밧세바가 아니라 우리아의 아내라고 하셨을까?

예수님의 족보(마태복음 1:6)

이새다윗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성경을 읽을 때 주의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1. 선입견(先入見)
2. 편견(偏見)
3. 고정관념(固定觀念)

미국 영화의 등급제

G(General) 등급은 누구나 관람할 수 있다는 영화.

PG(Parental Guidance) 등급은 부모의 감독을 받아야만 볼 수 있는 영화
예를 들면 PG 13은 13세 이하는 부모의 감독을 받아야 한다는 영화

R(Restricted)의 약자로 폭력적이고 성적인 내용이 많아 16세 이상이 관람할 수 있는 영화  

영화의 등급에 따라 성경의 이야기를 적용한다면 상당한 어떤 내용은 R 등급에 속한 것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대표적인 이야기는 우리아(Urias 또는 우리야, Urias. 여호와는 빛)의 아내 밧세바(Paddan, 맹약의 여자)에 대한 이야기라고 하겠습니다.

"우리야의 아내" 글자 수로는 여섯 글자입니다.
그러나 여섯 글자 안에 엄청난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우리야 또는 우리아라고도 합니다.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빛이시다"
우리아를 "헷 사람" 이라고 합니다.
헷 사람이 누구인지 살펴야 합니다.

"헷 사람 우리아"라는 짧은 문구에서 우리는 여섯 글자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밧세바엘리암의 딸이요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사무엘하 11:2-5)
우리아는 다윗의 37인 용사에 속한 인물이었으며(삼하 23:39) 밧세바는 다윗의 충성된 신하의 아내이었습니다.
 
우리아는 가나안 족 즉 이방인으로 여호와의 신앙을 받아드린 인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이름의 의미가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아라는 이름의 의미는 "여호와는 나의 빛" 이라는 뜻입니다.
 
우리아헷 사람이라고 상기시킴으로 이방인인 그가 이스라엘의 왕보다 더 의로움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그렇게 전사했다.
아니 살인을 당했다.
그것도 자신의 아내를 빼앗은 자에게, 자신이 그렇게 충성을 다 바쳤고 신뢰했던 자에게서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마태복음 1장 6절의 예수님의 족보를 보면 다윗은 우리아(개역한글판의 마태복음에서는 우리야라고 표기하고 있음)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라는 대목이 나온다.

두 가지의 의미를 묵상해 볼 수 있다.

먼저 밧세바라고 해도 되는 것을(마 1:5, 라합, 룻) 우리아의 아내라고 하므로 우리아에 대한 명예 회복적인 의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비록 비명에 죽었으나 족보에 언급됨으로써 그를 기억해 주는 기능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삶을 산 사람을 궁극적으로 높이시는 분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다윗 개인의 삶에는 커다란 오점이요, 다윗의 집안에는 칼이 떠나지 않게 한(삼하 12:10) 우리아 사건을 상기시킴으로써 결국 이러한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강조하고 있다.

그분은 불완전한 인간들을 통해 오셔서 그 가운데 구원을 베풀러 오셨음을 그분의 족보를 통해 상기시켜 준다.
동시에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감당하신 그분의 사랑과 은혜의 깊이를 느낄 수 있게 한다.

인간적 관점에서 우리아는 비록 억울하게 죽었지만 하나님 앞에 끝까지 충성스러운 종의 삶을 살았다(삼하 11장). 
이 점에서 그는 하나님 앞에서 큰 상을 얻었습니다.
우리아가 받은 상급은 밧세바라고 기록되야 할 자리에 밧세바가 아니라 우리아의 아내라고 우리아의 이름이 예수님의 족보 즉 왕의 족보 구세주의 족보에 이방 사람이었으나 하나님을 믿고 따름으로 받은 상급이라고 하겠습니다.
 
그의 삶과 죽음은 성군 다윗이 속으로부터 부패한 인간 존재로서 하나님 앞에 죄인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주었고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라면 성군 다윗도 아무 것도 아님을 증명해 주었다.

헷 사람이란 헷 족속에 속한 사람을 말합니다.
헷 족속은 노아의 세 아들 셈과 함과 야벳 중에서 함의  아들 가나안의 아들을 말합니다.
노아와의 관계는 손자가 됩니다.
헷 족속은 오래 전부터 가나안 땅에 거주하던 원주민이었습니다(창세기 15:20)
헤브론 지역(창 23:3-20))과 가나안 중앙 산지에 거주(민 13:29)하였으며 가나안에 가주한 족속 중에서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한 족속이었습니다(수 1:4).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하수 유브라데에 이르는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지는 편 대해까지 너희 지경이 되리라.

헷 족속으로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1. 에서의 아내 유딧과 바스맛(창세기 26:34)
2. 에브론(창세기 23:10)
3. 아히멜렉(사무엘상 26:6)
4. 우리아(사무엘하 23:39)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거주할 때 막벨라 굴을 팔았습니다(창세기 23:9)

이제까지 예수님의 족보를 소개 할 때마다 예수님의 족보에는 네 명의 여자들의 이름이 소개되었다고 소개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7월29일(수) 마태복음 1장을 오늘의 묵상을 위한 말씀으로 읽으면서 네 명의 여자들이 아니라 세 명의 여자들이었고 한 명의 남자 이름이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물론 예수님을 낳은 마리아를 포함하면 네 명의 여자와 한 명의 남자라고 하겠습니다.

헷(Hittites) 사람 우리야(우리아)

가나안의 아들들 가운데 두 번째로 이름이 나오는 사람인 의 자손으로 이루어진 민족(15,  18).

15, 가나안은 장자 시돈을 낳고.
18, 아르왓 족속스말 족속하맛 족속의 조상을 낳았더니 이 후로 가나안 자손의 족속이 흩어져 처하였더라.

따라서 그들은 함족이었다(창세기 10:6).

의 아들은 구스미스라임가나안이요.

우리아의 충성

첫째, 헷 사람

헷 사람이란 이방인을 의미합니다.
이방인이면서도 예수님의 족보에 기록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사건입니다.
헷 사람이란 노아의 아들 함의 후손으로 함이 낳은 아들 가나안의 후손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상당한 강한 세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서 막벨라 굴을 구입할 때 막벨라 굴이 헷 사람의 땅이었습니다.

모세가 죽은 후에 후계자 여호수아에게 명하셨던 이야기를 여호수아 1:1∼4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시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일러 가라사대.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하수 유브라데에 이르는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 지는 편 대해까지 너희 지경이 되리라.   

둘째 충성(忠誠)

우리아 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빛이시다"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처럼 우리아는 빛과 삶을 실천했던 충성스런 사람이었습니다.

우리아의 충성스런 모습은 전쟁터에 나가라고 명하면 그 명령에 따라 전쟁터에 나갔습니다. 전쟁터에서 돌아오라고 하면 전쟁터에서 돌아왔습니다. 다시 전쟁터로 나가라고 하면 전쟁터로 나갔습니다. 가장 치열한 전투에 참가하라고 하면 그 전투에 앞장서서 싸우다가 전사했습니다.

그러나 다윗 왕이 전쟁터에서 불러 왕궁에서 맛있는 음식과 더불어 술을 주어 마시고 취하게 한 후에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 집으로 돌아가라고 명했으나 그 명령을 거역하고 왕궁에서 머물렀습니다. 다윗 왕은 우리아의 강직한 모습에 두려움을 느끼고 전쟁터에서 지휘를 하던 요압 장군에게 편지를 쓰고 그 편지를 우리아에게 전달하게 했습니다. 다윗 왕의 편지 내용은 우리아를 가장 치열한 전투 맨 앞에 내세워 죽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아는 결국 치열한 전투에 앞서서 나갔다가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우리아는 개죽음을 당한 것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잊혀 질 수밖에 없는 우리아라는 이름을 예수님의 족보에 올려주셨습니다. 밧세바라는 이름이 기록되어야 할 그 자리에 헷 사람 우리아라고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충성하라는 주님의 명령

충성(忠誠)이란 무엇입니까?
우리아를 통해 볼 수 알 수 것은 우리아는 매우 우직한 사람이었습니다.
전투에 나가라면 나가고, 궁궐에 오라면 오고, 편지를 써서 가져가라면 가져가고, 성 밑에 가서 싸우라면 싸우고, 죽으라면 죽는 철저한 군인정신을 가졌던 우직한 사람이었습니다.

현대 사회의 특징은 "우직한 사람이 적다"는 것입니다.
정보의 홍수 시대를 살아가기 때문에 보고 듣는 정보의 양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 실천할 능력이 부족합니다. 이런 현상이 사람들을 이상하게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잔 꾀" 라는 말을 들어보셨지요?
"잔 머리 굴리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정보의 양은 많은데 많은 정보를 소화하지 못하고 실천하지 못하므로 나타나는 기현상이라고 하겠습니다.

우직하게 기도하는 사람이 충성스런 사람입니다.
우직하게 성경을 읽는 사람이 충성스런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셨습니다.
소금으로 살아야 합니다.
소금은 음식에 들어가면 완전히 녹아서 없어집니다.
나라고 하는 모습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나를 고집합니다.
내가 없어지면 나는 망하는 줄 알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빛은 어두운 곳에서 방향을 알려줍니다.
세상의 빛이 되기 위하여 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빛으로 드러나야 할 텐데 빛이 아니라 오히려 빛을 덮어버려 더 어둡게 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는 헷 사람 우리아처럼 충성스런 사람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우리의 조국 자유대한민국이 헷 사람 우리아와 같은 일군을 찾고 있습니다.
우리가 거주하고 있는 뉴욕이 헷 사람 우리아와 같은 일군을 찾고 있습니다.

우리아는 모든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전쟁터에 나가 있는 요압 장군과 군사들을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가서 아내와 잠자리를 가지라는 명령에는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왜 거절했을까요?

이것을 알기 위해 전쟁이 도대체 무엇인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 전쟁이란 거룩한 싸움이었습니다.
거룩한 싸움을 "성전(聖戰)" 이라고 합니다.
전쟁은 거룩한 싸움이었기 때문에 전쟁터에 나갈 때 항상 하나님의 궤를 갖고 나갔습니다.
전쟁은 하나님의 진 가운데서 진행되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거룩한 진이 있기 때문에 여자들은 진에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우리아는 지금 진과 함께 있으므로 집으로 돌아가 아내와 동침하라는 명령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충성해야 할까요?

성령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도움을 약간만 받는 것이 아니라 아주 많이 받아야 합니다.
너무 많이 받아서 내 속에서 흘러넘쳐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기도하겠습니다.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이 시간 저희들에게 성령으로 넘치도록 채워주셔서
우리가 하는 말이 주님의 언어와 같이 들려지게 하시고
우리가 하는 행동이 주님이 베푸시는 사랑과 같이 나타나게 하셔서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에 시달리는 많은 영혼들에게 소망이 되며 위로가 되고
우리와 더불어 영생의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충성스런 일군 모세(민수기 12:7)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라.

