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Preserve my life according to your word.
시편 119:25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시편 119편 가운데 4번째 히브리어 알파벳으로 시작되는, 25절부터 32절까지 4번째
단락을 공부하려고 합니다.
제가 3번째 알파벳을 뛰어 넘은 것을 표시를 잘 해 놓으시면, 제가 언젠가 하려고 합니다.
119편은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대로, 22개의 단락으로, 8절씩 아름답게 나누어져 있습니다.
오늘은 '달레트'로 시작하는 4번째 단락입니다.
옛날 어느 숲 속에 행복한 고추잠자리가 있었습니다. 늘 하늘을 높이 날며 부족한 것 없이 아주 행복하게 살고
있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이 고추잠자리에게 불행이 닥쳐왔습니다. 그의 사랑하는 어머니와 형제, 가족 모두가 날아다니는 새에게
잡혀 먹혔어요. 불행이 다가온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고추잠자리는 너무너무 슬펐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마음이 아파서 더 이상
살아갈 수가 없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이제 죽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숲 속의 요정을 찾아가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요정님, 저는
죽어야겠습니다" 요정이 묻습니다. "왜 죽어야 되니?" 고추잠자리는 자기의 일을 설명했습니다. "내가 이런 상황 가운데서 마음이
아파 도저히 더 살 수 없습니다. 어머니와 형제를 하루아침에 다 잃었습니다. 그런 제가 어떻게 살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때
요정이 얘기를 합니다. "네가 만일 한가지 일을 한다면 내가 네 마음의 상처를 깨끗이 씻어줄 수 있겠다" 고요. "그 한가지가
뭡니까?" "앞으로 일년의 시간을 줄 테니, 네가 일년동안 이 숲 속을 다니면서, 마음에 아픔이 없는 곤충을 아무나 하나 데리고
오면 내가 너의 마음의 상처를 깨끗이 씻어 줄게!"
고추잠자리가 그냥 보기엔 굉장히 쉬워 보이는 일이었어요. 죽는 것보다 훨씬 나아 보였어요. 왜냐하면 자기 눈에 비친
수많은 곤충들 중에, 대부분의 곤충들이 근심이 없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아, 그거야 쉽죠. 제가 해보겠습니다!" 그래서
고추잠자리가 근심 없는 곤충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걱정 없이 노래부르는 베짱이, 한여름 시원한 나무 위에서 독창회를 여는 매미,
그리고 달 밝은 밤에 시를 짓는 여치와 밤의 적막을 아름다운 멜로디로 수놓는 귀뚜라미 등 너무너무 많을 것 같았어요. 자신은
이렇게 아픔이 많고 근심이 많고 고통 가운데 살지만, 저 고통 없는 곤충들이 주위에 널려 있을 것 같아서,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아 아무 곤충이라도 데리고 올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수개월이 지나도 찾을 수가 없는 거예요. 드디어 일년의 시간이 다
지났습니다. 결국 그는 마음에 아픔이 없는 곤충을 한 마리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 고추잠자리는 더 이상 요정을 찾아갈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일년 동안 수많은 곤충들을 만나면서 자신의 아픔이 다 치유되었기 때문입니다.
앞의 이야기는 아주 어린아이에게 들려주는 동화입니다. 그러나 별 뜻 없는 동화는 아닙니다. 누구라서 아픔이 없는 인생이
있겠습니까? 지금 당장 우리에게 아픔이 다가오지 않더라도, 지나간 인생을 돌아보십시오. 한평생 사는 동안에 참으로 마음의 고통과,
남몰래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어찌 우리 가운데 아무도 없겠습니까? 오늘 세상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평화로워 보입니다.
괜찮아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겉모습만을 보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사람도 다가가 대화를
나눠보면 그 마음속에 고통과 아픔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저는 목회하면서 이 동화를 늘 떠올립니다. 겉으로 보기에, '저 집사님은 근심이 없어 보여요. 자녀도 복을 받았고,
사업도 복을 받았고, 얼굴도 환해 보이고,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저 집사님은 걱정이 없겠다, 저 성도는 괜찮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뒤, 가까이 다가가서 그와 마음 문을 열고, 대화를 나누면 그는 아픔의 눈물을 저에게 쏟아냅니다. 남몰래
흘리는 눈물이 있는 것입니다.
