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섹스

인간의 섹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섹스를 하는 궁금증에서부터 시작한다.
동물처럼 번식기에만 섹스를 하는 것이 아니라 시도 때도 없이, 심지어 임신 중에도 하는 것이 인간이다.
즉 인간에게 섹스는 번식만 아닌 쾌락의 역할도 있기 때문이다. 
동물 중에서 인간만이 유일하게 배란기가 아닌 때도 섹스를 하며, 평생을 따져 보면 인간은 일생 평균 5,778번, 총 2808시간을 섹스로 소비한다.

* 2808시간 ☓ 60분 =168,408분 168,408분 ∻ 5,778번 = 29분

동물에게 있어 섹스는 번식 수단이라 교미 시간이 매우 짧고 간단하게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인간은 밀어를 속삭이고 키스를 하며 번식기가 아니더라도 시도 때도 없이 사랑을 나눈다.
생물학적으로 본다면 대단히 비효율적인 행위를 하는 셈이다. 

일본 주간 <포스트>에 따르면 이렇듯 인간만이 유독 쾌락에 집착하고, 섹스를 향유하게 된 데에는 “뇌에 그 비밀이 있다"고 한다. 뇌 과학자 시오타 히사시 씨는 이렇게 설명한다.

“인간의 뇌는 오랜 기간 진화해왔다.
본능적인 성행위를 관장하는 곳은 대뇌변연계와 시상하부라고 불리는 뇌의 안쪽 부분인데, 인간의 뇌는 그 주위를 감싸는 대뇌신피질 또한 발달한 것이 특징이다.
대뇌신피질은 지성을 관장하므로 인간은 삽입, 사정이라는 원초적인 성행위뿐만 아니라 다양한 성적 행위를 익히게 된 것이다." 

인류학자 헬렌 피셔 박사는 뇌에 3가지 시스템이 존재하고 있다고 했다. 
1. 성욕
2. 로맨틱한 사랑
3. 상대에 대한 깊은 애착 문제는 이 세 가지 뇌 시스템이 모두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 사람에게 깊은 애착을 가지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사랑과 성욕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유엔 통계에 따르면 1947~2011년 사이 이혼 케이스를 연구한 결과 결혼 후 4년 만에 이혼을  많이 한다.
사랑에 빠지고 부부가 된 뒤 아기를  낳고 키우면서 부부 유대관계가 약해져 이혼으로 이르는 기간이 4년이 가장 많다는 것이다.  피셔 박사는 일부일처제가 과연 계속 유지될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오늘날 일부일처제는 당연하게 여겨지고 있으나 대략 1만 년 전 시작된 것으로 인류학자들은 추정한다.
인류가 농경생활을 하고 정착하면서 가축, 집을 소유하고 자식에게 물려주는 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일부일처제가 확립됐다는 것이다. 핀란드에서 흥미로운 실험이 있었다.

우리 뇌엔 일부일처에 적합한 호르몬인 ‘바소프레신’이 있는데 이를 받아들이는 수용체가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이 입증됐다. 즉 4명 중 한명 꼴로 이를 수용하는 정도가 낮았으며 이는 곧 자신의 파트너에 충실하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근 유럽에선 여러 사람과 관계를 가지는 “폴리아모리(polyamory)” 즉 다자간 연애가 등장하고 있다고  했다.
한 집에 두 쌍의 남녀가 살면서 자유연애를 즐기는 생활이다. 
두 사람 이상을 동시에 사랑하는 ‘다자간(多者間) 사랑’을 뜻하는 말인 폴리아모리 운동은 1970년대 태동했다.
이를 지향하는 이들은 일부일처제를 비판하며, 일부는 집단혼 형태로 가족 관계를 형성하기도 한다.
일부일처제를 일탈하는 이런 라이프 스타일이 잠깐 유행으로 그칠지, 아니면 오랜 인류 결혼제도를 바꿀지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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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레루야와 유대인의 결혼 풍속



할렐루야!(Hallelujyah. הַלְּלוּיָהּ)
-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

할랄 - 찬양하라
루 - 너희의
야 - 야훼 하나님

찬양하다, 영광스럽게 하다, 부르다 라는 뜻의 히브리어 동사의 2인칭 복수 명령형인 할렐루(hallelu)와 야웨의 축약형인 야(Yah)의 합성 단어이다. 직역하면 야(Yah)를 찬양하라.

라틴어 형태인 알렐루야(Alleluia)는 또 다시 그리스어의 음차인 알랠루이아(Αλληλούια)에서 유래했다. 그리스도 알파벳에는 'h'에 해당하는 문자가 없어서 'ἁ'를 사용한다.

영어권 성경에서는 할렐루야를 주로 'Praise ye the LORD.'로 번역한다. 
NIV 성경에서는 'Praise the Lord.'로 번역되었다.
천주교의 경우에는 할렐루야보다는 알렐루야나 '찬미 예수'의 사용 빈도가 높은 편이다. 
정교회
에서는 알릴루이아라고 한다.

구약에서 시편에서 23회
104:35, 45. 106:1, 48. 111:1. 112:1. 113:1, 9. 115:18. 116:19. 117:2. 135:1, 21. 146:1, 10. 147:1, 20. 148:1. 149:1, 9. 150:1, 6.

신약에서 요한계시록에서 4회
요한계시록 19:1, 3, 4, 6
19:1 -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하라!
19:3 - 심판의 하나님을 찬양하라!(2절 참조)
19:4 - (아멘과 함께 사용) 반드시 그렇게 이루어 질 것을 내가 믿고 찬양한다!
19:6 -  전능하신 통치를 찬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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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의 결혼 풍속 10단계

1단계 ; 적령기 13세∼18세
(일곱 절기 때 공공의 장소에서 서로 만날 수 있다)
(부모의 약속에 따라 만날 수도 있다)

2단계 ; 세 가지 준비물
1. 포도주 한 잔
2. 신부의 값을 결정하는 은과 금
3. 제1 서약서
(남자는 여자의 아버지에게 나는 ∼지파 ∼집의 ∼이다)신신
(찾아온 목적을 분명하게 말한다. 당신의 딸과 결혼을 하고 싶다. 허락해 주세요)

3단계 ; 세 가지 질문
(여자의 아버지가 딸에게 세 가지를 질문한다. 남자가 없는 자리에서)
1. 지적 요소 - 남자를 얼마나 알고 있는가?
2. 정적 요소 - 얼마나 사랑하는가?
3. 의적 요소 - 고난이 닥쳐와도 정말 헌신할 각오가 되었는가?
* 아버지가 딸에게 ‘내가 이 결혼을 허락해 주기를 원하느냐?’
(딸이 승낙한 후에 남자에게 허락을 한다)

4단계 ; 신부의 몸값을 흥정
(이때 남자는 자리를 피하고 대리인이 나선다. 거래를 위한 흥정이 아니라 서로 상대방의 집안 형편에 맞도록 고려한다)

5단계 ; 첫 번째 계약서를 읽는다.
포도주 한 잔을 남자와 여자가 반잔씩 나누어 마신다.
이때 서약서 위에 여자가 반잔을 마신 후 몇 방울의 포도주를 부은 후 남자가 마신다.
은금을 지불한다.
청혼, 포도주를 나누어 마신다, 서약서를 확인 후 정혼(定婚)으로 부부가 된다.

6단계 ; 신부의 아버지가 뿔나팔을 불어 정혼식을 알린다.
신랑과 신부를 축복기도 한다.
법적으로 부부가 인정되었으나 서로 떨어져 지낸다.

신부여 지금으로부터 약 일 년 후 어느 날 알지 못하는 어느 날 저녁 반드시 당신을 데리러 올 것입니다. 준비하고 기다리십시오!

7단계 ; 일 년간의 별거(別居)

생사가 걸린 일 이외에는 결코 만날 수 없다.
신랑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와서 함께 기거할 집을 준비한다. 
신부는 자기 생활 방식을 버리고 남편 집의 생활 방식을 연습한다.
신부는 신랑 이외에 이성 교제를 중단하고 신랑만을 사모하며 기다린다.

8단계 ; 신부를 데리러 오는 때
신부는 신랑을 맞이할 날을 학수고대한다.
신랑은 신부를 데리러 갈 그 날을 사모하며 기다린다.
어느 날 아버지가 아들을 부른 후에 “이제 신부를 데려 오너라!”
(신부를 데리러 가는 그 시간은 아버지의 권한에 속하므로 아들은 모른다)

신랑과 신랑의 친구들은 횃불을 들고 신부의 동네로 찾아간다.
신부 측에서는 “보라, 신랑이 오고 있다!”
신부는 이때 단장을 하고 친구들과 같이 신랑이 기다리는 곳으로 가서 함께 신랑의 집으로 간다.
9단계 ; 두 번째 계약서
미래의 삶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서와 신랑의 징표를 준다.
합방을 한다.

10단계 ; 사랑의 선언
두 번째 계약서를 들고 이 신부는 정절에 관하여 깨끗하였으므로 결혼은 완성되었다고 선언한다.

유대 사회에서 일 주일의 기간은 ‘김추어진 기간(Hidden Seven Days)’ 이라고 한다.

정혼은 신부의 집에서
결혼은 신랑의 집에서 이루어진다.

요한계시록 19:8,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 옳은 행실(디카이오마)

- 법령에서 사용하는 용어로 행위로 옳은 것이 아니다. 선포된 의를 말합니다. 행위적인 행위로 옳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선언에 의해서 옳다고 인정된 존재이다. 

로마서 3:20∼22,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빌립보서 3:4∼9,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히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옳은 행실은 구원의 은혜로 얻은 것입니다.

유대 풍속은 잔치에 초청을 받았을 때 내가 준비하는 예복이 없었다. 잔치를 준비한 신랑의 집에서 준비한 예복을 받아서 입어야 한다. 따라서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준비한 예복 즉 십자가 보혈에 의한 구원의 옷 세마포의 옷을 받아 입은 후에 그 잔치에 참여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은혜입니다.

             




예수님의 마음(빌립보서 2:5) 주일 설교 / 08-28-2022



예수님의 마음(빌립보서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Your attitude should be the same as that of Christ Jesus:

빌립보서는 바울 서신으로 옥중서신으로 분류합니다.
빌립보서는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힘"이라고 하겠습니다(느헤미야 8:10b).

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기쁨(5구절) - 빌립보서 1:4, 25, 2:4, 29, 4:1
기뻐하고(7구절)
- 빌립보서 1:18, 2:17, 18, 28, 3:1, 4:4, 10
기쁘시게(1구절)
- 빌립보서 4:18

빌립보서 전체 74구절에 비할 때 17%


(도입 이야기)

지난 8월 15일부터 18일까지 부산 벡스코에서 국제 실업인 선교회(CBMC) 제48차 대회가 열렸습니다.
첫날 간증자로 탈렌트 '김수미씨(73세)'가 맡았습니다.
간증의 주제가 '왜 이제 알았을까?'

예수님을 좀 더 일찍 알았으면 하는 안타까움을 이야기하는데 실은 김수미씨 작은 아버지 김명수장로님이 군산 신흥교회를 설립하였다고 합니다.

국민학교 5학년 때는 교인들이 더 이상 모이지 않아 자기 집 넓은 공간에 유아원을 설립하고 동네 아이들을 보살펴주었는데 아이들만 보내고 주일에 교회에 나오지 않아 부모님을 찾아다니며 이번 주일에 교회에 나오지 않으면 아이를 돌봐줄 수 없다고 하며 혼자 나오지 말고 동생과 친척들을 모시고 와야 한다고 했는데 정말 주일날 동네 아주머니들이 떼를 지어 몰려와서 교회가 가득찼다고 합니다.

더구나 김수미씨의 아버지가 딸을 서울로 올려보내 숭의여자중학교에 입학시켰는데 숭의여자중학교는 미션 스쿨입니다.
이렇게 신앙의 울타리에서 성장하였지만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6년전 쯤 살아계신 주님을 만난 후에 자신이 변했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헸습니다.

"마음이 바뀌면 세상이 바뀐다!"

이전에는 김수미씨와 연극, 영화, 드라마에 출연할 때 약속 시간을 엄수하며 지냈기 때문에 만일 오전 11시에 시작한다고 하면서 시간을 지키지 않으면 자리를 박차고 떠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담당 PD들이 매우 힘들어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제는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 개회식을 하고 간증하는 시간을 1시간씩이나 늦추는데 아름답게 기다렸다고 하며 시간 당 출연료가 1,500- 2,000만원을 받는데 간증하러 와서는 강사비를 받지 않는다고 하며 만일 강사비를 주면 모두 헌금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바뀌었다고 합니다.
최근에는 여러 PD들이 이런 말을 한다고 합니다.

"김수미씨가 죽을 때가 되었다. 기가 많이 꺾이고 죽었기 때문" 이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기가 꺾인 것이 아니라 "이제는 달라졌어요!" 라고 속으로 외친다고 합니다.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첫째는 기다릴 줄 아는 마음(생각, 태도)

드라마, 연극, 영화에 출연하여 촬영할 때 몇 시에 시작한다고 하면 반드시 그 시간에 정확하게 시작해야지 만일 지체하면 즉시 그 자리를 떠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한회 출연료가 대략 1,500-2,000만원인데 스케줄이 하나 뿐이면 모르지만 그 다음 스케줄을 소화하려면 시간을 철저하게 지켜야 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부산에서 간증을 하려고 서울에서 고속전철을 타고 내려와서 무대 뒤에서 1시간을 기다렸다고 합니다.
30분 간증을 한 후에 다시 다음 스케줄을 위하여 서울로 올라가야 하는데 너무 지체하는데 "아름답게 기다렸다!"고 하며 다음 스케줄을 위해 간략하게 간증을 한다고 합니다.

둘째는 물질적인 손해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생각, 태도)

지난번 폭우로 인하여 김수미씨가 살고 있는 주택에 비가 누수되어 3층에서부터 빗물이 흘러내려 아래층까지 빗물이 새어 보수 공사를 해야 하는데 옥상에 김수미씨가 정원을 만들어 놓았는데 방수 보수 공사를 하려면 먼저 옥상에 설치한 정원을 모두 철거해야 하는데 철거 비용만 1,500만원이라고 합니다.

만일 주님을 알지 못했다면 당장 1층과 2층의 주인들을 소집한 후 각 가정에서 보수 비용을 나누어서 분담해야 하는데 이번에는 모든 비용을 본인이 담당하겠다고 하자 공사를 맡은 업자가 "정말이세요? 철거비용과 보수 공사 비용이 꽤 많다"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김수미씨가 "내가 예전같으면 각 세대별로 분담하도록 하겠지만 이제는 예수를 만났기 때문에 두 눈 딱 감고 제가 모두 부담할테니 걱정하지 마시고 공사를 진행하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지금은 달라졌어요!" 라고 간증하며 나는 강남 푸른나무교회에 출석하는데 담임목사 곽수광목사님 설교 들으러 오시라고 하며 간증하는 이야기를 동영상으로 보았습니다.

'마음이 바뀌면 세상이 바뀐다!'

빌립보서 2장 5절은 예수님의 마음이라고 번역하였지만 헬라어 성경에서는 마음이 아니라 태도 또는 생각이라는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대한성성공회에서 발행한 "새한글 성경"에서 이렇개 번역했습니다.

"여러분은 서로 이 생각 곧 예수님 안에도 있던 생각을 품으시오"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예수님과 같은 태도"
NASB, NIV 성경에서는 "attitude"

(전개하는 이야기)

예수님의 마음이란 곧 예수님의 생각이며 예수님의 태도라고 하겠습니다.
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 (William James)

생각을 바꾸면 언어가 바뀐다
언어를 바꾸면 행동이 바뀐다
행동을 바꾸면 습관이 바뀐다
습관을 바꾸면 운명이 바뀐다.

예수님의 생각(요한복음 9:1-3)


예수께서 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예수
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어제의 생각이 오늘의 당신을 만들고, 오늘의 생각이 내일의 당신을 만든다."

부정적인 생각은 다른 사람의 허물을 잘 찾습니다.
그러나 긍정적인 생각은 나의 허물과 단점을 알기 때문에 나 보다 다른 사람을 더 높여주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부정적인 생각
전통적인 생각
이러한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이사야 55:7b.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리라.

예수님의 생각은 철저하게 "영적인 생각"을 하셨습니다.

마귀가 시험 할 때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영적이며 생명입니다(요한복음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

예수님의 언어(요한복음 21:15)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언어는 내 마음의 초상화" (J. Ray)

"말해야 할 때 말하지 않으면 사람을 잃고 말하지 말아야 할 때 말하면 신뢰를 잃는다." (논어)

* 트집을 잡으려는 언어가 세상을 뒤 흔들지라도 예수님께서는 용서하시려는 언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잘못을 문책하려는 언어가 아니라 다시 결단하고 일어나도록 기회를 찾게하는 언어.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하여 맹세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모두 주를 떠나고 버릴지라도 나는 주님과 함께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씩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노라(마태복음 26:70)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마태복음 26:72)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마태복음 26:74)

예수님의 행동(마태복음 26:5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느냐, 무엇을 알고 있느냐, 무엇을 믿고 있느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결국 우리가 무엇을 행동으로 실천하느냐이다." (John Ruskin)

"길을 안다는 것과 그 길을 걷는다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Morpheus)
* 모르페우스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꿈의 신


* 베드로의 용기는 분명 주님을 위한 행동이었지만 그 행동이 하늘의 법을 따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우쳤다.
때로는 누군가를 위하여 용기를 발휘한 것처럼 보였을지라도 참된 것은 행동이 아니라 사건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이다.

로마의 군병들이 몰려와 예수님을 체포하는 살벌한 현장에서 다른 제자들은 감히 나서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용감하게 평소에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뽑아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내리쳐서 떨어트렸습니다.
베드로가 얼마나 용감합니까?
베드로의 칼 솜씨가 얼마나 정확합니까?
칼을 뽑아서 내리쳤는데 말고의 오른 편 귀를 베어버렸습니다(요한복음 18:10).

이에 시몬 베드로가 검을 가졌는데 이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베드로의 칼을 휘두르는 솜씨가 얼마나 놀랍습니까?
칼을 빼어 오른 편 귀만 떨어트릴 수 있었을까요?

그런데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요한복음 18:11)

예수님의 습관(마가복음 1:35)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생활은 습관이 짜낸 천과 같다"(마이엘)

"좋은 습관은 유혹을 물리친 결과이다"(서양 속담)

"습관은 최고의 주인이거나 최악의 하인과 같다"(Nathaniel Bright Emerson)

온라인 두 이레 새벽기도회를 내일부터 시작합니다.
8월 29일(월) - 9월 13일(화)

온라인 특별 두 이레 새벽 기도회(14일)

기도 제목을 정합니다.
다른 기도보다 내가 정한 기도를 집중적으로 기도합니다.

영적 생각, 영적 언어, 영적 행동, 영적 습관을 유지하여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믿음으로 거듭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결론을 위한 이야기 / 백정(白丁)과 김서방 

옛날 어느 마을에 돌쇠라는 백정이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두 사람의 선비가 고기를 사러 왔습니다. 

첫 번째 젊은 선비가 "어이, 돌쇠야! 쇠고기 한 근만 팔거라." 하고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습니다.
돌쇠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고기 한 근을 칼로 베어 선비에게 주었습니다.
그 뒤에서 기다리고 있는 두 번째 선비가 "김서방 나한테도 쇠고기 한 근만 주게나."
그러자 돌쇠는 빙그레 웃으면서 " 네, 알겠습니다."
재빠른 솜씨로 또 고기 한근을 베어 저울에 달아서 그 선비 앞에 놓았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똑같은 한 근인데 누가 보아도 첫번째 젊은 선비에게 준 고기보다 두번째 선비에게 준 고기가 곱절이나 될 만큼 고기덩어리가 컸습니다. 

그것을 본 젊은 선비는 대뜸 큰 소리로 "야! 이 백정 놈아, 왜 사람을 차별하냐? 똑같은 한 근씩 인데  왜 내 것은 적고 저 손님 것은 곱절이나 많은 거야?" 하며 따졌습니다.

그러자 푸줏간 주인은 웃으며 조용한 목소리로 " 아, 그거야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손님보고 차별하는 것이 아니라 고기를 판 사람이 다르지요."

"고기를  판 사람이 다르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고기를 판 사람은 네가 아니냐?

"선비님에게 고기를 판 사람은 백정이었고, 저 선비님에게 고기를 판 사람은 김서방이었으니 고기 분량이 다를 수 밖에 없지요."  

무슨 이야기입니까?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중요하다는 교훈이라고 하겠습니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덱거의 명언)
통성 기도

주여!
이전에 가졌던 세속적인 생각과 세속적인 언어 세속적인 행동과 세속적인 습관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영적이며 신령한 생각과 언어와 행동과 습관을 형성하여 이 세상에서도 천국의 삶을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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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이해) 빌립보서 2장 5절에 대한 정확한 해석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Your attitude should be the same as that of Christ Jesus:

빌립보서에서 사용한 "마음(φρονέω, 프로네오)"이란 헬라 단어를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마음 / 프로네오(φρονέω)  

1. 생각하다,  2. ~에 몹시 마음을 두다,  3. 생각을 가지다
동사 : 생각을 가지다, 태도를 가지다, 빌립보서 2:5
빌립보서 2장 5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라고 할 때 마음이란 "생각을 가지다" 또는 "태도를 가지다" 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입니다.

영어 성경에서도 "마음"을 "attitude" 라고 하여 "태도" "자세"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마음이란?
첫째는 예수님의 생각을 갖는 것
둘째는 예수님의 태도를 따라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1. 생각하다, 의견을 가지다, 판단하다
   로마서 12:3, 고린도전서 13:11, 빌립보서 1:7

로마서 12:3,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고린도전서 13: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빌립보서 1:7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예한 자가 됨이라.

2. ~에 몹시 마음을 두다, ~에 전념하다, ~에 몰두하다

   로마서 12:16,  빌립보서 3:16,  골로새서 3:2

로마서 12:16,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체 말라

빌립보서 3:16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골로새서 3:2

위엣 것을 생각하고 엣 것을 생각지 말라.

3. 생각을 가지다, 태도를 가지다,
    빌립보서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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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제임스 (William James)
윌리엄 제임스는 미국의 철학자, 심리학자이다. 프래그머티즘 철학의 확립자로 알려졌다.
철학· 종교학· 심리학 등에 뛰어난 연구를 많이 남겼다.
1855년에서 1860년까지 유럽의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영국, 프랑스, 스위스, 독일에서 생활하면서 유럽 문물을 만났다.

If you change your mind and your language changes.
If you change the language and your behavior changes.
If you change your behavior and your habits change.
Changing habits changes fate.
생각을 바꾸면 언어가 바뀌고
언어를 바꾸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을 바꾸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을 바꾸면 운명이 바뀐다.

예수를 믿는 성도들이 예수님의 생각과 태도를 따라 신앙생활을 계속할 수 있다면 반드시 신앙생활에 성공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생각, 예수님의 언어, 예수님의 행동, 예수님의 습관을 몸과 마음에 익혀서 성공하는 신앙인이 되기를 다짐해 봅니다.

예수님의 생각
- 누구의 죄 때문인가?(요한복음 9:1-3)

예수
께서 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예수
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예수님의 언어
-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한복음 21:15)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 트집을 잡으려는 언어가 세상을 뒤 흔들지라도 예수님께서는 용서하시려는 언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잘못을 문책하려는 언어가 아니라 다시 결단하고 일어나도록 기회를 찾게하는 언어



예수님의 행동
- 검을 도로 꽂으라(마태복음 26:5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 베드로의 용기는 분명 주님을 위한 행동이었지만 그 행동이 하늘의 법을 따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우쳤다.
때로는 누군가를 위하여 용기를 발휘한 것처럼 보였을지라도 참된 것은 행동이 아니라 사건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이다.



예수님의 습관
- 새벽 미명 한적한 곳에 나가(마가복음 1:35)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예수님께서는 자주 기도하러 산으로 가셨다.
거룩한 습관은 거룩한 삶을 만들어 낼 것이다.



(결론을 위한 이야기)

랠프 월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 1803. 5. 3 ∼ 1882. 4. 27)

‘한 마디의 말은 다른 사람 앞에서 자기 초상화를 그리는 것이다.’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누가복음 6:45)

프로이드는 환자 스스로 정신문제의 근본 원인을 찾도록 도와주는 실험을 하는 중 정신분석학의 중요한 토대를 찾았다고 말한다.
즉 환자와 나누는 허심탄회한 일상의 대화 속에 모든 문제와 답이 담겨 있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우리 안에 녹아 있는 감정 의지 기질 성향 생각 등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은 바로 우리가 하고 있는 ‘말’임을 시사한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국이 필리핀의 마닐라를 공격하기 위해 군함을 막 출항시키려는 순간이었다.
그때 한 해군의 옷이 바다에 떨어졌다.
그 해군은 자신을 말리는 상관의 명령을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바다에 뛰어들어 옷을 건져 냈다.
병사는 명령불복종이란 죄로 즉시 군법회의에 넘겨졌다.
재판관이 그에게 물었다.

“귀관은 그까짓 옷 하나를 건지려고 상관의 명령을 어겼단 말인가?”


병사는 묵묵부답이었다.

“상관의 명령이 중요한가, 옷가지가 중요한가? 말해 보라.”


병사는 중형에 처해질 위기에 처했다.
사람들도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건 병사를 마땅히 중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때 병사는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제가 상관의 명령을 어기고 옷을 되찾으려고 바다에 뛰어든 것은 잘못입니다.

저를 처벌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바다에 뛰어든 이유는 옷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호주머니에서 빛바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옷 속엔 제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어머니의 사진이 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재판장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재판관도 그의 동기를 듣고 나서 큰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병사의 어깨에 손을 얹고 말했다.

“어머니 사진 때문에 목숨을 건 자네는 진정 용기 있는 군인이네.
자네는 조국을 위해서도 목숨을 걸고 싸울 수 있을 거야.”

병사는 무죄 선고를 받았다.
하나님도 우리의 숨은 동기를 보신다.
신자는 겉으로 드러난 행동보다 동기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임을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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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관이 된 노력을 실력이라 한다

습관에는 좋은 습관도 있고, 나쁜 습관도 있습니다.
따라서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나쁜 것은 빨리 버리고, 좋은 것은 계속 유지해야 합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처럼 일단 몸에 밴 습관은 쉽게 고쳐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제52대 총리였던 마가렛 대처의 말을 빌리자면 '습관은 운명이 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좋은 운명을 원한다면 좋은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습관의 중요성은 신앙생활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다니엘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다니엘서 6장 10절에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 하였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대인 다니엘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온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바벨론의 피식민지 지식인에 대한 우대정책으로 일찍이 당국에 발탁되어 총리의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그런 그를 시기한 사람들은 왕으로 하여금 왕 외에 그 어떤 사람이나 신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굴에 던져진다는 금령을 내리게 했습니다. 다니엘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습관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전에 하던 대로" 집에 돌아와 창문을 열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했습니다. 생명을 담보로 하는 왕이 내린 금령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다니엘은 기도의 습관을 버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신앙인은 이른바 ‘거룩한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특히 요즘처럼 코로나 전염병으로 인해 소모임 뿐만 아니라 공동예배조차 제대로 할 수 없어 자칫 신앙생활이 느슨해 질 수 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스승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언 중에 “우리가 반복하는 것이 우리 자신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반복하는’, 즉 ‘습관’은 우리 자신입니다. 시간을 정하여 기도하기, 하루에 일정 분량의 성경 읽기, 하루에 한 가지 이상 선한 일 하기 등의 거룩한 습관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의 정체성을 드러냅니다.

또한 무심코 우리의 입에서 자주 튀어 나오는 언어, 무조건적 반사처럼 반복되는 행위들 하나하나도 곧 우리 자신입니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 대신에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그런 언어와 행위를 통해 하나님을 봅니다.

따라서 ‘거룩한 습관’은 우리 자신의 신앙을 성숙시켜 줄 뿐만 아니라 우리를 바라보는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선교적 행위이기도 합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은 그들만의 공통된 습관이 있다"(스티븐 코비)고 하는데, 성공하는 신앙인이 되기 위해 우리도 오늘부터 ‘거룩한 습관’을 들여 보는 것은 어떨까요?


“당신이 35세입니까? 당신은 500일 남았습니다.” 관심을 확 끄는 제목의 이 논문은, 35세가 된 사람은 자신이 개인적으로 쓸 수 있는 시간이 앞으로 500일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고 주장을 합니다.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 논문에 따르면 사람은 음식을 만들고 먹는 데 4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옷을 갈아 입는 데는 1년 반, 머리를 빗는 데에도 1년 반이 걸린다고 합니다. 놀라운 것은 화장실에서 보내는 시간이 자그마치 7년이나 된다고 합니다. 잠자는 데는 24년, 쇼핑하는 데 3년을 소비한다고 합니다. 여기에 일하는 시간, 차 타는 시간 등등을 모두 빼면, 35세인 사람에게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 약 500일 정도의 개인적인 시간이 남게 된다고 합니다.

이 논문이 주장하는 것을 가만 생각하면 ‘정말 그럴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하게 공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별 생각 없이 사용하는 자투리 시간이 모이면 평생에 걸쳐서 어마어마한 양의 시간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습관이 중요합니다. 반복적으로 하는 습관이 평생에 걸쳐서 모이면 큰 시간이 되면서 그것이 바로 나를 만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좋은 습관을 이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위대한 신앙은 거룩한 습관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오늘 마가복음에 등장하는 예수께서 보여 주신 거룩한 습관을 묵상하면서 영성생활의 중요한 특징을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기도하는 거룩한 습관을 이루신 분입니다.

마가복음 1장에는 예수님 사역의 특별한 모습이 하나 등장합니다.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 1:35).

예수께서는 사역으로 바쁘신 가운데도 새벽 이른 시간에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는 기도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실천하신 거룩한 습관입니다.
이 매일 기도하시는 습관이 예수께서 그 많은 사역을 감당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기독교역사 속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에서 지혜를 배우고 실천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너무 바쁘기 때문에 하루 4시간씩 기도한다.”

우리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바쁘면 기도도, 성경 읽는 것도 건너뛸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루터는 바쁘기 때문에 더욱 기도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님에게서 이 모습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습관을 실천하는 것이 바로 바쁜 삶을 잘 감당하고, 승리할 수 있는 원동력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예수님처럼 이러한 거룩한 습관을 형성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찰스 두히그(Charles Duhigg)가 쓴 <습관의 힘>(The Power of Habit)이라는 책에는 새들백 교회(Saddleback Church)의 릭 워렌(Rick Warren) 목사의 인터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 인터뷰에서 릭 워렌 목사는 새들백교회가 지향하는 신앙의 핵심이 거룩한 습관을 형성하는 데에 있다고 말합니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서 살아가야 하는데, 예수님의 삶을 그대로 본받아 살라고 하면 이것이 며칠 가지를 못한다고 합니다.
신앙이 아직 자리 잡지 않은 교인들에게는 굉장한 부담감을 느끼게 만들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릭 워렌 목사가 택한 방법은 믿음의 습관을 길러 주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교회 안에 작은 그룹들을 많이 만들고, 교인들이 그 작은 그룹에 모두 참여하여 그 속에서 함께 기도하고, 삶을 나누고, 성경을 읽으면서 점차로 믿음의 습관을 형성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자연스럽게 신앙이 자라고, 예수님의 삶을 따라가는 힘이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습관이 신앙을 성숙하게 만들어 준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실천하신 거룩한 습관을 기르는 것이 우리 또한 건강한 신앙인으로 자라날 수 있는 방법입니다.

예수님은 거룩한 습관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신 분입니다.

마가복음 1장은 계속해서 이러한 거룩한 습관을 이루는 것이 필요한 이유를 설명해 줍니다. 예수께서는 거룩한 습관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제자들이 기도하는 주님을 찾아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막 1:37). 사람들에게 인기가 폭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기도 가운데 분별한 하나님의 뜻으로 제자들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막 1:38).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의 인기에 좌우되지 않는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사람들은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예수님을 향해서 몰려들었지만, 새벽에 기도하는 거룩한 습관을 통해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가운데 있던 예수님은 ‘다른 마을에 가서 전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제자들에게 이야기합니다. 거룩한 습관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게 합니다.

교회에서 직분으로 봉사하고, 여러 가지 일로 사역하는 사람은 이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바쁠 때에 더욱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 없이 사역으로 나아가서는 안 됩니다. 기도를 통해 나의 사역 가운데, 삶의 모든 일 가운데 내 뜻이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도록 애써야 합니다. 비록 사람들은 나에게 몰려오고, 나에게 칭찬과 박수를 보낼 때도 있지만, 이러한 관심과 칭찬은 사실 하나님께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가야 할 관심을 내가 빼앗을 때에 심각한 영적인 함정에 빠집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나는 이 일을 위해 왔노라” 말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나아갈 줄 아는 사역자와 봉사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일은 거룩한 습관을 통해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속에 있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예수님이 이루신 거룩한 습관은 기도와 사역의 조화입니다.

마가복음 1:39은 온 갈릴리를 다시니며 하나님나라의 운동을 펼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그들의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쫓으시더라.”
예수께서는 기도하신 후에 사역으로 나아가셨습니다.
기도하지 않고 사역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반대로 실천하고 행동하는 모습 없이 기도만 하는 것 또한 문제입니다.
참 이상하게도 기도만 한다고 신앙이 건강하게 자라지는 않습니다.
기도를 통해 영적인 에너지를 충전한 사람은 작은 것이라도 실천하는 모습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을 영성가들은 “기도 가운데 하는 실천”(action in prayer)이라고 말합니다.

