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성경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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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 Genesis (제너시스)

출애굽기 - Exodus (엑소더스)

레위기 - Leviticus (리비티커스)

민수기 - Numbers (넘벌즈)

신명기 - Deuteronomy (두털라너미)

여호수아 - Joshua (자슈아)

사사기 - Judges (저지스)

룻기 - Ruth (루쓰)

사무엘 상 - 1 Samuel (쌔무엘)

사무엘 하 - 2 Samuel

열왕기 상 - 1 Kings (킹스)

열왕기 하 - 2 Kings

역대 상 - 1 Chronicles (클로니클리즈)

역대 하 - 2 Chronicles

에스라 - Ezra (이즈라)

느헤미야 - Nehemiah (니허마이아)

에스더 - Esther (에스털)

욥기 - Job (죱)

시편 - Psalms (샴즈)

잠언 -  Proverbs (프라벌브스)

전도서 - Ecclesiastes (이클리지어스티)

아가 - Song of Songs (쏭 오브 쏭즈)

이사야 - Isaiah (아이자이어)

예레미야 - Jeremiah (제러마이아)

예레미야애가 - Lamentations (레멘테이션스)

에스겔 - Ezekiel (이지키얼)

다니엘 - Daniel (대니엘)

호세아 - Hosea (호지어)

요엘  - Joel (조엘)

아모스 - Amos (에이모스)

오바댜 - Obadiah (오버다이어)

요나 - Jonah (죠나)

미가 - Micah (마이커)

나훔 - Nahum (너이험)

하박국 - Habakkuk (해벅컥)

스바냐 - Zephaniah (제퍼나이어)

학개 - Haggai (해가이)

스가랴 - Zechariah (제커라이어)

말라기 - Malachi (맬러카이)

 

신약성경 The New Testament

 

마태복음 - Matthew (매튜-)

마가복음 - Mark (맠-)

누가복음 - Luke (눜-)

요한복음 - John (좐-)

사도행전 - Acts (액츠)

로마서 - Romans (로먼즈)

고린도 전서 - 1 Corinthians (펄스트 커린씨언즈)

고린도 후서 - 2 Corinthians (쎄칸드 커린씨언즈)

갈라디아서 - Galatinas (걸레이션즈)

에베소서 - Ephesians (이피젼즈)

빌립보서 - Philippians (필리피언즈)

골로새서 - Colossians (컬라시언즈)

데살로니가 전서 -  1 Thessalonians (펄스트 데설로니언즈)

데살로니가 후서 - 2 Thessalonians (쎄칸드 데설로니언즈)

디모데 전서 - 1 Timothy (펄스트 티모씨-)

디모데 후서 - 2 Timothy (쎄칸드 티모씨-)

디도서 - Titus (타이투스)

빌레몬서 - Philemon (필리먼)

히브리서 - Hebrews (히브루-즈)

야고보서 - James (제임스)

베드로 전서 - 1 Peter (펄스트 피터ㄹ)

베드로 후서 - 2 Peter (쎄칸드 피터ㄹ)

요한 1서 - 1 John (펄스트 좐-)

요한 2서 - 2 John (쎄칸드 좐-)

요한 3서 - 3 John (써드 좐-)

유다서 - Jude (쥬-드)

요한계시록 - Revelation (레벌레이션)








술 주(酒) / 술 주(酒) / 물 수(水) + 닭 유(酉)


술 주(酒) / 물 수(水) (氵) + 닭 유(酉)

酒(주) 
부수(닭유, 7획)
모양자
酉(닭 유) + 氵(삼수변 수)


酒자는 ‘술’이나 ‘술자리’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酒자는 水(물 수)자와 酉(닭 유)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酉자는 술을 담는 술병을 그린 것이다. 이렇게 술병을 그린 酉자에 水자가 더해져 있으니 酒자는 ‘술’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사실 고대에는 酒자와 酉자의 구별이 없었다. 酉자도 ‘술’이라는 뜻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酉자가 십이지(十二支)의 열째 글자인 ‘닭’을 뜻하게 되면서 지금은 酒자가 ‘술’이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촌(寸)
진한 술 주(酎) - 소주 주(酎)  / ( 燒酒 )

