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과 집사의 자격(디모데전서 3:1-16)


06-12-2022(주일)

감독과 집사의 자격(디모데전서 3:1-16)


1984. 감독 - 에피스코페(ĕpiskŏpē)  ἐπισκοπή, ῆς, ἡ


1. 방문,  2. 감독의 직분이나 지위

발음 / ĕpiskŏpē


어원 / 1980에서 유래
  에피스켑토마이(ἐπισκέπτομαι)

  1. 자세히 보다,  2. 보러가다,   3. 찾아부시다
  발음 /  ĕpiskĕptŏmai
 어원 / 미래 ἐπισκέψομαι,  제1부정 과거 ἐπεσκεψάμην, 1909와 4649의 어간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돌보다(마 25:36, 눅 1:68, 행 7:23, 히 2:6), 임하다(눅 1:78), 택하다(행 6:3), 취하다(행 15:14), 방문하다(행 15:36)
 신약 성경 / 11회 사용

관련 성경 /
직분(행 1:20), 감독의 직분(딤전 3:1), (심판하러) 오심(벧전 2:12), 보살핌 받음(눅 19:44)

신약 성경 /
4회 사용


* 1983. 에피스코페오(ἐπισκοπέω) : 주목하다, 감독하다, 내려다보다, 돌보다 
  관련 성경 / 조심하다(히 12:15), 감독의 직무를 수행하다(벧전 5:2)
  신약 성경 / 2회 사용

1249. 집사 - 디아코노스(diakŏnŏs)  διάκονος, ου, ὁ, ἡ

1. 종,   2. 협조자,   3. 집사

발음 / diakŏnŏs


어원 / 아마도 폐어가 된 διάκω ‘심부름을 가다’에서 유래[1377과 비교]


관련 성경 /
섬기 는 자(마 20:26, 막 10:43, 요 12:26), 사환(마 22:13), 하인(요 2:5,9), 사역자(롬 13:4, 고전 3:5), 추종자(롬 15:8),
일꾼(롬 16:1, 고후 3:6, 엡 6:21), 집사(빌 1:1, 딤전 3:12), 짓게 하는 자(갈 2:17)

신약 성경 /
29회 사용


감독의 품성 15가지

1. 책망할 것이 없는 자 - 비행이 없어야 한다

2. 한 아내의 남편이 된 자

3. 절제하며 - 영적으로 깨어 있는 상태

4. 근심하며 - 분별력 있는 행동

5. 아담하며 - 젊잖은 행동

6. 나그네를 대접하며

7. 가르치기를 잘 하며

8.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9. 구타하지 아니하며

10. 오직 관용하며

11. 다투지 아니하며

12. 돈을 사랑치 아니하며

13. 자기 집을 잘 다스리며

14. 새로 입교하지 않은 자

15. 외인에게 선한 증거를 갖는 자






하나님의 소원(God's Wish)


하나님의 소원

하나님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어드리는 것을 신앙생활의 목표로 정하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원을 얼마나 이루어드렸습니까?

부모님 앞에 두 종류의 자녀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효자(孝子)
둘째는 불효자(不孝子)

나는 하나님 앞에 어떤 종류의 자녀일까요?



에스겔 18:23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
Do I take any pleasure in the death of the wicked? declares the Sovereign LORD. Rather, am I not pleased when they turn from their ways and live?

디모데전서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who wants all men to be saved and to come to a knowledge of the truth.


디도서 2:11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For the grace of God that brings salvation has appeared to all men.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이스라엘(Israel)과 예루살렘(Jerusalem)




창세기 32:28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여호수아 10:1
여호수아가 아이를 취하여 진멸하되 여리고와 그 왕에게 행한 것 같이 아이와 그 왕에게 행한 것과 또 기브온 거민이 이스라엘과 화친하여 그 중에 있다함을 예루살렘 왕 아도니세덱이 듣고.





대체신학


대체신학이란 무엇인가?

대체신학이란 용어사 성경에는 없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대체신학을 인정하지 않고 이단이라고 정죄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체신학이란 무엇인가를 가장 쉽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은 메시아가 오는 통로로 사용된 것으로 그 사명이 끝이 났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더 이상 중요한 위치가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성경 전체의 문맥은 이스라엘의 회복과 예루살렘의 회복이라고 하겠다.
요한계시록 21장과 22장은 성경의 결론으로 새예루살렘으로 마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을 새이스라엘 또는 교회라고 하는 것은 너무 영적인 방향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대체신학 (혹은 교체신학)은 근본적으로 교회가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이스라엘을 대체했다고 가르칩니다. 대체 신학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유대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아니며,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구체적인 미래 계획을 갖고 있지 않다고 믿습니다. 교회와 이스라엘의 관계에 대한 모든 견해는 두 개의 캠프로 나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이스라엘의 연장 (대체신학/언약신학)이라는 견해와 교회는 이스라엘과 완전히 다르며 구별된다는 견해입니다 (세대주의/전천년주의).

