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보험 약관 / If you are in an accident


05-03-2023

If you are in an accident

1. Remain at the scene and do not admit fault.
    현장에 남아 잘못을 인정하지 마십시오.

2. Call the police to report the accident.  
    경찰에 신고하여 사고 경위를 작성하시오.
 
3. Exchange information with the other drivers.  
   상대방 운전자와 정보를 교환합니다.

4. Call claims Service at 1-800-274-4499  
   1-800-274-4499번으로 청구 서비스에 전화하십시오

5. Do not discuss the details of the accident with anyone except the police and your claims representative. 
   경찰과 청구 대리인을 제외한 누구와도 사고의 세부 사항을 논의하지 마십시오.

6. Get information about your claim at claims. progressive. com
    클레임에서 귀하의 클레임에 대한 정보를 얻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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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비어스 선교정책(宣敎政策)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는 1866년 9월 2일


네비어스 선교정책(宣敎政策)

선교사 네비어스(John L.   Nevius)가 중국에서의 선교활동을 위하여 창안한 선교방법론.

네비어스 선교방법.


네비어스 선교정책은 ‘3자 원칙’

첫째, 자전(自傳, self-propagation)

토착인이 토착인에게 전도하도록 하는 ‘자전’(自傳, self-propagation)

둘째, 자립(自立, self-supporting)

토착 교인이 토착 교회 목회자의 생활비와 교회 운영을 책임지도록 하는 ‘자립’(自立, self-supporting)

셋째, 자치(自治, self-governing)

토착 교회 문제를 토착 교인들이 처리하도록 하는 ‘자치’(自治, self-governing)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위 ‘3자 원칙’은 네비어스보다 먼저 제시했던 인물들이 있었다.
그들은 1840∼70년대 영국 교회와 미국 교회의 해외 선교 정책을 입안했던 헨리 벤(Henry Venn)루퍼스 앤더슨(Rufus Anderson) 등이었고, 네비어스는 그 원칙을 중국 선교 현장에 적용하여 보다 구체적인 방법론으로 정립하였다고 할 수 있다

연원 및 변천

네비어스 선교정책의 창안자로 알려진 네비어스는 미국 뉴욕 출생으로, 유니언대학과 프린스턴신학교(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를 졸업하였다.

이후 북장로회 중국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1854년 중국 남부 닝보(寧波)에 도착해 선교를 시작,
1871년 동북부 옌타이(煙臺)로 옮겨가 1893년 별세하기까지 40년간 선교사로 활동하였다.

초기 닝보 선교에서는 실패와 좌절을 경험했지만 그 경험을 바탕으로 옌타이에서는 성공적인 선교 결과를 얻었다.
그는 의료선교와 교육선교도 추진했지만, 주로 복음전도와 토착 교회 육성에 중점을 두었다.

그래서 연중 대부분의 시간을 지방교회 순회에 할애했으며, 여름에는 옌타이 선교부에 토착 교회 지도자들을 모아 성경을 가르쳤다. 또한 피폐해진 중국 농촌의 경제적 환경개선을 위한 농업개량 사업도 적극 추진하여 직접 과수원을 조성하고, 포도와 배 등 서양 과수를 들여와 중국인 농가에 보급하기도 했다.
따라서 이러한 네비어스의 선교는 중국 교회뿐 아니라 일반사회 지도자들로부터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네비어스는 자신의 선교 경험을 바탕으로 중국 선교 전략과 방법론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1885년 『차이니즈 레코더(Chinese Recorder)』에 발표한 「선교사의 토착교회 설립 및 육성방안(Planting and Development of Missionary Churches)」이 대표적인데, 이 글은 1886년 1월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단행본으로 인쇄되었고, 미국 북장로회 해외 선교부는 그 책을 ‘해외선교 문고’에 포함시켜 선교사 필독서로 출판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네비어스의 선교 방법론은 중국 이외의 지역에도 알려지게 되었다. 네비어스는 1890년 봄 상하이에서 개최된 제2차 중국 선교 10주년 연차대회에서 자신의 선교 정책을 발표한 후, 6월 안식년 휴가를 얻어 귀국하던 중 언더우드의 요청을 받고 서울을 방문하였다. 그는 2주간 머물면서 언더우드(H. G. Underwood)와 마펫(S. A. Moffett), 게일(J. S. Gale), 기포드(D. L. Gifford) 등 북장로회 선교사들에게 자신의 선교 경험과 방법론을 소개하였는데, 1885년부터 선교를 시작한 30대 초반의 한국 선교사들에게 40년 선교 경력의 60대 선교사 네비어스의 경험과 지혜는 큰 도움이 되었다. 한국 선교사들은 네비어스가 제시한 선교 이론과 방법론을 ‘네비어스 선교정책’으로 정리해서 한국 선교에 적용하기로 결의했다. 그리고 뒤에 들어온 미국 남장로회와 호주장로회, 캐나다장로회 선교부에서도 네비어스 선교정책을 수용하기로 했고, 공식 결의는 하지 않았지만 미국 북감리회와 남감리회도 큰 틀에서 네비어스 선교정책을 받아들임으로써 한국 개신교회의 대표적인 선교정책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내용

네비어스가 제시한 선교정책은 다섯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교회 지도자들은 자기 동네에서 직업을 갖고 자립생활을 하면서 동역자와 이웃에게 복음전도 사역을 해야 한다.
둘째, 선교사는 토착 교회에 필요하고 또한 운영해 나갈 수 있는 사역과 기관들을 개발해 주어야 한다.
셋째, 토착 교회가 스스로 목회자를 세우고 생활비를 부담해야 한다.
넷째, 예배당은 토착 교회 교인들의 헌금과 노력으로 마련하되 토착 양식으로 지어야 한다.
다섯째, 매년 토착 교회 지도자들에게 집중 과정으로 성경과 교리를 가르쳐야 한다.

결국 네비어스의 선교정책은 선교부나 선교사의 간섭과 통제는 최소화하면서 토착 교회 지도력 육성을 통해 토착 교회가 스스로 성장하고 발전하도록 돕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언더우드를 비롯한 초기 한국 선교사들은 이러한 네비어스 선교정책을 적극 수용하여 한국 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꾀하였다.
특히 1903∼1907년 초기 부흥운동을 거치면서 한국 교회는 그 지도력이 급성장했고, 결과적으로 스스로 전도하고 자립하며 자치하는 토착 교회로서 위상을 정립할 수 있었다.
그래서 1920년대 미국의 경제공황과 1940년 선교사들의 강제 귀국, 그리고 1960년대 후반 선교사 철수로 외부의 선교지원이 약화된 상황에서도 한국 교회는 위축되지 않고 부흥,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네비어스 선교정책에 대한 비판도 있었다.
우선 경제적 자립 원칙이 토착 교회 유지와 관리에 초점을 맞추어 ‘교회 중심’ 체제가 되면서 사회봉사나 구제사업, 사회적 현안에 대해서는 소극적이 된다는 견해였다.
그리고 봉건적 인습이 남아 있던 한국 교회 안에서의 자치 원칙은 임원 조직의 위계질서로 작용하여 교회의 민주적 운영을 저해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토착 교회 지도자 양성(성경공부와 신학교육)에 관한 권한과 역할을 선교사들이 독점함으로써 한국 교회 목회자의 지적 수준과 신학 발전에 한계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이처럼 비판받는 부분들도 있지만 네비어스 선교정책이 한국 교회의 부흥과 성장에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였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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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에게 난폭하게 굴어 불태웠다? 그 진실은…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는 1866년 9월 2일 대동강 변에서 당시 평양 군민들의 공격을 받고 불에 타버렸다. 이때 영국인 로버트 토머스 선교사도 순교했다. 약 한 달이 지나고 중국 지푸의 미국 영사 샌포드에게 이 소식이 전해졌다. 미국은 제너럴셔먼호가 왜 공격받았는지, 선원은 어떻게 죽었는지, 생존자는 있는지 등을 알고자 했다.

미국은 1867년 1월 아시아함대 와추세트호의 슈펠트 함장을 보내 이 사건을 조사했다. 하지만 조선은 협조하지 않았다. 그러나 평양감사 박규수는 분명히 미국이 다시 올 것이며, 그때를 위해 소위 ‘의답조회’를 작성해 같은 대답을 하도록 했다. 문서는 조선 정부가 미국에 전달한 이 사건에 관한 유일한 공식문서였다. 그러면 이 문서는 얼마나 진실을 말하고 있을까.

조선 후기 지리학자 김정호가 1834년 제작한 지도 '청구도'에 그려진 대동강 하류 일대. 박명수 교수 제공

박규수는 ‘의답조회’에서 제너럴셔먼호가 처음부터 조선인에게 난폭하게 행동했기 때문에 이런 사건이 일어났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초기 제너럴셔먼호와 조선인 사이에 심각한 갈등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들은 배에 몰려와 이양선을 구경하고 서로 물건을 매매하기도 했다. 토머스는 이들에게 과자와 성경을 나눠줬다.

제너럴셔먼호와 조선 측이 충돌한 이유는 중군(中軍, 일종의 지역 사령관) 이현익이 납치됐기 때문이다. ‘의답조회’는 이현익이 제너럴셔먼호와 조선인의 마찰을 막고자 배를 타고 감시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제너럴셔먼호가 이현익을 납치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현익의 구술을 기록한 ‘패강록’을 보면 제너럴셔먼호는 조선 측이 자신들을 유인해 상륙시킨 다음에 섬멸하려 한다는 것을 알았고, 이것을 막기 위해서 이현익을 납치했다고 했다. 이 사건을 연구했던 제임스 게일 선교사도 먼저 조선 측이 공격을 해왔기 때문에 제너럴셔먼호가 이현익을 납치했다고 본다.

또한 ‘의답조회’는 평양 군민이 이현익을 구출하기 위해서 땔나무에 불을 붙여 제너럴셔먼호를 공격하니 배에 저장된 폭약이 굉음을 내며 폭발했고 사람은 다 죽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정부의 공식문서인 ‘평양감영계록’에는 배가 불타고 있을 때, 토머스와 중국인 조능봉이 배에서 나와서 살려 달라고 요청했으나 군민에 의해 살해당했다고 기록됐다. 1884년 평양에 가서 이 사건을 조사한 미국공사관 무관 버나돈은 토머스는 평양 감영에 끌려갔으며, 이곳에서 중국으로 보내 줄 것을 요청했으나 평양감사는 이를 무시하고 처형했다고 했다.

제너럴셔먼호 사건의 또 다른 문제는 생존자 여부다. 제너럴셔먼호를 조선에 보낸 메도우사에 의하면 이 배에는 24명이 타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 측은 죽은 사람이 모두 20명이라고 밝혔다. 그러면 나머지 4명은 어떻게 됐을까. 미국은 생존자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런 상황에서 20년 이상을 청과 조선 사이 밀무역에 종사했고, 지푸의 외국인들과 잘 아는 중국인 우문태는 1867년 여름 평양에 갔을 때, 오랫동안 알고 있던 조선 상인 김자평(金子平)으로부터 평양에서 서양인 2명과 중국인 2명을 봤다는 말을 들었다. 이 소식은 북경의 외교가를 뒤흔들어 놓았다.

1868년 봄, 미국은 셰넌도어호 페비거 함장을 조선에 파송해 우문태의 말이 사실인지 확인하고자 했다. 조선 측은 이에 대해 자신들은 김대청(金大靑)은 알아도 김자평은 모른다고 대답했다. 김대청은 1867년 초 슈펠트가 조선에 왔을 때, 함께 와서 장연 육도에서 우문태를 만난 적이 있었다. 조선 측은 이 김대청을 우문태에게 생존설을 말한 김대평이라고 간주하고 체포해 미국 측과 함께 심문했다. 조선 측은 김대청에게 우문태를 만난 적이 있냐고 물었고 그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우문태에게 서양인 2명과 중국인 2명의 생존설을 말했는가를 물었고, 김대청은 그런 적이 없다고 대답했다. 조선 정부는 미국 측에 우문태의 주장은 거짓이라고 말했다.

여기에 대해 미국 측은 김대청에게 언제 우문태를 만났는지 물었다. 그는 1867년 초라고 답했다. 우문태가 김자평을 만난 것은 1867년 여름이었다. 만난 날짜가 다른 것이다. 또 미국 측은 김대청에게 주소와 직업을 물었다. 그는 장연 육도에 사는 어부라고 했다. 하지만 김대평은 작도에 사는 상인이었다. 미국 측은 조선 측이 데리고 온 사람은 김자평이 아니라 김대청이라고 생각했다.

조선 측은 김대청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황해 감사는 대원군의 명령으로 셰넌도어호가 정박해 있는 바다 앞에서 김대청을 효수해 버렸다. 이런 사건을 본 셰넌도어호 선원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페비거는 조선의 이야기를 믿을 수 없다고 보고했다.

제너럴셔먼호의 진상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당시 기록을 면밀하게 살펴본다면 우리는 좀 더 진실에 접근할 수 있다. 한미수교 140주년을 맞이해 한국 기독교는 제너럴셔먼호 사건의 실체를 밝혀 한·미 관계의 첫 단추를 바로 채우고, 한국 개신교의 시작을 바로 알려야 할 것이다.

[출처] - 국민일보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239414&code=23111111&sid1=chr





한국기독교역사(초기 한국선교사들을 통해 배우는 교훈)
-조슈아

1.머리말

조선! 꼬레아!(Corea!) 한국은 120년전(1885년)만 해도 동양의 숨겨진 작은 나라였다.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조선은 누구와도 통상을 맺지 않고 혼자만의 고립가운데 갇혀있었다. 중국과 일본사이에서 늘 괴롭힘을 당하는 힘없고 의지할 데 없는 작은 나라였다. 미국, 러시아, 프랑스, 독일등 열강들은 조선과의 통상을 주장하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고, 조선은 내부적으로도 수구파와 개화파등으로 나뉘어져 분열과 싸움의 위기상황가운데 있었다. 그로부터 120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한국은 세계에서 경제규모 10위안에 드는 나라, OECD회원국, 선교역사 120년만에 세계에서 2번째로 많은 선교사를 파송한 나라, 세계50개의 대형교회중 25개이상이 한국에 있으며, 인구 중 기독교인이 차지하는 비율이 20%가 넘는 세계에서 비슷한 류를 찾아볼 수 없는 그야말로 특이한 나라로 인식된다. 최근의 한류열풍은 언론의 플레이가 아니며, 중국에서 피부적으로 느낄 수 있는 그야말로 열풍이다. 한국영화와 드라마는 언론과 생활속으로 파고 들었고, 삼성 LG는 부의 상징처럼 되고 있다. 2002년 월드컵을 통해 온 민족이 하나되는 모습을 전세계에 보여준 짜릿한 감동이 아직도 남아있다. 얼마전 세계에서 제일 먼저 줄기세포 분화에 성공한 서울대 황우석 박사의 뉴스에 온 세계가 요란했다. 

중국으로부터 늘 영향을 받기만 했던 힘없던 한국이, 36년이라는 일제식민지배를 경험하며 고통가운데 눌렸던 이땅이, 한국전쟁이라는 참혹한 민족상잔을 겪으면서 아무것도 없던 곳에서 다시 시작한 한국이 어떻게 오늘날 이처럼 우뚝 서게 되었을까? 오늘의 대한민국이 되기까지 기독교가 한국사회, 경제, 정치, 교육, 문화등 사회전반에 미친 영향은 상상을 넘어선다. 물론 오늘날 기독교가 많이 세상과 불의와 타협하여 욕을 많이 먹고 있긴 하다만.. 초기 한국에 복음을 들고 와서 생명을 바친 많은 외국의 선교사들, 이 땅의 사역자들.. 그들이 땀과 피를 흘려 헌신한 기초위에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거의 모든 것들이 세워졌다. 우리는 지금 그들의 헌신과 생명의 열매를 먹고 있는 것이다. 

오늘 이 시간에 우리는 한국에 어떻게 기독교가 들어오게 되었고, 이 땅에 와서 생명을 바쳐 일하며 복음을 전했던 선교사들의 삶과 사역과 죽음의 이야기들과, 또 복음을 들은 이 땅의 우리의 선조들이 어떻게 복음을 위해 수고하며 애썼는지, 그들의 헌신을 통해 이루어진 오늘날의 우리의 현재모습을 돌아보고자 한다. 이 짧은 시간안에 한국기독교역사에 대한 모든 것을 다룰 수는 없어서 1910년 한일합방이전까지에 focus를 맞추어서 나누려고 한다. 나름대로 열심히 연구해보면서 이 땅에 온 초기선교사들과 우리의 선조들에 대한 감사와 감동이 있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은둔해 있던 조선을 세우셨는지, 어떻게 복음으로 이 땅을 회복시키시고 부흥케 하셨는지 참 기가 막힌다. 마음을 편안하게 가지면서 함께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보자. 오늘 몇가지 주제를 가지고 시대별로 정리해서 나누려고 한다. 주님께서 동일한 감동과 은혜를 주시기를 바란다.


2.복음의 씨앗을 받다

-기독교가 처음에 어떻게 한국으로 들어오게 되었는가를 살펴본다. 1.경교와 2.조선을 방문한 최초의 선교사, 귀츨라프 그리고 3.최초의 순교자 토마스선교사를 살펴본다.

635. 네리우스파 동양선교 시작함. 
한국이 기독교를 처음 접하게 된 시기를 잡는 여러 가지 가설이 있다. 그 중에 하나를 소개한다. 중국 당태종때 베리우스파는 중국으로 선교사를 파송한다. 1세기(100년) 이상 왕성하다가 쇠퇴한다. 중국에서 경교(景敎)라고 불렸다. 서안 비림박물관에 대진경교유행비가 있다.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초기에 한국으로 경교가 전래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경주 불국사지에서 발견된 돌십자가를 통해 경교의 영향이 미쳤을 가능성이 언급되어진다. 경주 불국사의 석굴암등 대부분의 불교유적에 경교의 흔적이 남아있다는 학자들의 견해가 있다. (사진-서안 경교비)(사진-경주 돌십자가)


1832. 조선을 방문한 최초의 선교사, 귀츨라프(K.F.A Gutzlaff,1803~1851. 네덜란드선교회).

-1832년 영국 암허스트 호 통역 겸 의사로 충청도 고대도에 도착한다. 전도문서와 성경을 전하며 주민들과 접촉하다. 감자심는 법을 가르쳐주며 주민들에게 약과 전도문서등을 전했다. 관리들이 이를 금지시켰다. 한달간 정박한후에 외국과 통상할수 없다는 통보로 인해 한국을 떠나야했다. 항해기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어쨌든 조선방문은 하나님의 역사였다. 이 땅에 뿌려진 하나님의 진리의 씨가 소멸되리라고 나는 믿지 않는다.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로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비가 미칠 날이 오고야 말 것이다. 우리는 이 날을 기다리고 있다. 한편 이날을 오게 하기 위하여 십자가의 도를 애써 전파하지 않으면 아니될 것이다... 우리는 한국당에 광명의 아침이 찾아오기를 기다려야 한다.”귀츨라프의 방문이 선교와 직접적으로 연결은 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의 씨를 뿌리는 수고와 간절한 염원이 마침내 이루어졌음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사진이 참 멋있지 않냐? 그 당시에 먹을 게 없었는데 그가 심은 감자가 유용하게 음식으로 쓰여졌다 전해진다.(사진-귀츨라프,기념교회)


1866. 한국최초의 기독교순교자  - 로버트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귀츨라프가 한국을 다녀간 지 33년 후, 토마스선교사가 한국으로 들어온다. 토마스는 중국 상해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중 부인이 사망하고 그 충격으로 선교사의 임무를 그만두고 해관통역업무를 보았다.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총무 윌리암슨을 만나면서 한국선교에 대해 눈을 뜨게 되고 한국에서 온 두명의 천주교신자들을 만나서 성경을 전해줬을때 기뻐하는 그들을 보면서 한국선교를 소망하게 된다. 그 당시 한국에는 천주교가 박해를 받고 있었고 어느 누구도 성경을 갖고 있지 않았다. 두 달 반의 한국선교여행(황해도)을 하게 되고 성경배포를 하였다. 주민들이 성경을 받아들고 기뻐하는 것을 보고 다시 들어갈 때를 기다렸다. 1866년 미국의 무장된 상선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대동강에 도착했지만, 배가 무장된 상선이었기에 병사들의 폭탄에 의해 좌초되고, 배에서 내리기 전까지 갖고 있던 성경을 한권 한권 뭍으로 던졌다. 토마스와 일행들은 뭍에 끌려내리게 되고 군인들에 의해 모두 죽음을 당하게 된다. 그의 나이 27세.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병사에게 성경을 전해주며 예수를 믿으라고 외치고 이렇게 기도하였다 한다. “오! 하나님,이 사람이 자기의 하는 일을 모르오니 이 사람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조선땅에 뿌린 복음의 씨앗이 헛되지 않게 하소서.내 영혼을 받아주소서…” 아직도 복음을 알지 못하던 땅, 뒷날 그의 죽음 위에 수많은 교회가 세워질, 훗날 한국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렸던 평양의 대동강변에서 순교의 피를 흘린 것이다. (사진-토마스,토마스의 무덤)

그 때 성경을 받은 병사가 훗날 예수를 믿게 되고 평양교회의 초대장로가 된 박춘권이란 사람이다. 그의 말이다. “내가 서양사람을 죽이는 중에 한사람을 죽인 것은 내가 지금 생각할수록 이상한 감이 있다. 내가 그를 찌르려고 할 때에 그는 두손을 마주잡고 무삼 말을 한 후 붉은 베를 입힌 책 을 가지고 우스면서 나에게 밧으라 권하였다. 그럼으로 내가 죽이기는 하엿스나 이책을 밧지 않을 수가 없어셔 밧아왔노라" (사진-박춘권)

그에게 성경을 받은 이들 중에 훗날 평양의 유력한 신앙가문을 일으킨 이들이 많다. 박춘권은 평양교회의 장로가 되었고, 장사포의 홍신길은 서가교회, 석호정 만경대의 최치량은 평양교회를 창설한 인물로 지목되고 있다. 성경을 뜯어 벽지를 바른 영문주사 박영식의 집은 널다리교회의 예배처소가 되었다 한다. 하나님의 일은 결단코 성취되어진다. 

