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Belt & Black Belt, Grain Be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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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e Belt

미국 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근본주의 개신교와 복음주의가 강세를 보이는 지역이다.
사회문화적으로 보수적, 종교적이며 이 지역의 교회 출석률은 미국 전체의 평균 수치에 비해 훨씬 높은 수치를 나타내는 지역이다.
심지어 교회가 가장 많은 지역이다.

미국 내에서 가장 교세가 큰  남침례회를 중심으로 한 미국 내 보수 개신교단들의 근거지가 바로 이쪽 지역이다.
바이블 벨트라는 용어는 미국 내에서 주로 언론인이나, 미국의 개신교를 비판하는 이들에 의해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Religion News Service의 2015년 2월 19일자 기사

출석율이 가장 높은 주 : 미시시피
출석율이 가장 낮은 주 : 버몬트

바이블 벨트는 사회와 정치에서 사회  보수적 개신교가 강한 역할을 하는 미국 남부의 지역으로 종파를 초월한 교회 출석율이 일반적으로 전국 평균보다 높다.
이 지역은 종교적으로 다양한 중서부와 오대호 그리고 유타와 아이다호의 모른몬교 회랑과 대비된다.

미국 서부 및 뉴일글랜드 지역(버몬트가 37%, 가장 높은 순위)에서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반면, 앨라배마 주의 바이블벨트 지역은 12%에 불과하며, 테네시 주의 복음주의 개신교 비율은 52%로 가장 높다.

복음주의 영향력은 북부 조지아, 테네시, 앨라배마, 미시시피. 너스켈롤라이나, 노스캐롤라이나. 남부 및 서부 버지니아, 웨스트 버지니아,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북부 지역 및 동부 텍사스에서 가장 강력합니다.

바이블 벨트라는 용어의 가장 오래된 사용법은 1924년 시카고 데일리 트리뷴에 기고한 미국인 저널리스트이며 사회평론가인 H. L. 멘켄에 의해 알려졌다.

그는 "이 오래된 게임은 아마도 바이블 벨트에서 펼쳐지기 시작하고 있다."
1927년, 멘켄은 그 용어를 그의  발명이라고 주장했다.
이 용어는 현재 다른 나라에서도 종교적 교의 채택률이 높은 지역에 사용되고 있다.





그레인 벨트(Grain Belt)

미국 중서부의 북쪽을 가로지르는 프레리 지역을 가리킨다.
이 지역은 세계에서 최고의 곡물 산지이기 때문에 이렇게 불린다. 
아이오와주일리노이주인디애나주오하이오주미주리주의 대부분과 위스콘신주캔자스주네브래스카주미네소타주의 일부로 구성된다.






로마서 8장 및 마가복음 8장



로마서 8장 및 마가복음 8장 

성경은 66권 1,189장으로 구성되었다.
1,189장에서 2장을 선택해야 한다면 로마서 8장과 마가복음 8장을 선택해야 한다.
왜냐하면 로마서 8장은 성령, 마가복음 8장은 예수를 증거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마가복음 8:1-38

성경 한 권이 다 타서 없어지더라도 로마서 8장 한 장만 남겨진다면 그 말씀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구원이 임하는데 전혀 지장이 없을 것이다." 하면서 로마서 8장의 가치를 치하했다면 저는 마가복음 8장은 첫 복음서라고 여겨지는 마가복음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장이다.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 함께 한 제자들.
예수님의 가르침의 대상은 다른 누구보다도 이 제자들이었다. 
그리고 예수님의 곁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12제자 뿐만 아니라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그분을 따르는 현대의 그리스도의 제자인 우리에게 그 가르침을 주신다. 

예수님은 과연 누구인가?
나는 예수님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1. 칠병이어의 기적(1-8절) 

마가복음 8장은 이른바 칠병이어의 기적이라 불리는 사천명을 먹이시는 사건으로 시작한다.

물고기 두마리와 보리떡 다섯개로 오천명을 먹이셨던 예수님은 이방인의 장소에서 또 다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일곱개를 가지고 4천명의 사람들을 먹이신다. 

단지 장소만 이스라엘 땅에서 이방인의 땅으로, 더 적은 사람이 모여있는데, 저들을 먹이라는 질문에 제자들은 자신들은 전혀 못한다고 한다.

오병이어 :  어린아이의 작은 헌신을 통해 주님이 축사해 주시는 사건 

동역의 원리 :  모세에게, 여호수아에게, 기드온에게....명령하였을 때 무엇이라고 대답하였는가?
나는 어떻게 대답하고 있는가?
나는 못합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
내 말에 순종하면....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 앞에 그들은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내 능력, 내가 가진 것만을 보면서 못한다고 한다. 

믿음은 내 가진 것이 아닌 내 순종을 통해 축사하시고 일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이다. 

그런데 오병이어와 칠병이어 사건을 통해 제자들은 여전히 자기와 함께 있는 분이 누구인지, 예수와 함께 하는 자신들의 사명이 무엇인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 

2. 사천명을 먹이신 사건 뒤에 바로 이어지는 바리새인들의 요구
- 표적을 보여 달라 한다(11-12절) 

도대체 언제까지 표적을 보여줘야 저들은 믿을까?
눈앞에 표적이 계속된다면 정말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을까?
예수님은 표적을 바라는 바리새인들을 바라보면서 깊이 탄식한다.
이 바리새인들의 모습은 다름아닌 눈에 보이는 표적, 끊임없이 보여주기만을 간구하는 제자들의 또 다른 모습일 것이다. 

기적 - 바리새인과의 논쟁 - 그리고 배 안에서 제자들과의 대화-
그리고 한 유대인의 치유... 

이런 싸이클의 대상은 제자들이다.
여기서 비교의 대상은 바리새인들의 신앙과 제자들이지만 결국 이들의 신앙은 다르지 않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바리새인들과 다른, 전통이나 헛된 외식에 빠지지 않는 신앙이 되기를 원하신다.  

3. 제자들과의 대화(13-21절)
다시 주님과 배를 탔다

그들이 함께 있는 분은 며칠 쌔 오쳔명을, 사천명을 먹이신 예수님이다.
그런데 제자들은 여전히 부족하다.
현실의 어려움은 오직 주님과 함께 있는 배 안에서도 은혜를 누리지 못하게 한다. 

문제는 또 떡의 문제이다.
은혜는 받았는데 여전히 배가 고프다.
현실의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떡 가져오기를 잊었다고 했다.
무슨 떡인가? 

4천명을 먹이고 남은 광주리가 일곱이라 했다.
이 일곱광주리는 모든 교회를 먹이고도 남을 양식이다.
하늘의 만나이다. 

그런데 떡이 하나 밖에 없다(14절) 

하나의 떡은 무엇일까? 
배에 단 하나 남은 떡은 누구일까?
일곱 광주리의 떡을 다 잃어버려도 된다.
남은 하나의 떡만 있으면 언제라도 또 채워질 수 있다.
그 분은 오쳔명을 먹이고도 이스라엘 12지파를 상징하는 12광주리를 이방인의 무리 4천명을 먹이시고도 일곱교회를 상징하는 7개의 광주리를 위해 떡을 남기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 분과 함께 있으면 언제라도 공급받을 수 있다. 

4. 단지 그들은  두 가지만 조심하면 된다. 

"바리새인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15절) 

- 바리새인의 누룩 그들의 관심은 예수님을 바라보는데 있지 않았다.
그들은 주님을 통해 자신들이 변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기를 증명하고 싶은 것이다.
자기 믿음이 최고라고, 자기가 했던 신앙생활이 맞다고 인정받고 싶은 것이다. 

누가 와서 자기를 맘껏 칭찬해 주기만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 깊은 마음 속엔 무엇이 있는가? 내가 남들보다 낫고, 내가 남들보다 의롭고, 내가 남들보다 높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칭찬하지 않고 꾸짖으신다. 그냥 꾸짖는 정도가 아니라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자들이여, 하면서 그들을 독사의 자식, 사탄의 자식이라 저주하신다" 너무나도 끔찍한 그들의 실상을 드러내신다. 

헤롯의 누룩은 무엇인가?
- 허영심, 허세, 인본주의, 번영신학........성공적 목회의 상징은 과연 대형교회인가?

하나님 없는 세상의 가치관이다.
세례요한이 의로운 줄 알면서도 사람들의 이목때문에 목을 베어버린 헤롯, 예수가 무죄인줄 알면서도 백성들의 눈치를 보며 십자가를 지게 했던 빌라도와 같은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지만 결국 의롭지도, 정직함도 없이 자기 주관대로도 아닌 남들 눈치만 보면서 살아가는 세상이다. 

바리새인들의 이런 교만의 누룩, 헤롯의 이런 세상적인 정욕의 누룩.... 이것만 주의하면 떡은 단지 하나면 족하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먹이신다.

그러면서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18절)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 

맹인의 정체 :  제자들 

5.  맹인을 고치심 

 -벳세다 :  house of fisher man (어부들의 집) -> 어부는 누구일까 누가 어부인가?  제자들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의 대상 - 제자들

육적 소경에서 sight를 주고(육적 시력)
영적 소경에게 주시는 것 insigt (영적 시력) 

23절.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예수님의 질문 : 무엇이 보이느냐? 본질적인 질문. 매서운 질문  - 무엇을 보면서 사는가? 

맹인의 대답 :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보는 것이냐, 보지 못하는 것이냐? 
다시 안수 하신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  

 

 이 사건은 마가복음에만 나온 내용으로 다른 병자를 고치시는 이적과는 좀 특이한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두 번에 걸쳐 안수하시며 맹인의 상태를 물으신 것이지요. 왜 특별히 이 맹인에게는 "두 번의 안수를 하시며 고치셨을까?"하는 질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안수 하시고 예수님이 "무엇이 보이느냐?" 하시니 소경이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의 안수가 완전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아직 소경의 보는 눈이 온전히 열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불완전한 이해 속에서 살아갑니다. 내가 아무리 오랜 신앙생활을 하고 권사이고, 장로이고, 목사이여도 난 여전히 완전히 보지 못하는 불완전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두 번째의 안수가 (제 2 의 은혜) 필요합니다. 

불완전한 자의 눈은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못합니다. 나무와 같은 물질, 대상으로 봅니다. 세상 사람들의 사람을 보는 시각과 같습니다. 나에게 유익한가? 그렇지 않은가? 나를 위하는 자인가? 적인가? 사람을 하나님이 창조하신 고귀한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나 중심적으로 사물로서 사람을 바라봅니다. 

사람을 숫자로 보는 것 - 유익으로 보는 것, 나 자신 마저도 

내가 필요한 사람인가? 내가 이 집에 필요한 사람인가? 내가 이 교회에 필요한 사람인가? 

주님께 내가 필요한 사람인가?

난 목사이지만 내가 주님께 필요한 사람인가?라고 물으면 언제나 자신이 없다. 

주님이 내게 필요한 분이시다. 

주님이 내게 필요해서 난 주님을 의지하고

이 교회가 내 신앙과 영적 여정에 필요해서 주님은 내게 교회의 사역자로 부르셨고 

성도님들이 내게 필요해서 여러분들과 같은 귀한 성도님들을 만나게 하신 것이다. 

 

여러분들에게는 꼭 내가 아니어도, 주님께는 꼭 내가 아니어도, 내가 아니면 돌맹이 하나를 통해서도 주님의 일을 맡기실 수 있지만 나의 구원에, 나의 성숙에, 나의 신앙에 주님이 필요하기 때문에 내게 다가오신 것이다.
그리고 아무런 값어치 없는 연약한 나를, 연약한 우리를 자녀라고, 친구라고 부르시면서 생업이 같은 동역자로 우리를 불러주시는 것이다. 

두 번째 안수하시니 모든 것을 밝히 보았다고 합니다.
그 사람의 외모가 어쩄든, 학식이 어쨌든,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나님이 형상이 있는 사람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은혜 안에 있는 자들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의 눈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눈이 열렸다는 것은 이제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진정 사람으로 보는가? 

우상은 다름아닌 image를 만들지 말라.
그것이 사람이든, 형상이든 심지어 하나님이든 그것의 이미지에 갇혀서 바라보지 말라.

진정한 모습을 보고 싶다.
죄로 인해 왜곡되고 변형되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 녹아 있는 그 모습 그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곧 형제를 사랑하는 것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것 그 사람의 모습을 밝히 보는 것 - 

성경 한 번 안 읽고 하나님을 안다라고 할 수 없듯이 그 사람의 진 면목을 우리는 모르고 산다. 마치 나무처럼, 사물처럼 사람들을 바라본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누구라고 보느냐?)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누구라고 보느냐?) 