아파 보셨나요? 마음이 괴로워 보셨나요? 이것이 인생이라고 성경은 얘기합니다. 인생은 망망한 대해와 같이 잔잔한 바다만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우리에게 폭풍이 다가오고 풍랑이 있는 것이 인생이라고 얘기합니다. 우리 가운데 고난이 있기 때문에
때로는 우리의 마음이 무너져 내립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읽은 이 시편기자 역시 마음의 고통이 대단했던 것 같습니다. 적어도 이 성경에 기록될 만한 시편
119편의 이 긴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사람이라면, 마음의 고통이 없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자신을 그렇게 우리에게
소개하지 않습니다. 오늘 이 네 번째 단락에서 시편기자가 자신의 아픔을 어떻게 소개하는지, 여러분들은 눈여겨보셨나요? 25절을
다시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우리에게 이렇게 얘기합니다.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여기에서 '진토'란 말은 흙이에요. 하나님께서 창세기 2장에서, 우리인간을 이 진토로 만드셨어요. 흙으로 우리 몸을 만드시고 하나님의 생기를 우리에게 불어넣으시니, 저와 여러분같이 사람이 된 겁니다.
사람이 육체만 있으면 사람인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 있는데,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서 떠나시면
우리는 저 짐승들과 아무런 다를 것이 없어요. 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다는 시편기자가 자기의 마음의 괴로움이
얼마나 심했던지 이렇게 얘기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제가 구원받았고 제 안에 하나님의 영이 계시지만, 제 마음의 고통이 얼마나
심한지, 제 영혼이 없는 사람같이, 제가 지음을 받을 때 제 몸이 지음 받은 그 재료인 흙에 내 영혼이 달라붙어 버렸나요"
영혼이 흙에 달라붙어 버렸어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28절을 보세요.
나의 영혼이 눌림을 인하여 녹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세우소서
원문대로 우리가 번역한다면 "제 마음의 짐이 너무나도 무거워서 곤비하여, 제 마음이 다 녹아버리는 것 같습니다. 제가
짊어지고 가기엔 뼈마디가 녹는 것 같사와, 제 마음의 고통을 견딜 수 없습니다." 말씀에서는 시편기자 자신의 고통을 감추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시편을 쓴, 하나님의 말씀을 쓴 사람의 한때 마음 상태였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마음이 아파서 무너질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김없이 찾아오는 우리 마음속의 고통과 좌절, 낙담, 고난의 일들을 우리는 그 앞에서 어찌 다루어야 합니까?
하나님은 이 시편기자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가 고통받을 때, 마음에 아픔이 폭풍처럼 찾아올 때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를, 몇 가지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첫 번째 방법은, 마음에 아픔이 엄습해올 때 먼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주님의 가르침을 기다려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1. 주님의 가르침을 기다려라
영어 단어에는 한마디로 표현했어요. 'Teachability' 라고 표현합니다. 이 단어는
가르침을 잘 받아들이는 성품이라는 겁니다. 겸손한 자세죠. 이 자세가, 아픔이 우리에게 찾아올 때 필요하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요즘 세계 각처에서 리더십 세미나가 굉장히 인기입니다. 그런데 그 리더십 세미나에서 반드시 다루는 항목 중의 하나가 Teachability 입니다.
제가 요즘 미국에 있는 신학교에 많은 추천서를 써주고 있습니다. 그 추천서의 항목 가운데 하나가 Teachability
입니다. 그런데 이 항목은 빠진 적이 없어요. "이 사람이 가르침을 받는 자세가 어떠한가를 표시해 주십시오" 라는 항목이 반드시
있어요.
한국 교육의 문제 중의 하나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교육은 사람들을 Teachable 하게 만들지 못하는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주입식 교육만 해서, 굉장히 가르침을 잘 받을 것 같은데 실상은 그렇지 않아요. 우리 나라 사람들은 특별히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게 굉장히 부족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허영과 허세가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허영이 얼마나
많습니까? 얼마나 허세가 많습니까? 그러다가 IMF 만난 것 아닙니까?
가정에서 국가에 이르기까지, 우리 나라 사람들은 굉장히 허영과 허세가 많아요. 왜 허영과 허세가 많다고 생각하세요?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깊은 철학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는 최고만 대접받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최선을 지향하지 않고, 최고만을 지향합니다.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해 보세요. 대접받는 사람은 누굽니까?
