌으로써 명확해진다. 이같이 성경은 그 자체가 가장 훌륭한 해석자가 된다. 성경은 많은 주제에 대해 한 문장 이상으로 설명하고 있다. 때때로 성경은 한 주제에 대해 어느 부분에서는 간략히 다루며 또 다른 부분에서는 길게 다루기도 한다.

그러므로 성경 전체의 맥락 속에서 성경의 각 본문을 풀어야 한다. 성경의 해석은 성경 안에 들어있다. 마태복음 7:21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라고 한 이 말씀을 생각할 때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갖춘 사람은 아무도 없다.(갈 2:16) 그 이유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그 해답은 성경 안에 있다. 요한복음 6:39,40에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라고 했다. 마태복음 7:21에 말씀하신 하나님의 뜻이 요한복음 6:39,40에 보면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 얻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이처럼 성경이 스스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성경 전체 내용을 알아야 하고 성경 전체의 맥을 보는 눈을 가져야 한다. 한 국가의 모든 법의 정신과 기초가 헌법에 있고 헌법은 모든 다른 법의 상위(上位)에 있음과 같이 전체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性稟)과 그분만의 영원한 자연적인 속성(屬性)은 모든 성경 해석의 헌법(憲法)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신 속성에 근거하여 선악과를 에덴동산에 두신 것은 인간을 향한 선하신 동기임을 믿는다. 왜냐면 우리가 죄인으로 있을 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아낌없이 주신 선하신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모든 계획과 행하심은 그의 속성상 항상 선하시다. 왜냐면 그분은 원래부터 영원히 선하신 분이신 것이 전체 성경을 통해 알게 된 하나님의 한 성품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에 하나님이 선악과(善惡果)를 두신 이유가 자세히 서술되어 있지 않았을지라도 그분의 성품을 믿음으로 그 성품 안에서 우리는 자유 하며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성경 66권을 부지런히 읽고 66권 전체에서 현현(顯現)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인격으로 만나야 한다. 편식(偏食)하면 우리 몸이 건강할 수 없듯이 성경을 편식하면 우리의 신앙이 건강하게 성장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가 그분의 성경에 연구되고 변화 받아야 한다.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형상을 닮아가야 한다.

고린도전서 2:12,13에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 선언하신 문맥의 원리를 보여준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이것은 성경을 이해하는 방법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이다. 성경을 설명하는 데는 오직 한 가지 방식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곧 성경으로 성경을 설명하는 방식인 것이다. 성경의 조명은 성경 자체를 통하여 온다. 그것이 바로 문맥 원리의 원칙이고 가치인 것이다.

문맥(文脈)에는 가까운 근접문맥(近接文脈, immediate context)과 먼 거리의 원접문맥(遠接文脈, remote context)이 있다. 근접문맥은 가까이 접해있는 단어들과 문장들로 구성된 한 두 개의 문단의 흐름이다. 흔하게 드는 예로 ‘GODISNOW-HERE’를 말할 수 있다.(‘아버지가방에들어가신다.’와 같은 말) 이 문장은 문맥에 따라 ‘God is now here’(하나님은 지금 여기에 계신다.)도 될 수 있고 ‘God is nowhere’(하나님은 아무 데도 없다.)가 될 수 있다.

이같이 한 문장이 문맥의 해석방법의 차이로 무신론(無神論)과 유신론(有神論)으로 갈리는 하늘과 땅 차이를 가져오기도 한다. 그러므로 올바른 성경 해석에 있어 상하 문맥을 이해하는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문맥은 단순히 의미를 이해하는 데 도움 되는 정도가 아니라 사실상 의미를 만들어 낸다.

원접문맥은 그보다 멀리 연결되는 문맥으로 책 전체나 한 저자의 여러 책이나 제일 크게는 성경 전체의 흐름이다. 원접문맥을 파악하는 방법의 예를 들면 빌립보서의 한 구절을 이해하려고 하면 먼저 빌립보서의 저자인 바울이 어디에서(어떤 상황에서) 어떤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썼는가를 생각하면서 전체의 대의를 파악해야 한다.

사실상 우리가 현재 보고 있는 성경의 장(章), 절(節) 구별은 원래부터 그렇게 되어 있던 게 아니라 사람이 구분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의 장(章), 절(節)을 넘어서 ‘문맥의 원리’로 문장의 상하를 잘 살펴 해석하고 이해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성경 해석의 우선순위를 따른다. ‘성경 전체의 대의’(大意) —> ‘성경 각 권의 대의’(大意) —> ‘각 장의 대의’(大意) —> ‘각 절의 의미’(意味) —> ‘각 단어의 뜻’ 순서다. 참고 : 최초 성경 전체를 1,189장으로 나눈 사람은 스티븐 랭톤(Stephen Lengton, 1150-1228), 1553년 최초 성경 전체를 31,163절로 나눈 사람은 인쇄업자 스테파누스(Robert Stephanus 일명 Robert Estienne, 1503-1559)이다.

5. 성경 본문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라.

모든 언어는 크게 두 가지 표현방식이 있는데 ‘문자적’(文子的) 표현과 ‘수사적’(修辭的) 표현이다. 이중 일차적인 표현이 ‘문자적’ 표현이다. 우리는 누구와 대화 할 때나 글을 읽을 때 문자적인 해석으로 이해가 될 때까지 먼저 문자적으로 이해한다. 여기에는 다음 두 가지 원칙이 문자적인 해석과 이해가 필요하다.

(1) 인간의 언어 관습이 문자적인 해석을 요구한다.

두 사람이 대화할 때 그 대화를 서로 이해하려면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약속한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한 사람이 ‘빵’을 말할 때 상대방도 먹는 ‘빵’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럴 때 피차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병원에서 의사가 환자를 진단한 후 X-Ray 사진 등을 보여주며 “폐암이니 빨리 입원하고 수술 준비하십시오.”라고 말했는데 듣는 사람이 폐암을 폐암으로 알아듣지 않고 수사적인 표현 즉 “감기 기침을 저런 식으로 표현을 했겠지…”하고 자기 임의대로 해석하여 이해한다면 이 환자는 앞으로 어떻게 되겠는가?

(2) 성경 목적이 문자적인 해석을 요구한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계시인 성경을 인간에게 주신 이유는 인간이 그 계시를 읽고 이해해서 구원받고 구원받은 후 변화 받아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예수를 증거 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누구나 관심을 가지고 성경을 읽는 사람은 그 읽는 성경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성경에 부분적으로 사용된 수사적(修辭的) 표현도 신비(神祕)를 추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성경 독자로 이해를 돕기 위한 목적에 있다.

또 성경의 예언(豫言)은 성취의 시간을 체계적으로 분류하여 기록해 놓은 것이 아니라 미래의 여러 가지 사건을 함께 취급하고 있기에 어느 예언이 어느 시대를 가리키는지에 유의하지 않으면 혼란에 빠질 수도 있다. 예를 들면 바벨론 포로, 주의 날과 연관된 사건들, 바벨론에서 귀환, 이스라엘의 흩어짐과 회복 등이 시간과 장소 구별 없이 성경에는 섞여져 있다.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이 특히 많은 혼동을 하게 한다. 오늘날의 우리가 볼 때 2,000년 이상의 간격(間隔, gap)이 있는 사건이 성경에는 동시에 언급되어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이사야 61:1,2 말씀을 주님께서는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 하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라고 누가복음 4:18,19에 인용하고 계신 데 두 곳을 비교해보면 주님이 이사야 61:2의 첫 부분에서 인용을 생략하고 계신 것을 보게 된다. 그 이유는 2절의 첫 부분까지는 주님의 초림 때 그리고 그 이하는 주님의 재림 때 성취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는 달리 이사야 61:1 이하에서는 시간의 차가 없이 함께 예언하고 있으나 주님은 2절 상반 절까지와 그 이하 사이에는 상당한 시차가 있음을 인정하고 계신 것이다.  

그리고 율법은 율법의 실체이신 예수님이 오심으로 폐하여진 내용이 있다.(히 10:9) ‘온전한 것이 올 때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기’ 때문이다.(고전 13:10) 영화 예고편은 본 영화가 나오기 전까지 광고용이다. 본 영화가 상영되기 시작하면 예고편은 폐기되는 것처럼 구약의 복잡한 여러 가지 제사(祭祀)들을 지금은 마땅히 폐하여야 할 예고편과 같은 것들인데 오늘날도 유월절을 고집하는 어리석은 이단도 적지 않다. 이와 달리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율법은 오늘날도 계속 지켜야 할 계명이다.(레 19:18, 마 5:17) 

또 구약의 결론은 오실 메시아의 예언으로 끝나지 않는다. 오신 메시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승천하신 주님이 보내사 우리 안에 임하실 성령 하나님을 증거 하고 있다.(렘 36:26,27, 욜 2:28,29) 그리고 성령님이 우리 안에 충만히 임하시면 우리가 비로소 주의 말씀을 온전히 순종하며 살게 된다는 것이다.

또 성결(聖潔)의 소극적인 개념은 죄를 범하지 않는 것이고 적극적인 개념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하나님의 성결 명령은 모든 시대의 도덕률의 표준이다. 그러므로 구약의 십계명은 신약의 예표가 아니고 영원한 도덕률의 규범이기에 신약의 성도들도 준수하여야 할 주의 명령이다.(참고, 마 22:34-40) 이러한 중요한 계명들은 문자 그대로 받으면 된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 충만 받아 성령님에 취하여 살 때 성결한 삶 곧 계명을 지키는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예수님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해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셨고 그래서 아버지의 뜻대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셨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본을 보이신 예수님 삶을 본받아(롬 8:29)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제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마 16:24) 예수님의 대속(代贖)의 죽음과 부활 승천 후 약속하신 대로(요 16:7) 성령님을 이 땅에 보내심으로 오늘날의 교회가 탄생했고 모든 족속으로 제자 삼아 땅끝까지 나아가는 세계 선교사역이 현재 진행형으로 계속되고 있음을 신약은 보여주고 있다.

 6. 성경 배경을 참고하여 성경을 이해하라.

성경은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3개 대륙에 걸쳐 3개의 상이(相異)한 언어로 상이한 배경에서 약 1,500년 간의 긴 세월에 걸쳐서 기록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그 당시 생활을 자세히 바르게 이해하는 게 바른 성경 해석에 아주 중요하다. 그러므로 성경 기록 당시의 역사, 지리, 정치, 종교, 경제, 풍습, 문화 등으로 돌아가야 한다. 성경은 이같이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예기를 기록한 것이 아니라 인간 역사적 사람의 현장에 주어진 말씀이기 때문에 역사적 해석과 이해가 필요하다. 성경 배경을 연구한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1) 성경 그 자체에서 실제적 증거를 얻는다.

예로서 고린도서는 고린도 교회의 역사적 배경과 상황을 반영한 바울의 서신이다. 우리는 고린도 전후서를 자세히 관찰하면 고린도 교회 당시 상황을 알 수 있다.(고전 1:6,12, 2:1, 6:1,6, 7:1-24, 8장, 10장, 11:13, 12장-14장) 

창세기는 하나님의 창조와 모든 인류 역사의 기원을 기록함으로 이 창세기 역사적 배경에서 인류의 역사는 시작된다. 즉 성경 자체가 역사적 배경을 기초로 하나님의 뜻을 전한다. 그러므로 성경 자체가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는데 표준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관주(貫珠) 성경을 사용하는 것은 역사적 배경 자료를 얻는데 좋은 방법의 하나다.

(2) 해당 전문 자료들을 통해 증거를 얻는다.

또 역사, 지리, 문화, 사회 등을 다루는 신구약 성경 배경 역사서 성경 사전이나 백과사전, 지리서 등을 통해 성경의 역사적 배경 이해가 가능하다. 몇 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① 역사적 배경

말씀 뒤의 감추어진 역사를 이해함으로써 성경을 더욱 완전하게 이해하게 된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2장의 배경의 역사를 살펴보면 헤롯 대제(Herod the Great, B.C. 73-4)가 그의 학정 말기에 너무 불안해서 처남을 죽이고 두 아들을 죽이고 마지막에는 첫 부인과의 사이에 태어난 가장 총애하고 신임하던 맏아들까지 죽였다. 이런 상황에서 동방의 박사들이 나타나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하고 물었을 때 헤롯은 뒤통수를 맞는 듯했을 것이다. 이러한 당시 헤롯의 입장으로 돌아가 보면 마태복음 2장의 내용이 더욱 실감 나게 이해가 된다.

② 문화적 배경(사회, 정치, 풍습, 예술. 종교, 문학, 과학, 경제 등)

예를 들면 사도행전 3:1에 “제 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의 배경은 무엇인가? 유대인과 로마인은 시간관념의 차이가 있었다. 복음서에서 요한복음은 로마인 시간으로 기록했고 기타 공관 복음서는 유대인(일몰에서 다음 날 일몰까지)으로 기록한 것이다. 로마인 시간은 유대인 시간에 6시간을 더하면 된다.

그런데 유대인 남자들은 성인이 된 만 13세부터는 하루에 세 번 정해진 기도 시간을 꼭 지켜야만 했다. 오전 9시, 낮 12시, 오후 3시에는 반드시 하던 모든 일을 중단하고 기도드렸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 장애인을 고쳐 준 것도 바로 오후 3시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가던 시각이었다. 또 유대교의 예배와 관습은 초대 기독교회의 기초였다.

⓷ 자연환경의 배경

“오늘은 밀 베는 때가 아니냐? 내가 여호와께 아뢰리니 여호와께서 우뢰와 비를 보내사 너희가 왕을 구한 일 곧 여호와의 목전에 범한 죄악이 큼을 너희로 밝히 알게 하시리라.”(삼상 12:17) 사무엘은 밀 베는 때에 비가 내리기를 하나님께 기도하겠다고 말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4월 중순에 10월까지는 비가 오지 않는 것이 상례이다. 밀 베는 수확은 4월 중순에서 5월 중순까지였다. 따라서 사무엘의 말은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증거가 된다.

또 기본적인 신구약 성경 지도를 그릴 정도면 성경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주의할 점은 배경연구나 참고는 어디까지나 성경 이해의 보조수단이지 성경 평가의 수단이 아니다. 만일 성경과 어긋날 때는 성경의 기준으로 배경사(背景史)를 비판해야 한다. 신학은 성경을 이해하고 전파하는데 돕는 시녀와 종의 역할을 해야지 주객이 전도되면 안 된다.

⓸ 언어적 배경

히브리인들의 독특한 관용어(慣用語)나 성경 원어(原語)를 한국어로 번역하는데 언어의 차이를 살피는 것도 참고해야 한다. 예를 들면 헬라어에 사랑은 네 가지 종류의 표현 단어가 있는데 스톨게(storge)는 가족 친지 간, 동족 인연 같은 혈육의 사랑이다. 에로스(eros)는 남녀 간 좋아하는 육체적 사랑이다. 필레오(phileo)는 친구 간 우정이다. 아가페(agape) 무조건(無條件)의 천래적(天來的) 사랑이다.

요한복음 21장에 부활하신 예수께서 베드로를 찾아와 물으셨다. “네가 이 모든 사람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때 주님이 물으신 사랑은 아가페(Agape)였다. 주님의 물음에 베드로는 대답했다. “예, 주님 나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이때 베드로의 대답한 사랑은 필레오(Phileo)였다. 그는 감히 아가페(Agape)로 대답할 수 없었다. 한국어로는 모두 사랑으로 번역이 되었으나 이렇게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국 사람이 털이 검은 개 한 마리를 사서 ‘검둥이’라고 이름 짓고 부르면 우리는 그 이름의 뜻을 잘 알아도 한국어에 익숙지 않은 외국인은 우리가 느끼는 언어의 뉘앙스(nuance)를 느낄 수가 없다.

성경에 나오는 선지자들의 이름은 신기하게도 대게 그 선지자의 일생을 대변하거나 그를 통한 그 선지서의 주제를 담고 있다. 예를 들면 구약의 선지자 미가(מִיכָה, Micah)라는 이름의 뜻은 “누가 여호와와 같은가?”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미가서의 주제는 7:18의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이다. 그래서 선지자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그 선지자의 삶과 그 책의 핵심을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그리고 성경은 연대기적으로 편성된 것이 아니라 시가서(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등)는 시가서 대로 역사서는 역사서(사무엘상하, 열왕기상하, 역대기상하등) 는 역사대로 대로 문학적 양식에 따라 분류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느헤미야서나 말라기서는 배열이 같이 있지 않아 거리가 멀게 느껴지지만 거의 같은 시대에 벌어진 사건이다. 그러나 느헤미야서는 역사서 그룹에 말라기서는 선지서 그룹으로 분류했기에 배열상 거리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선지서도 분량에 따라 배열의 순위를 정하여 다니엘 이야기가 시기적으로 더 먼저 일어난 일인데 에스겔서가 분량이 많아 앞에 배치된 것이기에 각 성경의 시기를 이해하는 것도 본문을 깊이 이해하는 데 필요하다. 그래서 신구약 중간(中間)에 침묵 시대라고 하는 신구약 중간사(中間史) 공부도 신약 이해에 데 도움이 되는 것이다.

 7. 특별한 내용은 기도하며 이해하라.

하나님이 만물을 보존하시고 통치하실 때는 자연법칙(自然法則)을 사용하시지만 필요하신 때는 홍해를 가르시거나 태양을 멈추시던 것처럼 초자연적(超自然的) 일도 행하신다. 언어를 해석하는데도 일반원칙을 주로 사용하지만 특별한 형태의 언어는 특별한 해석 원칙을 적용해야 한다. “당신은 나의 충전기입니다.”라고 할 때 문자적 이해로는 그 의미 이해가 안 된다. 이것은 수사법(修辭法)을 사용한 표현으로 상대방이 말하는 자에게 큰 힘과 도움을 준다는 은유적(隱喩的) 표현이다.  

성경 해석에 있어 우리는 기본적으로 문자적(文子的) 표현법을 기초로 해석하고 이해하면서 문자적인 뜻으로는 일반해석 원칙상 해석이 불가능할 때는 이차적으로 수사적(修辭的) 표현법을 사용한 것으로 생각하여 그에 상응하는 특별 해석 원칙을 적용해야 한다.  

또 문장의 행간(行間)을 읽으라고 한다. 행간이란 문장(文章)의 행과 행 사이를 가리키는 말로 글에 직접 나타나 있지는 않으나 그 글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숨은 뜻을 깨달으라는 말이다. 우리가 행간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글이나 말속에는 단어나 문장만으로는 전하려는 뜻을 정확하게 나타내거나 다 전할 수 없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 또 우리 생활문화 속에는 구체적이거나 직접적인 표현이 아닌 완곡(婉曲)한 표현으로 뜻을 전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경의 진리는 너무 심오(深奧)해서 일반적 언어로는 표현이 어려운 경우 성경 안에도 비유법(比喩法)이 사용되었음을 알게 된다. 수사적(修辭的) 표현은 깊고 어려운 진리를 생생하고 또렷한 방법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머릿속에 어떤 이미지(image)를 제시해 준다. 또 각 표현법은 하나님의 뜻을 인간들에게 더 효과적으로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성경에는 약 200개 이상의 수사적 표현들이 있다.

그러므로 ‘문자적 표현’은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수사적 표현’은 수사적으로 해석해야 올바른 본뜻을 알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계속해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문자적 해석이 모순 또는 애매함을 가져오지 않는 한 단어들은 그들의 문자적 의미에서 이해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해석의 기본법칙이다.  

또 모형(模型, 예표, 유형, 표상)이란 하나님이 어떤 성경 진리의 예시(豫示)로 지정하신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신약성경 중 히브리서는 레위기의 해설서(解說書)라 할 수 있다.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히 8:5) 또는 ‘비유’라고 말씀하면서 “개혁(改革)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히 9:9,10) 그러므로 모형, 그림자, 비유 등을 해석할 때에 유의해야 할 점은 구약의 모든 것을 예표로 삼아 알레고리칼(allegorycal) 하게 이해하는 과장 해석이나 억지 해석을 피해야 하고 나타난 실체(實體) 즉 밝히 드러난 복음의 빛을 통해 해석하고 이해해야 한다는 점이다.

마치는 말

성경은 일반 책과 달리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계시의 말씀이다. 로마서 16:25,26에 복음을 감추어졌던 ‘비밀의 계시’라고 했다. ‘계시’(啓示, αποκαλυπσιζ)는 ‘감추인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의 눈을 열어주셔야만 보인다.(엡 1:18) 간절히 기도하며 읽으면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주시고 복음과 선교의 비밀을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성경 이해에도 성령님의 도움이 없이는 올바로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 뜻을 따르며 순종하는 자들(친구)에게 영적 계시를 보여주신다. 요한복음 15:14,15에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계명을 지키는 자가 주님의 친구라고 하셨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3:1,2에 바울이 말씀을 음식으로 비유하여 어린아이 같은 신앙의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훈계(訓戒)하며 어린애들에게 먹이는 젖으로 그들을 대했다고 했다. 영적 생명은 우리의 일생동안 자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양들은 일생동안 영의 양식을 먹어야 한다. 갓난아이가 처음에는 젖을 먹다가 나중에는 점점 단단한 음식을 먹을 수 있듯이 영의 양식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어린이도 하루아침에 다 자라나 어른이 된 자가 없듯이 영적 생명도 하루아침에 주의 진리를 더 깨달을 필요 없이 다 깨닫고 행하는 자가 없다.

이것은 우리 신앙 성장에는 시간이 필요함을 말한다. 어릴 때 부모 마음을 알지 못하다가 철들어서 부모 마음을 알고 나중에는 자신이 부모가 되어 진실로 부모의 마음을 잘 알게 되듯이 영적 생명도 성장 정도에 따라 주의 말씀이 깨달아진다. 하나님을 아는 분량이 장성한 자(엡 4:13, 고전 13:11,12)가 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히브리서 5:14에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고 했다.  

성경은 우리가 나의 것으로 삼은 영적 생명의 분량만큼 이해되고 순종할 수 있다. 우리가 주님을 닮는 것은 일생의 거룩한 목표요 추구이다. 아무리 성령 충만해도 우리의 몸이 부활하기 전까지는 여전히 하나님과 하늘에 속한 진리의 말씀을 청동거울을 보는 것처럼 이해에 한계가 있음을 바울도 고백했다.(고전 13:12) 

그러므로 성경의 깨달아지지 않는 부분은 겸손히 주 앞에 내려놓고 그의 도움을 기다려야지 억지로 풀려다가는 잘못되는 것이다.(벧후 3:16) 억지로 풀어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잘못보다 “잘 모르겠다.”고 하는 정직과 겸손이 우리를 얼마나 자유 하게 하는지 모른다.

주님이 언제 다시 재림하시는가는 아무도 모른다. 왜냐면 주께서 말씀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칼빈(John Calvin, 1509-1564)은 성경이 가는 데까지 가고 성경이 멈추는 데서 멈춘다고 했다. 이는 성경 해석에 정직하고 올바른 태도를 보여 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데는 성령님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므로 항상 다윗과 같은 기도가 필요하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시 119:18)(*) 글쓴 이 / 김다니엘 목사, 서울신대, 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Asian United Theological University, ACTS), 미국 Faith Theological Seminary(D.D), 선교사, SIM 국제 대표(I.D) ㈜ 본 글은 본지 편집에 맞도록 재편집 한 것입니다. 원문은 아래 출처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출처 : http://cafe.daum.net/flower-rainy/gb8b/200  ‘베이직 구약성경’ 김다니엘 著, 쿰란출판사 



성경을 읽으며 무엇을 깨닫는가?


