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신학이란 무엇인가?
대체신학이란 용어사 성경에는 없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대체신학을 인정하지 않고 이단이라고 정죄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체신학이란 무엇인가를 가장 쉽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은 메시아가 오는 통로로 사용된 것으로 그 사명이 끝이 났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더 이상 중요한 위치가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성경 전체의 문맥은 이스라엘의 회복과 예루살렘의 회복이라고 하겠다.
요한계시록 21장과 22장은 성경의 결론으로 새예루살렘으로 마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을 새이스라엘 또는 교회라고 하는 것은 너무 영적인 방향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대체신학 (혹은 교체신학)은 근본적으로 교회가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이스라엘을 대체했다고 가르칩니다. 대체 신학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유대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아니며,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구체적인 미래 계획을 갖고 있지 않다고
믿습니다. 교회와 이스라엘의 관계에 대한 모든 견해는 두 개의 캠프로 나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이스라엘의 연장
(대체신학/언약신학)이라는 견해와 교회는 이스라엘과 완전히 다르며 구별된다는 견해입니다 (세대주의/전천년주의).
대체 신학은 교회가 이스라엘을 대신하는 것이라고 가르치며, 성경에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던 많은 약속들이 이스라엘이 아닌 기독교
교회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을 위한 복과 약속의 땅으로의 회복에 관한 성경의 예언들은 “영적으로” 혹은
“우화적으로” 해석되어,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 견해에는 주요한 문제들이 있는데, 수세기 동안
유대 민족이 계속 존재하여 왔다는 사실과 특히 현대 이스라엘 국가의 회복과 같은 것들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저주하셨다면, 유대 민족에게는 장래가 없을 터인데, 그들을 파괴하려는 수 많은 시도들에도 불구하고, 지난 2천년 동안 초자연적으로
생존하여 온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1900년 동안 존재하지 않았던 이스라엘 나라가 20세기에 국가로서 다시 등장한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이스라엘과 교회가 다르다는 것은 신약 성경에서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경적으로 말하자면, 교회는 이스라엘과 완전히 다른
별개이며, 이 둘을 절대로 혼동하거나 서로 바꾸어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성경으로부터 교회는 오순절 날에 존재하게 된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이며, 휴거에 의해 하늘로 들어올려질 때까지 계속해서 이 땅에 존재할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1:9-11; 데살로니가전서 4:13-17) . 교회는 이스라엘에 대한 저주나 축복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언약들과 약속들과
경고는 오직 이스라엘에게만 유효합니다. 지난 2천년 동안 흩어져 있으면서 이스라엘은 일시적으로 하나님의 계획에서 따로 있었습니다.
대체신학과는 반대로, 세대주의는 휴거 이후에 (데살로니가전서 4:13-18) 하나님께서 그분 계획의 주요 촛점으로서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이 때 있을 첫번째 사건이 휴거입니다 (요한계시록 6-19장). 세상은 그리스도를 거부함으로 심판을
받게 될 것이고, 이스라엘은 대환란의 시기를 통해 메시아의 재림을 준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다음, 환란이 끝난 뒤에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이스라엘은 그분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대환란에서 살아 남은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은 구원을 얻을 것이며, 주님은 이 땅 위에 예루살렘에 수도를 둔 그분의 왕국을 세우실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다스리며, 이스라엘은 지도 국가가 될 것이며, 모든 열방의 대표들이 예루살렘으로 와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하고 예배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와 함께 돌아와 문자 그대로 천년 동안 그분과 함께 다스릴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0:1-5).
구약과 신약 모두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전천년적 또는 세대주의로 이해하는 것을 지지합니다. 전천년주의에 대한 가장
강력한 지지는 계시록 20:1-7의 분명한 가르침에서 발견됩니다. 그 구절을 보면, 그리스도의 왕국이 천년 동안 지속될 것이라고
여섯 번이나 말합니다. 대환난 후에 주님께서 돌아오셔서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 그분의 왕국을 세우실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온 땅을
다스릴 것이며, 이스라엘이 열국의 지도 국가가 될 것입니다. 교회는 문자 그대로 천년 동안 주님과 함께 다스릴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계획에 있어서 이스라엘을 대체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은혜의 시대에 교회에 주된 관심을 집중하실 것이지만, 이스라엘을
잊지 않으셨으며, 어느 날 이스라엘을 회복하셔서 그분이 선택한 나라로서 원래 의도하셨던 역할을 맡기실 것입니다 (로마서 11
장).
