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신(출애굽기 32:32, 열왕기하 23:12) 10 / 04 / 2021(월)


헌신에 대한 묵상
10 / 04 / 2021(월)


헌신(출애굽기 32:32, 열왕기하 23:12)

출애굽기 32:32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주옵소서.

20절 / 모세가 그들의 만든 송아지를 가져 불살라 부수어 가루를 만들어 에 뿌려 이스라엘 자손에게 마시우니라.

열왕기하 23:12
유다 열왕이 아하스의 다락지붕에 세운 단들과 므낫세가 여호와의 전 두 마당에 세운 단들을 왕이 다 헐고 거기서 빻아내려서 그 가루를 기드론 시내에 쏟아버리고.

왜 그송아지를 불에 태워 백성들에게 마시라고 하셨나?

1. 우상을 먹어 똥으로 나오게 한다.
너희가 섬기는 그 우상이 가장 더러운 것이다.

2. 금을 주신이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우상을 섬기는가?
섬김의 대상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3. 먹어서 없이 한다.
영원히 없애버린다.

4. 순수한 금가루를 물에 넣었을 때 물의 색상이 붉은 빛이 되었다.
보혈의 피를 상징하는 것이다.


사사기 5:2
이스라엘의 두령이 그를 영솔하였고 백성이 즐거이 헌신하였으니 여호와를 찬송하라.

사사기 5:9
내 마음이 이스라엘의 방백을 사모함은 그들이 백성 중에서 즐거이 헌신하였음이라 여호와를 찬송하라 .

출애굽기 32:29
모세가 이르되 각 사람이 그 아들과 그 형제를 쳤으니 오늘날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날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시편 110:3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마가복음 12:30


계명을 지키는 믿음(마가복음 12: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다하여(ὅλης)
ὅλος, η, ον / holos: whole, complete

공동번역 /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현대인 / 너는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새번역 /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이신 주님을 사랑하여라.

첫째, 마음(καρδίας)

kardia: heart
Original Word: καρδία, ας, ἡ

마음을 다하는 믿음이란?

인심난측(人心難測) 사람 인, 마음 심, 여러울 난, 잴 측

마음처럼 깊게 사랑하라!
사랑이 너무 얄팍하다.
쉽게 사랑하고 쉽게 헤어지고 헤어져도 마음 아파하지 않는다.


둘째, 목숨(ψυχῆς)

psuché : breath, the soul
Original Word: ψυχή, ῆς, ἡ



셋째, 뜻(διανοίας)

dianoia: the mind, disposition, thought
Original Word: διάνοια, ας, ἡ



넷째, 힘(ἰσχύο)

ischus: strength, might
Original Word: ἰσχύς, ύος, ἡ















대한민국 미국 이스라엘의 건국


09 / 26 / 2021(주일)

기독교 신앙으로 세워진 나라 자유대한민국

국제정치학자들은 세계 모든 나라들(대략 220개국) 중에서 “하나님의 도움으로 세워진 나라”들은 “미국(1789. 4, 30. United States of America)” “이스라엘(1948. 5. 14. State of Israel)” “대한민국(1945. 8. 15. 大韓民國)”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미국은 청교도들에 의해서 건국되었기 때문이며, 이스라엘은 구약의 예언에 따라 독립국가로 출발했기 때문입니다. 한편 대한민국은 정통적인 기독교 신앙으로 거듭난 “이승만박사”에 의해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오늘부터 대한민국은 하나님이 세워주신 나라인 것을 소개합니다.

첫째, 개천절(開天節. Gaecheonjeol. National Foundation Day)

개천절은 10월 3일이다. 단군 왕검이 고조선을 세운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개천(開天)”이란 “하늘을 열었다”는 뜻이다.
“환웅”이 하늘에서 백두산의 신단수 아래로 내려온 것을 말합니다. 기원전 2333년 단군이 고조선을 처음 건국한 날이며 국경일로 정하여 태극기를 게양합니다.

성경에서 “하늘이 열리다”는 것은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1.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고 물 위로 올라올 때(마 3:16, 눅 3:21)
2. 베드로가 기도 시간에 기도할 때(행 10:11)
3. 에스겔이 바벨론 그발 강가에 있을 때(겔 1:1)

10 / 03 / 2021(주일)

기독교 신앙으로 세워진 나라 자유대한민국

지난주에는 첫 번째 개천절(開天節)을 통한 건국의 의미를 소개했습니다.

오늘은 두 번째로 애국가(愛國歌)에서 건국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애국가의 가사를 원문(原文)으로 소개합니다.

1. 東海 물과 白頭山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保佑하사 우리나라 萬歲

2. 南山 위에 저 소나무 鐵甲을 두른 듯 바람서리 不變함은 우리 氣像일세

3. 가을 하늘 空豁한데 높고 구름 없이 밝은 달은 우리 가슴 一片丹心일세

4. 이 氣像과 이 맘으로 忠誠을 다하여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

(후렴) 無窮花 三千里 華麗 江山 大韓 사람 大韓으로 길이 保全하세

애국가의 가사 1절에는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라고 하였습니다. “하느님” 또는 “하나님” 어느 것이 맞느냐? 하는 논쟁도 합니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하느님)” “단 한 분이신 하나님”이라고 하면 어느 단어를 선택하느냐 하는 것은 논쟁거리가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많은 나라들이 국가를 부르지만 대한민국처럼 기독교국가가 아님에도 가사에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라고 노래하는 것은 인간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가 감추어진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자유대한민국의 기상을 세계  만방에 널리 알려 예수 한국 복음 통일 세계 선교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그 날을 기대하며 오늘의 혼돈과 시련을 믿음으로 극복해야 합니다. 거친 광야와 같은 시절을 지나면 반드시 모두가 좋아할 새 날이 다가올 것입니다.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시편 144:15)

10 / 10 / 2021(주일)

기독교 신앙으로 세워진 자유대한민국

지난주에는 “애국가(愛國歌)”에서 건국의 의미를 소개했습니다.
오늘은 나라꽃이란 “국화(國花)”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한국의 국화는 “무궁화(無窮花)”입니다.
“무궁화는 영원히 피고 또 피어서 지지 않는 꽃”이라는 뜻입니다.

무궁화는 고조선(古朝鮮) 이전부터 하늘나라의 꽃으로 귀하게 여겼고, 신라는 스스로를 “근화향(槿花鄕, 무궁화 나라)”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중국에서도 우리나라를 오래 전부터 “무궁화가 피고 지는 군자의 나라”라고 칭송했습니다.

이처럼 오랜 세월 동안 우리 민족과 함께해 온 무궁화는 조선말 개화기를 거치면서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란 노랫말이 애국가에 삽입된 이후 더욱 국민들의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무궁화에 대한 우리 민족의 한결 같은 사랑은 일제강점기에
시련을 겪게 되었는데 일제는 무궁화를 “눈에 피꽃”이라 하여
보기만 해도 눈에 핏발이 선다거나 또는 “부스럼꽃”이라 하여
손에 닿기만 해도 부스럼이 생긴다고 하는 등 무궁화를 탄압했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우호익(禹浩翊), 남궁억(南宮檍) 등이 무궁화의 가치인식 및 무궁화 보급운동 등에 헌신하였으며, 동아일보에서는 1923년부터 10년 간 매년 무궁화 사진을 게재하는 등 우리 민족은 무궁화 보존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1백여 품종의 무궁화가 자라고 있는데, 꽃 색깔에 따라 단심계, 배달계, 아사달계 등으로 분류합니다.

정부는 이들 가운데서 꽃잎 중앙에 붉은 꽃심이 있는 단심계(丹心系) 홑꽃을 보급 품종으로 지정했습니다.

무궁화는 7월 초순에서 10월 하순까지 매일 꽃이 피며, 옮겨 심거나 꺾꽂이를 해도 잘 자라고 공해에도 강한 특성을 지니고 있어 민족의 무궁한 발전과 번영을 기원하는 마음을 잘 나타내 주기도 합니다.


10 / 17 / 2021(주일)

세상 모든 나라들은 나라를 상징하는 국화(國花)와 국조(國鳥)를 갖고 있습니다. 한국의 국화는 무궁화(無窮花)입니다. 1960년에 개최된 국제 조류 보호회의 결의로 세계 각국의 국조(國鳥)를 정하였는데 영국은 울새, 일본은 일본꿩, 중국은 참새, 호주는 강강앵무, 프랑스는 수닭, 미국은 흰머리 독수리, 독일은 붉은 머리 황새, 벨기에 국조는 황조롱이, 노르웨이는 까마귀, 덴마크는 종달새라고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국의 국조를 "까치"라고 알고 있지만 대한민국 정부에서 지정한 국가 상징물 중에 국조는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우호익(禹浩翊), 남궁억(南宮檍) 등이 무궁화의 가치인식 및 무궁화 보급운동 등에 헌신하였으며, 동아일보에서는 1923년부터 10년 간 매년 무궁화 사진을 게재하는 등 우리 민족은 무궁화 보존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1백여 품종의 무궁화가 자라고 있는데, 꽃 색깔에 따라 단심계, 배달계, 아사달계 등으로 분류합니다.

정부는 이들 가운데서 꽃잎 중앙에 붉은 꽃심이 있는 단심계(丹心系) 홑꽃을 보급 품종으로 지정했습니다.

무궁화는 7월 초순에서 10월 하순까지 매일 꽃이 피며, 옮겨 심거나 꺾꽂이를 해도 잘 자라고 공해에도 강한 특성을 지니고 있어 민족의 무궁한 발전과 번영을 기원하는 마음을 잘 나타내 주기도 합니다.


세상 모든 나라들은 나라를 상징하는 국가(國歌)와 국화(國花) 그리고 국조(國鳥)를 갖고 있습니다.
한국의 국화는 무궁화(無窮花)
한국의 국가는 애국가(愛國歌)
한국의 국조는 없습니다.

1960년에 개최된 국제 조류 보호회의 결의로 세계 각국의 국조(國鳥)를 정하였는데 영국은 울새, 일본은 일본꿩, 중국은 참새, 호주는 강강앵무, 프랑스는 수닭, 미국은 흰머리 독수리, 독일은 붉은 머리 황새, 벨기에 국조는 황조롱이, 노르웨이는 까마귀, 덴마크는 종달새라고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국의 국조를 "까치"라고 알고 있지만 대한민국 정부에서 지정한 국가 상징물 중에 국조는 없다고 합니다.


10 / 24 / 2021(주일)

제헌국회 이윤영의원 기도문

이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여,
이 민족을 돌아보시고 이땅에 축복하셔서 감사에 넘치는 오늘이 있게 하심을 주님께 저희들은 성심으로 감사하나이다. 
오랜 시일동안 이 민족의 고통과 호소를 들으시사 정의의 칼을 빼서 일제의 폭력을 굽히시사 하나님은 이제 세계만방의 양심을 움직이시고 또한 우리민족의 염원을 들으심으로 이 기쁜 역사적 환희의 날을 이 시간에 우리에게 오게 하심은 하나님의 섭리가 세계만방에 성시하신 것으로 저희들은 믿나이다.
하나님이시여, 이로부터 남북이 둘로 갈리어진 이 민족의 어려운 고통과수치를 신원(伸寃)하여 주시고 우리 민족 우리 동포가 손을 같이 잡고 웃으며 노래 부르는 날이 우리 앞에 속히 오기를 기도하나이다. 
하나님이시여 원치 아니한 민생의 도탄은 길면 길수록 이 땅에 악마의 권세가 확대되나,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광은 이땅에 오지 않을 수밖에 없을 줄 저희들은 생각하나이다.
원컨데 우리 조선독립과 함께 남북통일을 주시옵고 또한 우리 민생의 복락과아울러 세계평화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에 의지하여 저희들은 성스럽게 택함을 입어가지고 글자 그대로 민족의 대표가 되었습니다.
그러하오나 우리들의 책임이 중차대한 것을 저희들은 느끼고 우리자신이 진실로 무력한 것을 생각할 때 지와 인과 용과 모든 덕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 앞에 이러한 요소를 저희들이 간구하나이다.
이 제 이로부터 국회가 성립이 되어서, 우리 민족의 염원이 되는 모든 세계만방이 주시하고 기다리는 우리의 모든 문제가 원만히 해결되며 또한 이로부터 우리의 완전 자주독립이 이 땅에 오며 자손만대에 빛나고 푸르른 역사를 저희들이 정하는 이 사업을 완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이 회의를 사회하시는 의장으로부터 모든 우리 의원일동에게 건강을 주시옵고 또한 이겨서 양시의 정의와 위신을 가지고 이 업무를 완수하게 도와 주시옵기를 기도하나이다.
역사의 첫걸음을 걷는 오늘의 환희와 감격에 넘치는 이 민족적 기쁨을 다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를 올리나이다. 
이 모든 말씀을 주 예수그리스도 이름을 받들어 기도하나이다.

10 / 31 / 2021(주일)

넷째, 대통령 취임선서


"나는 憲法을 遵守하고 國家를 保衛하며 祖國의 平和的 統一과 國民의 自由와 福利의 增進 및 民族文化의 暢達에 努力하여 大統領으로서의 職責을 誠實히 遂行할 것을 國民앞에 嚴肅히 宣誓합니다."


헌법 제69조에서는 "대통령은 취임에 즈음하여 다음의 선서를 한다.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 및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고 규정하고 있다.



대통령 취임식은 1987년 직선제 개헌 이후 매번 2월 25일 열려 이날 대통령 취임선서가 진행됐다. 그러나 2017년 3월 10일 대한민국 헌정사 최초의 현직 대통령(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이 이뤄지면서 5월 9일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다. 선거 결과 19대 대통령에 당선된 문재인 대통령은 당선인 신분 없이 2017년 5월 10일 취임선서를 하고 대통령직 임기를 시작했다.


취임식 개요]

 

초대 이승만대통령은 1948년 7월 20일 국회에 의해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1948년 7월 24일 당시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되던 중앙청(옛 조선총독부) 광장에서 우리나라 헌정사상 최초의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대통령 취임식은 개식, 애국가제창 및 국기에 대한 경례, 취임선서, 대통령 취임사, 부통령 취임사, 축사 및 축전 낭독, 만세삼창, 폐회 등의 식순으로 진행되었다.

11 / 7 / 2021(주일)
초대 이승만 대통령 취임사(1948년 7월 24일 토요일) #. 1

 여러 번 죽었던 이 몸이 하느님 은혜와 동포들의 애호로 지금까지
살아 있다가 오늘에 이와 같이 영광스러운 추대를 받는 나로서는 일변 감격한 마음과 일변 감당키 어려 운 책임을 지고 두려운 생각을 금하기 어렵습니다.

기쁨이 克(극)하면 웃음이 변하여 눈물이 된다는 것을 글에서 보고 말로 들었던 것입니다. 요즘 나에게 치하하러 오는 남녀동포 가 모두 눈물을 씻으며 고개를 돌립니다. 각처에서 축전 오는 것을 보면 모두 눈물을 금하기 어렵습니다.

나는 본래 나의 감상(感想)으로 남에게 촉 감될 말을 하지 않기로 매양 힘쓰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목석간장(木石肝腸)이 아닌 만치 나도 뼈에 사무치는 눈물을 금하기 어렵습니다. 이것은 다름 아니라 40년 전에 잃었던 나라를 다시 찾은 것이요, 죽었던 민족이 다시 사는 것이 오늘에야 표명(表明)되는 까닭입니다.

오늘 대통령으로서 선서하는 이 자리에 하느님과 동포 앞에서 나의 직책을 다하기로 한층 더 결심하며 맹서합니다.

따라서 여러 동포들도 오늘 한층 더 분발해서 각각 자기의 몸을 잊어버리고 민족 전체의 행복을 위하여 대한민국(大韓民國)의 시민으로서 영광스럽고 신성한 직책을 다하도록 마음으로 맹서하기를 바랍니다.


11 / 14 / 2021(주일)

여러분이 나에게 맡기는 직책은 누구나 한 사람의 힘으로 성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중대한 책임을 내가 감히 부담할 때에 내 기능이나 지혜를 믿고 나서는 것이 결 코 아니며 오직 전국 애국남여(愛國男女)의 합심 합력으로써만 수행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 바입니다.
이번 우리 총선거의 대성공을 모든 우방(友邦)들이 축하하기에 이른 것은 우리 애국남여(愛國男女)가 단단한 애국성심(愛國誠心)으로 각각 의 책임을 다한 때문입니다.

그 결과로 국회(國會) 성립 또한 완전무결한 민주제도로 조직 되어 2, 3 정당(政黨)이 그 안에 대표가 되고 무 소속과 좌익 색채로 지목받는 대의원이 또 한 여럿이 있게 된 것입니다.
기왕의 경험으로 추측하면 이 많은 국회의 원 중에서 사상(思想) 충돌로 분쟁분열을 염려한 사람들이 없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중대한 문제에 대하여 극렬한 쟁론(爭論)이 있다가도 필경 표결(表決)될 때에는 다 공정한 자유의견을 표시하여 순리적으로 진행하게 되므로 헌법과 정부조직법을 다 민의(民意)대로 종다수로 통과된 후에는 아무 이의 없이 다 일심(一心)으로 복종하게 되므로 이 중대한 일을 조속한 한도 내에 원만히 해 결하여 오늘 이 자리에 이르게 된 것이니 국회의원 일동과 전문위원 여러분의 애국성심(愛國誠心)을 우리가 다 감복하지 않을 수 없는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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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 28 / 2021(주일)

나는 국회의장(國會議長)의 책임을 이에 사면(辭免)하고 국회에서 다시 의장을 선거할 것인데 만 일 국회의원 중에서 정부 부처장으로 임명 될 분이 있게 되면 그 후임자는 각기 소관 투표구역에서 재선(再選,) 보결(補缺)하게 될 것이니 원만히 보결된 후에 의장을 선 거하게 될듯하며 그동안은 부의장 두 분이 사무를 대임(代任)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 부의장 두 분이 그동안 의장을 보좌해서 각 방면으로 도와 협조 진행케 하신 것을 또한 감사히 생각합니다.

국무총리와 국무위원 조직에 대해서 그동안 여러 가지로 낭설이 유포되었으나 이는 다 추측적(推測的) 언론에 불과하며 며칠안 으로 결정 공포될 때에는 여론상 추측과 크 게 다를 것이니 부언낭설(浮言浪說)에 현혹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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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5일

우리가 정부를 조직하는 데 제일 중대히 주 의할 바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일할 수 있는 기관을 만드는 것입니다.

둘째는 이 기관이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사회적 명망(名望)이나 정당단체의 세력이나 간에 오직 국회에서 정하는 법률을 민의(民意)대로 준행해 나갈 기능 있는 사람끼리 모이는 기관이 되어야 할 것이니 우리는 그런 분들을 물색 하는 중입니다.

 

어떤 분은 인격이 너무 커 서 작은 자리에 채울 수 없는 이도 있고 혹은 작아서 큰 자리에 채울 수 없는 이도 있 으나 참으로 큰 사람은 큰 자리에도 채울 수 있고 작은 자리에도 채울 수 있을 뿐 아 니라 작은 자리 차지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참 큰 인물들이 있어 무 슨 책임을 맡기든지 大小와 高下를 구별치 않고 적은 데서 성공해서 차차 큰 자리에 오르기를 도모하는 분들이 많아야 우리의 목적이 속히 도달될 것입니다. 이런 인격들이 함께 책임을 분담하고 일해 나가면 우리 정부 일이 좋은 시계(時計) 속처럼 잘 돌아가는 중에서 이재(理財)를 많이 나 타낼 것이요,

 

세계의 신망과 동정이 날로 증진될 것입니다. 그런 즉 우리가 수립하는 정부는 어떤 부분적이나 어떤 지역을 한하지 않고 전민족의 뜻대로 전국(全國)을 대표하는 정부가 될 것입니다. 기왕에도 말한 바이지만 민주정부(民主政府)는 백성이 주장하지 않으면 그 정권이 필경 정객과 파당의 손에 떨어져서 전국이 위험한데 빠지는 법이니 일반국민은 다 각각 제 직책을 행해서 먼저 우리 정부를 사랑하며 보호해 야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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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2일

내 집을 내가 사랑하고 보 호하지 않으면 필경은 남이 주인노릇을 하 게 됩니다.

과거 40년 경험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의(義)로운 자를 보호하고 불의(不義) 한 자를 물리쳐서 의(義)가 서고 사(邪)가 물러가야 할 것입니다.
전에는 임금이 소인(小人)을 가까 이 하고 현인(賢人)을 멀리하면 나라가 위태하다 하였으나 지금은 백성이 주장이므로 민중(民衆) 이 의(義)로운 사람과 불의(不義)한 사람을 명백히 구 별해야 할 것입니다.

승인(承認) 문제에 대하여는 그 권리가 우리 에게 있는 것이 아니므로 우리가 판단할 수 는 없으나 우리의 순서가 이대로 계속된다면 모든 우방(友邦)의 호의(好意)로 속히 승인(承認)을 얻을 줄로 믿는 바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시하는 바는 승인(承認)을 얻는 데 있지 않고 먼저 국위(國威)를 공고히 세우는 데 있나니 모든 우방(友邦)이 기대하는 바 를 저버리지 아니하고 우리가 잘만 해 나가 면 우리의 요청을 기다리지 않고 자발적으 로 후원할 것이니 이것도 또한 우리가 일 잘하기에 달린 것입니다.  

9월에 파리에서 개회하는 유엔 총회에 파견 할 우리 대표단은 특별히 긴급한 책임을 가 지니 만치 가장 외교상 적합한 인물을 택하 여 파견할 터인데 아직 공포는 아니하였으 나 몇몇 고명(高名)한 인격으로 대략 내정되고 있 으니 정부 조직 후에 조만간 완정(完定) 공 포될 것입니다.

우리의 대표로 레이크 석세스에 가서 많은 성적(成績)을 내고 있는 임영신(任永信) 여사에 대해서는 우리가 다 고맙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재정후원(財政後援)도 못하고 통신상으로 밀접히 후원(後援)도 못하는 중에 중대한 책임을 그만치 진취시 킨 것을 우리는 다 영구히 기념하게 될 것 입니다.


12월 19일

 

이북(以北) 동포 중 공산주의자들에게 권고 하노니 우리 조국을 남의 나라에 부속(附屬)하자는 불충한 사상(思想)을 가지고 공산당(共産黨)을 빙자하여 국권(國權)을 파괴하려는 자들은 우리 전 민족이 원수로 대우하지 않을 수 없나니 남 의 선동을 받아 제 나라를 결단내고 남의 도움을 받으려는 반역(反逆)의 행동을 버리 고 남북(南北)의 정신통일로 우리 강토를 회복해 서 조상의 유업(遺業)을 완전히 보호하여 우리끼리 합하여 공산(共産)이나 무엇이나 민의(民意)를 따라 행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기왕에도 누누이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공산당(共産黨)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공산당(共産黨)의 매국주의(賣國主義)를 반대하는 것이므로 이북(以北)의 공산주의자(共産主義者)들은 이것을 절실히 깨닫고 일제히 회심해서 우리와 같이 같은 보조를 취하여 하루 바삐 평화적으로 남북을 통일 해서 정치와 경제상 모든 복리를 다 같이 누리게 하기를 바라며 부탁합니다.