반에서 1등,2등, 적어도 5등 안에 들어야 사람 취급받지, 40명중에 38등 하면 그 아이는 짐승처럼 취급받습니다. 집에 와도 그
아이는 자식도 아니에요. 그 아이가 태어날 때부터 IQ 80이면 어떻게 할 겁니까? 그래서 밤12시까지 공부했는데도 40명중에
38등 했어요. 그러면 하나님은 뭐라고 하실까요? 성경에서는 절대 최고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최선(最善)이지 최고(最高)가 아닙니다. 우리 사회에서, 우리 교육에서 평가방법을 바꿔야 합니다. 사람을 평가하는데 상대평가와
절대평가가 있습니다. 성경의 평가방법은 절대평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쓰고 있는 평가방법은 상대평가입니다. 100명중에 몇 등을
했느냐?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평가방법이 아니에요.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한 달란트의 비유를 아시지요? 하나님이 보시는 기준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이 보시는 기준은
최선을 다했는가 입니다. 다섯 달란트를 받았는가, 두 달란트를 받았는가, 한 달란트를 받았는가가 문제되지 않습니다. 열을
남겼는가, 다섯을 남겼는가의, 열매의 많고 적음을 묻지도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보신 것은 최선을 다했는가입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그렇지 않아요. 최고를 추구하며, 최고만을 대우합니다. 그러니까 최고가 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입니다.
거짓말을 하든, 사기를 치든, 남을 죽이든, 밟고 올라가서 무조건 윗자리를 차지해야 하는 거예요. 학교에서 커닝을 해서라도 1등을
해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최고가 되지 않으면 무시당하니까 우리 나라 사람들은 허영과 허세가 느는 겁니다. 도저히 가정형편이 그렇게 안
되는데도 불구하고요. 그리스도인들이 그랜저 탈 능력이 되더라도 소나타 타야 돼요. 그런데 어떻게 합니까? 소나타 타기에도 힘이
바들바들 떨리는데 악착같이 그랜저 타고 다니는 거예요. 왜냐하면 티코 타고 다니면 무시당하기 때문이에요. 제가 미국에서 바로
귀국해서 뭘 탔는지 아십니까? 그 자랑스러운 티코를 타고 다녔습니다. 티코가 얼마나 좋은지 아세요? 티코가 어떻습니까? 내 수준에
맞게 살아야 하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아요. 허영과 허세가 많아요.
명함을 봐도 그렇습니다. 제가 아는 사람 중에 세계를 다니면서 세계의 명함을 모아둔 사람이 있어요. 너무 신기하더라고요.
나라마다 명함이 다 다릅니다. 저에게 각 나라의 명함을 설명해 주었어요. 그분이 떠날 때쯤 되어서 저에게 이런 얘기를 했어요.
"목사님, 세계의 명함 중에서 가장 복잡한 명함이 어느 나라 명함인줄 압니까?" "어느 나랍니까?" 호기심이 발동해서 물어봤어요.
"한국입니다" 그러면서 몇 장을 보여주는데, 앞뒤로 빽빽한 것도 있어요. 목사님들 가운데도 그런 명함을 가진 분들이 있습니다.
무슨 회장이 그렇게 많은지... 명함은 한 줄이면 되잖아요? 어떤 목사님은 '40일 금식기도 3회 실시' 이런 것도 명함에 넣어
다녀요. 그러니까 앞뒤가 빽빽할 수밖에 없죠. 무슨 이사, 무슨 회장이 그렇게 많은지 몰라요. 제가 그래서 명함을 만들지 않는
겁니다.