대체 신학은 교회가 이스라엘을 대신하는 것이라고 가르치며, 성경에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던 많은 약속들이 이스라엘이 아닌 기독교 교회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을 위한 복과 약속의 땅으로의 회복에 관한 성경의 예언들은 “영적으로” 혹은 “우화적으로” 해석되어,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 견해에는 주요한 문제들이 있는데, 수세기 동안 유대 민족이 계속 존재하여 왔다는 사실과 특히 현대 이스라엘 국가의 회복과 같은 것들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저주하셨다면, 유대 민족에게는 장래가 없을 터인데, 그들을 파괴하려는 수 많은 시도들에도 불구하고, 지난 2천년 동안 초자연적으로 생존하여 온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1900년 동안 존재하지 않았던 이스라엘 나라가 20세기에 국가로서 다시 등장한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이스라엘과 교회가 다르다는 것은 신약 성경에서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경적으로 말하자면, 교회는 이스라엘과 완전히 다른 별개이며, 이 둘을 절대로 혼동하거나 서로 바꾸어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성경으로부터 교회는 오순절 날에 존재하게 된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이며, 휴거에 의해 하늘로 들어올려질 때까지 계속해서 이 땅에 존재할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1:9-11; 데살로니가전서 4:13-17) . 교회는 이스라엘에 대한 저주나 축복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언약들과 약속들과 경고는 오직 이스라엘에게만 유효합니다. 지난 2천년 동안 흩어져 있으면서 이스라엘은 일시적으로 하나님의 계획에서 따로 있었습니다.

대체신학과는 반대로, 세대주의는 휴거 이후에 (데살로니가전서 4:13-18) 하나님께서 그분 계획의 주요 촛점으로서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이 때 있을 첫번째 사건이 휴거입니다 (요한계시록 6-19장). 세상은 그리스도를 거부함으로 심판을 받게 될 것이고, 이스라엘은 대환란의 시기를 통해 메시아의 재림을 준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다음, 환란이 끝난 뒤에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이스라엘은 그분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대환란에서 살아 남은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은 구원을 얻을 것이며, 주님은 이 땅 위에 예루살렘에 수도를 둔 그분의 왕국을 세우실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다스리며, 이스라엘은 지도 국가가 될 것이며, 모든 열방의 대표들이 예루살렘으로 와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하고 예배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와 함께 돌아와 문자 그대로 천년 동안 그분과 함께 다스릴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0:1-5).

구약과 신약 모두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전천년적 또는 세대주의로 이해하는 것을 지지합니다. 전천년주의에 대한 가장 강력한 지지는 계시록 20:1-7의 분명한 가르침에서 발견됩니다. 그 구절을 보면, 그리스도의 왕국이 천년 동안 지속될 것이라고 여섯 번이나 말합니다. 대환난 후에 주님께서 돌아오셔서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 그분의 왕국을 세우실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온 땅을 다스릴 것이며, 이스라엘이 열국의 지도 국가가 될 것입니다. 교회는 문자 그대로 천년 동안 주님과 함께 다스릴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계획에 있어서 이스라엘을 대체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은혜의 시대에 교회에 주된 관심을 집중하실 것이지만, 이스라엘을 잊지 않으셨으며, 어느 날 이스라엘을 회복하셔서 그분이 선택한 나라로서 원래 의도하셨던 역할을 맡기실 것입니다 (로마서 11 장).


대체주의(Supersessionism)

'대체신학'이란 교회가 이스라엘을 대체하였다는 뜻을 담은 용어이다.
이 용어 사용자들은 '대체신학'을 반대한다.

"만일 교회가 마지막 때에 이스라엘 편에 선다면, '대체신학'은 근절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대체 신학은 근절될 필요가 없다. 대체신학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체 신학이란 용어는 혈통적 이스라엘의 회복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설정한 용어일 뿐이다.
이것은 전천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자신들이 주장하는 천년설이 없다 하여 무천년설이라고 말한 것과 동일한 패턴이다.

사실 무천년설은 정확한 말이 아니다.
무천년설이라는 신학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무천년설이란 말의 뜻은 천년왕국이 없다는 뜻인데 소위 무천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적어도 천년왕국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전천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주장하는 그 천년왕국이 없을 뿐이다.
무천년설은 지금 초림과 재림 사이의 이시대가 천년 왕국 시대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무천년설이라는 용어보다는 '현천년설'(present millenium)이란 용어가 정확하다.

