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


아리랑 신학

한국인의 전통 민요 "아리랑"에 관한 신학적 고찰을 위한 소연구 논문 발표를 위한 자료를 수집합니다.
2023년 전반기 6월에 발표 예정


미국 찬송가에 실려있는 아리랑 찬송 / 이정면박사

'세계 속 아리랑' 주제로 영문서 낸 이정면 유타大 명예교수
 
아리랑 가락을 편곡해 영국 작곡가가 가사를 붙인 자장가, 미국 개신교 찬송가에 수록된 아리랑…. 원로 지리학자 이정면(84) 미국 유타대 명예교수가 아리랑의 유래와 세계로 퍼져 나간 아리랑 이야기를 담은 영문서 《Arirang: Song of Korea》(이지출판사)를 펴냈다.

서울대 사범대 지리교육과를 나와 미국 미시간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이 교수는 1972년부터 유타대에서 교수로 재직하다 2002년 정년퇴직했다.

이 교수는 "아리랑 책을 쓰기 위해 자료를 수집하다가 아리랑이 미국을 비롯한 세계 곳곳에 많이 전파돼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말한다.

이 교수가 보여준 자장가 악보에는 어머니가 병든 아이를 달래는 노래라는 설명과 함께 한국 전통 민요(Korean Folk Song)라고 소개돼 있다.

이 노래를 편곡하고 가사를 쓴 이는 BBC 심포니 오케스트라 지휘자이자 작곡가였던 말콤 사전트(Sargent· 1895~1967). 이 교수는 "사전트가 1960년대 동북아지역을 여행하면서 한국을 방문했거나, 아리랑을 들은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이 교수는 또 1990년 미국 연합장로교회에서 발간한 찬송가집에 아리랑이 〈Christ, You Are the Fullness〉라는 제목 아래 수록돼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작사자는 미국 미시간주 칼빈 칼리지 음악 교수인 버트 폴만(Polman). 이 교수가 아리랑이 미국 찬송가에 들어가게 된 경위를 묻자 폴만 교수는 "멜로디가 너무 아름다워 아리랑을 찬송가에 포함하게 됐다"고 설명했다는 것.

이 교수는 헐버트, 알렌, 비숍 여사를 서구에 아리랑을 알린 선구자로 꼽는다.

이어 6·25전쟁 당시 유엔군으로 참전한 병사들을 통해 아리랑이 세계로 퍼져 나갔다고 설명한다.

미국 포크음악계의 대부이자 반전가수였던 피터 시거(Seeger)는 1964년 첫 라이브 앨범에 〈아리랑〉을 반전음악으로 수록하기도 했다.

이 교수는 2007년 아리랑의 고향 정선, 진도, 밀양 등을 찾아 《한 지리학자의 아리랑기행》을 펴냈다. 이 책을 출간한 뒤, 아리랑을 세계인들에게 소개하는 작업을 위해 영문서 출간에 매달려왔다.

이 교수의 전공은 토지 이용계획과 인구이동이다. 유타대 도서관 고문서실에서 191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유타주의 케네커트 주석 광산에서 일하던 한인 광부 411명의 명단을 찾아내는 등 미국 중서부 지역 한인 광산노동자의 역사를 발굴하기도 했다. 하와이에서 일자리를 찾아 미국 본토로 건너온 이들은 고된 광산일과 언어 문제 때문에 대개 며칠 만에 달아나버리기 일쑤였다.

이 교수는 "광산을 떠난 한인들의 다음 행로가 어땠는지 아직 찾아내지 못해서 아쉽다"고 했다.

이 교수는 "외국에서 오래 살다 보니 고국이 그립거나 외로울 때 마음을 위로해주는 노래가 아리랑"이라면서 "한국 전통문화의 정수인 아리랑을 연구하는 것은 인문 지리학의 영역"이라고 말했다.

서용순 이지출판사 대표는 "아마존 사이트를 통해 해외에 책을 보급하겠다"고 했다.

 

 

<오소운 목사의 추기>

아래 악보는 위에서 언급한 미국 북장로회 찬송가(The Presbyterian Hymnal, 1990) 346 장에 실린 아리랑 곡조의 찬송이다. 곡명(Tune Name)은 ARIRANG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 1절만 영어로 적어 소개한다.

 

Christ, You are the Fullness

 

Christ, You are the Fullness of God,

First born of everything.

For by You all things were made;

You hold them up.

You are head of the Church,

Which is Your body.

First born from the dead,

You in all things are supreme

 

아래에 미국 찬송가에서 스캔한 악보를 싣는다. 가사는 버트 폴만 (Bert Polman, b. 1945) 이 캐나다의 그리스도교개혁교회의 <시편찬송>(Psalter Hymnal, 1987)을 위해 1986년에 작사한 것이다. 그는 캐나다 온타리오에 있는 리디머칼레지(Redeemer College) 교수다. 또한 그는 미국과 캐나다 찬송가위원회의 실행위원이다. ARIRANG의 편곡자는 데일 그로텐후이스(Dale Grotenhuis, b.1931)인데  <시편찬송>(Psalter Hymnal, 1987)을 위해서 1986년에 편곡한 것이다. (source : Presbyterian Hymnal Companion, 1991, by LindaJo H. MaKim; p. 244)


Christ you are the fullness / 그리스도찬양의기쁨 CCM악보 [북미찬송가 가사, 한국 민요 아리랑 곡]

 

1.
Christ, You are the fullness of God, first born of everything.
For by You all things were made; You hold them up.
You are head of the church, which is your body.
First born from the dead. You in all things are supreme!

2. 
Since we have been raised with You, Lord, help keep our heart and minds.
Pure and set on things that build Your rule over all the earth.
All our life is now hidden with You in God.
When You come again we will share Your glory.

3.
Help us live in peace as true members of Your body.
Let Your word dwell richly in us as we teach and sing.
Thanks and praise be to God through You, Lord Jesus.
In whatever we do let Your name receive the praise!

** 한국의 민요 아리랑에 가사를 붙인 북미 찬송가 악보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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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곡에 담긴 신앙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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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라앙 아리라앙 아라아리이요오 아리라앙 고오개에로오 넘어간다..."

아무리 타국 만리에서 반세기 넘게 살았다고 해도, 어쩌면, 처녀로 성장할 때까지 근 스무 해를 써오던 우리말을 잊을 수가 있단 말인가? 정신대(挺身隊)로 끌려갔다가 전쟁이 끝난 다음에도 돌아오지 못하고 먼 이국 땅에서 50여 년을 보내고 최근에 극적으로 돌아 온 어느 할머니가 부르는 노랫가락이다.
우리말은 한 마디도 못하면서 '아리랑'은 구슬프게 부를 줄 안다.
말은 잊었는데 노래는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살아난다.
그런데, 그것이 '아리랑'이다.

미국연합장로교회의 찬송가 346장을 보면, "주님은 하나님의 충만하심"이라는 찬송이 있다.
영어 제목은 "Christ, You Are the Fullness"라고 되어 있고, 그 밑에 ARIRANG(아리랑)이라고 영어로 쓰여있다.
미국연합장로교회 찬송가에 우리의 한국 민요 아리랑 곡이 들어 있는 것이다! 우리도 감히 우리의 아리랑 곡에다가 우리의 하나님 찬양을 싣지 못하고 있는데, 미국연합장로교회가 이런 일을 하였기에 한 편으로는 신기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이런 세속적인 노랫가락을 찬송에 도입해도 되는 것인지 하는 의구심도 생긴다.

영어가사는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라고 하는 골로새서 1장 15절 이하의 말씀을 근거로 하여 작사한 것이다. 미국연합장로교회 찬송가의 그 가사는 다음과 같다.

Christ, You are the fullness of God, first born of everything.
For by You all things were made; You hold them up.
You are head of the church, which is your body.
First born from the dead. You in all things are supreme!

Since we have been raised with You, Lord, help keep our heart and minds.
Pure and set on things that build Your rule over all the earth.
All our life is now hidden with You in God.
When You come again we will share Your glory.  

Help us live in peace as true members of Your body.
Let Your word dwell richly in us as we teach and sing.
Thanks and praise be to God through You, Lord Jesus.
In whatever we do let Your name receive the praise!

위 가사를 다음과 같이 우리말로 번안(飜案)하여 '아리랑'에 실어 본다. 곡조의 세속성은 친밀감으로 바뀌고 가사의 장중(莊重)함은 가락의 흥겨움과 조화를 이루어, 흥겨운 신앙고백이 가능함을 보여준다.

    주님은 하나님 형상이시오
    만물 중에 으뜸이신 창조주시라
    부활하시어 다스리시니
    주님은 교회의 머리이시라
    
    주님과 더불어 새로 태어나
    성령 님 모시는 새 생활이라
    성령 열매를 풍성히 맺어
    주님 다시 오실 때 반겨 맞으리

    주님의 지체된 우리 몸이
    생명의 말씀을 먹고사니
    감사합니다 찬양합니다.
    주님 이름 높이며 살렵니다

골로새서 1장 15절에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여기에서, 예수님을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라고 표현한 것을 두고서 이것이 예수님의 피조성(被造性)을 말하는 것이라고 억지를 부리는 이들이 있다. 원어인 그리스어 표현 "프로토토코스 파세스 크티세오스"는 "모든 피조물의 첫 탄생(first born of all creation: RSV)"이라는 압축된 표현이다. 번역에 따라서는 "모든 피조물 위에 으뜸이신 맏아들(the first born Son, superior to all created things: GNB)"이라고 번역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 본문의 전체 문맥을 읽지 않고, 다만, '나셨다 (born)'라고 하는 낱말 하나에만 집착하는 쪽에서는 그리스도도 피조물 중에 속한다는 주장을 한다. 문맥을 보면 바로 다음절에 "(16)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고 하여 그리스도는 창조자이지 피조물이 아님을 분명히 말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우리말 번역에서 '먼저 나셨다'고 할 때 그 '먼저'는 '으뜸'을 뜻하는 것이고, '나셨다'는 것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관계가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독특한 관계를 부모 자식의 관계로 표현하려고 한 것이다. 그래서 이 노랫말 번역에서는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를 '만물 중에 으뜸이신 창조주시라'라고 불러보았다.

[출처: 뉴스앤조이] 아리랑 곡에 담긴 신앙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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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이 지구촌이 들썩들썩하는 '싸이 현상'은 다시 한 번 세계의 이목을 한국으로 집중시켰다. 그동안 '한류' 열풍이 동남아와 전 세계로 퍼져서 한민족의 위상을 떨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의 기저에는 한국민족만이 가지고 있는 특성이 있다고 본다. 필자는 이 독특한 심성의 특징으로 한(韓), 고(苦), 한(恨), 복(福), 정(情), 신명  등을 들었다.( <아리랑신학> 정행업 저. 대한기독교서회. 1996.)  그리고 한국인의 정서는 ‘아리랑’이라는 민요에 포괄적으로 표현돼 있다. 한국인은 ‘아리랑’이라는 민요를 통해 독특한 정서를 발산한다.
 
언제나 어디서나 아리랑을 부를 때 우리는 한(韓)민족의 고유한 동질성을 자각하게 되고 한민족의 뜨거운 정감에 사로잡히며 한국인의 얼과 힘이 꿈틀거림을 느끼게 된다. 한국인에게 있어 아리랑은 제2의 애국가라고 할 수 있다.
 
이번에 아리랑이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선정된 것은 한국인에게 매우 뜻 깊고 자랑스러운 쾌거라 할 수 있다. 모든 인류의 가시적 유형문화재는 비가시적 무형문화의 외적 표현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무형문화재는 한 민족을 이해하는 열쇠다.
 
필자는 이미 한국적 신학을 '아리랑 신학'으로 표현하자고 제안한 바가 있다. '아리랑 신학'은 한민족의 역사와 문화의 접목된 주체적인 신앙고백과 신학을 말한다. '아리랑 신학'은 한국인의 종교심성에서 형성된 신학을 말한다. 한민족은 어느 민족보다도 종교심이 강하다. 
 
오랫동안 고난의 역사를 경험했고 그래서 맺혀진 한이 있고 이 한을 풀기 위해 신을 찾았고 그에게 복을 빌고 노래하고 춤추며 신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모든 종교 행위가 '아리랑'이라고 하는 민요를 통해서 발산되었다.
 
이 아리랑이라고 하는 민요에 담긴 한국인의 심성이 이 땅에 기독교가 전래된 후에 그리스도인의 신앙양태와 한국교회 신학에 어떻게 영향을 끼쳤는가를 진지하게 탐구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심성을 긍정적으로 활용하여 그리스도교 선교에 활력소로 삼고, 아울러 그리스도교 문화 창달에 기여할 수 있기 위해 한국적 신학(아리랑 신학)에 대한 연구를 본격화할 때라고 본다.
 
정행업목사/대전신대 명예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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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챤투데이 2005-11-07 07:54<또 하나의 선민 알이랑 민족> 저자 유석근 목사 인터뷰



▲<또 하나의 선민 알이랑 민족> 저자 유석근 목사 ⓒ 류정희 기자

“아리랑은 원래 ‘알이랑’이다.
그리고 ‘알이랑’은 ‘알’과 ‘이랑’으로 구분되는데, ‘알’은 ‘하느님’을 뜻하는 말이다.
‘하느님’이라는 신명(神名)은 본래 ‘알’이었는데 ‘알’ 앞에 ‘한’이라는 관형사를 붙이고, ‘알’ 뒤에는 ‘님’이라는 존칭명사를 붙여 ‘한알님’이라고 했다.
이 ‘한알님’이 “한알님 → 하날님 → 하늘님 → 하느님”으로 변했다.
그래서 ‘알이랑’의 ‘알’은 성경의 ‘엘(EL)’처럼 ‘하느님’을 뜻하는 말이고 ‘이랑’은 ‘~와 함께’라는 뜻으로서 영어의 ‘With’에 해당한다.
즉, ‘알이랑’은 ‘하느님과 함께(With God)’라는 말이다”

최근 민요 ‘아리랑’을 화두로 삼아 선민 한국인의 정체성을 강조한 책 <또 하나의 선민 알이랑 민족>을 펴낸 저자 유석근 목사의 말이다.

유 목사는 ‘아리랑’은 현존하는 인류 최고(最古)의 찬송가로서, ‘알이랑’이라는 말은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한마디로 알려주는 선민 한국인의 키워드(Key word)라고 주장한다.
즉, 우리 겨레는 민족사를 ‘알이랑’ 곧 ‘하느님과 함께(With God)’라는 유일신 신앙으로 시작한 욕단계 천손민족(天孫民族)이라는 사실이 민요 ‘알이랑’으로 말미암아 입증되고 있다는 것.

“이 책은 아리랑이 어떤 노래인지를 바로 해석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인은 신자나 불신자를 막론하고 누구나 일독할만한 가치가 있다. 지금까지 아리랑의 뜻이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놓고 다양한 이론들이 제시되었으나 수긍할만한 해석은 없었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아리랑이 현존하는 인류 최고(最古)의 찬송가라는 놀라운 사실을 알 수 있다”

유 목사에 따르면 ‘아리랑’에서 “알이랑 알이랑 알 알이요 알이랑 고개를 넘어 간다”라고 부르는 노랫말의 의미는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이요, 하느님과 함께 고개를 넘어 간다”라는 것.

또한 유 목사는 “아리랑은 우리 겨레의 직계조상인 셈의 현손(玄孫) 욕단 족속(창 10:21~30)이 대홍수 후 동방으로 천동(遷動)할 때 파미르고원에서 천산산맥으로, 천산산맥에서 알타이산맥을 넘어오면서 불렀던 찬송가였다. 홍수 후 산을 넘어 가장 먼저 동방으로 천동한 족속은 ‘욕단’이었으며, 창세기 10장 21절과 25절에 의하면 욕단은 선택받은 종족인 에벨의 후손이었다”라고 주장한다.

아울러 “본인은 이 책의 메시지가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로서 반세기 이상 고난받고 있는 조국의 동포들에게 참된 소망과 위로를 안겨주는 매개체가 되기를 희망한다. 뿐만 아니라 전세계로 흩어진 디아스포라 564만 해외동포들과, 160여 나라에서 활동 중인 1만여 한국인 해외 선교사들에게도 격려와 용기를 북돋아주는 하늘의 소리가 되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한편, 책의 내용 중 일부는 지난해 1월부터 올해 8월까지 월간 <신앙계>에 연재되어 호평을 받은 바 있다.
유석근 목사는 현재 1992년에 개척한 상동중앙교회(예장합동 소속)을 담임하고 있으며 총신대학 신학대학원에서 구약신학을 전공했다.



아리랑은 우리 겨레의 시원과 그 기원을 함께 한 민족의 역사노래인 동시에 현존하는 인류 最古의 찬송가다!

필자는 저서 <알이랑민족>에서 아리랑은 현존하는 인류 최고(最古)의 찬송가라고 설명했다. 그것은 근거 없는 자의적 해석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객관적인 인문과학적 논거들을 다양하게 제시했다. 그러므로 아리랑 찬송가론을 부정하려면 그러한 결론을 도출한 논증에 오류가 있는지 조사해야 할 것이다. 그게 바른 순서다. 아리랑을 찬송가로 해석한 근거는 다음과 같다.

아리랑의 어원

① 우리의 문화와 역사를 논하려면 종교적인 시각으로 접근해야 한다. 배달 동이겨레는 하나님을 섬기던 제천민족(祭天民族)으로서 단순한 정치세력(민족, 국가)이 아닌 ‘종교적’ 집단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겨레는 다신숭배가 만연한 고대 세계에서 제천신앙으로 유일신 하나님을 숭배하던 독특한 민족이었다. (제천신앙에서 숭배의 대상이 된 ‘하느님’이 성경의 하나님과 동일한 신이셨다는 것은 책에서 자세히 근거를 제시했다.)

단군조선시대에는 제천의식이 북으로는 백두산에서, 남으로는 강화도 마리산 산정의 참성단에서 행하여졌다. 이 제천행사야말로 동이문화의 정수(精髓)이며, 우리 문화의 본성(本性)이다. 그러므로 동이의 후예인 우리가 부르는 ‘아리랑’도 종교적인 관점에서 접근해야 그 비밀이 드러날 것이다.

② 먼저 기억해야 할 사실은 아리랑은 한자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아리랑’이라는 한자가 기록된 책이 어디선가 고서(古書) 가운데 한 권이라도 발견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도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리랑은 입에서 입으로 구전으로만 전래되어 온 순 우리말의 민요이기 때문이다.

③ ‘아리랑’의 어원은 ‘알이랑’이다(알이랑 => 아리랑).

알이랑 알이랑 알 알이요 알이랑 고개를 넘어 간다

그런데 오랜 세월동안 글자가 없을 때 구전으로만 전승되다 보니,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로 부르게 되었고 결국 ‘알이랑’이 ‘아리랑’으로 고착되고 만 것이다. 따라서 아리랑이 진정 어떤 노래인지를 알려면 ‘알이랑 알이랑 알 알이요’로 잃어버린 원래의 노랫말을 되찾아야 한다. 그게 기본조건이다.

④ 아리랑의 비밀을 푸는 열쇠 ‘연음법칙’

왜 본래 “알이랑 알이랑 알 알이요”라는 가사를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로 부르게 되었을까? 우리말의 발음에는 ‘연음법칙’이라는 음절의 연결규칙이 있기 때문이다. 자음으로 끝나는 음절에 모음으로 시작되는 음절이 이어질 때 앞 음절의 끝소리가 뒤 음절의 첫소리가 되는 음운 규칙을 말한다.

예:

“깊이→기피” “옷을→오슬” “책이→채기” “낮에→나제” “벗이랑→버시랑” “가물어→가무러”

“하늘이→하느리”

알이랑 → 아리랑

알알이요 → 아라리요

(☞이제야 비로소 우리가 왜 “아리랑 아리랑 아리리요”가 아닌 “아라리요”라고 노래하고 있는지 그 의문이 해소되었다. 거기에는 문법적 이유가 있었다. 지금까지 어떤 아리랑 연구가도 이 문제를 문법적으로 설명하여 규명한 적이 없다.)

⑤ ‘알이랑’은 ‘알’과 ‘이랑’으로 구분된다. ‘알이랑’은 ‘알’이라는 이름씨(명사)와 ‘이랑’이라는 도움씨(조사)가 붙어서 된 말이다(알+이랑 = 알이랑). 그러므로 ‘알’과 ‘이랑’을 각각 따로 분리해서 그 의미를 찾아야 한다.

⑥ ‘알’은 ‘하느님’(하나님)을 의미한다. 우리 겨레는 잡신과 구별되는 유일신의 이름을 ‘하느님’이라고 불렀다. 이 ‘하느님’이라는 신명(神名)은 처음에 ‘알’이었다. 그런데 ‘알’ 앞에 ‘한’이라는 관형사를 붙이고, ‘알’ 뒤에 ‘님’이라는 존칭어미를 붙여서 ‘한알님’이라고 했다.

그것이 [한ᄋᆞᆯ님→하ᄂᆞᆯ님→하늘님→하느님]으로 바뀐 것이다(우리말 어원사전). 그래서 ‘알’은 ‘하느님’이다. 창조주 하느님 곧 유일신을 뜻하는 원시 언어가 ‘알’이었다.

⑦ 유대인의 ‘엘(EL)’, 아랍인의 ‘알아(알라)’는 바로 이 ‘알’에서 유래된 말이다(‘알라’는 아랍어로 '하나님'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렇기에 아랍 기독교도들은 성경의 유일신 하나님을 '알라'라고 아랍어 성경책에 표기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이름인 ‘엘로힘’(단수는 Eloah)은 ‘알라(alah)’라는 말에서 유래했다(벌코프 조직신학 239쪽 * 크리스천 다이제스트 간). 즉 창조주 하나님을 뜻하는 인류 최초의 신명(神名)이 ‘알’이었다. 이 ‘알’이 ‘엘(EL)’의 어원인데, 노아에 의해 홍수 이후의 세대로 전해졌다.

⑧ ‘이랑’은 ‘~와 함께’라는 토씨로서(언어학자들은 ‘~가’ ‘~이’ ‘~는’ ‘~이랑’ 등과 같은 ‘토씨’는 뜻과 소리가 바뀌지 않으면서 6천년 이상 간다고 한다) 영어의 ‘With’이다(예, 갑돌이랑 = 갑돌이와 함께, 갑순이랑 = 갑순이와 함께, 벗이랑 = 벗과 함께). 그러므로 ‘알이랑’은 “하나님과 함께”(with God)라는 말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 겨레가 잃어버린 아리랑의 원의(原意)이다. 아주 숭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⑨ 왜 ‘알’이 유일신 하나님을 뜻하는 말이었을까? ‘알’이 수많은 생명을 낳기 때문이다. 쌀도 볏알(볍씨)에서, 과실도 씨알에서 생기고, 하늘과 땅과 바다의 허다한 생물들이 또한 ‘알’에서 탄생한다. 그래서 ‘알’은 ‘모체(母體)’요, ‘근원(根源)’이요, ‘시작(始作)’과 같은 뜻을 갖는다. 따라서 창조주 하느님(하나님)도 ‘알’이었다. 왜냐하면 그 분은 만물의 모체이시고 근원이시며 시작이시기 때문이다.

⑩ 다만 우리 겨레는 그 ‘알’이 ‘큰 모체’이시고 ‘큰 근원’이시며 ‘커다란 시원(始原)’이시기에 ‘알’ 앞에 ‘한’이라는 관형사를 붙였다. 또한 그 ‘알’이 인격적 존재이심으로 ‘알’ 뒤에 ‘님’이라는 존칭어미를 붙였다. 그래서 창조주 유일신을 ‘한알님’이라고 부른 것이다. 이 ‘한알님’이 [한ᄋᆞᆯ님→하ᄂᆞᆯ님→하늘님→하느님]으로 소리가 변했다.

그러므로 ‘알’은 ‘엘(EL)’과 동의어로서 하나님을 뜻하는 말이다. ‘알’은 우주만물의 根源(근원)이며 始終(시종)이신 主宰主(주재주), 곧 유일신 하나님(God)을 의미하는 우리 배달겨레의 옛 말이다.

⑪ 고구려, 신라 그리고 가야의 지도자들이 모두 ‘알’에서 탄생했다는 이른바 ‘난생설화’(卵生說話)가 있다. 박혁거세가 큰 알에서 나왔다는 것, 주몽이 알의 껍질을 깨고 나왔다는 것, 김수로왕이 알에서 뛰쳐나왔다는 것은 모두 그들이 ‘한ᄋᆞᆯ님’의 자손 곧 천손(天孫)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태어난 사람이란 뜻이다. 바로 이것이 난생설화의 진정한 의미이다.

난생설화의 주인공들이 말 그대로 알에서 태어났다고 이해한다면 그것은 대단히 유치한 소견이다. 실제로 알에서 태어날 수는 없다. 그렇게 파악하기보다는 하늘에서 내려온 자손 즉 천손(天孫)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난생설화는 시조의 탄생에 신적권위를 부여하기 위한 이야기인 것이다.

⑫ 더욱이 ‘하늘’은 둥글어서 ‘알’인데, ‘하늘’이라는 말도 처음에는 ‘한ᄋᆞᆯ’, 즉 ‘큰 알(大卵)’이었다. 한ᄋᆞᆯ→하날→하늘로 변한 것이다. 만물을 내신 한알님(하느님)은 한알(하늘)에 계신다. ‘큰 알(大卵)’, ‘큰 모체(母體)’, ‘큰 근원(根源)’ 같은 뜻으로서의 ‘한ᄋᆞᆯ’에 ‘하늘’이라는 말의 기원이 있다. ‘하늘’이란 단어의 어원도 ‘한알’이다.

⑬ ‘알’이라는 것은 우리 조상들에게 있어서 사물(事物)의 핵심이었다. 그리고 ‘시작’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커다란 시원(始原)’으로서의 ‘알’이 곧 한알→하날→하늘로 된 것이다. 그러한 하늘(한알)이었기에 삼라만상(森羅萬象)은 곧 당신의 것이었다. 당신이 낳으시고, 당신이 기르시고, 또 당신이 주재하시는 것이었다. 홍수 전 사람들이 창조주 유일신을 ‘알’이라고 불렀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⑭ 하나님을 뜻하는 성경 원어 ‘엘(EL)’은 바로 이 ‘알’에서 변음이 되어 나온 말이다. ‘엘’은 ‘다스리는 이’, ‘강하신 분’이란 뜻을 가진 신명(神名)으로 셈어(Shemitic)에서 전반적으로 사용된 ‘하나님’ 또는 ‘신성(Divinty)’에 관한 호칭이다. 이 ‘엘’은 바로 ‘알’의 변음이다. 이 ‘알’이라는 단어는 창조주 하느님(하나님)을 뜻하는 일종의 원형언어로서 노아에 의해 홍수 이후의 세대로 구전되었다.

저명한 조직신학자 벌코프는 다음과 같이 썼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이름인 ‘엘로힘’(단수는 Eloah)은 ‘알라(alah)’라는 말에서 유래했다.”(벌코프 조직신학 239쪽 * 크리스천다이제스트 간). 즉 ‘엘’보다 ‘알’이 먼저였다. ‘엘’은 ‘알’의 변음이다.

⑮ 종교철학자 오강남 교수(캐나다 리자이나 대학)는 그의 저서 ‘길벗들의 대화’에서 ‘알다’는 동사가 ‘알’에서 나왔음을 가르쳤다. 알은 천지창조의 모태였다. 또 알의 열림 혹은 깨어짐은 밝음의 시작이었다. 실로 ‘알’(하나님)을 ‘앎’(지식)이 가장 큰 ‘앎’이다! 하나님(알)을 아는 지식(앎)이 가장 큰 지식이다.

16) 한국인의 무덤은 동그란 모양의 봉분인데 그것은 ‘큰 알’(大卵=한알)을 뜻한다. 셈의 후손으로서 ‘한알님’께 제사지내며 삶을 영위했던 한국인의 선조들은 스스로 천손민족(天孫民族) 즉 ‘한알님’의 백성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죽음이란 ‘한알’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한국인은 누군가 죽었을 때 ‘돌아가셨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어디로 돌아가신 것인가? ‘한알님’(하느님)이 계신 한알(하늘) 나라로! 그리하여 무덤이 동그란 모양의 ‘알’인 것이다. 그들은 ‘한알님’의 백성으로서 ‘알’에서 왔으니 ‘알’로 돌아가고자 했다. 실로 한국인은 ‘알이랑 정신’으로 살고 죽는 ‘알이랑민족’이 아닐 수 없다.

필자는 이상과 같이 인문과학적 논거들을 충분히 제시하면서 아리랑의 어원은 ‘알이랑’이며, 그 의미는 “하나님과 함께”(with God)라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자, 여기에 논리적 비약이 있나? 논거가 빈약한 아전인수격 주장인가? 유석근 목사는 터무니없는 소리를 했나? 아리랑의 어원과 의미에 관한 <알이랑신학>의 학문적 견해에 이의가 있다면 근거를 제시하고 반박하라.

그대가 어떤 학자가 발견한 새로운 연구 결과를 부정하고 비판할 수 있다. 하지만 반론을 제기할 때에는 갖추어야 할 조건이 있다. 먼저 그러한 결과를 도출한 이론적 근거들이 오류가 있는지 찾아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왜 오류인지를 객관적으로 설명해야 한다. 즉 반론과 비평도 근거와 더불어 제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냥 ‘아니다’ ‘틀렸다’ 하면 설득력이 없다. 그것은 억지다.

그런데 일부 아리랑 찬송가론을 비방하는 자들이 글을 읽어보면 누구도 타당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다. 논박 없는 반론인 것이다. 그러한 비평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 모 대학 B교수의 글도 예외가 아니다. B교수는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글에서 필자가 논리를 비약했다고 썼다. 실로 억지 주장이며, 일종의 횡포다. 나는 B교수의 국어 독해력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 그렇게 판단할 수밖에 없다. 왜? 논증 과정에서 논리적 비약은 조금도 없었기 때문이다.

B교수의 비판대로 과연 알이랑 찬송가론에 논리의 비약이 있는지 서울대 입학을 목표로 논술고사를 준비하는 똑똑한 고3 수험생들에게 확인 검증을 요청해 보았다. 필자의 저서를 정독한 학생들은 "논리가 정연하고 치밀해서" 알이랑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부정할 수 없다고 했다. 문장 이해력이 고3 수준만 되어도 논리 비약이라는 억지 주장은 안 할 것이다. 그러나 간혹 국어도 독해가 안 되는 사람이 있다. 이런 자들과는 대화가 안 되며 소통이 불가능하다.

이 정도는 그래도 양호한 편이다. 유석근 목사를 위험한 사상가로 교묘하게 날조하여 ‘이단’으로 조작한 인물들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는 조금도 요동하지 않을 것이다.

알이랑이 찬송가인 이유

앞서 설명한 바처럼 아리랑의 어원은 ‘알이랑’으로서 그 의미는 “하나님과 함께”(with God)라는 뜻이다. 그리하여 필자는 “알이랑 알이랑 알 알이요”는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이요”라는 뜻이고(with God, with God, with God, just God), “알이랑 고개를 넘어 간다”는 가사는 “하나님과 함께 고개를 넘어 간다”라는 뜻이라고 해석했다(accompany with God, I will cross over the mountains).

그리고 “알이랑 고개를 넘어 간다”는 가사에 나오는 그 ‘고개’란 우리의 먼 조상들이 대홍수 후 동방으로 천동(遷動)할 때 넘어 온 고개들 곧 “파미르고원~천산산맥~알타이산맥”이라고 설명했다.

이것은 유석근 목사가 소설을 쓴 것이 아니다. 우리 민족이 알타이에서 왔다는 것은 역사학자들도 인정하는 것이다. 더욱이 필자는 그것이 역사적 사실임을 입증해주는 일종의 물증으로서 다음과 같은 ‘언어유물’도 제시했다:

“파미르고원을 지나(支那) 사람들은 총령(蔥嶺: 파총, 재령)이라고 하는데, 이는 한국어 파(蔥) 마루(嶺) 그대로 파마루(파미르)이다. 지리학에서도 역시 파미르고원(蔥嶺)에서는 파(蔥)가 많이 야생한다고 한다.

파미르고원은 ‘파마루’로서 파(蔥)가 많이 자생하는 산마루(嶺)이기에 파마루(파머루) 고원인 것이다. ‘파미르’의 어원이 한국어 ‘파마루’이다.”

“한국인은 남자를 사내라고 한다. 사내는 ‘산아이’가 [산아이→사나이→사내]로 변한 것이다. 우리 선조들이 고대에 산지, 파미르고원→천산산맥→알타이산맥을 넘어 동방으로 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언어적 연관성은 한국인이 참으로 아득한 옛날 ‘파미르고원’을 넘고 ‘천산산맥’과 ‘알타이산맥’을 넘어서 동방으로 이동해 왔음을 가르쳐 주는 하나의 고고학적 증거인 것이다. 그것은 ‘언어유물’로서 일종의 ‘물증’과 같다.

그렇다! 우리 배달겨레는 아득한 옛날 광명의 본원지를 찾아 수많은 고개, 파미르고원~천산산맥~알타이산맥을 넘어서 동방으로 왔다. 알타이산맥을 넘어 가면 시베리아 벌판이 펼쳐진다. 시베리아는 만주 벌판이 연장된 땅으로서 우리 민족의 역사의 고향이다. 역사학자들은 한민족은 70% 이상이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에서 내려온 북방계 아시아인이라고 말한다.

한국인은 고대에 알타이산맥과 바이칼 호수 주변의 시베리아에 넓게 퍼져 살면서 극동으로 이주해 왔다. 우리 한민족의 뿌리는 단군이며 그 정신적 고향은 북방, 특히 백두산과 바이칼(밝알)호에 있다. 한국인의 주류는 시베리아 바이칼호에서 이동해 온 북방계 아시아족이다.

우리 조상들은 빛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공경했다. 그리하여 광명의 본원지를 찾아 가는 것이 꿈이었다. 그래서 아침에 뜨는 해를 따라 알이랑(하나님과 함께) 고개(파미르고원~천산산맥~알타이산맥)를 넘어 동쪽으로 쉬지 않고 이동하다가 마침내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땅 끝에 도달하였다. 그리하여 유라시아 대륙 가운데 가장 먼저 해가 뜨는 밝은 땅에 정착해 살게 된 백성이 우리 한국인이다.

그래서 우리 겨레가 사는 땅을 ‘밝달’이라고 했고, 이 밝은 땅에 사는 우리 겨레를 “밝달겨레”라 했다. “밝달겨레”의 이두문 음이 곧 “배달겨레”인 것이다. “밝달”과 “배달”을 어원적으로 살펴보면 밝달의 ‘달’은 땅(地)이란 말인데, 그것은 곧 양달(陽達)이 양지요, 응달(陰達)이 음지요, 빗달(傾斜地)이 비스듬한 땅인 것이다. 그런고로 “배달겨레”란 “밝은 땅에 사는 겨레”라는 뜻이다.

