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의 유래


아리랑의 유래


1.


한자와 관련된 어원 고찰은 흥선대원군 경복궁 중수 무렵 고향을 떠나는 부역꾼들이 '나는 님과 이별한다'는 뜻으로 아리랑(我離娘)을 불렀다는 설,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수를 위한 당백전 발행으로 원성이 자자하여 차라리 '내 귀가 멀었다'는 뜻으로 아이농(我耳聾)이라 한 것에서 유래했다.

2.

아리랑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민요이다.
아리랑은 2012년 12월, 대한민국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1]2014년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지역별로 각각 다른 아리랑이 전해져 온다.

아리랑은 대한민국을 비롯하여 한반도와 해외 한민족 사회에서 널리 애창되는 대표적인 노래이며 한반도의 중앙부에 위치한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발생된 아리랑은 강원도 정선 지역을 중심으로 점차 확산되어 1억 한민족의 민요가 되었다.[2]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 阿里娘打令[3](아리랑타령)이 있으며, 한자 표기는 원래 어원이 아닌 한자의 음을 빌려 표기한 음차 표기이다.


3.

아리랑의 어원은 불분명하나, 그에 대한 여러 가지 설이 제기되고 있다.

일부 시각에서는 아리랑을 '아리다'에 연관짓기도 한다. 아리다의 원래 어형은 '알히다[5]'이며 이는 '앓다'에 '-이-'가 붙어 형용사로 굳어진 것으로 본다. '아라리가 났네'는 '앓이가 나다'로 풀이되며 '앓이'는 '앓다'의 명사형이다. '앓앓이'는 강조를 위해 어간을 중복해서 사용했거나 다른 지역에서 나타나는 '아리리'와 같이 '앓이앓이'가 줄어든 형태인 것으로 보인다. 현대에는 '가슴앓이, 속앓이' 등의 형태로 남아있으며 '나다'는 '병이 나다'에서 '나다'에 대응한다. 또한 '아리랑'은 '구부렁(구부르다)', '달랑달랑(달다)'과 같이 동사 어간접미사를 붙여 의태어를 만든 것일 수 있다. 같은 방식으로 쓰리랑은 쓰리다와 연관된다.


또한 아래와 같이 한자에 연관하여 어원을 찾기도 하지만, 과거 어떠한 문헌에도 다음 예가 나타나지 않아 다양한 한자음에 음차한 것에 불과하여 문제가 제기되고 있으며 민간어원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한자와 관련된 어원 고찰은 흥선대원군경복궁 중수 무렵 고향을 떠나는 부역꾼들이 '나는 님과 이별한다'는 뜻으로 아리랑(我離娘)을 불렀다는 설,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수를 위한 당백전 발행으로 원성이 자자하여 차라리 '내 귀가 멀었다'는 뜻으로 아이농(我耳聾)이라 한 것에서 유래했다는 설, 세 번째로 밀양 아리랑의 전설의 주인공 '아랑'을 애도한 노래에서 유래했다는 아랑전설(阿娘傳說), 네 번째로 신라 박혁거세의 아내 알영부인을 찬미한 것에서 유래했다는 설 등이 있다.[6]

한편, 수필가 윤오영은 그의 수필 <민요 아리랑>에서 이들 어원설이 부회(附會)에 지나지 않는다고 평가하며, 아리랑의 '랑'은 령(嶺)의 변음이며 '아리'는 '장(長)'의 뜻을 지니므로 '아리랑'은 곧 '긴 고개'를 뜻한다고 설명한다. 그 근거로 장백산의 옛 이름인 '아이민상견'(阿爾民商堅)의 '아이'는 '장(長)'의 훈(訓)이며, '민'은 백(白)의 훈차이고, '상견'은 산(山)의 반절음이니 '장(長)'의 고어가 '아리'인 것이 분명하다는 설명과 함께, 아리수(阿利水)역시 곧 장강(長江)을 뜻하는 것으로 그 시대, 그 지역에서 가장 큰 강을 부른 이름이므로 '아리랑' 역시 지역 마다 있는 가장 큰 고개를 부르는 이름이었음을 밝힌다. 덧붙여 '쓰리랑'은 '시리 시리 시리랑'에서 온 것으로 이는 '사리 사리' 혹은 '서리 서리'의 변음이며, 지방마다 높은재를 '사실고개', '서슬고개'로 부르는 것으로 미루어 '꾸불꾸불 서린 고개길'을 뜻한다고 설명한다.[7]

'아리랑'과 '쓰리랑'은 고대 북방 샤머니즘의 장례문화에서 '영혼을 맞이하고 이별의 슬픔을 참는다'라는 의미로 추정된다는 견해도 있다.[8]

노래 아리랑은 떠돌이 소리꾼들이 부르던 것으로 전국을 떠돌며 힘든 고개를 넘을 때 힘든 것을 노래한 것으로 백성들이 그네들이 부르는 노래를 따라부르게 된 것이다. 아리랑 스리랑은 높고 구불구불한 재를 일컫는다.

이밖에도 뜻이 없다는 설 등 여러 설과 구음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는 설이 있다.


4. 

아리랑이 도대체 무슨 뜻일까? 사람들은 흔히 아리랑을 고개이름으로 알고 있는데, 이는 잘못된 인식이다. 아리랑은 고개이름이 아니라 가슴이 아리다는 뜻에서 유래되었고 쓰리랑은 가슴이 쓰리다는 의미에서 유래되었다. 아리랑 쓰리랑은 가슴이 아리고 쓰리다는 말이다.

왜 아리고 쓰리다가 우리민족의 대표적인 민요로 되었을까? 한반도는 역사적으로 몇 번이 모자라는 천 번에 가까운 외침을 받아왔다. 너무나도 빈번하게 외침을 받다 보니 항상 언제 당할지 모른다는 심리로 인해 늘 불안한 삶을 살아오게 되었다. 그래서 ‘무사한가?’가 우리민족의 인사말이 되어왔다. 중국인이 ‘밥을 먹었느냐?’가 인사말이 된 것에 비하면 참으로 우리민족의 비극적인 역사를 알 수 있다. 게다가 조선조 518년을 통해 양반과 상놈의 문화 때문에 백성들의 삶이 몹시 고달파졌다.

이러한 역사는 우리민족을 한(恨)의 민족으로 만들었다. 일제치하 시대인 1930·40년대 만들어진 가요 절대다수가 가사가 슬프고 멜로디가 느린 것이 특징이며, 이는 곧 우리민족의 한 많은 정서를 말해주는 좋은 예이다.
수많은 노래 중에서 우리민족의 비참한 역사 및 이로 인해 한의 민족이 된 정서를 가장 잘 나타내는 가요가 바로 아리랑이다. 이런 맥락에 의해 한국에는 아리랑가요 대표적인 정선아리랑 외에 진도아리랑, 홀로아리랑, 울산아리랑 등 수십 가지가 있다.

해외에 이주한 우리민족도 ‘전통아리랑’ 정서를 갖고 있었고 타향에서 정착하는 과정에 또 수많은 한이 싸이게 되었다. 이를테면 해외동포 700만 명 중 고국전통문화를 가장 잘 보존해온 조선족은 만주이주 초창기부터 삶의 터전을 마련하느라 고생과 고통이 가슴을 짓눌러 왔으며 한의 역사가 계속 지속되었던 것이다. 이 과정에 한의 정서가 담긴 아리랑을 비롯한 전통가요를 부르며 고달픈 맘을 달래 오곤 하였다.

신중국 건립 후 소수민족문화를 계승하고 발전하라는 중앙정부의 정책에 의해 조선족은 전통문화를 지켜올 수 있었고 새로운 민족정서를 반영하는 가요도 많이 창작하게 되었다. 아울러 전통 민요를 조선족의 실생활을 토대로 새로운 연변아리랑을 창작해냈다.

중국56개 민족 중 조선족은 가장 능가선무(能歌善舞)한 민족으로 소문나 있다. 따라서 조선족의 농악무는 2009년 이미 중국무형문화재에 등록이 되었고 제3차 중국무형문화재등록에 조선족 씨름, 회혼례, 가야금, 판소리와 함께 연변아리랑이 이름을 올렸다.
지난 6월 21일 길림신문을 비롯한 언론이 이 소식을 보도하자 이튿날인 6월 22일 한국의 지상파방송 3사와 조·중·동을 포함해 수많은 언론들이 떠들었다. 그런데 일부 한국 언론의 보도내용에 “중국이 아리랑을 약탈했다”는 주장이 있어 중국정부와 조선족을 당황하게 만들고 있다.

아리랑은 한국만의 자산이 아니라 전체 백의민족의 공동소유이다. 쉽게 말해 해외에 살고 있는 동포들도 소유할 자격이 있다. 조선족의 경우 거주국의 공민으로서 자신들의 문화가 국가무형문화재에 등록되는 것은 영광이며 고국인 한국은 이를 마땅히 지지하야 할 입장이라 필자는 생각한다.

한국 언론이 왜 약탈을 들먹이며 민감한 반응을 보일까? 그 근본적인 이유는 수천 년 동안 외침을 받아온 피해의식에서 생겨난 결과가 아닐까?

전체 백의민족의 정서를 대표하는 아리랑이 한국 언론에 의해 또 한 번 수난당하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

5.

'아리'는 하늘을 뜻하는 '알'의 변음(變音)이고,
'랑(郞)'은 사내·남편 외에도 '주인'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종대씨는 50년 전 중국 산둥성 일대에서 발굴된 8500년 전 토기에 새겨진 그림 문자를 근거로 들었다.
다섯 봉우리 산 위에 반달 같은 모양이 있고 그 위에 둥근 해가 있는 그림 문자였다.
이씨는 "학계에서는 이 그림이 아사달을 뜻한다고 보지만 사실 아리랑을 뜻한다"며 "직계 자손인 우리가 부끄럽게도 오랜 세월 잊고 살았다"고 했다.

처음 듣는 이야기여서 이씨를 만나봤다.
70세인 그는 전기제품 회사에 다니던 30년 전부터 우리 역사를 공부했는데 15년 전에 고대 그림 문자를 보고 아리랑의 뜻을 풀게 됐다고 했다.
그는 이런 내용을 담은 책을 내려고 했지만 출판사들이 거절해 작년에 자비로 40권을 찍었다고 했다.

그의 말을 듣고 인터넷과 자료를 찾아봤다.

아리랑의 어원(語源)에 대해 30종 가까운 설이 있으나 정설은 없었다.

경복궁 중건 때 원납전을 내라는 말에 저항한 민초(民草)들이 '내 귀는 멀었다'며 '아이롱(我耳聾)'이라는 노래를 부른 것이 기원이 됐다는 설,

'밝(光)'의 고어인 '아리'와 고개를 뜻하는 '령(嶺)'이 합쳐졌다는 양주동의 '아리령설',

고대 낙랑시대 교통의 관문이었던 자비령의 이름인 '아라'에서 유래했다는 이병도의 '낙랑설' 등이 있다.

미국인 헐버트는 1896년 최초의 아리랑 악보와 영문 가사를 남기면서 "한국인들에게 아리랑의 뜻을 물었지만 아는 사람이 없었다"고 썼다.

어원을 추적한 첫 연구는 1930년 일제 총독부 기관지에 실린 '조선 민요 아리랑'이었다. '아이롱설'과 나를 버리고 떠난 임이라는 '아리랑(我離娘)설' 등 6가지 설을 들고 있다. 아리랑 연구가 조용호 박사는 이 논문이 "아리랑을 희화화하고 식민 통치를 정당화하려는 의도를 감추고 있다"고 지적했다.

중국은 2011년 조선족아리랑을 국가무형문화유산으로 등록했다. 우리는 2012년 아리랑을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등록했지만 우리 무형문화재로는 올리지 못하고 있다. 2005년에 국내에 소개된 러시아 학자 추지노브와 유게라심의 연구에 따르면 우리 민족은 인종학적으로 고대 아리아족에서 갈려 나와 동쪽으로 이동했는데 이 아리아족과 아리랑이 관련이 있다고 한다. '아리아'는 '하느님의 아들', '아리야'는 '신성하다'는 뜻이라는 것이다. 이 주장은 이종대씨의 '하느님설'과 닮았다.

외국인들이 아리랑을 먼저 연구했고 지금도 세계를 뒤지며 다양한 방법으로 근원을 찾고 있으며 중국은 자기 것으로 만들려 하고 있는데 정작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답답하다. 한반도에서만 찾고 있어서 그동안 여러 연구가 있었어도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정부 차원의 지원은 바라지 않더라도 학자들이 각성해서 과학적 연구로 하루빨리 아리랑의 뜻을 복원해야 한다. 그것이 후손 된 도리다. "잘못 아는 것, 모르는 것을 바로잡지 않으면 이 민족은 영원히 부평초처럼 떠돌 수밖에 없다"는 이씨의 말이 귓가에 쟁쟁하다.


6.


현대인의 성경 / 창세기 10:30,
‘이들이 사는 땅은 메사에서부터 동쪽 산간 지역 스발까지였다.’

쉬운성경 /
‘이들은 메사와 동쪽 땅의 산악 지방에 있는 스발 사이에서 살았습니다.’

두 성경에서 욕단 족속들이 사는 지역은 메사에서부터  동쪽 아시아지역의 산악지방인 스발 사이에 살았다고 합니다. 

대 홍수 후 욕단이 유일신 신앙을 갖고서 동양으로 이동을 시작할 때에 벨렉은 형제인 욕단을 버리고 하나님을 불신하는 마음을 품고서 반대 방향인 서쪽인 ,즉 시날 평원으로 니므롯의 무 리와 하나가 되어 서부로 갔던 것입니다.

욕단의 가계는 무엇보다도 큰 이별의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이 때는 아직 노아를 비롯해 아르박삿, 셀라, 벨렉과 욕단의 아버지 에벨이 살아 있을 때였습니다.
벨렉의 가계는 아버지 에벨과 형제 욕단의 가계와 이별하고 서쪽으로 향하여 가고 욕단의 가계는 동양으로 향하여 갔던 것입니다.
욕단은 스발을 향해 동쪽으로 옮겨갔습니다. 스발은 그의 목적지였습니다. 우리 겨레의 노래 아리랑은 그 때에 욕단의 가계가 동방으로 이동하면서 불렀던 찬송가였습니다.

첫째, 아리랑고개를 넘어 동방으로

아리랑은 우리 겨레의 영아기 때의 체험을 간직하고 있는 민족의 역사 노래인 동시 에 현존하는 인류 가장 오래된 찬송가로서 한국인이 처음부터 창조주 하나님을 섬 긴 욕단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규명해줍니다, 알이랑은 선민 한민족의 키워드입니 다, 이것이 아리랑의 비밀입니다,

아리랑은 하나님과 함께라는 뜻입니다. 아리랑은 하나님 중심사상이요, 신본주의 정신입니다. 욕단은 홍수 후 니므롯에 의해서 셈족의 하나님 신앙이 강하게 흔들릴 때에도 결코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는 도전 받는 유일신 신앙을 보전하고자 ‘알이랑 정신’ 즉 하나님 중심 사상과 신본주의 정신을 갖고서 새 땅을 찾아 알이랑고개(파미르 고원-천산산맥-알타이 산맥)을 넘어 아 시아로 멀리 이동한 것입니다. 이것이 현존하는 인류 최고의 찬송가인 알이랑 역 사의 태동의 배경입니다. 인터넷의 위키백과 사전에서 아리랑에 대한 글을 뽑아봤 습니다, 

‘아리랑은 한국의 대표적인 민요이다. 2012년 12월, 대한민국의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 되었다.[1] 또한, 2014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지 역별로 각각 다른 아리랑이 전해져 온다. 아리랑은 한국의 각 지역 별로 다양한 종류가 있는데, 대표적으로 알려진 노래로는 진도아리랑, 밀양아리랑, 정선아리랑, 해주아리랑 등이 있다. 20 세기 이후에 주로 불려지고 있는 아리랑은 경기아리랑 또는 '신아리랑'이라 하며, 구한말에 지 금의 형태로 정형화된 노래이다. 수백에 가까운 변종이 있었을 정도로 즐겨 불리던 이 민요는 후렴부와 독창부가 번갈아 가면서 불리도록 이루어져 있다. 이 때문에 아리랑은 여러 사람이 같이 부를 때에는 '아리랑'이라는 전주부나 후렴부 사이에 여러 기원과 변종의 가사를 붙여 계 속 이어 부를 수 있고 다양한 변주가 가능한 노래이다. 

구한 말의 선교사 헐버트는 문경 새재 아리랑을 채보하여 영문 월간지 '한국소식' 1896년 2월 호에 실었는데, 이것이 아리랑을 서양음계로 처음 채보한 것이다.[8]

이때 헐버트는 아리랑은 한국인에게 쌀과 같은 존재라고 소개하였다.
1926년의 한국 최초의 장편 영화 〈아리랑〉의 주제 음악으로 쓰여 유명해졌다.[9][10]

아리랑은 최근 많은 방식으로 편곡되고 있다.
예를 들어 북한 공훈예술가 최성환 편곡의 관현악판 편곡에서부터 시작해서 오마주 투 코리아(Homage to Korea)나 아리랑 랩소디(Arirang Rhapsody), 최근엔 아리랑 판타지(Arirang fantasy)등이 있다. 미국 칼빈 대학교 교수이며 미국 찬송가 편찬원이었던 버트 폴먼(Bert Frederick Polman)교수는 아리랑의 멜로디를 가지고 1990년 미국 찬송가 229장을 만들었다. 제목은 '그리스도, 당신의 충만하심'(Christ, You Are the Fullness)이다. 같은 편집위원인 에밀리 브 링크는 멜로디가 너무 아름다워서 12명의 전원 찬성으로 새로운 찬송가에 실리게 되었었다고 한다.[11] 

한국 찬송가에는 횃불트리니티 대학원의 김은희교수는 평화통일과 화해를 위하여 남북이 함께 공감하며 소통할 수 있는 음악을 고민하며 연구하던 중 8,000만 민족의 애가인, 아리랑 곡조 (HymnTune)에 의한 아리랑(Arirang) 찬송을 작시한 바 있다. 아울러 아리랑 오르간 환상곡 (Arirang Organ Fantasy)연주와 아리랑 찬송가를 통하여 ‘평화통일과 화해’의 방안을 모색하 였다.[12] 아리랑(Beautiful Daring)은 민족의 애가(哀歌)이며 통일 조국이 함께 부를 민족의 애 가이므로 비록 지난 70년간 사상과 이념이 다른 체제 속에서 살아왔지만 우리가 한 민족이며, 한 동포임을 확인하게 해주는 곡이라고 주장한다. 해외 동포와 교회, 심지어 세계교회까지 한반 도의 평화통일을 위해 오랫동안 염원해 왔던 기도가 아리랑찬송을 통해 이루어지길 소망하며, 통일 후 민족의 애가, 아리랑을 통하여 주체사상으로 의식화 되어있는 북한주민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소개하는 도구가 되길 기대를 가지고 만들었다. [13] 

1.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2.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청천 하늘엔 잔별도 많고 우리네 가슴에 수심도 많다.  

3.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저기 저 산이 백두산이라지 동지 섣달에도 꽃만 핀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아리랑’이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모든 종류의 아리랑 노래에서 변하지 않고 쓰이고 있는 후렴구가 아리랑입니다.
그만큼 한국인에게 아리랑이라는 말은 특별한 뜻과 사연이 배어 있다는 뜻입니다.
아리랑이 후렴구라는 사실은 아리 랑이라는 말이 굉장히 중요한 뜻을 담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왜냐하면 대부 분의 후렴은 그 노래의 중요 메시지가 들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렇다면 아리랑 에 담겨 있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아리랑에는 한국인의 원형과 정체가 무엇인가를 알려 주는 아주 귀중한 비밀이 감 추어져 있습니다. 아리랑은 신민 한 민족의 키워드입니다. 아리랑은 원래 ‘알이랑’ 입니다. 알이랑-아리랑. 아리랑은 원래 ‘알’과 ‘이랑’으로 구분됩니다. ‘알’은 하나 님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란 신명은 본래 ‘알’이었습니다. 알에 한이라는 관형사 를 붙이고, ‘알’ 뒤에 ‘님’이라는 존칭명사를 붙여서 ‘한알님’이라고 했습니다. 그것 이 한알림-하날님-하나님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래서 ‘알’은 하나님입니다. 히브리 어 ‘엘’ 아랍인의 ‘알아(알라)는 바로 이 ‘알’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알라는 아랍사 람들의 하나님을 지칭하는 말로써 아랍 그리스도인들도 이 단어를 사용합니다, 창 조주 하나님을 뜻하는 인류 최초의 신명이 ‘알’이었는데 노아에 의해 홍수 이후의 세대로 전해졌습니다. 

그래서 ‘알’은홍수 이전 최초의 인류 가계로부터 내려온 지상 최초의 낱말 중 하나 로 고대 창조주 유일신 하나님을 뜻하는 이름입니다. 

‘이랑’은 함께라는 토씨로서 영어의 ‘with’와 같은 것입니다.

예로 갑돌이랑은, 갑순일랑은 갑돌이와 함께, 갑순이와 함께라는 뜻입니다,
언어학자들은 토씨는 6천년 이상 간다고 합니다.
아리랑을 다시 쓰면, 알이랑 알이랑 아라리요, 알이랑 고개를 넘어간다 입니다,
이것을 풀이하면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요, 하나님과 함께 고개를 넘어간다가 되겠습니다,
(with God, with God, With God, just God. Accompany with God, I will cross mountains.)

그러므로 알이랑은 하나님과 함께라는 뜻입니다,
왜 ‘알’이 유일신 하나님을 뜻하 는 말이었을까요? ‘알’이 수 많은 생명을 낳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고개를 넘어간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고대 한민족이 이란 고원을 지나 파미르고원을 넘어, 천산산맥을 넘어 알타이 산맥을 넘어갔다는 말입니다, ‘파미 르’고원을 한자로 총령(蔥嶺)이라고 합니다, 총은 우리 먹는 파를 말하며, 령은 마 루를 말합니다, 한국말로 파 마루(파미르)입니다 지리학에서도 역시 파미르고원은 파가 많이 자생한다고 합니다. 파미르고원은 파마루로서 파가 많이 자생하는 산마 루이기에 파마루(파미르)고원인 것입니다, 파미르는 한국말 파마루에서 전음된 것입니다, 천산산맥도 영어로 Tien Shan으로 표기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언어적 연관성은 고대 한국인이 참으로 ‘파미르’고원을 지나 천산산맥을 넘 고 알타이 산맥을 넘어서 동방으로 이동해 왔음을 보여 주는 하나의 고고학적 증명 입니다. 알타이 고개를 넘어서 동쪽으로 조금 더 이동하면 바이칼(밝하알)호수가 나 옵니다. 한국인의 선조들은 이 바이칼호수를 거쳐 동쪽으로 계속 이동하다가 마 침내 아시아 동녘에서 제일 높고 밝은 산인 한밝산(태백산-백두산)에 이르러 배달 나라를 세웠던 것입니다. 백두산 산정에 올라 창조주 하나님께 천제를 드린 후에 이 찬송가를 불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아리랑’은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던 고 대 한국인이 이 땅에 오기까지 수 많은 산과 언덕과 고원들을 넘으면서 부른 찬송 가였던 것입니다, 

아리랑이 우리 겨레의 마음 속에 그토록 크게 자리 잡고 있는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겨레의 역사와 가장 오랫동안 함께 해온 민족의 숨결이며 역사의 맥박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세번째 가사인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은 누구를 뜻합니까? 문맥상 하 나님을 섬기는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이 됩니다, 알이랑 고개를 넘어간다는 바로 앞의 가사는 하나님과 함께 고개를 넘어간다는 뜻인데 하나님을 버리고 떠나가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것은 홍수 후 노아의 후손들인 에벨의 자손들 벨렉계와 욕단 계가 동쪽으로 이동하다가 벨렉계가 방향을 전환해서 니므롯을 좇아 서쪽으로 떠 나는 벨렉계 형제들을 두고 한 말입니다, 

네번째 구절인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는 것은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에 대한 악담 이나 저주가 결단코 아닙니다, 만약 노래 가사가 ‘나를 버리고 가는 놈’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난다’고 했다면 그것은 실제로 발에 병이 나라고 욕하는 것이 될 것입 니다, 그러나 가사는 ‘가시는 님’이라고 했으며, 십리도 못가서 발 병난다고 한 것 은 더 떠나 가지 못하고 나의 품으로 되돌아 와 달라는 연정을 노래한 것입니다.   즉 창조주 하나님을 버리고 떠나는 자들을 향해 다시 순수한 하나님신앙으로 되돌 아 올 것을 촉구하는 노래인 것입니다, 이렇게 겨레의 노래 아리랑에는 하나님을 위한 열정과 잃은 자를 위한 연민이 함께 깊이 베어 있습니다, 경천애인의 얼이 닮 긴 노래입니다,

알이랑 고개를 넘어가던 우리 조상들의 가슴에 한 가지 커다란 근심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들인 서부로 향하여 갔던 배역자들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세상 근심과는 다른 것입니다, 알이랑의 2절은 바로 그것을 노래한 것입니 다, ‘청천 하늘에 잔 별도 많고, 우리네 가슴엔 수심도 많다.’ 우리 조상은 셈의 자 손이기 때문에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 아라랏 산에서 하나님께 첫 제사를 드렸듯이 산정에서의 제자를 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육축을 끌고 산을 넘고 골짜기를 지나 물을 건너 동방으로 이동해 왔는데, 이러한 유목민들은 들판이나 산 기슭에서 밤을 많이 지새웁니다, 

밤에는 하늘에 별이 빛납니다, 그래서 청천 하늘에 잔별도 많다고 노래한 것입니다, 그 밤 하늘의 수 많은 별들만큼이나 그들의 가슴에 하나님을 버린 자들로 인해 수 심도 많았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역사적 사연을 간직한 알이랑 찬송은 욕단족속이 중앙 아시아와 시베리아를 거치면서 이곳 아시아에 오기까지 끊임없이 불리어졌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겨레의 삶 가운데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3 절에 드디어 목적지인 백두산이 눈에 보이기 시작합니다.’ 저기 저 산이 백두산이라지 동지 섣달에도 꽃만 핀다.’ 꿈에도 그리던 백두산을 만나서 기쁨의 노래를 부르면서 개척적인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아리랑은 홍수 후 인류의 최초의 찬송가입니다, 겨레의 노래 아리랑은 우 리 한 민족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으뜸가는 코드입니다, 알이랑 민족 한국인 은 하나님을 섬기는 유일신 신앙으로 민족사를 시작한 셈족의 거룩한 백성인 것입 니다, 

둘째로 창조주 유일신의 이름 ‘알’
쌀은 볏알(볍씨), 과실도 씨알에서 생기고, 하늘과 땅과 바다의 허다한 생물들이 또한 ‘알’에서 탄생합니다, 그래서 ‘알’은 모체요 근원이요 시작이란 뜻을 갖습니다, 따라서 창조주 하나님도 ‘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주요 근원이시요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인은 그 ‘알’ 이 큰 모체이시고 큰 근원이시며 크다란 시원이시기에 ‘알’ 앞에 ‘큰’ 것을 뜻하는 ‘한’이라는 관 형사를 붙였습니다. 또한 ‘알’이 인격적 존재임으로 ‘알’ 뒤에 ‘님’이라는 존칭명사를 붙였습니다, 그래서 창조주 유일신을 ‘한알님’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이 한알님이 하늘님, 하날님, 하나님으 로 변한 것입니다,     
                                                                                                               
더욱이 하늘은 둥글어서 ‘알’인데 하늘이라는 말도 처음에는 한알, 즉 큰 알(卵)이었습니다 한알-하날-하늘로 변한 것입니다, 만물을 내신 하나님은 하늘에 계십니다, 큰 모체, 큰 근원과 같은 뜻으로서의 한알에서 하늘이라는 말의 기원이 있는 것입니다 

지난날의 우리 신화, 전설에서 한 시조의 탄생이 알에서의 탄생으로 이어지던 것을 기억할 것입 니다, 신라를 세운 박혁거세는 망아지가 알을 품고 있다가 뛰처 나간 그 알에서 태어났다고 합 니다, 짐승이나 사람이 알을 낳았습니다 그래서 하도 이상해서 갖다 버린다, 그러면 새와 짐승 들이 그 알을 보호하며 노래합니다, 그렇게 하늘의 보호를 받으며 태어난 것이 고주몽이기도 하 고 금와이기도 합니다, ‘알’이라는 것은 우리 조상에게 있어서 사물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리고 시작이기도 했습니다, 홍수 전 사람들이 창조주 유일신 하나님을 알이라고 한 것은 여기에 있습 니다, 하나님을 뜻하는 성경 원어 ‘엘’은 바로 이 ‘알’에서 가지 쳐 나온 말입니다,