사도행전 8:30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 깨닫느뇨?

* 깨닫느뇨(1097) γινώσκω  

1. 알다,  2. 신비를   3. 하나님을

발음 / 기노스코(ginōskō) 
관련 성경 / 알아보다(막 6:38), 알다(마 6:3, 12:5,7, 막 5:43, 8:17, 눅 20:19, 요 1:40), 알게 하다(마 9:30, 요 19:4), 알려지다(마 10:26, 눅12:2), 깨닫다(마 24:39, 막 5:29), 알리다(막 9:30, 요 7:17), 동침하다(마 1:25), 주다(막 4:11)
신약 성경 / 222회 사용


예수님과 이적의 사건들


오병이어의 이적

‘오병이어’는 번역 실수가 만든 기적?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
예수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여명을 먹이고도 남은 빵이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는 <신약성서>의 네 공관복음서에 모두 나오는 놀라운 이야기.

믿기 어려운 기적의 진실은 무엇일까?

1976년부터 예루살렘 히브리대학에서 성서학과 고대 셈어, 이집트학, 아시리아학을 공부하고 수메르어로 학위를 받은 뒤 10여년간 히브리대에서 가르쳤던 성서학의 국제적 권위자 조철수(60) 교수의 <예수 평전>은 눈이 번쩍 뜨이는 설명을 제시한다.

조 교수는 마르코 복음서 6장의 이 기적 이야기 일부를 이렇게 인용한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명령하여 각자 동료들끼리 풀밭에 앉게 했다. 백 명의 동료지간의 백부장과 오십 명의 동료지간의 오십부장이 끼리끼리 자리잡았다. 예수는 다섯 개의 빵과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하늘을 향해 쳐다보며 축복하고 빵을 떼어 그의 제자들에게 주며 그들 앞에 나누게 했다.”

공동번역 성서의 마르코 복음서는 이 가운데 ‘백명의~’ 부분을 이렇게 옮겨놓았다. “군중은 백 명씩 또는 오십 명씩 모여 앉았다.”
마태오나 루가 등 다른 복음서들에는 이들이 끼리끼리 모여 앉았다는 표현 자체가 아예 없다.
이 표현의 차이에 주목하라.


‘오병이어’는 번역 실수가 만든 기적?

조 교수가 인용한 마르코 복음서 내용은 자신이 따로 번역한 것이다.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신약성서 원문은 그리스어로 쓰여 있는 게 가장 오래된 사본이다.
그런데 이 그리스어 원본 자체가 번역본일 가능성이 높다.
원래 복음서나 사도들 편지는 히브리어나 아람어로 기록됐고 적어도 그 수십년 뒤에야 그리스어 본들이 만들어졌다.
히브리어와 아람어는 같은 계열이지만 그리스어는 전혀 다른 언어체계다.
따라서 아람어와 히브리어 텍스트들을 자신이 직접 번역한 조 교수의 인용문이 당시 이스라엘(유대)의 언어행위 실상과 사회상에 더 근접할 가능성이 높다.

조 교수는 1947년 발굴된 ‘사해 두루마리’ 등의 옛 전적들을 성서와 하나하나 대조하면서 예수의 실상을 재구성한다.

조 교수에 따르면 공관복음서에서 ‘오천 명’이라 옮긴 단어는 아람어 본(페시타) 신약성서에는 ‘오천’이라고만 돼 있다.
오천은 히브리어로 ‘아메쉐트 알라핌’이다.
그런데 이를 ‘하메쉐트 알루핌’으로 읽으면 ‘다섯 천부장’이라는 뜻이 된다.
당시 히브리어나 아람어에는 모음부호가 없었기 때문에 알라핌을 알루핌으로 읽는 식의 바꿔 읽기는 유대교 성서 해석에 종종 활용됐다. 따라서 오천을 오천명의 군중이 아니라 ‘다섯 천부장’으로 읽을 수 있다면 ‘백 명씩 오십 명씩’은 백부장, 오십부장으로 옮길 수 있다.
조 교수는 ‘빵을 먹은 이들이 다섯 천부장이었다’는 말은 백부장과 오십부장들이 참석한 그날의 특별한 만찬 의례에서 그들 가운데 다섯명의 천부장을 선출했다는 얘기고 예수가 그들에게 성찬의례를 베풀었다는 뜻이라고 풀이한다.
천부장들은 당시 예수가 한때 소속돼 있던 에세네파 공동체의 최고의결기관에서 재판관들과 사제장들, 부족장 등과 함께 그 조직 주요 구성원이었다.

사해 문헌 중의 에세네파 예식에 대한 규례들 중에도 “이스라엘의 천명의 장과 백 명, 오십 명, 십 명의 지도자와 재판관” 등이 재판 청문회에 참석한다는 내용들이 들어 있다. 나중에 에세네 공동체의 한계를 지적하며 떠나간 예수의 공동체 역시 성찬의례를 통해 다섯 천부장을 뽑고 그들이 열두 제자들 모임에 합류하는 좀더 발전된 상부조직을 갖게 된다. 열두 광주리의 12라는 숫자도 이스라엘 12지파, 12제자처럼 당시 사회의 현실을 반영하는 상징성을 갖고 있고, 메시아의 도래를 알리러 각지에 파견한 72제자의 72라는 숫자도 당시 천문관념에 따라 지파당 6명씩 배치한 결과로 읽힌다.

그렇다면 오병이어 기적의, 외딴곳 그 많은 군중을 어떻게 먹이느냐는 제자들 질문이나, 다 먹이고 남은 빵과 물고기가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는 복음서들 얘기는 오역을 그럴듯하게 포장하기 위해 후대에 추가되고 윤색된 내용일 가능성이 있다. 그날 성찬의례 참석자, 빵과 물고기를 단합과 사명과 정체성 확인 차원의 의례행위로 받아먹은 사람들은 예수 공동체의 소수 지도급 인사들이었다. 마르코 8장의 일곱개 빵으로 사천 명을 먹였다는 얘기도 일곱명의 원로들 모임에 합세할 네명의 천부장을 선출한 것으로 읽는 게 훨씬 더 설득력이 있다.

루가 6장의 “가난한 자는 복 받을 것입니다.
천국이 그들 것입니다”라는 예수의 말은 마태오 5장에서는 “마음으로 가난한 자는…”으로 돼 있다.
‘마음’의 히브리어는 ‘레브’다. 그런데 레브는 특정 맥락에서 모세 오경 또는 하느님의 말씀을 가리키는 ‘토라’의 은유적 표현으로도 사용된다. 따라서 ‘마음으로 가난한 자’라는 말은 토라 공부 때문에 가난한 자, “하느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는 데 전념하여 돈벌이에 급급하지 않아 구차한 삶을 사는 사람”을 뜻한다는 게 조 교수 풀이다. 따라서 ‘마음이 가난한 자’로 옮기는 건 의역이란다.

이런 식으로, 복음서들의 갖가지 치유기적의 의미, 두드리면 무엇이 열린다는 것인지, 첫째가 나중 되고 나중이 첫째 된다는 게 뭔지, 일 많이 하나 적게 하나 모두 같은 삯을 지불하는 포도밭 주인의 비유, 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가는지, 카이사르 것은 카이사르에게 주라는 건 무슨 의미인지, 왜 유다는 마지막 순간 예수에게 입 맞췄는지 등 성서 속의 많은 비유와 예화들이 전혀 새롭게 해석된다. 중요한 건 그것이 막연한 추론이 아니라 구체적인 문헌 근거들을 토대로 이뤄진다는 점이다.

사해문헌 중의 <하박국서 해석>엔 ‘진리’의 이름으로 불린 사제가 등장한다. 그는 이스라엘을 지배할 때 교만해져서 하느님을 떠났으며 재산 때문에 법규들을 배반하고 반동폭력배와 백성들의 재산을 훔쳐간 ‘악한 사제’로 로마 법정에 선동 혐의로 넘겨져 사형당한다. 조 교수는 그 사나이가 바로 예수라고 본다. 그를 악한으로 묘사한 하박국서 해석은 예수가 자신들을 배신했다고 본 이 해석서의 작성 주체인 에세네파의 시선이다.

바리새, 사두개는 물론이고 한때 자신이 그 사제요 교사로 복무했던 에세네파의 한계까지 과감하게 뛰어넘었고 결국 그 때문에 죽임을 당한 예수. 900쪽의 두툼한 <예수 평전>은 당대의 문헌자료들과 문화적 배경설명을 토대로 그 생애를 치밀하게 재해석한다.

에세네 ‘사해 두루마리’ 다양한 성서 해석 근거로

1947년 사해 북서쪽 쿰란의 계곡 언덕에서 잃어버린 염소를 찾던 두 젊은 양치기가 동굴 속의 항아리에서 일곱 개의 양피지 두루마리를 발견했다.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발견’으로 일컬어졌던 ‘사해 두루마리’들은 11개 동굴에서 모두 813가지가 나왔다. 이 가운데 223개가 히브리 성경 사본들이며, 나머지는 외경들과 공동체 규례, 법규, 예언서 등을 해석한 해석서, 종교절기에 관한 지침서와 감사 시편 등이었다. 대부분이 히브리어로 씌어졌고 96개 문서는 아람어, 7개가 그리스어 문서였다. 히브리 성경 사본 중 82개가 모세 오경 사본이었고 예언서 사본 41개 중 21개가 이사야 사본이었다. 하지만 온전한 것은 12개 정도.

에세네 ‘사해 두루마리’ 다양한 성서 해석 근거로

국내 유일의, 그리고 세계 11번째 앗시리아학 학위 소지자 조철수 교수에 따르면, 매년 100여개의 관련논문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사해문헌의 작성자들은 엣세네파 사람들. 1세기의 유대 역사학자 요세푸는 기원전 150년부터 서기 70년까지 유대 지방에는 바리새와 엣세네, 사두개라는 세 주요 분파가 있었다고 기록했다. 사두개는 사제들과 그 친인척 등으로 구성된 상류 기득권층으로 로마 제국 체제에 적극 가담한 자들이었고, 바리새는 전통적인 모세 법규에 집착하면서 사회참여를 주장한 타협적 중산층 지식계급이었다. 1세기께 형성된 랍비 유대교는 바리새의 후예들이다. 바리새를 비판한 엣세네는 종말론에 입각해 메시아가 도래할 새 세상을 꿈꾸는 신흥 자치공동체 세력. 이밖에 로마정권에 무력으로 저항한 열심당과 예수를 메시아로 믿은 예수 공동체 등이 등장해 첨예하게 충돌한 당시 이스라엘은 몹시 혼란스러웠다. 일제 패망 뒤에도 외세의 영향이 지속되고 있는 한반도 상황과도 닮은 점이 많다.

항상 그리스나 로마 등 외세와 결탁하면서 모세 오경의 내용을 글자 그대로 지키려 했던 사두개. 서기 2세기 저항세력을 격파한 로마는 유대인들의 예루살렘 입성을 막았고 성전이 없어진 상황에서 사두개도 사라졌다. 그리하여 유대교는 사제 없는 종교가 됐다.

토라에 집착하면서도 사제계층과 권력층에 반발한 바리새들은 1세기 말 모세 법규를 그대로 지키려는 샴마이파와 개혁적인 힐렐파로 나뉜다.

재산을 공동관리하며 가난한 삶을 찬양했던 내세적·자립적 공동체를 여러 도시들에 세웠던 엣세네 사람들은 로마 네로 황제의 폭정에 항거해 들고 일어선 서기 66년의 열성파 유대인들의 독립항쟁에 합세했다. 그러나 처절했던 마짜다(마사다) 항전으로도 널리 알려진 그 저항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진 엣세네들은 배우고 가르치던 두루마리들을 근처 동굴들에 숨기고 피신했다. 그렇게 해서 살아남은 것이 사해 두루마리다.

앞서 기원전 7년 12월 1일 태생일 가능성이 높은 예수는 20대에 엣세네파 사제가 됐고 개혁적인 바리새의 힐렐파 신조를 많이 받아들였다. 예수 공동체는 그러나 엣세네파의 율법주의를 거부하고 불치의 병자나 불구자, 무식쟁이들을 과감하게 받아들이는 등 기성체제 전반에 반기를 들었고 사랑과 평화를 설파했으며, 혈연·지연 중심의 민족종교 틀을 넘어 믿음에 바탕을 둔 신앙공동체로서 보편종교를 지향했다. 이 혁명적 행보는 사두개와 바리새, 엣세네파에게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으며, 결국 그들은 예수 제거를 공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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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오병이어의 기적(五餠二魚─奇蹟)은[1]예수의 기적 가운데 하나로, 예수가 한 소년으로부터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취하여 5천 명의 군중을 먹였다는 기적을 가리킨다.[2] 간단히 오병이어라고도 한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빵과 물고기를 취하여 군중을 먹인 예수의 두 기적들 가운데 하나로, 마르코의 복음서 8장과 마태오의 복음서 15장에는 이와 유사하지만 다른 기적이 서술되어 있다.

    본문

    5,000명의 군중을 먹이신 기적인 이 기적은 신약성서사복음서에 모두 등장하는데, 각각 다음과 같다.

    의미

    가난한 이들에 대한 예수의 지극한 마음을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마르코의 복음서에서 이르기를 예수께서는 가난한 이들을 보면서 불쌍히 여기셨다고 말하는데, 이는 "장이 끊어질 것처럼 고통스럽다"라는 뜻을 가진 '스플랑크니조마이'를 옮긴 것이다. 로마제국, 로마제국의 간접통치자인 헤로데 왕실, 예루살렘 성전 제사장 세력들의 수탈 때문에 굶주리는 불쌍한 민중들의 처지를 헤아리면서 예수는 무척 마음이 쓰렸던 것으로 의미된다.

    유사한 기적

    빵과 물고기를 취하여 군중을 먹인 다른 유사한 기적으로서 4,000명의 군중을 먹이신 기적이 있으며 다음 복음서들에 있으며 루가복음과 요한복음에는 없다.

    • 마르코복음 8장 1~9절
    • 마태오복음 15장 32~39절

    이 기적에서 예수는 군중에게 빵 일곱 개와 작은 물고기 몇 마리를 취하여 군중을 먹이는 기적을 보이셨다.[3]

    각주

  2. 한자적인 해석 그 자체로는 빵(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이지만, 당시에는 실제로 빵과 물고기가 쓰였다.
  3. John Clowes, 1817, The Miracles of Jesus Christ published by J. Gleave, Manchester, UK, page 109
  4. John Clowes, 1817, The Miracles of Jesus Christ published by J. Gleave, Manchester, UK, page 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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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프스 트라이얼(A. Scopes Trial)
하나의 기적을 믿으면 또 하나의 기적을 믿기도 쉽다.

성경은 예수님이 행하신 놀라운 기적들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오병이어의 기적이다.
이 기적은 마태복음 14:13∼21, 누가복음 9:10∼17, 요한복음 6:1∼13 등 4복음서에 모두 기록이 될 정도로 복음서의 저자들이 아주 중요하게 다룬 사건이다.

떡은 아주 어린아이의 한 끼 식량이고, 놀랍게도 그 어린아이는 그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자기의 도시락을 예수님께 드렸다. 기적은 여기서부터 시작이 되었다. 이 아이가 예수님께 드린 보리떡은 히브리어로 ‘마슈나’다. 이 떡은 일반적으로 사람이 아닌 짐승이 먹는 것이었다. 그리고 두 마리의 물고기를 드렸는데 이 고기는 ‘이크수스’다. 갈릴리 호수에서 어부들은 잡은 고기를 추려서 큰 고기는 집으로 가져가고 너무 작아서 먹을 수 없는 것은 해변에 버리는데 그 고기가 바로 ‘이크수스’다. 이 아이가 드린 물고기는 바로 ‘이크수스’다. 떡 중에 가장 하급의 떡 ‘마슈나’, 물고기 중에 너무 작은 물고기 ‘이크수스’였다.

아마 어린아이가 예수님을 따라가서 말씀을 듣겠다고 하니까 부모가 해변에 다니며 버린 고기를 주워다가 도시락을 싸 주었는지 모르겠다. 그것을 아이는 예수님께 드렸다. 그것이 5천명을 배부르게 먹게 하고 열두 광주리가 남았다. 가장 작은 것으로부터 가장 큰 기적이 일어났다. 

헌신이 기적

예수님께 드리는 헌신 위에 하나님의 기적이 임했다. 예수님 앞에 소년의 정성으로 1인분의 도시락이지만, 그것을 드렸을 때 많은 생명에게 유익하게 쓰였다. 우리에게 무엇이 있는가? 크고 작고, 많고 적고의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에게 무엇이든지 드리기만 하면 가장 유익하고, 가치 있게 사용된다. 예수님께 드리는 작은 헌신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한 사람의 헌신을 통해서 위대한 일을 이루실 수 있다. 보리떡 다섯 개, 생선 두 마리가 주님의 손에 들어갔을 때 그것은 5천명을 먹이고도 남았다. 무슨 뜻인가? 작지만, 보잘것없지만 예수님께 온전히 헌신하면 이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문제는 내가 온전히 헌신하는 데 있다. 자기의 것을 모두 주님께 드리는 데 있다. 그러면 결국 자기도 살고 다른 사람도 사는 것이다.

자기의 희생과 봉사가 없이 다른 사람을 구할 수 없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나 보고 기대하기 전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찾고 생각해 보아야 한다. 아이는 특별한 것을 드린 것이 아니다. 그저 자기가 가지고 있던 것을 드린 것 뿐이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이 무슨 특별한 것이 아니다. 그저 우리에게 있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드리는 것을 요구하신다. 시간, 달란트, 지식, 물질, 무엇이든지 있는 그대로를 온전히 드리면 된다. 주님을 위하여 드릴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는가? 내게 주신 물질이 있는가? 하나님이 내게 주신 물질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시기를 바란다.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땀 흘리게 하셨고 그 대가로 내게 주신 물질들을 귀하게 사용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시기를 바란다. 나를 위해서도 선용해야 하지만, 특별히 ‘하나님께서 지금 원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갖고 있는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을 하자.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날 것이다. 내게 무슨 재능이 있는가? 그 재능을 주님을 위하여 ‘필요하시다’ 할 때에 드리자. 미미한 재능이지만 하나님은 크게 사용하셔서 많은 사람들에게 크게 유익을 주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오병 이어의 기적에는 헌신이 있었다. 좋은 것은 아니지만 있는 그대로 주님 앞에 드렸다. 그냥 믿고 드릴 때 기적이 임한다.

감사가 기적

오병이어의 기적에는 감사가 있었다.
감사할 때 기적이 일어났다.
기적은 적은 것이라도 하나님을 향해 감사할 때 일어난다.

마가복음 6:41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시매. 

예수님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하늘을 우러러 보시며 감사기도를 드렸다.
어떻게 보면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늘을 우러러 감사기도를 드리셨다.

이 때에 기적이 일어났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감사로부터 시작되었다.
지금 우리의 생활이 길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는가?
생활이 온갖 흑암과 공허와 환난이 나를 둘러싸고 있는가?
그로 인하여 삶이 답답한 환경에서 몸부림치고 있는가?
그럴수록 하늘을 향해 감사하기 바란다.
그러면 기적이 일어난다.
감사와 불평은 자신에게 달려 있다.
하지만 감사할 조건이 수두룩해도 감사하지 않는다.
그렇게 불평만 하면 계속 불평할 일만 생긴다.
그러나 원망스럽고 괴로워도 감사하기 시작하면 감사의 조건이 얼마든지 생기게 된다.

마태복음 25: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있는 것 까지도 빼앗기리라.

지금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하나님을 향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 감사 위에 하나님의 기적적인 축복이 임할 것이다.

순종이 기적

오병이어의 기적에는 믿고 따르는 순종이 있었다.
어린 소년의 순종이 있었다.
제자들의 찾음에 자신이 갖고 있었던 것을 예수님께 드리는 순종이 있었다.
기적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리고 제자들의 믿음의 순종이 귀했다.

마가복음 6:39-40
제자들에게 명하사 그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시니 떼로 백 명씩 또는 오십 명씩 앉은지라.

주님은 제자들에게 명령하셨다.
제자들로 하여금 사람들이 제대로 무리를 지어 앉도록 질서를 위해서 잘 정리시키셨다.

어떤 제자들은 어떻게 처리할까 두려워했을지 모른다.
‘도대체 어떻게 하시려고 할까?’ 하는 의아심이나 궁금함 말이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이 무엇인가를 하실 것을 믿었다.
엄청난 일을 이루실 줄로 믿고, 그들은 그 일을 순종하여 자신들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다.
하나님은 이런 바탕 위에서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신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작은 헌신과 믿음의 순종을 기다리신다.
시도하는 사람을 통해 축복의 역사가 일어난다.
희생하는 사람을 통해 축복의 역사가 일어난다.
주님의 축복을 통해 축복의 역사가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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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성에 '바늘 귀'는 실재했을까?



예루살렘 성에 '바늘 귀'는 실재했을까?


예수가 살던 시대의 예루살렘 성에 '바늘 귀'라 불리는 성문이 실재했을 것이라는 생각은 아주 오랜 전부터 있어 왔다.
다른 성문보다 매우 작기에 '바늘 귀'라 불린 암문(혹은 개구멍)이 존재했으리라는 생각은 사실 그럴싸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에 덧붙여진 말들도 그럴듯했으니, 그 문의 크기는 사람은 여하히 통과할 수 있지만 낙타의 경우는 짊어진 물건을 모두 내려놓고 알몸뚱이가 되어야만 겨우 통과할 수 있는 정도라는 것이었다.
만일 그렇다면 이 말은 앞에서 인용한 마태복음의 문장을 쉽게 이해시킬 수 있다.
그 문장 다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제자들이 듣고 몹시 놀라 이르되,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마태복음 19: 23-25)*

 * 이 문장은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도 실려 있는데, 내용은 거의 같다.

아울러 이렇게 보면 위 예수의 말은 매우 설득력 있는 주문이 된다.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으나 재물에 대한 욕심으로 가기가 힘들니 그 욕심을 모두 내려놓으라는 말이 성립되기 때문이다.(부자를 폄훼하는 것은 아니지만, 9원을 가진 자가 10원을 채우기 위해 가난한 자의 1원을 뺏는다는 인식은 동서가 비슷하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하면 이것은 어불성설이며 본말 또한 전도돼 있다.

'바늘 귀'는 통과할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그 욕심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예수가 강조하고자 한 것은 낙타의 통과 여부가 아니라 그 낙타에 실린 재물이었을 터, 하지만 그림에서 보다시피 부자는 자신의 욕심을 버리지 않는다.
그저 짐을 잠시 내려놓았다 다시 싣는 수고가 뒤따랐을 뿐이다.
예수가 원한 것은 분명 이런 형태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문의 통과 주체는 사람이지 낙타가 아니다.
사람이 욕심을 버리는 게 중요하지 낙타 등 위의 수하물을 내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런 의미를 몰랐는지, 아니면 알고도 모른 척 밀어붙인 것인지 역대로 천국을 갈망하는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벽에서 아래와 같은 '바늘 귀'들을 찾아냈다. 물론 역사적 근거는 없는 것들이다.(굳이 장소를 명시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오해

성경이 기록된 사건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은, 막연히 성경의 내용을 상상하는 것과는 분명 큰 차이가 많다. 이스라엘에서 성경 현장학습을 인도하면서, 자주 받는 질문들과 오해들이 있는데, 그 중에 몇 가지를 간추려 여기에 소개한다.

바늘 귀 (the eye of a needle)

마태복음 19:24절에 예수님은 “낙타가 바늘 귀(the eye of a needle)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는 말씀을 하셨다. 여기에서 성전으로 들어가는 여러 문 가운데 ‘바늘 귀’라는 문이 있다는데 그 문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을 받고 한다.

