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 목회


스마트 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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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용이나 기타 콘텐츠의 변화보다는 전달하는 과정과 표현 방법 등에서 최신 스마트 기기를 활용한 목회를 의미한다.
이를 통해 달성하려는 목표는 ‘커뮤니케이션’이다.
교회에 와서만 들을 수 있는 내용, 체험, 정보를 다양한 스마트 기기를 통해 언제 어디서나 만날 수 있고 누구와도 ‘소통’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특히 팬데믹으로 인한 대면예배가 불편해지면서 ‘스마트 목회’는 더욱더 눈길을 끌었다. 

소위 스마트 목회용 장비로 알려진 제품들을 살펴보면, 값비싼 스마트 보드에서부터 고가의 라이브 방송 장비까지 어지간해서는 엄두를 내기 힘든 경우가 많다.

‘소통’에 중점을 둔 다섯 가지 스마트 목회법이 있다. 

첫째, 무료 이메일 마케팅을 활용하라


팬데믹 이후 소통을 위한 다양한 마케팅이 주목받고 있다.
그중에서 이메일 마케팅은 다시 한번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재택 근무자가 늘면서 이메일 마케팅은 소통을 위한 최고의 도구 중 하나다.
특히 이를 목회에 활용한다면 바쁜 현대인들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게다가 이메일 마케팅 서비스를 무료로 쓸 수 있는 것들도 많다.
무료 이메일 플랫폼은 여러 서비스가 있지만 그중에서 센딩 블루는 여러 장점을 갖추고 있다.
센딩 블루는 무료와 유료 두 가지 버전을 고를 수 있고, 무료 버전은 하루 최대 300개 이메일을 보낼 수 있다.
또한 보낼 수 있는 구독자 수를 제한하지 않기 때문에 타 서비스 대비 장점으로 통한다. 

둘째, 컴퓨터 캠만 있다면 온라인 성경 공부 가능 


노트북을 사용한다면 컴퓨터에 내장된 캠이 있을 것이다.
이것만 있다면 언제 어디서나 무료로 라이브 방송이 가능하다.
바로 온라인 회의 도구인 줌(ZOOM)을 활용하는 것이다.
줌은 무료 가입의 경우 최대 100명의 참가자를 받을 수 있다.
또한 40분 내 무제한 미팅이 가능하며, 개인 또는 그룹 모임도 할 수 있다.
여기에 줌 화이트보드라는 기능을 통해 최대 25mb 용량을 기본으로 제공한다.
따라서 하루 5분 내지, 10분 정도로 10명 내외 인원으로 구성된 성경 공부방 또는 훈련방 등을 줌을 통해 진행한다면 상당히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셋째, 포토샵 할 줄 몰라도 OK. 캔바에서 무료로 편하게 


카카오톡 또는 페이스북에 올릴 말씀 배너나 온라인 전도지 등을 만들고 싶지만, 포토샵에 대한 지식과 디자인에 대한 감각도 없다면? 이런 경우 잘 만들어진 디자인 위에 글자만 바꿔 사용할 수 있는 무료 디자인 템플릿을 만나보자.

대표적으로 캔바(CANVA) 플랫폼은 다양한 플랫폼과 폰트, 사진, 동영상 지원 기능까지 갖춘 만능 디자인 서비스다. 마음에 드는 디자인을 골라 전하고 싶은 문구나 말씀을 담고 다운로드받으면, 여느 디자이너가 만든 품질 못지않은 포스터, 디자인 배너 등을 만날 수 있다. 특히 미국 거주인 경우, 선택한 디자인에 대한 인쇄 서비스까지 누릴 수 있어 도움이 크다. 

넷째, 종이 주보 대신 앱으로 대신해볼까?


목회하다 보면 적지 않게 나가는 비용이 많다.
그중에서 매주 종이 주보 인쇄도 만만치 않다.
이럴 때 종이 주보 대신 앱으로 예배 순서와 교회 소식을 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교회 재정도 넉넉히 않은 터에 앱 개발은 엄두를 내기 힘들다.
미주 한인교회 중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면 미션21(MISSION21.COM)의 스마트굿뉴스 서비스를 만나보면 좋다.
스마트굿뉴스의 경우 주보 소식을 앱을 통해 확인할 수 있으며, 무료 푸시메시지를 발송할 수 있다. 또한 원하는 이미지로 꾸밀 수 있어 도움이 크다. 

문의 : global.mission21.co


다섯째, 잘 쓰면 보배. 구글 무료 서비스


스마트 목회를 생각할 때 구글이 제공하는 다양한 무료 서비스를 빼놓을 수 없다.
잘 쓰면 보배 그 이상의 기능과 효과를 누릴 수 있다.
먼저 구글 캘린더, 구글 독스(DOCS)는 상당히 유용한 툴이다.
각종 교회 행사와 교인들의 생일, 그룹별 모임 내용을 구글 캘린더를 활용해 사용하면 스마트폰과 컴퓨터, 교회 홈페이지 등에 연동하는 것도 가능하다.
구글 독스는 설문조사 기능뿐만 아니라 쉽고 빠르게 쓸 수 있는 문서 편집 기능 능도 누릴 수 있다.
또한 구글 드라이버 문서 내 자료 검색과 함께 오프라인에서도 일부 작업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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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기기" 목회에 이렇게 활용한다 - SLiNGstones (2014년 6월호)

이강세 목사 kangselee@gmail.com
Christ United Methodist Church, IL

https://www.resourceumc.org/ko/content/how-to-use-technology-in-ministry-slingstones-2014-6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진리를 전하는 목회자들에게 세상과의 소통은 늘 고민해야 할 문제이다.

오늘날 수많은 스마트기기가 개발이 되고 보급되는 과정에서 많은 목회자들이 스마트기기를 갖고 있지만 활용도가 그리 높지 않은 편이다. 목회는 잘 하고 계신데 스마트기기를 잘 활용하지 못하는 목사님들이 있고, 스마트기기는 잘 사용하지만 목회의 본질적인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서 아직 경험과 성찰이 부족한 목사님들이 있을 수 있다. 그동안 컴퓨터나 스마트기기 등이 목회의 현장에 어떻게 활용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해왔는데, 모든 목회자들의 목회 현장에서의 소중한 경험들이 더욱 적극적으로 나눠 지기를 바라면서 필자가 활용하고 있는 경험과 생각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1. 목적에 맞는 스마트기기를 사용한다.

스마트폰, 태블릿, 노트북 등 수많은 기기들이 존재하는데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고민해 본적이 있을 것이다. 물론 그 답은 “목적에 맞는 스마트기기”를 선택하는 것이다. 그럼 각각의 기기들의 목적은 무엇이고, 나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이와 같은 기기를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공부와 고민이 있어야 할 것이다. 스마트폰은 전화의 기능에 여러 가지 편리한 기능들이 더해진 것이다 태블릿과 노트북은 휴대성을 강조하며 진화해왔다. 그런데 적지 않은 교회지도자들이 태블릿과 노트북을 혼동한다. 그래서 태블릿을 두툼한 가죽케이스에 담아두거나 무선키보드를 장착해서 노트북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렇게 될 경우 노트북이 갖고 있는 짧은 배터리 수명을 극복할 수는 있겠지만, 휴대가 용이한 태블릿의 활용도는 점점 낮아지게 될 것이다.

2. 구글을 목회에 활용한다.

전 세계가 싸이의 강남스타일로 연결되고 소통하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는데 그 도구가 되는 것은 직접적으로 유튜브(YouTube)라고 할 수 있다. 유튜브뿐만 아니라 구글서치 엔진을 통해서 정보공유를 돕고 있는 구글회사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다양한 앱들은 오늘날 변화되어 가는 환경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목회자들에게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 Gmail: 이메일은 편리성 못지않게 스팸들을 양산해서 불편하기도 한데, 지메일은 스팸메일의 알고리즘을 분석해서 필터링해주고 있는데 100퍼센트는 불가능하지만 현존하는 각종 이메일 가운데 가장 훌륭한 필터링 시스템을 지니고 있다.
  • Google Calendar: 교회행사를 위한 계정과 유스그룹, 주일학교 그룹 계정 등 기관별로 칼렌더를 작성 운영하고, 웹사이트에 통합해서 보여준다.
  • Google Voice: 연합감리교회 목회자로서 임지에 따라 옮겨갈 때 휴대전화번호가 문제가 될 수 있는데, 구글보이스를 통해서 고유의 전화번호를 받아 사용한다. 회의중에 전화를 받을 수 없을 경우 상대방이 남겨놓은 메시지를(영어) 정해진 스마트폰으로 문자변환해서 보내주는 것도 아주 편리하다.
  • Google Docs: 마이크로소프트의 오피스나 한컴 오피스와 같은 정교한 문서 작성은 되지 않지만, 오히려 자주 사용하는 간편한 기능들이 일의 효용성을 높여준다. 구글문서, 스프레드쉬트, 프리젠테이션 등을 만들어서 그 링크를 예배 준비하는 팀들과 공유하며 함께 소통하며 만들어간다. 목회 마일리지 기록과 계산도 스프레드쉬트를 사용해서 만들고, 기도 요청을 받거나 특별한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의 목록을 작성해서 간단한 메모와 함께 기록해 두면 지속적인 돌봄에 도움이 된다.
  • Google Spreadsheet: 스프레드쉬트는 매주의 출석통계와 헌금통계 등을 손쉽게 기록해서 교회지도자들에게 현재 상황(Current Reality)을 보여주고, 원하는 미래(Desired Future)에 관한 그림을 함께 그리고 실행계획(Action Plan)을 만드는데 도움을 준다.