신앙생활의 핵심은 거룩한 습관으로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로 나아가는 것이고, 여기에서 받은 은혜와 사랑으로 실천하며 봉사하는 삶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이 본문 전체를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를 원하는 거룩한 습관의 핵심입니다.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신 예수께서 사역의 현장으로 나아가시고, 또한 사역의 현장에 있다가 다시 기도하는 자리로 들어오신 것처럼, 기도와 사역, 신앙과 봉사의 균형으로 건강한 신앙을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거룩한 습관은 이러한 ‘기도 가운데 하는 실천’입니다.
작은 것도 은혜 받은 대로 실천하려는 습관을 이루려고 할 때에, 이 습관이 우리의 신앙과 교회를 건강하게 만듭니다.

습관을 제2의 천성이라고도 합니다.
일단 습관이 형성되면 그 습관은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습관은 되도록 인생의 이른 시기에 익혀야 합니다.
좋은 습관을 만드는 것이 삶의 미션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 인생의 습관들을 연구하였으나 예수님의 습관을 연구하는 일은 드문 일입니다.
하지만 예수님보다 더 영향력 있는 인생을 산 사람이 없다면 그 분의 습관을 연구하는 일보다 중요한 일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의 습관을 연구하는 작업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그 일을 시작할 때입니다.
이 위대한 연구로 새로운 삶의 습관들이 태어난다면 우리네 삶의 마당은 지금보다 훨씬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인생의 변화가 불가능하다고 체념한 모든 이웃들에게 새로운 습관을 만드는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자 격려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습관을 나의 습관으로 만드는 보람찬 여정을 시작하며, 이 여정에 도전하는 길손들에게 축하를 보내 드립니다.
아이든, 청소년이든, 청년이든, 장년이든, 노년이든 새로운 습관으로 새 인생을 살고자 갈망하는 사람 모두에게 이 한 권의 책이 습관의 영원한 멘토가 되었으면 합니다.

당신이 익히는 새 습관이 곧 새 변화의 촉매가 될 것입니다.
자, 그러면 새 습관과 더불어 거룩한 새 인생을 시작하십시다.



[본문내용]

- 우리의 행동을 바꾸는 것은 단순히 나쁜 습관을 버리는 결심만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습관, 더 나은 습관, 거룩한 습관을 익혀야 합니다. 새로운 습관만이 우리가 사모하는 진정한 부흥, 진정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 우연히 찾아온 모든 만남들, 그 모든 만남들을 전도의 기회로 포착해 보십시오. 그것이 바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는 삶입니다. 우리의 행동을 바꾸는 것은 단순히 나쁜 습관을 버리는 결심만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습관, 더 나은 습관, 거룩한 습관을 익혀야 합니다. 새로운 습관만이 우리가 사모하는 진정한 부흥, 진정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 교회는 정말 불신자를 전도하는 교회로서 쓰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교회를 찾아 주고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는 분들은 거의 70-80%가 이미 믿는 분들입니다. 한국의 대형교회 대부분이 타 교회에서 전입되는 교우들의 소위 이동성장에 크게 의존하고 있습니다.

- 침묵이 필요할 때는 침묵으로 기도하지만, 통곡이 필요할 때는 통곡하며 기도할 줄 아는 성도들이 돼야 합니다. 오늘의 상황이 눈물을 요구한다면 우십시오. 하나님은 그 솔직한 눈물을 보고 싶어 하십니다.

- 예수님의 일생은 사역의 일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생을 복음서를 통해 연구해 보면 그분은 사역을 오직 기도로 실현하셨음을 보게 됩니다.

- 진정한 예배는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교정하는 장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예배할 때마다 변화되고 예배할 때마다 성숙하고 예배할 때마다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배의 축복입니다.

- 성도의 기본 동작은 예배에서 시작됩니다. 예배 자세가 흔들리고 예배에서 은혜를 받지 못하면 우리네 신앙생활 전반의 자세가 흔들리는 것입니다.

- 하는 일에 빈번하게 우선순위에서 밀려나는 일은 없습니까? 다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의 집을 찾아 그분을 예배하는 일, 이 일이 평생에 양보할 수 없는 우선순위의 습관이 되게 하십시오. 예배는 성도의 기본 동작입니다. 이 기본자세가 흔들리면 우리의 인생 전체가 흔들린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 우리의 모든 예배는 그분과의 만남에 초점이 맞춰져야 합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 속에 그분을 만나야 합니다. 찬양의 주제가 되시는 주님을 찬양하며 만나야 합니다. 사랑과 감사의 마음으로 헌금을 드리며 헌물을 받으시는 그분을 만나야 합니다. 말씀의 유일한 초점이신 예수님을 말씀이 선포되는 가운데 만나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임재가 느껴지도록 전심으로 찬양하십시오. 그분의 임재가 느껴지도록 집중해서 기도하십시오. 그분의 임재가 느껴지도록 그분에게 당신의 사랑을 드리십시오. 그분의 임재가 느껴지도록 말씀 속에서 그분의 음성을 귀 기울여 들으십시오.

- 안식은 인생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관점을 제공하고 인생의 경이를 받아들이게 하는 복된 여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행스럽게 제자들에게는 이런 안식의 여백이 있었고 그리하여 부활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 안식의 여백이 바로 하나님의 창조의 경이를 발견하는 준비가 되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부활처럼 놀라운 진리 앞에 감격하지도 감동하지도 못하고 삽니까? 마음에 부활의 사건에 놀랄 여유 그 자체를 상실한 까닭입니다.

- 믿음의 대화는 아주 중요합니다. 대화 속에 살아 계신 주님이 찾아오시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주께서 주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 영의 눈을 열어서 그분을 보십시오. 유진 피터슨은 이런 일상의 신비를 보는 눈이 열린다면 우리에게 일상의 장은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경험하고 그분을 증언하는 장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때 우리는 교회에서뿐만 아니라, 가정에서, 일터에서 날마다 그분을 만나고 날마다 그분에게 헌신을 드리는 놀라운 부활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 사단 마귀의 시험에서 우리를 지켜 승리하게 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바로 말씀 암송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붙들면 말씀이 우리를 붙들게 됩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성도라도 말씀이 우리 안에서 살아 움직이지 못하면 우리는 언제라도 사단 마귀의 먹이가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 우리가 시험에 빠졌을 때를 돌이켜 보면 반드시 공통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등한히 할 때 그리고 무엇보다 말씀에서 우리가 멀어져 있을 때가 아닙니까? 그러므로 시험에 승리하시려면 말씀을 가까이 하십시오. 말씀을 암송하십시오.

- 사용되지 않는 무기는 있으나 마나한 것입니다. 말씀을 암송하십시오. 그리고 시시 때때로 묵상하십시오. 그것이 우리를 거룩한 삶에 이르게 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 자들을 단기 선교의 장으로 파송하시면서 제일차적으로 강조하신 것이 지혜입니다. 지혜롭지 못한 말과 행동으로 오히려 불필요한 문제를 만들기도 하고, 선교지에서 선교사님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기도 합니다.

- 예수 믿고 구원받아 우리 이름이 하늘나라 생명책에 기록되는 구원의 사건보다 더 위대한 기적은 없습니다. 선교의 본질은 이 구원의 기쁨을 나누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의 기쁨을 누리는 자로 이 기쁨을 나누기 위해 선교하는 것입니다.

- 주께서는 인류에 대한 최선의 유익이 우리의 구원임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섬겨 구원하시고자 자신의 목숨을 속죄의 제물로 드리기로 결단하신 것입니다.

- 예수님의 오심의 목적이 바로 섬김이었습니다. 섬김의 절정의 표현이 바로 자기 목숨의 드림이었고 그 결과가 또한 인류의 구원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섬김은 목숨을 드리는 거창한 일뿐 아니라 가장 작은 일로도 가능한 것을 주님은 제자들에게 가르칠 필요가 있으셨습니다. 그래서 본문이 보여 주는 것처럼 수건과 대야를 들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입니다.

- 우리가 자신을 예수의 제자로 자처한다면 그분의 본을 따르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못할까요? 자신의 이기심 때문입니다. 내 한 몸 조금 편하기 위해 우리는 그 작은 고난들을 견디기가 싫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 섬김은 옵션이 아니라 명령입니다.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일이 아니라, 하지 않으면 안 될, 주인 되신 분의 명령입니다.

- 이웃들에게 거룩한 영향을 끼치는 제자 삼기의 삶, 그것은 무엇보다 상처 받고 고통 받는 이웃들의 모습을 주목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 세상에 고생하고 기진해 있는 영혼들이 한둘입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보여 주신 모범이 12명만 책임져 보라는 것입니다. 12명도 많아 보이면 우선 3명만 책임져 보십시오. 누구든지 내 주변에 힘들어하며 인생을 사는 세 분과 만나 기도하며 목장 모임을 시작해 보십시오.

- 교회는 말씀과 기도 그리고 삶의 고통과 기쁨을 나누며 서로 영혼들을 터치하는 곳입니다. 거기서 기대할 수 있는 최대의 사건이 무엇입니까? 눈이 열리고 예수를 보게 되는 일입니다.

- 우리가 기도하면 할수록 예수님의 사랑이 깊이 경험되는 이유는 그분이 귀 기울여 우리의 기도를 경청하는 분이심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경청 습관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경청의 기적을 경험하는 인생을 살기 바랍니다.

- 가족보다 민족보다도 더 높고 더 넓은 가치는 무엇일까요? 성경은 바로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가족관은 바로 이런 하나님의 뜻 위에 서 있었습니다.

- 교회 공동체 내에서의 서로를 위한 기도를 통해 우리는 인생의 문제를 매고 푸는 위대한 경험을 나누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장 교회로 모일 때마다 우리는 우리의 문제를 내어 놓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거기에 임재하시기 때문입니다.

- 고난이 불순종과 반항을 교정하고 우리를 순종의 자리에 반듯하게 세우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받았다고 해서 고난이 면제되지 않는 이유입니다. 아직 우리가 배워야 할 순종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예수님의 생각, 예수님의 태도


예수님의 공생애는 3년입니다.
3년의 공생애 중에서 마지막 날에 일어났던 사례들을 중심으로 예수님의 생각과 예수님의 태도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6:6-13

6. 예수
님이 베다니에 있는 문둥병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
7. 한 여자가 예수님께 값진 향유 한 병을 가지고 와서 식탁에 앉으신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
8. 그러나 제자들은 이것을 보고 분개하여 '무엇 때문에 이렇게 낭비하시오?
9. 이 향유를 비싼 값에 팔아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 수도 있지 않았소?' 하였다.
10. 그러자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왜 그 여자를 괴롭히느냐? 그녀는 나에게 좋은 일을 하였다.
11. 가난
한 사람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나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12. 이 여자는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준비하였다.
13. 내가 분명히 말해 둔다. 세상 어디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한 일도 알려져서 사람들의 기억에 남을 것이다.'

예수님의 생각과 언어 그리고 제자들의 생각과 언어

향유 한 병의 가격은 300데나리온(노동자의 일년치 임금 총액)
제자들 : 이렇게 비싼 것을 왜 순식간에 머리에 부어 허비하느냐?
예수님 : 나에게 좋은 일을 하였다. 나의 장례를 준비한 것으로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가 이 여자의 행한 것이 알려져서 사람들이 기억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생각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여자가 그 비싼 향유 한 병을 예수님의 머리에 붓는 것에 대해서 왜 돈을 낭비하느냐 하며 꾸짖습니다.
생각의 차이가 무엇인가요?

육체적인 환경에 얽매인 제자들
영적인 환경을 바라보는 예수님

신앙생활은 영적 생활입니다.
그렇다면 분명히 육체적인 환경보다는 영적인 환경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주일마다 모여서 예배할 때 불편한 것이 있습니다.
그 불편한 것이 무엇인가요?
숭실학교에서 숭실교회를 담임할 때 주위에서 모두들 학교에서는 교회가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 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첫째는 주차장(학교 운동장)
둘째는 교육관(학교 교실)
셋째는 담임선생님을 매 주일 만날 수 있다(학부모와 담임 선생의 신앙적인 만남)

그런데 안된다는 생각이 1년이 지나면서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경신학교 교목, 정신여고 교목 등 기독교 학교 교목들이 주일이면 예배 때에 방문하여 숭실학교에서 교회가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찾고자 합니다.
그 이후에 학원교회가 활발하게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뉴욕에서 파트리스교회가 될 수 있는 이유와 될 수 없는 이유를 살펴봅시다.
그리고 될 수 있는 장점을 부각시켜 이제부터 주일 예배를 부흥하도록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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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이 저지르는 잘못 중에서 가장 큰 잘못은       
 그 잘못으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할 때이다.
  - 존 포웰 


제가 주일학교에 다닐 때 자주 부르던 어린이 찬송 중에 "예수님의 마음"이란 찬송을 소개합니다.

1.
예수님의 마음은 고요한 연못
달밤에 벌어지는 연꽃잎처럼
우리들을 다정히 불러 주어요
우리들을 다정히 불러 주어요

2.
예수님의 마음은 높은 하늘
봄 하늘 노래하는 종달새처럼
원수들도 모두 다 품어 주어요
원수들도 모두 다 풀어 주어요

3.
예수님의 마음은 깊은 바다
값 비싼 보배들이 가득함 같이
기쁨으로 내 소원들어 주셔요
기쁨으로 내 소원들어 주셔요

빌립보서에서 사용한 "마음(φρονέω 스트롱번호 5426)"이란 헬라 단어를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마음 / 프로네오(φρονέω) 

1. 생각하다,  2. ~에 몹시 마음을 두다,  3. 생각을 가지다

발음 / 프로네오(phrŏnĕō)
어원 / 미완료 ἐφρόνουν, 미래 φρονήσω, 제1 부정과거 ἐφρόνησα, 542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생각하다(롬 8:5, 빌 1:7, 골 3:2), 여기다(롬 14:6), 뜻이 같게 하다(롬 15:5), (서로에게) 마음을 기울이다(롬 12:16, 빌 2:2, 5), [명] 사상(행 28:22)|
신약 성경 / 26회 사용
1. 동사  :  생각하다, 의견을 가지다, 판단하다, 롬 12:3, 고전 13:11, 빌 1:7
2. 동사  : ~에 몹시 마음을 두다, ~에 전념하다, ~에 몰두하다, 롬 12:16, 빌 3:16, 골 3:2
3. 동사 : 생각을 가지다, 태도를 가지다, 빌 2:5.

빌립보서 2장 5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라고 할 때 마음이란 "생각을 가지다" 또는 "태도를 가지다" 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입니다.

영어 성경에서도 "이 마음"을 "attitude" 라고 하여 "태도" "자세"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마음이란

첫째는 예수님의 생각을 갖는 것
둘째는 예수님의 태도를 따라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생각과 예수님의 태도를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마태복음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Take my yoke upon you and learn from me, for I am gentle and humble in heart, and you will find rest for your souls.

예수님의 마음은 온유한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겸손한 마음입니다.
오늘은 온유한 마음에 대해서 소개합니다.

온유(溫柔)(4235) 프라오스(πρᾶος)
겸손(謙遜)(5011) 타페이노스(ταπεινός)

온유(溫柔)(4235) πρᾶος

1. 4239의 한 형태 : 온화한
2. 겸손한
3. 온유한

발음 / 프라오스(praŏs)

관련 성경 / 온유한(마 11:29).
신약 성경 / 4회 사용
* 형용사 4239의 한 형태 : 온화한, 겸손한, 온유한, 마태복음 11:29.

겸손(謙遜)(5011) ταπεινός

1. 낮은 지위의
2. 비굴한
3. 겸손한

발음 / 타페이노스(tapĕinŏs)

어원 / 불확실한 어원에서 파생
관련 성경 / 겸손한(마 11:29, 약 4:6, 벧전 5:6), 비천한 (눅 1:52, 고후 7:6), 낮은(롬 12:16, 약 1:9), 유순한(고후 10:1) 
신약 성경 / 8회 사용
* 형용사 - 낮은 지위의, 천한, 보잘것없는, 눅 1: 52, 롬 12:16, 고후 7:6, 약 1:9


온유(溫柔) : 따뜻할 온(溫), 부드러울 유(柔)
- 온화하고 유순함

gentle : 부드러운, 온순한, 친절한, 다정한, 점잖은

민수기 12: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Now Moses was a very humble man, more humble than anyone else on the face of the earth.

온유에 대한 세 가지 신앙적 자세

첫째는 자기 자신에 대한 온유
둘째는 이웃에 대한 온유
셋째는 하나님에 대한 온유


첫째는 자기 자신에 대한 온유

자기 자신에 대한 온유는 "절제(節制)"에 의한 통제를 말합니다.
- 알맞게 조절함
- 방종(放縱)하지 않도록 자기(自己)의 욕망(欲望)을 이성(理性)으로써 제어(制御ㆍ制馭)함. 


둘째는 이웃에 대한 온유

이웃에 대한 온유는 "사랑(愛)"으로 표현됩니다.

애(愛)자는 ‘사랑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愛자는 爫(손톱 조),  冖(덮을 멱), 心(마음 심) , 夊(천천히 걸을 쇠) 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러나 금문에 나온 愛자를 보면 단순히 旡(목맬 기)자와 心(마음 심)자가  결합한 형태였다.
이것은 사람의 가슴 부위에 심장을 그린 것이다.
그러니까 금문에서는 사람의 가슴에 심장이 들어가 있는 모습을 그려져 ‘사랑하다’를 표현했다.
이러한 모습이 변하면서 소전에서는 마치 손으로 심장을 감싸 안은 것과 같은 형태가 되었다.

셋째는 하나님에 대한 온유

하나님에 대한 온유는 "감사(感謝)"하는 것입니다.

느낄 감(感), 사례할 사(謝)

1. 고마움
2. 고맙게 여김
3. 고맙게 여기고 사례(謝禮)함.

감사무지(感謝無地) : 무한(無限)히 감사(感謝)함.

감사만만(感謝萬萬) :  대단히 감사(感謝)함. 너무나 감사하여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음

온유에 대한 세 가지 신앙적인 자세를 좀 더 구체적으로 소개합니다.


첫째는 자기 자신에 대한 온유(누가복음 18:13)

자기 자신에 대한 온유를 누가복음 18:9-14에 등장하는 바리새인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에서 살펴봅니다.
바리새인도 기도하였고 세리도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의 기도보다 세리의 기도에 대하여 들으시고 세리가 바리새인 보다 더 의롭다고 하셨습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를 들어봅시다(18:11-12).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기도하는 내용에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비교의 대상이 잘못되었습니다.

세리의 기도를 들어봅시다(18: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온유는 자기의 의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온유는 자기를 자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둘째는 이웃에 대한 온유(마태복음 22:39)

이웃에 대한 온유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말씀에서 확인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다른 사람에 대한 온유라고 하겠습니다.



셋째는 하나님에 대한 온유

하나님에 대한 온유는 원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원망은 감사하는 것으로 든든하게 세워 갈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 5:9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밖에 서 계시니라.
Don't grumble against each other, brothers, or you will be judged. The Judge is standing at the door.

하나님에 대한 온유를 믿음으로 잘 표현한 인물은 "욥" 이라고 하겠습니다.

욥기 2:7-9
사단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게 한지라.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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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수정 / 08-22-2022(월)

빌립보서에서 사용한 "마음(φρονέω 스트롱번호 5426)"이란 헬라 단어를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마음 / 프로네오(φρονέω) 

1. 생각하다,  2. ~에 몹시 마음을 두다,  3. 생각을 가지다

발음 / 프로네오(phrŏnĕō)
어원 / 미완료 ἐφρόνουν, 미래 φρονήσω, 제1 부정과거 ἐφρόνησα, 542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생각하다(롬 8:5, 빌 1:7, 골 3:2), 여기다(롬 14:6), 뜻이 같게 하다(롬 15:5), (서로에게) 마음을 기울이다(롬 12:16, 빌 2:2, 5), [명] 사상(행 28:22)|
신약 성경 / 26회 사용
1.  동사  :  생각하다, 의견을 가지다, 판단하다, 롬 12:3, 고전 13:11, 빌 1:7
2. 동사  : ~에 몹시 마음을 두다, ~에 전념하다, ~에 몰두하다, 롬 12:16, 빌 3:16, 골 3:2
3. 동사 : 생각을 가지다, 태도를 가지다, 빌 2:5.
빌립보서 2장 5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라고 할 때 마음이란 "생각을 가지다" 또는 "태도를 가지다" 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입니다.

영어 성경에서도 "이 마음"을 "attitude" 라고 하여 "태도" "자세"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마음이란

첫째는 예수님의 생각을 갖는 것
둘째는 예수님의 태도를 따라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빌립보서의 본문을 묵상하면서 깨닫는 것은 한글 번역은 "마음"이지만 헬라어 성경에서는 "태도" 또는 "생각"이라고 하지요.
성경의 원문에 충실하려면 설교 제목은 "예수님의 마음" 이라고 하였으나 "예수님의 태도" 또는 "예수님의 생각"이 더 좋을 듯합니다.
이러한 원문 배경에 따라 "예수님의 태도"
'태도'는 생각, 언어, 행동, 습관으로 나타난다는 것으로 발전시켜서 설교 내용을 수정하려고 합니다.

윌리엄 제임스 (William James)

윌리엄 제임스는 미국의 철학자, 심리학자이다. 프래그머티즘 철학의 확립자로 알려졌다.
철학· 종교학· 심리학 등에 뛰어난 연구를 많이 남겼다.
1855년에서 1860년까지 유럽의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영국, 프랑스, 스위스, 독일에서 생활하면서 유럽 문물을 만났다.

If you change your mind and your language changes.
If you change the language and your behavior changes.
If you change your behavior and your habits change.
Changing habits changes fate.

생각을 바꾸면 언어가 바뀌고
언어를 바꾸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을 바꾸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을 바꾸면 운명이 바뀐다.

이러한 배경에서 설교 내용을 긴급하게 수정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생각, 태도)


 1. 예수님의 생각 -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좋았을 뻔하였느니라(마태복음 26:2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 8:6)

- 골로새서 3:2 /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2. 예수님의 언어 -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한복음 21:15, 16, 17)


 3. 예수님의 행동 - 충동적인 행동을 삼가라(마태복음 26:51-52)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에 하나가 손을 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4. 예수님의 습관 - 규칙적인 기도 생활(누가복음 22:39)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

 5. 예수님의 운명 - 하나님의 뜻대로 하옵소서(마태복음 26:39, 마가복음 14:36)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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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6:6-13

6. 예수
님이 베다니에 있는 문둥병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
7. 한 여자가 예수님께 값진 향유 한 병을 가지고 와서 식탁에 앉으신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
8. 그러나 제자들은 이것을 보고 분개하여 '무엇 때문에 이렇게 낭비하시오?
9. 이 향유를 비싼 값에 팔아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 수도 있지 않았소?' 하였다.
10. 그러자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왜 그 여자를 괴롭히느냐? 그녀는 나에게 좋은 일을 하였다.
11. 가난
한 사람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나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12. 이 여자는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준비하였다.
13. 내가 분명히 말해 둔다. 세상 어디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한 일도 알려져서 사람들의 기억에 남을 것이다.'

예수님의 생각과 언어 그리고 제자들의 생각과 언어

향유 한 병의 가격은 300데나리온(노동자의 일년치 임금 총액)
제자들 : 이렇게 비싼 것을 왜 순식간에 머리에 부어 허비하느냐?
예수님 : 나에게 좋은 일을 하였다. 나의 장례를 준비한 것으로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가 이 여자의 행한 것이 알려져서 사람들이 기억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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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는 이렇게 말했다.
앙브루아즈 폴 투생 쥘 발레리(Ambroise Paul Toussaint Jules Valéry)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사는 대로 생각하는 수동적인 삶
사는 대로 생각하는 것과, 생각하는 대로 사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사는 대로 생각하는 사람은 수동적인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주어진 환경의 지배를 받으면서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생각하는 대로 살아가는 능동적인 삶
생각하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다르다.
이 사람은 능동적인 삶을 산다.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고, 그 환경을 뛰어넘는다.
더 나은 삶을 생각하고 살아가기에, 오늘을 살아가는 삶의 자세와 태도가 다르다.

지금 이 시대는 생각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애플은 아이폰으로 세상을 완전히 바꾸어버린 기업이다.
애플의 성공 요인 중 하나가 ‘Think different’이다.
잡스의 남과 다른 생각이 세상을 바꾼 것이다.

빌 게이츠는 세계 최고의 갑부이자 가장 존경받는 비즈니스 리더이다.
IT혁명의 기수요 디지털 제국의 제왕이다.
오늘날 전 세계 컴퓨터의 90%가 빌 게이츠가 세운 마이크로소프트 운영체계를 사용하고 있다.

그가 구상하고 제시하는 미래상은, 얼마 안 가 우리의 현실이 되곤 한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다름 아닌 빌 게이츠의 홀로 있는 시간이었다.

빌 게이츠는 일 년에 두 번씩 미국 서북부 지역 작은 별장에 일주일 간 칩거하며 ‘생각 주간(Think Week)’을 갖는다.
빌 게이츠의 ‘생각 주간’은 지난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단지 마이크로 소프트사의 생존뿐 아니라 디지털 세계를 리드하게 하는 '힘의 근원, 전략의 원천'이 되어 왔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 생각의 중요성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평범한 생각이 아니라, 남다른 생각이 중요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생각이 아니라 창의적인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문제는 남다른 생각, 창의적인 생각은 그저 하고 싶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김용규 선생이 쓴 <생각의 시대>이다.

저자는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과 튀빙겐 대학에서 서양문명의 두 기둥인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정통 인문학자다.
그는 그동안 풍부한 인문학적 지식과 깊이 있는 성찰을 바탕으로 다양한 대중적 철학서와 인문교양서, 그리고 ‘지식소설’을 집필해왔다.

결코 쉽지 않은 주제들도 그의 글쓰기를 거치면 친절하고 맛깔스럽게 바뀌기 때문에, 독자들은 그런 그를 가리켜 ‘인문학의 연금술사’, ‘한국의 옴베르토 에코’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 저자가 ‘생각’에 주목했다.
저자는 이 시대 사람들이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을 잃어버렸다고 말한다.
그래서 지금 길을 잃고 당황하며 서성이고 있다는 것이다.

과연 해법은 없는 것일까?
저자는 해법이 의외로 단순하다고 말한다.
기원전 8세기부터 5세기까지 고대 그리스도인들에게 보편적이고 거시적이며 합리적인 사유 능력을 제공해 주었던 생각의 도구들과, 이후 지난 2,500년 동안 누적된 지식을 만들어 온 시원적인 도구를 찾아내면 된다는 것이다.

1. 은유 : 다른 모든 생각들의 원천
2. 원리 : 자연과 사회 관찰과 추론
3. 문장 : 언어적 논리와 설득 핵심
4. 숫자 : 합리적 패턴 이해와 조종
5. 수사 : 가장 강력한 설득의 수단

그것을 찾아내 스스로 익혀 활용하고 아이들에게 교육하면 된다는 것이다.
‘축의 시대(die Achscenzeit)’에 호메로스와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이 개발한 5가지 생각의 도구를 기록하고 있다.

첫째, 메타포라(metaphora, 은유)

은유는 인간의 사고와 언어, 그리고 학문과 예술을 구성하는 가장 원초적이고 근본적인 도구다. 보다 자극적으로 표현하자면, 은유 없이는 우리의 사고도, 언어도, 학문도, 예술도 불가능하다. 은유는 첫 번째 생각의 도구이자 다른 생각의 도구들의 근간이다.

은유는 생각이지만, 다른 모든 생각들을 만드는 생각이다. 은유는 유사성을 통해 ‘보편성’을, 비유사성을 통해 ‘창의성’을 드러내는 천재적인 생각의 도구이다. 한 마디로 은유는 새로운 생각을 창조하는 도구이다.

둘째, 아르케(arche, 원리)

원리는 인간이 그것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 구성하고 조종하거나 지배할 수 있게 하는 생각의 도구다. 또한 인간이 당면한 크고 작은 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할 수 있게 하는 생각의 도구이기도 하다.

원리는 자연과 사회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관찰하고, 그 관찰 결과를 사고하고 추론하여 만들어진다. 그 결과가 자연과 사회에서 일어나는 사실 또한 변화에 맞아 떨어질 때 비로소 완성된다. 원리는 곧 미래를 예측하는 힘을 가져다주는 도구이다.

셋째, 로고스(logos, 문장)

문장이라는 생각의 도구는 적어도 지난 2,500년 동안 서양 문명을 깎고 다듬어 왔으며, 서구인들의 정신까지도 만들어 왔다. 문장은 생각을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다시 말해 이성적으로 전개할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이고 효율적인 도구다.

사람은 은유를 통해 창의력을 키울 수 있다. 그러나 논리력을 향상시킬 수는 없다. 오직 문장을 통해 논리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 설득력의 핵심인 언어적 논리력은 오직 문장을 통해 획득할 수 있다.

넷째, 아리모스(arithmos, 수)

수는 하나의 강력하고 매혹적인 생각의 도구다. 원리와 마찬가지로 숫자도 합리적인 패턴으로 드러나게 하여, 그것을 이해하고 조종한다.

수 없이는 인간은 정상적인 사고도 언어도 거의 불가능하다. 우리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수를 통해 사고하고 대화하며, 가정생활부터 직장생활에 이르기까지 온통 수에 둘러싸여 있다. 단지 공기가 그렇듯, 느끼지 못할 뿐이다.

만일 인류가 수라는 생각의 도구를 개발하지 못했다면, 오늘날 일상생활은 물론이고 인문학을 제외한 거의 모든 학문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인간의 사고는 극히 제한되었을 것이며, 현대 문명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다.

다섯째, 레토리케(rhetorike, 수사)

수사는 가장 강력한 설득 수단이었다. 초기의 수사는 너나할 것 없이 마사여구를 사용한 ‘감동시키기’였다. 오늘날 학자들은 이런 수사를 ‘문예적 수사’라고 하는데, 그것이 기원전 8세기 호메르스 이후 지금까지 부단히 이어졌다. 지금도 수사라고 하면, 현란한 문학적 표현을 먼저 머리에 떠올리는 이유다.

그러나 기원전 5세기 프로타고라스, 고르기아스, 히피아스와 같은 소피스트들이 적극적으로 개발한 이래, 수사는 단순한 문학적 기예가 아니라 설득의 도구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만들어놓은 생각의 도구들
인간은 그것들을 다시 발견했을 뿐
예수님, 고정관념 넘어 도구들 사용

저자는 인류가 탄생시킨 모든 문명이 5가지 ‘생각의 도구’들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말한다. 그런데 우리가 이 책을 꼭 읽어야 하는 것은, 저자가 단지 생각의 5가지 도구만을 설명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그 생각의 도구들을 활용해 새로운 생각들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 실제적 방법들을 제시하고 있다. 이 실제적인 방법인 궁금한가? 이 책을 사서 읽기를 바란다.

생각의 도구들은 실제로 하나님께서 이미 이 세상 가운데 만들어 놓으신 것이다. 그것을 인간이 발견한 것뿐이다.

예수님은 이 땅 가운데 사역하시면서, 이 생각의 도구를 다 사용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의 생각은 고정관념을 뛰어넘으셨다.
시대를 뛰어넘으셨다.

지금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생각은 예수님의 생각이다.
생각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시대를 이끌 수 없다.
예수님의 생각으로 생각하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시대를 이끌어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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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사람 사이에  생각의 차이는 매우 클 것은 분명하다.
부모와 자식간에 생각 차이 만큼 될까요?
자식이 어릴 때는 차이가 크겠지만 부모가 나이들면 자식이 더 지혜로울 수 있게 되니 부모와 자식간의 생각 차이로 하나님과 사람의 생각 차이를 비교하는것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사야서 55:8-9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 차이

첫째는예수님께서 떡 7개로 4천명을 먹이신 후 배를 타고 이동중인데 제자들이 떡이 하나밖에 없다고 수근거립니다.
떡 이야기를 들으시며 예수님께서 떡 만드는데 쓰이는 누룩이라는 단어를 인용하여 가르침을 주십니다.

마가복음 8:15
‘예수께서 경고하여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록을 주의하라 하시니. 

예수님께서 조심하라는 것은  바리새인의 형식주의, 외식하는 신앙, 위선, 독선을 조심하라는 것이요, 헤롯의 누룩이란, 헤롯왕이 로마권력에 아부하여 유대인 혈통도 아니면서 유대 왕이 되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환심을 사려고 믿음도 없으면서 헤롯성전을 짓고, 음란한 삶을 사는, 이런 껍데기 신앙 세속적인 신앙을 경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영혼 구원을 위해 영의 말씀’을 주시는데 제자들은 ‘세상적 생각으로 예수님이 떡이 없어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구나’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혀 깨닫지 못합니다.
생각의 차이가 하늘과 땅의 차이가 아니라 비교자체가 안됩니다.

둘째는 예수님과 베드로의 생각을 비교

마가복음 8: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서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예수님께서는 인류에게 구원을 주시려고 십자가의 고난과 사흘만에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이해 할 턱이 없는 베드로는 ‘그리하지 마옵소서’ 합니다.
사람의 생각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야단을 치십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생각은 너무나 차이가 많아서 비교를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 55:9) 

이는 바로 영과 육의 차이에 해당됩니다.

영과 육의 차이를 로마서 8장 6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즉, 사람의 생각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생각은 생명이니

셋째는 하나님의 생각을 사람이 잘 헤아린 경우

불뱀과 놋뱀 사건 잘 아시지요?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광야를 다니다가 힘드니까 모세에게 불평합니다.
이에 진노하신 하나님께서 불뱀을 보내어 많은 사람이 죽으니까  그제서야 백성들이 범죄함을 회개했고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기도를 듣고 놋뱀을 장대에 매달아 보는 자마다 살아나게 합니다

그 사건 후 장대에 매달린 놋뱀은 귀중한 성물(聖物, Holy thing)이 되었고 이때부터 사람들이 모세의 놋뱀을 향해 분향합니다.

