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榮光)을 위하여


영광(榮光) : 영화 영(榮), 빛 광(光)
- 경쟁(競爭)에서 이기거나 남이 하지 못한 어려운 일을 해냈을 때의 빛나는 영예(榮譽)

덮을 멱(冖) / 덮다
불 화(火) / 불, 열과 빛
사람 인(人) / 사람, 인간, 다른 사람, 타인
열 십(十) / 열, 열번
빛 광(光) / 빛, 어둠을 물리치는 빛


גֵּאוּת 1348 [gêʼûwth]
  • 1. 명사 영광, 광채, 사 28:1,3.
  • 2. 명사 들어올림, 올려진 것, 사 9:17(18)
  • 3. 명사 위엄[하나님의], 시 93:1.

כָּבוֹד 3519 [kâbôwd]
  • 1. 남성형 명사 영광, 명예.
  • 2. 남성형 명사 위엄, 장엄, 권위, 광영, 영광, 존귀, 겔 1:28, 3:12,23, 8:4, 10:4,18, 11:23.
  • 3. 남성형 명사 [인간의] 삼상 4:21, 욥 19:9, 시 8:6(5).

נֶצַח 5331 [netsach]
  • 1. 명사 영광, 휘광, 대상 29:11, 삼상 15:29
  • 2.  명사 진실, 정직, 합 1:4, 잠 21:28.
  • 3. 명사 신앙, 확신, 애 3:18.

גֵּאוּת 1348 [gêʼûwth]
  • 1. 명사 영광, 광채, 사 28:1,3.
  • 2. 명사 들어올림, 올려진 것, 사 9:17(18)
  • 3.명사 위엄[하나님의], 시 93:1.

גָּאוֹן 1347 [gâʼôwn]
  • 1. 명사 장식, 영광, 화려함, 사 4:2, 60:15, 시 47:5(4), 암 8:7.
  • 2. 명사 장대함, 위엄[하나님의], 출 15:7, 사2:10, 19,21, 24:14
  • 3. 명사 교만, 오만, 거만, 잠 16:18, 암 6:8, 나 2:3(2), 욥 35:12, 사 13:11, 16:6.


5331 [netsach) נֶצַח
  • 명사 영광, 휘광, 대상 29:11, 삼상 15:29

  • 2. 명사 진실, 정직, 합 1:4, 잠 21:28.
  • 3. 명사 신앙, 확신, 애 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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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자인 마틴 루터가 쓴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유명한 논문이 있습니다.
루터는 이 논문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요점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지극히 자유로운 만물의 지배자이며 아무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지극히 충성스러운 만물의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된다.”

​마틴루터는 1520년 로마 교황청의 위협속에서도

8월에 '독일 크리스찬 귀족에게 보내는 글'
10월에 '교회의 바벨론 감금'
11월에 '크리스챤의 자유' 라는 논문을 출판하였다.


루터의 3대 대표 논문의 마지막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입니다.
1520년대 마지막 세 번째 논문이자 루터의 신학을 맛볼 수 있는 정점에 있는 논문입니다.
다른 논문도 비슷한 특징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이 논문은 루터가 심혈을 기울였고, 독일과 중세교회를 향한 자신의 의지를 분명히 드러낼 목적으로 기록된 것입니다.
공개서한으로 작성되었고, 라틴어뿐 아니라 독일어로 동시에 공개된 논문입니다. 당시 교황이었던 레오 10세에게 보낸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아직 종교개혁의 바람이 불지 않았던 시기였습니다. 루터는 마지막까지 가톨릭 중세교회와 결별하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작센(Sachsen)의 귀족 출신이자 교황의 시종인 칼 폰 밀티츠(Karl von Miltitz)는 루터와 교황을 중재시키기 위해 루터에게 간곡하게 부탁했던 결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루터는 그 요구에 응하기는 했지만 자신이 주장했던 중세 교회의 신학적 모순과 타락에 대해서는 조금도 철회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강경하게 주장합니다.

루터의 3대 논문 가운데 마지막에 해당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자유’를 개진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영적인 자유이며, 사람의 내부에서 온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됨으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루터는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근거는 ‘오직 믿음으로’와 ‘오직 성경으로’라는 명제를 통해 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주장은 인간의 행위와 공로, 거짓된 교리와 성경에 근거하지 않는 중세 성례 등과 상관없는 것임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통해 다시 한번 모든 신자들은 사제가 아닌 오직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자유가 아니라 철저히 내면적이며 영적인 자유입니다.

루터가 주장했던 자유는 독일인의 관념적 신앙과 맥락을 같이합니다. 루터는 영적인 자유에 과도하게 치중함으로 삶이 결여된 형태로 발전하게 됩니다. 철학사에서도 일어났던 대륙의 관념철학이 독일에서 일어난 것은 루터의 영향이 적지 않았습니다. 독일의 신비주의 신학과 필립 야콥 스페너'(Philip Jacob Spener)를 중심으로 일어났단 독일의 경건주의 운동(Pietismus)은 루터의 ‘자유’의 개념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운동은 다시 진젠도르프를 통해 일어난 모라비안주의들을 통해 관념적이며 신비주의를 표방한 부흥 운동의 틀을 다지게 됩니다. 루터의 뒤를 이은 칼뱅의 신학은 루터의 이신칭의를 넘어 ‘성화’를 강조합니다. 종교개혁의 신학은 루터에 의해 시작되어 칼뱅에 의해 완성되었습니다.

논문 초기에 논문에 함께 덧붙여진 교황에 대한 이야기는 오해의 소지가 많습니다. 루터는 교황인 레오 10세를 건전하고 경건한 사람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레오 10세는 이미 루터에게 1520년 6월 15일 ‘주여 일어 나소서(Exsurge Domine)’라는 파문 경고 교서를 루터에게 발송했습니다. 루터는 10월 10일 교서를 받습니다. 그리고 정확히 한 달 후인 11월 12일 경에 루터는 본 논문인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발표하게 됩니다. 이러한 정황들은 루터가 교황에게 절대 호의적이지 않았음을 반증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황에 대한 호의적인 표현들은 타협하기 위한 목적보다는 일종의 ‘경고’로 볼 수 있습니다. 즉 ‘당신이 진정 진리의 수호자라면 내가 지금 당신을 표현하고 있는 그대로 거룩한 교황으로 살아야 하며, 부패한 중세교회를 개혁시켜야 한다’로 읽는 것이 타당합니다. 이제 루터의 논문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은 이형기가 번역한 <루터 저작선>에 담긴 것을 인용했으며, 번역이 모호하거나 어색한 부분은 지원용이 번역한 <종교개혁 3대 논문>을 참고했음을 밝힙니다.

2. 간략한 요약

[교황 레오 10세게 보내는 공개서한]

로마에 계신 교황 레오 10세에게 마르틴 루터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이 있으시기를 바라나이다. 아멘.

3년째 이 세대의 괴물들과 싸우면서 그들 가운데 살고 있는 복된 아버지 레오를 우러러 보며 귀하게 생각합니다. 전임자들인 피우스(Pius)와 율리우스(Julius)의 칙령에도 불구하고 나에 대한 귀하의 불경건한 아첨꾼들의 부당한 광란은 나로 하여금 귀하의 교황직과 미래의 공의회에 호소하지 않을 수 없게 했습니다. 나는 귀하는 바벨론에 있는 다니엘로 불렀습니다. 저는 모두에게 칭찬 받는 당신에게 돌을 던질 만큼 어리석지 않으며, 첫 번째 사람도 아닙니다.(요 8:1-11) 로마 교황청은 공의회를 몹시 싫어하고 개혁을 두려워합니다. 한때는 하늘의 문이었던 로마 교황청은 이제 지옥의 열린 입구가 되었습니다.