‘엘’은 다스리는 이, 강하신 분이란 뜻을 가지 신명으로 셈어에서 전반적으로 사용된 하나님 또 는 신성에 관한 호칭입니다, 엘은 바로 알의 변음입니다, 홍수 이전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이 라고 불렀습니다, 이 ‘알’이라는 단어는 창조주 하나님을 뜻하는 일종의 원형언어로서 노아 홍 수 이후의 세대로 전승되었습니다. 노아는 홍수 후 방주가 머무른 산의 이름을 ‘하나님의 산’이 라는 뜻으로 ‘알뫼’(알산)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방주가 안착한 지역인 ‘알뫼’(아르메니아) 라는 지명이 나왔으며 그 산은 오늘날까지 안산 곧 ‘아르산’이라고 불리어집니다, 

창세기에는 방주가 아라랏 산에 정박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라랏 산은 터키 동부 고원지 대에 위치한 산인데 터키어로 ‘아르 다으’즉 아르 산’이라고 불립니다, 이 ‘아르’는 본래 ‘알’에서 나온 말입니다, 아라랏 산은 터키에서 가장 높은 해발 5137m의 ‘대 아르’와 해발 3985m의 ‘소 아르’로 구성되었습니다, 이 대아르는 일년 내내 눈으로 덮여 있는데 이 대아르가 창세기의 아라랏 산으로 추정됩니다, 

‘알’이란 단어는 고대로부터 대단히 소중한 말이어서 인명과 지명에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노아 로부터 일신신앙을 계승한 셈은 자신으로부터 일신신앙을 물러 받은 셋째 아들의 이름을 ‘알밝 삿’ 이라고 지었습니다, 또한 알밝삿의 증손자로서 에벨로부터 셈계의 일신신앙을 계승한 욕단 은 자신의 맏아들 이름을 ‘알모닷’이라고 지었습니다, 더 나아가 알아랏, 알뫼니아, 올알, 알타 이, 알알해(아랄해), 알마타, 알타이, 알류우산 열도, 알라스카와 같은 지명들은 모두 창조주 하나님의 최초 신명인 ‘알’에서 근거를 둔 말입니다, 

홍수 후 ‘알’은 주로 셈 계통의 민족들에게 그들의 신을 나타내는 말로 쓰였습니다, 유대인은 ‘엘’이라는 말을 쓰고 있는데 이스라엘(하나님과 겨루어 이김), 브니엘(하나님의 얼굴), 엘 샤다 이(전능하신 하나님), 엘리야, 엘리사, 엘 엘리온(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알’이 고대 하나님의 이름이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좋은 사례는 ‘메아리’를 들 수 있습니다. ‘메아리’는 본래 말이 ‘뫼알이’입니다, 이 말은 ‘뫼의 알’ 즉 산 신을 말합니다, 산에 가서 야호하고 고함을 치면 야호, 야호, 야호, 라고 산이 있는 숫자만큼 되돌아 오는 소리를 우리 조상들은 산신의 소리로 연상했 던 것입니다, 그리고 ‘엘’, ‘일’, ‘얼’과 같은 말은 바로 이 ‘알’의 변음입니다, 

‘알’에서 가지 처 나온 말이 ‘얼’입니다, 얼은 ‘신(神)’ ‘넋’을 말합니다, 정신 나간 사람을 ‘얼간이’ 얼빠진 사람이라고 하며,얼떨떨함과 어리둥절은 정신을 가다듬지 못하는 상태이며, 얼뜨기는 다부지지 못한 사람, 얼버무림은 제대로 버무리지 못함을 나타냅니다, 얼은 정신을 뜻하는 우리 의 토박이 말입니다, 이 ‘얼’이라는 말이 ‘알’에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수메르어에서 도 인간의 정신을 뜻하는 말이 ‘a-la’입니다, ‘역사는 수메르에서 시작되었다’의 저자S. N. Krammer박사는 그의 저서에서 수메르인은 동방에서 왔다고 합니다, 또한 문명의 창세기의 저자 노아 크레이머는  수메르라는 지명은 셈에서 유래되었다고 단정합니다, 

아마도 수메르인들은 대 홍수 후 동방으로 이동했던 욕단의 족속들로서 바이칼 호에서 역이동 하여 서쪽으로 다시 와 중앙아시아(실크로드)를 거쳐 메소포타미아 지방에 들어가 문명을 일으 킨 것으로 추정합니다.  수메르인들은 머리털이 검고 후두가 편평하며 태음력을 사용했고, 한국 어와 어순이 같은 교착어를 썼습니다, 대영백과사전에는 수메르인의 교착어가 한국어와 같다고 지적했습니다, 수메르어와 한국어는 뜻과 음이 일치하는 단어가 아주 많이 있습니다, 한국어의 광명을 뜻하는 ‘밝’은 BAR-BAR, 금은 GUSH-KIN인데 KIN은 누른, 금을 뜻합니다, 삼국시대 까지만 해도 우리 민족은 금을 ‘구지’라고 했습니다, 길은 GIR, 굴GUR, 구릉은 KUR, 노래는 NAR, 님(높은 사람에게 붙이는 존칭)은 NIM, 니므롯의 님도 역시 존칭이라고 합니다,

달은 DAL 대갈(머리)는 DAD-DIL, 장독은 DUG, 밭은 BAD, 빛은 BIR, 어른은 UR, 한 알은 AN-UR(가장 높다), 칼은 KAR, 엄마는 UMMA , 아빠는 ABBA, 아랍어의 아버지도 ABBA 아람어의 아버지도 ABBA입니다, 특히 수천년 동안 변화가 거의 없었던 인칭대명사나 지시 대명사인 이는 (I), 나는 NA, 너, 네는 NE, 그, 게는 GE로 발음되고 뜻도 같습니다, 수메르인은 우리 처럼 머리카락을 묶어 상투를 틀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와 뜩같은 형태의 씨름을 했으 며, 고구려, 신라, 가야 등에서 썼던 회도(칼)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파미르고원이 원산 지인 파를 즐겨 먹었다고 합니다,

욕단의 목적지 ‘새팔’은 빛이 시작되는 새 땅 곧 ‘새밝’으로서 광명의 본원지를 이르는 말입니 다, 욕단은 알이랑 고개를 넘어 빛이 시작되는 동방의 새 땅, 곧 시베리아로부터 남 북만주에 이 르는 ‘극동 아시아’까지 아주 멀리 이동했던 것입니다, 만주 벌판이 연장된 시베리아는 우리 밝 달겨레의 역사의 고향입니다, 한국인의 주류는 시베리아 바이칼호에서 온 북방계 아시아인입니  다, 배달민족의 ‘배달’이라는 말은 ‘밝달’에서 나왔습니다, 배달겨레 할 때의 ‘배’의 뿌리도 ‘밝’ 입니다, 그리고 달’은  곧 ‘달’에서부터 온 것으로서 ‘아사달’할 때의 달인데 땅이라는 뜻입니다, 곧 양달은 양지를 말하며, 음달은 음지, 빗달은 비스듬한 땅을 말합니다, 빛의 근원이신 하나님 을 공경하던 천손민족 에벨의 혈통 욕단의 가계는 광명의 본원지인 ‘밝의 땅(밝달-배달)을 찾아 아침에 뜨는 해를 따라 알이랑(하나님과 함께) 고개를(파미르고원-천산산맥-앞타이 산맥)을 넘어 쉼 없이 동쪽으로 이동했습니다, 

욕단족속은 이 ‘밝의 땅’에서 ‘한 밝산’을 발상지와 중심터로 삼아 한밝산과 그 변두리에 정착했 습니다, 그곳이 동방에서 가장 빛밝고 볕밝은 땅인데다 아시아 동쪽에서 가장 높은 산인 백두산 은 셈의 후손인 그들이 산정제사를 드릴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역 사적 단군신화에 나오는 태백산 천손강림의 모티브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배달겨레의 성경상의 시조는 하나님의 사람 ‘욕단’입니다, ‘한 밝산’인 배달은 볕 밝고, 빛 밝아 사람이 먹는 풀, 나무, 과일, 새, 짐승 등이 자연히 많아서 아득한 옛날에는 그곳이 사람 살기에 가장 좋은 땅 이며 터였기 때문에 우리 조상들은 이 배달을 낙원으로서 하나님이 점지하신 땅이라고 믿었습 니다, 욕단이 세운 나라는 가장(한) 환(桓)한 나라인 까닭에 이것을 그들은 하늘나라(한 나라), 신의 나라(신국=신시)라 하였습니다,  배달나라는 신시(神市)라 하였습니다.

참으로 배달나라는 신시 곧 신의 도성이었으니, 다음과 같은 사실들이 그것을 입증합니다, 우선 천국은 밝고 환합니다, 해이신 하나님이 계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배달나라도 밝고 환합니다, 해가 뜨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천국에서 가장 높은 곧은 주님의 보좌인데, 수정처럼 맑은 생명수가 그곳에서 흘러 나와 생명수강을 이룹니다, 한편 밝달 나라에도 가장 높은 한 밝산 꼭 대기에는 천지가 있는데 거기에도 수정처럼 맑은 생수가 있어 강이 되어 흐르니, 그 물이 절반 은 동해로 두만강이 흐르고, 절반은 서해로 압록강이 흐릅니다, 게다가 천국 백성들의 옷은 모 조리 흰옷인데(계3:4, 7:9-10,19:14,마7:2, 28:3,행1:10,단7:9)인데 배달나라 백성들도 모 두 흰옷을 입고 삽니다, 그들은 백의 민족입니다,

더욱이 밝고 환한 천국에는 흰옷 입은 성도들이 보좌 앞에서 늘 하나님께 예배하는데 밝고 환한 배달나라에서도 흰 옷입은 백의 민족이 백두산 산정에 올라 하늘보좌에 계신 하나님께 성대히 천제를 드립니다.  땅 위에 있는 배달나라의 광경이 천국의 모습과 아주 유사합니다. 욕단이 밝 달(밝은 땅)에 세운 한 밝은 배달나라는 지상에 있는 하늘나라의 모형이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그 나라는 알이랑 정신, 곧 하나님 중심사상과 신본주의 기초 위에 세워진 신시 즉 하나님의 도 성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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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老人)


여호수아 13:1
여호수아나이 많아 늙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나이 많아 늙었고 얻을 땅의 남은 것은 매우 많도다.

나이 많아 늙어서 라는 말씀은 "임종의 때가 다가왔다"는 뜻입니다.
임종의 때가 다가올 때 나이 많은 사람의 신앙적 자세는 무엇일까?

레위 지파와 같은 삶을 살아봅시다.

여호수아 13:14

오직 레위 지파에게는 여호수아가 기업으로 준 것이 없었으니 이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 드리는 화제물이 그 기업이 됨이 그에게 이르신 말씀과 같음이었더라.


여호수아 13:33
오직 레위 지파에게는 모세기업을 주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들에게 말씀하심 같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기업이 되심이었더라.

오직 하나님에게 집중하는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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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후연표 / (老後の年表) (나이 드는게 두렵지 않습니다)

- 요코테 쇼타(横手彰太)

“어떻게 하면 오래 살 수 있느냐는 (일본에선)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보다는 어떻게 하면 건강하게 100세를 맞이할 수 있는가에 더 관심이 많죠.
병실에서 누워만 지내는(寝たきり) 100세로 생을 마감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죠.”

일본의 노후 설계사인 요코테 쇼타(横手彰太)씨는 이달 초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앞으로는 100세까지 사는 게 드물지 않은 시대가 될 테지만 건강한 100세와 입원해서 혼수 상태가 된 100세와는 삶의 질이 천양지차”라며 “한 살이라도 젊고 건강할 때 노력해서 아프지 않는 몸을 만들어 행복하게 100세까지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요코테씨는 지난 4월 출간 이후 일본에서 경제 부문 베스트셀러로 떠오른 ‘노후 연표’를 쓴 은퇴 전문가다.
상속·증여 등 자산 문제와 관련, 1000가구 이상 직접 상담한 결과를 토대로 책을 썼다.
한국에선 ‘나이 드는 게 두렵지 않습니다(중앙북스)’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다.

요코테 쇼타씨는 밤 9시에 잠들고 새벽 5시에 일어나는 규칙적인 생활로 건강을 유지한다고 말했다.
아침 운동도 거르지 않는다.
이런 노력은 건강 수명을 늘리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건강한 100세를 맞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는 인터뷰 내내 ‘내가 먼저(미 퍼스트, Me First)’를 여러 번 강조했다.
다소 이기적이라고 들릴 수도 있겠지만 자기 자신이 스스로 행복하다고 느껴야만 다른 사람에게도 친절해질 수 있고 행복도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 생각하는 힘도, 움직이는 힘도 약해집니다.
그러니 건강할 때 ‘미 퍼스트’를 중심축으로 생각하고 어디가 내 인생의 목적지인지 명확히 해 두려는 노력이 필요해요.
또 나이가 들면 우울증이 생길 확률이 높아지는데, 이런 위기 상황을 피하려면 무엇보다도 자신의 심신을 안정시키는 행동과 습관도 중요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행복 호르몬이라고 불리는 ‘세로토닌’이 많이 분비되도록 평소에 햇빛을 쬐고 꾸준히 운동을 하는 등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아침밥은 거르지 말고, 아침 산책으로 햇볕도 하루 10분씩은 쬐어줘야 합니다.
일부러 멀리 여행을 갈 필요도 없어요. 푸른 녹지가 있는 공원에만 가도 충분합니다.”

이렇게 세로토닌이 꾸준히 분비되어야 밤에 잘 때 수면의 질이 좋아지고, 불면증이나 수면 부족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요코테씨는 말했다.

뇌의 질병이라는 인지증(치매)을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평소 숙면을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대로 세로토닌이 분비되지 않으면 외출은 물론, 식사 같은 간단한 활동조차도 귀찮아지게 되고 결국 노쇠 현상을 앞당길 수 있다.

그는 “잠은 단순히 오래 자기만 하는 게 좋은 게 아니라, 얼마나 잘 자는지가 더 중요하다”면서 “나쁜 수면 습관을 수십 년 동안 계속하면 뇌에 노폐물이 쌓이고, 결국 인지증으로 이어지게 된다”고 했다.

그는 인터뷰에서 세로토닌을 여러 번 강조했는데, 이렇게 낮에 세로토닌이 많이 나와야만 밤에 잠을 잘 잘 수 있고, 잠을 잘 자야만 인지증(치매)도 예방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인지증 환자가 600만명이 넘는 치매 대국이기 때문일까?
행복한 노후에 대한 전문가 조언도 생활비 얘기가 많은 한국과는 다소 결이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참고로 한국은 인지증 환자가 80만명 정도인데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다).

“출세나 성공이 주는 행복은 딱 50세까지입니다.
앞으로의 인생이 편해질지 고달퍼질지는 결국 50세부터 어떻게 생활하느냐에 달렸습니다.
나이 오십을 넘어선 인생 후반전엔 전반전과는 다른 경기 운영 방식이 필요하죠.
건강하게 100세까지 오래 사는 비결은 하루 하루의 사소한 본인 습관에 달려 있습니다.
노후에는 건강이 최고라는 생각을 의식적으로 가져야 합니다.”

인생 100세 시대에는 남의 돌봄을 받지 않아도 될 정도로 건강력을 키우는 것도 중요하다.
침대에 누워 100살까지 살기보다는 아프지 않고 75세까지 사는 게 나을 수도 있다.

“100세까지 건강하게 오래 살려면 ‘의욕 호르몬’이라는 도파민의 힘을 깨워야 합니다.
현역 시절엔 출세나 성공 등으로 도파민이 펑펑 쏟아져 나오죠.
하지만 노후에는 그 힘이 잠잠해 집니다.
작은 성취를 해내야 행복감이 지속적으로 커지고, 무기력에서 벗어나 의욕이 생깁니다.
가령 산책만 해도 어제보다 오늘 생각보다 더 오래 걸었다고 하면 성취감을 느끼게 되지요.
배움이나 성장을 실감하면서 삶의 활력을 조금이라도 되찾으세요. 그것이 건강한 100세의 비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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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 23:1-2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사방 대적을 다 멸하시고 안식이스라엘에게 주신지 오랜 후에 여호수아나이 많아 늙은지라.
여호수아
가 온 이스라엘 곧 그 장로들과 두령들과 재판장들과 유사들을 불러다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는 나이 많아 늙었도다.

창세기 24:1
아브라함나이 많아 늙었고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복을 주셨더라.

창세기 18:1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이 많아 늙었고 사라의 경수는 끊어졌는지라.

* 성경에서 "나이 많아 늙으매" 라는 말씀은 임종이 가까운 아주 연로한 상태를 말한다(23:1-2, 창세기 24:1)


성경에서 나이 많은 노인의 특징

1. 여성의 기능 상실 / 창세기 18:1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이 많아 늙었고 사라의 경수는 끊어졌는지라.


2. 시력의 감퇴 / 창세기 27:1
이삭이 나이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더니 맏아들 에서를 불러 가로되 내 아들아 하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3. 돌아갈 때 / 창세기 25:8
그가 수가 높고 나이 많아 기운이 진하여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매.

4. 범사에 복을 받는 때 / 창세기 24:1
아브라함이 나이 많아 늙었고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복을 주셨더라.


나이가 들면 경직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1.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가 어렵다
2. 학습능력의 저하
3. 문제해결 능력의 저하
4. 경직성의 증가


노인 우울증의 대표 증상 세 가지

1. 기억력 저하

뇌의 모세혈관이 좁아지면 우울증뿐 아니라 기억과 관련된 전두엽 기능이 떨어져 기억력 저하 증상이 나타난다.
이로 인해 노인 우울증을 치매로 오인하는 경우가 많다.
치매를 의심해 병원을 찾는 노인 환자 10명 중 4명은 우울증을 진단받는다는 강동성심병원 연구도 있다.

2. 식욕부진

노인 우울증이 있으면 식욕이 떨어져 암 등 중병으로 오인을 많이 한다.
식욕 부진도 뇌혈관 문제로 인한 전두엽 기능 저하 탓이 크다.
전두엽은 식욕과 의욕도 관장한다.
식욕만 없는 게 아니라 매사 무기력한 증상이 함께 나타나면 우울증을 의심해야 한다.

3. 통증

노인은 관절염· 허리디스크 등 이미 근골격계 질환을 앓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우울증이 생기면 온몸 감각이 예민해져 작은 자극에도 통증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노인 우울증 환자가 관절염을 앓으면 일반 관절염 환자보다 통증을 5.9배 더 강하게 느낀다는 미국 골관절외과학회지 연구가 있다.



노인의 개념

노인상담에서는 노인에 대한 이해가 일차적이다.
노인에 대한 이해에 따라 상담의 진행은 그만큼 원활해진다.
상담에서는 노인에 대한 존재적 이해를 일차적으로 필요로 한다.
노인상담에서 주체가 되는 노인은 누구인가?
우리는 노인에 대하여 존재론적으로 어떻게 정리할 수 있는가?
여기서는 노인에 대한 일반적 정의가 필요하다.

오토(Pallet Otto)

그는 노화를 변화의 과정으로 전제하여 이와 같은 변화 현상이 시간적 요소와 상관관계가 있음을 지적한다.
그리고 노인의 개념 규정에 있어 변화와 시간이라는 두 요소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에 따라 "노인은 인간의 노화과정에서 나타나는 생리적, 심리적, 행동의 변화가 상호작용하는 복합형태의 과정에 있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의 정의에 의하면 노인은 다음을 특징을 갖는 사람이다.
그것은 노화로 인하여 환경변화에 적절히 적응할 수 있는 자체조직에 결손이 있는 사람, 자신을 통합하려는 능력이 감퇴하고 있는 사람, 인체의 기관, 조직, 기능에 쇠퇴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시기에 있는 사람, 생활에 대한 정신적인 적응성이 결손 되어 가고 있는 사람, 조직 및 기능 저장의 소모로 적응감퇴 현상에 있는 사람 등이다.

이러한 노인개념은 단순히 한두 가지의 특징에 해당하는 사람을 지칭하지 않는다.
전반적으로 앞에서 제시한 여러 특징을 가지는 노년기에 있는 사람을 노인의 존재로 규정한다.
즉 노화에 따라 신체적, 정신적 기능이 쇠퇴하고 사회적 역할이 감소함에 따른 특수한 성격을 갖는 사람이다.
그러기에 노인은 사회의 인구, 경제 및 사회 문화적 요인의 복합적인 작용에 의하여 생활 기능을 정상적으로 발휘할 수 없는 사람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여 노인의 개념의 다음의 몇 가지로 구분하여 보기로 하자.

(1) 국제노년학회 규정에 따른 노인개념

1951년 제2회 국제노년학회에서는 노인을 '인간의 노령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생리적, 심리적, 환경적 변화와 행동의 변화가 상호작용하는 복합형태의 과정에 있는 사람'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이 정의에 따르면 노인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는다. 그것은 환경변화에 적절히 적응하는 데 결함이 있는 사람, 자기통합 능력이 감퇴되어 가는 시기에 있는 사람, 생물학적 기관 및 조직 기능상 감퇴시기에 있는 사람, 생활 자체의 적응이 정신적으로 결손 되어 가고 있는 사람, 인체 조직 및 기능 저장 소모로 적응력이 감퇴되는 시기에 있는 사람 등이다. 이런 노인의 개념은 의학의 발달과 노인 인구 증가 및 건강상태의 증진, 사회적 참여가 확대되어 감에 따라 노인에 대한 개념은 점차 결손과 감퇴의 측면에서 긍정적인 차원까지 포함하는 개념으로 확장되고 있다.

(2) 자각 연령과 역연령에 따른 노인개념

노인에 대한 기준을 제시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생물학적 연령과 개인 자각 연령의 차이가 큰 경우가 많으므로 노인을 개념화한다는 것은 상당히 복잡하다. 노인들은 자신들의 노화에 대하여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평가를 한다. 달력상의 나이인 역연령에 따른 나이는 자각 연령에 따른 나이와 차이가 있다. 다시 말해 개인이 가지고 있는 주관적인 평가에 따라 노인의 개념이 달라지게 된다.

연령에 따른 노인 개념은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다.
대개 달력상 계산으로 60세 혹은 65세 이상을 노인이라고 규정하는 방식이다.

뉴가르텐(B. Neugarten)

미국 노인을 생물학적 연령과 사회적 건강의 특징에 기초하여 연령별로 구분하였는데, 여기에는 다음의 3가지로 구분된다.

초령 노인(the young old)

초령 노인은 55-64세로서 활력이 있으면서 유능한 그룹으로 은퇴를 하였거나 직장과 가정에 대한 시간적 투자를 줄인 노인들이다.
이들은 재정적으로 안정되어 있고, 상당한 교육을 받았으며, 시간을 의미 있게 활용하는 방법을 찾는다. 그러면서 사회의 중요한 자원으로 인식되며,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요구가 활발하다.

고령 노인(the old-old)

고령 노인은 진정한 노인으로서 65-74세로서 대부분의 퇴직자가 여기에 해당된다. 이들은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상실을 경험하고 있으며, 사회적 지지와 건강에 대한 서비스를 가장 필요로 하는 집단이다.

초고령 노인(the oldest-old)

초고령 노인은 75세 이상의 나이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신체적으로 노쇠하고 질병에 걸린 경우가 많으며 사회적 활동이 어렵다.
여기에 속한 노인들 대부분은 경제적인 곤란을 겪고 있으며, 가정적,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있다.
그러나 오래 살수록 인간은 각각 다르게 노화된다는 사실이 드러나기 때문에 생물학적 나이는 개인의 건강이나 사회적 능력 수준에 대한 충분한 지표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집단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전통적으로 만 60세를 회갑으로 지내고 있다.
그러나 노인복지법(1997)에서는 65세를 노인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생활보호법(1961)에서도 65세 이상의 노인을 보호노인으로 규정한다.



(3) 현대 사회에서의 노인개념

현대에 와서 사회변화에 따라 가족과 사회 속에서 노인의 역할 또한 크게 변화하였다. 여기에는 다음의 3가지를 들 수 있다. 먼저는 부부중심의 핵가족화로의 이동을 들 수 있다. 부부중심의 핵가족화로 가족 내 의사결정과 주체가 노인에서 부부로 옮겨갔고, 과학기술의 발달과 서구 종교의 확산은 가정의 제사기능을 축소시켜 주체로서의 노인의 역할에 축소를 초래하였다.

다음으로는 역할의 약화를 들 수 있다. 사회변화의 가속화와 현대 과학의 발달은 노인들의 전통에 근거한 지식과 기술, 그리고 그들의 인생 경험을 통한 지혜를 화석화시켜, 노인을 무식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쓸모없는 존재로 만들었다. 따라서 원로, 지혜의 보고, 전통의 전수자로서의 노인의 역할이 약화되었다.

끝으로 역할의 축소를 들 수 있다. 과거 가족의 기능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던 교육의 기능 전부가 학교 등 형식적 교육기관으로 이양됨에 따라 가정의 교육책임자로서의 노인의 역할이 축소되었다. 가족 중심의 산업구조가 공업 및 서비스업 위주의 산업구조로 변화함에 따라 가정의 경제권은 생산성이 우수한 젊은 층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따라서 노인들은 가정 내 경제권을 상실하고 경제적 자립 능력이 없어 젊은이들로부터 부양을 받는 존재로 전락되었다고 볼 수 있다.
 
2. 노인의 특성적 이해

노인상담은 이러한 노인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노인상담은 노인에 대한 특성 이해가 필수적이다. 오늘날 노인에게 가장 큰 변화는 수명의 연장이다. 노인의 평균수명은 사회 및 과학의 발전에 따라 연장된 것으로 노인의 문제는 이러한 수명과 관련이 있다. 그 때문에 자연히 노인에 대한 문제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사회의 중요한 정책을 수립해야할 처지에 있다. 예를 들어 사회복지대책은 물론, 의료적인 혜택까지도 고려해야할 정도에 이른 것이다.

이 외에도 노년기는 인생을 마감하는 시기이므로 심리적으로 허탈감이나 인생에 대한 허무감 때문에 불안정한 삶을 사는 때이다. 더욱이 노인에게는 각종 사고 발생이 갑작스럽게 일어나고 또 예기치 않게 죽음을 맞을 수 있다는 생각 등이 이런 불안을 야기하는 수가 많다. 그것은 노인의 평균수명과 관련되어 나타나는 심리적인 문제로 관심을 가져야 할 요소라는 점에서 노인상담에서는 노인의 신체 및 심리적인 것과 관련된 전반적인 생활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게 된다. 이러한 노인에 대한 이해를 위하여 신체적, 심리적 특성, 노인과 사회와해 증후군, 심리적 적응유형 등으로 구분하여 볼 수 있다.

1) 신체적 특성

노년기의 신체적 변화는 노인에게 외부적으로 나타나는 현저한 변화 중의 하나이다. 노인의 신체는 세포조직이 약화됨에 따라 힘과 근력이 현저히 약화되는 현상이 따른다. 더욱이 신체는 신경조직의 둔화에 따라 속도 및 지구력이 감퇴되며, 특히 신체내부의 조직기능이 약화되고 시력과 청각도 감퇴하는 현상을 보인다. 이로 인해 전체적으로 팔, 다리의 힘이 감소되는 특징이 나타나 신체적인 질병이 발생하기 쉽다. 이러한 노인의 신체적인 특성은 다음의 3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신체적 기능의 약화로서 노인

노인에게 신체적인 기능약화는 일차적인 문제이다. 노인의 신체적 기능약화는 노화현상이라 부른다. 노화현상이란 생물학적으로는 본래 원형질이 변하는 것에 따라 각 세포에 변화가 오는 것이다. 세포의 변화에 따라 노인은 인체의 조직이 점차적으로 퇴화하며 세포분열과 세포의 성장조직이 둔화되는 현상을 보인다. 이러한 원인은 전반적으로는 세포의 구조가 위축되어 회복과 소생력이 약화됨에 따라 신체가 전반적으로 약화 내지는 둔화 또는 느린 활동의 결과로 일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노화현상은 대개 40세를 넘으면서 흰머리와 더불어 서서히 노안의 증세로 인해 예민도가 감소하므로 시작된다. 노화현상은 시력의 예민도가 격감되는 현상에서 시작한다는 것이다. 또한 시력의 예민도는 일반적으로 70세에서 80세가 되면, 노인성 백내장으로 인하여 시력이 급격히 감소되는 현상을 보인다. 그에 반해 청각의 쇠퇴는 시력에 비해 다소 늦게 찾아오는 편이다. 청각은 대개 60세까지는 별 이상이 없으며 70세부터는 30% 정도, 80대에는 절반 이상의 노인들이 난청이 된다.

