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의 의미



153의 의미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갈릴리에 오셔서 7제자들에게 그물을 오른편으로 던지라고 하시니 밤새 한 마리도 잡지 못했는데 153마리의 물고기를 잡게 되었다(요한 21장).


첫째, 153명의 치유 사건

사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47사건을 통해 153명이 치유 받고 회복되었다.

1. 마태복음 : 23사건을 통해 47명을 축복하셨다
(문둥병자 8:2, 베드로 장모, 야이로의 딸, 12년 혈루병 환자 가나안 여인의 딸 15:22, 막달라 마리아 27:56, 아리마대 요셉 등)

2. 마가복음 : 3사람
(귀신들린 자 1:23, 귀먹은 자 7:32, 눈먼 자 8:32)

3. 누가복음 : 14사건을 통해 94명이 축복을 받았다.

70명 제자들 (10:1). 열명의 나환자(17:12), 삭개오(19:2), 등

4. 요한복음 : 8개 기록을 통해 9명이 나음을 얻었다.
니고데모(3:1). 가나의 왕의 신하(4장), 간음한 여인(8:11), 나사로(11장)

이 모든 것을 합치는 47 사건을 통해 153명이 치유, 문제해결, 기도응답으로 축복을 받았다.


둘째, 9☓17=153

153마리는 9☓17 이며, 1+5+3=9 이다.
9는 인간의 허수이다.
17은 충만의 숫자이다.
하나님의 일에 전념하라는 가르침이다


셋째, 하나님의 자녀라는 히브리어 글자의 숫자 값


중세 기독교의 수비학인 “게마트리아(Gematria)”는 문자를 수로 사용하는 방법과 이것으로부터 나오는 수비학의 광대한 해석체계를 말한다. 즉 게마트리아의 본질적인 요소는 문자가 수를 나타내고 수가 문자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옛 이스라엘에서 사용되었던 유대교의 수비학(數祕學, numerology)으로 숫자를 이용하여 히브리어 단어나 문장을 암호화하는 방법이다.


“게마트리아”라는 말은 고대 그리스어로 “감마(gamma)”와 “트리아(tria)”가 합쳐졌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보통 고대문자들은 그 자체로 숫자의 의미도 포함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히브리어의 알파벳도 각 글자에 대응하는 숫자가 존재한다. 

숫자에 의한 문자 풀이법은 바벨론의 사르곤 2세(B.C. 723∼705) 시대의 비명을 통해 알려져 있다. 숫자에 의한 문자 풀이법은 유대 전통에서 각별한 사랑을 받았는데 A.D. 1세기경 유대고 랍비였던 엘리에제르는 경전 해석의 32가지 방법 중 29번째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B.C. 3세기 이후 헬라 문면의 영향 속에서 히브리인의 숫자 표현 방식에 변화가 생겼다. 알파벳 순서를 수의 기호로 사용하는 헬라 방식에 따라 유대인들도 히브리 자음 순서로 수의 기호를 표현했다. 유대인들이 문자를 수의 기호로 사용함에 따라 특정한 단어가 특정수로 나타나는 일이 벌어졌다. 성경이 모든 낱말과 각 글자는 일정한 숫자를 갖고 있어 서로 풀어지거나 얽힐 수 있으며 신비스런 의미를 나타낼 수 있다는 것. 즉 구약성경에 기록된 모든 단어들이 '코드'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영향은 성경을 필사하는 과정에서 랍비들이나 필사자들에 의해 구약성경의 문자 자음이 의도적으로 조작되는 경우가 일어났다. 단어와 숫자를 혼용하는 방식은 신약성경에도 종종 나타난다.

“하나님의 아들들(Beni ha-Elohim)”이란 낱말이 맛소라 구약성경에서 일곱 번만 나오며, 히브리어 낱말 수의 값은 153(2+50+10+5+1+30+5+10+40)이 된다. 그런데 신약에서 예수 부활 후 베드로가 잡은 물고기의 수가 “153마리” 라는 점을 들어 구약 하나님의 아들들과 연결시켜 교회(그물) 속에 들어간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가리킨다고 본다.

헬라어 “물고기”의 단어 수의 값이 “153×8”(1224)로 나오는데 “그물”도 “153×8”의 값이 나온다. 특히 “노타리곤”으로 물고기 “익두스(ΙΧΘΥΣ)”는 “예수스 크리스토스 데우 휘오스 소테르(Ιησουs Χριστοs Θεου Ύιοs Σωτερια)”, 곧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자 구원자”라는 의미를 만들기도 한다.


12 사도의 이름, 12지파와 유대인의 분파


12 사도의 이름

마태복음 4:18∼20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1. 베드로(Petrus, Πέτρος)

“시몬”이라 불렀으나 예수님이 “베드로” 즉 “반석”이란 이름으로 바꾸어 부르셨다(마태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반석은 히브리어 “페트라”에서 왔다.
예수님의 수제자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보다 권위는 아래였다. 

2. 안드레(안드레아)(Andreas, Ανδρέας)

시몬 베드로의 동생 또는 형이다. 성경은 형제로 나온다. 우리나라와 같은 서열 중심이 아니라 정학하게 서술하지 않는다. 전승은 그가 러시아로 건너가 선교했다고 한다. 그리스에서 체포되어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 성경 속에서 의외로 적게 나오면서 입지가 작다. 초대교회 문헌 속에서도 안드레는 잘 등장하지 않는다.

3. 야고보(세베대의 아들)(Iacobus Maior, Ιάκωβος)

사도 요한의 형이다. 대 야고보로 부른다. 보아너게(천둥의 아들)라는 별명을 가졌다. 최초의 순교자다. 헤롯 아그립파에게 순교 당한다. 베드로는 풀려나와 복음을 전한다. 사도로서 부름을 받았지만 거의 활동을 하지 못한 사도이다. 내가 아는 어떤 분은 소명을 받고 신학을 시작했지만 얼마가지 않아 교통사고로 천국에 갔다. 종종 야고보는 통해 그들의 삶을 읽는다.

4. 요한(Ioannes, Ιωάννης)

대 야고보의 동생이다. 대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과 친척간이다. 요한 서신의 기록자이다. 혹자는 야고보와 요한을 예수님의 친동생으로 보기도 한다. 마리아가 재혼한 것으로 주장한다. 학자들의 논란이 많은 곳이다.

5. 빌립(Philippus, Φίλιππος)

세례 요한의 제자이었다. 바돌로매의 소개로 예수님께 왔다. 그리스에서 선교하다 순교 당한다. 그의 묘가 터키의 파묵칼레에 있다고 한다. 

6. 바돌로매(나다나엘)(Bartholomaeus (Nathanael), Βαρθολομαίος ή Ναθαναήλ)

두 가지의 이름이 너무 달라 종종 헤갈린다. 어느 것이 본명인지 정확하지 않다. 산 채로 살가죽이 벗겨진채 머리를 베어 순교 당한다. 

7. 도마(토마스)(Thomas, Θωμάς)  

의심 많은 도마로 알려진 제자다. 인도에서 순교했고, 신라까지 왔다는 전설이 있지만 확실치 않다. 아직도 인도에 도마교회가 있다고 한다. 

8. 마태(Matthaeus, Ματθαίος)

마태복음의 저자로 알려져 있지만 마태복음은 마태의 이름을 빌려 쓴 다른 제자로 알려져 있다. 아프리카로 가서 선교했다. 금융업자의 수호신이다. 세리였기 때문일 것이다.

9. 야고보(작은, 알패오의 아들)(Iacobus Minor, Ιάκωβος ο μικρός)

[야고보서의 저자이며, 예수님의 동생이다.-논쟁이 많은 부분이다.] 개신교는 예수님의 친동생이 야고보를 적었다고 한다. 하지만 사촌가 친 동생이 한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일부의 학자들은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가 마리아의 재혼으로 인해 함께한 배다른 형제로 보기도 한다. 

10. 다대오(유다)(Iudas Thaddaeus, Θαδδαίος)

다대오 출신의 유다이다. 다대오로 자주 부른다. 가룟 유다는 가룟 출신 유다란 뜻이다. 가룟 유다는 그냥 유다라 부르는 경우가 많다. 성경에 거의 나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가 예수님께서는 사도로 불렀다는 점을 기억하자. 유다는 찬미하다의 뜻이고, 다대오는 갈릴리 지역의 한 마을 이름으로 '마음이 크고 넓다'는 뜻이다.

11. 시몬(Simon Cananeus, Σίμων ο Κανανίτης)

베드로의 동명이인이다. 알패오의 아들이며, 소(작은) 야고보의 형제다. 열심당원출신이다. 페르시아에서 전도하다 순교했다. 기둥에 거꾸로 매달려 톱으로 몸이 잘려 죽었다 한다. 이렇게 보면 알패의 아들은 유다와 시몬 둘이 된다. 

12. 가룟 유다(이스카리옷 유다)(Iudas Iscariot, Ιούδας ο Ισκαριώτης)

다른 사도는 모두 갈릴리 출신이지만 유다만은 유대 지역 출신이다. 가장 머리가 좋고 회계를 맡았다. 은 30에 예수님을 팔아 자신은 자살한다. 이 자리를 맛디아가 대신한다.

12-2. 맛디아(Matthias, Ματθίας)

가룟 유다 대신 뽑힌 사도이다. 에티오피아에서 선교하다 순교한다. 

가룟 유다와 13

가룟 유다는 13과 연관되었는가?
그는 13번째 사도가 아니다.
사도에서 제적된 사람이다.
그에 의해 예수님이 금요일에 죽었기 때문에 13과 연관된 것이다.
서양에서는 13일의 금요일을 가장 싫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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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12지파와 유대인의 분파

노아의 세 아들 중 셈의 후손인 아브라함에게 크고 강력한 민족을 이루리라는 축복을 주신 후(창세기 18:18)에 야곱(이스라엘)의 아들들이 12지파로 나뉘며 번성했다.

요셉을 이집트로 보내어 기아로부터 이스라엘 민족을 보호하게 하였고, 그 후에 이집트를 탈출하여 가나안 땅에 정착해서 번영했으나 하나님을 멀리하고 멸망하여 바벨론 땅으로 끌려갔다. 세 번에 걸쳐서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왔으나 다시 하나님을 멀리하여 여러 대언자들의 충고를 무시하고 핍박하고 죽였으며, 자기들을 구원하러 사람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마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등의 악한 행위들 때문에 AD 70년경에 로마의 티투스장군(10대 황제)에 의해 멸망되어 다시 온 세상으로 흩어지게 된다.

유대인들은 야곱(이스라엘)의 아들인 르우벤, 시므온, 유다, 잇사갈, 스블론(레아 저녀), 갓과 아셀(레아의 여종 실바의 자녀), 베냐민(라헬 자녀), 단과 납달리(라헬의 여종 빌하의 자녀)까지 10명(레아소생인 아들 레위는 성전 관리로 제외)과 야곱의 손자이자 요셉의 아들인 에브라임과 므낫세까지 12명의 후손들이 12지파를 이루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에브라임지파와 단지파가 예전의 불순종으로 인해 제외되고, 레위지파와 요셉지파가 12지파에 포함되었다.

유대인들은 이리저리 쫓겨 다니며 살다가 2차 대전 때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로 600만 명이 희생되었는데, 희생자 대다수는 폴란드, 네델란드, 헝가리 등에 살던 아쉬케나즈(Ashikenaz) 유대인들이었다. 1948년에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가나안) 땅에 이스라엘을 건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 이스라엘 국민의 90% 이상이 무신론자이며, 유대교 신자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살펴보면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지 않고 배반하고 반성했다가 상황이 괜찮아지면 또 다시 배반하곤 하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현재의 이스라엘도 대다수가 무신론자이며, 세계 최대의 퀴어축제를 개최할 정도로 하나님 보시기에는 타락한 것으로 보인다.

유대인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다윗, 요셉, 예수 그리스도 모두 셈의 후손들로 유지되었다. 유다와 베냐민지파의 유다왕국 출신들만 유대인으로 인정하고, 나머지 10지파의 이스라엘왕국 출신들은 혼혈인 사마리아사람들로 불리며 천대 받았다. 예수께서도 이스라엘집의 잃어버린 양에게 가라고 명령하셨다(마태 10:6, 15:24). 세계 각지로 흩어져 살면서 모계혈통으로 유대인을 분류하다보니 지금은 셈의 후손보다 야벳의 후손이 더 많아졌다. 현재 이스라엘과 미국에 거주하는 유대인이 1,100여만명 정도로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모계혈통으로 유대인을 구분하다보니 지금은 12지파의 구분도 불가능한 상황이어서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야곱)의 12지파를 어떻게 구분하실지 궁금하다. 현재는 크게 아쉬케나지와 세파르디계로 분류한다.