이렇게 우리 겨레는 밝고 환한 것을 지극히 선호하여 의복도 밝고 환한 흰옷을 입고 살아 온 백의민족인 것이다. 우리 겨레의 백의 착용의 동기와 백의 숭상의 유래는 무엇인가?

우리 민족의 흰옷 선호는 민족형성 과정에서부터 시작된 원초적인 것이다. 배달겨레는 민족사를 알이랑 곧 '하나님과 함께'라는 일신 신앙으로 시작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밝고 환한 천국에 빛 가운데 계시는 빛의 근원이신 분이다.

고대 한국인은 천지만물의 주재자가 되시는 분이 빛 가운데 계시는 창조주 한알님(하나님)이시라고 알고 자기네들은 그 하나님의 자손 곧 '천손민족'이라고 믿었는데, 빛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광명’을 표시하는 의미로 흰 빛을 신성하게 알아서 밝고 환한 흰옷을 자랑삼아 입다가 온 민족의 풍속을 이루고 만 것이다.

하나님은 빛이시다(요일 1:5). 그래서 하나님 백성인 우리 겨레는 빛의 옷인 흰옷을 즐겨 입은 '백의민족'인 것이며, 사는 땅도 빛이 시작되는 동방의 땅 끝 ‘밝달’에 자리 잡은 '배달민족'인 것이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요일 1:5). 흰 색은 어두움이 조금도 없는 가장 밝은 색이다. 그렇기에 스스로를 하늘의 자손이라 믿었던 우리 민족은 흰옷을 숭상해서 일상복은 물론이고 상복으로도 밝고 환한 흰옷을 널리 입었던 것이다. 성경에 의하면 흰옷은 하늘백성의 표지이다(계 7:9,14; 계 19:7~8; 전 9:8). 지혜 있는 자는 열매로 나무를 알 것이다.

그리하여 필자는 ‘아리랑’은 대홍수 후 빛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섬기던 고대 한국인이 광명의 본원지(밝달)를 찾아 이 땅에 오기까지 수많은 산과 언덕과 고원들을 넘어 오면서 부른 ‘찬송가’였다고 해석했다. 즉 아리랑은 우리 겨레의 영아기 때의 집단적 체험을 간직하고 있는 민족의 역사노래인 동시에 현존하는 인류 최고(最古)의 찬송가인 것이다. 바로 이것이 아리랑의 비밀이다.

알이랑 알이랑 알 알이요

=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이요

(with God, with God, with God)

 

알이랑 고개를 넘어 간다

= 하느님과 함께 고개를 넘어 간다

(accompany with God, I will cross over the mountains.)

‘아리랑’은 창조주 하나님을 숭배하던 우리네 조상들이 동방의 새 땅을 찿아 이동할 때 수많은 산과 언덕과 고원들을 넘어 가면서 부른 ‘찬송가’였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상실한 아리랑의 始原(시원)과 原意(원의)이다.

‘아리랑’이 우리 겨레의 마음속에 그토록 크게 자리 잡고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것은 실로 인류 최고(最古)의 찬송가로서 겨레의 역사와 가장 오랫동안 함께 해온 민족의 숨결이며 역사의 맥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리랑은 당연히 ‘세계무형인류문화유산’인 것이다. 우리 민족의 전통문화만이 아닌 지구촌 문화유산이다. 아리랑은 7천만 한민족의 노래만이 아니라 70억 세계인이 함께 보존하고 같이 불러야 할 인류의 노래인 것이다. 아리랑은 현존하는 인류 最古의 찬송가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리랑의 세계화에 힘써야 할 당위성 및 근본적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아리랑이 찬송가라는 이러한 해석은 성경의 본질적 진리를 훼손했는가? 그래서 위험천만한 사상인가? 이단 수준인가? 양심 있는 목사와 성도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것이다.

<알이랑신학>의 핵심 주제인 ‘아리랑 찬송가론’은 시원한 답이 없던 아리랑의 근원과 원의에 관해 명확히 해답을 제시한 인문과학적 이론이다. 이제 우리는 잃어버린 아리랑의 始原(시원)과 原意(원의)를 바로 알게 되었다.

그러나 최근에 ‘알이랑 찬송가론’을 ‘유해물질’과 같다고 매도한 목사가 있다. <알이랑신학>을 사설로 날조, 왜곡한 음해성 문서를 유포한 인물이다. 그렇게도 존재감을 과시하고 싶을까. 알고 보니 돈키호테 같은 이런 위인들이 서너 명 더 있다.

기가 막힌다. 유해물질이라... 아리랑을 찬송가라 했으니 찬불가를 부르는 불교 승려라면 모를까 기독교 목사가 지나친 표현인 것 같다. 오, 가련한 자여! 유해물질은 그대가 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제발 독서도 공부도 좀 더 하고 사고의 폭을 넓히기 바란다.

지금까지 18판이 리프린트된 필자의 저서 '알이랑민족'은 기독교적 관점에서 성경으로 우리의 문화와 역사를 해석한 책이다. 이와 같은 연구는 기독교 토착화와 민족복음화를 위해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실로 그것은 조로 현상을 보이며 성장이 멈춘 한국교회의 시급한 숙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성경의 본질적 진리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복음을 한국인의 정서와 문화에 맞게 어떻게 수용할지 연구해야 한다. 그래야만 기독교가 한국에서 뿌리를 내리고 많은 열매를 부단히 맺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한국교회의 미래가 달려 있는 문제다. 여기에 실패하면 한국교회는 작금의 조로 현상을 극복할 수 없을 것이다. <알이랑신학>은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는 한국적 토착화 신학이다. 우리는 언제까지 서구신학만 카피해서 가르쳐야 하나? 예수원 설립자 대천덕 신부님(성공회)은 한국교회를 향해 이렇게 도전한 바 있다:

“우리가 선교사들에게서 전수받은 성경 해석은 서양의 입장에서 해석한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한국사람 자신의 내부로부터 우러나오는 복음과 한국과의 새로운 대결을 통해서만 기독교가 한국에서 뿌리를 내리고 많은 열매를 내릴 수 있다는 점을 깊이 생각해볼 때이다. 오직 이런 대결을 통해서만 예배가 진정 한국인 자신의 예배가 될 것이며, 성경이 진정 한국인 자신의 성경이 될 것이다. 이것은 한국 문화와의 진지한 대화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한국의 참된 주체성을 발견하는 문제인 것이다.” (대천덕, 「대천덕 신부와의 대화」, 생명의 샘터, 1987, pp.71~72 ) (대천덕, 「우리와 하나님」, 도서출판 예수원, 1988, p.161)

<알이랑신학>은 대천덕 신부님의 지적에 잘 부합한다. 문화평론가 안준배 목사(기독교문화예술원장)는 <알이랑신학>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향후 한국교회의 두 가지 어젠다를 집약하면 기독교의 토착화를 통해 민족문화형성과 분단조국의 통일에의 접근이다. 유석근 목사의 저서 '알이랑민족'은 한국교회의 과제를 풀어주고 있다.

한민족이 살고 있는 지역마다 아리랑은 민족의 뿌리임을 증거 하는 바 ‘아리랑은 찬송가’라는 신학적 해석은 기독교가 가졌던 타종교에 대해 문화적 콤플렉스를 근원적으로 해소한 것이다.

더욱이 남북의 동질감형성의 주제가인 아리랑에 대한 신학적 성과는 통일신학을 배양하는 토대가 되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알이랑신학>을 사설로 매도하는 인물들이 있다. 그들은 우리의 전통문화는 죄다 이교도적이고 악마적인 것이라는 그릇된 편견을 갖고 있다. 민요 아리랑은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문화이다. 아리랑의 어원은 '알이랑'이며, 그 의미는 "하나님과 함께"(with God)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전혀 이교도적이지 않다. 오히려 '알이랑'은 기독교적이다. "하나님과 함께"(with God)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한국신학인 <알이랑신학>의 핵심 사상이다.

서울신대 전 총장 강근환 박사(역사신학, 사진)는 “한국교회가 지향해야 할 회개운동의 하나”라는 소논문에서 토착화 신학의 필요에 대해 다음과 같이 역설했다.

“우리는 기독교가 서양에서 발전한 종교이지만, 그 실질인 복음을 ‘서양문화적’ 형식과 동일시 할 수 없음에도 이를 절대화함으로서 선교가 일종의 ‘문화제국주의’로 전락해 버린 것을 비판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토착신학적’인 관점에서 한국교회의 문화적인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 기독교가 전해지기 이전의 한국문화를 온통 악마적인 것으로 또는 이교도적인 것으로 심판해버린 것은 확실히 자학행위요, 서구역사주의 신학에 세뇌된 자들의 오만한 태도이다. 그러기에 한국문화가 지니고 있는 일반 계시적 의미와 존재론적 자연신학의 가치를 인정하고 계시의 빛 가운데 이를 뚜렷이 밝혀 주어야 할 과제가 성립된다.

우리의 회개운동의 하나는 한국문화를 온통 악마적인 것으로 또는 이교도적인 것으로 매몰차게 심판하였던 지난날의 ‘왜곡된 회개’의 잘못을 바로 잡는 ”토착화 신학 지향적인 회개”여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전통문화’에 대한 무비판적 배타성에 대한 성찰이 요청된다. 한국교회가 가져온 기독교 복음이 서구적 포장지에 싸인 채 들어와서 우리 문화까지를 서구화 시켜버린 현상을 치유해야 한다. 더 이상 우리 전통문화를 죄다 악마적인 것으로 정죄하지 말라!”

한국적 토착화 신학인 <알이랑신학>을 사설로 매도하는 일부 사고가 경직된 신학자들이 경청해야 할 충고이다. 서구 문화와 신학에는 박사 급의 지식이 있으나 우리의 역사와 전통문화에 대해서는 무지몽매한 자들이 적지 않다. 그러니 평생 오직 서구신학만 카피해서 가르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 이상 서구신학이 전부일 수는 없다. 이제 한국교회는 세계교회 앞에 한국의 신학을 소개할 수 있어야 한다. 윤사무엘(미주장로회신학대학 교수, 올리벳신학교 총장) 박사는 최근 출간한 그의 저서 "한국교회와 신학"(쿰란출판사刊)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한국교회가 서구 기독교 선교를 받은 지 130년이 지났다. 이제 한국교회는 세계 앞에 한국적 신학을 내놓아야 한다.”

성민 코리아의 키워드 ‘알이랑’

앞서 고찰했듯이 아리랑의 어원은 ‘알이랑’이며 그 의미는 “하나님과 함께”(with God)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알이랑’은 “하나님중심사상”이며 “신본주의정신”이다. 이 숭고한 ‘알이랑 정신’이 바로 한국인의 ‘근본 사상’이요 ‘뿌리 정신’인 것이다. ‘알이랑’은 우리 한민족의 원형과 정체성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우리 겨레는 민족사를 ‘알이랑’ 즉 “하나님과 함께”라는 유일신 신앙으로 시작한 존귀한 백성이다. 그러나 한국인은 자신의 참 모습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렸다. 그리하여 마치 기억상실증 환자와 같은 상태에 있다.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지금 우리 한국교회는 마이너스 성장을 하고 있다. 필자가 단언컨대 한국 백성이 스스로를 자각하지 못하는 한 한국교회의 성장과 부흥은 한계가 있을 것이다. 이미 한국교회는 그 한계를 노출하고 있다.

50여 년 전 강원도 태백의 오지에 예수원을 설립하고 일생을 기도와 말씀으로 한국교회를 섬기신 대천덕(Reuben Archer Torrey 3세 / 1918~2002) 신부(성공회)는 일찍이 이렇게 역설한 바 있다:

“교회의 우선적 과제가 그리스도를 한국에 소개하는데 있다는 것은 두 말 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한국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인지, 한국의 진정한 사명이 무엇인지, 그리고 세계무대에서 한국이 담당할 역할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는 한 -다시 말해서 스스로를 자각하지 못하는 한- 그런 한국에 그리스도를 소개한다는 것은 무익한 일이다.

내가 보기엔 한국은 자신의 참모습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린, 흡사 기억상실증 환자와 같은 인상을 준다. 만일 우리가 진정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께서 한국 백성에게 공동의 선(善)에 기여할 수 있도록 어떤 특별한 역할을 부여하셨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다. 그러니만큼 한국으로서의 가장 긴급한 과제는 스스로를 재발견하고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는 일이다.” (대천덕, ‘기독교는 오늘을 위한 것’, 「생명의 샘터」, 1987, 70쪽)

그렇다! 우리 겨레는 안타깝게도 자신의 참모습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린 집단적 기억상실증에 걸려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토레이 신부의 지적과 같이 스스로를 재발견하고 민족 본연의 모습을 회복해야 한다. 그것은 실로 긴급을 요하는 한국인의 최우선적 과제이다.

한국인,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민족사를 ‘알이랑’ 곧 “하나님과 함께”(with God)라는 유일신 신앙으로 시작한 동방의 聖民 “알이랑민족”이다.

성경상으로는 셈의 셋째 아들 아르박삿의 손자 에벨의 둘째 아들 욕단의 가계가 알이랑민족 우리 한국인의 조상이다(창 10:21~30). 그들은 대홍수 후 가장 먼저 산악지대를 넘어서 동방의 새벌(스발, 새발)로 천동했다. 욕단이 아라비아 남단에 정착해 아랍 부족의 선조가 되었다는 서구 주석가들의 이론은 틀린 것이다.

트리니티 칼리지의 구약학 교수인 고든 웬함(Gordon Wenham)은 창세기 10장30절을 해석하면서 욕단의 영토가 아리비아 남부에 위치한다는 대다수 주석가들의 견해는 "추측"으로서 확실한 것이 아니라고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 “그들이”는 앞 구절에 논의된 욕단의 아들들 모두를 가리킨다. 불행하게도 이 구절은 대단히 모호하다. ‘메사’와 ‘스발’과 ‘동편 산’은 모두 명확하게 확인할 수 없다. 스발은 아라비아 남부의 차파르(saphar)라는 해안 도시일 수 있지만, 서로 다른 첫머리의 치찰음 때문에 이 제안은 의심스럽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메사는 욕단족의 서쪽 경계를, 스발은 동쪽 경계를 나타내며 그 영토는 아라비아 남부에 위치한다고 추측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고든 웬함 지음, 박영호 옮김, 「WBC성경주석 창세기 상」, 서울: 솔로몬, 2006, p.425)

고든 웬함 박사가 바로 설명했다. 한국교회 성도들은 추측에 불과한 서구 신학의 낡은 이론을 더 이상 맹종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욕단의 가계는 아라비아 남부로 가지 않았다. 그들은 동양으로 천동(遷動)하여 우리 배달민족의 조상이 되었다.

어떤 새로운 이론에 반대를 표명할 수 있다. 그러나 앞서 지적했듯이 반론과 비평도 근거와 더불어 제시되어야 한다. 그런데 아리랑의 어원이 ‘알이랑’이며, 그 뜻은 "하나님과 함께"라는 <알이랑신학>의 핵심 내용을 매도하는 일부 글들을 확인해보면 논박 없는 비평들뿐이다. 학문적 가치가 없는 편협한 주장인 것이다.

어떤 글은 유치할 정도로 작문 수준이 떨어지는 함량 미달의 글도 있다. 앞서 언급한 유해물질 운운한 음해성 날조 기사가 그런 문서다. 그렇게 엉성한 글을 반론이라고 작성해 포털사이트에 올리는 인물도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돈키호테가 연상되는 이유다. 애석하게도 듣는 귀가 둔한 사람은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필자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늘 견지하고 있다: “들을 귀 있는 자만 들어라!”

출처 : 새한일보(http://www.shilb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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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무형문화유산(無形文化遺産, 문화어: 비물질문화유산(非物質文化遺産), 영어: Intangible cultural heritage, ICH)은 유네스코의 사업 중 하나이다. 유네스코 사업인 세계유산이 건축물 등 유형 문화재의 보호와 계승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반면, 민속, 전통 등 무형 (무형문화재)을 보호 대상으로 하는 것을 목표로 한 것이다.

아랑전설(阿娘傳說)은 억울하게 죽은 아랑이 원령이 되어 자신의 원한을 푼 뒤 변고가 없어졌다는 이야기이다. 아랑은 경상도 밀양부사의 딸로, 이름은 윤동옥(尹東玉)이다.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유모에게서 자랐는데, 어느 날 밤 통인(通引)과 작당한 유모의 꼬임에 빠져 달구경을 나갔다. 통인 주기가 아랑을 겁간하려 했고, 아랑은 끝까지 항거하다가 끝내는 칼에 맞아 죽고, 대숲에 버려졌다. 부사는 아랑이 외간 남자와 내통하다 함께 달아난 것으로 알고 벼슬을 사직하였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 밀양에 오는 신임 부사마다 부임하는 첫날 밤 의문의 주검으로 발견되어 모두 그 자리를 꺼리게 되었다. 이때 이상사(李上舍)라는 담이 큰 사람이 밀양부사를 자원하여 왔다. 부임 첫날밤에 나타난 아랑의 원혼에게서 억울한 죽음을 들은 그는 원한을 풀어주기로 약속하였다. 이상사는 곧 주기를 잡아 처형하고 아랑의 주검을 찾아 장사를 지내주니 그 뒤로는 원혼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도 영남루 밑에는 아랑의 혼백에게 제사지낸 아랑각(阿娘閣)이 있고, 《밀양아리랑》도 이 영남루 비화(悲話)에서 발생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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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구전으로 전승되고 재창조되어 온 한국의 전통 민요.
요약문
아리랑은 구전으로 전승되고 재창조되어 온 한국의 전통 민요이다. ‘아리랑~’ 또는 ‘아라리~’ 및 이들의 변이를 여음(후렴 또는 앞소리)으로 지니고 있는 일군의 민요를 통칭하는 말이다. 정선·밀양·진도 아리랑을 3대 아리랑으로 부르지만 장단·박자·가사가 서로 다른 수많은 아리랑이 한국은 물론 우리 민족이 사는 세계 곳곳에 존재한다. 다양한 가락과 넋두리 같은 2행시 표현 속에 사회와 시대의 변화를 증언하면서 주제사적인 문제까지 제기하는 아리랑은 한국의 문학사와 예술사에서 질기고 굵은 맥을 전승해오고 있는 유일무이한 사례이다.
개설
아리랑은 ‘아리랑……’ 또는 ‘아라리……’ 및 이들의 변이를 여음(후렴 또는 앞소리)으로 지니고 있는 일군(一群)의 민요로, 아리랑이라는 명칭은 이들 여음에서 비롯하고 있다.
아리랑은 전국에 고루 분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해외에도 널리 퍼져 있어서 이른바 「독립군아리랑」을 비롯하여 「연변아리랑」 등의 이름이 쓰이고 있을 정도이며, 멀리 소련의 카자흐스탄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교포들의 아리랑도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확인할 수 있는 가요들을 토대로 하여 주로 강원도 일대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 「정선아리랑」, 호남지역의 「진도아리랑」, 그리고 경상남도 일원의 「밀양아리랑」을 묶어서 삼대아리랑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것은 이들 세 가지 아리랑이 각 지역 민요의 기본적 음악언어를 간직하고 있는, 지역 내의 자생적인 전통민요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이 경우, 이른바 「경기아리랑」 또는 「서울아리랑」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은 특정인의 창의적인 윤색을 거쳐 인위적으로 변이되었다는 뜻에서 ‘신민요아리랑’으로 분류함으로써 삼대 ‘전통아리랑’과 구별된다.
역사
  1. 1. 지역적 분포
    「정선아리랑」은 원래 「아라리」로 일컬어지던 노래이다. 정선을 비롯해서 이웃 영월과 평창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아라리」는 이 지역의 민요적 음악언어를 가장 충실하게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태백산맥의 동서를 따라 길게 설정될 수 있는 이른바 메나리토리권에서 민요 「메나리」(또는 메노리)의 음악언어와 가장 밀착된 노래로 「정선아라리」가 평가될 때, 메나리야말로 가장 전통성 짙은 민요이면서 동시에 주어진 지역의 민요적 음악언어의 기층성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물론 메나리→어산영(경상도지역)→산아지(호남지방)의 연계를 고려한다면 「정선아라리」의 전통성은 보다 더 넓은 지역에 걸쳐 논란될 수 있을 것이다. 아리랑 가운데 「정선아라리」가 유일하게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이유는 바로 이 점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강원도 영동·영서일대에서는 「정선아라리」 외에 「강원아리랑」 또는 「자진아리」로 일컬어지고 있는 또 다른 아리랑이 있다.
    「정선아라리」에 비해 훨씬 장단이 빠르고 “아리아리 쓰리쓰리 아라리요, 아리아리 고개로 넘어간다.”라는 여음을 지닌 이 「자진아리」는 영서·인제 지방의 「뗏목아리랑」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 「뗏목아리랑」이 그렇듯이 일노래로서의 쓰임새를 진하게 지니고 있다.
    학산과 같은 강릉 교외 일대에서는 논노래 또는 들노래로 쓰이고 있지만, ‘어루리’며 ‘아라성’이라는 특수한 여음을 지닌 횡성·원주·여주·이천 일대의 아리랑과 충주지역의 아리랑도 기본적으로는 이 「자진아리」에 속하여 있다고 보이는 들과 논의 일노래들이다. 이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정선아라리」는 놀이노래라는 성격이 강하다.
    「정선아라리」에서는 엮음 아라리라는 특수한 형식의 아라리를 지적할 수 있다. 이것은 노랫말이 일반 아라리보다 훨씬 길어서, 노래의 첫머리에서 중간 정도까지 상당한 부분이 빠른 말투로 사설을 엮어가는 노래이다. 그래서 일반 아라리에 엮음 아라리를 대비시킬 경우, 평시조와 사설시조의 대비를 연상하게 된다.
    호남 일대는 국악학계에서 육자배기토리권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것은 이 지방 민요들이 육자배기를 기층적인 음악언어로 삼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지만 「진도아리랑」은 육자배기토리에 속하면서도 그 음악언어의 특색이 육자배기와는 다소간의 차이를 보여 주고 있다. 그것은 후대에 약간의 윤색이 가하여졌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해석되고 있다.
    「진도아리랑」은 호남지역, 충청남도 일부, 경상남도 서부지역, 그리고 제주도 등지에 분포되어 있으나, 밀집 분포지역은 진도이다.
    한편 정자소리토리권인 영남을 배경으로 삼고 있는 「밀양아리랑」의 경우에도 그 음악언어의 특성이 정자소리의 음악언어에 대하여 다소간의 차이를 보여 주고 있음이 지적되고 있다.
    「밀양아리랑」의 분포는 밀양을 중심으로 하여 경상남도 동북지방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어 다른 두 지역 아리랑에 비하여 그 분포가 비교적 제한되어 있는 셈이다.
  1. 2. 역사와 변화
    정선과 진도 그리고 밀양 등 3대 아리랑을 전통민요 아리랑으로 잡을 경우 그 가운데서도 「정선아리랑」은 메나리조의 밀착성이 짙어, 주어진 지역 민요의 음악적 문법의 기층성을 가장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그것은 「정선아리랑」이 민요적 지역성과 전통성을 으뜸으로 간직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달리 말하면 「정선아리랑」은 짙은 민요적 원형성을 간직하고 있다.
    오늘날 정선의 현지 주민들에게서 그 기원이 고려 말에까지 소급될 것으로 믿을 만큼, 오랜 역사를 지닌 아리랑의 정통을 이은 계승자로서의 긍지를 실감할 수가 있다. 그들은 아리랑의 남상이 그들의 생활공간인 태백산맥의 중허리일 것으로 믿고 있다.
    「정선아리랑」이 지닌 민요적 원형성과 그리고 현지 주민의 믿음 및 그 전승태도 등을 묶어서 생각할 때 아리랑을 산간의 ‘흙의 노래’로서 비교적 쉽게 규정지을 수 있게 된다.
    이 경우 ‘흙의 노래’는 ① 지역적으로나 역사적으로 토착성이 강할 것, ② 지역적인 일상생활성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을 것, ③ 민간 전승다운 전통성을 지니고 있을 것, ④ 주어진 지역사람들의 보편성이 큰 노래 또는 소리일 것 등, 네 가지 속성을 갖추고 있음을 뜻하고 있다.
    그러나 네 속성을 통틀어서 단일한 명제를 엮어낸다면, 오래 전부터 전하여진 것으로 믿고 지역주민 대다수가 그들의 지역 내 일상생활을 실어서 노래하고 있는 소리가 곧 ‘흙의 소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흙의 소리’로서 아리랑은 그 기층구조가 메나리나 정자소리와 마찬가지로 밭과 논, 그리고 물이며 산에서 부른 ‘일노래’라는 성격을 갖추고 있다. 이 경우 산과 들을 통틀어서 흙이라는 말로 포괄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흙의 소리인 아리랑은 산과 들·밭에서 부르는, 혹은 집안에서 부르는 ‘놀이노래’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흙의 소리’로서 아리랑은 애원성·탄성(嘆聲) 등이 실린 개인적인 소리라는 속성을 강하게 갖추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소박한 주관적인 서정이 흙의 소리로서 아리랑이 지녔던 시정신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신세타령과 팔자한탄 등이 우세한 넋두리나 푸념에 견줌직한 소리였다고 생각된다. 그런가 하면 개인생활 주변 일상성의 묘사를 ‘흙의 소리’로서 아리랑이 갖추었을 또 다른 속성으로 생각하여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아리랑의 기원설과 전설들은 대원군의 경복궁 공사와 관련된 아리랑에서 말하여 주고 있다. 『매천야록 梅泉野錄』에 고종이 궁중에서 아리랑을 즐겼다고 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대원군·고종 때 당시 서울에도 이미 아리랑이 전해져 있었음을 헤아릴 수 있다.
    경복궁 공사를 위한 징용의 가혹함과 이 공사 경비조달을 위한 가렴주구가 아리랑에 얽혀서 전해지고 있음을 고려한다면 적어도 대한제국 말기의 가혹한 정치와 사회현상을 타고 아리랑은 ‘흙의 소리’에서 ‘역사와 사회의 소리’로 탈바꿈해 나갈 결정적 단서 내지 동기를 잡은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이것은 대원군 시대를 계기로 해서 비로소 아리랑이 역사성·사회성를 갖추게 되었다는 것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아리랑의 기원을 고려 말 유신들의 망국의 한에서 찾고 있는 아리랑의 기원설 내지 전설이, 이미 아리랑이 원천적으로 지니고 있을 역사·사회성에 대하여 시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리랑의 흙다움과 역사·사회다움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비중의 우세를 지적할 때 제기될 수 있는 개념들이다. 그것은 아리랑이 원천적으로 지니고 있었던 역사·사회성이 대원군 시대와 같이 역사적 충격을 받아 상대적으로 흙다움보다 훨씬 목소리를 높였음을 뜻하는 것이다.
    아리랑이 사회화하고 역사화하는 제2의 충격은 일제의 침략에 의하여 촉발된 것이라고 가정해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표현이 나운규(羅雲奎)가 제작한 영화 「아리랑」이었다고 더불어 가정해 볼 수 있다. 그와 같은 아리랑의 사회화와 역사화는 8·15광복과 6·25전쟁을 거치면서 중첩되어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아리랑의 자체 변화는 민간전승이 역사적 변화에 적응한 결과라고만 설명될 이상의 또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민간전승이 민간전승으로서, 다른 차원으로 옮겨 갔음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민간전승이 민간전승의 테두리를 떠나 다른 문화영역으로 옮겨 갔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아리랑은 농어촌 전통사회의 민간전승에서 좁게는 도시 민간전승, 넓게는 사회 민간전승으로 탈바꿈해간 것이다. 이와 같은 일은 다른 민간전승에서 그 유사한 사례를 찾기 힘든 것이다. 이 경우, 사회 민간전승이란 동시대의 한국사회 전체가 공유한 민간전승임을 뜻한다.
    그런 한편, 아리랑은 그 사회화와 역사화를 통하여 대중문화·상업소비문화, 그리고 창조적인 예술문화에까지 그 영역을 확대해 간 것이다.
    이 같이 ‘흙의 소리’ 아리랑이 역사화·사회화해 간 사실은 제2차세계대전을 전후해서, 이른바 제3세계들에 걸쳐 광범위하게 일어난 민족주의적 문화운동으로서 일어난 민요운동과 동궤의 것으로 평가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기도 한 것이다.
  1. 3. 신민요아리랑의 파장
    아리랑은 앞서 언급한 삼대 전통 아리랑이 그 원류라고 보여진다. 그러나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에서 비롯하였을 것으로 짐작되는 「경기아리랑」 또는 「서울아리랑」은 신아리랑 또는 신민요아리랑이 잇따라 발생할 수 있는 동기 구실을 다한 것으로 생각된다.
    신아리랑 또는 신민요아리랑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대중가요화한 아리랑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민요아리랑 또는 전통아리랑으로 하여금 새로운 시대, 말하자면 상업시대 및 산업사회의 대중들의 노래로서 살아남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 것이다.
    가령 「아리랑삼천리」(박시춘 곡)를 효시로 삼아서, 일제강점기에 창작된 다섯 편 가량의 대중가요 아리랑에서 오늘날의 「영암아리랑」(하춘화 노래)에 이르기까지 ‘대중가요 아리랑’의 맥이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노래로서 아리랑은 전통민요→신민요→대중가요의 길을 걸어갔으며, 한편 ‘가곡 아리랑’의 흐름도 있다. 노래로서 아리랑은 그만큼 다양한 장르들을 포괄하게 된 것이다.
    신민요아리랑의 효시라고 보아도 무관한 「경기아리랑」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난다.
    라는 노랫말로 유명하지만, 음악언어의 원류는 대체로 「정선아라리」에서 찾을 수 있다.
    1930년대 이후 숱한 신민요아리랑이 잇따라 창작되었을 때, 「경기아리랑」은 달리 「본조아리랑」으로도 호칭되었거니와 그것은 「경기아리랑」이 신민요아리랑의 본조, 곧 본류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경기아리랑」 이 외의 나머지 신민요아리랑들은 「별조아리랑」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삼대 아리랑을 중심으로 일어난 아리랑의 물살은 시대의 차이, 갈래의 차이를 넘어서서 우리의 근대사회에 널리 또는 깊게 파장을 미쳐간 것이지만, 「종두(種痘)아리랑」이나 「한글아리랑」으로 이름지을 만한 특수한 아리랑의 파생을 보기도 하였던 것이다.
    「종두아리랑」은 천연두 예방주사를 널리 보급시키기 위하여, 「한글아리랑」은 문명퇴치교육의 보급을 위하여 각기 창안된 것들이다.
    이들 두 가지 보기들은 아리랑이 특정한 목적을 위해 의도적으로 창조되기도 하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나, 「독립군아리랑」이라는 또 다른 보기와 함께 이들은 아리랑이 민요의 텃밭인 민간전승 밖으로 벗어나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가령, 이와 같은 아리랑의 탈민요 내지 탈민간전승을 크게 보아 아리랑의 원심력 방향 확산이라고 부르게 된다면, 앞에서 이미 언급한 대중가요화나 가곡화도 그 같은 확산의 일례로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아리랑의 탈민간전승운동이 굳이 한 방향, 한 범주로 묶여서 제약받을 수는 없다. 가령 상업화하는 경향, 예술(문학·음악 등)사에 편입되는 성향, 실용성 높게 사회화하는 경향 등을 지적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립군아리랑」의 경우는, 가령 그것이 집단적 의지에 의하여 자연발생적으로 자체 내에서 창작되어 집단의식의 독자성을 강하게 향유하고 있었다면, 전통민속이 아닌 새로운 시대의 민속으로 평가하여도 좋을 것이다.
    원심적 확산의 다양화는 민요아리랑의 사회화 내지 역사화로 표현할 수도 있는데, 이것은 아리랑이 원형 지향적 전통성(구심성) 이외에, 시대변화에 적응하는 높은 정도의 가변성을 향유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구심성과 원심성의 극대화된 사례를 다른 전통민요에서 찾아보기 힘들다는 사실을 지적한다면, 다른 민요와 상대적으로 아리랑이 가지게 되는 개성이 그만큼 크게 두드러져 보이게 될 것이다.
    결국 신민요아리랑의 파장은 급기야 천파만파를 불러 일으켜, 여러 방향으로 동시에 또 다른 파장이 일어나게 한 것이다.
아리랑의 어원 및 구조
  1. 1. 여러가지 후렴과 그 어원론
    여음의 대표적 어휘인 ‘아리랑’의 어원에 대해서는 ‘아리랑(我離郎)’을 비롯해서 신라의 ‘알영비(閼英妃)’, 밀양 전설의 인물인 ‘아랑(阿娘)’ 등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의미 없는 사설(nonsence verse)로 흥을 돕고 음조를 메워 나가는 구실을 할 뿐이다.
    즉, 아리랑의 여음은 여러 가지이며 그 쓰임새 또한 다양하다. 노래의 머리에서 앞소리 또는 내드름소리로 쓰이는가 하면, 노래의 꼬리에서 뒷소리 또는 받음소리로도 쓰이고 있다. 또는 앞사람의 노랫말이 끝난 뒤, 다른 사람이 그 뒤를 이어 다른 노랫말로 넘겨받는 넘김소리로도 쓰인다.
    쓰임새의 다양성은 당연히 여음이 노랫말에서 차지할 자리의 다양성에 대하여 말해 주는 것이다. 다른 민요의 여음은 대체로 일정한 마디(節) 구성을 지니고 있고, 또 그 쓰임새며 노랫말에서 차지하게 될 자리가 일정하다. 그러나 아리랑의 경우 여음은 다른 면의 다양성과 더불어 마디 구성상의 다양성을 아주 특이하게 드러내 보이고 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고개로 나를 넘겨주소. (정선)
    아리 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낫네. 아리랑 어절시구 날 넘겨 주소. (밀양)
    아리 당다중 쓰리 당다중 아라리가 낫네. 아리랑 어절시구 잘 넘어간다. (밀양)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 낫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낫네. (진도)
    아리아리 쓰리쓰리 아라리요 아리아리 고개로 넘어간다. (강원도)
    아라리요 아라리요 아리랑 어헐사 아라성아. (여주)
    이와 같이 다양한 여음은 ‘아·이’, ‘아이·으이’, ‘ㄹ·ㅇ’, ‘ㄹ·ㅅ’ 등의 대립적 내지 대조적 음운교체의 엮어짐이 주류를 이루고 있거니와, 그것은 그와 같은 대립·대조적 음운교체가 한국인의 시적(詩的)인 ‘쾌감있는 음상(音相)’을 자극하면서 동시에 아리랑이 지닌 지배적 정서에 호응하는 것이라고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아리랑 여음의 어원론적 설명은 그 같은 음운들의 엮어짐이 뜻이 있는 실사(實辭)로 간주됨으로써 다양하게 시도되어 왔고, 또 그 시도에 따라 이설이 분분한 아리랑 기원론이 제시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가령, ‘我離郎’·‘啞而聾’·‘我難離’ 같은 보기는 아리랑의 여러 가지 여음을 각기 실사로 보고 한자로 옮겨놓은 것들이다.
    여음 해설을 계기로 삼은 여러 가지 아리랑 기원론은 아리랑이라는 전승 자체 및 일부 노래말에 얽혀서 전하여져 있는 전설(설명 전설)과 함께, 크게 본 아리랑 전승을 이루고 있는 것이라고 보여진다.
    즉 아리랑 전승은 아리랑이 노래말로만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노래말이 주축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주축을 세워서 각종 기원론과 전설도 의젓한 아리랑 전승의 일부를 이룩하고 있는 것이다.
    다양한 기원론은 진지한 노력이나 부분적인 상당한 설득력에도 불구하고 민간어원설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원론의 언어학적인 타당성과는 별도로 정서론 내지 주제론적인 타당성은 상당한 정도로 함유하고 있다.
    그것은 크게는 어원설을 제기하는 사람들의 주관적인 감정이 투사된 결과이기는 하지만, 아리랑 전승 내부에 몸과 삶을 담고 살아온 사람으로서 경험론적인 실감이 거기에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아리랑의 기원설은 대체로 보아 아리랑을 오랜 역사적 유래를 가진 노래로, 그러면서 아리랑을 비창감이 진하게 서린 노래로 부각시키려는 두 가지 경향성을 보여 주고 있다.
    전자를 아리랑 기원설의 역사주의, 후자는 비창지향성이라고 부를 수 있다. 물론, 예외는 있으나 그 두 가지 경향성을 함께 고려할 때 아리랑 기원설에는 민족의 역사성 짙은 상흔이 간직되어 있다고 말하여도 좋을 것이다.
    그것을 아리랑 기원론이 간직하고 있는 민족의 역사적 원상의식(原傷意識)이라고 바꾸어 말하여도 무방할 듯하다. 아리랑을 푸념·넋두리라고 부를 수 있을 때 아리랑이 역사적 원상을 풀어나가는 양식상의 특색에 대하여 말하게 된다.
    아울러, 서러움·애달픔·원한을 말하게 되며 아리랑이 지닌 역사적 원상이 불러일으킬 감정 및 정조를 지적하는 것이 되며, 애원성이라고 하게 되면 역사적 원상의 노래인 아리랑이 지닌 소리로서의 특색을 지적하는 것이 될 것이다.
  1. 2. 시형식과 수사
    아리랑의 시형식은 기본적으로 2행시, 곧 두 줄 시라고 볼 수 있으며, 가장 간결한 시형식이다. 따라서 아리랑의 시형식은 민요형식의 단순성 매력을 갖추고 있다. 이 경우 여음은 따로 계산하고 뜻 있는 실사로 엮어진 시행만 문제 삼고 있는 것이다.
    두 줄 시로서 한 줄이 대체로 3∼5음보 정도로 엮어져 있다. 전체적으로 모두 10음보를 넘지 않는 짧고 간결한 시형식을 갖추고 있다. 당연히 예상되는 중문과 복문 이 외에 단문으로만 된 두 줄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면 아리랑의 단순성은 더욱 강조될 수 있을 것이다.
    두 줄 시는 「캐지량」이나 「강강술래」의 한 줄 시에 비하면 양식의 안정도 크다는 장점을 지니게 된다. 그런가 하면 세 줄 시와 네 줄 시에 견주어서 기억하기 좋고 즉흥성을 가미하기 쉽다는 양식상의 특색을 지적할 수 있다.
    본질적으로 민요 두 줄 시는 속담이나 속신 등 이른바 ‘민중의 신념’ 또는 ‘민중의 판단’이라고 총칭할 수 있는 ‘문장 구술 전승’과 한 범주에 들거나 아니면 서로 이웃할 수 있는 서술형식상의 속성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팥 심은 데 팥나고 콩심은 데 콩난다.”고 하는 속담이나 “아침 까치가 울면 손님이 오고 저녁 까치가 울면 사람이 죽는다.” 라는 속신 따위는 아리랑의 두 줄 구성과 구별하기가 어렵게 되어 있다.
    속신과 속담은 ‘민간 수사’라고 부를 만한 것의 최소 단위이다. 사물을 인지하고 판단하고 하는 데 쓰일 수 있는 민간 수사의 가장 작은 단위이다. 아리랑의 두 줄 구성은 실제로 민간 수사를 총망라하고 있기도 한 것이다.
    이 점이 아리랑이 지닌 형식상 또는 수사상의 큰 장점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아리랑의 배후에 속신과 속담 등에 견줄 수 있는 민간 수사가 있다고 하는 것은 아리랑이 각종 민간 수사의 보고임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아리랑은 그 양식이 단순하여 강한 암기성과 즉흥성을 촉발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추고 있음과 함께, 속담이나 속신에 견줄 수 있는 민간 수사의 보고라는 사실이 어울려서 무수한 아리랑 노래말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것은 다양한 노래말의 문체적 원천 내지 동기에 대한 설명이 될 수 있다.
    아리랑 노래말이 오늘날 많게는 한 지방의 경우 400∼500가지가 보고되어 있다. 그러나 노래말의 가짓수가 많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으로는 큰 의미가 없다. 요는 그렇게 다양하게 계속 지어지고 있는 바탕, 큰 시문법이나 초구조가 제시되어야 하는 것이다.
    아리랑의 두 줄 구성에서 대구법이 가장 우세한 것으로 지적될 수 있다. 그것을 ‘대구적 두 줄 구성’이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경우 대구는 대조와 대비의 대구로 크게 양분될 수 있다. 두 가지 사물 또는 존재의 차이가 상대적으로 강조된 것이 대조의 대구법이라면, 이와는 달리 큰 것들 사이의 공질성이 강조된 것이 대비의 대구법이다.
    “앞남산의 실안개는 산허리를 감고요 정든님 두 팔은 내허리를 감는다.”가 전자의 보기라면, “오릉촉단(吳綾蜀緞) 능라조(綾羅調)로 날 감지 말고 대장부 긴긴팔로 날 감아 주게.”는 후자의 보기로 알맞을 것이다.
    두 가지 노랫말에서 다 같이 ‘임에 의한 허리감기’는 사람이 충족된 상태를 뜻하고 있다. 이미 충족되어 있는 사람은 ‘임에 의한 허리감기’와 동형동질의 것을 찾아 짝을 맞추고 있고, 이와는 달리 충족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동행이질의 것을 찾아서 짝맞추기를 하고 있음을 쉽게 찾아낼 수가 있다.
    이것을 아리랑의 짝맞추기, 정확하게는 아리랑 두 줄 대구의 짝맞추기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짝맞추기에 의해 아리랑은 ‘도시(부)·농어촌(가난)’, 사회계층과 신분계층의 ‘위·아래’, ‘가짐·안 가짐’, ‘밝음·어둠’, ‘잘남·못남’ 등 종횡무진으로 노래부르는 것이다. 그 짝 맞추기에 따라 아리랑은 때로는 밝은 양지의 노래가 되고 때로는 어두운 음지의 노래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짝맞추기 대구법을 기본으로 삼고, 거기에 반복법·말놀음·쌍소리·문답법·독백체 등이 간간이 활용되면서 무수한 변이를 낳게 되고, 오늘날 3,000여 가지가 넘는 노래말이 수집, 보고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 결과 아리랑은 한국인이 말할 수 있는 온갖 말투와 말씨를 총동원한 소리의 소리, 노래의 노래가 될 수 있었다.
  1. 3. 장단과 가락
    민요·신민요 유행가에 ‘아리랑’이라는 제목이 붙거나 뒷소리에 아리랑이라는 말이 붙는 노래는 매우 많다.
    그러나 오늘날 세상에 널리 불리는 민요 가운데 아리랑은 「강원도아리랑」·「정선아리랑」·「밀양아리랑」·「진도아리랑」이라 할 수 있으며, 「서울긴아리랑」·「남도긴아리랑」·「해주아리랑」은 부르는 일이 극히 드물다. 「어랑타령(신고산타령)」·「긴아리」·「자진아리」는 오늘날 아리랑으로 꼽지 않고 있다.
    「강원도아리랑」은 강원도 영동지방에서 모내기소리로 불려지는 아라리에서 나온 것으로 강원도자진아라리이다. 이 아리랑은 8분의 10박자로 엇모리장단에 맞으며 엇모리 4장단에 메기고, 엇모리 4장단에 “아리아리 스리스리 아라리요 아리아리 고개로 넘어간다.”하고 뒷소리를 받는다.
    선율은 구성음이 미·솔·라·도·레로 되어 있고, 미나 라로 종지하며 미는 작게 떨고 레에서 도로 꺾는 목을 쓰는 메나리토리로 되어 있다. 「강원도아리랑」은 소박하고 구슬픈 느낌을 주어 서울에서 불리는 것보다 강원도 영동지방에서 불리는 것이 훨씬 향토적인 맛이 난다.
    「정선아리랑」은 강원도 영서지방에서 모내기소리로 불려지는 강원도 긴아라리를, 촘촘히 엮어 엮음 아라리로 불려지던 것이 세상에 퍼진 것이다.
    메기는 소리는 자유리듬으로 촘촘히 노랫말을 엮어가다가 세마치 8장단으로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로 날 넘겨주소.”하고 받는다.
    선율은 메나리토리로 되어 있다. 엮지 않는 것은 매우 처량한 느낌을 주며 엮는 것은 노랫말을 빠르게 촘촘히 엮어나가며 감정을 고조시키다가 끝에 높은 소리로 길게 질러내어 감정을 퍼버리며 뒷소리로 느리게 흐느끼는 느낌을 준다.
    아리랑은 세상에서 가장 널리 불리던 것으로 서울의 「구조아리랑」에서 나온 것이며, 장단은 세마치로 되어 있으나 흔히 4분의 3박자로 불러 신민요의 리듬으로 부른다. 세마치 8장단을 메기고 8장단을 받는다. 선율은 구성음이 솔·라·도·레·미로 되어 있고 솔이나 도로 마치는 경토리로 되어 있으며, 유창하고 명랑한 느낌을 준다.
    조선 말기에 성창하던 「구조아리랑」은 이 아리랑과 장단과 토리가 같으며 곡조가 약간 다를 뿐이다. 「긴아리랑」은 「구조아리랑」과 장단과 토리는 같으나 훨씬 느리고 곡조가 약간 변동되어 있다. 「아롱타령」은 장단과 토리는 「구조아리랑」과 같지만 곡조가 높은 음역에서 부르도록 바뀌어 있다.
    「밀양아리랑」은 서울의 「아롱타령」에서 파생된 것이다. 장단은 8분의 9박자 세마치 장단으로 되어 있고 8장단을 메기며 8장단을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에 아리랑 어헐시구 아라리가 났네.” 하고 뒷소리를 받는다. 선율은 경토리와 메나리토리가 뒤섞여 있으며, 매우 경쾌하고 씩씩한 느낌을 준다.
    「진도아리랑」은 「남도긴아리랑」을 변창한 것이다. 8분의 9박자 세마치장단으로 되어 있으며, 8장단을 메기고 8장단을 뒷소리로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하고 받는다.
    선율은 구성음이 미·라·시·도로 되어 있고 라로 마치며 미에서 세게 떨고, 도에서 시로 꺾고 레보다 낮은 음에서 도·시로 흘러내리는 육자배기토리로 되어 있다. 이 아리랑은 구슬프고 구성진 느낌을 준다. 「남도긴아리랑」은 서울 「구조아리랑」을 육자배기토리로 바꾼 것으로 장단은 세마치장단으로 되어 있다.
  1. 4. 다양성과 초역사성
    아리랑은 말할 것도 없이 일차적으로 전통민요이다. 따라서 구술과 암기에 의한 전승, 자연적 습득 등과 같은 민속성 외에 지역공동체집단의 소산이라는 민속성을 가지게 되고, 그 집단성은 시대성과 사회성을 내포하게 된다.
    “쓰라린 가슴을 움켜 쥐고 백두산 고개로 넘어 간다.”, “감발을 하고서 백두산 넘어 북간도 벌판을 헤매인다.”, “이천만 동포야 어데 있느냐 삼천리 강산만 살아 있네.”, “지금은 압록강 건너는 유랑객이요 삼천리 강산도 잃었구나.”, “36년간 피지 못하던 무궁화꽃은 을유년 8월 15일에 만발하였네.”, “사발그릇 깨어지면 두세 쪽이 나는데 삼팔선이 깨어지면 한덩어리로 뭉친다.”
    이와 같이 몇 가지의 노랫말을 나열해 놓는 것만으로도 「아리랑」이 근세의 민족사를 반영하고 있음이 일목에 드러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뗏목꾼은 뗏목꾼대로, 광부들은 광부들대로, 심메마니는 또 그들대로 각기 그들 생활의 애환의 순간순간을 아리랑에 담고 있다. 직업공동체나 사회공동체의 문화적 독자성이 강하게 아리랑에 담기게 되는 것이다. 민족이 위기에 처한 시대에 아리랑은 민족적 동질성을 지탱하는 소리였다.
    아리랑은 거시적으로 민족의 독자성에 이바지하였으나, 그보다 좀 작은 규모의 지역공동체이며 이익공동체의 독자성에도 상당한 기여를 한 것이다.
    그런 뜻에서 아리랑은 분명히 공동체의 휘장(徽章) 내지 민중의 휘장 노릇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럴 경우 애원성(哀願聲)이나 한탄의 소리인가 하면, 항거요 비판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체념의 하소연인가 하면 강한 삶의 의지의 표백이었고, 모가 난 말싸움인가 하면 익살떨기의 넉살부림이기도 하였다. 구시렁거리는 불만인가 하면 지독한 악담이요 욕이요 쌍소리이기도 하였다.
    한마디로 집단과 민중의 휘장이라고 하지만, 아리랑은 이 같은 다양한 목청과 소리투로 그 휘장을 노래한 것이다. 그러나 아리랑은 바로 그것이 지녔던 집단 내지 민중의 휘장이라는 성격으로 말미암아 사회문화인 민요운동을 우리 민요사에서 유일하게 도맡을 수 있었던 것이다.
    흙의 민속성에서 사회와 역사의 민속성을 향하여 아리랑은 자신을 확대할 것이다. 아리랑이 근대사를 살게 된 한국인의 사랑을 받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아리랑의 집단성은 앞소리와 뒷소리, 매김소리와 받음소리 등으로 나뉘어 부르는 형식에도 곧잘 드러나 있다. 한데 어울려 일하고 놀이하는 사람들이 그 소리의 가름을 따라 제창이나 윤창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리랑에서 그 집단성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옳은 일이 못 된다. 그것은 동시에 매우 강한 개인성을 갖추고도 있었기 때문이다. 아리랑은 주관성 높은 감정을 자연스럽게 토로하는 서정시이면서 원한과 아픔을 풀이하는 넋두리나 푸념이기도 하였다.
    유사 대화체나 독백체가 이 속성을 강하게 뒷받침할 수 있었다. 아리랑은 ‘떼소리’ 또는 ‘무리소리’이면서도 ‘혼자소리’이기도 하다.
    절로 한숨 짓듯이, 더운 숨결을 토하듯이, 혹은 매인 중치를 터놓듯이 혼자소리로 부르는 것이 아리랑이다. 소리꾼은 그 혼자소리로 삶을 달래고 애간장을 삭이면서 목숨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혼자 소리 아리랑은 삭임의 소리, 푸는 소리 구실을 한 것이다.
    이와 같은 집단성과 개인성은 아리랑이 지닌 또 다른 원심력과 구심력이지만, 그 양면성을 갖추고 있는 데에, 아리랑이 지닌 복합성을 읽게 되는 단서의 하나를 얻게 된다.
    아리랑은 결코 단일한 장르의 민요가 아니다. 아리랑은 그 다양한 복합성 때문에 역사의 변화와 사회의 변화 속에서도 살아남는 강한 적응력을 향유할 수 있었다. 그냥 단순히 과거의 화석으로 전해지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근대의 흐름 속에서 그때그때 새로이 새 삶을 얻으며 살아남은 것이다.
    한국의 문학사와 예술사에서 단일한 민요의 소재를 들자면 아리랑만큼 질기고 굵은 맥을 지켜온 보기를 구할 수 없다. 그것도 사회와 시대의 변화를 증언하면서 주제사적인 문제까지 더불어 제기하는 소재사의 맥을 구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내일의 한국의 시대, 그리고 사회에서 아리랑의 소재사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예언하기는 힘들다. 다만 소재사의 맥이 더욱 굵어지고 더욱 길게 이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참고문헌
  • 「한국 음악민요의 유형적 고찰」(김진균,『동서문화』 4,계명대학교 동서문화연구소,1970)

