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復活) 04-17-2022 부활주일 설교


2023년 부활주일 설교 주제
- 부활은 바꾸는 것이다!

04-19-2022(화) 묵상 중에
삶의 가치관과 목표를 바꾸는 것이 부활이다.

예를 들면 부활하기 전에는 철저하게 땅에 속한 삶을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땅에 속한 삶의 특징은 육체의 정욕, 이생의 자랑, 안목의 정욕이라고 하였다(요한일서 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육체의 정욕(베드로전서 2:11)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육체의 정욕을 섹스(성)라고 한다.

이생의 자랑
이생의 자랑은 물질(돈)이라고 한다.

안목의 정욕
안목의 정욕은 권력이라고 한다.


다시 사시는 그리스도

- 크리스토프 프리드리히 블룸하르트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고 말로만 외치면서 축하하는 부활절 기념은 너무 미흡합니다. 우리 역시 살아났다고 또 하늘로부터 무엇인가를 받은 게 있다고 말하지 못하면서 부활 자체만 선포하는 것은 헛된 일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라는 엄청난 사건이 반복적으로 선포되고 있지만 실제로 우리에게는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 것을 섬뜩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부활의 효력이 없습니다. 

아무런 감동도 없으면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계속 언급하는 유혹이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생겨났습니다. 마치 신문을 읽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지루하게 앉아서 듣고 있을 뿐입니다. 실은 신문이 더 흥미롭다고 느낄 겁니다. 이에 원수는 이득을 얻었습니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이 원수를 물리치고 싶다면 반드시 하나님 앞에 서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찾기 위해 기도로 싸워야 합니다.

사람들은 종교적인 질문을 가지고 엄청난 논쟁을 벌이지만, 신은 항상 죽어 있습니다. 신이 죽었다면 그들에게는 아주 잘된 일일 겁니다. 그래야만 자신들이 좋아하는 대로 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했는데 딱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나 저 세상에서나 행복한 삶을 얻기 바라지 않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아는 게 전부입니다. 저는 이 세상이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알 때까지 단 일 분의 값싼 행복도 바라지 않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엎드려 주님을 죽인 일을 통곡해야 합니다. 문제를 위해 태어났고, 투쟁하기 위해 태어난 우리입니다.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을 바늘구멍만큼 여기면서 인생은 항상 멋지고 순탄하기를 바라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미래는 우리가 기다려야만 하는 절대적으로 동떨어진 한 지점이 아니라 다가오고 있는 사건입니다. 아마 우리 대부분은 이것에 대한 의식이 없기 때문에 여간해서는 이렇게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그리스도의 미래는 현재이며, 현재가 아니라면 아무 뜻도 아닙니다.

죽음과 죽음의 한 가운데 있는 현생에서 자유롭기 위해서는 아무리 힘들어도 기꺼이 견디는 열의와 기쁨과 감사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럴 때 부활의 능력은 우리에게 더 가깝고, 그리스도는 참으로 부활하신 분이 되시며, 새 생명이 우리존재 속으로 찾아옵니다. 그것은 우리가 여태껏 추구해오던 종류의 생명이 아닙니다. 남들보다 좀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든지, 조금 덜 훔치거나 단정하게 차려 입고 품위 있게 걷거나, 범죄자의 모자를 그럴싸한 모자로 교체 하는 걸 새 삶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종류가 아닙니다. 이런 것을 새로운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말도 안됩니다.

이전보다 더 나아지는 것은 문제도 아닙니다. 새 생명이란 당신에게서 나타나는 생명의 힘이며,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것이자 거룩한 것으로 당신 안에서 자라날 수 있는 것을 뜻합니다. 죄악의 욕망은 더 이상 능력이 없고, 그리스도의 부활과 생명, 성령을 통한 능력이 우리를 온전하고 흠 없는 방향으로 인도하는 것을 실제로 볼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도대체 무엇입니까분명히 기독교 교리나 제도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을 위한 신성한 생명의 계시이며, 마음 생각 감정 가능성의 새 탄생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시려고 하나님으로부터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을 정복하시기 위해 우리 중의 한 사람처럼 되셔서 우리 속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완전히 새로운 삶과 새로운 질서를 위한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그분 안에서 우리는 완전히 다른 남자와 여자가 될 수 있습니다.

종종 그리스도인들은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들입니까!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보여줄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말문조차 열지 못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새 생명은 결코 이 세상의 일시적이고 세속적인 것에 들어 오거나 적용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완전히 새로 시작해야 합니다. 바로 이 지점으로 계속 되돌아 가야합니다. 더 깊고 더 철저히, 더 충분하게 완전한 새로운 출발을 계속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구주를 위하여 새로운 기초를 놓기까지 이 일을 지속해야 합니다. 그분의 죽음 같은 죽음으로 우리가 주님과의 연합에 이른다면 그분의 부활 같은 부활에도 반드시 연합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제서야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삶에 들어갑니다. 부활을 만난다는 것은 얼마나 엄청난 일입니까!

그리스도께서는 거듭하여 새롭게 살아나십니다.

부활은 과거 한때에 일어난 단독적 사건이거나 우연히 믿고 있는 교리 정도가 아닙니다. 그것들은 본질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만으로는 유익이 별로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믿긴 하지만 별다른 변화가 없습니다. 이런 믿음은 당신과 내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경험하지 않는 한 아무 도움이 못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기 어려워하는데 그건 최악이 아닙니다. 적어도 그 사람들은 아직까지 경솔하게 그것을 입밖에 내기에는 부활이 너무도 거대하고 엄청난 일이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실로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부활을 믿노라 주장은 하지만 실제로는 별 의미가 없을뿐더러 부활이 그들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죽음 이후 그 당시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부활이 있습니다. 부활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내면의 어떤 특정한 부분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갈 엄두도 못 내는 전혀 다른 장소에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완전히 다른 질서에 있음을 발견하는 그때 우리가 새롭게 되는 것이 현실이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거듭하여 새롭게 살아나십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새롭게 하기 원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의 뜻이 하늘에 계신 것처럼 이 땅을 위한 하나님의 뜻도 계십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그분의 실재를 전혀 모를 겁니다. 뭔가가 변화되리라는 상상도 전혀 할 수 없을 겁니다. 사람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인간으로선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영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아닙니다. 그분의 부활의 능력은 우리가 닿아 접근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새로운 가능성들이 있음을 깨닫고, 이것을 몸과 영으로 많이 감지할수록 더 요청할 수 있으며, 이 지상에서 더 높고 큰 것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사실, 아무 제한이 없습니다. 이런 연유로 우리는 일상생활에 속한 모든 영역에, 일하고 만지는 모든 것에 희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힘은 인간의 상황에 들어 올 준비가 되어 있으며 능히 그것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어둠과 악과 불완전성에 주목하지 말고, 이런 저런 문제들이 어떻게 결론 내려질지 파악해 내려고 애쓰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런 일은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넘쳐 날 때까지, 위로부터 오는 놀라운 능력이 우리의 모든 일에 작용할 때까지 예수님의 부활만을 더욱 더 구하는 게 우리의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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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부활주일을 준비하며
부활 신앙이란 주제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부활 신앙이란 사람의 존재 방식을 성경적으로 알고 믿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람의 존재 방식을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따라서 "부활이란 나의 존재 방식을 성경적으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첫째는 육체(肉體)의 사람

육체의 사람이란 현재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육체를 갖고 살아갑니다.
육체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 모두 하나 뿐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하나님 앞에서 평등합니다.

둘째는 영체(靈體)의 사람

영체의 사람이란 죽은 사람들이 존재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죽은 사람이 어디에 머물고 있는지는 모릅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한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이르리라고 하셨기에 낙원이라고 생각합니다.
또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서 부자와 거지가 죽었을 때 거지는 아브라함의 품에서 위로를 받았으나 부자는 음부에서 고통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낙원이든지 아브라함의 품이든지 또는 음부이든지 죽은 사람이 머무는 곳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셋째는 부활체(復活體)의 사람

부활체의 사람은 심판 때에 육체의 사람영체의 사람 모두가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을 말합니다.
부활체의 사람은 사도 바울은 신령한 몸이라고 하였습니다(고전 15:46)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우리들은 현재 육체의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육체의 사람이 앞으로 어떻게 변화될 것인가를 바르게 깨닫는 것이 부활 신앙입니다.

부활 신앙을 요약한 말씀이 요한복음 5장 24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I tell you the truth, whoever hears my word and believes him who sent me has eternal life and will not be condemned; he has crossed over from death to life.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영생을  얻었고(에케이)
      붙잡다, 소유하다  <현재형>

예수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습니다.
비록 우리들이 육체의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예수를 믿기 때문에 영생을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요한복음 11: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에르코마이)
      오다  <미래형>

세상 모든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히브리서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메타바이노)
      옮아가다, 옮기다  <현재완료>

예수를 믿기 시작한 것은 과거의 사건이었습니다.
이미 믿었을 때 구원을 받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지만 육체의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장차 부활의 날에 다시 살아날 것이므로 지금 받은 구원은 그 날에 다시 완성된 구원으로 드러날 것입니다(요한복음 11:25-2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사도 바울의 인간관

육(肉)에 속한 사람(고전 2:14)
The man without the Spirit

육신(肉身)에 속한 사람(고전 3:3)
You are still worldly

신령(神靈)한 사람(고전 2:15)
The spiritual man 

부활의 첫번째 정의는 나의 존재를 아는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는 육체의 사람에 속합니다.
육체의 사람은 땅에 속하였기 때문에 땅의 삶을 떠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땅에 속하였지만 땅의 것은 아닙니다.

부활의 두번째 정의는 나의 삶의 방식을 아는 것입니다.

나의 삶은 육신에 속한 삶에서 신령한 삶에 속한 방향으로 전진하여 나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아직도 육신에 속한 삶의 자리에 머물러 있다면 그 자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부활이란 육신에 속한 사람이 신령한 사람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육체의 나이와 영적인 나이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의 육체의 나이는 이미 어른이 되었으나 아직도 영적인 나이가 어른이 되지 못했다면 이것도 몹시 부끄러운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부활주일을 몇 번 맞이하셨습니까?
그만큼 영적인 나이가 성장했다면 성공적인 신앙생활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영적인 나이가 유치원생과 같다면 좀 더 분발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20:35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부활이란 죄에서 용서의 은혜를 확신하는 신앙
부활이란 죄의 결과에 따른 죽음에서 용서의 은혜에 따라 새생명을 얻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와 같은 부활 신앙 부활 생명을 일상생활에서 찾을 수 있는 몇 가지 사례로 설명하며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먼저 부활이란 "옮겨지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에덴동산에 있는 나무들 중에서 관심을 갖고 살펴야 할 두 그루의 나무는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와 "생명나무"라고 하겠습니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열매를 하와가 먼저 먹었고 그 다음에 아담에게도 주었습니다.
그 결과 아담과 하와에게 찾아온 것은 "죽음"이었습니다.

성경을 통전적(通全的)으로 읽어야 합니다.

"통전(統全)"이란 전체를 아우르고 조화시키고 통합한다는 뜻입니다.
‘통전’은 좌와 우, 아래와 위, 긍정과 부정, 개별자와 보편자, 특수성과 일반성, 그리고 믿음과 지식과 실천을 아우르고 통합하려는 것을 말합니다.

통전적 신학은 이것들을 아우르고 조화시키고 통합함으로써 단지 절충주의나 혼합주의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온전성(wholeness)을 지향한다. 한국 신학계에서 ‘통전적 신학’이란 표현을 가장 먼저 사용하고 통전적 신학의 수립을 위한 초석을 놓은 신학자가 이종성이다.

통전적 신학은 두 가지 중요한 측면이 결합된 신학이다.

통전적 신학은 방법론적으로 모든 것을 통합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 신학이다.
통전적 신학에 서 통(統)이란 말은 모든 것을 통합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통전적 신학은 모든 것을 통합하는 것(Integrity)에 머무는 신학이 아니다.

모든 것을 통합하는 것은 자칫 잘못되면 혼합주의로 흐를 위험이 있다.
통전적 신학은 모든 것을 통합해서 온전함(Wholeness)에 이르고자 하는 신학이다.
즉 통전적 신학은 온전함을 추구하는 신학이다.

통전적 신학의 영어 표기인 '통전적'(holistic)이란 말은 온전함과 관계가 깊은 단어이다.
즉 통전적 신학은 편협함을 극복하고, 중요한 정신과 관점을 소홀히 하거나 간과하지 아니하고 가능한 한 모든 진리를 통합해서 온전한 신학을 형성하고자 하는 신학이다.


성경에서 죽음의 시작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서 먹음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죽음에 대한 출발은 신약에서 사도 바울에 의하여 죄의 결과는 사망이라고 정의했습니다(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그런데 사람을 죽어야 할 길로 유혹한 존재는 사탄입니다.
사탄은 처음부터 죄를 짓게하는 타락한 천사를 말합니다(요한일서 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8:44 /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성경이 가르치는 교훈에 따라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는 죄를 짓게하는 사탄의 권세에 붙잡힌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생명나무는 영원한 삶을 약속받는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는 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두 나무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살펴보겠습니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창세기 2:17)
-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창세기 2:16-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
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선과 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죄의 결과라고 하셨습니다(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죽는다는 것은 죄의 결과라고 하겠습니다.
선악과의 열매를 따서 먹는다는 것은 죄를 범하는 것으로 선악과는 한마디로 죄의 나무 즉 사탄의 권세에 붙잡히게 하는 나무라고 하겠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모두 죽어야 합니다.
죽지 않으려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생명나무는 죽음을 해결하는 나무가 됩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가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생명나무를 따먹고 영생하는 것을 금하려고 생명나무 주위에 화염검을 두고 지키게 하셨습니다.

