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전도단(YWAM) 창설자 오대원 목사
주인공 이름이 '오대수'이다.
'오늘만 대충 수습하면서 살자'라는 뜻이다.
한국 '예수전도단(YWAM)' 설립자를 알고 있는가?
그의 이름은 오대원(David E. Ross)이다.
성은 로스(Ross)와 가장 유사한 발음이 '오'씨라서, 함께 살던 한옥집 주인인 오복균 장로의 ‘오’씨가 됐다.
이름은 대원군의 ‘대원’으로 지었다.
대원군은 나라를 아끼고 사랑했으나, 기독교를 심하게 박해한 인물이었다.
대원군같이 한국을 사랑하고, 대원군과는 반대로 '기독교를 잘 전파하라'는 뜻의 역설적인 이름이다.
오 목사는 한국말을 한국인 이상으로 잘한다.
강의를 들었던 학생이 물었다.
"저는 오 목사님처럼 한국말을 잘하는 백인은 처음 보았습니다. 어떻게 한국말을 잘하게 되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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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께 사랑을 받으면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사랑을 나누고 싶듯이, 한국인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으니까 그들과 마음껏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한국인을 사랑하게 되니 한국어도 빨리 배울 수 있었습니다. "
오목사는 한국 선교사로 파송 받기 전에 한국어를 미리 배우지 않았다.
사투리의 영향을 받지 않은 순수한 억양을 배우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에 도착하여 연세대학교 한국어학당에서 한국어를 처음 배웠다.
한국어를 빨리 익히기 위해 종로 거리를 누비며 대화를 시도했다.
빵집과 다방에서 처음 보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며 생활 한국어를 익혔다.
뿐만 아니라 부인인 엘렌과도 한국어로 대화했다.
인터뷰 내내 오 목사는 자신의 의사를 정확하게 전달함은 물론이고, 우리말에 담겨 있는 정서를 느끼면서 감정을 싣고 이야기를 하였다.
언어란 생각을 전달하는 수단 이상으로, 언어 안에는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가 녹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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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주간 배를 타고 한국으로 - 1961년
오 목사가 선교사의 소명을 갖게 된 것은 오래 전 일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1953년 여름, 청소년수련회에 참석해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만났다.
그때 ‘다른 민족을 위해 살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열방에 나가 예수님을 전하고 싶은 뜨거운 소망이 일어났다.
또 그리스도의 구원이 나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열방의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임을 깨닫고 선교사로 살기로 결심했다.
미국 테네시 주 킹대학에 다닐 때 ‘선교동호회’(Missionary Society)에 가입했다.
선교에 관심을 둔 사람들이 선교지에 대해 연구하고 중보기도하는 모임이었다.
이곳에서 평생의 반려자를 만났다.
엘렌 역시 선교사로 소명을 받은 후 모임에 참여했다.
엘렌의 부친은 목사이자 성서학을 가르치는 대학교수였다.
독실한 기독교가정에서 자란 그녀는 따뜻했고 활발한 성격이었다.
"난 어린시절 부친이 돌아가신 후 내향적인 아이가 됐다.
어머니는 바느질로 자녀들을 꿋꿋하게 양육하셨고 늘 내 편이 돼주셨다.
내가 선교사로 결단했을 때 말리지 않으시고 하나님께 순종하라고 하셨다."
부인인 엘렌과 오 목사는 가정환경과 성격이 달랐지만 선교에 대한 동일한 관심으로 쉽게 친구가 될 수 있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치된 마음을 갖고 선교의 비전을 공유하며 사랑을 키워나갔다.
졸업 후 함께 버지니아 주에 있는 '유니온 신학교'에 진학해 한 학기 다닌 후 1957년 한 가정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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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교로 진학하면서 대학선교에 마음을 두게 된 둘은 선교지로 대학선교를 함께할 수 있는 곳을 찾았다.
말씀을 사모하고 기도하며 흔들림 없이 선교사로서의 길을 준비했다.
그러다 한국인 선교사들을 만나는 기회가 주어졌다.
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UBF, University Bible Fellowship) 배사라,
대전지역의 농촌 선교사로 헌신했던 R K 로빈슨 목사와의 만남이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한국 교환학생들도 만나게 되면서 한국을 관심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한국과 관련된 여러 사람을 만나고 한국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면서 선교지를 한국으로 결정했다.
부부는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후 윌리엄 앤 메리 대학교에서 일 년간 캠퍼스 사역을 하였다.
곧 바로 한국으로 떠나고 싶었지만 총회에서는 일 년간의 선교사 준비기간을 요구했기에 60∼61년 교회와 대학 캠퍼스에서 사역했다.
윌리엄 앤 메리 대학은 배움과 열정이 있는 열려있는 학교였다.
그곳에서 성경을 가르치고 수양회를 열어 말씀을 전했다.
한 장로교회에서 부목사로 섬기기도 하였지만, 주로 대학교 선교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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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전도단 설립 - 1972년
한국 예수전도단은 1961년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로 파송된 오대원(David E. Ross) 목사에 의해 1972년에 설립되었다.
오대원 목사의 사역은 젊은 층, 특별히 대학생 중심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대학생 선교는 1967년 서울공대 기독학생회 사역으로 시작되었다.
대학생들의 민주화 운동 속에서 오히려 말씀으로 돌아가 성령으로 새롭게 되어 그 뜨거운 열정을 주께 돌이키면 좋겠다는 비전을 품었다.
예수 전도단의 출발은 '화요기도모임'을 시작하였다.
한동안 매주 화요일 광화문에 있는 '구세군회관'을 빌려 집회를 가졌다.
한국에서 '예수전도단'이 활발하게 활동할 때 YWAM(Youth With a Mission)은 국제적인 단체로 성장하여 한국에 지부를 설립할 가능성을 타진했다.
1973년에 YWAM이 '예수전도단'의 도움을 받아 한국에서 단기선교를 왔다.
YWAM은 오 목사에게 통합을 제안하였지만 거부를 했다.
만약 미국에서 선교사들이 대량으로 밀려오면 한국인 리더를 양육하는데 장애가 있을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오 목사는 YWAM과 교류는 하였지만 통합은 하지 않았다.
그러다 1979년 안식년 중에 오 목사 부부는 YWAM의 열방대학에서 예수제자훈련학교(DTS, Disciple- ship Training School) 교육 받을 기회가 있었다.
이 때 오 목사는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된다.
이미 세계적인 베이스 캠프를 가지고 있는 YWAM과 통합을 한다면, 한국의 젊은이들을 세계로 파송할 수 있는 비전을 갖게 된다.
인터뷰 중에 진정으로 오 목사는 한국인을 사랑하고 있다는 마음이 들었다.
통합의 거부도, 통합의 결단도 자기중심이 아닌 한국인 중심으로 했기 때문이다.
그는 1979년 9월 28일 예수전도단 사역을 YWAM과 연합하기로 결심하였고,
이에 따라 1979년 말에는 남장로교 선교사 직분을 사임하였다.
1980년 초 태국 치앙마이 봄 선교대회에서 통합이 이루어졌고, 오대원 목사가 한국 대표로 임명되었다.
정식 한국어 이름은 '예수전도단'으로, 영어 이름은 YWAM Korea로 사용하기로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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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전도단과 YWAM의 통합 - 1980년
'To Know God and Make Him known'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알리자)'
YWAM의 모토이다.
YWAM은 1960년 설립된 국제적인 선교단체이다.
창립자 로렌 커닝햄 목사는 자신이 하나님께 헌신하기로 결정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큰 파도와 같은 물결이 전 세계의 대륙을 덮은 환상을 보여주셨다.
그것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일어나서 큰 파도와 같이 전 세계의 각 나라로 복음을 들고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비전을 가지게 되었다.
YWAM은 예수 그리스도께 헌신된 모든 세대들을 일으켜 복음을 열방에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도록 훈련시키며 파송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국제적이고도 초교파적인 선교단체이다.
예수전도단은 하나님 나라의 자녀로서 주님께 예배하고 순종하는 것은 물론, 그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하고 섬기며 나아가 전 세계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여 열방을 제자 삼는 데 부름 받았다.
국제YWAM과의 연합으로 인한 가장 큰 변화는 열방을 향해 나아가는 믿음과 도전을 받은 것이다.
국내라는 지역적 한계에서 벗어나 해외로 나갈 수 있는 많은 기회를 갖게 됐다.
예수전도단은 최재선 선교사를 처음 해외에 파송하면서 열방을 향한 첫 발걸음을 내디뎠다.
국제 YW AM과 차이점이 있다면, 전도단은 단기보다는 장기 선교사를 기르는 데 초점을 둔 것이다.
이후 예수전도단은 예수제자훈련학교(DTS), 대학생제자훈련학교(UDTS), 성경연구학교(SBS) 등 체계적인 훈련을 통해 성장해 갔다.