히브리서 3:5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히브리서 3:6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

시편 101:6
내 눈이 이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거하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수종하리로다.


잠언 25:13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하느니라.

잠언 28:20
충성된 자는 복이 많아도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는 형벌을 면치 못하리라.

누가복음 16:10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갈라디아서 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아브라함은 가나안으로 이주했을 때 그곳에 거주하고 있던 헷 사람들과 얼마의 접촉을 가졌다.
그 전에 여호와께서는 헷 민족을 포함해서 여러 나라 사람들이 살고 있는 가나안 땅을 아브라함의 씨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신 적이 있었다(창 15:18∼21).
그렇지만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아모리 사람들(종종 가나안에 있는 나라들을 전체적으로 지칭하는 데 사용된 용어)의 잘못이 아직 온전히 차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다(창 15:16).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그 땅에 대한 헷 사람들의 소유권을 존중해 주었으며, 자기 아내 사라가 죽자 사라를 장사 지낼 동굴을 얻기 위해 헷 사람 소할의 아들 에프론과 거래하였다(창 23:1∼20).

여호수아 시대에 헷 사람들은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강 유프라테스 강까지, 곧 헷 사람들의 모든 땅”을 망라하는 지역에 거주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수 1:4). 그들은 주로 산간 지방에 살고 있었던 것 같은데, 여기에는 레바논과 어쩌면 시리아의 여러 지역도 포함되었을 것이다(민 13:29, 수 11:3)

노아의 저주 아래 있게 되다 헷 사람들은 가나안의 자손이기 때문에 노아가 가나안에게 내린 저주 아래 있었으며, 이스라엘이 그들을 복종시켰을 때 창세기 9:25∼27에 있는 노아의 말이 성취되었다. 헷 사람들의 종교는 다른 가나안의 종교들처럼 틀림없이 남근 숭배를 행하는 이교였을 것이다. 아브라함의 손자 에서가 헷 여자들과 결혼했을 때, 이것은 에서의 아버지와 어머니인 “이삭과 리브가에게 영의 비통함의 근원”이었다(창 26:34∼35, 27:46)

하느님께서는 헷 사람들과 그들과 함께 언급되는 여러 나라들이 차지하고 있던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묘사하셨다(출 3:8). 하지만 이러한 나라들은 매우 타락하게 되어, 그 땅에 그들이 있는 것으로 인해 그 땅은 더럽혀졌다(레 18:25, 27).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교제하여 그들의 타락하고 불결한 행위에 빠지는 것의 위험성에 관해 이스라엘에게 많은 경고를 하셨다. 그분은 여러 가지 부도덕한 행위들을 열거하시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러한 행위들을 행하는 것을 금하신 다음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것들 가운데서 어떤 것으로도 너희 자신을 부정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헷 사람들을 포함하여] 내가 너희 앞에서 쫓아내는 나라들이 이 모든 것으로 자신을 부정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레 18:1-30.

멸망이 선고되다 헷 사람들은 멸망에 바쳐져야 할 것으로 이름이 언급된 일곱 나라 가운데 하나였다. 이 나라들은 이스라엘보다 “인구가 더 많고 강대한” 것으로 묘사되었다. 따라서 당시 이 일곱 나라는 틀림없이 인구가 삼백만 명이 넘었을 것이며, 산악 지방을 본거지로 삼고 있는 헷 사람들은 만만찮은 적이었을 것이다. (신 7:1, 2) 그들은 이스라엘이 요르단 강을 건넜고 도시들인 예리코와 아이를 멸망시켰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가나안의 다른 나라들과 모여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과 싸움으로 적의를 나타냈다.(수 9:1-2, 24:11). 그러므로 헷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잃게 만드는 일이 없게 하려면, 그들의 도시는 멸망되어야 했고 그 주민들은 멸절되어야 하였다. (신 20:16-18)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명령을 철저히 이행하지 않았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 그들은 불순종하여 이 나라들을 제거하지 않았으며, 이 나라들은 옆구리의 가시로 그리고 그들을 항상 괴롭히는 것으로 남아 있었다.—민 33:55, 56.

후기 역사 이스라엘이 가나안 나라들을 완전히 멸망시키지 않았고 그래서 하느님께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선언하셨다. “나는 말한다.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지 않을 것이니, 그들은 정녕 너희에게 올무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은 너희에게 유혹물이 될 것이다.’” (판 2:3) 이스라엘 가운데 남아 있던 가나안 사람들은 관대한 대우를 받았으며, 드문 경우이지만 존경받고 책임 있는 지위를 받기까지 하였다. 가나안 나라들 중에서는 헷 사람들만이 하나의 나라로서 지위와 세력을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왕첫 10:29; 왕둘 7:6.

다윗 군대에 속한 군인 중에는 두 명의 헷 사람 즉 아히멜렉과 우리아가 있었는데, 이들은 장교들이었던 것 같다. 우리아는 이스라엘이 적들에게 승리를 거두는 일을 위해 열심을 나타내는 인물이었고,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관계를 가졌고, 뒤이어 우리아를 전투에서 위험한 위치에 배치하여 그곳에서 죽게 하였다. 이 때문에 다윗은 하느님께 처벌을 받았다.—삼첫 26:6; 삼둘 11:3, 4, 11, 15-17; 12:9-12.

솔로몬 왕은 헷 사람들 가운데 남자들을 동원하여 노예처럼 강제 노역을 하게 하였다. (대둘 8:7, 8) 그런데 헷 여자들을 포함한 솔로몬의 타국인 아내들은 솔로몬이 자신의 하느님 여호와에게서 돌아서게 만들었다. (왕첫 11:1-6) 헷 사람들은 이스라엘 왕 여호람 통치(기원전 917-905년경) 때에는 왕도 있었고 전투 능력도 보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성서에 언급되어 있다. (왕둘 7:6) 하지만 시리아와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가 그 땅을 정복했을 때 하나의 세력으로서 헷 사람들은 무력해진 듯하다.

이스라엘이 기원전 537년에 유배에서 회복된 뒤에, 이스라엘 백성과 심지어 일부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은 가나안 민족들의 여자들과 결혼하고 자기들의 딸을 가나안 사람들에게 주었는데 그중에는 헷 사람들도 있었다. 이것은 하느님의 율법을 범하는 일이었다. 이 때문에 에스라는 그들을 질책하고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 그들이 타국인 아내들을 내보내기로 합의하게 하였다.—라 9:1, 2; 10:14, 16-19, 44.

비유적 용법 여호와께서는 예언자 에스겔을 통해 말씀하시는 가운데, 예루살렘에 대한 말씀에서 “헷 사람”이라는 표현을 비유적으로 사용하셨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의 근본과 태생은 가나안 사람의 땅이었다. 네 아버지는 아모리 사람이었고, 네 어머니는 헷 사람이었다.” (겔 16:3) 여호와께서 자신의 이름을 그 위에 두신 나라의 수도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이 그 땅에 들어왔을 당시 여부스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던 도시였다. 하지만 가장 두드러진 부족이 아모리 사람들과 헷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이들이 여부스 사람들을 포함한 가나안 나라들을 대표하는 사람들로 사용된 듯하다. 따라서 그 도시의 유산은 보잘것없었지만, 여호와께서는 그 도시를 아름답게 하셨다. “여호와의 왕좌”에 앉은 다윗 왕을 통해(대첫 29:23), 그리고 시온 산 위에 있던 계약의 궤와, 끝으로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지은 찬란한 성전으로 인해, 예루살렘의 명성은 나라들 가운데 널리 퍼지게 되었다. 하지만 예루살렘은 그 주변의 가나안 나라들처럼 타락하고 부도덕해졌으며, 이 때문에 여호와께서는 결국 그 도시를 황폐시키셨다.—겔 16:14, 15.

정체를 밝혀내려는 세속 학자들의 노력 역사가들과 고고학자들은 성서에 나오는 헷 사람들이 세속 역사에 나오는 어떤 민족들인지를 밝혀내려고 애써 왔다. 그들은 주로 언어학적인 방법 즉 소리나 철자가 비슷해 보이는 단어들을 비교하는 방법을 근거로 같은 민족을 밝혀낸다.

아시리아의 설형 문자 문헌들에는 “하티”가 자주 언급되어 있는데, 대개의 경우 문맥에서는 하티가 시리아나 팔레스타인에 있었음을 알려 준다. 그러한 내용들은 성서에 나오는 헷 사람들을 언급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이 “하티”라는 표현에 근거하여, 학자들은 성서에 나오는 헷 사람들(Hittites)을, 가나안 땅에서 북쪽으로뿐 아니라 서쪽으로도 멀리 떨어져 있는 소아시아에 수도를 둔 소위 히타이트(Hittite) 제국과 동일시하려고 한다. 그들이 그렇게 하면서 사용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은데, 그렇게 하는 가운데 그들은 서로 다른 세 부류의 사람들을 관련시킨다.

헷 사람들과 “동일시되는” 세 민족 집단 소아시아의 아나톨리아(현재 터키로 불리는 지역의 일부)에서는 이전에 “하투샤시”라고 불리던 보가즈쾨이에서 많은 고대 문헌들이 발굴되었다. 이곳은 현대의 학자들이 하티라고 불러 왔고 그 주민이 “하티어”를 사용하던 나라의 수도였다. 초기의 이 민족은 정복자들에게 침략을 당한 것 같은데, 그 정복자들은 다른 언어, 즉 학자들에 의하면 인도·유럽 어족에 속하는 한 언어를 들여왔다고 한다. 이 언어는 설형 문자를 사용했으며, “설형 문자 히타이트어”라고 불린다. 후에 이 설형 문자는 상형 문자를 사용하는 또 다른 인도·유럽 어족 언어로 대치되었는데, 이 언어는 “상형 문자 히타이트어”라고 불린다. 이 언어로 쓰여진 실례가 될 만한 문헌들은 소아시아와 시리아 북부, 이 두 곳 모두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학자들은 이 세 가지 언어가 세 개의 민족 집단이 존재하였음을 보여 준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가운데 어떤 사람들도 성서에 나오는 헷 사람들이었다는 증거가 없다. 소위 설형 문자 히타이트어에 관해서, 마르틴 노트는 이렇게 기술하였다. “‘히타이트’라는 용어는 고대 문헌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현대의 연구가들이 이 언어와 소아시아의 하티 왕국 사이의 역사적 관련성에 의거하여 만들어 낸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히타이트 상형 문자”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히타이트라는 관례적인 용어를 그 문자들에 적용시키는 것은 부적절하며 혼란을 초래한다.” (「구약 성서의 세계」 The Old Testament World, 1966년, 231면) 또 다른 역사가인 E. A. 스파이저는 이렇게 결론짓는다. “성서에 나오는 헷 사람들에 관한 문제는 ··· 복잡하다. 우선, 성서 어느 구절에 헷 사람들(Hittites)이 나오든 간에, 그것이 어떤 히타이트인들을 말하는 것인지, 즉 하티인들인지, 설형 문자 기록을 사용한 인도·유럽 어족의 히타이트인들인지, 아니면 상형 문자를 사용한 히타이트인들인지부터가 문제이다.”—「유대 민족의 세계사」(The World History of the Jewish People), 1964년, 1권, 160면.