생명나무(창세기 2:9)
- the tree of life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세기 3: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세기 3:22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요한계시록 2: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요한계시록 22: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 나무가 있어 열 두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요한계시록 22:14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 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잠언 3:18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 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죄값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 생명을 얻으려면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생명나무가 상징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성경은 생명나무는 곧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는 사탄의 권세에 붙잡힌 인생
생명나무는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은 인생이라고 하겠습니다.

부활이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 즉 사탄의 권세에 붙잡힌 인생이 생명나무 즉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잡힌 인생으로 옮겨가는 것을 말합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땅에서 하늘로
마귀의 권세에서 하나님의 권세로
염소의 무리에서 양의 무리에게로

첫째는 플러그 아웃(Plug Out)에서 플러그 인(Plug In)

가정에서 가전제품을 사용하려면 먼저 가전 제품에 전원을 공급해야 합니다.
전원을 공급하려면 플러그를 꽂아야 합니다.

(예) 독일 교회 초청으로 독일행 비행기를 탑승하려고 김포 공항에 일행들이 모였습니다.
그때 작고하신 이정규목사님의 사위가 장인을 위하여 아주 성능이 좋은 전기 면도기를 선물하며 여행하는 동안 사용하라고 합니다.
당시 한국의 전압은 100V가 대세이었지요.
그런데 독일에 도착하여 몇일 후 이목사님께서 면도기를 빌려달라고 합니다.
그 성능 좋은 사위가 선물한 면도기를 사용하시지요?
코드가 맞지 않아 사용할 수 없다고 합니다.

둘째, 선악과나무에서 생명나무

에덴동산에 여러 나무들이 있었지만 특별히 두 종류의 나무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
또 다른 하나는 생명나무의 열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는 금지된 것이었습니다.
하지 말라는 것을 하라고 유혹한 것이 사탄입니다.

사탄의 정체가 무엇입니까?
사탄은 죄를 짓게하는 영적 존재입니다.

요한일서 3:8
죄를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사탄이 아담을 찾아온 것이 아니라 하와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하와를 유혹합니다.

셋째, 죄의 자리에서 용서의 자리

죄의 자리에 머물러 즐기며 살아가는 것은 염소와 같은 사람입니다.
용서의 자리에 머물며 믿음의 길을 걷는 것은 양과 같은 사람입니다.

염소는 가라고 하여도 가지 않습니다.
양은 가라고 하면 갑니다.
차이는 순종과 불순종입니다.

양은 여름철에는 가까이 다가가면 서로 덥기 때문에 흩어져서 잠을 잔다고 합니다.
염소는 겨울철이 되면 가까이 다가가면 따뜻해서 좋은 것을 알지만 상대편이 따뜻한 것이 싫어서 일부러 떨어진다고 합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염소는 섬김을 모릅니다.
반면에 양은 섬김을 압니다.

부활신앙은 섬김을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넷째, 사망에서 생명

사망은 땅에 속한 것이라면 생명은 하늘에 속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장례식 때 시신을 땅속에 안장하면서 이렇게 찬송을 부릅니다.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애급에 속한 인생이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간 것을 찬송합니다.

(예) 한승수일병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한일병은 대대장 1호차 운전병이었습니다.
관할부대 지역 지휘관들이 산정상 지휘소에 모여 작전 회의가 열리던 날 대대장을 회의장이 있는 곳으로 모신 후에 안내병의 신호에 따라 임시 주차시설이 있는 곳으로 차량을 이동하던 중 그만 1호차와 더불어 산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산 아래로 떨어진 1호차 운전병은 차밖으로 나와서 위를 바라보면 손을 흔들며 안전하다고 신호를 보냈습니다.
그 날 저녁 내무반에서 한일병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나의 생일은 오늘부터 이 날입니다."

왜 생일을 바꾸겠다고 하였을까요?
죽을 뻔 하였으나 구사일생으로 아무런 부상도 없이 살았기 때문입니다.

부활주일은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인생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삼일 후에 다시 살아나셔서 생명을 약속하신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면 누구든지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에 두 그루의 나무가 있었지요?

하나는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창세기 2:17)
-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창세기 2:16-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
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선과 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명매를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죄의 결과라고 하셨습니다(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죽는다는 것은 죄의 결과라고 하겠습니다.
선악과의 열매를 따서 먹는다는 것은 죄를 범하는 것으로 선악과는 한마디로 죄의 나무 즉 사탄의 권세에 붙잡히게 하는 나무라고 하겠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모두 죽어야 합니다.
죽지 않으려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생명나무는 죽음을 해결하는 나무가 됩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가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생명나무를 따먹고 영생하는 것을 금하려고 생명나무 주위에 화염검을 두고 지키게 하셨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생명나무(창세기 2:9)
- the tree of life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세기 3: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세기 3:22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요한계시록 2: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요한계시록 22: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 나무가 있어 열 두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요한계시록 22:14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 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잠언 3:18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 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 생명을 얻으려면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생명나무가 상징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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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위대한 복음 증거자 무디(1837-1899)는 젊었을 때 장례식 설교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장례식 설교대로 하기 위해 복음서를 살폈습니다. 

그러나 무디는 예수 그리스도의 장례식 설교가 없었으며 오히려 죽었던 사람들이 그의 말씀을 듣고 살아난 것을 확인했습니다.
예수께서 계신 곳에는 부활의 영광이 가득했던 것이다.

무디는 성경을 내려놓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크게 외쳤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파스칼은 청년 시절에 예수 그리스도와 깊은 만남을 가졌습니다.
인생을 전환시킨 이 경험은 그로 하여금 학문연구의 초점을 과학과 수학에서 신학으로 옮기게 했다고 합니다.

파스칼은 인생의 문제들에 직면하고 있는 모든 성도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훌륭한 기도문을 썼습니다.

"주님, 큰 일들을 마치 작은 일처럼 하도록 도와주소서.
제가 주님의 능력으로 그 일들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작은 일들을 마치 큰 일처럼 하도록 도와주소서.
제가 주님의 이름으로 그 일들을 하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주님이 내 안에 있는 한 작은 일은 없습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이 하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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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5년 니케아 회의에서 ‘춘분이 지나고 첫 번째 보름달이 오고 나서 첫 일요일을 부활절로 정했다’
왜 부활절에 색을 칠한 달걀을 주고받는 것일까요?

첫째 가설 : 그리스도의 고난을 추모하는 수난절 기간에는 금식이나 검소한 생활을 하도록 되어있으나 수난절이 끝나고 부활의 아침을 맞이할 때는 그 동안 먹지 않던 고기나 달걀을 먹는 데서 유래했습니다.

둘째 가설 : 죽음을 깨치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위대함과 놀라움은 바로 굳은 달걀 껍질을 깨치고 태어나는 병아리와 같다고 해서 달걀을 선물한 것입니다.

셋째 가설 : 유럽 십자군 전쟁 당시 로자린드 부인은 남편이 십자군 전쟁에 나간 뒤 사람들에게 집을 빼앗겨 먼 산골 마을에 피해 살게 되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 딱한 로자린드 부인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었고, 부인은 그 친절에 보답하는 뜻으로 부활절에 마을 아이들을 모아 맛있는 음식을 대접해주고,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상징으로 예쁘게 색칠한 달걀을 하나씩 나눠주었습니다. 그 달걀에는 로자린드 부인의 집안 가훈인 '하나님의 사랑을 믿자'라는 말을 적었고, 어느 해 부활절 날 길에서 로자린드는 병든 어머니를 찾아 간다는 어린 소년을 만나 위로하고 가지고 있던 색 달걀 하나를 주었습니다. 부인과 헤어진 그 소년은 어머니를 찾아가는 중에 한 산골에서 병든 군인을 만나 돌봐주고 로자린드 부인에게 받았던 달걀을 주었습니다. 그것을 받아든 군인은 자기집안의 가훈이 달걀에 쓰여 있는 것을 보고 소년에게 물어 그 부인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유래가 되어 오늘날에도 부활절이면 부활의 메시지가 담긴 색 달걀을 나누며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한다고 합니다.

넷째 가설 : 부활절 이전, 즉 Easter 축제일의 상징은 계란이 아니라 토끼였습니다. Easter 여신의 상징이 토끼였기 때문입니다. 이 부활절 토끼 풍습은 독일인들이 미국에 이민을 가면서 함께 들어갔으나 18세기 당시 미국의 기독교는 청교도를 위세해 엄격한 기독교가 주류를 이루었기 때문에 부활절 토끼는 전혀 발붙일 수 없었습니다.

부활절 역시 미국에서 자리 잡게 된 것은 남북전쟁 이후였습니다. 부활절을 축하하기 위해서 계란을 사용하게 된 것은 "모든 생명은 알에서부터 나온다."라는 로마의 속담을 비롯 기독교의 의미와 달걀이 연관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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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復活) :

돌아올 부(復), 다시 부(復). 살 활(活)

1.
한 번 행(行)하여지지 않게 된 것을 다시 한 번 행(行)하여 지도록 하는 것.
2. 십자가(十字架)에서 세상(世上)을 떠난 예수(Jesus)가 자신(自身)의 예언(豫言)대로 사흘만에 구주(救主) 그리스도(Kristos)로 되살아난 일. 부생(復生).
3. 톨스토이가 지은 장편(長篇) 소설(小說).
세계적(世界的) 명작(名作)의 하나.
공작(公爵) 네플류도프가 여주인공(主人公) 카추샤를 유혹(誘惑)하였으나 뒤에 양심(良心)에 가책(苛責)되어, 창부(娼婦)로 전락한 그를 갱생(更生)시키고 자신(自身)도 종교적(宗敎的)인 사랑에 의(依)하여 부활(復活)했다는 줄거리. 죄악(罪惡)과 허위(虛僞)에 찬 사회(社會)를 통렬(痛烈)히 비판(批判)했음.

revival
the Resurrection

ἔγερσις, εως, ἡ
부활
마태복음 27:53

οἰκητήριον, ου, τό  3613 [ŏikētēriŏn]
1. 거주
2. 부활 때 영광스럽게 변화 될 기독교인의 몸


ἀνάστασις, εως, ἡ  386 [anastasis]
1. 오름
2. 죽음으로부터의 부활
[과거에 있었던 예수의 부활] 행 1: 22, 2:31, 4:33, 17:18, 롬 1:4, 6:5, 빌 3:10, 히 11:35, 벧전 1:3, 3:21.

사도행전 2:31
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심판날에 있을 미래의 부활] 눅 14:14, 20:35,36, 요 11:24, 23:6,8, 24:15, 고전 15:12이하, 히 6:2, 계 20:15이하.

누가복음 14:14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3. 사도행전 1:22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ὀπτάνομαι 3700 [ŏptanŏmai]
1. 나타나다
2. 보여지다
3. 사도행전 1:3

ἐξανάστασις, εως, ἡ  1815 [ĕxanasta- sis]

1. 부활
2. 빌립보서 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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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이란 우리가 무엇을 행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누구에게 속했느냐의 문제입니다. 

죄를 지었기에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
아담에게 속해 있기에 죄를 짓게 되고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를 행하고 착하게 살았기에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속해 있기에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살게 된 것입니다. 

아담에게 속해 죄인이었던 우리를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 주시기 위해  죄가 없는 누군가의 희생과 대속의 죽음이 필요했고  그래서 주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셔서 기꺼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주께서 그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의 피가 우리를 의롭게 하였고  생명이신 주님께서 우리 안에 오심으로 영원한 새생명을 가진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  하나님의 가족이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의 희생으로 주님안에 거하여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고  용서하고 돕고 섬기는 주님의 열매를 맺는 하늘의 시민이 된것입니다. 
우리가 자녀가 되는 것은 내 의지와 상관이 없이 태어남으로 되는 것이지,  내 의지로 혹은 행위가 아름다워 누구의 자녀가 되는 것은 아니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내 의지와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택하심이요 사랑이요 은혜요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호흡이 멈추는 순간까지 반드시 기억하고 붙잡아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보혈의 피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없는 구원은 없습니다. 

구원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입니다. 
구원은 누구에게 속해 있느냐는 소속의 문제입니다. 
하늘에 속한 사람인지, 아니면 세상에 속한 사람인지... 

몸이 아프면 의사를 찾아갑니다.