오늘날 YWAM은 전 세계 180개 국에 1천여 개의 지부를 두고 18,000여 명의 전임사역자들이 함께 사역하는 단체로 발전하였으며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오직 그리스도의 지상명령 성취를 위해 자신의 삶을 드리는 세계선교를 위한 공동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특별히 열방대학을 근간으로 예수제자훈련학교, 선교사훈련학교, 성경연구학교 등의 다양한 훈련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교육, 훈련하여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도록 돕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다양한 은사와 방법을 사용하여 8개의 사회 각 영역(8 Mind Molders:정치, 경제, 교육, 매스미디어, 예술, 종교, 과학기술, 가정)과 9개의 최전방 개척지(9 Front- iers:이슬람권, 힌두권, 불교권, 공산권,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 25세 미만의 사람들, 인구 백만 이상의 대도시들, 미전도 종족,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 등의 모든 영역에 복음을 전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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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하지 않은 한국 추방 - 1986년
88서울올림픽을 앞둔 정부는 해외 선교사들이 거리에 많이 다니면 후진국가로 보인다며 선교사들의 활동을 원치 않았다.
급기야 정부는 오 목사에게 한국을 떠날 것을 명령했다.
61년 이 땅에 발을 디딘 오 목사는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한국에 머물고 싶었다.
그런 그에게 정부의 추방명령은 너무나 충격적이고 가슴 아픈 일이었다.
1986년 오대원 목사가 추방을 당할 때 '예수전도단'은 와해의 위기까지 오게 되었다.
YWAM의 관계자들은 미대사관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 진정서를 보냈지만 소용이 없었다.
떠나는 오 목사뿐 아니라 남아 있는 예수전도단도 '위기'였다.
그렇다, 그것은 '위험'일 수도 있고 '기회'일 수도 있었다.
시간이 흘러서야 하나님께서 예수전도단에게 자립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치 엄마가 아이의 젖을 떼는 기간과 같았다.
오대원 목사만 의지했던 예수전도단은 이제 오 목사 없이 홀로서기 시작했다.
오 목사는 추방 후 몇 년을 아파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추방까지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깊은 뜻을 알게 되었다.
오 목사는 이 사건을 후에 이렇게 간증했다.
"이제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였음을 알았습니다.
한국에서 우리를 떠나게 한 것은 정부가 아니라 하나님이셨습니다.
돌이켜보면 그때까지 주님을 위해서 너무 바쁘게 일해 왔습니다.
그 결과 ‘주님과 함께 일하는 시간’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주님과 함께 일하는 시간은 주님의 임재를 기뻐하고 그의 말씀을 듣는 것이었습니다.
그 시기 많은 사람들이 “당신은 너무나 열심히 일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난 선교사로서 안주하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더 많은 일을 하는 동안 난 약간의 칭찬을 받는 것을 즐기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를 기쁘게 받아들이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다른 사람의 유익보다 내 자신의 유익을 위해 나를 한국 밖으로 옮기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완벽하셨습니다.
우리가 한국에 남아 있었다면 할 수 없었던 전혀 다른 선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문을 열어 줄 준비를 하고 계셨습니다."
침묵해야 들리는 소리가 있고, 눈을 감아야 보이는 세계가 있으며, 떠나야 품을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오목사는 한국에 있을 때는 '한국'만 품었지만, 추방됨으로 '한반도'를 품을 수 있게 되었다.
안디옥 국제선교 훈련원(AIIM) - 1994년
오 목사는 1994년 시애틀에 ‘안디옥선교훈련원’(AIIM: Antioch Institute for International Ministries)을 개원했다.
훈련원은 국제 YWAM 소속단체로 선교 훈련, 북한연구학교, 캠퍼스 사역에 중점을 두고 있다.
훈련원은 선교사를 훈련하는 ‘세계선교 센터’, 선교사와 교회 봉사자들이 재충전하는 ‘희년 쇄신 센터’, 북한 선교를 위한 ‘새 코리아 센터’로 구성됐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과 더 깊은 관계를 가질 수 있도록 도전하며, 그리스도인들을 훈련하여 열방을 향한 부름에 순종하며 살게 하고, 교회를 동원하여 영육간의 잃어버린 자를 찾게 하며, 선교사와 다민족 공동체의 예배와 기도를 돕는 것이다.
오 목사는 ‘안디옥선교훈련원’ 설립 목적을 4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선교센터의 중심사역은 4가지가 있다.
첫째 북한선교사역,
둘째로 선교사 모집과 이들을 훈련시키는 사역,
셋째로 장기 선교사들의 치유와 회복을 위한 사역,
넷째 대학생 선교 및 구제사역 등이다.
특별히 그는 한반도의 결렬된 틈 사이에 들어가 중보하며 남과 북이 함께 변화되어 새로운 하나의 코리아를 만들자는 ‘뉴코리아’(New Korea) 운동을 펼치며, 한국과 해외에서 통일관련 캠프와 훈련학교(NKSS), 세미나(NK seminar) 등을 열고 있다.
원래 NKSS(North Korea Study School)는 '북한연구학교'의 약자였으니, 시간이 지나면서 뉴 코리아 섬김학교(New Korea Servant School)로 의미를 확장시켰다.
‘뉴코리아’라고 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강력한 힘을 갖고 한국으로부터 세계 모든 국가에 나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하나님께서 다시 한 번 더 남과 북에 있는 백성들이 합쳐지도록, 무언가 새로운 일을 한반도에서 하고 계시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오 목사는 탈북자들에 대한 관심도 유별나다.
"남북한 통일을 이루는 하나의 열쇠는 북에서 내려온 2만 7천여 명의 탈북주민입니다.
북에서 남으로 그 수많은 사람들을 내려 보내신 하나님의 커다란 목적은 무엇일까?
인간적인 해답은 그들이 박해 때문에 내려왔거나 북에 있는 그들의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한 방법을 찾으려고 내려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야만 합니다.
나는 하나님이 남과 북의 사람들이 다시 만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북에서 남으로 보내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렇다. 탈북자들은 통일한국을 대비한 '마중물'과 같은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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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를 부른 나이 - 2015년
오 목사는 1935년 생으로 모세가 소명 받을 때의 나이와 같다.
80세인 모세는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부르심을 받고 40년을 더 살았다.
시편 150편 중 모세가 쓴 90편 10절을 보면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라고 했다.
자신은 120세까지 살았으면서, 왜 후대 사람에게는 이런 가혹한(?) 말을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오 목사의 ‘팔순 감사예배’가 시드니예수전도단 318 베이스에서 열렸다.
이날 설교를 맡은 홍관표 목사는 사도행전 20:17-20절의 말씀을 의지하여, 오대원 목사의 80년 사역을 사도 바울의 사역과 비교하여 말씀을 전했다.
"바울이 '겸손, 눈물, 인내'로 사역한 것처럼 오 목사님도 그렇게 사역하셨습니다."
언급한 세 가지 덕목 중에서 겸손이 오 목사님에게 가장 적절한 '단어'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를 존경하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입니다.
그를 보면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말씀이 생각이 납니다.
그는 자기를 낮추고 남을 높일 줄 아는 사람입니다.”
식사를 하면서 홍 목사는 오 목사에게 90세 생일도 본인이 설교를 해야 한다며 본문과 제목을 미리 알려 주었다.
딤후 4:7절 ‘의의 면류관’이다.
이에 오 목사도 질세라 “저보다 4살 연배인 홍 목사님의 90세 생신 때 제가 먼저 설교를 해야죠”라고 웃으며 화답했다.
오대원 목사를 소개할 때 사용하는 많은 미사여구가 있지만, 그와 인터뷰하며 느꼈던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을 대신하며 글을 마무리 하려고 한다.
"그는 주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주님의 가슴으로 세상을 품어, 주님의 손으로 세상을 돕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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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원 선교사 -예수전도단 설립자 [역경의 열매] 국민일보 2010.7.4
[역경의 열매] 오대원 (1) 50년 전 태평양 건너 한국에 지금도 그 설렘에 가슴 떨려 / 입력 : 2010-07-04 09:51
1961년 8월. 미국 샌프란시스코 항을 출발한 화물선 초타우(Choctaw)는 20일이 넘는 긴 항해 중이었다.
낡고 오래된 화물선은 수리를 위해 태평양 한 가운데 이틀 동안 정박해야 했다.
그 시간동안 광대하게 펼쳐진 태평양을 응시했다.
사방을 둘러봐도 육지는 시야에 들어오지 않고, 바다의 끝은 보이지 않았다.
“지금 있는 이곳이 어디쯤일까?”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 순간 우린 아직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은 시간과 공간에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아내 엘렌과 난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로 파송받아 한국으로 가는 중이었다.
우린 하나의 문화를 떠나서 다른 문화권으로 들어가기 전, 잠시 여백의 시간에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여백은 하나님을 찾는 시간이다.
그 시간을 통해 선교에 대한 소명을 재확인했고, 인생과 선교에서 ‘여백(Space)’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도 사람들에게 “자신을 성찰하기 위해 여백의 시간을 가지세요”라고 강조하곤 한다.
태평양 한가운데서 가진 여백의 시간 속에서 선교의 핵심은 ‘하나님을 좀 더 진실 되게 만나기 위해 구하는 과정’이란 것을 알게 됐다.
내 안에 내(자아)가 너무 많으면 하나님이 계실 곳이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시도록 우린 자신을 비워내야 한다.
당시 한국에 대해서 아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너무도 분명하게 우리가 가야 할 곳은 한국이라고 말씀하셨다.
처음 희망했던 선교지는 무슬림 국가 이란이었지만 당시 문이 닫혀 있어 들어갈 수 없었다.
