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復活) 04-17-2022 부활주일 설교


2023년 부활주일 설교 주제
- 부활은 바꾸는 것이다!

04-19-2022(화) 묵상 중에
삶의 가치관과 목표를 바꾸는 것이 부활이다.

예를 들면 부활하기 전에는 철저하게 땅에 속한 삶을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땅에 속한 삶의 특징은 육체의 정욕, 이생의 자랑, 안목의 정욕이라고 하였다(요한일서 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육체의 정욕(베드로전서 2:11)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육체의 정욕을 섹스(성)라고 한다.

이생의 자랑
이생의 자랑은 물질(돈)이라고 한다.

안목의 정욕
안목의 정욕은 권력이라고 한다.


다시 사시는 그리스도

- 크리스토프 프리드리히 블룸하르트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고 말로만 외치면서 축하하는 부활절 기념은 너무 미흡합니다. 우리 역시 살아났다고 또 하늘로부터 무엇인가를 받은 게 있다고 말하지 못하면서 부활 자체만 선포하는 것은 헛된 일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라는 엄청난 사건이 반복적으로 선포되고 있지만 실제로 우리에게는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 것을 섬뜩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부활의 효력이 없습니다. 

아무런 감동도 없으면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계속 언급하는 유혹이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생겨났습니다. 마치 신문을 읽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지루하게 앉아서 듣고 있을 뿐입니다. 실은 신문이 더 흥미롭다고 느낄 겁니다. 이에 원수는 이득을 얻었습니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이 원수를 물리치고 싶다면 반드시 하나님 앞에 서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찾기 위해 기도로 싸워야 합니다.

사람들은 종교적인 질문을 가지고 엄청난 논쟁을 벌이지만, 신은 항상 죽어 있습니다. 신이 죽었다면 그들에게는 아주 잘된 일일 겁니다. 그래야만 자신들이 좋아하는 대로 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했는데 딱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나 저 세상에서나 행복한 삶을 얻기 바라지 않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아는 게 전부입니다. 저는 이 세상이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알 때까지 단 일 분의 값싼 행복도 바라지 않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엎드려 주님을 죽인 일을 통곡해야 합니다. 문제를 위해 태어났고, 투쟁하기 위해 태어난 우리입니다.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을 바늘구멍만큼 여기면서 인생은 항상 멋지고 순탄하기를 바라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미래는 우리가 기다려야만 하는 절대적으로 동떨어진 한 지점이 아니라 다가오고 있는 사건입니다. 아마 우리 대부분은 이것에 대한 의식이 없기 때문에 여간해서는 이렇게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그리스도의 미래는 현재이며, 현재가 아니라면 아무 뜻도 아닙니다.

죽음과 죽음의 한 가운데 있는 현생에서 자유롭기 위해서는 아무리 힘들어도 기꺼이 견디는 열의와 기쁨과 감사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럴 때 부활의 능력은 우리에게 더 가깝고, 그리스도는 참으로 부활하신 분이 되시며, 새 생명이 우리존재 속으로 찾아옵니다. 그것은 우리가 여태껏 추구해오던 종류의 생명이 아닙니다. 남들보다 좀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든지, 조금 덜 훔치거나 단정하게 차려 입고 품위 있게 걷거나, 범죄자의 모자를 그럴싸한 모자로 교체 하는 걸 새 삶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종류가 아닙니다. 이런 것을 새로운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말도 안됩니다.

이전보다 더 나아지는 것은 문제도 아닙니다. 새 생명이란 당신에게서 나타나는 생명의 힘이며,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것이자 거룩한 것으로 당신 안에서 자라날 수 있는 것을 뜻합니다. 죄악의 욕망은 더 이상 능력이 없고, 그리스도의 부활과 생명, 성령을 통한 능력이 우리를 온전하고 흠 없는 방향으로 인도하는 것을 실제로 볼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도대체 무엇입니까분명히 기독교 교리나 제도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을 위한 신성한 생명의 계시이며, 마음 생각 감정 가능성의 새 탄생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시려고 하나님으로부터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을 정복하시기 위해 우리 중의 한 사람처럼 되셔서 우리 속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완전히 새로운 삶과 새로운 질서를 위한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그분 안에서 우리는 완전히 다른 남자와 여자가 될 수 있습니다.

종종 그리스도인들은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들입니까!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보여줄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말문조차 열지 못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새 생명은 결코 이 세상의 일시적이고 세속적인 것에 들어 오거나 적용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완전히 새로 시작해야 합니다. 바로 이 지점으로 계속 되돌아 가야합니다. 더 깊고 더 철저히, 더 충분하게 완전한 새로운 출발을 계속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구주를 위하여 새로운 기초를 놓기까지 이 일을 지속해야 합니다. 그분의 죽음 같은 죽음으로 우리가 주님과의 연합에 이른다면 그분의 부활 같은 부활에도 반드시 연합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제서야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삶에 들어갑니다. 부활을 만난다는 것은 얼마나 엄청난 일입니까!

그리스도께서는 거듭하여 새롭게 살아나십니다.

부활은 과거 한때에 일어난 단독적 사건이거나 우연히 믿고 있는 교리 정도가 아닙니다. 그것들은 본질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만으로는 유익이 별로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믿긴 하지만 별다른 변화가 없습니다. 이런 믿음은 당신과 내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경험하지 않는 한 아무 도움이 못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기 어려워하는데 그건 최악이 아닙니다. 적어도 그 사람들은 아직까지 경솔하게 그것을 입밖에 내기에는 부활이 너무도 거대하고 엄청난 일이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실로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부활을 믿노라 주장은 하지만 실제로는 별 의미가 없을뿐더러 부활이 그들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죽음 이후 그 당시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부활이 있습니다. 부활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내면의 어떤 특정한 부분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갈 엄두도 못 내는 전혀 다른 장소에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완전히 다른 질서에 있음을 발견하는 그때 우리가 새롭게 되는 것이 현실이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거듭하여 새롭게 살아나십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새롭게 하기 원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의 뜻이 하늘에 계신 것처럼 이 땅을 위한 하나님의 뜻도 계십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그분의 실재를 전혀 모를 겁니다. 뭔가가 변화되리라는 상상도 전혀 할 수 없을 겁니다. 사람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인간으로선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영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아닙니다. 그분의 부활의 능력은 우리가 닿아 접근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새로운 가능성들이 있음을 깨닫고, 이것을 몸과 영으로 많이 감지할수록 더 요청할 수 있으며, 이 지상에서 더 높고 큰 것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사실, 아무 제한이 없습니다. 이런 연유로 우리는 일상생활에 속한 모든 영역에, 일하고 만지는 모든 것에 희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힘은 인간의 상황에 들어 올 준비가 되어 있으며 능히 그것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어둠과 악과 불완전성에 주목하지 말고, 이런 저런 문제들이 어떻게 결론 내려질지 파악해 내려고 애쓰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런 일은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넘쳐 날 때까지, 위로부터 오는 놀라운 능력이 우리의 모든 일에 작용할 때까지 예수님의 부활만을 더욱 더 구하는 게 우리의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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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부활주일을 준비하며
부활 신앙이란 주제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부활 신앙이란 사람의 존재 방식을 성경적으로 알고 믿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람의 존재 방식을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따라서 "부활이란 나의 존재 방식을 성경적으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첫째는 육체(肉體)의 사람

육체의 사람이란 현재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육체를 갖고 살아갑니다.
육체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 모두 하나 뿐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하나님 앞에서 평등합니다.

둘째는 영체(靈體)의 사람

영체의 사람이란 죽은 사람들이 존재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죽은 사람이 어디에 머물고 있는지는 모릅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한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이르리라고 하셨기에 낙원이라고 생각합니다.
또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서 부자와 거지가 죽었을 때 거지는 아브라함의 품에서 위로를 받았으나 부자는 음부에서 고통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낙원이든지 아브라함의 품이든지 또는 음부이든지 죽은 사람이 머무는 곳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셋째는 부활체(復活體)의 사람

부활체의 사람은 심판 때에 육체의 사람영체의 사람 모두가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을 말합니다.
부활체의 사람은 사도 바울은 신령한 몸이라고 하였습니다(고전 15:46)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우리들은 현재 육체의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육체의 사람이 앞으로 어떻게 변화될 것인가를 바르게 깨닫는 것이 부활 신앙입니다.

부활 신앙을 요약한 말씀이 요한복음 5장 24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I tell you the truth, whoever hears my word and believes him who sent me has eternal life and will not be condemned; he has crossed over from death to life.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영생을  얻었고(에케이)
      붙잡다, 소유하다  <현재형>

예수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습니다.
비록 우리들이 육체의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예수를 믿기 때문에 영생을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요한복음 11: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에르코마이)
      오다  <미래형>

세상 모든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히브리서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메타바이노)
      옮아가다, 옮기다  <현재완료>

예수를 믿기 시작한 것은 과거의 사건이었습니다.
이미 믿었을 때 구원을 받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지만 육체의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장차 부활의 날에 다시 살아날 것이므로 지금 받은 구원은 그 날에 다시 완성된 구원으로 드러날 것입니다(요한복음 11:25-2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사도 바울의 인간관

육(肉)에 속한 사람(고전 2:14)
The man without the Spirit

육신(肉身)에 속한 사람(고전 3:3)
You are still worldly

신령(神靈)한 사람(고전 2:15)
The spiritual man 

부활의 첫번째 정의는 나의 존재를 아는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는 육체의 사람에 속합니다.
육체의 사람은 땅에 속하였기 때문에 땅의 삶을 떠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땅에 속하였지만 땅의 것은 아닙니다.

부활의 두번째 정의는 나의 삶의 방식을 아는 것입니다.

나의 삶은 육신에 속한 삶에서 신령한 삶에 속한 방향으로 전진하여 나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아직도 육신에 속한 삶의 자리에 머물러 있다면 그 자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부활이란 육신에 속한 사람이 신령한 사람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육체의 나이와 영적인 나이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의 육체의 나이는 이미 어른이 되었으나 아직도 영적인 나이가 어른이 되지 못했다면 이것도 몹시 부끄러운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부활주일을 몇 번 맞이하셨습니까?
그만큼 영적인 나이가 성장했다면 성공적인 신앙생활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영적인 나이가 유치원생과 같다면 좀 더 분발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20:35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부활이란 죄에서 용서의 은혜를 확신하는 신앙
부활이란 죄의 결과에 따른 죽음에서 용서의 은혜에 따라 새생명을 얻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와 같은 부활 신앙 부활 생명을 일상생활에서 찾을 수 있는 몇 가지 사례로 설명하며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먼저 부활이란 "옮겨지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에덴동산에 있는 나무들 중에서 관심을 갖고 살펴야 할 두 그루의 나무는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와 "생명나무"라고 하겠습니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열매를 하와가 먼저 먹었고 그 다음에 아담에게도 주었습니다.
그 결과 아담과 하와에게 찾아온 것은 "죽음"이었습니다.

성경을 통전적(通全的)으로 읽어야 합니다.

"통전(統全)"이란 전체를 아우르고 조화시키고 통합한다는 뜻입니다.
‘통전’은 좌와 우, 아래와 위, 긍정과 부정, 개별자와 보편자, 특수성과 일반성, 그리고 믿음과 지식과 실천을 아우르고 통합하려는 것을 말합니다.

통전적 신학은 이것들을 아우르고 조화시키고 통합함으로써 단지 절충주의나 혼합주의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온전성(wholeness)을 지향한다. 한국 신학계에서 ‘통전적 신학’이란 표현을 가장 먼저 사용하고 통전적 신학의 수립을 위한 초석을 놓은 신학자가 이종성이다.

통전적 신학은 두 가지 중요한 측면이 결합된 신학이다.

통전적 신학은 방법론적으로 모든 것을 통합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 신학이다.
통전적 신학에 서 통(統)이란 말은 모든 것을 통합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통전적 신학은 모든 것을 통합하는 것(Integrity)에 머무는 신학이 아니다.

모든 것을 통합하는 것은 자칫 잘못되면 혼합주의로 흐를 위험이 있다.
통전적 신학은 모든 것을 통합해서 온전함(Wholeness)에 이르고자 하는 신학이다.
즉 통전적 신학은 온전함을 추구하는 신학이다.

통전적 신학의 영어 표기인 '통전적'(holistic)이란 말은 온전함과 관계가 깊은 단어이다.
즉 통전적 신학은 편협함을 극복하고, 중요한 정신과 관점을 소홀히 하거나 간과하지 아니하고 가능한 한 모든 진리를 통합해서 온전한 신학을 형성하고자 하는 신학이다.


성경에서 죽음의 시작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서 먹음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죽음에 대한 출발은 신약에서 사도 바울에 의하여 죄의 결과는 사망이라고 정의했습니다(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그런데 사람을 죽어야 할 길로 유혹한 존재는 사탄입니다.
사탄은 처음부터 죄를 짓게하는 타락한 천사를 말합니다(요한일서 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8:44 /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성경이 가르치는 교훈에 따라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는 죄를 짓게하는 사탄의 권세에 붙잡힌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생명나무는 영원한 삶을 약속받는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는 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두 나무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살펴보겠습니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창세기 2:17)
-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창세기 2:16-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
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선과 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죄의 결과라고 하셨습니다(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죽는다는 것은 죄의 결과라고 하겠습니다.
선악과의 열매를 따서 먹는다는 것은 죄를 범하는 것으로 선악과는 한마디로 죄의 나무 즉 사탄의 권세에 붙잡히게 하는 나무라고 하겠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모두 죽어야 합니다.
죽지 않으려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생명나무는 죽음을 해결하는 나무가 됩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가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생명나무를 따먹고 영생하는 것을 금하려고 생명나무 주위에 화염검을 두고 지키게 하셨습니다.

생명나무(창세기 2:9)
- the tree of life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세기 3: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세기 3:22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요한계시록 2: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요한계시록 22: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 나무가 있어 열 두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요한계시록 22:14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 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잠언 3:18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 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죄값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 생명을 얻으려면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생명나무가 상징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성경은 생명나무는 곧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는 사탄의 권세에 붙잡힌 인생
생명나무는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은 인생이라고 하겠습니다.

부활이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 즉 사탄의 권세에 붙잡힌 인생이 생명나무 즉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잡힌 인생으로 옮겨가는 것을 말합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땅에서 하늘로
마귀의 권세에서 하나님의 권세로
염소의 무리에서 양의 무리에게로

첫째는 플러그 아웃(Plug Out)에서 플러그 인(Plug In)

가정에서 가전제품을 사용하려면 먼저 가전 제품에 전원을 공급해야 합니다.
전원을 공급하려면 플러그를 꽂아야 합니다.

(예) 독일 교회 초청으로 독일행 비행기를 탑승하려고 김포 공항에 일행들이 모였습니다.
그때 작고하신 이정규목사님의 사위가 장인을 위하여 아주 성능이 좋은 전기 면도기를 선물하며 여행하는 동안 사용하라고 합니다.
당시 한국의 전압은 100V가 대세이었지요.
그런데 독일에 도착하여 몇일 후 이목사님께서 면도기를 빌려달라고 합니다.
그 성능 좋은 사위가 선물한 면도기를 사용하시지요?
코드가 맞지 않아 사용할 수 없다고 합니다.

둘째, 선악과나무에서 생명나무

에덴동산에 여러 나무들이 있었지만 특별히 두 종류의 나무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
또 다른 하나는 생명나무의 열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는 금지된 것이었습니다.
하지 말라는 것을 하라고 유혹한 것이 사탄입니다.

사탄의 정체가 무엇입니까?
사탄은 죄를 짓게하는 영적 존재입니다.

요한일서 3:8
죄를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사탄이 아담을 찾아온 것이 아니라 하와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하와를 유혹합니다.

셋째, 죄의 자리에서 용서의 자리

죄의 자리에 머물러 즐기며 살아가는 것은 염소와 같은 사람입니다.
용서의 자리에 머물며 믿음의 길을 걷는 것은 양과 같은 사람입니다.

염소는 가라고 하여도 가지 않습니다.
양은 가라고 하면 갑니다.
차이는 순종과 불순종입니다.

양은 여름철에는 가까이 다가가면 서로 덥기 때문에 흩어져서 잠을 잔다고 합니다.
염소는 겨울철이 되면 가까이 다가가면 따뜻해서 좋은 것을 알지만 상대편이 따뜻한 것이 싫어서 일부러 떨어진다고 합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염소는 섬김을 모릅니다.
반면에 양은 섬김을 압니다.

부활신앙은 섬김을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넷째, 사망에서 생명

사망은 땅에 속한 것이라면 생명은 하늘에 속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장례식 때 시신을 땅속에 안장하면서 이렇게 찬송을 부릅니다.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애급에 속한 인생이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간 것을 찬송합니다.

(예) 한승수일병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한일병은 대대장 1호차 운전병이었습니다.
관할부대 지역 지휘관들이 산정상 지휘소에 모여 작전 회의가 열리던 날 대대장을 회의장이 있는 곳으로 모신 후에 안내병의 신호에 따라 임시 주차시설이 있는 곳으로 차량을 이동하던 중 그만 1호차와 더불어 산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산 아래로 떨어진 1호차 운전병은 차밖으로 나와서 위를 바라보면 손을 흔들며 안전하다고 신호를 보냈습니다.
그 날 저녁 내무반에서 한일병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나의 생일은 오늘부터 이 날입니다."

왜 생일을 바꾸겠다고 하였을까요?
죽을 뻔 하였으나 구사일생으로 아무런 부상도 없이 살았기 때문입니다.

부활주일은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인생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삼일 후에 다시 살아나셔서 생명을 약속하신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면 누구든지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에 두 그루의 나무가 있었지요?

하나는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창세기 2:17)
-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창세기 2:16-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
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선과 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명매를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죄의 결과라고 하셨습니다(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죽는다는 것은 죄의 결과라고 하겠습니다.
선악과의 열매를 따서 먹는다는 것은 죄를 범하는 것으로 선악과는 한마디로 죄의 나무 즉 사탄의 권세에 붙잡히게 하는 나무라고 하겠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모두 죽어야 합니다.
죽지 않으려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생명나무는 죽음을 해결하는 나무가 됩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가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생명나무를 따먹고 영생하는 것을 금하려고 생명나무 주위에 화염검을 두고 지키게 하셨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생명나무(창세기 2:9)
- the tree of life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세기 3: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세기 3:22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요한계시록 2: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요한계시록 22: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 나무가 있어 열 두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요한계시록 22:14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 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잠언 3:18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 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 생명을 얻으려면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생명나무가 상징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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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위대한 복음 증거자 무디(1837-1899)는 젊었을 때 장례식 설교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장례식 설교대로 하기 위해 복음서를 살폈습니다. 

그러나 무디는 예수 그리스도의 장례식 설교가 없었으며 오히려 죽었던 사람들이 그의 말씀을 듣고 살아난 것을 확인했습니다.
예수께서 계신 곳에는 부활의 영광이 가득했던 것이다.

무디는 성경을 내려놓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크게 외쳤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파스칼은 청년 시절에 예수 그리스도와 깊은 만남을 가졌습니다.
인생을 전환시킨 이 경험은 그로 하여금 학문연구의 초점을 과학과 수학에서 신학으로 옮기게 했다고 합니다.

파스칼은 인생의 문제들에 직면하고 있는 모든 성도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훌륭한 기도문을 썼습니다.

"주님, 큰 일들을 마치 작은 일처럼 하도록 도와주소서.
제가 주님의 능력으로 그 일들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작은 일들을 마치 큰 일처럼 하도록 도와주소서.
제가 주님의 이름으로 그 일들을 하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주님이 내 안에 있는 한 작은 일은 없습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이 하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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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5년 니케아 회의에서 ‘춘분이 지나고 첫 번째 보름달이 오고 나서 첫 일요일을 부활절로 정했다’
왜 부활절에 색을 칠한 달걀을 주고받는 것일까요?

첫째 가설 : 그리스도의 고난을 추모하는 수난절 기간에는 금식이나 검소한 생활을 하도록 되어있으나 수난절이 끝나고 부활의 아침을 맞이할 때는 그 동안 먹지 않던 고기나 달걀을 먹는 데서 유래했습니다.

둘째 가설 : 죽음을 깨치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위대함과 놀라움은 바로 굳은 달걀 껍질을 깨치고 태어나는 병아리와 같다고 해서 달걀을 선물한 것입니다.

셋째 가설 : 유럽 십자군 전쟁 당시 로자린드 부인은 남편이 십자군 전쟁에 나간 뒤 사람들에게 집을 빼앗겨 먼 산골 마을에 피해 살게 되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 딱한 로자린드 부인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었고, 부인은 그 친절에 보답하는 뜻으로 부활절에 마을 아이들을 모아 맛있는 음식을 대접해주고,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상징으로 예쁘게 색칠한 달걀을 하나씩 나눠주었습니다. 그 달걀에는 로자린드 부인의 집안 가훈인 '하나님의 사랑을 믿자'라는 말을 적었고, 어느 해 부활절 날 길에서 로자린드는 병든 어머니를 찾아 간다는 어린 소년을 만나 위로하고 가지고 있던 색 달걀 하나를 주었습니다. 부인과 헤어진 그 소년은 어머니를 찾아가는 중에 한 산골에서 병든 군인을 만나 돌봐주고 로자린드 부인에게 받았던 달걀을 주었습니다. 그것을 받아든 군인은 자기집안의 가훈이 달걀에 쓰여 있는 것을 보고 소년에게 물어 그 부인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유래가 되어 오늘날에도 부활절이면 부활의 메시지가 담긴 색 달걀을 나누며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한다고 합니다.

넷째 가설 : 부활절 이전, 즉 Easter 축제일의 상징은 계란이 아니라 토끼였습니다. Easter 여신의 상징이 토끼였기 때문입니다. 이 부활절 토끼 풍습은 독일인들이 미국에 이민을 가면서 함께 들어갔으나 18세기 당시 미국의 기독교는 청교도를 위세해 엄격한 기독교가 주류를 이루었기 때문에 부활절 토끼는 전혀 발붙일 수 없었습니다.

부활절 역시 미국에서 자리 잡게 된 것은 남북전쟁 이후였습니다. 부활절을 축하하기 위해서 계란을 사용하게 된 것은 "모든 생명은 알에서부터 나온다."라는 로마의 속담을 비롯 기독교의 의미와 달걀이 연관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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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復活) :

돌아올 부(復), 다시 부(復). 살 활(活)

1.
한 번 행(行)하여지지 않게 된 것을 다시 한 번 행(行)하여 지도록 하는 것.
2. 십자가(十字架)에서 세상(世上)을 떠난 예수(Jesus)가 자신(自身)의 예언(豫言)대로 사흘만에 구주(救主) 그리스도(Kristos)로 되살아난 일. 부생(復生).
3. 톨스토이가 지은 장편(長篇) 소설(小說).
세계적(世界的) 명작(名作)의 하나.
공작(公爵) 네플류도프가 여주인공(主人公) 카추샤를 유혹(誘惑)하였으나 뒤에 양심(良心)에 가책(苛責)되어, 창부(娼婦)로 전락한 그를 갱생(更生)시키고 자신(自身)도 종교적(宗敎的)인 사랑에 의(依)하여 부활(復活)했다는 줄거리. 죄악(罪惡)과 허위(虛僞)에 찬 사회(社會)를 통렬(痛烈)히 비판(批判)했음.

revival
the Resurrection

ἔγερσις, εως, ἡ
부활
마태복음 27:53

οἰκητήριον, ου, τό  3613 [ŏikētēriŏn]
1. 거주
2. 부활 때 영광스럽게 변화 될 기독교인의 몸


ἀνάστασις, εως, ἡ  386 [anastasis]
1. 오름
2. 죽음으로부터의 부활
[과거에 있었던 예수의 부활] 행 1: 22, 2:31, 4:33, 17:18, 롬 1:4, 6:5, 빌 3:10, 히 11:35, 벧전 1:3, 3:21.

사도행전 2:31
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심판날에 있을 미래의 부활] 눅 14:14, 20:35,36, 요 11:24, 23:6,8, 24:15, 고전 15:12이하, 히 6:2, 계 20:15이하.

누가복음 14:14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3. 사도행전 1:22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ὀπτάνομαι 3700 [ŏptanŏmai]
1. 나타나다
2. 보여지다
3. 사도행전 1:3

ἐξανάστασις, εως, ἡ  1815 [ĕxanasta- sis]

1. 부활
2. 빌립보서 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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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이란 우리가 무엇을 행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누구에게 속했느냐의 문제입니다. 

죄를 지었기에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
아담에게 속해 있기에 죄를 짓게 되고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를 행하고 착하게 살았기에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속해 있기에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살게 된 것입니다. 

아담에게 속해 죄인이었던 우리를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 주시기 위해  죄가 없는 누군가의 희생과 대속의 죽음이 필요했고  그래서 주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셔서 기꺼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주께서 그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의 피가 우리를 의롭게 하였고  생명이신 주님께서 우리 안에 오심으로 영원한 새생명을 가진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  하나님의 가족이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의 희생으로 주님안에 거하여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고  용서하고 돕고 섬기는 주님의 열매를 맺는 하늘의 시민이 된것입니다. 
우리가 자녀가 되는 것은 내 의지와 상관이 없이 태어남으로 되는 것이지,  내 의지로 혹은 행위가 아름다워 누구의 자녀가 되는 것은 아니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내 의지와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택하심이요 사랑이요 은혜요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호흡이 멈추는 순간까지 반드시 기억하고 붙잡아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보혈의 피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없는 구원은 없습니다. 

구원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입니다. 
구원은 누구에게 속해 있느냐는 소속의 문제입니다. 
하늘에 속한 사람인지, 아니면 세상에 속한 사람인지... 

몸이 아프면 의사를 찾아갑니다.