3. 클라우드 서비스를 적극 활용한다.

사무실과 집, 그리고 이동 중에 사용하는 기기들이 각각 다를 때, 이전에는 휴대가 용이한 기기에 담아 가지고 다녔지만, 이제는 네트워크 서비스와 인터넷 속도의 발전으로 네트워크를 통해서 공유하게 되었다. 이를 위해 DropBox, OneDrive, Google Drive등의 서비스를 사용할 수 있는데, 드랍박스의 무료공간은 2기가이지만, 구글드라이브는 Gmail을 포함하여 15기가를 제공하고 있다. 복수의 구글 드라이브 계정을 오픈하고 그 파일을 폴더로 공유를 하면 공간에 제한을 받지 않고 사용할 수 있다.

4. 에버노트를 목회에 활용한다.

지난해 한국의 교회정보기술원의 조사에 따르면 80% 이상의 목회자들이 웹서핑보다 이메일 확인을 위해 컴퓨터를 사용했고, 그 다음으로 설교 작성을 위해서 사용했다고 한다. 그리고 스마트 기기로 웹서핑과 이메일 확인을 했다고 한다. 이렇게 사용한 자료들이 이메일 서버에 있지만 정작 그 자료를 필요한 때에 사용하지 못해 아쉬울 때가 많았다. 에버노트(Evernote)란 내가 읽고 경험한 모든 자료와 장면들을 노트(메모)의 형식으로 저장을 해 둘 수 있다. 이때 훗날 필요한 정보를 찾을 때 효과적인 출력을 위해 간단한 키워드로 태그를 달아둔다.

예를 들면, 목회자의 균형 있는 아이덴티티를 위해서 WORDS 에서 비롯된 Worship, Outreach, Relationship, Discipleship, Service를 태그로 사용하고, 다른 키워드와 함께 적어 두면 필요할 때 쉽게 출력해서 사용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메모할 수 있는 일상의 기록들, 명함과 영수증, 심지어는 음식점 메뉴까지 사진으로 찍어 두어 저장을 할 수 있고, 이렇게 저장된 사진 파일이나 PDF문서 안의 단어를 찾아주기도 해서 매우 편리하다. 이전에 몇 가지 To Do List 앱을 사용해 보았지만 그다지 효율적이고 생산적이라고 느껴보지 못했는데, 에버노트로 매주마다 리스트를 만들어서 매일 전화와 심방의 기록 등 각종 작업의 기록을 남겨 두면, 사람과의 관계를 이어가는 목회자의 입장에서 매우 도움이 되고 있다. 오피스 문서나 구글 문서들이 작성되는 시점에는 가장 효율적이지만, 시간이 흐르면 다시 찾게 되는 일이 드물어 지지만, 에버노트의 경험되어진 메모들은 시간이 흘러서도 그 가치를 더해 줄 수 있어서 이메일 보다 더 많이 사용을 하게 된다. 이메일로 받게 되는 회의록이나 기도요청, 주일 예배의 방문자에 대한 기록들도 에버노트로 포워딩할 수 있게 이메일에 필터링을 해두면 에버노트로 열어보고 태그작업을 해서 저장해 둔다.

5. 스마트기기의 다양한 감각 기능을 활용한다.

거의 모든 스마트기기에 있는 카메라와 오디오 기능을 적극 활용한다. 때로는 칼라 사진보다도 한 장의 흑백 사진이 더 분명한 메시지를 전해주는 것처럼, 비디오 카메라와 앱이 익숙지 않은 분은 오디오 녹음 기능을 활용해서 시설에 계신 분들이나 먼 거리에 계신 분의 음성을 녹음해서 들려주는 것도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데 유익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스캐너가 없다면 사진기를 활용해서 각종 문서나 자료, 영수증 들을 사진으로 찍어서 에버노트에 바로 저장해 두면 필요할 때 용이하게 사용할 수 있다. 필자의 경험들이 모쪼록 도움이 되었기를 바라며, 여러 목회자들의 소중한 목회현장에서의 경험과 성찰들이 나누어져서 동역을 용이하게 할 수 있기를 꿈꿔본다.

ⓒ Copyright 2014 General Board of Disciplesh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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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링스톤즈는 목회 및 사역이야기 속에 담긴 지혜와 통찰력을 나누면서 목회사역에 필요한 전략과 아이디어를 제공하기 위해 총회제자훈련부에서 매달 발행하는 온라인 뉴스레터이다.
편집인 김광기 목사 dkim@gbod.org

올린날: 2014년 6월 1일 연합감리교회 공보부 T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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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안드는 구글 스마트목회
[편집장의 친구들] 구글 이노베이터 김정준 목사가 알려주는 작은교회를 위한 구글사용법!!

https://www.youtube.com/watch?v=qdVosBFJ8pc









내 복음(로마서 2:16, 빌레몬서 1:13)



내 복음(로마서 2:16, 빌레몬서 1:13)

로마서 2:16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날이라.
This will take place on the day when God will judge men's secrets through Jesus Christ, as my gospel declares.


빌레몬서 1:13
저를 내게 머물러 두어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I would have liked to keep him with me so that he could take your place in helping me while I am in chains for the gospel.


내 복음이란?
내가 믿는 것으로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내가 머무는 것이다.
만일 내가 머물러야 할 자리에 내가 없다는 것은 곧 복음에서 떠난 것이다.
복음에서 떠난 것이 곧 죄의 자리가 된다.

유대인은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은 백성이다.
이방인은 율법이 없는 백성이다.
참 유대인(이면적 유대인)은 하나님이 인정하는 백성으로 이방인 중에서 또한 유대인 중에서 부름을 받은 백성을 말한다.




개혁자 루터의 반유대주의




개혁자 루터의 반유대주의

    - 1



프로테스탄트적 저항신학을 손에 들고 부패한 중세 가톨릭을 전복시켰다는 게 루터에 대한 대체적인 평가다.

그러나 루터의 고향 독일의 역사학자인 볼프강 비퍼만의 견해는 좀 다르다. 베를린 자유대학 교수인 그는 신간 '루터의 두 얼굴'(평사리)에서 종교개혁 500주년을 자축하는 동시대인들에게 찬물을 끼얹는다.

저자는 독일 개신교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를 국가주의, 국가가 주도하는 전쟁을 지지하는 주전(主戰)주의, 자본주의, 반유대주의, 반집시주의, 반페미니즘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그 뿌리를 루터에서 찾는다.

저자에 따르면 루터는 16세기 농민전쟁에서 제후들의 편에 섰다. 봉기한 농민들을 공격하라고 요구했고, 실제로 수천 명의 농민이 학살당했다.

1543년 출간된 루터의 저작 '셈 함포라스와 그리스도의 성에 관해'에서는 유대인을 "고삐 풀린, 나쁜 망나니로 이루어진 찌꺼기"라고 지칭하며 노골적으로 경멸한다. 또 다른 저작 '유대인과 그들의 거짓말에 관해'에서는 유대인의 종교 서적을 빼앗고, 그들의 회당을 불태우며, 재산은 몰수하자고 역설한다.

루터는 교황청의 폐습을 누구보다 앞장서 비판했지만, 정작 가톨릭의 마녀 미신은 극복하지 못한다. 그는 마녀를 '악마의 나쁜 창녀', '우유를 훔치고 악천후를 만들고 빗자루를 타고 다니는 존재'라고 묘사한다.

또한 "부인이나 처녀가 잘난 체할 때만큼 꼴사나울 때가 없다", "아내가 지닌 가장 위대한 명예는 언제나 남자들이 그녀에게서 태어난다는 것이다" 등 반페미니즘적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이에 대해 저자는 "루터는 여성들 안에서 오로지 가정주부와 어머니만을 보고 싶어 했다"고 꼬집는다.

저자는 이처럼 루터의 발언과 저작을 조목조목 분석한 뒤, 그의 유산을 무비판적으로 계승한 독일 교회의 흑역사를 재조명한다. 반기독교적인 나치가 등장할 때 교회가 이를 묵인하고, 유대인과 집시에 대한 박해에 침묵하는 죄를 짓지 않았느냐고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옮긴이 최용찬은 "비퍼만의 책은 독일 역사학자의 철저한 고증작업의 성과물인 동시에 독일 개신교도의 처절한 자기반성의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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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대주의(히브리어: אנטישמיות, 독일어: Antisemitismus)는 유대인들을 향한 차별과 증오를 말한다.