그런 문은 없다. ‘바늘 귀’ 문은 예전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다. 일부 설교자들은 ‘바늘 귀’ 문을 말하면서, 낙타가 성전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지고 있던 모든 짐을 내리고 무릎을 꿇어야만 들어가는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모든 짐을 내리고, 겸손하게 무릎을 꿇어야만 들어갈 수 있다고 설교한다고 한다.

예수님 당시 헤롯 성전 뜰로 들어가는 몇 개의 문이 있었으며, 지금도 그 문의 흔적은 찾을 수 있다. 남쪽에서 성전 뜰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은 훌다 문(the gate of Hulda)이 있다. 훌다 문은 삼중 문(triple gate-위의 사진)과 이중 문(double gate)을 가리킨다. 삼중 문은 성전 남쪽의 동쪽에 있었는데, 주로 입구로 이용되었고, 이중 문은 성전 남쪽의 서쪽에 있었는데, 출구 또는 상을 당한 가족의 성전 입구로 이용되었다.

서쪽에서 성전 뜰로 들어가는 두 개의 통로인 로빈슨 아치(Robinson’s arch- 아래 사진)와 윌슨 아치(Wilson’s arch-사진)가 있었다. 윌슨 아치는 성전과 예루살렘의 서쪽 언덕에 위치한 헤롯 궁, 대제사장의 주거지, 상위 계층의 생활 근거지를 서로 연결했던 통로로써 왕, 대제사장 및 상위 계층이 주로 이용했던 통로였다.

그리고 북쪽 베데스다 연못 근처에서 성전 뜰로 들어가는 문이 있었는데, 이 문은 요한복음 5:2절에 양문(Sheep gate)으로 기록되었다. 성경 어디에도 ‘바늘 귀’ 문은 없다. ‘바늘 귀’ 문은 15세기 이후부터 설교자들을 통해 강단에서 선포되어 온 대표적인 허구에 속한다. ‘바늘 귀 문’은 없다고 이야기해 주어도 여전히 반신반의한다.

대제사장 발목에 맸다는 끈

유대 월력으로 일곱 번째 달, 제 십 일은 대속죄일 (욤 키푸르)이다. 이 날은 대제사장이 자신의 죄와 백성들의 죄를 사하기 위하여 속죄 의식을 행하는 날이다 (레 23:27-32). 대제사장이 속죄 의식을 위하여 지성소로 들어갈 때, 그의 발목에 끈을 맸다는데, 끈을 맨 이유는 대제사장이 죽으면 끌어내기 위한 것이라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히브리어 성경, 신약 성경, 사해 문서, 요세푸스의 기록, 교부들의 기록, 미쉬나, 탈무드 어디에도 대제사장의 발목에 끈을 맸다는 기록은 없다.

이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13세기 유대인 조하르(Zohar)의 기록에서 찾아볼 뿐이다. 조하르는 이렇게 말하였다. “대제사장의 발목에 금으로 된 줄을 묶어 두었는데, 이는 그가 지성소에서 죽었을 경우, 그를 끌어내기 위한 것이다.” 조하르는 그리 신뢰할 유대 학자가 아니다. 발목에 끈을 맸다는 것은, 레위기 16:3-4절에 기록된 지성소로 들어가는 대제사장의 예복에 위반될 수 있다: 아론이 성소로 들어오려면 수송아지로 속죄 제물을 삼고 수양으로 번제물을 삼고 거룩한 세마포 속옷을 입으며 세마포 고의를 살에 입고 세마포 띠를 띠며 세마포 관을 쓸지니 이것들은 거룩한 옷이라 물로 몸을 씻고 입을 것이며. 일부 기독교 학자들은 출애굽기 28:35절 과 히브리서 9:7절 을 주석하면서 조하르의 글을 인용하기도 한다. 특히 히브리서 9:7절에서 요한 길(John Gill)은 조하르의 글을 소개하며 이렇게 주석하였다: “유대인들은 말하기를, 대제사장이 지성소로 들어갈 때, 그의 발에 끈이나 가죽 띠를 묶어 두었는데, 이는 대제사장이 지성소에서 사망하게 되면, 그를 끌어내기 위함이다. 다른 제사장이 지성소로 들어가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었기 때문에 대제사장이 죽으면 누구도 대제사장의 속죄 의식을 대신할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하르나 요한 길이 말하는 대제사장의 발목에 끈을 맸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이것 역시 설교자들의 대표적인 허구에 속한다.

만약 대제사장이 속죄 의식을 행하다 지성소에서 죽는 일이 발생하면 대제사장의 직무를 대신할 제사장은 있었다. 누가복음 1:8절의 세례 요한의 부친 사가랴는 ‘그 반열의 차례대로 제사장의 직무를 하나님 앞에 행할 쌔 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제비를 뽑아 주의 성소에 들어가고’라는 말씀이 있다. 만약 지성소에서 대제사장이 죽으면, 그의 발목에 맨 끈을 당기므로 시신을 끌어낸 것이 아니라 대제사장의 직무를 대행할 사람이 지성소로 들어가 대제사장의 시신을 끌어내는 것이다. 허구는 또 다른 허구를 만들어 낸다. 그러면,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이상해 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인 YHWH를 기록하는 서기관

성경의 소중한 사본이 대량으로 발견된 쿰란 유적지를 여행할 때, 간혹 서기관들에 대한 질문을 받곤 한다. 서기관들이 성경을 필사하면서, 하나님의 이름 YHWH을 기록할 때마다 붓을 꺾어 버리고 새로운 펜을 사용하였으며, 온 몸을 정결케 하는 정결 의식 또는 손을 씻은 후에 기록했다는 말이 있는데, 사실인가라는 질문을 받는다. 이것 역시 사실이 아니다. 유대인들의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드러내기 위하여 서기관들의 열심을 강조한 말이기는 하지만, 붓을 버리고 새 붓을 사용했다거나 목욕을 한 후에 다시 기록하기 시작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서기관(sofer)을 뜻하는 히브리어는 소페르이다. 소페르는 세다(count)를 뜻하는 사파르(safar)에서 온 단어이다. 서기관이란 말은, 서기관이 성경을 필사할 때, 자신이 기록한 단어를 정확하게 셌던 것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한다. 서기관이 사본의 글자 수를 세었던 것은, 사본의 원본 글자 수와 자신이 기록한 글자 수를 세므로 정확하게 기록했는지를 판단했기 때문이다.

▲기브온.
기브온 위에 멈췄던 태양

기브온(사진)은 예루살렘 다윗성에서 북서쪽 약 5-6마일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솔로몬의 일천 번제에 대한 배경과 여호수아 10장에 기록된 이스라엘 백성들과 아모리 족속들 간의 전쟁에 대한 배경을 살펴 보면서 여호수아의 기도를 묵상할 때가 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신 때가 이렇게까지 없었는데, 당일 여호수아의 기도는 이랬다: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할 찌어다 (수 10:12). 일부 목회자들은 여호수아의 태양이 멈추게 된 기도와 열왕기하 20:10-11절에 기록된 히스기야의 기도로 해가 10도 뒤로 물러간 배경을 이야기하면서, 나사(NASA) 과학자들이 잃어버린 하루를 찾았다고 말하는데 그것이 사실이냐고 묻는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강조하고 싶을 지라도, 나사(NASA) 과학자들이 잃어버린 하루를 찾았다는 잘못된 정보를 인용해 가며 하나님의 능력을 강조하는 것은 옳지 않다. 성경에서 잃어버린 하루를 찾기 위한 노력은 NASA가 존재하기 이전에도 있었다.

그러나 본문에서 이것은 생각해 볼 수 있다. ‘태양은 기브온 위에, 달은 아얄론 골짜기 위에 머무르라’는 여호수아의 기도에서, 기브온은 아얄론 골짜기의 동쪽에 있다. 다시 말하면, 기브온은 태양이 뜨는 동쪽에, 그리고 아얄론 골짜기는 태양이 지는 서쪽에 있다. 그리고 태양과 달은 하늘에 같이 떠 있었는데, 이런 일이 일어날 시간은 점심 때도 저녁 때도 아닌 아침 시간이다. 여호수아는 이른 아침에 태양이 여전히 기브온 위에 있고, 달은 서쪽 아얄론 골짜기에 있을 때에 아모리 족속들과 전쟁을 시작하면서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하였다.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할 찌어다 (수 10:12).



영의 눈을 열어주소서



열왕기하 6:8-17

8 시리아 왕이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고 있던 무렵이다. 그가 신하들과 은밀하게 의논하며 이러이러한 곳에 진을 치자고 말하였다.
9 그러자 하나님의 사람이 이스라엘 왕에게 사람을 보내어, 시리아 사람들이 거기에 진을 칠 곳이 이러이러한 지역이니, 그 곳으로 지나가는 것은 삼가라고 말하였다.
10 이러한 전갈을 받은 이스라엘 왕은, 하나님의 사람이 자신에게 말한 그 곳에 사람을 보내어, 그 곳을 엄하게 경계하도록 하였다. 그와 같이 경계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11 이 일 때문에 시리아 왕은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신하들을 불러모아 추궁하였다. “우리 가운데서 이스라엘 왕과 내통하는 자가 없고서야,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이냐?”
12 신하 가운데서 한 사람이 말하였다. “높으신 임금님,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에는 엘리사라는 예언자가 있어서, 임금님께서 침실에서 은밀히 하시는 말씀까지도 다 알아서, 일일이 이스라엘 왕에게 알려 줍니다.”
13 시리아 왕이 말하였다. “그가 어디에 있는지, 가서 찾아보아라. 내가 사람을 보내어 그를 붙잡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그 예언자가 도단에 있다고 왕에게 보고하였다.
14 왕은 곧 그 곳에 기마와 병거와 중무장한 강한 군대를 보내어서 밤을 틈타 그 성읍을 포위하였다.
15 하나님의 사람의 시종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 보니, 강한 군대가 말과 병거로 성읍을 포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시종이 엘리사에게 와서 이 사실을 알리면서 걱정하였다. “큰일이 났습니다. 선생님,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16 엘리사가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그들의 편에 있는 사람보다는 우리의 편에 있는 사람이 더 많다.”
17 그렇게 말한 다음에 엘리사는 기도를 드렸다. “주님, 간구하오니, 저 시종의 눈을 열어 주셔서, 볼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그러자 주님께서 그 시종의 눈을 열어 주셨다. 그가 바라보니, 온 언덕에는 불 말과 불 수레가 가득하여, 엘리사를 두루 에워싸고 있었다.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고 문제와 어려움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문제들과 위기를 만나지만 그 문제들과 위기를 바라보는 시각이 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기 전에는 그런 문제와 위기와 어려움을 만나면 두려워하고, 염려하고, 걱정하며 절망하지만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지고 영적인 눈이 열려 믿음의 눈으로 문제와 위기, 어려움을 보면 더 이상 두려움과 근심 걱정으로 흔들리지 않고 담대함으로 감당해 나가게 됩니다.

그런 믿음의 모습, 믿음의 눈을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사람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본문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을 침략하려는 계략을 미리 알아 방어하게 하는 엘리사 선지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아람(시리아) 왕이 엘리사를 죽이기 위해 기마와 병거로 중무장한 강한 군대를 보내어 엘리사가 사는 성읍을 겹겹이 포위합니다.

14절입니다. “왕은 곧 그 곳에 기마와 병거와 중무장한 강한 군대를 보내어서, 밤을 틈타 그 성읍을 포위하였다”

아침에 일어나 그 상황을 본 엘리사의 시종은 15절에 이젠 꼼짝없이 죽게 되었다고 두려워하며 엘리사에게 그 상황을 전합니다.
“큰일이 났습니다. 선생님,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그런데 똑같은 상황을 본 엘리사는 16절에 “두려워하지 말아라. 그들의 편에 있는 사람보다는 우리의 편에 있는 사람이 더 많다” 라고 시종을 안정시킵니다.

이 두 사람이 똑같은 상황을 보고 전혀 다른 말과 태도를 보인 이유는 엘리사의 사환은 육의 눈으로 앞에 보이는 위기만 보았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아람(시리아) 나라의 병거들과 창검들과 포위하고 있는 군사들만 본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영의 눈으로 자신을 보호하고 있는 하나님의 불 말과 불 병거를 타고 하늘의 군대를 본 것입니다.
17절 “그가 바라보니 온 언덕에 불 말과 불 수레가 가득하여 엘리사를 두루 에워싸고 있었다”

우리가 문제 속에서, 풍랑 속에서 담대할 수 있고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은 바로 이 영적인 눈이 열려야 합니다.
언제 이런 영적인 눈은 기도할 때 열립니다.
17절 “그렇게 말한 다음에 엘리사는 기도를 드렸다. 주님 간구하오니 저 시종의 눈을 열어 주셔서 볼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그러자 주님께서 그 시종의 눈을 열어 주셨다”기도할 때 눈이 열렸습니다.
영적인 눈이 열리자 시종은 시리아 군대와는 비교할 수 없는 엘리사가 본 불 말과 불 병거를 거느린 하나님의 군대를 시종도 보았습니다. 성읍을 둘러싼 시리아 군대를 보고 기겁하여 이제 죽었다고, 큰일이 났다고 두려워하고 걱정하던 시종이 영적인 눈이 열려 하나님의 군대를 본 후에 시리아 군대가 눈앞에 있고 포위를 하고 있는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문제가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자녀 된 우리에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염려하지 말라 라고 얼마나 많이 말씀하고 계십니까?
신앙의 눈이 열려야 합니다.
영적인 눈이 열려야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해야 할 기도는 “하나님, 나에게 영적인 눈을 열어 주시옵소서”
“믿음의 눈으로 문제와 상황을 볼 수 있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도우시는 능력의 손길을 보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영적인 눈이 열리면 하나님의 위대하심, 전능하심, 사랑하심을 보게 되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자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상속, 하늘의 상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보게 됩니다. 그래야 어떠한 상황에서도 두려움으로 인간적이고 불신앙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영적인 눈이 열려 이 땅과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한 천국이 보이고 끔찍한 죄의 심판이 있는 지옥이 보일 때 복음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볼 수 있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큰 그림을 볼 수 있을 때 인내함, 담대함, 순종함, 기뻐함, 희생함을 감당할 수 있는 참된 믿음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두려움과 걱정 근심, 분노와 짜증, 답답함이 내 안에 있습니까?
영적인 눈이 닫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보이지 않고 문제만 보일 때 불안과 두려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엘리사의 기도처럼 신앙의 눈으로 모든 상황을 담대함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내 눈을 열어 보게 하소서(시편 119:17-24)

17. 주의 종을 후대하여 살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주의 말씀을 지키리이다
18.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
19. 나는 땅에서 객이 되었사오니 주의 계명을 내게 숨기지 마소서
20. 주의 규례를 항상 사모함으로 내 마음이 상하나이다
21. 교만하여 저주를 받으며 주의 계명에서 떠나는 자를 주께서 꾸짖으셨나이다
22. 내가 주의 증거를 지켰사오니 훼방과 멸시를 내게서 떠나게 하소서
23. 방백들도 앉아 나를 훼방하였사오나 주의 종은 주의 율례를 묵상하였나이다
24. 주의 증거는 나의 즐거움이요 나의 모사니이다 

성경을 수 백번 읽은 어느 권사님께서 성경을 읽어도 도대체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다고 안타까워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다른 책을 그만큼 읽었으면 내용의 거의 암기할 수 있었을텐데 도대체 읽을 때마다 새롭다고 합니다.

성경을 읽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그 내용이 처음부터 하나님에게 속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지혜에 속한 광대한 진리요, 깊은 진리요, 놀라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 내용이 크고 깊기 때문에, 인간의 지혜와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는 겁니다.
완전히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그렇다고 똑똑한 사람은 이해할 수 있고 무식한 사람은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런 방식으로 어렵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이기 때문에 인간의 지혜로는 이해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라고 말했습니다(요 6:60).
그 때 예수님께서는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요 6:61, 63).

성경이 가르치는 바는 우리가 스스로 알 수 없는 구원의 지식이요 신령한 지식입니다.
우리의 이 육신의 눈과 이성의 빛만으로는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말씀을 읽고 이해할 수 있으려면 먼저 하나님이 우리 눈을 밝혀주시고 우리 눈을 열어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읽기는 읽어도 이해하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눈을 열어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 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말씀을 읽고 깨달을 수 없다

시편 119편의 기자는 이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상당한 식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진 신학자이며, 경건한 사람이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이 정도의 수준에 이른 사람이라면 그는 언제든지 자신이 말씀을 열어 읽기만 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통달할 것으로 생각하기 쉬울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말하기를,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고 간구하였습니다. 단순히 거듭난 사람이라고 해서 척척 알아지고 다 깨달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내용들을 조금 알고 있다고 해서 말씀에 감추인 모든 기이한 것들을 볼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계속 해서 ‘내 눈을 열어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 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참으로 고귀한 것이지마는, 이 말씀을 읽을 때에 얼마든지 읽기만 하고 깨닫지는 못한 채 지낼 수 있습니다. 그러면 헛일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 눈에서 비늘이 벗겨지게 하시기 전에는 우리는 본질상 하나님께 속한 일들에 대하여 눈이 멀어 있다”(시편 119편 설교 중에서). 약간의 빛을 받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여전히 더욱 많은 빛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눈을 활짝 열어주실 때에 우리가 이전에 보지 못했던 더 크고 놀라운 것들을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진리는 영적 진리이기 때문에 육신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죄로 인해 우리의 마음이 어두워졌고, 우리의 눈이 어두워졌고, 우리의 영적 이해력이 깨어지고 말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새로운 생명을 주시고, 새로운 생명에 걸맞은 영적 시력과 하나님의 지혜를 이해할 수 있는 정신을 하나님이 회복시켜 주시기 전에는 안 됩니다. 

우리의 눈을 열어주시고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빛을 주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 16:13). 영적인 것은 영적인 것으로라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소경에 불과합니다.

내 눈을 열어주소서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면서 살 수 있으려면, 먼저 눈이 열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볼 수 있는 눈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제 성경이 이토록 고귀한 말씀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우리의 기도는 이제 ‘하나님, 이 성경 말씀을 읽을 수 있도록, 정말 그 뜻을 하나하나 바로 알고 늘 우리 마음에 새기고, 그 말씀의 인도와 보호를 받으면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복된 길을 늘 잘 걸어갈 수 있도록, 제 눈을 열어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으려고 하기 전에, 말씀을 묵상할 때에, 설교를 준비하거나 설교를 하거나 들으려고 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지혜와 지식으로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없으므로, 우리는 성경을 읽거나 설교를 들을 때마다, ‘주여, 제가 읽고 있는 이 말씀을 좀 더 잘 깨달을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저를 이 말씀으로 가르쳐 주시옵소서’ 하고 전심으로 기도합시다. 조지 휫필드는 그의 일기에서, “나는 가능하면 한 절이나 한 단어를 읽을 때마다 기도했다. 말씀은 참으로 내 영혼에 고기요 음료였다. 매일 위로부터 새로운 생명과 빛과 능력을 공급받았다.”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그래야 이 복된 말씀이 우리에게도 복된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기도와 갈망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영광스럽고 놀랍고 기이한 것을 좀 더 보고자 하고 알고자 하는 소원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기이한 것들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하나님의 법의 기이한 것들로 가득합니다. 하나님에 관한 진리와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람이 죄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으며, 그가 어떻게 십자가에서 단번에 드리신 제사로 우리 죗값을 치르신 것과, 그 그리스도와 우리가 어떻게 믿음으로 연합하여 죄사함을 받을 수 있는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는 주의 법의 기이한 것으로 가득합니다. 이 모든 것들은 성령으로가 아니면 깨달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법의 기이한 것을 바로 알지 못하고는 진리를 알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은 우리 눈이 열려서 성경의 말씀을 읽고 깨달을 때에만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와 같이 매일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주의 종인 저에게 주의 은혜를 거두지 마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저는 주의 종이오니, 제 생명을 붙들어주셔서, 제가 사는 동안에 은혜를 주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우리가 사는 동안 하나님의 선하신 은혜 아래 거하면서 살게 해주시고, 우리 눈을 열어주셔서, 사는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밝히 보고 잘 깨달아 알아서, 사는 동안 그 말씀을 지키면서 살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탈무드의 이야기

어느 젊은이가 유명한 랍비를 찾아와서 "만일 나에게 하나님을 보여주신다면 나는 당장 하나님을 믿겠습니다"
이렇게 간청했습니다.
랍비는 그 젊은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온 후에 높은 하늘에서 빛나는 태양을 가리키며 "저 태양을 두 눈으로 똑똑히 쳐다보시오"
그러자 젊은이는 "아니, 저렇게 빛나는 태양을 어떻게 두 눈을 뜨고 쳐다볼 수 있습니까?"
이때 랍비는 젊은이에게 "이보게 젊은이 하나님의 만드신 저 태양도 쳐다볼 수 없으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보겠다고 하는가?"
랍비는 젊은이의 교만과 어리석음을 깨우쳤다고 합니다.

제가 그 젊은이와 같은 생각을 가졌던 때가 있었습니다.
모태 신앙으로 태어나서 태어나기 전에 아들이면 하나님께 바쳐서 목회자로 세우라고 부모님들의 서원에 의해서 일찍부터 목회자가 되어야 한다는 신앙의 분위기 가운데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젊은 혈기가 왕성하던 때 문득 "정말 하나님이 계시다면 한 번 만나달라고 떼를 쓰며 삼각산 승리기도원에서 삼일을 금식하며 기도할 때 마지막 삼일이 되던 날에 갑자기 나를 지배하는 생각은 '나와 같은 더럽고 추한 죄인이 어찌 거룩하고 존귀한 하나님을 보겠다고 하느냐?' 이런 마음을 갖게 되어 그 밤에 많이 울었습니다.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아침을 맞이할 때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신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영의 눈이 열리는 것일고 하겠습니다.
영의 눈이 열리지 않으면 일생동안 아니 몇 대째 예수를 믿어도 그것은 종교생활에 익숙한 것입니다.
영적 생활의 즐거움을 누리려면 반드시 영의 눈을 열어야 합니다.

어떻게 영의 눈을 열 수 있을까요?

첫째,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육신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일상생활에서 늘 부딪치는 문제들입니다.
이러한 부딪침 때문에 더 좋은 것, 더 맛있는 것, 더 멋있는 것을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이란 우선순위가 중요합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생각해야 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물질이 육신이 먼저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6:19~22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눈을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은 몸의 등불이라고 하셨습니다.
세상 물질만 사랑하고 욕심으로 가득찬 사람은 미래를 볼 줄 모르고 영안이 밝을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선입견이나 교만, 증오심을 버려야 마음의 눈이 밝아집니다.

선입견은 마치 색안경과 같습니다.
파란 안경을 쓰면 파랗게 보이고 빨간 안경을 쓰면 빨갛게 보이는 것처럼, 마음 속에 이미 들어와 있는 다른 사상이나 자기 나름의 어떤 철학 사상이 틀어 박혀 있으면 그것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바로 보고 영안이 열리기 위해서는 선입견도 교만과 증오심도 버려야 합니다.

둘째, 회개하고 거듭나야 합니다.

우선순위가 결정된 후에는 우선순위를 항상 유지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춰야 합니다.
이 조건을 갖추지 못하면 또다시 예전의 생활을 그리워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전에 좋던 것 이제는 값없다!
이렇게 찬송을 부르기 위해서 항상 회개하고 거듭난 상태를 유지해야 합니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하고 박사 학위를 많이 가졌다 할지라도 회개하고 그 영혼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을 바로 볼 수가 없습니다.