환자의 의사에 대한 신뢰는 너무도 중요합니다.
의사에 대한 신뢰가 클수록 환자는 심리적인 안정뿐 아니라 치료 과정을 성실히 따를 수 있습니다.
의사를 통해 병이 낫게 되면 의사에 대한 고마움이 저절로 표출됩니다.
완치된 환자는 주변 사람들에게 자기를 치료한 의사를 조금도 의심없이 추천합니다.
이러한 선순환은 환자와 의사를 비롯해서 사회 전반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예수님의 38년된 병자를 고친 일은 당시 유대인 사회에 얼마나 강력한 영향을 미쳤을지 충분히 예상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영향력을 축소시키기 위해 신성모독이라는 당시 사회에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죄목을 뒤집어씌웁니다.
사실 여부를 떠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만들어놓은 신성모독죄를 지은 죄인이라는 소문이 빠르게 퍼져나갔고 예수님에 대한 이미지도 매우 나빠졌습니다. 예수님이 무슨 말을 해도 믿지 않는 사회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이것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살해 위협과 사회적인 반감을 온 몸으로 느끼시면서도 자신이 누구인지,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강력히 선포하셨습니다. 자신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친아들과 아버지의 관계임을 더욱 큰 목소리로 외치셨습니다. 이것을 신성모독이란 죄목으로 덮어씌워 사람들을 예수님에게서 멀리 떨어지도록 만든 유대인들을 향해 하나님의 친아들로서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러 오셨음을 천명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생명과 심판을 주실 수 있는 권한을 갖고 계셨듯이 자신도 동일한 권한을 갖고 있음을 전하셨습니다. 아무리 유대 사회가 예수님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어도 그것에 굴하지 않고 자신을 통해야만 생명을 얻을 수 있음을 외치신 모습은 너무도 인상적입니다. 이런 배경 속에서 볼 때, 본문이 말하는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에 대한 이야기는 마치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듯한 느낌으로 들렸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을 믿지 못하도록 신성모독죄를 덮어씌웠는데 예수님은 ‘내 말을 듣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씀하시니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었을까요? 적대적인 분위기로 가득한 청중에게 ‘나를 믿으라’고 한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충분히 예상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분위기 속에서 ‘내 말을 들으라’고 사람들에게 외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시 유대인들에게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라고 외치신 것처럼 지금도 이 메시지는 울려퍼져야 합니다. 사람들의 반응이 적대적일수록 영생의 메시지는 더욱 큰 목소리로 외쳐져야 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야만 우리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확증하셨듯이 지금도 이 말씀은 유효합니다. 우리는 사회적인 반감과 사람들의 무관심 내지 적대심을 극복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이것만이 우리로 심판이 아닌 영생에 이르게 하며 사망에서 벗어나 생명으로 진입할 수 있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심판과 영생, 사망과 생명이라는 커다란 틀 속에서 예수님을 믿고 살아가야 합니다. 눈 앞에 닥친 세상의 수많은 일에 파묻혀 사는 우리가 이것을 놓치고 살기가 너무도 쉽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희노애락 속에서 좌충우돌하면서 살지만 우리는 심판이 아닌 영생을, 사망이 아닌 생명을 얻은 자로서 인생의 수많은 문제들에 맞서 싸울 수 있어야 합니다. 이뿐 아니라 우리는 사회의 넘쳐나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예수님의 말씀만이 진리라는 확신을 갖고 예수님에게 귀를 기울이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영생을 얻은 자로서, 사망이 아닌 생명을 얻은 자로서 세상에 우리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가장 훌륭한 방책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금준이란 애가 있었습니다.
몸이 약하고 성격이 소심해서 늘 맞고 다니는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맞고 다니기는 고사하고 대장 노릇을 했습니다.
특별히 힘이 세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성격이 완전히 바뀐 것도 아닌데 어찌된 노릇일까?
알아 봤더니 놀라운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금준이는 자기 아버지가 동네 어른들 가운데 싸움을 제일 잘하는 무서운 사람이란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강함을 안 후로는 누구도 무섭지 않았습니다.
특히 아버지가 깡패들과의 패싸움에서 칼에 맞고도 일어나서 그들을 때려 눕힌 전설적인 이야기를 듣고부터는 무서운게 없었습니다. 이게 바로 믿음의 힘입니다.
이게 바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의 힘입니다.

그런데 이 아이에게도 위기는 닥쳤습니다.
일년 365일 매일 잘 나가는 것이 아니고 어떤 때는 신나게 터졌습니다.
대장 노릇은 고사하고 다시 옛날로 돌아갔습니다.
아버지가 병이 들어서 자리에 누웠는데, 사람들이 모두 죽을 병이라고 수군거릴 때였습니다.
그동안 금준이 아버지가 무서워 기던 아이들이 일제히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금준이 아버지가 자리에서 털고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사정이 다시 역전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금준이가 다시 동네 형들의 가방을 메고 학교에 왔다갔다 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이유는 너무나 간단했습니다.
금준이가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여름에 동네에 아이스크림 장사가 오는데, 그게 먹고 싶어서 아버지 돈 50원을 슬쩍해서 사 먹어 버린 것입니다.
이게 아이들에게 약점이 잡힌 것입니다.
아이들은 그것을 너희 아버지에게 일러 버리겠다고 겁을 줬습니다.
자기의 힘이 되고, 든든한 방패가 되었던 아버지가 이제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특히 아버지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거짓말과 도둑질이라는 것을 아는데, 걸리면 죽는다는 생각에 졸지에 대장 노릇도 끝나고 종노릇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기가막힌 영적 교훈을 보여주는 예입니다.
만약 이 친구가 아직도 예수를 안믿는다면 어릴 때 직접 겪었던 이 이야기를 해 주고 싶습니다.
성도들이 힘을 잃어버리고 마귀의 종노릇하는 것은 바로 자신의 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하지 말라고 한 것을 했을 때, 하라고 한 것을 안하고 거짓말을 했을 때, 주어진 영적 권세와 능력을 소멸되고 맙니다. 원수들은 그것을 잘 이용합니다.

금준이가 속박의 생활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딱 한 가지였는데, 그는 오랫동안 그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몸도 약한 친구가 상급생들의 가방을 메고, 용돈을 뜯기고,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보다 못한 친구가 충고를 해 주었습니다.

“아버지에게 가서 다 말하고 용서를 빌어라.
맞을 때 맞더라도 그렇게 하고 나면 동네 형들에게는 편할 것 아니냐?”

그래서 금준이는 용기를 내서 아버지한테 죄를 다 고백했습니다.
그러면서 얼마나 서럽게 울었는지, 아버지가 불쌍한 마음이 들어서인지 그것 때문에 그 마음 고생을 하고, 힘든 생활을 한 아들에 대한 연민 때문인지 아이스크림을 마음대로 사먹으라고 500원을 줬습니다.
당시에는 매우 큰 돈이었습니다.
용서의 기쁨만 얻은 것이 아니라 생각지도 못한 용돈까지 듬뿍 얻었습니다.
그 다음날부터 동네 형들의 괴롭힘을 받았겠습니까?
안 받았겠습니까?
야, 가방 매! 하는 소리에 ‘내가 미쳤나, 자식아. 너의 가방을 내가 왜 메냐?’ 이 아이가 용서를 받고, 용돈까지 얻은 사실을 모르는 아이들이 약점을 잡고 협박을 했지만, 금준이 하는 말...‘그래 가서 입 아프도록 일러라!’ - 이미 끝난 것입니다.

금준이가 지은 죄를 그 아버지가 알면 신나게 맞고 터질 줄 알았는데, 아무 일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용돈까지 듬뿍 받았다는 말에 아무도 다시 그를 건드리지 못했습니다.
이것 역시 우리의 영적 생활, 영적 원리를 기가 막히게 잘 묘사해 준 예입니다.

세상에 죽음을 이기는 사람은 없습니다.
죽음을 피한 사람도 없습니다.
자신이 영원히 살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은 누구나 피할 수 없는 것처럼 생각해 왔습니다.
솔직히 삶과 죽음의 간격은 한 발짝입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다윗은 사무엘상 20:3에서 이르기를, [..그러나 진실로 [주]께서 살아 계심과 네 혼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와 죽음 사이는 한 걸음뿐이니라.](삼상 20:3).

우리는 늘 죽음을 직면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영원이 시작되는 데 걸리는 시간은 한 순간입니다.
이 세상에 너무 바빠서 자기 장례식에 가지 못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너무 바빠서 죽을 시간이 없는 사람도 없습니다.
죽음은 나이와 건강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죽을 수 있습니다.
건강할 때든, 병들어 있을 때든, 나이가 들었든, 젊든 상관없이 죽습니다.
우리는 잠시 하나님께서 빌려준 시간 속에서 살아 갈 뿐입니다.

이 세상에 죽음보다 더 강한 권세를 가진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사람이 죽어 가는 이야기를 보고 듣고 있습니다.
누가 죽음을 이긴 사람이 있습니까?

바그다는 신밧드의 고향이요, 알라딘의 램프와 같은 신화와 전설의 고향입니다.
거기에 내려오는 상인에 대한 전설이 하나 있습니다.

“어느날 상인이 자신의 종들을 시장에 보냈습니다.
오래지 않아 종이 하얗게 질려서 벌벌 떨며 돌아왔습니다.
종은 주인에게 초조하게 간청하기를 "시장에 내려갔다가 어떤 여자에게 밀쳐져 돌아섰을 때 사람들 가운데 서 있는 저승 사자를 만났습니다.
저승 사자는 정말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저를 위협하는 자세를 취하였습니다.
주인님, 제게 주인님의 말을 한 필 내어 주십시오.
저는 급히 죽음의 사자를 피해 멀리 도망가겠습니다.
저는 사마라로 가서 거기 숨어 있겠습니다.
죽음의 사자는 저를 찾지 못할 것입니다."

상인은 종에게 말을 한 필 내어 주었고 종은 전력 질주하여 도망쳤습니다.
주인은 시장으로 내려가서 사람들 가운데 서 있는 죽음의 사자를 보았습니다.

"이보시오. 어찌하여 나의 종에게 그리 겁을 주었소?"
그러자, 죽음의 사자는 "제가 겁을 주는 자세를 취한 것이 아닙니다. 바그다드에서 그를 보고 놀란 것은 오히려 저 쪽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밤 사마라에서 그를 만나기로 약속되어 있는데 말입니다."”.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죽음은 바로 죄의 삯이기 때문입니다(롬 6:23).
한번 죽는 것은 사람들에게 정해 놓으신 하나님의 법이기 때문입니다(히 9:27).

한 가지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해드리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죽음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그 언약은 다름 아닌 죽음이 부지불식간에 모르게 찾아와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죽음이 올 때는 반드시 미리 알려 주도록 했습니다.
수년 전에 알려주고, 마지막에는 죽기 전 바로 앞에 서 있도록 했습니다.
그 노인은 갑자기 질려서 쓰러지며, "왜 당신은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거요. 당신은 분명히 미리 말하지 않고는 오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지 않소. 당신은 사전에 나에게 아무런 경고도 주지 않았소."
그러자 죽음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소!"라고 대답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나는 흰 머리가 바로 경고였소.
모든 사람들의 빠지는 이가 바로 경고였소.
눈이 침침해지는 것도 경고였소. 육신의 힘이 쇠하여 지고 정력이 감퇴하는 것도 경고였소.
모든 것이 경고였소.
나는 수 차례 끊임없이 찾아 올 것을 경고해 드렸소이다!"

죽음은 지체하지 않습니다.
실수로 어떤 사람을 띄어 넘는 법도 없습니다.

어느 민족, 어느 시대에 살던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냉철한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위의 이야기들은 회교의 본 고장에서 만들어진 죽음에 대한 이야기들입니다.
어느 종교를 믿든지 죽음을 부정하거나 이길 수는 없었습니다.
죽음을 이기지 못하는 종교는 참 종교가 아닙니다.
죽음을 이길 수 없는 종교의 기원은 모두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성경에만 죽음을 이긴 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는 이것을 부활이라고 합니다.
주님은 죽은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누구든지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결코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 11:25-26).

주님은 죽은지 나흘이나 지난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셨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친히 죽음에서 일어나심으로 죽음을 정복한 첫 사람이 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의 권세를 이기는 힘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이시기 때문에 죽음은 그를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소망이 있고, 우리의 믿음의 근거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이야말로 하나님의 권능을 가장 잘 드러낸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병든 자를 치유하시고, 자연을 마음대로 다스리는데서도 자신의 권능을 보이셨지만 하나님도 죽을 수 있을까? 하나님도 죽으면 다시 살 수 있을까? 이런 어린 아이같은 질문이지만 인간들에게는 가장 심각한 문제에 대해서 시원한 해답, 정확무오한 해결책을 몸소 보여 주신 사건이 바로 부활이란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죽을래야 죽을 수 없는 분이시지만 스스로 인간의 육체를 입고 사람의 모양으로 오시고, 완전한 사람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생명 자체이시지만 사람들과 같이 사셨고, 육신의 연약함을 다 체험하시고 죽음을 맛보셨습니다.


다만 예수님을 보노니 이 예수님께서 죽음의 고난을 당하사 천사들보다 조금 낮아지셨다가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히 2:9).

하나님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일을 하셨지만 오늘은 간단하게 히브리서 기자가 말한 세 가지를 요약하겠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십자가의 죽음의 의의를 다음 세 가지로 요약했습니다.

첫째, 죽음의 권능을 가진자 마귀를 멸하셨습니다.

[자녀들은 살과 피에 함께 참여한 자들이므로 그분도 마찬가지로 같은 것에 참여하셨으니 이것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권능을 가진 자 곧 마귀를 멸하시고]
(히 2:14).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권능을 지니신 분이시며, 죽은 자를 일으키시는 부활의 권능을 소유하신 분이신데 반해 마귀는 죽음의 권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죽음을 통해서 하실 일이 있으셨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 죽음을 이기신 것입니다.

둘째, 죽음에 메인 사람들을 건져 내신 것입니다.

[또 죽음을 두려워하여 평생토록 속박에 얽매인 자들을 건져 내려 하심이라](히 2:15).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죽음을 두려워하고, 평생토록 죽음이나 속박에 매인 자들을 건져내셨습니다.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가장 효과적이고도 무서운 말이 ‘죽여 버린다’, ‘너 죽어’란 말입니다. 아무리 태연한 척, 용감한 척 해도 막상 죽음 앞에서는 두렵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셋째, 범죄들을 대속하시고 영원한 상속의 약속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그분께서는 새 /상속/ 언약의 중재자이시니 이것은 죽음을 통하여 첫 /상속/ 언약 아래 있던 범죄들을 대속하시고 부르심을 받은 자들로 하여금 영원한 상속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히 9:15).

주님은 죽음을 통해 새 상속 언약의 중재자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첫 상속 언약 아래 있던 범죄들을 대속하시고, 부름받은 자들로 하여금 영원한 상속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런 목적을 가지고 죽으신 주님께서 부활하지 못하셨다면 십자가의 죽음은 선한 목적으로 시도되었지만 비참한 실패로 종결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심으로 죽음을 통해 이루시고자 했던 모든 것들을 이루셨고, 믿는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게 되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의 참된 의의는

첫째, 주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신 것입니다.


[거룩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사 하나님의 아들로 권능 있게 드러나셨느니라.](롬1:4). 주님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로 권능있게 선포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는 아무도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못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믿었던 제자들에게도 의심과 불신을 던졌습니다. 그를 따르던 여인들에게도 심한 슬픔과 눈물, 통곡만을 뿌려주었습니다. 한 때 그를 믿었던 사람들에게는 깊은 좌절감과 강한 배신감을 안겨 주었습니다. 주님의 이적을 맛보고, 그분의 설교를 통해 은혜를 누렸던 사람들은 십자가의 죽는 모습을 통해 모든 것은 끝이 났다고 단정지었습니다. 그러나 부활을 통해 이전에 고백했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강한 확신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선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초대 교회 때 집회의 설교 주제는 항상 부활이었습니다. 그들의 모든 관심 역시 부활이었습니다. 부활의 설교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근심을, 믿는 자들에게는 언제나 은혜를 끼쳤던 것입니다. [그들이 백성을 가르치며 또 예수님을 통하여 죽은 자들로부터의 부활을 선포하므로 근심하고](행4:2). 부활의 소식이 근심이 된 사람들은 마귀의 자녀들입니다. 이들은 이것이 사실일지라도 덮어지고,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자기 아버지가 패했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할 자녀가 없듯이, 마귀의 자녀들 역시 그러했습니다. 반면 부활의 자녀들은 이 소식을 영원히 자랑스러워하는 위대한 사건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매 큰 은혜가 그들 모두에게 임하니라.](행4:33). 우리는 부활의 소식을 통해 날마다 죽음의 권능을 가진 마귀를 멸하신 우리 주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은혜를 누립니다.

어떤 아버지는 아들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네가 이제 비로소 내 아들이 되었구나!” 처음부터 자신의 아들이었지만 어떤 어려운 일을 기필코 완성해 내었을 때, 견뎌내고 승리했을 때 그런 말을 합니다. 연속되는 패배에 굴복하지 않고 일어섰을 때 아버지는 ‘오늘 너는 내 아들로 온 세상에 알려졌구나!’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었지만, 부활을 통해 온 세상에 권능있게 당당하게 공개적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부활하지 못했다면 저와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뭐 죽고 그래? 죽는게 사람이지 어찌 하나님의 아들이야? 죽었는데 알게 뭐야? 어떻게 증명해? ...그러나 부활로 인해 이런 의심에 찬 논쟁은 더 이상 의미가 없습니다. 부활을 통해 그분은 인간의 피가 아닌 하나님의 피로 육신을 입으신 성육신이 입증되었습니다. 부활을 통해 그분의 모든 이적과 권능있는 말씀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행하셨음이 확증되었습니다. 부활을 통해 그분의 죽으심이 대속의 죽음이란 사실이 증명되었습니다. 부활을 통해 그분의 다시 오심에 관한 약속 또한 분명히 성취될 약속임이 증거되었습니다.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영을 받은 우리 역시 하나님의 아들이란 사실이 선포되었습니다.

둘째,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성도는 십자가의 피를 통해 죄의 용서를 받고, 그분의 죽으심을 통해 죄의 육신을 처리받고, 부활을 통해 생명의 능력을 받습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찬송하리로다. 그분께서는 자신의 풍성하신 긍휼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게 하심으로 우리를 다시 낳으사 산 소망에 이르게 하시며](벧전1:3). 성경은 우리의 거듭남이 주님의 부활의 결과란 점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이 거듭나는 것을 살아 계신 말씀을 통해서입니다(약1:18, 벧전1:23). 그 말씀이란 바로 주님께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복음의 말씀입니다. 부활은 바로 우리의 거듭남, 구원의 핵심입니다. 주님의 부활이 없다면 구원은 없습니다. 거듭남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주님 자신 혼자만의 부활이 아니라 바로 믿는 자들의 영을 거듭나게 하는 생명을 주는 부활이셨습니다.

우리는 영은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모두 죽은 채 태어났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우리의 죽은 영을 살리시는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살아 있는 혼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셨느니라.](고전15:45). 우리의 몸은 구속받지 못했지만 우리의 영은 살아나 주님을 인지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는 본연의 기능을 회복했습니다.

셋째, 성도들이 하나님의 권능을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성도들에게 더 이상 죄의 권능, 사망의 권세 아래 종처럼 부림을 당하지 않고 오히려 승리하게 하는 역사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더 이상 육신의 소욕대로 살지 않고 세상의 조류대로 살지 않고 정복하는 삶을 충분히 가능하게 해 주었습니다. 아무도 이길 수 없었던 마귀를 몰아내고, 그들의 궤계를 멸하고 영적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단지 2,000년 전의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믿는 자들에게 지속적으로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바울이 이 땅에서 간절히 알고 싶어했던 한 가지는 바로 부활의 권능이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의 권능과 그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알고자 하여 그분의 죽으심과 같은 모습이 되어 어찌하든지 죽은 자들의 부활에 도달하려 하노니](빌3:10-11). 사도 바울은 이 땅에서 주님의 부활의 권능으로 살았던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스스로 고백하기를,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 대한 나의 기쁨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고 했습니다. 고로 그는 날마다 부활의 권능을 맛보았던 것입니다. 육신의 죽음과 부활은 한번 이상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영적인 여정은 날마다 죽고 날마다 살아나는 그런 삶의 연속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살아 있는 것은 육신의 생명이 죽지 않아서 살아 있는 것입니다. 반면 성도가 살아 있는 것은 육신이 죽고 영이 거듭나서 살아있는 것입니다. 이 생명은 결코 다함이나 끝이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땅에서 나는 음식으로 육신의 힘을 키우고, 종교적 신념과 교육을 통해 혼의 능력을 기릅니다. 그러나 그들의 영은 죽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우리의 영이 살아있습니다. 우리의 겉 사람은 세상 사람들과 마찬가집니다. 그러나 다시 태어난 속 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집니다. 부활의 권능은 우리의 속 사람을 새롭게, 강건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이런 까닭에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 사람은 썩어 없어지나 속 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지는도다.](고후4:16). [그분께서 자신의 영광의 풍부함에 따라 자신의 영을 통하여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엡3:16).

저는 성도들이 부활의 권능에 대한 깊은 이해와 조명이 있기를 바랍니다. 무지는 우리를 암흑 속에 가두어 둡니다. 무지는 동시에 권리를 향유하지 못하게 합니다. 권리 위에서 잠자는 자들은 법이 보호해 줄 수 없다는 어떤 판사의 판결처럼, 성도로서 성도의 권리를 전혀 누리지 못하는 것은 대부분 영적 무지에서 기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현재 우리 자신에게 미치는 영향이나 그 부활을 통해서 성도가 누릴 수 있는 영적인 권능에 대해 너무나 무지한 탓에 이름만 그리스도인일 뿐 아무런 영향력도 끼치지 못하고, 아무런 은혜도 누리지 못합니다. 십자가는 걸고 다닐 목걸이라도 있고, 장식이라도 있고, 성화(聖畵)라도 있지만 부활은 목걸이도 없습니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부활에 대해서는 해마다 부활절에만 연례 행사처럼 설교를 들을 뿐 도무지 생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저희 교회의 성도들은 그런 부류에 해당되어서는 안됩니다.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주님이 현재, 지금 바로 내 안에 살아 계시며, 영원히 함께 하고 있다는 임재(臨齋)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이는 그분께서 약하심을 통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셨으나 오히려 하나님의 권능으로 살아 계시기 때문이며 또 우리도 그분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한 하나님의 권능으로 그분과 함께 살 것이기 때문이라.](고후 13:4).

현재 우리가 사는 삶은 성령의 능력으로 사는 삶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사는 삶입니다.






기독교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십자가와 부활은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십자가의 죽음은 부활을 전제하고 있고, 부활은 십자가의 죽음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두 사건은 결코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사건’이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십자가에서 시작되었다.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는 부활을 말할 수 없고,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짊어져야 한다.

‘No cross, No crown’,
즉 고난의 십자가가 없으면, 영광의 면류관도 없다.

기독교 복음이 고난과 희생의 십자가에 머물지 않고 영광과 승리의 부활로 나아간다는 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오늘도 삶과 신앙의 현장에서 고난과 희생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우리 한국 기독교인들은 어떤 부활을 소망해야 할까?

사람의 부활을 소망하라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공생애를 통하여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가 죽어 무덤에 갇혀 있을 때 그를 다시 살리는 부활의 역사를 일으키셨다.(요 11:17-44)
그리고 자신 또한 안식일 전날인 금요일에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가 안식일 다음 날에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셨다.(막 16:1-7)
이로써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것이다.
사도 바울의 회상에 따르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게바에게 보이신 후 열두 제자에게와, 오백여 형제에게도 일시에 보이셨고 야고보에게도 보이셨으며, 맨 나중에는 자신에게도 보이셨다고 증언하고 있다.(고전 15:3-8)
이 과정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의아해하며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도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 그분의 부활을 믿게 되었다.(눅 24:13-35)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불신하던 도마조차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부활을 믿게 되었다.(요 20:24-29)
이처럼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제자들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가서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하였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수용한 한국 그리스도인들도 고난의 삶 속에서 부활에 대한 놀라운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서원보(W. C. Swearer) 선교사는 1901년 충청도 서해안에 위치한 해미 신앙공동체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이 신앙공동체의 지도자는 태풍이 왔을 때 바다에서 아들을 잃은 아픔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던 이 지도자는 천국에서 아들을 다시 볼 것이라는 부활의 소망을 굳게 가지고 있었다고 전한다.

이처럼 부활신앙은 내세에 대한 강한 믿음과 함께 현세에 선한 소망을 던져주고 있다.
그런 가운데 실제적으로 한국교회 역사 속에는 죽었던 자가 다시 살아나는 희귀한 일이 더러 있었는데, 이는 부활에 대한 예표가 되었다.

경기도 안산구역 전도사 김동일씨의 통신을 거한즉 본구역 사랑리교회 박봉근씨는 이왕 예수 믿기 전에 자기가족 중에 예수 믿는이를 원수같이 여기고 무수히 비방하더니 하루는 박씨가 믿는 형제의 집에 와서 말하기를 내 처가 사경에 이르렀으니 죽던지 살던지 찬미와 기도나 하여 달라고 간청하매 형제 몇 사람이 가 본즉 병자는 이미 죽었고 집안 식구는 장사 지낼 공론이 분분하거늘 그러나 기도하여 달라하거늘 형제들과 박봉근씨와 일심으로 찬송과 기도를 몇분동안 할 새 죽었던 사람이 차차 생기가 있어 그 아침에는 다니기도 하며 말도 하니 의연한 새사람이 되매 온 집안이 주를 독실히 믿으매 인동에 사는 외인까지 하나님의 권능을 찬송하였다더라

교회의 부활을 소망하라

사도 요한이 서신을 보냈다는 요한계시록 속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 소아시아 일곱교회는 교회로 존속하지 못하고 유적지로 변하였다.

그중 유일하게 서머나(현재 터키 이즈밀) 지역에는 순교자 폴리갑 감독을 기념한 교회가 재건되어 예배를 드리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교회 속에도 설립된 후 지금까지 그 역사를 이어가고 있는 교회들이 있지만, 설립되었다가 자취를 감춘 교회들도 결코 적지 않다. 달리 표현하자면, 궁극적으로 잃어버린 교회들이 된 것이다.

특히 해방의 봄 속에 깃든 분단의 겨울 속에서 북한 교회들도 잃어버렸다.
그리고 현재 교회 환경의 변화와 교인의 지속적인 감소 등으로 인해 다수의 농촌교회와 도시 개척교회들이 생존의 위기에 봉착해 있다.
살아 있으나 죽은 것과 진배 없는 교회들이 적지 않다는 뜻이다.

이러한 냉엄한 현실 속에서 한국교회의 역사 속에는 다 죽었던 교회가 되살아난 놀라운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강화 화도면에 자리한 문산교회의 부활 이야기이다.
1906년에 태동한 문산교회는 급속하게 성장하여 1907년 3월에는 교인들의 헌금과 미 감리회 여성해외선교회의 보조로 초가 10칸을 매입하여 독립적인 예배당까지 마련하였다.
그렇지만 교회에 큰 위기가 찾아왔다.
정미의병이 발생했을 때 일제의 강화수비병토벌대가 교회를 핍박함에 따라 교인들이 흩어져버린 것이다.
이 같은 최악의 상황 속에서 교인 박기산은 10여 년을 홀로 기도와 예배로 인내하며 교회를 지켰고, 1915년 강화도 마리산 부흥회를 계기로 문산교회는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강화군 화도면 문산동 사는 박기산(朴起山)씨는 교회 속장으로 일가의 핍박과 동리의 군축을 인하여 교우가 점점 흩어지고 교회가 없어지게 된지라 박씨가 애통하고 기도하고 십년동안을 혼자있어 기도하고 다 쓰러져가는 회당에서 매주일에 예배하고 성일을 지키더니 하나님께서 도우사 작년봄 부흥회에 자기 집안 식구들이 병도 고침을 얻고 다시 회개하는 열심도 얻어 함께 예배함으로 교우들이 차차 다시 일어나는지라 그 부친은 근본 여러해 동안에 영국종고성교회[성공회]를 믿어 그 교회의 회장으로 시무하셨으니 이름은 사가리아라 그때의 부흥회를 인하여 자기 집안 식구들이 특별히 은혜 받음을 보고 마음이 감동하는 중에 성신의 책망하심을 당하여 진리로 돌아온지라 부자형제가 단합하여 열심히 믿음에 교우들이 삼십명 달하고 금년봄부터 회당을 다시 건축하기로 시작하여 여름에 준공한지라 유월 이십구일 예배에 각 처 교우들이 모여서 회당봉헌식을 행하였는데 본지방 목사 김광국씨와 감리사 최병헌씨가 성례의 순서를 행하고 강도한지라 회당은 비록 크지 못하나 초가로 일곱간이오 당일에 모인 교우는 백여인이라 기쁨으로 찬송하고 정성으로 예배하였으니 하나님께서 박씨가 십년동안이나 잘 참고 견딘 정성을 권고하심이라 하더라

국가의 부활을 소망하라

가나안을 떠나 애굽으로 이주한 70명의 야곱의 후손은 430년 만에 애굽에서 탈출하는 해방의 기쁨을 맞이하였다.(출 12:40-42)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렘 29:10)처럼
70년 만에 고레스의 칙령에 의해 고국으로 귀환하였고, 이후 무너진 성을 재건하고 성전을 다시 건축하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크고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다.(스 1:1-4)

우리나라도 1910년 일본에 합병되는 한일병탄의 치욕을 경험하였다.
하지만 일제 치하 36년 만인 1945년 해방의 기쁨을 누렸다.
그렇지만 해방의 기쁨은 이내 남북분단의 아픔을 가져왔다. 비록 남북이 분단되었지만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역사로 남북통일이 이루어지는 새 역사를 창출해주실 것이라는 기대와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일례로, 충남 아산에 있는 구미동교회(현재 백암교회) 출신 김복희를 들 수 있다.
이화고등보통학교에 재학하던 중 3・1운동이 발생하자 학교의 휴교로 인해 고향 아산 백암리에 내려온 후 영신학교 교사 한연순과 함께 3・1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던 그녀는 일제로부터 독립이라는 ‘큰 일’을 행하신 하나님께서 남북통일의 ‘큰 일’도 반드시 이루어주시리라는 확신 속에 평생을 기도하였다.