유럽 언어에서 대체로 "반셈족주의"로 불리나, 명칭과 조금 다르게 셈족 전체에 대한 혐오보다는 오직 유대인들만을 대상으로 한 혐오를 가리키는 말로 주로 쓰인다.[1]

반유대주의는 여러 형태가 있다. 개인적인 증오에서 홀로코스트포그롬폭력적인 박해까지 여러 예가 있다. 긴 역사로 가장 오래된 증오라고 불리기도 한다.[2]

유럽 기독교인들이 유대인을 예수를 죽인 민족이라고 여기고, 고대교회 교부들은 유대인들을 위선자라고 부른 종교편견[3][4]이나 유대인들을 열등한 인종으로 보는 인종 차별이 반유대주의의 발단이 될 수 있다. 시온주의이스라엘을 반대하는 극우파, 근대 유럽의 사회주의[5]와 이슬람 급진주의에서도 반유대주의를 찾을 수 있다.

반유대주의의 첫 발생은 확실하지 않다. 베를린 자유대학교 페터 셰퍼(de) 교수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고대 이집트의 이야기를 다시 이야기 할 때 널리 퍼졌다고 주장했고 반유대주의는 이집트에서만 일어났다고 주장한다.[6] 가장 오래된 반유대주의의 흔적은 Agatharchides의 책에서 찾아볼 수 있다. 기원전 2세기당시 고대그리스의 역사가였던 그는 유대인들의 풍습은 어리석다고 조롱했고 안식일을 지내서 예루살렘이 침략받았다고 비꼰적 있다.[7]

또한 구약성서인 《마카베오기 제1권》에도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을 점령한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반유대주의정책이 언급되어 있다.[8]

서유럽의 유대인 박해

서유럽에서의 기독교 강제개종

유대인에 대한 핍박과 추방은 스페인, 포르투갈, 프랑스 등 기독교 국가를 중심으로 끊이지 않았다. 스페인은 유대인들에게 기독교로의 강제 개종 칙령을 내려 탄압하고 영구적으로 추방했고, 14세기 중엽부터 16세기까지 대부분의 독일 도시에서 유대인들은 공식적으로 추방을 당했다. 이러한 추방 외에도 기독교를 국가 종교로 표방한 서유럽의 유대인에 대한 대표적 박해 양상은 의식살인(de)유언비어[9], 성찬모독 비난, 탈무드 소각, 종교적 논쟁의 네 가지 형태로 일어났다. 이러한 박해의 양상으로 인하여 자연히 기독교에 대한 유대인들의 적대감은 깊어만 갔다.

동유럽으로의 이주

스페인의 유대인 박해는 전유럽에 유대인에 대한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서유럽에서조차 유대인들은 발붙일 곳을 얻지못했지만, 폴란드를 중심한 동유럽은 비교적 유대인들에게 관대하여 유대인들을 위한 새로운 보금자리 구실을 하였다. 18세기 중엽 전세계의 유대인 인구는 약 300만 가량이었고 이들 중 대부분은 동유럽에 편중되어 살게 되었다. 폴란드에는 주후 18세기 말 약 150만 명이나 되는 유대인들이 살았는데 폴란드가 붕괴되면서 이들은 러시아와 프로이센 그리고 오스트리아로 편입되었다.[10]

십자군 원정과 유대인

유대인들에 대한 통속적인 종교적 증오심을 교회가 공식적으로 주입하게 된 계기는 십자군 원정이었다. 1096년에 가톨릭 교회는 십자군 전쟁을 시작했다. 교황 우르반 2세는 무슬림 침략자들로부터 성지를 회복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군사들을 모집했다. 그런데 그들이 성지로 가는 도중에 만나는 유대인들을 무슬림처럼 취급하였다. 그러나, 십자군의 유대인 학살에 대하여 유대 공동체는 금욕적이고 냉정한 태도를 보였다. 유대인들은 십자군이 칼을 대고 제시하는 세례를 거부하면서 세례 받기보다는 율법대로 죽음을 감수하거나 아니면 집단 자살을 택했다. 십자군의 유대인들에 대한 만행은 십자군이 회복하고자 했던 성지 예루살렘에서 자행되었다. 십자군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 그들의 칼은 무슬림들은 물론 유대인들을 죽인 피로 물들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여, 우리는 당신을 찬양합니다!” 라는 노래를 부르면서 회당에 불을 질러 안에 있던 유대인들이 산 채로 불에 타 죽게 하였다. [11]

루터의 반유대주의

동정적인 입장

마르틴 루터는 그리스도의 유대적 배경에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그것은 유대인의 잘못이 아니라, 그들에 대한 기독교인의 태도라고 지적했다. 선교적인 관점에서 교회가 같은 뿌리의 종교를 가진 유대인 형제들에게 너무도 악한 모습을 보이고, 오히려 그들을 핍박함으로 유대인들이 교회에 등을 돌리게 되었다고 반성하였다.

1523년 루터는 《예수는 유대인으로 나셨다 Dass Jesus Christus ein geborener Jude sei 》라는 도발적인 제목으로 논문을 발표하여 기독교인들의 사악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또한 유대인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만일 내가 유대인이었다면 이런 둔하고 버릇 없는 자들이 기독교 신앙을 규제하고 가르치는 것을 보면서 오히려 기독교인이 되기 보다는 차라리 암퇘지가 되기를 더 좋아했을 것이다. 우리는 몇몇 유대인들을 그들 조상이 가졌던 참 신앙으로 이끌어 줌으로써 그들을 돕기를 원한다.”[12]

루터의 만년

표지, Wittenberg 1543년 1월

그러나 루터는 1543년 1월 반유대주의로 급선회하는 《유대인들과 그들의 거짓말에 관하여 Von den Jüden und jren Lügen》를 발표했다. 그는 이 저술에서 "유대인의 회당을 불지르고, 그들을 죽이고, 매장하고 회당을 무너뜨리고, 탈무드를 빼앗으라"고 주장하며 유대인 탄압을 선동했다. 루터의 이런 주장은 묻혀 있다가 19세기 초 반유대주의가 기승을 부리던 독일에서 기독사회당 (Christlich-soziale Partei) 대표인 아돌프 슈퇴커(Adolf Stoecker 1835-1909) 에 의해 널리 퍼졌고 나찌에게 파급되었다.[13]

드레퓌스 사건과 반유대주의

nowiki  드레퓌스 사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반유대주의가 최고조에 이르러 사회문제로 표출된 사건은 프랑스의 드레퓌스 사건 때였다. 1894년 드레퓌스는 증거가 없는데도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간첩으로 몰려 무기징역에 처해져 악마섬(Île du Diable)에 유배되었다. 반유대주의는 가톨릭 교회와 가톨릭 언론, 군부등을 중심으로 급속히 퍼졌다. 이에 에밀 졸라를 비롯한 지식인들의 격렬한 항의는 유럽에서 반유대주의의 심각성을 일깨웠고 이는 곧 오스트리아의 언론출신 유대인 테오도어 헤르츨시온주의 주창으로 연결됐다.[14]

홀로코스트

nowiki  홀로코스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현대의 반유대주의

인종 학살극인 홀로코스트의 충격으로 유럽과 미국에서는 극소수의 극우 이외에는 반유대주의는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아직도 반유대주의가 강하게 남아있으며, 특히 이스라엘 국가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많은 팔레스타인인들에게서 크게 나타난다. 또 아마디네자드 이란 전 대통령이 이스라엘에 핵 미사일을 날리겠다고 공언할 만큼 특히 이슬람 종파 중 시아파에서는 극심한 반유대주의가 나타나고 있다.


  1. 각주


  2. "Antisemitism has never anywhere been concerned with anyone but Jews." 루이스, 버나드. "Semites and Antisemites" Archived 2011년 5월 14일 - 웨이백 머신, Islam in History: Ideas, Men and Events in the Middle East, The Library Press, 1973.

  3. Our common inhumanity: anti-semitism and history Archived 2019년 6월 30일 - 웨이백 머신 by Richard Webster (a review of Antisemitism: The Longest Hatred by Robert S. Wistrich, Thames Methuen, 1991

  4. 《세계종교사입문》/서울대학교 종교학과 종교사연구회/청년사

  5. 《이야기 교회사》/이성덕 지음/살림

  6. 근대 유럽의 사회주의자들은 유대인들을 부르주아 계급으로 이해하여 반대하였다. 물론 모든 유대인들이 자본가였던 것은 아니었다. 살림지식총서《유대인》/정성호 지음/살림

  7. Schafer, Peter. Judeophobia, Harvard University Press, 1997, p 208.

  8. Flannery, Edward H. The Anguish of the Jews: Twenty-Three Centuries of Antisemitism. Paulist Press, first published in 1985; this edition 2004, pp.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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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는 루터의 반유대주의 글들을 굉장히 익숙해 했고 아주 존경했다.

'나의 투쟁(Mein Kampf)' 에서 히틀러는 루터를 독일의 가장 위대한 3명의 위인으로 칭송했다. 

Frederick the Great 와 Richard Wagner와 함께. 1938년 11월9-10일 나찌는 Kristallnacht 지역에 유태인 학살을 시작했다. 

그들은 독일에 있는 모든 유대인교회(synagogue)를 전부 파괴하고 35명의 유대인을 살해했다. 

그리고 그 날의 학살은 마틴루터의 생일을 기념해서 했다고 발표한다. 