영명하신 레오 성하여, 청컨대 이번 한 번만 나의 주장을 변호하고 귀하의 진짜 원수들을 고발하는 것을 허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귀하의 특사 세인트 시스토의 추기경이 나를 어떻게 대했는지 아실 겁니다. 그는 자기 명예만을 구하고, 나에게 일방적으로 나의 의견들을 취소하라고만 했습니다. 그는 야비한 자로 일을 더 꼬이게 만들었습니다. 다음으로 교황의 사절인 칼 밀티즈의 경솔함을 아실 것입니다. 에크 또한 거짓과 속임수로 이전보다 더 악하고 혼란하게 만들었습니다. 복되신 아버지여, 귀하게 빈손으로 나아가지 않으려고 나의 화평과 좋은 소망을 담은 이 작은 논문을 보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

그리스도인은 전적으로 자유로운 만물의 주이며 아무에게도 예속되어 있지 않다.
그리스도인은 전적으로 충실한 만물의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되어 있다.

이 두 명제는 서로 모순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이것들은 서로 잘 조화되며 우리의 목적에 이바지할 것이다. 이 두 말은 바울의 말이다. 그는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 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전 9:10)했고,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라 했다. 사랑은 본질상 사랑의 대상이 되는 사람을 섬기고 그 사람에게 예속되고자 한다. 그리스도는 만물의 주였지만 여자에게 나셨고, 율법 아래 나셨다.(갈 4:4)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과 “종의 형상”(빌 2:6-7)을 입은 자유자이시며 종이셨다.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은 믿는 이들의 영혼을 먹이고 의롭게 하여 자유롭게 하고 구원하는 것이다. 우리가 입으로 주를 시인하며 구원을 얻는다.(롬 10:9) 또한 주님의 부활을 믿으며, 의롭게 된다.(롬 10:4) 바울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했다. 그러므로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되며, 자유를 얻는다.

믿음은 행위와 관련하여 그 무엇도 관계될 수 없다. 행위에 의해 의롭게 된다면 믿는 것은 바알과 여호와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것이다.(왕상 18:21)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그로 인해 죄사함을 받고 의롭게 된다. 구원을 위해서 우리가 행해야할 일은 무엇인가? 없다. 오직 하나,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다.(요 6:29)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신앙은 완전한 구원을 가져오면 인간을 모든 악에서 구원하는데 비할 데 없는 보화이다.

그렇다면 성경이 가르치는 계명은 무엇인가? 계명은 사람에게 자기 자신을 알라고 가르친다. 계명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무력을 알고 자신에 대해 절망한다. 이것은 옛 계약이며, 새 언약을 예비한다. 예를 들면 탐내지 말라(출 20:17)는 계명은 우리가 모두 죄인임을 입증한다. 어느 누구든 탐내지 말라는 계명을 지키지 못한다. 그로 인해 우리는 절망하고 외부에서 도움을 구해야 한다. 일점일획도 변함없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모든 이들은 정죄 된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야 한다. 그 안에 은혜와 의와 평화와 자유가 약속되어 있다. 바울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롬 11:32) 밝힌다. 이것은 하나님의 새 언약이다. 그리스도인은 신앙 가운데서 자기가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며 자기를 의롭게 하기 위하여 어떤 행위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하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이요 그리스도인의 자유다.

믿음으로 우리의 영혼과 그리스도는 한 몸이 된다.(엡 5:31-32) 만약 결혼하여 한 몸이 된다면 서로의 것을 공유한다.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하나 되며 그리스도와 함께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것을 공유한다. 그리스도는 은혜와 생명과 구원으로 충만하시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은 죄와 죽음과 저주로 가득 차 있다. 이제는 믿음으로 죽음과 저주는 그리스도의 것이 되고 은혜와 생명과 구원은 신자의 것이 된다. 그리스도는 한 위격 안에서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시다. 신앙의 결혼반지로 그(그리스도)는 그의 신부(신자)의 것인 죄와 죽음과 지옥의 고통에 동참하신다. 그것이 마치 자신의 것인 양 고난을 받으시고, 음부에 내려가셨다. 그러나 죽음과 지옥이 그를 삼킬 수 없었다. 그의 의는 모든 사람들의 죄보다 더 크고 그의 생명은 죽음보다 더 강하며 그의 구원은 지옥보다 더 강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자는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영화롭게 된다. 믿음만이 그리스도인의 의이며 모든 계명의 성취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제사장들이며 왕들이다. 베드로는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벧전 2:9)이라고 선언한다. 또한 신자는 그분의 “거룩한 나라”이며, “그의 소유된 백성”이다. 그렇다. 신자들은 왕들이다. 모든 만물을 지배한다. 이는 훌륭한 특권이고 얻기 어려운 것이며, 참으로 전능한 능력인 영적 지배권이다. 동시에 제사장들이다. 우리는 제사장으로서 하나님 앞에 나가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거룩한 일들을 서로에게 가르칠 자격이 있다. (히 10:19,22) 그리스도인들은 만물로부터 자유로우며 만물에 대하여 자유롭다. 교회에서 사용되는 ‘사제’ ‘성직자’ ‘신분계층’은 ‘사역자’이며, ‘종’이고 ‘청지기’들이다. 이런 칭호는 사역의 의미를 부여하지만 신분의 차이를 말하지 않는다. 바울은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고전 4:1)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제 겉 사람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우리의 육신은 불완전하다. 육 가운데 살아갈 동안 장래에 완성될 것을 기대하며 어느 정도 진보를 향해 나아갈 뿐이다. 인간은 유한하고 불완전한 삶을 지나야 한다. 그러므로 현세를 살아가는 동안 자신의 육신을 제어해야 한다. 금식, 절제, 노동, 및 다른 적합한 훈련을 통해 자신의 육신을 잘 다스리고 육신을 성령의 지배 아래 두도록 힘써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의 육신은 속사람과 신앙에 복종하고 순응하며 신앙에 항거하지 않고 속사람을 훼방하지 않게 될 것이다. 제어하지 않으면 그렇게 행하는 것이 육신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육신은 절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오히려 육신은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 (갈 5:24) 인간이 자신들의 행위로 의롭게 된다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좋은 열매가 좋은 나무를 만들지 못한다. 이처럼 악인은 선을 행하지 못한다. 선은 선인에게 나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하면 그들의 선은 거짓이며, 아무것도 아니다. 선한 행위를 구하기 전에 먼저 선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인이 되면 선행은 자연히 흘러넘친다. 믿음으로 사는 자들은 자신만을 위하여 살지 않고 이웃을 돌아본다. 강요나 조건이 아닌 자발적인 선행을 통해 사랑을 드러낸다. 바울은 말한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7-8) 그리스도인은 필연적으로 이웃과 대면하고 관계를 맺는다. 자신의 손으로 일하고,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을 찾는다. (엡 4:28) 자, 이와 같은 믿음으로부터 주님 안에서의 사랑과 기쁨이 흘러나오며, 사랑으로부터 이웃을 기쁘게 섬기고 감사나 배은망덕, 칭찬이나 비난, 이득이나 손실을 고려치 않고 기쁘고 자발적이고 자유로운 생각이 흘러넘친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유롭게 살아간다. 강요나 억지로 율법을 행하지 않는다. 자원하고 기쁨으로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한다. 마라아의 자발적인 결례 행함, 디모데의 자발적 할례, 그리스도의 세근 납부와 그리스도인의 세속 권위에 대한 순종은 성령의 자유 가운데 행한 것들이다. 이러한 행위들은 의롭게 되려는 노력이 아니라 자발적인 선행이며 그리스도인으로서 기쁨으로 행하는 것들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 (고전 13:5) 그리스도인은 사랑의 원리를 따른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행위로부터 우리를 해방하지 않고 그릇된 견해에서 해방한다. 믿음은 우리를 양심을 구속(救贖)하고 바르게 보존(保存)하여 의(義)가 행위에서 비롯되지 않음을 안다.

