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66권, 1189장, 31102절)


성경의 권, 장, 절

66권 - 구약 : 39권           
           신약 : 27권  

1,189장 - 구약 : 929장              
                신약 : 260장

31,102절 - 구약 : 23,145절                  
                  신약 : 7,957절
책이름 장수                 절수


창세기 50 1533
출애굽기 40 1213
레위기 27 859
민수기 36 1288
신명기 34 959
여호수아 24 658
재판관기 21 618
룻기 4 85
사무엘상 31 810
사무엘하 24 695
열왕기상 22 816
열왕기하 25 719
역대기상 29 942
역대기하 36 822
에스라 10 280
느헤미야 13 406
에스더 10 167
욥기 42 1070
시편 150 2461
잠언 31 915
전도서 12 222
솔로몬의 노래 8 117
이사야 66 1292
예레미야 52 1364
예레미야 애가 5 154
에스겔 48 1273
다니엘 12 357
호세아 14 197
요엘 3 73
아모스 9 146
오바댜 1 21
요나 4 48
미카 7 105
나훔 3 47
하박국 3 56
스파냐 3 53
학개 2 38
스카랴 14 211
말라키 4 55
구약 총장.절수 929 23145
마태복음 28 1071
마가복음 16 678
누가복음 24 1151
요한복음 21 879
사도행전 28 1007
로마서 16 433
고린도전서 16 437
고린도후서 13 257
갈라디아서 6 149
에베소서 6 155
빌립보서 4 104
골로새서 4 95
데살로니가전서 5 89
데살로니가후서 3 47
디모데전서 6 113
디모데후서 4 83
디도서 3 46
빌레몬서 1 25
히브리서 13 303
야고보서 5 108
베드로전서 5 105
베드로후서 3 61
요한일서 5 105
요한이서 1 13
요한삼서 1 14
유다서 1 25
요한계시록 22               404 


신약 총 장.절수 260 7957
누계 1189  3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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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장과 절

구약의 장, 절 구분 

1. 열린 문단, 닫힌 문단

구약 히브리어 본문의 장과 절 구분이 있기 전부터 일찍이 쿰란에서 발견된 사본에도 문단 구분이 나타납니다.
마소라 본문 사본을 보면, 시편을 제외한 구약 전체가 문단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두 종류의 문단 구분이 있습니다.
하나는 열린 문단(프툭하, open paragraph)이고 다른 하나는 닫힌 문단(쓰투마, closed paragraph)입니다.

열린 문단이란 완전히 행(行)을 바꾸어서 쓴 새로운 문단을 일컫습니다. 
현대적 의미의 새로운 문단과 같은 것입니다.

닫힌 문단이란 같은 행 안에서 몇 자를 띄어서 새로운 문단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앞 문단과 뒤 새 문단이 행으로 구분되지 않고 몇 자를 띄운 공간으로 구분이 되는 것입니다.

 2. 세다림 (Sedarim)

구약 본문에는 452개의 세다림이 있습니다.
히브리어 쎄데르순서(order), 혹은 차례(sequence)를 일컫는 말입니다.
문단보다는 더 큰 단위로서 단원(section)에 해당합니다. 
팔레스타인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토라를 삼 년에 다 읽도록 매주 읽을 분량을 쎄다림으로 구분하였습니다.

바빌로니아에서는 토라를 일 년에 독파(讀破)하도록 단원을 구분하였는데
이것을 파라쇼트(Parashoth)라고 합니다. 
토라는 모두 54 (혹은 53) 파라쇼트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절 구분은 이미 탈무드 시대부터 알려져 있었습니다.
바빌로니아 전통과 팔레스타인 전통이 약간 다릅니다.
장 구분이 숫자로 표기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경입니다.
장 구분의 체계는 일찍이 스티븐 랭톤(Stephen Lengton 1150-1228)에서 시작되었고, 
이것을 14세기에 라틴어역 불가타가 받아드림으로써 정착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신약의 장, 절 구분

파리의 유명한 인쇄업자 스테파누스(1503-1559)의 '그리스어 신약'에서 처음 장절 구분이 보입니다.
1551년에 제네바에서 나온 스테파누스의 '그리스어 신약' 제 4판은 숫자로 절 구분이 되어 있는 최초의 그리스어 신약으로 유명합니다.

'제네바성서'(1557/1560)는 영어 성서로서는 처음으로 절 구분이 되어 나온 성서입니다.
로버트 에스티엔 (Robert Estienne)이 그의 '그리스어 신약전서'에 적용했던 절 구분을 그대로 따른 것입니다.

개신교 쪽에서는 1535년에 올리베땅(Olivetan)으로 알려진 삐에르 로버트(Pierre Robert)가 성경을 번역하였습니다. 
몇 차례 개정을 거듭하였고, 1546년판을 낼 때에는 칼빈이 서문을 썼습니다.
1553년에 인쇄업자 스테파누스 (Robert Stephanus 일명 Robert Estienne)가 이 번역을
제네바에서 출판할 때 원문에 장과 절을 구분하여 출판하였습니다.

'제네바성서'의 신약은 1557년에 나옵니다.
신.구약전서가 다 번역되어 나온 것은 1560년입니다. 
이것이 로마자로 인쇄되고 절 구분이 된 최초의 영어 성경전서인 '제네바성서' 초판입니다.

장절 구분의 차이의 예

공동번역 성서를 보시면, 출 7:26-8장 끝까지의 장절 구분에 이중의 표기가 있는 것을 확인하실 수있습니다. 
이는 서로 다른 두 가지의 장절 표기 방식을 함께 나타내준 것입니다. 
히브리어 성경과 라틴어 성경의 장절 구분이 다른 것입니다.

절 수의 차이의 예

시편의 경우에는 소제목 부분을 1절로 표시하는 경우와(독일어 루터 성경 참조),
소제목으로 보고 절로 구분하지 않는 경우에(성경전서개역한글판 참조) 따라서 절 수가 달라집니다.

성경 본문이 처음 기록될 당시에는 문장을 구분하는 아무런 체계가 없었습니다.
장을 구분한 최초의 성경은 신약의 경우,
제4세기의 바티칸 사본(codex vaticanus :B)의 가장 자리에 표시되었습니다.
여기에는 마태복음이 170구분, 마가복음이 62구분, 누가복음이 152구분, 요한복음이 50구분으로 되어있습니다. 

또 다른 구분체계는 제5세기의 알렉산드리아 사본(codex alandinus :A)에서 볼 수 있는데
여기에는 마태복음 68, 마가복음 48, 누가복음 83, 요한복음 18구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주의할 것은 어떤 경우에도 첫장이 책 서두에 오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아마 서기관들이 책의 시작부분을 머리말로 생각했기 때문이라 여겨집니다. 

사도행전도 사본에 따라 36, 69, 40, 83 등 여러 장으로 구분되고,
서신들도 여러 부분으로 구분되며, 계시록은 24장로를 따라 24강화로 나누고,
다시 그 각각을 인간의 세 요소를 반영하여 72장으로 구분하기도 했습니다.

구약의 경우는 라틴어역 Valgata에서 비롯됩니다.
이것은 1204-5에 캔터베리대 주교인 스테판 랑톤(Stephan Langton) 이 시도했으며,
그 후 1330년에 나온 솔로몬 벤 이스마엘(Solomon Ben Ishmael)의
히브리어 성경의 일부 필사본(筆寫本)이에 랑톤의 장 표시를 난외(欄外)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쇄본으로 장 표시를 했던 최초의 히브리어 성경은 1517년 7월 10일에 나온 히브리어,
라틴어, 헬라어, 70인역 등의 대역 성경인 Complutension Polyglot 입니다.
그러나 장 표시는 본문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난외에 표기되었습니다.

그 후로 1569-1572년에 베니토 아리아스 몬타노(Benito Arias Montano)가 편집한
Polyglot 에는 인쇄판 성경으로서는 처음으로 본문에 장 구분이 표시되었고,
또한 구약의 장 구분에 아라비아 숫자를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절에 대한 구분

구약 성경의 경우 절 구분은 장 구분보다 앞서서 시행되었습니다.
절 구분의 시직은 히브리어 본문을 회중들 앞에서 낭독하고
그것을 아람어로 통역하던 때부터 비롯된 것으로 알려집니다. 

낭독자는 일정량의 히브리어 본문을 끊어서 낭독했고,
통역관은 그것을 듣고서 아람어로 통역하는 방법이 계속되어 오다가
어느 단계에서 부터 절구분이 확정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낭독과 통역의 분위기를 느 8:1-8에서 볼 수 있습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은 일상생활에서는 아람어를 썼으나,
율법은 히브리어로 쓰여 있었기 때문에 통역관들이 통역을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매 절 끝에 그침표(:)를 붙인 것은 주후 500년경 부터라고 합니다.
하지만 오늘날과 같은 절구분이 MT에 확립된 것은
10세기에 아론 벤 모세 벤 아세르(Aron Ben Moshe Ben Asher)가 편집한 역본부터라고 하며,
총 절수는 5,845절로 되어 있습니다. 

신약성경의 절 구분은 1551년
프랑스의 인쇄업자 로버트 스테파누스(Robert Stephanus)에 의해 표기 되기 시작했으며
현재 까지도 통용되고 있습니다.

우리말 개역성경의 장 절 구분은 MT나 LXX이 아닌 Latin Vulgata를 많이 따르고 있습니다.
(월간 원어성서 9호 .pp165-166)

참고 - MT ; 맛소라 학파(유대인 학자들)에 의한 히브리어 구약성경 
LXX ; 70인경, 구약의 헬라어 역본 
Vulgata ; 신구약 성경의 라틴어 역본. 

성경의 장절(章節 : chapters and verses of Bible)은 처음부터 구분되어 있던 것은 아니다.
현재의 모습으로 장 구분을 한 이는 대체로
영국교회의 켄터베리 대주교였던 랭튼(Stephen Langton)일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한편 스테파누스(Stephanus Robertus)는 신약성경을 절로 구분하여 1551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출판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스테파누스는 파리에서 리용으로 가는 마상(馬上)에서 절을 나누었다고 한다. 
신,구약성경 모두에 장절이 붙여져 처음 출판된 해는 1555년인데,
스테파누스의 라틴역 불가타(Vulgata) 성경이다. 

오늘날의 성경은 1560년판 제네바 성경의 장절 구분을 받아들이고 있다. 
랭튼 (Langton, Stephanus 1150년경-1228. 7. 9 영국신학자, 역사가, 시인.) 
오랫동안 파리에서 신학을 가르치고 또한 성경주석을 집필했다.
불가타역 구약을 장(章)으로 나누었다.
1207년 켄터베리 대주교가 되고,
영국 존왕(John, Lackland ; 1199-1216 재위)의 반대자로 '대헌장'(大憲章 : Magna Carta)의 성립에 관여했다. 
스테파누스 (Stephanus Robertus [프] Etienne Robert 1503-1559 프랑스의 궁정 인쇄 기술자.) 
그의 집안은 아버지 앙리 이래 16∼17세기, 파리 및 제네바에서 인쇄업에 종사했다.
특히 성서의 인쇄로 유명했는데,
1539년 프랑소와 1세의 인쇄사가 되어 1546년에는
그리스어 학자인 아들 앙리(Henri ; 1528/31)의 협력을 얻어 그리스어 신약성경 소책자 2부를 간행했다.
본문(本文)은 주로 에라스무스판 신약본문 제5판(1535)에 의거하고,
콤플루툼판(Gomplutum : 1514)을 참조했다.
1550년에는 인쇄본문사상 큰 역할을 한 대형 호화판(궁정판)으로도 불리는 제3판을 냈다.
이것은 이문자료(異文資料)를 첨부한 최초의 판으로 영국에 있어서
'공인본문'(公認本文 : Textus Receptus)의 근거가 되었다.
그의 성경주해가 소르본느에서 비난을 받게되어 제네바에 도피, 칼빈파로 개종했다.
그해 다시 소책 2부의 본문을 간행했는데, 이것은 장절을 나누어 쓴 최초의 판이다.
그는 이 절분류를 파리에서 리용으로 기마여행(마차여행?)을 하는 가운데 시행했다고 전한다. 

이상을 정리하면

1. 히브리어 성경은 절 구분이 먼저 되었다. 10세기에 아론 벤 아쉐르 때부터 확립되었다.
2. 히브리어 성경 장 구분은 13세기 초에 랭튼이 했다.
3. 헬라어 성경 장 구분은 13세기 초에 랭튼이 했다.
4. 헬라어 성경 절 구분은 16세기에 스테파누스가 말 위에서 했다.
5. 신,구약 성경 모두에 장절이 붙여져 처음 출판된 해는 1555년인데, 스테파누스의 라틴역 불가타(Vulgata) 성경이다. 
6. 오늘날의 성경은 1560년판 제네바 성경의 장절 구분을 받아들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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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장은 구약에서는 시편 23편시편 1편이라고 합니다.
신약에서는 고린도전서 13장이라고 합니다.