  • 아리랑  (김연갑 편, 현대문예사, 1986)

  • 아리랑역사여 겨레여 소리여  (김열규, 조선일보사, 1987)

  • 「아리랑에 관한 음악적 고찰」(이보형,『민학회보』 15,1987)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아리랑)]

정의

2003년 제32회 유네스코 총회에서 채택된 무형문화유산 보호협약 제2조에서는 "무형문화유산은 관습, 묘사, 표현, 지식 및 기술 및 이와 관련된 기구, 물품, 가공품 및 문화 공간이며, 사회 집단 및 경우에 따라서는 개인이 자기의 문화 유산의 일부로 인정

동 협약에서는 무형문화유산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을 향상시키기 위해 유네스코에 설치된 무형 문화 유산 보호에 관한 정부 간 위원회에 의해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Representative List of the Intangible Cultural Heritage of Humanity)을 작성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제16조). 또한 조약 채택 전에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Masterpieces of the Oral and Intangible Heritage of Humanity)으로 선언된 것은 표에 기재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제31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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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교회(移民敎會)와 영성(靈聖)


09-11-2022(주일 주보)

바울의 비전

바울은 디아스포라 유대인(a Diaspora Jew)입니다.
고향인 유대 땅을 떠나 당시 로마제국에 흩어져 살았던 유대인 가운데 한 명입니다.
곧 바울은 이민자인 것입니다.
바울은 유대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로마 헬라 문화권(the Greco-Roman world)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유대문화와 로마헬라문화 모두에 익숙하면서도 이 두 문화에 대해 비판적인 거리를 두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중간인의 삶으로 인해 바울은 창조적인 비전을 보게 됩니다.

바울의 비전은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의 메시아로 보았던 예수님이 이방인을 포함한 ‘온 세상의 주’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비전은 몇몇 부분에서 예루살렘 중심의 유대계 그리스도인들과 충돌하였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에 소개되는 이방인들의 할례나 식사 규례(Kosher)에 관한 예루살렘 지도자들과의 논쟁이 그 분명한 예입니다.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은 새로 시작된 예수운동을 유대교의 상황에서 이해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유대인이면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기 시작하면서부터 였습니다. (다음 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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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8-2022(주일 주보)

문제는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기 시작하면서부터 였습니다.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은 자연스럽게 새로 예수님을 믿은 이방인들에게 자신들처럼 유대의 관습을 지킬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만큼 초기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의 분파처럼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의 생각에 반대했습니다.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데에 유대인이 되는 조건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의 이러한 생각은 1세기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대단히 혁신적이고 급진적인 생각이었습니다.
바울의 이러한 창조적인 생각은 그가 가진 중간인의 정체성으로부터 나왔습니다.
유대인이지만, 로마헬라문화 속에서 자라고 교육받은 바울은 유대문화에 대한 비판적 거리로부터 이러한 창조적인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바울의 비전은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바울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과 헬라인의 주님이실 뿐만 아니라, 피조물을 포함해 온 세상을 구원하시는 주님입니다.
바울의 종말론은 로마서에 나타나듯이 유대인과 헬라인은 물론, 신음하는 피조물까지도 고대하는 구원(롬 8장)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에서 이야기하는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계 21:5)입니다.
따라서 바울의 교회관을 한 마디로 말하면 ‘세상을 위한 교회’입니다.
교회는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차별없이 불러 모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온 세상의 구원을 향해 힘써 가는 공동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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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5-2022(주일 주보)

이민교회(移民敎會)와 영성(靈性)

미국에서 이민목회를 하면서 ‘이민교회와 그 목회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과 고민의 울타리를 벗어날 수 없다.
왜냐하면 미국에 있는 한인이민교회는 분명 한국교회와 다른데, 그 차이를 이해하고 그에 맞는 목회를 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기 때문이다.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 이민자의 삶을 살았던 바울의 씨름과 영성은 미국에서 한인 이민자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이민교회와 한국교회

미국을 방문한 어느 목사님께서 그가 시무하던 교회의 부목사가 이민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 고전하고 있을 때 “아니, 이민교회 하나 목회 못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라고 핀잔을 주었다고 한다.

한국의 큰 교회에서 다양한 목회 프로그램과 많은 성도들을 관리하던 부목사가 몇 명 안 되는 작은 교회에서 고전하는 것을 이해하기어려웠던 것 같다.

한국교회와 이민교회를 모교회와 지교회의 관계처럼 생각하는 것은 한국에 있는 교회는 신앙의 뿌리와 같고 이민교회는 이 뿌리에서 나와 미국에 자리 잡은 가지와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민교회는 중간자(中間子)로 시작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철학자 파스칼은 사람을 중간자라고 정의 하였다.

첫째는 시간적인 중간자
인간은 괴가와 미래라는 중간 즉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

둘째는 형태적인 중간자
인간은 천사도 아니고 사탄도 아닌 중간자로 존재하고 있다.

셋째는 공간적 중간자
인간은 하늘 위도 아니고 땅 속도 아닌 하늘과 땅 사이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민교회의 구성원들은 미국인도 아니고 한국인도 아닌 중간자로 하루 하루를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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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6-2022(주일 주보)

이민교회의 비전

이민교회의 비전은 바울처럼 ‘세상을 향한 교회’가 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중간인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인 이민교회가 비교적 수월하게 감당할 수 있는 비전입니다.
왜냐하면 이민교회는 문화와 세상을 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실존적으로 깨달은 사람들이 모여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문화와 미국문화의 두 문화 사이를 살아가는 한인이민교회들은 두 문화를 모두 끌어 안는 훈련을 통해 세상 전체를 끌어안는 하나님의 비전을 품고 나아가야 합니다.

이와 더불어 중간인이 가진 ‘비판적 창조성’ 또한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요즘의 한국교회의 모습을 보면 이민교회가 가진 비판적 창조성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요청되는 때인 것 같습니다.
지금의 한국교회는 성장주의의 폐해로 인해 대형화, 물질화, 세속화의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의 이민교회는 그 작은 규모와 한계로 인해 적어도 한국교회가 겪고 있는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조금 더 자유로운 모습을 보입니다.
이민교회들은 자신들의 영세함과 연약함을 부끄럽게 여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연약함을 극복해 대형교회로 성장하려는 맹목적인 목표를 세워서도 안 됩니다.
오히려 이민교회의 연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지혜가 나타나는 진정한 교회상을 세우도록 기도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과 바울이 보여준 ‘약하고자 하는 용기’(courage to be weak)로 대변되는 영성의 모습은 대형화된 한국교회보다 연약함을 자랑하는 이민교회에서 보다 수월하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민교회가 보여 줄 세상을 위한 교회, 연약함의 영성은 한국교회와 미국교회 모두를 건강하게 만들 수 있는 중간인의 사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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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 04 / 2022(대강절 제2주)

말씀을 묵상(默想)하라!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란 하나님(혹은 성령)이 불러 주신 내용을 성경의 저자들이 기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묵상하려면 먼저 성령의 도움을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을 기록하게 하셨던 성령의 감동이 말씀을 읽는 사람에게 임재하면 그 말씀의 깊은 의미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깨달은 후에는 그 말씀을 삶에 적용해야 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창세기 1:1-2).

이 말씀을 읽었을 때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혼돈과 흑암에 하나님의 성령이 임재하신다면 어떤 현상이 일어날 수 있을까?
 
나에게 닥쳐온 혼돈과 흑암이 무엇인가?
심한 독감으로 인한 육체의 질서가 파괴된 상태와 일상생활이 순조롭지 못한 것이구나!
주여, 지금 이곳에 주의 영이 임재하여 창조의 은혜를 만끽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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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 11 / 2022(대강절 제3주)

성경을 기도로 열어라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 7. 15~1669. 10. 4)는 바로크 시대의 네덜란드 화가로 그의 첫 제자인 헤릿 도우(Gerrit Dou. 1613-1675)는 "빛의 화가"라고 하며 그의 작품 “예언자 안나”라는 성화에서 성경을 읽는 하나의 방법을 생각합니다.
이 그림은 누가복음 2장에 나오는 84세의 과부였던 예언자 안나를 모델로 안나의 성경 읽기를 그린 것입니다.
'예언자 안나'라는 그림에서 '도우'가 강조하는 것은 손입니다.
성경을 받쳐 든 손은 ‘기도하는 손’입니다.
성경를 읽고 있는 안나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읽고 있습니다.
빛의 화가 '도우'에게 성경의 뜻이 드러나는 순간은 기도 속에서 성경을 읽을 때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묵상과 지적인 노력만으로 그 뜻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가운데 그 뜻을 보다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때로 성경지식이 풍부한 사람 가운데 성경의 내용이 지식의 차원에 머무르고 그 영적인 깊이가 드러나지 않는 경우는 바로 기도 가운데서 성경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경 말씀을 기도 가운데 가져갈 때 보다 깊은 영적인 의미를 깨닫고 그 의미를 머리에서 마음으로 옮겨갈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성경으로 기도할 때에 말씀을 통해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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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 18 / 2022(대강절 제4주)

성경을 실천하라

렘브란트에게도 성경의 안나를 그려낸 “예언자 안나”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렘브란트의 그림에서는 항상 빛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 그림에서는 빛이 등 뒤에서 와서 성서를 밝힙니다.
이 빛이 비치는 중심에 위치하는 것은 성서와 손입니다.
렘브란트는 안나의 손을 믿기지 않을 만큼 정교한 붓질로 그려냈습니다.
자세히 보면 안나의 손에서 주름과 혈관마저 보일 정도입니다.
여기에서 렘브란트는 성서를 ‘손으로 읽는” 장면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안나의 눈은 뜬 것인지 감은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습니다.
마치 맹인을 위한 점자책을 읽듯이 안나는 손으로 성서를 매만지며 읽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손으로 성서를 읽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그것은 몸으로 읽는다는 의미입니다.
곧 삶에서 실천한다는 의미와 다르지 않습니다.
성서의 뜻은 지적인 노력을 통해서만 이해되거나, 기도를 통해서만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서는 몸으로 읽을 때에 그 뜻이 드러나게 되는 거룩한 책입니다.
성서를 읽는 동안 이해하고 깨닫게 된 것을 온몸으로 삶에서 실천할 때에 성서의 의미는 비로소 완전하게 우리에게 드러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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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5일 성탄주일

성탄 편지
- 이해인

친구여, 알고 계시지요?
사랑하는 그대에게 제가 드릴 성탄 선물은
오래 전부터 가슴에 별이 되어 박힌 예수님의 사랑
그 사랑 안에 꽃피고 열매 맺은 우정의 기쁨과 평화인 것을.
슬픈 이를 위로하고,
미운 이를 용서하며,
우리 모두 누군가의 집이 되어 등불을 밝히고 싶은 성탄절
잊었던 이름들을 기억하고
먼데 있는 이들을 가까이 불러들이며 문을 엽니다.
죄가 많아 숨고 싶은 우리의 가난한 부끄러움도
기도로 봉헌하며 하얀 성탄을 맞이해야겠지요?
자연의 파괴로 앓고 있는 지구와 구원을 갈망하는 인류에게
구세주로 오시는 예수님을 우리 다시 그대에게 드립니다.
일상의 삶 안에서 새로이 태어나는 주님의 뜻을
우리도 성모님처럼 겸손히 받아 안기로 해요.
그 동안 못다 부른 감사의 노래를 함께 부르기로 해요.
친구여, 알고 계시지요?
아기예수의 탄생과 함께 갓 태어난 기쁨과 희망이
제가 그대에게 드리는 아름다운 새해 선물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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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토론하라

렘브란트가 이야기하는 성서의 뜻이 드러나는 방법을 베드로와 바울을 그린 그림에서 살펴봅시다. 원래는 “논쟁하는 두 노인”이라고 제목이 적혀 있지만, 이 그림의 등장인물은 베드로와 바울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작품에서 얼굴이 보이는 백발의 노인이 바울이고, 등을 보이고 있는 단단한 체격의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이 그림에도 역시 빛이 쏟아지고 있는 중심에 성서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 위로 바울과 베드로의 손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듯합니다.

이 그림에서 둘은 성서의 내용에 대해 서로 토론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손가락으로 성서를 가리키며 열심히 무언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도 그저 바울의 이야기만 듣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바울의 말이 끝나기만 기다리고 있는 듯합니다. 베드로는 바울의 이야기가 끝나는 대로 반론을 펼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손을 보십시오. 성경 곳곳에 손가락을 끼워놓고 자신의 주장을 펼칠 성경 구절들을 찾아 놓고 있습니다.

이 그림을 통해 렘브란트는 성서란 공동체로 서로 토론할 책이라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성서는 개인적으로만 묵상하고, 기도하고,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로 함께 질문하고 토론하는 가운데 그 의미를 깨닫게 되는 책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향해 질문하고, 우리의 삶과의 관계성을 끊임없이 묻고, 그 내용을 서로 토론하고 나눌 때에 성경은 비로소 그 의미가 완전히 드러납니다. 우리가 공동체로 함께 말씀을 묵상하고, 성경 공부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성서를 어떻게 읽습니까? 새해에 우리가 성서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기도하고, 몸으로 실천하며, 공동체로 나누고 토의할 때에 성경은 우리 삶을 뒤흔드는 하나님의 말씀 사건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 참고문헌: 김학철, 렘브란트 성서를 그리다 (서울 : 대한기독교서회,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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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교회(移民敎會)와 영성(靈性)

이러한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는 한국의 목회자들이 한국교회의 지교회를 해외에 창설하고, 이민교회 목회자들 가운데 한국에서 유행하는 목회전략을 무분별적으로 모방하려는 분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렇습니까?
이민교회는 한국교회라는 모교회의 지교회에 불과합니까?
이민교회는 미국이라는 새로운 땅에 하나님께서 세워 주신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한국교회가 동북아시아에 위치한 한국에서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목회하듯이, 미국의 이민교회는 북아메리카에 위치한 미국에서 이민자들과 1.5세, 2세를 대상으로 목회하는 교회입니다.

한국교회와 이민교회는 그 문화적인 상황이나 성격이 전혀 다른 교회입니다.
이것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한국교회의 목회를 수출하려는 한국의 교회나, 혹은 성장이라는 단순한 목표를 위해 한국의 목회전략과 목회자를 직수입하려고 하는 미국의 이민교회는 결국 어려움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워 주신 교회에는 그 상황과 문화에 맞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명이 있습니다.
한국교회와 이민교회는 각자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명을 발견해야 합니다.

창조적인 중간인

그렇다면 이민교회가 발견해야 할 사명은 무엇입니까?
이 질문을 숙고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민자들이 가진 삶의 특징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 특징을 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중간인의 삶”입니다.
미국에 사는 한인 이민자들은 한국문화와 미국문화의 ‘중간’(혹은 ‘사이 between’)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가끔 한국을 방문하면, ‘아, 이제 내 생각과 삶의 방식이 한국 사람들과 많이 달라졌구나.’ 하는 것을 절감합니다.
그렇다고 미국에서 미국사람과 똑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도 아닙니다.
미국에서 한국적 신학을 설파했던 이정용 교수는 이러한 이민자의 특수성을 ‘중간인의 삶’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민자는 두 문화의 중간에 끼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양쪽 모두의 문화에 속해 있으면서 동시에 어느 문화에도 완전히 속해 있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중간인은 사실 설움을 많이 경험하는 사람들입니다.
한국을 떠나면서 삶의 뿌리를 옮겨 오는 경험을 거친 후, 이제는 한국의 문화와도 거리가 생겨 생소한 마음의 아픔을 안고 살아갑니다. 미국에서는 여전히 주류에 속하지 못하고, 주변부에 머무르게 됩니다.
1세대 이민자들은 대부분 영어도 수월하지 않고, 힘든 일을 하는 경우들이 많아서 그 고달픔은 배가 됩니다.
게다가 때때로 겪게 되는 인종차별은 이 사회에서 이민자의 위치가 주변부에 있다는 것을 절감하게 합니다.

하지만 이정용 교수는 이러한 중간인의 삶에 설움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중간인이 받은 축복은 ‘비판적 창조성’입니다.
중간인은 양쪽 문화 모두에 속해 있으면서 양쪽 모두에 대해 거리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두 문화를 객관적이고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비판적 거리로부터 창조적인 생각이 가능합니다.
한국과 미국사회의 핵심적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가진 권력과 욕심에 눈이 멀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 때, 이에 대해 바른 말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주변부에서 약하게 살아온 중간인들 입니다.
한국이나 미국 문화가 어떤 특정한 가치와 생각을 편애하며 나아갈 때, 이에 대한 균형을 잡아 줄 수 있는 사람들 또한 양쪽 모두를 알면서도 비판적 창조성을 가진 이민자들입니다.
이러한 이민자들이 가진 실존적인 정체성에서 나오는 ‘비판적 창조성’을 대표적으로 보여 주는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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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영성’은 한국교회에서최근 하나의 유행처럼 논의되고 있습니다.
영성에 대한 많은 책들과 워크샵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반면, 이러한 모습을 견제하는 우려의 목소리 또한 적지 않은 것이 한국교회의 현실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모든 논의의 중심에 영성에 대한 오해가 자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영성을 교회 성장을 위해 유행하는 프로그램처럼 여기는 사람들에게서도, 또한 영성에 대한 위험성을 지적하는 사람들에게서도 기독교영성에 대한 적잖은 오해가 발견됩니다.
이 시간에는 한국교회에 자리하고 있는 ‘기독교영성의 오해’가 무엇인지 살펴보고, 이러한 오해를 넘어서는 성경에 근거한 건강한 영성의 예로 사도 바울의 영성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한국교회가 가진 영성에 대한 오해

한국교회의 영성에 대한 오해를 드러내는 가장 단적인 예는 최근 10월에 이루어진 한국의 주요 교단 총회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한국의 일부 교단은 총회를 통해 공식적으로 영성에 대한 위험성을 지적했습니다.

‘뉴스앤조이’라는 매체는 주요 교단들의 총회 소식을 전하는 기사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보도했습니다.
“예장합동 신학부는 ‘관상기도’가 불건전한 신비주의, 종교다원주의, 이교적 영향이 혼합되어 있어 복음의 순수성을 해칠 위험성이 있다고 보고했다.
예장합신 신학연구위도 ‘관상기도’를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위험하다고 했다.
이승구 교수(합신대)는 ‘관상기도는 기본적으로 가톨릭교회의 정화, 은혜의 주입, 신과의 합일이라는 생각에 뿌리 내리고 있다. 신학적으로 오류가 있는 부분이다.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해 하나님과 교제하는 기도를 배우고 추구해야 한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2011년 10월 6일) 비록 여기에서 논점은 ‘관상기도’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만, 이것은 관상기도로 대표되는 영성 전체에 대한 시각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신비주의, 문화와의 관계, 그리고 가톨릭의 영향입니다. 이 문제들은 직접적으로 한국교회가 가진 영성에 대한 오해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실 이 세 가지 모습들은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태도들입니다. 이제 각각의 요소들이 가진 영성에 대한 오해가 무엇인지 알아 보고, 이에 대해 바울의 영성은 어떤 입장을 취하는지 간단히 살펴 보고자 합니다.