 


마틴루터의 말기에 발행된 팜프렛의 그의 글 " Concerning the Jews and Their Lies" 에서 루터는 8가지 행동을 유태인들에게 행해야 한다고 발표했다. 


1. Burn all synagogues 

모든 유대인의 교회를 불태우라

2. Destroy Jewish dwellings

유대인의 거주지들을 파괴해라

3. Confiscate the Jews' holy book

유대인의 성경을 압수해라

4. Forbid rabbis to teach

랍비들이 가르치는 것을 금지하라

5. Forbid Jews to travel

유대인들의 여행을 금지하라

6. Forbid Jews to charge intereste on loans to non-Jews and confiscate Jewish property

유대인들이 비유대인들에게 돈을 빌릴때 이자를 금지하고 유대인의 재산을 압수해라

7. Force Jews to do physical labor

유대인들에게 육체적 노동을 시켜라

8. Expel the jews from provinces where Christians live

기독교인들이 사는 곳에서 유대인을 추방하라


마틴 루터 저-‘유대인과 그들의 거짓말’(Martin Luther, 1483-1546)에서   

“그들이야말로 진정 거짓말쟁이요 피에 굶주린 개때들이다. 

저들은 요망한 해석으로 성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변조하고 알아볼 수도 없게 만들어 놓았다.

저들의 매일 같은 한숨과 염원은 오직 구약의 에스더 시대에 저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 이방인들을 모조리 죽여 없애는 것이다...  

아, 저들이 얼마나 에스더기를 사랑하는지 보라. 저들의 피로 사무친 원한에 그보다 더 어울리는 책도 없을 것이다..

해가 이 땅에 뜬 이래로 스스로를 신에 선택 받은 민족이라 자처하는 유대인만큼 피에 굶주리고 복수심에 들끓는 족속도 없을 것이다.  

그들은 신의 이름으로 비유대인을 살인하고 절멸시켜야 한다고 믿고 있다. 저들이 기다리는 메시야란 것도 유대인을 위해 이방인을 말살하고 온 세상을 칼로 정복할 자에 지나지 않는다.

처음부터 저들이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그래왔듯이 저들은 오늘날도 똑같은 꿈을 꾸고 있다. 단지 힘이 모자라서 못하는 것 뿐이다...  

그들의 저주받을 저 고리대금업을 보면 알 듯이 불신자의 금과 은으로 입에서 악취를 풍기는 그들보다 

이 하늘 아래 더 탐욕스러웠고 또한 앞으로도 그럴 민족은 없을 것이다. 

그들에게 인생의 유일한 목표는 재물을 모으는 것이다.  

저들은, ‘메시야가 오면 온 세상의 금과 은을 빼앗아 유대인들에게 나누어 주리라’고 지껄인다.

그러므로 저들은 자기들의 그 끝없는 탐욕을 채울 수만 있다면 언제든 사악하게도 성서를 자기들 멋대로 왜곡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친애하는 기독교 형제들이여, 알지어다! 사탄 다음으로, 진정 유대인이고자 하는 유대인만큼 

우리에게 위험하고 독소적이며 골수에 박힌 적개심을 품은 적도 없음을.저들 중에는 개나 소나 믿을만한 망령된 미신이나 

관습의 노예가 된 자들이 있다. 

그러므로 역사 속에서 저들은 우물에 독을 풀고 트렌트(Trent)나 바이진(Weiszensee)의 사건처럼 아이들을 훔쳐 

흉악한 짓을 저지른다는 혐의를 받는 것이다. 

물론 저들은 이를 부정한다. 

어쨌든 사실여부를 떠나 나는 저들이 할 수만 있다면 공개적으로나 은밀하게 언제든지 이를 행동에 옮길 준비가 되어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사탄을 모르는 사람은 저들이 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왜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그토록 원한을 품고 있는지 어리둥절해 할 것이다.  

따지고 보면 그들에게 좋은 일만 하는 우리에게 그들이 원한을 품을 이유도 없다. 

그들은 우리나라에서, 우리들이 만든 집에서 살며 우리의 보호 아래 우리의 땅과 도로와 시장과 거리를 이용한다. 

대공(大公)들과 정부가 입을 벌린 채 코를 고는 동안 유대인은 그들의 금고와 민중의 호주머니를 마음대로 도둑질한다. 

이것이 스스로의 돈으로 피가 마를 때까지 착취당하고 결국은 거지꼴로 전락하는 게 아니라면 또 무엇이겠는가?  

외국인인 그들은 분명 우리의 것을 가질 권리가 없으며 저들의 재산도 실은 모두 우리의 재산이다. 

그들이 무슨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에게 유용한 것을 생산하는 것도 아니며 우리가 그들에게 돈을 기부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저들은 우리의 돈과 재물을 모조리 움켜쥐고 자기들이 유배생활을 하고 있다는 이 땅에서 주인 노릇을 하고 있다.  

“저들의 탈무드를 보면 이방인이 이스라엘 민족을 죽이면 죄가 되도 이스라엘 민족이 이방인을 죽이면 

죄가 되지 않는다고 랍비들이 말하지 아니하던가? 

또 이방인과의 약속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하지 않던가?  

그러므로 이방인의 돈을 도둑질하고 강탈하는 것은 (고리대금업으로 이미 하고 있듯이) 저들에겐 신에 대한 봉사인 셈이다...

 그리고 그들이야말로 이 세상의 군주이며 이 세상 사람들은 그들의 종이요 가축일 뿐이다...  

내가 보기에는 차라리 세편의 이솝 우화 속에 랍비들의 모든 탈무드 서(書)들보다 더한, 유대인은 절대로 깨닫지 못할 지혜가 담겨있다... 어쩌면 누가 나의 말이 너무 과하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실로 말을 아끼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그들이 그들의 회당과 학교에서 하는 기도 속에서 우리 고이들(Goyim)을 얼마나 저주하고 

우리에게 악의를 품었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고리대금으로 우리의 돈을 강탈하고 온갖 부류의 야비한 술수를 부린다.  

유대인을 사로잡고 있는 사탄이라면 모를까 그 어떤 외국인도 이런 짓을 하지 않았고 또 하지 않을 것이다... 

유대인 중에서도 학식 높은 랍비였다가 신의 은총으로 기독교인이 된(어쩌다 한번 있는 일이지만) 부르겐시스(Burgensis)는 유대인들이 그들의 회당에서 우리에게 퍼붓는 끔찍한 저주들(라이라도 증언하듯이)을 보면 그들이 결코 신의 선민일 수 없다고 결론짓는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창녀의 아들이라 부르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를 간음녀로 부른다

 - 사탄에 대적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이런 말을 입에 담는다. 

우리는 우리의 아내를 저들이 성모 마리아에 대해 하는 것처럼 창녀라 부르지 않고 저들이 우리의 주님 그리스도에 대해 

그러는 것처럼 후레자식이라 부르지 않는다.  

우리는 그들을 저주하지도 않을뿐더러 그들의 육신과 영혼을 위해 기도하며 우리와 함께 살도록 허락해 준다. 

우리는 저들의 아이를 훔쳐서 흉악한 짓을 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그들이 마시는 물에 독약을 풀지도 않고 

그들의 피에 목말라 하지도 않는다...  

자, 우리가 그들을 노예로 붙잡고 있다는 저들의 새빨간 거짓말을 보라! 예루살렘이 망한 것은 1400년 전이었고 

그 동안 우리 기독교인은 세상 곳곳에서 유대인에게 고문당하고 핍박 받아왔다.

게다가 우리는 도대체 그 어떤 마귀가 이들을 우리나라에 데려다 놓았는지 모른다. 

우리가 예루살렘에 가서 그들을 데려오지 않은 것은 분명하니 말이다!... 그렇다 우리는 그들을 인질로 붙잡아두고 있다.

마치 종살이를 하듯 나의 모든 것을 바쳐 내가 나의 류마티즘이니 자질구레한 질병이니 불운 따위를 붙잡아두려 하듯이 말이다!

나는 그들이 이 세상 모든 유대인들과 함께 그저 예루살렘에 머물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와 같이 절망적이고 사악하고 맹독적이며 악마적인 것이 지난 1400년 동안 우리의 역병이요 병균이요 

불운이었던 유대인의 운명인 것이다... 자, 그럼 이 저주받고 거부당하는 유대민족을 어찌 해야 하나?

우리의 이웃으로 눈을 돌려 프랑스나 스페인, 보헤미아 등지에서 유대인들을 어떻게 처리했나를 보고 보편적인 지혜를 얻어야 할 것이다.  

이들 나라에선 유대인이 고리대금으로 훔친 돈을 몰수하여 골고루 나누어 주는 대신 그들의 나라로부터 아예 추방시켜버렸다.

사람들이 얘기하듯이 유대인에 대한 신의 분노가 너무도 크기에 안일한 자비는 유대인을 더욱 간악하게 만들고 

매질을 가해도 유대인은 조금만 나아질 뿐이다.  

그러므로 모두 쫓아내어야 한다!... 우리의 돈으로 거부가 된 유대인들이 온 기독교국가들을 깔고 앉아 

우리를 비웃고 조롱하고 스스로의 대담함에 깔깔거리는 꼴을 언제까지 보고 견딜 수 있단 말인가?...