NL(자주파 종북주의), PD(평등파 계급투쟁)


NL : National Liberation / 주사파, 자주파 종복주의

PD : People's Democracy / 소련식 공산주의, 평등파 계급주의, 민중민주

PD계열인 조국, NL이 꺼리나…운동권 두 세력 재조명

“운동권의 양축인 NL계와 PD계는 견원지간인데 NL을 대표하는 임종석 비서실장과 PD를 대표하는 조국 민정수석이 화합해 문재인 대통령을 잘 보필할지 의문이다.”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인 2017년 5월 11일 정준길 자유한국당 대변인이 낸 논평이다. 당시 논평에 나온 NL(National Liberationㆍ민족해방)과 PD(People’s Democracyㆍ민중민주)는 80년대 이후 한국 진보 운동의 양대 축이다.

하지만 386 운동권 진영에선 한국사회에 대한 인식, 투쟁 방향, 북한과의 관계설정 등을 놓고 NL과 PD가 심각한 충돌을 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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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L=임종석 우상호 이인영… PD=조국 송영길 심상정…

NL은 한국 사회의 모순이 남북 분단에서 비롯됐다고 봤다. 민족 문제, 통일 투쟁에 중점을 두면서 친북 성향이 강하다. 특히 NL계열의 다수파는 북한의 주체사상을 신봉했기 때문에 ‘주사파’로 불렸다.

반면 PD 계열은 한국 사회 문제의 원인으로 자본주의하에서의 노동-자본 간 계급문제에 주목했다. NL과 달리 북한 정권에 대해서도 일정한 거리를 뒀다.

NL은 80년 광주항쟁 이후 대학가에 몰아닥친 반미운동과 함께 태동했다. 전두환 정권의 배후에 미국이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특히 86년 ‘강철’이라는 필명의 김영환(서울대 법대 82학번)씨가 편지형태의 친북 성향 유인물(일명 강철서신)을 대학가에 배포하면서 운동권에 NL이라는 사조가 빠르게 퍼졌다.

김씨가 결성한 구국학생연맹은 산하조직을 통해 북한의 주체사상을 전파했는데 86년 지도부가 검거돼 와해됐다. 이후 이 조직 노선은 고려대 운동권(안희정 전 충남지사 등)이 주도한 반미청년회를 거쳐 87년 전대협으로 이어졌다.

현 여권에서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을 비롯해 더불어민주당 이인영ㆍ우상호 의원, 오영식·한병도 전 의원 등이 전대협 출신이다. 청와대에선 신동호 연설기록비서관, 윤건영 국정상황실장 등이 NL계로 분류된다. 학생운동에서 NL이 주류였다면 PD는 소수파였다.

PD계열이 창당하면, NL이 이후 당 장악 패턴

NL과 PD는 2000년대 들어 민주노동당, 통합진보당의 운영과정에서도 크게 충돌했다. 민노당은 2000년 노회찬ㆍ심상정 등 PD계가 민노총을 기반으로 민노당을 창당했다.

하지만 이후 NL계가 대거 민노당에 들어와 이석기·이정희 등을 필두로 당권을 장악하면서 PD계와 불화를 빚었다. 이후 두 그룹은 2006년 10월 발생한 일심회 사건으로 갈라섰다. 민노당 중앙위원 등 NL계 간부들이 북한에 정보를 제공한 사건이다.

민노당은 이들에 대한 징계 논의를 했지만, NL계가 국가보안법은 악법이라는 논리를 내세우며 반대했다. 이 사건의 여파로 심상정ㆍ노회찬 등이 탈당해 2008년 진보신당을 만들었다.


통합진보당이 지난 2012월 5월 12일 일산 킨텍스에서 개최한 중앙위원회에서 당권파 당원들이 단상에 난입해 조준호 공동대표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 [중앙포토]

“NL이 조국 방패막이 되길 꺼리나” 음모론도 

이후 2011년 이정희ㆍ이석기 등 민주노동당계와 유시민ㆍ천호선 등 국민참여계, 심상정, 노회찬 등 진보신당 탈당파가 모여 통합진보당을 창당했다. 하지만 통진당 비례대표 부정 선거 의혹에 따른 이석기·김재연 의원 제명처리를 놓고 양측이 대충돌을 벌이면서 다시 PD 진영이 당을 떠났다.

이후 NL이 중심이 된 통진당은 ‘이석기 내란 선동 사건’에 휘말려 헌재로부터 정당 해산 선고를 받았다. 지금은 PD계가 중심이 된 정의당과 NL계가 다수인 민중당으로 나뉘어 진보정당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정치권 주변에선 조국 법무부 장관 사태를 두고도 음모론이 나온다. “PD 계열이 다수인 정의당과 심상정 대표가 조국 장관을 감싸는 게 아니냐”, “NL출신들이 PD계인 조국 장관의 방패막이 되길 꺼리는 것 같다” 등의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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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 : People's Democratic revolution, 민중민주노선

PD는 한국사회의 성격을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로 규정하는데 그 특징이 있다.

정리하자면 노동자-자본가 간의 계급관계를 사회적 기본모순으로 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반미/통일운동보다는 노동자계급의 혁명을 통한 민중민주주의 정권수립을 지향한다.
이념으로써는 Marxism을 사용한다.

하지만, 90년대 접어 들면서 PD 진영에서 '신식민지 국가 독점자본주의 이론'을 폐기하면서, 그 줄기가 사라지게 되고, 현재의 PD는 '좌파'라고 불리게된다.

좌파(PD)는 일부 시민 사회단체에 비주류로 활동하고 있고, 학계에 넓게 퍼져있다.
학생운동 단체로는전국 학생회 협의회, 전국학생연대회의 등이 좌파계열이고, 사회단체는 노동자의 힘, 사회당 등이 있으며, 학계에는 전 서울대교수인 김수행교수, 경기대 정운영교수, 한신대 윤소영 교수등이 대표적인 좌파 학자들로 구분되며, 진보평론이라는 계간지를 통해서 그들의 이론을 소개하고있다.

 NL에 비해 더 강조되는 키워드가 있다면, 평등, 투쟁, 쟁취, 승리 정도가 아닐까 싶다.
 
NL : National Liberation people's democratic revolution , 민족해방노선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 혁명론. PD와는 달리, 한국사회의 주요모순을 한국민중과 미국중심의 제국주의 및 그 예속세력간(현 정치체계상 보수층)의 모순으로 규정하고, 미국의 제국주의를 기반으로하는 식민성을 극복하기 위해 민중이 주체가 되는 혁명을 통해 제국주의 및 그 예속세력을 몰아내고 민주정권을 수립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이론은 북한의 주체사상을 지도이념으로 받아들이고 구체적인 투쟁노선으로 반미자주화·반파쇼민주화·조국통일을 설정한다.  
현재 NL은 주로 사회,시민 단체에 넓게 포진해 있다. 한총련, 전국연합, 민주노총, 민주노동당 등 현재 대부분 진보세력의 주류가 NL로 분류된다.

  NL의 주요 키워드는 민족, 통일, 자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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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地獄)


주일 설교 / 09 - 04 - 2022
성찬예식 주일

지옥(地獄)

지옥(地獄)은 헬라어로 "게엔나(γέεννα)"라고 합니다.

1067. γέεννα, ης, ἡ 

1. 힌놈의 아들들의 골짜기,  2. 예루살렘 남쪽 계곡,  3. 지옥

발음 / 게엔나(gĕĕnna)
어원 / 히브리어 1516과 201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지옥 불(마 5:22, 18:9, 약 3:6), 지옥(마 5:29, 막 9:45, 눅 12:5)
신약 성경 / 12회 사용

야고보서 3:6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불에서 나느니라.
The tongue also is a fire, a world of evil among the parts of the body. It corrupts the whole person, sets the whole course of his life on fire, and is itself set on fire by hell.

야고보서 3장 6절 이외에는 공관복음에서만 나타납니다.
(마 5:22, 29, 10:28, 눅 12:5, 막 9:43, 45)

구약에서 죽은 자의 갈 곳을 "스올()"이라고 합니다.
스올이란 단어가 구약에서 65회 가량 사용되었고 그 중에 54%는 "무덤"으로, 41%는 "음부"로, 4%는 "구멍"으로 번역되었습니다(Bullinger)

스올이란 단어가 구약에서 사용된 실예를 살펴봅시다.
슬픔(창 37:34-35, 42:38, 삼하 22:6, 시 116:3)
침묵(시 31:17, 6:5, 전 9:10)
놀라움(민 16:27, 34)
무지(전 9:5-6, 10)
형벌(민 16:27, 34, 왕상 2:6) 등의 장소로 사용되었습니다.

유대인의 관념에는 죽은 자는 통일적으로 스올에 가서 있다가 부활 때를 기다려 의인들은 낙원으로 옮겨지고 악인들은 그곳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고 봅니다.

스올에 해당하는 신약 헬라어 단어는 "헤데스(ᾅδης)"로서 11회 나타납니다.

86. ᾅδης, ου, ὁ

1. ‘눈에 보이지 않는다’,  2. 지하세계 신의 이름 ‘하데스’,  3. 죽은 자들의 거처

발음 / 하데스(hadēs)
어원 / 1[부정불변사]과 149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음부(마 11:23, 눅 10:15), 사망(고전 15:15, 계 1:18)
신약 성경 / 10회 사용

* 1492. εἴδω

1. 보다,  2. 별을 보다, 3. 눅 7:22

발음 / 에이도(ĕidō)
관련 성경 / 보다(마 2:2, 막 1:10, 요 1:39), 알다(마 2:16, 막 10:42, 요 9:25), 뵙다(마 28:17), 보이다(막 12:15), 당하다(행 2:31, 13:36),
시인하다(딛 1:16), 알리다(눅 2:15), 의논하다(행 15:6) 


그러나 스올이 죽은 자의 통일적으로 가는 곳이며 또한 "음부(陰府)" 혹은 "지옥(地獄이)"의 관념을 갖고 있으나 헤데스는 지옥과 혼돈됨이 없고 동시에 결정적으로 형벌의 장소가 됩니다(행 2:27, 31, 눅 16:23,  마 16:18, 계 1:18 등)

* 음부(陰府) : 그늘 음, 마을 부
- 축복(祝福) 받지 못한 사람이 죽어서 가는 곳

* 지옥(地獄) : 땅 지, 옥 옥
- 1. 중생(衆生)이 자기(自己)가 지은 죄업(罪業)으로 가서 나게 된다는 지하(地下)의 세계(世界)
- 2. 큰 죄인(罪人)으로서 그 죄(罪)의 사함을 얻지 못하고 영벌(永罰)을 받는다는 곳
- 3. 어둡고 추하고 처참(悽慘)한 곳의 비유(比喩ㆍ譬喩)
- 4. 아주 괴로운 지경(地境)

신약에는 "헤데스" 외에 "탈타로스()"라는 단어가 한번 사용되었는데(벧후 2:4), 범죄한 천사(마귀)가 갈 곳이라고 합니다.

스올이란 형벌의 장소가 아니라 죽은 자가 가는 곳으로 "황천(黃泉)" 또는 "저승" 등의 뜻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겠습니다.
그곳에서 악인에게는 형벌의 고통이 있고 의인에게는 더 좋은 부활의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시 16:9-11, 17:15, 사 25:8).

헤데스는 구약의 스올과 상통하면서 결정적으로 형벌의 곳이 되었고 그곳에는 의인들이 거할 곳으로는 "낙원(파라데이소스,)"이란 말이 따로 있다(눅 23:43, 고후 12:4, 계 2:7).
그렇다면 헤데스는 스올의 일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신약에는 이 외에 의인 영원히 살 곳으로 "천국(호 바실레이아 투 우리오우)"와 악인들이 영원한 처소 "지옥"을 보이고 있다.

이와같이 내세관에서도 신약은 구약에 근거해 있으면서도 그것이 명료해지고 완성하여 있다고 하겠다.

사람이 죽으면 의인들은 낙원에서 악인은 음부에서 부활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부활 후에 의인의 영은 변화된 육과 합하여 천국으로 옮겨지고 음부의 영은 부활하여 지옥으로 떨어진다.
음부와 낙원은 영들만 가는 곳이라고 하지만 그곳에서 고통과 즐거움은 겪게 된다(눅 16:23, 고후 12:4).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에 의하면 "의인의 영은 완전히 성결케 되어 최고의 하늘에 영접되어 영광의 빛 가운데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며 완전한 속량을 기다릴 것이다."

