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 10-02-2022 주일 설교 예정


성육신에 관한 설교를 하는 배경

1. 매 주일 신앙고백을 하면서도 고백의 내용을 성경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2. 성육신 사건은 구약의 속죄와 신약의 속죄에 대한 변화가 어떻게 실현되었는지를 알려주는 것이다.
3. 가톨릭교회에서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앙과 개신교회의 마리아에 대한 성경적 이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4. 하나님이 육신의 몸으로 오신다는 것의 의미.

현대 사회에서 성육신 사건은 "욤 키푸르(Yom Kippur)" '대속죄일'과 연관된다.
욤 키푸르가 메시아의 죄값 지불과 하나님 백성의 오늘의 안전을 이해하기 위한 필수적인 배경이 된다.
 

주일 설교 예정 / 08 - 07 - 2022
성찬예식주일(매월 첫번째 주일)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 요한복음 1:14, 로마서 8:3-4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肉身)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居)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榮光)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獨生子)의 영광(榮光)이요 은혜(恩惠)와 진리(眞理)가 충만(充滿)하더라.
The Word became flesh and made his dwelling among us. We have seen his glory, the glory of the One and Only, who came from the Father, full of grace and truth.

로마서 8:3-4
율법(律法)이 육신(肉身)으로 말미암아 연약(軟弱)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罪)를 인(因)하여 자기 아들을 죄(罪) 있는 육신(肉身)의 모양(模樣)으로 보내어 육신(肉身)에 죄(罪)를 정(定)하사. 육신(肉身)을 따르지 않고 그 영(靈)을 따라 행(行)하는 우리에게 율법(律法)의 요구(要求)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For what the law was powerless to do in that it was weakened by the sinful nature, God did by sending his own Son in the likeness of sinful man to be a sin offering. And so he condemned sin in sinful man.
in order that the righteous requirements of the law might be fully met in us, who do not live according to the sinful nature but according to the Spirit.

예배 때마다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합니다.
한국교회에서는 주로 신앙고백을 위하여 사도신조를 사용합니다.(4세기 경)

사도신경에 대한 오해를 바르게 잡아야 한다.
어떤 설교자는 마치 사도신경은 예수님의 12제자들이 한 구절씩 고백한 것을 모두 모아서 편집한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사도신경이라는 것은 사도들의 신앙 고백과 그 내용이 일치하므로 사도신경이라고 부른 것이다.
12사도들이 한 마디씩 작성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사도신조 이외에 니케아신조도 있습니다.(AD 325년)

사도신조에서 성육신에 관한 내용은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반면에 니케아신조에서 성육신에 관한 내용은 "그리고 우리는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분은 하느님의 외아들이시며, 아버지에게서 나셨으며, 곧 아버지의 본질에서 나셨다. 하느님에게서 나신 하느님이시며, 아버지와 본질에서 같으시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용서하는 방법으로 그의 아들을 사람의 몸으로 이 세상에 보내셔야 하셨는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죄를 속하기 위하여 다른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아들을 육체를 갖는 사람으로 세상에 보내신 이유가 무엇인가?

성육신 사건을 구약 레위기 23장 유대인의 7대 명절 중 "대속죄일"에서 살펴보겠습니다.

대속죄일(The Day of Atoinment)은 "욤 키푸르"를 영어로 표현한 것이다.
'키푸르(Kippur)'는 '덮다'는 뜻의 히브리어 '카파르(kaphar)'에서 파생 되었다.
그러므로 속죄의 단순한 의미는 덮개(covering)라고 하겠다.

지난해의 죄를 위한 속죄(덮개)가 욤 키푸르에 있었다.
속죄는 무죄한 가축의 피의 희생으로 구성된다.
하나님은 명하셨다(레위기 17: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덮개)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위기 17:11)
For the life of a creature is in the blood, and I have given it to you to make atonement for yourselves on the altar; it is the blood that makes atonement for one's life.

속죄일은 여섯 번째 절기로 가을에 있는 절기이다.
히브리력으로 일곱 번째인 티쉬리월 10일 이며 대략 9월이나 10월에 해당한다.
속죄일은 다른 두 개의 주요한 절기인 티쉬리월 1일의 나팔절(로쉬 하샤나)과  티쉬리월 15일에 시작하는 초막절 사이에 지킨다.

욤 키푸르의 성경 규례는 세 구절에 나타난다.

대제사장(레위기 16장)
백성(레위기 23:26-32)
희생 제물(민수기 29:7-11)

욤 키푸르의 중요성

욤 키푸르를 종종 '그 날' 이라고도 부른다.
욤 키푸르는 "너는 네 영혼을 스스로 괴롭게 하라"는 말이다(레위기 23:27, 32).
사람들은 이것을 금식으로 히해하였다(에스라  8:21)

때에 내가 아하와강 가에서 금식을 선포하고 우리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여 우리와 우리 어린것과 모든 소유를 위하여 평탄한 을 그에게 간구하였으니.

욤 키푸르 날에 금식하지 않는 백성은 "그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 이라고 하였다(레위기 23:29).

적용(適用)

1. 피의 필요성, 죄의 속죄가 오직 피로 이루어 진다(레위기 17:11)
- 육체생명에 있음이라 내가 이 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에 있으므로 가 죄를 속하느니라.

2. 신약에서도 동의한다(히브리서 9:22)
-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로써 정결케 되나니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새언약(新言約)

1. 진정한 용서와 진정한 안전
2. 새 언약은 죄에 대한 진정한 용서와 정결함을 제공하기 때문에 옛 언약을 능가한다.
3. 예수님의 죽음을 통한 희생은 영원하고 완전하고 충분하다(히브리서 7:27, 9:12, 25-28)
4. 옛 언약의 제물은 죄를 덮을 뿐이다(히브리서 10:4)
5. 새 언약의 어린 양은 죄를 제거하신다(요한복음 1:29)

결론(結論)


1. 양각 나팔 소리는 이스라엘을 회개로 초청하지만 현대의 유대교에는 속죄가 없다.
2. 피의 제사도 없고, 성전도 없으며, 제사장도, 례위인의 규례를 고수하는 것도 없다.
3. 유대인의 가슴속에는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용서를 받고 싶은 갈망이 있다.
4. 그러나 미쯔봇(mitzvot, 선행)이나 사람의 죄를 감금류에게 전가하는 행위 같은 전통으로는 용서를 받을 수 없다.
5. 오직 하나님의 어린 양 곧 예수님의 영원한 희생을 받아들일 때만 가능하다.
6. 히브리 성경은 메시아를 속건제물로 주셨다고 증언한다(이사야 53:10)
7. 희생 제물을 거절하면 반드시 자신의 죄값을 받아야 한다(이사야 59:2, 로마서 6:23)
8. 예수님을 신뢰하면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않으실 것이다(예레미야 31:34)








강생(降生, 잉카르나티오. incarnatio) 수육, 육아발생
기독교에서 쓰이는 용어로서, 하나님이 사람이 된 사건을 가리킨다.

강생의 성서적 근거

성경적인 근거로서 말씀의 성육신 교리는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찾는다.
말씀이신 하나님이 바로 육신을 입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즉 하나님으로 땅에 오신 구원자이심을 말한다.

하나님이 구원을 이루신 첫 번째 단계는 성육신으로서,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사람안에 들어오셔서 처녀인 성모 마리아를 통하여 인간으로 태어나셨다고 말한다.

창조에서 하나님은 조물주이셨으나 성육신 전에는 어떠한 창조물 안에도 들어가지 않으셨다.
사람을 창조할 때에도 그분은 사람안에 생명의 호흡만을 불어 넣었다(창세기 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또한 욥기 33:4에 의하면 하나님의 호흡이 사람에게 생명을 준다.
그러나 하나님 자신이 사람 안으로 들어오신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의 신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

그러나 성육신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사람안으로 들어오심을 볼 수 있다.
그분은 먼저 잉태되셨고, 아홉달 동안 처녀의 태에 있었으며, 그 후에 태어나셨다.

로마서 8:3-4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죄의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셨다고 말한다. 육신의 모양만 있었다는 것은 죄의 본성은 없었다는 의미이다. 로마서의 저자인 바울은 세가지 단어, 즉 모양과 육신과 죄로 이 구성을 규정했다. ... 성서에서는 [모양으로] 라는 말을 더함으로써 죄의 육신의 모양과 외양은 지녔지만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 죄가 없음을 가리킨다.

영지주의와의 차이점

매우 단순화 하여 말하자면 영지주의란 신이 사람의 껍데기를 쓰고 나타났다는 방식의 사상이다. 그래서 영지주의적 생각을 할 경우 예를 들자면 예수는 그의 지적(知的) 활동력이 육체를 입지 않은 하나님의 지적 활동력과 동일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성육신 사상은 말 그대로 '사람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을 가리킨다. 그렇기 때문에, 앞서 든 예를 따를 경우, 예수의 지적 활동력은 육체를 입지 않은 하나님의 모든 지적 능력을 발현하지는 못하였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물론 기독론에 따르면 부활한 예수의 새로운 육체는 그 전과는 달리 하나님으로서의 모든 인격적 활동을 발휘하는 데에 아무런 제약이 없는 것이라고 믿는다.

신조(Creed, 신앙 고백) 속의 성육신 언급

  • "우리 인간을 위하여,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오셔서, 성령으로 또 동정녀 마리아께 혈육을 취하시고 사람이 되셨음을 믿으며"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
  • "거룩한 교부들을 따라 우리는 한 분이시요 동일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며 모두가 일치하여 가르치는 바는, 그 동일하신 분은 신성에서 완전하시며 동일하신 분이 인성에서도 완전하시며, 완전한 하나님이요 완전한 인간이십니다." (칼케돈신경)
  • "하나님의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되어 나시고" (사도신경)

성육신(成肉身)이라고도 부른다.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강생한 하느님 즉, 하느님의 공현(Epiphany)이라고 믿는다

성육신
이란 단어는 라틴어 "in(안에)"과 "caro(육체)"의 합성 명사에서 "육신 안에 형성되다"는 뜻입니다.
* in caro / 실물안에

영원하신 하나님이 육신을 취하셔서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신이 인간이 되었다는 설은 기독교 이외에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1. 애급의 바로
2. 로마의 가이사 등은 신으로 자처하였다.

고대 신화에서도 흔한 일이었다(사도행전 14:11).

무리가 바울의 행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질러 가로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 오셨다.

3. 일본의 천황을 현인신(現人神)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신화와 기독교의 성육신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속죄관(贖罪觀)"에 있습니다.
고대의 신화에서 신들은 단순한 그의 위대성과 권력을 반영하였으나 기독교의 성육신은 만민의 속죄를 위해 육신을 취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성육신 사건은 성자의 비하(卑下)를 의미합니다.

인간이 상승해서 신격을 자처한 것기독교에서는 범죄한 인간을 대신하기 위하여 스스로 육신을 취하신 하나님의 자기 비하
낮추심이라고 하겠습니다.

성육신의 결과는 "그리스도의 신인(神人, 데오안드로포스. θεόἄνθρωπος)의 교리라고 합니다.
신인(神人)이란 용어는 오리겐(Origen)이 최초로 사용한 신학적 술어이며 그리스도론의 기본이 되었습니다.

성자는 성육신하심으로 완전한 하나님이신 동시에 완전한 사람이 되셨습니다.

이러한 견해는 많은 논쟁을 일으켰습니다.
예를 들면 유대파(Ultra Jewish Party), 에비온파(Ebionism) 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
도게대파(Docetism)는 육신은 가현이라고 주장
그노시스파(Gnosisticism)는 인성을 부인하였다.

니케아회의(Nicean Council, 325년)에서 정죄를 받은 아리우스(Arius, 256-336)는 그리스도를 천사처럼 하나님의 피조물이라고 하여 신성을 파괴하였다.

반면에 아타나시수스(Athanasisus, 293-373)는 그리스도은 하나님과 동질(homoiousios)이며 동등(homoousios)이라고 하였다.

또한 아폴리나리우스(Apollinarius the younger)는 그리스도인의 인성을 시인하며서 그것은 그의 인격 속에서 육(flesh)과 혼(soul)을 겸하고 신성은 신(spirit)을 겸한다고 하여 인성을 불완전한 것으로 만들었다.

케노시스(Kenosis) 학파는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는 그의 신성의 일부 또는 전부를 비어두고 오셨다고 주장하였다.
Gore, Thomasius, Grosby 등
케노시스란 비었다는 뜻이다.

유튀크스(Eutyches)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우리의 인성과는 다르며 그것은 그의 신성에 흡수된 것이라고 하여 인성을 파괴하였다.

결론적으로 성육신이란?

1.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이 있는 것(완전한 사람, 완전한 하나님)
2. 양성은 완전하고 참된 것(complete, real)
3. 불변하며 영원한 것
4. 그리스도의 인격속에 연합하여 있는 것(union) / 체휼(體恤) :
처지를 이해하여 가엾게 여김.

신은 신이요
인은 인이라는 부동한 원리에서 살아가는 인간에게 성육신의 사실이 주는 "신 인(神 人)"의 교리는 신비라고 하겠다.
신비한 교리는 기독교의 계시인 것이다.

영원과 시간
초 자연과 자연
로고스와 육신
이와 같은 양성이 연합한 성육신에서 계시를 이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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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1:13-20

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16. 만물
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19. 아버지
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20. 그의 십자가의 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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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신앙의 핵심에는 개념들이 있지 않고 구체적인 역사적 인물이 있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역사적 인물을 중심으로 하여 전개된다.
성탄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성육신의 첫 출발점이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는 다른 관념이나 이데올로기의 창시자의 존재와 전혀 다른 성격을 띤다.

헤겔주의나 마르크스주의와 같은 관념들은 그 관념의 주창자와 독립하여 존재할 수 있다.
비록 그 사상 체계가 그들에 의하여 소개되거나 종합되었을지라도 이제 그 사상 체계는 그 주창자로부터 독립하여 존재한다.
하지만 기독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단순히 소개된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기독교 사이의 관계는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 사이의 관계와는 사뭇 다른 모습을 지닌다.
기독교 신앙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핵으로 둘러싸며 존재하는데 예수그리스도는 육신이 되신 말씀이다.

성육신(成肉身)이란 요한복음 1장 14절에 있는 말씀에 근거하여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사건을 의미한다.
이 말씀은 세상의 창조 이전부터 계신 분이며, 이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을 뿐만 아니라 이 말씀 자신이 곧 하나님이시다(요 1:1).
요한의 증언에 따르면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은 이 말씀을 통하여 지음을 받았다(요 1:3).
이 말씀은 이제 육신이 되어서 사람들 사이에 거하셨는데 이 말씀은 참 빛이며 모든 사람들의 생명이다.
육신이 되신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로서 우리에게 오셨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의 사건이 곧 성육신의 사건이다.
성육신의 개념은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으신 것 곧 자기를 비워 모든 조건에서 인간과 같이 된 것을 의미한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빌 2:6-8)

성육신은 모든 만물을 지으신 분이 지음을 받은 존재 가운데 하나가 되었음을 뜻한다.

기독교 신앙은 역사적 인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나타나셨다는 주장에 그 기초를 두고 있는데 이는 성육신 교리에서 그 분명한 모습을 드러낸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가 단지 위대한 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라고 주장한다. 성경에 따르면 예수는 곧 하나님 자신이다. 예수는 하나님을 대표하여 행동한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를 경배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며 우리가 예수를 알 때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우리가 예수의 약속을 들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들으며 우리가 예수와 마주칠 때 우리는 하나님과 마주치는 것이다. 성육신의 개념은 그리스도의 신비에 대한 기독교적 성찰의 절정이다. 여기에서 성육신의 핵심은 예수 자신이 곧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자신이라는 성육신의 진리는 우리의 신앙과 삶에 어떤 의미를 지닐까? 2,000년 전에 팔레스타인에 살았던 한 초라한 인간의 삶 속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왜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을 그토록 열심히 붙들어야만 하는가? 우리는 여기에서 성육신 사건의 신학적 의미를 구원론의 차원과 신론의 차원에서 살펴본 뒤에 이러한 성육신 이해가 기독교 영성 이해에 미치는 함축점을 살펴보도록 하자. 여기서 우리가 살펴볼 질문들은 다음과 같다. 성육신 사건은 기독교의 구원 이해에 어떤 기초를 마련해 주는가? 성육신 사건에서 나타나는 기독교 신앙의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성육신 사건에 기초할 때 기독교적 삶의 양식이 드러내야 할 기독교 영성은 어떤 것인가?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성육신 사건의 구원론적 측면에 주목해야 한다. 성육신사건은 무엇보다도 구원의 사건이다. 성서의 중심적 주제는 죄에 빠진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다. 하나님은 불순종하는 인간과 그의 세계를 저버리지 않으시고 옛적부터 선지자를 보내어서 구원의 손길을 펼쳐 오셨다. 이제 하나님은 자신의 사자를 보내실 뿐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옷을 입으신다.

예수 그리스도 곧 성자 하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죄악에 빠진 인간과 그의 세계를 구원하신다. 성자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계에 찾아 오신 사건 곧 성육신의 사건은 하나님이 이 세계를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사랑하심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고대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 신성과 참 인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많은 논쟁을 벌였다. 여러 가지 복잡한 논쟁을 굳이 열거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고대 교부들이 이 문제를 얼마나 심각하게 여겼는가를 잘 알고 있다. 주후 451년에 있었던 칼케돈 회의는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 이며 '참 사랑' 임을 선언함으로써 복잡한 신학적 논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런데 고대 교회의 신앙인들은 무슨 이유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그토록 복잡한 논쟁을 벌였는가? 이 논쟁의 중요성은 구원론적인 시각에서 올바로 파악될 수 있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임을 고백한다. 여기서 핵심적인 쟁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동시에 확보되지 않는다면 기독교 신앙이 선포하는 구원이 불가능해진다는 점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참 사람인 것이 왜 중요한가? 예수 그리스도는 참 사람으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사람이 해야 하는' 속죄의 사역을 대신한다. 그러면 왜 예수를 그저 뛰어난 인간 헌신적인 인간이라고만 말하지 않는가? 예수는 틀림없이 인간이었다. 고대 교회와는 달리 오늘날에는 이 점을 부인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예수가 인간이기만 하다면 예수도 역시 인간의 곤경을 함께 나누어질 수밖에 없고 이는 예수가 참으로 구원자가 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인 것이 왜 중요한가?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으로서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그 사역을 완성한다. 그러면 '예수가 하나님이었고 하나님이기만 했다'고 말함으로써 이 문제를 풀면 되지 않는가? 하지만 예수가 하나님이기만 했다면 예수와 우리 인간 사이의 접촉점은 상실되고 만다. 예수 그리스도가 참 사람이 아니라면 예수가 인간을 대신하여 죽은 것이 우리에게 무슨 관련이 있을 수 있는가? 요약하자면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 아니었더라면 그는 인간을 구원할 수 없었을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참 사람이 아니었다면 인간은 그에 의한 구원의 대상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하여 예수는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이었다는 주장은 고대교회에서 매우 중요하게 받아 들여졌으며 이는 성경의 주장에 합당한 결정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참 하나님이 참 인간 안에서 나타난 성육신의 사건은 기독교 신앙의 구원론에 확고한 기초를 마련해 주게 된다.

다음에 성육신 사건의 신론적 의미를 살펴보자 성육신 사건은 하나님 이해에 있어서 결정적 단서를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하나님 이해의 차원을 가진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를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과 목적에 대해서 결정적인 내용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신 것은 단지 한 명의 인간이 더 태어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결정적인 모습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났다고 믿는다. '하나님은 누구일까? 라는 이 문제를 다루기에 앞서서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먼저 던져야 한다. 우리는 참 하나님에 관하여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나님의 존재를 알기 위하여 자연을 보아야 할까, 또는 인간 자신을 보아야 할까, 아니면 역사를 보아야 할까? 하나님은 여러 가치 자연 세계와 역사적 사건 속에서 발견될 수 있다.

성경도 하나님은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히 1:1)우리에게 말씀하신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결정적인 모습은 어디에서 드러날까? 이에 대하여 성경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결정적으로 자신을 계시하셨다고 말한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하나님 지식에 있어서 가장 신뢰할 만한 기초가 된다. 이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결정적으로 말씀하셨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히 1:3)이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육신의 개념을 강력하게 부정하는데 그 이유는 분명한 신학적 이유때문이다. 이는 성육신의 개념이 자신들이 미리 마음 속에 품고 있던 하나님 상(Image, 이미지)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이미 머리 속에 분명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하나님을 하나의 보편적 개념이나 일반적 원리로 생각한다. 개념이나 원리는 보편적이며 일반적인 것이지 구체적이여 특정적인 것이 될 수 없다. 이러한 자신의 하나님 개념에 기초하여 그들은 성육신의 사건을 부인한다. "어떻게 우주의 원리인 로고스(말씀)가 한 역사적 인간 속에서 자신을 다 드러낼 수 있다는 말인가? 이것이 그들의 질문이다.

고대 교회는 이 문제에 관하여 또한 심각한 논쟁을 벌였다. 이 논쟁의 핵심 질문은 다음과 같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비슷한(homoiousios)본성을 가졌을 뿐인가(아리우스) 아니면 하나님과 동일한(homoousios)본성을 가졌는가?(아타나시우스)" 이 두 단어 사이의 문자적 차이는 그리스어 i 일 뿐이지만 이 둘 사이의 신학적 차이는 엄청난 것이다. 우리가 만일 예수는 그저 하나님과 비슷한 존재일 뿐 참 하나님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그 뒤에는 다음과 같은 그리스 철학적 하나님 이해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피조물과 철저하게 다른 존재이며 하나님은 일반적 원리이기에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날 수 없다. 하나님은 피조물과 전혀 다르기에 결코 피조물의 아픔과 고통 가운데 들어올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은 저 하늘에 있는 초월적인 존재일 뿐이다." 그러므로 보편적이지 않은 진리는 참 진리가 될 수 없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하지만 조들이 이끌어 낸 하나님 지식은 어디로부터 비롯되는가?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 얻어진 하나님 지식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진 하나님 지식보다 더 신뢰할 만한 것이라는 증거가 있는가? 결국 다른 곳에서 얻어진 하나님 이해와 상충되기 때문에 성육신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육신에 대한 반론이 되지 못한다. 그러한 주장은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 그들 자신의 이해가 그리스도밖에 얻어진 선이해(先理解)에 근거한 것임을 보여줄 뿐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에 기초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에 관하여 그저 추상적으로 말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는 대체로 하나님은 불멸하며 무한하며 불변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님이 어떤 존재가 아니다'라는 것 이외에 무엇을 말하는가? 하나님의 불멸성, 무한성, 불변성 등은 단지 하나님은 멸하지 않으며(죽지 않으며-유한하지 않고, 변하지 않는다는 정도만 말할 뿐이다. 하나님의 불멸성, 무한성, 불변성 등은 보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기초할 때 하나님의 구체적 모습은 어떠한가? 성육신 교리에 따르면 하나님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성품은 예수 그리스도 같은 분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있기 전에는 하나님에 관한 모든 상(image: 이미지)은 우상으로 여겨졌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세우고 그것을 섬겼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참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보이지 아니 하시는 하나님의 형상(image)'(골 1:15)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육신은 하나님을 눈에 보이게 만든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와 같은 분이기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봄으로써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비로소 배우게 된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우리는 성육신 교리의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셨듯이 친구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버리는 사랑(요15:13)과 같다고 성경은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하나의 분명한 상(image: 이미지)을 얻을 수 있다.

성육신 사건을 통해서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본성에 대하여 무엇을 알 수 있을까?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우리의 하나님이 그저 개념이나 원리로서 존재하는 타자(他者)가 아니라 구체적인 인격으로 오시는 분임을 말한다.

성육신 사건에 따르면 하나님의 참 존재는 인격성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개념으로 찾아오시는 존재가 아니라 인격 안에서 찾아오시는 분이다. 하나님께서 개념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인격으로 오시기에 신앙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지적인 이해와 수긍이 아니라 인격적 신뢰와 순종이다. 인격은 신뢰와 순종을 요청하는 까닭이다.

둘째 하나님의 존재가 인격적이기에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행동하시는 분이다.

성육신 사건에 따르면 하나님의 존재는 피조물 세계를 향하여 찾아오는 가운데 행동하는 존재이다. 하나님의 존재는 피조물을 향한 구체적 행위 가운데 있다. 예수 그리스도와 성육신은 우리의 하나님을 피조물의 삶과는 동떨어진 가운데 멀리서 따로 존재하는 지배자가 아니라 피조물의 역사속으로 계속해서 찾아오시는 분임을 말한다. 성육신에 따르면 하나님은 구체적인 사건 속에서 피조물에게 찾아 오신다.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의 운명에 대해서 무관심한 분이 아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에 열정적으로 헌신하는 분이며 우리의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까지 내어 주시는 분이다.

성육신 사건에 따르면 기독교 신앙의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의 운동을 펼치시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이라는 구체적인 행위 속에 자신의 사랑을 드러내시는 분이다. 성육신은 우리의 하나님이 사랑 안에서 구체적으로 행동하시는 분임을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이라'(요 4:8)고 고백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저 사랑의 원리가 아니라 사랑 가운데 구체적으로 행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을 구체적인 행동 가운데 나타내셨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다.'(요일 4:9)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선언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안에서 올바로 이해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저 보편적이며 추상적인 개념이나 원리로 오해될 수 있다.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구체적으로 그 아들을 보내셨다.(요 3:16)는 성경의 선포는 참 진리는 그저 추상적인 원리가 아니라 구체적인 행위임을 말해 주고 있다. 요약하자면 성육신 사건은 "하나님은 저기 멀리에 있는 낯선 존재가 아니다. 역사적 예수 안에서 구체적인 인격으로서 찾아오신 이가 곧 하나님이다? 라고 하나님 존재에 대하여 선언한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구원론적인 기초를 제공하며 또한 우리에게 결정적인 하나님 이해의 터전을 마련해 준다. 이러한 성육신의 사건에 기독교 신앙은 어떠한 삭의 양태를 요청하는가? 다시 말하자면 성육신 사건은 어떠한 영성을 요청하는가?

첫째, 성육신 사건에서 드러난 기독교의 영성은 하나님과 세계를 분리하고 대립시키는 이원론을 거부하는 영성이다.

기독교의 신앙은 세계를 부정하는 영성이 아니라 세계를 긍정하는 영성을 전개한다. 이는 중세의 수도원적인 영성과 대비된다. 기독교의 영성은 하나님이 자신을 주셔서 사랑하신 이 세계를 저버리지 않는다. 물론 피조물인 세계를 하나님의 위치에까지 높이는 것은 거부된다.(롬 1:25) 하지만 세계는 하나님의 영광의 무대(마당)로서 긍정된다. 이 세계는 타락한 세계이지만 세계는 타락하기 이전에 이미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이기에 이 세계는 하나님에 의하여 사랑을 받는다.(요 3:16)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구속 사건 안에서 이 세계는 거듭남을 경험하는 가운데 이 세계는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 아래 포함된다. 그러므로 세계를 부정하는 이원론적 영성은 기독교적 성육신의 영성과 일치하지 않는다.

둘째, 성육신의 영성은 이 세계 안에서 그 구체적 표현을 지향하는 영성이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기독교 신앙의 하나님은 추상적인 개념이나 원리가 아니며 피조물의 세계를 향하여 구체적으로 찾아오시는 살아계신 인격이다. 이러한 살아계신 하나님을 신앙하는 진리는 또한 추상적인 진리가 아니라 구체적인 사람과 사건 가운데 드러난 진리이다. 그러므로 움직이는 진리이며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진리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하여 이 세계를 구원하신 하나님은 이제 성령 안에서 또 다른 성육신을 통하여 이 세계를 변화시킨다. 하나님을 이제 추상적인 진리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육신 안에(In carnation) 진리를 넣어 주신다. 기독교의 진리는 구체적인 사람과 사건 가운데 드러난 진리이다. 복음서에는 하나님의 역동적인 진리가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 안에 거하였다. 이제 사도행전에는 하나님의 역동적인 진리가 성령 안에서 믿음의 사람들 안에 거하기 시작한다. 이제 성령에 의하여 잉태되신 그리스도는 모든 그리스도인 안에서 다시 성령에 의하여 (재)잉태되기를 원하신다.

성육신 사건은 기독교 신앙의 구원 이해에 기초를 제공해 주는 사건이며 참 하나님의 성품을 우리에게 알려 주는 계시의 사건인 동시에 기독교적 영성의 모습이 어떠한가를 보여 주는 하나님의 모범의 사건이다.

성육신 안에서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이신 분이 인간 구원의 사역을 이루신다.
기독교 신앙의 하나님은 인간과 세계를 외면하든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낮춤의 고난을 감수하시고(빌 2:6-8)스스로 피조물 세계에 찾아오신 하나님이다.

성경은 인간으로 하여금 구원받기 위하여 구원의 사다리를 올라가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 자신이 자신의 왕관과 왕위를 버리고 이 땅에 찾아오셨음을 선포한다.
피조물의 범죄함 이전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고난의 사건이며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이다.

김교신은 이러한 구체적 하나님 이해를 깨달은 후에 자신의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오늘 재판정에 다녀왔다. 피고를 위하여 애쓰는 변호사가 아름답게 보였다. 문득 나를 위하여 변론까지 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나를 위하여 대신 피고의 자리에 서서 죽으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니 눈물이 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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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육신이란?
성육신의 본질은 무엇인가?   

성육신이란 하나님이 육신으로 나타난 것을 일컫는다.
즉, 하나님이 창조된 사람들 가운데서 육신의 형상으로 사역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육신이라고 하면, 무엇보다 먼저 육신, 그것도 정상 인성을 갖춘 육신이 필요하다.
이것은 최소한으로 갖춰야 할 것이다.
사실, 하나님이 입은 육신의 함의는 육신으로 사역하고 육신으로 생활하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본질이 육신이 되고 사람이 된 것이다.

성육신은 바로 하나님의 영이 육신 된 것, 즉 하나님이 육신 된 것이다.
육신이 하는 사역은 곧 영이 하는 사역이다.
영이 하는 사역은 육신을 통해 실체화되고, 육신을 통해 발현된다.
하나님이 거하는 육신 외에는 누구도 성육신 하나님의 직분을 대신할 수 없다.
즉, 하나님이 입은 육신의 정상 인성만이 신성 사역을 나타낼 수 있고, 그 외에는 어느 누구도 그것을 대신할 수 없다.

만일 하나님이 처음 성육신했을 때 29세 이전까지 정상 인성이 없고, 태어나자마자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고, 세상의 모든 일을 꿰뚫어 보며, 말을 떼자마자 천상의 말씀을 하고, 사람의 생각과 품고 있는 마음을 모두 알 수 있었다면, 이런 사람은 정상인이라고 할 수 없다.
또한, 이러한 육신은 육신이라고도 할 수 없다.

그리스도가 이런 사람이었다면 성육신의 의의와 본질이 사라졌을 것이다.
그에게 정상 인성이 있었다는 것은 그가 ‘말씀’이 ‘육신’된 하나님임을 증명한다.

그가 정상인의 성장 과정을 거쳤다는 것은 더더욱 그의 육신이 정상적이었음을 말해 준다.
또한 그의 사역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영’이 ‘육신’ 된 존재임을 충분히 보여 준다.