                                           ( 다윗의 별이 그려진 이스라엘 국기)

 

야벳의 후손인 아쉬케나짐(Ashkenazim, 독일 사람들이라는 의미)은 전통적으로 성경과 탈무드 연구에 주력했으며, 전체 유대인의 80% 이상을 차지한다. 이들은 독일계 유대인으로 독일, 네델란드와 폴란드, 러시아 등 동유럽, 미국, 이스라엘, 오스트레일리아 등지에 살고 있다.

 

야벳의 아들들은 고멜과 마곡과 마대와 야완과 두발과 메섹과 디라스요, 고멜의 아들들은 아스그나스(Ashikenaz)와 리밧과 도갈마요(창세기 10:2~3, 역대상 1:5~6),

* 바빌로니안 탈무드에 고멜이 Germania로 되어 있어, 고멜의 아들 아스그나스(Ashikenaz)가 독일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정착된 것 같고, 실제로 그들은 독일지역에 거주하다가 영국, 네델란드, 동유럽, 러시아, 미국 등지로 쫒겨다니며 정착하여 살고 있다.

                                          ( 세파르디 유대인 )

 

셈계통의 스파라딤(Sefardim, Sephardi, 스페인 사람들이라는 의미)은 전통적으로 종교적 관습을 중요시했으며,

이베리아반도(스페인, 포르투갈), 북아프리카, 터키, 프랑스, 미국, 남미 등에 많이 거주하며, 유대인의 16% 정도 차지한다.

 

유대교와 유대인의 상징이 메노라(일곱 촛대)여서 이스라엘을 함락시켰던 티투스장군(10대 황제가 됨)의 로마 개선문 벽화에도

탈취한 메노라를 매고 있는 형상이 새겨져 있다. 그런데 현재 이스라엘의 국기에는 다윗의 별이 들어가 있고, 메노라는 국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자손들의 이 군대는 가나안 사람들의 땅을 사르밧까지 소유하고

예루살렘의 포로 된 자들 곧 스바랏(Sepharad)에 있는 자들은 남쪽의 도시들을 소유하리로다(오바댜 1:20).

 

그 외에도 중동, 중앙아시아, 남아시아에 거주하는 유대인인 미즈라힘(동방사람들이라는 의미), 에디오피아 흑인 유대인(이스라엘 집을 뜻하는 베타 이스라엘이나 이주한 자들의 뜻을 가진 Falasha로 불림), 인도 붐바이 거주 유대인 베네 이스라엘, 인도 코친에 거주하는 코친 유대인, 발칸반도에 거주하는 로마니오트(Romaniotes) 유대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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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섹스

인간의 섹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섹스를 하는 궁금증에서부터 시작한다.
동물처럼 번식기에만 섹스를 하는 것이 아니라 시도 때도 없이, 심지어 임신 중에도 하는 것이 인간이다.
즉 인간에게 섹스는 번식만 아닌 쾌락의 역할도 있기 때문이다. 
동물 중에서 인간만이 유일하게 배란기가 아닌 때도 섹스를 하며, 평생을 따져 보면 인간은 일생 평균 5,778번, 총 2808시간을 섹스로 소비한다.

* 2808시간 ☓ 60분 =168,408분 168,408분 ∻ 5,778번 = 29분

동물에게 있어 섹스는 번식 수단이라 교미 시간이 매우 짧고 간단하게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인간은 밀어를 속삭이고 키스를 하며 번식기가 아니더라도 시도 때도 없이 사랑을 나눈다.
생물학적으로 본다면 대단히 비효율적인 행위를 하는 셈이다. 

일본 주간 <포스트>에 따르면 이렇듯 인간만이 유독 쾌락에 집착하고, 섹스를 향유하게 된 데에는 “뇌에 그 비밀이 있다"고 한다. 뇌 과학자 시오타 히사시 씨는 이렇게 설명한다.

“인간의 뇌는 오랜 기간 진화해왔다.
본능적인 성행위를 관장하는 곳은 대뇌변연계와 시상하부라고 불리는 뇌의 안쪽 부분인데, 인간의 뇌는 그 주위를 감싸는 대뇌신피질 또한 발달한 것이 특징이다.
대뇌신피질은 지성을 관장하므로 인간은 삽입, 사정이라는 원초적인 성행위뿐만 아니라 다양한 성적 행위를 익히게 된 것이다." 

인류학자 헬렌 피셔 박사는 뇌에 3가지 시스템이 존재하고 있다고 했다. 
1. 성욕
2. 로맨틱한 사랑
3. 상대에 대한 깊은 애착 문제는 이 세 가지 뇌 시스템이 모두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 사람에게 깊은 애착을 가지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사랑과 성욕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유엔 통계에 따르면 1947~2011년 사이 이혼 케이스를 연구한 결과 결혼 후 4년 만에 이혼을  많이 한다.
사랑에 빠지고 부부가 된 뒤 아기를  낳고 키우면서 부부 유대관계가 약해져 이혼으로 이르는 기간이 4년이 가장 많다는 것이다.  피셔 박사는 일부일처제가 과연 계속 유지될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오늘날 일부일처제는 당연하게 여겨지고 있으나 대략 1만 년 전 시작된 것으로 인류학자들은 추정한다.
인류가 농경생활을 하고 정착하면서 가축, 집을 소유하고 자식에게 물려주는 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일부일처제가 확립됐다는 것이다. 핀란드에서 흥미로운 실험이 있었다.

우리 뇌엔 일부일처에 적합한 호르몬인 ‘바소프레신’이 있는데 이를 받아들이는 수용체가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이 입증됐다. 즉 4명 중 한명 꼴로 이를 수용하는 정도가 낮았으며 이는 곧 자신의 파트너에 충실하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근 유럽에선 여러 사람과 관계를 가지는 “폴리아모리(polyamory)” 즉 다자간 연애가 등장하고 있다고  했다.
한 집에 두 쌍의 남녀가 살면서 자유연애를 즐기는 생활이다. 
두 사람 이상을 동시에 사랑하는 ‘다자간(多者間) 사랑’을 뜻하는 말인 폴리아모리 운동은 1970년대 태동했다.
이를 지향하는 이들은 일부일처제를 비판하며, 일부는 집단혼 형태로 가족 관계를 형성하기도 한다.
일부일처제를 일탈하는 이런 라이프 스타일이 잠깐 유행으로 그칠지, 아니면 오랜 인류 결혼제도를 바꿀지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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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레루야와 유대인의 결혼 풍속



할렐루야!(Hallelujyah. הַלְּלוּיָהּ)
-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

할랄 - 찬양하라
루 - 너희의
야 - 야훼 하나님

찬양하다, 영광스럽게 하다, 부르다 라는 뜻의 히브리어 동사의 2인칭 복수 명령형인 할렐루(hallelu)와 야웨의 축약형인 야(Yah)의 합성 단어이다. 직역하면 야(Yah)를 찬양하라.

라틴어 형태인 알렐루야(Alleluia)는 또 다시 그리스어의 음차인 알랠루이아(Αλληλούια)에서 유래했다. 그리스도 알파벳에는 'h'에 해당하는 문자가 없어서 'ἁ'를 사용한다.

영어권 성경에서는 할렐루야를 주로 'Praise ye the LORD.'로 번역한다. 
NIV 성경에서는 'Praise the Lord.'로 번역되었다.
천주교의 경우에는 할렐루야보다는 알렐루야나 '찬미 예수'의 사용 빈도가 높은 편이다. 
정교회
에서는 알릴루이아라고 한다.

구약에서 시편에서 23회
104:35, 45. 106:1, 48. 111:1. 112:1. 113:1, 9. 115:18. 116:19. 117:2. 135:1, 21. 146:1, 10. 147:1, 20. 148:1. 149:1, 9. 150:1, 6.

신약에서 요한계시록에서 4회
요한계시록 19:1, 3, 4, 6
19:1 -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하라!
19:3 - 심판의 하나님을 찬양하라!(2절 참조)
19:4 - (아멘과 함께 사용) 반드시 그렇게 이루어 질 것을 내가 믿고 찬양한다!
19:6 -  전능하신 통치를 찬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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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의 결혼 풍속 10단계

1단계 ; 적령기 13세∼18세
(일곱 절기 때 공공의 장소에서 서로 만날 수 있다)
(부모의 약속에 따라 만날 수도 있다)

2단계 ; 세 가지 준비물
1. 포도주 한 잔
2. 신부의 값을 결정하는 은과 금
3. 제1 서약서
(남자는 여자의 아버지에게 나는 ∼지파 ∼집의 ∼이다)신신
(찾아온 목적을 분명하게 말한다. 당신의 딸과 결혼을 하고 싶다. 허락해 주세요)

3단계 ; 세 가지 질문
(여자의 아버지가 딸에게 세 가지를 질문한다. 남자가 없는 자리에서)
1. 지적 요소 - 남자를 얼마나 알고 있는가?
2. 정적 요소 - 얼마나 사랑하는가?
3. 의적 요소 - 고난이 닥쳐와도 정말 헌신할 각오가 되었는가?
* 아버지가 딸에게 ‘내가 이 결혼을 허락해 주기를 원하느냐?’
(딸이 승낙한 후에 남자에게 허락을 한다)

4단계 ; 신부의 몸값을 흥정
(이때 남자는 자리를 피하고 대리인이 나선다. 거래를 위한 흥정이 아니라 서로 상대방의 집안 형편에 맞도록 고려한다)

5단계 ; 첫 번째 계약서를 읽는다.
포도주 한 잔을 남자와 여자가 반잔씩 나누어 마신다.
이때 서약서 위에 여자가 반잔을 마신 후 몇 방울의 포도주를 부은 후 남자가 마신다.
은금을 지불한다.
청혼, 포도주를 나누어 마신다, 서약서를 확인 후 정혼(定婚)으로 부부가 된다.

6단계 ; 신부의 아버지가 뿔나팔을 불어 정혼식을 알린다.
신랑과 신부를 축복기도 한다.
법적으로 부부가 인정되었으나 서로 떨어져 지낸다.

신부여 지금으로부터 약 일 년 후 어느 날 알지 못하는 어느 날 저녁 반드시 당신을 데리러 올 것입니다. 준비하고 기다리십시오!

7단계 ; 일 년간의 별거(別居)

생사가 걸린 일 이외에는 결코 만날 수 없다.
신랑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와서 함께 기거할 집을 준비한다. 
신부는 자기 생활 방식을 버리고 남편 집의 생활 방식을 연습한다.
신부는 신랑 이외에 이성 교제를 중단하고 신랑만을 사모하며 기다린다.

8단계 ; 신부를 데리러 오는 때
신부는 신랑을 맞이할 날을 학수고대한다.
신랑은 신부를 데리러 갈 그 날을 사모하며 기다린다.
어느 날 아버지가 아들을 부른 후에 “이제 신부를 데려 오너라!”
(신부를 데리러 가는 그 시간은 아버지의 권한에 속하므로 아들은 모른다)

신랑과 신랑의 친구들은 횃불을 들고 신부의 동네로 찾아간다.
신부 측에서는 “보라, 신랑이 오고 있다!”
신부는 이때 단장을 하고 친구들과 같이 신랑이 기다리는 곳으로 가서 함께 신랑의 집으로 간다.
9단계 ; 두 번째 계약서
미래의 삶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서와 신랑의 징표를 준다.
합방을 한다.

10단계 ; 사랑의 선언
두 번째 계약서를 들고 이 신부는 정절에 관하여 깨끗하였으므로 결혼은 완성되었다고 선언한다.

유대 사회에서 일 주일의 기간은 ‘김추어진 기간(Hidden Seven Days)’ 이라고 한다.

정혼은 신부의 집에서
결혼은 신랑의 집에서 이루어진다.

요한계시록 19:8,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 옳은 행실(디카이오마)

- 법령에서 사용하는 용어로 행위로 옳은 것이 아니다. 선포된 의를 말합니다. 행위적인 행위로 옳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선언에 의해서 옳다고 인정된 존재이다. 

로마서 3:20∼22,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빌립보서 3:4∼9,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히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옳은 행실은 구원의 은혜로 얻은 것입니다.

유대 풍속은 잔치에 초청을 받았을 때 내가 준비하는 예복이 없었다. 잔치를 준비한 신랑의 집에서 준비한 예복을 받아서 입어야 한다. 따라서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준비한 예복 즉 십자가 보혈에 의한 구원의 옷 세마포의 옷을 받아 입은 후에 그 잔치에 참여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은혜입니다.

             




예수님의 마음(빌립보서 2:5) 주일 설교 / 08-28-2022



예수님의 마음(빌립보서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Your attitude should be the same as that of Christ Jesus:

빌립보서는 바울 서신으로 옥중서신으로 분류합니다.
빌립보서는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힘"이라고 하겠습니다(느헤미야 8:10b).

