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성구 설교 자료 은혜(11. 06. 2022), 성령 훼방 죄(04. 20. 20) .물세례와 불세례, 3. 언약, 4. 하나님의 형상, 5. 지혜, 지식, 명철, 6. 은혜, 7. 추수감사


11-27-2022(추수감사주일)

범사에 감사하라(데살로니가전서 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공동번역)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보여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

(새번역)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여 파트리스교회 모든 성도들과 더불어 감사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 찾아봅니다.

첫째는 코로나의 위기를 모두 건강하게 지낸 것에 대한 감사
둘째는 예배 장소를 제공하신 붐붐데이케어 운영진에 대한 감사
셋째는 지금까지 지내 온 것에 대한 감사
넷째는 2023년을 기대하는 감사

첫째는 건강에 대한 감사  

코로나의 위기를 모두 건강하게 지낸 것에 대한 감사

파트리스교회 평균 연령은 대략 세라고 하겠습니다.
코로나는 노약자들에게 치명적이기 때문에 파트리스교회의 경우 한 사람도 쓸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었습니다.
물론 제 경우 1차 감염 후 항체가 형성되었다고 하여 걱정하지 않았는데 2차 감염때는 매우 심각한 상태이었습니다.
얼마다 고통스럽던지 밤새도록 콧물이 흐르고 열이 오르며 잠을 이룰 수 없어 차라리 이렇게 고통스럽다면 죽는 것이 더 편하겠다는 생각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2차 감염의 위기를 지나면서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심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아주 어렸을 때는 서소문동에 지금은 한일병원이지만 예전에는 경전병원이었습니다.
당시 검은색 지프차 뒤에 제 또래의 여자 아이와 앉아  있었는데 차가 후진하면서 여자 아이는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고 나는 응급실로 옮겨졌습니다. 얼마 후 응급실에서 니왔는데 마침 죽은 여자 아이를 안고 정신을 잃어버린 엄마가 나를 보더니 달려왔습니다.
죽은 아이의 머리가 깨져서 머리에서 흘러내린 허연 골을 보는 순간 무서워서 다시 병원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때 그 여자 아이의 엄마는 울부짖으며 "너는 살았는데......." 하는 소리가 잊혀 지지 않습니다.
 
여러 차례 죽음의 순간에서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뿐입니다.  

둘째는 예배 장소를 제공하신 붐붐데이케어 운영진에 대한 감사

매주일 이곳에 모여 예배할 수 있도록 장소를 제공하신 붐붐 데이케어 운영진에게 감사합니다.
뉴욕에서 이만한 장소를 사용하려면 적어도 매월 $2,000은 필요합니다.
그런데도 사용료를 받지 않기 때문에 비록 주일에만 모이지만 편하게 예배할 수 있었습니다.

데이케어 운영진에게 2023년 벽걸용 달력 250부를 제작하여 감사의 표시로 선물로 드리고 있습니다.
또한 데이케어에 4명이 회원으로 등록했습니다(김은신권사님, 박태임권사님, 이건일집사님, 한완섭권사님).
매주 월요일에는 구은숙권사님께서 네일 자원봉사로 회원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셋째는 지금까지 지내 온 것에 대한 감사

감사하려면 대부분 특별한 일을 경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람직한 감사는 지극히 평범한 것에 감사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아주 오래 전 저희들이 온산공업단지 지역에서 목회를 할 때 울산 시내 어느 병원에서 신생아가 태어났는데 항문이 형성되지 않아 구멍을 뜷고 호수를 집어 넣어 몸 밖으로 나오도록 하는데 당시 의술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 결국 그 아이는 부모의 품을 떠나야 했습니다.

이와 같은 사례를 생각하며 똥구멍 감사라고 소개했습니다.
사람은 누구가 태어날 때 항문을 갖고 태어납니다.
모두가 갖는 것이므로 감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항문이 없는 아이와 그 부모에게는 항문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깨닫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믿음이란 다른 사람의 문제를 마치 나의 문제로 인식하고 감사할 줄 아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넷째는 2023년을 기대하는 감사

대외적으로는 설교자들을 위하여 설교 작성을 돕기 위한 자료를 제공하려고 합니다.
현재 대략 3천명 이상이 그 자료를 참조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성경 전체를 1차 년도에는 "사랑"이라는 주제로 읽게 됩니다.
물론 성경 전체를 1년에 일독 하도록 계획합니다.
매주간 읽어야 할 말씀을 함께 읽고 읽은 내용 중에서 설교 본문과 제목을 정하고 말씀을 묵상하는 계획입니다.

내적으로는 주일 설교와 수요 성경 여행 그리고 새벽의 묵상을 3명의 목회자가 전담하여 믿음의 공동체를 성경적으로 섬기고 세워가려고 합니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히브리서 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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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6-2022(주일)

아 하나님의 은혜로(히브리서 4: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은혜(恩惠)

χάρις, ιτος, ἡ  5485

1. 우아함,  2. 은총,  3. 은혜로운 행위

발음 / 카리스(charis) 
어원 / 546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은혜(눅 1:30, 행 4:33, 몬 1:3), 칭찬(눅 6:32, 34), 칭송(행 2:47), 은총(행 7:10), 호의(행 25: 3), 은사(고후 9:15), 기쁨(몬 1:7), 아름다움 (벧전 2:19,20), 사랑스러움(눅 2:52), 감사 (눅 17:9, 롬 6:17, 고후 8:16, 골 3:16).
신약 성경 / 156회 사용

* 5463.  χαίρω  

1. 기뻐하다,  2. 안녕,  3. χαῖρε

발음  / 카이로(chairō)          
관련 성경 / 기뻐하다(마 2:10, 고후 6:10, 빌 4:10), 즐거워하다(마 5:12, 눅 19:6, 벧전 4:13), 평안하다 (마 27:29, 눅 1:28, 요 19:3),
즐겁다(눅 15:5), 문안하다(행 15:23, 23:26), 기쁘다(고전 7:30, 요이 1:4), 기쁘게 하다(고후 7:7).
신약 성경 / 74회 사용

은혜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카리스"라고 합니다.
카리스의 어원은 카라 즉 기쁨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은혜는 기쁜 것을 말합니다.
무엇을 기뻐할까요?

첫째는 죄를 이기는 기쁨(은혜)(요한일서 3:8-9)
둘째는 죽음을 이기는 기쁨(은혜)(고린도전서 15:55-57)
셋째는 세상을 이기는 기쁨(은혜)(요한복음 16:33)
넷째는 심판을 이길 수 있는 기쁨(은혜)(요한복음 5:29)

은혜는 기쁨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기쁨을

첫째는 죄를 이기는 기쁨(요한일서 3:8-9)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예화) 형의 옷을 입은 동생의 이야기

중국에서 실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부모를 잃고 살아가던 두 형제가 있었습니다. 

형은 동생을 몹시 사랑했습니다.
형은 평판이 좋은 사람이었지만 동생은 싸움과 도박을 일삼던 불쌍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동생이 패싸움을 하다가 홧김에 그만 사람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경찰에 쫓기던 동생은 다급한 마음에 형에게 달려와 도움을 청했습니다.
형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비장한 얼굴로 동생의 피 묻은 옷을 벗겨 자기의 옷과 바꿔 입었습니다.

동생이 형의 옷을 입고 달아난 후 형은 현행범으로 체포되어 결국 사형언도를 받았습니다.
한편 겁에 질려 달아났던 동생이 뒤늦게 이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고통 하다가 마침내 자수하였고 경찰은 그를 곧바로 수감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사회적인 관심 속에서 재판에 다시 회부되었습니다.
배심원들의 오랜 심의와 토론 끝에 마침내 판사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무죄를 선언합니다.”
그 이유는 동생의 이름으로 이미 법이 심판을 집행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같은 사건을 두 번 처벌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분명히 그는 죄인이었으나 법은 그에게 죄를 묻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그를 대신해서 죄값을 치렀기 때문에 그는 법적으로 죄가 없게 된 것입니다.
죄는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이므로 구원을 받기위해서는 이와 같이 법적으로 분명하게 죄 없다 함을 인정 받아야만 합니다.

사형 집행 전에 형이 남긴 편지글을 동생은 뒤늦게 읽게 되었습니다.

“나는 너의 죄의 옷을 입고 너 대신 죽노라. 이제 넌 나의 옷을 입고 나처럼 살아다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라디아서 3:27).

이미 우리는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나의 죄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으므로 죄의 대가를 지불하셨으며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에 사망의 권세에서 자유를 얻었다는 증거라고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세례를 받은지 너무 오래 되어서 세례를 다시 받아야 하겠다고 합니다.
이런 신앙은 아직도 세례의 의미를 성경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또 어떤 교회는 세례가 아니라 침례를 받아야 하므로 재세례를 요구합니다.
이것도 비성경적인 신앙입니다.
이런 교리를 가르치는 교회를 구원파라고 합니다.
구원파가 강조하는 것은 만일 당신이 구원을 받았다면 언제 어디에서 구원을 받았는지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내가 태어날 때 언제 어디에서 태어날 줄 알았습니까?
어느 누구도 태어날 시간과 장소를 알고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태어난 후에 부모로부터 날자를 들었고 태어난 장소를 듣고 알았을 뿐입니다.
세례를 받았다면 이미 구원받았다는 것을 믿음으로 확신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다른 교리와 가르침에 흔들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둘째는 죽음을 이기는 기쁨(고린도전서 15:55-57)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예화) 마법의 사과

어떤 임금님에게 외동딸이 있었는데, 그 공주가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시달리며 자리에 눕고 말았습니다.
온 나라에 유명한 의사들이 모두 동원되어 공주의 병을 고치려 하였으나 아무도 고칠 수 없었습니다.
고심하던 임금님은 딸의 병을 고쳐주는 사람을 사위로 삼을 것이며 장차 왕의 자리까지도 물려주겠다고 온 나라에 포고문을 붙였습니다.

아주 외딴 시골에 삼형제가 살고 있었는데, 그 형제들은 아주 특이한 물건들을 갖고 있었습니다.
맏아들은 아주 먼 곳에 있는 것도 바로 눈 앞에 있는 것처럼 볼 수 있는 신비한 망원경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 망원경으로 포고문을 읽고 동생들에게 말했습니다.
둘째 아들은 신비한 양탄자를 갖고 있었는데 그 양탄자에 올라타면 목적지까지 순식간에 도착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형제들은 그 양탄자 위에 올라앉고 왕궁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셋째 아들은 마법의 사과 갖고 있었는데 그 사과를 먹으면 당장 죽어가던 사람도 기운을 차리고 건강하게 살아날 수 있는 시비한 사과이었습니다.
셋째가 공주에게 그 사과를 주어 먹게 하였는데 공주는 즉시 그 자리에서 일어나 건강을 되찾았습니다.
 
온 백성들은 공주의 병이 나았다는 소식을 듣고 거리로 쏟아져 나와 기뻐했으며, 임금님은 큰 잔치를 벌이고 사위이자 다음번 임금이 될 사람을 발표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삼형제들은 서로 자기가 왕의 사위가 되어야 한다며 논쟁하고 있었습니다.
누가 공주의 남편이 될 수 있을까요?

큰 형이 말하기를 '만일 내 망원경으로 포고문을 보지 못했다면 우리는 공주가 병으로 누운 사실도 몰랐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자 둘째는 '만일 날아다니는 내 양탄자가 없었다면 이 먼곳까지 어떻게 왔겠느냐?'고 말합니다.
드디어 임금님은 사위가 될 사람은 셋째라고 발표했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의 그 망원경은 그대로 남아있고, 둘째도 타고 온 융단이 그대로 남아 있으며 셋째의 사과는 공주가 먹어버려 없어졌기 때문에 없어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지혜의 문학 탈무드가 가르치는 교훈은 "도움을 줄 때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는 것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라고 합니다.

죄의 결과는 사망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죽음이 끝이 아니라 죽음 이후에는 다른 세계가 있습니다.
심판을 받은 후에 천국으로 갈 수도 있고 지옥으로 갈 수도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세상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 반드시 구원받은 백성들이 가야 할 천국을 바라며 소망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세상을 이기는 기쁨(은혜)(요한복음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세상을 이긴다는 것은 이미 공중 권세를 잡은 사탄이 세상을 지배하고 다스리기 때문에 죄의 유혹에 끌려가 죄의 노예가 되어야 하지만 우리 주님께서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에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내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거주하시는 예수님께서 이기게  하십니다.

(예화) 한승옥권사님의 지혜

사랑하는 딸의 사위감을 찾으며 기도할 때 김미지
년말이면 자매부대를 방문하여 예배하고 음식을 대접하는데 마침 반주자가 없어서 권사님의 딸이 반주하게 되었다.
당시 딸은 부신 침례병원 수간호사로 근무하였는데 마침 근무가 없는 날이라 반주로 봉사하게 되었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돌아왔는데 몇 주 후에 그 부대 소대장이 집을 찾아와서 권사님에게 딸과 사귀겠다고 하더랍니다.
권사님께서 안 된다고 하면 예수를 모르는 소대장이 실망할까봐 잠시 묵상하며 기도하기를 "하나님 지혜를 주세요!" 그리고 소대장을 집안으로 들어오게 한 후 차를 대접한 후에 "실은 딸의 약혼자가 미국에서 공부하는 중"이라고 하였더니 잘 알겠다고 하며 돌아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몇 년이 지났어요.
딸이 시집을 가지 않고 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미국에서 목사님이 전화를 하셔서 권사님에게 사위감을 소개한다며 이름을 알려주고 한국으로 나갈 것이라고 하더랍니다.
약속된 날 부산역에서 기다리는데 이름만 들었기 때문에 얼굴은 모르지만 역에서 승객들이 나오는데 웬 젊은이가 걸어나오는데 속에서 "저 사람이구나" 하더랍니다. 그래서 그 젊은이에게 아무개가 맞느냐고 물었더니 맞다고 하여 한국에서 결혼 후 딸은 미국으로 시집을 갔다고 합니다.

넷째는 심판을 이길 수 있는 기쁨(은혜)(요한복음 5: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예화) 박동진 명창의 예수 영접

제가 신대원에 재학 중 당시 박동진씨가 간증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기독교 방송국에서 시골의 어르신들에게 성경을 창으로 들려주려고 박동진씨를 초대하여 복음서의 내용을 창으로 녹음을 시작하였는데 어느 정도 복음서의 내용이 거의 마무리 될 무렵 박동진씨가 방송국 관계자에게 이제까지 녹음 한 것 모두 폐기하고 다시 하자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관계자가 놀라서 안 됩니다. 이제 거의 마쳐가는데 왜 다시 합니까?

더구나 방송국 예산이 부족하여 다시 녹음을 하면 그 돈을 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자 박동진씨가 이전에 녹음을 한 것은 내가 예수를 모를 때 돈을 벌기 위해서 녹음한 것이지만 이제는 내가 예수를 영접하였으므로 돈은 받지 않을테니 다시 하자고 하여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일대기를 창으로 녹음하였다고 합니다.

명창 박동진님의 믿음은 장차 심판의 자리에 서게 될 때 양의 무리와 같이 오른편으로 옮겨질 수 있다는 믿음을 확신하였기에 복음의 내용을 창으로 다시 복음하는 기쁨에 매일같이 감격의 삶을 살아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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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훼방 죄(마가복음 3:29)

1차 설교 / 04 - 20-2022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
But whoever blasphemes against the Holy Spirit will never be forgiven; he is guilty of an eternal sin.

* 성령 훼방 죄는 "하나님의 일을 사람의 일로 바꾸는 것이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 고백은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제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하여 처음으로 고백한 내용입니다.

베드로의 고백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이에 제자들을 경계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가 공개적으로 드러난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아직 때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라고 말했을 때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사단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방금 전에 베드로에게 반석 위에 주님의 교회를 세울 것이라고 하셨고, 음부의 권세가 이길 수 없을 것이며, 천국 열쇠를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예르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는 그런 일이 주님에게 일어날 수 없습니다. 하며 주님의 말씀을 거부했습니다. 그 순간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책망하신 것입니다.

성령 훼방 죄가 무엇인지 이해가 되셨습니까?
하나님의 일을 사람의 일로 바꾸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이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삼일 후에 다니 살아나심으로 모든 백성들을 죄 가운데서 구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구원 사역을 반대하고 부정하는 것이 곧 성령 훼방 죄에 해당한다고 하겠습니다.

성령 훼방 죄에 서 자유롭게 되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ref : 마태복음 12:22∼32
       마가복음 3:22∼30
       누가복음 12:10
       -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어느 여전도회 회장 권사님의 사례(김경애 권사)

여전도회 회장으로 봉사할 때 "세례"에 대해 여전도회 회원들과 이야기를 하던 중 "나는 어릴 때 유아세례를 받았다."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어느 회원이 유아세례를 받으면 성인이 된 후에 "입교문답"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목사님에게 전달되었고 목사님은 그 이야기를 들은 후에 어느 주일에 "성령 훼방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는 설교를 하였고 그 설교를 듣고 나는 성령을 훼방한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여러 해 동안 고민하던 중 결국에는 부산 구포라는 지역에 김해와 연결되는 낙동강 하류에 세워진 구포대교 위에서 투신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성령 훼방 죄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과 잘못된 이해 때문에 일어났던 한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성령 훼방 죄" 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하여 성령 훼방 죄에 대한 말씀의 배경을 관찰해야 합니다.
신약 성경에서 성령 훼방 죄를 언급한 내용을 마태복음 12장마가복음 3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2:22∼32

마태복음의 배경은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1-8절), 회당에 들어가서 손 마른 사람을 안식일에 고쳐주신 사건(9-21절), 그리고 성령 훼방죄에 대한 사건(22-32절)이 소개됩니다.

귀신 들려 눈 멀고 벙어린 된 사람을 데리고 왔을 때 예수님께서 고쳐주심으로 말을 하고 보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고 놀랐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은 그 이야기를 듣고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이와 같은 생각과 말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31-32절)

마태복음에서 증거하는 "성령 훼방 죄"란 "예수님께서 귀신들려 눈 멀고 벙어리 된 사람을 고쳐주신 것을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도움을 받아 행하신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마태복음에서 성령 훼방 죄는 예수님 당시 예수님의 사역을 귀신의 사역이라고 부정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3:22∼30

마가복음 3장의 배경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신 사건(1-6), 바닷가로 몰려든 군중들은 많은 병자를 고치셨으므로 병에 고생하는 사람들이 예수를 만지려고 모여들었고 더러운 귀신들이 예수를 보면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외쳤던 사건(7-12절), 12제자를 부르신 사건(13-19절), 성령 훼방 죄에 대한 사건(20-30절)이 소개됩니다.

마가복음에서 증거하는 성령 훼방 죄란 바리새인들이 예수가 미쳤다고 하므로 붙잡으려고 찾아왔을 때 마침 예루살렘엥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예수께 바알세불이 지폈다 하며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난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사람의 모든 죄와 무릇 훼방하는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한다."고 하셨습니다.

마가복음에서 증거하는 성령 훼방 죄 또한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치시고 귀신들을 쫓아내는 것이 귀신의 힘을 빌려 행하는 것이라는 것으로 마태복음과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행하시는 사역의 특징을 살펴보겠습니다.

누가복음 4:18-19
,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은 구약 이사야서 61:1-3에 예언된 메시아 사역으로 희년의 선포에 관한 말씀입니다.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바 그 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병든 자를 고치시고 귀신들을 사람들을 회복시키신 것은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 사역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성령 훼방 죄는 예수님께서 메시아 사역을 행하시는 것을 귀신의 능력이라고 비난하고 부정하는 죄를 말합니다.

여러분 잘 기억해야 합니다.
"성령 훼방 죄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사역이 곧 예언된  메시아 사역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암의 종류가 다양하지만 특히 증세를 잘 느끼지 못하는 "간암"이란 질병은 네 단계를 거쳐 발전한다고 합니다.
첫째는 바이러스
둘째는 간염
셋째는 간경화
넷째는 간암

마찬가지로 성령 훼방 죄에 이르는 과정을 네 단계로 살펴보겠습니다.

성령 훼방 죄에 이르는 단계

1단계 : 성령을 근심케 하는 것(에베소서 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 치심을 받았느니라.
And do not grieve the Holy Spirit of God, with whom you were sealed for the day of redemption. 

우리 주변에는 늘 죄의 유혹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제는 죄의 문이 “스마트폰”이라는 손 안에 쥐어져 있고, 터치 한 번에 걷잡을 수 없는 죄악들이 물밀듯이 들이닥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믿는 자들 또한 예외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성령을 마음에 모신 자들에게도 이러한 죄의 유혹들은 어김없이 찾아옵니다.

이 때에 마음이 미혹되어 흔들리거나 떠다니는 죄의 유혹을 마음으로 붙잡는다면, 성령께서 근심하십니다. 잡은 거 놓으라고 하십니다. 그거 잡으면 죽는다고 이러한 성령의 음성이 들린다면 그건 놀라운 은혜요 축복입니다. 나의 영혼이 살아있다는 증거니까요.

2단계 :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데살로니가전서 5:19) 

성령을 소멸치 말며.
Do not put out the Spirit's fire; 

성령을 소멸하는 단계는 “성령께서 하라고 하신 것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말씀보고 기도하며 보좌 앞으로 나아가 시시때때로 주를 의지하여 마음을 토하며 함께 교제하자고 이끄시는 그 음성 또는 지속적으로 들려오는 그 성령의 탄식소리를 무시하고 소멸한다는 것입니다. 육신이 원하는 대로 자기 자신을 방치하며 성령께서 내미시는 손길을 잡지 않고 뿌리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들려주시는 음성에 귀를 막는 것입니다. 자기가 듣고 싶은 얘기만 듣고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정작 우리의 유익과 믿음의 성장을 위해 들려주시고 보여주시는 성령님을 등지고 돌아서는 것이 바로 성령을 소멸하는 것입니다.

3단계 : 성령을 거스림(사도행전 7: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You stiff-necked people, with uncircumcised hearts and ears! You are just like your fathers: You always resist the Holy Spirit! 

이제 성령을 거스리는 심각한 단계로 접어듭니다. 성령을 거스린다는 것은 “성령께서 하지 말라는 것을 의지를 동원하여 거역하는 것”입니다. 이 단계를 반복하면서 마음은 점점 굳어져갑니다. 육신의 원하는 대로 반복적으로 거스려 행하다보면 처음엔 주저하며 조심스럽게 거스리지만 이제는 탐욕과 죄에 연단된 담력을 가지고 담대히 죄를 행하게 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러한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하고 자랑하기에 이릅니다. 자신이 참으로 두렵고 무서운 자리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도 망각한 채 말입니다. 

4단계 : 성령을 훼방함(마가복음 3:29)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 
But whoever blasphemes against the Holy Spirit will never be forgiven; he is guilty of an eternal sin.

간암 말기 상태가 되면 회복이 불가능합니다.
배에 물이 가득차서 마치 임신한 사람처럼 배가 부풀어 오릅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자신의 종교적 자위와 기득권을 잃어버리지 않기 메시아로 예언된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귀신들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고치실 때 그것은 바알세불 곧 귀신의 왕을 힘입어 행하는 것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이러한 죄가 성령 훼방 죄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성령 훼방 죄는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과 사두개인들처럼 메시아를 갈망하면서도 예언된 메시아가 오셨을 때에 반대하고 비난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지금 이 세상에는 예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령 훼방 죄는 예수를 증거할 때 예수를 영접하지 않는 죄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고 따르지 않는 무리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 마귀의 자식, 회칠한 무덤, 지옥자식”이라고 하셨습니다.


로마서 8:12~14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로마서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죄
성령을 소멸하는 죄
성령을 거역하는 죄
성령을 훼방하는 죄

이러한 죄가 단계적으로 거듭 반복되어 사망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내가 죽고 성령님과 하나 되어 연합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이전 것은 곧 “옛사람”을 말합니다.
성령을 근심하게 하며, 소멸하고, 거역하며, 훼방하던 삶을 말합니다.
이러한 삶이 지나가고 새 것은 곧 “새 사람, 성령의 사람”을 말합니다.
말씀을 날마다 내 육체에 선포하며 내가 죽고 그리스도(성령)로 사는 것입니다. 이믿음으로 살지 않으면 날마다 집요하게 파고드는 죄와 사망권세를 이길 방도가 전혀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탄마귀는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이 복음의 핵심이 수면위로 드러나는 것을 심히 두려워합니다.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이 다시 살아나듯이 이 마지막 때에 성령으로 충만한 이기는 자들, 다시 오실 재림의 주를 기다리는 주님의 신부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이제는 성령을 등지고 사는 영적인 간질환 환자들이 회복되어져 진정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주님의 신부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자리에서 떠나야 합니다.
성령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자리를 피해야 합니다.
성령을 무시하고 내가 주인 되어 마음에 원하는 자리를 버려야 합니다.
성령의 음성에 귀 기우리며 순종하며 살아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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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를 위한 자료

훼방(毁謗) - 헐 훼(毁), 헐뜯을 방(謗)
1. 남의 일을 잘못되게 하거나 못하게 함
2. 남을 헐뜯어 비방함

 
βλασφημήσῃ - βλασφημέω(blasphémeó)
Definition : to slander, to speak lightly or profanely of sacred things

Usage : I speak evil against, blaspheme, use abusive or scurrilous language about (God or men).       

정의 : 중상하고, 경건하거나 비속 적으로 신성한 것들을 말하다

사용법 : (신 또는 남성)에 대해 악을 말하고 신성 모독하거나 모욕적 인 언어를 사용합니다.

훼방이란 단어의 뜻은 “헐뜯어 비방함” 또는 “잘못되게 하거나 못하게 함”
그러나 성경에서의 훼방이란 “신성 모독”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성령 훼방 죄는 “신성 모독 죄” 라고 하겠습니다.
 
교회 전통에서는 부활주일 다음으로 맞이하는 주일을 “성 도마 주일” 또는 “신생아주일” 이라고 합니다. ‘성 도마 주일’ ‘신생아 주일’이란 예수님의 부활을 자기 손으로 만져본 후에야 믿겠다고 의심했던 제자 도마에게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의 경우)
사탄아 네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최경일 장로의 경우)
울산에서 현대자동차 부품을 납품하는 회사 경영
십일조가 상당한 금액으로 헌금
교회에서 집사 임명을 하려고 한다.
유아세례 후 입교문답을 하지 않았다고 하자
집사 임명을 취소


“성령을 훼방하는 죄”에 대하여 설명해 주는 몇 가지 구절들이 있습니다.

요한일서 5:16, 사망에 이르는 죄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히브리서 6:4∼6, 타락한 자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히브리서 10:29,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이 세 구절을 통해 볼 때 이 말씀이 적용되는 대상이 모두 “믿는 자들” 이라는 점입니다.

불신자가 하나님을 욕하고 성령을 훼방한다면, 몰라서 그런 것이니 회개의 기회가 있을 수 있겠지만,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자신을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한 자는 영원한 사망에 이르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성령 훼방 죄는 결코 어느 날 갑자기 믿음 생활 잘 하던 사람이 돌변하여 성령을 등지고 욕하며 훼방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믿는 자가 이 지경까지 갈 수 있는지 단계적으로 말씀을 통해 고찰해 봅니다.

우리 몸의 여러 장기들 중에서 노폐물을 걸러내고 하수처리 역할을 하는 정화조와 같은 장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간”입니다. 간은 소위 “침묵의 장기”라고도 일컬으며, 우리 몸에 가장 큰 장기입니다.

묵묵히 듬직하게 자기 역할을 수행하며 재생능력도 탁월하여 정상크기의 1/6만 남아있어도 살아갈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간이 망가지고 제 기능을 잃어버리면 몸 안으로 들어오는 독소와 노폐물들이 걸러지지 않아 바로 생명과 직결이 된다고 합니다.

우리 영혼 속의 성령의 역할이 바로 이 간 기능과 흡사한 부분이 많습니다.

성령 훼방 죄에 이르는 단계

1단계 : 성령을 근심케 하는 것(에베소서 4:30) - 지방간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 치심을 받았느니라.
And do not grieve the Holy Spirit of God, with whom you were sealed for the day of redemption. 

우리 주변에는 늘 죄의 유혹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제는 죄의 문이 “스마트폰”이라는 손 안에 쥐어져 있고, 터치 한 번에 걷잡을 수 없는 죄악들이 물밀듯이 들이닥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믿는 자들 또한 예외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성령을 마음에 모신 자들에게도 이러한 죄의 유혹들은 어김없이 찾아옵니다.

이 때에 마음이 미혹되어 흔들리거나 떠다니는 죄의 유혹을 마음으로 붙잡는다면, 성령께서 근심하십니다. 잡은 거 놓으라고 하십니다. 그거 잡으면 죽는다고 이러한 성령의 음성이 들린다면 그건 놀라운 은혜요 축복입니다. 나의 영혼이 살아있다는 증거니까요.

2단계 :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데살로니가전서 5:19) - 간염

성령을 소멸치 말며.
Do not put out the Spirit's fire; 

성령을 소멸하는 단계는 “성령께서 하라고 하신 것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말씀보고 기도하며 보좌 앞으로 나아가 시시때때로 주를 의지하여 마음을 토하며 함께 교제하자고 이끄시는 그 음성 또는 지속적으로 들려오는 그 성령의 탄식소리를 무시하고 소멸한다는 것입니다. 육신이 원하는 대로 자기 자신을 방치하며 성령께서 내미시는 손길을 잡지 않고 뿌리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들려주시는 음성에 귀를 막는 것입니다. 자기가 듣고 싶은 얘기만 듣고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정작 우리의 유익과 믿음의 성장을 위해 들려주시고 보여주시는 성령님을 등지고 돌아서는 것이 바로 성령을 소멸하는 것입니다.

3단계 : 성령을 거스림(사도행전 7:51) - 간경변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You stiff-necked people, with uncircumcised hearts and ears! You are just like your fathers: You always resist the Holy Spirit! 

이제 성령을 거스리는 심각한 단계로 접어듭니다. 성령을 거스린다는 것은 “성령께서 하지 말라는 것을 의지를 동원하여 거역하는 것”입니다. 이 단계를 반복하면서 마음은 점점 굳어져갑니다. 육신의 원하는 대로 반복적으로 거스려 행하다보면 처음엔 주저하며 조심스럽게 거스리지만 이제는 탐욕과 죄에 연단된 담력을 가지고 담대히 죄를 행하게 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러한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하고 자랑하기에 이릅니다. 자신이 참으로 두렵고 무서운 자리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도 망각한 채 말입니다. 

4단계 : 성령을 훼방함(마가복음 3:29) - 간암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 
But whoever blasphemes against the Holy Spirit will never be forgiven; he is guilty of an eternal sin.

간암 말기 상태가 되면 회복이 불가능합니다. 배에 물이 가득차서 마치 임신한 사람처럼 배가 부풀어 오릅니다.

성령 훼방 죄


모든 죄는 용서받을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류의 모든 죄로부터 해방을 초래하였으므로,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그 죄로부터 사함을 받는다. 그러나 성경은 용서받지 못하는 죄에 대해서 특별히 말하고 있다. 그것을 소위 "성령훼방죄"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 12:31-32)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무릇 훼방하는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있느니라"(막 3:28-29)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눅 12:10)

혹간 몇 명의 청년들이 성령훼방죄에 대해서 매우 심각하게 상담을 해온 적이 자주 있다. 자신은 전에 성령을 모욕하는 말을 한 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성경을 보니 "성령훼방죄"라는 것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마태복음은 성령훼방죄에 대해서 "말로 성령을 거역하는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누가복음은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함을 받지 못한다고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미 자신이 성령훼방죄가 아닐까 걱정하는 분이라면 그 자체로 벌써 성령훼방죄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령훼방죄는 성령의 뜻을 알면서도 고의나 악의적으로 죄를 짓는 것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즉 성령훼방죄에 해당되는 죄는 회개를 수반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근심을 한다거나 양심에 찔림을 받아 고민을 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이미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았거나, 고의적이지 않았다는 증거이며, 즉 성령훼방죄가 아닙니다.”

"훼방"이란 말은 헬라어 "블라스습헤미아"로써 성경에서는 주로 "참람, 훼방"으로 번역하였다. 그 원래의 의미는 중상(특히 하나님에 대항하는), 참람(신적위엄을 손상시키는)을 말한다.

사도 바울은 딤전1장 13절에서 자신을 "훼방자"였다고 말하는데, 그 단어는 "블라습헤모스"라는 형용사로서 같은 어원을 갖는다.  만일 전에 성령을 훼방한 죄가 용서를 받지 못한다면 사도바울도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전에는 훼방자(블리습헤모스)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딤전 1:13)

바울은 자신이 훼방자였음을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이 믿지 않을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한 것"이라고 말하며, 그러나 지금 자신은 긍휼을 얻었다고 말하고 있다.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인을 고발하여 잡아가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고, 잡혀간 그리스도인들은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다.

즉 우리가 기독교인이 되기 이전에 성령을 훼방한 죄에 대해서는 우리는 죄사함을 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바울의 딤전 1:13의 기록처럼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한 성령훼방죄"는 해당되지 않는다. 바울은 기독교인들을 강제로 잡아 하나님을 "모독"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바울이 구원을 받지 못하였으며, 죄사함을 받지 못하였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블라스헵메오) 말을 하게 하고 저희를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까지도 가서 핍박하였고"(행 26:11)

윗 본문은 바울이 다메섹을 가기 이전, 즉 예수를 만나기 직전의 기록이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형벌하였으며 잡아 가두는 일을 담당하였으며,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였고, 그 "모독하다"는 단어는 "블라스헵메오"로서 앞에서 언급한 단어와 동일한 어원을 갖는 동사이다.

즉 결론적으로, 성령훼방죄는 그리스도인이면서 고의와 악의로 성령을 참람하게 모욕하는 것을 말한다. 자신이 한때 이단이나 사이비집단에 속해 있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철저하게 뉘우치고 회개한 사람은 더 이상 성령훼방죄에 속하지 않는다. 진실로 성령으로 거듭난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절대로 성령을 훼방하는 말을 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죄라고 말할 수도 없다. 바울도 성령훼방과 모독죄를 범하던 때에는 유대교에 속하여 있었다.

즉 성령훼방죄는 단지 진리를 의심하거나 그것을 부정하는 자체를 말하거나 과거의 잘못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일체의 회개를 거절하고, 양심과 성령의 조명을 고의와 악의로 거절하며 모독하는 경우를 말한다.

만일 누군가가 그러한 성령훼방죄를 범하지 않았을까 두려워하며 그것에 대해서 고민하고 번민하며 기도를 요구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성령훼방죄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기독교는 과거의 잘못을 따지지 않으며, 현재의 상태인 믿음으로 구원을 확증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가 예수를 믿기 전에 성령을 훼방했던 것은 용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충분히 알겠는데, 그가 기독교인이었다가 성령을 훼방하는 말을 했다면 그는 과연 구원을 받느냐? 이것이 문제가 될 수 있을 것아다.

성경에 의하면, 자신이 현재에 믿음을 갖고 있고, 성령의 조명을 받으면서도 성령을 훼방하며 하나님의 아들을 욕되게 하는 자라면 그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한다. 히브리서 6장4-6절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한번 살펴보기로 하겠지만, 사도요한은 “사망에 이르는 죄”에 대해서 구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리하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요일 5:16)

그렇다면 사도요한이 말하는 “사망에 이르는 죄”가 과연 무엇일까?

요한일서를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거짓그리스도, 거짓 선지자에 대해서 미혹되지 말 것을 사도요한이 강조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요일 3:10에서는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가 나타남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고,
4장 1-6절에서는 배교, 적그리스도, 거짓 교사에 대한 미혹을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하여 사도요한이 말하는 “사망에 이르는 죄”는 배교에 대한 것이 명백하다.

그렇다면 과거에 믿음을 갖고 기독교에 몸을 담았다가 이단 혹은 사이비집단에 미혹된 사람은 배교이고 적그리스도, 거짓교사에 미혹당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다시 회개하여 주님에게 돌아온 사람은 성령훼방죄라고 말할 수 없다. 아무리 과거에 교회를 다녔지만, 그 당시의 신앙이 확실한 성령의 조명 안에 있었다고 말할 수가 없다. 그가 이단에 미혹된 것은 "알지 못하고 한 죄"이기 때문이다. 비록 이단교회에 빠져서 예수를 모욕하였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고의적으로 행한 일이 아니었다면(예를 들어 성경적인 지식이 부족하였거나, 제대로 된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그리고 현재 올바른 믿음을 갖고 진정으로 회개하였다면, 용서를 받을 수 있다. 성경은 회개하고 돌아온 사람에 대해서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말하는 경우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로, 몰라서 그랬던 것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었던 사람이 (극단적인 예를 들면 돈이나 여자등 다른 목적을 위하여) 고의적인 목적을 갖고 이단으로 갔다면, 그리고 다시 회개하지 않았다면 다시 돌이킬 수가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진정으로 성령으로 거듭난 자에게는 사실 성령훼방죄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벧전 4:3)

음란, 정욕, 술취함, 방탕, 행락과 심지어 우상숭배를 한 것도 과거의 행한 것을 돌이킨다면 더 이상 문제를 삼지 않는다. 기독교의 구원은 현재의 믿음이 중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그렇다면 히브리서 6장 4-6절은 어떻게 해석하여야 하나요?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히 6:4-6)

신자(信者)와 거듭난 자는 다르다. "성령이 내주하여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성령의 인치심으로 인하여 그 구원이 끝까지 보증이 된다. 그러나 성경은 "믿는 자"(信者)에게 있어서 믿음이 떨어지는 가능성의 경우를 언급하고 있다. 다시 말하여 구원의 주체가 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취소하지 않을지라도, 구원의 소망을 가진 우리의 입장에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을 바라보며 믿음 위에 굳게 서야만 한다.