왜 그렇게 허세가 많나요? 교육을 시켜도 그렇습니다. 가정교육을 보면, 사실 오늘날 애들하고 저와 여러분들이 자랄 때를
비교하면, 누가 공부를 많이 합니까? 솔직히 말씀드리면 요즘 애들이 많이 합니다. 제가 기억하기로, 초등학교 때 학교 갔다 오면
공부를 합니까? 학교 갔다 오면 방에 들어갈 시간도 없어요. 그래서 5미터 밖에서 가방을 그냥 방으로 던지고 그대로 집을 나가
놀았어요. 해가 져서 어머니께서 부르셔서 밥을 주시면 먹었어요. 밥 먹고 나면 졸리니깐 코피 터져 가면서 잤어요. 솔직히 우리는
그렇게 컸잖아요? 자녀들 앞에서 이렇게 얘기할 수 있어야 해요. "아버지는 너처럼 공부 잘하지 못했어. 너처럼 공부 많이 안
했다. 아버지는 매일 놀았다" 그렇게 한번 얘기해 보세요. 애들이 기가 살아서 공부를 잘 할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성적표에는
양,가, 양,가, 양가집에서 자란 분이, 아들이 어쩌다 우, 미를 받아오면 머리를 쥐어박으면서 "아빠는 말이야 옛날에..." 요즘
아버지 치고 공부 못하는 아버지가 어디 있습니까? 다 공부 잘했어요. 다 수재였어요.
그리고 무슨 뼈 얘기를 그렇게 하는지요. "우리 조상들은..., 네 할아버지가..., 증조할아버지가 뭐였는데...."
얘길 들어 보면 평범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 양반이에요. 다 멸치집안이에요. 저희 외할아버지께서도 통뼈였다고 합니다. 힘이
굉장했는데, 아침마다 집 앞에 있는 바윗돌을 가지고 몸을 푸셨다고 해요. 그래서 제가 할아버지가 계시던 집에 가서 그 바위를
보러 갔어요. 보니까, 기중기로 들 바위인데 그걸 사람이 들었다고 하는 거예요. 우리 주위에 이런 일들이 얼마나 많아요? 바로
허영과 허세입니다. 우리 안에 최고가 되어야겠다는 허영과 허세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굉장한 영향을
줍니다. 우리가 Teachable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작은 참새 한 마리에게서도 예수님은 배우시고, 우리를 가르치셨는데, 우리는 배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서정주 시인은 풀 한
포기를 보고, 배우며 시를 짓곤 했는데, 우리는 배우려고 하지 않아요. 내 마음에 고통이 오면 남을 원망하기 바쁘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이 고통을 왜 나에게 주셨습니까? 왜 이런 일이 제게 있습니까?" 하며, 하나님 앞에 문을 열고 가르침 받으려고
하는 사람이, 오늘날 한국 교회 안에 너무나 적다는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왜 우리에게 아픔을 주십니까? 저와 여러분을 미워하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우리 마음에 고통이 심하면
심할수록, 마음에 아픔이 심하면 심할수록, 마음에 비수가 꽂히면 꽂힐수록 하나님은 그 아픔을 통해, 우리에게 무언가를 가르치시는
줄 믿습니다.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마음에 못이 박혀 있습니까? 누구에게도 얘기할 수 없는 마음의 상처가 있습니까? 아픔이
있나요? 그렇다면 그 아픔에 좌절하지 마시고, 그 아픔에 무릎꿇지 마시고, 여러분 마음이 아플 때,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열어보시기 바랍니다.
내 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내가 나의 행위를 고하매 주께서 내게 응답하셨으니 주의 율례를 내게 가르치소서
나로 주의 법도의 길을 깨닫게 하소서 말씀대로 나를 세우소서(25-28)
"나를 소생시키십시오. 나를 가르치십시오. 나로 깨닫게 해 주십시오. 나의 길을 인도해 주시고 굳건히 세워 주옵소서"
고통이 찾아오고 마음에 아픔이 있을 때, 이 시편기자는 기도로 하나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주님! 무엇을 말씀하시려 합니까? 나를
가르치시옵소서!"
우리 마음에 아픔이 찾아올 때, 주님 앞에 나아가 주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는 귀한 성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성경을 읽어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쓰임 받은 사람들은 다 하나님 앞에 언제가 한번은 가르침을 받았던 사람들이었어요.
다윗은 그의 아들이 반역을 일으켜 쫓겨다니고 있을 때, 자신이 왕이었을 때는 아부를 하던 시므이라는 사람이 길을 가는데 다윗에게
저주합니다. 그 때 다윗의 신하인 아비새가 너무나 화가 나서 "내가 당장 가서 그의 목을 칠까요?" 그때 다윗은 "두어라! 내
몸에서 난 내 아들도 나를 반역하는데, 저의 저주를 통해 하나님이 나를 저주하심인 줄 어찌 아느냐!" 시므이의 저주를 통해
하나님이 자신을 가르치시는지 어찌 아느냐고, 그러니 그냥 두라고 했습니다.