대체주의(Supersessionism)'대체신학'이란 교회가 이스라엘을 대체하였다는 뜻을 담은 용어이다.
이 용어 사용자들은 '대체신학'을
반대한다.
"만일 교회가 마지막 때에 이스라엘 편에 선다면, '대체신학'은 근절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대체 신학은
근절될 필요가 없다. 대체신학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체 신학이란 용어는 혈통적 이스라엘의 회복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설정한 용어일 뿐이다.
이것은 전천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자신들이 주장하는 천년설이 없다 하여 무천년설이라고 말한 것과 동일한 패턴이다.
사실
무천년설은 정확한 말이 아니다.
무천년설이라는 신학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무천년설이란 말의 뜻은 천년왕국이 없다는
뜻인데 소위 무천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적어도 천년왕국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전천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주장하는 그 천년왕국이 없을 뿐이다.
무천년설은 지금 초림과 재림 사이의 이시대가 천년 왕국 시대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무천년설이라는 용어보다는 '현천년설'(present millenium)이란 용어가 정확하다.
이러한
패턴이 교회가 이스라엘을 대체한다고 하여 대체 신학이라고 주장하는 경우에도 발생한다.
사실 교회가 이스라엘을 대체하는 측면은
있다.
그러나 인트레이터가 주장하는 방식의 대체가 아니다.
인트레이터가 대체라고 할 때에 그것은 구약과 신약과의 관계에 불연속성만
있을 때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둘 사이에 그러한 불연속성이 존재한다.
신약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구약의 이스라엘이 경험할 수 없는 탁월한 시대를 경험한다.
이러한 면에서 세례 요한은 자신을
신부의 친구라고 하고 예수님과 신약의 교회 공동체를 신랑과 신부로 비유하면서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요 3:29)고 말하면서 마침내는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요 3:30)는 멋진 말을 남기고 있다.
이것은 신약의 교회와 구약의 이스라엘 사이에 불연속적인 측면이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동시에 교회와 이스라엘 사이에 연속성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이스라엘과 교회와의 관계는 약속과 성취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구약의 여느 약속과 신약의 성취와의 관계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연속의 중간에 바로 예수님이 계신다.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오셨다고 하면서 끝내는 12사도를 세우셔서
교회 공동체를 세우는 작업을 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 자신이 구약의 이스라엘과 신약을 이어주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신다.
예수님을 통해 구약의 약속들이 신약에서 재해석되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신약 성경 저자들은 문맥에 따라
구약과 신약 사이에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과 교회 사이에에 연속성이 강조되기도 하지만 또한 불연속성이 강조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이 둘 사이에 이러한 두 가지 측면이 모두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대체 신학'이란 적절한 용어, 합당한 용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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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대한민국이나 전세계에 퍼져있는 신학가운데 가장 심각한 신학이 바로
삼위일체 신학과
대체신학입니다.
대체신학이 뭐냐면 간단하게
교회가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언약을 대체했다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언약이 이스라엘과 맺은 것인데 이 언약을 파기하고 교회가 그 언약의 계승자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대체신학입니다.
이것이
왜 심각하냐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신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거짓말하는 신이라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어야할
이유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약속을 지키지 않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겠다는 약속을 지키겠냐는 것입니다.
이
대체신학의 더 심각한 폐해는 이방인의 때가 차고 그 문이 닫히면 이제 교회로 대체된 하나님의 언약이 다시 이스라엘에게로
돌아갔다고 할수 있게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다시 언약을 세워서 그 약속을 지키겠다고 하게되면 교회는
하나님의 언약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체신학은
교회가 이스라엘을 대체했다는것인데 결국 이는 다시 이스라엘이 교회를 대체하는 결과를 초래할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심각한
상황을 교회가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것에 그 심각성이 더하고 있습니다.
왜
심각하냐고 하면 이 대체신학은 천년왕국론과 그 맥을 같이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이스라엘의 언약을 대체했다는
신학은 교회가 천년왕국이라는 논리를 만들어냈고 교회의 역사가 천년의 역사이며 이 역사가 끝나면 마지막 종말의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곧
천년왕국은 교회역사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천년왕국은 우리가 아는 천년왕국과 다릅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천년왕국은 100년도 못사는 인간들이 사는 곳이 아니라 인간들이 천년을 넘게 사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새예루살렘성에서
흘러내리는 생명수와 그 생명수 옆에 자라는 생명나무의 열매로 말미암아 인간들이 죽음을 맛보지 않고 천년을 살수 있는 그런 세상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이
천년왕국은 이스라엘백성들과 그들의 언약에 참예한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 곧 아브라함의 믿음의 후손들이 다스리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이 천년왕국이라면 이스라엘 백성이 이 세상을 다스리고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다스리고
있느냐는 문제입니다.