우리는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그런데 주님은 우리에게 묻는다. 

너는 나를 어떻게 보느냐?
 
데가볼리에서 4,000명을 먹이심(8:1-10)

마가복음 8:1-30의 이야기는 마가복음 6:31-7:37과 매우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두 기록의 주제를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저자 마가는 (6:52)과(8:14-21)에서 두 번에 걸쳐서 무리들에게 떡을 먹이신 일을 기록하였습니다.
한 사건은 유대인의 지역에게 일어났고, 다른 사건은 이방인의 지역에서 일어났습니다.
이 두 사건은 모두 다 무리와 제자들에게 영적인 깨달음을 주기 위한 사건이었습니다(7:14-18).
그러나 이 사건을 본 제자들은 아무 것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마치 영적으로 귀머거리와 소경 같았습니다.
마가는 이 두 사건 사이에 주님께서 귀머거리(벙어리)와 소경을 고쳐 주신 일을 삽입하였습니다(7:31-36, 8:22-26).
이것은 주님께서 영적인 귀머거리와 소경과 같은 제자들에게 주님을 계시해 줄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주님은 마침내 제자들의 눈과 귀를 열어서 자신이 누구인가를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통해서) 밝히 계시해 주셨습니다(8:27-30).

* 무리를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1-3)

그 즈음에 또 큰 무리가 있어 먹을 것이 없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만일 내가 저희를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도 있느니라.

주님께서 무리를 먹이신 이적은 데가볼리 근처 갈릴리 바다 주변에서 일어났습니다. 주님이 사역하는 동안 수많은 무리들이 모여들었으며, 이 사역은 3일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3일이 지나게 되자 무리들은 더 이상 먹을 음식이 없었습니다(1). 그들 중에는 벌써 음식이 떨어져서 매우 허기진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 중에는 먼 곳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허기진 배를 안고 먼길을 걸어가야만 했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무리들의 사정을 아시고 그들을 불쌍하게 생각하셨습니다(2-3). 5병2어의 이적(6:34) 때에 주님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헤메는 무리들을 보시고 그들의 목자와 지도자가 되어 진리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번 사건에서도 주님은 말씀을 듣다가 굶주린 무리를 보시고 그들에게 음식을 제공하셨습니다. 그러나 5병이어의 사건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졌고, 이번 사건은 이방인 지역에서 이루어졌습니다.

*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4-5)
"제자들이 대답하되 이 광야에서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4)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가 있느냐? 가로되 일곱이로소이다 하거늘(5)..."

제자들은 그 많은 무리를 먹일 떡을 광야에서 구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4), 주님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 고 물으셨고, 제자들은 "떡 7개"가 남아 있다고 대답했습니다(5). 주님은 제자들이 가지고 있던 것을 가지고 무리들을 먹이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없는 것을 요구하지는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가진 것이 부족하지만 그것을 가지고 이웃의 필요를 채워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연약한 때문에 고민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몇 개의 떡과 두어 마리의 생선으로도 수천 명이 먹고 남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부족해도 주님이 원하시면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은 믿음으로 드리는 작은 힘을 받으시고 수많은 이웃들의 부족함을 채워 주시는 도구로 사용해 주십니다.

* 풍성한 식사(6-10)
"예수께서 무리를 명하사 땅에 앉게 하시고 떡 일곱 개를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그 앞에 놓게 하시니 제자들이 무리 앞에 놓더라(6). 또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는지라. 이에 축복하시고 명하사 이것도 그 앞에 놓게 하시니(7).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 일곱 광주리를 거두었으며(8), 사람은 약 사천 명이었더라. 예수께서 저희를 흩어 보내시고(9), 곧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달마누다 지방으로 가시니라(10)."

주님은 무리들을 땅에 앉게 하신 후에 제자들이 가진 떡을 앞에 놓고 축사하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께서 오늘도 일용할 양식을 주신 것을 감사드렸습니다. 축사를 마치신 후에 주님은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그 떡을 무리들에게 나누어주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 명령대로 그 떡을 무리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6). 그리고 주님은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는 것이 보시고 그것도 축사하시고 무리들에게 나누어주라고 하셨습니다(7). 이제 모든 무리들은 모두 배부르게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무리들이 배부르게 먹은 후에도 일곱 광주리에 채울 만큼 떡이 남아 있었습니다(8). 5병이어 때에 무리들이 남긴 열 두 광주리는 "작은 바구니"(코피노오이)였으나, 지금 무리들을 먹고남은 일곱 광주리는 "사람을 운반할 수 있는 큰 광주리"(스피리다스)였습니다. 그러므로 이번에 남은 음식이 5병이어 사건 때보다 더 많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에 음식을 먹은 사람은 여자와 아이들을 제외하고 남자들만 약 4,000명이나 되었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무리들을 배부르게 먹이신 후에 그들을 돌려보내셨습니다. 무리들을 보낸 후에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바다 건너편(호수 서쪽) 디베랴 근처의 달마누다(또는 마가단; 마 15:39) 지방으로 가셨습니다(9-10).

* 유대인의 교회와 이방인의 교회
주님은 유대인들에게 행하신 오병이어 사건과 같이 이방인이 많이 사는 동네에서도큰 이적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함께 앉아 식사할 수 없었던 이방인들에게 말씀을 전하시고 함께 음식을 드셨습니다. 주님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거부하는 유대인들을 떠나 이방인의 땅 두로와 시돈, 그리고 데가볼리로 가셔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와 같이 주님 안에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한 형제가 될 수 있는 나라입니다. 우리 중에도 여러 대에 걸쳐서 주님을 믿은 사람도 있고, 당대에 혼자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오래 예수를 믿은 사람들은 불신자들이나 처음 믿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의를 자랑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매우 위험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누구든지 죄인이었을 때에 구원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래 믿은 사람일수록 외식에 빠지지 않기 위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더욱 힘써야만 합니다. 주님은 스스로 의롭게 여기고 남을 정죄하는 바리새인들을 크게 책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주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잊는 순간부터 우리는 감사와 감격을 잃고, 외식과 형식의 중병에 걸리게 될 것입니다.

* 이 사건이 주는 의미 *
1. 주님은 우리에게 영육간에 필요한 일용할 양식을 공급해 주신다.
2. 주님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구분하지 않으신다.
3. 주님은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이웃의 필요를 채울 수 있게 하신다.

적용을 위한질문
1. 우리는 주님께서 영육간에 필요한 것을 채워 주실 것을 믿고 살아가는가?

2. 우리 이웃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주님께 드려야 할 떡과 물고기는 무엇인가?

3. 왜 스스로 의롭게 생각하고 이웃을 정죄하는 일이 큰 범죄인지 말해보자.


표적을 요구하는 바리새인(막 8:11-13)



묵상 내용



*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요구함(11)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께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11)..."

주님은 이방인의 땅에서 복음을 전하신 후에 다시 배를 타고 갈릴리 서쪽으로 가셨습니다. 이방인들은 주님을 열렬히 환영하였으며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갈릴리로 돌아오게 되자 또 다시 외식 적인 바리새인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주님께 와서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여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이미 예수님을 이단이라고 판정했으며, 주님이 하는 일은 귀신의 왕의 힘을 빌려서 하는 것이라고 정죄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또 다시 주님께 하나님께서 주시는 표적을 요구했습니다(11). "표적"(세메이온: sign)은 어떤 사람의 말이 진실하고, 그 행동의 정당하다는 것을 보장해주는 "표시"(token)를 의미합니다. 구약을 보면 예언자들은 자신들이 하는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입증하기 여러 가지 표적을 행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엘리야는 하늘로부터 불을 내려오게 했으며, 다른 선지자들도 여러 가지 예언과 이적들을 행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주님께 와서 바로 이런 표적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사실상 주님은 그 동안 어떤 선지자들보다도 더 많은 '이적'(두나미스; miracle)을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이적들은 하나님께서 주님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표적'(세메이온; sign)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정직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더 이상 표적을 요구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그렇게 많은 표적을 보고서도 주님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주님이 이단이며 악마적인 행위를 하고 있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들이 이런 표적을 요구한 것은 주님을 반대할 근거를 찾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 이 세대가 어찌하여 표적을 구하느냐?(12)
"예수께서 마음속에 깊이 탄식하시며 가라사대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게 표적을 주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12)..."

주님께서는 그들의 완고한 마음을 아시고 깊이 탄식하셨습니다. 주님은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고 하시며 깊이 탄식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많은 표적을 보고도 또 다시 표적을 구하는 사람들을 보고 탄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동안 주님은 그 동안 어떤 구약의 선지자들보다 더 많은 이적들을 행하셨습니다. 주님은 수많은 병자를 고쳐주셨으며, 귀신을 내어 쫓으셨습니다. 주님은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하셨고 심지어 죽은 사람도 살려내셨습니다. 이러한 표적을 보고도 주님을 믿을 수 없다면 무엇을 보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주님은 또 다른 표적을 구하는 그들을 보고 탄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마치 날마다 하나님이 주신 만나를 먹으면서 끝없이 하나님을 시험하고 원망했던 이스라엘 사람들과 같이 완고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셨습니다(12). 주님은 그들에게 표적이 필요 없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들은 죽은 사람을 다시 살려도 주님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표적이 아니라 마음을 열고 정직하게 주님의 가르침과 행동을 평가하는 것이었습니다. 참된 성도들은 더 이상 다른 표적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은혜로 충분히 만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은혜도 감당할 수 없다고 고백 할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표적을 구하는 사람들을 향해 탄식하십니다. 주님은 항상 우리들과 함께 하시며 여러 가지 환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그러나 영적인 눈이 어두운 사람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또 다른 표적을 구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날마다 하나님이 주시는 만나를 먹고 구름 기둥과 불기둥의 보호를 받으면서도 날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시험했습니다.

영적으로 어두운 사람들은 그들과 같이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서도 계속해서 하나님을 의심하고 시험합니다. 주님은 이런 사람을 보시고 탄식하십니다. 우리는 또 다른 표적을 구하지 말고 이미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주님께 질병을 고쳐달라고 세 번이나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바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내게 족하다." 왜냐하면 주님은 그 질병을 통해서 바울을 겸손하게 하시고 그에게 큰 능력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환경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환경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에 우리에게 주신 환경에 만족하며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윗이 고백한 것과 같이 "하나님을 자기의 목자로 삼은 사람은 부족함이 없습니다."

* 저희를 떠나가신 예수님(13)
"저희를 떠나 다시 배에 올라 건너편으로 가시니라(13)."

마침내 주님은 표적을 요구하는 사람들을 떠나셨습니다. 주님은 계속해서 불신앙으로 대하는 바리새인들에게 분노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들과 논쟁하는 것이 백해무익하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갈릴리 바다를 건너 갈릴리 동편으로 건너 가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주님의 행하시는 일을 보고 주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깨달을 만한 영적인 안목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고의로 주님의 행하시는 표적에 눈을 감았으며, 끝없이 주님을 시험했습니다. 주님은 이 사건을 마지막으로 갈릴리에서의 공생애 사역을 마치셨습니다. 주님은 계속해서 은혜를 거부하는 사람들로부터 은혜의 기회를 거두셨습니다.

* 이 사건이 주는 교훈 *
1. 하나님은 이미 우리들이 하나님을 믿을만한 충분한 증거를 주셨다. 그러므로 정직한 마음으로 말씀을 대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길을 알 수 있다.
2. 이미 주신 은혜 외에 또 다른 표적을 찾는 사람은 불신앙의 사람이다.
3. 은혜를 받으면서 계속해서 믿지 않는 사람은 은혜의 기회를 잃게 된다.

적용을 위한질문
1. 우리는 하나님이 이미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는가? 아니면 또 다른 표적을 구하고 있는가?

2. 왜 불신앙의 사람에게 표적을 보여 주는 일이 아무 소용이 없는지 말해보자.

3. 주님의 은혜를 계속적으로 거부하는 사람에게 주님은 어떻게 대해주시는가?


바리새인의 교훈을 주의하라(막 8:14-21)



묵상 내용



* 바리새인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14-15)
"제자들이 떡 가져오기를 잊었으매 배에 떡 한 개 밖에 저희에게 없더라(14). 예수께서 경계하여 가라사대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15)..."