성육신 하나님을 가리켜 그리스도라 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이 입은 육신이며, 이 육신은 육에 속한 그 어떤 사람과도 다르다.
다르다고 말하는 이유는 그리스도가 육에 속하지 않은, 영의 화신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정상 인성과 완전한 신성을 갖고 있으며, 그의 신성은 어느 누구에게도 없는 것이다.
그의 정상 인성은 육신으로 하는 모든 정상적인 활동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고, 신성은 하나님 자신의 사역을 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인성이든 신성이든 모두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한다.

그리스도의 본질은 영이자 신성이기에 그의 본질이 곧 하나님 자신의 본질이다.
그 본질이 그의 사역을 방해할 리 없다.
그는 자신의 사역을 망치는 일도, 자신의 뜻에 위배되는 말도 할 리가 없다.
그렇기에 성육신 하나님은 절대로 자신의 경영을 방해하는 사역을 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이는 누구나 명확히 알고 있어야 할 점이다.

성령 역사의 본질은 인류 구원과 하나님 자신의 경영을 위한 것이고,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사역 역시 인류 구원과 하나님의 뜻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성육신한 이상 그의 본질을 육신에 실체화하여 육신이 충분히 그의 사역을 감당하게 한다.
그러므로 성육신한 기간의 그리스도의 사역은 하나님 영의 모든 사역을 대신하고, 성육신 기간의 모든 사역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핵심으로 하며, 다른 어떤 시대의 사역도 섞이지 않는다.
하나님은 성육신한 이상 육신의 신분으로 사역하며, 육신으로 온 이상 육신에서 그가 해야 할 사역을 완성한다.
하나님의 영이든 그리스도든 어쨌든 모두 하나님 자신이므로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사역을 하고 직분을 다한다.

그리스도란 성육신 하나님의 호칭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진리를 베풀어 주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조금도 지나치지 않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본질이 있고, 사람이 이를 수 없는 하나님의 성품과 사역의 지혜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역을 할 수 없으면서 자칭 그리스도라고 하는 자는 가짜다. 그리스도란 땅에서의 하나님의 발현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땅에서 사역을 펼치고 사람들 가운데서 그의 사역을 완성할 특유한 육신이다. 그 육신은 아무나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육신은 하나님이 땅에서 하는 사역을 감당할 수 있고,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낼 수 있으며,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고, 사람에게 생명을 공급할 수 있는 육신인 것이다.

성육신한 이상 하나님의 본질이 있고, 성육신한 이상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 하나님은 성육신한 이상 해야 할 사역을 가져오고, 성육신한 이상 하나님의 어떠함을 나타낼 것이며, 성육신한 이상 사람에게 진리를 가져다주고, 생명을 베풀고, 길을 가리켜 줄 수 있다. 하나님의 본질을 갖추지 않은 육신이라면 분명히 성육신 하나님이 아니다. 이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이 확실하다. 하나님이 입은 육신이 맞는지 알아보려면 그가 나타내는 성품과 말씀으로 확인해야 한다. 바꿔 말해서, 하나님이 입은 육신이 맞는지, 혹은 참도가 맞는지 확인하려면 반드시 그의 본질로 판별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입은 육신인지 아닌지의 핵심은 그 본질(사역, 말씀, 성품 등 훨씬 다양한 측면)에 있지, 겉모습에 있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겉모습을 살피느라 그 본질을 소홀히 한다면 그것은 사람이 무지몽매한 것이다.

하나님이 입은 육신의 함의는 육신으로 사역하고 육신으로 생활하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본질이 육신이 되고 사람이 된 것이다. 성육신 하나님의 삶과 사역은 크게 두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단계는 직분을 이행하기 전의 삶이다. 일반인의 가정에서 지극히 정상적인 인성으로 살며, 사람의 정상적인 생활 윤리와 법칙, 정상적인 필요(의식주 등), 정상적인 연약함과 정상인의 희로애락을 갖고 있다. 다시 말해, 첫 번째 단계에서는 신성이 아닌 완전히 정상적인 인성으로 살면서 정상인들이 하는 모든 활동을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단계는 직분을 이행하기 시작한 후의 삶이다. 이때도 여전히 정상 인성의 외형을 지닌 평범한 인성으로 살며, 겉모습에는 조금도 초자연적인 부분이 없지만, 직분을 이행하기 위해 살아간다. 이때의 정상 인성은 오로지 신성의 사역을 정상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존재한다. 직분을 이행하기 시작했을 때에는 정상 인성이 이미 직분을 이행할 수 있는 인성으로 성숙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 번째 단계의 삶은 정상 인성으로 직분을 이행하는 삶이자, 정상 인성과 완전한 신성의 삶이다. 첫 번째 단계의 삶이 완전히 평범한 인성으로 사는 삶인 이유는 그때의 인성이 신성의 모든 사역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하지 않았으며, 인성이 성숙해질 때까지, 즉 직분을 충분히 담당할 수 있는 인성으로 성숙해질 때까지 기다려야만 그가 이행해야 할 직분을 이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육신인 이상, 성장과 성숙의 과정이 필요하다. 따라서 첫 번째 단계의 삶은 그저 정상 인성의 삶에 불과하다. 그러나 두 번째 단계의 삶은 인성으로 사역을 충분히 담당하고 직분을 충분히 이행할 수 있는 삶이다. 그러므로 성육신 하나님이 직분을 이행하는 기간의 삶은 바로 인성과 완전한 신성의 삶이다. 만약 성육신 하나님이 태어나자마자 본격적으로 직분을 이행하고 초자연적인 이적과 기사만 행한다면, 육신의 본질은 없어진다. 그래서 성육신 하나님의 인성은 육신의 본질을 위해 존재하고, 인성이 없는 육신은 존재하지 않으며, 인성이 없는 사람은 비인간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렇듯, 육신의 인성은 하나님이 입은 육신의 고유한 속성이 되었다. 만약 누군가가 “성육신 하나님께는 신성만 있고 인성은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모독이다. 이는 아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고, 성육신의 원칙과도 위배되기 때문이다. 그는 직분을 이행하기 시작한 후에도 여전히 인성의 외형을 지닌 신성으로 살며 사역한다. 다만, 이때의 인성은 오로지 신성이 정상 육신에서 사역하는 것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역사하는 것은 인성 안에 있는 신성이다. 즉, 신성으로 사역하는 것이지 인성으로 사역하는 것이 아니다. 이 신성은 인성에 가려져 있지만 그 본질은 여전히 인성이 아닌 완전한 신성으로 사역하는 것이다. 단, 역사하는 것은 육신이며, 이 육신을 사람이라고도, 하나님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육신에 거하는 하나님이 되고, 사람의 외형과 본질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의 본질을 지닌 사람이기에 창조된 그 어떤 사람보다도 높고,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그 어떤 사람보다도 높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외형을 지닌 사람들 가운데, 인성을 지닌 모든 사람 가운데 오직 그만이 성육신한 하나님 자신이며, 그 외에는 모두 창조된 인류인 것이다. 똑같이 인성을 갖추고 있지만, 창조된 사람은 인성 말고는 다른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성육신 하나님은 다르다. 그의 육신에는 인성 말고도 무엇보다 중요한 신성이 있다. 인성은 육신의 외관으로 알아볼 수 있고, 일상생활에서 발견할 수도 있지만, 신성은 쉽게 사람에게 발견되지 않는다. 신성은 인성이 있는 전제하에 나타나며, 사람의 상상처럼 그렇게 비범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에게는 신성을 발견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 사람들이 지금까지 가장 측량하기 어려워하는 것은 성육신 하나님의 본질이 도대체 무엇이냐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많은 말을 했음에도 너희 대다수는 이에 대해 아직도 갈피를 잡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 이것은 아주 간단한 문제이다. 하나님이 성육신했다고 하면 그의 본질은 인성과 신성의 결합체이다. 이 결합체를 하나님 자신이자 땅의 하나님 자신이라고 하는 것이다.

성육신 하나님의 인성은 육신 안에 있는 신성의 정상적인 사역을 유지시키기 위한 것이며, 정상적인 두뇌의 사유는 정상 인성과 육신의 모든 정상적인 활동을 유지시켜 준다. 정상적인 두뇌의 사유는 육신에 거하는 하나님의 모든 사역을 유지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만약 그 육신에 정상 인성의 사유가 없다면 하나님은 육신으로 사역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는 육신으로 해야 할 사역을 영원히 완성할 수 없다. 성육신 하나님은 정상적인 두뇌의 사유를 지니고 있지만, 그의 사역에는 사람의 사유가 섞여 있지 않다. 그는 정상 사유를 지닌 인성으로 사역하고, 사유를 지닌 인성의 전제하에서 사역하는 것이지, 정상적인 두뇌의 사유를 발휘해 사역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거하고 있는 육신의 사유가 얼마나 고차원적이든, 그의 사역에는 논리학도, 사고학도 들어가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그의 사역은 육신의 사유를 통해 상상해 낸 것이 아니라 신성의 사역을 인성으로 직접 나타낸 것이다. 그의 사역은 전부 그가 이행해야 할 직분이지, 그가 머리로 생각해서 만든 것은 하나도 없다. 예를 들어, 그가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며, 십자가에 달린 것은 머리로 상상한 것이 아니며, 두뇌의 사유를 지닌 어떤 사람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오늘날의 정복 사역도 마찬가지로 성육신 하나님이 마땅히 이행해야 할 직분이다. 하지만 이 사역은 전부 사람의 뜻이 아닌 신성이 해야 하는 일로, 육에 속하는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육신 하나님은 반드시 두뇌의 정상적인 사유와 정상 인성이 필요하다. 그것은 그가 정상 사유를 지닌 인성으로 사역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성육신 하나님이 하는 사역의 본질이자, 성육신 하나님의 본질이다.

예수는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단지 정상 인성으로 살았다. 사람은 그가 하나님임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그가 성육신 하나님임을 발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람은 그저 그를 지극히 평범한 사람으로 알았을 뿐이다. 이 지극히 평범한 정상 인성은 하나님이 육신 되었음을 실증하고, 은혜시대는 영이 아닌 성육신 하나님이 사역한 시대임을 실증했다. 또한, 하나님의 영이 완전히 육신으로 실체화했으며, 하나님이 성육신한 시대에는 육신이 영의 모든 사역을 한다는 것을 실증했다. 정상 인성을 가진 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의 영이 정상 인성과 정상적인 이성, 정상적인 사유를 가진 육신으로 실체화한 것이다. ‘실체화’란 하나님이 사람이 되고, 영이 육신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좀 더 명확하게 말하자면, 하나님 자신이 정상 인성을 지닌 육신에 거하면서 그 육신을 통해 신성 사역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실체화’, 즉 말씀이 육신 된 것이다. 처음 성육신하였을 때는 사람을 위해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야 했다. 그가 하는 사역이 속량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인류를 속량하기 위해 사람에게 긍휼과 관용을 베풀어야 했다.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 그의 사역은 바로 사람을 위해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었다. 그 사역은 그가 사람을 죄와 더러움에서 구원할 것임을 예시했다. 은혜시대이기에 그는 사람의 병을 고쳐 주어야 했고, 그래서 이적과 기사를 나타냈다. 이러한 이적과 기사는 은혜시대 은혜의 상징이다. 은혜시대에는 주로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었기 때문에 평안과 기쁨, 또는 물질적인 축복이 은혜시대의 상징이자 예수를 믿는 상징이 되었다. 다시 말해, 사람의 병을 고쳐 주고 귀신을 쫓아내며,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은혜시대에 예수가 지닌 육신의 본능이었다. 영이 육신으로 실체화하여 행한 사역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시종 육신에 거하면서 그런 사역을 행했으며 육신을 초월하지는 않았다. 어떤 식으로 사람의 병을 고쳐 주었든 여전히 정상 인성을 지니고, 인성의 정상적인 삶을 살았다. 성육신의 시대에 육신이 영의 모든 사역을 한다고 말하는 이유는 그가 어떻게 사역하든 전부 육신으로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행한 사역 때문에 사람은 그의 육신이 육신의 본질을 완전히 지닌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의 육신이 이적을 나타낼 수 있으며, 아주 가끔 육신을 초월하는 사역을 할 때도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모두 그가 직분을 이행한 후에 나타난 일이다. 그가 40일 동안 시험을 받은 것이나 산 위에서 형상을 바꾼 것이 그 일례다. 그러므로 예수의 몸으로 성육신한 의의가 완전해지지 않았고, 일부만 완성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는 사역을 시작하기 전까지 육신의 모든 삶이 지극히 정상이었으나, 사역을 시작한 후로는 육신의 외형만 유지했다. 그가 하는 사역은 신성의 발현이었기 때문에 육신의 정상적인 기능을 뛰어넘었다. 어쨌든 하나님이 입은 육신인 만큼 육에 속하는 사람과 같지 않았다. 물론 그도 평상시에는 음식을 먹고, 옷을 입고, 잠을 자고, 집에 사는 등 정상적인 의식주 활동을 했고, 정상인의 이성과 두뇌 사유를 지니고 있었다. 사람이 보기에 그는 여전히 정상인이었으나, 그가 행한 사역은 아주 초자연적인 것이었다. 사실, 그는 어떤 사역이든 평범한 정상 인성으로 했다. 또한 그가 사역하는 때일수록 그의 이성은 더욱 정상적이었고, 그의 생각은 더욱 맑고 또렷했으며, 모든 정상인의 이성과 생각을 뛰어넘었다. 이러한 이성과 생각도 바로 성육신 하나님이 반드시 갖춰야 하는 것이다. 신성의 사역은 가장 정상적인 이성과 가장 맑고 또렷한 생각을 지닌 육신을 통해 발현되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육신으로 신성의 사역을 발현하는 목적을 이룰 수 있다. 예수는 33년 반 동안 세상에 있었다. 그는 33년 반 동안 시종일관 정상 인성을 유지했다. 다만 그가 3년 반 동안 행한 직분 사역 때문에 사람은 그가 매우 비범하고, 그전보다 훨씬 초자연적이라고 느꼈을 뿐이다. 사실, 예수는 직분을 이행하기 전이나 후나 정상 인성에 변함이 없었으며, 항상 똑같은 인성을 유지했다. 다만 직분을 이행하기 전과 후의 차이점들 때문에 사람들이 그의 육신에 대해 두 가지 다른 관점을 가지게 된 것이다. 사람들이 어떻게 보든, 성육신 하나님은 언제나 그가 본래 갖고 있던 정상 인성을 유지한다. 하나님은 성육신한 이상 육신으로 살아야 하고, 정상 인성의 육신으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직분을 이행하든 안 하든, 인성은 육신의 근본이므로 그의 육신이 지닌 정상 인성은 없어서는 안 된다. 직분을 시작하기 전, 예수의 육신은 완전하고 정상적이었으며, 정상인의 모든 활동을 해 왔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에게서 초자연적인 면이나 이적을 조금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때 그는 그저 하나님을 경배하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다. 다만 그는 다른 어떤 사람보다 더 간절하고 진실하게 추구했을 뿐이다. 이는 그의 가장 정상적인 인성의 모습이었다. 그는 직분을 이행하기 전까지 어떤 사역도 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은 그의 신분은 물론, 그의 육신의 남다른 점도 알아채지 못했다. 당시 그는 어떤 이적도 보이지 않았고, 하나님 자신의 어떤 사역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직분을 이행하기 시작한 후에도 여전히 정상 인성의 외형을 지니고 정상 인성의 이성으로 살았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 자신의 사역을 행하고, 그리스도의 직분을 이행하며, 평범한 인간, 즉 육에 속한 사람이 할 수 없는 사역을 시작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에게 정상 인성이 없다고 여겼으며, 그를 완전하고 정상적인 육신이 아닌 불완전한 육신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행한 사역으로 인해 사람들은 그를 정상 인성이 없는 육신의 하나님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인식은 사람이 성육신의 의의를 알지 못해서 생긴 것으로, 모두 잘못된 것이다. 사람들이 잘못된 인식을 갖게 된 이유는 육신에 거하는 하나님이 나타내는 것은 신성 사역이고, 그 사역은 정상 인성의 육신으로 발현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육신에 거하며, 인성을 통해 사역하면서 정상 인성이 가려졌기에, 사람들은 하나님께 신성만 있고 인성이 없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신성의 제약을 받는다. 비록 그가 육신에 거하고 있으나 그의 인성이 육에 속한 사람의 것과 완전히 같지는 않다. 그에게는 특정한 성격이 있으며, 그 성격 역시 신성의 제약을 받는다. 신성에는 연약함이 없다. 그리스도의 연약함이란 그의 인성을 두고 한 말이다. 이 연약함은 신성을 어느 정도 제약하지만 무한정 제약하는 것이 아니라 범위와 기한이 있다. 신성의 사역을 해야 할 때가 되면 인성이 어떠한지는 상관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전적으로 신성의 지배를 받는다. 인성의 정상 생활 이외에도 인성의 모든 활동은 신성의 영향을 받고, 신성에 좌우된다. 그리스도가 인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성의 사역과 서로 방해가 되지 않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인성이 신성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이 인성은 비록 처세에 미숙하지만 신성의 정상 사역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인성이 패괴되지 않았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인성이 직접적으로 신성에 지배되며, 그에게 보통 사람을 뛰어넘는 이성이 있음을 의미한다. 그의 인성은 신성이 지배하고 사역하기에 가장 적합한 인성이며, 신성의 사역을 가장 잘 나타내고 신성의 사역에 가장 잘 순종할 수 있는 인성이다. 하나님은 육신으로 사역하는 동안에도 여전히 육신을 입은 사람이 이행해야 할 본분을 이행하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경배드릴 수 있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본질이 있으며, 그의 신분은 하나님 자신의 신분이다. 그는 그저 하나의 피조물로 이 땅에 왔기에 피조물의 외형, 전에 없었던 인성을 갖게 되었을 뿐이다. 그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경배할 수 있는 것, 이는 하나님 자신의 어떠함이요, 사람이 따라 할 수 없는 것이다. 그의 신분이 하나님 자신임에도 그가 하나님께 경배드리는 것은 육신의 위치에서 행하는 일이므로 ‘그리스도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경배드린다’는 표현은 틀린 것이 아니다. 그가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 역시 그의 어떠함이다. 사람에게 요구하기 전에 그는 이미 그렇게 행하였다. 그는 절대로 자신은 ‘마음대로 행동하면서’ 다른 사람에게만 요구하지는 않는다. 이 모든 것이 그의 어떠함이기 때문이다. 그가 어떻게 사역하든 하나님을 거역할 리 없고, 그가 사람에게 어떻게 요구하든 사람이 행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날 리 없다. 그가 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고, 그의 경영을 위한 것이다. 신성을 지닌 그리스도는 어떤 사람보다도 높으므로 그는 피조물 중에서 최고의 권병을 갖고 있다. 그 권병은 신성이자 하나님 자신의 성품과 어떠함이다. 그 성품과 어떠함으로 그의 신분이 결정된다. 그러므로 그의 인성이 아무리 정상일지라도 그에게 하나님 자신의 신분이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가 어떤 위치에서 말씀하고 어떻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든, 그가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고는 할 수 없다.

성육신한 인자는 인성을 통해 하나님의 신성을 나타내고, 하나님의 뜻을 사람에게 전하고, 아울러 하나님의 뜻과 성품을 나타내는 방식으로 사람이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영계의 하나님을 사람에게 보여 주었다. 사람이 본 것은 형상을 지니고 뼈와 살이 있는 하나님 자신이었다. 그러므로 성육신한 인자는 하나님 자신의 신분, 지위, 형상, 성품, 소유와 어떠함 등등을 구체화하고 인간화한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에 있어서, 인자의 겉모습은 일정한 한계가 있지만, 인자의 본질과 소유와 어떠함은 하나님 자신의 신분과 지위를 완벽히 대변할 수 있었다. 단지 발현되는 형식에서 다소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인자의 인성이든 아니면 신성이든, 그가 하나님 자신의 신분과 지위를 대변한다는 것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다. 단지 하나님이 그 기간에 육신의 방식으로 사역하고, 육신의 위치에서 말씀했으며, 인자의 신분으로, 인자의 위치에서 인류를 마주했을 뿐이다. 그리하여 사람은 하나님이 사람들 가운데서 실제로 말씀하고 사역하는 것을 접하고 체험할 기회를 얻게 되었고, 또한 하나님의 신성을 알게 되었으며, 자신을 지극히 낮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높고 큼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또한 하나님의 진실함과 실제에 대해 초보적으로 알게 되었고, 초보적인 정의도 내릴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예수가 행한 사역과 그의 사역 방식, 말씀할 때의 위치는 영계에 있는 하나님의 참모습과 다소 다를지라도, 그의 모든 것은 사람이 본 적 없는 하나님 자신을 한 치 오차도 없이 대변하였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든, 어떤 위치에서 말씀하고 어떤 형상으로 사람을 마주하든, 하나님이 대표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 자신일 뿐이다. 그는 그 어떤 사람, 패괴된 인류 중의 그 어떤 사람도 대표할 리 없다. 하나님 자신은 곧 하나님 자신이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본질은 그 자체로 권병을 지니고 있지만, 그는 자신의 권병에서 나온 모든 것에 순종할 수도 있다. 영의 사역과 육신의 사역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영은 만물에 대한 권병을 지니고, 하나님의 본질이 있는 육신 역시 권병을 지니고 있지만, 육신에 거하는 하나님은 또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모든 사역을 할 수 있다. 이는 어느 누구도 이를 수 없고 또한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 자신이 바로 권병이지만, 그의 육신은 그의 권병에 순종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한다’는 말에 내포된 의미다. 하나님은 영이기 때문에 구원 사역을 할 수 있고, 사람이 되어도 마찬가지로 구원 사역을 할 수 있다. 어쨌든 하나님은 자신의 사역을 하고, 이를 방해하거나 교란하지 않으며, 모순되는 사역은 더욱 하지 않는다. 영과 육신이 하는 사역의 본질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또한 영이든 육신이든 모두 같은 뜻을 이루려 하며, 같은 사역을 경영하기 때문이다. 비록 영과 육신이 서로 아무 상관 없는 두 가지 속성을 지닌다고는 하나 그 본질은 동일하다. 모두 하나님 자신의 본질과 신분을 갖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 자신에게는 패역의 성분이 없으며, 하나님의 본질은 선하다. 그는 모든 아름다움과 선함의 발현이자 모든 사랑의 발현이다. 육신에 거하는 하나님이라 하더라도 하나님 아버지를 거역하는 일을 할 수는 없다. 희생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감수하지, 다른 선택의 여지를 두지 않는다. 하나님에게는 독선적이거나 자만하는 성분이 없고, 오만 방자하거나 교활한 성분도 없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들은 모두 사탄에게서 비롯된다. 사탄은 모든 추함과 악함의 근원이다. 사람이 사탄과 같은 속성을 갖게 된 이유는 사탄에 의해 패괴되고 가공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사탄에 의해 패괴되지 않았으므로 오직 하나님의 속성만 있을 뿐, 사탄의 속성은 없다. 하나님은 육신을 입고 생활할 때 사역이 아무리 어려워도, 그의 육신이 아무리 연약해져도 하나님 자신의 사역을 방해하는 일을 하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저버리며 거역하는 일은 더더욱 저지르지 않는다. 육신이 고통받을지언정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위배되는 일은 하지 않는다. 이는 예수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한 것과 같다. 사람에게는 자신의 선택이 있지만 그리스도에게는 자신의 선택이 없다. 그리스도가 하나님 자신의 신분을 지니고 있다고는 하나 그는 똑같이 육신의 위치에 서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 아버지가 준 사명을 완수한다. 이는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이다. 사탄에게서 비롯된 것에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는 본질만 있을 뿐 하나님의 본질이 있을 수 없다. 그런 존재는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기꺼이 순종하지도 못한다. 그리스도를 제외한 사람은 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저지를 수 있다. 그뿐 아니라 사람은 아무도 하나님이 맡긴 사역을 직접 담당할 수 없고, 하나님의 경영을 자신의 당연한 본분으로 삼아 이행할 수도 없다.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본질이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은 사탄의 속성이다. 이 두 가지 속성은 공존할 수 없으므로 사탄의 속성을 가진 자를 그리스도라 부를 수는 없다. 사람이 하나님의 사역을 대신할 수 없는 이유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본질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 사역하는 것은 개인의 이익과 앞날을 위함이지만 그리스도의 사역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영이 입은 육신은 하나님 자신의 고유한 육신이다.
하나님의 영은 지고지상하고 전능하며 거룩하고 공의롭다.
그러므로 그의 육신 역시 마찬가지로 지고지상하고 전능하며 거룩하고 공의롭다. 이 같은 육신은 오로지 공의로운 일, 인류에게 유익한 일, 거룩하고 빛나며 위대한 일만 할 수 있다. 진리와 도의에 어긋나는 일을 할 리 없고, 하나님의 영을 배반하는 일을 할 리는 더더욱 없다. 하나님의 영은 거룩하므로 그의 육신 또한 사탄에 의해 패괴될 수 없으며, 그것은 사람과는 다른 본질을 가진 육신이다. 사탄이 패괴시키는 것은 사람이지, 하나님이 아니며, 게다가 사탄은 하나님 자신의 육신을 패괴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과 그리스도가 같은 공간에서 살아도 사람만 사탄에게 점령되고, 이용당하고, 해를 입는 것이다. 반면 그리스도는 절대 사탄에게 패괴되지 않는다. 사탄은 영원히 가장 높은 곳에 이를 수 없고, 하나님께 접근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너희는 나를 배반하는 존재는 오직 사탄에게 패괴된 인류뿐이며, 이 문제는 그리스도와 영원히 하등의 관계가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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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육신이란?
육체(car) 안에(in)  태어나는 것을(natus) 의미합니다.

요한복음 1:14
로마서 8:3
골로새서 2:9
디모데전서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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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드 존스 교리강좌(25) 독생자의 성육신


구속의 교리를 살펴볼 때 우리 주님이시며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집중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를 접할 때 첫 번째로 마주치는 것은 바로 이 성육신(聖肉身, incarnation)의 교리이며 이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 복되신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 스스로 인간의 본성을 지니셨다는 일반적인 진술을 했다.

이 말의 의미는 새로운 인격이 발생하였다는 의미가 아니며 영원하신 성자 하나님이 성육신 하셨다는 의미이다.

우리의 구원과 영원한 운명이 주 예수 그리스도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에 의해 결정된다면, 그 분에 대한 정확하고 분명한 개념과 사고를 갖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신약성경과 교회사를 보면 마귀의 주된 관심은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세주 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및 사역에 대해 사람들을 미혹시키는데 최고의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점만 보더라도 성육신의 교리가 얼마나 중요하고 정확하게 아는 것이 왜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성육신 교리의 요점

1. 성육신(聖肉身) 교리는 삼위일체의 교리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삼위일체의 교리를 믿지 않는 자는 절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어떤 의미에서는 전체 기독교가 복되신 삼위일체 교리에 의해 좌우된다. 삼위일체 교리를 믿지 못하는 자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는 이유는 그가 구속의 교리 또한 믿을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성부, 성자, 성령 삼위로 존재하신다는 것을 항상 자각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성자의 인격을 논함으로 알게 된다.

2. 성육신은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 육신이 되신 것이다.

성육신 교리는 성삼위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인간이 되었다는 말이 아니고 성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 육신을 입고 사람이 되었다는 말이다. 성경은 이것을 ‘말씀이 육신이 되어’(요 1:14)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막연히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말하고 우리가 말하는 내용에 항상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3. 예수 그리스도가 취하신 것은 진정한 육체였다.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 취하신 것은 단순한 겉모습이나 형태가 아닌 진정한 성육신이었다. 예수님은 실제로 육체(肉體)로 오셨다. 영지주의 이단들은 예수님이 단순히 육체의 모양만 가졌다고 주장하였다. 몸의 형체만 있을 뿐 허깨비 같은 몸이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실제 육체로 오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거하신 것이다.

4. 성육신에 의해 새로운 인격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성육신에 의해 새로운 인격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 인간의 본성을 입으신 것이다. 그러나 성육신 교리는 인간적 본성과 결합해 한 인간을 형성한 것이 단순한 신적 본성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것을 초대교회 이후 수 세기동안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신성과 인성이 결합해 혼합되고 새로운 인격을 형성한 존재로 이해하였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인간의 본성을 입으신 분은 영원하신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셨다. 이 교리가 가르치는 바는 이 영원하신 두 번째 위격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이다.

5. 성육신에 의해 성자의 인격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어지는 요점은 성육신 교리는 성자의 인격에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가르치지도, 그런 개념을 포함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겉모습에는 변화가 있었고 스스로를 나타내시는 상태에는 변화가 있었으나 성자의 인격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분은 언제나 동일한 위격이시다. 동정녀 마리아의 태중에서도, 힘없는 아기의 모습으로 구유에 누워계실 때도 그분은 언제나 성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시다.

6. 성육신은 성자가 사람으로 변화했다는 의미도 아니다.

우리는 성자가 사람으로 변화했다는 인상을 주도록 이 교리를 설명해선 절대로 안 된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the word was made flesh, and dwelt among us)라는 문구에서 우리는 ‘was made’라는 문구가 종종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으로 변화했다고 믿게 만든다. 이것은 번역이 최선의 상태로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생긴 오해다.

이 구절의 진정한 의미는 ‘그가 육신이 되어’(he becomes flesh) 또는 ‘그가 육신을 입어’(he took on flesh)로 번역되어야 한다. ‘made’ 즉 ‘만들다’라는 개념은 일종의 변화의 의미를 암시하는데 이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육신으로 오신 것은 영원하신 두 번째 위격이시다. 이것이 올바른 표현이다.

7. 성육신에서 성자는 모양이 아닌 진정한 인간의 본성을 입으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히 인간 본성의 모양만 취하신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인간의 본성을 취하셨다. 구약 성경에는 천사들이 다양한 사람들에게 나타난 기록이 있는데 이 천사들은 분명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났다고 기록되어있다. 여기서 천사들이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났다고 말할 때 우리는 성육신이 아니라 그들의 모양을 이야기 한 것이다. 천사들의 본성이 변하거나 무엇인가 추가된 것이 아니라 단지 모양만을 취했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도 이런 방법으로 여러 차례 구약에 나타나신 것이 기록되어 있다. 즉 언약의 사자로 나타나셨다. 구약에서 언약의 사자는 분명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분은 한번 이상 여러 사람들에게 사람의 형태로 나타나셨는데 이를 ‘신의 현현’(顯現, theophany)이라고 한다. 신의 현현은 성육신과는 완전히 다르다. 신의 현현은 잠시 동안만 사람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성육신 교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모양이 아닌 진정한 인간의 본성을 입으셨다고 주장한다.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며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히 2:14)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히 2:16)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나니 이는 예수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요이 7) 예수님이 영으로 오셨다거나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으실 때만 메시아가 그에게로 들어왔다가 십자가에서 다시 떠났다고 주장하는 무리들이 있다. 이런 주장은 분명히 적그리스도의 거짓말이라고 단언한다.

8. 성육신에서 성자는 완전한 인성을 취하셨다.