특히 노인에게 치아의 변화는 더 심각한 것으로 60대에서는 50%, 70대에서는 60%, 80대에서는 80% 이상의 노인들이 치아로 인한 고통에 시달리는 편이다. 치아상태가 좋지 않은 노인이라면 치아로 인해 소화가 잘 안될 뿐 아니라, 얼굴형도 노인답게 변하고 스스로 노쇠현상을 자각하게 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이러한 치아상태와 관련하여 소화력의 둔화를 가져오기 때문에 노화현상이 점차 발전된다.

물론 노인의 소화력이란 주로 타액이나 위액이 감소하게 됨에 따라 둔화가 일어나지만 치아상태와도 관련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 외에도 인체에는 세포기능이 중요한데 노인은 세포기능이 약화되어 혈액생산의 기능이 약화됨으로 빈혈증도 나타난다. 그 결과로 신경이나 근육의 반응하는 시간이 길어져서 행동이나 작업이 느려지고 세심한 일을 하기가 어려워진다. 또한 노인에게는 인체를 지탱해주는 뼈가 아교질이 점차 없어지고 석회질이 증가되어 조그만 충격에도 부러지기 쉽다. 노인이 교통사고를 당하면 젊은 사람보다 회복이 어려운 것은 석회질의 증가와 관계가 있다.

(2) 신체적 질병의 발생으로서 노인

노인에게 신체적인 질병의 발생은 이차적인 것이다. 노인의 건강에는 개인차가 있는 것이 사실이나 대체로 질병이 자주 발생되는 편이다. 그런 점에서 노인의 질병은 특성상 갑작스럽다기보다는 신체적인 종합능력이 격감됨에 따라 발생하는 자연스런 현상이다. 신체의 폐활량과 혈액활동의 약화로 산소호흡량이 낮아지게 되면, 뇌의 기능도 약화되어 신체 전반적으로 기능이 원활치 못하게 되는 결과이다. 그것은 노인질병은 회복이 느리므로 인하여 장기화되는 경우가 많고, 심한 경우는 거의 미동도 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그런 경우에는 가족이 돌보아야 하므로 집안사람의 불편함이 따르는 등 생활의 변수가 일어나게 되는데, 이는 노인의 질병은 미연에 대비하거나 방지하는 것이 최선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노인의 신체적인 질병과 관련하여 우리나라에서는 각종 의료해택을 제공하려고 노력하는 점도 보인다. 이런 점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고령화 속도를 기록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 대책이 미비한 것에 불과하다고 보아야 한다. 그것은 아직도 노인의 질병에 대한 대책이 그다지 체계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압축적인 고령화 현상은 다양한 노인문제를 유발하고 있다는 점에서다. 게다가 노인에게는 질병의 문제뿐 아니라 빈곤, 고독, 소외, 무위의 '4중고'는 현재 노인들의 질병과 함께 공통적으로 겪고 있는 문제로 이미 사회적인 이슈로 부각되었다.

2) 심리적 특성

노년기는 인생의 황혼을 바라보는 시기이다. 이 노년기에는 젊은 시절을 회고하면서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해 만족감과 기쁨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노인은 심리적으로 고독감, 노여움, 소외감, 외로움, 좌절감 등을 갖기 쉽다. 이에 따라 노년기의 감정은 의심과 불평, 과거지향적인 집착, 호기심, 고집 등이 강한 편이며, 소극적이 되는 것이 특징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심리적 특성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내향성과 수동성의 특성이다.
노인은 은퇴에 따라 심리적으로 내면화 되는 현상을 보인다. 이러한 내면화는 경제력의 상실과 신체적인 약화와도 관계된다. 즉 생활기반이 되는 직장에서 은퇴함으로써 생활력을 상실함으로 인해 외부지향적인 적극성이 감소하고 모든 문제를 내면적으로 깊이 숙고하여 처리하는 태도가 증가한다. 따라서 외부적 환경에 대하여 자신이 주도적으로 움직이는 능동적인 자세보다 타인의 도움을 받아 해결하려는 수동적인 자세로 변화된다.

둘째, 경직성과 조심성의 특성이다.
우리는 "노인이 되면 고집이 강해진다."는 말을 흔히 듣는다. 이것은 노인의 경직성을 두고 한 말로서 노년기를 특징하는 것 중에 가장 뚜렷한 것이다. 노인이 되면 새로운 모험이나 생활방법을 수용하고 시도하기를 자제하게 된다. 그 때문에 최근에 편리하고 효율적인 기구나 방법이 개발되었음에도 그 사용을 거부하고 옛날의 비효율적인 방법을 고집하거나 고수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심리는 노인의 소극성에 기초하는 것으로 조심성과도 관계되고 있다. 노화에 따른 신체적 약화는 노인으로 하여금 그만큼 주의력과 조심성을 요구하여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예전과 다르다는 것을 스스로 자각하게 만든다. 따라서 노인은 모든 사물에 대한 판단과 행동수행에 매우 조심스러워 하는 경향을 특징적으로 나타낸다.

셋째, 친근한 사물에의 애착심의 특성이다.
노인은 이제까지 사용하던 물건에 더욱 친숙감을 느낀다. 이러한 물건에 대한 친숙감은 심리적으로 외로움과 소외감, 고독감에 따른 것으로 이전의 생활방법과는 퇴행이나 폐쇄성에 근접하는 경향이다. 그것은 예전에 하던 놀이나 행동을 선호하고 오래 사용하던 물건에 더욱 애착심을 가짐으로서 심리적인 안정과 중요감을 채워가는 현상이다. 이는 노인의 과거지향심리가 표출되는 현상이기 때문에 새로운 물건보다는 헌 물건이, 새로운 사람보다는 옛사람을 더 좋아하게 된다. 대개 노인이 새로운 친구를 사귀기 어려운 것은 그런 옛날을 지향하는 심리의 한 단면이라고 볼 수 있다.

넷째, 성(性)역할 변화의 특성이다.
노인이 되면 성역할에 변화가 일어난다. 성역할이란 일종의 특성의 변화로서 남성은 여성화 되며, 여성은 남성화 되는 경향이다. 이에 따라 남자 노인은 여성적 특성인 친밀성, 양육동기, 동정심 등에서 증가를 보인다. 그 반면에 여자 노인은 남성적 특성인 공격성, 자아중심적인 경향, 권위주의적 동기 등에 증가를 보인다. 그것은 할아버지는 여자 같이 행동하는 것을 자각하고 할머니는 남자처럼 용감하게 행동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을 의미한다. 그 결과로 남자 노인은 여자 노인을 더 적극적으로 의지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남과 여를 구분한 것으로 노인 전체적으로는 약화되는 현상이 일어난다. 그 때문에 "노인이 되면 어린애 같다"는 말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다섯째, 우울증 경향의 특성이다.
노년기는 심리적으로 여러 상실감을 경험하게 된다. 직장 은퇴로 인한 직장상실, 경제적 수입의 감소로 인한 경제력 상실, 가정 경제권이나 사회적 역할의 상실, 신체적 건강 수준의 하락, 사회적 고립감, 가족관계의 변화 등이 노년기의 우울성향을 증가시킨다. 게다가 함께한 배우자가 사망한다면 극심한 슬픔으로 인한 우울증이 더욱 증가하게 된다. 노인의 우울성향은 근본적으로 격리와 상실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볼 수 있는데 노인은 많은 상실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런 상실의 경험은 노인으로 하여금 우울성향을 높이는 요소로 크게 작용하고 있으며, "노인이 되면 까닭 없이 슬퍼진다"는 것은 노인에게는 우울성향이 증가하기 쉬운 것을 의미한다.

여섯째, 인생의 정리와 유산을 남기려는 특성이다.
노년기는 발달적 측면에서 인생의 마지막 과정에 해당한다. 사람은 누구나 노년기에 이르면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회고하고 지나온 일생을 정리하려는 심리가 작용한다. 이러한 정리의 과정은 이제까지 살아 온 인생에 대하여 실패하고 좌절한 경험에 대하여도 담담한 자세로 임하게 되는 준비가 된다. 특히 특정한 일에 대하여 고착되었던 감정을 해소하고 다가오는 죽음을 평온한 마음으로 맞을 수 있는 심리적 준비이다. 이런 상황에 대한 자각은 노인으로 하여금 생명의 유한성을 인식케 됨으로 후세에 남길 유산을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자신이 이 세상에 다녀갔다는 흔적을 남기려는 심리를 유산을 통하여 표출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상에서 기술한 노인의 심리적 특징은 거의 부정적인 측면이 강하다.
에릭슨(E. H. Erikson)은 노인의 심리적인 변화에는 노인 특유의 전체 인생에 대한 절망감이 기인하는 것으로 본다. 이 절망감이란 선택할 기회상실에 기초하는 것으로 노인에게 있어서는 이미 흘러가 버린 생으로 다시 선택할 기회가 상실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결과로 노인은 자기혐오와 자기경멸이라는 심리적 현상이 지배적으로 나타난다. 물론 그런 현상의 근본적인 원인은 노인의 개인적 가치평가에 따라 좌우되는 측면도 있다. 그것은 노인 스스로 생각하는 삶의 기준치에 대한 자존감의 격감과 관련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심리적인 기저에는 개인적인 가치평가만이 아닌 사회적인 현상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노인이 되어 사회로부터 차선으로 후퇴하는 전반적인 분위기가 노인으로 하여금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가치평가를 내리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노인이 사회에서 역할을 상실하고 철수하는 문제가 노인에게 심리적 절망감을 갖게 하는 현상이다.

이러한 노인의 심리적 문제와 관련하여 가장 큰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죽음이라고 보아야 한다. 노인이 되면 무엇보다도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여 두려워하고 괴로워한다는 점에서다. 그것은 죽음의 문제는 노인이 갖는 공통적인 심리특성이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죽음의 문제를 앞두고 있는 노인들의 현실은 죽음을 더 심각하게 생각하며 그 수용에 대하여도 다양한 반응을 보이게 된다.

이 반응의 공통점은 노인이 죽음에 대하여 현실적이지 못한 양상을 갖는다는 점이다. 그것은 죽음을 전혀 생각하지 않으려는 노인, 죽음을 평온하게 사라지는 것으로 느끼는 노인, 영원한 삶을 시작하는 것으로 여기는 노인 등의 형태를 의미한다. 특히 가까운 이들의 죽음이나 부부의 사별을 경험한 노인은 더욱 죽음의 문제를 심각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고민한다. 그 때문에 상담은 노인과 죽음의 문제를 중요시하여 다루는데, 이는 노인에게는 특히 죽음에 대한 이해와 정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노인과 죽음(임종)의 문제는 특수한 노인상담의 주제에서 상세히 다루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노인상담의 기초 이해에 대하여 기술했다. 노인상담은 노인기에 만나는 문제를 상담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노인들은 대개 개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중요한 결정을 하는데 도움을 받기 위해서, 그들이 행복하지 못하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어려운 상황을 다루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 위기를 겪는 동안에 도움과 위로, 지지를 받기 위해서, 공감적이고 지지적인 누군가와 대화를 하기 위해서, 그들 스스로에 대해서 더 잘 알기 위해서 상담을 받는 편이라고 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몇 개의 부분으로 구분하여 다루어야 했다.

노인상담의 이해에서는 노인상담이 발달적인 관점에서 보면 매우 다른 특징이 있다고 했다. 그것은 다른 발달적인 상담, 즉 아동상담, 청소년상담, 부부상담과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런 점은 노인이 갖는 특성에 근거한다고 보아야 했는데, 인생의 후반기에 해당하는 노인은 발달의 과정에 있는 사람과는 특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노인상담의 정의, 노인의 개념 등으로 구분하여 다루었다.

노인의 특성 이해에서는 노인상담은 이러한 노인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노인상담은 노인에 대한 특성이해가 필수적이라고 했다. 오늘날 노인에게 가장 큰 변화는 생명수명의 연장인데, 노인의 평균수명은 사회 및 과학의 발전에 따라 연장된 것으로 노인의 문제는 이러한 수명과 관련이 있다. 그 때문에 자연히 노인에 대한 문제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사회의 중요한 정책을 수립해야할 처지에 있다. 이와 관련하여 신체적 특성, 심리적 특성 등으로 구분하여 다루었다.




노인(老人)

노인, 어르신, 시니어, 고령자…. 노년층을 가리키는 용어가 적지 않지만 딱 맞는 것이 마땅치 않아 어떤 것을 써야 할지 망설여질 때가 많다.

'노인'은 만 65세 이상 연령층을 가리키는 법적, 행정적인 용어다.
노인복지법, 노인복지관 등처럼 노년층을 가리키는 공식 용어다.
다만 신체적으로 늙은 사람이라는 부정적인 뜻을 담고 있는 데다 만 65세 이상 연령층도 신체·정신적으로 젊은 사람 못지않은 경우가 많아 이 용어가 적절하지 않다는 지적도 나온다.

그래서 나온 용어가 '어르신'이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해당 연령자를 직접 부를 때, 뭔가 혜택을 드릴 때 주로 어르신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시는 2012년 공모를 거쳐 노인이라는 용어를 어르신으로 바꾸기도 했다.
다만 "고령층을 너무 높이는 말이라 도리어 불편하다"는 반론이 있다.

'시니어'라는 용어도 많이 쓰인다.
활동적인 고령층을 가리키는 용어로 주로 쓰고 있다.
미국에서는 노인 대신 시니어 시티즌(senior citizen)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영어권에서는 연장자라는 뜻의 '엘더리(the elderly)'라는 말도 쓰인다.

김일순 골든에이지포럼 회장은 "나이가 많은 사람이라는 객관적인 뜻을 담은 '고령자'라는 용어가 가장 적절해 보인다"고 말했다.
우리나라에서도 고용노동부 등에서 연령만을 따질 때 쓰고 있는데, 대상이 55세 이상이다.

남상요 유한대 교수는 "일본의 법·제도에서는 노인 대신 고령자를 주로 쓰고 있다"고 했다.

이상희 복지부 노인정책과장은 "어떤 용어를 선택해도 모두 동의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어서 상황에 따라 노인, 어르신, 시니어, 고령자를 적절하게 쓰고 있다"며 "건강한 노인이 증가하면서 세계적으로 적절한 노인 호칭을 고민하게 됐다"고 말했다.



노인의 심리적 특성과 이해

인간은 누구나 늙기 마련이며, 나이가 듦에 따라 신체의 각 부분도 노쇠
현상을 일으켜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점차적으로 몸의 각 기능이 퇴화되고
성격도 변화되어 간다. 따라서 같은 말과 같은 상황 아래에서도 젊은이들에
비하여 노인들은 더 노여워하고 서러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노년기의 특성을 잘 알아두어 노인과 대화를 나눌때에는 주의하는
것이 좋겠다.


1. 노년기 심리적 특성의 변화

○ 우울증 경향의 증가

우울증적 경향은 노년기 전반에 걸쳐 증가하게 된다. 신체적 질병, 배우자의
죽음, 경제능력의 약화, 사회와 가족으로부터의 소외 및 고립, 일상생활에
대한 자기통제의 불가능, 지나온 세월에 대한 회한 등이 많은 원인이 되어
우울증이 증가하게 된다.

○ 내향성 및 수동성의 증가

노년기에는 자기자신의 사고(思考)나 감정에 의해서 사물을 판단하게 되는
경향이 많아지고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수동적 경향이
증가하게 된다.

○ 경직성의 증가

노년기에는 경직성이 증가되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가 어렵고 이로 인하여
노인의 학습능력과 문제해결 능력이 저하된다고 한다.

○ 조심성의 증가

일반적으로 노년기에는 조심성이 증가한다고 한다.

노년기에는 노인 스스로의 의지로서 정확성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조심성이
증가하게 되며, 시각, 청각 등의 감각능력 쇠퇴를 비롯한 신체적, 심리적
기능이 쇠퇴하여 부득이 조심스럽게 되기도 한다.

또한 노인의 경우 결정에 대한 자신감이 쇠퇴하기 때문에 확실성이 확인될
경우에만 결정이 용이하게 되기도 한다.

○ 의존성의 증가

노인은 신체적, 경제적 능력의 쇠퇴로 인하여 의존성이 증가하는 경향이
있으며 의존성의 유형은 네가지로 들 수 있다.

① 경제능력 약화에 따른 경제적 의존성

② 신체적 기능의 약화로 인한 신체적 의존성

③ 중추신경 조직의 퇴화로 인한 정신적 의존성

④ 생활에서 의미있는 중요한 사람을 잃으므로서 생기는 사회적 의존성과
심리 정서적인 의존성 등을 들 수있다.

○ 친근한 사물에 대한 애착심

노인이 될수록 오래 사용해 온 물건에 대한 애착심이 증가한다.

집, 가재도구, 사진, 골동품, 일용품 등 여러 가지 친숙한 물건들은
노인들로 하여금 지나온 과거를 회상하고 마음의 안락과 만족을 느끼게
하며 비록 자신의 주변 세상과 세월은 많이 변하였지만 자신과 자신의
주변은 변하지 않고 일정한 방향으로 유지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되어
노인에게는 마음의 안정을 갖게하는 좋은 역할을 한다.


2. 노년기의 본능적 욕구

○ 식 욕

노인은 젊은이보다 배고픔을 오래 참고 식욕이 약한편이므로 조금씩 자주
식사를 하도록 유도하고 소화가 잘 되는 음식을 권한다.

○ 성 욕

성욕 자체는 남녀불문하고 연령의 증가에 따라 약화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나이가 들어서도 이성노인과 어울리기를
좋아한다.

○ 활동욕

활동을 하고 싶은 욕구는 연령의 증가에 따라 다소 줄어드는 경향이
있으나 연령증가의 요인보다 신체의 에너지가 저하되므로 어떤 활동을
즉각적으로 하지 못하고 많이 망설이게 되나 한 두번 경험 후에는 활동하고
싶은 욕구를 느끼게 되어 자발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3. 노년기의 감각기능

○ 시 각

연령의 증가에 따라 수정체의 조절능력이 약해져서 근거리의 물체를 잘
구별하지 못하며 백내장이 생기는 경우가 많다.

또한 시신경의 기능이 부분적으로 저하되어 실명에 이르는 녹내장 질환
도 많이 나타나고, 수정체의 색체가 노란색으로 변하는 황화현상으로
노랑, 주황, 빨강색 계통은 잘 구분하지만 보라, 남색, 파랑색은 구분은
하나 어려움을 느끼게 되며, 동공의 지름이 줄어들게 되어 60세 노인은
20대 보다 1/3정도 밖에 빛을 받아들이지 못하여 아주 밝은 것을 좋아한다.

○ 청 각

나이가 많아짐에 따라 소리의 고저(시끄러움의 정도), 강도에 대한
감지능력은 큰 변화가 없다고 한다. 노화로 인한 노인성 난청은 50세
이후에 두드러지며 여성 보다는 남성이 더 많이 나타난다고 한다.

○ 미 각

맛에 대한 감지능력은 약화되지만, 70세 이전까지는 큰 변화가 없다고
하며 노인이 일반적으로 맛에 대한 감지능력이 약하므로 조미료를 더
많이 넣은 음식을 좋아하고 단맛 보다는 시큼한 음식을 더 좋아한다고 한다.

○ 후 각

연령증가에 따른 변화가 거의 없다고 한다.

○ 촉 각

신체 부위에 대한 접촉의 민감성은 대체로 45세경 까지는 증가하다가
그 이후는 현저히 감퇴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노인들은 접촉의
강도가 높아야 쉽게 접촉감을 느낄 수 있다.


4. 성공적인 노화를 위하여

성공적인 노화를 추구하는 인간은 생애를 마치기 까지 최대의 인생
만족을 누리는 것이 최대의 희망이며 과제이다. 노인들에게 만족한
삶이란 사회의 변화에 적응하면서 개인에게 주어진 발달과업을 성취함
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노인들이 자신의 노화를 긍정적으로 받아
들이고 노년기의 변화에 성공적으로 적응해 나가도록 하기 위해서는 노인
자신 뿐만아니라 사회와 국가 모두가 노인에 대한 다음과 같은 배려가
필요하다.

○ 노인에 대한 시각의 확립

노인을 더 이상 무능한 사람으로 보지말고 인생의 마지막 발달 단계에서
성숙한 일생을 정리하는 유용한 존재로 보고 노인도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의 단계에서 가정과 사회에서의 적절한 역할수행을 함으로써 당당하고
떳떳한 여생을 마칠 수 있도록 유도 해야겠다.

○ 노화과정의 적응 유형에 맞는 노인역할 제공

노인 개개인의 특성을 살려 시간을 소일하고 건강유지에도 도움이 되는
건전한 놀이나 노인에게 맞는 체육활동을 하는 것도 좋으며, 변화하는
갖가지 새로운 지식들이나 관심분야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종교
활동에의 참여, 자연보호, 청소년 지도, 기술전수 등의 자원봉사 활동을
통해 사회에도 이바지하며 보람도 찾을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 좋겠다.







책 소개

나이 80이 되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들
신간 《80세의 벽》에서 저자가 주장하는 것은 단순하지만 명확하다.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 한다’라는 강박관념이 오히려 80세의 벽을 높인다는 것이다. 과도한 강박과 욕심이 스스로를 압박하고 무리한 절제로 이끌어 결과적으로 행복하지도, 건강하지도 못한 삶을 만든다는 것이다. 그 한 가지 예로 저자는 많은 이들이 두려워하는 ‘암’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80세가 넘으면 누구나 몸속에 암이 있다. 이를 모르고 사는 사람도 많다. 필자가 오랫동안 근무했던 요쿠후카이 병원은 노인 전문 병원으로, 이곳에서는 해마다 100명가량의 유해를 해부하고 연구했다. 그 결과 몸속에 심각한 질병이 있음에도 생전에는 알지 못한 채 다른 질환으로 사망한 사례가 적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요컨대, 마지막까지 자각하지 못하는 질병도 있다는 뜻이다. 암도 그중 하나이다. 85세 이상의 유해를 부검해보면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서 암이 발견된다. 즉 80세가 넘으면 누구나 몸속에 암을 품고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암에 대한 공포를 지니고 암에 걸리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지만, 오히려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현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는 의미이다. 저자는 연이어서 다음과 같은 행동들이 80세의 벽을 높이고 있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펼친다.

ㆍ 사실은 먹고 싶지만 건강에 해롭다니까 참는다.
ㆍ 몸을 움직이기 힘든데 건강을 위해 무리하여 운동한다.
ㆍ 좋아하는 담배나 술을 건강에 해롭다고 삼간다.
ㆍ 하고 싶은 일이 있지만 ‘이 나이에’라며 참는다.
ㆍ 효과를 느끼지 못하면서도 ‘오래 살려는 마음’에 계속 약을 먹는다.

건강하게 오래 살겠다는 생각으로 하고 있는 이러한 일들이 80세가 넘은 사람이라면 전부 자제할 필요도, 무리할 필요도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백 세 인생’이라는 말이 도리어 80세의 벽을 높이고 있으며, 지금까지 열심히 살았으므로 80세 이후부터는 자기 즐거움을 위해 행동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간 대다수의 사람들이 ‘상식’이라고 여기며 실천해왔던 많은 일들이 실은 ‘장수’와 무관하거나 혹은 해악이 될 수도 있음을 경고한 저자의 말에, 세계 최고 장수국가 일본의 고령자들이 격하게 반응한 것이다.

◎ 출간 즉시 아마존 베스트셀러 종합 1위!
◎ 누적 판매량 50만 부 돌파! (2022년 12월 10일 현재)
◎ 노년의 삶에 대한 인식을 바꿔버린 2022년 최고의 화제작!

80세의 벽을 넘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20년을 만나는 법
신간 《80세의 벽》이 지닌 또 다른 미덕은 ‘행복한 장수법’에 대한 기존의 상식과 편견을 깨뜨리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벽을 넘기 위한 구체적이고 실체적인 실천법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저자는 80세를 앞두고 만나는 벽을 ‘의사·약·병원의 벽’ ‘노화의 벽’ ‘치매·인지장애의 벽’ 등으로 구분해서 다양한 사례를 통해 설명한 다음 마지막 4장에서는 ‘잔존 기능을 남기는 44가지 조언’을 소개하고 있다. 저자가 지금까지 만나온 수많은 고령자들 가운데 행복한 노후를 보내는 사람들로부터 배운 것으로, 결국에는 ‘노쇠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때’가 오면 자신에게 남아 있는 기능을 보존하고 연장할 수 있는 방법이다.
남성 9년, 여성 12년. 노인이 질병이나 인지장애로 몸져눕거나 누군가의 돌봄 속에서 살아가는 평균 기간이다. 누구도 원하지 않지만, 언젠가는 현실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름답고 행복한 노년의 해답은 노화를 받아들이고 할 수 있는 일을 소중히 하는 것에 있다. 누구나 맞닥뜨리게 되는 80세의 벽, 이 책을 통해 좀 더 쉽고 행복하게 넘어설 수 있기를 바란다.

저자 소개

저자(글) 와다 히데키
정신과의사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노인정신의학 및 임상심리학 전문의로 30여 년 동안 노인정신의학 분야에 종사하며 연구를 계속해오고 있다. 1960년 오사카 출생으로 도쿄대학 의학부를 졸업했다. 정신과 전문의로 도쿄대학 의학부 부속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조수로 근무했으며 미국 칼 메닝거 정신의학학교 국제연구원을 거쳐 현재 ‘와다 히데키 마음과 몸 클리닉’ 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노인 문제 외에도 심리학, 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서 텔레비전과 라디오 출연, 단행본 집필을 하며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감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연습》, 《혼자 행복해지는 연습》, 《인생이 심플해지는 고민의 기술》, 《어른을 위한 공부법》, 《인내하므로 노화한다》, 《노인성 우울증》 등이 있으며, 한국에서는 《70세가 노화의 갈림길》, 《60대와 70대 마음과 몸을 가다듬는 법》, 《이렇게 하니 운이 밀려들기 시작했습니다》, 《부모님도 나도 치매는 처음인데, 어떻게 하지?》, 《내 꿈은 놀면서 사는 것》 등 다수의 책이 출간되었다.




믿음(信)


성경적(聖經的) 신앙(信仰)

(도입 이야기)

믿음 없이 장로직을 20년 이상 하였다니.....

어떤 교우가 꿈에 새 예루살렘 성에 가 보게 되었습니다.
높은 시온 산꼭대기는 새 예루 성을 잘 지어 금강석과 홍보석, 녹보석 등 가지 각색의 보석으로 아름답게 장식한 성이었습니다.

“내가 정말 새 예루살렘 성에 가까이 왔구나!” 하며 한 걸음 두 걸음 점점 올라가 보니 큰문이 있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기록한 대로 큰 진주 하나로 된 문이었습니다. 

“야! 내가 새 예루살렘 성에 왔구나!”

문을 두드렸습니다. 두드리자 마자 곧 문이 열리더니 베드로가 걸어 나옵니다.

“저는 아무 교회에서 온 아무게 올시다”

베드로가 묻습니다.

“이 성(城)에 들어오려면 믿음의 표가 있어야 하는데 믿음의 표를 가지고 왔느냐?”

“네, 가져왔습니다.”

하며 주머니를 만져 보니 믿음의 표가 없었습니다.
옆주머니를 뒤져보니 거기도 없습니다.
아무리 뒤져도 믿음의 표는 없었습니다.

“있는 줄 알았는데 없어졌습니다”

장사꾼이었던 이분은 사정을 해 보았습니다.

“나에게 믿음의 표는 없지만 아무 교회에 몇 십 년 이상 다녔는데 좀 들어갈 수 없습니까?”