소주(燒酒)(燒酎)

(전국술 주)의 한자 유래
한자 구성원리 | 형성문자

불사를 소
1. 불사르다(불에 태워 없애다), 불태우다 2. 타다 3. 익히다
부수 火  (불화, 4획)
총획 16획

전국술 주
1. 전국술(全-: 군물을 타지 아니한 진국의 술) 2. 세 번 빚은 술 3. (술을)빚다
부수 酉  (닭유, 7획)
총획 10획
뜻을 나타내는 닭유(酉 ☞ 술, 닭)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주(月+寸)의 생략형(省略形)이 합(合)하여 이루어짐.
  • (→燒酒(소주))


술은 알코올 성분이 있어서 먹으면 취하게 하는 모든 음료수를 통틀어 한 말입니다. 구약시대에 일반 민중에게는 취하지 말라고 했으나 성별되어야 할 나실인이나 왕이나 제사장이나 선지자는 아예 먹지 못하게 했습니다 (민6;3, 잠31:4-5, 사28:7, 레10:9). 나실인에게는 생포도든 건포도든 포도 씨든 포도 껍질이든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민6:3-4). 경건하게 살기를 원하는 부모들은 자녀에게 술은 보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잠23:31). 술에 즐기는 자와는 사귀지 말라고 했습니다 (잠23:20). 그 결과가 패망이라는 사실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잠23:21, 사5:11). 신약성경에도 감독(목사)나 집사 등 하나님의 일을 맡은 사람들은 술을 즐기거나 인박이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딛1:7, 딤전3:8). 누구든지 술에 취하는 자와는 사귀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고전5:11, 15:33).

오늘날 우리가 음주의 동기와 목적과 방법과 양 등에 대한 논란을 벌이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바로 살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술을 마시지 말라고 한 이유를 알게 되면 자연히 변론의 여지가 없어집니다.

① 영적 타락을 가져오게 하기 때문입니다. 술은 분별력이 없어지게 합니다. 만일 제사장이 술을 먹게 되면 제사 규례를 잊어버려 제사를 바로 드릴 수 없게 됩니다 (레10:8-11). 혹 왕이 마시게 되면 하나님의 율법을 잊어 버리고 재판을 공의롭게 할 수 없게 됩니다 (잠31:4-5). 선지자가 먹게 되면 하나님의 이상을 바로 해석할 수 없습니다 (사28:7). 호세아서에는 술이 마음을 빼앗아 음행하게 하고 우상을 섬기게 했다고 했습니다 (호4:11-13). 결국 술이 분별력을 없이 하고 하나님에게서 떠나게 만듭니다.

② 정신적 타락을 가져오게 하기 때문입니다. 술은 방탕하게 하고 덕을 상실하게 합니다. 로마서13:13에는 방탕과 술취하지 말며 라고 했고 에베소서 5:18에는 술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라 고 했습니다. 노아는 술에 취하여 장막에서 벌거벗고 있게 되었고, 아들 함이 그것을 보고 누설했다가 저주를 받았습니다 (창9:20-23). 롯은 소돔성에서 나와 굴에 있을 때 술취한 것 때문에 두 딸과 행음하고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두 아들이 이스라엘의 대적인 모압과 암몬 족속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창19:30-38). 술이 도덕적으로 타락을 가져오게 한 예입니다. 술로 인한 타락은 종말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마24:38-39).

③ 육체적 패망을 가져오게 하기 때문입니다. 술은 한번 먹게 되면 습관이 되고 그 습관은 물질을 탕진하게 하고 몸이 병들게 하고 정신적으로 황폐하게 합니다. 잠언21:17에 연락을 좋아하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술과 기름을 좋아하는 자는 부하게 되지 못하느니라 고 했고, 23:21에는 술 취하고 탐식하는 자는 가난하여질 것이요 라고 했고 호세아7:5에는 우리 왕의 날에 방백들이 술의 뜨거움을 인하여 병이 나며 라고 했습니다. 술취하는 생활은 개인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많은 손해를 보게 합니다.