 

대외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세계 모든 나라 와 다 친린(親隣)해서 평화를 증진하여 외 교 통상에 균평한 이익을 같이 누리기를 절대 도모할 것입니다. 만일 교제상(交際上). 친소(親疎)에 구별이 있다면 이 구별은 우 리가 시작하는 것이 아니고 타동적(他動的)으로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어느 나라든지 우리에게 친선(親善)히 한 나라는 우리가 친선(親善)히 대우 할 것이요, 친선(親善)치 않게 우리를 대우하는 나라는 우리가 친선히 대우할 수 없을 것입 니다. 과거 40년간 우리가 국제상(國際上) 상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 것은 세계 모든 나라가 우리와 접촉할 기회가 없었던 까닭 입니다.

 

일본인(日本人)들의 선전만을 듣고 우리를 판단해 왔었지만 지금부터는 우리 우방들의 도움으 로 우리가 우리 자리를 찾게 되었은즉 우리 가 우리말을 할 수 있고 우리 일도 할 수 있나니 세계 모든 나라들은 남의 말을 들어 우리를 판단하지 말고 우리가 하는 일을 보아서 우리의 가치를 우리의 습관대로만 정해 주는 것을 우리가 요청하는 바입니다 .

 

우리 정부와 민중은 외국의 선전을 중요히 여겨서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는 각국 남녀(男女)로 하여금 우리의 실정을 알려 주어서 피 차에 양해를 얻어야 정의(正義)가 상통하여 교제 가 친밀할 것이니 이것이 우리의 권리만 구 함이 아니요, 세계 평화를 보증하는 방법입 니다. 새 나라를 건설하는 데는 새로운 헌법과 새 로운 정부가 다 필요하지만 새 백성이 아니 고서는 결코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부패한 백성으로 신성한 국가를 이루지 못하나니 , 이런 민족이 날로 새로운 정신과 새로운 행동으로 구습(舊習)을 버리고 새 길을 찾아서 날로 분발 개진하여야 지나간 40년 동안 잃 어버린 세월을 다시 회복해서 세계 문명국 에 경쟁할 것이니, 나의 사랑하는 삼천만 남여(男女)는 이날부터 더욱 분투용진(奮鬪勇進) 해서 날로 새로운 백성을 이룸으로써 새로 운 국가를 만년반석(萬年盤石) 위에 세우기 로 결심합시다.

 

1948년 7월 24일

대통령 이승만(李承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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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이승만대통령의 위대한 지도자적인 모습은 "육군사관학교"를 설립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육군사관학교는 1951년에 출발합니다.
1951년은 한국전쟁이 진행중이었던 시기입니다.
한국 경제는 보릿고개를 넘지 못한 아주 가난한 나라에서 미국식 육군사관학교를 설립하도록 지시한 것은 굉장한 의미가 있습니다.
육군사관학교는 철저하게 미국의 육군사관학교(웨스트포인트)의 교육 방법을 비롯하여 모든 것을 그대로 도입하여 철저한 교육을 시켰습니다.
전쟁 중에 젊은 엘리트들을 4년 동안 훈련시킨다는 것은 주위에서 쉽게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대통령은 최고의 음식, 시설, 복장, 훈련 등을 책임질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협력한 것입니다.
물론 경제적 지원은 미국의 팬플리트 장군의(James Alward Van Fleet,  1892. 3. 19~1992. 9. 23) 도움을 받아서 진행하였다고 합니다.

유럽에서는 장교는 귀족 계급만이 임명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식 장교는 정규 사관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이 장교로 임명을 받았기 때문에 유럽과 미국식 장교의 출신 성분이 다를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한국에서 제1회 육군사관학교 졸업생들(11기, 정규 1기)은 군은 생명을 바치고 전쟁에 참여하는 사람이라는 군인정신이 뚜렷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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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조, 주기도, 십계명


사도신조

- 사도신경(복음의 7대 연합이 담겨진 내용)

사도신경(使徒信經, 라틴어: Symbolum Apostolicum) 또는 사도신조
기독교에서 사용되는 신앙고백의 하나로 주로 서방교회에서 기도문으로 활용한다.
'로마신조'서 유래한 기독교인들의 신앙고백문으로 주기도문(마태복음 6:9~13)과 달리 성경에는 나와 있지 않다.

사도신경(使徒信經), 사도신조(使徒信條), 종도신경(從徒信經)

서방교회의 주요 기독교 교파가 사용하는 신앙 고백문이다.
교회 공동체에서 기본적으로 믿어야 할 교의를 요약 정리하고, 초기 교부들과 공의회 등이 재확인하고 천명한 주요 교리 해석에 대해 동의하며 이에 대한 믿음을 약속하는 내용으로, 주로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을 대신하여 암송된다.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 대신에 사도신경을 사용하는 것은 동방교회에서는 인정하지 않는 서방교회의 고유한 전승이다.

본래 로마 지역의 교회에서 세례를 받을 때 사용하던 신앙고백문에 기초하여 발전했다고 추정한다.
하느님의 전능함, 창세의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죽음의 과정과 부활, 승천, 심판에 대한 예언, 성령과 교회 공동체에 대한 믿음, 부활과 영생에 대한 믿음을 차례로 약속한다.

2세기 무렵부터 영지주의 및 몬타누스주의 등 이단 사상이 대두되자 기독교가 신앙을 정립하고자 정했다고 보고, 이 신조에 의거하여 이단을 구분한다.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사람은 파문된다.
따라서, 사도신경을 외워 이에 대한 믿음을 선서하지 못하면 곧 이단이기 때문에 기독교 공동체 내에서 효과적인 신앙 검증 도구로 기능한다.

개신교 측에서는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복음 16:16)라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토대로 만들어졌다고 보기도 하며, 사도의 신앙고백이라는 말을 사도적 권위의, 즉 성경의 내용을 잘 요약하여 권위가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참고로 사도신경의 전해지는 이야기 중에 사도들이 예루살렘에서 만방으로 선교를 위하여 흩어지기 전에 한 구절씩 붙여서 만들었다는 전설이 있지만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에서도 이 전설이 사실이 아니라고 부정한다.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I believe in God, the Father Almighty,
Maker of heaven and earth,
and in Jesus Christ,
His Only Son our Lord,
who was conceived by the Holy Spirit,
born of the Virgin Mary,
suffered under Pontius Pilate,
was crucified, dead, and buried
He descended into hell
The third day He rose again from the dead
He ascended into heaven,
and sitteth on the right hand of God
the Father Almighty
from thence
He shall come
to judge the quick and the dead.
I believe in the Holy Spirit,
The Holy Universal Church,
The Communion of Saints,
The forgiveness of sins,
The resurrection of the body.
And the life everlasting,
Amen.

주기도

주님의 기도는 기독교의 기도문이다.
천주경(天主經, 라틴어 : Oratio Dominica), 주의 기도, 주기도문(主祈禱文)으로도 부른다.
예수가 직접 가르쳐준 기도문이며 교파를 막론하고 중요하게 여겨지는 기도문이다.

마태복음 6:9절에서 13절,
누가복음 11:2절에서 4절에 그 내용이 실려 있다.
대개는 마태복음서에 있는 내용을 위주로 채택하고 있다.
일부 기독교인들, 특히  개신교에서는 이 기도를 영광송으로 마무리한다.

그리스어 원문

Πάτερ ἡμῶν ὁ ἐν τοῖς οὐρανοῖς·
ἁγιασθήτω τὸ ὄνομά σου·
ἐλθέτω ἡ βασιλεία σου·
γενηθήτω τὸ θέλημά σου, ὡς ἐν οὐρανῷ καὶ ἐπὶ τῆς γῆς·
τὸν ἄρτον ἡμῶν τὸν ἐπιούσιον δὸς ἡμῖν σήμερον·
καὶ ἄφες ἡμῖν τὰ ὀφειλήματα ἡμῶν,
ὡς καὶ ἡμεῖς ἀφίεμεν τοῖς ὀφειλέταις ἡμῶν·
καὶ μὴ εἰσενέγκῃς ἡμᾶς εἰς πειρασμόν,
ἀλλὰ ῥῦσαι ἡμᾶς ἀπὸ τοῦ πονηροῦ.
[Ὅτι σοῦ ἐστιν ἡ βασιλεία καὶ ἡ δύναμις καὶ ἡ δόξα εἰς τοὺς αἰῶνας. ἀμήν.]


라틴어 버전[1]
Pater noster, qui es in caelis:
sanctificetur Nomen Tuum;
adveniat Regnum Tuum;
fiat voluntas Tua, sicut in caelo, et in terra.
Panem nostrum cotidianum da nobis hodie;
et dimitte nobis debita nostra,
Sicut et nos dimittimus debitoribus nostris;
et ne nos inducas in tentationem;
sed libera nos a Malo. Amen.
(Quia tuum est regnum, et potestas, et gloria in saecula saeculorum.)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들을 용서하듯이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시고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것이나이다. 아멘)

Our Father in heaven,
hallowed be your name,
your kingdom come,
your will be done,
on earth as in heaven.
Give us today our daily bread.
Forgive us our sins
as we forgive those who sin against us.
Save us from the time of trial
and deliver us from evil.
For the kingdom, the power, and the glory are yours
now and for ever. Amen.

The Study of the Lord’s Prayer (Matthew 6:9-13, Luke 11:2-4;  March, 1931)

 9"This, then, is how you should pray: "Our Father in heaven, hallowed be Your name,
 10 Your kingdom come, Your will be done on earth as it is in heaven.
 11 Give us today our daily bread.
 12 Forgive us our debts, as we also have forgiven our debtors.
 13 And lead us not into temptation, but deliver us from the evil one. For Yours is the kingdom and the power and the glory forever, Amen.

2 He said to them, "When you pray, say: " 'Father, hallowed be Your name, Your kingdom come.
3 Give us each day our daily bread. .
4 Forgive us our sins, for we also forgive everyone who sins against us. And lead us not into temptation.

1. Introduction:

To know the syllabus of Christianity in a shortest period of time, it is a reasonable method and a shortcut among others to study the Sermon on the Mount, as I already said. To achieve the same goal, it is nearer to its goal to study the Lord’s Prayer, a part of the Sermon on the Mount.

Essentially, prayer is the pulse and crystal of the religion. Where there is no prayer, there is no religion; in all ages and countries, each religion has its own style of prayer. Each prayer manifests its relative height and authenticity of the essence of that religion clearly more than any other things. Especially, Christians have this model prayer that Lord Jesus Christ Himself gave to us; this concise phrase composed of 57 words in the original text contains the great truth of whole Christianity; it provides much convenience to those who want to learn Christianity.

Like this, the Lord’s Prayer is not only an important material to study whole Christianity but also it can be viewed as a separate teaching as Luke described by looking at its location, rather than viewed as a part of the Sermon on the Mount as Matthew conveyed; by taking this opportunity, we shall study the true meaning of important words, by considering it as a supplement to His teaching about the prayer in Matthew 6:5-6 within the Sermon on the Mount. To help readers to understand, Matthew had tendency to collect Lord’s teachings in fragments originally, and systematically arranged them by their common character; like he collected parables of the kingdom of heaven in chapter 13, the prophecy of His coming back in chapters 24 and 25, he arranged the issues of deeds and motives in the first part of chapter 6; he pointed out the standard of human behaviors in three paragraphs; good deed between people, namely charitable deed in the first paragraph, good deed between people and God, namely prayer in the second paragraph, and good deed toward individual self, namely fasting for self-culture in the third paragraph. When he was discussing about prayer, he inserted the Lord’s Prayer in the middle; so the repeating clause at the end of those three phrases, ‘and your Father who sees in secret will Himself reward you openly’ was not connected orderly manner as we can see. (Matthew 6:4, 6, 18) Verses 7-15 regarding the Lord’s Prayer seem to be additional compilation of other things; consequently the timing of His teaching of the Lord’s Prayer seems not to be the early part of His missionary work around Galilee, namely the timing of the Sermon on the Mount.

On the contrary, according to Luke, “And it came to pass praying in a certain place, when He ceased, that one of His disciples said to Him, ‘Lord, teach us to pray, as John also taught his disciples.’ So He said to them, ‘When you pray, say: (Luke 11:2-4).” It is many scholars’ opinion that Luke’s quotation is probably closer to what Lord Jesus taught them originally, based on the fact that the reasoning of situations is more natural and the text is short and clear. But, they are very similar in general and there is little difference in their substance; so we will explain it by following the Book of Matthew for convenience’s sake now.

All churchgoers can recite the Lord’s Prayer; even kindergarteners learned to memorize it freely without looking at the Book. But, the name of it causes misunderstanding now and then; of course, the Lord’s Prayer does not mean that Lord Jesus used to pray like this for Himself; Lord taught a model prayer to disciples who asked for one. Since Lord taught us the Lord’s Prayer, believers should make it a model of our prayer; but "This, then, is how you should pray:” does not mean that we should repeat the outwardly ‘pattern’ of the Lord’s Prayer as it is; He was not asking us to adhere to its phrases as He taught us. If we do, it is against His original intention of teaching the Lord’s Prayer. Therefore, He taught us how to pray, simply following ‘the essential points’ and its ‘spirit’ and knowing what you pray for. While we can pray using completely different phrases for the same purpose of the Lord’s Prayer like Luther, the majority of believers recites the Lord’s Prayer many hundred times without a single mistake but their spirit runs counter to the spirit of the Lord completely just like south pole and north pole are diametrically opposed to.

The latter half of verse 13, the praise of glory, is not in the Gospel of Luke; and only recent manuscripts of the Gospel of Matthew include it; so scholars’ guess sounds reasonable that it was inserted after the Lord’s Prayer was used during a public assembly or a service; such a praising come to being at the end of this prayer is rather a manifestation of naivety, and it is not an unnatural thing like grafting a bamboo to a tree. When we exclude this praising at the end and the naming, ‘our Father in heaven’ at the beginning, the remainder in the middle is the essence of the Lord’s Prayer. The prayer consists of two sections; each section consists of three passages. In sum, the prayer consists of two sections, six passages, and fifty-seven words. This is the model of prayer for Christians, the greatest prayer of the world; the whole truth of Christianity, namely the administration of the universe, about which 66 books of the Old Testament and the New Testament convey, is completely contained in these 57 words. It is true what Luther said, “The lesser words are uttered, and the better the prayer is; the more words spoken, the worse it is.” Those, who cannot pray like a lecture with an intonation and a tune and so called a ’powerful’ prayer at great length, should be first of all relieved at the Lord’s Prayer.

The first section of the Lord’s Prayer is about Your (God’s) name, kingdom, and will, namely about the heaven. The second section is about our bread, forgiveness, and salvation, namely about the earth; the first section is for the heaven and the second for the earth, just like Moses’ Ten Commandments consist of two sections, one about God and another for men; He taught us that the beginning section of the prayer, that is the most important, should be about God. Indeed, the heart of what believers concerned the most should focus whether it is for the glory of God or not. Christ’s prayer did not leave this central issue at all times. Nearing the end when He was praying on the Gethsemane that if it were possible, the hour might pass from Him, sweating drops of blood in agony; and He said, “Abba, Father, all things are possible for You. Take this cup away from Me; nevertheless, not what I will, but what you will” (Mark 14:36). It was the manifestation of His most important issue, which He could not disregard for a short moment; to Jesus, it was His food and His living to do the will of God who sent Him, and to finish His work (John 4:34); His life and His prayer centered only on God from beginning to end. It does not need to explain any further that our most concerned issue should occupy the important first half of our prayer in an agreement with Him.

The second section deals with earthly issues, but only one issue is about flesh and other two deal with the issues of redemption and salvation; we should also pay attention to the fact that He prayed thinking about brothers and sisters and all other people, always expressing ‘our daily bread’, ‘our debts or sins’, and ‘lead us not into temptation’. According to our experience of daily life, a matter of flesh is more urgent than a spiritual matter; I can pray sincerely for the medical treatment of my illness, for my family living, for the sanctification of myself, and for the redemption of myself, rather than for my brethren or countrymen. We are thoroughly self-centered. Our human nature makes us to believe that our brothers and sisters exist for me, having faith is for my happiness; we even try to take advantage of God for our self. Yet, Jesus Christ taught us how to pray: Pray more about spiritual things than things of flesh, for ‘us’ rather than for ‘me’, pray for the salvation of the countrymen or the mankind rather than wishing for the happiness of one individual, and thirst for the glory of God more than for any other things.

When He gave us the model prayer, His purpose was to teach His disciples who did not know how to pray (Luke 11:1); at the same time, He clarify that there is the intrinsic difference between a babbling pagan’s prayer and a dialogic prayer to Abba Father. However, some misunderstand the meaning of ‘our’, and interpret that this prayer it should be recited together during their congregational service; or by taking ‘this is how you should pray’ literally, others read it deliberately, just like Buddhists chant ‘May Buddha’s blessing be upon us!’ for hundreds of times counting beads of a rosary; they believe they are accumulating virtuous deeds by doing so, because they completely forgot the intent of the Lord’s Prayer. So, Luther called the Lord’s Prayer ‘the greatest martyr’; ‘our’ should be understood that we should pray more for all believers and mankind rather than for one’s individual happiness.

According to the opinion of scholars, what Jesus personally taught about prayer when He was addressing the Sermon on the Mount is only Matthew 6:5-6; later when Matthew was editing the Lord’s Prayer in this section, he inserted verses 7 and 8 as the introduction of the Lord’s Prayer. Even if Matthew inserted it, it is very important; as Luke provided definite materials to understand the Lord’s Prayer outwardly about time and place, Matthew prepared indispensable materials to understand the Lord’s Prayer inwardly about its motive and purpose.

When we pray to living God, preliminary knowledge we should have is: we should not babble like those who pray to an idol that does not have either an ear or an eye; we are not praying to a god like a stranger who does not watch over us and who does not like to give us any; when we pray, we should be conscious that we are asking to Father who knows our necessities of life before we ask for them and He cannot wait to give us rather good and valuable things even if we ask for bad and mean things (Matthew 7:11). When we receive the Lord’s Prayer with such preparation, we can naturally understand the reason why there is no other comparable thing. (Refer verses 7 and 8 to the Sermon on the Mount) 

2. Calling Name:

Our Father in heaven (Matthew 6:9)

Luke wrote only ‘Father’; some scholars guess Luke’s is original form after all, and Matthew supplemented ‘our’ and ‘in heaven’ later for being concerned about confusion with gods on earth and own father; on the other hand, since no one would pray to gods on earth or to own father by calling ‘Father’, there is no chance for a confusion. So, if Matthew added ‘our’ and ‘in heaven’, other scholars think there are profound hidden meanings, and add all sorts of explanations about them. After all, let us leave details to the leisurely work of scholars; what is important to lay believers is to grasp its main point of this verse. Namely, there is no room to suggest any objection to the fact that the main point of Jesus’ teaching was to call ‘Father’ when we pray, that is common in Matthew and in Luke. Jesus told us to pray, calling ‘Father!’ to God who created universe and all things in it, who led out Israelites, and who has administered the history of the world.

By understanding one word, ‘Father’, we can understand the Lord’s Prayer; consequently, it is such an important word that we can even understand the outline of Christianity by understanding it, just like we can glance at Paul’s faith in general from Roman 1:1, whole Christianity is contained in beginning verses of Genesis, and the outset of the rest of books of the Bible manifest the most important truth. Now, depending on our attitude of taking this one word ‘Father’, we can either become one who can truly pray the Lord’s Prayer that is unique in Christianity, or else we can fall into grievous state; as an old saying goes ‘people are born Catholic’, some people try to feel ecstasy by submerging oneself into so-called religious atmosphere by turning the Lord’s Prayer into a skeleton again by chanting it ever so many times like Buddhists do, even though Jesus taught us to stop babbling.

Jesus Christ was not the first who called God as ‘Father’; according to scholars, examples had not been rare since Homer the great poet of all ages, and especially around Jesus’ time, an idea to call the creator as father was the fashion. But, the ‘fatherly god’ whom the great poet Homer imagined could not get out of the sphere of imagination after all; it was not far from the level of the ‘UNKNOWN GOD’ of people in Athens (Acts 17:23). In their imagination, they could not find One like God of Israelite who held Abraham’s wrist when he was going to sacrifice Isaac, and who had Moses to lead Israelite across Red Sea and wilderness.

In the Old Testament, God was called as ‘Father’ in many verses in the clearer sense: “You are the children of the Lord your God (Deuteronomy 14:1). “Is He not your Father, who bought you? Has He not made you and established you”(Deut. 32:6)? Their relationship was: “I will be his Father, and he shall be My son. If he commits iniquity, I will chasten with the rod of men and with the blows of the sons of men” (2 Samuel 7:14). (Refer to other verses: Isaiah 1:2, 63:16, Jeremiah 3:4, 19, Hosea 11:1 etc.) What is more, the Lord said, “Israel is My son, My firstborn.” They understood that they had special relationship.

But Israelite was son or firstborn as a whole nation, but not as an individual capacity. And, the nations other than Israelite were not included in it. In those days, His only begotten Son (John 3:16) came down to the world, to whom a voice came from heaven, “You are My beloved Son, in whom I am well pleased” (Mark 1:11, 9:7, Isaiah 42:1). After we heard His proclamation that said: ‘He who has seen Me has seen the Father’ (John 14:9), “we cry out, ‘Abba, Father’, for we did not receive the fearing spirit of bondage again, but we received the Spirit of adoption” (Roman 8:15, Galatians 4:6). Since that time, God and mankind entered into a special relationship of Father and children, which was unseen in the past. And, not being limited to Israelite, all mankind was able to call God, ‘Abba, Father’ through Jesus Christ (Matthew 5:45, Luke 6:35). We can say that the view of paternity toward God reached its climax.

As I mentioned it before, it is wrong to interpret ‘our’ to mean for us to use this prayer in the congregational assembly. The One who taught us to pray only before God ‘in the secret place’ would not teach us such an obvious contradiction. We should interpret this ‘our’ as His teaching, always to pray for brothers and sisters, for public benefits over personal happiness, to precedence of mankind over individual, even when you pray in the secret place. Of course, it does not mean that you should not pray for one individual or for personal matters. Paul prayed three times for his flesh (2 Corinthians 12:8). The main point depends on what the mental motive is.

Especially ‘Matthew used the phrase ‘in heaven’ many times, about 20 times, and Mark and Luke each used once. It is possible that he used it to distinguish Him from earthly father; those phrase ‘in heaven’ can possible remind of God who is omnipotent, omniscient, full of ‘agape’, who administers all creatures of the universe, transcending high above this world, and who is on the throne that is radiating immeasurable glory. Christ taught us to call ‘Father’ to God when believers pray. How can we possibly explain that profound and limitless secret meanings are concealed in this phrase? When Christ wanted to convey a message to mankind about Heaven, He likened it to a vineyard or a mustard seed or a grain of wheat or Him and the church as a bridegroom and a bride. For each case, Christ labored painfully about the method of His expression; ‘what parable to be used?’ or ‘how should He say it?’ When the Sadducees, who say there is no resurrection, came to Him and asked Him a difficult question to be answered; in the resurrection, what happen to woman who married to seven brothers? Jesus answered and sighed out to them, “You are mistaken, not knowing the scriptures or the power of God.” We can imagine how difficult for Him to deliver a message about things He saw in Heaven to fleshly people who did not understand it. Salt and sugar are seasonings, preservatives, and white color; but when He called Christians as ‘the salt of the earth’, there was an inevitable necessity. A father or a mother is same parent in relationship; but when He taught us the relationship with God as Father and son, there was an important reason. We do not call Him king, master, judge, or creator, etc., but we do call Him simply ‘Father’. Our relationship is completely personal; whipping for justice on the one hand but serious love at the other hand, and fearing Him but enjoying His grace, etc. If one utters this single word ‘Father’ lively, his whole prayer becomes live. Conversely, if this word becomes lifeless, those who pray are “people who draw near Me with their mouths and honor Me with their lips.”(Isaiah 29:13)

3. The First Supplication (April, 1931):

Matthew 6:9 (Refer to Luke 11:2): Hollowed be Your name.