예수님은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을 떠나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습니다. 제자들은 음식을 준비하는 것을 잊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떡 한 개밖에는 먹을 음식이 없었습니다(14). 주님은 제자들에게 "바리새인과 헤롯(안디바)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경계하셨습니다(15). 누룩은 볼 수 없지만 매우 적은 양으로 많은 반죽을 발효시킬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누룩은 두 가지로 사용되었습니다. 첫째로 누룩은 긍정적인 의미에서 복음의 침투력과 영향력을 나타냅니다(천국은 가루 서 말에 넣은 누룩과 같으니...). 그러나 누룩은 일반적으로 부정적인 의미에서 죄와 부패에 대한 은유로 사용되었습니다. 본문에서는 누룩이 바리새인과 헤롯의 가르침이나, 그들의 외식적인 신앙 태도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 대해 철저히 조사했기 때문에 주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을 이단으로 몰았으며, 귀신이 들렸다고 하면서 또 다른 표적을 요구했습니다. 그들은 정직하지 못했으며, 남에게 보이기 위한 외식적인 신앙 생활을 했습니다. 헤롯은 스스로 율법을 범하고(동생의 아내를 취함) 잘못을 지적하는 세례 요한이 의인인 줄 알면서도 죽였습니다. 그는 하나님보다 사람의 눈을 더 의식했습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과 헤롯은 둘 다 하나님 보다 사람의 눈을 더 의식하는 형식적인 신앙 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은 종교적인 지도자이며, 헤롯은 정치적인 지도자였기 때문에 그들의 신앙 태도는 많은 사람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의 교훈과 외식적인 신앙 태도를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 바리새인과 헤롯은 모두 백성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는 거짓 목자였습니다.

* 너희가 어찌 깨닫지 못하느냐?(16-18(상))
"제자들이 서로 의논하기를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 하거늘(16),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의논하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17)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18(상))"

그러나 제자들은 주님의 가르침을 오해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왜 미리 떡을 준비하지 못했느냐?" 고 책망하는 줄로 알았습니다(16). 그러므로 그들은 주님의 교훈을 듣고 음식을 준비하지 못한 일에 대해 책임 소재를 놓고 서로 다투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제자들을 보고 "너희가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고 책망하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의 영적 무지함을 보고 탄식하셨습니다(17). 그들은 마치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소경이었으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였습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주님과 함께 하며 수많은 이적을 보고 가르침을 받았지만 아직도 영적인 어린아이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주님의 책망을 받기에 마땅했습니다.

*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18(하)-21)
"또 기억지 못하느냐?(18) 내가 또 다섯 개를 오 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가로되 열 둘이니이다(19). 또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가로되 일곱이니이다(20). 가라사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21)"

주님은 제자들이 떡을 가지고 다투는 것을 보고 주님이 말하는 것이 음식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떡 다섯 개로 5000명을 먹일 때에 남은 조각을 얼마나 거두었느냐? 고 물으셨습니다. 제자들은 열두 광주리였다고 대답했습니다(19). 주님은 두 번째로 떡 일곱 개로 4000명을 먹일 때에 남은 떡을 얼마나 거두었느냐? 고 물었습니다. 제자들은 일곱 광주리였다고 대답했습니다(20). 주님께서 이 질문을 하신 것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의 초점이 음식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떡 다섯 개로 5000명을 먹이고 12광주리를 남기시는 주님께서 떡 문제로 걱정하지 않는 분이라는 것을 알아야 했습니다. 제자들은 떡 일곱 개로 4000명을 먹이고 일곱 광주리를 남기신 주님께서 떡이 없다고 제자들을 책망하실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이 질문을 하신 후에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고 하시며 제자들을 책망하셨습니다(21). 이러한 기록은 주님을 가깝게 모신 제자들도 영적인 면에서 헤롯과 바리새인, 그리고 다른 무리들과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가는 5000명을 먹인 사건 뒤에 귀머거리와 벙어리를 고친 일을 기록하였으며, 4000명을 먹인 사건 뒤에 소경을 고친 사건을 기록하였습니다. 이 사건들은 영적으로 귀머거리와 소경과 같은 제자들의 귀와 눈을 열어 주실 것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건 후에 제자들은 주는 메시야(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바리새인과 헤롯의 교훈을 조심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 보다 사람의 눈을 더 의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진전한 경건과 사랑을 버리고 형식과 외식만을 좆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이미 주신 은혜를 거부하고 또 다른 표적을 구하며 하나님을 시험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많은 말씀과 은혜에 대해 무감각해진 영적인 불감증 환자는 아닙니까? 그러면서도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이러한 영적 불감증 환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항상 성령 안에서 자신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제자들과 같이 영적인 귀머거리와 소경은 아닙니까? 우리는 아직도 구원해 주신 은혜와 수많은 은혜를 체험하고도 의식주 문제에 매여 서로 원망하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 우리의 모든 것을 채워 주실 것"을 믿고 있습니까? 우리는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주님이 우리와 동행하고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하고 살고 있지 않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이 시간 우리의 눈을 열어 달라고 주님께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 이 사건이 주는 교훈 *
1. 우리는 외식과 형식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항상 조심해야 한다.
2.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할 때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신다.
3. 주님은 우리의 닫혀진 영적인 눈과 귀를 열어 주시는 분이다.

적용을 위한질문
1. 하나님보다 사람의 눈을 더 의식하며 형식과 외식을 좆고 있지는 않는가?

2.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고 있는가?

3. 이 시간 우리 눈과 귀를 열어 주시도록 성령님께 기도하자.


소경의 눈을 고치심(막 8:22-26)



묵상 내용



마가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 사건 앞에 소경을 고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소경을 고치신 사건은 제자들이 주님을 바로 보게 될 것을 예고해주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계속된 이적(5병2어, 7병2어)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면에서 마치 소경과도 같았습니다. 주님은 소경을 고쳐주시듯이 제자들의 눈을 떠서 주님을 밝히 볼 수 있게 해 주실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소경을 고치신 이적은 다른 이적들과 몇 가지 점에서 다릅니다. 다른 이적들은 주님께서 치유를 선고하는 순간 즉시 치유를 받았지만, 본문에서는 시간이 흐르면서 치료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한 병자를 놓고 두 번이나 안수한 것도 다른 이적과는 다른 부분이었습니다.

1. 소경을 데리고 옴(22-23(상))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소경 하나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대시기를 구하거늘(22), 예수께서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밖으로 데리고나가사..."(23(상))

주님과 그의 제자들은 갈릴리 바다를 건너 갈릴리 동북쪽에 있는 벳세다 율리아스로 갔습니다. 이 곳은 헤롯 빌립이 다스리던 구역으로 규모 면에서는 도시였지만, 행정적으로는 마을이나 부락의 조직을 가진 곳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벳세다에 들어가셨을 때에 몇 사람이 소경 하나를 주님께 데리고 와서 안수해서 고쳐달라고 요청했습니다(22). 주님은 그 요청을 받으신 후에 그 소경의 손을 잡고 마을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마가복음을 보면 주님께서 이와 같이 비공개적인 장소에서 이적을 베푸신 일이 세 번 기록되어 있습니다(5:35-43, 7:31-37, 8:22-26 참조). 이 경우 주님께서 비공개적으로 병자를 치료하신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소경과 개인적인 관계를 통해서 믿음을 주기 위해서.
주님은 병자들의 마음에 있는 믿음을 보고 그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나 장애자들은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자기 믿음을 표현하는 일이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병자와 개인적인 대화를 통해서 그가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개인적인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었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해서 병자가 마음에 확신을 갖게 되면 그 믿음을 보시고 그 병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아마 본문에서 주님이 소경을 마을밖으로 데리고 나가신 일도 이런 목적 때문이었을 지 모릅니다.

2) 공개적인 이적으로 인해 복음 전도 사역에 방해를 받지 않도록
주님은 종종 병자를 고쳐 주신 후에 그 사실을 알리지 말도록 경고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복음보다 병을 치료받기 위해 몰려들기 때문에 찾아오기 때문에 복음 전도 사역이 지장을 받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주님께서는 소경을 고쳐 주신 후에 마을로 가지 말고 바로 집으로 가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이 사실이 공개되길 원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2. 소경을 고쳐 주심(23(하)-25)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23(하)), 우러러보며 가로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24),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저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만물을 밝히 보는지라(25)."

주님은 마을 밖으로 소경을 데려가신 후에 소경의 눈에 침을 뱉었으며 계속해서 안수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 소경에게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으셨습니다(23). 소경은 이 말을 듣고 눈을 들어 앞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자 그의 눈은 시력을 회복하여 사람들이 이리저리 걸어 다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시력은 아직 완전하게 회복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눈에는 걸어 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이 마치 나무가 걸어 다니는 것처럼 흐릿하게 보였습니다(24). 이 사람이 나무를 알고 있는 것을 보면 그는 날 때부터 소경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날 때부터 소경이었다면 나무에 대해서 알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온전한 시력을 가지고 있다가 어떤 사고로 인해 시력을 잃게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주님은 그의 눈이 아직 완전하게 시력을 회복되지 못했다는 것을 확인하신 후에 두 번째로 손을 그 사람의 눈에 대고 안수하셨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안수를 받은 소경의 눈은 완전하게 시력을 회복하였으며 사물을 분명히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25).


3. 마을로 들어가지 말라(26)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가라사대 마을에도 들어가지 말라 하시니라(26)."

주님은 그 사람을 고치신 후에 그에게 마을(벳세다)로 들어가지 말고 그의 집으로 바로 가라고 명하셨습니다(26). 그는 벳세다 사람이 아니었으며 다른 마을에서 병을 고침을 받기 위해 온 사람이었습니다. 주님께서 그에게 마을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신 것은 이 사실이 마을에 알려져서 전도 사역이 방해받기를 원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 이 사건이 주는 의미 *

1. 메시야 시대의 도래를 알림
이 사건은 다음과 같은 이사야의 예언의 성취였습니다. "그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사 35:5-6)." 이사야는 오래 전에 이미 메시아시대가 되면 소경이 눈을 뜨고, 벙어리가 말하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마가는 소경을 고친 사건을 통해서 이사야가 예언했던 메시아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마가는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께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아였으며, 주님을 통해서 메시아 시대가 이 땅에 도래했다는 것을 증거해 주었던 것입니다.

2. 육체적인 질병을 치유해 주심.
주님은 우리의 육체적인 병을 고쳐주시는 분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소경은 주님께 나아왔다가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오늘날도 자기의 질병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오면 주님은 그에게 믿음을 주시고 그를 고쳐 주십니다. 영적인 질병에 걸린 사람은 우리 곁에 계시는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또한 영적인 병에 걸린 사람은 주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영적인 질병을 가진 사람들은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영적인 믿음의 안약을 주실 것이며, 단련된 금(믿음)을 주셔서 우리를 부요 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3. 영적인 눈을 뜨게 해 주심.
이 사건은 영적인 소경과 같은 제자들의 눈을 뜨게 하실 것을 예고해 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제자들은 5병 2어와 같은 기적을 보고도 주님이 메시아인 줄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바로 소경을 고쳐주심으로 제자들의 영적인 눈을 열어주실 것임을 암시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 후에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제자들의 눈을 열어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히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적용을 위한질문
1. 왜 소경을 고친 사건이 주님의 메시아성을 증거하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가?

2. 우리는 영적인 소경이 아닌지 돌이켜 보자. 그리고 우리가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자.

3. 지금 병에 걸려 있는 사람들은 병이 낫기를 위해서 믿음으로 기도하자.

예수님의 기적의 의미에 대해서



마가복음 1-8장에 나타난 이적들을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가는 종종 예수님을 가르치시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마가복음에서 10번 예수님을 "선생"으로 언급하였으며,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청중들의 반응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가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내용에 대해서는 마태나 누가에 비해 매우 적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마가는 (막 1:14-8:30) 예수님의 이적에 대해서는 매우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막 1-10장)에서 예수님의 이적들을 기록하고 있는 구절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가 이 구절들을 보면 마가가 얼마나 예수님의 이적을 강조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 1장 21, 30, 32-34, 39, 40-45절
* 2장 1-12절
* 3장 1-6, 10-11절
* 4장 35-41절
* 5장 1-13절
* 6장 5, 30-44, 45-52, 53-56절
* 7장 24-30, 31-37절
* 8장 1-10, 22-26절
* 9장 14-29절
* 10장 46-52절

그러면 왜 마가는 이적들을 그렇게 강조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이 이적들이 예수님이 메시야(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 복음서에 기록된 4가지 이적들 *

복음서에 기록된 이적들은 다음과 같이 4가지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1. 이사야적인 이적들
"이사야적인 이적"이란 이름은 (마 11:2-6)과 (눅 7:18-23)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이 곳을 보면 세례 요한이 감옥에서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이렇게 묻는 장면이 나옵니다. "우리가 기다리던 사람(메시야)이 당신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 합니까?". 그때에 주님은 "내가 메시아다" 라고 대답하지 않고 대신 너희가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가서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전하라(마 11:5)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바로 오래 전에 선지자 이사야가 했던 예언의 성취였습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그때에(메시야 시대에) 소경의 눈이 밝아질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사 35:6, 42:7, 61:1)

유대인들은 메시야 시대가 도래하게 되면 이사야가 언급했던 이러한 "표적들"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행하신 일들은 메시야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결정적인 증거였습니다. 주님께서 눈 먼 자와 귀머거리, 그리고 벙어리와 다리 저는 병자를 고쳐 주신 메시야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표시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표적들은 "예수님이 누구신가?" 에 대한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해 주는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 마가는 그의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들을 그토록 많은 지면을 할애하면서 자세히 언급했던 것입니다.