1933년 9월14일에 대동강변에 토머스기념 예배당이 세워졌다. 이 제너럴 셔먼호사건으로 인해 미국이 보복하기 위해 군함을 보내어 신미양요가 일어나고, 얼마후인 1882년 한,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면서 미국교회가 한국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기도하게 된다. 그리고 1885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를 비롯한 많은 미국선교사들이 한국으로 들어오게 된다. 하나님은 국제간의 통상등을 사용하셔서 복음의 문을 여셨다.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것과 다르다. 어쨌든 이로써 조선은 복음의 씨앗을 받게 되었다. 이때까지 어떠한 열매도 없었지만 분명히 복음의 씨앗은 뿌려졌다. 그것이 자라서 열매를 맺기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사진-토마스기념교회)

3. 기독교의 자주적 수용

-한국의 기독교는 세계의 다른나라가 기독교를 접한 것과는 많이 다르다. 한국인들의 자발적인 요청으로 복음이 들어오게 되고 선교사가 들어오게 되며, 성경이 번역되어진다. 그리고 한국최초의 교회인 소래교회(솔내교회)가 세워진다.

1885.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했을 때 깜짝 놀라게 된다. 한글로 번역된 성경을 주민들이 갖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에 오기 전에 들른 일본에서도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한글로 번역된 마가복음이 벌써 있었던 것이다. 이를 알기 위해서 만주에서 사역하던 로스와 멕킨타이어선교사, 그리고 이들과 함께 한 서상륜등 한국사역자들, 일본에서 성경을 번역한 이수정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선교사가 한국으로 들어오기 이전에 사역자들과 성경이 만주와 일본에서 이미 세워지고 번역되어서 한국으로 먼저 들어왔다. 한국은 기독교를 자주적이며 자발적으로 수용했다. 이것은 다른 나라들에 복음이 들어가는 것과는 사뭇다르다. 다른 나라는 기독교가 제국주의 침략의 앞잡이처럼 이용되었다.

1887. 최초의 한글성경인 예수셩교젼서출간- 존 로스, 멕킨타이어 선교사

-토마스에게 한국선교를 주선했던 윌리암슨이 토마스의 순교이후에 스코틀랜드교회에 선교사파송을 요청하고, 로스와 매킨타이어선교사가 중국으로 오게 된다. 위리암슨은 중국에서 사역하던 성서공회 총무로서 토마스선교사에게 한국선교를 도전했던 선교사였다. 이처럼 한국선교를 위해 숨은 사역자들이 많이 있었다. 윌리암슨은 로스에게 토마스선교사의 순교사실을 알려주며 한국선교에 대해 도전하게 되고 1874년 로스선교사는 고려문이라는 청과 조선의 국경으로 가서 한문성경을 배포하였지만 주의를 끌지 못한다. 한 상인이 찾아와서 그에게 성경을 전해주게 되고, 훗날 그의 아들인 백홍준이 로스에게 세례를 받게 된다. 오늘 우리가 뿌리는 씨앗이 어디서 어떻게 열매를 맺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사진-존로스)

-1876년 2차 고려문여행에서 의주청년 이응찬을 만나게 된다. 그와 함께 만주로 돌아와서 한국어를 공부하며 이응찬의 도움으로 1877년에 선교사를 위한 한국어교재 'Corean Primer'를 발간한다.

-1876년 이응찬, 백홍준, 이성하, 김진기 4명이 맥킨타이어에게 한국인 최초로 세례를 받음. 한국최초의 신앙공동체가 중국에서 형성됨.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다. 이 때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목숨을 내놓고 믿는다는 것이었다. 우리의 선조들은 목숨을 내어놓고 믿었다.

-이응찬, 백홍준, 서상륜등의 도움으로 1882년 우리말 예수셩교젼서 누가복음을 출간하고 1887년 마침내 최초의 우리말 신약전서인 '예수셩교젼셔'발간됨. "한국인 학자가 한 명이라도 없었다면 나는 속수무책이었을 것"이라고 로스는 고백한다. 로스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지만 한국사역자들의 수고가 컸다는 얘기다. 그래서 ‘로스역’이라 하지 않고 ‘예수셩교젼서’라고 부른다. (사진-예수셩교젼서)

로스의 고백- “최초의 한글성서 발행이 한미조약 공표(1882)와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다. 이제 완고한 ‘고려문’이 ‘열린문’이 되면 곧바로 복음이 그 민족안으로 들어갈 것이다”

-로스선교사는 서상륜, 서경조 형제를 만나게 됨. 서상륜형제는 만주로 홍삼 장사를 하러 왔다가 병이 걸렸다. 메킨타이어선교사는 죽어가던 서상륜을 힘써 돌보아주어 병이 낫게 되고 그들이 예수를 믿게 됨. 서상륜은 의주를 대상으로 전도하다가 체포령이 내려 동생 서경조가 있는 솔내로 내려와서 힘껏 전도하여 당시 58세대 중 50세대가 예수를 믿게 되어 순전히 한국인들의 힘으로, 주체적이고 자립적으로, 한국최초의 신앙공동체인 소래교회(솔내교회)를 창설하게 된다.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교회가 세워진 것은 선교역사상 흔하지 않은 일이다. 이후에 서상륜은 계속해서 전도하여 많은 이들이 믿게 되자 1885년 언더우드가 한국에 들어온 것을 알고 찾아가서 세례를 베풀어달라고 요청하게 된다. 선교사가 복음을 전하기 전에 이미 교회와 세례받을 자가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언더우드는 이때 본국에 보낸 선교편지에 이렇게 썼다. “그 무렵은 씨를 뿌릴 시기였음에도 동시에 우리는 첫 열매들을 거둘 수가 있었습니다.” 동생 서경조는 1887년 1월 서울에서 언더우드에게 세례를 받고 그 후 그는 성직자의 길을 결심,한국 장로교회 최초의 목사 7인 가운데 한사람이 된다.(사진-서상륜, 소래교회,지도, 한국장로교 최초 목사 7인)

1880년, 로스선교사는 선교본부에 이런 편지를 썼다. “메킨타이어는 또한 4명의 학식있는 한국인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들은 앞으로 있을 놀라운 수확의 첫 열매들이라고 확신한다. 비록 현재 한국이 서구의 나라들과 어떠한 접촉도 철저하게 격리시키고 있지만, 그 쇄국은 곧 무너질 것이고, 또한 한국인들은 중국인보다 천성적으로 꾸밈이 없는 민족이고 보다 종교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으므로, 나는 그들에게 기독교가 전파되면 곧바로 급속하게 퍼져나갈 것으로 기대한다. ..작년(1979)에 모두 학식있는 4명의 한국인이 세례를 받았으며, 이들 외에도 기독교의 본질과 교리를 탐구하는 11명의 다른 사람들이 있고, 현재 동일한 수의 사람들이 한국민족을 위해 성경과 기독교문학을 준비하는 우리의 문서사업을 위해서 7-8일이 걸리는 우리 선교본부까지 기꺼이 올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므로 바로 여기에 기독교회를 향해 열려있는 새 민족, 새 나라, 새 언어가 있는 것이다.”

서상륜- 한국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당인 솔내[松川]교회 창립자. 선교사. 의주(義州) 출생. 1876년 행상으로 만주 뉴좡[牛莊]에 갔다가 로스 목사를 만나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어 세례를 받고 헤이룽장성[黑龍江省]에 사는 동포에게 전도하였다. 1884년 국내에서 전도하려고 의주로 돌아와 한국에서 최초의 종교집회를 가졌다. 그뒤 체포령이 내려 황해도 솔내로 피신, 1887년 동생 경조(景祚)와 함께 국내 최초의 교회인 솔내교회당을 세웠다.

서경조- 의주출생. 한국장로교회 최초 7명의 목사 가운데 한 사람. 일찍 부모를 여의고 독학으로 한학을 공부하였다. 1878년 처음으로 그리스도교를 접하였다. 1884년 황해도 장연의 솔내[松川]로 가, 형 상륜(相崙)과 함께 한국 최초의 교회를 건립하였다. 1900년 솔내교회에서 목사와 장로의 회합을 조직하고 한국 최초의 장로가 되어 해서지방의 교회 설립을 위해 노력하였다. 1907년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제1회로 졸업하였다. 한국 최초의 목사로 안수할 때 다른 6명과 함께 목사가 되었다. 


백홍준의 일화- 로스는 서상륜, 백홍준등에게 성경책을 짊어지고 한국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백홍준이 성경책을 등에 지고 우장을 출발하였다. 그는 10일 만에 의주 건너편에 있는 씨하지라는 마을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사정을 살펴 보는대로 역시 성경책을 그냥 가지고 들어가기란 매우 어려움을 알았다. 백홍준은 가지고 온 책을 한장씩 한장씩 종이로 풀었고, 그 종이를 말아가지고 노끈을 꼬았다. 다음은 낡은 종이를 많이 사다가 그 속에 책을 감추고 끈으로 묶어 마치 종이를 사오는 것처럼 가장하여 국경을 넘었다. 집에 도착한 그는 성경으로 된 노끈을 종이로 펼쳐 다시 책으로 만들었다. 그는 이 책을 가지고 의주를 중심하여 위원과 강계 등지를 다니면서 전도하였다. 그를 통해 10여명의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다. 백홍준은 로스가 고려문1차 여행때에 성경을 전해줬던 사람의 아들이다. 그가 아들에게 성경을 읽게 하여 백홍준은 만주로 건너가 로스에게 세례를 받게 된다. 그 후 로스와 성서번역작업을 같이 했고, 이후 1887년 언더우드가 새문안교회를 창립할 때 서상륜과 함께 초대장로로 추대되었다. 그후로 마펫,게일선교사등을 안내하며 순회전도집회를 다니다가 1892년 체포되어 모진고문을 받고 옥중에서 목에 칼을 쓴 채 죽었다. 이것이 한국 개신교 사상 최초의 순교사건이었다. 
(사진:백홍준, 매서인-책을 파는 사람-들의 전도)

백홍준- 의주출신. 1874년 만주 고려문(高麗門)을 방문했다가, 우연히 영국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선교사인 J.로스(한국명 羅約翰)와 J.매킨타이어(한국명 馬勤泰)를 만나 개신교 신자가 되었다. 선교사들의 체류지인 뉴좡[牛莊]에서 그들에게 한국어와 역사 등을 가르쳐 주고 자신은 영어를 배웠다. 1876년 이응찬·이성하 등과 함께 세례를 받고, 선교사들과 함께 한문 성경을 한국어로 옮기는 성서번역작업에 착수하였다. 1887년 H.G.언더우드가 서울 정동의 자기 집에서 14명의 신자와 함께 한국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창립하면서 서상륜(徐相崙)과 함께 장로로 추대되었는데, 이 교회가 새문안교회의 전신이다. 그후로도 선교사인 S.마펫, J.게일 등의 안내자로서 순회전도집회를 주선하다가, 1892년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고 옥중에서 목에 칼을 쓴 채 죽었다. 이것이 한국 프로테스탄트 사상 최초의 순교사건이었다. 

이성하의 일화- 1883년 이성하가 성경을 등에 지고 봉천을 떠났다. 그는 압록강 건너편까지 이르렀으나 성경책을 그대로 가지고 무사히 들어설 것 같지 아니하여 잠시 밖으로 나가 주위의 사정을 살피기 시작하였다. 이성하의 거동을 수상히 여긴 주막집 주인이 방안에 놓아 둔 짐짝을 풀어보니 그 속에 국가에서 금지하는 책이 있어 너무나 겁에 질린 집 주인은 일부는 불에 태워 없이하고 나머지는 전부 압록강 물에 내던지었다. 뒤에 이 소식을 들은 로스 선교사는 "하나님의 말씀이 던져진 압록강물을 마시는 한국 사람들은 생명수를 얻게 될 것이고, 불에 탄 성경재는 한국교회를 자라게 하는 거름이 되리라"고 예언하였다. 그 예언이 응하여 오늘날 한국교회는 세계속의 교회로 서게 된다. 이성하는 한국인 최초로 세례받은 4인중의 한명이며, 로스를 도와 성서번역사업에 힘을 썼다. 그는 성경을 몰래 숨기고 귀국하여 의주 서울 등지에서 비밀리에 전도를 하여 복음의 씨를 뿌렸다. 그 후 그의 아내는 백홍준의 아내와 함께 서상륜의 중재로 압록강에서 행해진 언더우드의 세례식에서 세례를 받고 한국교회 최초의 여자세례교인이 되었다고 전한다.

이성하-의주 출신. 1874년 이응찬 ·백홍준 ·김진기와 함께 중국 동북성으로 가서, 스코틀랜드 선교사인 J.로스와 알게 되었고, 이어 로스의 처남인 J.매킨타이어(한국명 馬勤奉) 선교사도 사귀게 되었다. 
1876년 마침내 이들 4인은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세례를 받고, 로스를 도와 최초의 성서 한글번역사업에 정열을 쏟았다. 그는 이후 4복음서와 《사도행전》 등을 몰래 숨기고 귀국, 의주 ·서울 등지에서 비밀리에 전도를 하여 한국에 '복음의 씨'를 뿌렸다. 그 후 그의 아내는 백홍준의 아내와 함께 압록강에서 행해진 H.G.언더우드 집례의 대세례식에서 세례를 받고 한국교회 최초의 여자세례교인이 되었다고 전한다


식자공(인쇄공) 김청송의 일화-성경을 인쇄하면서 예수를 믿게 된다. 그리고 옛 고구려의 고도인 즙안을 중심으로 쪽복음을 나눠주며 전도하였다. 1884년 즙안에는 75명의 세례받고자 하는 자들이 로스선교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11월 눈이 엄청 내리는 날 로스는 추위를 무릅쓰고 즙안으로 가서 75명 남자에게 세례식을 거행한다. 

이상에서 보듯이 한인최초의 교회의 설립과 흩어짐에서 성서중심적 특징과 자발적 복음수용과 전도라는 한국초대교회의 한 전형을 발견하게 된다. 선교사를 찾아가서 세례를 받고, 그들을 불러와서 세례를 베풀게 했던 한인촌과 의주, 그리고 소래의 신자들, 이들에 의해서 자생적인 한국교회는 세워져 나갔던 것이다. 선교사의 역할이 컸지만, 한국인들의 자발적이고 수용적인 복음수용과 전도로 한국교회가 세워져갔다. 

1882. 일본을 통한 기독교의 만남- 이수정의 개종

-하나님의 역사는 만주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다. 이수정은 1882년 신사유람단 일원으로 일본으로 건너감. 성경을 접하게 되고 읽으면서 개종하기로 결심하고, 1883년 4월 낙스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음. 전 일본기독교대회에 한국을 대표해서 참석하여 한국어로 대표기도를 하고 신앙고백을 하게 되면서 일본에 있던 미국선교사들은 한국선교에 대한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 
(사진-일본기독교대회에 참석한 이수정)

-1883. 이수정은 미국교회에 서신을 보낸다. 지난날 한국에서 생명을 무릎쓰고 천주교를 믿었던 이야기를 서두로 얼마있지 않으면 한국에서도 신앙의 자유가 올 것임을 얘기하고 미국교회에 선교사파송을 강력히 요청한 것이다. 다음은 이수정의 편지의 일부이다. “여러분의 나라는 기독교국가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우리에게 복음을 보내주지 않으면 나는 다른 나라가 그들의 교사들을 신속히 파송하리라 생각하며, 또한 그 가르침이 주님의 뜻과 일치하지 않을까 하여 걱정하는 것입니다. 비록 나는 영향력이 없는 사람이지만 여러분들이 파송하는 선교사들을 돕는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 편지가 미국 선교잡지에 소개되면서 미국선교본부는 언더우드를 선교사로 임명, 파송하게 된다. 피선교지의 사람들이 선교사를 요청하여 선교가 시작된 예는 선교역사가운데서 보기 드문 현상이다. 한국인들의 주체적이고 자발적인 복음의 수용에 대해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이러한 사람을 만난다는 게 선교사들에게 얼마나 큰 격려와 힘이 되었을까? 사역을 해 보지만, 이런 주도적인 몇 사람을 통해 사역이 힘있게 일어나게 된다. 

-1885. 마가복음서를 번역한 이수정. 성서공회 루미스목사와 함께 성경의 한국어 번역에 착수, 이른바 현토(縣吐)성서(한문 성서에 한국식 토를 단 것)인 4복음서와 사도행전을 완성하고 한글 마가복음을 출간하였는데, 이것이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등 최초로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이 가지고 온 성서로, 같은 해 만주 봉천에서 로스 목사와 백홍준이 만든 누가복음과 함께 최고(最古)의 한글판 성경이다. 한국에 들어가기 전에 일본에 들른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피선교지의 언어로 이미 성경이 번역되어 있음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는다. 선교지에 가서 성경을 번역하는 데에는 많은 노력과 시간이 걸린다. 그런데 한국인에게는 이미 그 나라 말로 성경이 번역되어 있었으며 오히려 선교사를 기다리고 있는 사정이었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 아니었겠는가! 그런고로 우리 땅에서는 복음의 씨가 속히 자라 열매를 거두기가 아주 손 쉬었다. 1885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이수정이 번역한 마가복음을 한아름씩 들고 한국으로 들어갔다. 이수정은 또 윤치호등 일본에 온 유학생들에게 전도하여 85년 7명이 모여 예배를 드린 것이 도쿄 유학생회의 모체가 되었다. 이듬해 귀국하였다가 수구파(守舊派)에게 살해되었다. (사진-이수정이 번역한 마가복음) 

이처럼 만주와 일본에서 동시에 일어난 한국인들의 자발적인 기독교의 수용과 전도, 그리고 선교사파송을 요청하면서 한국선교가 본격적으로 일어나게 될 것을 준비하였다. 


4. 초기선교사들의 입국과 활발한 선교사업

-본격적으로 외국선교사들이 입국하여 선교가 이루어지게 된 과정을 살펴보고, 초기선교사들과 그들의 선교사역을 살펴본다

-1882년 토마스선교사를 태운 제너럴셔먼호 사건으로 인해 미국은 군함을 이끌고 조선으로 와서 격전을 치른다. 이를 신미양요라 한다. 그 후 강압적인 한미수호통상조약을 맺게 된다. 이후 1883년 민영익을 대표로 한 견미사절단이 미국으로 간다. 거기에서 민영익은 미감리회의 가우처박사를 만난다. (사진-민영익을 대표로 한 견미사절단)

민영익을 만난 가우처박사는 한국선교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고, 한국선교를 위해 미국의 선교본부에 편지와 선교비를 보내게 되고 때를 같이 하여 이수정의 선교요청편지를 받으면서 이로 인해 본격적으로 한국선교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다. 미감리회는 1884년 스크랜튼(Wm. B. Scranton)박사와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그리고 스크랜튼의 어머니인 메리 스크랜튼(Mary. F. Scranton)이 한국선교사로 임명한다. 미 장로교회는 1884년 헤론(John W. Heron)을 한국최초의 선교사로 임명한다. 뒤이어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가 한국최초의 복음선교사로 임명된다. 하지만 한국땅에 가장 먼저 상륙한 선교사는 중국선교를 목표로 1883년 선교지로 떠났던 의사 알렌(Horace N. Allen)이었다. 

1884. 의료선교사 알렌(H.N. Allen) 미국공사관의 공의로 한국에 입국함
(사진-알렌,광혜원1,2,세브란스병원)
1883년에 중국에 왔지만 별다른 선교활동을 하지 못하던 알렌은 한국선교에 대한 소식을 전해듣고 한국으로 간다. 이로써 그는 한국에 상주하는 최초의 개신교선교사가 된다. 알렌은 이후에 벌어지는 수구파와 개화파사이의 싸움인 갑신정변에서 칼에 찔려 죽어가는 왕비 민비의 조카인 민영익을 살려주면서 왕실과 가까운 사이가 된다. 1885년 4월, 왕실은 알렌에게 한국최초의 서양 근대식병원인 국립병원 광혜원을 세우도록 허락한다. 이 광혜원은 후에 제중원으로 이름을 바꾸며 미국 실업가인 세브란스의 건축기금으로 현재의 연세대학교 세브란스병원이 되었다. 알렌은 왕의 어의가 되고, 광혜원은 이후에 들어오는 많은 선교사들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보호막의 역할을 하게 된다. 이같이 하나님은 국제수호통상조약이나 국내의 여러사건을 통해 선교사들이 들어오게 하시고, 사역을 시작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다.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을 통하면서도 인간이 계획하지 못했던 방법을 통해서 그의 목표를 이루어가셨다. 