성육신 교리는 우리 주님이 완전한 인성을 입으셨다고 주장한다. 본성의 일부가 아닌 완전한 사람의 본성을 입으신 것이다. 단순히 몸만 입으신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어떤 사람들은 성자가 단순히 몸만 입으셨다고 주장하거나 몸과 동물적인 혼만 성자가 취하시고 영은 영원하신 위격에 의해 공급받았다고 주장한다. 이 역시 이단적 주장이다. 성육신 교리는 성자가 완전한 인성, 즉 영을 포함한 몸과 혼을 취하신 참된 사람이었다고 가르친다.

9.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은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취하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같은 인성을 동정녀 마리아에게 취하셨다. 이 말은 새로운 인성이 성자를 위해 창조되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새로운 인성의 창조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이 강조하는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참으로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이 되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마 1:1) 새로운 인성이 창조되었다면 절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 될 수 없다.

이처럼 성육신 교리가 너무도 중요한 이유는 우리의 구속에 대한 교리 즉 구원에 대한 교리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인성을 입지 않으셨다면 그는 우리를 구원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2장에 분명하게 밝히듯 우리가 혈육에 속한 존재이기 때문에 예수님도 우리와 같이 되셔야 했다. 그것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우리가 여기서 성육신 교리가 조금이라도 변질되는 것을 용인한다면 우리 자신의 구속에 대한 교리를 전혀 말이 되지 않는 것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다.


동정녀(童貞女) 탄생

알마(5959) עַלְמָה

עַלְמָה

1. 결혼 적령기의 처녀,  2. 복수형 ׃עֲלָמוֹת 시 68:26,  3. 대상 15:20

발음 / 알마(ʽalmâh)

  • 관련 성경 / 여자(창 24:43, 잠 30:19), 소녀(출 2:8), 처녀(시 68:25, 아 1:3, 사 7:14), 시녀(아 6:8)
  • 구약 성경 / 7회 사용
  • 동정녀이사야 7:14에서 "처녀(알마)"를 마태복음 1:23에서 동정녀라고 번역한 것이다.

    알마란 히브리어 "처녀"를 의미하기도 하며 "여인" 즉 "젊은 여자"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처녀라고 번역한 이유는 구약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하는 70인역에서 처녀를 "파르데노스(

    강림(降臨)과 휴거(携擧, Rapture) 데살로니가전서 4:16-17


    강림(降臨)과 휴거(携擧, Rapture) 데살로니가전서 4:16-17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降臨)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携擧)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도입 이야기)

     문화 차이에 의해서 경험한 이야기

     미국에서 미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두 자녀들이 미국에서 유치원 과정을 마치고 부모님이 한국에서 사업을 하게 되어 한국에 정착한 후 초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한번은 아이들이 선생님으로부터 꾸중을 듣게 되었는데 두 아이들이 선생님을 쳐다보자 선생님은 버릇없이 선생님을 쳐다보느냐 하며 호되게 야단쳤다고 합니다. 얼마 후 집에서 부모님으로부터 꾸중을 듣게 되어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부모님의 야단치는 이야기를 듣는데 이번에는 왜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않느냐 하며 꾸짖습니다. 

     두 아이들은 한국과 미국의 문화 차이에 혼돈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에도 이와 비슷한 현상을 경험하게 됩니다. 

     강림이란 단어는 한글성경에서 39회 사용되었습니다.

     휴거라는 단어는 단 한 번도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두 불구하고 한국교회와 성도들은 휴거에 대한 신앙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배경을 생각하며 "강림과 휴거"라는 주제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 강림(降臨) 데살로니가전서 4:16


    헬라어 성경에 "강림"으로 번역 된 단어가 세 가지입니다.

    카타바이노, 파루시아, 에르코마이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携擧)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For the Lord himself will come down from heaven, with a loud command, with the voice of the archangel and with the trumpet call of God, and the dead in Christ will rise first.


    강림이란 "내릴 강(降)" "임할 림(臨)"

    한글성경에 39회(구약 23회, 신약 16회) 

    특히 데살로니가전서와 후서에서 9회(전서 6회, 후서 3회)

    NIV 성경 - come down

    헬라어 - 카타바이노(καταβαίνω) / 카타(κατά) + 바이노(βαίνω) / down + stepping, walking

    Strong's Greek: 939. βάσις (basis) -- a footStrong's Exhaustive Concordance. foot. From baino(to walk)

    basis : a foot

    Original Word : βάσις, εως, ἡ

    Strong's Greek: 1684. ἐμβαίνω (embainó) -- to walk on, to

    Strong's Concordance. embainó: to walk on, to step into, ie embark. Original Word:

    ἐμβαίνω Part of Speech: Verb Transliteration: embainó Phonetic

    (예) 누가복음 3:22(강림, 카타바이노), 데살로니가전서 4:16(카타바이노)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 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예) 고린도전서 15:23(강림, 파루시아)  παρουσία(parousia. 3952) a presence, a coming, 요한일서 2:28(파루시아), 베드로후서 1:16(파루시아), 3:4(파루시아), 야고보서 5:7-8(파루시아), 데살로니가후서 2:1(파루시아), 데살로니가후서 2:8(파루시아), 데살로니가전서 2:19(파루시아), 데살로니가전서 3:13(파루시아), 데살로니가전서 4:15(파루시아)


    (예) 데살로니가후서 1:10(에르코마이) ἔρχομαι(erchomai. 2064)  to come, go

     데살로니가전서 1:10(에르코마이),


    그 날에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얻으시고 

    모든 믿는 자에게서 기이히 여김을 얻으시리라 (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휴거(携擧, Rapture) 


    데살로니가전서 4:17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携擧)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After that, we who are still alive and are left will be caught up together with them in the clouds to meet the Lord in the air.  And so we will be with the Lord forever.    


    첫째, 휴거(Rapture)란 무엇인가?

    휴거는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성도들을 불러올리는 사건을 말합니다. 

    그런데 휴거라는 단어가 성경에는 없습니다. 

    그러면 왜 휴거라는 단어를 사용할까요? 


    한글 성경을 처음 번역할 때 중국의 한문 성경을 참조하여 한글로 번역했습니다. 

    당시 한글은 언문(言文)이라며 아녀자들만 사용하는 아주 천한 언어라고 하여 선비들은 주로 한문을 사용했습니다.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기 위해서 자연스럽게 한문 성경을 기본으로 사용하여 한글로 번역했습니다.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라는 말씀에서 “끌어 올려(caught up)” 라는 말씀을 한문 성경에서 “휴거(携擧)”라고 합니다. 

    따라서 공중으로 끌어 올려라는 문장을 간략하게 "휴거(携擧)" 라고 사용한 것입니다.


    둘째, 휴거(Rapture)의 의미는 무엇인가?


    1. 한자의 의미


    “휴거(携擧)”라는 한자는 “이끌 휴(携)” “들 거(擧)” 라는 훈으로 “이끌려 들려지다”라는 뜻입니다.


    2. 영어의 의미


    휴거를 영어로  “랩처(Rapture)” 라고 합니다.

    “랩처(Rapture)”의 뜻은 “환희(delight), 열중, 넋을 잃음”입니다.

    따라서 공중으로 끌어 올려간다는 의미는 전혀 없습니다.

    그러면 왜 영어에서 휴거를 랩처라고 하였는가?


    라틴어 성경에서 "공중으로 끌어 올려" 라는 말씀을 “라피오(rapio)” 또는 “라페레(Rapere)” 라고 합니다.

    “라피오(rapio)”를 영어로 번역할 때 “랩처(rapture)” 라고 합니다. 


    3. 헬라어의 의미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caught up)”는 헬라어로 “하르파게소메다(ἁρπαγησόμεθα)”라고 합니다.

    "하르파게소메다"의 동사 원형은 "하르파조(ἁρπάζω)" 라고 합니다.


    "하르파조(ἁρπάζω. harpazó. 726)"를 영어로 “to snach away” 라고 하며 그 의미는 “낚아챈다, 빼앗는다”는 뜻입니다(to seize, catch up, snatch away)


    * 끌어올려 - 수동태(Caught up)

    “갑작스럽게 잡아서 옮기다.” “강한 힘을 가지고 강하게 빼앗아 가다”, “재빠르게 자기에게 끌어들이다”

    * 데려감을 당하고 (마 24:40∼41, 눅 17:34-35) - 수동태(Taken away) 


    그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두 남자가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함께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 데려감 / “파라람바노(paralambano.παραλαμβάνω. 3880 )" : to receive from, “가까이 오도록 취하다”, “자기 자신에게로 이끌다.


    * 버려둠 / "아피헤미(aphiémi.  ἀφίημι. 863)": to send away, leave alone.


    셋째, 성경에서 휴거(하르파조, ἁρπάζω) 단어가 사용된 사례를 살펴봅니다.



    1. 요한복음 6:15 - 붙들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예수님을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


    2. 요한복음 10:12 - 물어 가다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도 제 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헤치느니라(물어 가고) 라는 말씀에서 “늑탈하고” 또는 "물어 가고" 라는 뜻으로 사용합니다.


    3. 요한복음 10:28 - 빼앗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에서 "빼앗을" 이란 뜻으로 사용합니다.


    4. 요한계시록 12:5 - 올려가다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GRK : σιδηρᾷ καὶ ἡρπάσθη τὸ τέκνον

    NAS : and her child was caught up to God

    KJV : her child was caught up unto God,

    INT : iron and was caught away the child  


    5. 유다서 1:23 - 끌어내다


    또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또 어떤 자를 그 육체로 더럽힌 옷까지도 미워하되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

    GRK : ἐκ πυρὸς ἁρπάζοντες οὓς δὲ

    NAS : save others, snatching them out of the fire;

    KJV : fear, pulling [them] out of

    INT : out of fire snatching [them] others moreover  


    6. 데살로니가전서 4:17 - 끌어 올리다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GRK : σὺν αὐτοῖς ἁρπαγησόμεθα ἐν νεφέλαις

    NAS : and remain will be caught up together

    KJV : [and] remain shall be caught up together

    INT : with them will be caught away in [the] clouds  


    성경 여러 구절에서 "끌어 올려(하르파조, ἁρπάζω)" 라는 의미를 살펴본 결과는 "공중으로 끌어 올려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악한 세력의 손에 끌려 갈 수 없다."라는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휴거라는 것에 열광할 이유가 없습니다.

    구약의 마지막 절(말라기 4:5~6)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엘리야는 선지자 엘리야가 아니라 장차 오실 메시아 즉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결론은 메시아이신 엘리야가 반드시 오실 것이라는 예언이라고 하겠습니다.


    신약의 마지막 절(요한계시록 22:20~21)


    이것들을 증거 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찌어다. 아멘.  


    신약의 결론은 구약의 마지막 책 말라기 4장에서 오실 메시아로서 엘리야로 오실 것을 예언했던 그 메시아가 신약에서 이 세상에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셨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후에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하늘로 올라가셨는데 다시 오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재림(再臨)이라고 합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의 사건을 요한계시록 21:1-2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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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거에 대한 비성경적인 신앙 

    칠년 대환난을 당할 때 환난의 시기를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공중으로 들림을 받는 것이다. 


    첫째, 대환난 시대를 피할 수 있다.


    요한계시록을 이해할 때 공중 재림은 7년 대환난 시대에 공중으로 들려올라 가므로 환난의 때를 아주 평안하게 지낼 수 있다고 믿는다.


    둘째, 공중으로 끌어 올려에 대한 오해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공중으로 끌어 올림을 받는다는 것은 실제로 공중으로 들려올라가는 문자적인 의미가 아니다.

    이와 같은 가르침은 사도 바울의 가르침이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악한 것에 의해서 빼앗길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이다. 


    선입견(先入見, Preoccupation)


    선입견(先入見, Preoccupation) : 사람, 사물(), 주의() 등()에 대()하여 실제()의 경험()보다 앞서, 미리 마음속에 부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으로 해서 형성()된 고정적()인 관념()이나 견해(

    편견(偏見, prejudice) : 공정()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 


    목회를 시작하고 얼마 지났을 때 낯선 젊은이가 찾아와서 결혼 주례를 부탁했습니다. 왜 나를 찾아왔느냐? 하고 물었더니 마을 다른 교회에 찾아가서 주례를 부탁했는데 세례를 받았느냐? 어느 교회에 다니느냐? 이런 질문을 하므로 세례도 받지 않았고 교회에 다니지도 않는다고 하였더니 주례를 맡을 수 없다고 하여 찾아온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묻기를 그러면 나는 주례를 맡아줄 것 같은가? 라고 물었더니 말이 없습니다. 그 젊은이에게 주례를 맡겠다고 약속을 하고 결혼식을 마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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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입견(先入見)과 신앙(信仰)

    성경을 읽으면서 한 가지 장애물이 있습니다. 그 장애물을 “선입견”이라고 하겠습니다.

    선입견(先入見, preoccupation)이란 “어떤 사람이나 사물 또는 주의나 주장에 대하여, 직접 경험하지 않은 상태에서 미리 마음속에 굳어진 견해.”

    선입견의 증거 중 하나는 예수님의 족보에 소개된 여자의 이름이라고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기억하고 있는 예수님의 족보에 기록된 여자의 이름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족보는 마태복음 1장과 누가복음 3장에서 소개됩니다.
    마태복음 족보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시작합니다. 위로부터 아래로 내려오는 족보입니다. 누가복음의 족보는 아래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는 족보입니다.

    마태복음 1장에 소개된 예수님의 족보에는 유대인의 족보에는 여자의 이름은 기록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족보에 여인들의 이름이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기록된 여자들의 이름은 누구일까요?

    첫째는 유다의 며느리 다말
    둘째는 여리고 성의 기생 라합
    셋째는 모압 여인 룻
    넷째는 우리아의 아내(밧세바)
    다섯째는 마리아(예수의 모친)

    밧세바라는 이름은 선입견에 의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아의 아내라고 소개했기 때문입니다. 밧세바라는 이름은 우리아의 아내라는 기록에 의해서 드러낸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네 명의 여자와 우리아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아 라는 이름이 왜 기록되었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바셋바라는 이름을 떠 올리는 것이 선입견 때문입니다. 선입견으로 말씀을 읽으면 “우리아”에 대한 의미를 지나쳐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첫째, 다말(3절)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유다의 며느리였던 다말에 대해 살펴봅시다. 다말은 원래 유다의 장자였던 엘의 아내였습니다. 그런데 엘이 악한 짓을 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일찍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아들도 없이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었습니다. 그 당시 유대법에 따르면 남편이 일찍 죽고 아들 없이 과부가 되면 남편의 형제 중에 한 사람이 그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여 죽은 사람의 대를 이어가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결혼제도를 “계대혼인법” 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엘의 동생 오난이 형수를 아내로 맞이했지만 그는 다말에게서 낳는 아들이 자기 아들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다말과의 잠자리를 가졌지만 형의 아들을 낳는 것이 싫어서 땅에 설정을 했습니다. 오난의 사건에서 오나니즘(onanism, 성교중절)이라는 영어 단어가 유래됩니다.

    그 일로 인해 그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죽임을 당합니다. 유다에게는 엘과 오난 외에 셀라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그는 아직 어렸습니다. 순서에 따르면 셀라가 다말을 아내로 맞이해야 했지만 유다는 막내아들 셀라를 잃을까 두려워해서 다말을 친정집에 보내서 셀라가 자랄 때까지 기다리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셀라가 다 성장했는데도 다말을 그의 아내로 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말은 자식을 얻을 생각으로 시아버지 유다를 유혹할 생각을 품었습니다. 그래서 창녀의 모습으로 변장을 한 후 시아버지 유다를 유혹하여 그와 동침하게 됩니다. 유다는 면박으로 얼굴을 가린 창녀가 며느리 다말인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 3개월이 지난 후 다말이 잉태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그녀를 불사르게 하려고 했으나 자기가 맡긴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보고 자기의 실수를 인정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다말이 쌍둥이를 낳습니다. 그들 중에 한 사람인 베레스가 예수님의 직접적인 조상이 됩니다(창 38장)

    둘째, 라합(5절)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예수님의 족보에 나오는 여인은 기생 라합 입니다. 그녀는 살몬의 아내였습니다. 기생 라합은 여리고성의 기생이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의 입장에서 볼 때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녀는 가나안 땅을 정찰하러 온 이스라엘 정탐꾼을 숨겨 주었습니다. 그 일로 인해 그는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성을 점령할 때 살아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 살몬과 결혼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다윗왕의 조상인 보아스를 낳게 됩니다. 참 동화 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이방여자로서 예수님의 조상 중의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여호수아 6장)

    셋째, 룻(5절)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룻은 모압 여인입니다. 룻기를 읽어 보면 그녀는 원래 베들레헴에서 모압 지방으로 이주한 나오미의 며느리였지만 남편이 일찍 죽는 바람에 젊어서 과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시어머니 나오미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돌아왔다가 죽은 남편의 가까운 친족인 보아스와 재혼을 해서 예수님의 조상 중의 한 사람이 됩니다.

    넷째, 밧세바(6절)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예수님의 족보에 나오는 여인은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 입니다. 사무엘서에 보면 다윗 왕이 부하 장수 우리야가 전쟁터에 나가 있는 동안에 그의 아내 밧세바가 한 밤중에 목욕하는 장면을 보고 그녀를 데려다가 간음을 저지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실이 발각될 것이 두려워 우리아를 전쟁터의 최전선에 내보내 죽게 만듭니다. 그리고 밧세바를 후궁으로 맞아들입니다. 나중에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서 솔로몬 왕이 태어납니다. 예수님의 족보에는 밧세바라는 이름은 직접 거론되지 않고 우리아의 아내라고만 표현되었습니다.

    다섯째, 마리아(16절)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마리아는 요셉과 정혼하였으나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하여 예수님을 낳습니다. 이것은 이사야 7:14절에 나오는 예언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이 다섯명의 여인들은 평범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인생에 큰 굴곡이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 분들의 이름을 자세히 족보에 기록한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 여인들 중에는 이방인도 있고, 간음한 자도 있고, 옳지 않은 방법으로 시아버지와 잠자리를 같이한 자도 있고, 자기 남편을 죽인 자의 아내가 된 자도 있습니다. 인간이 알고 있는 윤리의식이나 상식을 뛰어 넘은 극적인 일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입니다. 파란만장한 다섯여인들의 삶이지만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사역은 오늘날에도 파란만장한 우리들의 삶을 통해 계속해서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들 중에 하나님 보시기에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여러 가지 결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손에 붙들린 사람은 예수의 피로 그 모든 죄를 용서 받고 주님 나라를 위해 귀하게 사용되는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금그릇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사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은그릇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사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비롯 질그릇이지만 내 안에 예수께서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치 아니하리라.”(히10:17)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8:1)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 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사44:22)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를 자녀로 삼으시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그의 나라를 위해 충성된 일군이 되어야 합니다. 그 일을 위해 고난 받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고, 다른 사람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 성령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이 시간에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려 드립시다. 그리고 영혼구원, 제자양육, 성령충만을 위해 함께 기도합시다. 하나님이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면서 그분께 감사와 영광의 찬송을 올려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헷 사람 우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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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론

    마태복음은 예수의 족보로 시작된다 (마 1:1). 마태복음의 족보는 누가복음 3장 23-38절에 나오는 족보와는 달리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 다윗 왕을 거쳐 각 대를 지나 메시아라고 불리는 예수에게서 정점을 이룬다. 마태는 왜 예수의 족보로 그의 복음서를 시작한 것일까? 마태가 이 족보를 복음서의 서두에 배치한 것은 분명히 어떤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족보를 기록한 마태의 의도가 파악되면 마태복음 전체의 이해에도 커다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히브리인은 관례상 족보에 여자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마태복음의 족보에서는 예수의 모친 마리아를 제외하고도 각기 다른 평판을 가진 네 명의 구약 여인의 이름이 등장한다. 다말, 라합, 룻과 우리야의 아내가 예수의 족보에 언급된 것인데 마태가 이렇게 특별히 모계 쪽의 이름을 언급했다는 것은 메시아를 그려내는 데 있어 마태가 의도하는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마태는 왜 메시아의 가부장적인 족보에 구약의 네 명의 여인 이름을 포함시킨 것인가?

    웨첸(H.C. Waectjen)은 마태복음의 족보가 예수의 신적, 혈통적 기원과 관계되어 있으며 또한 마태복음의 족보는 마태복음을 해석하는 열쇠가 된다고 하면서 마태복음에서 족보가 차지하는 비중을 높게 평가한다. 이러한 웨첸의 견해에 동의한다면 마태복음에 나오는 족보의 특징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할 때, 마태복음 전체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따른다고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필자는 마태복음의 서론 중에서도 서론인 족보를 연구함에 있어 각기 평판이 다른 구약성경에 나오는 네 여인의 이름이 마태복음의 족보에 등장하는 이유를 연구하여 그 네 이름을 족보에 기록한 마태의 신학적 의도를 밝혀 보고자 한다.

    마태복음에서 예수의 족보로 시작한 마태의 의도를 먼저 살펴보고, 마태가 그 족보에 구약의 네 여인의 이름을 인용한 의도를 중점적으로 연구하되, 문헌 조사를 통하여 선행 연구를 조사하여 그 내용을 살피고, 동시에 그 비판적 고찰을 시도하여 귀납적 방법을 통해 결론을 얻고자 한다.


    2. 네 여인에 대한 구약 기사

    네 명의 여성 각각이 처한 구약 시대의 배경뿐만 아니라 그 구조적 지위와 결과에 초점을 두어 연구해 보고자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마태복음에서뿐만 아니라 예수의 족보에서 네 여인의 역할을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2.1. 다말(Tamar)

    다말은 예수의 족보 조상들의 목록에서 언급된 첫 번째 여자이다. 예수 족보에서 언급된 조상들은 예수가 그리스도이며, 다윗의 자손이며, 또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족보의 서두를 보다 구체화시키기 위해 기록된 것이다. 족보의 흐름에서 어머니로서의 다말은 베레스와 세라의 아버지인 유다라는 이름에 덧붙여져서 나온다. 아브라함은 이삭의 아버지요, 이삭은 야곱의 아버지이며,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의 아버지요 하는 식으로 유다 이전의 기록은 부계적인 흐름을 따라 기록하였다.

    유대적 문헌에 정통한 독자들에게 다말이라는 이름을 끼워 넣음을 통해 마태가 암시하려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사라, 리브가, 레아나 라헬 등 대족장의 어머니 이름이 아니고 다말을 명백하게 언급한 이유는 무엇일까?

    창세기 38장에서 보면 다말이 유다에게 베레스와 세라를 낳은 것은 다소 비정상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다말은 유다의 부인이 아니라 그의 며느리였기 때문이다. 유다는 결국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게 된다. 다말이 가계도에 명백히 언급된 것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에게 끼친 공로 때문이다.

    유다는 며느리 다말이 자기로 인해 잉태하였다는 사실을 안 후에 창세기 38장 26절에서 다음을 인정했다: ?다말이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김기동은 유대 사회 풍습에서 보면 다말은 결혼한 여자로서 남편의 가문에 자식을 낳아 혈통을 잇게 하려는 책임을 다하기 위해 혼신을 다한 여자라고 본다. 혈통을 잇고자 하는 사명감에 투철한 다말로 인해 유다의 자손이 끊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이며, 마침내 예수에게까지 그 계보가 이어져 내려오게 된 것이다.

    다말과 같은 계대혼의 경우는 요한복음(요 4:1-42)의 사마리아 여인에게서도 나타난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남편이 다섯이 있었다 하여 부정한 여인인 것처럼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예수는 그 여인에게 ?네 말이 참되도다”(요 4:18)라고 하시며 그녀의 고백을 인정하셨다. ‘참’이란 계시의 전통을 내포하고 있는 말이다. 남편은 법적 용어이다. 다섯 남자와 잤다고 해서 그들을 남편이라 한 것이 아니라, 그녀가 결혼해서 살았던 다섯 사람은 정식 남편이었다. 사마리아 여인은 성적으로 문란한 여자가 아니라 오히려 남편의 혈통을 이으려는 책임감 있는 신령한 여인이었다. 다말의 행위도 성적 범죄라기보다는 혈통을 이으려는 책임감 있는 믿음의 행위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2.2. 라합(Rahab)

    라합은 ‘넓다’라는 의미인데 여리고에 있는 가나안인 기생이었다. 여호수아 2장에서 6장까지 보면 라합은 여리고 성의 기생으로 누구보다도 더 가나안의 우상 종교, 성적 문화에 빠져있던 여인이었다. 그러나 여호수아가 파견한 이스라엘의 두 정탐군을 선대하여 도와 준 행위로 말미암아(수 2:1) 여리고가 함락될 때 그녀와 가족, 친척 모두가 구원을 얻었다(수 6:17).

    가나안 여자인 라합을 아브라함의 계보에 포함시킨 것은 이 땅의 모든 백성이 아브라함 안에서 복을 받으리라 하는 보편적인 약속이 이루어짐을 나타낸다. 라합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는 이방인의 첫 번째 예로서 포함되었다. 라합의 믿음으로 인해 라합의 가족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땅에 살게 될 그녀에게 속한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얻고, 동시에 아브라함의 약속을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라합은 히브리서 11장 31절과 야고보서 2장 25절에 보면 칭찬할만한 신앙의 용사로 인정되었다.


    2.3. 룻(Ruth)

    가나안 족속인 라합의 뒤를 이어 모압 족속이었던 룻은 아브라함의 약속을 포괄적이면서도 보편적 차원으로 강화시켰다. 라합과 같이 룻은 자신의 믿음에 의해 자기 자신을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생각하였다. 룻의 시어머니인 유대 여자 나오미가 룻에게 모압 족속에게로 돌아가 그 신을 섬기라고 했을 때 룻은 자신의 믿음을 고백하였다(룻 1:16).

    유다와 다말이 죄악된 방식으로 연합한 것과는 달리 라합과 룻 두 여인은 모두 합법적인 남편과 죄가 없는 연합을 가졌다. 비록 라합이 기생으로 알려졌으나, 라합이 살몬과 결혼한 사실이 성경적 전통에 전혀 위배되지 않으며, 또한 어떠한 죄도 저지르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마태에 따르면 라합은 보아스의 어머니가 되는데 보아스는 결과적으로 룻의 남편이 된다. 유다가 자신의 며느리인 다말과 부끄러운 연합을 함으로써 죄를 지은 것에 비하면 오히려 보아스는 나오미의 과부된 며느리인 룻과 연합함으로써 칭송을 받았다. 베들레헴의 사람들은 보아스의 결혼이 유다로부터 시작된 다윗의 명맥을 계속해서 이어가기를 희망하는 말을 보아스에게 하였다: “여호와께서 이 소년 여자로 네게 후사를 주사 네 집으로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룻 4:12). 예수의 족보에 다말과 함께 언급되고 있는 유다 이 후에 보아스의 어머니로서의 라합과 보아스의 부인이며 오벳의 어머니로서 룻을 언급함으로써 다윗으로 혈통이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4. 우리야(Uriah)의 아내

    ‘왕’인 다윗의 출생을 극적으로 언급한 후에 예수의 족보에는 네 번째 여인이 나타나게 된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마 1:6) - 다윗은 솔로몬의 아버지가 되었다.

    ‘우리야의 아내’라는 명칭은 ‘밧세바’라는 명칭보다도 다윗의 죄악성을 더욱 강조한다. 그 이름은 다윗이 간음했다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야를 살해했음을 기억나게 하기 때문이다. 다윗의 조상인 라합이나 룻에 의해 기억될 수 있는 모범적인 선한 행동과는 반대로 다윗의 사악한 행동은 다말에 의해 생각나는 다윗의 조상 유다에 의해 저질러진 죄악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음을 나타낸다.

    참으로 유다에 의해 시작되고 다윗 왕과 그 후대의 왕들에 의해 더욱 확대된 악함으로 인해 ‘여고냐와 그의 형제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가게 되는 비참한 결과를 맞이하게 되었다.

    예수의 족보는 다섯 번째이며 마지막 여성의 출현으로 최고도에 달하게 된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마 1:16). 이전의 네 여인이 예수가 다윗의 자손이요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는 유일한 도구였던 것에 반해, 마리아는 예수가 그리스도가 되게 하는 특별한 도구가 된다. 비록 마리아가 성령의 거룩한 역사로 인해 예수를 임신하게 되었을지라도, 요셉은 공식적으로 예수에게 다윗의 지위를 부여하게 된다. 즉, 예수의 법적인 아버지 요셉을 통하여 예수가 메시아로서 자격을 갖추고 있음을 분명히 확인해 주며, 동시에 예수가 요셉의 혈통적 자손임을 부인한다. 마리아의 이름이 포함된 것은 물론 마리아가 예수의 유일한 육신의 부모라는 것과 마리아가 요셉과 예수와의 연결고리임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다.


    3. 네 여인의 정체(正體)에 대한 제 견해

    마태복음의 예수 족보에는 모두 마흔 두 명의 이름 중에 다섯 명의 여인의 이름이 나타난다. 마리아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그녀가 예수의 어머니이므로 놀라운 일이 못 된다. 하지만 나머지 네 여인: 다말, 라합, 룻과 우리야의 아내(밧세바)는 왜 포함된 것인가? 대체로 성서 해석학자들은 마리아를 제외하고 네 명의 구약 성경 여인이 가지고 있는 어떤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예수의 족보에 포함된 것으로 보고 그 공통점을 찾으려 한다.

    지금까지 연구된 네 여인의 공통점에 대한 견해는 크게 세 가지로 분류될 수 있는데 각각의 견해를 소개하고 그 평가를 해보기로 한다.


    3.1. 죄인설

    첫 번째로, 마태가 네 여인을 의도적으로 예수 족보에 포함시킨 것은 구약성경의 네 여인이 공통적으로 가진 죄인으로서의 배경을 강조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인을 받아들이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는 견해이다. 이는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악으로부터 구원하려는 메시아의 역할을 예시하고(마 1:21) 인간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다윗에게 하신 약속을 실행하시려는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을 보여 주시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견해는 구약성경의 네 여인의 기사에서 나오는 성경적 근거나 성경이 강조하는 바를 정확히 표현하지 못하고 있다고 본다. 더구나 마태가 복음서를 기록할 당시 네 여인에 대한 유대인들의 개념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그리스도의 족보에 나타난 모든 자들은 구약성경에서 의미하는 죄인이었다. 더구나 아하스(마 1:9, 왕하 16:4), 므낫세(마 1:10, 왕하 21:1-9) 같은 자들, 더구나 유다(마 1:3) 같은 자는 여인 중의 그 누구보다도 더 수치스러운 죄를 지었던 자인 것이다.

    또한 네 명의 여인 모두 다 수치스러운 죄인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유다가 자기 자신의 죄를 시인하는 구절 -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창 38:26) - 에서 보면 유다는 다말의 동기를 자기 자신의 동기보다 더 순수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다말이 비록 성적으로 부도덕한 행위를 저질렀다 할지라도 그녀가 그렇게 한 동기는 유다의 혈통을 이으려는 것이었다. 문제의 핵심은 간교하게 불순종했던 유다의 아들인 에르와 오난(창 38:6-14)이었고, 유다가 그의 셋째 아들인 셀라를 주기를 거절했던 사실이다(창 38:14). 이렇게 유다가 다말에게 셀라를 주기를 거절한 것은 유다의 혈통을 따라 메시아가 오시는 것을 막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다말은 그 문제를 개정할 방안을 마련하였다.