이러한 패턴이 교회가 이스라엘을 대체한다고 하여 대체 신학이라고 주장하는 경우에도 발생한다.
사실 교회가 이스라엘을 대체하는 측면은 있다.
그러나 인트레이터가 주장하는 방식의 대체가 아니다.
인트레이터가 대체라고 할 때에 그것은 구약과 신약과의 관계에 불연속성만 있을 때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둘 사이에 그러한 불연속성이 존재한다.
신약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구약의 이스라엘이 경험할 수 없는 탁월한 시대를 경험한다.
이러한 면에서 세례 요한은 자신을 신부의 친구라고 하고 예수님과 신약의 교회 공동체를 신랑과 신부로 비유하면서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요 3:29)고 말하면서 마침내는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요 3:30)는 멋진 말을 남기고 있다.

이것은 신약의 교회와 구약의 이스라엘 사이에 불연속적인 측면이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동시에 교회와 이스라엘 사이에 연속성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이스라엘과 교회와의 관계는 약속과 성취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구약의 여느 약속과 신약의 성취와의 관계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연속의 중간에 바로 예수님이 계신다.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오셨다고 하면서 끝내는 12사도를 세우셔서 교회 공동체를 세우는 작업을 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 자신이 구약의 이스라엘과 신약을 이어주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신다.
예수님을 통해 구약의 약속들이 신약에서 재해석되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신약 성경 저자들은 문맥에 따라 구약과 신약 사이에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과 교회 사이에에 연속성이 강조되기도 하지만 또한 불연속성이 강조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이 둘 사이에 이러한 두 가지 측면이 모두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대체 신학'이란 적절한 용어, 합당한 용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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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대한민국이나 전세계에 퍼져있는 신학가운데 가장 심각한 신학이 바로  삼위일체 신학과  대체신학입니다. 
대체신학이 뭐냐면 간단하게  교회가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언약을 대체했다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언약이 이스라엘과 맺은 것인데  이 언약을 파기하고 교회가 그 언약의 계승자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대체신학입니다. 

이것이 왜 심각하냐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신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거짓말하는 신이라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어야할 이유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약속을 지키지 않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겠다는 약속을 지키겠냐는 것입니다. 


이 대체신학의 더 심각한 폐해는  이방인의 때가 차고 그 문이 닫히면 이제 교회로 대체된 하나님의 언약이  다시 이스라엘에게로 돌아갔다고 할수 있게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다시 언약을 세워서 그 약속을 지키겠다고 하게되면  교회는 하나님의 언약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체신학은  교회가 이스라엘을 대체했다는것인데  결국 이는 다시 이스라엘이 교회를 대체하는 결과를 초래할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심각한 상황을 교회가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것에 그 심각성이 더하고 있습니다. 


왜 심각하냐고 하면  이 대체신학은  천년왕국론과  그 맥을 같이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이스라엘의 언약을 대체했다는 신학은 교회가 천년왕국이라는 논리를 만들어냈고  교회의 역사가 천년의 역사이며 이 역사가 끝나면 마지막 종말의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곧 천년왕국은 교회역사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천년왕국은  우리가 아는 천년왕국과 다릅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천년왕국은  100년도 못사는 인간들이 사는 곳이 아니라  인간들이 천년을 넘게 사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새예루살렘성에서 흘러내리는 생명수와 그 생명수 옆에 자라는 생명나무의 열매로 말미암아 인간들이 죽음을 맛보지 않고 천년을 살수 있는 그런 세상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이 천년왕국은  이스라엘백성들과 그들의 언약에 참예한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 곧 아브라함의 믿음의 후손들이 다스리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이 천년왕국이라면  이스라엘 백성이 이 세상을 다스리고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다스리고 있느냐는 문제입니다. 


이스라엘은 지난 2천년동안  대체신학의 폐해로 말미암아  땅없이 온땅을 유리 방황했고  유대인이라는 팻말을 몸에 달고 살아야했으며  죽음의 위협속에서 늘 힘들게 살아야했고 땅이 없는 관계로  돈으로 먹고살수 밖에 없는 바람에 고리대금업자나  사채업자가 되어서 많은 나라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고 살아야했으며  결국은 천주교와 연합한 히틀러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학살하기에 이르기까지 했던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고 교회가 그들을 대체했다는 그 신학으로 말미암아  고문과 죽음의 고통가운데서 그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성경에 하나님께서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으며 살인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죽이고 그들을 죽이는것을 자랑으로 여기기까지 했습니다.  그들은 죽어 마땅한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중세기 신학이 만들어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정말 참혹한 시절이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잘한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음으로  저주를 받아 땅에서 쫓겨나 유리방황하는 삶을 살게된것은 어찌보면  그들이 자초한 삶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그들을 죽일 권리가 과연 기독교인들이나 천주교인들에게 있었을까요?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들에게서 나왔고 그들로 말미암아 구원의 복음은 이방인에게 전파되게 된것입니다.  곧 유대인들로 말미암아 구원이 온땅에 전파되게 된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원얻게된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이며 유대인들의 헌신때문에 가능했던것입니다.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사도님께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파하다가 순교하기까지 했습니다.  바울사도님은  이스라엘지파의 베냐민 지파 사람입니다.  바울 사도뿐입니까?  12명의 제자들과 수천수만명의 유대인들이 기독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했기 때문에 우리가 복음을 듣고 구원에 참예할수 있게된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유대인들을 저주해야하는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축복해야하고 감사해야하며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도록 기도해야 했던것이 마땅했던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하나님이 저주했다고 하며 죽이기까지 했으니  얼마나 큰 죄를 우리 기독교인들의 선배들이 저지른것일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교회는 천주교에서 내려온 대체신학을 중심신학으로 가지고 있으며  무천년설을 주장하고 있고  천주교 신학인 삼위일체 신학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제가 삼위일체 신학을 버려야한다고 할까요?  틀린것이 아닙니다. 삼위일체 신학은  성경적으로 맞는 논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경말씀에  하나라고 말씀하고 계시지 삼위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이고  성령님도 하나인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이듯이 우리도 하나인것입니다.  삼위일체 신학을 버려야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되는 바른 신학을 되찾을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주권적인것에서  능력적인것에서  그 존재적인 것에서 우리가 하나님이 될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되게하셨습니다. 


