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락(駝酪)


타락(駝酪)
- 떨어질 타, 떨어질 락(낙)

1. 품행(品行)이 나빠서 못된 구렁에 빠짐.
2. 도심(道心)을 잃고 속심(俗心)으로 떨어짐.
3. 죄(罪)를 범(犯)하여 불신(不信)의 생활(生活)에 빠짐.


부패(腐敗)
- 썩을 부, 패할 패

1. 부패균(腐敗菌)에 의(依)해 단백질(蛋白質) 및 유기물(有機物)이 유독(有毒)한 물질(物質)과 악취(惡臭)를 발생(發生)하게 되는 변화(變化).
2. 법규(法規), 제도(制度) 등(等)이 문란(紊亂)해 바르지 못함.
3. 정신(精神)이 타락(墮落)함.

예레미야 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창세기 6:11-12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


변화(變化)
- 변할 변, 될 화

1. 모양(模樣)이나 성질(性質)이 바뀌어 달라짐.

누가복음 9:29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로마서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고린도전서 15:51-52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고린도후서 3: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변질(變質)
- 변할 변, 바탕 질

1. 질이 달라짐.

예레미야애가 4:1
슬프다 어찌 그리 금이 빛을 잃고 순금이 변질하였으며 성소의 돌들이 거리 어귀마다 쏟아졌는고.



결혼이 파경에 이를 때, 부부는 사랑하고, 약혼하고, 결혼하던 시절의 기억이 없습니다.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던 시절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립니다.
사랑은 식어버리고, 불륜을 저질러서 이혼에 이르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타락을 결혼에 비유하여 말씀하실 때가 잦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따랐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땅을 더럽히고, 기업을 가증하게 하였습니다.
생활의 편안함으로 인해 무료함을 느꼈으며, 무언가 재미있고 신나는 일을 찾았을지 모릅니다.
그들이 선택한 것은 우상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엄격하고, 쾌락을 쫓아다니는 것에 대하여 금지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이방 종교는 그들에게 새로운 모험이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런 행위는 불륜이며,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행동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멸망은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지 못하는 데 있었습니다.
사막과 구덩이 땅 건조하고 사망의 음침한 땅, 사람이 다니지 아니하고, 거주하지 아니하는 땅을 통과하게 하셨습니다.
죽음의 고비에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지켜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잊어버렸습니다.
당신이 구원을 받았을 때, 감격스럽고 기뻤던 기억을 떠올려보십시오.
지금 바로 그런 감격이 있습니까?
우리는 그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노라고 맹세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렇게 살고 있습니까?
다시 세상의 신을 따라 욕망을 따라 살고 있지 않습니까?
처음 사랑이 식고, 열정이 식을 때, 신앙은 타락합니다.

우리는 사랑이 한결같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한결같지 않은 것이 사랑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잘못을 보편적인 것으로 만들어 죄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처음 사랑할 때를 기억하고, 그때의 사랑, 열정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우상을 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습니다.
재물을 섬기는 사람은 올바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할 수 없습니다.
성공을 우상으로 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공을 위해서는 온갖 잔인한 수단도 다 동원합니다.
그렇게 남을 짓밟고 올라서는 것을 성공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성공 자체가 우상일 수 없지만, 온갖 음모와 거짓말을 해서라도 성공을 추구하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온갖 쾌락, 도박, 마약, 술, 이런 것들에 빠진 것도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들은 우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면서 이런 잘못된 우상에 빠져 있습니다.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고 행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죄가 만연하면 죄가 죄로 느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하는 것을 죄라고 한다면 율법처럼 복음이 우리를 옥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사실 우리를 정직하게 살펴본다면 우리에게 우상이 있음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너무 지나쳐서 취미생활을 우상이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이 음악을 좋아하거나 독서를 하거나 무엇을 수집하는 행위를 우상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런 것을 하나님은 금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물은 위로부터 아래로 흐릅니다.

종교의 타락도 위에서부터 타락하여 백성까지 타락하게 합니다.
제사장은 여호와가 어디 계신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존재마저 의심하는 상황을 말합니다.
율법을 가르친 자는 하나님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가르치는 서구신학이 있습니다.
부활도 천국도 믿지 않습니다.
결국, 유럽은 이런 잘못된 신학 때문에 교회가 텅 비게 되었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것은 예수 믿어 부자 되고, 성공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없는 말씀을 가르칩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을 안다고 한다면 커다란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선지자들은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였습니다.
요즘은 과거처럼 예언한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과거에 예언한다고 하면서 잘못된 길로 인도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결국은 자신이 재림 예수라고 하고,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하는 웃지 못할 일들이 있었습니다.
예언은 교회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교인을 미혹하고, 선동하여 자신의 추종자로 만들려고 주신 은사가 아닙니다.

나는 첫 사랑을 회복하자는 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너무 뻔한 구호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나는 신앙이 나태하고 게으른 사람에게 이런 구호가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
왜냐하면, 알면서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종교의 타락은 처음 사랑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에 있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것에 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의 타락에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 중심, 예수 중심, 성령 중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있어야 할 자리에 버젓이 우상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에 인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자리에 심령술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의 신앙은 타락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대신에 다른 것을 섬길 때 교회는 타락합니다.
예수 중심일 때 결코 타락하는 일이 없습니다.
성령 중심일 때 교회의 부흥이 멈추지 않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삼위일체 하나님 중심의 신앙이어야 합니다.

타락의 결과


타락의 결과는 한 마디로 죽음이다.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사람이 스스로 자기를 구원할 수 없는 비참한 상태에 떨어진 것이다.
이 죽음이라고 하는 말은 네 가지 영역에서의 분리, 부조화 및 불일치를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첫째,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

“영적인 죽음”이라는 말로 설명되는 영적 상태로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것을 말한다.
타락 전에는 아담과 이브가 에덴 동산을 거니시는 하나님을 두려워 하거나 피하거나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께서 동산에 나타나시면 자연스럽게 그 하나님의 임재를 즐거워하며 함께 동산 안을 거닐었을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아름답고 평화롭고 행복한 그림을 연상할 수 있다.

아담의 범죄는 그런 아름다운 하나님과의 교제를 더 이상 상상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에덴 추방 이후, 그들에게 비록 “제사”라고 하는 방편을 통하여 하나님의 얼굴을 구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두셨지만,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통하여 볼 수 있는 것처럼 그것은 제물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고, 인간 쪽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구해야 하는 모습이다.
그나마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으시면 가인의 경우와 같이 그 제사는 열납되지 않았다.

타락 이후,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가 파기됨으로 사람이 영적 죽음의 상태,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가 단절된 상태에 들어 가게 되었다는 것을 바르게 이해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왜 거듭남을 이야기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화목을 이야기 하는지를 쉽게 이해 할 수 있다.

영적 죽음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것을 뜻한다면, 중생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것을 뜻한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대적하는 상태에 있던 사람의 의식 속에 하나님과 화목하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즐거워 하는 심령의 변화가 일어난 것을 뜻한다. 살아 있는 영성이란 이런 속사람의 변화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롭고 거룩한 성품이 언행 속에 반영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다른 사람들로부터의 분리

아담과 이브의 온전해 보였던 인간 관계는 선악과를 먹은 사건을 중심으로 결렬되었다.
이런 사실은 쉽게 창세기 앞 부분에 나타나는 아담과 이브,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통하여 살펴 볼 수 있다.
하나님의 계명을 범한 죄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는 하나님의 질문들에 대한 아담의 대답은, 아담이 어떻게 자신의 죄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과 이브에게 떠 넘기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남자와 여자 사이의 조화는 비참하고도 잔인하게 깨어졌다.
아벨을 돌로 쳐 죽인 가인의 이야기는 한 인간으로서 다른 사람을 대하는 관계의 균형이 얼마나 무참하게 무너져 내렸나 하는 것을 그림처럼 보여준다.

성경은 타락 이후 인간의 역사가 그렇게 시작하여 어떻게 세계 역사를 미움과 증오, 살인과 전쟁, 변명과 모함, 불신과 불화로 채색해 왔는지에 대하여 증언한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평화를 원하지만, 평화를 외치는 그 사람들 속에 진정한 평화는 없다. 오히려 평화를 갈구한다고 하는 것은 사람들이 얼마나 불화하며 살고 있는지를 역설적으로 반증 할 뿐이다.

이것은 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하나님과의 화목을 선포할 뿐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화목을 요구하는 지 쉽게 이해 할 수 있도록 해준다.

셋째, 만물로부터의 분리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저주는 인간 세계와 다른 피조물들의 세계에도 치명적인 변화를 가져 왔다.
사람을 위하여 지음을 받은 피조 세계는 하나님의 저주로 말미암아 그들의 본성과 일치하지 않는 부자유함 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도 탄식하며 고통한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라고 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몸의 구속함을 받는 날 그들도 죽고 썩는 것으로 부터 놓임을 받아 자유하게 될 것을 소망하고 있다(로마서 8:20-22).

사람의 행복과 안녕을 위하여 지음을 받는 피조 세계가 더 이상은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 시켜 주지 않는다.
언제 어디서 지진이나 해일, 가믐이나 홍수 같은 소위 자연 재해들이 일어 날지 모른다.
사람이 환경을 가꾸려고 노력하면 하는 것 만큼 환경은 상대적으로 열악해 지고 있다.
사람의 손길이 미치는 곳에 일시적으로 인공적인 아름다움이 만들어지는 것 같지만, 그 이면에는 쓰레기가 쌓이고 시간이 지나면 썩고 악취가 난다. 환경 보호를 외치는 인간의 노력에 반하여, 역설적으로 환경 파괴 현상이 뒤따른다.
그리스도의 구원 계획 속에 만물의 구속을 포함시키고 있는 것이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저주 아래 신음하는 만물을 제자리로 돌려 놓을 수 있는 능력이 없다.

넷째, 자신으로부터의 분리

속사람과 겉사람이 분리되는 소위 육체의 죽음을 통과하게 되기 전에도 사람은 내면적인 갈등 속에서 분리 현상을 경험하며 산다.
속사람과 겉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본성적 욕구의 불일치가 심령의 평안을 무너뜨리고 육체의 건강을 상하게 한다.

마음으로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원하지도 바라지도 않는 악은 행하며 산다.
육체의 욕구가 마음을 지배하여 하나님의 법을 불순종하게 만든다.
양심의 소리가 마음의 평안을 흔들어 놓지만 자포자기 하는 심정으로 양심의 소리에 귀를 막고, 논리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는 비이성적인 선택을 한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나”라고 하는 한 사람 속에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마음의 법과 몸의 지체 속에 있는 또 하나의 법이 충돌하여 사람으로하여금 죄의 법 아래 무릅을 끓게 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로마서 7:18-23).

“내 마음 나도 몰라”가 탄식처럼 입술을 비집고 흘러 나온다.