    비슷한 방식으로 볼 때 다윗과 밧세바 이야기는 다윗의 죄악에 초점을 둔 것이지, 밧세바가 저지르는 죄악에 초점을 둔 것이 아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려고 했을 때 다윗은 있지 말았어야 할 곳에 있었던 사람이었고(삼하 11:1), 밧세바는 아마도 죄악된 의도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윗은 그가 가진 동양 왕의 절대 권력으로 밧세바를 범하였다. 마태가 의도적으로 대조하려 한 것은 다윗의 간음, 기만 및 살인과 우리야의 흠 없는 완전함을 대조하는 데 있으며, 특별히 밧세바의 죄에 대해서는 전혀 강조하지 않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이 밧세바를?우리야의 아내’로 묘사한 이유가 될 수도 있다.

    구약 성경의 라합과 룻의 기사에서 성적 범죄가 없는 것을 볼 때, 라합과 룻이 성적으로 타락한 죄인이었다는 견해는 한층 더 독단적으로 될 수도 있다. 라합의 과거가 기생이었다고 언급되어 있는 반면에, 라합이 여호와께 대한 그녀의 믿음을 표현(수 2:8-21)한 후에는 더 이상 라합의 성적인 비도덕적 행위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없다. ‘기생’이라는 호칭은, 그녀의 과거 신분을 밝히면서, 그녀의 놀라운 회심에 대조하려는 의도로 쓰여졌던 것으로 보인다. 라합은 히브리서 11장과 야고보서 2장에서도 자기의 믿음을 행함으로 표현하는 자의 한 예로서 인용되었다.

    구약의 네 여인이 신약성서 시대와 그 다음에 오는 시대에 경멸받을 여인으로 생각되었는지는 심각하게 의심해 보아야 한다.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마태가 예수의 족보에 구약의 네 여인을 인용하기로 결정했을 때 이 결정이 내린 의미는 마태 시대에 이 여인에 대한 일반적 평가와 확실히 일관성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약성경 기사에서 나타난 네 여인에 대한 자료와 마태 시대에서 드러나고 있는 네 여인에 대한 평가에 기초해 보면, 네 여인의 공통점으로 죄악된 성품이나 행동을 강조하는 견해는 전혀 적절하지 않은 것이다.


    3.2. 이방인설

    두 번째로, 마태가 구약의 네 여인을 예수 족보에 포함시킨 것은 메시아의 족보와 그의 사역에 이방인이 포함되었다는 것을 공표한다는 견해이다. 즉, 네 여인이 모두 이방인이기 때문에 예수 족보에 포함되었다는 견해이다. 마르틴 루터에 의해 일반화된 이 견해는 예수가 유대인만을 위한 메시아를 넘어서는 것으로 보여지는 예수의 지상 명령을 예상하여 이방인으로서의 여인들에게 초점을 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마태복음이 메시아의 족보에 이방인의 혈통이 섞여 있음을 인용함으로써 마태복음이 이방인들에게 호소력을 가지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네 여인이 가진 공통점이 ‘이방인’이라는 견해는 어떤 취할 점을 가지고 있기도 하지만, 네 여인 중 한 명(밧세바)은 유대인이었을 수도 있으며 이방인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이러한 ‘문제’는 마태가 밧세바보다는 우리야에게 더 관심을 갖게 하려고 했던 사실에서도 설명된다.


    3.3. 특별한 사람설

    세 번째로, 구약성경의 네 여인은, 마리아와 같이 모두 평범하지 않은 결혼상태를 가지고 있었고 심지어는 각자의 과거에 성적인 추문까지 가지고 있었던 ‘특별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마태가 예수 족보에 포함시켰다는 견해이다.

    첫 번째의 ‘죄인설’로부터 변화된 이 견해는 네 여인의 죄악된 행동이나 성품보다는 각 여인에게 추문이 일어난 환경에 더 초점을 두면서, 네 여인은 하나님의 경륜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였거나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에서는 마리아의 비합법적인 아이에 대해 공중들 사이에서 떠도는 추문에 대한 응답으로서 네 여인이 언급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마태복음에서 마리아가 예수를 낳은 이야기는 예수의 족보 이후에 곧바로 언급되고 있다.

    이러한 견해를 가장 잘 대표하고 있는 브라운(R. Brown)은 구약의 네 여인을 통해 수치스럽고 비합법적인 결합과 하나님의 신령한 개입이라는 조합은 예수의 족보를 통해 마태가 의도하는 바를 가장 잘 설명해 주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후기 유대주의에서는 이러한 구약의 네 여인의 행위가 성령에의해 인도된 것이라고 실제적으로 생각되었다고 한다.

    하나의 통일된 단위로 마태복음 1장과 2장의 내용을 족보에 연관시키기 위해서, 또한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에서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마태복음의 강조를 위해서는 이 견해를 지지해야한다고 본다.


    4. 네 여인을 통해 본 마태의 신학적 의도


    4.1. 메시아의 족보로 시작한 마태의 의도

    신약 성경은 마태복음으로 시작하며 마태복음은 사람들의 이름을 기록한 인상적인 서두로 시작된다. 많은 독자는 아마도 그 기록을 별로 중요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그냥 넘어간다. 그러나 신약성경의 시작이 되고 있는 예수의 족보는 많은 점에서 성경의 가장 중요한 문서 중의 하나이다. 오버스트리트(R.L. Overstreet)는 마태복음의 예수 족보의 중요성을 언급하면서 구약과 신약의 연결고리로서 예수 족보의 중요성을 주장하였다.

    마태복음 1장 1절의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라는 구절은 단순히 역사적 자료를 인용한 것과는 거리가 멀고 정교하게 작성된 신학적 진술로 보아야 한다. 마태복음 1장 17절의 요약 구절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 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열 네 대요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 네 대러라”-에 기초해 보면, 마태가 족보를 기록한 목적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하신 약속과 예수와의 관계를 강조하려는 것이 분명하였다. 그 강조를 통하여 마태는 메시아로서의 예수의 자격을 확립하였다.

    그러므로 예수의 족보는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하신 약속을 예수가 완전히 이행하는 것을 최초로 제시하는 장치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렇게 구분되어진 시대의 이면에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찬란했던 때와 가장 비참했었던 시대가 있었고, 이러한 시대의 이면에는 모든 것을 그분의 목적과 그분이 정한 시간에 따라 모든 것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놀라운 하나님의 주권과 그의 구원하시는 의도는 통상적이 아니고 때로는 추문이 될 수도 있는 구약성경의 네 여인을 예수 족보에 포함시키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의 탄생에 대한 실제적 여건을 마련하는 장치인 것으로 보인다.


    4.2. 네 여인을 족보에 포함시킨 마태의 의도

    여인은 유대인의 족보에 통상적으로 포함되지 않는다. 게다가 “A는 B를 낳고” 하는 일정한 문구에서 벗어난 마태복음 1장 3절, 5절 및 6절은 의도적인 것임을 암시한다. 아마도 역대상 2장 4절에 다말의 이름이 포함된 데에서 마태는 영감을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역대상 2장 12절과 룻기 4장 21절에는 라합과 룻이 언급되어 있지 않음에도 다말 혼자가 아닌 네 명의 유사한 경우를 마태가 예수 족보에 포함시킨 것은 더 큰 목적이 있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보인다. 십 사 대씩 셋으로 나눈 마태복음의 족보 구성은 많은 세대를 누락시키고 있는데, 이러한 구성은 마태가 간결하고도 조직적인 배열을 하려고 했음을 나타낸다. 게다가, 유대인의 족보에 어머니의 이름을 포함시킨 것은 상당히 드문 경우이다.

    마태복음 1장 1-18절까지에는 족보를 기록하는 일반적 형식을 벗어난 또 다른 네 가지의 사례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 네 가지의 사례는 다음과 같다: “유다와 그의 형제"(2절), “베레스와 세라”(3절),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에 여고냐와 그의 형제”(11절), 및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16절).

    처음 세 개의 암시적인 구절은 좀 더 넓은 가족 집단에 주의를 기울이게 하는 방식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네 번째 구절(16절)에서는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3절), “살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4절),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4절), 그리고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6절)라는 패턴을 따르게 될 때 “요셉은 마리아에게서 예수를 낳고”라는 표현을 기대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대신에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하는 어색한 구절이 나타난다.

    앞에서부터 계속된 형식을 깨는 이러한 극적인 표현은 마리아의 역할이 이전의 네 여인의 역할을 얼마나 크게 능가하는 것인가를 나타낸다. 즉, 구약성경의 네 여인이 예수가 다윗의 자손이요,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는 유일한 도구였던 것에 반해, 마리아는 예수가 그리스도가 되게 하는(마 1:1) 특별한 도구가 된다. 또 이 구절은 예수의 법적인 아버지 요셉을 통하여 예수가 메시아로서 자격을 갖추고 있음을 분명히 확인해 주며, 동시에 예수가 요셉의 혈통적인 자손임을 부인한다. 유대인들의 가부장적인 일반적인 족보를 생각해 보면 예수가 요셉과 관련되어 있는 것에 대한 마태의 표현은 정확히 진술되어 있는 것이다. 마리아의 이름이 포함된 것은 물론 마리아가 예수의 유일한 육신의 부모라는 것과 마리아가 요셉과 예수와의 연결고리임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다.

    마태가 예수의 족보에 의도적으로 구약의 네 여인을 인용한 것은 메시아의 족보에 네 여인의 결코 평범하지 않은 놀라운 사건들이 존재하는 것을 나타냄으로써 네 여인으로 인해 마리아를 예표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은 전혀 있음직하지 않은 사건들의 전환 속에서 또는 그러한 사건의 전환을 통해서 심지어는 이방 여인 혹은 창기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에는 수용될 수 있는 여인들을 통해서도 때때로 성취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마리아의 처녀 수태도 그처럼 놀라운 사건이다. 마리아의 처녀 수태를 통해 하나님은 예수에게서 그 분의 목적을 실현하시는 것이다. 구약의 네 여인을 통해 하나님은 때로는 결코 평범하지 않은 놀라운 방식으로 그 분의 섭리의 손길을 나타내고 있으며 또한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를 이루시고 있음을 기억나게 하는 것이다.

    또한 마태가 의도적으로 네 여인을 인용한 것은 네 여인에게 초점을 맞추려는 것이 아니라 어떤 공통요소를 예증하고 있는 네 가지의 구약성경 기사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서이다. 그것은 구약성경의 족장 시대, 가나안 정복 시대, 사사 시대, 및 다윗 왕국 시대에 걸쳐 있다. 그리고 각 시대에 있어서 네 여인은 믿음이 크게 결여됐던 유대인과 대조하여 비범한 믿음을 보여 주었다.

    유다에 대비되는 다말의 믿음, 광야 시대의 이스라엘 민족에 대조되는 라합의 믿음, 사사 시대의 이스라엘의 믿음에 대조되는 룻의 믿음이 이스라엘의 역사상 중대한 고비를 맞을 때마다 나타났던 것이다. 그럴 때마다 이방인은 하나님에 대하여 이스라엘보다도 더 큰 믿음을 보였다. 밧세바라는 이름보다 우리야의 아내로서 언급한 것은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다윗의 믿음에 대조하여 우리야와 그의 믿음을 강조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이러한 사건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메시아가 오실 길을 보존하시는 데 충실하셨고, 어떤 경우에는 신령한 이방인을 통해서 그 길을 보존하셨던 것이다.

    이러한 믿음의 대조는 유대인에게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하신 계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신실함을 기억나게 하고, 유대인들로 하여금 임박한 메시아의 왕국을 좀더 정확히 이해하도록 하며, 또한 당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 속하여있던 이방인들에 대해 유대인들이 자기 의(義)를 나타내려는 태도를 버리도록 권면하는 마태의 의도와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마태는 유대인들에게 메시아가 오시는 길에서 이방인이 수행한 중대한 역할을 기억나게 함으로써 이러한 의도를 성취했던 것이다. 이러한 의도는 지혜로운 이방인(동방박사)의 이야기를 초반에 포함시킨 것을 설명해 준다(마 2장).


    5. 결론

    마태가 예수의 족보를 그의 복음서의 서두에 의도적으로 기록하면서, 예수는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하신 약속의 성취로서 오신 분임을 확립하려고 하였으며 그러한 과정에서 구약 성경의 네 여인을 그 족보에 포함시킨 의도를 연구하고자 하였다. 마태는 네 여인이 가진 공통점 등, 네 여인에게 초점을 맞추려한 것이 아니라 어떤 공통된 신학적 관점을 가진 구약성경의 기사를 독자들로 하여금 기억나게 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마태가 네 여인의 구약 기사를 통해 드러 내려한 신학적 관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구약성경의 네 여인의 기사를 통해 배교(背敎)의 시대에 있어서조차 메시아의 혈통을 보존하는 데 있어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과 섭리적 손길을 드러낸다. 이것은 자연적으로 마태복음에서 처녀 수태의 기사가 나오게 한다. 하나님은 처녀 수태라는 그 분의 주권적 사역을 통하여 메시아를 이 땅에 보내셨던 것이다.

    둘째는, 네 여인의 기사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과 섭리적 손길은 인종적 혈통이 아니라 믿음과 순종에 초점을 맞추어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하신 언약이 성취되어 감을 나타낸다. 이 언약의 성취 과정에서 하나님의 구원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뿐 아니라 만민에게 열려 있다는 뜻이 포함되는 것이다.

    셋째는, 구약성경 네 여인의 기사는 이스라엘의 역사상 중대한 시기에 신령한 이방인들의 믿음의 중요한 역할과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다. 따라서 마태복음의 유대인 독자들에게 회개와 겸손을 촉구하며, 또한 이방인들을 그리스도의 몸으로 받아들일 것을 촉구하는데, 이로 인해 모든 족속으로 제자 삼으라는 마태복음의 중요한 주제를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마태복음의 예수 족보는 마태복음 해석의 중요한 열쇠가 된다. 따라서 예수 족보를 그의 복음서 서두에 의도적으로 기록하면서, 결코 평범하지 않은 구약의 네 여인을 족보에 인용한 마태의 신학적인 의도를 파악해서 그러한 주제를 가지고 마태복음서를 읽고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다.


    그런데 밧세바의 이름은 정확하게 기록된 것이 아니라 이제까지 설교를 들으면서 우리 머리에 기억된 이름입니다. 정확하게 소개하면 우리아의 아내이지 밧세바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족보에 기록된 이름은 우리아라고 하겠습니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우상(偶像)
    - 베이컨은 사람들이 빠지는 편견을 네 가지 우상으로 설명하였다.


    첫째는 종족의 우상

    세계의 모든 현상을 인간의 관점에서만 보려는 것을 말한다.
    “저 새는 나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이 구슬프게 운다.”와 같은 표현이다.

    장자의 제물론에 나오는 글이다.
    사람은 습기가 많은 곳에 살면 허리병이 생기지만, 미꾸라지는 그렇지 않다. 나무 위에서 사람은 불안해하지만, 원숭이는 그렇지 않다. 사람들이 여희를 미인이라고 하지만, 물고기는 그녀를 보면 물속 깊이 숨고, 새는 높이 날아오르며, 순록은 기운껏 달아난다. 사람은 우상숭배가 대수롭게 생각지 않으나 하나님은 무서운 큰 죄로 보신다. 인본주의 생각이 옳은 것만은 아니다.

    둘째는 동굴의 우상

    동굴에 갇혀 있는 사람처럼, 개인적 경험이나 성격적인 편견으로 인해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우물 안 개구리”가 여기에 해당된다. 천사와 하늘나라가 존재하나 사람들 중에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여기에 속한다.

    셋째는 시장의 우상

    말 때문에 생기는 편견을 말하는 것으로, 베이컨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시장에서 잘못된 말과 소문이 많다고 생각하였다. “용”, “봉황”, “모순”과 같은 것들이 이런 예에 속한다.

    같은 말이라도 사람마다 가지는 편견이 있다. 예를 들면 “예수님!” 하면 나의 경우에는 “나의 구세주”, “나의 사랑”, “나의 기쁨”, “나의 소망”이지만, 믿음이 없는 자에겐 예수는 4대 성인 중에 한 사람에 불과하거나 심지어 재수 없게 생각한다.

    넷째는 극장의 우상

    연극이나 극장의 무대를 보고 환호하는 관객들처럼, 전통이나 권위에 의지하여 나타나는 지식이나 학문을 아무런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것을 가리켜 극장의 우상이라고 하였다. 그는 과거에 나온 이론들을 권위가 있다고 해서 무조건 추종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예를 들면 다윈의 진화론을 그대로 믿는 것도 이에 속한다.


    편견을 버리자


    오랫동안 편견과 오해로 형성된 사람으로 막달라 마리아를 꼽을 수 있습니다. 이는 성적 추문에 대한 세상의 야릇한 관심이 빚어낸 편견일 뿐입니다.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뮤지컬인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의 막달라 마리아는 그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극중 대표적인 아리아에서 마리아가 “예수님을 또 다른 한 남자로 여긴다.”는 애절한 노랫말이 나옵니다. 이는 마리아가 창녀였다는 편견에 따른 것입니다.

    최근의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도 비슷합니다. 모니카 벨루치의 막달라 마리아를 요한복음 8장의 간음한 여인과 동일시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에 대해 천주교회의 전통 즉 인간적인 전설을 따른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막달라 마리아가 돌아온 창녀라거나 간음한 여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세상의 관심에 따라 성경을 해석한 결과일 뿐입니다. 놀랍게도 성경이 말하는 막달라 마리아의 모습은 선임 사도 정도의 위치입니다. 요한복음은 막달라 마리아를 그리스도 부활의 첫 증인으로 기록했습니다. 그는 베드로를 비롯한 다른 제자들에게 그리스도 부활을 증거 하기 위해 소리쳤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이미 십자가 사건을 보고 줄행랑을 친 상황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쫓아다녔지만 십자가 곁까지 동참한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하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십자가 행렬은 물론이고 주님 처형 이후로도 가장 오랫동안 십자가 아래서 머물렀습니다. 그랬던 막달라 마리아가 이제 부활의 첫 목격자로서 “내가 주를 보았다”고 외쳤습니다. 남성 중심사회인 당시 막달라 마리아는 당당히 첫 증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갈릴리에서부터 따랐고 십자가 사건과 장례식, 그리고 부활을 목격한 사람은 주님의 제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야말로 이 모든 요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고향 갈릴리에서부터 주님을 만나 따라다녔습니다. 막달라란 갈릴리 호숫가의 고을이름입니다. 그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흔들림 없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런 점에서 중세 초 교회가 그에게 붙여준 애칭은 새겨들을 만합니다. ‘아포스톨라 아포스톨로룸’(사도들 중의 사도).

    고대교회는 막달라 마리아처럼 적지 않은 여자 지도자들이 교회 안에 있었습니다. 브리스길라, 루디아, 뵈뵈 등. 점차 교회가 제도화되고 로마의 정치적 구조 영향을 받아가는 동안 남성 중심의 지도력을 확보하려고 여성을 깎아내리려는 모종의 음모가 있었습니다. 이는 ‘교회제도의 로마화’입니다. 이에 따라 막달라 마리아는 회개한 창녀라는 초상화 속에 갇혀버린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도 많은 제도와 의식이 역할상의 차이를 넘어 성적 차별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편견은 강화되고 새롭게 생성되기까지 합니다. 교회는 남녀 누구나 그리스도 부활의 증인으로 당당히 살도록 도전해야 합니다.


    편견을 버리십시오


    전남 광주에서 전경으로 군대생활을 했던 어느 목사님 고백입니다. 훈련소 생활을 끝내고 자대가 있는 광주에 도착하던 날, 그분은 그날 아침의 착잡한 기분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서울에서만 자란 그분은 광주 민주화 운동을 폭도의 난동으로 알고 광주 사람은 다 사기꾼이고 귀신인 줄 알고 군대생활을 했습니다. 군대를 마치고 대학에 복학해서 MT(멤버 단합회)를 갔습니다. 그때 경북 영주 근처에서 텐트를 치고 잤는데, 깨어보니 텐트는 없어지고 돗자리에서만 자고 있었습니다. 그날부터 한 동안 경상도 사람은 다 깡패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회생활을 하면서 광주 사람이나 경상도 사람이나 대부분 착하고 좋은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왜 편견이 생깁니까? 과거의 나쁜 기억을 잊지 못해 생기는 초기 정신병적 질환이 바로 편견입니다. 사람의 영혼에 가장 나쁜 것은 과거의 나쁜 기억이 현재의 나를 지배하도록 방치하는 것입니다. 과거의 불행을 쉽게 잊을 줄 아는 거룩한 건망증은 행복의 제일 요소입니다. 과거의 불행을 잊을 때 현재의 행복이 있습니다. 편견은 비겁한 사람의 무기입니다. 겉만 보고 편견을 가진 사람에게 있는 특징 한 가지는 상대방이 외적으로 그럴듯하면 그 앞에서는 맥을 못 추는 것입니다. 강자에게는 한없이 비굴하고, 약자에게는 한없는 높아지는 마음이 편벽한 사람의 마음입니다. 편벽한 사람은 남을 무시도 잘하지만 남 앞에서 기도 잘 죽습니다. 편견의 뿌리는 교만입니다. 남보다 높아지고 싶은데 특별히 내세울 것이 없는 사람이 성별, 인종, 직업, 출신지 등을 언급하며 남을 낮추고 나를 낫게 보이려고 몸부림치는 것이 편견이고, 자기 인격이 더 못됐으면서 남의 인격을 못됐다고 하는 것이 편견입니다. 편견은 한 부분만 보고 판단하기에 진리를 가장 왜곡할 수 있습니다. 편견은 가장 가벼운 죄처럼 보이는 가장 무거운 죄이고, 인간영혼이 제거해야 할 제일 대상입니다. 편견의 벽을 무너뜨릴 때 불행의 벽도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도 예수님을 향해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고 직업에 대한 편견을 가졌고,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출신지에 대한 편견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이 지역적으로, 그리고 직업적으로 편견의 대상이 되는 출신으로 사셨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에 그 못 박힌 손 그대로 부활하심으로 영원히 장애인이 되신 것은 “편견을 버리라!”는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참된 믿음은 잘못된 편견을 깨뜨릴 줄 알 때 주어집니다. ‘나 중심’의 사고체계는 차이를 차별로 떨어뜨리지만, ‘우리 중심’의 사고체계는 차이를 개성으로 승화시킵니다. 졸장부는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생각하고 금방 편견을 가지지만 대장부는 ‘틀린 것’을 보고도 ‘틀린 사람’이라고 단정하지 않습니다.


    선입견을 버리세요


    오늘도 나는 학교를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탔다.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그 때 어떤 아저씨 한분이 탔다. 그 아저씨는 사람들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차내에 계신 승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희 딸이 백혈병에 걸려서 지금 병원에 입원해 있습니다. 그래서”

    순간 지하철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딸을 팔아 먹냐, 돈이 그렇게 궁하냐” 등등

    한동안 아저씨는 상기된 얼굴로 아무 말 없이 서 계셨다. 그리고는

    “오늘 제 딸이 수술을 받는데 제발 단 1초만이라도 기도해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순간 열차 안은 숨소리도 안 들릴 만큼 조용해졌다.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일까? 나 역시도 무슨 생각을 했는지


    베토벤을 죽이지 말라


    미국에 있는 UCLA라고 하는 대학의 의과대학 교수가 이제 머지않아 의학 공부를 마치고 바로 현지 병원에 나가서 환자들을 진찰하고 치료하게 될 학생들을 놓고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가르치는 중에 한 사례를 들어 학생들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매독균에 걸려 있고 어머니는 폐결핵 환자이다. 여기서 아이 넷이 태어났는데, 첫째아이는 매독균으로 인해서 장님이 되었고, 둘째 아이는 이미 병들어 죽었고, 셋째아이는 역시 이 부모들의 병 때문에 귀머거리가 되었고, 넷째 아이는 결핵 환자가 되었다. 이런 때에 어머니가 또 임신을 했다. 이런 경우에 그대들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학생들은 입을 모아 대답합니다. “유산시켜야 합니다. 아버지가 매독 환자요 어머니가 폐결핵 환자이며, 이미 낳은 아이 넷도 다 그 모양이 되었는데, 이러한 악조건에서 아이를 또 낳아놓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연히 유산시켜야 됩니다.”

    그러자 교수는 점잖게, 아주 정중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대들은 지금 베토벤을 죽였다.”

    우리가 아는 악성 베토벤은 바로 그런 환경 가운데서 1770년에 태어납니다. 아버지는 매독 환자요, 어머니는 폐결핵 환자요, 형제들도 다 병들어 그 모양이지마는 그 가운데서 태어나 57년 동안 작곡 활동을 했습니다. 물론 그도 나중에는 귀머거리가 되었습니다마는 그런 가운데서도 많은 불후의 명곡을 작곡하게 됩니다. 무릇 우리 인간이 판단과 사고가 얼마나 어리석고 잘못되기 쉬운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 교수는 말했습니다. “그대들은 환자들을 대할 때에 이 사실을 잊지 말라. 의학적 지식이 좀 있다고 해서 이렇게 저렇게 치료하고 수술하고 없애고 할 것이 아닌 것이다. 모름지기 하나님의 역사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생각하고 겸손하게 신중하게 할 것이다.”


    편견의 위험


    편견을 가지고 상대방을 즉흥적으로 판단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영국의 사회파 작가 “골즈워디”와 연애파 작가 “로렌스”가 어느 날 처음으로 만나 서로의 작품세계와 생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남들이 보기에 두 사람은 진지하고 다정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날 밤 일기에 상대방에 대한 인상을 기록했는데 그 “편견의 시각차”는 다음과 같다.

    골즈워디 : 미치광이 같은 촌놈이었다.

    로렌스 : 죽은 듯 한 눈을 가진 속물이었다.


    문전박대 당한 간디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 (야고보서 2:9)


    인도의 지도자 간디(1869∼1948)가 젊었을 때 영국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온갖 차별과 편견과 냉대에 시달리면서 어려운 유학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성경책을 발견하고 이를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간디는 참으로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특히 예수님이 산상수훈의 말씀은 그에게 큰 감명을 더하여 주었습니다. 성경을 읽은 간디는 하나님을 위해 그의 일생을 바쳐야겠다는 결심하고는 교회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에 지나지 않는 미개한 나라이었고 인종차별이 심한 때이었기 때문에 그의 결심은 빛을 볼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를 찾아다니며 예수를 잘 믿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여러 차례 청원을 해 보았으나 교회당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쫓겨났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쫓겨나면서 한 그의 마지막 말은 너무나 유명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는 존경하지만 그리스도인은 경멸한다.”

    그는 결국 기독교에 대한 신앙을 버리고 교회를 떠나고 말았습니다. 인도로 돌아온 그는 10억 인구의 인도를 움직이는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만약 그 때 교회가 간디의 간절한 소망을 외면하지 않았다면 인도의 역사는 전혀 달라졌을지 모릅니다. 간디가 기독교의 영향을 인도에 끼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도 칼카타에서 만나는 인간 이하의 삶을 사는 그 수많은 거지 떼들은 인도가 아직도 어두움 속에 헤매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숲을 보라


    오래 전 브라질에서 매일 오토바이를 타고 콜롬비아로 가는 노파가 있었다. 오토바이 뒤에는 주머니가 하나 있었는데 이를 수상히 여긴 세관원이 몇 번 노파를 검문, 수색했으나 혐의를 잡지 못했다. 그 주머니에는 언제나 모래만 들어 있을 뿐이었다. 한 달 후 세관원이 “체포하지 않을테니 솔직하게 말해 봐요. 밀수하는 게 있지요? 그게 뭡니까?” 라고 물었다. 그러자 노파는 웃으며 말했다. “이거요. 오토바이” 어쩌면 현대인들은 “중요한 단서”를 놓치고 사는지도 모른다.


    나무가 아니라 숲을 보라


    미국인 빌과 조지가 함께 이집트 여행을 떠났다. 어느 날 쇼핑을 나간 조지는 노파 한 명이 검은 고양이상을 팔고 있는 것을 보았다. 묵직한 게 마치 쇠붙이 같아 보였는데 값은 500달러나 됐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고양이 눈알은 진짜 진주였다. 조지는 300달러에 두 눈알만 팔라고 흥정을 했고 결국 진주를 손에 넣었다. 조지는 호텔로 들어와 빌에게 자랑을 했다. 전후 사정을 들은 빌은 노파의 위치를 묻고 황급히 뛰어갔다. 그리고 200달러에 그 쇠붙이 고양이를 샀다. 빌은 쇠 고양이를 이리저리 살핀 뒤 칼로 발바닥을 긁어보았다.

    그러자 검은 칠이 벗겨지고 황금빛이 반짝거렸다. 고양이를 처음 만든 주인이 분실을 우려해 검은 칠을 해 쇠고양이로 변장시켰던 것이다. 빌은 넋이 나간 조지에게 말했다.

    “조지, 잘 생각해보게. 진짜 진주를 눈으로 만든 고양이상이 설마 값싼 쇠붙이였겠는가!”

    소탐대실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작은 것을 탐하다 큰 것을 잃는다는 뜻이지요. 인간관계 또는 비즈니스에서 혹시 이런 우를 범하고 있진 않는가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망고나무


    페르시아에 네 아들을 둔 왕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왕은 아들들을 불러놓고 한 가지 명령을 했습니다. "지금부터 내 말을 들어라. 첫째는 겨울, 둘째는 봄, 셋째는 여름, 넷째는 가을에 정원 뒤편의 망고나무를 관찰하라. 다른 계절에 망고나무를 보아서는 안 된다."

    네 아들은 왕의 명령에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1년 후 왕은 네 아들을 불러놓고 물었습니다. "자, 이제부터 너희가 본 망고나무를 내게 설명해다오."

    네 아들의 대답은 각양각색이었습니다. "불에 타고 남은 폐허 같습니다. 잎이 푸르고 싱그럽습니다. 꽃은 장미처럼 아름답습니다. 주렁주렁 열린 열매가 탐스럽습니다."

    왕은 네 아들의 손을 잡고 교훈을 주었습니다.

    "너희들의 대답은 모두 옳다. 망고나무는 계절마다 각각 다른 모습을 보인다. 한 가지 모습만 보고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해선 안 된다. 이것이 너희들에게 주는 교훈이다."


    성급한 결론은 편견을 낳습니다. 편견은 분쟁을 일으킵니다. 어느 한 면만을 보고 판단하는 것은 화합을 깨트립니다. 한 가지 잘못으로 그 사람 전체를 평가하면 안 됩니다. 예를 들면 학교공부를 못한다고 그 사람이 모자라고 실패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박찬호, 박세리 선수를 보세요. 그 사람들은 학교 다닐 때 공부는 못했지만 얼마나 성공했습니까? 노아가 홍수 후에 포도주에 취해 벌거벗고 자다가 결국 아들 함의 후손들이 저주를 받았습니다. 이 일 한가지로 우리가 노아를 알콜중독자라고 말해야 합니까? 다윗이 부하장군 우리아의 아내 밧새바를 범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다윗을 '간음쟁이'라고 평가해야 할까요? 아브라함은 자기 목숨 살기 위해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브라함을 '거짓말장이'라고 해야 합니까? 또 베드로는 닭 울기 전에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베드로를 '비겁쟁이'라고 말해야 할까요? 한 가지 사실만으로 그 전체를 평가하고, 한 쪽으로 치우치는 것이 편견입니다. 대개 사이비종교들이 성경 어떤 한 두 구절을 너무 고집하다가 이단이 되고 거짓종교가 되었습니다.(약3:14, 요일2:21) 예를 들면 구원파는 로마서의 말씀인 믿음만을 강조하여 '우리는 이미 구원 얻었으니 회개할 필요가 없다' 등등의 이단 사설을 주장합니다. 안식일교는 구약의 율법 중 하나인 토요일 안식만을 주장하고 안식일을 범하는 자는 다 거짓이라고 주장합니다. 성경말씀은 모두 진리입니다. 로마서도 구약도 진리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성경의 한 면만을 보고 그것만을 주장하면 큰일납니다. 한쪽만 치우치면 병신입니다. 머리만 크면 과분수입니다. 한쪽 다리만 커지면 걷기 힘듭니다. 가슴만 키워도 안되고 지, 정, 의 (知情意)를 고루 갖추어야합니다.