하나님만이 하나인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다 하나인것입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신학보다  모든 만물이 하나라고 하는것이 더 성경적인 신학인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아버지 하나님보다  그리스도이신 성자하나님의 활동이 더 많이 나옵니다.  또한 신약에서도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여 인간으로 오셔서 활동하시는 것이 더 많이 나옵니다. 


성경의 중심은 그리스도라는것을 우리는 알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만난 그리스도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신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  똑같은 하나님이십니다.   구약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신약에서는 예수그리스도로 성경에 나오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그렇게 많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하나님의 존재는 성경에 나옵니다. 


단일신론자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그리스도가 구약에서 등장하는 여호와 하나님임을 인식하지 못하는 무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선지자나 지혜자가 아니라 그분이 바로 아버지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이스라엘은 몰랐다는 사실이지요. 


그것을 마지막때가 되면 알게될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아브라함과 언약하고  그 언약의 후손으로  이땅에 오시고 그 언약을 완성하시기 위해서 재림하실것입니다. 


언약의 완성은 예수그리스도의 재림과  자기 백성들이 제사장 나라가 되어서  온 세상에  하나님의 복을 전하고  만국을 소성케하며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는 날이 올때 바로  언약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언약의 완성이 아니라  온땅에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이 허락한 그 땅에 입성하게 되고 그땅에서 하나님을 섬기게되고 하나님이 재림하심으로 그 땅에서 언약이 이루어져 새로운 천년왕국 곧 그리스도가 다스리는 세상이 이루어질때 그 언약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대체신학은 이것을 없애버린것입니다.  이것을 없애버리니까  무천년설을 주장하게 되는것이고  무천년설을 없애야  대체신학이 바른 신학이 되어버린것입니다.  이것이  대한민국 기독교의 거대한 암덩어리이며 적폐입니다.  이것을 하루속히 버려야합니다. 


로마서 11장 25절~27절을 읽어보십시요.  언약의 완성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너무 자세히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9장 15절~ 이후를 읽어보십시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언약을 성취하기위한 죽으심임을 설명하고 있고 그 언약이 어떻게 성취될것임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는것을 알아야합니다. 



다시한번 말씀드립니다.  대체신학은 하나님을 거짓말장이로 만드는 신학이며  이 신학은  이방인의 때가 차면  이제 이스라엘로 교회를 대체하게 만들 신학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이 언약을 성취할때 그 언약과 이방인이 상관이 없다면 이방인은 구원과 상관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결국 이방인은 이스라엘이 버림받은것처럼  버림받게된것입니다 . 이스라엘은 조상과의 약속이 있어서 영원히 버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성취하겠지만  이방인은 이 약속이 없기때문에  버려지면 영원히 버려지는 것입니다. 


이방인이 이스라엘을 대체하여 교회를 이룬것이 아니라  이방인이 이스라엘과 연합하여 교회를 이루게된것이 바른 신학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약속에 이방인이 참예함으로서 그 약속을 함께 받고 함께 누리는 그 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가나안 여인이  예수님께  자기 딸을 고쳐줄것을 간청했을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 버린 양 외에는 다른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가나안여인이 더 간청하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이렇게 말씀하니 가나안 여인은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예수님이 그 가나안여인의 믿음이 크다고 칭찬하고 그 딸을 고쳐주었음을 성경을 통해서 볼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행동은 다 계산된 행동이겠지요  다 알고 계시니...이방인이 개라도 되겠다는 것이 얼마나 창피할까요?  그러나 자기딸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낮아질대로 낮아지는 그 여인의 믿음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  더 낮아지고 낮아질수 있는 이방인이 되어야합니다.  우리에게 약속이 없기 때문에  약속을 가진 이스라엘 백성과 한몸되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것을 자존심 상해할 필요가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감사하고 기뻐해야 하는 것입니다. 


