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소성케 하소서(시편 119:25, 37, 40, 107, 154, 156,159)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Preserve my life according to your word.

시편 119:25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시편 119편 가운데 4번째 히브리어 알파벳으로 시작되는, 25절부터 32절까지 4번째 단락을 공부하려고 합니다.
제가 3번째 알파벳을 뛰어 넘은 것을 표시를 잘 해 놓으시면, 제가 언젠가 하려고 합니다.
119편은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대로, 22개의 단락으로, 8절씩 아름답게 나누어져 있습니다.

오늘은 '달레트'로 시작하는 4번째 단락입니다.


옛날 어느 숲 속에 행복한 고추잠자리가 있었습니다. 늘 하늘을 높이 날며 부족한 것 없이 아주 행복하게 살고 있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이 고추잠자리에게 불행이 닥쳐왔습니다. 그의 사랑하는 어머니와 형제, 가족 모두가 날아다니는 새에게 잡혀 먹혔어요. 불행이 다가온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고추잠자리는 너무너무 슬펐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마음이 아파서 더 이상 살아갈 수가 없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이제 죽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숲 속의 요정을 찾아가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요정님, 저는 죽어야겠습니다" 요정이 묻습니다. "왜 죽어야 되니?" 고추잠자리는 자기의 일을 설명했습니다. "내가 이런 상황 가운데서 마음이 아파 도저히 더 살 수 없습니다. 어머니와 형제를 하루아침에 다 잃었습니다. 그런 제가 어떻게 살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때 요정이 얘기를 합니다. "네가 만일 한가지 일을 한다면 내가 네 마음의 상처를 깨끗이 씻어줄 수 있겠다" 고요. "그 한가지가 뭡니까?" "앞으로 일년의 시간을 줄 테니, 네가 일년동안 이 숲 속을 다니면서, 마음에 아픔이 없는 곤충을 아무나 하나 데리고 오면 내가 너의 마음의 상처를 깨끗이 씻어 줄게!"

고추잠자리가 그냥 보기엔 굉장히 쉬워 보이는 일이었어요. 죽는 것보다 훨씬 나아 보였어요. 왜냐하면 자기 눈에 비친 수많은 곤충들 중에, 대부분의 곤충들이 근심이 없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아, 그거야 쉽죠. 제가 해보겠습니다!" 그래서 고추잠자리가 근심 없는 곤충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걱정 없이 노래부르는 베짱이, 한여름 시원한 나무 위에서 독창회를 여는 매미, 그리고 달 밝은 밤에 시를 짓는 여치와 밤의 적막을 아름다운 멜로디로 수놓는 귀뚜라미 등 너무너무 많을 것 같았어요. 자신은 이렇게 아픔이 많고 근심이 많고 고통 가운데 살지만, 저 고통 없는 곤충들이 주위에 널려 있을 것 같아서,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아 아무 곤충이라도 데리고 올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수개월이 지나도 찾을 수가 없는 거예요. 드디어 일년의 시간이 다 지났습니다. 결국 그는 마음에 아픔이 없는 곤충을 한 마리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 고추잠자리는 더 이상 요정을 찾아갈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일년 동안 수많은 곤충들을 만나면서 자신의 아픔이 다 치유되었기 때문입니다.

앞의 이야기는 아주 어린아이에게 들려주는 동화입니다. 그러나 별 뜻 없는 동화는 아닙니다. 누구라서 아픔이 없는 인생이 있겠습니까? 지금 당장 우리에게 아픔이 다가오지 않더라도, 지나간 인생을 돌아보십시오. 한평생 사는 동안에 참으로 마음의 고통과, 남몰래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어찌 우리 가운데 아무도 없겠습니까? 오늘 세상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평화로워 보입니다. 괜찮아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겉모습만을 보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사람도 다가가 대화를 나눠보면 그 마음속에 고통과 아픔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저는 목회하면서 이 동화를 늘 떠올립니다. 겉으로 보기에, '저 집사님은 근심이 없어 보여요. 자녀도 복을 받았고, 사업도 복을 받았고, 얼굴도 환해 보이고,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저 집사님은 걱정이 없겠다, 저 성도는 괜찮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뒤, 가까이 다가가서 그와 마음 문을 열고, 대화를 나누면 그는 아픔의 눈물을 저에게 쏟아냅니다. 남몰래 흘리는 눈물이 있는 것입니다.
아파 보셨나요? 마음이 괴로워 보셨나요? 이것이 인생이라고 성경은 얘기합니다. 인생은 망망한 대해와 같이 잔잔한 바다만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우리에게 폭풍이 다가오고 풍랑이 있는 것이 인생이라고 얘기합니다. 우리 가운데 고난이 있기 때문에 때로는 우리의 마음이 무너져 내립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읽은 이 시편기자 역시 마음의 고통이 대단했던 것 같습니다. 적어도 이 성경에 기록될 만한 시편 119편의 이 긴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사람이라면, 마음의 고통이 없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자신을 그렇게 우리에게 소개하지 않습니다. 오늘 이 네 번째 단락에서 시편기자가 자신의 아픔을 어떻게 소개하는지, 여러분들은 눈여겨보셨나요? 25절을 다시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우리에게 이렇게 얘기합니다.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여기에서 '진토'란 말은 이에요. 하나님께서 창세기 2장에서, 우리인간을 이 진토로 만드셨어요. 흙으로 우리 몸을 만드시고 하나님의 생기를 우리에게 불어넣으시니, 저와 여러분같이 사람이 된 겁니다.

사람이 육체만 있으면 사람인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 있는데,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서 떠나시면 우리는 저 짐승들과 아무런 다를 것이 없어요. 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다는 시편기자가 자기의 마음의 괴로움이 얼마나 심했던지 이렇게 얘기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제가 구원받았고 제 안에 하나님의 영이 계시지만, 제 마음의 고통이 얼마나 심한지, 제 영혼이 없는 사람같이, 제가 지음을 받을 때 제 몸이 지음 받은 그 재료인 흙에 내 영혼이 달라붙어 버렸나요" 영혼이 흙에 달라붙어 버렸어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28절을 보세요.

나의 영혼이 눌림을 인하여 녹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세우소서

원문대로 우리가 번역한다면 "제 마음의 짐이 너무나도 무거워서 곤비하여, 제 마음이 다 녹아버리는 것 같습니다. 제가 짊어지고 가기엔 뼈마디가 녹는 것 같사와, 제 마음의 고통을 견딜 수 없습니다." 말씀에서는 시편기자 자신의 고통을 감추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시편을 쓴, 하나님의 말씀을 쓴 사람의 한때 마음 상태였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마음이 아파서 무너질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김없이 찾아오는 우리 마음속의 고통과 좌절, 낙담, 고난의 일들을 우리는 그 앞에서 어찌 다루어야 합니까?

하나님은 이 시편기자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가 고통받을 때, 마음에 아픔이 폭풍처럼 찾아올 때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를, 몇 가지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첫 번째 방법은, 마음에 아픔이 엄습해올 때 먼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주님의 가르침을 기다려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1. 주님의 가르침을 기다려라

 영어 단어에는 한마디로 표현했어요. 'Teachability' 라고 표현합니다. 이 단어는 가르침을 잘 받아들이는 성품이라는 겁니다. 겸손한 자세죠. 이 자세가, 아픔이 우리에게 찾아올 때 필요하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요즘 세계 각처에서 리더십 세미나가 굉장히 인기입니다. 그런데 그 리더십 세미나에서 반드시 다루는 항목 중의 하나가 Teachability 입니다.

제가 요즘 미국에 있는 신학교에 많은 추천서를 써주고 있습니다. 그 추천서의 항목 가운데 하나가 Teachability 입니다. 그런데 이 항목은 빠진 적이 없어요. "이 사람이 가르침을 받는 자세가 어떠한가를 표시해 주십시오" 라는 항목이 반드시 있어요.

한국 교육의 문제 중의 하나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교육은 사람들을 Teachable 하게 만들지 못하는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주입식 교육만 해서, 굉장히 가르침을 잘 받을 것 같은데 실상은 그렇지 않아요. 우리 나라 사람들은 특별히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게 굉장히 부족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허영과 허세가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허영이 얼마나 많습니까? 얼마나 허세가 많습니까? 그러다가 IMF 만난 것 아닙니까?
가정에서 국가에 이르기까지, 우리 나라 사람들은 굉장히 허영과 허세가 많아요. 왜 허영과 허세가 많다고 생각하세요?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깊은 철학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는 최고만 대접받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최선을 지향하지 않고, 최고만을 지향합니다.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해 보세요. 대접받는 사람은 누굽니까? 반에서 1등,2등, 적어도 5등 안에 들어야 사람 취급받지, 40명중에 38등 하면 그 아이는 짐승처럼 취급받습니다. 집에 와도 그 아이는 자식도 아니에요. 그 아이가 태어날 때부터 IQ 80이면 어떻게 할 겁니까? 그래서 밤12시까지 공부했는데도 40명중에 38등 했어요. 그러면 하나님은 뭐라고 하실까요? 성경에서는 절대 최고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최선(最善)이지 최고(最高)가 아닙니다. 우리 사회에서, 우리 교육에서 평가방법을 바꿔야 합니다. 사람을 평가하는데 상대평가와 절대평가가 있습니다. 성경의 평가방법은 절대평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쓰고 있는 평가방법은 상대평가입니다. 100명중에 몇 등을 했느냐?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평가방법이 아니에요.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한 달란트의 비유를 아시지요? 하나님이 보시는 기준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이 보시는 기준은 최선을 다했는가 입니다. 다섯 달란트를 받았는가, 두 달란트를 받았는가, 한 달란트를 받았는가가 문제되지 않습니다. 열을 남겼는가, 다섯을 남겼는가의, 열매의 많고 적음을 묻지도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보신 것은 최선을 다했는가입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그렇지 않아요. 최고를 추구하며, 최고만을 대우합니다. 그러니까 최고가 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입니다. 거짓말을 하든, 사기를 치든, 남을 죽이든, 밟고 올라가서 무조건 윗자리를 차지해야 하는 거예요. 학교에서 커닝을 해서라도 1등을 해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최고가 되지 않으면 무시당하니까 우리 나라 사람들은 허영과 허세가 느는 겁니다. 도저히 가정형편이 그렇게 안 되는데도 불구하고요. 그리스도인들이 그랜저 탈 능력이 되더라도 소나타 타야 돼요. 그런데 어떻게 합니까? 소나타 타기에도 힘이 바들바들 떨리는데 악착같이 그랜저 타고 다니는 거예요. 왜냐하면 티코 타고 다니면 무시당하기 때문이에요. 제가 미국에서 바로 귀국해서 뭘 탔는지 아십니까? 그 자랑스러운 티코를 타고 다녔습니다. 티코가 얼마나 좋은지 아세요? 티코가 어떻습니까? 내 수준에 맞게 살아야 하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아요. 허영과 허세가 많아요.

명함을 봐도 그렇습니다. 제가 아는 사람 중에 세계를 다니면서 세계의 명함을 모아둔 사람이 있어요. 너무 신기하더라고요. 나라마다 명함이 다 다릅니다. 저에게 각 나라의 명함을 설명해 주었어요. 그분이 떠날 때쯤 되어서 저에게 이런 얘기를 했어요. "목사님, 세계의 명함 중에서 가장 복잡한 명함이 어느 나라 명함인줄 압니까?" "어느 나랍니까?" 호기심이 발동해서 물어봤어요. "한국입니다" 그러면서 몇 장을 보여주는데, 앞뒤로 빽빽한 것도 있어요. 목사님들 가운데도 그런 명함을 가진 분들이 있습니다. 무슨 회장이 그렇게 많은지... 명함은 한 줄이면 되잖아요? 어떤 목사님은 '40일 금식기도 3회 실시' 이런 것도 명함에 넣어 다녀요. 그러니까 앞뒤가 빽빽할 수밖에 없죠. 무슨 이사, 무슨 회장이 그렇게 많은지 몰라요. 제가 그래서 명함을 만들지 않는 겁니다.