지옥(게엔나)은 신약에서 8회 나타나며, 악인의 영육이 이곳에 던지워 영원히 형벌 받는 곳이라고 한다.

지옥(게에 힌노움) : 힌놈의 골짜기(수 18:16)
예루살렘 남쪽에 위치한 골짜기로서 옛날 몰록의 신을 경배하던 곳이었다.
쇠로 만든 몰록 우상을 불로 달군 후 그 팔에다 아이를 안겨 타 죽게 하였던 곳이다(대하 28:3, 33:6).
이러한 배경에서 지옥에서 사람들이 불 가운데서 형벌을 받는 것을 예표하였다.

힌놈 골짜기는 요시야 왕이 이곳을 더럽히고 몰록신 경배를 금지한 곳이었다(왕하 23:10).
장차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심판하실 그림자가 엿 보인다.

힌놈 골짜기는 예루살렘 성내의 쓰레기를 버리는 곳이었다.
쓰레기에 불을 붙여 태우면 쉬지 않고 타므로 지옥은 마치 인간 쓰레기와 같은 악인들이 모여 언제나 꺼지지 않는 불의 형벌을 받는다는 것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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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 10-02-2022 주일 설교 예정


성육신에 관한 설교를 하는 배경

1. 매 주일 신앙고백을 하면서도 고백의 내용을 성경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2. 성육신 사건은 구약의 속죄와 신약의 속죄에 대한 변화가 어떻게 실현되었는지를 알려주는 것이다.
3. 가톨릭교회에서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앙과 개신교회의 마리아에 대한 성경적 이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4. 하나님이 육신의 몸으로 오신다는 것의 의미.

현대 사회에서 성육신 사건은 "욤 키푸르(Yom Kippur)" '대속죄일'과 연관된다.
욤 키푸르가 메시아의 죄값 지불과 하나님 백성의 오늘의 안전을 이해하기 위한 필수적인 배경이 된다.
 

주일 설교 예정 / 08 - 07 - 2022
성찬예식주일(매월 첫번째 주일)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 요한복음 1:14, 로마서 8:3-4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肉身)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居)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榮光)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獨生子)의 영광(榮光)이요 은혜(恩惠)와 진리(眞理)가 충만(充滿)하더라.
The Word became flesh and made his dwelling among us. We have seen his glory, the glory of the One and Only, who came from the Father, full of grace and truth.

로마서 8:3-4
율법(律法)이 육신(肉身)으로 말미암아 연약(軟弱)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罪)를 인(因)하여 자기 아들을 죄(罪) 있는 육신(肉身)의 모양(模樣)으로 보내어 육신(肉身)에 죄(罪)를 정(定)하사. 육신(肉身)을 따르지 않고 그 영(靈)을 따라 행(行)하는 우리에게 율법(律法)의 요구(要求)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For what the law was powerless to do in that it was weakened by the sinful nature, God did by sending his own Son in the likeness of sinful man to be a sin offering. And so he condemned sin in sinful man.
in order that the righteous requirements of the law might be fully met in us, who do not live according to the sinful nature but according to the Spirit.

예배 때마다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합니다.
한국교회에서는 주로 신앙고백을 위하여 사도신조를 사용합니다.(4세기 경)

사도신경에 대한 오해를 바르게 잡아야 한다.
어떤 설교자는 마치 사도신경은 예수님의 12제자들이 한 구절씩 고백한 것을 모두 모아서 편집한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사도신경이라는 것은 사도들의 신앙 고백과 그 내용이 일치하므로 사도신경이라고 부른 것이다.
12사도들이 한 마디씩 작성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사도신조 이외에 니케아신조도 있습니다.(AD 325년)

사도신조에서 성육신에 관한 내용은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반면에 니케아신조에서 성육신에 관한 내용은 "그리고 우리는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분은 하느님의 외아들이시며, 아버지에게서 나셨으며, 곧 아버지의 본질에서 나셨다. 하느님에게서 나신 하느님이시며, 아버지와 본질에서 같으시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용서하는 방법으로 그의 아들을 사람의 몸으로 이 세상에 보내셔야 하셨는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죄를 속하기 위하여 다른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아들을 육체를 갖는 사람으로 세상에 보내신 이유가 무엇인가?

성육신 사건을 구약 레위기 23장 유대인의 7대 명절 중 "대속죄일"에서 살펴보겠습니다.

대속죄일(The Day of Atoinment)은 "욤 키푸르"를 영어로 표현한 것이다.
'키푸르(Kippur)'는 '덮다'는 뜻의 히브리어 '카파르(kaphar)'에서 파생 되었다.
그러므로 속죄의 단순한 의미는 덮개(covering)라고 하겠다.

지난해의 죄를 위한 속죄(덮개)가 욤 키푸르에 있었다.
속죄는 무죄한 가축의 피의 희생으로 구성된다.
하나님은 명하셨다(레위기 17: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덮개)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위기 17:11)
For the life of a creature is in the blood, and I have given it to you to make atonement for yourselves on the altar; it is the blood that makes atonement for one's life.

속죄일은 여섯 번째 절기로 가을에 있는 절기이다.
히브리력으로 일곱 번째인 티쉬리월 10일 이며 대략 9월이나 10월에 해당한다.
속죄일은 다른 두 개의 주요한 절기인 티쉬리월 1일의 나팔절(로쉬 하샤나)과  티쉬리월 15일에 시작하는 초막절 사이에 지킨다.

욤 키푸르의 성경 규례는 세 구절에 나타난다.

대제사장(레위기 16장)
백성(레위기 23:26-32)
희생 제물(민수기 29:7-11)

욤 키푸르의 중요성

욤 키푸르를 종종 '그 날' 이라고도 부른다.
욤 키푸르는 "너는 네 영혼을 스스로 괴롭게 하라"는 말이다(레위기 23:27, 32).
사람들은 이것을 금식으로 히해하였다(에스라  8:21)

때에 내가 아하와강 가에서 금식을 선포하고 우리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여 우리와 우리 어린것과 모든 소유를 위하여 평탄한 을 그에게 간구하였으니.

욤 키푸르 날에 금식하지 않는 백성은 "그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 이라고 하였다(레위기 23:29).

적용(適用)

1. 피의 필요성, 죄의 속죄가 오직 피로 이루어 진다(레위기 17:11)
- 육체생명에 있음이라 내가 이 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에 있으므로 가 죄를 속하느니라.

2. 신약에서도 동의한다(히브리서 9:22)
-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로써 정결케 되나니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새언약(新言約)

1. 진정한 용서와 진정한 안전
2. 새 언약은 죄에 대한 진정한 용서와 정결함을 제공하기 때문에 옛 언약을 능가한다.
3. 예수님의 죽음을 통한 희생은 영원하고 완전하고 충분하다(히브리서 7:27, 9:12, 25-28)
4. 옛 언약의 제물은 죄를 덮을 뿐이다(히브리서 10:4)
5. 새 언약의 어린 양은 죄를 제거하신다(요한복음 1:29)

결론(結論)


1. 양각 나팔 소리는 이스라엘을 회개로 초청하지만 현대의 유대교에는 속죄가 없다.
2. 피의 제사도 없고, 성전도 없으며, 제사장도, 례위인의 규례를 고수하는 것도 없다.
3. 유대인의 가슴속에는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용서를 받고 싶은 갈망이 있다.
4. 그러나 미쯔봇(mitzvot, 선행)이나 사람의 죄를 감금류에게 전가하는 행위 같은 전통으로는 용서를 받을 수 없다.
5. 오직 하나님의 어린 양 곧 예수님의 영원한 희생을 받아들일 때만 가능하다.
6. 히브리 성경은 메시아를 속건제물로 주셨다고 증언한다(이사야 53:10)
7. 희생 제물을 거절하면 반드시 자신의 죄값을 받아야 한다(이사야 59:2, 로마서 6:23)
8. 예수님을 신뢰하면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않으실 것이다(예레미야 31:34)








강생(降生, 잉카르나티오. incarnatio) 수육, 육아발생
기독교에서 쓰이는 용어로서, 하나님이 사람이 된 사건을 가리킨다.

강생의 성서적 근거

성경적인 근거로서 말씀의 성육신 교리는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찾는다.
말씀이신 하나님이 바로 육신을 입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즉 하나님으로 땅에 오신 구원자이심을 말한다.

하나님이 구원을 이루신 첫 번째 단계는 성육신으로서,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사람안에 들어오셔서 처녀인 성모 마리아를 통하여 인간으로 태어나셨다고 말한다.

창조에서 하나님은 조물주이셨으나 성육신 전에는 어떠한 창조물 안에도 들어가지 않으셨다.
사람을 창조할 때에도 그분은 사람안에 생명의 호흡만을 불어 넣었다(창세기 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또한 욥기 33:4에 의하면 하나님의 호흡이 사람에게 생명을 준다.
그러나 하나님 자신이 사람 안으로 들어오신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의 신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

그러나 성육신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사람안으로 들어오심을 볼 수 있다.
그분은 먼저 잉태되셨고, 아홉달 동안 처녀의 태에 있었으며, 그 후에 태어나셨다.

로마서 8:3-4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죄의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셨다고 말한다. 육신의 모양만 있었다는 것은 죄의 본성은 없었다는 의미이다. 로마서의 저자인 바울은 세가지 단어, 즉 모양과 육신과 죄로 이 구성을 규정했다. ... 성서에서는 [모양으로] 라는 말을 더함으로써 죄의 육신의 모양과 외양은 지녔지만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 죄가 없음을 가리킨다.

영지주의와의 차이점

매우 단순화 하여 말하자면 영지주의란 신이 사람의 껍데기를 쓰고 나타났다는 방식의 사상이다. 그래서 영지주의적 생각을 할 경우 예를 들자면 예수는 그의 지적(知的) 활동력이 육체를 입지 않은 하나님의 지적 활동력과 동일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성육신 사상은 말 그대로 '사람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을 가리킨다. 그렇기 때문에, 앞서 든 예를 따를 경우, 예수의 지적 활동력은 육체를 입지 않은 하나님의 모든 지적 능력을 발현하지는 못하였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물론 기독론에 따르면 부활한 예수의 새로운 육체는 그 전과는 달리 하나님으로서의 모든 인격적 활동을 발휘하는 데에 아무런 제약이 없는 것이라고 믿는다.

신조(Creed, 신앙 고백) 속의 성육신 언급

  • "우리 인간을 위하여,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오셔서, 성령으로 또 동정녀 마리아께 혈육을 취하시고 사람이 되셨음을 믿으며"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
  • "거룩한 교부들을 따라 우리는 한 분이시요 동일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며 모두가 일치하여 가르치는 바는, 그 동일하신 분은 신성에서 완전하시며 동일하신 분이 인성에서도 완전하시며, 완전한 하나님이요 완전한 인간이십니다." (칼케돈신경)
  • "하나님의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되어 나시고" (사도신경)

성육신(成肉身)이라고도 부른다.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강생한 하느님 즉, 하느님의 공현(Epiphany)이라고 믿는다

성육신
이란 단어는 라틴어 "in(안에)"과 "caro(육체)"의 합성 명사에서 "육신 안에 형성되다"는 뜻입니다.
* in caro / 실물안에

영원하신 하나님이 육신을 취하셔서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신이 인간이 되었다는 설은 기독교 이외에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1. 애급의 바로
2. 로마의 가이사 등은 신으로 자처하였다.

고대 신화에서도 흔한 일이었다(사도행전 14:11).

무리가 바울의 행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질러 가로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 오셨다.

3. 일본의 천황을 현인신(現人神)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신화와 기독교의 성육신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속죄관(贖罪觀)"에 있습니다.
고대의 신화에서 신들은 단순한 그의 위대성과 권력을 반영하였으나 기독교의 성육신은 만민의 속죄를 위해 육신을 취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성육신 사건은 성자의 비하(卑下)를 의미합니다.

인간이 상승해서 신격을 자처한 것기독교에서는 범죄한 인간을 대신하기 위하여 스스로 육신을 취하신 하나님의 자기 비하
낮추심이라고 하겠습니다.

성육신의 결과는 "그리스도의 신인(神人, 데오안드로포스. θεόἄνθρωπος)의 교리라고 합니다.
신인(神人)이란 용어는 오리겐(Origen)이 최초로 사용한 신학적 술어이며 그리스도론의 기본이 되었습니다.

성자는 성육신하심으로 완전한 하나님이신 동시에 완전한 사람이 되셨습니다.

이러한 견해는 많은 논쟁을 일으켰습니다.
예를 들면 유대파(Ultra Jewish Party), 에비온파(Ebionism) 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
도게대파(Docetism)는 육신은 가현이라고 주장
그노시스파(Gnosisticism)는 인성을 부인하였다.