위의 내용을 볼 때, 성서에 나오는 헷 사람들을 하투샤시를 수도로 삼았던 “히타이트 제국”과 동일시하는 어떤 견해도 증명되지 않은 추측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불확실한 점들 때문에 본 출판물에서는 세속 역사 속의 “히타이트인들”을 언급할 때는 대개 따옴표를 사용하여, 독자에게 그들의 정체에 대한 그러한 견해가 증명되지 않은 것이며 우리는 그러한 견해가 결정적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증거가 강력하다고는 보지 않는다는 것을 상기시키고 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족보가 주는 의미

창세기 5장에는 많은 사람의 이름을 담은 족보가 나옵니다.
성경에서 족보를 자주 소개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족보는 성경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점, 그리고 유한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동시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이 성취되어 간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1975년 한국인의 평균 수명은 남성이 60세, 여성은 68세였습니다.
2005년에는 남성 76세, 여성 83세로 늘어나 평균 80세 정도가 되었습니다.
고려 시대 왕들의 평균 수명이 42세이고, 조선 시대 왕들의 평균 수명이 47세였던 것에 비하면 엄청나게 늘어난 것이고, 불과 30년 사이에 수명이 15년 이상 연장됐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의 수명은 차원이 다릅니다.
아담은 930세, 셋은 920세, 에노스는 905세, 가장 장수한 므두셀라는 969세까지 살았습니다.
365세라는 비교적 짧은 생애를 살았던 에녹을 제외하면 창세기 5장에 나타난 이들의 평균 수명은 912세나 됩니다.
홍수 이전에 장수한 사람들의 모습은 장차 천국에서 신앙인이 누릴 영원한 생명의 그림자 역할을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의 질병을 이기고 승리한 그리스도인은 주님 앞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을 소망하며 살아갑니다.
지상에서 오랫동안 사는 것은 주님의 축복입니다.
하지만 영원한 생명을 주신 주님을 생각하면 나그네 같은 땅 위의 삶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죽음이라는 운명을 피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소식은 근원적인 절망의 삶에 온전한 소망이 됩니다.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

어느 시대든 하나님은 사람을 택하고 세우셔서 그를 통해 구원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세상이 암흑으로 덮이고 인류에 죄악이 물결쳐도 시대를 거슬러 하나님을 향해 살아가는 경건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평범하게 흘러가는 족보 이야기 가운데 혜성처럼 빛나는 한 인물, 바로 에녹입니다.

그의 삶도 다른 사람들처럼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창 5:21~24).
단순한 그의 삶에 우리의 관심을 사로잡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입니다.
에녹의 삶에 동행이라는 말은 두 번이나 반복돼 그의 삶이 하나님과 전적으로 동행한 것이었음을 강조합니다.

어느 순간부터 그의 삶이 하나님께 헌신되었는지는 나타나지 않지만, 그는 365년의 생애 가운데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동행이란 ‘함께 걷다’ 또는 ‘함께 살다’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함께 걷고 살아간다는 것은 평소의 삶 자체를 보여 줍니다.

동행(同行) / 할라크(הָלַךְ)  

1. 가다
2. ㉠ 창7:18.㉡ 대하26:8.㉢ 수16:8.㉣ 느6:17.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으로 칭송받은 사람, 피조물이 창조된 목적대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그대로 실현했던 에녹이었습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 인류가 점점 죄악으로 물들어 갈 때, 에녹은 캄캄한 밤하늘에 혜성처럼 빛나는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기다리십니다.
시대의 흐름에 물들지 않고, 땅 위에 발을 디디고 살아가지만, 하늘을 향해 호흡하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자신의 행복이 최대 관심거리가 된 시대에 하나님의 영광을 향해 살아가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에녹이 평생 주님과 동행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름 아니라 매일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에녹은 매일 동행하기 위해 매 순간 주님께 의지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작은 결단입니다.
위대한 인생을 살려 하지 말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일평생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의 삶은 예수님의 일생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과 함께하셨고, 하나님 자신이셨던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셨고, 하나님의 뜻대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매 순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셨던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사람들, 이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

뿌리 없는 나무는 곧 시들어 말라버려 죽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의 뿌리가 있습니다.
Family Tree라는 말을 들어보셨는지요?
“가계도(家系圖)” 라고 합니다.
내 조상의 뿌리를 정리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의 신앙의 뿌리도 정리해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고 어떻게 봉사하며 섬겼는지 신앙의 이력서도 정리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오늘은 예수님의 족보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족보를 이야기할 때마다 예수님의 족보에는 네 명의 이방 여인의 이름이 기록되었다고 하는 설교를 자주 들었습니다. 이렇게 자주 듣던 설교 때문에 성경을 성경대로 읽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족보를 다시 살펴보면 네 명의 이방 여인의 이름이 아니라 세 명의 이방 여인의 이름과 한 명의 이방 남자의 이름이 정확하게 기록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런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성경을 읽을 때 습관적인 자세를 버려야 한다는 것을 알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성경 퀴즈 대회를 할 때에도 예수님의 족보에 나타난 이방 여인의 이름은 누구인가? 이런 질문도 있었습니다. 당연히 여리고 성의 기생 라합, 다말, 모압 여인 룻, 그리고 밧세바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런 대답에서 성경을 읽는 자세를 다시 한 번 더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세 명의 이방 여인들의 이름은 


우리아(Urias) / 뜻 - 빛

1. 헷 족속의 사람으로 다윗의 충성된 군인이요 미인 밧세바의 남편이다.

그가 랍바에 출정 중 다윗 왕이 그 처를 간통하고 그 죄의 자취를 감추려고 그를 소환 하여 집에 가서 편히 쉬라 하였으나 전쟁 중에 있는 동료들을 생각하고 불응하였다.

부득이 전쟁에 다시 보내며 대장 요압에게 편지하기를 우리아를 맹렬한 싸움의 제일 앞에 세워 죽게 하라고 하였다.

마침내 그는 전사하였다 애석하다, 충성된 군인이 불의의 화를 당함이여. 그 아내 밧세바는 다윗왕의 왕비가 되었다(삼하 11: 마 1:6).

2. 유대국 아하스 왕 때의 제사장으로 아하스 왕이 다메섹에 가서 보낸 우상의 제단 도형을 받아 그대로 만들어 왕으로 제사하게 하였다(왕하 16:20∼21).

3. 예레미야 선지자와 동시대의 선지자로서 여호야김과 나라에 대하여 예언을 하 였더니 그를 잡아 죽이려하므로 애급으로 도망하였다(렘 26:20∼21)>

밧세바(Bathsheba) / 뜻 -

밧세바는 엘리암의 딸이자 히타이트 사람으로 다윗의 부하 우리야의 아내였다. 어느 날 다윗이 밧세바가 목욕하는 것을 보고 그 아름다운 모습에 반하여 그 남편이 전쟁터에 나간 사이에 그녀와 여러 차례 정을 통하였다. 결국 밧세바가 다윗의 아이를 임신하게 되었고 다윗 왕은 밧세바를 영원히 차지하기 위해 자신의 부하이자 군대장관 요압에게 편지를 보내 도저히 살아올 수 없는 위험한 전투에 우리야를 내보내 우리야를 죽게 했다.

우리야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다윗 왕은 즉시 밧세바와 혼례를 올렸으며, 밧세바는 임신했던 첫째 아들을 낳았다. 하지만 예언자 나탄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다윗을 꾸짖고 저주하였고 아이는 일주일 만에 병으로 죽고 말았다. 이후 밧세바는 둘째 아들 솔로몬을 낳았고 이후 솔로몬은 다윗 왕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제3대 왕이 되었다.

다윗 왕 말기에 다윗의 넷째 아들 아도니야가 왕 행세를 하자 밧세바는 나단과 함께 이를 다윗에게 보고하여 아도니야의 반란에 미리 대처할 수 있었다. 밧세바에 관한 그 이후의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다윗과 밧세바 - 사무엘하 11장

1. 다윗의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었던 두 사람을 꼽으라면, 아마도 골리앗과 밧세바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살펴보면 이 두 사람은 완벽한 대조를 이룹니다. 골리앗을 만난 다윗은 아직 어리고 무명 이었며, 세상 경험도 많지 않았던 반면, 밧세바를 만났을 때 다윗은 왕이었고, 충분히 나이도 들었으며, 여러 가지 시련들을 극복하며 백성들로 이미 용기 있고 지혜로운 지도자로 인정받고 있던 때 이었습니다.

2. 이 둘의 외모 또한 극과 극이지만, 다윗과의 관계 측면에서는 유사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다윗을 일종의 시험장, 곧 그의 속마음이 어떠한지 드러내는 자리로 데려갔다는 사실입니다. 골리앗과의 만남에서는 다윗이 상황에 지배받기 보다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기도의 사람이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밧세바의 경우에는 그가 기도의 자리에 있지 아니한 것을 깨닫게 되고, 이후로 기도하는 자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게 됩니다.

3. 본문 당시의 상황은 계절 상 봄이었습니다. 당시의 관습에 따르면, 봄에 주로 전쟁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출전 중이었던 이스라엘 군대를 뒤로하고, 다윗은 궁전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다가 하루는 궁전 옥상을 거닐다 우연히 한 여인의 목욕하는 장면을 목격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왕으로서의 모든 힘을 과시하며 그 여인을 불러오고, 잠자리를 같이 합니다. 이는 기도하는 자의 정체성은 온데간데없고, 오직 자신의 사욕을 채우는 권력자의 모습만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4. 당시 그 여인,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는 전쟁에 나가있을 때였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밧세바는 자신이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되고 다윗 왕에게 전갈을 보냅니다. 밧세바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된 다윗 왕은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을까요? 다윗은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불러다가 휴가를 줍니다. 이러한 다윗의 반응에서 보여 지는 다윗 왕의 모습은 이미 세상일과 처세에 능하며, 어떻게 자신의 위기를 빠져나가야 할지를 알고 있는 모습입니다.