세월이 흘러 솔로몬이 혼인정책으로 지방 각처에서, 세계 각국에서 모두 1,000명에 달하는 부인을 맞이함으로 인해 이 여자들이 가지고 들어온 잡신들로 온 이스라엘에 우상숭배가 넘치게 됩니다.

하나님의 경고가 솔로몬에게 2번이나 있었지만 계속 범죄함으로 결국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분단되고 분단 후에도 하나님께 계속 범죄함으로 하나님은 북 이스라엘을 앗수르로 하여금 패망케 합니다.

홀로 남은 남 유다에서도 우상숭배가 만연하다가 히스기야가 왕이 되면서 대대적인 종교개혁을 단행, 전국에 산당을 부수고 아세라 목상을 불에 태웁니다.

그런데 종교개혁에 상상을 초월한 일이 벌어집니다.
모세 이후 570년 넘도록 조상들이 귀히 모시며 경배 분향하던 유물 '모세의 놋뱀'을 우상이라고 부수어 없앱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하기 위해서.....

어떻게 감히 모세가 남긴 성물,  조상 대대로 섬기던 성물을 없앨 수 있을까요?
사람의 생각으로는 없앨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히스기야를 감동시켜 역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뜻으로 알고 이에 순종하여  놋뱀을 부수고 산당을 없애니 하나님께서 이렇게 좋아하십니다.

열왕기하 18:7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매 그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였더라.

히스기야는 북이스라엘을 멸망시켰던 앗수르(앗시리아) 대군의 침공을 받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대승을 거두고 나라를 구합니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매 그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였더라’이는 우리 믿는 자들의 소망입니다.
히스기야 왕처럼 하나님의 생각과 합한 자가 되어 위와 같이 복받는 자가 모두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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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단 찬송 85장 구주를 생각만해도


'예수 찬미'로 알려진 라틴 찬송가는 11-12세기에 걸쳐 활약했던 수도사, 성자 클레르보의 베르나르(1101-1153)에 의해서 작사 되었다고 전해지는데, 본 찬송이 그의 시와 많은 유사점이 있으나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12세기 말엽에 쓴 찬송시 192행의 라틴어 시 '예수의 이름에 부치는 노래'에서 발췌하여 영역한 청초한 향취를 풍겨주는 찬송시이다. 

영국 태생의 성직자이며 찬송 작가인 에드워드 케스윌(1814-1878)이 부분적으로 발췌하여 번역한 것이라고 한다. 

베르나르는 깊은 묵상을 통하여 하나님과 교제 나누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간혹 신비주의자라고 불리기도 했다.  이 곳에도 그러한 분위기가 나타나 있지만 위대한 설교자요 뛰어난 신학자요 현명한 조언자였던 중세의 성자였다.  그는 그 당시 어느 누구보다도 가장 실천적인 신앙인이었다.  라틴어로 된 원제목은 '아름다운 예수에 대한 묵상이 내 맘에 참 기쁨을 주네'이다.  역사상 수많은 영혼들이 이 찬송을 부르며 위로를 얻었다. 

「찬송 속의 그리스도」(Christ in the Song)의 저자 샤프 박사는 이 찬송시를 가리켜 "중세 시대의 찬송 중에서 가장 복음적이고 아름다운 찬송"이라고 격찬했다.  이 찬송시가 쓰일 당시는 교회의 암흑기였다.  그 당시 중세 교회는 세속에 물들어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매우 타락한 상태에 있었다.  이 곡은 그렇게 어두운 상황 속에서도 항상 구주만을 생각하며 회개하고, 기쁨과 소망을 찾았던 작시자의 간증적 고백이다. 

♣ 작곡

존 바커스 다이크스(Dykes, Jhon Bacchus. 1823-1876).  목사이며 저명한 교회음악가이다.  영국 힐 태생의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남다른 음악적 재능을 보였다.  열살 때에 그는 할아버지가 목사로 시무하고 있던 교회에서 오르간을 연주하였다.  그는 웨이크필드와 케임브리지에 있는 성 캐더린 대학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1847년에 대학을 졸업한 후 부제로 서품되었고 그후 요크셔의 휠튼 성당의 사제가 되었으며, 2년 뒤에는 덜햄의 사제로 임명되었다.  얼마 뒤에 그곳 성당의 선창지가 되었고, 1861년에 덜햄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다음 해에 덜햄에 있는 성오스왈드 교회의 대리 사제가 되었으며 여생을 그곳에서 시무하였다.  

그는 빅토리아 시대의 찬송가 자곡자들 중에서 제일인자였는데 그의 곡들은 <고대와 현대의 찬송가들>이라는 책을 통해서 미국에 소개된 후 100년 이상 대부분의 주요한 교파들에서 찬송가로 선정되어 애창되고 있다.  다이크스는 대중적인 스타일로 대충의 취향에 맞게 작곡을 하였기 때문에 그의 찬송가들은 일반 신도들에 의해서 애창되고 있다. 

그가 작곡한 <성 아그네스>(St. Agnes) 외 500편의 찬송곡을 썼으며 통속적 가곡에 바탕을 둔 새로운 찬미곡을 쓰기도 했다.  그는 현재까지도 빅토리아 풍의 작곡가 가운데 최고봉의 위치를 점하고 있다.

통일찬송가에 본 곡 외에 9장(거룩 거룩 거룩) 59장(성전을 떠나가기 전) 81장(귀하신 주의 이름은) 129장(오 젊고 용감하신) 140장(성도들아 다 나아와) 429장(내 갈길 멀고 밤은 깊은데) 477장(바다에 놀이 치는 때) 508장(주와 같이 되기를) 등이 실려 있다.   


◈ 영국의 성 마리아 교회 토머스 싱 목사는 1882년 10월 22일 70세의 나이로 임종을 맞이했다. 
그는 곁에 서서 임종을 지켜보는 젊은 목사에게 바로 이 찬송을 불러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그도 간절한 마음으로 온 힘을 다하여 따라 불렀다.  마지막 아멘이 끝나자 마자 그는 평안하고 기쁨에 찬 얼굴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주 얼굴 뵈올 때'의 기쁨이 그의 얼굴에 그림자 되어 남아 있었던 것이다. 

♣ 가사 해설

예수님의 구속의 사랑에 접하여 새로 지음을 받은 영들의 입술에 쉬임없이 불려지는 '예수의 성호'는 그대로 인류의 빛이여, 사랑이요, 생명이여, 소망이여, 기쁨의 이름인 것이다. 
이는 우리가 '예수'라는 두 자의 이름 안에서만 우리의 가장 귀한 첫 전부를 찾을 수 있고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에게 예수란 이름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땅속의 지극히 작은 미생물의 가치보다도 더 보잘 것 없는 암흑의 생령들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생각할 때에 우리의  가슴이 쉬임없이 북바쳐 오르며 샘줄기같이 끓어오르는 감사와 기쁨과 감격으로 뜨겁게 되는 것이다.   

요한복음 10장 10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온 것을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찬송에서 한 가지 좋은 것과 더 좋은 것을 노래함은 대체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다 귀하심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예수가 귀하다 할지라도 사랑 없는 구주란 기쁨이 될 수 없다.

이 찬송가는 본래 나틴어로 씌여진 장시 '예수의 이름에 부치는 노래'에서 각 부분을 발췌하여 가사로 만든 것이다. 
그 내용은 주님과 대면하게 될 그때 누릴 기쁨에 대한 소망(1절),
출중한 이름 예수에 대한 송축(2절),
주님께서 참으로 회개하는 자에게 소망이 되심(3절),
체험으로만 알게 되는 주님의 사랑(4절),
영원한 기쁨과 영광이 되어 달라는 주님을 향한 간구(5절) 등으로 되어 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가 오래 계속되면 될수록 그분께 대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더욱 깊어짐을 잘 보여준다. 

'소망' (3) - 소망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과 맺으신 언약에 근거한다. 소망으로 인하여 믿음이 견고해진다. 

'기쁨' (5) - 기쁨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따라서 참된 기쁨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위에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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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주를 생각만 해도

♣ 작사,

이 '예수 찬미'로 알려진 라틴 찬송가는 11-12세기에 걸쳐 활약했던 수도사, 성자 클레르보의 베르나르(1101-1153)에 의해서 작사 되었다고 전해지는데, 본 찬송이 그의 시와 많은 유사점이 있으나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12세기 말엽에 쓴 찬송시 192행의 라틴어 시 '예수의 이름에 부치는 노래'에서 발췌하여 영역한 청초한 향취를 풍겨주는 찬송시이다. 

영국 태생의 성직자이며 찬송 작가인 에드워드 케스윌(1814-1878)이 부분적으로 발췌하여 번역한 것이라고 한다. 

베르나르는 깊은 묵상을 통하여 하나님과 교제 나누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간혹 신비주의자라고 불리기도 했다.  이 곳에도 그러한 분위기가 나타나 있지만 위대한 설교자요 뛰어난 신학자요 현명한 조언자였던 중세의 성자였다.  그는 그 당시 어느 누구보다도 가장 실천적인 신앙인이었다.  라틴어로 된 원제목은 '아름다운 예수에 대한 묵상이 내 맘에 참 기쁨을 주네'이다.  역사상 수많은 영혼들이 이 찬송을 부르며 위로를 얻었다. 

「찬송 속의 그리스도」(Christ in the Song)의 저자 샤프 박사는 이 찬송시를 가리켜 "중세 시대의 찬송 중에서 가장 복음적이고 아름다운 찬송"이라고 격찬했다.  이 찬송시가 쓰일 당시는 교회의 암흑기였다.  그 당시 중세 교회는 세속에 물들어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매우 타락한 상태에 있었다.  이 곡은 그렇게 어두운 상황 속에서도 항상 구주만을 생각하며 회개하고, 기쁨과 소망을 찾았던 작시자의 간증적 고백이다. 


♣ 작곡

존 바커스 다이크스(Dykes, Jhon Bacchus. 1823-1876).  목사이며 저명한 교회음악가이다.  영국 힐 태생의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남다른 음악적 재능을 보였다.  열살 때에 그는 할아버지가 목사로 시무하고 있던 교회에서 오르간을 연주하였다.  그는 웨이크필드와 케임브리지에 있는 성 캐더린 대학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1847년에 대학을 졸업한 후 부제로 서품되었고 그후 요크셔의 휠튼 성당의 사제가 되었으며, 2년 뒤에는 덜햄의 사제로 임명되었다.  얼마 뒤에 그곳 성당의 선창지가 되었고, 1861년에 덜햄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다음 해에 덜햄에 있는 성오스왈드 교회의 대리 사제가 되었으며 여생을 그곳에서 시무하였다.  

그는 빅토리아 시대의 찬송가 자곡자들 중에서 제일인자였는데 그의 곡들은 <고대와 현대의 찬송가들>이라는 책을 통해서 미국에 소개된 후 100년 이상 대부분의 주요한 교파들에서 찬송가로 선정되어 애창되고 있다.  다이크스는 대중적인 스타일로 대충의 취향에 맞게 작곡을 하였기 때문에 그의 찬송가들은 일반 신도들에 의해서 애창되고 있다. 

그가 작곡한 <성 아그네스>(St. Agnes) 외 500편의 찬송곡을 썼으며 통속적 가곡에 바탕을 둔 새로운 찬미곡을 쓰기도 했다.  그는 현재까지도 빅토리아 풍의 작곡가 가운데 최고봉의 위치를 점하고 있다.

통일찬송가에 본 곡 외에 9장(거룩 거룩 거룩) 59장(성전을 떠나가기 전) 81장(귀하신 주의 이름은) 129장(오 젊고 용감하신) 140장(성도들아 다 나아와) 429장(내 갈길 멀고 밤은 깊은데) 477장(바다에 놀이 치는 때) 508장(주와 같이 되기를) 등이 실려 있다.   


◈ 영국의 성 마리아 교회 토머스 싱 목사는 1882년 10월 22일 70세의 나이로 임종을 맞이했다.  그는 곁에 서서 임종을 지켜보는 젊은 목사에게 바로 이 찬송을 불러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그도 간절한 마음으로 온 힘을 다하여 따라 불렀다.  마지막 아멘이 끝나자 마자 그는 평안하고 기쁨에 찬 얼굴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주 얼굴 뵈올 때'의 기쁨이 그의 얼굴에 그림자 되어 남아 있었던 것이다. 


♣ 가사 해설

예수님의 구속의 사랑에 접하여 새로 지음을 받은 영들의 입술에 쉬임없이 불려지는 '예수의 성호'는 그대로 인류의 빛이여,사랑이요, 생명이여, 소망이여, 기쁨의 이름인 것이다.  이는 우리가 '예수'라는 두 자의 이름 안에서만 우리의 가장 귀한 첫 전부를 찾을 수 있고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에게 예수란 이름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땅속의 지극히 작은 미생물의 가치보다도 더 보잘 것 없는 암흑의 생령들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생각할 때에 우리의  가슴이 쉬임없이 북바쳐 오르며 샘줄기같이 끓어오르는 감사와 기쁨과 감격으로 뜨겁게 되는 것이다.   

요한복음 10장 10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온 것을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찬송에서 한 가지 좋은 것과 더 좋은 것을 노래함은 대체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다 귀하심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예수가 귀하다 할지라도 사랑 없는 구주란 기쁨이 될 수 없다.

이 찬송가는 본래 나틴어로 씌여진 장시 '예수의 이름에 부치는 노래'에서 각 부분을 발췌하여 가사로 만든 것이다.  그 내용은 주님과 대면하게 될 그때 누릴 기쁨에 대한 소망(1절), 출중한 이름 예수에 대한 송축(2절), 주님께서 참으로 회개하는 자에게 소망이 되심(3절), 체험으로만 알게 되는 주님의 사랑(4절), 영원한 기쁨과 영광이 되어 달라는 주님을 향한 간구(5절) 등으로 되어 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가 오래 계속되면 될수록 그분께 대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더욱 깊어짐을 잘 보여준다. 


'소망' (3) - 소망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과 맺으신 언약에 근거한다. 소망으로 인하여 믿음이 견고해진다. 

'기쁨' (5) - 기쁨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따라서 참된 기쁨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위에 나타난다.

11C 라틴 찬송으로 표기되어있는 이 찬송은 오랫동안 중세의 신비주의자였던 클레아보의 성 베르나르도(St.Bernard of Clairvaux, 1061-1153)가 쓴 시로 전해졌습니다. 그런데 최근 12 C 말엽에 영국의 시인이 쓴 ‘거룩한 예수의 이름’(Jesus, dulcis memoria)이란 제목의 시를 캐스월(Edward Caswall, 1814-1878)이 번역하여 ‘가톨릭 찬송’(lyra Catholica)에 발표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캐스월도 영국의 닐(Niel)박사에 버금가는 찬송가 발전에 지대한 공적을 쌓은 분이지요. 영국 예이틀리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취드웰(Chidwell)과 말보로(Malborough)에서 공부하고, 옥스퍼드의 부래스노스 대학을 졸업한 후 목사안수를 받고 스트라드퍼드에 있는 지하성채교회의 부목사로 시무했습니다. 그는 로마 가톨릭의식에 관해 관심을 갖고 많은 연구를 하였고, 프랑스어로 된 ‘제단교본’(Altar Manual)을 번역 출판 하는 등 활약을 했습니다. 캐스월의 번역은 원작의 내용을 거의 완벽하게 살릴 뿐 아니라 그 시가 아름다워 언어구사 능력이 뛰어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그는 종래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당시 유명한 뉴맨이 이끄는 에드그베이스튼(Edgbaston)의 기도원에 들어가 서 경건한 생활을 하며 자선과 저서에 큰 이바지를 했습니다.

이 찬송 곡인 ST.AGNES는 다익스(John Bacchus Dykes, 1823-1876)가 작곡하여 1866년 그레이(Gray)의 ‘영국교회용 찬송가’(Hymnal for use in the English Church)에 발표했는데, 다익스는 빅토리아 왕조 시대의 최고의 작곡가이지요. ‘거룩 거룩 거룩’(9장)의 작곡가말입니다. 영국의 헐(Hull) 태생으로 열 살 때부터 왕실교회에서 오르간 배우고, 웨이크필드(Wakefield)와 켐브리지의 성 캐트린(St.Catherine) 대학에서 교육을 받은 후 성직자가 되어 더햄(Durham)에서 평생토록 목회를 하면서 300여 편에 이르는 찬송을 작곡했습니다. 우리 찬송가에는 이 찬송을 비롯하여 ‘거룩 거룩 거룩’(9장), ‘성전을 떠나가기 전’(59), ‘귀하신 주의 이름은’(81장), ‘오 젊고 용감하신’(129장), ‘성도들아 다 나아와’(140장), ‘내 갈 길 멀고 밤은 깊은데’(429장), ‘바다에 놀이 치는 때’(477장), ‘주와 같이 되기를’(508장) 등 9장이 실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 3;1)는 말씀이 관련 성구로 표시되어있는데요, “깊이 생각하라”라는 대목이 눈을 끕니다. 보이지 않는 주님을 모실 곳도, 주님과 사랑을 나눌 곳도 우리의 마음이고 보면 생각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생각 없이 예배드리는 이들, 생각 없이 찬송하는 이들에게 이 히브리서 저자는 “깊이”생각하라고 말합니다. 깊이, 깊이...

이 찬송에서 또 재미있는 부분이 있어요. 마디 수를 세어보면 4343, 그러니까 모두 14마디의 불규칙적인 구조를 가지죠. 다른 노래처럼 “내 맘이 좋거든”이나 “얼마나 좋으랴”에서 4마디가 아니고, 1마디 부족한 3마디로 되어있다는 말입니다. 노래할 때 그 점에 유의해야겠고, 이는 “구주를 생각만 해도”는 땅의 숫자인 4마디, “내 맘이 좋거든”은 하늘의 숫자인 3마디, 합하여 완전 수 7마디라 신앙적으로 확대 해석할 수도 있겠지요.

5절의 마지막 “이제와 또한 영원히 영광이 되소서.”는 ‘영광송’(Gloria Patri)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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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오스타시스(homeostasis ) 항상성(恒常性)


호메오스타시스(homeostasis)

생물이 온갖 환경에 있더라도 체내의 상태는 대략 일정한 상태로 유지되는 현상.
항상성(恒常性)이라고도 한다.

척추동물의 혈액의 화학적 · 물리적 성질은 먹이 등에 영향 받지 않고, 항상 일정하게 유지되고 있다.
예컨대, 사람이 아주 더운 환경하에 있더라도 체온이나 체액(體液)의 삼투압(渗透壓)은 일정하게 유지되어 있다.
호메오스타시스의 메카니즘 중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신경과 호르몬에 의한 조절기구이다.
몸의 상태가 한 방향으로 어긋나려고 하면 그것과는 반대방향으로 그 상태를 바꾸도록 조절기구가 작용하여, 결과적으로 거의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도록 하고 있다.
이와 같은 조절 방법을 일반적으로 마이너스의 피드백이라 한다.

온유. πρᾶος  4235

마태복음 11:28-30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Come to me, all you who are weary and burdened, and I will give you rest.
Take my yoke upon you and learn from me, for I am gentle and humble in heart, and you will find rest for your souls.
For my yoke is easy and my burden is light."

온유. πρᾶος  4235

1. 4239의 한 형태 : 온화한,  2. 겸손한,  3. 온유한

발음 / 프라오스(praŏs) 

관련 성경 / 온유한(마 11:29).
신약 성경 / 4회 사용
* 4239 / πραΰς  4239

1. 온유한,  2. 친절한,  3. 얌전한

발음 / 프라우스(praüs) 

관련 성경 / 온유한(마 5:5, 벧전 3:4), 겸손한(마 21:5).
신약 성경 / 4회 사용

형용사  [기본형] 온유한, 친절한, 얌전한, 겸손한, 동정심 있는, 마 5:5, 11:29, 21:5, 벧전 3:4.

 1.  자기 자신 -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것
 2. 이웃 인간관계 - 복수 할 수 있는 힘이 있지만 참을 수 있는 것
 3. 하나님 앞에서 - 원망하지 않는 것 욥기 2:8-9, 19:28, 1:28

 마무리  유종의미
콥틱교회 이슬람 남편 딸 8살 성경 앍던 아내 살해 딸들을 묻어버렸다 8. 1살 15일동안 생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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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개론 시간에 ‘호메오스타시스(homeostasis)’라는 용어를 배운 적이 있다.
우리말로는 ‘항상성(恒常性)’이라고 한다.

생명체에는 외부환경 조건이 변해도 내부환경은 항상 일정하게 유지하려는 작용이 있다고 하여 이를 프랑스의 클로드 베르나르가 제안하고 나중에 미국의 캐논이 ‘호메오스타시스’라고 명명했다.

우리 인간의 신체를 예로 들면, 우리가 음식물을 섭취하지 않을 때는 간의 글리코겐이 분해돼 포도당으로 변해 혈액 중의 포도당 농도를 100mg/dl 전후로 유지시키고, 이 같은 절식(絶食)상태가 계속되면 지질, 단백질까지도 포도당으로 바뀌어 혈중 포도당 농도를 일정하게 유지한다.

이는 혈중 포도당 농도가 저하되면 뇌를 비롯해 신체의 중요한 조직에 중대한 장애가 유발되기 때문이다.
우리 신체는 이를 방지하기 위해 혈중 포도당 농도를 일정한 수준으로 유지하려고 반응하는데, 이 같은 생체작용이 ‘호메오스타시스’인 것이다.

질병이란 호메오스타시스가 깨어진 상태

‘영양공급’과 관련해서 좀 더 살펴보자.
우리 신체에 음식을 공급하지 않으면 먼저 당질이 소비되고 다음으로 지질, 단백질 순으로 소비되며, 더 이상 소비될 것이 없으면 혈당치가 내려가 죽음에 이르게 된다.

반대로 당질을 비롯해 과식을 하게 되면 췌장에서 인슐린 호르몬의 분비가 증대되어 혈당을 일정하게 유지시키지만, 과잉섭취가 장기간 계속되면 췌장의 랑게르 한스섬 베타세포에서의 인슐린 분비장애로 인해 당뇨병이 유발된다.

이같이 우리 신체는 외부환경에 대응해 반응하면서 내부환경을 일정하게 유지하려는 작용을 하며, 만일 신체에 유해한 외부환경의 변화가 강하고 장기간 계속되면 호메오스타시스는 깨져버리고 질병을 초래하는 것이다.

호메오스타시스는 우선 ‘조화(harmony)’를 의미한다.

생명체의 경우 각각의 부위가 정상적으로 움직이면서 조화를 이루어야 하고, 사회 또한 각 영역이 상생(相生)의 원리하에 조화를 이뤄야 한다. 마치 오케스트라의 협주곡이 제대로 소리를 내려면 각 단원 한사람 한사람의 연주가 조화를 이뤄야 하는 것과 같다.

고대 서양철학자 피타고라스는 세계 만물의 근원이 숫자(number)들의 조화로운 만남에 있다고 했다.
그에 의하면, 숫자 1은 최상의 수이고 모든 수의 출발점이지만 숫자 1의 최고의 가치는 숫자 2, 3 등 다른 숫자와의 일정한 비례관계를 통해 서로 조화를 이룰 때만 나타난다고 한다.
또, 아름다운 음악은 음과 음 사이의 멋진 수학적 비율에 있으며, 우리 신체의 건강은 신체의 각 부분들이 올바른 수학적 비례로 유지될 때 가능하다고 했다. 다른 한편, 조화를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need)한 부분의 결핍(need)된 부분을 채워 줘야 한다. 영어 need는 ‘필요’라는 의미와 함께 ‘결핍’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조화란 필요(need)한 부분 간의 화합이다. 우리 신체에 어느 영양소가 부족하면 무의식적으로 그 부족한 영양소를 찾아 음식을 섭취한다고 한다. 사회과정도 마찬가지다. 어려운 경제난 속에서 빈곤에 허덕이는 저소득층을 위해 더 많이 가진 사람들이 나눠 줘야 하고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벽을 깨기 위해 정규직이 더 많은 양보를 해야 한다. 오른손과 왼손이 부딪쳐야 박수소리가 나고 박수를 치면 칠수록 즐거워지고 건강해진다.

 호메오스타시스는 또한 ‘균형(gleich gewicht)’이다. 균형이란 대립된 요소들의 통일된 상태이다. 생명체로서 유기체는 유동적(fleissig) 균형상태를 이루고 있으며, 균형을 깨뜨리는 내외적 요소들에 대항해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 우리 신체도 균형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자율신경이 신속히 작용하고 내분비계가 반응하며, 외부나 내부의 이물질을 제거하기 위해 백혈구, 임파구 등이 나서서 싸운다. 사회의 경우에도 일정하게 합의된 민주적 가치를 위해 마치 백혈구처럼 헌신하는 사람들이 있다. 균형은 불균형을 전제로 한다. 아니 불균형을 이미 내포하고 있다. 사회는 끊임없이 움직이는 과정이고 이같이 움직이게 하는 것은 불균형 상태다. 사회의 부(富)가 어느 한쪽으로 쏠리면 이를 바로잡으려는 노력이 일게 마련이다. 사회는 상생(相生)의 원리에 따라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야 건강하기 때문이다. 정치를 흔히 살아있는 생물이라 한다. 그렇다면 정치는 ‘호메오스타시스’에 따라 부족한 곳을 채워주고 합의된 가치를 위해 싸우며 조화와 균형을 위해 나가는 것이어야 한다. ‘호메오스타시스(homeostasis)’, 이는 지금 현실이자 앞으로의 지향점이다.

출처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http://www.kihoilbo.co.kr)


내 몸 안의 의사, 호모오스타시스

글 권복기

<1회-건강과 질병 사이>
2회-음식이 약이다
3회-숨과 쉼
4회-최고의 명약, 마음

 

 

우리 몸은 호메오스타시스(Homeostasis)라고 하는 항상성을 갖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 몸을 최적의 상태, 가장 건강한 상태로 유지하려는 힘을 뜻합니다.


운동을 하거나 더운 곳에 있어서 몸의 온도가 높아지면 우리 몸은 땀을 통해 체온을 낮춥니다. 추울 때 소름이 돋는 것은 몸의 열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입모근이 수축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안 되면 우리 몸은 손발은 물론 온몸을 떨어 체온을 높이려 합니다.


외부에서 적이 나타나도 우리 몸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움직입니다. 눈앞에 사나운 개가 나타나 무서운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린다고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생존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두 가지입니다. 싸우거나 도망가거나. 이때 우리 몸은 여러 가지 호르몬을 분비해 심장박동을 늘려 온몸으로 혈액을 공급하고, 몸에 저장된 에너지를 팔과 다리의 근육으로 서둘러 보냅니다. 성욕, 식욕, 수면욕 같은 한가한 욕구들은 싹 달아납니다.


우리 몸의 호메오스타시스는 병에 대해서도 작동합니다. 감기에 걸리면 우리 몸은 감기를 초래한 균을 죽이기 위해 체온을 높입니다. 또 몸 어느 부위에 상처가 생겨 피가 나면 혈소판을 보내 상처 부위의 ‘펑크’를 때웁니다. 몸 바깥에서 ‘적’으로 인식되는 세포가 들어오면 몸 안의 파수꾼 구실을 하는 여러 세포들이 출동해 잡아먹습니다. 몸 안에서 생겨나는 이상세포도 마찬가지입니다. 세포는 일정 시간이 지나면 스스로 자살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이를 아포토시스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세포는 죽지 않고 계속 분열을 합니다. 암세포가 그렇습니다. 이런 세포도 우리 몸 안의 ‘파수꾼’ 역할을 하는 세포들이 잡아먹습니다.


이처럼 우리 몸은 질병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고 병을 치료합니다. 의학적으로는 이를 면역력이라고 합니다. 자연치유력 또는 생명력이라고도 부릅니다. 히포크라테스는 이를 ‘내 몸 안의 의사’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몸 안의 의사’가 고치지 못하는 병은 어떤 명의도 고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질병은 ‘우리 몸 안의 의사’인 면역력 또는 자연치유력에 문제가 생겨 나타나는 현상이며 치료는 이를 제대로 작동하도록 돕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히포크라테스는 ‘몸 안의 의사’가 고치지 못하는 병은 어떤 명의도 고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질병은 ‘우리 몸 안의 의사’인 면역력 또는 자연치유력에 문제가 생겨 나타나는 현상이며 치료는 이를 제대로 작동하도록 돕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몸 안에 있는 의사가 잘 치료하게 하려면


결국 건강하게 살려면 ‘몸 안의 의사’인 자연치유력과 면역력이 잘 작동하도록 하면 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의학적으로 사람은 120살까지 살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천수를 다하는 이들은 아주 드뭅니다. 물론 수명은 지속적으로 늘고 있습니다. 2005년 세계보건기구(WHO) 자료를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의 평균 수명은 77.5세였습니다. 1948년 평균 수명이 46.8세였던 것에 비하면 30년이나 더 오래 살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평균 수명에는 뇌졸중, 치매, 고혈압, 당뇨, 암 등 여러 가지 질병으로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하는 경우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 이들을 제외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건강수명은 67.8세 불과합니다. 10년은 앓다가 죽는다는 얘기가 됩니다.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아픈 사람이 없는 집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어르신을 모시는 가정은 더욱 그렇습니다.


또 겉으로 멀쩡해 보이는 사람도 사실은 건강에 문제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의사들은 현대인의 대부분이 미병(未病) 즉 병이 나지 않았을 뿐 건강한 사람이 아닌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대략적으로 현대인의 15%는 건강한 사람이고, 나머지 15%는 환자이며 70%의 사람들은 건강인에서 환자로 옮겨가고 있는 미병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건강한 사람과 미병 상태에 있는 사람은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요? 서양의학은 건강한 사람의 몸 상태를 수치화하고 있습니다. 혈압은 수축기 혈압이 120mmHg 이완기 혈압이 80mmHg이면 정상이라고 합니다. 수축기 혈압은 심장이 수축 혈액을 전신으로 보낼 때의 압력이고 이완기는 심장으로 혈액이 들어갈 때의 압력을 말합니다. 또 체질량지수는 18.5~24.9이면 정상입니다. 체질량지수는 비만 정도를 나타내는 지표로 체중을 키의 제곱으로 나누면 됩니다. 또 콜레스테롤의 경우 좋은 콜레스테롤인 HDL은 200mg/dL 미만, LDL 콜레스테롤은 130m/g이 미만을 유지해야 건강하다고 합니다. 혈당은 공복혈당이 100mg/dL 미만, 식사를 시작한 지 2시간쯤 지났을 때의 혈당이 120mg/dL 미만이면 정상이라고 합니다. 이밖에도 간 수치나 혈액 속의 백혈구 수치 등을 통해서도 건강한 사람을 ‘측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서양의학은 불건강 즉 미병 상태를 잡아내지는 못합니다. 근거 중심이 아닌 주관적 판단이라고 서양의학으로부터 비판받지만 한의학은 조금 다릅니다. 서양의학으로 ‘측정’되기 전에 맥진 등을 통해 발병 가능성을 예측하기 때문입니다.

 


짜증이 늘고 피로감이 잦고 잠을 푹 못잔다면 건강을 돌아보자


일반인들이 알 수 있는 방법도 있습니다. 최근 들어 짜증이 늘었다, 입 안이 잘 헌다, 잠을 자도 잔 것 같지 않다, 자꾸 억울한 생각이 든다, 입맛이 없다, 조금만 움직여도 피로하다, 걱정이 늘었다 등의 증상을 보이면 건강에 이상이 생겼을 가능성이 큽니다. 


 자신의 건강 여부를 이렇게 알 수도 있습니다. 먼저 건강한 사람은 입 안에 침이 많이 고입니다. 아기들을 보세요. 생명력이 왕성합니다. 물론 턱 관절이 완전히 발달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볼 수도 있지만 저는 다르게 봅니다. 살 활()자를 파자해보면 침과 건강의 관계를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혀()에 물(  )이 있다는 뜻입니다. 혀에 물이 있으면 즉 침이 잘 고이면 살 수 있다, 다시 말해 건강해질 수 있다는 말이지요. 


 다음으로 건강한 사람은 자고 일어나면 저절로 기지개를 켭니다. 이는 잠을 푹 잤다는 말입니다. 잠은 건강을 지키는데 아주 중요한 구실을 합니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면 피로가 쌓이게 됩니다. 절로 나오는 기지개는 깊은 잠을 자서 몸에 쓰이는 에너지가 아랫배 즉 단전에 충분히 쌓여 넘친다는 뜻입니다. 이때 오글오글한 느낌이 들면서 몸을 뒤틀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기지개가 나오는 것이지요. 이는 아랫배의 에너지를 손끝과 발끝에 보내기 위한 자연스런 움직임입니다. 아기를 보세요. 자고 일어나면 늘 기지개를 켭니다. 텔레비전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자주 나오는 시쳇말로 100%입니다. 동물도 그렇습니다. 개나 고양이는 자고 나면 늘 기지개를 켭니다.