In olden days, a governor asked to a commendable person within his jurisdiction, “What is your wish?” If his wish was suitable – if the governor could comply with it, his wish was realized. King Herod brought the daughter of Herodias and swore to her, “Ask me whatever you want, and I will give it to you. I will give you up to half of my kingdom” As Herodia instigated, the girl asked for the head of John the Baptist; so the blood of righteous man was shed (Mark 6:17-30). There was a girl of only ninth grader on a deathbed, and her bright uncle in a college was staying at her bedside. When her doctor informed him that her last moment was getting close, he asked her, “Hay, what is your wish? Tell me! I will make sure your wish come true, even if I quit my schooling or exchange my life with yours.” Girl’s wish was very simple, “I wish simply to live.” It was a genuine feeling, without any trickery, to give his life in place of hers; but it was impossible to do so. Even though he tried to emphasize ‘the doctrine of the immortality of the soul’ since Socrates, based on his knowledge gained from the introduction to philosophy class, for a considerable length of time, not only she was not much consoled but also he who was asserting emphatically was feeing emptiness himself. 

It is impossible to have a man without a wish. But, when we want our wishes to be heard, we better know who is listening to us. We should ask to the governor something within his jurisdiction, to King Herod something within the boundary of Philistine, but we should know that there is nothing out of a notebook of a college student in the introduction of philosophy class can console the soul of a young girl who was leaving this world she was so much attached.

We are asking our wishes to omnipotent God who created heaven and earth, all creatures in the universe and rule over them; we are not bowing before granite strangely formed by weathering or toward an idol shaped and plated with gold by human hands; still, we are not confessing and submitting to a powerful tyrant. We are telling our wishes to God, calling Him, “Abba, Father!” The One who hears our wishes is the omnipotent One who rules the universe, and calling Him, “Abba, Father!” reflects the mentality of whole Christians. Then, when we call Him Father, with whom we have loving personal relationship, what is our first supplication? Like the mother of Zebedee’s sons, entreating Him to grant that two sons may sit, one on His right hand and the other on the left, in His kingdom, is because we can not discriminate what to ask for (Matthew 20:20-22). We are entreating to the Ruler of the universe, being on terms of intimacy of Father and son; wishes suitable to children of Father.

The greatest and the most sincere wish should be “hollowed be Your name”; namely the name of God should be made holy. We have intimate relationship with God, when we call Him ‘Father’; that does not mean we can be too close to Him while being ill mannered. We ought to realize that the hearer of Christian’s prayer, calling Him Father, is the Almighty God who rules over the universe. He is the Holy Being, who is holy, holy, and limitlessly holy; we have to take our sandals off our feet and we cannot draw near Him (Exodus 3:5, Acts 7:33, Joshua 5:15). People hid their face before the Holy One, for not daring to see Him (Exodus 3:6, Isaiah 6:5, 1 King 19:13). When we pay reverence rightly due to God by acknowledging the Supreme and Holy One, the intimate Father-son relationship can be established justifiably. If there is the deficiency in the degree of our reverence, our Father-son relationship becomes impure. (The view of God in modern men has been deformed in this respect.) Therefore, Christian’s wish begins with adoration or worship toward God.

The phrase, “hollowed be Your name”, is to express our wishes indirectly altogether, because it is toward the Supreme Holy God Himself. We express our wishes indirectly, because the connotation of this indicates that people do not have power to make God holy or God Himself does not manifest His holiness, but God manifest His glory through mankind and all other creatures.

It is a cordial expression to call “Your name” to be hollowed, instead of directly calling “God”. Israelite who considered them to be the chosen people of Jehovah and the hair of God, they feared God too much to call God’s name, and they forgot to pronounce it. It has been a long custom in Korea too that people awe to call father’s name. Besides, ‘name’ clearly reveals the intrinsic nature of the entity; therefore, saying ’Your name’ to be hollowed, instead of ‘God’, expresses the intrinsic nature of God clearer. There are numerous such examples in the Bible: “He gave the right to become children of God, even to those who believe in His name” (John 1:12). “Let those also who love ‘Your name’ be joyful in You” (Psalm 5:11). “Through ‘Your name’ we will trample those who rise up against us” (Psalm 44:5). The ‘name’ of the Lord is a strong tower; the righteous run to it and are safe” (Proverb 18:10). “I will proclaim the ‘name’ of the Lord before you (Exodus 33:19). We can find more examples elsewhere. ‘The name of Christ’ in the New Testament also indicates the entity in the same way.

Greek word ‘hagiastheto’ is translated into ‘be hollowed’, or ‘become holy’. God becomes holy, when we render to Caesar the things that are Caesar’s, and to God the things that are God’s (Mark 12:17), when we consecrate even a earthen vessel to be used as one for an altar; namely, when we face the Most Holy God with honor and worship which are naturally due to holy entity of God.

The name of God is intrinsically holy without waiting for the honor and worship of mankind. But, since the corruption of Adam, gentiles were: “What may be known of God is manifest in them, for God has shown it to them. For since the creation of the world His invisible attributes are clearly seen, being understood by the things that are made, even His eternal power and Godhead, so that they are without excuse, because, although they knew God, they did not glorify Him as God, nor were thankful, but became futile in their thought, and their foolish hearts were darkened. Professing to be wise, they became fools, and changed the glory of the incorruptible God into an image made like corruptible man and birds and four-footed beasts and creeping things. They exchanged the truth of God for the lie, and worshiped and served the creature rather than the Creator, who is blessed forever. Knowing the righteous judgment of God, that those who practice such things are worthy of death, not only do the same but also approve of those who practice them” (Roman 1:19-23, 25, 32). At the same time, Paul said to Israelite, “You who make your boast in the law, do you dishonor God through breaking the law” (Roman 2:17-29)? And, through Ezekiel God said, “I will sanctify My great name, which has been profaned among the nations, which you have profaned in their midst” (Ezekiel 36:23).

Neither honor nor worship due to intrinsic nature of God was found among either gentiles or Israelite. In such time, hallowing God’s name means gentiles and nonbelievers began to listen to the sound of conscience of each individual and the earth shall be full of the knowledge of the Lord as the waters cover the sea (Isaiah 11:9); so firstly, the glory of God will be manifested since they realized to worship the Lord who created the universe rather than all created things without exchanging the incorruptible honor of God with corruptible idols, and they honored and worshiped God appropriately by acknowledging God; secondly, the holiness of God is manifested when Jews and Christians make God pleased by obeying the words “You shall be holy, for I the Lord your God am holy” (Leviticus 19:2, 1 Peter 1:15), they present ‘their bodies as a living sacrifice’ to God (Romans 12:1). This is the relationship, “He who sees you (believers) sees Me (Christ) and he who sees Me sees Him who sent Me.” Not only Christ taught us so, but also His prayer and His whole life were centered on how God’s name could be hallowed; “Father, glorify Your name” (John 12:28) and “I have glorified You on the earth. I have finished the work, which You have given Me to do (John 17:4).

4. The Second Supplication:

Matthew 6:10 (Refer to Luke 11:2): Your kingdom come.

“Kingdom” is “Your kingdom”: Namely, a kingdom ruled by the authority of Jehovah God. And, the original word ‘basileia’ means ‘kingdom’ so it does not mean a constitutional government or a republic, but an autocratic monarchy. Then, when you unconsciously and mechanically recite Lord’s Prayer, by saying ‘Your kingdom come’, we ought to realize that we are declaring our wish that is completely contrary to the current of modern thought. The meaning of ‘Your kingdom come’ does not mean that we are praying for the completion of the self-government, the realization of socialism, or founding a communist government; on the contrary, we are entreating for God to administer an autocratic monarchy. All modern mankind, especially young Koreans are displeased with ‘dictatorship’, ‘autocracy’, or ‘kingdom’. We should realize that it is not an ordinary thing to pray for God’s kingdom to come quickly even if we understand with our clear consciousness that autocratic God rules the kingdom.

Greek word ‘elthato’ was translated as ‘arrive’ in old versions but as ‘come’ in newer versions. ‘Your kingdom come’ is one simple sentence. Its meaning seems to be self-evident but this seemingly self-evident sentence is one of rare examples which have been interpreted in many different ways from olden times till now. For example, if 500 believers recited it in unison in a church, each one would visualize different kingdom as they interpreted it 500 different ways. (Omitted about 5 lines, which explained how Japanese and Chinese translated in their Bible.)

‘Come’ can be interpreted as it comes gradually, namely it advances and progresses little by little; ‘Your kingdom come’ can be taken as ‘Heaven comes on earth gradually’, and if it is lopsided, a church turns into a superficial charity organization which devoted itself to the movement of building Heaven on earth zealously. Of course, each one will have different idea about the concept of Heaven built on earth. Everyone can picture the Heaven of his own: some religious people will imagine the mansion of a missionary as Heaven on earth; some learned people might be envious of the golden state,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as the shadow of Heaven; or Denmark in the matter of agriculture, or communist Russia, or any other thing of individual choice.

On the other hand, by rejecting such gradual, progressive view of Heaven, some pious devotees take eschatological interpretation of ‘come’ that the perfect kingdom of God will be established later on the Second Advent, for they regard the movement of building Heaven on earth as a heretic. However, in reality, every one of those who take eschatological view will of course have his own imagination and belief when it comes to detail such as the timing of the Day of Judgment, the form and substance of the kingdom after its establishment, etc. Also, some who take eschatological view do not reject progressive view at all, while some who take progressive view wish the completion of Heaven as their final object; they are subtly intertwined in reality. Each case cannot be discussed in detail here; we just want to study the substance of the meaning of ‘Your kingdom come.’

Originally, Israelites strongly have longed for the coming of the kingdom of Messiah. Therefore, when Jesus was spreading Gospel of Heaven after John the Baptist was arrested, people tried to make Jesus a king, namely they tried to establish the kingdom of Messiah; that 12 disciples dreamed of the Messianic kingdom at the end can be learned from the betrayal of Judas Iscariot, Peter’s admonition (Mark 8:32), and the request of James and John, the sons of Zebedee (Mark 10:37), etc. If we examine this thought from the Old Testament: The Lord says, “Sing and rejoice, O daughter of Zion! For behold, I am coming and I will dwell in your midst” (Zechariah 2:10). Ezekiel said, “My tabernacle also shall be with them; indeed I will be their God, and they shall be My people (37:27). “And the name of the city from that day shall be: The Lord Is There” (48:35). Isaiah said, “The stretching out of his wings will fill the breadth of Your land, O Immanuel” (Isaiah 8:8).

If we read other verses such as Isaiah 25:8, 35:10, 65:17, 19 and 2 Chronicles 6:18, etc., they prophesied repeatedly that the old shall be gone and the new will come; that God will swallow up death and will wipe away tears; that sorrow and sighing shall flee away and new heavens and a new earth will be created; that the imperfect world shall be gone and the perfect Kingdom of Messiah will come. This idea continued till the New Testament era and righteous and pious people longed for this kingdom to come. “Now there was a man in Jerusalem called Simeon, who was righteous and devout. He was waiting for the consolation of Israel, and the Holy Spirit was upon him” (Luke 2:25). Joseph of Arimathea, a prominent member of the Council, who was himself waiting for the kingdom of God, went boldly to Pilate and asked for Jesus’ body (Mark 15:43). “Those who went ahead and those who followed shouted, “Hosanna! Blessed is he who comes in the name of the Lord! Blessed is the coming kingdom of our father David! Hosanna in the highest heaven” (Mark 11:9-10)! “While they were listening to this, he went on to tell them a parable, because he was near Jerusalem and the people thought that the kingdom of God was going to appear at once” (Luke 19:11). We can understand the situation how righteous people at the time of Jesus longed for the Kingdom of God, namely the kingdom of Messiah that was promised through prophets. When this came to disciples, this heavenly news became clear as an established fact visible to us as Paul said, “Now there is in store for me the crown of righteousness, which the Lord, the righteous Judge, will award to me on that day—and not only to me, but also to all who have longed for his appearing” (2 Timothy 4:8). Of course, it was because the meaning of ‘heaven’ and ‘come’ became clearer when Jesus, who had been in God’s bosom, came down from heaven. So, let us find the meaning of ‘Your kingdom come’ as written in the New Testament with words as spoken by Jesus in the following.

The first evangelical voice of Jesus was, “Now after John was arrested, Jesus came into Galilee, proclaiming the gospel of God, and saying, “The time is fulfilled, and the kingdom of God is at hand; repent and believe in the gospel” (Mark 1:14-15). That was what John the Baptist, who came to ‘prepare the way of the Christ, and make His paths straight, proclaimed on the shore of the Jordan River, “Repent, for the kingdom of heaven is at hand” (Matthew 3:2-3)! And the first sentence of the Sermon on the Mount was, “Blessed are the poor in spirit,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Matthew 5:3). Once, on being asked by the Pharisees when the kingdom of God would come, Jesus replied, “The coming of the kingdom of God is not something that can be observed, nor will people say, ‘Here it is,’ or ‘There it is,’ because the kingdom of God is in your midst”(Luke 17:20-21); and He said, “But if it is by the Spirit of God that I drive out demons, then the kingdom of God has come upon you” (Matthew 12:28). Namely, He meant that the kingdom of God has come within us already. And, He also talked about the development and accomplishment of the kingdom of God; He told them another parable: "The kingdom of heaven is like a mustard seed, which a man took and planted in his field” (Matthew 13:31). Regarding its completion, He said, “And this gospel of the kingdom will be preached in the whole world as a testimony to all nations, and then the end will come.” And, He also said, “For I will not drink wine again until the Kingdom of God has come" (Luke 22:18. Refer to Luke 23:42, Matthew 28:9, Acts 3:21).

To conclude based on above verses, we should not be infatuated with others who said “Here it is, or “There it is,” and it has come within us or in our midst; we should not insist it to be today or tomorrow, for it has come already to believers and to people who are born again; it is not enlarged by the campaign or work of people, the kingdom of heaven become flourishing like a mustard seed while the Words of God are being spread to the world like a farmer is watering to seedlings; if we, together with all creatures in the universe, heartily long for the kingdom of God where the righteous sun shines and receive it as a little child will (Luke 18:17), we shall see that our prayer will be answered in the end.

When a Christian prays “Your kingdom come,” he does not necessarily wishing for an earthly paradise; he does not aspire to attain improved living conditions. We are praying that self belong completely under the reign of God, and that whole world obey thoroughly to the rule of God. Therefore, people who have tasted the bitter taste of life are able to do such a prayer; it should be like the prodigal son’s feelings, “But when he came to his senses, he said, “How many of my father’s hired men have more than enough bread, but I am dying here with hunger!” (Luke 15:17); it must be wailing repentance of people whom God gave over to a depraved mind because they did not like to retain the knowledge of God (Romans 1:28-32); this kind of prayer can well up from people who share the feelings of the psalmist of Psalms 13.

5. The Third Supplication (September 1931):

Matthew 6:10: Your will be done on earth as it is in heaven.

This third supplication of the Lord’s Prayer as we remember is recorded only in the Book of Matthew, not of Luke. Therefore, some people think this third supplication is relatively less important part of the Lord’s Prayer, but it is definitely not so. On the whole, as all the members of one organic body have equal value (1 Corinthians 12:12-31), no part of the Lord’s Prayer can possibly be eliminated, leaving other parts alone. When we utter the Lord’s Prayer as living words out of our mouth, the first sound ‘Father’ comprehends the whole Prayer as mentioned before. Next, the first supplication, ‘Hollowed be Your name’, is filled with great truth that cannot be expressed adequately with speech or writing. The first half of the Lord’s Prayer is claimed to be related to spiritual things or important things directly related to God, but the part belong to the second half is not entirely concerned about fleshly things, worldly things, or self-interest or selfish desire. If we can chant the last word ‘amen’ in unison with full liveliness, we may discover the complete meaning of the Lord’s Prayer and grasp the Christianity on the whole. This is not to trifle with a paradox under no circumstances. If we touch any part of a living creature, we can feel the lively throb of life.

If the Lord’s Prayer becomes ‘the greatest martyr’ as Luther called and only the skeleton of it is being recited repeatedly, part of it might be useless and other part might be particularly important phrase. If it is not such a skeleton, all parts of it should have equal importance. Therefore, instead of making the first supplication as the annotation of the second and the third supplications or including the first and the second supplications in the third supplication as some scholars’ leisure work, we want to carefully consider how the third supplication is related to our faith. If we rewrite the verse: “Your will be done on earth as it is in heaven.” Without saying who prays or what religion he has, the purpose of a prayer has been to achieve ‘the will of self’ through all ages; we pray in an attempt to attain our wishes which are secretly kept at the bottom of our hearts; in many instances, we usually pray for wealth, fame, a distinguished achievement, or the blessing of descendents. There are many remains where Sung-gye Lee (The founder of Lee Dynasty in Korea.) and other heroes prayed for 100 days to attain a throne or power; these simply show what kind of usual prayers our ancestors have had.

Yet, it is surprising that the prayer Christians should do is completely different; we should pray not for our wishes to be achieved but ‘Your will be done.’ Usually, we pray to realize our will, and we cannot pray unless our will has been moved. Nevertheless, Jesus wants us to pray ‘Your will be done’. Needless to say, ‘Your’ means ‘God’s; there is no such a contradictory concept. Therefore, a certain scholar called this phrase ‘the suicide of prayer’; he had a point. We pray to accomplish our will, but we pray for God’s will be done; it is worse contradiction than a living creature suicides. But, this contradictory concept distinguishes Christian’s prayer from that of a pagan. This is an important point that shows a unique feature of Christian’s prayer.

It does not mean that a Christian should not have a wish for himself. Paul said, “Do not be anxious about anything, but in every situation, by prayer and petition, with thanksgiving, present your requests to God” (Philippians 4:6). Request to God ‘in every situation’: It does not mean that you request only noble and spiritual things, without asking for daily bread: Of course, it does not mean that you should ask for like an adult, not like a child, does. Everything is permissible, so just ask for it. Also, do not adhere to face-saving or do not take heed to emotion arising in social circles. At times, wrestle until dawn as Jacob wrestled with God (Genesis 32:24), or we might demand persistently for a year or even for our lifetime, even if we lose our face. And, God is pleased with such a prayer of trust, enthusiasm, and honesty; it is a separate issue whether He answers our prayer or not.

However, we ought to know that we can pray to our Father. Since we are praying to Father, there should be no distance; since we are asking to our Father, we should ask without hesitation or without doubting His love, even if our honest prayer has not resulted in effective answer or it seems to be so because He delays giving His answer. Namely, Christians may demand persistently and irrationally on one hand, but appending James’ condition: "If it is the Lord's will, we will live and do this or that" (James 4:15). It is not to accomplish my will by forcing God, but to get God’s answer if my wish matches His will. Jesus’ prayer on the mount Gethsemane most clearly teaches us this point: Going a little farther, He fell to the ground and prayed that if possible the hour might pass from Him. “Abba,Father,” He said, “everything is possible for You. Take this cup from Me. Yet not what I will, but what You will” (Mark 14:35-36). He started by stating His wish prominently, but He ended obediently to God’s will as melting wax in a hot summer day. He prayed wishing His prayer to be answered, and He would not stop praying because it would not be answered. Without concerning about its effectiveness, He expressed His trust to His Abba, Father. This is Christians’ prayer. Apostle Paul prayed three times for his flesh. Though he was not healed, he rather thanked to the Lord (2 Corinthians 12:8-10).

In the phrase ‘on earth as it is in heaven’, heaven where angels carry out God’s purpose obeying His will perfectly (Psalm 103:19-20, Daniel 7:10) is contrasted with earth that has been disobedient since the first man Adam. We are to pray that God’s purpose to be accomplished even on earth perfectly. ‘On earth as is in heaven’ is an independent clause, which can modify not only the third supplication but also the second and the third ones; there might be slight difference of connotation, but the meaning is similar in general. Therefore, the kingdom of God will come where God’s purpose is accomplished, and His name will be exalted perfectly in such a nation.

6. The Fourth Supplication:

Matthew 6:11: Give us today our daily bread. (Ref. Luke 11:3)

Those up to the third supplication were about heavenly things, but three supplications starting from the fourth supplication are about earthly things or about us. Among those three, the fifth supplication and the sixth one are about spiritual things, but the fourth supplication is completely about flesh. Therefore, since olden days, reverend fathers and some scholars claimed that this clause of seeking bread was unworthy of the divine nature of the Lord’s Prayer as a whole; by interpreting ‘bread’ in different meaning, they concluded that Lord surely taught us to seek for ‘spiritual bread’, for He would not have taught us to seek for inferior bread for flesh. There are numerous clauses in the Bible that support such an opinion.

Believers have food that the world does not know about (John 4:32); food for believers is to take the words of God and to do the will of God who sent Him (John 4:34). Believers already received the right to become children of God through the authority of Him (John 1:12); ‘but our citizenship is in heaven’ (Philippians 3:20). ‘Believers already have eternal life and will not be condemned; they have crossed over from death to life’ (John 5:24). No one who is born of God will continue to sin, because God’s seed remains in Him (1 John 3:9), for everyone born of God overcomes the world (1 John 5:4). Only thing for us to seek first is ‘His kingdom and His righteousness’ (Matthew 6:33); the thing for us to do is not ‘a matter of eating and drinking’ (Romans 14:17); the work of God is to believe in the One He has sent (John 6:29).

Looking at these verses, some heretics believed that interpreting ‘daily bread’ spiritually as ‘bread of God’ or ‘the true bread from heaven’ (John 6:32) would make the word of Christ more sacred; for it is the last thing that Jesus Christ would have taught us to pray for food of flesh and other five supplications of the Lord’s Prayer are all spiritual in nature.

Even though they did so to be faithful and devout to Christ, they ended up doing wrong to Christ. ‘artos’ in Greek means bread; but it means all necessary things for our living such as clothes, food, and house, needless to mention here. Scholars who toiled to interpret a word clearly referring to flesh as spiritual meaning made an error as great as their effort.

‘The Son of Man’ who grew up in poverty must have felt keenly the necessity of bread. He was not only the Son of God but also ‘the Son of Man’ with blood and flesh. He did not talk about an impractical theory or a futile argument just for a joke. He who was going to mitigate His hunger and thirst with figs knew well that ‘hunger makes us weak and thirst makes us impatient.’ By saying ‘Man does not live on bread alone, but on every word that comes from the mouth of God,’ He knew that He was a citizen of the kingdom of heaven as well as a Man living on earth; He also knew that He was a spiritual being who eats bread made of wheat flour for His bodily living just like other ordinary people. Believers are not different in earthly living; believers as well as nonbelievers live under the control of same laws for all matters; all of us are like earthen vessels, which are to be broken and are to be returned to soil soon. We have endless hope of throbbing with eternal life at one hand (2 Corinthians 4:7), and, at the other hand, our life is full of unbearable agony even though our life will disappear like a weed that cannot be found again where it used to be (1 Peter 1:24); in a way, believers have dual life. Therefore, that Jesus taught us to pray for daily bread for us to live bodily life is not a base teaching, definitely not a slip of the tongue, but a necessary prayer for the realities of life.

