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ybrid Church / 언론 자료 모음




Hybrid Church(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모두 사용할 수 있는 교회)

* hy·brid[ ˈhaɪbrɪd ] 1. 잡종,  2. 혼성체 

[미래세대 목회모델] 하이브리드 교회가 살아남는다!

-빛과소금의교회 장창영 목사

오늘날 한국 교회가 위기를 맞이한 것은 교회가 성경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창조질서와 자연법칙을 보면 ‘무한 성장’은 없어요.
각기 분량만큼 성장하는데 충분히 성장한 이후에는 반드시 성숙해지는 단계로 넘어가죠.
우리 인간 또한 20세까지는 몸이 성장하고 그 후에는 성숙해가면서 새 생명을 낳지 않습니까?
이처럼 교회 또한 성장 이후에는 성숙해가며 생명을 낳아야 합니다.
하나의 교회로 몸집을 계속해서 불려가는 것은 비성경적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흩어 보내셨어요.
반대로 한국 교회는 무한성장에 치중하다보니 점점 그 영향력이 약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빛과소금의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장창영 목사는 백석대학원을 졸업한 후 2007년에 교회를 개척했다.
당시 31세였던 장 목사는 아내와 4살 된 딸과 함께 가정 교회를 시작했다.
그는 상처받은 영혼들과 이웃을 섬겼고 조금씩 사람들이 모이면서 장소가 협소해지자 예배 처소를 두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루는 여호수아서 말씀을 묵상하며 큐티를 하던 중 ‘요단강을 건너라’는 감동을 받았다.

“요단강이 어딘지 기도하며 응답을 구했더니 바로 오른 편에 있는 ‘중랑천’임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장 목사는 개척 5개월 만에 중랑천을 건너 공릉동(서울시 노원구)에 상가를 얻어 설립예배를 드렸다.
2년 후, 늘어난 성도들과 함께 40일 간 특별 새벽기도를 드리고 다시 예배당을 이전했다.
그는 45평 상가에서 7년 동안 목회하며 120명의 성도와 함께 행복한 신앙생활을 이어갔다.
목회 10년 차가 되던 해, ‘다 찼으니 옮기라’는 성령의 감동을 받고 지금 위치한 구리시 갈매동에 예배 처소를 마련하여 300명의 성도를 섬기고 있다.

교회 자립이 쉽지 않은 오늘 날, 빛과소금의교회가 꾸준히 성장할 수 있었던 동력은 무엇일까?
장 목사는 그 비결이 누구나 알고 있는 ‘기본’에 있다고 말한다.

건강하면 성장합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누구나 아는 내용입니다.
‘재정의 투명성’,
‘세습 하지 않는 것’,
‘사유화 하지 않는 것’ 상식이지요.

그 다음에 목회자가 준비되어 있어야 하고 목회 전반에 필요한 리더십을 갖춰야 해요.
목회의 본질인 목양에 힘쓰지 않고 기술을 배우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이러한 기본을 갖추면 영혼을 사랑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일꾼이 양육되고 제자화되는 것이지요.
이제 저희 교회는 15년 차가 됩니다.
작지만 단단한 교회가 된 것 같아서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현재 빛과소금의교회는 16개의 형제 교회와 함께하고 있다.
장 목사는 한 교회의 몸집을 불리지 않고 개척하고 입양하며 형제 교회를 늘여나갔다.
오산, 수원, 노원구를 포함하여 멕시코, 일본, 중국, 방글라데시, 탄자니아, 시리아, 미얀마 등지에 16개 교회를 개척하고 입양했다.

‘빛과소금연합’ 플랫폼은 형제 교회를 재정적으로 지원하기도 하고, 교역자들이 함께 성장하는 기회를 가지며 함께 걸었다.
홀로 외롭게 목회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의지할 수 있는 든든한 기둥이 된 것.
최근에는 수원에 있는 한 교회 목회자가 ‘빛과소금’에 함께 하고 싶다며 찾아왔다.
이런 형태로 함께하는 교회의 경우 일종의 본부격인 갈매동 빛과소금의교회가 목회 전반에 걸친 디자인과 행정지원을 돕는다.
또한 빛과소금연합의 목회자, 또는 성도들을 위한 세미나를 공동으로 개최할 수 있기 때문에 작은 교회가 혼자 감당하기 힘든 사역을 ‘연합 사역’을 통해 얼마든지 진행할 수 있다.

빛과소금 플랫폼에 함께하고 있는 교회들은 합신, 합동, 백석, 독립교단 등 교단도 다릅니다.
하지만 환경을 뛰어넘어 교제하고 함께 하는 것이 가능해요.
목회자들이 가진 은사가 다 다르기 때문에 각자 가진 달란트를 살려 서로를 섬기고 지원할 때 놀라운 시너지가 있습니다.”

혁신, 플랫폼, 하이브리드

저는 ‘혁신’을 강조합니다.
혁신이란 본질은 유지하면서 비본질적인 것은 과감하게 바꾸는 것을 의미합니다.
임직식을 할 때 돈을 내는 것을 끊었고, 장로 권사가 계급화 되는 것을 바꾸었습니다.
교회는 섬기는 문화가 되어야 하니까요.
오늘날 60대 이상의 장로님들이 교회를 이끌고 가는 것이 보편화되어 있는데 그러면 젊은이들의 생각이 반영되기가 쉽지 않지요.
그래서 교회의 중요한 정책 결정은 30-40대 운영위원들이 하고, 연세가 있는 분들이 자문위원으로 참여하고 계세요.”

장 목사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성도를 섬기는 사역 또한 직관적이고 피부에 와 닿는 도움을 제공했다.
예를 들면 교인이 비즈니스를 할 수 있는 시드머니를 제공하는 ‘성도의 자립 프로젝트’를 진행한 것.
아울러 지역사회를 섬기는 다양한 사역도 병행했다.
그러면서도 목양의 본질인 ‘말씀과 기도’에 힘쓰고 이를 뜨겁게 강조하여 은혜가 식지 않도록 했다.

“코로나 이후, 교회는 ‘하이브리드’가 기능을 갖춰야 합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병행할 수 있어야 해요.
작은 교회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인력과 재정이 드는 일이 아니에요.
유튜브 플랫폼을 무료로 사용할 수 있고, 장비를 갖추는데 100만 원 정도면 충분합니다.
그래서 교회 규모와 관계없이 온라인 예배, 줌 모임을 통한 소그룹이 가능해요.”

비대면 체제로 바뀌면서 장 목사는 코로나 이전보다 더욱 바빠졌다.
장년부 여섯 그룹을 줌으로 인도했는데, 놀랍게도 코로나 이전보다 성도와 재정이 더욱 늘었다.
온라인 예배를 드리게 되면서 예배에 참여하고 싶어도 여러 가지 이유로 올 수 없었던 사람들이 함께 하기 시작했다.
장 목사는 향후 ‘하이브리드형 교회’, ‘플랫폼 교회’에에 관심 있는 목회자들을 위한 세미나와 해외 현지 목회자 양성 사역을 위해 꾸준히 매진할 계획이다.

제 3의 공간을 잡아라!