그렇다면 건강을 잃거나 미병 상태에 들어가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너무도 당연한 말이지만 건강을 해치는 생활을 하기 때문입니다. 전세일 CHA의과학대학교 대체의학대학원장님은 이를 재미있는 말로 표현합니다. 첫째, 건강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을 해서이고 둘째, 건강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지 않아서이며 셋째, 건강에 도움이 되는 일을 제대로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자연치유력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 일, 다시 말하면 이를 약화시키거나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게 하는 일을 하면서 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과로와 스트레스 그릇된 음식섭취가 질병을 부른다


사람은 자연의 일부입니다. 과학적으로 말하면 인간은 수백만 년 동안 자연에 적응하며 살아왔습니다. 인류의 식생활 습관은 그렇게 오랜 기간 형성된 것입니다. 하지만 최근 100여 년 사이에 이는 크게 바뀌었습니다. 먹는 것이 달라지고, 생활 패턴이 달라졌습니다. 하얀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으리으리한 빌딩에서 더위나 추위와 무관하게 일을 하지만 농경사회와 비교하기 힘들 정도의 스트레스를 받고 삽니다. 일은 너무 많아 잠 잘 시간이 없을 정도입니다. 또 우리는 오염된 물과 공기를 마시고, 컴퓨터, 휴대폰, 텔레비전 등 수많은 문명의 이기들이 뿜어대는 전자파에 둘러싸여 삽니다. 생활은 편리해졌지만 운동 부족에 시달리는 사람이 많고, 음식은 풍족해졌지만 상당수 음식이 화학첨가물이 든 가공 식품입니다. 계란, 우유, 고기 등을 배불리 먹지만 그 안에는 성장촉진제나 항생제가 함유되어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닭이나 소, 돼지 등은 자연적으로 키우는 게 아니라 좁은 우리에 가둬 놓고 키웁니다. 빨리 크게 하기 위해 성장촉진제를 먹이고, 운동 부족으로 병이 생기면 항생제를 투여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런 해로운 물질을 간접적으로 먹는 셈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위험한 환경에 노출된 것은 불과 100년이 채 안됩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우리 몸속의 유전자는 그렇게 빠른 변화에 적응하지 못합니다. 새로운 이물질이 몸에 들어왔을 때 이에 대응하는 시스템을 갖추는 데는 오랜 세월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면 건강을 회복하는 일은 어찌 보면 간단합니다. 우리 몸이 최적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자연스런 생활로 돌아가면 됩니다. 건강해지려면 100년 전의 생활로 돌아가자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자연의 일부입니다. 자연을 거슬러서는 건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부자연스런 환경이 너무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쉽지 않지만 길은 있습니다.   

 






한국인의 장점

1. 머리(아이큐 105, 유대인 97)
2. 열정
3. 교육열
4. 기술 : 자원이 없기 때문에 기술력을 키워야 한다(원자력 기술)
5. 730만 해외 동포(186 나라, 네트워크 형성) - 중국 5000만(180 나라)
6.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삼위일체(三位一體) 07-03-2022 (주일 설교)



                                                                                                                                    07-03-2022(주일) 파트리스교회 주일 설교 원고

삼위일체 신앙(빌립보서 2:6-8)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도입 이야기)
삼위일체 교리를 성경적으로 이해하고 가르치려던 성 어거스틴은 도저히 삼위일체의 교리를 설명할 수 없어 온 종일 고민하던 중 잠이 들었다고 합니다. 어거스틴이 잠을 자면서 꿈을 꾸게 됩니다. 꿈의 내용은 어느 노인이 넓은 바닷가에 앉아서 그 옆에 웅덩이를 파놓고 바다물을 퍼서 그 웅덩이 붓고 있었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어거스틴은 노인에게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 하고 질문합니다.

그러자 그 노인은 바닷물을 퍼서 이 웅덩이에 담으려고 한다는 대답이었습니다.
어거스틴은 하도 어이가 없어서 "아니 이 넓은 바다물을 어떻게 그 작은 바가지로 퍼서 웅덩이에 담을 수 있겠느냐?" 하고 말합니다.
그때 그 노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당신은 이 작은 머리로 어떻게 넓고 넓은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담으려고 하느냐?" 하고 꾸짖었다고 합니다.

이때 어거스틴(Augustinus. 354. 11. 13 ~ 430. 8. 28) 은 잠에서 깨어나 소리쳤다고 합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신비하다! 인간의 언어로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교리"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전개 이야기)
삼위일체라는 용어가 성경에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삼위일체 신앙의 내용은 성경 여러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희미하게 드러나셨던 삼위일체 하나님은 신약에서는 더욱 분명하게 계시하셨습니다.

삼위일체 신앙에 대한 그동안 우리들이 잘못 알고 있었던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목사라는 사람을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교회에서는 목사, 가정에서는 한 아내의 남편, 자녀들의 아버지라는 설명입니다.
사람은 한 사람이지만 그 사람이 여러 가지 일을 한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설명이 온전한 삼위일체 신앙이 아니라 "양태론(樣態論, Modalism)" 이라는 이단 사상입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들을 자주 들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태양의 경우 빛과 열과 둥근 모양
나무의 경우 뿌리와 줄기와 가지와 잎
사과의 경우 껍질, 씨방, 사과 살
계란의 경우 껍질, 흰자, 노란자
세 잎 크로바의 경우 줄기 하나에 세 개의 잎
물의 경우 고체가 되는 얼음, 기체가 되는 수증기, 액체가 되는 물
곤충의 경우 알에서 애벌레가 되었다가 날아다닌다

이러한 예로 설명하면 삼위일체 신앙을 쉽게 이해가 되는 듯합니다.
그러나 온전한 삼위일체 신앙이 아니기 때문에 문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다는 것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성자 예수님께서 성부 하나님께 기도하신 것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장 좋은 삼위일체에 대한 이야기를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나타나셨던 삼위에 대한 말씀에서 찾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3:16-17
예수
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에서 올라 오실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
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

마가복음 1:9-11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에서 올라 오실쌔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하늘
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

누가복음 3:21-22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쌔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 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이와 같은 주장은 AD 261 사벨리우스(Sabellius) 양태론적 삼위일체
당시에는 이러한 주장에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며 삼위일체 신앙의 신비를 이해하였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하나님으로 설명합니다.
이러한 설명을 삼신론(三神論, Tritheism)이라고 합니다.

삼신론과 같은 교리에서 경륜적 삼위일체론(經綸的 三位一體論)이 등장합니다.
경륜적 삼위일체론은 구약은 성부 하나님의 사역을 소개하며, 신약은 성자 하나님의 사역을 소개하였으며 그 이후에는 성령 하나님이 사역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공동체적 존재방식 : 우리

창세기 1: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육축과 온 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 우리 : 히브리문학적 표현, 삼위일체의 근거

사람을 지을 때는 하나님처럼 만드셨다.
우리의 형상대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다.
라틴어 이마고 데이(Imago Dei) 이미지 오브 갓(Image of God)
하나님의 형상이 충만한 것은 성령 충만
사람이 돈을 추구하다 나이가 들면 얼굴이 돈의 색갈로 바뀐다.
하나님의 형상을 많이 갖출수록 영적이라고 한다.

성경에 나타난 삼위일체 신앙의 근거

호세아 1:7
그러나 내가 유다 족속을 긍휼히 여겨 저희 하나님 여호와로 구원하겠고 활과 칼이나 전쟁이나 말과 마병으로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 내가 : 여호와 하나님
* 저희 하나님 여호와로 구원하겠고 :  예수님
- 말씀하시는 하나님, 백성을 구원하는 여호와 하나님

이사야 48:16-17
너희는 내게 가까이 나아와 이 말을 들으라 내가 처음부터 그것을 비밀히 말하지 아니하였나니 그 말이 있을 때부터 내가 거기 있었노라 하셨느니라 이제는 주 여호와께서 그 신을 보내셨느니라.
너희의 구속자시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이신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는 네게 유익하도록 가르치고 너를 마땅히 행할 로 인도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라.

16절에서 세 인격체가 소개되었다. 다른 말로 세 위를 드러내셨다.

* 주 여호와 :
* 나 :
* 그 신 :

신약에서는 메시아를 드러내셨으므로 더 명확한 명칭으로 소개하셨다.
마태복음 3:16-17
예수
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에서 올라 오실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
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8:19-20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아들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고린도전서 12:4-6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고린도후서 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찌어다.
May the grace of the Lord Jesus Christ, and the love of God, and the fellowship of the Holy Spirit be with you all.

에베소서 4:4-6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There is one body and one Spirit--just as you were called to one hope when you were called--
one Lord, one faith, one baptism;
one God and Father of all, who is over all and through all and in all.

베드로전서 1:2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찌어다.
who have been chosen according to the foreknowledge of God the Father, through the sanctifying work of the Spirit, for obedience to Jesus Christ and sprinkling by his blood: Grace and peace be yours in abundance.

파트리스교회 주일 설교 노트 / 07-03-2022


제목 / 삼위일체(三位一體) The Trinity
성경 / 빌립보서 2:6∼8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⑤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⑥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①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아멘
     ⑤. 형체(the form. μορφή) 모양, 형상, 외양 / 하나님의 속성, 성품 
     ⑥. 보류(robbery. ἁρπαγμός) 강탈, 전리품
     ①. 본체 - 형체와 같은 단어

  ♦ 어거스틴(Augustinus. 354. 11. 13~430. 8. 28)
  “삼위일체 교리는 신비하다. 인간의 언어로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교리.” 
 
  ☞ 삼위(三位)의 성경적 근거 /

  마태복음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고린도후서 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 
  희 무리와 함께 있을찌어다.

  베드로전서 1: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찌어다.  

- 1 -

♦ AD 261 사벨리우스(Sabellius) 양태론적(樣態論, Modalism) 삼위일체  
(예) 1. 남자(남편, 아버지, 아들)
       2. 사과(껍질, 씨방, 먹는 부분)
       3. 계란(껍질, 흰자, 노른자)
       4. H2O(물, 수증기, 얼음)
   
  ☞ 일체(一體)의 성경적 근거 /

  신명기 6: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고린도전서 12:4-6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에베소서 4:4-6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이사야 48:16-17
  너희는 내게 가까이 나아와 이 말을 들으라 내가 처음부터 그것을  비밀히 말하지 아니하였나니 그 말이 있을 때부터 내가 거기 있었노라 하셨느니라 이제는 주 여호와께서 나와 그 신을 보내셨느니라.
  너희의 구속자시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이신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는 네게 유익하도록 가르치고 너를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라.  

   - 2 -

 ♦ 삼신론(三神論, Tritheism)
  - 경륜적 삼위일체론(經綸的 三位一體論)
  성부 하나님 : 구약, 성자 예수님 : 신약, 성령 하나님 오순절 이후

 ♦ 하나님의 공동체적 존재방식 : 우리

 
  창세기 1: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 우리 : 히브리문학적 표현, 삼위일체의 근거 
  (예) 우리 마누라
  (예) 우리 가족
 
  마가복음 10:8
  그 둘이 한 몸이 될찌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예) 한 몸
  (예) 한 가족(아버지, 어머니, 아들과 딸)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 하나님(엘로힘) : 엘의 복수형

  창세기 1: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육축과 온 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세기 3:22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창세기 11: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이사야 6: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마태복음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아들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고린도후서 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 희 무리와 함께 있을찌어다.



요한복음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3 -

 ☞ 종교(宗敎) : 유일신교, 다신교
  - 유일신교(唯一神. Monotheism)
    1. 기독교(삼위일체 하나님)
    2. 유대교(성부 하나님)
    3. 이슬람교(알라)

  * 종교다원주의 / 모든 신은 동일하다

  - 다신교(多神敎. Polytheism)     

    1. 힌두교(Hindu Religion) 
    2. 불교(Buddhism)
    3. 토속종교(Native Religion) 
    4. 샤머니즘(Shamanism) 
    5. 뉴에이지(New Age) : 모든 사람이 신이다
    6. 종교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  

     - 4 -

 성부 하나님은 사랑
 성자 하나님은 은혜
 성령 하나님은 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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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는 삼위일체에 관한 신앙이 여러 곳에서 소개됩니다.
삼위일체 신앙의 명제

하나님은 삼위(三位)이시다.
각 위(位)는 완전(完全)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하나님은 삼위(三位)이시다.

성부 성자 성령은 독립된 위격(인격)이시다.
성부는 성자가 아니고, 성자는 성령이 아니며, 성령은 성부가 아니다.


요한복음 1:1-2
태초
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and the Word was with God, and the Word was God.
He was with God in the beginning.

- 함께 있으려면 반드시 독립된 존재이어야 한다.
독립된 존재란 서로 구별되는 것이다.

요한복음 17:24
아버지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Father, I want those you have given me to be with me where I am, and to see my glory, the glory you have given me because you loved me before the creation of the world.

요한일서 2:1


요한복음 14:26
보혜사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But the Counselor, the Holy Spirit, whom the Father will send in my name, will teach you all things and will remind you of everything I have said to you.

- 성령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은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신다.
독립된 위격(인격)


히브리서 7:25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Therefore he is able to save completely those who come to God through him, because he always lives to intercede for them.

요한복음 16: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But I tell you the truth: It is for your good that I am going away. Unless I go away, the Counselor will not come to you; but if I go, I will send him to you.

나 : 예수
보혜사 : 성령
성자와 성령도 구별된 인격체이시다.



각 위(位)는 완전(完全)한 하나님이시다.


각 위는 완전한 하나님이시다.

성부 하나님은 완전한 하나님 : 만물을 다스리시는 완전한 주권을 갖기 때문에 예수님도 하나님께 기도하셨다.

요한복음 1:1-4

말씀 : 예수님
그 말씀은 하나님

* 여호와의 증인 : 예수님을 피조물, 하나님과 동등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요한복음 20:28-29

도마의 고백
도마와 같은 신앙 상태에서 온전한 신앙으로 발전하라는 교훈
예수님의 신성을 고백하는 말씀

히브리서 1:8
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

아들에 대해서는
히브리서 1:10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바라.

예수님께서 창조의 사역을 하셨다.

로마서 9:5

이사야 9:6의 실현된 말씀



마태복음 3:3

이사야 40:3의 인용 구절

사도행전 5:3-4
성령을 속이고
하나님을 속였다.

시편 139:7-8

주의 영을 떠나


요한복음 3:5-6


성령은 하나님이시다.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은 성령(요 3:7)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1. 하나님은 삼위이시다.
 2. 각 위는 완전한 하나님이시다.
 3.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1, 2번까지만 언급하면 삼신론이 된다.
 그러므로 한 분이신 하나님을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은 여전히 한 분이시다.
 
신명기 6:4-5
여호와는 한 분이시다.

이사야 45:5-6
나는 여호와이며 다른 신이 없다.


야고보서 2:19

디모데전서 2:5

로마서 3:30


디모데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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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베티 럿셀(Betty Russell)

미국의 여류신학자인 Betty Russel은 하나님의 형상을 4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영적인 하나님이다.
둘째 사랑의 하나님이다.
셋째 창조적인 하나님이다.
넷째 공동체로 계시는 하나님이다.





신앙생활은 나 혼자 잘 하다가 나 혼자 천국에 간다는 것이 아니다.
공동체적인 삶이 필요하다.

어느 수녀의 이름이 천국에 없다.
여기에 이름이 없다.
저 아래 동네로 가야 한다.
저 아래 동네는 지옥이다.
혼자 깨끗이 잘 살면 이기주의적인 삶이다.
서로 북적대고 시끄럽고 다투는 것 같아도 이렇게 살면서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교회의 일은 서로 분담하여 공동체로 해야 한다.
교회의 일을 혼자서 다 하려는 것은 금해야 한다.

다스리게 하자! / 히브리어 "라다"(7287) רָדָה

רָדָה 
1. 짓밟다,  2. 정복하다,  3. 소유
발음 / 라다(râdâh)
관련 성경 / 다스리다(레 26:17, 왕상 4:24, 사 41:2, 겔 29:15), 사로잡다(사 14:2), 물러가게 하다(애 1:13), 거느리다(왕상 5:16),
억압하다(사 14:6), 치다(삿 5:13).
[명] 고관(시 68:27), 주권자(민 24:19)
구약 성경 / 25회 사용

과거에는 서구신학에서 라다의 의미를 정복하고 지배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성경적인 의미는 보존하고 관리하고 지켜가는 것이다.
성경에서 다스려야 하는 것들

1. 몸은 성전(고린도전서 6:19, 3:16)
2. 청지기 직(시편 8:4) 영권, 물권, 영권
3.
4.




창세기 1:1
태초하나님천지창조하시니라.

* 하나님 : 엘로힘 / 엘의 복수형

히브리서 1:10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바라.

요한계시록 3: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삼위일체에 대한 비판


이슬람(마호멧) : 한 몸에 머리가 셋이라는 것이다.

여호와의 증인 : 예수님을 피조물로 하나님과 동등할 수 없다.

성 어거스틴(아우구스티누스) : 햇빛으로 설명(태양 / 성부 하나님, 빛 / 성자 하나님, 열 / 성령 하나님)
- 전기에 비유 발전소 성부, 전선줄 성자, 빛 성령





신앙생활은 주신 복을 누리고 살아가는 것이다!









삼위일체 교리를 교육할 때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할 중요한 용어를 소개합니다.

첫째는

양태론(樣態論) / 모우덜리즘(Modalism) 

양태론(樣態論) 모우덜리즘(Modalism) - 그리스도 양태론(樣態論)(삼위는 한 하나님의 세 형태에 불과하다)

Theology
the doctrine that the persons of the Trinity represent only three modes or aspects of the divine revelation, not distinct and coexisting persons in the divine nature.
(삼위일체 교리는 오직 세 가지 방식이나 신적 계시의 측면만을 나타내며, 신적 본질에서 구별되고 공존하는 사람들은 나타내지 않는다)


모양 양(樣), 모습 태(態) / 태도 태(態)
놓여 있는 모양(模樣)이나 형편(形便)

양태론적인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설명으로 잘 알려진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아버지 / 교회에서 목사, 집에서는 아내의 남편, 아이들의 아버지
 2. (H2O) / 고체는얼음, 기체는 수증기, 액체는
 3. 태양 / , , 태양
 4. 나무 / 뿌리, 줄기, 가지와 잎
 5. 사과 / 껍질, 응어리, 씨방
 6. 계란 / 껍질, 흰자, 노른자

둘째는

삼신론(三神論) / 트리씨이점(Tritheism)

삼신론(三神論) 트리씨이점(Tritheism) - 삼신론(三神論), 삼위이체론(三位異體論)

(in Christian theology) the doctrine of or belief in the three persons of the Trinity as three distinct gods.
(삼위일체 교리 및 신념은 하나님은 셋으로 구분된다)

삼신론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아버지, 예수님, 성령이 모두 하나님이기 때문에 결국 삼신(三神)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틀린 말입니다.
하나님은 유일하십니다.
하나님은 한분뿐이십니다.

또 이런 주장도 있습니다.

경륜적(經綸的) 삼위일체론(三位一體論)


시대마다 다른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하나님이 세 가지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며 역사한다고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구약시대에, 예수님이 신약시대에, 성령님은 교회시대에 존재하시면서 역사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을 경륜적 삼위일체론이라고 합니다.
이것도 이단입니다.

삼위일체를 어떻게 이성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능할까를 시도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삼위일체 신론은 우리의 이성으로 이해가 불가능한 신비입니다.
삼위일체 신론은 우리에게 계시 된 만큼만 이해를 하셔야 합니다.
신비는 남겨두어야 합니다.
삼위일체 신론을 어떻게 이성으로 이해해야 할 것인가 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삼위일체 신론이 나타내는 진리가 무엇일까를 알고, 그 진리에 감사와 감격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하나님은 인간이시면 안 됩니다.
초월자이셔야 합니다.
초월자이셔야 우리를 구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려면 초월자이시지만 우주와 역사 가운데 내주하셔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는 우리의 영혼 안에 내주 하셔야 합니다.
초월하시면서,인류의 역사 가운데 내주하시고, 인간의 영혼 안에 내주하시는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존재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 우리를 사랑하셔서 구원하실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 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감격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의 지혜에 감탄해야 합니다.

삼위일체 신론은 세 인격이 어떻게 한 하나님으로 존재할 수 있는 가를 우리의 이성을 통해 이해하라고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닙니다.

삼위일체 신론은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려면, 초월자이시지만 역사 가운데 내주하셔야 하고, 더 나아가서는 우리의 영혼 안에 내주 하셔야 함을 우리로 하여금 경험하도록 주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이해 안 되면 그대로 두세요.
그 대신 하나만 명심하십시오.
우리를 구원할 구원자는 초월하시면서, 내재할 수 있는 신이어야 합니다.
그분이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AD 261 사벨리우스(Sabellius) 양태론적 삼위일체 
빌립보서 2:6-8을 근거로 삼위일체론을 설명할 때 당시 많은 사람들이 동조하였다.

사벨리우스주의(Sabellianism)
사벨리우스에 의해 주장된 이단의 한 종류이다.
양태론적 단일신론(양식적 단일신론)로 불린다.
성부, 성자, 성령의 세 각각의 태를 갖고 있으며, 신의 유일성을 주장한다.
그리스도가 오직 신성만을 가지고 있으면, 육체를 가짐을 부인한다.
이것은 요한복음 1장 14절, 디도데전서 3장 16절을 부인하는 것이므로 이단에 속하며 하나님의 아들이 육체로 오심 즉 성육신에 반하므로 또한 이단이다.
니케아 신경에서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신 하나님이시며, 빛으로부터 나신 빛이시며, 참 하나님으로부터 나신 참 하나님이시고'에서 사벨리우스주의를 반박하였다.


*사벨리우스와 아리안 주의*

우리 삶과 신앙의 대상이신 그리스도가 누구신지에 대해서 잘못 설명한 것으로 크게 두 부류의 의견이 있는데, 그것은 “양태론(modalism)”과 “양자론(adoptionism)”이다. “양태론” 또는 “삼태론”은 한 분 하나님이심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는 반면, “양자론”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한다. 그리고 양자론을 이끌고 주장하였던 사람이 바로 이리우스였다. 그래서 그를 보고 신학자들은 “이단성을 가장 잘 드러낸 사람은 아리우스이다”라고 할 정도로 유명해진 것이다. 아리우스는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장로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신적 성질은 나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즉, 그리스도는 피조물이며 그를 만드신 아버지에게 종속 된다는 것이다. 그는 성령의 신성 또한 부정한 인물이다.


양태론(樣態論) - 사벨리우스(Sabellius)

양태론(樣態論) - 사벨리우스(Sabellius)

양태론이란 한분 하나님께서 상황에 따라 두 가지 형상을 바꿔가며 나타나신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반 삼위일체의 강조점은 “단일신론(monarchianism)에서 나온 것인데 즉 삼위 하나님을 설명하는 있어 하나님의 단일 체제 또는 군주적 체제를 말한다. 군주(Monarchy)라는 말은 성부 하나님이 머리에, 그 밑에 성자 하나님, 그리고 그 아래에 성령 하나님이라는 계급적 체제로 하나님의 삼위를 보는 것이다. 이러한 이론은 단일신론 또는 군주적 단일신론을 전제로 한다. 뿐만 아니라 아리우스는 ”삼위일체“에서의 일체를 ”몸(body)“로 본다. 그래서 외모적으로는 ”몸“으로 보기에 하나임을 강조하고 주장한다. 일체라는 뜻을 우리의 몸처럼 하나로 보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삼위를 그것에 덧붙여진 것이나 모양을 따라 변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으며 물이 고체(얼음과 같은)가 되고 기체(수증기와 같은)가 된다고 설명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이론은 ”하나님“ 한분이 때로는 성부로, 때로는 성자로, 때로는 성령 하나님으로 나타난다고 억지 주장을 한 것이다.
이들이 주장하는 다른 예를 들어 보면 하나님이 가정에서는 남편이고, 직장에서는 직원이고, 부모님에게는 아들이라는 형태, 곧 한 분이 세 가지 역할을 하는 것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설명합니다.  

이 사상은 사벨리우스에게 흘러간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은 “성부자(hyiopator)이시고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은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는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이 다른 양식이나 양식을 가진 것에 불과하다고 억지주장 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삼위일체를 주장하는 사람을 세 머리를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 신화의 괴물, 케르베루스(Cerberus, 지옥을 지키는 개)를 숭배하는 자들이라고 하였다.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고 확실히 해야 하는 것은 삼위일체 외에는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길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물론 “삼위일체”라는 용어 자체는 성경에는 없다.
그러나 성경 전체에서 삼위 하나님을 의미하는 표현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기에 정통신앙인들은 “삼위일체”에 관해 의심을 주지 않았고 기독교라는 이름을 가진 모든 교회들은 이견없이 지금까지 삼위일체론을 받아들이고 있다.

신앙의 선배들은 2,000년 동안, 66권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길이 삼위일체라는 방법임을 말해왔다.

심위 일체론을 떠나서 하나님을 말한다면 불균형적으로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길이 불균형을 이루게 되었을 때, 겉으로 드러난 것 중 하나가 양태론이었다. 지금 교회도 이런 양태론 모습의  생각을 가진 분들이 혹 있을 수 있고, 그렇게 설명하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또는 세대주의 사상으로 한 분 하나님을 강조하기 위해서 한 분을 중앙에 놓아두고, 시대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등장하는 하나님으로 설명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런 사상을 세대주의 사상이라고 부른다.

양자론(樣子論) 양태론(樣態論) - 아리우스

양자론(樣子論) - 아리우스  

양자론(adoptionism)은 단일신론을 강조하다보니 한 분 하나님 외에 다른 분은 하나님이 되신 분이고 하나님과 같은 분이라고 여기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대신 인성에 관심을 가진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이었는데 어떤 계기로 해서, 즉 세례 시에 하나님이 되었다는 견해이다.
즉 사람이 신적인 존재로 입양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데오도투스에게서 시작되었다.

안디옥 교회의 감독으로 있었던 사모사타의 바울은 예수님에 대하여 설명하기를, 그분이 단순히 인간이었는데, 매우 도적적인 삶을 살았고 세례를 받으면서 이적적인 능력을 가지게 되면서 하나님과 교제하게 되었다는 사상을 퍼트렸다.
그는 268년에 이단으로 정죄를 받았다.
이 사람의 사상은 아리우스에게 영향을 끼치게 된다.

아리우스는 기독교에 대한 핍박의 시기와 자유의 시기를 모두 살았던 사람이었다. 핍박의 시기 이후에 많은 사람들 사이에 분열이 있었다. 갑자기 자유를 얻자 목적의식이 사라지고, 신앙이 쇠퇴해졌다. 두려움에 대상이 없어지자 방종하게 되고 세속적인 삶을 살게 되었다. 즉 핍박이 심할 때에는 견디기가 어려워서 신앙을 포기했던 사람들이 다시 교회에 돌아오기를 요청했을 때 노바티안은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노비티안은 어려운 시기는 피했다가 안정된 시기에 다시 돌아오고자 하는 박쥐같은 사람들을 허용할 수 없었다. 노비티안은 교회에 순전한 사람들만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순결을 지킨 그리스도의 신부들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에 반해 키프리안은 배교는 했지만 참으로 회개하면 교회에 들어올 수 있는 길을 마련했다. 그래서 그러한 배교자들이 세례를 받고 교회에 들어오도록 하는 좋은 전통을 남겼다.

그 당시 노바티안은 교회의 순수성을 주장하며 교회의 분열을 조장했는데 그와 같은 사람들 중에 아리우스가 있었다. 교회의 순결과 도덕적인 삶을 강조하다보니 오리겐의 사상을 자연스럽게 닮아가게 되었다. 아리우스는 오리겐과 그의 스승 컬레멘크가 사역했던 알렉산드리아에서 장로로 있었는데, 희미해져가는 교회의 기강을 세우기 위해서 강력한 이상형이 필요했고, 그 이상형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았다. 아리우스는 학문적이고 기독교인이 많았던 알렉산드리아가 좀더 기독교적인 모습이 되기를 원했다. 엘리트적인 마음을 가졌던 그는 사람들에게 도덕적인 사람을 살면 신적이 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수도적 삶을 사는 사람들이 가장 원하는 것, 곧 도덕적인 사람을 살면 경지에 이르게 된다는 유혹을 던졌던 것이다(자유주의였던 슈바이처 박사의 견해와 동일함). 이러한 사상의 바탕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하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도 인간이었는데, 도덕적인 거룩한 사람을 살았으므로 세례를 받을 때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사람들에게 제시했던 것이다. 사람이 신성과 연합하고 그 반열에 들어갈 수 있고, 거룩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은 엘리트들과 주위 사람들을 손쉽게 유혹할 수 있는 것이었다.

아리우스는 교회의 순수성에 관심을 가진 금욕주의자였으며 이러한 아리우스 주의는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이단을 만들어 냈다.


AD 318 알렉산더

동일본질(同一本質)과 유사본질(類似本質)

AD 325 니케아 종교회의 콘스탄티노플
삼위일체 하나님은 한 인격에 세 모양의 하나님이 아니라 세 인격에 한 본질의 하나님이시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아리우스(Arius)와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논쟁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 논쟁은 2위이신 예수님이 1위인 아버지 하나님과 동등하냐 ? 아니면 아버지보다 작으냐?의 논쟁입니다.
동등하다면 예수님은 100% 하나님이시고, 작다면 예수님은 100% 하나님이 아닌 것입니다.

아리우스파는 예수님은 아버지 보다 작은 분이고 종속되어있다고 믿었습니다.
지금의 여호와의 증인이 이 교리를 따르고 있습니다.

아타나시우스파는 예수님은 아버지와 100%동등하다고 믿었습니다.
이 논쟁에서 아타나시우스파가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아리우스파요한복음14:28아버지는 나보다 크다”라는 말씀을 인용합니다.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면 나의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
결국 그리스도는 아버지에게 종속되어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삼위일체 교리를 어떻게 믿고 가르쳐야 할까요?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을 히브리 성경에서 "엘로힘" 이라고 합니다.
'엘로힘'은 "엘"의 복수형이므로 정확한 번역은 "하나님들" 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므로 복수로 번역하면 오해할 수 있으므로 단수로 번역합니다.

창세기 1: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육축과 온 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우리"라는 단어는 복수형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표현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신명기 6: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우리 하나님"이란 말씀도 하나님은 단수형이 아니라 복수형으로 표현합니다.








요한복음 10:28-30

28.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요한일서 2:1 / 대언자(혹 보혜자)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빌립보서 2:6-8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우시아)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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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 교리에서 하나의 의미는 숫자가 아니라
삼위일체(三位一體, Trinity) 교리는 하나님의 존재(存在)를 서술(敍述)하는 신비(神秘)이며 인간의 언어와 사고(思考)의 한계를 가진다. 그래서 인간의 상식적인 사고로는 잘못된 이해에 빠지기 쉽고 오히려 바른 이해가 어렵다.
삼위일체론에서 ‘삼’위(三位) 하나님이 곧 ‘한’(一) 하나님이시라는 부분이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삼위일체론 진술의 두 가지 방법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진술하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1. 내재적 삼위일체론

하나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내적인 관계에 접근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기술하는 방법이다.
이렇게 이해한 삼위일체에 대한 이론을 ‘내재적(內在的) 삼위일체론’이라고 한다.
삼위 하나님을 반드시 ‘존재론’적으로 규명해야 한다는 점에서 ‘내재적 삼위일체론’은 중요하다.
하지만 내재적 삼위일체는 삼위의 내적인 관계이며, 삼위가 존재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인간으로서 인식하기 어려운 한계를 가진다.
또 삼위일체를 존재론적으로만 논하면 사변적이 되어 우리와는 직접적으로 관계 없는 하나님으로 느껴지기 쉬워 공허해진다.

2. 경세적(또는 섭리적) 삼위일체론

다른 하나는 삼위가 역사 속에서 행하신 구체적인 ‘행위’를 통해 인식하는 방법이다.
성경에는 성부, 성자, 성령께서 행하신 일들에 대한 풍부한 기록이 있다.
이렇게 삼위의 역사 섭리(攝理)를 통해 이해하는 방법을 ‘경세적(經世的, 세상을 다스리심) 삼위일체론’이라고 한다.
성경은 모호하게 삼위 하나님에 대해 말하지 않고 구체적 행위에 근거해서 말한다.
하나님의 활동과 역사는 인간에게 구체적으로 경험되고 인식된다.
이점에서 ‘경세적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이 우리와 아주 긴밀한 관계가 있는 분이심을 실감하게 하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경세적 삼위일체론’이 하나님의 ‘존재’에 근거하지 않으면 결국 하나님은 인간에게 경험되는 어떤 ‘기능’이나 ‘현상’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따라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접근할 때는 ‘경세적 삼위일체’로 시작하고 그에 근거해서 ‘내재적 삼위일체’를 함께 이해하는 방법이 좋다.
하나님의 활동은 반드시 그의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시고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시며 영원불변(永遠不變)하신 신적(神的) 존재를 전제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경륜(經綸)과 내재(內在)는 분리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칼 라너는 “경세적 삼위일체론은 내재적 삼위일체론이며, 내재적 삼위일체론은 경세적 삼위일체론이다.”라는 명제를 제시했다.

일체(一體)는 숫자가 아니라 공동체(共同體, Unity)

이제 삼위일체에 대한 적절한 개념과 표현을 보자.
삼위일체(三位一體)를 숫자의 개념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는 옳지 않은 접근방법이다.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세 위격(三位)이 숫자적으로 ‘하나’의 본질이나 신성을 가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맞지 않는다.
삼위일체론에서 이단적 삼위일체론들(False Doctrinal Views of the Trinity)

Unitarianism, Sabellianism, Tritheism(삼신론)

한 분 하나님과 세 인격(person)이라고 표현 할 때 한 하나님의 ‘하나’와 세 인격의 ‘셋’을 같은 일차원에서 다루면 안 된다.
즉 3과 1을 동일 평면에서 이해하면 셋이 하나가 되고 하나가 셋이 되는 모순에 빠진다.
인간의 이성으로 볼 때 ‘3=1’이 될 수 없다.
이렇게 삼위와 일체를 숫자로 이해하면 삼위일체는 매우 비합리적이고 모순적인 교리가 된다.
성부, 성자, 성령을 모두 신성이라고 인정한다면 결국 삼위일체론의 핵심은 ‘하나’를 어떻게 이해하는지가 관건이다.
‘하나’는 숫자가 아니고 세 위격이 함께 연합해서 가지는 공동체성을 의미한다.
‘일체’는 세 위격이 서로 분리되지 않고 상호 내재해 있는 ‘연합이며, 삼위의 의지 구속 사업이 서로 상반되지 않고 통일을 이루는 ‘공동체’를 뜻한다.