사람이 구원자를 필요로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타락의 결과 사람이 영적으로 죽었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간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도, 사람과 만물과의 관계도, 심지어는 한 사람을 이루고 있는 속사람과 겉사람의 관계도 다 무너져 내린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말미암아 한 사람이 거듭나면, 인간 세계 뿐만 아니라 자연 세계에도 희망이 생긴다.
사람마다 심령의 참된 평안을 회복하여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진정한 평화가 깃든다면, 사람들은 불완전한 그대로 최선을 다하여 삶의 환경으로 주어진 자연을 가꾸며, 자연과 더불어 몸의 구속을 바라보는 그 날을 고대하면서 살게 될 것이다.

사람의 타락


창세기 3장에서 11장까지의 기록에 따르면 인류는 네 단계로 타락했다.

Ⅰ. 타락의 첫 번째 단계

A.원인

1. 뱀의 유혹

만일 뱀이 와서 사람을 속이거나 유혹하지 않았더라면 사람은 타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유혹하는 뱀은 사탄의 화신(化身)이다. 사탄이 유혹하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게 하는 의문을 사람에게 던지는 것이다.(창3:1,4) 사탄은 여자에게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 하시더냐?”고 말했으며, 계속해서 그는 “너희가 죽지 아니하리라”고 거짓말 시켰다. 사탄의 제의를 받아들이고 나자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그녀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 먹었다. 오늘날도 사탄을 똑같은 방법으로 사람을 유혹한다.

2. 여자가 머리의 지위를 취함

사람이 타락한 또 하나의 원인은 여자가 머리의 지위를 취한 것이다.(창3:2-3,6) 원래 하나님은 아담을 머리고 창조하셨고 하와는 아니었다. 하와의 머리는 아담이었다. 하와가 뱀에게 미혹당한 이유는 그녀가 머리의 지위를 취하여 그녀 스스로 결정함으로 사탄의 함정에 빠진 것이다. 우주가운데 유일한 머리는 그리스도 자신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을 거절하고 머리의 지위를 취할 때 사탄에게 속임을 당할 것이다.

B. 과정

타락의 과정에 있어서 첫 번째 단계는 사람이 그의 영을 사용하지 않은 것이다. 영을 따라 살 때 사람은 하나님의 보호를 받게 된다. 두 번째 단계는 혼을 사용하는 것이다. 세 번째 단계는 몸의 행동이었다. 혼을 사용할 때 몸은 자연히 따라 오게 된다. 그녀가 실과를 따 먹은 것은 몸의 행도이다. 매일의 생활에서 우리는 영을 사용해야 한다. 다음에 혼을 지배하도록 해야 한다. 우리가 혼만 사용한다면 머리의 지위를 취하게 되고 우리의 혼이 주도권을 잡게 된다.

C. 결과

타락의 첫 번째 결과는 혼이 오염되고 부패하여 점령당하게 되는 것이다.
하와는 지식나무를 먹기 전에 이미 그녀의 생각은 오염되어 있었다. 그녀가 뱀과 얘기했을 때 뱀의 관념이 그녀의 생각에 스며들어 그녀의 생각을 더렵혔다.

두 번째 결과는 몸에 사탄이 성분이 더해짐으로 그 본질이 변하여 육체가 된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원래 사람이 몸은 순수했다. 그러나 타락한 후에 육체가 된 것이다.

세 번째 결과는 사람이 영이 죽어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하나님을 향해 그 기능을 상실한 것이다.
사람의 영이 죽었을 때 사람에게는 더 이상 하나님을 접촉하거나 교통할 능력이 없었다.

네 번째 결과는 타락한 사람이 죄인으로 짜여진 것이다(롬 5:19)
사람의 타락으로 인해 죄라고 부르는 요소가 사람 안에 주입되었다(롬 5:12)
우리는 죄인으로 짜여져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죄를 짓는 것이다.

다섯 번째 결과는 타락한 사람이 정죄받은 것이다(롬 5:18)
정죄는 아담뿐 아니라 온 인류를 포함한다.

여섯 번째 결과는 저주가 들어온 것이다(창 3:17-19)
죄진 것은 사람인데 모든 피조물들이 탄식하면 진통하고 있다.
이런 것들이 다 사람의 타락으로 들어온 저주의 항목들이다.

일곱 번째 항목은 사람이 낙원에서 쫓겨난 것이다(창 3:23-24)

여덟 번째 결과는 죽음이다(창 3:19, 롬 5:1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전 15:22)

Ⅱ. 타락의 두 번째 단계

A.배경

범죄한 후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자신들을 감추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찾아오사 여자의 씨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리라고 약속하셨다.(창3:15) 아담이 이 말을 들었을 때 그는 즉시 그이 아내를 하와라 불렀다.(창3:20) 하와는 ‘산자’를 의미한다. 그 후에 창세기 4장 1절은 하와가 가인을 낳았다. 가인은 ‘얻은 자’를 의미한다. 하와의 관념에 따르면 가인은 창세기 3장 15절에서 약속된 여자의 씨였다. 이러한 배경가운데서 사람은 하나님의 긍휼로 그분의 구원을 얻었어야 했다. 그러나 사람은 다시 타락했다.

B. 원인

가인은 하나님의 구원의 길로부터 돌아서버린 후 타락의 두 번째 단계를 초래했다.

1. 마귀의 획득
가인이 계속 타락하게 된 한 가지 이유는 마귀가 그를 안에서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창세기 4장의 시점에서 가인을 더욱 더 타락하게 한 자는 사탄이었다. 가인의 타락은 교활한 자에 의해 사주된 것이다.

2. 사람이 주제넘게 하나님의 구원의 길을 스스로 버림
하나님은 사람에게 희생 양의 가죽을 입혀 주심으로써 구원의 길을 보여 주셨다.(창3:21) 그러나 가인은 주제넘게도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을 받지 않았다. 그는 사탄을 따랐다. 이것이 사람이 더욱 타락하게 된 이유였다.

C. 과정

1. 자신의 방법대로 하나님을 섬김-사람의 관념에 따른 종교를 발명함
가인은 자신의 의견에 따라 제물을 드렸고, 아벨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제물을 드렸다. 아벨은 그의 대속물인 희생의 피를 흘려 드림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을 따랐다. 그러나 가인은 자신의 봉사와 제물을 드림으로 하나님의 방법을 거절하고 자신의 생각대로 제물을 드렸다.(창4:3-5) 가인은 종교를 발명해 낸 것이다.

2. 사람의 분냄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을 쳐다보지도 않았다는 것을 알고 가인은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했다.(창4:5) 이것은 그의 관념에 따라 하나님을 섬긴 결과이다.

3. 사람이 그의 형제를 죽임
창세기 4장 8절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 여기서 볼 때 가인은 처음에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시작했다가 결국 살인하는 것으로 끝맺었다. 요한복음 16장 2절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이상한 것이 아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방법에 따라 행하느냐 자신의 의견에 따라 행하느냐이다. 우리의 관념에 따라 행한다면 결국 살인에 이를 것이다.

4. 사람의 하나님께 대한 거짓말과 오만함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창4:9) 하나님께 대한 가인의 대답은 거짓말이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오만한 자임을 보여 준다. 가인은 감히 하나님을 향하여 그이 오만함을 드러냈다.

D. 결과
두 번째 단계의 타락의 결과로서 하나님은 더 큰 저주를 선포하셨다. 즉 사람은 땅을 경작하지만 땅이 그에게 효력을 주지 아니하리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가인은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쫓겨나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게 되었다.(4:11하,12,14) 결국 가인과 그 후예들은 하나님 없는 문화를 발명했다. 이 문화는 자존을 위한 성을 쌓는 것과 생계를 위해 육축 치는 것과 오락을 위해 음악을 발명한 것과 방어를 위해 무기를 발명한 것 등을 포함한다.(창4:17, 20-22) 하나님을 잃어버렸으므로 사람은 하나님 없는 문화를 발명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사람의 타락의 결과이다.

Ⅲ. 타락의 세 번째 단계

A. 원인
첫 번째 타락에서는 하나님의 적이 사람의 밖에 있었고, 두 번 째 타락에서는 이 적이 사람 안에 있었다. 이제 적은 또 다른 단계를 취하여 사람을 더욱 더 타락하게 했다.

1. 악한 영들이 사람과 혼합함-타락한 천사들이 불법적인 결혼을 통해 사람가 결합함
창세기 6장은 하나님이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결혼했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은 천사들이다. 욥기 1장 6절과 2장 1절은 천사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불리웠음을 말해준다. 사람의 딸들과 결혼한 천사들은 유다서 6절 7절에 기록된대로 자기의 지위를 지키지 않은 자들이었다. 타락한 몇몇 천사들이 땅에 내려와서 사람의 몸을 취했다. 그들은 사람의 딸들과 불법적인 결혼을 이루었다. 인간의 본성과 악한 영들의 혼합체가 되어 버렸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홍수로 인류를 심판하기로 작정하셨다.

2. 사람이 육체가 됨
창세기 6장 3절은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다투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타락이 첫 번째 단계에서 사람은 그의 영을 사용하지 않았고, 타락의 두 번째 단계에서 사람은 자신의 뜻을 따랐으며, 그의 혼으로 살았다. 타락의 세 번째 단계에서 사람은 타락한 몸을 오용하여 육체가 되었다. 온 인류가 육체가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분의 종 노아에게 나타나시어 그분이 모든 세대를 땅과 함께 멸하시리라고 말씀하셨다(창6:11-13)

B. 과정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정욕 가운데 빠져 살았으며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했다.(창6:5) 하나님조차도 더 이상 참으실 수 없을 정도로 타락한 것이었다.(창6:11-13)

C. 결과
먼저는 하나님의 영이 그들에게서 떠나셨다. 주님은 “내 영이 영원히 사람과 다투지 아니하리라”(창6:3)고 말씀하셨다. 사람이 육체가 되었을 때 하나님의 영은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은 완전히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었으며, 하나님께 버림받았다. 그 다음으로 홍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하였다. 노아의 가족 외에는 모두 홍수에 몰살되었다.(창7;19-23)

Ⅳ. 타락의 네 번째 단계

A. 원인
타락의 각 단계에는 두 가지 요인들이 있다. 첫째 요인은 사탄이고, 둘째 요인은 사람이다.

1. 사탄의 선동
타락의 네 번째 단계에서 사탄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권위를 열국을 만드는 데에 그리고 열국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대적하여 반역하도록 선동하는 데에 이용했다. 그러므로 사람은 집단적으로 하나님께 대해 공공연하게 반역하는 상태에 떨어졌다.

2. 인류의 반역
당초 사탄의 타락에 있어서 그의 의도는 하나님의 권위를 뒤엎는 것이었지만, 그것은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자 그는 다시 타락한 인류 가운데 와서 사람 안에 똑 같은 생각을 주입시킴으로써 사람으로 하여금 집단적으로 하나님의 권위에 대항하여 일어나도록 선동했다,

B. 과정
첫 번째 단계 하나님에 대해 반역하려는 음모였다,(창11:3-4)
두 번째 단계 사람의 수고로 흙으로 벽돌을 만드는 것이었다.
세 번째 성을 건축하는 것이었다. 네 번째 단계 하나님을 거절한다는 것을 선포하기 위해 탑을 세운 것이었다. 마지막 단계는 그들이 하나님 자신을 부인하기 위해 그들의 이름을 낸 것이다.