장 목사는 한국 교회가 과감한 혁신을 통해 다음 세대와 접촉하지 않으면 빠르면 10년, 늦어도 20년 안에 교회가 더 이상 유지하기 힘든 수준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1공간은 우리가 사는 현실,
2공간은 온라인 세상입니다.
그런데 다음 세대는 제 3의 공간,
즉 온라인 속의 가상 세계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나아갈 선교지가 바로 그곳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는 50-60대 목회자가 60-70대 직분자들과 함께 교회를 이끌고 있기 때문에 3 공간은커녕 2공간으로도 진입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10년, 20년 후에는 어떻게 될까요?
지금 교회에 2030세대가 얼마나 있죠?
이미 답은 나왔습니다.
교회에 아무도 없게 되죠.
회복 불가능한 상태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젊은 후임자 목사가 오면 좋아질 거라 생각하는 분들도 더러 계신데,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10대, 20대는 이미 혁신적인 교회를 찾아갔습니다.

장창영 목사는 온라인 사역에 힘쓰는 한편, 다음 세대가 오프라인을 경험하게 함으로써 교회 사역이 온라인에만 국한되지 않음을 주지시켜주는 것 또한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온오프라인을 유동적으로 변환하며 사역할 수 있는 ‘하이브리드 교회’ 구조를 탄탄하게 다져가고 있다.

다음 세대는 낚시를 온라인에서 즐깁니다.
바이든 대통령은 온라인 게임 속에 선거 캠프를 차리기도 했어요.
세상이 변했습니다.
한국 교회도 속히 3공간과 1공간을 오갈 수 있는 역동성을 갖추고, ‘이미 다가온 미래’에 잘 대처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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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브리드 교회(Hybrid Church)와 온라인 예배(조성실)

2022년 4월 13일
조성실(목사, 소망교회 온라인사역실장)

약 2년 전 코로나로 인해 교회의 문이 닫혔을 때, 교인들의 반응은 두 갈래로 나뉘었다.

하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대면 예배를 고수해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다른 하나는 방역을 위해 온라인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러한 입장의 차이는 신학적, 목회적 논쟁으로 이어졌고,
그로부터 약 2년이 지난 지금, 많은 교회들이 대면 예배와 비대면 예배를 병행하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대면 예배와 비대면 예배를 대립이나 선택의 요소로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대면 예배가 옳고 비대면 예배는 틀린 것이 아니다.
또한 비대면 예배가 미래이고 대면 예배는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다.
예배의 본질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것’이라면(요 4:24),
우리는 우리가 예배하는 곳에서 하나님을 만난다.
그 만남의 장소가 예배이다.

때문에 우리는 온오프라인의 각 영역을 고유하게 다룰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이분법적인 분리가 아닌, 하나의 유기적인 연결로서의 장소를 의미한다.
온라인이 필요(needs) 기반의 공간이라면, 오프라인은 열망(wants) 기반의 공간이다.
하이브리드 교회는 온라인과 오프라인 중 어느 한 장소를 기본으로 삼지 않는 교회를 말한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중 어느 한 곳에 장소의 우선성을 두지 않는다.
하이브리드 교회의 예배는 두 영역 모두를 진정성 있게 돌보고, 동일한 관심을 둔다.

콘텐츠 :

하이브리드 교회의 ‘온라인 예배’는 단순히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예배 현장을 생동감 있게 중계하는(streaming) 것에서 그쳐서는 안 된다.
예배 중계를 위해 많은 카메라를 세팅하고, 음향을 조정하고, 자막을 적절히 배치하여도, 그것이 온라인에서 일방적인 스트리밍으로 끝난다면, 온라인 예배에 참석하는 교인들은 지루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온라인 예배는 현장 예배와 완전히 동일한 내용이 아닌, 온라인 예배 참석자들만을 위한 특별한 예배 콘텐츠를 구성해야 한다.

예를 들어, 새들백 교회의 경우에는 주일 예배 스트리밍의 도입과 끝에 항상 ‘웰커머’(welcomer)가 등장한다.
이들은 화면을 통해 온라인 성도들을 환영하고, 그들만을 위한 안내와 공지를 전달한다.
현장 예배에서도 설교자는 항상 카메라 너머의 온라인 예배자를 고려하며, 그들을 위한 멘트를 준비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온라인 예배에 참여하는 회중들은 자신들의 존재를 인정받고, 서로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플랫폼 :

온라인 예배를 위해서는 플랫폼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최근 온라인 예배를 위해 활용할 수 있는 플랫폼은 너무나 다양하다.
페이스북은 교인들이 매우 쉽고 간편하게 접속할 수 있게 만든다.
유튜브는 방대한 사용자 수와 알고리즘을 통해 새로운 성도들에게 노출될 기회를 가진다.
비메오는 유튜브나 페이스북보다 규모는 작지만, 더 좋은 영상 퀄리티를 제공하고 광고로 인한 피로감을 줄여 준다.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줌’을 활용하고, 메타버스 기반의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게더타운’을 활용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플랫폼에는 각각의 단점이 존재한다.
페이스북은 계정이 없이는 접속이 불가능하다.
유튜브는 계속해서 다른 채널의 콘텐츠를 추천하기 때문에 이단의 영상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고, 작년(2021년 6월)부터 모든 영상에 유튜브 자체 광고를 내보내고 있기 때문에 이로 인한 피로도가 높아졌다.

비메오는 확장성이 떨어지고 비용이 유료라는 단점이 있고, 줌과 게더타운은 아직 비디오와 오디오의 품질이 낮다는 한계가 있다.
교회 지도자나 온라인 사역 담당자는 이러한 각 플랫폼의 장단점을 파악하고, 그에 맞는 계획과 예산을 수립해야 한다.
그리고 이제는 한 플랫폼만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 예배를 멀티 스트리밍을 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실시간 예배와 녹화 예배 :

하이브리드 교회의 예배는 실시간으로 드려야 하는가?
아니면 녹화된 예배를 송출해야 하는가?
교회의 실무자는 각 예배의 목적과 상황에 맞게 온라인 예배의 형태를 결정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두 형식의 장단점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먼저, 실시간 예배는 공동체의 관계성을 증대시킨다.
예배 인도자나 설교자는 채팅이나 이모티콘 등의 반응을 통해 실시간으로 온라인 회중의 참여를 유도할 수 있다.
이는 각자의 자리에 멀리 떨어져 있지만 서로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게 하여 예배를 통해 공동체성을 강화한다.
그뿐만 아니라 온라인 봉사자들은 채팅을 통해 예배에 참여하는 교인들을 환영하고, 개별적으로 반응하며 상호 교류한다.
라이프닷처치에서 제공하는 ‘처치 온라인 플랫폼’(churchonlineplatform.com)을 보면, 예배 중 ‘채팅 기능’과 ‘하트, 박수, 찬양’ 등의 ‘리액션 버튼’이 존재한다.
성도들은 채팅과 리액션 버튼으로 예배에 참여한다.
온라인 봉사자들은 각 예배 순서마다 필요한 안내 사항을 채팅창을 통해 제공한다.
가령 새가족 환영의 시간에는 새가족 등록 링크를 올려주고, 헌금 시간에는 온라인 헌금 링크를 안내해 준다.
또한 ‘기도 요청’(Request Prayer) 버튼을 누르면 즉시 온라인 기도 봉사자와 연결되어 1:1로 중보기도를 요청하고 기도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유기적인 실시간 예배를 위해서는 많은 준비와 인력, 그리고 예산이 투입되어야 한다.
실시간으로 생동감을 전할 수 있는 중계 역량이 갖추어져야 하고, 또한 온라인 예배 봉사자들을 모집하고 관리할 수 있어야 한다.