니케아회의(Nicean Council, 325년)에서 정죄를 받은 아리우스(Arius, 256-336)는 그리스도를 천사처럼 하나님의 피조물이라고 하여 신성을 파괴하였다.

반면에 아타나시수스(Athanasisus, 293-373)는 그리스도은 하나님과 동질(homoiousios)이며 동등(homoousios)이라고 하였다.

또한 아폴리나리우스(Apollinarius the younger)는 그리스도인의 인성을 시인하며서 그것은 그의 인격 속에서 육(flesh)과 혼(soul)을 겸하고 신성은 신(spirit)을 겸한다고 하여 인성을 불완전한 것으로 만들었다.

케노시스(Kenosis) 학파는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는 그의 신성의 일부 또는 전부를 비어두고 오셨다고 주장하였다.
Gore, Thomasius, Grosby 등
케노시스란 비었다는 뜻이다.

유튀크스(Eutyches)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우리의 인성과는 다르며 그것은 그의 신성에 흡수된 것이라고 하여 인성을 파괴하였다.

결론적으로 성육신이란?

1.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이 있는 것(완전한 사람, 완전한 하나님)
2. 양성은 완전하고 참된 것(complete, real)
3. 불변하며 영원한 것
4. 그리스도의 인격속에 연합하여 있는 것(union) / 체휼(體恤) :
처지를 이해하여 가엾게 여김.

신은 신이요
인은 인이라는 부동한 원리에서 살아가는 인간에게 성육신의 사실이 주는 "신 인(神 人)"의 교리는 신비라고 하겠다.
신비한 교리는 기독교의 계시인 것이다.

영원과 시간
초 자연과 자연
로고스와 육신
이와 같은 양성이 연합한 성육신에서 계시를 이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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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1:13-20

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16. 만물
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19. 아버지
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20. 그의 십자가의 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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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신앙의 핵심에는 개념들이 있지 않고 구체적인 역사적 인물이 있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역사적 인물을 중심으로 하여 전개된다.
성탄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성육신의 첫 출발점이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는 다른 관념이나 이데올로기의 창시자의 존재와 전혀 다른 성격을 띤다.

헤겔주의나 마르크스주의와 같은 관념들은 그 관념의 주창자와 독립하여 존재할 수 있다.
비록 그 사상 체계가 그들에 의하여 소개되거나 종합되었을지라도 이제 그 사상 체계는 그 주창자로부터 독립하여 존재한다.
하지만 기독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단순히 소개된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기독교 사이의 관계는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 사이의 관계와는 사뭇 다른 모습을 지닌다.
기독교 신앙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핵으로 둘러싸며 존재하는데 예수그리스도는 육신이 되신 말씀이다.

성육신(成肉身)이란 요한복음 1장 14절에 있는 말씀에 근거하여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사건을 의미한다.
이 말씀은 세상의 창조 이전부터 계신 분이며, 이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을 뿐만 아니라 이 말씀 자신이 곧 하나님이시다(요 1:1).
요한의 증언에 따르면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은 이 말씀을 통하여 지음을 받았다(요 1:3).
이 말씀은 이제 육신이 되어서 사람들 사이에 거하셨는데 이 말씀은 참 빛이며 모든 사람들의 생명이다.
육신이 되신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로서 우리에게 오셨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의 사건이 곧 성육신의 사건이다.
성육신의 개념은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으신 것 곧 자기를 비워 모든 조건에서 인간과 같이 된 것을 의미한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빌 2:6-8)

성육신은 모든 만물을 지으신 분이 지음을 받은 존재 가운데 하나가 되었음을 뜻한다.

기독교 신앙은 역사적 인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나타나셨다는 주장에 그 기초를 두고 있는데 이는 성육신 교리에서 그 분명한 모습을 드러낸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가 단지 위대한 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라고 주장한다. 성경에 따르면 예수는 곧 하나님 자신이다. 예수는 하나님을 대표하여 행동한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를 경배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며 우리가 예수를 알 때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우리가 예수의 약속을 들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들으며 우리가 예수와 마주칠 때 우리는 하나님과 마주치는 것이다. 성육신의 개념은 그리스도의 신비에 대한 기독교적 성찰의 절정이다. 여기에서 성육신의 핵심은 예수 자신이 곧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자신이라는 성육신의 진리는 우리의 신앙과 삶에 어떤 의미를 지닐까? 2,000년 전에 팔레스타인에 살았던 한 초라한 인간의 삶 속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왜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을 그토록 열심히 붙들어야만 하는가? 우리는 여기에서 성육신 사건의 신학적 의미를 구원론의 차원과 신론의 차원에서 살펴본 뒤에 이러한 성육신 이해가 기독교 영성 이해에 미치는 함축점을 살펴보도록 하자. 여기서 우리가 살펴볼 질문들은 다음과 같다. 성육신 사건은 기독교의 구원 이해에 어떤 기초를 마련해 주는가? 성육신 사건에서 나타나는 기독교 신앙의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성육신 사건에 기초할 때 기독교적 삶의 양식이 드러내야 할 기독교 영성은 어떤 것인가?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성육신 사건의 구원론적 측면에 주목해야 한다. 성육신사건은 무엇보다도 구원의 사건이다. 성서의 중심적 주제는 죄에 빠진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다. 하나님은 불순종하는 인간과 그의 세계를 저버리지 않으시고 옛적부터 선지자를 보내어서 구원의 손길을 펼쳐 오셨다. 이제 하나님은 자신의 사자를 보내실 뿐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옷을 입으신다.

예수 그리스도 곧 성자 하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죄악에 빠진 인간과 그의 세계를 구원하신다. 성자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계에 찾아 오신 사건 곧 성육신의 사건은 하나님이 이 세계를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사랑하심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고대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 신성과 참 인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많은 논쟁을 벌였다. 여러 가지 복잡한 논쟁을 굳이 열거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고대 교부들이 이 문제를 얼마나 심각하게 여겼는가를 잘 알고 있다. 주후 451년에 있었던 칼케돈 회의는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 이며 '참 사랑' 임을 선언함으로써 복잡한 신학적 논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런데 고대 교회의 신앙인들은 무슨 이유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그토록 복잡한 논쟁을 벌였는가? 이 논쟁의 중요성은 구원론적인 시각에서 올바로 파악될 수 있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임을 고백한다. 여기서 핵심적인 쟁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동시에 확보되지 않는다면 기독교 신앙이 선포하는 구원이 불가능해진다는 점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참 사람인 것이 왜 중요한가? 예수 그리스도는 참 사람으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사람이 해야 하는' 속죄의 사역을 대신한다. 그러면 왜 예수를 그저 뛰어난 인간 헌신적인 인간이라고만 말하지 않는가? 예수는 틀림없이 인간이었다. 고대 교회와는 달리 오늘날에는 이 점을 부인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예수가 인간이기만 하다면 예수도 역시 인간의 곤경을 함께 나누어질 수밖에 없고 이는 예수가 참으로 구원자가 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인 것이 왜 중요한가?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으로서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그 사역을 완성한다. 그러면 '예수가 하나님이었고 하나님이기만 했다'고 말함으로써 이 문제를 풀면 되지 않는가? 하지만 예수가 하나님이기만 했다면 예수와 우리 인간 사이의 접촉점은 상실되고 만다. 예수 그리스도가 참 사람이 아니라면 예수가 인간을 대신하여 죽은 것이 우리에게 무슨 관련이 있을 수 있는가? 요약하자면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 아니었더라면 그는 인간을 구원할 수 없었을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참 사람이 아니었다면 인간은 그에 의한 구원의 대상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하여 예수는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이었다는 주장은 고대교회에서 매우 중요하게 받아 들여졌으며 이는 성경의 주장에 합당한 결정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참 하나님이 참 인간 안에서 나타난 성육신의 사건은 기독교 신앙의 구원론에 확고한 기초를 마련해 주게 된다.

다음에 성육신 사건의 신론적 의미를 살펴보자 성육신 사건은 하나님 이해에 있어서 결정적 단서를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하나님 이해의 차원을 가진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를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과 목적에 대해서 결정적인 내용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신 것은 단지 한 명의 인간이 더 태어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결정적인 모습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났다고 믿는다. '하나님은 누구일까? 라는 이 문제를 다루기에 앞서서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먼저 던져야 한다. 우리는 참 하나님에 관하여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나님의 존재를 알기 위하여 자연을 보아야 할까, 또는 인간 자신을 보아야 할까, 아니면 역사를 보아야 할까? 하나님은 여러 가치 자연 세계와 역사적 사건 속에서 발견될 수 있다.

성경도 하나님은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히 1:1)우리에게 말씀하신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결정적인 모습은 어디에서 드러날까? 이에 대하여 성경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결정적으로 자신을 계시하셨다고 말한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하나님 지식에 있어서 가장 신뢰할 만한 기초가 된다. 이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결정적으로 말씀하셨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히 1:3)이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육신의 개념을 강력하게 부정하는데 그 이유는 분명한 신학적 이유때문이다. 이는 성육신의 개념이 자신들이 미리 마음 속에 품고 있던 하나님 상(Image, 이미지)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이미 머리 속에 분명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하나님을 하나의 보편적 개념이나 일반적 원리로 생각한다. 개념이나 원리는 보편적이며 일반적인 것이지 구체적이여 특정적인 것이 될 수 없다. 이러한 자신의 하나님 개념에 기초하여 그들은 성육신의 사건을 부인한다. "어떻게 우주의 원리인 로고스(말씀)가 한 역사적 인간 속에서 자신을 다 드러낼 수 있다는 말인가? 이것이 그들의 질문이다.

고대 교회는 이 문제에 관하여 또한 심각한 논쟁을 벌였다. 이 논쟁의 핵심 질문은 다음과 같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비슷한(homoiousios)본성을 가졌을 뿐인가(아리우스) 아니면 하나님과 동일한(homoousios)본성을 가졌는가?(아타나시우스)" 이 두 단어 사이의 문자적 차이는 그리스어 i 일 뿐이지만 이 둘 사이의 신학적 차이는 엄청난 것이다. 우리가 만일 예수는 그저 하나님과 비슷한 존재일 뿐 참 하나님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그 뒤에는 다음과 같은 그리스 철학적 하나님 이해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피조물과 철저하게 다른 존재이며 하나님은 일반적 원리이기에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날 수 없다. 하나님은 피조물과 전혀 다르기에 결코 피조물의 아픔과 고통 가운데 들어올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은 저 하늘에 있는 초월적인 존재일 뿐이다." 그러므로 보편적이지 않은 진리는 참 진리가 될 수 없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하지만 조들이 이끌어 낸 하나님 지식은 어디로부터 비롯되는가?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 얻어진 하나님 지식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진 하나님 지식보다 더 신뢰할 만한 것이라는 증거가 있는가? 결국 다른 곳에서 얻어진 하나님 이해와 상충되기 때문에 성육신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육신에 대한 반론이 되지 못한다. 그러한 주장은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 그들 자신의 이해가 그리스도밖에 얻어진 선이해(先理解)에 근거한 것임을 보여줄 뿐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에 기초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에 관하여 그저 추상적으로 말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는 대체로 하나님은 불멸하며 무한하며 불변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님이 어떤 존재가 아니다'라는 것 이외에 무엇을 말하는가? 하나님의 불멸성, 무한성, 불변성 등은 단지 하나님은 멸하지 않으며(죽지 않으며-유한하지 않고, 변하지 않는다는 정도만 말할 뿐이다. 하나님의 불멸성, 무한성, 불변성 등은 보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기초할 때 하나님의 구체적 모습은 어떠한가? 성육신 교리에 따르면 하나님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성품은 예수 그리스도 같은 분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있기 전에는 하나님에 관한 모든 상(image: 이미지)은 우상으로 여겨졌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세우고 그것을 섬겼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참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보이지 아니 하시는 하나님의 형상(image)'(골 1:15)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육신은 하나님을 눈에 보이게 만든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와 같은 분이기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봄으로써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비로소 배우게 된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우리는 성육신 교리의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셨듯이 친구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버리는 사랑(요15:13)과 같다고 성경은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하나의 분명한 상(image: 이미지)을 얻을 수 있다.

성육신 사건을 통해서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본성에 대하여 무엇을 알 수 있을까?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우리의 하나님이 그저 개념이나 원리로서 존재하는 타자(他者)가 아니라 구체적인 인격으로 오시는 분임을 말한다.