마태복음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봅니다.
죄가 마음에 가득한 사람은 아무리 똑똑해도 아무리 일류 학교를 나왔어도 바로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예수의 피로 죄사함 받고 거듭나게 될 때에 영의 눈이 밝아져서 바로 볼 수가 있습니다.

셋째, 바른 자리에 서야 합니다.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높은 데 올라가야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맑은 날 산꼭대기에 올라가면 온 시내를 멀리까지 다 볼 수 있는 것 같이, 심령이 맑고 죄악의 구름과 안개가 다 벗겨져 나가야 다른 사람이 능히 볼 수 없는 것을 멀리 바라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바른 자리가 어디 일까요?
산에 올라가야 합니까?
높은 건물에 올라가야 합니까?

마태복음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넷째, 성령님의 도움으로 보아야 합니다.

사도행전 19:2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믿음이란 눈에 안 보이지만 보이는 것과 똑같이 생각하고 나가는 것입니다.
지금 눈앞에 안나타났지만 바라는 것들의 실상을 보는 것 같이 믿고 나가는 것입니다.

"저의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 하는 이것이 우리의 진정한 기도가 되어야합니다.

에베소서 1:18~19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하나님 안에서 나를 새롭게 하고 새로운 눈으로 바라봐야 되겠습니다.
주님은 우리 마음의 눈을 밝히사 마음의 신령한 눈을 떠서 더 근본적이고 신비한 것을 알아가게 하십니다.
영안이 열리면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부르심의 소망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미래에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소망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님 안에서 나를 부르시는 소망이 무엇인지 알면 행복해 집니다.

"하나님이 나를 왜 세상에 보내셨나? 나를 왜 자녀 삼아 주셨나? 그리고 지금 내게 바라시는 소망이 무엇인가?" 여기에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를 부르신 분명한 목적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시고, 하나님 나라에 참여할 수 있게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소망을 갖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낙심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나에 대해서 소망을 갖고 계시는데 내가 나에 대해서 절망하는 것은 죄입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큰 능력 안에서 죄와 죽음을 이기고, 근심과 염려를 이기고, 영적전쟁에서 승리할수있는 큰 능력을 주님이 주셨습니다.
영안이 열리어 주님이 이미 주신 능력을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스런 자녀로 소망을 갖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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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眼)


1. 육안(肉眼)

불교(佛敎)에서 이르는 오안(五眼)의 하나.
육신(肉身)에 갖춰진 안구(眼球)
안경(眼鏡)을 쓰지 않은 천생(天生)의 시력(視力). 맨눈
눈으로 보는 표면적(表面的)인 안식(眼識).

2. 심안(心眼)

마음속으로 사물(事物)을 꿰뚫어 보는 힘. 또는 그 작용(作用).

3. 영안(靈眼)

신령한 세계를 볼 수 있는 눈

눈은 신체의 한 부분일 뿐이지만 육체의 눈이 밝고 어두움에 따라 온 몸이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눈은 몸의 등불이라고 한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성하다(마태복음 6:22-23)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하와가 선악과나무를 “보암직하고”(창세기 3:6)
“보암직하고”란 ‘눈이 추구하는’ 뜻이다.
즉, 욕망을 가지고 대상을 바라보았다는 뜻이다.

“眼目의 情慾”에서 “정욕(epithumia)”은 사물에 대한 탐욕을 뜻한다.
의지의 모든 결정, 그리고 심지어 가장 좋고 가장 숭고한 인간의 감정과 능력들까지도 이 탐욕의 포로가 된다.
하와의 눈이 밝아 진 것은 금지된 것을 탐욕스런 눈초리로 보게 되었다는 뜻이다.

아무리 훌륭한 자질을 지녔다 해도 시각과 청각을 마음대로 사용한다면, 심령이 왜곡되게 마련이다.
육신의 눈과 영의 눈은 따로 분리된 것이 아니다.
상호 긴밀한 관계에 있다.
인간은 “바라봄으로 변화된다.
바라보는 대상과 그 내용에 따라 인품은 꼴 지어진다.
그래서 관상학에서 몸은 1천 냥, 눈은 900냥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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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눈을 열어주소서(열왕기하 6:14-19)

눈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육신의 눈
둘째, 지식의 눈
셋째, 영적인 눈

기독교인들의 관심은 영적인 눈이 열리는 것이다.

엘리사 선지자 시대에 아람 나라는 강대국이 자주 이스라엘 지경을 침범해 오고는 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아람의 침략은 패배로 돌아갔습니다.
그것은 사전에 정보가 누설되어 이스라엘 편에서 벌써 침략할 루트를 알고 사전에 차단하고 있거나 군사를 매복하고 있음으로 번번이 패전으로 끝났던 것입니다.
 
아람 왕은 대단히 화가 나서 말하기를 ‘분명, 우리 편 중에 스파이가 있어서 적과 내통하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당장에 그 스파이를 찾아내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그러자 어느 신하가 말하기를 ‘왕이여.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에는 엘리사라는 선지자가 있어서 우리 나라의 모든 것을 손바닥 보듯이 다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왕이 침실에서 한 이야기라도 다 알고 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다시 말하면, 엘리사의 영적 레이더에 다 걸리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보고를 받은 왕은 기가 막힙니다.
아무리 국가의 1급 비밀이라도 환히 들여다보고 있는 한 결코 전쟁에 승리할 수 없는 줄 알고 왕은 우선 엘리사라는 선지자를 체포하리라고 결심을 하고 막강한 군사를 엘리사가 있는 도단이라는 작은 성으로 보내서 한 밤 중에 감쪽같이 몇 겹으로 포위를 했습니다.
마침내 아침이 훤히 밝았습니다.
선지자의 종이 아침 일찍이 일어나 하품을 하며 무심코 성 아래를 보다가 기절초풍을 했습니다.
 
아람나라의 군대가 성을 몇 겹으로 포위한 채, 무시무시한 창검을 번뜩이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종은 허겁지겁 주인 엘리사에게 쫓아와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지금 아람 군대가 우리를 포위하고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화급하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조금도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고 ‘두려워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저희와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지금 종의 눈에는 자기 나라 군대는 성을 지키는 몇 백명의 중대 병력이나 있을까, 가장 막강한 아람 군대의 수만의 군대와는 감히 비교도 안됩니다.
답답합니다.
엘리사가 이제는 노망이 들었습니까?
그 때, 엘리사가 종의 이러한 의심에 가득한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종의 눈에서 의심의 비늘이 벗기어지더니 영안이 열리었습니다.
 
열린 영안의 눈으로 성을 내려다보니 하나님의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성과 엘리사의 집을 옹위하고 하고 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엘리사는 다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시여. 저 아람 군대들의 눈을 어둡게 하소서.’ 그러자 아람 군대들의 눈들이 어두워졌습니다.
엘리사는 군인들 앞에 나아가 말하기를 ‘여러분, 이곳은 길도 아니요. 성도 아니 내가 인도하는 대로 따라 오라’고 하자, 군대가 저를 따라 이스라엘의 당시 수도인 사마리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아람 군대는 꼼짝없이 독 안에 든 쥐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큰 근심에 빠졌던 이스라엘 왕은 신이 나서 당장에 그 모든 군대를 몰살을 시키려고 했지만 엘리사가 만류하고 오히려 떡과 물을 주어 먹게 하고 돌려보냈습니다.
원수를 먹이고 마시우게 한 것입니다.
그러자, 혼줄이 난 아람 군대는 엘리사가 생존해 있는 동안에는 감히 침범하지 않았다고 23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선으로 악을 갚으니 그 사랑 앞에 녹아지는 것입니다.
여하튼 우리는 오늘 본문을 읽으면 너무나 멋지고 놀라워 감동이 큽니다.
 
이처럼 영안이 열리는 것은 신앙생활의 큰 힘이요, 승리의 비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 중에 영안이 닫히어서 하나님이 아무리 은혜를 주시려 하시거나 경고를 하시어도 깨닫지 못합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매를 들고 때리셔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더 큰 매를 자초합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유황불로 멸망할 때 아브라함은 영안이 열리어 그 사실을 알았으나 롯은 세상의 욕심에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다가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만났습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영안이 열리며 예수님을 보고 고꾸라지며 변화되었으나 사도행전 9:7절에 보면 같이 동행하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였다고 했습니다.

죽음의 유형지 밧모섬에서 사도 요한은 영안이 열리면서 신령한 하늘의 세계와 미래 세계에 대한 환상을 볼 수 있었으나 많은 죄수들은 자기들이 처한 절망적인 상황만 보다가 죽어갔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역사하시고 계시는 데 세상의 욕심에 영안이 닫히어 보지 못한다면 얼마나 답답한 노릇입니까?
여러분은 영안이 열린 자와 닫힌 자 중에 어디에 속한 자입니까?
여러분은 모두 영안이 열린 자가 됨으로 하나님의 세계, 하나님의 경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볼 수 있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어떻게 해야 믿음의 눈, 영안이 열릴 수가 있을까?
 
말씀의 눈을 열어라!

성경을 통하여 세상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약속인 말씀을 통해서 보는 자들이 되는 것

하나님의 약속은 성경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세계, 하나님의 뜻을 잘 모르지만 한가지 분명히 아는 것은 하나님은 성경의 약속대로 반드시 시행하시는 분이시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의 눈을 통해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세계와 하나님의 뜻을 봅니다.
우리는 영안이 확 열리어서 천사의 모습이나 마귀의 모습은 보지 못할지라도 오직 한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반드시 성경의 약속대로 시행한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고아 2,000명을 기적 가운데 먹여 살린 죠지물러에게 어느 분이 묻기를 ‘어떻게 그런 엄청난 일을 할 수 있었습니까?’하는 질문을 받고 대답하기를 ‘성경의 약속대로 믿은 데 있습니다.
나는 평생에 성경을 백 회 통독했습니다.
그러나 한번도 싫증이 난 일이 없습니다.
읽을 때마다 새로워졌고 읽을 때마다 힘을 얻고 희망을 얻었습니다.
성경은 믿는 자에게 약속대로 이루어 주는 책입니다.
이것은 나의 54년간의 경험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고 처음 3년간은 성경을 안 읽었습니다.
그때 나는 신자로서의 기쁨도 사명도 느끼지 못하는 죽은 크리스천이었습니다.
나는 그 2-3년 간을 잃어버린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의 눈으로 하나님의 세계와 하나님의 뜻과 인도를 바라볼 수 있는, 영안이 열린 자가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의 눈을 열어라
 
기도의 눈을 통해서 하나님의 세계와 뜻을 보는 것입니다.
성경의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인 반면, 기도는 그 약속을 붙잡고 드리는 청구요, 요청입니다.
즉, 성경은 약속의 보물창고라면 그 창고를 여는 열쇠는 기도인 것입니다.
우리가 신용카드를 가지고 있으면서 믿음으로 쓰지 못하고 굶거나 물건을 못 산다면 얼마나 어리석겠습니까?
그러므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 그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하나님의 경고와 인도히심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깊은 기도생활 중에 하나님의 거룩한 손길을 볼 수 있었고 가뭄 속에서도 미래의 큰비를 보는 믿음의 눈을 가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엘리사는 기도하는 자였기에 하나님의 천군 천사가 보호하는 것을 볼 수 있는 영안이 있었던 것입니다.
기도하는 자에게 믿음의 눈이 열립니다.
그러나 기도에 게을리 하면 이상하지요, 그나마 있던 믿음까지 약해지고 하나님의 세계와 그 뜻에 대해서 보지 못하는 지경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꾸준히 기도하여야 합니다.
그럴 때에 영적 세계를 보는 믿음의 눈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응답으로 바꾸는 기도는 적어도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합니다.

1. 기도하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약속을 찾아야 하고 그것을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2. 기도의 저해요소인 죄책감이나 근심, 염려, 낙심을 하나님께 맡기어야 합니다.
3. 기도의 응답을 받으려면 응답되어진 사실을 상상하며 그대로 될 줄로 믿으면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치유의 빛」의 저자 아그네스센포오드 여사에게 어느 부인이 상담하기를 ‘내 아이는 아주 삐뚤어 가고 있습니다.
남들이 자기를 싫어한다고 오해하여 점점 우울해지고 반항적으로 되어 감으로 점점 짜증이 나게 만들고 있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대답해 주기를 ‘이제부터 기도해 보세요. 기도를 하되 이렇게 해보세요. 밤에 그 아이가 잠들었을 때에 그 아이 위에 두 손을 얹고 그 아이가 앞으로 명랑하고 사랑스러우며 너그러운 아이가 되어 있는 모습을 눈앞에 그리면서 믿고 기도해 보세요.’라고 했습니다.
 
그 부인은 이 방법대로 한 달 동안 기도했습니다.
한 달 후에 연락이 오기를 ‘그 기도가 효과가 있었어요.
나는 한평생 그런 것을 본 적이 없었어요.
그 아이는 명랑해졌고 자신감이 생기었고 내게도 대단히 다정하게 대합니다.’라고 기뻐했고 2년 후에는 다시 연락이 오기를 그 아이는 행복감에 젖어 있고 훌륭한 신자가 되었다고 고백하더랍니다.
 
약속의 말씀을 믿음으로 붙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응답되어진 사실을 바라보면서 기도하심으로 응답의 기쁨을 맛보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행함의 눈

행함의 눈이란 말씀대로 믿고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이 있다는 증거로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며 동시에 말씀대로 행할 때에 온전한 믿음으로 인정하시고 그 믿음 위에 친히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세 친구에게 큰 위기가 왔습니다.
간악한 왕 느브갓네살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화형을 시키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왕은 그들을 유혹하기를 ‘너희들이 이제라도 내가 만든 신상에게 절하면 살려주겠다.’고 합니다.
 
세 친구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다가 죽느냐? 아니면 우상에게 절하고 목숨을 부지하느냐?’는 심한 갈등으로 고민하다가 마침내 결단하여 외치기를 ‘왕이 우리를 불 속에 던진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를 구해 주지 않으실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우상숭배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이 보호해 주셔서 전혀 불에 타지 않는 기적을 나타내셨습니다.
 
강대국 아람 나라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에 걸렸을 때에 엘리사의 초라한 초막으로 찾아왔습니다.
그러면 엘리사가 특별안수를 해주는 것이 예의입니다.
그런데 전혀 내다보지도 인사를 하지도 않은 채 하인을 시켜서 명령하기를 ‘요단강에 가서 일곱번 몸을 담그라.’고 했습니다.
이런 터무니없는 처방을 받고 나아만 장군은 처음에는 화를 몹시 냈으나 나중에는 모든 자존심을 벗어 던지고 무조건 물 속에 일곱번 들어갈 때에 문둥병이 깨끗이 고침받는 기적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신애성구공예사 대표 이희재 장로님의 간증에 의하면 4․19 혁명 이후에 사업이 크게 망해서 빚덤이 위에 앉게 됨으로 6남매가 굶기를 떡 먹듯이 하게 되고 설상가상으로 어머니인 이초운 권사님이 병들어 돌아가시는 큰 비극 속에서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삼각산에 올라가서 죽든 살든 간절히 기도하기를 며칠 동안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홀연히 “일어나라.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었습니다.
 
그런 음성을 세 번 듣고 힘을 얻은 다음에 다시 집에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충성을 다하기 시작했습니다.
주일성수, 십일조, 맡은 일에 충성 등, 몇 년 동안 여전히 빚덤이 위에서 아무 증거, 아무 환상, 아무 음성이 없을지라도 무조건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계속 충성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10년이 지난 어느 날부터 하나님이 길을 열어 주시기 시작하는 데 놀라운 정도였고 나중에는 70평의 공장이 240평이 되고, 다시 700평이 되는 축복의 역사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말씀의 눈, 기도의 눈, 행함의 눈에 의해 영안이 열리어서 하나님의 세계와 그 뜻, 그 인도하심을 볼 수 있는 자들이 됨으로 늘 승리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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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의 눈을 뜨게 하는 심청전의 이야기

고전소설 심청전(沈淸傳)에 보면 심봉사가 등장합니다.
심봉사의 본명은 ‘심학규’로 양반 집에 태어나 과거시험에도 합격을 했으나 곧 눈이 멀어 관직을 받지 못하고 몰락한 양반으로 살게 됩니다.
사람들은 이 비참한 양반 심학규를 본명 대신 심봉사라 부릅니다. 

옛날에는 시각장애인들을 ‘봉사’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심봉사의 딸 심청이가 천하의 효녀에요.
그래서 공양미 300석을 바치면 아비의 눈을 뜰 수 있다는 말에 청나라 상인들에게 자신을 팔아 인당수 바닷물에 풍덩 빠집니다.
심청이는 지극한 효성 때문에 복을 받아 왕비가 되고 딸을 만나러 온 아버지 심봉사는 결국 눈을 뜨게 됩니다.

육신의 눈을 뜨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가를 교훈하는 이야기라고 하겠습니다.

마음의 눈을 뜨게하는

눈은 사물을 보게 합니다. 또 어디로 가야할지, 가지 말아야 할지를 알려줍니다. 차를 탈 때도, 음식을 먹을 때도, 문화생활을 할 때도 눈이 있기에 풍성하게 누릴 수 있습니다.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눈은 우리가 태어날 때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선물입니다. 개인적으로 눈을 통해 누린 복이 참으로 많습니다. 어릴 적 2.0이나 되는 엄청난 시력으로 남들이 보기에 기이한 경험도 했습니다. 운동장 끝에 있는 글씨를 읽었을 정도니 내가 생각해도 대단했습니다. 물론 지금은 안경을 사용해야 앞에 있는 글씨도 정확하게 봅니다. 그래서 눈이 가져다 준 선물이 너무 고맙게 느껴지고, 잘 관리하지 못함에 대해 아쉬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육신에 참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손은 손대로, 발은 발대로 그리고 눈은 눈대로 다 소중하고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역할 역시 각자의 자리에 따라 의미가 있습니다.

발이 있기에 어느 곳이나 다닐 수 있습니다. 손이 있기에 식생활의 자유로움을 누릴 수 있습니다. 눈이 있기에 아름다움을 볼 수 있고 위기를 분별하여 피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눈은 창조의 영광을 가까이 인식하게 해줍니다. 그러므로 볼 수 있음에 대한 감사가 늘 넘쳐야 하고 보지 못하는 이에 대한 배려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볼 수 있음이 중요한 것은 단지 보기 때문이 아닙니다.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볼 수 있다고 아무것이나 본다면 그것은 눈을 주신 이의 뜻을 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보지 말아야 할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의 삶을 건강하게 만드는 일이 아니라 더욱 부패하게 만드는 모습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의하지 않으면 보는 것이 재앙이 될 수 있습니다.

백화점에 가면 그 화려함이 우리의 눈을 사로잡습니다. 더구나 명품 코너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습니다. 더 아름답고 더 멋지게 그리고 더욱 폼 나게 살고 싶은 인간의 마음을 자극하게 하는 제품들이 진열되어 있기에 쉽게 발을 옮기지 못합니다. 눈이 그 곳에 고정돼 있기 때문입니다. 눈이 우리의 삶을 움직이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눈에 우리의 삶을 모두 내주어서는 안 됩니다. 눈을 잘 제어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눈 때문에 패가망신에 이르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육신의 눈에 해당되는 것만이 아닙니다. 육신의 눈이 중요하다면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더욱 중요한 것은 바로 영적인 눈입니다. 육신의 눈으로 보이지 않는 영적인 눈이 그리스도인에게는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 개의 눈을 가진 존재입니다.

영의 눈을 뜨게 한 엘리사와 게하시의 이야기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육적인 눈과 영적인 눈의 차이를 보여주는 사건이 있습니다.
엘리사의 비서인 게하시의 이야기입니다.
엘리사를 죽이려는 아람 왕의 군사 앞에 게하시는 두려운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때 엘리사는 게하시의 눈을 열어 하나님의 군사들을 보여 주었습니다.
게하시는 육신의 눈으로 보이지 않았던 하나님의 군사들이 이스라엘을 둘러싸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게하시는 육신의 눈으로 보았던 불레셋의 군대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육신의 눈으로 보았을 때 절망적인 삶이 영의 눈으로 보았을 때 자신감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는 영의 눈은 바로 믿음의 눈입니다.
믿음의 눈을 가진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모습은 삶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전혀 다른 반응을 합니다.
믿음은 눈은 그리스도인의 특권입니다.
믿음의 눈은 육신의 눈으로 보지 못하는 일을 경험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눈을 가지고 있는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 모릅니다.

믿음의 눈이 주는 특권은 세상을 이기는 힘을 공급받습니다.
세상의 가치에 함몰되지 않습니다.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을 이길 힘을 얻습니다.
믿음의 눈을 가질 때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바라보고 자신의 소명을 발견합니다.
보이는 환경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일을 이룹니다.

믿음의 눈은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넣는 일과 같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믿음의 눈입니다.
믿음의 눈이 사라지고 이성의 눈만이 가득하면 하나님의 일을 감당 할 수 없습니다.
나는 믿음의 눈으로 살고 있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서 불행한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아무튼 이 심청전 이야기를 꺼낸 것은 그 시대에 이렇게 아픈 사람, 앞 못 보는 사람이 너무 많았고, 특히 사랑하는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려는 간절한 딸의 소망이 얼마나 귀한지 이야기 하고 싶어서입니다.

여러분, 오늘날에도 심봉사처럼 눈 먼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혹시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도 꼭 눈을 떠야 합니다. 그렇다고 여러분에게 공양미 300석을 교회에 바치라든지 인당수에 뛰어들라 소리는 하지 않겠습니다. 왜요? 우리가 떠야 할 눈은 ‘육신적인 눈’이 아니라 ‘영적인 눈’이기 때문입니다. 다같이 옆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기 바랍니다. “눈이 참 아름다우십니다!” 이번에는 반대편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기 바랍니다. 

“영적인 눈도 참 아름다우십니다!” 여러분이 만약 육신의 눈을 뜨기 원하신다면 안과를 찾아가 개안수술(요즘 수술 참 쉽습니다)을 받든지, 공양미 300석을 바치든지 하면 되겠지요. 하지만 성경은 우리의 육신적인 눈을 뜨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적인 눈, 즉 영안(靈眼)을 뜨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뇌성마비 중증장애를 앓아서 몸도 비틀어지고 말도 제대로 못하지만 아름다운 믿음의 시를 써서 유명한 송명희 시인은 <참 소경>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참 소경이 누구인가 세상을 못 보는 사람인가? 아니라 아니라 주님을 못 보는 사람 아닌가! 당신은 당신은 소경이 아닌가!

육신의 눈이 어두워 세상을 못 보는 사람이 아니라 멀쩡하게 눈을 뜨고 있지만 주님도 못 보고 영적인 세계를 보지 못하는 그가 진짜 소경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육신적인 눈보다 영적인 눈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체의 눈을 떠서 세상을 밝히 보기 위해 투자하고 노력할 것이 많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영적인 눈을 뜨기 위해 우리는 어떤 일을 해야 하며 어떤 노력을 바쳐야 하는가? 오늘부터 2013년 다섯 번째 시리즈 설교로 <열어주소서!>라는 말씀을 다섯 번에 걸쳐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으로 <내 눈을 열어주소서!>라는 제목으로 어떻게 하면 우리의 영안을 밝히 뜰 수 있는가 말씀을 나누려 합니다. 아무쪼록 오늘의 말씀을 통해 저와 여러분의 영안이 밝히 떠져 영적인 신비의 세계를 환히 볼 수 있는 복된 시간이 될 수 있기 바랍니다.