신에게 분노의 심판을 받기는커녕 그들의 매부리코로 새끼돼지들 마냥 킁킁대는 유대인을 보면서 

사탄과 그의 천사 암퇘지들은 또 얼마나 흥겨워할 것인가?” (Von den Juden und Ihren Luegen)

"어쩌면 부드럽고 온화한 기독교인들은 불쌍하고 핍박 받는 유대인들을 상대로 내가 너무 심하게 이들을 조롱하고

비아냥댄다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내 말을 들으라, 유대인과 같은 악마적인 족속을 조롱하기에 나는 너무 미약하고 저들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저들이야 말로 온갖 냉소와 조롱의 천재들이며 이 분야의 대가인 신을 섬기고 있다.  

그 신이란 바로 사탄인 것이다... 내가 보기엔 구약성경만 보더라도 유대인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온갖 타락상과 악의에 찌든 불량배들이라는 증거는 충분하며 그 누구도 내 생각을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고리대금업, 간첩, 배신과 기만행위로 나라를 망치고 우물에 독약을 풀고 애들을 훔쳐가고, 

한 마디로 온 세상에 퍼져 인간에게 해가 되는 갖은 못된 짓은 다 하는 족속인 것이다.” 

(Vom Schem Hamphoras und vom Geschlecht Christi)


루터의 개혁은 인문주의적(르네쌍스에 의한 그레꼬 로망의 부활로 인간이 중심이 되는 인본주의적 사상)인 바탕을 깔고

 인간중심 속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후에 인간중심인 동시에 사단중심적인 자유주의신학이 태어나는 빌미를 제공한 결과를 낳았으며 

이를 토대로 한 진화론이 발생하도록 방치한 결과로 나타나도록 한 것이다.

루터의 개혁 이후에도 로마 카톨릭의 태양문화 중심은 그대로 프로테스탄트 개혁 교회 속에 

그냥 잔존하게 되었으며 이것이 또한 개혁 교회의 전통이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루터에 의하여 개혁은 이루어졌지만 여전히 태양문화의 잔재는 아직도 이방교회 속에 남아 있다.. 


어쨌든 루터로 인하여 히틀러가 유대인을 위한 최종 해결책이라는 미친 생각을 갖기에 이르렀고 600만 대학살이라는 

역사상 미증유의 사태를 불러오기에 이르게 한 것인바, 이는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인 진실이며 보다 

또 하나의 명백한 역사적 증거인 것이다. 

히틀러로 하여금 전대미문의 대 참살 혹은 살육게임 즉 홀로코스트를 연출하도록 한 동기 부여를 한 당사자가 

바로 우리의 존경하는 개혁자인 마르틴 루터라는 사실은 참으로 안타깝고 놀라운 일이다. 

그래서 역사는 루터를 '히틀러의 아비'라는 가장 잔인하고 치욕적인 오명을 그에게 안겨 주고 있으며 

히틀러를 비난하듯이 그를 비난하고 공격하고 있다는 사실인데 과연 오늘날 교회에서 이러한 사실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런지?... 

루터는 자신의 글 속에서 에스더서를 아주 좋아했음을 고백하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 나오는 아각(아말렉 족속)의 후예인 하만의 유태민족 말살에 대한 것을 그대로 추종하고자 욕망을 보여 주고 있는데 

이로서 하만의 유대민족 말살의 사악함이 그대로 루터에 이어졌고 이는 다시 히틀러에 이어져 세기의 비극이 연출 된 것이다. 

하만의 소원이 루터를 거쳐 히틀러에 의하여 완성을 보았으며 따라서 하만과 루터와 히틀러는 

반유대주의 사상의 삼위일체가 된 셈이다..

  

더욱히 끔찍한 사실은 지금까지 개혁교회(프로테스탄트, 개신교) 안에 차지하는 루터의 영향력은 무시하지 못할 정도인지라 

오늘의 교회는 대체신학 속에 살고 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며, 또한 루터의 이러한 반유대주의적인 태도는 

지금까지도 교회로 하여금 유대인들의 반감을 사게 함으로써, 해서 유대인의 때가 도래한 오늘날에 있어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우리 이방인 교회에 커다란 짐과 장애가 되고 있다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며 또한 이는 유대인들에 대한 

복음의 방해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루터의 불완전하고 임시 방편적인 개혁으로 인하여 오늘의 프로테스탄트 교회 또는 개혁교회 속에는 

바빌론 이교사상(헬라철학과 로마주의)를 그대로 안고 있게 되었으며 더불어 교회의 예배 의식 제도 역시 사도교회와는 

다른 비성경적인 모습을 보여 줄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이는 또한 오늘날 거듭난 유태인 형제들의 모임(메시아닉 쥬 교회 또는 유대인 크리스천 교회)과 그들의 예배를 보면 

얼마나 이방인 교회안에 이교적 잔재가 남아 있으며 우리 이방인교회가 지금까지 성경속에 지시하고 계신 헤브라이즘적인 사상과 문화와 철학을 저버리고 이교적이며 태양문화적인 것에 몰두 해왔는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곡식가루가 거룩하니 떡덩이도 거룩한 것이며 뿌리가 거룩하니 그 가지 역시 거룩한 법이다.

그런데 거룩하지 않은(오염된 혹은 더러운) 곡식가루로 어찌 거룩한(정결한, 깨끗한) 떡덩이를 만들 수 있으며 

그 뿌리가 거룩하지 않은데 어찌 가지가 거룩하겠으며 또한 거룩한 열매, 아름다운 열매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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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음식 중에 학세(Haxe)란 게 있다. 종교개혁 발상지 여행단과 함께 나는 지난주 ‘개신교의 성지’로 불리는 독일 비텐베르크에 도착하여 또 학세를 시켜먹었다. 

 

본래는 슈바인학세(Schweinshaxe)라고 부르는데 우리는 그냥 “학세, 학세”라고 부른다. 우리가 흔히 먹는 돼지족발이라고 보면 된다. 학세는 피클, 맥주와 함께 독일식 삼합(三合)요리로 알려진 음식이다.

 

학세로 점심을 들고 비텐베르크의 그 유명한 시 교회를 방문했다. 성 마리아교회라고도 불리는 이 시 교회는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붙인 성교회와 함께 비텐베르크의 상징이자 ‘루터의도시’라고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는 시 교회에서 “내주는 강한 성이요”란 루터의 찬송가를 부르며 짧은 기도회를 가졌다. 함께 교회당을 둘러보던 모든 외국인들도 함께 찬송을 부르고 함께 기도를 드리는 모습이었다.

 

이 교회당은 루터가 수녀원에서 환속한 카탈리나 폰 보라와 결혼식을 올린 곳이다. 라틴어 미사를 폐지하고 독일어로 예배를 드린 최초의 교회이기도 하다. 부겐하겐이란 루터의 고해사제가 담임하던 이 교회에서 루터가 설교목사로 사역했던 곳이다. 루터와 그의 절친 멜랑히톤의 개혁사상을 그림으로 표현해 온 크라나흐의 유명한 제단화가 걸려있기도 하다.

 

그러니 이 시교회야 말로 개신교 1호 목사사모님이 탄생한 교회요, 최초로 개신교 예배가 시작된 곳이요, 비텐베르크에서 가장 오래된 예배당이니 기념비적인 교회라고 할 수 있다. 사실은 비텐베르크란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기도 하다.

 

시 교회를 나서면 루터와 멜랑히톤의 동상이 서 있는 마르크트 광장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이 도시를 찾아온 수많은 방문객들 틈으로 조용히 서명운동이 벌어지고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서명운동? 눈 여겨 보니 돼지가 문제였다.

 

우리가 기도회를 마치고 나온 시 교회당 건물에는 유대인을 돼지로 묘사하여 기분 나쁘게 풍자해 놓은 조각이 붙어 있으니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여 화해의 차원에서 이 돼지를 제거하자는 서명운동이었다. 교회당 건물에 돼지가 붙어 있는 줄은 나도 모르고 있다가 이번에야 알게 되었다. 독일에는 수십 개가 있다고 들었다. 이 교회당은 루터시대 훨씬 이전인 1300년대에 지어진 캐톨릭 성당이었으니 루터와 돼지는 사실 상관도 없다.