히브리서 6장4-6절은 상당히 난해한 구절로 간주되는데, 그 난해성에 대한 중요한 요점은 두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1.  성령을 체험한 사람이 배교를 함으로서 구원이 취소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 성경은 분명히 성령으로 인 치심에 의하여 구원의 보증이 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2. 그렇다면 예수를 믿고 거듭난 사람이 실수로 이단집단에 미혹되었다가 다시 회개하여 돌아왔을 경우에 그는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본문은 타락한 자는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예수를 두 번 못 박을 수 없다고 표현하고 있다.

먼저 두 번째의 답변은 어렵지 않다. “회개케 할 수 없다”고 하였기 때문에, 진정한 회개를 한다는 자체가 다시 돌이킬 수 있다는 뜻이 되어진다. 

히브리서10:26-29에는 유사한 경우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 경우는 (1) 하나님 아들을 밟고,
(2) 거룩하게 하는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3) 성령을 욕되게 하는 경우로서, 고의적인 훼방죄를 말한다.

즉 회개를 거부하며 고의적으로 욕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

과연 히브리서 본문이 말하는 사람은 어떤 유형의 사람일까?

1. 성령체험을 한 그리스도인이 배교를 한 경우인가?
2. 진실로 성령체험을 하지 못한 형식적인 그리스도를 말하는가?

어찌 되었든 히브리서 본문은 어떤 행위로 인하여 성령으로 거듭난 자가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는 내용은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경우는 보편적인 경우가 아닌 매우 드문 특별한 경우임에 분명하다.  

만약 그들이 진정으로 믿음을 갖고 성령으로 거듭난 자 자들이라면, 왜 성경은 “한번 비침을 얻고, 맛보고, 참여한 바 되고”라는 애매한 표현을 하였을까? 이러한 단어에 대해서 많은 학자들의 전문적인 연구가 있어왔다. 그러나 이러한 단어는 완전히 거듭나서 성령이 내주하는 성도에게 사용되었다고 보기에는 무언가 미흡한 것이 사실이다.

예를 들면 “비침을 얻었다”는 단어에 대해서 초대교회 교부들은 “세례를 받았다”라는 뜻으로 해석하였던 적도 있었는데, 현재도 Barclay, F.F.Bluce 같은 학자들은 그렇게 해석을 하고 있다. 헬라어 “포티스텐타스”라는 단어는 히브리서 10:32에서 사용되는데, 기독교의 입교 혹은 복음을 받아들인 것을 의미하다고 해석이 되어지므로 정확한 해석이 어렵다.

어쨌든 “한번 비침을 얻었다”는 표현에서 “한번”이라는 헬라어 단어는 “하팍스”인데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경우가 아니라 “한번(once)”이라는 의미이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 복음을 한번 받아들였다거나, 예수그리스도의 영광과 은혜라는 조명을 한번 비침으로 국한시킨다는 표현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맛보고”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규오마이”인데, 이 단어는 “먹다”(to eat)는 뜻도 있지만, “맛보다”(to taste)라는 뜻도 갖고 있다. 더 구체적으로는 “상징적으로 선이나 악을 경험하다”라는 뜻도 갖고 있다. 즉 어떤 음식을 먹는다는 의미도 있지만, 먹지는 않았지만 맛만 보는 그러한 개념도 갖고 있는 것이다. 이 단어에 대해서 “웨인그루뎀”은 그의 조직신학 중권에서 이러한 성경적인 예를 들고 있다.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아니 하시더라.”(마태복음 27:34)

예수님은 쓸개를 탄 포도주를 맛만 보고 마시지 않았는데 이 단어가 바로 “규오마이”가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이 의미는 실제로 먹은 것이 아니라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단지 맛만을 보았던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물론 “맛보았다”라는 단어는 “경험을 하다”라는 의미로도 사용되어질 수 있으며, 그러한 의미로 해석이 된다면 “내세의 능력을 맛보았다”라는 구절은 해석에 어려움이 뒤따른다.

그렇다면 “참예한 바 되고”라는 단어는 어떠한가? 헬라어 “메토코스”는 관계를 의미하는 단어인데 그 단어는 밀접한 관계를 의미하는 경우도 있고(히 3:14), 아주 밀접한 관계가 아닌 단순한 경우를 의미하는 경우에도 사용된다는 것이다.


참여하다(partake)는 의미는 “나누다, 분담하다, 함께 하다”는 의미이지만, “동참자, 동료”라는 단순적인 의미도 있기 때문이다.


웨인그루뎀”은 눅 5:7의 예를 들고 있다.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눅 5:7)

다른 배에 있는 “동무”가 “메토코스”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이 개념은 다른 고깃배를 타는 어부 동료를 뜻한다는 것이다.
즉 같은 배를 타는 밀접하고 직접적인 관계가 아니라, 단순적인 의미의 동반 혹은 참여를 뜻한다는 것이다.

웨인그루뎀은 그 증거로서 엡 5:7-8을 예로 든다.

“그러므로 저희와 함께 참예하는 자 되지 말라” (엡 5:7-8)

이 단어는 메토코스라는 단어에 syn(with)이 합성된 “쉼메토코스”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에베소서의 교인들이 불신자와 밀접하고 친밀한 관계를 가지지 말라는 뜻도 아니고 더욱이 불신자가 되라는 뜻도 아니며, 단지 불신자에게 악한 영향을 받지 않도록 단순한 교류나 타협을 하지 말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즉 “메토코스”라는 단어는 친밀하고 밀접한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동반의 개념을 갖는 참여를 의미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성령에 참예한 바 된다는 의미는 그들도 성령체험을 깊이 누렸다는 뜻보다는 성령체험을 하는 현장에 “함께 있었다” 혹은 “보았다”는 뜻이 될 수도 있고, “교회의 일에 함께 동참하였다”는 일반적인 의미가 되어진다는 것이다.

“한번 비침을 얻고, 맛보고, 참예한 바 되고”라는 의미는 그 배교자가 예수님의 제자와 사도들과 함께 그 현장을 체험하고 누리고 참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의미이며, 성령의 체험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결론이 되어진다.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구원의 경계선이 있다면, 그는 그 선 안에 들어온 사람은 아니며, 그 선을 밟고 있는 사람 또는 구원의 선에 막 미치지 못한 사람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다시 말하면 예수의 사도로서 함께 참여하였던 가롯 유다와 같은 경우를 뜻한다고 보여진다. 그는 예수와 함께 생활을 하며 기적과 표적을 보고, 성령의 역사와 은혜의 복음을 체험하였지만, 성경에는 가롯 유다가 온전히 성령이 내주하여 거듭났다고 볼 수 있는 구체적인 증거가 없다.

즉 구원이 취소가 될 수 있다고 해석이 될 수 있는 경우는 매우 제한적이며 한정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성령체험에 대한 시점의 다양한 해석문제일 뿐이다. 

즉 온전하게 구원을 받기로 하나님이 선택하여 성령을 보내주신 사람의 구원이 취소된다는 성경구절은 없다.

이러한 애매한 단어들의 선택은 그가 확실하고 완전하게 거듭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준다. 성령으로 거듭난 온전한 그리스도인에게 “한번 비침을 얻고, 맛보고, 참여한 바 되고”라는 용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이상하다. 반면에 불신자나 형식적인 그리스도인에게 “다시 새롭게 할 수 없고, 회개케 할 수 없다”는 무시무시한 말을 적용시킬 수도 없음에 우리는 동의하여야만 한다.

그리스도 밖에 있게 되면 우리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 반면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정죄를 받지 않는다. 뿌리와 연결되지 않는 가지는 열매를 맺을 수가 없으며 말라 죽게 되므로 결국 꺾임을 당한다.

“처음 믿음을 저버렸으므로 심판을 받느니라” (딤전 5:12)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딤전 1:19)

“진리에 관하여는 저희가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하므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딤후 2:18)


분명히 성경은 믿음을 버리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믿음이 아주 좋은 사람들이 간혹 미혹을 당하거나 믿음이 무너져서 이단에 빠지는 경우를 종종 보고 있다. 우리는 그들이 과거에 믿었다는 이유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할 수 없다. 믿음을 버리고 적그리스도와 거짓교사들에게 미혹을 당하여 고의적으로 배교를 하는 자가 곧 성령 훼방 죄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사도 베드로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일 저희가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저희에게 나으니라.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벧후 2:20-22)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기독교인은 믿음을 잃고 배교함으로서 구원을 잃을 수 있다. 다만 위 베드로후서의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라는 구절과 “의의 도를 안 후에”라는 구절의 의미가 어느 정도의 기독교인에게 해당되는가는 의문이다. 진정으로 거듭나서 성령이 내주하며, 그 성령께서 구원을 보증하고 인도하는 사람의 경우는 구원의 취소가 있을 수 없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후 1:22)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요일 4:4)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요 10:27-29)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 1:6)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살전 5:23-24)

결론적으로 성령 훼방 죄에 대해서 필자는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싶다.

1. 성령의 보증과 인도를 받는 확실히 구원받은 성도의 죄라고 말할 수 없다

2. 믿지 않을 때의 과거에 성령을 훼방하는 말을 한 죄가 아니다

3. 고의적인 배교를 뜻한다.

4. 성령을 대상으로 한 죄이다

5. 끝까지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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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염 → 간경화 → 간암

간질환은 그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무관심하다. 따라서 별 관심 없이 지내다가 날벼락을 맞는 참으로 안타까운 경우가 종종 일어난다. 그러나 대부분의 간 질환은 알고 나면 예방과 관리가 쉽다. 우리나라의 심각한 국민병이자 중년 남성들의 건강을 위협하고 있는 간질환에 대하여 알아본다.

1. 간질환 현주소

우리나라는 만성 바이러스성 간염, 간경변, 간암과 같은 만성 간질환이 많아 전 국민의 건강을 크게 위협하고 있다. 이로 인한 사회 경제적 손실도 막대하다. 한국인의 만성 간질환 중 B형 간염 감염자의 비율은 60~70%로 30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C형 간염 감염자는 10%인 20만 명, 알코올성 간질환이 16%, 자가 면역성 간염이 2%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만성 간질환의 주범인 B형 간염 바이러스의 경우 국가적인 예방 접종으로 감염율이 저하되고는 있으나 아직도 국민의 5~6%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있다.

특히, 한국인의 간암발생률이 세계 1위라는 부끄러운 통계도 나와 있을 만큼 연간 10만 명당 28명의 남성과 8명의 여성에서 간암이 발병되며, 40~65세에 해당하는 중장년기에는 5배나 많은 10만 명당 75명의 남성과 16명의 여성에서 간암이 발생하고 있다.

2. 간염의 중요성

먼저 간염이 중요한 이유는, 급성 간염에서 시작하여 만성 간염, 간경화, 그리고 간암으로 전이가 잘 되기 때문이다. 또한 복수, 부종, 신부전, 식도 정맥류, 울혈성 위장 질환, 비장 비대, 간성 혼수, 간암 등의 무서운 합병증을 동반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간염에 대한 진단과 치료는 간에 있어서 가장 기초적인 원인 질환을 잡는다는 의미에서 중요한 것이다. 간염은 바이러스, 약물과 알코올 등의 독성물질, 선천성 대사장애 등 여러 원인이 있으나, 크게 알코올성 간염과 바이러스성 간염(A형, B형, C형)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알코올성 간 질환은 술의 종류와 무관하고, 총 알코올 섭취량과 섭취의 지속성이 중요하다. 하루 음주량은 80g 이하가 안전하다. 즉, 맥주 2,000cc, 막걸리 1,000cc, 소주 한 병, 위스키 200cc(5잔) 정도이다. 그러나 매일 마시는 것은 피해야 하고, 음주 후에는 최소 2~3일은 금주해야 한다.

증상은 심한 급성 바이러스성 간염의 증상과 비슷하다. 즉 식욕이 없고 피로감, 구토, 설사, 우상복부(오른쪽 윗배) 통증, 간혹 미열이 있고, 심한 황달이 나타나기도 한다. 알코올성 간염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완전한 금주를 지키고 정맥주사나 경구투여로 단백질을 투여하며 비타민을 보충해 주어야 하고 그밖에 필요한 약물을 투여한다.

바이러스 간염을 일으키는 간염바이러스는 A, B, C, D, E, G 등 6가지가 현재 알려져 있다. 이 중 우리나라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만성화되는 B형과 C형이다.

A형 간염은 최근 우리나라 일부지역에서 10~30대의 젊은 연령층에서 골고루 급성 간염으로 발생하여 문제가 되고 있다. A형 간염은 주로 환자의 배설물에 오염된 식수와 음식물을 통하여 전염되며, 급성 간염 발병 2주전과 발병 후, 1주 사이가 가장 전염력이 강하다. 따라서 이 기간에 철저한 개인 위생관리가 요구된다. 대부분이 2달 후에는 완치되며, 만성 간염이나 간경화증으로 넘어가지는 않는다.

국민병으로 불리는 B형 간염 바이러스는 혈액 및 여러 가지 체액(정액, 질 분비불, 모유, 눈물, 침 혹은 상처의 진물 등)을 통하여 전염될 수 있다. 악수, 가벼운 입맞춤, 보유자가 요리한 음식, 감염자와의 대화, 재채기 혹은 기침 등 일상적인 접촉만으로는 전염되지 않는다.

급성 B형 간염은 환자 중 약 10% 이하 정도는 만성으로 넘어가지만, 아기 때 감염되면 약 90% 정도는 만성으로 넘어간다. 따라서 산모가 B형 간염 백신을 주사해야 한다. 그리고 B형 간염 표면항체가 없는 아이는 사회적 활동이 시작되는 학동기 전에는 B형 간염 백신을 접종하여 면역을 가지도록 해야 한다.

C형 간염은 1989년 처음 발견된 C형 간염 바이러스가 병을 일으키며, 급성 간염의 약 80%정도는 만성으로 넘어간다. 진단은 B형 간염과 같이 혈액에서 바이러스와 항체 검사를 한다. 주로 수혈을 통하여 감염되어 왔으나, 요즘은 수혈용 피를 미리 검사하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는 없다. 따라서 과거에 수혈을 받은 경력이나 침, 문신, 피어싱, 마약 주사제 등을 통하여 전염될 수 있으므로 자신이 이러한 과거력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두는 것이 좋다. 예방 접종 백신은 아직 개발되어 있지 않다. 우리나라에서 B형 만성 간염 다음으로 환자 수가 많으며, 간암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3. 만성 간염→간경화증→간암

간염은 간염 바이러스가 번식하는 간세포를 내 몸의 파수꾼인 면역세포가 공격함으로써 일어나는 하나의 전쟁으로 비유할 수 있다. 전쟁터인 간장에는 심한 흉터가 남는데, 이 흉터는 간 전체에 남기 때문에 간이 단단하게 굳게 된다. 바로 이러한 상태를 간경화증이라고 말한다.

B형 간염 바이러스를 만성적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은 정상인에 비해 약 100배 정도 간암이 생길 가능성이 높다고 알려져 있다. 이는 흡연이 폐암을 일으킬 가능성이 3배 전후라는 사실을 비교해 볼 때 매우 높은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간염 예방접종의 효과로 초등학생, 중학생들의 보균율은 다행히 감소추세에 있다. B형 만성간염의 진단은 혈액에서 간기능 검사나 간염 바이러스를 하고, 초음파 촬영을 통하여 간의 영상을 검사하여 진단을 내리게 된다.

C형 만성 간염에서도 간경화증이 서서히 진행된다. 20-30년이 지나서야 C형 만성간염환자의 약 30% 이상에서 간경변증이 발생한다. 앞으로는 예방접종으로 인해 B형 간염 환자가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C형 간염에 대해서는 효과적인 백신이 개발되어 있지 않으므로 간경화증으로 인한 간암 발생률이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B형 간염 바이러스로 인한 간암은 ▶B형 만성 간염으로 인한 간경변증 환자 에서 가장 잘 생기며 ▶B형 만성 간염 환자 ▶드물지만 B형 간염 바이러스 건강 보균자에서도 생긴다. 우리나라는 간암의 발생에서 B형간염 바이러스가 연관된 경우가 약 70%, C형간염 바이러스와의 연관이 약 10-20% 정도이다. 만성 간염이 20년 내에 48%에서 간경화로 되고, 35%에서 간암으로 될 수 있다. B형 간염환자에서 간암 발생률이 서구에 비해 높은데, 이는 어릴 때에 어머니로부터 수직 감염되어 B형 바이러스 보유 기간이 길기 때문이다. 즉 오랜 기간의 간세포의 파괴와 재생, 유전자 변이 등이 간암 발생을 증가시킨다. 그러므로 이런 환자들은 정기적인 검사로 간암을 조기 발견(간암의 크기가 3cm 이하일 때)해야 한다.

따라서 간암의 예방은 곧 이러한 바이러스의 감염을 예방하는 것이다. B형과 C형 간염 환자들을 비롯한 만성 간질환자는 전문의와 상의하여 정기적인 검사를 통해 간암을 조기 발견해야 한다. 간암을 조기에 발견한다는 것은 간암의 크기가 3cm 이하일 때를 말한다. 간암의 조기발견을 위해서는 혈액검사 뿐 아니라 간초음파검사, 필요하면 CT검사까지 해보아야 한다.

※ 간염 환자들이 지켜야 할 10대 건강수칙

1. 건강보조식품, 한약, 생약을 포함한 모든 약물은 의사와 상의 후 복용한다.
2. 술은 하루 80g이하로 마시되, 음주 후는 최소한 2-3일은 금주한다.
3. 음주 시에는 저지방, 고단백 안주와 함께 먹는다.
4. 여성들은 남성 보다 알코올성 간 질환이 잘 오므로 절주해야 한다.
5. 간에 좋은 것을 찾기보다는 해로운 것을 피하는 것이 더 유익하다.
6. 저지방, 고단백 식사를 고집하기보다는 골고루 섭취한다.
7. 무조건 휴식보다 일상적인 신체활동은 유지한다.
8. 면도기, 칫솔, 손톱깍기 등 위생용구는 따로 쓴다.
9. 간 질환 환자들은 최소 3개월에 한번 감염 진행상황을 점검하고, 바이러스성 간질환 환자 가족들도 혈액검사를 받는다.
10. 한 명의 주치의를 정해 정기적으로 진찰을 받는다.

간은 침묵의 장기이다. 술이나 스트레스로 간을 혹사해도 참을 수 있는 한 묵묵히 견뎌낸다. 그러다가 더 이상 인내할 수 없는 순간부터 급속도로 나빠져 그 후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잘 회복되지 않는다. 간암 또한 초기에는 증상이 별로 없어 몸이 피곤하고 소화가 잘 되지 않으며, 헛배가 부르고 복부 오른쪽 윗 부분에 불쾌감이 느껴지는 등 막연한 증상이 대부분이다. 증상이 아예 없는 경우도 많아 본인이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간암을 예방 또는 조기 발견하기 위해선 정기적으로 혈액검사와 초음파검사 등을 받아야 한다. 또한 알콜과 무분별한 약물 복용은 간경변증과 간암으로의 진행을 빠르게 하므로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10년 전만 하더라도 "간암으로 판정 받으면 6개월을 못 넘긴다"는 것이 상식이었다. 그러나 검사방법의 발달로 조기 발견율이 높아졌고 첨단치료법들이 개발돼 "간암도 고칠 수 있다"는 쪽으로 인식이 바뀌고 있다. 간암의 조기 발견만큼 중요한 것은 환자 자신의 절제된 생활과 투병 의지임을 잊지 말아야겠다.

건양대병원 소화기내과 강영우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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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리스교회 수요 성서 연구 #. 1 물세례와 불세례(2020-06-10)

세례(洗禮) 마태복음 3: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
I baptize you with water for repentance. But after me will come one who is more powerful than I, whose sandals I am not fit to carry.
He wi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and with fire.

구약의 마지막 책은 “말라기”입니다.
신약의 첫 번째 책은 “마태복음”입니다.
구약 ‘말라기’와 신약 ‘마태복음’은 종이 한 장의 차이로 느껴집니다.
그러나 성경의 역사를 살펴보면 구약 말라기와 신약 마태복음 사이는 “대략 400년” 이란 긴 세월이 있었습니다.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가 40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타날 징조가 전혀 보이지 않았던 시대이었습니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구약 말라기와 신약 마태복음의 400년의 기간을 “암흑의 시기” 또는 “침묵의 시기” 라고 합니다.
암흑의 시기’ 또는 ‘침묵의 시기’를 “신구약 중간 시대”라고도 합니다. (아래 난외 주 참조)

기독교 이외에 가톨릭교회와 유대교에서는 신구약 중간 시대에도 하나님은 말씀하셨다는 것을 강조하여 “외경”이란 말씀을 인정하고 사용합니다.

오래 동안 기다리던 메시아가 나타날 징조가 전혀 보이지 않던 때에 어느 날 광야에 낙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광야에 거주하는 낯선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 라고 외쳤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광야로 나와 요한의 외치는 소리를 들을 때 바로 이 사람이 메시아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요한은 나는 너희들이 기다리는 메시아가 아니라 다만 물로 세례를 주는 사람이다. 그러나 내 뒤에 오실 그 분은 너희들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며 실망하던 유대인들에게 메시아 신앙을 깨우쳤습니다. 요한의 외침을 듣고 많은 유대인들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외침에서 세 종류의 세례를 생각합니다.

첫째는 물세례(Water Baptism) ; 회개와 구원을 위한 세례
둘째는 성령세례(Holy Spirit Baptism) ; 구원의 확신과 보증을 위한 세례
셋째는 불세례(Fire Baptism) ; 심판을 위한 알곡과 죽정이를 구분하는 세례(불심판)

그런데 요한이 세례를 베풀었던 것은 분명하게 성경에 소개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풀 것이라고 하셨던 말씀은 어느 누구도 예수님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언제 예수님께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셨을까요?

세 종류의 세례를 베푸셨던 수여자(授與者)를 살펴봅시다.

첫째는 물세례(Water Baptism)는 누가 베풀었을까요?

예수님 당시에는 세례자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마태복음 3:5∼6,
이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People went out to him from Jerusalem and all Judea and the whole region of the Jordan.
Confessing their sins, they were baptized by him in the Jordan River.

그러나 오늘날은 교회에서 목사가 세례를 베풉니다.
"주 예수를 믿는 (아무개)에게 내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베드로전서 3:21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and this water symbolizes baptism that now saves you also--not the removal of dirt from the body but the pledge of a good conscience toward God. It saves you by the resurrection of Jesus Christ.


둘째는 성령세례(Holy Spirit Baptism)는 누가 베풀었을까요?

세례는 요한의 증거대로 분명히 예수님께서 베푸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언제 성령세례를 베푸셨으며 예수님께서 성령세례를 베푸셨다는 증거가 무엇일까요?

요한복음 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 하실 것이요. 
When the Counselor comes, whom I will send to you from the Father, the Spirit of truth who goes out from the Father, he will testify about me.

성령세례는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사람들에게 보내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성령을 “보혜사(保惠師)” 라고 합니다.

“보혜사(保惠師)”란 무엇인가?
- 지킬 보(保), 은혜 혜(惠), 스승 사(師)
보혜사란 “지켜주시고 은혜를 베푸시며 가르치시는 선생님” 이란 뜻입니다.

보혜사를 영어 성경에서 찾아보면 NIV에서는 “상담자(the Counselor)”, KJV에서는 “위로자(the Comforter)”, NASB에서는 “돕는자(the Helper)” 라고 합니다.

보혜사를 헬라어 성경에서는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 paraklétos)” 라고 합니다.
스트롱 번호 3875

1. 옹호자(an advocate), 중보자(intercessor),
2. 위로자(a consoler), 위로자(a comforter), 돕는자(helper),
3. 변호사(Paraclete)


παράκλητος, ου, ὁ 스트롱번호 3875

1. 남을 위해 나타난 자
2. 요한일서 2:1.
3. 요한복음 14:16
발음 : 파라클래토스(paraklētŏs)
어원: 387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보혜사(요 14:16,26, 16:7), 대언자(요일 2:1)
신약 성경 : 5회 사용

예수님께서 언제 누구에게 성령세례를 베푸셨습니까?

사도행전 2:1∼4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When the day of Pentecost came, they were all together in one place.
Suddenly a sound like the blowing of a violent wind came from heaven and filled the whole house where they were sitting.
They saw what seemed to be tongues of fire that separated and came to rest on each of them.
All of them were filled with the Holy Spirit and began to speak in other tongues as the Spirit enabled them.

오순절날 성령 강림 사건은 예수님께서 성령세례를 베푸셨던 사건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때 불세례도 함께 베푸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복음서를 자세히 관찰하면 성령과 불이라는 용어가 마태복음 3장과 누가복음 3장에서는 사용하였으나 마가복음 1장과 요한복음 1장에서는 성령이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성령과 불로 라고 모든 복음서에서 말씀하셨다면 불세례도 오순절 날 임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하셨을까요?
그러므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바르게 읽어야 합니다.

셋째는 불세례(Fire Baptism)는 누가 베푸셨을까요?

세례자 요한에 의하면 성령세례와 불세례는 예수님께서 베푸실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성경을 폭 넓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령과 불세례에 대한 말씀을 마태복음 3장과 누가복음 3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서는 성령세례만을 말씀합니다.

이제 성경을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3: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I baptize you with water for repentance. But after me will come one who is more powerful than I, whose sandals I am not fit to carry. He wi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and with fire.

12절,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His winnowing fork is in his hand, and he will clear his threshing floor, gathering his wheat into the barn and burning up the chaff with unquenchable fire.

“불세례”는 불로 심판하실 것을 의미합니다.

마가복음 1: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 
I baptize you with water, but he wi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9절,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리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At that time Jesus came from Nazareth in Galilee and was baptized by John in the Jordan.

누가복음 3:16,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John answered them all, "I baptize you with water. But one more powerful than I will come, the thongs of whose sandals I am not worthy to untie. He wi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and with fire.

17절,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His winnowing fork is in his hand to clear his threshing floor and to gather the wheat into his barn, but he will burn up the chaff with unquenchable fire.

요한복음 1: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I would not have known him, except that the one who sent me to baptize with water told me, 'The man on whom you see the Spirit come down and remain is he who will baptize with the Holy Spirit.'

34절,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하니라. 
I have seen and I testify that this is the Son of God.

참조 / 성령세례(사도행전 1:5, 11:16, 고린도전서 12:3)

“성령세례와 불세례”에 대해서 언급한 성경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이외 성경에서는 오직 “성령세례”만을 말씀합니다.

이와 같은 성경의 증거에서 성령세례는 예수님께서 베푸신 것이 분명하게 소개되었습니다.
그러나 불세례는 예수님께서 베푸신 것이 아닙니다.

다만 불의 혀 같이 갈라진다는 것은 불이 다양하게 갈라져서 오순절 날 한 자리에 모여 있었던 다양한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재 했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불세례는 누가 베푸셨을까요?

사도행전 2:1∼3,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 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When the day of Pentecost came, they were all together in one place.
Suddenly a sound like the blowing of a violent wind came from heaven and filled the whole house where they were sitting.
They saw what seemed to be tongues of fire that separated and came to rest on each of them.

오순절 날 성령의 임재가 나타났을 때 마치 성령은 강한 바람 소리로 들렸습니다.
불의 혀가 갈라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바람이 아닙니다.
성령은 불이 아닙니다.
다만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은 모여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 임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성령세례와 불세례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지워버려야 합니다.

헬라어 성경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
(βαπτίσει ἐν Πνεύματι Ἁγίῳ καὶ πυρί)
- will baptize with the Spirit Holy and fire  

세례 요한은 요단강에서 많은 유대인들에게 세례를 베풀면서 장차 오실 그 분께서는 “성령(프뉴마)과 불(푸르)”로 세례를 베풀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이렇게 외쳤던 요한의 증언은 공생애 기간 동안 예수께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세례를 베풀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시는 그 분이 그토록 기대하던 “메시아”라고 기다렸으나 예수께서 세례를 베풀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으며 사십일 후에는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사도행전 1:3).

이렇게 번역된 데는 헬라어 접속사 “카이(καὶ)”의 뜻을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는데 “카이”는 “등위 접속사”로서 “그리고(and)” 라고 하여 앞의 것과 뒤의 것을 동등하게 생각합니다.

따라서 “성령과 불”이라고 할 때 성령과 불을 동등한 것으로 해석합니다.
이제까지 성령과 불을 이렇게 등위 접속사로 해석한 것입니다.
그러나 등위 접속사가 아니라 우위 접속사로 해석하면 전혀 그 의미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직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만 성령과 불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불세례는 특별한 용법으로 사용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위 접속사”인 “또는(or)”의 뜻으로도 사용된다.
여기서는 바로 우위 접속사로 사용된 것이다.
따라서 '성령과 불로'로 번역된 “엔 프뉴마티 하기오 카이 퓌리(ἐν Πνεύματι Ἁγίῳ καὶ πυρί)”는 “성령 또는 불안에서” 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성경 본문의 문맥과 사(四)복음서를 비교하여 연구해보면 더욱 확실히 증명된다.
먼저 우리는 “성령과 불로”라는 말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만 나오고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는 “성령과 불로”가 아닌 “성령으로” 라고만 표현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또한 사도행전 1:5에서도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고 하여 불에 대한 언급 없이 “성령으로” 라고만 되어 있으며 사도행전 11:16과 고린도전서 12:13에서도 역시 “성령으로”라고말씀합니다.

이와 같은 여러 성구들을 참조할 때 주님이 신자들에게 주시는 세례는 오직 “성령으로” 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불”의 의미는 별도의 뜻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세례” 라는 것은 “성령 안에 잠기운다”라는 뜻으로 여기서 보더라도 “침례” 라는 말이 의미를 더 잘 통하게 한다. 만일 “세례”라고 하면 “성령으로 씻긴다”는 말이 되므로 오히려 이해하기 힘들게 된다.

성령은 영으로 다시 오시는 그리스도(요 14:18∼19)이므로 '성령 안에서 침례'라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을 상징하되 '생명의 연합'을 뜻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 함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성령 안에서 침례'는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행 2:38, 행 19:2)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 되는 것(고전 3:16-17)'과도 같은 말이 되는데 결국 우리와 주님과의 상호내주(Inter-Residence)를 뜻한다.

한편 요 4:24의 "하나님은 영이시니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에서 '신령으로'라는 말은 “엔 프뉴마”로서 원 뜻은 “성령 안에서”라는 뜻이다. 이 말씀의 의미 역시 '성령을 받음'으로 '주님을 모시는 것'이 되며 이는 곧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하는 뜻이다.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아버지께 예배를 드려야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자는 아무리 열심히 예배드려도 소용없다는 것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서는 예배드리는 자가 먼저 주님과 하나가 될 때만 가능한 것이다.

이상으로 볼 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요 3:5)'고 할 때 '물'과 '성령'의 의미가 모두 해석되는 것이다. 즉 '물'은 죄를 씻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물 안에 잠김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의 연합'을 상징하는 뜻이며 '성령'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상징하는 것으로 성령 안에 잠긴다는 뜻은 '그리스도와 생명의 연합'을 상징하는 것이다. 즉 죽었다가 살아나는 원리가 포함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불로 세(침)례를 주신다'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알아볼 차례가 되었다. '불로 세례를 주신다'라는 말씀은 직역하면 '불 속에서 세례를 주신다'는 말로서 신자와는 전혀 관계없고 불신자에게만 해당하는 말씀이다. 즉 불신자는 성령 안에 잠기게 하는 대신에 '불 속에 잠기게 한다'라는 의미로서 결국 '심판을 받는다'는 뜻이다.

이제 세례에 대한 용어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세례(밥티조, βαπτίζω)란 물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을 말합니다.
물속에 들어갔다는 것은 완전히 죽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물 위로 다시 올라올 때는 과거의 나 즉 옛 사람은 죽었고 이제부터는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물세례는 회개와 구원의 표시라고 하겠습니다.

βαπτίζω, ον 스트롱번호 907

1. 잠그다
2. 결례를 행하다
3. 세례를 베풀다
발음 : 밥티조(baptizō)
어원 : 미래 βαπτίσω, 제1부정과거 ἐβάπ- τισα, 제1부정과거중간태 ἐβαπτισά- μην, 미완료수동태 ἐβαπτιζόμην,
완료수동 분사 βεβαπτισμένος, 제1부정과거수동 ἐβαπτίσθην, 미래수동태 βαπτισθήσομαι, 911의 파생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세례 받다(마 3:6,16, 막 16:16), 씻다(막 7:4), 세례 베풀다(요 1:25,26, 고전 1:14).
 [명] 세례(마 3:11, 막 1:4, 눅 3:16)
신약 성경 : 77회 사용

그런데 회개와 구원의 표를 받았지만 공중권세를 잡은 사탄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 살면서 때로는 알게 모르게 죄를 짓게 됩니다.
이렇게 죄를 짓게 될 때 사탄은 정말 네가 구원을 받았느냐?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아직도 그렇게 살아가느냐? 하며 조롱하고 비난할 때 정말 내가 회개하고 구원을 받았는가? 하고 의심할 때가 있습니다.
이때 성령세례가 구원을 보증합니다.

고린도후서 1:22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set his seal of ownership on us, and put his Spirit in our hearts as a deposit, guaranteeing what is to come.

고린도후서 5: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Now it is God who has made us for this very purpose and has given us the Spirit as a deposit, guaranteeing what is to come.

히브리서 7:22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Because of this oath, Jesus has become the guarantee of a better covenant.

성령세례가 보증하는 것은 "생명"입니다.

로마서 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because through Christ Jesus the law of the Spirit of life set me free from the law of sin and death.

불세례는 심판 즉 소멸하는 것을 말합니다.

신명기 4:24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오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
For the LORD your God is a consuming fire, a jealous God.

히브리서 12:29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for our "God is a consuming f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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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약 자료

주제 ; 세례(洗禮)
- 세례(씻을 洗, 예도 禮)와 침례(잠길 沈, 예도 禮)
- 밥티조(물속에 잠기다)

성경 ; 마태복음 3:11

종류 ;

 1. 물세례(회개와 구원) 베드로전서 3:21

 2. 성령세례(생명의 보증) 보혜사(요한복음 15:26)
 - 로마서 8:2, 요한복음 6:63, 고린도후서 1:22, 5:5, 히브리서 12:29

 3. 불세례(심판, 알곡과 죽정이)
- 신명기 4:24, 히브리서 12:29
- 마태복음 3:12, 누가복음 3:17

*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요
- 전치사 "과"(카이)
 등위접속사로 해석할 때는 성령과 불을 같은 것으로 이해
 우위접속사로 해석할 때는 성령과 불은 서로 다른 것으로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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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1-2022(금)
성령세례

"오순절 사건은 더 이상 일어날 수 없다"

이와 같은 주장은 "비성경적"이다.
왜냐하면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첫째,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은 '전지전능(全知全能) 무소부재(無所不在)' 하신다.
이 속성은 한 마디로 "영원성(永遠性)"이다.
영원이란 어느 시대에는 나타나고 어느 시대에는 소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오순절 사건은 지금도 앞으로도 마지막 그 날까지 지속될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이름

"아니 엘 샤다이"라는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은 영으로 존재하시며 그 영은 지금도 계속적으로 역사하는 영이다.

셋째, 바울의 증거


고린도전서 2:9-10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바울의 성령은 통찰하는 영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영은 구약에서 이미 말씀하신 것을 통하여 계속된다.

신명기 29:4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신명기 30:6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레위기 18:5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로마서 11:8
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까지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

구약에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주셨다.
그런데 그 율법을 그의 백성들이 지킬 수 없다고 하였다.
그 이유는 그의 백성들에게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킬 수 없기 때문에 구원을 받을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마음에 할례를 받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강조하였다.

로마서 2:28-29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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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외 주)

신구약 중간시대

신구약 중간 시대를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구약과 신약을 시작하려고 하니 중간에 400년의 공백이 있습니다.
성경책으로는 말라기와 마태복음은 한 장 차이인데 말입니다. 

구약 이야기가 끝난 연대가 BC 400년경이고 그 때부터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400년의 역사가 바로 신약과 구약의 중간시대입니다.
이 기간은 포로 귀환 공동체를 제국들이 다스리는 실제 세계사 기간입니다.
성경은 에스라 포로 귀환 공동체, 이후 이야기가 없지만, 그래도 페르시아로마 역사는 실제로 흘러 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성경이 입을 다물고 있는 이 기간의 실제 세계사는 성경에서 예언한 그대로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신약을 앞두고 있는 이 상황에서 종속국으로 살아간 이 400년을 한마디로 말할 수 있다면 무엇일까요?