2. 자연에 대한 이적들
마가는 예수님께서 폭풍을 잠잠케 하셨고(4:35-41), 물위를 걸으셨으며(6:45-52), 무리들을 먹이신 이적들(6:30-44, 8:1-10)에 대해서 여러 번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적들은 예수님이 창조주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큰 바다와 심연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들은 결코 해양 민족이 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른 민족들을 통해서 화물을 실어왔습니다. (계 21:1)에 보면 요한은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에 대해 말한 후에 "바다가 다시 있지 않았다"고 덧붙였습니다. 이렇게 유대인들은 바다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바다의 폭풍을 다스리신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시 65:7)은 하나님을 "바다의 흉용과 물결의 요동을 잠재우시는 분"이라고 찬양하였으며, (시 89:9)은 "주께서 바다의 흉용함을 다스리시며 그 파도가 일어날 때에 평정케 하십니다" 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의 폭풍을 잠재우시고, 물위를 걸으셨을 때 마가는 주님께서 창조주 하나님의 신성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것을 증거하였던 것입니다(시 107:23-32). 마가복음은 무리를 먹이신 두 개의 이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막 6:30-44)에 보면 5천명을 먹이신 일이 나오며, (막 8:1-10)에는 4천명을 먹이신 기록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로서 그의 백성을 먹이셨듯이(출 16장, 시 78:23-29) 주님도 광야에서 그의 "새로운 백성"을 먹이셨습니다. 주님은 구약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행하신 일을 다시 행하셨습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주님께서 바로 구약의 하나님과 동일한 신성을 가지고 잇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3. 귀신들에 대한 이적 기사
마가에는 귀신들을 쫓아낸 이적들이 많이 나타납니다. 이러한 이적들은 구약의 예언에는 많이 언급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신구약 중간 기에 이르러 유대인들은 귀신의 세력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당시에는 사탄과 귀신들에 대해 많은 언급을 하고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질병은 인간의 죄와 사탄으로 인해 주어지는 것으로 생각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마가는 주님께서 사탄보다 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오셔서 사탄의 세력을 제압하고 귀신의 세력들을 내어쫓았다는 것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마가는 이러한 기록을 통해서 주님께서 사탄의 나라를 멸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오게 하셨다는 것을 증거 해 주고 있습니다(3:27).


4. 죽음에 대한 이적들
또한 마가는 죽은 사람을 다시 살려낸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5:22-43). 요한은 주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려 주신 일을 자세하게 기록해주고 있습니다(요 11장). 그리고 누가는 주님께서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을 살려주신 일을 기록했습니다(7:11-17). 우리는 구약에서 선지자 엘리야와 그의 후계자인 엘리사가 수넴 지방에서 죽었던 여인의 아들을 살린 일(왕상 17:17-24, 왕하 4:21-37)을 읽어볼 수 있습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이러한 생명을 다시 살리는 역사가 주님을 통해서 일어났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를 다시 살려내신 주님의 이적들은 선지자의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메시야 시대가 시작되면 하나님의 백성이 경험하게 될 기쁨을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그가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며,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겨주실 것이라"(사 25:8)"

죽은 자를 살리신 예수님의 이적은 주님께서 생명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분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들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마지막 날에 모든 사람들을 불러 다시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주님의 스스로 부활 하심으로 이것을 증거 해 주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장차 모든 사람을 다시 살려내실 장본인이라는 것을 만천하에 드러낸 사건이었습니다.

* 이 사건이 주는 교훈 *

1. 주님이 행하신 이적은 메시아의 시대에 대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의 성취였다.
2. 주님이 행하신 이적은 주께서 만물을 주관하는 창조자임을 증거한 사건이었다.
3. 주님이 행하신 이적은 주께서 사단의 나라를 멸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오게 하셨다는 것을 보여주신 사건이었다.
4. 주님이 행하신 이적은 주께서 생명을 주관하시며 마지막에 모든 사람을 다시 살려 주실 분임을 입증한 사건이었다

마가는 그의 복음서의 중심에 예수께서 "그리스도(메시야)"라고 하는 신앙고백을 두고 있습니다. 이 고백은 (1-8장)까지의 내용을 결론 짓는 매우 중요한 고백입니다. 그 동안 주님은 여러 가지 이적들을 행하셨지만 자신의 정체를 분명하게 밝히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정체는 수수께끼로 남아있었습니다(1:27, 2:7, 6:2). 주님은 죄인들과 교제하였으며 전통적인 경건 의식을 무시했습니다. 이로 인해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정통성을 신뢰하지 못했습니다(2;15-20, 3:22-30, 7:1-5). 예수님의 제자들도 주님을 따라다니면서 여러 가지 이적들을 목격했습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여전히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했습니다(4:41, 6:51). 바로 이때에 주님은 베드로의 고백을 통해서 자신이 "메시아(그리스도)"라는 것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27-28)
"예수와 제자들이 가이사랴 빌립보 여러 마을로 나가실새 노중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가로되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27) 여짜와 가로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28)."

주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벳새다에서 북쪽으로 25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가이사랴 빌립보의 여러 마을로 가셨습니다. 이곳에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높은 헬몬산이 있었습니다. 이 산에서 흘러내린 물은 이 지역 전체를 적시며 요단강으로 흘러 들어갔습니다. 이 물로 인해 이 지역은 매우 땅이 비옥했고 경치 또한 장관이었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는 로마황제 아우구스투스가 헤롯에게 준 도시였습니다.헤롯은 이에 감사하기 위해 이곳에 황제의 이름으로 된 신전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헤롯은 이 곳을 주전 3년에 자기 아들인 빌립에게 물려주었습니다. 헤롯의 아들 빌립은 이곳을 개발하고, 이 곳에 자기의 저택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도시를 로마 황제의 이름인 시이저, 즉 가이사라는 이름을 따서 "가이사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이미 지중해 해안에는 "가이사랴"라는 이름을 가진 항구도시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헤롯 빌립은 가이사랴 항구 도시와 이 도시를 구별하기 위해서 이 도시를 자기 이름을 따서 "가이사랴 빌립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므로 이 도시의 이름은 "빌립의 영토에 있는 가이사랴"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 도시는 황제 숭배가 가장 절정에 이르렀던 도시였습니다. 주님은 바로 이러한 도시에서 제자들에게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 질문은 이 세상의 주인은 "로마 황제"가 아니라, 바로 주님이라는 것을 알게하려는 질문이었습니다.

주님은 길가는 도중에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습니다(27). 제자들의 대답을 보면 당시 주님에 대한 백성들의 견해는 세가지였습니다.

1) 일부 사람들(헤롯 같은)은 예수님을 부활한 세례 요한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헤롯은 세례요한을 죽인 후에 계속해서 심한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주님의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는 주님에 대한 소식을 듣고 나서 주님은 세례요한이 자기를 심판하기 위해 다시 살아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2) 또 다른 사람들은 주님이 세상에 온 엘리야라고 생각했습니다. 말라기는 메시아 시대에 오면 엘리야가 먼저 와서 그 길을 예비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주님이 바로 말라기가 예언했던 엘리야라고 생각했습니다.

3) 또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선지자 중의 하나로 생각했습니다(28). 이스라엘에는 각 시대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여러 가지 표적을 행하였고,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에 일부는 주님의 가르침과 행하는 이적을 보고 들으면서 하나님이 자기들을 위해 선지자를 보내주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러한 제자들의 세 가지 대답에 대해 동의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이 이 대답에 동의하지 않은 것은 결국 그 대답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29)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29)..."

그때에 주님은 다시 제자들에게 질문하셨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주님은 이제 자신과 생사고락을 함께 해 온 제자들에게 자기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고 물으셨습니다. 바로 그때에 베드로가 앞에 나서서 그 질문에 대답했습니다. 베드로는 12제자의 대표자로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님은 그리스도(메시아)이십니다"(29). 다른 복음서 기자들은 그리스도라는 말 외에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헬라어로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히브리어로 "메시아"라는 말과 같은 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고백은 "주님이 바로 성경에 약속된 메시아"라는 것을 시인한 고백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왕이나 제사장, 또는 선지자와 같은 특별한 직분을 수여할 때에는 그 머리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베드로의 고백은 주님께서 "온 세상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분"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오래 전부터 사단을 멸하고 온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를 보내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삼하 7:14-16, 사 55:3-50, 렘 23:5 등). 베드로는 주님이 바로 성경에 약속된 그 메시아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고백은 참으로 놀라운 고백이었습니다.


* 자신을 알리시기를 유보하심(30)
"이에 자기의 말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계하시고(30)...."

베드로의 고백을 들은 주님은 매우 기뻐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깨달음을 하나님(성령)만이 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칭찬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 앞에서 분명하게 자신이 메시아라고 시인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왜 주님은 자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못하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아직 사람들이 메시아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메시아에 대하여 그릇된 선입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를 다윗과 같이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해방시킬 정치적인 지도자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폭력을 써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자신이 부활하여 참된 메시아가 어떤 것인지 분명하게 나타낼 때까지 자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숨기셨던 것입니다(30).


* 마가복음의 중요한 두 가지 주제
마가복음에는 마가가 묻고 대답하려고 하는 중요한 두 가지 주제가 있습니다
1) "예수님은 누구신가?"(신앙 고백)
2)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어떤 길을 가야 하는가?(제자의도)"

마가는 전반부(1-8장)에서 첫 번째 주제를 다루었으며, 후반부(9-16장)에서 두 번째 주제를 다루었습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주제의 중심에 베드로의 신앙 고백 사건을 기록하였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베드로의 신앙 고백 사건은 예수님이 누구신가? 에 대한 질문을 결론 짓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가야 할 길에 대한 주제로 출발하는 전환점이 되고 있습니다.

적용을 위한질문
1. 세상 사람들은 주님이 누구라고 생각하고 있는가?(성인, 훌륭한 교사, 정치가, 해방 자 등). 이러한 대답이 왜 옳지 않은 지에 대해서 말해보자.

2. 우리들은 예수님을 누구라고 고백하고 있는지 솔직하게 말해보자.

3. 우리는 누가 진정한 주님(Lord)이라고 생각하는지 솔직하게 말해보자. 우리는 세상을 따르고 있는가? 아니면 주님의 뜻을 따라 살고 있는가?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 번째 예언(막 8:31-33)



주님은 베드로의 말이 옳다고 동의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일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경계하셨습니다(30).
그러면 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메시아임을 알리지 못하게 하셨을까요?
신학자들은 이것을 "메시아 비밀"(the messianic secret)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아였다고 하는 소식이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전파된 것은 주님이 승천하시고 성령이 이 땅에 오셨을 때였습니다(행 2장).
주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아라는 사실을 이때까지 전파하지 않고 유보해 두셨습니다.
왜냐하면 이일은 완전히 성취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설명하거나 이해시키기가 너무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이 일을 계시하시는 일을 성령께서 오실 때까지 잠시 유보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왜 주님은 제자들에게는 이 사실을 가르쳐주셨을까요?
그것은 이 모든 일이 일어난 후에 이 일이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어떤 일을 하시기 전에 미리 선지자들을 통해서 그 일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 일이 일어난 후에 그 일이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죽음과 부활을 미리 예고해 주신 것도 이 모든 일이 일어난 후에 이일이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미리 작정된 것이었음을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 죽음과 부활에 대한 첫 번째 예언(31)

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

주님은 자신을 "인자"(son of man)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러면 왜 주님은 자기를 "인자"라고 부르셨을까요?