이스라엘은
지난 2천년동안 대체신학의 폐해로 말미암아 땅없이 온땅을 유리 방황했고 유대인이라는 팻말을 몸에 달고 살아야했으며 죽음의
위협속에서 늘 힘들게 살아야했고 땅이 없는 관계로 돈으로 먹고살수 밖에 없는 바람에 고리대금업자나 사채업자가 되어서 많은
나라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고 살아야했으며 결국은 천주교와 연합한 히틀러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학살하기에 이르기까지
했던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고 교회가 그들을 대체했다는 그 신학으로 말미암아 고문과 죽음의 고통가운데서 그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성경에
하나님께서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으며 살인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죽이고 그들을 죽이는것을
자랑으로 여기기까지 했습니다. 그들은 죽어 마땅한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중세기 신학이 만들어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정말 참혹한 시절이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잘한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음으로 저주를 받아 땅에서 쫓겨나 유리방황하는 삶을 살게된것은 어찌보면 그들이 자초한 삶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그들을 죽일 권리가 과연 기독교인들이나 천주교인들에게 있었을까요?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들에게서 나왔고 그들로
말미암아 구원의 복음은 이방인에게 전파되게 된것입니다. 곧 유대인들로 말미암아 구원이 온땅에 전파되게 된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원얻게된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이며 유대인들의 헌신때문에 가능했던것입니다.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사도님께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파하다가 순교하기까지 했습니다. 바울사도님은 이스라엘지파의 베냐민 지파 사람입니다. 바울 사도뿐입니까? 12명의 제자들과
수천수만명의 유대인들이 기독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했기 때문에 우리가 복음을 듣고 구원에 참예할수 있게된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유대인들을 저주해야하는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축복해야하고 감사해야하며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도록 기도해야 했던것이
마땅했던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하나님이 저주했다고 하며 죽이기까지 했으니 얼마나 큰 죄를 우리
기독교인들의 선배들이 저지른것일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교회는 천주교에서 내려온 대체신학을 중심신학으로 가지고 있으며 무천년설을 주장하고 있고 천주교 신학인 삼위일체 신학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제가 삼위일체 신학을 버려야한다고 할까요? 틀린것이 아닙니다. 삼위일체 신학은 성경적으로 맞는 논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경말씀에 하나라고 말씀하고 계시지 삼위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이고 성령님도 하나인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이듯이 우리도 하나인것입니다. 삼위일체 신학을 버려야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되는 바른 신학을 되찾을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주권적인것에서 능력적인것에서 그 존재적인 것에서 우리가 하나님이 될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되게하셨습니다.
하나님만이 하나인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다 하나인것입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신학보다 모든 만물이 하나라고 하는것이 더 성경적인 신학인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아버지 하나님보다 그리스도이신 성자하나님의 활동이 더 많이 나옵니다. 또한 신약에서도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여 인간으로 오셔서 활동하시는 것이 더 많이 나옵니다.
성경의
중심은 그리스도라는것을 우리는 알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만난 그리스도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신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 똑같은 하나님이십니다. 구약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신약에서는 예수그리스도로 성경에 나오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그렇게 많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하나님의 존재는 성경에 나옵니다.
단일신론자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그리스도가 구약에서 등장하는 여호와 하나님임을 인식하지 못하는 무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선지자나 지혜자가 아니라 그분이 바로 아버지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이스라엘은 몰랐다는 사실이지요.
그것을 마지막때가 되면 알게될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아브라함과 언약하고 그 언약의 후손으로 이땅에 오시고 그 언약을 완성하시기 위해서 재림하실것입니다.