    영적 편식


    요사이 복음을 좀 더 쉽게 그리고 빠르게 전하기 위한 수단으로 어떤 선택 기준을 세워놓고 간략화 된 신조를 만들어내는 경향이 있다. 단순화된 신조는 단편적이고도 세분화되지 못한 복음을 제시, 영적 편식을 초래할 수 있다. 그것은 마치 케이크 위에 장식용으로 놓인 앵두 몇 개를 빼먹으면서 케이크를 먹었다고 하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믿는 것이며 다른 모든 것은 바른 믿음과 집중적인 신앙생활을 통해 체험할 수 있다고 하는 발상은 매우 위험하고 미혹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단순한 특허처방은 개별적으로는 옳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을 복음 전체로 간주하는 사람들은 얼마 가지 않아 영적 편식으로 인한 결핍증이 나타나 정신적인 파멸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말씀을 현미경으로도 분석해야 하지만 또 망원경으로 전체를 볼 줄 알아야 한다. 우리의 믿음생활과 기도, 그리고 말씀을 받을 때 수동적인 태도를 취함은 위험을 초래한다. 수동성은 사람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하기 위한 토양을 형성하는 것과 같다.


    고정관념


    비가 오면 우산을 쓴다. 어느 국민이나 다 그렇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프랑스에 가본 사람은 안다. 비나 눈이 올 때 우산을 쓰지 않고 걸어 다니는 사람이 많다. 왜 그럴까? 프랑스인들은 어렸을 때 유치원에서 그렇게 교육을 받았다. 어린이가 우산을 쓰고 걸으면 앞이 가려져 위험하다는 것이다. 손이 자유롭지 못해 사고가 일어날 가능성도 높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능하면 우산을 안 쓰고 우비나 레인코트를 입도록 교육받는다. 고정관념은 우리들의 생각과 안목을 좁게 만든다. 고정관념을 깨뜨리면 세상이 훨씬 넓게 보인다. 생각을 바꾸면 사물이 훨씬 크게 보인다. 작은 것에 연연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사는 존재다. 그러므로 사고의 폭도 넓어야 한다.


    ▣ 전도의 잘못된 고정관념


    흔히 전도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영혼을 구원하는 것’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놀랍게도 이 고정관념 때문에 거의 모든 성도가 전도공포증 전도기피증 전도노이로제에 걸려 항상 기뻐해야 할 신앙생활을 누리지 못한 채 전도 못하는 죄책감에 짓눌려 불행하게 살고 있다. 이는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전도는 믿지 아니하는 사람을 교회로 인도하여 등록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문제는 쉽게 풀립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구원은 믿음이 있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진실과 사랑으로 감동을 주어 비신자의 마음을 녹여서 스스로 교회에 찾아오게 하는 전도가 구원의 첫 단계라면 예배설교 성경공부 기도훈련 등을 통하여 믿음의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구원의 2단계라 할 수 있습니다. 잘못된 고정관념을 버리고 올바른 전도개념만 갖게 되면 어렵게 여겨졌던 전도가 쉽고 신바람나는 일로 확 변할 것입니다.

    /여운학 장로(종합선교 규장 대표)


    ▣ 고정관념을 깨라


    하와이는 태평양 한가운데 더운 곳에 있는 섬입니다. 그야말로 와이키키 해변을 비롯해서 얼마나 뜨거운 곳입니까? 그런데 상상을 해보세요. 그 하와이 한가운데서 누가 밍크코트 장사를 하겠다고 한다면 미쳤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어떤 사람이 엉뚱한(?) 생각을 하고 하와이 그 뜨거운 섬에서 가죽옷, 밍크코트를 내놓고 파는 가게를 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사람을 두고 정신나간 사람이라고 했지마는 그는 생각했습니다. 온 세계 사람이 많이 여기에 오는데, 그 중에는 추운 지방 사람들도 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혜로운 사람은 겨울에 여름옷을 준비하고, 여름에 겨울옷을 준비할 것이다. 이윽고 그 밍크코트 가게에는 점점 사람들이 몰렸고 마침내 이 사람은 많은 수입을 올려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보통사람은 생각치 못 할 일을 전혀 다른 시각으로 봄으로 사업에 성공하게 된 것입니다. 고정관념을 깨야 창의력이 생기고, 새로운 세계가 보입니다.

    신앙생활의 장애물들 가운데 하나는 고정관념일 것입니다. 예전부터 갖고 있던 인간적인 사고의 틀을 벗어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신앙이 성장하지 못하고 어려움을 겪는 것입니다. 2천년전 이 땅에 예수님이 태어나셨을 때도 사람들은 고정관념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을 경배하기 위해 먼 길을 달려온 동방박사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학식이 풍부하고 인생의 경험도 많은 이들이 아기 예수를 만나기 위해 먼저 찾아간 곳은 헤롯왕의 궁전이었습니다. 온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라면 지위가 높고 권력도 강한 가문에서 태어날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에 왕궁을 찾아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으리으리한 왕궁에서 금 보자기에 싸여 태어나시지 않고 가장 허름한 마구간의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사람들의 그릇된 고정관념을 여지없이 깨뜨리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가난하고 소외당한 사람들도 누구나 예수님께 찾아올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 놓은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 포스베리 엉덩방아


    “포스베리 엉덩방아”란 스포츠 용어가 있습니다.

    이것은 높이뛰기를 정면으로 뛰지 않고(가위뛰기, 正面跳) 역U자 모양으로 높이 뛰어(Fosbury Flop, 背面跳) 떨어질 때 한 바퀴 돌아서 엉덩방아를 찧는 것을 말합니다. Fosbury Flop은 미국의 D. 포스베리가 고안해 낸 도약 방법입니다. 포스벨리 당시에는 높이뛰기의 기록은 1m 98cm이었고 2m는 인간이 더 이상 뛰어 넘을 수 없는 벽으로 인정되고 있었습니다. 포즈베리 역시 이 벽을 뛰어 넘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다이빙의 재주넘기 장면을 보다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 지금까지 하던 ‘앞으로 넘지 말고 뒤로 넘자’는 그의 새로운 아이디어를 시험해 보았습니다. 놀랍게도 2m의 벽을 쉽게 뛰어 넘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그 방식을 이용하여 1968년 멕시코 올림픽대회 높이뛰기에서 금메달을 차지했고 그의 도약방법인 Fosbury Flop은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는 높이뛰기 방식이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는 3m의 높이에 도전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우리는 너무나 자주 우리를 가로막는 벽을 경험합니다. 우리의 사고를 바꾸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정면으로도, 뒤로도 뛰어넘지 못하는 많은 벽들 앞에서 우리는 좌절하게 될 때면 하늘을 우러러 봅시다. 거기로부터 우리의 도움이 오기 때문입니다. “너희 머리를 들라 너희 구속이 가까웠느니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 2030 성공 습관 역발상이 가져온 혁신의 성과

    - 토마스 버크와 아돌프 키에프, 딕 포스베리.


    이름만 들어선 누군지 잘 모를 수 있다. 좀 오래된 과거의 사람들이기에. 하지만 시대를 초월해서 우리가 기억해둘 사람들이다. 이들 세 사람은 유명한 운동선수다. 그냥 유명한 정도가 아니라, 스포츠의 역사를 바꿔놓은 혁신적인 주인공들이다. 모두 올림픽 금메달을 딴사람인데, 이들이 가진 탁월한 운동능력 보다 역발상이자 창의력 덕분에 금메달을 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니 운동선수가 신체적 능력이 아니라 머리 써서 이겼다고? 맞다. 그들이 머리를 쓰지 않았다면 결코 금메달은 못 땄을 것이다.


    먼저, 백여 년을 거슬러 올라가보자. 1896년 제1회 아테네올림픽 육상 100m 결승 경기 출발선에 유독 한 선수만 다른 자세로 있었다. 모두가 서서 달릴 자세를 취하고 있는 반면, 한 선수만 머리를 숙이고 엉덩이는 치켜세운 채 출발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로선 아주 별난 자세를 한 그 선수가 바로 근대 올림픽 육상 100m 첫 금메달의 주인공이 된 토머스 버크다. 그가 취한 자세가 바로 지금은 모든 육상선수가 사용하는 ‘크라우칭 스타트(crouching start, 웅크린 채 출발하는 기법)’였다. 육상의 새로운 혁명을 가져온 방식이자, 기존의 방식을 과감히 뒤집은 역발상이었다. 지금은 누구나 그렇게 스타트를 하지만, 당시에는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았었다. 토머스 버크가 기존의 고정관념이자 관성을 깨버리고 새로운 기준을 만들어낸 셈이다.


    그 다음은 수영에서의 혁신 이야기다. 1935년 아돌프 키에프는 16세의 나이로 배영 100야드(91.44m) 부문에서 58.5초를 기록해 사상 처음으로 1분벽을 넘어섰다. 당시 세계적인 수영선수 누구도 넘지 못한 마의 1분벽을 무명의 학생이 넘어선 것이다. 그는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17세의 나이로 금메달까지 딴다.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바로 그가 플립턴(flip turn)을 사용한 최초의 선수였기 때문이다. 플립턴은 턴 지점 1m 정도를 남겨두고 몸을 뒤집어서 발로 터치하는 기술이다. 당시 모든 선수들은 손으로 벽을 짚고 턴을 해서 기존의 가속도를 전혀 살리지 못했다. 하지만 키에프는 턴 지점 앞에서 몸을 180도 회전시켜 손이 아닌 발로 턴하는 방식을 사용한 것이다. 기존의 발상을 과감히 뒤집은 덕에 어린 나이에 금메달을 따는 혁신적 성과와 함께 모든 수영선수의 턴하는 방식마저도 바꾸고 말았다. 이젠 플립턴은 모든 수영선수가 하는 기본이 되었다.


    셋 중에선 가장 최근의 일이다. 1968년 멕시코 올림픽 높이뛰기에선 딕 포스베리(Dick Fosbury)에 의해 새로운 세계신기록과 함께 충격적인 장면이 나왔다. 최초로 2미터 벽이 뚫리며 2.24m라는 엄청난 기록이 만들어졌는데, 사람들은 기록보다 그가 뛰는 모습에 더 충격을 받았다. 다른 선수들은 모두 앞으로 엎어져 가슴 뛰기 형태로 높이뛰기 바를 넘거나, 가위뛰기 형태로 바를 넘고 있었는데 포스베리 만 몸을 눕혀서 등으로 바를 넘었기 때문이다. 당시 어느 누구도 그런 자세로 바를 넘지 않았다. 포스베리가 배면뛰기를 하기 이전의 높이뛰기에는 오로지 정면 뛰기만 있었다. 하지만 그 후론 높이뛰기에서 배면뛰기가 아닌 정면 뛰기를 하는 선수는 사라졌다.


    포스베리 플랍(Fosbury Flop, 포스베리 도약), 혹은 배면뛰기라 불리는 이 방식은 높이뛰기의 새로운 혁명을 불러왔고, 높이뛰기 기록의 높이를 더욱 높여주었다. 실제로 이 방식은 무게 중심이 신체 밖에 위치해 자신의 기록보다 최대 10센티 이상 더 뛸 수 있게 했다. 지금은 모두가 쓰는 당연한 방식이지만, 포스베리가 시도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그 방식을 시도는커녕 생각조차도 하지 않았었다. 이런 것이 바로 역발상의 가치다.

    역발상은 분야를 막론하고 혁신의 성과를 안겨준다. 이들 세 명은 스포츠에서도 창의력이 강력한 경쟁력이 된다는 것을 보여줬다. 기존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에는 새로운 기회가 있고, 어떤 식으로 어떻게 무너뜨리느냐가 바로 창의력인 것이다.

    역발상은 말 그대로 기존과 다른 발상을 하는 거다. 선입견과 고정관념, 관성에 치우치지 않은 발상으로, 물리적으로 반대로 뒤집어보거나, 관점이나 입장을 바꿔보거나, 기존의 진리를 과감히 부정해보거나 하는 거다. 에디슨에게 밤은 원래부터 어두운 것이었고 어둡다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는 생각만 있었다면 전구를 발명할 수 있었을까? 이렇듯 부정은 새로운 사고의 전환을 낳고, 새로운 창조도 낳는다. 심지어 스포츠에서도 창의성과 역발상이 놀라운 가치를 발휘하는데, 비즈니스에선 오죽하겠나. 혁신은 천재들의 몫이 아니라 과감한 사람의 몫이다. 성공하고 싶다면 당신의 생각을 더 과감하게 뒤집어보자. 


    열린사회와 그 적들


    미국 유머 가운데 스피드광이건 굼벵이 운전자건 모두 자기보다 빨리 달리는 사람은 미친놈이고 자기보다 느리게 달리는 사람은 멍청한 놈으로 생각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오직 자신만이 옳은 기준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세태를 풍자한 유머다.


    우리가 거울을 볼 때 오른손을 들고 '오른손'이라고 우겨도 거울 속에 있는 또 다른 나는 '왼손'을 들고 있는 모습인 것처럼


    내가 절대 볼 수 없는 것


    내가 볼 수 없는 곳이 있다. 내 뒤통수, 내 정수리, 내 뒷덜미. 나는 나를 다 알아, 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지나치게 생각이 많아서 나를 너무 많이 들여다보는 게 탈이야 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꼭 보던 곳만 수없이 본다. 내가 절대 모르는 곳 그대로 모른 채 내가 절대 알고 싶지 않은 곳 내가 절대 본 적 없는 곳 그대로 덮어둔 채 나는 나이기만을 고집한다. 그래서 사람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고들 말하는 걸까. 변화하려면 그 곳을, 그 모르는 곳, 모르고 싶었던 곳, 가려운 곳, 아픈 곳, 정말 본 적 없는 곳을 보아야 한다. 뒷모습을 볼 수 있도록 앞에 다른 손거울 하나가 더 필요하다. 오직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만이 변화한다.


    울타리


    제2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의 어느 시골 마을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그런데 그 와중에 미군 병사 한 사람이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의 동료들은 시체를 전쟁터에 그냥 방치해 두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기독교식 장례를 치러 주기로 했는데, 전투가 벌어지는 일선에서 몇 마일 떨어진 곳에 흰 울타리를 친 작은 공동묘지가 딸린 교회가 있던 것을 기억해 냈다. 친구의 시체를 공동묘지로 옮겨가기 위해 상사의 허락을 받은 병사들은 해가 지기 전 겨우 그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허리가 굽고 야윈 신부가 그들을 맞아 주었다. 깊은 주름이 팬 해 빛에 그을린 신부의 얼굴 은 지혜와 열정으로 불타오르는 번쩍이는 두 눈이 자리 잡고 있는 집처럼 보였다. 한 병사가 정중하게 말을 꺼냈다. “친구가 전쟁터에서 숨졌습니다. 우리는 그를 교회 묘지 에 묻어주고 싶습니다.” 신부는 병사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이해했지만 아주 서투른 영어로 이렇게 대답했다. “미안합니다. 우리와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면 이곳에 묻어 줄 수가 없습니다. “수개월에 걸친 전쟁에 지친 병사들은 서운한 기색조차 보이지 않은 채 말없이 그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 그러자 노 신부가 그들을 불러 세웠다. “그렇지만 울타리 밖에 묻는 것은 괜찮습니다.” 그 말에 화가 나긴 했지만 병사들은 하얀 울타리 밖에 땅을 파고 친구를 묻어 주었다. 그 일을 다 마쳤을 때는 이미 해가 떨어지고 난 다음이었다. 다음날 아침 전선(戰線)을 옮기라는 명령을 받은 병사들은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친구에게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 그 작은 교회를 다시 찾아갔다. 그러나 친구를 묻은 자리를 찾을 수 가 없었다. 지치고 어리둥절해진 병사들은 교회의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친구를 묻은 자리를 알고 있는지를 물었다. “어젯밤 지치기도 했고 어두워서 그랬는지 제대로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그 말에 노신부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어젯밤 댁들이 떠난 후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 내가 울타리를 옮겨 놓았습니다.” 예수님은 울타리를 옮겨 놓는 그 이상의 일을 하셨다. 아예 울타리를 없애버리셨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긴장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울타리를 만든 사람들은 자기의 울타리가 무너져 내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편견(선입견)에 관한 성경말씀


    0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16:7)

    0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며(막6: 3, 4)

    0 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가로되 와 보라 하니라(요1: 46)

    0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힐난하여

    가로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베드로가 저희에게 이 일을 차례로 설명하여 가로되 내가 욥바성에서 기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환상을 보니 큰 보자기 같은 그릇을 네 귀를 매어 하늘로부터 내리워 내 앞에까지 드리우거늘 이것을 주목하여 보니 땅에 네 발 가진 것과 들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보이더라 또 들으니 소리 있어 내게 이르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 내가 가로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거나 깨끗지 아니한 물건은 언제든지 내 입에 들어간 일이 없나이다 하니 또 하늘로부터 두 번째 소리 있어 내게 대답하되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말라 하더라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에 모든 것이 다시 하늘로 끌려 올라가더라 마침 세 사람이 내 우거한 집 앞에 섰으니 가이사랴에서 내게로 보낸 사람이라 성령이 내게 명하사 아무 의심 말고 함께 가라 하시매 이 여섯 형제도 나와 함께 가서 그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가 우리에게 말하기를 천사가 내 집에 서서 말하되 네가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그가 너와 네 온 집의 구원 얻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함을 보았다 하거늘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행11:2- 15)

    0 베드로가 입을 열어 가로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행10:34, 35)

    0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약 2:1)

    0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약 2:3,4)

    0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약 2:9)


    편견에 관한 금언


    *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은 마귀에게 사로잡힌 사람이다. 편견은 진실을 볼 수 없도록 가리고 최악의 마귀이다. (트라이언 에드워즈)


    * 편견은 안개와 같아서 우리가 이 세상을 여행하는 동안 가장 밝은 빛을 가리고, 길 위에서 만나게 되는 가장 훌륭하고 영광스러운 것을 희미하게 만든다.

    * 어떤 경우에 대해 오직 자신이 주장한 것만 아는 사람은 그것에 대해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죤 스튜어트 밀)

    0 편견은 무지의 자식이다.(윌리엄 해즐리트)

    0 편견은 마음에 드는 것만 보고, 있는 그대로는 보지 못한다.(오브레이 드 베르)

    0 편견의 이치를 따지려 노력하지 마라. 편견은 논리적으로 설복시킬 수도 설복 될 수도 없는 것이다.(시드니 스미스)

    0 황달에 걸린 눈에는 모든 것이 노랗게 보인다. (알렉산더 포프)

    0 편견은 어리석은 사람의 이성이다. (프랑수아 마리 드 볼테르)

    0 무지는 편견보다 진실에 가깝다.(데니 디드로)

    0 인간의 편견보다 강한 것은 없다. 은둔자 피터의 광적인 감상주의는 유럽의 반을 휩쓸었으며 열국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웬델 필립스)

    0 편견에 대항하는 논리는 그림자에 대항하는 싸움과 같다. 그것은 편견에 뚜렷한 영향을 주지 않고 논리자를 지치게 만든다. 바람이 햇빛을 대신 할 수 없듯이 논쟁으로 가르침을 줄 수 없다. (챨스 마일드웨이)

    0 무지에 의한 편견은 관심에 의한 편견보다 쉽게 없어질 수 있다. 전자는 맹목적으로 얻어진 것이지만 후자는 의식적으로 선호된 것이기 때문이다. (죠지 밴크로포트)

    0 신중한 생활에서 얻어진 편견은 나태한 생활에서 얻어진 습관처럼 바꾸기가 어렵다. 어떤 이는 젊음을 낭비했기 때문에 노년도 낭비해야만 하고, 어떤 이는 길을 찾아내기 위해서 너무나 오랫동안 실수의 미로를 헤매고 다녔기 때문에 그 실수의 미로에서 고생을 계속해야 한다. (볼링브로크)

    0 편견을 조심하라. 편견은 쥐와 같고 사람의 마음은 쥐덫과 같다. 편견은 쉽게 들어오지만 나갈 수 있을 지는 의심스럽다.

    0 편견의 정도와 힘 만큼 사람이 그렇게 오랫동안 의식하지 못하는 것도 없다.

    0 편견에 바탕을 둔 견해는 항상 큰 폭력에 의해 유지된다. (프란시스 제프리 경)

    0 편견과 자부는 본래 세상에 대한 경험의 부족과 인류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죠셉 에디슨)

    0 우리가 현명해졌다고 생각할지라도 그것은 단지 새로운 편견이 낡은 편견을 대신한 것에 불과할 것이다.(크리스천 네스텔 보비)

    0 편견과 정신의 관계는 공기와 육체의 관계와 같다. 우리는 그 중 한 가지가 없으면 느낄 수가 없고 다른 한 가지가 없으면 숨을 쉬지 못한다.(그레빌 경)

    0 모든 사람들이 자신은 개입되지 않은 것처럼 다른 사람의 잘못된 편견에 대해 불평을 한다. 그렇다면 치료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편견은 놔두고 자신의 편견을 반성하는 것이다. (죤 로크)

    0 삶은 매 시기마다 고유의 편견을 가지고 있다. 과거를 칭송하고 현재를 비난하지 않는 노인을 누가 보았는가? (미셀 E. 드 몽테뉴)

    0 편견은 강렬하나 수명은 제한되어 있다. 그것들이 쓸모 없는 것을 발견하여 매장하는 것이 중요하며, 그 장례식에는 아무도 눈물을 흘리지 않을 것이다.

    0 자신의 나라를 한 번도 떠나본 적이 없는 사람은 편견으로 가득 차 있다. (카를로 콜드니)

    0 편견은 가상의 악으로 진실을 질식시키며, 이성을 압도하고, 강한 사람을 약하게, 약한 사람을 강하게 하는 요술쟁이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참고, 믿으며, 바라고 견뎌내는 관대한 사랑, 악한 것을 생각지 않는 관대한 사랑을 주신다. (죤 맥더프)

    0 우리는 오래 된 편견을 던져 버리는 대신 상당히 소중히 여긴다. 더욱 수치스러운 것은 그것이 편견이기 때문에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편견이 오래된 것일수록 우리는 더욱 소중히 한다. 우리는 사람들이 이성이라는 개인 재산을 이용하여 살아가는 것을 걱정한다. 한 개인의 이성이라는 재산은 얼마 되지 않으므로 모든 나라와 모든 연령에 일반적인 편견이라는 은행과 자본을 이용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에드먼드 버크)

    0 눈으로 보는 편견을 허용하여 마음을 결정하지 말라. (요한 케올크 지먼스)

    0 현명한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의 편견을 경멸할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을 나이든 부모나 훈계자 처럼 두려워해야 한다. 결국에는 그 자신보다 다른 사람의 편견이 더 현명한 것으로 증명 될 수 있다.(윌리엄 해즐리트)

    0 국가적 혐오는 모든 편견 중에서 가장 옹졸하고 무식한 것이므로 가장 저속한 것이다.(제인 포터)

    0 태양의 개기 일식이 우리의 하늘에서 일어났다고 해서 미국에서도 일식이 일어났다고 하지 않을 것이며, 내 코앞에 눈송이가 떨어진다고 해서 황금해안(가나 공화국 일부)에도 눈이 내린다고 믿을 이유는 없다(쟝 폴 리히터)

    0 편견은 푸석푸석해지거나 교육에 의해 비옥해져 본 적이 없는 마음밭에서 근절되기가 가장 어렵다. 편견은 그곳에서 바위 사이의 잡초처럼 단단하게 자란다. (샬로트 브렌테)

    0 모든 편견을 포기하는 것은 모든 원칙을 포기하는 것이다. 원칙이 없는 사람은 변덕의 지배를 받는다. (프리드리히 야코비)

    0 우리가 낡은 편견을 버릴 때는 새로운 미덕이 필요하다.(스탤 부인)

    0 실수를 전혀 하지 않을 만큼 현명한 사람은 없다. 그러나 실수, 특히 편견의 실수를 깨닫고 고칠 줄 아는 현명한 사람은 다소 있다. (워싱턴 배로우)

    0 편견은 일반 대중을 지배하는 것이다.(프랑수아 마리 드 볼테르)

    0 다른 사람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편견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판단을 왜곡시키고 자신의 재능의 자연스런 발휘를 방해하는 기이함, 허영, 자만, 고집과 같은 악덕으로 가는 모든 길을 열어 놓은 것과 같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견해가 다른 사람들의 동의로 비준되고 인정되기 전까지는 설사 그런 척하더라도 실제로는 만족하지 못한다. 우리는 영원히 논쟁하고 언쟁한다. 우리는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가지 않고 그들을 이쪽으로 오게 하려고 노력한다.(죠수아 레이놀즈 경)

    0 판단이 약해지면 편견이 강하게 고개를 든다. (케인 오하라)

    0 편견은 논리를 가장하기 쉽다.(윌리엄 해즐리트)

    0 발전의 큰 장애는 편견이다.(크리스천 네스텔 보비)

    * 편견을 가진 정신은 알카리가 산을 중화시키듯 진실의 힘을 중화시킨다. 가장 설득력 있는 논쟁, 가장 힘있는 강연이 편견에 의해 즉시 무산될 수 있다.(데이비드 토마스)

    * 편견은 바라볼 때는 곁눈질하고 말할 때는 거짓말을 한다.(뒤셰 드 아브랑테)

    * 과거에 현명하고 선한 사람들이 인정하고 선택한 의견들은 대개 그 기반이 튼튼한 것이었다. 자신들의 의견에 대한 집착이 편견으로 여겨져도 그들은 가볍게 부인하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 사람들은 오래된 편견에 대한 경고를 듣곤 하지만 나라면 새로운 자만에 대해 경고하겠다. 도덕적 문제에 대한 새로운 견해는 그러한 새로운 자만의 일례이다. 일반적으로 사람의 감정이나 예부터 내려 온 의견과 관련해서 새로운 결론을 얻은 사람은 불완전한 사색가라고 할 수 있다. 참된 철학자라면 어떤 다른 것, 즉 그러한 감정의 타당성, 견해의 현명함, 정당하고 영속적인 것의 생명력 있는 뿌리 같은 것을 찾을 것이다.

    * 외고집과 편견은 어디서든지 공격하라. 만인을 위한 정의만이 민주주의의 보루이니라. (죤 에드가 후버)
    * 편견은 무식의 소산이다. (윌리엄 해즐리트)

     





    신약성경은 예수님의 족보로부터 시작됩니다. 성경을 처음 대하는 사람은 이 족보를 읽다가 답답해서 성경 읽는 것을 그만두기도 합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족보에 나오는 사람들에 잘 모릅니다. 그래서 족보가 재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는 사정이 다릅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나오는 사람들은 그들의 조상의 이름들입니다. 그들에게는 친숙한 이름들입니다. 그들에게는 이 족보가 흥미로웠을 것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은 그들에게 놀라운 사실이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족보를 자세히 읽어 가다 보면 다섯명의 여인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은 유다의 며느리였던 다말과 살몬의 아내였던 기생 라합과 모압여인 룻과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입니다. 원래 유대인의 족보에는 여자들의 이름은 올라가지 않습니다. 남자들의 이름만 올라갑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다섯명의 여자가 족보에 나옵니다.

    예수님의 조상들 중에는 이 다섯명의 여인들 외에 수 많은 여자들이 있었지만 그 중에 이 다섯명만의 이름이 이 족보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 뛰어난 사람이어서 이름이 올라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 중에 넷 사람은 각각 여자로서 큰 약점을 가진 자들이었지만 예수님의 족보에 그 이름이 올라간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무엇인가 중요한 교훈을 주고 계시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는 여인보의 예수 탄생 족보를 보면 특이한 점이 있다. 유대인의 족보엔 우리나라 족보와 같이 여인들이 들어가지 않는 것이 통례이다. 그런데 예수 탄생 족보에 다섯 여인이 들어있으며 그 중 4명이 이방여인으로 아주 부끄러운 사연들을 가진 자들이다. 다말은 창녀 모습으로 단장하고 시아버지 유다를 꾀여 관계했던 여인이며, 라합은 여리고성의 기생으로 기생집 주인, 룻은 이방 모압 여인, 밧세바는 우리아의 아내지만 다윗왕과 간음하였던 여인이다. 이것은 선민사상을 갖는 유대인들로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다. 그럼에도 왜 마태는 그 복음서 첫 장에서 저들의 이름을 열거하면서 예수 그리스도 탄생 족보에 넣어 두었을까? 그 의도는 무엇이며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는가?


    첫째는 성경은 진실을 말해 줌으로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임에 확신을 준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 단점을 말하기를 꺼려하지만 장점은 말하길 좋아할 뿐 아니라 과장하여 말하기도 한다. 이것은 인간의 속성이다. 그러나 성경은 은밀한 일까지 폭로해 주면서 사실을 사실 그대로 기록해 주고 있다. 그리고 결국에 하나님은 그 은밀한 일까지도 심판하시는 분이시다(전12:14). 성경은 진실한 책이며 사건들을 꾸밈없이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더욱 신뢰하게 되고 하나님의 무오한 말씀에 확신을 갖게 된다.


    사도바울은 스테반을 돌로 쳐 죽이는 일을 진두지휘했던 사람이었지만 변화되어 복음의 사명을 맡은 자로 충성을 다하였던 사람이다. 그럼에도 그는 “내가 부득불 자랑할 진데 나의 약한 것(약점)을 자랑하리라(고후11:30)”고 말한다. 성경은 믿음의 사람들의 약점을 기록해 주며 어떻게 변화되었고 어떤 사람이 되었는가를 가르쳐 준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연약한 모습을 보게하고 변화되어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 되게하는 믿음과 확신, 용기를 심어준다.


    둘째는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길이며,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얻게 됨을 증명해 준다.

    네 명의 이방여인들은 사회, 도덕 윤리적 면에서 볼 때 흠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다. 그러나 저들은 메시야를 믿음으로 대망하던 자들이다. 따라서 성경은 저들을 그리스도 탄생의 역사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스도가 없는 선행은 그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지만(잠16:25), 큰 죄를 범한 자라도 그리스도를 믿어 회개한 자들은 죄사함을 받아 의롭다 하심을 받게 되며, 이러한 자들을 하나님은 자녀 삼으시고 저들로 인하여 기뻐하시며 저들에게 복을 주시고 존귀히 여기신다.


    셋째는 죄인이 그리스도로 인하여 변화되고 5단계의 신앙 성장을 가져옴을 표적으로 보여준다.