5. 하지만, 아무리 능수능란하여 상황은 만들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사람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아는 집에 돌아왔지만 동료들을 생각하며 편하게 잠자리를 갖지 않습니다. 우리아에게 술을 먹여보아도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다윗왕은 우리아가 마음대로 되지 않자, 우리아를 다시 전쟁터에 보내며 위험한 최전방에 배치하라고 지시합니다. 그리고 우리아는 전쟁터에서 전사하게 됩니다.

6.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다윗왕의 모습, 특별히 지도자로서 모습을 가지고 있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으로서의 모습이 아니라, 이 순간만큼은 하나님을 완전히 떠난 자의 정체성으로 자신의 사욕을 채우고 있는 탐욕스런 왕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윗 왕은 첫째로, 간음의 죄를 저질렀고, 둘째로, 간음한 자신의 죄를 덮으려고 한 여인의 남편을 고의적으로 죽게 한 죄를 범했습니다. 자신이 죄인으로 드러나는 것이 두려워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은 셈입니다.

7. 하지만 이것이 다윗의 저지른 죄는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사무엘하 11장 본문을 살펴보면, 의도적으로 보이리만큼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보내다" 라는 단어입니다. 다윗 왕은 군대를 보내고, 신하를 보내고, 전갈을 보내고 우리아를 보내고 사람을 보내고,,,등등 이 본문에서 '보내다'는 동사/표현이 반복적으로 사용됩니다. '보낸다'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신학적/신앙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8. 그런데 바로 다음 장인 사무엘하 12장을 보면, 다윗의 죄를 깨닫게 한 선지자 나단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12장 1절에 '보내다'라는 단어가 다시 등장합니다. "여호와께서 선지자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시니..." 어쩌면 성경의 저자는 다윗의 이야기를 전하며 수 많은 상황 속에 보내는 주체로서의 다윗을 서술하다가 마침내 선지자 나단을 등장시키며, 하나님의 보내심을 말합니다. 즉, 보내는 것은 어쩌면 하나님의 영역일지 모릅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윗은 사람들의 삶에 스스로 하나님 역할을 했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을 보내고, 전갈을 보내며 사람들의 삶을 조종했습니다. 이것이 다윗의 본질적인 죄입니다.

9. 그렇다면, 다윗 왕이 이러한 죄악의 길로 빠지게 되는 통로는 무엇이었을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예를 들어, 옥상으로 올라간 다윗의 행동이 문제였는지, 혹은 다 보이는 곳에서 목욕을 한 밧세바가 더욱 문제였는지 하는 사실여부도 다시 생각해봐야 합니다. 다시 말해, 어느 순간부터 잘못되었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본문의 상황 안에서 어떠한 행동 혹은 환경이 다윗으로 하여금 죄의 길로 들어서게 했는지 살보며 우리 역시 죄의 통로를 경계해야 합니다.

10. 알다시피 다윗은 사울에 이어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일종의 군사적인 이유에서 왕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삼상 8장을 보면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사무엘을 찾아가서 왕을 세워달라고 요청할 때. 사무엘은 그들에게 왕이 생겨나면 이러저러한 어려움이 있을텐데 괜찮을지 물어봅니다. "왕이 세워진 그 때는 너희 손으로 세운 왕을 인해서 하나님께 부르짖어도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으실 것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11. 하지만 사무엘의 말에 장로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백성이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하여 가로되 아니로소이다. 우리도 우리 왕이 있어야 하리니 우리도 열방과 같이 되어 우리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 (삼상 8장 19-20절) 그들의 말에 의하면 왕의 역할은 두 가지인데, 첫 번째는 백성을 다스리는 것과 둘째는 군사를 이끌고 앞에 나가서 전쟁을 지휘하는 것이었습니다.

12. 그런데 오늘 본문 1절에서는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해가 돌아와서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매.." 즉, 전쟁의 때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인 다윗은 요압과 그 신복 온 이스라엘 군대를 전쟁터로 보냈습니다. 원문의 표현에 보면 그 다음을 이렇게 말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예루살렘에 남아있었다.” 그리고 그는 저녁에 왕궁 지붕 위를 거닐다가 한 여인을 발견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13. 그렇다면 다윗이 죄로 빠지게 된 통로가 무엇이라고 생각됩니까? 그것은 나라가 전쟁 중인데도 불구하고 전쟁을 이끌어야 할 왕이 전쟁에 나가지 않은 것입니다. 왕이 왕으로서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아니하고 자신의 몸이 편한 곳,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특별히 지도자들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끼게 됩니다.

14. 그런 의미에서, 우리도 스스로를 돌아보며 우리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물리적인 위치도 있지만, 영적이고 상황적인 위치도 있을 수 있습니다. 또한 과연 이 사회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있어야 할 곳이 어디인지도 생각해봐야 합니다. 요즘과 같은 때에 국내외 정치를 보면서 우리는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감사절과 연말이 다가오는 시점에 우리는 과연 어느 자리에 있어야 하는지 끊임없는 고민과 실행을 위한 노력이 필요한 때입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밧세바는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 불의하게 자신의 부인으로 취한 여인이었다(삼하 11∼12장).  그러나 위에서 언급된 아비가일과 아히노암은 다윗이 왕 되기 전 고난 중 변함없이 함께 한 여인들이다.  이 점에서 이 여인들과 비교한다면 밧세바가 어떤 여인인지  짐작된다.


그러나 나중 밧세바도 알았을 것이다. 자신의 외적 미모가 죄의 유혹을 일으켰고 그 결과 불행과 비극을 당했지만 오로지 하나님의 은총으로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정말 비싼 대가를 치르고 자신의 무가치함과 하나님의 은총의 위대성을 철저히 깨달았을 것이다.  그렇게 밧세바는 헌신적인 신앙인으로 날마다 달라졌을 것이다.


그렇지만 당연히 아비가일이나 아히노암이 밧세바보다 성경에 더 많이 기록되어야 했다. 그러나 그 반대였다. 밧세바의 기록은 자랑스럽지 않은 일로부터 시작하여 아들 솔로몬이 왕이 된 후에까지 기록된다. 사무엘하 11장부터 열왕기상 2장까지 밧세바의 삶은 성경에 계속 기록된다. 이와 비교한다면 그렇게 훌륭하고 지혜로운 여인인 아비가일은 사무엘상 25장 한 장에만 그리고 아히노암은 아비가일의 기록 중 겨우 한 줄(삼상 25:43)만 언급되었다.

상급을 공평하게 줄 하나님이 불공평하게 이들을 대한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속사는 하나님이 주인공으로 어떻게 인류의 구원을 위해 일했는가를 기록한다.  주인공 이외 다른 인물들을 조연(助演)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조연들도 하나님의 구속사에 공헌을 한다.  조연들은 이 공헌에 쓰임을 받았다는 사실에 만족하며 감사해야 한다.


조연들은 맡은 사역이 있고 그에 따른 직분이 있다.  사역이나 직분에 따라 은사도 다 달리 주어진다.  이 때문에 은사의 크기를 서로 비교하며 좋고 나쁘다는 이분법으로 조연들을 평가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그 보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어느 누가 더 자신의 역할에 충성했는가가 더 중요하고 이것이 하나님이 평가하는 기준일 것이다.  어떤 충성을 하였느냐에 따라 상급이 결정될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밧세바가 종국적으로 자신의 외적 미모 덕분에 다윗의 부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위에서 언급한 두 여인들과는 완전히 다르고 영적 차원에서 본다면 한참 저차원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밧세바는 솔로몬이라는 위대한 왕을 낳는 영광을 얻었다.  인간적 관점에서 보아 정말 하나님은 불공평한 것처럼 보인다.


밧세바 때문에 그의 남편이며 다윗에게 충성한 신하이며 용맹스런 장군이었던 우리아가 전쟁터에서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다.  물론 다윗이 꾸민 음모의 결과였다.  다윗은 참으로 비열하고 몰인정하며 가증스런 왕으로 하나님 앞에 드러났다.  그가 비록 기름 부음을 받은 그리스도였지만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와는 완전히 달랐다.  그가 모형이라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원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윗 같은 성군이라도 일단 죄를 범한다면 연이어 죄를 짓게 된다.  죄는 죄를 또 낳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죄는 그 모양이라도 버려야 했다.


인간적 관점에서 비록 억울하게 죽었지만 우리아는 하나님 앞에 끝까지 충성스러운 종의 삶을 살았다(삼하11장).  이 점에서 그는 하나님 앞에서 큰 상을 얻었을 것이다.  그의 삶과 죽음은 성군 다윗이 속으로부터 부패한 인간 존재로서 하나님 앞에 죄인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주었고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라면 성군 다윗도 아무 것도 아님을 증명해 주었다.


결국 밧세바와 그의 삶은 하나님의 은총을 강조하는 역할을 했다.  이 사실은 그녀에게서 솔로몬이 출생했다는 사실에서도 잘 증명된다.  불의한 관계로부터 출발된 다윗과 밧세바의 인연은 처음부터 하나님 앞에 불의하고 가증스러워 죄와 죄악 자체였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이 이런 불완전한 다윗과 영원한 왕국 언약을 이미 맺었다는 것이다(삼하7장).


이 언약 체결 덕분에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영광과 명예와 존귀를 얻은 다윗(삼7:18-19절)은 그만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아의 부인인 밧세바와 불의한 성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은 취소불능했다.  다윗에게 약속한 대로 하나님 나라 다윗 왕국을 계속 이어나갈 후손을 하나님은 주어야 했다(삼하7:12-16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족보가 서로 다른 이유는 무엇인가?

예수님의 족보는 성경의 두 곳, 즉 마태복음 1장과 누가복음 3:23∼38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으로부터 아브라함까지 계보를 추적합니다.
누가는 예수님으로부터 아담까지 계보를 추적합니다.
하지만 마태와 누가가 완전히 다른 족보를 추적하고 있다고 믿을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마태는 요셉의 아버지를 야곱(마 1:16)이라고 기록한 반면, 누가는 요셉의 아버지를 헬리(눅 3:23)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마 1:6)의 계열을 따라 추적하지만, 누가는 다윗의 아들 나단(눅 3:31)의 계열을 따라 추적하고 있습니다. 사실, 다윗과 예수님 사이에서 각 족보가 공통으로 서술하는 이름들은 스알디엘과 스룹바벨 뿐입니다(마 1:26, 눅 3:27).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차이점을 성경의 오류라고 지적합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꼼꼼한 기록 관리자들이었으며, 특히 계보와 관련해서는 더욱 세심하였습니다. 마태와 누가가 동일한 혈통에 대해 완전하게 서로 모순되는 족보를 세울 수 있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다윗으로부터 예수님까지 이어지는 계보는 각각 완전히 다릅니다. 심지어 스알디엘과 스룹바벨에 대한 언급조차도 동명이인에 대한 언급일 수 있습니다. 마태는 “스알디엘”의 아버지를 “여고냐”라고 언급하는 반면 누가는 “스알디엘”의 아버지를 “네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스알디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남자가 자기 아들의 이름을 스룹바벨이라고 짓는 것은 그런 이름을 가진 자들 중에 유명한 사람들이 많은 것을 고려할 때 일반적인 것입니다(에스라와 느헤미야를 읽어 보십시오).