왜 그렇게 허세가 많나요? 교육을 시켜도 그렇습니다. 가정교육을 보면, 사실 오늘날 애들하고 저와 여러분들이 자랄 때를 비교하면, 누가 공부를 많이 합니까? 솔직히 말씀드리면 요즘 애들이 많이 합니다. 제가 기억하기로, 초등학교 때 학교 갔다 오면 공부를 합니까? 학교 갔다 오면 방에 들어갈 시간도 없어요. 그래서 5미터 밖에서 가방을 그냥 방으로 던지고 그대로 집을 나가 놀았어요. 해가 져서 어머니께서 부르셔서 밥을 주시면 먹었어요. 밥 먹고 나면 졸리니깐 코피 터져 가면서 잤어요. 솔직히 우리는 그렇게 컸잖아요? 자녀들 앞에서 이렇게 얘기할 수 있어야 해요. "아버지는 너처럼 공부 잘하지 못했어. 너처럼 공부 많이 안 했다. 아버지는 매일 놀았다" 그렇게 한번 얘기해 보세요. 애들이 기가 살아서 공부를 잘 할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성적표에는 양,가, 양,가, 양가집에서 자란 분이, 아들이 어쩌다 우, 미를 받아오면 머리를 쥐어박으면서 "아빠는 말이야 옛날에..." 요즘 아버지 치고 공부 못하는 아버지가 어디 있습니까? 다 공부 잘했어요. 다 수재였어요.

그리고 무슨 뼈 얘기를 그렇게 하는지요. "우리 조상들은..., 네 할아버지가..., 증조할아버지가 뭐였는데...." 얘길 들어 보면 평범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 양반이에요. 다 멸치집안이에요. 저희 외할아버지께서도 통뼈였다고 합니다. 힘이 굉장했는데, 아침마다 집 앞에 있는 바윗돌을 가지고 몸을 푸셨다고 해요. 그래서 제가 할아버지가 계시던 집에 가서 그 바위를 보러 갔어요. 보니까, 기중기로 들 바위인데 그걸 사람이 들었다고 하는 거예요. 우리 주위에 이런 일들이 얼마나 많아요? 바로 허영과 허세입니다. 우리 안에 최고가 되어야겠다는 허영과 허세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굉장한 영향을 줍니다. 우리가 Teachable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작은 참새 한 마리에게서도 예수님은 배우시고, 우리를 가르치셨는데, 우리는 배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서정주 시인은 풀 한 포기를 보고, 배우며 시를 짓곤 했는데, 우리는 배우려고 하지 않아요. 내 마음에 고통이 오면 남을 원망하기 바쁘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이 고통을 왜 나에게 주셨습니까? 왜 이런 일이 제게 있습니까?" 하며, 하나님 앞에 문을 열고 가르침 받으려고 하는 사람이, 오늘날 한국 교회 안에 너무나 적다는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왜 우리에게 아픔을 주십니까? 저와 여러분을 미워하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우리 마음에 고통이 심하면 심할수록, 마음에 아픔이 심하면 심할수록, 마음에 비수가 꽂히면 꽂힐수록 하나님은 그 아픔을 통해, 우리에게 무언가를 가르치시는 줄 믿습니다.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마음에 못이 박혀 있습니까? 누구에게도 얘기할 수 없는 마음의 상처가 있습니까? 아픔이 있나요? 그렇다면 그 아픔에 좌절하지 마시고, 그 아픔에 무릎꿇지 마시고, 여러분 마음이 아플 때,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열어보시기 바랍니다.

내 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내가 나의 행위를 고하매 주께서 내게 응답하셨으니 주의 율례를 내게 가르치소서
나로 주의 법도의 길을 깨닫게 하소서 말씀대로 나를 세우소서(25-28)

"나를 소생시키십시오. 나를 가르치십시오. 나로 깨닫게 해 주십시오. 나의 길을 인도해 주시고 굳건히 세워 주옵소서" 고통이 찾아오고 마음에 아픔이 있을 때, 이 시편기자는 기도로 하나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주님! 무엇을 말씀하시려 합니까? 나를 가르치시옵소서!"
우리 마음에 아픔이 찾아올 때, 주님 앞에 나아가 주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는 귀한 성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성경을 읽어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쓰임 받은 사람들은 다 하나님 앞에 언제가 한번은 가르침을 받았던 사람들이었어요. 다윗은 그의 아들이 반역을 일으켜 쫓겨다니고 있을 때, 자신이 왕이었을 때는 아부를 하던 시므이라는 사람이 길을 가는데 다윗에게 저주합니다. 그 때 다윗의 신하인 아비새가 너무나 화가 나서 "내가 당장 가서 그의 목을 칠까요?" 그때 다윗은 "두어라! 내 몸에서 난 내 아들도 나를 반역하는데, 저의 저주를 통해 하나님이 나를 저주하심인 줄 어찌 아느냐!" 시므이의 저주를 통해 하나님이 자신을 가르치시는지 어찌 아느냐고, 그러니 그냥 두라고 했습니다.

억울하게 비난을 받고 계십니까? 억울하게 손해를 보고 계십니까? 억울하게 핍박 받았나요? 그 사람들을 원망하기 전에 그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무엇을 가르치시는지 먼저 여쭈어 보시기 바랍니다. 모세가 그랬습니다. 모세는 왕자였어요. 40년을 왕궁에서 부족함 없이 살았어요. 그러나 하루아침에 쫓겨나서 저 광야에서 양을 치는 목동이 되었습니다. 그 마음의 고통이 어떠했을까요? 그러나 모세는 원망하지 않고 40년 동안이나 "주여! 나를 가르치시옵소서!" 하고 기도했습니다. 그가 가르침 받은 이후에 하나님이 이렇게 모세를 평했습니다. 혈기로 사람을 죽였던 모세였는데, "온 세계에서 모세의 온유함이 가장 승(勝)하도다!" 그는 광야에서 고통을 통해 가르침을 받았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경험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내 마음에 고통이 찾아올 때, 믿지 않는 사람들과 똑같이 원망하고, 실망하고 낙담한다면 우리의 믿음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고통을 심어 주실 때, 우리 마음이 아파 올 때, 내 창자가 끊어질 때, 내 영혼이 진토에 눌릴 때, 앞으로는 이렇게 기도합시다. "주여, 제 마음을 열겠습니다. 이 고통을 통해 제게 주실 말씀을 나로 깨닫게 하옵소서!"
고통이 찾아올 때 먼저 주님의 가르침을 기다려야 합니다. 두 번째로 필요한 것은 자신의 삶을 정결케 해야 합니다.

2. 자기의 삶을 정결케 하라(29절) 

거짓 행위를 내게서 떠나게 하시고 주의 법을 내게 은혜로이 베푸소서

도대체 내 마음에서 고통과 거짓행위가 떠난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고통과 거짓행위는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얼마 있으면 우리 나라에도 태풍이 찾아올 겁니다. 미국에서는 '토네이도'라고 하죠. 회오리바람인데 굉장합니다. 저는 텍사스에 살아서 그것을 자주 보았어요. 소가 깃털 날아가듯 가볍게 날아갑니다. 자동차도 그대로 날아갑니다. 차 타고 공중을 날고 싶은 분은 저에게 안내를 받으세요. '토네이도'가 올 때쯤 고속도로에 서 있으면 공중으로 그대로 날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왜 그런 태풍에 보내셔서 우리를 괴롭힐까?'하고 생각할지 몰라도, 자연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태풍은 우리 생활에 꼭 필요한 것이라고 합니다. 태풍이 없으면 이 세상은 오염이 더욱 심해져서 살 수가 없습니다. 태풍이 이 세상을 청소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어떤 과학자를 만났는데, 아주 재미있는 얘기를 해 주었어요. "목사님, 과학자들은 태풍을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창조 과학회에서 "태풍은 하나님의 대청소 작업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깨끗하게 대청소하고 계시다는 겁니다. 저와 여러분의 마음에, 고통이 이러한 일을 하고 있음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왜 고통을 주시는가? 우리 안에 있는 무엇인가를 청소하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을 향한 욕심, 잘못된 가치관, 과거에 지은 죄악, 현재에 끊지 못한 나쁜 습관들을 하나님께서 우리를 정결케 하시기 위해, 때로 고난과 고통을 허락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야곱을 기억하십니까? 야곱이 언제 철저히 자기를 깨끗케 했습니까? 저는 아브라함보다 야곱이 좋습니다. 저와 좀 비슷한 것 같아서요. 거짓말도 좀 하고, 머리도 좀 쓰고, 우리와 비슷하잖아요? 그런데 야곱은 말년에 굉장히 그의 믿음이 성숙되잖아요.
야곱이 언제 철저히 자기를 깨끗케 하고 하나님 앞에 순종했습니까? 얍복강에서 그렇게 했습니까? 아닙니다. 야곱이 자기를 가장 깨끗하게 한 것이 창세기 34장에 나오는데, 그것은 야곱이 가장 고통스러운 때였어요. 야곱의 마음이 면도날로 찢어질 대로 찢어져 버린 그 상황에서, 비로소 자기를 깨끗케 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야곱의 딸이 이방인에게 강간당했어요. 야곱의 딸 디나가 여행 중에 밖으로 놀러 나갔는데, 한 남자에게 강간을 당해버립니다. 그 일로 분노한 야곱의 아들들이 하나님의 율법인 할례를 거짓말로 속여서, 그 동네의 남자들을 다 죽여버립니다. 딸은 강간당하고 아들들은 하루 아침에 살인자가 되어 버렸어요.
이 사건을 여러분의 일로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 설악산에 휴가 갔어요. 아들 셋과 예쁜 딸을 데리고 갔어요. 그곳의 한 남자가 딸을 겁탈하고 강간했어요. 거기에 분노한 여러분의 아들 세 명이 그 가족을 몰살해 버렸어요. 그래서 그들은 감옥에 가게 되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부모의 입장에서 그 마음의 고통을 이해하십니까?

그 고통 속에서 야곱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창세기 35장 2- 3절을 보세요.

야곱이 이에 자기 집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의 이방 신
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
을 쌓으려 하노라

이전에 하나님이 야곱에게 벧엘로 올라가라고 하셨는데, 야곱이 순종하지 않았어요. 다른 땅에서 살아왔어요. 그런데 야곱이 "얘들아! 우리가 우상을 버리고, 우리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깨끗케 하고,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돌아가자!" 어떤 사건 다음에 이 일이 일어났습니까? 평안하고 축복 받은 때입니까? 아닙니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고통이 엄습해 올 때, 그의 마음이 가장 많이 찢어졌을 때, 비로소 야곱은 하나님께 돌아갔다고 성경은 전해 줍니다.

아프십니까? 고난 중에 계십니까? 고난 앞에 무릎꿇지 마시고, 다른 사람을 원망하지 마시고, 조용히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 자신을 정결케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게 나쁜 습관이 있습니다. 내가 아직 버리지 못한 그 무엇이 있습니까? 하나님 나를 깨끗케 해 주세요! 정결케 해 주세요!" 이것이 저와 여러분의 기도가 되도록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3. 우리의 마음을 넓히자(32절)

주께서 내 마음을 넓히시오면 내가 주의 계명의 길로 달려가리이다

우리의 마음을 넓혀야 합니다. 남자들은 근육을 갖기를 원합니다. 어제 바디 빌딩하는 걸 보았는데 여자들도 그렇게 합디다. 저 근육을 가지고 남편 목조르기 한번 하면 꼼짝도 못하겠다는 생각을 해보았어요. 근육이 성장하려면 어떻게 합니까? 체육학을 전공한 사람들은 근육이 커지려면, 근육이 찢어져야 된다고 표현합니다. 여러분이 운동을 안 하다가 등산을 하고 나면, 종아리가 아프고 몸살이 납니다. 근육이 찢어졌기 때문에 아프고 몸살이 난다고 합니다. 근육을 확장하고 늘이려면 근육의 찢어짐이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이 광안리 앞바다 같이 넓어지기를 바랍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마음을 찢으셔야 합니다. 다른 방법이 없어요. 하나님은 고통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넓히십니다. '마음'을 어떤 번역에는 'Understanding'으로 표현하고 있어요. 이해를 넓힌다는 겁니다. 고통이 찾아오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어요. 평온할 때는 몰랐는데 고통이 찾아오니까 하나님의 놀라우심을 이해하게 됩니다. 항상 건강을 통해서만 축복하시는 하나님인 줄 알았는데, 병을 통해 고통을 당해보니까 '그 병을 통해서도 우리를 축복하시는구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구나!'라는 사실을 깨닫는 거예요.