억울하게 비난을 받고 계십니까? 억울하게 손해를 보고 계십니까? 억울하게 핍박 받았나요? 그 사람들을 원망하기 전에 그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무엇을 가르치시는지 먼저 여쭈어 보시기 바랍니다. 모세가 그랬습니다. 모세는 왕자였어요. 40년을
왕궁에서 부족함 없이 살았어요. 그러나 하루아침에 쫓겨나서 저 광야에서 양을 치는 목동이 되었습니다. 그 마음의 고통이
어떠했을까요? 그러나 모세는 원망하지 않고 40년 동안이나 "주여! 나를 가르치시옵소서!" 하고 기도했습니다. 그가 가르침 받은
이후에 하나님이 이렇게 모세를 평했습니다. 혈기로 사람을 죽였던 모세였는데, "온 세계에서 모세의 온유함이 가장 승(勝)하도다!"
그는 광야에서 고통을 통해 가르침을 받았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경험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내 마음에 고통이 찾아올 때, 믿지 않는 사람들과 똑같이 원망하고, 실망하고 낙담한다면 우리의 믿음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고통을 심어 주실 때, 우리 마음이 아파 올 때, 내 창자가 끊어질 때, 내
영혼이 진토에 눌릴 때, 앞으로는 이렇게 기도합시다. "주여, 제 마음을 열겠습니다. 이 고통을 통해 제게 주실 말씀을 나로
깨닫게 하옵소서!"
고통이 찾아올 때 먼저 주님의 가르침을 기다려야 합니다. 두 번째로 필요한 것은 자신의 삶을 정결케 해야 합니다.
2. 자기의 삶을 정결케 하라(29절)
거짓 행위를 내게서 떠나게 하시고 주의 법을 내게 은혜로이 베푸소서
도대체 내 마음에서 고통과 거짓행위가 떠난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고통과 거짓행위는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얼마 있으면 우리 나라에도 태풍이 찾아올 겁니다. 미국에서는 '토네이도'라고 하죠. 회오리바람인데 굉장합니다. 저는
텍사스에 살아서 그것을 자주 보았어요. 소가 깃털 날아가듯 가볍게 날아갑니다. 자동차도 그대로 날아갑니다. 차 타고 공중을 날고
싶은 분은 저에게 안내를 받으세요. '토네이도'가 올 때쯤 고속도로에 서 있으면 공중으로 그대로 날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왜 그런 태풍에 보내셔서 우리를 괴롭힐까?'하고 생각할지 몰라도, 자연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태풍은 우리 생활에
꼭 필요한 것이라고 합니다. 태풍이 없으면 이 세상은 오염이 더욱 심해져서 살 수가 없습니다. 태풍이 이 세상을 청소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어떤 과학자를 만났는데, 아주 재미있는 얘기를 해 주었어요. "목사님, 과학자들은 태풍을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창조 과학회에서 "태풍은 하나님의 대청소 작업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깨끗하게 대청소하고 계시다는 겁니다. 저와
여러분의 마음에, 고통이 이러한 일을 하고 있음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왜 고통을 주시는가? 우리 안에 있는 무엇인가를 청소하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을 향한 욕심, 잘못된
가치관, 과거에 지은 죄악, 현재에 끊지 못한 나쁜 습관들을 하나님께서 우리를 정결케 하시기 위해, 때로 고난과 고통을
허락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야곱을 기억하십니까? 야곱이 언제 철저히 자기를 깨끗케 했습니까? 저는 아브라함보다 야곱이 좋습니다. 저와 좀 비슷한 것
같아서요. 거짓말도 좀 하고, 머리도 좀 쓰고, 우리와 비슷하잖아요? 그런데 야곱은 말년에 굉장히 그의 믿음이 성숙되잖아요.
야곱이 언제 철저히 자기를 깨끗케 하고 하나님 앞에 순종했습니까? 얍복강에서 그렇게 했습니까? 아닙니다. 야곱이 자기를
가장 깨끗하게 한 것이 창세기 34장에 나오는데, 그것은 야곱이 가장 고통스러운 때였어요. 야곱의 마음이 면도날로 찢어질 대로
찢어져 버린 그 상황에서, 비로소 자기를 깨끗케 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야곱의 딸이 이방인에게 강간당했어요. 야곱의 딸 디나가 여행 중에 밖으로 놀러 나갔는데, 한 남자에게 강간을
당해버립니다. 그 일로 분노한 야곱의 아들들이 하나님의 율법인 할례를 거짓말로 속여서, 그 동네의 남자들을 다 죽여버립니다. 딸은
강간당하고 아들들은 하루 아침에 살인자가 되어 버렸어요.