이처럼 김복희가 가졌던 남북통일에 대한 기대와 확신은 다른 무엇보다 일제로부터 해방을 체험한 역사적 경험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만큼 조국해방은 함석헌 옹의 표현대로 느닷없이 도둑처럼 찾아온 바로 그런 것이었다.

강원용 목사는 자신의 회고록 『빈들에서』에서 느닷없이 도둑처럼 찾아온 해방에 대하여 시편 126편 1절의 표현처럼 마치 꿈꾸는 것 같았다고 회상한 바 있다.
이는 일제 말기 사상범으로 수감되었다가 가석방된 그가 재수감의 우려 속에 가족들과 함께 산속으로 들어가 생활하던 중 산에서 해방을 인지하게 되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였다. 그는 마치 꿈꾸는 것 같았다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우리는 그렇게 산속에서 외부와는 일체 단절된 채 한 열흘 정도 살았는데, 어느 날 아랫동네에서 느닷없이 애국가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아마 그때가 8월 18일 정도였던 것 같다. 깜짝 놀라서 마을 쪽을 자세히 관찰했더니 마을에서 국민학생쯤 되는 아이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뛰어다니는 것이 보였다.

나는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눈 앞에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아 우리는 어안이 벙벙한 채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어찌됐든 진짜 해방이 되었다면 우리 식구는 힘든 산속생활을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되었으므로 우리에겐 해방이 정말 실감나는 ‘해방’인 셈이다.



부자들의 파티

부활이 없는자의 삶은 소망이 없기에 방탕합니다.

옛날 어느 나라에서 부자들이 파티 할 때에 필히 관을 준비하고 그 관속에 인형을 시체대신 수의를 입혀서 눕혀 놓았다가 한창 잔치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누군가가 그 관뚜껑을 열어 제치고 그 속을 들여다 보게 하면서 “우리도 머지 않아 이렇게 관속에 들어갈 수 밖에 없는 운명인데 그러기 전에 더 잘 먹고 더 재미있게 놀다 죽읍시다. 

잔뜩 쌓아만 놓고 먹지도 놀지도 못하다 죽으면 얼마나 원통한가?” 하고 외치면 모두 미친듯이 먹고 마시고 날뛴다고 합니다. 
부활을 모르는자들의 춤과 노래와 향연은 미친듯이 날띄는 것 뿐입니다.    

뱀의 몸을 찢은 물고기 
 
“한마리의 큰 뱀이 바닷속을 헤엄치면서 많은 물고기를 집어 삼켰습니다.
그러다가 날카로운 지느러미를 가진 물고기를 집어 삼켰습니다.
날카로운 지느러미를 가진 이 물고기는 뱀의 뱃속에 들어가 너무 캄캄한지라 여기서 못살겠구나 하여 자기의 무기인 날카로운 지느러미로 그 뱀의 배를 찢고 나와 버렸습니다.
그랬더니 먼저 잡혀 먹힌 다른 물고기들도 그 뒤를 따라 나와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뱀은 죽었습니다.”

이뱀은 사망입니다.
이 뱀이 오랫동안 사람들을 잡아먹었습니다.
어느날 예수님까지 삼켰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의 무덤을 열어 헤치고 나왔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믿고 죽은자가 예수님을 따라나오게 됩니다. 
믿는자의 산 소망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무덤문은 열렸습니다.

사슴의 눈물을 먹는 이유

오래살려고 서양 사람들은  사슴의 눈물을 먹습니다.
왜냐하면 세익스피어의 희곡 “마음내키는대로”를 보면 사슴이 죽을때는 반드시 눈물을 흘리는데 그 눈물을 받아 먹으면 만병이 통치되어 오래 산다는 대사가 나오는데 그 말을 믿고 먹는답니다.
그러나 오래살 수는 있어도 늙는길 막을 수 없습니다 . 

옛시인 정철은 인생의 허무함을 이렇게 읊었습니다.

“한 손에 막대잡고 한 손에 가시쥐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려 하였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알렉산더 대왕이 흘린 세번의 눈물

옛날에 좀처럼 울지 않기로 유명했던 알렉산더 대왕도 세번 울은 적이 있답니다.

한번은 그가 페르샤 원정을 갔을때 페르샤 왕 고레스의 묘비를 보고 울었는데 “인생이 아무리 한때 부귀영화를 누려도 결국은 한개의 무덤밖에 남기는 것이 없으니 허무하구나” 하고 눈물을 흘렸다.

인도의 인더스강가에서 인더스강만 건느가면 인도를 정복할 수 있는데 지친 부하들이 따라주지 않고 다시 돌아가야만 할 때 거기서 목놓아 울었었다.

그가 부하들과 모래사장에서 씨름을 하다가 넘어졌는데 넘어진 그 자리를 보고 울었다고 합니다.
그를 넘어뜨렸던 부하가 하도 무안해 왜 우시냐고 물었더니 부하에게 져서 원통하여 운 것이 아니라, 모래 사장에 넘어진 자국을 보고 내가 지금은 이렇게 큰 나라를 가지고 부귀 권세를 누리지만 나도 죽으면 한 평의 땅속에 묻혀 버리고 말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인생이 얼마나 무상하냐고 하며 울었다고 합니다.

케파 샘팡기 목사의 부활절 주일 예배

이 사건은 아프리카 우간다 어떤 교회에서 일어났던 일입니다.
그 당시 우간다는 독재자인 이디 아민이라는 악명 높은 사람의 통치 아래 있었습니다.
이 교회의 목사인 케파 샘팡기 목사님는 종종 정부의 불의를 책망하는 예언적인 설교를 하곤 했습니다.
이 사건이 난 아침에도 7천명이나 되는 교인들이 부활절 주일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설교를 마친 후 목사님이 교회 사무실로 들어섰을 때 거기에는 5명의 비밀경찰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 중 한 사람이 “우리는 국가의 명으로 반국가 사범을 처단하기 위해 왔소”라고 하면서 목사님에게 총을 겨누었습니다.
이때 케파 목사님은 아주 담담하게 이런 부탁을 했습니다.

오늘은 부활절 아침입니다.
나는 부활을 믿는 사람으로 죽는 것이 전혀 두렵지 않지만 나에게 2분의 시간을 주신다면 잠시 주님께 기도를 드리고 생을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2분의 시간을 허락 받은 목사님은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간다의 통치자 이디 아민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그의 명령을 원하지 않으면서도 받들어야 하는 불행한 이 5명의 형제들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우간다 국민에게 자유를 주시옵소서.
내 사랑하는 조국이 사랑의 땅과 의의 땅이 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나의 죽음으로 다시는 이러한 비극이 이 땅에 되풀이되지 않도록 긍휼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기도를 마쳤을 때, 목사님의 눈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고 기도를 듣던 경찰들의 눈에서도 뜨거운 눈물이 흘렀습니다.

경찰의 통솔자인 한 사람이 무릎을 꿇으면서 “목사님, 죄송합니다. 우리가 큰 실수를 저지를 뻔했습니다. 목사님은 피신하여 교회에 계시지 않는 것으로 보고하겠습니다. 빨리 이 자리를 떠나 주십시오”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 사건을 통해 부활의 믿음은 죽은 후의 육체적인 부활의 소망을 약속할 뿐 아니라 오늘을 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승리의 삶을 살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말레이시아 최종국 선교사 "사랑합니다"

말레이시아에서 무슬림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는 최종국 선교사님이 “사랑합니다”라는 책을 쓰셨습니다.
이 책은 아직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은 부모님이나, 가족, 친구들에게 선물하기에 좋은 책입니다.

저자의 아버지가 어느 날 폐암 말기라는 진단을 받게 됩니다.
병원에서는 더 이상 손을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며 수술을 거부하였답니다.
어느 날 아들이 퇴근하면서 그동안 미뤄왔던 말을 하기로 결심했답니다.
평소에 전혀 하지 않던 말을 하려니 많이 망설여지고 또 몹시 쑥스러웠답니다.

“아버지, 저는 아버지가 참 존경스러워요.
평생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제가 많이 배운 것 같아요.”

그 말을 듣고 아버지가 대답하셨습니다.
“그래, 고맙구나! 아들아, 내가 널 많이 사랑한다.”

아버지도 그 말을 얼마나 어렵고 힘들게 꺼내셨는지는 그 표정만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답니다.
뜨거운 눈물 두 줄기가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답니다.

선교사님의 아버지는 그때까지 믿지 않으신 분인데, 집에서 가까운 교회에 나가셔서 복음의 소식을 듣고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별거 중이었던 어머니와 극적으로 화해하시고 온 가족이 함께한 가운데 감동적인 세례식을 가졌답니다.
아버지께서 세례를 받는 내내 울고 계셨답니다.
그 선교사님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이 믿어지지가 않았답니다.
어머니가 자녀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아버지가 우는 모습은 처음 본다. 저 무심한 양반이 그래도 눈물이 있었구나.” 했답니다.

다음은 그 아버지께서 하나님께 가시기 전에 남기신 신앙 간증입니다.

“그저 착하게만 살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병들어 죽어가면서 내가 아무리 착하게 살았어도 죽음 앞에서는 아무도 나를 도와줄 수 없음을 깨달았을 때, 그때서야 나는 비로소 눈을 떴습니다.
나를 도울 수 있는 분은 오직 그분, 그 한 분뿐이라는 것을! 이제 부끄럽지만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가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내 모든 부끄러움과 고집스러움을 십자가에서 다 용서해 주셨으니, 오직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말씀만 가슴에 새기고 가려합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모든 고난을 당하셨고, 나의 모든 죄를 다 갚아 주셨기에 오직 그분을 의지해서 하나님 아버지에게 가려합니다.”

“이 땅에서의 시간은 참으로 빠른 것 같습니다.
그러니, 오늘 더 많이 사랑한다고 말해야 합니다. 더 많이 기뻐하고, 더 많이 감사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분은 예수님 안에서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라는 것을 보는 눈이 열린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죽지만 예수님을 영접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죽음을 넉넉하게 이길 수 있는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죽음을 영원한 세계로 들어가는 과정으로 오히려 축복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신 부활의 능력으로 사망을 향하여,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 15:55, 57)

부활은 죽음도 어떻게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레나 마리아라는 가스펠 가수는 태어날 때부터 두 팔이 없고 한 쪽 다리가 짧은 아이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고통을 이기고 가스펠 가수로 세계인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있습니다.
언론은 그녀의 목소리를 “천상의 노래”라고 격찬했습니다.
그녀의 인생을 담은 <발로 쓴 내 인생의 악보>는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중증 장애인이지만 세계장애인수영선수권대회에서 4개의 금메달을 땄습니다.
그녀는 자신을 부활의 증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녀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자신의 육체에 대해 불평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일본에서 공연을 했을 때 일본 텔레비전에 출연한 적이 있었는데 사회자가 “레나, 당신은 왜 그렇게 밝을 수 있죠?”라고 물었답니다. 그 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내 삶을 움직이고 계시며, 내가 필요한 것을 채우시며, 또 내 곁에서 나를 위로하시고 새 힘을 주시니까요.” 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누군가 내게 ‘주님이 살아 계시고, 부활하셨다는 증거’를 대라고 말한다면 “나는 나의 약한 육신과 날마다 찬송하는 내 입술을 당당하게 보여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되었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로 죽음을 정복하고 완전한 승리를 누리게 됩니다(54∼57).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로 주님 재림하실 때 영생의 부활로 참여합니다(50∼53).
그러면 부활을 믿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첫째, 부활을 믿는 증인이라면 어떤 일을 당하여도 신앙이 흔들리지 않고 더욱 견고해져야 합니다(58).
세속화된 도시 속에 있는 고린도교회에는 갖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럴 때 부활신앙에 회의가 생길 수 있습니다.
“천국이 있다면 저렇게 할까? 부활이 있다면 저 정도 수준일까?” 신앙이 흔들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부활신앙이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 부활을 믿는 증인이라면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써야 합니다(58).

셋째, 부활을 믿는 증인이라면 우리의 수고가 헛되지 않다는 사실을 믿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수고하는 것 중에는 헛된 것들이 있는 반면에 영원히 헛되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부활이 있음으로, 내세가 있음으로, 천국이 있음으로 주님을 위한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오후 3시에 인천 제물포 앞바다에 증기선 한 척이 들어왔습니다.
한국교회 최초의 선교사 아펜젤러언더우드가 탄 배였습니다.

27살의 청년 아펜젤러(1858. 2. 6~1902. 6. 11)가 한국 땅에 첫발을 디딜 때 했던 기도가 있습니다.

“우리는 부활주일에 이곳에 도착했습니다.
이날 죽음의 철장을 부수신 주님께서 이 백성을 얽매고 있는 줄을 끊으시고 그들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빛과 자유를 얻게 하소서!”

아펜젤러 선교사는 44세가 되던 1902년에 목포에서 배가 침몰해 순교했습니다.
조선 땅에 고결한 젊음을 바친 한 청년, 그가 그토록 원했던 것은 흑암의 조선 땅에 부활의 복음을 심는 일이었습니다.
오늘 피로 뿌린 그 씨앗은 싹이 트고 열매가 맺혀 조국 강산을 그리스도의 핏빛으로 물들이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사건을 말하면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십자가가 없는 죄 사함이 없듯이 부활이 없는 영생은 없습니다.
십자가가 과거의 모든 죄 문제를 해결했다면 부활은 현재와 미래를 여는 출입문입니다.
기독교는 십자가의 아픔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기쁨으로 나아갑니다.
부활 없는 희망이 없고, 부활 없는 기독교는 없습니다.

빌리 그레함이 부활에 대해 한 말입니다.
“줄리어스 시저가 생존했거나 알렉산더 대왕이 33살에 죽은 것보다 더 확실한 부활의 증거가 있다.”

성경이 부활을 말씀하고, 주님을 만난 제자들이 부활을 증언했고, 기독교 2천 년 역사가 피로 선포한 것이 예수님의 부활이었습니다.

성경의 모든 인물 가운데 부활을 가장 극적으로 체험한 사람이 바울입니다.
바울이 쓴 고린도전서 15장은 부활장이라고 말합니다.
특이한 사실은 바울이 부활을 설교하면서 변증으로 시작하지 않고 선포로 시작한다는 점입니다.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바울에게 부활이란 너무나 확실하기에 변증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부활을 선포하고 부활을 체험한 사람들을 소개합니다.

부활을 체험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인생에 위대한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주님을 버리고 도망했다가 부활을 체험하고 생명을 드리는 헌신자들이 됐습니다.
그들을 기다린 것은 채찍과 죽음의 위협이었습니다.
그러나 부활을 체험한 사람에게 두려운 것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의 터툴리안이 한 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그가 진리를 소유한다는 확신이 없다면 기꺼이 죽을 수 없을 것이다.” 참으로 옳은 말입니다. 그것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확신이 없다면 생명을 바칠 수는 없습니다. 한두 명이 아니라 12명이 모두 동시에 목숨을 던질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정말 주님을 믿는다면 물어봐야 합니다. 내가 정말 부활을 체험했는가? 나의 죄를 위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정말 만났는가? 부활을 체험했다면 다시 물어봐야 합니다. 내 삶이 정말 말씀대로 변화를 받았는가? 부활하신 주님은 모든 것을 바꿔 놓습니다. 얼마나 많이 변화를 받았는가 하는 질문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더 변화 받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근본적으로 변화를 받았는지 물어야 합니다. 내가 죽고 내 속에 부활하신 주님이 살고 계시는지 물어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순간 내가 죽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오직 예수만이 있을 뿐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위대한 은혜를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 부활을 체험한 사람들은 죽어서 가는 내세를 강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제자로서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삶 속에 부활을 사는 사람들 그리고 변화된 삶으로 부활을 증명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하늘에 속한 사람에게 걸맞은 삶의 방식이 있습니다. 내일이 없는 것처럼 살아서는 안 됩니다. 부활의 신앙을 믿어야 신앙생활이 행복합니다. 봉사가 즐겁습니다. 주님의 교회를 위해 어떤 일을 섬겨도 기쁨이 넘칩니다.

장로교의 기초를 놓은 존 칼빈은 1509년에 태어났습니다.
그의 가르침으로 종교개혁이 꽃을 피웠고 기독교뿐 아니라 세계 역사에 가장 큰 흔적을 남긴 사람이었습니다.
칼빈을 연구하기 위해 그가 태어난 프랑스 누아용, 목회했던 프랑스 스트라스부르그와 스위스 제네바 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칼빈의 무덤은 지금까지 어느 곳에 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칼빈은 이 땅을 떠나면서 유언을 남겼습니다.
나의 무덤을 누구에게도 남기지 말라!
일생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살아간 칼빈다운 유언이었습니다.
칼빈이 마지막으로 목회했던 제네바 성 피에르 예배당 근처에는 공원묘지가 있습니다.
그곳에 가면 J.C라고 씌어진 무덤이 있습니다.
존 칼빈이라는 이름입니다.
비어있는 무덤입니다.
그의 무덤은 비어있지만, 그 무덤에서 부활의 복음이 터져 나오고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변화를 요구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사람에게는 하늘에 속한 사람다운 삶이 있습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허무에서 감격으로 바뀐 사람에게는 그들의 모든 삶 가운데 살아계신 예수의 흔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내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 나의 부활 이야기를 시작하는 부활주일을 맞이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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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삶을 살아가겠다는 결단입니다.
왜 예수님의 삶을 살아야 할까요?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제가 군 생활을 할 때 지휘관의 지프차를 운전하던 '한 일병" 이란 사병이 있었습니다.
당시 군 관할 지역의 지휘관들이 OP에 모여서 작전 회의를 하려고 모였습니다.
한 일병도 지휘관의 차를 운전하여 작전지역에 지휘관을 내려주고 주차장으로 안내를 받아 주차하던 중 주차장 아래 벼랑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지프차도 운전병도 모두 안전하게 구조되었습니다.

그 날 저녁 한 일병이 내무반에 들어와서 "내 생일은 오늘부터 이 날로 바꾼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죽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기 때문에 살아난 그 날이 그의 생일이 되었다는 이야기라고 한다면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었던 내가 예수를 믿음으로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은혜를 확신한다면 반드시 예수님처럼 살아가겠다는 결단을 요구하는 것이 부활 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보내신 것은 죄에 팔려버린 인생을 되사시기 위함이셨습니다.
인생들이 어떻게 죄에 팔렸느냐고요?
간단하게 누구든지 죄를 지으면 죄의 종이 되거든요.
이 세상에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도 궁금하시면 마가복음 7:20-23절을 읽어보세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희생의 대가로 원래의 신분인 하나님의 자녀로 되돌아 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모든 것은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생명으로 사셨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5:15절입니다.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데살로니가전서 5:10절도 봅시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베드로전서 4:2절입니다.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이것이 그의 백성 된 우리가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아야 할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부름 받은 선지자 중에서 가장 분명하고 단순한 소명을 받은 선지자가 세례 요한일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과 신약의 중간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행한 선지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세례 요한을 일컬어 "여자가 나은 자 중에서 가장 큰 자"(마11:11)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선지자의 삶을 보십시오! 그의 의복은 약대 털옷과 가죽 띠였고, 음식은 메뚜기와 간간이 들 꿀인 석청을 먹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잠자리는 하늘을 지붕 삼고, 땅을 방바닥으로 삼은 세상에서 가장 큰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의식주 문제로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관심은 오직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았다는 말입니다. 오늘의 성도들에게도 동일한 것이 요구됩니다(눅12:22-34).

우리가 잘 아는 마태복음 6:33절의 “그의 나라를 구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기를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는 일을 제일로 삼으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행할 가장 귀중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된 삶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자 하나님의 자녀이면 너무도 당연히 하나님의 뜻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말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세상의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그 말을 믿을 수가 없겠지요?


눈을 열어 주소서!

초막절은 메시아를 기다리는 절기이기도 했지만 아무도 진정한 메시아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고, 들었지만 듣지 못했다.

이 와중에 예수님은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고치심. 이러한 눈이 열리는 기적들이 우리 가족들에게 일어나길.

그렇다면 어떤 눈들이 열려야 할까?


1. 예수를 볼 수 있는 믿음의 눈
-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v.1)
- 원문에서는 그 사람을 지칭하는 관사가 없다: 특정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 눈이 먼 그 당시의 유대인들, 그리고 오늘날의 우리를 지칭하는듯
- 선악과를 먹음으로서 정녕 죽었던 인간, 영의 눈이 감겨버렸다. 그리고 태어나는 모든 인간들은 영의 눈이 감긴채로 태어난다.
- 예수님이 보이기 시작하면 예수님의 말씀이 들린다. 그렇다면 이 땅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해석이 된다. 해석이 바뀌면 생각이 바뀌고 생각이 바뀌면 삶이 바뀐다.


2. 세상을 볼 수 있는 의 눈
-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v.5)
- 생명의 빛되신 예수님. 예수님이라고 하는 패러다임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을 바로 볼 수 있다.
- 진흙을 이겨 눈에 발라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창조주의 모습을 보다: 눈을 재창조해주시는 예수님.
>>> 영적인 눈이 뜨여지면 얼마나 두렵기도 하고 놀라울까
>>> 보는 것은 똑같지만 영의 눈이 열렸느냐에 따라 해석이 완전히 달라진다
- 많은 사람이 허상에 잡혀 산다 (특히 물질). 그러한 허상은 죽을 때 깨어진다.



3. 해야 할 일을 보는 사명의 눈
-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v.7)
- 눈을 뜬 맹인은 논쟁하는 것이 아니라 증언한다. 예수님을 드러낸다.
- 내 생각이 어떻게 바꼈는데, 내 삶이 어떻게 바꼈는지 간증하는 삶이 되길.

출처: https://hoseastory.tistory.com/2008 [호.세.아. - 사람을 세우는 가정]






십자가(Cross)는 라틴어 '크룩스(crux)'라는 말에서 온 것으로 '고문대(拷問臺)'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는 인간이 만든 형벌 가운데 가장 참혹한 것이었습니다.
십자가의 형벌은 고대 여러 민족들 사이에서 이미 통용되어 왔던 사형법 이었습니다.
알렉산더 왕도 그가 점령한 지역에서 반기를 드는 사람들을 즐겨 십자가에 매달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드로 사람 일 천명을 십자가에 처형했다고 합니다.

에스라 6:11에는 파사의 다리오 왕이 조서를 내리는데 자기의 명령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십자가에 달아 매어 죽이라고 명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로마제국에 와서는 노예만을 십자가에 죽였으나 때로는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라도 중죄(로류)를 범한 경우 이를 적용시켰습니다. 그러나 너무도 참혹했기 때문에 로마 본국 내에서는 가급적 십자가 형을 실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콘스탄틴 황제가 십자가 형벌 금지령을 내렸고, 그 후 이 사형법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릴 죄인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구속 사업을 성취하기 위하여 그 참혹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이미 구약에서 예표로 알려진 것과 같이, 십자가를 쳐다보는 사람은 죽지 않으리라는 그 말씀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류 구원이란 신학적 의미를 가진 사건이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립보서 2:6-7)

십자가 위에서 남기신 예수님의 일곱마디 말씀 (架上七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린 것이 오전 9시이고, 운명한 것이 오후3시니 십자가 위에서 6시간 동안 생명이 유지되어 있었습니다.
빨리 죽지 않고 모든 고통을 겪으며 서서히 죽기 때문에 십자가 처형은 가장 고통스러운 처형 방법인 것입니다.
이 6시간 동안에 예수는 일곱 마디 밖에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4복음서에 나타난 것을 종합해서 순서대로 적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말 -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 : 34).
              이것은 용서의 기도였습니다.

둘째말 -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 : 43).
              이것은 파라다이스(낙원)의 약속이었습니다.

셋째말 - "어머니 보십시오, 당신의 아들입니다. " "보라, 네 어머니다"(요 19 : 26-27).
               이것은 아들로서의 효도였습니다.

넷째말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마 27 . 46).
              이것은 영적인 고민이 었습니다.

다섯째말 - "목 마르다"(요 19 : 28).
                이것은 육신적인 고통이었습니다.

여섯째말 - "다 이루었다"(요 19 : 30).
                이것은 승리의 선언이었습니다.

일곱째말 -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눅 23 : 46),
                 이것은 최후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이상 일곱 마디 중 처음 세 마디는 9시부터 12시 사이에 말씀하셨고, 12시부터 3시까지 세 시간 동안 갑자기 온 땅이 어두워졌습니다. 그 세 시간 동안 예수는 한마디도 말씀하지 않으셨고 오후 3시에 예수께서는 나머지 네 마디 말씀을 연거푸하시고 운명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사실로 이루어진 구약의 예언
 
십자가 사후에 일어 난 사실들
     
    (1) 지진으로 성전 휘장이 찢어짐(마 27 : 51).
    (2) 무덤이 열림(마 27 : 52).
    (3) 백부장의 증거(마 27; 54).
    (4) 무리들의 확신(눅 23; 48).
    (5) 도적의 다리를 꺾음(요 19 : 31-32).
    (6) 옆구리 찌름(요 19 : 34).
    (7) 장사 지냄(요 19 : 38-42).
    (8) 무덤 봉하고 파수꾼 세움(마 27 : 66).
 
고난에 관한 금언 ·격언 ·속담
     
    (1) "고난은 축복을 갖다 주는 지름길이다. " -M. 루터-
    (2) "하나님 앞에 진실되게 살려고 하는 이는 고통을 보석으로 삼는다. " -하천풍언-
    (3) "고난은 성공의 축대를 쌓는 것과 같다. " -M.NL. 영안-
    (4) "고생보다 더 중요한 교육은 없다. " -지스레지-
    (5) "고난을 모르는 사람보다 더 불쌍한 사람은 없다. " -도미트 아쓰 -
    (6) "고난이 크면 클수록 그 영광도 크다. " -M. T시세로
    (7) 초년 고생은 말년 낙의 근본이라. 네가 자라면 오복이 구비하고 남이 우러러보는 사람이 되리라." -이광수 -
    (8) "대부분의 생의 고난은 우리 자신이 햇빛에 서 있기 때문에 생긴다" -에머슨-
    (9) "고난은 하나님의 심부름꾼이다. 어려움이 우리에게 찾아 왔을 때,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물로써 하나님의 신임의 증거 라고 간주해야 한다. " -비쳐(H.W. Beecher)-
    (10) 고난이란? 좋은 것이다.
    • 고난은 좋은 훈련이다.
    • 고난은 사람이 살기에 귀찮을 정도다.
    • 고난은 여행하는 것과 같다.
    • 고난은 자신이 깨뜨려지는 것이다.
    • 고난은 나쁜 문제들을 안고 있는 것이다.
    • 고난은 한 성도가 받으면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고통을 겪게 된다.
    • 고난은 하나의 체험이다.
    • 고문을 받는 것도 심한 고난이다.