대체신학은  이방인의 자존심을 살리는 신학일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고 자기를 선택했다고 하는  이스라엘의 선민사상을 자기들에게로 가져올수 있는 신학이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자존심을 살리는 신학입니까!!! 


그러나 이 신학은 독배입니다. 먹으면 죽는 것입니다.  교만하게 하는 신학입니다 죽이는 신학입니다.  독사과는 먹는게 아니라 버리는것이 사는 길입니다.  대체신학은 독사과입니다.  버려야합니다. 


기존의 신학에 물든 많은 기독교인들이여!!!  바른 신학을 찾읍시다. 이스라엘과 한몸되어 한 하나님을 섬기는것을 부끄러워 할필요가 없습니다.  어차피 우리는  저주받은 자요  희망도 없고 미래도없고 약속도 없는 자들이었는데  이제 하나님이 복을 얻을수 있는 방법을 주시지 않았습니까!!! 


이스라엘을 축복하고 아브라함을 축복하면  그 복을 함께 누릴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저주하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면 그 저주를 우리가 받게될것입니다.  이스라엘과 아브라함은 저주를 받지 않습니다. 


축복하면 축복이 우리에게 오고 그들에게도 복이 가지만  저주하면 저주만 우리에게 오게되는것입니다. 


대체신학은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신학입니다.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신학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자손인 우리가  믿음의 조상 아버지되시는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꼴이 되는 것이 대체신학인것입니다. 


제가 그동안 이스라엘에 대해서 수없이 많은 글을 썼습니다.  그 핵심이 바로 이것입니다.  대체신학의 악마성을  알게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이 어떤 존재인지를 설명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영적 자손들이여!!  아브라함을 축복하고 그 후손들을 축복하십시요.  그것이 믿음의 자손들이 형제를 축복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살고  우리 후손들이 살고  우리 형제들이 사는 길이고 하나님의 복을 얻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그리고 하나님의 근심(창세기 6:1-7)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창세기 6:2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사람의 딸들은 여러 가지로 해석되어 왔다.
복음주의 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에 관련된 해석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1. 타락한 천사설

위경 “에녹서”와 쿰란 두루마리 “창세기 외경‘에 근거를 둔 천사설은 ”하나님의 아들들“(בְנֵי־הָאֱלֹהִים 베네 하엘로힘)이라는 어구와 베드로전서 3:19-20, 유다서 6-7에 두고 있다.

고대의 유대 주석가들과 초기 교부들, 그리고 많은 현대의 성경 강해자들은 이 “아들들”을 욥 1:6; 2:1; 38:7에 의거하여, 천사들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이리하여 문맥은 천상적 존재와 지상적 존재의 결연 같은 것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 견해는 곧 내리게 될 홍수 심판 문맥에 맞지 않는다.
그 심판은 천사들의 죄악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죄악(참조 3절)으로 인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께서 부활 때에는 천사들처럼 결혼하지 않는다(마 22:30)고 한 점에 맞지 않는다.

2. 가인 계열 통치자설

“하나님의 아들들”을 왕들로 보는 해석은 2세기 유대인 저술가들의 해석에도 나온다.
M. Kline은 “Divine Kingship and Gen 6:1-4," WTJ 24(1962):187-204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을 가인 계열의 왕들이나 왕조의 통치자로, ’사람의 딸들‘은 그 왕들의 후궁으로 해석했다.

가인 계열의 통치자들은 창 4:17-24에 진술된 문명을 이룬 자들이다.
라멕이 일부다처를 둔 것은 그가 소유한 처첩들이었다.
이 견해 주장자들은 고대 왕들이 자기들을 天子로 자처하였다는 점을 근거로 제시한다(참고, 삼하 7:14; 대하 29:23; 시 2:3).

그러나 이 견해는 가인 계열에 통치자들이 있었다는 것은 성경 문맥을 벗어난 가설일 뿐이다.
또한 왕정 제도는 오랜 시대 이후에 도입되었던 점과 홍수 심판이 모든 인간들에게 다 내린 점에 비추어 맞지 않다.

3. 셋의 후손설(The Sethite Interpretation)

미드라쉬를 포함하여 유대인 주경가 다수가 주장하는 이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아들들”을 셋의 후손들로, ‘사람의 딸들’은 가인의 후손들로 본다.