안수 집사님 한 분이 치질수술을 하셨어요. 치질수술은 감춘다고 합니다. 부산에서 제일 유명한 허 무량 장로님이 운영하는 병원에 입원했어요. 그런데 그 장로님이 저를 보시고 하는 얘기가, 영안 교회에 저한테 치질수술 받은 사람이 굉장히 많은데, 기분 나쁜 것은 사람들이 선전을 안 해준다는 겁니다. 누가 수술 받았는지 다 말해줘서 제가 다 알아요. 감춰도 소용없어요. 그분이 하시는 말씀이, 치질수술 받고 나니까 배설이 잘 안되잖아요. 사흘이 되니까 너무 괴로웠답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배변을 했어요. 그 중의 한 집사님이 "목사님, 먹는 것만 은혜인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어요. 화장실에 앉아서도 꼭 감사기도 해야 되겠어요"라고 했어요. 고통을 당해보니 우리의 이해가 넓어지는 겁니다. 숨쉬는 것, 화장실에 잘 가는 것, 모든 것이 은혜이고 감사한 겁니다.

고통이 찾아오면 하나님에 대한 이해만 넓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에 대해서도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사람을 대할 때 마음이 넓어져요. 마음이 넓은 사람들을 보면 대개 과거에 고통을 많이 겪은 사람입니다. 고난을 많이 겪고 마음이 아파 본 자들은 사람을 함부로 정죄할 수 없습니다. 함부로 비판하지 않습니다. 그의 모든 것을 이해해 주려고 하는 겁니다. 그러나 고난이 없는 사람은 항상 흑백논리를 적용합니다. 저것은 옳고, 저 사람은 나쁘다고 생각합니다. 그에게는 나쁜 사람이 그렇게 많아요. 왜냐하면 고난을 당해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픔이 찾아옵니까? 마음이 아플 때가 바로 기회입니다. 근육이 찢어져서 자라듯, 고통이 찾아올 때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 마음을 넓히시기 바랍니다.
시편기자는 기도합니다. "주여! 내 마음을 넓혀 주시옵소서!" 이것이 저와 여러분의 기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바다를 잘 압니다. 제가 부산에 사는 가장 큰 이유는 바다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회가 좋아서입니다. 저 넓은 바다를 보면, 내 마음에 분노와 낙심과 괴로움이 있을 때, 산 위에 올라가서 바다를 몇 시간 바라보고 있으면, 내 마음이 깨끗이 씻어집니다. 경험해 보셨지요? 그 바다로 수많은 강물이 흘러갑니다. 그 강물은 맑은 물도 있지만, 온갖 흙탕물도 바다로 흘러갑니다. 폭우가 쏟아지면 산이나 길에 있던 온갖 쓰레기들이 강을 거쳐서 바다로 스며듭니다. 그래도 바다는 그것을 거절하지 않습니다. 다 수용하고 나서 여전히 파랗게 자기의 상태를 유지하는 겁니다. 그것이 바다의 포용성입니다. 우리가 바다를 바라보고 좋아하는 것이 바로 포용성 때문일 겁니다.

진주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아시지요? 조개에 이물질이 들어옵니다. 조개가 처음엔 그 이물질을 거부하다가, 나중에는 그것을 내 몸의 일부로 삼기 위해 어떤 물질을 쏟아냅니다. 그 물질과 이물질이 합쳐져서 아름다운 진주를 빚어내는 겁니다. 아픔은 우리 삶의 일부입니다. 우리의 적(敵)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성숙시키기 위해 때로 아픔을 허락하십니다. 고통을 허락할 수 있습니다. 그 아픔이 찾아올 때, 시편기자와 같이 우리 모두 올바로 반응했으면 좋겠습니다. 마음이 아플 때 "오, 하나님! 내 마음 문을 엽니다. 내가 무엇을 배워야 되겠습니까? 나를 가르치시옵소서! 내 안의 무엇을 깨끗케 하면 좋겠습니까? 이 고통을 통해 내 마음을 넓혀 주시옵소서!" 이것이 우리의 기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시편 119:37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고 주의 도에 나를 소성케 하소서.

시편 119: 40
내가 주의 법도를 사모하였사오니 주의 의에 나를 소성케 하소서

시편 119:107
나의 고난이 막심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시편 119:154
주는 나의 원한을 펴시고 나를 구속하사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시편 119:156
여호와여 주의 긍휼이 크오니 주의 규례를 따라 나를 소성케 하소서

시편 119:159
내가 주의 법도 사랑함을 보옵소서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신 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시인의 기도는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라고 하였다.
인간에게 주시는 복도 주의 말씀에 근거하여 주시고,
징계도 말씀에 근거하여 내리신다는 것을 여러 곳에서 증언하였다.
그리고 기도도 주의 말씀에 의거하여 하고 있다.

오늘 말씀은 시인이 매우 위급한 지경에서 나온 것이다.
지금은 표현력이 과격해져서 막심하다는 정도의 말은 별로 크게 주목하지 않지만,
다윗시대는 진정으로 심할 때 막심하다고 하였다.
그만큼 언어를 진실하게 사용하였다고 본다.

시인이 위급한 상황에서 여호와의 말씀을 의지한 것은
이미 전에 그러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렇지 않을지라도 여호와의 말씀을 의지할 사람이지만
시인은 다른 어떤 도움보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소성케 해 주시기를 바라고 있다.

이와 같이 말씀에서 힘을 얻고 말씀을 의지해서 방향을 잡는 삶은 크리스천의 마땅한 바이다.
그러나 이것이 말씀을 듣는 것에만 그치는 이유는

첫째, 믿음이 연약하여 말씀에 확신이 없는 까닭이다.
둘째, 하나님을 의지하는 방법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믿음이 연약한 문제는 근본적인 문제라서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방법을 잃어버린 것은 되찾을 수가 있다.

오늘 말씀이 그 방법을 제시한다.
바로 여호와의 말씀을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가까이 하는 것이다.
많이 읽다보면 깊이 있게 묵상도 하게 되고,
묵상을 통하여 그 말씀이 내 몸에 녹아든다.
즉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영과 육이 되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규칙이 된다.

이 귀한 성경을 우리는 손쉽게 접할 수 있지만 아직도 지구상에는 여러 가지 사정(경제적, 정치적)으로 성경을 구할 수 없는 곳이 많다.

성서주일은 성경 보급을 돕기 위해 제정된 주일인데 한국교회는 1899년부터 지켜오고 있다.  
오늘은 하나님의 말씀을 귀중히 여기던 성도가 지은 시편 119편의 한 부분을 살펴보려 한다.  

시편 119편은 성경에서 가장 긴 장인데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에 따라 지어진 독특한 시다.
히브리 알파벳 22자를 각기 8절씩 구성하여 지었기에 176절로 작성되었다.

본문은 4번째 순서인 달렏( ㄱ)으로 시작되는 문장인데 말씀을 통해서 얻는 유익을 노래하고 있다.

첫째,  소성케 하는 말씀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진토에 붙은 영혼은 밑바닥으로 추락한 인생을 의미한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는 소설 제목처럼 한때 잘 나가던 자들이 급작스럽게 추락하는 경우가 있다.
영적인 상황도 마찬가지다.
열정을 가지고 뜨겁게 신앙생활하던 자들이 하루 아침에 곤두박질쳐서 엘리야처럼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나약한 모습을 보일 때가 있다.

비록 진토로 추락한 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영감을 얻게 되면 소성할 수 있다.

"나의 영혼이 눌림을 인하여 녹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세우소서"

현대인들 중에는 특히 물질 문제로 영혼이 짓눌려 평안 없이 사는 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8-10)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문제로 영혼이 눌려 평안을 누리지 못할 때가 많은데 그때마다 이 시인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 받기 위해 기도해야 할 것이다.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주의 말씀대로 나를 세우소서"

"거짓 행위를 내게서 떠나게 하시고 주의 법을 내게 은혜로이 베푸소서"

둘째, 말씀을 깨닫기 원함

성경이 진리요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주는 말씀이지만 그것은 감추어진 보화와 같아 아무나 깨달을 수 없다(욥 28장).
눈이 있어도 볼 수 없고 귀가 있어도 들을 수 없는 것이 말씀 속에 감추인 진리다.

하나님은 지혜롭다고 자처하는 자들에게는 이 진리를 숨기시고 어린아이와 같이 미련한 자들에게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신다(마11:25-27).

말씀 앞에서 좀더 솔직해져야 한다. 우리의 부족을 낱낱이 아뢰면서 주의 도움을 구해야 한다.

"내가 내 행위를 고하매 주께서 내게 응답하셨으니 주의 율례를 내게 가르치소서 나로 주의 법도의 길을 깨닫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기사를 묵상하리이다"

성경 보급은 포화상태가 되었지만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고 그 속에 감추인 진리를 깨닫기 원하는 간절함을 가지고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에디오피아의 국고를 맡은 큰 권세가 있는 내시는 병거를 타고 가면서 성경을 읽었다. 이해되지 않았지만 간절히 사모하며 읽었기에 성령께서 빌립을 그에게 보내어 성경을 가르치게 하셨고 내시는 말씀을 통해 깨달음을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곧바로 세례를 받았다.

셋째, 말씀을 깨달은 자들의 삶

성경말씀의 가르침을 받아 진리를 깨닫고 그 영혼이 소성케 되면 그 말씀에 대한 열정이 살아나 뜨겁게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

1. 말씀을 기준으로 삼음 : "내가 성실한 길을 택하고 주의 규례를 내 앞에 두었나이다"

내 생각과 감정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아 바른 길을 선택한다.

2. 말씀을 고수한다 : "내가 주의 증거에 밀접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로 수치를 당케 마소서"

주의 증거에 밀접했다는 말씀은 곧 성경 말씀을 고수(준수)했다는 의미다.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아는 자들은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그 말씀을 따라 생명까지도 헌신한다.

3. 열심히 실천한다 : '주께서 내 마음을 넓히시오면 내가 주의 계명의 길로 달려가리이다"

  마음을 넓히신다는 것을 굳게 닫혀 있던 마음의 문을 열어 말씀을 받아들이게 하신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행 16:14)

  마음을 열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들이게 되면 신앙적 순종과 열정이 일어나게 된다.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행 16:15)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맟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눅 5:5)

* 마음이 짓눌려 기쁨 없이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인가?
겸손히 말씀을 받아들임으로 영혼이 소성함을 입고 열정을 가지고 계명의 길로 달려가자. 


 









































마틴 루터 킹의 비폭력 저항의 메시지





김영호 목사
    ( 역사신학 교수, 미동부크리스천 아카데미 원장, 1983년 설립)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당시 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백인들의 차별과 멸시를 받는 세대에 훅인으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백인들과 흑인들의 동등한 법적 사회적 평등과 인권회복의 실현을
전심 전력을 다해 부르짖고 활동하면서 그 수단으로 폭력과 증오범죄가 난무하던 시기에  ‘비폭력
저항운동’과  ‘원수까지 사랑 운동’을 앞장 서서 할 수 있었던 배경과  그런 특이한 메세지의 원동력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를 살펴보자.
 
자료를 찾아보면 그도 예외 없이 어린시절 흑인 어린이라고 차별과 멸시를 받았었다. 킹이 옆집의
백인 쌍둥이 형제와 놀려고 하자 그 형제의 어머니가 “넌 검둥이니까 검둥이들 하고 놀아 !”라고 했고,
킹은 울면서 집으로 돌아왔더니 어머니가 어린 킹을 달래면서 왜 흑인이 차별받게되었는가 그리고
인종차별을 이겨내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한다.
 