성육신 사건에 따르면 하나님의 참 존재는 인격성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개념으로 찾아오시는 존재가 아니라 인격 안에서 찾아오시는 분이다. 하나님께서 개념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인격으로 오시기에 신앙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지적인 이해와 수긍이 아니라 인격적 신뢰와 순종이다. 인격은 신뢰와 순종을 요청하는 까닭이다.

둘째 하나님의 존재가 인격적이기에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행동하시는 분이다.

성육신 사건에 따르면 하나님의 존재는 피조물 세계를 향하여 찾아오는 가운데 행동하는 존재이다. 하나님의 존재는 피조물을 향한 구체적 행위 가운데 있다. 예수 그리스도와 성육신은 우리의 하나님을 피조물의 삶과는 동떨어진 가운데 멀리서 따로 존재하는 지배자가 아니라 피조물의 역사속으로 계속해서 찾아오시는 분임을 말한다. 성육신에 따르면 하나님은 구체적인 사건 속에서 피조물에게 찾아 오신다.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의 운명에 대해서 무관심한 분이 아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에 열정적으로 헌신하는 분이며 우리의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까지 내어 주시는 분이다.

성육신 사건에 따르면 기독교 신앙의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의 운동을 펼치시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이라는 구체적인 행위 속에 자신의 사랑을 드러내시는 분이다. 성육신은 우리의 하나님이 사랑 안에서 구체적으로 행동하시는 분임을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이라'(요 4:8)고 고백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저 사랑의 원리가 아니라 사랑 가운데 구체적으로 행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을 구체적인 행동 가운데 나타내셨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다.'(요일 4:9)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선언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안에서 올바로 이해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저 보편적이며 추상적인 개념이나 원리로 오해될 수 있다.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구체적으로 그 아들을 보내셨다.(요 3:16)는 성경의 선포는 참 진리는 그저 추상적인 원리가 아니라 구체적인 행위임을 말해 주고 있다. 요약하자면 성육신 사건은 "하나님은 저기 멀리에 있는 낯선 존재가 아니다. 역사적 예수 안에서 구체적인 인격으로서 찾아오신 이가 곧 하나님이다? 라고 하나님 존재에 대하여 선언한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구원론적인 기초를 제공하며 또한 우리에게 결정적인 하나님 이해의 터전을 마련해 준다. 이러한 성육신의 사건에 기독교 신앙은 어떠한 삭의 양태를 요청하는가? 다시 말하자면 성육신 사건은 어떠한 영성을 요청하는가?

첫째, 성육신 사건에서 드러난 기독교의 영성은 하나님과 세계를 분리하고 대립시키는 이원론을 거부하는 영성이다.

기독교의 신앙은 세계를 부정하는 영성이 아니라 세계를 긍정하는 영성을 전개한다. 이는 중세의 수도원적인 영성과 대비된다. 기독교의 영성은 하나님이 자신을 주셔서 사랑하신 이 세계를 저버리지 않는다. 물론 피조물인 세계를 하나님의 위치에까지 높이는 것은 거부된다.(롬 1:25) 하지만 세계는 하나님의 영광의 무대(마당)로서 긍정된다. 이 세계는 타락한 세계이지만 세계는 타락하기 이전에 이미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이기에 이 세계는 하나님에 의하여 사랑을 받는다.(요 3:16)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구속 사건 안에서 이 세계는 거듭남을 경험하는 가운데 이 세계는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 아래 포함된다. 그러므로 세계를 부정하는 이원론적 영성은 기독교적 성육신의 영성과 일치하지 않는다.

둘째, 성육신의 영성은 이 세계 안에서 그 구체적 표현을 지향하는 영성이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기독교 신앙의 하나님은 추상적인 개념이나 원리가 아니며 피조물의 세계를 향하여 구체적으로 찾아오시는 살아계신 인격이다. 이러한 살아계신 하나님을 신앙하는 진리는 또한 추상적인 진리가 아니라 구체적인 사람과 사건 가운데 드러난 진리이다. 그러므로 움직이는 진리이며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진리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하여 이 세계를 구원하신 하나님은 이제 성령 안에서 또 다른 성육신을 통하여 이 세계를 변화시킨다. 하나님을 이제 추상적인 진리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육신 안에(In carnation) 진리를 넣어 주신다. 기독교의 진리는 구체적인 사람과 사건 가운데 드러난 진리이다. 복음서에는 하나님의 역동적인 진리가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 안에 거하였다. 이제 사도행전에는 하나님의 역동적인 진리가 성령 안에서 믿음의 사람들 안에 거하기 시작한다. 이제 성령에 의하여 잉태되신 그리스도는 모든 그리스도인 안에서 다시 성령에 의하여 (재)잉태되기를 원하신다.

성육신 사건은 기독교 신앙의 구원 이해에 기초를 제공해 주는 사건이며 참 하나님의 성품을 우리에게 알려 주는 계시의 사건인 동시에 기독교적 영성의 모습이 어떠한가를 보여 주는 하나님의 모범의 사건이다.

성육신 안에서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이신 분이 인간 구원의 사역을 이루신다.
기독교 신앙의 하나님은 인간과 세계를 외면하든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낮춤의 고난을 감수하시고(빌 2:6-8)스스로 피조물 세계에 찾아오신 하나님이다.

성경은 인간으로 하여금 구원받기 위하여 구원의 사다리를 올라가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 자신이 자신의 왕관과 왕위를 버리고 이 땅에 찾아오셨음을 선포한다.
피조물의 범죄함 이전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고난의 사건이며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이다.

김교신은 이러한 구체적 하나님 이해를 깨달은 후에 자신의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오늘 재판정에 다녀왔다. 피고를 위하여 애쓰는 변호사가 아름답게 보였다. 문득 나를 위하여 변론까지 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나를 위하여 대신 피고의 자리에 서서 죽으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니 눈물이 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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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육신이란?
성육신의 본질은 무엇인가?   

성육신이란 하나님이 육신으로 나타난 것을 일컫는다.
즉, 하나님이 창조된 사람들 가운데서 육신의 형상으로 사역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육신이라고 하면, 무엇보다 먼저 육신, 그것도 정상 인성을 갖춘 육신이 필요하다.
이것은 최소한으로 갖춰야 할 것이다.
사실, 하나님이 입은 육신의 함의는 육신으로 사역하고 육신으로 생활하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본질이 육신이 되고 사람이 된 것이다.

성육신은 바로 하나님의 영이 육신 된 것, 즉 하나님이 육신 된 것이다.
육신이 하는 사역은 곧 영이 하는 사역이다.
영이 하는 사역은 육신을 통해 실체화되고, 육신을 통해 발현된다.
하나님이 거하는 육신 외에는 누구도 성육신 하나님의 직분을 대신할 수 없다.
즉, 하나님이 입은 육신의 정상 인성만이 신성 사역을 나타낼 수 있고, 그 외에는 어느 누구도 그것을 대신할 수 없다.

만일 하나님이 처음 성육신했을 때 29세 이전까지 정상 인성이 없고, 태어나자마자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고, 세상의 모든 일을 꿰뚫어 보며, 말을 떼자마자 천상의 말씀을 하고, 사람의 생각과 품고 있는 마음을 모두 알 수 있었다면, 이런 사람은 정상인이라고 할 수 없다.
또한, 이러한 육신은 육신이라고도 할 수 없다.

그리스도가 이런 사람이었다면 성육신의 의의와 본질이 사라졌을 것이다.
그에게 정상 인성이 있었다는 것은 그가 ‘말씀’이 ‘육신’된 하나님임을 증명한다.

그가 정상인의 성장 과정을 거쳤다는 것은 더더욱 그의 육신이 정상적이었음을 말해 준다.
또한 그의 사역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영’이 ‘육신’ 된 존재임을 충분히 보여 준다.

성육신 하나님을 가리켜 그리스도라 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이 입은 육신이며, 이 육신은 육에 속한 그 어떤 사람과도 다르다.
다르다고 말하는 이유는 그리스도가 육에 속하지 않은, 영의 화신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정상 인성과 완전한 신성을 갖고 있으며, 그의 신성은 어느 누구에게도 없는 것이다.
그의 정상 인성은 육신으로 하는 모든 정상적인 활동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고, 신성은 하나님 자신의 사역을 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인성이든 신성이든 모두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한다.

그리스도의 본질은 영이자 신성이기에 그의 본질이 곧 하나님 자신의 본질이다.
그 본질이 그의 사역을 방해할 리 없다.
그는 자신의 사역을 망치는 일도, 자신의 뜻에 위배되는 말도 할 리가 없다.
그렇기에 성육신 하나님은 절대로 자신의 경영을 방해하는 사역을 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이는 누구나 명확히 알고 있어야 할 점이다.

성령 역사의 본질은 인류 구원과 하나님 자신의 경영을 위한 것이고,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사역 역시 인류 구원과 하나님의 뜻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성육신한 이상 그의 본질을 육신에 실체화하여 육신이 충분히 그의 사역을 감당하게 한다.
그러므로 성육신한 기간의 그리스도의 사역은 하나님 영의 모든 사역을 대신하고, 성육신 기간의 모든 사역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핵심으로 하며, 다른 어떤 시대의 사역도 섞이지 않는다.
하나님은 성육신한 이상 육신의 신분으로 사역하며, 육신으로 온 이상 육신에서 그가 해야 할 사역을 완성한다.
하나님의 영이든 그리스도든 어쨌든 모두 하나님 자신이므로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사역을 하고 직분을 다한다.

그리스도란 성육신 하나님의 호칭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진리를 베풀어 주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조금도 지나치지 않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본질이 있고, 사람이 이를 수 없는 하나님의 성품과 사역의 지혜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역을 할 수 없으면서 자칭 그리스도라고 하는 자는 가짜다. 그리스도란 땅에서의 하나님의 발현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땅에서 사역을 펼치고 사람들 가운데서 그의 사역을 완성할 특유한 육신이다. 그 육신은 아무나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육신은 하나님이 땅에서 하는 사역을 감당할 수 있고,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낼 수 있으며,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고, 사람에게 생명을 공급할 수 있는 육신인 것이다.

성육신한 이상 하나님의 본질이 있고, 성육신한 이상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 하나님은 성육신한 이상 해야 할 사역을 가져오고, 성육신한 이상 하나님의 어떠함을 나타낼 것이며, 성육신한 이상 사람에게 진리를 가져다주고, 생명을 베풀고, 길을 가리켜 줄 수 있다. 하나님의 본질을 갖추지 않은 육신이라면 분명히 성육신 하나님이 아니다. 이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이 확실하다. 하나님이 입은 육신이 맞는지 알아보려면 그가 나타내는 성품과 말씀으로 확인해야 한다. 바꿔 말해서, 하나님이 입은 육신이 맞는지, 혹은 참도가 맞는지 확인하려면 반드시 그의 본질로 판별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입은 육신인지 아닌지의 핵심은 그 본질(사역, 말씀, 성품 등 훨씬 다양한 측면)에 있지, 겉모습에 있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겉모습을 살피느라 그 본질을 소홀히 한다면 그것은 사람이 무지몽매한 것이다.