이 시각은 크리소스톰, 아우구스투스 등 교부들, 칼뱅 같은 종교개혁자들이 선호하는 시각이기도 하다.
셋의 후손과 가인의 후손 두 사이에 혼인관계가 이루어졌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먼저 하나님 신앙으로 오는 구원 대 인간의 행함으로 얻는 구원의 콘트라스트를 보여주고 있다.
가인의 제물에는 자기의 행함으로 구원을 이루고자 하는 상향적 특성이 담겨 있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아벨의 제물은 오실 여인의 후손을 통하여 이루고자 하는 하나님의 구속적 행위를 믿는 신앙을 예표하고 있었다(4:1-15).

셋은 최초의 순교자 아벨 대신 하나님께서 주신 아들이다.

창세기 4:25부터 5장에 나오는 셋의 톨레도트(toledot, 계보, 족보)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거의 규칙적으로 나온다.
이 계보를 시작하는 단락에서 셋은 에노스를 낳았고 에노스는 공중예배를 암시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4;26).

아담-셋의 계보에서 아담 7세손인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하나님이 데려가셨다.
셋 계보 끝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6:8) 의인이고, 완전한 자로 하나님과 동행한 노아가 나온다(6:9).

다음으로 하나님의 형상 대 인간의 형상의 콘트라스트가 나온다.
아담의 톨레도트는 하나님의 창조를 인정하는 긴 서론으로 시작하고(5:1-2),
셋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전달된 기사가 나온다(5;3).

반면에 4:16-24 에 나오는 가인의 톨레도트는 가인 중심으로 시작하고, 하나님에 관한 언급이 결여되어 있다.
이 결여는 의도적인 것으로 보인다.
이런 대조는 아담과 가인의 아내 기사에서도 엿볼 수 있다.
즉, 아담의 아내 이름이 하와로 나오지만, 가인의 아내 이름은 나오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아담의 아내 하와는 인정받고, 존경 받으며 평등한 한 인격으로 비쳐지고 있지만, 가인의 아내 이름은 거론도 안 되고 있어서 가인의 목적 달성을 위한 무명의 도구나 수단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풍기고 있다.

또한 두 계보에서 “~ 낳고”의 과정을 서술해 나가는 문맥은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아들들”이라는 콘트라스트가 함축된 것으로 비쳐지기도 한다.

즉, 셋을 통한 아담의 계열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등뼈나 산맥처럼 이어지고 있는 점에 대조적으로 가인의 계열은 하나님을 등진 인간의 연계성이 깔려 있다.
그리하여 성경의 문맥에서 가인 계열은 단순히 사람의 아들들로 나올 뿐이다.

반면에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표현이 하나님의 백성들로 자주 언급되어 나온다(신 14;1; 32;5-6; 사 1:2; 삼하 7:14 등).
하나님께서는 훗날 이스라엘을 그분의 “장자”(출 4:22)라고 말했고,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자녀”(신 14:1)라고 불렀다.

또한 창세기 26:34-35에는 에서의 동족이 아닌 여자와 혼인이 야곱에게 근심거리가 되었다.

눅 3:38이 아담을 하나님의 아들로 표현한 점에 비추어 창 5장의 아담의 계보의 연속선상에서 6장의 “하나님의 아들들”을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다.

엘렌 화잇도 “사람의 딸들”을 경건치 못한 가인의 후손들로 보았다(PP 81).

이런 셋의 후손이라는 해석은 신자의 자녀와 불신자의 자녀들 사이의 신성치 못한 결혼관계를 함축하고 있다.

그러나 이 견해는 셋의 계열은 모두가 의롭고 가인의 딸들은 모두가 악하였느냐는 물음에 답을 내 놓아야 한다. 이 점은 다음 항목의 서술을 통하여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나 판단된다.

보고, 좋아하고, 취하고

“하나님의 아들들은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אָהרָ, 주목하다)
자기들이 좋아하는(בָּחַר 결정하다)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לָקַח 취하다)”(6:2).

이는 인간들의 결혼을 말해주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참조, 11:29; 24;48; 삿 14:3 등).
예수께서도 혼수 전 인간들의 결혼의 문란상으로 풀이하였다(마 24:38).
그래서 본문을 천적 존재와 인간 사이의 결합이라는 해석하는 것을 성경과 거리가 먼 해석으로 배척하는 것이다.

이 본문에 나오는 <보았다...좋았다...취했다>는 창 3:6의 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 이생의 자랑 패턴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으로 비쳐지고 있다.
그리하여 하나님 백성들까지도 하나님이 창조 시에 계획하신 결혼제도의 거룩한 의도를 짓밟아 버리는 방향으로 확장되어 간 것이다.

셋의 자손과 가인의 자손 사이의 이런 거룩하지 못한 결연(結緣)의 증가는 급속히 증가하는 죄악의 원인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참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 불신자들과 혼인하지 말라고 경고한 것은 그로 인해 수반되는 심각한 위험 때문이었다.
대개의 경우 신자가 불신자와 결혼하게 되면 배우자의 요구에 굴복하기 마련이다(민 7:3, 4; 수 23:12, 13; 스 9:2; 느 13:25; 고후 6:14, 15).