C. 결과
먼저는 하나님이 그들을 흩으시기 위해 오셨다.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더 이상 같은 언어를 갖지 못하도록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다. 세 번째로 혼란이 들어온 것이었다. 바벨은 혼란을 의미한다. 이것은 저주와 심판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침내 하나님은 아담의 족속들을 포기하실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사람은 매우 선하고 죄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대적인 마귀에 의해 선악을 아는 지식의 나무의 실과를 따 먹도록 속임을 당했다.
따라서 그는 타락했고 죄인이 되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으며 또 한 면으로 그는 사탄의 악한 본성을 그 안에 갖게 되었다.
사람이 타락한 본성은 그이 후손들로 하여금 또 다시 계속 타락하여 마침내 하나님을 대적하여 반역하고 일어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했다.
이 단계에서 사람은 극도로 타락했으며, 하나님께 버림당했다.


부패하고 타락하는 이유

1. 부패와 타락의 한자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부패(腐敗) - 부패균에 의해 단백질 및 유기물이 유독한 물질과 악취를 발생하게 되는 변화, 법규, 제도 등이 문란해 바르지 못함, 정신이 타락함. △타락(墮落) - 품행이 나빠서 못된 구렁에 빠짐, 도심을 잃고 속심으로 떨어짐, 죄를 범하여 불신의 생활에 빠짐. 사전적 의미에서 부패와 타락은 서로 수식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보인다. 그러나 한자의 의미를 살펴보면 부패는 물질이나 제도 또는 정신의 부정적 변화의 과정을 의미하고 타락은 이같은 부정적 변화의 완료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2. 부패에 대한 성경적 의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부패는 신앙과 욕심 사이에서 갈등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러한 부패는 회개를 통해 구원으로 회복이 가능하다(신 9:12, 신31:29, 겔 23:11, 고후 11:3, 딤전 6:5). 부패가 부패균과의 결합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면 종교적인 부패는 돈과 명예와 권력에 대한 욕심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부패균을 차단하여 부패를 막는 것처럼 돈과 명예와 권력을 차단하여 종교적인 부패를 방지할 수 있다. 이른바 당회장, 노회장, 총회장 그리고 더 나아가 연합 단체의 회장 등 각종 명예직과 권력직이 난무하는 풍토는 종교적인 부패를 일으키는 온상이 되고 있다.

즉 오늘날 한국 개신교 교회의 관료적 권력 구조가 부패의 원인이 된 것이다. 이른바 부패가 신앙 양심과 욕심 사이에서 방황하는 과정이라고 한다면 깊은 회개와 반성을 통해 회복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하나님의 존재를 의식하면서도 인간의 약함으로 인해 욕심에 기울었던 것은 다분히 감정적이고 단기적이며 수동적인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한국 개신교 교회는 모든 명예와 권력 구조를 벗어 버리고 오로지 봉사하고 섬기는 본연의 모습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3. 타락에 대한 성경적 의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타락은 욕심을 위하여 신앙과 양심을 버린 것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무시하고 오히려 도전하는 태도를 보인다는 것이다. 이른바 타락한 자들에게서 공통으로 보이는 뻔뻔스러운 태도는 "천벌을 받아도 좋으니…"라고 하는 것이다 (삿 2:19, 단 11:32, 딤전 4:2). 그러면 이러한 타락한 자들에게도 갱생의 길은 있는 것인가. 성경은 타락한 자들에게는 갱생의 길이 없다고 단언하고 있다(히 6:6). 타락은 이른바 양심에 화인 맞은 것으로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완전한 부패를 의미한다. 이러한 타락은 부패의 최후의 단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오직 심판과 멸망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타락한 자들에 대한 교회의 태도는 이들을 분리하고 격리하는 것이다.

4. 부패와 타락에 대한 신학적 의미

신학적 의미에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인식, 즉 신앙의 유무에 따라 부패와 타락이 구별된다고 하겠다.
즉 신앙이 있으면서 죄를 범하는 것을 부패라 하고 신앙을 잃거나 아예 신앙이 있지 않은 상태를 타락이라 하는 것이다.
즉 신학적 의미에서의 부패는 세속화(돈과 명예와 권력을 추구하는 것)를 의미하며 점차 인간의 양심과 진리의 빛을 잃어 가는 부정적 변화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부패는 인간 실존의 변화를 의미하며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 욕심을 추구하는 과정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즉 욕심이 신앙 양심을 지배하지만 어디까지나 양심의 가책은 아직 살아 있는 것이다.
타락은 이러한 부패의 끝을 의미하며 세속주의 그 자체를 신념으로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인간 양심의 말살 내지는 정의감의 상실 또는 완전한 불신이나 무신론적 태도 등 완전한 정신적 어둠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타락은 인간 실존의 변화 과정을 넘어 신념의 변화에까지 이른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잘못된 신념을 지니고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자신이 추구하는 악행에 대해 확신을 하고 전념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이른바 신념의 타락이며 또한 타락한 신념에 충실한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공산주의나 파시즘, 또는 독선적인 자국 제일주의나 민족지상주의가 여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른바 천민자본주의 내지는 환차익을 노려 국가 간의 경제적 기반을 무너뜨리는 악질적 투기 자본들의 금융 자유주의 내지는 신자본주의 등이 이에 속할 것이다.
부패한 관료는 직분과 직권을 이용하여 자신의 사리사욕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타락한 관료는 파벌과 당파의 이익이 주된 신념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이는 신념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개인적 양심의 자각이나 가책이 없이 집단의 이익을 위해 무슨 짓이든 정당화하는 것이다.
조선 시대 양반층의 집단 이기주의는 백성의 수탈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일제강점기의 학정은 조선으로부터의 수탈을 배경으로 하는 것과 같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 교회의 최대 병폐로 지목되는 개 교회 주의와 목사들의 세속적 욕심은 이제 서서히 부패의 단계를 벗어나 오히려 신념의 단계로 접어드는 것 같다.

이른바 성직의 타락이라고 할 수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부패한 관료와 타락한 관료는 그 신념에 서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
부패한 관료는 죄의식 속에서 자신의 사리사욕을 추구하지만, 타락한 관료는 국가와 사회에 공헌한다는 신념을 지니고 악행을 추구하는 것이다.

부패한 성직자와 타락한 성직자 사이에도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
부패한 성직자는 사리사욕을 추구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껴 공공연하게 자행하지 못하지만, 타락한 성직자는 그 모든 악행의 근거가 자신의 종교적 신념에서 나온 것으로 주장하여 공공연하게 악행을 자행하는 것이다.
종교개혁 당시 면죄부를 팔았던 로마가톨릭의 고위 성직자들은 이것을 비밀스럽게 그리고 은밀하게 한 것이 아니라 공공연하게 신념을 지니고 시행하였으며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지도적 위치에 있는 분들의 행태 또한 은밀하게가 아닌 오히려 신념을 지니고 사리사욕을 향해 돌진하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부패한 젊은이와 타락한 젊은이 역시 그 근본적 실상이 전혀 다르다고 할 것이다.
부패한 젊은이는 일시적인 충동과 감정에 휩쓸려 실수하게 되지만, 타락한 젊은이는 오히려 당당한 신념을 지니고 서슴없이 악행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이른바 부패한 경찰은 있어도 부패한 깡패는 없다.
경찰은 주어진 사명감과 정의감에서 출발하는 반면 깡패는 이미 사악한 신념으로부터 출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간혹 깡패였다가 회개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분들은 아직 양심이 남아 있어서 온전한 깡패로 타락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는데 이러한 분들이 회개할 은혜를 받은 경우일 것이다.

만일 경찰이 타락한다면 그것은 국민에게 절망적인 위해를 끼치게 될 것이다.
부패한 목사는 있어도 부패한 창녀는 없다.
목사란 주어진 소명에 대한 헌신에서 출발하지만, 창녀에게는 이미 그러한 소명적 희생심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간혹 창녀였다가 회개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분들은 아직 양심이 남아 있어서 온전히 창녀로 타락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는데 이러한 분들이 회개할 은혜를 받은 경우일 것이다.
그러나 만약 목사가 타락한다면 이것은 정말 회복할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이 타락한 천사로 말미암아 비롯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목사의 타락이란 이 세상에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악행이 될 것이다.
부패에서 벗어나는 길은 회개에 있으나 타락에 대해서는 심판과 저주와 영벌이 있을 뿐이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사건은 제자의 부패라고 할 수 있다.
베드로는 엉겁결에 주님을 부인했지만,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깊이 회개하였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 양 떼를 목양하는 사도로 회복될 수 있었다.

그의 이러한 경험은 훗날 초대교회를 위해 사역할 때에 커다란 교훈이 되었으며 그가 순교할 수 있는 거룩한 동력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반면 가롯 유다의 배반은 계획적이며 능동적이었으며 예수님을 배반하는 것에 대해 신념을 지니고 행동하였다.
그는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고 자살하는 것으로 생을 마쳤지만 그의 배반은 이른바 타락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결코 회개를 통해 회복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인간 타락의 원인과 결과

    
1. 서론
    
인간의 타락과 구원의 계획이 나오는 곳은 창세기 3장이다
    
가. 인간 타락의 원인 : 1~6절
나. 인간 타락의 결과 : 7~24절
다. 인간 구원의 계획 : 15절, 20절, 21절
    
2. 하나님 나라의 기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창 2:16~17)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선한 통치가 이루어지는 최종의 기준이다.
하나님은 이 명령에 대한 아담의 순종을 요구하였다.
    
3. 인간 타락의 원인(1~6절)
    
가. 뱀(사탄)의 유혹(1,4,5절)
나.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불평과 불만(2절~3절)
다.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는 인간의 교만함과 불순종(6절)
    
사탄과 하와의 대화 문제점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왜곡에 있다.
선악과 이야기는 하와를 만드시기 전에 아담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와는 아담으로부터 이 명령의 말씀을 들었을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이렇게 받아 드리는 경우가 많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편한 방식으로 받아드린다.
    
4. 사탄 : 뱀, 용, 마귀, 귀신
    
사탄의 시작은 알 수 없지만 악한 영의 존재가 있음을 알게 한다. (요8:44)
인간은 사는 동안 그와 대적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러나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뱀의 말을 더 믿었다.
결국 아담의 불순종이 인간의 타락을 불러 왔다. (창3:1~5)
    
사탄은 영원히 구원함을 받을 수가 없는 존재이다.
    
5. 죄를 지은 인간의 모습 (7~13절)
    
가. 수치심을 느낀다. (7절)
나. 두려움을 느낀다. (8~11절)
다. 들키면 핑계를 댄다. (12~13절)
    
6. 하나님의 저주 내용(14절~24절)
    
가. 뱀에 대한 저주 (14~15절)
    
(1) 배로 다니고 흙을 먹을 것이다 (14절) 이는 굴욕과 수치의 표현이다.
(2)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한다.(15절)
    
[창]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하나님이 하와를 하나님 편으로 만들겠다는 뜻이다.
이 말씀은 타락한 인간의 구원에 관한 첫 번째 말씀으로 원시복음이라고 불리우고 있다.
    