환자의 의사에 대한 신뢰는 너무도 중요합니다.
의사에 대한 신뢰가 클수록 환자는 심리적인 안정뿐 아니라 치료 과정을 성실히 따를 수 있습니다.
의사를 통해 병이 낫게 되면 의사에 대한 고마움이 저절로 표출됩니다.
완치된 환자는 주변 사람들에게 자기를 치료한 의사를 조금도 의심없이 추천합니다.
이러한 선순환은 환자와 의사를 비롯해서 사회 전반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예수님의 38년된 병자를 고친 일은 당시 유대인 사회에 얼마나 강력한 영향을 미쳤을지 충분히 예상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영향력을 축소시키기 위해 신성모독이라는 당시 사회에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죄목을 뒤집어씌웁니다.
사실 여부를 떠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만들어놓은 신성모독죄를 지은 죄인이라는 소문이 빠르게 퍼져나갔고 예수님에 대한 이미지도 매우 나빠졌습니다. 예수님이 무슨 말을 해도 믿지 않는 사회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이것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살해 위협과 사회적인 반감을 온 몸으로 느끼시면서도 자신이 누구인지,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강력히 선포하셨습니다. 자신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친아들과 아버지의 관계임을 더욱 큰 목소리로 외치셨습니다. 이것을 신성모독이란 죄목으로 덮어씌워 사람들을 예수님에게서 멀리 떨어지도록 만든 유대인들을 향해 하나님의 친아들로서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러 오셨음을 천명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생명과 심판을 주실 수 있는 권한을 갖고 계셨듯이 자신도 동일한 권한을 갖고 있음을 전하셨습니다. 아무리 유대 사회가 예수님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어도 그것에 굴하지 않고 자신을 통해야만 생명을 얻을 수 있음을 외치신 모습은 너무도 인상적입니다. 이런 배경 속에서 볼 때, 본문이 말하는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에 대한 이야기는 마치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듯한 느낌으로 들렸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을 믿지 못하도록 신성모독죄를 덮어씌웠는데 예수님은 ‘내 말을 듣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씀하시니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었을까요? 적대적인 분위기로 가득한 청중에게 ‘나를 믿으라’고 한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충분히 예상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분위기 속에서 ‘내 말을 들으라’고 사람들에게 외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시 유대인들에게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라고 외치신 것처럼 지금도 이 메시지는 울려퍼져야 합니다. 사람들의 반응이 적대적일수록 영생의 메시지는 더욱 큰 목소리로 외쳐져야 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야만 우리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확증하셨듯이 지금도 이 말씀은 유효합니다. 우리는 사회적인 반감과 사람들의 무관심 내지 적대심을 극복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이것만이 우리로 심판이 아닌 영생에 이르게 하며 사망에서 벗어나 생명으로 진입할 수 있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심판과 영생, 사망과 생명이라는 커다란 틀 속에서 예수님을 믿고 살아가야 합니다. 눈 앞에 닥친 세상의 수많은 일에 파묻혀 사는 우리가 이것을 놓치고 살기가 너무도 쉽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희노애락 속에서 좌충우돌하면서 살지만 우리는 심판이 아닌 영생을, 사망이 아닌 생명을 얻은 자로서 인생의 수많은 문제들에 맞서 싸울 수 있어야 합니다. 이뿐 아니라 우리는 사회의 넘쳐나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예수님의 말씀만이 진리라는 확신을 갖고 예수님에게 귀를 기울이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영생을 얻은 자로서, 사망이 아닌 생명을 얻은 자로서 세상에 우리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가장 훌륭한 방책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금준이란 애가 있었습니다.
몸이 약하고 성격이 소심해서 늘 맞고 다니는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맞고 다니기는 고사하고 대장 노릇을 했습니다.
특별히 힘이 세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성격이 완전히 바뀐 것도 아닌데 어찌된 노릇일까?
알아 봤더니 놀라운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금준이는 자기 아버지가 동네 어른들 가운데 싸움을 제일 잘하는 무서운 사람이란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강함을 안 후로는 누구도 무섭지 않았습니다.
특히 아버지가 깡패들과의 패싸움에서 칼에 맞고도 일어나서 그들을 때려 눕힌 전설적인 이야기를 듣고부터는 무서운게 없었습니다. 이게 바로 믿음의 힘입니다.
이게 바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의 힘입니다.

그런데 이 아이에게도 위기는 닥쳤습니다.
일년 365일 매일 잘 나가는 것이 아니고 어떤 때는 신나게 터졌습니다.
대장 노릇은 고사하고 다시 옛날로 돌아갔습니다.
아버지가 병이 들어서 자리에 누웠는데, 사람들이 모두 죽을 병이라고 수군거릴 때였습니다.
그동안 금준이 아버지가 무서워 기던 아이들이 일제히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금준이 아버지가 자리에서 털고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사정이 다시 역전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금준이가 다시 동네 형들의 가방을 메고 학교에 왔다갔다 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이유는 너무나 간단했습니다.
금준이가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여름에 동네에 아이스크림 장사가 오는데, 그게 먹고 싶어서 아버지 돈 50원을 슬쩍해서 사 먹어 버린 것입니다.
이게 아이들에게 약점이 잡힌 것입니다.
아이들은 그것을 너희 아버지에게 일러 버리겠다고 겁을 줬습니다.
자기의 힘이 되고, 든든한 방패가 되었던 아버지가 이제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특히 아버지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거짓말과 도둑질이라는 것을 아는데, 걸리면 죽는다는 생각에 졸지에 대장 노릇도 끝나고 종노릇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기가막힌 영적 교훈을 보여주는 예입니다.
만약 이 친구가 아직도 예수를 안믿는다면 어릴 때 직접 겪었던 이 이야기를 해 주고 싶습니다.
성도들이 힘을 잃어버리고 마귀의 종노릇하는 것은 바로 자신의 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하지 말라고 한 것을 했을 때, 하라고 한 것을 안하고 거짓말을 했을 때, 주어진 영적 권세와 능력을 소멸되고 맙니다. 원수들은 그것을 잘 이용합니다.

금준이가 속박의 생활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딱 한 가지였는데, 그는 오랫동안 그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몸도 약한 친구가 상급생들의 가방을 메고, 용돈을 뜯기고,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보다 못한 친구가 충고를 해 주었습니다.

“아버지에게 가서 다 말하고 용서를 빌어라.
맞을 때 맞더라도 그렇게 하고 나면 동네 형들에게는 편할 것 아니냐?”

그래서 금준이는 용기를 내서 아버지한테 죄를 다 고백했습니다.
그러면서 얼마나 서럽게 울었는지, 아버지가 불쌍한 마음이 들어서인지 그것 때문에 그 마음 고생을 하고, 힘든 생활을 한 아들에 대한 연민 때문인지 아이스크림을 마음대로 사먹으라고 500원을 줬습니다.
당시에는 매우 큰 돈이었습니다.
용서의 기쁨만 얻은 것이 아니라 생각지도 못한 용돈까지 듬뿍 얻었습니다.
그 다음날부터 동네 형들의 괴롭힘을 받았겠습니까?
안 받았겠습니까?
야, 가방 매! 하는 소리에 ‘내가 미쳤나, 자식아. 너의 가방을 내가 왜 메냐?’ 이 아이가 용서를 받고, 용돈까지 얻은 사실을 모르는 아이들이 약점을 잡고 협박을 했지만, 금준이 하는 말...‘그래 가서 입 아프도록 일러라!’ - 이미 끝난 것입니다.

금준이가 지은 죄를 그 아버지가 알면 신나게 맞고 터질 줄 알았는데, 아무 일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용돈까지 듬뿍 받았다는 말에 아무도 다시 그를 건드리지 못했습니다.
이것 역시 우리의 영적 생활, 영적 원리를 기가 막히게 잘 묘사해 준 예입니다.

세상에 죽음을 이기는 사람은 없습니다.
죽음을 피한 사람도 없습니다.
자신이 영원히 살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은 누구나 피할 수 없는 것처럼 생각해 왔습니다.
솔직히 삶과 죽음의 간격은 한 발짝입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다윗은 사무엘상 20:3에서 이르기를, [..그러나 진실로 [주]께서 살아 계심과 네 혼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와 죽음 사이는 한 걸음뿐이니라.](삼상 20:3).

우리는 늘 죽음을 직면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영원이 시작되는 데 걸리는 시간은 한 순간입니다.
이 세상에 너무 바빠서 자기 장례식에 가지 못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너무 바빠서 죽을 시간이 없는 사람도 없습니다.
죽음은 나이와 건강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죽을 수 있습니다.
건강할 때든, 병들어 있을 때든, 나이가 들었든, 젊든 상관없이 죽습니다.
우리는 잠시 하나님께서 빌려준 시간 속에서 살아 갈 뿐입니다.

이 세상에 죽음보다 더 강한 권세를 가진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사람이 죽어 가는 이야기를 보고 듣고 있습니다.
누가 죽음을 이긴 사람이 있습니까?

바그다는 신밧드의 고향이요, 알라딘의 램프와 같은 신화와 전설의 고향입니다.
거기에 내려오는 상인에 대한 전설이 하나 있습니다.

“어느날 상인이 자신의 종들을 시장에 보냈습니다.
오래지 않아 종이 하얗게 질려서 벌벌 떨며 돌아왔습니다.
종은 주인에게 초조하게 간청하기를 "시장에 내려갔다가 어떤 여자에게 밀쳐져 돌아섰을 때 사람들 가운데 서 있는 저승 사자를 만났습니다.
저승 사자는 정말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저를 위협하는 자세를 취하였습니다.
주인님, 제게 주인님의 말을 한 필 내어 주십시오.
저는 급히 죽음의 사자를 피해 멀리 도망가겠습니다.
저는 사마라로 가서 거기 숨어 있겠습니다.
죽음의 사자는 저를 찾지 못할 것입니다."

상인은 종에게 말을 한 필 내어 주었고 종은 전력 질주하여 도망쳤습니다.
주인은 시장으로 내려가서 사람들 가운데 서 있는 죽음의 사자를 보았습니다.

"이보시오. 어찌하여 나의 종에게 그리 겁을 주었소?"
그러자, 죽음의 사자는 "제가 겁을 주는 자세를 취한 것이 아닙니다. 바그다드에서 그를 보고 놀란 것은 오히려 저 쪽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밤 사마라에서 그를 만나기로 약속되어 있는데 말입니다."”.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죽음은 바로 죄의 삯이기 때문입니다(롬 6:23).
한번 죽는 것은 사람들에게 정해 놓으신 하나님의 법이기 때문입니다(히 9:27).

한 가지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해드리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죽음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그 언약은 다름 아닌 죽음이 부지불식간에 모르게 찾아와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죽음이 올 때는 반드시 미리 알려 주도록 했습니다.
수년 전에 알려주고, 마지막에는 죽기 전 바로 앞에 서 있도록 했습니다.
그 노인은 갑자기 질려서 쓰러지며, "왜 당신은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거요. 당신은 분명히 미리 말하지 않고는 오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지 않소. 당신은 사전에 나에게 아무런 경고도 주지 않았소."
그러자 죽음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소!"라고 대답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나는 흰 머리가 바로 경고였소.
모든 사람들의 빠지는 이가 바로 경고였소.
눈이 침침해지는 것도 경고였소. 육신의 힘이 쇠하여 지고 정력이 감퇴하는 것도 경고였소.
모든 것이 경고였소.
나는 수 차례 끊임없이 찾아 올 것을 경고해 드렸소이다!"

죽음은 지체하지 않습니다.
실수로 어떤 사람을 띄어 넘는 법도 없습니다.

어느 민족, 어느 시대에 살던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냉철한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위의 이야기들은 회교의 본 고장에서 만들어진 죽음에 대한 이야기들입니다.
어느 종교를 믿든지 죽음을 부정하거나 이길 수는 없었습니다.
죽음을 이기지 못하는 종교는 참 종교가 아닙니다.
죽음을 이길 수 없는 종교의 기원은 모두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성경에만 죽음을 이긴 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는 이것을 부활이라고 합니다.
주님은 죽은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누구든지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결코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 11:25-26).

주님은 죽은지 나흘이나 지난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셨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친히 죽음에서 일어나심으로 죽음을 정복한 첫 사람이 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의 권세를 이기는 힘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이시기 때문에 죽음은 그를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소망이 있고, 우리의 믿음의 근거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이야말로 하나님의 권능을 가장 잘 드러낸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병든 자를 치유하시고, 자연을 마음대로 다스리는데서도 자신의 권능을 보이셨지만 하나님도 죽을 수 있을까? 하나님도 죽으면 다시 살 수 있을까? 이런 어린 아이같은 질문이지만 인간들에게는 가장 심각한 문제에 대해서 시원한 해답, 정확무오한 해결책을 몸소 보여 주신 사건이 바로 부활이란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죽을래야 죽을 수 없는 분이시지만 스스로 인간의 육체를 입고 사람의 모양으로 오시고, 완전한 사람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생명 자체이시지만 사람들과 같이 사셨고, 육신의 연약함을 다 체험하시고 죽음을 맛보셨습니다.


다만 예수님을 보노니 이 예수님께서 죽음의 고난을 당하사 천사들보다 조금 낮아지셨다가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히 2:9).

하나님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일을 하셨지만 오늘은 간단하게 히브리서 기자가 말한 세 가지를 요약하겠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십자가의 죽음의 의의를 다음 세 가지로 요약했습니다.

첫째, 죽음의 권능을 가진자 마귀를 멸하셨습니다.

[자녀들은 살과 피에 함께 참여한 자들이므로 그분도 마찬가지로 같은 것에 참여하셨으니 이것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권능을 가진 자 곧 마귀를 멸하시고]
(히 2:14).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권능을 지니신 분이시며, 죽은 자를 일으키시는 부활의 권능을 소유하신 분이신데 반해 마귀는 죽음의 권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죽음을 통해서 하실 일이 있으셨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 죽음을 이기신 것입니다.

둘째, 죽음에 메인 사람들을 건져 내신 것입니다.

[또 죽음을 두려워하여 평생토록 속박에 얽매인 자들을 건져 내려 하심이라](히 2:15).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죽음을 두려워하고, 평생토록 죽음이나 속박에 매인 자들을 건져내셨습니다.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가장 효과적이고도 무서운 말이 ‘죽여 버린다’, ‘너 죽어’란 말입니다. 아무리 태연한 척, 용감한 척 해도 막상 죽음 앞에서는 두렵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셋째, 범죄들을 대속하시고 영원한 상속의 약속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그분께서는 새 /상속/ 언약의 중재자이시니 이것은 죽음을 통하여 첫 /상속/ 언약 아래 있던 범죄들을 대속하시고 부르심을 받은 자들로 하여금 영원한 상속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히 9:15).