영성의 목표

먼저 신비주의에 얽힌 오해를 살펴봅시다.
이것은 영성의 목표에 대한 오해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신비주의’는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와 계시를 추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직통 계시를 추구할 때, 개인의 영성이 강조되어서 이것을 통제하거나 판단할 근거가 약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자신만의 직통 계시를 주장하면서 이를 통해 자신의 이익을 챙기고 공동체에 해를 끼치기도 합니다. 이러한 위험성으로 인해 기독교 안에는 성경의 계시를 모든 계시의 우월한 근거로 두는 전통이 생겼습니다. 기독교영성 또한 이러한 신비주의적 경향을 배제할 수 없기에, 성경의 계시에 우월성을 두는(심지어는 문자화된 계시인 성경 이외에는 어떠한 계시도 인정하지 않는) 한국교회로서는 영성이 가진 이러한 신비주의적 성향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영성이나 신비주의가 하나님과의 직통 계시나 신비한 경험을 그 목표로 하고 있습니까? 이것은 영성에 대한 첫번째 오해입니다.

사실 일반적인 신앙인들이 이러한 신비한 경험을 추구하지, 영성가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에서 감정적인 확신을 가지길 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뜨겁게 경험하고, 부인할 수 없는 모습으로 하나님을 만나길 바랍니다. 자신이 고민하는 문제에 대해 하나님이 직접적인 음성을 들려 주시길 원합니다. 그래서 신령한 목회자들을 찾아가 특정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를 받기도 합니다. 일반적인 신앙인들이 이러한 부정적인 의미의 신비주의를 추구하는 것에 비해 영성가들이 신비주의라는 이름 하에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와 삶입니다. 영성가들은 스스로 대단한 신비를 경험한 사람들이지만, 자신들의 신비경험을 자랑거리로 내세우지 않습니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이러한 경험이 가르쳐 주는 신앙과 삶에 대한 의미입니다. 그래서 어떤 영성가들은 자신의 삶에서 경험한 신비를 평생토록 묵상한 후에 삶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비로소 그 경험이 가진 의미를 책으로 남깁니다. 영성가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와 변화되는 삶이지, 신비한 경험 자체가 아닙니다. 이러한 경험은 영성적 삶을 시작하게 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곧 경험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아니라, 관계와 삶에 관심을 갖는 것이 영성입니다.

바울의 삶이 이러한 모습을 잘 드러내 줍니다. 바울만큼 신비한 경험을 많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신비한 경험을 했습니다. 이 신비체험은 바울의 삶을 송두리째 뒤바꾸어 놓았습니다. 바울은 세상과 삶을 이 경험의 빛 아래에서 새롭게 해석하기 시작합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바로 이 신비경험이 가르쳐 준 하나님과의 관계와 이것에 뒤따르는 삶에 관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 외에도 많은 신비체험을 한 것이 분명합니다. 다른 사람의 경험인 것처럼 언급하는 삼층천에 올라간 사건도 그 예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의 신비체험을 직접 말하는 것을 극도로 자제합니다. 바울의 삶을 뒤바꾸어 놓은 다메섹 사건도 사도행전을 통해서 겨우 알 수 있을 정도입니다.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신비체험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의 목적은 이러한 경험들이 자신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 하나님에 대해 무엇을 깨닫게 해주었는지를 전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의 영성은 우리가 지향해야 할 영성의 목표를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영성의 목표는 체험을 추구하는 신비주의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와 이에 따르는 삶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영성이 입어야 할 옷

두번째, 한국교회는 영성과 문화의 관계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영성이 입고 있는 옷과 관계된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영성에서 종교다원주의의 위험성을 지적하는 이유는 영성훈련의 모습 가운데 뉴에이지의 명상이라든지, 불교의 수련과 유사한 소위 ‘이교적 요소’가 있어서 종교혼합주의 성격이 가능하다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이것 또한 영성에 대한 오해입니다. 영성훈련에 나오는 명상과 수련 방법들은 기독교의 역사적인 전통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영성가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와 이에 따르는 삶을 증진시켜 주는 방법과 개념을 자신들이 살아가던 문화 속에서 찾았습니다. 당시의 철학, 세계관, 통용되던 훈련들을 영성가들이 자신의 영성이 입어야 할 옷으로 취한 것입니다. 영성가들은 영성의 목표와 방법을 잘 설명해 주는 문화적 개념과 훈련 방법의 창조적 수용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부인할 수 없는 것은, 모든 기독교의 신학과 영성은 당시의 문화의 옷을 입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어떤 영성훈련이 새로운 옷을 입고 기독교의 복음을 묵상한다고 하면, 그것을 혼합주의라는 잣대로 보기보다 그 옷이 내용을 얼마나 잘 담아내고 있는가를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문화의 옷을 입고 자신의 복음과 영성을 설명하는 창조적인 영성가였습니다. 바울은 헬라문화에서 태어나고 교육 받은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서, 이러한 두 문화 속에 살아가는 그의 정체성은 유대 땅에서 시작된 복음을 헬라의 새로운 옷으로 덧입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는 헬라문화 속에서 이방인을 위해 유대교와 복음을 재해석한 신학자였습니다. 바울의 유일한 관심은 자신이 발견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라는 복음을 어떻게 바르게 해석하고 삶에서 실천할 것인지였습니다. 바울은 그 내용을 입히기 위한 문화의 옷을 창조적으로 수용했던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가진 영성에 대한 오해는 속의 내용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그것을 감싸고 있는 옷에만 집중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한국교회는 옷 안에 숨겨진 영성의 의미와 목표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뿐만아니라, 한국교회에 맞는 영성의 옷이 무엇인지 창조적으로 고민해야 할 때입니다.


2012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한 해가 시작되면 저마다 새해의 소망을 마음에 품게 됩니다. 각자 새해에 기대하는 것이 다르겠지만, ‘기쁨이 가득한 한 해’를 꿈꾸는 것은 모두의 공통된 소망이라 생각합니다. 2012년에는 정말 좋은 일만 가득한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분들의 삶 속에 기쁨과 행복이 가득하고, 웃음꽃이 활짝 피어나는 새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쁨과 웃음이 가득한 한 해를 소망하는 것은 대단히 영적인 일이기도 합니다. 사실 기쁨과 웃음은 우리의 신앙생활과 밀접한 관계에 있습니다. 최근 출간된 제임스 마틴(James Martin)의 책, 『천국과 웃음 사이 (Between Heaven and Mirth)』는 기쁨과 웃음이 왜 신앙생활에 중요한지를 유쾌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 책의 내용을 소개해 드리면서 2012년을 웃음과 기쁨을 통해 더욱 깊어지는 신앙을 체험하는 새해로 만드는 방법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신앙은 기쁨이 가득한 것

요즘 미국의 가톨릭계에서 가장 각광 받는 작가 중의 한 명이 제임스 마틴입니다. 마틴은 펜실베니아대 와튼스쿨을 졸업하고 승승장구하던 중에 채워지지 않는 삶의 갈증으로 고민하던 중, 20세기의 영성가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의 영향을 크게 받아 가톨릭 예수회 사제가 된 사람입니다. 그의 책은 영성가들의 지혜를 다양한 삶의 이야기와 함께 풀어내는데, 그 방식이 항상 유머러스한 것이 매력적입니다.

평소에 마틴의 책을 즐겨 읽던 저는 어느 날, 제가 살고 있는 보스톤의 한 대학(Boston College)에서 마틴의 공개강연이 있다는 광고를 보고 한걸음에 달려가게 되었습니다. 큰 강당을 가득 메운 사람들 앞에 나타난 제임스 마틴은 강연의 시작을 몇 가지의 재미있는 이야기들로 풀어나갔습니다. 얼마나 그 이야기가 재미있던지 내가 예수회가 운영하는 대학에서 한 가톨릭 사제에게 강연을 듣고 있다는 것을 송두리째 잊어버릴 정도였습니다. 온 청중을 들었다 놨다 웃긴 후에 제임스 마틴은 강연의 첫번째 포인트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신이 농담만 늘어놓고 강연은 시작하지 않은 것 같지만, 사실 이 농담들이 자신의 강연의 전부라는 것입니다. 신앙은 사실 즐겁고 행복한 것인데, 우리는 신앙을 너무 심각한 것으로 만들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진지하고 심각해 보이는 사람의 신앙은 좋아 보이고, 밝고 발랄해 보이는 사람은 왠지 경박하고 믿음이 없는 사람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앙은 기쁨이 가득한 것입니다. 신앙에는 웃음꽃이 피어나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마틴의 그 날 강연은 결국 오늘 소개하는 책으로 출간되었고, 이 책에서 마틴은 기쁨과 유머가 왜 우리의 신앙생활에 그렇게 중요한 것인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 중의 몇 가지를 여기에 소개해 봅니다.

유머보다 좋은 전도는 없습니다

신앙생활에서 유머가 중요한 이유는 전도의 좋은 방법이 되기 때문이라고 마틴은 말합니다. 기쁨과 행복은 사람들을 그 주변으로 불러 모읍니다. 그 누구도 우울하고 인상을 쓰고 있는 사람의 곁에는 가고 싶어하지 않지만, 밝고 행복한 기운을 뿜어내는 사람 곁에는 다가가 머무르고 싶어합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기쁨과 유머와 웃음이 있기 마련입니다. 교회 공동체에 이러한 웃음과 기쁨이 가득하면 비록 아무도 전도하지 않을지라도 주변의 사람들은 그 공동체에 끌려오게 됩니다.

마틴은 자신의 경험을 하나 소개합니다. 예수회의 사제가 되기 위해서 훈련을 받고 있을 때에 그 지역 예수회의 감독이 마틴이 속한 공동체를 방문합니다. 마틴과 동료 수사들은 그 감독에게 한 가지씩 질문을 할 수 있었습니다. 마틴은 오랫동안 고민하다가 감독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합니다. “감독님, 요즘 사제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이 적은데, 어떻게 하면 그 수를 늘릴 수 있을까요?” 마틴의 질문을 들은 감독은 예상밖의 대답을 했습니다. 그의 간단하면서 지혜로운 대답은 “당신의 사제 직분을 즐겁게 살아가십시오.”였습니다. 기쁨은 사람들을 매료시키고, 결국 하나님께로 이끌어 갑니다. 교회의 가장 최고의 전도방법은 기쁨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유머는 겸손의 표현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듣는 유머 중많은 것들은 자기 자신을 낮출 때에 가능합니다. 경직되고 자신의 것을 움켜쥔 사람들은 유머를 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자신을 솔직히 드러내고, 자신을 웃음거리의 소재로 만들 마음의 여유가 있는 사람은 따뜻한 유머를 구사할 줄 압니다. 그래서 유머는 겸손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고, 겸손한 마음의 표현이 됩니다. 마틴이 소개하는 유머 중에 저를 가장 웃게 만들었던 이야기가 바로 이러한 모습을 잘 보여 줍니다.

뉴욕에 있는 예수회가 운영하는 한 병원에 그 지역의 감독이 방문했습니다. 이 감독은 그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는 은퇴한 예수회 사제들을 모아 놓고 대화를 하였습니다. 감독은 이들 앞에서 자신의 고충을 털어놓았습니다. 뉴욕 지구에 은퇴하고 나이 많은 사제들이 얼마나 많은지, 이들을 관리할 시설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한 사제가 벌떡 일어서며 말했습니다. “감독님, 걱정 마세요. 여기 있는 우리 모두는 최선을 다해서 빨리 죽으려고 합니다.”

그저 웃음을 주는 이야기만이 아니라, 이 유머에선 은퇴한 사제가 가진 삶의 여유와 겸손이 묻어납니다. 삶을 움켜쥐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죽음을 소재로 한 이러한 유머를 도저히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깊은 신뢰와 믿음 속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것에 주저함이 없는 사람은 이러한 유머로 자신의 겸손을 드러낼 줄 압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유머는 겸손을 배우게 하는 좋은 영적 훈련입니다.

유머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게 합니다

마틴이 말하는 ‘기쁨의 영성’(Spirituality of Joy)의 가장 중요한 대목이 바로 이것입니다. 유머와 기쁨은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를 더욱 깊고 풍성하게 만들어 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지나치게 엄격한 분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저 하늘 위에서 우리를 내려다보시고, 우리가 잘못하면 벌을 주시는 엄격하고 멀리 계신 분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에게 우리가 농담을 하거나 따뜻한 대화를 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랑이 많고 따뜻한 분이십니다. 마틴은 이에 덧붙여 장난기 많으신 하나님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유머 감각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따뜻하고 생동감 있는 것으로 만들어 줍니다.

마틴이 소개하는 아빌라의 테레사(St. Teresa of Avila) 이야기를 예로 들어 봅니다. 테레사가 어느날 자신이 타고 있던 나귀에서 떨어져 진흙구덩이에 처박히면서 다리를 다쳤습니다. 테레사는 하나님께 기도 중에 불평하듯이 말합니다. “하나님, 참 더할 나위 없이 안 좋은 때에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셨네요. 왜 이런 일을 내게 일어나게 하셨습니까?” 테레사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이것이 내가 친구들을 대하는 방식이다.” 그러자 테레사가 하나님께 응답합니다. “그렇군요. 하나님께 친구가 많지 않은 이유가 이것이군요.”

영성가 테레사의 유명한 이 이야기는 테레사와 하나님의 관계 속에 들어 있는 유머와 기쁨을 잘 보여 줍니다. 이 이야기에 담긴 테레사의 하나님을 향한 태도를 보십시오. 경직되거나 긴장된 것이 아닌 마치 가까운 가족과 친구를 대하는 듯한 다정함과 장난기가 어려 있습니다. 이러한 테레사를 대하는 하나님 또한 사랑과 장난기가 가득한 모습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오고가는 이러한 모습은 우리의 신앙생활을 더욱 깊은 차원으로 이끌어 줍니다. 우리의 기도는 내면의 깊은 감정들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장소가 되고, 그 속에서 경험하는 기쁨과 친근함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더욱 친밀하고 깊은 단계로 이끌게 됩니다.

기쁨의 새해를 만드십시오

16세기의 영성가 필립 네리(St. Philip Neri)는 “기쁨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선물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기쁨의 원천이시고, 우리가 삶에서 누리는 기쁨은 그것의 원천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선물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삶에서 경험하는 기쁨은 다른 사람을 매료시켜 결국은 기쁨의 원천이신 하나님께로 이끌어 가게 되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겸손함이 이 기쁨을 경험하게 하며, 이러한 기쁨은 결국 그 원천이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게 하는 매개체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쁨이 가득한 새해를 만드는 것은 우리 모두의 소망만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영적인 삶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권고합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살전 5:16). 2012년 새해는 이러한 해가 되어야겠습니다. 항상 기뻐하는 해, 웃음꽃이 가득한 한 해!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살전 5:18)입니다.

* 참고문헌

James Martin, Between Heaven and Mirth: Why Joy, Humor, and Laughter Are at the Heart of the Spiritual Life (New York: HarperOne, 2011)


새해를 시작하면서 기독교인들이 다짐하는 것들 중에 공통적인 것은 “성경 읽기”라고 하겠습니다. 새해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 많이 읽고 그 안에서 신앙의 성숙을 다지고자 하는 결심을 많이 하게 됩니다. 오늘은 이러한 새해의 결심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책을 한 권 소개하고자 합니다. 한 신약성서 학자가 쓴 “렘브란트, 성서를 그리다”라는 책입니다. 이 책은 화가 렘브란트가 그린 성화들을 묵상하면서 렘브란트가 어떻게 성서를 해석하여 성서 속의 장면을 그의 그림 속에 그려냈는가를 연구한 책입니다. 오늘은 이 책의 내용 가운데 “성서의 뜻이 드러나는 법”이라는 장을 살펴보면서 우리의 성서읽기가 어떠해야 할지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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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와 영성

사람은 저마다 마음 속에 분노를 품고 삽니다.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에 대한 분노, 나를 이용하고 저버린 조직에 대한 분노, 내가 변화시킬 수 없는 답답한 상황에 대한 분노, 그리고 이 모든 것에 나약하며 스스로 받아들이기 어렵고 싫은 모습을 가진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가 때로 우리의 마음을 소용돌이치게 만듭니다. 우리가 내면에서 경험하는 이러한 분노를 이해하고, 이것을 잘 다루는 것은 우리의 정신건강에 필수적일 뿐만 아니라 영성형성을 위해서도 중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분노는 결국 하나님에 대한 분노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에 대해 분노할 수 있느냐고 비록 인정하고 싶지 않을지라도 일상에서 경험하는 분노는 이러한 일을 일어나게 허락하신 하나님에 대한 원망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과 삶에 이렇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분노의 문제를 어떻게 다룰 수 있을 것인가? “분노와 영성”에 대해 이 시간 함께 생각해봅시다..

분노의 긍정적인 역할

캐슬린 그라이더(Kathleen Greider)라는 목회상담학자는 분노를 다룰 때에 이것이 가진 긍정적인 역할을 먼저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우리는 흔히 분노를 부정적인 어떤 것으로 생각하지만, 분노에는 우리를 위한 긍정적인 모습이 많다고 그라이더는 말합니다. 분노는 먼저 삶의 에너지와 활력을 주는 역할을 합니다. 분노의 모습 중의 하나가 공격성(aggression)입니다. 우리에게 어느 정도의 공격성이 없다면 삶은 수동적이고, 우울하며, 가라앉은 모습으로 일관될 수 있습니다. 삶에 활력이 넘칠 때는 우리가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도전하고 성취해 갈 때입니다. 이러한 도전정신은 인간이 가진 기본적인 성향 중의 하나인 공격성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분노의 또 다른 긍정적인 모습은 상처에 대한 아픔을 치유하는 기능입니다. 우리가 성인이 아니고서야 일반적으로 분노하지 않고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나, 조직, 환경에 대해서 충분히 불평하고 분노한 후에야 우리 안에 있는 독이 밖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분노하고 불평한 사람만이 용서하고 치유하는 과정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분노에는 불의에 대한 정당한 분노가 있습니다. 정당한 분노는 세상의 정의와 공평함을 세우는 데 필수적인 요소가 됩니다.

분노가 가진 이러한 긍정적인 역할에도 불구하고, 어떤 분노가 오랫동안 지속되면 이것은 우리에게 부정적인 기능을 수행하며 우리의 정신건강과 영성을 해치게 됩니다. 독자 여러분에게는 최근 자신을 가장 힘들고 분노하게 한 사건이 있습니까? 이 분노 속에서 치를 떠는 동안 온몸의 뼈가 녹아내리는 것 같은 경험을 하지 않았습니까? 스캇 펙(Scott Peck)은 “분노란 결국 자신의 뼈를 갉아 먹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분노로 피해를 받는 사람은 내 분노의 대상이 아니라, 결국은 자기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이렇게 분노하게 된 것만으로도 억울한 일인데, 분노하는 동안 자기 자신을 상하게 한다면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지속되는 분노가 우리를 상하게 할 때, 우리는 이 분노의 문제를 잘 다루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분노의 치유는 어떻게 가능할까요?

분노의 치유

분노를 치유하는 첫번째 단계는 나를 분노하게 한 대상에 대해 정당한 비판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분노는 격정적이고 감정적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분노가 감정적으로만 치우칠 때, 우리는 분노의 의미를 잘 모르게 될 경우가 많습니다. 분노의 대상에 대해 정당한 비판을 하는 것은 나의 분노를 이해하는 과정입니다.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것입니다. 정당하게 비판하는 동안 왜 내가 분노하게 되었는지, 무엇이 나를 힘들게 하였는지 이해하게 됩니다.

특별히 이러한 정당한 비판은 나의 상처와 대면하도록 만들어 줍니다. 우리는 자신을 분노하게 만든 사람이나 사건을 대면하는 것을 피하려고 합니다. 그 일이나 사람에 대해서 말도 꺼내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를 상처받게 한 그 사람을 다시 마주치거나 상처받았던 일과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되면, 우리의 분노는 여지 없이 다시 폭발하게 됩니다. 분노는 피하거나 미룬다고 저절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분노하게 된 대상에 대해 정당한 비판을 한다는 것은 나의 분노와 상처를 미루지 않고 대면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정당한 비판은 우리에게 정당하게 분노할 기회를 제공합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우리는 충분히 불평하고 분노한 후에야 치유될 수 있습니다. 내가 겪은 일에 대해 그 사람이 잘못했다, 내가 억울한 일을 당하였다고 정당하게 분노한 후에야 우리의 가슴 속에서 이 아픔의 감정을 내보낼 수 있게 됩니다. 이제 이렇게 분노의 의미를 이해하고, 자신의 분노 속에 숨은 상처를 대면하고, 정당한 비판을 통해 이 감정을 내보낸 사람은 치유를 위한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은 용서입니다.


『오두막』이라는 소설을 보면 자신의 딸을 납치 살해한 범인을 용서하기를 촉구하는 하나님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주인공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용서하길 바란다. 용서란 너를 지배하는 것으로부터 너 자신을 해방시키는 일이야.” 용서는 용서받게 된 대상보다 용서하는 사람 자신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치는 행위입니다. 용서는 결국 자신의 뼈를 갉아먹는 숨막히는 상황에서 자신을 해방시키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용서할 때 우리의 분노가 치유됩니다.

하나님과 함께 춤추기

분노의 문제에 있어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과의 화해입니다. 우리가 삶에서 경험한 분노는 결국 이러한 일을 일어나게 허락하신 하나님에 대한 원망을 불러일으키고, 곧바로 영적인 침체와 시험으로 이어집니다. 헨리 나우웬은 원망을 ‘차가운 분노’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차가운 분노를 치유하기 위해 헨리 나우웬은 한 조각상을 묵상해 보라고 권고합니다. 안토니오 카노바의 <춤추는 여인>(1809-1812년경)이라는 작품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조각가가 이 작품을 처음 만들고 있을 때의 상황을 상상해 보라고 합니다. 커다란 돌덩이가 한 조각 한 조각 떨어져 나가면서 점차 춤추는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으로 변해 갑니다. 영성형성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의 돌덩이를 깎아서 ‘원망의 돌조각을 파내시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라고 헨리 나우웬은 말합니다.

삶이란 이렇게 깎아낸 빈 공간 속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춤을 추는 것입니다. 춤의 신비는 그 안에 모든 발자국이 있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느리게,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격정적이게. 이 모든 발자국이 모여 하나의 아름다운 춤이 됩니다. 삶에도 이렇게 다양한 발자국이 있습니다. 때로는 슬프고, 때로는 기뻐하며, 때로는 분노하고, 때로는 행복해합니다. 이 모든 삶의 발자국이 모여 삶이라는 아름다운 춤을 만들어 갑니다. 우리의 과제는 이 모든 발자국을 인도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삶이라는 춤을 추는 것입니다.

삶이란 결국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롬 8:28)을 신뢰하며, 이 하나님과 더불어 함께 추는 춤입니다. 삶에 대한 이러한 신비를 깨달은 사람은 원망을 넘어서 감사로 나아가게 됩니다. “삶의 모든 것이 은혜”라는 고백이 우리의 분노를 감사로 변하게 만듭니다. 감사는 우리의 모든 분노를 치유합니다.

* 참고문헌

Kathleen Greider, Reckoning With Aggression (Louisville: WJK, 1997)

스캇 펙, 끝나지 않은 여행 (서울: 열음사, 2007)

윌리엄 폴 영, 오두막 (파주: 세계사, 2009)

헨리 나우웬, 두려움에서 사랑으로 (서울: 두란노, 2011)

화평의 영성

얼마 전 한 이민교회를 다녀왔습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던 교회에서 어려움을 겪다가 끝내는 그 교회에서 갈라져 나와 이제 막 새롭게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개척교회였습니다. 교인들은 그 전에 있던 교회에서 받았던 상처 때문에 아직도 많이 힘들어 하는 눈치였습니다. 이런 모습은 이민교회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민교회가 겪고 있는 수많은 문제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쉽게 교회가 갈라지고 분열되는 모습입니다. 아마도 이민자들이 겪고 있는 삶의 고달픔 때문인지, 이민교회는 이민자의 삶의 아픔들이 쉽게 표면화되는 장소이고, 이 표출된 아픔들로 인해 생기는 분쟁을 해결할 능력과 인내심이 때로 부족해 보입니다. 서로 다른 생각들과 오해들 때문에 서로를 비난하다가, 그 결과는 교회가 쉽게 갈라지고 나뉘어지는 모습입니다.

오늘 ‘영성가 이야기’에서는 이러한 이민교회의 모습을 묵상하며, 바울의 영성이 주는 통찰력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교회 안에서 약한 자나 강한 자나 하나의 예배공동체로 설 것을 촉구합니다. 이 평범하게 들리는 말에는 엄청난 힘이 담겨 있습니다. 바울은 이 주장을 쉽게 하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모든 상황을 깊이 숙고하고, 어느 무리에도 편들지 않으면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원하시는 뜻을 분명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살펴 볼 본문은 로마서 14장과 15장의 말씀입니다. 먼저 본문을 들여다 보기 전에 이 본문을 이해하기 위한 상황을 잠시 소개해야 하겠습니다.

로마에 돌아온 유대계 그리스도인들

초기 기독교는 아마도 유대교의 한 부분처럼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유대인이셨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대부분 유대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에 세워진 교회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로마교회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가운데 예수를 주로 고백했던 사람들, 곧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을 중심으로 새로 예수를 믿게 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섞여 있는 형태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로마교회에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로마의 황제는 유대인들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를 종종 보이곤 했는데, 대표적으로 황제 글라우디오는 49년에 발표한 칙령을 통해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을 모두 추방하였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글라우디오 황제 때 유대인들 사이에 ‘크레스투스’(Chrestus)와 관계된 충돌이 잦았는데, 이것이 황제의 심기를 거스른 것이었습니다. 학자들은 아마도 ‘크레스투스’가 ‘그리스도’(Christ)를 의미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곧 유대인들 사이에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계 그리스도인들과 전통적인 유대인들 사이에 논쟁과 충돌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칙령의 결과로 모든 유대인들이 로마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바울이 고린도에서 만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행 18:2)도 이때에 로마에서 쫓겨난 유대인이었습니다.

문제는 글라우디오 황제가 54년에 죽으면서 생기게 됩니다. 황제가 죽자 추방당했던 유대인들이 다시 로마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5년 동안 로마교회는 쫓겨난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의 자리를 대신해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지도자의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5년간 로마교회는 이방인 그리스도인 중심의 교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글라우디오 사후 로마교회에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돌아오게 되자, 긴장과 갈등이 조성됩니다. 갈등의 요소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5년간 성장해온 이방인 그리스도인과 다시 돌아온 유대계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서로 화합하고 지도력을 나누는가의 문제입니다. 두번째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로 유대인의 관습에 우호적인 유대계 그리스도인들과 이러한 문제에 자유로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바울은 로마에 있는 교회에 편지를 보내게 됩니다. 바울도 익히 이 두 무리의 사람들이 서로 불편한 관계에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제 바울은 유대계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해 로마서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루게 됩니다.

약한 자와 강한 자

바울은 로마서 14장과 15장에서 로마교회에서 골머리를 앓고 있었던 약한 자들과 강한 자들의 분쟁을 다룹니다. 바울이 의미하는 약한 자는 유대인의 관습에 매여 있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를 누리고 있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약한 자들로 바울은 채식주의자(롬 14:2)와 ‘날을 중히 여기는 자’(롬 14:5)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음식에 대해서 특별한 규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고기는 적절한 방식으로 도축되고 손질되어야 하고, 적절한 방법으로 요리가 되어야 하며, 적절한 그릇에 담겨야 하는 정결예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로마에 만연한 우상에게 바쳤던 고기는 절대로 먹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아직도 유대의 음식규정에 대해 호의적이었던 사람들은 어떤 고기를 먹을 때 이것이 먹기에 적절한 것인지 의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고기를 먹지 않는 채식주의자로 돌아선 것입니다. ‘날을 중히 여기는 자’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여전히 유대의 절기들을 중히 여겨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약한 자들은 모두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아직도 유대의 율법과 관습에 매여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에 반해 강한 자는 바울처럼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를 누리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약한 자와 강한 자를 구분하는 데 있어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로 나누어 표현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애매하게 보이는 약한 자와 강한 자라는 두루뭉술한 말로 로마교회의 나누어진 무리를 표현합니다. 이것은 아마도 바울의 세심한 배려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약한 자라고 해서 모두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만 있을 것도 아니고, 이방인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유대의 관습에 호의적인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약한 자를 유대인 그리스도인으로, 강한 자를 이방인 그리스도인으로 구분해 버리면, 가뜩이나 두 무리 사이에 긴장이 있는 판에 둘 사이의 갈등을 표면화시켜 긴장관계를 더욱 심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약한 자와 강한 자라는 모호한 표현으로 조심스럽게 로마교회 내에서 갈등을 겪고 있는 두 무리의 문제에 접근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의 예배공동체

바울이 이 문제를 다루는 데에 있어서 위대한 점은 어느 한 쪽의 편을 들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이 주목하는 것은 누가 옳다, 그르다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를 대하는 ‘태도’에 관한 것입니다. 바울이 두 무리 모두에게 권하는 태도는 세 가지의 모습입니다. 첫째, 두 무리 모두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것임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롬 14:6). 약한 자들도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것이고, 자유를 누리는 강한 자도 모두 하나님을 위해서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할 때 서로를 존중할 수 있게 됩니다. 둘째,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14:15). 아무리 자신이 하는 행동이 하나님을 위한 것일지라도 이것이 다른 사람들을 힘들게 할 때에는 자제할 줄 아는 배려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서로 배려하는 마음에서 이루는 평화와 기쁨이 그 핵심이기 때문입니다(롬 14:17, 19). 마지막으로 바울은 그리스도처럼 서로 용납하라고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롬 15:7). 그리스도께서 아직 죄인이었던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실 정도로 우리를 받으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를 그렇게 용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엄청난 사랑과 용서를 받은 빚진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나와 생각이 다른 그 무리를 위해서도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셨기에, 사랑에 빚진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그들을 받아들이고 사랑해야 함이 마땅합니다.

바울이 이야기하는 약한 자와 강한 자에 대한 이 모든 조언의 목표는 하나입니다.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롬 15:6). 곧 하나의 예배공동체입니다. 약한 자나 강한 자나 신앙의 색깔이 어떠하든지, 삶에 어떤 아픔이 있든지, 생각의 차이가 어떠하든지, 모두가 하나 되어 하나의 예배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구속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강조하는 이러한 ‘화평의 영성’은 오늘의 이민교회가 추구해야 할 중요한 영성의 모습입니다.

얼마 전 방문했던 갈라져 나온 이민교회를 보며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그 교인들이 겪었던 마음의 상처가 많이 안쓰러웠습니다. 새로 시작한 그 개척교회에도 하나님이 주시는 사명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픔과 상처를 넘어서 하나님이 그 교회에 주시는 사명을 발견하고 나아갈 수 있기를 기도하고 왔습니다. 하지만 현재 갈등 속에 있는 교회가 있다면 오늘 바울이 들려 준 이야기를 깊이 가슴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교회 내에 갈등이 있다고 교회를 나가 새로운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 능사는 아닐 것입니다. 갈등과 분쟁 속에 있는 교회는 바울이 조언하는 ‘하나의 예배공동체를 이루라’는 조언을 분별하며 숙고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결국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롬 15:17)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모든 분쟁과 갈등을 넘어서 성령의 능력을 통해 드러나는 평화와 기쁨이 넘치는 하나의 예배공동체를 이룰 때에 우리는 그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묵상하며, 바울의 영성이 주는 통찰력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교회 안에서 약한 자나 강한 자나 하나의 예배공동체로 설 것을 촉구합니다. 이 평범하게 들리는 말에는 엄청난 힘이 담겨 있습니다. 바울은 이 주장을 쉽게 하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모든 상황을 깊이 숙고하고, 어느 무리에도 편들지 않으면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원하시는 뜻을 분명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살펴 볼 본문은 로마서 14장과 15장의 말씀입니다. 먼저 본문을 들여다 보기 전에 이 본문을 이해하기 위한 상황을 잠시 소개해야 하겠습니다.

로마에 돌아온 유대계 그리스도인들

초기 기독교는 아마도 유대교의 한 부분처럼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유대인이셨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대부분 유대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에 세워진 교회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로마교회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가운데 예수를 주로 고백했던 사람들, 곧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을 중심으로 새로 예수를 믿게 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섞여 있는 형태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로마교회에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로마의 황제는 유대인들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를 종종 보이곤 했는데, 대표적으로 황제 글라우디오는 49년에 발표한 칙령을 통해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을 모두 추방하였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글라우디오 황제 때 유대인들 사이에 ‘크레스투스’(Chrestus)와 관계된 충돌이 잦았는데, 이것이 황제의 심기를 거스른 것이었습니다. 학자들은 아마도 ‘크레스투스’가 ‘그리스도’(Christ)를 의미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곧 유대인들 사이에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계 그리스도인들과 전통적인 유대인들 사이에 논쟁과 충돌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칙령의 결과로 모든 유대인들이 로마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바울이 고린도에서 만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행 18:2)도 이때에 로마에서 쫓겨난 유대인이었습니다.

문제는 글라우디오 황제가 54년에 죽으면서 생기게 됩니다. 황제가 죽자 추방당했던 유대인들이 다시 로마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5년 동안 로마교회는 쫓겨난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의 자리를 대신해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지도자의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5년간 로마교회는 이방인 그리스도인 중심의 교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글라우디오 사후 로마교회에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돌아오게 되자, 긴장과 갈등이 조성됩니다. 갈등의 요소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5년간 성장해온 이방인 그리스도인과 다시 돌아온 유대계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서로 화합하고 지도력을 나누는가의 문제입니다. 두번째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로 유대인의 관습에 우호적인 유대계 그리스도인들과 이러한 문제에 자유로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바울은 로마에 있는 교회에 편지를 보내게 됩니다. 바울도 익히 이 두 무리의 사람들이 서로 불편한 관계에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제 바울은 유대계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해 로마서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루게 됩니다.