바로 유대인의 신앙, 유대교를 낳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고난, 그리고 죽으심과 부활 승천, 사도바울을 일평생 추적하며 괴롭힌 신약의 이야기의 또 다른 주인공의 실체는 "유대교"와의 싸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사실이 전제 되어야 신약 성경을 대하기가 쉽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성경을 보면 유대교는 바로 구약의 끝 장면인 "에스라의 종교개혁"때 생겼습니다.
예레미아의 예언대로 정말 70년 만에 포로로 잡혀갔던 그들이 돌아 오게 되니, 어느 누구도 예언의 말씀을 부정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을 신뢰하게 되고 그러면서 "말씀공부"를 하면서 자신들이 유일하신 하나님의 백성이고 자신들의 민족이 대단함을 깨닫게 됩니다. 
말씀을 배우다 보니 정신이 든 겁니다. 정체성의 변화가 일어나고 의식의 전환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자신들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역사를 갖고 있으며, 말씀대로, 율법. 안식일, 절기를 시키면서 부정한 것과 정결한 것을 구별하며 살아야 할 거룩한 백성들 이고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기룩하라" 당부한 것을 순종해야 함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들이 포로로 잡혀간 이유는 거룩함을 버리고 이방 종교를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하나님께 돌아와야 합니다.
순결해야 합니다.
섞이면 안 됩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말씀이 기준이 된 것입니다.

마치 노예 공동체에게 모세가 출애굽으로 새 민족 정신을 심어준 것처럼 에스라가 그 역할을 한 것입니다.
시내산 언약을 깨뜨리고 우상을 따른 것이 화의 근원이었다는 것을 민족이 포로가 되어 깨달은 것입니다. 

말씀 성취를 공동 체험하고 포로로 잡혀갔다 돌아와 보니 하나님의 말씀이 놀랍도록 전부 맞는 겁니다.
말씀과 역사와 민족성과 정체성, 그리고 모세의 재발견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자신들의 정체성을 가르쳐준 말씀(율법,모세오경)이 얼마나 우월한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앗수르(앗시리아), 바벨로니아(바벨론), 바사(페르시아)시대를 지나면서 다른 민족에 비교하여 월등한 민족이라는 정체성에 확신이 생겼습니다. 이렇게 말씀공부를 통해서 쉽게 없어지지 않을 지적인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깨닫음은 감격이 되어, 통곡과 회개를 하게 했고, 자연히 삶에도 개혁이 일어나 감동적인 공동체 경험으로 까지 이어지고 그 공동체의 확신은 무서운 힘이 되었습니다.

그것을 결단하고 서약서까지 남겨, 제도화할 정도였는데, 구약시대 마지막 장면은 이처럼 느헤미야 10장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서명한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 (중략) 이 밖에도 나머지 백성 모두가 귀족 지도자들과 함께 하나님의 종 모세가 전하여 준 하나님의 율법을 따르기로 하고, 우리 주 하나님의 모든 계명과 규례와 율례에 복종하기로 하였으며 그것을 어기면 저주를 받아도 좋다고 다음과 같이 맹세하였다"

"우리는 딸을 이 땅의 백성과 결혼 시키지 않는다. 우리는 아들을 이들의 딸과 결혼 시키지 않는다. 이 땅의 백성이 안식일에나 성일에 물건이나 어떤 곡식을 내다 팔더라도 우리가 사지 않는다. 일곱 해마다 땅을 쉬게 하고 육 년이 지난 빚은 모두 없애준다.(성도로서의 거룩한 삶을 지키겠다고 문서화함)

하나님의 성전 비용으로 쓰도록 우리는 해마다 삼분의 일 세겔씩 바친다. 집안별로 주사위를 던져서, 해마다 정한 때에 하나님의 성전에 땔 나무를 바칠 순서를 정한다. 해마다 우리 밭에서 나는 맏물과 온갖 과일 나무의 첫 열매를 주님의 성전에 바친다. (성전 운영을 위해서 재정을 책임지겠다)  처음 난 맏새끼들을 성전 제사장들 생활비를 위해서 바친다."(성전이 운영 되는데 필요한 인건비도 서포트하겠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을 아무렇게나 버리두지 않을 것이다."(서약)
바로 이것이 유대교, 유대인, 유대 성격입니다.

창세기 12장부터 출발된 이스라엘의 민족역사를 잇는 공동체는 "유대인"(사마리이인, 아님)이라고 이렇게 개명한 것입니다. 이 때부터 이들은 "이스라엘=유대인"이라는 새 정체성을 갖는 것입니다.

히브리 정신을 잇는 정통성 있는 유일한 공동체, 포로귀환 공동체 유대인 이렇게 그들은 크고 두려운 "여호와의 날", "구원의 날"을 기다리며 살아갔습니다.
후손들도 선조들의 뒤를 이어 BC 300년대 바사(페르시아) 제국시대을 숨을 죽이고 지나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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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약속의 책이다.

약속의 책은 언약을 중심으로 형성된다.
언약의 내용은 "에덴, 노아, 아브라함, 모세, 다윗,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게 된다.
언약의 핵심을 잘 이해하는 것이 성경을 이해하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

에덴 언약은 "선악과"(창세기 2:17)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But you must not eat from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for when you eat of it you will surely die.

노아 언약은 "무지개"(창세기 6:13) 

하나님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에 가득하므로 그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과 함께 멸하리라.
So God said to Noah, "I am going to put an end to all people, for the earth is filled with violence because of them. I am surely going to destroy both them and the earth.

아브라함 언약은 "복의 근원"(창세기 12: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The LORD had said to Abram, "Leave your country, your people and your father's household and go to the land I will show you.
I will make you into a great nation and I will bless you; I will make your name great, and you will be a blessing.
I will bless those who bless you, and whoever curses you I will curse; and all peoples on earth will be blessed through you.


모세 언약은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 (출애굽기 19:5-6)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찌니라.
Now if you obey me fully and keep my covenant, then out of all nations you will be my treasured possession. Although the whole earth is mine,
you will be for me a kingdom of priests and a holy nation.' These are the words you are to speak to the Israelites.


다윗 언약은 "아들의 나라 언약"(사무엘하 7:12)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When your days are over and you rest with your fathers, I will raise up your offspring to succeed you, who will come from your own body, and I will establish his kingd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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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의 언약

하나님께서는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각 “시대마다 독특한 경영 방침”(Dispensation)으로 역사를 주관하신다. 성경을 배우는 학생이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교리적인 모순이 없이 성경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경영 방침에 따라서 구분될 수 있는 각 시대들을 구체적으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인간들과 맺으신 언약들(Covenants)을 통해 경영 방침의 차이에서 오는 각 시대들의 특징을 알아야 한다.

  언약은 하나님과 사람이나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이루어지는 계약이나 합의로써, 쌍방 간에 확실한 이해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언약은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이다. 하나님의 언약은 약속에 대한 확실한 성취를 바탕으로 주어진다. 성경에는 여덟 번의 언약들이 나타난다. 각각의 새로운 언약들이 설립될 때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다루시는 방법이 바뀌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각 시대의 대표적인 사람들을 택하셔서 그 사람들에게 약속을 주셨다.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들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각 시대마다 인간들에게 주신 명령에 순종해야만 한다. 이 명령들은 ‘먹지 말라, 계명들을 지키라, 믿으라’ 등 다양하다. 인간들이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거역할 때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고, 다시 새로운 언약이 시작된다. 이제 여덟 번의 언약들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겠다.  

1. 에덴의 언약 (창세기 2:16-18)

에덴의 언약은 인간이 죄를 짓기 이전 에덴에서 아담과 이브에게 주어진 것이다. 에덴의 언약이 선포된 때부터 다음 언약이 맺어질 때까지를 일반적으로 무죄시대(Innocence)라고 부른다. 언약의 내용은 땅을 다시 채우는 것, 땅을 정복하는 것, 동물들에 대한 지배권을 갖는 것, 식물만을 먹는 것, 에덴의 동산을 가꾸고 지키는 것,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를 먹지 않는 것이었다.

에덴의 언약 아래서의 삶은 완전한 환경 속에서 이루어졌다. 옷도 입지 않고, 일도 하지 않고, 세금도 없고, 전쟁도 없고, 병도 없고, 죽음도 없고, 바깥에서 살았으며 모든 동물들과 교제를 나눴다. 동산을 가꾸는 것은 의심할 것 없이 의무적인 일이 아닌 유쾌하고 즐거운 일이었다. 땅에는 저주가 없음으로 가시나 엉겅퀴를 내지 않았고 동물들도 식물을 먹고 살았음으로 서로 물어뜯고 피를 흘리는 일이 없었다. 바로 이러한 시대를 현대의 모든 인본주의자들은 법과 전쟁, 과학과 교육을 통해 이루어 보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의 어떤 노력으로도 결코 이룰 수 없는 것이다. 에덴에서 아담이 할 일은 동산을 지키며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나무 열매를 먹지 않는 것이었다. 만약 금지된 열매를 먹는다면 그 대가는 죽음이었다. 그 외에는 지켜야 할 안식일도 없었으며, 십계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는 생명나무(the tree of life)를 값없이, 자유롭게(freely) 먹으면 되었다. 단지 나무 열매를 따먹는 행위로 구원을 받을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동산을 거니시면서 아담과 교제하셨기에,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인 믿음은 필요가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함께 대화하셨고 아담은 그 분을 볼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이브가 완전한 환경에 대해 충분하게 경험을 할 때까지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브가 육체적으로만 성숙했으며 전혀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 가장 간교한 존재인 뱀의 유혹과 대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담의 타락에 대해 하나님께 책임을 돌릴 수는 없다. 선과 악의 지식 나무를 먹지 말라는 명령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그것을 먹도록 유혹하는 어떤 존재에 대해 아담에게 경고하신 것이다. 또한 에덴의 동산을 지키라(keep)고 말씀하셨다.

이처럼 지상에서 인간의 존재는 최고의 환경 가운데 시작되었다. 땅은 태고의 영광으로 회복되었고 물은 물고기들로 가득 찼으며, 무성한 식물들이 지표면을 덮었다. 공중은 새들과 식물에서 나오는 향기로 가득 찼고, 땅은 안개로 촉촉이 젖으므로 파괴적인 폭풍 같은 것은 있지 않았다. 낮과 밤의 아름다움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장엄했을 것이며 모든 생물들은 각기 종류대로 완전했다.

아담은 최상의 동산에서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운 경치와 더불어 하나님과 방문자들인 천사들과 교제하며 살았다. 모든 것이 이상적이었다. 아담이 그 속에서 홀로 있는 것이 좋지 않았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위해 돕는 배필(help meet)을 만드셨다. 아담은 이브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고 있었다는 것은 명백하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그녀가 남자에게서 취하여 졌으니 여자라 하리라』(창 2:23). 처음부터 아담이 그녀를 사랑했고 그는 그녀가 금지된 열매를 먹음으로 죽음에 처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최초의 부부는 달콤한 교제 가운데 행복했으며 그러한 상황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지식의 나무에 대한 금지 이유를 알기 위해 호기심 있는 이브가 아담 몰래 나무 가까이 갔을 것이다. 나무 곁에서 이브를 발견한 사탄은 그 기회를 즉각적으로 이용했다. 사탄은 하나님께서 아담과 이브에게 나무 열매를 금지하신 이유에 대해 교활하게 속였다. 이브가 뱀과 대화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은 것은 뱀이 혐오감을 주는 파충류가 아니고 이브에게 낯선 존재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려 준다. 이브는 종종 뱀을 보았고 아마 전에도 뱀과 이야기 했을 것이다. 사탄은 빛의 천사로 나타난 것이다.

사탄은 최초의 고등비평가(higher cri- ticism)이다. 사탄은 의심의 창조자이다. 『주 하나님께서 지으신 들의 어떤 짐승들보다도 뱀은 더욱 간교하더라. 그가 여자에게 말하기를 “참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동산의 모든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지 말라.’ 하시더냐?” 하니』(창3:1). 사탄의 질문은 이브의 마음과 생각 속에 자리 잡았다. 의심은 인류가 이브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 말씀에 의문을 제기하는 만큼 하나님의 선하심을 부인한다. ‘하나님께서는 정말로 이렇게 말씀하셨는가? 하나님께서는 사랑이 많으시고 자비로우셔서 악한 자들이라도 영원한 형벌에 처하지는 않으실 것이다.’ 결국 사탄은 『너희는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든다.

인간의 타락에서 사탄의 승리는 완전했다. 아담과 이브의 불순종의 최초의 결과는 자기 의(self righteousness)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벌거벗었음을 알았고, 이 지식의 결과 무화과 잎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 모든 동물은 자연적으로 옷 입혀진다. 물고기는 비늘로, 새는 깃털로, 짐승은 털이나 가죽 등으로. 심지어 뱀들도 아름답고 색깔 있는 피부를 가졌다. 하나님의 모든 창조물 중에서 오직 인간만이 벌거벗은 상태로 남아있어 인공적인 옷을 입어야만 한다. 이것은 죄의 결과이다.

에덴의 언약으로 구분 지을 수 있는 시대는 완전하게 독특하다. 죄의 부재와 하나님의 임재로 특징지을 수 있다. 하나님의 성막이 인간과 함께 있게 되기까지는 다시 이와 같은 시기는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새 땅에서 인간과 함께 거하실 것이다(계21:3). 에덴에서 하나님께서는 무죄(innocence)를 기본으로 아담을 다루셨다. 죄의 저주가 땅에서 제거될 때까지는 하나님께서 똑같은 방법으로 인간을 다루실 수 없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에덴의 언약은 파기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담과 이브가 생명나무를 먹고 죄악 된 몸으로 영원히 사는 것을 막기 위해서 용서받은 죄인들을 동산에서 내쫓으셨다. 첫 번째 언약 아래에서 인간은 저주 받은 인간, 저주 받은 땅으로 실패하고 만다. 지금도 인간들은 주장하기를 깨끗하고 완전한 환경은 죄를 대항하는 보호자가 된다고 하지만 에덴의 언약 아래서의 실패는 이러한 주장이 거짓임을 증명한다. 

에덴에서 아담의 실패는 순수했던 시대를 끝맺고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한다. 아담이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기 전에 하나님과 아담 사이에 아담의 언약(Adamic Covenant)이 맺어 진다. 이 언약으로 인간 역사는 두 번째 경륜(Dispen- sation)으로 접어들게 되며, 이때부터 노아의 시대까지는 동일한 방법에 의해 역사가 운영된다. 선과 악을 아는 양심(conscience)에 의해 인간들이 다루어졌다고 하여 이때를 일반적으로 ‘양심의 시대’라고 부른다. 아담의 언약으로 인해 새로운 경륜이 시작되기는 하지만, 이 언약은 그 시대만을 규정하지는 않는다. 에덴에서의 언약과 마찬가지로, 무조건적인 이 언약은 이후로의 모든 인간 역사를 규제한다. 하나님의 아들(the Son of God)이 다시 오셔서, 세상에서 저주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이 언약은 유효하다.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 전파되는 지금도 아담의 언약은 파기되지 않았다.

아담의 언약에 포함된 내용은 저주와 약속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첫째는 뱀에 대한 저주이다. 뱀은 모든 가축과 들짐승들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평생토록 배로 기어 다니게 되며, 흙을 먹게 된다. 또 뱀과 여자 사이에는 적의(enmity)가 있게 된다. 창조로부터 이 순간까지 뱀은 아름다운 존재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보기만 해도 혐오스러운 파충류의 모습을 갖게 된다. 지금도 뱀을 혐오하지 않는 여자는 거의 없다. 둘째는 여자에 대한 저주이다. 여자에게는 고통과 임신이 크게 늘어나게 되었고, 고통 가운데서 자식들을 낳게 되었다. 또한 여자의 바람은 남편에게 있게 되어 남자가 여자를 주관하게 된다. 이것은 남자와 여자 사이의 기본적 질서를 나타낸다. 남자와 여자 사이의 지위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다. 어느 누구도 언약에 포함된 저주에 대해 항변할 권리를 갖고 있지 못하다. 셋째는 아담에 대한 저주이다. 그가 자기 아내의 음성에 귀를 기울인 까닭에, 금지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음으로 땅이 저주를 받게 된다. 아담은 일생 동안 고통 가운데서 땅의 소산을 먹으며 얼굴에는 땀을 흘려야만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된다. 그로 인해 저주받은 땅은 가시와 엉겅퀴를 내어 땅을 경작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주게 된다. 이때 아담에게 허락된 것은 단지 식물뿐이다. 결국 불순종의 대가로 아담은 육체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됐으며, 흙으로 돌아갈 운명에 놓인다. 죄는 인간에게 영(spirit)과 몸(body)의 죽음을 야기 시켰다.

아담의 언약은 저주뿐만 아니라 약속도 담고 있다. 그 약속은 여자의 씨가 뱀의 머리를 부수게 될 것이고, 뱀의 씨는 ‘여자의 씨’의 발꿈치를 부술 것이라는 내용이다. 이 약속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들은 약속된 ‘여자의 씨’를 기다려 왔으나, 반대로, 사탄과 그의 추종자들은 계속해서 그 씨가 출현하는 길을 막으려고 노력했다. 아담 이후의 역사는 하나님의 약속을 거짓으로 만들어 버리려는 사탄의 계속적인 시도를 보여 준다. 각 시대마다 반복되는 인간들의 실패도 이 사실을 설명한다. 이러한 약속에 포함된 사실들에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자체가 은혜로 연결됨을 볼 수 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그의 아내를 에덴 동산에서 쫓아내실 때 그들에게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히셨다. 이 사건으로 하나님께서는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무엇인가의 피가 흘려져야 됨을 아담에게 보여주셨다. 하나님께서는 가죽옷으로 아담에게 입혀 주심으로 피로 드리는 제사를 계시해 주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아담이 그러한 제사를 드렸는지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다. 성경에서 처음으로 피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간 사람은 아벨이었다. 카인은 저주받은 땅의 소산만을 의지하였으나 아벨은 자기의 양 중에서 첫배 새끼의 피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갔다.

위에서 살펴 본 ‘아담의 언약’에 담긴 내용들은 아담 이후 모든 역사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지금도 여자들은 고통 가운데 아기를 낳으며, 동서를 막론하고 남녀 사이의 주도권은 남자에게 있다. 혹, 출산의 고통을 피하려는 시도가 행해지는데 이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칙에 위배되는 것이다. 현대에 와서 권위에 대한 여자들의 도전도 하나님의 말씀과는 반대되는 움직임이다. 아울러 남자들은 땀을 흘리며 일을 해야만 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선언하신 예외 없는 법칙이다. 만약 남자가 땀을 흘리지 않는다면 그는 몸에 쌓인 노폐물로 인해 병들어 죽을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구약과 마찬가지로 신약에서도 피(The blood)가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아담의 언약에 포함된 인간들의 삶에 대한 기본적인 원리들은 계속해서 파괴되어 가고 있다.

아담의 언약으로 죽음과 고통이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이것들은 하나님만이 그치게 하실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계시록 20장에 묘사된 날들이 오면 이것들을 그치게 하실 것이다. 현대 인간들이 인위적으로 만들어 가는 모든 과정들은 단지 아담의 언약을 뒤엎으려는 시도일 뿐이다. 남성들의 권위를 제거하는 것, 환경을 통제하는 것, 고통 없이 아기를 낳게 하는 것, 땀을 흘리지 않게 하는 에어컨 시설 등등.... 이러한 현실은 인간의 역사 가운데로 ‘하나님의 아들’의 직접적인 개입을 필요로 한다.

에덴에서 지식의 나무(the tree of the knowledge) 열매를 먹은 인간은 선악에 대한 지식을 갖게 되고, 선악을 아는 능력인 양심에 따라 살아가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환경 속에서 실패한 인간에게 양심에 따라 살도록 허용하심으로써 인간들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보여 주셨다. 양심은 후회와 두려움을 가져오나, 저항하는 힘이 없기 때문에 인간들이 악을 선택하고 그것을 행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아담의 언약이 선포되는 때부터 인간들은 전체적으로 다루어졌다. 양심에 의해 지배받던 이러한 시대를 ‘무지했던 때’(행 17:30)라고 부른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율법 하에서는 즉시 사형에 처해져야 하는 죄도 이 시대에는 눈감아 주셨다. 하지만 이것이 직접적으로 영적인 구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죄에 대한 법적 기준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랬던 것뿐이다. 인간들은 이 점에 대해 율법이 없던 시기의 죄에 대한 심판은 부당하다며 자신들을 변명한다. 그러나 이러한 변명은 의미가 없다. 세상의 창조 때부터 하나님의 영원한 능력과 신격(God- head)까지도 만들어진 것들에 의해 분명하게 알려졌기 때문이다. 양심에 의해 행동하던 인간들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를 돌리지 않았고, 오히려 창조주보다 피조물을 더 경배하고 섬겼다. 그들에게 율법은 없었으나, 그들에게 심판이 주어진다면 그들은 율법 없이 멸망할 것이다. 무지했던 때라도 심판에서 제외되지는 않는다.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도 본성에 의해 율법의 내용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무척 중요하다. 아브라함 이후 이스라엘 민족이 역사에서 특별히 구분된 이후에도, 이방 민족들은 아담의 언약과 함께 양심에 대한 경영원리에 계속해서 적용되기 때문이다.

지금도 동일하다.
백보좌심판대에서 심판을 받을 사람들은 두 부류로 구분할 수 있다.
1. 복음을 알지만 복음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
2. 복음을 통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는 죄인들

아담의 언약이 맺어진 이후로도 양심에 의해 하나님을 만나고 선을 행할 수는 있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들이 의롭게 되지 않고, 행하는 자들이 의롭게 되기 때문이다.
양심에 따라서 바르게 행했다면 의인이 될 수 있었다.
이 사실로 양심을 근거한 이방인들의 구원을 설명할 수 있다.
양심에 따라, 그들은 본성에 의해 하나님을 찾았다.
아브라함이나 코넬료처럼 경건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계시하신다.
그러나 이 시대도 역사 가운데 전개되는 모든 시대의 대표적인 특징에서 예외일 수는 없었다.
아담의 언약과 더불어 시작된 이 시대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에서 출발하였으나 점진적인 타락이 있었고 죄와 일치된 세상 속에서 불경건하고 찬란했던 문명은 파멸을 맞게 된다.
오직 에덴에서 선포된 아담과의 언약만은 불변한 채 존속되어 온다. 

노아의 언약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그의 씨와 그와 함께한 모든 생물과 언약을 세우셨다.
다시는 모든 육체가 홍수로 인한 물들로 멸망당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영속하는 세대들을 위하여 구름 속에 무지개를 두심으로 땅과의 언약의 표가 되게 하셨다.
에덴에서 아담의 타락 이후 양심에 따라 살아가던 인간들은 또 한번의 파국을 맞게 된다.
아담 이후에 태어난 인간들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를 돌리지 않고 자신들의 뜻에 따라 살아갔다.
양심을 따라 선을 행할 수 있었는데도 그들은 타락과 파멸의 길로 가고 말았다.
사람들이 지면에서 번성하기 시작하면서 딸들이 그들에게서 태어났다.
그 가운데서 약 1000년 전에 에덴에서 뼈아픈 실패를 경험한 아담은 자신의 후손들이 타락의 길로 가는 것을 친히 목격했을 것이다(창 5:5).
땅이 부패하고 폭력으로 가득차자 하나님께서는 물들로 땅을 심판하셨다.
홍수 이후 하나님께서 유일한 인간 노아와 맺으신 언약과 함께 인간이 인간을 다스릴 수 있는 권세가 주어지는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홍수로 인한 심판은 단지 인간들의 부패와 타락 때문만은 아니었다.
땅도 하나님 앞에 부패하고, 폭력으로 가득 차게 만든 놀라운 사건이 있었다.
영적인 존재들인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이 아름다운 것을 보고 그들을 자기들의 아내로 삼는 일이 발생했다(창 6:2).
이들은 자기들의 처음 위치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신들의 처소를 떠남으로 땅에 심판을 가져오게 했다.

땅 위의 모든 육체를 땅과 함께 멸망시키기로 작정하신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택하시어 죄에 대한 심판 가운데서도 또 한번의 은혜를 인간에게 베풀어 주셨다.
노아는 의인이고 그 당대의 완전한 사람이었으며 하나님과 동행하던 사람이었다(창 6:9).
그래서 주의 눈에 은혜를 입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신 모든 육체를 물로 멸망시키신 후, 노아에게 말씀하시어 모든 동물들과 함께 방주에서 나오라고 하셨다.
노아가 방주에서 나온 후 제단을 쌓고 번제를 드리자 하나님께서 그 향기를 맡으시고 노아 이후뿐만 아니라 모든 시대에도 포괄적으로 적용되는 언약을 맺으셨다.

일반적으로 노아와의 언약으로 “인간 통치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언약은 그 시대만을 제한하지 않는다.
아담과의 언약과 마찬가지로 무조건적으로 맺어진 노아와의 언약도 현재까지도 파기되지 않고 유효하며, 천년왕국은 물론 영원(Eternity)까지도 연장된다(창 9:16).
홍수 이후에 하나님께서 노아와 맺으신 언약과 연관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는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고 하셨다.
이는 사람의 마음의 구상이 어려서부터 악하기 때문이었다.
또 땅이 있는 동안에는 씨 뿌리고 추수하는 시기와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그치지 않게 되리라고 하셨다(창 8:22).
시편에는 땅에 대해 “영원히 세우신 땅”이라고 하였고 땅의 기초는 영원히 요동치 않도록 놓으셨다고 기록되었다.
하나님의 의가 거하는 땅은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그래서, 노아 이후부터 시작되어 지금도 게속되는 지상의 날씨와 연관된 달(month)의 변화도 땅이 있는 동안에는 지속될 것이다.

노아에게는 에덴에서 아담에게 주어졌던 명령이 반복된다(창 1:28; 9:1).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을 다시 채우라』

이로써 노아는 온 지구를 혼자서 차지하게 된다.
온 지구를 혼자서 차지한 사람은 아담과 노아 두 사람뿐이다.
아담과 노아 두 사람은 공통된 점이 많다.
두 사람 모두 죄로 인해 벌거벗게 되고, 두 사람 모두 세 명의 아들을 가졌는데 그들 중에 한 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고,
한 명은 저주를 받는다.
아담과 노아에게 위의 명령이 주어지기 전에 땅에는 물로 인한 심판이 있었다(벧후 3:5).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통하여 또 한번의 기회를 인간들에게 주신 것이다.

홍수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함을 땅의 모든 짐승들과 공중의 모든 새들과 땅 위에서 움직이는 모든 것들과 바다의 모든 동물들에게 넣어 주셨기에 인간이 모든 피조물을 지배할 수 있게 되었다(창 9:2).
만약 동물이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이미 오래 전에 멸절되고 말았을 것이다.
아담은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를 내는 나무의 열매만 먹을 수 있었으나, 노아는 살아서 움직이는 모든 것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이것들을 채소와 같이 먹게 되었다.
이때부터 인간들은 모세의 율법 아래에서 유대인들에게 금지된 음식 이외에는 아무것도 거부될 것이 없게 된다.
음식은 하나님께서 진리를 믿고 사는 사람들이 감사함으로 받도록 지으신 것으로,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좋은 것이다.
그러나 노아에게조차도 고기를 생명과 더불어 즉 거기에 있는 피째 먹는 것은 금지된다(창 9:4).
피를 먹는 것은 영원히 금지되는 명령이다(레 3:17).
이것은 노아에게처럼 율법 이전과, 율법 아래와, 은혜의 복음이 전파되는 시기 모두에서 금지된 사항이다(행 15:20).

노아의 언약을 설명함에 있어서 주목할 만한 사항 중의 하나는 사형제도의 실행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짐승과 사람의 손에서 생명의 피를 찾으신다고 하셨다(창 9:5).
사람의 피를 흘리는 사람은 사람에 의해서 자기의 피도 흘려지게 된다.
이 사형제도는 율법 아래서도 “도피 성읍”에서만을 제외하고는 결코 폐지되지 않았다.
피를 금지한 것과 마찬가지로 사형제도도 은혜의 복음이 전파되는 때에서도 존속된다.
바울은 페스토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며 말하기를, 무엇을 잘못했거나 죽을 만한 일을 했다면 죽겠다고 했다(행 25:11).
천년왕국에서도 이 제도는 유지되어, 형제에게 ‘어리석은 자’라 하는 자는 누구나 지옥불에 들어간다.
그러므로 현대에 있어서 사형제도를 폐지하기 위한 운동은 성경의 진리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죄에는 분명한 삯이 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사람을 죽이는 것은 창조주에 대한 도전인 것이다.
노아와의 언약은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과도 맺으신 것이므로, 만약 동물이 사람을 죽인다면 그 동물도 죽임을 당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출 21:28).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언약을 세우겠다고 말씀하신 것은 창세기 9:9에서이다.
이 부분이 실제적인 노아와의 언약으로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노아의 씨와 그와 함께한 모든 생물과 언약을 세우셨다.
다시는 모든 육체가 홍수로 인한 물들로 멸망당하지 않을 것이며 또 땅을 멸망시킬 홍수가 다시는 있지 않으리라는 내용이다.
이 언약은 하나님과 노아와 함께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체결된 것으로, 영속하는 세대들을 위하여 구름 속에 무지개를 두심으로 땅과의 언약의 표가 되게 하셨다.
이후로부터 하나님께서는 무지개가 구름 속에 보이면 하나님과 노아와 모든 육체를 가진 생물 사이에 맺은 언약을 기억하신다.
그래서 다시는 물들이 모든 육체를 멸망시키는 홍수가 되지 않는다.
이 언약은 영원한 언약이다.
그러나 땅에 있는 모든 것은 또 한번 멸망할 때가 온다.
하지만 이번에는 물이 아니고 불로써 그렇게 될 것이다(벧후 3:7).

‘노아와의 언약’으로 노아는 땅에 대한 실제적 통치자가 되었다.
노아가 쌓은 번제단과 그가 드린 번제는 진실된 경배 형태를 다시 설립하게 했다.
600세가 넘은 사람인 노아는 풍부한 경험과 지혜를 갖추고, 심판에 대한 기억을 가진 채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에덴에서 이브를 속인 사탄은 직접적으로 자신을 드러내진 않았으나 노아를 향해서도 자신의 일를 계속했다.
노아의 강력한 통치권도, 그가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자기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 이후 상실하게 된다.
스스로를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다스릴 수 없다.
노아가 술 취하여 자신의 알몸을 드러냄으로 에덴에서 아담의 실패가 반복된다. 인간이 벌거벗는 것은 항상 죄의 결과이다.

노아의 아들들에게서 난 자들이 온 땅에 퍼졌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을 다시 채우기보다는 큰 도시를 건설하려 하고, 그들의 탑이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쌓음으로 자기들의 이름을 내며 지면에 멀리 흩어지지 않으려 했다(창 11:4).
이 시도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으로 끝을 맞이하게 된다.
온 땅에 하나의 언어와 하나의 말만 있었기에 이런 일이 시작되었다.
그때 하나님께서 직접 내려오셔서 인간들의 언어를 혼잡 시켜 그들이 서로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하셨다.
그리하여 그들이 온 지면에 멀리 흩어지게 되고, 그 도성을 짓는 것도 그쳤다.
바벨(Babel)의 건축자들의 이름은 님롯(Nimrod) 한 사람만이 알려진다.
이곳에서 각기 다른 언어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때의 저주는 신약의 오순절에 와서야 부분적인 역전 현상이 있었다.
바벨 이후 인간 역사는 하나의 전환기를 맞는다.
이제까지는 한 종족이었고 유대인도 이방인도 없었다.
그런 가운데 인간들의 계속적인 실패와 타락과 파멸로의 질주는 전체적인 우상 숭배를 낳았고 창조주보다 피조물을 더 경배하게 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경륜은 이제까지 인류 전체를 대상으로 운영해 오시던 역사를 한 종족, 한 민족을 상대로만 경영하시게 되는 상황으로 변하게 된다.
이제까지의 언약은 모든 인간이 ‘이방인’이던 때에 맺어진 것이기에 아담 이후부터 노아의 언약까지의 원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현재의 인간들에게도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언약

아브라함과의 언약 이전에 있는 언약들은 하나님께서 전 인류를 대상으로 맺으신 것이었다.
아담 이후 계속되는 인간들의 실패는 첫째는 에덴, 둘째는 홍수, 셋째는 바벨에서 나타났다.
세 번의 실패로 인하여 하나님의 경영방법이 크게 변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시날 땅에서 하나님께서 온 땅의 언어를 혼란케 하셨으므로, 사람들은 거기서부터 온 지면에서 멀리 흩어지게 됐다.

홍수 이후 창세기의 기록은 아브라함을 예비하기 위한 계보만을 언급한다.
‘바벨’이후 모든 인간들은 배도의 길로 접어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필요로 하는 인물이 등장하자 그를 부르시고 그에게 무조건적인 약속들을 하신다.
갈대아 우르는 이교도 지역 가운데 전형적인 이교도의 도시였다.
이곳에 거하던 아브람에게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처음으로 말씀하신 것은 창세기 12:1-3에 나타난다.
인간들이 전체적인 이교도화를 겪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을 선택하셨다.
아담 이후 이제까지의 경륜과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다.
한 사람을 부르셔서 그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셨다. 창세기 12:1-3부터를 “아브라함의 언약”의 시작이라 볼 수 있다.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살펴보고, 언약의 내용들을 연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 언약의 내용 가운데는 아브라함의 씨에 관한 것과, 그들에게 약속된 땅에 관한 내용이 중요한 부분인데, 이것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적용하느냐에 따라서 성경을 보는 시각이 전혀 달라지기 때문이다.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문자적으로 해석한다면 그 약속은 아직도 성취되지 않은 채, 역사는 약속의 성취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러나 비문자적으로 해석한다면 이 언약의 성취는 이미 이루어졌고, 현재도 부분적으로 성취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언약을 살펴볼 때 유의해야 할 것은, 아브라함의 언약은 이전 언약들과 마찬가지로 무조건적(unconditional)인 언약이라는 것이다. 언약의 체결이나 성취를 위해서 아브라함이 먼저 해야 할 일은 없었다.
오직 하나님께서 주체가 되셔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선포하셨다.

창세기 15장에서 약속을 확인하실 때에 아브람은 깊은 잠에 빠졌었고 연기 나는 가마가 보이며, 불타는 등만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갔다.
언약은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체결하신 것이고, 아브라함은 그 언약을 듣는 위치였다.

이후 맺어지는 모세와의 언약과는 대조적이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실 때는 “너희가 ...을 하면(If you will...) 내가 ...을 하겠다(I will)”라고 하셨다.
이것은 조건적인 언약임을 보여준다.

아브라함의 언약은 창세기 12장 이후 계속해서 확증되고, 언약의 내용도 구체화된다.
처음에는 『내가 네게 보여줄 땅』(12:1)이라고 말씀하셨으나 “눈을 들어... 바라보라. 이는 네가 보는 땅”으로 구체화된다.
그리고 이 땅은 “이집트 강에서부터 큰 강 유프라테스까지”와 “카나안의 모든 땅”으로 더욱 구체화된다.
하나님의 언약이 점진적으로 계시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특이한 사실은 땅에 대한 약속이 구체화되고 확증된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순종 여부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오히려 『네 자신의 몸에서 나올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듣고도 아내 사래의 여종 이집트인 하갈을 아내로 삼아 임신토록 했다.
하갈은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아 주었다.
이처럼 약속의 말씀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행동을 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세우시고 내가 너를 심히 번성케 하리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맺으신 언약은 무조건적이다.
또 변화될 수 없는 영원한 언약이다(창 17:7).
사람의 언약일지라도 확정되고 나면 아무도 폐기하거나 덧붙이지 못한다.
이 영원한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의 씨에게 하신 것으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이삭 안에서 미리 확정하셨다.

아브라함의 언약은 세 부분으로 구분지어 살펴볼 수 있다.

1. 아브라함 자신에 대한 약속
2. 아브라함의 씨에 대한 약속
3. 땅의 모든 족속들에 대한 약속

1. 아브라함 자신에 대한 약속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최초로 약속하신 것은 다음과 같다.
『큰 민족을 이루게 할 것이며 네게 복을 주고 네 이름을 위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되리라』(창 12:2,3a).
『너를 축복하는 자들에게 내가 복을 주고 너를 저주하는 자를 저주하리라.』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 당대에 문자 그대로 성취되었다.
이집트인 하갈의 소생 이스마엘을 통해 큰 민족이 이루어지고, 열 두 통치자들이 나오게 된다(창 25: 16; 17:20).
사라가 죽고 난 후 아브라함이 다시 아내를 얻어서 낳은 아들들을 통해서도 많은 족속들을 이루게 된다.
여기에 그의 상속자 이삭의 후손까지 포함한다면 그야말로 많은 민족들의 아비가 된 것이 분명하다(창 17:5).
지금도 아랍 민족과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을 자기들의 조상으로 여기고 있다.

또한 아브라함은 복이 되었다.
그에게 대적했던 크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은 모두 그에게 패하였고, 그로인해 하나님께서는 그랄 왕 아비멜렉 집안의 모든 태를 닫으셨고,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선대하자 그의 아내와 그의 여종들을 치유해 주심으로 그들이 아이들을 낳을 수 있게 하셨다(창 20:17,18).

물질적인 면에 있어서도 아브라함은 복을 받았다.
그는 가축과 은과 금으로 매우 부유하였고, 그와 함께 거하던 롯도 양떼와 소떼가 많으므로 그들이 함께 거하는 것을 그 땅이 수용할 수 없었다(창 13:6).
아브라함은 영적인 면에서도 복을 받아 무할례 시의 믿음으로 된 의를 할례의 표로 인침 받음으로, 할례 받지 않고 믿는 모든 자들의 조상이 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친구라고 불렸다(약 2:23).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이삭을 제물로 드렸는데, 그는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이삭을 다시 살리실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하나님께서 네 씨라 부를 자는 이삭에게서 난 자들이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개인에게 하신 약속들은 모두 문자적으로 성취되었다.