1) 당시의 관습에 따라서.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G. Vermes) 주님 당시 "인자"라는 말은 "나"라는 말을 낮추어 부르는 말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내가"를 낮추어서 부를 때에 "제가"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학자들은 주님 당시에 "인자"라고 말은 능욕이나 위험, 또는 죽음과 관계되어 있을 때에 사용되었다고 말합니다.(M. Black, An Aramaic Approach to the Gospel and Acts, Oxford 1967). 우리가 이 견해를 받아들인다면 주님은 자기를 겸손하게 표현하였고,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말하는 데에 적합한 표현으로 자신을 "인자"라고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메시아에 대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 사용했다.
주님이 자신을 "인자"라고 부른 것은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릇된 메시아 관에 대한 오해를 피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당시에 유대인들이 생각한 메시아는 성경에서 말하는 메시아와 많이 달랐습니다. 그들은 메시아를 무력으로 로마를 정복하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세계적인 정부를 세울 정치적 지도자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이 이러한 메시아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이러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메시아"라는 말대신 자신을 "인자"라고 부르셨습니다.

3) 자신이 성경에 예언된 메시아임을 증거하기 위해 사용함.
주님이 자신을 인자로 부른 것은 자신이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였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구약에는 "인자"라는 말이 메시아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 경우가 있습니다(단 7:13-14).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 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니라(단 7:13-14)." 다니엘은 환상 중에 "인자 같은 이"가 구름을 타고 하나님께 와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인자라고 부르심으로 자신이 다니엘에 예언된 "인자"라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이 하나님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을 것이며, 영원히 계속될 나라를 세우실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의도적으로 자신을 "인자'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러한 영광은 능욕과 죽음을 지나서 도달하게 될 길이라는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 죽음과 부활 예고의 의미(32)

주님은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버림을 받은 후에 죽을 것이며, 죽은 지 3일만에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을 미리 예고하셨습니다(8:1, 9:31, 10:33).주님이 이 사실을 미리 예고해 주신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주님을 정치적인 메시아로 잘못 이해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바른 메시아의 길(수난, 부활)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8:31).
2) 누가 더 큰 자인지 다투고 있는 제자들에게 메시아가 섬기러 온 종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9:32-).
3)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의 좌우 편에 앉게 해 달라고 했을 때 메시아를 따르는 일이 매우 힘든 일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10:35-37,41).


* 베드로의 만류와 주님의 책망(32-33)

"드러내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잡고 간하매(32),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가라사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있다 하시고(33)..."

주님은 지금까지 진리를 전하실 때에 비유를 통해서 완곡하게 전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자들에게 아무 것도 숨기지 않고 공개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제자들)는 '십자가에 달려 죽는 무력한 메시아"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언젠가는 로마를 치고 이 세상에 세계적인 신정국가를 세울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 로마인에 의해 처형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결코 이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32). 그러자 주님은 걸어가시다가 몸을 뒤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면서 엄히 책망 하셨습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있도다"(33).

주님은 베드로가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부인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말은 사단이 베드로를 통해서 주님을 유혹하기 위해 던진 말이라는 것을 주님은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베드로에게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고 외치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통해서 유혹하는 사단의 유혹을 단호하게 대처하셨습니다. 사단은 베드로를 통해서 예수님을 생각해 주는 척 하면서 하나님이 정하신 구원 계획을 부정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러한 사단의 유혹을 단호하게 물리치셨습니다.


* 제자의 도(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좆을 것이니라.

"이 말씀은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말씀이다"
주님은 무리와 제자들을 함께 부르시고 그들에게 제자의 길에 대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뿐 아니라 주님을 따르던 무리들에게도 주신 말씀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제자의 도가 교회의 지도자에게만 해당되고 자기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생각은 그릇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제자의 도에 대해서 제자들과 주님을 따르는 무리들에게 함께 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제자는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
주님은 자기를 따르기 원하는 사람은 먼저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따르려는 사람들은 먼저 자기의 뜻을 포기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주님을 따르려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이기적인 마음(자기 명예나 영광)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의 명예와 영광을 포기하지 않고도 주님을 따를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세상의 소금과 빛이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자기를 부정하지 않고 주님을 따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위해 철저하게 자기를 부인하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 하늘 보좌를 버리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위해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을 따르기를 원한다면 먼저 이기적인 마음을 포기해야 합니다.

"주님의 제자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수 있어야 한다"
주님은 자기를 따르기 원하는 사람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34).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자기가 못 박힐 십자가를 지고 사형장을 향해 걸어가셨습니다. 만일 주님이 이 십자가를 지시지 않았다면 인류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은 무산되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생명을 내놓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마가 복음이 쓰여질 당시의 로마 교회 성도들은 순교의 위협 앞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실제로 십자가를 지고 사형 당할 각오가 되지 않은 사람은 주님의 뒤를 따를 수가 없었습니다.


* 잃으면 찾으리라(3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주님은 제자들과 무리들에게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려고 하면 잃을 것이지만, 주님과 복음을 위해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받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따르려는 사람은 생명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당시의 로마 교회 성도들은 죽음의 위협 속에서 살아갔습니다.
그들은 언제든지 발각되어 체포되면 고문을 받았습니다.
재판관들은 그들에게 예수를 부인하고 황제 만세를 외치기만 하면 살려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자기 목숨을 부지하려는 사람은 주님을 따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과 복음을 위해 생명을 포기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자기 목숨을 위해서 주님을 포기하고 로마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영원한 심판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수많은 성도들이 주님을 위해 자기 목숨을 포기했습니다.
그들은 순교의 제물이 되어 세상을 떠났으나 주님은 그들에게 영생으로 갚아 주셨습니다.
주님은 마침내 그들의 피를 통해서 로마를 점령하셨습니다.
로마는 공식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섬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을 위해 생명을 포기한 사람들이 승리했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 주님을 부인하는 자가 당할 운명(36-38)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36),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37)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38)."

주님은 온 세상을 얻고 자기 생명을 잃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 하셨습니다(37).
자기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주님을 부인한 성도들은 그 대가로 영원한 생명을 잃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세상에서 잠시 생명을 연장하고 영원한 생명을 잃게 된 것입니다.
주님은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패역한 세상에서 주님과 주님의 말씀(복음)을 부끄러워하면, 주님도 하나님의 영광으로 천사들과 함께 오실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 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38).

당시 로마 당국은 성도들에게 로마 황제만이 주(Lord)라고 고백하면 살려줄 것이라고 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자기 목숨을 구하기 위해 주님을 부인하고 황제를 주님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주님은 재림하실 때에 천사들 앞에서 그 사람을 수치스럽게 여길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자기 생명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 하나님의 나라가 능력으로 임할 것을 볼 사람들(9:1)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주님은 그 자리에 서있는 사람들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가 있다고 하셨습니다(9:1).
어떤 학자들은 이 말씀이 바로 뒤에 나오는 변화 산에서 이루어졌다고 말합니다.
세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산에 올라가서 부활 하실 주님의 영광을 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학자들은 여기에서 세 제자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보았다고 주장합니다.
다른 학자들은 이 예언이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통해 성취되었다고 말합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했을 때에 제자들은 방언을 하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에게 임한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이 예언이 사도 요한을 통해서 이루어졌다고 말합니다.
사도 요한은 밧모 섬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모든 광경을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왜 제자의 도를 말씀하시다가 이 말씀을 하셨습니까?
그것은 장차 주님의 재림이 분명한 일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재림으로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사람은 주님과 복음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믿음이 없는 사람은 자기 목숨을 포기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장차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서 주님을 부인한 사람이 겪게될 운명을 미리 예고해 주심으로 성도들에게 용기를 얻을 수 있게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이기적인 마음(명예, 욕심)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리고 생명을 걸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 두 가지를 하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끝까지 주님을 따를 수 없을 것입니다.



로마서 8:1-39




정월, 여월, 가월, 초월, 중하, 계하, 교월, 현월, 개월, 설한, 극월


음력 1월 / 정월(正月)

음력 1월은 일 년의 시작을 으뜸으로 여긴다고 하여 정월이라고 불렀다.
원월(元月), 맹춘(孟春), 태월(泰月)이라고도 한다.

1월(해 솟음달, January) 새해를 맞이하는 달.

로마의 신 야누스(Janus)의 이름에서 유래.
야누스는 모든 문과 성문, 그리고 다른 출입구의 신으로서 숭배되었다.        

음력 2월 / 여월(如月)

음력 2월은 겨울잠에 들었던 만물이 깨어나는 시기라고 하여 여월이라고 불렀다. 대장월(大狀月)이라는 별칭도 있다.

2월(시샘달, February)                                

봄을 시샘하는 겨울의 끝 달.                                                  

로마시대에 2월은 “정화의 달”                                                  

정화를 뜻하는 라틴어 “FEBRUARIUS”에서 유래.

음력 3월 / 가월(嘉月)

음력 3월은 날이 따뜻해지고 꽃들이 피어나는 시기라고 하여 가월이라고 불렀다.

복숭아꽃이 피는 시기라고 하여 도월(桃月)이라고도 불렀으며, 화창한 봄을 뜻하는 소화(韶華), 십이지간 순에서 유래한 진월(辰月)이라는 이름도 있다.

3월(물 오름달, March)
산과 들에 물이 오르는 달.
로마 전쟁의 신인 마르스의 이름에서 유래.                                     

음력 4월 / 초월(初月)

음력 4월은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달이라 하여 초월(初月)이라 불렀다.
또한 양기가 가득하다 하여 정양(正陽)이라고도 불렀다.

4월(잎새달, April)                                                    
물오른 나무들이 저마다 잎새를 돋우는 달

April의 근원인 라틴어 Aprils의 어원에 대해서는 확실한 설이 없고 여러 가지로 주장되고 있다.
하나는 4월이 초목의 눈이 싹트는 달이므로 라틴어 Aperire(열리다)에서 나왔다고 한다.

                                                

음력 5월 / 중하(仲夏)

음력 5월은 매실이 익어가는 달이라 하여 매월(梅月), 매천(梅天), 매하(梅夏)라고도 불렀다.
석류꽃이 핀다는 뜻의 유화월(榴花月), 단오를 뜻하는 포월(蒲月) 등의 이름도 있다.

5월(푸른달, May)                             

마음이 푸른 모든 이의 달.
May는 고대 로마 사람들이 달 이름으로 부르던 Maius에서 따 온 것이다.
Maius란 말은 성장과 번식의 여신인 Maia에게 드린 달이라는 뜻이다.
이 달에는 May Day(5월 축제) 행사가 오래 전부터 영국에서 행하여졌었다.


인디언 아라파호족은 5월을 “오래전에 죽은 자를 생각하는 달”이라고 불렀다.

인디언은 부족마다 각기 다른 문장으로 된 달 이름을 썼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시 같은 문장을 구사한 부족이 아라파호족이 아닌가 싶다.
정희성 시인은 그들의 11월인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을 제목으로 붙인 시를 쓴 적도 있다.

우리에게도 5월을 달리 부르는 이름이 있다.
여름에 들어선다는 뜻을 지닌 입하가 있고, 햇볕이 좋아 모든 만물이 점차 성장하여 가득 찬다는 소만이 있는 달이다.
겨우내 사라졌던 것들이 하나하나 제 모습을 찾아가는 충만하기 짝이 없는 달 이름으로 손색이 없다.
그 밖에도 세간에서는 5월을 계절의 여왕, 가정의 달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이 다투어 5월의 주인 행세를 한다.
국가지정 기념일이 차고 넘치는 5월의 분위기는 아라파호족 5월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돌아보면 내 인생의 5월은 이런 날에 중독되어 푸르기만 했던 것 같다.
어린이날 노래를 부르며 신명나는 걸음으로 행진을 하던 어린 시절에는 마냥 걸어가면 온 세상 어린이를 다 만날 것만 같은 꿈에 부풀어 있었던 것 같다. 세상 돌아가는 영문도 모른 채 자장면과 카네이션으로 이어지던 즐겁기만 한 5월이었다.

그러나 5월은 언제나 푸르게만 있어주지 않았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5월의 갈피갈피에는 다른 색의 기억들이 끼어들었다.
노동절에서 근로자의 날로 바뀐 메이데이,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일은 5월을 피의 빛으로 색을 더했다.
게다가 유독 가까웠던 사람들이 세상을 달리한 무채색의 날도 늘어났다.

국가 지정 기념일도 많지만 내가 동그라미를 쳐놓은 날도 만만찮다.
자연스레 “오래전에 죽은 자를 생각하는 달”이 된 것이다.

음력 6월 / 계하(季夏)

음력 6월은 여름의 끝이라 하여 계하라고 불렀다.
또, 여름의 무더위를 뜻하는 홍염(洪炎), 서월(暑月), 복염(伏炎) 등으로도 불렀다.

6월(누리달, June)                                     
온누리에 생명의 소리가 가득차 넘치는 달.                                    
6월의 영어 이름인 June은 고대 로마 사람들이 달 이름으로 부르던 Junius에서 온 것이다.