주님은 죽음을 통해 새 상속 언약의 중재자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첫 상속 언약 아래 있던 범죄들을 대속하시고, 부름받은 자들로 하여금 영원한 상속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런 목적을 가지고 죽으신 주님께서 부활하지 못하셨다면 십자가의 죽음은 선한 목적으로 시도되었지만 비참한 실패로 종결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심으로 죽음을 통해 이루시고자 했던 모든 것들을 이루셨고, 믿는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게 되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의 참된 의의는

첫째, 주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신 것입니다.


[거룩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사 하나님의 아들로 권능 있게 드러나셨느니라.](롬1:4). 주님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로 권능있게 선포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는 아무도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못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믿었던 제자들에게도 의심과 불신을 던졌습니다. 그를 따르던 여인들에게도 심한 슬픔과 눈물, 통곡만을 뿌려주었습니다. 한 때 그를 믿었던 사람들에게는 깊은 좌절감과 강한 배신감을 안겨 주었습니다. 주님의 이적을 맛보고, 그분의 설교를 통해 은혜를 누렸던 사람들은 십자가의 죽는 모습을 통해 모든 것은 끝이 났다고 단정지었습니다. 그러나 부활을 통해 이전에 고백했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강한 확신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선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초대 교회 때 집회의 설교 주제는 항상 부활이었습니다. 그들의 모든 관심 역시 부활이었습니다. 부활의 설교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근심을, 믿는 자들에게는 언제나 은혜를 끼쳤던 것입니다. [그들이 백성을 가르치며 또 예수님을 통하여 죽은 자들로부터의 부활을 선포하므로 근심하고](행4:2). 부활의 소식이 근심이 된 사람들은 마귀의 자녀들입니다. 이들은 이것이 사실일지라도 덮어지고,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자기 아버지가 패했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할 자녀가 없듯이, 마귀의 자녀들 역시 그러했습니다. 반면 부활의 자녀들은 이 소식을 영원히 자랑스러워하는 위대한 사건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매 큰 은혜가 그들 모두에게 임하니라.](행4:33). 우리는 부활의 소식을 통해 날마다 죽음의 권능을 가진 마귀를 멸하신 우리 주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은혜를 누립니다.

어떤 아버지는 아들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네가 이제 비로소 내 아들이 되었구나!” 처음부터 자신의 아들이었지만 어떤 어려운 일을 기필코 완성해 내었을 때, 견뎌내고 승리했을 때 그런 말을 합니다. 연속되는 패배에 굴복하지 않고 일어섰을 때 아버지는 ‘오늘 너는 내 아들로 온 세상에 알려졌구나!’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었지만, 부활을 통해 온 세상에 권능있게 당당하게 공개적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부활하지 못했다면 저와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뭐 죽고 그래? 죽는게 사람이지 어찌 하나님의 아들이야? 죽었는데 알게 뭐야? 어떻게 증명해? ...그러나 부활로 인해 이런 의심에 찬 논쟁은 더 이상 의미가 없습니다. 부활을 통해 그분은 인간의 피가 아닌 하나님의 피로 육신을 입으신 성육신이 입증되었습니다. 부활을 통해 그분의 모든 이적과 권능있는 말씀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행하셨음이 확증되었습니다. 부활을 통해 그분의 죽으심이 대속의 죽음이란 사실이 증명되었습니다. 부활을 통해 그분의 다시 오심에 관한 약속 또한 분명히 성취될 약속임이 증거되었습니다.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영을 받은 우리 역시 하나님의 아들이란 사실이 선포되었습니다.

둘째,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성도는 십자가의 피를 통해 죄의 용서를 받고, 그분의 죽으심을 통해 죄의 육신을 처리받고, 부활을 통해 생명의 능력을 받습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찬송하리로다. 그분께서는 자신의 풍성하신 긍휼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게 하심으로 우리를 다시 낳으사 산 소망에 이르게 하시며](벧전1:3). 성경은 우리의 거듭남이 주님의 부활의 결과란 점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이 거듭나는 것을 살아 계신 말씀을 통해서입니다(약1:18, 벧전1:23). 그 말씀이란 바로 주님께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복음의 말씀입니다. 부활은 바로 우리의 거듭남, 구원의 핵심입니다. 주님의 부활이 없다면 구원은 없습니다. 거듭남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주님 자신 혼자만의 부활이 아니라 바로 믿는 자들의 영을 거듭나게 하는 생명을 주는 부활이셨습니다.

우리는 영은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모두 죽은 채 태어났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우리의 죽은 영을 살리시는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살아 있는 혼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셨느니라.](고전15:45). 우리의 몸은 구속받지 못했지만 우리의 영은 살아나 주님을 인지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는 본연의 기능을 회복했습니다.

셋째, 성도들이 하나님의 권능을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성도들에게 더 이상 죄의 권능, 사망의 권세 아래 종처럼 부림을 당하지 않고 오히려 승리하게 하는 역사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더 이상 육신의 소욕대로 살지 않고 세상의 조류대로 살지 않고 정복하는 삶을 충분히 가능하게 해 주었습니다. 아무도 이길 수 없었던 마귀를 몰아내고, 그들의 궤계를 멸하고 영적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단지 2,000년 전의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믿는 자들에게 지속적으로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바울이 이 땅에서 간절히 알고 싶어했던 한 가지는 바로 부활의 권능이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의 권능과 그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알고자 하여 그분의 죽으심과 같은 모습이 되어 어찌하든지 죽은 자들의 부활에 도달하려 하노니](빌3:10-11). 사도 바울은 이 땅에서 주님의 부활의 권능으로 살았던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스스로 고백하기를,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 대한 나의 기쁨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고 했습니다. 고로 그는 날마다 부활의 권능을 맛보았던 것입니다. 육신의 죽음과 부활은 한번 이상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영적인 여정은 날마다 죽고 날마다 살아나는 그런 삶의 연속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살아 있는 것은 육신의 생명이 죽지 않아서 살아 있는 것입니다. 반면 성도가 살아 있는 것은 육신이 죽고 영이 거듭나서 살아있는 것입니다. 이 생명은 결코 다함이나 끝이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땅에서 나는 음식으로 육신의 힘을 키우고, 종교적 신념과 교육을 통해 혼의 능력을 기릅니다. 그러나 그들의 영은 죽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우리의 영이 살아있습니다. 우리의 겉 사람은 세상 사람들과 마찬가집니다. 그러나 다시 태어난 속 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집니다. 부활의 권능은 우리의 속 사람을 새롭게, 강건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이런 까닭에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 사람은 썩어 없어지나 속 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지는도다.](고후4:16). [그분께서 자신의 영광의 풍부함에 따라 자신의 영을 통하여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엡3:16).

저는 성도들이 부활의 권능에 대한 깊은 이해와 조명이 있기를 바랍니다. 무지는 우리를 암흑 속에 가두어 둡니다. 무지는 동시에 권리를 향유하지 못하게 합니다. 권리 위에서 잠자는 자들은 법이 보호해 줄 수 없다는 어떤 판사의 판결처럼, 성도로서 성도의 권리를 전혀 누리지 못하는 것은 대부분 영적 무지에서 기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현재 우리 자신에게 미치는 영향이나 그 부활을 통해서 성도가 누릴 수 있는 영적인 권능에 대해 너무나 무지한 탓에 이름만 그리스도인일 뿐 아무런 영향력도 끼치지 못하고, 아무런 은혜도 누리지 못합니다. 십자가는 걸고 다닐 목걸이라도 있고, 장식이라도 있고, 성화(聖畵)라도 있지만 부활은 목걸이도 없습니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부활에 대해서는 해마다 부활절에만 연례 행사처럼 설교를 들을 뿐 도무지 생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저희 교회의 성도들은 그런 부류에 해당되어서는 안됩니다.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주님이 현재, 지금 바로 내 안에 살아 계시며, 영원히 함께 하고 있다는 임재(臨齋)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이는 그분께서 약하심을 통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셨으나 오히려 하나님의 권능으로 살아 계시기 때문이며 또 우리도 그분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한 하나님의 권능으로 그분과 함께 살 것이기 때문이라.](고후 13:4).

현재 우리가 사는 삶은 성령의 능력으로 사는 삶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사는 삶입니다.






기독교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십자가와 부활은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십자가의 죽음은 부활을 전제하고 있고, 부활은 십자가의 죽음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두 사건은 결코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사건’이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십자가에서 시작되었다.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는 부활을 말할 수 없고,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짊어져야 한다.

‘No cross, No crown’,
즉 고난의 십자가가 없으면, 영광의 면류관도 없다.

기독교 복음이 고난과 희생의 십자가에 머물지 않고 영광과 승리의 부활로 나아간다는 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오늘도 삶과 신앙의 현장에서 고난과 희생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우리 한국 기독교인들은 어떤 부활을 소망해야 할까?

사람의 부활을 소망하라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공생애를 통하여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가 죽어 무덤에 갇혀 있을 때 그를 다시 살리는 부활의 역사를 일으키셨다.(요 11:17-44)
그리고 자신 또한 안식일 전날인 금요일에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가 안식일 다음 날에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셨다.(막 16:1-7)
이로써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것이다.
사도 바울의 회상에 따르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게바에게 보이신 후 열두 제자에게와, 오백여 형제에게도 일시에 보이셨고 야고보에게도 보이셨으며, 맨 나중에는 자신에게도 보이셨다고 증언하고 있다.(고전 15:3-8)
이 과정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의아해하며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도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 그분의 부활을 믿게 되었다.(눅 24:13-35)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불신하던 도마조차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부활을 믿게 되었다.(요 20:24-29)
이처럼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제자들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가서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하였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수용한 한국 그리스도인들도 고난의 삶 속에서 부활에 대한 놀라운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서원보(W. C. Swearer) 선교사는 1901년 충청도 서해안에 위치한 해미 신앙공동체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이 신앙공동체의 지도자는 태풍이 왔을 때 바다에서 아들을 잃은 아픔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던 이 지도자는 천국에서 아들을 다시 볼 것이라는 부활의 소망을 굳게 가지고 있었다고 전한다.

이처럼 부활신앙은 내세에 대한 강한 믿음과 함께 현세에 선한 소망을 던져주고 있다.
그런 가운데 실제적으로 한국교회 역사 속에는 죽었던 자가 다시 살아나는 희귀한 일이 더러 있었는데, 이는 부활에 대한 예표가 되었다.

경기도 안산구역 전도사 김동일씨의 통신을 거한즉 본구역 사랑리교회 박봉근씨는 이왕 예수 믿기 전에 자기가족 중에 예수 믿는이를 원수같이 여기고 무수히 비방하더니 하루는 박씨가 믿는 형제의 집에 와서 말하기를 내 처가 사경에 이르렀으니 죽던지 살던지 찬미와 기도나 하여 달라고 간청하매 형제 몇 사람이 가 본즉 병자는 이미 죽었고 집안 식구는 장사 지낼 공론이 분분하거늘 그러나 기도하여 달라하거늘 형제들과 박봉근씨와 일심으로 찬송과 기도를 몇분동안 할 새 죽었던 사람이 차차 생기가 있어 그 아침에는 다니기도 하며 말도 하니 의연한 새사람이 되매 온 집안이 주를 독실히 믿으매 인동에 사는 외인까지 하나님의 권능을 찬송하였다더라

교회의 부활을 소망하라

사도 요한이 서신을 보냈다는 요한계시록 속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 소아시아 일곱교회는 교회로 존속하지 못하고 유적지로 변하였다.

그중 유일하게 서머나(현재 터키 이즈밀) 지역에는 순교자 폴리갑 감독을 기념한 교회가 재건되어 예배를 드리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교회 속에도 설립된 후 지금까지 그 역사를 이어가고 있는 교회들이 있지만, 설립되었다가 자취를 감춘 교회들도 결코 적지 않다. 달리 표현하자면, 궁극적으로 잃어버린 교회들이 된 것이다.

특히 해방의 봄 속에 깃든 분단의 겨울 속에서 북한 교회들도 잃어버렸다.
그리고 현재 교회 환경의 변화와 교인의 지속적인 감소 등으로 인해 다수의 농촌교회와 도시 개척교회들이 생존의 위기에 봉착해 있다.
살아 있으나 죽은 것과 진배 없는 교회들이 적지 않다는 뜻이다.