최근 삼위의 공동체성을 지칭하는 용어로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가 있다.
페리코레시스’는 상호 내재적, 순환적, 침투적이라는 의미다.
즉 성부, 성자, 성령께서는 ‘페리코레시스’ 곧 상호통재(相互通在)를 통해서 일체되시는 ‘공동체적 하나님’을 형성하고 있다.
이 통일성 때문에:

성부는 성자 안에 전적으로 계시고, 성령 안에 전적으로 계신다.
성자는 성부 안에 전적으로 계시고, 성령 안에 전적으로 계신다.
성령은 성부 안에 전적으로 계시고, 성자 안에 전적으로 계신다.

‘페리코레시스’는 성부, 성자, 성령께서는 독립적으로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고 상호 침투하여 성부는 성자 안에, 성자는 성부 안에, 성부와 성자는 성령 안에 거하시는 삼위(Three)가 공동체(Unity)라는 의미다.

함께 일하시는 삼위 하나님

기독교 역사에서 오랫동안 성부, 성자, 성령이 가지는 고유한 속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성부를 전능(全能), 성자를 전지(全知), 성령을 전선(全善)으로 표현했다.
또 성부를 태초의 근원, 성자를 지혜, 성령을 덕성으로 부르는 것도 유사한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최근 삼위의 속성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됐다.
삼위가 자신만의 고유한 속성을 가지면 결국은 삼위의 완전한 일치가 깨지고 삼위가 분리(分離)된다.
그렇게 되면 삼신론(三神論)에 빠질 위험성이 있다.
삼위의 역할과 경세(經世)도 마찬가지다.
만약 성부가 천지창조의 행위를 하시고, 성자는 십자가에서 대속(代贖)의 죽음으로 구원을 하시고, 성령은 성화(聖化)의 영(靈)으로 피조세계에 임한다고 생각하면 삼위는 각자 고유한 영역(領域)을 가지게 되고 결국 삼위의 공동체성이 훼손될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되면 또한 삼신론(三神論)이 된다.

최근 신학계에서는 “삼위가 함께 활동하신다.”는 표현이 더 좋다고 본다.

예를 들면 천지창조는 성부의 단독 행위가 아니라 성자와 성령이 함께 하신 사건으로 본다.
또 십자가의 구원도 예수님의 단독 행위가 아니라 삼위 하나님의 행위이고, 성령님의 성화도 성령 홀로가 아니라 삼위의 역사(役事)로 본다.

성경이 어떤 사건을 때로는 성부, 때로는 성자, 때로는 성령의 행위로 표현하지만 그 의미는 삼위(三位) 하나님 가운데 한 위(位)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 아니라 삼위(三位)께서 함께 역사(役事)하신 것으로 보는 것이다.

즉 십자가 사건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와 ‘함께’ 성령을 ‘통해’ 행하신 구속(救贖) 사역인 것이다.

20세기 중반 이후 삼위일체론의 중요성이 부각되어 삼위일체론 르네상스 시대를 맞고 있다.
삼위의 온전한 사귐 안에서 인간사회의 자유와 평등을 이해하는 실마리를 찾기도 하고, 삼위일체를 실천적이고 해방적 교리로 해석하기도 하며, 삼위의 섭리 형태를 생태계와 우주를 포함하는 사상으로 발전시키는 모티브로 삼기도 한다.
삼위 하나님에게 다가가려는 노력 속에서 온 피조 세계가 하나님 안에 안길 수 있는 새로운 지평이 열리기를 기대한다.(

참조 / 글쓴 이  김동건 교수(영남대 조직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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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태론(樣態論, Modalism, 양태론적 단일신론의 준말)은 양식론(樣式論)이라고도 한다.
전통적 유일신 신앙(단일신론)은 고수하면서 삼위일체를 설명하고자 했던 기독교의 이단 이론을 말한다.
이 단어는 독일 신학자 아돌프 폰 하르낙(Adolf Von harnack, 1851-1930)이 삼위일체에 대해 이단적 교리를 가지고 있던 노에투스프락세아스, 3세기 사벨리우스, 이 세 사람의 공통적 요소를 말하려고 도입한 단어였다.

양태론자들은 하나님은 한분이시고 그리스도는 완전한 신성을 가졌으므로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라는 입장을 고수하였다.
한분 하나님께서 모양만 성부, 성자, 성령의 다른 형식(forms)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그리스도의 인격과 성령의 인격은 사라지고 단일한 신격만 남게 되어 이단 사상이 되어 버린다.
전형적인 양태론은 같은 하나님이 창조 시에는 성부 하나님으로, 구속에는 성자 하나님으로, 성화 때는 성령 하나님으로 활동한다고 본다.
양태론은 교회의 정통적 삼위일체론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다.

히폴리투스(170-236)에 의하면 노에투스(Noetus of Smyrna, 200-225)는 ‘성부가 친히 성육신하시어 그리스도가 되어 고난 받고 죽었다가 스스로 부활했다’는 성부수난설(聖父受難說, Patripassianism)을 주장하여 최초의 양태론자의 모습을 보인다.

노에투스
의 제자요 반 몬타누스주의자였던 프락세아스(Praxeas)도 190년 경 로마에 와서 스승인 노에투스처럼 ‘창조주 하나님은 성부 한분으로 아버지 자신이 동정녀에게 들어가 그 자신이 동정녀에게 나시고 그 자신이 수난 받으셨다’ 주장하여 삼위의 위격 구별을 부정하였다.

터툴리안이 비판한 프락세아스야 말로 진정한 최초의 양태론자로 보기도 한다.
주로 로마에서 활약한 사벨리우스(Sabellius, ?-260?)도 하나님은 오직 한분임을 강조하면서 신격의 엄중한 단일성을 가르쳤다.
태양빛, 열, 둥근 형체를 가지고 있으나 오직 하나의 태양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세 가지 명칭을 가지고 있으나 하나님은 한 인격이 세 가지 다른 형태로 나타나는 단일한 실체, 단일한 인격이라고 사벨리우스는 본 것이다.

사벨리우스에 의하면 성자와 성령이란 한 분 성부께서 자신을 계시하시는 임시적 양식에 불과할 뿐이다.
결국 사벨리우스는 한 인격을 가진 한분, 한 존재인 하나님이 창조와 율법 수여 시에는 성부로, 성육신에서는 성자로, 중생과 성화에서는 성령으로 각각 나타난다고 주장하여 양태론의 절정을 이룬 인물이 되었다.

양태론을 사벨리아니즘(Sabellianism)이라고도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또한 한위가 세 양태로 나타나니 "일위삼양설"이라고도 부르고 성부가 성자에게, 성자가 성령에게 계승 되므로 계승설(Successism)이라고도 한다.

이 같은 양태론에 대해 교황 칼리스투스(Callistus, 217-222)는 처음, 사벨리우스에 동조했으나 결국 263년 로마 회의는 사벨리우스를 정죄, 파문하게 된다. 물론 사벨리우스가 세 인격의 동등한 본질, 동등한 영원성을 암시한 점은 주목할 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삼위를 부정하고 단일한 인격을 주장함으로 대표적인 양태론을 주장한 인물로 남게 되었다.
그리고 양태론은. 종교개혁 시대 세르베투스(M. Servetus)와 18세기 신비주의자 임마누엘 스웨덴 보르그(I. Swedenborg) 등에게서 다시 등장하게 되었으나 그리 큰 힘을 발휘하지는 못하였다.

기독교 초기 양태론이 나왔다는 것은 그만큼 피조물인 우리 인간에게 있어 삼위일체 교리의 이해와 설명이 쉽지 않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때로, 말로는 삼위일체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삼위일체와 양태론을 잘 구분하지 못해 양태론에 빠지는 사람들이 최근에도 많이 있음을 보게 된다. 그만큼 삼위일체 교리는 심오한 것이다. 하지만 설명은 쉽지 않더라도 성경은 분명 하나님이 삼위일체임을 말씀하고 있다. 따라서 양태론적으로 하나님을 해석하면 이단이 된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에도 일부 기독교인들이 무의식적으로 양태론에 빠져서 방황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교회는 성도들이 바른 분별력을 가지도록 늘 바른 교리를 잘 가르쳐야 할 것이다.

5. 삼위일체 하나님이 하시는 일

1) 성부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신다.
성부 하나님은 뛰어난 창조주이시다.
그러나 성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성자와 성령도 함께 협력하셨다(창 1:26)

2) 성자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구속의 사업을 성취하셨다(엡 1:13~14)
이 구속의 사업에도 성부, 성령이 함께 협력하셨다.

3) 성령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의 보내심을 받아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영감으로 주셨고(고전 2:13, 벧후 1:2), 교회를 형성하고 확장시키시며(엡 1:22, 23, 2:22, 고전 3:16, 12:4) 우리들의 마음을 성전 삼아 거하시고(고전 3:16),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다(벧전 1:2). 그리고 성령은 교회를 가르치시고 보호하시며 모든 진리 안에서 교회를 인도하신다(요 14:26, 15:26, 16:13,14, 행 5:32, 히 10:15, 요일2:27).

발전된 형태의 양태론적 단일신론(Modalistic Monarchianism)을 표방한 그리스도교 (→ 단일신론)
로마의 장로로 추측되는 사벨리우스(217경~220경 활동)가 제창했다.
사실상 사벨리우스의 생애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으며,
그에 관한 가장 상세한 정보는 단일신론을 반대하는 동시대의 로마 신학자 히폴리투스의 편견에 찬  글에 담겨져 있다.

로마에서는 단일신론자(양태론자)들과 신격 안에 항구적인 구별(위격)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사이에 활기찬 논쟁이 있었다. 
하느님의 단일신격(하느님의 절대 단일성과 불가분리성)에 관심을 가졌던 단일신론자들은그런 구별이 궁극적이며 항구적이라는 견해에 반대했다.

사벨리우스는 신격은 단일체(monad)이며 3가지 작용으로 자신을 표현한다고 명시적으로 가르쳤다. 
즉 창조에서는 성부로, 구속에서는 성자로, 성화(聖化)에서는 성령으로 표현한다는 것이다. 
교황 칼릭스투스는 처음에는 사벨리우스의 가르침에 동조하는 경향을 보였으나 후에는 사벨리우스를 정죄하고 파문했다.
사벨리우스주의는 30년 후에 다시 리비아에 나타나 알렉산드리아의 디오니시우스의 반대를 받았다. 
4세기에 아리우스는 사벨리우스주의를 지지한 자신의 주교를 공박했고, 아리우스주의 논쟁 때 니케아 정통교리의 지지자들(니케아 신조에서 주창된 삼위일체 교리를 인정하는 사람들)에게도 똑같은 비난을 가했다. 

정통파들이 성부와 성자 실체의 단일성을 역설하자 아리우스파는 정통파가 신격 내의 위격의 구별을 부정한다고 해석했던 것이다.
375년경 사벨리우스주의는 네오카이사리아에 다시 나타났고 바실리우스의 공격을 받았다.
스페인에서는 프리스 킬리아누스가 사벨리우스의 입장에서 하느님의 단일체 교리를 주장했던 것같다(→ 아리우스주의).
종교개혁 때는 사벨리우스주의가 스페인의 신학자이며 의사인 미겔  세르베투스에 의해 재정립되었는데,  그는 그리스도와 성령은 하나의 신격, 즉 성부의 대행적 형태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18세기에는 스웨덴의 신비주의 철학자이며 과학자인 에마누엘 스베덴보리가 역시  이 교리를 가르쳤고, 새 교회(New Church)를 설립한 그의 제자들도 그렇게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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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三位一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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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 방패'라고 하며 삼위일체를 요약하는 그림이다. 'est'는 '같다'를, 'non est'는 '같지 않다'를 의미한다.

하느님의 위격은 성부, 성자, 성령
세 가지 페르소나(person)이며 서로 구별되면서도 본질이 같다(ὁμοούσιος)는 기독교의 교리이다.

성부도 하느님, 성자도 하느님, 성령도 하느님이지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서로 다른 존재라는 의미.
길게 풀면 성부는 성자, 성령과 다른 존재이다.
성자는 성부, 성령과 다른 존재이다.
성령은 성부, 성자와 다른 존재이다.

각 위격 사이에 우열은 존재하지 않으며, 삼 위격 세 분 모두 각각 온전한 하느님이라고 설명한다.
성부에게서 성자가 발생(發生)하고, 또한 성부와 성자에게서 성령이 발출(發出)한다고 한다.
이처럼 ‘하나이면서 동시에 셋이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일반적인 논리 구조로는 이해가 불가능한 신학적인 개념이다.

종교를 따르는 이유의 핵심인 구원론 부분에서 삼위일체는 본체가 아니다.
무식하게 본질만 꺼내면, 하느님께서 반드시 죽으리라 선언한 것을 따라 모든 인생이 영영 하느님과 관계가 끊겨 죽게된 것을 철회한 것이 십자가 사건이고 그걸 믿고 따르는게 기독교다.

삼위일체가 성경에 나오는가라고 묻는다면 아니다.
삼위일체는 교회 전승으로 내려오는 교리이다.
과거에는 창세기에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우리'라고 부르신 부분이 삼위일체를 가리킨다고 여겼다.
하지만 성경 전체에서 이외에 삼위일체를 나타내는 표현이 없기 때문에 옛날부터 신학자들 사이에 '우리'라는 단어 하나로 성경에 삼위일체가 나온다고 말할 수 있느냐는 의견이 있었다.
현재는 성경에 삼위일체가 나오지 않고, 창세기의 '우리'는 하나님께서 여시는 어전 회의를 의미한다는 것이 다수 신학자의 생각이다.

하지만 기독교에서 삼위일체는 절대적으로 중요한 교리이다.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순간 의심의 여지 없이 이단이다.
삼위일체는 바로 저 "죽음의 선언을 철회"함에 있어 절대적 전제 조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선언하셨으므로 철회도 하나님만 가능하다.

무조건 믿어야 하는 영역이기 때문에
기독교의 구원론을 따르겠다면 삼위일체를 무조건 믿어야 한다.


삼위일체(Trinity)에 대해서

신학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연구하는 분야를 "신론(神論)"이라고 합니다.
신론에서는 하나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주제들을 연구합니다. 

 1) 하나님의 본질 : 신지식, 하나님의 존재증명,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에 대한 지식
 2)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이름들과 그 의미 
 3) 하나님의 속성 : 하나님만이 가지신 속성과 인간과 함께 공유하는 속성들 
 4) 삼위일체 
 5) 하나님의 사역 
  1) 작정 
  2) 예정 
  3) 창조 
  4) 섭리  

위를 보면 네 번째 항목에 "삼위일체"라는 주제가 포함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라는 말은 기독교의 신론에서만 사용되고 있는 독특한 용어입니다.   

물론 삼위일체라는 말은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이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기독교인들이 이 말을 사용하게 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신적 본질과 영광을 가진 세 인격 : 성부, 성자, 성령


성경을 연구하다 보면 성경에서 신적인 본질과 영광을 소유하신 인격이 셋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세 인격은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에서 이 세 인격은 순서나 사역에서 서로 구별되면서, 모두 신적인 칭호와 영광과 속성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신적인 영광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자와 성령께서 신적인 영광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익숙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래에 있는 성경 구절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성자와 성령님께서도 신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2-1.성자의 신성에 대한 증거

 가) 성자의 신성에 대한 증거(요 1:1, 20:28, 롬 9:5, 빌 2:6, 딛 2:13, 요일 5:20) 
 나) 성자에게 신적 명칭을 돌림(사 9:6, 40:3, 렘 23:5,6, 딤전 3:16, 욜 2:32, 비교 행 2:21) 
 다) 성자에게 신적 속성을 돌림 
 * 영원성(사 9:6, 요 1:1-2, 계 1:8, 22:13) 
 * 편재성(마 18:20, 28:20, 요 3:13) 
 * 전지성(요 2:24-25, 21:17, 계 2:23) 
 * 전능성(사 9:6, 빌 3:21, 계 1:8) 
 * 불변성(히 1:10-12, 13:8) 
 * 성부에게 속한 모든 속성(골 2:9) 

 라) 성자께서 신적인 사역을 행하심 
 * 창조(요 1:3,10, 골 1:16, 히 1:2,10) 
 * 섭리(눅 10:22, 요 3:35, 17:2, 엡 1:22, 골 1:17, 히 1:3) 
 * 사죄(마 9:2-7, 막 2:7-10, 골 3:13) 
 * 부활과 심판(마 25:31-32, 요 5:19-29, 행 10:42, 17:31, 빌 3:21) 
 * 만물의 마지막 붕괴과 갱신(히 1:10-12, 빌 3:21, 계 21:5) 

 마) 성자께 신적 영광을 돌림(요 5:22-23, 14:1, 고전 15:19, 고후 13;13, 히 1:6, 마 28:19 등)

이 구절들을 읽어보면 성경에서 성자께 성부와 동등한 신적 영광을 돌리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2-2. 성령의 신성에 대한 증거들

 가) 성령을 하나님과 동일시 함 
 * (행 5:3-4) : 성령을 속인 것=하나님을 속인 것 
 * (고전 3:16) : 성도-하나님의 성전=성령이 안에 거하심 
 * (딤후 3:16) : 하나님의 감동-성령의 감동

 나) 성령을 예수님과 동일시 함 
 * (행 16:6-7) : 예수의 영=성령
 
 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속성을 소유하심 
 * 편재성(시 139-7-10) 
 * 전지성(사 40:13-14-롬 11:34, 고전 2:10-11) 
 * 전능성(고전 12:11, 롬 15:19) 
 * 영원성(히 9:14) 

 라) 성령께서 신적 사역을 수행하심 
 * 창조 사역에 참여(창 1:2, 욥 26:13, 33;34) 
 * 하나님의 섭리 사역(시 104:30) 
 * 중생 사역(요 3:5-6, 딛 3:5) 
 * 죽은 자를 부활 시킴(롬 8:11) 

 마) 신적인 영광과 존귀가 성령께 돌려짐 
 *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마 28:19) 
 * 3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도함(고후 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한 분이신 하나님


성경은 성부, 성자, 성령에 대해 모두 하나님으로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3분의 하나님이 계신다고 말하고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삼신론)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한 분의 하나님만이 존재하신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유일신론). 

신적 본질과 영광을 가진 인격이 셋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성경은 이 세상에 하나님은 오직 한 분만이 계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1) "3분의 구별되는 인격을 가지신
 2) 한 분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터툴리안이라는 사람은 "한 실체-세 인격(Una substantia-tres persona)이신 하나님"이란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이 말에서 "3위일체"란 말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에 대해서 분명히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그 이유는 세상에서 이러한 하나님의 모델을 찾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한 실체-세 인격을 가지신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신관은 기독교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신관이며, 다른 종교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신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삼위 하나님의 관계


성경에서 3위 하나님은 언제나 성부-성자-성령의 순으로 기술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3위 사이의 질서와 논리적 순서를 밝힌 것이지, 어느 한 위가 다른 위에 대해 지위와 능력과 기원이 종속되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1) 존재론적 순서 
  3위 하나님은 존재론적인 면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부는 다른 위로부터 발생하지 않으셨고, 성자는 성부로부터 영원히 발생(generation)하셨으며,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영원히 방출(procession)하셨다."

 2) 경륜적 순서 
  3위 하나님은 경륜적인 면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습니다.

  "만물이 "성부로부터"(out of) 나오고, "성자로 말미암고"(through), "성령 안에"(in)있다(요 1:3,14)."

 3) 구원 사역적 순서 
  3위 하나님은 인간의 구속 사역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습니다.

  "성부는 구속을 계획하셨고(요 17:6), 성자는 죽음을 통해 구속을 성취하셨으며(롬 5:8), 성령은 구원의 효과를 각 개인에게 적용하신다(고후 3:18)."

삼위일체에 대한 신앙은 무조건 믿는 것 뿐이다


삼위일체 문제는 세상에 똑같은 모델이 없기 때문에 예를 들어 설명하는 일이 불가능합니다.

피조물인 우리가 하나님의 본질을 모두 이해하고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아마도 이 문제는 우리가 천국에서 하나님을 뵙게될 때에 완전히 해결될 수 잇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계시해주신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을 연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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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십니다.
삼위일체란 유일하신 하나님(본질)이 3인격(위격)으로 존재하시고 사역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삼위일체는 기독교에 매우 중요한 교리이기 때문에 이 삼위일체를 부인하면 이단이 됩니다.
그럼에도 정통 기독교신자들도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는 말은 자주 들어서 알고 있지만 실제 그것이 무슨 뜻인지 잘 모릅니다.

삼위일체라는 용어는 신학적으로 정립이 된 용어이지, 성경에 직접 나타난 용어는 아닙니다.
삼위일체는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된 진리일 뿐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가장 잘 계시하여준 성경 중에 하나가 바로 요한복음입니다.
사도요한은 유대인입니다.
그래서 그는 구약의 하나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바로 그가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예수님의 사역과 말씀 가운데서 바로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보혜사 성령님, 그리스도의 영이 오셨는데 그분도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요한에게는 유일하신 하나님이 3위격으로 존재하시고 사역하신다는 사실이 굉장한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아리우스와 아타나시우스 논쟁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 논쟁은 2위이신 예수님이 1위인 아버지 하나님과 동등하냐 아니면 아버지보다 작으냐의 논쟁입니다.
동등하다면 예수님은 100% 하나님이시고, 작다면 예수님은 100% 하나님이 아닌 것입니다.

아리우스파는 예수님은 아버지 보다 작은 분이고 종속되어있다고 믿었습니다.
지금의 여호와의 증인이 이것을 따르고 있습니다.

아타나시우스파는 예수님은 아버지와 100%동등하다고 믿었습니다.
이 논쟁에서 아타나시우스파가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아리우스파요한복음14:28아버지는 나보다 크다”라는 말씀을 인용합니다.
결국 그리스도는 아버지에게 종속되어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삼위일체 하나님을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가에 대한 시도를 많이 합니다.

예컨대, 얼음이 녹으면 물이 되고, 물이 수증기가 되지 않습니까?
얼음, 물, 수증기는 같지 않습니까?
태양이 있고, 빛이 있고, 열이 있지 않습니까?
태양, 빛, 열은 결국 같은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분들은 삼위일체 하나님도 이렇게 이해 할 수 있는 듯이 말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셋이 하나가 되는가에 대한 이런 숫자 놀음은 우리 신앙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점 더 고상하게 말하는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소위 삼신론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아버지, 예수님, 성령이 모두 하나님이기 때문에 결국 삼신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틀린 말입니다.
하나님은 유일하십니다.
하나님은 한분뿐이십니다.

또 이런 주장도 있습니다.

시대마다 다른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하나님이 세 가지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며 역사한다고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구약시대에, 예수님이 신약시대에, 성령님은 교회시대에 존재하시면서 역사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을 경륜적 삼위일체론이라고 합니다.
이것도 이단입니다.

삼위일체를 어떻게 이성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능할까를 시도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삼위일체 신론은 우리의 이성으로 이해가 불가능한 신비입니다.
삼위일체 신론은 우리에게 계시 된 만큼만 이해를 하셔야 합니다.
신비는 남겨두어야 합니다.
삼위일체 신론을 어떻게 이성으로 이해해야 할 것인가 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삼위일체 신론이 나타내는 진리가 무엇일까를 알고, 그 진리에 감사와 감격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하나님은 인간이시면 안 됩니다.
초월자이셔야 합니다.
초월자이셔야 우리를 구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려면 초월자이시지만 우주와 역사 가운데 내주하셔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는 우리의 영혼 안에 내주 하셔야 합니다.
초월하시면서,인류의 역사 가운데 내주하시고, 인간의 영혼 안에 내주하시는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존재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 우리를 사랑하셔서 구원하실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 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감격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의 지혜에 감탄해야 합니다.

삼위일체 신론은 세 인격이 어떻게 한 하나님으로 존재할 수 있는 가를 우리의 이성을 통해 이해하라고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닙니다.

삼위일체 신론은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려면, 초월자이시지만 역사 가운데 내주하셔야 하고, 더 나아가서는 우리의 영혼 안에 내주 하셔야 함을 우리로 하여금 경험하도록 주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이해 안 되면 그대로 두세요.
그 대신 하나만 명심하십시오.
우리를 구원할 구원자는 초월하시면서, 내재할 수 있는 신이어야 합니다.
그분이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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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라는 말은 성경에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성경에 나온 하나님에 관해서 분명하게 설명하는 용어로 쓰이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지칭할 때 분명하게 아버지, 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님이라는 말로 표현하며 또한 하나님은 오직 한분이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삼위”이라는 말은 세 분을 가르키지만 “일체”라는 말은 하나의 몸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드러내는 것인데 바로 하나님은 세 분, 즉 성부, 성자, 성령의 모습이 있지만 세 분 모두 같은 신의 성품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삼위일체를 H2O 에 비유해서 설명하기도 합니다.
H2O는 물, 얼음, 수증기의 세가지 형태를 갖고 있으나 모두 H2O라고 부릅니다.

또 다른 설명은 바로 계란이 껍질, 노른자, 흰자로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설명은 부분적이 면이 합쳐져서 하나가 되었다는 말이기 때문에 삼위일체를 설명하는 예로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이십니다.
성부는 또한 완전한 하나님이십니다.
성령도 완전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십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우리의 제한된 경험을 가지고 삼위일체를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창세기 1:26의 내용을 에서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유축과 온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께서 그 분 자신을 지칭할 때, “우리”라는 대명사를 사용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음의 성경 구절은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심을 보여줍니다.

  •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신명기 6:4)

  •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이가 없나니 나 밖에 신이 없느니라.” (이사야 45:5)

  • 하나님은 한 분 밖에 없는줄 아노라 (고린도전서 8:4)

  • 예수꼐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3:16-17)

  •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마태복음 28:19)

  • 예수님이 말씀하시되 :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요한복음 10:30)

  •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요한복음 14:9)

  •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요한복음 12:45)

  •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로마서 8:9)

  •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마태복음 1:20)

  •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마리아에게]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누가복음 1:35)

  •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여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기키리니 내 아버지꼐서 저를 사랑하실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요한복음 14:16-17,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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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위일체 교리는 인간의 하나님 체험입니다.

하나님의 유일성,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역사 경험,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에 대한 인격적 체험이, 삼위일체를 깨닫게 했습니다.

2.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인간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삼위일체의 관계로 존재하듯이 인간은 사랑의 관계로 존재하고 사랑의 관계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랑인 것처럼 사람도 사랑입니다. 

만일 사람을 현혹해서 모아야 하는 사이비 종교 창시자가 되기 위해 교리를 자의적으로 만든다면 실용성과 상품성 차원에서 절대로 포함시키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삼위일체 교리입니다.
사람들 마음을 사로잡으려면 설명이 쉽고 합리적인 것들을 골라 모아야 하는데, 삼위일체 교리는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들고 설명이 너무 어렵고 선동적인 감동도 없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이 힘들고 어려운 개념을 핵심 교리로 붙잡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실용성 없이 미련해 보이는 짓을 하는 것일까요?
억지로 만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의 반증(反證)입니다.
인위적으로 편의를 위해 만든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사람의 머리로 이해가 잘 안 된다 해서 포기할 수 없는 진리라는 말입니다.

   ‘삼위일체’, 교회사 속 신조어(新造語)

삼위일체(三位一體, trinity)라는 말은 라틴어 trinitas(3중)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간추려서 말하자면 “한 분 하나님 존재 안에서 세 신격(神格)”(Three Persons in One Godhead) 즉 ‘셋으로 하나’라는 뜻입니다.
이 교리에 대한 긴 논쟁은 니케아 공의회에서(325년) 시작해서 126년간 이어져 칼케돈 공의회(451년)에서 완료되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1649) 제 2장 “하나님과 삼위일체” 3조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본체(本體)는 하나이시며 곧 동시에 삼위(三位)이시다(요일 5:7, 마 3:16, 17, 28:19, 고후 13:13).
즉 본체와 능력과 영원성에 있어서 동일하신 삼위의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이시다.
성부는 아무에게서도 나시거나 나오시지 않으시고, 성자는 성부에게 서 영원히 나셨고(요 1:14, 18),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영원히 나오신다(요 15:25, 갈 4:6)”

중세 때 설명을 위해 사용했던 ‘삼위일체 방패’ 도식은 그 의미를 잘 요약해 줍니다.

(1) 성부는 하나님이십니다. 성자도 하나님이십니다. 성령도 하나님이십니다.
(2) 성부는 성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성부도 성자도 한 하나님이십니다.
(3) 성부는 성령이 아니십니다. 그러나 성부와 성령은 한 하나님이십니다.
(4) 성자는 성령이 아니십니다. 그러나 성자와 성령은 한 하나님이십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 인간의 인식으로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계시되었습니다.

이 용어 자체는 성경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 만든 단어입니다.
그러나 개념은 다 성경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삼위일체란 단어는 성경에 없지만 삼위일체 개념은 성경에 가득하다는 말입니다.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만들어내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계시되었기 때문에

첫째,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

이것이 모든 계명의 근간입니다. 십계명의 제 1-2 계명이 이 때문에 주어졌습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신 6:4, 참고, 약 2:19).

둘째,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전적으로 하나님이시며, 인간이 되셨던 하나님 존재의 두 번째 신격이십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빌 2:6-7, 참고 요 1:1, 8:58).

셋째, 성령은 하나님의 영으로 하나님이십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며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넷째, 세 신격은 각자 전적으로 하나님이시지만 일정한 차별성을 보이며 서로 관계하십니다.

성부께서 성자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막 9:37, 마 10:40, 갈 4:4).
성부와 성자는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요 14:26, 15:26, 16:7).

세 신격의 관계를 보여주는 가장 극적인 장면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입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 3:16-17) 개별적 신격으로 존재하십니다. 서로 관계를 가지십니다. 그러나 하나이십니다. 그래서 삼위일체입니다.

이것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삼위일체(Trinity) 교리는 인간의 역사적 하나님 체험입니다.
하나님의 유일성,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역사 경험,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에 대한 인격적 체험이, 교회로 하여금 삼위일체를 깨닫게 했고 그래서 그 교리를 기록하게 했습니다. 즉 우리가 삼위일체를 알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그렇게 계시하셨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가 주는 의미

그렇다면 삼위일체가 지닌 의미가 무엇일까요?

1. 삼위일체는 사랑입니다.

세 신격이시지만 한 분이십니다.
논리로는 이해가 안 되는 신비입니다.
셋이지만 하나인 완전한 연합입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1).

이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7-8).

2.  십자가의 복음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인간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9-10).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신 복음은 그 삼위일체의 사랑이 우리 위에 그대로 쏟아 부어진 것입니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5, 8).

삼위일체는,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여 우리를 구원하시는 사랑의 계시입니다. 성부께서 우리를 사랑하여 성자를 보내 우리를 위해 죽게 하시고 성령님을 통해서 그 사랑을 알게 하신 것이 우리의 구원입니다(요 3:16, 고전 2:12).

3. 삼위일체는 우리 삶의 모델입니다.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요 17:22-23).   

사랑이 가장 큰 계명인 이유는, 삼위일체로 서로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그 사랑의 형상대로 우리를 서로 사랑하는 존재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둘이 아니라 하나라고 하십니다(창 2:24).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요일 1:3).

그래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의 사랑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구현된 것입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 2:12-13).

삼위일체의 형상인 인간도 사랑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인간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삼위일체의 관계로 존재하듯이 인간은 사랑의 관계로 존재하고 사랑의 관계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랑인 것처럼 사람도 사랑입니다.
인생은 사랑입니다.
인생은 사랑이면 성공이고 미움과 무관심이면 실패입니다.
마음과 목숨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큰 계명입니다.
그리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모든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그 사랑으로 성부, 성자, 성령의 메시지를 세상에 전하는 것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

우리가 진정 서로 사랑하기만 해도 전도가 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서로 사랑하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세상에 보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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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5287)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1650)

5287. 실상 - 후포스타시스(ὑπόστασις)

5287. 실상 - 후포스타시스(ὑπόστασις) 1650. 증거 - 엘렝코스(ἔλεγχος)

ὑπόστασις, εως, ἡ 

1. 본질적 성질,  2. 확신
발음 / 후포스타시스(hüpŏstasis)
관련 성경 / 본체(히 1:3), 실상(히 11:1), 믿던 것(고후 9:4)
신약 성경 / 5회 사용

'후포스타시스'는 '후포'(아래, sub)와 히스테미(ἵστημι, histemi, 서게 하다, 확립하다)

* 후포(~에 의하여). 5259.
ὑπό 

1. ~에 의하여,  2. 마태 1:22,  3. 마태 17:12
발음 / 후포(hüpŏ)
관련 성경 / «속격» 의하여, 말미암아(마 1:22, 눅 2:18)
                  «대격» 아래, 밑에(마 8:9, 행 4:12)
신약 성경 / 220회 사용

* 히스테미(서게하다) 2476

ἵστημι

1. 놓다,  2. 세우다,  3. 내세우다
발음 / 히스테미(histēmi)
관련 성경 / 서다(마 2:9, 막 9:1, 요 1:35), 세우다(마 4:5, 행 6:6, 롬 3:31), 데리고 가다(마 18:16), 서 있다(마 20:6), 두다(마 25:33),
멈추다(행 8:38), 작정하다(행 17:31), 그대로 두다(고전 7:37), 확정하다(고후 13:1), 대적하다(엡 6:13), 앉다(약 2:3), 일어서다(계 11:11)신약 성경 / 154회 사용

* 후포스타시스 - 아래에 서게하다 즉 받침대를 의미한다.
꽃을 위한 받침대, 책을 위한 받침대,
이렇게 발전하여 믿음을 위한 받침대가 곧 후포스타시스로 실상(실체)이라고 하겠다.