인간의 본성과 자연적인 이성은 본질적으로 미신적이다. 의를 율법과 행위를 통해 얻으려 한다. 그러나 거듭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비밀 가운데 숨겨져 있는 지혜를 우리 마음에 가르치시지 않는다면 인간의 본성은 그것을 어리석은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렇게 기도하자.

“하나님이여, 영원히 복되신 하나님이여, 우리가 땅 위에서 그의 길을 알고 만민 중에서 그의 구원을 알도록 마침내 그들과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주의 얼굴을 우리에게 비추소서! 아멘”

3. 나가면서

루터가 말하는 ‘자유’는 이렇게 정리될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역설적 존재로서의 자유를 주장합니다.

먼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로 인해 자유를 얻었고, 만물의 주가 되었다. 그러므로 아무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 둘째, 그리스도인은 더할 수 없는 충만한 만물의 종이며, 다른 사람에게 예속된다.

루터는 모순처럼 보이는 두 명제를 통해 그리스도인이 갖는 자유의 실체를 드러냅니다. 그리스도가 만물의 주이시며,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하나님이시지만, 죄인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스스로 종이 되어 율법 아래 나심으로 고난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십니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한 은혜와 생명을 공유합니다. 즉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됩니다. 그렇다면 믿음으로 얻게 된 ‘의’는 타락한 인간의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주입된 것입니다. 루터는 바로 이 지점, 외부로부터 주입된 의가 인간의 본성을 바꾸고 진정한 선행을 가능하게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어리석고 타락한 중세 교회는 자신의 본질을 바꾸려 하지 않고 타락한 자신이 행한 행위를 통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려는 우를 범합니다. 그들의 “행위는 양의 옷을 입고 약탈하는 이리들과 같이 사람들을 속이며 사람들을 서로 속이게 만”들고 맙니다.

아직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인데도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명징하고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5년 후인 1525년 에라스무스와 ‘자유의지 논쟁’을 하게 될 것입니다. 5년이란 시간이 무색할 만큼 루터의 자유 관념은 완전한 성숙에 이르렀음을 발견합니다. 아직 어거스틴의 글을 인용하고 있지 않지만 어거스틴의 ‘은총론’이 루터의 신학 속에 완벽하게 스며있습니다. 타락한 인간에게는 소망이 없으며,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선언합니다. 그렇다면 의는 인간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서 온 것이며, 그리스도로 인한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새 창조의 결과입니다. 루터는 신약 성경이 ‘그리스도 중심’인 것을 확고히 합니다. 이는 교부들의 전통을 완벽히 인식했다는 증거이며, ‘새 언약’의 관점에서 성경을 읽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의 자유에는 관념적 ‘이신칭의’ 개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이 보입니다. 어쩌면 이러한 약점은 종교개혁의 시작점에 있던 루터에게는 불가피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중세교회의 타락으로 인해 행위에 대해 부정적으로 볼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선행’도 축소해야 했을 것입니다. 루터의 급선무는 행위를 통해 의롭게 되고자 했던 왜곡된 중세의 신학을 타파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직 완숙한 단계는 아니었지만, 루터의 자유에 대한 신학적 정의는 성경에 깊이 뿌리내린 것이었으며, 앞으로 전개될 다음 세대의 종교개혁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지금의 개혁교회야말로 다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 참된 개혁​의 정신을 회복해야 되기 때문이다.
마틴루터의 종교개혁 3대 논문은 개신교인이라면, 특히 목회자라면 꼭 한번은 읽어봐야 하는 책이다.
이 책을 통해, 종교개혁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마틴루터는 1520년 로마 교황청의 위협속에서도

8월에 '독일 크리스찬 귀족에게 보내는 글'
10월에 '교회의 바벨론 감금'
11월에 '크리스챤의 자유' 라는 논문을 출판하였다.

​​1. 독일 크리스챤 귀족에게 보내는 글

​이 논문은 다른 세 편의 글과 비교했을 때  로만 가톨릭에 대해 가장 공격적이고, 로마 교황에 대해​ 가장 비판적인 글이다.
그 이유는, 마틴 루터가 이 논문을 통하여, 독일 크리스챤 귀족들의 구체적인 행동을 촉구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이 논문에서, 마틴 루터는 로만 가톨릭이 여태껏 세 가지 담을 쌓아 놓고 그 뒤에서 이제까지 자신들을 방어해가며, 부패했다고 비판한다. 

첫째 담 세속적 계급 위에 있는 영적 계급(성속의 구분)
둘째 담 성서해석자인 교황과 교황무오설(성서해석 독점)
셋째 담 교황과 공의회(교황은 처벌받지 않음) 

​마틴 루터는 교황의 허위, 그리고 사제들의 특권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그들이 평신도보다 거룩하거나 뛰어난 존재가 결코 아님을 주장한다.

이것은 말하자면 모든 크리스찬은 참으로 "영적 계급"에 속하며 그들 가운데는 직무상의 차별 이외에 아무것도 없다. 구두 수선공, 대장장이, 농부는 각기 자기들의 일과 직무를 맡고 있으면서도 그들은 다 성별받은 사제와 주교와 같다. -29~34p 

​마틴 루터는 이 논문에서 그 당시 혁명적인 평등사상을 전개한다.
어떻게, 그 당시에 하늘같은 교황과 땅같은 농부가 같은 크리스챤이라고 말하며, 교황이 그들보다 결코 우월하지 않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지금의 그리스도인은 마틴 루터가 가졌던, 혁명적 평등사상을 망각한 건 아닐까?
인간 사회의 비인간적 불평등과, 교회내의 비성경적 불평등에 너무 익숙해진건 아닐까?

이 논문을 통해, 마틴 루터가 주장하는 '만인 사제설'의 의미와 그 효과에 대해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있다.​

2.교회의 바벨론 감금

​15​20년 10월에 나온 이 논문은 마틴루터의 성례관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글이다.
설교가 들려지는 말씀이라면, 성례전은 보여지는 말씀이다.
그러나 로만 가톨릭은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들려지는 말씀보다 보여지는 말씀인 성례전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마틴루터는 성례전보다 본질적으로 중요한 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그곳에 교회가 있다(ubi est verbum ibi est ecclesia)라고 주장하며,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의 본질임을 강조했다.

마틴루터는 이 논문에서 로만 가톨릭이 많이 하는 성례중에 성찬과 세례를 예수님께서 제정하셨기에 남겨두고, 나머지는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

마틴​ 루터는 성찬식에서 잔을 주지 않고 떡만 주는 것이 비성경적이라고 이야기하며 얀 후스를 언급한다.
체코의 종교개혁자 얀 후스는 성도들과 떡뿐만 아니라 잔을  나누며 성찬식을 하다가 화형을 당하였기 때문이다.

마틴 루터는 자신이 존 위클리프와 얀 후스의 사상적 후예라고 이야기 한다.

​​나는 이러한 나의 가르침이 위클리프적이고 후스적이고 이단적이고 또 교회의 규정에 배치된다고 부르짖을 사람들에게 대하여 조금도 귀를 기울이거나 중요시하지 않으려고 한다. -185p

​우리는 흔히 종교개혁이 1517년 마틴루터에 의해서 시작되었고, 그 전에는 종교개혁자가 없었던 것처럼 생각하지만, 실제로 마틴루터 이전에 존 위클리프와 얀 후스와 같은 선구적 종교개혁자들이 존재하였다. ​

영국의 존 위클리프가 성경을 자국어인 영어로 번역하였고, 얀 후스가 위클리프의 영향을 받아 성경을 자국어인 체코어로 번역하였고, 마틴 루터가 얀후스의 영향을 받아 성경을 자국어인 독일어로 번역하였다. ​

3. 크리스챤의 자유

​1520년 11월에 쓴 '크리스챤의 자유'는 앞의 두권의 논문보다는 다소 온건한 어조다. 마틴 루터는 이 논문에서 크리스챤으로서 어떻게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지 이야기 한다. 크리스챤은 본질적으로 자유인이면서 또한 봉사자다.