약한 자와 강한 자

바울은 로마서 14장과 15장에서 로마교회에서 골머리를 앓고 있었던 약한 자들과 강한 자들의 분쟁을 다룹니다. 바울이 의미하는 약한 자는 유대인의 관습에 매여 있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를 누리고 있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약한 자들로 바울은 채식주의자(롬 14:2)와 ‘날을 중히 여기는 자’(롬 14:5)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음식에 대해서 특별한 규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고기는 적절한 방식으로 도축되고 손질되어야 하고, 적절한 방법으로 요리가 되어야 하며, 적절한 그릇에 담겨야 하는 정결예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로마에 만연한 우상에게 바쳤던 고기는 절대로 먹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아직도 유대의 음식규정에 대해 호의적이었던 사람들은 어떤 고기를 먹을 때 이것이 먹기에 적절한 것인지 의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고기를 먹지 않는 채식주의자로 돌아선 것입니다. ‘날을 중히 여기는 자’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여전히 유대의 절기들을 중히 여겨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약한 자들은 모두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아직도 유대의 율법과 관습에 매여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에 반해 강한 자는 바울처럼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를 누리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약한 자와 강한 자를 구분하는 데 있어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로 나누어 표현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애매하게 보이는 약한 자와 강한 자라는 두루뭉술한 말로 로마교회의 나누어진 무리를 표현합니다. 이것은 아마도 바울의 세심한 배려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약한 자라고 해서 모두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만 있을 것도 아니고, 이방인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유대의 관습에 호의적인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약한 자를 유대인 그리스도인으로, 강한 자를 이방인 그리스도인으로 구분해 버리면, 가뜩이나 두 무리 사이에 긴장이 있는 판에 둘 사이의 갈등을 표면화시켜 긴장관계를 더욱 심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약한 자와 강한 자라는 모호한 표현으로 조심스럽게 로마교회 내에서 갈등을 겪고 있는 두 무리의 문제에 접근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의 예배공동체

바울이 이 문제를 다루는 데에 있어서 위대한 점은 어느 한 쪽의 편을 들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이 주목하는 것은 누가 옳다, 그르다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를 대하는 ‘태도’에 관한 것입니다. 바울이 두 무리 모두에게 권하는 태도는 세 가지의 모습입니다. 첫째, 두 무리 모두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것임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롬 14:6). 약한 자들도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것이고, 자유를 누리는 강한 자도 모두 하나님을 위해서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할 때 서로를 존중할 수 있게 됩니다. 둘째,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14:15). 아무리 자신이 하는 행동이 하나님을 위한 것일지라도 이것이 다른 사람들을 힘들게 할 때에는 자제할 줄 아는 배려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서로 배려하는 마음에서 이루는 평화와 기쁨이 그 핵심이기 때문입니다(롬 14:17, 19). 마지막으로 바울은 그리스도처럼 서로 용납하라고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롬 15:7). 그리스도께서 아직 죄인이었던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실 정도로 우리를 받으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를 그렇게 용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엄청난 사랑과 용서를 받은 빚진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나와 생각이 다른 그 무리를 위해서도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셨기에, 사랑에 빚진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그들을 받아들이고 사랑해야 함이 마땅합니다.

바울이 이야기하는 약한 자와 강한 자에 대한 이 모든 조언의 목표는 하나입니다.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롬 15:6). 곧 하나의 예배공동체입니다. 약한 자나 강한 자나 신앙의 색깔이 어떠하든지, 삶에 어떤 아픔이 있든지, 생각의 차이가 어떠하든지, 모두가 하나 되어 하나의 예배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구속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강조하는 이러한 ‘화평의 영성’은 오늘의 이민교회가 추구해야 할 중요한 영성의 모습입니다.

얼마 전 방문했던 갈라져 나온 이민교회를 보며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그 교인들이 겪었던 마음의 상처가 많이 안쓰러웠습니다. 새로 시작한 그 개척교회에도 하나님이 주시는 사명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픔과 상처를 넘어서 하나님이 그 교회에 주시는 사명을 발견하고 나아갈 수 있기를 기도하고 왔습니다. 하지만 현재 갈등 속에 있는 교회가 있다면 오늘 바울이 들려 준 이야기를 깊이 가슴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교회 내에 갈등이 있다고 교회를 나가 새로운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 능사는 아닐 것입니다. 갈등과 분쟁 속에 있는 교회는 바울이 조언하는 ‘하나의 예배공동체를 이루라’는 조언을 분별하며 숙고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결국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롬 15:17)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모든 분쟁과 갈등을 넘어서 성령의 능력을 통해 드러나는 평화와 기쁨이 넘치는 하나의 예배공동체를 이룰 때에 우리는 그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얼마 전 한 이민교회를 다녀왔습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던 교회에서 어려움을 겪다가 끝내는 그 교회에서 갈라져 나와 이제 막 새롭게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개척교회였습니다. 교인들은 그 전에 있던 교회에서 받았던 상처 때문에 아직도 많이 힘들어 하는 눈치였습니다. 이런 모습은 이민교회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민교회가 겪고 있는 수많은 문제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쉽게 교회가 갈라지고 분열되는 모습입니다. 아마도 이민자들이 겪고 있는 삶의 고달픔 때문인지, 이민교회는 이민자의 삶의 아픔들이 쉽게 표면화되는 장소이고, 이 표출된 아픔들로 인해 생기는 분쟁을 해결할 능력과 인내심이 때로 부족해 보입니다. 서로 다른 생각들과 오해들 때문에 서로를 비난하다가, 그 결과는 교회가 쉽게 갈라지고 나뉘어지는 모습입니다.

오늘 ‘영성가 이야기’에서는 이러한 이민교회의 모습을 묵상하며, 바울의 영성이 주는 통찰력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교회 안에서 약한 자나 강한 자나 하나의 예배공동체로 설 것을 촉구합니다. 이 평범하게 들리는 말에는 엄청난 힘이 담겨 있습니다. 바울은 이 주장을 쉽게 하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모든 상황을 깊이 숙고하고, 어느 무리에도 편들지 않으면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원하시는 뜻을 분명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살펴 볼 본문은 로마서 14장과 15장의 말씀입니다. 먼저 본문을 들여다 보기 전에 이 본문을 이해하기 위한 상황을 잠시 소개해야 하겠습니다.

로마에 돌아온 유대계 그리스도인들

초기 기독교는 아마도 유대교의 한 부분처럼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유대인이셨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대부분 유대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에 세워진 교회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로마교회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가운데 예수를 주로 고백했던 사람들, 곧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을 중심으로 새로 예수를 믿게 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섞여 있는 형태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로마교회에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로마의 황제는 유대인들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를 종종 보이곤 했는데, 대표적으로 황제 글라우디오는 49년에 발표한 칙령을 통해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을 모두 추방하였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글라우디오 황제 때 유대인들 사이에 ‘크레스투스’(Chrestus)와 관계된 충돌이 잦았는데, 이것이 황제의 심기를 거스른 것이었습니다. 학자들은 아마도 ‘크레스투스’가 ‘그리스도’(Christ)를 의미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곧 유대인들 사이에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계 그리스도인들과 전통적인 유대인들 사이에 논쟁과 충돌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칙령의 결과로 모든 유대인들이 로마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바울이 고린도에서 만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행 18:2)도 이때에 로마에서 쫓겨난 유대인이었습니다.

문제는 글라우디오 황제가 54년에 죽으면서 생기게 됩니다. 황제가 죽자 추방당했던 유대인들이 다시 로마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5년 동안 로마교회는 쫓겨난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의 자리를 대신해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지도자의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5년간 로마교회는 이방인 그리스도인 중심의 교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글라우디오 사후 로마교회에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돌아오게 되자, 긴장과 갈등이 조성됩니다. 갈등의 요소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5년간 성장해온 이방인 그리스도인과 다시 돌아온 유대계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서로 화합하고 지도력을 나누는가의 문제입니다. 두번째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로 유대인의 관습에 우호적인 유대계 그리스도인들과 이러한 문제에 자유로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바울은 로마에 있는 교회에 편지를 보내게 됩니다. 바울도 익히 이 두 무리의 사람들이 서로 불편한 관계에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제 바울은 유대계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해 로마서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루게 됩니다.

약한 자와 강한 자

바울은 로마서 14장과 15장에서 로마교회에서 골머리를 앓고 있었던 약한 자들과 강한 자들의 분쟁을 다룹니다. 바울이 의미하는 약한 자는 유대인의 관습에 매여 있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를 누리고 있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약한 자들로 바울은 채식주의자(롬 14:2)와 ‘날을 중히 여기는 자’(롬 14:5)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음식에 대해서 특별한 규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고기는 적절한 방식으로 도축되고 손질되어야 하고, 적절한 방법으로 요리가 되어야 하며, 적절한 그릇에 담겨야 하는 정결예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로마에 만연한 우상에게 바쳤던 고기는 절대로 먹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아직도 유대의 음식규정에 대해 호의적이었던 사람들은 어떤 고기를 먹을 때 이것이 먹기에 적절한 것인지 의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고기를 먹지 않는 채식주의자로 돌아선 것입니다. ‘날을 중히 여기는 자’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여전히 유대의 절기들을 중히 여겨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약한 자들은 모두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아직도 유대의 율법과 관습에 매여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에 반해 강한 자는 바울처럼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를 누리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약한 자와 강한 자를 구분하는 데 있어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로 나누어 표현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애매하게 보이는 약한 자와 강한 자라는 두루뭉술한 말로 로마교회의 나누어진 무리를 표현합니다. 이것은 아마도 바울의 세심한 배려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약한 자라고 해서 모두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만 있을 것도 아니고, 이방인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유대의 관습에 호의적인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약한 자를 유대인 그리스도인으로, 강한 자를 이방인 그리스도인으로 구분해 버리면, 가뜩이나 두 무리 사이에 긴장이 있는 판에 둘 사이의 갈등을 표면화시켜 긴장관계를 더욱 심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약한 자와 강한 자라는 모호한 표현으로 조심스럽게 로마교회 내에서 갈등을 겪고 있는 두 무리의 문제에 접근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의 예배공동체

바울이 이 문제를 다루는 데에 있어서 위대한 점은 어느 한 쪽의 편을 들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이 주목하는 것은 누가 옳다, 그르다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를 대하는 ‘태도’에 관한 것입니다. 바울이 두 무리 모두에게 권하는 태도는 세 가지의 모습입니다. 첫째, 두 무리 모두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것임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롬 14:6). 약한 자들도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것이고, 자유를 누리는 강한 자도 모두 하나님을 위해서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할 때 서로를 존중할 수 있게 됩니다. 둘째,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14:15). 아무리 자신이 하는 행동이 하나님을 위한 것일지라도 이것이 다른 사람들을 힘들게 할 때에는 자제할 줄 아는 배려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서로 배려하는 마음에서 이루는 평화와 기쁨이 그 핵심이기 때문입니다(롬 14:17, 19). 마지막으로 바울은 그리스도처럼 서로 용납하라고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롬 15:7). 그리스도께서 아직 죄인이었던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실 정도로 우리를 받으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를 그렇게 용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엄청난 사랑과 용서를 받은 빚진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나와 생각이 다른 그 무리를 위해서도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셨기에, 사랑에 빚진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그들을 받아들이고 사랑해야 함이 마땅합니다.

바울이 이야기하는 약한 자와 강한 자에 대한 이 모든 조언의 목표는 하나입니다.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롬 15:6). 곧 하나의 예배공동체입니다. 약한 자나 강한 자나 신앙의 색깔이 어떠하든지, 삶에 어떤 아픔이 있든지, 생각의 차이가 어떠하든지, 모두가 하나 되어 하나의 예배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구속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강조하는 이러한 ‘화평의 영성’은 오늘의 이민교회가 추구해야 할 중요한 영성의 모습입니다.

얼마 전 방문했던 갈라져 나온 이민교회를 보며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그 교인들이 겪었던 마음의 상처가 많이 안쓰러웠습니다. 새로 시작한 그 개척교회에도 하나님이 주시는 사명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픔과 상처를 넘어서 하나님이 그 교회에 주시는 사명을 발견하고 나아갈 수 있기를 기도하고 왔습니다. 하지만 현재 갈등 속에 있는 교회가 있다면 오늘 바울이 들려 준 이야기를 깊이 가슴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교회 내에 갈등이 있다고 교회를 나가 새로운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 능사는 아닐 것입니다. 갈등과 분쟁 속에 있는 교회는 바울이 조언하는 ‘하나의 예배공동체를 이루라’는 조언을 분별하며 숙고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결국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롬 15:17)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모든 분쟁과 갈등을 넘어서 성령의 능력을 통해 드러나는 평화와 기쁨이 넘치는 하나의 예배공동체를 이룰 때에 우리는 그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과 헌신의 영성

오늘 “영성가 이야기”에서는 헌신에 대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사실 ‘헌신’이라는 주제는 대단히 무거운 주제입니다. 사람들은 무언가에 헌신하는 것을 두려워 하고 부담스러워 합니다. 남녀 사이에서도 그렇게 서로 뜨겁게 사랑하고, 그(혹은 그녀)가 없으면 죽을 것 같다가도 막상 결혼을 결정할 때가 되면 고민을 하는 커플을 보곤 합니다. 이들이 고민하는 것 또한 헌신의 문제입니다. ‘내가 과연 이 남자, 혹은 이 여자만 바라보고 평생을 살 수 있을까?’ 한번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하는 결단과 헌신의 순간인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두렵고 부담스러운지 결혼식 전날 도망가는 신랑 신부가 생기기도 합니다.

남녀간의 헌신도 이렇게 두려울진대, 우리가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은 얼마나 더 부담스럽고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원하시는 헌신은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만을 바라보고 살기로 결단하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기로 결단하는 것이 바로 헌신입니다. 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하나님 안에서 내 삶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 삶의 변화가 신앙생활의 핵심입니다. 오늘 이 헌신에 담겨 있는 신앙생활의 비밀을 삭개오의 이야기(누가복음 19:1-10)에서 묵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철저한 헌신을 이룬 삭개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여리고라는 곳으로 들어가신 장면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께서 여리고에 오셨다는 소식에 흥분하였고,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삭개오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삭개오에 대한 소개를 본문은 아주 짧게 “세리장”이요, “부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주 짧은 소개지만, 이 소개를 듣는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삭개오가 어떤 사람인지 고개를 끄덕이며 충분히 알 수 있었습니다. 삭개오는 한 마디로 상종해서는 안 될 인간이었습니다. 삭개오의 직업은 세금을 걷어들이는 세리였습니다. 당시의 세리는 침략자인 로마제국을 대신해서 세금을 걷어 로마황제에게 바치는, 로마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시의 세리들은 보통 걷어들여야 할 세금보다 더 많은 돈을 걷어서 남은 돈을 자기 호주머니에 채웠습니다. 요즘 세상에도 세금을 낼 때마다 “아니, 무슨 세금을 이렇게 많이 떼어가나” 하면서 툴툴거리는데, 로마제국의 앞잡이 노릇을 하면서 게다가 웃돈을 얹어 걷어들이는 세리들을 얼마나 사람들이 욕을 해댔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삭개오를 그런 세리요, 부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온갖 욕을 먹을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셈입니다. 삭개오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말할 수 없는 미움과 조롱의 대상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삭개오의 삶은 항상 외로웠습니다. 주위에 친구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자기의 주위에 있는 사람이라고는 자기의 돈을 노리고 아첨하는 사람들이거나, 아니면 노골적으로 경멸의 시선을 보내며 자신을 욕하는 사람들뿐이었습니다. 부자였던 삭개오의 삶은 풍요로웠지만, 그 많은 재산이 삭개오의 마음에 기쁨을 가져다 주지는 못했습니다. 마음의 한 구석에 커다란 구멍이 나있는 것 같았습니다. 비록 욕을 먹는 직업이었어도 안정된 직업에, 넘치는 재산에, 사랑하는 가족들까지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라고는 없었지만, 삶에서 느끼는 이 공허함은 삭개오의 힘으로는 도무지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삭개오는 자신의 삶의 공허함 속에 예수님을 보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예수께서 삭개오의 삶의 문제를 치유해 주시기를 기대하는 간절한 소망으로 나아갑니다. 하지만 키가 작았던 삭개오는 수많은 사람들로 인해 예수님을 볼 수 없어서 예수님을 보기 위해 근처에 있는 뽕나무에 올라갑니다. 삭개오의 위대함은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의 공허함에 머물러 있지 않고, 간절한 소망 가운데 예수께로 나아간 것입니다. 뽕나무 위에까지 기어 올라갈 만큼 간절했습니다.

마침내 예수께서 삭개오가 있는 나무 밑에 이르러 삭개오를 쳐다보십니다. 예수께서는 나무에 매달려 있는 삭개오의 모습에서 그 마음의 공허함과 갈급함,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소망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삭개오를 초대하십니다. “삭개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내가 오늘 너의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예수님의 초대를 받고 삭개오는 곧바로 나무에서 내려와 예수님을 집으로 모셔들입니다. 삭개오는 이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기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다른 사람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다면 네 배로 갚겠다고 약속합니다. 삭개오의 변화는 철저하고 즉각적이었습니다. 삭개오는 삶의 완전한 변화, 철저한 헌신을 이룬 사람입니다.

오직 사랑에 매여

그렇다면 한 가지 질문이 떠오릅니다. 어떻게 삭개오에게 이런 철저한 헌신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요? 그 모든 비밀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작은 한 단어에 담겨 있습니다. 본문 6절에 나오는 “즐거워하며”라는 단어입니다.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표준새번역은 이것을 “기뻐하면서”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삭개오에게 “어서 내려오너라” 말씀하시자, 삭개오는 엄청나게 기뻐하면서 나무에서 내려왔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삭개오가 큰 기쁨을 누린 것은 오늘의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삭개오가 경험한 기쁨은 자기를 찾아오신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감격이었습니다. 그 누구도 삭개오를 인간 취급하지 않았고, 모두가 욕을 하는 삭개오였지만,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10절)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은 삭개오를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삭개오를 예수께서 찾아가셨습니다. 삭개오의 마음의 중심에 있는 공허함을 연민의 눈으로 보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가 죄인인 삭개오와 어울린다는 사람들의 수근거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삭개오에게 “내가 오늘 너의 집에서 머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삭개오에게는 이 짧은 순간이 예수님의 엄청난 사랑을 체험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자신의 전 존재를 채워 주시는 예수님을 감격적으로 만나고, 직접적으로 보는 순간이었습니다. 이 사랑의 감격이 기쁨이 되고, 이 기쁨은 삭개오의 변화의 모든 이유가 됩니다.

삭개오를 찾아가신 예수님처럼,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먼저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흔히 착각을 하는데,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찾아갈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의 곁을 떠난다고 할지라도, 우리를 다시 찾아오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늘 우리를 먼저 찾아오시기에,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을 찾아 나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에게서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입니다.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하나님이 항상 나를 사랑하시고 함께 계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때로 삶에서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삶에서 시험과 고통을 당할 때에는 마치 하나님이 나를 떠나서 이 어려움 속에 홀로 내버려 둔 것같이 느낄 때가 있습니다. 봉사를 하다가 지쳐서 힘이 들 때에는 나의 신앙생활에서 하나님이 사라져 버린 것같이 느껴집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사랑 속에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뜨겁게 체험하고, 이 기쁨에 거하는 사람만이 삭개오처럼 삶의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삭개오의 헌신의 비밀은 하나님의 사랑의 기쁨에 사로잡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충만하면 그 기쁨과 감격이 헌신의 삶을 부담감이 아니라 넉넉히 할 만한 것, 기쁘게 할 만한 것으로 만듭니다. 하나님 사랑에 매인 그 감격이 우리의 사명을 넉넉히 짊어지게 합니다. 외롭지 않습니다. 힘들지 않습니다. 늘 기쁨과 찬양이 넘칩니다.

가끔 교회에서 봉사하는 제직들이나, 성가대원, 교사들을 보면 봉사하는 데 지쳐서 시험에 드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그런데 제 경험으로는, 그렇게 힘들게 봉사하시는 분들이 일이 많다는 이유만으로 시험에 드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경우에 이 하나님의 사랑의 기쁨에 사로잡힌 영적 에너지가 부족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늘 새롭게 감격하면, 모든 봉사와 관계에 의미와 활력이 돋아납니다.

헨리 나우웬은 봉사는 마치 잔에서 물이 흘러 넘치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잔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흘러 넘쳐서, 그 넘치는 것을 조금 나누어 주는 것이 봉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잔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흘러 넘치기는 커녕, 그 잔을 아무리 들여다 보고 바닥을 박박 긁어 보아도 퍼줄 것이 없으면, 도대체 무엇을 나눌 수 있겠습니까? 봉사는 하나님의 사랑의 기쁨에 사로잡혀서 내 잔에 흘러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를 주위의 사람들과 나누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봉사하는 가운데 지치고 회의에 빠지면, 하나님의 사랑을 새롭게 발견하기 위해 신앙의 점검을 해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교회 부서에서 충돌이 생기고 봉사에 회의가 들면, 자꾸 모여서 회의를 합니다. 자꾸 회의만 하면 더 회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오히려 기도를 해야 합니다. 내 잔을 하나님 사랑의 기쁨으로, 은혜의 감격으로 채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늘 새롭게 느낀다면, 우리의 봉사에도 언제나 기쁨이 가득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 사랑의 기쁨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헌신의 삶을 살아가기를 독자 여러분과 함께 소망해 봅니다.

* 더 자세한 내용을 원하시는 분은 저자의 『하나님 만나기』(대한기독교서회, 2010) 3부를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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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는 아버지의 영성

누가복음 15장에 등장하는 “탕자의 비유”를 함께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이 비유는 한 가족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한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 둘째 아들이 집을 나갔다 돌아오는 이야기입니다. 이 둘째 아들을 나의 삶과 비교하며 읽어 보면, 이 둘째 아들이 바로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쉽게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자신의 영적인 여정에 대한 이야기를 발견하게 됩니다.

아버지의 품을 떠난 둘째 아들

본문이 시작되면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청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재산 중에 내가 나중에 상속받을 재산을 지금 나에게 나누어 주십시오.” 둘째 아들이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받게 될 유산을 미리 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런 요구는 자칫하면 “아버지가 죽기를 바란다.”는 말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둘째 아들의 이 말은 사실 생각할수록 괘씸한 말입니다. 하지만 오늘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이 아들의 말을 들어 줍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아버지의 사랑은 달랐습니다. 이 아버지는 아들을 무조건 잡는 것만이 사랑이 아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아들의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 이 아버지가 가진 큰 사랑이었습니다. 사실 이것을 이해하기가 어려울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아들이 집 나가는 것을 허락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이 아버지의 사랑은 자신의 생각을 아들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아버지가 사랑한 방식은 아들을 존중하고, 떠날 자유를 허락하는 것이었습니다. 떠날 자유를 허락한 아버지만이 돌아올 자유도 줄 수 있습니다. 떠날 자유를 주지 않는 아버지는 훗날 아들이 돌아온다 해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러한 자유를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곁을 떠날 수 있는 것 또한 ‘떠날 자유'를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오늘 누가복음의 탕자 이야기는 시작부터 하나님의 사랑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둘째 아들은 왜 아버지의 곁을 떠나려고 했을까요? 우리는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 집에서는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집을 떠나 재산에 의지해 즐기며 살고자 합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집을 나와서 가기로 작정한 곳을 본문 13절에서는 ‘먼 나라'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아들은 아버지의 품을 떠나서 가장 ‘먼 나라', 곧 아버지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최대한 먼 곳으로 달아나서 그곳에서 재산과 자신의 능력에 의지하여 행복과 자유를 즐기며 살아가기로 작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 위젤의 작품 중에 다음과 같은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늘보좌에 앉은 하나님 앞에 가서 물었다고 합니다. “하나님, 사람 노릇과 하나님 노릇 중에 어떤 것이 더 힘들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랬더니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물론 하나님 노릇이 더 힘들지. 인간인 그대야 가족과 직장 등의 일밖에 신경 쓸 것이 없지만, 나야 온 우주와 은하계와 별들을 신경 써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이 사람은 하나님께 계속 물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하나님께는 무한한 시간과 능력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 인간이야 한정된 능력과 짧은 인생살이 속에서 모든 일을 해내야 하지요. 그게 힘들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 사람은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하나님 노릇이 더 어렵다고 생각하신다면, 딱 1초 동안만 서로 역할을 바꿔 보면 어떨까요?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게 되실 겁니다.” 하나님은 내키지 않았지만, 그 사람이 워낙 졸라대는 바람에 마지못해 서로의 역할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십니까? 일단 하나님의 자리에 앉은 그 사람은 그 자리를 돌려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멀리 쫓아내고 그때부터 이 세상의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이 우화는 우리들의 본성 속에 있는 숨은 욕망을 잘 보여 줍니다. 우리들은 모두 하나님을 떠나서, 나의 삶의 중심에서 내가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며 살아가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의 품에선 자유가 없으니까 그 품을 떠나서 나의 힘과 자유, 세상의 성공에 의지하며 살아갈 때 기쁨이 있으리라는 욕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둘째 아들의 선택이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이 아들은 아버지에게 유산을 미리 받아서 아버지의 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먼 곳으로 달아나, 가진 재산에 의지하며, 그 속에서 인생의 의미와 행복을 찾아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둘째 아들이 경험하는 것은 삶에서의 기쁨과 자유와 행복이 아니라, 실패와 절망과 무의미뿐입니다. 둘째 아들은 먼 나라에서 허랑방탕한 삶을 삽니다. 가지고 간 재물을 금방 다 써버리고 맙니다. 이제 둘째 아들을 채우고 있는 것은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삶의 공허함과 무의미함입니다. 둘째 아들의 상태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 주는 모습이 바로 돼지우리에서 돼지가 먹는 밥을 빼앗아 먹으려는 모습입니다. 구약시대부터 이스라엘 사람들은 돼지를 부정한 동물로 여겼습니다(레 11:7). 랍비들은 유대인들이 돼지 기르는 것을 금지하였습니다. 그런데 유대인인 이 둘째 아들이 돼지를 치러 돼지우리 속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리고 너무 배가 고파 돼지가 먹는 음식을 빼앗아 먹으려고까지 하고 있습니다. 이 장면은 둘째 아들이 겪고 있는 삶의 곤고함과 공허함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둘째 아들의 돌아섬

이제 새로운 돌아섬이 시작됩니다. 자신이 겪고 있는 삶의 무의미와 절망을 넘어서는 둘째 아들의 새로운 여행이 시작됩니다. 둘째 아들은 돼지우리의 절망 속에서 비로소 제 정신이 돌아옵니다. 본문 17절에서 “이에 스스로 돌이켜”라고 적혀 있는데, 영어성경을 보면 그 의미가 보다 분명합니다. “When he came to his senses.” 한 마디로 제 정신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다가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둘째 아들에게는 돼지우리가 자신의 삶의 한계를 볼 수 있도록 도와 준 축복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도 삶에서 실패와 아픔을 경험할 때, 비록 우리를 힘들게 하지만, 실패의 경험은 우리가 붙잡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알게 해주고 제정신이 들게 해줍니다.

둘째 아들은 이제 아버지의 집에 있었던 풍요로움을 생각합니다. 자유가 없다고 생각했던 아버지의 품에 있었을 때에 자신이 얼마나 자유롭고 풍요롭게 살았는지 그 따뜻함을 기억해 냅니다. 이 기억이 둘째 아들로 하여금 아버지께 돌아갈 것을 결심하게 합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이러한 기억이 있습니다. 비록 의식하지는 못할지언정, 우리 모두에겐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 가운데 있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들입니다.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와의 사귐을 기뻐하시던 하나님, 그 안에서 누리던 완전한 의미와 행복에 대한 기억이 우리 본성 가운데 숨겨져 있습니다. 삶이 아무리 안정되어 있어도 우리의 마음 한구석이 허전한 것은 이 숨겨져 있는 기억 때문입니다. 어느 순간 제정신이 들어 하나님을 찾아 나서게 되는 것도 바로 우리의 본성 가운데 숨겨져 있는 이 기억 때문입니다. 이 본능 속에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품에 대한 기억이 우리로 하여금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시 42:1) 하나님을 찾아 나서도록 만듭니다.

이제 둘째아들은 자신의 돌아섬을 행동에 옮깁니다. 여기에 둘째 아들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자신의 삶의 방식에서 돌아서는 것입니다. 자신의 절망적인 삶의 자리에서, 세상적인 욕심을 향해 달려가던 삶의 방식에서 돌아서서 아버지의 품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기다리는 아버지

마침내 돌아온 둘째 아들 이야기의 절정적인 장면을 읽어 봅니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바로 20절 말씀에 있습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기다리는 아버지” 입니다. 처음 이야기를 시작할 때, 둘째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버지의 품을 떠나는 것을 허락했던 사랑의 하나님은 이 아들이 떠나 있는 동안 내내 돌아오기를 기다렸던 분입니다. 본문은 이러한 기다리는 아버지의 모습을 ‘아직 거리가 먼 데'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둘째 아들이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아니 마을에 들어오기도 전에 먼 거리에서 아버지는 아들이 오는 것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먼 거리에서 아들이 오는 것을 볼 수 있었던 이유는 매일같이 그를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큰 상처를 주고 떠난 아들이었지만, 이미 아들을 용서하고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였습니다. 아들이 언제 올까 매일같이 기다리면서 눈물 흘리던 아버지였습니다. 그리고 먼 곳에서 아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자 사랑의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서 달려 나가 그를 안고 입을 맞춥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만나면 하려고 연습하고 준비한 말들을 채 다 듣지도 않습니다.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아버지는 아들에게 좋은 옷을 입히고, 신을 신기고, 반지를 끼우고, 기뻐하며 잔치를 베풉니다. 이 아버지는 아들이 떠난 그 순간부터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던 사랑의 아버지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이야기에 나오는 아버지와 같은 분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곁을 떠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가 돌아오기를 한결같이 기다리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누가복음의 돌아온 탕자 이야기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사랑의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곁을 떠날 때에 그 속에서도 우리의 자유를 허락하시는 사랑의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올 때에 우리의 모습이 어떠하건 상관하지 않고 맞아 주시는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의 곁을 떠나 있을 때에도 한결같은 사랑으로 우리를 기다리시는 하나님. 이 하나님의 사랑의 품으로 돌아갈 때에 우리의 삶에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 삶은 하나님의 품에 있을 때 행복해집니다. 사랑의 하나님의 품에서 우리는 우리의 상처를 치유해 주시고, 회복시켜 주시고, 삶의 의미와 만족으로 채워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http://www.kcjlogos.org/news/articleView.html?idxno=7655 


교회 절기(대림절, 성탄절, 사순절, 추수감사절,


대림절(Advent)

대림절을 뜻하는 라틴어 "Advent"에는 '오심' 혹은 '도착' 외에도 '모험'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성탄은 하나님의 모험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오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의 전부를 걸고 이 땅에 오시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위로 올라가는 것, 상승하는 것이 영광스러운 일이고, 반면에 낮아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그랬습니다.
옥타비아누스라는 사람은 한 인간이지만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 마침내 신이 되었습니다.
인간이 오르고 또 올라 오를 수 있는 마지막 정점, 즉 신의 자리에 올라 그는 거기서 '옥타비아누스'라는 인간의 이름을 버리고 '아우구스투스'라는 신의 이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존엄한 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런 세상의 영광을 거슬러 인간이 신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이 되는 사건, 참으로 황당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가장 높으신 분이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오셨습니다.
가장 거룩한 분이 황실의 요람이 아니라 더러운 마구간의 구유 위에 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몸을 입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아픔에 참여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 보좌가 아니라 십자가 위에 달리셨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치욕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성서는 이것이야말로 '영광'이라 말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육신의 신비요, 성탄의 복음입니다.

진실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요 1:11)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약하고 힘없고 외로운 사람들을 찾아오셨습니다.
병들고 외롭고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성탄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성탄은 우리의 생명을 위해 자신의 전부를 건 하나님의 위대한 모험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메시아가 강한 군대를 거느리고 오시지 않고 연약한 한 아기의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태어나셨습니다.
그 아기의 이름은 이사야 선지가가 예언한 대로, '놀라우신 조언자,'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그리고 '평화의 왕'입니다(이사야 9:6).

대림절(Advent)
크리스마스 전 4주간 성탄(聖誕)과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교회력 절기이다. 
대강절, 강림절로도 불린다. 어원은 “오다(Adventus)”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유래하였다. 교회력은 대림절로 시작하기 때문에, 한 해의 시작을 알리는 뜻도 있다.
대림절에 사용하는 예전색은 기다림을 뜻하는 보라색이다.
대림절은 주현절을 준비하기 위한 절기로 4세기 이후부터 정식으로 지켜지기 시작하였고, 6세기의 그레고리 때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을 지키는 의미의 절기로 확대하여 기념하게 되었다.

대림절 첫째 주일날 켜는 촛불 : 기다림과 소망의 촛불

그리스도의 오심을 대망하고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나타내는 첫 번째 촛불. 그리스도인들이란 세상에서 지치고 곤고한 자들과 어두움에 있는 자들에게 빛의 소망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통해 그분께서 이루실 하나님의 나라를 그려보아야 한다.

대림절 둘째 주일날 켜는 촛불 : 회개의 촛불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수 없도록 방해한 나의 모습을 회개하는 의미로 회개의 촛불을 켠다. 이 주간에는 하나님의 자녀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하고 회개하며 지낸다.

대림절 셋째 주일날 켜는 촛불 : 사랑과 나눔의 촛불 

주변에 상처 입은 이웃들, 배고픈 이웃들, 외로움에 쓸쓸한 이웃들에게 성도의 사랑을 나누어야 한다. 예를 들어 섬김, 봉사, 물질의 공급, 병든 자 위로, 사랑의 선물 등을 구체적으로 생각하고 이를 실천해 보도록 하자.

대림절 넷째 주일날 켜는 촛불 : 만남과 화해의 촛불

사람으로 오신 아기 예수와의 만남과 화해를 의미하는 촛불을 켠다. 이 주간에는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이웃을 초청하여 예배에 참석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함께 예배드릴 수 있도록 해 본다. 

대림절의 네 가지 의미
첫째,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을 세상에 전한다는 의미. 둘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쁜 마음으로 영접한다는 의미.
셋째, 마치 결혼을 앞둔 신부가 몸을 단장하는 것처럼 우리를 정결하게 거룩하게 깨끗하게 하고 기다린다는 의미.
넷째,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린다는 의미.
우리 죄를 회개, 자백, 정리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순종으로 겸손하게 나아가는 ‘기다림’의 시간이다.


예수 탄생의 예언과 성취


코로나 바이러스가 새로운 용어를 만들었습니다.

대면 예배와 비대면 예배

사회적 거리


또한 코로나 바이러스가 교회 중심의 신앙생활에서 가정 중심의 신앙생활로 바꾸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정은 대면생활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는 마스크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얼굴과 얼굴을 마주볼 수 있는 곳이 가정입니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린도전서 13:12)


가정은 대면 생활을 통하여 서로 온전히 알 수 있는 곳입니다.

서로 잘 알 수 있는 최초의 장소는 에덴동산이었습니다.

 

최초의 가정은 에덴동산이었습니다.

에덴동산의 특징은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옷이 없었다.


옷이 많다는 것은 뭔가 감출 것이 많다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전도 여행을 떠나면서 두 벌 옷과 지팡이 이외에는 아무 것도 갖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요즈음에 미니멀 라이프라는 생활 신조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최소한의 것만 갖고 나머지는 모두 포기하는 생활이라고 합니다.


둘째는 집이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집은 부의 상징으로 드러났다.

특히 대도시에서 집이 없다는 것은 가난하다는 증거가 되었다.


셋째는 주방이 없었다.