Junius란 말은 고대 로마의 명문 집안인 “유니우스”가에 바쳐져서 이름 붙여진 것이다.
유니우스 가의 선조인 “유니우스 브루투스(Junius Brutus)”로서, 그는 기원전 510년 왕정을 폐지하고 자신이 로마의 초대 집정관이 되었다.

음력 7월 / 교월(巧月)

음력 7월은 견우와 직녀가 오작교에서 만난다는 전설이 있는 칠월칠석(7월 7일)이 있는 달이라 교월이라고 불렀다.

한편, 칠월칠석에 처녀들은 직녀성에게 바느질 솜씨가 잘 늘어나도록 빌었고, 남자 아이들은 견우와 직녀를 주제로 글짓기를 하였다고 한다.
또 목욕재계를 하고 칠성제를 올리면 남자 아이를 낳는다고 하였다.

7월(견우직녀달, July)                                                  
견우직녀가 만나는 달.          

로마의 장군이자 클레오파트라의 연인이었던 줄리어스 시저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음력 8월 / 계월(桂月)

음력 8월은 계수나무에 꽃이 핀다고 하여 계월, 계추(桂秋)라고도 불렀다.
또 단풍이 든다 하여 엽월(葉月), 저녁달이 밝다는 뜻의 월석(月夕), 그리고 달이 하얗게 뜬다고 하여 소월(素月)이라고도 불렀다.  

8월(타오름달, August)                                
하늘에선 해가 땅위에서는 가슴이 타는 정열의 달.
줄리어스 시저의 후계자이자 조카인Gaius julius caesar octavianus(옥타비아누스)의 이름을 딴 것이다.
로마의 평의회는 이 시저에게 외경을 뜻하는 “아우구스투스”의 칭호를 주고 그를 본 따 달 이름을 지음으로써 그를 더 명예롭게 했습니다.                                              

음력 9월 / 현월(玄月)

음력 9월은 여름동안 푸르던 만물이 검게 변한다고 하여 검을 현자를 써서 현월이라고 불렀다.

또 서리가 내린다고 하여 상신(霜辰)), 상랭(霜冷)이라고도 불렀으며, 산의 단풍이 더 깊이 물든다는 의미로 풍신(楓辰)이라고도 불렀다.

9월(열매달, September)
가지마다 열매 맺는달.
라틴어인 Stember에서 유래했는데, 그 의미는 “seven(일곱)”
9월은 기원전 700년 정도까지 7번째 달이었고, 로마의 2번째 왕인 Numa Pompilious가 태음력을 304일에서 355일로 바꾸었다.                          

음력 10월 / 개월(開月)

음력 10월은 본격적으로 겨울로 접어들었다는 뜻으로 개동(開冬)이라고 불렀다.
그외 비슷한 뜻으로 맹동(孟冬), 조동(肇冬)이라고도 불렀다.

10월(하늘연달, October)
밝은 달 위에 아침의 나라가 열린 달.                                          October도 September와 마찬가지로 2개월이 늦춰진 이름이다.
라틴어에서 octo는 '8'의 뜻이다.
이 달에는 어린이들에게 가장 즐거운 축제인 핼로인(Halloween)이 있다.

                        

음력 11월 / 설한(雪寒)

음력 11월은 눈이 내리기 시작하고 몹시 추운 달이라 하여 눈과 추위를 뜻하는 설한이라고 불렀다.
또, 1년 중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동지(冬至)가 있는 달이라 동짓달이라고도 불렀다.

11월(미틈달, November)
가을에서 겨울로 치닫는 달.
November의 이름도 September처럼 본래의 뜻보다 2개월이 늦은 것이다.
라틴어에서 Novem은 '9'를 나타낸다.
해마다 이 달의 넷째 목요일은 추수 감사절(Thanksgiving Day)이라 하여 미국과 캐나다에서 지내오는 가을 명절이다.

                                                

음력 12월 / 극월(極月)

음력 12월은 한 해의 마지막 달이라는 뜻으로 극월이라고 불렀다.
또, 전통적으로 '설이 드는 달'이라는 뜻인 섣달이라고도 불렀는데, 현재는 음력 1월 1일을 설날로 기념해 쇠고 있지만 아주 오랜 옛날에는 12월 1일을 설날로 쇠었다고 한다.
그래서 음력 12월을 섣달로 불렀으며, 그것이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것이라 한다.

그 외에도 추운 겨울을 지나며 한해가 다했다는 뜻의 궁월(窮月), 궁동(窮冬), 궁기(窮紀)라고도 불렀다.


12월(매듭달, December)
마음을 가다듬는 한해의 끄트머리 달.                                          December은 어원상으로 10월을 나타내지만, September처럼 2개월이 늦어져 12월이 되었다.
라틴어에서 Decem은 '10'을 의미한다.
이 달 25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크리스마스(Christmas)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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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 로보 문

그 해는 1 월의 보름달로 시작되었으며, 아메리카 원주민의 이름은 “늑대의 달”이었습니다.

그 당시 배고픈 늑대가 한겨울에 식량 부족으로 울부 짖었 기 때문에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2월 - 스노우 문

그 날 주변의 식량 부족으로 인해 폭풍 달과 헝거 달이라고도합니다.

이 이름은 북미에서 발생하는 춥고 눈이 내리는 계절에서 유래했습니다.

3월 — 구사노의 달

이 이름은 아메리카 원주민에 의해 주어졌습니다.

겨울철의 전형적인 서리가 끝날 때 새로 녹은 토양에 벌레의 흔적이 나타 났기 때문입니다.

4월 - 루나 로사

고대부터 이끼 낀 플록스 식물의 큰 개화는 이번 달의 보름달을 루나 로사 (Luna rosa) 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한 것입니다.

이끼 낀 플록스는 여러 개의 분홍색 꽃을 돋보이게합니다.

5월 — 꽃의 달

이 계절에는 꽃이 풍부합니다.

일부 지역에서는 옥수수의 파종 달, 우유의 달이라고도 한다.

6월 — 스트로베리 문

6월의 딸기 수확으로 유명합니다.

유럽과 같은 다른 문화의 경우 장미의 달, 또는 뜨거운 달.

7월 — 사슴의 달

수컷 사슴은 매년 뿔을 흘리며 뿔이 피는 달인 7 월에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눈에 띄지 않았고 달을 그렇게 부르기로 결정했습니다.

또한 알려진 또 다른 이름은 천둥 달입니다.

그 당시 천둥은 풍부하기 때문입니다.

8월 — 스터전 문

철갑상어가 풍부하여 8월의 보름달 이름이 붙었습니다.

9월 — 하베스트 문

이 이름은 작물이 수확되는 계절 인 가을 춘분 이후의 시간을 나타냅니다.

10월 — 헌터의 달

고대부터 모든 것이 버려지기 때문에 시골에 숨을 수 없었던 사슴과 여우를 사냥하기에 이상적이고 선호되는 달이었기 때문에 명명되었습니다.

11월 - 비버 문

다음은 비버 달의 이름으로 인정되는 두 가지 이론입니다.

첫 번째는 이번 달 동안 비버가 겨울철에 굴을 쌓는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이론은 북미 인디언들이 이번 달에 비버를 가두었다는 것입니다.

12월 — 콜드 문

이번 달은 북미에서 일년중 가장 추운시기를 시작하기 때문에 콜드 문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긴 밤의 달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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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라틴어 

라틴어 기원의 뜻

1월

January

Januarius(야누아리우스)

야누스

2월

February

Februarius(페브루아리우스)

정결함, 정화

3월

March

Martius(마르티누스)

마르스(군신)

4월

April

Aprilis(아프릴리스)

개화, 아프로디테(미의 신)

5월

May

Maius(마이우스)

마이아(헤르메스의 어머니)

6월

June

Junius(유니우스)

유노(결혼의 여신)

7월

July

Julius(율리우스)

율리우스 시저

8월

August

Augustus(아우구스투스)

옥타비아누스의 존칭

9월

September

Septembris(셉템브리스)

7(일곱 번째)

10월

October

Octobris(옥토베리스)

8(여덟 번째)

11월

November

Novembris(노벰베리스)

9(아홉 번째)

12월

December

Decembris(디셈브리스)

10(열 번째)


















국경일(國慶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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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천절(開天節)

개천절(開天節, Gaecheonjeol 또는 National Foundation Day)
대한민국의 국경일. 날짜는 양력 10월 3일.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세운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하늘을 열었다는 ‘개천(開天)’이란 말은 환웅이 하늘에서
백두산의 신단수 아래로 내려온 것, 혹은 기원전 2333년에
단군이 고조선을 처음 건국한 것을 의미한다.
이 날에는 대한민국의 국기인 태극기를 게양한다.                                          

개천절의 역사 유래

1909년 1월 15일 나철(羅喆)에 의해 대종교(大倧敎)가 중광(中光)(다시 교문(敎門)을 염)되면서 음력 10월 3일을 개천절로 제정하였습니다.

음력 10월 3일은 3월 16일과 함께 신시 배달 이래로 우리 민족이 하늘의 상제님께 천제(天祭)를 올리던 민족 최대의 명절이었습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음력 10월 3일을 경축일로 제정하고 중국으로 망명한 대종교와 합동으로 경축 행사를 거행하였습니다.

광복이 되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1949년 10월 1일에 '국경일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여 양력 10월 3일을 개천절로 정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대통령마저 외면한 건국기념일

우리가 알고 있는 개천절(開天節)은 국조 단군이 우리 민족 최초 국가인 고조선의 건국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된 날입니다.
개천절의 뜻과 의미는 곧 ‘건국기념일’입니다. 개천(開天)의 문자적 의미는 ‘하늘을 열다, 하늘의 가르침을 열다’는 뜻인 만큼 여기에는 다분히 종교와 철학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가히 ‘나라세움’에 대한 가장 신성한 의미 부여의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라의 ‘건국기념일’이라면 그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국경일 중의 하나로 국가 차원에서 가장 성대하게 기념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우리나라에서는 개천절이 가장 초라하고 궁색(窮塞)한 국경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국가를 대표하는 최고 책임자인 대통령이 개천절 기념행사에 참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 이후 20년 동안 나라의 대통령들이 개천절 행사에 줄곧 참석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건국기념일’에 국가원수가 참석하지 않는 유일한 나라입니다.

단군의 개천이 아닌 환웅의 개천

일제가 심어놓은 식민사관을 계승한 강단 사학자들의 제도 교육 덕분에 이제 대다수 국민들은 단군조선은 그 존재 근거가 불명확한 나라이고, 그 이전의 배달시대는 신화 속의 이야기로만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관이 팽배한 상황에서 개천절 행사가 힘을 받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역시나 국민들도 개천절을 한글날과 이어지는 황금연휴로만 인식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단군의 개천이 아니라 환웅의 개천으로 알았습니다.
『환단고기』「삼성기 하」에서는 환국의 7대 지위리智爲利 환인이 환웅에게 “새 시대를 열어 가르침을 세우고 세상을 신교의 진리로 다스리고 깨우쳐서 이를 만세 자손의 큰 규범으로 삼아라[開天立敎# 在世理化 爲萬世子孫之洪範也]”는 말씀을 내리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에 초대 환웅께서는 환인으로부터 천부인天符印과 홍익인간을 전수받아 동방의 백두산에 오시어 나라를 열었습니다.
「삼성기 상」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입도신시立都神市 국칭배달國稱倍達, 도읍을 신시에 정하고 나라 이름을 배달이라 하였다”고 분명히 적시하고 있습니다.
동방 한민족의 최초의 국가는 고조선이 아니고 배달이었습니다.
그러니 개천절은 당연히 환웅의 배달 건국이어야 하고 그 주인공은 단군이 아니고 환웅인 것입니다.


홍익인간은 환국의 생활이념

개천의 주체가 왜곡된 것처럼 홍익인간(弘益人間 )이념의 번지수도 잘못되었습니다.
단군 왕검의 개국이념으로 알고 있는 홍익인간은 사실은 환웅이 환인에게서 전수받은 것입니다.
홍익인간은 환국의 생활이념이자 배달의 건국이념이었습니다.
잘못된 역사족보에 의해 할아버지의 역사를 아버지의 역사로, 할아버지의 정신을 아버지의 정신으로 기념하는 서글픈 촌극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나 10월 3일에 삼신상제님께 대천제를 올린 전통이 사라졌으니 오늘날의 개천절 행사는 알맹이가 빠지고 껍데기만 남았습니다. 현 정부에서 추진하고 있는 ‘비정상의 정상화’, 그 시작은 당연히 잃어버린 역사와 문화를 회복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개천절의 주체로 배달과 환웅천황이 자리를 잡게 되면 자연스레 배달의 뿌리이자 동서 문명의 뿌리 나라인 환국에 대한 관심이 환기될 것입니다.
또 배달을 계승한 단군조선 역시 역사의 사실로 제자리를 잡게 됩니다.
홀대받고 있는 국경일 개천절, 이날 대통령의 참석은 물론이고 새로운 의미부여와 행사자체의 수정, 보완이 시급한 과제입니다.