술은 영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해악을 가져오게 하는 매개체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은 술에 취하는 자는 화가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술은 한번 입에 대기 시작하면 절제하기가 힘들고 마침내는 습관화 되게 됩니다. 김유신 장군의 말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아예 보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잠언23:31-35에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 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이것이 마침내 뱀같이 물 것이요 독사같이 쏠 것이며 -또 네 눈에는 괴이한 것이 보일 것이요 네 마음은 망령된 것을 발할 것이며 -너는 바다 가운데 누운 자 같을 것이요 돛대 위에 누운 자 같을 것이며 -네가 스스로 말하기를 사람이 나를 때려도 나는 아프지 아니하고 나를 상하게 하여도 내게 감각이 없도다 내가 언제나 깰까 다시 술을 찾겠다 하리라 고 했습니다.

영적으로 볼 때 무엇이든지 세상 문화와 문명에 관한 것들을 사랑하거나 그것에 도취되면 술취하는 것과 같은 결과에 빠지게 됩니다 (계17:2, 18:3). 그러므로 무엇에든지 그것들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취하려거든 성령께 취하도록 해야 합니다 (삼상1:12-15, 행2:13-15, 엡5:18).








부활의 날(제 삼일)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날부터 부활하시기 전까지 땅에 묻혀 계셨던 시간에 관한 내용이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날 자체가 중요하지는 않지만, 그에 대한 찬반론이 많았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 연구는 매우 흥미로워진다.
그 이유는 기존의 우세한 견해의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금요일 오후에 돌아가셔서 일요일 아침에 부활하신 것이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2:40에 하신 말씀과 상반된다고 지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해당 구절을 읽어보자.

마태복음 12:40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사람들은 금요일 늦은 오후부터 일요일 이른 아침까지를 어떻게 사흘 밤낮으로 볼 수 있느냐는 이유로 많이 혼란스러워 했다.

사흘 낮과 사흘 밤은 얼마의 시간인가?

예수님께서 무덤 안에 계셨던 시간을 아무리 계산해도 사흘 낮과 사흘 밤이 되지 않는다고 믿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루 낮과 하루 밤”이 하루의 일부가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이 견해에 근거해서 다시 말하자면, 하루의 한 시간도 “하루 낮과 하루 밤”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사흘”의 개념에 대해 명확하게 말씀하지 않으신 것이 사실이라 해도, 예수님께서 분명히 사흘 낮과 사흘 밤 동안 무덤에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금요일 늦은 오후부터 일요일 이른 아침까지의 시간(금요일과 토요일)이 하루(토요일)와 다른 하루의 단 몇 시간(금요일의 한 두시간) 즉, 이틀 밤이 채 되지 않기 때문에, 이 주장은 분명 논란의 소지가 있으며 연구가 좀 더 필요하다.

요한복음 19:31과 누가복음 23:50-54

예수님께서 금요일에 십자가 책형을 당하셨다는 논리는 요한복음 19:31과 누가복음 23:54-56, 두 구절에 근거하고 있다.
해당 구절은 다음과 같다.

요한복음 19:31
이 날은 준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누가복음 23:50, 52-53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그가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여 이를 내려 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넣우 두니 이날은 준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다 되었더라.

여기에서 “안식일이 거의 다 되었더라”는 구절이 자정이 거의 다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는데 대해, 독자들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사실, 그 시대의 시간 계산법으로 추정해보면, 하루는 자정이 아니라 해가 지는 시각에 시작되었으며, 4월에는 그 시각이 대략 7시 경이었다.

마태복음 27:46에 보면, 예수님은 “제 9시경”에 돌아가셨고, 이는 현대의 시간으로 말하면 오후 3시경이므로, 성경의 다른 사건과 마찬가지로 위에 기록된 사건에서 예수님이 돌아가신 시간부터 묻히신 시간은 오후 3시경부터 7시경 사이가 된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시간에 대해 모든 사람들이 금요일이었다고 믿는 이유는, 위의 성경 구절에서 말하는 안식일이 그 주의 안식일, 즉 한 주의 7번째 날인 십자가에 못박히신 날의 다음 날이라고 정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안식일”은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이 아니라 다른 특별한 준비일로 사람들이 이를 혼돈했던 것 뿐이다.