이에 대해 교회 역사가 “유세비우스”가 제시한 한 가지 설명은 마태가 장자 또는 생물학적 계보를 추적하는 반면 누가는 “수혼 결혼”의 경우들을 고려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한 남자가 아들을 갖지 못하고 죽으면 그 남자의 형제가 그 과부와 결혼하여 죽은 사람의 이름을 이어받을 아들을 갖게 하는 것이 전통이었습니다. 유세비우스의 이론에 따르면, 멜기(눅 3:24)와 맛단(마 1:15)은 똑같은 여인(전통에 따르면 그녀의 이름은 ‘에스다’임)에게 다른 시기에 결혼했습니다. 이에 헬리(눅 3:23)와 야곱(마 1:15)은 이부 형제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 후 헬리는 아들이 없이 죽었고, 이에 그의 이부 형제 야곱이 과부가 된 헬리의 아내와 결혼하여 요셉을 낳았습니다. 따라서 요셉은 합법적으로는 ‘헬리의 아들’이지만 생물학적으로는 ‘야곱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마태와 누가는 모두 요셉의 동일한 계보를 기록하고 있지만 누가는 법적인 계보를 따르고 마태는 생물학적인 계보를 따릅니다.


오늘날 보수적인 성서학자들은 누가는 마리아의 계보를 기록하고 있고 마태는 요셉의 계보를 기록하고 있다는 다른 견해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 견해에 따르면, 마태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을 통해 요셉(예수님의 합법적인 아버지)의 계보를 따라가며 누가는 다윗의 아들 나단을 통해 마리아(예수님과 혈연관계)의 계보를 따라갑니다. 요셉은 헬리의 딸 마리아와 결혼하면서 헬리의 사위가 되었지만 헬라어에는 ‘사위’에 해당하는 단어가 없기 때문에 “헬리의 아들”로 불립니다. 아무튼 마리아의 계통을 따르든지 또는 요셉의 계통을 따르든지 예수님은 다윗의 후손이기 때문에 메시야가 되실 자격이 있습니다. 모계 쪽으로 족보를 추적하는 것은 드문 일이지만 처녀 마리아를 통한 탄생은 더욱 그러합니다. 누가의 설명은 예수님은 요셉의 아들이었고 사람들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눅 3:2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선택된 왕의 계보(마태복음)

* 마태는 예수님의 조상을 14대씩 3세대로 나누어 기록하였다(일반적인 유대 선택적 족보기록 법을 따름)

왕국 이전 /   
①. 아브라함, ②. 이삭, ③. 야곱, ④. 유다, ⑤. 베레스, ⑥. 헤스론, ⑦. 람, ⑧. 아미나답, ⑨. 나손, ⑩. 살몬,  ⑪. 보아스, ⑫. 오벳, ⑬. 이새,  ⑭. 다윗

왕국 시대 / 
①. 다윗, ②. 솔로몬, ③. 르호보암, ④. 아비야, ⑤. 아사, ⑥. 여호사밧, ⑦. 요람, ⑧. 웃시야, ⑨. 요담, ⑩. 아하스, ⑪. 히스기야, ⑫. 므낫세,  ⑬. 아몬, ⑭. 요시야


왕국 이후 / 
①. 여고냐, ②. 스알디엘, ③. 스룹바벨, ④. 아비훗, ⑤. 엘리아김, ⑥.아소르, ⑦. 사독, ⑧. 아킴, ⑨. 엘리웃, ⑩. 엘르아살, ⑪. 맛단, ⑫. 야곱, ⑬. 요셉, ⑭. 주 예수 그리스도 


* 다윗만 유일하게 이 족보에서 왕으로 묘사된다(마 1:6)


예수 그리스도, 그는 다윗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신 진정한 왕이셨다. 다윗조차도 그를 왕으로 불렀다(시 110:1, 참조 눅 20:43)


여호와(성부 하나님)께서 나의 주님(예수님)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 앞에 굴복시킬 때까지 너는 내 오른편에 앉아 있거라.”(시편 110:1)

4명의 이방 여인

* 마태는 4명의 이방여인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다(특별하고 독창적인 족보기록 법을 만듦) 

1. 다말(3절)   

①아람인

②첫 번째 남편 ‘엘’- 주의 눈 앞에 사악한 자, 그래서 죽음(창 38:7)

③‘오난’- 하나님을 뜻을 거역함, 그래서 죽음(창 38:10)

④ ‘셀라’- 유다는 또 죽을 까봐 시간만 질질 끔(창 38:14)


*계대결혼(수혼법) 신명기 25:5∼6 

창 38:26 / “유다가 그것을 알아보고 가로되, 그녀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녀를 내 아들 이게 워냐 니들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녀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2. 라합(5절)  

①가나안인-여리고의 창녀

②하나님의 소식을 듣고 믿음을 가짐(수 2:9상, 11하) 

③정탐꾼을 숨겨줌(수 2:10, 11, 히 11:31, 약 2:25)

* 붉은 동아줄? 

3.(5절)  

①모압인- 여호와의 회중에 들어올 수 없는 족속(신 23:3-6)

②시어머니를 따라 하나님을 섬기고자 함, 죽음 남편의 친족 보아스를 만남


* 보아스는 룻의 증손자

* 기업무를 자 : 

“여호와께서 이 젊은 여자로 말미암아 네게 상속자를 주사 네 집이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시니라”(룻 4:12)

4. 밧세바(6절)

①헷사람 - 헷사람 우리아의 아내(삼하 11:3)
* 밧세바라 하지 않고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② 솔로몬를 낳는다(간음을 통해 태어난 첫째 아들은 태어난 지 7일 만에 죽음(삼하 12:15-18)

       

* 예수는 이방인의 하나님, 이방인의 구주이시다.

* 은혜로만 구원받는다(‘라합’과 ‘밧세바’는 부도덕/ ‘다말’과 ‘라합’, ‘룻’은 믿음).

요셉과 그리스도

마태복음 1: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목록에 나오는 다른 아버지들의 경우 중요하게 사용된 용어인 “낳고”가 빠져 있다! 요셉의 이름이 법적 아버지요 계보의 연결로서 언급되는데, 이것은 1세기에 유대인들이 법적으로 요구했고 또 인식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요셉은 예수의 생물학적 아버지가 아니었다. 예수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동정녀를 통해 탄생하셨다(참조, 1:23-25; 눅 1:34-35).

*“요셉과 약혼하고”: 약혼은 두 사람의 관계를 법적으로 묶는 유대인의 관습으로서 대개 결혼에 앞서 1 년 전에 행해졌다. 두 사람이 따로 떨어져 살았지만, 계약적으로는 결혼상태로 여겨졌다. 죽음 혹은 이혼만 약혼 관계를 파할 수 있었다.


요셉

“의로운 사람이라”(1:19)

“가만히 끊고자 하여”: 요셉이 이를 위해 취할 수 있는 두 가지 법적 조치는 다음과 같았을 것이다: (1) 법정에서의 공개적인 비난 혹은 (2) 두 증인 앞에서 이혼증서를 기록하여 주는 일(참조, 신명기 24 장). 마리아는 잉태와 관련된 환상을 요셉에게 말하지 않았다. 구약의 율법은 성적으로 신실하지 못한 사람에게 사형을 선언했다(참조, 신 22:20-21,23-24).


끝까지 마리아를 지켜줌

"요셉은 잠에서 깨어나 주님의 천사가 일러 준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그러나 그는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때까지 그녀와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았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자 요셉은 이름을 ‘예수’ 라 하였다."(마태복음 1:24‭-‬25)


마리아

1.  마리아는 처녀가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말씀을 믿었다(눅 1:37-38).

2.  율법에 따라 돌에 맞아 죽을 수 있는 상황이 되는데도 그 말씀을 믿은 것이다.

마태복음의 족보와 마가복음 족보의 차이

1. 마태는 유대인의 왕이신 예수님을 위한 족보를 기록했다.
다윗과 솔로몬으로 이어지는 족보이다.
아브라함에서 예수까지 하향식족보(총 41명)이다.
마태복음 첫머리에 이 족보가 등장한다.

* 히브리어로 다윗의 이름이 갖는 수는 14를 이룸
 D(4) + V(6) + D(4) = 14 유대인들은 다윗을 상징하는 숫자를 14로 여긴다.

2. 누가는 창세기의 예언을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다(이방인 독자).
솔로몬의 동복 형인 나단(삼하 5:14, 대상 3:5, 14:4)으로 이어지는 족보이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상향식 족보 총77명).

아담- 하나님께 이어지는 족보이다(인성).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요한의 세례 이후에 기록되었다(회개의 세례 눅 3:3)

3. 마태복음에서는 요셉의 위를 야곱으로 기록합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서는 요셉의 위를 헬리(또는 엘리)로 기록합니다.
헬리는 마리아의 아버지. 즉 요셉의 장인이다.
그러나 헬리는 아들이 없어서 요셉이 데릴사위 겸 양자로 맞이하게 된다. 

4. 누가는 이 족보의 신빙성과 동정녀 탄생을 고려해 이렇게 기록합니다.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삼십세쯤되시니라.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누가복음 3:23)"  

• 참고 성경구절/

* 누가복음 3:38
"그 이상은 아담이요, 그 이상은 하나님이시니라.” 

* 창세기 49:10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 이사야 11:10 
"그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 사무엘하 7: 15~16 
"내가 네 앞에서 물러나게 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뺏은 것처럼 그에게서는 빼앗지 아니하리라.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존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 창세기 3:15
"내가 너와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니"

* 갈라디아서 4:4-5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김일성 갓끈 이론


김일성 갓끈 이론

"사람의 머리에 쓰는 갓은 두 개의 끈 중에서 하나만 잘라도 바람에 날아간다.”
김일성이 1972년 김일성정치대학 졸업식 연설에서 강조한 이른바 ‘갓끈 전술’이다.
김일성은 “남조선 정권은 미국과 일본이라는 두 개의 끈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남조선 정권은 미국이라는 끈과 일본이라는 끈 중에서 어느 하나만 잘라버리면 무너지고 말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국으로 망명한 북한의 주체사상 창시자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도 “북한 정권은 김일성의 갓끈 전술에 따라 한·미동맹과 한·일 우호관계를 약화시키려는 통일전선전술을 구사하고 있다”고 지적했었다.