 

돼지는 어떻게 교회당 건물에 붙어 있게 되었을까? 캐톨릭 교회가 왕성했던 중세의 프랑스, 스페인을 중심으로 유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처형한 유대인들을 원수로 보았다. 그래서 유대인의 학대와 추방이 끊이지 않았다. 도시마다 유대인과 함께 어울려 사는 것조차 꺼려해 게토란 곳에 잡아넣기도 했다. 특히 11세기가 시작되면서 교황 우르반 2세가 총대를 메고 시작한 십자군 전쟁은 성지 예루살렘을 점령한 모슬렘들이 공격 타겟이었지만 무수한 유대인들도 함께 죽었다. 십자군에 의해 유대인들의 죽음도 피바다를 이뤘다. 14세기-16세기에 이르러 독일에서도 본격적인 유대인 학대와 추방이 시작되었다. 유럽에서 쫓겨난 유대인들이 발붙일 곳을 찾아 나선 곳은 동유럽. 특히 유대인 학대가 느슨했던 폴란드에 몰려든 것이다. 인류최대의 범죄자로 낙인찍힌 히틀러의 유대인 대량학살 홀로코스트의 무대가 폴랜드 아우슈비츠가 되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이처럼 유대인을 증오하던 캐톨릭교회의 유산으로 남아 있는 것이 바로 예배당의 돼지 조각이다. 이 암퇘지 조각은 우선 새끼 돼지들과 유대인들이 암퇘지 밑에서 젖을 빨며 누워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암퇘지 뒤에는, 돼지의 오른 다리를 들고, 꼬리를 잡고는, 자신들의 쉠함포라스(유대인들이 부르는 하나님의 이름을 비꼬기 위해 쓰는 표현, Shemhamphoras)를 발견하기 위해 어떤 중요하고 특별한 무언가를 읽는 것처럼 꼬리 밑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는 랍비를 조각해 놓은 것이다.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는 사람들이 나눠준 안내문에는 “이 조형물은 유대인들에게 모욕이 될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이 돼지의 젖을 먹고 그 엉덩이에 손을 대는 것같이 음란하게 묘사함으로 상식적인 예의에도 어긋난다. 이것은 음란하고 충격적인 반유대적 형상이며 위엄과 예의로 장식되어야 할 기독교 예배 장소에 대한 모욕”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반유대적이라고 손가락질을 당하고 있는 것은 비단 그 돼지조각뿐 만 아니라 종교개혁의 ‘주연배우’ 마르틴 루터도 마찬가지다.

 

루터는 기독교가 같은 종교를 가진 유대인 형제들에게 너무 악한 모습을 보이며 핍박하는 것을 반성하고 1523년 ‘예수는 유대인으로 나셨다’란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면서 기독교인들의 사악함을 비판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180도 돌변한 것이다. ‘유대인들과 그들의 거짓말’을 통해 유대인 탄압을 선동하고 나섰다는 것이다. 유대인 회당을 무너트리고 탈무드를 불태우라고 선동까지 했다는 루터는 결국 두 얼굴을 가진 배신자였다는 주장이 일기 시작했다. 루터가 세상을 떠난 지 약 200년이 지난 19세기 초 독일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알고 보니 캐톨릭 교회의 농간으로 밝혀졌다. 루터에게 배반의 칼을 맞은 캐톨릭 교회는 종교개혁이후 자체적인 내부 개혁운동에 착수했고 이때 등장한 급진적 ‘예수회’가 루터를 반유대주의자로 몰아가려 했다는 것이다. 결국 히틀러의 반유대주의 뿌리는 다름 아닌 루터였다는 음모론 때문에 죽은 몸이긴 했어도 살아 있을 때의 명예에 먹칠을 당한 억울한 루터. . .

 

광장을 지나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저들의 서명운동으로 드디어 시 교회의 돼지 조각은 철거될 수 있을까? 그리고 루터는 언제 반유대주의자란 누명을 벗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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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론(Ecclesiology)



교회론(敎會論)

교회론(Ecclesiology)은 기독교 신학의 조직신학 분야의 연구 분야
1.  기독교의 기원
2.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
3. 구원의 역할
4. 교회의 정책, 치리
5. 리더십과 관련된 기독교 교회를 연구하는 것이다.

교회의 명칭

1.  카할 : "불러 모으다", "소집하다"

집회 자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회중(출애굽기 16:3,레위기 17:17,민수기 14:5,역대상 29:1), 집회(창세기 49:6, 시 26:5), 이스라엘의 총회(신명기 31:30), 여호와의 총회(민수기 16:3,20:4), 하나님의 회(느헤미야 13:1)

2. 에다 : 집회의 대상을 중심으로 회중(출애굽기 12:3, 레위기 8:3, 민수기 3:7, 여호수아 9:19, 사사기 21:13), 집회(시 7:7)

3. 수나고게 : 유대인들의 종교적 모임과 모임이 이루어진 건물로서 회당(마태복음6:2,10:17,마가복음1:21,누가복음7:4)

4. 에클레시아 : "부름을 받아 나온 사람들의 모임"이란 뜻으로 일정한 지역내에 있는 지교회(사도행전5:10~11,11:25~26,고린도전서11;18,갈라디아서1:2~3), 가정교회(로마서16:5,고린도전서16:19,골로새서4:15,빌레몬서1:2), 지교회의 총칭(사도행전9:31), 유형교회(고린도전서10:32,11:22,12:28), 무형교회(에베소서1:22~23,3:10)

5. 그리스도의 몸 : 교회의 유기적 단일성을 강조하는 교회(고린도전서12:27,에베소서1:22~23,골로새서1:18)

6. 하나님의 성전 : 교회의 거룩성을 강조하는 교회(고린도전서3:16), = "하나님의 처소"(에베소서2:21~22), "신령한 집"(베드로전서2:5), "예루살렘"(갈라디아서4:26,히브리서12:22,요한계시록21:2)

7. 진리의 기둥과 터 : 진리의 수호자임을 강조하는 교회(디모데전서3:15)

 

교회의 기원과 본질

 

구원을 위하여 선택받은 자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유기적 단일체인 "무형교회"와 구원을 실현하기 위하여 지상에 존재하는 유형적 단일체인 "유형교회"의 기원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안에 이미 창세전 부터 하나님 자신의 은혜를 나타내기 위하여 교회조직이 이루어졌다고 보는 "근원적 기원"(에베소서1:3~6)과 그리스도의 예언(마태복음16:18)대로 오순절 기원 성령강림사건으로 신약교회가 성립되었다고 보는 "역사적 기원"이 있습니다(사도행전2:2~4,47,4:32)  로마카톨릭은 외부적이고 유형적인 조직체에서 교회의 본질을 찾지만 기독교는 성도의 무형적, 영적 교류를 교회의 본질로 보고 있습니다

 

(3) 교회의 구별

 

로마카톨릭은 성직자로 구성된 "가르치는 교회", 성도로 이루어진 "듣는 교회", 영세받고 중생하여 하나님의 자녀된 자로 이루어진 "혼으로서의 교회", 외형적인 교인으로서 구성된 "몸으로의 교회"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세가지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① 전투적 교회와 승리적 교회 : 흑암의 세력과 영적투쟁을 하는 전투적 교회(에베소서6:12)

② 유형교회와 무형교회 : 신앙고백, 조직, 행정, 복음사역 등 육안으로 식별가능한 교회요소를 갖춘 "가시적 교회"와 진정한 의미에서 구원에 동참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자들로 구성된 "불가시적 교회"로 구분

③ 유기적 교회와 조직적 교회 : '유기적 교회"는 성령의 유대로 인하여 하나의 살아있는 생명체로서 연합된 성도들의 집단,  "조직적 교회"는 교회의 직분, 성례, 말씀선포, 정치 등 교회행정 조직과 관련된 조직체로서 모두 가시적교회의 구분에 속합니다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

 

성경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함께 지상에 실체적으로 임재한 것, 성도의 심령(누가복음17:20~21)과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마태복음13:31,33,44.47), 그리스도께서 왕노릇하시는 천년왕국(사무엘하7:10~16,시89:3~4,20~37), 신천 신지(요한계시록21:1~4)를 말합니다  이와같이 그리스도의 영적왕권이 미치는 영역을 하나님 나라로 볼때 지상의 교회와는 부분적으로 일치하고, 하늘에 있는 승리적 교회와는 완전히 일치합니다

 

여러 시대의 교회형태

1. 가정교회 : 아담이후 모세전까지 족장시대 교회는 경건한 가정과 제사장적 가장에 의해 보존

2. 국가교회 :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 백성은 국가를 형성했고 국가단위로 종교생활을 했습니다  상세한 의식절차에 따라 정해진 장소에서 제사장의 집전으로 수행된 이스라엘 종교는 국가로 부터 독립성을 획득하지 못했습니다

3. 신약교회 : 오순절 이후 교회는 국가와는 독립적인 조직을 가졌습니다  이때부터 교회는 범세계적으로 선교하였으며 의식적 예배에서 신령한 영적 예배를 드리는 교회로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교회의 속성

1. 통일성 : 로마카톨릭은  전세계에 퍼져있는 조직체로서 교회의 통일성을 주장하지만, 기독교는 교회가 영적으로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성도는 각기 지체가 되어 궁극적으로 한 몸을 이룹니다

2. 거룩성 : 로마카톨릭은 교리, 교훈, 예배, 권징 등과 같은 교회외적 형식에서 거룩성을 찾으나, 기독교는 성도들이 그리스도안에서 새생명을 얻고 의롭다함을 받았으므로 원리면에서 거룩성을 교회의 성도들에게 두고 있습니다

3. 보편성 : 로마카톨릭은 유형교회의 보편성을 주장하지만, 기독교는 모든 시대 모든 성도들을 포함하는 무형교회를 보편교회로 지칭합니다

4. 사도성 : 로마카톨릭은 교황권이 베드로 사도로 부터 기원하였으며 베드로만이 천국의 열쇠를 소유한 것으로 주장하지만(마태복음16:18~19), 기독교는 교회 설립이 복음에 대한 사도들의 공헌으로 하여 교회가 사도들의 가르침에 성실함으로서 사도권을 지닌 것으로 봅니다

5. 생명성 : 교회는 생명이신(요한복음 5:26,11:25, 14:6) 그리스도의 몸이며(에베소서 1:23),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는 목적(요한복음 10:10)으로 그리스도를 보내셨으며(요한복음3:16,6:39~40),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영원한 참 생명을 소유하고 있으므로(요한복음 5:24,에베소서 2:1,요한일서 5:12) 교회는 생명성을 지닌 것입니다

6. 무오성 : 로마카톨릭은 교황무오설을 주장하고 교회의 무오성을 공유하지만,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오류가 없는 성경에 기초함으로서 무오한 일면을 갖는 것입니다




창조(創造)


워치만 니의 바라와 아사와 야차르에 대한 해석
- 지방교회의 해석 

창세기의 첫 두장에서 창조행위를 가리키는 말로 세개의 다른 말이 사용되어 있다.