2. 아브라함의 씨에 대한 약속

아직 상속자도 없는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약속을 하셨다.

『이제 눈을 들어 네가 있는 곳에서부터 북쪽과 남쪽과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이는 네가 보는 모든 땅을 내가 네게 줄 것이며 네 씨에게 영원히 주고 내가 네 씨를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셀 수 있다면 네 씨도 셀 수 있으리라.』

아브라함의 씨를 언급하면서 땅을 약속하는 언약은 곧 영원한 언약으로 불리며(창 17:17),
카나안의 모든 땅을 주어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며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하셨다.
이 언약의 표로서 모든 남자 아이는 대대로 난지 팔일이 되면 할례를 받도록 되어있고,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아이는 그의 백성 중에서 끊어진다.

또한 이 영원한 언약은 이스마엘이 아닌 이삭과 그의 씨에게 세워지게 된다.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것은 그대로 이삭에게 확증되어 다시 언급된다.

『내가 너와 함께 하고 너에게 복 주리라. 내가 너와 네 씨에게 이 모든 지역들을 주고, 또 내가 네 아비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리니 내가 네 씨를 하늘의 별들처럼 번성하게 할 것이며 이 모든 지역들을 네 씨에게 주리라. 네 씨 안에서 땅의 모든 민족들이 복을 받으리라』(창 26:3,4).

이 영원한 언약은 무조건적이다.
이삭이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그랄에 거하였고 아브라함과 마찬가지로 이삭도 똑같은 죄를 지었으나, 하나님께서는 이삭에게 복을 주셨고 그로 창대하고 번성하며 매우 부유하게 하셨다.
이같이 이삭에게 계승된 “아브라함의 언약”은 그대로 그의 아들 야곱에게 이어진다. 『나는 네 아비 아브라함의 주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씨에게 주리라. 네 씨는 땅의 티끌같이 될 것이며 너는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까지 멀리 퍼지리라. 땅의 모든 족속들이 너와 네 씨 안에서 복을 받으리라』(창28:13- 14).

아브라함의 씨가 그 땅을 영원히 소유하리라는 약속은 야곱에게도 미래의 일로 언급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 약속은 언제 성취될 것인가? 이 질문이 성경의 예언연구에 있어서 가장 핵심이 되는 말이다. 이 언약들의 성취가 이스라엘의 실패로 인하여 신약에 와서 교회를 통하여 영적으로 이루어 졌다고 한다면 무천년적 해석이 된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들에게 이루어질 것이라고 가르친다면 전천년적 해석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언약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서 솔로몬 시대에 이 언약들이 잠시 동안 문자 그대로 성취된 것을 볼 수 있다. 『유다와 이스라엘이 많았으니, 바닷가에 있는 모래처럼 많아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더라. 솔로몬이 모든 왕국들을 다스렸으니, 강에서부터 필리스티아인들의 땅과 이집트의 경계까지더라. 그들이 예물들을 가져오며 솔로몬의 평생 동안 그를 섬기니라』(왕상 4:20,21).

실제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씨가 바닷가에 있는 모래처럼 많았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그 땅, 이집트 강에서부터 큰 강 유프라테스까지를 솔로몬이 통치했다. 그렇다면 솔로몬 시대에 “아브라함과의 언약”이 성취되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아브라함의 씨가 땅의 소유를 갖는 것은 영원하다. 그러나 솔로몬의 통치는 솔로몬 당대로 끝났다. 여기서의 기록은 천년왕국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땅을 통치하시는 모습을 모형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은 문자 그대로의 성취는 미래의 일이다. 솔로몬 때처럼 문자 그대로 그 땅을 소유하고 바닷가에 있는 모래처럼 번성하며 영원토록 소유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 자신을 두고 맹세하셨다.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위대한 이를 두고 맹세하나, 자기보다 더 큰 자가 없으므로 자신을 두고 맹세하셨다. 맹세는 모든 논쟁의 종결을 짓는 확정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을 유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자기의 뜻이 불변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확정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거짓말하실 수 없다. 유대인의 불순종도 언약을 파기시키는 조건이 될 수 없다. 다만 성취의 시기가 유보될 수는 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또 야곱에게 유업으로, 이스라엘에게 영원한 언약으로 확증하셨다(시 105:6-11).

만약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칙들, 즉 태양이 낮의 빛이 되고, 달과 별이 밤의 빛이 되는 것들이 없어진다면 이스라엘도 민족이 되지 못하고 영원히 끊어질 것이고, 위로 하늘을 측량할 수 있고 아래로 땅의 기초들을 탐지할 수 있다면 이스라엘이 행한 죄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그들 모두를 버리실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내용은 기록된 그대로 미래에 성취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언약들은 아브라함 이후 지금까지 아직 성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세의 언약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아브라함의 씨가 자기 땅이 아닌 곳에서 타국인이 되어 그들을 섬길 것이며 그들이 사백년 동안 아브라함의 자손을 괴롭게 할 것이라고 하셨다(창 15:13).

그 후 카나안 땅에 있던 7년간의 흉년으로 인해 야곱과 그의 아들들은 이집트로 내려가서 그 곳에서 거했다.
이집트에 거주한 이스라엘 자손의 기거 기간 사백삼십 년이 끝나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모든 군대를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오셨다(출 12:40).
이때는 이삭 안에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이 확정된 지 사백년 후로써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대로 성취되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집트를 나온 후 홍해를 지나 광야에 도착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호렙에서 이스라엘 자손과 언약을 맺으셨다.

이때 맺은 언약을 “모세의 언약”으로 설명한다.
모세의 언약은 창세기의 “아브라함의 언약”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스라엘 자손들을 하나님께서 굽어보시고,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신 것은 그들의 신음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맺은 그의 언약을 기억하셨기 때문이다. 아브라함과의 언약은 영원한 언약이기에 결코 취소되거나 변경되지 않고 지속된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실 때도 이것이 아브라함과의 언약의 성취임을 밝히시고 있다(출2:24).

  이 언약은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에서 빠져 나온 후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에서 맺어졌다. 모세와의 언약의 가장 큰 특징은 아브라함과의 언약과는 달리 조건적이라는 데 있다.

  “이제 만일 너희가 참으로 내 음성에 복종하고 나의 언약을 지키면...”(출19:5). 이스라엘 자손들의 순종이 선행되어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약속하신 것을 하실 수 있었다. 이스라엘이 모든 백성보다 특별한 보물이 되고 하나님께 제사장들의 왕국이 되며 거룩한 민족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율법을 지켜야 했다. 이 율법의 내용은 출애굽기 20장부터 시작하여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이 후로의 이스라엘 역사를 규제하며, 인간 역사를 “율법시대”라는 또 하나의 경영시대로 구분한다. 이것은 인간 역사에서 다섯 번째 경륜이다. 이 시대는 시내 산에서부터 갈보리까지, 출애굽에서 십자가까지 연장된다. 이후로 광야와 카나안 땅에서의 이스라엘 역사는 율법을 위반해가는 과정의 기록이다.

  모세와의 언약에서도 표적(sign)을 구하는 유대인들에게 영원한 표적이 주어진다.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은 이후 안식일이 율법의 영원한 표적이 되었다(출31:17). 이스라엘 자손은 안식일을 지켜야 하며, 그들 대대에 걸쳐 영원히 지켜서 영원한 언약을 삼아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자손 사이의 영원한 표적이다. 이 날은 유대인들에게 거룩한 날이다. 이 날을 더럽히는 자는 모두 반드시 죽이게 되어있다. 이 날에 일하는 자는 누구라도 그 혼이 자기 백성 가운데서 끊어질 것이다(출31:13).

  그러나 안식일은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에게 한정되는 표적이다. 현 시대 그리스도인이 안식일을 지켜야 할 아무런 성경적인 근거가 없다. 만약 그리스도인이 이 날을 지킨다면 안식일뿐만 아니라, 모세와의 언약에 언급된 모든 율법을 지켜야만 된다. 그가 죄를 지었다면 짐승을 끌고 성막으로 가서 그 짐승의 피를 하나님께 드려야 하며, 돼지고기를 금해야 하고, 최소한 1년에 세 차례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한다.

  모세의 언약은 이스라엘 민족들의 도덕적, 종교적, 사회적, 위생적 사항에 대해 세부적이며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고, 2,000개 이상의 명령으로 구성되어 있다. 모세 이후 모든 이스라엘의 종교적, 도덕적 법칙을 제공하며, 새 언약을 맺으시는 날까지 존속된다(히 8장). 결혼과 성에 대한 규례, 정결례, 십계명, 재판에 대한 것, 성막의 봉사, 명절들 등. 이 율법은 이스라엘 자손들의 모든 삶을 세세하게 기술하여 그들의 삶을 규제했다. 『이것은 주 너희 하나님께서 너희를 가르치라고 명령하신 계명들과 규례들과 명령들이니, 너희가 가서 치리할 그 땅에서 이것들을 행할지니라』(신6:1). 이스라엘 백성이 카나안 땅에 들어가서 행해야 할 율법은 기본적으로 세 부분으로 구분된다.

1. 계명(Commandment) : 하나님의 의로우신 뜻을 나타낸다(출 20:1-26).

2. 명령(Judgment) : 이스라엘의 사회적 생활을 규제한다(출 21:1-24:11).

3. 규례(Statutes) : 이스라엘의 종교적 생활을 규제한다(출 24:12-31:18).

계명들과 규례들은 하나의 종교적 체계를 이룬다.
계명들은 정죄와 죽음의 직분이었다(고후 3:7-9).
그러나 율법은 다양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정죄와 죽음의 직분이면서도, 율법은 마음을 기쁘게 하고 눈을 밝게 하며 복 있는 사람의 즐거움이 되었다(시 1:1,2; 19:8).
또한 영생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주님이 말씀하신 것은 생명으로 들어가기를 원한다면 계명들을 지키라는 것이었다(눅 10:23).
그러나 율법은 엄격했다.
누구든지 율법 전체를 지키다가 하나를 범하면 전체를 범한 자가 되었다(약 2:10).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간음하지 않고 안식일도 범하지 않고 다른 모든 계명들을 지켰다 하더라도 만일 그가 살인을 했다면 그는 율법 전체를 범한 자가 되었다.
이스라엘은 율법을 통해서 죄의 깨달음을 얻었다.
율법이 죄는 아니지만, 율법에 의하지 않고서는 죄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율법이 없으면 죄는 죽은 것이나 계명이 오자 죄가 살아나게 되었다.
행하도록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것을 계속해서 행하지 않는 자는 누구나 저주를 받았다.

그러나 우리 시대(교회시대)에는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누구든지 저주 아래 놓이게 된다.
구약에서 율법은 단지 황소나 염소의 피와 암송아지의 피로 불결한 자들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하게 할 뿐이었다.
그들의 죄가 깨끗하게 되었던 것은 아니다.
자비롭고 은혜로우며, 오래참고 선함과 진리가 풍성하신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자비를 수 천대까지 간직하여, 허물과 죄를 용서하시나 죄악이 결코 깨끗케 되지는 않았다(출 34:7).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후로는 모든 사람들이 율법의 행위가 없어도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
그러나 믿음으로 인하여 의롭게 된다고 하여 율법을 폐하지는 못한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율법은 굳건하게 세워졌으며, 또 완전하게 되었고,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믿는 사람에게 의가 되시고자 율법의 끝이 되셨다.

이제 그리스도의 몸이 땅에서 사라지고 하나님의 경륜이 이스라엘에게로 다시 돌아올 때 출애굽 당시 시내 산에서 주어진 모세와의 언약은 다시 효력을 갖게 될 것이다.
대 환란 기간에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며 안식일을 지키게 된다(계 12:7, 마 24:20).

다윗의 언약

성경의 예언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 중의 하나가 다윗의 언약이다.
대개의 경우 아브라함의 언약에 대해서는 주의 깊게 다루어지고 있으나 다윗의 언약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왕국이라는 성경의 대 주제를 이해하고 미래에 있을 일에 대해 확증을 갖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언약을 살펴보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

이 언약을 앞선 언약들과 비교해 볼 때, 전 우주를 향해 구체적으로 나타내신 하나님의 계획을 알 수 있다.
다윗이 받은 언약을 대할 때 쉽게 범하는 잘못은 이 약속들이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서 모두 성취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과연 이 언약이 솔로몬에게서 완전히 성취되었는지 아니면 미래의 성취를 향해 지금도 나아가고 있는지를 주의 깊게 보아야 한다.

다윗이 왕위에 오른 후 하나님께서는 주위의 모든 그의 원수들로부터 그에게 쉼을 주셨다.
그때 다윗이 선지자 나단에게 말하기를, 자신은 백향목 집에 거하는데 하나님의 궤는 휘장 안에 있노라고 하여 하나님의 전 건축을 위한 자신의 계획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나단을 통하여 다윗을 향한 더 큰 우주적인 계획을 보여주셨다.

"네 연수가 차서 네가 네 조상들과 함께 잠들 때, 내가 네 몸에서 나올 네 씨를 네 뒤에 세우고, 그의 왕국을 견고하게 하리라."(사무엘하 7:12)

위의 구절에서 세 가지 사실을 볼 수가 있다.

첫째, 다윗의 보좌는 그의 아들을 통해 계승된다는 것
둘째, 아직 아들이 태어나지도 않았을 때인데 이 약속이 주어졌다는 것
다윗은 밧세바를 이 약속을 받은 이후에 만나게 된다(삼하 11:1-27)
셋째, 그의 왕국이 견고하게 되리라는 것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한 집을 세울 것이요, 내가 그의 왕국의 보좌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삼하 7:13).

사면에서 그를 에워싼 전쟁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윗의 발바닥 아래에 두실 때까지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전을 건축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사면에 쉼을 주셨으며, 아무 대적도 재앙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때 솔로몬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전을 건축하려고 계획하였다(왕상 5: 5).

솔로몬이 이스라엘을 치리한 지 사년 둘째 달에 주의 전을 건축하기 시작하였고, 십일 년에 주의 전이 그 모든 양식대로 모든 부분이 완성되었다.
솔로몬이 전을 건축하는 데 칠 년이 걸린 것이다.
‘주의 이름을 위하여 한 집을 세울 것이라’는 부분은 솔로몬에서 성취되었다.
그러나 ‘왕국의 보좌가 영원히 견고하게 되리라’는 부분은 솔로몬 당대에만 성취되는 약속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그렇기에 이 구절은 다윗의 아들인 메시야를 통하여 미래에 완전하게 성취될 것이다.
왜냐하면, 다윗 왕국의 보좌가 영원히 견고하게 서리라는 약속은 솔로몬 때 성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이 가지인 사람을 보라, 그가 자기 자리에서 자라 주의 성전을 건축하리라."(스가랴 6:12).

그의 이름이 가지인 분이 주의 성전을 건축하고 영광을 지니며 그의 보좌에 앉아 다스릴 것이다.
위의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완전하게 성취되게 된다.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되리니, 만일 그가 죄악을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막대기로 그를 징책 하고 사람의 자식의 채찍으로 징책 하리라."(사무엘하 7:14)

위의 구절은 히브리서 1:5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실로 인용된다.
다윗의 언약을 다루는 사무엘하의 구절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솔로몬 안에서 이중적 성취로도 설명할 수 있으나 솔로몬에게서의 성취는 완전한 것이 없고 역사적이고 부분적인 것일 뿐이다.

솔로몬이 주의 전을 지었으나 그의 왕국은 영원히 서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타국 여인들에 관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셨다.

"너희는 그들에게로 들어가지 말고, 그들은 너희에게 들어오게도 말지니, 이는 그들이 반드시 너희 마음을 돌려서 그들의 신들을 따르게 할 것이기 때문이라." (열왕기상 11:2)

그러나, 솔로몬은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과 결합하였다.
그에게는 이집트인, 모압인, 암몬인, 에돔인, 시돈인, 힛인의 여인들로부터 왕비가 칠백, 후궁이 삼백이었으며, 그 아내들이 그의 마음을 그들의 신들에게로 돌이켰다.
솔로몬은 그의 아버지 다윗의 마음처럼 하나님과 더불어 온전하지 아니하여, 시돈인들의 여신 아스토렛과 암몬인의 신 밀콤을 따랐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 말씀하시어 그 왕국을 찢어 그의 신하들에게 주시겠다고 하셨다(왕상11:11).

사무엘하 7:14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됨은 명백하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때라도 천사들 중 어느 누구에게 아들이라고 하신 적은 없다.
죄를 알지도 못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삼으셔서 친히 나무에 달린 자신의 몸으로 우리의 죄들을 담당하게 하셨으며,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낫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질고를 지고 멸시받았으며 우리의 슬픔을 지고 우리의 형벌을 대신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당하셨다. 그가 맞은 채찍으로 우리가 치유되었다.

  『그러나 내가 네 앞에서 제거한 사울로부터 나의 자비를 빼앗은 것과 같이, 그것이 그에게서 떠나지는 아니하리니 네 집과 네 왕국이 네 앞에서 영원히 서리라. 네 보좌가 영원히 서리라』(삼하7:15,16).

  하나님께서는 사울로부터 자비를 빼앗은 것과 같이, 다윗의 아들로부터 하나님의 자비를 완전히 제거하지는 아니하리라고 약속하셨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세 가지를 약속하셨다.

1.  집이 영원히 서리라
2.  왕국이 영원히 서리라
3.  보좌가 영원히 서리라

다윗의 씨의 보좌는 영원히 견고하게 되지만, 솔로몬에게는 이같이 말씀하지 않았다.
솔로몬의 계보는 코니야를 끝으로 해서 그의 씨에서는 아무도 번성치 못하며 다윗의 보좌에 않아 유다를 다스릴 자가 더 이상 없게 된다(렘 22:30).

시드키야는 마태복음을 통해 볼 때 왕의 계보에 들지 못한다.
이제, 다윗의 언약에 나타난 약속에 대한 실제적인 성취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가 됨을 볼 수 있다.

"주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의 조상 다윗의 보좌를 주실 것이며 그는 야곱의 집안을 영원히 통치할 것이요 그의 왕국은 무궁하리라."
(누가복음 1:32, 33).

예수 그리스도는 솔로몬을 통하여 다윗의 씨가 되지 않고, 다윗의 다른 아들 나단을 통하여 그의 합법적인 계승자가 된다(누가복음 3:31).

"그 이상은 멜레아요 그 이상은 멘나요 그 이상은 맛다다요 그 이상은 나단이요 그 이상은 다윗이요."

다윗의 언약의 성취를 위해서는 통치권적인 왕의 형태가 지속되는 것보다는, 다윗의 씨가 순수하게 보존되는 것이 필요했다.
다윗의 언약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는 것임을 확인한다면 다윗에게 약속한 그 왕국과 보좌는 아직도 미래의 사건임을 알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다윗의 보좌에 앉아 계시지 않고, 천상에서 하나님의 오른편 보좌에 앉아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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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형상(창세기 1:26-28)

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육축과 온 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하나님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에 충만하라, 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Then God said, "Let us make man in our image, in our likeness, and let them rule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the birds of the air, over the livestock, over all the earth, and over all the creatures that move along the ground."
So God created man in his own image, in the image of God he created him; male and female he created them.
God blessed them and said to them, "Be fruitful and increase in number; fill the earth and subdue it. Rule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the birds of the air and over every living creature that moves on the ground."

하나님의 형상(히브리어 : צֶלֶם אֱלֹהִים, 라틴어 : Imago Dei, 하나님의 모습)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모양)으로 창조되었다고 보는 유대교, 기독교 전통적인 신학적 개념이자 교리이다.

우리의 형상,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26절에 "우리" 라는 복수 인칭 대명사가 3회 반복되어 사용되었습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하나님은 단수 명사인데 우리라는 복수 명사로 표현한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첫째는 히브리 문학의 특수한 표현

예를 들면 한국에서도 "우리 마누라" 라고 말합니다.
만일 이런 표현을 수백년 후에 사람들이 문자로 읽는다면 이 시대에는 남자의 수가 매우 적어서 여자 한 사람이 여러 남자와 결혼하였구나 하고 이해할 것입니다.
우리 마누라라고 말하는 것은 한국인들의 "나의 마누라"에 대한 특별한 표현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와 같은 비슷한 표현으로 "우리 집" "우리 아들" "우리 교회" "우리 학교" 등은 복수 명사로 표현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그렇지만 "우리 마누라"라는 표현은 당시 문화와 풍속을 알지 못하면 문제가 있는 줄 알 것입니다.

둘째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표현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그 위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 셋으로 구분합니다.
도저히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기가 어려운 용어라고 하겠습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은 삼위로 존재하면서 동시에 온전한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라는 용어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하나님형상대로

 하나님의 형상(צֶלֶם אֱלֹהִים,  Imago Dei)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모양)으로 창조되었다고 보는 유대교, 기독교의 전통적인 신학적 개념이자 교리이다.

6754. 형상(形象) - 체렘(צֶלֶם)

1. 그림자,  2. 형상
발음 / 체렘(tselem)
어원 / ‘그늘지다’는 의미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관련 성경 / 형상(창 1:26, 삼상 6:5, 시 73:20), 석상(민 33:52), 우상(왕하 11:18, 겔 7:20, 암 5:26), 그림자(시 39:6)
구약 성경 / 17회 사용


1823. 모양(模樣) - 데무트(דְּמוּת)

1. 유사,  2. 유형,  3. 형상
발음 / 데무트(demûwth)
어원 / 181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모양(창 1:26, 겔 1:10, 13), 형상(창 5:1, 대하 4:3, 겔 10:22), 구조(왕하 16:10), 같음(시 58:4,사 40:18, 단 10:16)
구약 성경 / 25회 사용

1819. 닮다 - 다마(דָּמָה)

1. 닮다,  2. 시편 102:7,  3. 에스겔 31:8
발음 / 다마(dâmâh)
관련 성경 / 비(比)하다(겔 31:2, 아 1:9), 생각하다(민 33:56, 시 48:9, 50:21), 모해(謀害)하다(삼하 21:5), 비교하다(사 40:25, 46:5, 애2:13), 비유를 베풀다(호 12:10), 생각하다(에 4:13)
구약 성경 / 30회 사용

각종 동물과 사람을 만들 때 사용된 재료는 "흙"입니다.
동물과 사람은 같은 재료를 사용하여 만들어진 "피조물"이지만 동물과 사람이 다른 이유는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사람에게는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었습니다.

다시 한 번 더 강조합니다.
사람과 동물이 다른 이유 두 가지를 소개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만들어진 피조물
둘째는 사람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신 피조물

초대교회 교부들은 형상과 모양을 별개의 단어로 설명하였다.
형상이란 구체적인 닮음으로 신체와 관련 된 것
모양이란 추상적인 유사성으로 영적이고 도덕적인 본성으로 보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물질적인 요소가 없으시다.
따라서 형상을 신체와 관련된 것으로 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성경의 용법에 따라 형상과 모양은 상호 융통성 있게 사용되는 단어로 엄밀하게 구분하는 것보다 유사한 단어를 반복하여 사용하므로 강조하는 문학적인 표현이라고 한다.

사람의 전인격적인 성품과 속성이 하나님을 닮았다.

첫째, 실제적인 관점

어거스틴, 루터, 칼빈 등 고전적인 신학자들의 견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실체적인 어떤 요소라고 하였다.
어거스틴 - 이성, 자유의지
루터, 칼빈 - 이성, 자유의지 이외에 의, 진리, 거룩함, 지식(에베소서 4:23-24, 골로새서 3:10)

에베소서 4:23-24.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골로새서 3:10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둘째, 관계적인 관점

에밀 부르너, 칼 바르트 등
하나님의 형싱이란 사람에게 부여된 어떤 실체가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한다.
사람이 관계하는 경험성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한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세 위격 간의 관계성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여 사람은 이와 같은 인격적 관계성에 따라 하나님과 사람들과 곤계성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다.

셋째, 기능적인 관점

하나님의 형싱이란 관계성도 아니고, 소유하고 있는 어떤 본질이 아니라 사람이 수행하는 어떤 기능을 말한다.
모든 것을 다스리라는 말씀에 따라 대리 통치하는 행위를 하나님의 형상아라고 한다.

이와 같은 세 가지 관점은 서로 상충되는 견해라기 보다는 상호 보완적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이란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을 닮았다는 것은 사람이 이성과 자유의지와 의와 진리와 거룩함을 갖는 존재이며,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 사이에 관계성을 갖고 살아가는 존재로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대리 통치를 하는 존재라는 뜻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에 따라 지어진 피조물로서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완성을 위하여 살아가야 한다.

이제 형상이란 히브리 단어 "체렘"에서 그 배경을 설명합니다.

예를 들어 어느 길에 사람이 옮기기 어려운 거대한 바위가 누군가에 의해서 버려졌습니다.
그 바위를 보며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누가 저런 못된 짓을 했을까?
그런데 어느 유명한 조각가는 그 바위를 인부를 동원하여 그의 작업실로 옮겨 놓았습니다.
그리고 몇날 몇일 동안 그 바위를 바라봅니다.
사람들은 조각가를 바보라고 비웃지만 조각가는 사람들의 조롱과 비난에 전혀 동요되지 않습니다.
드디어 조각가는 손에 망치와 정을 들고 그 바위를 쪼아내기 시작합니다.
거대한 바위가 점점 작아집니다.
바위 덩어리에서 떨어져 나가는 조각들을 "체렘"이라고 합니다.
모든 조각들이 떨어져 나간 후에 마지막에 유명한 작품이 드러났습니다.
그동안 비웃던 사람들이 조각품을 보는 순간 감탄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체렘)과 모양(데무트)에 따라 창조된 피조물입니다.
처음 사람 아담과 하와는 온전한 형상과 모양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죄가 아담과 하와에게 들어오면서 온전한 모양과 형상은 보이지 않고 외모만 보게 되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드러내지 못하는 죄와 같은 조각들을 말씀의 검으로 쪼개어 부숴버려야 합니다.

내가 버려야 할 조각들을 찾아내야 합니다.

현재 이민교회의 문제를 살펴봅니다.

1. 목회자의 자질 / 목회자의 지적, 도덕적, 영적 자질
2. 신앙과 삶의 불일치 / 교단, 교회 연합단체의 비윤리성, 교회 분쟁, 성직자 중심의 교회 권력 구조,  재정적 불투명
3. 외적 성장을 추구 / 기복 신앙 기복 설교,  현행법 위반(이민법, 세법),  개교회주의, 교인 빼오기, 교회들의 과잉경쟁,  교회 밖의 사회에 대한 무관심,  직분의 감투화,  교회내의 부유층,  지식층 우대,  신학교 난립,  목사 안수 과정의 비정상화
 
한국교회의 전통적인 신앙적 고질병

1. 이원론적인 신앙생활(신앙과 삶이 전혀 다르다)
- 이중구조적 신앙생활(생활신앙으로 회복하라)

2. 기복신앙(예수를 잘 믿으면 복을 받는다)
- 샤머니즘의 영향

3. 직분론의 문제
- 기능을 위한 직분이 사회신분을 위한 직분으로 타락하였다.
  예를 들면 직분을 맡으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

첫째는 거짓 - 진실이 완전히 무너져 버린 세상

윤석열정부가 검사들로 내각을 구성하므로 검찰공화국이라고 비난하고 반대한다.
왜 검사들을 내각의 관리들로 세워야 하는가?
질서가 완전히 파괴되었기 때문에 먼저 법질서를 바르게 세워야 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불순종 - 말씀에 대한 왜곡

수많은 설교가 파고 넘치지만 홍수 때에 마실 물이 없는 것처럼 설교는 많지만 진리를 선포하는 설교를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는가?

김금자씨의 경우 그 해에 성경 읽기에 따라 신구약 성경을 1년에 한 번씩 통독하므로 그 주간에 읽은 말씀 중에서 본문을 선택하여 설교를 하게 됩니다.
년말이 되어 요한계시록을 본문으로 설교를 준비하는데 이 설교를 하면 분명히 김금자씨가 그 다음주부터 교회에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너무 분명합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살짝 피해가야 하는가?
아니면 그대러 진행해야 하는가?
결국 베리칩은 요한계시록에 소개된 666이 아니라고 설교했더니 정말 그 다음주부터 출석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 언니 김영애씨에게도 그런 교회에 나가지 말라고 강요하더랍니다.
그때 김영애씨의 남편이 이렇게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너희들이 성경을 알면 목사님보다 더 잘 알겠느냐?
그리고 성경에 없는 이상한 것을 따르지 말라"고 강조했다고 합니다.

저는 목사에게 순종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순종의 대상을 하나님 한 분입니다.
목사가 하나님의 진리를 잘못 가르칠 때는 순종하지 않는 것이 진리편에 서는 것입니다.

셋째는 어리석음(무지) - 차별금지법에 대한 무관심

거의 모든 나라들이 차별금지법을 법으로 제정하고 있습니다.
지구촌에서 유일하게 차별금지법에 대하여 반대하는 나라가 자유대한민국입니다.
성소수자들에 대해서 그들을 미워하고 증오하는 것이 기독교가 아닙니다.
그들의 잘못된 성생활에 대한 지식을 깨우쳐서 성경적으로 회복시키려는 것입니다.

남성과 여성 그리고 간성을 이야기 합니다.
더구나 지난 6월 7일 미 국무부 부장관이 한국을 방문하였을 때 미국 대사관저에 성조기와 오색기를 게양하며 바이든 정부는 성소수자들에게 많은 관심을 갖고 저들의 인권 회복을 위해 노력한다고 선언했습니다.
이와 같은 일에 대해서 교회가 무관심하다는 것은 어리석음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성(性), Intersex

세상에는 세 가지의 성(性)이 있다.  
남성, 여성 그리고 간성(間性)이다.
간성은 남성과 여성의 특징을 같이 가지고 있는 존재로 흔히 인터섹스(Intersex)라는 말로 더 잘 알려져있다. 

2017년 11월 9일 유럽 최초로 독일에서 남성과 여성이 아닌 제3의 성을 인정한다는 소식이 국내 언론에 보도되었다.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는 인간의 기본권에 기초하여 ‘간성(間性, intersex)’을 새로운 성으로 등록할 수 있도록 허가할 것을 결정함과 동시에 연방의회에 2018년 말까지 관련법의 개정을 요구했고 내무부 측은 헌재의 결정을 이행할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고 한다.



남성과 여성의 신체적, 유전적 특징이 섞인 채 태어나는 Intersex는 트랜스젠더(Transgender)와 다르다.
인터섹스가 유전자 혼란으로 인해 야기되는 일종의 질병이라면 트랜스젠더는 유전적 이유, 후천적 이유등 좀 더 포괄적인 이유로 성 정체성의 혼란이 발생한 경우다.   

여자는 XX 염색체를 남자는 XY 염색체를 가지고 태어나며 또 그래야 한다.
인터섹스는 XX 염색체임에도 남자 몸을 갖고 태어나거나 반대로 XY 염색체임에도 여자 몸으로 태어나기도 하며, 심지어 남자와 여자의 두가지 생식기를 모두 갖고 태어나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인터섹스는  약 30여가지의 다양한 유전적 변이의 경우를 포함하는 데, 우리 상식과 달리 2,000명중 한 명꼴로 발생하는 빈도를 가지고 있다 (미국 Centruries Society 집계 자료). 
즉, 남한 국민이 45백만이라고 치면 대략 2만명이 넘는 인터섹스가 우리 나라에 존재할 정도로 높은 발병율을 보이는 질병이지만, 우리는 마치 포르노물을 보는 사춘기 소년처럼 은밀한 주제로만 생각 할 뿐이다.        

인터섹스의 몇 가지 경우를 실제 인물과 비교해서 살펴보자.
이 아름다운 여인은 Katie라는 22살의 미국 여대생이다.

  

그녀는 XY 남성 염색체에 여성의 몸을 가지고 태어난 인터섹스다.
외모는 천상 여인이지만 그녀는 비 정상적인 여성 생식기에 남자의 고환을 가지고 있다.
법적, 사회적, 의학적으로도 여성으로 분류되는 Katie에게 있어 가장 큰 문제는 바로 XY 염색체였다고 한다.
여성 생식기의 내부 기관이 제대로 발달하지 못한 점이나 비정상적인 고환의 존재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니 차지하더라도, 성장하면서 그녀 몸안에 활발하게 분비되는 남성 호르몬 (Testosterone)은 성숙한 여인으로의 신체 발달을 막고 반대로 남성화시키는 위험한 존재였다.

6살때 맹장 수술을 하면서 처음 이 사실을 알게된 이후 Katie는 16년간 신체발달의 역주행을 막기위해 에스트로겐(estrogen)을 꾸준히 복용해야했다.
아름다운 여성의 몸에 남자의 본능을 부여한 신을 탓하는 대신 그녀는 의대생이 되서 자신과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도울 방법을 찾고 있다.
본인 스스로도 자신을 여성으로 인식하고 있는 Katie는 대부분의 인터섹스들과는 달리 외모만큼이나 아름답게 삶을 가꾸어온 성공적 케이스로 분류할 수 있다.

남성적인 매력이 물씬 느껴지는 이 사람은 Hida라는 미국 여성이다.
법적으로는 그렇다.

  

그녀는 XX 여성 염색체에 완벽한 여성의 몸을 지니고 태어났지만, 남성호르몬(Testosterone)이 과다하게 분비되는 유전자 이상 증후군을 앓고있다.
어린 Hida는 자신의 몸이 남성처럼 변해가면서 두렵고 당황했던 시간을 보냈다.
심지어 성기 마저도 남자 생식기의 특징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오랫동안 그녀는 혼란에 빠져있었다.
자신이 여성인지 남성인지 스스로도 판단하지 못하는 긴 터널같은 어두운 시간을 지나온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상황에 따라 남성적, 여성적 본능이 번갈아 나타난다고 한다.
이젠 어느정도 심리적 안정을 되찾은 Hida는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해 이렇게 정의내린다.

  

 

"사회는 내게 여성과 남성중 하나만 선택하기를 강요한다.
하지만 난 이대로가 좋다.
두가지 성을 다가지고 살아가야 하지만 난 인터섹스로서의 삶에 만족한다.
그것이 내가 호르몬 치료를 거부한 이유고, 또 앞으로도 그렇게 살길 희망하는 이유다."

Hida는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남성과 여성 모두를 끌어안고 살기로 결심한 것이다.  

대중적으로 그나마 많이 알려진 인터섹스로는 남아공 중거리 달리기 선수였던 Caster Semenya가 있다.

  

 그녀는 2009 월드 챔피언쉽 800미터 여자 달리기 시합에서 1분 55초 45의 기록으로 금메달을 따냈다.
하지만 그녀의 탁월한 신체조건에 대한 많은 의문이 제기됬고, 정밀검사 결과 그녀는 인터섹스로 판명되 2010년 7월 6일까지 국제대회 참가가 거부되는 불운을 겪어야 했다. 

당시 18세였던 캐스터 세멘야는 신체적으로 남성 성기와 여성 성기를 모두 가지고 있으며 위 글의 Katie나 Hida처럼 여성 호르몬이 아닌 남성 호르몬이 분비되는 유전적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위원회는 순수한 여성 선수들(?)과의 형평성을 고려해 그녀의 금메달을 박탈하고 선수자격을 정지시킨 것이라는 보도자료를 내놓았다.

그간 자신을 여성으로 생각해 온 Caster semenya의 여성성을 공개적으로 부정한 이 날 결정은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다.
본인 의사를 무시한 정보 공개와 그로 인해 선수가 받았을 수치심에 대한 고려, 그리고 인터섹스의 참가자격에 대한 구체적인 판단기준을 구비하지 못했던 조직 위원회의 준비 부족등 많은 의문을 남기는 사건이었다.

 

 

인터섹스는 이렇듯 분명 우리 주위에 존재하고 있으며 그 숫자도 무시할 만한 수준은 아니다.
그것이 자신들의 잘못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받아야 하는 따가운 주위의 시선과 심적 고통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클 것이다.
한국사회가 질병의 한 종류인 인터섹스를 막연히 동성애자 내지는 변태로 규범지어 사회적으로 소외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봐 야 한다. 

남성과 여성외 다른 성을 인정할 수 없는 고리타분한 유교 문화권인 한국에서 그들은 자신을 괴롭히는 미친 염색체 뿐만 아니라 원인에 대한 접근없이 보이는 현상만 중요시 여기는 사회의 고정 관념과도 싸워야 하는 힘든 싸움을 하고 있다.


비뇨기과 전문의 임수현

독일이 제3의 성을 인정한다는 기사와 청원 내용을 보면 그 중심에 간성이라는 용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간성은 다른 용어로 ‘성분화의 이상(disorder of sexual development)’ 또는 ‘성분화의 차이(difference of sexual development)’ 라고도 하는데, ‘이상 또는 장애(disorder)’라는 용어로부터 받는 부정적인 영향 때문에 용어 선택에 있어 논란이 제기되기도 한다.
하지만 세계보건기구나 많은 의학저널은 여전히 의학 용어로서 ‘성분화의 이상’을 쓰고 있다.
또한 그 정의가 성염색체뿐 아니라 상염색체의 유전정보에서 유래하는 복합적인 과정 중에 발생한 이상에서 기인한 성분화의 장애로서 국제질병분류(ICD-10)에 ‘선천기형, 변형 및 염색체이상’ 또는 ‘내분비, 영양 및 대사질환’ 등으로 분류되는 질병이다.