나. 여자에 대한 저주 (16절)
    
(1) 해산의 고통
(2)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다.
    
* (공동번역) 남편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싶겠지만, 도리어 남편의 손아귀에 들리라."       
* (표준새번역) 네가 남편을 지배하려고 해도, 남편이 너를 다스릴 것이다.
    
* 그래서 부부는 한 평생 갈등을 일으키며 사는 것일까?
    
다. 남자에 대한 저주 (17~19절)
    
(1) 땅이 저주를 받고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낸다.
(2)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을 수 있다.
(3)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 갈 것이다. (육체적 죽음)
(4) 에덴동산에서 쫓겨난다.
    
7. 인간 타락(원죄)의 결과
    
가. 하나님과의 관계
    
하나님에 대한 공포가 생기며, 하나님에 대한 감사가 없다.
이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으로 발전한다.
  
나. 이웃과의 관계
    
서로 적대시하며 믿지를 못한다.
서로 이기심을 갖고 이웃을 “이용해 먹으려 한다”.
인간은 습관적으로 서로를 오해하게 된다.
    
다. 남녀간의 관계
    
서로에게 수치심을 갖는다. 
벌거벗은 것을 부끄러워한다. (거리감)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긴다. 
돕는 배필에서 서로 지배하려는 관계로 변했다.
    
라. 자신과의 관계
    
인간은 항상 내적 갈등과 분열, 불안을 겪는다.
    
마. 자연피조물과의 관계
    
땅이 저주를 받아 엉겅퀴와 가시덤불을 내며 인간에게 지나친 노동이 들어온다.
인간은 자연을 파괴하고 환경을 오염시키며 청지기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한다.
    
바. 시간과의 관계
    
죄로 인해 우리는 영원을 상실하였다.
시간의 한계는 인간에게 불안을 가져온다.
죽음은 인간의 무가치와 무능을 선언한다.
    
8. 하나님은 아담이 타락할 것을 알고 있었을까?
    
아담과 하와는 순전한 상태이나 불변한 상태는 아니었다.
이 변화성은 피조물의 한계이다.
    
9. 결론
    
하나님은 죄 가운에 있는 인간을 긍휼과 용서와 은혜로 구원하시며 그 분의 영광을 드러내신다.
악인들에게는 공의의 심판으로 그 분의 영광을 드러내신다.
























이다니엘을 위한 기도문 성구(03-14-2022 / 월 -


03-14-2022(월)

마가복음 16:17-18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아멘

03-15-2022(화)

사도행전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아멘

다니엘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아
머리가 맑아질 것이며
간이 정상화 될 것이며
모든 것이 정상으로 자리를 잡을 것이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
믿으면 아멘하고
기도하자.

03-16-2022(수)

시편 39:13
주는 나를 용서하사
내가 떠나 없어지기 전에
나의 건강을 회복시키소서.

주여
보혈의 능력으로
저희들을 덮어주시고
치유하는 손길로
우리 몸의 약한 지체를
새롭고 강하게 하사
청춘의 몸으로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03-17-2022(목)

다니엘 9:23b
너는 크게 은총을 입은 자라 그런즉 너는 이 일을 생각하고 그 이상을 깨달을지니라.

전능하신 하나님!
그 옛날 다니엘 선지자와 함께 하셨던 그 은혜로
오늘의 시대를 살아야 할 다니엘에게 내려주셔서 선지자 다니엘처럼 믿음의 사람으로 당당하게 세워주시옵소서.

03-18-2022(금)

욥기 23:10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아멘

전능하신 하나님
다니엘의 약한 것이 무엇인지
의사들보다 더 정확하게
알고 계시지요
약한 것을 새롭게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의사들이 치료하지 못하는 약함을
온전하게 하심으로
모두가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머리 숙여 섬김의 길을 함께 가도록
인도하여주시옵소서. 아멘


03-19-2022(토)

전도서 3:3
죽일 때가 있고 치료 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사랑의 하나님
모든 것이 때가 있다고 하셨지요?
지금은 치료할 때 입니다.
속히 다니엘의 약한 것을 치료하여 주세요!
치료의 은혜를 힘입어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예수 믿는 기쁨을
예수 믿는 은혜를
예수 믿는 마음을 자랑하게 해주세요.
아멘

이사무엘 기도문

02-27-2022
이사무엘 대표기도

오늘도 변함없이 하나님께 간구할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회개보다 부탁할 간구가 많고, 감사보다 부탁드릴
간구가 많은 우리들의 쳇바퀴같은 신앙생활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변함없이, 오늘도 한결같이, 들어주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먼저 감사를 드립니다. 성령님의 임재하심에 우리 모든 삶의 인도하심이 있음을 믿으며,
과거나 미래를 떠나 예배의 자리에 함께 할 수 있는 지금 현재만으로도 먼저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큰 혼선없이 많은 분들이 예배의 장소로 잘 찾아오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기도가운데 성령님이
함께하시면 길바닥에서 드리는 예배라도 은혜가 가득할 것을 믿습니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도와주는 수많은
성도들이 이 자리에 함께하고 있습니다.
가까이 눈을 돌려 우리 나라인 한국과 미국 그리고 우리의 형제자매인 북한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복음의 말씀이
북한 곳곳에 스며들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대선이 다가오는 한국에서 누가 당선이 되든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로서 축복할 수 있길 바랍니다.
조금 더 멀리 내다보면 이 세상 모든 구석구석에도 하나님 복음의 말씀이 전파되길 바라며, 전쟁의 소용돌이에
있는 우크라이나에 하나님 나라의 평화가 임하게 해주세요. 온 열방이 하나님 아래에 있는데 우리민족만을
생각하지 않고, 더더욱 기도로 어려움에 처한 하나님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는 저희가 되길 간구합니다. 수많은
기적들을 경험하고도 은혜를 잊었던 옛 이스라엘 백성들과 달리, 우리는 전쟁때문에 나라가 찢겨지고 이후
회복해왔던 순간들을 잊지 않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어떤 무기보다 강력한 기도의 힘을 믿습니다.
세계에 평화가 돌아오길 기도함과 동시에,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뉴욕과 맨하탄에 복음이 구석구석 전파되게
해주세요. 각자의 가정과 직장, 학교, 그리고 텐트메이커에서 모두 복음이 번져나가게끔 해주시고 그를 이루기
위한 열정이 우리가운데 일어나게 해주세요.
순장사관학교에 참가중인 모든 성도들에게 또한 큰 은혜를 베풀어 주세요. 순장님들을 통해 우리 교회 공동체
사역의 뼈대가 이뤄집니다. 그들에게 부담의 짐을 덜어주시고 기쁨의 힘을 불어넣어주시길 간구합니다.
순모임을 위해서도 기도합니다. 순모임은 예배의 연장선으로서 여러가지 사역을 맡은 자들이 항상 순모임에
먼저 집중 할 수 있게 해주세요.
작고 사소한 일부터, 크게는 가까이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은 분까지 어려움 가운데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
어디서보다 순모임에서 가장 먼저, 가장 많이 안아 줄 수 있길 기도합니다. 순모임의 시간과 장소에 제약받지
않고 언제든지 서로의 고통을 나눌 수 있는 순모임이 되게 해주세요.
대학청년부 수련회를 통해 많은 성도들이 성령의 큰 은혜를 입게 해주세요. 코로나 위기때문에 오랜만에 다같이
모이는 수련회가 다시 돌아오게 됐습니다. 다같이 직접 모여 불같이 기도하는 가운데 그 어느때보다 뜨거운
성령님의 임재하심이 있을 줄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말씀 인도를 해주실 김성근 목사님을 위해 기도드립니다. 대륙 반대편에서 온 가족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뉴욕으로 와서 이제 적응가운데 있습니다. 목사님과 가정이 바쁜 가운데서도 하나님 말씀을
전하시느라 몸과 마음이 피로할텐데, 하나님께서 성령님의 인도 가운데 그분들에게 끊어지지 않을 기력을
주시길 간구합니다.
그리고 오늘 듣게 될 말씀을 흘려버리지 않고 우리의 삶으로 녹여낼 수 있게, 변화할 수 있게, 저희들의 완악한
마음을 누그러뜨려주실 성령님의 임재가 우리모두에게 임하길 바라며, 이 모든 말씀을 살아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榮光)을 위하여


영광(榮光) : 영화 영(榮), 빛 광(光)
- 경쟁(競爭)에서 이기거나 남이 하지 못한 어려운 일을 해냈을 때의 빛나는 영예(榮譽)

덮을 멱(冖) / 덮다
불 화(火) / 불, 열과 빛
사람 인(人) / 사람, 인간, 다른 사람, 타인
열 십(十) / 열, 열번
빛 광(光) / 빛, 어둠을 물리치는 빛


גֵּאוּת 1348 [gêʼûwth]
  • 1. 명사 영광, 광채, 사 28:1,3.
  • 2. 명사 들어올림, 올려진 것, 사 9:17(18)
  • 3. 명사 위엄[하나님의], 시 93:1.

כָּבוֹד 3519 [kâbôwd]
  • 1. 남성형 명사 영광, 명예.
  • 2. 남성형 명사 위엄, 장엄, 권위, 광영, 영광, 존귀, 겔 1:28, 3:12,23, 8:4, 10:4,18, 11:23.
  • 3. 남성형 명사 [인간의] 삼상 4:21, 욥 19:9, 시 8:6(5).

נֶצַח 5331 [netsach]
  • 1. 명사 영광, 휘광, 대상 29:11, 삼상 15:29
  • 2.  명사 진실, 정직, 합 1:4, 잠 21:28.
  • 3. 명사 신앙, 확신, 애 3:18.

גֵּאוּת 1348 [gêʼûwth]
  • 1. 명사 영광, 광채, 사 28:1,3.
  • 2. 명사 들어올림, 올려진 것, 사 9:17(18)
  • 3.명사 위엄[하나님의], 시 93:1.

גָּאוֹן 1347 [gâʼôwn]
  • 1. 명사 장식, 영광, 화려함, 사 4:2, 60:15, 시 47:5(4), 암 8:7.
  • 2. 명사 장대함, 위엄[하나님의], 출 15:7, 사2:10, 19,21, 24:14
  • 3. 명사 교만, 오만, 거만, 잠 16:18, 암 6:8, 나 2:3(2), 욥 35:12, 사 13:11, 16:6.


5331 [netsach) נֶצַח
  • 명사 영광, 휘광, 대상 29:11, 삼상 15:29

  • 2. 명사 진실, 정직, 합 1:4, 잠 21:28.
  • 3. 명사 신앙, 확신, 애 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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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자인 마틴 루터가 쓴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유명한 논문이 있습니다.
루터는 이 논문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요점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지극히 자유로운 만물의 지배자이며 아무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지극히 충성스러운 만물의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된다.”