심지어 대학시절에 더 심각한 일을 당하였다. 그가 친구들과 식당에서 식사를 하러 갔었는데
백인 식당 주인이 “ 흑인 새끼한테는 음식 안 팔아 !”라며 총을 쏘며 난동을 피워, 경찰이 도착했지만
백인 손님들은 침묵을 지켰다. 몇몇 백인 대학생들이 증언하기로 했지만 KKK등 백인 우익/ 과격단체
들이 압력을 넣는 바람에 증언하는 것을 취소하는 아픈 경험을 했다고한다.
 
이와 비슷한 인종 차별을 당한 것으로 인해 목사가 된이후 인종차별이 반 인륜적이며 성경말씀과
하나님 뜻에 어긋남에 근거하여 인권회복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목사가 되기전 킹은 가정의 유산인 기독교 신앙과 훈련과 부모님 특히 3대째 침례교 목사인 아버지
마틴 루터 킹 시니어의 삶을 통한 기독교 지도자가 되는 가르침에 큰 영향을 받았다.1) 백인 경찰의
인종차별에 당당하고 논리적으로 항의하는 부친의 실천은 어린이였던 루터 킹에게 ‘옳지 않은 것을
보면 굴종하거나 침묵하지 말고 항의 한다’,는 가르침을 주었다. 백인 경찰이 부친에게 “어이, 꼬마
운전면허증 보여줘”라고 하자, “꼬마는 여기 있는 아들입니다. 면허증 여기 있습니다”라고 대꾸하였고,
그 말을 듣고 경찰은 자신의 무례함을 부끄럽게 여겨서 슬거머니 물러났다고 한다. 2)실제전국유색인지위향상협회(NAACP) 애틀랜타 지부장을 맡고 있던 부친은  자랑스런 흑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자주 강조하였고, 비열하고 이중적인 백인에게 당당하게 맞서라고 가르치며 본을 보였다.
3) 1935년 종교개혁 유적지를 둘러보면서 미국의 교계와 사회를 개혁하려면  본래의 이름 마이클보다는
개혁의 선봉자였던 ‘Martin Luther’가 더 좋겠다고 생각하고 본인의 이름을  Martin Luther King Sr.로하고
아들 이름도 Martin Luther King Jr.로 바꾸어 불의앞에 ‘Here I stand !’ 라고 외치며 종교개혁을 이뤄낸
루터의 삶과 정신을 이어 받게 하였다.
 
두번 째로 킹 목사에게 큰 영향을 끼친 이는  미국 사회복음의 아버지로 불리는 Walter Rauschenbusch
(1861-1918)였다.복음의 사회성과 물질성에대한 강조는 이후 킹의 사회운동에 기반을 제공해 주었다.
그는 “사회정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곳에 하나님 나라가 있을 수 없고 사회를 구원하지 못하는 그리스도교는 진정한 의미에서 예수의 가르침에  충실했다고 할 수 없다.내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봉사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고 봉사하는 것이다”라고 가르쳤다.
 
세번 째로 킹의 사상체계를 뒤흔들어 놓은 것은 하워드대학 학장 Mordecai W. Johnson(1891-19760)
박사의 강의를 통해 인도 Mahatma Gandhi(1869-1948)의 비폭력평화주의를 배운 것이었다.간디를
공부하면서 킹은 “산상수훈에 기록된 예수의 ‘비폭력 저항’이라는 메시지가 개인에게만 아니라 인종 및 국가 관계에서도실현가능한 사회적 역량이다”라고 굳게 믿게되었다. 이 영향에 힘입어  1954년
보스톤대학 기독교 윤리학박사과정을 끝내면서 킹은 “사회정의를 추구하는 피억압 대중이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비폭력적인 저항’이라고 다짐하게 되었다.  킹은  간디의 후계자 네루의
초청으로 1595년 2월 3일부터 3월 18일까지 인도여행을 하였다.  간디의 발자취를 따라 뉴델리거리를 걸어보고, 인도의고질적인 계급사회를 폭력을 사용치않고도 간디의 정신으로 개선해나는것을 확인하고 킹 은 다음과 같이 자신의 입장을공개적으로 밝혔다.

                  “인도에 다녀온이후, ‘비폭력 저항’이야말로 억압된 민중이 정의회복,
                    만인평등과 인간의 존엄성을 되찾기위한 투쟁을하여 좋은 결과를
                  가져 오는 최선책임이라는 나의 확신이 더욱 궁굳어졌습니다.간디는
                  스스로의 삶을 통해 우주의 도덕적체계에 전해져 내려오는 보편적 원칙이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우리는 만유인력의 법칙을
                  벗어날 수 없듯이 그 원칙에서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극심한 인종차별과 폭력과 혐오범죄 난무 시기에  이 난제해결위해 고심하던 킹 목사가  위와 같은  교계 안팎의
선두 지도자들의 지식과 가르침에 큰 영향을 받은 사실이나 그의 삶의 배경과  가장 어려울 때  그가내린 결단의
원동력은  살아계셔서 역사를 주관하시고 억압받던 백성의 울부짖음을 들어시고 마침내 꿀과 젖이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신 능려자 하나님을 확실하게  의지하는 믿음과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에서 나왔음이 분명하다.
 
Paul Tillich가 1950년 예일대 강연, ‘존재로의 용기’’(The Courage to Be)에서 “참되고 강력한 용기는 하나밖에
없는 자기 생명을 던질 수 있는 진리와 그 대상을  만났을 때 생긴다”고 했는데  마틴 루터 킹 목사는 폭력은 ‘비폭력저항’으로, 증오문제는 ‘ 원수까지 사랑’으로, 인종 차별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만민평등’으로
해결 할 수 있다는 진리를 하나님말씀과 예수님의  산상설교와 십자가에서 찾았기에 죽음을 두려워 하지않고
흑인만이 아니라 차별받는 모든 ‘작은 자’들을 위해 투쟁해 마침내 승리하여, 1964년 7월 인종, 민족, 종교, 남녀
등의 차이에 따른 차별을 불법화한 미국 인군권법이 제정되었던 것이다.
 
킹 목사가  28세의 청년목사로 몽고메리에서 인종차별하는 버스의 승차거부 운동을 하다가 감옥에서 쓴
다음의 옥중설교의 내용을 또박또박 읽 보면 그의‘비폭력 저항’과 ‘원수까지 사랑’의 원동력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음과 예수님의 십자가 신학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그대를 사랑하리라 우리 집에
 폭탄을 던지고 우리 아이들을 위협해도
 그대를 사랑하리라

  한 밤중에 우리 마을을 습격하여
우리를 때려서 반 쯤 죽여 놓아도
그대를 사랑하리라 

그러나 우리 대장은 예수시오
우리의 깃발은 하나님이시니
결국 어느날인가 사랑이
승리하고 말 것이다

우리의 승리는 우리 흑인만의
승리가 아니라 전 세계에서 차별 받고 사는
모든 작은 자들의 승리이므로 우리는 실제
이중의 승리를 거두게 되고 말것이다 “

어떻게 폭력을 휘두르는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 라는 물음에

킹 목사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하는 일 없이 원수사랑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십자가상의 자기를 저주한 자에게
‘아버지시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일을 알지 못함이니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그들에 대한 용서와 그 극진한
사랑을 우리도 따라야한다고 생각을 바꾸면
우리를 해친 원수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구원받아야 할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고 우리를 일깨웠다

킹 목사는 예수님 말씀과 삶을 생명을 내놓고 따른 신실한 제자였고 우리 모두를 향하여
폭력은 ‘비폭력’으로,
증오는 ‘원수
까지의 사랑실천’으로,
인종차별은 ‘하나님 앞에서 만민평등’으로
승리하라고 가르친다.

도피성(여호수아 20:7-8)과 거룩한 피할 곳(이사야 8:14)

이사야 8:14
그가 거룩한 避(피)할 곳이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거치는 돌, 걸리는 磐石(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居民(거민)에게는 陷穽(함정), 올무가 되시리니.


겔11:16 그런즉 너는 말하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비록 그들을 멀리 이방인 가운데로 쫓고 열방에 흩었으나 그들이 이른 열방에서 내가 잠간 그들에게 성소가 되리라 하셨다 하고

여호수아 20:7-8
무리가 납달리의 山地(산지) 갈릴리 게데스와, 에브라임 山地(산지)의 세겜과, 유다 山地(산지)의 기럇 아르바 곧 헤브론을 區別(구별)하였고

또 여리고 東(동) 요단 저便(편) 르우벤 支派(지파) 中(중)에서 平地(평지) 曠野(광야)의 베셀과 갓 支派(지파) 中(중)에서 길르앗라못과 므낫세 支派(지파) 中(중)에서 바산 골란을 擇(택)하였으니

도피성 존재의 이유



이스라엘의 요단강을 기점으로 하여 48개의 성읍 중 6곳을 택하였습니다.

요단강 동편에 3곳(베셀, 길르앗라못, 골란) 요단강 서편에 3곳(게데스, 세겜, 헤브론)이었습니다(수 20:7-8).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 지명의 뜻까지도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동쪽의 도피성은 골란과 길르앗 라못, 그리고 베셀에 두었고 서쪽에는 게데스와 세겜, 그리고 헤브론에 세우게 되었습니다.
이 도피성은 이스라엘 지도를 참조하여 보면 이스라엘 전역 어디에서든지 32km 이내에 위치하여 있어서 부득이 도피성으로 피해 가야할 경우 하룻길 이내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 성을 향한 도로는 폭을 14m 이상이 되도록 넓게 잘 닦아 놓았으며 또 길을 잃지 않도록 미클라트(도피성)라는 안내판도 곳곳에 설치해 놓았습니다.

도피성은 무슨 이유로 세워놓은 것일까요?

사람이 지을 수 있는 가장 큰 죄는 살인죄일 것입니다.
따라서 이 죄에 대한 형벌은 무거울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이에 대한 형벌이 없다면 사회 정의는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거기에다 연속적으로 살인에 대한 끝없는 복수가 이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살인죄가 중할수록 그리고 그 형벌이 엄할수록 의도적인 살인과 과실로 발생하는 사고와는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혹은 누명을 쓴 사람이 피살자의 가족들로부터 즉각적인 보복을 당하기 전 까지 자기 결백을 증명할 수 있도록 안전하게 피신할 장소도 필요하였습니다.
하지만 아무나 다 그 도피성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고의로 이웃을 모살하였으면 살인자가 거룩한 단에 있을지라도 끌어내어 죽이라고 명령하신 바 있습니다.(출21:12-14)
따라서 이 도피성은 중한 과실죄를 지었으나 구원을 기다리는 자들의 피난처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도피성에도 운영의 원칙이 있습니다.

첫째, 살인자가 과실로 죄를 지었다는 것에 대한 판결을 받아야 합니다.

도피성에 들어가 숨는다 하더라도 자신이 의도적으로 살인하지 않았음에 대한 판결을 받아야 합니다. 살인에 대한 도구가 있거나 계획적인 살인을 하였다면 구제 받을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과실로 살인한 자는 도피성에서 얼마든지 생활할 수 있는 조건을 제공받게 됩니다.

둘째, 반드시 도피성으로 스스로 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살인자는 도피성 안에 있을 때 보호받을 수 있습니다. 피하는 도중에 보복을 당하거나 도피성에서만 생활하는 것이 지루하다 하여 밖으로 나와 있다가 죽음을 당하는 일은 도피성에 대한 규정에 따라 보호받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자기 자신이 스스로 무죄하고 또 억울한 누명을 썼다고 생각할지라도 도피성으로 피하지 않으면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도록 하는 보수(報酬)의 원칙에 따라 피해자의 가족들에게 내어준바 되어 죽임을 당하는 것으로 죄 값을 치루게 될 수 있습니다.