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기쁨(5구절) - 빌립보서 1:4, 25, 2:4, 29, 4:1
기뻐하고(7구절)
- 빌립보서 1:18, 2:17, 18, 28, 3:1, 4:4, 10
기쁘시게(1구절)
- 빌립보서 4:18

빌립보서 전체 74구절에 비할 때 17%


(도입 이야기)

지난 8월 15일부터 18일까지 부산 벡스코에서 국제 실업인 선교회(CBMC) 제48차 대회가 열렸습니다.
첫날 간증자로 탈렌트 '김수미씨(73세)'가 맡았습니다.
간증의 주제가 '왜 이제 알았을까?'

예수님을 좀 더 일찍 알았으면 하는 안타까움을 이야기하는데 실은 김수미씨 작은 아버지 김명수장로님이 군산 신흥교회를 설립하였다고 합니다.

국민학교 5학년 때는 교인들이 더 이상 모이지 않아 자기 집 넓은 공간에 유아원을 설립하고 동네 아이들을 보살펴주었는데 아이들만 보내고 주일에 교회에 나오지 않아 부모님을 찾아다니며 이번 주일에 교회에 나오지 않으면 아이를 돌봐줄 수 없다고 하며 혼자 나오지 말고 동생과 친척들을 모시고 와야 한다고 했는데 정말 주일날 동네 아주머니들이 떼를 지어 몰려와서 교회가 가득찼다고 합니다.

더구나 김수미씨의 아버지가 딸을 서울로 올려보내 숭의여자중학교에 입학시켰는데 숭의여자중학교는 미션 스쿨입니다.
이렇게 신앙의 울타리에서 성장하였지만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6년전 쯤 살아계신 주님을 만난 후에 자신이 변했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헸습니다.

"마음이 바뀌면 세상이 바뀐다!"

이전에는 김수미씨와 연극, 영화, 드라마에 출연할 때 약속 시간을 엄수하며 지냈기 때문에 만일 오전 11시에 시작한다고 하면서 시간을 지키지 않으면 자리를 박차고 떠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담당 PD들이 매우 힘들어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제는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 개회식을 하고 간증하는 시간을 1시간씩이나 늦추는데 아름답게 기다렸다고 하며 시간 당 출연료가 1,500- 2,000만원을 받는데 간증하러 와서는 강사비를 받지 않는다고 하며 만일 강사비를 주면 모두 헌금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바뀌었다고 합니다.
최근에는 여러 PD들이 이런 말을 한다고 합니다.

"김수미씨가 죽을 때가 되었다. 기가 많이 꺾이고 죽었기 때문" 이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기가 꺾인 것이 아니라 "이제는 달라졌어요!" 라고 속으로 외친다고 합니다.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첫째는 기다릴 줄 아는 마음(생각, 태도)

드라마, 연극, 영화에 출연하여 촬영할 때 몇 시에 시작한다고 하면 반드시 그 시간에 정확하게 시작해야지 만일 지체하면 즉시 그 자리를 떠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한회 출연료가 대략 1,500-2,000만원인데 스케줄이 하나 뿐이면 모르지만 그 다음 스케줄을 소화하려면 시간을 철저하게 지켜야 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부산에서 간증을 하려고 서울에서 고속전철을 타고 내려와서 무대 뒤에서 1시간을 기다렸다고 합니다.
30분 간증을 한 후에 다시 다음 스케줄을 위하여 서울로 올라가야 하는데 너무 지체하는데 "아름답게 기다렸다!"고 하며 다음 스케줄을 위해 간략하게 간증을 한다고 합니다.

둘째는 물질적인 손해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생각, 태도)

지난번 폭우로 인하여 김수미씨가 살고 있는 주택에 비가 누수되어 3층에서부터 빗물이 흘러내려 아래층까지 빗물이 새어 보수 공사를 해야 하는데 옥상에 김수미씨가 정원을 만들어 놓았는데 방수 보수 공사를 하려면 먼저 옥상에 설치한 정원을 모두 철거해야 하는데 철거 비용만 1,500만원이라고 합니다.

만일 주님을 알지 못했다면 당장 1층과 2층의 주인들을 소집한 후 각 가정에서 보수 비용을 나누어서 분담해야 하는데 이번에는 모든 비용을 본인이 담당하겠다고 하자 공사를 맡은 업자가 "정말이세요? 철거비용과 보수 공사 비용이 꽤 많다"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김수미씨가 "내가 예전같으면 각 세대별로 분담하도록 하겠지만 이제는 예수를 만났기 때문에 두 눈 딱 감고 제가 모두 부담할테니 걱정하지 마시고 공사를 진행하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지금은 달라졌어요!" 라고 간증하며 나는 강남 푸른나무교회에 출석하는데 담임목사 곽수광목사님 설교 들으러 오시라고 하며 간증하는 이야기를 동영상으로 보았습니다.

'마음이 바뀌면 세상이 바뀐다!'

빌립보서 2장 5절은 예수님의 마음이라고 번역하였지만 헬라어 성경에서는 마음이 아니라 태도 또는 생각이라는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대한성성공회에서 발행한 "새한글 성경"에서 이렇개 번역했습니다.

"여러분은 서로 이 생각 곧 예수님 안에도 있던 생각을 품으시오"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예수님과 같은 태도"
NASB, NIV 성경에서는 "attitude"

(전개하는 이야기)

예수님의 마음이란 곧 예수님의 생각이며 예수님의 태도라고 하겠습니다.
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 (William James)

생각을 바꾸면 언어가 바뀐다
언어를 바꾸면 행동이 바뀐다
행동을 바꾸면 습관이 바뀐다
습관을 바꾸면 운명이 바뀐다.

예수님의 생각(요한복음 9:1-3)


예수께서 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예수
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어제의 생각이 오늘의 당신을 만들고, 오늘의 생각이 내일의 당신을 만든다."

부정적인 생각은 다른 사람의 허물을 잘 찾습니다.
그러나 긍정적인 생각은 나의 허물과 단점을 알기 때문에 나 보다 다른 사람을 더 높여주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부정적인 생각
전통적인 생각
이러한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이사야 55:7b.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리라.

예수님의 생각은 철저하게 "영적인 생각"을 하셨습니다.

마귀가 시험 할 때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영적이며 생명입니다(요한복음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

예수님의 언어(요한복음 21:15)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언어는 내 마음의 초상화" (J. Ray)

"말해야 할 때 말하지 않으면 사람을 잃고 말하지 말아야 할 때 말하면 신뢰를 잃는다." (논어)

* 트집을 잡으려는 언어가 세상을 뒤 흔들지라도 예수님께서는 용서하시려는 언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잘못을 문책하려는 언어가 아니라 다시 결단하고 일어나도록 기회를 찾게하는 언어.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하여 맹세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모두 주를 떠나고 버릴지라도 나는 주님과 함께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씩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노라(마태복음 26:70)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마태복음 26:72)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마태복음 26:74)

예수님의 행동(마태복음 26:5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느냐, 무엇을 알고 있느냐, 무엇을 믿고 있느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결국 우리가 무엇을 행동으로 실천하느냐이다." (John Ruskin)

"길을 안다는 것과 그 길을 걷는다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Morpheus)
* 모르페우스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꿈의 신


* 베드로의 용기는 분명 주님을 위한 행동이었지만 그 행동이 하늘의 법을 따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우쳤다.
때로는 누군가를 위하여 용기를 발휘한 것처럼 보였을지라도 참된 것은 행동이 아니라 사건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이다.

로마의 군병들이 몰려와 예수님을 체포하는 살벌한 현장에서 다른 제자들은 감히 나서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용감하게 평소에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뽑아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내리쳐서 떨어트렸습니다.
베드로가 얼마나 용감합니까?
베드로의 칼 솜씨가 얼마나 정확합니까?
칼을 뽑아서 내리쳤는데 말고의 오른 편 귀를 베어버렸습니다(요한복음 18:10).

이에 시몬 베드로가 검을 가졌는데 이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베드로의 칼을 휘두르는 솜씨가 얼마나 놀랍습니까?
칼을 빼어 오른 편 귀만 떨어트릴 수 있었을까요?

그런데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요한복음 18:11)

예수님의 습관(마가복음 1:35)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생활은 습관이 짜낸 천과 같다"(마이엘)

"좋은 습관은 유혹을 물리친 결과이다"(서양 속담)

"습관은 최고의 주인이거나 최악의 하인과 같다"(Nathaniel Bright Emerson)

온라인 두 이레 새벽기도회를 내일부터 시작합니다.
8월 29일(월) - 9월 13일(화)

온라인 특별 두 이레 새벽 기도회(14일)

기도 제목을 정합니다.
다른 기도보다 내가 정한 기도를 집중적으로 기도합니다.

영적 생각, 영적 언어, 영적 행동, 영적 습관을 유지하여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믿음으로 거듭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결론을 위한 이야기 / 백정(白丁)과 김서방 

옛날 어느 마을에 돌쇠라는 백정이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두 사람의 선비가 고기를 사러 왔습니다. 

첫 번째 젊은 선비가 "어이, 돌쇠야! 쇠고기 한 근만 팔거라." 하고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습니다.
돌쇠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고기 한 근을 칼로 베어 선비에게 주었습니다.
그 뒤에서 기다리고 있는 두 번째 선비가 "김서방 나한테도 쇠고기 한 근만 주게나."
그러자 돌쇠는 빙그레 웃으면서 " 네, 알겠습니다."
재빠른 솜씨로 또 고기 한근을 베어 저울에 달아서 그 선비 앞에 놓았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똑같은 한 근인데 누가 보아도 첫번째 젊은 선비에게 준 고기보다 두번째 선비에게 준 고기가 곱절이나 될 만큼 고기덩어리가 컸습니다. 

그것을 본 젊은 선비는 대뜸 큰 소리로 "야! 이 백정 놈아, 왜 사람을 차별하냐? 똑같은 한 근씩 인데  왜 내 것은 적고 저 손님 것은 곱절이나 많은 거야?" 하며 따졌습니다.

그러자 푸줏간 주인은 웃으며 조용한 목소리로 " 아, 그거야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손님보고 차별하는 것이 아니라 고기를 판 사람이 다르지요."

"고기를  판 사람이 다르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고기를 판 사람은 네가 아니냐?

"선비님에게 고기를 판 사람은 백정이었고, 저 선비님에게 고기를 판 사람은 김서방이었으니 고기 분량이 다를 수 밖에 없지요."  

무슨 이야기입니까?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중요하다는 교훈이라고 하겠습니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덱거의 명언)
통성 기도

주여!
이전에 가졌던 세속적인 생각과 세속적인 언어 세속적인 행동과 세속적인 습관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영적이며 신령한 생각과 언어와 행동과 습관을 형성하여 이 세상에서도 천국의 삶을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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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이해) 빌립보서 2장 5절에 대한 정확한 해석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Your attitude should be the same as that of Christ Jesus:

빌립보서에서 사용한 "마음(φρονέω, 프로네오)"이란 헬라 단어를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마음 / 프로네오(φρονέω)  

1. 생각하다,  2. ~에 몹시 마음을 두다,  3. 생각을 가지다
동사 : 생각을 가지다, 태도를 가지다, 빌립보서 2:5
빌립보서 2장 5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라고 할 때 마음이란 "생각을 가지다" 또는 "태도를 가지다" 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입니다.

영어 성경에서도 "마음"을 "attitude" 라고 하여 "태도" "자세"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마음이란?
첫째는 예수님의 생각을 갖는 것
둘째는 예수님의 태도를 따라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1. 생각하다, 의견을 가지다, 판단하다
   로마서 12:3, 고린도전서 13:11, 빌립보서 1:7

로마서 12:3,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고린도전서 13: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빌립보서 1:7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예한 자가 됨이라.

2. ~에 몹시 마음을 두다, ~에 전념하다, ~에 몰두하다

   로마서 12:16,  빌립보서 3:16,  골로새서 3:2

로마서 12:16,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체 말라

빌립보서 3:16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골로새서 3:2

위엣 것을 생각하고 엣 것을 생각지 말라.

3. 생각을 가지다, 태도를 가지다,
    빌립보서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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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제임스 (William James)
윌리엄 제임스는 미국의 철학자, 심리학자이다. 프래그머티즘 철학의 확립자로 알려졌다.
철학· 종교학· 심리학 등에 뛰어난 연구를 많이 남겼다.
1855년에서 1860년까지 유럽의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영국, 프랑스, 스위스, 독일에서 생활하면서 유럽 문물을 만났다.

If you change your mind and your language changes.
If you change the language and your behavior changes.
If you change your behavior and your habits change.
Changing habits changes fate.
생각을 바꾸면 언어가 바뀌고
언어를 바꾸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을 바꾸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을 바꾸면 운명이 바뀐다.