이 사건을 여러분의 일로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 설악산에 휴가 갔어요. 아들 셋과 예쁜 딸을 데리고 갔어요. 그곳의 한
남자가 딸을 겁탈하고 강간했어요. 거기에 분노한 여러분의 아들 세 명이 그 가족을 몰살해 버렸어요. 그래서 그들은 감옥에 가게
되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부모의 입장에서 그 마음의 고통을 이해하십니까?
그 고통 속에서 야곱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창세기 35장 2- 3절을 보세요.
야곱이 이에 자기 집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의 이방 신
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
을 쌓으려 하노라
이전에 하나님이 야곱에게 벧엘로 올라가라고 하셨는데, 야곱이 순종하지 않았어요. 다른 땅에서 살아왔어요. 그런데 야곱이
"얘들아! 우리가 우상을 버리고, 우리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깨끗케 하고,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돌아가자!" 어떤 사건
다음에 이 일이 일어났습니까? 평안하고 축복 받은 때입니까? 아닙니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고통이 엄습해 올 때, 그의 마음이
가장 많이 찢어졌을 때, 비로소 야곱은 하나님께 돌아갔다고 성경은 전해 줍니다.
아프십니까? 고난 중에 계십니까? 고난 앞에 무릎꿇지 마시고, 다른 사람을 원망하지 마시고, 조용히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 자신을 정결케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게 나쁜 습관이 있습니다. 내가 아직 버리지 못한 그 무엇이 있습니까? 하나님 나를 깨끗케 해 주세요! 정결케 해 주세요!" 이것이 저와 여러분의 기도가 되도록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3. 우리의 마음을 넓히자(32절)
주께서 내 마음을 넓히시오면 내가 주의 계명의 길로 달려가리이다
우리의 마음을 넓혀야 합니다. 남자들은 근육을 갖기를 원합니다. 어제 바디 빌딩하는 걸 보았는데 여자들도 그렇게 합디다.
저 근육을 가지고 남편 목조르기 한번 하면 꼼짝도 못하겠다는 생각을 해보았어요. 근육이 성장하려면 어떻게 합니까? 체육학을
전공한 사람들은 근육이 커지려면, 근육이 찢어져야 된다고 표현합니다. 여러분이 운동을 안 하다가 등산을 하고 나면, 종아리가
아프고 몸살이 납니다. 근육이 찢어졌기 때문에 아프고 몸살이 난다고 합니다. 근육을 확장하고 늘이려면 근육의 찢어짐이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이 광안리 앞바다 같이 넓어지기를 바랍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마음을 찢으셔야 합니다. 다른 방법이
없어요. 하나님은 고통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넓히십니다. '마음'을 어떤 번역에는 'Understanding'으로 표현하고
있어요. 이해를 넓힌다는 겁니다. 고통이 찾아오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어요. 평온할 때는 몰랐는데 고통이
찾아오니까 하나님의 놀라우심을 이해하게 됩니다. 항상 건강을 통해서만 축복하시는 하나님인 줄 알았는데, 병을 통해 고통을
당해보니까 '그 병을 통해서도 우리를 축복하시는구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구나!'라는 사실을 깨닫는 거예요.
안수 집사님 한 분이 치질수술을 하셨어요. 치질수술은 감춘다고 합니다. 부산에서 제일 유명한 허 무량 장로님이 운영하는
병원에 입원했어요. 그런데 그 장로님이 저를 보시고 하는 얘기가, 영안 교회에 저한테 치질수술 받은 사람이 굉장히 많은데, 기분
나쁜 것은 사람들이 선전을 안 해준다는 겁니다. 누가 수술 받았는지 다 말해줘서 제가 다 알아요. 감춰도 소용없어요. 그분이
하시는 말씀이, 치질수술 받고 나니까 배설이 잘 안되잖아요. 사흘이 되니까 너무 괴로웠답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배변을 했어요. 그
중의 한 집사님이 "목사님, 먹는 것만 은혜인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어요. 화장실에 앉아서도 꼭 감사기도 해야 되겠어요"라고
했어요. 고통을 당해보니 우리의 이해가 넓어지는 겁니다. 숨쉬는 것, 화장실에 잘 가는 것, 모든 것이 은혜이고 감사한 겁니다.