성분화 이상은 문헌에 따르면 1/4,500~5,500의 확률로 드물게 발생하며 (반면, 일부 기사에 따르면 UN은 세계의 간성 인구를 0.5~1.7%로 추정한다), 그 형태와 종류, 그리고 외부생식기의 모호성 정도가 다양하고 진단이 쉽지 않기 때문에 치료의 적응증, 시기, 방법 등을 결정하기 또한 어렵다. 하지만 많은 의학 그룹에서 동의하는 것은 환자가 정상적인 신체 인식과 성정체성을 가지고 성장하며, 성인이 되어 정상적인 성생활을 가능하게 하고 생식능력을 가지도록 하기 위해서 남성 또는 여성의 적절한 성을 지정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별을 결정할 때 중요 고려 인자는 환자의 나이와 외부생식기의 상태이며, 최상의 결과를 위해 환자와 가족 그리고 경험이 많은 여러 분야의 전문 의료진들이 긴밀히 협력해야만 한다. 또한 다른 동반 기형 및 동반 질환과 모호한 생식기 교정을 위한 수술, 그리고 성정체성의 혼란과 모호한 외형 때문에 받는 차별 등으로 인해 낮은 삶의 질 속에서 힘겨워하기에 전문적이고 다각적인 보살핌이 필요하고 그들이 겪는 어려움을 덜어 주기 위한 합리적인 방법을 찾아야 함이 마땅하다. 이는 우리 사회와 구성원들이 다른 기형이나 장애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한 정책을 수립하고 행동하고자 노력하는 것에 포함될 것이다.
하지만 독일 헌재가 제3의 성을 인정하기까지의 과정과 청와대 국민청원사이트에 등록된 글을 살펴보면, 이들이 목적하는 바는 극히 드문 선천적 장애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질병으로부터 회복하고 치유하기 위함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대신에 남성과 여성이라는 양성 사이에 다양한 젠더가 존재한다고 주장하고 심지어는 성의 구별 자체를 해체하려는 젠더이데올로기와 이를 사회 전 영역에 적용하려는 젠더주류화의 흐름 안에서 차별과 혐오를 일으킨다고 하며 ‘성분화 이상’이라는 의학적인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그들이 말하는 젠더 관점에서 간성이라는 용어를 선택하며 이용한다는 것이다.

독일의 사회학자 가브리엘 쿠비 교수의 저서 Global Sexual Revolution에 따르면, 이러한 독일의 현방헌재의 결정 이전에 젠더 이론가들의 국제 네트워크들이 합작하여 2012년에 독일 윤리위원회로 하여금 중요한 발언을 하도록 하였다.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가 독일 연방정부에게 간성과 성전환증transsexual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NGO와의 대화를 촉구하며 이들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효과적인 조치를 취하도록 요구하였고 독일 연방정부의 요청에 따라 독일 윤리위원회가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1. 질병illness이나 장애disorder와 같은 부정적인 결론에 이르는 것을 피하고 제3의 성이 존재하는가에 대해서는 향후 논의할 문제로 남겨놓기 위해 윤리위원회는 ‘성분화의 차이Difference of Sex Development, DSD’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2. 윤리위원회는 DSD들이 출생신고서에 남성 혹은 여성의 분류로 정하도록 강요하는 것을 그들의 사생활권과 평등한 대우를 받을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하는 행위로 간주한다. 따라서 ‘기타’라는 새로운 분류 목록을 도입해야 한다. 그러나 결정을 할 수 있는 최대의 나이가 될 때까지, 어떠한 기록도 해서는 안 되며, 그러한 기록은 어느 때고 바꿀 수 있다.

3. 윤리위원회의 대다수는 ‘다른'(‘기타’에 속한) 젠더를 가진 사람들도 과거에는 동성파트너들에게만 허용되었던 시민결합등록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믿는다. 더 나아가, 윤리위원회의 위원들 중 몇몇은 이들의 결혼에 대한 가능성까지도 열어 놓을 것을 권고한다.

4. 출생신고서에 성별을 기록하는 것이 필요하기나 하는지에 대한 고려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쿠비 교수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독일 윤리위원회는 생물학적 성별이 모호한 8천명의 사람들의 요구를 맞추어주기 위해 ‘제3의 성’을 만들어 내었다. 만약 연방정부가 이러한 권고를 따른다면 미래의 출생신고서 양식은 ‘남성’, ‘여성’ 그리고 ‘기타’ 중에서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를 주게 될 것이며 심지어는 젠더 운동가들이 목표하는 데로 양성의 성정체성을 모호하고 불확실하게 만드는 수준에까지 이르게 될 것이다.”

과연 쿠비 교수의 통찰대로 독일은 제3의 성을 인정하였고 관련법들을 바꾸고 있다. 잘 조직된 소수의 젠더 운동가들은 소수의 약자를 이용하여 그들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사회의 기초인 양성의 질서를 침해하고 있다. 성별이 모호한 몇 천 명의 불행한 운명에 관한 문제의 구제책으로 남성과 여성의 정체성을 완전히 해체시키려하고 있다. 독일은 합법적으로 제3의 성이 존재하게 되었으니 성에 대한 정의로움을 이루기 위해 그들의 결혼을 허용하도록 요구하거나, 자녀를 소유할 수 있는 권리를 요구한다면, 다양한 전체 ‘퀴어’들도 똑같은 권리를 주장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독일의 상황을 보고 따르는 청와대 국민청원 등록자와 소수이지만 이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목표하는 바일 것이다.

가족들과 함께 동성애 문제에 대하여 이야기한 적이 있다. “남자끼리 또는 여자끼리 결혼하려 하고, 몸은 남자인데 마음은 여자여서 자기 몸을 여자로 바꾸는 수술을 하는 사람 또는 그 반대인 사람도 있고, 몸은 남자인데 여자로 사는 사람이나 그 반대인 경우 등등… 남자와 여자끼리만 결혼해야만 한다는 것을 부정하고 성별이 남자와 여자 두 가지만 있는 것도 아니고 몸이랑 상관없이 자기가 끌리는 대로 성을 여러 가지로 결정 할 수 있대.” 가만히 듣고 있던 3학년 아들이 골똘히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근데 아빠, 남자끼리 결혼하고 여자끼리 결혼하면 아이를 못 낳는데 그러면 인류가 없어지는 거 아냐?” 3학년 어린 아이도 걱정하는 인류 파멸의 길을 그들은 왜 보호받고 치료받아야 할 장애를 가진 약자들을 ‘제3의 성’이라 부르고 이용하면서까지 가려 하는지 다시 한번 묻지 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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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창조의 마지막 날에 하나님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고 하셨다(창 1:26).
그러므로 하나님은 “친히 손으로” 그분의 일을 마무리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 2:7).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 가운데 물질적인 육체와 비물질적인 영/혼을 모두 지닌 유일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가졌다는 것은, 간단히 말해서, 우리들이 하나님과 닮게 지어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피와 살을 가지셨다는 의미에서 아담이 하나님을 닮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영이시라”고 합니다(요 4:24).
그러므로 하나님은 육체가 없습니다.
하지만 아담의 몸은 완전히 건강한 상태로 지음 받았고 죽음을 겪지 않는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반영하였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비물질적인 부분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동물의 세계로부터 인간을 구별하여 주며, 인간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대로 땅 위의 모든 것을 다스리기에 적합하게 해 줍니다(창 1:28).
또한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이 창조주와 교류할 수 있도록 합니다.
이것은 정신적으로 도덕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하나님과 닮은 부분입니다.

정신적으로, 인간은 이성적이고 의지적인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사람은 사유할 수 있고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지적 능력과 자유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기계를 발명하고, 책을 쓰고, 풍경을 그리고, 교향곡을 즐기고, 총합을 계산하고, 또는 애완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 줄 때마다, 그 사람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사실을 공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덕적으로, 인간은 의롭고 완전한 결백 상태로 지어졌는데, 이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반영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지으신 모든 만물(사람을 포함하여)을 보시고 “심히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창 1:31).
우리의 양심이나 ‘도덕 기준’은 이런 처음 상태의 흔적입니다.
누군가 법을 만들고, 악을 멀리하고, 선한 행위를 칭찬하거나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 진 사실을 확증하여 주는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인간은 교제를 위해 지어졌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적인 속성과 그분의 사랑을 반영합니다.
에덴 동산에서 인간은 주로 하나님과 교제하였으며(창 3:8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시사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기에”(창 2:18) 첫 번째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창세기 3:8
그들이 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창세기 2:18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누군가 결혼하고, 친구를 사귀고, 어린이를 안아주며, 또는 교회를 다니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음 받은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사실은 또한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점에서 그러합니다.
아담에게 의로운 속성이 주어졌더라도, 그는 자신의 창조주를 대적하는 악한 선택을 내렸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아담은 자신 안에 있던 하나님의 형상을 손상시켰고, 그 손상된 모양을 그의 모든 후손들에게 전가시켰습니다(롬 5:12).

로마서 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오늘날,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습니다(약 3:9).
하지만 우리는 또한 죄의 상처를 지니고 있습니다.
정신적으로, 도덕적으로, 사회적으로, 육체적으로, 죄의 결과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좋은 소식은 하나님께서 한 개인을 구원하실 때 , 그 사람은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엡 4:24)이 되면서 하나님의 원래 형상으로 회복되기 시작하는 점입니다.
그 구원은,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킨 죄에서 구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로서만 가능합니다(엡 2:8-9).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모양대로 새롭게 지어졌습니다(고후 5:17).

에베소서 4:22-24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에베소서 2:8-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고린도후서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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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되었다고 말씀한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 1:26-27).

하나님의 ‘형상’(첼렘)과 ‘모양’(데무트)이란 용어가 사용된다.
본래 히브리어 어법으로는 이 둘을 동의어의 반복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고대교회 이래 ‘형상’은 인간 안의 이성과 같은 자연적인 특성을, 그리고 ‘모양’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초자연적 특성을 가리키는 용어로 이해되었다.

그리고 인간의 타락으로 후자는 상실되었으나, 전자는 여전히 남아서 인간의 주체성을 구성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맥락에서 에밀 브루너(Emil Brunner, 1889-1966)는 인간 안의 하나님 형상이 내용적으로는 상실되었지만 형식적으로는 남아있다고 말했다.

브루너에 따르면,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식적 형상이 남아있기 때문에 인간은 다른 피조물들과 구별되는 인간만의 사회적 규범과 국가적 질서를 유지할 수 있으며, 나아가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하여 인격적 주체로서 응답할 수 있다. 브루너는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인간의 주체적 응답의 가능성을 “접촉점”(contact point)으로 표현했다. 접촉점은 형식적인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그 말의 뜻은 “죄인인 인간들도 잃어버리지 않은 것으로서, 인간은 인간이라는 사실과… 말씀을 받아들이는 능력과 책임성을 가진 인격성(Humanitas)이란 뜻이다.” 브루너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인간이 들을 수 있는(거부할 수도 있는) 형식적 가능성으로서 말씀에 대한 인간의 수용성(receptivity)을 인정했다.

성서에서 언급되고 있는 인간의 하나님 형상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그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이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대리자로 세움을 받았다는 사실에 있다는 해석이다.
이러한 해석의 근거는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는 창세기 2장 27절 바로 다음 절인 28절에 하나님이 인간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라고 말씀하신 사실에서 발견된다. 그런데 이 절에서 “정복하라”는 구절은 인간이 다른 피조물에 대해 강압적인 지배력을 행사해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청지기적 대리자로서 다른 피조물을 돌보고 가꾸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학자들 가운데는 창세기 2장 27절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는 구절 바로 다음에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는 구절이 뒤따르는 것에 주목하여, 하나님의 형상이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것과 관계가 있다고 보는 사람들이 다수 있다. 구약학자인 클라우스 베스터만(Claus Westermann, 1909-2000)은 창세기 본문에서 여자의 창조가 단지 인간의 성적 분화를 의미하는 것만이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성 안에 있는 인간의 공동체성을 의미한다고 이해한다. 바르트도 인간 안의 하나님 형상의 의미가 인간이 남자와 여자로 지음을 받은 사실에서 발견된다고 주장했다. 즉 바르트는 인간이 남자와 여자로 창조된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가 세 위격의 관계성으로 구성되는 것처럼 인간이 관계적 존재로 창조되었음을 지시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것을 관계유비라고 불렀다.

일반적으로 고대 교부들은 인간의 하나님 형상이 육체가 아닌 이성적 영혼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생각은 오늘날 그리 큰 호응을 얻지 못한다. 창세기 2장 27절에 기초해서 인간의 하나님 형상을 관계성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견해는 특히 오늘날 큰 공감을 얻고 있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는 관계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살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과학(특히 양자 물리학)은 실재를 구성하는 근본적 요소 또는 구조를 서로 고립된 자기충족적인 실체(입자)로가 아니라 장(場, field)과 같은 관계의 그물망으로 파악한다. 생활세계(Lebenswelt)라는 장으로부터 분리된 근대의 초월적 자아(transcendental ego) 개념은 오늘날 허구임이 드러났다. 인간은 이웃과 타자와 세계와의 관계성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구현한다. 이웃과 타자와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 자신의 정체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알리스터 맥그래스(Alister McGrath, 1953~)는 인간 안의 하나님 형상을 “인간의 본성에 내재한 본능적 충동”으로서 “하나님을 향한 귀소 본능”으로 이해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자기가 나온 물질적 질서 속으로 무너져 내리지 않으려고 위쪽을 지향하는데, 이러한 인간의 자기 초월 욕구는 하나님을 향한 숨겨진 갈망을 나타낸다. 다른 피조물과 구별되는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의 핵심은, 인간만이 하나님을 갈망하며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 안에서 하나님과 대화하고 교제할 수 있다는 사실에 있다. 인간이 다른 피조물과 공유하는 육체적 실존과 구별되는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영적 실존의 본질은, 인간이 육체와 구별되는 영이란 불멸의 실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인간만이 하나님과 상호적인 인격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받았다는 사실에 있다.

인간 안의 하나님 형상의 원형이 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이 삼위일체적 관계성 안에 존재한다.
즉 삼위일체 하나님의 세 위격은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 안에서 친교적 연합(communion)을 이룬다.
페리코레시스는 상호 내주, 상호 침투, 상호 의존, 상호 순환을 의미한다.
아버지의 아버지 됨은 아들과 성령과의 관계성 안에서만 가능하고 아들의 아들 됨과 성령의 성령 됨도 각기 다른 두 위격과의 관계성 안에서만 가능하다.
페리코레시스는 “자기초월적 개방성 안에서의 공감적 사랑”으로 재해석될 수 있다.
하나님은 세 위격 사이의 “자기초월적 개방성 안에서의 공감적 사랑” 안에서 친교적 연합을 이루신다.

이 하나님의 공감적 사랑이 참된 하나님의 형상인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십자가의 죽음에서 결정적으로 계시되었다.
성서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하게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씀한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골 1:15).
우리 인간은 이 그리스도 안의 하나님 형상을 닮아가야 하며 이 형상으로 변해가야 한다(롬 8:29; 고전 15:49; 고후 3:18).
아담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에게 주어진 선물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최종적 운명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종말론적 운명으로 인간에게 주어진 완전한 하나님 형상의 역사적 현현으로서, 죄로 인해 손상된 인간의 하나님 형상을 회복시키고 완성으로 이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 안에 나타난 삼위일체 하나님의 공감적 사랑이 죄악된 인간을 구원하고 인간 안의 하나님 형상을 새롭게 하고 완성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 1926~)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성이 하나님의 내적 구조 안에 닫혀있지 않고 본유적으로 세계를 향해 열려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몰트만에게 있어서 삼위일체 하나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부터만 인식 가능하다.
따라서 경세적 삼위일체와 분리되거나 그것으로부터 동떨어진 내재적 삼위일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 안의 하나님 형상은 이와 같은 관계성 안에 계신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존재를 반영한다.
다시 말하면, 세 위격 사이의 페리코레시스 즉 자기초월적 개방성 안에서의 공감적 사랑 안에서 친교적 연합을 이루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으로부터 인간 안의 하나님 형상이 이해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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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49년 만에 ‘낙태 합법화 판례’ 뒤집었다

미국 연방대법원이 낙태 합법화를 가져온 1973년 ‘로 대 웨이드’ 판결을 49년 만에 폐기했다.

미국 크리스천포스트에 따르면, 연방대법원은 24일 ‘토마스 돕스 대 잭슨여성보건기구’ 사건에서 찬성 6, 반대 3으로 미시시피주의 ‘임신 15주 후 낙태금지법’에 손을 들어 줬다.

다수 의견서는 새뮤얼 앨리토 대법관이 작성했으며, 클래런스 토마스, 에이미 코니 배럿, 브렛 캐버노, 닐 고서치 대법관과 존 로버츠 대법원장이 의견을 같이했다.

앨리토 대법관은 “헌법은 낙태에 관해 권리를 부여하지 않는다. ‘로(대 웨이드)’ 및 ‘(가족계획연맹 대) 케이시’ 판결은 기각된다”라며 “낙태를 규제할 권한은 국민과 그들이 선출한 대표들에게 반환된다”고 명시했다.

또한 “‘로’는 처음부터 터무니없이 잘못됐다.
논리는 터무니없이 약했고, 그 결정은 해로운 결과를 초래했다”며 “낙태 문제에 국가적 해결을 가져오는 대신, 논쟁과 분열을 심화시켰다.
헌법에 귀 기울여야 하고, 낙태 문제는 국민이 선출한 대표에게 돌려줄 때”라고 밝혔다.

1973년 대법원은 ‘로 대 웨이드’ 판결에서 여성의 낙태권을 헌법에 기초한 사생활 권리에 포함시켰고, 이로 인해 주정부의 낙태 제한 권한은 약화됐다.
또 법원은 1992년 ‘가족계획연맹 대 케이시’ 사건에서 태아의 생존 가능성이 있기 전의 낙태를 허용하며 다시 한 번 낙태 권리를 강화했다.

진보 성향의 대법관인 스티븐 브레이어, 소니아 소토마요르, 엘레나 케이건 판사는 즉각 반대 의견을 냈다.
이들은 의견서에서 기존 판례를 옹호하며 “‘로’와 ‘케이시’는 낙태 허용과 이를 규제하는 법 허용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했다.
오늘 법원은 그 균형을 폐기한 것”이라며 “수정하는 그 순간부터, 여성은 말할 권리가 없다고 (판결은) 말한다. 주(정부)가 한 개인 및 가족이 막대한 비용을 치르더라도, 임신하도록 강제할 수 있게 됐다”고 지적했다.

또 “여기서 문제가 되는 미시시피 법은 임신 15주 후 낙태를 금지한다.
그러나 대다수 판결에 따르면 다른 주의 법은 10주 후, 또는 5주, 3주나 1주 후, 심지어 수정하는 시점부터 금지할 수 있다”며 “주들은 이미 오늘 판결을 예상하고 그러한 법률을 통과시켰다.
더 많은 주가 뒤따를 것”이라고 경고했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26개 주에서 낙태를 금지할 것으로 보인다.
AP통신은 남부와 중부의 13개 주가 즉시 시행 가능한 낙태 금지 법안을 마련해 놨다고 보도했다.

2018년 미시시피주는 낙태 금지 기준을 기존 ‘임신 20주 후’에서 ‘임신 15주 후’로 변경하는 하원법안 1510호(HB 1510)를 통과시켰다. 이 법안은 낙태 가능 조건에 산모의 생명을 위협하는 의료 응급 상황 또는 심각한 태아 기형은 포함시켰으나, 강간 또는 근친상간은 제외했다.

그러자 이 법안은 낙태를 합법화했던 ‘로’ 판례에 대한 도전의 서막이 되었다. 법안 통과 후, 미시시피주 낙태시술업체인 잭슨여성보건기구는 주정부 보건책임자인 토마스 돕스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2019년 12월 연방 제5항소법원은 하급심을 지지하며 미시시피주 법에 영구 금지 명령을 내렸다. 돕스는 이 사건을 연방대법원에 항소했고, 2021년 5월 법원은 심리에 합의해 12월 양측의 구두 변론을 심리했다.

지난달 2일에는 사무엘 엘리토 대법관이 쓴 소송 판결문 초안이 유출돼, 정치 보도전문 매체 ‘폴리티코’를 통해 보도됨으로써 논란의 불씨를 당겼다.

당시 의견서는 대법관 찬성 5, 반대 4로 49년 만에 ’로 대 웨이드’ 판례를 폐기할 것을 제안했고, 낙태 금지 여부는 주정부에 결정 권한을 주는 것을 골자로 했다.

이는 낙태 권리를 요구하는 운동가들의 시위와, 교회와 친생명단체 사무실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졌다.
지난달 7일 새벽 뉴욕주의 한 임신출산지원센터 사무실에는 화염병이 날아들어 화재가 발생했다.
8일 위스콘신주 소재 친생명단체 사무실에도 화염병 테러가 발생했다.

이달 8일 새벽 메릴랜드주 체비 체이스에 있는 브렛 캐버노 연방 대법관 자택 인근에서는 총과 흉기를 소지한 남성이 배회하다 경찰에 체포됐다.
이 20대 남성은 낙태권 결정 초안에 분노해 대법관을 살해할 목적을 가진 것으로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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엿새 동안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피조물인 인간을 창조하셨다.

인간은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창조 세계를 관리하고 다스리며 번성 시켜야 할 존재이므로 다른 어떤 피조물보다 중요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특히 다론 존재와는 달리 흙으로 자신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붙어 넣으므로 생령이 되게 하셨다.
이로써 인간은 특별히 하나님과 직접적이고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유일한 피조물이 되었던 것이다.

인간 창조에 관한 이야기는 모든 신화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고대 수메르 신화에서는 어머니 신인 닌투가 자신의 육체와 피틀 흙에 섞어서 인간을 창조했다고 말한다. 

이집트의 신화에서는 크눔신이 나일 강변의 진흙으로 인간을 만들고 하토르 여신이 생명을 불어 넣었다고 설명한다. 

그리스 신화에는 프로메테우스가 흙과 물로 인간을 만들었다고 말하며 중국의 여와 설화나 우리나라의 생굿에도 흙으로 인간을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나타난다.

이와 같이 각 민족마다 인간 창조의 설화를 가지고 있으며 또한 그 형식에 있어서 매우 유사함을 지니고 있다.
이것을 근거로 해서 어떤 학자들은 성경의 창조 기사가 고대 근동의 인간 창조 설화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형식을 떠나 성경의 인간 창조 기사는 그 내용과 목적에 있어서 큰 차이를 지니고 있다.

첫째, 다른 신화는 바벨론 신화에서와 같이 인간을 신들을 섬기고 그들 대신 잡일들을 시키 기 위한 부속물로 창조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신과 인간 사이에 인격적인 관계가 없고 대립적인 관계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의 형상을 닮은 자로 만드시고 사랑의 대상으로 인정하셨으며 인격적인 관로 창조하셨다는 점에서 비교할 수 없는 진리와 소망의 메세지를 담고 있다.

본문은 인간 존재의 기원에 대해 분명한 선언을 하고 있다. 즉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물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 안에서만 생명의 근거를 찾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다른 신이나 인간적인 사상 속에서는 구원의 길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인간 존재의 출발에 대한 기사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만이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성경의 주제가 영원한 진리임을 증명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만물의 영장이라고들 말합니다.
그 말은 일반적으로 모든 동물들 중에서 인간이 가랑 뛰어남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 존재에 대하여 독특한 주장을 펴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으나 대표적으로 인간 존재의 존엄성과 그 역할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인간을 다른 동물들과 동일한 존재로 파악하는 진화론을 신봉하고 있는데 비하여 성경은 사람과 다른 동돌들과의 근본적인 차이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우연하게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 창조주의 계획과 섭리 하에서 피조 되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자로 서있다는 것은 우리의 존재 목적과 가치를 분명하게 해 줍니다.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의 존재성과 그 존엄성을 교훈 받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식물과 동물을 창조하신 후에 자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은 비슷한 말인데.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지음 받았다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가시화하여 나타낼 수 있는 존재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지음받은 인간은 외적인 모습이 하나님과 닮은 것이 아니라 육체를 지닌 몸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을 밝히 드러내는 존재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심으로써 자신의 영광을 밝히 드러내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영적인 존재로 지음을 받았고 하나님과 공유하는 인격성을 지니게 만들어졌습니다.

오늘날 인간이 하나님의 거록하심과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은 타락으로 하나님의 형상에 큰 파괴를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중생함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고후 5:17)
이는 죄로 인하여 상실하게 되었던 하나님의 형상을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회복하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답게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의를 쫓아 순종 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보이신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본받아 살아갈 때에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피조물로서의 사명을 다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사랑의 새 계명을 주시면서 그 세계명을 지킬 것을 제자들에게 명하셨습니다(참조. 요 13:34).

2. 사람에게 부여된 세상에 대한 통치권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심은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피조물의 왕 노릇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세상 만물의 궁극적인 왕 은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시고 그에게 모든 세상을 다스릴 권한을 부여하셨습니다.
여기서의 다 스림은 자연을 잘 관리하고 보살피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즉 사람은 다른 것들과 함께 하나님의 피조풀이면서도 독특한 권세를 부여받은 피조물의 왕으로서 하나님과 피조물 간의 중보적 역할을 감당하여야 했던 것입니다.
사람이 지혜를 가지고 세상을 다스릴 때에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드러낼 수가 있었습니다.
아담이 모든 동물의 이름을 친히 지어준 것은 이러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사역을 감당한 최초의 일이었습니다.
자녀의 이름을 그 부모 가 지어주듯이 동물들의 이름을 지어줌으로써 아담은 모든 동물의 주인이요 통치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인류가 죄로 인하여 타락하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의 영광을 피조물의 형상으로 바꾸는 질서 파괴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즉 인간은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자연을 다스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연을 두려워하고 도리어 그 자연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어 그 앞에서 절하며 섬김으로써 우상 숭배의 죄를 범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계명을 주시면서 자연으로 아무런 형상을 만들지도 말고 그 앞에서 섬기지 말 것을 명하셨습니다(참조. 출20: 4).

세상 사람둘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존재의식을 망각하고 헛된 세상의 것들을 섬기고 있지만 성도는 세상을 다스리며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날에는 나무나 돌 앞에 가 서 절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지만 대부분 세상의 재물을 하나님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재물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필요를 위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재물은 사람이 사용하고 다스릴 대상이지 승배할 대상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세상 사람들은 배금주의 사상에 물들 어 재물을 사랑하고 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음을 말씀하시면서 인간이 섬겨야 할 대상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교훈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을 섬김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바로 다스릴 줄 아는 지혜를 소유하여야겠습니다.

3. 사랑의 존재로 지음 받은 인간

하나님께서 자기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어 한 가정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이는 가정이라는 제도 속에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가치를 발휘하여야 함을 의미합니다.
아담이 홀로 있을 때에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치 않았음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즉 인간은 홀로가 아니라 서로 간의 사랑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완성시켜 나가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여 주신 남자와 여자가 서로 하나 되어 협력 하여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여 나아감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밝히 드러내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심을 인간 사회의 가장 근본적이고 기초가 되는 가정 속에서 증거 하여야 됐던 것입니다.

사단은 사랑으로 이루어져야 할 인간관계를 파괴함으로써 온갖 성범죄와 가정 파탄이 일어나도록 역사하였습니다.

그래서 성도의 생활은 먼저 가정에서부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야 합니다. 가정에서 부부 간에 서로 사랑 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녀를 양육함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의 획복을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결혼은 그런 면에서 매우 가치 있는 일인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사랑 은 사회로 확대되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들려야 합니다.
이러한 사랑으로 인한 하나님의 형상의 완전한 회복이 이루어지는 곳이 완성된 하나님 나라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의 존재 가치와 사명에 대하여 교훈을 받았습니다.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자로서 하나님을 바로 섬기고 세상을 다스림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하여야 하겠습니다.
또한 모든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본성을 닮아감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서의 복된 살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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엿새 동안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피조물인 인간을 창조하셨다.
인간은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창조 세계를 관리하고 다스리며 번성 시켜야 할 존재이므로 다른 어떤 피조물보다 중요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특히 다론 존재와는 달리 흙으로 자신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붙어 넣으므로 생령이 되게 하셨다.
이로써 인간은 특별히 하나님과 직접적이고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유일한 피조물이 되었던 것이다.

인간 창조에 관한 이야기는 모든 신화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고대 수메르 신화에서는 어머니 신인 닌투가 자신의 육체와 피틀 흙에 섞어서 인간을 창조했다고 말한다.

이집트의 신화에서는 크눔신이 나일 강변의 진흙으로 인간을 만들고 하토르 여신이 생명을 불어 넣었다고 설명한다.

그리스 신화에는 프로메테우스가 흙과 물로 인간을 만들었다고 말하며 중국의 여와 설화나 우리나라의 생굿에도 흙으로 인간을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나타난다.

이와 같이 각 민족마다 인간 창조의 설화를 가지고 있으며 또한 그 형식에 있어서 매우 유사함을 지니고 있다.
이것을 근거로 해서 어떤 학자들은 성경의 창조 기사가 고대 근동의 인간 창조 설화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형식을 떠나 성경의 인간 창조 기사는 그 내용과 목적에 있어서 큰 차이를 지니고 있다.

첫째, 다른 신화는 바벨론 신화에서와 같이 인간을 신들을 섬기고 그들 대신 잡일들을 시키 기 위한 부속물로 창조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신과 인간 사이에 인격적인 관계가 없고 대립적인 관계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의 형상을 닮은 자로 만드시고 사랑의 대상으로 인정하셨으며 인격적인 관로 창조하셨다는 점에 서 비교할 수 없는 진리와 소망의 메세지를 담고 있다.

본문은 인간 존재의 기원에 대해 분명한 선언을 하고 있다.
즉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물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 안에서만 생명의 근거를 찾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다른 신이나 인간적인 사상 속에서는 구원의 길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인간 존재의 출발에 대한 기사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만이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성경의 주제가 영원한 진리임을 증명하고 있다.

* 설명

일반적으로 사람은 만물의 영장이라고들 말합니다.
그 말은 일반적으로 모든 동물들 중에서 인간이 가랑 뛰어남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 존재에 대하여 독특한 주장을 펴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으나 대표적으로 인간 존재의 존엄성과 그 역할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인간을 다른 동물들과 동일한 존재로 파악하는 진화론을 신봉하고 있는데 비하여 성경은 사람과 다른 동돌들과의 근본적인 차이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우연하게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 창조주의 계획과 섭리 하에서 피조 되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자로 서있다는 것은 우리의 존재 목적과 가치를 분명하게 해 줍니다.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의 존재성과 그 존엄성을 교훈 받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식물과 동물을 창조하신 후에 자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은 비슷한 말인데.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지음 받았다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가시화하여 나타낼 수 있는 존재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지음받은 인간은 외적인 모습이 하나님과 닮은 것이 아니라 육체를 지닌 몸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을 밝히 드러내는 존재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심으로써 자신의 영광을 밝히 드러내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영적인 존재로 지음을 받았고 하나님과 공유하는 인격성을 지니게 만들어졌습니다.

오늘날 인간이 하나님의 거록하심과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은 타락으로 하나님의 형상에 큰 파괴를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중생함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고후 5:17).
이는 죄로 인하여 상실하게 되었던 하나님의 형상을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회복하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답게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의를 쫓아 순종 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보이신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본받아 살아갈 때에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피조물로서의 사명을 다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사랑의 새 계명을 주시면서 그 세계명을 지킬 것을 제자들에게 명하셨습니다(참조. 요 13:34).

2. 사람에게 부여된 세상에 대한 통치권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심은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피조물의 왕 노릇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세상 만물의 궁극적인 왕은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시고 그에게 모든 세상을 다스릴 권한을 부여하셨습니다.
여기서 다스림은 자연을 잘 관리하고 보살피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즉 사람은 다른 것들과 함께 하나님의 피조풀이면서도 독특한 권세를 부여받은 피조물의 왕으로서 하나님과 피조물 간의 중보적 역할을 감당하여야 했던 것입니다.
사람이 지혜를 가지고 세상을 다스릴 때에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드러낼 수가 있었습니다.
아담이 모든 동물의 이름을 친히 지어준 것은 이러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사역을 감당한 최초의 일이었습니다.
자녀의 이름을 그 부모 가 지어주듯이 동물들의 이름을 지어줌으로써 아담은 모든 동물의 주인이요 통치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인류가 죄로 인하여 타락하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의 영광을 피조물의 형상으로 바꾸는 질서 파괴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즉 인간은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자연을 다스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연을 두려워하고 도리어 그 자연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어 그 앞에서 절하며 섬김으로써 우상 숭배의 죄를 범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계명을 주시면서 자연으로 아무런 형상을 만들지도 말고 그 앞에서 섬기지 말 것을 명하셨습니다(참조. 출20: 4).

세상 사람둘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존재의식을 망각하고 헛된 세상의 것들을 섬기고 있지만 성도는 세상을 다스리며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날에는 나무나 돌앞에 가서 절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지만 대부분 세상의 재물을 하나님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재물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필요를 위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재물은 사람이 사용하고 다스릴 대상이지 승배할 대상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세상 사람들은 배금주의 사상에 물들 어 재물을 사랑하고 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음을 말씀하시면서 인간이 섬겨야 할 대상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교훈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을 섬김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바로 다스릴 줄 아는 지혜를 소유하여야겠습니다.

3. 사랑의 존재로 지음 받은 인간

하나님께서 자기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어 한 가정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이는 가정이라는 제도 속에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가치를 발휘하여야 함을 의미합니다.
아담이 홀로 있을 때에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치 않았음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즉 인간은 홀로가 아니라 서로 간의 사랑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완성시켜 나가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여 주신 남자와 여자가 서로 하나 되어 협력 하여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여 나아감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밝히 드러내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심을 인간 사회의 가장 근본적이고 기초가 되는 가정 속에서 증거 하여야 됐던 것입니다.

사단은 사랑으로 이루어져야 할 인간관계를 파괴함으로써 온갖 성범죄와 가정 파탄이 일어나도록 역사하였습니다.

그래서 성도의 생활은 먼저 가정에서부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야 합니다.
가정에서 부부 간에 서로 사랑 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녀를 양육함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의 획복을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결혼은 그런 면에서 매우 가치 있는 일인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사랑 은 사회로 확대되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들려야 합니다.
이러한 사랑으로 인한 하나님의 형상의 완전한 회복이 이루어지는 곳이 완성된 하나님 나라인 것입니다.

결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의 존재 가치와 사명에 대하여 교훈을 받았습니다.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자로서 하나님을 바로 섬기고 세상을 다스림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하여야 하겠습니다.
또한 모든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본성을 닮아감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서의 복된 살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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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6일(월) 오늘의 묵상 주제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비밀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셨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대상이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비밀을 믿습니다.
그렇가면 하나님의 비밀을 정확하고 알고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비밀(골로새서 2:2)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년/1225년? ~ 1274년 3월 7일)
“나는 믿기 위해 이해한다”

어거스틴(St. Augustine, 354. 11. 13 ~ 430. 8. 28)
“나는 이해하기 위해 믿는다”


살아있는 교회와 죽어가는 교회
- 스피노스 조디아티 목사

미국에서 풀빛(Pulpit)이라는 잡지를 만드는 스피노스 조디아티 목사는 ‘살아있는 교회와 죽은 교회’와의 차이를 설명했다.

살아 있는 교회는 항상 변화 한다.
죽어 가는 교회는 늘 똑 같다.

살아있는 교회는 아이들의 소리로 늘 시끄럽다.
죽어가는 교회는 죽은 듯이 조용하다.

살아있는 교회는 예산을 초과해서 쓴다.
죽어가는 교회는 은행에 잔고가 많다.

살아있는 교회는 새 얼굴, 이름 알기가 어려워 애를 먹는다.
죽어 가는 교회는 해를 거듭해도 그 얼굴이 그 얼굴이다.

살아있는 교회는 선교 사업이 활발하다.
죽어가는 교회는 교회 안에서만 움직인다.

살아있는 교회는 주는 자로 가득 차고
죽어가는 교회는 티내는 자로 차있다.

살아있는 교회는 배우고 봉사하기 바쁘고
죽어가는 교회는 편안하고 느긋하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지 사업체가 아닙니다.
그것은 생명체이지 조직이 아닙니다.
교회는 생명입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성장을 뜻합니다.
때문에 생명이 있었던 교회는 성장을 계속했습니다.
그런데 교회의 부흥은 숫자가 아니라 사랑의 부흥이고 용서의 부흥입니다.
고여 있는 물이 썩는 것처럼, 변화되지 않는 교회는 병에 걸려 시들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교리적으로 완벽하다 할지라도 가슴은 식어갈 수 있습니다.


살아있는 교회는 믿음 위에 운행되고,
죽어가는 교회는 인간적 판단(sight) 위에 운행된다.

 

파스칼(Blaise Pascal, 1623. 6. 19~1662. 8. 19)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세 종류로 구분합니다.

‘신과 무관한 인생’,
‘신을 탐구하는 인생’,
‘신을 신뢰하는 인생’

신과 무관한 인생을 ‘어리석은 자’라고 하였고,
신을 탐구하는 인생을 ‘불행한 자’,라고 하였으며
신을 신뢰하는 인생을 ‘행복한 자’라고 하였다.

이 시간 나는 어떤 인생인가를 함께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나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었는가?
나는 불행한 자가 아니었는가?
나는 행복한 자인가?