예수를 믿는 성도들이 예수님의 생각과 태도를 따라 신앙생활을 계속할 수 있다면 반드시 신앙생활에 성공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생각, 예수님의 언어, 예수님의 행동, 예수님의 습관을 몸과 마음에 익혀서 성공하는 신앙인이 되기를 다짐해 봅니다.

예수님의 생각
- 누구의 죄 때문인가?(요한복음 9:1-3)

예수
께서 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예수
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예수님의 언어
-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한복음 21:15)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 트집을 잡으려는 언어가 세상을 뒤 흔들지라도 예수님께서는 용서하시려는 언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잘못을 문책하려는 언어가 아니라 다시 결단하고 일어나도록 기회를 찾게하는 언어



예수님의 행동
- 검을 도로 꽂으라(마태복음 26:5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 베드로의 용기는 분명 주님을 위한 행동이었지만 그 행동이 하늘의 법을 따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우쳤다.
때로는 누군가를 위하여 용기를 발휘한 것처럼 보였을지라도 참된 것은 행동이 아니라 사건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이다.



예수님의 습관
- 새벽 미명 한적한 곳에 나가(마가복음 1:35)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예수님께서는 자주 기도하러 산으로 가셨다.
거룩한 습관은 거룩한 삶을 만들어 낼 것이다.



(결론을 위한 이야기)

랠프 월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 1803. 5. 3 ∼ 1882. 4. 27)

‘한 마디의 말은 다른 사람 앞에서 자기 초상화를 그리는 것이다.’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누가복음 6:45)

프로이드는 환자 스스로 정신문제의 근본 원인을 찾도록 도와주는 실험을 하는 중 정신분석학의 중요한 토대를 찾았다고 말한다.
즉 환자와 나누는 허심탄회한 일상의 대화 속에 모든 문제와 답이 담겨 있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우리 안에 녹아 있는 감정 의지 기질 성향 생각 등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은 바로 우리가 하고 있는 ‘말’임을 시사한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국이 필리핀의 마닐라를 공격하기 위해 군함을 막 출항시키려는 순간이었다.
그때 한 해군의 옷이 바다에 떨어졌다.
그 해군은 자신을 말리는 상관의 명령을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바다에 뛰어들어 옷을 건져 냈다.
병사는 명령불복종이란 죄로 즉시 군법회의에 넘겨졌다.
재판관이 그에게 물었다.

“귀관은 그까짓 옷 하나를 건지려고 상관의 명령을 어겼단 말인가?”


병사는 묵묵부답이었다.

“상관의 명령이 중요한가, 옷가지가 중요한가? 말해 보라.”


병사는 중형에 처해질 위기에 처했다.
사람들도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건 병사를 마땅히 중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때 병사는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제가 상관의 명령을 어기고 옷을 되찾으려고 바다에 뛰어든 것은 잘못입니다.

저를 처벌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바다에 뛰어든 이유는 옷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호주머니에서 빛바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옷 속엔 제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어머니의 사진이 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재판장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재판관도 그의 동기를 듣고 나서 큰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병사의 어깨에 손을 얹고 말했다.

“어머니 사진 때문에 목숨을 건 자네는 진정 용기 있는 군인이네.
자네는 조국을 위해서도 목숨을 걸고 싸울 수 있을 거야.”

병사는 무죄 선고를 받았다.
하나님도 우리의 숨은 동기를 보신다.
신자는 겉으로 드러난 행동보다 동기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임을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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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관이 된 노력을 실력이라 한다

습관에는 좋은 습관도 있고, 나쁜 습관도 있습니다.
따라서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나쁜 것은 빨리 버리고, 좋은 것은 계속 유지해야 합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처럼 일단 몸에 밴 습관은 쉽게 고쳐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제52대 총리였던 마가렛 대처의 말을 빌리자면 '습관은 운명이 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좋은 운명을 원한다면 좋은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습관의 중요성은 신앙생활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다니엘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다니엘서 6장 10절에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 하였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대인 다니엘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온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바벨론의 피식민지 지식인에 대한 우대정책으로 일찍이 당국에 발탁되어 총리의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그런 그를 시기한 사람들은 왕으로 하여금 왕 외에 그 어떤 사람이나 신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굴에 던져진다는 금령을 내리게 했습니다. 다니엘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습관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전에 하던 대로" 집에 돌아와 창문을 열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했습니다. 생명을 담보로 하는 왕이 내린 금령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다니엘은 기도의 습관을 버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신앙인은 이른바 ‘거룩한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특히 요즘처럼 코로나 전염병으로 인해 소모임 뿐만 아니라 공동예배조차 제대로 할 수 없어 자칫 신앙생활이 느슨해 질 수 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스승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언 중에 “우리가 반복하는 것이 우리 자신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반복하는’, 즉 ‘습관’은 우리 자신입니다. 시간을 정하여 기도하기, 하루에 일정 분량의 성경 읽기, 하루에 한 가지 이상 선한 일 하기 등의 거룩한 습관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의 정체성을 드러냅니다.

또한 무심코 우리의 입에서 자주 튀어 나오는 언어, 무조건적 반사처럼 반복되는 행위들 하나하나도 곧 우리 자신입니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 대신에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그런 언어와 행위를 통해 하나님을 봅니다.

따라서 ‘거룩한 습관’은 우리 자신의 신앙을 성숙시켜 줄 뿐만 아니라 우리를 바라보는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선교적 행위이기도 합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은 그들만의 공통된 습관이 있다"(스티븐 코비)고 하는데, 성공하는 신앙인이 되기 위해 우리도 오늘부터 ‘거룩한 습관’을 들여 보는 것은 어떨까요?


“당신이 35세입니까? 당신은 500일 남았습니다.” 관심을 확 끄는 제목의 이 논문은, 35세가 된 사람은 자신이 개인적으로 쓸 수 있는 시간이 앞으로 500일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고 주장을 합니다.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 논문에 따르면 사람은 음식을 만들고 먹는 데 4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옷을 갈아 입는 데는 1년 반, 머리를 빗는 데에도 1년 반이 걸린다고 합니다. 놀라운 것은 화장실에서 보내는 시간이 자그마치 7년이나 된다고 합니다. 잠자는 데는 24년, 쇼핑하는 데 3년을 소비한다고 합니다. 여기에 일하는 시간, 차 타는 시간 등등을 모두 빼면, 35세인 사람에게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 약 500일 정도의 개인적인 시간이 남게 된다고 합니다.

이 논문이 주장하는 것을 가만 생각하면 ‘정말 그럴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하게 공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별 생각 없이 사용하는 자투리 시간이 모이면 평생에 걸쳐서 어마어마한 양의 시간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습관이 중요합니다. 반복적으로 하는 습관이 평생에 걸쳐서 모이면 큰 시간이 되면서 그것이 바로 나를 만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좋은 습관을 이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위대한 신앙은 거룩한 습관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오늘 마가복음에 등장하는 예수께서 보여 주신 거룩한 습관을 묵상하면서 영성생활의 중요한 특징을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기도하는 거룩한 습관을 이루신 분입니다.

마가복음 1장에는 예수님 사역의 특별한 모습이 하나 등장합니다.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 1:35).

예수께서는 사역으로 바쁘신 가운데도 새벽 이른 시간에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는 기도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실천하신 거룩한 습관입니다.
이 매일 기도하시는 습관이 예수께서 그 많은 사역을 감당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기독교역사 속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에서 지혜를 배우고 실천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너무 바쁘기 때문에 하루 4시간씩 기도한다.”

우리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바쁘면 기도도, 성경 읽는 것도 건너뛸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루터는 바쁘기 때문에 더욱 기도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님에게서 이 모습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습관을 실천하는 것이 바로 바쁜 삶을 잘 감당하고, 승리할 수 있는 원동력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예수님처럼 이러한 거룩한 습관을 형성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찰스 두히그(Charles Duhigg)가 쓴 <습관의 힘>(The Power of Habit)이라는 책에는 새들백 교회(Saddleback Church)의 릭 워렌(Rick Warren) 목사의 인터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 인터뷰에서 릭 워렌 목사는 새들백교회가 지향하는 신앙의 핵심이 거룩한 습관을 형성하는 데에 있다고 말합니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서 살아가야 하는데, 예수님의 삶을 그대로 본받아 살라고 하면 이것이 며칠 가지를 못한다고 합니다.
신앙이 아직 자리 잡지 않은 교인들에게는 굉장한 부담감을 느끼게 만들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릭 워렌 목사가 택한 방법은 믿음의 습관을 길러 주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교회 안에 작은 그룹들을 많이 만들고, 교인들이 그 작은 그룹에 모두 참여하여 그 속에서 함께 기도하고, 삶을 나누고, 성경을 읽으면서 점차로 믿음의 습관을 형성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자연스럽게 신앙이 자라고, 예수님의 삶을 따라가는 힘이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습관이 신앙을 성숙하게 만들어 준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실천하신 거룩한 습관을 기르는 것이 우리 또한 건강한 신앙인으로 자라날 수 있는 방법입니다.

예수님은 거룩한 습관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신 분입니다.

마가복음 1장은 계속해서 이러한 거룩한 습관을 이루는 것이 필요한 이유를 설명해 줍니다. 예수께서는 거룩한 습관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제자들이 기도하는 주님을 찾아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막 1:37). 사람들에게 인기가 폭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기도 가운데 분별한 하나님의 뜻으로 제자들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막 1:38).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의 인기에 좌우되지 않는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사람들은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예수님을 향해서 몰려들었지만, 새벽에 기도하는 거룩한 습관을 통해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가운데 있던 예수님은 ‘다른 마을에 가서 전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제자들에게 이야기합니다. 거룩한 습관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게 합니다.

교회에서 직분으로 봉사하고, 여러 가지 일로 사역하는 사람은 이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바쁠 때에 더욱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 없이 사역으로 나아가서는 안 됩니다. 기도를 통해 나의 사역 가운데, 삶의 모든 일 가운데 내 뜻이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도록 애써야 합니다. 비록 사람들은 나에게 몰려오고, 나에게 칭찬과 박수를 보낼 때도 있지만, 이러한 관심과 칭찬은 사실 하나님께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가야 할 관심을 내가 빼앗을 때에 심각한 영적인 함정에 빠집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나는 이 일을 위해 왔노라” 말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나아갈 줄 아는 사역자와 봉사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일은 거룩한 습관을 통해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속에 있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예수님이 이루신 거룩한 습관은 기도와 사역의 조화입니다.

마가복음 1:39은 온 갈릴리를 다시니며 하나님나라의 운동을 펼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그들의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쫓으시더라.”
예수께서는 기도하신 후에 사역으로 나아가셨습니다.
기도하지 않고 사역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반대로 실천하고 행동하는 모습 없이 기도만 하는 것 또한 문제입니다.
참 이상하게도 기도만 한다고 신앙이 건강하게 자라지는 않습니다.
기도를 통해 영적인 에너지를 충전한 사람은 작은 것이라도 실천하는 모습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을 영성가들은 “기도 가운데 하는 실천”(action in prayer)이라고 말합니다.

신앙생활의 핵심은 거룩한 습관으로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로 나아가는 것이고, 여기에서 받은 은혜와 사랑으로 실천하며 봉사하는 삶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이 본문 전체를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를 원하는 거룩한 습관의 핵심입니다.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신 예수께서 사역의 현장으로 나아가시고, 또한 사역의 현장에 있다가 다시 기도하는 자리로 들어오신 것처럼, 기도와 사역, 신앙과 봉사의 균형으로 건강한 신앙을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거룩한 습관은 이러한 ‘기도 가운데 하는 실천’입니다.
작은 것도 은혜 받은 대로 실천하려는 습관을 이루려고 할 때에, 이 습관이 우리의 신앙과 교회를 건강하게 만듭니다.

습관을 제2의 천성이라고도 합니다.
일단 습관이 형성되면 그 습관은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습관은 되도록 인생의 이른 시기에 익혀야 합니다.
좋은 습관을 만드는 것이 삶의 미션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 인생의 습관들을 연구하였으나 예수님의 습관을 연구하는 일은 드문 일입니다.
하지만 예수님보다 더 영향력 있는 인생을 산 사람이 없다면 그 분의 습관을 연구하는 일보다 중요한 일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의 습관을 연구하는 작업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그 일을 시작할 때입니다.
이 위대한 연구로 새로운 삶의 습관들이 태어난다면 우리네 삶의 마당은 지금보다 훨씬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인생의 변화가 불가능하다고 체념한 모든 이웃들에게 새로운 습관을 만드는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자 격려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습관을 나의 습관으로 만드는 보람찬 여정을 시작하며, 이 여정에 도전하는 길손들에게 축하를 보내 드립니다.
아이든, 청소년이든, 청년이든, 장년이든, 노년이든 새로운 습관으로 새 인생을 살고자 갈망하는 사람 모두에게 이 한 권의 책이 습관의 영원한 멘토가 되었으면 합니다.