언약의 완성은 예수그리스도의 재림과 자기 백성들이 제사장 나라가 되어서 온 세상에 하나님의 복을 전하고 만국을 소성케하며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는 날이 올때 바로 언약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언약의 완성이 아니라 온땅에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이 허락한 그 땅에 입성하게 되고 그땅에서 하나님을 섬기게되고
하나님이 재림하심으로 그 땅에서 언약이 이루어져 새로운 천년왕국 곧 그리스도가 다스리는 세상이 이루어질때 그 언약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대체신학은
이것을 없애버린것입니다. 이것을 없애버리니까 무천년설을 주장하게 되는것이고 무천년설을 없애야 대체신학이 바른 신학이
되어버린것입니다. 이것이 대한민국 기독교의 거대한 암덩어리이며 적폐입니다. 이것을 하루속히 버려야합니다.
로마서 11장 25절~27절을 읽어보십시요. 언약의 완성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너무 자세히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9장 15절~ 이후를 읽어보십시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언약을 성취하기위한 죽으심임을 설명하고 있고 그 언약이 어떻게
성취될것임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는것을 알아야합니다.
다시한번
말씀드립니다. 대체신학은 하나님을 거짓말장이로 만드는 신학이며 이 신학은 이방인의 때가 차면 이제 이스라엘로 교회를
대체하게 만들 신학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이 언약을 성취할때 그 언약과 이방인이 상관이 없다면 이방인은 구원과 상관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결국 이방인은 이스라엘이 버림받은것처럼 버림받게된것입니다 . 이스라엘은 조상과의 약속이 있어서 영원히 버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성취하겠지만 이방인은 이 약속이 없기때문에 버려지면 영원히 버려지는 것입니다.
이방인이 이스라엘을 대체하여 교회를 이룬것이 아니라 이방인이 이스라엘과 연합하여 교회를 이루게된것이 바른 신학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약속에 이방인이 참예함으로서 그 약속을 함께 받고 함께 누리는 그 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가나안 여인이 예수님께 자기 딸을 고쳐줄것을 간청했을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 버린 양 외에는 다른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가나안여인이 더 간청하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이렇게 말씀하니 가나안 여인은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예수님이 그 가나안여인의 믿음이 크다고 칭찬하고 그 딸을 고쳐주었음을 성경을 통해서 볼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행동은 다 계산된 행동이겠지요 다 알고 계시니...이방인이 개라도 되겠다는 것이 얼마나 창피할까요? 그러나 자기딸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낮아질대로 낮아지는 그 여인의 믿음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 더 낮아지고 낮아질수 있는 이방인이 되어야합니다. 우리에게 약속이 없기 때문에 약속을 가진 이스라엘
백성과 한몸되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것을 자존심 상해할 필요가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감사하고 기뻐해야 하는 것입니다.
대체신학은 이방인의 자존심을 살리는 신학일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고 자기를 선택했다고 하는 이스라엘의 선민사상을 자기들에게로 가져올수 있는 신학이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자존심을 살리는 신학입니까!!!
그러나 이 신학은 독배입니다. 먹으면 죽는 것입니다. 교만하게 하는 신학입니다 죽이는 신학입니다. 독사과는 먹는게 아니라 버리는것이 사는 길입니다. 대체신학은 독사과입니다. 버려야합니다.
기존의
신학에 물든 많은 기독교인들이여!!! 바른 신학을 찾읍시다. 이스라엘과 한몸되어 한 하나님을 섬기는것을 부끄러워 할필요가
없습니다. 어차피 우리는 저주받은 자요 희망도 없고 미래도없고 약속도 없는 자들이었는데 이제 하나님이 복을 얻을수 있는
방법을 주시지 않았습니까!!!
이스라엘을 축복하고 아브라함을 축복하면 그 복을 함께 누릴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저주하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면 그 저주를 우리가 받게될것입니다. 이스라엘과 아브라함은 저주를 받지 않습니다.
축복하면 축복이 우리에게 오고 그들에게도 복이 가지만 저주하면 저주만 우리에게 오게되는것입니다.
대체신학은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신학입니다.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신학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자손인 우리가 믿음의 조상 아버지되시는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꼴이 되는 것이 대체신학인것입니다.
제가 그동안 이스라엘에 대해서 수없이 많은 글을 썼습니다. 그 핵심이 바로 이것입니다. 대체신학의 악마성을 알게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이 어떤 존재인지를 설명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영적 자손들이여!! 아브라함을 축복하고 그 후손들을 축복하십시요. 그것이 믿음의 자손들이 형제를 축복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살고 우리 후손들이 살고 우리 형제들이 사는 길이고 하나님의 복을 얻는 길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