1885. 4. 5 미국 장로교선교사 언더우드와 미국 감리교선교사 아펜젤러 부활주일에 한국 인천에 입국함. 이때부터 본격적인 한국선교가 시작된다. 그래서 1885년을 한국선교의 원년으로 부른다. 아펜젤러는 인천 제물포에 도착즉시 이같이 기도하였다. “우리는 부활주일에 여기 왔습니다. 이 날에 죽음의 철장을 부수신 주님께서 이 백성을 얽매고 있는 줄을 끊으시고 그들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얻는 빛과 자유를 누리게 하소서!” 언더우드는 독신이었고, 아펜젤러는 임신중인 아내와 함께 제물포항에 도착한다. 현지사정의 악화로 아펜젤러는 아내와 함께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가 2개월후에 입국하게 되고, 언더우드는 알렌의 도움으로 서울에 들어오게 된다. (사진-언,아,기도문)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1859.7.19~1916) - 미장로회의 첫 번째 복음파송선교사. 
(사진-언더우드1,2, 새문안교회, 벽돌교회, 그리스도신문, 언더우드관, 언더우드가계도, 언더우드가족, 언더우드 일가, 언더우드 일가의 무덤, 노춘경)


한국명 원두우(元杜尤). 1885년 아펜젤러와 함께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가 되어 한국에 와서 광혜원(廣惠院)에서 물리·화학을 가르쳤다. 한국선교를 결정한후 약혼자에게 한국으로 같이 가자고 했을때 no라고 하자 약혼을 파기하고 혼자서 한국으로 입국하였다. 이후 광혜원 여의사로 온 릴리아스 호턴과 결혼하고, 신혼여행으로 벽지순회전도여행을 다녀온다. 잘생겼다. 엘비스 프레슬리인줄 알았다. 1886년, 언더우드에 의해 국내에서 최초로 세례를 받은 사람은 노사도라고 불려지는 노춘경이다. 그는 알렌의 집에 갔다가 책상위에 있는 한문으로 된 성경과 책 한권을 몰래갖고(훔쳐서) 집에 가서 탐독하다가 예수를 믿기로 작정을 한다. 그리고 언더우드에게 와서 세례를 받고싶다고 한다. 당시 조선은 세례를 법적으로 금지하였다. 복음에 불타오르던 언더우드는 다른선교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노춘경에게 세례를 베푼다. 어느날, 한밤중에 서상륜이 언더우드를 찾아온다. 서상륜은 만주에서 로스선교사와 함께 성경을 번역하고 국내로 들어와서 황해도 솔내에 솔내교회를 세운 장본인이다. 서상륜은 솔내에 세례받기를 원하는 많은 이들이 있다면서 세례를 베풀어주기를 부탁한다. 그 때 언더우드는 이렇게 말한다. “누가 조선땅을 잠자고 있는 땅이요 미개한 나라라고 일렀는가! 누가 조선사람들을 게으른 백성이요 무지한 민족이라 하였는가!” 언더우드는 조정의 강압적인 태도로 인해 쉬이 결정하지 못하고 몇 개월이 흐르고.. 서상륜은 훗날 한국최초의 7인목사중 한사람이 되는, 동생 서경조를 비롯한 3명을 데리고 언더우드에게 다시 나타난다. “목사님, 목사님이 못오실 것 같아서 세례를 받으러 저희들이 올라왔습니다.” 세례를 베풀고, 이로 인해 언더우드는 담대함을 갖게 된다. “목사님, 솔내에는 세례를 받아야 할 사람이 또 있습니다.” 서상륜의 요청으로 얼마 후 언더우드는 솔내로 가서  세례를 베풀려고 하는데 한국에서는 세례가 금지되어 있어서 당시 중국영토였던 압록강까지 가서 세례를 집례한다. 70여명이 세례를 받은 것으로 나와있다. 언더우드는 단지 세례만 주었을 뿐이다. 이미 국내에는 자발적으로 믿고 전도하는 성도들과 교회가 세워져 있었다. 1887년, 14명의 사람들과 함께 자신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한국최초의 장로교회인 새문안교회가 시작된다. 그리고 솔내교회의 서상륜과 백홍준은 새문안교회의 초대장로가 된다. 1889년에는 기독교서회(基督敎書會)를 창설, 1897년《그리스도신문》도 창간, 1900년 기독청년회(YMCA)를 조직하였으며, 1915년에는 경신학교(儆新學校)에 대학부를 개설, 연희전문학교(오늘 연세대학교)로 발전시켰다. 성서번역위원회를 만들어 한글성서완역하는데 기여하다. 그는 "사람이 일을 아니하면 세상사는 재미가 없다"고 하면서 많은 일을 했다. 1916년 신병으로 귀국, 미국에서 죽었다. 그의 아들,손자,증손자까지 한국선교와 교육등에 헌신하였다. 언더우드의 부인 L S 호턴(한국 이름 호돈·好敦)은 광혜원 의사와 명성황후 시의(侍醫)로 인술을 펼쳤고, 언더우드 2세(한국 이름 원한경·元漢慶)는 3·1운동 당시 일제의 제암리 교회 학살사건을 폭로해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며, 연희대학교 명예총장이 된다. 언더우드3세(원일한)는 선교사요 교육학가로서 연세대학교에서 교수로, 총장서리로, 전쟁때에 UN통역으로 한미간 우호증진에 힘을 쏟았다. 그리고 얼마전(2002년) 언더우드4세는 지난 120년동안 한국에서 언더우드일가가 해야 할 일을 다했다면서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그들의 삶과 전부를 조선을 위해 기꺼이 바쳤다. 양화진에는 언더우드 4대의 묘역이 있다. 비문에 “언더우드 일가의 정신과 공적은 우리 겨레의 사랑과 함께 영원히 살아있을 것이다”고 적혀있다. 기독교기업인 e-land는 언더우드를 기념하여 옷의 브랜드로 만들기도 했다. 언더우드 한사람을 통해 한국초기 기독교와 교육, 사회전반에 걸쳐 많은 변혁과 변화가 있었다. 그 한사람뿐 아니라 그의 아내, 아들, 며느리, 손자, 손자며느리, 증손자에 이르기까지 한국을 위해 그들의 생명을 바쳤다. 양화진에는 언더우드 일가의 무덤이 있다.

언더우드의 기도- 오 주여,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여!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들을 옮겨 와 심으셨습니다.
그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주께서 붙잡아 뚝 떨어뜨려 놓으신 듯한
이곳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한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 사람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 있는지도,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 줄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주겠다고 하면
의심하고 화부터 냅니다.

조선 남자들의 속셈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나라 조정의 내심도 보이지 않습니다.
가마를 타고 다니는 여자들을 영영 볼 기회가 없으면 어쩌나 합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해야 할 일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이
볼수 있는 날이 있을 줄 믿나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조선의 믿음의 앞날을 볼수 있게 될 것을 믿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황무지 위에 맨손으로 서 있는 것 같사오나
지금은 우리가 서양 귀신 양귀자라고 손가락질 받고 있사오나
저희들이 우리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하늘나라의 한 백성,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나이다.

지금은 예배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의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


아펜젤러[Appenzeller, Henry Gerhard, 1858.2.6~1902] 
(아펜젤러,성서번역자들,조선그리스도회보,동상,정동교회1,2,최병헌목사,배재학당,무덤,비문,전도,엘리스 아펜젤러비문)


1885년 언더우드와 함께 미감리회 파송선교사로 한국에 왔다. 배재학당(培材學堂)을 설립하였다. 배재학당은 고종이 지어준 이름으로 정부의 정식인가를 받은 한국 역사상 최초의 근대식 교육 기관이다. 감리교 최초의 교회인 정동제일교회를 세웠다. 1887년 언더우드, J.S.게일 등과 함께 성경 번역사업에 참여하였다. 그는 암기 위주인 한국의 교육방식을 이해중심적인 교육방식으로 고치는 데도 크게 공헌하였다. 언더우드와 함께 YMCA를 설립을 주도했다. 그의 행적은 서울에만 머물지 않았다. 교회가 출범하기 전인 4∼5월에는 평양을 답사, 선교요충지임을 확인하고 돌아왔고 88년 봄에는 정부의 소환명령으로 중도 포기했지만 언더우드와 함께 북부지방 전도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이후에도 수차례 여행에 나서 평생 조선팔도중 6개 도에 걸쳐 7천2백리길을 돌았다고 하니 당시 교통사정등에 미루어 그 열정이 놀랍기만 하다. 1902년 목포(木浦)에서 열리는 성경번역자회의에 참석차 배를 타고 가다가 목포 앞바다에서 충돌사고로 익사하였다. 마포구 양화진외국인묘지에 묻혔다. 아펜젤러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쓰여있다.‘사자처럼 우람하고 여인처럼 우아한가 하면, 주님을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용감하게 덤벼드는 정열의 감리교인 아펜젤러. 평생을 두고 이웃만을 섬기며 주님을 증거한 하나님의 사람, 아펜젤러. 아펜젤러의 딸인 앨리스 아펜젤러는 조선에서 태어난 최초의 서양아이이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아버지가 생명을 바친 조선으로 다시 들어와서 이화여자전문학교 초대 총장을 지내며 이화여대의 기초를 마련했다. 앨리스 아펜젤러는 1950년, 한국전쟁을 넉달 앞두고 66세의 나이에 이화여대 학생들에게 설교하다가 죽음을 맞는다. 그의 묘비에는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노라 (Not to Be ministered Unto But to Minister)”고 쓰여 있다. 아펜젤러의 막내도 이화여대 교수로 선교에 헌신하였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한국선교사적으로, 그리고 교육, 사회적으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들이 인천 제물포항에 입항한 1885년을 한국기독교의 원년으로 본다. 지난 1985년에 한국 기독교 100주년 기념식을 했다. 그들 당대에만 아니라 그들의 아들, 손자, 증손자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한국사랑은 유별나다. 그들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이곳에 있다. 

존 헤론(John W. Heron, 惠論)
테네시 의과대학을 개교이래 최고의 성적으로 졸업한 수재이다. 학교의 교수로 남아달라는 학교당국의 제안을 만류하고 주님이 말씀하신 땅끝이 어디인지 찾다가 조선으로 선교지를 정하고 준비한다. 선교본부에 조선으로 파송을 요청하다. “의약품과 의료기기 얼마를 준비할수만 있다면 나는 지금이라도 당장 조선으로 떠나겠습니다.” 1884년 장로교 최초의 조선선교사로 임명받는다. 일본으로 갔다가 알렌과 언더우드,아펜젤러가 조선으로 입국한 후에 조선땅을 밟는다. 알렌의 뒤를 이어 2대 광혜원 원장을 맡아서 생명을 아끼지 않고 환자들을 돌보다가 죽음을 맡는다. “조선과 조선사람들을 더 ..더..뜨겁게 사랑하고 싶소. 그동안 다하지 못한 것...”병원의 조수들,집안일을 돕던 일군들 모두 불러모았다. “나를 사랑해주고 도와준 친구들 감사합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은 여러분 한분 한분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셨고 그 생명을 바치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다만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1890년 7월 26일 헤론은 죽음을 맞는다. 정부에서는 양화진언덕을 허락해준다. 헤론은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처음으로 묻힌다. 양화진은 한국을 사랑했던 선교사들과 외국인들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묘비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The son of God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라고 쓰여 있다. 헤론의 아내와 자녀들도 계속해서 한국의 선교를 위해서 삶을 드렸다.

메리 스크랜톤(Scranton, Mary Fletcher Benton, 1832-1909)
미국 감리회 여선교부 최초의 여선교사이다. 남편을 일찍 여의고 의사인 아들 스크랜톤선교사와 함께 아펜젤러부부와 함께 1885년 조선땅을 밟는다. 당시 조선여자는 이름도 없었다. 1886년, 메리 스크랜톤은 1명의 거지여자아이를 시작으로 여자학교를 설립한다. 그것이 오늘날 이화여대의 전신인 이화학당이다. 오늘날의 연세대,이화여대등 처음엔 몇 명으로 시작했다. 설립한 이의 비전이 결국 성취되어지는 것을 본다. 스크랜톤의 말이다. “..나는 믿고 있다. 이곳에서 이 땅 조선의 여인들이 인간의 권리를 찾는 문이 열리기 시작할 것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바라는 것, 말씀을 믿고 바라는 그것이 실상이 되어 든든한 건물이 세워지고 그 건물속에서 어느나라 여성보다도 당당한 딸들이 늠름하게 걸어나올 날이 있을 것이다. 이 일은 주님께서 시작하신 일이다.” 메리 스크랜톤의 비전이 오늘날 성취되어서 이화여대뿐 아니라 한국의 여성기독교육에 큰 변혁을 가져온다. 비문에는 “오늘 이 땅에 자유 사랑 평화의 여성 교육이 열매 맺으니, 이는 스크랜톤 여사가 이화동산에 씨 뿌렸기 때문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사진-메리스크랜톤,이화학당,비문, )

스크래톤선교사(Scranton, B. William, 1856-1922)
미 감리회 파송 선교사. 1885년 어머니 메리 스크랜톤과 아펜젤러부부와 함께 조선땅을 밟았다. 광혜원에서 의료를 했다. 왕립병원인 광혜원(제중원)은 사회 중,상류층을 위한 병원이었다. 스크랜톤은 버림받은 계급, 가난한 사람들, 그늘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조선사람을 향한 병원을 시작한다. 1885년, 세워진 무료병원이 제동병원이다. 고종임금은 스크랜톤의 한국이름인 시린돈의 ‘시’자를 따서 시병원이라는 이름을 하사한다. 스크랜톤은 상동교회를 세우고 가난한 서민들을 위해 의료로, 교육으로 삶을 드렸다. (사진-시병원, 상동병원교회, 알렌과 스크랜톤) 

호머 헐버트(Hulbert, Homer Bezaleel, 1863-1949)
육영공원교사로, 선교사로 와서 한국의 교육에 힘썼다. 그는 “한국이 살아갈 방도는 교육뿐이며, 한국을 정복한 민족(일본)과 대등하게 될 때까지 교육에 전념해야하며, 순수한 인간성을 무기로 능력을 갖추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교육 선구자로서 23년 간(1886-1909) 봉직하면서 한국의 문화, 역사 등 각 분야에서 한국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린 열정적 선교사였다. YMCA창설을 주도했으며, 조선의 국권회복을 위해 고종의 외교고문, 밀사로 활약하며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되기도 했다. 한국전통노래인 아리랑을 서양악보로 적은 사람도 헐버트였다. 태어난지 1살이 지났을뿐인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며 아리랑을 불렀다고 한다. 묘비에는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고 자신의 조국보다 한국을 위해 헌신한 헐버트... ”이라는 추모비와 “나는 웨스트민스터 성당보다도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I would rather be buried in Korea than in Westminister Abbey)”는 어록이 있다. 
(사진-헐버트,고종의 친서,비문)


셔우드 홀 가족(Sherwood Hall)
아버지는 제임스 홀이며 평양에서 의료선교를 하다 일찍 생명을 마감하고, 어머니는 로제타 홀이며 맹인 점자교육의 창시자이며 평양 기홀병원을 세웠다. 한국최초의 여의사 김점동을 길러내었다. 고려대병원의 모체인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를 세웠다. 아들 셔우드 홀은 조선에서 태어났다. 의사요 선교사로서 1932년 크리스마스 씰을 시행하여 결핵퇴치운동을 벌였다. (사진-크리스마스 실) 위 실은 우리나라 최초의 크리스마스 실로 첫 해(1932-33)의 남대문과 두번째 해(1933-34)의 미국의 실을 모델로 한 크리스마스 캐럴을 부르는 소년 소녀의 모습 (사진-셔우드홀,셔우드홀부부,홀과 거지들,평양병원,셔우드홀부부,최초의X-mas 실, 비문) 아버지,어머니,아들,딸,며느리 모두 양화진에 묻혔다. 


사무엘 F. 무어(Moore, Samuel Forman)
1892년 한국으로 들어왔다. ‘백정해방운동의 지도자’라는 호칭으로 불리웠다. 구원받았지만 당시 양반과 서민의 차별이 존재하였고, 특히 백정에 대한 양반의 차별이 대단하였다. 양반출신 교인들은 백정들과 함께 예배드릴 수 없다고 하여 교회를 분리하여 나가는 일도 있었다. 이에 무어선교사는 교회내의 백정차별을 없애고, 오히려 서민과 백정들을 향한 사역에 헌신하여 서민과 백정선교의 열매를 많이 맺었다. 1894년 승동교회를 세운지 4년이 지났을때 세례받은 108명중 30명이 백정출신이었고 1898년 132명의 백정이 세례를 받는다. 1920년 백정자녀들에 대한 교육열이 뜨거워져서 40%가 교육을 받았는데, 당시 일반인들의 자녀들중 5%만이 교육을 받았음을 볼때 대단한 변화였다. 그의 묘비에는 우리말로 “조선 인사를 사랑하였고 또 그들을 예수께로 인도하기를 원하였다.”라 기록되었다. 그리고 영문으로 '예수그리스도의 충성된 종, 아름다운 인격과 정신의 소유자, 한국인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을 몸소 실천하셨다'라는 기록도 있다.


하디(R.A.hardie)  
-캐나다 YMCA파송 선교사. 의사요 선교사로서 강원도에서 의료개척사역을 했으나 열매를 맺지 못함.
-1903년 원산에서 열렸던 기도회에서 하디선교사는 공개적으로 선교사로서의 자신의 무력함을 고백하는 통회의 기도를 하였다. 이것이 부흥운동의 발단이 되었다. “나는 3년동안 남감리회가 강원도에 세운 교회에서 애써 일해왔으나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한국교회가 부흥이 안되는 원인이 한국인에게 있는 줄 알았는데 그 원인이 나한테 있음을 알았습니다.아무리 수고하고 정성을 다해 일을 한다고 해도 성령의 임재와 능력이 없으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나의 교만과 완악함과 신앙의 부족을 회개합니다” 한 선교사의 고백적인 기도가 발단이 된 이 운동은 그후 평양일대와 전국 각지의 부흥운동과 회개운동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대부흥운동의 불길이 점화되었다.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길선주목사가 또 외국선교사를 미워한다는 것을 회개하였을대 회개와 부흥의 역사는 전국 각지로 퍼져가게 되었다. 사역자가 먼저 회개하고 무력함을 고백할 때 그때 인간의 역사는 그쳐지고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된다. (사진-하디,길선주,장대현교회1,2, ㄱ자교회, 하디무덤)

이 부흥운동은 한국에서만 머무르지 않고 만주와 몽고 북경지방까지 확산되었다 한다. 중국을 통해 기독교를 받아들인지 채 30년이 안되어 한국교회는 그 열매를 다시 중국에 전해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후에도 보겠지만 한국은 짧은 선교역사에도 불구하고 선교사를 파송하는 일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것으로 인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는 나라가 되었다. 


5.초기 한국기독교의 특징

1)성서중심적 특징 - 선교사가 한국에 들어오기 전에 먼저 성경이 번역되었다. 1887년 만주에서 로스와 서상륜, 백홍준, 이응찬등을 통해 예수셩교젼서가 번역되었고, 1885년 일본의 이수정과 루미스등을 통해 마가복음이 번역되었다. 그리고 권서인,매서인들을 통해 성경이 전달되어지고 성경을 통해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고 변화되게 된다. 이후에 계속되는 부흥에는 항상 성경이 중심이 되었다. 한국기독교에는 ‘말씀사경회’라는 독특한 모임이 있었다. 말씀의 기초위에 한국의 기독교와 교회는 견고히 세워질수 있었다. 오늘날에도 동일하다. 성경이 기초이다.


2)자발적 복음수용과 전도 - 일본에서 이수정의 요청으로 언더우드를 비롯한 미국선교사들이 조선으로 오게 되었고, 인쇄공 김청송의 요청으로 로스선교사가 즙안으로 가서 75명에게 세례를 베풀고, 서상륜등의 요청으로 로스, 언더우드가 소래교회로 가서 세례를 베풀게 되는 등 한국인들의 자발적인 복음수용과 요청으로 선교사역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한국최초의 교회인 소래교회등 교회를 설립하고 전도하는데 한국인들의 주도로 되어졌다. 1907년 대부흥성회가 있었던 장대현교회는 한석진을 비롯한 한국인들에 의해 세워진 교회였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복음을 받고 가만히 있을수 없었다. 생명을 무릅쓰고 복음을 전했고, 교회를 세웠다. 로스선교사가 선교본부에 보낸 편지를 다시 보자. “또한 한국인들은 중국인보다 천성적으로 꾸밈이 없는 민족이고 보다 종교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으므로, 나는 그들에게 기독교가 전파되면 곧바로 급속하게 퍼져나갈 것으로 기대한다..”주도적이며 자발적인 태도로 복음을 수용하고 가까운 이들에게로 가서 전도했던 모습이 오늘 우리에게도 있어야 한다. 


3)초기 한국선교사들의 헌신 - 알렌,헤론,언더우드,아펜젤러,제임스홀,스크랜톤,메리스크랜톤,헐버트등 한국에 온 선교사들의 생명을 드린 헌신으로 이 땅에 많은 믿는 자들과 교회의 열매를 맺게 되었다. 조선을 사랑하여 웨스트민스트사원에 묻히기보다 한국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고 했고, 내 생명이 천이 주어진다 해도 그 모든 생명을 한국을 위해 드리기를 원하노라고 했다. 때로는 한국에 온지 한달만에 죽기도 하고, 아내를 잃어 세 번씩 결혼하기도 하고, 1살된 아들이 먼저 죽어 떠나보내며 아리랑을 부른 선교사도 있었다. 자기들 생명보다 더 한국을 사랑했던 선교사들의 헌신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여기에 있다. 선교사들 당대에서만 아니라, 그들의 아내, 아들, 손자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한국사랑은 특별했다. 우리는 지금 그들의 헌신을 먹고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생명을 드려 섬길 사람들은 누구인가?