당신이 익히는 새 습관이 곧 새 변화의 촉매가 될 것입니다.
자, 그러면 새 습관과 더불어 거룩한 새 인생을 시작하십시다.



[본문내용]

- 우리의 행동을 바꾸는 것은 단순히 나쁜 습관을 버리는 결심만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습관, 더 나은 습관, 거룩한 습관을 익혀야 합니다. 새로운 습관만이 우리가 사모하는 진정한 부흥, 진정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 우연히 찾아온 모든 만남들, 그 모든 만남들을 전도의 기회로 포착해 보십시오. 그것이 바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는 삶입니다. 우리의 행동을 바꾸는 것은 단순히 나쁜 습관을 버리는 결심만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습관, 더 나은 습관, 거룩한 습관을 익혀야 합니다. 새로운 습관만이 우리가 사모하는 진정한 부흥, 진정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 교회는 정말 불신자를 전도하는 교회로서 쓰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교회를 찾아 주고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는 분들은 거의 70-80%가 이미 믿는 분들입니다. 한국의 대형교회 대부분이 타 교회에서 전입되는 교우들의 소위 이동성장에 크게 의존하고 있습니다.

- 침묵이 필요할 때는 침묵으로 기도하지만, 통곡이 필요할 때는 통곡하며 기도할 줄 아는 성도들이 돼야 합니다. 오늘의 상황이 눈물을 요구한다면 우십시오. 하나님은 그 솔직한 눈물을 보고 싶어 하십니다.

- 예수님의 일생은 사역의 일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생을 복음서를 통해 연구해 보면 그분은 사역을 오직 기도로 실현하셨음을 보게 됩니다.

- 진정한 예배는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교정하는 장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예배할 때마다 변화되고 예배할 때마다 성숙하고 예배할 때마다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배의 축복입니다.

- 성도의 기본 동작은 예배에서 시작됩니다. 예배 자세가 흔들리고 예배에서 은혜를 받지 못하면 우리네 신앙생활 전반의 자세가 흔들리는 것입니다.

- 하는 일에 빈번하게 우선순위에서 밀려나는 일은 없습니까? 다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의 집을 찾아 그분을 예배하는 일, 이 일이 평생에 양보할 수 없는 우선순위의 습관이 되게 하십시오. 예배는 성도의 기본 동작입니다. 이 기본자세가 흔들리면 우리의 인생 전체가 흔들린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 우리의 모든 예배는 그분과의 만남에 초점이 맞춰져야 합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 속에 그분을 만나야 합니다. 찬양의 주제가 되시는 주님을 찬양하며 만나야 합니다. 사랑과 감사의 마음으로 헌금을 드리며 헌물을 받으시는 그분을 만나야 합니다. 말씀의 유일한 초점이신 예수님을 말씀이 선포되는 가운데 만나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임재가 느껴지도록 전심으로 찬양하십시오. 그분의 임재가 느껴지도록 집중해서 기도하십시오. 그분의 임재가 느껴지도록 그분에게 당신의 사랑을 드리십시오. 그분의 임재가 느껴지도록 말씀 속에서 그분의 음성을 귀 기울여 들으십시오.

- 안식은 인생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관점을 제공하고 인생의 경이를 받아들이게 하는 복된 여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행스럽게 제자들에게는 이런 안식의 여백이 있었고 그리하여 부활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 안식의 여백이 바로 하나님의 창조의 경이를 발견하는 준비가 되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부활처럼 놀라운 진리 앞에 감격하지도 감동하지도 못하고 삽니까? 마음에 부활의 사건에 놀랄 여유 그 자체를 상실한 까닭입니다.

- 믿음의 대화는 아주 중요합니다. 대화 속에 살아 계신 주님이 찾아오시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주께서 주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 영의 눈을 열어서 그분을 보십시오. 유진 피터슨은 이런 일상의 신비를 보는 눈이 열린다면 우리에게 일상의 장은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경험하고 그분을 증언하는 장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때 우리는 교회에서뿐만 아니라, 가정에서, 일터에서 날마다 그분을 만나고 날마다 그분에게 헌신을 드리는 놀라운 부활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 사단 마귀의 시험에서 우리를 지켜 승리하게 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바로 말씀 암송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붙들면 말씀이 우리를 붙들게 됩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성도라도 말씀이 우리 안에서 살아 움직이지 못하면 우리는 언제라도 사단 마귀의 먹이가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 우리가 시험에 빠졌을 때를 돌이켜 보면 반드시 공통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등한히 할 때 그리고 무엇보다 말씀에서 우리가 멀어져 있을 때가 아닙니까? 그러므로 시험에 승리하시려면 말씀을 가까이 하십시오. 말씀을 암송하십시오.

- 사용되지 않는 무기는 있으나 마나한 것입니다. 말씀을 암송하십시오. 그리고 시시 때때로 묵상하십시오. 그것이 우리를 거룩한 삶에 이르게 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 자들을 단기 선교의 장으로 파송하시면서 제일차적으로 강조하신 것이 지혜입니다. 지혜롭지 못한 말과 행동으로 오히려 불필요한 문제를 만들기도 하고, 선교지에서 선교사님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기도 합니다.

- 예수 믿고 구원받아 우리 이름이 하늘나라 생명책에 기록되는 구원의 사건보다 더 위대한 기적은 없습니다. 선교의 본질은 이 구원의 기쁨을 나누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의 기쁨을 누리는 자로 이 기쁨을 나누기 위해 선교하는 것입니다.

- 주께서는 인류에 대한 최선의 유익이 우리의 구원임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섬겨 구원하시고자 자신의 목숨을 속죄의 제물로 드리기로 결단하신 것입니다.

- 예수님의 오심의 목적이 바로 섬김이었습니다. 섬김의 절정의 표현이 바로 자기 목숨의 드림이었고 그 결과가 또한 인류의 구원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섬김은 목숨을 드리는 거창한 일뿐 아니라 가장 작은 일로도 가능한 것을 주님은 제자들에게 가르칠 필요가 있으셨습니다. 그래서 본문이 보여 주는 것처럼 수건과 대야를 들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입니다.

- 우리가 자신을 예수의 제자로 자처한다면 그분의 본을 따르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못할까요? 자신의 이기심 때문입니다. 내 한 몸 조금 편하기 위해 우리는 그 작은 고난들을 견디기가 싫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 섬김은 옵션이 아니라 명령입니다.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일이 아니라, 하지 않으면 안 될, 주인 되신 분의 명령입니다.

- 이웃들에게 거룩한 영향을 끼치는 제자 삼기의 삶, 그것은 무엇보다 상처 받고 고통 받는 이웃들의 모습을 주목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 세상에 고생하고 기진해 있는 영혼들이 한둘입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보여 주신 모범이 12명만 책임져 보라는 것입니다. 12명도 많아 보이면 우선 3명만 책임져 보십시오. 누구든지 내 주변에 힘들어하며 인생을 사는 세 분과 만나 기도하며 목장 모임을 시작해 보십시오.

- 교회는 말씀과 기도 그리고 삶의 고통과 기쁨을 나누며 서로 영혼들을 터치하는 곳입니다. 거기서 기대할 수 있는 최대의 사건이 무엇입니까? 눈이 열리고 예수를 보게 되는 일입니다.

- 우리가 기도하면 할수록 예수님의 사랑이 깊이 경험되는 이유는 그분이 귀 기울여 우리의 기도를 경청하는 분이심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경청 습관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경청의 기적을 경험하는 인생을 살기 바랍니다.

- 가족보다 민족보다도 더 높고 더 넓은 가치는 무엇일까요? 성경은 바로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가족관은 바로 이런 하나님의 뜻 위에 서 있었습니다.

- 교회 공동체 내에서의 서로를 위한 기도를 통해 우리는 인생의 문제를 매고 푸는 위대한 경험을 나누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장 교회로 모일 때마다 우리는 우리의 문제를 내어 놓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거기에 임재하시기 때문입니다.

- 고난이 불순종과 반항을 교정하고 우리를 순종의 자리에 반듯하게 세우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받았다고 해서 고난이 면제되지 않는 이유입니다. 아직 우리가 배워야 할 순종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예수님의 생각, 예수님의 태도


예수님의 공생애는 3년입니다.
3년의 공생애 중에서 마지막 날에 일어났던 사례들을 중심으로 예수님의 생각과 예수님의 태도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6:6-13

6. 예수
님이 베다니에 있는 문둥병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
7. 한 여자가 예수님께 값진 향유 한 병을 가지고 와서 식탁에 앉으신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
8. 그러나 제자들은 이것을 보고 분개하여 '무엇 때문에 이렇게 낭비하시오?
9. 이 향유를 비싼 값에 팔아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 수도 있지 않았소?' 하였다.
10. 그러자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왜 그 여자를 괴롭히느냐? 그녀는 나에게 좋은 일을 하였다.
11. 가난
한 사람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나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12. 이 여자는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준비하였다.
13. 내가 분명히 말해 둔다. 세상 어디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한 일도 알려져서 사람들의 기억에 남을 것이다.'

예수님의 생각과 언어 그리고 제자들의 생각과 언어

향유 한 병의 가격은 300데나리온(노동자의 일년치 임금 총액)
제자들 : 이렇게 비싼 것을 왜 순식간에 머리에 부어 허비하느냐?
예수님 : 나에게 좋은 일을 하였다. 나의 장례를 준비한 것으로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가 이 여자의 행한 것이 알려져서 사람들이 기억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생각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여자가 그 비싼 향유 한 병을 예수님의 머리에 붓는 것에 대해서 왜 돈을 낭비하느냐 하며 꾸짖습니다.
생각의 차이가 무엇인가요?

육체적인 환경에 얽매인 제자들
영적인 환경을 바라보는 예수님

신앙생활은 영적 생활입니다.
그렇다면 분명히 육체적인 환경보다는 영적인 환경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주일마다 모여서 예배할 때 불편한 것이 있습니다.
그 불편한 것이 무엇인가요?
숭실학교에서 숭실교회를 담임할 때 주위에서 모두들 학교에서는 교회가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 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첫째는 주차장(학교 운동장)
둘째는 교육관(학교 교실)
셋째는 담임선생님을 매 주일 만날 수 있다(학부모와 담임 선생의 신앙적인 만남)

그런데 안된다는 생각이 1년이 지나면서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경신학교 교목, 정신여고 교목 등 기독교 학교 교목들이 주일이면 예배 때에 방문하여 숭실학교에서 교회가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찾고자 합니다.
그 이후에 학원교회가 활발하게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뉴욕에서 파트리스교회가 될 수 있는 이유와 될 수 없는 이유를 살펴봅시다.
그리고 될 수 있는 장점을 부각시켜 이제부터 주일 예배를 부흥하도록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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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이 저지르는 잘못 중에서 가장 큰 잘못은       
 그 잘못으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할 때이다.
  - 존 포웰 


제가 주일학교에 다닐 때 자주 부르던 어린이 찬송 중에 "예수님의 마음"이란 찬송을 소개합니다.

1.
예수님의 마음은 고요한 연못
달밤에 벌어지는 연꽃잎처럼
우리들을 다정히 불러 주어요
우리들을 다정히 불러 주어요

2.
예수님의 마음은 높은 하늘
봄 하늘 노래하는 종달새처럼
원수들도 모두 다 품어 주어요
원수들도 모두 다 풀어 주어요

3.
예수님의 마음은 깊은 바다
값 비싼 보배들이 가득함 같이
기쁨으로 내 소원들어 주셔요
기쁨으로 내 소원들어 주셔요

빌립보서에서 사용한 "마음(φρονέω 스트롱번호 5426)"이란 헬라 단어를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마음 / 프로네오(φρονέω) 

1. 생각하다,  2. ~에 몹시 마음을 두다,  3. 생각을 가지다

발음 / 프로네오(phrŏnĕō)
어원 / 미완료 ἐφρόνουν, 미래 φρονήσω, 제1 부정과거 ἐφρόνησα, 542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생각하다(롬 8:5, 빌 1:7, 골 3:2), 여기다(롬 14:6), 뜻이 같게 하다(롬 15:5), (서로에게) 마음을 기울이다(롬 12:16, 빌 2:2, 5), [명] 사상(행 28:22)|
신약 성경 / 26회 사용
1. 동사  :  생각하다, 의견을 가지다, 판단하다, 롬 12:3, 고전 13:11, 빌 1:7
2. 동사  : ~에 몹시 마음을 두다, ~에 전념하다, ~에 몰두하다, 롬 12:16, 빌 3:16, 골 3:2
3. 동사 : 생각을 가지다, 태도를 가지다, 빌 2:5.