신앙이 해이하여진 셋의 자손들은 하나님 말씀의 경계선을 넘어갔다.
그들의 신앙은 죄악적 세속 문화에 융합되어 갔다.
그들은 육욕적, 감각적인 매력에 이끌려 건실한 신앙적 판단력이 둔화되어 갔다.
그들은 경건한 집안의 아름다운 딸들과 경건한 결혼생활을 따분하게 여기고, 가인 자손의 여인들의 매혹적 아름다움에 이끌러 갔다.
더욱이, 그들이 “모든 여자를 아내로 취했다”(6:2)는 점에 비추어 일부다처 제도가 셋의 사회에 파고들었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영이 인간 결혼생활을 탄식하며 떠나는 상태로 전락되어 버렸고 심판을 자초하는 것이 되어 버렸다(창 6;3).
성의 타락은 인간이 스스로 멸망의 길로 나선 것이 되어버렸다.
가정의 해체는 문명의 해체와 인류 종말의 길이 된다.

“當時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後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子息을 낳았으니 그들은 勇士라 古代에 名聲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6:4).

성스럽지 못한 결혼의 결실들은 네필림이었다.
네필림은 육체적인 거인들을 뜻하기보다는 도덕적으로 “타락한 자들(the fallen ones),” “난폭한 자들," 또는 "폭행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네필림의 어원 나팔(napal)이 ”타락하다”를 뜻한다.
네필림을 거인(giants)으로 번역한 것은 70인역이 네필림을 기간테스(gigantes)라고 번역한 것으로부터 유래했는데 홍수 전 시대에는 인류가 다 기골이 장대하였으므로, 이 말은 신장보다는 도덕적 성격을 가리킨 것이 바람직 해 보인다.

홍수 전 사람들은 대체로 대단한 신체적 및 정신적 능력을 소유했었다.
지혜와 기술력이 뛰어난 이 사람들은 그들의 지력과 신체적인 능력을 교만심과 정욕을 만족시키고 동료 인간들을 압제하는 일에 끊임없이 바쳤다(PP 80 84, 90).
이들의 자식들은 명성이 있는 “용사들(gibborim)"이었다(6:4).
여기 명성은 부정적 의미에서 악명을 떨치는 자들로 보인다.
깃보림(용사들)은 가인계열 자손 라멕의 특징인 포악스런 성품과 일치하는 것으로 보인다(4:23-24).

성령 철수 예고와 하나님의 근심

“나의 靈이 永遠히 사람과 함께 하지(통치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肉身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百二十 年이 되리라 하시니라”(6:3).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 하리니(shall not strive)"는 '그가 사람들과 다투거나 설득하지 아니할 것이다'를 뜻한다.

“함께 하다”(NKJV에는 “애쓰다<strive>”로 번역)라는 말의 히브리어는 “다스리다”, “심판하다”의 뜻으로, 통치를 나타내는 말이다.
당대의 인간들은 정욕의 포로가 되어 더 이상 하나님의 영의 지배를 받지 않고 배척하여 성령께서 비집고 들어가 권고할 없어져 버렸다. 성스러워야 할 혼인제도가 무너져 내렸으며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포악스런 자들인 네필림들은 성령이 더 이상 역사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이러므로 말미암아 성령께서는 집요하게 회개를 거절하는 인류로부터 떠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도 곧 끝나야만 했다.
베드로는 홍수 이전 사람들의 마음에 성령이 역사한 것을 언급하면서 그리스도의 영이 사단에 포로된 이들(베드로는 “옥에 있는 영들”이라고 함)에게 전파했다고 말한다(벧전 3:18~20).
이 세상은 창조 시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그 아름답고 선한 모습과는 정반대의 상황으로 전락되어 버린 것이다.

“이는 그들이 肉身(basar)이 됨이라.”

이 말씀은 사람들이 육신의 정욕을 따라 살면서 죄된 욕망에 포로가 되어 버린 상태를 함축하고 있다.
자기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께 굴복하지 않는 인간들에게 더 이상 성령이 계실 이유가 없어져 버렸다.
사람들이 거룩한 감화에 완전히 무감각해져 있으므로, 하나님의 영은 떠나게 된다.
그들을 제지하거나 개선하기 위해 더 이상 “애쓸” 필요가 없게 된다. 홍수 전 사람들로부터 성령께서 철수하시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날”에 관한 예언을 하시므로 아직도 인내하시는 유예의 시간대를 주셨다.
홍수 때 까지 120년간은 자비의 시간대, 은혜의 시간대라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罪惡이 世上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計劃이 恒常 惡할 뿐임을 보시고 6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恨嘆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6:5-6).