2022년 고난주간 일정


일요일
  • 예수가 나귀 타시고 예루살렘 입성(마 21 : 1 - 11, 막 11 : 1 - 11).

주일

** 예루살렘에서의 승리의 입성(마21:1-11, 막11:1-11, 눅19:29-44, 요12:12-19)

주님의 고난은 예루살렘의 입성과 함께 시작된다.

유월절을 며칠 앞두고 예루살렘의 거리는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유월절 양되신 예수님은 제자들이 구해온 어린양을 타고 감람산 쪽에서 들어 오셨다.

전에 갈릴리에 계실 때에 그의 교훈을 듣고 도움을 받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특별히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 떡을 얻어 먹었던 사람들은 이 기회에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호산나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다. 군중들은 흥분하기 시작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승리의 표시인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예수님을 호위하고 어떤 사람들은 옷을 벗어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며 외치었다.

예루살렘의 거리는 예수님의 입성으로 진동하였다.

예수님은 스가랴 9:9에 있는 말씀대로 왕으로 그의 도성에 입성하신 것이다

그러나 군중이 원하는 왕과 예수님의 왕되심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었다.

군중들은 제한된 한 민족의 왕, 육체의 왕로마의 압제에서 해방과 빵문제를 해결으로 생각하 였으나 예수님의 왕되심은 우주의 왕이요, 영원한 왕으로 입성하신 것이다.

 

월요일
  • 열매 없는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심(마 21. 18 - 19, 막 11 : 12 - 14).
  • (세금의 질문에 설명) 성전 청결케 함(마 21 : 12 - 13, 막 11 : 15 - 19).

월요일

*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다 (마 21:18-20,막11:12-14,20,21)

성밖 베다니에서 하루 저녁을 쉬신 예수님은 이른 아침에 예루살렘으로 향하시었다.

도중에 시장기를 느끼신 예수님을 때마침 길 가에 있는 무화과나무 밑으로 가셨다

그러나 잎만 무성했지 열매를 얻을 수 없었다. 실망하신 예수님은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고 저주하셨다.

* 성전을 정결케 하시다(마 21:12,13,막11:15-17,눅19:45,46)

성안에 들어오신 예수님을 그 길로 곧 성전에 가시었다

예수님은 성전 안에서 사람들이 돈을 바꾸고 짐승을 파느라고 소란한 것을 보셨다

채찍을 들지 않을수 없으셨다. 짐승을 내몰고 장사하는 사람을 내 쫒았다.

돈 바꾸는 상도 뒤집어 엎으셨다.

그리고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가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고 꾸짖으셨다.

그러나 책망을 듣는 자들의 눈길은 회개의 빛대신에 시기와 원망의 눈으로 가득 채워져

“어디 두고 보자식의 노기였다

예수님은 해가 저물어 전과 같이 쉬시기 위하여 성 밖으로 나가셨다.

 


화요일
  • 무화과나무 마름(마 21 : 19 - 22, 막 11 : 20 - 25).
  • 제사장 바리새인의 질문(막 11 : 27 - 33, 눅 20 : 1 - 8).
  • 경고의 세 가지 비유, 포도원 비유(마 21 : 28 - 22 : 14, 막 12 : 1 - 12).
  • 바리새인과 헤롯 왕이 예수께 질문(마 22 : 15 - 40).
  • 메시야에 대한 예수의 질문(눅 20 : 41 - 44).
  • 예수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 책망(막 12 : 38 - 40).
  • 과부연보에 대하여 칭찬함(막 12 : 41 - 44, 눅 21 : 1 - 4)
  • 유대인이 예수를 배척함. 예루살렘 멸망과 말세를 예언함(눅 21 : 5 - 38, 요 12 : 37 - 50).

수요일
  • 예수가 밤마다 베다니에 나가시니 이 날은 거기서 기도했을 것임.(성경에 수요일은 기록이 없음.)


유다가 배반하다(마26:14-16,막14:41-45,눅22:1-6,요18:1-11)

예수님은 아직 성밖에 계시면서 제자들에게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우리라고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교훈하고 계실 때

한편 성안 가야바 대제사장 아문에서는 예수님을 궤계로 잡아 죽이려고 모의하고 있었다.

그리고 제자중 하나인 가룟유다는 제자들 사애에서 빠져 나와 대제사장의 회의장으로 달려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고 협상한다

제사장들은 기회가 왔다는 듯이 은 30을 달아 가룟 유다에게 주었다.

유다는 이때부터 예수님을 넘겨 줄 기회를 노리고 있게 된다.



화요일

* 무화과나무의 교훈을 하시다 (막 11:20)

그 이튿날 제자들은 성으로 들어오는 도중 놀라운 것을 보았다.

어제 예수님께로 저주를 받은 그 무화과나무가 뿌리부터 말라 죽었다.

성급한 베드로는 놀라운 얼굴로 선생님,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이에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으라,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하면

그 말하는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믿음의 교훈을 해 주시었다

* 성전 안에서 힐란을 받으시다(마21:23-27,막 11:27-33,눅20:1-8)

성안에 들어오신 예수님은 어제의 그 성전으로 가시었다.

책망을 듣고 회개할 줄 모르는 서기관과 장로들이 예수님을 힐란한다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시기에 찬 질문이요,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모르는 무지에 찬 질문이었다

예수님은 이들의 악함을 안타까이 여기시고 여러가지 비유로 저들을 깨우치려 말씀하셨다.

말 안 듣는 맏아들의 비유(마 21:28-32),

사악한 농부의 비유(마 21:33-41,마12:1-9,눅20:9-16),

왕자의 잔치를 거절한 악한 사람들의 소(행22:1-14)등을 말씀하시었다.

그러나 저들은 계속해서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질문을 하였다.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까불가하니이까”

“부활때 일곱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어떻게 해서든지 넘어뜨리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놀라운 지혜로 답변하시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에수님은 말세에 되어질 일들(마24,막13장, 눅21장)과

주의 재림의 때에 되어질 일들(마25)을 교훈하여 주시었다.


목요일
  • 최후 성만찬, 예수 그리스도의 고별사(마 26 : 31 - 35, 막 14 : 12 - 26, 눅 22 : 31 - 38).
 목요일

* 제자들의 발의 씻기다(요13:1-17)

유대인의 최대 명절인 유월절이 되었다.

저녁이 되자 예수님을 제자들이 미리 준비한 성내의 한 여성도의 집 이층 다락방으로 가시 었다

거기에는 유대인의 법을 따라 유월절을 지키기 위한 누룩없는 떡과 포도주가 준비되어 있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상가에 둘러 앉아 식사를 하기 시작하셧다.

식사를 하시던 예수님은 갑자기 일어서더니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떠 오시어 그 물로 제자들의 발을 하나 하나 씻기기 시작하셨다.

제자들은 어리둥절하였다

베드로의 차례가 왔을때 베드로는 내 발은 절대로 씻기지 못하리이다”

그때에 예수님은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고 답하시었다

그리고 예수님은 계속해서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의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고 겸손에 대하여 교훈해 주시었다.

* 반역자를 지목하시다(마26:21-25,막14:18-21,눅22:21-23,요13:21-30)

예수님은 서로 발을 씻기라는 말씀을 하신 후에 심히 민망한 표정으로

“너희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하시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여 누구오니이까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며 가룟유다에게 떡을 주셨다

이 말을 들은 가룟유다는 기분 나쁘다는 듯이 나가 버렸다

자기의 할 일을 하기 위하여 나간 것이다.

이제 사단은 완전히 유다의 마음을 사로 잡은 것이다.

* 마지막 만찬이 베풀어지다(마26:26-29,막14:22-25,눅22:19)

이와같은 일이 있은 후 예수님은 저희 가운데서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며 받아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다 이것을 마시라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첫번 성만찬식을 베풀었다.

그리고 죽음을 앞두신 예수님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려 가노라고 제자들 을 위로하시었다.

*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다(마26:36-46,막14:32-42,눅22:39-46,요18:1)

모든 말씀을 마치신 에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나가셨다

이 산 서쪽 기슭 아래에는 겟세마네라는 동산이 있었고

예수님은 이곳에서 최후의 고난의 쓴 잔을 마시기 위하여 기도하셨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있으라

예수님은 제자들과 돌던질만한 거리로 나가서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셨다

그의 이마에서는 피와 같은 땀이 떨어졌다.

 



금요일
  •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반역과 예수의 포박(마 26 : 36 - 47, 막 14 : 32 - 52).
  • 안나스와 가야바의 심문(막 14 : 53 - 72, 요 18 : 13 - 27).
  • 빌라도의 심문(마 27 : 2 - 11, 31, 요 18 : 13 - 29).
  • 십자가의 고난(마 27 : 32 - 56, 눅 23 : 26 - 45).
  •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를 장사함(마27 : 57 - 61, 막 15 : 43-47).
금요일

* 예수님이 잡히시다.(마26:4,7,56,막14:43-52,눅22:47-53,요18:3-13)

예수님은 기도중 대제사장이 보낸 사람들이 가까이 온 것을 느끼셨다.

그리하여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때가 온 것을 환기시키고 있을때

무리들은 몽치와 검을 가지고 올라오고 있었다.

그 중에는 열두 제자 중 하나였던 가룟 유다가 있었다.

그가 예수님께 다가서더니 랍비여 안녕하십니까하고 입을 맞추었다.

물론 이것은 예수님을 넘겨주기 위한 군호의 간사한 입맞춤이었다.

이로써 예수님은 악당들에게 잡히셨고 제자들은 모두 흩어지고 말았다.

* 심문을 받으시다(마26:57,27:26,30,막14:53,15:15,눅22:54,23:24,요18:13,19:16)

예수님을 잡아 결박한 유대인의 하속들은 먼저 예수님을 안나스와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에게 끌고 갔다.

거기에는 이미 많은 서기관과 제사장들이 모여 있었다.

저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찾고 있었으나 찾지 못하였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리라는 예수님 자신의 증거가 있을 때

저들은 분을 내며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주먹으로 치고 손바닥으로 때렸다.

그러나 재판권이 없는 저들은 당시의 총독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끌고 갔다.

저들은 여러 말로 예수님을 고소하였으나 역시 죄를 찾지 못하였다.

빌라도는 저들이 시기하여 예수님을 자기에게 넘겨준 줄 알고 석방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저들의 소리는 한층 높아졌다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그 피를 우리와 우리의 자손에게 돌리소서

저들은 너무도 무지하나이다


토요일
  • 무덤을 파수군이 굳게 지킴(마 27 : 62 - 66).
일요일
  • 부활의 새벽(마 28 : 1 - 10, 막 16 : 1 - 17).
  • 파수군이 부활의 사건을 제사장에게 보고(마 28 : 11 - 15, 눅 24 : 13 - 35).
  • 엠마오 도상의 예수(눅 24 : 13 - 35).
  • 도마와 다른 제자들에게 예수 나타남(막 16 : 14, 요 20 : 19 - 25).

종교개혁자 루터의 이야기입니다.
당시 독일에서는 고학생들 중에 노래를 잘하는 학생들은 남의 집 앞에서 노래를 불러 돈을 받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루터가 부잣집 창문 아래서 큰 소리로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노래를 시작하자마자 체격이 크고 무섭게 생긴 사나이가 창문을 열고 뛰어나오는 것이었습니다. 루터는 그 험상궂게 생긴 사나이가 주먹질이라도 할 줄 알고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사나이는 계속 쫓아왔고 결국 붙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공포심에 벌벌 떨고 있는 루터에게 그 사람은 주먹이 아닌 돈 뭉치를 내밀었습니다. 장학금을 주려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루터는 그때를 회고하면서 “두려움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만사가 모두 걱정과 염려로 가득 차 있고,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이 감사하고 좋게 보이며, 하나님의 손길이 보인다”고 하였습니다. 

 

루터의 말처럼 우리가 환경을 어떤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해석이 다르고, 그 해석에 따라 삶이 행복하게 느껴질 수도, 불행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찰스 엘 알렌(Charles L. Allen)이라는 사람은 사람에게는 세 가지의 시력을 갖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첫째는 신체적 시력
이것은 누구나 볼 수 있는 시각입니다.
옷, 집, 자동차, 음식, 남자와 여자, 건물 등

둘째는 정신적 시력
이것은 합리적으로 사물을 판단하고 이해할 수 있는 힘입니다.
정신적 시력이 없이는 진리를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영적인 시력
이것은 영적 시각입니다.
하나님을 알아볼 수 있는 영의 눈입니다. 

 


 

한해를 살면서 우리 삶에 펼쳐지는 모든 일들을 육체적 정신적 시력으로만 보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많지만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다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오늘 예배드리시는 여러분 믿음의 눈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감사와 찬송의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의 말씀은 아람과 이스라엘의 적대인 관계속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열왕기하 6장 8절을 보면 아람왕이 이스라엘을 침공하기 위해서 자기의 신복들과 함께 의논하여 우리가 아무데 아무데 진을 치리라하였습니다. 이때 엘리사는 이스라엘 왕에게 사람을 보내어 왕은 삼가 아무 곳으로 지나가지 마소서 아람 사람이 그곳으로 내려올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왕은 엘리사가 말한 장소로 사람을 보내 철저히 경계하게 하였는데 이렇게 한 것이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아람왕의 마음이 불안하여 그 신복들을 불러 우리 가운데 누가 이스라엘 왕과 내통하고 있는지 말하라고 하였습니다. 

 

12절에 그때 그 신복 중에 하나가 “우리 주 왕이여 아니로소이다. 오직 이스라엘 선지자 엘리사가 왕의 침실에서 하신 말씀조차도 이스라엘 왕에게 알려준다고” 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람왕은 “너는 가서 엘리사가 어디 있는가 보라! 내가 잡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신하들은 엘리사가 도단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아람왕은 최정예 군대를 총동원해서 도단성을 겹겹이 둘러쌌습니다.

 

다음날 아침 엘리사의 사환이 일어나서 보니까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읍을 에워싸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사환은 엘리사에게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하고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때 엘리사는 아무런 두려움도 갖지 않고 사환을 진정시키면서 “두려워 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종의 눈을 열어 보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사환의 눈을 열어 주셨습니다. 17절을 보면 “불말과 불 마차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18절에 아람 사람이 엘리사에게 다가오자 엘리사는 저사람들이 눈이 멀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람 군대의 눈을 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엘리사는 아람 군대를 사마리아로 데리고 갔습니다. 이스라엘이 왕은 아람 군대를 위해 큰 잔치를 베풀어 먹고 마시게 한뒤 그들을 돌려보냈습니다. 23절을 보면 이로부터 아람 군사의 부내다 다시는 이스라엘 땅에 들어오지 못하였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한해를 살아가면서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어떤 믿음의 원리를 배워야 할까요? 

 

첫째로 신체적 시선이 아닌 믿음의 시선을 가져야 합니다. 

 

사환은 도단을 둘러싸고 있는 수 많은 군사들을 보고 두려워하며 절망하였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보고 평안해 하였습니다.

 

시편 91편 11절에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주를 경외하는 자를 위해서 하늘의 사자들을 동원해서 지키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잠언 29장 25절에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똑같은 상황이라도 어떤 시선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결과도 달라집니다.

 

러시아의 우주 비행사 티토브라는 사람은 달에 다녀온후에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우주에서 하나님을 찾아보려고 했지만 그 어디에도 하나님은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우주비행사 맥디브는 “나는 우주의 신비 속에서 창조주 하나님이 분명히 계신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고 느끼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똑같이 우주에 다녀왔는데 한 사람은 예수를 믿지 않은 사람이고 또 한사람은 예수를 믿고 거듭난 사람이었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았더니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의 세계속에서 하나님이 분명히 계시다는 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믿음의 시선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환경만을 보면 절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내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들을 만나면 사람은 낙심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 보다 크신 하나님을 믿음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하나님이 문제를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시고 길을 열어주십니다. 

 

하나님은 항상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여호수아와 갈렙은 믿음의 시선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가데스 바네아에서 12명의 가나안 정탐꾼을 보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돌아와서 보고하기를 저들은 거인이고 우리는 메뚜기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민수기 13장 33절에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민수기 14장 7-8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회중들의 원망의 소리를 들으시고 여호수아와 갈렙외에는 약속하신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눈으로 보는대로 생각하며 판단하는 것이 옳은 것 같고 객관적 사실인 것 같지만 하나님은 믿음의 시선을 갖고 생각하며 행동하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신명기 31장 6절에 보면 “너희는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가시며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삶에서 이루실 것들을 믿음의 눈으로 기대하며 바라보는 살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믿음의 시선은 기도와 말씀을 통해 열린다는 것입니다. 

17절에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라고 말씀합니다. 

엘리사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사환의 눈을 열으셔서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러싸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리처드 포스터는 기도에 대해서 정의하기를 “하늘의 문을 여는 열쇠”라고 하였습니다.하나님께서 축복의 문, 은혜의 문, 사랑의 문을 열어주시도록 하는 것이 기도라는 것입니다. 

 

하늘의 문을 여는 기도의 열쇠는 아무에게 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에게만 주시는 특권입니다. 

 

마태복음 7장 7-8절에 (7:7)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7:8)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고 말씀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의 기초 위해서 기도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과 다른 것은 세상 사람들은 떡으로만 살지만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말씀을 의지하고 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살 동안에는 떡으로만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홍해를 건너서 광야로 들어갔을 때는 떡으로 살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 말씀만 바라보았습니다. 모세가 하나님 말씀을 받아서 전하고 그 말씀을 믿을 때 말씀을 통해서 만나도 오고 메추라기도 오고 물도 생겨나고 병도 낫고 의복도 낡아지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눈을 열어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하며 마음에 새기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기초로 믿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낙도선교회에서 펴낸 『교회 하나만 주고 가이소』에 실린 이야기를 소개해 드립니다. 

 

신학생들이 매년 여름 농촌에 복음을 전하러 가는데, 한번은 마을 주민들이 부정 탄다며 아예 마을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했습니다. 선교 팀은 하는 수 없이 마을 밖에 텐트를 치고 아이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했습니다. 다행이 아이들이 예수님을 영접했고, 선교 팀과 함께 여름성경학교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선교팀원들은 어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이끌고 성황당그늘에서 주무시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향해 갔습니다. 아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척하면서 할아버지, 할머니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속셈이었습니다.

“얘들아, 저 나무와 꽃들은 누가 만드셨지?”<하나님이요>

“그래, 하나님이시란다. 하나님은 전능하셔서 뭐든지 못하시는 것이 없으셔. 너 희들 모두 믿지?”<아멘>

 

그러자 주무시던 할아버지들 가운데 한 분이 일어났습니다.

“어이 젊은이, 하나님이 정말 전능하신가? 뭐든지 못하시는 일이 없으신가?”

<그럼요, 하나님은 뭐든지 못하시는 일이 없으세요.>

“그럼 내 다리 한번 고쳐 보거라. 나는 어릴 때부터 소아마비에 걸려 이 다리를 못 썼다.” 그러면서 할아버지가 다리를 내밀었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선교팀원들은 덜컥 겁이 났습니다. 팀원들 중에는 병자를 치유하는 기적을 행하거나 체험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팀장은 하나님이 고쳐 주실 것을 믿고 팀원들과 다리 하나를 붙잡고 한참 동안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주여, 낫게 해 주옵소서. 믿습니다!”

 

기도가 끝난 후 팀장은 하나님이 다리를 낫게 하셨다고 담대히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웬 낭패입니까? 할아버지가 “이놈들아, 이 다리가 아니야. 아픈 다리는 이쪽 다리야!”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팀장과 팀원들은 다시 다른 다리를 붙잡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주여, 이쪽 다리랍니다. 낫게 해 주옵소서. 믿습니다.!” 한 참 동안 기도한 후 팀장이 다시 외쳤습니다.

“할아버지. 일어나 보세요.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 걸어라!” 그러나 할아버지가 팔짝팔짝 뛰면서 “신기하네. 내가 다 나았다! 내가 다 나았다!”라고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기도한 팀원들도 다 놀랐습니다. 자기들이 기도해 놓고도 진짜로 기적이 일어난 것을 보자 너무 놀란 것입니다. 결국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은 그 마을에 복음의 뿌리가 내리게 하셨고, 마침내는 교회를 세우게 하셨습니다.

 

100% 확신을 가지고 한 기도가 아니지만 하나님의 말씀에는 능력이 있고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 신학생들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신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와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예수님도 공생애 사역을 하시면서 사탄의 수 없는 공격을 받으실 때에도 기도와 말씀의 능력으로 마귀를 물리치셨습니다. 

 

기도와 말씀의 능력을 회복하는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영국의 영성 작가 안소리 블룸은 “우리는 하나님께 겨우 몇 분 내드리면서 그 시간에 그분이 임재하지 않는다고 불평한다. 하지만 우리의 문을 두르드시는 하나님께 죄송하지만 바쁩니다 라고 말하는 나머지 23시간 50분의 시간은 어떤가 심지어 전혀 반응이 없을 때도 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양심과 삶의 문을 두드리시는 하나님의 노크 소리를 아예 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때로 우리는 하나님의 주배에 대해 불평할 권리가 없다. 그분보다 우리가 더 부재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잠깐 기도하고 하나님이 내 삶에 아무것도 안해주신다고 불평하고 원망할 때가 참 많은 것 같습니다.  

 

올한해 “하나님 믿음의 눈을 열어주소서”라고 기도할 때 믿음안에서 담대하게 살아가는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셋째로 믿음의 능력으로 매일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엘리사는 기도의 능력으로 아람 군대의 공격을 물리쳤습니다. 우리도 매일 믿음의 능력으로 힘있게 살아가야 합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항상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시편 27편 1절에 “야훼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야훼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생명이 우리에게 들어올 때 우리는 두려움이 아닌 강하고 담대함을 가지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비행기 조종사들이 비행 훈련을 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계기판을 절대 신뢰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비행을 하다 보면 수 많은 변수가 작용을 합니다. 안개가끼고 구름속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하늘로 올라가면 주변에 무슨 건물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해서 그 위치가 어디인지를 도저히 분간 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계기판에 나타난 정보를 통해서 지금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분간할 수 있습니다. 전투기 조종사들이 빠른 속도로 비행을 하면서 비행기 위 아래를 바꿔서 비행할 때가 있는데 순간적으로 방향 감각을 잃어버려서 바다나 땅바닥으로 향할 때가 있다고 합니다. 이때도 자기의 감각을 믿는 것이 아니라 계기판을 신뢰하고 움직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런 것처럼 우리 삶의 나침반 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합니다. 

 

앨리슨 래퍼(Alison Lapper)는 1965년에 영국에서 태어났습니다. 해표지증이라고 팔과 다리가 없이 손과 발만 몸에 붙어서 태어나는 병을 갖고 태어났습니다. 생후 6주 만에 부모님이 기르는 것을 포기하고 보호시설에 맡겨졌습니다. 팔과 다리가 없이 자라야 하니 그 어린 시절도 사춘기 청소년 시절을 지나면서 우울한 시기를 보냈습니다. 결혼을 했는데 남편을 잘못 만나서 남편이 몸도 장애를 가진 이 여인을 심하게 때렸습니다. 아이를 가져도 번번이 유산합니다. 그런데 주변에서 “당신은 선천적인 장애가 있기 때문에 임신하면 아이도 문제고 당신도 문제”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런 주변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오히려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런 가운데 건강한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입에 붓을 물고 그림을 그리고 발로 그림을 그리는 구족화가가 되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녀가 고백하기를 “하나님은 우리에게 감당할 만큼의 고통을 주십니다. 큰 고통을 주는 것은 크게 쓰이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부족한 장애를 갖고 태어났지만, 긍정의 힘과 강인한 의지로 저의 장애를 극복했습니다. 긍정적인 생각과 습관이 저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나에게 무엇인가를 할 수 없다고 말할 때마다 더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저의 부족한 1%의 의지가 99%의 도전을 가능케 하고 마침내 세상을 움직이는 동력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장애가 있는 지금이 행복하고 감사합니다. 어려운 상황은 언젠가 끝나며 앞으로 나가다 보면 꿈도 이룹니다. 고통도 축복입니다. 극복할 수 없는 장애는 없습니다. 장애는 마음속에 있는 것일 뿐 마음의 장애를 이겨내고 새로운 것에 도전한다면 많은 것을 이룰 수 있습니다”

 

진정한 장애는 마음의 장애입니다. 스스로 절망하고 낙심하고 포기하는 것이 문제이지 믿음의 눈으로 절대 긍정의 믿음을 가지면 어떤 문제도 이길 수 있습니다. 

 

2021년 한해를 살아가실 때 순간 순간마다 믿음의 눈을 열어 주십시오. 믿음의 눈을 열어 주십시오, 믿음의 눈을 열어주십시오라고 기도하셔서 문제 보다 크신 하나님이 문제를 이기게 하시고 우리의 마음에 꿈꾸고 소원하고 기도하는 모든 것에 차고 넘치게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거짓말하는 영



  • 거짓의 아비 마귀(요한복음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죄를 조장하는 원조 범죄자 마귀

오늘 본문은 마귀를 ‘처음부터 살인한 자’, ‘거짓말쟁이’, ‘거짓의 아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3:8절은 마귀를 ‘처음부터 범죄한 자’로 소개합니다. 처음부터라는 말은 마귀가 존재하기 시작할 때부터라는 말이 아니라, 역사의 시작 부분들에서부터 악했다는 말입니다.

마귀는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선악과 열매를 따 먹으면 ‘하나님 같이’된다고 거짓말을 하여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선악과를 범하게 함으로써 인류를 죽음으로 이끌었습니다. 거짓말을 했으니 거짓말쟁이요, 죽음에 이르게 했으니 살인자이며, 죄를 낳았으니 거짓의 아비가 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라는 말은 지금도 그렇다는 말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마귀는 환상이나 소설이나 동화 속 존재가 아니라 실존입니다. 오늘도 끊임없이 범죄의 원흉이 되어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에서 멀어지게 하는 일을 범하고 있습니다.

마귀는 사탄, 루시퍼 등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악한 자’ (요일 5:19) ‘불량한 자 (벨리알)’ (고후 6:15), 시험하는 자 (살전 3:5), ‘형제들을 참소하는 자’ (계 12:10) 등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이 이름들은 마귀가 사람들에게 하고 있는 짓을 잘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마귀는 오늘도 갖은 속임수로 성도들을 속이고 있습니다. 자신의 가치를 지나치게 부각시켜 교만에 빠지게도 하고, 자신의 가치를 지나치게 하락시켜 열등감과 자괴감에 빠지게도 합니다. 마귀는 또한 거짓 교리를 지어내어 믿는 자마저도 미혹하고자 하며, 하나님 대신 신으로 위장하여 대신 경배를 받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귀의 거짓에 속지 않기 위하여 진리를 명확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오직 진리가 마귀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입니다.

마귀에게 속한 세상

오늘 본문은 예수님을 완고하게 대적하던 유대인들에게 한 말입니다.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그들을 마귀의 자식이라고 표현을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마귀의 자식이란 말은 ‘마귀에게 속한 자’를 의미합니다. 요한은 이에 대해 요한일서에서 더욱 명확히 설명을 합니다.

“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9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10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요일 3:8-10).