북한 정권은 그동안 한국에서 반일 감정을 부추기고, 일본과의 관계 강화를 강조하는 한국의 인사들을 친일파로 몰아세우는 등 선전·선동 공작을 벌여왔다. 실제로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을 비롯한 북한 관영 언론매체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일본의 과거 식민 지배를 비판하는 등 철저하게 반일 노선을 주장해왔다.

특히 북한 관영 언론매체들은 군사·외교 등의 분야에서 한·일 관계의 강화에 대해 신랄하게 비난해왔다.


친일파 일색 북한 초대내각의 진실
북한 정권은 또 한국은 친일파가 득세해 정통성이 없고 자신들은 친일파를 청산하고 항일독립투사인 김일성이 세운 나라이니까 정통성이 있다고 말해왔다.

때문에 북한 정권은 친일파가 세운 한국보다 도덕적으로 우위에 있다는 입장이다. 그런데 북한 정권의 이런 주장은 전적으로 거짓말이라는 것이 역사적으로 증명됐다. 김일성 정권의 초대내각과 군부 등의 주요 인사들 가운데 16명이 친일파였다.

특히 김일성의 동생인 김영주 부주석은 일제강점기 헌병 보조원으로 근무했다. 김일성 모친 강반석의 7촌인 강양욱은 일제강점기 때 도의원을 지냈다. 강양욱은 북한 인민위원회 상임위원장을 지냈다.

부수상 홍명희는 일제의 전쟁 비용 마련을 위한 임전(臨戰)대책협의회에서 적극 활동했다. 사법부장 장헌근은 중추원 참의 출신이었고, 북한 초대 공군사령관 이활, 북한 인민군 9사단장 허민국, 북한 인민군 기술 부사단장 강치우 등은 모두 일본군 나고야 항공학교 출신들이었다.

반면 한국의 이승만 정권 초기 내각은 임시정부 내무총장을 지낸 이시영 부통령, 광복군 참모장이었던 이범석 국방장관, 광복군 총사령관을 역임한 이청천 무임소장관 등 임시정부와 광복군 출신인사들로 구성됐다. 친일파는 한 명도 없었다.

김일성은 “남조선(한국)은 친일 부역배들인 한민당과 이승만이 결탁하여 세운 미제의 괴뢰(傀儡)정부이므로 정통성을 인정받을 수 없다”면서 민족사적 정통성은 북한에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 근거로 항일 빨치산 투쟁을 했던 자신을 구심점으로 내세워왔다. 하지만 북한 정권이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들 가운데 가장 큰 업적으로 주장해온 ‘보천보전투’ 역시 완전한 조작이다.

북한 정권의 주장에 따르면 보천보전투는 김일성이 1937년 6월 4일 조선인민혁명군(동북항일연군) 소속 부대를 이끌고 함경남도 갑산군 보천면 보천보(현재 양강도 보천군 보천읍)를 습격해 주요기관을 일시적으로 점령했던 사건을 말한다.

북한의 중학교 교과서는 “김일성이 1937년 3월 경찰주재소, 면사무소를 비롯한 일제의 통치기관들을 습격하고 보천보 일대를 해방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당시 보천보에는 일본인이 26호에 50명, 조선인이 280호에 1323명, 중국인이 2호에 10명 등 총 308호에 1383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무장인원으로는 5명의 경찰이 주재소에 있었을 뿐이다.

반일 앞세운 북한의 역사 조작

북한 교과서가 엄청난 전투가 있었던 것처럼 묘사하고 있지만 말 그대로 소규모 전투에 불과하다. 이명영 전 성균관대 정치학과 교수는 '김일성 열전'에서 "보천보전투의 김일성 장군은 1887년 태어난 일본 육사 출신의 김광서라는 사람"이라면서 "북한 김일성이 보천보전투의 김일성 장군으로 둔갑한 것은 소련이 광복 이후 북한의 공산 정권 수립에 용이하게 사용될 수 있는 지명도가 높은 이름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소련의 지휘하에서 훈련받았던 만주의 공산 유격대 출신인 김일성의 본명은 김성주(金聖柱)였다. 소련의 지시로 광복 후 북한으로 들어온 김성주는 김일성 장군으로 행세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북한 정권이 주장하는 김일성의 항일투쟁은 조작임을 알 수 있다. 북한 정권은 올해 100주년을 맞는 3·1운동도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1894~1926)과 평양 숭실중학교 청년학생들이 주동했다고 교과서를 비롯한 모든 역사서에 기록하고 있다.

3·1운동의 발원지도 서울의 탑골(파고다)공원이 아니라 평양의 숭덕여학교이며 평양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됐다고 역사를 왜곡·날조하고 있다. 또한 3·1운동의 성격을 3·1 인민봉기로 규정하고, 남조선의 33인 민족대표가 외세에 의존한 부르주아 상층 분자들이어서 운동 자체가 실패했다고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

더욱이 북한 정권은 김일성이 7살의 나이로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3·1운동에 참여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북한의 조선력사(고등중학교 제4학년용)는 “그때 위대한 수령 김일성 대원수님께서는 여덟 살의 어리신 나이에 시위대렬(대열)에 참가하시여 만세를 부르시며 보통문 앞까지 가시였다. 민족의 류혈(유혈)을 처음으로 목격하신 어리신 대원수님의 마음은 분노로 끓어 번지시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김일성도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여덟 살(전통적인 우리식 계산법에 따른 나이. 김일성은 1912년 4월 15일 출생)이였던 나도 다 꿰진 신발을 신고 시위대렬에 끼여 만세를 부르면서 보통문 앞에까지 갔다”고 밝혔다. 그런데 당시 김일성은 김형직과 함께 중강진에 있었다. 북한 정권이 발간한 ‘김일성 원수님의 어린 시절’이란 책을 보면 김형직이 1918년 국경지대인 중강진으로 이사했고, 이때 김일성도 함께 고향을 떠나 김형직을 도왔다고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북한 정권이 역사를 조작하면서 스스로 오류까지 저지르고 있는 셈이다.

미국·일본·한국의 해군 함정들이 동중국해에서 훈련을 실시하고 있다.

북한이 한ㆍ일 틈 벌리려는 이유

북한 정권이 이처럼 역사를 조작하면서까지 반일 노선을 추진해온 것은 김일성이 내세운 이른바 '갓끈 전술' 때문이다. 북한 정권의 일관된 목표는 한·미·일 3각 동맹을 저지하려는 것이다.

특히 북한 정권은 한·미 동맹이 굳건한 만큼 한·일 관계를 이간질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고 보고 있다. 일제강점기 시절 한반도 전체가 고통을 받아온 만큼 북한 정권은 이를 고리로 ‘우리 민족끼리’를 앞세우면서 한국에서의 반일 정서를 부추기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북한이 한·일 관계의 틈을 벌리려는 가장 큰 이유는 6·25전쟁 때의 교훈(?)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시 일본은 미군을 비롯해 유엔군의 핵심 후방기지였다. 남기정 서울대 교수의 저서 ‘기지 국가의 탄생: 일본이 치른 한국전쟁’에 따르면 1953년 1월 일본 내 미군 기지는 무려 733개에 달했다.

주일 미군 기지들은 병사 및 물자 수송 및 훈련 등 후방기지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당시 미 공군은 주일 미군 기지에서 한반도로 100만여회나 출격해 폭탄 70만t을 투하했다. 주일 미군 기지에선 인천 상륙작전을 위한 한국군 병사 8000여명이 훈련을 받았으며, 원산 상륙을 위한 기뢰 제거 및 미군 수송에 8000여명의 일본인들이 동원됐다.

이는 6·25전쟁에 참전한 유엔군 16개 국가 중 6위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일본의 이런 역할은 지금까지 과거와 동일하다. 일본은 6·25전쟁 당시나 지금이나 지리적·전략적으로 같은 자리에 있다. 게다가 한반도 유사시 미군 전력이 출동하는 유엔군 사령부 후방기지 7곳이 모두 주일 미군기지이다.

미국과 유엔군 사령부 참여국들은 한반도 전쟁 상황에 대비해 일본에 유엔사 후방기지를 유지하면서 병력과 장비를 배치하고 있다. 7곳에 있는 병력과 군수물자들을 한국으로 이동하려면 미군 단독으론 안 된다. 일본 해상자위대의 지원이 필요하다. 미국은 또 항모전단의 호송 전력이 부족해 일본 이지스함 등의 지원을 받아야만 한다.

북한 잠수함들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할 경우 한국으로 수송되는 병력과 물자들을 막기 위해 일본 근해로 출동할 것이 분명하다. 이때 일본 해상자위대 잠수함이 북한 잠수함로부터 수송선을 보호해야만 한다. 일본 해상자위대는 막강한 대잠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주한미군은 주일미군의 지원이 없으면 북한의 공격을 제대로 막을 수 없다. 주한미군에 반드시 제공되어야 할 항공, 해상 전력과 전략 자산을 주일 미군이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일본은 전략적으로 한국의 안보에 매우 중요한 국가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실리로 돌아선 중ㆍ일 관계의 교훈

그런데 문제는 북한의 갓끈 전략이 문재인 정부의 반일 노선과 맞아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박근혜 정부에서 체결한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합의를 정면 부정했고, 대법원의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판결에 대해서도 존중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게다가 우리 해군 광개토대왕함의 일본 해상자위대 초계기 레이더 겨냥 논란으로 한·일 관계는 더욱 악화하고 있다.

한·일 관계는 1965년 수교 이래 과거사 문제와 독도 영유권 등으로 충돌을 거듭해왔으나 안보 분야에서는 협력 기조가 유지돼왔다. 북한의 핵과 탄도미사일 도발은 한국은 물론 일본에도 가장 큰 위협이었다. 한·일 양국이 2016년 11월 군사비밀정보보호협정(GSOMIA)을 체결한 것도 북한 핵과 탄도미사일 위협 증대에 공동 대처해야 한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문재인 정부는 한·일 관계를 미래 지향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면서도 과거 지향적으로만 가고 있다. 실제로 문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지난해 3차례 정상회담을 가졌지만 일본군 위안부 등 과거사 문제를 놓고 입장 차이만 확인한 채 서로 등을 돌렸다.