4)짧은 선교역사이지만 선교사를 파송함 - 한국교회는 초창기부터 외지선교에 대한 열망이 높았다. 독노회 창설로 조직을 정비한 장로교의 첫 사업중의 하나도 이기풍목사를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한 일이었다. 이어 1900년에는 한석진목사를 일본 유학생 선교사로, 최관흘 목사를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선교사로, 이듬해에는 김영제 목사를 북간도 선교사로 보내 동포선교를 벌였다. 물론 감리교도 만주에 이화춘목사 배성식·손정도 목사 등을 파송했고 기타 교파들도 자체 선교를 일찍부터 벌였다. 산동성선교를 위해 1913년 박태로 사병순 김영훈 등 3인을 정식 선교사로 산동성에 파송했다. 선교사를 받아들인 피선교지가 이처럼 빨리 선교사를 파송한 선교역사는 드물다. 로스의 예언이 적중했다. 오늘날 한국은 미국을 이어 세계 제 2의 선교대국이다. (사진-장로교초대7인목사중 한석진-왼쪽아래,이기풍-왼쪽두번째-을선교사로파송, 이기풍-우학리교회)


5)고난을 통해 순전한 믿음을 가짐
초기에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생명을 걸로 믿어야 했다. 한 사람의 크리스찬은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왜냐? 순전한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다른 동기가 없었다. 고난가운데 믿음이 순전해졌다. 오로지 구원하신 주님에 대한 감사와 아직 구원받지 못한 민족에 대한 측은한 마음과 사랑으로 복음을 전하고 주를 섬겼다. 이후 일제식민지기간과 한국전쟁등 특히나 고난이 많은 나라였다. 그 고난을 통해 순전해졌다.


6.초기 한국에 온 선교사들의 삶과 사역과 죽음(동영상)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1859~1916)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J. D. 언더우드) 

아펜젤러[Appenzeller, Henry Gerhard, 1858~1902] 
-앨리스 아펜젤러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습니다" 


메리 스크랜톤(Scranton, Mary Fletcher Benton, 1832-1909)
-“오늘 이 땅에 자유 사랑 평화의 여성 교육이 열매 맺으니, 이는 스크랜톤 여사가 이화동산에 씨 뿌렸기 때문이다.

H. B. 헐버트(Hulbert, Homer Bezaleel, 1863-1949)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고 자신의 조국보다 한국을 위해 헌신한 헐버트 ”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기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I would rather be buried in Korea than in Westminister Abbey)”

존 W. 헤론(John W. Heron) 
-양화진에 최초로 묻힌 의료선교사. 광혜원원장, 고종임금 시의(侍醫). 한국체류 5년 33세 별세 
-묘비문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The son of God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제임스 홀, 로제타 홀부부, 셔우드홀
-제임스 홀 : 평양개척 의료선교사. 광성학교 설립.
-“내가 조선인의 가슴에 청진기를 댈때 언제나 나의 청진기도 그들의 심장소리와 함께 두근거렸다. 나는 아직도 조선을 사랑한다”
-로제타 홀 : 평양 기홀병원설립. 맹인 점자교육 창시자
-셔우드 홀 : 크리스마스 씰을 발행하여 결핵퇴치운동 펼침
-마펫선교사 “홀은 주님의 명령에 따라 살다가 죽었다. 주님이 명령하매 한국에 기꺼이 왔고, 다시 명령하매 세상을 떠나 하늘나라에 갔다. 그는 위대한 신앙, 위대한 사랑, 위대한 자비의 사람이다.”

W.V. 존슨(Johnson, Walter Virgil, 1874-1903)
-한달간의 선교준비기간중 천연두로 생명을 잃음
-묘비문 "하나님께 죽도록 충성을 다하였습니다"

K.R. 켄드릭(Kendrik, Ruby Rachel, 1883-1908)
-1년동안 황해도 개성에서 여학교교사로 재직함. 급성맹장염으로 죽음.
-묘비문 “만일 내게 천의 생명이 주어진다 해도 그 모두를 한국에 바치리라"
-캔드릭의 유언 : "내가 죽거든 텍사스 청년들에게 10명, 20명, 50명씩 한국으로 나오라고 일러주세요" 


J.A 젠센(Jensen, Anders Kristian, 1897-1956)
-한국 전쟁에서 고난을 극복한 A.k.젠센.
-묘비문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 "사람은 자기의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고, 조문객은 거리를 왕래하며. 육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J.P. 캠벨(Campbell, Josephine Eaton Peel, 1853-1920)
-감리회 첫 여선교사 배화(培花)의 초석 캠벨
-'내가 조선에서 헌신하였으니 죽어도 조선에서 죽는 것이 마땅하다'라 

D. A. 벙커(Bunker, Dalziel A)
-최초로 애국가 만들고 옥중 전도 시작한 벙커 선교사 
-묘비문 “날이 새이고 흑암이 물러갈 때까지”


사무엘 F. 무어(1860~1906) 
-양반과 천민 신분 제도를 철폐하며, 한국서민을 사랑하여 백정선교에 헌신
-'예수그리스도의 충성된 종, 아름다운 인격과 정신의 소유자, 한국인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을 몸소 실천하셨다'



조지 프리드먼(George Friedman)




조지 프리드먼(George Friedman)
헝가리 태생의 미국 군사정치 전문가

코넬 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고 루이지애나 주립대 교수로 일하다가, 1996년 정치, 경제, 외교 싱크탱크인 스트랫포(STRATFOR, Strategic Forecasting, Inc.)를 설립했다.
저서로 '넥스트 디케이드(The Next Decade)', '100년 후(The Next 100 Years)' 등이 있다.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는 국제정세 분석가이자 미래 예측가. 정세 분석에 있어 놀라운 적중률로 인해 “21세기의 노스트라다무스”라 불린다.
1949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난 조지 프리드먼은 어렸을 때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
뉴욕 시립대에서 정치학을 공부했고 코넬대에서 정부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민간 분야에서 활동하기 전까지 미 국방부 장기전략 싱크탱크 ONA, 미 육군 국방대학, 미 국립 국방대학, 랜드 연구소 등에서 안보와 국방 문제에 관해 강의와 자문을 수행했다.

조지 프리드먼은 현재 지정학적 관점에서 국제 체제의 흐름을 분석하고 예측하는 매체인 지오폴리티컬 퓨처스(Geopolitical Futures)의 설립자이자 회장으로 있다(www.geopoliticalfutures.com).
지오폴리티컬 퓨처스를 설립하기 이전에는 국제정세 및 경제 분야 민간 정보회사인 스트랫포(STRATFOR)의 회장으로 있었으며, 2015년에 퇴직했다.

조지 프리드먼은 자신의 전작인 『100년 후The Next 100 Years』에서, 장기적인 측면에서 전 세계적인 권력 구도가 어떻게 변화될지를 예측한 바 있다. 이 책 『21세기 지정학과 미국의 패권전략』에서는 세계 각 지역의 정세와 세력 구도를 분석하고 예측하면서 잠재적인 도전 세력의 부상을 억지하고 미국의 패권을 유지하기 위한 전략을 제시한다. 조지 프리드먼은 자신의 정세 예측이 정확한 이유에 대해 "사람들이 말하려고 하는 것을 듣지 않고, 그들이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그 위에 있는 힘을 보려고 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저서 100년 후는 국내에서도 아주 유명한 책입니다.  현대판 '노스트라다무스'로 유명한 그가 향후 50년 동안 세계 흐름 및 국제 정세에 대한 부분을 설명합니다.

 

2017년 본격적으로 시작된 미국과 중국은 패권국으로서의 다툼이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이에 세계 국가들은 미국과 중국에 줄을 서는 모습입니다. 2020년 6월 30일 제네바에서 열린 홍콩 국가보안법에 대하여 회의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명확하게 나라가 갈라진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홍콩안전법 지지하는 국가는 53개국 비판하는 국가는 28개 국가입니다.  

 



푸른색이 '홍콩 보안법 지지'국가, 노란색이 '홍콩 보안법 반대' 국가다.ⓒAxios

홍콩보안법을 지지하는 국가들에게는 두가지 특징이 나타납니다. 첫번째는 대부분 독재국가이며 반미 국가이고, 두번째는 중국에게 많은 빚이 있는 국가들입니다. 물론 미국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미국은 유엔 인권위원회에 탈퇴를 했기 때문입니다.

 

PPP와 중국의 인구 그리고 친중국가들의 여러 전반적인 상황을 보게 된다면 중국이 미국을 넘어 세계 1위국가가 되는 것은 필연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중국은 미국보다 여러 불리한 입장에 있습니다. 지리적입장으로는 유라시아는 분열되어 있습니다. 히말라야로 동남아시아와 분리되어 있고 중앙아시아와는 높은 산맥들이 가로막고 있습니다. 위쪽으로는 사막이 있고 시베리아가 있고요 동쪽으로는 태평양이 펼쳐져 있습니다. 중국과 국경을 맞닿은 나라는 14개가 있지만 동남아시아 섬국가까지 합치면 약 20개로 늘어납니다. 아시아에서는 중국을 견제할 수 있는 국가로 일본과 인도가 존재하며(한국은 저울질하고 있기 때문에 제외) 중국은 강제적으로 국방에 비용을 최대한 지출해야하는 상황에 놓여있습니다.

 

또한 중국은 분열되어 있는 나라입니다. 명목상으로 중국은 하나의 거대한 땅을 소유하고 있지만  내몽골, 신장 위구르, 티베트, 광지 좡족, 조선족 등 내부에서도 분열되어 있습니다. 이 많은 수의 중국자치구들은 인권침해로 인해 항상 시위가 일어나고 테러가 일어납니다. 홍콩도 그 중하나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은 이러한 자치구를 강제수용소 설치 홍콩보안법 통과 내몽골에 중국어 필수과목, 시진핑 우상화 등 여러가지 방안으로 외곽부를 묶어두려고 애씁니다. 이러한 곳에 에너지를 써야하는 중국은 미국에 비해 굉장히 불리한 입장에 처해 있습니다.

 

경제적으로는 중국은 전세계 공장을 자처하며 엄청난 공장을 설립하였고 또 최대 수출국입니다. 이러한 엄청난 수출로 중국 경제 성장은 7~9%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중국 입장에서 보면 미국은 중국의 최대 고객입니다. 왜냐하면 미국은 중국의 최대 수입국이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미국에서 수입을 원천적으로 막아버린다면 중국이 고속 성장은 불가능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일대일로 등 다양한 방법으로 고객을 모색하려고 했습니다. 코로나 이전에는 유럽 또한 여러 친중국가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또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중국 내수로 버티는 것은 한계가 분명존재합니다. 중국내에서 고부가 테크놀로지 공산품을 소비할 수 있는 인구는 딱 정해져있습니다. 이 말은 즉, 대부분 중국인들은 그러한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중국이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고속성장도 그 이유를 한몫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권에 문제가 있더라도 그들은 참을 수 있었던 것이죠.

 

그렇지만 앞으로 중국의 고성장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최대 고객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미국이 중국의 조건을 결정합니다. 수출 및 중국 부근의 분쟁지역 가속화시킵니다. 중국의 부흥 또한 미국이 수입을 해줬기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 중국뽕에 취한 사람들은 이러한 미국에 이익이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맞습니다. 중국은 구소련을 붕괴시키기 위한 하나의 카드였고 급부상하는 일본을 견제하기 위한 카드였습니다. 이러한 중국을 요긴하게 쓸 수 있었기에 대만과 사이도 저버린 미국입니다. 하지만 이제 중국은 미국의 타켓이 되었고 미국은 중국을 무너뜨리기 위해 친미 국가를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이번 강연에는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정재호 교수님과 서울대 국제대학원 안덕근 교수님이 참여하여 토론을 이어나갔습니다.  유튜브로도 공개 방송을 했습니다. 관련된 내용은 아래 링크에 있습니다. 국제 지정학에 관심이 많은 분이라면 충분히 도움이 되는 자료입니다.




성령(보혜사)


오늘날 우리의 삶 속에서 성령의 역할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인류에게 주신 모든 은사들 가운데 성령의 임재보다 더 큰 선물은 없습니다.
성령께서는 많은 기능과 역할과 활동을 행하십니다.

첫째, 어디에서나 모든 사람들의 마음 속에 역사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도록”(요한복음 16:7-11)
이 세상에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인정하든 않든, “하나님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공정하고 충분한 논증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사람들의 마음에 적용하여 그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만드십니다.
그 확신에 응답할 때, 우리는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가 일단 구원을 받고 하나님께 속하게 되면 성령은 영원토록 우리의 마음에 거주하시면서 우리가 영원토록 하나님의 자녀인 사실을 확증하고, 보증하며, 증거하기 위해 인치십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돕고 위로하고 인도하실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 14:16).
이 구절에서 “보혜사”로 번역된 헬라어 원어의 의미는 “함께 부름을 받은 자”라는 뜻으로서, 격려하고 위로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성령께서는 신자의 마음 속에 영원히 거주하십니다(롬 8:9; 고전 6:19-20; 고전 12:13).
예수께서는 이 세상을 떠나시면서 만일 우리와 개인적으로 함께 계셨더라면 우리에게 행하셨을 일 들을 수행하도록 자기 대신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그 일들 중에는 진리는 드러내는 일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예수님은 그분의 제자들에게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라”(요 16:13)

이처럼 성령께서는 우리의 마음에 예배와 교리와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련한 하나님의 모든 경륜을 알려주십니다.
성령께서는 궁극적인 인도자이시며, 앞서 가시고, 길을 인도하시고, 장애물을 제거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모든 것을 분명하고 자명하게 알게 하십니다.
성령께서는 모든 영적인 일들에 대해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성령의 인도하심이 없이는 오류에 쉽게 빠질 것입니다.
성령께서 진리에 대해서 알려주시는 가장 중요한 부분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가르침입니다(요 15:26; 고전 12:3).
성령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성육신, 메시아 되심, 고난과 죽음, 부활과 승천, 하나님의 오른 편에 승귀하심 , 모든 것을 심판하시는 그분의 역할에 대해 우리에게 확신시켜줍니다(요 16:14).

성령의 역할 중 또 다른 역할은 은사를 주는 역할 입니다.
고린도전서 12 장은 이 땅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기능을 감당할 수 있도록 신자들에게 부여된 영적 은사에 대해 설명합니다.
이 모든 은사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나타내고 그분을 영화롭게 하면서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대사가 되도록 하기 위해 크든 작든 성령께서 주신 은사 입니다.

성령님은 또한 우리 삶에서 열매를 맺는 역할을 하십니다.
그분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우리의 삶 속에서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라는 열매를 맺는 일을 시작하십니다(갈 5:22-23).
이것들은 우리의 육체의 일들이 아닌데, 이는 육체는 이러한 열매를 맺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열매는 우리 삶에서 역사하는 성령의 열매들입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의 삶에 거하시며 이러한 모든 기적적인 기능을 수행하고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며 결코 우리를 떠나시거나 버리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우리에게 큰 기쁨과 위로의 원인이 됩니다.




아모스 3:7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교회(敎會)와 교회당(敎會堂)의 관계

1. 영혼(靈魂)과 육신(肉身)의 관계
2. 본질(本質)과 현상(現像)의 관계

(예) 콩깍지 - 콩과 깍지의 관계
(예) 바나나 - 과육과 바나나 껍질의 관계
(예) 사과 - 과육과 껍질의 관계

마태복음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영혼                육신
 본질                현상
   콩                  깍지


이사야 14:12-13. / 음부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창세기 3:4-5


마태복음 4:5-6

마가복음 9:22


마태복음 27:5
/ 목메어 자살


사무엘상 31:4
/ 할복 자살(割腹 自殺)

벨 할, 배 복 - 배를 갈라 자살함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것은 잘못한 것
잘못함으로 천국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는 것
잘못한 것을 통하여 선한 것으로 인도하신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

잘못을 딛고 일어나라
베드로가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한 것은 잘못한 것이다
그러나 잘못한 후에 베드로를 찾아가서 일으켜 세우신 것은 사도 베드로가 되게 하신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궁으로 불러들였다.
결정적 실수 때문에 회개하며 살아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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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서 4장 4절을 보면 생수가 아닌 불로 나타나는 성령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는 주께서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기시며 예루살렘의 피를 그 중에서 청결하게 하실 때가 됨이라.” 여기서 이사야는 심판하는 영을 소멸하는 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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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세례

마태복음 3: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I baptize you with water for repentance. But after me will come one who is more powerful than I, whose sandals I am not fit to carry. He wi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and with fire.

마가복음 1: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
I baptize you with water, but he wi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누가복음 3:16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John answered them all, "I baptize you with water. But one more powerful than I will come, the thongs of whose sandals I am not worthy to untie. He wi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and with fire.



마태복음 3: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As soon as Jesus was baptized, he went up out of the water. At that moment heaven was opened, and he saw the Spirit of God descending like a dove and lighting on him.

요한복음 1: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줄 알라 하셨기에.
I would not have known him, except that the one who sent me to baptize with water told me, 'The man on whom you see the Spirit come down and remain is he who will baptize with the Holy Spirit.


사도행전 1: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For John baptized with water, but in a few days you will be baptized with the Holy Spirit.

사도행전 11:16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 받으리라 하신것이 생각났노라.
Then I remembered what the Lord had said: 'John baptized withwater, but you will be baptized with the Holy Spirit.


마태복음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Therefore go and make disciples of all nations, baptizing them in the name of the Father and of the Son and of the Holy Spirit.


사도행전 8:16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
because the Holy Spirit had not yet come upon any of them; they had simply been baptized into the name of the Lord Jesus.


사도행전 10:47
이에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하리요 하고.
Can anyone keep these people from being baptized with water? They have received the Holy Spirit just as we have.


성령 세례를 받는 비결

사도행전 2:38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Peter replied, "Repent and be baptized, every one of you, in the name of Jesus Christ for the forgiveness of your sins. And you will receive the gift of the Holy Spirit.





성령 세례를 받은 결과                

고린도전서 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For we were all baptized by one Spirit into one body--whether Jews or Greeks, slave or free--and we were all given the one Spirit to drink.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성령(聖靈)
                                                                        파라크래토스(παράκλητος)

파라크래토스(παράκλητος) ου, ὁ 스트롱번호 3875

- 발음 / 파라크래토스(paraklētŏs)

1. 남을 위해 나타난 자
2. 요한일서 2:1(대언자)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3. 요한복음 14:16(보혜사)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어원 3870에서 유래
관련 성경 보혜사(요 14:16,26, 16:7), 대언자(요일 2:1).
신약 성경 5회 사용

뜻풀이

1. 남을 위해 나타난 자, 중재자, 조정자, 돕는 자, 변호자, 위로 자, 중보자.
  • a. 그리스도를 가리켜서 / 요일 2:1.

  • b. 성령을 가리켜서 /  요 14:16, 26, 15:26, 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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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혜사(保惠師)는 '도울 보, 은혜 혜, 스승 사'자를 써서 '은혜로 돕는 스승'이라는 뜻이다.
보혜사
로 번역된 헬라 원어는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인데, 주로 법정에서 피고인을 변호하도록 판사로부터 부름을 받은 사람을 가리킨다.

파라클레토스’는 변호자(Advocate), 중보자(Mediator), 조력자(Helper), 위로자(Comforter), 상담자(Counselor) 등으로 번역된다.

성경 속에서 보혜사는 대부분 ‘성령’을 가리키며(요한복음 14:16, 14:26, 15:26, 16:7), 경우에 따라 ‘그리스도’를 가리키기도 한다(요한일서 2:1).

보혜사 성령 그리고 예수님

2천 년 전 당시 예수님께서는 장차 오실 성령 하나님을 ‘또 다른 보혜사’라고 표현하셨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요한복음 14:16)

여기서 ‘또 다른’이라는 말로 번역된 헬라 원어 ‘알로스(ἀλλοϛ)’‘똑같은 종류 중 다른 무엇‘을 나타낼 때 사용된다. 쉽게 풀어보자면 장차 오실 보혜사는 예수님과 본질적으로 같은 분이시라는 의미다. 두 분은 별개의 존재가 아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셨다가 다른 이름으로 오시리라는 의미로 위와 같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보혜사 성령께서 ‘당신의 이름’으로 오신다고 말씀하셨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한복음 14:26)

이 진리를 깨달았던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곧 ‘파라클레토스’이심을 분명히 증거했다.

우리에게 대언자(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요한일서 2:1)

이 말씀들을 비교해보면, 보혜사 성령과 예수님은 개체가 아닌 한 분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같은 두 분을 구분하여 기록한 이유는 역사하시는 시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아들의 입장’으로 역사하시는 시대가 있고, ‘성령의 입장’으로 역사하시는 시대가 있을 뿐 성자 예수님과 성령께서 별개의 존재는 아니라는 이야기다.

이 개념을 정립하고 다음 단락으로 넘어가려면 삼위일체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데,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성령’에 대해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현되는 에너지’정도로 여기고 있다. 하지만 성령께서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감정을 가지시고 행동도 하시고 심지어 이름까지 가지신 인격체다. 성령의 개념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삼위일체 성령, 그분의 근본에 대한 참 쉬운 설명’이라는 포스트에서 집중적으로 다루기로 하고, 이제부터는 성자와 성령께서 본질적으로 같은 분이심을 성경을 통해 알아보기로 하자.