크리스찬은 더할 수 없이 자유로운 만물의 주이며 아무에게도 예속하지 않는다.
크리스챤은 더할 수 없이 충의로운 만물의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한다. -295p 

​크리스챤은 매우 자유로운 존재이지만, 매우 부자유한 존재이다. 이런 모순이 왜 발생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크리스챤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율법에서 도달할 수 없는 자유를 얻지만, 그 자유로 이웃을 적극적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종이되기 때문이다.

그는 신앙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살며, 사랑으로 그의 이웃 안에서 산다. 신앙에 의하여 그는 그 자신 이상으로 하나님께 올리워지며, 사랑에 의하여 그는 그 자신 이하로 이웃에게 내려간다. -338p







형제 자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부르셔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자유를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구실로 삼지말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 갈라디아서 5:13

크리스챤은 믿음때문에 주인이고, 사랑때문에 종이된다.
에리히프롬이 말한 것처럼, 참된 자유는 freedom from에서 freedom to로 넘어가야 한다.
크리스챤은 죄에서 해방되어, 이웃을 적극적으로 사랑하는 삶을 살게 될 때 참으로 해방된다. 

그래서 마틴 루터는 용기있게 이렇게 선포한다.

"침묵을 지킬때는 지나가고 이제는 말할 때가 왔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죄에서 자유함을 얻어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자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자유롭게 된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만물의 지배자로 아무에게도 예속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육신적으로 이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이웃과의 관계에서 종처럼 그들을 사랑하고 섬겨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이러한 이중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본문에 앞서 성도는 자기의 신앙양심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할 자유가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적인 자유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자유롭게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먹고 마시는 문제에서부터 삶의 중요한 문제까지 결정하며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상의 문제들을 선택하고 결정하는데 중요한 원리가 있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문제에 대한 사도 바울의 최종적인 결론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인들의 참된 삶의 목적에 대해 가르쳐 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참된 성도의 신앙과 생활을 정확하게 요약한 핵심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모든 행위의 기준, 전 인생의 기반 역시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음을 가리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을 지배하는 아주 기본적인 원리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든 행동, 즉 그것이 먹는 것이든지 마시는 것이든지 생업의 일이든지 봉사의 일이든지 무슨 일이든지 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아야 하나님이 영광을 위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은 ‘자신의 존재 목적과 삶의 목적을 바로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은 존재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만드실 때에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창조하셨습니다.
그 목적인 무엇인지 알아야 분명한 삶을 살고,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목적을 상실하고 있다면 존재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존재가치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가치창조의 수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적을 상실하면 자연히 존재의 가치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는 마치 땅만 허비하고 세월만 허송하는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와 같습니다. 일본의 유명한 신학자인 우찌무라 간조목사님은 말하기를 "실패하는 것이 죄가 아니라 목적이 잘못된 것이 죄"라고 했습니다. 

삶의 의미와 목적을 가장 잘 인식한 사도 바울은 빌 1:20-21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사도 바울은 이 고백을 통해 자신의 존재목적이 예수님을 존귀하게 해드리기 위함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존재목적도 역시 하나님과 주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몇 년 전 우리 한국교회에 ‘목적이 이끄는 삶’ 열풍이 불었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새들백 교회 릭 워렌 목사님을 통해 많은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열풍이 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때문에 우리 한국교회가 목적이 이끄는 교회가 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목적이 이끄는 교회가 되었다면 지금쯤 우리 한국교회는 많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인정을 받아 부흥하고 성장하는 교회가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맛을 잃은 소금과 같이 세상 사람들의 발에 밟히고 있습니다. 

높은뜻 숭의교회 김동호 목사님은 오늘 날 우리 한국교회가 이렇게 된 원인을 한국교회가 교회의 존재목적을 상실하였기 때문이라고 진단했습니다. 교회의 존재목적은 교회를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의 존재목적은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만드는 것입니다. 세상을 모든 사람들이 살기 좋은 천국, 즉 하나님 나라로 만드는 것이 교회의 소명이고 사명이며 교회의 존재목적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한국교회가 그 목적을 잊었습니다. 세상을 등졌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잊었습니다. 교회가 교회의 목적이 되었습니다. 교회의 부흥, 교회의 성장이 교회의 목적이 되었습니다. 교회의 성장이 목적이 되고, 교회의 부흥이 목적이 되어 온 교회가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그 결과 어느 정도 그 목적을 이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 세계에서 제일 큰 장로교회, 세계에서 제일 큰 감리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교회는 점점 커지는데 교회는 점점 그 생명력을 잃어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교회는 점점 그 아름다움을 잃어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세상의 존경을 받고 인정을 받던 교회는 점점 세상의 지탄을 받고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는 교회로 추락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교회가 교회의 존재목적을 잃으면서 교인들도 존재의 목적을 잃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부자 되고, 세상에서 성공하고, 세상에서 출세하는 것이 목적이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과 똑같은 목적을 갖게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과 다른 것이 있다면 그 목적을 하나님께 기도하여 얻겠다고 하는 것만 달라졌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처럼 소중한 소명을 잊었습니다. 사명을 잊었습니다. 자신의 존재목적을 상실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상실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사를 잃어버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는 하지만 예수의 능력은 상실한 사람들이 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삶의 목표와 목적을 수정해야 합니다. 자신의 성공만을 위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과 소명을 잊어버리고 살고 있는 어리석은 삶을 벗어 버리고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살아가는 목적을 다시 한 번 세우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존재하는 목적을 알게 되면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개념이 무엇인지는 잘 알아야 합니다. 영광의 개념을 생각할 때 항상 두가지 개념 즉, 하나님과 인간의 관점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께서 “그 영광을 나타내셨다”는 표현도 있고,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표현도 있습니다. 

하나님 입장에서의 영광의 개념은 “하나님의 임재나 나타내심”의 의미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영광을 보았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보았다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 2장에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는 기적을 행하실 때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셨다”(11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갈릴리 가나의 한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되신다는 사실을 나타내셨다고 하는 뜻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말이나 행동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여주고 드러나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는 일이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능력과 사랑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일을 하든지 간에 이 일을 통하여 하나님을 드러내고, 알려주고, 보여주며, 높이는 방편이 되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신원 에벤에셀 박성철 회장은 장로님입니다. 20여 년 전 남의 건물 얻어서 조그맣게 봉제공장을 시작하면서 하나님께 물질의 복을 주시면 수입의 30%를 하나님 영광을 위해 쓰겠다고 서원하였습니다. 오늘날 그 기업은 신흥재벌의 순위에 들어 있다고 합니다. 사업을 하든, 운동을 하든, 공부를 하든, 무엇을 하든 하나님의 자녀들의 일차적 목표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을 드러내고 보여주며 알려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에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삶의 의미와 가치의 전부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데 두었습니다. 