고통이 찾아오면 하나님에 대한 이해만 넓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에 대해서도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사람을 대할 때
마음이 넓어져요. 마음이 넓은 사람들을 보면 대개 과거에 고통을 많이 겪은 사람입니다. 고난을 많이 겪고 마음이 아파 본 자들은
사람을 함부로 정죄할 수 없습니다. 함부로 비판하지 않습니다. 그의 모든 것을 이해해 주려고 하는 겁니다. 그러나 고난이 없는
사람은 항상 흑백논리를 적용합니다. 저것은 옳고, 저 사람은 나쁘다고 생각합니다. 그에게는 나쁜 사람이 그렇게 많아요. 왜냐하면
고난을 당해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픔이 찾아옵니까? 마음이 아플 때가 바로 기회입니다. 근육이 찢어져서 자라듯, 고통이
찾아올 때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 마음을 넓히시기 바랍니다.
시편기자는 기도합니다. "주여! 내 마음을 넓혀 주시옵소서!" 이것이 저와 여러분의 기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바다를 잘 압니다. 제가 부산에 사는 가장 큰 이유는 바다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회가 좋아서입니다. 저
넓은 바다를 보면, 내 마음에 분노와 낙심과 괴로움이 있을 때, 산 위에 올라가서 바다를 몇 시간 바라보고 있으면, 내 마음이
깨끗이 씻어집니다. 경험해 보셨지요? 그 바다로 수많은 강물이 흘러갑니다. 그 강물은 맑은 물도 있지만, 온갖 흙탕물도 바다로
흘러갑니다. 폭우가 쏟아지면 산이나 길에 있던 온갖 쓰레기들이 강을 거쳐서 바다로 스며듭니다. 그래도 바다는 그것을 거절하지
않습니다. 다 수용하고 나서 여전히 파랗게 자기의 상태를 유지하는 겁니다. 그것이 바다의 포용성입니다. 우리가 바다를 바라보고
좋아하는 것이 바로 포용성 때문일 겁니다.
진주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아시지요? 조개에 이물질이 들어옵니다. 조개가 처음엔 그 이물질을 거부하다가, 나중에는 그것을
내 몸의 일부로 삼기 위해 어떤 물질을 쏟아냅니다. 그 물질과 이물질이 합쳐져서 아름다운 진주를 빚어내는 겁니다. 아픔은 우리
삶의 일부입니다. 우리의 적(敵)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성숙시키기 위해 때로 아픔을 허락하십니다. 고통을 허락할 수
있습니다. 그 아픔이 찾아올 때, 시편기자와 같이 우리 모두 올바로 반응했으면 좋겠습니다. 마음이 아플 때 "오, 하나님! 내
마음 문을 엽니다. 내가 무엇을 배워야 되겠습니까? 나를 가르치시옵소서! 내 안의 무엇을 깨끗케 하면 좋겠습니까? 이 고통을 통해
내 마음을 넓혀 주시옵소서!" 이것이 우리의 기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시편 119:37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고 주의 도에 나를 소성케 하소서.
시편 119: 40
내가 주의 법도를 사모하였사오니 주의 의에 나를 소성케 하소서
시편 119:107
나의 고난이 막심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시편 119:154
주는 나의 원한을 펴시고 나를 구속하사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시편 119:156
여호와여 주의 긍휼이 크오니 주의 규례를 따라 나를 소성케 하소서
시편 119:159
내가 주의 법도 사랑함을 보옵소서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신 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시인의 기도는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라고 하였다.
인간에게 주시는 복도 주의 말씀에 근거하여 주시고,
징계도 말씀에 근거하여 내리신다는 것을 여러 곳에서 증언하였다.
그리고 기도도 주의 말씀에 의거하여 하고 있다.
오늘 말씀은 시인이 매우 위급한 지경에서 나온 것이다.
지금은 표현력이 과격해져서 막심하다는 정도의 말은 별로 크게 주목하지 않지만,
다윗시대는 진정으로 심할 때 막심하다고 하였다.