이러한 냉엄한 현실 속에서 한국교회의 역사 속에는 다 죽었던 교회가 되살아난 놀라운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강화 화도면에 자리한 문산교회의 부활 이야기이다.
1906년에 태동한 문산교회는 급속하게 성장하여 1907년 3월에는 교인들의 헌금과 미 감리회 여성해외선교회의 보조로 초가 10칸을 매입하여 독립적인 예배당까지 마련하였다.
그렇지만 교회에 큰 위기가 찾아왔다.
정미의병이 발생했을 때 일제의 강화수비병토벌대가 교회를 핍박함에 따라 교인들이 흩어져버린 것이다.
이 같은 최악의 상황 속에서 교인 박기산은 10여 년을 홀로 기도와 예배로 인내하며 교회를 지켰고, 1915년 강화도 마리산 부흥회를 계기로 문산교회는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강화군 화도면 문산동 사는 박기산(朴起山)씨는 교회 속장으로 일가의 핍박과 동리의 군축을 인하여 교우가 점점 흩어지고 교회가 없어지게 된지라 박씨가 애통하고 기도하고 십년동안을 혼자있어 기도하고 다 쓰러져가는 회당에서 매주일에 예배하고 성일을 지키더니 하나님께서 도우사 작년봄 부흥회에 자기 집안 식구들이 병도 고침을 얻고 다시 회개하는 열심도 얻어 함께 예배함으로 교우들이 차차 다시 일어나는지라 그 부친은 근본 여러해 동안에 영국종고성교회[성공회]를 믿어 그 교회의 회장으로 시무하셨으니 이름은 사가리아라 그때의 부흥회를 인하여 자기 집안 식구들이 특별히 은혜 받음을 보고 마음이 감동하는 중에 성신의 책망하심을 당하여 진리로 돌아온지라 부자형제가 단합하여 열심히 믿음에 교우들이 삼십명 달하고 금년봄부터 회당을 다시 건축하기로 시작하여 여름에 준공한지라 유월 이십구일 예배에 각 처 교우들이 모여서 회당봉헌식을 행하였는데 본지방 목사 김광국씨와 감리사 최병헌씨가 성례의 순서를 행하고 강도한지라 회당은 비록 크지 못하나 초가로 일곱간이오 당일에 모인 교우는 백여인이라 기쁨으로 찬송하고 정성으로 예배하였으니 하나님께서 박씨가 십년동안이나 잘 참고 견딘 정성을 권고하심이라 하더라

국가의 부활을 소망하라

가나안을 떠나 애굽으로 이주한 70명의 야곱의 후손은 430년 만에 애굽에서 탈출하는 해방의 기쁨을 맞이하였다.(출 12:40-42)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렘 29:10)처럼
70년 만에 고레스의 칙령에 의해 고국으로 귀환하였고, 이후 무너진 성을 재건하고 성전을 다시 건축하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크고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다.(스 1:1-4)

우리나라도 1910년 일본에 합병되는 한일병탄의 치욕을 경험하였다.
하지만 일제 치하 36년 만인 1945년 해방의 기쁨을 누렸다.
그렇지만 해방의 기쁨은 이내 남북분단의 아픔을 가져왔다. 비록 남북이 분단되었지만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역사로 남북통일이 이루어지는 새 역사를 창출해주실 것이라는 기대와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일례로, 충남 아산에 있는 구미동교회(현재 백암교회) 출신 김복희를 들 수 있다.
이화고등보통학교에 재학하던 중 3・1운동이 발생하자 학교의 휴교로 인해 고향 아산 백암리에 내려온 후 영신학교 교사 한연순과 함께 3・1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던 그녀는 일제로부터 독립이라는 ‘큰 일’을 행하신 하나님께서 남북통일의 ‘큰 일’도 반드시 이루어주시리라는 확신 속에 평생을 기도하였다.

이처럼 김복희가 가졌던 남북통일에 대한 기대와 확신은 다른 무엇보다 일제로부터 해방을 체험한 역사적 경험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만큼 조국해방은 함석헌 옹의 표현대로 느닷없이 도둑처럼 찾아온 바로 그런 것이었다.

강원용 목사는 자신의 회고록 『빈들에서』에서 느닷없이 도둑처럼 찾아온 해방에 대하여 시편 126편 1절의 표현처럼 마치 꿈꾸는 것 같았다고 회상한 바 있다.
이는 일제 말기 사상범으로 수감되었다가 가석방된 그가 재수감의 우려 속에 가족들과 함께 산속으로 들어가 생활하던 중 산에서 해방을 인지하게 되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였다. 그는 마치 꿈꾸는 것 같았다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우리는 그렇게 산속에서 외부와는 일체 단절된 채 한 열흘 정도 살았는데, 어느 날 아랫동네에서 느닷없이 애국가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아마 그때가 8월 18일 정도였던 것 같다. 깜짝 놀라서 마을 쪽을 자세히 관찰했더니 마을에서 국민학생쯤 되는 아이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뛰어다니는 것이 보였다.

나는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눈 앞에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아 우리는 어안이 벙벙한 채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어찌됐든 진짜 해방이 되었다면 우리 식구는 힘든 산속생활을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되었으므로 우리에겐 해방이 정말 실감나는 ‘해방’인 셈이다.



부자들의 파티

부활이 없는자의 삶은 소망이 없기에 방탕합니다.

옛날 어느 나라에서 부자들이 파티 할 때에 필히 관을 준비하고 그 관속에 인형을 시체대신 수의를 입혀서 눕혀 놓았다가 한창 잔치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누군가가 그 관뚜껑을 열어 제치고 그 속을 들여다 보게 하면서 “우리도 머지 않아 이렇게 관속에 들어갈 수 밖에 없는 운명인데 그러기 전에 더 잘 먹고 더 재미있게 놀다 죽읍시다. 

잔뜩 쌓아만 놓고 먹지도 놀지도 못하다 죽으면 얼마나 원통한가?” 하고 외치면 모두 미친듯이 먹고 마시고 날뛴다고 합니다. 
부활을 모르는자들의 춤과 노래와 향연은 미친듯이 날띄는 것 뿐입니다.    

뱀의 몸을 찢은 물고기 
 
“한마리의 큰 뱀이 바닷속을 헤엄치면서 많은 물고기를 집어 삼켰습니다.
그러다가 날카로운 지느러미를 가진 물고기를 집어 삼켰습니다.
날카로운 지느러미를 가진 이 물고기는 뱀의 뱃속에 들어가 너무 캄캄한지라 여기서 못살겠구나 하여 자기의 무기인 날카로운 지느러미로 그 뱀의 배를 찢고 나와 버렸습니다.
그랬더니 먼저 잡혀 먹힌 다른 물고기들도 그 뒤를 따라 나와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뱀은 죽었습니다.”

이뱀은 사망입니다.
이 뱀이 오랫동안 사람들을 잡아먹었습니다.
어느날 예수님까지 삼켰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의 무덤을 열어 헤치고 나왔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믿고 죽은자가 예수님을 따라나오게 됩니다. 
믿는자의 산 소망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무덤문은 열렸습니다.

사슴의 눈물을 먹는 이유

오래살려고 서양 사람들은  사슴의 눈물을 먹습니다.
왜냐하면 세익스피어의 희곡 “마음내키는대로”를 보면 사슴이 죽을때는 반드시 눈물을 흘리는데 그 눈물을 받아 먹으면 만병이 통치되어 오래 산다는 대사가 나오는데 그 말을 믿고 먹는답니다.
그러나 오래살 수는 있어도 늙는길 막을 수 없습니다 . 

옛시인 정철은 인생의 허무함을 이렇게 읊었습니다.

“한 손에 막대잡고 한 손에 가시쥐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려 하였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알렉산더 대왕이 흘린 세번의 눈물

옛날에 좀처럼 울지 않기로 유명했던 알렉산더 대왕도 세번 울은 적이 있답니다.

한번은 그가 페르샤 원정을 갔을때 페르샤 왕 고레스의 묘비를 보고 울었는데 “인생이 아무리 한때 부귀영화를 누려도 결국은 한개의 무덤밖에 남기는 것이 없으니 허무하구나” 하고 눈물을 흘렸다.

인도의 인더스강가에서 인더스강만 건느가면 인도를 정복할 수 있는데 지친 부하들이 따라주지 않고 다시 돌아가야만 할 때 거기서 목놓아 울었었다.

그가 부하들과 모래사장에서 씨름을 하다가 넘어졌는데 넘어진 그 자리를 보고 울었다고 합니다.
그를 넘어뜨렸던 부하가 하도 무안해 왜 우시냐고 물었더니 부하에게 져서 원통하여 운 것이 아니라, 모래 사장에 넘어진 자국을 보고 내가 지금은 이렇게 큰 나라를 가지고 부귀 권세를 누리지만 나도 죽으면 한 평의 땅속에 묻혀 버리고 말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인생이 얼마나 무상하냐고 하며 울었다고 합니다.

케파 샘팡기 목사의 부활절 주일 예배

이 사건은 아프리카 우간다 어떤 교회에서 일어났던 일입니다.
그 당시 우간다는 독재자인 이디 아민이라는 악명 높은 사람의 통치 아래 있었습니다.
이 교회의 목사인 케파 샘팡기 목사님는 종종 정부의 불의를 책망하는 예언적인 설교를 하곤 했습니다.
이 사건이 난 아침에도 7천명이나 되는 교인들이 부활절 주일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설교를 마친 후 목사님이 교회 사무실로 들어섰을 때 거기에는 5명의 비밀경찰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 중 한 사람이 “우리는 국가의 명으로 반국가 사범을 처단하기 위해 왔소”라고 하면서 목사님에게 총을 겨누었습니다.
이때 케파 목사님은 아주 담담하게 이런 부탁을 했습니다.

오늘은 부활절 아침입니다.
나는 부활을 믿는 사람으로 죽는 것이 전혀 두렵지 않지만 나에게 2분의 시간을 주신다면 잠시 주님께 기도를 드리고 생을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2분의 시간을 허락 받은 목사님은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간다의 통치자 이디 아민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그의 명령을 원하지 않으면서도 받들어야 하는 불행한 이 5명의 형제들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우간다 국민에게 자유를 주시옵소서.
내 사랑하는 조국이 사랑의 땅과 의의 땅이 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나의 죽음으로 다시는 이러한 비극이 이 땅에 되풀이되지 않도록 긍휼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기도를 마쳤을 때, 목사님의 눈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고 기도를 듣던 경찰들의 눈에서도 뜨거운 눈물이 흘렀습니다.

경찰의 통솔자인 한 사람이 무릎을 꿇으면서 “목사님, 죄송합니다. 우리가 큰 실수를 저지를 뻔했습니다. 목사님은 피신하여 교회에 계시지 않는 것으로 보고하겠습니다. 빨리 이 자리를 떠나 주십시오”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 사건을 통해 부활의 믿음은 죽은 후의 육체적인 부활의 소망을 약속할 뿐 아니라 오늘을 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승리의 삶을 살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말레이시아 최종국 선교사 "사랑합니다"

말레이시아에서 무슬림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는 최종국 선교사님이 “사랑합니다”라는 책을 쓰셨습니다.
이 책은 아직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은 부모님이나, 가족, 친구들에게 선물하기에 좋은 책입니다.

저자의 아버지가 어느 날 폐암 말기라는 진단을 받게 됩니다.
병원에서는 더 이상 손을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며 수술을 거부하였답니다.
어느 날 아들이 퇴근하면서 그동안 미뤄왔던 말을 하기로 결심했답니다.
평소에 전혀 하지 않던 말을 하려니 많이 망설여지고 또 몹시 쑥스러웠답니다.

“아버지, 저는 아버지가 참 존경스러워요.
평생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제가 많이 배운 것 같아요.”

그 말을 듣고 아버지가 대답하셨습니다.
“그래, 고맙구나! 아들아, 내가 널 많이 사랑한다.”

아버지도 그 말을 얼마나 어렵고 힘들게 꺼내셨는지는 그 표정만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답니다.
뜨거운 눈물 두 줄기가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답니다.

선교사님의 아버지는 그때까지 믿지 않으신 분인데, 집에서 가까운 교회에 나가셔서 복음의 소식을 듣고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별거 중이었던 어머니와 극적으로 화해하시고 온 가족이 함께한 가운데 감동적인 세례식을 가졌답니다.
아버지께서 세례를 받는 내내 울고 계셨답니다.
그 선교사님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이 믿어지지가 않았답니다.
어머니가 자녀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아버지가 우는 모습은 처음 본다. 저 무심한 양반이 그래도 눈물이 있었구나.” 했답니다.

다음은 그 아버지께서 하나님께 가시기 전에 남기신 신앙 간증입니다.

“그저 착하게만 살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병들어 죽어가면서 내가 아무리 착하게 살았어도 죽음 앞에서는 아무도 나를 도와줄 수 없음을 깨달았을 때, 그때서야 나는 비로소 눈을 떴습니다.
나를 도울 수 있는 분은 오직 그분, 그 한 분뿐이라는 것을! 이제 부끄럽지만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가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내 모든 부끄러움과 고집스러움을 십자가에서 다 용서해 주셨으니, 오직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말씀만 가슴에 새기고 가려합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모든 고난을 당하셨고, 나의 모든 죄를 다 갚아 주셨기에 오직 그분을 의지해서 하나님 아버지에게 가려합니다.”

“이 땅에서의 시간은 참으로 빠른 것 같습니다.
그러니, 오늘 더 많이 사랑한다고 말해야 합니다. 더 많이 기뻐하고, 더 많이 감사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분은 예수님 안에서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라는 것을 보는 눈이 열린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죽지만 예수님을 영접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죽음을 넉넉하게 이길 수 있는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죽음을 영원한 세계로 들어가는 과정으로 오히려 축복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신 부활의 능력으로 사망을 향하여,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 15:55, 57)

부활은 죽음도 어떻게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레나 마리아라는 가스펠 가수는 태어날 때부터 두 팔이 없고 한 쪽 다리가 짧은 아이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고통을 이기고 가스펠 가수로 세계인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있습니다.
언론은 그녀의 목소리를 “천상의 노래”라고 격찬했습니다.
그녀의 인생을 담은 <발로 쓴 내 인생의 악보>는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중증 장애인이지만 세계장애인수영선수권대회에서 4개의 금메달을 땄습니다.
그녀는 자신을 부활의 증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녀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자신의 육체에 대해 불평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일본에서 공연을 했을 때 일본 텔레비전에 출연한 적이 있었는데 사회자가 “레나, 당신은 왜 그렇게 밝을 수 있죠?”라고 물었답니다. 그 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내 삶을 움직이고 계시며, 내가 필요한 것을 채우시며, 또 내 곁에서 나를 위로하시고 새 힘을 주시니까요.” 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누군가 내게 ‘주님이 살아 계시고, 부활하셨다는 증거’를 대라고 말한다면 “나는 나의 약한 육신과 날마다 찬송하는 내 입술을 당당하게 보여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되었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로 죽음을 정복하고 완전한 승리를 누리게 됩니다(54∼57).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로 주님 재림하실 때 영생의 부활로 참여합니다(50∼53).
그러면 부활을 믿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첫째, 부활을 믿는 증인이라면 어떤 일을 당하여도 신앙이 흔들리지 않고 더욱 견고해져야 합니다(58).
세속화된 도시 속에 있는 고린도교회에는 갖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럴 때 부활신앙에 회의가 생길 수 있습니다.
“천국이 있다면 저렇게 할까? 부활이 있다면 저 정도 수준일까?” 신앙이 흔들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부활신앙이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 부활을 믿는 증인이라면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써야 합니다(58).