Yet, if we interpret it as shown above, there are timid scholars and devout believers who are concerned about praying for things for flesh as heathens do; even if bread clearly means food needed for daily living, they hold fast to their view that this one clause out of six must be base in comparison to others, by interpreting the asking phrase, ‘give us…’ was not taught by Jesus actively but He ‘permitted’ us to pray for flesh; at the other hand, by interpreting such a way, they want to see a clear difference from heathen’s prayer that asks for things for flesh in this world only.

We already mentioned it is wrong idea that praying for necessities for bodily living is base, and it is also wrong idea to differentiate our prayer from that of heathens based on the kinds of materials in our prayer. Of course, it is true that the prayer of Christians – like Lord’s Prayer – put more emphasis on heavenly things or spiritual things, while heathen’s prayer mostly asks for only things for flesh. But, it is all right that the fourth supplication of the Lord’s Prayer and heathen’s prayer are the same; for example, they can ask for the same materials. ‘The difference should be the attitude of the prayers, not the kind of materials they are asking for.’ Christians do not call on different gods to find one god who will answer their prayer effectively; they pray to their Father even if their prayers do not get answered. They pray heartily for their daily bread not only when they are in need but also when they are millionaires already, just like a slave watches the hand of his mistress. Not only they pray when they do not have job, but also when they completed good work at the end of a day, without eating bread as their right but considering themselves as an ‘unworthy servant’ (Luke 17:10).

God causes His sun to rise on the evil, and sends rain on the unrighteous; He raises the birds in the air and the lilies of the field. Even if we do not pray, we know we will have enough food to live on. Therefore, Christians pray not because they worry that God would not give them bread, nor because they feel poor in need of bread. Believers know well that their whole livelihood depends on God’s support. So, Christian’s prayer is nothing but an expression of a child who trust his father. So called Christian’s prayer is from all born-again Christians owing to Christ, the poor or the rich, the lowly or the noble, the sick or the healthy, who cannot hold back their trust from out-flowing toward God the Father. Not only it is not base for us with flesh to ask necessary things for bodily living but also it is natural thing to depend on and to trust father for all spiritual matters as well as even fleshly things, to be sure.

The Greek word ‘epiousion’ that is translated as ‘daily’ in the fourth supplication, has been interpreted in several different ways since olden days; (1) necessary for subsistence, (2) many scholars read as ‘on that day’, (3) but it might be most appropriate to read as ‘following day’ and interpret it as a prayer asking for ‘bread needed for future days’. Namely, if we pray in the evening, it means food for tomorrow, and if we do in the morning, bread needed to sustain our life for that day.

And, ‘today’ was used in Matthew, but ‘each day’ was used in Luke, and the forms of the verb ‘give us’ are different; meaning: Instead of ‘give us once’ in Matthew, give us ‘continuously’ in Luke; but, actually both mean the same. Namely, Luke was simply ‘asking for food needed for each day, today’s portion for today and tomorrow’s for tomorrow’, definitely not ‘to store so much of it that it will be consumed in several years’. The characteristic of this prayer lies where we ask for our daily necessities to Father who demands profound relationship to His children. (Refer to the parable of a rich man who built a larger warehouse in Luke 12 and the story about manna in Exodus 16.)

Thus, it is definitely not self-centered corruption to pray for bread in order to sustain our bodily life. As far as thorough God-centeredness is concerned, the first supplication of ‘hollowed be Your name’ and the fourth supplication of ‘give us today our daily bread’ are the same in essence; they are both equal expression of faith and identical manifestation of love. And, the spiritual as well as bodily life of believers is based on daily living in each day in principle; for the life in absolute faith can not be any other than daily living in each day (James 4:13-16). One, who can kneel before Father and pray naively ‘give us today our daily bread’ as Christ did, is blessed because he is poor in spirit and the kingdom of heaven is his (Matthew 5:3).

7. The Fifth Supplication (October 1931):

Matthew 6:12: Forgive us our debts, as we also have forgiven our debtors. (Refer to Luke 11:4)

Though we are not the same as King David, who said, “…according to your great compassion, blot out my transgressions” (Psalm 51:1), all believers’ sincere desire is to request our past sins to be forgiven. The second half of the Lord’s Prayer is consist of the request of people or the supplication about earthly things; the fourth supplication prays only for daily food for body, but both fifth and sixth supplications are about spiritual things; out of those, the sixth supplication entrusts matters in the future, while the fifth supplication requests about things happened in the past. While we live in body, we need food to nourish our body and it is a reasonable demand to pray to Father as mentioned before. But, Christians are urgently compelled to pray for spiritual things more than bodily things.

It is told that we know etiquette when food and clothes are well provided, but it is also said that we can die gladly if we hear the way in the morning in certain circumstances. It is true that a day in a Lord’s courtyard is better than thousand days on earth. Experience rather than a theory proves well that Christians eagerly burn with spiritual request more than bodily one. Also, though both are supplications for spiritual things and supplication for the matters in the future is not unimportant, an earnest supplication for the forgiveness of inequities we committed in the past is a true and urgent request from the bottom of our heart; it is common fact well known to experienced Christians and we can see that it is in very natural order. Unless the relationship between God and people is restored to right relationship by disposing old sins, entrusting God to protect us from future temptation is futile, daily bread cannot be valuable, and praise and thanksgiving out of our mouth are in vain because they cannot possibly reach to God.

Therefore, if we were poets, we should begin the first verse, ‘blot out all my transgression’, like King David did; if we were in a situation where we could pray only in one verse, we should pray for His compassion so that He would first forgive our sins, like the criminal hung on the cross who said, “Jesus, remember me when You come into Your kingdom” (Luke 23:42).

Since it is our honest desire from the bottom of our heart that our past sins are forgiven and it is like a preparatory part of all prayers, all Christians without exception pray about it most vividly, naturally, and eagerly. But, to some believers who tend to think deeply, this supplication seems to contain numerous contradictions and questions, compared to other verses. Therefore, some honest believers might stop their prayer when they come to the fifth supplication. Accordingly some of them give up reciting the Lord’s Prayer loudly out of their mouth.

As it was mentioned before, the Lord’s Prayer should be our prayer to God everyday. Matthew used ‘debts’ while Luke used ‘sins’; the duties we have not fulfilled to God, namely ‘debts’ to God, are ‘sins’. Jesus taught us this in a parable of a king who settled accounts with his servants in Matthew 18:23-35. Yet, all the sins, whether they were great or small and serious or trifling, we had committed during the times of unbelievers were forgiven already when we believed Jesus. Our old self, the body of sin, was crucified with Jesus (Romans 6:6), and we became pure since that time. Therefore, it is obvious that ‘forgive us our sins’ does not refer to past sins committed before we believed in Jesus. Therefore, the sins mentioned here are evidently our sins committed knowingly or unknowingly since we became believers of Jesus, and we are praying for those to be forgiven. Sins make the space between God and people filled with dark clouds and segregate them. Not only we invigorate our energy by taking food for our body everyday, but also we should remove obstacles between God and people everyday by maintaining spiritual respiration so that sins committed on that day ought to be forgiven in the same day.

But, there arises a strong opposition against this view. All Christians have been forgiven for their sins already, ones who were really cleansed should not commit sins again, so they do not have to pray for their sins to be forgiven. Believers cannot commit sins; if they do, it is a proof that they are not really saved yet. St. John wrote, “No one lives in Him keeps on sinning. No one who continues to sin has either seen Him or known Him.” “No one who is born of God will continue to sin, because God’s seed remains in Him” (1 John 3:6, 9). So, even if same sins were committed as of old, those are not to be called sins; but, regardless how they are called, the facts remain the same sternly.

Of course, we count ourselves dead to sin but alive to God in Christ Jesus (Romans 6:11). Since the root of our sin has been cut off, ‘sin shall not be our master’ (6:14). Because our past sins have been purified with the blood of Christ, we are clean without any speckle of dirt (1 John 1:9, 2:1-2). But, it is true that we have duality in our life in the flesh. Just like remaining stump of a cut-off plant often shoot out buds and come into flowers, the plant of our sin that was cut off often regenerates its root in our spirit and attempt to graft small branches to it. The superfluous power of the flesh attempts to revive its power at all possible opportunities. Apostle Paul sincerely confessed, ‘For in my inner being I delight in God’s law, but I see another law at work in the members of my body, waging war against the law of my mind and making me a prisoner of the law of sin at work within my members.’ He lamented, “What a wretched man I am! Who will rescue me from this body of death” (Romans 7:22-24)? Honest believers experience the same feeling in common. Once we realize the fact that the law of my mind of inner being does not commit sins but another ‘law of my body’ makes us to sin, we should not sit tight vaguely, doing nothing but holding fast to a religious doctrine; going one step forward, sins we commit each day ought to be forgiven by repenting them on the very same day so that we can live a day as a regenerated being filled with lively spirit like children, or start a life journey of a day.

Because we have been educated that the secret of self-culture is to ‘examine oneself three times each day’ as a disciple of Confucius said, we are apprehensive of the teachings of Paul in a sort, “Forgetting what is behind and straining toward what is ahead, I press on toward the goal to win the prize…” (Philippians 3:13-14). However, wasting a whole night merely thinking and examining sins already committed is not the fruitful means for our life. Remembrance of accumulated sins not only makes our conscience dull but also makes us unable to understand what the redemption of the cross is, and unbelieving God’s love and power lead us to shallow faith and faithless conducts. Even if we had committed sins tens of thousand times in the past, we ought to dispose them thoroughly; after they are cleansed, we should forget those completely; when we face new sins, we should face them with a sensitive and fearing mind of a innocent maid.

As seen above, the supplication, ‘forgive us our debts’, is necessary to maintain fresh and healthy growth of our spirit each day by cleansing it. Whenever we recite the Lord’s Prayer in real life, we feel unique difficulty if we come to the fifth supplication, because a sort of condition, ‘as we also have forgiven our debtors,’ is attached, which is different from other supplications. In order to avoid this difficulty, scholars attempted different interpretations; for example, the verb ‘forgiven’ used in Matthew is ‘aphekamen’, an aorist tense to express a past action, ‘have already forgiven’ in English. At the other hand, ‘aphiomen’ was used in Luke to express present tense, ‘forgive now’ or ‘will forgive in the future’. They tried to avoid the difficulty of this supplication by taking Luke’s milder expression rather than Matthew’s stronger one; they interpret that it is sufficient for our sins to be forgiven and we would forgive others who sin against us at the same time. But, for being very cramped expedient, Jesus added verses 14 and 15 after the Lord’s Prayer, apparently He disapproved such a temporizing means; not to give us any room for an excuse, He said, “For if you forgive men when they sin against you, your heavenly Father will also forgive you. But if you do not forgive men their sins, your Father will not forgive your sins.” Elsewhere, He repeatedly said the same meaning more than a couple of times; Mark 11:25 says, “When you stand praying, if you hold anything against anyone, forgive him, so that your Father in heaven may forgive you your sins.” There are same teaching in Matthew 5:23-24 and 18:23, etc. Thus, the purport of Jesus’ teaching is very clear. If we want our sins to be forgiven by God, it is precondition for us to forgive others’ sins.

But, how can we practice it? We do not have ability to love our enemy. Therefore, by praying for us to forgive the sins of others and by borrowing the power of Holy Spirit, we can gain experience in forgiving the little offense of our brothers; then, we praise God, knowing how great God’s love is who forgives our great sins; for we are moved by His great love, we are able to forgive the sins of others again. As Paul said, “Be kind and compassionate to one another, forgiving each other, just as in Christ God forgave you (Ephesians 4:32, Colossians 3:13), we need to practice loving others; then we try to become children who gradually resemble our Father, till we love our enemy without taking vengeance upon them, and we can ‘be perfect, therefore, as your heavenly Father is perfect’ (Matthew 5:48).

It is so obvious fact: “If anyone says, ‘I love God,’ and hates his brother, he is a liar; for he who does not love his brother whom he has seen cannot love God whom he has not seen (1 John 4:20).” First of all, we should forgive our brother whom we have seen, and go forward before God as His children to ask our sins to be forgiven. Of course, our deeds cannot be the condition of exchange with God’s forgiveness, as the Bible teaches us throughout. When we try to forgive little offense of others, we realize how great and deep our sins are and how immense the grace of God is, so that we can gradually shatter our self to pieces till we can humbly pray, “Forgive us our debtors, as we also have forgiven our debtors.” Thus, a complete relationship between God and people can be established then.

8. The Sixth Supplication:

Matthew 6:13: And lead us not into temptation, but deliver us from the evil one. For Yours is the kingdom and the power and the glory forever, Amen. (Refer to Luke 11:4)

Earnest desire of Christians from the bottom of their heart that their past sins to be forgiven is manifested as the fifth supplication, “Forgive us our debts.” But, can we be content with repeating the fifth supplication, simply because “where sin increased, grace increased all the more” (Romans 5:20)? Definitely not! Even if we have sinned tens of thousand times, if we supplicate with a little faith, God does not consider it troublesome to forgive us ten thousand times, and cleanse us with hyssop until we become whiter than snow (Psalms 51:7) as we can see vividly. But, what is sin? It is not a sphere of imagination or a conceptual one. One who really tasted the pain of ‘sin,’ one who experienced the difficulty of forgiving other’s unrighteousness against him, children who realized God’s ‘grief’ when He forgive us, cannot but desire deep in one’s heart that ‘one wishes not to fall into new sins again.’ A patient is happy when a confident doctor cured his disease with proper treatments. However, rather than tasting the same happiness again, it is wiser for him to exercise actively so that he does not fall into the pain of sickness again. Therefore, it is proper that the sixth supplication comes after the fifth supplication, and it is the end of our supplications.

Thus, looking at the order of the expression of Christians’ wishes, this sixth supplication is natural; looking at the purpose, the substance is clear. Incompetent children ask for daily bread to Father in the fourth supplication; children who committed sins against Father ask for forgiveness in the fifth supplication; children who realized their weakness ask for Father’s protection in the sixth supplication; all of these are in series which manifest the utmost trust between Father and son. Yet, if we consider the sixth supplication in detail, possibly there have been problems in several aspects from olden times.

Greek word ‘peirasmos’ has two meanings; the first meaning is ‘temptation’ into which Satan lead people, luring with suffering or pleasure in order to capture them as prisoners with evil purpose; the second meaning is ‘trial’ through which God tests and trains people with good intentions. The problem is which one of the two meanings is applicable to this verse. Whether we interpret it as ‘temptation’ or as ‘trial,’ both get into a difficulty to some extent. Firstly, if we take it as ‘temptation,’ it is meaningless to ask God not to tempt us, because “God cannot be tempted by evil, nor does He tempt anyone” (James 1:2). Secondly, if we interpret it as a trial, instead of avoiding or withdrawing from what God gives to train us, ‘we should rejoice in our sufferings’ (Romans 5:3); and Christians, who ought to ‘consider it pure joy, whenever they face trials of many kinds (James 1:2), seem to be irrational if they try to avoid any trials.

Temptation is from Satan and trial from God, so the difference in objective of those two is like the difference between heaven and earth. However, if we think it over again, it is scholars’ leisure business to pry into temptation or trial in the Lord’s Prayer. In a practical problem, we cannot differentiate Satan’s temptation from God’s trial, and we do not need to differentiate them. The temptation that Adam and Eve encountered with ended as temptation (Genesis ch.3), but the Satan’s temptation Job faced ended in God’s trial (Job chapter 1 & 2). Namely, Satan tries to tempt people by taking advantage of God’s trial, and God tries to bring loved one to trial by taking the opportunity of Satan’s temptation. Therefore, at the beginning, from a person’s point of view, it is not possible to know if it is Satan’s temptation or God’s trial. So depending on the attitude of the person who faces a problem, one can either cave in to Satan’s temptation for being unable to cope with God given trial, or at the other hand, another can willingly put up with Satan’s temptation by considering it as suffering and discipline which Heavenly Father gives to loving children in order to train them (Hebrews 12:6-12).

So, rather than wasting our effort to separate and distinguish temptation and trial from the beginning, let us accept both meanings as original Greek word has; the most urgent practical need is to determine our attitude to cope with the situation when we face a temptation or a trial. Even if God has approved the trial, mankind has to pass through it with all our strength; if it is Satan’s temptation, the more we should fight bravely until we win a victory. In fact, the most challenging problem of life is how to be victorious.

In general, the surest way to win a war is to know what the substance of enemy is before anything else; tactics of campaign are secondary issue. It is possible that others in outer world cause us temptation like Eve in the case of Adam, but as James said, “Each one is tempted when, by his own evil desire, he is dragged away and enticed” (James 1:14) in most cases. Our fleshly desire always becomes our strong enemy of our spiritual work. Needless to say, we should realize external temptation and internal desire and refrain from them, but more important thing than that is to recognize the existence of ‘Satan.’ He is not a merely personified imaginary figure of fleshly desire. Since Bunyan saw Satan with whom Luther fought and Satan tempted both Job and Jesus, our battle should start by understanding the substance of Satan clearly, who definitely exist just as God exists.

Since we have confirmed that Satan is our enemy with whom we have to fight desperately even to death, we need to fight against Satan’s schemes, putting on the full armor of God, with the belt of truth buckled, with the breastplate of righteousness in place, with our feet fitted with the readiness that comes from the gospel of peace, taking up the shield of faith, and taking the helmet of salvation and the sword of the Spirit (Ephesians 6:11-17). Yet, how strong our enemy’s fighting power? Paul said, “Our struggle is not against flesh and blood, but against the rulers, against the authorities, against the power of this dark world and against the spiritual forces of evil in the heavenly realms” (Ephesians 6:12). And Peter said, “Our enemy the devil prowls around like a roaring lion looking for someone to devour” (1 Peter 5:8).

Against such a brutal enemy’s camp, how our battle strategies should be? First of all, we need to acknowledge that enemy is as brutal as a lion but we are as weak as sheep. The first step toward victory is to fully recognize that Satan is absolutely strong one while we are powerless without any room for argument. As it is in all wars, the biggest cause of defeat in a war against Satan is to hold enemy in contempt. While fully recognizing the powerlessness of our self but without fear, we will fight with full weapons furnished, praying in the Spirit on all occasions with all kinds of prayers and requests and being alert and always keep on praying, when we cannot avoid head-on collision out of necessity against our will.

But, the head-on collision with Satan is only when we cannot avoid it; if possible, we should avoid all-out frontal attack against Satan; it is not because we are cowards but because the wise man avoids dangerous place. If Satan attacks us like a roaring lion and like the ruler of the kingdom of the air, we should not decline a battle against him even though ‘our spirit is willing, but the body is weak’ (Matthew 26:41). However, there is a great gap to cross between Satan’s tactics and our defense strategy. If Satan incites us with clear sins, it is not too difficult to refuse it. When Satan tempted Eve, he did not incite her to disobey God. As a certain scholar guessed, Satan probably praised Eve’s beauty at first. At the moment she accepted those words of praise, they were already ready to be expelled from Eden. Who possibly knew that an ordinary word really could turn out to be a huge bombshell that can determine the destiny of their whole life! To a man who called Him, “Good teacher,” Jesus answered him right away, “No one is good – except God alone”; there was a great reason for not accepting it.

Therefore, a person, who knows his weakness vividly and has seen the power of Satan, would not use brute force, like trying to catch a tiger with bare hand; he would rather choose to withstand it, avoiding a head-on collision or a battle, whenever it is possible. We believe that the sixth supplication of the Lord’s Prayer sends this message. We have praised the courage of Han Shin who crawled through under the groin of scoundrels rather than fighting with them, when they ordered him an insulting command to do so; Satan’s case is particularly so. Paul wrote, “For when I am weak, then I am strong (2 Corinthians 12:10). Peter replied, “Even if all fall away on account of you, I never will” (Matthew 26:33). And he also declared big words, “Even if I have to die with you, I will never disown you” (v. 35), but he suffered a crushing defeat before a rooster crew three times; on the other hand, Jesus, appeared like an incapable child, said, “My Father, if it is possible, may this cup be taken from me” (Matthew 26:39), wishing to escape the time of crucifixion on the Cross, but Jesus won a triumphant victory on the Cross at the end; we ought to learn a lesson from it. Satan is not an enemy we can easily fight off, but only God can easily defeat him; naturally, we ought to entrust the matter to omnipotent One.

The verse, ‘deliver us from the evil one’, is not in the Gospel Luke. Original Greek word translated as ’the evil’ means ‘evil man’, ‘devil’ if gender is masculine, or ‘evil’, ‘evil thing’ if gender is neutral. However, because it is not clear whether the gender is masculine or neutral in this verse, several interpretations have been suggested. From the context, it seems appropriate to read it as ‘devil’, by taking it as a masculine gender. The second half of this verse is neither an independent supplication nor the repetition of the first half. The first half is wishing to avoid the temptation from Satan while the second half is asking to keep us off from Satan himself (apo) in more positive expression, an idea advanced one step further.

All scholars agree in their opinion that the recitation at the end, ‘For Yours is the kingdom and the power and the glory forever, Amen’, was added afterwards. After the Lord’s Prayer lost its significance and used as a prayer recited in unison at the church for the sake of formality, it was inserted so that the congregation and the priest could harmonize with each other. Directly, it modifies the later part or the entire sixth supplication; indirectly, the Lord’s Prayer as a whole. The original source is known to be from 1 Chronicles 29:11, but it is a natural recitation overflowing from the mouth of the men who has prayed from the first supplication to the sixth whole-heartedly.

(Supplemental study of the Lord’s Prayer is completed.)


십계명(Ten Commandments)

십계명(十誡命, 히브리어. עֲשֶׂרֶת הַדִּבְּרוֹת‬ 아세레트 하디브로트, 라틴어. Decalogus 데칼로구스)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중시하는 계명이자 모세 율법의 핵심이다.

십계명은 우리가 승영하는 데 필요한 영원한 복음의 원리이다.
주님은 고대에 모세에게 그것을 알려 주셨으며(출 20:1-17), 후일의 계시에서 그것을 다시 언급하셨다.
십계명은 복음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부분이다.
이 계명에 순종하는 것은 다른 복음 원리에 순종하는 것을 쉽게 한다.


십계명은 성경에 있는 열 가지의 법으로서 하나님께서 출애굽을 한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이스라엘 국가에게 주신 것입니다. 십계명은 본질적으로 구약 성경에 포함된 613개의 계명들이 요약된 것입니다. 처음 4 개의 계명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다루고 있습니다. 나머지 6개의 계명은 우리들끼리의 서로의 관계를 다룹니다.

십계명은 성경의 출애굽기 20장 1-17절신명기 5장 6-21절에 기록되어 있으며 다음과 같습니다.

1.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이것은 유일하고 참되신 하나님 외에 어떤 다른 신을 숭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신들은 거짓된 신들입니다.

2.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이 명령은 우상, 즉, 하나님을 눈으로 볼 수 있게 나타내는 것을 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는 우상을 만드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묘사하는 우상을 만드는 것은 거짓된 신을 숭배하는 것입니다.

3.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이것은 주님의 이름을 헛되이 취하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가볍게 취급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오직 존경하고 공경하는 방법으로 하나님을 언급함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보여야 합니다.