❚내 눈을 열어주소서!

제일 먼저 왜 성경이 그토록 우리의 영적인 눈이 밝히 떠져야 한다고 말씀하는지 이유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우리가 영안이 떠져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래야 하나님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또 영안이 떠져야 하나님의 말씀이 밝히 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이 그것을 말씀합니다. 시편 119편은 자그마치 176절이나 되어서 성경에서 가장 절수가 긴 시편인데 이 176절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내용이라서 사람들이 ‘말씀 시편’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 시편인 119편 17~18절에서 시인은 무엇을 특별히 간구하고 있습니까?

17 주의 종을 후대하여 살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주의 말씀을 지키리이다 18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아마도 시인은 지금 좀 힘든 상황에 처해있는 모양입니다. 건강에 문제가 생겼든지 가정이나 물질에 문제가 생겼든지 뭔가 어려움이 겪고 있는데 시인은 하나님이 저를 후대하시고 이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그런데 그냥 해결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좀 특별한 이유가 있어요. “주의 말씀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간구합니다. “주님! 제 눈을 열어주세요. 그래서 주의 율법, 주님의 말씀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해주세요!”라고 말입니다. 발음은 본토발음이 아니더라도 용서하고 들으세요. 영어성경인 NIV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Open my eyes that I may see wonderful things in your law

제가 굳이 영어성경을 인용하는 이유는 영어로 볼 때 좀 더 느낌이 와 닿기 때문입니다. 그대로 직역하면 “제 눈을 열어주세요! 제가 당신의 율법에서 원더풀 한 것, 놀라운 것, 신기한 것을 볼 수 있게 말입니다.” 느낌 알지요? 확 와 닿지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영적인 눈을 꼭 떠야 하는 이유는 그 영안이 떠져야 하나님이 보이고, 예수님도 보이기 때문입니다. 송명희 시인의 시처럼 주님을 보지 못하는 눈뜬 소경이 너무 많습니다. 남편에게 자녀에게 주변 사람에게 아무리 예수님이 있다, 하나님이 계신다 해도 못 믿는 것은 그들의 육신적인 눈은 멀쩡한데 아직 영안이 가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가 필요한 거에요. 그게 지식으로도 안 되고 노력으로 안 되거든요. “하나님! 어리석은 제 눈을 떠서 하나님을 보게 하신 것처럼 저 영안이 가려진 제 남편, 자식, 저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해주세요.” 이렇게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영안이 뜨여야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에서 그야말로 원더풀한 것, 놀랍고 신기한 것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이미 영안이 열려서 하나님을 보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잖아요? 그래서 교회를 다니는데 문제는 아직도 영안이 밝히 열리지 않아서 말씀을 보아도 잘 깨닫지 못하고 말씀을 들어도 느낌이 확 와 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이 벳세다라는 곳에 가셨을 때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데려와 고쳐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주님이 맹인 손을 붙잡고 마을 밖으로 나가 눈에 침을 뱉고 안수하십니다. 더럽게 웬 침이냐? 약이라고 발라주신 것이냐? 아마도 무슨 상징적인 행위겠지요.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이 안수하신 후 그 맹인에게 이렇게 물으신 것입니다. “무엇이 보이느냐?”(23절) 그랬더니 맹인이 대답합니다. “사람들이 보이는데 또렷하진 않고 희미하게 윤곽만 보여서 마치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 같습니다.” 아직 눈이 완전히 떠지지 않아서 그렇지요. 보이긴 보이는데 아직 희미합니다. 

그러니까 희미하게 윤곽만 보이고 사람이 나무 걸어가는 것처럼 보이는 겁니다. 우리가 혹시 이렇지 않습니까? 교회는 다니고 예수는 믿어서 보이긴 보이는데 아직 영안이 환하게 열리지 않았다면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보이기는 보여요. 하나님도 보이고 예수님도 보이는데 또렷하게 환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남들한테도 “이거다!” 하고 확신을 가지고 말하지 못해요. 그러니 신앙생활에 확신도 적고 전도도 잘 안 되는 것입니다. 게다가 말씀을 보고 들으면 좀 알 것은 같은데 아직 그렇게 뚜렷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 말씀이 원더풀하다? 시편 19:10에 “주의 말씀을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하고 그 맛이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다고 했는데 그 맛이 뭔지, 그 놀랍고 짜릿한 느낌이 뭔지 잘 모르고 사는 것이지요. 그런데 주님은 다시금 그 맹인에게 안수하십니다. 그러고 나니 맹인이 비로소 모든 것을 밝히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25절). 이것은 정말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도 이 맹인처럼 또 한 번의 안수가 필요합니다. 성령으로 안수 받아야 합니다. 말씀의 능력으로 안수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비로소 우리의 영적인 눈이 환히 열려서 말씀이 또렷이 보이고 말씀의 능력이, 그 놀라운 말이 확 느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얼마 전 곧 임직을 받을 피택자 중 한 분이 이런 얘기를 해요. “목사님! 요즘 제가 참 즐겁습니다. 피택자 교육을 ‘세게’ 받아서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는데 어, 정말 말씀이 보이기 시작하고 막 느낌이 오기 시작하네요.” 그렇습니다. 영안이 열리기 시작한 겁니다. 

영적인 눈이 열리니 전에도 많이 읽고 들은 말씀이지만 그야말로 말씀이 새롭게 느껴지고, 느낌이 확 와 닿고, 정말 원더풀, 놀랍고 짜릿한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도 다 이런 경험을 해야 합니다. 교회를 오래 다녔는데도 말씀이 아직 원더풀 하게 깨달아 지지 않는다, 짜릿한 느낌이 없다고 한다면 참 불행한 일입니다. 속히 우리의 영안이 떠지기 바랍니다. 크게 밝게 떠져서 하나님의 말씀이 그야말로 내 속에서 막 살아 움직이고 역사하고 말씀 때문에 놀랍고 짜릿하고 뜨겁고 이런 경험을 다 할 수 있는 여러분 되기 바랍니다.

❚사명을 보게 하소서!

한 가지만 더 얘기합시다. 우리의 영안이 열리면 하나님을 보게 되고, 말씀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게 참 중요하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의 영안이 열리면 또 한 가지의 놀라운 일이 생긴다고 말씀합니다. 그것은 “영안이 열리면 사명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사도 바울 이야기입니다.

사도 바울이 사울이었을 때 그는 율법에 미쳐서 예수장이들을 미워하고 다 박멸하기로 마음먹습니다. 그래서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데반 집사를 돌로 쳐 죽일 때 옷을 맡아 기꺼이 증인이 되고, 나중에는 아예 머나먼 다메섹까지 쫓아가 그곳에 있는 예수장이들을 다 잡아들이려 하지요. 그런데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그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주님은 박해자 사울에게 나타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행 9:4) 하시는데 그 순간 사울은 눈이 멀게 됩니다. 

사흘 동안 다메섹의 한 집에서 보지도 먹지도 못하고 있던 사울에게 주님은 아나니아라는 제자를 보내십니다.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가서 말씀을 선포하는 순간 사울의 눈에서는 비늘 같은 것이 떨어져 나가 다시 보게 되고 그 즉시 세례를 받고 그 때부터 박해자 사울이가 복음을 위해 목숨 거는 사도 바울이 된 것입니다. 물론 이 때 사울이 다시 뜬 것은 육신의 눈입니다. 그런데 육신의 눈이 떠지는 동시에 그의 영적인 눈도 뜨게 된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의 눈에는 비늘이 껴있었습니다. 

율법과 유대교라는 비늘이 껴있으니 영안이 닫혀서 예수님을 못 보다가 이제 그 비늘이 떨어져 나가고 영안이 뜨이니 주님을 보게 된 것이지요. 뿐만 아닙니다. 그는 지금까지 보지 못하던 자신의 사명을 보게 됩니다. 지금까지 율법을 수호하는 것이 자기 사명인 줄 알았는데 영안이 열리니 내 진짜 사명은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증거하는 일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영안이 열리면 사명이 보인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 눈에는 혹시 어떤 비늘이 껴있는지요? 먹고 사는 것 걱정, 내 삶, 내 가정, 내 가족만 보고 있으면 그것이 비늘이 되어 우리 눈에 끼어서 영안을 가리게 됩니다. 그러면 사명은 안 보이고 나만 보이고, 내 생각과 내 고집만 보이게 됩니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 혹시 이런 말 들어보셨습니까? 이 ‘뭐’에 해당되는 말이 뭔지 아시지요? 동물 이름입니다. 이 말이 강단에서 쓰기 힘든 속된 말이라 이렇게 넘어가지만 그래도 꼭 맞는 말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이 말은 내 마음이 닫히고 눈이 닫히면 꼭 그 수준밖에는 안 보인다는 뜻입니다. 눈은 그 사람의 수준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어요. 어떤 교회가 건축을 잘 하고 나서 본당에 뭘 들여놓을 것인지 의논하다가 싸움이 났답니다. 싸우는 이유는 이겁니다. 본당에 오르간을 들여놔야 하느냐, 피아노를 들여놔야 하느냐? 우리 교회처럼 오르간 피아노도 다 들여놓으면 안 싸웠을 텐데 아마 좀 작은 교회였나 봐요. 그 교회에 음악을 좀 아는 사람 둘이 있는데 한 사람은 누가 뭐래도 교회는 오르간이다 고집하고 또 한 사람은 아니다 좋은 피아노가 있어야 한다 고집하니 싸움이 난 것입니다. 

우리가 들으면 참 우스운 일이지만 두 사람은 서로 음악수준이 높네 낮네 싸우다가 교회 전체가 오르간 파와 피아노 파로 나누어 지금도 목숨 걸고 싸우고 있는 모양입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길까요? 바로 눈 때문입니다. 시야입니다. 시야가 좁아져요. 육신적인 눈만 뜨고 영적인 눈을 못 뜬 게지요. 이 경우는 내 음악지식이 육신의 눈이 되는 겁니다. 믿음의 눈이 열리고 영적인 눈이 열리면 누가 보인다고 했습니까? 하나님부터 보이고 예수님부터 보이지요. 그러면 하나님이 뭘 원하실까? 

주님은 뭘 원하실까? 이것부터 봐야하지 않습니까? 하나님한테 오르간이냐 피아노냐 그것이 뭐 그리도 중요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찬양받으시는데 오르간으로 찬양 드리든, 피아노라 드리든 하나님이 그걸 따지시겠습니까? 하나님께 정말 중요한 것은 교회의 화평입니다. 그런데 영적인 눈이 안 열리니 알량한 작은 음악지식 가지고 그렇게 다투는 것이지요. 영안이 열리지 않으면 자신만 크게 보입니다. 교회는 작게 보입니다. 자기 지식과 주장만 보이고 하나님은 안 보입니다. 이 모든 것보다 오직 하나님이 보이고, 하나님의 뜻이 보이고,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명과 책임을 볼 수 있는 영안이 뜨이길 축원합니다.

❚볼 수만 있다면!

중학생 때 영어시간에 읽은 글 하나가 너무 제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헬렌 켈러가 쓴 “3일 동안만 볼 수 있다면”이라는 짧은 글입니다. 그녀는 태어난 지 19개월 만에 열병을 앓아 보지도 듣지도 못하고 따라서 말도 못하게 된 3중장애를 가졌지만 훌륭한 교육자이며 저술가가 되었습니다. 헬렌 켈러가 위대한 사람이 되도록 도운 설리반 선생님도 유명하지요. 이 글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만약 내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유일한 소망이 하나 있다고 하면 그것은 죽기 전에 꼭 3일 동안만 눈을 뜨고 보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사흘간 볼 수 있다면 첫날에는 나를 가르쳐 준 설리번 선생님의 얼굴을 바라보겠습니다. 그리고 산으로 가서 아름다운 꽃과 풀과 빛나는 노을을 보고 싶습니다. 둘째 날엔 새벽에 일찍 일어나 먼동이 터오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저녁에는 영롱하게 빛나는 하늘의 별을 보겠습니다. 셋째 날엔 아침 일찍 큰 길로 나가 부지런히 출근하는 사람들의 활기찬 표정을 보고 싶습니다. 점심때는 아름다운 영화를 보고 저녁에는 화려한 네온사인과 쇼윈도의 상품들을 구경하고 저녁에 집에 돌아와 사흘간 눈을 뜨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싶습니다.”

헬렌 켈러는 육신의 눈이 먼 사람입니다. 아름다운 세상도 못 보고 사랑하는 부모님이나 선생님 얼굴도 볼 수 없는 시각장애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육신의 눈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세상의 아름다움을 더 잘 느낄 수 있었습니다. 더욱이 영적인 눈은 그 누구보다 환히 열려서 하나님을 보고 감사할 수 있는 신앙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헬렌 켈러와 달리 너무 멀쩡한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눈을 가지고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세상만 봅니까? 나만 보입니까? 지금까지 받은 은혜 못 보고 없는 것, 부족한 것, 원망 불평거리만 보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환하게 보이고, 말씀이 놀랍게 보이고, 내게 주신 사명이 확실하게 보이십니까? 불평 원망보다 감사의 제목이 보이십니까? 다시 한 번 주님께 간구하기 바랍니다. “하나님, 내 눈을 열어주소서! 그래서 그 환한 눈으로 주님을 확실히 보고 주의 일을 확실히 하게 하옵소서!” 이렇게 말입니다.













도서 / 환대와 구원, 뜻밖의 회심, 감각의 제국, 다섯 가지 절대 법칙, 단순한 교회, 레미레자블, 자본론,


환대와 구원

조슈아 W. 지프
‘환대와 구원’
‘믿음과 환대에 의한 구원’(Saved by Faith and Hospitality)

초기 기독교 서적인 ‘클레멘스 1서’에 나오는 이야기를 언급한다.
아브라함 롯 라합이 믿음과 환대를 통해 구원을 얻었다는 내용이다.
결코 우리가 환대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구원은 반드시 환대로 이어진다는 의미다.

오늘날 개인주의 시대에서 교회가 잃어버린 것이 있다면 타인을 향한 환대와 ‘손대접’일 것이다.

‘뜻밖의 회심’ 저자인 로자리아 버터필드는 기독교에 적대적이었고 레즈비언 공동체에 소속돼 있었던 사람이었지만, 복음을 따라 환대를 베풀었던 한 부부의 식탁 교제에 참여해 교류하면서 극적 회심을 경험했다.

복음전도가 잘 되지 않는 시대에 가장 효과적인 복음전도 방법도 바로 이웃에게 베푸는 환대와 손대접일 것이다.
그들과 친구가 되어보라.
우리의 우정과 섬김을 따라 복음이 흘러가게 될 것이다.
고립의 시대에 환대의 공동체는 외로운 시대에 가장 좋은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의 별명 중 하나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과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의 복음은 환대를 통해 흘러 들어갔다.

동성애 이슈가 중요한 화두로 떠오르고 동성애 찬반 논쟁이 치열하게 진행되는 오늘날, 한 레즈비언 교수가 자신의 파격적인 회심과 세계관의 변화를 진솔한 필체로 묘사했다.

저자는 이 책에서 회심 이전의 삶과 가치관을 밝힐 뿐 아니라 어떻게 성경에 관심을 갖고 되고 켄 목사 부부와의 지속적인 만남을 통해 내면에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 소상하게 얘기한다.

이후 교회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던 때와 교인들이 자기에게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세례를 받고 정식교인이 된 후 어떻게 신앙생활을 영위했는지, 그리고 그녀의 세계관에 지각변동이 일어난 과정을 진솔하게 진술하고 있다.

훗날 남편을 만나 가정을 이루고 목사 아내로서, 네 명의 아이를 입양하여 홈스쿨링하는 엄마로서, 그리고 손님대접을 주된 사역으로 삼고 살아가는 모습을 묘사한다.

이번에 출간된 확대개정판에는 저자의 회심에 결정적 역할을 한 켄 목사와 남편 켄트의 이야기, 저자의 공개편지 두 편, 그리고 궁금증을 풀어주는 질문과 응답이 부록으로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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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대와 구원' (조슈아 지프)

“교회가 진지하게 귀담아 들어야 할 매우 중요한 통찰력을 제공한 책이다.
본서의 주장은 단순하고 분명하다.
곧 그리스도인은 ‘환대’로써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좀 더 풀어서 설명하면, 구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무런 조건이나 자격 없이 전적으로 환대해주신 결과로 주어진 것인 것처럼, 우리 또한 타자를 차별 없이 환대함으로써 그 구원의 은혜에 참여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행위의 진정성은 타자에 대한 ‘환대’로 증명된다.”

기독교 영성 나아가 선교적 삶의 핵심을 관통하는 ‘환대’에 대해 이 책만큼 풍부한 지식과 통찰력을 주는 책은 없을 것입니다.
크리스천이 가야 할 환대의 길에 대한 분명한 이정표를 보게했고, 특히 저에게는 자신있게 환대에 대해 외칠 수 있는 용기와 설교해야 할 책임감을 주었습니다.

미국 트리니티복음주의신학대학원 신약학 교수인 조슈아 지프(Joshua W Jipp)가 저술했다.
원제목은 ‘믿음과 환대에 의한 구원’(Saved by Faith and Hospitality)이다.
종교개혁 전통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불편하게 들릴 수 있는 다소 도발적인 제목이다.
물론 당연하게도 저자는 소위 행위 구원론을 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환대에 기인한다는 사실과, 어떻게 이것이 사람의 환대를 이끌어내는지를 복음적으로 매우 탄탄하고 명쾌하게 정리한다.

지프 교수가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환대하셨다는 것은 복음 메시지의 핵심 중 핵심이다.
종교개혁의 칭의론도 아무 공로 없는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하나님의 자녀가 됐다는 것에 강조점을 둔다.
우리가 하나님의 넉넉한 품으로 환대를 받았다는 사실은 우리 신앙의 근본과도 같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그저 이 사실 앞에 감격하는 것에서 멈추고 마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한한 환대를 베푸셨다는 것이 함의하는 바가 무엇인지에까지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구약성경에서부터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땅에 들어오도록 환대받은 자들로 묘사된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땅은 하나님의 소유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약속한 땅을 분깃으로 내어 주신다.
그러므로 성도의 정체성은 광야의 나그네로서 하나님께 환대받은 자이다.
그리고 여기서 성도의 삶의 태도와 방식이 도출된다.

“셋째 해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 네 모든 소산의 십일조 내기를 마친 후에 그것을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 네 성읍 안에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신명기 26:12)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서 첫 소산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려 하나님의 환대 은혜에 대해 인정하고 감사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뿐만 아니라, 그 소산을 연약한 타자들과 나눌 것을 명령하신다.
하나님의 환대 때문에 구원받은 자들이 이제 환대를 베푸는 자들로 살아갈 것을 요구받는 것이다.

신약의 예는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환대의 실체로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사회의 아웃사이더들과 함께하기를 마다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즐거워하셨다.
심지어 그것이 사회문화적으로 또 종교적으로 터부시되는 일이었음에도 그 어떠한 비난도 예수님의 환대를 막지 못했다.
예수님은 기꺼이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로 불리셨다.
그리고 우리 또한 감히 예수님의 그 넉넉함 품에 안겨 있다.

물론 환대하는 삶으로의 부르심은 오늘날 우리에게 참 불편한 메시지임이 틀림없다.
무엇보다 환대하는 삶을 살아가고자 할 때 맞닥뜨리게 될 수많은 현실적 문제들이 우리 머릿속에 먼저 떠오르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현실이라는 장벽 앞에서 성경의 가르침은 슬쩍 뒤로하고 마는 것이 우리의 부족함이고 연약함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환대하는 삶으로 초대하실 뿐만 아니라 그런 일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도 주심을 믿어야 한다.
환대하는 삶으로의 전환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더 많이 경험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바로 환대의 근원이시기 때문이다.

교회는 유람선이 아니라 구조선이다.
유람선을 타고 가는 듯한 신앙생활에서 이제부터는 구조선을 타고 생명을 구원하는 구조대원의 역할을 바르게 감당해야 할 때가 되었다.
그러면 반드시 세상은 비난의 화살을 날리던 교회를 향하여 칭찬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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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회심(The Secret Thoughts of an Unlikely Convert)
로자리아 버터필드 지음



레즈비언의 삶을 버리고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온 페미니스트여성에 대한 간증이다.

오늘날 반동성애 운동이후에 그들을 돌보는 사역이 미흡한 가운데, 동성애자들을 교회와 개인이 어떻게 돌보고 이끌어야 하는지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게 해 주는 책이다.

동성애는 복음으로 극복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 책은 여러가지를 알게 합니다. 

1. 교회 밖에서 바라본 교회의 모습

2.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성도들은 어떤 자세로 그들을 대해야 하는가?

3. 성소수자들이 그들의 정체성과 그들의 공동체에서 느끼는 부분은 어떤 것인가?

4. 교회는 어떤 부분에서 교회 밖 사람들을 불편하고 갈등하게 하는가?

5. 복음을 통한 회심은 어떤 과정을 거치는가/


저자는 대학 부교수이자 종신교수 자격을 부여받은 엘리트 여성이고, 학과장을 맡는 동시에 성소수자 인식 개선에 앞장서는 역할을 맡고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레즈비언이자 사회운동가이기도 한 인물입니다.

여기까지 나열한 수식어 만으로도 그리고 그의 본인의 의견으로도 그가 얼마나 복음과 먼 인물인지를 짐작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그런 그에게 있어 기독교인들에 대한 인식은 상당히 확고하게 좋지 않았습니다.

내게는 기독교인들이 엉성한 사고의 소유자들처럼 보였다. 빈곤과 폭력, 인종차별과 같은 이 세상의 실제적인 문제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이 지닌 비현실적인 세계관이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책을 읽어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천박하다'라고 조롱하는 방식, 즉 토론을 심화시키고 풍요롭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둘러 종결시키기 위해서 막무가내로 성경책을 끌어들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이 걸핏하면 들먹이는 "성경말씀에 의하면"이라는 말은 정상적인 사고를 포기하라는 주문처럼 들릴 뿐이었다. 그 말이 나오면 영락없이 얼마 지나지 않아 대화가 파국을 맞았으니까. 그들이 자주 사용하는 캐치프레이즈나 상용어구들도 역겹기는 마찬가지였다. "예수님이 답입니다."라는 말을 들으면 지금도 뿌리 없이 서있는 나무를 보는 느낌이 든다.

답은 질문이 주어진 다음에 나오는 것이 정상이다. 질문에 대해서는 구체적이고 설득력 있는 답을내놓아야지 모든 것을 다 덮어버리는 포괄적인 말을 답이라고 내놓아서는 안 된다. "정말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이에요"라는 대답을 들을 때마다 십계명의 세 번째 계명(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을 어기는 짓거리, 또는 값싼 감상으로 뒤범벅된 너절한 감사카드를 보는 느낌이 든다. 
..(중략)..

그들이 반지성적인 사람들처럼 보인다는 것 외에 내가 기독교인들에게 느끼는 두려움이 한 가지 더 있었다.
..(중략)..