후포스타시스 / 

“삼위일체”에서 ‘위(位)’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후포스타시스’라는 용어의 주가를 높여놓은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보통 ‘실체(實體)’로 번역됩니다.
그래서 삼위일체에서 ‘체(體)’에 상응하는 용어일 것 같은데요, 아닙니다.
‘체’에 상응하는 용어는 ‘우시아’입니다.
이때 우시아는 “본질”을 의미하지요.
삼위일체에 상응하는 그리스어 용어를 그대로 풀어내자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은 각각 다른 분이나 본질적으로는 같은 분이시다

‘본질’은 무엇이고 ‘같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후속 논의가 여전히 남아있지만 신학자가 아닌 우리들은 사변적인 영역에 들어가지 말고“일체”를 간단히 “통일체”로 이해하고 신앙생활하는 것이 유익하다.  

‘실상’이 바로 ‘휘포스타시스’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체이다”

우리나라 말이지만 여전히 미궁 속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성경 번역은 기본 의미가 아닌, 파생적 의미에서 해법을 찾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휘포스타시스에는 동적인 개념이 들어있는데 이 점을 드러낼 때는 “실체”가 아닌 “기체”(基體)로 번역합니다.
어떤 것을 형성하고 완성하는 출발점 내지 토대라고 할까요?
이러한 방향으로 해석하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는 이런 뜻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을 실현해가는 토대와 같은 것이다”

믿음의 행위의 하나인 기도를 생각해봅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다 아시는데 왜 기도로 아뢰어야 합니까?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역사(役事)의 재료(토대)가 된다!”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전자는 “확신” 비슷한 의미로,
후자는 “증거” 비슷한 의미로 번역합니다.
객관성과 관련 있는 “증거”(엘렝코스)로 번역했을 때 이 구절이 말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상반절이 형이상학 개념과 관련되어 있다면  하반절은 인식론 개념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애초 믿음에는 주관성이 강해서 객관성이 강한 ‘증거’과 연결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생물학에서 세포핵을 관찰할 때 염색을 하지요. 그렇게 보이게 된 세포핵은 엄격히 말해 원래 세포핵은 아닙니다. “염색약에 물든 세포핵”이지요. 하지만 이것은 세포핵에 대한 증거가 되지요.

믿음으로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는 것도 비슷합니다.
믿음이라는 염색약이 들어갔지만 염색약 같은 믿음도 증거의 요소가 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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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三位一體) 

삼위일체는 성경적인 교리인가? 

삼위일체에 관하여 성경은 무엇을 가르치는가?
삼위일체는 성경적인 교리인가?
기독교의 삼위일체 개념에서 가장 어려운 점은 그것을 완벽하고 충분하게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삼위일체는 설명은 고사하고 그것을 완벽하게 이해하기가 불가능한 개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존재 방식은 우리와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보다 한없이 위대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기를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아버지,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 모두 하나님이시라고 가르칩니다.

성경은 또한 하나님은 오직 한 분뿐이라고 가르칩니다.

우리가 삼위일체 내의 서로 다른 위격(인격)들의 관계에 대해 몇 가지 사실들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그것은 인간의 생각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삼위일체가 사실이 아니거나 성경의 가르침을 근거로 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삼위일체는 한 하나님께서 세 위격으로 존재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는 세 하나님을 제안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기 바랍니다.
이 주제를 공부할 때, “삼위일체”라는 단어가 성서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단어라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이 용어는 세 위격의 하나님을 묘사하기 위하여 사용된 것입니다.
세 위격은 같이 공존하시고, 함께 영원하신 위격들로서 한 하나님을 구성하십니다.
진짜 중요한 점은 “삼위일체”라는 단어로 표현되는 개념은 성경에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삼위일체에 대해 언급하는 내용들입니다.

1.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신 6:4; 고전 8:4; 갈 3:20; 딤전 2:5).

2. 삼위일체는 세 위격들로 구성됩니다(창 1:1, 26; 3:22; 11:7; 사 6:8, 48:16, 61; 마 3:16-17, 28:19; 고후 13:14). 

창세기 1장 1절에서, 복수형의 히브리어 “엘로힘”(Elohim)이 사용되었습니다.
창세기 1장 26절, 3장 22절, 11장 7절, 그리고 이사야 6장 8절에서, 복수 인칭 대명사인 “우리”가 사용되었습니다.
‘엘로힘’(하나님들)이라는 단어나 인칭 대명사 “우리들”은 복수 형태인데, 두 개 이상의 것들을 분명하게 지칭하는 히브리어입니다.
이것이 삼위일체에 대한 명쾌한 주장은 아닐지라도 하나님의 복수적 측면을 나타내줍니다.
하나님을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 ‘엘로힘’은 명확하게 삼위일체 개념을 허용합니다.

이사야 48장 16절과 61장 1절에서, 아들은 아버지와 성령에 대해 언급합니다.
이사야 61장1절을 누가복음 4장 14-19절과 비교해 보십시오.

마태복음 3장 16-17절은 예수님의 세례 사건을 묘사합니다.
이 구절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성부 하나님께서 아들을 기뻐하신다고 선포하시는 동안 성령 하나님은 성자 예수님 위에 강림하십니다.

마태복음 28장 19절과 고린도후서 13장 14절은 삼위일체 내에서 서로 구별되는 세 위격을 보여주는 예가 됩니다.

3. 삼위일체의 세 위는 서로 구별됩니다. 

구약 성경에서, “여호와”(the LORD)는 “주”(the Lord)와 구별됩니다(창 19:24; 호 1:4).
여호와 하나님은 한 아들이 가지십니다(시 2:7, 12; 잠 30:2-4).
성령님은 여호와(민 27:8)와 하나님(시 51:10-12)과 구별됩니다.
성자는 성부와 구별됩니다(시 45:6-7; 히 1:8-9).

신약에서 예수께서는 보혜사(돕는 분)이신 성령님을 보내시는 것에 대하여 아버님께 말씀드리십니다(요 14:16-17).
이는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아버지나 성령으로 여기지 않으셨음을 보여줍니다.
이 외에,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아버지께 말씀하시는 모든 다른 경우들을 살펴보기 바랍니다.
그분(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에게 말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분은 삼위일체의 다른 분이신(다른 위격이신) 아버지께 말씀하셨습니다.

4. 삼위일체의 세 위는 하나님입니다. 

아버지는 하나님이십니다(요 6:27; 롬 1:7; 벧전 1:2).
아들은 하나님이십니다(요 1:1, 14; 골 2:9; 히 1:8; 요일 5:20).
성령은 하나님이십니다(행 5:3-4; 고전 3:16).

5. 삼위일체의 세 위는 긴밀한 관계입니다. 

성부는 다른 위에서 발생하지 않았으며, 성자는 성부로 부터 영원히 발생하셨으며,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 부터  영원히 방출하셨습니다.이것은 내부의 관계로서 삼위일체 그 어느 분의 신성도 부인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유한한 우리의 마음으로 무한하신 하나님에 관해 이해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아들에 관한 참조로는 누가복음 22:42, 요한복음 5:36, 그리고 요한일서 4:14을 보십시오.
성령에 관한 참조로는 요한복음 14:16, 14:26, 15:26, 16:7, 그리고 특히 요한복음 16:13-14)을 보십시오.

6. 삼위일체의 세 위는 서로 다른 과업들을 갖습니다. 

성부는 우주 생성의 궁극적 원천 또는 원인(고전 8:6; 계 4:11)이시며, 하나님의 계시(계 1:1), 구원(요 3:16-17), 그리고 예수님의 인간으로서의 사역들(요 5:17. 14:10)의 궁극적인 원인이십니다.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일들을 일으키십니다.

성자는 성부께서 다음과 같은 일들을 하실 때의 대리자이십니다.
우주의 창조와 보전(고전 8:6; 요 1:3; 골 1:16-17); 하나님의 계시(요 1:1, 16:12-15; 마 11:27; 계 1:1), 그리고 구원(고후 5:19; 마 1:21; 요 4:42). 아버지는 그의 대리자 역할을 하는 아들을 통하여 이 모든 일들을 수행하십니다.

성령은 성부께서 다음과 같은 일들을 수행하시는 수단입니다.
우주의 창조와 보전(창 1:2; 욥 26:13; 시 104:30); 하나님의 계시(요 16:12-15; 엡 3:5; 벧후 1:21); 구원(요 3:6; 디도서 3:5; 벧전 1:2); 그리고 예수님의 사역들(사 61:1; 행 10:38). 따라서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일들을 성령의 능력으로 수행하십니다.

삼위일체를 실례를 들어 설명하려는 많은 시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대중적인 설명은 그 어떤 것도 완전히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계란(또는 사과)의 예에서, 껍질, 과육, 그리고 씨앗이 사과의 부분이며 사과 자체가 아닌 것처럼, 또는 달걀의 예에서 껍질, 흰자, 그리고 노른자는 달걀의 부분이며 계란 그 자체는 아니라는 점에서 삼위일체를 설명하지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하나님의 부분들이 아니며 또한 그들 각각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러한 설명은 삼위일체에 대한 설명이 될 수 없습니다.

물의 실례는 다소 나아 보이지만, 여전히 삼위일체를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합니다. 액체, 기체, 그리고 얼음은 물의 형태들입니다.

아버님, 아들, 그리고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형태들이 아닌, 각자가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이러한 실례들이 삼위일체의 그림을 제공할지는 몰라도, 그 그림은 완전히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은 한정적인 실례에 의해 온전히 묘사될 수 없으십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기독교 교회의 역사를 통틀어 분열을 초래하는 쟁점이었습니다.
삼위일체의 핵심적 측면이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에 제시되어 있지만, 몇 가지 부차적인 쟁점들은 명쾌하게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아버지는 하나님이시고, 아들도 하나님이시고, 성령도 하나님이시지만, 오직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만 존재하십니다.
이것이 삼위일체의 성경적 교리입니다. 

이 사실 외에서의 쟁점들은 어느 정도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본질 부분은 아닙니다.
우리의 한정된 생각으로 삼위일체를 완전히 정의하려고 하는 것 보다는,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무한하게 높으신 그분의 본성에 초점을 맞추며 섬기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34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로마서 11:33-34).


삼위일체라는 용어는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삼위엘체라는 개념과 기능은 분명히 성경적인 근거를 갖는다.

삼위일체(三位一體)                    

1. 삼위일체의 용어와 형성

이단들은 삼위일체라는 용어가 성경에 없다고 주장한다.
물론 삼위일체라는 용어는 성경에 없다.
그러나 삼위일체라는 개념과 그 용어는 분명히 성경적인 근거를 갖는다.

성경은 하나님이 유일하신 한분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또한 성부와 성자, 그리고 성령에 대해서 분명히 하나님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또한 삼위하나님은 상호교류와 상호구별된다는 성경내용도 기록되어 있다.
이것을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성경 기록을 그대로 요약하고 정리하는 가운데 삼위일체라는 이론이 정립되어진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공동번역] 그 아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찬란한 빛이시요, 하느님의 본질을 그대로 간직하신 분이시며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인간의 죄를 깨끗하게 씻어 주셨고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신 전능하신 분의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표준새번역] 아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요, 하나님의 본바탕의 본보기이시요자기의 능력 있는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는 죄를 깨끗하게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현대인의성경] 그 아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며 하나님의 본성을 그대로 나타내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능력 있는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시며 죄를 깨끗게 하시고 하늘에 계시는 위대하신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셨습니다.

[개역]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휘포스타시스)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KJV] Who being the brightness of [his] glory, and the express image of his person, and upholding all things by the word of his power, when he had by himself purged our sins, sat down on the right hand of the Majesty on high;

[NIV] The Son is the radiance of God's glory and the exact representation of his being, sustaining all things by his powerful word. After he had provided purification for sins, he sat down at the right hand of the Majesty in heaven.

[RSV] He reflects the glory of God and bears the very stamp of his nature, upholding the universe by his word of power. When he had made purification for sins, he sat down at the right hand of the Majesty on high,   

                                          

히브리서 1:3에서 “휘포스타시스”(confidence essence, nature, person)라는 단어가 나타나는데 이 단어의 뜻은 “본질, 본체, 실체, 실상”이라는 뜻을 갖는다. 다시 말하여 예수님은 성부하나님의 “휘포스타시스”인 것이다.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본질은 동일하다는 이 단어가 삼위일체라는 단어를 탄생하게 한다.  

이 단어는 단순한 유사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곧 하나님의 본질이라는 뜻이다.
또한 히브리서 외에도 빌립보서 2:6에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본체, 본질임이 기록되어 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몰프헤)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몰프헤”라는 단어는 “휘포스타시스”와 동일한 뜻을 가진다.
즉 “본체, 본질, 형상”이라는 뜻이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이시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아니하셨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은 하나님과 본질에서 동등하다는 결론을 갖음으로서 삼위일체라는 용어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AD 318년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장로 아리우스는 예수그리스도가 "비존재로부터 피조되었으며, 존재하지 않았을 때도 있었다"고 주장하며 유사본질이라고 주장함으로서 알렉산더 감독과 대립하여 초대교회를 분열시켰다.

아리우스 장로는 알렉산드리아교회의 중요한 인물이었는데, 쉽게 말하자면,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고, 예수를 피조물로 보는 여호와의 증인들의 선조라고 보면 맞다.

알렉산드리아 지방의 주교인 알렉산더감독은 아리우스를 이단으로 정죄하였으며, 알렉산더 감독이 죽은 후에 그 서기였고 집사였던 아타나시우스가 아리우스를 상대로 힘겨운 토론을 하여 결국 승리를 갖게 된다.

결국 아타나시우스가 예수가 하나님의 동일본질이며, 피조물이 아니라는 것을 토론을 통하여 입증하고 승리함으로서 삼위일체의 초석이 니케야회의를 통하여 정립되었던 것이다.

삼위일체, 바로 알고 계신가요? 

1. 요 1:1; 마 3:16-17

삼위일체, 교인이라면 얼마나 귀에 익숙한 어휘입니까?
그런데 솔직히 얼마나 난감한 어휘인지요?
기독교의 핵심적 진리에 속한다는 것은 알지만 막상 설명하라면 말이 막히는 진리, 그것이 ‘삼위일체’란 진리입니다.
그리고 문제는, 설명한다고 하는 많은 기독교인이 삼위일체를 양태론이나 삼신론 식으로 설명한다는 점입니다.
양태론과 삼신론은 모두 삼위일체에 대한 잘못된 이론으로서 실제로 ‘이단’인 이론들입니다. 

그렇다면 삼위일체니, 양태론이니 골치 앓을 것 없이 그저 열심히 믿으면 된다고 해야 할까요?
그러나 믿음만 있으면 된다는 태도는 기독교의 건강한 신앙이 항상 ‘믿음의 열정(fervor of faith)’과 ‘진리에 대한 바른 이해(right understanding of truth)’의 균형에 의해 유지되는 사실과 역행합니다.

이 균형은 정확히 예수님이 말씀하신 ‘영’과 ‘진리’의 균형입니다(요 4:24).
‘열심’이라면 이단 추종자들도, 공산주의자도 다 갖는 것인데 그들의 문제는 ‘진리에 대한 이해’가 없다는 점입니다.

‘삼위일체’는 어떤 진리입니까?

삼위일체는 하나님께서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내 보여주신 ‘하나님의 본질적 구조’에 대한 진리입니다.
하나님 자신의 ‘존재구조’ 안에 분명한 ‘세 분’이 계시며, 그 세 분은 깊은 관계성 안에서 ‘한 분’이시라는 것, 그것이 삼위일체입니다.
이러한 삼위일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타내어 주신 하나님의 ‘본질적 구조’에 대한 진리이기에 매우 중대한 진리입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누구신가를 알려면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진리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하나님 자신에 대한 진리를 우리에게 알려주실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는
(1) 하나님과의 ‘살아 있는 관계’를 위하여 필수이기 때문이며,
(2) 기독교인으로서의 ‘바른 삶’을 위하여 필수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에서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는 ‘기독교인으로서의 바른 삶’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만 합니다.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나타내시고 계시하신 진리 중 필요 없다거나 중요하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정확한 일조량의 햇빛이 지구에 닿게 하셨겠습니까?
지구 위의 생명체들이 그것을 통해 생명을 얻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삼위일체의 사실을 계시하셨을까요?
믿는 자들이 그 진리를 통해 생명 있는 자들이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진리의 내용을 바르게 알려는 ‘진지함’ 없이 그저 자기 생각대로 믿어도 된다고 하는 것은 어리석고 무지한 고집일 뿐입니다.

성경은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마 5:5).
성경이 말하는 ‘온유’는 배워야 할 것을 배우려는 자세를 포함합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하나님의 삼위일체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라고 물으면 다수의 교인이 ‘유일신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유일신’이라고 하는 순간 그들의 머릿속을 장악하고 있는 생각은 “단독적 주체의 신,” 그저 영원부터 영원까지 ‘싱글’인 신, ‘영원한 솔로’인 신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러한 ‘영원한 솔로’로서의 유일신은 정확히 이슬람의 알라신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이제 알아볼 것이지만, 성경의 ‘삼위일체 하나님’은 그러한 ‘영원한 솔로’의 신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그저 ‘단독적 주체’로, 즉 ‘영원한 솔로’로 생각하는 교인은 삼위일체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요?
가장 흔한 이해가 삼위일체를 하나님의 ‘세 면(面)’이나 하나님의 ‘세 역할(function)’로 보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아버지, 아들, 성령이란 ‘한 분 하나님’의 ‘세 면,’ 혹은 ‘세 역할’일 뿐이라고 보는 것이지요.

‘한 남자’가 집에서는 아버지, 직장에서는 과장님, 교회에서는 집사님인 것과 같다는 식의 설명을 들은 적이 있는지요?
마치 한 남자의 ‘원맨쇼’처럼 말입니다.
혹시 주일학교에서 그런 식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을 본 적이 있는지요?
유감스럽게도 그 ‘원맨쇼의 하나님’ 설명은 정확히 ‘이단’에 속하는 이론입니다.

교회사를 보면, 2세기에 사벨리우스(Sabellius)라는 사람이 그런 식으로 삼위일체를 가르쳤습니다.
그는 ‘한 분 하나님’이 구약에는 ‘아버지’로, 신약에는 ‘아들’로, 교회시대에는 ‘성령’으로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단독적 주체의 하나님’이 역사 안에서 ‘세 역할’을 했다는 것이지요.
아버지, 아들, 성령을 단순히 한 하나님의 세 면(세 양상, 세 역할)으로 본다고 해서 그의 이론을 ‘양태론(Modalism)’이라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론은 성경의 삼위일체 진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교회의 지도자들(교부들)은 알았습니다.
그래서 교회 교부들은 사벨리우스의 양태론을 반(反) 성경적 이단으로 단죄하였습니다(AD 262).   

우리는 진정한 삼위일체는 양태론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한 단독적 주체의 신이 ‘세 역할’을 하는 그런 신관이 아닙니다. 
성경이 증언하고 교회가 ‘정통’으로 유지해온 삼위일체론에 의하면, 하나님의 존재구조 안에는 참으로 ‘세 분’이 계십니다.
‘세 분’ 아버지, 아들, 성령은 ‘단독적 신’의 세 면이 아니고, 각자가 자신의 주체성(selfhood)을 가지신 분명한 ‘세 주체들(three Persons)’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사랑, 대화, 일 등을 나누시는 ‘인격적 관계(personal relationship)’ 안에 있는 분들이신 것입니다.    

아버지, 아들, 성령 각자가 자신의 ‘개별적 정체성’을 가진 ‘주체’시라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것이 마태복음 3장 16-17의 예수님 세례 장면입니다.

이 세례 장면에서 삼위일체 안의 ‘아들(Son)’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애를 시작하기 위한 세례를 받으십니다.
그런데 거기에 누가 나타나십니까?
‘성령’께서 비둘기 모양으로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또 다른 분이 나타나시는데 하늘의 음성으로 나타나시는 ‘아버지(Father)’이십니다.
주목할 것은, 예수님의 세례 장면에 아버지, 아들, 성령 세 분이 ‘동시에(simultaneously)’ 나타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각 분께서 자신의 정체성을 가지고 현현(顯現)하여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경의 증거가 사벨리우스의 양태론 이단과 어떻게 다른지 보시는지요?
사벨리우스 말대로 ‘솔로’인 단독신이 어떤 때는 아버지로, 어떤 때는 아들로, 어떤 때는 성령으로 혼자 ‘원맨쇼’를 했다면, 마태 3장에서와 같이 아버지, 아들, 성령이 ‘동시에’ 각자의 신분으로 현현(顯現)하실 수는 없겠지요.

이 마태 3장의 예수님 세례 장면은 그래서 양태론이 거짓인 것을 증명하는 중요한 성경 말씀입니다.

이러한 성경적 증거 때문에 2세기의 현명한 교부들이 양태론을 이단으로 단죄했던 것입니다. 

양태론에 반(反)하는 다른 성경의 증거들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성경에서 예수님은 자신과 아버지를 존재적으로 분명하게 구별하십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향해 기도도 하시며(요 17:5), 자신의 뜻과 아버지의 뜻을 구별하시기도 합니다(눅 22:42).
또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인도하셨다는 구절은 성령과 아들(예수님)을 구별하는 말씀입니다(막 1:12). 

‘삼위일체’란 언어는 성경에는 없는 언어지만 위의 예에서 보는 것처럼 삼위일체의 ‘내용’은 성경 전체에 흐르고 있습니다.

‘원죄’라는 말이 성경에 없지만 원죄의 진리가 성경 전체에 흐르듯이 말입니다.
성육신’이라는 말이 성경에 없지만 성육신에 대한 진리가 성경 전체에 있듯이 말입니다.
삼위일체’란 용어는 3세기의 터툴리안(Tertullian)이 양태론을 반박하기 위하여 처음 사용하였습니다. 

주목할 것은, 삼위일체의 진리는 이미 구약에서 힌트와 암시로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구약에서 자신의 복수성과 단수성을, 즉 삼위일체적 특징을 나타내셨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주 ‘우리(we, our)’라는 표현을 쓰십니다(창 1:26; 사 6:8).
또한 놀랍게도 ‘하나님’을 뜻하는 히브리어 ‘엘로힘’은 정확히 ‘하나님들’입니다.
즉 단수가 아닌 복수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 1절도 정확히 하면 “태초에 하나님들(엘로힘, Gods)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입니다.
그리고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전 12:1)”는 말씀의 ‘창조주’는 히브리 원어에서 ‘에쓰보레카’로서 ‘창조주들(Creators)’입니다.
즉 “창조주들을 기억하라”입니다.
그런데 구약은 하나님이 ‘한 분’이신 하나님이시라는 것도 아울러 강조해 가르칩니다(신 6:4).

자유주의 신학자 중에는 하나님의 복수적 표현인 ‘엘로힘’을 삼위일체와 무관한 것으로 해석하지만, 구약과 신약 전체의 전후관계와 문맥 안에서 볼 때, ‘엘로힘(하나님들)’은 삼위일체적 계시의 용어로 충분히 볼 수 있다는 것이 복음주의 신학의 해석입니다. 

요즘 이단들에 대한 경계를 많이 하는데 막상 ‘정통교회’에 속해 있다는 교인은 이슬람의 알라(Allah)신과 성경의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질적 차이를 모르고 있습니다.

당혹스런 사실이지요. 알고 보면 삼위일체는 기독교 진리의 근본이며 근간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성육신의 진리, “그리스도께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셨다”는 속죄의 진리,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자이시다”라는 기독론적 진리는 모두 삼위일체의 진리에 서 있는 것들입니다.

과연 삼위일체는 하나님에 대한 성경적 이해를 위해 가장 근본적이며 중대한 진리인 것입니다.
본 장에서 저는 특히 양태론(Madalism)의 오류를 지적하면서 아버지, 아들, 성령 각 분이 참으로 서로 구별되는 분들임을 말했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이 ‘세분들’이 어떻게 ‘한 분’이신지 말해보도록 하겠습니다.


2.  신명기 6:4, 요한복음 17:5 

하나님의 존재구조 안에 참으로 ‘세 분’이 계시다는 사실 앞에서 우리는 그 다음의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기독교가 결국 ‘세 하나님들(three Gods)’을 가르치느냐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단호히 ‘아니오’입니다.
기독교 신학은 ‘세 하나님들’이라는 표현은 쓰지 않습니다.
그 표현은 삼신론(tritheism)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삼신론이란 쉽게 말해서 서로 분리된 ‘세 신들’을 말합니다. 
즉 각자가 자신의 주체성을 가진 세 신들이 ‘서로 따로 노는’ 식으로 존재한다는 이해의 신론입니다.
따라서 삼신론에서는 만일 한 신이 없어져도 다른 ‘두 신들’의 존재에는 이상이 없습니다.
이러한 삼신론은 정확히 힌두교에서 발견되며(부라마, 비쉬누, 시바), 몰몬교에서도 볼 수 있는 신관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삼위일체는 삼신론과는 전혀 다른 신론임을 이제 확인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기독교의 신학은 아버지, 아들, 성령은 분명한 ‘세 분’이시지만 그분들은 ‘함께’ 분명한 ‘한 분’이시기도 하다고 가르칩니다.
즉 3 = 1이라는 것입니다.
그 말은 역으로 1 = 3임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아버지, 아들, 성령이 ‘분명한 세 분의 주체들’이시면서 동시에 ‘한 분(one)’이시란 말입니까?

‘한 분’이신 분이 어떻게 동시에 ‘세 분’이시라는 것입니까?

삼위일체의 진리는 알고 보면 다양성(diversity)과 일체성(unity)의 관계를 말하는 문제입니다.
주목할 것은 ‘3의 요소(threeness)’가 모여 ‘일체 됨(oneness)’을 이루는 것은, 즉 다양성(diversity)이 일하여 일체성(unity)을 이루는 것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자연 속에 충만히 들어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자연 만물이 하나님의 능력(power)과 신성(divinity)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합니다(롬 1:20).
바울의 말대로 자연은 하나님의 여러 면 - 하나님의 능력, 지혜, 아름다우심 등 - 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자연이 하나님의 ‘삼위일체 되심’도 많이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연을 주시해 볼 때 자연 안에는 ‘3의 요소’가 모여 ‘일체성’을 이루는 것으로 차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환경인 ‘3차원 세계’는 물질, 시간, 공간이라는 ‘3 요소’로 되어 있습니다.
우주의 물리적 세계를 지배하는 힘은 강력, 전자기약력, 만유인력으로 되어 있습니다.

요즘 과학자들은 전자기력과 약력을 본질적으로 하나의 힘으로 봅니다.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로 되어 있으며,
공간은 가로, 세로, 높이로 구성돼 있습니다.
음악에서 장조의 으뜸화음은 도, 미, 솔 ‘세 음’의 화음입니다.
미술에서 물감의 삼원색은 빨강, 노랑, 파랑입니다.
우리의 생태계는 육지, 바다, 대기 3 요소입니다.
이렇게 자연이 ‘이상하게’ 3의 요소를 드러내며 그 ‘3의 요소’가 함께 일하여 의미 있는 ‘일체성’을 이루는 것은 단지 우연일까요?
아니면 바울의 말대로 자연이 하나님의 신성(하나님 되심)을 드러내는 면일까요?   

신학에서 자연이 드러내는 3과 1의 면들을 ‘삼위일체의 유비’라고 합니다.
자연에서 발견되는 삼위일체의 유비들은 결코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정확하게 대변하지는 않습니다.
때로 자연 안의 유비(analogy)를 잘못 사용하여 삼위일체에 대한 곡해를 낳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삼위일체를 물의 기체, 액체, 고체로 설명하거나, 달걀의 노른자, 흰자, 껍질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런 유비로 삼위일체를 설명하면 흔히 양태론적으로 빠져 혼란이 발생합니다.
이러한 유비의 위험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자연 안의 ‘3의 요소’와 그것이 이루는 ‘일체성’의 신비는 삼위일체에 대한 무시할 수 없는 ‘흔적’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다양성’이 모여 ‘일체성’을 이루는 실체를 유기체(organism)라고 합니다.
그라이더(J. Kenneth Grider) 교수께서 하나님의 삼위일체 되심을 ‘유기적 일체성(organic unity)’으로 강조합니다.
‘유기적 일체’의 특징은 한 부분이라도 없으면 ‘전체’가 마비되고 없다는 것입니다.
물질, 시간, 공간 중 하나라도 제거하면 ‘삼차원세계’ 전체가 없어져 버립니다.
육지, 바다, 대기 중 하나라도 없애면 ‘생태계’ 자체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주목할 것은, 하나님의 존재구조에서 아버지(Father), 아들(Son), 성령(Holy Spirit) 각 분은 유기적으로 다른 분들과 관계되고 연결되어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존재적으로(ontologically) 한 분이 안 계시면 다른 두 분도 계실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능적으로(functionally) 한 분의 일은 다른 두 분과의 관계 안에서만 있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세 분’이 ‘한 분’이시라고 할 때 그 ‘한 분’은 유기적 차원에서 ‘한 분’이신 것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아버지’의 일은 결코 ‘아버지 홀로’의 일이 아니며, ‘아들’의 일도 결코 ‘아들 홀로’의 일이 아닙니다.
‘한 분’의 일은 항상 ‘다른 분들’과 ‘함께’ 이루는 일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창조도 ‘세 분’의 합동적 일이며(창 1:1-28; 요 1:3), 구원의 일도 ‘세 분’이 ‘함께’ 이루신 것입니다(요 3:16).

삼위일체에서 중요한 신학적 용어가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라는 말입니다.

‘페리코레시스’는 ‘돈다(go round)’는 뜻의 희랍어로서 ‘상호투과,’ 혹은 ‘상호교통’을 의미합니다.
아버지, 아들, 성령 세 분은 존재적으로, 기능적으로 ‘상호 교통’과 ‘상호투과’의 관계에 있다는 진리입니다.

한 예로 육지, 바다, 대기는 서로 ‘상호투과’적 관계에 있습니다.
‘육지’는 대기에서 물을 내려주어 생명을 유지하며, 대기의 물은 바다가 줍니다.
바다는 또 끊임없이 육지로부터 공급을 받습니다.
남자가 여자와 합하여 ‘한 몸’을 이룬다는 진리도(창 2:24) 육체적, 정신적으로 서로 주고받으며 하나 되는 ‘상호투과’적 진리입니다.
나무의 뿌리, 줄기, 잎에서 각 부분은 다른 부분과 연결되어서만 자신의 정체성을 갖습니다.
(‘나무’의 예는 양태론적으로 이해되기 쉬워 조심해야 합니다)
삼위일체에서 아버지, 아들, 성령 ‘각 분’은 ‘따로 분리된’ 분이 아니고 항상 유기적으로 다른 ‘두 분’의 본질을 나누어 받아 자신의 정체성을 갖는 분입니다.
중세의 현명한 신학자들은 그래서 삼위일체를 나타내는 도형을 그렸습니다.

 

 Trinity - Good4Joy

위의 도형에서 외곽선은 두 분 사이의 ‘구별’의 선입니다.
즉 아버지와 아들 사이가 영어 “IS NOT"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것은 “아버지는 아들이 아니시다,” 혹은 “아들은 아버지가 아니시다”를 뜻합니다.
그러나 내부의 선은 ‘동일화’의 선입니다.
본질에서 ‘하나님’이시라는 점에서 모든 분들이 “IS," 즉 “하나님이시다”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도형은 한 편으로는 양태론을 피하며 다른 편으로는 삼신론을 피하는 좋은 도형입니다.
‘셰마(들으라)’라고 하는 신명기 6장 4절은 놀랍게도 하나님의 복수성과 단수성을 모두 천명하는 구절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이 구절에서 ‘하나님’은 ‘엘로힘’으로서 ‘하나님들’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우리 ‘하나님들(복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단수)”라는 선언입니다.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의 존재구조는 이처럼 ‘분명한 3분’께서 유기적으로, 페리코레스적으로 연결되시어 ‘분명한 한 분’을 이루고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한 분 되심’은 ‘도’라는 단순한 단수의 하나가 아니고 ‘도’와 ‘미’와 ‘솔’이라는 다양성이 만들고 있는 ‘풍요한 하나 됨’의 한 분 되심입니다.

삼위일체를 설명할 때 피아노 건반에서 도, 미, 솔 ‘세 음’을 함께 쳐 화음을 들려줍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 소리는 하나입니까, 여럿입니까?”하고 묻습니다.
눈치가 빠른 분은 “둘 다입니다”하고 대답을 하지요.
(완전한 유비는 아니지만 도움이 됩니다) 아버지, 아들, 성령 세 분이 함께 ‘풍요한 한 분’을 이루고 계신 진리는 놀랍기만 합니다. ‘아들’ 예수께서는 그래서 영원부터 영원까지의 삼위적 영광을 함축하는 기도를 아버지께 하십니다:
“아버지, 세상이 있기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누렸던 그 영광으로 지금 아버지 앞에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소서(요 17:5).”

삼위일체가 얼마나 중대한 성경의 하나님에 대한 진리인지 ‘감’을 좀 잡으셨는지요?
삼위일체의 진리는 기독교의 신관을 이슬람의 단독주체적 신관과 구별되게 하며, 모든 이단들의 잘못된 신관과 구별되게 하는 중대한 성경의 진리입니다.
이단들의 공통적 특징은 ‘모두’ 성경적 삼위일체론에 서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증인은 단독유일신을 주장하며, ‘지방교회’라는 이단은 양태론을 가르칩니다.
몰몬교는 삼신론적 신관을 갖고 있습니다. 이제 다음 글로 삼위일체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3. 요한복음 3:16, 요한일서 4:16 

교회의 삼위일체론은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요?
머리 좋은 신학자들이 원탁에 둘러앉아 짜낸 이론인가요?