성자와 성령의 근본에 대하여

성자 예수님과 보혜사 성령께서 근본 한 분이심을 알 수 있는 구절은 많다.

성령이 말씀을 못 전하게 하시거늘 (사도행전 16:6)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 (사도행전 16:7)

사도 바울은 더베, 루스드라 등의 여러 지역을 방문한 후 아시아로 가려 했으나 성령께 제지를 받았다. 그러자 방향을 반대로 바꾸어 비두니아 지역으로 이동하려 했으나 그마저도 예수의 영께 저지당했다. 이 말씀을 보면 성령이 따로, 예수님의 영이 따로 존재하는 줄로 오해하는 이가 있을 수 있겠으나 아래의 구절을 보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로마서 8:34)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심이니라 (로마서 8:26-27)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중보자로서의 사역을 담당하신다는 것은 익히 알 것이다. 그러나 로마서의 말씀에 따르면 성령께서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중보자시다. 이 구절만 보면 ‘두 분이 별개로 존재하셔서 각자 중보자의 역할을 담당하시는지 어떻게 아느냐’고 반문할 여지가 있으므로, 사도 베드로의 기록을 제시하여 주장의 신빙성을 더하도록 하겠다.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구약의 선지자들)이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베드로전서 1:10-11)


사도 베드로가 저 편지서를 작성할 시점에서 보면 저 선지자들은 당연히 구약의 선지자이다. 그들이 ‘예수님이 받을 고난과 영광을 미리 증거했다’는 대목을 통해서도 이 선지자들이 구약의 인물들임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런데 그들은 누구의 영에 감동되어 증거했는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다. 그런데 베드로후서에는 구약의 선지자들이 성령에 감동되어 기록하였다고 한다.

예언은 …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베드로후서 1:21)

구약의 선지자들 중 일부는 예수님의 영에, 일부는 보혜사 성령에 감동되어 예언을 했다는 것인가? 아니면 베드로가 잠시 착각을 한 것일까? 당연히 모두 아니다. 성자와 성령께서 근본적으로 같은 분이심을 교차 검증하여 깨닫도록, 하나님께서 위의 기록들을 허락하신 것이다.

결론

결국 예수의 영보혜사 성령은 각각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근본이 한 분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 2천 년 전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고 승천하셨다가, 성령시대에 다른 이름으로 오시는 것을 가리켜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는 삼위일체의 본질을 깨닫고 성령 하나님을 영접하는 자야말로 하나님의 비밀을 발견한 자인 동시에 큰 축복을 받은 자가 된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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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겠느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겠느냐 ?   

갈라디아 성도들이 당초엔 믿음생활을 성령으로 시작하여 정상적(복음적)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갈 2:4)들이 "그리스도인이 된 이방인일지라도 율법을 준수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다른 복음을 전했습니다.(갈 2:19, 4:10, 5:2-3, 6:12)
이에 갈라디아 성도들이 미혹을 받아 그 신앙이 유대인의 율법적인 신앙 형태로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심각한 경고의 메세지를 보냈습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 3:1-3)

여기서 ’육체로 마치겠느냐?’ 의 "육체"의 의미는 곧 율법 준수를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10: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 5:4)

즉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게 되려고 하는 것"은,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가 되어 결국 신앙생활의 마침이 될 수 밖에 없는 존재를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에는 인간을 세 종류로 나누고 있습니다.

첫째, "육에 속한 사람(고전 2:14)"

구원받지 못한 불신자를 의미합니다.

둘째, "육신에 속한 사람(고전 3:1)"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어린 아이들과 같은 자를 말합니다.

셋째, "신령한 자(고전 3:1)"

영적으로 장성한 자를 뜻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아이러니하게도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는 교회였습니다.(고전 1:7)
즉 아홉 가지 은사(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치는 은사, 능력 행함, 예언, 영들 분별함, 방언, 방언 통역)를 다 받은 교회입니다. (고전 12:8-10)

성령(은사) 충만한 교회란 뜻입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신령한 자"라 하지 않고 '육신에 속한 자' 즉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를 대함과 같은 자'라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는, 성령의 은사는 부족함이 없지만 성도들 간에 서로 시기와 분쟁이 있고, 파당을 지어 당파 싸움을 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육의 사람이 아니리요.”(고전 3:1-4)

오늘 우리는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는 장본인이 아닌가?>를 깊이 반성해 봐야 합니다.
이를테면 교회에서 열심을 다하여 충성한다면서 '행위 운운--' 하며 율법적인 신앙행태를 보이는 것은 아닌지?
혹은 하나님의 의가 뭔지로 모르면서 힘써 자기의(自己義)를 세우려함은 아닌지?(롬 10:3), 또 성령(은사) 충만을 자처하며 서로 시기, 분쟁하고 그룹을 만들어 당파 싸움을 일삼다가 결국 교회가 쪼개지고, 교파가 갈라지는 행태를 연출하고 있진 않은지?--  오늘날 교회가 이 문제를 놓고 맹성(猛省)을 해야 합니다.

모두 자기들은 신령한 싸움을 한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는 우를 범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 모두 똑바로 깨달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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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혜사’란 단어를 영어 성경에서는 세 가지로 번역했습니다.

첫째, 킹 제임스 버전(KJV)에서는 위로자(Comforter),

둘째, 뉴 인터네셔날 버전(NIV)에서는 상담가(Counselor),

셋째, 뉴 아메리칸스탠다드 버전(NASV)에서는 도움자(Helper)

이 단어들처럼 성령님은 우리의 보혜사가 되셔서 우리들을 위로해 주시고, 우리의 문제들을 상담해 주시며,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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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혜사란 무슨 뜻인가?

“보혜사”란 “파라클레토스”라는 헬라어로서 “파라”(옆에)와 “클레오”(부르다)의 합성어로서,
보혜사라는 단어는 헬라어를 한문으로 음역한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초대교회의 사도들조차 자신을 보혜사라고 말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보혜사라는 단어 자체가 “성도들의 옆에서 함께하는 신적인 존재”를 의미하며, 종말론적으로는 하나님의 심판에서 “피고를 돕는 변호사”를 뜻하는 헬라의 법적용어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보혜사”에 대해서 언급한 구절을 살펴보자. “보혜사”(파라클레토스)라는 단어는 요한복음에서 4번 나타나며, 요한일서에서 한번 나타난다

요한복음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한복음 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요한복음 16: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요한복음 14:16-17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예수님이 말씀하신 보혜사는 성령을 말한다.
그리고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께서는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에 만인에게 오심으로 성취되었다.

그런데 보혜사라는 단어가 성령 외에 예수님 자신에게 적용된 적이 있다는데, 바로 위의 요한복음 14장16절이다.
예수님이 또다른 보혜사를 보내준다고 하신 성경구절 때문에 오늘날 자신을 보혜사라고 하는 이단 교주가 47명이 된다.
예수님이 성령을 또 다른 보혜사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예수님이 보혜사이기 때문이다.

요한일서 2장1절에는 예수님이 파라클레토스라고 설명하고 있으며, 그 단어의 뜻이 바로 핼라의 법정용어인 피고측 변호인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파라클레토스)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라.

   

다른 성경은 다음과 같이 번역하였다.

   

[공동번역] 나는 믿음의 자녀인 여러분이 죄를 짓지 않게 하려고 여러분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그러나 혹 누가 죄를 짓더라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표준새번역] 나의 자녀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렇게 쓰는 것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죄를 짓지 않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누가 죄를 짓더라도, 아버지 앞에서 변호해 주시는 분이 우리에게 계시는데,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현대인의성경] 나의 믿음의 자녀들이여, 여러분이 죄를 짓지 않게 하려고 나는 이 편지를 씁니다. 그러나 만일 누가 죄를 짓더라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KJV] My little children, these things write I unto you, that ye sin not. And if any man sin, we have an advocate with the Father, Jesus Christ the righteous:

  

[NIV] My dear children, I write this to you so that you will not sin. But if anybody does sin, we have one who speaks to the Father in our defense--Jesus Christ, the Righteous One.

  

대언자는 누구의 대언자인가? 하나님의 대언자인가? 성도들의 대언자인가?

성경에 의하면, 보혜사는 오직 예수와 성령이며 그 누구도 사람이 보혜사라고 불리운 적이 없다.

    

신약에 나타난 성령에 대한 상징 일곱 개를 살펴봅시다.

1. 바람

성령은 히브리어로 루아흐이고 헬라어로 프뉴마이다.
이 둘다 일차적으로는 바람 혹은 호흡이란 뜻이다.
그러니 바람이란 말은 성령이란 단어가 가지는 원래 의미에 가장 가까운 상징 내지는 지시어일 것이다.
성령은 우리 가운데 바람처럼 오시고 호흡처럼 내주한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한복음 3장 8절),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요한복음 20장 21-22절)

바람은 성령의 자유롭고 주권적인 역사를 생각하게 해준다.

2. 불

불은 성령의 상징으로 자주 사용된다.
교회에서 아주 관습적으로 사용되는 말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성령의 불이라고 말이다.
이는 성령의 세례와 관계가 크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데 이것을 요한은 자신이 주는 물세례에 대해서 그리스도가 주는 성령과 불의 세례라고 말한다.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마태복음 3장 11절)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누가복음 12장 49절)

불은 우리의 죄를 태우고 불꽃이 일어나듯이 우리를 하나님의 은사로 뜨겁게 해주는 모양을 상기시킨다.

특히 위에 바람과 불 두가지는 성령이 처음으로 이 땅에 성도들 가운데 보혜사로 임하실 때 동반된 현상이다.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사도행전 2장 1-4절)

3. 기름

기름도 성령의 대표적인 상징이다.
하나님의 성신의 임재는 구약에서 종종 기음부음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부르심이나 보내심을 받는 사람은 기르부음의 절차가 뒤따른다.
즉 제사장이나 왕이나 선지자등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름부음을 받고 그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이는 하나님의 신이 임하여 그에게 자원하는 심령과 지혜를 주어 그 일을 거룩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게 수행하는 표라고 이해된다.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종으로 직접 부르심을 받았다는 표징이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사도행전 10장 38절),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고린도후서 1장 21절),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요한일서 2장 20절),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한이서 2장 27절)

4. 물

물은 세례의 도구이다.
세례 받을 때에 우리는 물세례를 받고 동시에 성령 세례도 받게 된다.
반드시 물세례와 성령세례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할수는 없어도 하여튼 우리가 받는 물세례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주어지기 때문에 우리는 성령의 세례가 가장 본질적인 차원에서 동반되어야 한다는 것은 말할 수 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성령 세례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물세례만으로 구원에 이를 수도 없고 그리스도인으로 불려질 수도 없다. 왜냐하면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로마서 8장 9절).

기름이 거룩함을 말한다면 물은 깨끗함 내지는 정결함을 말한다고 볼수 있다. 또 갈망과 및 목마름을 해갈해주는 힘이다.

"명절 끝 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요한복음 7장 37-39절)

5. 인

도장을 말한다. 이것은 성령이 우리 구원의 확실한 보장이 된다는 뜻이다.
계약서에 도장을 찍듯이 하나님이 우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구원되었다는 증거로 성령으로 도장을 찍었다. 인치다는 도장을 찍고 밀봉을 하는 행위와 비슷하다. 목자들이 자기 양을 표시하기 위해서 불로 지진 도장을 하듯이 하나님은 자기 독생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우리에게 인치심으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임을 확증한다. 이는 바로 성령의 능동적이고 자발적인 구원의 사역이다.

"썩은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요한복음 6장 27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린도후서 1장 22절),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에베소서 1장 13절),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에베소서 4장 30절)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디모데 2장 19절)

그러므로 인침은 확실한 보증을 뜻한다.
그러기에 배신은 절대로 용납되지 않는다.

"너는 나를 인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같이 잔혹하며 불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 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아가서 8장 6-7절)

6. 검(칼)

성도가 가진 유일한 공격용 무기이다. 에베소서에서 말하는 전신갑주가 다 방어용이면 유일하게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이 성도가 마귀와의 영적  싸움에서 사용하는 공격용 무기이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도 광야에서 사단에게 세번 시험받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즉 성령의 검으로 물리치신 것이다. 무사가 칼다루는데 능하듯이 하나님의 사람들은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에 능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브리서 4장 12절)

":10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에베소서 6장 10-17절)

성경 말씀은 성령이 주시는 말씀이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디모데전서 4장 1절),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히브리서 3장 7절),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히브리서 9장 8절),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요한일서 5장 7절),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요한계시록 2장 29절)

성령은 친히 말씀하시고 증거하신다. 그래서 성령의 검, 즉 하나님의 말씀은 마귀의 공격을 붕괴시키는 치명적인 공격용 무기가 된다.

7. 비둘기

비둘기는 온유하고 평화로운 동물로 이해되어 평화의 상징으로 온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스도가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받고 올라오실 때에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오셨다고 성경은 증거한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마태복음 3장 16절),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누가복음 3장 22절)

이때 성령은 창세기 1장에서 혼돈의 흑암 중에 수면위를 운행하는 성령의 모습을 생각나게 해준다. 날개를 양쪽으로 펴고 품는 듯 하늘을 나는 모습이다.

그리고 비둘기는 순전함 내지는 온유함의 상징이다.

그러기에 예수도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마태복음 10장 16절)

비둘기 같이 온유하고 오래참고 사랑과 자비로 품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성품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는 말이다.

우리는 위에서 성령의 생각나게 하는 성경의 중요한 표현을 살펴보았다.
이는 모두 성령의 본질적인 사역을 말하면서 동시에 성령의 전으로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각자 혹은 교회로서 사회에서 행해야 하는 삶의 자세를 지시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바람처럼 자유롭고 알수 없는 능력을 입어 불로 죄를 태우고, 물로 깨끗하게 씻어 정결하게 되고, 기름으로 거룩하게 바르고 하나님의 확실한 인침을 받아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성령의 검 즉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담대하고 용감하게 영적 전투를 하되 항상 사랑의 마음으로 두렵고 떨리는 가운데 비둘기같이 순결하고 온유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성령의 능력으로 전에 말한 성도의 길에 도사리고 있는 12가지 덫을 피해갈 수 있다.

오직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라.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갈라디아서 5장 16-18절), 그러면 성령의 열매를 맺을 것이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라디아서 5장 22-23절),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에베소서 1장 13절)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갈라디아서 5장 5절)며,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갈라디아서 5장 25절) 것입니다.


민수기 6:24-26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성령의 상징

성경에는 성령을 상징적으로 지칭하는 단어들이 있다.
구약에서는 성령은 여호와의 신으로 일컫는다.
예수 그리스도가 땅에서 그 거룩한 구속사역을 마치신 후 아버지께로 가고 그를 대신해서 성령이 다른 보혜사로서 이제 각 성도의 마음에 친히 거하고 성도들의 모임 가운데 살고 있다.




보혜사의 3대 책망(요한복음 16:7-11)

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8. 그가 와서 에 대하여, 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9. 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10. 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제자들에게 행한 마지막 강론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에 성령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이 오셔서 하실 역할은 제자들을 진리 가운데로 이끌어주되, 특별히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설명이 선뜻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우선 너무 추상적인 용어들이 사용되었습니다.

또 죄와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는 것은 그런대로 이해가 되지만 의에 대해 책망한다는 것은 뭔가 모순된 것 같습니다.
그 이유로 든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은 제자들은 물론 세상이 책임질 사유가 전혀 아닌데도 말입니다.

이런 궁금증을 밝히려면 예수님께서 그 말씀을 하게 된 배경부터 따져 보아야 합니다.
나아가 당신께서 승천하심으로써 죄인을 구원해주는 사역이 완성됨으로 성령님이 오셨기에 성령의 책망도 반드시 구원과 연결해서 해석해야 합니다.  

제자들의 근심

예수님의 설명에 따르면 비록 스승이 함께 하지 않더라도 제자들은 이제 곧 온전하고도 절대적 진리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어떤 긍정적 반응도 보이지 않고 마음에 근심만 가득했습니다.
물론 3년 동안 동고동락하며 사랑하던 스승이 죽어야만 한다는 말씀에 염려 안 될 리는 결코 없습니다. 믿음과는 별개의 인지상정입니다.

그런데 만약 정말로 그런 뜻뿐이었다면 최소한 당신께 “어디로 가느냐?”고 질문은 했어야 하지 않느냐고 예수님은 지적했습니다.
이 또한 제자들에게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말씀을 하기 직전에 예수님은 제자들이 앞으로 세상에서 큰 핍박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로선 스승이 큰 권능으로 끝까지 함께 하시어 지켜주셔야 하지 않느냐는 마음이 응당 들었을 것입니다.
지난 3년간도 많은 비방과 멸시와 핍박을 당했지만 스승이 앞장서서 방패막이 되어주셨고 또 온갖 이적을 일으키는 놀라운 능력을 보았기에 견딜 수 있었는데, 이제 우리끼리만 남게 되면 어떡하느냐는 걱정이 앞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표면적 결과만 따지면 예수님 말씀은 자살하겠다는 뜻입니다.
맨 처음 스승의 죽음 예고를 들었을 때에 베드로가 그럴 수 없다고 막아섰습니다.
그러나 도리어 스승으로부터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 16:23)
말하자면 이제는 어떤 제자도 주님의 죽으심을 말릴 수 있는 계제는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그리스도이면서 왜 꼭 죽어야 하는지, 지금 어디로 무엇 때문에 가는지 진지하게 관심을 가졌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부활조차 아무도 믿지 못했고 심지어 빈 무덤을 보고 온 여인들의 보고에도 반신반의했던 제자들로선 오직 스승이 죽지 않고 계속 함께 있어주었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부활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해도 여전히 어디로 가는지는 물어봤어야 했습니다.
아무리 사흘 후 부활하겠다고 약속했어도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구세주가 꼭 죽어야만 하는지, 또 진짜로 부활하실 양이면 그 후에 무슨 일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말입니다.
최소한 지금 죽으면 메시아로서의 과업이 중단되는 것은 아닌지 따져 봐야 했습니다.  

스승이 사라지고 난 다음 제자들의 처지가 어떻게 된다고 했습니까? 당장 하나님의 이름으로 유대 사회에서 출회 당할 것이라고 합니다.(2절) 제자들의 입장에선 이런 황당한 경우도 없습니다. 메시야를 만났다고 좋아서 3년을 따라 다녔는데 구원의 확신도 생기기 전에 도리어 하나님의 대적이 될 판입니다. 또 자기 개인의 문제는 그렇다 쳐도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은 대체 언제 어떤 식으로 이뤄질지 아직도 감감합니다.  

결국 자기들이 진리를 찾았다고 믿고 예수님을 따라다닌 지난 3년간의 고생은 완전히 헛것이 될 판국입니다. 그 시간을 투자한 열매가 대체 무엇인지, 아니면 왜 우리를 두고 죽는지 그 이유라도 정확히 알자고 핏대를 세우며 반발해도 시원찮을 판국이지 않습니까? 예수님으로선 제자들이 정작 자신과 이스라엘의 구원에 관한 소망과 관심을 접은 채 하염없이 장래 일만 근심하고 있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위로

정곡을 찌르는 질문을 하자면 상황이나 내용을 정확히 파악해야만 합니다. 제자들이 닥쳐올 핍박에 대해 염려한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스승이 말하는 대로 앞으로 사태가 진행되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인지 전혀 감도 못 잡았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제자들의 머리가 뒤죽박죽이 되어서 질문을 할 여유는커녕 무엇을 질문할지도 몰랐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랑하는 제자들의 그런 상황을 눈치 못 챌 리는 없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그들을 야단쳤다기보다는 앞으로 벌어질 실상(實狀)을 말해주려는 뜻이었습니다. 제자들이 가장 염려하는 바를 덜어주겠다는 것입니다.  