    1. 다말: 그리스도 영접 -- 창세기 38장에 기록된 유다(시아버지)와 다말(며느리)의 정사 사건은 현대 드라마에서는 Rated "R" 혹은 “X"에 속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럼에도 성경은 이 사건을 적나라하게 기록해 준다. 창세기 38장은 성경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만약에 이 장의 기록이 빠져 있다면, 그리스도의 탄생 족보에 연결이 끊어지기 때문이다. 창세기의 후반부 기록은 요셉의 이야기지만 그리스도는 요셉의 족보를 통해서 오시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다말은 자기 남편이 죽게 되었을 때, 다른 곳으로 시집간다 해도 아무 하자가 없었다. 그럼에도 다말은 끝까지 유다의 후손을 이어주는 자가 되길 원했다. 분명 그녀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믿음을 가졌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언약 ”네 씨(Seed = Christ)로 말미암아 만인이 복을 받으리라(창22:38)“하신 말씀을 전해 듣고 확신을 가졌던 것이 분명하다. 그녀는 자기 남편과 남편의 동생 죽었음에도 시아버지 유다의 셋째 아들이 클 때까지 오랜 기간을 기다렸지만 그 아들을 자기에게 주지 않음을 알고 시아버지를 꾀어 통간을 하였다. 그 결과로 쌍둥이 아들을 얻어 그리스도 족보의 연결을 이루었다. 그녀는 그리스도를 대망하며 죽음을 각오하고 그 일 행했다.


    이는 마치 야곱이 아버지를 속이면서도 장자의 축복을 취하였던 것과 같이 그 행위에서는 칭찬은 못하겠지만 믿음으로 행하였다는 것이다. 그러한 다말의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게 되신 것이다. 이는 마치 모든 구원 받은 자들이 신앙의 첫 단계로 그리스도(Seed)를 심령에 영접하여 그리스도인이 되는 첫 단계와 같다고 볼 수 있다.


    2. 라합: 구원의 확신 -- 여호수아 2장은 여리고 성이 이스라엘의 공격에 함락되어질 때 기생 라합과 그 친족들이 다 구원을 받게 되는 사건을 기록해 준다. 라합은 죽음의 위험을 무릎서고 이스라엘 정탐꾼을 숨겨 살려주었다. 라합은 정탐꾼들에게 자기와 가족들을 선대해 달라고 요청했으며 정탐꾼은 비밀을 누설치 말 것과 라합의 집 창문에 붉은 줄을 내려 놓을 것을 지시했다.


    만약 라합이 그 집 창문에 붉은 줄을 내리지 않았다면 아무리 그녀가 정탐군을 살려줬다 할지라도 살아남을 수 없었다. 라합과 그 가족이 구원을 받게 된 것은 그녀가 창문에 붉은 줄을 내렸고 그 집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출애굽 사건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린양을 잡고 그 피를 문설주와 문지방에 바름으로 장자를 구할 수 있었던 것과 같다. 붉은 색은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미하며 붉은 줄을 내림은 구원의 확신을 가진 믿음의 행위인 것이다. 신앙의 두 번째 단계로 구원의 확신을 갖는 것이며, 오늘 죽는 다 해도 그리스도 보혈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됨에 확신을 갖게 되는 단계인 것이다.


    3. 룻: 교회에 충성 -- 룻기는 이방 모암 여인 룻의 이야기를 기록해 준다.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게 되니 엘리멜렉은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지방으로 이주했고 두 아들은 이방여인과 결혼하게 됐다. 여기서 엘리멜렉과 두 아들 죽게 되자 나오미와 두 며느리들만 남게 됐다. 이 때 나오미는 두 며느리에게 친정으로 돌아가 재혼하라고 종용했지만 룻은 끝까지 시어머니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왔다. 여기서 룻은 기업 무를 자인 보아스(기생 라합이 낳은 아들)와 결혼을 하게 됐고 아들 오벳(다윗의 친할아버지)을 낳았다.


    시어머니 나오미(기쁨)가 마라(고통) 칭하여지는(룻1:20) 상황에도 룻은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며, 어머니를 죽기까지 따르겠다는 위대한 결단을 한 여인이며, 그 결단으로 실천에 옮긴 여인이다. 성경에서 과부는 참된 그리스도의 교회를 예표해 준다. 여기에 반하여 계시록에 나타난 음녀는 타락한 교회를 말해준다고 볼 수 있다. 현대 교회에 확산되어 가는 종교 다원주위를 외치는 교회들은 타락한 음녀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룻에게서 핍박과 환난 가운데서도 믿음의 정절을 지키며 교회를 충성으로 섬기는 성도의 모습(계2:10, 충성된 서머나 교회)을 찾아보게 된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인으로 구원의 확신을 가진 자는 참된 교회를 위해 죽도록 충성하는 3번째 신앙의 단계를 갖게 된다.


    4. 밧세바: 죄씻음으로 성결 -- 우리아의 아내인 밧세바는 남편이 전쟁터에 나가 있는 동안 집 뜰에서 목욕하였으며 그 몸매가 너무 아름다워 다윗의 시선을 끌게 됐다. 결국 다윗과 간통을 하게 되었으며 그로인해 임신하게 되었다. 그 때문에 다윗은 그녀의 남편 우리아를 전쟁에서 죽게 하는 더 큰 죄를 범하게 되었다. 다윗이 밧세바를 아내로 삼고 낳은 아이는 병들어 죽게 되었으며 밧세바는 그 후에 4명의 아들을 갖게 되었다. 그 아들 중에 솔로몬을 통해 족보(마리아의 남편 요셉의 족보)가 이루어 졌으며, 다른 아들인 나단을 통해 누가복음에 기록된 예수 족보(마리아 편의 족보)가 이루어지게 됐다.


    그러면 어떤 점에서 밧세바가 예수 족보에 들어가게 되었을까? 그 해답은 사무엘하 11장 4절의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리말 성경에는, “다윗이 사자를 보내어 저(밧세바)를 자기에게로 데려오게 하고 저가 그 부정함을 깨끗게 하였으므로 더불어 동침하매 저가 지기 집으로 돌아가니라”라고 기록해 주고 있다. 그러나 원문 성경 기록에서는 그 순서가 다르게 기록되어 있으며, (1)더불어 동침하고, (2)부정함을 깨끗게(Purify) 했기에, (3)자기 집으로 돌아갔다는 순서이다. 대부분의 영어성경(KJV, RSV, NIV 등등)에는 원문 순서를 따라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NRSV에서는 “she was purifying herself after her period(월경기간)”이라고 표현한 번역도 있는데 이 번역은 잘못된 것이며, 우리말 성경 번역도 잘못된 번역이라고 필자는 믿는다.


    밧세바가 다윗과 동침을 하고 그 부정함(간음)을 정결케 하는 종교적 의식으로 물로 씻은 후에 자기 집으로 갔다는 번역이 옳다. 성경은 성경으로 풀어야 한다. 성경은 남녀가 부정하게 동침하여 설정을 하였을 경우 남녀 둘 다 물로 몸을 씻어야 한다(레15:16-18)고 기록하고 있다. 또 여자가 경수(월경)가 있을 때 부정하게 되는데 경수가 시작하는 날부터 7일과 그리고 경수가 끝나는 날로부터 7일간 부정하게 된다고 말해준다.(레15:19-33). 밧세바가 후자의 경우로 경수 때문에 동침 전에 몸을 씻었다(우리말 성경)고 본다면 아이를 갖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동침 전에 몸을 씻었다는 것은 인간적인 면에서 자신들의 성교를 위해 몸을 씻는 일이 되어진다. 그러나 성교 후에 몸을 씻음은 종교적 의식으로 분명히 성결케하는(Purify) 의식이며, 이는 성경적으로 영적으로 의미를 갖는 것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분명히 원문 순서와 대부분의 영어성경 번역이 옳다고 주장한다. 밧세바는 비록 이방인이지만 성경의 가르침에 순종했으며 죄로부터 성결해 짐을 바랬다. 우리가 아무리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교회를 충성으로 섬기는 자라 할지라도 우리는 죄를 범할 수 밖에 없는 연약한 자들이다. 우리는 이 때마다 다윗왕의 요청에 불응할 수 없었던 밧세바와 같이 즉시 우리의 죄를 씻는 회개의 눈물을 가져야 한다. 매일 우리의 연약한 부분을 교정해 나가는 회개와 성결의 삶을 살아가는 믿음의 4번째 단계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롬7:24)고 고백했고, 예수께서 베드로의 발을 씻어 주셨던 것이다. 우리 유리함으로 눈물의 수치가 주의 책(생명책)에 기록되어짐(시56:8)을 명심하자.


    5. 예수의 모친 마리아: 겸손, 순종, 온전함에 이르는 신앙의 마지막 단계

    마리아는 나사렛에서 자라난 여인이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요1:46)”고 나다나엘이 말했듯이 나사렛은 도덕, 윤리적으로 평판이 좋지 않는 마을이었다. 이러한 마을에서 자랐지만 마리아는 참으로 순결했다. 마치 쓰레기장에서 한 송이의 아름다운 향기를 날리는 백합화가 같이 순결한 여인이다. 그러기에 그녀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요(눅1:28),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은혜가 보여졌다(눅1:30).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은 누구나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고 있음이 보여져야 한다. 이는 그 삶에서 겸손과 순종과 온전함에 이루어가는 모습이 보여져야 한다는 말이다. 바로 마리아는 이 은혜를 갖춘 여인이었다. 마리아는 자기의 생명에 위험이 있을 수도 있는 상황이 전개될 수 있지만, 천사의 지시하심에 “주의 계집종이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1:30)”라고 말한다. “주의 계집종”이란 표현에서 그녀의 겸손,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에서 말씀에서 그녀의 온전한 순종을 볼 수 있다.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 계집 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눅1;46-48)라고 구주로 인해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신앙의 온전함을 증명해 주는 신앙의 마지막 단계를 말해 주고 있다.


    이와 같이 예수 탄생 족보에 나온 다섯 여인들은 성경의 진실함과 믿음과 은혜로 인하여 구원을 얻게 됨을 증명해주며, 더 나아가 우리 각자가 주 안에서 거룩함과 온전함에 성화를 이루게 됨을 표적(Sign)으로 말씀해 주고 있다. 이 여인들은 그리스도 예수의 탄생을 준비했던 자들이며 슬기로운 믿음의 여인들이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이제 머잖아 홀연히 심판의 주로서 재림하게 된다. 마태복음 25장에 기록된 미련한 다섯 처녀와 슬기로운 다섯 처녀를 비유를 보자. 미련한 처녀들은 등은 준비되었으나 등에 기름이 없어진 줄 모르고 잠에 취해 있다 혼인잔치에서 제외되었다. 슬기로운 5처녀는 깨어 기름을 준비하며 등불을 켜고 신랑을 기다리다가 혼인잔치에 참여하게 되었다, 계시록 19장에는 어린양의 혼인잔치가 열려진다. 그때 음녀들은 심판을 받게 되지만 빛나고 깨꿋한 세마로를 입은 성도들은 어린양 혼인 잔치에 참여하는 영광을 얻게 된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어진다(마5:18). 과연 나는 구원받은 성도인가? 그렇다면 신앙의 어떤 단계에 있는 자인가? 그리고 내 집(가족 친족 친지)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신앙(信仰, faith)이란 “믿고 바라는 일” “신과 같은 성스러운 존재를 신뢰하고 복종함.”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

    뿌리 없는 나무는 곧 시들어 말라버려 죽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의 뿌리가 있습니다.
    Family Tree라는 말을 들어보셨는지요?
    “가계도(家系圖)” 라고 합니다.
    내 조상의 뿌리를 정리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의 신앙의 뿌리도 정리해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고 어떻게 봉사하며 섬겼는지 신앙의 이력서도 정리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오늘은 예수님의 족보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족보를 이야기할 때마다 예수님의 족보에는 네 명의 이방 여인의 이름이 기록되었다고 하는 설교를 자주 들었습니다. 이렇게 자주 듣던 설교 때문에 성경을 성경대로 읽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족보를 다시 살펴보면 네 명의 이방 여인의 이름이 아니라 세 명의 이방 여인의 이름과 한 명의 이방 남자의 이름이 정확하게 기록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런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성경을 읽을 때 습관적인 자세를 버려야 한다는 것을 알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성경 퀴즈 대회를 할 때에도 예수님의 족보에 나타난 이방 여인의 이름은 누구인가? 이런 질문도 있었습니다. 당연히 여리고 성의 기생 라합, 다말, 모압 여인 룻, 그리고 밧세바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런 대답에서 성경을 읽는 자세를 다시 한 번 더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세 명의 이방 여인들의 이름은 



    우리아(Urias) / 뜻 - 빛

    1. 헷 족속의 사람으로 다윗의 충성된 군인이요 미인 밧세바의 남편이다.

    그가 랍바에 출정 중 다윗 왕이 그 처를 간통하고 그 죄의 자취를 감추려고 그를 소환 하여 집에 가서 편히 쉬라 하였으나 전쟁 중에 있는 동료들을 생각하고 불응하였다.

    부득이 전쟁에 다시 보내며 대장 요압에게 편지하기를 우리아를 맹렬한 싸움의 제일 앞에 세워 죽게 하라고 하였다.

    마침내 그는 전사하였다 애석하다, 충성된 군인이 불의의 화를 당함이여. 그 아내 밧세바는 다윗왕의 왕비가 되었다(삼하 11: 마 1:6).

    2. 유대국 아하스 왕 때의 제사장으로 아하스 왕이 다메섹에 가서 보낸 우상의 제단 도형을 받아 그대로 만들어 왕으로 제사하게 하였다(왕하 16:20∼21).

    3. 예레미야 선지자와 동시대의 선지자로서 여호야김과 나라에 대하여 예언을 하 였더니 그를 잡아 죽이려하므로 애급으로 도망하였다(렘 26:20∼21)>

    밧세바(Bathsheba) / 뜻 -

    밧세바는 엘리암의 딸이자 히타이트 사람으로 다윗의 부하 우리야의 아내였다. 어느 날 다윗이 밧세바가 목욕하는 것을 보고 그 아름다운 모습에 반하여 그 남편이 전쟁터에 나간 사이에 그녀와 여러 차례 정을 통하였다. 결국 밧세바가 다윗의 아이를 임신하게 되었고 다윗 왕은 밧세바를 영원히 차지하기 위해 자신의 부하이자 군대장관 요압에게 편지를 보내 도저히 살아올 수 없는 위험한 전투에 우리야를 내보내 우리야를 죽게 했다.

    우리야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다윗 왕은 즉시 밧세바와 혼례를 올렸으며, 밧세바는 임신했던 첫째 아들을 낳았다. 하지만 예언자 나탄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다윗을 꾸짖고 저주하였고 아이는 일주일 만에 병으로 죽고 말았다. 이후 밧세바는 둘째 아들 솔로몬을 낳았고 이후 솔로몬은 다윗 왕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제3대 왕이 되었다.

    다윗 왕 말기에 다윗의 넷째 아들 아도니야가 왕 행세를 하자 밧세바는 나단과 함께 이를 다윗에게 보고하여 아도니야의 반란에 미리 대처할 수 있었다. 밧세바에 관한 그 이후의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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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윗과 밧세바 - 사무엘하 11장

    1. 다윗의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었던 두 사람을 꼽으라면, 아마도 골리앗과 밧세바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살펴보면 이 두 사람은 완벽한 대조를 이룹니다. 골리앗을 만난 다윗은 아직 어리고 무명 이었며, 세상 경험도 많지 않았던 반면, 밧세바를 만났을 때 다윗은 왕이었고, 충분히 나이도 들었으며, 여러 가지 시련들을 극복하며 백성들로 이미 용기 있고 지혜로운 지도자로 인정받고 있던 때 이었습니다.

    2. 이 둘의 외모 또한 극과 극이지만, 다윗과의 관계 측면에서는 유사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다윗을 일종의 시험장, 곧 그의 속마음이 어떠한지 드러내는 자리로 데려갔다는 사실입니다. 골리앗과의 만남에서는 다윗이 상황에 지배받기 보다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기도의 사람이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밧세바의 경우에는 그가 기도의 자리에 있지 아니한 것을 깨닫게 되고, 이후로 기도하는 자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게 됩니다.

    3. 본문 당시의 상황은 계절 상 봄이었습니다. 당시의 관습에 따르면, 봄에 주로 전쟁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출전 중이었던 이스라엘 군대를 뒤로하고, 다윗은 궁전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다가 하루는 궁전 옥상을 거닐다 우연히 한 여인의 목욕하는 장면을 목격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왕으로서의 모든 힘을 과시하며 그 여인을 불러오고, 잠자리를 같이 합니다. 이는 기도하는 자의 정체성은 온데간데없고, 오직 자신의 사욕을 채우는 권력자의 모습만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4. 당시 그 여인,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는 전쟁에 나가있을 때였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밧세바는 자신이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되고 다윗 왕에게 전갈을 보냅니다. 밧세바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된 다윗 왕은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을까요? 다윗은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불러다가 휴가를 줍니다. 이러한 다윗의 반응에서 보여 지는 다윗 왕의 모습은 이미 세상일과 처세에 능하며, 어떻게 자신의 위기를 빠져나가야 할지를 알고 있는 모습입니다.

    5. 하지만, 아무리 능수능란하여 상황은 만들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사람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아는 집에 돌아왔지만 동료들을 생각하며 편하게 잠자리를 갖지 않습니다. 우리아에게 술을 먹여보아도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다윗왕은 우리아가 마음대로 되지 않자, 우리아를 다시 전쟁터에 보내며 위험한 최전방에 배치하라고 지시합니다. 그리고 우리아는 전쟁터에서 전사하게 됩니다.

    6.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다윗왕의 모습, 특별히 지도자로서 모습을 가지고 있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으로서의 모습이 아니라, 이 순간만큼은 하나님을 완전히 떠난 자의 정체성으로 자신의 사욕을 채우고 있는 탐욕스런 왕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윗 왕은 첫째로, 간음의 죄를 저질렀고, 둘째로, 간음한 자신의 죄를 덮으려고 한 여인의 남편을 고의적으로 죽게 한 죄를 범했습니다. 자신이 죄인으로 드러나는 것이 두려워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은 셈입니다.

    7. 하지만 이것이 다윗의 저지른 죄는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사무엘하 11장 본문을 살펴보면, 의도적으로 보이리만큼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보내다" 라는 단어입니다. 다윗 왕은 군대를 보내고, 신하를 보내고, 전갈을 보내고 우리아를 보내고 사람을 보내고,,,등등 이 본문에서 '보내다'는 동사/표현이 반복적으로 사용됩니다. '보낸다'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신학적/신앙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8. 그런데 바로 다음 장인 사무엘하 12장을 보면, 다윗의 죄를 깨닫게 한 선지자 나단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12장 1절에 '보내다'라는 단어가 다시 등장합니다. "여호와께서 선지자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시니..." 어쩌면 성경의 저자는 다윗의 이야기를 전하며 수 많은 상황 속에 보내는 주체로서의 다윗을 서술하다가 마침내 선지자 나단을 등장시키며, 하나님의 보내심을 말합니다. 즉, 보내는 것은 어쩌면 하나님의 영역일지 모릅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윗은 사람들의 삶에 스스로 하나님 역할을 했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을 보내고, 전갈을 보내며 사람들의 삶을 조종했습니다. 이것이 다윗의 본질적인 죄입니다.

    9. 그렇다면, 다윗 왕이 이러한 죄악의 길로 빠지게 되는 통로는 무엇이었을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예를 들어, 옥상으로 올라간 다윗의 행동이 문제였는지, 혹은 다 보이는 곳에서 목욕을 한 밧세바가 더욱 문제였는지 하는 사실여부도 다시 생각해봐야 합니다. 다시 말해, 어느 순간부터 잘못되었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본문의 상황 안에서 어떠한 행동 혹은 환경이 다윗으로 하여금 죄의 길로 들어서게 했는지 살보며 우리 역시 죄의 통로를 경계해야 합니다.

    10. 알다시피 다윗은 사울에 이어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일종의 군사적인 이유에서 왕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삼상 8장을 보면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사무엘을 찾아가서 왕을 세워달라고 요청할 때. 사무엘은 그들에게 왕이 생겨나면 이러저러한 어려움이 있을텐데 괜찮을지 물어봅니다. "왕이 세워진 그 때는 너희 손으로 세운 왕을 인해서 하나님께 부르짖어도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으실 것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11. 하지만 사무엘의 말에 장로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백성이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하여 가로되 아니로소이다. 우리도 우리 왕이 있어야 하리니 우리도 열방과 같이 되어 우리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 (삼상 8장 19-20절) 그들의 말에 의하면 왕의 역할은 두 가지인데, 첫 번째는 백성을 다스리는 것과 둘째는 군사를 이끌고 앞에 나가서 전쟁을 지휘하는 것이었습니다.

    12. 그런데 오늘 본문 1절에서는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해가 돌아와서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매.." 즉, 전쟁의 때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인 다윗은 요압과 그 신복 온 이스라엘 군대를 전쟁터로 보냈습니다. 원문의 표현에 보면 그 다음을 이렇게 말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예루살렘에 남아있었다.” 그리고 그는 저녁에 왕궁 지붕 위를 거닐다가 한 여인을 발견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13. 그렇다면 다윗이 죄로 빠지게 된 통로가 무엇이라고 생각됩니까? 그것은 나라가 전쟁 중인데도 불구하고 전쟁을 이끌어야 할 왕이 전쟁에 나가지 않은 것입니다. 왕이 왕으로서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아니하고 자신의 몸이 편한 곳,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특별히 지도자들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끼게 됩니다.

    14. 그런 의미에서, 우리도 스스로를 돌아보며 우리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물리적인 위치도 있지만, 영적이고 상황적인 위치도 있을 수 있습니다. 또한 과연 이 사회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있어야 할 곳이 어디인지도 생각해봐야 합니다. 요즘과 같은 때에 국내외 정치를 보면서 우리는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감사절과 연말이 다가오는 시점에 우리는 과연 어느 자리에 있어야 하는지 끊임없는 고민과 실행을 위한 노력이 필요한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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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밧세바는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 불의하게 자신의 부인으로 취한 여인이었다(삼하 11∼12장).  그러나 위에서 언급된 아비가일과 아히노암은 다윗이 왕 되기 전 고난 중 변함없이 함께 한 여인들이다.  이 점에서 이 여인들과 비교한다면 밧세바가 어떤 여인인지  짐작된다.


    그러나 나중 밧세바도 알았을 것이다. 자신의 외적 미모가 죄의 유혹을 일으켰고 그 결과 불행과 비극을 당했지만 오로지 하나님의 은총으로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정말 비싼 대가를 치르고 자신의 무가치함과 하나님의 은총의 위대성을 철저히 깨달았을 것이다.  그렇게 밧세바는 헌신적인 신앙인으로 날마다 달라졌을 것이다.


    그렇지만 당연히 아비가일이나 아히노암이 밧세바보다 성경에 더 많이 기록되어야 했다. 그러나 그 반대였다. 밧세바의 기록은 자랑스럽지 않은 일로부터 시작하여 아들 솔로몬이 왕이 된 후에까지 기록된다. 사무엘하 11장부터 열왕기상 2장까지 밧세바의 삶은 성경에 계속 기록된다. 이와 비교한다면 그렇게 훌륭하고 지혜로운 여인인 아비가일은 사무엘상 25장 한 장에만 그리고 아히노암은 아비가일의 기록 중 겨우 한 줄(삼상 25:43)만 언급되었다.

    상급을 공평하게 줄 하나님이 불공평하게 이들을 대한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속사는 하나님이 주인공으로 어떻게 인류의 구원을 위해 일했는가를 기록한다.  주인공 이외 다른 인물들을 조연(助演)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조연들도 하나님의 구속사에 공헌을 한다.  조연들은 이 공헌에 쓰임을 받았다는 사실에 만족하며 감사해야 한다.


    조연들은 맡은 사역이 있고 그에 따른 직분이 있다.  사역이나 직분에 따라 은사도 다 달리 주어진다.  이 때문에 은사의 크기를 서로 비교하며 좋고 나쁘다는 이분법으로 조연들을 평가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그 보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어느 누가 더 자신의 역할에 충성했는가가 더 중요하고 이것이 하나님이 평가하는 기준일 것이다.  어떤 충성을 하였느냐에 따라 상급이 결정될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밧세바가 종국적으로 자신의 외적 미모 덕분에 다윗의 부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위에서 언급한 두 여인들과는 완전히 다르고 영적 차원에서 본다면 한참 저차원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밧세바는 솔로몬이라는 위대한 왕을 낳는 영광을 얻었다.  인간적 관점에서 보아 정말 하나님은 불공평한 것처럼 보인다.


    밧세바 때문에 그의 남편이며 다윗에게 충성한 신하이며 용맹스런 장군이었던 우리아가 전쟁터에서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다.  물론 다윗이 꾸민 음모의 결과였다.  다윗은 참으로 비열하고 몰인정하며 가증스런 왕으로 하나님 앞에 드러났다.  그가 비록 기름 부음을 받은 그리스도였지만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와는 완전히 달랐다.  그가 모형이라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원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윗 같은 성군이라도 일단 죄를 범한다면 연이어 죄를 짓게 된다.  죄는 죄를 또 낳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죄는 그 모양이라도 버려야 했다.


    인간적 관점에서 비록 억울하게 죽었지만 우리아는 하나님 앞에 끝까지 충성스러운 종의 삶을 살았다(삼하11장).  이 점에서 그는 하나님 앞에서 큰 상을 얻었을 것이다.  그의 삶과 죽음은 성군 다윗이 속으로부터 부패한 인간 존재로서 하나님 앞에 죄인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주었고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라면 성군 다윗도 아무 것도 아님을 증명해 주었다.


    결국 밧세바와 그의 삶은 하나님의 은총을 강조하는 역할을 했다.  이 사실은 그녀에게서 솔로몬이 출생했다는 사실에서도 잘 증명된다.  불의한 관계로부터 출발된 다윗과 밧세바의 인연은 처음부터 하나님 앞에 불의하고 가증스러워 죄와 죄악 자체였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이 이런 불완전한 다윗과 영원한 왕국 언약을 이미 맺었다는 것이다(삼하7장).


    이 언약 체결 덕분에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영광과 명예와 존귀를 얻은 다윗(삼7:18-19절)은 그만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아의 부인인 밧세바와 불의한 성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은 취소불능했다.  다윗에게 약속한 대로 하나님 나라 다윗 왕국을 계속 이어나갈 후손을 하나님은 주어야 했다(삼하7:12-1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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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족보
    https://zekesnote.tistory.com/1123 


    질문 :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족보가 서로 다른 이유는 무엇인가?


    답변 : 예수님의 족보는 성경의 두 곳, 즉 마태복음 1장과 누가복음 3:23∼38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으로부터 아브라함까지 계보를 추적합니다.
    누가는 예수님으로부터 아담까지 계보를 추적합니다.
    하지만 마태와 누가가 완전히 다른 족보를 추적하고 있다고 믿을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마태는 요셉의 아버지를 야곱(마 1:16)이라고 기록한 반면, 누가는 요셉의 아버지를 헬리(눅 3:23)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마 1:6)의 계열을 따라 추적하지만, 누가는 다윗의 아들 나단(눅 3:31)의 계열을 따라 추적하고 있습니다. 사실, 다윗과 예수님 사이에서 각 족보가 공통으로 서술하는 이름들은 스알디엘과 스룹바벨 뿐입니다(마 1:26, 눅 3:27).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차이점을 성경의 오류라고 지적합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꼼꼼한 기록 관리자들이었으며, 특히 계보와 관련해서는 더욱 세심하였습니다. 마태와 누가가 동일한 혈통에 대해 완전하게 서로 모순되는 족보를 세울 수 있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다윗으로부터 예수님까지 이어지는 계보는 각각 완전히 다릅니다. 심지어 스알디엘과 스룹바벨에 대한 언급조차도 동명이인에 대한 언급일 수 있습니다. 마태는 “스알디엘”의 아버지를 “여고냐”라고 언급하는 반면 누가는 “스알디엘”의 아버지를 “네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스알디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남자가 자기 아들의 이름을 스룹바벨이라고 짓는 것은 그런 이름을 가진 자들 중에 유명한 사람들이 많은 것을 고려할 때 일반적인 것입니다(에스라와 느헤미야를 읽어 보십시오).


    이에 대해 교회 역사가 “유세비우스”가 제시한 한 가지 설명은 마태가 장자 또는 생물학적 계보를 추적하는 반면 누가는 “수혼 결혼”의 경우들을 고려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한 남자가 아들을 갖지 못하고 죽으면 그 남자의 형제가 그 과부와 결혼하여 죽은 사람의 이름을 이어받을 아들을 갖게 하는 것이 전통이었습니다. 유세비우스의 이론에 따르면, 멜기(눅 3:24)와 맛단(마 1:15)은 똑같은 여인(전통에 따르면 그녀의 이름은 ‘에스다’임)에게 다른 시기에 결혼했습니다. 이에 헬리(눅 3:23)와 야곱(마 1:15)은 이부 형제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 후 헬리는 아들이 없이 죽었고, 이에 그의 이부 형제 야곱이 과부가 된 헬리의 아내와 결혼하여 요셉을 낳았습니다. 따라서 요셉은 합법적으로는 ‘헬리의 아들’이지만 생물학적으로는 ‘야곱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마태와 누가는 모두 요셉의 동일한 계보를 기록하고 있지만 누가는 법적인 계보를 따르고 마태는 생물학적인 계보를 따릅니다.


    오늘날 보수적인 성서학자들은 누가는 마리아의 계보를 기록하고 있고 마태는 요셉의 계보를 기록하고 있다는 다른 견해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 견해에 따르면, 마태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을 통해 요셉(예수님의 합법적인 아버지)의 계보를 따라가며 누가는 다윗의 아들 나단을 통해 마리아(예수님과 혈연관계)의 계보를 따라갑니다. 요셉은 헬리의 딸 마리아와 결혼하면서 헬리의 사위가 되었지만 헬라어에는 ‘사위’에 해당하는 단어가 없기 때문에 “헬리의 아들”로 불립니다. 아무튼 마리아의 계통을 따르든지 또는 요셉의 계통을 따르든지 예수님은 다윗의 후손이기 때문에 메시야가 되실 자격이 있습니다. 모계 쪽으로 족보를 추적하는 것은 드문 일이지만 처녀 마리아를 통한 탄생은 더욱 그러합니다. 누가의 설명은 예수님은 요셉의 아들이었고 사람들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눅 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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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택된 왕의 계보(마태복음)

    * 마태는 예수님의 조상을 14대씩 3세대로 나누어 기록하였다(일반적인 유대 선택적 족보기록 법을 따름)


    왕국 이전 /   
    ①. 아브라함, ②. 이삭, ③. 야곱, ④. 유다, ⑤. 베레스, ⑥. 헤스론, ⑦. 람, ⑧. 아미나답, ⑨. 나손, ⑩. 살몬,  ⑪. 보아스, ⑫. 오벳, ⑬. 이새,  ⑭. 다윗


    왕국 시대 / 
    ①. 다윗, ②. 솔로몬, ③. 르호보암, ④. 아비야, ⑤. 아사, ⑥. 여호사밧, ⑦. 요람, ⑧. 웃시야, ⑨. 요담, ⑩. 아하스, ⑪. 히스기야, ⑫. 므낫세,  ⑬. 아몬, ⑭. 요시야


    왕국 이후 / 
    ①. 여고냐, ②. 스알디엘, ③. 스룹바벨, ④. 아비훗, ⑤. 엘리아김, ⑥.아소르, ⑦. 사독, ⑧. 아킴, ⑨. 엘리웃, ⑩. 엘르아살, ⑪. 맛단, ⑫. 야곱, ⑬. 요셉, ⑭. 주 예수 그리스도 


    * 다윗만 유일하게 이 족보에서 왕으로 묘사된다(마 1:6)


    예수 그리스도, 그는 다윗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신 진정한 왕이셨다. 다윗조차도 그를 왕으로 불렀다(시 110:1, 참조 눅 20:43)


    여호와(성부 하나님)께서 나의 주님(예수님)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 앞에 굴복시킬 때까지 너는 내 오른편에 앉아 있거라.”(시편 110:1)

    4명의 이방 여인

    * 마태는 4명의 이방여인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다(특별하고 독창적인 족보기록 법을 만듦) 


    1. 다말(3절)   

    ①아람인

    ②첫 번째 남편 ‘엘’- 주의 눈 앞에 사악한 자, 그래서 죽음(창 38:7)

    ③‘오난’- 하나님을 뜻을 거역함, 그래서 죽음(창 38:10)

    ④ ‘셀라’- 유다는 또 죽을 까봐 시간만 질질 끔(창 38:14)


    *계대결혼(수혼법)/ 신 25:5∼6 


    창 38:26 / “유다가 그것을 알아보고 가로되, 그녀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녀를 내 아들 이게 워냐 니들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녀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2. 라합(5절)  

    ①가나안인-여리고의 창녀

    ②하나님의 소식을 듣고 믿음을 가짐(수 2:9상, 11하) 

    ③정탐꾼을 숨겨줌(수 2:10, 11, 히 11:31, 약 2:25)

    * 붉은 동아줄? 