요한은 하나님에게서 나지 않은 자들을 마귀의 자녀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또한 마귀의 자녀들의 특성을 마귀의 영향력과 탐욕에 종속된 자들로 규정을 합니다. 같은 의미로 성경은 마귀를 ‘이 세상의 임금’이라고 (요 12:31)이라고 부릅니다. 사실 마귀는 이 세상의 임금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임금은 당연히 하나님이시고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왕이신 하나님이 아닌 반역자 마귀를 왕으로 섬기며 살아갑니다. 마귀가 불법적으로 세상 사람들의 왕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마귀가 아닌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이 왕이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온전히 우리를 다스리신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입으로는 예수님을 왕이라고 고백하면서 다른 것을 왕으로 삼고 살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마귀는 사람들을 속여 자신이 왕처럼 행세하는 일에 능수능란한 기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창세 이래로 쭈욱 그 일을 해왔으며 사람의 모든 패턴과 심리와 역사를 잘 알고 있습니다. 돈, 명예, 권력, 사람 등의 물질이나, 지성, 감정, 의지, 사상 등의 정신, 그리고 언행과 습관과 문화 등 행동까지 인간의 모든 영역을 통해 각 사람의 약점이 무엇인지를 너무나도 잘 알고 그것을 활용합니다. 그것에 넘어가면 인간은 예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왕으로 모시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자신이 스스로 왕인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왕이 되는 법은 없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도록 디자인 되어 있고, 마귀는 그 왕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려 들기 때문입니다. 이 때 마귀가 시전하는 궁극의 스킬이 바로 “네가 네 인생의 주인이야”라는 거짓입니다. 그 속임에 넘어가는 순간 인간은 자신이 왕이 되어 사는 것으로 착각하지만, 사실 마귀를 왕으로 모시는 결과를 초래하고 맙니다. 마귀의 덫에 넘어갔으니, 그 자체로 마귀에게 예속된 것일 뿐 아니라, 이후의 인생에서도 마귀가 그를 떡 주무르듯 주무르게 됩니다.

3. 인간을 지배하려는 마귀

마귀의 세력은 오늘날도 불신자나 신자들에게 끊임없이 그 영향력을 미치고 있습니다. 불신자들은 완전히 사단의 지배 아래 놓인 사람들입니다. 에베소서 2:1은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베소 교인들은 예수 믿기 전 세상 풍조를 따라 살았습니다. 세상의 풍조는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 즉 마귀가 사람들을 장악하는 수단입니다. 마귀는 지금도 여전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입니다. 여기에서 불순종의 아들들이란 불신자들을 의미합니다. 마귀는 불신자들을 장악하고 하나님이 아닌 세상의 풍조를 좇아 살도록 유혹을 하여 그들의 삶이 마귀에게 예속되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 풍조를 좇아 사는 것은 곧 마귀에게 속한 자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마귀의 세력은 신자들을 향해서도 공격을 늦추지 않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며 경고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벧전 5:8). 요한 역시 “용(사탄)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라고 성도를 대적하는 마귀에 대해 말해주고 있습니다 (계 12:17). 우리는 우리의 인식 여부와 상관없이 무차별적인 마귀의 공격 아래 놓여져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가치가 아닌 세상의 가치를 가지고 세상의 풍습을 따라 사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이 괜찮다고 얘기한다 해서 정말 괜찮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을 거슬러 사는 자들이 되어야 하며, 세상과 구분된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의 풍습은 마귀가 걸어 놓은 덫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만약 말씀을 따라 살지 않고 세상 풍습이나 마귀가 주는 유혹에 따라 산다면 그것은 아직 우리가 마귀에게 속한 상태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함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마귀를 대적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우리가 마귀를 대적하면 마귀는 우리를 피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안에 마귀를 이길 힘을 예수님께서 주셨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원하는 것

1.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 “사탄”

마귀의 첫 번째 의도는 사탄(대적자)이라는 이름의 뜻처럼 하나님을 대적하여 하나님의 일이 이 땅에 이루어지지 않게 방해를 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인간과 아름다운 교제를 나누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방해하기 위해 하와를 유혹하여 범죄하게 만들었습니다. 마귀는 인간의 구원과 마귀의 멸망을 동시에 가져올 예수님의 탄생을 막기 위해 발악을 해왔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탄생했을 때에 예수님을 죽이려는 시도를 했으며, 아담을 유혹했던 동일한 방식으로 예수님마저 유혹하여 구원자의 자격을 빼앗으려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사람들을 격동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들을 이용하여 결국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여셨으며, 또한 마귀의 일을 모두 멸하셨습니다.

2. 인간을 중상하는 자 “마귀”

마귀의 두 번째 의도는 마귀(중상자)라는 이름의 뜻처럼 사람이 범죄하게 한 후, 그 죄를 빌미로 하나님 앞에서 인간을 참소하는 것입니다. 그는 인간에게 죄를 범하게 한 다음 죄를 지었으니 죄값을 받게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주장을 할 근거를 마련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마귀가 당대의 의인이라 불리던 욥을 중상하여 욥에게 고통을 주었던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마귀의 꾀에 넘어가 욥에게 고통을 주신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깨서는 마귀 따위에게 속임을 당하실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욥에게는 고통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신앙의 지경이 있었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가능케 하고자 섭리하셨을 뿐입니다. 또한 욥을 통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악인의 형통과 의인의 고통이라고 하는 난제에 대한 빛을 주고, 고통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바라볼 수 있게 해주시고자 한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려는 자 “루시퍼”

마귀의 세 번째 의도는 “루시퍼(빛을 가진 자)”라는 이름의 뜻처럼 하나님께서 받을 빛난 영광을 자신이 대신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원래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기 위해 하나님을 대적했던 자입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쫓겨난 이후에도 여전히 인간으로부터 숭배받고 영광받기를 갈망합니다.

우리는 모든 거짓말고 속임수를 통해 주인행세를 하려고 하는 마귀를 대적해야 할 것입니다. 그의 의도는 우리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왕으로 모시고 살게 하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떠나게 하는 것이며, 결국 하나님 대신 자신이 영광을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마귀 숭배자에게만 숭배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사랑하는 모든 행위가 바로 마귀를 숭배하는 행위이며, 그것이 바로 마귀의 의도입니다. 마귀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 우리를 통해 이땅에 이루어지는 삶을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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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 하는 영 / 성경 전체에서 4개 구절

열왕기상 22:22-23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어떻게 하겠느냐?’ 하시니 그가 말하기를 ‘내가 나가서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그의 모든 선지자들의 입에 있겠나이다.’ 하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그를 설득하여 이루라. 나가서 그렇게 하라.’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이제 보소서, 주께서 이 모든 왕의 선지자들의 입에 거짓말하는 영을 넣으셨고, 또 주께서 왕에게 재앙을 말씀하셨나이다.” 하더라.

And the LORD said unto him, Wherewith? And he said, I will go forth, and I will be a lying spirit in the mouth of all his prophets. And he said, Thou shalt persuade him, and prevail also: go forth, and do so.
Now therefore, behold, the LORD hath put a lying spirit in the mouth of all these thy prophets, and the LORD hath spoken evil concerning thee.

역대하 18:21-22

그가 말하기를 ‘내가 나가서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그의 모든 선지자들의 입에 있겠나이다.’ 하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그를 꾀고 또 이루라. 나가서 그렇게 하라.’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이제 보소서, 주께서 이들 왕의 선지자들의 입에 거짓말하는 영을 넣으셨고 또 주께서 왕에 대하여 재앙을 말씀하셨나이다.” 하더라.

And he said, I will go out, and be a lying spirit in the mouth of all his prophets. And the LORD said, Thou shalt entice him, and thou shalt also prevail: go out, and do even so.
Now therefore, behold, the LORD hath put a lying spirit in the mouth of these thy prophets, and the LORD hath spoken evil against t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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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하 ​​​​​​​​​​​​​
18:21 "그가 이르되 내가 나가서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그의 모든 선지자들의 입에 있겠나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꾀겠고 또 이루리라 나가서 그리하라 하셨은즉"
22절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왕의 이 모든 선지자들의 입에 넣으셨고 또 여호와께서 왕에게 대하여 재앙을 말씀하셨나이다 하니"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이 적대적인 관계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여호사밧과 아합 사이에는 혼인을 맺을 정도로 화친의 관계를 가지고 있을 때도 있었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이었을까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아합의 요청으로 여호사밧이 북이스라엘로 올라온다.
그리고 길르앗 라못을 되찾는 전쟁에 함께 나아갈 것을 요청한다.
여호사밧은 이것이 과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인지 묻기를 바란다.
사백명이 넘는 수많은 선지자들은 아합왕이 원하는 대답대로 아첨한다.
하지만 한 선지자 미가야만이 반대되는 예언을 한다.
권력에 눈치를 보고 사람이 원하는 방법, 방향, 세상의 관례를 따르는 것이 곧 거짓말하는 영을 따르는 모습이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도 쉽게 거짓말하는 영을 따라 가버린다.
오직 한사람 미가야만이 거짓말하는 영을 따르지 않는다.
그것은 목숨을 거는 문제였고 엄청난 고통의 문제였다.
그렇기에 거짓말하는 영에 따르지 않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문제인지 생각하게 된다.

​​​​​​​​​​​​​​​​​​​​​​​삶에 적용 :

목사와 장로들이 모두 관례를 따지고 다들 그렇게 했다는 논리로 우리도 그렇게 해 오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때에야 준비해야할 서류가 무엇인지 말한다.
거짓말하는 영을 따르는 모습이다.
교회가 믿는 자들이 온통 거짓말하는 영에 싸여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양 살아간다.
물론 다행인것은 그들이 요구하는 것들이 터무니없고 말도 안되는 이야기이지만 그들이 요구를 마땅히 따르기 위해 거짓말을 하거나 하지 않아도 되도록 해 주셨다는 것에 감사하다.
하지만 진정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다시 바라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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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하 18장

19.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가 이스라엘 왕 아합을 꾀어 그에게 길르앗 라못에 올라가서 죽게 할까 하시니 하나는 이렇게 하겠다 하고 하나는 저렇게 하겠다 하였는데 
20. 한 영이 나와서 여호와 앞에 서서 말하되 내가 그를 꾀겠나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어떻게 하겠느냐 하시니 
21. 그가 이르되 내가 나가서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그의 모든 선지자들의 입에 있겠나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꾀겠고 또 이루리라 나가서 그리하라 하셨은즉 
22.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왕의 이 모든 선지자들의 입에 넣으셨고 또 여호와께서 왕에게 대하여 재앙을 말씀하셨나이다 하니 

 ㅡ> 21절에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와
22절 '거짓말하는 영을'에서

일반적으로 알기는 거짓말하는 영은 타락한 천사 즉 악령을 의미한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위의 거짓말하는 영은 하늘에 있는 천사(즉 돕는 영)가 잠시 거짓말하는 영으로 그 역할을 하는 것입니까?

오늘날도 거짓말하는 영은 대체로 타락한 천사 즉 악령의 역사로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유일신을 믿었고 그래서 세상 만사를 하나님이 주관한다고 믿었습니다.
실제로 사람을 죽일 능력이 있는 사탄마저도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섭리에 따른 허락이 있어야만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욥기 1장) 하나님은 당신의 거룩하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악한 세력을 얼마든지 동원하실 수 있습니다.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을 징계 심판하기 위해서 우상(사탄)을 숭배하는 이방나라로 이스라엘을 침략 정복 도륙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이 사탄으로 사람을 죽이는 일까지 허락하셨는데 거짓말의 영도 당신의 절대적인 뜻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도 가룟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눅 22:3) 예수님을 밀고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질문하신 주제에 관한 가장 대표적인 케이스로는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사탄은 예수님을 죽여 없애면 자기가 승리할 줄 착각하고 유다를 비롯한 유대종교지도자들과 우매한 군중들을 배후에서 조종하여 십자가 처형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오히려 그 모든 것이 사탄에 미혹되어 죄로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였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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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사밧과 아합의 결혼 동맹

여호사밧에게는 한가지 연약한 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북 왕조 아합 가문과의 결혼동맹이었습니다(1).
여호사밧은 아합의 딸을 며느리로 맞아들임으로 남북 분열 이후 계속되어 온 긴장 관계를 해소하고 화해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또한 이것은 외세로 둘러싸인 두 나라의 존립과 번영에 도움을 얻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자 이 같은 혼인관계가 어떤 악영향을 끼치는지가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여호사밧이 사돈을 만나러 갔을 때 아합은 큰 잔치를 준비하고 함께 길르앗 라못을 치러 가기를 설득했습니다(2).
아합과의 전쟁에서 패한 아람 왕 벤하닷이 과거 자기 부친이 빼앗은 모든 북 이스라엘의 성읍들을 반환한다는 조건으로 평화조약을 체결했는데(왕상 20:34), 길르앗 라못을 반환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호사밧은 이 같은 사돈의 제안을 “나는 당신과 다름이 없고 내 백성은 당신의 백성과 다름이 없으니 당신과 함께 싸우리이다”라고 하며 선뜻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3).

물론 여호사밧은 이 말 끝에 “먼저 여호와의 말씀이 어떠하신지 오늘 물어보소서”라고 단서를 달고 있습니다(4).
하지만 이미 악인과 관계를 맺었고 동업을 하기로 한 마당에서 이 같은 점검은 찜찜함을 달래기 위한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 나에게는 아합과 동맹을 맺은 여호사밧의 연약함은 없습니까?

거짓 선지자들과 참 선지자

아합은 즉시 선지자 사백 명을 모으고 길르앗 라못과 싸울지 말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들 선지자들은 모두 이구동성으로 올라가라고 화답했습니다(5).
이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이세벨의 우상숭배와 타협한 자들로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권력자의 뜻을 위해 입의 혀처럼 움직이는 존재였던 것입니다.

특별히 시드기야는 철로 뿔들을 만들어 와서는 ‘ 여호와께서 이것들로 아람사람을 찔러 진멸케 하라’ 는 작전까지 주셨다면서 아부를 떨었습니다(10-11).

하지만 여호사밧은 한결같은 저들의 말에 의심을 표하며 믿을만한 다른 여호와의 선지자를 찾았습니다(6).

그러자 아합은 자기에게 나쁜 일만 예언하기 때문에 미워하는 선지자가 있다고 털어놓았고, 여호사밧은 속히 미가야를 불러주기를 요청했습니다(7-8).
말씀을 자기에게 맞추려고 하는 사람은 아합입니다.
나에게 좋던 나쁘던 말씀에 나를 맞추고 사랑하는 사람이 참된 신자입니다.

● 나는 말씀을 자기에게 맞추려고 합니까?
말씀에 자기를 맞추고 사랑하는 사람입니까?







오늘은 그동안 성도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는 주님의 성품에 대해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이는 매우 엄중하고도 무서운 경고요, 성도들이 마음 속 깊이 명심해야 할 진리입니다. 성도들이라면 누구나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에 대한 설교와 간증을 많이 듣지만 주께서 악인을 더욱 완악하게 하시고, 심판할 자들을 속이신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익숙하지 않습니다. 저희 교회 성도들은 이미 이런 설교와 성경 구절들에 익숙할 줄로 압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심판하기로 정하신 한 죄인 아합 왕에게 수십번에 걸쳐 기회를 주시고, 말씀을 주셨습니다. 몇 차례나 엘리야를 통해 말씀하셨고, 다른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내시기도 하셨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여호사밧 왕의 권고로 미가야 대언자를 통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 듣게 되었습니다. 미가야는 아합도 인정하는 하나님의 대언자였습니다. 그러나 아합은 단지 그가 자신에게 좋지 않는 대언을 한다는 이유로 그를 배척하였습니다. 덕분에 그의 주위에는 자신의 비위를 맞추어 줄 줄 아는 그런 대언자들로만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진리는 언제나 소수였으며 이는 지금이나 앞으로도 변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이는 성경적인 설교를 싫어하는 오늘날의 성도들의 모습과도 비슷합니다.

드디어 미가야가 왕 앞으로 불려 왔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그가 왕에게 나오니 왕이 그에게 이르되, 미가야야, 우리가 라못길르앗으로 싸우러 가랴, 아니면 삼가랴? 하니 그가 왕께 이르되, 올라가서 성공하소서. 이는 주께서 그곳을 왕의 손에 넘겨주실 것임이니이다, 하매](15). 이것은 왕이 원했던 답입니다. 지금까지 미가야는 다른 대언자들처럼 아합이 원하는 대답을 할 줄 몰라서 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대언자였기에 하나님의 말씀만 한 것입니다. 아합은 즉시 미가야가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는 미가야가 평소대로 ‘주의 이름으로...’ 또는 ‘주께서 이르시기를...’이라고 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모든 대언자들이 왕의 눈치를 보고, 왕을 기쁘게 해 주기 위해 충성 경쟁을 벌일 때, 미가야는 오히려 그 말을 가지고 조롱하였습니다. 다른 대언자들은 눈에 보이는 왕을 두려워하고 눈에 보이는 왕을 기쁘게 해 주려고만 할 뿐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님을 두려워하고 기쁘시게 할 줄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미가야는 만군의 주시며, 만왕의 왕을 바라보았습니다. 진리의 편에 선 사람은 언제나 소수입니다. 아합이 찾을 수 있는 성경적인 설교자,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은 미가야 한 명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아합은 미가야를 미워했습니다. 자기 기분을 맞춰 주지 않고 사실을 사실대로 말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조언이나 충고를 들을 때 내게 힘을 주고, 나를 합리화해 주고, 변호해주고, 정당화해 주는 말을 얼마나 좋아합니까? 그것이 진리냐? 아니냐?의 유무보다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이냐? 아니냐?에 따라서 판단했던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말세의 특징은 자기의 가려운 귀를 긁어 줄 선생들을 많이 두는 것입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왕이 그에게 이르되, 내가 몇 번이나 너로 하여금 맹세하게 하여야 네가 주의 이름으로 오직 진실한 것만을 내게 고하겠느냐? 하니](16). 왕은 미가야의 말이 조롱이란 사실을 알고 주의 이름으로 말해 보라고 했습니다. 대언자 미가야는 다른 400명의 대언자들과 달리 ‘주의 이름으로’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잘못을 잘못이라 하지 않고 그럴 수도 있다고 하고, 죄를 죄라 하지 않고 육신의 연약함이라 변명해 주는 것은 다 거짓이요, 진실이 아닙니다. 흔히들 사람들의 입에서 ‘불쌍한 죄인’이란 말을 잘 씁니다. 그러나 성경은 단 한 곳도 불쌍한 죄인이란 말이 없습니다. 죄인이면 죄인이고, 악한 죄인이면 악한 죄인이지 불쌍한 죄인이라고 죄에 대해 연민과 동정을 베풀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용서받은 죄인이요, 회개한 죄인일 수 있지만 불쌍한 죄인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조언은 언제나 성경적이어야 하며 주의 이름으로 오직 진실한 것만을 말해야 합니다. 아합은 미가야에게 주의 이름으로 오직 진실한 것만을 고하라고 명했습니다. 이는 주의 말씀을 듣고 싶거나,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 한 말이 아니라, 네가 감히 이번에는 나에게 뭐라고 말하나 보자 하는 식의 객기로 말한 것입니다. 아합은 주의 뜻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때로 아합과 같이 자신의 뜻을 정해 두고 요식 행위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습니까? 믿고 순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자신이 결정한 일을 복 주시기만을 구하지는 않습니까? 자신의 마음에 맞지 않는 충고나 조언을 할 때면 성질을 내거나 그 사람을 미워하지는 않습니까?

17절을 보십시오. [그가 이르되 내가 보매 온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같이 산에 흩어졌는데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들에게 주인이 없으니 각각 평안히 자기 집으로 돌아가게 하라, 하셨나이다.](17). 미가야는 아합에게 전쟁을 일으키지 말고 여기서 중단하고 군대를 해산하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뜻이며, 명령입니다. 아합은 언제나 마찬가지로 최소한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몰라서 못한 것이 아닙니다. 아합은 주의 뜻을 들었고, 알았습니다. 그러나 들었을 뿐 믿지 않았습니다. 알았지만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문제많은 성도들의 특징이 바로 이것입니다. 설교를 들을 뿐 그것을 믿지 않습니다. 성경의 말씀을 알지만 순종하지 않습니다. 아합에게는 주의 말씀이 주어졌고, 순종과 불순종의 선택은 그의 몫이었습니다. 아합은 전에 두 차례에 걸쳐 시리아를 상대로 대승한 경험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승리를 주셨기 때문에 적은 군대로도 크게 이겼습니다. 이는 아합이 잘나서 이긴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이길 수 있다고 믿었을 것입니다. 시리아를 상대로 하는 싸움은 패배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싶었고, 나름대로 외교를 펼쳐 유다 왕 여호사밧까지 끌어 들여 대군을 이끌고 전쟁을 준비하였습니다. 때로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것을 자신의 능력으로 오해하거나 과신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승리를 주신 하나님보다 승리 자체에 마음이 빼앗긴 결과입니다. 나에게 베푸신 은혜와 긍휼이 크다해도 그것은 나의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성품 때문이란 사실을 알 때 겸손한 마음으로 감사와 찬양을 돌려 드릴 수 있지만 받은 은혜만 기억하면 그것은 이미 빗나간 것입니다.

아합은 대언자 미가야의 말을 어떻게 들었습니까? 그가 보인 반응이 바로 그 사람의 마음 상태입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왕이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그가 나에 관하여 좋게 대언하지 아니하고 나쁘게 대언하려 한다고 당신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매](18). 아합은 벌컥 화를 내었고, 분노에 찼습니다. 그런 가운데도 미가야에게 먼저 화를 내기에 앞서 여호사밧을 향해 말했습니다. 만약 여호사밧이 이 말을 듣고 군대를 철수하거나 전쟁에 못나가겠다고 하면 큰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의 대언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했던 여호사밧은 말씀을 듣는 즉시 전쟁을 포기하고 유다로 돌아가야 했지만 아합에게 그대로 걸려들어 전쟁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속지 말라, 악한 사귐은 선한 습성을 부패시키느니라.](고전15:33). 그는 아합과의 사귐을 통해 한 순간이지만 주님의 말씀보다 아합의 말에 따라 행동하게 되었고, 전쟁에서 목숨이 날아갈 뻔한 큰 위험에 처했습니다. 우리는 주의 말씀과 사람의 말들 중에 올바른 선택을 위해 주님과의 친교뿐만 아니라 교회 내에서 영적 사귐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주일에 와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형제, 자매들과 영적 교제를 갖는 일 역시 매우 중요합니다. 성도들은 서로 권면하고, 서로 가르치고, 서로 세워주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집회가 필요하고 모임이 중요한 것입니다. 삶에서 배우고 터득한 것, 성경을 통해 체험한 것, 패배한 것, 잘못한 것 들을 함께 나눌 수 있습니다. 형제들의 힘을 빼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워 주기 위해서입니다.

19-22절은 아합을 죽이기 위해 하나님께서 천상의 신탁 회의를 하는 장면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은혜와 용서의 빛만을 보내 주셨던 주님께서 드디어 죽이기로 결심하셨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죽이는가?에 관한 회의입니다. 아합은 지금이라도 대언자 미가야의 말에 순종해서 얼마든지 살아날 기회가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회개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순간, 죽음을 보내는 그 순간까지 주님은 자신의 종을 통해 말씀하시는 말씀의 하나님이십니다. 19절을 보십시오. [미가야가 이르되, 그런즉 왕은 주의 말씀을 들으소서. 내가 보니 주께서 자신의 왕좌에 앉으셨고 하늘의 모든 군대가 그분 옆으로 오른쪽과 왼쪽에 서 있는데](19). 이 장면은 하나님께서 군사 회의를 주제하는 자리입니다. 주님은 전사(戰士)이시며, 구원의 대장이십니다. 지금까지 아합이 이길 수 있었던 것도 이 자리에서 아합의 군대를 지원하도록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땅의 모든 일은 하늘에서 결정됩니다. 특히 성도들의 생활은 저 하늘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빌립보서 3:20, [이는 우리의 생활권(conversation)이 하늘이기(in heaven-하늘 안에 있기) 때문이라...](빌3:20a). 이 땅에서의 우리의 생활은 저 하늘에서 그대로 기록됩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뭔가를 구하고, 청원하고,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미가야를 통해 하늘의 군사회의가 이 땅에 생 중계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모든 일은 저 하늘에 그대로 보여지고, 중계됩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이르시되, 누가 아합을 설득하여 그로 하여금 라못길르앗에 올라가 엎어지게 할까? 하시니 하나는 이렇게 하겠다 하고 다른 하나는 저렇게 하겠다 하였는데](20). 이 부분을 주목해서 보십시오. 하나님은 마귀를 이용하시지 않고 자신의 군대에서 직접 이 일을 진행시키고 있습니다. 천군 천사들 가운데 지원자를 받고 있습니다. 이 땅의 일에 주님은 침묵하시는 듯이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다니엘이 기도할 때 즉시 응답을 가지고 가도록 가브리엘을 보내셨습니다. 때로는 주의 천사가 직접 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도 천사를 보내셨습니다. 다니엘이 사자굴에 던져질 때도 천사를 보내셔서 지키셨습니다. 히스기야가 기도했을 때는 주의 천사가 직접 하룻밤에 앗시리아 군대를 전멸시켜 버렸습니다. 주님은 좌, 우편에 세워둔 군대를 이 땅에 파견하십니다. [누가 아합을 설득하여 그로 하여금 라못길르앗에 올라가 엎어지게 할까?]하고 주님이 묻습니다. 저마다 의견을 내었지만 한 명이 자원했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한 영이 나아와 주 앞에 서서 이르되, 내가 그를 설득하겠나이다, 하매](21). 이 땅과 저 하늘의 통신 수단이 없다면 이런 사실은 도무지 알래야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아합이 꿈엔들 이런 사실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자신이 하시는 일을 미리 대언자 미가야를 통해 알려 주셨습니다. 아모스 3:7, [분명히 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은밀한 일을 자신의 종 대언자들에게 계시하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암3:7). 주님의 이 원칙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성령의 조명을 통해 주님의 계시를 받습니다. 사람이 속는 경우는 세 가지이입니다. 첫째, 스스로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둘째, 마귀에게 속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에게 속는 경우입니다. 하나님이 속이시면 아무도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아합을 속이시려고 하십니다. 문제는 듣지 못해서가 아니라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는 것이 재앙입니다. 지금도 주의 오심과 공중 들림, 대환란, 천년 왕국, 불 심판 등과 같은 수많은 성경의 경고들을 말해 주지만 듣지 못해서가 아니라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믿지 않기 때문에 멸망당하고 있습니다.