행복한 사람은 하나님의 비밀을 하는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도입 이야기)
어느 시골 교회의 터가 넓어서 여러 가지 과실수를 심어 놓았는데, 이른 가을철만 되면 채 익지도 않은 감, 사과들을 몰래 따먹으러 오는 동네 개구쟁이들 때문에 목사님이 크게 골치를 앓았다.  

24시간 내내 지킬 수도 없고 그렇다고 채 익지도 않은 것을 그냥 따먹게 내버려둘 수도 없고 해서, 그 개구쟁이들의 양심에 호소하기로 마음을 먹은 교회목사님이 하루는 다음과 같은 팻말을 만들어 꽂아 놓았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는 그 다음날 목사님이 "이젠 별일 없겠지!" 하고 그곳에 가보았더니 과일은 과일대로 없어졌을 뿐 아니라, 그 팻말 아래 다음과 같은 글이 추가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비밀을 지켜 주십니다.“

사람마다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어느 교수가 믿음이 좋다는 학생을 지목하여 질문했다.

"정말 하나님이 모든 것을 창조하셨는가?"

지목을 받은 학생은 확신에 찬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교수님"

그러자 교수가 말했다.

"만약 하나님이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면 
악(evil, 惡)도 존재하므로 하나님은 악도 창조하셨겠네! 
그렇다면 우리의 성과가 우리가 누군지를 규정 짓는다는 원리에 근거한다면
하나님은 악이 아닌가?"

교수는 빙그레 웃으며 스스로에게 대단히 만족해하며 자신이 학생들에게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미신임을 다시 한번 증명했다며 으쓱해 했다.
그러자 다른 학생이 손을 들고 말했다.

"교수님께서 질문을 해도 되겠습니까?"

교수는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이지."

그 학생이 일어서서 물었다.

"교수님. 추위가 존재합니까?"
교수는 엉뚱하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무슨 질문이 그런가? 당연히 추위가 존재하지. 자넨 추운 적 없는가?"

다른 학생들은 이 학생의 뜬금없는 질문에 모두 낄낄거렸다.
학생은 게념치 않고 다시 교수에게 말했다.
"사실은..... 교수님. 추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물리학 법칙에 의하면 우리가 추위라고 간주하는 것은 실상은 '열의 부재'입니다.
누구나 그리고 무엇이든 에너지를 전달할 때 연구 가능한 것입니다.
절대 0도(섭씨 -2730도)는 '열의 완전한 부재' 입니다.
그 온도에서는 모든 것이 반응할 수 없거나 쓸모가 없어지는 것이므로 
추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추위라는 이 단어는 열이 없을 때 
우리가 어떻게 느끼는지를 묘사하기 위해서 인간인 만든 단어인 것입니다." 
학생은 계속해서 말했다.
"교수님. 어두움이 존재합니까?"
웃음기가 사라진 교수는 대답했다.
"물론 존재하지."
학생은 다시 말했다.
" 다시 한번 교수님이 틀렸습니다. '어두움' 역시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두움은 사실상 '빛의 부재'입니다.
우리는 빛을 연구할 수 있지만 어두움은 그렇지 못합니다.
사실 뉴턴이 프리즘을 이용항여 흰 불빛을 여러색으로 나누고, 
각 빛깔의 다양한 파장을 연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어두움을 측정할 수는 없습니다.
조그마한 한 줄기 빛으로도 어두움을 깨고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어떤 장소가 얼마나 어두운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우리는 빛의 양만을 측정합니다. 이것이 옳지 않습니까?
어두움은 빛의 부재를 묘사하기 위해 인간이 사용하는 용어일 뿐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 학생은 교수에게 마지막으로 물었다.
"교수님. 악이 존재합니까?"
이제 교수는 확신하지 못한채 대답했다.
"물론이지. 이미 말한대로야. 우리는 매일 뉴스를 통해서 보지 않는가?
매일 일상에서 보는 인간의 잔인함이 존재하며
세상 곳곳의 각종 범죄와 폭력에도 존재한다네.
이러한 현상들을 악 이외에 무엇이라 하겠는가?"
이에 학생이 대답했다.
"교수님. 악은 존재하지 않거나 적어도 스스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악은 단순히 '하나님의 부재입니다.
마치 어두움과 추위와 같이 '하나님의 부재'를 묘사하기 위해 인간이 만들어낸
단어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악을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빛, 열과 같은 믿음, 사랑과 악은 다릅니다.
악은 인간의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없을 때 벌어지는 결과입니다.
이것은 마치 열이 없을 때 추위가 오고, 빛이 없을 때 어두움이 오는 것과
같습니다. 교수님이 말씀하신 악이란 하나님의 사랑이 없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에요,
그러므로 하나님은 결코 악을 창조하지 않으셨으며 지고지순한 선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학생의 하나님에 대해서 과학적으로 증명하는 정확한 말에 
교수는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흐느끼며 주저 앉고 말았다.
이 당돌한 학생의 이름은....
알버트 아인슈타인이었다.
+
인간의 언어로 어찌 하나님을 규정하고 증명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인간의 증명을 넘어서는 곳에 
존재를 존재케 하는 존재 그 자체이십니다.
피조물은 창조주를 증명하려고 드는 것이 아니라
존재할 수 있음을 찬양할 따름입니다.




장님 다섯 명이 처음으로 코끼리 구경을 갔습니다.
첫째 사람은 코끼리의 배를 만져 보고 ‘코끼리는 바람벽같이 생겼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둘째 사람은 코끼리의 코를 만져 보고 ‘코끼리는 구렁이같이 생겼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셋째 사람은 코끼리의 다리를 안아 보고는 ‘코끼리는 나무통같이 생겼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넷째 사람은 코끼리의 귀를 한참 만져 보고는 ‘코끼리는 부채 같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다섯째 사람은 코끼리의 꼬리를 만져 보고는 ‘코끼리는 밧줄과 같이 생겼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도대체 기독교인의 생활이 무엇입니까? 왜 예수를 믿습니까?’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어떻게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성경을 읽고 믿는 것이지요’라고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일 주일에 한 번 교회에 가는 것, 열심히 기도하는 생활 등을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근원적인 것은 우리의 신앙의 근거가 되시는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만남과 동시에 우리의 삶에 근원적인 변화를 가져온다는 사실입니다.
즉 새로운 눈이 열려서 그리스도의 빛 가운데서, 신앙의 능력 가운데서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새로운 세계를 보는 것입니다.




* 기도: 하나님의 비밀한 것을 깨닫게 하소서


조이스 럽이 쓴 ‘느긋하게 걸어라’는 책이 있다.
프랑스 서부에서 스페인까지 가는 산티아고 순례의 길을 적은 책이다.
예순을 앞둔 노 수녀가 오랜 친구 목사와 함께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어가며 
건져 올린 인생의 교훈과 깨달음을 25개의 주제로 정리한 글을 모아 엮은 책이다. 
럽은 800킬로미터의 먼 길을 36일간 걸으며, 
그 길에서 겪은 신산고초의 경험과 그 길에서 만난 
다양한 사람들을 통해 삶의 의미를 돌아보고 재발견한다.
이 책에는 순례자들의 삶과 자세가 드러나고 있다.
순례자들은 걸으며 ‘프리메로 디오스’(Primero Dios)를 늘 생각한다고 한다.
‘하나님을 첫 자리에’라는 뜻이다.
순례자들이 그 힘든 순례의 길을 가는 것은 
하나님을 첫 자리에 두기 위해서라고 한다..


사실은 우리가 매일의 삶이 곧 순례요 모험입니다.-
하나님을 첫 자리에 두는 연습입니다.
하나님 제일주의가 우리가 사는 목적입니다.
그것을 잊어버리면 길을 잃고 맙니다.
오늘도 '프리메로 디오스'의 자세로 길을 떠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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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智慧), 명철(明哲), 지식(知識)의 차이

- 지식은 아는 능력
- 지혜는 행하는 능력
- 명철은 분별하는 능력

지식(비나)이란?
아는 능력

비나 / 
בִּינָה

스트롱번호 998
1. 이해,  2. 총명

발음 : 비나(bîynâh)
어원 : 99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지식(신 4:6), 총명(대상 22:12, 욥 34:16, 사 29:14), 명철(대하 2:12, 잠 2:3, 23:23), 지혜(욥 39:26, 잠 7:4, 23:4),
지각(사 27:11), 뜻(단 8:15)
구약 성경 : 37회 사용

잠언 2:3 / 지식을 불러 구하며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며.
                and if you call out for insight and cry aloud for understandin.

세상에서는 학문을 비롯하여 다양한 분야에서 아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을 말합니다.

지혜(호크마)란?
행하는 능력


호크마 / חָכְמָה

스트롱번호 2451

1. 숙련,  2. 지혜, 3. 다양한 학식
발음 : 호크마(chokmâh)
어원 : 244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지혜(출 28:3, 삼하 20:22), 슬기(출 35:26), 유능한 기술자(대상 28:21)
구약 성경 : 153회 사용

출애굽기 28:3 / 너는 무릇 마음에 지혜 있는 자 곧 내가 지혜로운 으로 채운 자들에게 말하여 아론의 옷을 지어 그를 거룩하게하여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라.
                         Tell all the skilled men to whom I have given wisdom in such matters that they are to make garments for Aaron, for his consecration, so he may serve me as priest.

인생의 경험이 많은 노인들은 어떤 어려운 문제를 만났을 때 자기의 경험에 비추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방법을 찾아내는 것을 말합니다.

지혜는 영적, 도덕적 능력을 모두 포함합니다.

명철(테부나)이란?
분별하는 능력


테부나 / תְּבוּנָה

스트롱번호  8394

1. 지식, 2. 욥기 32:11
발음 :테부나(tebûwnâh)
어원 : 99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총명(출 31:3, 왕상 4:29, 겔 28:4), 분별력(신 32:28), 명철(욥 12:12, 시 49:3, 잠 2:2), 지혜(욥 26:12, 시 136:5),
통달(사 40:14), 지각(옵 1:7). 능숙함(시 78:72, 호 13:2). [형] 명철한(잠 10:23, 20:5)
구약 성경 : 42회 사용

잠언 2:2 / 네 귀를 지혜에 기울이며 네 마음을 명철에 두며
                turning your ear to wisdom and applying your heart to understanding.

모양이 같은 쇠뭉치를 보고 어떤 사람은 그것이 납이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그것을 고철이라고 합니다.
정확한 구별을 위하여 자석을 사용하듯이 명철이란 사물을 보고 그 본질을 정확하게 분별하는 것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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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용어를 설명하려고 다양한 방법을 시도하였다.
예를 들면,

첫째는 히브리어 원전에서(잠언 2:2~3)

“호크마”를 ‘지혜’,
“비나”를 ‘지식’,
“테부나”를 ‘명철’
이 단어들은 동사형 명사(동사에서 만들어진 명사)라고 보시고 동사의 뜻을 알면 명사의 의미가 풍성해질 것입니다.

“호크마”의 동사형은 “하캄”으로 지혜롭다, 지혜롭게 행동하다는 뜻
“비나”와 “테부나”는 “빈”이라는 동사에서 온 것으로 모양은 판이하나 히브리어에서 어미나 접두어를 붙여서 명사로 만든다고 보시면 이해가 쉬울 듯

동사 “빈”이란 의미는 ~사이를 식별(구별)하다는 의미로서 즉 구별하고 식별할 수 있으니  지식이나 이해 혹은 깨달음 등으로 될 수 있을 것이고 통찰력이 있어야 되는 문제이니 명철로 더 나아가 지혜로 해석이 가능해집니다.
 
“하캄”과 “빈”은 내용을 들여다보면 동의어에 가깝습니다.
우리말에선 식별과 지혜는 별개처럼 정의 되지만...
통상적으로 어떤 단어를 얘기할 때 ‘이것이다’라고 번역하지만 여러 뜻이 있고 심지어 우리말의 하나의 단어에서 여러 의미가 있듯이...  그래서 문맥 안에서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원전문맥으로 들어가 보면

[1절~2절] 아들아! 하고서 ‘임’(만약~ 한다면),
[3절] ‘키 임’(그래서 ‘만약~ 한다면),
[4절] ’임’(만약~ 한다면),
[5절] ‘아쯔’(then)로 귀결이 됩니다.

아들아! [1~4절]까지 만약~ 한다면, [5절]하나님을 제대로 알 수 있을 것이다.
5절을 사역하면 “여호와의 경외를 구별할(빈) 것이고 // 하나님의 지식을 찾을 것이다”
결국 역으로 말하면 1장의 내용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머리,시작)이어늘
(1:7) 이는 먼저 여호와 경외 곧 하나님 지식을 찾음으로 파생되는 모든 것 즉 지혜, 지식, 명철 등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을 보실 때 특히 시편이나 잠언 등에서 자세히 보시면 단어나 문장 두 개를 나란히 놓습니다.
반복 구절처럼 놓는데 그들의 특성입니다.
이렇게 하므로 뜻을 풍성히 하거나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는 두 개의 내용을  함축하는 것으로써 각자의 뜻으로 보는 게 아니라 서로 잡아주어 하나의 내용으로 보셔야 합니다.

[2절] 네 귀를 지혜에 기울이며 //  네 마음을 명철에 두며
[3절] 지식을 불러 구하며 //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며’
[5절] 여호와의 경외와 하나님의 지식도 나란히 놓였음을 볼 수 있고...
  그러므로 여기서 지혜와 지식과 명철은 위에 언급된 것처럼 개별적이나 서로 합하여 풍성과 강조를 더한 하나의 뜻으로 보아야 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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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는 사건의 해결 능력

우리가 이 세상의 유혹이나 삶의 문제들 앞에서 넘어지지 않고 승리해 나갈 수 있는 지혜는 하나님 말씀으로부터 옵니다.

명철(insight or understanding)은  사물에 대한 통찰력과 이해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묵상할 때” 명철함이 스승보다 그리고 노인보다 더 뛰어나다고 말합니다(시 119: 99-100). 

스승은 세속적 지식을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세상 지식은 영적 지식과는 다릅니다.
아무리 세상의 박사 학위를 가진 자도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십자가의 구속과 복음에 대한 영적인 일을 이해할 수 없지만, 초등학교 밖에 안 나온 크리스천이라도 성령님께서 깨우치시면 복음의 깊은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노인은 이 세상의 갖가지 경험을 다 한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처세에 밝고 인생사는 법을 잘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을 사랑하고 묵상하는 사람은 공부를 많이 한 스승보다, 지혜와 명철이 뛰어났던 것은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창 41:39).
다니엘과 세 친구는 바벨론의 모든 자보다 모든 학문과 재주 뿐 아니라 지혜와 총명이 훨씬 뛰어났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외과 의사이며 "Think Big"(크게 생각하라)의 저자인 벤 카슨은 학창 시절부터 매일 잠언을 하루에 1장씩 읽었다고 합니다. 잠언을 읽으면 삶의 참된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는 “140억개의 뇌세포는 우리가 마주치는 모든 것을 수용한다”고 말하면서 어떤 것을 뇌에 입력하느냐가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저속적인 책들이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는 세상적인 대중매체를 입력하느냐,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뇌 속에 입력하느냐 하는 것은 어떤 인생을 사느냐를 좌우하는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많은 지식보다 또 어떤 능력보다 중요한 것은 지혜와 명철입니다. 이러한 지혜와 명철을 갖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마음속에 내면화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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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는 상황에 맞게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잠언 9:10)
-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The fear of the LORD is the beginning of wisdom, and knowledge of the Holy One is understanding.

지식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잠언 1:7)
-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The fear of the LORD is the beginning of knowledge, but fools despise wisdom and discipline.

명철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예레미야 9:24)
-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찌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에 행하는 자인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but let him who boasts boast about this: that he understands and knows me, that I am the LORD, who exercises kindness, justice and righteousness on earth, for in these I delight," declares the LORD.

1. 지혜(智慧)
히. 호크(chokma), 헬. 소피아(sophia), 영. 위즈덤(wisdom)

관찰, 경험, 반성에 의해 얻어지는, 적절한 생활에 대한 지식과 감정을 말한다.
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며(고전 2:6,7),
머릿속 지식이 아니라 행동으로 이어져야 하는 총체적 삶의 양식으로,
하나님에의 신앙과 복종을 지혜의 중심으로 생각했다(시 111:10; 잠 1:7,9:10).

 ①.  습득한 지식을 이용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②.  미래형(未來形)이다.
 ③. 명철로 주소를 삼으며 지식을 통하여 얻는다(잠 8:12)

 2. 명철(明哲)
히. 비나(beenah), 헬. 순네시스(sunesis), 영. 언더스텐딩(understanding)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예리한 분별력(욥 6:30,32:9),
어떤 주제를 예리하게 파악하고 이해하는 지적 능력(욥 6:24,15:9,18:2,23:5)
지혜에 이르는 길을 하나님께서 '깨달으신다'(욥 28:23)는 말을 이 단어로 표현하고 있다.

 ①. 지식과 지혜를 이용하여 사물의 성질을 분별하는 것이다.
 ②. 현재형(現在形)이다.
 ③. 거룩하신 자를 알고(잠 9:10), 악을 떠나는 것이다(욥 28;28)

* 예레미야 9:24, 여호와를 아는 것 

3. 지식(知識)
히. 다드(daath), 헬. 그론시스(gnosis), 영. 나리지(knowledge)  

사물에 관한 명확한 인식이나 판단.
어떤 사물에 관하여 알고 있는 것 또는 그 내용을 이르는 것.
인간의 심리적 3요소(지정의, 知情意) 중 하나, 지식 없이는 인간답게 살아갈 수 없다.

 ①. 사물을 있는 그대로만 파악하여 습득하는 것이다.
 ②. 과거형(過去形)이다.
 ③. 절제가 없으면(벧후 1:6), 사람을 교만하게 한다(고전 8;1)

 '지혜'와 '명철'은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었으며, '명철'은 '지혜'의 대구(對句, 비슷한 어조나 어세를 가진 것으로 짝을 맞춘 글귀)로 사용되고 있다. (잠언 4:5,7, 7:4, 9:10, 16:16; 욥 28:12, 20, 28; 1:20; 사 11:2).

 ①.  모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다(잠 1:7,9:10; 시 111:10).
 ②. 모두 하늘로서 내리시는 선물이다(전 2:26).
 ③. 모두 긴밀한 관계에 있다(잠 18:15,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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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크마” - ‘지혜’
“비나” - ‘지식’
“테부나” - ‘명철’

이 단어들은 동사형 명사(동사에서 만들어진 명사)라고 보시고 동사의 뜻을 알면 명사의 의미가 풍성해질 것입니다.

호크마”의 동사형은 “하캄”으로 지혜롭다, 지혜롭게 행동하다
비나”와 “테부나”는 “”이라는 동사에서 온 것
모양은 판이하나 히브리어에서 어미나 접두어를 붙여서 명사로 만든다고 보시면 이해가 쉬울 듯합니다.

동사 “”이란 의미는 ~사이를 식별(구별)하다는 의미로서 즉 구별하고 식별할 수 있으니  지식이나 이해 혹은 깨달음 등으로 될 수 있을 것이고 통찰력이 있어야 되는 문제이니 명철로 더 나아가 지혜로 해석이 가능해집니다. 

“하캄”과 “빈”은 내용을 들여다보면 동의어에 가깝습니다.

우리말에선 식별과 지혜는 별개처럼 정의 되지만...
통상적으로 어떤 단어를 얘기할 때 ‘이것이다’라고 번역하지만 여러 뜻이 있고 심지어 우리말의 하나의 단어에서 여러 의미가 있듯이...  그래서 문맥 안에서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원전문맥으로 들어가 보면

[1절~2절] 아들아!!!하고서 ‘임’(만약~ 한다면),
[3절]에서 ‘키 임’(그래서 ‘만약~ 한다면),
[4절]에 ’임’(만약~ 한다면).
[5절] ‘아쯔’(then)로 귀결이 됩니다.

아들아! [1~4절]까지 만약~ 한다면,
[5절]하나님을 제대로 알 수 있을 것이다.

5절을 사역하면 “여호와의 경외를 구별할(빈) 것이고// 하나님의 지식을 찾을 것이다”

결국 역으로 말하면 1장의 내용으로 돌아가는 것일테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머리,시작)이어늘~~~(1:7)
이는 먼저 여호와경외 곧 하나님지식을 찾음으로 파생되는 모든 것 즉 지혜,지식,명철등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보실 때 특히 시편이나 잠언 등에서 자세히 보시면 단어나 문장 두 개를 나란히 놓습니다.

반복 구절처럼 놓는데 그들의 특성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뜻을 풍성히 하거나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는 두 개의 내용을  함축하는 것으로써 각자의 뜻으로 보는 게 아니라 서로 잡아주어 하나의 내용으로 보셔야 합니다.

[2절]을 보시면 ‘네 귀를 지혜에 기울이며// 네 마음을 명철에 두며
[3절]지식을 불러 구하며//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며’

[5절]도 보시면 여호와의 경외와 하나님의 지식도 나란히 놓였음을 볼 수 있고...
 그러므로 여기서 지혜와 지식과 명철은 위에 언급된 것처럼 개별적이나 서로 합하여 풍성과 강조를 더한 하나의 뜻으로 보아야 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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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믿고 전도하라.”
“신구약 성서 가운데 여러 말씀을 지키는 자가 어찌 나의 유언은 지키지 않겠는가.”
“이잣돈 욕심 말라. 금전은 1원이라도 저금하라.”
“교육을 양성하는 일만 경영하라.”

1930년 경남 함안 조씨의 한 가문이 작성한 ‘교육조합(敎育組合)’ 문서에 담긴 내용이다.
교육조합은 함안 군북면 사촌리에 거주하던 조좌규(1854~1936)씨가 다섯 아들과 함께 결성한 조합이다.
집안의 경제적 부침과 상관없이 문중의 인재를 끝까지 교육하기 위해 다섯 섬 두 마지기의 땅을 내놓아 여기서 나오는 산출로 후손을 교육하라는 뜻이 담겨 있다.
핵심은 기독교 인재 양성이다.

함안 조씨는 영남의 명문가다.
효성그룹 조홍제 회장이 이 문중의 일가이고 인근 지수초등학교는 삼성 이병철, LG 구인회, 효성 조 회장 등을 1회 졸업생으로 배출한 곳으로 유명하다. 조용기 여의도순복음교회 목사 역시 함안 조씨다.

구한말 외세에 의해 국권이 흔들리던 상황에서 조동규 조좌규 형제는 기독교를 받아들인다. 봉건적인 유교 전통에서 벗어난 일이라고 문중에서는 족보를 퇴출하는 등의 아픔을 겪었지만, 이들은 굳건하게 믿음을 이어갔다.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 소속 함안 사촌교회는 1897년 설립돼 125년 역사를 이어왔는데 호주 선교사 앤드루 애덤슨(손안로)이 조동규씨에게 전도하면서 설립됐다.

당시 조동규씨는 애덤슨 선교사에게 “우리가 개종하면 조선이 독립될 수 있는지” 물었고, 애덤슨 선교사는 “조선 사람 100만명이 예수를 믿으면 독립이 가능할 것이오”라고 답했다. 조씨는 즉각 조카 조용관과 함께 논 1980㎡를 헌납해 사촌리에 최초로 교회당을 세웠다. 조동규의 아들 조용석은 호러스 G 언더우드 선교사의 서울 경신학교에 다니며 3·1운동의 주역으로 나섰다가 투옥됐고, 훗날 일본 와세다대를 졸업했다. 문중에서 배출한 대표 목회자로는 대한기독교서회 총무(지금의 사장 직위)를 네 번 연임한 조선출 목사가 있다.

1930년 작성된 교육조합 서문.

교육조합 문서는 1부 서문, 2부 규칙, 3부 유서로 작성돼 있다. 문중을 일으키기 위해 영특한 자손을 교육하는 기금을 내고 이를 운용하는 규칙과 더불어 신앙을 지키라는 특별한 유언을 남겼다. 허경진 전 연세대 국문과 교수가 한문 번역을 도왔다. 허 교수는 “동서고금 유언은 생전엔 효력이 없고 죽은 뒤에 효력이 있다는 히브리서 9장 16~17절 말씀으로 유언이 시작된다”면서 “전도를 당부하고 금전 대부를 금지하며 정의와 가규(家規)를 강조하는 등 기독교 신앙과 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20일 오후엔 사촌저수지가 내려다보이는 고갯길 문중의 산에서 교육조합비 제막식이 열렸다. 교육조합 문서를 한글로 번역해 후손들이 쉽게 읽도록 돕는 비석이 세워졌다. 이어 박병연 사촌교회 목사의 인도로 기념 예배가 드려졌다. 문중을 대표해 조종석(78) 안수집사가 인사말을 했다.

1930년 작성된 교육조합 규칙.

“당시 문중의 어른들은 독립된 나라를 되찾는 길이 새 세계의 조류에 합류하는 것이라 확신하고 교육조합을 창설해 ‘주 안에서 교육에 힘을 다하라’고 하셨습니다. 저희는 이런 뜻을 받들어 가풍으로 삼고자 이 기념비를 봉헌합니다.”

사촌교회 앞마당에는 1928년 조동규씨의 교회와 관련한 헌신을 기록한 비석도 남아 있다. 비석의 글은 3·1운동을 배후에서 주도하고 투옥 후 당시 마산 문창교회에서 시무하던 함태영 목사가 썼다. 법관에서 독립운동가로, 이후 목사에서 정치가로 계속 거듭난 함 목사는 서울 남대문교회, 연동교회와 인연이 있고 한국신학대 학장을 역임하다 이승만정부에서 부통령까지 지냈다.

사촌교회 박 목사는 “함안 출신 산돌 손양원 기념관과 세브란스 출신 의사이자 독립운동가인 이태석 기념관, 그리고 사촌교회와 교육조합 비석까지 함께 기독교 역사 순례지로 찾아와 달라”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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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e Belt & Black Belt, Grain Be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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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e Belt

미국 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근본주의 개신교와 복음주의가 강세를 보이는 지역이다.
사회문화적으로 보수적, 종교적이며 이 지역의 교회 출석률은 미국 전체의 평균 수치에 비해 훨씬 높은 수치를 나타내는 지역이다.
심지어 교회가 가장 많은 지역이다.

미국 내에서 가장 교세가 큰  남침례회를 중심으로 한 미국 내 보수 개신교단들의 근거지가 바로 이쪽 지역이다.
바이블 벨트라는 용어는 미국 내에서 주로 언론인이나, 미국의 개신교를 비판하는 이들에 의해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Religion News Service의 2015년 2월 19일자 기사

출석율이 가장 높은 주 : 미시시피
출석율이 가장 낮은 주 : 버몬트

바이블 벨트는 사회와 정치에서 사회  보수적 개신교가 강한 역할을 하는 미국 남부의 지역으로 종파를 초월한 교회 출석율이 일반적으로 전국 평균보다 높다.
이 지역은 종교적으로 다양한 중서부와 오대호 그리고 유타와 아이다호의 모른몬교 회랑과 대비된다.

미국 서부 및 뉴일글랜드 지역(버몬트가 37%, 가장 높은 순위)에서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반면, 앨라배마 주의 바이블벨트 지역은 12%에 불과하며, 테네시 주의 복음주의 개신교 비율은 52%로 가장 높다.

복음주의 영향력은 북부 조지아, 테네시, 앨라배마, 미시시피. 너스켈롤라이나, 노스캐롤라이나. 남부 및 서부 버지니아, 웨스트 버지니아,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북부 지역 및 동부 텍사스에서 가장 강력합니다.

바이블 벨트라는 용어의 가장 오래된 사용법은 1924년 시카고 데일리 트리뷴에 기고한 미국인 저널리스트이며 사회평론가인 H. L. 멘켄에 의해 알려졌다.

그는 "이 오래된 게임은 아마도 바이블 벨트에서 펼쳐지기 시작하고 있다."
1927년, 멘켄은 그 용어를 그의  발명이라고 주장했다.
이 용어는 현재 다른 나라에서도 종교적 교의 채택률이 높은 지역에 사용되고 있다.





그레인 벨트(Grain Belt)

미국 중서부의 북쪽을 가로지르는 프레리 지역을 가리킨다.
이 지역은 세계에서 최고의 곡물 산지이기 때문에 이렇게 불린다. 
아이오와주일리노이주인디애나주오하이오주미주리주의 대부분과 위스콘신주캔자스주네브래스카주미네소타주의 일부로 구성된다.






로마서 8장 및 마가복음 8장



로마서 8장 및 마가복음 8장 

성경은 66권 1,189장으로 구성되었다.
1,189장에서 2장을 선택해야 한다면 로마서 8장과 마가복음 8장을 선택해야 한다.
왜냐하면 로마서 8장은 성령, 마가복음 8장은 예수를 증거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마가복음 8:1-38

성경 한 권이 다 타서 없어지더라도 로마서 8장 한 장만 남겨진다면 그 말씀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구원이 임하는데 전혀 지장이 없을 것이다." 하면서 로마서 8장의 가치를 치하했다면 저는 마가복음 8장은 첫 복음서라고 여겨지는 마가복음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장이다.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 함께 한 제자들.
예수님의 가르침의 대상은 다른 누구보다도 이 제자들이었다. 
그리고 예수님의 곁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12제자 뿐만 아니라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그분을 따르는 현대의 그리스도의 제자인 우리에게 그 가르침을 주신다. 

예수님은 과연 누구인가?
나는 예수님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1. 칠병이어의 기적(1-8절) 

마가복음 8장은 이른바 칠병이어의 기적이라 불리는 사천명을 먹이시는 사건으로 시작한다.

물고기 두마리와 보리떡 다섯개로 오천명을 먹이셨던 예수님은 이방인의 장소에서 또 다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일곱개를 가지고 4천명의 사람들을 먹이신다. 

단지 장소만 이스라엘 땅에서 이방인의 땅으로, 더 적은 사람이 모여있는데, 저들을 먹이라는 질문에 제자들은 자신들은 전혀 못한다고 한다.

오병이어 :  어린아이의 작은 헌신을 통해 주님이 축사해 주시는 사건 

동역의 원리 :  모세에게, 여호수아에게, 기드온에게....명령하였을 때 무엇이라고 대답하였는가?
나는 어떻게 대답하고 있는가?
나는 못합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
내 말에 순종하면....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 앞에 그들은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내 능력, 내가 가진 것만을 보면서 못한다고 한다. 

믿음은 내 가진 것이 아닌 내 순종을 통해 축사하시고 일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이다. 

그런데 오병이어와 칠병이어 사건을 통해 제자들은 여전히 자기와 함께 있는 분이 누구인지, 예수와 함께 하는 자신들의 사명이 무엇인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 

2. 사천명을 먹이신 사건 뒤에 바로 이어지는 바리새인들의 요구
- 표적을 보여 달라 한다(11-12절) 

도대체 언제까지 표적을 보여줘야 저들은 믿을까?
눈앞에 표적이 계속된다면 정말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을까?
예수님은 표적을 바라는 바리새인들을 바라보면서 깊이 탄식한다.
이 바리새인들의 모습은 다름아닌 눈에 보이는 표적, 끊임없이 보여주기만을 간구하는 제자들의 또 다른 모습일 것이다. 

기적 - 바리새인과의 논쟁 - 그리고 배 안에서 제자들과의 대화-
그리고 한 유대인의 치유... 

이런 싸이클의 대상은 제자들이다.
여기서 비교의 대상은 바리새인들의 신앙과 제자들이지만 결국 이들의 신앙은 다르지 않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바리새인들과 다른, 전통이나 헛된 외식에 빠지지 않는 신앙이 되기를 원하신다.  

3. 제자들과의 대화(13-21절)
다시 주님과 배를 탔다

그들이 함께 있는 분은 며칠 쌔 오쳔명을, 사천명을 먹이신 예수님이다.
그런데 제자들은 여전히 부족하다.
현실의 어려움은 오직 주님과 함께 있는 배 안에서도 은혜를 누리지 못하게 한다. 

문제는 또 떡의 문제이다.
은혜는 받았는데 여전히 배가 고프다.
현실의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떡 가져오기를 잊었다고 했다.
무슨 떡인가? 

4천명을 먹이고 남은 광주리가 일곱이라 했다.
이 일곱광주리는 모든 교회를 먹이고도 남을 양식이다.
하늘의 만나이다. 

그런데 떡이 하나 밖에 없다(14절) 

하나의 떡은 무엇일까? 
배에 단 하나 남은 떡은 누구일까?
일곱 광주리의 떡을 다 잃어버려도 된다.
남은 하나의 떡만 있으면 언제라도 또 채워질 수 있다.
그 분은 오쳔명을 먹이고도 이스라엘 12지파를 상징하는 12광주리를 이방인의 무리 4천명을 먹이시고도 일곱교회를 상징하는 7개의 광주리를 위해 떡을 남기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 분과 함께 있으면 언제라도 공급받을 수 있다. 

4. 단지 그들은  두 가지만 조심하면 된다. 

"바리새인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15절) 

- 바리새인의 누룩 그들의 관심은 예수님을 바라보는데 있지 않았다.
그들은 주님을 통해 자신들이 변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기를 증명하고 싶은 것이다.
자기 믿음이 최고라고, 자기가 했던 신앙생활이 맞다고 인정받고 싶은 것이다. 

누가 와서 자기를 맘껏 칭찬해 주기만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 깊은 마음 속엔 무엇이 있는가? 내가 남들보다 낫고, 내가 남들보다 의롭고, 내가 남들보다 높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칭찬하지 않고 꾸짖으신다. 그냥 꾸짖는 정도가 아니라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자들이여, 하면서 그들을 독사의 자식, 사탄의 자식이라 저주하신다" 너무나도 끔찍한 그들의 실상을 드러내신다. 

헤롯의 누룩은 무엇인가?
- 허영심, 허세, 인본주의, 번영신학........성공적 목회의 상징은 과연 대형교회인가?

하나님 없는 세상의 가치관이다.
세례요한이 의로운 줄 알면서도 사람들의 이목때문에 목을 베어버린 헤롯, 예수가 무죄인줄 알면서도 백성들의 눈치를 보며 십자가를 지게 했던 빌라도와 같은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지만 결국 의롭지도, 정직함도 없이 자기 주관대로도 아닌 남들 눈치만 보면서 살아가는 세상이다. 

바리새인들의 이런 교만의 누룩, 헤롯의 이런 세상적인 정욕의 누룩.... 이것만 주의하면 떡은 단지 하나면 족하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먹이신다.

그러면서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18절)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 

맹인의 정체 :  제자들 

5.  맹인을 고치심 

 -벳세다 :  house of fisher man (어부들의 집) -> 어부는 누구일까 누가 어부인가?  제자들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의 대상 - 제자들

육적 소경에서 sight를 주고(육적 시력)
영적 소경에게 주시는 것 insigt (영적 시력) 

23절.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예수님의 질문 : 무엇이 보이느냐? 본질적인 질문. 매서운 질문  - 무엇을 보면서 사는가? 

맹인의 대답 :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보는 것이냐, 보지 못하는 것이냐? 
다시 안수 하신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  

 

 이 사건은 마가복음에만 나온 내용으로 다른 병자를 고치시는 이적과는 좀 특이한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두 번에 걸쳐 안수하시며 맹인의 상태를 물으신 것이지요. 왜 특별히 이 맹인에게는 "두 번의 안수를 하시며 고치셨을까?"하는 질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안수 하시고 예수님이 "무엇이 보이느냐?" 하시니 소경이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의 안수가 완전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아직 소경의 보는 눈이 온전히 열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불완전한 이해 속에서 살아갑니다. 내가 아무리 오랜 신앙생활을 하고 권사이고, 장로이고, 목사이여도 난 여전히 완전히 보지 못하는 불완전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두 번째의 안수가 (제 2 의 은혜) 필요합니다. 

불완전한 자의 눈은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못합니다. 나무와 같은 물질, 대상으로 봅니다. 세상 사람들의 사람을 보는 시각과 같습니다. 나에게 유익한가? 그렇지 않은가? 나를 위하는 자인가? 적인가? 사람을 하나님이 창조하신 고귀한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나 중심적으로 사물로서 사람을 바라봅니다. 

사람을 숫자로 보는 것 - 유익으로 보는 것, 나 자신 마저도 

내가 필요한 사람인가? 내가 이 집에 필요한 사람인가? 내가 이 교회에 필요한 사람인가? 

주님께 내가 필요한 사람인가?

난 목사이지만 내가 주님께 필요한 사람인가?라고 물으면 언제나 자신이 없다. 

주님이 내게 필요한 분이시다. 

주님이 내게 필요해서 난 주님을 의지하고

이 교회가 내 신앙과 영적 여정에 필요해서 주님은 내게 교회의 사역자로 부르셨고 

성도님들이 내게 필요해서 여러분들과 같은 귀한 성도님들을 만나게 하신 것이다. 

 

여러분들에게는 꼭 내가 아니어도, 주님께는 꼭 내가 아니어도, 내가 아니면 돌맹이 하나를 통해서도 주님의 일을 맡기실 수 있지만 나의 구원에, 나의 성숙에, 나의 신앙에 주님이 필요하기 때문에 내게 다가오신 것이다.
그리고 아무런 값어치 없는 연약한 나를, 연약한 우리를 자녀라고, 친구라고 부르시면서 생업이 같은 동역자로 우리를 불러주시는 것이다. 

두 번째 안수하시니 모든 것을 밝히 보았다고 합니다.
그 사람의 외모가 어쩄든, 학식이 어쨌든,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나님이 형상이 있는 사람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은혜 안에 있는 자들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의 눈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눈이 열렸다는 것은 이제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진정 사람으로 보는가? 