4.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이것은 우리가 주님께 전념하고 쉬는 날로서 안식일(토요일, 한 주간에 마지막 날)을 따로 챙기라는 명령입니다.

5.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이것은 부모님을 항상 존중하고 공경하라는 명령입니다.

6. 살인하지 말라.

이것은 다른 사람을 계획적으로 죽이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7. 간음하지 말라.

이것은 자신의 배우자 외에 다른 누구와도 성관계를 하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8. 도둑질하지 말라.

이것은 자신이 소유하지 않은 그 어떤 것도 그것을 소유한 사람의 허락 없이 취하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9.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이것은 다른 사람에 대해 거짓으로 증언하는 것을 금하는 명령입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10.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이것은 자신의 것이 아니면 그 어떤 것이라도 갈망하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탐낸다는 것은 위에 열거된 계명들(살인, 간음, 그리고 도둑질에 관한 계명들) 중 하나를 어기게 할 수 있습니다.
어떤 것을 하는 것이 잘못이라면, 바로 그것을 하려는 욕구 또한 잘못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십계명을 지키면 죽은 후에 천국 가는 것을 보장하는 한 묶음의 규율로 잘못 알고 있습니다. 이와 반대로, 십계명의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 없다는 것과(롬 7:7-11) 따라서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9장 16절에 나오는 부자 청년의 주장과는 반대로 누구도 완벽하게 십계명을 지킬 수 없습니다(전 7:20). 십계명은 우리 모두가 죄를 범하였고(롬 3:23), 그러므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만이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가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십계명의 대부분은 우리가 해서는 안 되는 것들을 열거하지만, 그것들은 또한 해야 할 일들을 나타내기도 한다.

구주께서는 십계명을 두 가지 원리, 즉 주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요약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마태복음 22:37-39)


1. You Shall have no other gods before me.

2. You shall not make for yourself an idol in the form of anything. And you shall not bow down to them or worship them.

3. You shall not misuse the name of the Lord your God. 

4. Remember the Sabbath day by keeping it holy. 

5. Honor your father and your mother. 

6. You shall not murder.

7. You shall not commit adultery. 

8. You shall not steal.

9. You shall not give false testimony against your neighbor. 

10. You shall not covet your neighbor's house. 

1.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2. 너는 아무 형상이든지 너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고,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3.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4.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5. 네 부모를 공경하라. 

6. 살인하지 말지니라.

7. 간음하지 말지니라.

8. 도적질하지 말지니라.

9.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증거하지 말지니라.

10.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하나님 사랑에 대한 설교 자료


마가복음 12:28-34

우리가 날마다 숨쉬고 활동하고 있는 이 세상에 대한 우리들이 알 수 없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매일 자다 깨면 또 다른 세상을 만나는 것 같이 그렇게 급변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방향 없는 변화입니다. 그 앞에 우리들은 속수무책일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변화의 결과에 대한 불확실성입니다. 많은 미래 학자들이 나름대로 열심히 연구하고 미래를 전망합니다만 그대로 되지 않습니다. 믿었던 과학자의 생명연구가 이기적인 명예욕 때문에 물거품이 되는가하면,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생각지 않았던 배신을 느끼고 돌아서서 울어야 하는 예기치 않은 인간사들이 마치 럭비공이 뛰는 것처럼 어느 방향으로 뛸는지 알 수 없고, 어느 방향으로 변화될는지 모르는 그런 세상, 불확실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을까요? 자세히 살피면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절대로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해야 옳습니다. 여러분 노래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옛날에는 노래를<소리>라고 했습니다. 혹은<가락>이라고 했습니다. 옛날 우리 어르신들은<소리>라고만 하면 그 안에 창(唱)도 있고, 판소리도 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엔 트로트, 재즈, 락앤롤, 트위스트, 랩 그리고 발라드, 테크노, 힙합, 이게 정말 노래인가 싶을 정도의 도무지 이해가 잘 안가는 그런 장르의 음악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어르신들께 죄송하지만 가끔씩은 나도 나이가 들어가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합니다만 그러나 흘깃 흘깃 들어보면 한 가지는 분명히 귀에 들어오는 것이 있습니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 모든 노래를 통 털어 보면 주제는 사랑입니다. 사랑을 떠난 노래가 없습니다. 전부가 사랑에 대해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사랑, 기다리는 사랑, 갈구하는 사랑, 사랑이 주제가 됩니다. 그건 변함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랑은 곧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향방 없이 변하고, 빨리 변한다할지라도 이 사랑 만큼은 변하지 말아야 합니다. 행복의 원천이 사랑에 있기 때문입니다.
<뉴욕 데일리 뉴스지>에 예방의학 전문가인[피터 한센(Peter Hansen)]박사가 이런 연구를 보도한바가 있습니다. 현대인의 건강을 위하여 우리가 흔히 말하는 건강식품, 규칙적인 운동, 담배, 술, 과로, 과식, 수면 부족 등 해로운 습관을 버리는 것을 50점으로 보고 남은 50점의 건강 관리법은<사랑>이라고 합니다. 사랑은 하면 할수록 창조적인 힘이 있어 신체의 저항력이 강해지고 병균과 싸우는 자연의 힘이 배양된다고 합니다. 사랑의 힘은 때때로 상상을 뛰어넘기도 하고 가끔은 상식을 뛰어넘기도 합니다.
<하버드대학교>심리학 교수팀이 실험을 하였습니다. 인도의 빈민가에서 사랑의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는<테레사 수녀>가 가난한 사람들을 병원에서 도와주는 모습을 찍은 기록 영화를 학생들에게 보여주고 그 학생들의<감기 바이러스와 싸우는 저항력>을 검사하고, 일주일 후 같은 학생들에게<나치 독일>이 유태인을 학살하는 잔인한 기록 영화를 보여주고 다시 저항력을 조사했답니다. 그랬더니 테레사 수녀의 영화를 본 뒤에 감기 바이러스와 싸우는 저항력의 수치가 훨씬 높게 나타나더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육체적 건강뿐만 아니라 정신적 건강 나아가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도 하는 강한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왜 이리 시끄럽습니까? 결국 세상의 모든 문제는 사랑의 문제입니다. 먼저는 사랑이 없어서 문제입니다. 아예 사랑할 마음조차 없습니다. 둘째는 사랑이 있긴 있는데 병들어서 문제입니다. 또 사랑에 거짓이 문제입니다. 사랑에 속았습니다. 거짓된 사랑이 우리 마음을 실망하게 합니다. 저마다 사랑을 외치지만 그게 사랑이 아닙니다. 이렇게 때로는 스스로 속을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의 무지가 문제입니다. 사랑을 모르기 때문에 못합니다. 또 하나는 문제는 사랑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에 있습니다. 분명히 사랑을 받고 있으면서도 느끼질 못하고 그래서 사랑을 주지도 못하는 사랑의 의사소통이 되질 않습니다. 그래서 사랑이 단절됩니다. 결국 이것은 불신의 문제입니다. 분명히 그는 사랑하고 있고 나는 사랑 받고 있으면서 내가 그 사랑을 믿지 않으면 사랑을 모르게 되고, 사랑을 모르면 감격이 없고, 감격 없는 사랑은 절망할 수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사랑에는 세 단계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첫째는<관심의 단계>입니다. 사실은 관심도 대단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쥐를 키우는데 있어서 우유병만 빨려서 키운 쥐는 평균 600일을 살고, 그릇에 우유를 부어놓고 사람이 손으로 우유를 직접 먹이며 사랑의 손으로 쓰다듬어 주면서 키운 쥐는 훨씬 더 오래 사는데 평균 950일을 살더라는 것입니다. 사랑할 대상에 대해 거저 관심만 가지고 있어도 그것이 아름다운 사랑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둘째는<헌신의 단계>입니다. 말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과 시간을 바쳐 사랑합니다. 그를 위해서 선물을 준비하고 그를 위해서 시간을 구별하여 둡니다. 마지막 셋째는<희생의 단계>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바치겠다는 자세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른 응답이 아니라 오직 그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내가 됩니다. 이 사랑에 이르면 무슨 일이든지 이길 수 있는 힘이 있는 사랑이 됩니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끊을 수 없는 강한 사랑이 됩니다.
어느 날[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을 아주 싫어하던 한 부인이 처칠에게 이렇게 거친 말을 했습니다.“윈스턴, 만일 당신이 나의 남편이었다면 나는 당신의 차 속에 양잿물을 넣었을 것이오.”이 말을 들은 윈스턴이 얼마나 멋있게 받아 넘겼던지 참 감동적입니다.“부인, 만일 당신이 나의 아내였다면, 나는 그 양잿물을 마셨을 것입니다.”나를 미워하는 사람일지라도 내가 희생하며 그를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온전한 사랑은 이런 힘을 가진 능력입니다.
이처럼 사랑의 단계에 따라서 결과도 달라집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그 사랑은 어느 단계까지 와 있습니까? 아직도 그저 막연한<관심의 단계>에 머무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헌신의 단계>,<희생의 단계>까지 와 있는 수준 높은 사랑을 하십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더 이상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랑을 받은 우리들이 마땅히 드려야 할 사랑은 어떤 사랑이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복을 베풀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복을 받지 못하는 이유가 뭡니까? 답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로는 사랑한다고 하지만 맘에도 사랑이 없고 행동에도 사랑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나타나는 가장 강한 사랑의 모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오직 자기 사랑입니다. 그러나 자기 사랑이 먼저가 아닙니다. 성경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앨버트 슈바이처]는 인간에게는 행복을 위한 세 가지 조건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첫째는 할 일(Something to Do)이 있어야 인간은 행복하고,
둘째는 바라는 것(Something to Hope)이 있어야 하며
셋째는 사랑할 대상(Something to Love)이 있을 때 사람은 행복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분명한 사랑의 대상이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내가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도 큰 불행이라고 말합니다만 그 보다 더 큰 불행은 내가 사랑할 대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곧 내 사랑을 받아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 나를 절망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사랑할 대상이 있다는 것은 너무나 큰 행복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도 그 사랑의 첫 번째 대상이 하나님임을 아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 중에 행복한 사람입니다.
바로 오늘 성경 말씀이 이 사랑의 시작을 말합니다. 2006년도 교회의 표어를<하나님 사랑, 교회 봉사, 이웃 섬김>이라고 정했는데 오늘 새해 첫 주일에 그 첫 번째인 하나님 사랑에 대한 말씀으로 한 해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신앙의 출발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는?인간은 알고 있는 것에 의하여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사랑하는 것에 따라서 평가되어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면 그 사랑하는 것을 따라가게 되고, 또한 사랑하는 것에 모든 것을 바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사랑하느냐가 그를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결국 자기의 욕심과 자기탐욕에 빠집니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돈 때문에 죄를 짓게 되고, 명예와 권세를 사랑하는 사람은 그것을 위해서라면 불법과 비리에라도 빠지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사랑해야 합니까? 오늘 말씀인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가운데 첫 번째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 신앙의 출발이어야 합니다. 신앙인이라면 마땅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우선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서 신앙생활 한다고 하는 사람은 거짓입니다. 교회는 다닌다고 하면서 하나님은 사랑하지 않는다면 거짓 신자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한 서기관이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똑같은 이야기를 기록한 마22장에 보면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여 물었다고 되어 있습니다.?선생님이여,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큽니까??그러자 예수님께서?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 말씀처럼 사랑에 대한 계명이 가장 큰 계명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먼저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얼마만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한 해를 시작하면서 하나님을 향한 내 사랑을 확인하시고 출발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첫 걸음을 어떻게 내 딛느냐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매사를 어떤 마음으로 시작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더군다나 신앙의 출발을 어디로부터 출발하느냐가 한 해를 성공적으로 사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를 가름합니다. 부디 오늘 우리는 새해를 시작하는 이 첫걸음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앙의 결심으로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교회를 봉사하고 이웃을 섬길 줄 아는 신앙의 한 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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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같은 하나님의 사랑  (에스더 6:1~3, 8:1~2)  



우리가 신앙생활 하다보면 분명히 하나님이 살아계신데 왜 이런 일이 생기도록 내버려두시나 분명히 이것은 하나님이 실수하셨거나 무관심하신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지나놓고 보면 그것이 하나님의 더 깊은 사랑이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1. 세밀하신 하나님의 사랑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은 세밀하신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먼저 하나님께 대한 태도를 보아서 세 종류의 사람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째가 우주만물 즉 해와 달과 수억 만 개의 별들이 저절로 생겨났다고, 조물주 같은 하나님은 없다고, 하는 무신론자가 있습니다. 둘째로 해와 달과 별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존재하신다고 믿지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신 분이 아니라 위대한 창조주 하나님이 계실 뿐이라고 하는 약간의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위대하셔서 해와 달과 수억만 개의 별들을 창조하실 뿐 아니라 우리 각자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우리의 머리털 하나라도 다 세시는 무소불능하시고(omnipotent) 무소부지하시고(omniscient) 무소부재하신(omnipresent) 하나님이라 믿는 신앙입니다. 이 세밀하신 하나님을 믿어야 참된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바다와 육지를 지으시고 해와 달과 수억 만 개의 별들을 지으시고 운행하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하지요. 어떻게 빅뱅에 의해서 우연히 생긴 해와 달과 별들이 질서 있게 운행될 수 있습니까? 전에도 설명드렸지만 단 5분도 늦지 않고 24시간에 자전하고 365일에 공전하고 태양과 지구의 거리가 조금만 더 가까우면 인간과 생물은 다 죽을 것이고 조금만 더 멀면 우리는 다 얼어 죽고 맙니다. 또 골고루 햇빛을 비치게 하려고 지구가 23.5°가 기울어져서 회전하니까 우리가 살지 기울기가 10°만 달라도 한쪽은 타 죽고 한쪽은 얼어 죽습니다. 또 달의 인력으로 바다의 조수가 들어왔다 나갔다 하니까 생물이 살 수가 있지 만일 물이 조용히 가만있으면 물이 썩어서 생물이 살 수가 없고 인력이 너무 강하면 지구가 물로 다 덮여 버리고 말 것입니다. 지구가 돌면서도 바닷물이 쏟아지지도 않게 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이 시계도 설계하고 만든 분이 있는 것같이, 이 예배당을 설계하고 건축한 사람이 있듯이, 해와 달과 모든 별들을 지으시고 운행하시는 하나님이 계신 것입니다.
  이렇게 위대하신 하나님은 참새 한 마리 떨어지는 것까지 주관하셔서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셨고 그 많은 머리칼 하나 떨어지는 것까지 다 알고 계시는 분입니다. 마태복음 10장 29절에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  
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또 30~31절에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못하실 것이 없으시고 모르시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이 없다고 합니다. 시편 14편 1절에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라고 설명합니다.
  시편 139편 1~4절에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7~10절에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가 앉고 일어서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을 모르시는 것이 하나도 없이 다 알고 계심을 믿어야 참된 신앙의 소유자입니다.
  예수님은 돈은 많지만 갈급한 심령을 가지고 뽕나무에 올라가 기다리는 삭개오의 이름까지 아시고 찾아오신 분이며 남편을 여섯 번이나 갈아 살며 외롭고 왕따당한 수가성 여인이 물 길러 올 것을 아시는 세밀하고 자비로우신 주님이십니다.
  예수님 주위에는 벼슬이 높고 막강한 권력과 돈을 많이 가진 권세자들이나 부자는 별로 없고 가난하고 병들고 죄에 깊이 빠진 사람들과 어린아이들이 가까이 늘 있었습니다. 세밀하신 주님이 그들의 요구와 필요를 아시고 돌보아주신 것입니다. 마치 부모가 잘난 자식들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불구자, 정박아 자식의 손톱과 발톱 하나에까지 세밀하게 관심을 가지고 돌보는 것과 같습니다. 세밀하신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실수 같은 하나님의 사랑

  어떤 때 하나님은 꼭 실수하셨거나 깜빡 잘못하신 것처럼 보이는 때가 있지만 지나고 보면 하나님의 세밀하신 사랑임을 알게 됩니다. 고아와 같은 에스더를 잘 키워준 모르드개는 말씀에 순종하며 목숨을 걸고 담대하게 살아가는 믿음의 용사입니다.
  당시 파사와 메데의 큰 나라를 통치하는 아하수에로 왕 밑에 둘째로 큰 권세와 능력을 가진 하만이란 교만한 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수레를 타고 거리를 지나갈 때에는 온 국민이 엎드려 절을 했는데 신앙이 독실한 모르드개만은 우상이나 사람 앞에는 머리 숙여 절하지 않는다는 굳은 믿음으로 고개를 뻣뻣이 든 채 절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안 하만이 모르드개가 유대인인 줄 알고 모르드개만 아니라 온 유대 백성을 하루아침에 다 몰살시키려는 계략을 가지고 왕의 조서에 어인까지 받아놓았습니다. 이 때에 온 유대 백성이 모르드개 한 놈 때문에 우리가 멸절당하게 되었다고 얼마나 원망하고 불평하고 통곡을 했겠습니까?
  오늘날 남다른 믿음을 가지고 바르게 살려고 하면 온갖 핍밥과 비난과 훼방을 받고 원망도 듣는 법입니다. 에스더 4장 3절에 보면 “왕의 조명이 각 도에 이르매 유다인이 크게 애통하여 금식하며 곡읍하며 부르짖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누운 자가 무수하더라”고 했으니 모르드개 한 놈 때문에 우리가 다 몰살당하게 되었다고, 얼마나 욕하고 원망하고 죽일 듯이 날뛰었겠습니까? 믿음으로 살고 말씀대로 살 때 이런 핍박과 원망을 들을 때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모르드개는 전에 왕이 모살당할 뻔했을 그것을 발견하고 즉시 고발하여 왕이 죽지  않게 되었습니다. 에스더 2장 21~23절에 “모르드개가 대궐 문에 앉았을 때에 문 지킨 왕의 내시 빅단과 데레스 두 사람이 아하수에로 왕을 원한하여 모살하려 하거늘 모르드개가 알고 왕후 에스더에게 고하니 에스더가 모르드개의 이름으로 왕에게 고한지라 사실하여 실정을 얻었으므로 두 사람을 나무에 달고 그 일을 왕의 앞에서 궁중 일기에 기록하니라”고 했습니다. 이 큰 공을 세운 모르드개에게 아무런 상을 주지 않았으니 이런 억울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의 실수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큰 사랑의 섭리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에스더 6장 1~2절에 “이 밤에 왕이 잠이 오지 아니하므로 명하여 역대 일기를 가져다가 자기 앞에서 읽히더니 그 속에 기록하기를 문 지킨 왕의 두 내시 빅다나와 데레스가 아하수에로 왕을 모살하려 하는 것을 모르드개가 고발하였다 하였는지라”, 이어 3절에 “왕이 가로되 이 일을 인하여 무슨 존귀와 관작을 모르드개에게 베풀었느냐 시신이 대답하되 아무것도 베풀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날 밤에 왕이 잠이 오지 않은 것도 하나님의 세밀하신 섭리요, 공을 세웠으나 보상을 받지 못하고 지나간 것도 바로 유대 민족이 위기를 당했을 때 대 역전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세밀하신 계획과 사랑이었습니다.
  에스더 6장 4절에 “왕이 가로되 누가 뜰에 있느냐 마침 하만이 자기가 세운 나무에 모르드개 달기를 왕께 구하고자 하여 왕궁 바깥 뜰에 이른지라”고 했습니다. 왕이 묻기를 “…왕이 존귀케 하기를 기뻐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하여야 하겠느뇨…”(6절)라고 하니까 하만이 왕후의 만찬에 초청도 받았던 터라 “나밖에 누가 또 있으랴?”라고 생각하고, 7절에 “…왕께서 사람을 존귀케 하려면 왕의 입으시는 왕복과 왕의 타시는 말과 머리에 쓰시는 왕관을 취하고 그 왕복과 말을 왕의 방백 중 가장 존귀한 자의 손에 붙여서…성중 거리로 다니며 그 앞에서 반포하여 이르기를 왕이 존귀케 하기를 기뻐하시는 사람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하게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왕명이 내려졌는데 그것은 자기가 아니라, 자기가 50규빗 되는 장대에 매달아 죽이려던 모르드개였습니다. 왕의 말에 자기가 제안한 대로 모르드개를 태우고 거리를 돌아다니며 외쳤습니다. 그날 밤 잔치에 다시 초대 받았는데 에스더가 나와 내 민족을 도륙하고 진멸하려는 자가 바로 이 하만이라고 할 때 끌려 나가 모르드개를 죽이려던 장대에 자기가 달려 죽었습니다.
  하나님은 “역전의 명수”란 말이 있듯이 하나님은 이 때를 위하여 모르드개가 공을 세웠으나 포상도 못 받았고 왕이 밤에 잠도 오지 않았고 그 때문에 역사책을 읽다가 이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실수같이 보였지만 다 하나님의 세밀하신 사랑의 섭리였습니다. 하나님의 실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세밀하신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해와 달과 수억 만 개의 별들을 지으시고 운행하실 뿐 아니라 참새 한 마리 떨어지는 것까지 간섭하시고 60억 인구의 머리털도 다 알고 세시는 무소부지하신 하나님이신 것을 믿어야 합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고 실수하시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깊은 사랑의 섭리임을 믿고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요셉이 형들의 시기로 애굽에 팔려 간 것이나 억울하게 감옥살이 하는 것을 볼 때 하나님이 안 계시거나 하나님이 실수하시는 것으로 보입니다. 더욱이 술 맡은 관원의 꿈을 해몽해주면서 나가거든 나를 변호해달라고 부탁을 했는데도 그 사람이 까맣게 잊은 것도 도무지 하나님이 안 계시거나 무관심하신 것 또는 실수하신 것처럼 보이지만 요셉이 감옥에 가지 않았다면 국무총리가 되지 못했을 것이고 또 꿈 해몽 받은 사람이 나가서 잊지 않고 즉시 왕께 고하여 출감했더라면 애굽의 바로 왕의 꿈도 해몽하지 못했을 것이고 따라서 애굽의 국무총리도 못 되고 자기 민족과 애굽 백성을 구원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실수처럼 보일지라도 세밀하신 하나님의 사랑임을 믿는 신앙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가까이 지내며 신앙생활을 바로 하는 사람일수록, 하나님은 세밀하셔서 세밀한 부분까지 간섭하시고 때론 징계하시고 때로는 칭찬하시고 축복도 하십니다. 그러나 되는 대로 적당히 신앙생활하는 사람은 세밀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인도하심을 느끼고 체험할 수가 없습니다. 대강대강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세밀한 사랑을 체험할 수가 없습니다.
  
  3. 세밀하신 사랑을 받으려면

  ① 먼저 거듭 나서 구원받아야 합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해야 그 순간부터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목자장 되시는 주님의 울타리 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하셨고, 로마서 10장 10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했습니다. 죄가 하나도 없고 완전히 의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영접하면 그 순간부터 되는 것입니다.