1. 바라 : 미리 존재하는 재료의 도움 없이 존재케하는 것

2. 아사 : 이것은 바라와는 매우 다르다.

바라가 아무런 재료도 없이 창조한다는 뜻을 지칭하는데 반해 "아사"는 이미 존재하는 재료로 부터 만들거나 형성하거나 작성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목수는 의자를 만들 수는 있으나 창조할 수는 없다.

창조기사의 6일 동안의 일들은 주로 아사의 차원에 속한다.

3. 야차르 : 이것은 도공이 진흙으로 하듯이 모양이나 형을 짓는 것을 의미한다.

이 낱말은 창 2:7에 사용되어 있다.

창조한은 무에서 부터 성립시킨 것을 의미하고
지었고는 일정한 형태로 이루었음을 지칭하며
만들었느니라는 앞서 존재한 재료로부터 제작했음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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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창조설을로 맞추기위에 워치만 니는
바라는 create로
아사를 make로,
야차르를 form이 라고 제한 해서만 사용하는데
이 해석이 창세기 안에서만 봐도 충돌 됩니다.

기본형을 적습니다.

(창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 바라
(창 2:4) (창 2:4)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 바라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 아사

(창 1:21하)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 새: 바라

(창 1:25)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 짐승, 가축, 땅에 기는 것 -- 아사
(창 2:19)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 짐승.새 -- 야차르
(창 1: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사람 -- 아사
(창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 사람 --- 바라
(창 2:8)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 사람 --- 야차르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가 히브리어를 모른 다는 것 이 창세기만 봐도 명백히 드러납니다.

구약성경 다른 부분도 바라와 아사와 야차르는 혼용하여 사용되는 것을 여러구절에서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 단어는 창조뿐만 아니라 섭리에 해당하는 분에도 사용됩니다.  --> 안찾겠습니다.

벌콥 신론에 창조개요라는 부분에서 이를 설명하니 보려면 그 부분을 찾아보세요.

재창조설로 신학을 전개하니 그 구조의 틀이 무너지면 워치만 니 신학 전반이 무너지는 겁니다. 

어디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가 정말 원문을 알았을까요?

창세기 1장과 2장부분만이라도  원어로 제대로 살폈어도 그런 전개 안했을 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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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에 나타난 다섯 가지 하나님의 사랑

첫째,  하나님의 이름(여호와)을 알려주신 사랑(창세기 2:4)

창조시 하나님은 엘로힘 하나님이었다.
엘로힘은 누구나 부를 수 있는 신의 이름이다(=신의 이름 엘).
이스라'엘', 벧'엘', 임마누'엘'의 '엘'이 바로 '신'이다. 바'알', '알'라와 같은 이방신도 '알'('엘')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자신을 자기 백성에게 알릴 때에는 여호와라고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성경에 여호와는 모두 6,823번 나타난다.
이때 여호와라는 이름은 모두 정확하게 자기 백성에게 자신을 계시할 때 쓰였다.
'엘'은 평범한 이름이다.
세상에 아버지는 많으나 아무나 나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다.
마찬가지로 아무나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없다.
하나님은 먼저 우리를 찾아오시고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셨다.
우리와 친히 관계를 맺으시는 여호와로 나타나신다.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말로 처음 나타나셨다.
여호와는 거룩한 이름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이름(발음)을 제대로 부르지 못하였다.
여호와라는 명칭을 제대로 부르지도 못하였다.
괜히 송구스러워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여호와'라고 쓰고도 제대로 부르지 못하고 하나님을 '아도나이'라고 불렀다.
우리 성경에 '주님'으로 번역된 그 말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자신을 먼저 들어내신 분이다. 부모도 아기에게 맨 먼저 아빠, 엄마부터 말을 가르친다.

사람들은 자신과 수준이 안 맞으면 속으로 '넌 알 필요도 없어'하며 무시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신을 먼저 오픈하셨다.
자신을 드러내셨다.
'하나님의 먼저 사랑'이 사람이 범죄 한 이후에도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신 이유가 되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

바울은 로마서 10장 9절에서 네가 네 입으로 예수를 주라 시인하라 했다.
즉 창세기 2장 4절의 '여호와 하나님'(=아도나이 하나님) 즉 '주님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말한다.
바울은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님은 하나라고 분명히 못 박고 있다. '나의 주님이 바로 나의 여호와 하나님'이다!

둘째, 사람을 위해 동산을 배려하신 사랑(창세기 2:5-6)

하나님은 낙원을 주시는데 그것은 사람을 위한 준비였다.
사람이 없을 때에 동산은 아직 초목과 채소가 없었다.
사람이 있을 때에 이런 것들은 의미가 있다.
주인공이 있어야 케익이나 꽃이 의미가 있다.
주인공 없이 꽃다발을 들고 다니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나님은 먼저 사람을 만드시고 자신이 만드신 동산으로 사람을 데려가셨다.
들의 초목이나 밭의 채소는 1장에기록된 풀과 씨 맺는 채소나 열매 맺는 과목과는 다르다.
2장의 이 말은 땅을 일구고 수고해야 먹을 수 있는 곡물이나 떨기나무, 관목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은 에덴동산에 이런 것들을 두지 않았다.

이 말씀은 에덴동산의 아름다움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인간 타락 이전의 모습을 상상해보라.
일하지 않고도 얻을 수 있는 열매들은 무엇을 말하는가?
천국의 모습은 지금과 다를 것을 상상할 수 있다.
천국은 상상할 수 없는 곳이다.
그저 다르다는 것만은 확인할 수 있다.
타락하여 무너진 세상에 살면서 천국을 가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저 상상으로 바라볼 뿐이다.
천국 간증은 상상이다. 즉 거짓이다. 상상은 자신 만이 간직해야 된다.
남에게 퍼뜨릴 때 문제가 발생한다.
천국을 조금이라도 상상해보고 싶다면 말씀 안에서 타락 이전의 이 에덴동산을 보고 상상해보라.
성경은 타락된 지금 세상과 조금 다른 에덴동산을 살짝 알려준다.

셋째, 창조주 하나님은 사람을 다른 피조물과 다르게 지으셨음을 알려주신 사랑(창세기 2:7)

사람은 본래 흙이었다.
흙이 가진 17가진 주요 성분이 사람 몸에도 그대로 있다.
사람도 다른 생명처럼 육체이다.
육체로는 다른 생물과 별 다를 것이 없다.
생령이 아닌 죽은 육체는 그래서 구루터기나 다름없다.
그저 썪어서 흙으로 되돌아간다. 하지만 다르다.
사람은 하나님이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셔서 생령이 되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빚어 지으셨다(히브리어 '야차르').
'야차르'는 토기장이가 흙으로 무엇을 만들 때 쓰는 단어이다.
토기장이는 의미 없이 아무렇게나 질그릇이나 토기를 만들지 않는다.
분명한 목적이 있다.
특별한 목적 즉 예술가가 아무렇게나 작품을 만들지 않는다.

그 목적이란 성경에 보면 첫째 인간의 찬양을 받기 위함이요(사 43:21)
둘째 하나님은 야곱을 '야차르'하였기에 잊지 않겠다(사 44:21)
심지어 복 중에 '야차르'하기 전에 예레미야를 알았다(사랑했다) 했다.
하나님이 알면 하나님이 사랑한 것이다(렘 1:5).
하나님은 '나는 아이라 말할 줄 모른다'고 변명하는 예레미야를 안다(사랑한다)고 하였다.
하나님은 우리의 수명도 '야차르' 하였고(시 139:16), 악인도 '야차르' 하였다(왕하 19:25).
하나님이 성도를 '야차르'하였다.
가정을 '야차르'하였고, 교회를 '야차르'하였다.
선한 목적의 '야차르'였다.
하나님은 선한 것은 선한 뜻에 맞게, 악한 것은 악한 것에 맞게 '야차르' 한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데는 하나님의 특별한 선한 목적이 있다.
여러분을 구원하시고 여러분 가정 교회를 주신 목적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선한 '야차르'를 믿는 다면 두려움이 없어진다.

넷째, 사람의 주거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창세기 2:8-14)

에덴동산은 '기쁨의 장소'라는 뜻이다.
즉 참기쁜 곳이라는 뜻이다.
그 위치는 정확하지 않다.
위치가 중요하지 않다.
인류가 죄 지은 이후로 에덴은 사라졌다.
이제 에덴은 지역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만 회복된다.
참기쁨은 예수 안에 있다.