베드로가 하는 말이 “그것은 안되네, 아무리 오래 다녀도 소용없네. 믿음의 표가 있어야 하네” 라고 강하게 대답하자,

“그게 아니올시다, 사실은 제가 그 교회에서 장로 일을 20여 년이나 했습니다. 그래도 들어갈 수 없습니까?” 라고 사정을 하자,
베드로는 ‘장로 일을 20여 년이나 믿음 없이 했으면 어지간히 말썽꾸러기였겠구먼’ 하고는 문을 닫고 들어갔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사도 베드로는 성질이 급한 분입니다.
큰 소리를 내며 문을 “꽝” 닫는 소리에 깨어 보니 꿈이더랍니다.
그것이 꿈이었기에 다행이지 꿈이 아니었으면 어떻 할 뻔 했겠습니까?


한글개역성경을 인터넷으로 검색하려고 검색창에 "믿음"이란 단어를 입력하였습니다.

성경에서 믿음이란 단어가 얼마나 사용되었을까요?

구약 성경에서는 1회
신약 성경에서는 224회로 나타났습니다.

구약에서 믿음이란 단어가 사용된 성경은 "하박국서" 입니다.

하박국 2: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공동번역)
멋대로 설치지 마라. 나는 그런 사람을 옳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의로운 사람은 그의 신실함으로써 살리라.

(새번역)
마음이 한껏 부푼 교만한 자를 보아라. 그는 정직하지 못하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현대인의 성경)
악인은 마음이 교만하고 정직하지 못하므로 살아 남지 못할 것이나 의로운 사람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NIV
See, he is puffed up; his desires are not upright-- but the righteous will live by his faith

KJV
Behold, his soul which is lifted up is not upright in him: but the just shall live by his faith.

NASB
Behold, as for the proud one, His soul is not right within him; But the righteous will live by his faith.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두 가지 모습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겸손한 사람(humble person)

둘째는 정직한 사람(honest person)(truepenny)

겸손한 사람은 누구인가?


빌립보서 2: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겸손할 겸(謙) 겸손할 손(遜)

마태복음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따뜻할 온(溫)  부드러울 유(柔)


민수기 12: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현대인) 모세는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겸손한 사람이었다.
(새번역) 모세로 말하자면,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겸손한 사람이다.
(공동번역) 모세는 실상 매우 겸손한 사람이었다. 땅 위에 사는 사람 가운데 그만큼 겸손한 사람은 없었다.


광야(미드바르. midbâr) מִדְבָּר

전치사 민(min) מִן

-와 함께, -와 더불어

명사 다바르(dâbâr) דָּבָר 

말씀, 사건 

"광야는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역사(사건)를 경험하는 장소(시간)"


민수기 14:34

너희는 그 땅을 정탐한 날 수인
사십 일의 하루를 일 년으로 쳐서
그 사십 년간 너희의 죄악을 담당할지니
너희는 그제서야 내가 싫어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알리라. 



모세는 온유한 사람이었나?

출애굽기 32:16, 19
그 판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요 글자는 하나님이 쓰셔서 판에 새기신 것이더라.

진에 가까이 이르러 그 송아지와 그 춤 추는 것들을 보고 크게 노하여 손에서 그 판들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리니라.


민수기 20:8, 11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령하여 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이 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게 할지니라.

모세가 그의 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미디안(Midian) 광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인도했습니다.
10가지 재앙을 목격하고 홍해의 기적을 체험한 이들은 꿈에 그리던 땅을 향해 나아갑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열하루 길이면 갈 수 있는 쉬운 길로 이끌지 않았습니다.
무려 40년을 광야에서 지내게 합니다.
성경은 이를 민수기 14장에 나온 ‘40일간의 가나안 정탐’에 대한 부정적 반응 때문으로 설명합니다만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광야를 번역하면 ‘미드바르’입니다.
이는 ‘∼로부터’ ‘∼와 함께’란 의미의 전치사 ‘민’과 ‘말씀’ ‘사건’이란 의미의 ‘다바르’란 명사의 합성어입니다.

곧 광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역사(사건)를 체험하는 시간이자 장소’를 뜻하는 것입니다.

육안으로 볼 때 광야는 나무나 풀 등 생명이 자라기 힘든 역경의 장소로 보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눈으로 볼 때 광야는 가나안 입성 전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을 성장케 하는 곳입니다.

인생에 있어 누구나 한 번쯤 광야에서 보내는 시간이 있습니다.
지루하고 고통스럽게 느껴지겠지만 결코 무의미한 시간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다 구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혹시 광야 중에 있습니까?
하나님을 깊이 체험할 수 있는 귀한 시간으로 삼으시길 바랍니다.

12월 1일(수)

정직한 사람은 누구인가?

독일의 위대한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의 아버지가 말을 타고 집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숲속을 지나고 있을 때 갑자기 강도들이 나타났습니다.
소지품을 다 빼앗고는 “이게 전부냐?” 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칸트의 아버지는 “그게 전부요.”라고 말하고는 어서 그들에게서 벗어나고자 빠른 걸음으로 가는데 무언가 묵직한 것이 손에 닿았습니다.

옷 속을 살펴보니 금덩이가 꿰매어져 있었습니다.
그는 되돌아가 강도들에게 금덩이를 내보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까는 정신이 없어 이걸 옷 속에 넣어둔 걸 깜박했소.”

강도들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빼앗은 물건을 모두 되돌려주고 사라졌습니다.

현대 사회는 정직한 사람들을 바보 같다고 하지만, 가장 강한 힘은 바로 정직한 사람의 한마디입니다.


정직한 사람이 당장에는 손해를 볼 수 있고 다른 사람들보다 더 뒤쳐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정직한 길을 선택할 때는 반드시 그 결과는 믿음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광야는 사막과 비슷한 의미로 사용됐다.
'광야' 하면 제일 먼저 황량하고 척박한 땅, 음식과 물이 귀하고 자연환경도 열악한 불모의 사막을 생각하기 쉽다.  

광야는 일반적으로 죽음과 쇠퇴, 파멸의 땅을 의미한다. 광야에는 수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고, 기아와 갈증이 존재한다. 또 무서운 모래 바람, 위험한 뱀과 전갈 등이 인간의 생명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곳이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광야는 의미가 깊다.
그들은 종살이하던 이집트에서 나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광야에서 40년을 지냈다(민수 14,33). 이 광야 체험에 대한 기억은 이스라엘 역사 전체에 걸쳐 생생하게 살아 있다. 적의 공격, 부족한 물과 음식, 빗발치는 백성의 불평을 무릅쓰고 민족 지도자 모세는 백성을 이끌었다. 이스라엘 민족은 광야 생활을 통해 강한 공동체 의식을 지닐 수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는 시험과 시련의 장소이기도 했다(탈출 15,22-26). 동시에 하느님과의 친교 장소로서 그분의 보호와 은총을 체험하는 장소이기도 했다(탈출 16,32).

성경은 하느님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시고, 또 백성이 궁핍하거나 위기에 처했을 때 간청하는 소리를 듣고 은혜를 베풀었다는 사실을 다양한 방법으로 강조하고 있다. 그 은혜란 무엇보다 일용할 양식을 베풀어주는, 가장 기본적 욕구를 해소할 수 있는 것의 제공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기적들을 통해 하느님께서 현존하신다는 표징들을 보게 된다.

이처럼 구약에서 광야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셨던 장소이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광야는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과 함께해 주시는 곳으로 보호와 영적 쇄신의 장소가 되기도 한다(창세 16,7-13). 구약성경은 광야의 이미지를 사용해 하느님의 심판과 구원을 표현하기도 했다.  

예수님께서는 공적 직무를 시작하기 전에 광야에서 단식과 기도로 40일을 보내셨다(루카 4,1-13). 공적 직무를 수행하는 예수님께 광야는 기도의 장소로 아버지 하느님과 대화를 나누셨던 곳이었다(루카 4,42). 신약성경에서 광야는 고행이나 수련, 정화, 기도의 장소로 묘사되고 있다. 세례자 요한은 유다 광야에서 극기 생활을 하면서 회개와 세례를 촉구했다.  

광야는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이다(신명 32,10).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 사는 동안 수많은 고난을 겪고 불평을 반복하면서 마침내 하느님께서 함께하심을 깨달을 수 있었다. 광야는 인간이 자신의 힘만으로는 살 수 없음을 뼈저리게 가르쳐준 장소다.


성경에 광야의 이름이 일곱가지로 나와 있습니다.

미드바르, 아라바, 예쉬몬, 호르바,치야, 토후, 예레모스

이와같은 어원들을 영역하기를 사막(deser), 황야(wilderness)로 번갈아가며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광야는 사막이나 황야로만 이해될 수없습니다. 고고학지들은 이른바 광야는 완전히 경작되지 않았다거나, 사람들이 살지 않았던 곳이거나,그 안에는 목초지와 평원이 있고, 샘물과 가끔 비가 오고 거기에는 물을 끌어들여 마을도 세우고, 대상로를 유지할 수 있는 오아시스가 있는 곳으로밝혀줍니다. 성경에서 주로 언급되는 광야, (또는 사막)는 트랜스 요르단,고란고원,사해부근 ,그리고, 시나이 반도에 있는 광양들입니다. 이상 일곱개의 낱말에 나타나 있는 광야의 뜻을 제 나름대로 통합을 해보면은, 양을 몰고 다닐 수 있는 초장, 한정되었으나 시나이 사막과 같은곳, 씨 뿌리지 못하는 땅, 사람이 없는 땅,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 폭풍이일어나는 바다와 같은 광야, 회오리바람의 현장이요 무서운 땅 적군에 의해서 패배당한 한나라의 모습과 간이 황량한곳 폐허, 버려진 땅, 물이 없는땅 황무지 사막처럼 텅비고 길이 없는 지역, 광야, 사막, 외로운 곳으로 종합해 볼 수 있습니다. 제가 그곳을 여행하며, 경험한 바로는 낮에는 너무 덥고 밤에는 너무 춥고, 먹고마실것이 없는 곳, 생존의 위협을 시시각각으로 느끼게 되는 저주받은 공포의 땅으로 느꼈습니다. 나무 그늘이 없어 비탈진 산그늘에서 까마귀떼가 쉬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 모진 엉겅퀴들이 자라며, 드문드문 멀리 싯딤나무들이 서있는 황량한 곳이었습니다. 아직도 베드윈 족속들이 양을 치며 사는 땅, 온통 산은 구리빛으로 변하고, 흙이 물을 빨아들일 수 없는 죽은 땅으로 사람 살곳이 못되는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밑으로 수로가 있어 중간 중간 오아시스를 형성하고 있는 신비의 땅이었습니다.

 

2. 본 론

 

그런데 이스랑엘 백성들의 역사와 신앙과 신학은 광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모세의 소명이 그렇고 엘리야의 생애가 그러했으며, 세례요한의 생야가 광야로부터 시작되었고, 사도바울의 생야가 그렇고, 오늘 본문을 통해서몰 때 예수님의 공생애 역시 광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볼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렇게 살기 힘든 광야로 당신의 백성들을 인도하셨는가?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를 광야로부터 시작하셨는가?

 

첫째,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훈련하신 것입니다.

 

히브리인들은 세계를 떠돌면서 또 이집트에서 종살이 하면서 많은 우상을 보았고, 또 그 우상을 섬기기도 했습니다. 그 우상 가운데는 짐승의 상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인간을 신으로 섬기는 경험도 가졌습니다. 정착된 농경사회 속에서는 이것이 가능한 일일런지 모르겠으나, 광야생활에서는 이것이 불가능한인위적인 잘못된 종교행위임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광양의 짐승은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광야에서의 인간은 너무도 위약한 존재였습니다. 해갈이나 기근, 더위와 추위등 인간의 근본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방을 둘러보았습니다. 산도, 들도 그들의 안전을 도모해주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여오와 하나님만을 찾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두번째,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도록 훈련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시107:35에 "또 광야를 변하여 못이 되게 하시며 마른땅으로 샘물이 되게 하시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물을 내시고, 식량을 공급하시며,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호할 수 있는 능력은 하나님의 능력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훈련을 목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이끄신 것이었습니다.

 

세번째, 광야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나타내 보이시는 곳이었습니다.

 

왕상 19:4-7에 보면은 바알 선지자 450인을 죽인 엘리야를 이세벧이 죽이려하자 엘리야는 유다 광야로 도망칩니다. 거기 로뎀나무 아래 앉아 죽기를 구하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 시내산으로 인도하시고 거기서 다시 엘리야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엘리야를 다마스커스로 보내어 아람왕국과 이스라엘 왕국의 역사를 개혁하도록 하십니다. 이와같이 광야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만나주시는 처소였습니다.

 

네번째, 광야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묵상하고 기도하기 위해 찾아가는 외로운 곳이었습니다.

 

히 11:38에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박해 받던 하나님의 사람들이 외로운 광야로 나가 묵상하며 기도했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요한에게 세례받고 하나님으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공인을 받은 후 인류 구속의 역사를 시작하시기 전에 광야로 나가 40일 금식하며 기도하셨습니다. 광야는 하나님의 자녀가 기도하는 처소였습니다.

 

3.결 론

 

광야는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만을 신뢰할 수 있도록 연단하는 하나님의 학교였습니다. 광야는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케 하는 역사적인 수련장이었습니다. 광야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외롭게 찾아가 묵상하며 기도하는 기도처였습니다. 이러한 광야생활에서 시험을 물리쳤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은총을 덧입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광야의 세 가지 시험을 물리치심으로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입증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은 첫째 경제적인 시험이요, 둘째는 명예와 결부된 종교적인 시험이며, 셋째는 세상과 타협하며 살아가야할 정치적인 시험이었습니다. 우리도 광야 같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만을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절대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현현을 체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정치, 경제, 종교적인 온갖 시험을 물리치므로 크리스천으로서 인정받는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출처: https://koinedata.tistory.com/1139 [코이네자료실]





광야의 의미(신명기 8:1-6)

 

1. 광야란?

성경에는 광야라는 표현이 많이 나옵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양에도 광야 같은 세상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을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지냈습니다. 여기서 광야라는 말은 에레모스(e[rhmo")로 고독한, 황량한, 외로운 등등의 의미입니다. 더 나아가 사람이 살지 않는 땅을 말합니다. 한 마디로 광야란 외롭고 쓸쓸한 곳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하시면서 시험을 받으십니다. 광야는 사람이 살기 힘들고 어려운 척박한 땅을 지칭하지만 성경에서 광야는 늘 시련과 시험, 훈련의 장을 지칭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요한계시록 12장에는 그 광야에 대한 결정적인 힌트가 나옵니다.

6절에서는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천이백육십일 동안 그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에 있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천이백육십 일은 거룩한 성이 짓밟힘을 당하는 기간(11:2절), 두 증인이 증인의 사역을 하는 기간(11:3절), 그리고 짐승이 통치하는 기간(13:5절)과 같습니다. 마흔 두 달과 천이백육십일은 같은 기간에 대한 다른 느낌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광야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보후 가운데 양육되고 성장하고 훈련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광야란 교회가 부대끼며 훈련 받고 성장하는 곳입니다. 적그리스도의 세력들이 활개를 치며 교회를 공격하는 곳입니다. 치열한 전쟁이 수행되는 곳입니다. 반대로 광야는 양육 받는 곳이기도 합니다. 치열한 훈련은 곧 좋은 그리스도인으로 훈련된다는 의미도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성경에서 광야는 교회가 존재하는 자리입니다. 교회가 제 몫을 감당하면서 치열하게 싸우고 성장해야 하는 곳이 바로 광야라는 것입니다. 치열한 곳입니다. 어려운 곳입니다. 무엇하나 풍족하지 못한 곳입니다.

그런 광야의 내용적인 의미에 대해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만큼 시원하게 설명해 주는 곳도 없습니다. 문제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왜 교회의 자리를 광야에 두는가에 있습니다.

어쩌면 이 질문은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자리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일 수 있습니다. 왜 내가 살아가는 삶의 자리가 이렇게 척박하고 힘든가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함께 본문을 보시면서 광야에서 지켜야 할 원칙과 광야에서 기억해야 할 것, 그리고 광야의 참된 의미를 배울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2. 광야에서 지켜야 할 원칙

언젠가 잘 모르는 곳에 대한 기독 사진가 협회 회원들과 출사를 간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인도자가 길을 헤매는 듯이 보였습니다. 여긴가 저긴가 하는데 해는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빛을 향해서 무작정 달렸습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물어 찾아간 곳은 엉뚱한 곳이었습니다. 결국 고생고생해서 다시 길을 올라 처음 자리로 갔습니다. 그리고 인도자의 안내를 받아 겨우 포인트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기본적으로 생각해야 할 것은 광야는 거칠고 험한 곳입니다. 따라서 인도자가 주는 매뉴얼을 잘 숙지하고 인도자에게서 눈을 떼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칫 실족하고 넘어지며 상처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절대적으로 지켜야할 원칙은 말씀을 잘 따르는 것입니다.

1절 말씀입니다.

“내가 오늘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여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

사실 본문의 구조는 1절과 6절이 봉투를 형성하고 그 안에 광야의 의미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1절과 6절은 광야에서 살아남는 법이며 2-5절은 광의 의미가 될 것입니다.

광야에서 교회가 생존하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 행하는 것입니다. 그게 광야에서 길을 잃지 않고 승리하는 비결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광야를 밝히는 빛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발의 등이요 빛입니다. 우리가 실족하지 않도록 우리를 인도해 주는 말씀인 것입니다. 따라서 광야에서 교회가 길을 잃지 않고 생존하고 승리하는 비결은 절대적으로 우리의 목자이신 주님을 신뢰하고 따르는 일입니다.

저는 과거 내비게이션이 없을 때는 가다가 수 없이 길을 묻고 또 물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내비게이션이 생겨서 내비게이션을 정말 잘 보고 따라갑니다. 그런데 가끔은 고속도로 중심으로, 또 가끔은 엉뚱한 길을 돌게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진정한 광야의 내비게이션이십니다. 주님이 인도하시면 잘못된 길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길 끝에는 항상 주님이 계십니다. 그러므로 매일 주의 말씀이라는 내비게이션을 켜고 잘 따라가야 합니다. 딤후 3:16절에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고 말씀합니다. 광야에서 길을 잃지 않고 교회가 올바르게 세워져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주의 말씀을 매일 묵상하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6절입니다. “그의 명령을 지켜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를 경외할지니라.”그럽니다.

그러니까 광야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면 주님의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여러분! 아십니까? 제자라는 말이 바로 따라가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주님이 가신 발자취를 그대로 따라가는 사람이 바로 제자입니다. 그런 것처럼 광야 교회는 주님의 명령을 그대로 따라가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길을 잃지 않고 옳은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그의 길을 따라가는 것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야 할 때가 반드시 나오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굳게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으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넉넉히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광야 교회는 치열한 싸움이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샬롬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고 그의 길을 따라가는 교회, 그런 광야 교회가 광야에서 살아남을 수 있고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광야의 의미(2-5절)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교회를 광야에 두시는 것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40년을 지나올 때 그 교회 이름을 광야교회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세상도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광야입니다. 하나님은 왜 교회의 자리를 광야라고 부르시는 것입니까? 왜 그렇게 치열한 싸움이 있고 길을 잃을 가능성이 많고 생존의 위협을 받는 곳에 두시는 것일까요?

 

1) 마음이 어떤지

우선 우리는 2절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를 기억하라고 도전합니다.

신8:1-10:11절은 신6:1-11:25절이라는 모세의 두 번째 설교 속에 포함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이 부분은 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야 하고, 우상을 멀리해야 하는가를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그 중에서도 (신8:1-10:11)은 광야생활의 경험을 말하면서 계속 '기억하라'고 말씀합니다.

8:2-10절은 너로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고 말씀합니다.

8:11-20절은 가나안의 풍요로운 삶에서도 하나님을 잊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9:1-6절은 하나님이 네게 땅을 주신 까닭을 알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9:7-10:11절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격노케 한 일을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는 교회가 서 있는 자리인 훈련의 광야에서 무엇을 기억하라고 말씀합니까? 우선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광야 길을 걷게 하셨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말씀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광야는 하나님이 걷게 하신 것입니다. 척박하고, 물이 귀하고 먹을 것이 귀한 광야입니다. 끊임없이 이동해야 하기 때문에 무엇도 많이 가질 수 없는 광야입니다. 그런 광야를 하나님이 걷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광야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분명히 그 광야에는 하나님의 의도가 있고 은혜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옳게 이해하고 배우는 것이 오늘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요? 광야의 의미 첫 번째는 마음이 어떠한지를 알게 하시는 훈련이었다고 말씀하십니다. 특히 이 광야는 낮추심의 광야였습니다. 그 하나님의 낮추심 앞에 마음이 어떠한지를 시험하는 것이 광야입니다. 즉 광야는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는 훈련장입니다. 하나님의 낮추심은 광야라는 혹독한 환경과 배고픔이라는 어려움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런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훈련시키시기 위한 광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모르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그들을 낮추시고 또 낮추십니다. 그런 환경에서 하나님만 바라고 신뢰하는 훈련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 훈련이 40년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한 광야입니다. 그런 광야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훈련장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광야는 하나님의 낮추심 앞에 겸손하게 순종하는 훈련장입니다.

 

2) 광야는 염려의 세계관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훈련장

그들을 낮추시고 주리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일용할 양식인 만나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만나는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입니다. 그 이전에도 없었고 그 이후에도 없었던 광야에서만 먹었던 양식입니다. 그러니까 만나는 자연적 소산물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늘에서 내린 만나를 보고 “이것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출16:15).

그리고 그 때부터 40년 동안 매일 아침 만나를 거두어 일용할 양식으로 지족하고 자족하는 훈련을 하게 하십니다. 안식일에는 이틀 분을 거두어 먹을 수 있게 하셔서 그침의 훈련도 겸하게 하십니다. 그 40년 동안 만나를 통해 하나님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는 염려의 세계관을 하나님이 먹이시고 입히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4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 40년 동안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않았다고 말씀합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설마 한 벌 의복이 해어지지 않았다고 읽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먹이시고 입히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그들을 낮추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일용할 양식을 먹이시고 입히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훈련장이었습니다. 광야는 그렇게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아가야 하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입히신다는 믿음으로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광야는 그 자체로 척박하고 온갖 공경들에 노출된 곳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을 낮추신 것은 거기서 하나님의 보호와 임재, 먹이시고 입히시는 것을 경험하고, 또 경험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광야는 내일 일에 대한 염려의 세계관이 존재할 수 없는 곳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일 하나님이 만나를 주셔야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전적으로 내일 주실 만나에 의지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광야는 하나님만 의지하는 훈련장이면서 염려의 세계관을 내려놓고 일용할 양식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훈련장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용할 양식의 훈련에 대해 하나님은 전혀 다른 해석을 하십니다. 뭐라고 합니까? “사람이 떡으로 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뒷날 이 말씀을 누가 인용합니까? 예수께서 마4:4절에서 인용합니다. 이 말씀은 40일을 금식하고 주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시험하는 마귀의 시험에 대해 주님이 답변하신 것입니다. 이 돌들을 들어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유혹이었습니다. 그 유혹에 대해 하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고 대답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만나는 단순히 일용할 양식을 넘어서 성도가 매일 먹어야 하는 생명의 양식이라는 의미가 되었습니다. 만나를 통해 하나님은 단순히 떡으로만 사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생명의 떡을 먹게 하시는 훈련장이었다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만나와 함께 하나님의 임재와 역사 앞에 서야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만나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생명의 양식과 만나야 했습니다. 따라서 만나는 단순히 먹거리 이상의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그 만나를 매일 먹는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는 깊은 가르침이 있었던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도 매일 먹어야 삽니다. 광야는 그것을 가르치는 훈련장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매일 생명의 양식을 먹어야 합니다. 만나는 우리가 떡으로만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훈련의 광야에는 징계의 성격도 분명히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기 때문에, 아들이기 때문에 징계하신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징계함같이 징계하는 줄 마음에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징계라는 말은 '야사르'(rs'y:)는 '고치다' 흑은 '교육하다' 혹은 훈련시킨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따라서 징계는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들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아버지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즉 교회의 자리가 광야인 것은 믿음의 훈련장이라는 의미입니다.

 

4. 그러면 우리는

사랑하는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는 오늘 주님 다시 오시기까지 이 땅에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로 존재해야 하는 우리의 광야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출애굽기, 신명기의 광야는 훈련의 광야요 거친 광야였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의 광야는 오히려 흘러 떠내려가는 광야입니다. 요한계시록의 교회는 광야에서 사탄과 치열한 싸움을 싸워야 하는 교회였습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교회를 흘러 떠내려가게 하고 미혹하여 거룩한 교회로 존재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시대의 광야가 거칠고 험난한 광야가 아니라 너무 편하고 안락해서 흘러 떠내려가는 광야라고 느낍니다. 위험은 이 광야가 훨씬 더 위험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묵상하고 있는 사사기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거친 광야를 지나 안락한 가나안에 들어왔을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대적들을 남겨두시고 믿음으로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믿음으로 그들을 온전히 내 쫓고 말씀에 순종해서 타협하고 흘러 떠내려가지 않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행동합니까? 좀 편안해 지면 여지없이 흘러 떠내려갑니다.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고 하나님을 떠납니다. 자녀들을 이방 사람들에게 시집보내고 장가보냅니다. 치열한 광야에서는 그래도 원방과 불평을 하고 징계를 당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흘러 떠내려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평안함의 광야에서는 타협과 변질이 난무합니다. 훨씬 더 치명적인 위험, 치명적인 독이 난무하는 광야가 바로 가나안이라는 광야입니다. 영원히 머물 곳이 아닙니다. 광야는 지나가는 곳입니다. 이 땅이 영원하지 않고 우리네 인생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영원할 것처럼 주저앉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광야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은 광야의 의미를 분명히 알라고 말씀하십니다.

광야에서는 분명한 목적지를 설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목적지가 분명하더라도 길을 잃기 쉬운 곳이 광야입니다. 그래서 진리의 말씀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광야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우리를 안내하는 유일한 빛이 바로 진리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만나는 생명의 떡으로 오신 주님을 바라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러나 광야는 훈련장입니다. 어려움이 많습니다. 유혹도 많습니다. 그러기에 광야는 믿음이 있어야 걸어갈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지쳐서, 실족해서 걸어갈 수 없는 길입니다. 어떤 믿음입니까? 이 길 끝에는 우리 주님이 계시다는 믿음입니다. 우리를 그 품에 안아 주실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영원한 천국으로 가는 길이라는 믿음입니다.

거친 광야보다 더 어려운 광야가 라오디게아 교회가 그리 했던 것처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느끼는 영적 게으름의 광야입니다. 이 광야는 타협과 변질이 난무합니다. 샛길이 옳은 길로 둔갑하는 곳입니다. 말씀 대신 다른 것들이 신앙생활을 채우는 곳입니다. 거친 광야보다 훨씬 치명적인 유혹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출애굽의 광야보다 계시록의 광야가 훨씬 더 어렵습니다. 그래서 매일 말씀으로 인도받지 못하면 이 광야에서는 언제 흘러 떠내려갔는지 내가 도대체 어디에 서 있는지 조차도 알 수 없습니다.

이 광야에서 우리는 거룩한 교회로 존재하고 세상에 영향력을 나누어 주는 교회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지금 광야에서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올바른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습니까? 광야는 편안하고 영원히 머물 곳이 아닙니다. 그런데 영원할 것처럼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다시 한 번 광야의 의미를 기억하시면서 광야의 삶을 회복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이 광야를 잘 살아갈 방법은 없습니다. 그것을 꼭 기억하셔서 우리 주님의 말씀으로 인도받아 영원한 천국의 삶을 이 땅에서 맛보고 영원한 천국을 상속 받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도입 이야기)

생각을 바꾸라

어떤 한 사람이 길을 가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을 원망했다.
이 사람은 직장을 구하러 다니는 중이었다.
집에는 며칠 동안 직장을 못 얻어서 처자식들이 굶고 앉았다.

“하나님, 이럴 수가 있습니까?’

원망하면서 직장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본래 이 사람은 슈퍼마켓을 경영했는데 동업하는 사람에게 사기를 당해서 빚더미에 올라앉은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 원망을 하며 길을 가다가 휠체어를 타고 있는 한 사람을 만나면서 생각이 달라지게 되었다.
휠체어에 앉은 사람이“Good morning!”하고 인사를 하면서 “오늘 날씨가 참 좋지요?”하고 말을 걸어왔다.
그런데 휠체어에 앉아있는 사람을 자세히 보니까 두발이 없었다.
그 순간 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아니, 발이 없어 휠체어에 앉은 분이 날씨 좋은 건 또 뭐요. 저 사람도 날씨 좋은 날이 있나?’