  ② 세밀한 음성을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해와 달과 별들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으로만 믿지 말고 섬세하시고 세밀하셔서 우리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도 아시는 무소부지하신 하나님이심을 알고 세밀한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또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시편 119편 105절에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말씀하신 대로 한 걸음, 한 걸음, 말씀에 비추어서 행동해야 합니다. 작은 일에도 적당히 거짓말하고 얼렁뚱땅 넘어가지 말고 깨끗한 양심을 지키며 생활해야 합니다.
  어느 교수님이 한국에서는 십일조도 안 하고 기도생활도 안 했는데 미국에 가서 어떻게 은혜를 받고 십일조생활을 철저히 했습니다. 그 전에는 하나님이 구만리 장천 멀리 계신 것 같았는데 십일조생활을 철저히 한 다음부터 하나님이 가까이 계셔서 피부로 느낄 정도로 체험적인 생활을 한다고 간증하더랍니다. 새벽기도 한 번만 빠져도 하나님이 징계하심을 느끼고 주일성수 한 번 안 해도 사랑의 채찍을 맞고 십일조 한 번 떼어먹어도 소매치기를 당하거나 교통사고로 손해를 보는 체험을 간증하는 이가 많습니다. 예수님은 과부의 동전 두 닢을 관심 깊게 보시는 분입니다. 세밀하게 신앙생활해야 하나님의 세밀한 사랑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③ 기도해본 후에 결정하십시오
  무슨 일이나 기도해본 후에 결정하고 행동해야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성군 다윗은 전쟁할 때에도 “가리이까, 말리이까?”, 또 “싸우리이까, 말리이까?” 하고 물어본 후에 전쟁에 나갔습니다. 하나님과 교제해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신명기 4장 7절에 “하나님은 기도할 때마다 가까이 하시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기도생활을 안 하면 하나님과 멀어지고 하나님의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때로 하나님의 실수같이 느껴지는 때가 있어도 의심하지 말고 믿음으로 나아가면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깊고 넓은 사랑을 알 수가 있게 됩니다.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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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사도행전 2:1-4)


지난 주일 성령 강림절을 맞아 방지일 목사님을 모시고 은혜와 감동이 넘치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길선주 목사님은 성령과 말씀과 기도에 사로잡혔던 분이었기 때문에 철저한 회개와 부흥운동을 일으키셨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진정한 부흥운동은 말씀 운동이고 성령 운동이고 기도 운동이고 회개운동이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방지일 목사님은 "영의 지배를 받아야 내 주장, 내 주관, 내 주체가 없어진다"고 말씀했습니다. "영의 지배를 받아야 죄를 회개하게 되고 예수를 증거하게 되고 바른 신앙인이 된다”고 말씀했습니다. 오늘 한국교회의 살길도 “영의 지배를 받는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날 한국교회는 성령과 말씀과 기도와 회개에 사로잡히는 것보다는 음악과 프로그램 등 인간적인 수단 방법에 치중하고 있고 정서와 감정에 치우치고 있고 심지어는 하나님을 조정하려고 한다는 경고의 말씀도 들었습니다. 가슴에 깊이 새겨야 할 경고의 말씀이었습니다. 성령강림절은 지났지만 오늘 아침에도 성령에 관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사실 오늘 아침에 드리려고 하는 말씀은 2년 전인 2005년 4월 24일 주일에 제가 설교한 말씀입니다. 2년 전에 한 저의 설교를 다시 읽어보았는데 다시 한 번 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2년 전에는 “성령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는데 오늘 아침에는 “성령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주셨다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3:16). 하나님께서는 또한 자기의 백성들을 이처럼 사랑하사 하나님의 신인 성령님을 자기의 백성들에게 보내주셨다고 말씀했습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자기 땅을 위하여 중심이 뜨거우시며 그 백성을 긍휼히 여기실 것이라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 이른 비를 너희에게 적당하게 주시리니”(요엘2:18,23).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2:1-4).
하나님께서 세상과 자기 백성들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보내주셨고 성령님을 보내주셨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저는 이렇게 쉽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지성이 엄마 아빠가 지성이를 사랑해서 많은 것을 해 주었습니다. 영양분이 많은 음식도 먹여 주었고, 좋은 약도 먹여 주었고, 좋은 장난감도 사 주었고, 포근한 이불도 만들어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성이 엄마 아빠가 지성에게 준 가장 큰 사랑의 선물은 아빠의 간을 떼어주고 엄마의 눈물을 쏟아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사랑하셔서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있는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다 만들어주셨지만, 우리들에게 주신 가장 큰 사랑의 선물은 하나님 자신의 몸의 일부를 떼어서 주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보내 주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피와 살을 떼어서 주셨다는 말씀이고, 성령님을 보내 주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정신과 혼의 일부를 떼어서 주셨다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아침에는 성령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설교를 합니다. 아들과 성령님을 보내주신 이유와 목적 세 가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째는 우리들을 살리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지성이 아빠와 엄마가 간을 떼어주고 눈물을 쏟아준 것은 지성이를 살리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시고 성령님을 보내신 것은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들을 살리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에스겔 37장은 죄와 허물로 죽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마른 뼈들의 모습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뼈들이 살아난 것은 말씀과 생기 즉 하나님의 아들과 성령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이에 내가 그 명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겔37:2-10). 하나님께서 마른 뼈들을 살리신 두 가지 방편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말씀이었고 다른 하나는 생기였습니다. 말씀은 예수님을 가리키고 생기는 성령님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들과 성령님을 우리들에게 보내신 목적은 우리들을 살리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들과 성령은 우리들을 살리십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엡2:1,4,5).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갈수 없느니라”(요3:5).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고후3:6). 성령은 죽은 자들을 살리는 일을 하십니다. 마른 뼈들 위에 말씀과 성령이 임했을 때 살아 일어서서 큰 군대를 이루었다고 했습니다. 마가의 다락 방에서 기도하던 120명 위에 성령이 바람과 같이 임했다고 했습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행2:2). 여기 바람은 생기를 가리키는데 생기는 살리는 영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과 성령님을 우리들에게 보내주신 첫째 이유와 목적은 죽었던 우리들을 살리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입니다.

둘째는 우리들을 만남과 교제의 존재들로 만드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지성이 아빠와 엄마가 간을 떼어주고 눈물을 쏟아 주면서 지성이를 살린 목적은 지성이가 엄마 아빠와 말을 주고 받고 사랑을 주고 받으며 살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혜성이와 말을 주고 받고 사랑을 주고 받으며 살도록 하기 위해서였고, 할머니 할아버지와 말을 주고 받고 사랑을 주고 받으며 살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커 가면서 친구들과 함께 놀기도 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교제하면서 살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람은 만남과 교제의 존재입니다. 사람은 만남과 교제를 통해서 기쁨과 보람과 행복을 누리며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죄는 생명을 앗아가고 죄는 만남과 교제도 앗아 갑니다. 그래서 사람이 불행해집니다. 인사도 하지 않고 만나지도 않고 교제도 하지 않는 사람은 영이 죽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과 성령님이 오셔서 하시는 중요한 일은 우리 죄인들로 하여금 만남과 교제의 삶을 살게 하시는 일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하게 되고 이웃과 교제하게 됩니다. 그리고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게 되고 이웃과 친밀하게 교제하게 됩니다. 오순절 날 성령이 임했을 때 저희가 모두 방언을 했다고 했습니다.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2:1-4). 여기 방언은 하나님과 친밀하게 말하는 것을 의미하고 사람들과 친밀하게 말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성령은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바 아바지’ 라고 부르면서 하나님과 친밀하게 말하게 하고, 이웃들을 형제 자매라고 부르면서 이웃들과 친밀하게 말을 하게 합니다. 말은 만남과 교제의 가장 중요한 수단입니다. 성령 충만한 초대교회 성도들은 날마다 함께 모여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과 성령님을 우리들에게 보내주신 둘째 이유와 목적은 말도 인사도 할 줄 몰랐던 우리들을 말도 하고 인사도 하고 교제도 하는 만남과 교제의 존재들로 만드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입니다.

셋째는 우리들을 주의 일을 하는 봉사자들로 만드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지성이 아빠와 엄마가 간을 떼어주고 눈물을 쏟아 주면서 지성이를 살린 또 하나의 목적은 지성이가 엄마 아빠와 말과 사랑을 주고 받으며 살뿐만 아니라 커서 좋은 일을 하는 훌륭한 일꾼으로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람이 사는 목적은 좋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일 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봉사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성령님은 우리들로 하여금 주의 일을 하게 하십니다. 봉사하게 하십니다. "성령으로 봉사하며"(빌3:3) 라고 했습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예수님의 증인이 된다고 말씀했습니다. “오직 성련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성령님은 우리들에게 여러 가지 은사들을 주시는데 그 모든 은사들은 우리들로 하여금 주님의 일을 하게 하는 은사들입니다.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주시나니”(고전12:8-10).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롬12:6-8).
성령을 받은 자는 열심히 주의 일을 합니다. “내 평생 소원 이것뿐 주의 일하다가” 이렇게 찬송을 부르면서 열심히 주의 일을 합니다. 특히 교제와 기도와 봉사와 전도의 일을 열심히 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예루살렘교회의 성도들은 열심히 교제하고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봉사하고 열심히 전도하면서 주의 일을 했습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2:42-47).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예루살렘 교회의 일곱 집사들은 자기의 재산과 소유를 팔아서 구제하는 일에 힘을 썼고 전도하는 일에 힘을 썼고 선교하는 일에 힘을 썼습니다. 성령님은 이기적이고 무능하고 게으른 우리들로 하여금 열심히 주님의 일을 열심히 하게 하고 그래서 기쁨과 행복을 누리며 살게 하십니다. 물질과 시간에 인색한 사람은 주님과 거리가 먼 사람이고 성령님과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우리 조선의 초대교회 신앙의 선배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자기들의 몸은 돌보지 않고 자기들의 몸이 부서지고 닳도록 주님의 일을 열심히 했습니다. 이기풍 목사님이 그랬고 최권능 목사님이 그랬고 윤함애 사모님이 그랬습니다. 윤함애 사모는 기도의 여인이었고 사랑과 봉사의 여인이었습니다. 최봉석 목사는 고난의 십자가를 짊어진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과 성령님을 우리들에게 보내주신 셋째 이유와 목적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이기적이고 무능하고 게으른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을 하는 하나님의 일꾼들로 만드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래서 아들과 성령님을 우리들에게 보내어주셨습니다. 첫째는 우리들을 살리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둘째는 우리들을 만남과 교제의 사람들로 만드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셋째는 우리들을 봉사하며 사는 주님의 일꾼들로 만드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것이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이었습니다. 자신의 몸의 일부를 떼어주시면서 까지 우리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진실하고 충만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예수님과 성령님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사모하고 예수님으로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성령님을 사모하고 성령님으로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생명이 충만하고, 교제가 충만하고, 봉사가 충만한 행복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일곱 집사님들이 성령이 충만했던 것처럼 우리 교회 집사님들과 권사님들이 모두 성령님으로 충만하기 바랍니다. 사도들이 성령 충만했던 것처럼 우리 교회 교역자들과 장로님들이 모두 성령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마치기 전에 영화 이야기를 간단히 하겠습니다. 최근에 깐느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으면서 유명해진 영화 '밀양'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사실 저는 여 배우가 누군지도 모르고 그 영화를 본 일도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어제 아침 우연히 CBS 인터넷 뉴스에 실린 '밀양'이라는 영화에 대한 어느 사람의 해설을 읽고 그 해설에 공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해설의 일부를 여러분들에게 그대로 소개합니다.
"영화의 내용은 단순하다.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고 유괴범에게 아들까지 살해당한 여주인공 '신애'가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그 힘으로 고통을 이겨가던 중 어느 날 자신의 아들을 죽인 범인을 용서하겠다며 범인을 면회 가겠다고 나선다. 신애는 자신이 하나님을 알게 되고 믿게 되면서 마음의 평안을 얻게 되었고 자신의 아들을 죽인 범인을 용서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범인으로부터 뜻밖의 말을 듣는다. 범인은 자신은 감옥에 와서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그 하나님께 회개하고 이미 용서를 받았으며 지금은 너무도 마음이 평안하다고 말한다. 순간 신애의 얼굴에 당혹한 기색이 역력해진다. ‘그래요?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셨어요?’ 범인과의 면회를 마치고 나온 신애는 주차장에서 기절한다. 결국 신애는 그와 같은 살인범의 말에 충격을 받고 기독교의 신앙을 버린다.” 영화에 대한 분석적 해설은 다음과 같이 이어졌습니다.
“신애와 범인이 구원과 용서를 말하지만 정작 그들의 삶이 비극인 이유는 그들이 말하는 구원과 용서가 허상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구원과 용서가 허상인 까닭은 그것이 허영과 탐욕에 바탕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애의 비극의 원천은 허영이다. 아들의 죽음은 신애 자신의 허영이 부른 비극인 셈이다. 신애의 허영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신애는 상처받은 자들을 위한 기도회에 참석한 후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하며 믿음생활을 한다. 그녀는 예전에는 보지 못하고 알지 못했던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알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더 이상 고통 가운데 통곡하지 않으며 마음의 평안을 얻었다고 주장한다. 모두가 그녀의 믿음에 감탄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그녀는 진정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고 알게 되었던 것일까? 그녀는 진정 그 믿음의 힘으로 범인을 용서할 수 있었던 것일까? 아니다. 그녀는 여전히 눈에 보이는 세계에 붙잡혀 있을 뿐 진정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알지 못했다. 신애는 용서를 보여주려 했다. 범인에게 그리고 교인들에게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 범인을 용서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다. 허영이란 실제보다 더 크게 보이려고 하는 마음이다. 돈이 없으면서도 돈 많은 것처럼 보이고자 사지도 못할 땅을 보러 다녔던 것처럼 신애의 용서에는 영적인 허영이 감추어져 있다. 자신이 범인을 용서하는 모습을 굳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에 영적 허영의 덫이 놓여있다."
저는 이와 같은 영화에 대한 해설을 읽으면서 이창동 감독이나 상당수의 불신자들의 눈에 비친 오늘날 한국교회의 신자들의 모습이 ‘허상’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 심각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창동 감독이나 상당수의 불신자들이 용서와 구원을 전하는 기독교 복음의 깊은 내용을 알 수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창동 감독이나 상당수의 불신자들의 눈에 비친 오늘날 한국교회의 신자들의 모습이 허상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 심각한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얼마 전에 옥한흠 목사는 오늘의 한국교회는 ‘허수’ ‘허세’ ‘허상’ 등 `3허(虛)'에 사로잡혀 있다고 분석한 일도 있었습니다. 사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 안에는 ‘허영’과 ‘허상’이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오늘날 기독교 안에도 이와 같은 ‘허영’과 ‘허상’이 적지 않게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몸의 일부를 떼어서 우리들에게 주신 중요한 이유는 우리들에게서 이와 같은 모든 종교적인 ‘허영’과 ‘허상’을 제거하시고 우리들을 하나님 닮은 진실하고 겸손하고 참된 하나님의 자녀들로 만들어주시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날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받아 먹어야 하고 하나님의 생기를 받아 마셔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 충만 성령님 충만 그리고 하나님 충만한 삶, 하나님 닮은 진실하고 겸손하고 참된 하나님의 자녀들로서의 복된 삶을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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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하나님의 사랑 (로마서 5:1~8)


사도 바울은 오늘 봉독한 본문 말씀을 통해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어떤 변화가 있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 여기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것은 지은 죄를 깨끗이 씻어 주셔서 우리가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새로운 관계가 바로 샬롬, 화평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돌아온 탕자를 맞이하는 아버지의 모습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탕자가 아니라 아들로 맞이합니다. 아들의 과거는 전혀 묻지 않습니다. 다만 아들이 돌아왔기 때문에 기쁘게 맞이합니다.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눅 15:22~24) 아버지의 말에는 탕자라는 말이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예수를 구주로 믿고 돌아온 우리를 용서하시고 의롭다 인정하십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사실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믿었으면 또한 내가 나 자신을 용서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나를 바로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나를 바로 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믿는다고 말은 하면서도 나를 용서하지 못합니다. 계속 나 자신을 괴롭히며 힘들게 살아갑니다. 그리고 마치 그것이 믿음이 좋은 것처럼 착각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우리는 무엇보다 자신과의 화평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말씀을 통해서 “화평을 누리자!”고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화평을 즐기자는 말입니다. 화평이란 그냥 갖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즐겨야 합니다. 돈도 갖고 있다고 해서 다 내 것입니까? 내가 써야 내 것입니다. 멋진 집을 구입해서 평생 남에게 빌려 줬다면 그 집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 집에서 하루라도 살면서 즐겨야 비로소 내 집입니다. 즐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화평은 즐겨야 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화평을 잃어버린 후에 비로소 그 화평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다 깨진 후에 뒤늦게 후회하지 않습니까? 때문에 먼저 화평이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졌는가 하는 것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화평이 주어졌습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평이 이루어졌다는 말입니다. 주님이 십자가로 막힌 담을 깨뜨리셨습니다. 얼마나 비싼 댓가를 치렀습니까? 그 가치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화평을 즐길 수 있습니다. 너무 쉽게 주어졌기 때문에 사람들은 화평의 가치를 제대로 모르는 것 같습니다. 모르면 즐거움을 누리기 어렵습니다. 즐거움은 깨닫는 것에서 비롯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가치를 깨닫는 순간 즐거움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화평의 관점에서 세상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화평을 누리게 되었다는 사실을 기초로 모든 것을 볼 수 있어야 하겠다는 말입니다. 불화한 상태에서 보는 것과 화평한 상태에서 보는 것은 아주 다릅니다. 불화한 상태에서 이웃을 보면 불편하기 짝이 없습니다. 무슨 말을 해도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화평한 상태에서는 모든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책망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모든 것을 화평한 상태에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더불어 사랑을 나누면서 이 세상을 긍정적으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 먼 미래까지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미래의 약속을 바라보며 즐거워한다고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영원을 바라보는 믿음의 사람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합니다. 어떻게 환난 중에 즐거워할 수 있습니까? 말씀 속에 그 비밀이 있습니다. “앎이로다!” 즉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알기 때문에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어떤 환난이 있어도 믿음의 사람은 그 의미를 깨달아 알고 있기 때문에 그 환난으로 인한 고통도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으면 깨닫지 못합니다. 매를 맞을 때 나를 사랑해서 때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히려 고맙지 않습니까? 그러나 나를 미워해서 때린다고 생각하면 상황은 정반대가 됩니다. 같은 매라도 하나님과 화평을 즐기는 상태에서 맞으면 그 매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 것 같으면 더 이상 무엇이 문제가 됩니까? 우리가 환난 중에 고통을 느끼는 것은 꼭 저주받은 것 같고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린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고통이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주시는 것이라고 믿으면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때문에 믿음의 사람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과수원을 경영하는 농부는 나무가 자라기 시작하는 봄에 그 가지를 잘라 줍니다. 잘라 주어야 제대로 자랍니다. 가지를 자를 때 그 나무가 미워서 자릅니까? 우리도 가지를 잘라내는 고통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아픔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확신만 있으면 그 아픔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는 것과 믿어지는 것의 차이를 잘 구별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믿는 것이란 내가 믿으려고 애쓰는 경우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반면에 믿어지는 것은 성령이 도우셔서 저절로 믿어지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행악자 중 하나가 그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그는 믿어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자기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비참하게 죽어 가고 있는 한 청년을 그는 그리스도로 믿었습니다. 성령이 역사하시지 않았으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 가는 자를 어떻게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할 수 있겠습니까?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때문에 믿음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믿어지는 것도 성령이 역사하셔야 비로소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려고 애쓰는 것과 사랑하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오히려 사랑하기 어렵지 않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사랑하려고 할 때 무엇을 먼저 생각합니까? 상대방의 반응을 생각하게 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상대방이 기대한 것과 다른 반응을 보이면 오히려 그 사랑이 변하여 미움이 되지 않습니까? 힘쓰고 애쓰는 것으로는 참 사랑을 경험하기 어렵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형제를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백 구십 번의 용서란 우리의 의지만 가지고서는 절대로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그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드십니다. 저절로 사랑하게 되는 신비한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진정한 용서를 배울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처럼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의 선물로 우리 마음에 부어지면 우리의 삶은 참으로 자유롭고 또 풍성하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사랑하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훗날 사랑의 사도라고 일컬어진 요한에게 주목하게 됩니다. 그가 원래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주님이 제자들과 함께 사마리아의 한 마을에 들어가려고 하실 때 그 마을 사람들이 길을 막고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화가 난 요한이 말했습니다.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눅 9:54) 사랑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말을 서슴지 않고 내뱉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사랑이 부어지자 그는 놀랍게 변화되었습니다. 때문에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진 마음을 간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죄와 더불어 싸울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우리 마음대로 됩니까? 율법이 없어서 우리가 죄를 짓습니까? 법으로도 도저히 막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지 않으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죄의 유혹은 더 달콤하게 다가오지 않습니까? 우리의 힘으로는 결코 죄를 이길 수 없습니다. 오직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주어질 때 비로소 죄의 종 노릇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게 되고, 사랑하게 되고, 죄를 이기게 되는 것은 모두 다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합니다. 성령이 우리 마음에

부어져야 비로소 가능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하셨는데 내가 나를 용서하지 못할 까닭이 무엇입니까? 나 자신과 더불어 먼저 화평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아울러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때 비로소 놀라운 변화를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심지어 환난 중에도 즐거워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았기 때문에 더 이상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소망 중에 우리가 기뻐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우리의 힘이나 능력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오직 우리 가운데 임하신 충만한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 특히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의 선물로 우리의 마음에 부어지면 우리의 삶은 참으로 자유롭고 또 풍성하게 될 것입니다. 이 마지막 때에 충만한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새롭게 변화된 모습으로 죄와 더불어 싸워 이길 뿐 아니라 십자가 위에 나타난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땅끝까지 전하고 증거하는 충성스러운 주님의 제자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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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성도  (사무엘하 12장 15-25절)

요새 암에 걸리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암 전문의 원종수 권사님의 말에 의하면 암이 자라 자각 증상이 생길 때까지는 7년이 걸리고, 마지막 1년에 암이 증상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암의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분명한 원인은 담배라고 합니다. 담배 피면 암 걸릴 확률이 25배가 되고, 거기에 술을 하면 4배가 늘어나서 술 담배 하면 보통 사람보다 암에 걸릴 확률이 100배가 된다고 합니다.

담배 다음으로 지적되는 암의 원인으로 공해, 합성세제, 농약 등이 있지만 그런 경우에는 2-3배가 늘어난다고 합니다. 그처럼 보통 사람에게 생기는 하루 6-7개의 암세포와 술 담배를 하는 사람에게 생기는 하루 600-700개의 암세포는 사람 몸에 있는 경찰세포(surveillance cell)가 잡아먹는데, 사람에게 마음의 상처와 스트레스가 있으면 그 마음의 상처와 스트레스로 인해 경찰세포의 활동이 줄고 결국 암에 걸리게 된다고 합니다.