물론 과거 식민 지배를 당한 한국으로선 당연히 일본에 진정성 있는 사과와 반성을 요구해야만 한다. 일본도 강제징용, 근로정신대, 군대 위안부 등 제국주의 시절 자행된 반인륜적 범죄에 대해서는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피해자인 한국이 가해자인 일본에 과거사 문제만을 물고 늘어진다면 양국 관계는 파국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문 대통령이 국내 정치만을 의식해 한·일 관계를 끌고 가서는 안 된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해 10월 베이징에서 아베 총리와 정상회담을 갖고 역사와 영토 문제로 인한 갈등과 대립에도 불구하고 경제협력을 강화하기로 합의했다. 앙숙 관계인 양국이 손을 잡은 것은 실리적인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미국과 무역전쟁을 벌이는 중국으로선 우군이 필요하고, 미국과 무역협상을 진행 중인 일본도 미국을 견제할 카드가 필요했다. 양국으로선 안보 문제 등으로 인해 밀월 관계를 맺을 수는 없지만 전략적으로 이득을 계산해 관계개선에 나선 것이다.

김일성이 광복 후 귀국해 평양 시민들에게 연설하는 모습을 그린 벽화.

문재인 정부도 대일 외교 노선을 전면 개선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한반도에서 한목소리로 반일 정서가 표출된다면 자칫하면 반미 정서로 비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일 관계를 중재할 수밖에 없는 미국에 대해 국내 일부 친북 및 종북 단체들이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식으로 반미 정서를 부추길 수 있다.

북한 정권은 이미 통일전선전략을 통해 이런 수법을 쓰고 있다. 북한 정권이 유엔사 철수를 주장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특히 한·일 관계 강화는 북한의 비핵화 실현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북한과의 대화든, 압박이든 가장 중요한 것은 한·미뿐만 아니라 한·미·일 협력이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한·일 군사 협력이 필요하다.

현 상황에서 한·미 훈련의 축소와 취소도 문제지만 한 번도 일본 자위대와 손발을 맞춰보지 않고 있는 점도 문제다. 북한의 도발이나 침공 등 한반도 유사시 한·미·일 3국의 협력이 중요한데, 한·일 간 아무런 사전준비 없이 협력할 수는 없다.

한·일 양국은 동북아 안보와 경제, 문화 등에서 교류와 협력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숙명적인 인접국이다. 한국 젊은이들이 가장 많이 여행하는 곳이 일본이다. 일본 젊은이들이 가장 열광하는 것이 한류(韓(流)다. 한·일 양국은 과거의 아픈 역사를 뛰어넘어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블루오션


https://md2biz.tistory.com/279


블루오션(Blue Ocean) & 레드오션(Red Ocean)

INSEAD 경영대학원의 김위찬 교수러네이 모본 교수가 창안한 용어로, 새로이 탄생하거나, 경쟁자가 별로 없는 시장을 의미한다. 넓고 광활한 푸른 바다에서 경쟁자 없이 평화롭게 지낸다는 의미로 시작되었다.

반대말인 레드 오션(Red Ocean)은 과거부터 존재해 오고 있는 메이저한 시장들로, 필연적으로 경쟁이 치열하다.

틈새시장은 차별화된 취향을 보이는 특정 소비자 계층으로 이루어지는 시장을 뜻하는데, 이 시장은 블루 오션일 수도, 레드 오션일 수도 있다.

'틈새 시장', 또는 '니치 마켓(niche market)'이라고 따로 이런 시장을 부르는 용어가 있는 것으로써 알 수 있듯, 이 둘은 분명히 구별되는 개념임에 유의할 것. 단지, 틈새시장이 아닌 시장이 블루 오션인 경우가 좀처럼 없는 이유로, 현대의 블루 오션은 틈새시장에 있는 경우가 많을 뿐이다.

블루 오션의 의의는 타 기업보다 그 시장분야에서 고수익을 낼 수 있다는 것이다.
한 기업이 수요를 새로이 창출한 시장이라면 당연히 기존 사업자가 있을 수 없고, 짧게나마 그 기업은 해당 산업에서 독점적 지위를 누릴 수 있다.

학문적으로는 포터의 5 Force 모델의 안티테제적인 위치에 있다.
포터의 주장은 시장에 존재하는 힘들의 균형에 의해 시장의 수익성이 결정된다는 주장과 달리, 블루오션의 개념은 하나의 아이디어에 따라 시장에 영향을 미치던 기존의 힘들을 메롱시키고 수익성을 결정지을 수 있다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물론 역관광의 사례는 얼마든지 존재한다.

레드 오션이 자그만한 아이디어 하나에 블루 오션으로 바뀌는 경우도 있다.
기저귀 제품을 생산하던 한 업체가 아이디어로 여아용 남아용 기저귀를 구분해서 팔자 순식간에 기저귀 시장에서 1위를 차지한 적이 있다.
여아용/남아용 기저귀의 구별이라는 아이디어가 레드 오션으로서의 기저귀 시장을 여아용 기저귀 시장, 남아용 기저귀 시장이라는 두 블루 오션으로 나뉘었고, 처음으로 이 아이디어를 낸 업체 측은 짧게나마 두 시장을 독점할 수 있었다.

Wii는 10대-30대의 전유물로 생각되던 콘솔 게임 시장의 기술과 "가족의 놀이"라는 아이디어를 결합하여 가족의 게임기 시장을 만들어냈고, 나중에 이 시장에서 절대 강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또 다른 블루 오션의 예를 들면, 스마트폰 앱 시장에 워낙 어그로가 끌리고 양산형 자바 프로그래머가 많아진 탓에 경쟁이 오히려 줄어든 윈도우 프로그램을 들 수 있다. 곧, 본래 레드 오션이었더라도 다른 레드 오션이 관심을 끌어 경쟁자가 줄어드는 현상이 일어났다면 훌륭한 블루 오션이 된다. 이런 현상의 수혜자로 반디 소프트가 있다.

"프로그래머로 대입해도 자바는 레드 오션이고 C, C++, C#, 파이썬 같은 언어들은 블루 오션이다."는 이해를 돕기 위해 서술한 듯 한데, 엄밀히 말하면 JAVA 같은 범용적인 언어는 앱을 개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PC 프로그램이나 Iot기기 펌웨어 개발에도 활용 할 수는 있다.

최적화 면에서는 조금 뒤떨어질지 몰라도 요즘 컴퓨터들의 상향평준화를 고려하면 가벼운 프로그램 정도는 C#을 쓰건 C++을 쓰건 자바를 쓰건 그게 그거다.

적은 지식으로 다양한 플랫폼(=시장)에 진출해 볼 수 있다는 점으로 본인 능력이 좀 후달리거나 어쩌면 자바의 선택도 나쁘지 않으며, 이러한 범용적인 면으로서의 자바는 레드 오션이 절대로 아니다.

오히려 C++로 컴퓨터 프로그램 만들어놓고 ARM이나 PowerPC와 같이 모바일 기기나 Iot 기기의 다른 아키텍처에, 또는 리눅스, 맥 같은 다른 OS에 이식할 때, 그러니까 크로스플랫폼을 시도할 때의 삽질을 훨씬 줄일 수 있다. 자바는 가상머신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물론 C#도 가상머신 쓰긴 하는데, 자바의 역사가 더 길어서 정보가 더 풍성하고, 타 OS가 아니라 이종 아키텍처 사이의 이식에는 Java가 더 유리하다는 말이 있다. 그도 그럴게, Java 런타임(그러니까 일종의 가상머신)만 깔려 있으면 자바 프로그램 대부분은 그냥 돌아가거나 하다못해 수정이 필요하더라도 맨땅에 헤딩보다는 조금 삽질을 덜 할 수 있다.

성공 신화만 보면, 발견하기만 하면 부와 명성을 가져다 주는파랑새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현실은 시궁창이다.
하나의 아이디어로 없던 시장을 창조해내는 것부터가 상식의 틀을 깨는 아이디어로, 상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소비자들을 유혹해야 한다는 면으로 쉽지 않은 과제이다.
이렇게 만들어낸 시장이 수익성이 있을지 없을지는 다른 문제이다.
심지어 어떻게든 수익성 좋은 시장을 만들어냈다고 해도 그 시장에 계속 머무르려면 이후 육박해 들어올 대기업의 자본력과 힘겨운 승부를 벌여야 한다.
위에 언급된 성공신화들이 기존의 산업에서 한 때나마 재미를 보던 쇠락한 대기업들이라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한창 IT버블이 한창일 때 수많은 벤처기업이 등장하고 주목을 받았지만, 현재 남아있는 기업은 얼마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물론 신흥 대기업이 된 사례도 있긴 하지만 그 당시에 등장한 벤처기업의 수로 현재 남아 있는 벤처 출신 신흥 대기업의 수를 나누면 거의 0에 수렴한다.

덤으로, 블루 오션 구역이 알려지면 당연히 비슷한 상품을 판매하는 이들이 그리로 몰리게 되므로, 결국 영구히 지속되는 블루 오션도 있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레드오션이 늦게 되느냐 빨리 되느냐의 문제이다.
그러니 '잠재적 레드 오션'이라는 말이 틀리지 않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메타버스

메타버스(metaverse)

초월을 뜻하는 메타(meta),
세상을 뜻하는 유티버스(Universe)를 합한 메타버스(metaverse)

온라인 공간을 마치 현실의 3차원 공간처럼 이용하는 기술이다.

가상 우주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1992년 출간된 닐 스티븐슨의  소설 '스노 크래시'에서 가장 먼저 쓰였다.
이는 3차원에서 실제 생활과 법적으로 인정되는 활동인 직업, 금융, 학습 등이 연결된 가상 세계를 뜻한다.

가상 현실, 증강 현실의 상위 개념으로서,
현실을 디지털 기반의 가상 세계로 확장시켜 가상의 공간에서 모든 활동을 할 수 있게 만드는 시스템이다.
구체적으로, 정치와 경제, 사회, 문화의 전반적 측면에서 현실과 비현실이 공존하는 생활형, 게임형 가상 세계라는 의미로 폭넓게 사용한다.

메타버스의 네 가지 유형

1. 증강현실(
Augmented Reality)
2. 일상기록(
Lifelogging)
3. 거울세계(
Mirror Worlds)
4. 가상세계(
Virtual Worlds)

비영리 기술 연구 단체 ASF(Acceleration Studies Foundation)는
메타버스를 '증강과 시뮬레이션',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라는 두 축을 가지고 네 가지 범주로 분류했다.

증강현실(Augmented Reality)

증강현실은 현실공간에 2D 또는 3D로 표현한 가상의 겹쳐 보이는 물체를 통해 상호작용하는 환경을 의미한다.
사람들에게서 가상세계에 거부감을 줄이고, 몰입감을 높이는 특징을 지닌다.
사용자가 단말기 카메라로 현재는 유적만 남은 흔적을 촬영하면 디지털로 구축된 과거의 건물이 사용자 단말기에 중첩해 보이는 장면이 증강현실 일례이다.
증강현실의 또 다른 예시로는 부동산(Property)과 디지털 기술(Technology)의 융합을 일컫는 ‘프롭테크(Proptech)’ 산업에서도 활용되고있다는 점이다.