그리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불만에 가득한 자기 모습이 보였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서 화장실에 있는 큰 거울에 써 붙였다.

“구두가 없어서 불편하거든 구두를 신을 필요가 없는 사람을 생각하라!”

그 순간 생각이 바뀐 것이다.

‘나는 행복하다. 나는 넉넉하다.’

그는 새로운 일을 개척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

(전개 이야기)

믿음이란 무엇일까?

한글개역성경을 인터넷으로 검색하려고 검색창에 "믿음"이란 단어를 입력하였습니다.

성경에서 믿음이란 단어가 얼마나 사용되었을까요?

구약 성경에서는 1회
신약 성경에서는 224회로 나타났습니다.

구약에서 믿음이란 단어가 사용된 성경은 "하박국서" 입니다.

하박국 2: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공동번역)
멋대로 설치지 마라. 나는 그런 사람을 옳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의로운 사람은 그의 신실함으로써 살리라.

(새번역)
마음이 한껏 부푼 교만한 자를 보아라. 그는 정직하지 못하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현대인의 성경)
악인은 마음이 교만하고 정직하지 못하므로 살아 남지 못할 것이나 의로운 사람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NIV
See, he is puffed up; his desires are not upright-- but the righteous will live by his faith

KJV
Behold, his soul which is lifted up is not upright in him: but the just shall live by his faith.

NASB
Behold, as for the proud one, His soul is not right within him; But the righteous will live by his faith.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두 가지 모습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겸손한 사람(humble person)

둘째는 정직한 사람(honest person)(truepenny)

겸손한 사람은 누구인가?


민수기 12: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정직한 사람은 누구인가?

사무엘하 12:13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대답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우리가 받은 사랑이란 사실상 내가 모를 때 받은 것입니다.
가장 큰 사랑은 4살까지 받는다고 합니다.
갓 태어난 핏덩이를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누이고 그 많은 고생을 하면서 애지 중지 키우지 않습니까?
그런데 교육학에서 보면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4살 전의 일은 까맣게 기억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갓난아이 때에 우유를 먹었습니까?
엄마의 모유를 먹었습니까?
아마 그것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4살 이후에도 모유나 우유를 먹었던 사람일 겁니다.
그 소중한 사랑은 다 몰라요.
모르게 되어 있어요.
이것이야말로 믿음으로만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어머니가 나를 먹였다더라, 저 분이 나를 도왔다더라, 그것은 믿음으로 알게 된 것이지 결코 피부로 기억으로 알게 되어 있지 않아요.

내가 모르는 사이에 받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엄청난 사랑입니다.
이 엄청난 사랑을 내가 지금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라도 그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모를 때, 알지 못할 때에 사랑을 받았다고 성경은 말씀하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시집 갈 때 새색시를 가마에 태우고 갔습니다.
가마꾼이 색시를 태우고 앞에서 가마꾼이 메고 가고 뒷사람이 또 메고 갑니다.
이런 경우 앞에서 가는 사람은 앞을 보며 가지만 뒤에서 따라가는 사람은 아무 것도 안 보입니다.
앞에는 가마가 꽉 막았는데 이걸 붙들고 갑니다.

옛날 어른들은 이것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앞에 있는 가마꾼은 소망이요, 뒤에서 따라가는 가마꾼은 믿음이요, 가운데 있는 색시는 사랑이다.
그래서 신랑집에 도착하면 소망과 믿음의 두 가마꾼은 물러가고 가마안에서 신부가 나와 신랑에게 간다.
그러므로 사랑이 영원한 것이다.

 

사람은 확실히 사랑으로 삽니다. 죽을 사람도 사랑으로 인 해서 살아납니다.

어찌 생각하면 사랑 없이 되는 일은 다 죽음으로 치닫습니다. 오직 사랑이 있어서 살고, 사랑이 있어서 의미가 있고, 사랑이 있어서 소생하는 힘을 얻는 것이고 사랑이 있어서 병도 치유되 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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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믿음'은 심각하게 오해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믿음을 지식 (episteme, 에피스테메)과 동일시합니다.
그래서 성경에 대한 정보를 쌓고, 교회사와 신학에 대한 체계적인 지식을 쌓으면 믿음이 생성되고 자란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지식, 새로운 정보를 찾아 다닙니다.
그러다가 정작 가져야 할 바르고 참된 믿음을 가지지 못한 채 지식과 정보의 홍수 속에서 자신을 잃어 버리고, 끊임없이 영적으로 방황한다.

믿음이 지식을 기반으로 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지식을 추구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믿음과 지식을 동일시하는 것은 철저한 오류이다.

어떤 사람들은 믿음을 신비한 경험이나 체험과 동일시 한다.
그래서 종교적인 체험이나 신비한 체험을 많이 할수록 믿음이 좋아진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들은 방언이나 신유나 축사와 같은 신비한 체험을 극단적으로 추구한다.
물론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이 그 믿음에 기초한 어떤 신앙적 체험과 경험을 할 수 있지만, 종교적이고 신비한 경험을 믿음과 동일시하는 것 역시 철저한 오류이다.

어떤 사람들은 믿음이란 무조건 믿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런 질문이나 의문도 없이 그냥 덮어 놓고 성경을 믿고, 지도자의 가르침을 그대로 믿고, 맹목적으로 순종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서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은 이성적으로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머리와 이성으로 이해가 안되더라도 그냥 맹목적으로 믿고 따라가면 된다고 생각한다.
소위 따지지 않는 믿음 즉 맹신이  큰 미덕으로 여겨진다.

위에서 언급된 믿음에 대한 세 가지 태도는 현재 한국교회와 이민교회에 전반적으로 널리 퍼져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바른 믿음의 본질은 위의 세 가지와 전혀 다르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하다.
그렇다면 성경은 믿음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가?

첫째, 인격적인 신뢰 (personal trust)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한 인격이 다른 인격을 신뢰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신뢰란 믿어 주는 것(believing in), 그 사람이 믿을만한(trustworthy)분임을 인정하고, 그 사람에게 의지하고(depending on), 의존하는(relying on) 것을 뜻한다.
믿음의 대상에게 기대고 의탁하고, 자신을 맡기는 것(entrusting)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예수님의 인격과 약속을 신뢰하는 것을 뜻한다. 
예수님의 선한 의도와 능력을 믿고, 그 분에게 우리의 삶과 영원한 운명을 의탁하는 것이다.
예수님만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기 원하시며,  또한 구원할 수 있는 분이시고, 동시에 예수님 만이 우리의 참된 주님이시요 임금이심을 인정하고, 그 분께 우리의 모든 것을 맡기고, 의지하고, 의존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예수님 앞에 우리의 무릎을 꿇고, 우리의 주권을 양도하는 것 즉 주님의 주되심 (lordship)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이 말하는 바른 믿음 즉  구원에 이르게 하는 참된 믿음이 인격적인 신뢰라는 말은 어떤 명제적인 진리나 교리가 우리 믿음의 간접적인 대상이긴 해도, 직접적인 대상이 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성경에 기초하여 설명되고 정리된 명제적인 진리나 교리가 옳다고 믿는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는 것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참된 믿음이 아니다. 그 명제적 진리나 교리가 지시하는 살아있는 인격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그 분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 참된 믿음이다. 우리는 어떤 명제적 진리나 교리가 옳다고 믿기 때문에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 명제적 진리와 교리가 증거하고 지시하는 살아있는 인격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함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다.

둘째, 바른 지식

바른 지식과 함께 시작하고, 바른 지식에 기초하며, 바른 지식을 향하여 나아간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때 그것은 반드시 예수님에 대한 바른 지식과 함께 시작한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자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아는 지식이 바른 믿음의 기초가 된다.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셨고, 그 죄인을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다시 살아나셨다는 복음에 대한 바른 지식과 함께 믿음은 시작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복음진리에 대한 바른 지식이 없이는 믿음은 시작조차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참된 믿음이란 맹목적인 것이 아니다. 의심도 질문도 제기하지 못한 채 무조건 믿는 것이 아니다. 아무런 지성적 근거도 없이 막무가내로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바른 믿음은 그 믿음의 대상에 대한 바른 지식에 기초하며, 그 지식과 함께 시작된다. 그래서 때로는 의심이 일어날 때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면서 믿음이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성경은 한번도 우리에게 "말도 안되고, 이해도 안되는 것을 무조건 믿으라"고 명령한 적이 없다. 도리어 질문과 의심이 섞인 약한 믿음이 이해를 추구하는 과정을 통해서 더 강한 믿음이 되도록 도움을 요청하라고 권면한다 (롬 1:17). 중세 신학자 안셈 (Anselm of Canterbury, 1033/4-1109) 이 주장한 것처럼 참된 믿음은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 (fides quaerens Iintellectum, faith seeking understanding)"일 수 밖에 없다.

셋째, 신앙적 경험과 체험

우리가 에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님과 구원자로 믿고 의지할 때, 그 믿음은 반드시 우리 삶에 구체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우리 삶에 실재적인 변화를 가져다 준다. 믿음이 가진 그 영향력으로 인하여 우리는 또한 우리 삶 속에서 다양한 체험을 하게 된다.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의 경험, 기도가 응답되는 체험, 범사에 감사함으로 기쁨이 우리 삶을 지배하는 체험, 용서가 되지 않던 다른 사람들을 긍휼한 마음으로 용서하게 되는 경험, 사랑과 무관했던 우리 마음이 사랑으로 가득차고, 그 사랑이 우리 삶을 변화시켜가는 경험, 때로는 신비한 은사에 대한 체험 등 다양한 경험과 체험들이 바로 참되고 바른 믿음의 산물이 되는 것이다.

넷째, 믿음에 일치하는 행동

참된 믿음은 순종과 실천에 이르게 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입술로는 믿음이 있다고 고백하면서도, 그의 삶 속에서 순종과 선행과 실천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의 신앙고백 여부와 상관없이 그의 믿음은 죽은 믿음, 가짜 믿음, 귀신의 믿음일 수밖에 없다 (약 2:19).
믿음과 순종은 동전의 앞면과 뒷면과 같다. 믿음이 있으면 반드시 순종이 따른다.
믿음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실천이 따른다.
예수님을 주님과 구주로 참되게 믿는 사람은 그 주님의 말씀에 더 순종하는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다.
그것은 논리적 필연이다.
우리의 순종이 연약하다는 것은 역으로 말하면 우리의 믿음이 연약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믿음은 항상 순종에 선행한다.
왜냐하면 믿음이 뿌리라면, 순종은 열매이기 때문이다.
뿌리가 살아있는 나무는 반드시 때가 되면 열매를 맺게 마련아닌가?

그 동안 한국교회와 이민교회는안타깝게도 믿음에 대해서 여러모로 오해해 왔다.
성경이 말하는 참되고 바른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확인하고, 그것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할 때, 한국교회와 이민교회의 갱신과 개혁은 앞당겨질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미국과 캐나다의 국경 사이에 높이 48미터, 너비 900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나이아가라 폭포가 있다.

나이아가라 폭포는 폭이 1킬로미터가 넘는 강물이 유유히 흘러오다가 갑자기 땅이 푹 꺼져서, 아파트 2, 30층 높이만한 까마득한 절벽을 만난 그 많은 물이 ‘우르르르르르르르’ 쏟아져 내리는 것 같다고 상상해보면 된다.

이 엄청난 폭포와 관련한 일화가 많은데, 19세기 중반 찰스 블론딘이라는 곡예사가 외줄타기로 나이아가라 폭포를 횡단한다고 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가 줄 위에서 눈을 감고 걷기도 하고 자전거를 타는 것을 보고 환호했다. 찰스 블론딘은 자신을 향해 환호하는 관중들에게 물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여러분의 열렬한 응원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사실 저는 솔직히 마음에 차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이게 너무 싱겁습니다. 제 실력은 이게 다가 아닙니다. 저는 사람 한 명을 등에 업고 이 폭포를 건널 수도 있습니다. 믿으십니까?”

사람들은 여전히 환호하며 “당연히 믿지요!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곡예사입니다!”라고 말했다. 블론딘이 기뻐하며 대답했다.

“그토록 저를 믿어주신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모두에게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누가 저의 등에 올라타고 저와 이 계곡을 건너시겠습니까?”

일순간 정적이 흘렀다. 아무도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만 젓고 있을 때, 실망한 블론딘은 그의 매니저이자 오랜 친구인 해리에게 가서 “자네도 나를 믿지 못하나?”라고 물었다. 친구는 “믿고말고”라고 대답하고 그의 등에 올라탔다. 그리고 그들은 무사히 계곡을 건너갔다.

믿기는 믿는데 타지는 못하겠다?
그것이 과연 믿음인가?
믿는다고 말만 하고 그 진리에 몸을 싣지는 않으면서 믿었다고 여기고 넘어가고 있지는 않는가?
그러므로 지식적인 동의나 희망사항은 믿음이 아니다. 나를 움직일 수 없는 믿음은 결코 믿음이 아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 로마서 1장 17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 로마서 10장 17절


지식적으로 하나님이 계신 것을 동의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 또한 부정할 수 없었습니다.
이 정도면 저에게도 믿음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믿는 대로 행동하게 하옵소서.


진짜 믿음은 우리를 행동하게 만듭니다.
오늘 내가 주님을 믿는 자로 행동으로 옮겨야 할 믿음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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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Belief, Faith)은 어떠한 가치관, 종교. 사람, 사실 등에 대해 다른 사람의 동의와 관계 없이 확고한 진리로서 받아들이는 개인적인 심리 상태이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어떠한 사실이나 사람을 믿는 마음’으로 설명되어 있다.|
철학, 사회, 정치 등의 분야에서는 일반적으로 신념(信念)이라 하며,
종교에서는 신앙(信仰), 신심(信心), 신앙심(信仰心) 등으로 불리며, 신과 신이 주신 말을 믿는것이다.
맹목적 믿음이 분쟁과 갈등을 초래하기도 한다.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는 말로 상징되는 믿음이란 기독교에서 많이 사용하는 단어이다.
믿음은 반드시 대상이 있다.
기독교에서 믿음이란 예수에 대하여 단순히 "역사적 사실에 대한 지적으로 동의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지, 정, 의가 작용하는 신뢰를 말한다.
믿음이 성장할수록 점점 사후에 신격화되어 만들어진 "예수에 대한 신뢰가 온전하여지고, 삶의 안정감을 누릴 수 있다"고 한다.
믿음은 인간이 스스로 결정하기 보다는 "하느님 또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 이해해야 하며,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마음에 거듭나서 예수를 구주로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

한편 기독교에서 신앙 또는 믿음(faith)이란 낱말에 대한 정의에 관해서는 논란이 되곤 한다.
계통적 서술에 의하면 히브리서에 있는 "희망하는 것에 대한 확신, 보지 않은 것에 대한 확신"으로 본다.
대부분의 기독교 이론들이 역사적으로 이 성경적 서술을 따라왔다.
다른 아브라함계 종교와 마찬가지로 신에 대한 믿음을 포함하여 신이 그의 자비로운 의지, 또는 인간에 대한 계획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세계에 대해 관리한다는 - 현실을 초월한 영역을 실제로 믿음을 포함한다.

기독교가 다른 아브라함계 종교와 구분되는 것은 예수의 역할에 초점을 맞추는 것과 그가 고난과 부활이 예언에 따라 입증된 구원자(그리스도, 크라이스트)라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신약성서의 믿음에 포함되는 내용이다.
기독교의 대부분 전통에 의하면 기독교 신앙(믿음)은 예수가 그의 아버지 성령에 의해 부활했음을 믿는다.

정확한 “믿음”이란 단어에 대한 이해는 다양한 기독교 교파의 전통에 따라 다르다.
이러한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은 보편적으로 예수가 기독교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고,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 이러한 믿음이 필요하다는 믿음에는 공통점을 보인다. 기독교의 전통은 예수에 대한 믿음이 매우 중심이 되기 때문에 “믿음의 종교”라 불리기도 한다. 신앙 또는 믿음(faith)과 믿음(belief)이란 개념은 기독교인들이 ‘믿는 사람’으로 간주되듯 빈번히 동의어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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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란 무엇인가?
 - 찰스 스펄전

성경은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라고 말합니다.
이때 말하는 믿음은 무엇일까요?
믿음을 설명하는 말은 많습니다만, 거의 모든 설명이 우리가 이미 아는 것 이상으로 설명해 주지는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 구절을 읽으면 믿음을 설명하기가 더욱 복잡해진다고 합니다.
믿음을 설명하려는 우리의 노력은 누구도 이해시키지 못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세 가지 요소 : 지식, 동의, 신뢰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믿음은 세 가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곧 지식과 동의와 신뢰입니다.

믿음은 아는 것이다(지식)

지식이 제일 먼저 나오는 것에 주의하십시오.
로마 가톨릭 사제 들은 모르는 것도 믿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아마 그들은 사람이 할 수 없는 것도 할 수 있다고 여기는모양입니다.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오(롬 10:14)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은 먼저 어떤 사실에 대해 알아야 믿을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것저것을 믿지만, 듣지도 못한 많은 것들을 믿는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우리는 먼저 들어야합니다.
그래야 무엇을 믿어야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누군가 여러분을 신뢰한다고 말한다면 적어도 그는 여러분의 이름 정도는 아는 사람일 것입니다.
믿음을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지식이 필수적입니다. 그러므로 지식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옛 선지자는'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사55:3)고 말했습니다. 이 말씀은 지금도 복음의 말씀입니다. 성경을 찾아 성령께서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에 대해 어떻게 가르치시는지 배우십시오. 하나님을 알려고 하십시오. 하나님은 자 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십니다(히11:6).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여호와를 알고 경외하는 마음'을 주실 것입니다. 복음을 아십시오. 기쁜 소식이 무엇이며, 값없이 주시는 용서가 무엇인지, 회개에 대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그 외에 수없이 많은 축복들에 대해 배우십시오. 하나님이 누구신지 아십시오. 복음을 배우십시오.

 

특별히 그리스도 예수, 하나님의 아들이신 구세주를 아십시오. 그분은 인간으로서 우리와 연합하시고, 신으로서 하나성과 연합되신 분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가 되셔서 그 손으로 각각 하나님과 사람을 붙잡고 계십니다. 그분은 죄인과 세상의 심판자 사이를 연결하십니다. 그리스도를 점점 더 많이 알도록 노력하십시오. 바울은 회심한 지 20여 년이 지난 후에도 자신이 그리스도를 알기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바울의 고백을 통해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알수록 더욱더 그리스도를 알기 원하고, 그리하여 우리의 믿음은 더 욱 자라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의 희생에 관한 교리를 알도록 노력하십시오. 그것이 믿음이 지향하는 목표의 중심입니다. 구원을 얻는 믿음이 바로 여기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노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히5:19)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저주를 받으셨음을 알기 바랍니다.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3:13). 그리스도의 대속 교리를 깊이 연구하십시오. 바로 여기에 인간의 죄에 대한 위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5:21). 그러므로 믿음은 지식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배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입니다.

믿음은 동의(belief)하는 것이다 

이제 생각은 그 지식이 진실하다고 동의하는 단계로 나아갑니다. 영혼은 하나님이 존재하시며 그분은 진실한 마음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또 복음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사실이라는 데 동의하게 됩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는 것은 하나님이 이 말세에 그의 성령으로 전에 없이 분명하게 드러내 보여 주신 위대한 진리라는 데 동의합니다. 그 다음에는 분명히 그리고 진실로 예수님께서 우리 하나님이요, 구주요, 인류의 구속자요, 선지자요, 제사장이요, 왕이심을 마음으로 받아들입니다. 여러분도 여기에 이르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신다'는 사실을 굳게 받아들이십시오. 하나님은 인간을 위한 예수님의 희생을 완전하고 온전한 것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자는 정죄를 당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신뢰하는 것이다  

여러분은 자신을 자비로우신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여러분의 소망을 은혜로운 복음에 두십시오. 여러분의 영혼을 죽으시고 살아나신 구주께 위탁하십시오. 여러분의 죄를 대속의 피에 씻으십시오. 그의 완전한 의를 받아들이십시오. 그러면 모두 해결될 것입니다. 신뢰는 믿음에 생명을 주는 피 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구원을 얻는 믿음이 아닙니다.

청교도들은 믿음을 종종 '기대 누움'이라는 말로 설명했습니다. 여러분은 그 의미를 알 것입니다. 저는 지금 이 단에 기대고 있습니다. 저의 체중을 모두 여기에 기댔습니다. 이처럼 늘 그리스도께 기대십시오. 온몸을 한껏 뻗쳐서 바위에 기대어 남작 드러눕듯 그리스도께 완전히 던지십시오. 자신을 그리스도께 던져 그분 안에서 쉬며 그분께 맡기십시오. 그렇게 한다면 여러분은 구원을 얻는 믿음을 가진 것입니다.

믿음은 맹목적인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지식에서 시작됩니다. 신앙은 짐작이 아닙니다. 확실한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신앙은 비실제적인 것, 꿈같은 것도 아닙니다. 신뢰하는 것으로 계시된 진리에 그 운명을 거는 것입니다. 믿음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진리에 거는 것입니다. 쉬운 말은 아니지만,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 시인의 말은 제가 의미하는 바를 잘 보여줍니다.

 

그에게 걸어라, 모든 것을 걸어라.

다른 어떤 신뢰도 침투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이 믿음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한 방법입니다. 혹시 제가 '복잡하게' 만들지는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누구를 믿고, 무엇을 믿는가?

다시 살펴봅시다. 신앙이란, 그리스도께서 그 자신이 친히 말씀 하신 그분이라는 것, 그리고 그분은 자신의 약속을 반드시 행하신 다는 것을 믿고, 그것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그분은 하나님이시며, 인간의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이시고, 성품은 완전하시며, 우리를 위해 화목제물이 되셨고, 우리의 죄를 지고 친히 나무에 달리셨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허물을 해결하셨으며, 죄에 종지부를 찍으셨고, 그리하여 영원한 의를 가져오셨다고 말합니다. 나아가 성경은 그가 ‘부활’하셨으며, 그리하여 '살아계셔서 우리를 위해 영원히 증보하고 계시고, 그는 영광을 입으셨으며, 천국에 자기 백성이 있을 곳을 마련하시고, 곧 세상을 의로, 그의 백성을 공평으로 심판하기 위해 다시 오실 거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분명히 그렇다고 굳게 믿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막9:7)고 증거 하신 사실입니다. 이는 성령 하나님께서도 증거 하신 사실입니다. 성령께서는 말씀과 여러 가지 이적을 통해,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역사하심으로써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증거를 사실로 믿어야 합니다.

신앙은 또한 그리스도께서 친히 증거 하신 대로 행하실 것을 믿습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자기에게 오는 자를 내들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않으면, 그분은 분명 우리가 그분께로 갈 때 우리를 내쫓지 않으실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4)고 말씀하셨으면, 그것이 진실하다고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생명수를 그리스도께로부터 받는다면, 이 생명수는 우리 안에 남아 있을 것이며 우리 안에서 거룩한 생명의 샘물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무엇이든지 약속하신 것을 행하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밀고 그분의 약속에 따라서 용서와 칭의와 견인과 영원한 영광을 그분께 받을 것이라 믿어야합니다.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가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친히 말씀하신 바로 그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친히 행하겠다고 말씀하신 것을 행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각 사람은 그 분을 신뢰 하고,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나에게 그분은 자신이 친히 말씀하신 그분이시다. 그리고 그분은 친히 하겠다고 약속하신 것을 나를 위해 행하신다. 나는 나를 구원하기 위해 지정되신 그분의 손에 나를 맡긴다. 그러면 그분이 나를 구원하실 것이다. 나는 그분이 말씀하신 그대로 행하실 것이라 믿으며, 그분의 약속을 의지한다. "이것이 구원을 얻는 믿음입니다. 이 신앙을 가진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가집니다. 그에게 어떤 위험과 어려움이 닥치든, 그가 어떤 어들과 침체에 빠지든, 그가 어떤 허물과 죄를 가지든 이 처림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정죄함이 없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정죄를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설명이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설명이 하나님의 성령께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세 가지 믿음에 대한 예화

믿음은 지식의 분량이나 혹은 다른 이유들에 따라 그 수준이 매우 다릅니다.
때로 믿음은 단순히 그리스도께 매달리는 수준에 불과합니다.
의지한다는 생각, 또는 의지하겠다는 의지에 불과한 것 입니다.

바닷가에 가면 우리는 바위에 붙은 조개를 볼 수 있습니다.
바위 위를 살금살금 걸어가 막대기로 힘껏 내려친다면 조개는 떨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조개를 내려치는 소리를 옆의 조개가 들었다고 합시다.
그래서 옆의 조개는 있는 힘을 다해 매달립니다.
여러분은 그 조개를 떼어낼 수 없습니다.
치고 또 쳐 보십시오.
막대기만 부서질 것입니다.

이 조그마한 조개는 아는 것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매달립니다.
자기가 매달린 바위에 대해, 그 바위의 지질학적 성분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매달립니다.
그 조개는 매달릴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이 조개가 아는 작은 지식입니다.
그리고 조개는 그 구원 의 바위에 매달림으로써 자신의 지식을 사용합니다.
매달림으로 써 조개가 생명을 얻습니다.

수많은 하나님의 백성들도 이 이상의 지식을 갖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마음과 목숨을 다해 예수님께 매달리는 데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강하고 능한 구주십니다. 움직이지 않고 변하지 않는 반석입니다. 그들은 생명을 얻기 위해 예수님께 매달립니다. 이 매달림이 그들을 구원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매달리는 성향을 주십니다.
마당에 자라는 완두콩을 보십시오. 혹시 콩 줄기가 땅바닥에 떨어졌다면, 줄기를 들어 시렁 위에 올리거나 붙들어 매 보십시오. 줄기가 이내 시렁을 붙잡을 것입니다. 완두콩은 닿는 것은 무엇이든 붙잡는 덩굴손이 있기 때문입니다.

완두콩은 위로 자라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덩굴손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도 모두 하나님을 향한 덩굴손이 있습니다. 생각과 소원, 소망이 있어서 그것으로 그리스도와 그의 약속을 붙잡습니다. 이것은 아주 단순한 종류의 믿음이지만 아주 완전하고 효과적인 형태의 믿음입니다. 사실 이것이 모든 밀음의 핵심입니다. 우리가 어려움에 빠지거나 우리의 생각이 병들고 영적으로 침체에 빠졌을 때 우리는 종종 이 믿음으로 이끌립니다. 다른 무엇을 할 수 없을 때에도 우리는 매달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본질입니다.

복음에 대해 마땅히 알바를 알지 못한다 해도, 아는 것에 매달리십시오. 자신이 아직 생명의 강에 겨우 들어선 어린양 같습니까? 깊은 곳으로 헤엄쳐 들어갈 만큼 강하지 않다 해도 그 생명수를 마시기 바랍니다. 헤엄치기 때문이 아니라 마시기 때문에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매달리십시오! 예수님께 매달리십시오. 그것이 믿음입니다.

 

또 다른 믿음의 형태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 그를 의지하고 따릅니다. 첫 번째 예화에 나온 조개는 바위에 대해 많이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설명하려는 단계의 믿음에는 더 많은 지식이 있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안내자를 신뢰합니다. 안내자 가 볼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는 안내자를 신뢰하고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 걷습니다. 선천적으로 앞을 보지 못해 본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해도, 그는 시각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리고 자신의 안내자는 시각을 가졌다는 사실도 압니다. 그래서 스스럼없이 자신의 손을 안내자의 손에 맡기고 그가 이끄는 대로 따릅니다.

이것은 믿음에 대한 좋은 예화가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 가 가지지 못한 공로와 능력과 축복을 가지고 계심을 압니다. 그래 서 기쁨으로 우리 자신을 예수님께 맡깁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신뢰를 결코 배신하지 않으십니다.

 

 

권위와 사랑에 근거한 믿음

학교에 다니는 학생은 모두자신이 배우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지리 선생님이 지구의 형태와 어떤 큰 도시, 또는 국가에 대해 설명을 합니다. 학생은 이것이 사실인지 알지 못합니다. 다만 선생님과 교과서를 믿을 뿐입니다. 바로 이것이 여러분이 구원받기 위해 그리스도께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렇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구원을 주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그분을 신뢰해야 합니다.

여러분과 제가 아는 거의 모든 것은 믿음으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의 과학적 발견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을 확신합니다. 무엇을 근거로 확신합니까? 저명한 학자의 권위가 그 근거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한 실험을 직접 해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증거 한 것을 믿습니다.