롬 14:8절에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라”고 하면서 주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제일의 목적이 바로 인간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의 목표를 하나님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마땅합니다. 하나님은 친히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을 말씀합니다. 사 43:7절에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이 목적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처럼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때 나타나는 중요한 열매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32-33절에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통해 우리의 자유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하나님의 교회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 것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성도든지 아니든지, 아니면 나와 관계있는 사람이든지 아니든지 관계없이 그들의 유익을 구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하여 그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목표는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삶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구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유익을 구하며 살아갑니다. 거미같이 자기만 위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넘어지게 하고 손해나게 하며 해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개미와 같이 부지런히 살기는 하는데 전적으로 자기만을 위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부지런히 일하는 꿀벌과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꿀벌은 부지런히 일하며 살아갑니다만 그 모든 것이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이 특징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남에게 유익을 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 삶의 결과는 반드시 영혼을 구원하는 것으로 연결되어져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많은 사람에게 전도하여 영생 얻고 구원받는 사람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가장 큰 뜻은 예수 믿고 구원 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 6:39-40절에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처럼 구원받아 영생을 소유한 우리 성도들의 삶은 어찌하든지 한 사람의 영혼이라도 구원하는 일에 목표를 두고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 믿기를 권하고, 예수 믿게 하여, 우리와 같이 영생을 얻고 구원받는 사람이 되도록 하는 것이 우리 생애의 최대의 목표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하든지 한사람에게라도 복음을 전해 그들의 영혼을 건져야합니다. 영혼 구원을 위해서 시간을 바치고 물질을 바치고 재능을 바치는 것은 참으로 가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실 때 복음을 위해 생명까지 바친다면 최고의 영광일 것입니다. 예수님도 무슨 일을 하든지 궁극적인 목표를 영혼구원에 두었습니다. 이제 우리도 무엇을 하든지 복음을 전하여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중심을 두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과 박해와 핍박을 각오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까? 내 가족, 내 친지,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혹 아직도 하나님을 영접하지 못하고, 어둠의 세계에서 방황하도록 내버려두지는 않았습니까? 

추석명절에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온 가족이 감사하시고, 우상숭배를 멀리하며 온 가족을 구원하는 전도의 기회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언약궤(言約櫃)


언약궤(言約櫃)

법궤(ארון הברית / 아론 하버리스)
성궤(聖櫃)
언약궤(Ark of the Covenant, 約櫃)

언약궤는 금박을 입힌 나무 상자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받은 십계명을 새긴 석판 두 개를 보관하고 있다고 합니다.

언약궤는 무엇인가요?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언약 (조건적인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면, 당대뿐만 아니라 자손대대로 좋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이 불순종하면, 가망이 없으며, 형벌을 받고, 흩어질 것이라고 늘 경고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상징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당신께서 직접 설계하신 상자를 만들게 하시고, 그 안에 십계명을 담은 석판을 두게 하셨습니다.

이 상자, 또는 함은 “궤”라고 불렸으며, 금으로 도금된 아카시아 나무로 만들어졌습니다.
이 궤는 사막의 성막 안 성소에 보관되었고, 결국에는 예루살렘에 성전이 지어지면 그곳에 보관될 예정이었습니다.
이 상자가 언약궤로 알려진 것입니다.

언약궤의 정말 중요한 부분은 “속죄소(Mercy Seat)”로 알려진 상자의 뚜껑과 관련된 것입니다.

‘속죄소’라는 용어는 “덮다, 달래다, 요구를 들어주다, 씻어주다, 취소하다 혹은 속죄하다”를 의미하는 히브리어로부터 유래되었습니다.

대제사장이 일 년에 단 한번(레위기 16장) 언약궤가 보관된 지성소에 들어가 자신의 죄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속죄 받았던 것도 바로 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대제사장은 과거에 지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화를 달래기 위해, 희생제물로 바쳐진 짐승의 피를 속죄소에 뿌렸습니다. 세상에서 이 속죄가 이루어질 수 있는 유일한 장소가 바로 이곳이었습니다.

언약궤 위에 덮여 있던 속죄소는 모든 죄를 위한 궁극적인 희생, 즉, 죄 사함을 위해 십자가에 뿌려진 그리스도의 피에 대한 상징적인 전조였습니다.

바리새인이자 구약성경에 익숙했던 사도 바울은 로마서 3:24-25에서 우리의 죄를 덮으시는 그리스도에 대해 썼을 때, 이 개념을 아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으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구약성경에서 속죄를 치를 수 있었던 유일한 처소가 언약궤의 속죄소였던 것처럼, 신약성경 때와 현재에도 속죄를 위한 유일한 처소가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크리스천인 우리는 화목제사와 속죄를 위해 더 이상 언약궤에 의지하지 않고, 주 예수께만 의지합니다.

법궤 안에 숨겨진 그리스도
출애굽기 37:1-9

성경과 우리의 신앙의 중심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발견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신약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것은 매우 쉽지만 구약에서는 어렵다고 생각 합니다.
그러나 조금만 주의 깊게 살펴보면 구약에도 그리스도에 대한 상징과 예언이 차고도 넘칩니다.
그 중에 성막을 통하여 보여주신 숨겨진 비밀과 그분이 주시는 은혜에 대해 살피어 보려고 합니다.

법궤의 중요성은 성막에 관하여 제일 먼저 법궤로 부터 시작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서열상 맨 앞에 두었습니다.
그러므로 법궤 없이는 성막에서 섬기는 모든 일이 무의미 하며 또한 무가치 합니다.
법궤가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는 곳으로 상징 되었던 것은 그의 언약의축복이 법궤 안에 안치되었기 때문 입니다.
법궤는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 인격을 상징 합니다.

모든 기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나 또는 그 결과를 나타내고 있으나 법궤 만은 그의 인격을 나타내고 있으니 모든 성막기구 중에 맨 앞서 설명 되어진 것입니다.

법궤의 이름은 일곱 가지로 놀랍게도 각기 다양한 권위와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첫째, 증거궤(출애굽기 25:22)

두 돌판 십계명이 보관되어 있었기 때문

둘째, 언약궤(민수기 10:33)

하나님께서 돌 판을 통해 언약을 분명히 하기 때문이고 여호와의 궤인데(수 3:15) 이스라엘이 요단을 마른 땅으로 건넜고 여리고 성을 함락 시킨 것도 법궤를 메고 갔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궤(삼상 3:3) 거룩한 궤 (대하 35:3) 주의 권능의 궤(시 132:8) 등으로 소개 되고 있습니다.

법궤에 그 테를 두른 것은 언약궤의 귀중성을 보여 주신 것이고 채를 모서리에 달았으니 이편에 두 고리요 저편에 두 고리이며 넷은 (동, 서, 남 북) 세상의 수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우주 성을 의미 합니다.
실로 하나님의 사랑은 인종과 피부를 초월하고 국경을 초월하는 온 우주에 편만 하십니다.

또한 이것은 이동하기에 용이 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f를 통과하여 가나안을 정복한 이후 성전이 완성 될 때 까지는 불가피 하게 언약궤를 메고 이동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성막의 널판을 금으로 싸서 받침대 위에 세우게 하셨고 널판을 완전히 고정시키기 위하여 긴 나무 막대기 다섯개를 만들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한 것은 성막의 모든 널판들이 다섯 개의 긴 띠로 하나로 묶여 지듯이 구원받은 성도들도 진리의 말씀으로 하나가 되는 것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몸이 하나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엡 4:4)

널판을 하나가 되게 묶어주는 띠는(출 36:33) 그리스도 인들의 가슴과 가슴 이어 지는 성령의 상징 입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고(시 133:1)
협력하여 선을 이 룸을 말하는 것입니다(롬 8:28)
한분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을 받고(고후 4:13)
주 예수님 안에서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한 성령을 받아 한 몸이 되었기에(고후 12:13)
모든 뜻이 하나가 되어 주님의 집 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법궤와 삼위일체 하나님

법궤 속에는 십계명 돌판 두개와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 그리고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들어습니다(히 9:4).
법궤는 하나님을 상징하고 이 세가지 물품은 삼위 일체가 되신 하나님을 상징 합니다.
십계명 돌판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성부 하나님, 만나는 내가 하늘에서 내려 온 산 떡이라고 하신(요 6:51) 성자 하나님을 싹난 지팡이는 죽은 생명을 부활시키는 성령 하나님을 상징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성물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직접 만드시고 내려 주시고 또 역사하신 것들입니다.
이 법궤는 지성소에 안치되어 있었으니 지성소는 하나님이 임재해 계신 곳으로서 성막 안에 있었고 이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중심 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난다고(25:22) 하십니다.
하나님과 만남이 가능한 것은 속죄소에 뿌려진 대속의 피로 말미암음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고안해낸 방법이요 전적인 하나님께서 설계 하신 것입니다.
율법아래 있게 되면 모두가 죄 아래 있게 되고 ”심판 아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은혜아래 있으면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얻게 되고 하나님과의 만남이 가능해 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보내시기 전에 이를 모형을 통해서 보여 주시려고 성소를 짓되 내가 네게 보인 식량대로 지으라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속죄소와 십자가

법궤에서 십자가의 대속을 상징하는 곳은 법궤의 뚜껑인 속죄소입니다.
이 속죄소에는 정금으로 그룹 둘을 만들어 속죄소 양끝에 두어 서로 얼굴을 대하고 날개 를 펴고서 그 날개들로 속죄소를 덮었습니다. 두 그룹의 날개가 속죄소를 덮은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들의 모든 죄를 속량함 (덮는다) 함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속죄소 에서 대 제사장 아론을 만나 그의 속죄를 위해 피 뿌림을 통하여 죄 사하여 주셨습니다.