일상기록(Lifelogging)

일상기록 또는 라이프로깅(Lifelogging)은 사물과 사람에 대한 일상적인 경험과 정보를 캡처하고 저장하고 묘사하는 기술이다.
사용자는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모든 순간을 텍스트, 영상, 사운드 등으로 캡처하고 그 내용을 서버에 저장하여 이를 정리하고, 다른 사용자들과 공유가 가능하다.
센서가 부착된 스포츠 웨어를 네트워크 연결이 가능한 MP3 플레이어와 연동하여 사용해서 달린 거리, 소비 칼로리, 선곡 음악 등의 정보를 저장하고 공유하는 등의 행위가 일상기록 예시이다.

거울세계(Mirror Worlds)

거울세계는 실제 세계를 가능한 한 사실적으로, 있는 그대로 반영하되 "정보적으로 확장된" 가상세계를 말한다.
대표적인 예로 구글 어스(Google Earth)를 들 수 있다.
구글 어스는 세계 전역의 위성사진을 모조리 수집하여 일정 주기로 사진을 업데이트하면서 시시각각 변화하는 현실세계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기술의 발전이 계속될수록 현실이 반영된 거울세계는 점점 현실세계에 근접해갈 것이며, 이는 향후 가상현실의 커다란 몰입적 요소가 된다.
이같은 거울세계 사용자는 가상세계를 열람함으로써 현실세계에 대한 정보를 얻게 된다.

가상세계(Virtual Worlds)

가상세계(Virtual World)는 현실과 유사하거나 혹은 완전히 다른 대안적 세계를 디지털 데이터로 구축한 것이다.

(예) 게임

가상 세계에서 사용자들은 아바타를 통해 현실세계의 경제적, 사회적인 활동과 유사한 활동을 한다는 특징이 있다.
가상세계는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형태의 메타버스로서, 리니지와 같은 온라인 롤플레잉게임에서부터 린든 랩에서 개발된 세컨드 라이프와 같은 생활형 가상세계에 이르기까지 3차원 컴퓨터그래픽환경에서 구현되는 커뮤니티를 총칭하는 개념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개인의 가치를 점점 더 중시하는 ‘슈퍼 개인’의 시대가 왔다.
끈끈한 정보다 느슨한 연대를 선호하고, 메타버스의 등장으로 ‘부캐’(부캐릭터)의 활약이 주목받고 있다.
주요 트렌드 서적에 등장하는 ‘2022년 트렌드’의 주요 흐름이다.

이런 변화 속에서 담아낼 선교적 과제는 없을까.

4권의 서적
‘트렌드 코리아(김난도)’
‘라이프 트렌드(김용섭)’
‘트렌드노트(생활변화관측소)
‘트렌드모니터(엠브레인)’다.

이 시대 트렌드는 왜 주목할 만한가.

“최근 들어 4차산업 기술의 발달로 거대한 변화가 이어지고 있다.
그 와중에 코로나가 터지면서 그동안 늦춰졌던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을 10년 정도 앞당겼다는 분석이 있다.
2030년 쯤에 일어날 일들이 지금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같은 전례없던 흐름을 진단하고 거대한 변화의 축이 바뀌는 걸 이해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사고방식과 가치관 등 다방면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트렌드와 복음을 연결하려는 시도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선교의 과정을 보면 늘 새로운 경계가 생겨난다.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성경(사도행전) 속에는 익숙한 경계를 넘어설 때마다 ‘복음을 어떻게 전할 것인가’하는 문제도 늘 제기된다.

베드로와 고넬료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선교의 큰 이슈 가운데 하나가 ‘상황화’다. 복음에 충실하면서도 어떻게 문화적으로 복음이 들어가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새로운 상황이 펼쳐지고 라이프 스타일이 변할 때, 절대 변하지 않는 복음이 어떻게 새롭게 재발견되는지 살펴보는 일도 가치가 있다.”

7가지 트렌드로 본 선교적 고려사항


1. ‘슈퍼개인’의 시대: 사회 파편화&개인 확장 시대

올해 가장 두드러진 트렌드 가운데 하나는 ‘슈퍼개인’ 시대의 도래다. 나노시대 또는 ‘나중시대’(나중심의 시대)라고도 한다. 어떤 면에서는 내가 다 책임져야 하는 시대다. 자기존중·자기표현·자기중심 분위기가 강해지면서 공동체 정신이 와해될 수 있다.

▶선교적 고려사항
=교회는 개인의 가치, 개개인의 삶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 신앙 안에서 교회가 개인주의의 위험성을 극복하면서도 건강한 개인주의를 재발견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교회 안에서도 개인의 특성과 취향에 따른 모임을 성도들이 주도하게 끔 길을 열어줄 필요가 있다.

2. 일상의 재발견: 루틴&습관의 계발

자신의 일상을 통제해서 습관을 계발하는 등의 ‘바른생활 루틴’이 뜨고 있다. 독서나 운동, 다이어트, 식단조절 등 ‘내 삶을 훈련시킨다’ ‘내 시간의 주인이 되겠다’는 인식이 바탕에 있다.

▶선교적 고려사항
=기독교의 강점이 두드러지는 분야다. 새벽기도나 큐티 등 한국교회의 강한 전통이 떠오르지 않나. 선교적으로 볼 때는 교회밖 사람들과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작은 동호회 활동같은 게 유용한 선교적 도구가 될 수 있다. 같이 책을 읽거나 운동하는 등 교회(성도들)가 세상 사람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커뮤니티를 만드는 것이다. 금연 절주 등 자기발전을 위한 소그룹도 충분히 만들 수도 있다. 이를 통해 교회 밖 사람들이 기독교 공동체를 경험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 교회성장 전문가인 톰 레이너 박사는 “성경공부는 집회, 영적 훈련 등 이른바 ‘하이키’는 불신자들의 교회 참여가 어렵지만, 동호회나 소소한 모임 같은 ‘로우키’는 교회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도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3. 생태적 라이프 스타일

친환경, 자연친화적 스타일이 확산되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한 경각심 영향이 크다. 동물과 식물을 보호하는 트렌드도 동반되고 있다. 20~30세대로까지 확산되고 있다. 기후환경 위기가 젊은 층에 당면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런 트렌드는 지속적으로 확산될 것이다.

▶선교적 고려사항
=환경과 생명 돌봄을 중시하는 건 기독교 가치와 일맥상통한다. 기독교 학자인 하워드 스나이더는 “병든 지구에 사
는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건강할 수 있겠는가”라며 창조세계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책임을 강조했다. 교회가 환경 보전운동에 적극 나서야 한다. 환경운동가를 양성하는 등 리더십을 키우는 일이 그 예가 될 것이다.

4. 메타버스의 가속화

피할 수 없는 환경이다. 교육과 업무 등 일상의 상당히 많은 부분을 대체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 내 모습을 뜻하는 ‘본캐(본캐릭터)’보다 가상의 내모습인 ‘부캐’의 활약을 기대하게 만든다. 사람들이 자기의 ‘본캐’가 아닌 ‘부캐’를 표현하면서 다른 세계를 경험하려는 트렌드가 더욱 확산될 것이다.

▶선교적 고려사항
=메타버스 예배에 대해선 다소 회의적이다.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것이다. 하지만 부캐로 온전한 예배의 정신을 구현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보다는 ‘부캐를 통한 은사의 발견·활용’의 가능성을 높게 본다. 가상 세계 속에서 여러 자아의 계발을 통해 이를 선교 도구로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례로 어떤 목회자는 부캐로 연극배우가 되어 문화선교사로 활동하는 식이다.

5. 세계관과 내러티브

메타버스 세계는 이야기의 보고다. 수많은 이야기가 나올 것이다. 새로운 세계와 관계와 공동체도 등장할 수 밖에 없다. 새로운 세계관과 내러티브(서사)가 굉장히 중요한 컨텐츠 능력이 될 것이다.

▶선교적 고려사항
=기독교에서는 성경 자체가 내러티브의 자양분이 될 수 있다. 성경적 세계관을 담은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이 또한 중요한 선교의 도구가 될 것이다. 앞으로의 시대는 내러티브적 해석 능력을 강조하는 시대다. 이는 내러티브를 통해 복음을 전하는 방식의 구현도 가능하다. 기독교 세계관은 기존의 내러티브 해석을 비평해 줄 수 있다. 이미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끈 ‘오징어게임’이나 ‘지옥’같은 영화나 드라마 통해서도 얼마든지 기독교적인 내러티브를 생산하지 않았는가.

6. 진화하는 관계

인간관계와 공동체의 관계가 변하고 있다. 이전까지는 사람들이 학연·지연·혈연 등으로 끈끈하게 이어졌다. 그 관계에 헌신했는데 이제는 아니다. 느슨한 연대사회로 흘러가고 있다. 비혼이 늘고, 덩달아 1인 가구가 늘면서 위계적 가족 질서가 무너지고 있다.

▶선교적 고려사항
=이럴 때 일수록 교회는 믿음 중심의 건강한 공동체로서의 본을 보여줘야 한다. 건강한 결혼과 가정 생활의 모델을 보여주는 것도 중요하다.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라 가족을 이루지 못하거나 이룰 수 없는 사람들(비혼자, 이혼가정 등)을 끌어안을 수 있어야 한다. 입양과 성인후견인 제도 등에도 관심을 기울일 만한다.

7. 앙트레프레너(기업가 정신)

고정적·안정적 사회가 지나가고 변동성이 심한 사회로 흘러가고 있다. 변화를 감당할만한 자금과 버틸 수 있는 힘이 없으면 낭패를 볼 수 있다. 동시에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찾아가는 시대다. 먹고 살기 위해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도 병행하는 시대로 향하고 있다. 새로운 시대에 내 아이디어를 구현시키고 행동하고 실행하는데 의미가 있다. 기획하고 실행하고 관리하는 종합적인 능력이 발휘되고 있다.

선교적 고려사항=일터가 신앙을 표현하고 경험하고 전할 수 있는 곳으로 떠오르고 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21세기는 ‘마켓 플레이스’ 전도가 지배할 것이다”라고 전망한 적이 있다. 그는 광장에서 전도했지만 이제는 일터에서 ‘기독교적 비즈니스’를 육성하며 소명을 발견할 수 있는 시대다. 정치·경제·문화 등 주요 영역별로 어떻게 선교할 수 있는지 배우고 실천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할 때다.

김 교수는 “지금 다방면에서 빠르게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모든 일이 온 우주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통치와 섭리 속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면서 “복음에 대한 자신감을 갖자. 복음만이 현 시대에 답을 줄 수 있다. 지금이 오히려 선교적으로 의미 있고, 도전할 수 있는 환경이 구축됐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