그처럼 사람이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관리하지 못하면 질병이 생길 확률은 현저하게 높아집니다. 죄는 질병을 초래하고, 거의 모든 불행도 죄와 관련이 있습니다. 죄가 있으면 마음의 평안도 없고, 능력 있는 삶도 살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거룩한 만큼 능력이 나타납니다. 어떤 분은 산에 가야 능력이 생기는 줄 아는데 그것은 오해입니다. 사람은 거룩한 만큼 능력이 생깁니다. 우리의 기도도 거룩한 만큼 능력 있는 기도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거룩한 삶의 능력을 잘 체험하지 못합니까? 그것은 오해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거룩한 사람을 유머도 없고, 잘 웃지도 않고, 웃어도 절대 이빨을 보이지 않고, 목소리도 항상 낮게 깔고 말하는 사람인 줄 압니다. 그런 분들은 “주여!”라는 말이 입에 배였습니다. 길을 가다 발을 삐끗해도 “주여!”라고 하고, 밥 먹다 돌을 씹어도 “주여!”라고 합니다. 전화를 하면 “여보세요!”라고 하지 않고 목소리를 낮게 깔고 “할렐루야!”라고 합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사람들은 거룩한 사람을 존경하기보다는 꽉 막힌 지긋지긋한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그런 사람들을 보고 자라면서 “나는 커서 절대 거룩한 사람은 되지 말아야지!”라고 결심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거룩함을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거룩함은 겉모양이나 옷차림과는 상관없습니다. 어떤 분은 분명히 거룩한 분입니다. 그런데 평소에 참 유머도 많고 얼마나 잘 웃는지 모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거룩함은 내면이 아름다운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아름답게 내면을 가꾸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의 삶도 아름답게 만드실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성도 >

오늘 본문은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 생긴 불륜의 아들이 병에 걸려 죽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고통을 다윗이 잘 극복해서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주셨고, 본문 25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이름을 여디디야라고 부르게 하셨습니다. 여디디야란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란 뜻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님은 어떤 성도를 사랑하실까요?

1. 진실하게 회개하는 성도

본문을 보면 죄의 대가가 아주 비싸다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됩니다. 다윗이 자신의 불륜에 대해 회개했을 때 13절 말씀에서 하나님은 다윗의 회개를 받아주셨지만 불륜의 자식은 하나님께서 치셔서 죽게 하셨습니다. 그처럼 죄는 우리가 진실로 회개하면 언제나 사함 받을 수 있지만 죄의 열매는 반드시 주어지게 됩니다. 그처럼 죄의 대가는 비싸기 때문에 우리는 은혜로 살면서도 죄를 힘써 멀리해야 합니다.

어느 날, 미국의 한 주정뱅이 도박꾼이 근처에 살던 조나단 에드워드란 유명한 목사님에게 와서 간밤에 꾼 꿈을 말해주었습니다. 그 꿈에서 천사가 나타나 만일 회개하지 않으면 1년 후에 너를 불러가겠다고 했다면서 그날부터 그는 술과 도박을 끊고, 교회를 잘 다녔습니다. 그러나 몇 개월 후에 다시 술과 도박에 손을 대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은 그의 꿈을 말하며 권면했지만 그는 더욱 교회에서 멀어져 갔고 마침내 이런 말까지 했습니다. “그 꿈은 개꿈이었어요. 그런 꿈에 왜 연연합니까?” 그러던 어느 날 밤 그는 술에 만취되어 계단을 내려오다 실족해 목이 꺾여 죽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목사님이 일기책을 찾아보니까 그날이 꼭 1년 전 그가 자신을 찾아온 날이었다고 합니다.

물론 다 그렇게 벌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죄는 반드시 뼈아픈 대가를 지불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죄를 멀리해야 합니다. 어떻게 죄를 멀리할 수 있습니까? 사람은 완벽하게 살 수 없기 때문에 다른 방법은 없고, 중요한 것은 진실하게 회개하는 것입니다. 죄의 대가만 비싼 것이 아니라 진실한 회개의 대가도 비싸고, 순종과 헌신의 대가도 비쌉니다. 우리가 진실하게 회개하고 힘써 하나님의 뜻에 헌신하면 그만큼 복된 열매가 맺힐 것입니다.

제가 자주 하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어느 한 기도제목이라도 우리는 잊을지라도 하나님을 기억하시고 반드시 가장 적절하게 최선의 모습으로 응답해주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또한 우리가 교회에 나온 발걸음 하나라도 기억하시고, 교회에 떨어진 종이 한 장 주운 것과 이웃에게 냉수 한 그릇 주신 것도 하나님은 기억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일한 대로 갚아주시고,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십니다.

2. 최선을 다하는 성도

다윗은 자신의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아들이 죽어 갈 때에 어떻게 합니까? 본문 16절 말씀을 보십시오. “다윗이 그 아이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되 금식하고 안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으니.” 이 구절에서 “안에 들어가서”라는 말은 골방 안에 들어갔다는 말입니다. 그는 골방 안으로 들어가서 떳떳하게 머리를 들어 기도하지 못하고 밤새도록 땅에 엎드려 애절하게 기도했습니다.

너무 애절하게 기도하니까 왕의 건강을 염려해 원로 신하들이 다윗을 일으키려 했지만 다윗은 듣지도 않고 먹지도 않으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지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예배도 최선을 다하고, 기도도 최선을 다하고, 예배 후에 세상에 나가 사는 것도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1960년대 어느 날, 한 신학생이 섬기는 시골 교회에서 한분이 소천했습니다. 그 장례 일로 학기말 시험공부를 못했습니다. 그리고 주일예배를 마치고 야간열차를 타고 아침에 신학교에 도착했습니다. 첫 과목시험은 ‘성령론’이었는데, 시험 시간까지 한 시간 정도 남았습니다. 그런데 책을 여니까 너무 피곤해서 아무 것도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절망한 나머지 전도사님은 어차피 책은 눈에 안 들어오니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매달리자고 생각하고 기도실로 갔습니다. 그리고 한 시간 동안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저의 처지를 잘 아시는 하나님! 저는 매주 먼 길을 다니며 지금 목회와 공부를 동시에 하는데 왜 하필이면 시험 전에 김 집사님을 불러가셨습니까? 이제 시험이 닥쳤습니다. 성령님! 성령론 시험 시간에 임하셔서 시험 들지 않게 하소서!”

그처럼 간절히 기도한 후 교실에 들어가 큰 기대를 하고 시험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문제였습니다. 하나님도 무심하셨습니다. 성령론 시험시간에 성령님은 어디론가 사라지셨습니다. 결국 그 전도사님은 시험지에 자기상황을 간략하게 쓰고 마지막에 이렇게 썼습니다. “교수님! 죄송합니다. 저는 이 문제를 몰라도 성령님은 잘 아실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담당교수가 그 답안지를 보고 이렇게 채점했습니다. “성령님은 100점! 너는 0점!” 결국 그 신학생은 그 과목을 재수강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가끔 보면 믿음생활은 100점인 것 같은데 가정생활이나 사회생활은 0점으로 사는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이든지 최선을 다하는 책임감 있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3.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는 성도

그처럼 다윗이 간절히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 아이는 죽었습니다. 그때 다윗이 어떻게 반응을 합니까? 본문 20절 말씀을 보십시오. “다윗이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궁으로 돌아와서 명하여 음식을 그 앞에 베풀게 하고 먹은지라.” 아이가 죽자 다윗은 곧 일어나 단장을 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하나님께 예배드린 후에 궁으로 돌아와서 식사를 했습니다.

그때 신하들이 왕에게 물었습니다. “왕이여! 왜 아이가 살았을 때는 금식하시고 우시더니 왜 아이가 죽으니까 일어나 잡수십니까?” 그때 다윗은 말합니다. 본문 22-23절 말씀을 보십시오. “가로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어니와/ 시방은 죽었으니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저에게로 가려니와 저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다윗은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이미 그렇게 하셨는데 너무 슬퍼하면서 죽은 아이에 대해 지나치게 미련을 가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고 그 일에 더 이상 미련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처럼 간절한 기도해도 응답이 없을 때가 있지만 사실 응답이 없는 것도 크게 보면 결국 응답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그 고난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을 주시고, 나중에 더 귀한 자식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기도가 주는 한 가지 축복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기도하면 기도하는 사람 자체가 믿음의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기도를 통해서 자식의 죽음조차 넉넉히 이길 수 있는 마음을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환경은 바뀌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반드시 내 마음은 바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시련도 이길 수 있는 엄청난 능력과 여유가 생길 것입니다. 기도는 엑스테리어(exterior)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인테리어(interior)를 바꾸는 것입니다. 그런 내적인 변화는 기도가 주는 가장 큰 축복의 중의 하나입니다. 그렇게 인테리어를 변화시키면 신기하게 엑스테리어도 변화되는 큰 축복이 따라옵니다.

우리는 이 기도의 패턴을 잊지 말고 내가 원하는 대로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다고 조급한 마음으로 기도에 대해 회의를 느끼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내가 원하는 모습대로 물리적으로 응답되지는 않아도, 반드시 하나님 앞에 열납되어 가장 선한 모습으로 화학적인 변화를 일으켜 은혜의 단비가 되어 우리들에게 내릴 것입니다.

4. 새롭게 시작하는 성도

다윗은 아이가 죽기 전에는 아이를 살려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지만 아이가 죽자 금방 그 불행을 잃어버리고 20절 말씀처럼 몸을 단장하고 하나님께 경배한 후에 새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다윗의 가장 매력적인 면이 바로 이 장면입니다. 그 모습을 하나님이 기쁘게 보시고 하나님은 솔로몬이란 귀한 자녀를 새로 주셨습니다.

우리는 과거의 불행을 쉽게 잊을 줄 아는 거룩한 건망증을 가져야 합니다. 거룩한 건망증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 중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과거의 불행을 잘 잊을 때 새로운 은혜를 더해주실 것입니다. 잘했든 잘못했든 과거의 일은 하나님께서 이미 결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결재하신 지나간 일에 너무 매달려 살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대개 시간낭비일 뿐입니다.

사람에게 제일 나쁜 성품 중의 하나가 편견인데, 왜 편견이 생깁니까? 과거에 대한 나쁜 기억을 잊어버리지 못하면서 생기는 초기 정신병적 질환이 바로 편견입니다. 편견은 세상을 자기가 아는 잣대로만 봅니다. 그러다 보면 전혀 현실과 동떨어진 판단을 할 수 있고, 일부만 보고 전체를 판단하기 때문에 성공적인 삶을 살 수도 없고, 하나님께서도 그런 야박한 사람에게 결코 은혜를 주시지 않습니다.

어떤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그분은 군대 생활을 전남 광주에서 전경으로 했습니다. 어느 날, 훈련소 생활을 끝내고 자대가 있는 광주에 도착했을 때, 그분은 기분이 착잡했다고 합니다. 그분은 서울에서만 자란 분이었는데, 광주 민주화 운동을 폭도가 난동을 부린 일로 알고 광주 사람은 다 사기꾼이고 귀신인 줄 알고 군대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3년 후, 그분이 군대를 마치고 대학에 복학해서 MT(멤버 단합회)를 갔습니다. 그런데 경상도 영주 근처에서 텐트를 치고 잤는데 깨어보니 텐트는 없어지고 돗자리에서만 자고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한 동안 경상도 사람은 다 깡패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회생활을 하면서 광주 사람이나 경상도 사람이나 대부분 착하고 좋은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과거의 나쁜 기억이 나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요새 제가 정길진 목사님이 4월에 사모님을 보내시고 깜빡 잊어버리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어떤 약속을 하면 저에게 몇 번이나 확인 전화를 합니다. “목사님! 우리가 약속한 날짜가 내일인가요?” 그러면 제가 가끔 핀잔을 줍니다. “목사님! 거의 치매 수준이 되었어요. 이제 사모님 그만 잊으세요.”

우리는 지난 일을 잘 잊을 줄 알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을 향해 지금 새롭게 결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새로운 결단과 실천을 보시고 더 좋은 일을 결재해주시고, 우리의 새로운 결단은 곧 주님의 결단으로 바꾸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이사야 43장 19절 말씀처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우리 인생을 돌아보면 지금까지 잘못한 일과 부끄러운 일과 실패한 일도 많았지만 그 일에 매여 낙심하고 좌절하고 우리의 선한 계획과 열심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언제나 우리를 용납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믿고 오늘도 예배 시간에 다시 새로운 옷을 입고 힘차게 출발하면 우리는 반드시 변화의 주인공이 될 수 있고, 우리 앞에는 지금보다 더욱 복된 길이 펼쳐질 것입니다.

< 신실한 하나님의 사랑 >

다윗이 과거의 불행을 잘 극복하자 하나님께서 어떤 축복을 주셨습니까? 본문 24절 말씀을 보십시오. “다윗이 그 처 밧세바를 위로하고 저에게 들어가 동침하였더니 저가 아들을 낳으매 그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믿음을 보시고 더 좋은 아이를 주셨고, 다윗은 그 아이의 이름을 솔로몬이라고 지었습니다. 솔로몬은 ‘평강의 사람’이란 뜻으로 ‘샬롬’이란 말과 같은 어원에서 나온 말입니다.

계속해서 본문 25절 말씀을 보십시오. “선지자 나단을 보내사 그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심을 인함이더라.” 이 구절에서 ‘여디디야’란 정확하게 말하면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란 뜻입니다. 다윗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징벌을 겸허하게 받아들이자 하나님께서 죽은 아이보다 더 사랑스런 아이를 주셨다는 뜻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6.25 때 평양 창동교회 전도사님 한 분이 남쪽으로 피난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피난 도중에 다리가 불편해 중화(中和)라는 지역에서 더 피난가지 못하고 빈집에 혼자 머물렀습니다. 마음속에 원망이 생겼습니다. “하나님! 하필 이런 때에 다리를 못 쓰게 만드시나요?” 그분은 공산 치하에서 열심히 하나님 일을 한 보상이 이건가 하는 원망이 생겼습니다.

다음날, 다행이 다리가 조금 나아져 다시 급히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조금 가자 길옆에 수십 구의 시체가 있었는데, 전날 같이 피난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피난 가다 조그만 군수창고에서 인민군복을 발견하고 추우니까 껴입었는데 미군이 인민군인 줄 알고 기총소사를 해서 거의 대부분이 죽은 것이었습니다. 그때 전도사님은 하나님을 잠시 원망했던 것을 회개하고, 그때의 은혜를 기억하며 열심히 교회를 섬겨 큰 교회를 이뤘는데, 그 교회가 바로 노량진 교회라고 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고난도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사람의 실패는 하나님의 실패가 아닙니다. 진짜 실패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축복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놀라운 기억력을 가진 것이고,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저주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사는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고양이보다 개를 더 선호합니까? 가장 큰 이유는 개가 고양이보다 주인을 더 따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고양이와 개는 기억시스템이 아주 다르다고 합니다. 개는 주인이 열 가지를 잘못해도 한 가지만 잘해주면 그 한 가지 잘해준 것을 기억해서 주인을 졸졸 따른다고 합니다. 반면에 고양이는 열 번 잘해줘도 한번 잘못해 주면 잘해준 것은 싹 잊어버리고 잘못한 것 때문에 토라져서 주인과 거리를 둔다고 합니다.

우리는 고양이형 성도가 되지 말고 개형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바다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우리가 지금 당하는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은혜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한두 가지 고난을 가지고 만 가지 은혜를 잊어버리고 불평하고, 원망하고, 절망하는 것은 고양이 같은 모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죽도록 잊지 못하는 개 같은 충성스런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이 은혜를 잊어버리면 추하게 되고, 결말도 비참하게 됩니다. 반면에 은혜를 잊지 않으면 반드시 은혜를 더 입습니다. 가정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에 대해서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지를 잊어버리면 그 사람은 인격적으로 아주 문제가 많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수고하는 남편과 아내의 뒷모습을 보고 눈물이 나오지 않으면 그런 눈깔은 한참 문제가 있는 눈깔이라고 했습니다.

저도 그 말을 듣고 아내의 뒷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눈물이 나오지 않아서 “내 눈깔이 문제가 있나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어느 날은 아내의 뒷모습을 보고 눈에서 눈물은 나오지 않았지만 가슴에서 눈물이 나오는 것 같았습니다. 깊이 생각하면 배우자는 너무 고마운 존재입니다. 저도 가끔 “아내가 없으면 어떻게 살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도 그런데 하나님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성령님이 없으면 우리가 어떻게 삽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없고, 성령님의 함께 하심이 없었으면 사는 것이 참으로 외롭고 힘들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범사에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감사는 축복받는 길이고, 불평은 망하는 길입니다.

원종수 권사님의 간증입니다. 그분은 의사가 되면서 두 가지 소원을 가졌습니다. 하나는 가난한 어머니의 속옷을 사드리는 것이고, 또 하나는 어머니와 돼지고기 같이 먹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분이 서울대 병원 인턴으로 첫 월급을 받고 어머니에게 달려가 말했습니다. “어머님! 첫 월급 받았습니다. 이제 돼지불고기 먹으러 가고 어머니 속옷을 사러 백화점에도 같이 가요.”

그때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종수야 기왕 믿을 바에야 잘 믿자. 지금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으니 앞으로도 하나님의 은혜로 살자! 이 첫 월급은 첫 열매잖아. 이 첫 열매는 하나님께 드리자!” 결국 그 첫 열매를 주님께 드렸습니다.

그 일이 있고 약 보름 후에 학장님이 불렀습니다. 의사고시 전국대회에서 1등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금을 주는데 하나님 앞에 바쳤던 월급의 2배를 주셨습니다. 그는 감탄했습니다. “하나님! 정말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군요. 첫 열매를 다 드렸더니 1등도 하게 해주시고 상금도 주셨네요.” 그는 그 상금을 가지고 어머니에게 달려가 말했습니다. “어머니! 제가 전국 의사고시에서 1등 했어요. 이제 저와 함께 돼지불고기 실컷 먹어요.”

그때 어머니가 봉투를 받아들고 말했습니다. “종수야! 너 상금 타 본적 있니?” “처음인데요.” “그래? 첫 상금이면 첫 열매구나! 이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자. 그리고 주일까지 기다리다간 우리가 시험 들겠다! 내일 새벽 제단에 가서 드리자!” 결국 그 상금도 바로 제단에 바쳤다고 합니다. 그런 헌신이 있었기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혜와 구변을 더해주시고 암 치료의 권위자이자 훌륭한 전도자로 삼아주신 줄 믿습니다.

때로 살다 보면 고난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고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도 지나보면 별것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분명히 걱정거리가 있었겠지만 지난 달 무슨 걱정을 했는지, 작년에 무슨 걱정을 했는지 지금은 거의 기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오늘 걱정하고 근심하는 것이 지나고 보면 별로 걱정할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미래입니다. 아무리 고난이 있어도 오늘 이 순간부터 그냥 잊어버리고 범사에 감사하면서 우리의 사명과 비전을 향해 열심히 달려 나가면 반드시 우리 앞에 놀라운 일들이 펼쳐질 것입니다. 항상 믿는 사람답게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사랑 받는 복된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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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축복 (시편 91:14-16)



1.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성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 ; 354∼430)는 “인간은 알고 있는 것에 의하여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사랑하는 것에 따라서 평가되어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면 그 사랑하는 것을 따라가게 되고, 또한 사랑하는 것에 모든 것을 바치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결국 욕심과 탐욕에 빠집니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돈 때문에 죄를 짓게 되고, 명예와 권세를 사랑하는 사람은 불법과 비리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사랑해야 합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22장을 보면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큽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마태복음 22장 37∼39절에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에 대한 계명이 큰 계명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이 사랑에 대한 계명을 지키지 않습니다. 또 사랑한다 하면서 잘못된 사랑을 합니다. 온전한 사랑을 하지 못하여 사랑 때문에 죄짓고 불신앙에 빠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가짜 사랑을 하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그러나 진짜 사랑, 하나님 앞에 인정받고 축복 받는 사랑을 하려면, 사랑에도 세 단계가 필요합니다.
첫째, ‘관심의 단계’입니다. 둘째, ‘헌신의 단계’입니다. 말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과 시간을 바쳐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셋째, ‘희생의 단계’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바치겠다는 자세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단계에 따라서 결과도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여러분은 어느 단계까지 와 있습니까? 그저 막연한 ‘관심의 단계’입니까? 아니면 ‘헌신의 단계’, ‘희생의 단계’까지 와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축복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이 축복받지 못하는 이유가 뭡니까?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입술로는, 말로는 사랑한다고 하지만, 맘에도 사랑이 없고 행동에도 사랑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자기만 사랑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복을 주시고(신 7:12∼13), 위험에서 건져내시고(시 91:14), 평안하게 만들어 주시고(시 119:165), 보호하여 주십니다(시 145:20). 하나님께서 넘치는 사랑을 주시고(잠 8:17), 기쁨을 채워주시고(사 56:6∼7),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고(롬 8:28),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하십니다(약 2:5). 사랑의 씨앗을 뿌리면 사랑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습니다.

2. 본문 배경 설명

오늘 봉독한 성경 말씀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삶의 역경과 절망적인 위기 상황에 처했을 때도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고 지키고 보호하신다는 내용의 찬양시입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왕과 신하, 백성들이, 전쟁터에 출전하기 전에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때, 혹은 어떤 사람이 삶의 위협으로부터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릴 때, 제사장이 불렀던 찬송으로 추측됩니다.
“하나님이여, 우리를 보호하시고 축복하시고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주께서 축복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사오니, 하나님이여 우리에게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민족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여 주시고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날 우리도 살다보면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에 봉착할 때가 많지 않습니까? 질병이 닥칠 때도 있고, 죽음이 닥칠 때도 있고, 두려움과 불안감에 떨 때도 있습니다.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날지 모르지만, 결과는 모두 그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느냐, 사랑하고 있지 않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하나님만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다섯 가지의 축복을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께서 건져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높여주시고, 세 번째는 응답하시고, 네 번째는 저와 함께 하시고, 다섯 번째는 장수하게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이 다섯 가지 축복이 나타납니다.