우선 당신이 떠나가는 것이 그들에게 유익인데 보혜사 성령님이 오시어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총회에서 제자들을 출회시키고 죽음으로 몰아가는 유대인들이 진리 밖에 있고, 너희야말로 참 진리를 소유한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아무리 유대인들이 제자들을 죽이고선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고 주장해도 전혀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로 섬기는 자는 그들이 아니고 바로 너희라는 것입니다. 지금 너희와 함께 하는 내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자 메시야이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반드시 당신께서 십자가에 죽으셔야 성령이 오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지 않으면 성령이 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성령이 오셔야만 비로소 당신께서 의도하신 구원 사역이 완성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역으로 말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셔도 구원이 완성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오해는 말아야 합니다. 십자가로 성자 하나님이 하실 바, 구원 과업은 완벽하게 달성되었습니다. 더 이상 이룰 것이 없습니다. 단지 이 땅에 남아 있을 제자들이 진리 가운데 들지 못하고 있는데 성령의 깨우침을 받아야만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제자들이 이 시점에서 구원받지 못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선택하여 부르시고 모든 죄를 용서해주셨기에 이미 구원은 받은 것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100% 보장된 구원 과정이 벌써 진행되고 있으되 각자가 자신의 구원 확신만 아직 갖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성령이 오셔서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셔야만 비로소 자신의 구원을 확신할 뿐만 아니라 그 의미도 정확하게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장래의 핍박 앞에 제자들을 아무 대책 없이 방치해두고 꼭 십자가에 죽으셔야만 했던 이유를 비로소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14:16-18)

예수님은 성령을 “또 다른 보혜사”라고 표현했습니다. 여기서 “또 다른”의 의미는 모양이나 기능이 다르다는(different) 것이 아니라, 모든 면에서 똑 같지만 단지 개체만 다르다는(another) 뜻입니다. 비유컨대 전자는 사과와 배의 관계라면, 후자는 모양 색깔 맛에서 완전 복제한 것과 같은 또 다른 사과라는 뜻입니다. 제자들로 구원 진리를 깨닫게 해줄 성령 또한 삼위 하나님의 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이 제자들을 떠나가도 또 다른 예수님이 오신다고 약속한 셈입니다. 떠나가신 예수님은 성육신하셨던 하나님이라면, 새로 오실 예수님은 영으로 오시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모양, 색깔, 맛에서 하나 다를 것 없는 사과처럼 동일한 하나님이신지라 구원의 사역이 중단될 리도 없으며 스승이 제자들을 떠난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분이 오시면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으며 아예 너희와 함께 거하며 너희 속에 있을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너희가 염려하는 것처럼 내가 가버린다고 해서 메시아로서의 사역이 결코 중지되지 않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성령을 뜻하는 헬라 원어 파라클레토스는 바로 곁에서(파라) 위로하는 자(클레토스)입니다.  영어로는 comforter라고 번역되었습니다. 즉 예수님이 떠나가더라도 성령이 항상 함께 하여 위로해주므로 어떤 핍박도 걱정할 필요나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한글 성경도 성령을 보혜사(保惠師)라는 어려운 한자말로 번역했는데 그 하시는 역할을 축약한 의미입니다. 지키다, 돕는다는 뜻의 보(保)와, 은혜를 베풀다, 사랑하다는 혜(惠)와, 스승 사(師)를 사용한 것입니다. 성령이 초자연적으로 간섭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인쳐서 구원하며 또 그 구원의 뜻을 깨닫게 한다는 것입니다. 구원 후에도 성도를 도와서 보호 인도하는 은혜를 베풀며 나아가 예수님 닮게 변화시키는 스승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떠나고 성령이 오시면 유익이라고 해서 예수님과 성령의 역할에 우열이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예수님의 사역이 불완전하거나 불충분했다는 뜻도 아닙니다. 구원 사역은 주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완성이 되었습니다. 신자 개인별로 그 구원의 은혜 가운데 들어오게 하는 역할을 이제 성령님이 맡으시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십자가 복음이 진리 그 자체인데 성령은 성도로 그 진리를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이 역사하여 거듭난다는 것 즉, 구원을 받는다는 것 자체도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완성시킨 구원의 의미를 정확히 깨닫는 것인 셈입니다. 역으로 따지면 그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성령의 거듭남의 역사가 없었다는 뜻이 됩니다. 그럼 과연 그 깨우침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구원 법정

예수님은 지금 당신이 죽고 성령이 오심으로 세 가지 대상을 책망할 것이라고 합니다. 책망의 원어는 꾸짖다, 혹은 부끄럽게 만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단어가 신약성경에 쓰인 용례는 거의 전부 어떤 사람에게 그의 죄를 드러내 보임으로써 즉, 깨닫게 함으로써 회개로 이끈다는 것입니다.  

성령께 책망 받을 대상이 처음에는 죄가, 마지막에는 심판입니다. 각기 죄의 성격과 심판한 결과를 설명했습니다. 중간의 의에 대한 책망이 선뜻 이해가 되지 않지만 이렇게 따지면 그 죄를 심판하는 근거를 말씀하셨다는 것이 논리적 흐름에 맞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지금 법정 재판을 염두에 두고 말씀을 전개하고 있는 셈인데, 의에 대한 책망도 이런 관점에서 살펴 볼 필요가 있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십자가 구원에는 법률적 측면이 있지 않습니까? 인간의 죄는 여전히 생생히 살아 있음에도 하나님이 예수님의 공로에 근거해 죄인을 의롭다고 판결 내려준 것입니다. 사형을 기다리던 죄인이 오직 어린 양 보혈의 은혜를 믿은 것을 의롭다고 여기고 하나님이 사형을 면제해준 이신칭의(以信稱義)가 구원의 핵심 의미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한 죄인이 하나님의 법정에 세워져서 죄에 대한 판정을 거쳤다는 뜻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성령의 책망도 구원을 주기로 택한 한 죄인을 그 법정에 세운 것과 같습니다. 그 모든 재판 과정을 성령이 진행할 것인데 물론 신자의 내면, 특별히 영혼의 영역에서 이뤄질 것입니다. 쉽게 말해 성령이 죄인더러 어린 양의 보혈의 은혜를 철두철미 깨달아 구원의 확신을 갖게 만들 것입니다.

- 죄에 대하여

재판의 첫 절차는 검사가 죄목(罪目)을 낭독하는 것입니다.
지금 그 죄목이 “예수를 믿지 않은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을 핍박할 유대인들도 창조주 유일신 하나님을 열심히 믿었고 심지어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는 것이 그분께 드리는 제물이라고 여겼지 않습니까?

하나님 믿은 것으로 구원 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반드시 예수를 믿어야만 하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율법으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단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자격, 조건, 선행, 제물, 공적, 종교는 물론 심지어 회개하고 믿음을 가졌다고 해서 하나님의 의에 결코 합격할 수 없습니다.
죄로 따지면 단 한 명의 예외 없이 본질상 하나님의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당장 모두 죽여도 인간에겐 한 마디의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또 그렇게 된 까닭은 인간이 하나님을 제치고 세상의 주인 노릇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고의로 배역하고 그 영혼이 완전히 타락하였기에 그분의 의를 알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런 비참한 처지에 빠진 이 땅에 예수님이 오셔서 당신의 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혔던 담을 허시고 그분과 화평케 해주셨습니다. 죽어 마땅한 우리를 대신하여 예수님이 죽음으로써 그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된 것입니다.
우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되는데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엡 2:9).  

구원의 법정에서 선언될 죄목은 윤리적 종교적 죄가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지 않은 죄입니다.
그분이 세상에 빛으로 왔으되 어둠을 더 사랑하여 그분을 배척한 자는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 의에 대하여

먼저 죄목이 설명된 후에는 그 죄를 심판할 관련 법규를 찾아 적용해야 합니다.
구원의 법정에선 당연히 하나님의 의가 그 기준이 되며 또 그에 따르면 모든 인간이 당장에 사형감입니다.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습니다.
모두가 빵점입니다.
법률적으로는 하나님의 공의가 적용되어져 사형이 선포되어야 마땅했습니다.  

그런데 천국 법정에서 적용하여 형량을 선고한 규정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 바로 그 근거가 되었습니다(10절).
예수님을 다시 보지 못하니까 제자들의 사정을 봐준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또 그래서 예수님 대신에 영적으로 교제하라는 뜻으로 성령을 보낸다는 뜻도 아닙니다.  

물론 그럴 리는 없지만 순전히 가정으로 예수님이 만약 십자가에 죽으신 것으로만 끝났으면 인류의 죄에 대한 죄 값은 치러진 셈입니다. 죄에 대한 공의의 심판은 이행되는 셈입니다.
그러면 인간도 그분과 함께 죽던지, 최소한 벌만 면제받은 것뿐이지 거기서 더 나아간 조치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죄인들을 죄에서 건져서 새 생명을 주시는 사랑이 베풀어져야만 했고 그러려면 예수님은 반드시 부활하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늘에 오르신 것은 죽음과 부활로 구속사역을 완성하셨기에 인간으로 오신 구세주가 원래의 하나님 독생자의 자리에 복귀한 것입니다.
제자들로선 당연히 그분을 다시 보지 못하게 됩니다.
반면에 아담의 타락 이후로 죄와 사단과 사망의 노예가 되어 신음하는 인간을 보고 죽 품고 계셨던 하나님의 크나큰 안타까움은 완전히 해소되었습니다.
천국 보좌에서 성부와 성자 하나님이 구원사역이 완성되었음으로 인해 함께 기뻐했을 것입니다.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노릇하리로다 하더라. ...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계 5:9,10 & 7:10)

구원 재판에 실제로 적용된 규정은 성부 하나님의 공의 대신에 성자 하나님의 의 즉, 십자가의 사랑이었습니다.
정확히 말해 죄에는 공의가, 죄인에게는 사랑이 적용된 것입니다.

죄 값은 당신의 죽음이 치렀습니다.
죄인은 당신의 부활로 온전한 모습으로, 단순히 목숨만 부지시켜주신 것이 아니라.
되살려주셨습니다.
이 어린 양의 대속 은혜를 믿는 자에게는 그분의 의가 덧입혀집니다.
죽임을 당해야 마땅한 죄인들이 도리어 새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함께 만족하게 적용되는 완벽한 재판이었습니다.

구원을 얻은 신자는 그 믿음의 고백으로 세례를 받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즉, 천국 법정에서 공의와 사랑의 재판을 통과했다는 뜻입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롬 6:3-5)  

- 심판에 대하여  

구원의 법정에 섰던 죽어 마땅한 죄인이 사면 받았습니다. 비록 죄가 심판 받았지만 무형적인 개념일 뿐입니다. 가시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인격체가 아닙니다. 말하자면 십자가 재판은 벌 받은 인간 하나 없이 즉, 아무 실질적 결과 없이 끝난 셈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 받았음이니라”(11절)고 선언합니다. 죄인 대신에 실제적인 심판을 받은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세상 임금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단 빌라도 로마총독이나, 헤롯 유대 왕이나, 산헤드린 공회원들이나, 대제사장을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사단입니다.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12:31) 하늘에서 예수님의 권능을 인정하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 후에 예수님은 당신의 십자가 사역을 통해 사단이 심판받을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결국 구원의 법정에선 피고였던 죄인 인간은 사면 받고 대신에 그 자리에 사단을 세워 심판하신 셈입니다. 인간으로 하나님을 배역하고 죄에 빠지게 만든 원흉이 바로 사단이었기 때문입니다. 또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인간을 꼼짝 없이 죄의 노예로 묶어두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신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세상의 권력자들을 충동질하여 예수님을 골고다 언덕까지 이끌어 온 사단은 계속 자기가 세상을 죄악으로 마음껏 지배할 수 있으리라 착각했습니다. 그러나 아리마대 요셉의 빈 무덤으로 그 계획은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사단은 무참히 패배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공중 권세 잡은 자”(엡2:3)요,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엡6:12)였던 사단의 멍에 아래 신음하던 인간을 당신의 보혈로 그 멍에를 끊고 건져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큰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실 때에 사단은 최후의 심판을 받아 영원한 불 못으로 던져질 것입니다.  

주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는 사단은 불신자들로 어떻게 하든 예수를 믿지 못하게 모든 수단과 노력을 강구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고후4:4), 즉 거짓으로 미혹만할 수 있을 뿐입니다. 더 이상 세상을 죄악으로 제 멋대로 농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물론 불신 세상은 여전히 자기 수하의 노예로 둘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 받은 신자가 성령과 함께 하여서 그리스도의 빛을 세상 앞에 비출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신자가 주위의 불쌍한 미혹된 영혼을 위해서 사단과 당당히 맞설 수 있기 때문에 인류의 실상이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으로 인해 흑암에 갇힌 자들을 영원한 빛 가운데로 인도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세상이 감당치 못할 진리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한다는 말씀을 간단히 다시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가시어 담당하실 천국의 구원 법정에선 당신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영원한 죽음의 심판을, 어린양 은혜를 믿는 자에게는 당신의 십자가 의를 적용해서 영생의 선물을 선고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사단은 십자가에서 이미 심판을 받아 모든 권세를 빼앗길 것입니다. 단지 당신이 다시 오셔서 최후의 심판을 할 때까지 수족이 완전히 절단된 상태로 한시적으로 공중 권세만 잡도록 놓아두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진리를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바로 그 순간에도 제자들은 전혀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날 정경으로 완성된 성경기록을 갖고서 몇 번씩 읽어봐도 그 뜻을 잘 모르는데 당시 제자들은 당연히 제대로 알아먹을 수 없었습니다. 거기다 곧 스승과 헤어질 사실에 걱정만 앞선 상태에선 더더욱 그러했습니다.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라고 합니다. 바로 위에서 말한 세 가지 책망에 관한 진리입니다. 당신의 십자가 죽음이 가져다 줄 은혜를 말합니다. 성령의 간섭으로 구원의 은혜 가운데 들어가는 자는 성령의 지혜로 그 은혜의 의미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진정 성령으로 구원 받은 자라면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지만 오직 예수님의 은혜로 죽음에서 건짐을 받았음을 절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주님의 십자가가 없었다면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서 아무 소망 없는 삶이 되었을 것입니다. 심지어 선택 받은 민족으로 거룩한 율법을 받아 그런대로 잘 준행하며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마저 그러했습니다.  

모든 인간은 아무리 도덕적으로 의롭고, 사상적으로 심오하고, 종교적으로 경건해도 하나님의 의에는 절대 미칠 수 없습니다. 만물 가운데 심히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인지라 예수를 모르는 자연인의 속에서 나오는 것은 오직 더럽고 추한 죄악뿐입니다. 그 영혼이 성령으로 새롭게 되지 않는 한에는 사단의 권세에 묶여서 죄와 사망의 노예로서 헛되고 헛된 일생을 살게 됩니다.

세상에서 의인이라 칭송 받는 자들의 선행도 따지고 보면 온전한 선이 아닙니다. 자기 자랑이나 욕심에서 나올 뿐입니다. 온전히 진실하고, 선하고, 아름다운 것은 오직 하나님께로 오며 그것도 예수님으로 인해 그분과 화해된 자를 통해서만 세상에 드러날 뿐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로키 위한 목적으로 장차 당신 대신에 오실 진리의 성령이 하시는 역할을 설명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 그것도 동족으로부터 죽음에 넘기움을 당할 제자들에게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떠나지 않고 위로와 지도를 해줄 테니 아무 염려 말고 안심하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럼 어떤 뜻이 됩니까? 성령이 예수님의 십자가 진리를 알아 구원에 이르게만 할 뿐만 아니라, 제자들로 그 진리를 확신하게 만들어 얼마든지 핍박을 이겨낼 수 있게도 한다는 것입니다. 진짜 구원의 확신을 가진 신자는,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끊임없이 그분의 보호와 인도를 받는 신자는, 그래서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세상을 책망할 줄 아는 신자는, 핍박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기쁨으로 담대하게 감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핍박을 견디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아니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때문에 그런 핍박을 당한다고 합니다. 16장 바로 앞의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거하느니라.”(요15:26,27)

놀랍게도 순교(Martyrdom)라는 영어 단어가 증거한다(Martyr)는 헬라어 단어에서 유래한 것인 줄 아십니까?
초대 교회 당시는 예수님을 담대히 증거하면 거의 순교를 당했고 또 신자들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증거했던 까닭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시점에선 예수님의 뜻을 전혀 감당하지 못했던 제자들이 오순절 이후로는 자기 생명마저 과감히 버릴 수 있는 십자가 군병으로 변모되었던 것입니다.

또 신자들의 그런 모습 가운데서 세상 사람들은 살아계신 예수님의 권능과 은혜를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당연히 복음은 아무도 말리지 못하는 가운데 염병처럼 유대와 사마리아를 넘어서 번져나갈 수 있었고 당시 우상이 지배하던 세상을 뒤집어엎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이 온갖 비방과 핍박 가운데도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지 않습니까?(행 6:15)
그가 돌에 맞아 죽어가는 모습을 성경이 어떻게 묘사했습니까?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행 7:55- 56)

3646. 순교자 -  ὁλοκαύτωμα, ατος, τό 
1. 번제,   2. 마가복음 12:33,  3. 순교자
발음 / 호로카우토마(hŏlŏkau- tōma)
어원 / 3650과 2545의 파생어와의 합성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전체로 드리는 번제물(막 12:33), 전체로 번제함(히 10:6, 8)
신약 성경 / 3회 사용

* 3650 / 전체의 - 호로스 ὅλος, η, ον
1. 전체의,  2. 디도서 1:11,  3. 마태복음 14:35
발음 / 호로스(hŏlŏs)
관련 성경 / 모든(마 1:22), 온(살전 4:10), 전부(마 13:33, 눅 13:21), 다(마 22:37), 사방(눅 4:14), 온전히 (눅 11:36, 요 9:34),
전신(요 7:23), 각각(요 19: 23), ~간(행 11:26), 두루(행 13:49), 종일(롬 8:36, 10:21), 전체(갈 5:3), 온통(딛 1:11)
신약 성경 / 110회 사용

* 2545 / 불붙이다, 등불을 켜다, 마음이 타다 - καίω
1. 불붙이다,  2. 등불을 켜다,  3. 마음이 타다
발음 / 카이오(kaiō)
관련 성경 / 켜다(마 5:15, 요 5:35, 계 4:5), 뜨겁다(눅 24: 32), 사르다(요 15:6), 불사르다(고전 13:3), 불붙다(히 12:18), 타다(계 8:10, 21:8), 붙다(계 19:20)
신약 성경 / 12회 사용


3144. 증인 - μάρτυς, μάρτυρος, ὁ
1. 증거,  2. 마태복음 18:16,  3. 로마서 1:9
발음 / 마르투스(martüs)
어원 / 불확실한 유사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증인(마 18:16, 막 14:63, 눅 24:48)
신약 성경 / 35회 사용

I. 명사 / 증거, 증인
  • 1.명사 [문자적으로, 법적 의미에서] 마 18:16, 막 14:63, 행 7:58, 고후 13:1.
  • 2. 명사 [비유적으로]
    • a. 명사 [하나님이나 그리스도가 증인이 되시는 경우] 롬 1:9, 빌 1:8, 살전 2:5,10.
    • b.명사 [사람의 눈이나 귀로 듣고 보고 증언 하는 것] 살전 2:10, 딤전 6:12, 딤후 2:2.
    • c. 명사 [하나님의 메시지에 대한] 증인, 계 11:3.
  • 3. 명사 순교자, 행 22:20, 계 2:13, 17:6.


진리의 영인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에 오르신 예수님을 보았고 또 그분의 의에 기준하여 세상이 그분을 믿지 않는 것에 대해 책망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복음을 듣고 마음에 찔렸습니다.
사단이 그런 군중을 충동하여 스데반에 대해 이를 갈게 만들어 돌로 쳐서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심판 받은 것은 사단이었습니다.
스데반도 예수님처럼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간구하며 천국으로 올라갔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역할에 대해서 많은 신자들이 초자연적 은사나 이적이라는 일부 제한된 측면에만 관심을 쏟습니다.
그것은 성령이 충만하여 낳은 결과일 뿐입니다.
성령의 근본 역할은 지금 예수님의 설명대로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세상을 책망하는 것입니다.
요컨대 오직 그리스도의 영광의 빛을 세상에 비추이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성령의 간섭으로만이 한 죄인을 거듭나게 해서 예수를 주라 시인할 수 있으며, 성령에 내주에 의해서만이 구원 받은 신자가 예수님을 닮아가고 싶은 소원을 심어 주시며, 성령의 충만한 인도만이 신자로 그분의 일에 평생을 걸고 헌신코자 하는 열망이 생기게 하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성령의 궁극적 역할은 세상이 어떤 핍박을 가해도, 심지어 죽음으로 내몰아도 신자가 사도들처럼 오히려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행 5:41) 세상을 책망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성령의 권능은 세상이 전혀 감당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세상이 도무지 감당 못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또 그 진리는 하나님 본체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으로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이미 세상을 책망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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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혜사 성령의 세 가지 사역

 

요한복음 16:7-14

본문은 예수님께서 수난을 받으시고 장사 된지 사흘 만에 부활 승천 하실 날을 불과 열흘도 앞두지 않은 때에 하신 말씀이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이후에 곧바로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시사,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롯하여 다가오는 신약 시대의 모든 성도들과 함께 있게 하신다는 위로의 말씀을 주셨다.
‘보혜사’ 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라클레토스’는 ‘곁에서 돕는 자’, 혹은 ‘변호자’, ‘조언자’ 라는 뜻이다.
즉 예수님께서 보내실 보혜사 성령은 성도들 곁에서 함상 도우시며, 변호하시며 조언해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보내실 보혜사 성령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성도들을 도우시는가?
이에 보혜사 성령께서 성도들에게 하시는 일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1. 우리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게 하신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책망하다‘(엘랭코)는 말은 재판정에서 자기의 죄를 부인하는 피의자를 변론으로 설복시켜, 자기의 죄를 깨닫게 할 뿐 아니라 그의 죄를 자복하도록 하는 것을 가리킨다. 

즉 성령께서는 우리 인간이 여호와 앞에서 죄인임을 깨닫게 하신다.
여기에서 죄를 깨닫게 하신다는 것은 단지 도덕적으로 무슨 죄를 지었는지 일일이 기억나게 하시는 것 정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근본적으로 인간은 아담의 원죄를 물려받은 죄인으로서 여호와께서 요구하시는 의를 실행 할 수 없다는 전적 무능력을 깨닫게 하신다는 것이다. 

또한 거룩하신 여호와 앞에 서기에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자기 입으로 고백하게 하시는 것이다. 오늘 내가 범하는 자그마한 실수나 범죄도 결국은 그러한 전적 부패의 결과임을 깨닫고 고백하게 하시는 것이다. 이처럼 죄를 깨닫고 고백하게 하시는 성령의 사역은 일차적으로는 불신자가 자기 죄를 회개하고 회심하여, 처음 예수님을 믿게 할 때에[ 가장 강하게 나타난다. 