셋째, 부활을 믿는 증인이라면 우리의 수고가 헛되지 않다는 사실을 믿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수고하는 것 중에는 헛된 것들이 있는 반면에 영원히 헛되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부활이 있음으로, 내세가 있음으로, 천국이 있음으로 주님을 위한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오후 3시에 인천 제물포 앞바다에 증기선 한 척이 들어왔습니다.
한국교회 최초의 선교사 아펜젤러언더우드가 탄 배였습니다.

27살의 청년 아펜젤러(1858. 2. 6~1902. 6. 11)가 한국 땅에 첫발을 디딜 때 했던 기도가 있습니다.

“우리는 부활주일에 이곳에 도착했습니다.
이날 죽음의 철장을 부수신 주님께서 이 백성을 얽매고 있는 줄을 끊으시고 그들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빛과 자유를 얻게 하소서!”

아펜젤러 선교사는 44세가 되던 1902년에 목포에서 배가 침몰해 순교했습니다.
조선 땅에 고결한 젊음을 바친 한 청년, 그가 그토록 원했던 것은 흑암의 조선 땅에 부활의 복음을 심는 일이었습니다.
오늘 피로 뿌린 그 씨앗은 싹이 트고 열매가 맺혀 조국 강산을 그리스도의 핏빛으로 물들이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사건을 말하면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십자가가 없는 죄 사함이 없듯이 부활이 없는 영생은 없습니다.
십자가가 과거의 모든 죄 문제를 해결했다면 부활은 현재와 미래를 여는 출입문입니다.
기독교는 십자가의 아픔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기쁨으로 나아갑니다.
부활 없는 희망이 없고, 부활 없는 기독교는 없습니다.

빌리 그레함이 부활에 대해 한 말입니다.
“줄리어스 시저가 생존했거나 알렉산더 대왕이 33살에 죽은 것보다 더 확실한 부활의 증거가 있다.”

성경이 부활을 말씀하고, 주님을 만난 제자들이 부활을 증언했고, 기독교 2천 년 역사가 피로 선포한 것이 예수님의 부활이었습니다.

성경의 모든 인물 가운데 부활을 가장 극적으로 체험한 사람이 바울입니다.
바울이 쓴 고린도전서 15장은 부활장이라고 말합니다.
특이한 사실은 바울이 부활을 설교하면서 변증으로 시작하지 않고 선포로 시작한다는 점입니다.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바울에게 부활이란 너무나 확실하기에 변증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부활을 선포하고 부활을 체험한 사람들을 소개합니다.

부활을 체험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인생에 위대한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주님을 버리고 도망했다가 부활을 체험하고 생명을 드리는 헌신자들이 됐습니다.
그들을 기다린 것은 채찍과 죽음의 위협이었습니다.
그러나 부활을 체험한 사람에게 두려운 것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의 터툴리안이 한 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그가 진리를 소유한다는 확신이 없다면 기꺼이 죽을 수 없을 것이다.” 참으로 옳은 말입니다. 그것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확신이 없다면 생명을 바칠 수는 없습니다. 한두 명이 아니라 12명이 모두 동시에 목숨을 던질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정말 주님을 믿는다면 물어봐야 합니다. 내가 정말 부활을 체험했는가? 나의 죄를 위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정말 만났는가? 부활을 체험했다면 다시 물어봐야 합니다. 내 삶이 정말 말씀대로 변화를 받았는가? 부활하신 주님은 모든 것을 바꿔 놓습니다. 얼마나 많이 변화를 받았는가 하는 질문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더 변화 받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근본적으로 변화를 받았는지 물어야 합니다. 내가 죽고 내 속에 부활하신 주님이 살고 계시는지 물어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순간 내가 죽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오직 예수만이 있을 뿐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위대한 은혜를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 부활을 체험한 사람들은 죽어서 가는 내세를 강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제자로서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삶 속에 부활을 사는 사람들 그리고 변화된 삶으로 부활을 증명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하늘에 속한 사람에게 걸맞은 삶의 방식이 있습니다. 내일이 없는 것처럼 살아서는 안 됩니다. 부활의 신앙을 믿어야 신앙생활이 행복합니다. 봉사가 즐겁습니다. 주님의 교회를 위해 어떤 일을 섬겨도 기쁨이 넘칩니다.

장로교의 기초를 놓은 존 칼빈은 1509년에 태어났습니다.
그의 가르침으로 종교개혁이 꽃을 피웠고 기독교뿐 아니라 세계 역사에 가장 큰 흔적을 남긴 사람이었습니다.
칼빈을 연구하기 위해 그가 태어난 프랑스 누아용, 목회했던 프랑스 스트라스부르그와 스위스 제네바 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칼빈의 무덤은 지금까지 어느 곳에 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칼빈은 이 땅을 떠나면서 유언을 남겼습니다.
나의 무덤을 누구에게도 남기지 말라!
일생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살아간 칼빈다운 유언이었습니다.
칼빈이 마지막으로 목회했던 제네바 성 피에르 예배당 근처에는 공원묘지가 있습니다.
그곳에 가면 J.C라고 씌어진 무덤이 있습니다.
존 칼빈이라는 이름입니다.
비어있는 무덤입니다.
그의 무덤은 비어있지만, 그 무덤에서 부활의 복음이 터져 나오고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변화를 요구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사람에게는 하늘에 속한 사람다운 삶이 있습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허무에서 감격으로 바뀐 사람에게는 그들의 모든 삶 가운데 살아계신 예수의 흔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내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 나의 부활 이야기를 시작하는 부활주일을 맞이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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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삶을 살아가겠다는 결단입니다.
왜 예수님의 삶을 살아야 할까요?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제가 군 생활을 할 때 지휘관의 지프차를 운전하던 '한 일병" 이란 사병이 있었습니다.
당시 군 관할 지역의 지휘관들이 OP에 모여서 작전 회의를 하려고 모였습니다.
한 일병도 지휘관의 차를 운전하여 작전지역에 지휘관을 내려주고 주차장으로 안내를 받아 주차하던 중 주차장 아래 벼랑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지프차도 운전병도 모두 안전하게 구조되었습니다.

그 날 저녁 한 일병이 내무반에 들어와서 "내 생일은 오늘부터 이 날로 바꾼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죽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기 때문에 살아난 그 날이 그의 생일이 되었다는 이야기라고 한다면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었던 내가 예수를 믿음으로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은혜를 확신한다면 반드시 예수님처럼 살아가겠다는 결단을 요구하는 것이 부활 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보내신 것은 죄에 팔려버린 인생을 되사시기 위함이셨습니다.
인생들이 어떻게 죄에 팔렸느냐고요?
간단하게 누구든지 죄를 지으면 죄의 종이 되거든요.
이 세상에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도 궁금하시면 마가복음 7:20-23절을 읽어보세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희생의 대가로 원래의 신분인 하나님의 자녀로 되돌아 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모든 것은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생명으로 사셨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5:15절입니다.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데살로니가전서 5:10절도 봅시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베드로전서 4:2절입니다.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이것이 그의 백성 된 우리가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아야 할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부름 받은 선지자 중에서 가장 분명하고 단순한 소명을 받은 선지자가 세례 요한일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과 신약의 중간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행한 선지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세례 요한을 일컬어 "여자가 나은 자 중에서 가장 큰 자"(마11:11)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선지자의 삶을 보십시오! 그의 의복은 약대 털옷과 가죽 띠였고, 음식은 메뚜기와 간간이 들 꿀인 석청을 먹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잠자리는 하늘을 지붕 삼고, 땅을 방바닥으로 삼은 세상에서 가장 큰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의식주 문제로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관심은 오직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았다는 말입니다. 오늘의 성도들에게도 동일한 것이 요구됩니다(눅12:22-34).

우리가 잘 아는 마태복음 6:33절의 “그의 나라를 구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기를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는 일을 제일로 삼으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행할 가장 귀중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된 삶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자 하나님의 자녀이면 너무도 당연히 하나님의 뜻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말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세상의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그 말을 믿을 수가 없겠지요?


눈을 열어 주소서!

초막절은 메시아를 기다리는 절기이기도 했지만 아무도 진정한 메시아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고, 들었지만 듣지 못했다.

이 와중에 예수님은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고치심. 이러한 눈이 열리는 기적들이 우리 가족들에게 일어나길.

그렇다면 어떤 눈들이 열려야 할까?


1. 예수를 볼 수 있는 믿음의 눈
-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v.1)
- 원문에서는 그 사람을 지칭하는 관사가 없다: 특정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 눈이 먼 그 당시의 유대인들, 그리고 오늘날의 우리를 지칭하는듯
- 선악과를 먹음으로서 정녕 죽었던 인간, 영의 눈이 감겨버렸다. 그리고 태어나는 모든 인간들은 영의 눈이 감긴채로 태어난다.
- 예수님이 보이기 시작하면 예수님의 말씀이 들린다. 그렇다면 이 땅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해석이 된다. 해석이 바뀌면 생각이 바뀌고 생각이 바뀌면 삶이 바뀐다.


2. 세상을 볼 수 있는 의 눈
-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v.5)
- 생명의 빛되신 예수님. 예수님이라고 하는 패러다임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을 바로 볼 수 있다.
- 진흙을 이겨 눈에 발라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창조주의 모습을 보다: 눈을 재창조해주시는 예수님.
>>> 영적인 눈이 뜨여지면 얼마나 두렵기도 하고 놀라울까
>>> 보는 것은 똑같지만 영의 눈이 열렸느냐에 따라 해석이 완전히 달라진다
- 많은 사람이 허상에 잡혀 산다 (특히 물질). 그러한 허상은 죽을 때 깨어진다.



3. 해야 할 일을 보는 사명의 눈
-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v.7)
- 눈을 뜬 맹인은 논쟁하는 것이 아니라 증언한다. 예수님을 드러낸다.
- 내 생각이 어떻게 바꼈는데, 내 삶이 어떻게 바꼈는지 간증하는 삶이 되길.

출처: https://hoseastory.tistory.com/2008 [호.세.아. - 사람을 세우는 가정]






십자가(Cross)는 라틴어 '크룩스(crux)'라는 말에서 온 것으로 '고문대(拷問臺)'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는 인간이 만든 형벌 가운데 가장 참혹한 것이었습니다.
십자가의 형벌은 고대 여러 민족들 사이에서 이미 통용되어 왔던 사형법 이었습니다.
알렉산더 왕도 그가 점령한 지역에서 반기를 드는 사람들을 즐겨 십자가에 매달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드로 사람 일 천명을 십자가에 처형했다고 합니다.

에스라 6:11에는 파사의 다리오 왕이 조서를 내리는데 자기의 명령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십자가에 달아 매어 죽이라고 명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로마제국에 와서는 노예만을 십자가에 죽였으나 때로는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라도 중죄(로류)를 범한 경우 이를 적용시켰습니다. 그러나 너무도 참혹했기 때문에 로마 본국 내에서는 가급적 십자가 형을 실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콘스탄틴 황제가 십자가 형벌 금지령을 내렸고, 그 후 이 사형법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릴 죄인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구속 사업을 성취하기 위하여 그 참혹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이미 구약에서 예표로 알려진 것과 같이, 십자가를 쳐다보는 사람은 죽지 않으리라는 그 말씀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류 구원이란 신학적 의미를 가진 사건이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립보서 2:6-7)

십자가 위에서 남기신 예수님의 일곱마디 말씀 (架上七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린 것이 오전 9시이고, 운명한 것이 오후3시니 십자가 위에서 6시간 동안 생명이 유지되어 있었습니다.
빨리 죽지 않고 모든 고통을 겪으며 서서히 죽기 때문에 십자가 처형은 가장 고통스러운 처형 방법인 것입니다.
이 6시간 동안에 예수는 일곱 마디 밖에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4복음서에 나타난 것을 종합해서 순서대로 적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말 -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 : 34).
              이것은 용서의 기도였습니다.

둘째말 -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 : 43).
              이것은 파라다이스(낙원)의 약속이었습니다.

셋째말 - "어머니 보십시오, 당신의 아들입니다. " "보라, 네 어머니다"(요 19 : 26-27).
               이것은 아들로서의 효도였습니다.

넷째말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마 27 . 46).
              이것은 영적인 고민이 었습니다.

다섯째말 - "목 마르다"(요 19 : 28).
                이것은 육신적인 고통이었습니다.

여섯째말 - "다 이루었다"(요 19 : 30).
                이것은 승리의 선언이었습니다.

일곱째말 -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눅 23 : 46),
                 이것은 최후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이상 일곱 마디 중 처음 세 마디는 9시부터 12시 사이에 말씀하셨고, 12시부터 3시까지 세 시간 동안 갑자기 온 땅이 어두워졌습니다. 그 세 시간 동안 예수는 한마디도 말씀하지 않으셨고 오후 3시에 예수께서는 나머지 네 마디 말씀을 연거푸하시고 운명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사실로 이루어진 구약의 예언
 
십자가 사후에 일어 난 사실들
     
    (1) 지진으로 성전 휘장이 찢어짐(마 27 : 51).
    (2) 무덤이 열림(마 27 : 52).
    (3) 백부장의 증거(마 27; 54).
    (4) 무리들의 확신(눅 23; 48).
    (5) 도적의 다리를 꺾음(요 19 : 31-32).
    (6) 옆구리 찌름(요 19 : 34).
    (7) 장사 지냄(요 19 : 38-42).
    (8) 무덤 봉하고 파수꾼 세움(마 27 : 66).
 