레즈비언들의 공동체는 내게 안전하고 안정된 보금자리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곳은 내가 가장잘 알고 아끼는 사람들이 속한 공동체 이기도 했다. 하지만 레즈비언 공동체가 다가오는 사람들을 팔 벌려 포용하고 환영하는 반면에 기독교인들의 공동체는 배타적으로 보였고(실제로 그런 경우도 많다) 쉽게 사람들을 정죄하려 들거나 냉소적이고 이질적인 요소가 그들에게 섞일까 봐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본문 p25-26)

 

이 부분을 읽으며 등골이 오싹하고 얼굴이 벌개져왔습니다. 아니라고 반문하고 픈 분들도 많으시리라 생각합니다. 우리 공동체는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싶으신 분들도 많으실 겁니다. 그렇지만 상처는 준 사람 기준이 아니라 받은 사람 기준으로 생각되어야 하듯, 교회 밖에서 바라보는 교회를 향한 시선은 우리 성도들이 분명히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이 글이 더 귀하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아니라고 말씀하고 계신 분께선 내가 최근에 반갑게 맞이하고 시간을 따로 내서 새로 방문한 이들의 이야기를 듣거나 방문한 기억이 있는지만 돌아봐도 답은 나올 것 같습니다. 기독교 진리는 배타적입니다. 왜냐하면 구원의 길은 오직 예수님 한 분 뿐이기 때문이고, 세상 종교가 말하는 어디에나 신이 있다는 범신론도, 선행으로 구원을 이룰 수 있다는 자력 종교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진리가 배타적이라고 해서 기독교인들이 그런 태도를 가져선 안될 것입니다.

 

안 그래도 복음은 친절하지도 듣기 좋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듣는 이가 스스로가 죄인임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복음의 씨앗이 어떻게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뿌려질 수 있을까요? 

그 단서를 저자가 복음을 받아들이게 된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과의 만남의 장면에서 찾아보고자 합니다.

시러큐스 개혁장로교회 담임목사 켄 스미스가 보낸 편지도 그런 편지들 가운데 섞여 내게 왔다. 그의 편지는 매우 친절한 어투로 나 자신도 간절히 대답하고픈 그런 질문들을 묻고 있었다. 당신은 투고에 실린 결론에 어떻게 이르게 되었는가? 당신은 자신의 의견이 옳다는 것을 어떻게 검증할 수 있는가? 당신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가? 켄 목사는 내 글의 근거가 되는 전제들을 더 깊이 연구해 보라고 권하고 있었다.
..(중략)..

전화상으로 얼마간 즐거운 대화를 나눈 후 그가 나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하지만 전화를 끊기 전에, 그때서야 생각이 났는지, 초면인 사람의 집으로 저녁 식사를 하러 오는 것이 부담스러우면 자신과 아내가 근처의 레스토랑으로 나가는 것도 좋다고 했다. 나는 그가 아주 사려 깊은 사람, 아니 거의 기사도를 따르는 사람처럼 여겨졌다.
..(중략)..

저녁으로 채식주의자를 위한 볶음요리를 준비했다는 플로이의 말을 듣고 얼마나 안도감을 느꼈었는지는 지금도 기억난다. (도덕적인 이유에서는 물론 건강상의 이유로 나는 채식을 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중략)..

꽤 더운 칠월 날씨였지만 두 사람이 에어컨을 틀지 않고 있었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나는 환경문제 전반에, 특히 오존층에 대해 관심이 많았는데 그들도 그런 것 같았다.)
..(중략)..

나는 그들과 친숙해지고 싶었지만 내 도덕적인 잣대들을 포기할 만큼은 아니었다. 레즈비언으로서의 내 정체성, 동성애 문화, 가치관들이 내게는 훨씬 더 중요했다. 삶의 경험뿐만 아니라 연구와 사유의 과정을 통해 나는 내가 지닌 문화, 가치들을 소유하게 되었다. 

내가 켄과 플로이를 보고 바로 마음에 들어했던 것은 그들이 그런 점에 민감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그 두 사람과 나는 명백한 차이점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들은 내가 빈 칠판 같은 상태로 그곳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내게도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와 견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였고, 대화를 하면서도 충분히 나를 존중해 주었다.
..(중략)..

켄과 플로이는 내가 어떤 인간인지 파악하려 들지 않았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내말을 경청해 주었다. 그들은 기독교인의 동정심을 가지고 이방인인 내게 다가오는 긴 여정을 시작하려 했다. 식사 중 그들은 내게 복음에 대해 말을 하지 않았고 식사 후에도 교회에 나오라는 말 같은 건 하지 않았다. 으레 나오리라 예상했던 말들이 나오지 않은 덕분일까 식사 후 켄이 나랑 계속 연락을 하며 지냈으면 좋겠다고 제안을 했을 때 나는 부담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본문 p36-37)

 

그런 부담감이 있는 것 같습니다. 교회 밖 사람이 교회 안 사람을 만날 때..

 

직접 경험해 본 경험에서 아니면 주변 사람들의 경험으로부터의 간접 경험에서든... 많은 사람들이 막연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무례함에 대한 혹은 쉽게 정죄함에 대한 그런 기억들이 차곡차곡 쌓여 무언가 다른 관점을 만들어내고 그 관점이 교회 안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되살아 나는.. 그런 모습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분들을 뵐 때마다 신앙인으로서 어떤 자세로 사람들을 대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고 스스로를 경계 하게 됩니다. 나의 섣부른 말이나 툭 던지는 멘트들이 누군가에게 평생에 걸쳐 복음을 접하는 데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이 되지는 않을까 하는..

 

그런 의미에서 켄 목사님과 플로이 사모님의 모습은 정말 성도들이 어떤 자세로 사람들을 대하고 신앙인이 어떤 겸손함과 예의를 가지고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좋은 모범이 되는 것 같습니다.

 

이 책에서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 부부와의 첫 만남에서 첫번째 식사를 위해 본인을 교회로 초청했다면 그 즉시 뺑소니를 놓고 다시는 그들을 만나지 않았을 거라는 말에서 느껴지듯 깊은 인내와 진심을 가지고 대해야 함을 배우게 됩니다.

 

그런 안정적이면서 상호 신뢰가 쌓인 관계가 구축된 이후 켄 목사님의 주도적인 복음 전파로 인해 저자가 변화된 것이 아님을 보게 됩니다. 물론 모든 관계, 모든 사람에 대해 동일하게 진행되리라 보는 것은 어렵지만, 그 관계를 통해 그리고 사람을 통해 하나님을 다시 바라보게 된 저자는 스스로 복음을 알아가기 시작합니다. 전 이 부분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인간관계에 의해 마지못해 걸음 하는 신앙생활은 그 나름으로도 가치가 있겠지만 쉽게 무너지거나 쉽게 변질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복음과 자신을 비교해 나가며 가치관의 갈등과 충돌을 느끼고 감수하고 싸우고 고민하는 가운데 얻은 복음과 믿음은 그 든든함이 분명 다름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고 앞서 얘기한것처럼 인간관계에 의해 마지못해 걸음 하며 시작한 신앙생활을 폄하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복음을 들을 수 있다면 분명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요지는 복음을 듣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그렇게 살기 위해서 겪는 변화들은 누군가가 대신해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그 치열한 싸움과 변화를 스스로 싸워냅니다. 그리고 힘들거나 무너질 때에는 섣부른 조언이 아닌 항상 옆에서 든든히 있어주고, 믿어주며, 기도해 주는 동역자들의 조언과 도움을 받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진정한 동역자이자 중보자들의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묻지도 않은 조언을, 특히 자신의 신앙 경험을 무조건적으로 진리라 믿으며 강요 아닌 강요를 하는 것은 정말 좋지 못한 자세입니다. 그런 모습은 중보 대상자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자칫 내 생각을 기준으로 그 사람을 통제하거나 조종하는 것으로 변질되기 쉽습니다.

 

저자는 자신의 변화를 드디어 느낄 정도로 자신이 변화되고 있음을 알아챕니다. 그러는 가운데 고민과 어려움이 있을 때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필요한 지식을 쌓기 위해 말씀을 읽고 책을 찾아 읽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선후가 바뀌긴 했지만, 뒤에 있는 내용을 인용하며 살펴보고자 하는 내용은 교회 밖의 사람이 복음을 통해 회심을 하면서 느끼는 교회의 모습이 얼마나 처참한지를 보고자 합니다.

성경에 묘사된, 그리고 내가 실제로 경험한 혹독한 회심의 과정을 고려할 때, 지금의 복음주의 문화가 정형화시킨, 믿음은 손쉬운 것이라는 생각들이 가져올 수도 있을 결과를 생각하면 두려운 마음이 든다. 내가 사는 지역만 해도 복음주의의 놀이공원이라 할 만한 지역이다. 이웃들 중 몇 집은 지역의 대형교회들에 출석하고 있는데 교회 안에 패스트푸드 식당들이 입점해 있고 유명한 커피 체인점들과 바람을 채운 거대한 고무 놀이기구들을 가져다 놓았다.
..(중략)..

릭 워렌 목사는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는 자신의 책에서 회심을 다음과 같이 고백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예수님, 제가 당신을 믿고 받아들입니다." 죄인들을 받아들이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 자신의 말에 믿음을 거는 행위는 사람들을 그릇된 희망의 함정에 빠지게 한다. 릭 워렌 목사가 사람들에게 구원을 보장하는 방식은 위험스러울 정도로 잘못된 것이다. 그는 계속 설명을 한다. "만약 당신이 신실하게 그 기돌르 드렸다면 이제 축하를 받을 차례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이 된 것을 환영합니다." 내 기도가 신실한지 여부를 내가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구원의 은혜는 구속할 자를 선택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 오래 참으시고 자신을 희생하시며 순종하신 구세주께 속한 것이다. 이렇게 큰 은총이 어떻게 내 신실함에 달려 있을 수 있겠는가? (본문 p 81-82)

교회는 편의와 새신자들에게 다가오기 쉽게 하기 위해 변하는 것은 찬성하지만, 그 본질을 위협할 정도가 된다면 그것은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성도들에게 그리고 새 신자들에게 분명히 알게 해야 합니다. 복음은 친절하지도 않고, 편하지도 않고, 쉽게 받아들여질 만한 내용도 아님을 말이죠.

복음은 듣는 이를 죄인이라 합니다. 당신이 틀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복음이 그토록 쉽게 받아들여진다? 전 그것은 위선이고 거짓이라 감히 표현하고 싶습니다. 


그런 가운데 저자에게 든 고민은 "왜 동생애가 죄인가?" 하는 부분이었습니다.

 

그걸 왜 죄인줄 모르지? 하며 분개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그 근거를 제시할 수 있는 성경 구절이 있는지 반문해 보고 싶습니다. 예전에 제가 아는 분에게 그 반문을 했더니 창세기에 나온 소돔과 고모라 멸망 사건을 예로 들었습니다. 이 책의 저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소돔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동성애를 응징하기 위해서라고 알고 이해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왜 그렇게 하셨는지에 대한 말씀이 있는 것을 이번에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에스겔서 16장

네 아우 소돔의 죄악은 이러하니 그와 그의 딸들에게 교만함과 음식물의 풍족함과 태평함이 있음이며 또 그가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주지 아니하며 거만하여 가증한 일을 내 앞에서 행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보고 곧 그들을 없이 하였느니라

 

소돔의 멸망은 동성애에 대한 응징이 아니라, 그들의 1) 교만함과 2) 풍족한 가운에서도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돕지 않고 3)가증한 일을 하였기 때문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네 아우 소돔이라 표현함으로 실상 이 구절의 대상이 이스라엘 민족에 대해 그들의 숨겨진 죄악을 지적하시는 도구로 이 예를 들었음을 알게 됩니다.

 

죄의 선 후 구조에 대해 저자는 아래와 같이 적고 있습니다.

자만, 부요, 도락에의 집중, 자비와 겸손의 부재. 이런 죄악들 자체에서 본질적으로 성적인 요소들을 찾아볼 수는 없다. 우리는 흔히 죄가 논리나 심리학에 의해 설명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성적인 죄가 성적인 혹은 감정적인 원인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가 지나치게 협소한 시각으로 성애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성적인 활동은 침대에서 벌어지는 일들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넓은 범위의 욕구들, 필요와 갈급함 등을 포함한다. 성애는 우리의 삶이 처해있는 상황의 원인이라기보다는 그 표현으로서, 근원이나 기원이라기보다는 결과에 가깝다. (본문 p74)

 

우리는 현상에 집중하는 그 에너지를 조금이나마 그 근원에 집중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동서애는 분명한 죄이지만, 동성애에 집중하기 앞서 그 근원에 무엇이 있는지를 바라보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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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님 코끼리 만지는 격'이라는 속담이 있다. '코끼리'로 표상되는 대상의 전체를 보지 못하고 대상을 이루는 부분을 전체로 잘못 인식하는 경우를 빗댄 말이다. 어찌 보면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 '장님 코끼리 만지는 격'에 가까운지 모르겠다. 감각기관을 통해 대상을 인식하고 그로 인한 경험적 지식이 곧 우리의 세계관을 형성하니 말이다.

즉 감각 경험을 통해 받아들인 세계가 곧 우리가 바라보는 세계인 것이다. 이를 두고 칸트는, '인간은 감각과 오성을 통해 대상을 인식하고, 세계의 모든 대상은 인간이 가진 자발적인 인식 능력이 능동적으로 작용하여 구성해 낸 결과물들'이라고 했다. 결국 우리는 감각할 수 있는 세계만을 인식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감각할 수 없는 것은 우리에게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다니엘 키시'를 통해 본 뇌 가소성

 



지난 6월 5일 방송된 <신비한TV 서프라이즈>에서 생후 13개월에 안구를 적출해서 앞을 볼 수 없는 시각 장애인 다니엘 키시가 소개됐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마치 눈이 보이는 것처럼 요리를 하거나 자전거를 타는 등 일상생활에 불편함이 없어 보였다.
사전정보가 전혀 주어지지 않은 상태에서도 자신이 서 있는 장소가 어디인지 알았으며 근처에 어떤 건물이 있고, 요트가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도 알고 있었다.

다니엘 키시가 말하길, 그가 앞을 보는 방법은 자신이 혀로 내는 소리에 있다고 했다.
'딱딱' 소리를 내며 주변 사물에 부딪쳐 반사되는 음파로 대상을 구별한다는 것이다.
마치 초음파를 이용해 사물을 구별하는 돌고래와 박쥐처럼 말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음파는 사물이 멀리 있을수록 돌아오는 시간이 오래 걸리고 사물이 딱딱할수록 강도가 크게 느껴진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음파를 통해 사물을 구별한다는 것이 보면서도 잘 믿기지 않았다.
방송에서는 이를 과학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로어델러 박사가 다니엘 키시와 함께 실험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실험 결과 비시각장애인이 시각정보를 처리할 때 활성화되는 조거피질이 다니엘 키시의 경우 소리를 통해 활성화되었다.

소리를 통해 사물을 구분하는 것이 가능함을 입증한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다니엘 키시가 앞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의심했으나 그의 말은 진실이었다. 또한 누구라도 훈련을 반복하면 그와 같이 앞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현실에서 가능한 기적처럼 느껴졌다.

책 <감각의 제국>은 EBS 다큐프라임 <감각의 제국>을 책으로 엮은 것으로, 다니엘 키시와 같은 시각 장애인이 앞을 볼 수 있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시각장애인에게는 시각을 제외한 다른 감각이 발달했을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 같은 소리를 들려주더라도 다른 쪽 뇌의 활성이 더 강하거나 영역이 확장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은 거지요. 그런데 과학적으로 공간에 대한 정보를 가장 잘 담을 수 있는 곳은 시각피질입니다. 꼭 시각이라는 감각이 아니어도 시각피질은 공간 표상을 굉장히 정확하게 하는 곳이기 때문에 시각에 해당하는 정보를 처리하지 못하더라도 다른 감각을 이용해 공간 파악을 할 수 있는 겁니다." - 서울대학교 뇌인지과학과 이상훈 교수, 본문 105-106쪽

"인간은 매우 시각적인 동물입니다. 그래서 좁게는 약 40퍼센트 정도의 뇌가 시각 정보체계에 관여하고 있고요, 넓게는 60퍼센트 가까이 되는데, 선천적인 시각장애인의 경우에는 시각 정보 처리가 완전히 차단되어 있어서 체감각이나 청각으로 정보를 받아들였을 때조차도, 심지어 기억과제를 하고 있을 때조차도 시각피질이 매우 활성화된다는 보고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 서울대학교 뇌인지과학과 이상훈 교수, 본문 108쪽


일반적으로 시각 정보가 입력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볼 수 없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시각을 제외한 다른 감각을 통해 입력된 정보로도 시각피질이 활성화되고 공간을 표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뇌가 결핍된 감각을 채우기 위해 다른 감각 정보의 영역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책에서는 이를 '뇌 가소성'으로 설명한다. 뇌 가소성이란 '뇌가 생각과 활동을 통해 스스로의 기능과 구조를 변경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멀쩡한 성인의 눈을 가린 채 외부에서 들어오는 시각 정보를 완전히 차단하면, 뇌는 달라진 환경에 맞춰 스스로를 변화시킨다. 어떤 감각 하나가 차단되면 그 감각을 담당하던 뇌 영역이 다른 감각을 처리하기 시작하면서, 뇌가 영역을 재배치하는 것이다. 하지만 차단된 감각을 다시 열어 주면 뇌는 원상태로 돌아온다. 무엇을 감각하고 무엇을 감각하지 않느냐에 따라 수시로 뇌 지도가 달라진다. 감각은 어떤 식으로든 뇌에 흔적을 남기고, 그 흔적은 끊임없이 뇌를 바꾼다. - 본문 102쪽


우리 몸이 바뀐 외부 환경에 자연스럽게 적응할 수 있었던 것도 뇌 가소성 때문이었다. 우리가 무엇을 감각하느냐에 따라 뇌 지도가 수시로 달라지는 것이라면 더 이상 지능은 우리의 능력을 표상하는 기준이 되지 못한다.

또한 다양한 감각 경험을 통해 우리의 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은 현대인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긍정적인 감각을 경험함으로써 뇌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반면, 스트레스를 계속 받는 상황에서는 부정적인 감각을 경험함으로써 우리 뇌를 부정적으로 변화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감정, 감각의 언어

이 책은 우리의 감각이 공감이라는 능력을 갖게 함으로써 인류의 진화를 가능하게 했다고 본다. 공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감정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간이 느끼는 희로애락의 감정은 흔히 본능적인 것이라고 한다.

책에서도 감정을 '감각의 언어'라고 설명한다. 감정에 따라 신체감정지도가 달라진다는 것인데, '사랑과 행복이라는 감정을 느낄 때는 몸 전체의 감각이 증가했고,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느낄 때에는 발 부분이 차가워' 진 것을 통해 인간의 감정에 따라 몸의 감각이 변화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인간의 감정이 '감각의 언어'이고 타고난 본능이라면, 갓 태어난 아기는 물론이고 태아 역시 감정을 느낄 수 있을까? 책은 '수정 후 10주가 지날 무렵부터 태아는 감정을 느낄 수 있다'고 설명한다. 감각기관이 발달함에 따라 태아는 외부 자극에 반응을 나타내기 시작하고, 각각의 자극에 따라 다른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와이즈베리의 <퍼펙트 베이비>에 따르면, '엄마가 즐거워하면 태아는 힘차게 발을 차며 움직이고, 엄마가 슬퍼하면 태아의 발차기 횟수는 거의 절반으로 떨어진다'고 한다. 이를 통해 태아 역시 엄마의 감정 변화를 느끼는 것은 물론 이를 공유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인간은 태어나기도 전에 엄마 배 속에서부터 감각할 수 있고, 엄마의 다양한 감정 변화를 느끼며 엄마의 감정에 공감할 수 있다. 태아가 엄마의 목소리에 반응하는 줄은 알고 있었지만 엄마의 감정에 이처럼 공감할 수 있다는 사실은 놀라웠다. 그렇다면 공감도 감각처럼 본능적인 것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공감이 본능적으로 타고난 것이라면 왜 어떤 사람은 공감능력을 지닌 반면, 또 어떤 사람은 그렇지 못한 걸까?

인간의 천성, 공감 능력

우선 공감이란 무엇인지 그 의미부터 살펴보자.
공감이라는 뜻의 영어 단어 '엠퍼티(empathy)의 어원은 아인픨룽(Einfhlung)이란 단어는 아인('Ein, 안으로), 퓔룽(fuhlung, 느끼다)'라는 독일어에 기원을 둔 것으로, '타인의 마음, 타인의 감정, 타인의 현재 상태에서 그 사람이 하고 있는 생각을 내가 그 사람의 입장으로 들어가서 느끼고 지각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미국의 문화인류학자 로먼 크르즈나릭은 공감을 '다른 사람의 처지가 되어보고, 그들의 감정(정서적 측면)과 관점(인지적 측면)을 이해하고, 그 이해를 활용해 우리의 행동을 인도하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이를 통해 공감은 단순히 타인의 감정을 공유하는 것뿐만 아니라 타인이 처한 상황과 관점을 이해할 수 있는 해석이 동반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문가들은 이를 구분하여 전자를 정서적 공감 능력으로, 후자를 인지적 공감 능력으로 설명한다. 정서적 공감 능력은 무의식적인 것으로 타인의 고통을 느낄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이다. '측은지심(惻隱之心)'을 떠올리면 된다.

이에 대해 소아정신과 전문의 김붕년 교수는 "유년기에 부모와의 정서적⋅감정적 교류로 타인의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뇌 발달이 이루어졌다면 그런 정서적 공감은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라고 설명한다. 반면에 인지적 공감 능력은 그 사람이 처한 상황과 입장을 이해하려고 노력함으로써 그 사람의 생각을 읽어내고, 표정을 통해 감정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책은 인간의 공감 능력과 뇌의 상관관계를 살펴보고자 짧은꼬리원숭이 실험을 소개한다. 실험의 내용은 '전운동 피질(행동을 계획하고 움직임을 실행하는 기능에 관여하는 뇌의 영역)의 신경세포에서 발생하는 전기 작용을 기록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실수로 실험실 연구원이 기록 장치를 끄지 않은 채 점심을 먹으러 갔고, 후식으로 한 연구원이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걸 본 원숭이는 움직임이 전혀 없었는데도 '(원숭이의) 전운동 영역의 뇌가 활성화'되었다.

움직임이 있어야 활성화된 영역이 사람의 표정과 행동을 눈으로 관찰하고 심리적으로 모방한 것만으로도 활성화된 것이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타인의 행동이나 의도, 감정을 머릿속에서 추측하고 모방하여 인간의 공감 능력을 담당하는 신경세포' 즉, 거울신경(mirror neurons) 때문이다.

거울 신경은 우리가 직접 행동을 행할 때에도 발화하지만 다른 사람이 그와 유사한 행동을 할 때도 발화하는 세포들이다. 이렇게 발화한 세포들은 뇌에서 감정을 담당하는 변연계(동기와 정서를 주로 담당하는 기관)를 자극해 다른 사람이 느끼는 감정까지 함께 느끼게 한다. 그러므로 거울신경은 타인의 마음이나 의도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데 매우 중요한 바탕이 된다. …… 그러나 거울신경이 제대로 발달하지 못하면 공감할 수 있는 기능 자체가 제대로 발달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폐 성향을 보이게 된다. 그렇게 되면 결국 타인과 나에 대한 감정적인 교류 자체가 어려워져 사회적⋅인지적인 발달이 이루어지지 못한다. - 본문 202쪽


이를 통해 공감 능력이란 거울 신경의 발달을 전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에게 공감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행동을 모방하는 '거울 신경 회로'와 타인의 감정을 인식하는 '측은지심 회로', 그리고 타인의 생각을 읽어낼 수 있는 '인지적 공감 능력 회로'의 세 가지 공감 회로가 필요한 셈이다. '인지적 공감 능력 회로'는 차치하고라도 뇌의 신경세포인 '거울 신경회로'와 무의식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측은지심 회로'는 타고난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공감은 인간이 가진 천성인 것이다.