그리고 이미 예수님의 구속 은혜를 깨닫고 신앙을 갖게 된 성도들에게도 역시 죄를 깨달아 고백하게 하시는 일을 상령께서 하신다. 이미 신앙을 가진 성도라 할지라도 이 땅에 살고 있는 동안에는 여전히 죄와 부패의 영향력 아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우리 성도들이 천국에 이를 때까지 성화(聖化) 할 수 있도록 계속해서 죄와 부패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죄를 깨닫게 하고, 그럼으로써 다시는 범죄 하지 않도록 일을 하시는 것이다.

2.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 .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 성령이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에서 진리가 무엇인가? 다시 요 15:26절은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성령이 예수님을 증거 하실 것이요.’라고 하셨다. 이것으로 볼 때 진리란 바로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이다. 

우리가 죄 가운데 죽게 되었을 때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해 주시기 위해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던 예수님,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그 구속의 은혜를 힘입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해 주시는 예수님, 뿐만 아니라 죄의 몸으로는 결단코 여호와의 앞에 나아갈 수 없었으나 오직 예수님을 의지하여 담대하게 나아가 여호와와 화목을 누릴 수 있게 해 주시는 예수님, 그분 바로 진리이시다. 

보자. 예수님께서도 자신을 가리켜 말씀 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말미암지 못하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고 하셨다. 이처럼 보혜사 성령은 죄인 된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고, 나아가 그 죄의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진리의 길로 인도해 주시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 진리이신 예수님을 발견하게 하고, 그 구속의 은혜를 누리며 또 예수님을 의지하여 점차 예수님을 닮아가는 성화를 할 수 있게 하시는 것이다 

3. 우리의 승리를 보증해 주신다.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여기에서 ‘ 이 세상의 임금’이란 바로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엡  2:2), 사단을 가리킨다.
즉 예수께서 성육신하여 초림하시고 또 십자가 수난을 받으신 후 장사 된지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사단과 그의 악한 세력들이 패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히브리서 2:14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목 박혀 죽으신 것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려고.

이처럼 예수께서 사단을 이기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누구든지 예수님 안에만 있으면 사단의 세력도, 사망도 결코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롬 6:16, 히 2:15). 또한 사단이 이처럼 예수님에 의해 패하였고, 장차 앞으로 영원히 꺼지지 않는 유황불 속에 던져질 것이기 때문에, 이제 우리들은 예수님의 복음을 세계 곳곳에 전파 할 사역자들도 더 이상 사단의 새력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 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셨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눅 10:19), 이와 같이 보혜사 성령께서는 사단이 이미 여호와의 심판 아래 있음을 알겨 주고, 현재 남아 있는 사단의 잔존 세력들의 최후 발악을 결단코 두려워하지 않도록 성도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지상의 공생애 사역을 마치고 승천하시기 전에 약속하셨던 보혜사 성령님이 이제는 우리 곁에 있는 것이다. 
성령님이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해 주시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며, 사단의 세력에 대항 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더욱 보혜사 성령님을 의지하여 신앙생활에 박차를 가하며,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되겠다.

* 자료출처 / 그랜드종합주석 요한복음 16장 pp 920-921 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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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기독교 교리 중 ‘삼위일체’는 가장 난해한 영역에 속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계시는데 셋이 아닌 하나인 유일신론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셋이란 의미가 아니라 한 하나님만 계시다는 뜻입니다.

대표적인 구절인 요한복음 15:26은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라고 삼위일체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떠나셔야만 성령이 오실 수가 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 보내리니”(요 16:7)란 말씀으로 설명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이 오셔서 하실 일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요한복음 14:26에서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성령은 예수님을 세상에 알리시는 일을 하실 것입니다.
어떤 방식으로 이 사역을 하실지에 대해 오늘 본문은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생각나게 하시는 동시에 세상이 왜 정죄받아야 하는지를 알리시는 사역을 하실 것입니다.

성령과 예수의 관계, 성령과 세상의 관계가 어떻게 형성될 지에 대해 우리는 바른 이해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령은 철저히 예수의 사역을 이어가실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은 세상을 가만히 놔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세상이 어떤 곳이며, 무엇이 근본적인 문제인지를 끊임없이 드러내실 것입니다.
물론 이 일을 예수님이 먼저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이 얼마나 삐뚤어져 있는지를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내셨습니다.
예를 들면, 세상에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떡으로 자신을 소개하신 예수님은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고 하셨는데, 세상은 그를 거절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요 15:18)는 말씀으로 세상이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드러내셨습니다.

세상이 예수를 거절하는 이유에 대해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 3:19) 는 답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세상의 본질적인 모습이 무엇인지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런 세상을 위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를 어떻게 대했습니까?
세상을 없애기 위함이 아닌 살리기 위해 생명까지도 내놓으시는 그를 세상은 극도로 미워했습니다.
억울한 누명까지 씌워서 가장 비참한 처형 방식인 십자가에 죽이는 일까지 서슴없이 행한 세상의 모습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진짜 얼굴입니다.

세상의 일그러지고 뒤틀린 모습을 성령은 오셔서 꾸짖으실 것입니다.
이 일을 성령이 어떤 방식으로 해내시는지를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성령이 초대 교회를 통해 당시 유대 사회를 어떻게 뒤집어 놓으셨는지를 보면 그 사역이 어떻게 펼쳐질 것인지를 충분히 예상할 수가 있습니다.
또한 성령은 베드로와 바울이라는 특출난 사도들만을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수많은 이름 없는 이들을 통해 세상을 책망하셨습니다.
이들이 바로 교회입니다.
세상에 있는 교회는 성령의 도구로서 세상의 잘못된 관행과 뿌리깊은 죄성을 폭로해야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만 세상이 구원받을 수 있음을 전해야 합니다.
이것이 세상을 책망하시는 성령의 사역에 순종하는 교회의 참된 모습입니다.
이 일을 교회가 하지 않고 있다면 성령과 반대되는 사역을 하고 있다는 의심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친구가 되는 것이 교회의 임무가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이 올바른 방향으로 회복될 수 있음을 끊임없이 외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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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망의 구체적인 내용은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는 것인데,
죄에 대하여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하신 것처럼 예수 안 믿었던 것에 대하여 강한 회개 현상을 주십니다.
즉 성령이 오시면 내가 왜 이제 예수를 믿게 되었지 하면서 예수를 나의 구주로 적극 모시고 된다는 말입니다.
이 회개의 역사가 내적인 으로 강하게 일어납니다.

그리고 의에 대하여 책망하신다는 것은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하신 것처럼 우리가 세상에서 자기 의를 찾지 않고 높이 되신 예수 안에서 거룩하심과 영화로우심을 찾고 입게 되는 현상을 가리킵니다.

마치 바울이 십자가에서 나는 다 사라지고 오직 자기 안에 예수로 가득한 사람이 되기를 갈망했던 그 갈망이 바로 의에 대한 책망현상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역사하시면 데굴데굴 구르면서까지 죽든지 살든지 예수 안에서 온전케 되려는 갈망이 생겨납니다.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하신 말씀은 우리가 예수 안에서 승리했음을 믿고 감격하는 승리적 확신입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육신적인 눈이 아니라 신령한 눈으로 사물을 보고 사건을 보고 환경을 보면서 믿음으로 생각하고 믿음으로 말하고 믿음으로 행합니다.
이런 믿음으로 복음에 서서 예수님의 승리를 선포할 때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 나타납니다.

그 뿐 아니라 원수 마귀의 나라를 정복하여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기 위해서 복음 전파를 위해서 간절히 갈망하게 하십니다.
이 마음을 갖게 되는 교회에서 작은 것 가지고 서로 안 하겠다고 옥신각신 싸우는 일은 없습니다.
모두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라 헌신하고 충성함을 갈망합니다.
이처럼 성령님께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놀라운 구원을 적극적으로 개입하셔서 그 구원의 순서를 이루어 온전한 사람 만들어 가시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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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천지의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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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천지의 교주 이만희가 자신을 보혜사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 살펴보자.

 - 예수님의 말씀을 대언한 본문의 천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와서 ‘예수님의 말씀’을 대언하기로 약속한 ‘진리의 성령 보혜사’의 입장에 있다(요 14:26).
진리의 성령이라 함은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요 17:17)을 가지고 오는 자(계 1:1)라는 말이며
보혜사는 은혜로 보호하는 스승이라는 뜻이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요 5:43)’으로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요 14:24) ‘보혜사 예수님(요일 2:1 난하주)’이 하나님께 구하여 보낸 대언자이므로 ‘다른 보혜사’라 한다(요 14:16).

승천하신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대언자로 삼으신 것처럼 보혜사 성령을 자신의 대언자로 삼아 말씀을 전하시며 직접 우리에게 나타나 말씀을 가르쳐 주시지 않는다.(요한계시록의 실상, 417쪽)


1. 이만희는 “진리의 성령”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오는 자”이며,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갖고 온 천사나 선지자나 사도를 "성령"이라고 불렀던 적이 있는가? 단 한번도 없다.

아래 요한복음 14:16-17에서 말하는 진리의 영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을 말한다.

신천지에서는 이만희가 교인들의 속에 거한다고 가르치는가?
세상은 진리의 성령인 보혜사를 보지도 알지도 못한다고 말하고 있다.
세상은 이만희를 보지도 못하는가?  

요한복음 14:16-17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2. 이만희는 “보혜사”가 “은혜로 보호하는 스승”이라는 뜻이라고 말한다.

이만희는 보혜사를 한문풀이를 하여 保惠師, 즉 “은혜로 보호하는 스승”이라고 해석을 한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를 한문으로 음역하여 기독(基督)이라고 하는데, 이만희는 그리스도를 “기독”이라는 한문으로 해석하는 것과 같으며, 예수를 야소(耶蘇)라고 하는데 그것도 한문으로 해석할 것인가?
베드로는 한문으로 음역할 때에 피득(彼得)이라고 하는데, 이것도 한문으로 해석할 것인가?

保惠師의 “사”가 스승 “師”이므로 스승인 이만희를 말한다는 해석은 웃을 수도 없는 코메디에 가깝다.
그렇다면 醫師는 의학을 전하는 스승이고, 按摩師는 안마를 전하여 주는 스승인가? 이만희는 牧師를 가축을 치는 일을 가르쳐주는 스승으로 해석하는가?

그는 보혜사가 헬라어 "파라클레토스"라는 단어를 음역한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한문풀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설명한 것을 다시 반복하면, "파라"라는 헬라어는 "옆에"라는 뜻이고 "클레토스"는 "클레오"라는 단어에서 파생되었는데 "부르다"라는 의미로서 파라클레토스는 헬라의 법정용어로서 피고측 변호인이라는 뜻을 갖는다.

이만희는 “대언자”가 하나님을 대언하는 자라고 주장하는데, 파라클레토스가 성도를 의미하는 피고측 변호인을 뜻한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그런 주장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대언자”(파라클레토스)는 하나님을 대언하는 것이 아니라 피고, 즉 성도를 대언하여주는 직분을 뜻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라고 기록되어있는 것을 보면 누구든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파라클레토스)가 있으니

3. 이만희는 천사가 쓰는 사람이 보혜사이므로 사도요한이 보혜사이고, 그래서 이만희가 보혜사가 된다고 주장하는 비논리적이고 비성경적인 주장을 하고 있다.
보혜사의 입장에 있었던 천사는 성경에 단 한번도 존재하지 않는다.

- 보혜사 성령은 요한복음 16장 14절 말씀대로 예수님의 것을 가지고 와서 장래일을 알린다. 계시록 1장 1~3절과 10장에 본 바 보혜사의 입장에 있는 천사가 택하여 쓰는 사람은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전해 받는 사도 요한이다. 그러므로 요한은 ‘성령의 대언자’로서 보혜사의 입장에 놓인다. 그는 진리의 성령은 아니지만 그와 함께 하는 영(요14:17)으로 말미암아 보혜사의 위치에서 대언하게 된다. 계시록 성취 때가 되면 보혜사 성령이 함께 하는 대언자 곧 사도 요한의 입장으로 오는 목자가 출현하여 밤과 같이 어두운 심령을 밝힌다. 성경에 무지한 사람들은 그를 핍박할 것이나 그것은 보혜사 성령을 보내신 예수님을 찌르는 행위가 된다.(요한계시록의 실상, 418쪽)

즉 보혜사라는 단어는 “보혜사의 입장”이라는 이상한 표현과 함께, 천사 - 사도요한 - 이만희로 이동되어지는데, 이만희는 “사도요한이 입장”이 되어진다고 말한다.

이만희는 비논리적이며 비상식적인 말도 안되는 황당하고 무지한 논리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한번 정리하여 보자

첫째, 이만희는 천사가 보혜사 입장이라고 주장하는데.... 천사를 보혜사라고 부른 성경은 단 한 구절도 없다.

둘째, 이만희는 사도요한이 대언자이므로 보혜사 입장에 놓인다는 주장도 황당한 주장이며, 대언자라는 성경구절은 “파라클레토스”로서 다른 번역성경은 “변호자”로 번역하였다, 더욱이 본문은 천사나 사도요한이 대언자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대언자라는 내용이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파라클레토스)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2:1)

즉 파라클레토스라는 단어는 헬라의 법정용어로서 "피고측 변호사"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장차 심판에서 우리를 변호하여 준다는 뜻이다.

예수가 대언자(변호자)가 되어주신다는 성경구절을 천사라고 해석하며, 사도요한이라고 해석하는 이만희는 도대체 성경을 어떻게 보는 것인지 묻고 싶다. "은혜로 보호해주는 스승"이라는 한문풀이가 보혜사의 뜻인가?

과연 예수가 우리의 변호자가 되신다는 본문구절이 “보혜사 성령이 함께 하는 대언자 곧 사도 요한의 입장으로 오는 목자가 출현한다”는 뜻인가?

[공동번역] 나는 믿음의 자녀인 여러분이 죄를 짓지 않게 하려고 여러분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그러나 혹 누가 죄를 짓더라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의로우신 예수 그리수도이십니다.

[표준새번역] 나의 자녀 여러분, 여러분이 죄를 짓지 않게 하려고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씁니다. 누가 죄를 지을지라도 아버지 앞에서 변호해 주시는 분이 우리에게 계시는데,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현대인의성경] 나의 믿음의 자녀들이여, 여러분이 죄를 짓지 않게 하려고 나는 이 편지를 씁니다. 그러나 만일 누가 죄를 짓더라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KJV] My little children, these things write I unto you, that ye sin not. And if any man sin, we have an advocate with the Father, Jesus Christ the righteous:

[NIV] My dear children, I write this to you so that you will not sin. But if anybody does sin, we have one who speaks to the Father in our defense--Jesus Christ, the Righteous One.

셋째, 이만희가 어떻게 사도요한의 입장이 되며, 사도요한이 어떻게 보혜사의 입장이 되는가?
이러한 주장을 하는 자체가 부끄러운 생각이 들지 않는지 묻고 싶다.

이만희는 천사가 보혜사의 입장이므로 사도요한도 보혜사이고, 사도요한이 보혜사의 입장이므로 이만희가 보혜사가 된다는 전혀 말이 되지 않는 해괴망칙한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신천지는 처음에는 이만희가 보혜사라고 주장하다가, 나중에는 진리의 영도 보혜사이고 육체도 보혜사라는 주장을 한다.

넷째, 헬라어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이만희가 헬라어 파라클레토스가 음역된 보혜사라는 단어를 한문으로 풀이하여 자신이 “은혜로 보호하는 스승”이므로 보혜사라고 주장하는 웃을 수 없는 코메디가 연출되었던 것인데, 헬라어를 확인하거나 영어성경, 다른 한글번역성경을 확인하면 그의 거짓말이 그대로 폭로되므로 이만희는 이렇게 웃지 못할 주장을 하고 있다.

- 성경이 히브리어나 헬라어로 기록되었다 할지라도 기록된 바 그 예언이 대한민국에서 이루어질 말씀이라면, 한국어로 번역된 성경의 말씀이 가장 정확할 것이다. 굳이 이유를 말하자면 그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이 대한민국 사람을 들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때문에 성령의 역사로 정확하게 기록했을 터이고, 또한 하나님이 기록된 말씀대로 이루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성령의 역사를 믿는 성도라면 아멘으로 화답할 것이다.(성도와 천국, 9쪽)

헬라어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이만희는 실제로 한문풀이를 하고 있다.

그는 삼위일체를 몸이 하나이며(一體) 보좌가 셋(三位)인 사람으로 해석하여 이만희 자신이 삼위일체라고 주장한다. 삼위일체에서 삼위는 위격(인격, person)을 말하며, 일체는 본질(본체, nature)을 뜻한다는 기본적인 용어조차도 모르는 것이다.

히브리서 1:3에서 “휘포스타시스”(confidence essence, nature, person)라는 단어가 나타나는데 이 단어의 뜻이 “본질, 본체, 실체, 실상”이라는 뜻을 갖는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휘포스타시스)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3)

즉 예수도 하나님과 동일한 휘포스타시스를 갖는다는 성경말씀에서 삼위일체라는 용어가 발전된 것이며, 삼위일체란 “한 본질을 가진 세분(three persons in one nature)”으로서 가장 성경적인 정통적인 기독교 신관의 정의가 되어왔다. 세분은 하나의 본질(nature)을 가지고 있어서 하나됨(일체)을 유지하는 한편, 각자의 독특한 특성(property)에 의해서 위격으로 상호구별(삼위)된다는 뜻이다.

이 교리가 16세기 중국에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한자로 “三位一體”라고 번역되었는데, 선교사들이 한문 그대로 우리나라에 이 중국식의 용어를 들여온 것이다. 

그는 무지한 사이비집단의 교주답게 삼위일체를 몸이 하나이고, 보좌가 셋으로 해석하여 자기가 삼위일체라고 주장을 하여 웃을 수도 없는 주장을 하고 있다.

- 본문 21절의 말씀은 위(位)가 셋이요 육체는 하나이니 삼위일체라 할 수 있고 3장 12절에는 이긴 자에게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기록하였으니 일체(一體)에 위(位)가 셋이니 이것이 말하자면 삼위일체이다.(천국비밀계시)

3. 성령과 그리스도의 영, 하나님의 영

- 성령은 일반 성령이 있고 진리의 성령 보혜사가 있다. 목자도 일반목자가 있고 약속의 목자(대언의 목자)가 있으며, 교회도 일반교회가 있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성경에 약속한 성전이 있다. (이만희, 성도와 천국, 명심할 사항, 227쪽)

신천지에서는 이만희가 예수의 영을 받았으며, 진리의 성령을 받았다고 주장하는데, 예수를 믿고 거듭난 성도들은 모두 성령을 받는다. 신천지 교주 이만희는 오직 그만이 예수의 영을 받았다고 가르치기 때문에, 성도들이 받는 일반 성령과 예수의 영은 다르다고 주장할 수 밖에 없다.

처음 단추를 제대로 맞추지 못하면 마지막 단추는 맞출 구멍이 없어진다. 결론적으로 성경적으로 볼 때에는 그리스도의 영과 하나님의 영, 성령은 모두 동일한 것이라고 말씀 드리며, 단지 명칭적인 차이가 있을 뿐이다.


381년 콘스탄티노플회의에서 325년의 니케야회의에 만들어진 니케야신조에 “또한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 성부에게서 나오시며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예배받고 영광 받으시며 예언자를 통해서 말씀하신.....”이라는 구절이 추가되었다.이 추가된 문구의 해석에 대해서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에서 심각한 대립이 발생하였다. 동방교회에서는 “성령이 성자를 통해서 성부에게서 좇아나심”으로 해석했고 서방교회에서는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게서 좇아나심”으로 해석한 것이다.

이 단어가 바로 유명한 ‘필리오케(Filioque)’라는 라틴어인데 그 뜻은 “...와 성자에게서”라는 의미이다. 동방교회에서는 콘스탄티노플회의에서 추가된 신조를 “변조”되었다고 주장하였고, 서방교회에서는 확대해석이라고 주장한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성령은 하나님의 영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의 영인가?성령은 성자에 의하여 성부에게서 방출되는가? 아니면 성부와 성자에게서 방출되어지는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He)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14:26)

 

위 성경본문은 성부께서 예수의 이름으로 보내신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아래 성경본문은 예수께서 성령을 보낸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him) 너희에게 보내리니”(요16:7)

 

왜 이러한 상이한 부분이 있을까?

그리스도가 보내는 영이 별도로 있고, 하나님이 보내는 영이 별도로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이 성경본문에서 삼위일체의 본질을 깨닫게 된다.정통삼위일체에서 분명히 삼위의 하나님은 인격적(위격적)으로 구별되어진다. 성부는 성자가 아니고 성자는 성령이 아니며, 성령은 성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본질적인 면에서는 삼위는 모두 동일하며, 오직 하나의 신적본질을 공유하고 있다. 즉 성부하나님의 본질은 성자예수의 본질과 동일하다. 그래서 예수는 하나님의 본체이시며, 하나님의 형상인 것이다.

 

우리는 어떤 신학적인 주장을 하기 위해서 단지 추측적이고 인위적인 논리로 성경을 판단할 수는 없으며, 반드시 그 증거를 제시하여야만 한다. 이러한 성경적인 증거가 정통교리의 첫 번째 조건이 된다. 성경에서 성령은 간혹 아들의 영이라고 불리워지며 그 아들의 영, 즉 예수의 영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에게 보내진다.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4:6)

 

누가 보아도 위 갈라디아서 본문에서 하나님이 보내는 ‘아들의 영’은 성령이 분명하다. 또한 다음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영”과 “그리스도의 영”, 그리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은 모두 동일하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8:9-10)

 

성경 본문에서 하나님의 영과 그리스도의 영, 그리고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 즉 하나님의 영이며, 우리 안에 거하시는 영, 즉 성령의 근본적인 구별은 없는 것이 분명하다. 믿는 성도의 안에 거하는 성령은 오직 하나이며, 오직 한분의 성부와 한분의 성자가 있는 것과 같이 오직 한 분의 성령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이중방출(Double Procession)의 개념을 발전시키게 되었다.