빌립보서 2장 5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라고 할 때 마음이란 "생각을 가지다" 또는 "태도를 가지다" 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입니다.

영어 성경에서도 "이 마음"을 "attitude" 라고 하여 "태도" "자세"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마음이란

첫째는 예수님의 생각을 갖는 것
둘째는 예수님의 태도를 따라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생각과 예수님의 태도를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마태복음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Take my yoke upon you and learn from me, for I am gentle and humble in heart, and you will find rest for your souls.

예수님의 마음은 온유한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겸손한 마음입니다.
오늘은 온유한 마음에 대해서 소개합니다.

온유(溫柔)(4235) 프라오스(πρᾶος)
겸손(謙遜)(5011) 타페이노스(ταπεινός)

온유(溫柔)(4235) πρᾶος

1. 4239의 한 형태 : 온화한
2. 겸손한
3. 온유한

발음 / 프라오스(praŏs)

관련 성경 / 온유한(마 11:29).
신약 성경 / 4회 사용
* 형용사 4239의 한 형태 : 온화한, 겸손한, 온유한, 마태복음 11:29.

겸손(謙遜)(5011) ταπεινός

1. 낮은 지위의
2. 비굴한
3. 겸손한

발음 / 타페이노스(tapĕinŏs)

어원 / 불확실한 어원에서 파생
관련 성경 / 겸손한(마 11:29, 약 4:6, 벧전 5:6), 비천한 (눅 1:52, 고후 7:6), 낮은(롬 12:16, 약 1:9), 유순한(고후 10:1) 
신약 성경 / 8회 사용
* 형용사 - 낮은 지위의, 천한, 보잘것없는, 눅 1: 52, 롬 12:16, 고후 7:6, 약 1:9


온유(溫柔) : 따뜻할 온(溫), 부드러울 유(柔)
- 온화하고 유순함

gentle : 부드러운, 온순한, 친절한, 다정한, 점잖은

민수기 12: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Now Moses was a very humble man, more humble than anyone else on the face of the earth.

온유에 대한 세 가지 신앙적 자세

첫째는 자기 자신에 대한 온유
둘째는 이웃에 대한 온유
셋째는 하나님에 대한 온유


첫째는 자기 자신에 대한 온유

자기 자신에 대한 온유는 "절제(節制)"에 의한 통제를 말합니다.
- 알맞게 조절함
- 방종(放縱)하지 않도록 자기(自己)의 욕망(欲望)을 이성(理性)으로써 제어(制御ㆍ制馭)함. 


둘째는 이웃에 대한 온유

이웃에 대한 온유는 "사랑(愛)"으로 표현됩니다.

애(愛)자는 ‘사랑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愛자는 爫(손톱 조),  冖(덮을 멱), 心(마음 심) , 夊(천천히 걸을 쇠) 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러나 금문에 나온 愛자를 보면 단순히 旡(목맬 기)자와 心(마음 심)자가  결합한 형태였다.
이것은 사람의 가슴 부위에 심장을 그린 것이다.
그러니까 금문에서는 사람의 가슴에 심장이 들어가 있는 모습을 그려져 ‘사랑하다’를 표현했다.
이러한 모습이 변하면서 소전에서는 마치 손으로 심장을 감싸 안은 것과 같은 형태가 되었다.

셋째는 하나님에 대한 온유

하나님에 대한 온유는 "감사(感謝)"하는 것입니다.

느낄 감(感), 사례할 사(謝)

1. 고마움
2. 고맙게 여김
3. 고맙게 여기고 사례(謝禮)함.

감사무지(感謝無地) : 무한(無限)히 감사(感謝)함.

감사만만(感謝萬萬) :  대단히 감사(感謝)함. 너무나 감사하여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음

온유에 대한 세 가지 신앙적인 자세를 좀 더 구체적으로 소개합니다.


첫째는 자기 자신에 대한 온유(누가복음 18:13)

자기 자신에 대한 온유를 누가복음 18:9-14에 등장하는 바리새인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에서 살펴봅니다.
바리새인도 기도하였고 세리도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의 기도보다 세리의 기도에 대하여 들으시고 세리가 바리새인 보다 더 의롭다고 하셨습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를 들어봅시다(18:11-12).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기도하는 내용에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비교의 대상이 잘못되었습니다.

세리의 기도를 들어봅시다(18: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온유는 자기의 의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온유는 자기를 자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둘째는 이웃에 대한 온유(마태복음 22:39)

이웃에 대한 온유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말씀에서 확인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다른 사람에 대한 온유라고 하겠습니다.



셋째는 하나님에 대한 온유

하나님에 대한 온유는 원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원망은 감사하는 것으로 든든하게 세워 갈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 5:9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밖에 서 계시니라.
Don't grumble against each other, brothers, or you will be judged. The Judge is standing at the door.

하나님에 대한 온유를 믿음으로 잘 표현한 인물은 "욥" 이라고 하겠습니다.

욥기 2:7-9
사단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게 한지라.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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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수정 / 08-22-2022(월)

빌립보서에서 사용한 "마음(φρονέω 스트롱번호 5426)"이란 헬라 단어를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마음 / 프로네오(φρονέω) 

1. 생각하다,  2. ~에 몹시 마음을 두다,  3. 생각을 가지다

발음 / 프로네오(phrŏnĕō)
어원 / 미완료 ἐφρόνουν, 미래 φρονήσω, 제1 부정과거 ἐφρόνησα, 542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생각하다(롬 8:5, 빌 1:7, 골 3:2), 여기다(롬 14:6), 뜻이 같게 하다(롬 15:5), (서로에게) 마음을 기울이다(롬 12:16, 빌 2:2, 5), [명] 사상(행 28:22)|
신약 성경 / 26회 사용
1.  동사  :  생각하다, 의견을 가지다, 판단하다, 롬 12:3, 고전 13:11, 빌 1:7
2. 동사  : ~에 몹시 마음을 두다, ~에 전념하다, ~에 몰두하다, 롬 12:16, 빌 3:16, 골 3:2
3. 동사 : 생각을 가지다, 태도를 가지다, 빌 2:5.
빌립보서 2장 5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라고 할 때 마음이란 "생각을 가지다" 또는 "태도를 가지다" 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입니다.

영어 성경에서도 "이 마음"을 "attitude" 라고 하여 "태도" "자세"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마음이란

첫째는 예수님의 생각을 갖는 것
둘째는 예수님의 태도를 따라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빌립보서의 본문을 묵상하면서 깨닫는 것은 한글 번역은 "마음"이지만 헬라어 성경에서는 "태도" 또는 "생각"이라고 하지요.
성경의 원문에 충실하려면 설교 제목은 "예수님의 마음" 이라고 하였으나 "예수님의 태도" 또는 "예수님의 생각"이 더 좋을 듯합니다.
이러한 원문 배경에 따라 "예수님의 태도"
'태도'는 생각, 언어, 행동, 습관으로 나타난다는 것으로 발전시켜서 설교 내용을 수정하려고 합니다.

윌리엄 제임스 (William James)

윌리엄 제임스는 미국의 철학자, 심리학자이다. 프래그머티즘 철학의 확립자로 알려졌다.
철학· 종교학· 심리학 등에 뛰어난 연구를 많이 남겼다.
1855년에서 1860년까지 유럽의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영국, 프랑스, 스위스, 독일에서 생활하면서 유럽 문물을 만났다.

If you change your mind and your language changes.
If you change the language and your behavior changes.
If you change your behavior and your habits change.
Changing habits changes fate.

생각을 바꾸면 언어가 바뀌고
언어를 바꾸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을 바꾸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을 바꾸면 운명이 바뀐다.

이러한 배경에서 설교 내용을 긴급하게 수정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생각, 태도)


 1. 예수님의 생각 -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좋았을 뻔하였느니라(마태복음 26:2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 8:6)

- 골로새서 3:2 /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2. 예수님의 언어 -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한복음 21:15, 16, 17)


 3. 예수님의 행동 - 충동적인 행동을 삼가라(마태복음 26:51-52)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에 하나가 손을 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4. 예수님의 습관 - 규칙적인 기도 생활(누가복음 22:39)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

 5. 예수님의 운명 - 하나님의 뜻대로 하옵소서(마태복음 26:39, 마가복음 14:36)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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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6:6-13

6. 예수
님이 베다니에 있는 문둥병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
7. 한 여자가 예수님께 값진 향유 한 병을 가지고 와서 식탁에 앉으신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
8. 그러나 제자들은 이것을 보고 분개하여 '무엇 때문에 이렇게 낭비하시오?
9. 이 향유를 비싼 값에 팔아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 수도 있지 않았소?' 하였다.
10. 그러자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왜 그 여자를 괴롭히느냐? 그녀는 나에게 좋은 일을 하였다.
11. 가난
한 사람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나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12. 이 여자는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준비하였다.
13. 내가 분명히 말해 둔다. 세상 어디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한 일도 알려져서 사람들의 기억에 남을 것이다.'

예수님의 생각과 언어 그리고 제자들의 생각과 언어

향유 한 병의 가격은 300데나리온(노동자의 일년치 임금 총액)
제자들 : 이렇게 비싼 것을 왜 순식간에 머리에 부어 허비하느냐?
예수님 : 나에게 좋은 일을 하였다. 나의 장례를 준비한 것으로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가 이 여자의 행한 것이 알려져서 사람들이 기억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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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는 이렇게 말했다.
앙브루아즈 폴 투생 쥘 발레리(Ambroise Paul Toussaint Jules Valéry)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사는 대로 생각하는 수동적인 삶
사는 대로 생각하는 것과, 생각하는 대로 사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사는 대로 생각하는 사람은 수동적인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주어진 환경의 지배를 받으면서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생각하는 대로 살아가는 능동적인 삶
생각하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다르다.
이 사람은 능동적인 삶을 산다.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고, 그 환경을 뛰어넘는다.
더 나은 삶을 생각하고 살아가기에, 오늘을 살아가는 삶의 자세와 태도가 다르다.

지금 이 시대는 생각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애플은 아이폰으로 세상을 완전히 바꾸어버린 기업이다.
애플의 성공 요인 중 하나가 ‘Think different’이다.
잡스의 남과 다른 생각이 세상을 바꾼 것이다.

빌 게이츠는 세계 최고의 갑부이자 가장 존경받는 비즈니스 리더이다.
IT혁명의 기수요 디지털 제국의 제왕이다.
오늘날 전 세계 컴퓨터의 90%가 빌 게이츠가 세운 마이크로소프트 운영체계를 사용하고 있다.

그가 구상하고 제시하는 미래상은, 얼마 안 가 우리의 현실이 되곤 한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다름 아닌 빌 게이츠의 홀로 있는 시간이었다.

빌 게이츠는 일 년에 두 번씩 미국 서북부 지역 작은 별장에 일주일 간 칩거하며 ‘생각 주간(Think Week)’을 갖는다.
빌 게이츠의 ‘생각 주간’은 지난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단지 마이크로 소프트사의 생존뿐 아니라 디지털 세계를 리드하게 하는 '힘의 근원, 전략의 원천'이 되어 왔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 생각의 중요성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평범한 생각이 아니라, 남다른 생각이 중요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생각이 아니라 창의적인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문제는 남다른 생각, 창의적인 생각은 그저 하고 싶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김용규 선생이 쓴 <생각의 시대>이다.

저자는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과 튀빙겐 대학에서 서양문명의 두 기둥인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정통 인문학자다.
그는 그동안 풍부한 인문학적 지식과 깊이 있는 성찰을 바탕으로 다양한 대중적 철학서와 인문교양서, 그리고 ‘지식소설’을 집필해왔다.

결코 쉽지 않은 주제들도 그의 글쓰기를 거치면 친절하고 맛깔스럽게 바뀌기 때문에, 독자들은 그런 그를 가리켜 ‘인문학의 연금술사’, ‘한국의 옴베르토 에코’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 저자가 ‘생각’에 주목했다.
저자는 이 시대 사람들이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을 잃어버렸다고 말한다.
그래서 지금 길을 잃고 당황하며 서성이고 있다는 것이다.

과연 해법은 없는 것일까?
저자는 해법이 의외로 단순하다고 말한다.
기원전 8세기부터 5세기까지 고대 그리스도인들에게 보편적이고 거시적이며 합리적인 사유 능력을 제공해 주었던 생각의 도구들과, 이후 지난 2,500년 동안 누적된 지식을 만들어 온 시원적인 도구를 찾아내면 된다는 것이다.