주방이 없었다는 것은 음식을 만들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눈만 뜨면 어디서든지 먹을 것을 구할 수 있었다.


현대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옷과 집과 음식이 필요 없었던 곳이 에덴동산이었다.

 

예수 탄생의 신학적인 의미

예수 탄생의 의미는 "하나님의 비우심" 혹은 "낮추심" 이라고 하겠습니다.

바울은 하나님 안에서 일어난 이 놀라운 신비를 다음과 같이 찬양하고 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 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빌립보서 2:5-8)

예수는 만인을 위해 단 한 번 자신을 낮추시고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셨다.

그러나 이것은 바로 영원부터 사랑하시는 동일한 하나님의 본성의 표현이고,

그래서 하나님은 영원부터 자신을 낮추시는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지 않는가?



신학자 칼 바르트(K. Barth)

하나님의 신성(神性)은 바로 그 분의 인간되심(人間性) 가운데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며,

그 분의 영광은 바로 그 분의 수치 가운데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하나님의 낮추심, 고난과 수치는 하나님의 본질과는 무관한, 단 한번 인간을 향해 행동하신 일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 자신 안에 있는 영원한 사건이요, 그 분의 영원한 신적인 본성과 영광의 표현이요 그 계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영원히 자신을 낮추시는 사랑의 하나님, 영원히 사랑하시므로 고난당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 말해야 한다. 물론 우리가 이해하는 '영원성'(永遠性)은 하나님의 '영원성'과는 다른 것이겠지만.

하나님의 본성은 영원히 남(타자)과 함께 하고 참여하는 사랑, 영원히 남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연대성(連帶性), 영원히 남을 유익케 하는 희생에 있다. 이 신비를 우리는 '삼위일체'(三位一體)라고 부른다. 이 신비는 하나님의 영원한 본성 안에 있는 신비이다. 이 신비가 역사 속에서 몸, 형체, 모양을 취한 것을 우리는 '말씀의 성육신'이라고 부른다. 요한은 사랑의 하나님이 바로 '육신'(肉身)속으로 오셨다고 선언한다(요 1,14). 이 육신 안에 오신 하나님이야말로 바로 자신의 영광과 은혜와 진리를 충만케 드러내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영광과 은혜와 진리를 바로 그분의 낮추심 가운데서만 충만히, 즉 온전히 깨닫게 된다.


신학적 의미는 무엇인가?

하나님은 바로 이 땅 가운데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길 원하시며(나라이 임하옵시며!),

이 땅이 그 분의 뜻이 실현되는 장소가 되길 원하시며(뜻이 이루어지이다!),

이 땅이 그 분의 거룩함이 거하는 성소가 되길 원하신다!(이름이 거룩하옵시며!)

예수의 가르침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은 이 세상 안으로 들어오고 이 세상 안에서 편만히 확장되고 세워지고 완성된다(누룩, 저절로 자라는 씨, 땅 속에 감추인 보화의 비유를 참조하라!)

칼 맑스(K. Marxs)가 말하기도 훨씬 전에 이미 예수는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서 도피시키는 종교를 '아편'이라고 선언하신 셈이다. 아니 그런 종교는 장님의 종교요, 그런 종교의 마지막은 바로 영원한 벌이다(마태복음 25장의 마지막 심판의 비유를 보라!). 예수는 눈물의 골짜기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탄식하는 종교인들과는 반대로 육신을 입고 이 세상 한가운데로 오셨고, 지금도 오고 계신다. 그러므로 착각하지 말자. 예수가 땅에 오신 것은 우리를 하늘로 데려가시기 위함이 아니라 그의 나라를 우리에게, 이 땅에 더 가까이 가져오시기 위함이요, 그래서 우리를 이 세상의 일로 더 가까이 데려가시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니체(Nitzsche)가 말하기도 훨씬 전에 이미 예수는 우리에게 "이 땅에 충실하라!"고 선언하신 셈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세상도피적이거나 영혼만의 반쪽 사랑이 아니라, 이 세상적이고 책임적이고 온전한 사랑이다. 이 사랑은 자신이 창조한 것을 방기(放棄)하고, 마치 도박이나 하듯이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사랑이 아니라, 자신이 창조한 것에 신실하고 책임지고 구원하고 완성하는 사랑이다. 이 사랑은 자기지향적이고 자기완성적이고 자기위안적인 것이 아니라, 타자지향적이고 타자완성적이고 타자구원적이다. 이것이야말로 영원한 사랑이신 하나님의 역사적 계시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예수의 탄생사건으로부터 받는 영광과 은혜와 진리이다.

예수의 탄생이 어떤 실천적 의미를 갖는가?


성탄의 신비가 현실 속에서 사는 우리에게 어떤 실천적 행동을 촉구하고 유발하는가?

성탄의 신학적 의미를 통하여 우리는 이미 암시적으로 우리의 실천적 행동의 근거와 의미 및 목표를 알았으리라. 더 이상 무엇을 말하랴? 남은 것은 비겁을 떨치고 일어서는 용기일 뿐일지니, 더 많은 말이 왜 필요하랴? 그러나 두 가지만 이야기하기로 하자.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대면의 삶이 가장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곳은 가정


최초의 가정은 에덴동산이었고 그 가정에는 아담과 하와가 있었습니다.

가정에서 소명과 사명을 확인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탄의 의미를 먼저 가정에서 확인하고 회복해야 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기 전에는 기독교 신앙이 교회 중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교회에서 모일 수 없기 때문에 가정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초대교회 때처럼 가정 교회가 자연스럽게 형성되고 있습니다.


일터에 나가 일을 마친 후에는 반드시 가정으로 돌아옵니다.

그 가정에서 회복되고 무장한 후 다시 그 다음 날 일터로 나가야 합니다.


가정의 에덴동산

에덴동산에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옷이 없었습니다.

주방도 없습니다.

그런데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면서부터 옷이 늘어났고 주방도 필수적인 공간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에덴동산에서는 눈만 뜨면 배가 고플 때는 나무 열매를 따 먹었습니다.

냉장고도 필요없습니다.

음식을 저장하고 보관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와 세상을, 거룩한 영역과 속된 영역을, 평일과 주일(안식일)을 나누지 말자! 하나님이 어디 거룩한 영역, 교회, 안식일에만 오셨는가? 모든 것이 신앙적인 일이고 신학적인 일이며 그래서 정치적인 일이다. 매일이 안식일이고, 정치적인 활동이 거룩한 예배이고, 속된 것 속에 거룩한 것이 있다. 기도가 행동이고, 행동이 기도이다. 중요한 것은 "인간과 인간의 영광을 위하느냐 하나님의 일, 그 분의 영광, 그 분의 나라와 정의를 위하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참여하지 못할 일이 없고 가지 못할 곳이 없다. 물론 역할과 기능 혹은 은사의 구분은 있어야 하겠지만, 그 구별과 차별 혹은 분리는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이 하나가 되게 하신 일을 사람이 인위적으로 나누지 말자! 하늘이 땅과 하나가 되었고, 교회는 세상을 위하도록 부름받았거늘, 세상을 도피하는 교회는 그 무슨 자폐증 환자이며, 교회를 핍박하는 세상은 그 무슨 묵시적 괴물인가?

 2.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아혀 대면의 삶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은 일터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통하여 동시에 하나님의 영광을 이 땅에서 증거하며 세워야 한다. 그러므로 일의 우선순위를 논하지 말자!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는 일에 "전도가 우선이냐, 사회참여가 우선이냐?" 혹은 "복음화가 우선이냐, 인간화가 우선이냐?"를 부질없이 논하지 말자. 만약 우선순위가 있다면, 그런 무익한 논의보다는 당장 실천할 수 있는 일을 먼저 하자! 개인구원이 바로 사회구원의 열매를 맺고, 사회구원이 바로 개인구원의 열매를 맺거늘, 복음화는 인간화를 지향하고, 인간화는 복음화를 지향하거늘, 아직도 "이것이 우선이다, 저것이 우선이다!"하며 싸우는 것은 그 무슨 정신분열증 환자의 넋두리인가? 하늘의 영광은 땅에서 가장 찬란하며, 하나님의 일은 땅끝까지 미친다. 가장 신앙적인 것은 가장 실천적이며, 가장 실천적인 것은 가장 신앙적인 것이다. 이것을 깨우쳐 주시기 위하여 예수는 한 번 오셨고, 또 지금도 오고 계실지 모른다. 또 장차 오실 그 분 앞에서 우리가 고백해야 할 한 마디도 이것일지 모른다.


예수 탄생의 예언을 구약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아담의 증거

 1. 여자의 몸을 빌려 성육신 하실 것을 예언(창 3:15, 사 7:14, 미 5;3, 마 1:23, 눅 1:34~35)


창세기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이사야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미가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찌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갈라디아서 4:4-5,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마태복음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누가복음 1:34-35,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2. 아담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예표

 가죽 옷 : 십자가에 몸이 상하여 죽어 주심을 예표(창 3:22)

고린도전서 15: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고린도전서 15:45,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에스겔의 증거


1. 세상의 모든 자가 부활할 것을 예언(겔 37:1~28)


2. 평화의 왕으로 예언(겔 34:25)

내가 또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우고 악한 짐승을 그 땅에서 그치게 하리니 그들이 빈들에 평안히 거하며 수풀 가운데서 잘찌라.


* 화평의 언약(베리트 솰롬)

①. 하나님만이 계약의 주체가 되어 계약이 일반적으로 이루어진다.

②. 메시아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약의 핵심이 된다.

③. 물질적인 것이나 상호 이해 관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다.

한편 본절의 언약 성취는 일반적으로 바벨론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되는 BC 538년에 성취되었고 궁극적으로는 영원한 메시아 왕국의 시대에 성취될 것이다(예레미야 23:5, 33:14∼16, 26)


예레미야 23:5,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예레미야 33:14∼16,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대하여 이른 선한 말을 성취할 날이 이르리라. 그 날 그 때에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공평과 정의를 실행할 것이라. 그 날에 유다가 구원을 얻겠고 예루살렘이 안전히 거할 것이며 그 성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입으리라.     


예레미야 33:26, 내가 야곱과 내 종 다윗의 자손을 버려서 다시는 다윗의 자손 중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을 다스릴 자를 택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그 포로 된 자로 돌아오게 하고 그를 긍휼히 여기리라.  


3. 선지자로 예언(겔 33:33)


그 말이 응하리니 응할 때에는 그들이 한 선지자가 자기 가운데 있었던 줄을 알리라. 


4. 공평하실 것을 예언(겔 33:17)


그래도 네 민족은 말하기를 주의 길이 공평치 않다 하는도다 그러나 실상은 그들의 길이 공평치 아니하니라. 


성탄을 맞이하는 계절입니다.

성탄을 맞이하는 세속적인 문화가 기독교 신앙을 흔들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메리 크리스마스(Merry Christmas)라는 인사말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그대신에 해피 할러데이(Happy Holiday)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세속 문화에 다음 세대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는 성탄의 의미는 축제의 한 날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성탄절에 산타가 등장합니다.

기독교는 성탄절의 주인이 2000년 전에 말구유에서 나신 아기 예수그리스도 그분이 바로 성탄의 주인공인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오셨는가?

왜 이땅에 말구유에 오셔야만 했는가?


예수탄생의 복음을 우리가 알아야 되는데, 예수탄생의 복음을 가진 자인 나는 누구인가?

나라는 존재는 바로 종이라는 사실입니다. 나라는 존재는 예수탄생의 복음 증거자로 만세전에 세움을 입었다는 사실이요, 그것을 일컬어서 택정함을 받았다. 이렇게 얘기하는 것입니다. 종이라는 말은 로마세계에 있어서 그 주인에게 있어서는 일개 기구와 같았습니다. 종이라는 것은, 물건과 같이 취급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어느 역사가가 로마를 연구하는 중에 가구 가운데 세 종류가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첫째 가구, 말할 줄 모르는 가구


호미, 낫, 삽,

둘째 가구, 말을 못하지만 움직이는 가구

말, 소, 나귀 등

셋째 가구, 말을 하는 가구


노예를 가구로 봤기 때문에, 말을 하는 노예를 가구와 같이 취급한 사회가 로마사회였어요. 그래서 바울은 자기를 가리켜서 친히“예수그리스도의 종”이라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즉 예수그리스도의 종이라는 것은 예수그리스도께 복종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울이 예수그리스도께 복종함은 타에 의함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복종하는 것이요, 예수탄생의 복음을 들은 저와 여러분에게도 예수님은 주인이십니다. 종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주인이 시키는 것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사명이라고 부르는데, 그 사명은 복음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 복음의 핵심은 예수그리스도요, 예수그리스도께서 왜 오셨는가를 증거 하는 것이 바로 복음이고, 그것을 증거 하라고 우리는 택정함을 받았습니다.

 

두 번째 알아야할 사실은 예수님은 육신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2절에서 말합니다.“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선지자들로 말미암아서 그의 아들에 관해서 무엇을 어떻게 말했는가? 예수님은 육신으로 이 땅에 오실 것이요, 이미 오셨다는 것입니다.

 

“육신을 입고”라는 단어가 맞는 말일까요? 틀린 말입니다.

찬송 122장 4절에“육신을 입고”이렇게 찬송을 하잖아요. 그 말은 우리가 잘못된 것임을 알아야 되요. 육신을 입으신 것이 아니라 육신을 가지고 오신 거예요‘입다’라는 것은 옷을 입듯이 그렇게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이 인간이 아닌데 육신을 입었다는 것은, 어떻게 생각이 들게 하냐하면, 예수님이 인간이 아닌데 인간의 모습과 같이 그렇게 보였다라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걸 일컬어서 이단이 주장하는 가현설이라고 하는 겁니다. 즉 예수님의 신성은 인정하되 인성은 부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2000년 전에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오셨으나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직 남자를 알지 못하는 즉 동정녀의 몸에서 성령으로 잉태되어 태어났습니다. 이것은 바로 성령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친히 동정녀의 몸에서 나게 하셨어요. 왜? 죄가 없으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친히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주신 참 하나님이세요. 그분이 어디서 나오셨냐? 바로 동정녀의 몸에서 나오셨다 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핵심 교리 중에 하나요, 신비인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땅에 오셔야만 했는가?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서 이땅에 오셔야만 했습니다. 죄 있는 사람이 죄를 담당할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으로 오셨지만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세 번째로 알아야될 사실은, 예수님은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이에요.

여기에 신성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인성을 가지고 계셨을 때에도 하나님이세요. 그러나 그 하나님에 대한 모습이 어디에서 들어나냐 하면,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신데서 드러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4절에서 이르기를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라”

 

여러분, 예수님은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모든 사람들의 보증이 되십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부활하심으로 인해서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다 부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 이제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신성과 인성을 다가지고 계신 하나님이란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그분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으로 나신분이시요, 신성으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부활하심을 통해서 우리에게 밝히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네 번째로 알아야 될 사실은 우리는 그 일을 위해서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이에요.

우리가 성탄절을 맞이해서 세상들과 같이 그냥 흥청망청 성탄절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이 성탄절에 어떻게 해야 하느냐? 바로 에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6절 말씀에 이르기를 “너희도 그들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았어요. 택함을 받은 성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므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 몸을 구별해야 합니다.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 이 성탄 계절에 우리가 거룩하게 깨어서 근신하면서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시기를 축원합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가운데 게신 성령의 전인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19-20)

 

다른 날들도 1년 365일 우리의 몸을 가지고 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겠지만 특별히 이 성탄의 계절에는 우리의 몸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됩니다. 노래방에 가서 노래는 부르지만, 하나님의 전에 와서 입술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는 무엇인가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나의 몸이 성전이라고 했는데, 성전인 이 몸을 가지고, 육적인 일에만 육적인 쾌락을 위해서만 쓴다면 우리는 무언가 잘못 살고 있다 라는 사실 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아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사람들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고, 그 피로 말미암아 대속함을 입었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이제 무엇으로 부름을 받았느냐? 하면‘성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7절에 말해주고 있습니다.“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은 이제는 우리 신자들에게는 아버지가 되셔요. 우리의 신분이 바뀌었어요. 우리의 신분은 하늘나라의 신분이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15절에 “아바 아버지라”말하고 있으며, 그런 사람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구속함을 입은 사람들, 정말 예수그리스도의 그 나심을 축하면서 기뻐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은혜와 평강이 그에게 임한다는 것예요.

 

여러분 아직도 내 마음속에 은혜와 평강이 없습니까?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산 사람입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우리 구주 예수님을 만났고 변화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늘 은혜로 삽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넘쳐났고, 복음증거하다 감옥에 갇히는 일을 당했어도 거기서 찬송을 했더니 기적이 일어나는 역사가 생겼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든 세상이 다 나를 반대해도 하나님 한분만이 나를 기뻐하고 나를 도와준다면, 나를 지지해준다면, 그것은 오히려 복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또 저와 여러분 중에 아직도 힘들고 어려워하면서, 눌려 지내면서 기쁨이 사라진지 오래된 심령들이 잇습니까?

 

저와 여러분 내 맘속에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이 주신 평강으로 살지 못하고 있는 심령이 있습니까? 분명히 아십시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세상들이 얻는 호의보다, 세상 사람들이 받는 대접보다 더 주요하고 기쁜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인정함을 받는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친히 그 아들 에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시사, 십자가에 그 대속의 피를 흘리게 하셨고,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이전에는 마음에 평강이 없고, 은혜로 살지 못하던 사람이 이제는 은혜로써 이 세상을 살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남아공에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있잖아요? 오래 살다가 돌아가셨는데, 그분이 살아생전에 어떤 기자가 인터뷰를 했습니다. 그 기자가 물었습니다.‘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감옥에 오래 갇혀있으면 병에 걸리거나 오래 못사는데, 당신은 어떻게 세계 역대 대통령 중에 가장 감옥에 오래 있었으면서도 어떻게 질병하나 걸리지 않고 오래 살 수 있었습니까? 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만델라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감옥에 있을 때에도 감사했고, 무슨 일이 주어지던 지간에 노동을 하면서도 감사했고, 어떤 일을 하던지 감사했다”고, 감사한 생활이 감옥 생활하면서도 건강할 수 있었던 비결이었습니다. 여러분 성탄의 계절에, 우리는 정말 내 삶속에 감사로 살고 있습니까?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 땅에 평화를 주셨는데, 내 맘속에는 여전히 평화가 없고, 평강이 없으니까 우리 주님께서는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평안하냐? 살롬? 왜 그렇게 물으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평강의 왕으로 오셨어요. 삭막해진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 복음이 들어가면 푸르른 숲과 같은 마음으로 바뀌어 버리는 것이, 바로 예수 복음 이예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순절(Lent)
사순절(Lent : 四旬節)

첫째 주일 1 First S. in Lent (Invocabit)
Gn 3:1–21 or 1Sm 17:40–51 2Co 6:1–10 or Heb 4:14–16 Mt 4:1–11 Mar. 8

둘째주일Second S. in Lent (Reminiscere)
Gn 32:22–32 1Th 4:1–7 or Rm 5:1–5 Mt 15:21–28 Mar. 15

셋째주일 Third S. in Lent (Oculi)
Ex 8:16–24 or Jer 26:1–15 Eph 5:1–9 Lk 11:14–28 Mar. 22

넷째주일 Fourth S. in Lent (Laetare)
Ex 16:2–21 or Is 49:8–13 Gal 4:21–31 or Ac 2:41–47 Jn 6:1–15 Mar. 29

다섯째주일 Fifth S. in Lent (Judica)
Gn 22:1–14 Heb 9:11–15 Jn 8:(42–45) 46–59 Apr.

5 Palm Sunday (Palmarum)
Zec 9:9–12 Php 2:5–11 Mt 26:1–27:66 or Sunday of the Passion Mt 27:11–54
Apr. 9 Holy (Maundy) Thurs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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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교회력에 의한 여섯 번의 사순절 주일의 이름 

1. 사순절 첫째 주일은 인보카비트(Invokavit)입니다.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시편 91:15)라는 라틴어의 초입송의 처음 말입니다.

사순절은 주님께 기도하는 거룩한 절기입니다.

 

2. 사순절 둘째 주일은 레미니스제레(Reminiszere)입니다.


“기억하옵소서.”(시 25:6)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사순절을 기억하는 것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주님의

희생과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3. 사순절 셋째 주일은 오쿨리(Okuli)입니다.


“나의 눈이 늘 주께 향하나이다.”(시편 25:15)라는 뜻입니다.

사순절에 우리의 눈은 주님과 주님의 십자가를 향해 있어야 합니다.

 

4. 사순절 넷째 주일은 라에타레(Laetere)입니다.


“너희는 예루살렘과 함께 즐거워하라”(이사야 66:10)라는 뜻 입니다.

사순절은 부활의 소망을 가진 온 교회가 함께 기쁨을 누리는 절기입니다.

 

5. 사순절 다섯째 주일은 유디카(Judika)입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시편 43:1)에서 온 말입니다.

우리는 언젠가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합니다.

주님의 심판 대 앞에 부끄럽지 않도록 준비하는 기간이 사순절입니다.

 

6. 사순절 여섯째 주일은 종려주일(Palmarum)입니다.


혹은 고난주일이라고도 합니다.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고난을 깊이 묵상하며 십자가

언덕을 넘어 부활의 언덕으로 나아가는 사순절 마지막 주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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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 원

 

사순절을 뜻하는 Lent는 앵글로 색슨 족의 언어의 ‘봄‘을 의미하는 Lang에서 유래했으며 독일어 Lenz와 같은 명칭이다. 우리나라에서는 ’40일간의 기념일‘이라는 뜻의 희랍어인 ‘테살코스테‘를 따라 사순절로 번역했다. 이 절기는 부활절을 위한 신앙의 성장과 참회를 통한 영적 준비의 시기이며 교회력 중에서 주님의 수난과 죽음에 초점이 맞추어지는 때이다. 이 절기는 AD 325년 니케아 총회(council of Nicea) 부터 시작되었는데 특별한 참회일인 속죄일(Ash Wednesday)에서 시작되어 주일을 제외한 40일간의 제기(劑期) 즉 부활절 전 6주간으로 거룩한 금요일의 슬픔과 비극 가운데 끝난다.

 

그러나 교회 역사 속에는 40일이 아닌 기간 동안 사순절의 의미를 갖는 절기가 지켜지는 경우도 많았다. 과거 동로마 교회에서는 부활절 준비 기간으로 7주를 지키되 토요일은 제외하고 일요일도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에 왕으로 입성하신 ‘성 주일‘만을 포함해 36일을 이 기간으로 지켰었다. 서로마 교회도 6주간을 지키되 주일을 제외한 36일을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을 기념하는 기간으로 정했다. 이런 관습은 니케아 회의 후에도 계속되어 얼마 동안은 오늘날과 같은 40일간의 절기로 지켜지지 않았다. 그후 7세기 무렵 서로마 교회가 재의 수요일부터 사순절의 첫 주일까지의 4일을 포함하면서부터 오늘날과 동일한 40일간의 사순절을 철저히 지키게 되었다.

 

2. 시 기

 

올해의 사순절의 시작은 2월 13일 수요일부터이다. 사순절은 언제나 수요일부터 시작되는데 이 수요일을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 즉 ‘속죄일‘ ‘성회 수요일‘이라고 부른다. 성경에서는 재(Ash)를 슬픔과 죄에 대한 회개를 상징한다. 전년도 종려 주일에 사용한 종려 가지를 태워서 재로 만들어 두었다가 이 재(Ash)를 수요일에 신자들의 이마에 감람나무의 재나 숯덩이로 십자가를 그었다. 이 날부터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부활절까지 참회가 계속된다. 이 기간 동안 금식하며 자기 성찰의 기회로 삼으며 40이라는 숫자는 여러 가지의 의미가 있다. 40년 간의 광야 교회의 생활, 예수님의 공생애를 위한 광야의 40일간의 금식, 시내산의 모세의 40일 금식과 십계명, 무덤 속에서 40시간을 계신 예수님, 부활에서 승천까지 주님의 사역기간, 등을 의미한다. 유대인들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금식으로 준비했다.

 

3. 유 래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찢기신 살과 흘리신 피를 기념하는 성만찬을 준비하면서 주님이 겪은 수난에 동참한다는 의미를 가진 금식을 행하던 것으로부터 유래되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을 준비하기 위해 유월절 전에 금식을 행했는데, 초대 교회 성도들도 신앙의 성장과 회개를 통한 영적 준비라는 차원에서 구약의 유월절 만찬을 새롭게 해석하여, 주님께서 제공하신 성찬식에 앞서 금식을 행했던 것이다. 40일 동안 금식하였으며 사순절 기간 하루 한 끼, 또는 저녁 식사만 허락하되 육식은 물론 생선 정도의 육식까지도 금하였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기 위하여 새 생명의 탄생을 연상케 하는 달걀이나 우유 등의 음식까지도 규제할 정도로 매우 엄격하게 지켰다고 한다. 그러나 9세기 이후 금식 규정이 완화되기 시작하여 15세기에 와서는 식사를 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습이 되었으나 의식적인 금식보다는 성령의 열매인 절제와 경건의 훈련을 통한 내적인 자기 정화를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접근하여 그리스도의 삶을 맛보며 주님을 본받는데 부적합한 집착들을 제거하는데 그 의미가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따르는 성도라면 그리스도께서 취하신 외형적인 형식만을 닮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그 이면에 숨겨진 내면적인 의미를 맛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사순절이 끝나는 부활절에는 새로 영접한 성도들의 성례식이 있게 되는데, 세례 예비자들이 이 때 세례와 입교(入敎)를 받기 위하여 이들을 추천한 보증인들과 함께 두 주간의 준비 기간을 두고 금식과 기도로 죄의 회개와 신령한 훈련에 참여하는 기회로 삼기도 했다. 이때 부활절에 있을 세례식을 준비하는 세례 예비자들은 물론 이미 성도로 영접된 사람들 모두 금식과 기도 생활에 힘썼다. 사순절 행사로서의 금식은 수세기 동안 매우 엄격하게 지켜졌다. 사순절의 식사로는 저녁 전에 한 끼 식사만이 허용되었으며, 물고기와 고기 등의 육류는 물론 우유와 달걀로 만든 음식까지도 금지되었었다. 그러나 8세기 이후로 가면서 이 규정은 많이 완화되기 시작해 14세기에는 금식 기도 대신에 절식 기도가 행해졌으며 , 15세기에 와서는 정오에 식사하는 것이 일반적인 종교 관습이 되었고, 저녁 시간에도 간단한 식사인 콜레이션(collation)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사순절 기간 동안에 연극, 무용, 연애 소설 읽는 것과 같은 오락 행위는 여전히 금지되었으며, 화려한 옷을 입는 것, 좋은 음식을 먹는 것 등 호화 생활 등도 자제되었다. 대신 자선과 예배 참석, 기도 등이 권장되었다.

 

4. 관 습

 

1. 금식 기도

요즘 와서는 우리 개신 교회가 사순절을 지키는 것이 마치 로마 카톨릭의 의식인 것처럼 생각하는 이도 있는데 물론 역사적으로 동방교회는 7주 동안 금식하게 하였으며 서방교회는 6주 동안 금식하게 하여 의식화되어 내면의 깊은 뜻이 퇴색한 것은 인정하나 금식은 사순절의 가장 중요한 관습이었다. 시기와 장소에 따라 금식의 기간과 그 엄격성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구속 사역을 기리고 하늘 나라의 백성 됨을 감사하며 그 백성 된 자로서의 삶의 자세를 돌이키게 하는 금식 기도는 초대 교회 시대부터 행해졌었다. 오늘날 행해지는 금식 기도는 엄격했던 초기의 형태에서 많이 변형되어 절식(節食) 기도의 형태로 행해지고 있다. 작금 은혜를 사모하는 교회들이 신앙의 대 선배들이신 모세(출 24:18; 신 9:9; 10:10) 엘리야(왕상 19:8), 그리고 믿음의 주요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마 4:2; 눅 4:1-2)의 40일 금식에 대한 믿음의 자세로 이 기간 그리스도 예수님의 생애를 묵상하고 그의 고난의 의미를 살피며 남은 고난을 우리의 육체에 채워 가며 그의 죽으심을 선포하고 성도들의 신앙적인 자세를 가다듬고 절제와 단식을 하며 자신의 부족함을 발견하고 죄악을 발견하여 자백하고 사함 받는 기회로 삼아 은혜가 더욱 넘치는 기회로 삼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2. 이마에 십자가 그리기

종려나무를 태운 재 혹은 숯으로 이마에 십자가를 그리는 풍습은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Ash Wendnesday)에 행해지던 풍습이다. 이때 사용되는 재는 지난해 종려 주일에 사용했던 종려나무를 태워 만든 것으로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대속의 죽음으로 이끌었던 인간의 죄에 대한 참회의 표시로 이마에 십자가를 그렸다. 이는 또한 아름다운 풀과 꽃이 잠깐 후면 마르고 시들 듯 세상의 모든 부귀와 영화도 잠시 잠깐 후면 사라지고, 한 줌의 흙에서 왔던 우리도 또 다시 흙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엄숙한 인생의 교훈을 담고 있다. 또한 언젠가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될 우리의 삶의 자세를 정비한다는 점에서도 그 의미를 가지고 있다.

 

3. 구제와 자선

사순절에는 범죄한 인류를 위해 고난받으신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의미에서 불우한 이웃을 위한 구제와 자선이 행해졌다. 특히 사순절에 행해지는 금식 기도를 통해 주님의 고난에의 동참, 불의한 자신에 대한 회개뿐만 아니라 불우한 이웃의 배고픔과 가난을 생각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의 실천에 있음을 기억할 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사랑을 본받아 이를 실천함은 성도의 마땅한 자세라 할 것이다. 한편 어떤 곳에서는 사순절이 시작되기 전에 3일 정도의 ‘사육제‘(canival)가 거행되었었는데 이 사육제는 원래 ‘육이여‘(carni), ‘안녕‘(vale)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교적인 영향을 받은 이 축제의 기간 동안에는 금식하는 사순절과는 대조적으로 술과 고기를 먹었으며, 가장 행렬 등의 인간의 쾌락 본능을 자극하는 행사들이 행해졌으며 지금에 와서는 그것이 오히려 더 확산되어 수개월 동안 행해지는 유럽 국가들도 있다. 그러나 1517년 종교 개혁 이후 종교 개혁자들은 형식적이며 지나치게 많은 교회의 의식 절차들을 폐지했는데, 이때 사순절에 관계된 많은 의식들도 간소화 내지는 폐지되었다. 그러나 회개의 시기로 지켰던 중세 교회의 사상은 받아들여 공동기도문 중 사순절 기도문의 주제를 회개로 삼는 등, 계속해서 이 절기를 기념하고 있다.

 

4. 사순절 행사

그러면 교회들은 사순절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첫째, 예배를 경건하게 드릴 수 있도록 성결하게 몸과 마음을 준비를 해야 한다. 주일을 범하지 않을 것을 결심하고, 예배를 드릴 때마다 회개와 헌신의 결단이 있어야 한다.

둘째, 사순절은 자기 근신과 금식의 기간, 즉 영적 훈련의 기간으로 죄 자백에 주력하여야 한다. 예수님과 함께 고난과 죽음으로 향해 가는 순례의 기간이며 자기를 부인하고 스스로 죽는 것을 배우는 기간이다. 매일 시간을 정하여서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하여야 한다. 특별한 기간을 정해서 금식함으로서 자신을 절제하고, 자신을 죽이는 훈련을 한다. 오락을 금하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으며 금식과 절제를 통하여 모아진 금액을 이웃을 위하여 사용하도록 한다.

셋째, 원래 사순절이 부활절 세례를 받기 위하여 자원자를 준비시키는 기간인 것을 감안하여 이 기간 동안 성경공부에 빠지지 말고 세례와 학습자는 미리 준비를 해야 한다. 또한 이 기간 동안에는 전도를 함으로 십자가의 구속의 의미를 친구들에게 전해야 한다. 그리고 온 가족이 모여 가정 예배를 드리고 이웃을 초청하여 음식을 나누는 일도 바람직하다.

 

1. 새벽기도회

2. 금식 기도회

3. 주일 시리즈 예배

사순절 절기 안에는 6번의 주일이 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을 기념하는 사순절의 각 주일에는 단계와 특색이 있다.

첫째 주일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아들로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신 후 사단에게 시험받으셨음을 생각하며 지낸다(마 4:1-10).

둘째 주일은 사단의 시험을 이기시고 인류의 구원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예배를 드린다(마 4:11).

셋째 주일은 빛과 어둠의 대립 즉, 빛의 아들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어둠의 세력인 사단과의 대립을 중심으로 한 말씀(요 1:1-18)을 생각하며 예배를 드린다.

넷째 주일은 사순절 중간에 끼어 있어 ‘사순절 중절‘ 또는 ‘휴양 주일‘(休養週日)이라고 불린다. 이 주일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위한 고난과 사단과의 싸움 등을 다루는 사순절의 다른 주일과는 달리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이신 것으로 말씀을 삼는다(마 14:13-21).

다섯째 주일은 고난 주일이라고도 하는데, 이 주일의 명칭은 주님이 자신에게 임할 고난을 제자들에게 예언하셨던 것에서 유래하였다. 이때는 가룟 유다에게 팔리어 고난받으셨던 주님에 대해 생각하며 예배를 드린다(마 20:18,19).

여섯째 주일, 즉 종려 주일(Palm Sunday)에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과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했던 군중들에 관계된 말씀을 본다(마 2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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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시기(四旬時期, 그리스어: Τεσσαρακοστή, 라틴어: Quadragesima, 영어: Lent)는 기독교에서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념하는 교회력 절기를 말한다. 사순절의 이름은 성서 그리스어인 헬라어로 40을 의미하는 어원에서 나온 '테사라코스테'(그리스어: Τεσσαρακοστή)의 번역 단어이다. 재를 머리에 얹거나 이마에 바르며 죄를 통찰하는 재의 수요일로 시작되며, 부활절 전 40일(사순,四旬) 기간 동안 지킨다. 기독교에서 동방전통과 서방전통의 사순절의 차이가 있다. 동방 정교회에서는 매주간 5일만을 기간으로 여기고, 토요일과 주일을 40일 날짜에 포함하지 않는다. 부활절 이전 8주간이 사순절이 된다. 서방 기독교인 천주교에서는 주일을 포함하여 사순 시기가 성주간 목요일까지이다. 40일 날수는 전례대혁 후에상징적인 것으로 바뀌었다. 개신교에서는 주일을 제외하고 토요일을 포함한 40일을 사순절로 지킨다. 부활절 이전 6주와 4일이 사순절이 된다. 즉, 재의 수요일부터 성토요일까지, 주일을 제외시키고 날수를 세면 40일이 된다.[1] 이날에는 금식 등의 자기 절제와 회개를 한다. 부활절 이전에 예수의 십자가상 수난과 죽음을 기억하는 절기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성 요한 세례자에게 세례를 받은 후 40일 동안 광야에서 시험 받았던 사건을 떠올리기도 한다. 부활절 바로 전 주간을 고난주간이라고도 한다.