공감 능력의 결여가 말해주는 것

하지만 자폐증 환자나 사이코패스의 경우에는 이러한 공감능력이 결여되어 있다. 자폐증은 병적인 문제로 인지적 공감능력이 결여된 반면, 사이코패스는 정서적 공감능력이 결여된 경우로 '뇌의 감정 스위치라고도 불리는 편도체의 발달이 저하'되어 있기 때문이다.

책에서는 '샐리&앤 테스트'라는 공감능력 테스트를 통해 아동의 인지적, 정서적 공감능력을 평가하고 9~10년 뒤 학교 폭력의 가해나 피해 여부를 조사한 결과를 보여준다. 4~5세에 인지적 공감능력의 결함이 있던 아이가 청소년기에 학교 폭력의 피해 학생이 되고, 정서적 공감능력이 결여되어 있던 아이는 10년 후 가해학생이 되는 경우가 통계적으로 많았다는 것이다.

인지적 공감능력이 부족한 경우 반복적인 사회성 훈련을 통해 타인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을 기르고 자신의 행동을 조절해 나갈 수 있지만, 정서적 공감능력은 어릴 적 애착관계 형성에서 비롯되기에 결여된 경우 촉진시키는 방법을 찾기 어렵다고. 다만 자신이 폭력을 휘두른 결과 상대방이 어떠한 피해를 입는지 명확히 알려줌으로써 자신의 행동을 억제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한다.

이를 통해 공감 능력의 결여는 개인의 사회성과 적응에도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사회적인 범죄를 야기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서 정서적 공감 능력은 부모와의 정서적⋅감정적 교류, 즉 부모와의 애착관계 형성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인간의 성장에는 결정적 시기가 있듯이 공감 능력 또한 적절한 시기에 자극을 받고 발달해야 하는 것이다. 부모의 양육 태도와 양육 환경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공감, 우리에게 필요한 것

앞서 앞을 보는 시각 장애인 다니엘 키시를 통해 우리는 감각할 수 없는 것조차 감각할 수 있음을 알았다. 이는 우리가 감각할 수 없는 세계의 존재 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직접 경험하지 않고도 타인의 상황이나 입장을 이해하고 타인의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공감 능력이 잘 말해준다. 우리는 타인에게 공감함으로써 우리가 직접 감각할 수 없는 세계와 마주할 수 있는 것이다. 공감은 우리 인간이 가진 최상위의 감각인 셈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 공동체는 공감 능력을 상실한 듯 저마다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다. 한쪽에선 신음하고 아파하는데도 다른 한쪽에선 귀를 막고 다른 이야기를 떠들고 있다. 책에서는 우리 인간에게 공감 능력이 있었기에 사회라는 공동체를 이루고 사회적인 연대와 협력을 통해 현재의 삶을 가능하게 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제라도 우리의 천성인 공감 능력을 회복해야 하지 않을까. 더 늦기 전에 말이다.

"공감한다는 것은 다른 누군가의 처지가 되어 보는 것입니다.
우리와 다른 사람의 눈으로, 배고픈 아이들의 눈으로, 해고된 철강노동자의 눈으로, 당신 기숙사 방을 청소하는 이민 노동자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우리는 공감을 장려하지 않는 문화에 살고 있습니다."
- 2006년 노스웨스턴대학교에서 오바마 연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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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이 핵무기 7200기를 갖고 있을 때 망하고 말았다.
북한이 핵을 보유한다고 하여 두려워할 것이 없다.
왜냐하면 공산주의는 무너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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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광은 인간관계를 지배하는 5가지의 법칙이라는 책을 썼다.

이 책에 나오는 5가지의 법칙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열정보존의 법칙이다.

내가 쏟아부은 열정은 열정의 양만큼 결국에는 자신에게 그대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둘째, 힘의 법칙이다.

힘이 있는 곳으로 사람이 모이고, 힘이 있는 자가 우위에 서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누구나 힘을 갖기 위해서 노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힘을 가지게 되는 그 순간부터가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내가 가진 힘보다 더 큰 힘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힘이 있을때 상대를 배려해 줄수 있는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셋째, 기브 앤 테이크의 법칙이다.

뿌린대로 거둔다는 것이다. 내 주변의 사람들과의 관계가 좋은 관계가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면 상대에게 조금이라도 더 주려고 노력해야 한다.

넷째, 습관의 법칙이다.

미국의 저명한 심리학자이자 철학자인 윌리엄 제임스는 말했다.

"생각을 조심하라. 왜냐하면 그것은 말이 되기 때문이다.

말을 조심하라. 왜냐하면 그것은 행동이 되기 때문이다.

행동을 조심하라. 왜냐하면 그것은 습관이 되기 때문이다.

습관을 조심하라. 왜냐하면 그것은 인격이 되기 때문이다.

인격을 조심하라. 왜냐하면 그것은 인생이 되기 때문이다"

습관은 인생이다. 좋지 못한 습관이 있다면 빨리 버리고, 좋은 습관이 있다면 더욱더 활성화 시키자.

다섯째, 위대함의 법칙이다.

인간의 내면속에 감추어진 그 크기를 알수 없는 능력있다. 물질적인 성공이 아니라 가치있는 인간이 되는 것에 중심을 두어야 한다.
사람이 엄청난 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물질적인 부를 추구할때가 아니라 진정 소중한 무엇을 지키기 위할 때가 더 많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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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교회

톰 라이너&에릭 게이거 「단순한 교회」 생명의말씀사 P. 88~89


“단순한 교회는 영적 성장의 단계를 통해 사람들을 활동하게 하는 간단하고 전략적인 과정을 염두에 두고 설계된 모임이다.”

이 정의 다소 무게가 느껴진다.
이 정의를 하나씩 살펴보자.

단순한 교회는 설계된다. 그 교회는 부주의하게 던져진 것이 아니다. 우연히 계획된 것도 아니다. 목회는 “단순한 우연” 이상을 행하는 것이다. 목회는 용의주도하게 고려된 것이다. 조직화되어 있고 조심스럽게 설계되어 있다.

또한 단순한 교회는 염두에 두고 설계된다.

단순한 교회의 설계는 무언가를 중점으로 이루어진다. 프로그램과 목회는 무언가를 중심 주제로 삼는다. 그들은 교회의 연중 행사표와 소책자에 연연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어떤 것을 염두에 두고 계획되어 있다. 그리고 그 어떤 것을 모호하고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다. 단순한 교회에서의 제자 사역을 위한 설계는 그 과정을 중심 주제로 삼는다.

단순한 교회는 간단하고 전략적인 과정을 염두에 두고 설계된다.
과정은 간단하다.
혼란스럽지 않고, 이해하기가 쉽다.
지도자들은 그것을 알고,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한다.
과정은 의도적으로 단순하게 유지된다.
늘어나지 않는다. 매달 바꾸지 않는다.

단순한 교회는 단순한 과정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복잡함을 좋아하지 않는다.
더 많은 프로그램들이 과정에 덧붙여지지 않는다.
그 교회는 다수의 새로운 프로그램들과 그것에 제시된 모델들을 거부한다.

과정이 방법(how)을 뜻하기 때문에, 그것은 또한 전략적이라 할 수 있다.
과정은 교회의 목적이나 비전에 매여 있다.
그 둘은 친밀하게 결합되어 있다.
과정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기 위한 실행을 목적으로 만들어진다.
과정은 사람들이 그것을 통해 활동하게 하기 위해 연속적으로 일어나도록 계획되어 있다.

단순한 교회의 과정은 사람들을 활동하게 한다.

단순하고 전략적인 과정은 활동을 추진한다.
과정은 논리적으로 흐른다.
그리스도와 교회에 끌리고, 애착이 가는 쪽으로 움직인다.
프로그램들은 이러한 활동을 진척시키기 위한 도구들로 사용된다.
그리고 단순하고 전략적인 과정을 통한 활동은 의도적이고, 의도된 최종 결과를 가진다.

단순한 교회의 과정은 영적 성장의 단계를 통해 사람들을 활동하게 하는 것이다.
그 목적은 영적 성장의 단계를 통해 사람들을 활동하게 하시는 하나님과 동반자가 되는 것이다.
변화된 삶은 핵심이며, 의도된 최종 결과다. 사람들 속에 형성된 그리스도가 그 목적이다.

단순한 교회는 사람들이 그들의 영적인 여정에서 각기 다른 단계에 있다는 사실과, 영적 성장이 하나의 과정이라는 사실을 이해한다. 그 교회는 영적 성장의 단계를 통하여 사람들을 활동하게 하시는 하나님과 동반자가 되도록 설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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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미제라블 : 은혜의 순간은 한 사람의 일생을 변화시킬 수 있다

[크리스찬북뉴스 칼럼] 자비(mercy)와 은혜(grace)

자비’와 ‘은혜’는 하나님의 속성을 의미하는 중요한 두 주제이다. 우리는 흔히 두 낱말을 동의어인 양 혼용할 때가 많다.

어떤 학자들은 구약에서는 ‘자비’란 말을 사용하고, 신약에서는 ‘은혜’란 말을 쓴다고 구분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자비’란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을 면제해 주는 것을 의미한다면, ‘은혜’란 받을 자격이 없는 선물을 주는 것을 뜻한다고 보면 된다.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 설명해 보자.

자비는 이삭의 심장에 꽂힐 칼을 막아준다.
은혜는 수풀에 걸린 숫양을 공급해 준다.

자비는 달려가 탕자를 용서한다.
은혜는 모든 좋은 것으로 잔치를 베푼다.

자비는 강도 만난 사람의 상처를 치료해 준다.
은혜는 그가 완전히 회복하는 데 필요한 경비를 모두 부담한다.

자비는 십자가에 달린 강도의 외침을 들어준다.
은혜는 그날에 낙원을 약속한다.

자비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 대가를 치른다.
은혜는 우리의 악함을 그리스도의 의로 덮어준다.

자비는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을 회심시킨다.
은혜는 그에게 사도가 되라고 외친다.

자비는 반역과 죄의 삶에서 존 뉴턴을 구한다.
은혜는 그를 목사가 되게 하고 시대를 초월한 찬송가의 저자가 되게 한다.

자비는 지옥에 이르는 문을 닫는다.
은혜는 천국에 이르는 문을 연다.

자비는 우리의 수고를 거부한다.
은혜는 우리가 수고하지 않은 축복을 더해준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 미제라블』에서 장발장은 프랑스 혁명기에 굶주린 가족을 먹이기 위해 빵 한 조각을 훔치다 잡혀 감옥에 갇히기 전까지는 선하고 겸손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19년 동안 복역하고 나온 그는 사회와 하나님을 향하여 원한과 분노를 품은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프랑스 동서부에 사는 일흔네 살의 미리엘 신부 역시 혁명기에 큰 고초를 겪은 사람이다.
유산 가운데 남아 있는 고가품이라곤 칼과 포크 여섯 벌, 국자 하나, 그리고 촛대 두 개가 고작이었다.
그러나 그는 곤궁한 자들에게 동정을 베풀고 겸손한 종으로서 그들을 섬겼다.

나흘 간의 자유를 누린 후 장발장은 이제 피로와 굶주림으로 절망적인 상태에 놓여 있다.
그는 미리엘 신부의 집 문 앞에 서 있다.
염치고 자시고 그 집을 여관으로 오인한 그는 뻔뻔스럽게 부엌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거기서 신부의 따뜻한 대접을 받고 당혹스러워한다.
그날 밤 모두 잠든 사이, 장발장은 19년 만에 처음 누워본 매트리스와 하얀 시트를 뒤로 한 채 몰래 귀한 은식기들을 배낭에 훔쳐넣고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이튿날 아침, 손에 수갑이 채워진 채 그 식기들은 자기가 얻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장발장을 보며, 신부는 헌병들에게 그의 말이 사실이라고 한다.

헌병들에게 장발장을 놓아달라고 하며, 신부는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다시 만나 반갑소. 그런데 내가 은촛대까지 함께 주지 않았소? 아마 200프랑은 족히 받을 수 있을 거요. 포크, 스푼과 함께 그것도 가져가시오.”

믿기 어렵다는 듯 장발장이 신부에게 묻는다.

“정말 나를 놓아 주시는 겁니까?”

신부는 그를 안심시키며 이렇게 덧붙인다.

“형제여, 떠나기 전에 여기 당신 촛대도 가져가시오. 그리고 절대 잊지 마시오. 이 돈을 정직한 사람이 되는 데 사용하겠다는 약속을 말이오….

장발장, 나의 형제여, 더 이상 악에 속하지 말고 선에 속하시오. 내가 당신에게서 산 것은 바로 당신의 영혼이오. 나는 그것을 가증스런 생각과 죽음의 영으로부터 이끌어내어 하나님께 드린다오.”

자신에게 주어진 은혜에 당혹감을 느낀 장발장은 자신의 영혼 안에 있는 어두움, 그리고 가슴속의 한을 관통하는 사랑의 강렬한 빛, 이 둘이 서로 대조되는 것을 본다.

“은혜의 빛이 그의 삶, 그의 영혼에 닿았다. 그에게 그것은 마치 천국의 빛으로 사탄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정말 그랬다.

“그는 더 이상 이전의 그가 아니었다. 그의 모든 것이 변화했다.” 그 신부는 “이 비참한 인간의 전 영혼을 장엄한 광채로 채웠다.”

그 사건이 있은 지 하루 만에 그는 범죄의 현장으로 돌아와서 “기도하는 모습으로 그 자애로운 신부의 집 문 앞, 어둠이 깔린 길에 무릎을 꿇었다.”

은혜의 순간은 한 사람의 일생을 변화시킬 수 있다. 아니, 그것은 영원을 변화시키고도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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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 일, 복… 한국교회 성도들의 세 가지 오해
한국교회 성도들에게는 크게 세 가지 혼동이 있다.
성경을 이렇게 오해하면 성도의 신앙 성숙이 대단히 어렵다.

사실 대단히 깊숙히 퍼져 있는 신앙적 혼란이고, 2천 년 기독교 역사와 관련이 있다고 보여진다.
그래서 이것은 비단 우리나라 교인들에게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신앙의 오해는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복, 이 세 가지다.
성도들이 이 문제로 혼란을 겪는 경우가 참으로 많다.
이래서 성경적 신앙의 성숙이 어려워진다.
그것은 결정론, 이원론, 그리고 무속신앙이다.

하나님의 뜻을 결정론으로 오해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을 이원론으로 오해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복을 무속적으로 오해하는 것이다.

첫째, 하나님의 뜻과 결정론의 오해

성경이 아닌 결정론으로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 하는 것이다.
이렇게 성경을 오해하면, 나의 인생 미래에 어떤 하나의 길을 하나님이 미리 정해놓으셨고, 그것을 보물찾기하듯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끊임없이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뜻을 찾으려고 애쓴다.

둘째, 하나님의 일과 이원론의 혼란

이원론은 고대 헬라의 영육 이원론에서 로마가톨릭의 성속 이원론으로 발전되어 왔다.
성도가 이원론으로 하나님의 일을 받아들이면, 교회 안의 일과 교회 밖의 일거룩한 일과 속된 일로 구분한다.
교회에서 하는 일은 거룩하고 가치 있으며, 세상에서 하는 일은 속된 일이라고 본다. 


셋째, 하나님의 복과 무속신앙적 경향

하나님의 복을 무속신앙으로 오해하는 경우는 한국교회에 아주 흔한 현상이다.
신자들이 나 혼자 복 받으려고 열심히 예수 믿는다.
그러면 그 성도에게는 두 가지가 없다.
믿음과 삶의 변화가 따로 가기에 삶의 변화인 성숙이 없다.
그는 나 혼자 복받는 것이 목표이므로 복의 통로가 되려는 생각이 아예 없다.

이런 세 가지 오해와 혼동으로 한국교회 성도들은 길을 잃은 상황이다.
이 혼란에서 벗어나 성경적 신앙으로 가려면 가이드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제럴드 싯처의 <하나님의 뜻>
브루스 월키의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인도>
레너드 맥컬리, 제람 바즈의 <인간 하나님의 형상>

이 세 가지 혼동은 마치 칡넝쿨같이 얽혀 있어, 현재 한국교회 신자들의 내면을 뒤죽박죽 만들고 어린아이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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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론(資本論)

애덤 스미스

자본: 정치경제학 비판
Das Kapital: Kritik der politischen Ökonomie,
Capital: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자본론(資本論, Das Kapital)은 카를 마르크스가 독일어로 집필하고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편집한 방대한 정치경제학 논문으로 1867년에 제1권이 출간되었다.

《자본론》은 주로 영국의 고전파 경제학 및 자본주의와 영국 사회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는데, 내용은 1859년 발간된 마르크스의 저서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다.

총 3권으로 구성되어 있고, 1권은 자본의 생산과정, 2권은 자본의 유통과정, 3권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총과정이 부제로 붙어 있다.
1권은 1867년에 나왔으며  2, 3권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마르크스의 유고를 모아 집필, 각각 1885년과 1894년 발간되었다.

국부론(國富論) / 칼 막스

애덤 스미스의 대표적인 저서이자 애덤 스미스 본인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도덕감정론보다 후세 사람들에게 더 각광을 받은 책.

원제는 《국부의 형성과 그 본질에 관한 연구(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이다.
일상 대화에서 원제를 말하기에는 원제가 꽤나 길기 때문에 일상 대화나 비격식적인 글에서는 국부론(國富論)으로 짧게 부르는 경우가 많다. 영어권에서도 The Wealth of Nations로 줄여서 부른다.

영국의 학자 애덤 스미스가 찰스 타운센드 공작의 아들을 개인과외하며 유럽 각지를 여행하고 1766년에 영국에 귀국한 뒤 1776년까지 10년간 커콜디에서 자신의 서재에 파묻혀 지내며 쓴 책이다. 사실 이 여행을 떠날 때까지만 해도 스미스는 경제학과는 거리가 먼 철학자였는데, 여행을 통해 경제학에 대한 관심과 식견을 가지게 되었다. 이 사실은 국부론의 초안을 작성할 때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도 드러난다.
"나는 요즘 시간을 때우려고 책을 한 권 쓰고 있다네."
이는 케인스가 막 경제학에 흥미를 붙일 무렵 친구에게 했던 말인 "어쩌면 나는 경제학에 소질이 있을지도 몰라."와 더불어 경제학 역사상 가장 겸손한 발언으로 손꼽힌다.

경제학을 잘 모르더라도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은 아는 사람이 많은데, 바로 이 《국부론》에서 나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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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래시스 요시히로 후쿠야마(Francis Yoshihiro Fukuyama, 1952. 10. 27 ~ )


The End of History and the Last Man
<역사의 종언과 최후의 인간>

헤겔 정치철학을 신봉하는 일본계 미국 학자이다.

<역사의 종언과 최후의 인간>에서 인간의 역사 과정은 두 가지 큰 힘의 상호 작용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첫번째 힘은, 부를 축적해 물질적인 욕구를 만족시키려는 인간의 합리적인 욕망이라는 힘이다.
두번째 힘은, 역사 진보 과정의 중요한 원동력으로서 헤겔이 ‘승인 받기 위한 투쟁’이다.

이것은 모든 인간이 자신의 본질이 자유롭고 도덕적인 존재임을 인정 받으려는 욕망이다.

이같은 결론은 이제 전세계가 자유민주주의라는 단일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통일되어 가는 상황에 있다는 것이다.
헤겔의 역사 개념이 이데올로기의 역사를 지칭하는 것인 만큼, 이제 대립된 이데올로기를 통일함으로써 역사의 종언을 선언한다는 것이 후쿠야마의 논지이다.

<트러스트>는 그 후속편 성격을 띠고 있는데, 그러한 사실은 이 책의 첫장 제목이 ‘역사의 종언을 맞이한 인간의 상황’이라는 데서 잘 드러난다. 이 책의 논지는 ‘한 국가의 복지와 경쟁력은 하나의 지배적인 문화적 특성, 즉 한 사회가 고유하게 지니고 있는 신뢰의 수준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신뢰에 바탕 두어야 사회 발전


후쿠야마는 고 제임스 콜맨의 ‘사회적 자본’이라는 개념을 사람들이 공통의 목적을 위해 단체와 조직 내에서 함께 일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이해하여 중시한다. 즉 개인 간의 관계가 신뢰에 바탕을 둔 사회는 발전과 번영을 구가한다는 주장이다.

후쿠야마가 이 책에서 주장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대단히 중요하다. 그는 개인의 자유와 존엄성을 중시하는 자유민주주의를 찬양하면서도, 개인의 이기심에 기초한 물질적 동인만으로는 사회가 발전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개인의 이익을 큰 집단의 이익에 종속시킬 수 있는가 여부와, 규범과 가치를 공유하는지 여부가 더욱 중요하고, 그 공유된 가치로부터 신뢰가 탄생하며 신뢰는 중요한 경제적 가치를 가진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한국과 중국은 근본적으로 신뢰가 낮은 저신뢰 사회이고, 일본과 독일은 고신뢰 사회이다. 한국이나 중국같이 가족 중심적인 사회는 근본적으로 가족 이외의 사람과 사회적 협동이 이루어지기 상당히 어렵다고 비판한다. 우리가 새겨들을 필요가 있는 지적이다. 한국에서 뇌물과 부패가 성행하고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우리 사회 제도에 대해 우리 스스로가 신뢰하지 못해 나타나는 현상이다. 공무원과 정치가를 신뢰하는 사회라면 뇌물을 흔히 주고받는 현상은 절대로 나타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후쿠야마의 이론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은 사회 발전의 동인을 신뢰에 너무 많은 무게를 실어주는 것 같다는 것이다. 그 자신이 인정하듯이 합리적 선택론에 기초한 이기심이 80%를 설명해 주는 고전경제학의 법칙을 무시할 수는 없다. 합리적 선택론이 사회를 설명해 주는 충분 조건은 아니더라도, 가장 중요한 조건이라는 점을 더욱 강조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인류가 물질적으로 발전해온 동인으로는 시장경제 체제가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구승회 박사의 번역은 대단히 수준 높은 것이어서, 독자들은 이 책이 번역한 것이라기보다는 애초에 우리 글로 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질지도 모른다. 단지 utility를 ‘효용’이 아니라 ‘유용성’으로, rational choice를 ‘합리적 선택’이 아니라 ‘이성적 선택’으로 번역한 것이 옥의 티로 남는다. 후쿠야마의 책은 오늘날의 선진 자본주의 국가가 가지고 있는 특성을 시장 경제와 자유민주주의라는 두 가지 축으로 잘 설명했다는 점에서 지성인의 필독서다.

욕구에 의한 역사의 발전

1. 더 잘려는 욕구
- 경제적 욕구

2. 인정 받으려는 욕구
-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장점이 많으나 시들어간다.
인민 대중을 인정하지 않고 간부들끼리만 잘 먹고 잘 살려고 한다.
- 자유민주주의는 약점이 많으나 발전하는 이유는 개인의 자유를 인정해 주기 때문에 발전할 수밖에 없다.


미국 스텐퍼드 대학교의 교수이며 철학자, 정치경제학자이다.
일본계 미국인 3세이다.
그는 이데올로기 대결의 역사를 자유주의와 공산주의의 프레임으로 설명하면서 "자유주의의 승리로 끝났다"고 평가한 《역사의 종언》으로 유명하다.