신학자 몰트만(Jurgen Moltmann)은 삼위일체에 대한 결정적 계시자는 다른 분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지적했습니다.
구약에서 이미 암시적으로 계시된 하나님의 복수성과 단수성(삼위일체의 본질), 그것의 의미를 예수께서 오셔서 밝히 드러내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누구십니까?
예수는 삼위일체의 한 멤버이십니다.
삼위일체에서 ‘아들(Son)’이신 분입니다.
삼위일체는 말하자면 삼위일체의 멤버이신 분이 세상에 오시어 드러내 주신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오셔서 ‘아버지(Father)’의 존재를 분명하게 해 주셨고,                         
 예수님 자신이 ‘아들(Son)’이심을 밝히셨고,                       
 보혜사 성령(Holy Spirit)을 소개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통하여, 하나님이 삼위일체이심을 명백하게 알게 된 것입니다.
몰트만(Moltmann)은 그래서 삼위일체에 대한 바른 이해는 예수 그리스도에서 출발하여야만 옳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한 분’보다는 ‘세 분’에서 시작하는 이해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는 누구십니까?

그는 태초부터 하나님의 삼위일체 존재구조에서 ‘아들 하나님(God the Son)’으로 계신 분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예수님을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창조의 일을 누가 하셨느냐고 하면 어떤 사람은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요한은 ‘아들’이신 예수님도 창조의 일을 하셨음을 분명히 합니다(요 1:3).
성령께서도 자신의 몫을 하셨습니다(창 1:2).
창조는 아버지, 아들, 성령 삼위의 ‘합작’입니다.
인간을 죄와 죽음에서 살리는 ‘구원의 일’도 역시 삼위(三位)의 합동적 일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하나님의 구원’에 관한 구절인데 놀랍게도 삼위일체적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 보내시는 아버지(Sender)                             
 독생자를 주셨으니 ------------------- 보내심을 받은 아들(The Sent)                            
 이는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 믿도록 돕는 성령(Helper)                            
 (영생을 얻게하려 하심이라 -----> 삼위일체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축복)

기독교는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 진술의 의미를 잘 파악해야 합니다.
여기서 ‘인간이 되신 하나님’은 ‘아버지, 아들, 성령’ 세 분 전부가 아닙니다. 
여기서 ‘인간이 되신 하나님’은 ‘아들 하나님(God the Son)’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고 할 때, 그 ‘인간이 되신’ 주인공은 ‘아들 하나님’이십니다.
그 ‘아들’도 분명한 하나님이시기에(요 1:2)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진술은 참인 것입니다.
그 아들이 인간이 되신 것은 ‘아버지’가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아들이 구원의 일을 완성하실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의 도우심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일”은 역시 아버지, 아들, 성령 세 분의 합동적 일입니다. 

 

 

 

   요한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16)”고 선포합니다. 이 선포가 삼위일체와 직결된 중대한 진리임을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몰트만(Moltmann)은 하나님이 오직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이시기에 이러한 선언이 가능하다고 지적했습니다. “사랑이시라”는 말의 시제는 현재형인데 이 현재형은 영원성을 함축합니다. 즉 세상을 창조하기 전에도 하나님은 본질에서 사랑이시라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아버지, 아들, 성령 사이의 사랑입니다. 몰트만(Moltmann)은 절대유일적 신은 본질에서 사랑일 수 없음을 지적합니다. 왜냐하면 이슬람의 알라(Allah)같은 절대유일신은 창조 전에 ‘홀로’이기에 사랑할 대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한다면 자기 자신을 해야 하는데 그것은 나르시시즘(narcissism), 즉 ‘자기애’ 이상이 되지 못합니다. 성경이 증언하는 참 창조주 삼위일체 하나님은 본질에서 사랑이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절대 단독자가 아니고 삼위일체시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가 창조하신 세상을 움직이는 중요한 원칙이기도 합니다. 동물들의 본능 속에 심어져 있는 ‘사랑의 원리’는 매우 놀랍습니다. 단단한 호두껍질은 마치 ‘사랑’처럼 속 알갱이를 보호해 줍니다. 태양열은 ‘사랑’처럼 적당한 온기로 우리에게 내리쬐어 줍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인간 피조물 안에는 하나님의 마음을 닮은 ‘긍휼의 힘’이 있습니다! 

 

 

 

   알고 보면 삼위일체의 사실은 기독교의 모든 중대한 진리들의 근거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성육신(incarnation)’은 삼위일체 없이 설명이 안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대속(代贖)의 힘’을 가진 십자가라는 것도 삼위일체를 통해서만 사실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아니라면 그의 십자가도 대속(代贖)의 십자가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고찰했듯이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는 것도 삼위일체가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진리입니다. 기독교가 선포하는 복음, 그것은 오직 구원이 삼위일체의 합작이기에 있을 수 있는 ‘기쁜 소식’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신 분이 ‘하나님 자신’이시라는 사실이 드러내 주고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낮춤의 하나님’이시며, ‘희생의 하나님’이시며, ‘긍휼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삼위일체가 사실이 아니면 십자가를 중심으로 한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이해들이 가능하지 않을 것입니다.

 

 

 

   삼위일체를 가르치다 보면 받게 되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 아들, 성령 세 분이 모두 하나님의 신분을 가진 분이라면 어느 분에게 우리가 기도를 해야 하느냐는 질문입니다. 제가 언급했던 그라이더(J. K. Grider)교수께서 정확히 이 문제를 수업시간에 다루었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분의 강의와 또 제가 그 후 공부한 내용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엄밀히 아버지, 아들, 성령 모두 하나님이시기에 어떤 분에게 기도해도 신학적 오류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공중기도를 할 때는 흔히 아버지, 하나님, 주님 등의 좀 더 대표적이며 포괄적인 명칭이 적절하다고 보겠습니다. 개인적 기도에서는 이러한 명칭들 외에 ‘예수님’께 직접 기도를 하는 것도 좋습니다. 인간이 되어 오신 중보자가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기도할 때 ‘성령’을 부르며 기도하는 일은 드문데 실제로 성령님께 기도하는 것이 잘못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역할은 ‘아버지’와 ‘아들’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일이기에 성령님은 우리가 ‘아버지’와 ‘아들’을 부르는 것으로 만족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할 때는 실상 삼위일체 전체를 대상화하는 것이기에 성령님도 포함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특정한 분에게 기도하던지 간에 궁극적으로는 항상 ‘삼위(三位)’ 전체께 기도를 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아버지’를 부르며 기도할 때 우리는 이미 ‘아들’을 통하여, ‘성령’ 안에서 아버지를 부르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 기도를 할 때, 우리는 이미 ‘아들을 보내주신 아버지’에 대한 감사 안에서 그 기도를 하는 것이며, 또 성령의 도움으로 하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분을 부르며 기도할 때 다른 분들이 섭섭하실까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요. 어떤 분에게 기도를 드리던지 기독교의 기도는 항상 ‘삼위일체 하나님’ 전체께 드리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에 관한 다른 질문은 아버지, 아들, 성령 사이에 어떤 위계질서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하여 현재 복음주의의 어떤 신학자들은 삼위(三位)의 존재적 동등설을 주장합니다. 즉 아버지, 아들, 성령 사이에 지위적으로 높낮이가 전혀 없다는 관입니다. 그러나 어떤 신학자들은 ‘지위의 차이’를 주장합니다. 그들은 아버지, 아들, 성령 세 분은 ‘하나님의 신분’이라는 점에서는 동등하지만, 위계질서에서 ‘아버지’의 우선됨(the primacy of the Father)이 있다고 합니다. 즉 ‘아버지’가 삼위일체 안에서 으뜸이시며 지도자급의 존재시라는 것입니다. 저는 성경의 증거가 ‘위계질서의 실재’ 쪽으로 더 강하게 말하고 있다고 보는 신학자입니다. ‘아들’ 예수께서 항상 아버지의 지도력과 권위를 인정하신 것이 한 증거입니다. ‘아들’께서 역사 안에 오시어 분명하게 하신 것이 인간의 ‘불순종의 역사’를 깨고 ‘순종의 역사’를 시작하신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정확히 ‘불순종의 아들들’의 자리에서 떠나 ‘순종의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성경은 ‘아버지’가 ‘아들’을 보내셨다는 것을 천명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버지’의 우선성에 대한 성경의 증거라고 봅니다.

 

 

 

   삼위일체의 진리는 하나님 자신께서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나님 자신에 대한 ‘놀라운 사실’입니다. 삼위일체는 그저 이론적 유희나 즐기라고 주신 지식은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삼위일체의 진리를 알게 될 때, 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참으로 우리의 기쁨과 힘과 생명이 되도록 하나님은 이 진리를 계시해 주신 것입니다. 삼위일체의 이해를 통해 우리는 나 같은 죄인을 위해 하나님께서 참으로 인간이 되신 것을 압니다. 그 하나님께서 참으로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을 압니다. 이런 깨달음과 반응이 우리의 마음 중심에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삼위일체의 영광을 우리에게 드러내 주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다소 길게 3차례에 걸쳐 삼위일체의 진리를 설명하였습니다. 이러한 저의 ‘노력’은 삼위일체 진리의 중요성에 대한 저의 인식 때문입니다. 모쪼록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의 생각 속에 성경의 삼위일체 진리가 새로운 이해로 뿌리내리기를 바라며, 또한 그 이해와 함께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찬양과 감사가 더욱 마음속에 넘치기를 기원합니다.








목회적 시각으로 본 삼위일체론 교육                                    
  - 기독교강요 1권 13장을 중심으로-

 

0. 들어가면서

A. 고대 교부들의 삼위일체론의 용어 해석(I,13,1-6)

1.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해석

2. 삼위에 대한 해석

3. 새로운 신학적 용어들의 필요성과 한계

B. 성자와 성령의 인격과 신성

1. 성자의 인격과 신성

a. 성자의 인격

b. 성자의 신성

2. 성령의 인격과 신성

3. 삼위의 구별성과 일체성(16-20)

a. 한 분 하나님

b. 삼위이신 하나님

C. 칼빈의 삼위일체론 대적들(21-29)

1. 세르베투스

a. 세르베투스는 위격(位格)이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b. 세르베투스는 범신론적인 오류에 빠졌다

2. Valentinum Gentilem

a. 성부만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한다

b. 이들은 성자는 하나님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c. 이들은 성부와 성자의 차이점을 신성의 양으로 구별한다

d. 칼빈의 반격

D. 나가면서

 

 

 

  0. 들어가면서

 

기독교인들이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왜 중요할까? 첫째는 성경의 하나님을 바로 인식하지 못하고 믿는다는 것은 우상숭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인간은 자기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 이해에 따라 그들의 삶의 양식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을 바로 알고 믿는 일과 하나님의 백성답게 하는 일은 같이 가기 때문이다. 특별히 고도의 사고(思考)를 요구하는 삼위일체론은 그 지역 기독교인들의 삶의 양태를 결정하는 것이다.

한국교회 성도들이 거의 대부분 양태론에 빠져 있다는 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바이다. 그 원인은 교회 지도자들이 삼위일체를 설명할 때 피조물 속에서 설명근거를 가져와서 설명했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 즉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삼위일체를 설명할 때 피조물에서 예를 가져와 설명을 시도하다가 결국 양태론에 빠졌다는 말이다. 후론하겠거니와 칼빈은 이런 시도의 위험을 간파하고 자신은 그렇게 설명하지 않는다고 했다. 말하자면 한국 기독교인들은 상당한 부분 삼위일체 하나님을 왜곡되게 이해하고 있거나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데서는 기독교인으로서 바른 정체성을 기대하기가 힘들다. 인간 이성으로 하나님을 정확하게 이해한다는 말은 이치에 맞지 않다. 작은 인간 이성으로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크신 하나님을 모두 파악한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다. 이런 무리한 시도는 결국 인간이 하나님을 정의하고 심판하는 오류에 빠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 최소한 성경이 계시하는 내용을 바로 이해해 보려는 자세는 요구되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마술신앙에 빠진 한국교인들은 이런 일에 태만히 한 것이다.

칼빈이 삼위일체를 설명한 내용으로 보면 그가 성도들에게 삼위일체 하나님을 이해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한 것을 볼 수 있다. 크게는 칼빈의 기독교강요 자체는 삼위일체를 가르치는 교과서로 볼 수 있다. 그는 사도신경의 구조를 본받아 기독교강요를 삼위일체론적으로 형성했다. 제 1권은 창조주 하나님을, 제 2권은 구속주(救贖主) 하나님을, 제 3장은 구속을 우리에게 적용시키는 성령 하나님을 다룬다.

우리의 관심은 칼빈이 좁은 의미에서 삼위일체론을 어떻게 이해했고 또 어떻게 설명했는가 하는 것이다. 칼빈의 신관은 기독교강요 제 1권 10장에서 13장까지 인데, 10-12장까지의 내용은 13장에 나오는 삼위일체론의 양의 절반을 조금 넘는다.이것은 칼빈이 신론을 설명하면서 삼위일체론에 관심을 집중시켰음을 의미한다. 그는 여기서 먼저 고대 교부들의 삼위일체론을 정리하면서 자기 나름대로 삼위일체론을 설명하고(I,13,1-6) 그 다음 그는 성경의 증거에 근거하여 성자와 성령의 신격과 신성을 설명한다(I,13,7-13).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는 삼위일체론의 대적들을 비판하면서 다시 바른 삼위일체론을 설명한다(I,13,14-29). 그가 이 교리를 설명하는 내용을 보면 성도들이 이해하기에 쉽도록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그는 목회적인 시각으로 삼위일체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또

칼빈이 기독교강요에서 삼위일체론을 열거한 과정은 그의 교육방법을 암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A. 고대 교부들의 삼위일체론의 용어 해석(I,13,1-6)

 

칼빈은 먼저 고대 교부들의 삼위체론을 간단히 점검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고대교부들이 삼위일체론을 설명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언급한 용어는 ‘하나님의 본질’, ‘삼위’, ‘위격’ 등이다. 칼빈은 이런 용어들을 차례로 설명하면서 한편으로는 고대 교부들의 삼위일체론을 점거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성경 구절에 근거하여 그 내용을 상세하게 설명한다.

 

1.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해석

 

그러면 칼빈은 ‘하나님의 본질’(essentia Dei)을 어떻게 설명할까? 우리는 그가 두 가지로 설명함을 볼 수 있다. 그 중에 하나는 이 하나님은 인격(人格)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건전한 상태로 지키시기 위하여 그의 본질에 대해서는 별로 말씀하시지 않으시지만, 앞에서 언급한 두 가지 속성들로써 인간의 어리석은 상상을 모두 제거하시고 또한 인간의 마음의 대담무쌍함을 억제하시는 것이다”(I,13,1). 물론 칼빈은 여기서 ‘하나님이 인격이시다’라는 말을 직접 표현하지는 않는다. 칼빈이 여기서 하나님의 동작과 행위를 표현한 것을 보면 그가 인격임이 드러나는 것이다. 즉 칼빈은 하나님이 인격이심을 전제하고 하나님의 본질을 설명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런 인격성은 ‘하나님의 적응성’을 설명하면서도 드러난다. “유모가 어린 아기들을 대할 때에 흔히 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렇게 우리에게 맞추어서 말씀하신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만큼 그렇게 지능이 모자라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주목할 만한 것은 칼빈이 여기서 세속 철학의 비인격적인 범신론을 비판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옛날 어떤 사람은 ‘우리가 보든 것이든, 보지 못하는 것이든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이다’라고 매우 그럴듯해 보이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그는 신성이 세계의 모든 개체에 주입되어 있다는 식으로 상상했다”

그 다음 칼빈은 하나님의 본질을 설명하기 위해 하나님의 속성을 두 가지 언급한다. 그것은 ‘무한하심’(immesitas)과 ‘영적임’(spiritualis natura)이다. “하나님의 무한하심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잣대로 그를 재지 못하도록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며, 또한 그가 영이시라는 사실은 그에 관한 어떤 세속적이며 육신적인 상상에 빠지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칼빈은 이런 하나님은 인간이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분이심을 말하는 동시에 그의 편재성을 말하여 인간 이성의 한계를 벗어난 분임을 지적한다. 이 설명 속에서도 하나님은 인격이심을 암시한다.

요컨대 칼빈은 하나님의 본질을 설명하면서 그가 인격이라는 것과 그는 인간의 이성의 능력을 벗어난 무한하신 분임을 지적한 것이다. 즉 그는 하나님이 인간 이성을 초월하는 크신 분임을 독자들에게 인식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마술신앙에 빠져 하나님을 자기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이용하는 미성숙한 교인들에게 일침을 가하는 것이다.

 

2. 삼위에 대한 해석

 

칼빈은 ‘하나님의 본질’에 대해 설명한 다음 하나님은 한 분이지만 이 하나님은 구별된 삼위로 존재하심을 설명한다. “그는 자신을 유일하신 한 분으로 선언하시는 한편, 동시에 세 분의 위격으로(삼위로) 구별되게 바라보도록 그렇게 자신을 계시하신다” 칼빈은 이 같은 사실을 ‘하나님 안에 세 본체가 계신다’라고도 표현한다.

 

 

 

 

 

 

 

그 다음 칼빈은 세 분이 구별된 분임을 설명한다. 우선 그는 성부와 성자는 구별됨을 설명한다. 그는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은 “그 본체의 형상”이라고 말씀하는 히브리서 1:3을 인용한다. 그는 이런 표현 속에는 성자와는 다른 어떤 특질이 성부에게 있음을 의미한다고 말하여 이 두 분은 구별됨을 지적한다. 그러면 성부와 성자는 어떤 관계에 놓여 있을까? 칼빈은 성자 안에서 성부가 자신을 온전히 표현한다는 사실을 지적함으로써 이 두 사이의 관계를 설명한다. “그러나 성부께서는 비록 그가 그의 고유한 특성을 통해 아들과 구별되지만 성자 안에서 전적으로 자신을 나타내셨기 때문에, 그가 성자 안에서 자신의 본체를 나타내셨다고 주장하는 것은 충분한 이유가 된다.” 위의 내용을 도식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칼빈은 성령 역시 성부와 구별되는 분임을 지적한다. “그가 성부와 다른 분이신 것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는 여기서 성령과 성부의 구별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성령은 하나님인 동시에 이 하나님 안에 있는 세 본체 가운데 하나임을 말한다.

이와 연관하여 칼빈은 고대 교부들의 ‘위격’ 내지 ‘본체’ 이해를 설명하면서 동방 교부들과 서방 교부들은 이 점에서 일치함을 지적한다. 칼빈에 의하면 라틴 교부들은 ‘위격’이라는 말에 persona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그것을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subsistentia(실재)이고 희랍 교부들은 ‘하나님 안에 세 얼굴이 계시다’(προσωπα in Deo esse)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그 의미는 동일하다고 한다(I,13,2).

지금까지 내용을 도식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신약성경이 증거하는 대로 성령이 성자를 드러낸다면, 결국 성자 뿐 아니라 성자가 반영하는 성부의 본체도 성령 안에서 반영된다고 볼 수 있다. 칼빈은 여기서는 이 문제를 언급하지는 않았다.

 

3. 새로운 신학적 용어들의 필요성과 한계

 

칼빈은 ‘삼위일체’, ‘위격’과 같은 용어들을 만들어 성경의 진리를 설명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본다. 특히 대적들에게 대답하려고 할 때 이런 용어들이 매우 유용함을 지적한다. “즉 생각하는 것과 말하는 것의 확실한 규범을 성경에서 찾고, 마음의 생각과 입으로부터 나오는 일체의 말을 여기에 순응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해하기 어렵고 난해한 성경의 내용들을 보다 명백한 말로 설명하는 것을 누가 못하게 하는가?”(I,13,4). 즉 칼빈은 거짓 교사들을 폭로하기 위해 ‘삼위일체’, ‘위격’과 같은 표현들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겼다. 이를테면, 칼빈은 아리우스에 대항하여 ‘호모우시오스’(동일본질)라는 용어가 효과적으로 작용했고 사벨리우스에 대항하여 ‘위격’ 곧 ‘한 분 하나님 안에 삼위가 일체로 계심’이라는 용어가 효과적이었음을 지적한다.

그럼에도 칼빈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정확하게 이해한다면 ‘삼위일체’ 또는 ‘위격’이라는 용어는 잊혀져도 좋다고 생각한다(I,13,5). 말하자면 이런 용어들은 진리를 인식하는데 도구 역할을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용어 문제를 두고 고대의 수많은 교부들은 일치하지 않았음과 이들이 새로운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매우 주저하며 신중했음을 지적한다.(Inst I,13,5). 칼빈은 어거스틴도 새로운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주저했음을 지적한다. “즉 그는 이와 같은 중대한 문제를 논하기에는 인간의 말이 빈곤하기 때문에 ‘휘포스타시스’라는 용어를 부득불 사용하게 되었으나 이러한 용어로는 하나님께서 어떠한 분이시라는 것을 설명할 수 없고, 다만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실재가 존재한다는 것을 묵과하지 않기 위해 사용한 것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칼빈은 이들이 새로운 용어들을 사용하는 것이 필요함을 인식하도록 설득해야 된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고대 교부들이 당시에 등장한 여러 대적자들과 싸울 때 이런 용어들이 있었더라면 더욱 효과적으로 물리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이를테면 아리우스에 대항하여 성부와 성자의 본질이 같음을 말하면 아리우스의 정체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성부와 그 본질이 동일하시다고 주장해 보라. 그러면 이 변절자의 가면을 벗길 수 있을 것이다” 또 사벨리우스 곧 성부와 성자, 성령의 명칭은 신격의 구별을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벨리우스에게 ‘하나님의 본질 안에 삼위가 있다’라고 주장하면 그의 공허한 다변을 억제케 함을 지적했다.

그 다음 그는 삼위일체론을 정리한다. “본체들의 하나됨” 그리고 “한 본질 안의 셋이 있다는 것은 삼위일체의 세 위격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가 위에서 언급한 자기의 삼위일체론에 기초하여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성부, 성자, 성령이 한 분 하나님이시나 성자는 성부가 아니며 성령 또한 성자가 아니며 그들 각자는 서로가 어떤 특성에 의하여 구별된다”

칼빈은 지금까지의 내용을 마지막 절에서 자기의 삼위일체론을 요약 정리한다.

1) “위격”은 하나님의 본질에 속하며 세 “위격”들은 상호 관계하며 각기 비공유적 특성으로 서로 구별된다.

2) 실재인 “위격”은 본질과 분리될 수 없으며 특별한 표지가 있어서 본질과 구별된다. 칼빈은 이 말을 다시 설명한다. “그래서 나는 세 실재는 상호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도 각자의 특성에 의하여 서로 구별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3) 각 위에게 고유한 것은 어떤 것이라도 전달될 수 없다.

b. 성자의 신성 

칼빈은 요한복음 1장 첫 부분에 기록된 내용이 성자가 하나님이심을 매우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성자의 신성을 강조한다. “요한은 이 말씀에 견고하고 영원하신 본질을 부여하고 그에게 고유한 것이 있음을 인정하며, 또한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심으로 우주의 창조자가 되셨는가를 명백히 보여주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모든 계시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로 불리는 것이 마땅하듯이, 이 하나님의 실체를 지니신 이 말씀은 최고의 자리 곧 모든 예언의 원천의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 그 이유는 이 말씀이 불변하시며 하나님과 영원히 동일하시고 바로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성자의 신성과 위격을 동시에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리고 칼빈은 ‘성자의 신성’을 논하면서(I,13,7) 성자가 성부에게서 나왔음을 두 번이나 강조하며 그의 신성과 동시에 위격성을 보여준다.

칼빈은 또 “말씀의 영원성”(I,13,8)을 논하면서 성자가 시간을 초월해서 영원 속에 계신 분임을 말함으로써 그의 신성을 증거한다. 그는 창조 기사를 설명하면서(창 1:3)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기 이전에 이미 그 말씀이 존재하고 계셨음을 지적한다. 칼빈은 성자에게는 시작이 없다는 것을 요한복음 17장을 인용하여 증거하고 요한복음 1장 1-3절을 언급하면서 그의 영원성을 증거하여 그의 신성을 말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부와 성자 사이의 관계와 그의 신성에 대해 요약 정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한 번 굳건히 정리할 수 있다: 시간의 처음 이전에 하나님에 의해 나셨고, 영원히 그와 함께 거하셨다. 이로써 이 말씀의 영원성, 그의 참된 본질 그리고 그의 신성이 증명되는 것이다.”

그 다음 칼빈은 구약성경이 성자가 하나님임을 증거하는 구절로 고개를 돌린다. 칼빈은 예수 그리스도가 성육신 하신 말씀이라는 구절이 그의 신성을 입증한다는 사실을 언급한 다음이사야 선지자의 말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심과 하나님의 고유한 속성 가운데 하나인 최고의 권능을 지니신 분으로 제시한다.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신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칼빈은 또 예레미야의 발언 곧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렘 23:5-6)는 구절과 “그 날에 유다가 구원을 받겠고 예루살렘이 안전히 살 것이며 이 성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는 이름을 얻으리라”(렘 33:16)는 구절이 성자께서 영원한 하나님이라는 것을 제시한다고 말한다.(I,13,9). 칼빈은 또 에스겔이 말하는 ‘여호와 삼마’(겔 48:35)라는 표현과 모세가 말하는 ‘여호와 닛시’라는 표현 등은 여호와가 그리스도임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I,13,9.).

흥미로운 것은 칼빈이 구약에 나타난 ‘여호와의 사자(천사)’를 그리스도와 연결시킨다는 것이다(I,13,10). 그는 기드온에게 나타난 ‘여호와의 사자’가 그로부터 희생제물을 받는다는 사실에서(삿 6:11,12,20,21,22; 7:5,9), 그리고 삼손의 부모에게 나타난 ‘여호와의 천사’가 하나님이라는 사실 속에서(삿 13:16,18,20,22,23), 호세아서를 인용하여 야곱이 씨름한 그 천사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호 12:5)이라는 사실 속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창조함을 받은 천사가 아니라, 충만한 신성을 지니신 하나님이심을 말한다(I,13,10). 칼빈은 또 스가랴서 2장에 나오는 ‘다른 천사를 보내시는 천사’(슥 2:3)가 만군의 여호와임을 말하며 이사야의 발언 곧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 이는 여호와시라”(사 25:9)고 했는데 이 여호와의 천사가 바로 그리스도임을 말한다.

그 다음 칼빈은 신약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문제로 눈을 돌린다(I,13,11). 그는 사도들이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내용 곧 성육신 사건을 증거하는 모든 구절들이 그의 영원한 신성을 증거함을 말한다(I,13,11). 이를테면, 바울이 로마서 9:32-33에서 이사야서 8:14를 인용하며 예언이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다고 말함을 주목하고 그리스도가 만군의 여호와임을 천명한다. 칼빈은 이사야서 45:23을 인용하는 로마서 14:10-11 내용 속에서도 그런 내용을 본다. 또 시편 68:18을 인용하는 에베소서 4:8에서, 이사야 6:1을 인용하는 요한복음 12:41에서, 시편 102:25을 인용한 히브리서 1:10에서, 시편 97:7을 인용하는 히브리서 1:6에서 그런 내용을 본다. 칼빈은 사도들이 구약의 이런 내용들을 그리스도에게 적용하는 것은 성경을 왜곡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칼빈은 ‘일어나사 시온을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시오(시 102:13), ‘온 땅과 모든 섬들을 다스리시는 것으로 말씀하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로 본다(시 97:1).

그 외에 칼빈은 요한이 말씀을 하나님이라고 선포한 내용(요 1:1,14), 바울이 그리스도를 가리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롬 9:5)이라고 말한 내용,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심판대에 앉는다는 내용(고후 5:10), 또 하나님이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었다(딤전 3:16)는 내용, 그만이 모든 영광과 존귀를 받으시기에 합당하다(딤전 1:17)는 내용,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빌 2:6-7)라는 내용, 요한이 예수를 가리켜 “참 하나님이시오 영생이라”(요일 5:20)는 내용,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행 20:28라는 내용, 도마의 고백(요 20:28) 내용 속에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본다.(I,13,11).

그뿐 아니다. 칼빈은 그리스도의 사역 속에서 그의 신성을 본다(I,13,12). 그는 그리스도의 창조와 섭리 사역은 그의 신성을 보여준다고 한다. “섭리와 권능으로 온 우주를 다스리시며 그의 능력의 명령으로 만물을 붙드신다는 것은 - 이는 사도가 그리스도의 사역을 말씀하는 것인데(히 1:3)- 오직 창조주만이 행하는 일인 것이다”나아가 칼빈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죄하심 속에서(사 43:25; 마 9:6), 사람의 마음의 은밀한 생각을 꿰뚫어 보는 일 속에서(마 9:4; 요 2:25) 그의 신성을 본다. 또 칼빈은 예수께서 스스로 베푸신 이적 속에서 그의 신성이 드러나지만, 그가 제자들에게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병자를 낫게하며, 귀신을 내어 쫓는 권능을 주셨다는 사실 속에서(마 10:8; 막 3:15; 6:7) 그의 신성이 드러난다고 말한다(I,13,13). 칼빈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이 교회의 서고 무너짐인 것처럼 그것을 규명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사실 그리스도의 신성과 삼위의 신성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다음과 같은 벤델의 말은 주목할 만하다. “누구든지 삼위의 신성을 부인하면 그리스도의 신성을 마멸시키며 이와 더불어 기독교 신학의 모퉁이 돌을 내칠 뿐 아니라 복된 믿음을 저버리게 된다”

우리는 칼빈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증거하는 내용이 동시에 그의 인격을 보여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삼위일체를 설명할 때 성자의 신성과 그의 인격은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위의 내용을 요약하면 칼빈은 성자가 성부에게서 나오셨다는 것과, 성자가 인격인 동시에 하나님임을 성경 구절을 통해 쉽게 설명했다는 것이다. 즉 칼빈은 이성에 의해 철학적인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신성을 설명하지 않고 성경 계시 중심으로 설명을 시도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는 ‘오직 성경’이라는 종교개혁 원리에 충실했다고 본다.

 

2. 성령의 인격과 신성 

칼빈은 성자에 대한 내용에 비해 성령의 신성에 대해서는 그렇게 많이 논하지 않는다(I,13,14-15). 그런데 그는 성령의 인격성과 신성을 정확하게 가르친다. 칼빈은 성령의 인격성과 신성을 동시에 설명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이 두 가지를 한꺼번에 논하기로 한다.

칼빈은 성령이 창조 사역에 관여하셨음 속에서 그의 신성이 드러난다고 하는 동시에 문장 표현을 통해 그의 인격성을 암시한다. “그는(모세)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혹은 형체가 없는 물질 위에) 운행하시니라’(창 1:2)고 보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보도는 우리가 지금 지각하고 있는 우주의 아름다움이 성령의 능력 덕분에 힘있게 보존되고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우주가 그런 아름다움으로 장식되기 전부터 성령께서 그 혼돈 덩어리에 관여하셨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칼빈의 발언도 성령의 인격성과 신성을 잘 반영한다. “성경이 성령께 속한 임무로 가르치고 또 경건한 자들이 실제로 성령께서 행하시는 것으로 느끼는 일들 - 세상에 가득하여 만물을 지탱시키고, 자라게 하고, 하늘과 땅에서 만물을 살리는 등의 일들 - 은 피조물이 행하는 일과는 전혀 거리가 먼 것이다. 또한 성령께는 한계로 정해진 것이 없기 때문에 그는 피조물들의 범주에 속하지 않으시며, 만물에게 생기를 주입시키시고 본질과 생명과 움직임을 불어넣어 주시는 데에서 그의 신적인 위엄이 드러나는 것이다”

칼빈은 성령의 중생시키시는 사역 속에서도 그의 신성과 인격성을 보여준다. 그는 성령의 중생시키는 사역을 설명하면서 성령의 독자성을 지적할 뿐 아니라 이 사역이 하나님께만 속한 기능임을 지적한다. “그런데 성경은 곳곳에서 성령께서 중생을 일으키시는 분으로, 그것도 빌려온 능력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능력으로 중생을 이루시는 분으로 말하고 있고, 또한 중생뿐만 아니라 미래의 영생을 베푸시는 주체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다음 칼빈은 성도들이 하나님과 교통하는 일, 칭의와 성화 그리고 은사를 분배하는 성령의 사역을 설명하면서 성령의 독자적인 위치와 그의 신성을 설명한다. 끝으로 칼빈은 성령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분으로서 그 분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만일 성령께서 하나님 안에 계신 실체가 아니시라면, 선택과 의지가 그에게 있다는 식으로는 결코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성령께 신적 권능이 있음을 매우 분명하게 가르치며, 또한 그가 본체로 하나님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칼빈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고 성령이 하나님이심을 증거하는 성경 구절을 언급함으로써 그의 신성을 증명한다(I,13,15). 먼저 칼빈은 ‘하나님의 성전’을 ‘성령의 전’과 동일시 한다는 데서(고전 3:16-17; 6:19; 고후 6:16) 그의 신성을 본다. 동시에 칼빈은 베드로가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책망할 때 사용한 성령의 명칭에서도(행 5:3-4) 그와 같은 것을 본다. 또 칼빈은 사도들이 하나님을 지칭하는 구약성경 구절을 신약에서 인용할 때 그 분을 성령으로 표현하는 것 속에서도 그의 신성을 본다(사 6:9; 행 29:25-26; 벧후 1:21; 사 63:10). 그 외에 칼빈은 성령에 대한 범죄를 설명하면서 그 분이 하나님임을 증거한다(I,13,15).

위의 내용은 칼빈이 성령을 증거할 때 사변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오직 성경을 주목하여 그의 신성을 증명해 낸다. 여기서도 그는 ‘오직 성경’이라는 종교개혁의 원리에 충실함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런데 칼빈은 여기서는 성자를 설명할 때와는 달리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온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그의 관심은 오직 성령의 신성에 집중한다.