셋째, 대제사장이 죽으면 도피성에 피해 있던 자들에게 사면이 내려진다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이 죽어 사면령이 내려지면 보수자가 살인자를 만나도 보수의 원칙에 따라 피를 흘리게 할 수 없습니다.(민35:27,28) 대제사장의 죽음으로 대신 은총이 내려집니다. 왜냐하면 이 도피성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그림자요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에서 우리의 과실에 대한 보수를 사면 받을 수 있습니다. 그에게 오기만 하면 대제사장인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자유가 주어질 것입니다.

예수님과 도피성의 의미(게 세 헤 베 길 골)

1. 게데스 - 구별하다 (납달리 산지)

서쪽 경계지의 산들 가운데 있고 갈릴리 바다 북쪽 약 80km 지점에 있다
  예수님은 그 누구와도 구별된 그리스도요 구원자이심을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셔서 그를 믿고 그에게 나아가는 자는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구별하여 주신다는 뜻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므로 세상의 죄에서 구별되어 거룩한 성도로 사는 은혜를 받게됩니다.

2. 세겜 - 어깨 짐 (에브라임 산지)

에발산과 그리심산 사이의 동서 경계선상에 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무거운 짐을 어깨에 메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시기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내 멍에는 가볍고 쉬움이라(마11:28)고 하셨습니다.

3. 헤브론 - 연합, 동맹, 교제(유다 산지)

기럇 아르바로 알려진 곳으로 유다의 예루살렘 남쪽 약 32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 사람을 연합하게 하시는 자요 또한 우리와 연합하여 하나님을 잘 섬기고 이웃 섬기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저 안에 저가 내 안에 있으면 과실을 많이 맺으리니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리라고 하였습니다.

4. 베셀 - 요새 (르우벤 지파)

사해바다로 흘러가는 요단강 입구 동쪽 산지에 위치하고 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요새가 되십니다. 특히 환난을 당한 자에게 요새가 되십시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주신 자를 빼앗기지 않습니다. 심지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와 돌에 맞아 죽을 여인에게도 요새가 되어 주셨습니다. (시 91:2)

5. 길르앗 라못 - 언덕, 고지 (갓 지파)

길르앗 라못 산지의 약 80km이상 북쪽에 위치했다.
예수님은 언덕이요 고지가 되심으로 어떤 경우에 가까이 나가기가 어렵습니다. 예수 믿으려하니 끊을 것도 많고 버릴 것도 많고 그대로 살려고 하니 힘든 것도 많습니다. 예배 시간, 기도 시간, 봉사 시간에 참여하려하니 얼마나 힘듭니까?
때로 비난과 표적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곳이 곧 쉼의 언덕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곳이 바로 우리를 높이 세우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암사슴 발을 높은 곳에 세워주심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한나, 롯, 에스더를 높이 세워주신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6. 골란 - 기쁨 (므낫세 지파)

갈릴리바다 동쪽산지 어딘가에 있었으나 정확한 위치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예수님은 최후 승리자요 기쁨이십니다. 그에게 나아가는 자에게도 승리와 기쁨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장차 재림하심으로 모든 성도에게 큰 기쁨이요 승리요 영광이 될 줄 믿습니다.





통일 운동을 위한 제안


통일을 위한 열성적인 기도가 뜨거운 한국교회의 몸부림을 지켜 볼 때 왜 하나님은 이렇게 열정적인 통일을 위한 기도에 눈을 감으셨을까?
새벽마다 통일을 기도하고
밤을 새워저도 통일을 기도하며
심지어 금식까지 하면서 통일을 기도하는 한국교회의 실정을 생각할 때 한 가지 부족한 것은 통일을 준비하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통일을 위한 몇 가지 제안을 정리해 봅니다.

첫째, 통일 기금 모으기 운동(통기모운)

한국교회 교인들이 매 주일 1천원씩만 적립할 수 있다면 1천만 그리스도인들이 이 일에 동참할 수 있다면 1주에 100억입니다.
한 달이면 400억이며, 일년이면 1,800억입니다.
만일 이렇게 10년동안 적립하였다면 그 적립액은 정부가 할 수 없는 통일 후의 혼란과 휴유증을 교회가 감당하므로 상당한 시너지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 북한의 헐벗은 산에 나무 심기 운동(산나심운)

북한의 경제적 어려움은 산에 나무가 없다는 것도 한 원인이 될 것입니다.

나무 심기 운동에 대한 자료를 소개합니다.

I. 북한 산림 황폐화의 원인 - 가난

구소련의 붕괴로 석유공급이 중단되면서 북한 주민들은 겨울 난방을 위해 벌목을 시작했다. 북한의 군부대도 겨울 난방을 위해 주변 산에서 땔감용 벌목을 지속해왔다. 가스보일러가 아닌 땔감 난방이 북한 산림 황폐화의 가장 큰 원인이다.

국가가 북한군부대에 막사 지을 자재를 공급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20개 군단 120만 병력의 북한군 각 부대는 스스로 막사 지을 목재를 조달해왔고 그러다보니 북한 전역에서 산림이 황폐해졌다.

북한은 농지가 적고 산지가 많아 식량증산을 위해 1970년대부터 주체농법이라 하여 다락밭 개간을 시행하였고 그로 인해 산림은 줄어들었다. 1980년대 중반부터 국가의 부식물 공급이 중단되자 군부대 역시 식량을 자급하기 위하여 주변 야산에 불을 질러 부업지를 마련하면서 녹지가 더욱 줄어들었다. 1990년대부터는 민간에게도 식량배급이 중단됐고 이는 북한주민들의 다락밭 개간을 더욱 부추겼다.

소나무 재선충병은 감염속도가 빠른 일종의 나무 전염병인데 북한에는 이를 막을 약품이 충분치 않아 재선충병으로 인해 산림이 점점 더 황폐화 되어가고 있다. 이미 황폐화된 산지와 다락밭은 홍수에 취약하여 비가 오면 토사가 쓸려나가고 거름 성분이 유출돼 그만큼 나무가 자라기가 어려워졌다.

 II. 북한 산림 황폐화 현황-30%의 산지가 황폐화

1990년 820만 1000ha였던 북한 산림은 2011년 554만 ha로 줄었다. 10년 만에 북한 산림의 32.4%가 사라졌다. 한국의 국립산림과학원에 따르면 황폐화된 북한 산림면적은 총 284만ha(2008년 기준)로 총 산림면적 899만ha의 32%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됐다. 영국의 ‘메이플크로프트’가 2011년에 발표한 ‘세계 산림 황폐화 지수’를 보면 북한은 나이지리아와 인도네시아에 이어 3번째로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발표기관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으나 대개 30% 수준의 황폐화 율을 보이고 있다는데 의견을 같이 한다.

독일의 환경단체인 German Watch가 발표한 자료에서는 북한의 산림황폐화로 인한 자연재해로 가중된 사회적·경제적 피해는 연간 24억달러(2012년)로 북한 GDP의 7.6%수준이다. 국제 적십자 연맹에 따르면 지금까지 기후변화로 인한 이상기후로 세계에서 120만 명이 사망했고 북한지역에서는 45만8000여명이 사망해 북한의 이상기후 피해가 심각한 수준임을 알 수 있다.

국립산림과학원은 황폐된 북한 산림 284만ha(2008년 기준)를 복구하는 데 모두 32조1172억 원이 소요될 것으로 전망했는데, 이는 인건비를 개성공단 월 임금 약 144달러를 기준으로 추산한 것이다. 월 임금을 한국 근로자에 맞추면 복구비용은 증가한다. 직접 조림하는데 드는 돈은 7조2680억 원이지만 토지와 나무가 쓸려가지 않도록 하는 사방사업에는 23조4140억 원이 예상된다. 양묘장 조성과 복구비용도 5410억 원으로 추산된다.

III. 남한의 대북 나무심기 지원 정책 - 그린데땅트

북한에 어떠한 인도적 지원도 불가피하게 북한 군사력에 대한 간접지원 효과를 발생하지만, 나무심기지원은 군사적 오남용효과가 가장 적을 것으로 공감되고 있다. 대북지원에 대한 국내 반발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박근혜 정부에게는 북한나무심기 지원은 부담이 가장 적은 아이템이다. 이에 더하여 박근혜 정부에게는 남한의 산림녹화를 성공시킨 고박정희 대통령의 성공 사례를 북한에서 재현해보려는 희망이 강하다.

박근혜 대통령 인수위원회는 ‘그린 데탕트’를 통한 남북 환경공동체 건설을 제안한 바 있다. 그린 데땅트 국정철학을 배경으로 2014년 3월19일 창립한 아시아녹화기구(GAO)는 식량과 땔감 대책까지 포함한 ‘임농(林農)복합경영’ 방식을 북한에 제안했다.

임농복합경영이란“양묘 조림 연료(땔감) 식량 문제를 체계적으로 연결해 북한 주민이 나무를 심고 식량문제를 해결하며 소득까지 올리는 ‘농촌지역개발사업’으로 추진하는 경영방식이다. GAO의 제안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향후 10년 동안, 식량 생산단지(40만 ha) 연료림(80만 ha) 소득작물 생산단지(20만 ha) 목축용 사료 초지(30만 ha) 유지·펄프 같은 공업연료 생산림(50만 ha) 등 용도별로 녹지를 조성하는 것이며 특히 홍수에 약한 다락밭에는 속성수인 아카시아 나무를 심어 지력을 회복하면서 땔감도 공급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한국의 새마을운동에서 활용해 큰 성과를 본 방식이다.

한국정부의 해당기관 역시 박근혜대통령의 북한녹화에 적극적이다. 통일부는 “남북 공동 영농과 시범 조림으로 ‘그린 데탕트’ 발전을 앞당기겠다”고 발표하였고 산림청도 통일시대에 대비한 북한 산림 복구를 준비하겠으며 민간기구와 공조해 시범 조림·병해충 방제를 추진하겠다고 하였으며,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녹색기후기금(GCF) 글로벌녹색성장연구소(GGGI) 등 국제기구를 활용해 남북한 ‘그린 데탕트’를 앞당기겠다고 하였다.

IV. 북한 당국의 산림화 노력과 조치들 - 10년 안에 임농복합방식으로 녹화 완수

북한은 1971년부터 식수절을 정하면서 나무심기를 독려해왔다. 1990년대에는 산림황폐화문제를 종합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산림법을 제정하였다.

김정은 정권은 2012년부터 산림정책을 강화할 의지를 보였다. 김정은의 지시로 북한 당국은 현재 ‘산림 복원 10개년’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2012년 4월 27일 김정은 북한 노동당 제1비서는 “땔감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나무를 아무리 많이 심어도 그것을 망탕(마구) 찍어 땔감으로 쓰기 때문에 산림을 보호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산림 조성과 보호관리사업을 혁신해 10년 안으로 벌거숭이산을 모두 수림화(산림녹화)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 당의 확고한 결심이며 의지”라고 강조했다.

목표는 2023년까지 무입목지 168만 ha에 총 65억 그루의 나무를 심는 것이다. 단순히 나무를 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소득대책과 환경보전, 주민 생활 개선을 동시에 추구한다는 계획이다. 김정은 정권의 이 같은 산림계획은 GAO가 북한에 제안한 “임농복합경영” 방식의 북한 녹화와 내용이 동일하다. 북한이 필요로 하는 바로 그 방식 그 내용으로 남한당국과 NGO들이 지원하겠다고 하고 있어 나무심기를 매개로 하는 남북한 협력 잠재력은 작지 않다.

V. OGKM과 북한 나무심기 - 위임장에 근거한 북한나무심기운동

2013년 12월에 북한의 국토환경보호성은 재미교포인 김호진에게 <65억 그루의 나무심기와 그에 부대되는 일체의 사업에 대한 위임장>을 교부하였다. 그 위임장에는 국토환경보호성의 장관인 김경준 상의 서명이 있고 교부 전에 김정은 제일 국방위원장의 승인을 받았다고 한다. 그 위임장이 한국에 소개된 지 2년이 되어간다. 지난 2년간 OGKM의 김호진 대표는 북한의 산림관료들을 중국으로 초청하여 한국과 북한녹화를 주제로 2014년 *월과 *월에 두 차례 국제회의를 진행하였다. 2015년 *월에는 남쪽의 *** 기관이 수거 보관해온 나무씨앗 4톤을 평양으로 보냈으며 2015년 *월에는 한국교계의 인사들이 북한의 ***지역을 방문해서 나무심기행사에 참여하게 하였다.