이 속죄소는 율법과 은혜가 만나는 장소입니다.
하나님의 법에 의하여 정죄된 인간이 이 속죄소 에서 은혜를 입어 죄 사함을 받게 됩니다.
이것은 십자가의 의미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의미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9:25-26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찌니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법궤가 성소 안에 있는 기구들 가운데 가장 신성하고 거룩한 것은 그 성소가 법궤를 두는집으로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구주 입니다.

출애굽기에는 성막의 교회는 주님의 거하시는 집이기 때문에 분명히 육과 영의 구별이 있습니다.
우리가 진리로 하나가 되지만 진리가 아닌 것은 과감하게 분리해 야 합니다.
바로 교회 안에서 누룩을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브사렐이 궤를 만든 장면이 나옵니다.
그 궤는 정금으로 안팍을 쌓으며 위로 돌아가면서 금으로 쌓았습니다.

금으로 쌓았다는 것은 성령의 기름 부음을 상징하고(마 3:16) 금테를 둘렀다는 것 은 예수님께서 왕 중의 왕이심을(계 19:16)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쓰신 면류관은 생의 고난과 죽기까지 낮아지는 순종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었습니다.
마찬 가지로 율법에 의해 먼저 정죄 당하고 죽어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원자 이십니다.

마태복음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그래서 세상 죄를 담당 하시고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과 정죄를 상징하는 율법 돌판을 덮는 속죄소를 만든 것입니다.
속죄소는 법궤의 뚜껑인데 전 체가 정금이며 망치로 쳐서 만든 것이 특징입니다.

쳐서 만들었다는 것은 골고다의 고난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두 말 할 것 없이 예 수님께서 우리대신 골고다에서 모진 고난의 채찍을 맞으시고 피 흘리심으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신 것입니다.

이사야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빌립보서 4:21-23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에게 각각 문안하라 나와 함께 있는 형제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모든 성도들이 너희에게 문안하되 특별히 가이사집 사람 중 몇이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찌어다.


그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가이사 집 사람이 같은 식구가 되었다고 햇습니다.
가이사집의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당시는 네로 치하 이였습니다.
폭군이 다스리는 폭압정치의 시대에도 복음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오히려 어둠이 짙을 수록 빛을 찾는 무리들이 더 많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스도는 알파와 오메가 이십니다.
그의 은혜는 처음이며 마지막 이십니다.
그 분이 시작과 끝이 되어야 하는 것은 그가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자 이십니다 그러면 그 구원자를 맞이할 자는 누구입니까? 우리의 삶이 주 예수 그리스도 은혜여야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삶의 주인이 되시며 도움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그 분이 우리의 소망 이시기 때문입니다.

“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 한다는 놀라운 소망은 우리에게 있는 가능성이 아니라 그의 은혜뿐입니다.

시작도 은혜요 끝맺음도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합시다.
성막 에 숨겨진 그리스도를 더욱 발견하고 그 분이 주시는 은혜 안에서 복된 삶을 누리는 여러분들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시은좌(施恩座)
속죄소(贖罪所)

궤(언약궤, 법궤, 증거궤) 안에는 두 돌판(율법판, 증거판) 외에도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모세의 지팡이도 들어있었다고 합니다(히브리서 9:4).

금 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판들이 있고.”

언약궤 안에는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두 돌판이 있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열왕기상 8:9에 “그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 아무것도 없으니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후 여호와께서 저희와 언약을 맺으실 때에 모세가 호렙에서 그 안에 넣은 것이더라”고 했습니다.

역대하 5:10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 아무것도 없으니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나온 후 여호와께서 저희와 언약을 세우실 때에 모세호렙에서 그 안에 넣은 것이더라.

언약궤 안에 모세 때는 세 종류의 물건이 들어있었는데 두 종류는 분실되고 솔로몬왕 때에는 한하나만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학자들 가운데는 사울왕 때 이스라엘이 언약궤를 블레셋 빼앗겼는데(삼상 4:11,17) 그 때 두 종류는 분실하고 하나만 남게 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설득력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언약궤를 블레셋에 빼앗겼을 때 하나님은 언약궤를 스스로 지켰습니다.
언약궤가 이동되는 곳마다 재앙을 내려서 유다로 돌아오게 했고 유다의 벧세메스 사람들은 그 언약궤 뚜껑을 열어보았다가 70명이 죽임을 당했습니다(삼상 5:1-8, 6:19).
그런 분위기를 보면 하나님이 블레셋에서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이난 지팡이를 잃어버리도록 내버려 두었다는 것은 납득하기가 어렵습니다.

처음부터 언약궤 안에는 두 돌비 즉 율법판만 들어있었을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분명히 돌비는 하나님이 언약궤 안에 넣으라고 하셨고 모세는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언약궤 안에 넣었습니다.

출애굽기 40:20
그는 또 증거판을 궤 속에 넣고 채를 궤에 꿰고 속죄소를 궤 위에 두고.

신명기 10:5
내가 돌이켜 산에서 내려와서 여호와께서 내게 명령하신 대로 그 판을 내가 만든 궤에 넣었더니 지금까지 있느니라.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처음부터 언약궤 안에 두라고 하지 않고 앞에 두라고 하셨습니다.

출애굽기16:33-34
또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항아리를 가져다가 그 속에 만나 한 오멜을 담아 여호와 앞에 두어 너희 대대로 간수하라. 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것을 증거판 앞에 두어 간수하게 하였고.

민수기17:10-11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지팡이는 증거궤 앞으로 도로 가져다가 거기 간직하여 반역한 자에 대한 표징이 되게 하여 그들로 내게 대한 원망을 그치고 죽지 않게 할지니라. 모세가 곧 그 같이 하되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대로 하였더라.

히브리서는 왜 세 종류가 있었다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히브리서의 목적에서 보아야 합니다.
히브리서의 목적은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는데 있지 않고 구약의 율법과 제도와 성전이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한 것이라는 구속사적 해석을 하는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언약궤와 관련하여 하나님이 보관하게 했던 물건들이 무엇이었는지에 주목하게 하고 그것들이 무엇을 예표하는지에 대해 관심을 갖게 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의 의도로 보면 그것들이 언약궤 안에 있었는지 밖에 있었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세 종류의 물건들이 언약궤와 관련되어 무엇을 예표하고 있는 것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들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바, 예수 그리스도의 직분(왕, 제사장, 선지자)과 관련된 표호들입니다.


마태복음 22:34-40
34. 예수
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35.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 예수
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로마서 13: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요한복음 15: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요한복음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세례(洗禮) 마태복음 3:11 오순절 사건은 일회적 사건인가?