22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어떻게 하겠느냐?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나가서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그의 모든 대언자의 입에 있겠나이다, 하매 그분께서 이르시되, 너는 그를 설득하겠고 또 이기리라, 나가서 그와 같이 하라, 하셨사오니](22). 드디어 하늘의 보좌 앞에 있던 한 영이 하나님의 재가를 얻어 아합의 곁에 있는 사 백명의 대언자들의 입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무슨 말을 해도 거짓말입니다. 이는 거짓말하는 영이 그 입에 붙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한영은 주의 대언자의 입이 아니라 ‘그(아합)의 모든 대언자의 입’에 있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지금 400백 명의 아합의 대언자와 한 명의 주의 대언자 미가야가 있는데 400명의 입에는 거짓말하는 영이 들어갔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보소서, 이제 주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왕의 이 모든 대언자의 입에 넣으셨고 또 주께서 왕에 관하여 화를 말씀하셨나이다, 하니라.](23). 미가야는 주님께서 주신 말씀을 있는 그대로 다 전했습니다. 그것도 자신을 미워하는 왕 앞에서 주의 말씀을 하나도 가감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미기야가 대언한 이 구절을 깊이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제 주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왕의 이 모든 대언자의 입에 넣으셨고]

주님께서 과연 사람들에게 거짓말하는 영을 보내시는가? 주님께서 사람을 속이시는가? 주님께서 자기 백성들도 속일 수 있는가? 답은 그렇다입니다. 주님은 계속해서 불순종하면서도 회개하지 않는 사울에게 악한 영을 보내셨습니다. 그는 처음에 왕이 될 때 기름부음을 받았고, 성령으로 충만하여 대언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런 그가 주의 말씀을 버렸을 때 무슨 일이 났습니까? 사무엘상 16:14, [그러나 주의 영께서 사울을 떠나고 주께로부터 온 악한 영이 그를 괴롭게 하므로](삼상16:14). 성령 충만이 기쁨과 담대함을 주는 반면 악한 영은 괴로움을 줍니다. 사무엘상 18:10, [그 다음날 하나님께로부터 온 악한 영이 사울 위에 임하매 그가 자기 집 한 가운데서 대언을 하더라....](삼상18:10). 사울이 질투심에 사로 잡혔을 때 악령이 찾아 왔습니다. 악령이 임해도 대언을 한다는 점에서 성령과 유사한 점이 있습니다. 이는 표적과 기사가 모두 주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란 점을 분명히 보여 주는 예입니다. 재판관기 9:23, [하나님께서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 사이에 악한 영을 보내시매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배반하였으니](판9:23). 아비멜렉은 아버지 기드온의 자식들이요, 자기 형제들을 하룻만에 73명이나 죽였습니다. 주님은 그를 심판하시기 위해 악령을 보내셨습니다. 주님이 말세에 하실 일 가운데 하나는 이 세상에 강한 미혹을 보내셔서 거짓을 믿게 하시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11, [이런 까닭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강한 미혹을 보내사 거짓말을 믿게 하시리니](살후2:11). 지금 아합의 경우가 바로 여기에 해당할 것입니다. 주님은 거짓말하는 영을 보내셔서 대언자들이 거짓말로 대언할 때 자신들조차 자신들이 속은 것을 알지 못합니다. 만약 지금 교회들에 주님께서 이런 역사를 하셨다면 대부분의 교회는 성경과 상관없는 거짓 교리를 설교하고, 가르치고, 성도들에게 거짓말을 믿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순절 교회, 은사주의 교회, 귀신쫓는 교회, 성공 신학, 축복 신학으로 무장한 교회들을 시무하는 목사들의 입에는 이미 거짓말하는 영이 그 입에 들어갔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은 악령으로부터 영원히 안전한가? 그렇지 않습니다. 몇몇 근본주의자들은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절대로 악령에 들릴 수 없다, 마귀들림은 오직 거듭나지 않는 자들에게만 한정된다는 교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성도들이라도 언제든지 마귀에게 속을 수 있고, 마귀 들릴 수 있습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속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뿐만 아니라 ‘아무도 어떤 방법으로든지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살후2:3)고 말씀합니다. 마귀는 인류 6,000년 역사에서 사람을 속이는데 단 한 명(예수 그리스도)을 제외하고 실패해 본 적이 없습니다. 마귀는 사람을 속이는데는 고도의 전문가입니다. 특히 마귀의 전공 분야가 바로 기독교인들과 성경 문제입니다.

성도들이 자기 마음 속에 우상을 세워둔다면 그는 분명히 속습니다. 하나님은 마음 속에 우상이 가득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속이셨습니다. 에스겔 14:4, 9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의 집에서 자기 우상들을 마음 속에 세우며 자기 불법의 걸림돌을 자기 얼굴 앞에 두고 대언자에게 나아오는 모든 자에게 나 주가 그 우상들의 많은 수효대로 응답하리니](4), [만일 대언자가 어떤 일을 말할 때에 속임을 당하였으면 나 주가 그 대언자를 속인 것이니 내가 내 손을 그 위로 내밀고 그를 멸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의 한 가운데 그치게 하리라.](9). 이런 이유로 오늘날 너무나 많은 성도들이 체험이란 이름 아래 성경적 진리에서 이탈하고 있습니다. 마음 속에 우상을 가지고 기도할 때 주님께서 그대로 응답하심으로 그들은 다 하나님께서 그대로 응답하신 줄로 압니다. 예를 들어 돈을 많이 버는 것, 집 한 채 장만하는 것, 좋은 차를 굴리고, 좋은 직장을 잡는 것 등 이런 것들이 마음에 가득한 채 주님께 왔을 때 주님은 그래도 응답하실 수 있습니다. 기도 응답으로 받은 것들이 자기를 파멸로 몰고 가는 줄을 모르고, 주님께 속은 줄도 모르고 성경과는 동떨어진 삶을 삽니다. 하나님께서 No로 응답하시는 편이 속이시는 경우가 얼마나 더 큰 은혜인 줄 아셔야 합니다.

① 마귀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속입니다. 마귀는 매우 종교적인 존재입니다. 모든 종교는 같은 것이다. 어느 종교에나 구원이 있다. 기독교는 너무 배타적이고 편협하다...

② 자기에게 죄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다 속은 것입니다(요일1:8). 구원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다(구원파)고 말하는 사람은 모두 속은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내가 죄인 중의 우두머리니라”(현재)고 했지 “우두머리였느니라”(과거)고 하지 않았습니다(딤전1:15).

③ 죄를 지어도 자백하면 깨끗하게 되기 때문에 죄를 지어도 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속은 것입니다(갈6:7). 물론 자백하면 용서를 받고 깨끗하게 되겠지만 이 세상에서나 오는 세상에서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다윗, 삼손, 바울...)

④ 자신이 뭔가 된줄로 아는 교만한 사람은 속은 것입니다(갈6:3).

⑤ 세상 지혜로 인해 속을 수 있습니다(고전3:18). 철학, 과학, 전통, 문학, 고고학, 역사학, 천문학 등의 학문이나 히브리어, 헬라어, 고대 아람어, 라틴어 등에서 박사 학위를 몇 개씩 땄다고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에도 지혜롭다고 생각하면 속은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하나님 앞에 어리석은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⑥ 우리가 영적 성장을 멈추면 속습니다. 자신의 현재 신앙 수준에 만족하고 말씀을 읽고 공부하고 진리의 지식의 보화를 캐는 일을 멈추면 속게 됩니다(엡4:14). 현재 우리를 속이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교리의 풍조는 수없이 많습니다.

⑦ 이 세상에 완전 무오한 성경은 없다고 생각하면 이미 속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진리의 말씀에 꾸준히 거하면 진리를 알게 되고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며, 그 말씀으로 인해 자라나고 튼튼하게 세워지고, 깨끗하게 되며, 마귀를 대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기록된 주의 말씀에 가감없이 읽고, 읽는 그대로 믿는다면 주님께서 거짓 영을 내게 보내시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은 능력과 사랑과 건전한 생각의 영입니다. 하지만 마음 가운데 우상을 두고, 주의 율법에서 귀를 돌이킨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상실한 마음 가운데 내버려두시거나 속이실 것입니다.

24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나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가 가까이 나아와 미가야의 뺨을 치며 이르되, 주의 영께서 나를 떠나 어느 길로 가서 네게 말씀하시더냐? 하니](22). 미가야의 말을 듣고 있던 사백명의 대언자들 중 하나인 시드기야가 미가야의 뺨을 쳤습니다. 때로 거짓 대언자들은 자신들의 믿음이 너무나 확고하여 주의 대언자들을 압도해 보입니다. “주의 영께서 나를 떠나 어느 길로 가서 네게 말씀하시더냐?”는 말은 그가 얼마나 자기 확신에 차 있는지, 얼마나 철저히 속았는지를 웅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뺨을 맞으셨습니다(요18:22). 미가야의 뺨을 친 사람이 같은 대언자였듯이 바른 성경으로 바른 신앙 생활을 하겠다고 할 때 가장 박해하는 자들 역시 같은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진리를 전하는 일은 핍박과 모욕과 위협이 뒤따릅니다. 미가야에게 돌아온 것은 무엇입니까? 감옥 생활이었습니다. 아합은 미가야를 지하 감옥에 가두고 변장한 채 전쟁에 나갔지만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 살기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 보았지만 주의 말씀은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을 죄인들이라고 말한다는 이유로 미워합니다. 죄에 대해서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을 미워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미가야와 같이 죄에 대해서 성경이 말하는대로 말해 주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사람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죄 가운데서 태어났으며, 그들의 마음은 악으로 가득하며, 전적으로 부패하고 타락했다는 말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미가야처럼 사람의 죄성과 죄악을 있는 그대로 전해 주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구원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구원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미가야처럼 있는 그대로 말해 주어야 합니다. 도덕적인 의와 행위가 아니라 구주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사람들은 분리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사람들은 섬김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자매들은 남편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말을 듣기 싫어합니다. 아이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부모에게 절대 복종해야 한다는 사실을 싫어합니다. 사람들은 지옥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미가야처럼 말해야 합니다. 그 결과가 감옥이든 죽음이든 있는 그대로를 말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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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성경말씀은 모두가 거짓말할 때에 오진 진실만을 말했던 주의 선지자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때는 우상숭배가 성행하던 때였습니다. 사람들은 오직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우상숭배에 빠졌습니다. 그로 인해서 자신의 유익과 욕심을 추구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서 자신이 받은 축복을 전부 잃어버리고 있었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것은 처음에는 자신의 욕심과 필요를 만족시켜주지 않지만 나중에는 하나님의 상급과 축복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따라야만 하는데 그들은 욕심에 이끌려 이방신들을 따라갔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고통의 원인이었습니다.   

이러한 우상숭배의 심각한 문제와 어려움을 보여주는 장면이 본문에 나옵니다. 그 때는 이스라엘 왕이 남유다 왕과 더불어 아람왕을 공격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하나님의 예언을 듣고자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것이었기에 모든 선지자가 총출동되었습니다.

  

“[왕상]22:10       이스라엘의 왕과 유다의 여호사밧 왕이 왕복을 입고 사마리아 성문 어귀 장에서 각기 왕좌에 앉아 있고 모든 선지자가 그들의 앞에서 예언을 하고 있는데

  

[왕상]22:11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는 자기를 위하여 철로 뿔들을 만들어 가지고 말하되 여호와의 말씀이 왕이 이것들로 아람 사람을 찔러 진멸하리라 하셨다 하고”

  

모든 선지자들은 전부 거짓된 예언을 하고 있었고 그들 중에서 특별히 시드기야는 유난하게 철로 뿔들을 만들어 가지고 와서 여호와의 말씀이 이것들로 진멸하리라 하셨다고 용감하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거짓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전혀 다른 것을 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선지자들은 오직 사람이 듣던 듣지 않던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즐겁게 하고자 하면서 자신의 말을 하고자 했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사람들의 구미와 필요를 채우려고 하면서 세상의 영향을 받습니다. 그것은 처음에는 원하는 것을 이루어주니까 좋게 보이지만 나중에는 그 결과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고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모든 좋은 것을 빼앗기게 됩니다. 왜냐하면 욕심을 채우고자 하면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듣기 좋은 말을 하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결국은 욕구로 말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원하신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전하라 하신 것만 말하는 삶입니다. 좋게 보이려고 하지 않고 옳게 하려고 할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진실한 뜻을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변에는 사람들의 욕구를 채워주려고 하는 노력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것이 아니고서는 아무 것도 되지 못할 것 같게 보이기도 합니다. 그게 대세였기 때문에 많은 다른 선지자들도 이러한 시드기야의 말에 동참했습니다. 아마 시드기야처럼 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지막으로 남은 미가야 선지자에게도 그러한 거짓을 요구했습니다.

  

“[왕상]22:12       모든 선지자도 그와 같이 예언하여 이르기를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가 승리를 얻으소서 여호와께서 그 성읍을 왕의 손에 넘기시리이다 하더라

  

[왕상]22:13        미가야를 부르러 간 사신이 일러 이르되 선지자들의 말이 하나 같이 왕에게 길하게 하니 청하건대 당신의 말도 그들 중 한 사람의 말처럼 길하게 하소서”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을 즐겁게 하지 않으면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리라는 우려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화나게 하거나 실망시키는 일은 쉽게 행하기 어렵습니다. 그러한 우려 때문에 우리 속에는 사람들을 즐겁게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미가야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께서 전하게 하시는 말씀에만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뜻을 증거하고 전달해주는 것입니다. 미가야는 오직 자기가 아는 진실만을 이야기했습니다.

  

“[왕상]22:19       미가야가 이르되 그런즉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내가 보니 여호와께서 그의 보좌에 앉으셨고 하늘의 만군이 그의 좌우편에 모시고 서 있는데

  

[왕상]22:20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가 아합을 꾀어 그를 길르앗 라못에 올라가서 죽게 할꼬 하시니 하나는 이렇게 하겠다 하고 또 하나는 저렇게 하겠다 하였는데

  

[왕상]22:21        한 영이 나아와 여호와 앞에 서서 말하되 내가 그를 꾀겠나이다

  

[왕상]22:22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어떻게 하겠느냐 이르되 내가 나가서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그의 모든 선지자들의 입에 있겠나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꾀겠고 또 이루리라 나가서 그리하라 하셨은즉”

  

그는 거짓말하는 영의 존재를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진실을 보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는 바로 이러한 거짓말 하는 영이 존재합니다. 그 영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노력을 중단해야 합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할 때에 거짓말 하는 영의 영향을 받게 됩니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오직 그 영을 제어하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럴 때 거짓을 넘어서서 진질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해서 문제를 극복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세상의 지혜는 사람의 마음을 좋게 해주기 위해서 결과를 왜곡시키고 문제를 변질시킵니다. 그 결과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먼저 마음이 좋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아무런 열매가 없습니다. 하지만 먼저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따른다면 귀한 열매를 얻을 수 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생명을 얻게 합니다. 또한 사망에 이르지 않게 합니다. 이스라엘 왕은 미가야의 말을 듣지 않았을 때 결국 자신의 생명을 잃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만을 따르고 그 지혜에만 순종하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참으로 여러분을 열매 맺게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만 섬기면서 그 살아있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진실하고 기뻐하시는 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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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이스라엘 아합 왕이 남유다 왕 여호사밧과 동맹을 맺어 아람을 치기로 약속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호사밧은 먼저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야 할 것을 제의했습니다. 이렇게 성도는 항상 하나님께 먼저 묻는 기도가 있고 난 뒤에 행동해야 합니다.

북이스라엘 아합 왕이 선지자들을 다 불러서 아람을 쳐야 할지 말아야 할지 물었을 때, 선지자들은 한결같이 치러 올라가서 아람을 취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는, 이러한 예언들이 결국 아합 왕을 꾀어 길르앗 라못에 올라가게 해서 아람 왕의 손에 죽게 하려는 악한 영의 간계에서 나온 거짓 예언임을 말해줍니다.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가 아합을 꾀어 그를 길르앗 라못에 올라가서 죽게 할꼬. 한 영이 나아와 말하되, 내가 나가서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그의 모든 선지자들의 입에 있겠나이다.여호와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왕의 이 모든 선지자의 입에 넣으셨고 또 여호와께서 왕에 대하여 화를 말씀하셨나이다(19∼23절).”

거짓말하는 악한 영들의 간계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에게도 나타나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이 악한 영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거짓말하는 영의 간계에 넘어가서 거짓된 말을 하고 거짓된 행동을 하게 됩니다. 물론 하나님은 사람들의 거짓된 말이나 행동에 대해서 아주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거짓말이나 거짓증거하지 못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성도는 거짓말하게 하는 악한 영들의 유혹과 간계를 분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런 분별력을 갖추기 위하여 말씀과 기도의 삶을 쉬지 않고 계속해야 합니다. 그리고 거짓말하게 하는 악한 영의 유혹이 올 때 그것을 이길 수 있는 용기와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미가야 선지자는 거짓 선지자들의 협박과 좋은 소리만 듣기 원하는 왕의 위협에도, 생명을 걸고 진실을 왕에게 말하는 용기와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미가야 선지자가 가졌던 용기와 믿음을 얻고자 우리도 기도해야 합니다.


사단의 악한 영 가운데는 거짓말하는 영이 있습니다. 이 거짓말하는 영은 거짓말을 하는 사람과 거짓말을 듣는 모든 사람을 파멸로 이끌어 가고 있는 영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천지 만물과 모든 천사와 모든 영의 창조자이십니다. 마귀도 역사 하나님으로부터 지음을 받은 천사가 하나님을 배반하여 마귀가 되었고, 거짓말하는 영도 역시 마귀와 같이 하나님을 배반한 하나님의 창조함을 받은 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영으로, 사람들을 거짓말을 믿게 하여 인간을 파멸로 몰아가는 마귀의 영입니다. 

   

지금 현재는 모두 마귀에게 속한 영들이 최후로 악하게 발동을 하고 있습니다. 적그리스도 영, 미혹의 영, 다른 영, 귀신의 영, 거짓말하는 영 등이 지금 우는 사자같이 돌아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심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딤전4:2)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요한 계시록 21장 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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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원어 사이트



성경 원어 사이트 



히브리어 성경을 성경 책명과 장절을 치면 나옵니다.

히브리어 성경 Interliner 가 나옵니다. 

헬라어 성경 Interliner 가 나옵니다

- Blue Letter Bible
http://www.blueletterbible.org/Bible.cfm?b=Gen&c=1&t=KJV

성경을 공부하기에 너무나 잘 만들어진 사이트입니다. 이 사이트를 발견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어, 헬라어 원어 분해 뿐만 아니라 다른 성경 번역본과 대조 기능, Commentaries, 사전, 등 조금만 사용에 익숙해지면 너무 좋은 사이트입니다. 강추합니다.

- Parallel Bible
http://bible.cc/genesis/1-1.htm

한국어 성경만 아니라면 이렇게 잘 갖추어진 성경 사이트도 찾기 힙듭니다. 각종 영어성경과 히브리어, 헬라어 성경이 총망라되어 있습니다. (Parallel로 볼수는 없지만 다국어 성경에 한국어 성경도 개역성경 하나는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Atlas, Concordance, Dictionary, Encyclopedia, 지도, 등 모든 것이 두루 잘 갖춰진 사이트입니다.

- 인터넷 매일 성경 연구원
http://www.biblenara.org/
한글 사이트로 성경공부에 관한 자료들을 잘 분류하여 관련 사이트에 연결해 놓았습니다. 한글로 성경을 공부하는데 매우 유용한 사이트입니다.

- 오디오 성경
http://www.drimi.com/bible/audio.htm#
눈이 피곤하여 쉬고 싶을 때, 드러누워 성경을 듣고 싶을 때^^ 좋은 사이트입니다. C3TV 오디오 성경(개역성경)을 사용하기 쉽게 편집하여 한 눈에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해 놓았습니다. 음향효과도 집어 놓고 잘 녹음되어 있습니다. 

- 온라인 개역 관주 성경
http://www.sihong.pe.kr/
온라인 한글 관주 성경을 찾던 중에 관주 성경을 저처럼 좋아하시는 어떤 분이 개인적으로 만들어 놓은 사이트입니다. 이 사이트도 한 눈에 성경 전체에서 원하는 장절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해 놓았습니다. 관주는 옛 뉴톰슨 주석 성경을 따른 것으로 보입니다.

- StudyLight
http://www.studylight.org/com/
Public domain에 있는 성경 주석을 총망라해서 모아 놓은 곳입니다. 성경 해석서가 필요할 때 유용한 사이트입니다.

- NET Bible
http://net.bible.org/bible.php?book=Gen&chapter=1
성경에 간단 명료한 주석을 달아 놓아서 흔히 평신도들이 쓰는 주석 성경을 대신할 수 있는 좋은 사이트입니다. 그리고 다른 관련된 성경사전, 지도, 성경단어연구, 관주, 히브리어-헬라어 reference 등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강추입니다.

- Mybible
http://mybible.hompee.com/hompee/home_A.asp?User=&SiteID=62573&SkinID=ARE
평신도가 개발한 성경 프로그램입니다. 이 프로그램은 가입하신 후에 다운로드 받아서 자기 컴퓨터에서 실행해서 쓰는 프로그램입니다. 이 프로그램의 장점은 단순하고, 빠르고, 사용하기 쉽다는 점입니다. 저도 별일이 없으면 주로 이 프로그램을 쓰고 있습니다. 위의 미국 사이트처럼 많은 주변 자료들이 갖추어져 있지는 않지만 기본적인 검색기능, 간단한 인물/지명사전, 책갈피 기능, 등 기본적인 것은 갖추어져 있습니다. 
포함된 성경은 한글로는 개역, 개역개정, 쉬운성경, 공동번역, 표준새번역, 현대어 성경이 있고 영어 성경으로는 KJV, NIV가 있습니다. 최근 버젼에는 저작권 문제로 개역, 개역개정, 공동번역, 표준새번역, 현대어 성경, 그리고 KJV만 제공된다고 합니다.

다른 것들은 다 온라인이지만 이 프로그램은 인터넷이 안되어도 언제나 쓸 수 있어서 좋습니다. 찬송가 프로그램도 따라옵니다.^^

- World Language Bible
http://www.yawill.com/
한영 대조 성경을 찾는다면 이 사이트가 사용하기 쉽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한글로는 개역성경, 영어버전으로는 KJV, NIV, NASB, AMP, ASV가 있습니다. 그 외에도 중국, 일본, 스페인, 독일, 프랑스, 히브리, 헬라 성경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 Internatioanl Bible Society
http://www.ibs.org/bibles/translations/#CEV
영어 성경 번역본끼리 어떤 차이가 있는지 잘 설명되어 있는 사이트입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대한성서공회
http://www.bskorea.or.kr/about/default.aspx
우리말 성경번역 역사와 세계 성경 번역 역사가 시대로 구분되어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http://hebrew.pe.kr 허성갑 목사의 사이트로서 히브리대학에서 
히브리어를 전공하였답니다. 모세오경의 히브리어 성경을 보고 들을 수 있음. 

http://bible.ort.org/ 영어사이트 입니다. 들어가셔서 왼쪽에 있는 English를 

누릅니다. 다음에 Calender(달력)를 누르셔서 들어가면 오늘 날짜가 영어로 
나옵니다. 거기에서 달과 날를 선택하면 그 날에 읽을 성경장절을 보여주니 
그 장절을 누르면 히브리어성경이 보입니다. 스피커 그림을 누르면 음성이 
들립니다. 영어로 12개의 달과 이름과 30일의 날자가 나옵니다. 아무거나 
선택하면 됩니다. 성경전부가 12달 365일로 나눠진 모양입니다. 

http://www.jiscast.com/demo/freelecture/free_hebrew.htm 
김경래교수의 사이트로서 무료와 유료강좌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기초를 무료로 
다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http://www-users.cs.york.ac.uk/~fisher/gnt/chapters.html 
헬라어 성경의 텍스트를 보여줍니다. 음성은 없음. 
그리고 파일을 눌러서 저장하면 됩니다. 

http://www.ccel.org/a/anonymous/gnt/mp3/ 
헬라어 성경을 읽어주는 사이트 입니다. MP3 으로 저장도 가능합니다. 

http://unbound.biola.edu/zips/index.cfm?lang=English 
히브리어성경, 헬라어, 영어성경 전체 다운 가능 

http://www.sacrednamebible.com/index2.htm 킹 제임스 바이블 읽기 

http://www.inthebeginning.org/ntgreek/lesson3/gl3.htm 
여기는 헬라어를 기초부터 가르쳐줍니다. 헬라어 알파벧트를 자세히 
가르쳐 줍니다. 왼쪽을 보시면 Learn , NT Greek 에 마우스를 가져가면 
1과에서 6과까지 나오는데 그중 하나를 누르고 다운을 받으면 됩니다. 

http://www.inthebeginning.org/ntgreek/phonics/alphainstruction.htm 
헬라어 아파?을 읽어줍니다 

http://www.audio-bible.com/bible/bible.html 
킹 제임스 바이블을 보고 들을 수 있는 사이트입니다. 

http://www.onnuritv.com/education/bible_english/ 
온누리 교회 TV 의 영어강좌입니다. 성경본문을 읽고 해설합니다. 

http://www.onnuritv.com/education/with_jesus/main_2002_0507.htm 
온누리 Tv 의 어린이 영어입니다. 아이들과 어른이 함께 배울 수 있습니다. 

http://www.ncctv.co.kr/zboard/zboard.php?id=engbible 
영어 성경 공부해설 25개 자세함 

http://www.sarangtv.com/edu/aca_bible.asp#listfocus 
사랑의교회 영어성경공부 고성삼 목사가 인도합니다. 




사도 바울의 인간관


창세기 2:21
여호와 하나님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본질(本質)


잠(3462)  יָשֵׁן 

1. 미완료형 יָשֵׁן       
2. 잠에 곯아 떨어지다, 3. 시편 44:24

발음 /  야센(yâshên) 
관련 성경 / 오래 살다(신 4:25), 오래다(레 13:11), 잠자다(시 13:3), 자다(왕상 19:5, 사 5:27), 잠들다(렘 51:39, 창 2:21), 주무시다(시44:23, 121:4).
구약 성경 / 25회 사용

깊은 잠(8639) תַּרְדֵּמָה 

1. 깊은 잠,  2. 창세기 2:21,  3. 창세기 15:12

발음  / 타르데마(tardêmâh) 
어원 / 729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깊은 잠(창 15:12, 욥 4:13).
구약 성경 / 7회 사용

아담을 만드신 후 잠을 재우셨다는 것은 아담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죽은 아담의 옆구리에서 갈빗대를 취하여 하와를 만드셨다.
십자가의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피를 흘리신 사건으로 신랑이 되신 예수님의 신부가 되는 교회를 세우신 것을 예표한다.

본질(本質)

라틴어 / 나투라(natura), 영어 / 에쎈스(essence)

한글사전 / 1. 본디부터 가지고 있는 사물 자체의 성질이나 모습.                 
                 2. 사물이나 현상을 성립시키는 근본적인 성질.               
                 3. 철학 실존(實存)에 상대되는 말로, 어떤 존재에 관해 ‘그 무엇’이라고 정의될 수 있는 성질.

기독교의 본질은 "예수" "십자가"

1. 자연인(自然人) / (Ψυχικὸς δὲ ἄνθρωπος)
-
φυσικό πρόσωπο

2. 성령인(聖靈人) / 프뉴마티코스(πνευματικὸς)
-
Άγιο πνεύμα

3. 세속인(世俗人) / 사르키노이스(σαρκίνοις)
-
κοσμικός

자연인(自然人)

육에 속한 사람(고린도전서 2:14)
-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현대인의 성경 /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은 하나님의 성령이 주시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적으로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일 뿐만 아니라 그들은 그것을 깨달을 수도 없습니다.

성령인(聖靈人)

신령한 사람(고린도전서 2:15)
-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현대인의 성경 / 적인 사람은 모든 것을 제대로 평가하지만 세상 사람은 그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합니다.

세속인(世俗人)


육신에 속한 사람(고린도전서 3:1-3)
-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현대인의 성경 /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적인 사람을 대하듯이 말할 수가 없어서 세속적인 사람,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를 대하듯 말합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젖을 먹이고 단단한 음식을 먹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그것을 소화시킬 능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직도 여러분은 세상 사람들처럼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시기와 다툼이 있는데 어찌 육적인 세상 사람들처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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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에 있는 자냐 영에 있는 자냐(롬 8:8-9)'의 기준은, 거듭났느냐 아니냐로 결정됩니다.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말한 육으로 난 것과 영으로 난 것의 기준(요 3:6)이나 천국 입성의 자격도, 성령으로 거듭났느냐 여부에 있습니다(요 3:5).