이에 비해서 녹화 예배는 비교적 적은 예산과 노력으로 높은 수준의 예배 영상을 제작할 수 있다.
NG가 났을 경우에는 다시 재촬영을 할 수 있고, 훨씬 더 다양한 카메라 워킹을 시도할 수 있기 때문에 예배의 생동감을 연출하기에 용이하다.
찬양의 경우, 세팅된 환경에서 최적의 음질로 녹음하고 이후 다양한 공간에서 진행된 비디오 촬영 결과물로 편집하면, 평면적인 실시간 스트리밍 찬양보다 훨씬 몰입감 높은 찬양 영상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녹화 예배는 촬영 이후에 편집에 투입되는 시간과 에너지가 확보되어야 하고, 성도들에게는 실시간이 아니라는 인식 때문에 예배 참여나 공동체의 관계성을 만들어 내기에 부족함이 있다.

이처럼 실시간 예배와 녹화 예배에는 각각의 장단점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각 상황에 따라, 그리고 그 효과를 고려하여 예배 형식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주기적으로 예배에 참여하는 회중들의 피드백을 듣고,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여 새로운 방식으로 예배 형태를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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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코로나, 하이브리드 목회의 5가지 방향성

미국장로교(PCUSA) 한인목회실에서는 최근 전국 한인교회에 2021년 목회서신을 발송했다.
서신 안에는 한인목회실 조문길 목사의 글이 담겨 있는데 그 내용에 많은 목회자들의 공감이 있었다. 

조문길 목사는 백신접종이 시작되었지만 팬데믹이 끝난 것이 아니라 앞으로 상당기간 여전히 코로나와 함께하는 “with-COVID”가 될 것이라며, 이에 대한 대책으로 ‘대면’과 ‘비대면’이 공존하는 하이브리드 목회를 소개했다.

그리고 5가지 주제로 도전했는데

△ 성도들의 개인의 경건을 위한 도움
△ 대면예배와 같은 감동을 위한 인터넷 예배의 예전 마련
△ 설교의 중요성 늘어남
△ 상생의 정신과 이웃과의 나눔
△ 교인의 영적 가이드로서의 목사의 역할 강화 등이다.


새해가 되고 백신 접종이 시작되면서 이제 우리의 관심은 집단면역을 이루고 코로나가 종식된 후의 세상의 모습은 어떠할까, 즉 “post-COVID”에 초점이 맞춰지는 것 같습니다.
이에 관하여 많은 개인들과 전문가들이 예측을 하는 공통점은 코로나 이후의 세상은 한 마디로 “with-COVID”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백신과 집단면역을 통하여 인간이 생리의학적으로는 코로나로부터 웬만큼 자유해진다고 하더라도, 코로나 기간 동안 살았던 인간의 삶과 모습과 방식은 여전히 남아서 상당 기간 우리와 함께 갈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미래의 세상은 (상황과 문화에 따라서 다소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대면’ 과 ‘비대면’이 어느 정도 공존하는 하이브리드(hybrid) 의 세상이 될 것이며, 아마 교회와 우리들의 목회도 역시 하이브리드의 형태가 당분간 지속될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겠습니다.

 지난 한 해를 되돌아보면, 코로나 하나만도 감당하기 어려웠는데, 우리가 이해하고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버겁고 아픈 상상 못했던 일들이 수없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2천 5백만 명의 확진자-무증상자를 포함하면 몇 배 더 많을 것이라고 함, 40-50만 명의 사망자, 시신보관용 냉동 트럭들, 수천만 명의 실직자들, 푸드 뱅크 앞에 늘어선 차량들, 끝없이 달아오르는 주식시장, 미네소타 조지 플로이드 질식 사망, 인종 갈등과 폭동, 양극화와 분열, 유례없는 대통령 선거, 국회의사당 유혈 사태, 문을 못 여는 공립학교들과 정상 수업을 진행하는 사립학교들, 등등...) 

이런 암담하고 혼돈스러운 현실의 세상과 그 안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려움, 불안감, 분노, 초조함, 우울증, 절망, 무기력에 빠져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교회는 이런 위기에도 불구하고 교회이기 때문에 “with-COVID 시대에 세상이 요구하는 하이브리드 목회라는 현실 앞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할 수 밖에 없고 우리 교회 지도자들은 정직하게 이에 대한 답을 해야만 합니다.

오늘 저는 거의 1년을 은둔자처럼 지내며 위의 질문에 대해 제 자신이 했던 답의 내용들을 조금은 구체적으로 여러분들과 나누고자 합니다.

물론, 오늘 나누고자 하는 내용은 저의 답이기는 하지만 교단의 한인교회들을 마음에 품고 제 자신을 돌아보며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혹시 여러 동역자들께서 앞으로의 하이브리드 목회를 준비하는데 한번쯤 참고한다면 여러분들의 목회는 물론 교단 전체의 한인교회 목회에 유익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부디, 동역 하시는 당회와 기도하고 의논하고 고민하는 가운데 with-COVID 시대에 섬기시는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원하시는 하이브리드 목회의 그림을 그리며 미래를 준비할 수 있기를 기도 하겠습니다.

1. 개인의 경건 (Individual Piety)

한국 교회는 지금까지 집단적 영성(Corporate Piety)을 중요시 하며 이에 근거하여 목회를 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기도를 해도 개인기도 보다는 모여서 새벽기도와 통성기도 혹은 중보기도를 했으며, 예배를 포함하는 성수주일을 그 무엇보다 강조해 왔으며, 교회에서 구역 모임에서 식사를 나누며 친교하고, 신앙 증진을 위하여 부흥회와 사경회도 수없이 가졌으며, 성경공부도 모여서 하고, 선교와 봉사도 개인적으로 각자의 상황에 맞게 하기보다는 단체로 훈련받고 동일한 시간과 장소에서 단체로 진행한 것들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간의 한국교회 발전의 원동력이었던 이러한 집단적 경건 중심의 목회는 모두 다 ‘대면’ 이라는 틀에서만 가능했다는 것이 이제 우리의 고민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옆 좌석의 교인들과의 수평적인 교감이나 연결 없이 스크린 앞에 앉은 한 사람이 혼자만의 고유한 장소와 시간에서도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의 사람으로 거듭나 이 험한 세상에서 묵묵히 자유하게 예수님의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목회자가 인도하여야 할 시간이 다가온 것 같습니다.