북한당국이 교부한 위임장과 다소간의 성과를 바탕으로 OGKM은 2015년 8월에 통일부의 허가를 받아 비영리단체로 등록하였다. OGKM의 정관에는 그 설립목적이 “한반도와 국제사회의 각 층위 협력단위와 협력하여 북한나무심기를 효과적이고 평화적으로 완수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한다. 각 층위의 협력단위라 함은 국가의 정부, 준 국가기구, 각종 지자체, 언론사, 시민단체, 종교단체, 각종 회사, 국제기구, 국제NGO 및 개인들을 의미한다.”로 되어 있다. 사단법인 OGKM은 현재 북한나무심기를 통해 남북관계가 개선되도록 다방면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VI. 북한 나무 심기와 남북 화해 통일

북한지역에 발생한 소나무 재선충병은 남한의 강원도 일대로 전염돼 남측 산림자원을 훼손하였다. 북한임진강 상류에서 홍수가 났을 때에는 남한의 연천과 파주 일대에 대규모 수해가 발생하였다. 이와 같이 북한 산림의 황폐화의 피해는 남한으로 이어진다.

남북한이 분단돼 있다는 이유로 남북 산하(山河)를 푸르게 통일시키는 노력까지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특단의 대책을 서둘러 세우지 않는 한 통일한국은 황폐한 북녘 산하 때문에 시름하게 될 것이다. 북한 산림의 황폐화 실태나 속도를 보면 남북 산림 협력 사업이 지연될수록 비용과 노력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할 것이다.

한국은 산림화(山林化)에 성공한 경험을 북한에 전수해 민족의 환경재앙을 막을 수 있다. 북한 정부 역시 산림 황폐화에 고심하며 한국의 산림녹화 사업에 관심을 보이고 있어 한국이 먼저 적극적으로 손을 내밀면 남북한이 산림녹화를 매개로 협력을 강화할 수 있다. 한반도를 푸르게 만들어 <One Green Korea>를 이루면 정치통일도 보다 쉬워질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남한과의 정치군사적 대결에서 산림협력을 분리시키지 못해 왔다. 박근혜 정부 역시 북한녹화를 위하여 한미군사훈련을 줄이거나 북한인권문제에 침묵할 생각은 없다. 북한이 군사훈련을 줄이지 않고 인권문제를 계속 언급하는 남한당국과 산림녹화에 대해서만 분리 대응하여 협력하는 일은 현재로서는 상상하기 힘들다. 남북당국이 사안별 분리대응을 학습하지 못하는 한 북한나무심기는 남북관계를 개선시키는 촉매제가 아니라, 남북관계 개선의 최종 열매일 수밖에 없다. 사안별 분리대응을 지속하여 평화통일을 이룬 과거의 동서독이나 정경분리대응을 15년째 지속하면서 사실상의 통일을 거의 이루어낸 현재의 중국대만에게서 남북은 평화통일의 기본 공식을 배워야한다. 북한나무심기 사업은 남북의 현재 여건 상 협력하여 성공시키기 가장 좋은 아이템이다. 남북한 당국 공히 조금 더 성숙한 자세로 나무심기 분리대응을 실천하기를 기대한다.

셋째, 북한 사역을 일원화

현재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단체들이 활동하는 북한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통일부가 아니라 북한 전문 연구 기관을 설립하여 이 기관을 통해 모든 것을 통솔 주관하므로 북한에서 진행하는 활동을 투명하게 국제사회에 알려야 한다 .
더구나 교회는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 때문에 북한을 돕는 것도 은밀하게 진행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역은 불투명하기 때문에 북한 전 지역에 대한 사역이 될 수 없다고 하겠다.
 




한국 : 독일 처참한 비교

한국 : 독일 처참한 비교  

오늘의 한국,
1년에 51조원 외국 등에 이자로 줘야 한다.
 
인구 8300만명의 독일보다
인구 5000만명의 한국 공무원수가 2배가 많다.
인구수로 대비하여 비교를 하면
무려 4배가 더 많은 것이다.

대한민국은 하는 짓 아무 것도 없는 쓰레기 국회의원, 공무원의 급여, 활동비용이 세계에서 가장 많이 소모되는 나라가 한국이다.

대한민국은 고위 공무원과 검찰,국회의원들이 착실히
말아먹고 있다.
 
2차 세계대전 직후 폐허가 된 독일엔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없이 엄청난 전쟁배상금만 기하급수적으로
나날이 늘어갔다.
무너진 폐허 위로 겨울이 왔다.
뼈속까지 스며드는 독일 추위는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수치상 기온은 춥지 않지만,
대부분 흐리고 강풍이 부는 날씨에
덜덜덜 떨게 하는 냉혹한 추위지만,
연료나 에너지원은 많이 부족했다.
그러자 독일 정부가 방송을 했다.
산의 나무를 베다가 때기라도 하시라고  
패전으로 이미 실의에 빠진 국민을
얼어죽이기까지 할 수 는 없었으므로.
 그러나 독일 국민 그 누구도
산의 나무를 베어다 때지 않았다.
옷을 있는대로 껴입고,
식구들끼리 부둥켜 안고 자다가
새벽에 잔인한 추위가 몰아치면,
식구들은 제자리 뛰기를 했단다.
나무를 베다가 때는 건 한 순간이지만,
산의 나무는 30년이상 가꿔야
숲이 된다는 사실을 아는 국민은
그 누구도 나무를 하러 산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렇게 검은 숲(Black Forest,Schwarzwald) 은
세계적으로 으뜸의 산림이 되었고,
독일은 어마어마한 전쟁배상금을 갚고,
라인강의 기적을 이뤄냈고
오늘날 세계 최대의 채권국이 됐다.
 
위기는 그렇게 극복하는 것.
나라는 그렇게 발전하는 것.
정부가 아무리 말해도
국민이 '노' 할 수 있는 집단,
지성이 살아 있는 나라만이 나라다운 나라,
반듯한 국가,
지속 가능한 나라, Sustainable state가 될 수 있다.
 
그런데 2020년 한국 국가 재정운용 예산은 513조  
 2020년도 국가 재정 운용 금액 중
한국은 유독히 공무원, 정치인들을 위한 지출이
지나치게 많은데,
세계적으로 국가 규모에 비해
국회의원의 급여, 활동비용이
가장 많이 소모되는 나라가 한국입니다.  
17년간 독일생활을 해 본 자로서
독일의 주요 재정 지출과
견주어 비교해 보면
2019년 우리나라 예산은 469조원이고
독일은 439조원 입니다.
 
독일은 439조원으로 대학까지 무상교육,
아동수당(킨더겔트)으로 만15세까지
매월 평균 30만원 준다.
부득이한 사정으로 직업없는 사람, 노약자,
빈곤층에게 생계비, 주거비를 주기에
국민들 모두가 큰 걱정 없이 생활할 수 있다.
50조원 국방비로 17만명의 직업군인들에게
1인당 월급(최저250만원)을 준다.
 
충격적인 사실은
2019년의 독일인구는 8300만명으로,
한국 총인구수의 1.7배수나 되지만,
대한민국보다 예산이 30조원이나 더 적은데도
월등히 많은 복지를 두루 시행한다는 일입니다.
 
인구가1.7배 많고 땅도 1.7배가 넓은 독일이
한국보다 30조원이나 더 적은 예산액으로
빈곤층 없이 1등 복지국가인 것을
대한민국의 통치자들
즉 모든 정치인, 관료, 고위직 공무원들은
참고해야 할 일이고 국민 모두가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인구 8300만명의 독일보다
공무원수가 2배 많은 대한민국
그런데도 공무원은 부족하다고 계속 늘립니다.  
한국의 정치인과 공무원이
독일 등 선진국들 보다 턱없이 많고,
그들을 위한 국가 재정 지출이 대단히 과합니다.

이럼에도 한국은 돈을 빌려서
전국민에게 코로나19 재난지원금을 줍니다.
또한 빚을 내서 3차 추경 35조원을 또 지출합니다.  

나랏 빚이 걱정되는 이유
그게 얼마나 무서운지 살펴볼까요?

현재 나랏 빚이 약 1,700조원
정부보증 공공기관 빚이 550조원
그래서 2,200조원 정도 되는데....

올해 추경에 90조원,
내년에는 100조원 예상.
이렇게 국가채무가 5년 후에는 약 3,000조원
(국민 일인당 6천 만원이 되겠지요)
현재 한국 채무 이자율이 년리 약 1.7%
 3000조원의 1.7% 일년이자가 51조원입니다.  
1년에 51조원을 외국 등에 이자로 줘야 한다.  
이런 상황에도 조속히 한국 재정으로
북한에 고속철도 등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정치인들이 있는 나라가 한국입니다.

또한 국내총생산(GDP)의 약20%를 창출하는
삼성그룹 수장을 감옥에 넣어서 묶어놔야 한다고
주장하는 고위 정치인이 많은 나라가 한국입니다.

설령 죄는 있을지언정 경제가 극히 어려운 시기 이기에
중추 경제인들을 자주 불러 수사하거나,
구치소에 묶어 놓기를 유예하고,
자유로운 경제활동으로 국가에 도움이 되게끔 해야합니다.
또한 우리 국민이 미래를 위하고,
현재의 자신보다는 내 자식,
손자들을 위해 현실의 포퓰리즘 정책들을 심판하고
정신차려야 하겠습니다

사) 한글세계화문화재단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wwljc87&logNo=222156958653





“환자의 사망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며, 회복되기만을 바랐던 가족들에게 애도를 전합니다.
병원에서의 감염은 모두 예방됐으며 당국은 의료진을 비롯해 메르스 대응에 관여했던 정부 관리들의 노력이
대단히 성공적이었던 것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달랐을까?
독일에서도 며칠 전 메르스로 1명이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추가 감염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사망자가 나온 독일 니더작센주 보건부가 내놓은 성명을 꼼꼼히 살펴봤다.
숨진 사람은 아랍에미리트연합(UAE)에서 휴가를 보내고 돌아온 65세 남성이었다.
한국의 첫번째 환자(68)와 나이도 비슷하다.
이 남성은 지난 2월 8일 귀국했고 이틀 뒤 발병해 병원에서 일주일간 집중 치료를 받았다.
당시 유럽질병통제센터(ECDC) 보고서에 따르면 환자는 위중했지만 안정적인 상태였다.
5월에는 메르스가 완치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폐질환을 비롯한 합병증으로 6월 6일 사망했다.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독일에서도 감염자와 접촉한 사람들은 많았다.
환자 가족, 집중치료를 받은 병원, 감염자가 숨진 병원이 모두 방역 대상이었다.
발병 뒤 처음 찾아간 병원에서는 메르스 의심증세라 판단하고 두 차례 환자의 체액을 채취해
본 대학의 로버트-코흐연구소에 분석을 맡겼다.

메르스 확진판정을 받은 것은 3월 7일이었다.
독일 정부는 세계보건기구(WHO)와 ECDC에 보고했고 유럽 전염병 조기경보·대응시스템이 가동됐다.
이후 3개월 동안 주 보건부와 사회복지부, 지역보건소, 병원, 대학연구소는 유기적으로 대응했다.
이미 2월 23일부터 지역 보건 당국은 환자가 머물렀던 병원과 접촉자들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200명 넘는 사람들을 추적해 전원 감염 여부를 검사했다.
다행히 모두 음성 판정이 나왔다.