우리가 선교지를 선택해야 할 시기인 1960년, 한국에서 4·19혁명이 일어났다.
세계 각국이 한국 대학생들의 모습에 주목했다.
미국 신문 1면은 불의에 항거하는 한국 학생들의 이야기를 다뤘다.
한국 땅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또 한국 대학생들이 나라를 위해 그토록 과감하게 일어설 수 있다면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도 그렇게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한국을 선교지로 마음에 품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이 기도는 한국장로교 총회의 초청과 맞물려 한국에 선교사로 파송되는 결실을 맺었다.
아내는 25세였고 나는 26세였다.
3주 동안의 항해는 흥분되고 즐거운 여행길이었다.
바다는 너무 고요했고 우리는 멀미도 하지 않았고 피곤하지 않았다.
배에는 보성여고 교장선생님이셨던 김종순 장로와 2명의 가톨릭 수녀, 일본인 부부, 한국으로 가는 세 명의 다른 선교사들이 있었다.
주일엔 그들과 선원들이 함께하는 예배를 인도했다.
긴 항해 끝에 배가 인천항에 도착했는데 거센 파도 때문에 하선을 할 수 없었다.
새로운 땅을 밟기 위해 하루를 더 기다렸다.
우리의 마음속엔 두려움보다는 설렘이 더 컸다.
한국 땅을 처음 밟았을 때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하나님. 저희를 이 아름다운 한국 땅에 보내심을 감사드립니다.
이 나라에서 한국인의 심장소리를 듣게 하시고 문화를 배우게 하소서.
그리고 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게 하소서.”
그날로부터 오늘날까지 하나님이 우리를 한국에 보내주신 놀라운 사랑에 대해 끊임없이 감사드리고 있다.
◇오대원 목사(David E Ross)=1960년 버지니아 주 유니온신학교를 졸업하고 미국남장로교 소속 선교사로 한국에 파송되었다.
1972년 예수전도단을 설립하고 1980년에 YWAM(Youth With A Mission)과 연합해 국내외적으로 사역을 감당했다.
1986년 이후 지금까지 미국에서 한인 2세들을 위한 안디옥 커넥션사역과 북한 선교를 하고 있다
[역경의 열매] 오대원 (2) 대학 선교동호회서 아내 엘렌 만나 / 입력 : 2010-07-05 17:28
내가 선교사의 소명을 갖게 된 것은 오래전 일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1953년 여름, 청소년수련회에 참석해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만났다. 그때 ‘다른 민족을 위해 살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열방에 나가 예수님을 전하고 싶은 뜨거운 소망이 일어났다. 또 그리스도의 구원이 나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열방의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임을 깨닫고 선교사로 살기로 결심했다. 선교사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몰랐고 선교사를 한 번도 만나본 적도 없었는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런 마음이 들게 하셨는지 지금 생각해도 신비롭다.
미국 테네시 주 킹대학에 다닐 때 ‘선교동호회(Missionary Society)’에 가입했다. 선교에 관심을 둔 사람들이 선교지에 대해 연구하고 중보기도하는 모임이었다. 이곳에서 평생의 반려자를 만났다. 엘렌 역시 선교사로 소명을 받은 후 모임에 참여했다. 엘렌의 부친은 목사이자 성서학을 가르치는 대학교수였다. 독실한 기독교가정에서 자란 그녀는 따뜻했고 활발한 성격이었다. 난 어린시절 부친이 돌아가신 후 내향적인 아이가 됐다. 어머니는 바느질로 자녀들을 꿋꿋하게 양육하셨고 늘 내 편이 돼주셨다. 내가 선교사로 결단했을 때 말리지 않으시고 하나님께 순종하라고 하셨다.
엘렌과 난 가정환경과 성격이 달랐지만 선교에 대한 동일한 관심으로 쉽게 친구가 될 수 있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치된 마음을 갖고 선교의 비전을 공유하며 사랑을 키워나갔다. 졸업 후 함께 버지니아 주에 있는 유니온신학교에 진학해 한 학기 다닌 후 1957년 한 가정을 이루었다.
신학교로 진학하면서 대학선교에 마음을 두게 된 우린 선교지로 대학선교를 함께할 수 있는 곳을 찾았다. 말씀을 사모하고 기도하며 흔들림 없이 선교사로서의 길을 준비했다. 그러자 한국인 선교사들을 만나는 기회가 주어졌다. UBF 배사라(사라 베리), 대전지역의 농촌 선교사로 헌신했던 R K 로빈슨 목사와의 만남이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한국 교환학생들도 만나게 되면서 한국을 관심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한국과 관련된 여러 사람을 만나고 한국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면서 선교지를 한국으로 결정했다.
우리 부부는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후 윌리엄 앤 메리 대학교에서 1년간 캠퍼스 사역을 하였다. 곧 바로 한국으로 떠나고 싶었지만 총회에서는 1년간의 선교사 준비기간을 요구했기에 60∼61년 교회와 대학 캠퍼스에서 사역했다. 윌리엄 앤 메리 대학은 배움과 열정이 있는 열려있는 학교였다. 그곳에서 성경을 가르치고 수양회를 열어 말씀을 전했다. 한 장로교회에서 부목사로 섬기기도 하였지만, 주로 대학교 선교에 힘썼다.
한국 선교사로 파송되기 전, 일부러 한국어는 미리 배우지 않았다. 사투리의 영향을 받지 않은 순수한 억양을 배우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한국 연세대학교 한국어학당에서 한국어를 처음 배웠다. 한국어를 빨리 익히기 위해 종로 거리를 누비며 대화를 시도했다. 빵집과 다방에서 처음 보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며 생활 한국어를 익혔다. 엘렌과 난 한국어를 빨리 배우기 위해 둘이 있을 때도 한국어로 대화했다.
사람들은 종종 내게 “한국말을 잘하게 된 비결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하나님께 사랑을 받으면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사랑을 나누고 싶듯이, 한국인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으니까 그들과 마음껏 이야기하고 싶었다. 한국인을 사랑하게 되니 한국어도 빨리 배울 수 있었다.
[역경의 열매] 오대원 (3) 기독인 박해 대원군에서 이름 따와 / 입력 : 2010-07-06 17:31
한국에 도착한 후 서울 연희동의 언더우드 선교사 집에 짐을 풀었다.
다른 외국인 선교사들과 함께 3개월 정도 머물렀다.
그러나 하루라도 빨리 한국인들과 함께 생활하고 싶었다.
서울 회현동 한옥집에 방 하나를 빌려 이사했다.
아름다운 한국인 가정을 만날 수 있었다.
나의 한국 이름 오대원은 그 한옥집 주인이던 오복균 장로님이 지어주셨다.
로스와 가장 유사한 발음이면서 오 장로의 성씨인 ‘오’씨가 됐다.
이름은 흥선대원군에서 따온 ‘대원’으로 지었다.
대원군은 굉장히 나라를 아끼고 사랑했으나 기독교인을 심하게 박해한 인물이었다.
역설적인 의미로 대원군과 반대로 살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
엘렌은 오성애로 지었다.
엘렌과 난 처음부터 많은 계획은 세우지 않았다.
우리의 첫 임무는 새로운 ‘조국’을 배우는 것이었다.
많은 고민을 했다.
한국 사람들과 가까워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결론은 ‘파도 밑으로 온몸을 던지는 것’이었다.
오래전 하와이를 방문했을 때 해변에서 파도 타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은 높은 파도를 겁내지 않고 온몸을 던져 파도를 탔다. 너무 재미있을 것 같아서 시도했다. 문제는 내가 파도 타는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었다. 보드 위에 꼿꼿이 서 파도를 만나자 거꾸로 바다에 빠져버렸다. 한 친구가 다가와 “파도 밑으로 다이빙하라”고 가르쳐 주었다. 몸을 낮추고 넘실거리는 파도 밑으로 몸을 던지자 신기하게도 물에 빠지지 않고 평화롭게 파도를 탈 수 있었다.
그것이 바로 새로운 나라 한국에 들어가는 방법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잠수해라” “사람들 속으로 파고 들어가라” “섬기려는 사람들 밑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한국 사회에 적응하는 우리의 모토였다.
자전거를 타고 시내를 누비며 한국의 생활상과 문화를 배우기 시작했다. 외국인이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는 모습이 신기한 듯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았다. 당시 한국 풍경은 오래된 사진첩을 보는 듯했다. 한 손이 없는 상이군인을 보며 전쟁의 상흔을 느낄 수 있었고, 귀엽게 생긴 시발택시와 무지개가 그려진 버스가 기억에 남았다.
영락교회에 다니며 대학생 영어 성경공부를 4년 동안 인도했고 이때 담임목사이셨던 한경직 목사님과도 교제를 나누었다. 어느 정도 한국어를 익힌 후 우린 남장로교 선교부의 지시로 전라도 광주에 가서 2년 동안 인턴십을 했다. 광주에서의 2년은 한국인들의 심성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경험이었다.
당시 배사라 선교사가 사역하는 UBF에서 함께 사역했다. 우리는 광주에 있는 20개 고등학교에 고등부를 세웠고 캠퍼스 리더를 모아 귀납적 성경공부를 가르쳤다. 토요일 전체 모임엔 수백명의 학생이 모였다. 일주일에 4번은 고등학생들이 영어를 배우러 선교회 사무실에 왔다. 신발장에 80∼100켤레의 검정 고무신이 꽉 찼다.