    3. 룻(5절)  

    ①모압인- 여호와의 회중에 들어올 수 없는 족속(신 23:3-6)

    ②시어머니를 따라 하나님을 섬기고자 함, 죽음 남편의 친족 보아스를 만남

         

    * 보아스는 룻의 증손자

    * 기업무를 자 : 

    “여호와께서 이 젊은 여자로 말미암아 네게 상속자를 주사 네 집이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시니라”(룻 4:12)


    4. 밧세바(6절)

    ①헷사람 - 헷사람 우리아의 아내(삼하 11:3)
    * 밧세바라 하지 않고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② 솔로몬를 낳는다(간음을 통해 태어난 첫째 아들은 태어난 지 7일 만에 죽음(삼하 12:15-18)

           

    * 예수는 이방인의 하나님, 이방인의 구주이시다.

    * 은혜로만 구원받는다(‘라합’과 ‘밧세바’는 부도덕/ ‘다말’과 ‘라합’, ‘룻’은 믿음).


    요셉과 그리스도

    마태복음 1: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목록에 나오는 다른 아버지들의 경우 중요하게 사용된 용어인 “낳고”가 빠져 있다! 요셉의 이름이 법적 아버지요 계보의 연결로서 언급되는데, 이것은 1세기에 유대인들이 법적으로 요구했고 또 인식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요셉은 예수의 생물학적 아버지가 아니었다. 예수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동정녀를 통해 탄생하셨다(참조, 1:23-25; 눅 1:34-35).


    *“요셉과 약혼하고”: 약혼은 두 사람의 관계를 법적으로 묶는 유대인의 관습으로서 대개 결혼에 앞서 1 년 전에 행해졌다. 두 사람이 따로 떨어져 살았지만, 계약적으로는 결혼상태로 여겨졌다. 죽음 혹은 이혼만 약혼 관계를 파할 수 있었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1:19)

    “가만히 끊고자 하여”: 요셉이 이를 위해 취할 수 있는 두 가지 법적 조치는 다음과 같았을 것이다: (1) 법정에서의 공개적인 비난 혹은 (2) 두 증인 앞에서 이혼증서를 기록하여 주는 일(참조, 신명기 24 장). 마리아는 잉태와 관련된 환상을 요셉에게 말하지 않았다. 구약의 율법은 성적으로 신실하지 못한 사람에게 사형을 선언했다(참조, 신 22:20-21,23-24).


    끝까지 마리아를 지켜줌

    "요셉은 잠에서 깨어나 주님의 천사가 일러 준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그러나 그는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때까지 그녀와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았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자 요셉은 이름을 ‘예수’ 라 하였다."(마태복음 1:24‭-‬25)


    •마리아는

    ① 마리아는 처녀가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말씀을 믿었다(눅 1:37-38).

    ② 율법에 따라 돌에 맞아 죽을 수 있는 상황이 되는데도 그 말씀을 믿은 것이다.


    마태복음의 족보와 마가복음 족보의 차이

    1. 마태는 유대인의 왕이신 예수님을 위한 족보를 기록했다. 다윗과 솔로몬으로 이어지는 족보이다. 아브라함에서 예수까지 하향식족보(총 41명)이다. 마태복음 첫머리에 이 족보가 등장한다.


    *히브리어로 다윗의 이름이 갖는 수는 14를 이룸: D(4)+V(6)+ D(4)= 14 유대인들은 다윗을 상징하는 숫자를 14로 여긴다.


    2. 누가는 창세기의 예언을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다(이방인 독자). 솔로몬의 동복 형인 나단(삼하 5:14, 대상 3:5, 14:4)로 이어지는 족보이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상향식 족보 총77명). 아담- 하나님께 이어지는 족보이다(인성).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요한의 세례 이후에 기록되었다(회개의 세례 눅 3:3)


    3. 마태복음에서는 요셉의 위를 야곱으로 기록합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서는 요셉의 위를 헬리(또는 엘리)로 기록합니다. 헬리는 마리아의 아버지. 즉 요셉의 장인이다. 그러나 헬리는 아들이 없어서 요셉이 데릴사위 겸 양자로 맞이하게 된다. 


    4. 누가는 이 족보의 신빙성과 동정녀 탄생을 고려해 이렇게 기록합니다.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삼십세쯤되시니라.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누가복음 3장23절)"  



    • 참고 성경구절/

    * 누가복음 3장 38절 / "그 이상은 아담이요, 그 이상은 하나님이시니라.” 


    * 창세기 49장10절 /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 이사야 11장 10절 / "그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 사무엘하7장 15~16 / "내가 네 앞에서 물러나게 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뺏은 것처럼 그에게서는 빼앗지 아니하리라.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존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 창세기 3장 15절 / "내가 너와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니"


    * 갈라디아서 4장 4, 5절 /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출처 : https://mybiblenotes.tistory.com/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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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헷(Hittites) 사람 우리야

    가나안의 아들들 가운데 두 번째로 이름이 나오는 사람인 헷의 자손으로 이루어진 민족(창 10:15, 18). 따라서 그들은 함족이었다(창 10:6).

    아브라함은 가나안으로 이주했을 때 그곳에 거주하고 있던 헷 사람들과 얼마의 접촉을 가졌다. 그 전에 여호와께서는 헷 민족을 포함해서 여러 나라 사람들이 살고 있는 가나안 땅을 아브라함의 씨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신 적이 있었다(창 15:18∼21). 그렇지만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아모리 사람들(종종 가나안에 있는 나라들을 전체적으로 지칭하는 데 사용된 용어)의 잘못이 아직 온전히 차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다(창 15:16).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그 땅에 대한 헷 사람들의 소유권을 존중해 주었으며, 자기 아내 사라가 죽자 사라를 장사 지낼 동굴을 얻기 위해 헷 사람 소할의 아들 에프론과 거래하였다(창 23:1∼20).

    여호수아 시대에 헷 사람들은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강 유프라테스 강까지, 곧 헷 사람들의 모든 땅”을 망라하는 지역에 거주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수 1:4). 그들은 주로 산간 지방에 살고 있었던 것 같은데, 여기에는 레바논과 어쩌면 시리아의 여러 지역도 포함되었을 것이다(민 13:29, 수 11:3)

    노아의 저주 아래 있게 되다 헷 사람들은 가나안의 자손이기 때문에 노아가 가나안에게 내린 저주 아래 있었으며, 이스라엘이 그들을 복종시켰을 때 창세기 9:25∼27에 있는 노아의 말이 성취되었다. 헷 사람들의 종교는 다른 가나안의 종교들처럼 틀림없이 남근 숭배를 행하는 이교였을 것이다. 아브라함의 손자 에서가 헷 여자들과 결혼했을 때, 이것은 에서의 아버지와 어머니인 “이삭과 리브가에게 영의 비통함의 근원”이었다(창 26:34∼35, 27:46)

    하느님께서는 헷 사람들과 그들과 함께 언급되는 여러 나라들이 차지하고 있던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묘사하셨다(출 3L8). 하지만 이러한 나라들은 매우 타락하게 되어, 그 땅에 그들이 있는 것으로 인해 그 땅은 더럽혀졌다(레 18:25, 27).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교제하여 그들의 타락하고 불결한 행위에 빠지는 것의 위험성에 관해 이스라엘에게 많은 경고를 하셨다. 그분은 여러 가지 부도덕한 행위들을 열거하시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러한 행위들을 행하는 것을 금하신 다음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것들 가운데서 어떤 것으로도 너희 자신을 부정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헷 사람들을 포함하여] 내가 너희 앞에서 쫓아내는 나라들이 이 모든 것으로 자신을 부정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레 18:1-30.

    멸망이 선고되다 헷 사람들은 멸망에 바쳐져야 할 것으로 이름이 언급된 일곱 나라 가운데 하나였다. 이 나라들은 이스라엘보다 “인구가 더 많고 강대한” 것으로 묘사되었다. 따라서 당시 이 일곱 나라는 틀림없이 인구가 삼백만 명이 넘었을 것이며, 산악 지방을 본거지로 삼고 있는 헷 사람들은 만만찮은 적이었을 것이다. (신 7:1, 2) 그들은 이스라엘이 요르단 강을 건넜고 도시들인 예리코와 아이를 멸망시켰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가나안의 다른 나라들과 모여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과 싸움으로 적의를 나타냈다.(수 9:1-2, 24:11). 그러므로 헷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잃게 만드는 일이 없게 하려면, 그들의 도시는 멸망되어야 했고 그 주민들은 멸절되어야 하였다. (신 20:16-18)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명령을 철저히 이행하지 않았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 그들은 불순종하여 이 나라들을 제거하지 않았으며, 이 나라들은 옆구리의 가시로 그리고 그들을 항상 괴롭히는 것으로 남아 있었다.—민 33:55, 56.

    후기 역사 이스라엘이 가나안 나라들을 완전히 멸망시키지 않았고 그래서 하느님께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선언하셨다. “나는 말한다.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지 않을 것이니, 그들은 정녕 너희에게 올무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은 너희에게 유혹물이 될 것이다.’” (판 2:3) 이스라엘 가운데 남아 있던 가나안 사람들은 관대한 대우를 받았으며, 드문 경우이지만 존경받고 책임 있는 지위를 받기까지 하였다. 가나안 나라들 중에서는 헷 사람들만이 하나의 나라로서 지위와 세력을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왕첫 10:29; 왕둘 7:6.

    다윗 군대에 속한 군인 중에는 두 명의 헷 사람 즉 아히멜렉과 우리아가 있었는데, 이들은 장교들이었던 것 같다. 우리아는 이스라엘이 적들에게 승리를 거두는 일을 위해 열심을 나타내는 인물이었고,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관계를 가졌고, 뒤이어 우리아를 전투에서 위험한 위치에 배치하여 그곳에서 죽게 하였다. 이 때문에 다윗은 하느님께 처벌을 받았다.—삼첫 26:6; 삼둘 11:3, 4, 11, 15-17; 12:9-12.

    솔로몬 왕은 헷 사람들 가운데 남자들을 동원하여 노예처럼 강제 노역을 하게 하였다. (대둘 8:7, 8) 그런데 헷 여자들을 포함한 솔로몬의 타국인 아내들은 솔로몬이 자신의 하느님 여호와에게서 돌아서게 만들었다. (왕첫 11:1-6) 헷 사람들은 이스라엘 왕 여호람 통치(기원전 917-905년경) 때에는 왕도 있었고 전투 능력도 보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성서에 언급되어 있다. (왕둘 7:6) 하지만 시리아와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가 그 땅을 정복했을 때 하나의 세력으로서 헷 사람들은 무력해진 듯하다.

    이스라엘이 기원전 537년에 유배에서 회복된 뒤에, 이스라엘 백성과 심지어 일부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은 가나안 민족들의 여자들과 결혼하고 자기들의 딸을 가나안 사람들에게 주었는데 그중에는 헷 사람들도 있었다. 이것은 하느님의 율법을 범하는 일이었다. 이 때문에 에스라는 그들을 질책하고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 그들이 타국인 아내들을 내보내기로 합의하게 하였다.—라 9:1, 2; 10:14, 16-19, 44.

    비유적 용법 여호와께서는 예언자 에스겔을 통해 말씀하시는 가운데, 예루살렘에 대한 말씀에서 “헷 사람”이라는 표현을 비유적으로 사용하셨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의 근본과 태생은 가나안 사람의 땅이었다. 네 아버지는 아모리 사람이었고, 네 어머니는 헷 사람이었다.” (겔 16:3) 여호와께서 자신의 이름을 그 위에 두신 나라의 수도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이 그 땅에 들어왔을 당시 여부스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던 도시였다. 하지만 가장 두드러진 부족이 아모리 사람들과 헷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이들이 여부스 사람들을 포함한 가나안 나라들을 대표하는 사람들로 사용된 듯하다. 따라서 그 도시의 유산은 보잘것없었지만, 여호와께서는 그 도시를 아름답게 하셨다. “여호와의 왕좌”에 앉은 다윗 왕을 통해(대첫 29:23), 그리고 시온 산 위에 있던 계약의 궤와, 끝으로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지은 찬란한 성전으로 인해, 예루살렘의 명성은 나라들 가운데 널리 퍼지게 되었다. 하지만 예루살렘은 그 주변의 가나안 나라들처럼 타락하고 부도덕해졌으며, 이 때문에 여호와께서는 결국 그 도시를 황폐시키셨다.—겔 16:14, 15.

    정체를 밝혀내려는 세속 학자들의 노력 역사가들과 고고학자들은 성서에 나오는 헷 사람들이 세속 역사에 나오는 어떤 민족들인지를 밝혀내려고 애써 왔다. 그들은 주로 언어학적인 방법 즉 소리나 철자가 비슷해 보이는 단어들을 비교하는 방법을 근거로 같은 민족을 밝혀낸다.

    아시리아의 설형 문자 문헌들에는 “하티”가 자주 언급되어 있는데, 대개의 경우 문맥에서는 하티가 시리아나 팔레스타인에 있었음을 알려 준다. 그러한 내용들은 성서에 나오는 헷 사람들을 언급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이 “하티”라는 표현에 근거하여, 학자들은 성서에 나오는 헷 사람들(Hittites)을, 가나안 땅에서 북쪽으로뿐 아니라 서쪽으로도 멀리 떨어져 있는 소아시아에 수도를 둔 소위 히타이트(Hittite) 제국과 동일시하려고 한다. 그들이 그렇게 하면서 사용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은데, 그렇게 하는 가운데 그들은 서로 다른 세 부류의 사람들을 관련시킨다.

    헷 사람들과 “동일시되는” 세 민족 집단 소아시아의 아나톨리아(현재 터키로 불리는 지역의 일부)에서는 이전에 “하투샤시”라고 불리던 보가즈쾨이에서 많은 고대 문헌들이 발굴되었다. 이곳은 현대의 학자들이 하티라고 불러 왔고 그 주민이 “하티어”를 사용하던 나라의 수도였다. 초기의 이 민족은 정복자들에게 침략을 당한 것 같은데, 그 정복자들은 다른 언어, 즉 학자들에 의하면 인도·유럽 어족에 속하는 한 언어를 들여왔다고 한다. 이 언어는 설형 문자를 사용했으며, “설형 문자 히타이트어”라고 불린다. 후에 이 설형 문자는 상형 문자를 사용하는 또 다른 인도·유럽 어족 언어로 대치되었는데, 이 언어는 “상형 문자 히타이트어”라고 불린다. 이 언어로 쓰여진 실례가 될 만한 문헌들은 소아시아와 시리아 북부, 이 두 곳 모두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학자들은 이 세 가지 언어가 세 개의 민족 집단이 존재하였음을 보여 준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가운데 어떤 사람들도 성서에 나오는 헷 사람들이었다는 증거가 없다. 소위 설형 문자 히타이트어에 관해서, 마르틴 노트는 이렇게 기술하였다. “‘히타이트’라는 용어는 고대 문헌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현대의 연구가들이 이 언어와 소아시아의 하티 왕국 사이의 역사적 관련성에 의거하여 만들어 낸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히타이트 상형 문자”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히타이트라는 관례적인 용어를 그 문자들에 적용시키는 것은 부적절하며 혼란을 초래한다.” (「구약 성서의 세계」 The Old Testament World, 1966년, 231면) 또 다른 역사가인 E. A. 스파이저는 이렇게 결론짓는다. “성서에 나오는 헷 사람들에 관한 문제는 ··· 복잡하다. 우선, 성서 어느 구절에 헷 사람들(Hittites)이 나오든 간에, 그것이 어떤 히타이트인들을 말하는 것인지, 즉 하티인들인지, 설형 문자 기록을 사용한 인도·유럽 어족의 히타이트인들인지, 아니면 상형 문자를 사용한 히타이트인들인지부터가 문제이다.”—「유대 민족의 세계사」(The World History of the Jewish People), 1964년, 1권, 160면.

    위의 내용을 볼 때, 성서에 나오는 헷 사람들을 하투샤시를 수도로 삼았던 “히타이트 제국”과 동일시하는 어떤 견해도 증명되지 않은 추측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불확실한 점들 때문에 본 출판물에서는 세속 역사 속의 “히타이트인들”을 언급할 때는 대개 따옴표를 사용하여, 독자에게 그들의 정체에 대한 그러한 견해가 증명되지 않은 것이며 우리는 그러한 견해가 결정적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증거가 강력하다고는 보지 않는다는 것을 상기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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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족보가 주는 의미


    창세기 5장에는 많은 사람의 이름을 담은 족보가 나옵니다. 성경에서 족보를 자주 소개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족보는 성경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점, 그리고 유한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동시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이 성취되어 간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1975년 한국인의 평균 수명은 남성이 60세, 여성은 68세였습니다. 2005년에는 남성 76세, 여성 83세로 늘어나 평균 80세 정도가 되었습니다. 고려 시대 왕들의 평균 수명이 42세이고, 조선 시대 왕들의 평균 수명이 47세였던 것에 비하면 엄청나게 늘어난 것이고, 불과 30년 사이에 수명이 15년 이상 연장됐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의 수명은 차원이 다릅니다.
    아담은 930세, 셋은 920세, 에노스는 905세, 가장 장수한 므두셀라는 969세까지 살았습니다. 365세라는 비교적 짧은 생애를 살았던 에녹을 제외하면 창세기 5장에 나타난 이들의 평균 수명은 912세나 됩니다. 홍수 이전에 장수한 사람들의 모습은 장차 천국에서 신앙인이 누릴 영원한 생명의 그림자 역할을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의 질병을 이기고 승리한 그리스도인은 주님 앞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을 소망하며 살아갑니다. 지상에서 오랫동안 사는 것은 주님의 축복입니다. 하지만 영원한 생명을 주신 주님을 생각하면 나그네 같은 땅 위의 삶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죽음이라는 운명을 피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소식은 근원적인 절망의 삶에 온전한 소망이 됩니다.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


    어느 시대든 하나님은 사람을 택하고 세우셔서 그를 통해 구원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세상이 암흑으로 덮이고 인류에 죄악이 물결쳐도 시대를 거슬러 하나님을 향해 살아가는 경건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평범하게 흘러가는 족보 이야기 가운데 혜성처럼 빛나는 한 인물, 바로 에녹입니다.


    그의 삶도 다른 사람들처럼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창 5:21~24). 단순한 그의 삶에 우리의 관심을 사로잡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입니다. 에녹의 삶에 동행이라는 말은 두 번이나 반복돼 그의 삶이 하나님과 전적으로 동행한 것이었음을 강조합니다.


    어느 순간부터 그의 삶이 하나님께 헌신되었는지는 나타나지 않지만, 그는 365년의 생애 가운데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동행이란 ‘함께 걷다’ 또는 ‘함께 살다’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함께 걷고 살아간다는 것은 평소의 삶 자체를 보여 줍니다.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으로 칭송받은 사람, 피조물이 창조된 목적대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그대로 실현했던 에녹이었습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 인류가 점점 죄악으로 물들어 갈 때, 에녹은 캄캄한 밤하늘에 혜성처럼 빛나는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기다리십니다. 시대의 흐름에 물들지 않고, 땅 위에 발을 디디고 살아가지만, 하늘을 향해 호흡하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자신의 행복이 최대 관심거리가 된 시대에 하나님의 영광을 향해 살아가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에녹이 평생 주님과 동행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름 아니라 매일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에녹은 매일 동행하기 위해 매 순간 주님께 의지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작은 결단입니다. 위대한 인생을 살려 하지 말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일평생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의 삶은 예수님의 일생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과 함께하셨고, 하나님 자신이셨던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셨고, 하나님의 뜻대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매 순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셨던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사람들, 이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Hybrid Church / 언론 자료 모음




    Hybrid Church(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모두 사용할 수 있는 교회)

    * hy·brid[ ˈhaɪbrɪd ] 1. 잡종,  2. 혼성체 

    [미래세대 목회모델] 하이브리드 교회가 살아남는다!

    -빛과소금의교회 장창영 목사

    오늘날 한국 교회가 위기를 맞이한 것은 교회가 성경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창조질서와 자연법칙을 보면 ‘무한 성장’은 없어요.
    각기 분량만큼 성장하는데 충분히 성장한 이후에는 반드시 성숙해지는 단계로 넘어가죠.
    우리 인간 또한 20세까지는 몸이 성장하고 그 후에는 성숙해가면서 새 생명을 낳지 않습니까?
    이처럼 교회 또한 성장 이후에는 성숙해가며 생명을 낳아야 합니다.
    하나의 교회로 몸집을 계속해서 불려가는 것은 비성경적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흩어 보내셨어요.
    반대로 한국 교회는 무한성장에 치중하다보니 점점 그 영향력이 약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빛과소금의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장창영 목사는 백석대학원을 졸업한 후 2007년에 교회를 개척했다.
    당시 31세였던 장 목사는 아내와 4살 된 딸과 함께 가정 교회를 시작했다.
    그는 상처받은 영혼들과 이웃을 섬겼고 조금씩 사람들이 모이면서 장소가 협소해지자 예배 처소를 두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루는 여호수아서 말씀을 묵상하며 큐티를 하던 중 ‘요단강을 건너라’는 감동을 받았다.

    “요단강이 어딘지 기도하며 응답을 구했더니 바로 오른 편에 있는 ‘중랑천’임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장 목사는 개척 5개월 만에 중랑천을 건너 공릉동(서울시 노원구)에 상가를 얻어 설립예배를 드렸다.
    2년 후, 늘어난 성도들과 함께 40일 간 특별 새벽기도를 드리고 다시 예배당을 이전했다.
    그는 45평 상가에서 7년 동안 목회하며 120명의 성도와 함께 행복한 신앙생활을 이어갔다.
    목회 10년 차가 되던 해, ‘다 찼으니 옮기라’는 성령의 감동을 받고 지금 위치한 구리시 갈매동에 예배 처소를 마련하여 300명의 성도를 섬기고 있다.

    교회 자립이 쉽지 않은 오늘 날, 빛과소금의교회가 꾸준히 성장할 수 있었던 동력은 무엇일까?
    장 목사는 그 비결이 누구나 알고 있는 ‘기본’에 있다고 말한다.

    건강하면 성장합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누구나 아는 내용입니다.
    ‘재정의 투명성’,
    ‘세습 하지 않는 것’,
    ‘사유화 하지 않는 것’ 상식이지요.

    그 다음에 목회자가 준비되어 있어야 하고 목회 전반에 필요한 리더십을 갖춰야 해요.
    목회의 본질인 목양에 힘쓰지 않고 기술을 배우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이러한 기본을 갖추면 영혼을 사랑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일꾼이 양육되고 제자화되는 것이지요.
    이제 저희 교회는 15년 차가 됩니다.
    작지만 단단한 교회가 된 것 같아서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현재 빛과소금의교회는 16개의 형제 교회와 함께하고 있다.
    장 목사는 한 교회의 몸집을 불리지 않고 개척하고 입양하며 형제 교회를 늘여나갔다.
    오산, 수원, 노원구를 포함하여 멕시코, 일본, 중국, 방글라데시, 탄자니아, 시리아, 미얀마 등지에 16개 교회를 개척하고 입양했다.

    ‘빛과소금연합’ 플랫폼은 형제 교회를 재정적으로 지원하기도 하고, 교역자들이 함께 성장하는 기회를 가지며 함께 걸었다.
    홀로 외롭게 목회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의지할 수 있는 든든한 기둥이 된 것.
    최근에는 수원에 있는 한 교회 목회자가 ‘빛과소금’에 함께 하고 싶다며 찾아왔다.
    이런 형태로 함께하는 교회의 경우 일종의 본부격인 갈매동 빛과소금의교회가 목회 전반에 걸친 디자인과 행정지원을 돕는다.
    또한 빛과소금연합의 목회자, 또는 성도들을 위한 세미나를 공동으로 개최할 수 있기 때문에 작은 교회가 혼자 감당하기 힘든 사역을 ‘연합 사역’을 통해 얼마든지 진행할 수 있다.

    빛과소금 플랫폼에 함께하고 있는 교회들은 합신, 합동, 백석, 독립교단 등 교단도 다릅니다.
    하지만 환경을 뛰어넘어 교제하고 함께 하는 것이 가능해요.
    목회자들이 가진 은사가 다 다르기 때문에 각자 가진 달란트를 살려 서로를 섬기고 지원할 때 놀라운 시너지가 있습니다.”

    혁신, 플랫폼, 하이브리드

    저는 ‘혁신’을 강조합니다.
    혁신이란 본질은 유지하면서 비본질적인 것은 과감하게 바꾸는 것을 의미합니다.
    임직식을 할 때 돈을 내는 것을 끊었고, 장로 권사가 계급화 되는 것을 바꾸었습니다.
    교회는 섬기는 문화가 되어야 하니까요.
    오늘날 60대 이상의 장로님들이 교회를 이끌고 가는 것이 보편화되어 있는데 그러면 젊은이들의 생각이 반영되기가 쉽지 않지요.
    그래서 교회의 중요한 정책 결정은 30-40대 운영위원들이 하고, 연세가 있는 분들이 자문위원으로 참여하고 계세요.”

    장 목사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성도를 섬기는 사역 또한 직관적이고 피부에 와 닿는 도움을 제공했다.
    예를 들면 교인이 비즈니스를 할 수 있는 시드머니를 제공하는 ‘성도의 자립 프로젝트’를 진행한 것.
    아울러 지역사회를 섬기는 다양한 사역도 병행했다.
    그러면서도 목양의 본질인 ‘말씀과 기도’에 힘쓰고 이를 뜨겁게 강조하여 은혜가 식지 않도록 했다.

    “코로나 이후, 교회는 ‘하이브리드’가 기능을 갖춰야 합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병행할 수 있어야 해요.
    작은 교회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인력과 재정이 드는 일이 아니에요.
    유튜브 플랫폼을 무료로 사용할 수 있고, 장비를 갖추는데 100만 원 정도면 충분합니다.
    그래서 교회 규모와 관계없이 온라인 예배, 줌 모임을 통한 소그룹이 가능해요.”

    비대면 체제로 바뀌면서 장 목사는 코로나 이전보다 더욱 바빠졌다.
    장년부 여섯 그룹을 줌으로 인도했는데, 놀랍게도 코로나 이전보다 성도와 재정이 더욱 늘었다.
    온라인 예배를 드리게 되면서 예배에 참여하고 싶어도 여러 가지 이유로 올 수 없었던 사람들이 함께 하기 시작했다.
    장 목사는 향후 ‘하이브리드형 교회’, ‘플랫폼 교회’에에 관심 있는 목회자들을 위한 세미나와 해외 현지 목회자 양성 사역을 위해 꾸준히 매진할 계획이다.

    제 3의 공간을 잡아라!

    장 목사는 한국 교회가 과감한 혁신을 통해 다음 세대와 접촉하지 않으면 빠르면 10년, 늦어도 20년 안에 교회가 더 이상 유지하기 힘든 수준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1공간은 우리가 사는 현실,
    2공간은 온라인 세상입니다.
    그런데 다음 세대는 제 3의 공간,
    즉 온라인 속의 가상 세계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나아갈 선교지가 바로 그곳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는 50-60대 목회자가 60-70대 직분자들과 함께 교회를 이끌고 있기 때문에 3 공간은커녕 2공간으로도 진입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10년, 20년 후에는 어떻게 될까요?
    지금 교회에 2030세대가 얼마나 있죠?
    이미 답은 나왔습니다.
    교회에 아무도 없게 되죠.
    회복 불가능한 상태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젊은 후임자 목사가 오면 좋아질 거라 생각하는 분들도 더러 계신데,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10대, 20대는 이미 혁신적인 교회를 찾아갔습니다.

    장창영 목사는 온라인 사역에 힘쓰는 한편, 다음 세대가 오프라인을 경험하게 함으로써 교회 사역이 온라인에만 국한되지 않음을 주지시켜주는 것 또한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온오프라인을 유동적으로 변환하며 사역할 수 있는 ‘하이브리드 교회’ 구조를 탄탄하게 다져가고 있다.

    다음 세대는 낚시를 온라인에서 즐깁니다.
    바이든 대통령은 온라인 게임 속에 선거 캠프를 차리기도 했어요.
    세상이 변했습니다.
    한국 교회도 속히 3공간과 1공간을 오갈 수 있는 역동성을 갖추고, ‘이미 다가온 미래’에 잘 대처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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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이브리드 교회(Hybrid Church)와 온라인 예배(조성실)

    2022년 4월 13일
    조성실(목사, 소망교회 온라인사역실장)

    약 2년 전 코로나로 인해 교회의 문이 닫혔을 때, 교인들의 반응은 두 갈래로 나뉘었다.

    하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대면 예배를 고수해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다른 하나는 방역을 위해 온라인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러한 입장의 차이는 신학적, 목회적 논쟁으로 이어졌고,
    그로부터 약 2년이 지난 지금, 많은 교회들이 대면 예배와 비대면 예배를 병행하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대면 예배와 비대면 예배를 대립이나 선택의 요소로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대면 예배가 옳고 비대면 예배는 틀린 것이 아니다.
    또한 비대면 예배가 미래이고 대면 예배는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다.
    예배의 본질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것’이라면(요 4:24),
    우리는 우리가 예배하는 곳에서 하나님을 만난다.
    그 만남의 장소가 예배이다.

    때문에 우리는 온오프라인의 각 영역을 고유하게 다룰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이분법적인 분리가 아닌, 하나의 유기적인 연결로서의 장소를 의미한다.
    온라인이 필요(needs) 기반의 공간이라면, 오프라인은 열망(wants) 기반의 공간이다.
    하이브리드 교회는 온라인과 오프라인 중 어느 한 장소를 기본으로 삼지 않는 교회를 말한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중 어느 한 곳에 장소의 우선성을 두지 않는다.
    하이브리드 교회의 예배는 두 영역 모두를 진정성 있게 돌보고, 동일한 관심을 둔다.