하나님이 입은 육신의 함의는 육신으로 사역하고 육신으로 생활하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본질이 육신이 되고 사람이 된 것이다. 성육신 하나님의 삶과 사역은 크게 두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단계는 직분을 이행하기 전의 삶이다. 일반인의 가정에서 지극히 정상적인 인성으로 살며, 사람의 정상적인 생활 윤리와 법칙, 정상적인 필요(의식주 등), 정상적인 연약함과 정상인의 희로애락을 갖고 있다. 다시 말해, 첫 번째 단계에서는 신성이 아닌 완전히 정상적인 인성으로 살면서 정상인들이 하는 모든 활동을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단계는 직분을 이행하기 시작한 후의 삶이다. 이때도 여전히 정상 인성의 외형을 지닌 평범한 인성으로 살며, 겉모습에는 조금도 초자연적인 부분이 없지만, 직분을 이행하기 위해 살아간다. 이때의 정상 인성은 오로지 신성의 사역을 정상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존재한다. 직분을 이행하기 시작했을 때에는 정상 인성이 이미 직분을 이행할 수 있는 인성으로 성숙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 번째 단계의 삶은 정상 인성으로 직분을 이행하는 삶이자, 정상 인성과 완전한 신성의 삶이다. 첫 번째 단계의 삶이 완전히 평범한 인성으로 사는 삶인 이유는 그때의 인성이 신성의 모든 사역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하지 않았으며, 인성이 성숙해질 때까지, 즉 직분을 충분히 담당할 수 있는 인성으로 성숙해질 때까지 기다려야만 그가 이행해야 할 직분을 이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육신인 이상, 성장과 성숙의 과정이 필요하다. 따라서 첫 번째 단계의 삶은 그저 정상 인성의 삶에 불과하다. 그러나 두 번째 단계의 삶은 인성으로 사역을 충분히 담당하고 직분을 충분히 이행할 수 있는 삶이다. 그러므로 성육신 하나님이 직분을 이행하는 기간의 삶은 바로 인성과 완전한 신성의 삶이다. 만약 성육신 하나님이 태어나자마자 본격적으로 직분을 이행하고 초자연적인 이적과 기사만 행한다면, 육신의 본질은 없어진다. 그래서 성육신 하나님의 인성은 육신의 본질을 위해 존재하고, 인성이 없는 육신은 존재하지 않으며, 인성이 없는 사람은 비인간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렇듯, 육신의 인성은 하나님이 입은 육신의 고유한 속성이 되었다. 만약 누군가가 “성육신 하나님께는 신성만 있고 인성은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모독이다. 이는 아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고, 성육신의 원칙과도 위배되기 때문이다. 그는 직분을 이행하기 시작한 후에도 여전히 인성의 외형을 지닌 신성으로 살며 사역한다. 다만, 이때의 인성은 오로지 신성이 정상 육신에서 사역하는 것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역사하는 것은 인성 안에 있는 신성이다. 즉, 신성으로 사역하는 것이지 인성으로 사역하는 것이 아니다. 이 신성은 인성에 가려져 있지만 그 본질은 여전히 인성이 아닌 완전한 신성으로 사역하는 것이다. 단, 역사하는 것은 육신이며, 이 육신을 사람이라고도, 하나님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육신에 거하는 하나님이 되고, 사람의 외형과 본질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의 본질을 지닌 사람이기에 창조된 그 어떤 사람보다도 높고,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그 어떤 사람보다도 높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외형을 지닌 사람들 가운데, 인성을 지닌 모든 사람 가운데 오직 그만이 성육신한 하나님 자신이며, 그 외에는 모두 창조된 인류인 것이다. 똑같이 인성을 갖추고 있지만, 창조된 사람은 인성 말고는 다른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성육신 하나님은 다르다. 그의 육신에는 인성 말고도 무엇보다 중요한 신성이 있다. 인성은 육신의 외관으로 알아볼 수 있고, 일상생활에서 발견할 수도 있지만, 신성은 쉽게 사람에게 발견되지 않는다. 신성은 인성이 있는 전제하에 나타나며, 사람의 상상처럼 그렇게 비범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에게는 신성을 발견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 사람들이 지금까지 가장 측량하기 어려워하는 것은 성육신 하나님의 본질이 도대체 무엇이냐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많은 말을 했음에도 너희 대다수는 이에 대해 아직도 갈피를 잡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 이것은 아주 간단한 문제이다. 하나님이 성육신했다고 하면 그의 본질은 인성과 신성의 결합체이다. 이 결합체를 하나님 자신이자 땅의 하나님 자신이라고 하는 것이다.

성육신 하나님의 인성은 육신 안에 있는 신성의 정상적인 사역을 유지시키기 위한 것이며, 정상적인 두뇌의 사유는 정상 인성과 육신의 모든 정상적인 활동을 유지시켜 준다. 정상적인 두뇌의 사유는 육신에 거하는 하나님의 모든 사역을 유지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만약 그 육신에 정상 인성의 사유가 없다면 하나님은 육신으로 사역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는 육신으로 해야 할 사역을 영원히 완성할 수 없다. 성육신 하나님은 정상적인 두뇌의 사유를 지니고 있지만, 그의 사역에는 사람의 사유가 섞여 있지 않다. 그는 정상 사유를 지닌 인성으로 사역하고, 사유를 지닌 인성의 전제하에서 사역하는 것이지, 정상적인 두뇌의 사유를 발휘해 사역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거하고 있는 육신의 사유가 얼마나 고차원적이든, 그의 사역에는 논리학도, 사고학도 들어가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그의 사역은 육신의 사유를 통해 상상해 낸 것이 아니라 신성의 사역을 인성으로 직접 나타낸 것이다. 그의 사역은 전부 그가 이행해야 할 직분이지, 그가 머리로 생각해서 만든 것은 하나도 없다. 예를 들어, 그가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며, 십자가에 달린 것은 머리로 상상한 것이 아니며, 두뇌의 사유를 지닌 어떤 사람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오늘날의 정복 사역도 마찬가지로 성육신 하나님이 마땅히 이행해야 할 직분이다. 하지만 이 사역은 전부 사람의 뜻이 아닌 신성이 해야 하는 일로, 육에 속하는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육신 하나님은 반드시 두뇌의 정상적인 사유와 정상 인성이 필요하다. 그것은 그가 정상 사유를 지닌 인성으로 사역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성육신 하나님이 하는 사역의 본질이자, 성육신 하나님의 본질이다.

예수는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단지 정상 인성으로 살았다. 사람은 그가 하나님임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그가 성육신 하나님임을 발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람은 그저 그를 지극히 평범한 사람으로 알았을 뿐이다. 이 지극히 평범한 정상 인성은 하나님이 육신 되었음을 실증하고, 은혜시대는 영이 아닌 성육신 하나님이 사역한 시대임을 실증했다. 또한, 하나님의 영이 완전히 육신으로 실체화했으며, 하나님이 성육신한 시대에는 육신이 영의 모든 사역을 한다는 것을 실증했다. 정상 인성을 가진 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의 영이 정상 인성과 정상적인 이성, 정상적인 사유를 가진 육신으로 실체화한 것이다. ‘실체화’란 하나님이 사람이 되고, 영이 육신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좀 더 명확하게 말하자면, 하나님 자신이 정상 인성을 지닌 육신에 거하면서 그 육신을 통해 신성 사역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실체화’, 즉 말씀이 육신 된 것이다. 처음 성육신하였을 때는 사람을 위해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야 했다. 그가 하는 사역이 속량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인류를 속량하기 위해 사람에게 긍휼과 관용을 베풀어야 했다.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 그의 사역은 바로 사람을 위해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었다. 그 사역은 그가 사람을 죄와 더러움에서 구원할 것임을 예시했다. 은혜시대이기에 그는 사람의 병을 고쳐 주어야 했고, 그래서 이적과 기사를 나타냈다. 이러한 이적과 기사는 은혜시대 은혜의 상징이다. 은혜시대에는 주로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었기 때문에 평안과 기쁨, 또는 물질적인 축복이 은혜시대의 상징이자 예수를 믿는 상징이 되었다. 다시 말해, 사람의 병을 고쳐 주고 귀신을 쫓아내며,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은혜시대에 예수가 지닌 육신의 본능이었다. 영이 육신으로 실체화하여 행한 사역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시종 육신에 거하면서 그런 사역을 행했으며 육신을 초월하지는 않았다. 어떤 식으로 사람의 병을 고쳐 주었든 여전히 정상 인성을 지니고, 인성의 정상적인 삶을 살았다. 성육신의 시대에 육신이 영의 모든 사역을 한다고 말하는 이유는 그가 어떻게 사역하든 전부 육신으로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행한 사역 때문에 사람은 그의 육신이 육신의 본질을 완전히 지닌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의 육신이 이적을 나타낼 수 있으며, 아주 가끔 육신을 초월하는 사역을 할 때도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모두 그가 직분을 이행한 후에 나타난 일이다. 그가 40일 동안 시험을 받은 것이나 산 위에서 형상을 바꾼 것이 그 일례다. 그러므로 예수의 몸으로 성육신한 의의가 완전해지지 않았고, 일부만 완성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는 사역을 시작하기 전까지 육신의 모든 삶이 지극히 정상이었으나, 사역을 시작한 후로는 육신의 외형만 유지했다. 그가 하는 사역은 신성의 발현이었기 때문에 육신의 정상적인 기능을 뛰어넘었다. 어쨌든 하나님이 입은 육신인 만큼 육에 속하는 사람과 같지 않았다. 물론 그도 평상시에는 음식을 먹고, 옷을 입고, 잠을 자고, 집에 사는 등 정상적인 의식주 활동을 했고, 정상인의 이성과 두뇌 사유를 지니고 있었다. 사람이 보기에 그는 여전히 정상인이었으나, 그가 행한 사역은 아주 초자연적인 것이었다. 사실, 그는 어떤 사역이든 평범한 정상 인성으로 했다. 또한 그가 사역하는 때일수록 그의 이성은 더욱 정상적이었고, 그의 생각은 더욱 맑고 또렷했으며, 모든 정상인의 이성과 생각을 뛰어넘었다. 이러한 이성과 생각도 바로 성육신 하나님이 반드시 갖춰야 하는 것이다. 신성의 사역은 가장 정상적인 이성과 가장 맑고 또렷한 생각을 지닌 육신을 통해 발현되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육신으로 신성의 사역을 발현하는 목적을 이룰 수 있다. 예수는 33년 반 동안 세상에 있었다. 그는 33년 반 동안 시종일관 정상 인성을 유지했다. 다만 그가 3년 반 동안 행한 직분 사역 때문에 사람은 그가 매우 비범하고, 그전보다 훨씬 초자연적이라고 느꼈을 뿐이다. 사실, 예수는 직분을 이행하기 전이나 후나 정상 인성에 변함이 없었으며, 항상 똑같은 인성을 유지했다. 다만 직분을 이행하기 전과 후의 차이점들 때문에 사람들이 그의 육신에 대해 두 가지 다른 관점을 가지게 된 것이다. 사람들이 어떻게 보든, 성육신 하나님은 언제나 그가 본래 갖고 있던 정상 인성을 유지한다. 하나님은 성육신한 이상 육신으로 살아야 하고, 정상 인성의 육신으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직분을 이행하든 안 하든, 인성은 육신의 근본이므로 그의 육신이 지닌 정상 인성은 없어서는 안 된다. 직분을 시작하기 전, 예수의 육신은 완전하고 정상적이었으며, 정상인의 모든 활동을 해 왔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에게서 초자연적인 면이나 이적을 조금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때 그는 그저 하나님을 경배하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다. 다만 그는 다른 어떤 사람보다 더 간절하고 진실하게 추구했을 뿐이다. 이는 그의 가장 정상적인 인성의 모습이었다. 그는 직분을 이행하기 전까지 어떤 사역도 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은 그의 신분은 물론, 그의 육신의 남다른 점도 알아채지 못했다. 당시 그는 어떤 이적도 보이지 않았고, 하나님 자신의 어떤 사역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직분을 이행하기 시작한 후에도 여전히 정상 인성의 외형을 지니고 정상 인성의 이성으로 살았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 자신의 사역을 행하고, 그리스도의 직분을 이행하며, 평범한 인간, 즉 육에 속한 사람이 할 수 없는 사역을 시작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에게 정상 인성이 없다고 여겼으며, 그를 완전하고 정상적인 육신이 아닌 불완전한 육신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행한 사역으로 인해 사람들은 그를 정상 인성이 없는 육신의 하나님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인식은 사람이 성육신의 의의를 알지 못해서 생긴 것으로, 모두 잘못된 것이다. 사람들이 잘못된 인식을 갖게 된 이유는 육신에 거하는 하나님이 나타내는 것은 신성 사역이고, 그 사역은 정상 인성의 육신으로 발현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육신에 거하며, 인성을 통해 사역하면서 정상 인성이 가려졌기에, 사람들은 하나님께 신성만 있고 인성이 없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신성의 제약을 받는다. 비록 그가 육신에 거하고 있으나 그의 인성이 육에 속한 사람의 것과 완전히 같지는 않다. 그에게는 특정한 성격이 있으며, 그 성격 역시 신성의 제약을 받는다. 신성에는 연약함이 없다. 그리스도의 연약함이란 그의 인성을 두고 한 말이다. 이 연약함은 신성을 어느 정도 제약하지만 무한정 제약하는 것이 아니라 범위와 기한이 있다. 신성의 사역을 해야 할 때가 되면 인성이 어떠한지는 상관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전적으로 신성의 지배를 받는다. 인성의 정상 생활 이외에도 인성의 모든 활동은 신성의 영향을 받고, 신성에 좌우된다. 그리스도가 인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성의 사역과 서로 방해가 되지 않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인성이 신성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이 인성은 비록 처세에 미숙하지만 신성의 정상 사역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인성이 패괴되지 않았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인성이 직접적으로 신성에 지배되며, 그에게 보통 사람을 뛰어넘는 이성이 있음을 의미한다. 그의 인성은 신성이 지배하고 사역하기에 가장 적합한 인성이며, 신성의 사역을 가장 잘 나타내고 신성의 사역에 가장 잘 순종할 수 있는 인성이다. 하나님은 육신으로 사역하는 동안에도 여전히 육신을 입은 사람이 이행해야 할 본분을 이행하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경배드릴 수 있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본질이 있으며, 그의 신분은 하나님 자신의 신분이다. 그는 그저 하나의 피조물로 이 땅에 왔기에 피조물의 외형, 전에 없었던 인성을 갖게 되었을 뿐이다. 그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경배할 수 있는 것, 이는 하나님 자신의 어떠함이요, 사람이 따라 할 수 없는 것이다. 그의 신분이 하나님 자신임에도 그가 하나님께 경배드리는 것은 육신의 위치에서 행하는 일이므로 ‘그리스도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경배드린다’는 표현은 틀린 것이 아니다. 그가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 역시 그의 어떠함이다. 사람에게 요구하기 전에 그는 이미 그렇게 행하였다. 그는 절대로 자신은 ‘마음대로 행동하면서’ 다른 사람에게만 요구하지는 않는다. 이 모든 것이 그의 어떠함이기 때문이다. 그가 어떻게 사역하든 하나님을 거역할 리 없고, 그가 사람에게 어떻게 요구하든 사람이 행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날 리 없다. 그가 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고, 그의 경영을 위한 것이다. 신성을 지닌 그리스도는 어떤 사람보다도 높으므로 그는 피조물 중에서 최고의 권병을 갖고 있다. 그 권병은 신성이자 하나님 자신의 성품과 어떠함이다. 그 성품과 어떠함으로 그의 신분이 결정된다. 그러므로 그의 인성이 아무리 정상일지라도 그에게 하나님 자신의 신분이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가 어떤 위치에서 말씀하고 어떻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든, 그가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고는 할 수 없다.