한 교회를 돌보는 목사는 “with-COVID” 세상을 벅차게 살아가야 하는 사람이 홀로 개인적 경건을 이루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들이 높은 수준의 개인적 경건에 다다를 수 있도록 기도하며 생각하고 창의적인 목회를 준비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2. 인터넷 예배의 예배식 / 예전(liturgy) 

저는 지난 11개월 동안 여러 교회들의 (심지어 한국의 교회들의) 인터넷 예배를 경험하고, 또 주위의 다양한 평신도들과 대화해 본 결과, 예배당에서 드리는 예배와 비슷한 수준의 감동을 위하여서는 인터넷 예배를 위한 예전(Liturgy)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로, 찬송을 부를 때에 예배당 좌우에서 들려오는 성도들의 우렁찬 목소리 대신 스피커에서 나오는 목사님과 단둘이 찬송을 부른다는 것은 (목사님이 아무리 음악성이 뛰어난다 하더라도) 평신도로서는 꽤나 어색할 뿐 아니라 맥이 빠지는 일입니다.
그 외에도 솔직히 현장예배의 여러 순서들에 푹 빠져서 따라가기 어려운 부분들이 많이 있고 예배의 맥이 자주 끊어짐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앞으로 총회 신학예배부에서 인터넷 예배의 예전(Liturgy)을 개발할 것을 제안 하겠지만, 일단 개교회는 인터넷 예배에 참여하는 분들이 각자의 집과 거실에서도 현장예배와 비슷한 수준의 생동감과 성령의 감동이 있는 예배의 기쁨과 의미를 회복할 수 있도록, 예배자의 입장에 서서 나름대로의 예전(Liturgy)을 개발하시고 예배 중의 디테일한 부분까지 신경을 써서 준비한다면 큰 유익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설교 중에는, 주보가 없거나 늦게 예배에 들어오신 분들을 위하여, 가끔 아래 자막으로 본문과 제목을 띄워 주는 것도 작은 배려이지만 예배자로 하여금 설교에 집중케 하는 좋은 방법일 것입니다.
그 외에도 디테일 하게 따져보면 작은 변화를 통하여 인터넷 예배의 효과를 끌어 올릴 수 있는 부분들이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3. 설교(Homily)의 중요성

교회의 역사에서 설교가 중요하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지만, 하이브리드(hybrid) 목회에서는 그 어느 때 보다도 설교와 말씀이 가장 중요하다고 확신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 인터넷으로 드릴 때는 말할 것도 없고 마스크를 쓰고, 띄엄띄엄 앉아, ‘평화의 인사(Passing the Peace)’ 같은 순서도 없고, 찬송도 맘껏 못 부르는 상황으로 현장예배를 드리다보니, 코로나 이전 ‘대면’ 시대에 느끼고 누렸던 예배순서 전체를 통하여 임하는 성령의 감동과 감격에 빠지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예배의 다른 순서들 보다 설교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둘째, 코로나에 지치고, 이념과 정치 논쟁에 함몰되고, 끝이 안 보이는 경제적 압박의 벼랑 끝 현실 앞에서 사람들이 교회를 찾는 경우도 때로는 있을 수 있겠지만, 많은 경우에는 이전보다 더 교회를 외면하고 멀리하며 더 냉담해 질 수 있습니다.
특히 많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신천지, BTJ, IEM 같은 집단들이 교회와 동일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설문과 통계들을 보면 양적인 면에서의 교회 미래는 결코 밝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사람들이 교회를 거부하고 멀리 하면 할수록 그들의 내면세계는 그만큼 더 공허해지고 어두워지고 무의미해 진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 이런 작은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한 영혼의 그 공허하고 어두운 내면을 채우고 밝히며 참된 자신을 발견하고 하나님 안에서의 인생이 정말 살만한 가치와 의미가 충분하다는 것을 깨우쳐야 하며, 바로 그것이 코로나 시대에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주신 사명이라고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주로 설교로 가능하기 때문에 “with-COVID” 시대의 하이브리드 목회에서는 설교가 중요해지는 것입니다.

지난 추석 때에 코로나로 답답하고 절망 가운데 있던 한국에서 70을 넘긴 어느 노 가수의 멘트와 가요들이 한국민 전체에게 큰 희망과 위로가 되었다는 소식은, 또 최근 들어 한국에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불고 있는 트롯 열풍 현상은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요?
가요의 한국적 가락이 좋아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그러한 가락과 함께 짧은 몇 소절의 가사가 마음에 와 닿아 옛날 생각도 나고, 잘못 살았던 지난 세월에 대한 짙은 아쉬움과 함께 이렇게 사는 것은 아닌데 라는 생각들, 그렇지만 그래도 이게 끝이 아니니 다시 한 번 일어나자... 같은 그들의 내면을 두드리고 움직이는 강력한 매력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특히 코로나와 지난 1년간 발생했던 엄청난 사건들 속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은, 어떤 신학적 교리나 이론 혹은 기독교적 이념이나 사상 혹은 성경해석이나 강해의 메시지가 아니라, 건전한 신학과 성경에 뿌리를 두면서도 고달픈 인생에 위로와 소망이 되며, 망가진 것 같은 자신들을 다시 한 번 삶의 자리에서 용기를 갖고 일어나 이제라도 제대로 된 인생길을 걸어가도록 하게 하는 즉 그들의 내면의 결핍을 채우며 소망을 불어넣는 그런 참된 메시지(설교)에 목말라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6.25전쟁 이후 1950년대와 60년대 그리고 적어도 70년대 초까지, 한국의 교회들이 성장하고 그로 인하여 나라가 여러모로 발전하여 오늘의 한국을 가능케 했던 가장 큰 이유는, 처절한 동족상잔으로 나라 전체가 폐허가 된 잿더미에서 가난하고 기댈 곳이 없던 절체절명의 상황이었지만, 당시 목사님들의 설교가 깊은 절망 가운데 있던 국민들이 또 실의에 빠져 있던 월남 실향민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일어나도록 하는 소망과 위로의 메시지이었다는 사실이 아주 좋은 예입니다.

생명의 말씀 외에는 인간의 공허하며 차갑고 어두운 내면을 찾아가 따뜻한 위로와 함께 소망을 불어 넣을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특히, 유튜브와 각종 SNS와 그에 장착된 인공지능(AI, Artificial Intelligence)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인간들의 삶의 양식과 성향 심지어 부족하고 필요한 부분들까지도 예측하여 전 세계 사람들을 각각 커스터마이저(customize) 해서 그들에게 맞는 사이버 공간이라는 가상공간으로 몰아넣어 다양한 것들을 경험하게 합니다.
교회와 목사님의 설교가 이런 현대인들의 특성과 약점을 간파하여 심령을 새롭게 하는 설교를 통하여 가상공간에서 ‘비대면’으로라도 그들을 만날 수 있다면 우리의 미래는 아주 긍정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말처럼 그렇게 쉬운 것도 아니고 내 힘으로 감당할 수도 없는 것이기에, 우리 모두는 성령님을 온전히 의지하여 말씀을 전하는 사명을 신실하게 감당해야만 합니다.

4. 상생의 정신 / 이웃과의 나눔(Sharing)

코로나 이후의 두드러진 사회적 현상 중 하나는 빈익빈 부익부로서, 어렵고 힘들고 소외당한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나며 그들이 더욱 힘들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럴 때에 교회가 상생의 정신에 근거한 나눔을 실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작년 봄에 미국 정부가 개인에게 1,200불씩 (한국은 가정당 1백만 원) 코로나 지원금을 지급했습니다.
당시, 저는 미국이나 한국이나 그 지원금이 꼭 필요한 분들은 각자의 필요에 따라서 사용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그것이 없어도 기본 의식주에 별지장이 없는 크리스천들은 그 지원금들을 모아서 주위의 생계가 어렵고 힘든 분들을 도울 수 있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만약 당시에 교회가, 지원금으로 골프를 즐기고 한우를 사먹고 명품으로 치장하는 세상과는 달리 나눔의 운동을 일으켰더라면, 교회를 바라보는 세상의 시각이 크게 변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라기에는 최근 지급된 2차 지원금에 관하여는 교회들이 앞장서서 예수님의 정신에 따라서 그런 운동을 벌여 나갈 수 있으면 하는 바람이 제게 있습니다. 