​마틴루터는 1520년 로마 교황청의 위협속에서도

8월에 '독일 크리스찬 귀족에게 보내는 글'
10월에 '교회의 바벨론 감금'
11월에 '크리스챤의 자유' 라는 논문을 출판하였다.


루터의 3대 대표 논문의 마지막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입니다.
1520년대 마지막 세 번째 논문이자 루터의 신학을 맛볼 수 있는 정점에 있는 논문입니다.
다른 논문도 비슷한 특징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이 논문은 루터가 심혈을 기울였고, 독일과 중세교회를 향한 자신의 의지를 분명히 드러낼 목적으로 기록된 것입니다.
공개서한으로 작성되었고, 라틴어뿐 아니라 독일어로 동시에 공개된 논문입니다. 당시 교황이었던 레오 10세에게 보낸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아직 종교개혁의 바람이 불지 않았던 시기였습니다. 루터는 마지막까지 가톨릭 중세교회와 결별하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작센(Sachsen)의 귀족 출신이자 교황의 시종인 칼 폰 밀티츠(Karl von Miltitz)는 루터와 교황을 중재시키기 위해 루터에게 간곡하게 부탁했던 결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루터는 그 요구에 응하기는 했지만 자신이 주장했던 중세 교회의 신학적 모순과 타락에 대해서는 조금도 철회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강경하게 주장합니다.

루터의 3대 논문 가운데 마지막에 해당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자유’를 개진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영적인 자유이며, 사람의 내부에서 온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됨으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루터는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근거는 ‘오직 믿음으로’와 ‘오직 성경으로’라는 명제를 통해 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주장은 인간의 행위와 공로, 거짓된 교리와 성경에 근거하지 않는 중세 성례 등과 상관없는 것임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통해 다시 한번 모든 신자들은 사제가 아닌 오직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자유가 아니라 철저히 내면적이며 영적인 자유입니다.

루터가 주장했던 자유는 독일인의 관념적 신앙과 맥락을 같이합니다. 루터는 영적인 자유에 과도하게 치중함으로 삶이 결여된 형태로 발전하게 됩니다. 철학사에서도 일어났던 대륙의 관념철학이 독일에서 일어난 것은 루터의 영향이 적지 않았습니다. 독일의 신비주의 신학과 필립 야콥 스페너'(Philip Jacob Spener)를 중심으로 일어났단 독일의 경건주의 운동(Pietismus)은 루터의 ‘자유’의 개념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운동은 다시 진젠도르프를 통해 일어난 모라비안주의들을 통해 관념적이며 신비주의를 표방한 부흥 운동의 틀을 다지게 됩니다. 루터의 뒤를 이은 칼뱅의 신학은 루터의 이신칭의를 넘어 ‘성화’를 강조합니다. 종교개혁의 신학은 루터에 의해 시작되어 칼뱅에 의해 완성되었습니다.

논문 초기에 논문에 함께 덧붙여진 교황에 대한 이야기는 오해의 소지가 많습니다. 루터는 교황인 레오 10세를 건전하고 경건한 사람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레오 10세는 이미 루터에게 1520년 6월 15일 ‘주여 일어 나소서(Exsurge Domine)’라는 파문 경고 교서를 루터에게 발송했습니다. 루터는 10월 10일 교서를 받습니다. 그리고 정확히 한 달 후인 11월 12일 경에 루터는 본 논문인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발표하게 됩니다. 이러한 정황들은 루터가 교황에게 절대 호의적이지 않았음을 반증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황에 대한 호의적인 표현들은 타협하기 위한 목적보다는 일종의 ‘경고’로 볼 수 있습니다. 즉 ‘당신이 진정 진리의 수호자라면 내가 지금 당신을 표현하고 있는 그대로 거룩한 교황으로 살아야 하며, 부패한 중세교회를 개혁시켜야 한다’로 읽는 것이 타당합니다. 이제 루터의 논문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은 이형기가 번역한 <루터 저작선>에 담긴 것을 인용했으며, 번역이 모호하거나 어색한 부분은 지원용이 번역한 <종교개혁 3대 논문>을 참고했음을 밝힙니다.

2. 간략한 요약

[교황 레오 10세게 보내는 공개서한]

로마에 계신 교황 레오 10세에게 마르틴 루터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이 있으시기를 바라나이다. 아멘.

3년째 이 세대의 괴물들과 싸우면서 그들 가운데 살고 있는 복된 아버지 레오를 우러러 보며 귀하게 생각합니다. 전임자들인 피우스(Pius)와 율리우스(Julius)의 칙령에도 불구하고 나에 대한 귀하의 불경건한 아첨꾼들의 부당한 광란은 나로 하여금 귀하의 교황직과 미래의 공의회에 호소하지 않을 수 없게 했습니다. 나는 귀하는 바벨론에 있는 다니엘로 불렀습니다. 저는 모두에게 칭찬 받는 당신에게 돌을 던질 만큼 어리석지 않으며, 첫 번째 사람도 아닙니다.(요 8:1-11) 로마 교황청은 공의회를 몹시 싫어하고 개혁을 두려워합니다. 한때는 하늘의 문이었던 로마 교황청은 이제 지옥의 열린 입구가 되었습니다.

영명하신 레오 성하여, 청컨대 이번 한 번만 나의 주장을 변호하고 귀하의 진짜 원수들을 고발하는 것을 허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귀하의 특사 세인트 시스토의 추기경이 나를 어떻게 대했는지 아실 겁니다. 그는 자기 명예만을 구하고, 나에게 일방적으로 나의 의견들을 취소하라고만 했습니다. 그는 야비한 자로 일을 더 꼬이게 만들었습니다. 다음으로 교황의 사절인 칼 밀티즈의 경솔함을 아실 것입니다. 에크 또한 거짓과 속임수로 이전보다 더 악하고 혼란하게 만들었습니다. 복되신 아버지여, 귀하게 빈손으로 나아가지 않으려고 나의 화평과 좋은 소망을 담은 이 작은 논문을 보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

그리스도인은 전적으로 자유로운 만물의 주이며 아무에게도 예속되어 있지 않다.
그리스도인은 전적으로 충실한 만물의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되어 있다.

이 두 명제는 서로 모순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이것들은 서로 잘 조화되며 우리의 목적에 이바지할 것이다. 이 두 말은 바울의 말이다. 그는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 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전 9:10)했고,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라 했다. 사랑은 본질상 사랑의 대상이 되는 사람을 섬기고 그 사람에게 예속되고자 한다. 그리스도는 만물의 주였지만 여자에게 나셨고, 율법 아래 나셨다.(갈 4:4)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과 “종의 형상”(빌 2:6-7)을 입은 자유자이시며 종이셨다.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은 믿는 이들의 영혼을 먹이고 의롭게 하여 자유롭게 하고 구원하는 것이다. 우리가 입으로 주를 시인하며 구원을 얻는다.(롬 10:9) 또한 주님의 부활을 믿으며, 의롭게 된다.(롬 10:4) 바울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했다. 그러므로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되며, 자유를 얻는다.

믿음은 행위와 관련하여 그 무엇도 관계될 수 없다. 행위에 의해 의롭게 된다면 믿는 것은 바알과 여호와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것이다.(왕상 18:21)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그로 인해 죄사함을 받고 의롭게 된다. 구원을 위해서 우리가 행해야할 일은 무엇인가? 없다. 오직 하나,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다.(요 6:29)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신앙은 완전한 구원을 가져오면 인간을 모든 악에서 구원하는데 비할 데 없는 보화이다.

그렇다면 성경이 가르치는 계명은 무엇인가? 계명은 사람에게 자기 자신을 알라고 가르친다. 계명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무력을 알고 자신에 대해 절망한다. 이것은 옛 계약이며, 새 언약을 예비한다. 예를 들면 탐내지 말라(출 20:17)는 계명은 우리가 모두 죄인임을 입증한다. 어느 누구든 탐내지 말라는 계명을 지키지 못한다. 그로 인해 우리는 절망하고 외부에서 도움을 구해야 한다. 일점일획도 변함없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모든 이들은 정죄 된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야 한다. 그 안에 은혜와 의와 평화와 자유가 약속되어 있다. 바울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롬 11:32) 밝힌다. 이것은 하나님의 새 언약이다. 그리스도인은 신앙 가운데서 자기가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며 자기를 의롭게 하기 위하여 어떤 행위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하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이요 그리스도인의 자유다.

믿음으로 우리의 영혼과 그리스도는 한 몸이 된다.(엡 5:31-32) 만약 결혼하여 한 몸이 된다면 서로의 것을 공유한다.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하나 되며 그리스도와 함께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것을 공유한다. 그리스도는 은혜와 생명과 구원으로 충만하시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은 죄와 죽음과 저주로 가득 차 있다. 이제는 믿음으로 죽음과 저주는 그리스도의 것이 되고 은혜와 생명과 구원은 신자의 것이 된다. 그리스도는 한 위격 안에서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시다. 신앙의 결혼반지로 그(그리스도)는 그의 신부(신자)의 것인 죄와 죽음과 지옥의 고통에 동참하신다. 그것이 마치 자신의 것인 양 고난을 받으시고, 음부에 내려가셨다. 그러나 죽음과 지옥이 그를 삼킬 수 없었다. 그의 의는 모든 사람들의 죄보다 더 크고 그의 생명은 죽음보다 더 강하며 그의 구원은 지옥보다 더 강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자는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영화롭게 된다. 믿음만이 그리스도인의 의이며 모든 계명의 성취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제사장들이며 왕들이다. 베드로는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벧전 2:9)이라고 선언한다. 또한 신자는 그분의 “거룩한 나라”이며, “그의 소유된 백성”이다. 그렇다. 신자들은 왕들이다. 모든 만물을 지배한다. 이는 훌륭한 특권이고 얻기 어려운 것이며, 참으로 전능한 능력인 영적 지배권이다. 동시에 제사장들이다. 우리는 제사장으로서 하나님 앞에 나가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거룩한 일들을 서로에게 가르칠 자격이 있다. (히 10:19,22) 그리스도인들은 만물로부터 자유로우며 만물에 대하여 자유롭다. 교회에서 사용되는 ‘사제’ ‘성직자’ ‘신분계층’은 ‘사역자’이며, ‘종’이고 ‘청지기’들이다. 이런 칭호는 사역의 의미를 부여하지만 신분의 차이를 말하지 않는다. 바울은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고전 4:1)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제 겉 사람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우리의 육신은 불완전하다. 육 가운데 살아갈 동안 장래에 완성될 것을 기대하며 어느 정도 진보를 향해 나아갈 뿐이다. 인간은 유한하고 불완전한 삶을 지나야 한다. 그러므로 현세를 살아가는 동안 자신의 육신을 제어해야 한다. 금식, 절제, 노동, 및 다른 적합한 훈련을 통해 자신의 육신을 잘 다스리고 육신을 성령의 지배 아래 두도록 힘써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의 육신은 속사람과 신앙에 복종하고 순응하며 신앙에 항거하지 않고 속사람을 훼방하지 않게 될 것이다. 제어하지 않으면 그렇게 행하는 것이 육신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육신은 절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오히려 육신은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 (갈 5:24) 인간이 자신들의 행위로 의롭게 된다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좋은 열매가 좋은 나무를 만들지 못한다. 이처럼 악인은 선을 행하지 못한다. 선은 선인에게 나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하면 그들의 선은 거짓이며, 아무것도 아니다. 선한 행위를 구하기 전에 먼저 선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인이 되면 선행은 자연히 흘러넘친다. 믿음으로 사는 자들은 자신만을 위하여 살지 않고 이웃을 돌아본다. 강요나 조건이 아닌 자발적인 선행을 통해 사랑을 드러낸다. 바울은 말한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7-8) 그리스도인은 필연적으로 이웃과 대면하고 관계를 맺는다. 자신의 손으로 일하고,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을 찾는다. (엡 4:28) 자, 이와 같은 믿음으로부터 주님 안에서의 사랑과 기쁨이 흘러나오며, 사랑으로부터 이웃을 기쁘게 섬기고 감사나 배은망덕, 칭찬이나 비난, 이득이나 손실을 고려치 않고 기쁘고 자발적이고 자유로운 생각이 흘러넘친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유롭게 살아간다. 강요나 억지로 율법을 행하지 않는다. 자원하고 기쁨으로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한다. 마라아의 자발적인 결례 행함, 디모데의 자발적 할례, 그리스도의 세근 납부와 그리스도인의 세속 권위에 대한 순종은 성령의 자유 가운데 행한 것들이다. 이러한 행위들은 의롭게 되려는 노력이 아니라 자발적인 선행이며 그리스도인으로서 기쁨으로 행하는 것들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 (고전 13:5) 그리스도인은 사랑의 원리를 따른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행위로부터 우리를 해방하지 않고 그릇된 견해에서 해방한다. 믿음은 우리를 양심을 구속(救贖)하고 바르게 보존(保存)하여 의(義)가 행위에서 비롯되지 않음을 안다.