우리 집에선 매일 오전 6시 영어 성경공부가 열렸다. 대학교수, 고교 교사 등 20∼30명이 모였다. 전남대에서 동양철학을 가르치는 교수들과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영어를 배우려고 찾아왔다. 웃지 못할 일도 많았다.
모임을 마칠 때 돌아가면서 영어로 기도했는데 한번은 내가 깜박 잠이 들었다. 깜짝 놀라 깨어 보니 방에 아무도 없었다. 피곤해서 잠이 든 내가 깰까봐 사람들이 소리 없이 돌아간 것이다. 또 한번은 추운 겨울, 눈이 오는 날이었다. 늦잠을 잔 내가 후다닥 나가 문을 열어 제치니 30여명이 눈을 맞으며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벨을 누르거나 문을 두드리면 될 텐데, 내가 깰까봐 그냥 열어줄 때까지 기다린 것이었다. 미숙한 선교사를 이렇게 멋있는 분들이 양육해 준 것이다. 그들과 정이 많이 들었다.
[역경의 열매] 오대원 (4) 대학생 선교하며 조국재건 열정 느껴 / 입력 : 2010-07-07 17:52
하나님은 작은 권리를 포기하면 큰 것을 주시는 분이시다. 제일 싫어하는 것을 제일 좋아하는 것으로 바꿔 주시는 분이시다. 나에게 권리 포기는 음식부터 시작됐다. 지금은 한국음식을 너무 좋아하지만 처음엔 입에 맞지 않아 금식하는 날이 많았다. 이런 내가 김치찌개를 제일 좋아하게 된 사연이 있다.
전주에서 여름 대학생 수련회가 10일 동안 열렸다. 첫날 저녁식사로 김치찌개가 나왔다. 맵고 뜨거워서 도저히 먹을 수 없었다.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오늘 금식하라고 하셨다”고 말했다. 사정을 모르는 학생들은 나를 경건하고 거룩하게 바라보았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계속 김치찌개가 나왔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하나님께 “하나님 너무 배가 고픈데 어떻게 합니까”라고 기도했다. 하나님께서는 “너는 왜 그렇게 어리석은 질문을 하느냐? 그냥 먹어라”고 하셨다. 그래서 먹을 권리를 포기하고 힘들어도 그냥 먹었다. 복음을 위해서라면 아주 사소한 것일지라도 내가 가진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배우기 시작했다.
음식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자 억눌림으로부터 해방되었다. 작은 것에서 해방되니 다른 것에도 자유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사실 작은 것이 크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왜 이 일을 하는지에 대한 이유가 분명하다면 권리를 포기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음식 외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국을 즐기며 한국 생활에 잘 적응해 나갔다. 고향 생각도 잘 안 날 정도였다.
광주에서 선교하던 우리의 마음은 서울에 많이 가 있었다. 하루 빨리 서울에 가서 대학생선교를 하길 원했다. 그 무렵 김덕영 권사님이 서울 공대에서 함께 기독학생회를 이끌자고 제안했다. 1967년, 우린 서울에서 대학 캠퍼스를 중심으로 학생사역을 시작할 수 있었다. 김 권사님은 독립문 부근에서 사업을 크게 해서 많은 교회를 설립한 분으로 청량리 인근의 6개 대학(서울공대, 서울여대, 육군사관학교, 시립대, 경희대, 외대)에 기독학생회를 설립했다.
서울공대 기독학생회는 다른 학생단체와 달리 독립적이었다. 68년부터 서울공대에서 매주 설교하며 성경공부 인도와 기숙사 심방을 했다. 기숙사의 사랑방을 커피숍으로 만들어 학생들과 교제했다. 우리는 대학교 건너편에 있는 공릉동에 살면서 캠퍼스 내 학생들에게 선교했다. 학생들은 기숙사보다 우리 집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우리는 곧 학생들이 먹는 것을 정말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됐고, 함께 먹는다는 것이 기독교 공동체의 핵심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또 기독학생들이 전도와 조국의 재건에 대한 큰 소망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함께 사역한 김 권사님은 성령 충만한 분이었다. 그분은 “나는 엘리야가 승천 후, 갑절로 성령의 능력을 입을 엘리사가 후임으로 오기를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로스 당신이 엘리사처럼 되기를 사모하며 기도하길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당시엔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분이 돌아가신 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난 김 권사님이 돌아가신 후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심정이었다. 학생들을 격려하고 위로해야 했는데 별로 말을 하지 않고 지내게 되었다. 단지 “수고 한다” “평안이 있길 바란다” “예수님을 잘 믿어야 한다”는 말을 했지만 별로 파워가 느껴지지 않았다. 좌절감을 많이 느끼던 시기는 계속됐다.
[역경의 열매] 오대원 (5) 성령세례 받고 신앙생활 결실 맺어 / 입력 : 2010-07-08 17:27
서울대학교 기숙사에 살고 있는 학생들은 대부분 시골에서 올라왔기 때문에 방학엔 집으로 돌아갔다. 엘렌과 난 여름방학이면 몇몇 학생들과 그들의 시골집으로 여행을 떠났다. 한국문화를 배우고 그들을 좀 더 알기 위해서였다. 즐거운 기억이 많았지만 경상도 지역을 여행하는 동안 한 학생이 갑자기 마귀에 사로잡힌 사건도 있었다.
내가 성령세례를 받기 전이었기 때문에 사탄과 마귀의 능력에 대한 기독인의 권위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였다. 학생은 부산의 바닷가에서 자살을 시도하고 경찰관과 싸움을 하는 등 많은 어려움을 주었고 결국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엘렌과 난 인간적인 사랑과 노력만 해줄 수 있었다. 성령사역이 필요했다는 것은 시간이 지난 후에야 알게 된 것이다. 모든 크리스천과 특히 지도자들에게 성령세례 받기를 강권한다.
서울대 공대에서 보냈던 사역의 시간들은 정신적 육체적으로 우리를 강하게 해주는 듯했다. 그러나 하루 15시간 이상 선교활동을 했지만 영적으로 채워지지 않는 곤고함이 있었다. 1971년, 한국에 온 지 10년의 세월이 지나고 있었다. 변화를 위한 ‘여백’의 시간이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1년간 미국에서 재충전을 하고 오기로 했다.
목사나 선교사가 일이 잘 안 될 때 하나님께 먼저 구하기보다 공부하기로 쉽게 결정하곤 한다. 공부를 더 하면 일을 더 잘할 수 있을 거라는 마음에서다. 나 역시 안식년 동안 선교학을 공부하고 싶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내게 물어오셨다. “너는 누구를 위한 공부를 하고 있느냐?” 그 말씀에 순종해 결국 공부는 내려놓게 됐다.
엘렌과 나는 72년 1월 같은 날 동시에 성령세례를 받았다. 10년 동안 메마른 신앙생활을 한 후에 주 안에서 40년 동안 열매 맺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네가 나로 말미암아 열매를 얻으리라”(호 14:8)고 말씀하셨다. 성령세례는 모든 열매를 만들어 내시는 주님과 친밀하게 되는 문을 열어 주셨다.
미국 애틀랜타 에모리대학의 ‘예수운동(Jesus Movement)’ 모임에 엘렌과 참석했다. ‘예수운동’은 이름 그대로 ‘오직 예수!’라는 원초적인 신앙으로 돌아가는 새로운 부흥운동이었다. 장로교에서 성장한 난 교회에서는 배운 일이 없었던 ‘성령세례’라는 생소한 용어를 그때 접하게 됐다.
모임의 학생들은 우리에게 “언제든지 필요하면 기도를 부탁하라”고 했지만 난 괜찮다고 했다. 사실 거짓말이었다. 10년 동안 선교를 했지만 결실이 없어 얼마나 막막했는지 말하기 부끄러웠다. 그러나 당시 50여권의 성령에 대한 책을 읽고 성경을 다시 읽으며 성령을 사모하기 시작했다.
20명 정도 모여서 성경을 읽었는데 학생들은 마치 연인한테 편지를 읽는 듯 신중하고 열정적으로 읽었다. 모임에서 병 고침의 기적도 많이 일어났다. 다리 길이가 다른 사람의 다리가 신기하게 똑바로 맞춰지는 광경을 직접 목격했다. 결국 그 모임에서 우린 기도받기 위해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 순간 온몸이 뜨거워졌다. 목자가 어린 양을 안은 것처럼 껴안아주는 듯했다. 그리고 “너는 나의 것이다, 방해되는 것 모든 것을 제거하고 널 쓰겠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찬양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그 때 누군가가 “너의 집은 찬양의 집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것은 후에 그대로 이루어졌다. 우리 집이 예수전도단 화요모임의 시작이 되는 것으로 성취됐다.
[역경의 열매] 오대원 (6) 성령세례 후 인생·사역 방향 대전환 / 입력 : 2010-07-11 17:46
‘예수운동’ 모임에서 성령세례를 받은 후 아내와 나에게 커다란 변화가 찾아왔다. 그 첫 번째가 자유함이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억눌린 자아의 해방감이었다. 그동안 우리의 사역이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경력의 사역’이었다면 이젠 성령님이 인도하는 ‘섬김의 사역’으로 변화했다.