1. 은유 : 다른 모든 생각들의 원천
2. 원리 : 자연과 사회 관찰과 추론
3. 문장 : 언어적 논리와 설득 핵심
4. 숫자 : 합리적 패턴 이해와 조종
5. 수사 : 가장 강력한 설득의 수단

그것을 찾아내 스스로 익혀 활용하고 아이들에게 교육하면 된다는 것이다.
‘축의 시대(die Achscenzeit)’에 호메로스와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이 개발한 5가지 생각의 도구를 기록하고 있다.

첫째, 메타포라(metaphora, 은유)

은유는 인간의 사고와 언어, 그리고 학문과 예술을 구성하는 가장 원초적이고 근본적인 도구다. 보다 자극적으로 표현하자면, 은유 없이는 우리의 사고도, 언어도, 학문도, 예술도 불가능하다. 은유는 첫 번째 생각의 도구이자 다른 생각의 도구들의 근간이다.

은유는 생각이지만, 다른 모든 생각들을 만드는 생각이다. 은유는 유사성을 통해 ‘보편성’을, 비유사성을 통해 ‘창의성’을 드러내는 천재적인 생각의 도구이다. 한 마디로 은유는 새로운 생각을 창조하는 도구이다.

둘째, 아르케(arche, 원리)

원리는 인간이 그것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 구성하고 조종하거나 지배할 수 있게 하는 생각의 도구다. 또한 인간이 당면한 크고 작은 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할 수 있게 하는 생각의 도구이기도 하다.

원리는 자연과 사회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관찰하고, 그 관찰 결과를 사고하고 추론하여 만들어진다. 그 결과가 자연과 사회에서 일어나는 사실 또한 변화에 맞아 떨어질 때 비로소 완성된다. 원리는 곧 미래를 예측하는 힘을 가져다주는 도구이다.

셋째, 로고스(logos, 문장)

문장이라는 생각의 도구는 적어도 지난 2,500년 동안 서양 문명을 깎고 다듬어 왔으며, 서구인들의 정신까지도 만들어 왔다. 문장은 생각을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다시 말해 이성적으로 전개할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이고 효율적인 도구다.

사람은 은유를 통해 창의력을 키울 수 있다. 그러나 논리력을 향상시킬 수는 없다. 오직 문장을 통해 논리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 설득력의 핵심인 언어적 논리력은 오직 문장을 통해 획득할 수 있다.

넷째, 아리모스(arithmos, 수)

수는 하나의 강력하고 매혹적인 생각의 도구다. 원리와 마찬가지로 숫자도 합리적인 패턴으로 드러나게 하여, 그것을 이해하고 조종한다.

수 없이는 인간은 정상적인 사고도 언어도 거의 불가능하다. 우리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수를 통해 사고하고 대화하며, 가정생활부터 직장생활에 이르기까지 온통 수에 둘러싸여 있다. 단지 공기가 그렇듯, 느끼지 못할 뿐이다.

만일 인류가 수라는 생각의 도구를 개발하지 못했다면, 오늘날 일상생활은 물론이고 인문학을 제외한 거의 모든 학문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인간의 사고는 극히 제한되었을 것이며, 현대 문명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다.

다섯째, 레토리케(rhetorike, 수사)

수사는 가장 강력한 설득 수단이었다. 초기의 수사는 너나할 것 없이 마사여구를 사용한 ‘감동시키기’였다. 오늘날 학자들은 이런 수사를 ‘문예적 수사’라고 하는데, 그것이 기원전 8세기 호메르스 이후 지금까지 부단히 이어졌다. 지금도 수사라고 하면, 현란한 문학적 표현을 먼저 머리에 떠올리는 이유다.

그러나 기원전 5세기 프로타고라스, 고르기아스, 히피아스와 같은 소피스트들이 적극적으로 개발한 이래, 수사는 단순한 문학적 기예가 아니라 설득의 도구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만들어놓은 생각의 도구들
인간은 그것들을 다시 발견했을 뿐
예수님, 고정관념 넘어 도구들 사용

저자는 인류가 탄생시킨 모든 문명이 5가지 ‘생각의 도구’들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말한다. 그런데 우리가 이 책을 꼭 읽어야 하는 것은, 저자가 단지 생각의 5가지 도구만을 설명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그 생각의 도구들을 활용해 새로운 생각들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 실제적 방법들을 제시하고 있다. 이 실제적인 방법인 궁금한가? 이 책을 사서 읽기를 바란다.

생각의 도구들은 실제로 하나님께서 이미 이 세상 가운데 만들어 놓으신 것이다. 그것을 인간이 발견한 것뿐이다.

예수님은 이 땅 가운데 사역하시면서, 이 생각의 도구를 다 사용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의 생각은 고정관념을 뛰어넘으셨다.
시대를 뛰어넘으셨다.

지금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생각은 예수님의 생각이다.
생각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시대를 이끌 수 없다.
예수님의 생각으로 생각하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시대를 이끌어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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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사람 사이에  생각의 차이는 매우 클 것은 분명하다.
부모와 자식간에 생각 차이 만큼 될까요?
자식이 어릴 때는 차이가 크겠지만 부모가 나이들면 자식이 더 지혜로울 수 있게 되니 부모와 자식간의 생각 차이로 하나님과 사람의 생각 차이를 비교하는것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사야서 55:8-9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 차이

첫째는예수님께서 떡 7개로 4천명을 먹이신 후 배를 타고 이동중인데 제자들이 떡이 하나밖에 없다고 수근거립니다.
떡 이야기를 들으시며 예수님께서 떡 만드는데 쓰이는 누룩이라는 단어를 인용하여 가르침을 주십니다.

마가복음 8:15
‘예수께서 경고하여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록을 주의하라 하시니. 

예수님께서 조심하라는 것은  바리새인의 형식주의, 외식하는 신앙, 위선, 독선을 조심하라는 것이요, 헤롯의 누룩이란, 헤롯왕이 로마권력에 아부하여 유대인 혈통도 아니면서 유대 왕이 되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환심을 사려고 믿음도 없으면서 헤롯성전을 짓고, 음란한 삶을 사는, 이런 껍데기 신앙 세속적인 신앙을 경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영혼 구원을 위해 영의 말씀’을 주시는데 제자들은 ‘세상적 생각으로 예수님이 떡이 없어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구나’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혀 깨닫지 못합니다.
생각의 차이가 하늘과 땅의 차이가 아니라 비교자체가 안됩니다.

둘째는 예수님과 베드로의 생각을 비교

마가복음 8: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서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예수님께서는 인류에게 구원을 주시려고 십자가의 고난과 사흘만에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이해 할 턱이 없는 베드로는 ‘그리하지 마옵소서’ 합니다.
사람의 생각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야단을 치십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생각은 너무나 차이가 많아서 비교를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 55:9) 

이는 바로 영과 육의 차이에 해당됩니다.

영과 육의 차이를 로마서 8장 6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즉, 사람의 생각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생각은 생명이니

셋째는 하나님의 생각을 사람이 잘 헤아린 경우

불뱀과 놋뱀 사건 잘 아시지요?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광야를 다니다가 힘드니까 모세에게 불평합니다.
이에 진노하신 하나님께서 불뱀을 보내어 많은 사람이 죽으니까  그제서야 백성들이 범죄함을 회개했고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기도를 듣고 놋뱀을 장대에 매달아 보는 자마다 살아나게 합니다

그 사건 후 장대에 매달린 놋뱀은 귀중한 성물(聖物, Holy thing)이 되었고 이때부터 사람들이 모세의 놋뱀을 향해 분향합니다.

세월이 흘러 솔로몬이 혼인정책으로 지방 각처에서, 세계 각국에서 모두 1,000명에 달하는 부인을 맞이함으로 인해 이 여자들이 가지고 들어온 잡신들로 온 이스라엘에 우상숭배가 넘치게 됩니다.

하나님의 경고가 솔로몬에게 2번이나 있었지만 계속 범죄함으로 결국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분단되고 분단 후에도 하나님께 계속 범죄함으로 하나님은 북 이스라엘을 앗수르로 하여금 패망케 합니다.

홀로 남은 남 유다에서도 우상숭배가 만연하다가 히스기야가 왕이 되면서 대대적인 종교개혁을 단행, 전국에 산당을 부수고 아세라 목상을 불에 태웁니다.

그런데 종교개혁에 상상을 초월한 일이 벌어집니다.
모세 이후 570년 넘도록 조상들이 귀히 모시며 경배 분향하던 유물 '모세의 놋뱀'을 우상이라고 부수어 없앱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하기 위해서.....

어떻게 감히 모세가 남긴 성물,  조상 대대로 섬기던 성물을 없앨 수 있을까요?
사람의 생각으로는 없앨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히스기야를 감동시켜 역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뜻으로 알고 이에 순종하여  놋뱀을 부수고 산당을 없애니 하나님께서 이렇게 좋아하십니다.

열왕기하 18:7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매 그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였더라.

히스기야는 북이스라엘을 멸망시켰던 앗수르(앗시리아) 대군의 침공을 받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대승을 거두고 나라를 구합니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매 그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였더라’이는 우리 믿는 자들의 소망입니다.
히스기야 왕처럼 하나님의 생각과 합한 자가 되어 위와 같이 복받는 자가 모두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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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단 찬송 85장 구주를 생각만해도


'예수 찬미'로 알려진 라틴 찬송가는 11-12세기에 걸쳐 활약했던 수도사, 성자 클레르보의 베르나르(1101-1153)에 의해서 작사 되었다고 전해지는데, 본 찬송이 그의 시와 많은 유사점이 있으나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12세기 말엽에 쓴 찬송시 192행의 라틴어 시 '예수의 이름에 부치는 노래'에서 발췌하여 영역한 청초한 향취를 풍겨주는 찬송시이다. 

영국 태생의 성직자이며 찬송 작가인 에드워드 케스윌(1814-1878)이 부분적으로 발췌하여 번역한 것이라고 한다. 

베르나르는 깊은 묵상을 통하여 하나님과 교제 나누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간혹 신비주의자라고 불리기도 했다.  이 곳에도 그러한 분위기가 나타나 있지만 위대한 설교자요 뛰어난 신학자요 현명한 조언자였던 중세의 성자였다.  그는 그 당시 어느 누구보다도 가장 실천적인 신앙인이었다.  라틴어로 된 원제목은 '아름다운 예수에 대한 묵상이 내 맘에 참 기쁨을 주네'이다.  역사상 수많은 영혼들이 이 찬송을 부르며 위로를 얻었다. 

「찬송 속의 그리스도」(Christ in the Song)의 저자 샤프 박사는 이 찬송시를 가리켜 "중세 시대의 찬송 중에서 가장 복음적이고 아름다운 찬송"이라고 격찬했다.  이 찬송시가 쓰일 당시는 교회의 암흑기였다.  그 당시 중세 교회는 세속에 물들어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매우 타락한 상태에 있었다.  이 곡은 그렇게 어두운 상황 속에서도 항상 구주만을 생각하며 회개하고, 기쁨과 소망을 찾았던 작시자의 간증적 고백이다. 

♣ 작곡

존 바커스 다이크스(Dykes, Jhon Bacchus. 1823-1876).  목사이며 저명한 교회음악가이다.  영국 힐 태생의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남다른 음악적 재능을 보였다.  열살 때에 그는 할아버지가 목사로 시무하고 있던 교회에서 오르간을 연주하였다.  그는 웨이크필드와 케임브리지에 있는 성 캐더린 대학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1847년에 대학을 졸업한 후 부제로 서품되었고 그후 요크셔의 휠튼 성당의 사제가 되었으며, 2년 뒤에는 덜햄의 사제로 임명되었다.  얼마 뒤에 그곳 성당의 선창지가 되었고, 1861년에 덜햄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다음 해에 덜햄에 있는 성오스왈드 교회의 대리 사제가 되었으며 여생을 그곳에서 시무하였다.  

그는 빅토리아 시대의 찬송가 자곡자들 중에서 제일인자였는데 그의 곡들은 <고대와 현대의 찬송가들>이라는 책을 통해서 미국에 소개된 후 100년 이상 대부분의 주요한 교파들에서 찬송가로 선정되어 애창되고 있다.  다이크스는 대중적인 스타일로 대충의 취향에 맞게 작곡을 하였기 때문에 그의 찬송가들은 일반 신도들에 의해서 애창되고 있다. 

그가 작곡한 <성 아그네스>(St. Agnes) 외 500편의 찬송곡을 썼으며 통속적 가곡에 바탕을 둔 새로운 찬미곡을 쓰기도 했다.  그는 현재까지도 빅토리아 풍의 작곡가 가운데 최고봉의 위치를 점하고 있다.

통일찬송가에 본 곡 외에 9장(거룩 거룩 거룩) 59장(성전을 떠나가기 전) 81장(귀하신 주의 이름은) 129장(오 젊고 용감하신) 140장(성도들아 다 나아와) 429장(내 갈길 멀고 밤은 깊은데) 477장(바다에 놀이 치는 때) 508장(주와 같이 되기를) 등이 실려 있다.   