2.1 두 가지 종류의 안식일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과는 별도로 다른 특별한 안식일이 있다는 사실은 이스라엘 자손이 지켜야 할 절기의 규정에 대해 언급한 레위기 23장을 통해 알 수 있다. 4-8절 말씀을 함께 읽어보자.

레위기 23:4-8
이것이 너희가 그 정한 때에 성회로 공포할 여호와의 절기들이니라. 첫째 달 열나흗날 저녁은 여호와의 유월절이요. 이 달 열닷새날은 여호와의 무교절이니 이레 동안 너희는 무교병을 먹을 것이요. 그 첫 날에는 너희가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며 너희는 이레 동안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 것이요 일곱째 날에도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니라.

히브리 달력의 첫번째 달은 아빕으로 후에 니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1.
요한복음 19:31과 누가복음 23:53에서 말하는 준비는 유월절과 무교병 절기에 대한 준비였다.
마태복음 27:46에 의하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유월절 규례에 따라 어린 양을 번제로 드리는 니산 제 14일, “9시 경”, 즉 오후 3시 경에 돌아가셨다. 같은 날 저녁 유월절 음식을 먹고, 무교절이 시작되었다. 따라서 안식일이 “거의 다 되었다(누가복음 23:53)”는 것은, 레위기 23:7의 무교절 첫째날을 의미한다.

레위기 23:7
"그 첫 날에는 너희가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며"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며”라는 구절로 인해 무교절 첫째날을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의 개념으로 인식하게 했다. 하지만, 이 날은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2이 아니라, 규례에서 모든 노동을 금하는 특별한 안식일, 즉, 준비일이다. 요한복음 19:31을 보면, 이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요한복음 19:31
"이 날은 준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즉, 안식일은 주마다 돌아오는 안식일이 아니라 준비일, 특별한 안식]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마가복음 15:42에서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날과 해가 저문 후 시체를 받은 날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마가복음 15:42-43
"이 날은 준비일 곧 안식일 전날이므로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경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날은 니산 제 14일로, 아직 유월절을 준비하는 무교절이었다. 위의 성경 구절에서 살펴보았듯이, 이 날은 항상 [“곧”이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안식일 전날”로, 요한복음 19:31과 누가복은 23:52-54의 안식일, 즉 무교절의 첫째 날이며, 그 다음 날이 항상 안식일이 되는 날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날은 (니산 제 15일로) 정해진 날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논하는 구절의 안식일은 매주 돌아오는 날이 아닌 특별한 안식일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무교절 첫째날만이 특별한 안식일이 아니었다. 성경에서는 더 많은 날을 명확하게 “안식일”이라는 단어를 사용해 표현하고 있다. 레위기 23:23-32를 함께 읽어보자.

 

레위기 23:23-3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일곱째 달 곧 그 달 첫 날은 너희에게 쉬는 날이 될지니 이는 나팔을 불어 기념할 날이요 성회라 어떤 노동도 하지 말고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일곱째 달 열흘날은 속죄일이니 너희는 성회를 열고 스스로 괴롭게 하며 여호와께 화제를 드리고 이 날에는 어떤 일도 하지 말 것은 너희를 위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 속죄할 속죄일이 됨이니라 이 날에 스스로 괴롭게 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라 이 날에 누구든지 어떤 일이라도 하는 자는 내가 그의 백성 중에서 멸절시키리니 너희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거주하는 각처에서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 이는 너희가 쉴 안식일이라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 이 달 아흐렛날 저녁 곧 그 저녁부터 이튿날 저녁3까지 안식을 지킬지니라."

 

안식일로 묘사된 일곱번째 달의 첫 날이나 열흘날은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을 의미하지 않으며, 미리 정해진 날짜나 기일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 날을 “안식일”이라 부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주일은 아니었지만 특별한 안식일, “어떤 일”도 하지 말아야 할 준비일로, 주님의 죽음 다음날인 무교절 첫날에는 말그대로 “어떤 일”도 하지 말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특별한 안식일에 대해 언급한 또 다른 구절인 레위기 23:33-36을 읽어보자.