그리스도께 대해서도 이와 같이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어떤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의 말씀을 믿고 그를 의지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보다 무한히 뛰어나신 분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주와 주인으로서 자신을 보여 주셔서 우리가 신뢰하도록 하십니다. 우리가 그 분과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면 구원을 얻게 됩니다.

 

또 하나의 고상한 형태의 믿음은 사랑에서 자라나는 믿음입니다. 아이가 자기 아버지를 신뢰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예를 들어 우리가 그 아이보다 그의 아버지에 대해 약간 더 안다고 합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아버지를 무조건적으로 의지하지 않습니다. 아이가 자기 아버지를 신뢰하는 이유는 아버지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깊은 사랑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복되고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성품에 매력을 느끼고 그의 사명을 좋아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인애에 흠뻑 빠졌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존경하고 경외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신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의심하는 일은 힘듭니다. 만일 그런 상태에 이르렀다면 그 다음에는 질투라는 끔찍한 감정이 기 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죽음처럼 강하고 무덤처럼 잔인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온통 신뢰하고 확신하는 상태에 이르도록 합니다.

구주를 사랑으로 신뢰하는 방법은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의사의 아내가 있습니다. 그녀는 매우 심각 한 병에 걸려 눕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아주 차분하고 조용합니다. 자기 남편이 그 질병을 전문적으로 연구해 왔으며, 그 병에 걸린 사람들을 수없이 치료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조금도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이의 손에 맡겼으니 이제 안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남편이 최선을 다해 모든 기술과 사랑을 쏟을 것입니다. 그녀의 믿음은합당하고 담연합니다. 남편은 어느 모로 보나 아내가 그런 신뢰를 가질 만한 사람입니다. 가장 행복한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향해 갖는 믿음이 바로 이런 믿음입니다. 그리스도와 같은 의사는 없습니다. 그분처럼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신을 그분의 손에 맡기고, 그분이 어떤 처방을 내리든 받아들이고, 무엇을 요구하든 따릅니다. 그분이 우리를 지도하시는 한 잘못된 지시를 받을 가능성은 없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너무도 사량하시기에 우리로 멸망을 당하게 하시거나 불필요한 고통을 당하게 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어린아이 같은 믿음

믿음은 또한 살아계신 하나님과 구주의 임재하심을 체험하게 합니다. 그 결과 다음 예화의 어린아이가 보이는 고요함과 평온함이 그 영혼 안에 생깁니다. 광풍이 불자 어린아이의 어머니는 깜짝 놀랍니다. 그러나 그 귀여운 아이는 즐거워하며 기뻐서 박수를 칩니다. 번개가 번쩍여도 창가에 서서 "엄마 보세요. 아름다워요, 정말 아름다워요" 라고 소리칩니다. 어머니는 "얘야 이리 온. 번개는 무섭단다." 라고 말합니다. 그래도 아이는 하나님께서 하늘에 만드시는 그 아름다운 빛을 보게 해달라고 졸라댑니다. 하나님께서 자신 의 어린아이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실 것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가 "하지만 저 무서운 천둥소리를 들어 봐." 라고 말하자, 아이는 "엄마가 하나님께서는 천둥소리로 말씀하신다고 하지 않았어요.“ 라고 말합니다. 어머니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그래" 라고 대답하자, 아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니 얼마나 멋져요. 하나님이 아주 큰소리로 말씀하셔요.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들으라고 그러시는 것 같아요. 그렇지 않아요, 엄마? 아이는 새처럼 즐거워합니다.

아이가 이처럼 평온할 수 있는 것은 그 아이가 하나님을 실제적으로 바라보며, 또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그 아이에게는 번개가 하나님의 아름다운 빛입니다. 천둥소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음성입니다. 그래서 행복합니다. 아이의 어머니는 자연 법칙과 전기 에너지에 대해 아주 많이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지식이 그녀에게 위로를 주지는 못합니다. 어린아이의 지식은 작지만, 그 지식은 확고하고 소중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자부심이 매우 강해져서 자명한 진리에 위로받지 못하고, 의심스러운 이론들로 스스로를 비참하게 만들기를 더 좋아합니다. 후드(Hood)의 다음 노래는 심오한 영적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워라, 그리워라.

그 검고 커다란 전나무.

나는 이따금 생각했지.

가느다란 꼭대기가 하늘에 닿겠구나!

어렸고 어리석은 생각이었지.

그러나 이제 나는 슬픔을 느끼네.

그때보다 지금 더

천국에서 멀어졌음을 알기에.

 

저는 그릇된 길로 똑똑하게 성장하기 보다는 다시 어린아이가 되고 싶습니다. 믿음은 그리스도를 향해 어린아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지금 이 순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그분을 믿는 것 입니다. 이것은 유치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 안에서 행복 하려면 우리는 모두 이런 어린아이와 같은 자세로 나아가야 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눅18:17).

믿음은 마치 어린아이가 그의 아버지를 믿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그분이 하신 말씀 그대로 받아들이고 과거, 현재, 미래를 아주 단순하게 신뢰하고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믿음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더는 증거가 필요 없는 믿음

확고한 믿음은 분명한 지식에서 나오며, 은혜 안에 성장함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란 그를 알기에, 그의 한결 같은 신실함이 입증되었기에 그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이제 증거와 증표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다만 용감하게 믿습니다.

 

항해사의 믿음을 보십시오. 저는 종종 그의 믿음에 놀랍니다. 그는 닻줄을 풀고 해안에서 떨어져 나갑니다. 며칠, 몇 주, 몇 달씩 그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도 항해를 합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않고 밤낮으로 항해하여 어느 아침, 그가 가려고 했던 안식처에 이릅니다. 바닥을 알 수 없는 깊은 곳에서 그는 어떻게 길을 찾았을까요? 그는 나침반과 항해력, 망원경, 천체를 신뢰하고 그것들의 안내를 따랐습니다. 그래서 정확하게 항해하여 목표했던 항구에 도착한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상태로 항해하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보이는 해 안을 떠나 "내안의 느낌, 증거, 증표여 안녕. 이제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나는 즉시 천국을 향해 항해할 것이다." 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영적으로 복된 일입니다. “보지 않고 믿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들은 언젠가 멋지게 입항할 것입니다. 그 항해길도 안전할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우리 영혼과 그 모든 영원한 관심들을 구주께 쉽게 맡기도록 합니다. 어떤 사람은 어느 정도의 신뢰만으로 은행에 가서 자신의 돈을 맡깁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은행의 거래 내역을 살피고 은밀한 내용을 조사하여 그 은행이 막대한 투자금을 확보하고 있음을 확인하고는 절대적 확신을 가지고 자기 돈을 맡깁니다. 그는 알고 믿음을 가겼기에 즐거운 마음으로 자기의 모든 것을 은행에 맡깁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아는 우리는 그분이 우리를 끝까지 지키실 것을 알기에 우리의 모든 것을 그분의 손에 맡깁니다.

하나님은 갈수록 많은 확신을 주셔서 우리가 마침내 흔들리지 않는 믿음에 이르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코 의심하지 않고 신뢰하게 됩니다. 쟁기질하는 사람을 보십시오. 그는 나무에 잎도 없고 즐거운 새소리도 없는 추운 겨울 동안 열심히 쟁기질을 합니다. 쟁기질을 한 다음에는 소중한 씨앗을 이랑에 심습니다. 싹이 날 것을 확신하며 말입니다. 그 농부는 이미 수십 번 추수를 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추수를 기대하며, 믿음으로 소중한 곡식을 뿌립니다.

좋은 곡식을 흩뿌려 땅에 심는 행위는 겉보기에 인간이 하는 행위 중 가장 어리석어 보입니다. 혹시 여러분이 그 결과를 보거나 들은 적이 없다면, 그저 낭비요 농사일이 아닌 것으로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농부는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는 씨를 뿌리기를 갈망합니다. 그는 믿음을 가지고 씨 뿌리기에 좋은 날씨를 고대합니다. 만일 그에게 어리석다고 말한다면, 농부는 여러분의 무지함을 비웃으며 추수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이것은 경험을 통해 믿음이 자라는 것을 보여 주는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경험은 겉으로 보이는 것과 상관없이 우리가 행동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또한 우리의 모든 것을 그리스도께 맡기도록 합니다. 우리의 소망과 우리의 삶을 그와 함께 묻으면서 우리가 그와 함께 죽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것을 기쁨으로 확신합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죽음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셔서 새로운 생명을 얻게 하시도 기쁨과 평안을 수확하게 하실 것입니다.

모든 것을 그리스도께 맡기십시오. 그러면 더욱 풍성하게 되받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강한 믿음을 얻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해가 뜨고 지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 것처럼 구주께서 시시때때로 우리를 도우심을 의심하지 않는 것처럼 구주께서 시시때때로 우리를 도우심을 의심하지 않게 되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 주님을 의뢰했고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아무리 믿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그러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14:1)는 그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 ‘믿음, 자신 있게 대답하라’, 찰스 스펄전 외, 생명의 말씀사, p.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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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란 무엇인가? 이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먹는 모든 음식에 거의 소금이 들어가지 않는 것이 없는 것처럼 우리의 모든 삶과 행동에는 다 믿음이 들어갑니다. 우리가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을 안정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마음에 믿음을 활용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믿음에 관하여 어느 정도 알고 있나요?

1. 믿음은 누가 주신 것인가?

믿음이란 누가 주신 것일까? 그런 질문을 해본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성경에는 로마서 12장 3절에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각 사람에게 분량대로 믿음을 나누어 주셨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은 믿음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인간생활의 모든 일에 기름을 치듯 믿음을 보태야 되는 것입니다. 이목구비를 하나님이 주신 것 같이 믿음도 태어났을 때부터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에 보면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하나님이 선물로 믿음을 주시고 그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고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미국기독교출판협회 골드 메달리온을 받은 마이크 메이어슨은 천성적으로 우울한 기질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우울증을 겪으며 삶의 회의를 느끼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는 빌립보서 4장 4절의 하나님 말씀을 읽고 ‘매일 기뻐하면서 사는 것이 정말 가능한 것일까?’ 한번 시험해보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제 앞으로 90일 동안 주님 안에서 기뻐하겠다’는 마음의 굳은 결심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삶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90일 동안 주님 안에서 기뻐하기로 결심하고 노력했더니 실제로 우울과 두려움이 사라지고 마음에 기쁨이 밀려들어오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기뻐하라”는 말씀뿐만 아니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와 같은 말씀들도 적용하면서 행복한 삶을 지금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요 16:22)”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겠다고 결심하고 나아가면 놀라운 믿음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2. 믿음이 크거나 작은 이유는 무엇인가?

믿음의 크고 작은 것은 왜 그런가? 왜 저 사람 믿음은 상당히 크고 내 믿음은 이렇게 적은가? 그 이유가 어디 있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일 작은 믿음을 겨자씨에 비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7장 20절에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믿음의 위력에 대한 설명인 것입니다. 겨자씨 조그마한 것, 그것이 실제로 하나님 보시기에는 태산을 옮길만한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속에 실제로 하나님이 보실 때 굉장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태산 같은 어려운 문제를 움직일 수 있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모르고 있지마는요. 여러분 믿음. 솔직히 겨자씨를 보신 분 별로 많지 않지요? 겨자씨 보신 분 한번 손 들어봐 주십시오. 예. 보신 분도 많이 있군요.

안 보신 분들을 위해서 제가 새벽기도 때 겨자씨를 성경책에 얹어서 사람들 줄을 서서 앞에 나와서 겨자씨 보고 지나가라 했는데 나이 잡수신 권사님 한분이 앞에 나와서 잘 안 보인다고 그래서 내가 눈 밑에 까닥 대면서 “여기 있네요. 여기 보세요.” “안 보이는데요?” 그만 그 입 바람에 다 날아가 버렸습니다. 내가 마음에 화가 나서, “권사님 말을 좀 조심스럽게 해야지. 그렇게 가까이대고 하면 다 날아가 버리지 않습니까?” “아이고 미안해요.”

그런데 성령께서 말씀하시기를 “화내지 마라. 권사님 입술 바람에 날아갈 만한 겨자씨면 얼마나 작으냐? 그런 겨자씨만 있어도 산들을 명하여 바다에 던지라고 할 능력이 있는 것이다.” 성도들이 그것만 개발한다면 인생에 어려운 문제에 당해서 절망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만 믿음이 개발될 수 있습니까? 믿음은 말씀을 듣고 성령 충만함으로 강해지는 것입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한번 따라 말씀해 주세요.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지 우리가 다른 것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자세히 듣고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으면 말씀이 이 믿음의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또 로마서 10장 17절에 보면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갈 5:5)’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행한다. 성령이 들어오면 믿음에 활기를 넣어주시는 것입니다. 믿음은 또 어려움을 경험하고 극복함으로 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겠다고 각오를 하고 어려운 역경이 다가올 때에 믿음으로 그를 참고 견디며 하나님께 감사기도하고 나가면 믿음이 자라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38절에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어려움이 생길 때 믿고 기도하고 견뎌야지 믿음을 포기하고 뒤로 물러가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인내를 통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미국의 조지 바나 연구소에서 “하나님께 한 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고 반드시 대답해 주신다면, 당신은 어떤 질문을 하나님께 하겠습니까?”라는 주제로 사람들에게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그 결과, 가장 많은 응답자들이 “세상에는 왜 아픔과 고난이 있습니까?”이 질문을 하나님께 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계시면 왜 이렇게 많은 병이 있고 고난이 있습니까? 고난은 모든 사람들이 겪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무지개를 보려면 먼저 소낙비가 와야 돼요. 소낙비가 없이 하늘에 찬란한 무지개가 뜨지 않습니다. 우리의 인생에 꽃 피고 열매 맺는 아름다움이 오기 전에 반드시 비바람을 통해야 되는 것입니다. 비바람 통하고 난 다음에 아름다운 삶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미국의 펜실베이니아를 개척한 윌리엄 펜은 “고생하지 않고는 열매를 거둘 수 없고, 가시밭길을 걷지 않고는 왕의 길을 걸을 수 없으며, 쓴맛을 보지 않고는 영광을 맛볼 수가 없다.”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이기고 나아갈 때, 믿음이 강해지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상급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은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을 나열하고 있는데, 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말씀에 뿌리를 내려야 믿음이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얼마 전, 100년 만의 최대 강우량을 동반한 태풍이 중국을 덮쳐서 아름드리 나무가 뿌리째 뽑히고 철제 건물이 무너지는 등 엄청난 피해를 입었습니다. 태풍이 올 때 나무가 쓰러지는 것은 뿌리가 깊지 않기 때문입니다. 뿌리를 깊이 내린 나무는 강력한 태풍이 불어도 쓰러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무풍지대에 사는 것은 아닙니다. 성도들의 삶에도 고난의 바람이 반드시 불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 토네이도나 쓰나미가 불어와도 쓰러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있는 신앙이냐 아니냐?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 7:24~27)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행할 때, 우리의 믿음이 자라고 강해지기 때문인 것입니다. 믿음을 맘속에 가지고 있으면 믿음을 행해야 되는 것입니다.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내가 믿어야 될 때는 믿고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할 일은 계산적인 믿음을 갖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믿음을 갖는 것이다. 계산은 하나님께서 하신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될까 안 될까’를 계산하면, 의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안되면 큰일 나겠지, 과연 될까? 그렇게 의심이 마음 속에 들어오면 문제가 고약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되든 안 되든’ 하나님께 맡기고 나아가면, 믿음이 역사하기 시작합니다. 죽으면 죽지 뭐, 망하면 망할 것이다. 한번 해 보자. 아주 믿을 때는 결단을 내리고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이 역사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제가 우리 한국에서 저명한 목사님과 함께 식사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 목사님은 한국에서 손꼽히는 목사님이요 지금은 세상을 떴습니다. 나하고 동갑입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이 “조용기 목사는 내내 믿음에 대한 설교를 하고 있는데 그 교인들이 그래도 아멘하고 따라오는 것이 희한하다”고 그래서 내가 “목사님, 목사님 한번 믿어보십시오. 목사님은 수술도 여러 번 했고 세계적으로 좋은 약도 많이 먹어보아도 낫지 않았는데 제가 어리석게 보이더라도 믿음으로 역사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그러면 내가 믿고 난 다음 하나님이 역사 안하면 조 목사가 책임지겠소?” 그럽니다. “목사님 아픈 것을 내가 책임질 수야 없지요. 목사님이 스스로 책임져야 되겠지만 한 번 믿어보십시다. 한 번 믿어보고 주님의 기적을 바라십시다.” 그러니까 내가 아무리 믿으려고 해도 “하나님께서 과연 역사하실까?” 의심이 생겨서 믿을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 말하고 난 다음 한 달이 지나기 전에 세상을 뜨고 만 것입니다. 그렇게 빨리 뜰 바에야 믿어보고 떴으면 좋지 않겠습니까? 아예 안 되려거든 믿어보고 안 되는 것이 좋지 안 되는 것을 일찌감치 미리 받아들이면 안될 것입니다.

우리가 계산을 하면 기적이 일어날 가능성이 없지만, 믿음으로 살겠다고 결심하면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계산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기적을 이룬 적은 없습니다. 토마스 왓슨은 “이성이 걸어갈 수 없는 곳에서도 믿음은 헤엄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기적은 계산하는 자의 것이 아니라 믿음을 가진 자의 것인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오늘 무슨 일이 생길 때 계산을 하면 하나님 자리에 들어서는 것입니다. 계산은 하나님이 하시는 거예요. 여러분이 믿고 기도하려고 할 때, “어 그거? 내가 계산하마. 너는 믿어라.” 여러분, 믿고 나가면 어려운 것은 하나님이 계산해서 대처해주는 것입니다.

저는 어릴 때 나비가 고치를 뚫고 나오려고 몸부림치는 것을 보고 불쌍히 여겼습니다. 제가 어릴 때는 누에를 많이 쳤는데 누에 방에 들어가면 고치가 그 집을 뚫고 나와서 나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고치를 뚫고 나오려고 조그마한 구멍을 뚫어놓고 하루 종일 몸부림을 칩니다. 그래서 제가 학교가기 전에 “야 고치야 불쌍하다. 너 오늘 편안하게 나오게 해주마.” 그래서 제가 쭉 찢어주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찢어준 고치는 나비가 되어 나와서 몇 번 몸을 흔들어보다가 그대로 죽었어요. 그리고 개미들이 박신박신 뜯어먹고 있습니다.

왜 그러냐고 보니까 고치에 구멍이 뚫려있어서 나오려고 몸부림을 치는 바람에 몸에서 기름이 나와서 날개를 적셔주니까 날개가 쫙 펴져서 나는 거예요. 그런데 몸에 부딪혀서 몸의 기름이 날개에 묻지 않은 고치는 그냥 날아보지도 못하고 개미 밥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우리 고난을 통해야 성령의 은혜가 마음에 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하지 아니하면 성령의 기름부음이 임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믿음의 은사가 나오지 않습니다. 구멍은 좁은데 나오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는 고치가 보기에는 애처롭지만은 구멍을 뚫어주면 안됩니다. 자기가 그를 뚫고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나비가 아름다운 날개를 펴고 날아갈 것이라 생각하고 날개를 제대로 펴지 못하게 구멍을 뚫어주면 기름이 날개를 펴지 않게 하므로 그만 죽고 마는 것입니다. 온 힘을 다하여 뚫고 나오면 하늘을 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에 다가오는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을 이기고 나아갈 때 우리의 믿음이 강해지는 것입니다. 고난을 이기고 나가십시오.

3. 믿음의 능력

믿음의 능력을 태산을 옮기는 능력과 늘 비교해 보십시오. 여러분, 마귀가 와서 “너 믿음 없다. 너 믿음 없다”고 할 때, “내 믿음은 태산을 옮길 만한 능력이 있다.”고 대답을 하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누구든지 목사만 되는 것이 아니라 남녀노유 빈부귀천할 것 없이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대단한 말씀이 아니십니까?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막 11:22-25). 태산을 보고 물러가라고 말하고 난 다음 마음에 그대로 믿으면 그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쉽게 믿음이 활용된다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을 방해하는 것은 남을 미워하면 방해되는데 남에게 혐의가 있거든 용서해주고 믿음을 가질 수 있게 하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태산을 옮길 믿음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면 마음에 담대해지는 것입니다. 태산이 옮기도록 믿음으로 행하면 의심이 따라오는데 여러분이 꼭 알아야 될 것은 믿음이 있기 때문에 의심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의심이 안 따라옵니다. 믿음이 없는데 마귀가 의심을 가지고 따라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의심이 마음에 생기거든 아 믿음이 내 마음 속에 확실히 있구나.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사탄아, 내가 믿음이 있으니 네가 그 믿음을 빼앗으려고 따라오지만 어림없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물러가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마음에 의심을 하지 말도록 믿음을 강하게 붙잡고 입으로 시인해야 되는 것입니다. 믿음을 붙잡아주는 것은 입술의 고백인 것입니다.

마음에 의심이 생기면 아이고 의심이 되네, 마음이 두렵네. 그런 소리 하지 말고 ‘저가 채찍에 맞으므로 네가 나음을 입었다!’ 원수마귀야 물러가라! 네 거짓말에 두려워하지 않는다. 내가 치료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으니까 네가 그 믿음을 빼앗으려고 나를 꾀지만은 예수이름으로 명하노니 너는 물러가라! 타협을 하지 말고 받아주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단호하게 대해야 되는 것입니다.

요번에 북한이 한번 협박을 해보았는데 우리 대통령 이하 정부 지도자들이 대단히 강하게 대하니까 뒤로 물러가지 않습니까? 약하게 나오면 그것을 틈타거나 고난을 가지고 올라고 했는데... 우리 박 대통령이 강하게 잘한 것입니다. 우리가 강하게 대하면 저쪽에서 우리가 힘이 있는 줄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사재기도 안하고 겁도 먹지 아니하고 우리 국민 전체가 조용하고 담담하게 있으니까 ‘이거 잘못 건드렸다가는 우리가 당하겠구나.’ 겁을 집어먹고 타협을 하고 나오는 것입니다.

사탄도 한 가지인 것입니다. 여러분을 따라다니면서 훼방을 하려고 하는데 여러분이 담대하게 두려워하지 않고 믿음으로 나가면 ‘잘못했다가 우리 마귀나라가 절단 나겠다. 물러가는 게 좋겠다.’ 마귀가 물러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는 것입니다. “나는 나았다. 나는 복 받은 사람이다. 나는 건강하다.” 우리가 응답받은 것을 마음에 꿈꾸어 보고 마음에 믿고 입술로 명령하면 마귀의 훼방을 이기고 능히 승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의심을 극복하고 계속 믿으면 기적이 생기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4장 20절로 21절에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다’고, 히브리서 11장 6절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우리 마음속에 태산이 옮겨가는 꿈을 꾸라는 것입니다. 태산이 옮겨가는 꿈을 마음에 꾸라. 그 꿈이야 아무도 꿀 수 있는 것입니다.

시편 145편 19절에 ‘그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의 소원을 이루어주시며, 또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 소원을 들어주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태산을 움직이는 꿈을 꾸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태산이 옮겨가는 명령을 하십시오. 민수기 14장 28절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야훼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라’ 하나님 앞에 내가 말한 대로 하나님이 말씀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배짱 있게 “가난은 물러가라! 고난은 사라져라! 질병은 고침 받으라! 슬픔과 괴로움은 떠나가라!” 태산을 옮기는 명령을 내리라는 것입니다. 시편 21편 2절에 ‘그의 마음은 소원을 들어 주셨으며 그의 입술의 요구를 거절하지 아니하였도다’ 입술로 우리의 요구를 담대하게 말할 때 하나님은 그것을 이루어주시는 것입니다. 태산을 옮기는 꿈을 꾸어야 되는 것입니다. 제일 처음에 시작부터 꿈을 꾸어야 되는 것입니다.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하는 것인데 우리가 꿈을 꾸어 그 꿈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글렌 커닝엄은 기적을 만든 사람으로 불립니다. 7살 때 다리에 큰 화상을 입어서 병원에서 의사들이 다리를 잘라야 된다고 선고를 내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일어나서 걷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고 일어나서 걷는 꿈을 마음속에 가졌습니다. 집에는 혼자 못 걸어 다니기 때문에 엄마가 휠체어에 앉혀서 그를 정원으로 나가서 산책도 시키고 시장에 갈 때도 그 의자에 앉혀서 끌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엄마가 휠체어에 그를 싣고 정원에 갖다놓고 다른 일을 보는 동안에 얘가 의자에서 굴러서 떨어져서 정원을 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팔로써 기어요. 밑에 두 다리는 못쓰니까.

엄마가 보니까 온 전신에 흙더미가 되어서 손으로 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면 어떻게 하느냐? 가만히 의자에 앉아있지 않고!” “엄마 나는 꼭 걷습니다. 누가 무어라고 말해도 나는 두 다리를 가지고 걸을 것입니다.” 매달, 일마다 엄마를 조여서 마당에 나와서 그는 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얼마 지나서 두 다리로 서서 저벅저벅 걷기 시작해요.

그 다음 그는 하는 말이 “나는 달리기 시작합니다. 저 선수들이 뛰는 것처럼 뛰는 내 모습을 바라보고 나는 뛸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매일같이 정원에 나와서 뜁니다. 뛰는 것이 사람들 보기에는 걷는 것입니다. 걷는 것이 자기에겐 뛰는 것이에요. 그런데 낙심하지 아니하고 자기는 자기가 뛰는 꿈을 꾸고 뛸 수 있다고 믿고 늘 자기에게 말하기를 “너는 뛸 수 있다.” 바라보고 믿고 입으로 말하면서.

그 어머니가 “괜한 수고하지 말고 이만큼 걷는 것도 기쁘게 여겨라.” “아니요. 어머니 저는 단거리 선수가 될 것입니다.” “그 웃기는 소리하지 마라.” “아니요. 나는 내가 뛰는 것을 바라보고 믿고 성경에 태산더러 명하여 바다로 던지라고 한 것처럼 명령을 내립니다.” 그러면서 뛰기를 시작했는데 놀랍게도 점점 뛰기 시작해서 미국의 1934년 남자 육상 1,500m에서 세계신기록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1934년 베를린올림픽대회에 미국선수로 나가서 은메달을 땄습니다. 온 미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습니다. 잘라버려야 될 두 다리를 가지고 그가 꿈꾸고 믿고 말한 결과로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서 육상선수가 되고 꿈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할 수 있다는 꿈과 믿음이 기적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여러분 꿈을 꾸십시오! 사람들이 너무나 꿈을 안 꿉니다. 여러분,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어보십시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몸 찢고 피 흘려 여러분을 죄 사함 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주시고 치료받아 건강한 사람이 되게 하시고 축복을 받아 남에게 나누어줄지라도 구걸하는 사람이 되지 아니하고.

여러분은 주님의 백성으로 천국 가게 만들어주시기 때문에 이런 것들을 꿈꾸고 믿고 나는 이런 사람이 되었다고 말하십시오. 여러분을 믿음으로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어 가십시오. 우리가 아무것도 안 되는 사람이 되어서 패배하고 낙심하고 살아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꿈을 가지고 믿음을 가지고 입술로 고백하면 상상할 수 없는 역사가 여러분에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결론>

주님은 여러분 보고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아십니까? “어찌 이렇게 두려워하느냐! 어찌 믿음이 없느냐!” 주님이 각 사람에게 분량대로 믿음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믿음이 있습니다. 믿음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읽음으로써 믿음이 자라고 성령이 믿음을 자라게 하고 시련을 견디므로 믿음이 자라게 되어서 겨자씨만한 믿음이 사과만큼 큰 믿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에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이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개인을 위한 믿음만 가지지 말고 이웃사람을 위해서 기도해주면 그 기도가 기적을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음으로 양으로 믿음이 우리의 생활 속에 굉장한 도움을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저는 많은 사람이 안수기도를 받으러 오는 것입니다. 중요한 시험을 칠 때 기도를 받으러 옵니다. 그런데 항상 내 맘속에 내가 기도한다고 시험을 치는 사람이 도움이 될 것이냐? 그럴 때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너가 기도해주는 것이냐? 네 기도를 통해서 내가 축복을 해주는 것이다. 내가 축복을 해주면 내 능력으로서 잘된다.”