15 가지 지리적인 언급 가운데 14 가지가 현재시제이다(지금 거기 있다는 뜻).
과거에 있었다고 말하지 않았다. 지금거기 있는 것이다. 두 강은 지금도 있다. 따라서 에덴의 과거 위치를 일부 짐작하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무너진 실락원을 지금 굳이 찾아본 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다섯째, 하나님의 사랑은 언약 사랑임을 알리심(창세기 2:15-17)

하나님 사랑은 무절제한 사랑이 아니다. 관계된 사랑이다. 아무런 언약이 없는 하룻밤 사랑이 아니라 질서가 있는 사랑이다. 하나님은 그것을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로 표현하고 있다. 15절서 8절을 반복하신 이유는 중요하다는 의미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선악의 구별을 아는 유일한 생명체다. 그래서 인간에게만 죄라는 개념이 있다. 에덴동산에 언약의 징표를 두신 이유는 하나님과의 사랑은 무분별한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관계가 깨져버리면 생명도 깨진다. 단순 연애와 부부의 차이(무분별과 언약의 차이)를 구별하라. 쥐새끼가 고구마 훔쳐 먹고 죄책감을 가지는가? 강아지가 사람 물고 죄책감을 가지는가? 강아지는 또 문다.

행복은 믿음과 순종에서 온다!

우리를 빚으신('야차르'하신) 그분께 순종하는 것이 기쁨이요 복이요 완전한 행복, 완전한 평화, 완전한 사랑을 체험하는 길이다. 일방적 사랑이 열매를 맺으려면 그 사랑을 상대방이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짝사랑하신다!

그 사랑이 맺어지려면 간단하다.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간단한 것을 못해 방황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사랑을 만드신 하나님의 사랑보다 더 귀하고 값지고 짜릿한 사랑이 어디 있겠는가. 세상의 짜릿한 사랑은 즐기면서 하나님과별거하려는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가. 누구 때문인가?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바로 그 존재, 사단이다! 하지만 누가 그 사랑을 끊으리요. 하나님 본체가 사랑이다.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호 1장 23-2장 1절/14장 4절) 내가 저희의 패역을 고치고 즐거이 사랑하겠다고 했다. 그런데도 이 사랑을 외면하는 그들은 누구인가. 그렇게 세상의 쾌락이 달콤한가!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면 동물만도 못하다. 아니 못한게 아니라 추악하고 패역하다. 고릴라는 하나님을 대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마귀의 유혹으로 타락한 사람은 마귀처럼 하나님을 배반할 수 있다. 고릴라보다 더 못한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부모 빰을 치거나 방망이로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은 극형에 처한다. 패역한 자식이기 때문이다!

원숭이보다도 고릴라보다도 못나게 살아갈 것인가?
값진 사랑을 하며 살아갈 것인가!
하나님은 창세전에 우리를 부르셨다.


에베소서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로 사랑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사랑하시는 예수 안에서 거져 주셨다.

이 비밀한 사랑을 알아야 사랑은 완성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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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말한 천지 창조와 빛과 어둠은 어떤 것인가?

빛은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 있는 자이며 어둠은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자를 말하고 있습니다. 빛을 내는 해달별을 창세기 37장에서는 하나님의 가족인 이스라엘을 말하였고 하늘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소속도 되는것입니다. 그럼 데살로니가전서5장의 말씀처럼 빛의 사람이 있다면 밤(어둠)의 사람도 있게 되는것이고 초림때에는 빛이신 예수님과 그 말씀에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을 어둠이라고 하셨습니다.


출처: https://loveismeet.tistory.com/354 [신천지 맛디아지파 공식블로그]


본문 : 창 1:1-19 (살전 5:1-8, 렘 4:23-28, 요 1:1-5, 계 21장)

● 성경이 말한 천지 창조(창1장)

하나님께서 창세기 1:1에 천지를 창조하실 것을 말씀하셨고, 이 때로부터 6천 년이 지난 계시록 성취 때(계21장)에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다."고 하셨다. 이로 보건대, 창세기 1장의 말씀은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부패하고 낡아서 없어져 갈 때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으로 볼 수 있다.

처음 하늘과 새 하늘, 그리고 처음 땅과 새 땅은 영적인 것인가, 육적인 것인가? 이는 육적 세계의 명칭을 빙자한 영적 세계의 멸망과 재창조를 말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둘째 날과 셋째 날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기 전, 첫째 날의 2절(창1:2)에 혼돈하고 공허한 땅이 있었고 흑암한 하늘이 있었다. 그리고 수면(水面)이 있었다. 창세기 1:1의 창조 전에 있었던 이것들은 무엇인가? 첫째 날에 빛을 찾은(창1:3) 후 있게 된, 둘째 날의 하늘과 셋째 날의 땅은(창1:7-10) 재창조가 아닌가?

 

하나님이 왜 빛을 수면에서 찾으셨는가? 왜 하늘(궁창)을 물 가운데 만드셨는가? 왜 땅이 물속에서 나왔는가? 첫째 날의 땅과 셋째 날의 땅은 어떻게 다른가? 첫째 날의 땅도 물(수면)도 흑암한 하늘도 새로운 창조가 아닌, 본래부터 있었던 것이 아닌가?

넷째 날에는 물 가운데 있는 궁창에 해, 달, 별을 만들어 주야(晝夜)를 주관하게 하셨다(창1:14-18). 첫째 날의 빛과 넷째 날의 빛은 어떻게 다른가? 첫째 날의 빛이 자연계의 해이고, 이 빛(햇빛)으로 셋째 날의 초목과 채소가(창1:11-12) 났다면, 넷째 날에 창조된 해, 달, 별은 무엇이며, 하늘에 해가 두 개란 말인가? 그리고 어째서 하늘이 물속에 있는가?(창1:6) 또 넷째 날에 만든 것이 자연계의 해, 달, 별이라면, 해가 있기 전(前)인 셋째 날에 나무와 채소가 있을 수 있는가?

 

창세기 1장이 자연계 창조라면 이치에 맞지 않는다. 이 어찌 진리라 할 수 있겠는가? 이는 다른 뜻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이는 자연계를 빙자한 영적세계의 재창조를 말한 것이며, 이룰 예언이다.

 

● 성경이 말한 빛과 어둠 (살전5장)

'빛'은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 있는 자이며, '어둠'은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자이다(살전5:1-8). 그 이유는 말씀을 빛 또는 생명이라 하셨기(요1:1-4) 때문이다.

 

창세기 37:9-11에 이스라엘 가족을 해와 달과 별이라 하였으니, 해, 달, 별은 하나님의 가족(선민)이다. 해, 달, 별이 있는 곳이 하늘이니, 하나님의 가족이 있는 교회(장막)가 하늘이다. 이 하늘과 해, 달, 별은 창세기 1장 8절의 하늘(궁창)과 14-18절의 해, 달, 별과 다름이 없다. 그리고 하나님의 가족이 있는 교회가 하늘이니, 하나님의 가족이 없는 교회는 땅이다.

예레미야 4:23-25에서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새가 다 날아간 것은 하나님의 장막(교회)과 선민이 부패로 인하여 멸망받은 것을 알린 말씀이었다. 이는 창세기 첫째 날과 같다.(창1:2)

데살로니가전서 5장의 말씀에 낮(빛)과 밤(어둠)의 사람이 있고, 요한복음 1장에도 빛과 어둠의 사람이 있으며, 예수님은 빛으로 이 땅에 오셨다(요12:46). 그런데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하였다(요1:5, 9-11). 어두움의 세상에 빛이 비취었다는 것은, 무지하고 부패한 어두움(밤)의 시대가 가고 새 시대가 왔음을 알 수 있다. 이로 보건대 한 시대가 부패함으로 새로운 시대가 창조되는 것이었다.

 

6천 년이 지난 오늘날, 계시록에서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지고 새 하늘 새 땅이 창조된 것은(계21:1) 창세기(1장)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다. 부패한 시대는 창세기 1장과 같이 빛이신 하나님이 떠난 세상이요. 이는 밤이며, 없어지는 것이고, 하나님이 함께하는 세상은 빛이요 낮이며, 새로 창조되는 것이다. 또한 생명이신 하나님이 함께하는 곳은 생명이다. 오늘날 계시록에서 증명한, 없어지는 시대는 밤과 어둠이요(살전5장), 다시 창조되는 열두 지파는 낮과 빛이며, 하나님의 세계 가족들이다. 이를 믿지 않는 자는, 요한복음 1장의 말씀같이 빛이 어둠에 비취었으나 어둠이 되어 깨닫지 못한 자들이다.

 

빛은 무지하고 부패한 밤에게 같은 빛이 되게 하고자 빛을 전하고 있다. 빛은 생명이니, 빛이 없으면 만물은 살지 못한다. 하늘의 빛과 비와 공기같이 우리는 만물에게 생명을 전하고 있다. 이 생명을 받아서 살기를 기도한다.



출처: https://heavenstroy.tistory.com/60 [Sky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