본문은 인간의 마음, 곧 “계획” 혹은 생각과 행위 가운데 악이 극도에 달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거의 예외 없이 사악하였다.
그것도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항상, 그리고 몇 사람의 경우가 아니라 사회가 전면적으로 사악했다.
이런 일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부러 잊으려”(벧후 3:5) 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여호와께서 “한탄(nakham)”했다는 말은 이어져 나오는 그분의 마음이 “근심했다(‘astab)”는 해설에서 그 진의를 엿볼 수 있다.
“한탄”은 기쁨의 반대어이다(느 8:10).
하나님의 한탄은 그분의 예지력의 부족이나 그분의 본질 또는 목적의 가변성을 전제하는 표현이 아니다.
또한 하나님은 결코 무엇을 후회하지 않는 분이시다(삼상 15:29).
하나님의 “한탄”은 인간의 죄악으로 야기된, 거룩한 사랑의 고통을 나타내는 은총과 위로의 표현이다.

한탄(nakham)의 어근의 기원은 '깊이 숨 쉼' 따라서 사람의 감정, 주로 슬픔, 동정, 위로의 육체적 표출이라는 개념을 반영한다.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불변성을 유지하시면서도 멸망해가는 변화된 환경과 관계에 적음, 대처하시는 은혜로운 자비와 위로, 및 구원의 소망을 내포하고 있는 진리를 이렇게 나타내신 것이다.
인간의 타락상으로 인한 하나님의 비탄에 관한 언급은 하나님이 인간을 미워하지 않는다는 감동적인 암시도 된다.
인간의 죄는 하나님의 마음을 깊은 슬픔과 연민으로 채운다.
그것은 무한한 사랑만이 할 수 있는, 죄짓는 인간들에게 따르는 보응을 향한 측량할 수 없는 연민의 바다를 온통 끓어오르게 한다(렘 18:6~10).

근심하는 아버지 이야기

<예언의 소리> 부장인 분스트라 목사의 딸이 외과수술 날짜를 잡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평소에는 그렇게 의젓하고 활달하던 아이가 달력에 표시된 수술 날짜가 하루하루 다가올수록 의기소침하여 지며 풀이 죽어 가고 있었다. 아버지인 나는 딸이 갈수록 침울해져 가고 있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였다.
딸은 수술 받았을 어땠느냐고 여러 번 물어 왔다.
아버지인 나도 지나간 삶을 통하여 여러 번 수술을 받았던 일을 상기시키며 안심시켰다.
그러나 아무도 수술 결과를 예단할 수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내 자신이 수술실에 실려 갈 때, 이야기를 하였지만, 딸의 수술을 앞 둔 아버지의 길을 처음 당하고 있어서 나 자신도 추스르지 못하였다.

사실상 나는 딸이 당하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을 받고 있었다.
딸을 마취과 의사에게 인계한 다음 100%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부모란 없다.
수술 날짜가 드디어 이르렀다.
나는 근심 걱정으로 위통을 앓아 딸을 배웅할 수조차도 없었다.
인간 아버지도 이럴 진대 하물며 하늘 아버지께서는 성령을 철수시키며 홍수를 예고하였을 때 그 심정이란 참으로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이런 하늘 아버지의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고통스런 심정을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恨嘆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라는 말씀에서 읽어내지 못한다면 이 얼마나 한탄스러운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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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피림(Nephilim)


하나님의 아들들은 누구였을까요?

히브리어 “브네이 하엘로힘”(בני האלוהים).
“하나님의 아들들”은 성경에 나오는 천사들의 이름입니다.
이 “하나님의 아들들”은 하나님을 거역했으며, 지구로 내려와 인간 여자들을 부인으로 취하고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천사들의 그룹입니다.
거인으로 알려져 있으며 초인적인 힘과 능력을 가지고 있는 네피림은 천사들과 인간 여자들의 자식들입니다.

네피림은 무슨 의미일까요?

네피림이 거인이었다는 사실이 그들의 혈통이 초인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 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악마이기도 했는데요, 어떻게 그들이 악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까요?
바로 이때 히브리 성경을 읽으면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네피림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단어 나팔르 נפל, (떨어지다)에서 왔는데요, 접미사 ‘임(림)’ 은 간단히 복수로 추가되기 때문에 그들은 “타락한 것들” 이라고 해석되게 됩니다.

타락한 사탄의 천사들에게서 태어난 네피림들은 지구를 난폭하게 지배하며 폭력으로 물들였습니다.   

노아의 홍수에 숨겨져 있던 이야기

네피림들은 노아의 홍수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합니다.
노아의 홍수는 하나님께서 인류가 저지른 죄에 대한 벌 뿐만이 아니라, 인류가 네피림들에 의해서 완전이 타락하기 전에, 인류와 그 혈통인 “이브의 자손들”를 보존하기 위한 방법이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