우상은 다름아닌 image를 만들지 말라.
그것이 사람이든, 형상이든 심지어 하나님이든 그것의 이미지에 갇혀서 바라보지 말라.

진정한 모습을 보고 싶다.
죄로 인해 왜곡되고 변형되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 녹아 있는 그 모습 그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곧 형제를 사랑하는 것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것 그 사람의 모습을 밝히 보는 것 - 

성경 한 번 안 읽고 하나님을 안다라고 할 수 없듯이 그 사람의 진 면목을 우리는 모르고 산다. 마치 나무처럼, 사물처럼 사람들을 바라본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누구라고 보느냐?)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누구라고 보느냐?) 

우리는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그런데 주님은 우리에게 묻는다. 

너는 나를 어떻게 보느냐?
 
데가볼리에서 4,000명을 먹이심(8:1-10)

마가복음 8:1-30의 이야기는 마가복음 6:31-7:37과 매우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두 기록의 주제를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저자 마가는 (6:52)과(8:14-21)에서 두 번에 걸쳐서 무리들에게 떡을 먹이신 일을 기록하였습니다.
한 사건은 유대인의 지역에게 일어났고, 다른 사건은 이방인의 지역에서 일어났습니다.
이 두 사건은 모두 다 무리와 제자들에게 영적인 깨달음을 주기 위한 사건이었습니다(7:14-18).
그러나 이 사건을 본 제자들은 아무 것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마치 영적으로 귀머거리와 소경 같았습니다.
마가는 이 두 사건 사이에 주님께서 귀머거리(벙어리)와 소경을 고쳐 주신 일을 삽입하였습니다(7:31-36, 8:22-26).
이것은 주님께서 영적인 귀머거리와 소경과 같은 제자들에게 주님을 계시해 줄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주님은 마침내 제자들의 눈과 귀를 열어서 자신이 누구인가를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통해서) 밝히 계시해 주셨습니다(8:27-30).

* 무리를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1-3)

그 즈음에 또 큰 무리가 있어 먹을 것이 없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만일 내가 저희를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도 있느니라.

주님께서 무리를 먹이신 이적은 데가볼리 근처 갈릴리 바다 주변에서 일어났습니다. 주님이 사역하는 동안 수많은 무리들이 모여들었으며, 이 사역은 3일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3일이 지나게 되자 무리들은 더 이상 먹을 음식이 없었습니다(1). 그들 중에는 벌써 음식이 떨어져서 매우 허기진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 중에는 먼 곳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허기진 배를 안고 먼길을 걸어가야만 했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무리들의 사정을 아시고 그들을 불쌍하게 생각하셨습니다(2-3). 5병2어의 이적(6:34) 때에 주님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헤메는 무리들을 보시고 그들의 목자와 지도자가 되어 진리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번 사건에서도 주님은 말씀을 듣다가 굶주린 무리를 보시고 그들에게 음식을 제공하셨습니다. 그러나 5병이어의 사건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졌고, 이번 사건은 이방인 지역에서 이루어졌습니다.

*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4-5)
"제자들이 대답하되 이 광야에서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4)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가 있느냐? 가로되 일곱이로소이다 하거늘(5)..."

제자들은 그 많은 무리를 먹일 떡을 광야에서 구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4), 주님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 고 물으셨고, 제자들은 "떡 7개"가 남아 있다고 대답했습니다(5). 주님은 제자들이 가지고 있던 것을 가지고 무리들을 먹이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없는 것을 요구하지는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가진 것이 부족하지만 그것을 가지고 이웃의 필요를 채워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연약한 때문에 고민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몇 개의 떡과 두어 마리의 생선으로도 수천 명이 먹고 남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부족해도 주님이 원하시면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은 믿음으로 드리는 작은 힘을 받으시고 수많은 이웃들의 부족함을 채워 주시는 도구로 사용해 주십니다.

* 풍성한 식사(6-10)
"예수께서 무리를 명하사 땅에 앉게 하시고 떡 일곱 개를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그 앞에 놓게 하시니 제자들이 무리 앞에 놓더라(6). 또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는지라. 이에 축복하시고 명하사 이것도 그 앞에 놓게 하시니(7).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 일곱 광주리를 거두었으며(8), 사람은 약 사천 명이었더라. 예수께서 저희를 흩어 보내시고(9), 곧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달마누다 지방으로 가시니라(10)."

주님은 무리들을 땅에 앉게 하신 후에 제자들이 가진 떡을 앞에 놓고 축사하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께서 오늘도 일용할 양식을 주신 것을 감사드렸습니다. 축사를 마치신 후에 주님은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그 떡을 무리들에게 나누어주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 명령대로 그 떡을 무리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6). 그리고 주님은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는 것이 보시고 그것도 축사하시고 무리들에게 나누어주라고 하셨습니다(7). 이제 모든 무리들은 모두 배부르게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무리들이 배부르게 먹은 후에도 일곱 광주리에 채울 만큼 떡이 남아 있었습니다(8). 5병이어 때에 무리들이 남긴 열 두 광주리는 "작은 바구니"(코피노오이)였으나, 지금 무리들을 먹고남은 일곱 광주리는 "사람을 운반할 수 있는 큰 광주리"(스피리다스)였습니다. 그러므로 이번에 남은 음식이 5병이어 사건 때보다 더 많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에 음식을 먹은 사람은 여자와 아이들을 제외하고 남자들만 약 4,000명이나 되었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무리들을 배부르게 먹이신 후에 그들을 돌려보내셨습니다. 무리들을 보낸 후에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바다 건너편(호수 서쪽) 디베랴 근처의 달마누다(또는 마가단; 마 15:39) 지방으로 가셨습니다(9-10).

* 유대인의 교회와 이방인의 교회
주님은 유대인들에게 행하신 오병이어 사건과 같이 이방인이 많이 사는 동네에서도큰 이적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함께 앉아 식사할 수 없었던 이방인들에게 말씀을 전하시고 함께 음식을 드셨습니다. 주님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거부하는 유대인들을 떠나 이방인의 땅 두로와 시돈, 그리고 데가볼리로 가셔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와 같이 주님 안에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한 형제가 될 수 있는 나라입니다. 우리 중에도 여러 대에 걸쳐서 주님을 믿은 사람도 있고, 당대에 혼자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오래 예수를 믿은 사람들은 불신자들이나 처음 믿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의를 자랑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매우 위험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누구든지 죄인이었을 때에 구원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래 믿은 사람일수록 외식에 빠지지 않기 위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더욱 힘써야만 합니다. 주님은 스스로 의롭게 여기고 남을 정죄하는 바리새인들을 크게 책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주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잊는 순간부터 우리는 감사와 감격을 잃고, 외식과 형식의 중병에 걸리게 될 것입니다.

* 이 사건이 주는 의미 *
1. 주님은 우리에게 영육간에 필요한 일용할 양식을 공급해 주신다.
2. 주님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구분하지 않으신다.
3. 주님은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이웃의 필요를 채울 수 있게 하신다.

적용을 위한질문
1. 우리는 주님께서 영육간에 필요한 것을 채워 주실 것을 믿고 살아가는가?

2. 우리 이웃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주님께 드려야 할 떡과 물고기는 무엇인가?

3. 왜 스스로 의롭게 생각하고 이웃을 정죄하는 일이 큰 범죄인지 말해보자.


표적을 요구하는 바리새인(막 8:11-13)



묵상 내용



*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요구함(11)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께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11)..."

주님은 이방인의 땅에서 복음을 전하신 후에 다시 배를 타고 갈릴리 서쪽으로 가셨습니다. 이방인들은 주님을 열렬히 환영하였으며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갈릴리로 돌아오게 되자 또 다시 외식 적인 바리새인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주님께 와서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여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이미 예수님을 이단이라고 판정했으며, 주님이 하는 일은 귀신의 왕의 힘을 빌려서 하는 것이라고 정죄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또 다시 주님께 하나님께서 주시는 표적을 요구했습니다(11). "표적"(세메이온: sign)은 어떤 사람의 말이 진실하고, 그 행동의 정당하다는 것을 보장해주는 "표시"(token)를 의미합니다. 구약을 보면 예언자들은 자신들이 하는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입증하기 여러 가지 표적을 행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엘리야는 하늘로부터 불을 내려오게 했으며, 다른 선지자들도 여러 가지 예언과 이적들을 행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주님께 와서 바로 이런 표적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사실상 주님은 그 동안 어떤 선지자들보다도 더 많은 '이적'(두나미스; miracle)을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이적들은 하나님께서 주님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표적'(세메이온; sign)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정직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더 이상 표적을 요구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그렇게 많은 표적을 보고서도 주님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주님이 이단이며 악마적인 행위를 하고 있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들이 이런 표적을 요구한 것은 주님을 반대할 근거를 찾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 이 세대가 어찌하여 표적을 구하느냐?(12)
"예수께서 마음속에 깊이 탄식하시며 가라사대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게 표적을 주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12)..."

주님께서는 그들의 완고한 마음을 아시고 깊이 탄식하셨습니다. 주님은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고 하시며 깊이 탄식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많은 표적을 보고도 또 다시 표적을 구하는 사람들을 보고 탄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동안 주님은 그 동안 어떤 구약의 선지자들보다 더 많은 이적들을 행하셨습니다. 주님은 수많은 병자를 고쳐주셨으며, 귀신을 내어 쫓으셨습니다. 주님은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하셨고 심지어 죽은 사람도 살려내셨습니다. 이러한 표적을 보고도 주님을 믿을 수 없다면 무엇을 보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주님은 또 다른 표적을 구하는 그들을 보고 탄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마치 날마다 하나님이 주신 만나를 먹으면서 끝없이 하나님을 시험하고 원망했던 이스라엘 사람들과 같이 완고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셨습니다(12). 주님은 그들에게 표적이 필요 없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들은 죽은 사람을 다시 살려도 주님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표적이 아니라 마음을 열고 정직하게 주님의 가르침과 행동을 평가하는 것이었습니다. 참된 성도들은 더 이상 다른 표적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은혜로 충분히 만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은혜도 감당할 수 없다고 고백 할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표적을 구하는 사람들을 향해 탄식하십니다. 주님은 항상 우리들과 함께 하시며 여러 가지 환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그러나 영적인 눈이 어두운 사람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또 다른 표적을 구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날마다 하나님이 주시는 만나를 먹고 구름 기둥과 불기둥의 보호를 받으면서도 날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시험했습니다.

영적으로 어두운 사람들은 그들과 같이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서도 계속해서 하나님을 의심하고 시험합니다. 주님은 이런 사람을 보시고 탄식하십니다. 우리는 또 다른 표적을 구하지 말고 이미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주님께 질병을 고쳐달라고 세 번이나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바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내게 족하다." 왜냐하면 주님은 그 질병을 통해서 바울을 겸손하게 하시고 그에게 큰 능력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환경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환경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에 우리에게 주신 환경에 만족하며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윗이 고백한 것과 같이 "하나님을 자기의 목자로 삼은 사람은 부족함이 없습니다."

* 저희를 떠나가신 예수님(13)
"저희를 떠나 다시 배에 올라 건너편으로 가시니라(13)."

마침내 주님은 표적을 요구하는 사람들을 떠나셨습니다. 주님은 계속해서 불신앙으로 대하는 바리새인들에게 분노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들과 논쟁하는 것이 백해무익하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갈릴리 바다를 건너 갈릴리 동편으로 건너 가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주님의 행하시는 일을 보고 주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깨달을 만한 영적인 안목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고의로 주님의 행하시는 표적에 눈을 감았으며, 끝없이 주님을 시험했습니다. 주님은 이 사건을 마지막으로 갈릴리에서의 공생애 사역을 마치셨습니다. 주님은 계속해서 은혜를 거부하는 사람들로부터 은혜의 기회를 거두셨습니다.

* 이 사건이 주는 교훈 *
1. 하나님은 이미 우리들이 하나님을 믿을만한 충분한 증거를 주셨다. 그러므로 정직한 마음으로 말씀을 대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길을 알 수 있다.
2. 이미 주신 은혜 외에 또 다른 표적을 찾는 사람은 불신앙의 사람이다.
3. 은혜를 받으면서 계속해서 믿지 않는 사람은 은혜의 기회를 잃게 된다.

적용을 위한질문
1. 우리는 하나님이 이미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는가? 아니면 또 다른 표적을 구하고 있는가?

2. 왜 불신앙의 사람에게 표적을 보여 주는 일이 아무 소용이 없는지 말해보자.

3. 주님의 은혜를 계속적으로 거부하는 사람에게 주님은 어떻게 대해주시는가?


바리새인의 교훈을 주의하라(막 8:14-21)



묵상 내용



* 바리새인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14-15)
"제자들이 떡 가져오기를 잊었으매 배에 떡 한 개 밖에 저희에게 없더라(14). 예수께서 경계하여 가라사대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15)..."

예수님은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을 떠나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습니다. 제자들은 음식을 준비하는 것을 잊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떡 한 개밖에는 먹을 음식이 없었습니다(14). 주님은 제자들에게 "바리새인과 헤롯(안디바)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경계하셨습니다(15). 누룩은 볼 수 없지만 매우 적은 양으로 많은 반죽을 발효시킬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누룩은 두 가지로 사용되었습니다. 첫째로 누룩은 긍정적인 의미에서 복음의 침투력과 영향력을 나타냅니다(천국은 가루 서 말에 넣은 누룩과 같으니...). 그러나 누룩은 일반적으로 부정적인 의미에서 죄와 부패에 대한 은유로 사용되었습니다. 본문에서는 누룩이 바리새인과 헤롯의 가르침이나, 그들의 외식적인 신앙 태도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 대해 철저히 조사했기 때문에 주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을 이단으로 몰았으며, 귀신이 들렸다고 하면서 또 다른 표적을 요구했습니다. 그들은 정직하지 못했으며, 남에게 보이기 위한 외식적인 신앙 생활을 했습니다. 헤롯은 스스로 율법을 범하고(동생의 아내를 취함) 잘못을 지적하는 세례 요한이 의인인 줄 알면서도 죽였습니다. 그는 하나님보다 사람의 눈을 더 의식했습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과 헤롯은 둘 다 하나님 보다 사람의 눈을 더 의식하는 형식적인 신앙 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은 종교적인 지도자이며, 헤롯은 정치적인 지도자였기 때문에 그들의 신앙 태도는 많은 사람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의 교훈과 외식적인 신앙 태도를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 바리새인과 헤롯은 모두 백성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는 거짓 목자였습니다.

* 너희가 어찌 깨닫지 못하느냐?(16-18(상))
"제자들이 서로 의논하기를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 하거늘(16),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의논하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17)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18(상))"

그러나 제자들은 주님의 가르침을 오해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왜 미리 떡을 준비하지 못했느냐?" 고 책망하는 줄로 알았습니다(16). 그러므로 그들은 주님의 교훈을 듣고 음식을 준비하지 못한 일에 대해 책임 소재를 놓고 서로 다투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제자들을 보고 "너희가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고 책망하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의 영적 무지함을 보고 탄식하셨습니다(17). 그들은 마치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소경이었으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였습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주님과 함께 하며 수많은 이적을 보고 가르침을 받았지만 아직도 영적인 어린아이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주님의 책망을 받기에 마땅했습니다.

*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18(하)-21)
"또 기억지 못하느냐?(18) 내가 또 다섯 개를 오 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가로되 열 둘이니이다(19). 또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가로되 일곱이니이다(20). 가라사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21)"

주님은 제자들이 떡을 가지고 다투는 것을 보고 주님이 말하는 것이 음식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떡 다섯 개로 5000명을 먹일 때에 남은 조각을 얼마나 거두었느냐? 고 물으셨습니다. 제자들은 열두 광주리였다고 대답했습니다(19). 주님은 두 번째로 떡 일곱 개로 4000명을 먹일 때에 남은 떡을 얼마나 거두었느냐? 고 물었습니다. 제자들은 일곱 광주리였다고 대답했습니다(20). 주님께서 이 질문을 하신 것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의 초점이 음식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떡 다섯 개로 5000명을 먹이고 12광주리를 남기시는 주님께서 떡 문제로 걱정하지 않는 분이라는 것을 알아야 했습니다. 제자들은 떡 일곱 개로 4000명을 먹이고 일곱 광주리를 남기신 주님께서 떡이 없다고 제자들을 책망하실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이 질문을 하신 후에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고 하시며 제자들을 책망하셨습니다(21). 이러한 기록은 주님을 가깝게 모신 제자들도 영적인 면에서 헤롯과 바리새인, 그리고 다른 무리들과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가는 5000명을 먹인 사건 뒤에 귀머거리와 벙어리를 고친 일을 기록하였으며, 4000명을 먹인 사건 뒤에 소경을 고친 사건을 기록하였습니다. 이 사건들은 영적으로 귀머거리와 소경과 같은 제자들의 귀와 눈을 열어 주실 것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건 후에 제자들은 주는 메시야(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바리새인과 헤롯의 교훈을 조심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 보다 사람의 눈을 더 의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진전한 경건과 사랑을 버리고 형식과 외식만을 좆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이미 주신 은혜를 거부하고 또 다른 표적을 구하며 하나님을 시험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많은 말씀과 은혜에 대해 무감각해진 영적인 불감증 환자는 아닙니까? 그러면서도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이러한 영적 불감증 환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항상 성령 안에서 자신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제자들과 같이 영적인 귀머거리와 소경은 아닙니까? 우리는 아직도 구원해 주신 은혜와 수많은 은혜를 체험하고도 의식주 문제에 매여 서로 원망하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 우리의 모든 것을 채워 주실 것"을 믿고 있습니까? 우리는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주님이 우리와 동행하고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하고 살고 있지 않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이 시간 우리의 눈을 열어 달라고 주님께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 이 사건이 주는 교훈 *
1. 우리는 외식과 형식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항상 조심해야 한다.
2.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할 때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신다.
3. 주님은 우리의 닫혀진 영적인 눈과 귀를 열어 주시는 분이다.

적용을 위한질문
1. 하나님보다 사람의 눈을 더 의식하며 형식과 외식을 좆고 있지는 않는가?

2.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고 있는가?

3. 이 시간 우리 눈과 귀를 열어 주시도록 성령님께 기도하자.


소경의 눈을 고치심(막 8:22-26)



묵상 내용



마가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 사건 앞에 소경을 고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소경을 고치신 사건은 제자들이 주님을 바로 보게 될 것을 예고해주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계속된 이적(5병2어, 7병2어)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면에서 마치 소경과도 같았습니다. 주님은 소경을 고쳐주시듯이 제자들의 눈을 떠서 주님을 밝히 볼 수 있게 해 주실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소경을 고치신 이적은 다른 이적들과 몇 가지 점에서 다릅니다. 다른 이적들은 주님께서 치유를 선고하는 순간 즉시 치유를 받았지만, 본문에서는 시간이 흐르면서 치료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한 병자를 놓고 두 번이나 안수한 것도 다른 이적과는 다른 부분이었습니다.

1. 소경을 데리고 옴(22-23(상))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소경 하나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대시기를 구하거늘(22), 예수께서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밖으로 데리고나가사..."(23(상))

주님과 그의 제자들은 갈릴리 바다를 건너 갈릴리 동북쪽에 있는 벳세다 율리아스로 갔습니다. 이 곳은 헤롯 빌립이 다스리던 구역으로 규모 면에서는 도시였지만, 행정적으로는 마을이나 부락의 조직을 가진 곳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벳세다에 들어가셨을 때에 몇 사람이 소경 하나를 주님께 데리고 와서 안수해서 고쳐달라고 요청했습니다(22). 주님은 그 요청을 받으신 후에 그 소경의 손을 잡고 마을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마가복음을 보면 주님께서 이와 같이 비공개적인 장소에서 이적을 베푸신 일이 세 번 기록되어 있습니다(5:35-43, 7:31-37, 8:22-26 참조). 이 경우 주님께서 비공개적으로 병자를 치료하신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소경과 개인적인 관계를 통해서 믿음을 주기 위해서.
주님은 병자들의 마음에 있는 믿음을 보고 그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나 장애자들은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자기 믿음을 표현하는 일이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병자와 개인적인 대화를 통해서 그가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개인적인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었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해서 병자가 마음에 확신을 갖게 되면 그 믿음을 보시고 그 병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아마 본문에서 주님이 소경을 마을밖으로 데리고 나가신 일도 이런 목적 때문이었을 지 모릅니다.

2) 공개적인 이적으로 인해 복음 전도 사역에 방해를 받지 않도록
주님은 종종 병자를 고쳐 주신 후에 그 사실을 알리지 말도록 경고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복음보다 병을 치료받기 위해 몰려들기 때문에 찾아오기 때문에 복음 전도 사역이 지장을 받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주님께서는 소경을 고쳐 주신 후에 마을로 가지 말고 바로 집으로 가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이 사실이 공개되길 원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2. 소경을 고쳐 주심(23(하)-25)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23(하)), 우러러보며 가로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24),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저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만물을 밝히 보는지라(25)."

주님은 마을 밖으로 소경을 데려가신 후에 소경의 눈에 침을 뱉었으며 계속해서 안수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 소경에게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으셨습니다(23). 소경은 이 말을 듣고 눈을 들어 앞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자 그의 눈은 시력을 회복하여 사람들이 이리저리 걸어 다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시력은 아직 완전하게 회복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눈에는 걸어 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이 마치 나무가 걸어 다니는 것처럼 흐릿하게 보였습니다(24). 이 사람이 나무를 알고 있는 것을 보면 그는 날 때부터 소경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날 때부터 소경이었다면 나무에 대해서 알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온전한 시력을 가지고 있다가 어떤 사고로 인해 시력을 잃게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주님은 그의 눈이 아직 완전하게 시력을 회복되지 못했다는 것을 확인하신 후에 두 번째로 손을 그 사람의 눈에 대고 안수하셨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안수를 받은 소경의 눈은 완전하게 시력을 회복하였으며 사물을 분명히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25).


3. 마을로 들어가지 말라(26)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가라사대 마을에도 들어가지 말라 하시니라(26)."

주님은 그 사람을 고치신 후에 그에게 마을(벳세다)로 들어가지 말고 그의 집으로 바로 가라고 명하셨습니다(26). 그는 벳세다 사람이 아니었으며 다른 마을에서 병을 고침을 받기 위해 온 사람이었습니다. 주님께서 그에게 마을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신 것은 이 사실이 마을에 알려져서 전도 사역이 방해받기를 원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 이 사건이 주는 의미 *

1. 메시야 시대의 도래를 알림
이 사건은 다음과 같은 이사야의 예언의 성취였습니다. "그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사 35:5-6)." 이사야는 오래 전에 이미 메시아시대가 되면 소경이 눈을 뜨고, 벙어리가 말하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마가는 소경을 고친 사건을 통해서 이사야가 예언했던 메시아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마가는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께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아였으며, 주님을 통해서 메시아 시대가 이 땅에 도래했다는 것을 증거해 주었던 것입니다.

2. 육체적인 질병을 치유해 주심.
주님은 우리의 육체적인 병을 고쳐주시는 분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소경은 주님께 나아왔다가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오늘날도 자기의 질병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오면 주님은 그에게 믿음을 주시고 그를 고쳐 주십니다. 영적인 질병에 걸린 사람은 우리 곁에 계시는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또한 영적인 병에 걸린 사람은 주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영적인 질병을 가진 사람들은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영적인 믿음의 안약을 주실 것이며, 단련된 금(믿음)을 주셔서 우리를 부요 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3. 영적인 눈을 뜨게 해 주심.
이 사건은 영적인 소경과 같은 제자들의 눈을 뜨게 하실 것을 예고해 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제자들은 5병 2어와 같은 기적을 보고도 주님이 메시아인 줄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바로 소경을 고쳐주심으로 제자들의 영적인 눈을 열어주실 것임을 암시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 후에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제자들의 눈을 열어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히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적용을 위한질문
1. 왜 소경을 고친 사건이 주님의 메시아성을 증거하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가?

2. 우리는 영적인 소경이 아닌지 돌이켜 보자. 그리고 우리가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자.

3. 지금 병에 걸려 있는 사람들은 병이 낫기를 위해서 믿음으로 기도하자.

예수님의 기적의 의미에 대해서



마가복음 1-8장에 나타난 이적들을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가는 종종 예수님을 가르치시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마가복음에서 10번 예수님을 "선생"으로 언급하였으며,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청중들의 반응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가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내용에 대해서는 마태나 누가에 비해 매우 적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마가는 (막 1:14-8:30) 예수님의 이적에 대해서는 매우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막 1-10장)에서 예수님의 이적들을 기록하고 있는 구절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가 이 구절들을 보면 마가가 얼마나 예수님의 이적을 강조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 1장 21, 30, 32-34, 39, 40-45절
* 2장 1-12절
* 3장 1-6, 10-11절
* 4장 35-41절
* 5장 1-13절
* 6장 5, 30-44, 45-52, 53-56절
* 7장 24-30, 31-37절
* 8장 1-10, 22-26절
* 9장 14-29절
* 10장 46-52절

그러면 왜 마가는 이적들을 그렇게 강조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이 이적들이 예수님이 메시야(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 복음서에 기록된 4가지 이적들 *

복음서에 기록된 이적들은 다음과 같이 4가지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1. 이사야적인 이적들
"이사야적인 이적"이란 이름은 (마 11:2-6)과 (눅 7:18-23)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이 곳을 보면 세례 요한이 감옥에서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이렇게 묻는 장면이 나옵니다. "우리가 기다리던 사람(메시야)이 당신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 합니까?". 그때에 주님은 "내가 메시아다" 라고 대답하지 않고 대신 너희가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가서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전하라(마 11:5)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바로 오래 전에 선지자 이사야가 했던 예언의 성취였습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그때에(메시야 시대에) 소경의 눈이 밝아질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사 35:6, 42:7, 61:1)

유대인들은 메시야 시대가 도래하게 되면 이사야가 언급했던 이러한 "표적들"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행하신 일들은 메시야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결정적인 증거였습니다. 주님께서 눈 먼 자와 귀머거리, 그리고 벙어리와 다리 저는 병자를 고쳐 주신 메시야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표시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표적들은 "예수님이 누구신가?" 에 대한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해 주는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 마가는 그의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들을 그토록 많은 지면을 할애하면서 자세히 언급했던 것입니다.


2. 자연에 대한 이적들
마가는 예수님께서 폭풍을 잠잠케 하셨고(4:35-41), 물위를 걸으셨으며(6:45-52), 무리들을 먹이신 이적들(6:30-44, 8:1-10)에 대해서 여러 번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적들은 예수님이 창조주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큰 바다와 심연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들은 결코 해양 민족이 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른 민족들을 통해서 화물을 실어왔습니다. (계 21:1)에 보면 요한은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에 대해 말한 후에 "바다가 다시 있지 않았다"고 덧붙였습니다. 이렇게 유대인들은 바다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바다의 폭풍을 다스리신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시 65:7)은 하나님을 "바다의 흉용과 물결의 요동을 잠재우시는 분"이라고 찬양하였으며, (시 89:9)은 "주께서 바다의 흉용함을 다스리시며 그 파도가 일어날 때에 평정케 하십니다" 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의 폭풍을 잠재우시고, 물위를 걸으셨을 때 마가는 주님께서 창조주 하나님의 신성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것을 증거하였던 것입니다(시 107:23-32). 마가복음은 무리를 먹이신 두 개의 이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막 6:30-44)에 보면 5천명을 먹이신 일이 나오며, (막 8:1-10)에는 4천명을 먹이신 기록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로서 그의 백성을 먹이셨듯이(출 16장, 시 78:23-29) 주님도 광야에서 그의 "새로운 백성"을 먹이셨습니다. 주님은 구약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행하신 일을 다시 행하셨습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주님께서 바로 구약의 하나님과 동일한 신성을 가지고 잇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3. 귀신들에 대한 이적 기사
마가에는 귀신들을 쫓아낸 이적들이 많이 나타납니다. 이러한 이적들은 구약의 예언에는 많이 언급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신구약 중간 기에 이르러 유대인들은 귀신의 세력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당시에는 사탄과 귀신들에 대해 많은 언급을 하고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질병은 인간의 죄와 사탄으로 인해 주어지는 것으로 생각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마가는 주님께서 사탄보다 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오셔서 사탄의 세력을 제압하고 귀신의 세력들을 내어쫓았다는 것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마가는 이러한 기록을 통해서 주님께서 사탄의 나라를 멸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오게 하셨다는 것을 증거 해 주고 있습니다(3:27).


4. 죽음에 대한 이적들
또한 마가는 죽은 사람을 다시 살려낸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5:22-43). 요한은 주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려 주신 일을 자세하게 기록해주고 있습니다(요 11장). 그리고 누가는 주님께서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을 살려주신 일을 기록했습니다(7:11-17). 우리는 구약에서 선지자 엘리야와 그의 후계자인 엘리사가 수넴 지방에서 죽었던 여인의 아들을 살린 일(왕상 17:17-24, 왕하 4:21-37)을 읽어볼 수 있습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이러한 생명을 다시 살리는 역사가 주님을 통해서 일어났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를 다시 살려내신 주님의 이적들은 선지자의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메시야 시대가 시작되면 하나님의 백성이 경험하게 될 기쁨을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그가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며,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겨주실 것이라"(사 25:8)"

죽은 자를 살리신 예수님의 이적은 주님께서 생명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분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들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마지막 날에 모든 사람들을 불러 다시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주님의 스스로 부활 하심으로 이것을 증거 해 주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장차 모든 사람을 다시 살려내실 장본인이라는 것을 만천하에 드러낸 사건이었습니다.

* 이 사건이 주는 교훈 *

1. 주님이 행하신 이적은 메시아의 시대에 대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의 성취였다.
2. 주님이 행하신 이적은 주께서 만물을 주관하는 창조자임을 증거한 사건이었다.
3. 주님이 행하신 이적은 주께서 사단의 나라를 멸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오게 하셨다는 것을 보여주신 사건이었다.
4. 주님이 행하신 이적은 주께서 생명을 주관하시며 마지막에 모든 사람을 다시 살려 주실 분임을 입증한 사건이었다

마가는 그의 복음서의 중심에 예수께서 "그리스도(메시야)"라고 하는 신앙고백을 두고 있습니다. 이 고백은 (1-8장)까지의 내용을 결론 짓는 매우 중요한 고백입니다. 그 동안 주님은 여러 가지 이적들을 행하셨지만 자신의 정체를 분명하게 밝히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정체는 수수께끼로 남아있었습니다(1:27, 2:7, 6:2). 주님은 죄인들과 교제하였으며 전통적인 경건 의식을 무시했습니다. 이로 인해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정통성을 신뢰하지 못했습니다(2;15-20, 3:22-30, 7:1-5). 예수님의 제자들도 주님을 따라다니면서 여러 가지 이적들을 목격했습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여전히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했습니다(4:41, 6:51). 바로 이때에 주님은 베드로의 고백을 통해서 자신이 "메시아(그리스도)"라는 것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27-28)
"예수와 제자들이 가이사랴 빌립보 여러 마을로 나가실새 노중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가로되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27) 여짜와 가로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28)."

주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벳새다에서 북쪽으로 25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가이사랴 빌립보의 여러 마을로 가셨습니다. 이곳에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높은 헬몬산이 있었습니다. 이 산에서 흘러내린 물은 이 지역 전체를 적시며 요단강으로 흘러 들어갔습니다. 이 물로 인해 이 지역은 매우 땅이 비옥했고 경치 또한 장관이었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는 로마황제 아우구스투스가 헤롯에게 준 도시였습니다.헤롯은 이에 감사하기 위해 이곳에 황제의 이름으로 된 신전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헤롯은 이 곳을 주전 3년에 자기 아들인 빌립에게 물려주었습니다. 헤롯의 아들 빌립은 이곳을 개발하고, 이 곳에 자기의 저택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도시를 로마 황제의 이름인 시이저, 즉 가이사라는 이름을 따서 "가이사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이미 지중해 해안에는 "가이사랴"라는 이름을 가진 항구도시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헤롯 빌립은 가이사랴 항구 도시와 이 도시를 구별하기 위해서 이 도시를 자기 이름을 따서 "가이사랴 빌립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므로 이 도시의 이름은 "빌립의 영토에 있는 가이사랴"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 도시는 황제 숭배가 가장 절정에 이르렀던 도시였습니다. 주님은 바로 이러한 도시에서 제자들에게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 질문은 이 세상의 주인은 "로마 황제"가 아니라, 바로 주님이라는 것을 알게하려는 질문이었습니다.

주님은 길가는 도중에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습니다(27). 제자들의 대답을 보면 당시 주님에 대한 백성들의 견해는 세가지였습니다.

1) 일부 사람들(헤롯 같은)은 예수님을 부활한 세례 요한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헤롯은 세례요한을 죽인 후에 계속해서 심한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주님의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는 주님에 대한 소식을 듣고 나서 주님은 세례요한이 자기를 심판하기 위해 다시 살아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2) 또 다른 사람들은 주님이 세상에 온 엘리야라고 생각했습니다. 말라기는 메시아 시대에 오면 엘리야가 먼저 와서 그 길을 예비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주님이 바로 말라기가 예언했던 엘리야라고 생각했습니다.

3) 또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선지자 중의 하나로 생각했습니다(28). 이스라엘에는 각 시대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여러 가지 표적을 행하였고,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에 일부는 주님의 가르침과 행하는 이적을 보고 들으면서 하나님이 자기들을 위해 선지자를 보내주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러한 제자들의 세 가지 대답에 대해 동의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이 이 대답에 동의하지 않은 것은 결국 그 대답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29)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29)..."

그때에 주님은 다시 제자들에게 질문하셨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주님은 이제 자신과 생사고락을 함께 해 온 제자들에게 자기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고 물으셨습니다. 바로 그때에 베드로가 앞에 나서서 그 질문에 대답했습니다. 베드로는 12제자의 대표자로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님은 그리스도(메시아)이십니다"(29). 다른 복음서 기자들은 그리스도라는 말 외에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헬라어로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히브리어로 "메시아"라는 말과 같은 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고백은 "주님이 바로 성경에 약속된 메시아"라는 것을 시인한 고백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왕이나 제사장, 또는 선지자와 같은 특별한 직분을 수여할 때에는 그 머리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베드로의 고백은 주님께서 "온 세상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분"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오래 전부터 사단을 멸하고 온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를 보내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삼하 7:14-16, 사 55:3-50, 렘 23:5 등). 베드로는 주님이 바로 성경에 약속된 그 메시아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고백은 참으로 놀라운 고백이었습니다.


* 자신을 알리시기를 유보하심(30)
"이에 자기의 말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계하시고(30)...."

베드로의 고백을 들은 주님은 매우 기뻐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깨달음을 하나님(성령)만이 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칭찬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 앞에서 분명하게 자신이 메시아라고 시인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왜 주님은 자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못하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아직 사람들이 메시아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메시아에 대하여 그릇된 선입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를 다윗과 같이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해방시킬 정치적인 지도자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폭력을 써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자신이 부활하여 참된 메시아가 어떤 것인지 분명하게 나타낼 때까지 자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숨기셨던 것입니다(30).


* 마가복음의 중요한 두 가지 주제
마가복음에는 마가가 묻고 대답하려고 하는 중요한 두 가지 주제가 있습니다
1) "예수님은 누구신가?"(신앙 고백)
2)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어떤 길을 가야 하는가?(제자의도)"

마가는 전반부(1-8장)에서 첫 번째 주제를 다루었으며, 후반부(9-16장)에서 두 번째 주제를 다루었습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주제의 중심에 베드로의 신앙 고백 사건을 기록하였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베드로의 신앙 고백 사건은 예수님이 누구신가? 에 대한 질문을 결론 짓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가야 할 길에 대한 주제로 출발하는 전환점이 되고 있습니다.

적용을 위한질문
1. 세상 사람들은 주님이 누구라고 생각하고 있는가?(성인, 훌륭한 교사, 정치가, 해방 자 등). 이러한 대답이 왜 옳지 않은 지에 대해서 말해보자.

2. 우리들은 예수님을 누구라고 고백하고 있는지 솔직하게 말해보자.

3. 우리는 누가 진정한 주님(Lord)이라고 생각하는지 솔직하게 말해보자. 우리는 세상을 따르고 있는가? 아니면 주님의 뜻을 따라 살고 있는가?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 번째 예언(막 8:31-33)



주님은 베드로의 말이 옳다고 동의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일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경계하셨습니다(30).
그러면 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메시아임을 알리지 못하게 하셨을까요?
신학자들은 이것을 "메시아 비밀"(the messianic secret)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아였다고 하는 소식이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전파된 것은 주님이 승천하시고 성령이 이 땅에 오셨을 때였습니다(행 2장).
주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아라는 사실을 이때까지 전파하지 않고 유보해 두셨습니다.
왜냐하면 이일은 완전히 성취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설명하거나 이해시키기가 너무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이 일을 계시하시는 일을 성령께서 오실 때까지 잠시 유보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왜 주님은 제자들에게는 이 사실을 가르쳐주셨을까요?
그것은 이 모든 일이 일어난 후에 이 일이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어떤 일을 하시기 전에 미리 선지자들을 통해서 그 일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 일이 일어난 후에 그 일이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죽음과 부활을 미리 예고해 주신 것도 이 모든 일이 일어난 후에 이일이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미리 작정된 것이었음을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 죽음과 부활에 대한 첫 번째 예언(31)

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

주님은 자신을 "인자"(son of man)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러면 왜 주님은 자기를 "인자"라고 부르셨을까요?