    콘텐츠 :

    하이브리드 교회의 ‘온라인 예배’는 단순히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예배 현장을 생동감 있게 중계하는(streaming) 것에서 그쳐서는 안 된다.
    예배 중계를 위해 많은 카메라를 세팅하고, 음향을 조정하고, 자막을 적절히 배치하여도, 그것이 온라인에서 일방적인 스트리밍으로 끝난다면, 온라인 예배에 참석하는 교인들은 지루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온라인 예배는 현장 예배와 완전히 동일한 내용이 아닌, 온라인 예배 참석자들만을 위한 특별한 예배 콘텐츠를 구성해야 한다.

    예를 들어, 새들백 교회의 경우에는 주일 예배 스트리밍의 도입과 끝에 항상 ‘웰커머’(welcomer)가 등장한다.
    이들은 화면을 통해 온라인 성도들을 환영하고, 그들만을 위한 안내와 공지를 전달한다.
    현장 예배에서도 설교자는 항상 카메라 너머의 온라인 예배자를 고려하며, 그들을 위한 멘트를 준비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온라인 예배에 참여하는 회중들은 자신들의 존재를 인정받고, 서로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플랫폼 :

    온라인 예배를 위해서는 플랫폼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최근 온라인 예배를 위해 활용할 수 있는 플랫폼은 너무나 다양하다.
    페이스북은 교인들이 매우 쉽고 간편하게 접속할 수 있게 만든다.
    유튜브는 방대한 사용자 수와 알고리즘을 통해 새로운 성도들에게 노출될 기회를 가진다.
    비메오는 유튜브나 페이스북보다 규모는 작지만, 더 좋은 영상 퀄리티를 제공하고 광고로 인한 피로감을 줄여 준다.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줌’을 활용하고, 메타버스 기반의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게더타운’을 활용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플랫폼에는 각각의 단점이 존재한다.
    페이스북은 계정이 없이는 접속이 불가능하다.
    유튜브는 계속해서 다른 채널의 콘텐츠를 추천하기 때문에 이단의 영상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고, 작년(2021년 6월)부터 모든 영상에 유튜브 자체 광고를 내보내고 있기 때문에 이로 인한 피로도가 높아졌다.

    비메오는 확장성이 떨어지고 비용이 유료라는 단점이 있고, 줌과 게더타운은 아직 비디오와 오디오의 품질이 낮다는 한계가 있다.
    교회 지도자나 온라인 사역 담당자는 이러한 각 플랫폼의 장단점을 파악하고, 그에 맞는 계획과 예산을 수립해야 한다.
    그리고 이제는 한 플랫폼만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 예배를 멀티 스트리밍을 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실시간 예배와 녹화 예배 :

    하이브리드 교회의 예배는 실시간으로 드려야 하는가?
    아니면 녹화된 예배를 송출해야 하는가?
    교회의 실무자는 각 예배의 목적과 상황에 맞게 온라인 예배의 형태를 결정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두 형식의 장단점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먼저, 실시간 예배는 공동체의 관계성을 증대시킨다.
    예배 인도자나 설교자는 채팅이나 이모티콘 등의 반응을 통해 실시간으로 온라인 회중의 참여를 유도할 수 있다.
    이는 각자의 자리에 멀리 떨어져 있지만 서로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게 하여 예배를 통해 공동체성을 강화한다.
    그뿐만 아니라 온라인 봉사자들은 채팅을 통해 예배에 참여하는 교인들을 환영하고, 개별적으로 반응하며 상호 교류한다.
    라이프닷처치에서 제공하는 ‘처치 온라인 플랫폼’(churchonlineplatform.com)을 보면, 예배 중 ‘채팅 기능’과 ‘하트, 박수, 찬양’ 등의 ‘리액션 버튼’이 존재한다.
    성도들은 채팅과 리액션 버튼으로 예배에 참여한다.
    온라인 봉사자들은 각 예배 순서마다 필요한 안내 사항을 채팅창을 통해 제공한다.
    가령 새가족 환영의 시간에는 새가족 등록 링크를 올려주고, 헌금 시간에는 온라인 헌금 링크를 안내해 준다.
    또한 ‘기도 요청’(Request Prayer) 버튼을 누르면 즉시 온라인 기도 봉사자와 연결되어 1:1로 중보기도를 요청하고 기도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유기적인 실시간 예배를 위해서는 많은 준비와 인력, 그리고 예산이 투입되어야 한다.
    실시간으로 생동감을 전할 수 있는 중계 역량이 갖추어져야 하고, 또한 온라인 예배 봉사자들을 모집하고 관리할 수 있어야 한다.

    이에 비해서 녹화 예배는 비교적 적은 예산과 노력으로 높은 수준의 예배 영상을 제작할 수 있다.
    NG가 났을 경우에는 다시 재촬영을 할 수 있고, 훨씬 더 다양한 카메라 워킹을 시도할 수 있기 때문에 예배의 생동감을 연출하기에 용이하다.
    찬양의 경우, 세팅된 환경에서 최적의 음질로 녹음하고 이후 다양한 공간에서 진행된 비디오 촬영 결과물로 편집하면, 평면적인 실시간 스트리밍 찬양보다 훨씬 몰입감 높은 찬양 영상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녹화 예배는 촬영 이후에 편집에 투입되는 시간과 에너지가 확보되어야 하고, 성도들에게는 실시간이 아니라는 인식 때문에 예배 참여나 공동체의 관계성을 만들어 내기에 부족함이 있다.

    이처럼 실시간 예배와 녹화 예배에는 각각의 장단점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각 상황에 따라, 그리고 그 효과를 고려하여 예배 형식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주기적으로 예배에 참여하는 회중들의 피드백을 듣고,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여 새로운 방식으로 예배 형태를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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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스트 코로나, 하이브리드 목회의 5가지 방향성

    미국장로교(PCUSA) 한인목회실에서는 최근 전국 한인교회에 2021년 목회서신을 발송했다.
    서신 안에는 한인목회실 조문길 목사의 글이 담겨 있는데 그 내용에 많은 목회자들의 공감이 있었다. 

    조문길 목사는 백신접종이 시작되었지만 팬데믹이 끝난 것이 아니라 앞으로 상당기간 여전히 코로나와 함께하는 “with-COVID”가 될 것이라며, 이에 대한 대책으로 ‘대면’과 ‘비대면’이 공존하는 하이브리드 목회를 소개했다.

    그리고 5가지 주제로 도전했는데

    △ 성도들의 개인의 경건을 위한 도움
    △ 대면예배와 같은 감동을 위한 인터넷 예배의 예전 마련
    △ 설교의 중요성 늘어남
    △ 상생의 정신과 이웃과의 나눔
    △ 교인의 영적 가이드로서의 목사의 역할 강화 등이다.


    새해가 되고 백신 접종이 시작되면서 이제 우리의 관심은 집단면역을 이루고 코로나가 종식된 후의 세상의 모습은 어떠할까, 즉 “post-COVID”에 초점이 맞춰지는 것 같습니다.
    이에 관하여 많은 개인들과 전문가들이 예측을 하는 공통점은 코로나 이후의 세상은 한 마디로 “with-COVID”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백신과 집단면역을 통하여 인간이 생리의학적으로는 코로나로부터 웬만큼 자유해진다고 하더라도, 코로나 기간 동안 살았던 인간의 삶과 모습과 방식은 여전히 남아서 상당 기간 우리와 함께 갈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미래의 세상은 (상황과 문화에 따라서 다소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대면’ 과 ‘비대면’이 어느 정도 공존하는 하이브리드(hybrid) 의 세상이 될 것이며, 아마 교회와 우리들의 목회도 역시 하이브리드의 형태가 당분간 지속될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겠습니다.

     지난 한 해를 되돌아보면, 코로나 하나만도 감당하기 어려웠는데, 우리가 이해하고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버겁고 아픈 상상 못했던 일들이 수없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2천 5백만 명의 확진자-무증상자를 포함하면 몇 배 더 많을 것이라고 함, 40-50만 명의 사망자, 시신보관용 냉동 트럭들, 수천만 명의 실직자들, 푸드 뱅크 앞에 늘어선 차량들, 끝없이 달아오르는 주식시장, 미네소타 조지 플로이드 질식 사망, 인종 갈등과 폭동, 양극화와 분열, 유례없는 대통령 선거, 국회의사당 유혈 사태, 문을 못 여는 공립학교들과 정상 수업을 진행하는 사립학교들, 등등...) 

    이런 암담하고 혼돈스러운 현실의 세상과 그 안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려움, 불안감, 분노, 초조함, 우울증, 절망, 무기력에 빠져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교회는 이런 위기에도 불구하고 교회이기 때문에 “with-COVID 시대에 세상이 요구하는 하이브리드 목회라는 현실 앞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할 수 밖에 없고 우리 교회 지도자들은 정직하게 이에 대한 답을 해야만 합니다.

    오늘 저는 거의 1년을 은둔자처럼 지내며 위의 질문에 대해 제 자신이 했던 답의 내용들을 조금은 구체적으로 여러분들과 나누고자 합니다.

    물론, 오늘 나누고자 하는 내용은 저의 답이기는 하지만 교단의 한인교회들을 마음에 품고 제 자신을 돌아보며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혹시 여러 동역자들께서 앞으로의 하이브리드 목회를 준비하는데 한번쯤 참고한다면 여러분들의 목회는 물론 교단 전체의 한인교회 목회에 유익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부디, 동역 하시는 당회와 기도하고 의논하고 고민하는 가운데 with-COVID 시대에 섬기시는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원하시는 하이브리드 목회의 그림을 그리며 미래를 준비할 수 있기를 기도 하겠습니다.

    1. 개인의 경건 (Individual Piety)

    한국 교회는 지금까지 집단적 영성(Corporate Piety)을 중요시 하며 이에 근거하여 목회를 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기도를 해도 개인기도 보다는 모여서 새벽기도와 통성기도 혹은 중보기도를 했으며, 예배를 포함하는 성수주일을 그 무엇보다 강조해 왔으며, 교회에서 구역 모임에서 식사를 나누며 친교하고, 신앙 증진을 위하여 부흥회와 사경회도 수없이 가졌으며, 성경공부도 모여서 하고, 선교와 봉사도 개인적으로 각자의 상황에 맞게 하기보다는 단체로 훈련받고 동일한 시간과 장소에서 단체로 진행한 것들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간의 한국교회 발전의 원동력이었던 이러한 집단적 경건 중심의 목회는 모두 다 ‘대면’ 이라는 틀에서만 가능했다는 것이 이제 우리의 고민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옆 좌석의 교인들과의 수평적인 교감이나 연결 없이 스크린 앞에 앉은 한 사람이 혼자만의 고유한 장소와 시간에서도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의 사람으로 거듭나 이 험한 세상에서 묵묵히 자유하게 예수님의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목회자가 인도하여야 할 시간이 다가온 것 같습니다.

    한 교회를 돌보는 목사는 “with-COVID” 세상을 벅차게 살아가야 하는 사람이 홀로 개인적 경건을 이루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들이 높은 수준의 개인적 경건에 다다를 수 있도록 기도하며 생각하고 창의적인 목회를 준비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2. 인터넷 예배의 예배식 / 예전(liturgy) 

    저는 지난 11개월 동안 여러 교회들의 (심지어 한국의 교회들의) 인터넷 예배를 경험하고, 또 주위의 다양한 평신도들과 대화해 본 결과, 예배당에서 드리는 예배와 비슷한 수준의 감동을 위하여서는 인터넷 예배를 위한 예전(Liturgy)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로, 찬송을 부를 때에 예배당 좌우에서 들려오는 성도들의 우렁찬 목소리 대신 스피커에서 나오는 목사님과 단둘이 찬송을 부른다는 것은 (목사님이 아무리 음악성이 뛰어난다 하더라도) 평신도로서는 꽤나 어색할 뿐 아니라 맥이 빠지는 일입니다.
    그 외에도 솔직히 현장예배의 여러 순서들에 푹 빠져서 따라가기 어려운 부분들이 많이 있고 예배의 맥이 자주 끊어짐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앞으로 총회 신학예배부에서 인터넷 예배의 예전(Liturgy)을 개발할 것을 제안 하겠지만, 일단 개교회는 인터넷 예배에 참여하는 분들이 각자의 집과 거실에서도 현장예배와 비슷한 수준의 생동감과 성령의 감동이 있는 예배의 기쁨과 의미를 회복할 수 있도록, 예배자의 입장에 서서 나름대로의 예전(Liturgy)을 개발하시고 예배 중의 디테일한 부분까지 신경을 써서 준비한다면 큰 유익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설교 중에는, 주보가 없거나 늦게 예배에 들어오신 분들을 위하여, 가끔 아래 자막으로 본문과 제목을 띄워 주는 것도 작은 배려이지만 예배자로 하여금 설교에 집중케 하는 좋은 방법일 것입니다.
    그 외에도 디테일 하게 따져보면 작은 변화를 통하여 인터넷 예배의 효과를 끌어 올릴 수 있는 부분들이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3. 설교(Homily)의 중요성

    교회의 역사에서 설교가 중요하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지만, 하이브리드(hybrid) 목회에서는 그 어느 때 보다도 설교와 말씀이 가장 중요하다고 확신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 인터넷으로 드릴 때는 말할 것도 없고 마스크를 쓰고, 띄엄띄엄 앉아, ‘평화의 인사(Passing the Peace)’ 같은 순서도 없고, 찬송도 맘껏 못 부르는 상황으로 현장예배를 드리다보니, 코로나 이전 ‘대면’ 시대에 느끼고 누렸던 예배순서 전체를 통하여 임하는 성령의 감동과 감격에 빠지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예배의 다른 순서들 보다 설교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둘째, 코로나에 지치고, 이념과 정치 논쟁에 함몰되고, 끝이 안 보이는 경제적 압박의 벼랑 끝 현실 앞에서 사람들이 교회를 찾는 경우도 때로는 있을 수 있겠지만, 많은 경우에는 이전보다 더 교회를 외면하고 멀리하며 더 냉담해 질 수 있습니다.
    특히 많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신천지, BTJ, IEM 같은 집단들이 교회와 동일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설문과 통계들을 보면 양적인 면에서의 교회 미래는 결코 밝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사람들이 교회를 거부하고 멀리 하면 할수록 그들의 내면세계는 그만큼 더 공허해지고 어두워지고 무의미해 진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 이런 작은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한 영혼의 그 공허하고 어두운 내면을 채우고 밝히며 참된 자신을 발견하고 하나님 안에서의 인생이 정말 살만한 가치와 의미가 충분하다는 것을 깨우쳐야 하며, 바로 그것이 코로나 시대에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주신 사명이라고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주로 설교로 가능하기 때문에 “with-COVID” 시대의 하이브리드 목회에서는 설교가 중요해지는 것입니다.

    지난 추석 때에 코로나로 답답하고 절망 가운데 있던 한국에서 70을 넘긴 어느 노 가수의 멘트와 가요들이 한국민 전체에게 큰 희망과 위로가 되었다는 소식은, 또 최근 들어 한국에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불고 있는 트롯 열풍 현상은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요?
    가요의 한국적 가락이 좋아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그러한 가락과 함께 짧은 몇 소절의 가사가 마음에 와 닿아 옛날 생각도 나고, 잘못 살았던 지난 세월에 대한 짙은 아쉬움과 함께 이렇게 사는 것은 아닌데 라는 생각들, 그렇지만 그래도 이게 끝이 아니니 다시 한 번 일어나자... 같은 그들의 내면을 두드리고 움직이는 강력한 매력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특히 코로나와 지난 1년간 발생했던 엄청난 사건들 속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은, 어떤 신학적 교리나 이론 혹은 기독교적 이념이나 사상 혹은 성경해석이나 강해의 메시지가 아니라, 건전한 신학과 성경에 뿌리를 두면서도 고달픈 인생에 위로와 소망이 되며, 망가진 것 같은 자신들을 다시 한 번 삶의 자리에서 용기를 갖고 일어나 이제라도 제대로 된 인생길을 걸어가도록 하게 하는 즉 그들의 내면의 결핍을 채우며 소망을 불어넣는 그런 참된 메시지(설교)에 목말라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6.25전쟁 이후 1950년대와 60년대 그리고 적어도 70년대 초까지, 한국의 교회들이 성장하고 그로 인하여 나라가 여러모로 발전하여 오늘의 한국을 가능케 했던 가장 큰 이유는, 처절한 동족상잔으로 나라 전체가 폐허가 된 잿더미에서 가난하고 기댈 곳이 없던 절체절명의 상황이었지만, 당시 목사님들의 설교가 깊은 절망 가운데 있던 국민들이 또 실의에 빠져 있던 월남 실향민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일어나도록 하는 소망과 위로의 메시지이었다는 사실이 아주 좋은 예입니다.

    생명의 말씀 외에는 인간의 공허하며 차갑고 어두운 내면을 찾아가 따뜻한 위로와 함께 소망을 불어 넣을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특히, 유튜브와 각종 SNS와 그에 장착된 인공지능(AI, Artificial Intelligence)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인간들의 삶의 양식과 성향 심지어 부족하고 필요한 부분들까지도 예측하여 전 세계 사람들을 각각 커스터마이저(customize) 해서 그들에게 맞는 사이버 공간이라는 가상공간으로 몰아넣어 다양한 것들을 경험하게 합니다.
    교회와 목사님의 설교가 이런 현대인들의 특성과 약점을 간파하여 심령을 새롭게 하는 설교를 통하여 가상공간에서 ‘비대면’으로라도 그들을 만날 수 있다면 우리의 미래는 아주 긍정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말처럼 그렇게 쉬운 것도 아니고 내 힘으로 감당할 수도 없는 것이기에, 우리 모두는 성령님을 온전히 의지하여 말씀을 전하는 사명을 신실하게 감당해야만 합니다.

    4. 상생의 정신 / 이웃과의 나눔(Sharing)

    코로나 이후의 두드러진 사회적 현상 중 하나는 빈익빈 부익부로서, 어렵고 힘들고 소외당한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나며 그들이 더욱 힘들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럴 때에 교회가 상생의 정신에 근거한 나눔을 실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작년 봄에 미국 정부가 개인에게 1,200불씩 (한국은 가정당 1백만 원) 코로나 지원금을 지급했습니다.
    당시, 저는 미국이나 한국이나 그 지원금이 꼭 필요한 분들은 각자의 필요에 따라서 사용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그것이 없어도 기본 의식주에 별지장이 없는 크리스천들은 그 지원금들을 모아서 주위의 생계가 어렵고 힘든 분들을 도울 수 있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만약 당시에 교회가, 지원금으로 골프를 즐기고 한우를 사먹고 명품으로 치장하는 세상과는 달리 나눔의 운동을 일으켰더라면, 교회를 바라보는 세상의 시각이 크게 변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라기에는 최근 지급된 2차 지원금에 관하여는 교회들이 앞장서서 예수님의 정신에 따라서 그런 운동을 벌여 나갈 수 있으면 하는 바람이 제게 있습니다. 

    또한, 비대면 수업을 위하여서는 컴퓨터가 필수적인데, 많은 어려운 가정들은 인터넷도 제대로 없고 자녀들 각자의 컴퓨터가 없기 때문에 학업을 제대로 따라갈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요즘은 직업을 찾거나 실직수당을 신청해도 인터넷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결국, 교육의 빈익빅 부익부 현상이 발생하며, 이는 앞으로 10-20년 후에는 우리 모두가 큰 대가를 치러야만 하는 사회적 부담으로 전체에게 돌아올 것이 뻔합니다. 한인 교회들이 앞장서서 지역의 어려운 가정들에게 (새것이 아니더라도) 기본적인 컴퓨터를 공급해 주고, 그 자녀들이 교육에서 뒤쳐지지 않도록 돕는 운동 같은 것을 시도하면 참 좋겠습니다. 이외에도 교회가 이웃과의 나눔을 실천할 수 있는 길은 찾아보면 너무나도 많습니다.

    총회에서 보면, 미국장로교 내의 많은 미국 원주민(Native American) 들과 히스패닉(Hispanic) 교회와 교인들은 재정 형편이 허락지 않아서 인터넷 예배도 드리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한인교회들이 앞으로 지속적인 나눔의 실천을 이어간다면 지역사회는 물론 교회도 회복의 역사를 경험할 것으로 확신합니다.

    5. 영적 가이드(Spiritual Guide)로서의 목사

    미국장로교에서 목사의 호칭을 공식적으로 “말씀과 성례전의 목사 (Minister of Word & Sacrament)” 라고 부르다 보니, 자연스럽게 목사는 말씀을 가르치는 영적 지도자(Spiritual Leader)로 인식되어 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대면’과 ‘비대면’이 공존하는 “하이브리드 시대”에서 목사는 한편으로는 영적 지도자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영적 가이드가 되어야 합니다.
    마치 여행 가이드가 그를 따르는 관광객들에게 기본적인 코스와 안내를 해주지만 여행 중의 여러 옵션들 중에 특정한 것을 강요하기 보다는 각자 자신의 취향과 입장에 따라서 여행을 즐길 수 있도록 돕고 안내하는 것처럼, 영적 가이드는 기본적인 장로교 신앙과 말씀으로 가르치지만 ‘비대면’ 세상에서 또 다양성이 인정되는 “with-COVID” 세상에서 개인적 경건(Individual piety)을 추구하는 사람이 자신만의 독특한 방법과 길을 통하여 삼위일체의 하나님과 깊이 교제할 수 있도록 하면서도 탈선하지 않도록 안내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목사는 어떤 특정한 신앙관(Dogma)을 주입식으로 가르치기 보다는 교인 각자가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고 참된 자신만의 신학자(theologian)가 될 수 있도록 안내하고 도와주겠다는 자세를 취하여야 합니다.
    결국, 영적 가이드로서의 목사는 이미 우리가 해오고 있는 설교와 성경공부 이외에, 성경과 신학적 입장에 관하여 궁금해 하면서도 질문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던 한국교회의 전통과 문화에서 벗어나 누구하고든지 어디서든지 또 심지어 전통적인 신앙과 다른 입장을 가진 분들까지도 품어 안으면서 격의 없는 솔직하고 진실된 대화를 가질 수 있는 경지까지 도달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이브리드 시대에 곳곳에 흩어져 있는 다양한 사람들이 개인적 경건(Individual Piety)을 이룰 수 있고 그것들이 모여지면 결국 교회가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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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겉사람과 속사람


    겉사람과 속사람


    겉 사람과 속 사람

    고린도후서 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용어

    영어

    성구

    헬라어

    의미

    겉 사람

    outward man
    outwardly
    outer man

    고후 4:16

    ἔξω

    육에 끌리는 사람

    속 사람

    inwardly
    inward man
    inner man

    고후 4:16

    ἔσω

    영에 끌리는 사람

    옛 사람

     the old man
    the old self   

    엡 4:22

    παλαιός

    중생 이전의 사람

    새 사람

     the new self
    the new man

    엡 4:24

    καινός

    중생 이후의 사람


    겉 사람과 속 사람은             나타난 현상을 말합니다.
    겉 사람은 육에 끌리는 사람입니다.
    속 사람은 영에 끌리는 사람입니다.

    옛 사람은 중생 이전의 사람
    새 사람은 중생 이후의 사람

    에베소서 4: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 새 사람(τὸν καινὸν ἄνθρωπον) the new man
    444 /

    2537 / καινός(kainos: new, fresh)  
    3820 /

    사무엘상 10:6
    네게는 여호와의 신이 크게 임하리니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

    골로새서 3: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에베소서 4: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 옛 사람(τὸν παλαιὸν ἄνθρωπον) the old man    
           
    - 3588, τὸν. /
    - 3820, παλαιὸν. / παλαιός(palaios) : old, ancient   
    - 444, ἄνθρωπον. / 


    겉 사람과 속사람을 이야기를 할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작업은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속 사람(inner man, inwardly, inward man)
    겉 사람(outer man, outwardly, outward man)

    영어 성경에서 번역한 용어를 확장시켜 헬라어 성경에서 살펴보겠습니다.

    겉사람(ἔξω) - 에코(exó. ἔξω, 1854) 부사(adverb). outside, without 
    속사람(ἔσω) - 에소(esó. ἔσω, 2080) 부사(adverb). within  

    이렇게 성경 이외에서 단어에 대한 정리를 마친 후에는 성경에서 가르치는 의미를 살펴야 합니다.

    겉 사람과 속 사람


    한글 개역 성경에서 "겉 사람"과 "속 사람"이란 단어가 사용된 구절을 살펴본 결과 "겉 사람"이 사용된 구절은 1구절(고후 4:16)이며 "속 사람"이 사용된 구절은 2구절(로마서 7:22, 에베소서 3:16)입니다.


    "겉 사람"이란 육(肉)에 끌리는 사람(1구절)

    고린도후서 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속사람"이란 영(靈)에 끌리는 사람(2구절)

    로마서 7: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에베소서 3:16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옛 사람이란 중생 이전의 사람으로 한글 개역 성경에서 6구절에 사용되었다.
    새 사람이란 중생 이후의 사람으로 한글 개역 성경에서 4구절에 사용되었다.

    ♦ 옛 사람 / 6구절

    사무엘하 20:18
    여인이 말하여 가로되 옛 사람들이 흔히 말하기를 아벨에 가서 물을 것이라 하고 그 일을 끝내었나이다.

    마태복음 5:21 람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태복음 5:33

    또 옛 사람에게 말한바 헛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로마서 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에베소서 4: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골로새서 3:9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 새 사람 / 4구절

    사무엘상 10:6
    네게는 여호와의 신이 크게 임하리니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

    에베소서 2:15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에베소서 4: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골로새서 3: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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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이프 성경사전

    Ⅰ. 옛 사람

    옛사람(old self)이란 문자적으로는 ‘지나간 세대의 사람들이나 조상들(people old age)'을 말하며 성경에서는 사무엘하 20:18, 마태복음 5:21에서 찾아볼 수 있다.

    1. [사무엘하 20:18]

    여인이 말하여 가로되 옛 사람들이 흔히 말하기를 아벨에 가서 물을 것이라 하고 그 일을 끝내었나이다

    2. [마태복음 5:21]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영적으로는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지 못한 본성과 거기에 기초한 악한 활동들을 말하며 성경에서는 로마서 6:6, 에베소서 4:22, 골로새서 3:9~10에서 찾아볼 수 있다.

    3. [마태복음 5:33]

     또 옛 사람에게 말한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 [로마서 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5. [에베소서 4: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6. [골로새서 3:9]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로마서 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에베소서 4:22∼24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골로새서 3:9~10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새사람(new self)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새롭게 변화된 사람(엡 4:24; 골 3:10).

    육체의 욕심(롬 8:4),

    사욕(벧전 1:14),

    본성(고전 2:14),

    율법에 매인 삶(롬 7:6)을 사는 옛사람과 대조되는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 갈 6:15),

    새로 태어난 자(벧전 1:23; 2:2),

    거듭난 자(요 3:3,7)와 같은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겉 사람과 속 사람을 구분하는 기준을 “거듭남(중생)” 이라고 한다.

    거듭남이란 “위로부터 남” 즉 사람은 아래에서 태어났지만 거듭남이란 중생은 위로부터 태어나는 것을 말한다.

    거듭남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요한복음 1:13)
    중생은 위로부터 옵니다(요한복음 3:3, 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수 없느니라.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성령으로부터 옵니다(요한복음 3:5, 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거듭나는 은혜는 성령으로부터 죄인들에게 직접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믿음과 회개를 통해서 거듭난 사실을 외적으로 드러나도록 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음에도 세례를 받거나 교회생활을 열심히 하면 자동적으로 거듭나는 것은 아닙니다.

     

    중생(重生)이란?

    중생이란 영적(靈的)으로 죽은 상태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새 생명을 가지게 된 것. 즉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는 것(요 3:3). 이는 근본적이고도 즉시적인 변화로, 회개를 수반한다.
     

    겉 사람(outward man) 
    육신의 욕심과 본성을 좇는 인간 고유의 부패한 본성, 그리스도 안에서 중생하여 거듭난 ‘속사람’과 대조되는 표현이다(고후 4:16).

    고린도후서 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Therefore we do not lose heart. Though outwardly we are wasting away, yet inwardly we are being renewed day by day.)    


    속 사람(inner being)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사람의 심령(엡 3:16).

    에베소서 3:16,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I pray that out of his glorious riches he may strengthen you with power through his Spirit in your inner being.)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을 받아 새롭게 창조된 새사람(엡 4:24).

    에베소서 4:22∼24,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You were taught, with regard to your former way of life, to put off your old self, which is being corrupted by its deceitful desires; to be made new in the attitude of your minds; and to put on the new self, created to be like God in true righteousness and holiness.)      

    속사람은 죄의 지체와 대립되고(롬 7:22) 겉사람에 대비되며, 성령의 능력으로 날로 새로워지는 은혜를 체험하는 자들이다(고후 4:16, 엡 3:16).

    이를 베드로는 ‘숨은 사람’이라고 하였다(벧전 3:4).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Instead, it should be that of your inner self, the unfading beauty of a gentle and quiet spirit, which is of great worth in God's sight.    


    많은 신학자들과 전문서적들이 있지만 의외로 이 네 가지 사람에 대한 정의와 구분이 명확하지 않습니다. 흔히 옛 사람과 겉 사람, 새 사람과 속 사람을 같은 개념의 다른 용어로 사용합니다. 그러나 이미 살펴보았듯이, 중생 이전의 옛사람과 중생 이후의 새사람은 확연히 다릅니다.

    성경은 “여러분도 전에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가 넘치는 분이셔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크신 사랑으로 말미암아 범죄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엡 2:1, 4, 5)라고 말씀합니다.

    중생으로 인한 구원으로 말미암아, 옛사람과 새사람이 구분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생한 새사람 속에 겉 사람과 속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겉 사람은 여전히 옛사람의 습성과 잔재를 가지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4: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and to put on the new self, created to be like God in true righteousness and holiness.)

    겉 사람에게 붙어 있는 옛사람의 흔적(구습, 옛사람의 습성과 잔재)을 벗어 버리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는 말씀은, 진정한 새사람, 곧 속사람을 뜻합니다. 이때 새 사람에게 있는, 겉 사람은 육에 이끌리고 속 사람은 영에 이끌립니다.

    겉사람은 육에 끌리는 사람
    속사람은 영에 끌리는 사람
    그러므로 영에 끌리는 속사람이 되려면 하나님을 따라야 합니다.

    에베소서 4:22∽24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You were taught, with regard to your former way of life, to put off your old self, which is being corrupted by its deceitful desires; to be made new in the attitude of your minds; and to put on the new self, created to be like God in true righteousness and holi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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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형상

    1. 영이신 하나님(요한복음 4:24)

    2. 사랑이신 하나님(요한일서 4:8)
    3. 창조하시는 하나님(에베소서 4:23, 골로새서 3:10, 요한계시록 21:5, 디도서 3:5)
    4. 공동체의 하나님(성부, 성자, 성령) 마태복음 28:19
    5. 자유하신 하나님(갈라디아서 5:1)

    * 시편 103:5, 독수리같이 새롭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