   파트리스교회 수요 성서 연구 #. 1 물세례와 불세례(2020-06-10)

세례(洗禮) 마태복음 3: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

구약의 마지막 책은 “말라기”입니다.
신약의 첫 번째 책은 “마태복음”입니다.
구약 ‘말라기’와 신약 ‘마태복음’은 종이 한 장의 차이로 느껴집니다. 그러나 성경의 역사를 살펴보면 구약 말라기와 신약 마태복음
사이는 “대략 400년” 이란 긴 세월이 있었습니다.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가 40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타날 징조가 전혀 보이지 않았던 시대이었습니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구약 말라기와 신약 마태복음의 400년의 기간을 “암흑의 시기” 또는 “침묵의 시기” 라고 합니다.
‘암흑의 시기’ 또는 ‘침묵의 시기’를 “신구약 중간 시대”라고도 합니다.

기독교 이외에 가톨릭교회와 유대교에서는 신구약 중간 시대에도 하나님은 말씀하셨다는 것을 강조하여 “외경”이란 말씀을 인정하고 사용합니다.

오래 동안 기다리던 메시아가 나타날 징조가 전혀 보이지 않던 때에 어느 날 광야에 낙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광야에 거주하는 낯선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 라고 외쳤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광야로 나와 요한의 외치는 소리를 들을 때 바로 이 사람이 메시아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요한은 나는 너희들이 기다리는 메시아가 아니라 다만 물로 세례를 주는 사람이다. 그러나 내 뒤에 오실 그 분은 너희들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며 실망하던 유대인들에게 메시아 신앙을 깨우쳤습니다. 요한의 외침을 듣고 많은 유대인들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외침에서 세 종류의 세례를 생각합니다.

첫째는 물세례(Water Baptism) ; 회개와 구원을 위한 세례
둘째는 성령세례(Holy Spirit Baptism) ; 구원의 확신과 보증을 위한 세례
셋째는 불세례(Fire Baptism) ; 심판을 위한 알곡과 죽정이를 구분하는 세례(불심판)

그런데 요한이 세례를 베풀었던 것은 분명하게 성경에 소개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풀 것이라고 하셨던 말씀은 어느 누구도 예수님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언제 예수님께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셨을까요?

세 종류의 세례를 베푸셨던 수여자(授與者)를 살펴봅시다.

첫째는 물세례(Water Baptism)는 누가 베풀었을까요?

예수님 당시에는 세례자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마태복음 3:5∼6,
이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그러나 오늘날은 교회에서 목사가 세례를 베풉니다.
주 예수를 믿는 (아무개)에게 내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베드로전서 3:21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둘째는 성령세례(Holy Spirit Baptism)는 누가 베풀었을까요?

성령째는 성령세례(Holy Spirit Baptism)는 누가 베풀었을까요?세례는 요한의 증거대로 분명히 예수님께서 베푸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언제 성령세례를 베푸셨으며 예수님께서 성령세례를 베푸셨다는 증거가 무엇일까요?

요한복음 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 하실 것이요. 

성령세례는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사람들에게 보내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성령을 “보혜사(保惠師)” 라고 합니다.

“보혜사(保惠師)”란 무엇인가?
- 지킬 보(保), 은혜 혜(惠), 스승 사(師)
보혜사란 “지켜주시고 은혜를 베푸시며 가르치시는 선생님” 이란 뜻입니다.

보혜사를 영어 성경에서 찾아보면 NIV에서는 “상담자(the Counselor)”, KJV에서는 “위로자(the Comforter)”, NASB에서는 “돕는자(the Helper)” 라고 합니다.

보혜사를 헬라어 성경에서는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 paraklétos)” 라고 합니다.

1. 옹호자(an advocate), 중보자(intercessor),
2. 위로자(a consoler), 위로자(a comforter), 돕는자(helper),
3. 변호사(Paraclete)

예수님께서 언제 누구에게 성령세례를 베푸셨습니까?

사도행전 2:1∼4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오순절날 성령 강림 사건은 예수님께서 성령세례를 베푸셨던 사건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때 불세례도 함께 베푸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복음서를 자세히 관찰하면 성령과 불이라는 용어가 마태복음 3장과 누가복음 3장에서는 사용하였으나 마가복음 1장과 요한복음 1장에서는 성령이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성령과 불로 라고 모든 복음서에서 말씀하셨다면 불세례도 오순절 날 임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하셨을까요? 그러므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바르게 읽어야 합니다.

셋째는 불세례(Fire Baptism)는 누가 베푸셨을까요?

세례자 요한에 의하면 성령세례와 불세례는 예수님께서 베푸실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성경을 폭 넓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령과 불세례에 대한 말씀을 마태복음 3장과 누가복음 3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서는 성령세례만을 말씀합니다.

이제 성경을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3: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12절,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불세례”는 불로 심판하실 것을 의미합니다.

마가복음 1: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 

9절,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리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누가복음 3:16,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17절,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요한복음 1: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34절,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하니라.  

참조 / 성령세례(사도행전 1:5, 11:16, 고린도전서 12:3)

“성령세례와 불세례”에 대해서 언급한 성경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이외 성경에서는 오직 “성령세례”만을 말씀합니다.

이와 같은 성경의 증거에서 성령세례는 예수님께서 베푸신 것이 분명하게 소개되었습니다. 그러나 불세례는 예수님께서 베푸신 것이 아닙니다.

다만 불의 혀 같이 갈라진다는 것은 불이 다양하게 갈라져서 오순절 날 한 자리에 모여 있었던 다양한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재 했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불세례는 누가 베푸셨을까요?
사도행전 2:1∼3,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 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오순절 날 성령의 임재가 나타났을 때 마치 성령은 강한 바람 소리로 들렸습니다. 불의 혀가 갈라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바람이 아닙니다. 성령은 불이 아닙니다. 다만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은 모여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 임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성령세례와 불세례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지워버려야 합니다.

헬라어 성경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
(βαπτίσει ἐν Πνεύματι Ἁγίῳ καὶ πυρί)
- will baptize with the Spirit Holy and fire  

세례 요한은 요단강에서 많은 유대인들에게 세례를 베풀면서 장차 오실 그 분께서는 “성령(프뉴마)과 불(푸르)”로 세례를 베풀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이렇게 외쳤던 요한의 증언은 공생애 기간 동안 예수께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세례를 베풀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시는 그 분이 그토록 기대하던 “메시아”라고 기다렸으나 예수께서 세례를 베풀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으며 사십일 후에는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사도행전 1:3).

이렇게 번역된 데는 헬라어 접속사 “카이(καὶ)”의 뜻을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는데 “카이”는 “등위 접속사”로서 “그리고(and)” 라고 하여 앞의 것과 뒤의 것을 동등하게 생각합니다.

따라서 “성령과 불”이라고 할 때 성령과 불을 동등한 것으로 해석합니다. 이제까지 성령과 불을 이렇게 등위 접속사로 해석한 것입니다. 그러나 등위 접속사가 아니라 우위 접속사로 해석하면 전혀 그 의미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직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만 성령과 불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불세례는 특별한 용법으로 사용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위 접속사”인 “또는(or)”의 뜻으로도 사용된다. 여기서는 바로 우위 접속사로 사용된 것이다. 따라서 '성령과 불로'로 번역된 “엔 프뉴마티 하기오 카이 퓌리(ἐν Πνεύματι Ἁγίῳ καὶ πυρί)”는 “성령 또는 불안에서” 라는 뜻이다.

이러한 사실은 성경 본문의 문맥과 사(四)복음서를 비교하여 연구해보면 더욱 확실히 증명된다. 먼저 우리는 “성령과 불로”라는 말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만 나오고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는 “성령과 불로”가 아닌 “성령으로” 라고만 표현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또한 사도행전 1:5에서도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고 하여 불에 대한 언급 없이 “성령으로” 라고만 되어 있으며 사도행전 11:16과 고린도전서 12:13에서도 역시 “성령으로”라고말씀합니다.