바울 사도가 에서(Esau)를 '육체를 따라 난 자'로, 야곱(Jacob)을 '성령을 따라 난 자'로 구분한 기준도 거듭남 이었습니다(갈 4:29).

영역본 성경은 거듭나지 못한 '육신에 속한 자'를 자연인(natulal man)이라 번역했고(고전 15:46),
윌리엄 쉐드(William G. T. Shedd, 1820-1894) 역시 그의 명저 "Sernons to the Natulal man"에서, 육신에 속한 자를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the natulal man)으로 풀이했습니다.

식품은 자연산 그대로가 좋지만, 사람은 아담으로부터 난 자연산 그대로는 부패하고 더럽습니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부정한 짐승의 상징으로 언급한 돼지는(마 7:6), 거듭나지 못한 유대인들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유대인처럼 율법에 완벽한 이들이 없다고 공인되던 시대에, 그들이 부정함의 상징이 된 것은 파격입니다.
이는 부정하고 정결함의 기준이 인간 윤리가 아닌 거듭남의 여부에 달려있음을 말해주며, 기독교 윤리의 코페르니쿠스적인 새 기준의 출현이었습니다.

성경이 육신에 있는 자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한 것도(롬 8:8),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은 행위 이전에 존재 자체로 하나님을 불쾌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를 미워한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라는(롬 9:11) 원천적 이유 외에, 성령을 따라 났느냐가 관건이었습니다.

이는 기독교 인간론이 행위론적(behavioral) 이전에 존재론적(ontological)이며 관계론적(relational)이라는 확증이며,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물이고 하나님 의존적인 존재라는 사실과 직결됩니다.

인간은 고결한 덕행자냐 아니냐를 불문하고, 존재론적(ontological)으로 다시 나지 않는 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썩은 오물은 그 악취와 추한 몰골만으로도 능히 사람을 불쾌하게 하듯,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존재 그 자체로 하나님을 불쾌하게 만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더 핑크(A. W. Pink, 1886-1952)가 "인간의 행위적인 죄는 부패한 인간 존재에서 나온 열매일 뿐, 하나님을 불쾌하게 만드는 근본 요인은 타락한 인간 존재 자체"라고 한 것은 올바른 지적입니다.

"인간은 교양이 있고 교육받고 세련되었고 종교적이기 조차 할지라도 그의 마음은 '심히 부패'하였다(렘 17:9).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행해지는 것은 하나도 없기에... 아담의 모든 후손들은 다 타락한 자들이고 인간의 존재의 모든 부분은 죄로 인해 오염돼 있다. ... 그의 성향은 변질되어 버려서 그는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을 사랑하고 사랑하시는 것을 미워한다.

그것은 몇 개의 잎사귀가 시들어버린 것이 아니라 나무 전체의 뿌리와 가지까지 썩어버린 것을 의미한다. ... 인간 안에는 그 존재의 근원과 기질 안에 본래부터 부패되고 원래 악마적인 것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죄는 그 열매에 지나지 않는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미워하심을 받을 뿐더러, 그 자신도 하나님을 본능적으로 싫어합니다.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롬 3:10)"는 말씀은 다만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소극적인 무관심(무지)을 넘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롬 1:28)' 의도적 반감을 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막 9:40)'는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며, 하나님에 대한 노골적인 적개심을 표하지 않는 단순 무관심자는 기독교의 적대자가 아니라는 낙관론을 폅니다.

그러나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마 12:30)"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사실 그들의 무관심은 포장된 적대감의 표출입니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우리 의식 세계는 자신이 싫어하는 것에 대해선 의도적으로 눈을 감는 속성이 있다고 합니다. 인간이 자기를 창조한 하나님께 대해 무관심(무지)으로 일관 할 수 없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는 이사야 선지자의 책망대로 미물 짐승보다 못합니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사 1:3)."

성경이 하나님 무지(무관심)에 대한 인간의 변명이 심판 때에 그를 변호해주지 못할 것이라고 한 것은(롬 1:20), 그들의 숨겨진 적개심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직설 화법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을 심판받을 죄로 선언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살후 1:8)." 그들의 하나님 무지가 비의도적이고 소극적인 것이 아닌, 부러 잊으려는(willingly are ignorant, 벧후 3:5) 의도적인 것임을 명백하게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진주와 돼지 비유에서 사람이 진주를 던지면 돼지가 그것을 발로 밟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던져준 사람에게 덤비기까지 하는 것은(마 7:6),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무관심 뒤에 적개심이 도사리고 있음을 은유적으로 표현 한 것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 드러내는 사람들의 냉소와 무반응은, 사실은 하나님에 대한 숨겨진 적개심의 표출입니다. 복음 전도자나 설교자들이 전도를 녹록한 태도로 접근할 수 없게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육신에 속한 자들의 하나님에 대한 적개심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반감으로도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자신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감이 하나님을 미워한 데서 연유됐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 나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요 8:42)."

그는 세상이 제자들을 미워하는 이유 역시, 그들이 자신에게 속한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9).",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요 15:18)."

동생 아벨을 형 가인이 돌로 쳐 죽인 것은, 가인을 미워해서라기보다는 아벨이 믿는 하나님을 미워한 때문입니다. 동생의 제사는 받고 자신의 제사는 안 받는 하나님에 대한 적개심이, 동생을 향한 질투심으로 나타났습니다(창 4:3-8). 그리스도를 전하는 스데반에게, 유대인들이 귀를 막고 달려들어 돌로 쳐 죽인 것은 스데반이 전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적개심 때문이었습니다(행 7:57).

그리고 성경이 육신에 속한 자를 '육신을 좇는 자(롬 8:5)'로 지칭하는 것은, 그가 유별나게 저급한 육욕을 좇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타고난 본성에 충실한 거듭나지 못한 모든 자연인을 뜻합니다. 영적으로 죽은 자들은 신령한 것에 대한 감각과 갈망이 없기에 본성적인 것만을 쫓기 마련입니다.

마치 사자가 풀을, 돼지가 진주를, 까마귀가 깨끗한 고기를 좋아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창 8:7-9). 망령된 에서가 장자의 기업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먹는 것은(창 25:33-34), 영적인 것의 가치를 모르고, 땅의 것만 탐하는 거듭나지 못한 자의 속성을 드러낸 것입니다.

이어서 거듭나지 못한 자의 '육신의 생각'과 그것이 갖다 주는 '사망'에 대해 언급하고자 합니다. 성경이 육신의 생각이 사망이라고 한 것은(롬 8:6),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의 생각의 허망함(엡 4:17)과 거기에 따르는 심판을 말한 것입니다. 죄와 허물로 죽은 자들의(엡 2:1) 모든 생각은 죽음같이 허망하고, 그 허망한 생각이 그를 사망에 빠뜨립니다.

성경이 죄 된 행실을 죽은 행실과 동일시하고 있음도(히 6:1; 9:14) 같은 맥락이며, 그 생각의 내용은 선악을 불문합니다. 악하고 더러운 생각뿐만 아니라, 불쌍한 자들을 향한 선한 연민의 마음도 사망의 범주를 벗어나게 못합니다.

이는 그 선한 마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는 동기의 발로가 아닌, 자연인의 본성과 자기 의(義)의 발로에서이고, 선행의 원천적인 힘도 육신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선악을 불문하고 본능으로 행하는 모든 것을 멸망 받을 짓거리로 폄하합니다. "또 저희는 이성 없는 짐승 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유 1:10)."

계신대학원대학교 설립자 이병규 박사가 '짐승 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을 해석하여-유별나게 짐승 같은 추잡한 속성을 쫓는 것이 아닌-짐승과 같이 오관(五官)으로 느껴지는 본능 따라 행하는 자기 자랑, 자기중심, 자기만족을 위해 하는 것이라 하고, '이성'을, 중생한 영혼이 사용하는 선한 기관으로 풀이한 것은 적절합니다.

죄인은 악을 행하면서도 죄를 쌓을 뿐더러 선을 행하면서도 죄를 쌓습니다. 이는  그의 선행 동기가 자기 본성과 의의 구현에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롬 14:23)"고 한 것도 같은 관점입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참된 행위를, '성령으로 행하며 예수를 높이고 육체의 힘으로 하지 아니하는 것'이라 규정했습니다(빌 3:3). 이 기준에 맞출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거듭난 사람뿐입니다.

그러나 '육신의 생각'이, 다만 거듭나지 못한 자에게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거듭난 사람임에도 그 안에 남아있는 옛사람이 내는 생각도 육신의 생각입니다. 베드로가 분노하며 말고의 귀를 자른 것(마 26:51), 외식(갈 2:13-14), 십자가를 지실 예수님의 대업 앞에서 하나님의 일보다 사람의 일을 생각한 것(마 16:22-23) 역시 다 육신의 생각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심히 다투어 갈라선 것(행 15:39),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작정한 연보를 떼어먹은 것(행 5:1-10),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파당을 짓고 경쟁심과 교만에 빠진 것(고전 1:11-13)도 다 육신의 생각입니다.

그런 육신의 생각들로 인해 사망의 악취를 풍겨내며 타인을 실족케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거듭나지 못한 자들의 육신의 생각처럼 사망의 판결을 받게 하지는 않습니다. 거듭난 자들에게는 성화의 판결은 있겠지만 더 이상 칭의의 심판은 없기 때문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이 갖는 육신의 생각이 하나님과 원수 된다는 것도(롬 8:7) 말하고자 합니다. 죄로 죽은 인간은 본성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합니다(고후 10:5). 성경이 사람의 계획하는 바가 어릴 때부터 악하고(창 8:21), 마음의 생각이 항상 악하다(창 6:5)는 말은, 단지 인간은 어려서부터 도덕적으로 부패하다는 뜻이 아니라, 아담의 원죄를 유전 받은 인간은 날 때부터 하나님을 부인하고 대적하는 존재로 난다는 뜻입니다.

존 번연(John Bunyun, 1628-1688)도 같은 견해를 피력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원수가 되나니(롬 8:7; 골 1:21)'는, '본래 인간은 하나님에 대하여 원수이고 그의 마음에서 원수 된 자'라는 뜻이다."

나아가 거듭나지 못한 자의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법(롬 8:7)'에 굴복할 수 도 없습니다. 이 하나님의 법은 단순히 율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고 구원 얻는 '믿음의 법(롬 3:27)'이 그 핵심이며, 오직 성령으로만 받아들여집니다(고전 12:3). 거듭나지 못한 자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일 뿐입니다(고전 2:9). 동물이 사람의 생각을 알 수 없듯, 성령 없는 자연인에게는 믿음의 법이 어처구니없게 보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전 2:9)." 오직 예수가 위하여 죽은 구원 예정을 받은 자, 곧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으로 거듭난 자만 예수 믿고 구원 얻는 도리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48).",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반면 영의 사람이 갖는 '영의 생각(롬 8:6)'도 있습니다. 이는 타계주의자들의 세속사를 초탈한 생각, 혹은 신비주의자들의 소위 탈혼(입신) 상태에서 나오는 계시 같은 것이 아닙니다. 이는 자연인의 본성에는 없는, 성령의 거듭남으로 우리 안에 부어진 하나님을 향한 생각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가 정의한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영적인 사람들이 이전에는 전혀 몰랐던 새로운 것을 영혼이 의식하게 되는 것은 결과적으로 마음에 전적으로 새로운 지각이나 감각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 참된 성도는 새로운 영적 지각과 감각의 원리가 생긴다, 그리고 참된 성도는 이 새로운 감각으로 영적이고 신령한 것들을 알게 된다."

존 오웬(John Owen, 1616-1683) 의 견해 역시 같은 취지로 보입니다. "영의 생각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마음 자세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는 유일한 마음 상태이다."

'영과 영의 생각'에 대한 그의 견해도 탁월합니다. "성경에서 영은 '성령(롬8:9)'이나 '성령에 의해 신자 속에 생성되는 새로운 영적 생명(요 3:6)'을 뜻한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영의 생각이란 '신자 속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영적 생명의 활동'을 뜻한다. 이 새로운 영적 생명은 신자가 영적인 생각을 하게하며 기뻐하게 한다. 회심하기 전에는 이런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불신자는 땅의 일들을 좋아하지만, 신자는 하나님의 일들을 우선시한다."

이렇게 성령으로 거듭나고 하나님과 화목한 영의 사람의 생각에는 생명과 평안이 깃들어 있습니다. 이는 마인드 콘트롤(Mind-Control)이나 종교 수양으로 만들어진 심리학적인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하나님과의 화평과 초자연적인 성령으로 말미암아 마음에 이루어진 하나님나라의 경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 5:1).",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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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령한 사람 (고린도전서 2:13~16)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성령을 받았느냐? 라는 질문은 그리스도인이 되었느냐? 아니면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했느냐? 하는 기준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이란 호칭은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에서 약 일년간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 후 복음을 믿고 삶이 변화된 사람들에게 처음 붇여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바로 영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을 가리켜 부르는 호칭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주위에는 영적인 삶이란 무엇인지 참된 영적인 삶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고 영적인 삶을 살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참된 영적인 삶을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떻게 하면 예수님처럼 현실에 확실하게 발을 딛고 살면서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영적인 사람이 될 수 있을까’하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예) 예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참된 영적인 삶이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질적인 삶을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완전히 기쁘시게 하고 영화롭게 해드린 유일한 분은 그리스도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이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닮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영적인 삶란 예수 그리스도를 철저히 닮아가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그리스도 중심의 종교입니다.
내가 성화된다는 것도 그리스도 중심이요 영적이라고 하는 것도 그리스도 중심이며 그리스도인의 삶 자체가 바로 그리스도 중심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1)고 고백했습니다.

바울은 참된 영적인 삶을 제대로 깨달은 분이었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한 순간부터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도록 일하고 계십니다.   
모든 여건을 통해 모든 방법을 통해서 역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화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 안에서는 이 순간에도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성품이 형성되고 있습니다. 이것을 신학에서는 거룩됨 또는 성화라고 부릅니다.
  
사람의 모습을 육에 속한 자 곧 육적인 사람(고전 2:14) 육신에 속한 자(고전 3:1) 그리고 신령한 자 곧 영적인 사람(고전 2:15)으로 말씀 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자연인) 고린도전서 2:14 / 불신자

육에 속한 사람(프쉬코스 데 안드로스)
새 생명을 얻지 못한 상태의 자연인(표준역)을 뜻하는 거듭나지 못한 사람 자연인(현대인의 성경)으로 영적이지 못한 사람(공동번역)으로 불신자에 해당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육적인 삶을 삽니다.
그러나 영적인 삶에 있어서는 영적으로 살고 있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육으로 한번 태어난 자연인은 영적인 진리를 잘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미련하게 보이며 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연인에케는 영적인 진리들이 바보처럼 우스꽝스럽게 보인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대해 사도 바울이 지적한 말씀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2:14 /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예수님께서도 니고데모에게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네가 한 번 더 태어나야 하겠다는 말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그 말씀이 이해가 안되어서 어머니의 배속에 들어 갔다 나와야 하느냐고 하였습니다.
한번 태어난 육신과 지성으로 한 차원 위인 영적인 것에 대해 이해를 하려니 안된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예수님을 찾아다닌 무리들이 그 전날 예수님께서 수 많은 사람을 먹이셨던 것 때문에 다시 찾아온 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썩을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썩지 않을 양식을 구하라”고 하셨습니다(요 6: 27).

예수님이 떡을 먹이신 것은 떡에 목적을 두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생명의 떡임을 알게 하려고 행하신 것입니다.
자연인은 예수를 믿고 성령으로 거듭나야 복음에 대해 이해가 가능해집니다.

예수님께서도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습니다(요 3:3).

따라서 안 믿는 사람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게 화를 내고 욕하는 것에 대해 속상해 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이해가 안되어서 그러는 것입니다.

육적인 사람의 본성은 자기 중심적입니다.
심지어 선한 일을 해도 그 안에 이기적인 동기가 숨어 있습니다.
자아가 마음 보좌에 앉아 있고 예수님은 그의 삶 밖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육적인 사람은 영적인 진리를 잘 받아들이지 않을 뿐더러 하나님의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고전 2:14). 
이것은 자연인이 무식하다는 소리가 아니라 영적인 것을 이해할 능력이 없다는 말입니다.
  
목사님이 기독교에 대한 강의를 하는데. 한사람이 자꾸 엉뚱한 질문을 해대고 반론을 하면서 강의를 방해하더랍니다.
그래서 참다 참다 “전공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핵공학이라고 하여서 “핵이 소금으로 만들어진 것을 아시요?” 했더니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린가 하고 의아해하더랍니다.
그래서 ’핵에 대해 전혀 모르는 내가 핵이 어쩌고 저쩌고 하면 얼마나 웃깁니까? 마찬가지로 기독교에 대한 것은 내가 전공했으니 내가 좀 얘기하게 놔두시오”라고 했더니 그 사람은 무안해서 그냥 나가버리고 말더랍니다.

육적인 사람 영적인 생명이 그 안에 없어 진리에 대하여 이해 할 수가 없습니다.

육신에 속한 자(세속인) 고린도전서 3: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육신에 속한 자(사르키노이스)는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이라고 하는 표현에서 보듯 성령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성숙하지 못한 신앙 때문에 성령에 사로잡혀 있지 않고 자연인의 본성에 더 지배 받아 육신적 기준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이들을 의미 한다고 봅니다.

예수는 믿는데 생각하고 사는 모습이 예수 안 믿는 것같은 사람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표준역)으로 아직도 영적인 신앙인이 아니기 때문에 영적인 사람에게처럼 말해봤자 못 알아들을 것이므로 그 수준에 맞게 말하겠다고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서신에서 사도 바울은 이야기합니다.

육신에 속한 자의 본성은 자아가 마음 중심에 자리잡고 예수님은 한편구석에 위치하고 있는 세속적인 사람(현대인의 성경)입니다.
  
거듭났다는 자체가 성화된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가끔 혼동되는데 거듭났다는 것은 영적으로 태어났다는 것이지 영적으로 성숙한 것은 아닙니다.
마치 아이가 태어났다는 것과 성인이 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육신에 속한 자의 특징은  미성숙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린 아이 다루듯이 잘 보살피고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또한 영적인 진리를 아직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잘 설명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교인들에 대해 질투심이 많고 잘 비판한다는 것입니다.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은 남에 대해 못마땅한 것이 많습니다.


신령한 사람(성령인) 고린도전서 2: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신령한 자(프뉴마티코스) 성령께서 내주 하시는 영적인 사람(공동번역 현대인의 성경) 성령으로 거듭난 새 생명의 사람 성령 충만한 사람마음의 중심 보좌에 주님을 모시고 섬기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어떡하든지 나 자신이 점점 없어지고 그 대신 예수님이 성령님이 점점 내 삶을 점령하시게 됩니다.
  
성령은 예수 믿는 사람에게 임합니다.

고린도전서 3: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 합니다.

그러나 내재하시되 얼마만큼 성령이 내 삶을 점령하셨는가는 또다른 이야기입니다.
만약 내 가슴 속에 질투,분노 욕심 등이 확 차 있다면 성령님이 눌려서 활동하시기 어려워집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를 믿자마자 마음속의 욕심,악독,분노,질투 같은 것을 자꾸 내버러서 비워 드릴 때 성령께서 더 강하게 역사하십니다

에베소서 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에게 성령이 임하십니다.
성령은 말씀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감화로 기록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씀만 철저히 알아도 성령의 뜻을 대부분 알 수가 있습니다.
말씀과 기도 외에는 신앙이 성장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신령한 사람 곧 영적인 사람은 진리릍 배우고 싶어할 뿐 아니라이해를 잘 합니다.
설교를 들은 후 그 설교가 귀에 쏙쏙 들어오며 참 좋은 것 배웠다고 기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설교자가 특별히 설교를 잘했기 때문이라기 보다 그 사람에게 들을 귀가 있기 때문입니다.
머리로 들은 것들이 금방 가슴으로 전해 집니다.
    
신령한 사람 영적인 사람은 또한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은 마음이 있습니다.
영적인 사람은 시간이 흐를수록 예수를 닮아갑니다.
그것은 지식이 늘어난다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예수를 닮는 것과 지식이 느는 것이 비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식이 는다고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은 마음을 갖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가야 할 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지식적으로 하나님 아는가 얼마나 봉사하고 있는가를 놓고 우리의 신령성을 가늠하시지 않습니다. 

평생 조용히 산골에 묻혀 살면서도 예수를 많이 닮아 신령성을 가진 사람이 기독교 역사에는 많이 있었습니다.
크게 이름 내며 일하지 않았어도 그저 자그마한 일이나마 예수님을 닮은 신앙으로 묵묵히 해내며 죽어간 사람들이 구석구석 많이 잇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모릍지라도 하나님은 그들을 기뻐하셨고 그들을 통해 영광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께 헌신(devotioo)하였나로 신령성의 척도틀 삼으십니다.
'헌신’(devotion)은 단순한 헌신이 아니라 헌신과 깊은 사랑이 합해진 상태를 말합니다.
나 자신을 바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자신을 바친다고 하는 것은 나의 재주와 찬송과 열정뿐 아니라 나의 고민과 슬픔도 바치는 것입니다.
찬송은 바치면서 고민은 내가 붇들고 있으면 온전한 헌신이 아닙니다.
제일 사랑하는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숨길 것 하나 없이 다 드리는 것 그것이 바로 헌신입니다.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얼마나 친숙한가 하는 친숙도로 하나님은 신령성을 판단하십니다. 
  
신령성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친숙합니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만큼 친숙한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신령성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과 친숙하며 하나님의 말씀과 친숙하며 하나님께 기도하기에 친숙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기에 친숙합니다.
하나님과 더 깊이 친숙할수록 아들이 아버지를 닮아가듯 하나님을 더 많이 닮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이 얼마나 예수님을 닮았는가 하는 것으로 신령성을 분별하십니다.
신령성은 주님을 얼마나 닮았는가 하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참된 사랑을 나누는 두 부부가 서로를 닮아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친숙할수록 부부는 더 깊은 사랑과 교제률 나누게 되며 마침내 얼굴과 식성과 성격까지 닮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말과 행동과 인격이 얼마나 예수님을 닮았나 하는 것으로 우리는 그가 신령성을 가졌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영적 신앙인인지 아닌지 또 어느 정도 영적인지 알아 보기릍 원한다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합니다.
내가 그 분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
여기서 ‘안다’고 하는 것은 막연히 상대방의 배경이나 현실을 아는 정도가 아니라 얼마나 친숙하게 상대방에 대해 아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분을 얼마나 사랑하는가?
스스로에게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많은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
새벽기도도 열심히히 다니고 성경공부를 열심히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열심인 사람일수록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느냐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의 마음 깊은 곳에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이 모든 것은 헛된 것입니다.

신령성은 얼마나 그분을 닮았는가입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닮고 딸도 어머니를 닯습니다.
아버지만큼 아들을 사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머니만큼 자기 딸을 사랑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아내는 남편을 알고 남편은 아내를 압니다. 부부 사이만큼 서로를 잘 알고 서로를 사랑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을 잘 알고 사랑한다면 알게 모르게 그 사람을 닮아가게 됩니다.
  
참된 영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예수님을 닮은 모습일 것입니다.
참된 영성이란 예수님을 닮아가는 데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영적인 사람 곧 신령한 사람은 성령에 감화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성령의 조명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는 보이는 세계가 모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압니다.
그는 보이는 세계 저 너머에 보다 본질적이고 궁극적이며 영원한 세계가 있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관한 일보다는 저 세상에 관한 일에 삶의 비중을 두고 힘을 쓰고 노력을 합니다.
한마디로 그는 이 세상 사람들이 가진 '육안'에 믿음의 눈인 '영안'을 하나 더 가진 사람입니다.

영에 속한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은 영적 분별력을 갖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이 세상과 저 세상,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구분합니다.
그는 이 세상 일을 멸시하거나 포기하지 않지만 거기에 얽매이거나 크게 영향 받지 않습니다.
세상일을 추구하거나 쾌락에 몰두하는 일이 하나님과 원수가 됨을 알기 때문에(약 4:4) 세상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삽니다. 

반면 그는 하나님이 요구하고 성령이 불러일으키는 거룩한 소욕에는 적극적입니다.
그는 '영원'과 비교하여 이 세상에서의 삶이 지극히 짧다는 것을 앎으로 이 세상에서의 삶을 '영원'을 위하여 과감하게 투자합니다.
그는 삶에 있어서 모든 일의 우선순위를 압니다.
그에게는 모든 일의 판단 기준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으므로 그의 판단은 정확하며 오류가 없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 만족할 만큼 실수 없이 사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로부터 지탄받고 비난받을 만큼 실수투성이의 삶은 살지 않습니다(15절).

영에 속한 신령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습니다.
신령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대속 교리와 가르침의 진정성을 압니다.
그의 가르침에 동조하고 굴복하며 순복하며 그 뜻에 따릅니다.
그에게는 그리스도의 내주하시는 영이 계시므로(롬 8:9) 그 영의 활동에 의하여 그는 그리스도의 생각을 알게 되며(11절) 그 뜻에 굴복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성이란 말은 성경에 없습니다.
신령함이 영성입니다.
신령한 사람으로서 참된 영성의 사람으로서 하나님께 영광돌리며 사명 감당하는 이 시대가 요구하는 그리스도인으로 무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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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영적인 사람인가?

들어가는 말 

우리의 몸을 축구 공으로 비유하여 보자 겉 가죽은 사람의 몸튜브는 혼공기는 영을 가리킨다.

또한 바울은 사람을 세 종류로 구분합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 세속인(고전 3:1-3)
육에 속한 사람, 자연인(고전 2:14)
영적인 사람, 거듭난 사람, 성령인(고전 3:1)

예를 들어 봅시다.

사람을 축구공으로 비유해 봅시다.
축구공의 겉가죽은 사람의 육체
축구공의 튜브는 혼
튜브안에 채워진 공기는 영이라고 하겠습니다.

육체라는 몸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을 보고, 느끼는 감각기관으로써 물질 세계를 접하고 있다.
혼은 육체의 다섯 가지 감각기관을 이용하여 물질 세계를 연구하고 사고하여 자기 자신을 표현하고 외부와 교류를 갖는 역할을 한다. 혼으로 들어가는 문은 상상, 의식, 기억, 사고, 감정이다. 

상상의 문(Imagination)은 육체의 시각에 해당되는 것으로서,  혼에 있어서 보는 눈과 같은 것이다.
의식의 문(Gate of Conscience)은 육체의 후각에 해당되며 혼이 선악의 존재를 구별하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기억의 문(Memory)은 청각에 해당되며 전에 들은 것을 혼이 재생하도록 한다.
이성(사고)의 문(Reason)은 미각에 해당되며 맛으로 음식을 비교하듯이 혼이 사실을 비교하게 해준다.
감정(애정)의 문(Affection)은 촉각에 해당되는데.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을 만져서 알 수 있듯이 혼이  느끼는 것이다.

"영"(spirit)은 "혼"(soul)과 "몸"(body)을 통하여  외부의 물질을 이해한다.
영의 감지능력은 영적인 것으로서, 믿음, 소망, 경배, 기도 등의 일을 한다.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는 인간의 영은 하늘로부터 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아담이 타락하자 죄는 영의 창문을 닫고 커텐을 쳐버렸으며 "영의 방"은 "죽음의 방"이 되어버렸다.
지금도 거듭나지 못한 영은 죽은 상태로 남아 있다.

성령의 능력으로 "빛"과 "생명"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생명이 그 방안에 거해야 빛과 생명으로 가득차게 될 것이다.
그때서야 비로소 우리는 왜 "자연인"이 "영적인 일"들을 이해할 수 없었는가를 알게 된다.
영적인 본성이 거듭나기까지는 영적인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자연인의 영은 어둠속에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의지(Will)"가 문 앞에 있다가 성령이 들어오려는 것을 방해한다.
성령이 그 사람의 "영"에 들어와  거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칼"인 "하나님의 말씀" 앞에 의지가 굴복해야만 한다.