또한, 비대면 수업을 위하여서는 컴퓨터가 필수적인데, 많은 어려운 가정들은 인터넷도 제대로 없고 자녀들 각자의 컴퓨터가 없기 때문에 학업을 제대로 따라갈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요즘은 직업을 찾거나 실직수당을 신청해도 인터넷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결국, 교육의 빈익빅 부익부 현상이 발생하며, 이는 앞으로 10-20년 후에는 우리 모두가 큰 대가를 치러야만 하는 사회적 부담으로 전체에게 돌아올 것이 뻔합니다. 한인 교회들이 앞장서서 지역의 어려운 가정들에게 (새것이 아니더라도) 기본적인 컴퓨터를 공급해 주고, 그 자녀들이 교육에서 뒤쳐지지 않도록 돕는 운동 같은 것을 시도하면 참 좋겠습니다. 이외에도 교회가 이웃과의 나눔을 실천할 수 있는 길은 찾아보면 너무나도 많습니다.

총회에서 보면, 미국장로교 내의 많은 미국 원주민(Native American) 들과 히스패닉(Hispanic) 교회와 교인들은 재정 형편이 허락지 않아서 인터넷 예배도 드리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한인교회들이 앞으로 지속적인 나눔의 실천을 이어간다면 지역사회는 물론 교회도 회복의 역사를 경험할 것으로 확신합니다.

5. 영적 가이드(Spiritual Guide)로서의 목사

미국장로교에서 목사의 호칭을 공식적으로 “말씀과 성례전의 목사 (Minister of Word & Sacrament)” 라고 부르다 보니, 자연스럽게 목사는 말씀을 가르치는 영적 지도자(Spiritual Leader)로 인식되어 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대면’과 ‘비대면’이 공존하는 “하이브리드 시대”에서 목사는 한편으로는 영적 지도자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영적 가이드가 되어야 합니다.
마치 여행 가이드가 그를 따르는 관광객들에게 기본적인 코스와 안내를 해주지만 여행 중의 여러 옵션들 중에 특정한 것을 강요하기 보다는 각자 자신의 취향과 입장에 따라서 여행을 즐길 수 있도록 돕고 안내하는 것처럼, 영적 가이드는 기본적인 장로교 신앙과 말씀으로 가르치지만 ‘비대면’ 세상에서 또 다양성이 인정되는 “with-COVID” 세상에서 개인적 경건(Individual piety)을 추구하는 사람이 자신만의 독특한 방법과 길을 통하여 삼위일체의 하나님과 깊이 교제할 수 있도록 하면서도 탈선하지 않도록 안내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목사는 어떤 특정한 신앙관(Dogma)을 주입식으로 가르치기 보다는 교인 각자가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고 참된 자신만의 신학자(theologian)가 될 수 있도록 안내하고 도와주겠다는 자세를 취하여야 합니다.
결국, 영적 가이드로서의 목사는 이미 우리가 해오고 있는 설교와 성경공부 이외에, 성경과 신학적 입장에 관하여 궁금해 하면서도 질문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던 한국교회의 전통과 문화에서 벗어나 누구하고든지 어디서든지 또 심지어 전통적인 신앙과 다른 입장을 가진 분들까지도 품어 안으면서 격의 없는 솔직하고 진실된 대화를 가질 수 있는 경지까지 도달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이브리드 시대에 곳곳에 흩어져 있는 다양한 사람들이 개인적 경건(Individual Piety)을 이룰 수 있고 그것들이 모여지면 결국 교회가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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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의 의미



153의 의미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갈릴리에 오셔서 7제자들에게 그물을 오른편으로 던지라고 하시니 밤새 한 마리도 잡지 못했는데 153마리의 물고기를 잡게 되었다(요한 21장).


첫째, 153명의 치유 사건

사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47사건을 통해 153명이 치유 받고 회복되었다.

1. 마태복음 : 23사건을 통해 47명을 축복하셨다
(문둥병자 8:2, 베드로 장모, 야이로의 딸, 12년 혈루병 환자 가나안 여인의 딸 15:22, 막달라 마리아 27:56, 아리마대 요셉 등)

2. 마가복음 : 3사람
(귀신들린 자 1:23, 귀먹은 자 7:32, 눈먼 자 8:32)

3. 누가복음 : 14사건을 통해 94명이 축복을 받았다.

70명 제자들 (10:1). 열명의 나환자(17:12), 삭개오(19:2), 등

4. 요한복음 : 8개 기록을 통해 9명이 나음을 얻었다.
니고데모(3:1). 가나의 왕의 신하(4장), 간음한 여인(8:11), 나사로(11장)

이 모든 것을 합치는 47 사건을 통해 153명이 치유, 문제해결, 기도응답으로 축복을 받았다.


둘째, 9☓17=153

153마리는 9☓17 이며, 1+5+3=9 이다.
9는 인간의 허수이다.
17은 충만의 숫자이다.
하나님의 일에 전념하라는 가르침이다


셋째, 하나님의 자녀라는 히브리어 글자의 숫자 값


중세 기독교의 수비학인 “게마트리아(Gematria)”는 문자를 수로 사용하는 방법과 이것으로부터 나오는 수비학의 광대한 해석체계를 말한다. 즉 게마트리아의 본질적인 요소는 문자가 수를 나타내고 수가 문자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옛 이스라엘에서 사용되었던 유대교의 수비학(數祕學, numerology)으로 숫자를 이용하여 히브리어 단어나 문장을 암호화하는 방법이다.


“게마트리아”라는 말은 고대 그리스어로 “감마(gamma)”와 “트리아(tria)”가 합쳐졌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보통 고대문자들은 그 자체로 숫자의 의미도 포함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히브리어의 알파벳도 각 글자에 대응하는 숫자가 존재한다. 

숫자에 의한 문자 풀이법은 바벨론의 사르곤 2세(B.C. 723∼705) 시대의 비명을 통해 알려져 있다. 숫자에 의한 문자 풀이법은 유대 전통에서 각별한 사랑을 받았는데 A.D. 1세기경 유대고 랍비였던 엘리에제르는 경전 해석의 32가지 방법 중 29번째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B.C. 3세기 이후 헬라 문면의 영향 속에서 히브리인의 숫자 표현 방식에 변화가 생겼다. 알파벳 순서를 수의 기호로 사용하는 헬라 방식에 따라 유대인들도 히브리 자음 순서로 수의 기호를 표현했다. 유대인들이 문자를 수의 기호로 사용함에 따라 특정한 단어가 특정수로 나타나는 일이 벌어졌다. 성경이 모든 낱말과 각 글자는 일정한 숫자를 갖고 있어 서로 풀어지거나 얽힐 수 있으며 신비스런 의미를 나타낼 수 있다는 것. 즉 구약성경에 기록된 모든 단어들이 '코드'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영향은 성경을 필사하는 과정에서 랍비들이나 필사자들에 의해 구약성경의 문자 자음이 의도적으로 조작되는 경우가 일어났다. 단어와 숫자를 혼용하는 방식은 신약성경에도 종종 나타난다.