한국 교회로는 로마 가톨릭교회는 물론이며, 개신교인 대한성공회루터교감리교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그리고, 한국 정교회 등에서 지키고 있다. 또한 개신교 계통의 장로교 교단인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의 경우 사순 시기 대신 주님 부활 대축일 전 한 주간을 고난주간으로 지키고 있다.

전통적으로 사순 시기의 의식 색깔은 자색이며,다만 주님 수난 성지주일과 주님 수난 성금요일에는 붉은색을 사용한다。



Lent originally was established for new Christians, those who experienced a call. They were to spend 40 days and 40 nights preparing for their baptism. If at the end they still wanted to follow Jesus, then on Easter Eve they would be baptized as the sun was rising in the east, signaling the new day, the new era, inaugurated because of the Resurrection.

사순절은 원래 부르심을 경험한 새로운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세워진 절기였다. 그들은 그들의 세례식을 위해서 40일 주야를 보내는 것이었다. 만약 그들이 그 40일의 기간 끝에 여전히 예수님을 따르기로 헌신한다면, 부활절 저녁에 그들은 세례를 받을 수가 있었다. 마치 해가 동쪽에서 뜨듯 새로운 날, 새로운 시대를 상징하며 부활로 인해 새 시작을 선언하듯 말이다.



I am sure it had a powerful significance for them, to have prepared for their vocation as Christians the same way Jesus prepared for His vocation as the Messiah: 40 days of introspection and self-examination.

저는 이러한 사순절이 새 그리스도인들에게 자기성찰과 자기점검의 40일을 이겨내신 메시야 예수님과 같이 동일한 방법으로 분명한 소명을 준비할 수 있게 한 중대한 의미였을 것을 확신합니다.



Later the church used the 40 days as a time of renewal for those who were already Christians, because at a certain point everyone in the empire...was baptized as infants. So the time of Lent was used as a time of renewal and recommitment to the Christian life, examining our lives in light of the One we are supposed to follow.

훗날 교회는 그 40일의 새로운 날의 시간을 새 그리스도인이 아닌 기존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사용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시점의 로마황제 시대 모든 사람들은 유아기때에 세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순절의 기간은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따라야 할 빛 가운데서의 삶인지를 점검하는 새로움과 재헌신의 시간으로 사용되어진 것입니다.



(Mark Trotter, Collected Ser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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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는 목회서신

“여호와께 감사하라 저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편 118:1)

2020년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는 감사의 계절을 맞이합니다.
특별히 2020년은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떠났고 주님의 몸 된 교회들이 문을 닫는 안타까운 시간들이었습니다.

이렇게 급변하는 세상에서 지금까지 파트리스 공동체의 일군들을 건강하게 지켜주신 은혜를 감사합니다.

금년이 다 가기 전에 모든 공동체 가족들이 주님의 품안에서 강건하여 오늘보다 더 좋은 모습으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하며 기도합니다.

감사의 마음으로 한아름 상품권($20)을 보냅니다.
비록 작은 나눔이지만 서로 나누게 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모두가 회복하여 더 아름다운 나눔과 만남을 함께 기도하며 파트리스 공동체를 하나님의 말씀 위에 든든하게 세워가는 일에 기쁘게 참여하여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주후 2020년 11월 16일(월)
파트리스교회 담임목사 이승혁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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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감사주일


2020년 11월 22일(주일)
해마다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합니다.
2020년 추수감사주일은 이제껏 지켜오던 추수감사주일과 전혀 다른 주일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난 3월부터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대면예배가 금지되고 아직도 자유롭게 모여서 예배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을 시작하게 되는 동기가 주로 사람의 계획과 결단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그러나 코로나 바이러스처럼 전염병균에 의해서 전혀 새로운 동기가 부여되었다는 것은 인간의 계획과 결단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2020년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여 결단해 봅시다.

감사해!
사랑해!
미안해!

아마 이 세 가지 마음만 회복할 수 있어도 굉장한 수확을 얻게 될 것입니다.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1620년 9월 6일, 영국의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 동부를 향하여 출발했다는 얘기 다 알고 계시죠? 그런데 거의 비슷한 시기에 ‘매스터호’라는 배를 타고 남미로 간 청교도들이 있었다는 사실도 아시는지요? 많은 분들이 메이플라워호에 대해서는 잘 알고 계시지만 매스터호에 대해서는 대부분이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신앙인으로서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던 사람들이었고 또한 신앙의 자유가 필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북미로 가던 ‘메이플라워호’와 남미로 떠나가던 ‘매스터호’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게 뭔지 아세요. 그것은 바로 동기의 차이였습니다. 물론 남미로 간 사람들에게도 신앙적인 동기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어요.

그러나 그들이 남미로 가려고 했던 가장 큰 동기는 황금과 같은 물질을 찾아서였습니다. 남미에서 엄청난 양의 금이 발견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그들은 새로운 대륙에 가서 새로운 기회를 잡아 부자가 되겠다는 동기 때문에 ‘매스터호’를 탔던 것이지요. 반면에 북미로 갔던 사람들은 금과 같은 물질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맘껏 섬기기 위해서 떠났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다른 어떠한 것보다도 신앙적인 동기 때문에 “메이플라워호”를 탔습니다. 그들은 영국 국교도들의 핍박으로 인해 마음대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자, 마음껏 찬양을 부르고 마음껏 기도를 하고 마음껏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는 진정한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메이플라워호를 탔던 것입니다.

똑같이 신앙생활을 하던 두 그룹이 각기 다른 동기로 각기 다른 지역을 향해 떠나갔습니다.

이들의 결과를 아십니까?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앙을 찾아 북미로 찾아온 그들과 그 후예들이 어떻게 됐는지 잘 알고 계시지요? 그들은 하나님 한 분만을 찾아서 그 곳에 와서 땀과 눈물과 피를 흘리며 예배당부터 먼저 지었습니다.

믿음의 형제들이 하나, 둘 죽어감에도 기어코 예배당을 완공했으며 1년 동안 농사를 하고 그 추수를 하나님께 드리면서 추수감사주일을 지켰습니다. 신앙적인 동기 때문에 북미로 간 사람들은 신앙의 르네상스를 경험하였을 뿐 아니라 물질의 풍성함도 누리고 있습니다. 그들이 뿌린 감사와 희생의 씨로 말미암아 그들의 후손은 오늘의 최대강국인 미국을 이루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현재 미국은 정치, 경제, 사화, 문화, 스포츠, 영화, 과학 등 모든 분야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최고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매스터호를 타고 황금을 좇아 남미로 간 사람들은 어떻게 됐는지 아십니까? 물질적인 동기 때문에 남미로 간 사람들은 신앙도 잊어버리고 그들이 그렇게 원했던 돈도 벌지 못했습니다.

지금 남미 지역의 나라들이 얼마나 경제적으로 어렵습니까?

브라질, 아르헨티나, 칠레, 페루 등의 나라들은 인플레이션과 반목되는 경제 불안으로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다 그 후예들 아닙니까? 그래서 한 번은 남미의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미국의 대통령을 만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조상들은 하나님(God)을 찾아서 신대륙으로 건너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도 찾고 하나님의 축복 속에 황금(Gold)도 선물로 얻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조상들은 황금을 찾아서 이 땅으로 건너와서 황금도 찾지 못하고 하나님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신앙의 조상들을 둔 당신들이 한없이 부럽습니다!”라고 말입니다.

결심의 동기의 차이가 빚은 결과는 이처럼 충격적인 대조를 보여줍니다. 성경은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 16:13b)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과 재물, 하나님과 세상, 하나님과 인기, 하나님과 명예, 이중 무엇을 선택하시렵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인 우리는 오직 하나만 선택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바로 그분을 말입니다.

언제 어떤 순간에도 하나님만 선택함으로 감사의 조건들이 넘쳐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신성욱 교수(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설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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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친구로 산 사람(창세기 18:16-21) 

‘친구’라는 말은 참 정감이 있는 말입니다.

 사전적인 뜻? 오랫동안 가깝게 사귀어 온 사람. 가깝게 지냄, 허물이 없음, 비밀이 없음의 의미를 가집니다.

 옛말에 ‘죽마고우’(竹馬故友)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렸을 때 대나무로 된 말을 타고 함께 논 동네 친구를 가리킵니다.

 또 ‘관포지교’(管鮑之交)라는 말이 있는데 조금은 생소할 수 있습니다.

 중국 고사성어인데요. 관중과 포숙은 어렸을 때부터 한 동네에서 함께 자란 죽마고우였습니다. 두 사람이 절친한 친구였는데 특히 포숙이 관중을 더 깊이 사랑했습니다.

 관중은 욕심이 많고 잔머리도 잘 돌아가는 친구입니다.

 포숙은 마음이 넓고 포용적인 친구입니다.

 젊었을 때 관중은 포숙과 같이 생선 장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이익금을 두 사람이 공평하게 나누어 가져야 했지만 언제나 관중이 더 많이 집어 갔습니다. 이것을 보고 세상 사람들이 관중을 욕했지만 포숙은 관중을 변호해 주었습니다. “관중이 이익금을 더 많이 가져가는 것은 욕심이 많아서가 아니라 나보다 집안이 더 가난하고 딸린 식구들이 더 많기 때문이다.”

 또한 두 사람이 함께 전쟁터에 나갔을 때 포숙은 맨 앞에 서서 열심히 싸웠지만 관중은 언제나 뒷전에서 얼쩡거리다가 싸움이 끝나면 가장 먼저 걸어 나왔습니다. 사람들이 관중을 비겁자로 몰아붙일 때에도 포숙이 감싸주었습니다. “관중이 비겁해서가 아니라 그에게는 늙은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이야. 몸을 아껴 살아남아서 어머니께 길이 효도들 다하려는 효심에서 그랬던 게야”

 이렇게 포숙은 관중이 여러 가지 부족함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한결같이 우정을 지켜주었습니다. 한번도 배신하지 않고. . .

 관중이 나중에 포로로 잡혀 목숨을 잃게 되었을 때에도 포숙은 그를 구해서 높은 자리에 앉게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는 관중보다 낮은 자리에 머무르면서 친구가 잘 되기를 빌었습니다. 결국 관중은 제나라의 유명한 재상이 되어서 나라에 큰 공헌을 할 수 있었습니다.

 관중은 나중에 포숙의 눈물겨운 우정에 감동이 되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나를 낳아 준 것은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 준 것은 포숙이었다.”

 관중이 큰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포숙이라는 좋은 친구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 해서든지 밀어내고 흠집을 내려고 하는데. . . 친구도 없습니다. 그러나 포숙은 평생 관중을 믿고 감싸주고 자기보다 더 높은 자리에 앉게 했습니다.

 이 두 사람의 우정에서 나온 말이 '관포지교'라는 말입니다.

 ‘만왕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친히 낮은 우리를 찾아오시어 우리와 더불어 살기를 원하시니 이렇게 감사. 감격할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려 함이라”하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고. 우리를 친구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요15: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느니라. . .”

 우리를 위해 친히 십자가를 지시고 피흘려 죽으셨습니다.

 이보다 더 좋은 친구가 어디에 있으리요. 우리가 예수님과 친구하고 싶다고 친구가 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친구 하자고 제의를 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 그분은 우리의 가장 좋은 친구입니다!

 최고의 친구이십니다.

 우리의 허물을 끝없는 사랑으로 덮어주시고 용서하십니다.

 우리가 방황할 때 우리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옆에서 지켜 주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다 외면하고 버려도 예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여러분들이 제 아무리 좋은 친구를 많이 가졌다고 해도 그 친구들은 영원하지 못합니다.

 연약한 인간들이기 때문에 때로 여러분들의 마음을 섭섭하게 만들고 배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친구 예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찬양) 예수보가 더좋은 친구없네(두번) 괴로울 때 다가와서 마음에 평화주는 신실하신 나의 참 친구. 외로울 때 찾아와서 친구가 되어주는 사랑 많은 나의 참 친구.

 주 예수 사랑하리라. 나의 생명다할 때까지(두번)

 여러분 여러분의 참 친구는 누구입니까?

 누구를 친구로 삼으시렵니까.

 사람은 가까이 하는 사람을 닮게 되어 있습니다.

 변덕장이를 친구로 삼으면 자연 변덕스러운 사람이 되는 법입니다.

 돈을 가까이 하는 사람은 수전노가 되기 쉽고 오락을 가까이 하는 사람은 육체적인 정욕으로 가정 파국을 맞는 일이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좋은 친구 때문에 출세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또 나쁜 친구 가까이 하다가 망하는 사람들도 허다합니다.

 맹모는 자식 교육을 위하여 세 번의 이사를 하였다고 한다. 시장에서 공동묘지에서 서당가로 세 번의 이사를 하였다고 하였다. 좋은 교육의 환경에서 교육시킬려고. . .

 그 당시부터 좋은 학군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무엇을 가까이 하시고 계십니까?

 신앙인은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당장의 이익을 위하여 부정한 권력, 유명한 사람과가까이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가까이 하게 될 경우 세상적으로 가깝게 하고자 하는 것들이 자연스럽게 가까이 따라 오게 될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친구처럼 살았습니다. 친구와 이야기 함과 같이 하나님과 대화하며 살았습니다.

 약2:21-23에 보면 하나님과 아브라함은 친구의 관계로 가깝게 지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이에 경에 이른 바 이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과 친구처럼 지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75세가 되어도 자녀가 없었습니다.

 아내 사라는 경수가 그치고 자신은 노령의 나이 75가 되어 자식을 낳을 희망이 없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이 나타나 말씀하시기를 하늘의 별같이 바다의 모래알 같이 자녀가 있을 예언하십니다. 그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그 약속을 믿습니다. 그 믿음을 하나님은 옳게 여기신 것입니다. ‘의로 여기셨다고’ 그때 하나님은 너무기뻐하시면서 ‘우리 친구하자’하시고 친구 제의의 손을 내미셨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친구의 증거를 보여 주십니다. 아브라함이 징표를 요구할 때 하나님은 제물을 지정해 주시면서 번제로 드리라고 합니다. 횃불이 쪼개진 고기 사이로 지나갑니다. "내가 이땅을 네 자손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친구 제의 요청을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신용을 얻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시고 의로 여기셔야 합니다.

 1. 참 친구는 외로울 때 함께 있습니다.

 매일 정오만 되면 교회에 들어가는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노인은 들어간 지 2,3분만에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하루는 관리인이 교회 문을 나서는 노인을 불러 세웠습니다.

 “무슨 일로 교회에 들어갔다 나오십니까?”

 “그야 기도하고 나오는 길이지요.”

 “기도라니요 ? 그 짧은 시간에 무슨 기도를 한다는 말입니까?”(조금 수상쩍다는 듯이)

 “저는 길게 기도할 줄 모릅니다. 그래서 늘 이렇게 기도합니다. ‘예수님 ! 저 왔습니다. 짐(Jim) 말입니다’”

 약 한 달 후, 노인은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노인이 들어온 이후로 병실에서는 늘 웃음이 떠날 날이 없었습니다. 이상히 여긴 간호사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 할아버지께서는 이 병실의 환자들에게 웃음을 주고 계신다면서요?”

 “음, 내가 이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고 있지. 모두 다 나를 찾아오는 그 방문객 덕분이야. 그 사람이 내게 늘 기쁨을 주고 가거든”

 간호사가 평소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노인에게 방문객이 있다는 말에 깜짝 놀랐습니다.

 “방문객이라뇨 ? 도대체 언제 찾아오나요?”

 “날마다 나를 찾아오지. 정오만 되면 늘 내 침대 곁에 와 있는걸. 그분이 나를 찾아와서는 이렇게 말하신다우. ‘여보게 짐 ! 잘 있었나 ? 나 예수야!’”하고 말이야.

 그리고는 기쁨을 한 아름 내게 안겨 주고 가시지. . .”이 할아버지는 늘 하나님을 친구로 삼고 사는 할아버지였기에 외롭지 않았습니다. 기쁨이 넘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참 친구셨습니다.

 창13:14절에 조카 롯이 아브람을 떠났습니다. 물좋고 기름진 소돔 땅을 택해서. . .

 롯이 떠나고 아브라함은 얼마나 외로웠겠습니까?

 롯이 떠나고 난 외로운 그 자리에 하나님이 오셨습니다. 너무나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롯은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부터 함께 동행했기 때문에 서로가 얼마나 의지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떨어진다는 것은 너무나 큰 충격이었습니다.

 얼마나 허전했겠습니까? 두렵기도 하고. . .

 그러나 아브라함의 믿음을 올케 여기신 하나님은 그 자리에 오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 성도들에게도 그와같이 오십니다. 외로운 자리에 오십니다.

 허전하고 텅빈 것 같은 그 자리에 오십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믿음을 인정 받는 것입니다. 옳다고. . . 신용을 얻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마음에, 삶 속에 늘 찾아오시는 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2. 참 친구는 비밀이 없습니다. (16-21)

 야고보서에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참 친구 사이에는 비밀이 없습니다. 부모에게는 못하는 말이라도 친구에게는 합니다.

 하나님은 친구 된 아브라함에게 당신이 하고자 하시는 일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친구 된 아브라함에게 뜻을 알리고 당신의 일을 하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보여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롯에게 선택권을 줄 때 롯은 눈에 보이는 대로 물과 풀이 좋은 소돔을 바라봤습니다. 그리고 여지없이 그것을 차지해 버립니다. 아브라함은 여러가지로 마음이 허전, 섭섭했습니다. 하나님은 허전하게 서 있는 당신의 친구 아브라함에게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있음을 보라는 것입니다.

 창13:13-14절에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네 자손에게주리니 영원이 이르리라” 고 했습니다.

 우리는 수동적으로 보이는 대로 보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의해서 바라봐야 합니다. 믿음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비밀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보라고 하시는 것은 이유 없이 말씀하시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본문 16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의 넘치는 대접을 받은 하나님과 두 천사는 소돔으로 향할 쯤에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17) 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친구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계획을 숨길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 아브라함을 택한 목적을 말씀하십니다.

 * 소돔과 고모라성에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 아브라함에게 축복하시는 말씀을 하십니다.

 창18:18-19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나님의 친구 아브라함을 택하신 이유는 놀랍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서 복을 받게 하고 후손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을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하나님의 친구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루려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주님은 종이라 하지 않고 친구라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친구인 우리들을 통해서 주님의 지상명령인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인 역할을 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친구로 부르신 이유는 함께 일하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대한 일을 함께 동역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을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동역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참 친구는 급할 때 도움이 됩니다(22-33)

 22절 두 천사는 소돔으로 가고 여호와 하나님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있는 소돔성을 멸하시겠다고 하시니까 아브라함은 두려웠습니다. 아브라함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 엎드려 구원해 달라고 중보하며 간청합니다.

 보이는 대로 소돔을 선택한 롯과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선택한 아브라함과는 엄청난 차이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은 축복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한 사람은 심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영국의 청교도들 가운데 북쪽(북미)으로 이민간 사람과 남쪽으로 이민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메이플라호’를 타고 북쪽으로 간 사람들은 매사에 믿음으로, 예배중심의 삶을 살았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매스터호’를 타고 남쪽(남미)으로 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청교도이고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한 사람들인데 동기의 차이는 큽니다.

 남미로 간 사람들은 새로운 대륙에 가서 돈을 벌려는 관심이 더 컸습니다.

 그러나 북미로 간 사람들은 순수한 신앙적인 동기뿐이 없었습니다.

 남미로 돈벌러 간 사람들은 신앙도 못 찾고 돈도 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북쪽으로 간 사람들은 신앙을 성취할뿐 아니라 세계 강국으로 우뚝설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과 롯의 차이와도 같습니다.

 하나님이 소돔을 멸하신다고 말씀하실 때 보통사람 같으면 지난번에 아버지 같은 삼촌을 손톱만큼도 생각지 않은 조카에 대해서 모른척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생각할 때도 소돔성은 멸망해야 했습니다.

 얼마나 악한 도시였으면 지금까지 인류 역사에 있어서 죄악의 도시의 대명사로 쓰이고 있는 것입니까? 원래는 이 성읍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물이 넉넉하고 땅이 기름지고 아마 에덴동산같았나 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목자의 심정으로 소돔성을 사랑합니다. 특히 롯의 가족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참 지도자입니다.

 아브라함은 소돔 성 사람들의 멸망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으로 살다가 세상을 사랑하여 소돔 땅에 들어가 살게 된 롯을 생각할 때 견딜 수가 없어서 간절히, 간절히 하나님께 매달린 것입니다.

 50명에서 10명에 이르기까지 필사적으로 구원을 요청했던 것입니다.

 창세기19:29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 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친구 아브라함의 간절한 요청을 들어 주셨습니다. 친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오늘, 죽어가는 이 민족과 나의 형제들의 수많은 영혼들을 구하는 하나님의 친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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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daum.net/pilgrimhouse/13111234













창세기


창세기 1:1
태초하나님천지창조하시니라.
בְּרֵאשִׁית בָּרָא אֱלֹהִים אֵת הַשָּׁמַיִם וְאֵת הָאָרֶץ

베레쉬트 바라 엘로힘 엩 핫솨마임 웨엩 하아레츠


태초에(בְּרֵאשִׁית - 베레쉬트)

‘베레쉬트’는 '베'와 ‘레쉬트’의 합성어이다.
'베'는 명사들과 결합하여 그 명사와 관련된 특정한 때를 가리키는 불분리 전치사로서 영어의 ‘IN’에 해당한다.
그리고 레쉬트는 '근원'(2:10), '머리'(3:15), '꼭대기'(왕상 18:42) 등의 의미를 가진 어근 '로쉬'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시작'(10:10),
'근본'(시 111:10),
‘으뜸’(욥 40: 19) 등의 의미를 갖는다.

이처럼 ‘베’ 와 ‘레쉬트’의 합성어인 ‘베레쉬트’는 직역하면 시간이 막 흐르기 시작한,
시간의 시작인 '시초에'라는 뜻이며 인간 역사의 시작을 의미한다. 

'태초에'는 시간의 시작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주 공간 자체와 우주 만물의 구성 재료가 될 모든 기본 물질들을
'무'에서 '유'로 한 순간에 생겨나게 하신 ‘때’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요한복음 1:1에도 '태초에'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헬라어 '엔 아르케'를 번역한 말로 '영원부터'라는 뜻이다.
요한복음 1:1의 '태초에'인 '엔 아르케'는 시간이 시작되기 이전의 영원한 때를 가리킨다.
창세기 1:1의  '태초에'인 '베레쉬트'는 시간이 시작되었던 때, 즉 영원과 시간의 시작이 접촉되는 때를 가리킨다.   

따라서 두 단어 모두 한글로는 '태초에'로 번역되었지만 그것이 가리키는 근본적인 의미는 조금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정리하면 '태초에'는 하나님이 천지 창조를 개시함으로 시작된 '역사적 시간의 출발점'을 가리킨다.
이는 창세기가 영원 전 사건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우주 및 인류가 탄생하는 시점으로부터 시작되는 역사에 관한 서술임을 보여준다.

하나님이(אֱלֹהִים - 엘로힘)

'태초에'는 천지가 언제 창조되었는지를 밝힌 것
'하나님'은 천지를 누가 창조하였는지를 밝히는 것이다.

엘로힘은 ‘권세 있다’, ‘강하다’란 뜻을 가진 '울'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권세 있고 힘 있는 뛰어난'이란 뜻을 가진 '엘로아흐'의 복수형이다.
즉, 엘로힘은 '두려워해야 할 강하고 능력있는 자', '경외해야 할 최고의 존재'라는 의미이다. 

'여호와'란 명칭이 '언약을 지키시는 자', '택한 백성을 구속하는 자'란 의미로 쓰였다면(출 6:3),
'엘로힘'이란 명칭은 성경에서 주로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을 강조할 때 쓰였다(출 20:1; 신 6:4; 삼하 22:32).

한편 일부 학자는 '엘로힘'이 '엘로아흐'의 복수형인 점을 들어 이를 다신론적 사상의 반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엘로힘'이라는 단어는 비록 형태는 복수형이나 실질적으로는 단수로 사용되었다.
왜냐하면 이 '엘로힘' 뒤에 나오는 '창조하시니라'란 동사가 단수 형태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엘로힘'으로 표현한 것은 삼위이시나 일체이신 하나님의 존재 양식에 대한 암시로 볼 수 있다(26절).
그리고 존귀하거나 장엄한 것을 표현할 때 복수형을 쓰는 히브리인의 독특한 관습에 따라 이를 장엄의 복수형으로도 볼 수 있다.

천지를(אֵת הַשָּׁמַיִם וְאֵת הָאָרֶץ - 엩 핫솨마임 웨엩 하아레츠)

창조의 대상이 무엇이었는지를 밝힌다.
히브리어 '엩'는 우리말 '~을', '~를'이고 '핫솨마임'은 복수로 '그 하늘들'이라는 뜻이다.
'그리고'에 해당하는 접속사 '웨'와 '엩'가 결합하여 '웨엩'가 되었고 '하아레츠'는 '그 땅'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 문장을 직역하면 '그 하늘들을 그리고 그 땅을'이다.

하늘이 복수형으로 표기된 것은 고대 히브리인들의 하늘 개념이 반영된 것이다.
고대 히브리인들은 하늘을 세 개의 층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았다.
새들이 날아다니는 우리 눈에 보이는 공중인 첫째 하늘
우리들이 살고 있는 땅을 반원형으로 둘러싸고 있는 것으로 해, 달, 별 등이 붙어 있는 궁창(Firmament)과 그 위에 보관된 엄청난 양의 물로 구성된 둘째 하늘
그 너머의 순수한 영적 존재들인 천사들이 하나님의 영광의 현현을 매일 보며 거하는 셋째 하늘.

이렇게 히브리인들은 하늘이 모두 세 개의 층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하늘을 표현할 때에 복수로 표현했다. 

'땅’을 표현하는 ‘아레츠’도 하늘과 대조된 의미에서의 ‘온 땅’ 곧 우리들이 발붙이고 사는 이 '지구' 뿐만 아니라
넓게는 땅 아래의 ‘지하 세계(the Underworld)’까지 가리킨다. 

천지를 만드셨다는 뜻은 문자적으로 하늘과 땅만 만드신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다 만드셨다는 의미이다.
성경에는 ‘해 돋는 데서부터 해 지는 데까지'(시 113:3), ‘단에서 브엘세바까지’(삼하 17 :11) 등과 같이 양 극단을 사용하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은 그 양극단 뿐만 아니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다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천지를 만드셨다는 표현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창조하셨다는 뜻이다. 


히브리인들의 하늘 개념(그랜드종합주석 p.194)

창조하시니라(בָּרָא - 바라)

창세기 1장 1절에서 '태초에'는 '언제(when)'를, '하나님이'는 '누가(who)' 를, ‘천지를’은 ‘무엇(what)'을, 끝으로 ‘창조하시니라’는 ‘어떻게(how)'를 보여 준다. 

‘창조하시니라’에 해당하는 히브리 원어는 ‘바라’인데 이 단어의 어원은 불명확하다.
그러나 용례상 대략 '자르다(cut)', '새기다 (carve)' 그리고 '낳다' 또는 '출생하다(bear or be born)', 그리고 '먹다(eat)', '양육하다(bring up)', '살이 오르다(get weight)' 등의 뜻으로 쓰였다.

그런데 이 '바라'가 '만들다', '지어 내다'라는 뜻으로 쓰일 때에는 오직 하나님과만 관련되어 쓰였다.
그리하여 그 이전과는 자르듯이 완전히 단절된 상태에서 전혀 새로운 것을 만드시고 또 있게 하시는 하나님만의 절대 주권적 행위를 나타낸다(신 4:32; 시 89:12; 사 43:1; 렘 31:22).
따라서 '바라'는 이전에는 전혀 없었던 일을, 이전의  그 어떤 것과도 상관없이 새로이 있게 하는 절대적 창조 행위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창조 활동은 그분의 자유로운 의지에서 기인한 단독 사역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 능력은 제한적이거나 부차적이지 않고 완전한 무에서 유에로의 창조를 가능케 하는 새롭고 신비한 성격의 것이다. 또한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존재인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의 주인으로서 그 모든 것을 자신의 기쁘신 뜻에 따라 말씀으로 만드셨다(시33:6-9; 렘10:12).

절대적 창조 행위는 만물을 초월하여 자존하시는 절대 주권자이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인 우리 인간도 우리의 능력을 활용하여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수는 있으나 그것은 과거와의 연속성 안에서, 이미 있는 것을 활용해서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바라'는 '만들다', '지어내다'라는 뜻으로 구약에서 총 44회 쓰였는데, 이 때에는 오직 ‘하나님’을 가리키는 단어와만 짝을 이루어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절대적 창조 행위를 가리키고 있다.

창세기 1장 1절의 '창조하시니라' 곧 '바라'는 무에서 유로 광대한 우주 공간은 물론 그 안의 천하 만물을 구성할 재료가 될 모든 기본 물질들을 동시에 존재하게 하신 하나님의 절대적 창조 행위를 가리킨다.



미국 공휴일 및 축제(할로윈 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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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평 원룸 크기 공간서 300명 깔려... 사망자 여기서 다 나왔다

폭 3.2m 좁은 내리막길 골목
넘어지며 수백명 6~7겹 쌓여

20대 이모씨는 “사람들 사이에 뒤엉킨 채 모르는 사람 손을 붙잡고 ‘우리 살아 나가자’라고 말하며 30분을 버텼다”면서 “신고를 할 수도 없을 만큼 팔 하나도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라, 계속 살려달라고 소리를 쳤다”고 했다.
또 다른 이모(25)씨도 “바로 옆에서 몸집이 작고 숨 쉬기가 어렵다며 우는 20대 초반 여성을 봤고, 실신하는 외국인 여성도 있었다”고 했다.

김모(28)씨는 “나는 키가 크니까 숨을 쉴 수 있었는데 키가 작은 여성들은 가슴 부분이 끼어서 숨쉬기가 더 힘들어 보였다”면서 ”끼어 있어서 손을 못 쓰니까 숨 막혀 죽을까 봐 서로 옆 사람의 마스크를 내려주기도 했다.
숨을 쉬려면 배가 나왔다 들어갔다 해야 되는데 그럴 공간조차 없었다”고 했다.
또 다른 김모(27)씨도 “양옆으로 기절한 사람이 너무 많았고 밀지 말라 소리를 마구 질렀는데도 사람이 많아서 전달도 잘 안 되는 것 같았다”고 했다.

오후 11시쯤 인파를 뚫고 현장에 간신히 도착한 구급대원들이 깔린 사람들을 꺼내며 구조를 시작했다.
하지만 30분 이상 사람들 아래 눌렸던 피해자들은 대부분 의식이 없거나 숨진 상태였던 경우가 많았다.
오후 11시 30분쯤부터는 이태원역 주변 길가에서 구급대원과 경찰, 시민 등 수십명이 길 위에 쓰러진 사람들을 눕혀두고 심폐소생술(CPR)을 하기 시작했다.
모포나 비닐 등으로 얼굴을 가린 시신들이 길가에 놓이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다.

30일 오전 1시쯤 열린 소방 브리핑에서 집계된 피해자 수는 사망 2명, 부상 22명으로 총 24명이었다.
그러나 1시간쯤 뒤인 2시 15분 브리핑에서는 사망이 59명으로 늘었다.
부상자도 150명으로 급격히 늘었다.
30분 뒤쯤에 열린 브리핑에서는 사망자가 120명으로 늘었고 부상이 100명에 달했다.
오전 4시엔 사망자가 146명, 부상자가 150명으로 늘었다는 발표가 나왔다.
피해자를 구조하고 사망 여부를 확인하는 과정이 오래 걸렸고, 심폐소생술을 하면서 병원으로 이송되는 사람 중 적지 않은 수가 사망한 탓이었다.

“선 채로 당한 희생자 많다” 증언들... 전문가들이 추정한 사인은

“호흡은 갈비뼈 사이 근육과 횡경막의 ‘흉곽 운동’
그 공간 확보 안 되면 질식… 서나 앉으나 무관”
”인파에 휩쓸렸다면 가장 자리로 가 기둥 잡고 버텨야”

29일 서울 이태원 핼러윈 참사 희생자 상당수는 선 채로 압사(壓死)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 언론은 소방당국을 인용, “희생자들이 밟혀서 압사당한 게 아니라 서 있는 상태에서 짓눌려 압사당했다”고 보도했다. 온라인에도 “선 채로 실신한 사람이 있었다”는 현장 목격담이 올라왔다. 실제로 한 인터넷 방송 운영자가 참사 발생 당시 현장에서 실시간으로 올린 영상에서는, 한 여성이 선 상태 그대로 사방에서 밀려드는 압력에 고통받으며 비명을 지르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힘을 잃은 듯 늘어지는 장면이 포착되기도 했다.

29                                     TV
29일 밤 서울 이태원에서 압사 사고가 벌어질 당시 현장 상황을 생중계한 영상의 한 장면. 사람들이 사방에서 밀려드는 압력으로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오른쪽 맨 아래 모자이크 처리된 여성은 "살려달라"고 비명을 지른 뒤, 맥이 빠진 모습으로 더는 말이 없었다. /아프리카TV

네티즌들은 충격적으로 받아들였다. 믿을 수 없다는 반응도 나왔다. 일반적으로 압사를 생각할 때 ‘넘어져 깔린 상황’을 떠올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선 채로 압사당하는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서중석 전 국립과학수사연구원장은 30일 조선닷컴 통화에서 “사망자 상당수는 ‘압착성 질식사’로 추정되며, 이는 서 있거나 쓰러져 있거나 등 자세와는 무관하게 벌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인간은 갈비뼈와 갈비뼈 사이 근육과 횡경막을 움직여서 호흡을 하는데, 이번 사고 희생자들은 선채 사방에서 밀려든 강력한 압력으로 흉곽운동에 필요한 공간을 확보하지 못해 숨졌을 것이란 추정이었다.

서 원장은 “물론 부검을 해보기 전엔 단언하기 어렵다. 바닥에 깔린 상태로 충격이 가해져 심장 등 장기 파열이 일어났을 수도 있고, 목뼈가 부러지는 경우도 있을 수는 있다”며 “그러나 당시 상황으로 미뤄봤을 때, 가장 가능성이 높은 사인은 압착성 질식사”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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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 오후 대규모 압사사고가 벌어진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해밀턴호텔 뒷골목의 모습. /뉴스1

공하성 우석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도 비슷한 해석을 내놨다. 공 교수는 “서서 껴있는 채로도 압박을 강하게 받을 수 있고, 압사당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사람이 몸을 가누지 못하는 상황은 최소한 자신의 몸무게의 1.5배 이상 압력이 외부에서 가해졌다는 의미인데, 이번 사고에선 좁은 골목에 한꺼번에 수백명 사람이 몰리면서 그 압력이 급증했다”며 “선채로 갈비뼈가 부러지는 상황도 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직장 인증을 통해 운영되는 익명 커뮤니티 블라인드에도 ‘의사’로 인증한 인물이 비슷한 글을 올렸다. 그는 “압사의 주된 사망 원인은 장기파열도 아니고 혈복강도 아닌 단순 호흡부전”이라며 “호흡공간이 없는 상태에서 호흡근이 이기지 못할 압력으로 눌리면 숨을 못쉬어서 질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상황을 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공하성 교수는 “가장자리가 그래도 하중이 제일 적은 편이기 때문에 인파에 휩쓸리면 가장자리로 빨리 이동해야 한다”며 “가장자리에 도착했다면 거기서 간판, 벽을 붙잡고 버티는 게 좋다”고 했다.