◈ 영국의 성 마리아 교회 토머스 싱 목사는 1882년 10월 22일 70세의 나이로 임종을 맞이했다. 
그는 곁에 서서 임종을 지켜보는 젊은 목사에게 바로 이 찬송을 불러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그도 간절한 마음으로 온 힘을 다하여 따라 불렀다.  마지막 아멘이 끝나자 마자 그는 평안하고 기쁨에 찬 얼굴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주 얼굴 뵈올 때'의 기쁨이 그의 얼굴에 그림자 되어 남아 있었던 것이다. 

♣ 가사 해설

예수님의 구속의 사랑에 접하여 새로 지음을 받은 영들의 입술에 쉬임없이 불려지는 '예수의 성호'는 그대로 인류의 빛이여, 사랑이요, 생명이여, 소망이여, 기쁨의 이름인 것이다. 
이는 우리가 '예수'라는 두 자의 이름 안에서만 우리의 가장 귀한 첫 전부를 찾을 수 있고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에게 예수란 이름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땅속의 지극히 작은 미생물의 가치보다도 더 보잘 것 없는 암흑의 생령들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생각할 때에 우리의  가슴이 쉬임없이 북바쳐 오르며 샘줄기같이 끓어오르는 감사와 기쁨과 감격으로 뜨겁게 되는 것이다.   

요한복음 10장 10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온 것을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찬송에서 한 가지 좋은 것과 더 좋은 것을 노래함은 대체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다 귀하심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예수가 귀하다 할지라도 사랑 없는 구주란 기쁨이 될 수 없다.

이 찬송가는 본래 나틴어로 씌여진 장시 '예수의 이름에 부치는 노래'에서 각 부분을 발췌하여 가사로 만든 것이다. 
그 내용은 주님과 대면하게 될 그때 누릴 기쁨에 대한 소망(1절),
출중한 이름 예수에 대한 송축(2절),
주님께서 참으로 회개하는 자에게 소망이 되심(3절),
체험으로만 알게 되는 주님의 사랑(4절),
영원한 기쁨과 영광이 되어 달라는 주님을 향한 간구(5절) 등으로 되어 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가 오래 계속되면 될수록 그분께 대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더욱 깊어짐을 잘 보여준다. 

'소망' (3) - 소망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과 맺으신 언약에 근거한다. 소망으로 인하여 믿음이 견고해진다. 

'기쁨' (5) - 기쁨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따라서 참된 기쁨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위에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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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주를 생각만 해도

♣ 작사,

이 '예수 찬미'로 알려진 라틴 찬송가는 11-12세기에 걸쳐 활약했던 수도사, 성자 클레르보의 베르나르(1101-1153)에 의해서 작사 되었다고 전해지는데, 본 찬송이 그의 시와 많은 유사점이 있으나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12세기 말엽에 쓴 찬송시 192행의 라틴어 시 '예수의 이름에 부치는 노래'에서 발췌하여 영역한 청초한 향취를 풍겨주는 찬송시이다. 

영국 태생의 성직자이며 찬송 작가인 에드워드 케스윌(1814-1878)이 부분적으로 발췌하여 번역한 것이라고 한다. 

베르나르는 깊은 묵상을 통하여 하나님과 교제 나누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간혹 신비주의자라고 불리기도 했다.  이 곳에도 그러한 분위기가 나타나 있지만 위대한 설교자요 뛰어난 신학자요 현명한 조언자였던 중세의 성자였다.  그는 그 당시 어느 누구보다도 가장 실천적인 신앙인이었다.  라틴어로 된 원제목은 '아름다운 예수에 대한 묵상이 내 맘에 참 기쁨을 주네'이다.  역사상 수많은 영혼들이 이 찬송을 부르며 위로를 얻었다. 

「찬송 속의 그리스도」(Christ in the Song)의 저자 샤프 박사는 이 찬송시를 가리켜 "중세 시대의 찬송 중에서 가장 복음적이고 아름다운 찬송"이라고 격찬했다.  이 찬송시가 쓰일 당시는 교회의 암흑기였다.  그 당시 중세 교회는 세속에 물들어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매우 타락한 상태에 있었다.  이 곡은 그렇게 어두운 상황 속에서도 항상 구주만을 생각하며 회개하고, 기쁨과 소망을 찾았던 작시자의 간증적 고백이다. 


♣ 작곡

존 바커스 다이크스(Dykes, Jhon Bacchus. 1823-1876).  목사이며 저명한 교회음악가이다.  영국 힐 태생의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남다른 음악적 재능을 보였다.  열살 때에 그는 할아버지가 목사로 시무하고 있던 교회에서 오르간을 연주하였다.  그는 웨이크필드와 케임브리지에 있는 성 캐더린 대학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1847년에 대학을 졸업한 후 부제로 서품되었고 그후 요크셔의 휠튼 성당의 사제가 되었으며, 2년 뒤에는 덜햄의 사제로 임명되었다.  얼마 뒤에 그곳 성당의 선창지가 되었고, 1861년에 덜햄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다음 해에 덜햄에 있는 성오스왈드 교회의 대리 사제가 되었으며 여생을 그곳에서 시무하였다.  

그는 빅토리아 시대의 찬송가 자곡자들 중에서 제일인자였는데 그의 곡들은 <고대와 현대의 찬송가들>이라는 책을 통해서 미국에 소개된 후 100년 이상 대부분의 주요한 교파들에서 찬송가로 선정되어 애창되고 있다.  다이크스는 대중적인 스타일로 대충의 취향에 맞게 작곡을 하였기 때문에 그의 찬송가들은 일반 신도들에 의해서 애창되고 있다. 

그가 작곡한 <성 아그네스>(St. Agnes) 외 500편의 찬송곡을 썼으며 통속적 가곡에 바탕을 둔 새로운 찬미곡을 쓰기도 했다.  그는 현재까지도 빅토리아 풍의 작곡가 가운데 최고봉의 위치를 점하고 있다.

통일찬송가에 본 곡 외에 9장(거룩 거룩 거룩) 59장(성전을 떠나가기 전) 81장(귀하신 주의 이름은) 129장(오 젊고 용감하신) 140장(성도들아 다 나아와) 429장(내 갈길 멀고 밤은 깊은데) 477장(바다에 놀이 치는 때) 508장(주와 같이 되기를) 등이 실려 있다.   


◈ 영국의 성 마리아 교회 토머스 싱 목사는 1882년 10월 22일 70세의 나이로 임종을 맞이했다.  그는 곁에 서서 임종을 지켜보는 젊은 목사에게 바로 이 찬송을 불러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그도 간절한 마음으로 온 힘을 다하여 따라 불렀다.  마지막 아멘이 끝나자 마자 그는 평안하고 기쁨에 찬 얼굴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주 얼굴 뵈올 때'의 기쁨이 그의 얼굴에 그림자 되어 남아 있었던 것이다. 


♣ 가사 해설

예수님의 구속의 사랑에 접하여 새로 지음을 받은 영들의 입술에 쉬임없이 불려지는 '예수의 성호'는 그대로 인류의 빛이여,사랑이요, 생명이여, 소망이여, 기쁨의 이름인 것이다.  이는 우리가 '예수'라는 두 자의 이름 안에서만 우리의 가장 귀한 첫 전부를 찾을 수 있고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에게 예수란 이름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땅속의 지극히 작은 미생물의 가치보다도 더 보잘 것 없는 암흑의 생령들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생각할 때에 우리의  가슴이 쉬임없이 북바쳐 오르며 샘줄기같이 끓어오르는 감사와 기쁨과 감격으로 뜨겁게 되는 것이다.   

요한복음 10장 10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온 것을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찬송에서 한 가지 좋은 것과 더 좋은 것을 노래함은 대체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다 귀하심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예수가 귀하다 할지라도 사랑 없는 구주란 기쁨이 될 수 없다.

이 찬송가는 본래 나틴어로 씌여진 장시 '예수의 이름에 부치는 노래'에서 각 부분을 발췌하여 가사로 만든 것이다.  그 내용은 주님과 대면하게 될 그때 누릴 기쁨에 대한 소망(1절), 출중한 이름 예수에 대한 송축(2절), 주님께서 참으로 회개하는 자에게 소망이 되심(3절), 체험으로만 알게 되는 주님의 사랑(4절), 영원한 기쁨과 영광이 되어 달라는 주님을 향한 간구(5절) 등으로 되어 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가 오래 계속되면 될수록 그분께 대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더욱 깊어짐을 잘 보여준다. 


'소망' (3) - 소망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과 맺으신 언약에 근거한다. 소망으로 인하여 믿음이 견고해진다. 

'기쁨' (5) - 기쁨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따라서 참된 기쁨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위에 나타난다.

11C 라틴 찬송으로 표기되어있는 이 찬송은 오랫동안 중세의 신비주의자였던 클레아보의 성 베르나르도(St.Bernard of Clairvaux, 1061-1153)가 쓴 시로 전해졌습니다. 그런데 최근 12 C 말엽에 영국의 시인이 쓴 ‘거룩한 예수의 이름’(Jesus, dulcis memoria)이란 제목의 시를 캐스월(Edward Caswall, 1814-1878)이 번역하여 ‘가톨릭 찬송’(lyra Catholica)에 발표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캐스월도 영국의 닐(Niel)박사에 버금가는 찬송가 발전에 지대한 공적을 쌓은 분이지요. 영국 예이틀리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취드웰(Chidwell)과 말보로(Malborough)에서 공부하고, 옥스퍼드의 부래스노스 대학을 졸업한 후 목사안수를 받고 스트라드퍼드에 있는 지하성채교회의 부목사로 시무했습니다. 그는 로마 가톨릭의식에 관해 관심을 갖고 많은 연구를 하였고, 프랑스어로 된 ‘제단교본’(Altar Manual)을 번역 출판 하는 등 활약을 했습니다. 캐스월의 번역은 원작의 내용을 거의 완벽하게 살릴 뿐 아니라 그 시가 아름다워 언어구사 능력이 뛰어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그는 종래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당시 유명한 뉴맨이 이끄는 에드그베이스튼(Edgbaston)의 기도원에 들어가 서 경건한 생활을 하며 자선과 저서에 큰 이바지를 했습니다.

이 찬송 곡인 ST.AGNES는 다익스(John Bacchus Dykes, 1823-1876)가 작곡하여 1866년 그레이(Gray)의 ‘영국교회용 찬송가’(Hymnal for use in the English Church)에 발표했는데, 다익스는 빅토리아 왕조 시대의 최고의 작곡가이지요. ‘거룩 거룩 거룩’(9장)의 작곡가말입니다. 영국의 헐(Hull) 태생으로 열 살 때부터 왕실교회에서 오르간 배우고, 웨이크필드(Wakefield)와 켐브리지의 성 캐트린(St.Catherine) 대학에서 교육을 받은 후 성직자가 되어 더햄(Durham)에서 평생토록 목회를 하면서 300여 편에 이르는 찬송을 작곡했습니다. 우리 찬송가에는 이 찬송을 비롯하여 ‘거룩 거룩 거룩’(9장), ‘성전을 떠나가기 전’(59), ‘귀하신 주의 이름은’(81장), ‘오 젊고 용감하신’(129장), ‘성도들아 다 나아와’(140장), ‘내 갈 길 멀고 밤은 깊은데’(429장), ‘바다에 놀이 치는 때’(477장), ‘주와 같이 되기를’(508장) 등 9장이 실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 3;1)는 말씀이 관련 성구로 표시되어있는데요, “깊이 생각하라”라는 대목이 눈을 끕니다. 보이지 않는 주님을 모실 곳도, 주님과 사랑을 나눌 곳도 우리의 마음이고 보면 생각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생각 없이 예배드리는 이들, 생각 없이 찬송하는 이들에게 이 히브리서 저자는 “깊이”생각하라고 말합니다. 깊이, 깊이...

이 찬송에서 또 재미있는 부분이 있어요. 마디 수를 세어보면 4343, 그러니까 모두 14마디의 불규칙적인 구조를 가지죠. 다른 노래처럼 “내 맘이 좋거든”이나 “얼마나 좋으랴”에서 4마디가 아니고, 1마디 부족한 3마디로 되어있다는 말입니다. 노래할 때 그 점에 유의해야겠고, 이는 “구주를 생각만 해도”는 땅의 숫자인 4마디, “내 맘이 좋거든”은 하늘의 숫자인 3마디, 합하여 완전 수 7마디라 신앙적으로 확대 해석할 수도 있겠지요.

5절의 마지막 “이제와 또한 영원히 영광이 되소서.”는 ‘영광송’(Gloria Patri)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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