1) 당시의 관습에 따라서.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G. Vermes) 주님 당시 "인자"라는 말은 "나"라는 말을 낮추어 부르는 말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내가"를 낮추어서 부를 때에 "제가"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학자들은 주님 당시에 "인자"라고 말은 능욕이나 위험, 또는 죽음과 관계되어 있을 때에 사용되었다고 말합니다.(M. Black, An Aramaic Approach to the Gospel and Acts, Oxford 1967). 우리가 이 견해를 받아들인다면 주님은 자기를 겸손하게 표현하였고,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말하는 데에 적합한 표현으로 자신을 "인자"라고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메시아에 대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 사용했다.
주님이 자신을 "인자"라고 부른 것은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릇된 메시아 관에 대한 오해를 피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당시에 유대인들이 생각한 메시아는 성경에서 말하는 메시아와 많이 달랐습니다. 그들은 메시아를 무력으로 로마를 정복하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세계적인 정부를 세울 정치적 지도자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이 이러한 메시아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이러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메시아"라는 말대신 자신을 "인자"라고 부르셨습니다.

3) 자신이 성경에 예언된 메시아임을 증거하기 위해 사용함.
주님이 자신을 인자로 부른 것은 자신이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였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구약에는 "인자"라는 말이 메시아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 경우가 있습니다(단 7:13-14).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 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니라(단 7:13-14)." 다니엘은 환상 중에 "인자 같은 이"가 구름을 타고 하나님께 와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인자라고 부르심으로 자신이 다니엘에 예언된 "인자"라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이 하나님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을 것이며, 영원히 계속될 나라를 세우실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의도적으로 자신을 "인자'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러한 영광은 능욕과 죽음을 지나서 도달하게 될 길이라는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 죽음과 부활 예고의 의미(32)

주님은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버림을 받은 후에 죽을 것이며, 죽은 지 3일만에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을 미리 예고하셨습니다(8:1, 9:31, 10:33).주님이 이 사실을 미리 예고해 주신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주님을 정치적인 메시아로 잘못 이해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바른 메시아의 길(수난, 부활)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8:31).
2) 누가 더 큰 자인지 다투고 있는 제자들에게 메시아가 섬기러 온 종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9:32-).
3)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의 좌우 편에 앉게 해 달라고 했을 때 메시아를 따르는 일이 매우 힘든 일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10:35-37,41).


* 베드로의 만류와 주님의 책망(32-33)

"드러내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잡고 간하매(32),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가라사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있다 하시고(33)..."

주님은 지금까지 진리를 전하실 때에 비유를 통해서 완곡하게 전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자들에게 아무 것도 숨기지 않고 공개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제자들)는 '십자가에 달려 죽는 무력한 메시아"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언젠가는 로마를 치고 이 세상에 세계적인 신정국가를 세울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 로마인에 의해 처형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결코 이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32). 그러자 주님은 걸어가시다가 몸을 뒤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면서 엄히 책망 하셨습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있도다"(33).

주님은 베드로가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부인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말은 사단이 베드로를 통해서 주님을 유혹하기 위해 던진 말이라는 것을 주님은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베드로에게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고 외치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통해서 유혹하는 사단의 유혹을 단호하게 대처하셨습니다. 사단은 베드로를 통해서 예수님을 생각해 주는 척 하면서 하나님이 정하신 구원 계획을 부정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러한 사단의 유혹을 단호하게 물리치셨습니다.


* 제자의 도(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좆을 것이니라.

"이 말씀은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말씀이다"
주님은 무리와 제자들을 함께 부르시고 그들에게 제자의 길에 대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뿐 아니라 주님을 따르던 무리들에게도 주신 말씀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제자의 도가 교회의 지도자에게만 해당되고 자기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생각은 그릇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제자의 도에 대해서 제자들과 주님을 따르는 무리들에게 함께 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제자는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
주님은 자기를 따르기 원하는 사람은 먼저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따르려는 사람들은 먼저 자기의 뜻을 포기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주님을 따르려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이기적인 마음(자기 명예나 영광)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의 명예와 영광을 포기하지 않고도 주님을 따를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세상의 소금과 빛이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자기를 부정하지 않고 주님을 따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위해 철저하게 자기를 부인하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 하늘 보좌를 버리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위해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을 따르기를 원한다면 먼저 이기적인 마음을 포기해야 합니다.

"주님의 제자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수 있어야 한다"
주님은 자기를 따르기 원하는 사람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34).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자기가 못 박힐 십자가를 지고 사형장을 향해 걸어가셨습니다. 만일 주님이 이 십자가를 지시지 않았다면 인류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은 무산되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생명을 내놓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마가 복음이 쓰여질 당시의 로마 교회 성도들은 순교의 위협 앞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실제로 십자가를 지고 사형 당할 각오가 되지 않은 사람은 주님의 뒤를 따를 수가 없었습니다.


* 잃으면 찾으리라(3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주님은 제자들과 무리들에게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려고 하면 잃을 것이지만, 주님과 복음을 위해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받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따르려는 사람은 생명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당시의 로마 교회 성도들은 죽음의 위협 속에서 살아갔습니다.
그들은 언제든지 발각되어 체포되면 고문을 받았습니다.
재판관들은 그들에게 예수를 부인하고 황제 만세를 외치기만 하면 살려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자기 목숨을 부지하려는 사람은 주님을 따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과 복음을 위해 생명을 포기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자기 목숨을 위해서 주님을 포기하고 로마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영원한 심판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수많은 성도들이 주님을 위해 자기 목숨을 포기했습니다.
그들은 순교의 제물이 되어 세상을 떠났으나 주님은 그들에게 영생으로 갚아 주셨습니다.
주님은 마침내 그들의 피를 통해서 로마를 점령하셨습니다.
로마는 공식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섬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을 위해 생명을 포기한 사람들이 승리했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 주님을 부인하는 자가 당할 운명(36-38)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36),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37)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38)."

주님은 온 세상을 얻고 자기 생명을 잃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 하셨습니다(37).
자기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주님을 부인한 성도들은 그 대가로 영원한 생명을 잃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세상에서 잠시 생명을 연장하고 영원한 생명을 잃게 된 것입니다.
주님은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패역한 세상에서 주님과 주님의 말씀(복음)을 부끄러워하면, 주님도 하나님의 영광으로 천사들과 함께 오실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 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38).

당시 로마 당국은 성도들에게 로마 황제만이 주(Lord)라고 고백하면 살려줄 것이라고 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자기 목숨을 구하기 위해 주님을 부인하고 황제를 주님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주님은 재림하실 때에 천사들 앞에서 그 사람을 수치스럽게 여길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자기 생명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 하나님의 나라가 능력으로 임할 것을 볼 사람들(9:1)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주님은 그 자리에 서있는 사람들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가 있다고 하셨습니다(9:1).
어떤 학자들은 이 말씀이 바로 뒤에 나오는 변화 산에서 이루어졌다고 말합니다.
세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산에 올라가서 부활 하실 주님의 영광을 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학자들은 여기에서 세 제자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보았다고 주장합니다.
다른 학자들은 이 예언이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통해 성취되었다고 말합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했을 때에 제자들은 방언을 하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에게 임한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이 예언이 사도 요한을 통해서 이루어졌다고 말합니다.
사도 요한은 밧모 섬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모든 광경을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왜 제자의 도를 말씀하시다가 이 말씀을 하셨습니까?
그것은 장차 주님의 재림이 분명한 일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재림으로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사람은 주님과 복음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믿음이 없는 사람은 자기 목숨을 포기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장차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서 주님을 부인한 사람이 겪게될 운명을 미리 예고해 주심으로 성도들에게 용기를 얻을 수 있게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이기적인 마음(명예, 욕심)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리고 생명을 걸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 두 가지를 하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끝까지 주님을 따를 수 없을 것입니다.



로마서 8:1-39




정월, 여월, 가월, 초월, 중하, 계하, 교월, 현월, 개월, 설한, 극월


음력 1월 / 정월(正月)

음력 1월은 일 년의 시작을 으뜸으로 여긴다고 하여 정월이라고 불렀다.
원월(元月), 맹춘(孟春), 태월(泰月)이라고도 한다.

1월(해 솟음달, January) 새해를 맞이하는 달.

로마의 신 야누스(Janus)의 이름에서 유래.
야누스는 모든 문과 성문, 그리고 다른 출입구의 신으로서 숭배되었다.        

음력 2월 / 여월(如月)

음력 2월은 겨울잠에 들었던 만물이 깨어나는 시기라고 하여 여월이라고 불렀다. 대장월(大狀月)이라는 별칭도 있다.

2월(시샘달, February)                                

봄을 시샘하는 겨울의 끝 달.                                                  

로마시대에 2월은 “정화의 달”                                                  

정화를 뜻하는 라틴어 “FEBRUARIUS”에서 유래.

음력 3월 / 가월(嘉月)

음력 3월은 날이 따뜻해지고 꽃들이 피어나는 시기라고 하여 가월이라고 불렀다.

복숭아꽃이 피는 시기라고 하여 도월(桃月)이라고도 불렀으며, 화창한 봄을 뜻하는 소화(韶華), 십이지간 순에서 유래한 진월(辰月)이라는 이름도 있다.

3월(물 오름달, March)
산과 들에 물이 오르는 달.
로마 전쟁의 신인 마르스의 이름에서 유래.                                     

음력 4월 / 초월(初月)

음력 4월은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달이라 하여 초월(初月)이라 불렀다.
또한 양기가 가득하다 하여 정양(正陽)이라고도 불렀다.

4월(잎새달, April)                                                    
물오른 나무들이 저마다 잎새를 돋우는 달

April의 근원인 라틴어 Aprils의 어원에 대해서는 확실한 설이 없고 여러 가지로 주장되고 있다.
하나는 4월이 초목의 눈이 싹트는 달이므로 라틴어 Aperire(열리다)에서 나왔다고 한다.

                                                

음력 5월 / 중하(仲夏)

음력 5월은 매실이 익어가는 달이라 하여 매월(梅月), 매천(梅天), 매하(梅夏)라고도 불렀다.
석류꽃이 핀다는 뜻의 유화월(榴花月), 단오를 뜻하는 포월(蒲月) 등의 이름도 있다.

5월(푸른달, May)                             

마음이 푸른 모든 이의 달.
May는 고대 로마 사람들이 달 이름으로 부르던 Maius에서 따 온 것이다.
Maius란 말은 성장과 번식의 여신인 Maia에게 드린 달이라는 뜻이다.
이 달에는 May Day(5월 축제) 행사가 오래 전부터 영국에서 행하여졌었다.


인디언 아라파호족은 5월을 “오래전에 죽은 자를 생각하는 달”이라고 불렀다.

인디언은 부족마다 각기 다른 문장으로 된 달 이름을 썼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시 같은 문장을 구사한 부족이 아라파호족이 아닌가 싶다.
정희성 시인은 그들의 11월인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을 제목으로 붙인 시를 쓴 적도 있다.

우리에게도 5월을 달리 부르는 이름이 있다.
여름에 들어선다는 뜻을 지닌 입하가 있고, 햇볕이 좋아 모든 만물이 점차 성장하여 가득 찬다는 소만이 있는 달이다.
겨우내 사라졌던 것들이 하나하나 제 모습을 찾아가는 충만하기 짝이 없는 달 이름으로 손색이 없다.
그 밖에도 세간에서는 5월을 계절의 여왕, 가정의 달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이 다투어 5월의 주인 행세를 한다.
국가지정 기념일이 차고 넘치는 5월의 분위기는 아라파호족 5월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돌아보면 내 인생의 5월은 이런 날에 중독되어 푸르기만 했던 것 같다.
어린이날 노래를 부르며 신명나는 걸음으로 행진을 하던 어린 시절에는 마냥 걸어가면 온 세상 어린이를 다 만날 것만 같은 꿈에 부풀어 있었던 것 같다. 세상 돌아가는 영문도 모른 채 자장면과 카네이션으로 이어지던 즐겁기만 한 5월이었다.

그러나 5월은 언제나 푸르게만 있어주지 않았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5월의 갈피갈피에는 다른 색의 기억들이 끼어들었다.
노동절에서 근로자의 날로 바뀐 메이데이,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일은 5월을 피의 빛으로 색을 더했다.
게다가 유독 가까웠던 사람들이 세상을 달리한 무채색의 날도 늘어났다.

국가 지정 기념일도 많지만 내가 동그라미를 쳐놓은 날도 만만찮다.
자연스레 “오래전에 죽은 자를 생각하는 달”이 된 것이다.

음력 6월 / 계하(季夏)

음력 6월은 여름의 끝이라 하여 계하라고 불렀다.
또, 여름의 무더위를 뜻하는 홍염(洪炎), 서월(暑月), 복염(伏炎) 등으로도 불렀다.

6월(누리달, June)                                     
온누리에 생명의 소리가 가득차 넘치는 달.                                    
6월의 영어 이름인 June은 고대 로마 사람들이 달 이름으로 부르던 Junius에서 온 것이다.

Junius란 말은 고대 로마의 명문 집안인 “유니우스”가에 바쳐져서 이름 붙여진 것이다.
유니우스 가의 선조인 “유니우스 브루투스(Junius Brutus)”로서, 그는 기원전 510년 왕정을 폐지하고 자신이 로마의 초대 집정관이 되었다.

음력 7월 / 교월(巧月)

음력 7월은 견우와 직녀가 오작교에서 만난다는 전설이 있는 칠월칠석(7월 7일)이 있는 달이라 교월이라고 불렀다.

한편, 칠월칠석에 처녀들은 직녀성에게 바느질 솜씨가 잘 늘어나도록 빌었고, 남자 아이들은 견우와 직녀를 주제로 글짓기를 하였다고 한다.
또 목욕재계를 하고 칠성제를 올리면 남자 아이를 낳는다고 하였다.

7월(견우직녀달, July)                                                  
견우직녀가 만나는 달.          

로마의 장군이자 클레오파트라의 연인이었던 줄리어스 시저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음력 8월 / 계월(桂月)

음력 8월은 계수나무에 꽃이 핀다고 하여 계월, 계추(桂秋)라고도 불렀다.
또 단풍이 든다 하여 엽월(葉月), 저녁달이 밝다는 뜻의 월석(月夕), 그리고 달이 하얗게 뜬다고 하여 소월(素月)이라고도 불렀다.  

8월(타오름달, August)                                
하늘에선 해가 땅위에서는 가슴이 타는 정열의 달.
줄리어스 시저의 후계자이자 조카인Gaius julius caesar octavianus(옥타비아누스)의 이름을 딴 것이다.
로마의 평의회는 이 시저에게 외경을 뜻하는 “아우구스투스”의 칭호를 주고 그를 본 따 달 이름을 지음으로써 그를 더 명예롭게 했습니다.                                              

음력 9월 / 현월(玄月)

음력 9월은 여름동안 푸르던 만물이 검게 변한다고 하여 검을 현자를 써서 현월이라고 불렀다.

또 서리가 내린다고 하여 상신(霜辰)), 상랭(霜冷)이라고도 불렀으며, 산의 단풍이 더 깊이 물든다는 의미로 풍신(楓辰)이라고도 불렀다.

9월(열매달, September)
가지마다 열매 맺는달.
라틴어인 Stember에서 유래했는데, 그 의미는 “seven(일곱)”
9월은 기원전 700년 정도까지 7번째 달이었고, 로마의 2번째 왕인 Numa Pompilious가 태음력을 304일에서 355일로 바꾸었다.                          

음력 10월 / 개월(開月)

음력 10월은 본격적으로 겨울로 접어들었다는 뜻으로 개동(開冬)이라고 불렀다.
그외 비슷한 뜻으로 맹동(孟冬), 조동(肇冬)이라고도 불렀다.

10월(하늘연달, October)
밝은 달 위에 아침의 나라가 열린 달.                                          October도 September와 마찬가지로 2개월이 늦춰진 이름이다.
라틴어에서 octo는 '8'의 뜻이다.
이 달에는 어린이들에게 가장 즐거운 축제인 핼로인(Halloween)이 있다.

                        

음력 11월 / 설한(雪寒)

음력 11월은 눈이 내리기 시작하고 몹시 추운 달이라 하여 눈과 추위를 뜻하는 설한이라고 불렀다.
또, 1년 중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동지(冬至)가 있는 달이라 동짓달이라고도 불렀다.

11월(미틈달, November)
가을에서 겨울로 치닫는 달.
November의 이름도 September처럼 본래의 뜻보다 2개월이 늦은 것이다.
라틴어에서 Novem은 '9'를 나타낸다.
해마다 이 달의 넷째 목요일은 추수 감사절(Thanksgiving Day)이라 하여 미국과 캐나다에서 지내오는 가을 명절이다.

                                                

음력 12월 / 극월(極月)

음력 12월은 한 해의 마지막 달이라는 뜻으로 극월이라고 불렀다.
또, 전통적으로 '설이 드는 달'이라는 뜻인 섣달이라고도 불렀는데, 현재는 음력 1월 1일을 설날로 기념해 쇠고 있지만 아주 오랜 옛날에는 12월 1일을 설날로 쇠었다고 한다.
그래서 음력 12월을 섣달로 불렀으며, 그것이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것이라 한다.

그 외에도 추운 겨울을 지나며 한해가 다했다는 뜻의 궁월(窮月), 궁동(窮冬), 궁기(窮紀)라고도 불렀다.


12월(매듭달, December)
마음을 가다듬는 한해의 끄트머리 달.                                          December은 어원상으로 10월을 나타내지만, September처럼 2개월이 늦어져 12월이 되었다.
라틴어에서 Decem은 '10'을 의미한다.
이 달 25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크리스마스(Christmas)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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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 로보 문

그 해는 1 월의 보름달로 시작되었으며, 아메리카 원주민의 이름은 “늑대의 달”이었습니다.

그 당시 배고픈 늑대가 한겨울에 식량 부족으로 울부 짖었 기 때문에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2월 - 스노우 문

그 날 주변의 식량 부족으로 인해 폭풍 달과 헝거 달이라고도합니다.

이 이름은 북미에서 발생하는 춥고 눈이 내리는 계절에서 유래했습니다.

3월 — 구사노의 달

이 이름은 아메리카 원주민에 의해 주어졌습니다.

겨울철의 전형적인 서리가 끝날 때 새로 녹은 토양에 벌레의 흔적이 나타 났기 때문입니다.

4월 - 루나 로사

고대부터 이끼 낀 플록스 식물의 큰 개화는 이번 달의 보름달을 루나 로사 (Luna rosa) 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한 것입니다.

이끼 낀 플록스는 여러 개의 분홍색 꽃을 돋보이게합니다.

5월 — 꽃의 달

이 계절에는 꽃이 풍부합니다.

일부 지역에서는 옥수수의 파종 달, 우유의 달이라고도 한다.

6월 — 스트로베리 문

6월의 딸기 수확으로 유명합니다.

유럽과 같은 다른 문화의 경우 장미의 달, 또는 뜨거운 달.

7월 — 사슴의 달

수컷 사슴은 매년 뿔을 흘리며 뿔이 피는 달인 7 월에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눈에 띄지 않았고 달을 그렇게 부르기로 결정했습니다.

또한 알려진 또 다른 이름은 천둥 달입니다.

그 당시 천둥은 풍부하기 때문입니다.

8월 — 스터전 문

철갑상어가 풍부하여 8월의 보름달 이름이 붙었습니다.

9월 — 하베스트 문

이 이름은 작물이 수확되는 계절 인 가을 춘분 이후의 시간을 나타냅니다.

10월 — 헌터의 달

고대부터 모든 것이 버려지기 때문에 시골에 숨을 수 없었던 사슴과 여우를 사냥하기에 이상적이고 선호되는 달이었기 때문에 명명되었습니다.

11월 - 비버 문

다음은 비버 달의 이름으로 인정되는 두 가지 이론입니다.

첫 번째는 이번 달 동안 비버가 겨울철에 굴을 쌓는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이론은 북미 인디언들이 이번 달에 비버를 가두었다는 것입니다.

12월 — 콜드 문

이번 달은 북미에서 일년중 가장 추운시기를 시작하기 때문에 콜드 문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긴 밤의 달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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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라틴어 

라틴어 기원의 뜻

1월

January

Januarius(야누아리우스)

야누스

2월

February

Februarius(페브루아리우스)

정결함, 정화

3월

March

Martius(마르티누스)

마르스(군신)

4월

April

Aprilis(아프릴리스)

개화, 아프로디테(미의 신)

5월

May

Maius(마이우스)

마이아(헤르메스의 어머니)

6월

June

Junius(유니우스)

유노(결혼의 여신)

7월

July

Julius(율리우스)

율리우스 시저

8월

August

Augustus(아우구스투스)

옥타비아누스의 존칭

9월

September

Septembris(셉템브리스)

7(일곱 번째)

10월

October

Octobris(옥토베리스)

8(여덟 번째)

11월

November

Novembris(노벰베리스)

9(아홉 번째)

12월

December

Decembris(디셈브리스)

10(열 번째)


















국경일(國慶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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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천절(開天節)

개천절(開天節, Gaecheonjeol 또는 National Foundation Day)
대한민국의 국경일. 날짜는 양력 10월 3일.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세운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하늘을 열었다는 ‘개천(開天)’이란 말은 환웅이 하늘에서
백두산의 신단수 아래로 내려온 것, 혹은 기원전 2333년에
단군이 고조선을 처음 건국한 것을 의미한다.
이 날에는 대한민국의 국기인 태극기를 게양한다.                                          

개천절의 역사 유래

1909년 1월 15일 나철(羅喆)에 의해 대종교(大倧敎)가 중광(中光)(다시 교문(敎門)을 염)되면서 음력 10월 3일을 개천절로 제정하였습니다.

음력 10월 3일은 3월 16일과 함께 신시 배달 이래로 우리 민족이 하늘의 상제님께 천제(天祭)를 올리던 민족 최대의 명절이었습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음력 10월 3일을 경축일로 제정하고 중국으로 망명한 대종교와 합동으로 경축 행사를 거행하였습니다.

광복이 되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1949년 10월 1일에 '국경일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여 양력 10월 3일을 개천절로 정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대통령마저 외면한 건국기념일

우리가 알고 있는 개천절(開天節)은 국조 단군이 우리 민족 최초 국가인 고조선의 건국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된 날입니다.
개천절의 뜻과 의미는 곧 ‘건국기념일’입니다. 개천(開天)의 문자적 의미는 ‘하늘을 열다, 하늘의 가르침을 열다’는 뜻인 만큼 여기에는 다분히 종교와 철학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가히 ‘나라세움’에 대한 가장 신성한 의미 부여의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라의 ‘건국기념일’이라면 그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국경일 중의 하나로 국가 차원에서 가장 성대하게 기념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우리나라에서는 개천절이 가장 초라하고 궁색(窮塞)한 국경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국가를 대표하는 최고 책임자인 대통령이 개천절 기념행사에 참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 이후 20년 동안 나라의 대통령들이 개천절 행사에 줄곧 참석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건국기념일’에 국가원수가 참석하지 않는 유일한 나라입니다.

단군의 개천이 아닌 환웅의 개천

일제가 심어놓은 식민사관을 계승한 강단 사학자들의 제도 교육 덕분에 이제 대다수 국민들은 단군조선은 그 존재 근거가 불명확한 나라이고, 그 이전의 배달시대는 신화 속의 이야기로만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관이 팽배한 상황에서 개천절 행사가 힘을 받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역시나 국민들도 개천절을 한글날과 이어지는 황금연휴로만 인식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단군의 개천이 아니라 환웅의 개천으로 알았습니다.
『환단고기』「삼성기 하」에서는 환국의 7대 지위리智爲利 환인이 환웅에게 “새 시대를 열어 가르침을 세우고 세상을 신교의 진리로 다스리고 깨우쳐서 이를 만세 자손의 큰 규범으로 삼아라[開天立敎# 在世理化 爲萬世子孫之洪範也]”는 말씀을 내리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에 초대 환웅께서는 환인으로부터 천부인天符印과 홍익인간을 전수받아 동방의 백두산에 오시어 나라를 열었습니다.
「삼성기 상」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입도신시立都神市 국칭배달國稱倍達, 도읍을 신시에 정하고 나라 이름을 배달이라 하였다”고 분명히 적시하고 있습니다.
동방 한민족의 최초의 국가는 고조선이 아니고 배달이었습니다.
그러니 개천절은 당연히 환웅의 배달 건국이어야 하고 그 주인공은 단군이 아니고 환웅인 것입니다.


홍익인간은 환국의 생활이념

개천의 주체가 왜곡된 것처럼 홍익인간(弘益人間 )이념의 번지수도 잘못되었습니다.
단군 왕검의 개국이념으로 알고 있는 홍익인간은 사실은 환웅이 환인에게서 전수받은 것입니다.
홍익인간은 환국의 생활이념이자 배달의 건국이념이었습니다.
잘못된 역사족보에 의해 할아버지의 역사를 아버지의 역사로, 할아버지의 정신을 아버지의 정신으로 기념하는 서글픈 촌극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나 10월 3일에 삼신상제님께 대천제를 올린 전통이 사라졌으니 오늘날의 개천절 행사는 알맹이가 빠지고 껍데기만 남았습니다. 현 정부에서 추진하고 있는 ‘비정상의 정상화’, 그 시작은 당연히 잃어버린 역사와 문화를 회복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개천절의 주체로 배달과 환웅천황이 자리를 잡게 되면 자연스레 배달의 뿌리이자 동서 문명의 뿌리 나라인 환국에 대한 관심이 환기될 것입니다.
또 배달을 계승한 단군조선 역시 역사의 사실로 제자리를 잡게 됩니다.
홀대받고 있는 국경일 개천절, 이날 대통령의 참석은 물론이고 새로운 의미부여와 행사자체의 수정, 보완이 시급한 과제입니다.



'개천절(開天節)'이란 단어가 말하듯, 서기전 2333년, 즉 단군기원 원년 음력 10월 3일에 국조 단군이 최초의 민족국가인 단군조선을 건국했음을 기리는 뜻으로 제정됐습니다.

​2022년은 단기 4355년

개천절은 민족국가의 건국을 경축하는 국가적 경축일인 동시에, 문화민족으로서의 새로운 탄생을 경축하며 하늘에 감사하는 우리 민족 고유의 전통적 명절이다.​

환웅은 단군의 아버지로, 쑥과 마늘을 먹고 100일을 버텨 사람이 된 곰과 결혼을 하여 단군을 낳았다.
개천절은 이렇듯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단군 신화와 관련이 있는 날.

개천절을 기념해 우리 조상들은 무엇을 했을까?

특히 우리 민족은 10월을 상달[上月]이라 불렀습니다.
한 해 농사를 추수하고 햇곡식으로 제상을 차려 감사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제천행사를 행하게 되는 10월을 가장 귀하게 여겼지요.
3일의 3의 숫자를 길수(吉數)로 여겨 왔다는 사실은 개천절의 본래의 뜻을 보다 분명히 한다고 하겠지요.

이러한 명절을 개천절이라 이름 짓고 시작한 것은 대종교에서 비롯했습니다. 일제강점기 때 개천절 행사는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습니다. 광복 후 대한민국에서는 이를 계승하여 개천절을 국경일로 정식 제정했죠.

개천절은 원래 음력 10월 3일이므로 대한민국 수립 후까지도 음력으로 지켜왔습니다. 그러나 1949년 10월 1일에 공포된 「국경일에 관한 법률」에 따라, 음력 10월 3일을 양력 10월 3일로 바꾸어 거행하게 됐죠.

사단법인 국학원 회원들이 개천절 기념 타종식을 마친 후 거리 퍼레이드를 하는 장면(출처=뉴스1)

개천절에 즐길 수 있는 행사

이 날은 정부를 비롯해 일반 관공서와 공공단체에서 거행되는 경하식과 달리, 실제로 여러 단군숭모단체들이 주체가 되어 마니산의 제천단(참성단), 태백산의 단군전, 그리고 사직단의 백악전 등에서 경건한 제천의식을 올리고 있습니다.

이렇듯 개천절에만 즐길 수 있는 색다른 행사들을 알아볼까요?

사직동에서 눈 앞에 펼쳐지는

개천절 대제전 2019

출처=한국관광공사

사단법인 현정회에서 주관하고 문화체육관광부, 서울특별시, 종로구가 후원하는 개천절 대제전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왕산로 22에서 개최됩니다. 개천절 대제(제향)와 이와 관련한 학술 강연, 공연 등을 볼 수 있어요. 제복체험, 예절체험, 다례체험 등 민족문화 체험도 할 수 있습니다.


경상남도와 진주시가 주관하고 10월 3일부터 10월13일까지 열리는 제69회 개천예술제경상남도 진주시 강남로 215에서 개최됩니다. 이름에서 볼 수 있듯, 관련 행사들을 더욱 풍성하게 볼 수 있는데요. 개천절 당일 오후부터는 서제 행사 중 성화 채화를 시작으로 진다례 말차시연, 호국타종, 제향, 성화 봉송 및 안치, 진군명령 퍼포먼스, 불꽃놀이 등을 시간대별로 관람하실 수 있습니다.

10월의 하늘은 그 어떤 계절의 하늘보다 눈부시고 깨끗한데요.
이렇게 10월의 초입을 자리하는 개천절.
이번 개천절에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우리가 밟고 있는 이 나라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되새겨보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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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날

한글날(Hangeul Proclamation Day, Korean Alphabet Day)
또는 조선글날(朝鮮글날)은 한글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 세종 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반포한 사실을 기념하기 위한 목적으로 한글이 반포된 날을 기념일로 지정한 국경일을 말한다.

대한민국에서는 10월 9일을 
한글날로 정하여 태극기를 게양하며, 법정 공휴일로 지되어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날인 1월 15일을 조선글로 정하고 있다.

유래와 역사

훈민정음 언해본

한글날은 한글 반포일을 기념하는 날로 《세종실록》 1446년(세종 28년) 음력 9월 29일의 기록에 따르면 훈민정음은 9월중에 반포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근거로 지금 한글 학회의 전신인 조선어연구회와 신민사가 1926년 음력 9월의 마지막 날인 음력 9월 29일(양력 11월 4일)에 훈민정음 반포 여덟 회갑(480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가졌다. 그 당시 한글을 ‘가갸글’이라고도 불렀으므로 이날을 제1회 ‘가갸날’이라고 했다. 그러다가 국어학자인 주시경이 1906년에 제안했던 ‘한글’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1928년부터는 ‘한글날’로 명명했다.

1931년 또는 1932년부터 양력으로 당시 날짜를 따져 10월 29일에 지냈다. 이것은 1582년 이전의 윤일은 율리우스력에 따라 매기고, 1582년에 생략된 날짜는 고려하지 않고 잘못 환산한 것이었다. 1446년 당시 서양이 사용했던 율리우스력으로 환산하면, 실제로는 율리우스력으로 10월 18일이 된다.

한글연구단체인 조선어학회 회원이었던 국어학자 이희승과 이극로는 이를 1932년부터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1931년부터 양력으로 지냈다는 신문 기사도 있다. 1934년부터는 전문가들 의견을 따라 1582년 이전기간도 그레고리력을 썼던 것으로 가정하는 역산 그레고리력(proleptic gregorian calender)을 적용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합의가 나와 그에 따라 계산한 10월 28일에 지내었다.

그러던중에 한글이 반포된 날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기록된 《훈민정음 해례본》이 1940년에 경북 안동에서 발견되었다. 이 책에 정인지가 쓴 서문 내용에 따르면 9월 상순에 《훈민정음 해례본》이 완성되었다고 되어 있다. 이를 토대로 1446년 9월 상순의 마지막 날인 음력 9월 10일을 그레고리력으로 계산하면 10월 9일이 되므로 새로이 한글날을 10월 9일로 변경하여 기념하게 되었다.

대한민국[편집]

1945년 8.15 광복 이후 대한민국 정부는 11월 16일[6]을 한글날로 제정하고 공휴일로 만들었다.

1949년 6월 4일 대통령령 "관공서의공휴일에관한건"이 제정[7]되면서, "10월9일(한글날)"도 공휴일로 지정되었다. 1949년부터 1990년까지 매년 10월 9일 한글날은 공휴일이었다.

1949년 10월 1일 "국경일에관한법률"이 제정[8]되었는데, 당시 국경일은 3·1절,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 네 개였고, 한글날은 포함되지 않았다.

1970년 6월 15일 "관공서의공휴일에관한건"이 "관공서의공휴일에관한규정"으로 전부개정[9]되었는데, 한글날은 계속해서 공휴일로 포함되었다.

1982년 5월 15일 "각종기념일등에관한규정"이 개정[10]되면서, "[별표] 각종기념일표"에 한글날이 포함되었다.

1984년 2월 21일 "대한민국국기에관한규정"이 제정[11]되면서, 제12조에서 국경일, 국군의 날, 현충일 등과 함께 한글날에도 국기를 게양한다는 것을 규정했다. 1984년부터 지금까지 매년 10월 9일 한글날에 국기를 게양하고 있다.

공휴일이 지나치게 많아 경제 발전에 지장이 있다는 이유로 1990년 11월 5일 "관공서의공휴일에관한규정"이 개정[12]되면서, 국군의 날과 함께 한글날이 공휴일에서 빠졌다. 이에 따라 1991년부터 2012년까지는 매년 10월 9일 한글날이 공휴일이 아니었는데, 다만 1994년2005년2011년에는 일요일이었던 관계로 쉬었다.

2005년 10월 5일 대한민국 국회 문화관광위원회는 ‘한글날 국경일 지정 촉구 결의문’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2005년 11월 30일 국회 행정자치위원회는 법안심사 소위를 열어 한글날을 국경일로 격상하는 내용의 ‘국경일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상정했고, 이 개정안은 2005년 12월 8일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했다. 이로써 2005년부터 지금까지 매년 11월 16일 한글날은 국경일이다.[13] 국경일이라고 해서 공휴일인 것은 아니다. 한글날은 국경일이면서 쉬지 않는 날이었다.

2006년 9월 6일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이 개정[14]되면서, "[별표] 각종기념일표"에서 한글날이 제외되었다. 한글날은 국경일에 포함되었기 때문에 별표에서 따로 규정하지 않아도 기념행사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07년 1월 26일 '대한민국국기법'이 제정[15]되면서, 제08조에서 국경일에 국기를 게양한다는 것을 규정했고, 2007년 7월 27일 "대한민국국기법 시행령"을 제정[16]하면서, 같은 날 "대한민국 국기에 관한 규정"을 폐지[17]했다. 한글날은 국경일이므로 당연히 국기를 게양한다.

한글날을 공휴일로 지정하기 위한 노력이 다각도로 진행되었는데, 한글학회한글문화연대 등 시민단체의 연합체인 한글날 공휴일 추진 범국민연합은 한글날을 앞두고 국민청원서를 제청하기는 등 했고,[18] 한글날의 기념일 주관 부서인 문화체육관광부는 한글날을 공휴일로 재지정하는 방안을 추진했으며,[19] 정치권에서는 민주당이 어버이날과 함께 한글날을 공휴일로 지정하는 내용의 공휴일에 관한 법률을 발의했다.[20]

2012년 11월 7일 한글날을 다시 공휴일으로 지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관련 규정의 일부 개정안이 입법 예고되고, 법률 절차를 거쳐 2012년 12월 24일국무회의에서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 일부 개정령안이 통과됨에 따라, 2012년 12월 28일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이 개정[21]되면서, 한글날은 다시 공휴일로 지정되었으며, 2013년부터 매년 10월 9일 한글날은 공휴일이다.[3][22]

기념[편집]

대한민국 정부는 아래와 같은 법률 및 시행령으로 한글날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23][24]

국어기본법 제20조 (한글날) ① 정부는 한글의 독창성과 과학성을 국내외에 널리 알리고 범국민적 한글 사랑 의식을 높이기 위하여 매년 10월 9일을 한글날로 정하고, 기념행사를 한다.

② 제1항에 따른 기념행사에 관하여 필요한 사항은 대통령령으로 정한다. [전문개정 2011.4.14.]

국어기본법 시행령 제15조(한글날 기념행사) ① 정부는 법 제20조제1항에 따른 한글날 기념행사를 할 때에 한글과 국어 발전에 이바지한 공이 매우 큰 개인이나 단체를 한글발전유공자로 포상하고, 한국 문화 창달에 이바지한 공적이 뚜렷한 개인이나 단체에 대하여 세종문화상을 수여할 수 있다.

② 제1항에 따른 한글발전유공자의 포상은 「상훈법」에서 정하는 바에 따르고, 세종문화상의 수여는 「정부 표창 규정」에서 정하는 바에 따르며, 시상 분야, 수상 인원과 그 밖에 필요한 사항은 문화체육관광부장관이 정한다. 〈개정 2013.1.16.〉

그외에 다른 한글 진흥을 위한 부분은 국어기본법 및 시행령에 따라 대한민국 정부에서 주관하여 진행하고 있다.

2005년에 국어기본법[25]과 국어기본법 시행령[26]을 제정하여 한글날 기념 부분을 법률화하고, 2006년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별표][27]을 개정해서 한글날 관련 별표가 삭제되었다.

이전에는〈각종기념일등에관한규정〉[별표][28]에 따라 한글날에는 문화체육관광부가 주관하여 “세종대왕의 성덕과 위업을 추모하고 한글의 우수성을 선양하기 위한 행사를 한다”라고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