지난 10년 동안 우린 모든 인간적인 힘과 지혜를 다해 선교사로 일했다. 우리는 열심히 준비했고, 오랜 시간 일했으며, 주의 깊게 계획을 세웠고, 학생들의 얘기를 관심 있게 들어주었다. 그러나 충분하지 않았다. 이런 인간적인 노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성령세례를 받은 후 성령님이 인도하는 곳으로, 그가 선택하는 방식대로 따라가자 우리는 두려움과 의심에서 자유로워졌다. 우리는 다시 태어났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기 시작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갈 5:22∼23)라는 말씀처럼 우리는 성령님을 통해 점차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닮아갔다. 우리는 방언으로 말하고 기도하며 노래하는 축복을 받았다. 방언의 은사는 성령의 다른 은사들이 우리 삶에서 활동하도록 문을 열어주는 은사라고 믿는다. 방언을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주님과 더 친밀해질 수 있다. 우린 방언기도를 통해 주님과 영적으로 더욱 가까워질 수 있었다.
또 하나의 변화는 선교사역의 방향이었다. 성령세례를 받은 후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교사로서 한국인을 섬길 뿐 아니라 한국인들이 열방으로 나가는 선교사가 되도록 훈련해야 한다는 마음을 심어주셨다. 처음 한국 땅을 밟았을 때는 새로운 곳에 대한 흥분과 모험이 있었다면 ‘이제 이 나라는 내 나라, 내 땅이며 이들은 나의 백성’이라는 확실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선교사를 만드는 선교사가 되리라.” 1972년 6월, 안식년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다. 사역의 주된 방향은 선교사를 훈련시켜서 타 민족들에게 파송하는 것으로 자리를 잡았다.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어 너로 하여금 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창 12:2)는 말씀처럼 한국인들이 복의 근원이 돼야 한다는 생각이 확고해졌다. 이를 위해서 모든 것을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맡겼다.
우리가 성령세례를 받은 사실을 가장 먼저 나누고 싶었던 사람은 예수원의 대천덕 신부님이었다. 왜인지는 몰랐지만 우린 그와 나눠야만 한다고 느꼈다. 1961년에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그의 지적인 능력과 예수님에 대한 열정에 감동을 받았었다. 그러나 당시 성령에 대한 그의 설교를 받아들일 준비는 돼 있지 않았다. 찬양할 때마다 손을 높이 드는 그의 모습이 장로교 목사의 눈에 이상하게 비춰지기도 했다. 당시 성령에 대해 내가 올바르게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 강원도 깊은 산속에 있는 예수원을 찾아갔다. 대 신부님을 만나서 우리에게 일어난 일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우리가 성령체험을 한 것을 알고 계셨다. 그는 우리를 위해 지난 10년 동안 매일 기도했다고 말했다.
“지난 10년 동안 하나님께 로스 목사 부부를 성령으로 감동시켜서 차고 넘치게 해달라고 간구했습니다. 그리고 기도 가운데 당신들이 성령을 체험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대 신부님과 맺은 인연은 예수전도단을 설립한 이후에도 지속됐다. 대 신부님은 한 달에 한 번 정도 예수전도단에 와서 강의를 해주셨고, 예수전도단은 전도학교를 예수원에서 한 달간 여는 등 두 단체는 지속적인 관계를 가졌다. 그리고 대 신부님은 기꺼이 나의 멘토가 돼주셨다.
[역경의 열매] 오대원 (7) 성경공부 모임 발전 예수전도단으로 / 입력 : 2010-07-12 20:52
우리가 서울공대 기독학생회로 돌아간 1972년 10월, 계엄령이 내려 지방에 살던 학생들은 집으로 내려가고 그곳엔 다섯 명 가량의 학생만 남아있었다. 나라가 어수선한 시기였지만 그로 인해 젊은 지성들은 더 예배에 집중했다.
학생들은 서울공대 앞에 있던 우리 집에서 날마다 6시간 정도 기도와 찬양, 성경공부를 했다. 다섯 명의 학생은 모두 성령세례를 받았고 예배 중에 병 고침의 기적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런 소문이 학생들 사이에 퍼지자 서울에 있는 다른 대학생들도 공릉동에 있는 우리 집에 모이기 시작했다. 10명에서 30명, 50명, 나중엔 100명의 학생들이 늘어났다.
‘먼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라는 등의 외국 찬양곡을 많이 불렀다. 당시 서울공대 학생이었던 김성수(현 총신대 교수)씨가 번안을, 현요한(현 장신대 교수)씨가 찬양인도를 은혜롭게 잘했다. 악기는 기타 하나였지만 찬양은 회중의 마음을 움직였다.
모임이 커지면서 서울대학교 연합기독학생회와도 관련을 맺었다. 집에는 데모하다 온 학생도 간혹 머물곤 해 형사들이 찾아와 모임을 감시하는 일도 있었다. 우린 집회에 참석하는 형사들을 오히려 환영하며 공개적으로 초청했다.
매주 화요일마다 집에서 드리던 예배가 교회에 알려지면서 이름이 필요했다. 예수원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우린 예수원에서 ‘예수’를 따서 사용하기로 했다. 그리고 세상으로 나가 전도하는 모임이란 의미를 포함해 ‘예수전도단’이라고 지었다. 1973년 예수전도단이라는 공식적인 이름이 선포됐다.
이후 예배 장소는 서울 연희동 외국인학교 내 수양관, 서울역 앞 여성절제회관을 거쳐 77년에는 명동 YWCA회관 강당으로 옮겨갔다. 명동시절엔 2000명가량이 모였다. 강당 의자는 450석뿐이어서 앞에는 돗자리를 깔고 앉았으며 복도와 뒤편까지 모두 꽉 찼다.
그때 왜 그렇게 많은 회중이 모였을까? 그것은 우리의 모임은 성령 충만한 젊은 평신도들의 지도력으로 움직였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은 한국이 세계 선교의 전초기지가 될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열심히 기도하며 선교 열정을 불태웠다. 이후 모임에서 세계로 선교하러 가는 수많은 목사와 선교사들이 배출됐다.
사실 우리가 화요일에 모이는 이유는 수요예배와 금요철야가 있는 교회사역과의 중복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이 화요모임을 통해 예배와 기도, 말씀과 교제가 어우러진 현대적 예배가 시도되고 미국에서 들여온 복음성가가 예배에 처음으로 도입됐다.
당시 일어서서 박수를 치며, 무릎을 꿇고 손을 들고 찬양하는 모습은 예배 형식의 파격적인 혁명이었다. 교단과 교파를 초월해 모이고, 교회와 열방을 위해 기도하는 것도 젊은 그리스도인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또 우린 방언으로 기도하고 찬양했다. 당시 성령세례와 성령 충만을 위해 기도하는 것 역시 파격적인 것이어서 많은 대형교회에서 공개적으로 예수전도단 화요모임에 가지 말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나 우리가 모일 때마다 예수님 영접, 성령세례, 치유가 행해졌는데 하나님께서는 매번 놀랍게 역사하셨다. 연희동에 있는 수양관에서는 매일 아침 6시 성경공부가 열렸는데 먼 지역에 사는 학생들도 찾아왔다. 우린 학생들과 함께 먹고 자며 공동체 생활을 했다. 문득 예전에 대천덕 신부님이 “성령에 대해 관심 있는 사람은 세계의 누구든지 한국에 오면 수양관을 찾을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이 생각났다.
[역경의 열매] 오대원 (8) 1973년 성탄전야 복음들고 첫 전도사역 / 입력 : 2010-07-13 17:39
예수전도단의 핵심은 찬양예배, 제자훈련과 선교훈련, 세계 선교다. 그러나 예수전도단 창립 초기엔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그런 우리가 세상으로 나가 전도하게 된 계기가 있다.
1973년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며 의미 있는 성탄전야를 보내고 싶었다. 이날 성령세례를 받지 못한 학생들을 위해 중보기도하기로 했다. 나름대로 멋진 계획이라고 생각했다. 70여명이 모여 뜨겁게 기도했다. 그런데 기도 중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 모임의 이름이 예수전도단이란 것을 기억하고 있니? 그런데 너희는 1년 중 가장 중요한 이 밤에 왜 증거하러 나가지 않지? 성탄전야에 수많은 젊은이가 모이는 곳으로 나가야지. 지금 당장 명동으로 나가라.”
가슴에서 쿵쾅거리는 북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래! 맞다. 그동안 하나님을 찬양하고 성령충만을 위해 기도했지만 전도하지 않았다. 이제 복음을 들고 세상으로 나갈 때다. 난 학생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전하며 모두 명동으로 나가자고 말했다.
그때 모였던 70여명 모두 명동으로 나갔다. 성탄전야에 명동은 젊은이들로 가득했다. 우린 두 사람씩 짝을 지어 명동에 있는 다방마다 들어갔다. 마담의 허락을 구해 테이블마다 전도를 했고, 허락하지 않을 때엔 차를 마시며 주위 사람들에게 전도했다. 학생들은 다방에서 아는 친구들을 많이 만났지만 하나님께서 쑥스러움을 없애 주셔서 용감하게 전도했다. 그날 많은 젊은이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했다.