물론 독일은 의료보장이 매우 잘 돼 있다.
1880년대에 이미 유럽에서도 가장 먼저 국민 헬스케어 시스템을 구축한 나라다.
‘하우스에르츠트’라 불리는 주치의를 지정해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한국처럼 이 병원 저 병원을 돌아다니며 ‘의료 쇼핑’을 하는 문화는 없다.
그렇다 해도 메르스가 진단과 치료에 고도의 의학적 수준을 요구하는 난치병은 아니다.
세계은행 자료에 따르면 인구 1000명당 내과의사 수는 한국이 2.1명, 독일은 3.9명으로 2배 정도다.
그러나 인구 1000명당 병상 수는 한국이 10.3개로 독일의 8.2개보다 많다.
메르스를 일으키는 코로나바이러스(MERS-CoV)가 신종이라고 하지만 세상에 알려진 지 3년이 됐다.
결국 독일과 한국의 상황을 가른 것은 두 나라의 대응 과정 차이였다.

메르스 감염자가 나온 25개국 중 최초 발생지인 사우디아라비아를 빼면 대규모 전염이 일어난 나라는 한국뿐이다.
니더작센주의 성명은 반복해서 한국을 언급한다.
“의료관계자, 환자 가족과 친척들에게 전염된” 한국의 “비극적인” 상황은
이 질병에 대한 “조율된 대응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한국이 남의 나라에서 반면교사의 대상이 됐다고 해서 국가 이미지가 실추돼 큰일이라거나 민족적 수치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사스) 때에는 우리도 방역의 모범 사례였다.
하지만 정부 대응이 ‘손 잘 씻기’처럼 개인 책임을 강조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건 실망을 넘어 공포스럽다.
무엇이 잘못됐는지에 대한 보건 당국의 꼼꼼한 분석과 반성과 각오는 들려오지 않는다.
수없이 인용되는 누군가의 말을 ‘표절’해 보자면 “국가가 가장 기본적인 임무인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하지도 못하는 것을
보면서 정부의 무능과 무책임에 분노하며, 국가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갖게 됐다.”

세월호도, 메르스도 결론은 각자도생이며, 정부도 국민들에게 그걸 가르치고 있는 듯하다.
알아서 살아남으라는 것만큼 무서운 것은 없다.
우리는 절벽에서 내던져진 채 살아남아야 하는 사자새끼가 아니다.

[김영회 칼럼] 독일과 한국의 차이


-휴전이 된 지 63주년, 계속되는 전쟁 아닌 전쟁. 독일의 성숙한 민족의식과 남과 북의 대결정책을 곰곰이 생각해 본다-

북한이 쏜 미사일을 공중에서 폭파시킨다는 미국의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사드(THAAD) 도입문제를 놓고 국무총리가 주민들에게 봉변을 당하지 않나, 그러잖아도 바람 잘 날이 없는 나라가 또 한 번 뒤숭숭합니다.

“민중은 개, 돼지이니 먹을 것 만 주면 된다”는 어느 철부지 공무원의 고약한 망언도 들리고 간도 크게 남의 돈으로 100억을 해먹고 구속된 현직 검사장 소식에 ‘화장실 전문’ 성폭행 연예인 등등등…

세상 돌아가는 꼴이 요지경(瑤池鏡)입니다. 검찰청은 아주 친절하게 ‘포토라인’까지 그어 놓고 날마다 불려오는 피의자들을 맞느라 바쁘니 그러잖아도 불쾌지수가 높은 장마철이 더욱 무덥기만 합니다.

각설(却說)하고.

1989년 11월 9일 독일분단의 상징인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 문 양쪽 장벽위에는 수 천 명의 젊은이들이 망치와 도끼를 들고 올라가 동서를 갈라놓은 시멘트장벽을 마구 깨부수는 역사적인 장면을 연출합니다.

광장을 메운 수 만 명의 시민들은 “뷔어 진트 아인 폴크!”(Wir sind ein Volk. 우리는 한 민족이다)를 외치며 거대한 함성으로 환호하는 가운데 이 감동적인 드라마는 텔레비전을 통해 전 세계에 생중계되면서 세계인들은 게르만 민족의 재결합에 뜨거운 박수를 보냅니다. 그것은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환희의 송가’가 울려 퍼지는 20세기 독일 국민의 위대한 퍼포먼스였습니다.

베를린은 원래 독일을 상징하는 수도였습니다. 그러나 1945년 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하면서 승전국인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의 서방진영과 공산진영인 소련에 의해 동서로 나뉘어져 1949년 동베를린은 소련이, 서베를린은 서방이 관할하는 두 개의 도시로 분할돼 40년 동안 ‘냉전(冷戰)의 상징’으로 지속돼 왔습니다.

분단과 함께 베를린시는 동독 안에 위치한 섬이나 다름없는 도시가 됐습니다. 서독에서 베를린을 가자면 동독 땅을 거쳐 가야 하기 때문에 서베를린 시민들은 미군기를 통해서만 공수작전으로 생활필수품을 공급받을 수밖에 없는 불편을 겪습니다.

서독은 빌리 브란트가 수상이 되기까지 동독과 철저한 적대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서독은 서독만이 독일의 유일한 합법정부라며 동독을 인정하지 않았고 동독을 승인하거나 수교하는 국가와는 관계를 맺지 않는 소위 ‘할슈타인 독트린’에 따라 20년간 대 동독 강경노선을 취했습니다.

그러나 서독은 1970년 서베를린 시장으로 명성을 얻은 브란트가 수상에 취임하면서 ‘동방정책’을 선언, 동독을 인정하고 공산권국가들과의 화해정책을 폅니다. 브란트는 독일 ‘경제부흥의 아버지’ 아데나워 수상의 ‘라인강의 기적’으로 국력이 크게 신장된 서독에 대해 주변국들의 경계의 눈초리가 일자 서독은 절대 대립의 의지가 없음을 세계에 알리며 점차로 통일의 기반을 다져나갑니다.

그러나 공산권의 맹주인 소련과 냉전의 선봉에 서있던 미국이 동방정책을 견제했고 국내 보수 세력들의 반대 역시 적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브란트는 굽히지 않고 반대세력을 설득해가며 화해정책을 밀고 나갑니다. 브란트는 분단으로 인한 동·서독 국민들의 문화적 이질감 극복을 위해 먼저 방송개방을 추진합니다. 서독국민이 아무런 제재 없이 동독 텔레비전을 볼 수 있게 했고 동독도 뒤따라 서독 텔레비전을 개방함으로써 양독 국민의 동질성 회복에 획기적 전기를 마련합니다.

또한 양쪽 국민들의 통행이 자유화되어 동독국민이 서독을, 서독국민이 동독을 자유롭게 오고가는 조치가 이루어집니다. 당연히 서신 교환은 필수적으로 시행됐습니다. 동독국민이 서독을 방문할 때는 서독 정부가 여비 일체를 부담해주었고 서독 국민이 동독을 방문할 때도 마찬가지로 경비를 지원해 주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서독정부는 베를린으로 연결되는 수 백 km에 달하는 동독 내 고속도로를 건설해 주었습니다.

당시 동독은 유럽의 공산주의 국가들 중에서는 경제가 가장 발전해 집집마다 자동차가 있을 정도로 기본적인 부는 누리고 있었지만 서독의 그것과 비교할 바는 아니었습니다.

브란트는 동독의 경제가 발전해 양독(兩獨)이 균형을 이룰 때 통일이 가능하다는 확신에 따라 각 분야에서 동독을 도왔습니다. 서독의 도시 건설공사를 동독업자에게 맡기는가 하면 심지어 서독 군인들의 군복과 같은 군수품 제조마저 동독 업체에 주는 통 큰 모습마저 보였습니다.

독일의 통일은 어느 날 우연히 이루어 진 것이 아니라 동서독 국민들의 수준 높은 민족의식이 원동력이 되었고 빌리 브란트라는 불세출(不世出)의 인물이 과감히 앞에서 끌고 동서독 국민들이 손을 잡고 함께 뒤를 따랐기에 가능했습니다. 분단 40년, 동방정책 20년이 거둔 빛나는 결과였습니다.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삼국통일을 이룬 것은 676년입니다. 그 이후 우리 한민족은 고려와 조선을 거치며 침략은 당했을지 언 정 1300년 동안 분단 된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일제치하 35년을 거쳐 1945년 나라를 되찾고 71년, 국토는 둘로 분단되고 민족은 갈라진 채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평양에 가보면 그곳 사람들은 “우리 통일합시다”를 입에 달고 삽니다. 남쪽에선 아이들이 학교에 가면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가르치고 노래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상대를 비난하는 거친 악담과 험담만이 남과 북을 오고 갈 뿐입니다.

1990년 독일이 통일되기 전 한때 서독에서 몇 개월 머문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변호사인 남편과 고등학교 역사교사인 아내 부부를 만나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한국과 독일은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라고 말을 건넸습니다.

그때만 해도 한국사람은 독일사람을 만나면 ‘한국과 독일은 같은 분단국’임을 은근히 강조함으로써 동병상련(同病相憐)을 확인해 친밀감을 더 하려는 버릇 아닌 버릇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독일 아내는 빤히 쳐다보면서 “우리는 민족끼리 전쟁을 하지는 않았어요. 한국은 서로 수백만 명이 죽는 전쟁을 했지 않나요”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요. 같은 분단국이지요”라는 대답을 기대했던 필자는 순간, 당혹감을 감추지 못 했습니다. 그리고 부끄러운 생각으로 얼굴이 뜨거워 졌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녀의 말이 옳았습니다. 독일이나 우리나 외세에 의해 분단 된 것은 마찬가지지만 그들은 민족끼리 싸우지 않았고 우리는 민족끼리 전쟁을 했습니다. 그게 다릅니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의 의지로 통일을 이루었고 우리는 지금도 ‘전쟁 아닌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북한은 핵무기를 만들어 위협을 하고 있고 우리 또한 미국을 믿고 “해 볼 테면 해보자”고 큰소리를 치고 있습니다. 남북이 주고받는 험악한 말들을 듣노라면 금방이라도 전쟁이 터질 것 만 같은 두려움을 떨치기 어렵습니다.

도대체 언제 우리는 남북을 갈라놓은 저 155마일, 휴전선의 철조망을 걷어 낼 수 있을지, 독일과 우리가 다른 점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달 27일은 1953년 판문점에서 6·25전쟁의 휴전협정을 맺은 지 63주년 되는 날입니다.

출처 : 여성경제신문(http://www.womaneconomy.kr)



인생이 아름다운 이유 몇 가지

며칠 전 급한 볼일이 있어서 외출을 했다.
뭔가 중요한 걸 결정해야 하는 일이었기에
출발 전부터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다.

그래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려고
동네 커피전문점에 들어가 카페라테 한 잔을
주문했다.
그 커피전문점에는 발달장애인 청년 한 명이
직원으로 일하고 있다.
카페라테를 테이크아웃해서 들고 나오는데
살짝 유리문에 부딪혔다.
그 순간 종이컵 뚜껑이 제대로 안 닫혔는지
커피가 새어 나왔다.
바로 안으로 들어가서
“이거 하나도 제대로 못 하느냐?”고 화를 냈다.

종이컵 뚜껑을 잘못 닫은 그 청년은
어눌한 발음으로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하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그때 커피 나왔다는 신호로 누군가의
진동벨이 울렸다.
아주머니 한 분이커피를 받아서 내게 내밀었다.

“카페라테예요?
저는 커피를 좋아하지 않아서 늘 남겨요?
그거 제가 마실게요? 우리 바꿔요.”

난 그분이 손에 쥐여준 그분 몫의 카페라테를
들고 도망치듯 나왔다.
너무 부끄러웠다.

커피집에 들를 때마다
문득 문득 그때 커피전문점에서 상황이
마음속에 늘 그늘로 남아있어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가끔 들르는 커피집에 낯선 청년이 새로 와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가만 보니 행동이 느리고
말이 어눌했다.

순간 그 청년을 채용해 준 회사가 몹시
고마웠다.

그건 단순히 취직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생에
눈부신 날개를 달아 주는 일이었다.

그리고 내 시선을 빼앗은 또 한 사람.
40대 아주머니 한 분이 구석에앉아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단순한손님이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그 아주머니는 오직 한 사람만 보고 있었다.
아주 애틋하고 절절한 눈빛으로....
 청년의 어머니라는걸 쉽게 알 수있었다.

발달장애인인 아들의 첫 직장에서
그 아들을 지켜보는 심정이 어떨까?