그래서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방출된다”고 선포되었던 것이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상호연합과 교통하심으로 본질적인 공통의 개념을 갖는다. 하나님의 영이시며 그리스도의 영이시다.

사도요한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요일1:3)

 

그리스도와 성령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신자들의 마음 속에 성령과 그리스도께서 같이 거하신다고 말할 수 있다. (갈2:20, 롬8:9-10). 또한 성령과 성부하나님도 본질적인 동일성을 표현하고 있는데, 예를 들면 성령이 거하는 성도들의 몸은 하나님이 거하는 성전이라고 불리워진다.(고전3:16)

 

이만희가 재림예수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하여, 예수의 영과 일반 성령이 다르다고 주장하는 신천지가 과연 성경적인 곳이라고 생각되는가? 그들의 교리는 성경을 근거로 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교리에 성경을 부분적으로 짜맞추는 것뿐이다.

성경은 성령이 곧 아들의 영이며, 예수의 영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영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성령은 한분이시지만 그분의 여러가지 역사를 나타내는 명칭을 많은 것이다. 성령은 하나님의(여호와의) 영, 하나님의(여호와의) 신, 보혜사, 그리스도의 영, 진리의 영, 아들의 영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려진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행16:6-7)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4:6)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 2:10-11)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으로 우리에게 그 뜻을 보이신다. 하나님의 영이 곧 하나님을 알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명칭은 비록 다르지만 성도들에게 거하며 역사하는 성령은 오직 하나인 것이다.

이만희는 예수의 영을 받았고, 교인들은 일반 성령을 받았다?  참으로 웃을 수도 없는 주장이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1:6-8).

   

또한 사도바울은 기록한 말씀을 진리의 기준으로 제시하였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고전4:6).

   

또한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도 자의적으로 말하지 않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말씀을 증거한다. 즉 기록된 성경과 다른 복음을 전하거나, 다른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들은 모두 거짓선생이며 거짓 선지자이다.

   

4) 예수님이 약속하신 그 보혜사는 오순절에 성령으로 오셨다.

   

본문은 예수가 제자들에게 직접 말하는 화법이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라” (요16:12-14)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파라클레토스)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요 14:16-17)

  

위 본문에서 “너희”가 누구를 말하는가? 기본적인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너희”는 예수의 제자들을 말하는 복수대명사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신천지에서는 이 진리의 영이 이만희에게 왔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인칭대명사는 왜 “너희”라고 복수대명사를 사용하였는가? 이 보혜사 성령은 이만희가 아니라 바로 오순절에 오신 성령으로 성취되었다. 그 증거가 성경에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눅 24:49)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보혜사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여러번을 약속하시면서 예루살렘 성에 머물라고 하셨다. 이 약속은 누가복음뿐 아니라 사도행전에도 나타난다. 특히 요한복음에서는 내가 가면 보혜사 그를 보내주시겠다고 여러번을 약속하셨다.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행 1:4-5)

   

그리고 제자들은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는 것을 보고, 그 성령이 바로 예수님의 약속인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행 11:15-16)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행 2:38-29)

   

이 약속이 곧 요엘서에서 예언한 그 성령이었고, 베드로는 사도행전에서 베드로가 요엘서를 인용하며 그 성령이 성취되었음을 말한다.

   

5) 성령의 회상사역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할 것”(요15: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

    

물론 성령께서 개인적이며 일상생활적인 것까지 일일이 직접적으로 가르쳐 주는 것은 아니다. 정말 그렇게 가르쳐 주셨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또 자기 자신에게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을 모두 성령의 감동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신비주의라고 단언하여도 좋다. 오순절에 오신 성령은 예수가 가르치는 말씀을 증거하였다. 이것을 성령의 “회상사역”이라고 하는데, 예수님이 가르쳤던 말씀을 제자들에게 기억하게 해주었다는 뜻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요일 4:6).

 

진리의 영은 이만희만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자는 누구나 말씀으로 분별할 수 있는 것이다

 

사도요한이 요한일서에 말한 “우리의 말”은 사도들의 말이며, 곧 기록된 성경을 뜻한다. 즉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은 사도들의 말을 받아들이는 기준으로 구별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성경말씀으로 영을 구별한다는 뜻이다. 성령은 개인의 장래를 점을 쳐주거나 예언을 하여주거나, 일상생활의 일거수 일투족과 세상의 지식까지 모두 일일이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다.

신천지는 기독교에서 성령을 받았다고 가르치는데, 그러면 성령을 받으면 모든 것을 아는가? 라고 질문을 한다.

예수님은 오실 성령의 기능과 역할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 16:8).

  

성령께서는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 책망을 하여 주실 것이다. 곧 우리는 성령의 조명과 감동으로 죄와 의와 심판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며, 예수가 가르치셨던 말씀이 무엇인지 성경을 통하여 알려 주신다.

  

성령이 모든 것을 가르쳐 주므로 공부나 학습이 전혀 불필요하다는 주장은 잘못된 주장이다. 주관적인 신비주의자들은 인간교사를 부정하고 오직 성령으로만 직접적인 가르침을 받아야만 한다고 주장하거나, 직접계시만을 주장하기도 한다.  성경에서 보면, 초대교회는 성령의 은사로써 교사를 사용하였음을 알 수가 있다.(고전 12:28, 14:19; 롬 12:7, 엡 4:11)

  

즉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진리를 가르치기 위하여 교사를 도구로 사용하셨다. 이러한 성령의 은사는 그리스도의 몸이신 교회에 덕을 세우도록 주어지는 것이다(고전 14:12).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에서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20)는 말씀을 발견할 수 있다.

   

즉 다른 사람을 가르치며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인도하는 교사들은 기도하며 최선을 다하여 공부하고 미리 준비하여야 한다. 성령의 가르침이란 인간의 노력을 전혀 배제하여도 저절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의 노력으로만 되는 것은 아니며,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도우심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도 잊으면 안된다. 시편의 기자는 이렇게 기도하였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시 119:18).

  

아볼로는 학문이 많고 일찍 주의 도를 배운 사람이었으나 그는 요한의 세례만 알던 사람이었다.

   

“그가 일찍 주의 도를 배워 열심히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행18:24-25).

   

그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 성경을 자세히 풀어 배움을 받고 나서부터, 공중 앞에서 성경으로 유대인들을 이기게 되었고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증거하게 되었던 것이다(행 18:26-28). 아볼로는 초대교회의 성경교사였으며 지도자였다. 훗날 바울은 아볼로에게 고린도교회를 다시 방문해달라고 권유하기도 한다(고전 16:12).

바울은 성경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고전3:6).

   

즉 하나님께서 자라나도록 역사하시지만, 인간 교사의 노력과 가르침을 배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즉 인간 교사의 노력과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함께 동참되는 동역을 말하는 것이다. 바울은 아볼로나 자신의 노력이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러나 아볼로와 자신이 모두 하나님의 동역자임을 말하였다(고전 3:9).

   

아볼로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 성경의 가르침을 자세히 배운 후에야 그도 역시 성경 교사가 되었던 것이다(행 18:24-28). 또한 몸 되신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 각각 지체가 되는 우리들이 서로 연합함으로서 각각의 은사가 공동체를 위하여 활용되어져야만 한다.

   

디모데는 “저희가 또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딤후 2:2)라고 말했으며, 히브리서 기자는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히 5:12)라고 기록하였다.

   

안디옥 교회에서는 스데반의 순교로 흩어진 무명의 그리스도인들에 의하여 복음이 전파되어 교회가 세워졌는데, 바나바와 바울이 일년간을 교회에 머물면서 가르쳤을 때에야 비로소 그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일컬음을 받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행 11:26).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행 11:25-26)

 

6) 하나님의 교회가 말하는 보혜사

   

우리나라에 자칭 보혜사는 47명이다.

특히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88년에 면 종류를 먹다가 죽은 안상홍이 보혜사 성령이라고 주장한다. 더욱이 안상홍을 하나님, 초림예수, 재림예수, 보혜사 성령, 멜기세덱, 이삭이라고 주장하며, 강림하실 예수라고 주장한다.

그동안 박태선과 같이 교주 자신을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하는 이단은 거의 없었다. 게다가 하나님의교회는 1인 5역이며 양태론적인 삼위일체이다. 재림과 강림은 다르다고 주장하며, 안상홍이 재림예수였으며 장차 강림할 예수도 안상홍이라고 주장하므로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1인 7역으로 가르치고 있는 사이비단체이다.

  

박태선(전도관) 출신인 이영수, 김풍일, 조희성등 하나같이 자신을 보혜사이며 이긴자라고 주장하는데, 모두 박태선에게서 그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이만희 역시 전도관 출신으로서 보혜사, 이긴자, 감람나무, 두 증인등 모두 배워온 것을 그대로 모방하는 것뿐이다. 

 

결론적으로 교주나 지도자를 보혜사라고 가르치는 곳이 있다면 그곳은 말할 필요도 없는 이단이라고 보면 정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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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향하시고(창세기 8:21)



흠향하시고(창세기 8:21)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흠향하시고(7306) 루아흐(rûwach) רוּחַַ  

1. 불다,  2. 숨을 쉬다,  3. 냄새 맡다

발음 / 루아흐(rûwach) 
관련 성경 / (향취를) 맡다(창 27:27, 출 30:38, 시 115:6), 불타다(삿 16:9), 기뻐하다(암 5:21), (향기를)받다(창 8:21), 흠향하다(레 26:31).
구약 성경 / 8회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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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향(레위기 26:31)

레위기 26:31
내가 너희 성읍으로 황폐케 하고 너희 성소들로 황량케 할것이요 너희의 향기로운 향을 흠향치 아니하고.

향(7381) 레아흐(rêyach) רֵיחַ 

1. 향기,  2. 향내,  3. 창세기 27:27

발음  / 레아흐(rêyach) 
어원 / 730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향기(창 8:21, 아 2:13, 호 14:6), 향취(창 27:27), 기운(욥 14:9), 냄새(아 7:8), 맛(렘 48:11). [형] 향기로운(출 29:18,  민15:3, 레26:31).
구약 성경 / 69회 사용

* 7306. 루아흐(rûwach)  רוּחַַ

1. 불다,  2. 숨을 쉬다,  3. 냄새를 맡다

발음 / 루아흐(rûwach) 
관련 성경 / 맡다(창 27:27, 출 30:38, 시 115:6), 불타다(삿 16:9), 기뻐하다(암 5:21), (향기를)받다(창 8:21), 흠향하다(레 26:31).
구약 성경 / 8회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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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향(歆饗)

흠향(歆饗)은 향이라는 발음 때문에 혼동하기 쉽지만 향기(香氣)와는 다른 단어입니다.
어려운 단어인데 아래와 같은 뜻이 있습니다.

歆 흠향할 흠
㉠흠향하다 ㉡부러워하다 ㉢움직이다

饗 잔치할 향 
㉠잔치하다 ㉡흠향하다 ㉢대접하다 ㉣누리다 ㉤드리다 ㉥마시다 ㉦제사 지내다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람이 드린 제물을 받으신다고 할 때 쓰였습니다.

흠향(歆饗)이라는 단어는 중국고대 제사용어로도 쓰였는데요 즉 신명(神明)이 제물을 받는다는 뜻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그것을 우리 성경이 차용한 것인데 개역성경에 비해서 개정성경은 흠향이라는단어보다는 받으신다는 단어로 많이 바꾸었습니다. 

영어성경은 Accept를 썼습니다.
받아주셨다는 뜻입니다.
다시 생각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무슨 제물이든지 다 받으시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제물을 받지 않으시고 거부하시기도 하십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은 우리의 기도나 제물을 하나님께서 열납(悅納; 기쁠 열, 받으실 납, <영> Regard) 해주시기를 원하는 기도가 많았습니다.  
 
[레26:31] 내가 너희의 성읍을 황폐하게 하고 너희의 성소들을 황량하게 할 것이요 너희의 향기로운 냄새를 내가 흠향(歆饗) 하지 아니하고
 

 
그런데 주목하고 싶은 것은 흠향(歆饗) 이라는 단어의 히브리어입니다. 하나님께서 흠향(歆饗) 하신다할 때의 흠향(歆饗) 이 히브리어로는 루아흐입니다. 구약성경을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은 루아흐라는 단어에서 금방 성령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것입니다.
루아흐는 하나님의 호흡,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기, 하나님의 숨결로 해석됩니다. 그리고 곧 그것은 성령으로 이해됩니다.
j'Wr 루아흐- 성령
기본어근;본래 의미는 ‘불다’, 즉 ‘숨을 쉬다’;오직(문자적으로)‘냄새맡다’, 또는 (함축적으로)‘감지하다’(상징적으로 ‘기대하다’, ‘즐기다’):-받아들이다, 냄새맡다.
 

그렇다면 우리의 시간에,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시간의 제물에,
시간을 걸어가는 우리의 걸음에 성령님께서 동행하지 않으신다면 그 시간의 제물은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시지 않으신다는 교훈이 얻을 수 있겠습니다.
우리의 모든 시간의 제물에 '루아흐'의 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삶의 걸음이 성령님의 도움으로 향기로운 시간의 제물이 되고 시간의 향기가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성경에서도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정결한 짐승과 새를 취하여 여호와께 번제를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셨다고 말합니다.(창세기 8:20-21)

하나님께 번제를 드린다고 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번제를 흠향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의 번제를 받지 않으셨고(창 4:5)
사울왕의 번제를 받지 않았습니다(삼상 13:13)
이사야 시대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무수한 제물과 숫양의 번제를 기뻐하지 않으셨으며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사 1:11-13)
그것은 그들의 악으로 인해 그들이 손을 펼 때에 하나님이 눈을 가리우시고 많이 기도할지라도 듣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사 1:14)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합니까?
악을 행하는 자는 무수한 예물과 기도를 드린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번제를 흠향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눈을 가리고 귀를 닫으시니 그 모든 번제와 기도는 곧 쓸데없는 일만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흠향하시는 기도가 무엇인지 알고 제대로 신앙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흠향하시는 기도는 먼저 자신의 악행을 버리는 회개에서 시작된다고 말씀하십니다(사 1:16)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를 통해 세리가 의롭다 함을 얻었다고 하시며 그의 기도가 하나님께 흠향되었음을 말씀해 주셨습니다.(눅 18:14)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세리의 회개 기도를 기뻐하셨는데 그는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자이었기 때문이라고 예수님은 설명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 18:14)

이처럼 겸손한 자의 기도가 하나님께 흠향되는 이유는 그는 자신의 온 영혼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겸손은 곧 자신의 자기중심적인 태도가 사라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는 자신의 교만을 꺾었기에 진정으로 회개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의가 보이지 않기에 진정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솔로몬과 같이 일천번제의 예물을 기꺼이 드리며 온 맘으로 예배할 수 있습니다(왕상 3:4)
그는 자신의 부귀와 영광에는 관심이 없기에 진정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 솔로몬과 같이 백성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왕상 3:9)
성경에서는 그의 기도가 “주의 마음에 든지라” 라고 표현합니다(왕상 3:10)
즉 그의 기도가 하나님께 흠향된 것입니다.
그로 인해 그는 하나님께 전무후무한 지혜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가 구하지도 아니한 부귀와 영광도 받는 축복을 누렸습니다(왕상 3:11-13)

그러므로 당신에게 진정한 축복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곧 하나님이 흠향하시는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진정 겸손함에서 드리는 회개의 기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기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기도는 전부 하나님께서 향기로운 제물로 흠향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 기도를 천사가 금 향로에 담아 아름다운 향기로 하나님의 제단에 드린다는 사실입니다.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 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와 합하여 보좌 앞 금 제단에 드리고자 함이라(계 8:3)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기도

주님!
당신은 하나님의 본체이시지만 자신을 낮추시고 종의 형체가 되신 주님!
하나님께 당신의 영혼과 삶을 흠향하도록 드리신 겸손하신 주님이십니다.
이시간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의 옷을 입고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높아진 마음, ​나태한 마음, 추정하는 마음 다 내려놓고 하나님께 나의 영혼을 드립니다.
주님!
오늘 하루도 주님의 겸손의 옷입고 살기를 다짐합니다.
나의 삶과 기도가 하나님께 흠향되는 향기로운 예배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성령님 나를 붙들어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적용

하나님께 자신의 삶, 말과 행동, 생각, 기도가 흠향되고 있는지 점검해 볼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내가 온전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가족과 이웃들을 사랑하며 살고 있는지 돌아보면서 기도의 자리로 나아갑시다.


흠향이란 예배와 관련지어 사용하는 것은 적절한 표현이다

지금은 하나님이 우리가 마음과 뜻과 정성을 합하여 드리는 예배를 기뻐 받으시는 것이지, 제단에 차려놓은 음식을 먹는다는 의미를 가진 제사에서 쓰이는 말인, 흠향을 하시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구약시대에는 제사(sacrifice)로여호와를 섬겼으나 지금은 예배(worship)로 여호와를 섬기기 때문이다.                

예배드릴 때 기도 인도자가 ‘하나님 우리 예배를 흠향하여 주시고---’와 같은 표현을 하는 것을 자주 듣는다.
즉 흠향이란 말을 예배와 관련지어 사용하는 것을 듣는데 이것은 적절한 표현이 못된다.

표준국어 대사전에서는 흠향(歆饗)을 ‘신명(神明)이 제물을 받아서 먹음’이라 풀이했고 아울러 운감(殞感)을 참고하라고 지시해 놓았으며,  흠향의 용례로 ‘이제 이순신으로 삼도수군통제사를 봉하와 침략자 왜적의 무리를 소탕하려하오니, 모든 신은 흠향하시고 그를 도와주소서’(박종화, 임진왜란)를 들었다.

운감의 뜻은 ‘제사 때 차려 놓은 음식을 귀신이 맛봄’이다.

이처럼 이 흠향이란 단어는 제사 때 그 차려놓은 음식을 귀신이 받아서 먹는 것을 뜻하는 말인데, 이와 같이 무속신앙과 연관되어 쓰이고 있는 말인 이 흠향을 예배와 관련지어 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성경에서도 이 흠향이 쓰인 것이 간혹 발견되기는 한다.

구약에서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창 8:20~21),

‘내가 너희 성읍으로 황무케 하고 너희 성소들로 황무케 할 것이요 너희의 향기로운 향을 흠향치 아니하고 그 땅을 황무케 하리니’(레26:31~32)와 같이

제사와 관련하여 이 흠향이 쓰였으며 신약에서는 이 흠향이 쓰이지 않고 있다.

이것은 구약시대에는 제사(sacrifice)로 여호와를 섬겼으나 신약시대에는 제사가 아닌 예배(worship)로 여호와를 섬기기 때문임은 다시 설명할 필요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대속제물이 되시면서 구약시대는 끝났고, 신약시대가 시작되었으며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도 제사가 아닌 예배로 바뀐 것이다.

지금은 하나님이 우리가 마음과 뜻과 정성을 합하여 드리는 예배를 기뻐 받으시는 것이지, 제사에서 제단에 차려놓은 음식을 먹는다는 의미를 가진 흠향을 하시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 흠향을 쓸 것 같으면 우리의 예배를 다시 제사로 돌리는 격이 되고 마는데 이것은 경계해야할 일이다.

다시 말하면 제사는 제주가 집행을 하듯이 구약시대에는 반드시 제사장이 제사를 주관하였다.

즉 백성들을 대신해서 제사장이 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신 이후에는 제사장이 대신해서 드려주는 제사는 끝났으며 우리도 직접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된 것인데,

다시 구약적인 제사의 개념을 불러 드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구약적인 제사와 관련되는 용어가 많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이 흠향이다.

만일 우리가 이 흠향을 사용한다면 지금 드리는 예배를 다시 구약적인,  달리 말하면 유태교적, 율법적인 제사로 되돌리는 결과가 되고 만다.

이것은 신앙적으로 매우 위험한 일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드리는 예배도, 나는 주체가 되지 못하고 다만 참여자의 입장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이것은 구약시대에 제사장이 대신해서 제사를 지내 줄 때, 곁에 있던 백성의 입장과 같이 되고 마는 결과가 된다.

지금은 만인제사장 시대가 아닌가? 한 사람 한 사람 직접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은혜의 시대가 아닌가?

이러한 점을 감안하여 우리는 구약의 제사에나 해당되는 흠향을 쓰는 것은 삼가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던 성막의 성소에는 세 가지 성물이 있다. 금등대, 진설병을 두는 상, 분향단이다. 이 중 분향단은 성소에서 향을 피우는 곳이다.
분향단은 오늘날로 말하면 기도하는 곳이다. 향기로운 향을 사를 때 그 연기가 올라가듯이, 우리들의 드려지는 기도가 하늘 보좌로 올라가기 때문이다(요한계시록 5:8, 8:3-4). 하나님께서 흠향하시는 기도는 어떠한 기도일까.
분향단에서 드려졌던 네 가지 향은 우리에게 그 비밀을 증거하고 있다.

향을 만드는 향품은 네 가지로, 소합향, 나감향, 풍자향, 유향이다(출애굽기 30: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