인간의 본성과 자연적인 이성은 본질적으로 미신적이다. 의를 율법과 행위를 통해 얻으려 한다. 그러나 거듭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비밀 가운데 숨겨져 있는 지혜를 우리 마음에 가르치시지 않는다면 인간의 본성은 그것을 어리석은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렇게 기도하자.

“하나님이여, 영원히 복되신 하나님이여, 우리가 땅 위에서 그의 길을 알고 만민 중에서 그의 구원을 알도록 마침내 그들과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주의 얼굴을 우리에게 비추소서! 아멘”

3. 나가면서

루터가 말하는 ‘자유’는 이렇게 정리될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역설적 존재로서의 자유를 주장합니다.

먼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로 인해 자유를 얻었고, 만물의 주가 되었다. 그러므로 아무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 둘째, 그리스도인은 더할 수 없는 충만한 만물의 종이며, 다른 사람에게 예속된다.

루터는 모순처럼 보이는 두 명제를 통해 그리스도인이 갖는 자유의 실체를 드러냅니다. 그리스도가 만물의 주이시며,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하나님이시지만, 죄인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스스로 종이 되어 율법 아래 나심으로 고난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십니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한 은혜와 생명을 공유합니다. 즉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됩니다. 그렇다면 믿음으로 얻게 된 ‘의’는 타락한 인간의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주입된 것입니다. 루터는 바로 이 지점, 외부로부터 주입된 의가 인간의 본성을 바꾸고 진정한 선행을 가능하게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어리석고 타락한 중세 교회는 자신의 본질을 바꾸려 하지 않고 타락한 자신이 행한 행위를 통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려는 우를 범합니다. 그들의 “행위는 양의 옷을 입고 약탈하는 이리들과 같이 사람들을 속이며 사람들을 서로 속이게 만”들고 맙니다.

아직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인데도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명징하고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5년 후인 1525년 에라스무스와 ‘자유의지 논쟁’을 하게 될 것입니다. 5년이란 시간이 무색할 만큼 루터의 자유 관념은 완전한 성숙에 이르렀음을 발견합니다. 아직 어거스틴의 글을 인용하고 있지 않지만 어거스틴의 ‘은총론’이 루터의 신학 속에 완벽하게 스며있습니다. 타락한 인간에게는 소망이 없으며,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선언합니다. 그렇다면 의는 인간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서 온 것이며, 그리스도로 인한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새 창조의 결과입니다. 루터는 신약 성경이 ‘그리스도 중심’인 것을 확고히 합니다. 이는 교부들의 전통을 완벽히 인식했다는 증거이며, ‘새 언약’의 관점에서 성경을 읽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의 자유에는 관념적 ‘이신칭의’ 개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이 보입니다. 어쩌면 이러한 약점은 종교개혁의 시작점에 있던 루터에게는 불가피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중세교회의 타락으로 인해 행위에 대해 부정적으로 볼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선행’도 축소해야 했을 것입니다. 루터의 급선무는 행위를 통해 의롭게 되고자 했던 왜곡된 중세의 신학을 타파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직 완숙한 단계는 아니었지만, 루터의 자유에 대한 신학적 정의는 성경에 깊이 뿌리내린 것이었으며, 앞으로 전개될 다음 세대의 종교개혁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지금의 개혁교회야말로 다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 참된 개혁​의 정신을 회복해야 되기 때문이다.
마틴루터의 종교개혁 3대 논문은 개신교인이라면, 특히 목회자라면 꼭 한번은 읽어봐야 하는 책이다.
이 책을 통해, 종교개혁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마틴루터는 1520년 로마 교황청의 위협속에서도

8월에 '독일 크리스찬 귀족에게 보내는 글'
10월에 '교회의 바벨론 감금'
11월에 '크리스챤의 자유' 라는 논문을 출판하였다.

​​1. 독일 크리스챤 귀족에게 보내는 글

​이 논문은 다른 세 편의 글과 비교했을 때  로만 가톨릭에 대해 가장 공격적이고, 로마 교황에 대해​ 가장 비판적인 글이다.
그 이유는, 마틴 루터가 이 논문을 통하여, 독일 크리스챤 귀족들의 구체적인 행동을 촉구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이 논문에서, 마틴 루터는 로만 가톨릭이 여태껏 세 가지 담을 쌓아 놓고 그 뒤에서 이제까지 자신들을 방어해가며, 부패했다고 비판한다. 

첫째 담 세속적 계급 위에 있는 영적 계급(성속의 구분)
둘째 담 성서해석자인 교황과 교황무오설(성서해석 독점)
셋째 담 교황과 공의회(교황은 처벌받지 않음) 

​마틴 루터는 교황의 허위, 그리고 사제들의 특권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그들이 평신도보다 거룩하거나 뛰어난 존재가 결코 아님을 주장한다.

이것은 말하자면 모든 크리스찬은 참으로 "영적 계급"에 속하며 그들 가운데는 직무상의 차별 이외에 아무것도 없다. 구두 수선공, 대장장이, 농부는 각기 자기들의 일과 직무를 맡고 있으면서도 그들은 다 성별받은 사제와 주교와 같다. -29~34p 

​마틴 루터는 이 논문에서 그 당시 혁명적인 평등사상을 전개한다.
어떻게, 그 당시에 하늘같은 교황과 땅같은 농부가 같은 크리스챤이라고 말하며, 교황이 그들보다 결코 우월하지 않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지금의 그리스도인은 마틴 루터가 가졌던, 혁명적 평등사상을 망각한 건 아닐까?
인간 사회의 비인간적 불평등과, 교회내의 비성경적 불평등에 너무 익숙해진건 아닐까?

이 논문을 통해, 마틴 루터가 주장하는 '만인 사제설'의 의미와 그 효과에 대해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있다.​

2.교회의 바벨론 감금

​15​20년 10월에 나온 이 논문은 마틴루터의 성례관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글이다.
설교가 들려지는 말씀이라면, 성례전은 보여지는 말씀이다.
그러나 로만 가톨릭은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들려지는 말씀보다 보여지는 말씀인 성례전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마틴루터는 성례전보다 본질적으로 중요한 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그곳에 교회가 있다(ubi est verbum ibi est ecclesia)라고 주장하며,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의 본질임을 강조했다.

마틴루터는 이 논문에서 로만 가톨릭이 많이 하는 성례중에 성찬과 세례를 예수님께서 제정하셨기에 남겨두고, 나머지는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

마틴​ 루터는 성찬식에서 잔을 주지 않고 떡만 주는 것이 비성경적이라고 이야기하며 얀 후스를 언급한다.
체코의 종교개혁자 얀 후스는 성도들과 떡뿐만 아니라 잔을  나누며 성찬식을 하다가 화형을 당하였기 때문이다.

마틴 루터는 자신이 존 위클리프와 얀 후스의 사상적 후예라고 이야기 한다.

​​나는 이러한 나의 가르침이 위클리프적이고 후스적이고 이단적이고 또 교회의 규정에 배치된다고 부르짖을 사람들에게 대하여 조금도 귀를 기울이거나 중요시하지 않으려고 한다. -185p

​우리는 흔히 종교개혁이 1517년 마틴루터에 의해서 시작되었고, 그 전에는 종교개혁자가 없었던 것처럼 생각하지만, 실제로 마틴루터 이전에 존 위클리프와 얀 후스와 같은 선구적 종교개혁자들이 존재하였다. ​

영국의 존 위클리프가 성경을 자국어인 영어로 번역하였고, 얀 후스가 위클리프의 영향을 받아 성경을 자국어인 체코어로 번역하였고, 마틴 루터가 얀후스의 영향을 받아 성경을 자국어인 독일어로 번역하였다. ​

3. 크리스챤의 자유

​1520년 11월에 쓴 '크리스챤의 자유'는 앞의 두권의 논문보다는 다소 온건한 어조다. 마틴 루터는 이 논문에서 크리스챤으로서 어떻게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지 이야기 한다. 크리스챤은 본질적으로 자유인이면서 또한 봉사자다.

크리스찬은 더할 수 없이 자유로운 만물의 주이며 아무에게도 예속하지 않는다.
크리스챤은 더할 수 없이 충의로운 만물의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한다. -295p 

​크리스챤은 매우 자유로운 존재이지만, 매우 부자유한 존재이다. 이런 모순이 왜 발생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크리스챤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율법에서 도달할 수 없는 자유를 얻지만, 그 자유로 이웃을 적극적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종이되기 때문이다.

그는 신앙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살며, 사랑으로 그의 이웃 안에서 산다. 신앙에 의하여 그는 그 자신 이상으로 하나님께 올리워지며, 사랑에 의하여 그는 그 자신 이하로 이웃에게 내려간다. -338p







형제 자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부르셔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자유를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구실로 삼지말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 갈라디아서 5:13

크리스챤은 믿음때문에 주인이고, 사랑때문에 종이된다.
에리히프롬이 말한 것처럼, 참된 자유는 freedom from에서 freedom to로 넘어가야 한다.
크리스챤은 죄에서 해방되어, 이웃을 적극적으로 사랑하는 삶을 살게 될 때 참으로 해방된다. 