'개천절(開天節)'이란 단어가 말하듯, 서기전 2333년, 즉 단군기원 원년 음력 10월 3일에 국조 단군이 최초의 민족국가인 단군조선을 건국했음을 기리는 뜻으로 제정됐습니다.

​2022년은 단기 4355년

개천절은 민족국가의 건국을 경축하는 국가적 경축일인 동시에, 문화민족으로서의 새로운 탄생을 경축하며 하늘에 감사하는 우리 민족 고유의 전통적 명절이다.​

환웅은 단군의 아버지로, 쑥과 마늘을 먹고 100일을 버텨 사람이 된 곰과 결혼을 하여 단군을 낳았다.
개천절은 이렇듯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단군 신화와 관련이 있는 날.

개천절을 기념해 우리 조상들은 무엇을 했을까?

특히 우리 민족은 10월을 상달[上月]이라 불렀습니다.
한 해 농사를 추수하고 햇곡식으로 제상을 차려 감사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제천행사를 행하게 되는 10월을 가장 귀하게 여겼지요.
3일의 3의 숫자를 길수(吉數)로 여겨 왔다는 사실은 개천절의 본래의 뜻을 보다 분명히 한다고 하겠지요.

이러한 명절을 개천절이라 이름 짓고 시작한 것은 대종교에서 비롯했습니다. 일제강점기 때 개천절 행사는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습니다. 광복 후 대한민국에서는 이를 계승하여 개천절을 국경일로 정식 제정했죠.

개천절은 원래 음력 10월 3일이므로 대한민국 수립 후까지도 음력으로 지켜왔습니다. 그러나 1949년 10월 1일에 공포된 「국경일에 관한 법률」에 따라, 음력 10월 3일을 양력 10월 3일로 바꾸어 거행하게 됐죠.

사단법인 국학원 회원들이 개천절 기념 타종식을 마친 후 거리 퍼레이드를 하는 장면(출처=뉴스1)

개천절에 즐길 수 있는 행사

이 날은 정부를 비롯해 일반 관공서와 공공단체에서 거행되는 경하식과 달리, 실제로 여러 단군숭모단체들이 주체가 되어 마니산의 제천단(참성단), 태백산의 단군전, 그리고 사직단의 백악전 등에서 경건한 제천의식을 올리고 있습니다.

이렇듯 개천절에만 즐길 수 있는 색다른 행사들을 알아볼까요?

사직동에서 눈 앞에 펼쳐지는

개천절 대제전 2019

출처=한국관광공사

사단법인 현정회에서 주관하고 문화체육관광부, 서울특별시, 종로구가 후원하는 개천절 대제전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왕산로 22에서 개최됩니다. 개천절 대제(제향)와 이와 관련한 학술 강연, 공연 등을 볼 수 있어요. 제복체험, 예절체험, 다례체험 등 민족문화 체험도 할 수 있습니다.


경상남도와 진주시가 주관하고 10월 3일부터 10월13일까지 열리는 제69회 개천예술제경상남도 진주시 강남로 215에서 개최됩니다. 이름에서 볼 수 있듯, 관련 행사들을 더욱 풍성하게 볼 수 있는데요. 개천절 당일 오후부터는 서제 행사 중 성화 채화를 시작으로 진다례 말차시연, 호국타종, 제향, 성화 봉송 및 안치, 진군명령 퍼포먼스, 불꽃놀이 등을 시간대별로 관람하실 수 있습니다.

10월의 하늘은 그 어떤 계절의 하늘보다 눈부시고 깨끗한데요.
이렇게 10월의 초입을 자리하는 개천절.
이번 개천절에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우리가 밟고 있는 이 나라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되새겨보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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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날

한글날(Hangeul Proclamation Day, Korean Alphabet Day)
또는 조선글날(朝鮮글날)은 한글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 세종 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반포한 사실을 기념하기 위한 목적으로 한글이 반포된 날을 기념일로 지정한 국경일을 말한다.

대한민국에서는 10월 9일을 
한글날로 정하여 태극기를 게양하며, 법정 공휴일로 지되어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날인 1월 15일을 조선글로 정하고 있다.

유래와 역사

훈민정음 언해본

한글날은 한글 반포일을 기념하는 날로 《세종실록》 1446년(세종 28년) 음력 9월 29일의 기록에 따르면 훈민정음은 9월중에 반포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근거로 지금 한글 학회의 전신인 조선어연구회와 신민사가 1926년 음력 9월의 마지막 날인 음력 9월 29일(양력 11월 4일)에 훈민정음 반포 여덟 회갑(480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가졌다. 그 당시 한글을 ‘가갸글’이라고도 불렀으므로 이날을 제1회 ‘가갸날’이라고 했다. 그러다가 국어학자인 주시경이 1906년에 제안했던 ‘한글’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1928년부터는 ‘한글날’로 명명했다.

1931년 또는 1932년부터 양력으로 당시 날짜를 따져 10월 29일에 지냈다. 이것은 1582년 이전의 윤일은 율리우스력에 따라 매기고, 1582년에 생략된 날짜는 고려하지 않고 잘못 환산한 것이었다. 1446년 당시 서양이 사용했던 율리우스력으로 환산하면, 실제로는 율리우스력으로 10월 18일이 된다.

한글연구단체인 조선어학회 회원이었던 국어학자 이희승과 이극로는 이를 1932년부터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1931년부터 양력으로 지냈다는 신문 기사도 있다. 1934년부터는 전문가들 의견을 따라 1582년 이전기간도 그레고리력을 썼던 것으로 가정하는 역산 그레고리력(proleptic gregorian calender)을 적용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합의가 나와 그에 따라 계산한 10월 28일에 지내었다.

그러던중에 한글이 반포된 날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기록된 《훈민정음 해례본》이 1940년에 경북 안동에서 발견되었다. 이 책에 정인지가 쓴 서문 내용에 따르면 9월 상순에 《훈민정음 해례본》이 완성되었다고 되어 있다. 이를 토대로 1446년 9월 상순의 마지막 날인 음력 9월 10일을 그레고리력으로 계산하면 10월 9일이 되므로 새로이 한글날을 10월 9일로 변경하여 기념하게 되었다.

대한민국[편집]

1945년 8.15 광복 이후 대한민국 정부는 11월 16일[6]을 한글날로 제정하고 공휴일로 만들었다.

1949년 6월 4일 대통령령 "관공서의공휴일에관한건"이 제정[7]되면서, "10월9일(한글날)"도 공휴일로 지정되었다. 1949년부터 1990년까지 매년 10월 9일 한글날은 공휴일이었다.

1949년 10월 1일 "국경일에관한법률"이 제정[8]되었는데, 당시 국경일은 3·1절,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 네 개였고, 한글날은 포함되지 않았다.

1970년 6월 15일 "관공서의공휴일에관한건"이 "관공서의공휴일에관한규정"으로 전부개정[9]되었는데, 한글날은 계속해서 공휴일로 포함되었다.

1982년 5월 15일 "각종기념일등에관한규정"이 개정[10]되면서, "[별표] 각종기념일표"에 한글날이 포함되었다.

1984년 2월 21일 "대한민국국기에관한규정"이 제정[11]되면서, 제12조에서 국경일, 국군의 날, 현충일 등과 함께 한글날에도 국기를 게양한다는 것을 규정했다. 1984년부터 지금까지 매년 10월 9일 한글날에 국기를 게양하고 있다.

공휴일이 지나치게 많아 경제 발전에 지장이 있다는 이유로 1990년 11월 5일 "관공서의공휴일에관한규정"이 개정[12]되면서, 국군의 날과 함께 한글날이 공휴일에서 빠졌다. 이에 따라 1991년부터 2012년까지는 매년 10월 9일 한글날이 공휴일이 아니었는데, 다만 1994년2005년2011년에는 일요일이었던 관계로 쉬었다.

2005년 10월 5일 대한민국 국회 문화관광위원회는 ‘한글날 국경일 지정 촉구 결의문’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2005년 11월 30일 국회 행정자치위원회는 법안심사 소위를 열어 한글날을 국경일로 격상하는 내용의 ‘국경일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상정했고, 이 개정안은 2005년 12월 8일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했다. 이로써 2005년부터 지금까지 매년 11월 16일 한글날은 국경일이다.[13] 국경일이라고 해서 공휴일인 것은 아니다. 한글날은 국경일이면서 쉬지 않는 날이었다.

2006년 9월 6일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이 개정[14]되면서, "[별표] 각종기념일표"에서 한글날이 제외되었다. 한글날은 국경일에 포함되었기 때문에 별표에서 따로 규정하지 않아도 기념행사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07년 1월 26일 '대한민국국기법'이 제정[15]되면서, 제08조에서 국경일에 국기를 게양한다는 것을 규정했고, 2007년 7월 27일 "대한민국국기법 시행령"을 제정[16]하면서, 같은 날 "대한민국 국기에 관한 규정"을 폐지[17]했다. 한글날은 국경일이므로 당연히 국기를 게양한다.

한글날을 공휴일로 지정하기 위한 노력이 다각도로 진행되었는데, 한글학회한글문화연대 등 시민단체의 연합체인 한글날 공휴일 추진 범국민연합은 한글날을 앞두고 국민청원서를 제청하기는 등 했고,[18] 한글날의 기념일 주관 부서인 문화체육관광부는 한글날을 공휴일로 재지정하는 방안을 추진했으며,[19] 정치권에서는 민주당이 어버이날과 함께 한글날을 공휴일로 지정하는 내용의 공휴일에 관한 법률을 발의했다.[20]

2012년 11월 7일 한글날을 다시 공휴일으로 지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관련 규정의 일부 개정안이 입법 예고되고, 법률 절차를 거쳐 2012년 12월 24일국무회의에서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 일부 개정령안이 통과됨에 따라, 2012년 12월 28일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이 개정[21]되면서, 한글날은 다시 공휴일로 지정되었으며, 2013년부터 매년 10월 9일 한글날은 공휴일이다.[3][22]

기념[편집]

대한민국 정부는 아래와 같은 법률 및 시행령으로 한글날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23][24]

국어기본법 제20조 (한글날) ① 정부는 한글의 독창성과 과학성을 국내외에 널리 알리고 범국민적 한글 사랑 의식을 높이기 위하여 매년 10월 9일을 한글날로 정하고, 기념행사를 한다.

② 제1항에 따른 기념행사에 관하여 필요한 사항은 대통령령으로 정한다. [전문개정 2011.4.14.]

국어기본법 시행령 제15조(한글날 기념행사) ① 정부는 법 제20조제1항에 따른 한글날 기념행사를 할 때에 한글과 국어 발전에 이바지한 공이 매우 큰 개인이나 단체를 한글발전유공자로 포상하고, 한국 문화 창달에 이바지한 공적이 뚜렷한 개인이나 단체에 대하여 세종문화상을 수여할 수 있다.

② 제1항에 따른 한글발전유공자의 포상은 「상훈법」에서 정하는 바에 따르고, 세종문화상의 수여는 「정부 표창 규정」에서 정하는 바에 따르며, 시상 분야, 수상 인원과 그 밖에 필요한 사항은 문화체육관광부장관이 정한다. 〈개정 2013.1.16.〉

그외에 다른 한글 진흥을 위한 부분은 국어기본법 및 시행령에 따라 대한민국 정부에서 주관하여 진행하고 있다.

2005년에 국어기본법[25]과 국어기본법 시행령[26]을 제정하여 한글날 기념 부분을 법률화하고, 2006년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별표][27]을 개정해서 한글날 관련 별표가 삭제되었다.

이전에는〈각종기념일등에관한규정〉[별표][28]에 따라 한글날에는 문화체육관광부가 주관하여 “세종대왕의 성덕과 위업을 추모하고 한글의 우수성을 선양하기 위한 행사를 한다”라고 되어 있었다.