놀라운 일은 전도를 하고 돌아와 성령세례를 구하기 시작했는데, 그날 전도했던 학생들은 모두 성령세례를 받은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당시 학생들은 필사적으로 기도했다. 기독인으로 살아가기 위한 힘이 필요하다는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기도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예수전도단은 73년 여름 전도학교를 처음 시작했다. 전도학교는 3주 동안 성경을 배우고 10일 동안 전도하러 다니는 방식이었다. 전도는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지도를 펼쳐들고 어디로 가는지 하나님 음성을 듣고 일치가결해 마음이 일치되는 곳으로 전도하러 떠났다. 당시 외국에서 원조를 받지 않는 원칙을 세웠기에 돈이 없으면 돈이 없는 대로 떠났다. 하나님께서 충분히 다 채워주셨다.
74∼79년 예수전도단은 주로 말씀, 중보기도, 찬양, 전도에 초점을 두고 사역했다. 서울대, 이대, 고대, 연대, 중대, 수도여사대, 경희대, 외대, 숙대 등에서의 캠퍼스 전도 사역도 활발히 이뤄졌다. 캠퍼스 사역은 10명 정도의 전임 간사와 자원자들로 진행됐다. 이 무렵 직장인 전도학교도 열었다. 당시 사람들은 한 달 동안 우리 집에서 먹고 자면서 출근하고 새벽과 밤에 공부했다. 이 모임이 커져 나중에 장소를 경기도 역곡에 있는 새소망소년의 집으로 옮겼다.
예수전도단 선교 초기에 우린 매일 기적을 체험했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고 치유를 받았으며 악한 영에서 자유함을 얻었다. 너무나 많은 간증거리가 있다. 그러나 우린 하나님의 놀라운 사역의 작은 일부분이라는 것을 깨달으며 겸손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성령님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보통사람들을 통해서 사역하셨다.
[역경의 열매] 오대원 (9) 여름 전도여행 떠나 놀라운 은혜 체험 / 입력 : 2010-07-14 17:16
예수전도단은 여름방학이면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단기간의 전도여행을 떠났다. 떠나기 전에는 하나님의 원칙과 어떻게 복음을 전할 것인지를 공부했다. 전도여행은 하나님의 선물이었다. 성령님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했고 감사를 배웠다. 학생들과 쥐포와 오징어, 사이다를 나눠 먹으면서 전국 곳곳에서 전도하던 그 시간을 생각하면 입가에 미소가 돈다.
충북 음성에 갔을 때였다. 그 지역 한 목사님 댁을 방문했었는데 간식으로 번데기를 밥그릇에 가득 담아 내오셨다. 처음 먹는 것이었다. 모두가 나에게 기도하라고 했다. “단백질 높은 음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주여 무슨 독이라도 해가 되지 않도록 도우소서”라고 기도했다. 번데기 13마리를 맛있게 먹었다. 다른 사람들은 내가 번데기를 하나씩 먹는다고 비웃었는데, 결국 그들은 새벽 4시에 설사가 나서 고생했고 난 무사했다. 그 일은 두고두고 우리들의 재미난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나는 “그러길래 기도하지 그랬냐?”고 학생들을 계속 놀려댔다.
우리들의 아름다운 이야기는 끝이 없다. 태백 황지로 30여명이 전도여행을 갔을 때 일이다. 황지-광주-서울 코스로 전도여행 일정이 정해졌지만, 돈이 없어서 더 이상 갈 수가 없었다. 우리가 황지역 시계탑에서 찬양할 때 양복 입은 한 신사가 다가왔다. 그는 “제가 원래 교회에 나가는데 요즘 교회를 못나간다”면서 봉투를 주었다. 열어보니 광주에서 서울까지 가고도 남을 돈이었다. 남은 돈을 교회에 헌금할 정도로 많았다. 하나님의 관대하심을 느낄 수 있었던 일이었다.
예수전도단 선교 초기에는 수많은 이적과 기사들이 일어났다. 그 중 ‘귀신집’이 ‘예수집’으로 불리게 된 일을 잊을 수 없다. 전남 곡성에 10명이 전도여행을 갔을 때였다. 낮에는 가가호호를 방문해 전도하고 밤에는 교회에서 복음집회를 열었다. 그런데 마을엔 ‘귀신집’이라고 불리는 집이 있었다. 우린 며칠 동안 그 집 앞을 지나갔지만 아무도 전도하지 않았다. 그 집엔 이름모를 병을 시름시름 앓고 있는 노부부가 산다는 이야기만 들었다.
그런데 바로 그 집에서 우리에게 기도를 요청해왔다. 노부부는 서울에서 예수전도단이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무당을 부르기로 한 것을 취소했다는 것이었다. 전도여행에 동행했던 서울대 황혜경 교수가 학생들에게 “함께 가자”했지만 학생들은 “우리 믿음이 약해 그곳에 가기가 두렵다”며 거부했다.
그러나 잠시 후,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 세상의 어떤 악한 세력보다 위대하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요일 4:4)는 말씀을 붙들고 기도한 후 시골교회 청년들을 포함해 15명이 ‘귀신집’으로 갔다.
좁은 방에 모두 앉을 수 없어 누워계신 할머니 할아버지의 주위를 둘러서서 찬양하며 기도했다. 우린 할머니 할아버지의 치유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20분가량 기도했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우린 다소 실망스런 마음으로 서울로 돌아왔다.
그러나 3주 후 시골교회의 젊은 전도사로부터 편지가 왔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병이 깨끗하게 나으셔서 우리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계십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노부부는 그 후 돌아가실 때까지 건강한 모습으로 교회에 열심히 다니셨다고 한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그 집을 더 이상 ‘귀신집’으로 부르지 않고 ‘예수집’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역경의 열매] 오대원 (10) 예수전도단-국제 YWAM 연합 결정 / 입력 : 2010-07-15 20:37
1973년 9월, 국제 YWAM 선교봉사단이 한국을 방문했다. 로렌 커닝햄, 딘 셜만, 조이 도우슨 등을 비롯한 180명의 대규모 선교봉사단을 만났을 때 ‘우린 하나’란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우리와 똑같이 기도하고 찬양하며 전도했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예수전도단원들은 한 달 동안 이들과 함께 서울, 광주, 부산, 대구 등 전국 각 도시에서 전도했다. 매일 오전에는 전체가 모여 도우슨과 커닝햄의 강의를 들으며 말씀에 대한 갈급함을 채웠다. 이들과 함께하며 단원들은 열방을 향한 뜨거운 마음을 배우게 됐다. ‘모든 열방을 제자 삼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더욱 깊이 헌신하는 계기가 됐다.
당시 이들은 한국에 지부를 세울 계획이었다. 도우슨은 나에게 “로스, 기도하는 가운데 한국 리더로 당신의 이름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한국지부를 맡아주겠습니까”라고 물었다. 그 자리에서 잠시 기도한 후 승낙했지만 집으로 돌아와 엘렌과 다시 기도하는 중에 마음의 불안을 느꼈다. 선교봉사단이 떠나기 전날 밤, 그들을 찾아가 요청을 정중히 거절했다.
오랜 시간이 흘러 이 모든 일은 한국 YWAM의 리더로 한국인을 키우고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었음을 알게 됐다. 만약 그들이 한국지부를 개척했다면 한국인의 리더십을 성장시킬 기회가 적었을 것이다. 또 언어와 문화적인 장벽은 물론 한국인의 성향에 적합한 훈련을 제공하는 데도 어려움이 따랐을 것이다. 나는 한국인을 리더로 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74년부터 2년여 동안 도우슨을 비롯한 국제 YWAM 리더들을 초청해 강의를 듣는 기회를 여러 번 가질 수 있었다. 당시 국제 YWAM의 모든 원칙, 즉 중보기도, 하나님 음성을 듣는 법,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등은 도우슨이 세운 것이었다. 그녀가 직접 영적 지도자 세미나를 인도하고 강의하는 열의를 보여 주었다.
79년 엘렌과 난 다시 안식년을 맞아 세 자녀를 데리고 미국으로 갔다. 우선 국제 YWAM 본부가 있는 하와이를 방문했고 보름 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하와이 코나에서 인생의 갈림길에 있는 35세 이상의 사람들을 위한 ‘제자훈련과정’에 참여하면서 다시 한번 국제 YWAM과의 연합을 생각하게 됐다. 그들과 영적인 일치감을 누리며 ‘이렇게 한마음이 될 수 있는 지도자들과 일하고 싶다’는 마음이 커져갔다. 이를 위해 엘렌과 기도했다.
79년 9월 24일, 하나님께서는 구약성서 학개서 2장 18∼19절 말씀을 주셨다. “너희는 오늘 이전을 기억하라 아홉째 달 이십사일 곧 여호와의 성전 지대를 쌓던 날부터 기억하여 보라 곡식 종자가 아직도 창고에 있느냐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석류나무 감람나무에 열매가 맺지 못하였느니라 그러나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그날부터 열매를 맺게 하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이었다. 79년 장로교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예수전도단과 국제 YWAM의 연합을 결정했다. 바로 주님의 말씀대로 9월 24일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리고 80년 봄 태국에서 열린 국제 YWAM 모임에서 공식적으로 두 단체의 연합을 선포했다. 예수전도단의 영어이름은 YWAM Korea로 사용하되 국내 이름은 계속해서 예수전도단으로 부르기로 했다.