이와 같은 여러 성구들을 참조할 때 주님이 신자들에게 주시는 세례는 오직 “성령으로” 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불”의 의미는 별도의 뜻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세례” 라는 것은 “성령 안에 잠기운다”라는 뜻으로 여기서 보더라도 “침례” 라는 말이 의미를 더 잘 통하게 한다. 만일 “세례”라고 하면 “성령으로 씻긴다”는 말이 되므로 오히려 이해하기 힘들게 된다.

성령은 영으로 다시 오시는 그리스도(요 14:18∼19)이므로 '성령 안에서 침례'라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을 상징하되 '생명의 연합'을 뜻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 함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성령 안에서 침례'는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행 2:38, 행 19:2)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 되는 것(고전 3:16-17)'과도 같은 말이 되는데 결국 우리와 주님과의 상호내주(Inter-Residence)를 뜻한다.

한편 요 4:24의 "하나님은 영이시니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에서 '신령으로'라는 말은 “엔 프뉴마”로서 원 뜻은 “성령 안에서”라는 뜻이다. 이 말씀의 의미 역시 '성령을 받음'으로 '주님을 모시는 것'이 되며 이는 곧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하는 뜻이다.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아버지께 예배를 드려야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자는 아무리 열심히 예배드려도 소용없다는 것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서는 예배드리는 자가 먼저 주님과 하나가 될 때만 가능한 것이다.

이상으로 볼 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요 3:5)'고 할 때 '물'과 '성령'의 의미가 모두 해석되는 것이다. 즉 '물'은 죄를 씻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물 안에 잠김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의 연합'을 상징하는 뜻이며 '성령'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상징하는 것으로 성령 안에 잠긴다는 뜻은 '그리스도와 생명의 연합'을 상징하는 것이다. 즉 죽었다가 살아나는 원리가 포함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불로 세(침)례를 주신다'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알아볼 차례가 되었다. '불로 세례를 주신다'라는 말씀은 직역하면 '불 속에서 세례를 주신다'는 말로서 신자와는 전혀 관계없고 불신자에게만 해당하는 말씀이다. 즉 불신자는 성령 안에 잠기게 하는 대신에 '불 속에 잠기게 한다'라는 의미로서 결국 '심판을 받는다'는 뜻이다.

이제 세례에 대한 용어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세례(밥티조)란 물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을 말합니다.
물속에 들어갔다는 것은 완전히 죽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물 위로 다시 올라올 때는 과거의 나 즉 옛 사람은 죽었고 이제부터는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물세례는 회개와 구원의 표시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회개와 구원의 표를 받았지만 공중권세를 잡은 사탄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 살면서 때로는 알게 모르게 죄를 짓게 됩니다. 이렇게 죄를 짓게 될 때 사탄은 정말 네가 구원을 받았느냐?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아직도 그렇게 살아가느냐? 하며 조롱하고 비난할 때 정말 내가 회개하고 구원을 받았는가? 하고 의심할 때가 있습니다. 이때 성령세례가 구원을 보증합니다.

고린도후서 1:22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고린도후서 5: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히브리서 7:22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성령세례가 보증하는 것은 "생명"입니다.
로마서 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불세례는 심판 즉 소멸하는 것을 말합니다.

신명기 4:24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오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

히브리서 12:29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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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약 자료

주제 ; 세례
- 세례(씻을 세, 예도 예)와 침례(잠길 침, 예도 예)
- 밥티조(물속에 잠기다)

성경 ; 마태복음 3:11

종류 ;

 1. 물세례(회개와 구원) 베드로전서 3:21

 2. 성령세례(생명의 보증) 보혜사(요한복음 15:26)
 - 로마서 8:2, 요한복음 6:63, 고린도후서 1:22, 5:5, 히브리서 12:29

 3. 불세례(심판, 알곡과 죽정이)
- 신명기 4:24, 히브리서 12:29
- 마태복음 3:12, 누가복음 3:17

*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요
- 전치사 "과"(카이)
 등위접속사로 해석할 때는 성령과 불을 같은 것으로 이해
 우위접속사로 해석할 때는 성령과 불은 서로 다른 것으로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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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1-2022(금)
성령세례

"오순절 사건은 더 이상 일어날 수 없다"

이와 같은 주장은 "비성경적"이다.
왜냐하면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첫째,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은 '전지전능(全知全能) 무소부재(無所不在)' 하신다.
이 속성은 한 마디로 "영원성(永遠性)"이다.
영원이란 어느 시대에는 나타나고 어느 시대에는 소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오순절 사건은 지금도 앞으로도 마지막 그 날까지 지속될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이름

"아니 엘 샤다이"라는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은 영으로 존재하시며 그 영은 지금도 계속적으로 역사하는 영이다.

셋째, 바울의 증거


고린도전서 2:9-10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바울의 성령은 통찰하는 영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영은 구약에서 이미 말씀하신 것을 통하여 계속된다.

신명기 29:4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신명기 30:6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레위기 18:5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로마서 11:8
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까지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

구약에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주셨다.
그런데 그 율법을 그의 백성들이 지킬 수 없다고 하였다.
그 이유는 그의 백성들에게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킬 수 없기 때문에 구원을 받을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마음에 할례를 받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강조하였다.

로마서 2:28-29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조선족


중국에서는 ‘조선족’이라 부르고, 한국에서는 ‘중국 동포’라고 부른다.

1949년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졌다. 중국 동포는 그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1949년 이전은 다시 1910년(경술국치)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다.

1910년 이전에는 수해와 가뭄 등 자연재해로 인한 조선인의 만주 이주가 아주 활발히 이루어졌다. 당시 청나라는 봉금령을 폐지하고, 만주 일대를 전문 개간 구역으로 지정했다. 황무지를 개간하기 위해서였다. 많은 조선인이 건너가 특유의 근면성으로 황무지를 개간해 농사를 지었다. 농작물을 추수할 때가 되면 청나라 관리들이 와서 약탈을 했다. 부패한 관리들을 관청에 신고하고 투쟁하며 자신의 권리를 찾는 과정이 중국 기록에도 남아 있다.
만주, 특히 간도 지방은 역사적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지역이었다. 국경 개념도 애매해 당시에는 자유롭게 오가던 곳이었다.
1905년에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 전초 단계가 됐다.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는 애국자들이 만주로 급격하게 이주했고, 만주는 항일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됐다.
당시 청나라는 서방 외세의 침략과 일본의 침략을 동시에 받고 있었다. 외국인 선교사는 만주 일대에서 자유롭게 선교 활동을 했다. 만주에 살던 우리 민족도 자연스럽게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됐다. 1907년 간도의 용정촌에 윤동주 시인이 다녔던 명동학교가 설립되는 등 종교와 교육 기관 등이 생겨났다.
청나라는 쇠퇴해 결국 멸망했고, 1912년 신해혁명으로 중화민국이 수립됐다. 1945년 우리나라는 해방됐고, 이어서 남과 북으로 분단됐다. 남한에는 자유민주주의, 북한에는 공산주의가 들어왔다.
중국은 1949년에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했다. 1952년에는 연변 조선족 자치구를 인정했다. 1954년에 조선족은 소수 민족으로 인정됐고, 중국 국민으로 정식 등록됐다.
그 전만 해도 조선족은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를 자유롭게 왕래했다. 일제 강점기 때는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투쟁한 우리 민족이었다. 생활 터전은 만주땅이었지만, 만주와 한반도는 언제든지 오갈 수 있었다. 본인의 선택이 아니라 역사적 상황 때문에 중국 동포가 된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 냉전 시대에 한국과 중국은 외교 관계가 없었다. 조선족은 북한하고만 왕래하며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해야했다. 한국에는 올 수가 없었다. 1992년 한중 수교가 되고 나서야, 중국 동포가 일자리를 찾아서 한국으로 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3개월짜리 비자만 허용해 불법 체류자가 대다수였다. 2007년 방문 취업제도를 시행해 비로소 합법적인 한국 입국과 취업이 가능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