초조하고 불안하고 흐뭇하고 감사하고
참으로 다양한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눈물을 참고 있는 듯 보였다.

순간 나는 그 아주머니를 안심시켜 주고
싶었다.

다가가서 이렇게 말했다.

“저 여기 단골인데요? 아무 걱정 마세요?
여기서 일하는 직원들 다 착하고 좋아요?
아드님도 잘할 거예요.”

그 아주머니의 눈에 눈물이 핑 도는
걸 보고 나도 울컥했다.

삶이 아름다운 건
서로 어깨를 내어주기 때문이 아닐까?
한문자의 사람 인(人) 자처럼.

망설임 없이 자신의 몫인 온전한 카페라테를
내어준 아주머니.

코로나19로 인해 몇 개월간 집에 못 들어가서
보고 싶은 어린 딸과 영상통화를 하면서도
울지 않는 간호사님.

화재 현장에서 부상을 입어 들것에 실려
병원으로 향하면서도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하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소방관님.

장사 안 되는 동네 입구 과일가게에서 사과를
살 때 제일 볼품없는 것만 골라 넣는 퇴근길
영이 아버지.

마스크를 서너 개씩 여분으로 가방에 넣고
다니며 마스크를 안 쓴 사람에게 말없이
내미는 준호 할머니.

이렇듯 참으로 많은 보통사람들이 우리의
인생을 아름답게 만들고 있습니다.

희망찬  신축년 새해  감사하며 배풀며
살아갈수 있을까?

올 한 해 나는 얼마나 자주 내 어깨를 내어줄
수 있을까?

마음만 굴뚝같았지 일상에서 사소한 일에
어깨를 내줘보지 못한 나는 부끄러움의
회한에 못이겨 눈물을 흘리고 마네.







[뜨거운 파인애플 물]
 
퍼 나르세요 !!
베이징 육군 종합병원의
천희렌 교수는 만약
이 소식을 받는
모든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10부를 전달한다면,
최소한 한 명의 목숨은
구할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저는 제 책임을 다했습니다. 당신도 할 수 있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뜨거운 파인애플 물은
당신의 평생을 살릴 수
있습니다.
뜨거운 파인애플 물은
암세포를 죽일 수 있습니다.
얇게자른 파인애플 2~3
조각을 컵에 넣고
뜨거운 물을 부으면
"알칼리성 물"이
되며, 매일 마시면
아무에게나 좋습니다.
뜨거운 파인애플 물은
항암물질을 분비하는데,
이것은 의학에서 가장 최근에
개발된 효과적인
암 치료법입니다.
뜨거운 파인애플 과일은
낭종이나 종양을 죽이는
효과가 있습니다.  
모든 종류의 암을
고칠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뜨거운 파인애플 물은
알레르기의 결과물인
신체의 모든 세균과
독소를 죽일 수 있습니다.
파인애플 추출물이
들어 있는 약의 종류는
단지 * 폭력적인 세포들을
파괴할 뿐, 건강한 세포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또 파인애플 주스에
들어있는 아미노산과
파인애플 폴리페놀은
고혈압을 조절할 수 있어
내혈관의 막힘을 방지하고
혈액순환을 효과적으로
방지하고 혈전을 줄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읽고 나서
가족, 친구등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서 건강을 지키세요.
이 메시지를 묻어두지 말고
퍼뜨리면 생명을 구할 수
있습니다.


춘화현상

한국에 초빙교수로 살다가 귀국한 세계적인 정신 의학계 교수에게 한국인의 이미지가 어떻냐고 묻자,
“한국인은 너무 친절하다.
그러나 그것이 그 사람의 인격이라고 판단하면 오해다.
권력 있거나 유명한 사람에게는 지나칠 정도로 친절하지만 자기보다 약하거나 힘없는 서민에게는 거만하기 짝이 없어 놀랄 때가 많다.
특히 식당 종업원에게는 마구잡이로 무례하게 대해 같이 간 사람이 불쾌 할 정도다.

잘 나가는 엘리트일수록 이 같은 이중인격자들이 많다.
잘 알지 못하는 사이거나 VIP인 경우는 난감하다.
한국에서 엘리트 계층에 속한다면 배운 사람이다.
배운 사람일수록 겸손해 하는데 오히려 거만을 떤다.

지식은 많은데 지혜롭지가 못하다.
말은 유식한데 행동은 무식하기 짝이 없다.
게다가 준법정신이 엉망이다.
힘 있는 사람부터 법을 안 지키니 부정부패가 만연할 수밖에 없다.

한국 엘리트들의 또 다른 모순은 자기 잘못을 절대 인정하지 않는 점이다.

회사에서도 뭐가 잘못되면 전부 윗사람 아랫사람 탓이고 자기반성은 조금도 없다.
세상 모두가 남의 탓이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이 너무 네거티브하다.

모여 앉으면 정치 이야기인데 완전히 흑백 논리로 평한다. 호남 친구들과 만나면 박정희, 혹평하는 것. 듣다가 시간 다가고, 경상도 친구들과 만나면 김대중과 문재인을 씹어댄다. 한국에는 존경받는 대통령은 없다.

모두가 이래서 죽일 놈이고 저래서 죽일 놈이다. 국민소득은 3만 달러 수준인데 국민 의식은 500달러 수준이다. 경제가 눈부시게 발전했다고 자랑 하지만 그것은 곧 벼락부자가 되었다는 뜻이다. 벼락부자의 단점이 무엇인가. 그저 남에게 내가 이만큼 가졌다고 자랑하는 것이다.

성공의 의미가 너무 좁다. 돈 있고 잘사는 데도 자기보다 더 잘사는 사람을 부러워하며 항상 뭐가 불만족이다.
춘화현상(春化現象 Vernalization)이 바로 이것이다.

호주 시드니에 사는 교민이 고국을 다녀가는 길에 개나리 가지를 꺾어다가 자기 집 앞마당에 옮겨 심었다. 이듬해 봄이 되었다. 맑은 공기와 좋은 햇볕 덕에 가지와 잎은 한국에서 보다 무성했지만, 꽃은 피지 않았다.

첫해라 그런가 보다 여겼지만 2년째에도, 3년째에도 꽃은 피지 않았다. 그리고 비로소 알게 되었다. 한국처럼 혹한의 겨울이 없는 호주에서는 개나리꽃이 아예 피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온을 거쳐야만 꽃이 피는 것은 전문용어로 '춘화현상'이라 하는데 튤립, 히아신스, 백합, 라일락, 철쭉, 진달래 등이 모두 여기에 속한다.

인생은 마치 춘화현상과 같다. 눈부신 인생의 꽃들은 혹한을 거친 뒤에야 피는 법이다. 그런가 하면 봄에 파종하는 봄보리에 비해 가을에 파종하여 겨울을 나는 가을보리의 수확이 훨씬 더 많을 뿐만 아니라 맛도 좋다. 인생의 열매는 마치 가을보리와 같아, 겨울을 거치면서 더욱 풍성하고 견실해진다.

마찬가지로 고난을 많이 헤쳐 나온 사람일수록 강인함과 향기로운 맛이 더욱 깊은 것이다. 작금의 대한민국 현실이 젊은이들이 짊어지고 겪어야 할 춘화현상이라면 감내해야 할 세대들이 갑갑하게 느껴진다.


가장 늙은 오늘과 가장 젊은 오늘

명사초청 특강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 날의 초청 강사는
명의로 꽤 이름이 높은
권위 있는 의사 선생님이었다.

건강에 대한 대중 강연을 하시면서
그 의사 선생님이
사람들에게 질문을 했다.

첫 번째 "이거 먹으면 오래 삽니다.
이것은 무엇일까요?"

사람들은 잠시 생각하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 때 내 뒷자리에 앉아있던 분이 손을 번쩍 들고 말했다.

"밥입니다. 밥 많이 먹으면 오래 살죠?
밥이 최고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유쾌하게 웃었지만

강사가 원하는 답은 아니었다.

물,  홍삼,  버섯 등
사람들은 여러 가지를 말했다.

어떤 사람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욕입니다. 욕 먹으면 오래 살죠?"
라고 말해 또, 한 번의 폭소를 자아냈다.

사람들이 다양한 답을 쏟아낼 때
강사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

"정답은 나이입니다.
나이 많이 먹으면
오래 사는 거잖아요?"

사람들의 허를 찌르는 재미있는 질문이었다.

모두들 즐겁게 웃었다.
그렇게 사람들을 즐겁게 하시고
 강사는 다시
건강에 대한 강의를 계속했다.
나는 그 질문이 재미 있으면서도
매우 인상적인 면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왜냐하면 스스로에게 이렇게 질문을
해봤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거 먹으면 죽습니다.
이것은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대답도 "나이" 다.
나이 먹으면 오래 살고
또 나이 먹으면 죽는 거다.
먹으면 오래 사는 것과
먹으면 죽는 것에 대한 공통된
대답이 "나이'라고 생각하니
재미있으면서도 무엇인가
머리 속을 두드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 두 가지 질문은
어떤 사람은 나이 먹으며
죽어가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나이 먹으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나에게 말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같은 것을 보면서
다른 생각을 한다.

사람들이 다른 생각을 하는 이유는
다른 정보를 접하고
다른 경험을 하기 때문이 아니다.

같은 경험을 하고
같은 것을 보고 들어도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사람들은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이다.

우리가 많이 들어본 이야기로
아프리카에 시장조사를 간
두 명의 신발회사의 영업사원 이야기를
생각해 보자!

두 명의 영업 사원이 아프리카에 갔다.
신발회사 직원이었던 그들은
아프리카 사람들을 대상으로
신발을 팔기 위해 시장조사를 나갔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아프리카 사람들이
모두 맨발로 다니는 것을 보게 된다.

한 사람은 회사에 보고서를 쓴다.
아프리카 사람들 중에는 신발을
신고 있는 사람이 없음.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는 신발을
팔 수 가 없음.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이렇게 보고서를 썼다.
아프리카 사람들 중에는 신발을
신고 있는 사람이 없음.
그렇기 때문에 신발의 필요성을
조금만 일깨워주면 무궁무진한 시장이
개척될 것임.

우리는 항상 같은 것을 보면서도
서로 다른 생각을 한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무엇을 보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본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더 중요하다.

정보가 돈이라고 하지만
진짜 중요한 것은
정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그것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하느냐 이다.

어려운 난관에 좌절하며
한탄하는 사람이 있다.

“이것 때문에 안 되는구나!"“
나는 왜 이렇게 운이 없을까?”
정말 안 되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

하지만 똑 같은 상황을 기회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이것 때문에 나에게까지
기회가 온 것이구나!"
"이것만 해결하면 큰 행운인데,
다른 사람들은 대부분 여기서
힘들어 하겠군?"
"이게 나에게 기회야!"

같은 것을 보면서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세상은 내 마음 먹기에 달렸다’는
말이 생각난다.

이런 말은 사극에서
어느 도사님이 할만한 대사지
오늘을 살고 있는 나에게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
말처럼 들린다.

하지만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구체적으로 보면 볼수록
도사님이 하는 말씀이 옳다는 것을 느낀다.

오늘 내가 어떤 마음을 먹고 사느냐에 따라
내 인생은 결정될 것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있다.

하나는 거울을 보면서
늙어가는 자신을 한탄하는 것이다.
자신의 과거를 생각하며
 예전에 멋있고 예뻤던 기억을 떠올리며
우울한 오늘 하루를 보내는 것이다.

오늘은 우리가 살아온 날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날이다.

오늘은 우리 인생에 가장 늙은 날이다.
오늘에 대한 또 한 가지의 선택은
자신의 모습에 만족하며
오늘을 즐기는 것이다.

오늘은 내가 살아갈 날들 중
가장 나이가 적은 날이다.
오늘은 내 인생에 가장 젊은 날이다.
나는 젊음을 즐기며
앞으로의 인생을 의미 있고
행복하게 살 것이다.

우리에게는 같은 오늘이 주어졌다.
어떤 오늘을 선택하느냐가
바로, 우리의 인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