그만큼 언어를 진실하게 사용하였다고 본다.
시인이 위급한 상황에서 여호와의 말씀을 의지한 것은
이미 전에 그러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렇지 않을지라도 여호와의 말씀을 의지할 사람이지만
시인은 다른 어떤 도움보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소성케 해 주시기를 바라고 있다.
이와 같이 말씀에서 힘을 얻고 말씀을 의지해서 방향을 잡는 삶은 크리스천의 마땅한 바이다.
그러나 이것이 말씀을 듣는 것에만 그치는 이유는
첫째, 믿음이 연약하여 말씀에 확신이 없는 까닭이다.
둘째, 하나님을 의지하는 방법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믿음이 연약한 문제는 근본적인 문제라서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방법을 잃어버린 것은 되찾을 수가 있다.
오늘 말씀이 그 방법을 제시한다.
바로 여호와의 말씀을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가까이 하는 것이다.
많이 읽다보면 깊이 있게 묵상도 하게 되고,
묵상을 통하여 그 말씀이 내 몸에 녹아든다.
즉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영과 육이 되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규칙이 된다. 이 귀한 성경을 우리는 손쉽게 접할 수 있지만 아직도 지구상에는 여러 가지 사정(경제적, 정치적)으로 성경을 구할 수 없는 곳이 많다. 성서주일은 성경 보급을 돕기 위해 제정된 주일인데 한국교회는 1899년부터 지켜오고 있다. 첫째, 소성케 하는 말씀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진토에
붙은 영혼은 밑바닥으로 추락한 인생을 의미한다. 비록 진토로 추락한 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영감을 얻게 되면 소성할 수 있다. "나의 영혼이 눌림을 인하여 녹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세우소서" 현대인들
중에는 특히 물질 문제로 영혼이 짓눌려 평안 없이 사는 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문제로 영혼이 눌려 평안을 누리지 못할 때가 많은데 그때마다 이 시인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 받기 위해 기도해야 할 것이다.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주의 말씀대로 나를 세우소서" "거짓 행위를 내게서 떠나게 하시고 주의 법을 내게 은혜로이 베푸소서" 둘째, 말씀을 깨닫기 원함 성경이 진리요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주는 말씀이지만 그것은 감추어진 보화와 같아 아무나 깨달을 수 없다(욥 28장). 하나님은 지혜롭다고 자처하는 자들에게는 이 진리를 숨기시고 어린아이와 같이 미련한 자들에게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신다(마11:25-27). 말씀 앞에서 좀더 솔직해져야 한다. 우리의 부족을 낱낱이 아뢰면서 주의 도움을 구해야 한다. "내가 내 행위를 고하매 주께서 내게 응답하셨으니 주의 율례를 내게 가르치소서 나로 주의 법도의 길을 깨닫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기사를 묵상하리이다" 성경 보급은 포화상태가 되었지만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고 그 속에 감추인 진리를 깨닫기 원하는 간절함을 가지고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에디오피아의 국고를 맡은 큰 권세가 있는 내시는 병거를 타고 가면서 성경을 읽었다. 이해되지 않았지만 간절히 사모하며 읽었기에 성령께서 빌립을 그에게 보내어 성경을 가르치게 하셨고 내시는 말씀을 통해 깨달음을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곧바로 세례를 받았다. 셋째, 말씀을 깨달은 자들의 삶 성경말씀의 가르침을 받아 진리를 깨닫고 그 영혼이 소성케 되면 그 말씀에 대한 열정이 살아나 뜨겁게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 1. 말씀을 기준으로 삼음 : "내가 성실한 길을 택하고 주의 규례를 내 앞에 두었나이다" 내 생각과 감정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아 바른 길을 선택한다. 2. 말씀을 고수한다 : "내가 주의 증거에 밀접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로 수치를 당케 마소서"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아는 자들은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그 말씀을 따라 생명까지도 헌신한다. 3. 열심히 실천한다 : '주께서 내 마음을 넓히시오면 내가 주의 계명의 길로 달려가리이다" 마음을 넓히신다는 것을 굳게 닫혀 있던 마음의 문을 열어 말씀을 받아들이게 하신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행 16:14) 마음을 열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들이게 되면 신앙적 순종과 열정이 일어나게 된다.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행 16:15)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맟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눅 5:5) * 마음이 짓눌려 기쁨 없이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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