[역경의 열매] 오대원 (11) 한국 세 아이 입양 가정에 행복충만 / 입력 : 2010-07-18 17:59
엘렌과 난 아이들을 정말 좋아한다. 결혼 전부터 자연스럽게 2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만일 아이가 생기지 않으면 갈등하지 말고 입양하자고 약속했었다. 우린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가정을 갖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아이들은 부모가 필요하고, 결혼한 모든 부부에겐 자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부모의 사랑을 정말 필요로 하는 아이들이 너무나 많다.
결혼 후 6년이 지났을 때까지 우리에게 아기가 생기지 않았다. 한국에서 사역을 시작한 지 2년쯤 되던 시기였다. 우린 세 명의 한국아이를 기쁜 마음으로 입양했다. 천사같이 사랑스러운 큰딸 데비는
1963년 여름, 홀트아동복지회를 통해 처음 만났다. 생후 5일 된 데비는 새까만 머리카락과 맑은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우린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키우는 부모가 된 것에 감격했고 감사했다. 이후 64년에 생후 5개월 된 아들 데이빗, 69년에 생후 한달 된 딸 베키를 차례로 입양했다. 아이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잘 성장해 현재 아름다운 가정을 이뤄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
입양 후 우린 많은 것을 배웠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그들을 선택했고, 그들을 위해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것이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5) 그렇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과 딸로 입양된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입양은 현실에서 자녀가 없는 부부가 부모가 없는 아이를 입양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우리가 겪은 자녀양육의 어려움은 모든 부모들이 아이를 키우면서 겪는 것들과 같았다. 아이들은 입양됐다는 이유로 방황하거나 문제를 일으킨 적은 없었다. 한 가지 어려웠던 점이 있었다면 아이들과 우리가 닮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많은 사람들에게 입양의 소중함을 이야기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을 통해 하신 일은 분명했다. 입양을 알리신 일이었다. 우린 입양에 대한 의견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며, 다른 가정에도 입양을 권유하곤 했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입양에 대해 열린 시각을 갖고 있지만 당시엔 그렇지 않았다. 여전히 ‘혈연’ 때문에 입양을 꺼리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보여주신 보혈의 끈이면 충분하지 않겠냐”고 말하곤 했다.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선택된 우리의 삶은 커다란 모험이었다. 사역과 자녀양육 둘 다 포기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우린 마음속 깊이 아이들에게 미안해했다. 사역을 하느라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많이 부족했다.
특히 70년대의 예수전도단 시절, 우리 집은 예배장소로 늘 개방돼 있었다. 학생들은 철야기도 후 자고 가기도 했다. 가끔 자매들이 아들 방에 들어가 잔 경우가 있었다. 긴 머리의 아들이 자는 모습을 보고 딸로 착각한 것이다. 아들은 아침에 깨어나 기겁을 했고 그런 환경이 반복되자 몹시 불만스러워했다.
79년 하와이에서 ‘크로스 디티에스(DTS·예수제자훈련학교)’에 참여했을 때였다. 당시 중학교 3학년이었던 아들을 위해 기도하던 중 하나님께서 “아들에게 가서 사과하라”고 말씀하셨다. 난 아들에게 “그동안 아빠가 함께 시간을 많이 보내지 못해 정말 미안하다”며 용서를 구했다. 그런데 아들은 거절했다. 그만큼 상처와 불만이 깊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는 싸움이 끝났으니 이제 감사기도를 하라”고 말씀해 주셨다. 아들의 거절에 개의치 않고 계속 감사기도를 드렸다. 이후 수양회에 참석한 아들은 완전히 변화됐고 나와의 관계도 회복됐다.
[역경의 열매] 오대원 (12) 88올림픽 앞두고 추방명령 ‘충격’ / 입력 : 2010-07-19 18:00
국제YWAM과의 연합으로 인한 가장 큰 변화는 열방을 향해 나아가는 믿음과 도전을 받은 것이다. 국내라는 지역적 한계에서 벗어나 해외로 나갈 수 있는 많은 기회를 갖게 됐다. 예수전도단은 최재선 선교사를 처음 해외에 파송하면서 열방을 향한 첫 발걸음을 내디뎠다. 국제 YWAM과 차이점이 있다면, 전도단은 단기보다는 장기 선교사를 기르는 데 초점을 둔 것이다. 이후 예수전도단은 제자훈련학교(DTS), 대학생제자훈련학교(UDTS), 성경연구학교(SBS) 등 체계적인 훈련을 통해 성장해 갔다.
예수전도단 사역이 확장되고 있는 가운데 난 힘겨운 시련을 마주해야 했다. 1986년은 나와 가족 모두에게 힘든 시간이었다. 88올림픽을 앞둔 정부는 해외 선교사들이 거리에 많이 다니면 후진국가로 보인다며 선교사들의 활동을 원치 않았다. 급기야 정부는 나에게 한국을 떠날 것을 명령했다. 61년 이 땅에 발을 디딘 우린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한국에 머물고 싶었다. 그런 우리에게 정부의 추방명령은 너무나 충격적이고 가슴 아픈 일이었다.
그 무렵, 하나님께선 나에게 사인을 보내주셨다. 86년 1월이었다. 대만에서 열린 DTS에서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이제는 북미와 유럽에 있는 한국인 2세를 위해 일해야 한다. 이들 중 선교사로 부름 받은 이들이 많은데 그들을 일깨울 사람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다. 난 즉시 순종하지 못했다. 한국을 언젠가 떠나야 하겠지만 그때가 지금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제 나를 한국에서 옮기시려고 하는구나’ 하고 순순히 받아들였으면 좋았겠지만, 그렇게 하지 못해 힘든 시기를 보내야 했다. 내가 떠나지 않자 여러 가지 압력이 가해졌다. 경찰 관계자는 찾아와 “북한에서 당신을 죽이려 하니 미국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TV 방송에 대학생들의 데모하는 장면과 예수전도단의 집회장면이 함께 나가기도 했다. 우리가 정부에게 불편한 존재라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었다.
86년 8월, 우리 가족은 모두 미국으로 떠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한국을 갑자기 떠남에 괴롭고 슬펐다. 머릿속은 혼돈과 후회로 가득했다. 한국을 떠난 뒤 마음의 상처를 회복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미국에 도착한 후 LA의 한 공동체에서 하루 6시간 이상 말씀을 묵상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주님께 회개하는 데 여러 달의 시간을 보냈다. 2년이라는 기간 동안 공동체 안에서 상담도 받고 격려 받으며 회복되어갔다.
이제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였음을 안다. 한국에서 우리를 떠나게 한 것은 정부가 아니라 하나님이셨다. 돌이켜보면 그때까지 주님을 위해서 너무 바쁘게 일해 왔다. 그 결과 ‘주님과 함께 일하는 시간’을 가질 수 없었다. 주님과 함께 일하는 시간은 주님의 임재를 기뻐하고 그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그 시기 많은 사람들이 “당신은 너무나 열심히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실제로 난 선교사로서 안주하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이 더 많은 일을 하는 동안 난 약간의 칭찬을 받는 것을 즐기는 경향이 있었다. 하나님은 이를 기쁘게 받아들이지 않으셨다. 주님은 다른 사람의 유익보다 내 자신의 유익을 위해 나를 한국 밖으로 옮기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계획은 완벽하셨다. 우리가 한국에 남아 있었다면 할 수 없었던 전혀 다른 선교를 하게 하셨다. 하나님은 한국의 디아스포라(해외교포) 사이에서 일하길 원하셨다. 주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문을 열어 줄 준비를 하고 계셨다.
[역경의 열매] 오대원 (13) 한국 떠난 후 예수전도단 더욱 성장 / 입력 : 2010-07-20 17:27
우리가 고난으로부터 도망치려 하지 않고, 고난을 우리가 받은 축복 아래 두면 그 고난은 결국 축복이 된다. 한국을 떠나온 후 여러 시간, 여러 날 동안 하나님 말씀 안에서 살면서 나는 차츰 회복되어짐을 느꼈다. 우리가 한국을 떠난 후 예수전도단은 더욱더 성장해 사역은 깊어졌다. 우리 가족 역시 더 강해지고 서로에 대한 사랑이 깊어졌다.
하나님은 우리 부부에게 다시 기름을 부어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세계 각국에 흩어져 살고 있는 한국 동포들에게 선교하라는 커다란 비전을 주셨다. 엘렌과 난 뉴욕에서 8년 동안 청소년과 대학생 사역을 하며 비전을 발전시켜 나갔다.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선교훈련이라 생각했다. 1994년 시애틀에 안디옥선교훈련원을 개원했다. 훈련원은 국제YWAM 소속단체로 선교 훈련, 북한연구학교, 캠퍼스 사역에 중점을 두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세계선교를 할 한국의 해외 동포를 훈련시키는 것이 우리 사역의 핵심이다.