성육신한 인자는 인성을 통해 하나님의 신성을 나타내고, 하나님의 뜻을 사람에게 전하고, 아울러 하나님의 뜻과 성품을 나타내는 방식으로 사람이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영계의 하나님을 사람에게 보여 주었다. 사람이 본 것은 형상을 지니고 뼈와 살이 있는 하나님 자신이었다. 그러므로 성육신한 인자는 하나님 자신의 신분, 지위, 형상, 성품, 소유와 어떠함 등등을 구체화하고 인간화한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에 있어서, 인자의 겉모습은 일정한 한계가 있지만, 인자의 본질과 소유와 어떠함은 하나님 자신의 신분과 지위를 완벽히 대변할 수 있었다. 단지 발현되는 형식에서 다소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인자의 인성이든 아니면 신성이든, 그가 하나님 자신의 신분과 지위를 대변한다는 것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다. 단지 하나님이 그 기간에 육신의 방식으로 사역하고, 육신의 위치에서 말씀했으며, 인자의 신분으로, 인자의 위치에서 인류를 마주했을 뿐이다. 그리하여 사람은 하나님이 사람들 가운데서 실제로 말씀하고 사역하는 것을 접하고 체험할 기회를 얻게 되었고, 또한 하나님의 신성을 알게 되었으며, 자신을 지극히 낮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높고 큼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또한 하나님의 진실함과 실제에 대해 초보적으로 알게 되었고, 초보적인 정의도 내릴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예수가 행한 사역과 그의 사역 방식, 말씀할 때의 위치는 영계에 있는 하나님의 참모습과 다소 다를지라도, 그의 모든 것은 사람이 본 적 없는 하나님 자신을 한 치 오차도 없이 대변하였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든, 어떤 위치에서 말씀하고 어떤 형상으로 사람을 마주하든, 하나님이 대표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 자신일 뿐이다. 그는 그 어떤 사람, 패괴된 인류 중의 그 어떤 사람도 대표할 리 없다. 하나님 자신은 곧 하나님 자신이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본질은 그 자체로 권병을 지니고 있지만, 그는 자신의 권병에서 나온 모든 것에 순종할 수도 있다. 영의 사역과 육신의 사역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영은 만물에 대한 권병을 지니고, 하나님의 본질이 있는 육신 역시 권병을 지니고 있지만, 육신에 거하는 하나님은 또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모든 사역을 할 수 있다. 이는 어느 누구도 이를 수 없고 또한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 자신이 바로 권병이지만, 그의 육신은 그의 권병에 순종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한다’는 말에 내포된 의미다. 하나님은 영이기 때문에 구원 사역을 할 수 있고, 사람이 되어도 마찬가지로 구원 사역을 할 수 있다. 어쨌든 하나님은 자신의 사역을 하고, 이를 방해하거나 교란하지 않으며, 모순되는 사역은 더욱 하지 않는다. 영과 육신이 하는 사역의 본질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또한 영이든 육신이든 모두 같은 뜻을 이루려 하며, 같은 사역을 경영하기 때문이다. 비록 영과 육신이 서로 아무 상관 없는 두 가지 속성을 지닌다고는 하나 그 본질은 동일하다. 모두 하나님 자신의 본질과 신분을 갖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 자신에게는 패역의 성분이 없으며, 하나님의 본질은 선하다. 그는 모든 아름다움과 선함의 발현이자 모든 사랑의 발현이다. 육신에 거하는 하나님이라 하더라도 하나님 아버지를 거역하는 일을 할 수는 없다. 희생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감수하지, 다른 선택의 여지를 두지 않는다. 하나님에게는 독선적이거나 자만하는 성분이 없고, 오만 방자하거나 교활한 성분도 없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들은 모두 사탄에게서 비롯된다. 사탄은 모든 추함과 악함의 근원이다. 사람이 사탄과 같은 속성을 갖게 된 이유는 사탄에 의해 패괴되고 가공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사탄에 의해 패괴되지 않았으므로 오직 하나님의 속성만 있을 뿐, 사탄의 속성은 없다. 하나님은 육신을 입고 생활할 때 사역이 아무리 어려워도, 그의 육신이 아무리 연약해져도 하나님 자신의 사역을 방해하는 일을 하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저버리며 거역하는 일은 더더욱 저지르지 않는다. 육신이 고통받을지언정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위배되는 일은 하지 않는다. 이는 예수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한 것과 같다. 사람에게는 자신의 선택이 있지만 그리스도에게는 자신의 선택이 없다. 그리스도가 하나님 자신의 신분을 지니고 있다고는 하나 그는 똑같이 육신의 위치에 서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 아버지가 준 사명을 완수한다. 이는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이다. 사탄에게서 비롯된 것에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는 본질만 있을 뿐 하나님의 본질이 있을 수 없다. 그런 존재는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기꺼이 순종하지도 못한다. 그리스도를 제외한 사람은 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저지를 수 있다. 그뿐 아니라 사람은 아무도 하나님이 맡긴 사역을 직접 담당할 수 없고, 하나님의 경영을 자신의 당연한 본분으로 삼아 이행할 수도 없다.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본질이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은 사탄의 속성이다. 이 두 가지 속성은 공존할 수 없으므로 사탄의 속성을 가진 자를 그리스도라 부를 수는 없다. 사람이 하나님의 사역을 대신할 수 없는 이유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본질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 사역하는 것은 개인의 이익과 앞날을 위함이지만 그리스도의 사역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영이 입은 육신은 하나님 자신의 고유한 육신이다.
하나님의 영은 지고지상하고 전능하며 거룩하고 공의롭다.
그러므로 그의 육신 역시 마찬가지로 지고지상하고 전능하며 거룩하고 공의롭다. 이 같은 육신은 오로지 공의로운 일, 인류에게 유익한 일, 거룩하고 빛나며 위대한 일만 할 수 있다. 진리와 도의에 어긋나는 일을 할 리 없고, 하나님의 영을 배반하는 일을 할 리는 더더욱 없다. 하나님의 영은 거룩하므로 그의 육신 또한 사탄에 의해 패괴될 수 없으며, 그것은 사람과는 다른 본질을 가진 육신이다. 사탄이 패괴시키는 것은 사람이지, 하나님이 아니며, 게다가 사탄은 하나님 자신의 육신을 패괴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과 그리스도가 같은 공간에서 살아도 사람만 사탄에게 점령되고, 이용당하고, 해를 입는 것이다. 반면 그리스도는 절대 사탄에게 패괴되지 않는다. 사탄은 영원히 가장 높은 곳에 이를 수 없고, 하나님께 접근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너희는 나를 배반하는 존재는 오직 사탄에게 패괴된 인류뿐이며, 이 문제는 그리스도와 영원히 하등의 관계가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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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육신이란?
육체(car) 안에(in)  태어나는 것을(natus) 의미합니다.

요한복음 1:14
로마서 8:3
골로새서 2:9
디모데전서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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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드 존스 교리강좌(25) 독생자의 성육신


구속의 교리를 살펴볼 때 우리 주님이시며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집중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를 접할 때 첫 번째로 마주치는 것은 바로 이 성육신(聖肉身, incarnation)의 교리이며 이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 복되신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 스스로 인간의 본성을 지니셨다는 일반적인 진술을 했다.

이 말의 의미는 새로운 인격이 발생하였다는 의미가 아니며 영원하신 성자 하나님이 성육신 하셨다는 의미이다.

우리의 구원과 영원한 운명이 주 예수 그리스도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에 의해 결정된다면, 그 분에 대한 정확하고 분명한 개념과 사고를 갖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신약성경과 교회사를 보면 마귀의 주된 관심은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세주 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및 사역에 대해 사람들을 미혹시키는데 최고의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점만 보더라도 성육신의 교리가 얼마나 중요하고 정확하게 아는 것이 왜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성육신 교리의 요점

1. 성육신(聖肉身) 교리는 삼위일체의 교리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삼위일체의 교리를 믿지 않는 자는 절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어떤 의미에서는 전체 기독교가 복되신 삼위일체 교리에 의해 좌우된다. 삼위일체 교리를 믿지 못하는 자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는 이유는 그가 구속의 교리 또한 믿을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성부, 성자, 성령 삼위로 존재하신다는 것을 항상 자각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성자의 인격을 논함으로 알게 된다.

2. 성육신은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 육신이 되신 것이다.

성육신 교리는 성삼위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인간이 되었다는 말이 아니고 성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 육신을 입고 사람이 되었다는 말이다. 성경은 이것을 ‘말씀이 육신이 되어’(요 1:14)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막연히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말하고 우리가 말하는 내용에 항상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3. 예수 그리스도가 취하신 것은 진정한 육체였다.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 취하신 것은 단순한 겉모습이나 형태가 아닌 진정한 성육신이었다. 예수님은 실제로 육체(肉體)로 오셨다. 영지주의 이단들은 예수님이 단순히 육체의 모양만 가졌다고 주장하였다. 몸의 형체만 있을 뿐 허깨비 같은 몸이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실제 육체로 오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거하신 것이다.

4. 성육신에 의해 새로운 인격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성육신에 의해 새로운 인격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 인간의 본성을 입으신 것이다. 그러나 성육신 교리는 인간적 본성과 결합해 한 인간을 형성한 것이 단순한 신적 본성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것을 초대교회 이후 수 세기동안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신성과 인성이 결합해 혼합되고 새로운 인격을 형성한 존재로 이해하였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인간의 본성을 입으신 분은 영원하신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셨다. 이 교리가 가르치는 바는 이 영원하신 두 번째 위격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이다.

5. 성육신에 의해 성자의 인격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어지는 요점은 성육신 교리는 성자의 인격에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가르치지도, 그런 개념을 포함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겉모습에는 변화가 있었고 스스로를 나타내시는 상태에는 변화가 있었으나 성자의 인격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분은 언제나 동일한 위격이시다. 동정녀 마리아의 태중에서도, 힘없는 아기의 모습으로 구유에 누워계실 때도 그분은 언제나 성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시다.

6. 성육신은 성자가 사람으로 변화했다는 의미도 아니다.

우리는 성자가 사람으로 변화했다는 인상을 주도록 이 교리를 설명해선 절대로 안 된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the word was made flesh, and dwelt among us)라는 문구에서 우리는 ‘was made’라는 문구가 종종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으로 변화했다고 믿게 만든다. 이것은 번역이 최선의 상태로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생긴 오해다.

이 구절의 진정한 의미는 ‘그가 육신이 되어’(he becomes flesh) 또는 ‘그가 육신을 입어’(he took on flesh)로 번역되어야 한다. ‘made’ 즉 ‘만들다’라는 개념은 일종의 변화의 의미를 암시하는데 이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육신으로 오신 것은 영원하신 두 번째 위격이시다. 이것이 올바른 표현이다.