후쿠야마는 1989년 냉전이 종식되는 순간을 역사의 종말이라고 하였다.
그 근거로 이념적으로 헤겔이 말한 인간의 욕구에 대해서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는 일방적이 아니라 상호성이 보장될 때 충족할 수 있게 되는 것으로, 이를 가능케 하는 정치제도가 바로 민주주의 정치제도라고 보았고 이를 궁극적이고도 역사적으로 최종적인 정치 체제로 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역사적인 관점에서 냉전이라는 기간 동안 민주주의 체제는 파시즘과 공산주의 체제로부터 많은 투쟁을 거치면서 승리를 거머쥔 만큼 더 이상 민주주의 체제에 도전할 수 있는 이념과 철학 체계가 없다고 보았기 때문에 역사가 종말에 도달했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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쉐인 클레어본의 혁명적인 삶 이야기 / 쉐인 클레어본 <믿음은 행동이 증명한다>


무소유 공동체 심플웨이 설립자 쉐인 클레어본의 혁명적인 삶
나눔의 폭발적인 전염성을 삶으로 보여 주는 사랑의 급진주의자 이야기

"저항할 수 없는 믿음 혁명이 당신 안에서 시작되고 당신의 작은 사랑의 행동을 통해 온 세상을 덮게 될 것이다.
다시 크리스천으로 살기를 시작하자. 예수님이 용기를 주신다."


"쉐인 클레어본의 이 책은 새로운 세대의 신자들이 깨어나고 있으며, 다시 새롭게 복음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고 있음을 보여 주는 이 시대 최고의 증거다." (짐 월리스)

▲ <믿음은 행동이 증명한다> / 쉐인 클레어본 지음 / 배응준 옮김 / 아바서원 펴냄 / 400쪽 / 1만 6000원

자본, 폭력, 권력, 전쟁에 깊이 물들어 있는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의지를 찾지 못하는 오늘날 교회는 천국의 희망을 전하는 것으로 교회의 사명을 다한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 더불어 세상의 가치관을 복음 속에 버무려 넣어 세상 사람들에게 거북스럽지 않은 교회가 되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있다. 이런 교회의 틀 안에 있는 교인들은 나에게'만', 우리 가족에게'만' 복을 준다는 편안한 말씀을 듣기에 익숙해져 있을 뿐만 아니라,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만 알았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전혀 고민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뜻에 무뎌져 가는 교회와 성도들에게 행동하는 믿음을 보여 온 저자 쉐인 클레어본은 안전하고 편안한 복음이 아닌, 위험하고 불편한 복음을 이야기한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을 따르기로 결단했다면, 호불호에 따라 말씀을 선별해서 실천할 것이 아니라 삶 속에 그대로 말씀이 구현되어야 한다고 외친다. 말씀을 깨달았다면 그대로 실천해야 하는 단순한 원리에 순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말만 하는 전도자가 아니다. 그런 외침과 더불어 삶 속에서 말씀이 진실로 실현되는 것을 증언하며 살고 있다. 쉐인은 대학 시절 필라델피아 뒷골목의 노숙자들을 돕는 일을 시작으로, 인도 캘커타에서 테레사 수녀와 함께 나환자 돌봄 사역에 합류했으며, 9‧11테러 이후 미군의 폭격으로 부상당한 바그다드의 환자들을 치료하며 위로하기 위해 이라크를 방문하기도 했다. 또한 월스트리트 거리에서 희년 의식을 거행함으로 성경적 경제관을 외치기도 했다.

대학 졸업 후에는 무소유 공동체 '심플웨이'를 설립해서 노숙자들과 도심의 가난한 자들에게 음식과 의복을 제공하며 보육과 의료 혜택을 베풀며 그들의 신앙과 재활을 돕는 운동을 펼치고 있다. 이 공동체는 초대교회의 모습을 실현해 내며, 사랑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

이 책은 반쪽 복음을 넘어서서 믿고 깨닫는 대로 실천하는 믿음 이야기다. 말씀을 듣고도 편안함에 빠져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불편하고 부끄럽고 두렵게 하는 책이다. 말씀을 깨달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워하는 이들에게 믿음을 실천하게 도와주는 지침서다. 잠자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거부할 수 없는 혁명(Irresistible Revolution)', 믿음 혁명으로 초대하는 통렬한 외침이다.

쉐인 클레어본(Shane Claiborne) 

무소유 공동체 '심플웨이(Simple Way)' 설립자 쉐인 클레어본은 사랑의 근본적인 의미와 기독교의 뿌리를 찾아간다는 의미에서 스스로를 '평범한 급진주의자'라 칭하며, 죄로 인해 엉클어진 세상의 탄식에 귀 기울이고 그 탄식에 대한 대안을 적극적으로 만들어 내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는 대학 시절 어느 교수에게서 "세상이 네 영혼을 도적질하지 못하게 하라.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예수를 선택한다는 것이며, 목숨을 걸고 담대하게 어떤 것을 하겠다고 결단하는 것이다"는 이야기를 듣고 도전을 받아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 후 인도 캘커타로 가서 테레사 수녀와 함께 10주 동안 나환자들을 돌보면서 심령이 가난한 자들에게 임하는 천국을 보았고, 그들의 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

2003년 3월에는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평화봉사단원으로 일하며 폭격이 있었던 지역과 병원을 방문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과 함께 활동하고 예배했다.

또한 2004년에는 쓰나미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팀을 결성하여 태국 현장에서 사역했으며 저개발 국가의 수질 개선을 위한 '우물 파 주기 운동'과 인터넷 모금 운동인 '관계의 십일조 운동'을 통해 전 세계의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긍정적인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2011년 5월 케이티와 결혼하여 필라델피아에서 살고 있다.

심플웨이 리더이자 주목받는 설교자로서 평화, 사회 정의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활발히 전하며 여러 책을 집필했다.
대표 저서로 <행동하는 기도>(IVP 역간)가 있다.

심플웨이 홈페이지 www.thesimpleway.org


"이 땅의 크리스천들에게 각성제가 되어 줄 것이라 확신하는 책이다. 감히 성경 곁에 함께 두고 읽어야 할 또 한 권의 책으로 추천한다. 부디 스마트폰을 팔아서라도 사서 읽기를!" -김성수, 예드림교회 목사. 작은도서관 '호모북커스' 대표

"작금의 한국교회 상황을 마음속 부담으로 가진 자들이라면, 어떻게 예수를 진정으로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할지 고민하는 자들이라면, 이 책을 꼭 읽으라. 바다 건너에서 우리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믿음의 동지를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김형국, 나들목교회 대표 목사. <교회 안의 거짓말> 저자

"한국교회의 거듭된 삽질에 기독교인임을 반납하고 싶은 사람, 물 타지 않은 복음 그대로를 '래디컬'하게 전하고 살아야 한다고 믿는 사람, '허다한 무리'에 속하길 거부하고 예수가 간 좁은 길을 우월감 없이 가려는 사람이라면 닥치고 이 책을 읽으라. 그리고 여러분 하나하나가 우리 시대가 보길 원하는 겸손한 대안'들'이 되라. 교회에 희망이 없다고 하지 말라. 우리가 교회다." -박총, 작가. 도심형 재속재가수도원 '신비와저항' 원장

"그리스도께 무조건적으로 순종하려는 저자의 열정을 반만이라도 닮는다면, 오늘날 복음주의 운동은 엄청난 능력을 갖게 될 것이고, 우리는 이 깨어진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로날드 사이더, <가난한 시대를 사는 부유한 그리스도인> 저자

"이 책을 읽다 보면 나처럼 당신도 불편함을 느낄 것이다. 우리에게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이런 불편함이 필요하다." -브라이언 맥클라렌, <새로운 그리스도인이 온다> 저자

"당신이 쉐인을 안다면, 이 책의 페이지마다 소리치는 저항할 수 없는 그의 외침을 듣게 될 것이다. 당신이 쉐인을 모른다면, 페이지마다 담겨 있는 저항할 수 없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게 될 것이다." -레너드 스위트, <귀 없는 리더? 귀 있는 리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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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하지만 진정한 기도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이해하는 사람은 드물다. 크리스천은 기도가 무엇인지 묻고 깨달을 책임이 있다. 이에 대한 도움을 줄 R. C. 스프로울의 신간 ‘어떻게 기도할까?’가 15일 발간됐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예수님의 제자들조차 자신들의 기도생활이 미흡하다고 느껴 예수님께 도움을 청했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실제로 마태복음 6장을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께 기도하는 법을 알려달라고 요청하는 내용이 있다. 그리고 그 일을 계기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우리가 알고 있는 ‘주기도문’을 가르쳐주셨다.

오늘날의 일부 그리스도인들처럼 이 기도문을 기계적으로 암송하는 것은 결코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바가 아니었다. 저자는 주기도문이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할 때 실천해야 할 원리들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기도의 모델이라고 이야기한다. 또한 주기도문의 각 구절, 심지어 한 단어 한 단어까지 자세히 살펴보고 그 원리들을 찾아내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권면하신 것이 무엇이었는지 분명하게 가르쳐준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기도에 대한 도움을 요청한 까닭은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누리신 관계의 풍성함을 경험하고자 하는 갈망이었다. 따라서 이 책을 통해 주기도문의 문자적 의미를 넘어 예수님이 그 속에서 가르쳐주시는 진리들을 발견함으로써, 현대의 제자들 또한 더 풍성하고 깊은 하나님과의 동행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 책에서 R. C. 스프로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기도의 모델 주기도문이 자주 간과되고 오해되기 십상인 영적 훈련의 원리들을 담고 있는 보고임을 설명한다. 그는 먼저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할 기도의 예들을 보여준 다음, 한 구절 한 구절 주기도문을 파헤친다. 특유의 명료함으로 각 구절의 의미를 새롭게 조명할 뿐 아니라 한 발 더 나아가 주기도문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기타 주제들, 즉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뜻, 용서, 유혹 등에 대해 자세히 풀어준다. 또한 부록에서는 기도에 관한 여러 가지 질문과 답,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과 기도 간의 복잡한 신학적 관계에 대한 해결책을 제공한다.

결론적으로 R. C. 스프로울의 <어떻게 기도할까?>는 그리스도인 삶의 전 영역에 있어서 기도가 어떻게 기능해야 하는지 보여주는 책이다. 이 책을 통해 성도들은 하나님에 대해, 그리고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더 깊은 이해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추천글

R. C. 스프로울은 난해한 진리들을 명쾌하고 인상적이며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설명하는 데 천부적인 자질을 지녔다. 그는 주기도문을 가르치기에 이상적인 교사다. 왜냐하면 주기도문 자체가 ‘기도’라는 어려운 주제에 대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놀라울 정도로 간결하게 가르쳐 주신 하나의 심오한 교훈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우리 모두에게 크나큰 유익과 도움을 줄 것이다. - 존 맥아더 (그레이스 커뮤니티 교회 담임목사 / 『담대한 복음전도』 저자)

나는 R. C. 스프로울의 강의를 좋아하는데 이 책은 그의 목소리와 흡사하다. 놀랍도록 생생하게 진리를 꿰뚫는 바로 그것이다. 그의 뛰어난 인용솜씨와 목회감각에서 나온 지혜는 그의 강의를 듣는 것만큼이나 읽기 수월하게 만들어준다. (게다가 책이 짧아서 금상첨화다!) 스프로울은 간결하고 정확한 문장으로 성경말씀을 명료하게 해석해준다. 그는 중요한 것들, 즉 기도는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 역사에 대한 진리들을 간결하고 명료하게 전달하고 있으며 충분히 제대로 알고 있다. 말미에는 도움을 주는 질의응답까지 덧붙여져 있다. 이 책은 이제 명실공히 기도의 고전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것이다. - 마크 데버 (캐피털힐침례교회 담임목사)

R. C. 스프로울은 내가 처음으로 신학을 배운 선생님이다. 갓 믿은 신자로서 나는 그가 진행하는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Renewing Your Mind)’ 라디오 방송을 청취하면서 신학과 철학, 교회사에 대해 엄청나게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제 그는 <어떻게 기도할까?>를 통해 자신의 방대한 신학적, 철학적, 역사적 재능과 자원들을 기도라는 중대한 주제에 쏟아 붓고 있다. 이것은 워낙 중요한 주제인 만큼 잘 숙련된 선생의 손에 다루어져야 마땅하다. 그가 나에게 가르쳐준 다른 모든 것과 더불어,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의 우선순위를 배우는 데 그의 인도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더없는 특권이다. 이 짧은 책을 읽고 나면 당신 앞에 기도생활의 새로운 패턴이 펼쳐질 것이다. - 타비티 안야빌리 (케이맨 제도 그랜드 케이맨 제일침례교회 담임목사)

저자소개

R. C. 스프로울 - 개혁주의 신학계를 이끄는 저명한 신학자로 심오한 진리들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는 글과 강의로 유명하다. 또한 딱딱하게 들리던 성경 교리를 명쾌한 논리와 적절한 예화로 풀어, 성경 말씀이 주일 예배뿐 아니라 나머지 6일의 삶과 떨어질 수 없게 연결고리를 만들어준다.

낙스신학대학교 등 여러 주요 신학교에서 신학과 변증학 교수로 재직했으며 현재는 플로리다주에 위치한 세인트 앤드류 채플(St. Andrews Chapel)의 담임목사로서 말씀을 전하고 있다. 평신도 교육에 열정을 품고 70여 권의 책을 저술했으며, 리고니어 선교회와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Renewing Your Mind)’라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기독교의 진리를 일반인들에게 알리려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1994년 『크리스채너티투데이』의 비평가들이 뽑은 ‘신앙생활에 가장 큰 영향을 준 학자’ 3위에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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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존 프리처드/김홍일, 민경찬/비아/강도헌 편집위원

기도하는 인간(homo orans)

 

 

인간은 기도하는 존재이다. 인간으로 태어나 그가 종교가 있든 없든 기도 한 번 하지 않고 죽는 인간을 없을 것이다. 또한 기도는 그리스도교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종교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처럼 인간은 왜 기도하는 것일까? 여러 가지 관점에서 답을 찾을 수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느낌과 생각을 인간은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기도의 목적에 대해 기독교 영성가 오스왈드 챔버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기도의 목적은 이상적이지 않은 현실에서 하나님과 이상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자세를 취하는 것이다. 이곳에서의 현실은 우리에게 이상적인 조건을 제공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를 실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챔버스는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 것과는 먼 이상적이지 않은 현실이 주님과의 관계를 촉진시키고, 우리의 기도의 목적 또한 우리가 원하는 이상적인 현실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상적이지 않은 현실 속에서 실현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기도는 현실적이지만, 현실을 초월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꿈과 기도의 관계

 

요즘 교회에서는 현실을 초월하는 것에 대해 꿈과 비전이라는 단어들을 사용한다. 그래서 교파를 초월해 꿈과 비전이라는 단어는 오늘날 교회에서 매우 익숙한 단어들이다. 특히 청소년이나 청년들에게는 주요 설교 주제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필자도 과거 청년부를 지도할 때 꿈과 비전에 대해 많은 설교들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최근에 필자는 청년들에게 비전과 꿈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가 조심스럽고 꺼려진다. 금수저, 흙수저, 3포 세대, 4포 세대를 넘어 9포 세대라는 말까지 나오는 터라 말장난처럼 보일까봐 극도로 조심하고 있는 상황이다. 지금은 청년들 뿐만이 아니라 모든 세대가 미래에 대해 비전과 꿈을 가지기 보다는 불안감들이 감돌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이럴 때 청년들과 성도들에게 어떤 설교를 해야 할까? 믿음을 강조하면서 어떤 꿈과 비전을 제시할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지금 교회와 성도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초월은 물질적 어려움에서 벗어나 물질적 풍요를 원하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물질적인 초월이다. 그래서 이 시대의 기도 또한 개인의 필요와 욕구들을 채워 달라는 기도, 혹은 고통이나 물질적인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는 기도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물론 물질적 기도를 드리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모든 관심과 기도가 여기에 무게를 두고 거기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성경적으로 볼 때 미래가 그렇게 밝지 못하다.  

 

기도는 무엇인가?

 

종교학자들은 기도에 대해 인간의 욕망과 욕구에 대한 갈망이 기도의 출발이라고 말한다. 즉, 인간의 욕망과 욕구는 끝이 없기 때문에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이 기도를 하게 한다는 것이다. 둘째,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이 기도를 하게 한다고 말한다. 즉, 인간의 불완전함은 완전함을 추구하고, 인간의 유한함은 영원을 추구하게 하면서 종교와 기도가 발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 들이 과거에는 어떠했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이 시대의 교회들에게는 상당부분 맞는 말인 것 같다.

 

기독교 안에서 기도에 대한 정의는 단 한 가지가 아니다. 다양한 기도의 정의들은 기도의 의미를 더 풍성하게 해 준다. 그러한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라는 정의에 공감하고 있다. 그러한 가운데 기독교는 오랜 역사동안 다양한 하나님과의 대화 방법들을 발견하고 실천해 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기도의 정의, 기도의 방법들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재 삶의 시간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자리를 만들고 기도함으로 나아가야 한다.  

 

시작하기

 

본서는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1부의 주제는 ‘시작하기’이다. 그렇다 기도는 시작해야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기도의 필요성은 느끼고 있으나 막상 기도를 시작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본서는 기도를 시작하기 위해 먼저 삶의 속도를 늦추어라고 시작한다. 참된 기도(독백이 아닌 하나님을 만나는 기도)는 일상의 삶을 멈추고 하나님께 집중해야만 시작할 수 있다. 그래서 삶의 속도를 늦추어야 한다. 이때 기도의 길이, 기도의 질, 지식의 수준은 기도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러한 것들에 신경을 쓰는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 만남 보다는 자기 만족을 추구하기 쉽다. 시작하는 기도의 기도는 실재로 기도를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고, 자기의 솔직한 마음을 담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처음부터 하나님과 친밀한 사람은 없다. 기도를 지속함으로 친밀함은 발전하게 된다. 그러므로 어색하더라도 기도를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 먼저 기도를 위한 시간을 찾아라. 기도에 도움이 되는 음악, 성경본문, 그림(헤겔에 따르면 상징은 인간의 종교성을 충족시키기 위해 고안된 표현 형태이다. 이러한 상징에 집착하는 ‘상징주의’는 참된 영적 깨달음을 방해한다. 헤겔은 상징을 통해 얻어지는 상징적 지식과 하나님과 친밀한 만남을 통해 얻어지는 직접적 이해(통찰)를 날카롭게 구분한다. 그러나 상징자체를 부정하는 것 또한 ‘문자주의’의 위험을 안고 있다. 전문 독자라면 상징에 대한 헤겔의 견해를 두고 로마 가톨릭의 신학자 칼 라너, 개신교 신학자 폴틸리히, 그리고 고대 교부 아타나시우스의 상징에 대한 논의들을 참고하라. 칼빈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들을 활용하는 것에 대해 부정하지 않는다.) 등을 활용해도 좋다. 관건은 규칙성에 있다. 습관적으로 기도하는 것은 좋지 않지만, 기도가 습관이 되는 것은 중요하다.  

 

더 깊게 들어가기

 

2부는 ‘더 깊게 들어가기’이다. 기도가 습관이 되면서 영적인 성장이 일어나고 영적인 성장을 통해 기도의 방식도 성장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침묵을 통한 기도로 들어간다. 즉, 듣는 기도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 때 중요한 것은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깊이 들어가기 위해서는 깊이 들어가는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때 의식을 집중하여 응시하는 ‘관상’(관상에 대해 개신교는 약간의 오해가 있다. 뉴에이저들이 사용하는 기법이라 하여 이교도적 행위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이것은 오해다. 관상은 집중하여 응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시험 문제를 풀거나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집중하여 응시하는 것 또한 관상적 방법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관상에 대해 무조건적 반감은 자제가 필요하다.)적 자세를 통해 집중하는 것이 필요하다. 관상은 하나님을 향해 시선과 의식을 집중하는 것으로, 자기 집착에서 벗어나 하나님께로 집중하도록 인도한다.

 

여기서 깊은 기도에 대한 오해 또한 풀어야 한다. 깊은 기도에 들어가면 신비한 것을 보거나 체험하는 것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실재는 그렇지 않다. 깊은 기도로 들어가는 과정은 사막을 통과하는 것과 같다. 새로운 미지의 세계는 온갖 보화들로 가득차 있는 것이 아니라 황량한 사막과 같은 느낌을 받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황량함은 그곳에서 다가오시는 주님께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 요소이기도 하다. 하지만, 자칫 하면 지루함을 느끼게 되고 기도에 흥미를 잃을 수도 있는 기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다시 현실적이고 외적인 것들을 추구하는 삶으로 되돌아 갈 수 있음도 유념해야 한다. 그러나 이 시간들을 기도로 잘 극복해 나가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와 총명함을 통해 통찰력들이 생기게 된다. 이 때 중요한 것은 기도를 통해 깨달은 바들을 행동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계속해서 나아가기

 

3부는 ‘계속해서 나아가기’이다. 이 부분에서는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지금 기도에 대한 다양한 질문들을 던지고 거기에 대한 답들을 제시하고 있다. ‘과학 법칙이 지배하는 우주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요?’, ‘기도가 응답받지 못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나요?’, ‘기도할 때 별다른 느낌이 들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어떻게 해야 기도의 활력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등의 질문과 답을 소개한다.  

 

평생에 걸친 여정

 

인간을 구분하는 관점과 기준들은 매우 다양하다. 그중에서 필자는 본서를 읽으면서 ‘기도하는 인간’, ‘기도하지 않는 인간’으로 구분해서 생각해 보았다. 물론 기도에 대해 필요성을 못 느끼는 사람들은 여기서 배제된다. 기도의 필요성을 느끼면서도 기도하지 않는 인간이 왜 있을까? 분명 그들은 기도를 미루거나, 기도를 못하는 분명한 변명거리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본서를 읽어보라. 기도는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할 수 있는 것이다. 눈을 감고 할 수도 있고, 눈을 뜨고 할 수도 있다. 성경을 읽으면서도 할 수있고, 일을 하면서도 할 수 있다. 기도는 언제 어디에나 계시는 하나님을 향해 언제 어디에서나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고, 언제 어디에서나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평생동안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의 기도 생활은 평생의 여정임이 분명하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면 기도를 미루거나 생략하는 인간이 아니라 기도하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 본서는 기도의 큰 그림과 핵심을 어렵지 않게 안내해 주고 있다.  

 

존 프리처드 (John Pritchard) 


1948년생. 성공회 성직자이자 문필가. 옥스퍼드 세인트 피터 갈리지, 케임브리지 리들리 홀에서 공부한 뒤 1973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이후 지역 교회 사목 활동과 동시에 잉글랜드 성공회에서 진행하는 그리스도교 교육 활동과 관련하여 여러 직책을 맡았다. 2002년에는 주교 서품을 받았으며 2006년부터 2014년까지 옥스퍼드 교구의 주교로 활동했다. 현재 SPCK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성숙과 영성 생활을 돕는 다양한 저작을 썼으며 주요 저서로 『기도하는 법』How to Pray(2002), 『교회에 가다』Going to Church(2009) 등이 있다.   

   

출판사의 책소개

 

기도에 관한 입문서. 그리스도교 신앙생활의 알짬이라 할 수 있는 기도가 무엇인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살핀다. 어떻게 기도라는 여정을 심화시켜 나갈 것인지, 이때 우리가 갖추어야 할 것들은 무엇인지,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들은 무엇인지 찬찬히 설명한다. 부록으로는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시행하고 있는 기도의 종류를 소개하고 있으며 함께 읽을 만한 책들에 대한 역자의 해설을 수록했다. 기도라는 주제와 관련해 궁금한 이들, 기도의 삶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이들에게 도움을 주는 얇지만 단단한 입문서다.  

   

목차

 

들어가며

1. 시작하기

2. 더 깊게 들어가기

3. 계속해서 나아가기

해설 : 기도의 단계와 그리스도교 전통의 기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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