제가 참 존경하는 법조계에 계시는 분이 계신데 그 아들들이 미국에 하버드 대학 그 외, 훌륭한 대학에 졸업을 하고 미국의 중요한 시험에 시험을 치기 위해서 기도해달라고 그럽니다. 그 지금 미국에 있는데 어떻게 하냐고 했더니 날짜를 정해주면 미국에서 한국까지 데리고 나오겠다는 것입니다. 내 가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보다 그 사람 믿음이 더 강한 것 같아요. 한국에 와서 내게 기도를 받고 미국에 들어가서 시험을 치겠다. 그래서 나오라고 할 수도 없고, 나오지 말라고도 할 수도 없고. 나오라고 하려니 내가 믿음도 없는 녀석이 쓸데없는 소리 하는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이 나고 마음에 내가 시련을 겪었습니다.

내가 기도를 하고 하나님께 어떻게 할까요? 나오라고 할까요? 나오지 말라고 할까요? 그러니까 마음에 성령이 말씀하신 것이 “니가 그에게 축복을 주겠느냐? 내가 주겠느냐?” “그 주님이 주시는 것이지요.” “그러면 내가 팔다리를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 니는 팔다리를 좀 빌려다오.” “아 그야 빌려드리지요.” 그래서 나오라했습니다. 나오라 해서 제가 그들에게 안수기도를 간절히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미국으로 들어가서 두 사람이 다 중요한 시험에 합격을 해서 지금은 대단히 높은 자리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 형제가 나를 만나서 말씀하기를 “그때 목사님이 기도해 주셔서 우리 조카가 이렇게 훌륭한 인물들이 되었는데 이제 나를 위해서 좀 기도해 주십시오. 나도 나이가 많이 먹었지만은 할 일 없이 세상을 지나갈 수야 있겠습니까? 나도 일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그래서 그 조카 위해서 기도할 때보다도 담대한 믿음으로 기도를 했습니다. “일이 생겨날지어다!” 곧 좋은 소식을 들어올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들도 꼭 제게 안수기도를 받으면 좋은 일이 생겨날 줄 믿으면 받으러 오십시오.

마가복음 4장 35절로 41절에 보면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주님께서 환경을 바라보시고 ‘잠잠하라! 고요하라’! 명령하시니 바람과 바다도 명령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보고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믿음은 그냥 자기 일신의 문제 뿐 아니라 환경의 바람과 바다도 잠잠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사를 형통케 할 수 있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죄 사함 받고 천국 가는 것은 말할 필요 없습니다. 구원받은 믿음인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구원받는 믿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병 고침 받는 건강 하라는 믿음도 있고, 물질적으로 축복을 받아 부하게 되는 믿음도 있고, 선한 일을 많이 하고 착한 일을 많이 해서 하나님께 칭찬받는 믿음도 있고, 그 믿음을 여러 방면에서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믿음이 없는 자가 아니라 믿음이 있는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태어날 때부터 믿음을 주셨으므로 자기가 믿음이 있는 자라는 것을 항상 확인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믿음을 자라게 하는 것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을 늘 읽어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은 여러분이 마음대로 만들어서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통해서 믿음이 자라고 기도하면 성령의 은혜가 와서 믿음을 자라게 하는 것입니다. 말씀과 성령을 통해서 믿음이 자라고 또 우리에게 다가오는 여러 가지 시험과 환난을 기도하고 믿음으로 이기므로 믿음이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이 평소에 말씀을 읽고, 성령으로 충만하고, 시련을 참고 견디고, 경험을 얻고, 그래서 믿음이 자라면 그 믿음을 통해서 자기도 자라고 발전하고 이웃도 자라고 발전하게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 예수 믿는 사람에게 가장 귀한 것입니다. 보배로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활용할 때 항상 꿈을 꿔야 되는 것입니다. 먼저 여러분이 소원하는바 목적의 꿈을 꾸는 것입니다. 그 꿈이 이루어지는 것을 마음속에 바라봐야 되는 것입니다. 무지개를 바라보듯 꿈을 바라봐야 돼요. 적은 꿈도 있고 큰 꿈도 있는데 꿈을 이루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늘에 별들 같이 많은 자손들의 꿈을 꾸고 믿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여러분이 바라는 바 원하는 것이 이루어진 것을 마음에 꿈꾸고 그걸 바라보고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믿습니다. 하나님이 이루어주실 줄 믿습니다. 그리고는 입술로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말해야 되는 것입니다. “바람아 잠잠하라! 물결은 고요하라! 병은 물러가라! 사업은 이루어질지어다!” 창조적인 명령을 내려야 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단계를 여러분 꼭 잊지 마십시오. 따라 말씀하세요. “첫째, 꿈을 가지자. 둘째, 믿자. 셋째, 입술로 고백하자!” 꿈을 바라보고, 믿고, 입술로 고백하는 것, 이 세 가지 형태를 통해서 여러분 마음 속에 주신 믿음은 자라고, 활동하고, 기적을 베풀어주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너무나 기적을 체험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적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이 자라는 것입니다. 그냥 세상 다른 종교와 같이 종교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생활에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에 잘 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는 기적을 창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여러분과 같이 계셔서 여러분이 꿈을 꾸고 믿고 입술로 명령하는 것을 이루시려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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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무엇​이며, 왜 필요​한가?

사람​들​은 믿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며, 그런 견해​가 잘못​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믿음​은 마음​을 끄는 특성​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은 믿음​이란 아무런 명백​한 증거 없이 그냥 믿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믿음​을 하찮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견해​입니다.
믿음​은 맹신​과 다릅니다.
믿음​은 단순​한 느낌​이 아니며, 그저 무언가를 믿는 것 이상​을 의미​합니다.
맹신​은 위험​합니다.
단순​한 느낌​은 생겼다가도 사라질 수 있습니다.

또한 하느님​에 대해서는 그저 믿기​만 하는 것 역시 충분​하지 않습니다.
성서​에서는 “악귀​들​도 믿고 떤다”고 알려 주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2: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You believe that there is one God. Good! Even the demons believe that--and shudder.

우리​의 믿음​은 보이지 않는 어떤 두 가지 부류​의 것​에 초점​을 맞춥니까?
우리​의 믿음​은 얼마나 확고​한 근거​에 기초​해 있어야 합니까?
예​를 들어 설명​해 보십시오.

진정​한 믿음​에는 그러한 것​들​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성서​에서 믿음​을 무엇​이라고 정의​하는지 유의​해 보십시오.

히브리서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Now faith is being sure of what we hope for and certain of what we do not see.

바울​은 믿음​이 우리​가 볼 수 없는 두 가지 부류​의 것​에 초점​을 맞춘다고 말​했습니다.

첫째​로, 현재 존재​하고 있지만 “보이지 않는” 실체​에 초점​을 맞춥니다.
문자적​인 눈​으로는 여호와 하느님​이나 그분​의 아들, 지금 하늘​에서 통치​하는 왕국 등 영계​에 있는 실체​를 볼 수 없습니다.

둘째​로, “바라는 것​들” 즉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들​에 초점​을 맞춥니다.
지금 우리​는 조만간 하느님​의 왕국​이 가져올 신세계​를 볼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실체​와 바라는 것​들​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근거​가 없는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진정​한 믿음​은 확고​한 근거​에 기초​해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는 믿음​을 가리켜 “보증​된 기대”라고 했을 때 “권리 증서”로도 번역​될 수 있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누군가​가 당신​에게 집 한 채​를 주기​로 했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는 집​에 대한 증서​를 건네주면서 “당신 집 여기 있어요”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당연​히 그 말​은 당신​이 그 종​이 위​에서 살 것​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 문서​가 강한 법적 구속력​이 있기 때문​에 사실상 집 자체​와 같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와 비슷​하게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께서 자신​의 말씀​에서 하신 모든 약속​이 실현​된 것​이나 다름없다는 확신​을 갖게 해 줍니다. 

진정​한 믿음​에는 무엇​이 포함​됩니까?

따라서 진정​한 믿음​에는 여호와 하느님​께 명확​히 초점​을 맞춘 흔들리지 않는 신념​과 충분​한 근거​에 기초​한 확신​이라는 의미​가 포함​됩니다.

믿음​이 있으면 하느님​을 사랑 많은 아버지​로 여기게 되며 그분​이 하신 약속​이 모두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신뢰​를 갖게 됩니다.
하지만 진정​한 믿음​에는 그​보다 더 많은 것​이 포함​됩니다.
진정​한 믿음​은 생명체​와도 같아서 자양분​을 공급​해 주어야만 살아 있을 수 있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행동​으로 표현​되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죽게 됩니다.

야고보서 2:26
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As the body without the spirit is dead, so faith without deeds is dead.

믿음​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믿음​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울​이 한 말​에는 그​에 대한 분명​한 대답​이 들어 있습니다.

히브리서 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And without faith it is impossible to please God, because anyone who comes to him must believe that he exists and that he rewards those who earnestly seek him.

믿음​이 없으면 여호와​께 다가가거나 그분​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성 있는 피조물​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고상​한 목적​을 이루려면 즉 하늘​에 계신 아버지 여호와​께 가까이 가고 그분​께 영예​를 돌리려면 믿음​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이 필요​하다는 점​을 알고 계심​을 어떻게 나타내 오셨습니까?

여호와​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잘 아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믿음​을 길러 나가고 나타내는 방법​을 배울 수 있도록 여러 모범​을 주셨습니다.
그분​은 그리스도인 회중​에 인도​하는 일​을 하는 모범​이 되는 충실​한 남자​들​을 주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고 권합니다.

히브리서 13:7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
Remember your leaders, who spoke the word of God to you. Consider the outcome of their way of life and imitate their faith.

하느님​이 주신 모범​은  그 외​에도 더 있습니다.
바울​은 “구름​같이 많은 증인​들” 다시 말​해 믿음​의 탁월​한 본​을 남긴 고대​의 남녀​들​에 대해 썼습니다.


히브리서 12: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Therefore, since we are surrounded by such a great cloud of witnesses, let us throw off everything that hinders and the sin that so easily entangles, and let us run with perseverance the race marked out for us.

바울​이 히브리서 11장​에 기록​한 이​들​이 충실​한 사람​들 전부​는 아닙니다.
성서​에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온갖 배경​을 가진 사람​들​의 실제 이야기​가 가득 들어 있습니다.
믿음​을 나타낸 그​들​의 삶​은 믿음 없는 현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커다란 교훈​이 됩니다.

충실​한 사람​들​의 믿음​을 어떻게 본​받을 수 있는가?

성서​에 나오는 충실​한 남녀​를 본​받는 데 개인 연구​가 어떻게 도움​이 될 수 있습니까?

누군가​를 본​받으려면 먼저 그​를 자세히 관찰​해야 합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믿음​을 나타낸 남녀​들​을 잘 관찰​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많은 연구​와 조사​가 이루어졌다는 점​을 알게 될 것​입니다. 당신​도 그​와 같이 스스로 연구​와 조사​를 해 볼 수 있습니까?
개인 연구​를 할 때, 활용​할 수 있는 여러 도구​를 사용​하여 성서​의 내용​을 깊이 파고들어 가 보십시오.
연구​하는 내용​을 묵상​하면서 성서​에 기록​된 일​이 일어난 상황​과 배경​을 머릿속​에 그려 보십시오.
당시​의 장면​을 눈​으로 보고 소리​를 듣고 냄새​를 맡으려고 해 보십시오.
더 중요​한 점​으로 성서​에 나오는 인물​들​의 감정​을 분별​하려고 노력​하십시오.
그 충실​한 남녀​들​의 감정​을 이해​해 감​에 따라 그​들​이 더욱 실제적​으로 느껴지고 친숙​해질 것​입니다.
심지어 어떤 인물​들​은 오랫동안 알고 지낸 소중​한 친구​처럼 여겨질지 모릅니다.

어떻게 하면 아브람​과 사래​가 더 친밀​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까?
한나​와 엘리야, 사무엘​의 모범​으로부터 어떻게 유익​을 얻을 수 있습니까?

성서 인물​들​을 정말​로 잘 알게 되면 그​들​을 본​받고 싶은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예​를 들어 당신​이 새로운 임무​에 대해 심사숙고​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여호와​의 조직​을 통해 어떤 방식​으로인가 봉사​의 직무​를 확장​하라는 제의​를 받았습니까?
어쩌면 전파자​들​이 절실​히 필요​한 지역​으로 이주​하라는 권고​를 받았을지 모릅니다.
혹은 익숙​하지 않거나 별로 내키지 않는 형태​의 봉사​를 시도​해 보라는 제안​을 받았을 수 있습니다.
그 점​에 대해 숙고​하고 기도​하면서 아브람​의 본​을 묵상​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겠습니까?
아브람​과 사래​는 우르​에서의 편안​한 생활​을 기꺼이 포기​했고 그 결과 풍성​한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들​의 발자취​를 따르다 보면 틀림​없이 그​들​을 훨씬 더 잘 알게 되었다고 느낄 것​입니다.

가까운 누군가​가 당신​을 악의적​으로 대해서 낙담​해 있습니까?
심지어 집회​에 가지 않고 집​에 있고 싶은 마음​이 들기​까지 합니까?
한나​가 브닌나​에게서 악의적​인 대우​를 받으면서도 어떻게 인내​했는지 그​의 모범​을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하면 올바른 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될 뿐 아니라 한나​가 더 친밀​한 친구​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또는 자신​이 무가치​한 존재​라는 생각 때문​에 실의​에 빠져 있습니까?
엘리야​가 어떤 곤경​에 처해 있었고 여호와​께서 어떻게 그​를 위로​해 주셨는지 연구​해 보면 엘리야​가 더욱 가깝게 느껴질지 모릅니다. 학교​에서  부도덕​한 행동​을 하라는 압력​에 시달리는 청소년​들​은 사무엘​의 모범​을 연구​해 보십시오.
장막​에서 엘리​의 아들​들​이 타락​한 행동​을 했을 때 사무엘​이 어떻게 처신​했는지 연구​한다면 사무엘​이 더 친한 친구​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성서 인물​들​의 믿음​을 본​받으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당신​의 믿음​이 지닌 가치​가 떨어집니까?

성서 인물​들​의 믿음​을 본​받으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당신​의 믿음​이 지닌 가치​가 떨어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에서 다른 사람​들​의 믿음​을 본​받으라고 권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하십시오.

고린도전서 4:16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Therefore I urge you to imitate me.

데살로니가후서 3:7, 9

어떻게 우리를 본받아야 할지를 너희가 스스로 아나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무질서하게 행하지 아니하며.
For you yourselves know how you ought to follow our example. We were not idle when we were with you.

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보여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
We did this, not because we do not have the right to such help, but in order to make ourselves a model for you to follow.

마리아​는 한나​의 기도​에 들어 있는 표현​을 언급​한 것​으로 보입니다. 마리아​는 한나​를 자신​이 따라야 할 모범​으로 보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마리아​의 믿음​이 강하지 않았다고 생각​해야 합니까? 아닙니다! 한나​의 모범 덕분​에 마리아​는 믿음​을 키워 나갈 수 있었고 여호와 하느님 앞​에서 비길 데 없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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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관계라고 하겠습니다.
관계란 신앙의 대상이 되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삼위일체(三位一體)로 존재합니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성부(聖父), 성자(聖子), 성령(聖靈)을 말합니다.

첫째는 나와 하나님의 관계

히브리서 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하나님(GOD)


둘째는 나와 예수님의 관계

예수님(JESUS)

히브리서 5:7-10


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8.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9.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10.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


셋째는 나와 성령님의 관계

요한복음 16: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성령님(SPIRIT)







성경은 비유로 말씀하는 부분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이사야 34:16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신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

마태복음 13:34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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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고린도후서 13:5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모든 인간은 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본능적인 모순을 안고 있습니다.
자신은 실수를 하면서도 남의 실수를 용납하지 않거나, 자기의 이익에 집착하다가도 자신과 관계가 없는 일에는 냉정해 버립니다.
이렇게 죄성과 모순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것은 매우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동안 갈등이나 분쟁이 일어나는 것은 결국 죄성과 모순이 만나서 서로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시험의 과정이라 합니다.

본문에서는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라는 질문 뒤에 ‘너희 자신을 시험하라’고 합니다.

시험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과정에서 반드시 거쳐야 할 절차입니다.
시험을 통하여 알아가고 깨달아가며 성숙한 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지만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자유로운 인생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 자신을 시험해보아야 합니다.

욥이 갑자기 들이닥친 고난 앞에서 엄청난 시험을 겪으면서도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음과 양심의 시험을 만날 때 남이 아니라 자신을 시험해야 하고 또 다른 시험으로 연결되지 않도록 삼가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또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 합니다.

우리는 ‘기본에 충실하라’는 말이나 ‘본질에 충실하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됩니다.
믿음의 기본에 충실한 것은, 자신의 고정관념이나 욕심이나 자기 우월감이나 감정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본질에 충실히 한다는 것은 자신이 서 있어야 할 위치와 감당해야 할 역할과 사명이 무엇인지를 확신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기회를 엿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살피고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기회는 인간을 바른길로 가게 하기보다는 바르지 않은 길로 가도록 방향을 열어주기가 쉽습니다.

창세기에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는 질문 속에는 많은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 가능성의 결과는 비참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놓고 기회를 엿보는 것이 아니라 기본과 본질에 충실하고 자신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고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성은 몰라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알기 때문에 일어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모르는 사람은 모르기 때문에 순수할 수 있으나 아는 사람은 알기 때문에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찾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상교회를 세우는 것은 세상의 어떤 공동체를 세우는 것보다 힘든 일입니다.
각기 다른 성격 성향 기질 환경 습관 경험 인식 사고방식을 한 공동체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공동체가 시험에 빠지게 되면 회복할 수 없는 깊은 상처가 남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했지만, 사람의 욕심으로 분쟁이 일어나기 때문에 후유증이 오래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해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동일한 믿음의 선물과 성경의 약속과 성령의 감동을 주셨기 때문에 얼마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고 회복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질문합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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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개론 /





창세기(創世記 /    )

- 창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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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出埃及記 /    )

- 출애굽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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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레위기 /    )

- 레위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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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民數記 /    )

- 민수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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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申命記 / דְּבָרִים 데바림, / Δευτερονόμιον 데우테로노미온 /   Book of Deuteronomy)

- 신명기는 17:16
말을 사지 말라,
율법책을 등사(복사)하여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우라!

신명기는 타나크의 율법서 토라의 다섯 번째 책.
구약 성경의 다섯 번째 책이다.
이스라엘인들이 가나안 땅에 도착하기 전, 모세가 야훼의 가르침을 마지막으로 전하고 죽기까지의 내용을 담고 있다.
대부분 출애굽기와 민수기 등에 등장했던 가르침이 반복되는 내용이기 때문에 신명기라는 이름이 붙었다.

창세기 / 아들의 이야기 -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죽이려는 사건에서 예수 십자가

출애굽기 / 십계명 이야기 - 성막

레위기 / 거룩의 이야기 -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 피가 흐르는 성막 히브리서의 피흘림과 죄사함

민수기 / 광야의 이야기(백성의 수를 계수) 

신명기 / 순종 이야기

  1. 신약에서 가장 자주 인용하는 책 / 80번 언급
 
  * 존 스타트 : 성경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

 모든 성경의 중심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
 예수의 강 위로 66개의 다리가 놓였다.
 
  2. 모세의 설교 3편

  1차 설교 / 1-4:43
  2차 설교 / 4:44-29:1
  십계명 : 출애굽기 20장 안식일(창조), 신명기(구속을 이야기, 애굽에서)
  3차 설교 / 29:2-30:20
  결론 / 31-34

  * 왜 출애굽을 시켰나? 약속의 땅에 들어가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광야에서 1세대들은 죽었다.
    광야에서 태어진 2세들만 가나안 땅에 들어간다.

1. 재판 / 신명기 16:19 - 법정에서

너는 재판을 굽게 하지 말며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며 또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지혜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인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2. 저울 / 25:13-15 한결같지 않은 추 - 시장에서

너는 네 주머니에 두 종류의 저울추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넣지 말 것이며.
네 집에 두 종류의 되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두지 말 것이요.
오직 온전하고 공정한 저울추를 두며 온전하고 공정한 되를 둘 것이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 날이 길리라.

3. 진실 / 32:4, 20

그는 반석이시니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

그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얼굴을 그들에게서 숨겨 그들의 종말이 어떠함을 보리니 그들은 심히 패역한 세대요 진실이 없는 자녀임이로다.

  * 십계명이 실천되는 사회가 건강한 공동체가 된다.


신명기 신학

신명기 30:15-20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로 행하며 그의 명령 규례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 다른 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내가 오늘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너희의 이 길지 못할 것이니라.내가 오늘 하늘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이삭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

신명기 30:16은 신명기 신학이라고 한다.

* 땅은 구약의 역사서의 주제가 된다.
  땅에서 쫓겨나는 사건이 일어난다.

가나안 - 공동체 - 건강한가? 아닌가?
건강한 공동체가 되려면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는 것이다.

요한복음 14:21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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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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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사람이란 누구인가?
고린도전서 2:10~16



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11.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16.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하나님께 받은 것이 무엇인가요?
사도 바울 시대에도 그렇고 오늘날에도 ‘성령’님에 대한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성령 충만 대 성회, 폭포수 같은 성령을 경험하세요. 이 집회에서 성령 충만을 경험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령 충만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장소에서, 그곳에서 인도하는 누군가가 ‘성령’을 준다는 인상을 준다는 것입니다.

제가 너무 부정적인지 모르지만, 그 집회와 강사가 그래서 특별히 신령하다는 듯한 인상을 준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표현하기는 민망한 부분도 있는데, 마치 무당이 굿을 하며 선전하듯이, 점쟁이가 자신의 능력이 얼마나 되는지를 자랑하듯이, 무슨 부적을 써주는 스님이 영험하다든지.
제가 이렇게 표현한 것이 민망한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본문의 구절이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영적인 일’이 무엇인가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혹은 학교에서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이신 일입니다.
신앙의 본질을 흐트러뜨리는 일들은 하나님의 것을 영적으로 알려고 하지 않고 세상의 방법으로 알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누군가 대신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통하지 않고 조금 쉽게 알고자 하는 얄팍한 욕망은 아닐까요?

2천 년 전 초대교회에서 있었던 문제가 어떻게 우리와 이렇게 같은지, 종교개혁을 공부하며 그 시대의 개혁이 오늘의 개혁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과 1960년대 가장 강력하게 복음을 전했던 A. W. 토저의 책을 보면서 그 시대를 향한 예언자의 외침이 오늘날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교회도 너무 빈약하고 참 초라했던 때, 영성가였던 이용도 목사님의 삶과 설교가 어떻게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그렇게 적절하게 교훈이 되는지 말입니다.

한국교회 초대사에 영성가로 알려진 이용도 목사님이 1930년에 썼던 일기의 내용입니다.

현대의 교인은 ‘괴이한 예수’를 요구하매 현대 목사는 괴이한 예수를 전하다.
참 예수가 오시면 꼭 피살될 수밖에 없다.
참 예수는 저희들이 죽여 버리고 말았구나.
그리고 죄의 요구대로 마귀를 예수와 같이 가장하여 가지고 선전하는구나.
화 있을진저 현대 교회여!
저희의 요구하는 예수는 육(肉)의 예수, 영(榮)의 예수, 부(富)의 예수, 고(高)의 예수였고
예수의 예수는 영(靈)의 예수, 천(賤)의 예수, 빈(貧)의 예수, 비(卑)의 예수였나이다.

예수를 요구하느냐?
하나님의 아들을 찾으라,


인(人)의 예수 - 너희가 만들어 세운 예수 말고!

예수를 갖다가 너희 마음에 맞게 할 것이 아니라
너를 갖다가 예수에게 맞게 할 것이니라.
 
이용도 목사님의 일화입니다.
만주 용정에 신학교 동기이자 형 같았던 이호빈 목사님께서 목회하시던 교회에 초청을 받아 부흥회를 인도하게 되었답니다.
설교하기 전 준비 찬송을 하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이용도 목사님이 강단에 오르지 않는 겁니다.
그저 강단 중앙 의자에 쪼그려 앉아 기도만 합니다.
시간이 자꾸 지나 강사 목사님을 쳐다보았지만, 요지부동입니다.
그때 쪽지가 하나 올라왔습니다.

형님, 오늘은 주님께서 말씀을 주시지 않네요.”

그래서 그날 저녁 그렇게 찬양만 하다가 사람들이 돌아갔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부터 강력한 성령님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했답니다.

주님이 주셔야 하는 것,
성령이 오셔야 하는 것,
이것이 복음의 이야기가 아닐까요?

쉐인 클레어본(Shane Claiborne)
저서 "믿음은 행동이 증명한다"

우리가 가난한 사람을 도우면 사람들이 우리를 착하다 칭찬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처럼 살려고 하면 십자가에 매달 것입니다.”

영적인 흉내를 내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영적으로 산다는 것은 그렇게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여기서 “통달하신다”라는 말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신다’라는 말입니다.

통달’이란 단어를 국어사전에서 보니까 ‘어떤 것을 막힘이 없이 환히 다 알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영어 성경에는 이 부분을 ‘search’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것은 ‘구석구석 다 검색해서 알아낸다’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어 인터넷에 엠파스나 네이버와 같은 search engine이 있습니다.
이것은 바다와 같은 인터넷을 샅샅이 이 잡듯이 뒤져서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정보를 찾아주는 검색 사이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가장 주목해 보아야 하는 것은 성령께서 ‘통달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라고 말씀합니다. 강력한 search engine을 가지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도록 우리를 인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어떤 부분에 어떻게 관여하시는지를 알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영적인 사람이 되어 갑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이 세상에 계실 때 우리에게 약속하신 부분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6~17절에서 예수님은 성령님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그럼 우리에게 궁금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깊은 곳에 무엇이 있을까요?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죄인 하나까지도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주신 ‘사랑’이 있습니다.
그 사랑은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다 기록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깊은 곳에 무엇이 있을까요?

거룩하심’입니다.
더러운 죄가 하나님 앞에서 대낮같이 드러납니다.
그 거룩하심 앞에서 우리의 존재가 순결해져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앞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머리를 들 수 없는 겸손함이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교만하게 머리를 뻣뻣하게 들고 있다면 하나님에 대하여 알고 있지 못하다는 증거입니다.
아니, 지식적으로는 알아도 영적으로 하나님을 깊이 알지 못한다는 증거입니다.

사도 바울이 주님을 영적으로 알게 된 후에 어떤 고백을 하나요?
빌립보서 3장 8절 말씀에서 그는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아는 특권을 누리게 된 후에 자신이 자랑스럽게 여기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쓰레기통에 버렸습니다.

“가장 귀한 것을 위해 가장 귀하지 않은 것을 버리는 것!”
이것이 영적인 일이 아닐까요?

"삶의 어떤 순간에도 하나님"
페리 노블(Perry Noble)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면 지옥에 간다고 말한다.
인생 최대의 문제점은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가장 시급한 문제는 잘못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상상 이상으로 사랑하시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만나면 말 그대로 십자가를 건너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아간다.
그런데 십자가 오른편으로 넘어가기만 하면 삶이 편해진다는 오해가 교회 안팎에 만연해 있다.

사람들은 크리스천이 완벽한 삶을 산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우리가 술 담배를 전혀 하지 않고 종일 찬양만 부르는 줄로 안다. 하지만 내가 20년 넘게 목회를 하면서 보니 십자가 저편만큼이나 이편에도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

그리스도를 만나면 죄의 형벌에서는 완전한 구원을 받지만, 죄의 효과에서는 벗어나지 못한다.
구원을 받은 뒤에도 우리는 스스로 죄를 짓고 남들의 죄에 상처를 입으며 여전히 이 망가진 세상에서 살아간다.
그리스도를 만나 십자가 너머로 건너간 뒤에 우리가 할 일은 완벽한 이미지를 가꾸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님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사실을 더 절실히 깨닫고 날마다 그분과 더 깊은 사랑에 빠져야 한다.

예수님은 아무런 문제점이 없는 완벽한 사람들과 동행하시지 않았다.
그분이 완벽한 사람들을 부르시지 않았는데 왜 우리는 그분의 몸에 완벽한 사람들만 가득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육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일

영적이라는 말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 충만해져서, 하나님과 함께 인격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성령께서 가능케 하시는 사역이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안에는 ‘영적’인 것과 ‘영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 사이에 혼동이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조금 더 명백하게 ‘육적인 사람’과 ‘영적인 사람’을 대비하여 말하는 듯합니다.

13~14절을 보세요.

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육적인 사람을 희랍어에서는 ‘프쉬키코스 안드로포스’라고 말하는데,
성경에서는 ‘영적인 사람’과 대조되는 개념입니다.