 

3. 삼위의 구별성과 일체성(16-20) 

칼빈은 삼위일체에서 성자와 성령이 어떤 분인지를 각각 성경의 증거로서 규명한 다음 세 분 사이의 관계를 설명한다.

 

a. 한 분 하나님 

칼빈은 하나님이 한 분임을 증명하기 위해 세례와 믿음을 설명한다. 세례는 한 분 하나님 이름으로 베풀어진다는 것이다. “세례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 안에서 자기 자신을 완전히 명확하게 보여주신 한 분 하나님의 이름으로 베풀어질 것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본질 안에 삼위 - 한 분 하나님이 오직 이 분들 안에서 알려지신다 - 가 거하신다는 것이 너무나 분명하게 인식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칼빈은 믿음이 오직 한분 하나님과 관계함을 지적하는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성부와 성자 그리고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는 명령은 우리가 한 믿음으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믿는 것과 연결되어 성자와 성령이 하나님의 본질임을 추론해 낸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오직 한 분이시라는 것이 이미 확실하게 세워진 원리이므로, 우리는 말씀과 성령이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이시라고 결론짓게 되는 것이다”

 

b. 삼위이신 하나님 

한 마디로 칼빈은 여기서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은 구별되는 분들임을 설명한다. 칼빈은 이 구별을 설명하기 위해 먼저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의 말을 인용한다. “한 분 하나님을 생각하자마자 즉시 삼위의 광채에 싸이게 되고, 삼위를 구별하여 보자마자 곧바로 다시 한 분 하나님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칼빈은 다음과 같이 이 구별을 설명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는 단어들 자체가 진정한 구별을 시사하여,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의 사역들에 따라서 이 이름들로 다양하게 불리는 그 명칭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우리는 여기서 칼빈이 양태론과 삼신론을 동시에 경계함을 볼 수 있다.

성경에는 한 꺼 번에 세 분 곧 성부, 성자, 성령이 구별된다고 말하는 구절이 없기 때문에, 칼빈은 우선 성경에서 성부와 성자가 구별되는 것을 말하는 내용을 언급하여 그 구별을 규명해 낸다(슥 13:7; 요 5:32; 8:16; 1:3; 히 11:3). 특별히 성부가 성자를 이 세상에 보내신 사실을 언급하여 이 두 분이 구별됨을 규명한다(요 1:18; 17:5). 그 다음 칼빈은 성령이 아버지에게서 나온다는 사실과(요 15:26; 14:26) 예수께서 다른 보혜사(요 14:16)를 보내신다는 구절을 언급하며 세 분이 구별됨을 보여준다.

칼빈은 다시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 세 분의 순서를 중심으로 세 분이 각기 다른 위격임을 보여주려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주제를 논하면서 삼위일체를 설명할 때 사람들의 일에서 나온 비유를 사용하는 것이 위험함을 지적한다는 사실이다. 먼저 칼빈은 하나님의 사역을 중심으로 그 순서에 대해 말한다. “모든 활동의 시작과 모든 일의 근원과 원천은 성부께 있고, 또한 지혜와 경륜과 모든 일의 질서 있는 시행은 성자께 있으며, 또한 그 활동의 능력과 효력은 성령께 있다는 사실이다”칼빈은 사람들이 먼저 성부를, 그 다음은 그에게서 나온 지혜인 성자를, 마지막으로 두 분에게서 나온 성령 곧 하나님의 계획과 작정들을 시행하는 능력을 생각한다고 말함과 동시에 고대 교회가 가르친 삼위 간의 관계를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자께서는 오직 성부께로부터 오시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께로부터 동시에 나오신다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칼빈의 목회적인 교육 자세를 볼 수 있다. 그는 성도들이 이것을 잘 이해하기 위해 연거푸 비슷한 내용으로 설명하고 있다.

칼빈은 성부, 성자, 성령이 구별될 뿐만 아니라 이 셋은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설명한다. “성자는 성부와 함께 한 하나님이시다. 그 이유는 그는 동시에 성부와 한 성령을 가지기 때문이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영이므로 성부나 성자와 전혀 상관 없는 다른 존재가 아니다”라고 한다. 칼빈은 삼위일체 세 분의 관계와 각각의 고유성에 대한 내용을 명확하게 가르치기 위해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각기 세 분에게는 고유한 특성이 있다는 것과 더불어 각 본체(위격) 안에 온전한 신적 본성이 거하시는 것이다”

칼빈은 마지막에서(I,13,20) 지금까지 삼위일체 교육 내용을 요약 정리한다. 먼저 알아야 될 것은 하나님이라는 단일하고 유일하신 본질이며 그 다음 그 안에 삼위 혹은 세 본체가 계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 분 사이의 관계를 설명한다. 이 말은 칼빈은 각 부속품의 특성을 잘 설명한 뒤에 그 부속들이 저절로 서로 맞추어져 몸통 전체를 이루게 하듯이 성도들이 하나님의 본질, 세분의 위격의 특성 그리고 그 각각의 관계를 잘 설명하여 성도들의 머리속에서 저절로 삼위일체가 종합될 수 있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아래 도식과 같은 그림이 그려지도록 만든다는 말이다. 그리고 칼빈은 여기서 매우 목회적인 발언을 한다. “그러므로 알아서 유익이 되는 내용을 간단히 제시할 것이니, 진지함을 정말로 사랑하며 또한 주어진 믿음의 분량대로 만족하는 이들은 이를 받아들이기를 바란다”.

칼빈은 지금까지 내용을 도식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C. 칼빈의 삼위일체론 대적들(21-29) 

매우 흥미로운 사실은 칼빈이 자신의 삼위일체론을 열거한 다음, 항목을 정해 놓고 대적들을 비판한다는 점이다. 아마 그 당시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세력들이 교인들을 미혹했기 때문에 목회적인 차원에서 교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그렇게 한 것 같다. 칼빈은 이 부분에서 앞에서 언급한 자기의 삼위일체론을 매개로 하여 이단들을 비판하면서 교인들에게 삼위일체론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칼빈은 모든 이단의 근원이 사탄임과 이단들의 핵심 공격 내용이 성자와 성령의 신성을 부인하는 동시에 각 위격의 구별을 부정하는데 있음을 먼저 집고 넘어간다.그리고 칼빈은 처음부터 삼위일체론의 대적을 간헐적으로 언급한다. 이를테면 그는 범신론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지만 그런 사상을 비판한다. “고대의 어떤이는 ‘우리가 보는 것과 또 보지 못하는 것 모두가 하나님이시다’라고 그럴 듯한 말을 했다. 이 말에 의하면 그는 세계의 모든 부분에 신성이 침투해 있다고 상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칼빈은 마니교의 이원론적 오류를 지적하고 지나간다. “저들은 두 원리를 가정함으로써 악마를 하나님과 거의 동등한 지위에 놀려놓았던 것이다” 그리고 칼빈은 양태론을 비판한다. 또 그는 성자의 신성과 관계해서는 그것을 부인하는 유대주의를 대적으로 삼고 그들의 문제점을 논한다. 우리는 여기서 칼빈이 정식으로 비판한 그의 대적들만 분석하고 평가하려고 한다.

 

1. 세르베투스 

칼빈은 세베르투스의 반(反)삼위일체론을 비판하면서 먼저 자신의 삼위일체론을 일목요연하게 열거하고 하고 넘어간다. 마치 칼빈은 비판의 표준을 제시라도 하는 듯이 그렇게 한다. “한 분 하나님의 본질은 단일하며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 그 본질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연장된다는 것, 그러나 반면에 성부의 고유한 속성이 성자와 다르며, 성자의 고유한 속성이 성령과 다르다는 것을” 칼빈에 의하면 이런 삼위일체론만 구비되면 아리우스와 사벨리우스는 물론 고대의 잘못된 이단들의 입을 막을 수 있다고 한다.(I,13,22).

 

a. 세르베투스는 위격(位格)이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면 칼빈은 세르베투스의 문제점은 어디에 있다고 보는가? 칼빈은 세르베투스가 위(位)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 연고로 반삼위일체자가 된 것으로 판단한다. 칼빈은 지적하기를 세르베투스는 “하나님의 본질 안에 삼위가 존재하신다고 이야기하면 결국 하나님이 셋으로 분리되신다는 것이 되는데, 이 세 가지 연합은 하나의 상상인데 이는 하나님의 단일성과 모순되기 때문이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칼빈은 세르베투스가 삼위일체를 믿는 자들을 “Trinitarios”라고 부르며 이들이 무신론자들이라고 비난한 것을 주목한다.이것은 세르베투스가 고대 교부들이 창안한 위격(位格)이라는 이 단어를 바로 이해하지 못한 것을 의미한다.

칼빈은 또 세베르투스의 주장을 묘사하되 “그는 위(位)들은 하나님의 본질 속에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요 우리에게 이런저런 형식으로 하나님을 나타내 주는 특정한 외형적인 관념들이라고 주장하였다. 태초에는 말씀과 성령이 본래 동일했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 구별이 없었는데,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으로서 나오시고 성령이 하나님으로부터 또 다른 하나님으로 나오신 후부터 구별이 생겨났다는 것이다”라고 했는가 하면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었고, 그의 관념의 반영이었으며, 또한 성령은 그의 신성의 그림자였다는 식으로 설명하기도 했으나”라고 열거했는데, 이것은 양태론과 같은 것이다.

 

b. 세르베투스는 범신론적인 오류에 빠졌다 

칼빈은 세르베투스가 위격을 무시한 것은 결국 범신론에 빠진 연고로 그렇게 되었음을 주목한다. 즉 세베르투스가 범신론적인 오류에 빠진 나머지 성자와 성령의 신성을 부인하는 것으로 비판한다. “결국 그는 마치 우리 속에도 실체로 있고, 또한 나무와 돌 속에도 있는 그 동일한 영이 하나님의 일부분인 것처럼, 분배의 양식에 따라서 보면, 하나님의 일부분이 성자에게나 성령에게 있는 것이라고 선언하여, 그리스도와 성령의 신성을 무(無)로 돌려버리는 것이다”(Inst I,13,22).

칼빈은 세르베투스가 위(位)란 단순히 “하나님의 영광의 가시적인 현현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을 주목하고 요한복음 1:1과 요한복음 17:5에 근거하여 성부와 성자 위격이 실재함을 규명해 낸다. 그리고 칼빈은 성령의 위격을 부인하는 세르베투스의 발언에 대항하여 그가 범신론적 오류에 빠진 결과 그렇게 주장함을 주목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저주스러운 것은 성자와 성령을 다른 피조물들과 구별하지 않고 완전히 뒤섞어 놓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본질 속에는 여러 부분들의 구분이 있는데, 그 각 부분이 하나님이시라고 공공연히 선언하고 있다. 그리고 특히 신자들의 영들이 하나님과 똑같이 영원하며 본질이 동일하다고 진술하며, 다른 곳에서는 사람의 영혼뿐만 아니라 다른 피조물들에게까지도 본질적인 신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칼빈이 본 세르베투스의 문제점이 그가 성자와 성령을 피조물과 혼합시켰다고 지적한 니이젤의 말은 매우 적절한 것이다.

한 마디로 칼빈에 의하면, 세르베투스가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이유는 그가 위격의 의미를 몰랐고 동시에 범신론적인 오류에 빠져 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2. Valentinum Gentilem 

a. 성부만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한다 

칼빈은 여기서 괴물이라고 표현한 이 인물의 이름을 거론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칼빈 선집(OS)의 편집자를 통해 그의 이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이 반(反) 삼위일체론자인 발렌티눔은 무엇을 주장했을까? 칼빈이 묘사한 내용을 언뜻 보아도 이 괴물은 종속론자가 아니면 아리우스의 추종자임을 알 수 있다. 칼빈이 묘사한 그의 정체는 다음과 같다. “어떤 악당들이 세르베투스의 불경스러움의 혐오와 수치를 피하기 위하여 삼위가 계시다는 것을 고백하지만, 거기에 단서를 붙이기를, 홀로 참되고 정당한 하나님이신 성부께서 성자와 성령을 만드시고 그들에게 자기 자신의 신성을 전입시켰다” 칼빈은 이 괴물의 종속론적인 발언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성부가 유일하게 본질 수여자(essentiator)라는 점에서 성자 및 성령과는 구별된다” 다음과 같은 발언도 여기에 속한다. “우선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흔히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신다는 사실을 논지로 삼고, 이를 근거로 하여 오직 성부만이 정당한 의미에서 하나님이시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칼빈은 여기서 이들을 비판하면서 성부와 성자가 동등한 하나님이심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이다.

 

b. 이들은 성자는 하나님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위에서 본 대로, 칼빈에 의하면, 이들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아니고 단지 성부의 신성을 전입(轉入) 받은 존재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칼빈은 이들이 어리석게도 그리스도가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를 한 위격(位格)의 아들로 생각한다고 오해함을 비판한다. 그리고 이들은 위격(位格, persona)의 의미를 모름을 통해 이런 오류에 빠짐을 간접적으로 지적한다. 이에 대해 칼빈은 이들이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는 하나 성부만이 참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나누어지지 않는 본질의 단일성’(simplex essentiae unitas)을 보지 못한 연고라고 비판한다. 그리고 칼빈은 성부만이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결국 성자는 하나님의 지위에서 내던져지고 만다고 본다.

칼빈은 이들에게 대항하여 성경의 증거를 통해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심을 명확하게 설명한다. 칼빈은 구약을 인용하는 신약의 기자들이 이해한 내용을 매개로 하여 구약의 하나님이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임을 증거함을 지적한다. 이를테면 요한이 이사야서 6:1에 나오는 하나님이 그리스도로 단정하는 것이라든가(요 12:41),바울이 이사야가 말씀하신 하나님이 바로 그리스도라고 증거한 내용(롬 9:33), 그리고 바울이 이사야서 49:18과 45:23에 나오는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해석한 것을 주목하며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심을 규명한다. 그리고 칼빈은 히브리서가 시편을 인용하여 그가 창조자이심(히 1:10; 시 102:25-26)과 천사의 경배를 받으실 분()히 1:6; 시 97:7)임을 지적함을 통해 그가 하나님임을 보여준다.

또 칼빈은 구약 성경의 ‘여호와’라는 이름이 그리스도에게 적용될 수 있으며 성부로부터 신성이 전이(轉移)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존하신 분이며 이사야가 말하는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사 44:6)는 구절은 그 하나님이 바로 그리스도임을 지적한다. 칼빈이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창조자이신 성자는 자존하시며 성부로부터 신성의 본질을 전입 받은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이런 설명은 성경의 통일성과 사도들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을 전제한다. 우리는 칼빈의 설명에서 사변적인 논리 장난이 전혀 보이지 않고 오직 성경에 근거하여 자기가 주장하는 펼치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이들이 그런 잘못된 주장을 하는 것은 그들의 사고방식이 범신론적인 데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c. 이들은 성부와 성자의 차이점을 신성의 양으로 구별한다 

칼빈은 발렌티눔이 성부와 성자 사이의 차이점을 본질의 양의 차이로 봄을 주목한다. 칼빈은 이들이 성자가 본질(essentia)을 부분적으로 공유한다고 여기며 신성을 부분적으로만 소유하는 성자를 반신(反神)으로 만든다고 비판한다. 또 이럴 경우 하나님의 본질을 찢어놓는 오류를 범한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칼빈은 만일 이들이 “성부가 본질을 성자에게 주시면서도 여전히 유일한 하나님으로 남아 계시고 그에게 신적 본질이 그대로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결국 “그리스도는 상징적인 하나님, 곧 겉모양과 이름은 하나님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이 아닌 존재가 되어 버릴 것이다”라는 결론을 얻게 된다고 지적한다. 즉 성부가 성자에게 자기의 신성을 부어주면 그만큼 성부에게는 신성이 부족할 텐데 그럼에도 성부가 온전한 하나님으로 남는다면, 성자에게로 신성이 흘러들어가지 않게 된다는 말이다. 칼빈은 여기서 이들의 자가당착을 포착한 것이다. 말하자면 이것은 이들이 존재론적인 사고방식에 빠진 나머지 위격의 구별과 각 위격의 특성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비판한 것이다. 칼빈은 이들의 경우 성자가 신적인 본질을 부여받은 것이라면 그것을 빼앗길 경우에는 하나님이 아님을 주목한다. 그 결과 칼빈은 이들이 명목상으로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라고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그를 하나님으로 보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이에 대항하여 칼빈은 전통적인 삼위일체론을 소개하면서 독자들로 하여금 이들의 오류에 빠지지 않게 한다. “성부와 성자는 모두 신적 본질을 전체로서 완전하게 공유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다면, 본질에 관해서는 성부와 성자 사이에 구별이 없는 것이다”

 

d. 칼빈의 반격 

칼빈은 이런 이단에 대항하여 삼위 세 분 모두 하나님임을 성경을 통해 규명한다(I,23,24). 먼저 칼빈은 성부만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이 이단에 대항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임을 성경 구절로 규명해 낸다. 그 다음 삼위 세 분이 하나님임을 말한다. “그러므로 창조의 능력과 명령할 수 있는 권세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공통되는 것이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I,23,24). 또 칼빈은 요한복음 4:24에 나오는 “하나님은 영이시니”라는 구절이 성부, 성자, 성령께 동등하게 적용된다고 말함으로써, 세 분 모두 하나님임을 말한다.

칼빈은 이들이 위격과 본질 사이의 관계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여, 즉 각 위(位)가 신적 본질 가운데 자기 자신의 분리된 몫을 지니고 있다면 삼신론(三神論)에 빠질 것으로 비판한다(I,13,25). 이들을 비판하기 위해 칼빈은 먼저 전통적인 삼위일체론을 언급하고 그들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하나님의 본질이 하나이며, 따라서 성자와 성령의 본질이 낳은 바 된 것이 아니지만, 성부께서 순서상 첫째가 되시고 또한 바로 앞에서 논의한 바대로 그가 친히 그의 지혜를 낳으셨으므로, 성부를 가리켜 신성 전체의 시초요 근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단서가 없는 그냥 하나님은 나신 바 되지 않으신 분이요, 또한 성부 역시 그의 위격에 관한 한 나신 바 되지 않으신 것이다”(I,13,25). 그리고 칼빈은 이들이 전통적인 삼위일체론을 오해하여 그것을 ‘사위일체’로 비웃음을 지적한다. 이들은 세 위격과 본질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이에 대항하여 칼빈은 “우리는 위격을 본질과 분리시키는 것이 아니고, 각 위들이 그 본질 내에 머물러 있는 상태에서 서로 구별된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I,13,25)라고 말한 다음, 만일 이들의 주장대로 위격이 본질과 분리되었자면 삼신을 하나로 결합하는 것과 같은 결과가 생길 것이라고 말한다. 칼빈에 의하면, 이들의 삼위일체론은 결국 한 하나님과 두 피조물의 결합인 것이다.

그 다음 칼빈은 이들이 생트집을 잡는 문제들에 대항하여 대답한다. 이를테면 이들은 성경에서 그리스도가 성부보다는 위상이 낮은 것으로 표현한 구절을 대며 종속론적인 발언을 하나 칼빈은 성경 내용에 근거하여 그들의 발언에 쐐기를 박는다(I,13,26).

그리고 칼빈은 마지막으로 이들이 교부들을 잘못 인용하는 것을 점검하고 비판한다. 먼저 이들은 이레니우스를 잘못 이해하고 이용했다는 것이다. 이레니우스의 경우 이들과는 달리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칼빈이 요약한 이레니우스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이레니우스의 진술의 요점은 바로 이것이다. 그리스도의 아버지 이외에는 성경에서 다른 하나님을 선포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하며, 따라서 다른 신을 상상하는 것은 그릇된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높이시는 그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외에는 다른 하나님이 없다는 사실을 그렇게도 자주 강조하는 것이 전혀 놀랄 일이 아닌 것이다 …… 곧 그 옛날 족장들에게 나타나셨던 그 하나님은 다른 분이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이셨다고 말이다”

또 칼빈은 이레니우스의 저서(Adv. haer.) 3권 6장을 인용하여 “성경에서 절대적인 의미로 아무런 단서 없이 하나님으로 불려지시는 분은 진실로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며, 또한 그리스도께서 절대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으로 불려지신다”라고 말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신성을 명확하게 말한다. 칼빈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임을 주장하는 이레니우스의 글을 계속 인용하면서 그의 신성을 주장한다.

또 칼빈은 이 대적들이 터툴리안의 글을 잘못 이해했음을 지적하고 터툴리안의 글을 소개하며 삼위일체 속의 성자가 하나님임을 증명하고 있다. “한 분 하나님이 존재하시며 경륜에 따라 그의 말씀이 존재하신다. 하나님은 본질의 단일성을 통해 유일하신 하나님이며 그럼에도 그 단일성은 그들의 신비로운 사역을 통해 삼위일체로 질서를 이루신다. 세 분은 상태에 따라서가 아니고 단계에 따라, 본질에 따라서가 아니라 형식에 따라, 능력에 따라서가 아니라 위격들의 수에 따라 존재한다.”

마지막으로 여러 교부들을 언급하면서 그들이 한결같이 삼위일체를 확증함을 지적하는 동시에(이레니우스, 유스티누스, 힐라리우스, 이그나티우스, 어거스틴) 아리우스가 고대의 인정을 받는 저술가를 인용하지 못함을 지적하여 그의 가르침은 정통성을 유지하지 못함을 암시한다.(I,13,29).

칼빈은 자기의 삼위일체론을 마무리하면서 목회자로서 성도들을 사탄의 세력으로부터 보호하려는 의도를 내비친다. “자 이제 경건한 독자들은, 지금까지 교리에 대한 순전한 믿음을 왜곡시키고 어둡게 만들기 위하여 사탄이 사용해 온 온갖 비난들이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서 반박된 것을 인식하리라 믿는다”(I,13,29).

 

 

D. 나가면서

 

1. 칼빈의 기독교강요 1권 13장에 나오는 삼위일체론은 단순히 하나의 삼위일체론을 설명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나름대로 삼위일체 교육 방법이 반영되어서 여기에는 칼빈의 목회 정신을 볼 수 있다. 그는 먼저 고대교부들의 삼위일체론을 소개한 다음, 그것을 성경 구절을 동원하여 성도들이 손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2. 칼빈의 삼위일체론은 근본적으로는 서방교회를 따르나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를 잇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는 크리소스툼의 저서를 읽으면서 동방교회 신학과 만난 것으로 판단된다.

3. 칼빈의 삼위일체론은 매우 성경적이다. 매우 사변적인 내용을 성경 구절을 통해 성도들이 쉽게 접근하고 이해할 수 있게 만들었다.

4. 칼빈은 당시의 대적들의 문제점을 자세하게 열거하고 비판함을 통해 성도들이 실족하지 않도록 했다. 이것은 매우 목회적인 것으로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칼빈의 이런 자세는 막연하게 복음만 전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식으로 사역하는 한국교회 지도자들에게 무언의 암시를 하고 있다. 담임목사들은 자기 주위에 등장하는 이단들을 정확하게 분석해서 성도들이 실족하지 않도록 해야 된다는 말이다.

5. 우리는 칼빈을 통해 삼위일체론을 효과적으로 가르치는 요령을 습득하게 된다. 1) 즉 먼저 우리는 세 분이 위격 내지 인격이심을 성경구절을 통해 규명해 낸다. 2) 그 다음 세 분이 하나님임을 성경 구절을 통해 설명한다. 3) 마지막으로 성부와 성자의 관계, 성부와 성령의 관계 그리고 성자와 성령 사이의 관계를 구체적인 성경 구절을 통해 규명한다. 그리고 성도들이 자연스럽게 그 마음속에서 이 세 분의 관계를 조립토록 해야 한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본질’, ‘위격’, 그리고 ‘세 분의 관계’가 삼위일체를 바르게 이해하는 관건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 이 세분의 사역 곧 창조, 섭리, 보존 등이 어떻게 이루어지며 그런 사역이 우리의 삶과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지 가르쳐야 한다. 이렇게 될 때 삼위일체 하나님은 성도들의 개인의 삶과 연결되어 이원론에 빠지지 않고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신앙생활의 성공 여부는 이 삼위일체 하나님과 성도 간의 인격적인 관계에 달려 있는 것이다. 칼빈은 이런 면에서 매우 모범적으로 삼위일체론을 가르친 것으로 평가된다.

참고서적

 

1) 1차자료

 

-Joannis Calvini, OS III. Chr. Kaiser: Monachii in Aedibus, 1967.

-Johannes Calvin, Unterricht in der christlichen Religion. übersetzt von O.Weber, Neukirchener Verlag, 1984. 3. Aufl.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ed. bz John T. McNeil. tr. bz Ford Lewis Battles in LCC vol. XX(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67. 4th. printing.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tr. by Henry Beveridge. Grand Rapids: Eerdmans, 1989.

-Jean Calvin, Institution de la religion chrétienne. Aix-en-France: Edition Kerygma/ Charols: Editions Exelsis, 2009.

-죤 칼빈, 『基督敎綱要』 上, 中, 下권 김종흡 신복윤 이종성 한철하 공역. 서울: 생명의말씀사, 1994. 14쇄.

-존 칼빈, 『기독교강요』 in 세계기독교고전 44. 원광연 역. 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3.

 

2) 2차 자료

 

-François Wendel, Calvin. Ursprung und Entwicklung seiner Theologie. Neukirchen: Neukirchener Verlag, 1968.

-Wilhelm Niesel, Die Theologie Calvins. München: Chr. Kaiser Verlag, 1938,

-요셉 하트이안 편저, 『칼빈의 조직신학 해석』 한국칼빈주의연구원 편역. 서울: 기독교문화협회, 1986.

-Ford Lewis Battles, Interpreting John Calvin. Grand Rapids: Baker Books, 1996. 

 




 

B. 성자와 성령의 인격과 신성

 

칼빈은 삼위일체를 설명함에 있어서 위의 내용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는 성경의 역사 속에 계시된 삼위 하나님의 활동을 점검하고 위의 내용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로 보건대 칼빈의 삼위일체론에서 특이한 것은 삼위일체 내부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하여 역사속에 계시된 삼위 하나님의 사역을 관찰하여 그 내용을 설명한다는 것이다. 즉 칼빈의 경우 먼저 교부들이 전수해준 ‘내재적 삼위일체’를 설명한 다음, ‘경륜적 삼위일체’를 설명하면서 전자를 확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결국 성자와 성령의 신격과 신성에 대한 내용을 점검하는 문제와 연관된다.

칼빈이 여기서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은 성자와 성령 두 분 다 하나님이시라는 것과 둘은 서로 다른 분임을 드러내려고 한 것이다. 그는 이것을 철학적인 사색을 통해 드러내려고 하지 않고 성경의 증거를 통해 이것을 드러내려고 한다. 이런 시도 속에서 그가 기독교인들에게 구체적인 해당 성경 구절을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을 쉽고 효과적으로 설명하려는 노력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는 고대 교부들의 삼위일체론을 능가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삼위의 하나님이 인격이심을 강조해야 되는 이유는 성경의 하나님이 이방신들과 다른 점이 인격성에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하나님의 인격성이 무시되면 범신론에 빠져 무신론으로 둔갑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칼빈이 열거한 내용 속에서 성자와 성령이 각기 다른 인격임과 동시에 두 분이 하나님임을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1. 성자의 인격과 신성

a. 성자의 인격

 

칼빈은 여기서(I,13,7-13) ‘성자가 인격이다’라는 말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그의 사역 내지 행동을 묘사함으로써 그가 인격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칼빈은 사도들과 솔로몬의 말을 참고하면서 성자가 만물을 창조하시고 유지하시며 섭리하신다는 말에 근거하여 성자가 인격임을 드러낸다. “사도들은, 세상이 성자로 말미암아 지음을 받았으며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셨다고 가르친다(히 1:2-3)” 칼빈은 전도서 8장에 나오는 ‘지혜’와 연관하여 성자가 인격이심을 암시한다. “지혜가 만세 전에 성부로부터 나와서 만물을 창조하고 하나님의 모든 사역을 통할하였다고 소개한 것이다(잠 8:22)” 잠언서의 이 발언은 성자가 하나님인 동시에 인격임을 암시하고 있다. 칼빈은 요한복음의 한 구절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5:17)라는 구절도 잠언서의 ‘지혜’에 대한 내용과 연관됨을 지적하면서 성자가 인격이심을 분명하게 말한다.

그 외에 아래에서 논하겠지만 칼빈이 구약이 증거하는 여호와 또는 여호와의 사자가 구약속의 그리스도로서 인격임을 말하는가 하면 구약의 많은 구절들이 여호와가 그리스도임을 증거한다는 것을 주목하는 내용은 성자가 한 분의 인격임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2. 본질과 인격                                                            

삼위일체에서 “삼위”는 휘포스타시스라는 단어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세 휘포스타시스가 존재한다는 개념으로 발전되어짐에 따라 세 인격(위격, person)이라는 의미가 되어진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의 본질은 하나이다.
그러나 성자도 한 휘포스타시스이고 성령도 한 휘포스타시스로써, 세 휘포스타시스가 존재한다.
이러한 용어에서 처음에는 본질과 인격이라는 단어가 혼동되어 사용되었다.
다시 말하면 세 인격(위격)이 존재하며, 이 세 인격(위격)은 동일한 한 본질(본체)을 공유한다.                          

실제로 고전적 삼위일체가 정립되는 과정에서 본체와 본질이라는 단어가 상당히 혼동을 일으켰다.
이 "휘포스타시스"가 셋 존재한다는 의미로서, “인격”이라는 개념으로 바뀌어가게 되는데, 헬라어가 라틴어로 바뀌는 과정에서 서방의 교부들, 특별히 어거스틴은 이 “휘포스타시스”라는 헬라어를 번역함에 있어 라틴어 “페르소나”(persona)라는 단어를 사용하게 된다. 
이 용어적인 차이에서 양태론이 나타나는 계기가 되어지는데, “페르소나”라는 단어는 배우가 여러 가지 가면을 쓰고 연극(일인다역)을 한다는 뜻에서 일인다역의 양태론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동방교회의 신학자들은 서방교회가 즐겨 사용한 '페르소나'를 피하고 그 대신 '휘포스타시스'라는 말을 사용했다.
'페르소나'의 본래의 뜻이 가면(mask)이므로 그 말을 삼위에 적용시킬 때, 사벨리우스주의라는 오해를 받을 위험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체를 의미하는 말로서 '우시아'를 사용했다. 한 '우시아'에 세 '휘포스타시스'가 있다고 했다.”
(이종성의 삼위일체론. 259쪽)                    

서방교회에서 휘포스타시스라는 용어가 페르소나로 번역되고 인격이라는 의미가 되자,  동방교회에서는 본질을 뜻하는 용어로 “우시아”라는 단어를 사용하게 되고, 동방교회에서는 "한 우시아(본질)에 세 휘포스타시스(위격)가 있다"라고 정의되었고, (미아 우시아 트레이스 휘포스타시스) 서방교회에서는 우시아라는 용어 대신에 “한 숩스탄시아에 세 페르소나가 있다”고 정의가 된다.(우나 숩스탄티아 트레스 페르소나)

페르소나는 영어로 person이 되고, 우시아는 essence로 번역되어지며, 숩스탄시아는 substance가 되어진다.
서방교회에서는 ‘휘포스타시스’를 ‘페르소나’(헬라어 프로소폰)라고 라틴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동방교회는 헬라어를 사용했고, 서방교회는 라틴어를 사용하였는데, 로마사람들에게는 ‘우시아’는 잘 이해되지 않는 언어였고, 헬라인들에게는 ‘페르소나’라는 단어가 잘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 말은(프로소폰, 라틴어 페르소나의 헬라어) 불행하게도 사벨리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에 의하여 오용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을 형식적으로만 믿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란 자체 안에 있는 관계명칭이 아니라, 한 하나님이 외부세계와 가질 때 가지는 명칭뿐이라고 했다.
이름은 셋이나 실제는 한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는 당시 로마 교회 안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페르소나' 대신에 '프로소폰'이라는 말을 썼다.
이 말을 쓰면서 그는 삼위가 아버지 하나님과 동일한 실체를 가진분이 아니라, 기능의 일부를 담당하고 있을 뿐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때로는 아버지로, 때로는 아들로, 때로는 성령으로 나타나서 특유의 기능을 발휘하나, 하나님과 별개의 휘포타시스를 가진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렇게 말하면서 하나님은 한때는 창조자로, 한때는 구속자로, 한때는 생명의 부여자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종성의 삼위일체론 298페이지)   







1650. 증거 - 엘렝코스(ἔλεγχος)

ἔλεγχος, ου, ὁ 

1. 증거,  2. 유죄증명,  3. 견책
발음 / 엘렝코스(ĕlĕngchŏs)
어원 / 165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책망(딤후 3:16), 증거(히 11:1)
신약 성경 / 1회 사용

* 1651. 증명하다 - 엘렝코(ἐλέγχω)

ἐλέγχω 

1. 빛으로 가져오다,  2. 증명하다,  3. 견책하다
발음 / 엘렝코(ĕlĕngchō)
어원 / 미래 ἐλέγξω, 제1부정과거명령 ἔ- λεγξον, 제1부정과거부정사 ἐλέγξαι, 제1부정과거수동태 ἠλέγχθην, 불확실한 유사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권고하다(마 18:15), 드러나다(요 3:20), 책망하다(요 16:8, 딛 1:9, 계 3:19), 책잡다(요 8: 46), 꾸짖다(딤전 5:20, 딛 1:13),
정죄하다(약 2:9), 경책하다(딤후 4:2), 꾸지람을 받다(히 12:5), 책망을 받다(눅 3:19, 엡 5:13), 가책을 느끼다(요 8:9)
신약 성경 / 17회 사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