고난에 관한 금언 ·격언 ·속담
     
    (1) "고난은 축복을 갖다 주는 지름길이다. " -M. 루터-
    (2) "하나님 앞에 진실되게 살려고 하는 이는 고통을 보석으로 삼는다. " -하천풍언-
    (3) "고난은 성공의 축대를 쌓는 것과 같다. " -M.NL. 영안-
    (4) "고생보다 더 중요한 교육은 없다. " -지스레지-
    (5) "고난을 모르는 사람보다 더 불쌍한 사람은 없다. " -도미트 아쓰 -
    (6) "고난이 크면 클수록 그 영광도 크다. " -M. T시세로
    (7) 초년 고생은 말년 낙의 근본이라. 네가 자라면 오복이 구비하고 남이 우러러보는 사람이 되리라." -이광수 -
    (8) "대부분의 생의 고난은 우리 자신이 햇빛에 서 있기 때문에 생긴다" -에머슨-
    (9) "고난은 하나님의 심부름꾼이다. 어려움이 우리에게 찾아 왔을 때,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물로써 하나님의 신임의 증거 라고 간주해야 한다. " -비쳐(H.W. Beecher)-
    (10) 고난이란? 좋은 것이다.
    • 고난은 좋은 훈련이다.
    • 고난은 사람이 살기에 귀찮을 정도다.
    • 고난은 여행하는 것과 같다.
    • 고난은 자신이 깨뜨려지는 것이다.
    • 고난은 나쁜 문제들을 안고 있는 것이다.
    • 고난은 한 성도가 받으면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고통을 겪게 된다.
    • 고난은 하나의 체험이다.
    • 고문을 받는 것도 심한 고난이다.







2022년 고난주간 일정


일요일
  • 예수가 나귀 타시고 예루살렘 입성(마 21 : 1 - 11, 막 11 : 1 - 11).

주일

** 예루살렘에서의 승리의 입성(마21:1-11, 막11:1-11, 눅19:29-44, 요12:12-19)

주님의 고난은 예루살렘의 입성과 함께 시작된다.

유월절을 며칠 앞두고 예루살렘의 거리는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유월절 양되신 예수님은 제자들이 구해온 어린양을 타고 감람산 쪽에서 들어 오셨다.

전에 갈릴리에 계실 때에 그의 교훈을 듣고 도움을 받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특별히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 떡을 얻어 먹었던 사람들은 이 기회에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호산나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다. 군중들은 흥분하기 시작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승리의 표시인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예수님을 호위하고 어떤 사람들은 옷을 벗어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며 외치었다.

예루살렘의 거리는 예수님의 입성으로 진동하였다.

예수님은 스가랴 9:9에 있는 말씀대로 왕으로 그의 도성에 입성하신 것이다

그러나 군중이 원하는 왕과 예수님의 왕되심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었다.

군중들은 제한된 한 민족의 왕, 육체의 왕로마의 압제에서 해방과 빵문제를 해결으로 생각하 였으나 예수님의 왕되심은 우주의 왕이요, 영원한 왕으로 입성하신 것이다.

 

월요일
  • 열매 없는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심(마 21. 18 - 19, 막 11 : 12 - 14).
  • (세금의 질문에 설명) 성전 청결케 함(마 21 : 12 - 13, 막 11 : 15 - 19).

월요일

*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다 (마 21:18-20,막11:12-14,20,21)

성밖 베다니에서 하루 저녁을 쉬신 예수님은 이른 아침에 예루살렘으로 향하시었다.

도중에 시장기를 느끼신 예수님을 때마침 길 가에 있는 무화과나무 밑으로 가셨다

그러나 잎만 무성했지 열매를 얻을 수 없었다. 실망하신 예수님은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고 저주하셨다.

* 성전을 정결케 하시다(마 21:12,13,막11:15-17,눅19:45,46)

성안에 들어오신 예수님을 그 길로 곧 성전에 가시었다

예수님은 성전 안에서 사람들이 돈을 바꾸고 짐승을 파느라고 소란한 것을 보셨다

채찍을 들지 않을수 없으셨다. 짐승을 내몰고 장사하는 사람을 내 쫒았다.

돈 바꾸는 상도 뒤집어 엎으셨다.

그리고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가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고 꾸짖으셨다.

그러나 책망을 듣는 자들의 눈길은 회개의 빛대신에 시기와 원망의 눈으로 가득 채워져

“어디 두고 보자식의 노기였다

예수님은 해가 저물어 전과 같이 쉬시기 위하여 성 밖으로 나가셨다.

 


화요일
  • 무화과나무 마름(마 21 : 19 - 22, 막 11 : 20 - 25).
  • 제사장 바리새인의 질문(막 11 : 27 - 33, 눅 20 : 1 - 8).
  • 경고의 세 가지 비유, 포도원 비유(마 21 : 28 - 22 : 14, 막 12 : 1 - 12).
  • 바리새인과 헤롯 왕이 예수께 질문(마 22 : 15 - 40).
  • 메시야에 대한 예수의 질문(눅 20 : 41 - 44).
  • 예수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 책망(막 12 : 38 - 40).
  • 과부연보에 대하여 칭찬함(막 12 : 41 - 44, 눅 21 : 1 - 4)
  • 유대인이 예수를 배척함. 예루살렘 멸망과 말세를 예언함(눅 21 : 5 - 38, 요 12 : 37 - 50).

수요일
  • 예수가 밤마다 베다니에 나가시니 이 날은 거기서 기도했을 것임.(성경에 수요일은 기록이 없음.)


유다가 배반하다(마26:14-16,막14:41-45,눅22:1-6,요18:1-11)

예수님은 아직 성밖에 계시면서 제자들에게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우리라고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교훈하고 계실 때

한편 성안 가야바 대제사장 아문에서는 예수님을 궤계로 잡아 죽이려고 모의하고 있었다.

그리고 제자중 하나인 가룟유다는 제자들 사애에서 빠져 나와 대제사장의 회의장으로 달려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고 협상한다

제사장들은 기회가 왔다는 듯이 은 30을 달아 가룟 유다에게 주었다.

유다는 이때부터 예수님을 넘겨 줄 기회를 노리고 있게 된다.



화요일

* 무화과나무의 교훈을 하시다 (막 11:20)

그 이튿날 제자들은 성으로 들어오는 도중 놀라운 것을 보았다.

어제 예수님께로 저주를 받은 그 무화과나무가 뿌리부터 말라 죽었다.

성급한 베드로는 놀라운 얼굴로 선생님,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이에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으라,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하면

그 말하는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믿음의 교훈을 해 주시었다

* 성전 안에서 힐란을 받으시다(마21:23-27,막 11:27-33,눅20:1-8)

성안에 들어오신 예수님은 어제의 그 성전으로 가시었다.

책망을 듣고 회개할 줄 모르는 서기관과 장로들이 예수님을 힐란한다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시기에 찬 질문이요,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모르는 무지에 찬 질문이었다

예수님은 이들의 악함을 안타까이 여기시고 여러가지 비유로 저들을 깨우치려 말씀하셨다.

말 안 듣는 맏아들의 비유(마 21:28-32),

사악한 농부의 비유(마 21:33-41,마12:1-9,눅20:9-16),

왕자의 잔치를 거절한 악한 사람들의 소(행22:1-14)등을 말씀하시었다.

그러나 저들은 계속해서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질문을 하였다.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까불가하니이까”

“부활때 일곱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어떻게 해서든지 넘어뜨리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놀라운 지혜로 답변하시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에수님은 말세에 되어질 일들(마24,막13장, 눅21장)과

주의 재림의 때에 되어질 일들(마25)을 교훈하여 주시었다.


목요일
  • 최후 성만찬, 예수 그리스도의 고별사(마 26 : 31 - 35, 막 14 : 12 - 26, 눅 22 : 31 - 38).
 목요일

* 제자들의 발의 씻기다(요13:1-17)

유대인의 최대 명절인 유월절이 되었다.

저녁이 되자 예수님을 제자들이 미리 준비한 성내의 한 여성도의 집 이층 다락방으로 가시 었다

거기에는 유대인의 법을 따라 유월절을 지키기 위한 누룩없는 떡과 포도주가 준비되어 있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상가에 둘러 앉아 식사를 하기 시작하셧다.

식사를 하시던 예수님은 갑자기 일어서더니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떠 오시어 그 물로 제자들의 발을 하나 하나 씻기기 시작하셨다.

제자들은 어리둥절하였다

베드로의 차례가 왔을때 베드로는 내 발은 절대로 씻기지 못하리이다”

그때에 예수님은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고 답하시었다

그리고 예수님은 계속해서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의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고 겸손에 대하여 교훈해 주시었다.

* 반역자를 지목하시다(마26:21-25,막14:18-21,눅22:21-23,요13:21-30)

예수님은 서로 발을 씻기라는 말씀을 하신 후에 심히 민망한 표정으로

“너희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하시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여 누구오니이까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며 가룟유다에게 떡을 주셨다

이 말을 들은 가룟유다는 기분 나쁘다는 듯이 나가 버렸다

자기의 할 일을 하기 위하여 나간 것이다.

이제 사단은 완전히 유다의 마음을 사로 잡은 것이다.

* 마지막 만찬이 베풀어지다(마26:26-29,막14:22-25,눅22:19)

이와같은 일이 있은 후 예수님은 저희 가운데서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며 받아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다 이것을 마시라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첫번 성만찬식을 베풀었다.

그리고 죽음을 앞두신 예수님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려 가노라고 제자들 을 위로하시었다.

*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다(마26:36-46,막14:32-42,눅22:39-46,요18:1)

모든 말씀을 마치신 에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나가셨다

이 산 서쪽 기슭 아래에는 겟세마네라는 동산이 있었고

예수님은 이곳에서 최후의 고난의 쓴 잔을 마시기 위하여 기도하셨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있으라

예수님은 제자들과 돌던질만한 거리로 나가서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셨다

그의 이마에서는 피와 같은 땀이 떨어졌다.

 



금요일
  •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반역과 예수의 포박(마 26 : 36 - 47, 막 14 : 32 - 52).
  • 안나스와 가야바의 심문(막 14 : 53 - 72, 요 18 : 13 - 27).
  • 빌라도의 심문(마 27 : 2 - 11, 31, 요 18 : 13 - 29).
  • 십자가의 고난(마 27 : 32 - 56, 눅 23 : 26 - 45).
  •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를 장사함(마27 : 57 - 61, 막 15 : 43-47).
금요일

* 예수님이 잡히시다.(마26:4,7,56,막14:43-52,눅22:47-53,요18:3-13)

예수님은 기도중 대제사장이 보낸 사람들이 가까이 온 것을 느끼셨다.

그리하여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때가 온 것을 환기시키고 있을때

무리들은 몽치와 검을 가지고 올라오고 있었다.

그 중에는 열두 제자 중 하나였던 가룟 유다가 있었다.

그가 예수님께 다가서더니 랍비여 안녕하십니까하고 입을 맞추었다.

물론 이것은 예수님을 넘겨주기 위한 군호의 간사한 입맞춤이었다.

이로써 예수님은 악당들에게 잡히셨고 제자들은 모두 흩어지고 말았다.

* 심문을 받으시다(마26:57,27:26,30,막14:53,15:15,눅22:54,23:24,요18:13,19:16)

예수님을 잡아 결박한 유대인의 하속들은 먼저 예수님을 안나스와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에게 끌고 갔다.

거기에는 이미 많은 서기관과 제사장들이 모여 있었다.

저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찾고 있었으나 찾지 못하였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리라는 예수님 자신의 증거가 있을 때

저들은 분을 내며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주먹으로 치고 손바닥으로 때렸다.

그러나 재판권이 없는 저들은 당시의 총독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끌고 갔다.

저들은 여러 말로 예수님을 고소하였으나 역시 죄를 찾지 못하였다.

빌라도는 저들이 시기하여 예수님을 자기에게 넘겨준 줄 알고 석방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저들의 소리는 한층 높아졌다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그 피를 우리와 우리의 자손에게 돌리소서

저들은 너무도 무지하나이다


토요일
  • 무덤을 파수군이 굳게 지킴(마 27 : 62 - 66).
일요일
  • 부활의 새벽(마 28 : 1 - 10, 막 16 : 1 - 17).
  • 파수군이 부활의 사건을 제사장에게 보고(마 28 : 11 - 15, 눅 24 : 13 - 35).
  • 엠마오 도상의 예수(눅 24 : 13 - 35).
  • 도마와 다른 제자들에게 예수 나타남(막 16 : 14, 요 20 : 19 - 25).

종교개혁자 루터의 이야기입니다.
당시 독일에서는 고학생들 중에 노래를 잘하는 학생들은 남의 집 앞에서 노래를 불러 돈을 받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루터가 부잣집 창문 아래서 큰 소리로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노래를 시작하자마자 체격이 크고 무섭게 생긴 사나이가 창문을 열고 뛰어나오는 것이었습니다. 루터는 그 험상궂게 생긴 사나이가 주먹질이라도 할 줄 알고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사나이는 계속 쫓아왔고 결국 붙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공포심에 벌벌 떨고 있는 루터에게 그 사람은 주먹이 아닌 돈 뭉치를 내밀었습니다. 장학금을 주려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루터는 그때를 회고하면서 “두려움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만사가 모두 걱정과 염려로 가득 차 있고,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이 감사하고 좋게 보이며, 하나님의 손길이 보인다”고 하였습니다. 