“하나님의 아들들(Beni ha-Elohim)”이란 낱말이 맛소라 구약성경에서 일곱 번만 나오며, 히브리어 낱말 수의 값은 153(2+50+10+5+1+30+5+10+40)이 된다. 그런데 신약에서 예수 부활 후 베드로가 잡은 물고기의 수가 “153마리” 라는 점을 들어 구약 하나님의 아들들과 연결시켜 교회(그물) 속에 들어간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가리킨다고 본다.

헬라어 “물고기”의 단어 수의 값이 “153×8”(1224)로 나오는데 “그물”도 “153×8”의 값이 나온다. 특히 “노타리곤”으로 물고기 “익두스(ΙΧΘΥΣ)”는 “예수스 크리스토스 데우 휘오스 소테르(Ιησουs Χριστοs Θεου Ύιοs Σωτερια)”, 곧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자 구원자”라는 의미를 만들기도 한다.


12 사도의 이름, 12지파와 유대인의 분파


12 사도의 이름

마태복음 4:18∼20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1. 베드로(Petrus, Πέτρος)

“시몬”이라 불렀으나 예수님이 “베드로” 즉 “반석”이란 이름으로 바꾸어 부르셨다(마태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반석은 히브리어 “페트라”에서 왔다.
예수님의 수제자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보다 권위는 아래였다. 

2. 안드레(안드레아)(Andreas, Ανδρέας)

시몬 베드로의 동생 또는 형이다. 성경은 형제로 나온다. 우리나라와 같은 서열 중심이 아니라 정학하게 서술하지 않는다. 전승은 그가 러시아로 건너가 선교했다고 한다. 그리스에서 체포되어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 성경 속에서 의외로 적게 나오면서 입지가 작다. 초대교회 문헌 속에서도 안드레는 잘 등장하지 않는다.

3. 야고보(세베대의 아들)(Iacobus Maior, Ιάκωβος)

사도 요한의 형이다. 대 야고보로 부른다. 보아너게(천둥의 아들)라는 별명을 가졌다. 최초의 순교자다. 헤롯 아그립파에게 순교 당한다. 베드로는 풀려나와 복음을 전한다. 사도로서 부름을 받았지만 거의 활동을 하지 못한 사도이다. 내가 아는 어떤 분은 소명을 받고 신학을 시작했지만 얼마가지 않아 교통사고로 천국에 갔다. 종종 야고보는 통해 그들의 삶을 읽는다.

4. 요한(Ioannes, Ιωάννης)

대 야고보의 동생이다. 대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과 친척간이다. 요한 서신의 기록자이다. 혹자는 야고보와 요한을 예수님의 친동생으로 보기도 한다. 마리아가 재혼한 것으로 주장한다. 학자들의 논란이 많은 곳이다.

5. 빌립(Philippus, Φίλιππος)

세례 요한의 제자이었다. 바돌로매의 소개로 예수님께 왔다. 그리스에서 선교하다 순교 당한다. 그의 묘가 터키의 파묵칼레에 있다고 한다. 

6. 바돌로매(나다나엘)(Bartholomaeus (Nathanael), Βαρθολομαίος ή Ναθαναήλ)

두 가지의 이름이 너무 달라 종종 헤갈린다. 어느 것이 본명인지 정확하지 않다. 산 채로 살가죽이 벗겨진채 머리를 베어 순교 당한다. 

7. 도마(토마스)(Thomas, Θωμάς)  

의심 많은 도마로 알려진 제자다. 인도에서 순교했고, 신라까지 왔다는 전설이 있지만 확실치 않다. 아직도 인도에 도마교회가 있다고 한다. 

8. 마태(Matthaeus, Ματθαίος)

마태복음의 저자로 알려져 있지만 마태복음은 마태의 이름을 빌려 쓴 다른 제자로 알려져 있다. 아프리카로 가서 선교했다. 금융업자의 수호신이다. 세리였기 때문일 것이다.

9. 야고보(작은, 알패오의 아들)(Iacobus Minor, Ιάκωβος ο μικρός)

[야고보서의 저자이며, 예수님의 동생이다.-논쟁이 많은 부분이다.] 개신교는 예수님의 친동생이 야고보를 적었다고 한다. 하지만 사촌가 친 동생이 한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일부의 학자들은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가 마리아의 재혼으로 인해 함께한 배다른 형제로 보기도 한다. 

10. 다대오(유다)(Iudas Thaddaeus, Θαδδαίος)

다대오 출신의 유다이다. 다대오로 자주 부른다. 가룟 유다는 가룟 출신 유다란 뜻이다. 가룟 유다는 그냥 유다라 부르는 경우가 많다. 성경에 거의 나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가 예수님께서는 사도로 불렀다는 점을 기억하자. 유다는 찬미하다의 뜻이고, 다대오는 갈릴리 지역의 한 마을 이름으로 '마음이 크고 넓다'는 뜻이다.

11. 시몬(Simon Cananeus, Σίμων ο Κανανίτης)

베드로의 동명이인이다. 알패오의 아들이며, 소(작은) 야고보의 형제다. 열심당원출신이다. 페르시아에서 전도하다 순교했다. 기둥에 거꾸로 매달려 톱으로 몸이 잘려 죽었다 한다. 이렇게 보면 알패의 아들은 유다와 시몬 둘이 된다. 

12. 가룟 유다(이스카리옷 유다)(Iudas Iscariot, Ιούδας ο Ισκαριώτης)

다른 사도는 모두 갈릴리 출신이지만 유다만은 유대 지역 출신이다. 가장 머리가 좋고 회계를 맡았다. 은 30에 예수님을 팔아 자신은 자살한다. 이 자리를 맛디아가 대신한다.

12-2. 맛디아(Matthias, Ματθίας)

가룟 유다 대신 뽑힌 사도이다. 에티오피아에서 선교하다 순교한다. 

가룟 유다와 13

가룟 유다는 13과 연관되었는가?
그는 13번째 사도가 아니다.
사도에서 제적된 사람이다.
그에 의해 예수님이 금요일에 죽었기 때문에 13과 연관된 것이다.
서양에서는 13일의 금요일을 가장 싫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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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12지파와 유대인의 분파

노아의 세 아들 중 셈의 후손인 아브라함에게 크고 강력한 민족을 이루리라는 축복을 주신 후(창세기 18:18)에 야곱(이스라엘)의 아들들이 12지파로 나뉘며 번성했다.

요셉을 이집트로 보내어 기아로부터 이스라엘 민족을 보호하게 하였고, 그 후에 이집트를 탈출하여 가나안 땅에 정착해서 번영했으나 하나님을 멀리하고 멸망하여 바벨론 땅으로 끌려갔다. 세 번에 걸쳐서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왔으나 다시 하나님을 멀리하여 여러 대언자들의 충고를 무시하고 핍박하고 죽였으며, 자기들을 구원하러 사람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마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등의 악한 행위들 때문에 AD 70년경에 로마의 티투스장군(10대 황제)에 의해 멸망되어 다시 온 세상으로 흩어지게 된다.