그래서 마틴 루터는 용기있게 이렇게 선포한다.

"침묵을 지킬때는 지나가고 이제는 말할 때가 왔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죄에서 자유함을 얻어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자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자유롭게 된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만물의 지배자로 아무에게도 예속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육신적으로 이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이웃과의 관계에서 종처럼 그들을 사랑하고 섬겨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이러한 이중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본문에 앞서 성도는 자기의 신앙양심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할 자유가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적인 자유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자유롭게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먹고 마시는 문제에서부터 삶의 중요한 문제까지 결정하며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상의 문제들을 선택하고 결정하는데 중요한 원리가 있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문제에 대한 사도 바울의 최종적인 결론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인들의 참된 삶의 목적에 대해 가르쳐 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참된 성도의 신앙과 생활을 정확하게 요약한 핵심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모든 행위의 기준, 전 인생의 기반 역시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음을 가리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을 지배하는 아주 기본적인 원리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든 행동, 즉 그것이 먹는 것이든지 마시는 것이든지 생업의 일이든지 봉사의 일이든지 무슨 일이든지 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아야 하나님이 영광을 위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은 ‘자신의 존재 목적과 삶의 목적을 바로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은 존재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만드실 때에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창조하셨습니다.
그 목적인 무엇인지 알아야 분명한 삶을 살고,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목적을 상실하고 있다면 존재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존재가치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가치창조의 수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적을 상실하면 자연히 존재의 가치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는 마치 땅만 허비하고 세월만 허송하는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와 같습니다. 일본의 유명한 신학자인 우찌무라 간조목사님은 말하기를 "실패하는 것이 죄가 아니라 목적이 잘못된 것이 죄"라고 했습니다. 

삶의 의미와 목적을 가장 잘 인식한 사도 바울은 빌 1:20-21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사도 바울은 이 고백을 통해 자신의 존재목적이 예수님을 존귀하게 해드리기 위함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존재목적도 역시 하나님과 주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몇 년 전 우리 한국교회에 ‘목적이 이끄는 삶’ 열풍이 불었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새들백 교회 릭 워렌 목사님을 통해 많은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열풍이 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때문에 우리 한국교회가 목적이 이끄는 교회가 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목적이 이끄는 교회가 되었다면 지금쯤 우리 한국교회는 많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인정을 받아 부흥하고 성장하는 교회가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맛을 잃은 소금과 같이 세상 사람들의 발에 밟히고 있습니다. 

높은뜻 숭의교회 김동호 목사님은 오늘 날 우리 한국교회가 이렇게 된 원인을 한국교회가 교회의 존재목적을 상실하였기 때문이라고 진단했습니다. 교회의 존재목적은 교회를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의 존재목적은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만드는 것입니다. 세상을 모든 사람들이 살기 좋은 천국, 즉 하나님 나라로 만드는 것이 교회의 소명이고 사명이며 교회의 존재목적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한국교회가 그 목적을 잊었습니다. 세상을 등졌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잊었습니다. 교회가 교회의 목적이 되었습니다. 교회의 부흥, 교회의 성장이 교회의 목적이 되었습니다. 교회의 성장이 목적이 되고, 교회의 부흥이 목적이 되어 온 교회가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그 결과 어느 정도 그 목적을 이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 세계에서 제일 큰 장로교회, 세계에서 제일 큰 감리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교회는 점점 커지는데 교회는 점점 그 생명력을 잃어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교회는 점점 그 아름다움을 잃어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세상의 존경을 받고 인정을 받던 교회는 점점 세상의 지탄을 받고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는 교회로 추락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교회가 교회의 존재목적을 잃으면서 교인들도 존재의 목적을 잃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부자 되고, 세상에서 성공하고, 세상에서 출세하는 것이 목적이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과 똑같은 목적을 갖게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과 다른 것이 있다면 그 목적을 하나님께 기도하여 얻겠다고 하는 것만 달라졌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처럼 소중한 소명을 잊었습니다. 사명을 잊었습니다. 자신의 존재목적을 상실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상실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사를 잃어버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는 하지만 예수의 능력은 상실한 사람들이 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삶의 목표와 목적을 수정해야 합니다. 자신의 성공만을 위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과 소명을 잊어버리고 살고 있는 어리석은 삶을 벗어 버리고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살아가는 목적을 다시 한 번 세우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존재하는 목적을 알게 되면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개념이 무엇인지는 잘 알아야 합니다. 영광의 개념을 생각할 때 항상 두가지 개념 즉, 하나님과 인간의 관점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께서 “그 영광을 나타내셨다”는 표현도 있고,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표현도 있습니다. 

하나님 입장에서의 영광의 개념은 “하나님의 임재나 나타내심”의 의미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영광을 보았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보았다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 2장에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는 기적을 행하실 때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셨다”(11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갈릴리 가나의 한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되신다는 사실을 나타내셨다고 하는 뜻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말이나 행동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여주고 드러나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는 일이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능력과 사랑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일을 하든지 간에 이 일을 통하여 하나님을 드러내고, 알려주고, 보여주며, 높이는 방편이 되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신원 에벤에셀 박성철 회장은 장로님입니다. 20여 년 전 남의 건물 얻어서 조그맣게 봉제공장을 시작하면서 하나님께 물질의 복을 주시면 수입의 30%를 하나님 영광을 위해 쓰겠다고 서원하였습니다. 오늘날 그 기업은 신흥재벌의 순위에 들어 있다고 합니다. 사업을 하든, 운동을 하든, 공부를 하든, 무엇을 하든 하나님의 자녀들의 일차적 목표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을 드러내고 보여주며 알려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에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삶의 의미와 가치의 전부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데 두었습니다. 

롬 14:8절에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라”고 하면서 주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제일의 목적이 바로 인간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의 목표를 하나님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마땅합니다. 하나님은 친히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을 말씀합니다. 사 43:7절에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이 목적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처럼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때 나타나는 중요한 열매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32-33절에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통해 우리의 자유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하나님의 교회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 것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성도든지 아니든지, 아니면 나와 관계있는 사람이든지 아니든지 관계없이 그들의 유익을 구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하여 그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목표는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삶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구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유익을 구하며 살아갑니다. 거미같이 자기만 위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넘어지게 하고 손해나게 하며 해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개미와 같이 부지런히 살기는 하는데 전적으로 자기만을 위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부지런히 일하는 꿀벌과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꿀벌은 부지런히 일하며 살아갑니다만 그 모든 것이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이 특징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남에게 유익을 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 삶의 결과는 반드시 영혼을 구원하는 것으로 연결되어져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많은 사람에게 전도하여 영생 얻고 구원받는 사람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가장 큰 뜻은 예수 믿고 구원 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 6:39-40절에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처럼 구원받아 영생을 소유한 우리 성도들의 삶은 어찌하든지 한 사람의 영혼이라도 구원하는 일에 목표를 두고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 믿기를 권하고, 예수 믿게 하여, 우리와 같이 영생을 얻고 구원받는 사람이 되도록 하는 것이 우리 생애의 최대의 목표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하든지 한사람에게라도 복음을 전해 그들의 영혼을 건져야합니다. 영혼 구원을 위해서 시간을 바치고 물질을 바치고 재능을 바치는 것은 참으로 가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실 때 복음을 위해 생명까지 바친다면 최고의 영광일 것입니다. 예수님도 무슨 일을 하든지 궁극적인 목표를 영혼구원에 두었습니다. 이제 우리도 무엇을 하든지 복음을 전하여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중심을 두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과 박해와 핍박을 각오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까? 내 가족, 내 친지,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혹 아직도 하나님을 영접하지 못하고, 어둠의 세계에서 방황하도록 내버려두지는 않았습니까? 

추석명절에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온 가족이 감사하시고, 우상숭배를 멀리하며 온 가족을 구원하는 전도의 기회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언약궤(言約櫃)


언약궤(言約櫃)

법궤(ארון הברית / 아론 하버리스)
성궤(聖櫃)
언약궤(Ark of the Covenant, 約櫃)

언약궤는 금박을 입힌 나무 상자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받은 십계명을 새긴 석판 두 개를 보관하고 있다고 합니다.

언약궤는 무엇인가요?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언약 (조건적인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면, 당대뿐만 아니라 자손대대로 좋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이 불순종하면, 가망이 없으며, 형벌을 받고, 흩어질 것이라고 늘 경고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상징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당신께서 직접 설계하신 상자를 만들게 하시고, 그 안에 십계명을 담은 석판을 두게 하셨습니다.

이 상자, 또는 함은 “궤”라고 불렸으며, 금으로 도금된 아카시아 나무로 만들어졌습니다.
이 궤는 사막의 성막 안 성소에 보관되었고, 결국에는 예루살렘에 성전이 지어지면 그곳에 보관될 예정이었습니다.
이 상자가 언약궤로 알려진 것입니다.

언약궤의 정말 중요한 부분은 “속죄소(Mercy Seat)”로 알려진 상자의 뚜껑과 관련된 것입니다.

‘속죄소’라는 용어는 “덮다, 달래다, 요구를 들어주다, 씻어주다, 취소하다 혹은 속죄하다”를 의미하는 히브리어로부터 유래되었습니다.

대제사장이 일 년에 단 한번(레위기 16장) 언약궤가 보관된 지성소에 들어가 자신의 죄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속죄 받았던 것도 바로 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대제사장은 과거에 지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화를 달래기 위해, 희생제물로 바쳐진 짐승의 피를 속죄소에 뿌렸습니다. 세상에서 이 속죄가 이루어질 수 있는 유일한 장소가 바로 이곳이었습니다.

언약궤 위에 덮여 있던 속죄소는 모든 죄를 위한 궁극적인 희생, 즉, 죄 사함을 위해 십자가에 뿌려진 그리스도의 피에 대한 상징적인 전조였습니다.

바리새인이자 구약성경에 익숙했던 사도 바울은 로마서 3:24-25에서 우리의 죄를 덮으시는 그리스도에 대해 썼을 때, 이 개념을 아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으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구약성경에서 속죄를 치를 수 있었던 유일한 처소가 언약궤의 속죄소였던 것처럼, 신약성경 때와 현재에도 속죄를 위한 유일한 처소가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크리스천인 우리는 화목제사와 속죄를 위해 더 이상 언약궤에 의지하지 않고, 주 예수께만 의지합니다.

법궤 안에 숨겨진 그리스도
출애굽기 37:1-9

성경과 우리의 신앙의 중심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발견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신약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것은 매우 쉽지만 구약에서는 어렵다고 생각 합니다.
그러나 조금만 주의 깊게 살펴보면 구약에도 그리스도에 대한 상징과 예언이 차고도 넘칩니다.
그 중에 성막을 통하여 보여주신 숨겨진 비밀과 그분이 주시는 은혜에 대해 살피어 보려고 합니다.