즉 감각적 성질, 자신의 욕구와 격정의 지배를 받는 사람입니다.
앞부분과 연결해서 보면 성령님을 모르기 때문에,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즉 구원받지 못한 자들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특징이 무엇인가요?
하나님 없이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치는 말로 하지 않습니다.
지혜가 필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지혜를 넘어선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합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만 분별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의 특징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성령께서 하시는 일들이 어리석게 보입니다.
육적인 사람들에게는 세상의 욕심과 육혹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는 것이 어리석게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이 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모릅니다.

지난해 알래스카에 가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한국에서 온 신혼부부가 당한 비참한 소식입니다.
앵커리지 인근 바다는 밀물과 썰물이 있습니다.
그런 바다의 갯벌에는 먹을 것이 많지요.
한국에서 온 사람들에게 갯벌에 펼쳐진 커다란 조개를 마음껏 주울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매력적인 일이겠습니까?
물이 들어오는 시간이 순식간이기 때문에 함부로 들어가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신혼부부가 갯벌에서 조개를 잡다가 그만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고 말았습니다.
매력적인 일이 눈에 보이면 지켜야 할 것들이 우습게 보이는 모양입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말을 우리가 잘 듣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육적인 눈으로만 세상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영적인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별이 되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14절)

언젠가 이 부분을 묵상하며 적었던 글이 있습니다. 좋은 예가 될 듯하네요.
고린도전서 2장 후반부에서 사도바울의 이야기를 유진 피터슨은 메시지 성경에서 이렇게 풀어쓰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아는 것은, 책을 읽거나 학교에 다녀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직접 배웠기 때문입니다. 영에 속하지 않은 사람은 본질상 하나님의 영의 선물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영을 알 수 있는 통로는 영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과 우리의 영은 막힘없이 서로 통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을 가졌습니다."

영적이다!
이 말은 때로 ‘우리가 이해하기 힘들다!’라는 말일 수도 있죠.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이 우리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미국신학교 이사회에 참석했을 때 케노샤라는 지역에 사는 한인 가정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미국에 이민 와서 어느 정도 성공도 하고 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가정입니다.
그래서 14년 전 한국에서 온 한 가정을 열심히 전도했답니다.
그러다 보니 미국에 온 첫해 절에서 운영하는 수련회에 참석하고 온 아이들이 바로 교회 수련회를 가게 되었고 혼란스러웠죠.
계속해서 전도하는 이 가정 때문에 새로 이사 온 한국 분은 이렇게 말을 했답니다.

"나는 교회는 안 다녀 혹시 아이 아빠가 목사가 되면 그 교회나 다닐까?"

그런데 어제 끝까지 신앙을 갖지 않은 그 사람이 식사를 도우려 함께 하게 되었고, 또 자연스럽게 전도하는 분위기가 되었죠.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도저히 목회는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한 말이었는데, 그 집 아기 아빠가 지금 신학을 공부하며 목회를 준비하고 있네요.

제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자매님! 당신 한 사람을 위해 저분이 목회를 하게 되었네요. 14년 전 한 그 말을 잘 지키세요."

참으로 신기하죠.
그때 상황을 모면하려고 한 말을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구원하시려는 계획 말입니다.
그분이 왜 목회를 하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어쩌면 하나님의 계획 속에 한 사람을 향한 사랑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의 이야기가 그런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의 이야기는 영으로 보이는 것과 이해되는 것이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가 영의 눈을 들어보며, 나 하나를 위해 일하시는 세밀한 하나님의 손길도 경험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 세상에 일어나는 육적인 일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영적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영에 속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됩니다.


영분별은…
이제 중요한 문제가 남게 됩니다.

우리가 세상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기 위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하는데 어떻게 분별하느냐는 것이죠.

신앙생활의 영역에서 가장 어려운 일 중의 하나가 ‘분별’입니다.

오늘 본문 15~16절을 보세요.
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16.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참 오해하기 쉬운 부분입니다.
대개 영적이라는 사람들이 하는 말입니다.

2천 년의 기독교 역사 가운데 모든 이단이 주장하는 것이 “영적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 많은 사람이 판단할 근거가 없기에 맹목적으로 따라가기도 합니다.

지난해 또 한 번 세상을 현혹시킨 여자 선지자가 있습니다.
“자칭 선지자”입니다.
아무리 봐도 무당 같은데 말입니다.
영적이라고 주장하고, 또 하나님께로부터 계시를 받았다고 하니 사람들이 쉽게 판단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아주 중요한 근거가 있습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영적인 것의 기준은 우리가 알아들을 수 없는 모호한 이야기들이 아니라 아주 명백하게 하나님의 마음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홍혜선 자칭 전도사의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대한민국에 12월 14일 오전 4시 30분에 전쟁이 일어날 것이므로 피신하자는 것입니다.
미국에 있는 누군가의 집이 노아의 방주가 될 것이니, 그곳으로 피신하자는 것입니다.
전쟁이 일어나는데 자기 혼자 살기 위해 한국을 떠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 있는 것인가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조국과 가정을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요?
그렇게 영적이라고 생각하면서 ‘노아의 방주’란 단지 이생의 목숨을 건지는 것인가요?

참으로 신기한 말을 합니다.
땅굴을 부정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말입니다.
어떻게 땅굴의 존재로 인간의 구원이 좌우됩니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념이 있고, 조국이 있지만 어떻게 공산주의자들은 용서받지 못하고 지옥에 가야 합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인가요?

영적인 것처럼 보이는데 주님의 마음이 없다면, 하나님의 영이 아닌 것이 분명하지 않나요?
매번 이야기하지만,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치시면서 돈을 요구한 적이 있으신가요?
삭개오의 집에 방문하셔서, 회당장의 딸을 고치시고, 돈을 요구하신 적이 있으신가요?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왜 이렇게 무지한가요?
영적인 것을 영적으로 분별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인격적이지 않기 때문에 누군가의 말에 쉽게 놀아나는 것은 아닌가요?

바울은 로마서 8장 9절에서 분명하게 말합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한, 로마서 8장 15절에서도 다시 말합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養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이전에 우리가 살펴보았던 ‘육에 속한 사람’이 감각적이고, 육신적이고, 욕망적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본성의 지배를 받기 때문입니다. 이와 반대로 ‘신령한 자’는 영적인 사람인데, 성령을 받아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성령의 지배를 받을 수 있을까요?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셔야 합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더러운 곳에 거하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구원받은 거듭난 성도들을 향해 말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이 거룩한 성전임을 알지 못하느냐?”

구원받은 자의 진정한 고백이 있을 때,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십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성령님을 초청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하는 말입니다. 성령님은 인격적이십니다. 우리 속에 들어오실 수도 떠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일에 대하여 인격적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영적인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성령님을 초청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주사 세상을 ‘판단하고 분별’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그렇게 하나님께 신실한 사람들이 변하는 것을 봅니다.
어떻게 그렇게 훌륭한 사역자가 욕심이 생길 수 있는가?
어떻게 그렇게 자기중심적일 수 있는가?
이유가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영이 떠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사람이 되면 성령이 떠나간 사람들에 대하여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담대해야 합니다. 영적으로 분별하여 하나님의 마음이 아닌 것을 명확히 해야 합니다.

이것은 ‘비난’과 다른 것입니다.
진리를 말하는 것과 비난하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단순한 비난은 상처로 사람을 아프게 하고 죽이게 하지만, 성령님께서 깨닫게 하시는 아픈 지적은 죽은 살을 제거하고 새살을 돋게 합니다. 그러므로 비난이 있는 곳에는 어둠과 죽음이 지배하지만, 성령님께서 임하시는 곳에는 새로운 생명을 향한 창조적 아픔이 있을 뿐입니다.

오늘 중요한 말씀이 있죠?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15절)
이것은 교만이 아니라 오직 성령님께만 판단을 받겠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세상의 정욕과 사탄의 유혹에 쉽게 흔들리지 않겠다는 다짐입니다. 적어도 성도라면 이런 자신감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도’가 무엇입니까? 목사의 말을 따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다른 성도의 말을 따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성도와 목사에게 돈으로 사기를 당하고, 어떻게 그렇게 쉽게 성적인 유혹에 넘어갑니까? 하나님의 마음이 아닌 육신의 소욕으로 접근하는 데 말입니다.
다시 한 번 요한복음 14장 16~17절 말씀에 주목하십시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입니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오늘 본문 13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현재 고린도 교회가 처한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는 ‘분열’입니다. 이 문제의 근원이 무엇일까요? 신령한 판단이 아니라 사람의 판단 때문이라는 것이죠.
사람의 판단은 자기 기준에 의해 정죄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기준에 의해 자신을 드러내려는 이기심과 교만입니다. 육적인 판단은 남을 배려하기보다는 자신의 이기심을 충족시키려고 합니다. 이것이 분열의 가장 큰 원인입니다.

‘영적인 것’이 무엇일까요?
성령이 가르치시는 것을 아는 것,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가 흔히 착각하는 것은 ‘신앙적 열심’을 영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제가 만나 교회에서 지난 일들을 생각하며 깨닫게 된 것이 있습니다.
교인들과 장로님들을 설득해야겠다고, 가르쳐야겠다고, 변화시켜야겠다고 생각했던 적이 많습니다.
그런데 가르치고 변화시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런 생각의 깊숙한 곳에는 내가 ‘힘’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목회를 하면서 가장 편안했던 때가 언제인가를 생각해 보니, 제가 약하고 힘들 때였던 것 같습니다.
목사인 제가 누구를 이해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교인들이 저를 이해하고 도와주려고 할 때 말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영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것 같지 않나요? 이 세상은 절대로 ‘힘’ ‘정의와 공평’의 논리로 하나 된 적이 없습니다.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또 하나의 힘의 원리가 작용했을 뿐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신령한 자의 마음은 ‘하나 됨’에 있습니다. 신령한 사람은 신령한 것을 생각하며 신령한 시각으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받은 자라야 그리스도인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 보면,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로마서 8장 9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선포하였습니다.

마음속에 성령님이 계신 사람이라야 신령한 사람이 되고, 신령한 생각을 합니다. 신령한 사람들이 모여야 분열이 치유됩니다. 성령님의 역사는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입니다. 12절의 말씀을 보세요.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영을 가진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은 ‘은혜’를 압니다.
여러분은 경험하듯이 어린아이들은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을 기가 막히게 압니다. 이것은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아는 것입니다. 괜히 달라고도 안 하는데 미운 사람이 있고, 그냥 마구 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지식의 차원이 아니라 마음의 문제인 것을 아시지요.
우리가 하나님께 영을 받으면 마음이 압니다. 가슴으로 믿어지기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고 용서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열린 가슴은 다른 사람을 향해서도 열리게 됩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보혜사 성령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고 가르치실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속에 계실 때, 비로소 은혜를 은혜로 알게 됩니다. 여러분의 삶의 모든 것이 은혜로 고백되기 시작할 때, 신령한 것이 여러분 속에 존재합니다.

여러분은 여름이 되면 가장 싫은 것이 무엇인가요?
더위죠?
더운 것이 은혜라는 것을 아시나요?
그 더위가 없으면 우리는 다 굶어 죽습니다.
더위가 있어야 가을의 감사가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더위를 불평하지 않습니다.
불평하는 사람들은 늘 불평하고, 늘 사람들이 맘에 들지 않는데, 성령님이 마음속에 계신 사람은 늘 감사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누리는 그 많은 것이 여러분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온 것임을 고백하는 사람들의 겸손이야말로 신령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당하는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를 보는 사람이야말로 신령한 것이 가득한 사람입니다.

어느 날 여러분의 삶에서 감사가 사라졌습니까?
모든 것이 허무하고 고통스럽게 느껴지십니까?
이제는 하나님이 여러분의 아바 아버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주 근본적으로 성령을 받으면 우리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만족의 문제, 기쁨의 문제, 자기 존재의 문제, 자기실현의 문제 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에서 아바 아버지로 고백되기를 바랍니다.
아바 아버지께서 여러분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감사로 고백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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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로메로의 본을 따라
Óscar Arnulfo Romero y Galdámez
(오스카르 아르눌포 로메로 이 가르다메스)
1917년 8월 15일 ~ 1980년 3월 24일 (62세)


우편 폭탄 테러의 희생자로서 살바도르 성인의 순교를 되돌아보다.

- 미셸 랍슬리


이 글은 플라우 출판사의 영적 안내 시리즈 중 《구속의 스캔들 :하나님이 가난한 자를 해방하고 죄인을 구원하며 나라를 해방할 때》 (한국어 미발간)의 서문입니다. 


오스카 로메로에 관한 나의 견해는 내가 겪은 인생 행로에 의해 형성되었다.
1980년 3월 24일 미사를 집전하던 로메로가 총격을 당했을 때 나는 로메로와 다른 많은 종교 지도자들처럼 불의에 항거하는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추방되어 전면이 남아프리카 공화국 영토에 완전히 둘러싸인 작은 산악 왕국 레소토에 살고 있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아파르트헤이트라는 합법화된 인종차별 정책을 시행했던 나라다.
유엔은 아파르트헤이트를 반인도적 범죄라고 선언했고, 국제 기독교 사회는 이를 이단이나 어긋난 교리라고 했지만, 남아공은 여전히 아파르트헤이트가 신성한 기독교적 정책이라고 강조했다. 

로메로처럼 나도 어릴때부터 예수님을 따르려는 소망을 품었다.
열일곱 살에 나는 뉴질랜드를 떠나 호주로 가서 성공회 사제직 훈련을 시작했고 성공회 수도회인 신성 선교 협회에도 가입했다.

수도회는 1973년에 나를 남아프리카로 파송했다.
그곳에 도착하면 나는 세 부류의 사람들과 만나게 되리라 상상했다.
억압받는 이들과 억압하는 이들 그리고 내가 속하게 될 세 번째 부류인 ‘사람’.
그러나 나는 내가 원하지 않더라도 내 피부색이 나를 압제자 집단의 일부로 만든다는 불쾌한 현실에 먼저 눈뜨게 됐다.
남아프리카에 도착한 날, 나는 사람이 아닌 백인이 되었다.

Michael Lapsley

미셸 랍슬리 

1976년 9월 나는 남아프리카에서 추방되었다. 불과 3개월 전인 6월 16일 경찰과 군인들이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총을 쏘기 시작했다. 이것이 내 인생의 본질을 바꾸어놓았다.

로메로 대주교에게 전환점은 1977년 3월 12일 발생한 루틸리오 그란데 신부의 암살이었다. 로메로는 이렇게 말했다. "죽은 루틸리오의 누워있는 모습을 보면서 ‘그가 자신이 행한 일 때문에 죽음을 당했다면 나 역시 같은 길을 걷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로메로 대주교와 달리 나는 정치적 해방 운동에 참여하기로 했다. 하지만 나도 로메로처럼 오직 내 혀만을 유일한 무기로 사용하였다. 내게 해방 투쟁에 참여한다는 것은 기본 인권을 위해 투쟁하는 유색인들과의 연대에서 나의 인간성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거리에 어린이들의 피가 쏟아진 직후, 나는 성공회 대학생들의 대표 사제로 선출되었고 어린이 살해와 만연한 구금과 고문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로메로의 암살 소식에 나는 멈춰 서서 내 행동이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될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 전 세계에서 정의를 위해 비슷한 투쟁을 하는 신앙인들도 분명 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하지만 로메로의 말과 증거는 그런 생각을 뛰어넘어 우리가 직면한 상황에 예수님의 말씀을 더욱 분명하고 담대하게 적용할 수 있는 용기와 결단을 주었다. 1982년 마세루에서 남아공 군대의 총격으로 42명이 사망한 대학살이 일어났다. 그 당시 나는 그곳에 없었지만 몇 명의 교회 관계자를 통해 내가 그 학살의 표적 중 한 명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아파르트헤이트를 종식시키고 어린이들이 안전하게 자고 일어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서약했던 때였다.

남아공 정부의 암살 대상자 목록에 들어있던 나는 하루 24시간을 무장 경찰과 함께 짐바브웨에서 수 년간 살아야 했다. 그곳에서 넬슨 만델라가 석방된지 3개월이 지난 1990년 4월, 나는 두 권의 종교 잡지 속에 숨겨진 폭탄을 우편으로 받았다. 그 폭발로 인해 두 손과 한 눈을 잃었고 고막은 산산조각 났다.

폭탄이 터졌을 때 나는 하나님께서 나의 시련에 함께 하고 계시며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께서도 내가 겪는 일을 이해할 것이라고 느꼈다. 전 세계 사람들의 기도와 사랑은 하나님께서 그 폭발을 죽음에서 생명을, 악에서 선을 이끌어 내는 구속의 도구로 쓰시게 했다.

그 당시, 로메로의 모범이 다시 한번 내게 강하게 다가왔다. 나는 그가 총에 맞기 직전 제단에서 했던 마지막 말을 기억했다. “인류를 위하여 제물로 바쳐진 이 몸과 육체가 자양분이 되어 그리스도께서 하신 대로, 우리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이 백성에게 정의와 평화가 임하도록 우리의 몸과 피를 고난과 고통에 바치게 하여 주소서."

로메로 대주교가 죽음을 당하기 며칠 전에 했던 한 인터뷰에서 나는 특별한 도전과 영감을 받았다. 그는 자신을 죽일 사람이 누구든 이미 용서 받았다는 사실을 알기 바란다고 말했다. 나는 지금까지도 1990년 4월에 내게 폭탄을 보낸 이가 누군지 모른다. 그러나 그 사람이 자신이 저지른 일로 지금까지 죄의 포로로 있다면 내가 가진 열쇠로 그를 풀어 주리라.

나의 회복과 남아프리카 공화국 사람들에 대한 성찰을 통해 기억치유 협회(Institute for Healing of Memories) 가 설립되었다. 이 비정부 기구의 국제적 작업의 일환으로 나는 2016년 11월, 이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세상의 구세주(El Salvador)라는 이름을 가진 오스카 로메로의 나라를 처음으로 방문했다. 살바도르 사람들의 치유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2016년, 모든 성인의 축일에 산살바도르에 있는 진리와 기억의 벽 앞에서 열린, 수 만명의 살바도르 내전 실종자와 사망자를 위한 세계교회 추도식에 참여했다. 그리고 오스카 로메로의 무덤과 그의 암살과 순교가 일어났던 곳에 무릎을 꿇었다.

비극적이게도, 구세주의 땅은 여전히 거대한 사회적 폭력과 불평등이 만연하다. 그러나 로메로의 증언은 살아있다. 엘살바도르 성공회의 호세 오스발도 로페즈는 다음과 같이 썼다.

로메로의 생애와 행적을 통해 나는 예수께서 친히 엘살바도르 한 가운데를 지나셨고, 로메로는 한 사람이자 목회자로서 삶의 모범을 보임으로 분명하고도 강한 메시지를 우리에게 남겼다고 확신합니다. 로메로는 내게 단순한 목회적 모델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기독교인으로서 사회적, 구조적 불의에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라고 요구하는 엄청난 도전입니다. 불의에 대해 비난만 하라고 하는게 아닙니다. 그보다는 내 주변 사람들을 사랑하라고 강력하게 부릅니다. … 형제자매들을 사랑함으로써 로메로를 본받을 뿐 아니라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게 예수님과 함께 할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이 땅에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일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인류라는 가족의 치유에 겸손하게 이바지할 길을 찾는 과정에서 오스카 로메로의 삶과 유산에서 계속 영감을 얻을 것이다. 그가 이 책을 통해 의에 주리고 목마른 다른 세대에게도 같은 일을 할 수 있기를 바라며 기도한다. 당신이 열린 마음으로 이 책을 읽는다면 정의와 모두를 위한 하나님의 꿈에 참여하겠다는 믿음과 헌신이 더욱 깊어질 것이라 의심치 않는다.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원래 병약했고 학교도 12살 때까지만 다녔다고 한다. 이후에는 목수 일을 배우는 등 노동자로 일하다가 신학교에 입학, 사제의 길을 걷게 된다. 이후 유럽에 유학하기도 하면서 자신의 고향에서 오랫동안 사목했고, 알콜 중독자의 재활을 지원하는 등 일반적인 사제의 길을 걸었다.

원래는 상당히 보수적인 인물이었다. 그가 1977년 대주교가 되었을 때는 군사정권 측에서 환영했을 정도로 사회정의운동에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같은 사제이며 친구로 농민운동을 하던 그란데 신부가 암살당한 사건을 계기로 반 독재운동에 가담하였다..[2] 이후 1979년 쿠데타로 들어선 엘살바도르의 독재 정권에 항거하여 빈곤층을 돕고 인권침해를 고발했다. 그러다 1980년 프로비덴시아 병원 경당에서 미사 성찬기도 중 무장괴한 4명에게 저격을 받아 암살당했다.피격 직후 사진(노약자 클릭 주의) 당시 독재정부가 그의 죽음에 개입했지만, 사후 30년이 지나 2009년에야 엘살바도르 정부가 이 사실을 인정하였다. 독재정권이 무너졌기 때문에 인정도 가능했다.

사실 로메로 주교가 처음부터 진보 성향은 아니었다. 그는 본래 전통주의자였고, 독재정권의 무자비한 인권 탄압에 그리스도인으로 인권을 옹호했을 뿐, 해방신학과는 거리가 있던 보수적인 주교였다. 일례로, 로메로 주교는 해방신학의 오류를 교리적으로 반박하는 임무를 맡은 오푸스 데이의 성 십자가 사제회와 교류하며 영적 도움을 받았다. 그가 순교한 날 아침에도 오푸스 데이 협력 사제 모임에 참가한 후 미사 집전 중에 피격을 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순교 후에 해방신학 추종자들이 자신들의 이미지를 덮어씌운 것이다. 그 결과 이젠 그가 해방신학의 아이콘처럼 인식되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

이런 이유로 진작에 시성이 되어야 했지만, 해방신학 추종자들이 이를 자신들의 교리를 정당화하는 데 악용할까 우려한 교황청에서 이를 늦춘 것이다. 인권 탄압에 저항하는 것은 가톨릭에서는 보수건 진보건 당연한 일이다. 이를 두고 소련을 위시한 공산진영에 맞서는 것은 장려하면서, 반공을 명분으로 자국민을 탄압한 남유럽(예: 프랑코 치하의 스페인)과 중남미 국가의 군부 독재정권에 대해서는 소극적이었던 20세기 천주교회의 이중적인 모습을 드러낸 것이라는 비판, 지적을 받기도 한다. 물론 프랑코 정권 문제는, 스페인 극좌파들에 의해 저질러진 옥석을 가리지 않는 무차별 교회 탄압과 학살 문제도 함께 고려해야 할 일이다. 장례식장에 신자들 25만 명이 운집했는데 폭탄 테러와 총격전이 벌어져 40명이 죽었음 역시 비극이었다.

그의 오랜 친구이자 동료였던 그레고리오 로사 차베스 신부가 2017년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엘살바도르 천주교회 사상 첫 번째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다. 그는 1992년 엘살바도르의 오랜 내전을 종식시키는 과정에 기여했으며, 추기경이 된 2017년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교황청 시성성 장관 안젤로 아마토 추기경이 집전한 오스카 로메로의 시복 미사, 2015년 5월 23일
20세기순교자 중의 한 사람으로 런던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성공회)에 동상이 건립되었으며, 요한 바오로 2세 때 '하느님의 종'[3]으로 인정되었으나 그가 종교적 문제가 아닌 정치적 문제로 죽었다는 점을 이유를 내세운 교황청 내의 반대 의견 때문에 절차가 지지부진했는데,[4]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출된지 6주만에 시성 절차가 재개되었다.[5] 기사

그리하여 2015년 2월 3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로메로 대주교의 죽음을 순교로 선포함에 따라 시복시성에 가속도가 붙었다.[6] 마침내 동년 5월 23일 시복식거행되었다. 엘살바도르의 수도 산살바도르의 살바도르 델 문도 광장에서 거행된 이번 시복 미사는 교황을 대리한 교황청 시성성 장관 안젤로 아마토 추기경이 집전했으며, 30만 명이 넘는 군중이 운집해 로메로 대주교의 시복을 기념했다. 축일은 3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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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니 애플시드

- 비어리 훌리엇


영적 각성운동이 미국 전역을 휩쓸고 있었던 1829년 무렵, 오하이오주에 있는 맨스필드에서 한 설교자가 청중들을 향해 도전의 말씀을 전하며 누군가를 찾았다.

“지금 맨발로 천국을 향해 순례길을 걷고 계신 분이 어디에 있나요?” 
“여기 있습니다.”

셔츠 대신에 커피 자루를 입고 있던 맨발의 한 사내가 앞으로 나왔다.
그 사내의 이름은 바로 존 채프만(1774-1845)이었다.
그는 미국 개척시대에 살면서 가는 곳마다 많은 사과 농장을 일구고 천국의 복음소식을 전했다. 훗날 사람들은 그를 조니 애플시드(Johnny Appleseed)라 부르며 미국의 국민 영웅으로 여기게 된다. 채프만은 미국 서부지역으로 개척여행을 떠나면서 사과 농장 관리인으로 여러 지역들에 많은 과수원들을 만들고 경작하였다. 그의 사업은 큰 성공을 거두었고 세상을 뜰 무렵에는 사백만 제곱미터에 달하는 넓은 땅을 소유했지만 성공을 즐기지 않고 고되고 외로운 삶의 길을 끝까지 걸었다. 채프만은 꿀과 야생 딸기 그리고 우유와 옥수수 가루로 만든 음식들을 먹었고 이러한 그의 삶의 방식은 세례 요한을 생각나게 했다. 음식을 버리는 한 여인을 향해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선물을 버리는 것은 죄입니다.’ 라고 말했던 일화를 통해서도 채프만은 세례 요한과 같은 하나님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살았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채프만은 친절한 사람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너무나 가난해서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사과 묘목들을 무상으로 제공했으며, 어느 한겨울에는 서부로 여행 중인 한 가족에게 자신이 가진 유일한 신발 한 켤레를 거저 주었다. 심지어 뱀이나 곤충과 같은 동물들에게까지 친절을 베풀었고 이러한 그의 태도로 인해 여행하면서 만났던 미국의 인디언 원주민들은 그를 존경했다. 채프만이 가지고 있던 자연을 향한 경외심은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보다 훨씬 깊었다. 당시 사람들은 과일 나무들이 잘 자라도록 좋은 나무에 있는 어린 가지를 잘라 튼튼한 나무 줄기에 접붙이는 작업들을 했는데, 채프만은 그러한 접붙임은 하나님의 창조 섭리에 벗어나는 죄로 여겼다. 그런데 그가 심은 나무에서 수확한 사과들은 먹기에 적합하지 않아서 발효한 사과주스나 애플 브랜디(사과주를 증류시켜 만든 독한 술)를 만드는데 사용되었다. 
채프만은 항상 성경과 함께 윌리엄 블레이크나 랠프 에머슨과 같은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던 엠마누엘 스베덴보리의 책들을 지니고 다녔다. 나그네들을 위한 숙소를 찾아가 여러 밤을 지내면서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자주 읽어 주기도 했다. 채프만은 이타적인 친절을 베풂으로 진정으로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자신의 삶 속에서 살아냈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볼 때에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보여질 수 있지만 거칠고 고된 그의 삶이 그를 특별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채프만이 젊은 시절 말에게 머리를 차인 적이 있다는 등의 이야기들을 들먹거리며 정신이 이상한 사람으로 여겼지만, 아이들은 채프만이 자신의 집을 방문하기를 학수고대할 만큼 그를 좋아했다. 채프만은 여자 아이들을 위해서 리본을 가지고 다녔고, 남자 아이들을 위해서는 불타는 숯불 위를 맨발로 걸어 다니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그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채프만에 대한 믿을 만한 정보들이 워낙 드물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 그를 전설적인 인물로 묘사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조니 애플시드는 원래의 존 채프만과는 많은 부분이 다르게 그려졌다. 사실, 그에 대한 이야기는 훨씬 더 굉장하다. 1881년 오하이오주의 한 역사가였던 힐(N. N. Hill)은 “지난 백 년 동안 채프만처럼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사람은 없었다.” 라고 평가했다.

 
 

존 채프만의 실제적인 삶에 대해서 더 알고 싶으신 분은 하워드 민스(Howard Means)가 지은 Johnny Appleseed: The Man, the Myth, the American Story (Simon and Schuster, 2011)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이 글은 하워드 민스의 연구의 바탕 아래 쓰여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