 

루터의 말처럼 우리가 환경을 어떤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해석이 다르고, 그 해석에 따라 삶이 행복하게 느껴질 수도, 불행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찰스 엘 알렌(Charles L. Allen)이라는 사람은 사람에게는 세 가지의 시력을 갖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첫째는 신체적 시력
이것은 누구나 볼 수 있는 시각입니다.
옷, 집, 자동차, 음식, 남자와 여자, 건물 등

둘째는 정신적 시력
이것은 합리적으로 사물을 판단하고 이해할 수 있는 힘입니다.
정신적 시력이 없이는 진리를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영적인 시력
이것은 영적 시각입니다.
하나님을 알아볼 수 있는 영의 눈입니다. 

 


 

한해를 살면서 우리 삶에 펼쳐지는 모든 일들을 육체적 정신적 시력으로만 보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많지만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다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오늘 예배드리시는 여러분 믿음의 눈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감사와 찬송의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의 말씀은 아람과 이스라엘의 적대인 관계속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열왕기하 6장 8절을 보면 아람왕이 이스라엘을 침공하기 위해서 자기의 신복들과 함께 의논하여 우리가 아무데 아무데 진을 치리라하였습니다. 이때 엘리사는 이스라엘 왕에게 사람을 보내어 왕은 삼가 아무 곳으로 지나가지 마소서 아람 사람이 그곳으로 내려올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왕은 엘리사가 말한 장소로 사람을 보내 철저히 경계하게 하였는데 이렇게 한 것이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아람왕의 마음이 불안하여 그 신복들을 불러 우리 가운데 누가 이스라엘 왕과 내통하고 있는지 말하라고 하였습니다. 

 

12절에 그때 그 신복 중에 하나가 “우리 주 왕이여 아니로소이다. 오직 이스라엘 선지자 엘리사가 왕의 침실에서 하신 말씀조차도 이스라엘 왕에게 알려준다고” 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람왕은 “너는 가서 엘리사가 어디 있는가 보라! 내가 잡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신하들은 엘리사가 도단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아람왕은 최정예 군대를 총동원해서 도단성을 겹겹이 둘러쌌습니다.

 

다음날 아침 엘리사의 사환이 일어나서 보니까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읍을 에워싸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사환은 엘리사에게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하고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때 엘리사는 아무런 두려움도 갖지 않고 사환을 진정시키면서 “두려워 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종의 눈을 열어 보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사환의 눈을 열어 주셨습니다. 17절을 보면 “불말과 불 마차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18절에 아람 사람이 엘리사에게 다가오자 엘리사는 저사람들이 눈이 멀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람 군대의 눈을 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엘리사는 아람 군대를 사마리아로 데리고 갔습니다. 이스라엘이 왕은 아람 군대를 위해 큰 잔치를 베풀어 먹고 마시게 한뒤 그들을 돌려보냈습니다. 23절을 보면 이로부터 아람 군사의 부내다 다시는 이스라엘 땅에 들어오지 못하였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한해를 살아가면서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어떤 믿음의 원리를 배워야 할까요? 

 

첫째로 신체적 시선이 아닌 믿음의 시선을 가져야 합니다. 

 

사환은 도단을 둘러싸고 있는 수 많은 군사들을 보고 두려워하며 절망하였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보고 평안해 하였습니다.

 

시편 91편 11절에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주를 경외하는 자를 위해서 하늘의 사자들을 동원해서 지키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잠언 29장 25절에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똑같은 상황이라도 어떤 시선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결과도 달라집니다.

 

러시아의 우주 비행사 티토브라는 사람은 달에 다녀온후에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우주에서 하나님을 찾아보려고 했지만 그 어디에도 하나님은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우주비행사 맥디브는 “나는 우주의 신비 속에서 창조주 하나님이 분명히 계신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고 느끼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똑같이 우주에 다녀왔는데 한 사람은 예수를 믿지 않은 사람이고 또 한사람은 예수를 믿고 거듭난 사람이었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았더니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의 세계속에서 하나님이 분명히 계시다는 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믿음의 시선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환경만을 보면 절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내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들을 만나면 사람은 낙심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 보다 크신 하나님을 믿음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하나님이 문제를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시고 길을 열어주십니다. 

 

하나님은 항상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여호수아와 갈렙은 믿음의 시선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가데스 바네아에서 12명의 가나안 정탐꾼을 보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돌아와서 보고하기를 저들은 거인이고 우리는 메뚜기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민수기 13장 33절에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민수기 14장 7-8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회중들의 원망의 소리를 들으시고 여호수아와 갈렙외에는 약속하신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눈으로 보는대로 생각하며 판단하는 것이 옳은 것 같고 객관적 사실인 것 같지만 하나님은 믿음의 시선을 갖고 생각하며 행동하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신명기 31장 6절에 보면 “너희는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가시며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삶에서 이루실 것들을 믿음의 눈으로 기대하며 바라보는 살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믿음의 시선은 기도와 말씀을 통해 열린다는 것입니다. 

17절에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라고 말씀합니다. 

엘리사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사환의 눈을 열으셔서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러싸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리처드 포스터는 기도에 대해서 정의하기를 “하늘의 문을 여는 열쇠”라고 하였습니다.하나님께서 축복의 문, 은혜의 문, 사랑의 문을 열어주시도록 하는 것이 기도라는 것입니다. 

 

하늘의 문을 여는 기도의 열쇠는 아무에게 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에게만 주시는 특권입니다. 

 

마태복음 7장 7-8절에 (7:7)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7:8)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고 말씀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의 기초 위해서 기도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과 다른 것은 세상 사람들은 떡으로만 살지만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말씀을 의지하고 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살 동안에는 떡으로만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홍해를 건너서 광야로 들어갔을 때는 떡으로 살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 말씀만 바라보았습니다. 모세가 하나님 말씀을 받아서 전하고 그 말씀을 믿을 때 말씀을 통해서 만나도 오고 메추라기도 오고 물도 생겨나고 병도 낫고 의복도 낡아지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눈을 열어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하며 마음에 새기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기초로 믿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낙도선교회에서 펴낸 『교회 하나만 주고 가이소』에 실린 이야기를 소개해 드립니다. 

 

신학생들이 매년 여름 농촌에 복음을 전하러 가는데, 한번은 마을 주민들이 부정 탄다며 아예 마을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했습니다. 선교 팀은 하는 수 없이 마을 밖에 텐트를 치고 아이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했습니다. 다행이 아이들이 예수님을 영접했고, 선교 팀과 함께 여름성경학교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선교팀원들은 어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이끌고 성황당그늘에서 주무시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향해 갔습니다. 아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척하면서 할아버지, 할머니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속셈이었습니다.

“얘들아, 저 나무와 꽃들은 누가 만드셨지?”<하나님이요>

“그래, 하나님이시란다. 하나님은 전능하셔서 뭐든지 못하시는 것이 없으셔. 너 희들 모두 믿지?”<아멘>

 

그러자 주무시던 할아버지들 가운데 한 분이 일어났습니다.

“어이 젊은이, 하나님이 정말 전능하신가? 뭐든지 못하시는 일이 없으신가?”

<그럼요, 하나님은 뭐든지 못하시는 일이 없으세요.>

“그럼 내 다리 한번 고쳐 보거라. 나는 어릴 때부터 소아마비에 걸려 이 다리를 못 썼다.” 그러면서 할아버지가 다리를 내밀었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선교팀원들은 덜컥 겁이 났습니다. 팀원들 중에는 병자를 치유하는 기적을 행하거나 체험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팀장은 하나님이 고쳐 주실 것을 믿고 팀원들과 다리 하나를 붙잡고 한참 동안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주여, 낫게 해 주옵소서. 믿습니다!”

 

기도가 끝난 후 팀장은 하나님이 다리를 낫게 하셨다고 담대히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웬 낭패입니까? 할아버지가 “이놈들아, 이 다리가 아니야. 아픈 다리는 이쪽 다리야!”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팀장과 팀원들은 다시 다른 다리를 붙잡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주여, 이쪽 다리랍니다. 낫게 해 주옵소서. 믿습니다.!” 한 참 동안 기도한 후 팀장이 다시 외쳤습니다.

“할아버지. 일어나 보세요.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 걸어라!” 그러나 할아버지가 팔짝팔짝 뛰면서 “신기하네. 내가 다 나았다! 내가 다 나았다!”라고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기도한 팀원들도 다 놀랐습니다. 자기들이 기도해 놓고도 진짜로 기적이 일어난 것을 보자 너무 놀란 것입니다. 결국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은 그 마을에 복음의 뿌리가 내리게 하셨고, 마침내는 교회를 세우게 하셨습니다.

 

100% 확신을 가지고 한 기도가 아니지만 하나님의 말씀에는 능력이 있고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 신학생들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신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와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예수님도 공생애 사역을 하시면서 사탄의 수 없는 공격을 받으실 때에도 기도와 말씀의 능력으로 마귀를 물리치셨습니다. 

 

기도와 말씀의 능력을 회복하는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영국의 영성 작가 안소리 블룸은 “우리는 하나님께 겨우 몇 분 내드리면서 그 시간에 그분이 임재하지 않는다고 불평한다. 하지만 우리의 문을 두르드시는 하나님께 죄송하지만 바쁩니다 라고 말하는 나머지 23시간 50분의 시간은 어떤가 심지어 전혀 반응이 없을 때도 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양심과 삶의 문을 두드리시는 하나님의 노크 소리를 아예 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때로 우리는 하나님의 주배에 대해 불평할 권리가 없다. 그분보다 우리가 더 부재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잠깐 기도하고 하나님이 내 삶에 아무것도 안해주신다고 불평하고 원망할 때가 참 많은 것 같습니다.  

 

올한해 “하나님 믿음의 눈을 열어주소서”라고 기도할 때 믿음안에서 담대하게 살아가는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셋째로 믿음의 능력으로 매일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엘리사는 기도의 능력으로 아람 군대의 공격을 물리쳤습니다. 우리도 매일 믿음의 능력으로 힘있게 살아가야 합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항상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시편 27편 1절에 “야훼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야훼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생명이 우리에게 들어올 때 우리는 두려움이 아닌 강하고 담대함을 가지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비행기 조종사들이 비행 훈련을 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계기판을 절대 신뢰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비행을 하다 보면 수 많은 변수가 작용을 합니다. 안개가끼고 구름속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하늘로 올라가면 주변에 무슨 건물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해서 그 위치가 어디인지를 도저히 분간 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계기판에 나타난 정보를 통해서 지금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분간할 수 있습니다. 전투기 조종사들이 빠른 속도로 비행을 하면서 비행기 위 아래를 바꿔서 비행할 때가 있는데 순간적으로 방향 감각을 잃어버려서 바다나 땅바닥으로 향할 때가 있다고 합니다. 이때도 자기의 감각을 믿는 것이 아니라 계기판을 신뢰하고 움직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런 것처럼 우리 삶의 나침반 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합니다. 

 

앨리슨 래퍼(Alison Lapper)는 1965년에 영국에서 태어났습니다. 해표지증이라고 팔과 다리가 없이 손과 발만 몸에 붙어서 태어나는 병을 갖고 태어났습니다. 생후 6주 만에 부모님이 기르는 것을 포기하고 보호시설에 맡겨졌습니다. 팔과 다리가 없이 자라야 하니 그 어린 시절도 사춘기 청소년 시절을 지나면서 우울한 시기를 보냈습니다. 결혼을 했는데 남편을 잘못 만나서 남편이 몸도 장애를 가진 이 여인을 심하게 때렸습니다. 아이를 가져도 번번이 유산합니다. 그런데 주변에서 “당신은 선천적인 장애가 있기 때문에 임신하면 아이도 문제고 당신도 문제”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런 주변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오히려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런 가운데 건강한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입에 붓을 물고 그림을 그리고 발로 그림을 그리는 구족화가가 되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녀가 고백하기를 “하나님은 우리에게 감당할 만큼의 고통을 주십니다. 큰 고통을 주는 것은 크게 쓰이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부족한 장애를 갖고 태어났지만, 긍정의 힘과 강인한 의지로 저의 장애를 극복했습니다. 긍정적인 생각과 습관이 저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나에게 무엇인가를 할 수 없다고 말할 때마다 더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저의 부족한 1%의 의지가 99%의 도전을 가능케 하고 마침내 세상을 움직이는 동력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장애가 있는 지금이 행복하고 감사합니다. 어려운 상황은 언젠가 끝나며 앞으로 나가다 보면 꿈도 이룹니다. 고통도 축복입니다. 극복할 수 없는 장애는 없습니다. 장애는 마음속에 있는 것일 뿐 마음의 장애를 이겨내고 새로운 것에 도전한다면 많은 것을 이룰 수 있습니다”

 

진정한 장애는 마음의 장애입니다. 스스로 절망하고 낙심하고 포기하는 것이 문제이지 믿음의 눈으로 절대 긍정의 믿음을 가지면 어떤 문제도 이길 수 있습니다. 

 

2021년 한해를 살아가실 때 순간 순간마다 믿음의 눈을 열어 주십시오. 믿음의 눈을 열어 주십시오, 믿음의 눈을 열어주십시오라고 기도하셔서 문제 보다 크신 하나님이 문제를 이기게 하시고 우리의 마음에 꿈꾸고 소원하고 기도하는 모든 것에 차고 넘치게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