7. 성육신에서 성자는 모양이 아닌 진정한 인간의 본성을 입으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히 인간 본성의 모양만 취하신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인간의 본성을 취하셨다. 구약 성경에는 천사들이 다양한 사람들에게 나타난 기록이 있는데 이 천사들은 분명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났다고 기록되어있다. 여기서 천사들이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났다고 말할 때 우리는 성육신이 아니라 그들의 모양을 이야기 한 것이다. 천사들의 본성이 변하거나 무엇인가 추가된 것이 아니라 단지 모양만을 취했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도 이런 방법으로 여러 차례 구약에 나타나신 것이 기록되어 있다. 즉 언약의 사자로 나타나셨다. 구약에서 언약의 사자는 분명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분은 한번 이상 여러 사람들에게 사람의 형태로 나타나셨는데 이를 ‘신의 현현’(顯現, theophany)이라고 한다. 신의 현현은 성육신과는 완전히 다르다. 신의 현현은 잠시 동안만 사람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성육신 교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모양이 아닌 진정한 인간의 본성을 입으셨다고 주장한다.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며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히 2:14)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히 2:16)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나니 이는 예수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요이 7) 예수님이 영으로 오셨다거나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으실 때만 메시아가 그에게로 들어왔다가 십자가에서 다시 떠났다고 주장하는 무리들이 있다. 이런 주장은 분명히 적그리스도의 거짓말이라고 단언한다.

8. 성육신에서 성자는 완전한 인성을 취하셨다.

성육신 교리는 우리 주님이 완전한 인성을 입으셨다고 주장한다. 본성의 일부가 아닌 완전한 사람의 본성을 입으신 것이다. 단순히 몸만 입으신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어떤 사람들은 성자가 단순히 몸만 입으셨다고 주장하거나 몸과 동물적인 혼만 성자가 취하시고 영은 영원하신 위격에 의해 공급받았다고 주장한다. 이 역시 이단적 주장이다. 성육신 교리는 성자가 완전한 인성, 즉 영을 포함한 몸과 혼을 취하신 참된 사람이었다고 가르친다.

9.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은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취하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같은 인성을 동정녀 마리아에게 취하셨다. 이 말은 새로운 인성이 성자를 위해 창조되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새로운 인성의 창조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이 강조하는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참으로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이 되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마 1:1) 새로운 인성이 창조되었다면 절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 될 수 없다.

이처럼 성육신 교리가 너무도 중요한 이유는 우리의 구속에 대한 교리 즉 구원에 대한 교리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인성을 입지 않으셨다면 그는 우리를 구원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2장에 분명하게 밝히듯 우리가 혈육에 속한 존재이기 때문에 예수님도 우리와 같이 되셔야 했다. 그것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우리가 여기서 성육신 교리가 조금이라도 변질되는 것을 용인한다면 우리 자신의 구속에 대한 교리를 전혀 말이 되지 않는 것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다.


동정녀(童貞女) 탄생

알마(5959) עַלְמָה

עַלְמָה

1. 결혼 적령기의 처녀,  2. 복수형 ׃עֲלָמוֹת 시 68:26,  3. 대상 15:20

발음 / 알마(ʽalmâh)

  • 관련 성경 / 여자(창 24:43, 잠 30:19), 소녀(출 2:8), 처녀(시 68:25, 아 1:3, 사 7:14), 시녀(아 6:8)
  • 구약 성경 / 7회 사용
  • 동정녀이사야 7:14에서 "처녀(알마)"를 마태복음 1:23에서 동정녀라고 번역한 것이다.

    알마란 히브리어 "처녀"를 의미하기도 하며 "여인" 즉 "젊은 여자"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처녀라고 번역한 이유는 구약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하는 70인역에서 처녀를 "파르데노스(

    강림(降臨)과 휴거(携擧, Rapture) 데살로니가전서 4:16-17


    강림(降臨)과 휴거(携擧, Rapture) 데살로니가전서 4:16-17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降臨)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携擧)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도입 이야기)

     문화 차이에 의해서 경험한 이야기

     미국에서 미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두 자녀들이 미국에서 유치원 과정을 마치고 부모님이 한국에서 사업을 하게 되어 한국에 정착한 후 초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한번은 아이들이 선생님으로부터 꾸중을 듣게 되었는데 두 아이들이 선생님을 쳐다보자 선생님은 버릇없이 선생님을 쳐다보느냐 하며 호되게 야단쳤다고 합니다. 얼마 후 집에서 부모님으로부터 꾸중을 듣게 되어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부모님의 야단치는 이야기를 듣는데 이번에는 왜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않느냐 하며 꾸짖습니다. 

     두 아이들은 한국과 미국의 문화 차이에 혼돈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에도 이와 비슷한 현상을 경험하게 됩니다. 

     강림이란 단어는 한글성경에서 39회 사용되었습니다.

     휴거라는 단어는 단 한 번도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두 불구하고 한국교회와 성도들은 휴거에 대한 신앙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배경을 생각하며 "강림과 휴거"라는 주제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 강림(降臨) 데살로니가전서 4:16


    헬라어 성경에 "강림"으로 번역 된 단어가 세 가지입니다.

    카타바이노, 파루시아, 에르코마이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携擧)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For the Lord himself will come down from heaven, with a loud command, with the voice of the archangel and with the trumpet call of God, and the dead in Christ will rise first.


    강림이란 "내릴 강(降)" "임할 림(臨)"

    한글성경에 39회(구약 23회, 신약 16회) 

    특히 데살로니가전서와 후서에서 9회(전서 6회, 후서 3회)

    NIV 성경 - come down

    헬라어 - 카타바이노(καταβαίνω) / 카타(κατά) + 바이노(βαίνω) / down + stepping, walking

    Strong's Greek: 939. βάσις (basis) -- a footStrong's Exhaustive Concordance. foot. From baino(to walk)

    basis : a foot

    Original Word : βάσις, εως, ἡ

    Strong's Greek: 1684. ἐμβαίνω (embainó) -- to walk on, to

    Strong's Concordance. embainó: to walk on, to step into, ie embark. Original Word:

    ἐμβαίνω Part of Speech: Verb Transliteration: embainó Phonetic

    (예) 누가복음 3:22(강림, 카타바이노), 데살로니가전서 4:16(카타바이노)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 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예) 고린도전서 15:23(강림, 파루시아)  παρουσία(parousia. 3952) a presence, a coming, 요한일서 2:28(파루시아), 베드로후서 1:16(파루시아), 3:4(파루시아), 야고보서 5:7-8(파루시아), 데살로니가후서 2:1(파루시아), 데살로니가후서 2:8(파루시아), 데살로니가전서 2:19(파루시아), 데살로니가전서 3:13(파루시아), 데살로니가전서 4:15(파루시아)


    (예) 데살로니가후서 1:10(에르코마이) ἔρχομαι(erchomai. 2064)  to come, go

     데살로니가전서 1:10(에르코마이),


    그 날에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얻으시고 

    모든 믿는 자에게서 기이히 여김을 얻으시리라 (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휴거(携擧, Rapture) 


    데살로니가전서 4:17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携擧)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After that, we who are still alive and are left will be caught up together with them in the clouds to meet the Lord in the air.  And so we will be with the Lord forever.    


    첫째, 휴거(Rapture)란 무엇인가?

    휴거는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성도들을 불러올리는 사건을 말합니다. 

    그런데 휴거라는 단어가 성경에는 없습니다. 

    그러면 왜 휴거라는 단어를 사용할까요? 


    한글 성경을 처음 번역할 때 중국의 한문 성경을 참조하여 한글로 번역했습니다. 

    당시 한글은 언문(言文)이라며 아녀자들만 사용하는 아주 천한 언어라고 하여 선비들은 주로 한문을 사용했습니다.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기 위해서 자연스럽게 한문 성경을 기본으로 사용하여 한글로 번역했습니다.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라는 말씀에서 “끌어 올려(caught up)” 라는 말씀을 한문 성경에서 “휴거(携擧)”라고 합니다. 

    따라서 공중으로 끌어 올려라는 문장을 간략하게 "휴거(携擧)" 라고 사용한 것입니다.


    둘째, 휴거(Rapture)의 의미는 무엇인가?


    1. 한자의 의미


    “휴거(携擧)”라는 한자는 “이끌 휴(携)” “들 거(擧)” 라는 훈으로 “이끌려 들려지다”라는 뜻입니다.


    2. 영어의 의미


    휴거를 영어로  “랩처(Rapture)” 라고 합니다.

    “랩처(Rapture)”의 뜻은 “환희(delight), 열중, 넋을 잃음”입니다.

    따라서 공중으로 끌어 올려간다는 의미는 전혀 없습니다.

    그러면 왜 영어에서 휴거를 랩처라고 하였는가?


    라틴어 성경에서 "공중으로 끌어 올려" 라는 말씀을 “라피오(rapio)” 또는 “라페레(Rapere)” 라고 합니다.

    “라피오(rapio)”를 영어로 번역할 때 “랩처(rapture)” 라고 합니다. 


    3. 헬라어의 의미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caught up)”는 헬라어로 “하르파게소메다(ἁρπαγησόμεθα)”라고 합니다.

    "하르파게소메다"의 동사 원형은 "하르파조(ἁρπάζω)" 라고 합니다.


    "하르파조(ἁρπάζω. harpazó. 726)"를 영어로 “to snach away” 라고 하며 그 의미는 “낚아챈다, 빼앗는다”는 뜻입니다(to seize, catch up, snatch away)


    * 끌어올려 - 수동태(Caught up)

    “갑작스럽게 잡아서 옮기다.” “강한 힘을 가지고 강하게 빼앗아 가다”, “재빠르게 자기에게 끌어들이다”

    * 데려감을 당하고 (마 24:40∼41, 눅 17:34-35) - 수동태(Taken away) 


    그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두 남자가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함께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 데려감 / “파라람바노(paralambano.παραλαμβάνω. 3880 )" : to receive from, “가까이 오도록 취하다”, “자기 자신에게로 이끌다.


    * 버려둠 / "아피헤미(aphiémi.  ἀφίημι. 863)": to send away, leave alone.


    셋째, 성경에서 휴거(하르파조, ἁρπάζω) 단어가 사용된 사례를 살펴봅니다.



    1. 요한복음 6:15 - 붙들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예수님을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


    2. 요한복음 10:12 - 물어 가다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도 제 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헤치느니라(물어 가고) 라는 말씀에서 “늑탈하고” 또는 "물어 가고" 라는 뜻으로 사용합니다.


    3. 요한복음 10:28 - 빼앗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에서 "빼앗을" 이란 뜻으로 사용합니다.


    4. 요한계시록 12:5 - 올려가다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GRK : σιδηρᾷ καὶ ἡρπάσθη τὸ τέκνον

    NAS : and her child was caught up to God

    KJV : her child was caught up unto God,

    INT : iron and was caught away the child  


    5. 유다서 1:23 - 끌어내다


    또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또 어떤 자를 그 육체로 더럽힌 옷까지도 미워하되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

    GRK : ἐκ πυρὸς ἁρπάζοντες οὓς δὲ

    NAS : save others, snatching them out of the fire;

    KJV : fear, pulling [them] out of

    INT : out of fire snatching [them] others moreover  


    6. 데살로니가전서 4:17 - 끌어 올리다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GRK : σὺν αὐτοῖς ἁρπαγησόμεθα ἐν νεφέλαις

    NAS : and remain will be caught up together

    KJV : [and] remain shall be caught up together

    INT : with them will be caught away in [the] clouds  


    성경 여러 구절에서 "끌어 올려(하르파조, ἁρπάζω)" 라는 의미를 살펴본 결과는 "공중으로 끌어 올려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악한 세력의 손에 끌려 갈 수 없다."라는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휴거라는 것에 열광할 이유가 없습니다.

    구약의 마지막 절(말라기 4:5~6)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엘리야는 선지자 엘리야가 아니라 장차 오실 메시아 즉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결론은 메시아이신 엘리야가 반드시 오실 것이라는 예언이라고 하겠습니다.


    신약의 마지막 절(요한계시록 22:20~21)


    이것들을 증거 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찌어다. 아멘.  


    신약의 결론은 구약의 마지막 책 말라기 4장에서 오실 메시아로서 엘리야로 오실 것을 예언했던 그 메시아가 신약에서 이 세상에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셨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후에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하늘로 올라가셨는데 다시 오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재림(再臨)이라고 합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의 사건을 요한계시록 21:1-2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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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거에 대한 비성경적인 신앙 

    칠년 대환난을 당할 때 환난의 시기를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공중으로 들림을 받는 것이다. 


    첫째, 대환난 시대를 피할 수 있다.


    요한계시록을 이해할 때 공중 재림은 7년 대환난 시대에 공중으로 들려올라 가므로 환난의 때를 아주 평안하게 지낼 수 있다고 믿는다.


    둘째, 공중으로 끌어 올려에 대한 오해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공중으로 끌어 올림을 받는다는 것은 실제로 공중으로 들려올라가는 문자적인 의미가 아니다.

    이와 같은 가르침은 사도 바울의 가르침이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악한 것에 의해서 빼앗길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