유대인들은 야곱(이스라엘)의 아들인 르우벤, 시므온, 유다, 잇사갈, 스블론(레아 저녀), 갓과 아셀(레아의 여종 실바의 자녀), 베냐민(라헬 자녀), 단과 납달리(라헬의 여종 빌하의 자녀)까지 10명(레아소생인 아들 레위는 성전 관리로 제외)과 야곱의 손자이자 요셉의 아들인 에브라임과 므낫세까지 12명의 후손들이 12지파를 이루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에브라임지파와 단지파가 예전의 불순종으로 인해 제외되고, 레위지파와 요셉지파가 12지파에 포함되었다.

유대인들은 이리저리 쫓겨 다니며 살다가 2차 대전 때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로 600만 명이 희생되었는데, 희생자 대다수는 폴란드, 네델란드, 헝가리 등에 살던 아쉬케나즈(Ashikenaz) 유대인들이었다. 1948년에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가나안) 땅에 이스라엘을 건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 이스라엘 국민의 90% 이상이 무신론자이며, 유대교 신자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살펴보면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지 않고 배반하고 반성했다가 상황이 괜찮아지면 또 다시 배반하곤 하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현재의 이스라엘도 대다수가 무신론자이며, 세계 최대의 퀴어축제를 개최할 정도로 하나님 보시기에는 타락한 것으로 보인다.

유대인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다윗, 요셉, 예수 그리스도 모두 셈의 후손들로 유지되었다. 유다와 베냐민지파의 유다왕국 출신들만 유대인으로 인정하고, 나머지 10지파의 이스라엘왕국 출신들은 혼혈인 사마리아사람들로 불리며 천대 받았다. 예수께서도 이스라엘집의 잃어버린 양에게 가라고 명령하셨다(마태 10:6, 15:24). 세계 각지로 흩어져 살면서 모계혈통으로 유대인을 분류하다보니 지금은 셈의 후손보다 야벳의 후손이 더 많아졌다. 현재 이스라엘과 미국에 거주하는 유대인이 1,100여만명 정도로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모계혈통으로 유대인을 구분하다보니 지금은 12지파의 구분도 불가능한 상황이어서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야곱)의 12지파를 어떻게 구분하실지 궁금하다. 현재는 크게 아쉬케나지와 세파르디계로 분류한다.

                                           ( 다윗의 별이 그려진 이스라엘 국기)

 

야벳의 후손인 아쉬케나짐(Ashkenazim, 독일 사람들이라는 의미)은 전통적으로 성경과 탈무드 연구에 주력했으며, 전체 유대인의 80% 이상을 차지한다. 이들은 독일계 유대인으로 독일, 네델란드와 폴란드, 러시아 등 동유럽, 미국, 이스라엘, 오스트레일리아 등지에 살고 있다.

 

야벳의 아들들은 고멜과 마곡과 마대와 야완과 두발과 메섹과 디라스요, 고멜의 아들들은 아스그나스(Ashikenaz)와 리밧과 도갈마요(창세기 10:2~3, 역대상 1:5~6),

* 바빌로니안 탈무드에 고멜이 Germania로 되어 있어, 고멜의 아들 아스그나스(Ashikenaz)가 독일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정착된 것 같고, 실제로 그들은 독일지역에 거주하다가 영국, 네델란드, 동유럽, 러시아, 미국 등지로 쫒겨다니며 정착하여 살고 있다.

                                          ( 세파르디 유대인 )

 

셈계통의 스파라딤(Sefardim, Sephardi, 스페인 사람들이라는 의미)은 전통적으로 종교적 관습을 중요시했으며,

이베리아반도(스페인, 포르투갈), 북아프리카, 터키, 프랑스, 미국, 남미 등에 많이 거주하며, 유대인의 16% 정도 차지한다.

 

유대교와 유대인의 상징이 메노라(일곱 촛대)여서 이스라엘을 함락시켰던 티투스장군(10대 황제가 됨)의 로마 개선문 벽화에도

탈취한 메노라를 매고 있는 형상이 새겨져 있다. 그런데 현재 이스라엘의 국기에는 다윗의 별이 들어가 있고, 메노라는 국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자손들의 이 군대는 가나안 사람들의 땅을 사르밧까지 소유하고

예루살렘의 포로 된 자들 곧 스바랏(Sepharad)에 있는 자들은 남쪽의 도시들을 소유하리로다(오바댜 1:20).

 

그 외에도 중동, 중앙아시아, 남아시아에 거주하는 유대인인 미즈라힘(동방사람들이라는 의미), 에디오피아 흑인 유대인(이스라엘 집을 뜻하는 베타 이스라엘이나 이주한 자들의 뜻을 가진 Falasha로 불림), 인도 붐바이 거주 유대인 베네 이스라엘, 인도 코친에 거주하는 코친 유대인, 발칸반도에 거주하는 로마니오트(Romaniotes) 유대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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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섹스

인간의 섹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섹스를 하는 궁금증에서부터 시작한다.
동물처럼 번식기에만 섹스를 하는 것이 아니라 시도 때도 없이, 심지어 임신 중에도 하는 것이 인간이다.
즉 인간에게 섹스는 번식만 아닌 쾌락의 역할도 있기 때문이다. 
동물 중에서 인간만이 유일하게 배란기가 아닌 때도 섹스를 하며, 평생을 따져 보면 인간은 일생 평균 5,778번, 총 2808시간을 섹스로 소비한다.

* 2808시간 ☓ 60분 =168,408분 168,408분 ∻ 5,778번 = 29분

동물에게 있어 섹스는 번식 수단이라 교미 시간이 매우 짧고 간단하게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인간은 밀어를 속삭이고 키스를 하며 번식기가 아니더라도 시도 때도 없이 사랑을 나눈다.
생물학적으로 본다면 대단히 비효율적인 행위를 하는 셈이다. 

일본 주간 <포스트>에 따르면 이렇듯 인간만이 유독 쾌락에 집착하고, 섹스를 향유하게 된 데에는 “뇌에 그 비밀이 있다"고 한다. 뇌 과학자 시오타 히사시 씨는 이렇게 설명한다.

“인간의 뇌는 오랜 기간 진화해왔다.
본능적인 성행위를 관장하는 곳은 대뇌변연계와 시상하부라고 불리는 뇌의 안쪽 부분인데, 인간의 뇌는 그 주위를 감싸는 대뇌신피질 또한 발달한 것이 특징이다.
대뇌신피질은 지성을 관장하므로 인간은 삽입, 사정이라는 원초적인 성행위뿐만 아니라 다양한 성적 행위를 익히게 된 것이다." 

인류학자 헬렌 피셔 박사는 뇌에 3가지 시스템이 존재하고 있다고 했다. 
1. 성욕
2. 로맨틱한 사랑
3. 상대에 대한 깊은 애착 문제는 이 세 가지 뇌 시스템이 모두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 사람에게 깊은 애착을 가지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사랑과 성욕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유엔 통계에 따르면 1947~2011년 사이 이혼 케이스를 연구한 결과 결혼 후 4년 만에 이혼을  많이 한다.
사랑에 빠지고 부부가 된 뒤 아기를  낳고 키우면서 부부 유대관계가 약해져 이혼으로 이르는 기간이 4년이 가장 많다는 것이다.  피셔 박사는 일부일처제가 과연 계속 유지될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오늘날 일부일처제는 당연하게 여겨지고 있으나 대략 1만 년 전 시작된 것으로 인류학자들은 추정한다.
인류가 농경생활을 하고 정착하면서 가축, 집을 소유하고 자식에게 물려주는 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일부일처제가 확립됐다는 것이다. 핀란드에서 흥미로운 실험이 있었다.