B.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축복

1. 내가 저를 건지리라 - 구원

“하나님이 가라사대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시 91:14a)

여기서 ‘사랑’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하솨크’라고 하는데, 그 뜻은 ‘달라붙다’, ‘애착을 가지다’입니다. 다시 말해서 갓난아이가 엄마를 안 떨어지려고 꽉 붙드는 것을 말합니다. 갓난아이는 엄마를 떨어지기만 하면 울고 난리가 납니다. 어떻게 하든지 엄마를 안 떨어지려고 붙들고 발버둥을 칩니다. ‘하솨크’는 바로 그런 상태를 말합니다. 전적으로 의지하고 매달리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 앞에 꼭 붙잡힌 바 되고, 우리도 하나님 앞에 달라붙어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역사, 하나님께서 지키고 보호하시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린아이가 엄마 품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꼭 달라붙어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여, 나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만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고 매달립니다. 그래서 말씀에 순종합니다. 하나님 앞에 충성합니다. 예배를 드립니다. 노력합니다. 최선을 다합니다.”라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라면, 하나님께서 그 사랑을 통해서 우리에게 축복을 주십니다. 우리를 건져 주십니다. 그런데 ‘건지리라’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엄마가 젖먹이 자식을 항상 보살피는 것을 말합니다. 마치 엄마가 젖먹이 자식에게 젖도 주고 옷도 입혀 주고 병났을 때는 병원에도 데려가고 항상 돌봐주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봐주시고 전쟁과 위험에서 건져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면, 고난 중에도 피할 길을 주시고 구원하시고 보호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의 품에서 결단코 이탈되는 일이 없습니다.
시편 145편 20절에 다윗 왕은 “여호와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는 다 보호하시고 악인은 다 멸하시리로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아무리 어려움과 위험 속에 빠졌다 할지라도 눈만 똑바로 뜨고 있으면 결코 낙심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수직적인 눈’과 ‘수평적인 눈’만 가지고 있으면 곧 회복될 수 있습니다.
수직적인 눈은 하늘을 쳐다보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을 말합니다. 수평적인 눈은 인류 역사와 세계를 바라보는 눈을 말합니다. 하늘을 쳐다보는 사람, 수직적인 눈을 가진 사람은 결코 낙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청합니다. 또한 수평적인 눈을 가지고 인류 역사를 바라보고 하나님께서 역사 가운데 섭리하셨음을 깨닫고 진리 가운데 항상 거합니다.
기자 생활을 하던 서른두 살 난 젊은 남자가 있었습니다. 5∼6년 동안 기자 생활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그런지 불면증과 심한 우울증을 앓게 되었습니다. 그는 밤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무려 백일 동안이나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대인공포증, 자율신경실조 현상까지 나타났습니다.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 가서 정신과 의사를 만났습니다.
“나를 좀 도와 주십시오. 내가 무슨 병에 걸렸습니까?”
“당신은 기자 생활로 너무 심하게 스트레스를 받아서 모든 것이 다 비정상입니다. 그러니 나하고 세 가지만 약속합시다. ‘첫째, 자살하지 말 것, 둘째, 이사하지 말 것, 셋째, 사표 쓰지 말 것.’ 이것이 당신이 지켜야 할 약속입니다.”
그는 정말, 빌딩 옥상 같은 데 올라가면 뛰어내리고 싶고, 다리를 지나가면 강에 뛰어들어가고 싶고, 자동차가 지나가면 뛰어들어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어머니가 달려왔습니다. 아들을 붙들고 “얘야, 내가 너에게 강권하니 넌 무조건 교회 나가라. 너는 교회 나가야 된다. 교회밖에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이 남자는 그냥 십자가 간판만 보고 집에서 가장 가까운 동네 교회를 나갔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에게 “목사님, 나를 좀 도와 주십시오. 나는 극심한 정신병으로 시달리고 있습니다.”라고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랬더니 목사님은 “불뱀에 물린 이스라엘 백성이 놋뱀을 쳐다보고 구원받은 것처럼, 당신도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내가 당신에게 숙제를 주겠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숙제입니까?”
“매일마다 성경 한 장씩을 쓰십시오. 병이 나을 때까지, 성경을 하루에 한 장씩 계속해서 쓰십시오. 이것이 숙제입니다.”
그래서 이 남자는 성경을 한 장씩 계속해서 썼습니다. 한 달, 석 달, 육 개월, 일 년 동안 썼는데, 성경을 읽기 시작한 지 일 년 만에 잠을 잘 자게 되었습니다. 불면증이 없어졌습니다. 스트레스가 없어졌습니다.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성격이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특히 그는 돈과 자존심 문제에 민감했습니다. 누구든지 자기에게 해를 끼치면 울분과 분노, 질투심 때문에 견디질 못했습니다. 자기에게 해를 끼친 사람을 원수처럼 미워했습니다. 그런데 성경 말씀을 쓰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미워하는 마음이 떠나게 하시고 질투심이 떠나게 하시고 증오감이 떠나게 하시고, 나에게 용서하는 마음을 주시옵소서.’
그러자 평소에 증오하고 미워했던 사람에 대한 마음의 응어리가 풀리게 되었고, 오히려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평강을 주시고 기쁨을 주셨습니다. 일 년 동안 성경 말씀을 읽자 생각이 변화되고 변화되어서 스트레스, 우울증도 없어지고 다시 건강을 되찾아 온전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변화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의 진리 가운데서 새로운 역사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새로운 인식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도 하나님께서 해결하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을 사랑하면,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의 변화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2. 내가 저를 높이리라 - 높임, 존귀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시 91:14b)

여기서 ‘안다’는 것은 그냥 막연하게 아는 것이 아닙니다. ‘체험적으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느끼고 맛보아 체험적으로 아는 신앙과 믿음을 말합니다. 그냥 친구 정도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부부가 함께 살므로서 서로 성격과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아는 것을 ‘안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 연단과 시련을 받은 다음에야 비로소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오늘날 교회 나와 신앙 생활 하면서도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의 축복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연단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심판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섭리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때도 모릅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원망과 불평, 부정적인 생각에만 빠져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교회를 등지고, 성경을 등지고 자기 혼자 삽니다.
하나님을 올바르게 아는 자를 하나님께서 높여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원래 ‘높인다’는 단어에는 ‘안전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침략할 수 없는 높은 요새에 옮겨서 안전하고 편안하게 해 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여러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 높은 요새에 들어 올리셔서 아무 재앙 없이 안전하고 평안하게 살게 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둘째, 신분이 높아져서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점점 형통하고 잘되는 것을 말합니다. 더 나아가서 셋째, 영광의 자리에 앉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낮아지고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점점 높여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한나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여 아들, 사무엘을 나았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상 2장 7절 말씀을 보면, 사무엘을 하나님께 바치고 감사함으로 하나님 앞에 찬양했습니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富)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한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음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높이시면 낮출 자가 없고, 하나님이 낮추시면 높일 자가 없으며,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을 부자가 되게도 하시며 부자를 가난하게도 하시고,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려있음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높여 주십니까? 작은 일에 충성하는 사람을 높여 주십니다(마 5:19). 섬기는 사람을 높여 주십니다(마 23:11). 기도하는 사람을 높여 주십니다(행 10:2, 22). 선을 행하는 사람(롬 13:3), 전도하는 사람(고후 8:18), 순종하는 사람(히 5:8∼10), 하나님 앞에 겸손한 사람(벧전 5:6)을 높여 주십니다. 교만한 사람은 패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늘 겸손하게 낮아지고 낮아진 사람은 하나님께서 높여 주시고,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명심보감(明心寶鑑)에 “부귀(富貴)는 재천(在天)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자가 되고 귀하게 되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하늘에 달려 있는 것이 뭡니까? 구름입니까, 아니면 태양입니까, 별입니까, 달입니까? 아닙니다. 부귀가 하늘에게 달려 있다고 했습니다.
부자가 되는 것, 귀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부자가 되고 귀하게 되고 존귀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영국의 국회의원 중에 헨리 파우세트(Henry Fawcet)라는 지도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막대한 영향력을 가진 국회의원은 맹인이었습니다. 어떻게 맹인이 가장 영향력 있는 국회의원이 되었을까요?
헨리 파우세트가 20세 때의 일이었습니다. 하루는 아버지와 함께 사냥을 나갔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실수로 총이 오발되는 바람에 그만 총알이 그의 얼굴에 맞고 말았습니다. 목숨은 건졌으나 그는 실명하여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 사고로 아버지도 충격을 받고 아들도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내가 내 아들 장래를 망쳤구나. 차라리 내가 죽는 게 낫겠다.’라고 죄책감에 사로잡혔습니다. 아들은 아들대로 ‘나는 이제 앞을 못 보니 책도 못 보고 살아서 뭐 하겠는가? 죽어버리자.’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부자가 다 이렇게 죽을 궁리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헨리는 누군가 심하게 통곡하며 흐느껴 우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보니까 자기 아버지였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우는 소리를 듣고 마음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울지 마세요. 아직도 나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나를 도와주시면 나도 훌륭하게 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너를 도와 주면 되겠니?”
“아버지, 나를 위해서 책을 읽어 주세요. 아버지가 나에게 책을 읽어 주시면, 내가 아버지를 통해서 책을 읽고 훌륭한 사람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점자도 배워서 열심히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날 좀 도와주세요.”
“그래, 내가 널 도와 주마.”
아버지는 아들을 도와 열심히 책을 읽어주고, 아들은 점자를 배워서 최선을 다해 공부했습니다. 그래서 영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국회의원, 맹인 국회의원이 되었습니다.
위기에 처하면 절망하고 포기하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에게도 아직 희망은 있습니다. 눈이 먼 헨리에게도 말할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에게는 청춘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없는 것만 생각하고, 불평과 원망에 빠집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믿음이 있고 건강이 있고 소망이 있고 지혜가 있고 생각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잃어버린 것은 잃어버린 것이고, 남은 것을 가지고도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와 주시면, 하나님께서 높여 주시면 무엇을 못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축복하시고 인도하시고 사랑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만 하면,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높여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3. 내가 응답하리라 - 간구, 응답

“저가 내게 간구(懇求)하리니 내가 응답(應答)하리라”(시 91:15a)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간구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응답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간구하지 않습니다. 기도하지 않습니다. 찬송하지 않습니다. 감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간절히 구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무슨 말을 못하겠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자기의 고민을 얘기할 수 있습니다. 비밀을 얘기할 수 있습니다. 부모한테도 말못하고, 친구한테도 말 못했던 것, 얘기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말할 수 있고, 또 사랑하는 사람이 얘기하기 때문에 그 얘기를 들어주고 도와줍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간구를 들어주십니다. 사람들은 무시하고 멸시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얘기, 어떤 간구를 하고 부르짖더라도 관심을 가지고 다 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간구하는 기도에는 응답이 있습니다. 문제 해결이 있습니다. 고난에서 구원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을 채워주시기 때문에 기적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장 24절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기쁨이 충만한 사람은 기도하는 사람이요, 슬픔이 충만한 사람은 기도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인상쓰는 사람, 우울한 사람, 불안한 사람, 두려움과 공포에 빠진 사람은 기도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 얼굴에는 기쁨이 넘쳐납니다. 감사가 넘쳐납니다. 용기와 희망이 솟아납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 사는 사람, 하나님의 도움을 바라고 사는 사람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도 기도하는 사람에게 역사 하시고 응답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가정도 행복한 가정은 기도하는 가정입니다. 회사도 잘되고 축복받는 회사는 기도하는 회사입니다. 교회도 부흥하고 발전하는 교회는 기도하는 교회입니다. 기도는 우리에게 활력을 줍니다. 우리 생활을 풍족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강남 어느 지역에서 식당을 경영하는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장사는 되지 않고,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만 생겼습니다. 이것저것 잡일로만 바빴지 식당 사업이 잘 되지 않았습니다. 부동산에 내놨는데 팔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가게를 처분해야 하는데…. 이 가게를 팔고 뭘 할까?’하고 걱정했습니다. 앞길이 막막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내가 왜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았지?’
그는 자기가 그 동안 새벽 기도도 하지 않고, 금식 기도, 철야 기도도 하지 않았던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 이제 내가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나에게 새벽 기도의 능력, 철야 기도의 능력, 금식 기도의 능력 주시고, 이 가게도 팔아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하기 시작했는데 얼마 되지 않아서 한 점잖은 신사가 그 식당에 찾아왔습니다. “우리 회사 직원이 한 50명 되는데, 직원 식사를 이 식당에 위탁할테니 직원들의 식사를 좀 맡아 주시오.”라고 말하며 선금으로 100만 원을 주고 갔습니다. 그래서 직원 50명이 식사를 하러 오니까 식당은 자리가 모자랄 정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식당을 팔아달라고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식당을 넘치게 채워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하나님, 식당 처분 안하게 된 것 감사합니다. 내 기도대로 응답 안 해 주신 것 감사합니다. 이제 이 식당 안 팔리게 만들어 주시옵소서. 이 식당을 통해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근심하고 걱정하면서도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새벽 기도 하지 않습니다. 철야 기도 하지 않습니다. 금식 기도 하지 않습니다. 병원에 가서 수술하면 금식할지언정 하나님 앞에는 금식 기도 못합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고, 발등에 불이 떨어져야, 어려운 고난과 고통 닥쳐야 뒤늦게 정신을 차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사람이고,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하는 자의 기도에 응답하여 주십니다. 여러분, 기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대화입니다. 그리고 대화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사랑한다고 하면서 입을 꾹 다물고 서로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듣지 않는다면, 그것이 사랑입니까? 아닙니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사람과 오순도순 대화하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작은 문제도 기도하고, 큰 문제도 기도해야 합니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도 기도하고, 감당할 수 없는 것도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늘 깨어서 기도할 때,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기도가 응답과 축복으로 나타나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내가 저와 함께 하리라 - 함께 하심

“저희 환난(患難) 때에 내가 저와 함께 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榮華)롭게 하리라”(시 91:15b)

여러분, 하나님께서 함께 하여 주십니다. 동행하여 주십니다. 임마누엘의 축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성공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형통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반드시 행복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데 왜 불행합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데 왜 사업이 망합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데 왜 회사에 부도가 납니까?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잘났다고 떠나고, 교만해서 떠났기 때문에, 교회를 떠나고 불신앙에 빠지고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축복이 점점 떠나 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반드시 영광을 허락하여 주십니다. 환난에서 건져서 영화롭게 해 주십니다. 정신적인 만족과 물질의 축복,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는 축복을 허락하여 주십니다. 번영과 칭찬과 영광과 성공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39장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으로 요셉은 어디 가서 무엇을 하든지 형통한 자가 되었습니다.
요셉은 애굽 사람에게 팔려 보디발의 집에 갔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범사에 그를 형통케 하셨습니다(창 39:2). 또한 요셉은 모함을 받아 감옥에도 갔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하나님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케 하셨습니다(창 39:23). 결국 그는 옥중에서 바로 왕의 꿈을 해석해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마지막에 가서, 결국에 가서는 하나님께서 보상하시고 축복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사실을 늘 깨닫고 느끼고 감사해야 합니다.
17세기 프랑스의 철학자요, 수학자였던 파스칼(Blaise Pascal ; 1623∼1662)은 “행복은 우리 밖에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 안에 있는 것도 아니다. 행복은 오직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만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어디 가야 행복이 있습니까? 누가 행복한 사람입니까? 돈 많이 버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까? 대통령이 행복한 사람입니까? 아니면 권력을 가진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돈이 있든 없든, 권력이 있든 없든, 하나님만 함께 하시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짜리 딸을 둔 어느 가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딸이 사춘기라서 그런지 부모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공부는 제쳐놓고 학교도 제대로 가지 않았습니다. 친구들하고 놀러 다니고, 집에는 밤늦게 들어왔습니다. 야단도 쳐보고 때려도 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러다 가출해서 아주 잘못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걱정을 하다, 하다 이 부부가 ‘안되겠다. 이제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수밖에 없다. 우리 부모로선 더 이상 못하겠다.’라고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딸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어디 가서 죄짓지 않게 하고, 사고 치지 않게 하시고,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안타깝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는데 갑자기 마음속에 음성이 들렸습니다.
‘야, 너만 안타까우냐. 나도 안타깝다.’
‘뭐가요?’
‘네가 내 말을 안 들을 때, 내가 얼마나 안타까운 줄 아느냐?’
그 음성을 듣는 순간 자신도 집사였지만 교회에 제대로 안 나가고, 하나님 말씀을 안 듣고 불순종했던 것이 깨달아졌습니다.
‘나도 너 참 안타깝다. 그러니까 너무 야단하지 마라. 나도 너를 참았으니까, 너도 참아라. 기도만 해라.’
그래서 딸이 속썩이고 말 안 듣는 것을 통해, 자기도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잘못했던 것을 회개하고 ‘하나님, 이제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겠습니다. 충성하고 헌신하겠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이 나에 대해서 인내한 것처럼, 나도 이제는 하나님 앞에서 딸에 대해 인내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그 날 밤도 딸이 안 들어오자 부부는 걱정이 되어 어쩔 줄 몰랐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어디 가서 뭘 하는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지키고 보호하고 함께 하실 것을 믿습니다.’라고 기도하고 있는데 갑자기 전화가 “따르릉” 울렸습니다. 병원 응급실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딸이 병원에 입원하고 있으니 빨리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가봤더니 교통사고였습니다. 딸이 친구 세 명과 함께 택시를 탔는데, 택시가 그만 전신주에 정면충돌을 했다는 것입니다. 차는 불이 붙어서 전소해 버리고, 기사는 물론 그 안에 타고 있던 세 명의 학생이 다 다쳐서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운전사 바로 옆, 조수 석에 앉았던 자기 딸만 무사했습니다. 너무 놀란 나머지 얼굴만 하얗게 질려있었습니다.
‘하나님, 어째서 제일 위험한 자리에 앉은 내 딸만 안전하고 다른 사람들은 다 피투성이가 되고 다쳤습니까? 하나님께서 내 딸과 함께 하여 주심을 감사합니다.’
걱정 근심 하며 그냥 있지 않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위험한 교통 사고에서 딸의 생명을 보호해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딸이 병원에서 입원하고 있는 동안 아버지, 어머니와 대화를 많이 하여 부모와 올바른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사춘기에 탈선하고 방종하던 딸이 다시 돌아와 정상적으로 공부하고 착한 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딸을 살려주신 것 감사합니다. 딸의 마음을 다시 돌이키신 것 감사합니다. 하나님, 우리가 인내하고 끝까지 참고 기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여러분, 어떤 어려움과 절망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낙심하거나 탄식하거나 포기하지 마시고, 끝까지 하나님 앞에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자녀가 안 들어 와도 하나님 앞에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사업이 안되도 하나님 앞에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어려운 문제, 역경이 와도 하나님 앞에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끝까지 하나님을 사랑하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거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사랑하는 자에게 함께 하시는 축복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우리 가정은 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축복을 받게 하시고, 이 나라도 민족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축복을 받게 하시고, 회사도 직장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축복을 주시고, 우리 교회 집사·장로·권사·성도들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축복을 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는 축복을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5. 내가 장수함으로 저를 만족케 하리라 - 장수, 만족

“내가 장수(長壽)함으로 저를 만족(滿足)케 하며 나의 구원(救援)으로 보이리라 하시도다”(시 91:16)

여러분, 생명의 주관자가 누구입니까? 누가 사람을 만들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셨기 때문에 건강과 장수는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 살고 죽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세상에 태어나는 것도 하나님의 뜻입니다. 누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났습니까? 우리가 한국에 태어난 것, 부모를 만나서 김씨, 박씨, 최씨가 된 것, 우리 인간에게는 선택권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셨기 때문에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의 주관자, 생명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생명도 주십니다. 건강도 주십니다. 장수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자를 장수함으로 만족케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래 산다고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 세상의 악한 사람들 중에도 오래 사는 사람이 있지만, 그들은 욕망과 죄악과 갈등 속에서 삽니다. 만족이 없습니다. 만족 없이 오래 사는 것은 오히려 고통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편안한 가운데 장수의 축복을 누리도록 허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잠언 10장 27절에 솔로몬 왕은 “여호와를 경외(敬畏)하면 장수하느니라…”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올바로 믿으면 장수의 축복을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장수한 사람들의 기록이 많이 나옵니다.
구약 성경에 사라는 127세(창 23:1), 아브라함은 175세까지 장수했습니다(창 25:7∼8). 이삭은 더 오래 살아서 180세까지 살았습니다(창 35:28∼29). 야곱이 147세(창 47:28), 요셉이 110세(창 50:26), 아론이 123세(민 33:39), 모세가 120세(신 34:7), 여호수아가 110세(수 24:29). 다 100세 이상을 살았습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을 잘 믿으면 100세 이상 축복 받고 산다는 걸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신약 성경에 안나는 106세까지 살았을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눅 2:36∼37). 왜냐하면 당시 이스라엘 여자는 보통 15세에 시집을 갔는데, 7년 동안 결혼 생활하고 84세를 과부로 살았다고 하니까 그의 나이를 106세로 추정하는 것입니다. 안나는 106세까지 과부로 살면서 성전을 떠나지 않고 금식하고 기도하여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렸습니다. 오늘 참석한 여러분도 다 장수의 축복을 받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최근 8·15 남북이산가족 상봉 후에 ‘건강 관리 신드롬’이 생겼다고 합니다. “살아 있어야 가족과 형제들을 만날 수 있다. 건강해야 된다.”라고 해서 60세, 70세, 80세 할머니·할아버지들이 건강 관리에 대단한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새벽이면 약수터를 오르내리며 운동을 하고, 저녁에도 아파트 주변을 산책한다고 합니다.
여러분, 건강의 비결이 뭡니까? 어떤 사람은 “건강 식품을 먹어야 건강하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세계적인 건강 식품 제조 업체인 미국의 허벌라이프사의 창업자 마크 휴즈 회장은, 건강 보조 식품을 판매해 한해 매출이 9억 달러에 달하는, 엄청나게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그는 좀 더 안전하고 훌륭한 다이어트 식품을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많은 건강 식품을 팔았습니다. 그리고 “세계 사람에게 더 많은 건강 보조 식품을 공급하는데 생애를 바치겠다.”라고 장담했습니다.
그런데 본인은 로스앤젤레스 해변에 있는 무려 300억 원짜리 초호화 맨션에서 자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건강, 건강’, ‘장수, 장수’를 외치던 건강 식품 창업자 마크 휴즈는 44세에 심장마비로 죽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건강 식품을 먹고 오래 살고자 해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 오래 삽니다. 하나님께서 건강을 주시고 장수하게 하셔야 오래 삽니다. 생명을 주신 하나님, 건강의 근원 되신 하나님, 우리는 그 하나님을 잘 믿어서 장수를 해야 합니다.
우리 한국에는 건강을 위협하는 유해 식품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가 기도해야 할 제목입니다.
중국산 납 꽃게뿐만이 아닙니다. 납이 들어간 복어와 병어, 물 먹인 아귀, 돌 넣은 홍어, 살충제를 쓴 인삼 등 유해 식품이 아주 많습니다. 옥수수 기름에다 황산을 넣어 참기름 색깔로 바꾼, 황산 식용류를 만들어 30억 어치나 팔았습니다. 그밖에도 타르 색소를 넣어서 암을 유발시키고 혈소판 감소증을 일으키는 검은 깨, 발암 물질인 묵, 쇳가루 섞인 고춧가루 등 불량 식품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런 음식을 먹고도 살아 있다는 것이 기적입니다.
요즘 신문을 보면 먹을 게 별로 없습니다. 무엇을 먹고 살아야겠습니까? 병든 소를 잡아서 소고기를 팔아먹지를 않나, 육류도 불량 식품이 참 많습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불량 식품, 한국의 부정부패가 빨리 떠나게 하시고, 진정한 건강 식품이 나오게 하여 주시옵소서.’

C.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여 축복받는 성도가 되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해 주시고, 축복을 주십니다. 그래서 첫째, 하나님께서 우리를 건져주시고, 둘째, 높여주시고, 셋째, 기도를 응답하시고, 넷째, 우리와 함께 하시고, 다섯째, 장수케 해 주십니다.
여러분,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음은 조선일보에 난 기사입니다. 충청남도 금산군에 사시는 95세 동갑내기 할머니와 할아버지, 송병호, 송원금 씨는 결혼 생활 80년 동안 한번도 아픈 적이 없을 정도로 건강하십니다.
그래서 “할머니, 할아버지, 건강 비결이 뭡니까?”하고 물었더니, 한결같이 “교회 때문이여. 교회 가는거 밖에 몰라.”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할머니가 시집왔을 때 시어머니 손에 이끌려 나갔던, 교회 생활이 건강을 유지하는 큰 기둥이라며, “우리는 첫째도 교회, 둘째도 교회, 셋째도 교회, 교회밖에 몰라요. 교회 열심히 다녔더니 하나님께서 장수하게 해 주셨습니다. 새벽 기도, 철야 기도, 금식 기도 예배 시간마다 나가고 하나님만 믿었습니다. 하나님만 의지했습니다. 기도했습니다. 찬송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물질을 드렸습니다. 우리는 교회밖에 없습니다.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축복이 넘쳐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신앙이 좋으니까 그 집 아들, 딸부터 손자, 손녀까지 다 하나님 앞에 충성하고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축복 받고 영광을 돌립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고, 교회를 사랑한다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의 신앙, 사랑의 인생을 살 때 하나님께서 풍족하게 역사하시고 축복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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