훈련원은 선교사를 훈련하는 ‘세계선교 센터’, 선교사와 교회 봉사자들이 재충전하는 ‘희년 쇄신 센터’, 북한 선교를 위한 ‘새 코리아 센터’로 구성됐다. 우리는 성령의 선교공동체다. 15명의 어린이를 포함한 30여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우리는 음식과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삶과 예배와 성경 공부, 다양한 영적 은사들을 함께 나누며 살고 있다. 우린 단순히 주님을 위해서 무엇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시는 존재가 되길 원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가 됐을 때 함께 움직이고 역사해 주셨다.
‘세계선교 센터’에는 5개월간의 제자훈련학교, 4개월간의 직장인을 위한 ‘주말 독수리제자훈련학교’ ‘셀라 성경학교’ 등 프로그램이 있다. 제자훈련학교는 삶과 선교를 준비하도록 돕고 있으며, 한국어와 영어로 진행된다. 또한 우린 어린이들을 세계복음화를 위해 훈련시킬 뿐만 아니라 워싱턴 대학에서 캠퍼스 복음 사역도 감당하고 있다.
또 모든 나라의 기독교 공동체에서 가장 필요한 것 중 하나는 영적, 감정적, 그리고 육체적 치유라고 생각한다. ‘희년 쇄신 센터’는 그런 이들을 위해 세워졌다. 여러 선교단체들을 대표하는 선교사들이 6주간의 교육을 받으러 이곳에 온다. 그들은 캐나다 쪽의 로키산맥을 여행하고, 태평양 북서쪽에 있는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바라보면서 삶을 재충전하고 있다.
무엇보다 우리 훈련원의 핵심과제 중 하나는 북한선교다. 우리는 정기적으로 NKSS(새코리아 섬기는일꾼학교) 과정을 열고 있다. 우리가 ‘새 코리아’라고 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강력한 힘을 갖고 한국으로부터 세계 모든 국가에 나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하나님께서 다시 한번 더 남과 북에 있는 백성들이 합쳐지도록, 무언가 새로운 일을 한반도에 하고 계시다는 것을 우리는 믿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섬기는 일꾼’이라고 하는 이유는 효과적으로 선교하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섬기는 사역을 통해서이기 때문이다. 세계 많은 나라에서 ‘새 코리아 세미나’를 개최하고 있다. 최근에 우리는 북한 내부로 들어가서 선교할 몽골 기독교인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몽골에서 ‘새 코리아 캠프’를 열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크고 새로운 일의 한 부분이 되는 것에 영광스럽고 흥분된 마음이다.
[역경의 열매] 오대원 (14) 1986년 한국 떠나면서 북한선교 시작 / 입력 : 2010-07-21 17:16
북한선교는 1986년 한국을 떠나면서 비로소 시작되었다. 우리가 계속 한국에 머물러 있었다면 지금처럼 북한선교를 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안디옥선교훈련원의 주된 사역 중 하나가 바로 북한선교다. 훈련원에는 북한연구 자료관을 비롯해 북한연구 학교가 있다. 또 북한선교를 위해 각국의 중보기도팀과 연합해 기도하며 구제사업을 펼치고 있다.
특히 NKSS(새코리아섬기는일꾼학교)는 국제YWAM의 선교훈련과정 중 하나다. 이곳에서 하나님의 관점과 실제적으로 북한에 접근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
사실 나의 북한선교 비전은 1978년부터 시작됐다. 당시 북한을 접할 기회가 없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북한을 두고 기도하게 하셨다. 나는 오늘날 한반도가 역사상 중요한 교차로에 서 있다고 믿는다. 만약 한반도에 하나님의 성령이 강력하게 역사하신다면 한반도는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등대’가 될 것이며, 모든 인류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할 것이다. 그러나 거룩함과 의로움과 공정함이 다시 한반도 전체를 다스리지 못한다면 한반도는 전 세계에 커다란 파괴를 가져다 줄 혼돈의 장소가 될 것이다. 선택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즉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달려 있다.
우리가 북한선교를 준비하면서 중점을 두는 것은 어린이들이다. 어린이들은 북한에서 심각하게 고통 받고 있다. 많은 어린이가 성장을 저해하는 영양실조로 고통 받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북한 어린이들을 위해 일하시고 계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간 방황하고 있을 때 가장 큰 두려움은 그들의 자녀가 죽어서 소멸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반대로 말씀하셨다. “너희가 사로잡히겠다고 말하던 너희의 유아들은 내가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들은 너희가 싫어하던 땅을 보려니와”(민 14:31).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의 자녀들을 초자연적으로 보호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렇게 하셨다.
부모의 죄악으로 자녀들이 고통을 받을 수 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진리다. 어른인 우리, 바로 부모의 죄악이 자녀들에게 비극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스라엘과 북한의 어린이들이 고통 받는 것은 바로 지도자들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은 직접적인 결과다.
누구의 죄인가? 바로 아버지들의 죄이다. 어떤 죄인가? 주님을 따라 살기를 거부한 죄이다. 물론 그것은 북한 지도자들의 죄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곳 지도자들의 죄일 뿐만 아니라, 바로 우리의 죄이다. 다시 말하면 어린이들을 돕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신앙적으로만 얘기하는 죄, 하나님에게 단지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는 것처럼 공허한 기도만 하는 죄, 그의 백성을 인도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는 죄 등이다.
수년 전에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북한 어린이에 대한 환상을 보여주셨다. ‘아이는 며칠 전 9세 생일이 지나갔다. 아이는 새로 파묻은 형의 무덤 옆에 무릎 꿇고 있었다. 아이는 이제 정말 혼자 남았다. 어머니는 2년 전 영양실조로 죽었으며, 아버지는 음식을 구하는 중에 없어졌다. 이 작은 소년에게는 살아남을 수 있는 어떤 희망의 끈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환상은 계속되었다. 아이는 속 깊은 곳에서 울부짖고 있었다.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을 선포하리로다”(시 118:17). 이 소년은 하나님께서 아직 죽게 내버려두지 않으신 북한의 많은 어린이들 중 하나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택하셔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게 하심으로써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복음전도자가 되도록 준비하시고 계신 것이다.
[역경의 열매] 오대원 (15·끝) “앞으로 주어진 시간도 한국 위해 쓸것” / 입력 : 2010-07-22 20:34
아직도 사람들 중에는 경제적이거나 정치적인 이유로 통일을 두려워하거나, 심지어 통일을 반대하고 전혀 관심을 갖고 있지 않는 이들이 있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통일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두 개의 분리된 국가로 살아가는 것을 결코 인정하시지 않기 때문이며, 하나님은 새롭게 된 한반도가 세계의 다른 국가들을 축복하는 커다란 계획을 갖고 계심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남과 북이 다시 하나 되었을 때, 찢어진 가정이 다시 돌아오는 위대한 치유를 상상해 본다. 복음이 북한의 모든 들판과 시골 마을을 관통해서 기독교인들이 떳떳하고 담대하게 예배를 드리고 복음을 증거하는 모습을 생각해본다.
남북한 통일을 이루는 하나의 열쇠는 북에서 내려온 2만 여명의 탈북주민이다. 북에서 남으로 그 수많은 사람들을 내려 보내신 하나님의 커다란 목적은 무엇일까? 인간적인 해답은 그들이 박해 때문에 내려왔거나 북에 있는 그들의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한 방법을 찾으려고 내려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야만 한다. 나는 하나님이 남과 북의 사람들이 다시 만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한국 백성들을 북에서 남으로 보내신 것이라고 믿는다.
만남을 통해서, 우리는 서로 통일을 준비할 수 있다. 60년 이상 떨어져서 살아와 두 개의 다른 문화가 생겨났다. 더 많이 배워야 하고 더 많이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다시 한번 더, 우리를 축복하시고 용서해주시며, 우리를 위해 준비하시고, 놀라운 방법으로 우리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을 깊이 생각해야만 한다.
기독교인들이 북한에 대해 한 마음과 한 뜻이 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공산주의가 좋다는 것이 아니다. 공산주의는 인간 관심사에서 하나님을 없애버린 나쁜 체제이다.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는 어떠한 정치적인 체제도 나라를 새롭게 하거나 번영하게 할 수 없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정치를 넘어서서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면, 우리는 성령이 이끄는 대로, 성령의 하나됨 안에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해야만 한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그의 백성들에게 응답하신다. 기도는 하나님의 명령이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기도한다(요일 5:14∼15).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해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한반도에 강력한 길을 인도하실 것이다. 우리는 한반도의 구원을 위해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매일 매일 좀더 확신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세계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사용하시는 전 세계적인 중보기도자의 위대한 군대에 동참하길 바란다. 또 많은 분들이 말씀 안에 거하는 생활을 하길 바란다. 그분의 생명이 우리 안에 더 풍성해지고 성령이 우리 삶 속에서 더 강하게 역사할 것이다.
2011년은 우리가 한국에서 선교를 한 지 50주년이 되는 해이며, 2012년은 엘렌과 내가 성령 안에서 살아온 4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동안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다른 사람을 축복해준 것보다 우리에게 더 많이 축복해주셨다. 우리는 한국을 아주 많이 사랑한다. 한국에 와서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됐고, 선교는 사랑이라는 것을 배웠다. 앞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도 북한선교와 재외한인을 위해 보낼 것이다. 한국은 우리 삶의 중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