공 교수는 이어 “넘어지면 그야말로 최악”이라며 “만약 넘어졌다면 빨리 몸을 동그랗게 웅크려 머리와 가슴, 몸을 보호하면서 숨 쉴 공간을 확보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태원 사망자 또 늘어 153명... 부상자는 133명


29일 밤 서울 용산구 이태원역 일대에서 발생한 압사 참사로 인한 사망자가 30일 153명으로 늘어났다.

30                     153   24  79   1031
30일 오후 서울 용산구 이태원 압사 사고 현장에 한 시민이 꽃을 놓고 있다. 이태원 압사사고로 발생한 인명피해는 이날 오후 현재 사망 153명이었다.
부상자는 중상 24명, 경상 79명 등으로 총 103명이다./뉴스1

행정안전부와 소방청에 따르면, 이날 오후 6시 기준 이태원 핼러윈 참사로 인한 사망자가 153명으로 집계됐다.
앞서 오전 10시에 발표한 사망자 수(151명)보다 2명이 늘었다.
부상자는 중상 37명, 경상 96명 등으로 총 133명이다.

외국인 사망자는 20명, 부상자는 15명으로 외국인 사상자는 총 35명으로 집계됐다.
외국인 사망자의 구체적인 국적으로는 중국과 이란, 우즈베키스탄과 러시아 등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2022년 10월 29일 할로윈 데이 축제를 맞아 서울 이태원에서 일어난 참사

이태원과 관련된
슬프고 아픈 역사에 관한 글을 공유합니다.

이번 참사를 계기로 더 이상의 아픔이
반복되지 않기를 염원하며,
국민 모두 애도와 함께 자숙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___________

[슬픈 이태원의 유래]

'이태원'은 한자로 '梨泰院'이라 씁니다.

이태원의 이름은  한자만 3번 변했습니다.
조선 초에는 '오얏나무 李'를 써서  '李泰院'
→임진왜란 이후에 '異胎院'
→효종 이후에는 '梨泰院'으로
글자와 의미가 변합니다.

원래 이태원은 서울을 벗어나 처음 만나는
원(院)이었습니다.

서쪽의 홍제원.
동쪽의 보제원.
남쪽의 이태원과 인덕원은
서울 부근의 중요한 첫번째 원이었습니다.

이태원은 지금의 용산고등학교 자리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이태원의 역사를 살피다 보면
슬픈 이 땅의 역사가 떠오릅니다.

슬픈 역사하면
역시나 조선 시대의 '양대 칠푼이'
선조와 인조가 등장합니다.

아시다시피 임진왜란 때
고니시 유키나카(소서행장)와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 부대는
경쟁적으로 진격하여
가토 기요마사 부대는 남대문으로
유키나카부대는 동대문으로 입성합니다.

그 결과 이들이 처음 통과한 문이라는
상징성을 바탕으로 조선총독부는
남대문과 동대문을 조선고적 1.2호로 지정했습니다.
결국 이 문들은
오늘날 대한민국 국보 1호와 보물 1호가 되었습니다.
(이런 아픈역사가 있음에도 불에 타버려
졸속 복구한 남대문을 국보 1호라고
전 세계에 자랑하는 나라 꼴이나,
한술 더 떠서 궤변으로 그를 합리화시키는
일부 학자들을 보면 한심스럽습니다.)

한양에 들어온 '가등청정'은
이태원에 주둔을 합니다.

주둔 중에 '가등청정과 부대'는
여자들을 겁탈하기 시작하는데,
대분분의 여자들은 피난을 가버린 상황이라
그 대상은 피난을 가지 못한 여자와
이태원 황학골에 있는 '운정사'의 비구니들이
주대상이었습니다.

천주교 신자이자 반전론자인
상인 출신의 소서행장과
불교신자이자 주전론자인
장수 출신의 가등청정은
일본에서부터 라이벌이었는데,
오히려 불교신자인 가등청정은
여승들을 겁탈하고
운정사까지 불살라 버립니다.
(가등청정 이 놈은 불국사도 불질러 버린 놈입니다.)

문제는 이 비구니들과 여인들이
임신을 하여 아이를 낳게 됩니다.

절이 사라진 상태에서
비구니들의 아이들과
왜놈에게 겁탈당한 부녀자 등이 애를 낳고
기를 보육원을 지어 정착케 하였는데,
당시 왜병들의 피가 많이 섞인 곳이라하여
이태원(異胎圓=다른 민족의 태를 가지고 있는 곳)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후,
임진왜란이 끝나자
일본에 잡혀갔다 돌아온 조선여자와  
왜란 중에 성폭행을 당한 여성과
그들이 낳은 아이들이 사회적 문제로 등장합니다.

선조는 이에 이들과 그 자식들
그리고, 임진왜란 이후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한
포로나 귀화한 일본인들을 한 곳에 몰아서
일종의 이방인 공동체 지역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곳이 이태원입니다
<출처 : 임하필기(林下筆記) 동국여지비고>

여기에 칠푼이 2호인 인조까지 가세하게 됩니다.
병자호란에 끌려갔던 여인과 그 자식들까지
상당수가 결국은 이곳으로 들어옵니다.

이후,
북벌을 준비하던 효종은 지명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이곳을 배나무가 많은 곳이라는 이름의 梨泰院이라
고쳐 부르게 하여 오늘날까지 이르렀습니다.

이태원은 우리 역사에서
오랜 기간 '이방인의 땅'으로 인식되기 시작합니다.

조선시대부터 용산 일대는 군사 관련 시설이 많았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들어 군용지로 이용되면서
조선 주둔 일본군 사령부가 이곳에 머문 이후
이태원은 군사지역으로서 본격적인 정체성을
나타내기 시작합니다.

임오군란을 진압하러 조선에 온 청나라 부대는
1882∼1984년 이태원에 주둔했고,
이후 일본군 조선사령부가 1910∼1945년에
주둔하기 시작합니다.
이때부터 근대식 마을이 본격적으로 형성됩니다.

광복 이후엔 미군이 이곳을 차지했습니다.
6.25전쟁이 끝나고 나서 이태원 상권은
사실상 미군이 주도했습니다.

1957년 미군의 외박과 외출이 허용되면서
기지촌까지 생겨났습니다.
1970년대 미군기지에서 나온 물품들로
상권이 형성된 이태원은
이후 미군을 위한 유흥가로 거듭나
기지촌과 미국식 클럽이 우후죽순 들어섰습니다.

한편으로 정부는 이태원 미군기지 중심으로
서빙고동, 한남동, 동부이촌동 일대에
외국인 전용주택과 아파트는
물론 고급 외국인 주택단지까지 건설합니다.

그러자 1960년대 이후
한국에 들어온 각국의 대사관이
이태원 지역에 대거 입주했고,
그 영향으로 1970년대까지 지속적으로
고급주택단지도 조성됐습니다

이태원은 1990년대 이후
아프리카인의 유입이 늘면서
현재는 판잣집과 대저택이 공존하는
독특한 경관을 연출합니다

기지촌 단속으로 퇴폐업소가 사라지면서
경리단길과 더블어
한국 속의 외국으로 변화하는 '이태원'

웬지 가까와지지 않는
이방인의 느낌이 드는 도심지 이태원.

그 바탕에는 아픈 역사가 있었습니다.

WSJ “아이들이 사탕 얻는 핼러윈, 한국선 클럽 가는 날 됐다”

각국 외신이 29일 밤 발생한 이태원 압사 사고를 집중 조명 중인 가운데, 한국 내 핼러윈 문화가 변질되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29일(현지 시각)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일대에서 벌어진 참사를 자세히 전한 뒤 “한국에서 핼러윈은 아이들이 사탕을 얻으러가는 날이 아니다”라며 “최근 몇 년 간 20대를 중심으로 코스튬을 차려입고 클럽에 가는 행사로 정착됐다”고 전했다.

이어 “이태원 지역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주한미군이 주둔했던 곳으로 세계 각국 요리를 선보이는 바, 클럽, 레스토랑이 즐비한 장소”라며 “사고 전 서울 중심부에 있는 이곳에 약 10만명의 인파가 몰릴 것으로 예상됐다”고 했다.

또 “영업시간 제한과 마스크 착용 의무화 등 코로나 관련 규제가 해제된 이후 첫 핼러윈이라는 점 때문에 참여율이 더 높았다”며 “한국의 핼러윈 악몽은 가장 큰 비극 중 하나로 전 세계에서 애도의 뜻을 표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미국 축제로 잘 알려진 핼러윈은 고대 켈트족이 새해(11월 1일)에 치르는 사윈(Samhain) 축제에서 유래된 것으로 전해진다.
켈트족은 이날 사후 세계 경계가 흐릿해지며 악마나 망령이 세상에 나타날 수 있다고 여겼으며, 사자의 혼을 달래고자 모닥불을 피우고 음식을 내놨다.
망령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분장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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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로윈(Halloween)의 정체 / 10월 31일

글을 시작하면서

매년 10월 31일은 종교개혁의 날이다.
독일의 종교개혁자 루터(Martin Luther, 1484~1546년) 1517년에 독일 비텐베르크대학 교회의 정문에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붙인 것으로 시작으로 종교개혁의 불길이 일어난 날이다.
그러므로 이날은 우리 기독교의 역사에서는 아주 중요한 날이다.
교회에서는 종교개혁자들의 발자취와 역사적 의미를 설교하며 개혁의 정신을 이어가고자 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10월 31일은 종교개혁의 날이기보다는 ‘할로윈 데이(Halloween day)’로 더 많이 알려졌다는 느낌을 받고 있다는 데 있다. 즉 이날이 되면 ‘할로윈 데이(Halloween day)’ 축제로 세상 사람들은 즐기며 지낸다.
그런데 문제는 이날에 일부 교인들마저도 함께 즐기려고 동참한다는 슬픈 소식이 들려지기 때문이다.
귀신 분장을 하며, 호박 등을 들고 마법 모자를 쓰고 아이들이 유치원 등에서 이 귀신의 축제에 동참하는 그리스도인 자녀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물론 영적인 무지 때문일 수도 있으나 그러한 무지에 대해 깨우쳐주지 않는 영적인 지도자들의 책임도 있을 것이라는 자책을 하면서 할로윈에 대한 정체를 알려야 할 필요성을 느끼면서 이 글을 시작한다.

할로윈(Halloween) 용어의 의미

멕시코의 전통명절 중 대표적인 것이 매년 10월 31일부터 11월 2일까지 지키는 ‘죽은 자들의 날’이란 것이 있다.
명절 중에 11월 1일‘어린 영혼을 위한 날’이고 2일 ‘어른 영혼을 위한 날’이라 한다.

이 이간에 이 나라 사람들은 집 안에 특별한 제단을 꾸며 죽은 자들을 위한 선물을 올려놓는다.
또 죽은 자의 영혼을 불러들이는 준비과정으로 무덤을 꽃과 선물로 장식한다.
이러한 축제는 죽은 자들이 이승으로 돌아와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 머문다는 내세관에서 출발하였다.

떠난 이들의 영혼을 기리는 행사로 수 세기 동안 지속되면서 멕시코의 전통 축제로 자리매김한 이 기간에 칼라베라(calavera)라고 불리는 설탕으로 만들어진 해골 모양의 장식을 준비한다.
이것은 매우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으며 이마에는 죽은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놓는다.
이러한 명절에 먹는 음식으로는 ‘죽은 자의 빵(pan de muerto)’초콜릿 음료가 대표적이며, 설탕으로 만든 색색깔의 해골 과자를 만들기도 한다.
이렇게 멕시코에서의 ‘죽은 자의 날’이란 귀신과 연관된 날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이와 유사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할로윈 데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여기에 쓰이는 할로윈(Halloween)이란 단어를 풀어서 쓸 때 첫 단어인 hallow는 고대 앵글로색슨족의 언어로 성인을 뜻한다.
여기에 전야제를 뜻하는 even과 만나 hallow’s even 혹은 hallow’s evening으로 쓰고 있으며, 문자적으로 보면 ‘거룩한 전야’라는 뜻이다. 그리고 정확한 뜻은 만성절 전야제이다.

이것이 한국의 종교용어로 ‘만성제’라고 부르기도 한다.
바로 10월 31일은 모든 성인 대축일 전날로, 죽은 사람의 영혼이 이승으로 돌아오는 시기로 여겨진다.
그리고 이러한 할로윈(Halloween)이란 ‘모든 성인 대축일 전야제(All Hallows’ Day evening)’의 줄임말이다.

할로윈(Halloween)의 유래

할로윈데이의 기원은 대체로 켈트족의 이교도 풍습과 로마카톨릭 전통의 성인 대축일 전야제가 결합된 혼합 문화로 일반적으로 알려진 그 유래를 살펴보고자 한다.
‘환락과 유희의 밤’으로 변화된 오늘날의 할로윈은 아일랜드 켈트족의 ‘삼하인’이라 하는 의식에서 비롯되었다고 알려졌다.
삼하인은 죽음의 제왕인 샤먼을 섬기는 신성한 의식이었다.
당시의 사람들은 성인(聖人)의 날 하루 전날인 10월의 마지막 밤을 여기저기에서 온갖 요정들이 세상으로 나오는 날이라고 생각했으며, 인간이 ‘영(靈)의 세계’에 가장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날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실상 할로윈 데이는 귀신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됐다.
기원전 500년경 영국과 아일랜드, 프랑스 북서부 지방에 살던 켈트족은 죽은 영혼이 자신의 몸속에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귀신 복장을 하고 집안을 차갑게 만들었다.
이들은 열 달을 1년으로 하는 달력을 사용해서 11월 1일은 한 해의 시작이자 겨울이 시작되는 첫날이었다.
당시 한 해의 마지막 날이었던 10월 31일은 저승의 문이 열려 죽은 자의 영혼과 악마들이 이승을 올라와 자신이 머무를 다른 사람을 찾으러 다니는 날이라고 믿었다.
이렇게 할로윈은 고대 브리튼과 아일랜드에 거주했던 켈트족의 문화에서 유래했다.
켈트족은 한 해에 네 번 축제를 열었다.
매년 10월 31일에 열리는 ‘삼하인(Samhain) 축제’가 그중 하나다.
켈트족은 이 축제 때 동물의 머리나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어 분장을 했고, 동물이나 곡식, 사람을 제물로 바쳐 불에 태웠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삼하인 축제는 로마카톨릭교회가 아일랜드에 전파된 후 6세기 무렵에 로마카톨릭교회에 흡수되었다.
835년경 교황 그레고리오 4세는 모든 성인 대축일을 5월 13일에서 11월 1일로 정식 변경했다.
이후 할로윈은 모든 성인 대축일 전날에 치르는 축제로 굳어졌다.
이렇게 로마카톨릭교회에서 11월은 세상을 떠난 이들의 영혼을 기억하며 기도하는 ‘위령성월’로 전통적인 삼하인 축제와도 연결되는 측면이 있다.
모든 성인 대축일 다음 날인 11월 2일은 ‘위령의 날’로 죽은 이들을 기리며 연옥에서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기도한다.

이후 1840년대의 대기근을 피해 온 아일랜드계 이주민에 의해서 할로윈은 미국에 전해지게 되었다.
그런데 현재의 할로윈 문화가 정착한 것은 20세기 초반부터다. 이전까지는 미국으로 이주한 소수의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출신 이민자들이 벌이는 작은 행사에 불과했다.
1930년대 이후부터는 아이들이 분장하고 집마다 돌아다니며 사탕과 과자를 얻는 풍습도 자리 잡았다.
이렇게 19세기 중반부터 아일랜드 출신의 이민자가 급증하자 전통 축제인 할로윈도 미국 내에서 빠르게 퍼지기 시작하면서 지금은 미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축제가 되어 있다.
이러한 할로윈은 미국 땅에 상륙하여 맘몬(돈의 신)과 결탁한다.
그 이후 할로윈 의상 등 각종 할로윈 상품과 막대한 양의 주류 판매 등으로 거대상권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막을 수 없을 정도로 할로윈 문화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할로윈(Halloween)의 정체

할로윈(Halloween)은 이교적인 풍습이다.

할로윈 데이는 켈트족의 이교도 풍습과 함께 다신교 문화였던 로마를 한 번에 기독교 문화로 바꾸기가 힘들어 점진적인 변화를 위해 로마카톨릭교회에서 채용한 방법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여전히 그 축제 속에는 성경적 근거보다는 다신교적 정신이 스며들어 있다. 따라서 성경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이 할로윈 축제는 비성경적이다.
더 나아가 반기독교적인 축제일 뿐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경계하고 단호하게 거부해야 한다.

할로윈(Halloween)은 사탄적인 문화이다.

할로윈의 정점은 바로 귀신 의상을 입고, 귀신 놀이를 하는 것이다.
마귀상, 귀신상, 도깨비 상, 해골상 등 의상으로 변장해서 집집마다 방문하면서 “Trick or treats” 놀이를 한다.
이러한 “트릭 올 트릿”(Trick or Treat!)은 켈트족들이 죽은 조상 영혼들이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방황하며 가을 수확물에 대해 장난(trick)을 일삼으며 저주를 가져다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들을 저승으로 평안히 보내기 위해서는 술, 음식, 수확한 곡식 등으로 달래주는 일(treat)이 필요한데 이런 의식을 일 년에 한 번 행하는 미신적이고 사탄적인 행위이다.

이렇게 10월 31일에 할로윈(Halloween)을 적극적으로 즐기는 사람들은 기괴한 가면 등의 복장을 하고 있다.
무서운 이빨을 드러낸 모습의 호박 등을 켜고 동네를 누비며 사람을 놀라게 한다.
캔디 구걸 또는 구입을 해 나눠 먹는 관습도 있다.
더 기분을 내느라 아주 섬뜩한(spooky) 장면, 또는 흉갓집(haunted house) 놀이, 공포영화(horror movies) 따위를 즐기기도 한다.
이러한 할로윈은 켈트족의 이교도 풍습이 결합된 사탄적인 것으로 문화라는 광명의 옷을 입고 살며시 사람들에게 스며들고 있다.

옛날 켈트족의 지도자로 동물 희생의 제사장으로 있다가 예수를 믿게 된 탐 생귀네트(Tom Sanguinet)라는 사람은 「할로윈의 어두운 면」(The Dark Side of the Halloween) 이라는 책에서 “할로윈은 사탄이 마음 놓고 활보하는, 사탄이 가장 좋아하는 날”이라고 하였다.

김명도는 할로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할로윈은 어두움과 사단의 소산이다.
어린애들이 재미를 보는 흥겨운 민속놀이가 아닌가?
그게 뭐 그리 대단한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겉으로는 어린애들이 놀이를 즐긴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영적으로 애들은 사단의 노예로서 ‘사단 놀이’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고 보면 이는 크리스천으로 묵과할 수 없는 심각한 문제임이 틀림없다.”

할로윈(Halloween)은 인신 제사와 관련되어 있다.

할로윈(Halloween)의 기원은 인신(人身) 제사를 지냈던 유럽의 고대 켈트족이 지켜온 이교적 풍습에서 유래한다.
당시 켈트족은 폭력적이고 야만성이 있어서 희생 제사를 바칠 때 사람까지 번제로 바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특히 종교집단이던 드루이드교를 신봉하던 드루이드파들은 검은 옷과 검은 두건 차림으로 횃불을 들고 마을을 돌아다니며 강제로 처녀를 공양받아 사람의 모양으로 지은 목조건물에 가두어두고 불태워 삼하인(Samhain)에게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켈트족들은 마법에 걸린 사후의 인간 영혼은 드루이드가 섬기는 신(神)인 삼하인(Samhain)에 의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삼하인은 인간의 죽음과 사후 세계를 관장하는 죽음의 신이었기에 사람들은 당연히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러므로 이때 드루이드파들은 마을을 방문할 때마다 “(처녀를) 바칠 것인가 아니면 죽을 것인가?”라고 묻고는 처녀를 바치지 않는 마을 전체를 불태워버리는 등 대단히 폭력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켈트족은 정령을 숭배하는 드루이드교를 신봉하였던 그들은 죽은 자의 영혼을 두려워했다고 한다.
무덤 속에서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영혼들이 복수하기 위해서 돌아온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인신 제사를 지냄으로써, 악령으로부터 화를 면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할로윈의 상징은 ‘잭-오-랜턴(Jack-o’Lantern)’으로 불리는 ‘호박 등’이다. 큰 호박의 속을 도려낸 뒤 도깨비 얼굴을 새기고, 그 속에 양초를 켜서 도깨비 눈이 반짝이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 호박 등이 바로 ‘잭-오-랜턴’이다. 전설에 의하면 술 잘 먹고, 교활한 잭이라는 사람이 마귀를 속여 골탕 먹인 뒤 죽었다. 앙심을 품은 마귀에 의해 잭의 영혼은 천국도 지옥도 가지 못하고, 아일랜드의 추운 날씨 속에서 암흑 속을 방황하게 되었다. 결국, 추위에 지친 잭은 마귀에게 사정하여 숯을 얻었고, 온기를 유지하기 위해 호박 속을 파내고 이 숯을 넣어 랜턴을 만들었다. 이것이 할로윈을 상징하는 ‘잭-오-랜턴’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신(人身) 제사를 지내던 고대 이교도의 풍습에 의하면, 이 호박 등에 넣는 기름의 원료는 제물로 희생된 처녀의 몸에서 짜낸 기름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할로윈 때 아이들이 사탕을 얻어내기 위해서 집집마다 떼지어 돌아다니며 외치는 소리도, “제물을 바치지 않으면 화를 당할 것이야!”라고 협박하던 고대의 인신제사 풍습에서 기원한 것이라고 한다.

할로윈(Halloween)에 대한 비판적 견해와 제언

10월 31일은 종교개혁일이다.
이러한 종교개혁일 전인 전야제 행사가 공개적으로 사탄을 찬양하고, 악령들을 초청하는 날로 인식되어 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필자에게는 매우 당혹감이 들지만, 현실에서는 오히려 할로윈이 기독교 문화로 포장되어 퍼져감에도 그리스도인들은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 입장에서 보면 분명 로마카톨릭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종교개혁 기념일인 10월 31일에 귀신과 악마, 좀비 등이 출몰하는 ‘할로윈 데이’는 기독교인들이 즐기기 매우 곤란한 기념일이다.

그런데도 할로윈(Halloween)은 미국이나 한국에서 점점 더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할로윈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도 문제이지만 기독교인들이 할로윈을 하나의 문화로 생각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본다. 여기에는 할로윈이 재미가 있다고 생각하다 보니 거기에서 어떤 해로운 것도 보지 못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할로윈은 단순한 문화행사가 아니다. 기독교인 시각에서 보면 분명 할로윈(Halloween)은 사탄을 찬양하는 행사이다. 그러므로 멀쩡한 사람들이 마귀로 분장하여 사탄과 놀아나는 것은 철저하게 배격해야 할 사탄문화임을 인식하고 대처해야 한다.

이렇게 문화라는 이유만으로 귀신 분장과 혐오스러운 도구, 소품 등을 활용해 행사를 즐기는 것은 기독교 신앙에 유익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악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는 일에 불과하거나 사탄을 좋게 만드는 행위이다.

할로윈(Halloween) 데이는 죽음의 영혼들의 모습으로 분장하고 귀신 놀이, 사탄 놀이하는 것은 영적으로 매우 심각한 문제이다. 여기에 아이들에게 사탕을 안 주면 이 집을 그냥 두지 않겠다는 보복성, 폭력적 심리를 자극할 수 있다. 이것은 재미, 흥미의 놀이가 아니라 아이들에게 욕심을 불러일으키고, 협박에 대한 보상 심리의 쾌감을 얻게 하는 것도 교육적으로 바르지 않다고 정준모는 지적하고 있다.

사탄교 창시자인 안톤 라비(Anton LaVey)는 “나는 크리스천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적어도 1년에 한 번 사탄을 숭배하도록 허락한 것에 대해 기뻐한다”라고 말한 바 있다. 또한 예수의 복음을 영접하기 전 사탄교의 고위 성직자였던 존 라미레즈(John Ramirez)는 할로윈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다.

“우리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사탄을 숭배하는데 발 빠르게 움직인다. 왜냐하면 그것이 즐겁기 때문이다. 우리는 할로윈 복장을 하며 얼굴에 색칠하고, 심지어 교회까지도 할로윈을 축하하기 위해 호박으로 교회 정문을 장식한다. 이런 행동은 마치 ‘내 교회가 여기 있다. 네가 가져도 좋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존 라미레즈(John Ramirez)는 계속해서 “우리는 사탄의식을 행한다거나 인간 희생의 의식을 하지 않기 때문에 안전하다고 생각하지만 당신이 할로윈 복장을 하는 순간 사탄이 당신을 소유한다는 사실을 아는가?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은 당신의 법적 권리를 사탄에게 양도하고 당신과 당신의 아이들이 사탄의 휴일을 축하하는 것이다. 당신은 아이들에게 할로윈 복장을 허락함으로써 당신의 아이들을 영적인 희생물로 바치는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이러한 할로윈의 가장 큰 위험은 어린이들에게 사탄, 귀신, 그리고 여러 악한 생각을 친구처럼 만들어 버린다는 것에 있다. 그리고 그것을 재미로 즐기는 동안 어린이들은 선과 악에 대한 개념을 혼동하게 한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어린이들은 ‘재미’가 선악의 기준이 되어 버렸다. 재미가 있으면 모든 것이 용납되고 재미가 없으면 아무리 옳은 것이라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따라서 부모들은 우리의 자녀들에게 선과 악을 분명히 구별하도록 훈련시킬 필요가 있다고 제언하고 있다.

또한 정준모는 이러한 할로윈의 정체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 할로윈은 일종의 우상 숭배이다.

* 할로윈은 다른 신을 인정하고 혹은 섬기는 행위이다.

* 할로윈은 결국 귀신을 좋게 하고 섬기는 일이다.

* 할로윈은 사탄을 일종 사탄을 섬기는 일이다.

또한 정준모는 할로윈에 대한 성경적 비판과 올바른 방향을 위해 다음과 같이 제언하고 있다.

* 할로윈은 유일신 하나님만을 숭배하는 성경적 진리와 어긋난다. 십계명에 하나님 외 다른 신을 섬기지도 말고, 어떤 형상과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했다. 하나님 절대 신앙을 가진 성도로서 할로윈을 지내는 것을 문화적 행사나 놀이가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영성은 바로 귀신을 섬기고 숭상하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 할로윈은 이교적 문화이다. 귀신, 사탄, 우상 숭배의 문화이다. 상업주의, 세속화의 영향이다. 흥미를 유발하는 놀이 행사, 문화 행사가 아니다. 순전한 아이들과 청소년들이 귀신, 사탄, 해골 흉내를 내는 것은 심각한 영적인 문제요, 교육적 문제이다. 이러한 날을 기점으로 가정적으로 교회적으로 대안적 문화 계발과 행사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절대 신앙을 교육할 기회로 삼아야 한다.”

* 할로윈 이교 문화에 대하여 수용하고 관용적 입장을 취하는 것은 일종의 종교다원주의를 추구하는 것이다. 이교문화와 기독교 진리와 문화는 마치 석가모니 출생을 기념하기 위해 목사나 신부가 가서 합장하고 축하하는 행위와 같다.

* 이스라엘 민족이 패망한 역사적 현장을 볼 때, 그들은 아침에는 하나님을 찾고 저녁에는 바알과 아세라를 찾는 혼합주의 신앙행태에서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우리는 문화라는 탈, 어린아이들의 놀이라는 포용성 때문에 절대 양보할 수 없는 하나님 절대 신앙에 흠결이 생겨서는 안 된다.

* 어떤 한인 교회나 미국 교회에서는 10월 31일 ‘할로윈’(Halloween)을 이날을 ‘홀리윈’(Holyween), ‘추수제’(Harvest Festival), ‘할렐루야 나이트’(Hallelujah Night)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여 가족 중심의 행사로 방향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그것도 신앙적 반사 효과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 할로윈 날에 교회에서 그런 행사를 시도하는 자체가 그날을 인정하는 의미도 있다.

* 이스라엘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쉐마교육을 하였듯이, 이날에 가정에서 혹은 교회에서 특별히 휠로윈의 허구성과 거짓 우상에 대한 성경적 진리를 가르치는 시간이 되어야 하겠다.

이제 여호수아는 출애굽 이후 가나안에 입성한 백성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은 말씀을 통하여 분명한 선택을 하라고 경고하였다.

(수24:15)“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는 10월 31일에 대하여 분명히 결단해야 한다. 이날 10월 31일은 종교개혁의 날이다. 그러므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이날을 귀신과 사탄의 날로 즐기는 할로윈 데이로 지낼 것이 아니다. 중세시대 타락한 로마카톨릭교회의 부패로부터 성경으로 돌아가고자 일어난 종교개혁의 날로 알고 지내야 한다.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은 할로윈을 맞아 즐기며 논다고 해서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종교개혁의 날을 뒤로하고 할로윈을 향해 달려간다면 그것은 사탄이 좋아하는 우상을 섬기는 행태가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할로윈은 영적인 싸움에 대상이다. 이에 바울 사도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실천해야 할 것이다.

(엡6:11-13)“(11)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12)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13)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참고문헌

“망자(死者)의 빵”(Pan de muerto - 멕시코 전통명절 “죽은 자들의 날”에 먹는 빵), https://blog.naver.com/myatomgogo/100061017995

“멕시코 죽은 자들의 날”, https://blog.naver.com/ending-note/222029333114

“할로윈 데이(Halloween Day)는 사탄의 날이다.”, http://cafe.daum.net/jrcalvin/LOIV/59

“할로윈, 그리고 모든 성인의 날 만성절”, https://altisimo.tistory.com/54

“할로윈데이 Halloween Day”, http://cafe.daum.net/kcmc91/Pkb8/1163

김명도, “기독교인과 할로윈(Halloween)”, http://cafe.naver.com/solideogloriafaith/1459

김성훈, “할로윈(할로윈)의 정체”, https://cafe.daum.net/kcmc91/Qi6n/60

다음백과, “할로윈 축제”,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42XXXXX00067

다음백과, “할로윈”,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b24h3121a

박혜정, “할로윈데이, 크리스천들에게도 ‘축제’일까?”, 「데일리굿뉴스」, 2018. 10. 25.

안석문, “할로윈”, http://cafe.daum.net/kcmc91/Pkb8/1171

우혜란, “할로윈(Halloween) 축제 - 한 수상한 외래 풍속의 한국 정착기”, http://cafe.daum.net/kcmc91/Pkb8/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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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산나, “할로윈은 마귀 축제 철저하게 배격하라”, http://cafe.daum.net/ilmak/5OwK/8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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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럼버스의 날(Columbus Day)

크리스토퍼 콜럼버스1492년 8월 3일 항해를 시작해 같은 해 10월 12일에 현재의 바하마 제도(諸島)에 있는 산살바도르섬(추정)에 도착함으로써 처음으로 아메리카 대륙에 발을 딛었다. 미국중앙아메리카 일부 국가에서는 이 날을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날이라 하여 매년 10월 12일을 콜럼버스의 날로 정해 기념한다.

특히 미국에서는 10월의 두 번째 월요일을 국경일로 지정해 신대륙 미국의 건국과 번영에 헌신한 이탈리아계(系) 미국인들의 공헌에 감사하고, 이들의 희생을 기리는 행사를 한다.

그러나 베네수엘라를 비롯한 일부 중앙아메리카 국가들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한 이래 150년 동안 1억 명에 달하던 원주민들이 300만 명으로 줄어들었는데, 이 모두가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상륙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콜럼버스는 인류 역사상 가장 큰 학살을 촉발한 침략자이지 존경할 만한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이 날을 '원주민 저항의 날'로 바꾸자.'는 움직임도 일고 있다.[1]

미국의 기념일

콜럼버스의 날은 1906년콜로라도주의 공식 휴일이었으며 1934년에 연방 휴일로 지정되었다.
하지만 미국인들은 콜럼버스의 항해를 식민지 시대부터 기념일로 여겼다.
1792년 뉴욕을 비롯한 미국내 다른 도시에서는 콜럼버스아메리카대륙 상륙 이후 300주년 기념을 자축했다. 1892년 벤자민 해리슨 대통령은 시민들에게 콜럼버스의 날 400주년 기념일을 축하하도록 강조했다.
400주년 기념일에 교사, 성직자, 시인, 정치가들은 콜럼버스의 날 기념일을 통해 사람들에게 애국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애국적 행사는 국가에 대한 충성, 시민권 행사, 사회 발전 축하 등을 위한 방향으로 많이 행해졌다.

19세기 중반 로마 가톨릭 이민자들이 미국으로 들어오면서 쿠 클럭스 클랜(Ku Klux Klan)과 같은 이민을 반대하는 단체가 생겨났다. 이민 반대 시위에 대항한 많은 미국 이민자들과 마찬가지로 가톨릭 이민자들은 이민에 대한 차별에 대항 할 수 있도록 조직을 형성하였으며 반이민 시위에 투쟁하는 동료 이민자들을 지원했다. 조직명은 콜럼버스 기사단(Knights of Columbus)이었다. 이러한 이름을 선택하게 된 동기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가톨릭 신자였고 이민자의 시민권을 상징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당.

일부 이탈리아계 미국인은 1866년 10월 12일 뉴욕시에서 콜럼버스의 날을 축제일이라고 주장하였다.처음에 콜럼비아의 날은 덴버(Davner)에서 이탈리아계 이민자 1세 안젤로 노스(Angelo Noce)의 로비 활동을 통해 미국의 공휴일로 유명해졌다. 1905년 콜럼버스의 날은 맥도날드 제시(Jesse F. McDonald) 콜로라도 주지사의 공식 선언으로 공휴일로 지정되었고 1907년에는 토요일 또한 공휴일로 지정되었다. 샌프란시스코(San Fransico)는 1869년부터 이탈리안계 미국인 들이 기념해왔고 콜럼버스의 날에 대해 두 번째로 기 역사를 갖고 있다. 1934년 콜럼버스 기사단(Knights of Columbus), 민중, 루즈벨트 대통령의 로비 활동을 계기로 같은 해 10월 12일 '콜럼버스의 날'이란 명칭으로 공식 연방 공휴일로 지정되었다.

1971년부터 콜럼버스의 날은 10월 둘째 주 월요일로 변경이 되었으며 우연히 캐나다추수 감사절과 같은 날이 되었다. 현재 은행, 채권 시장, 우체국, 연방 조직, 대부분의 정부 사무실, 학교는 콜럼버스의 날에 쉰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기업 및 증권 거래소는 쉬지 않으며 미국내 몇몇 주는 공휴일로 준수 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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