법궤의 중요성은 성막에 관하여 제일 먼저 법궤로 부터 시작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서열상 맨 앞에 두었습니다.
그러므로 법궤 없이는 성막에서 섬기는 모든 일이 무의미 하며 또한 무가치 합니다.
법궤가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는 곳으로 상징 되었던 것은 그의 언약의축복이 법궤 안에 안치되었기 때문 입니다.
법궤는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 인격을 상징 합니다.

모든 기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나 또는 그 결과를 나타내고 있으나 법궤 만은 그의 인격을 나타내고 있으니 모든 성막기구 중에 맨 앞서 설명 되어진 것입니다.

법궤의 이름은 일곱 가지로 놀랍게도 각기 다양한 권위와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첫째, 증거궤(출애굽기 25:22)

두 돌판 십계명이 보관되어 있었기 때문

둘째, 언약궤(민수기 10:33)

하나님께서 돌 판을 통해 언약을 분명히 하기 때문이고 여호와의 궤인데(수 3:15) 이스라엘이 요단을 마른 땅으로 건넜고 여리고 성을 함락 시킨 것도 법궤를 메고 갔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궤(삼상 3:3) 거룩한 궤 (대하 35:3) 주의 권능의 궤(시 132:8) 등으로 소개 되고 있습니다.

법궤에 그 테를 두른 것은 언약궤의 귀중성을 보여 주신 것이고 채를 모서리에 달았으니 이편에 두 고리요 저편에 두 고리이며 넷은 (동, 서, 남 북) 세상의 수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우주 성을 의미 합니다.
실로 하나님의 사랑은 인종과 피부를 초월하고 국경을 초월하는 온 우주에 편만 하십니다.

또한 이것은 이동하기에 용이 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f를 통과하여 가나안을 정복한 이후 성전이 완성 될 때 까지는 불가피 하게 언약궤를 메고 이동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성막의 널판을 금으로 싸서 받침대 위에 세우게 하셨고 널판을 완전히 고정시키기 위하여 긴 나무 막대기 다섯개를 만들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한 것은 성막의 모든 널판들이 다섯 개의 긴 띠로 하나로 묶여 지듯이 구원받은 성도들도 진리의 말씀으로 하나가 되는 것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몸이 하나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엡 4:4)

널판을 하나가 되게 묶어주는 띠는(출 36:33) 그리스도 인들의 가슴과 가슴 이어 지는 성령의 상징 입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고(시 133:1)
협력하여 선을 이 룸을 말하는 것입니다(롬 8:28)
한분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을 받고(고후 4:13)
주 예수님 안에서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한 성령을 받아 한 몸이 되었기에(고후 12:13)
모든 뜻이 하나가 되어 주님의 집 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법궤와 삼위일체 하나님

법궤 속에는 십계명 돌판 두개와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 그리고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들어습니다(히 9:4).
법궤는 하나님을 상징하고 이 세가지 물품은 삼위 일체가 되신 하나님을 상징 합니다.
십계명 돌판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성부 하나님, 만나는 내가 하늘에서 내려 온 산 떡이라고 하신(요 6:51) 성자 하나님을 싹난 지팡이는 죽은 생명을 부활시키는 성령 하나님을 상징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성물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직접 만드시고 내려 주시고 또 역사하신 것들입니다.
이 법궤는 지성소에 안치되어 있었으니 지성소는 하나님이 임재해 계신 곳으로서 성막 안에 있었고 이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중심 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난다고(25:22) 하십니다.
하나님과 만남이 가능한 것은 속죄소에 뿌려진 대속의 피로 말미암음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고안해낸 방법이요 전적인 하나님께서 설계 하신 것입니다.
율법아래 있게 되면 모두가 죄 아래 있게 되고 ”심판 아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은혜아래 있으면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얻게 되고 하나님과의 만남이 가능해 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보내시기 전에 이를 모형을 통해서 보여 주시려고 성소를 짓되 내가 네게 보인 식량대로 지으라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속죄소와 십자가

법궤에서 십자가의 대속을 상징하는 곳은 법궤의 뚜껑인 속죄소입니다.
이 속죄소에는 정금으로 그룹 둘을 만들어 속죄소 양끝에 두어 서로 얼굴을 대하고 날개 를 펴고서 그 날개들로 속죄소를 덮었습니다. 두 그룹의 날개가 속죄소를 덮은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들의 모든 죄를 속량함 (덮는다) 함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속죄소 에서 대 제사장 아론을 만나 그의 속죄를 위해 피 뿌림을 통하여 죄 사하여 주셨습니다.

이 속죄소는 율법과 은혜가 만나는 장소입니다.
하나님의 법에 의하여 정죄된 인간이 이 속죄소 에서 은혜를 입어 죄 사함을 받게 됩니다.
이것은 십자가의 의미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의미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9:25-26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찌니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법궤가 성소 안에 있는 기구들 가운데 가장 신성하고 거룩한 것은 그 성소가 법궤를 두는집으로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구주 입니다.

출애굽기에는 성막의 교회는 주님의 거하시는 집이기 때문에 분명히 육과 영의 구별이 있습니다.
우리가 진리로 하나가 되지만 진리가 아닌 것은 과감하게 분리해 야 합니다.
바로 교회 안에서 누룩을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브사렐이 궤를 만든 장면이 나옵니다.
그 궤는 정금으로 안팍을 쌓으며 위로 돌아가면서 금으로 쌓았습니다.

금으로 쌓았다는 것은 성령의 기름 부음을 상징하고(마 3:16) 금테를 둘렀다는 것 은 예수님께서 왕 중의 왕이심을(계 19:16)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쓰신 면류관은 생의 고난과 죽기까지 낮아지는 순종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었습니다.
마찬 가지로 율법에 의해 먼저 정죄 당하고 죽어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원자 이십니다.

마태복음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그래서 세상 죄를 담당 하시고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과 정죄를 상징하는 율법 돌판을 덮는 속죄소를 만든 것입니다.
속죄소는 법궤의 뚜껑인데 전 체가 정금이며 망치로 쳐서 만든 것이 특징입니다.

쳐서 만들었다는 것은 골고다의 고난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두 말 할 것 없이 예 수님께서 우리대신 골고다에서 모진 고난의 채찍을 맞으시고 피 흘리심으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신 것입니다.

이사야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빌립보서 4:21-23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에게 각각 문안하라 나와 함께 있는 형제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모든 성도들이 너희에게 문안하되 특별히 가이사집 사람 중 몇이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찌어다.


그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가이사 집 사람이 같은 식구가 되었다고 햇습니다.
가이사집의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당시는 네로 치하 이였습니다.
폭군이 다스리는 폭압정치의 시대에도 복음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오히려 어둠이 짙을 수록 빛을 찾는 무리들이 더 많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스도는 알파와 오메가 이십니다.
그의 은혜는 처음이며 마지막 이십니다.
그 분이 시작과 끝이 되어야 하는 것은 그가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자 이십니다 그러면 그 구원자를 맞이할 자는 누구입니까? 우리의 삶이 주 예수 그리스도 은혜여야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삶의 주인이 되시며 도움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그 분이 우리의 소망 이시기 때문입니다.

“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 한다는 놀라운 소망은 우리에게 있는 가능성이 아니라 그의 은혜뿐입니다.

시작도 은혜요 끝맺음도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합시다.
성막 에 숨겨진 그리스도를 더욱 발견하고 그 분이 주시는 은혜 안에서 복된 삶을 누리는 여러분들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시은좌(施恩座)
속죄소(贖罪所)

궤(언약궤, 법궤, 증거궤) 안에는 두 돌판(율법판, 증거판) 외에도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모세의 지팡이도 들어있었다고 합니다(히브리서 9:4).

금 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판들이 있고.”

언약궤 안에는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두 돌판이 있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열왕기상 8:9에 “그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 아무것도 없으니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후 여호와께서 저희와 언약을 맺으실 때에 모세가 호렙에서 그 안에 넣은 것이더라”고 했습니다.

역대하 5:10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 아무것도 없으니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나온 후 여호와께서 저희와 언약을 세우실 때에 모세호렙에서 그 안에 넣은 것이더라.

언약궤 안에 모세 때는 세 종류의 물건이 들어있었는데 두 종류는 분실되고 솔로몬왕 때에는 한하나만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학자들 가운데는 사울왕 때 이스라엘이 언약궤를 블레셋 빼앗겼는데(삼상 4:11,17) 그 때 두 종류는 분실하고 하나만 남게 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설득력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언약궤를 블레셋에 빼앗겼을 때 하나님은 언약궤를 스스로 지켰습니다.
언약궤가 이동되는 곳마다 재앙을 내려서 유다로 돌아오게 했고 유다의 벧세메스 사람들은 그 언약궤 뚜껑을 열어보았다가 70명이 죽임을 당했습니다(삼상 5:1-8, 6:19).
그런 분위기를 보면 하나님이 블레셋에서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이난 지팡이를 잃어버리도록 내버려 두었다는 것은 납득하기가 어렵습니다.

처음부터 언약궤 안에는 두 돌비 즉 율법판만 들어있었을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분명히 돌비는 하나님이 언약궤 안에 넣으라고 하셨고 모세는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언약궤 안에 넣었습니다.

출애굽기 40:20
그는 또 증거판을 궤 속에 넣고 채를 궤에 꿰고 속죄소를 궤 위에 두고.

신명기 10:5
내가 돌이켜 산에서 내려와서 여호와께서 내게 명령하신 대로 그 판을 내가 만든 궤에 넣었더니 지금까지 있느니라.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처음부터 언약궤 안에 두라고 하지 않고 앞에 두라고 하셨습니다.

출애굽기16:33-34
또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항아리를 가져다가 그 속에 만나 한 오멜을 담아 여호와 앞에 두어 너희 대대로 간수하라. 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것을 증거판 앞에 두어 간수하게 하였고.

민수기17:10-11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지팡이는 증거궤 앞으로 도로 가져다가 거기 간직하여 반역한 자에 대한 표징이 되게 하여 그들로 내게 대한 원망을 그치고 죽지 않게 할지니라. 모세가 곧 그 같이 하되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대로 하였더라.

히브리서는 왜 세 종류가 있었다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히브리서의 목적에서 보아야 합니다.
히브리서의 목적은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는데 있지 않고 구약의 율법과 제도와 성전이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한 것이라는 구속사적 해석을 하는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언약궤와 관련하여 하나님이 보관하게 했던 물건들이 무엇이었는지에 주목하게 하고 그것들이 무엇을 예표하는지에 대해 관심을 갖게 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의 의도로 보면 그것들이 언약궤 안에 있었는지 밖에 있었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세 종류의 물건들이 언약궤와 관련되어 무엇을 예표하고 있는 것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들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바, 예수 그리스도의 직분(왕, 제사장, 선지자)과 관련된 표호들입니다.


마태복음 22:34-40
34. 예수
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35.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 예수
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로마서 13: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요한복음 15: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요한복음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