성경(66권, 1189장, 31102절)


성경의 권, 장, 절

66권 - 구약 : 39권           
           신약 : 27권  

1,189장 - 구약 : 929장              
                신약 : 260장

31,102절 - 구약 : 23,145절                  
                  신약 : 7,957절
책이름 장수                 절수


창세기 50 1533
출애굽기 40 1213
레위기 27 859
민수기 36 1288
신명기 34 959
여호수아 24 658
재판관기 21 618
룻기 4 85
사무엘상 31 810
사무엘하 24 695
열왕기상 22 816
열왕기하 25 719
역대기상 29 942
역대기하 36 822
에스라 10 280
느헤미야 13 406
에스더 10 167
욥기 42 1070
시편 150 2461
잠언 31 915
전도서 12 222
솔로몬의 노래 8 117
이사야 66 1292
예레미야 52 1364
예레미야 애가 5 154
에스겔 48 1273
다니엘 12 357
호세아 14 197
요엘 3 73
아모스 9 146
오바댜 1 21
요나 4 48
미카 7 105
나훔 3 47
하박국 3 56
스파냐 3 53
학개 2 38
스카랴 14 211
말라키 4 55
구약 총장.절수 929 23145
마태복음 28 1071
마가복음 16 678
누가복음 24 1151
요한복음 21 879
사도행전 28 1007
로마서 16 433
고린도전서 16 437
고린도후서 13 257
갈라디아서 6 149
에베소서 6 155
빌립보서 4 104
골로새서 4 95
데살로니가전서 5 89
데살로니가후서 3 47
디모데전서 6 113
디모데후서 4 83
디도서 3 46
빌레몬서 1 25
히브리서 13 303
야고보서 5 108
베드로전서 5 105
베드로후서 3 61
요한일서 5 105
요한이서 1 13
요한삼서 1 14
유다서 1 25
요한계시록 22               404 


신약 총 장.절수 260 7957
누계 1189  3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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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장과 절

구약의 장, 절 구분 

1. 열린 문단, 닫힌 문단

구약 히브리어 본문의 장과 절 구분이 있기 전부터 일찍이 쿰란에서 발견된 사본에도 문단 구분이 나타납니다.
마소라 본문 사본을 보면, 시편을 제외한 구약 전체가 문단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두 종류의 문단 구분이 있습니다.
하나는 열린 문단(프툭하, open paragraph)이고 다른 하나는 닫힌 문단(쓰투마, closed paragraph)입니다.

열린 문단이란 완전히 행(行)을 바꾸어서 쓴 새로운 문단을 일컫습니다. 
현대적 의미의 새로운 문단과 같은 것입니다.

닫힌 문단이란 같은 행 안에서 몇 자를 띄어서 새로운 문단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앞 문단과 뒤 새 문단이 행으로 구분되지 않고 몇 자를 띄운 공간으로 구분이 되는 것입니다.

 2. 세다림 (Sedarim)

구약 본문에는 452개의 세다림이 있습니다.
히브리어 쎄데르순서(order), 혹은 차례(sequence)를 일컫는 말입니다.
문단보다는 더 큰 단위로서 단원(section)에 해당합니다. 
팔레스타인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토라를 삼 년에 다 읽도록 매주 읽을 분량을 쎄다림으로 구분하였습니다.

바빌로니아에서는 토라를 일 년에 독파(讀破)하도록 단원을 구분하였는데
이것을 파라쇼트(Parashoth)라고 합니다. 
토라는 모두 54 (혹은 53) 파라쇼트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절 구분은 이미 탈무드 시대부터 알려져 있었습니다.
바빌로니아 전통과 팔레스타인 전통이 약간 다릅니다.
장 구분이 숫자로 표기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경입니다.
장 구분의 체계는 일찍이 스티븐 랭톤(Stephen Lengton 1150-1228)에서 시작되었고, 
이것을 14세기에 라틴어역 불가타가 받아드림으로써 정착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신약의 장, 절 구분

파리의 유명한 인쇄업자 스테파누스(1503-1559)의 '그리스어 신약'에서 처음 장절 구분이 보입니다.
1551년에 제네바에서 나온 스테파누스의 '그리스어 신약' 제 4판은 숫자로 절 구분이 되어 있는 최초의 그리스어 신약으로 유명합니다.

'제네바성서'(1557/1560)는 영어 성서로서는 처음으로 절 구분이 되어 나온 성서입니다.
로버트 에스티엔 (Robert Estienne)이 그의 '그리스어 신약전서'에 적용했던 절 구분을 그대로 따른 것입니다.

개신교 쪽에서는 1535년에 올리베땅(Olivetan)으로 알려진 삐에르 로버트(Pierre Robert)가 성경을 번역하였습니다. 
몇 차례 개정을 거듭하였고, 1546년판을 낼 때에는 칼빈이 서문을 썼습니다.
1553년에 인쇄업자 스테파누스 (Robert Stephanus 일명 Robert Estienne)가 이 번역을
제네바에서 출판할 때 원문에 장과 절을 구분하여 출판하였습니다.

'제네바성서'의 신약은 1557년에 나옵니다.
신.구약전서가 다 번역되어 나온 것은 1560년입니다. 
이것이 로마자로 인쇄되고 절 구분이 된 최초의 영어 성경전서인 '제네바성서' 초판입니다.

장절 구분의 차이의 예

공동번역 성서를 보시면, 출 7:26-8장 끝까지의 장절 구분에 이중의 표기가 있는 것을 확인하실 수있습니다. 
이는 서로 다른 두 가지의 장절 표기 방식을 함께 나타내준 것입니다. 
히브리어 성경과 라틴어 성경의 장절 구분이 다른 것입니다.

절 수의 차이의 예

시편의 경우에는 소제목 부분을 1절로 표시하는 경우와(독일어 루터 성경 참조),
소제목으로 보고 절로 구분하지 않는 경우에(성경전서개역한글판 참조) 따라서 절 수가 달라집니다.

성경 본문이 처음 기록될 당시에는 문장을 구분하는 아무런 체계가 없었습니다.
장을 구분한 최초의 성경은 신약의 경우,
제4세기의 바티칸 사본(codex vaticanus :B)의 가장 자리에 표시되었습니다.
여기에는 마태복음이 170구분, 마가복음이 62구분, 누가복음이 152구분, 요한복음이 50구분으로 되어있습니다. 

또 다른 구분체계는 제5세기의 알렉산드리아 사본(codex alandinus :A)에서 볼 수 있는데
여기에는 마태복음 68, 마가복음 48, 누가복음 83, 요한복음 18구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주의할 것은 어떤 경우에도 첫장이 책 서두에 오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아마 서기관들이 책의 시작부분을 머리말로 생각했기 때문이라 여겨집니다. 

사도행전도 사본에 따라 36, 69, 40, 83 등 여러 장으로 구분되고,
서신들도 여러 부분으로 구분되며, 계시록은 24장로를 따라 24강화로 나누고,
다시 그 각각을 인간의 세 요소를 반영하여 72장으로 구분하기도 했습니다.

구약의 경우는 라틴어역 Valgata에서 비롯됩니다.
이것은 1204-5에 캔터베리대 주교인 스테판 랑톤(Stephan Langton) 이 시도했으며,
그 후 1330년에 나온 솔로몬 벤 이스마엘(Solomon Ben Ishmael)의
히브리어 성경의 일부 필사본(筆寫本)이에 랑톤의 장 표시를 난외(欄外)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쇄본으로 장 표시를 했던 최초의 히브리어 성경은 1517년 7월 10일에 나온 히브리어,
라틴어, 헬라어, 70인역 등의 대역 성경인 Complutension Polyglot 입니다.
그러나 장 표시는 본문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난외에 표기되었습니다.

그 후로 1569-1572년에 베니토 아리아스 몬타노(Benito Arias Montano)가 편집한
Polyglot 에는 인쇄판 성경으로서는 처음으로 본문에 장 구분이 표시되었고,
또한 구약의 장 구분에 아라비아 숫자를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절에 대한 구분

구약 성경의 경우 절 구분은 장 구분보다 앞서서 시행되었습니다.
절 구분의 시직은 히브리어 본문을 회중들 앞에서 낭독하고
그것을 아람어로 통역하던 때부터 비롯된 것으로 알려집니다. 

낭독자는 일정량의 히브리어 본문을 끊어서 낭독했고,
통역관은 그것을 듣고서 아람어로 통역하는 방법이 계속되어 오다가
어느 단계에서 부터 절구분이 확정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낭독과 통역의 분위기를 느 8:1-8에서 볼 수 있습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은 일상생활에서는 아람어를 썼으나,
율법은 히브리어로 쓰여 있었기 때문에 통역관들이 통역을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매 절 끝에 그침표(:)를 붙인 것은 주후 500년경 부터라고 합니다.
하지만 오늘날과 같은 절구분이 MT에 확립된 것은
10세기에 아론 벤 모세 벤 아세르(Aron Ben Moshe Ben Asher)가 편집한 역본부터라고 하며,
총 절수는 5,845절로 되어 있습니다. 

신약성경의 절 구분은 1551년
프랑스의 인쇄업자 로버트 스테파누스(Robert Stephanus)에 의해 표기 되기 시작했으며
현재 까지도 통용되고 있습니다.

우리말 개역성경의 장 절 구분은 MT나 LXX이 아닌 Latin Vulgata를 많이 따르고 있습니다.
(월간 원어성서 9호 .pp165-166)

참고 - MT ; 맛소라 학파(유대인 학자들)에 의한 히브리어 구약성경 
LXX ; 70인경, 구약의 헬라어 역본 
Vulgata ; 신구약 성경의 라틴어 역본. 

성경의 장절(章節 : chapters and verses of Bible)은 처음부터 구분되어 있던 것은 아니다.
현재의 모습으로 장 구분을 한 이는 대체로
영국교회의 켄터베리 대주교였던 랭튼(Stephen Langton)일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한편 스테파누스(Stephanus Robertus)는 신약성경을 절로 구분하여 1551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출판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스테파누스는 파리에서 리용으로 가는 마상(馬上)에서 절을 나누었다고 한다. 
신,구약성경 모두에 장절이 붙여져 처음 출판된 해는 1555년인데,
스테파누스의 라틴역 불가타(Vulgata) 성경이다. 

오늘날의 성경은 1560년판 제네바 성경의 장절 구분을 받아들이고 있다. 
랭튼 (Langton, Stephanus 1150년경-1228. 7. 9 영국신학자, 역사가, 시인.) 
오랫동안 파리에서 신학을 가르치고 또한 성경주석을 집필했다.
불가타역 구약을 장(章)으로 나누었다.
1207년 켄터베리 대주교가 되고,
영국 존왕(John, Lackland ; 1199-1216 재위)의 반대자로 '대헌장'(大憲章 : Magna Carta)의 성립에 관여했다. 
스테파누스 (Stephanus Robertus [프] Etienne Robert 1503-1559 프랑스의 궁정 인쇄 기술자.) 
그의 집안은 아버지 앙리 이래 16∼17세기, 파리 및 제네바에서 인쇄업에 종사했다.
특히 성서의 인쇄로 유명했는데,
1539년 프랑소와 1세의 인쇄사가 되어 1546년에는
그리스어 학자인 아들 앙리(Henri ; 1528/31)의 협력을 얻어 그리스어 신약성경 소책자 2부를 간행했다.
본문(本文)은 주로 에라스무스판 신약본문 제5판(1535)에 의거하고,
콤플루툼판(Gomplutum : 1514)을 참조했다.
1550년에는 인쇄본문사상 큰 역할을 한 대형 호화판(궁정판)으로도 불리는 제3판을 냈다.
이것은 이문자료(異文資料)를 첨부한 최초의 판으로 영국에 있어서
'공인본문'(公認本文 : Textus Receptus)의 근거가 되었다.
그의 성경주해가 소르본느에서 비난을 받게되어 제네바에 도피, 칼빈파로 개종했다.
그해 다시 소책 2부의 본문을 간행했는데, 이것은 장절을 나누어 쓴 최초의 판이다.
그는 이 절분류를 파리에서 리용으로 기마여행(마차여행?)을 하는 가운데 시행했다고 전한다. 

이상을 정리하면

1. 히브리어 성경은 절 구분이 먼저 되었다. 10세기에 아론 벤 아쉐르 때부터 확립되었다.
2. 히브리어 성경 장 구분은 13세기 초에 랭튼이 했다.
3. 헬라어 성경 장 구분은 13세기 초에 랭튼이 했다.
4. 헬라어 성경 절 구분은 16세기에 스테파누스가 말 위에서 했다.
5. 신,구약 성경 모두에 장절이 붙여져 처음 출판된 해는 1555년인데, 스테파누스의 라틴역 불가타(Vulgata) 성경이다. 
6. 오늘날의 성경은 1560년판 제네바 성경의 장절 구분을 받아들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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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장은 구약에서는 시편 23편시편 1편이라고 합니다.
신약에서는 고린도전서 13장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