 "선"과 "악"의 전쟁터는 인간의 "혼"이다. 성령이 사람의 "영"에 자리잡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성령은 "혼"과 "육"에도 접근해야 한다.
그 때까지는 사람이 성화될(Sanctified) 수 없는데, 이는  "거룩함"이라는 것은 영과 혼과 몸이 "성령으로 충만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건강한 혼과 영은 건강한 몸을 필요로 한다.
몸이 육신의 정욕으로 넘겨지거나  또는 심지어 몸을 쇠약하게 하는 지나친 금식으로  혼과 영이 함께 고통을 받으면 전체 인간이  영적으로 병들게 된다. 

이제 혼과 영이 몸을 떠나 뒤의 상태를 살펴보자 "부자와 나사로"에 관한 기사에서  우리는 지하 세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지하 세계"는 둘로 나뉘어져 있는데 그 사이는 건널 수 없는 구렁이 있으며 그것을 "끝없이 깊은   구렁"이라 한다. 이 곳은 악한 영들(마귀들)이 일시적으로 묶여 있을 곳이다. 그 곳의  왕은 "아폴루온(Apollyon)"인데 하나님께서 가두어 두셨다가 원하실 때에 천사를 시켜 잠깐 풀어 주실 것이다(계 9:1-11;17:8;20:1-3).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기 전에 죽은 의로운 사람들의 혼과 영은 "지하 낙원"에 있었다. 거기서 그리스도는 십자가 상에서 죽었던 "회개한 강도"를 만나셨다. 그리스도의 혼과 영은 그가 부활하신 날 지상으로 돌아 오셨으나 주님은 혼자 오신 것이 아니었다. 낙원에 있던  자들을 함께 데리고 올라오셨으며, 그후 낙원의 문은 잠그셨고 지금은 사망과 지옥의 열쇠를 갖고 계신다.(계 1:18) 여기에서 "사망"은 지하 세계의 "무덤"과 "하데스"를 나타낸다. 

그들은 몸을 입고 무덤에서 일어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한 첫 열매들로 주님과 함께 하늘로 올라갔다(마 27:52,53). 그들은 "셋째 하늘"로 올라갔는데, 그곳은 사도 바울이 갔던 곳이었다(고후 12:1-4).  바울은 그곳을 낙원이라 불렀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이후 죽은 모든 의로운 자들은 그곳으로 가서 "주와 함께" 있을 것이다(빌 1:23,고후 5:8). 

자신의 신부인 교회를 만나시려고 공중에 오실때 주님은 "셋째 하늘"의 낙원으로부터 이 의로운 혼들을 데려오실 것이다. 데살로니가전서 4:14에는 "예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을 우리가 믿는다면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예수 안에서 잠든 자들"도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땅으로 내려와 자신들의 몸을 되찾아 무덤에서 일어나서 "변화 받은 성도들"과 함께 올라가 공중에서 그리스도를 만날 것이다.

 

  그러나 죽은 "악한 자"의 혼은 계속 "지하 세계"의 "한 부분"인 지옥에  갇혀 있다가, 두 번째 부활이 이루어질 때에야  땅으로 돌아와 자신들의 몸을 다시 입고 "큰백보좌 심판석" 앞에서 심판 받게 된다. 그들은 그 심판에서 "둘째 사망"의 선고를 받게 되며, 그 의미에서  그들은 다시 죽어서 육신을 잃게 되며, 몸에서 이탈된 혼은 불못에 던져져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 가운데서 고통을 받게 된다. 혼은 불에 타지 않으므로 악한자의 혼은 불못(둘째 사망)에 던져져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 가운데서 고통을 받게 된다. 혼은 불에 타지 않음으로, 악한 자의 혼은 글자 그대로 영원히 불 가운데  있게 된다.

 

땅이 "불로써 타버리면(Renovated)" 사탄을 비롯한 하늘의 모든 "악한 권세들"은 갇히게 될 것이며 그때 하늘은  반란을 일으켰던 모든 악한 영들로부터 "깨끗하게" 될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사람은 타락이전의 아담의 상태로 회복되며 자연계와 영의 세계 사이를 나누고 있던 "휘장"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2. 들어가는 말

 

 교회(모임체)에서는 "영적인 사람"은 그것을 알지만 영적인 사람이 아닌 사람은 이것을 모른다고 하면서 성별되어있는 채  회자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보다 더 잘못된 생활을 하면서 당당할까?  왜 그들은 비성경적인 사업과 비리와 사회의 비난을 받으면서도 영적인 사람으로 허세를 부리며 허풍를 떨까? 많은 의문이 난다. 하여, 성령이 가르쳐주시는대로 "영적인 사람"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하자!

 

 1)  『사람의 일을 그 사람 안에 있는 사람의 영이 아니면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이 아니면 아무도 모르느니라』(고전 2:11).

 

  (1)  영에는 세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의 영이며, 세 번째는 더러운 영, 즉 사탄의 영이다. 성경은 또 짐승에게도 영이 있다고 말씀한다. 『사람의 영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영은 땅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누가 알리요?』(전 3:21). 이렇게 보면, 이 우주에는 네 가지 유형의 영이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지만, 짐승은 영적인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육체적인 필요를 충족하고 자신의 몸이 편안하기만 하면 나머지는 운명에 맡긴 채 행복할 수 있느냐 하면, 절대로 그렇지가 않다. 그것은 인간이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짐승은 육신적인 욕구만 충족하면 그것으로 충분히 행복하다. 인간도 육신을 갖고 태어났지만, 그것이 타고난 모든 요소의 핵심이 될 수 없다.

육신이 인간이 타고난 모든 요소의 핵심이 될 수 없다는 것은 그것이 죽어 썩으면 벌레들의 밥이 된다는 것을 알기에, 육신만이 아닌 다른 무엇인가를 위해서도 살려고 한다는 것을 보면 자명하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기에 그 중심에 영이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인간은 육신의 필요를 충족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만족할 수가 없으며, 인간은 그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영적인 필요를 충족해야만 비로소 행복을 느낀다. 인간은 육신을 위하여 밥만 먹으면 되는 존재가 아니다. 그러나 짐승은 밥만 먹으면 한없이 행복하다. 인간은 육신을 위해 밥을 먹지만, 영에게도 무엇인가를 먹여야만 비로소 행복을 느낀다.

 

  (2)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도 새들은 갖가지 아주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인간과 짐승들 사이에 완전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느냐 하면, 결코 그게 아니다. 아무리 훈련을 잘 시키고 아무리 집에서 함께 산다고 해도 인간과 짐승들 사이에는 어딘가 건널 수 없는 간격이 있기 마련이다.

이 틈은 인간이 영적인 존재인데 반하여 짐승들은 그렇지가 않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생기는 간격이며, 이 간격은 도저히 뛰어 넘을 수 없는 틈이다. 그래서 짐승은 사람의 일을 결코 알 수가 없다. 사람의 일은 사람의 영이 아니면 결코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짐승이 사람의 일을 알려면 사람의 영을 소유해야만 한다. 그것이 만일 가능하다면 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이 아니면 인간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인간이 하나님의 일을 알려면 하나님의 영을 소유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다행히도 하나님께서는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을 소유할 수 있도록 해놓으셨다.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새 생명을 얻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하나님의 영을 넣어 주시는 것이다. 구원받은 우리는 세상의 영을 버리고 하나님의 영을 받았다. 구원받은 우리들에게 이처럼 하나님의 영을 넣어 주시는 까닭이 무엇인가?

 

 2)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 (12절).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12절).

 

   (1)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을 받도록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 말은, 우리가 새롭게 태어나면, 전에는 알지 못했던 무엇인가를 알게 된다는 뜻이다. 우리가 거듭나지 못했을 때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조차도 알지 못했고,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창조하셨다는 사실도 몰랐으며,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나에게 진리를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도 몰랐고, 그분께서 거룩하신 분이며, 진실하시며, 신실하시다는 사실들, 그 어느 것도 알지 못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거듭나지 않고는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었다. 도무지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는 명철이 터럭만큼도 없었으며, 하나님께서 내 인생에 어떻게 개입하시는가에 대해서 눈꼽만치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은 말할 것도 없으려니와, 마귀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마귀가 얼마나 막강한 힘을 갖고 있는지도 알 길이 없다. 그러나 거듭나고 구원받은 우리는 이제 이러한 모든 것들에 대해서 잘 알게 되었다. 어떻게?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을 받았기 때문이다.

 

  (2)  하나님께로부터 온 이 영은 삼위일체의 한 분이신 인격적인 성령, 그분을 지칭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분”이 아니라 “그것”(it)으로 표현되는 “영” 그 자체를 의미하기도 한다는 것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시거니와』라고 말씀하고 있는 로마서 8:16에서 성령을 대문자 “Spirit”로 표기하여 인격적인 분으로서의 그분을 나타내고는 있지만, “성령이 친히”에서 “Spirit himslef”가 아니라 “Spirit itself”로 표기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성령 그분 자신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성령 그것 자체가”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경우에는 성령님을 인격적인 분으로서의 성령님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역사하심, 또는 성령님의 영향력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처럼 “그것”으로 표현되는 하나님의 영을 소문자로 표기한 곳도 성경에는 나온다. 출애굽기 31:3,4이나 출애굽기 35:31,32에 보면 『하나님의 영으로 그를 충만케 하시어 지혜와 명철과 지식과 온갖 솜씨로 정교한 기술을 고안하여 금과 은과 놋으로 일하게 하시며』에서 하나님의 “영”을 소문자 “spirit”로 표기하고 있다.

이처럼 소문자로 표기한 “영”은 하나님의 영의 영향력, 또는 그분이 행하시는 사역 자체를 의미한다. 고린도전서 2:12에서도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을 소문자로 표기하고 있거니와, 이것은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거듭난 사람들에게 인격체이신 성령님으로 오셔서 인도하시기도 하지만, 능력의 “영”을 주셔서 그 영향력으로 지혜를 깨닫도록 하시기도 한다.

캠벨주의자들은 인격적인 분으로서의 성령님을 인정하지 않고 어느 경우에나 성령은 하나의 “영향력”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한 인격체이신 것을 부정하고 하나의 에너지적 존재로 간주하는 배교자들의 발상이다. 성령님은 인격체이시며, 또 사역을 행하는 영향력이시다.

 

 3)  영적인 일들을 영적으로 비교 (13절).

 

『또한 우리가 그것들을 말하되 인간의 지혜가 가르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성령께서 가르치시는 말로 하나니 영적인 일들을 영적으로 비교하여 말하느니라』(13절).

 

『성령께서 가르치는 말』이란 곧 성경 말씀을 의미한다. 나블레 고블레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이나 지껄이는 은사주의자들이 환각 속에서 들었다고 곧잘 주절대는 그런 말이 아니라 성령님께서는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신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방언이 아니라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분명한 말로 말을 한다.

 

『영적인 일들을 영적으로 비교하여 말하느니라.』 이 구절은 꼭 배워두어야 할 말씀이다. 영적인 일들이란 영적인 성경 말씀들을 의미한다. 이것은 바로 앞에서 『또한 우리가 그것들을 말하되 인간의 지혜가 가르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성령께서 가르치시는 말로 하나니』에서 “성령께서 가르치시는 말”이 곧 성경을 의미한다는 데서 자명하다. 이처럼 영적인 일들에 관해서 말씀하는 성경은 영적으로 말씀하는 성경으로 비교해 보아야 이해할 수가 있다. 다시 말해서, 말씀은 말씀으로 비교될 때 그 말씀의 온전한 뜻이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들을 육신적이거나 인간의 지혜에서 나온 세상적인 지식에 비추어서 이해하려고 하면, 아무리 해도 이해될 수가 없는 것이다.

 

 4)  자연인은 영의 일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14절)

 

『그러나 자연인은 하나님의 영의 일들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일들이 그 사람에게는 어리석게 여겨지기 때문이요, 또 알 수도 없나니 이는 그 일들이 영적으로만이 분별되기 때문이니라』(14절).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자연인 그대로 내팽겨쳐진 사람이다. 따라서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일들을 알 수도 없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무지하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들이 모두 어리석게만 보인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영의 일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들은 사람의 일을 이해하지 못하는 짐승들이나 마찬가지다.

한편, 거듭났다고 해서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하나님의 영의 일들을 받아들이느냐 하면, 결코 그렇지가 않다.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육신적인 사람은 자연인이나 마찬가지로 성령의 일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성령을 따르지 않으면 그 사람은 성령의 일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이런 사람들은 여전히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다. 『육신을 따르는 사람들은 육신의 일들을 생각하나 성령을 따르는 사람들은 성령의 일들을 생각하느니라』(롬 8:5).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은 구원받지 못한 “자연인”과 구별되어야 하지만, 성령을 따르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자연인이나 마찬가지다.

 

 5)  영적인 사람은 판단하나 (15절)

 

 『영적인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15절).

 

   (1)  꼭 기억해 두어야 할 위대한 구절이다. “영적인 사람”이란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을 말한다.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는 지혜를 소유한다.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하나님의 영을 받고 하나님의 영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이 자신에게 무어라고 지껄여도 거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기 때문이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지혜나 인간의 생각으로 무엇을 판단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올바르게 판단하는 사람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인간의 생각으로 자신에게 이러쿵 저러쿵 판단하려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반면에 그리스도인은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판단해서도 안된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가치 기준은 오직 성경 말씀에 있기 때문에 사람의 생각으로 함부로 형제를 판단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판단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도 판단받지 않을 것이라』(마 7:1). 『그런즉 우리가 더 이상 서로를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형제들 앞에 거치는 것이나 방해물을 놓지 아니하였는지 판단해야 하리라』(롬 14:13).  

 

   (2) 『판단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도 판단받지 않을 것이라.너희가 판단하는 그 판단으로 너희도 판단받을 것이며, 너희가 재는 그 자로 너희도 다시 측정을 받으리라. 어찌하여 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생각지 못하느냐? 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도 ‘네 눈에서 티를 빼내 주마.’라고 네 형제에게 말할 수 있느냐?』(마 7:1-4) 


   ① 이 구절 역시 많은 기독교인들의 입에서 회자되는 말로써, 누가 누군가를 판단한다고 생각되면 즉시 이 구절을 들고 나와 “네 눈에서 들보를 먼저 빼내라.”고 말한다. 물론 이 구절은 어느 시대 누구에게나 미덕으로 사용될 수 있는 구절이다. 우리는 남을 함부로 비판하고, 함부로 공격해서는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도 그러한 잘못을 저질렀을 수 있고, 또 저지를 가능성이 충분히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구절을 지나치게 적용하려는 사람들은 진리를 가지고 오류를 판단하는 것조차 “비판”이라고 생각하여, 스스로의 무지를 정당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그리스도인들은 판단할 수 있다. 만약에 우리가 판단할 수 없다면 어떻게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그 사람이 구원받지 못했다는 판단하에, 적어도 그 사람이 구원받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판단”하에 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또 오류에 빠진 사람을 진리로 바로 잡으려면 그 사람의 오류를 “판단”해야 하며, 누군가에게 지식을 전달하거나 교육할 때 그들의 잘못을 “판단”해야만 그들을 올바로 가르칠 수 있다. 특별히 영적인 문제에 있어서 “판단”은 더욱 명확하게 행해져야 하는데, 그것은 고린도전서 2:15의 말씀 때문이다. 『영적인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고전 2:15). 영적인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다. 그는 판단하여 사람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해 주어야 한다.

 

   ② 마태복음 7:1의 말씀과 고린도전서 2:15의 말씀이 서로 상충이 되는 것은 우리가 마태복음 5장에서 살펴보았듯이 이 두 말씀이 서로 다른 경륜(또는 세대)에서 사용되기 때문이다. 즉 고린도전서 2:15의 말씀은 교회 시대의 성도가 행해야 할 말씀이고, 마태복음 7:1은 왕국 시대의 백성들이 행해야 할 말씀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도 함부로 비판만 해서는 안될 것이다.

고린도전서 2:15의 전제는 “영적인 사람”이다. 자신이 영적인 사람이 아니라면 그는 함부로 판단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육신적인 판단은 또 다른 판단을 낳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3장에서 육신적인 판단을 금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자신을 영적인 상태, 즉 성령충만한 상태로 유지하여 모든 것을 올바로 판단하는 가운데, 진리를 전파해야 한다. 절대진리, 즉 하나님의 말씀의 잣대로 모든 것을 과감히 판단하라.  

 

  (3)  『그런즉 우리가 더 이상 서로를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형제들 앞에 거치는 것이나 방해물을 놓지 아니하였는지 판단해야 하리라』(롬 14:13).

『우리가... 서로를 판단하지 말고 ...것이나 ...아니하였는지』, 그 일을 판단해야 한다고 말씀한다. 쉽게 말해서, 사람을 판단하지 말고 어떤 “것,” 즉 “일”을 판단하라는 말씀이다. 우리가 판단해야 할 “것”으로는 가령, 『형제들 앞에 거치는 것이나 방해물을 놓지 아니하였는지』 하는 것들이다. 형제들 앞에 방해물을 놓아 그들이 실족하기라도 한다면 당신은 이에 대해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해명해야 할 것이고 이로 인해서 진땀을 흘려야 할 뿐더러 당신에게 돌아오는 상은 없다. 당신은 이것을 결코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6)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각을 가졌느니라 (16절)

 

『누가 주의 생각을 알았다고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각을 가졌느니라』(16절).

 

   (1)  당신이 구원받고 성령님께서 당신 안에 들어오시면, 당신이 그리스도와 동일한 생각을 하도록 그분께서 인도해 주신다. 당신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때, 당신은 주님께서 생각하시는 것과 똑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는 말이다. 『너희 안에 이 생각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도 있는 생각이라.』(빌 2:5)고 성경은 말씀한다.

거듭난 사람에게 성령님께서 들어오시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와 똑같은 생각과 마음을 가져야 하고, 주님께서 보시는 대로 보아야 하며, 지난날의 생각과 안목은 모두 버려야 한다. 『너희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써 변화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롬 12:2). 그런데, 그리스도의 생각을 갖고는 있으면서도 그리스도의 생각을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생각대로 행하지 않는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로마서 12:2를 보라. 『너희는 이 세상과 일치하지 말고 너희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써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입증하도록 하라.』고 성경은 명령하고 있다.

 

   (2)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생각을 가졌다. 그러나 그 생각을 행동으로 나타내어 입증할 수 있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이런 사람은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써 변화를 받은” 사람이 아니라 단지 그리스도의 생각을 머리 속으로 상상만 하고 있는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생각을 갖고 그 생각대로 행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머리 속으로 생각만 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은 구원받고 생각할 수 있는 두뇌를 되돌려 받은 것이 아니라 마음이 새롭게 회복된 사람들이다. 새롭게 된 마음으로 변화되어 그리스도의 생각과 똑같은 생각대로 살아가는 데에 대해서 겁먹을 필요는 하나도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영이 아니라 능력과 사랑과 건전한 생각의 영이라.』(딤후 1:7)고 말씀하고 있지 않은가!

 

 

3.  마치는 말

 

 1) 『너희는 이 세상과 일치하지 말고 너희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써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입증하도록 하라』(롬 12:2).

『이 세상과 일치하지 말고...』.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어려운 문제가 이것이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답게 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바로 세상 문제다. 마귀가 그리스도인에게 제공하는 가장 큰 걸림돌이 이것이고, 여기에 걸려 넘어져 세상과 일치하게 하려는 것이 마귀의 유일한 목표다. 당신이 비록 그리스도인이지만 세상과 일치하려고만 한다면 마귀는 당신에게 거의 모든 것을 제공할 것처럼 유혹해 온다.

당신이 세상에 일치하기만 하면 당신에 대하여 마귀가 할 일은 그것으로 종결되어 임무 끝이다. 그러나 당신이 세상과 일치하지 않고 있는 한 마귀는 당신에 대한 자신의 일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신에 대한 공략을 계속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이 그리스도인에게는 최대의 골칫거리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무슨 일이 있어도 세상과 일치하려고 하지 않는 바람에 박해를 받고 고문당하고 끝내는 순교까지 당하고 만 초기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처하였던 갖가지 상황을 책을 통해 읽고 연구하면 할수록 그들이 안고 있던 큰 문제가 무엇이었는지 더욱 여실히 발견되는데, 이른바 “인류에 대한 증오심”이라는 문제가 그것이었다. 초기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로마 측과는 사이좋게 지내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는데, 바로 이것 때문에 그들은 죽임을 당했던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몸을 산 제물로 드려야 마땅한 이유는 롬 11:36이었다. 모든 것이 그분께로부터 나온다는 사실, 이것이 헌신해야 하는 첫 번째 합당한 사유였다. 우리의 몸을 산 제물로 드려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12:1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셨다. 이것이 헌신해야 하는 두 번째 정당한 사유다.

그리고 그 세 번째 합당한 이유가 여기 2절이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 이것이 당신의 몸을 산 제물로 드려야 하는 정당한 사유인 것이다. 이 세 번째 이유를 분명히 알기 위해서라도 당신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당신은 확실하게 찾아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려야 하는 합당한 이유는 이렇게 세 가지로 집약된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는 사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자비를 베푸셨다는 사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어떻게 하기를 원하시는지 분명한 뜻을 갖고 계시다는 사실, 이 세 가지가 당신의 헌신을 요구할 수 있는 정당한 근거인 것이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롬 12:2).

당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세 가지 뜻이 모두 개진되고 있다.

선하신 뜻(good will)
기뻐하시는 뜻(acceptable will)
온전하신 뜻(perfect will)

하나님의 뜻은 선하라 선하게 행하라

첫 번째는 그릇되게 행하여 죄를 짓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선하라, 선하게 행하라,” 이것이 하나님의 첫 번째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누구도 그릇되게 생각하고 죄 짓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어떤 뜻을 갖고 계실 때, 그 뜻의 첫 번째는 언제나 “선하라.”는 것, 이것이다.

 

하나님의 두 번째 뜻은 선한 행동

당신이 덮어놓고 어떤 “선한 행동”을 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과연 그것을 기뻐하시느냐 하는 것은 완전히 별개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은 당신이 생각했던 것과는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그러므로 당신은 어떤 “선한 행동”을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인가를 먼저 정확하게 헤아려 알고 난 다음에 그 선한 일에 착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당신이 아무리 많은 선행을 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에 부응하는 것이 아니었다면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전혀 평가되지 않을 터인즉, 당연히 그에 대한 상도 없다.

​하나님의 세 번째 뜻은 온전하신 뜻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선하기를 바라시고 선한 행동을 하기 바라신다.
그래서 당신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행이 무엇일까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고 선한 일이라도 어떤 선한 일을 해야만 주님께서 기뻐 받으실까를 정확하게 알기 위해 성경을 읽고 하나님의 말씀들을 상고하면서 기도하고 묵상한다.
그런 다음 당신은 마침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알게 되고 그 뜻에 따라 행동한다.
따라서 당신이 행한 모든 선한 것들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에 온전히 부합된다.
이것이 바로 당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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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靑瓦臺)와 용산 국방부 청사(國防部 廳舍)


청와대(靑瓦臺)와 용산 국방부 청사(國防部 廳舍)


#. 1 국방부에서 근무했던 분이 쓴 글

현 국방부는 옛 건물이라서 낡았지만 워낙 건물을 튼튼히 지어서 여전히 쓸만합니다.

입구는 A, B 현관으로 나누어졌고 계급에 따라 출입문이 다르며 헌병 근무자가 밖으로 나와 거수 경례 마중하는 시스템이고 청사내 전체가 보안구역이긴 하지만 사무공간이나 다름없습니다.
특별한 무슨 군사시스템이 갖추어진 것도 아닙니다.

전시에는 건물은 하나도 필요없으며 청사 바로 붙어서 ㅇㅇ 벙커가 전쟁지휘소 역할을 하며 옥상에는 대공발칸포가 있습니다.
또 국방부 옆 합참 건물은 원래 한미연합사가 들어가려고 신축한 것인데 평택으로 가는 바람에 합참이 입주하고 거의 절반은 공실입니다.
따라서 합참과 국방부가 한 건물에 입주해도 충분하며 남서쪽으로 옛 육본과 여군단본부로 광활하게 넓습니다.
여기에다 대통령관저를 신축하고 잠시만 한남동공관에서 출퇴근하면 됩니다.
영빈관도 있고 한번에 수백명 수용이 가능한 초대형 식당도 있으며 헬기장, 축구장 등 없는게 없습니다.
용산공원부지 절반되는 크기입니다.

국방부 내 근무 부대라고 해봐야 사이버작전사령부, 헌병경비중대, 수송대, 보안대, 조사대 정도이고 전투부대는 하나도 없습니다.
육본이 계룡대로 가고나서 가용 공간이 무궁무진하고 이태원쪽, 용산공원쪽, 서빙고동 남쪽은 전부 미군부대였거나 공원부지입니다.
또한 국방부 인근 삼각지 근처는 어차피 지금도 고도제한구역으로 고층건물 신축이 안 됩니다.
다만 삼각지 너머 남영동부터 용산역 거쳐 한강까지는 청와대 이전해도 고층건물이나 아파트 재건축하는데 아무 문제 없습니다.
합참건물과 국방부청사는 지하로 서로 연결되어 국군통수권자로서 유사시 즉각 대응이 가능하며 국가 위기관리센터에 버금가는 시스템이 지하벙커에 구축되어 있지요.

이전 비용 떠드는데 국방부는 바로 옆 건물 합참으로 가는데 무슨 엄청난 비용이 들 것처럼 민주당이 부풀리는데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국방부내 전투부대 한개도 없습니다.

국가안보를 위해서도 이보다 더 좋은 장소가 없습니다.
유사시 대통령이 국방장관, 합참이 한 자리에서 지휘 통솔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 아닌가 생각합니다.
아니면 합참사령부만 놔두고 실무부대는 최신 지휘센터가 있는 남태령쪽으로 가는게 국방에 훨씬 더 유리합니다.

민주당 말대로 청와대 경비여단과 북악산 페트리어트 미사일 전부 다 옛 육본 자리에 들어갈 수 있으며 장병들 숙소부터 모든 문제를 해결할 최적의 장소라고 판단합니다.

국방부와 합참 옥상에 대공무기 신형으로 교체 설치하고 광화문 근처 건물 옥상, 여의도 ㅇㅇ 빌딩 등 서울시내 어지간한 건물 옥상에는 지금도 대공포 즐비하게 다 설치되어 있습니다.

군사기밀도 아닌 비밀이지만, 이미 수도방위를 위해 수많은 대공무기들이 우리들 생활 주변에 거미줄처럼 배치되어 있습니다.
민주당은 쓸데없이 국민 불안감 조성하려고 하는게 아닌지 의심이 듭니다.

명색이 장군 출신이란 사람이 정파가 다르다고 해서 말도 안되는 억지가 너무 심하네요.

용산 주민들 걱정 마세요.
대통령실 그 쪽으로 가도 절대 재건축이나 고층건물 불가하지 않습니다.
용산과 이태원쪽 서빙고 그리고 청사 서남쪽은 어차피 전부 국유지이거나 미군부대가 있어서 일반 시민들의 재산권을 침해할 이유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말도 안되는 무슨 1조원 이야기는 너무 나간거 아닌가요?

감사합니다.

ps 국방부는 입구, 출구, 정문으로 나뉘고 옛 육본 자리는 따로 정문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