우리 뇌엔 일부일처에 적합한 호르몬인 ‘바소프레신’이 있는데 이를 받아들이는 수용체가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이 입증됐다. 즉 4명 중 한명 꼴로 이를 수용하는 정도가 낮았으며 이는 곧 자신의 파트너에 충실하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근 유럽에선 여러 사람과 관계를 가지는 “폴리아모리(polyamory)” 즉 다자간 연애가 등장하고 있다고  했다.
한 집에 두 쌍의 남녀가 살면서 자유연애를 즐기는 생활이다. 
두 사람 이상을 동시에 사랑하는 ‘다자간(多者間) 사랑’을 뜻하는 말인 폴리아모리 운동은 1970년대 태동했다.
이를 지향하는 이들은 일부일처제를 비판하며, 일부는 집단혼 형태로 가족 관계를 형성하기도 한다.
일부일처제를 일탈하는 이런 라이프 스타일이 잠깐 유행으로 그칠지, 아니면 오랜 인류 결혼제도를 바꿀지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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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레루야와 유대인의 결혼 풍속



할렐루야!(Hallelujyah. הַלְּלוּיָהּ)
-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

할랄 - 찬양하라
루 - 너희의
야 - 야훼 하나님

찬양하다, 영광스럽게 하다, 부르다 라는 뜻의 히브리어 동사의 2인칭 복수 명령형인 할렐루(hallelu)와 야웨의 축약형인 야(Yah)의 합성 단어이다. 직역하면 야(Yah)를 찬양하라.

라틴어 형태인 알렐루야(Alleluia)는 또 다시 그리스어의 음차인 알랠루이아(Αλληλούια)에서 유래했다. 그리스도 알파벳에는 'h'에 해당하는 문자가 없어서 'ἁ'를 사용한다.

영어권 성경에서는 할렐루야를 주로 'Praise ye the LORD.'로 번역한다. 
NIV 성경에서는 'Praise the Lord.'로 번역되었다.
천주교의 경우에는 할렐루야보다는 알렐루야나 '찬미 예수'의 사용 빈도가 높은 편이다. 
정교회
에서는 알릴루이아라고 한다.

구약에서 시편에서 23회
104:35, 45. 106:1, 48. 111:1. 112:1. 113:1, 9. 115:18. 116:19. 117:2. 135:1, 21. 146:1, 10. 147:1, 20. 148:1. 149:1, 9. 150:1, 6.

신약에서 요한계시록에서 4회
요한계시록 19:1, 3, 4, 6
19:1 -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하라!
19:3 - 심판의 하나님을 찬양하라!(2절 참조)
19:4 - (아멘과 함께 사용) 반드시 그렇게 이루어 질 것을 내가 믿고 찬양한다!
19:6 -  전능하신 통치를 찬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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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의 결혼 풍속 10단계

1단계 ; 적령기 13세∼18세
(일곱 절기 때 공공의 장소에서 서로 만날 수 있다)
(부모의 약속에 따라 만날 수도 있다)

2단계 ; 세 가지 준비물
1. 포도주 한 잔
2. 신부의 값을 결정하는 은과 금
3. 제1 서약서
(남자는 여자의 아버지에게 나는 ∼지파 ∼집의 ∼이다)신신
(찾아온 목적을 분명하게 말한다. 당신의 딸과 결혼을 하고 싶다. 허락해 주세요)

3단계 ; 세 가지 질문
(여자의 아버지가 딸에게 세 가지를 질문한다. 남자가 없는 자리에서)
1. 지적 요소 - 남자를 얼마나 알고 있는가?
2. 정적 요소 - 얼마나 사랑하는가?
3. 의적 요소 - 고난이 닥쳐와도 정말 헌신할 각오가 되었는가?
* 아버지가 딸에게 ‘내가 이 결혼을 허락해 주기를 원하느냐?’
(딸이 승낙한 후에 남자에게 허락을 한다)

4단계 ; 신부의 몸값을 흥정
(이때 남자는 자리를 피하고 대리인이 나선다. 거래를 위한 흥정이 아니라 서로 상대방의 집안 형편에 맞도록 고려한다)

5단계 ; 첫 번째 계약서를 읽는다.
포도주 한 잔을 남자와 여자가 반잔씩 나누어 마신다.
이때 서약서 위에 여자가 반잔을 마신 후 몇 방울의 포도주를 부은 후 남자가 마신다.
은금을 지불한다.
청혼, 포도주를 나누어 마신다, 서약서를 확인 후 정혼(定婚)으로 부부가 된다.

6단계 ; 신부의 아버지가 뿔나팔을 불어 정혼식을 알린다.
신랑과 신부를 축복기도 한다.
법적으로 부부가 인정되었으나 서로 떨어져 지낸다.

신부여 지금으로부터 약 일 년 후 어느 날 알지 못하는 어느 날 저녁 반드시 당신을 데리러 올 것입니다. 준비하고 기다리십시오!

7단계 ; 일 년간의 별거(別居)

생사가 걸린 일 이외에는 결코 만날 수 없다.
신랑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와서 함께 기거할 집을 준비한다. 
신부는 자기 생활 방식을 버리고 남편 집의 생활 방식을 연습한다.
신부는 신랑 이외에 이성 교제를 중단하고 신랑만을 사모하며 기다린다.

8단계 ; 신부를 데리러 오는 때
신부는 신랑을 맞이할 날을 학수고대한다.
신랑은 신부를 데리러 갈 그 날을 사모하며 기다린다.
어느 날 아버지가 아들을 부른 후에 “이제 신부를 데려 오너라!”
(신부를 데리러 가는 그 시간은 아버지의 권한에 속하므로 아들은 모른다)

신랑과 신랑의 친구들은 횃불을 들고 신부의 동네로 찾아간다.
신부 측에서는 “보라, 신랑이 오고 있다!”
신부는 이때 단장을 하고 친구들과 같이 신랑이 기다리는 곳으로 가서 함께 신랑의 집으로 간다.
9단계 ; 두 번째 계약서
미래의 삶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서와 신랑의 징표를 준다.
합방을 한다.

10단계 ; 사랑의 선언
두 번째 계약서를 들고 이 신부는 정절에 관하여 깨끗하였으므로 결혼은 완성되었다고 선언한다.

유대 사회에서 일 주일의 기간은 ‘김추어진 기간(Hidden Seven Days)’ 이라고 한다.

정혼은 신부의 집에서
결혼은 신랑의 집에서 이루어진다.

요한계시록 19:8,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 옳은 행실(디카이오마)

- 법령에서 사용하는 용어로 행위로 옳은 것이 아니다. 선포된 의를 말합니다. 행위적인 행위로 옳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선언에 의해서 옳다고 인정된 존재이다. 

로마서 3:20∼22,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빌립보서 3:4∼9,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히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옳은 행실은 구원의 은혜로 얻은 것입니다.

유대 풍속은 잔치에 초청을 받았을 때 내가 준비하는 예복이 없었다. 잔치를 준비한 신랑의 집에서 준비한 예복을 받아서 입어야 한다. 따라서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준비한 예복 즉 십자가 보혈에 의한 구원의 옷 세마포의 옷을 받아 입은 후에 그 잔치에 참여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은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