 

레위기 23:33-3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일곱째 달 열 닷샛날은 초막절이니 여호와를 위하여 이레 동안 지킬 것이라 첫 날에는 성회로 모일지니 너희는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며 이레 동안에 너희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 것이요 여덟째 날에도 너희는 성회로 모여서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이는 거룩한 대회라 너희는 어떤 노동도 하지 말지니라"

 

이 성경 구절에 나와 있듯이, 초막절 첫 날과 여덟째 날 모두 “어떤 노동도” 하지 말아야 할 특별한 안식일, 즉, 준비일로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과는 다른 개념이다4.

그러나 “안식일”이라는 단어는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 즉 미리 정해진 날짜의 준비일에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1년 내내 주일과 일치할 필요가 없이 사용되었다. 레위기 25:1-4의 말씀을 읽어보자.

 

레위기 25:1-4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간 후에 그 땅으로 여호와 앞에 안식하게 하라 너는 육 동안 그 밭에 파종하며 육 년 동안 그 포도원을 가꾸어 그 소출을 거둘 것이나 일곱째 해에는 그 땅이 쉬어 안식하게 할지니 여호와께 대한 안식이라 너는 그 밭에 파종하거나 포도원을 가꾸지 말며”

 

위에 살펴본 구절들을 통해 성경에서 말하는 안식일은, 일반적인 주일인 “한 주의 일곱째 날”과, 어떤 노동도 하지 말아야 할 준비일인 특별한 안식일의 두 가지 종류가 있음을 알았다.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은 기일인 반면, 특별한 안식일은 미리 정해진 날짜로, 주중 어떤 날도 될 수가 있다. 특별한 안식일은 무교절의 첫 날로,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다음 날이었다. 그래서 요한복음 19:31에서는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라고 표현하였고,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이 아닌, 주중 어떤 날도 될 수 있는 특별한 안식일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언제 부활하셨는가?

안식일이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다음 날이며 주일이 아닌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사흘 낮과 사흘 밤을 (금요일 늦은 오후부터 일요일 이른 아침까지) 40시간에 끼워 맞추려할 필요가 없어졌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를 그대로 믿으면 돌아가신 날짜를 찾는 것 또한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진실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예수님께서 “땅 속에” 사흘 낮과 사흘 밤을 계셨다면, 예수님께서는 해가 질 때 땅 속에 묻히셨고, 사흘 낮과 사흘 밤, 즉 정확하게 72시간 후, 땅 속에 묻히신 시각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시각에 부활하셨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시각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던 일요일 아침이 아닌 오후, 즉, 해가 질 무렵이 되는 것이다.

사실,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일요일 아침이라고 생각하는 유일한 이유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시각이 여인들이 무덤을 찾아갔던 새벽 바로 직전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기 때문이다 (마가복음 16:1-8).
모두가 알고 있듯이, 여인들이 무덤이 비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여인들이 빈 무덤을 발견한 것이 일요일 아침이라고 해서 예수님께서 무덤을 떠나신 시점이 일요일 아침이 될 수는 없다5.

그렇다면 정확히 언제 부활하셨는가?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정확히 사흘 낮과 사흘 밤을 “땅 속에서” 보내시고, 토요일 오후 해질 무렵, 즉 땅에 묻히신 시각과 일치하는 그 시각에 부활하신 것이 된다.

예수님께서 일요일 새벽이 아닌 토요일 오후에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마태복음 28:1-2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마태복음 28:1-2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위 구절에서 안식일은 무교절 첫날,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준비일”인 특별한 안식일이 아니다.
일주일의 일곱째 날인 주일이다. 주님께서 “땅 속에서” 계셨던 사흘 낮과 밤이 특별한 안식이었던 동시에 주일이었다는 사실은 마가복음 16:1과 누가복음 23:56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마가복음 16:1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누가복음 23:56
"[마가복음 16:1과 동일한 여인들이 (누가복음 24:10 참조)]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더라 계명을 따라 안식일에 쉬더라"

마가복음에서는 안식일이 지나매 여인들이 향품을 샀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누가복음에서는 안식일 전에 (여인들이 미리 향품을 샀다는 의미로) 향품을 준비했다고 되어 있다. 이 두 구절 사이에 모순이 있을까? 그렇지 않다. 왜냐 하면 이 두 안식일은 같은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가복음 16:1에 나오는 안식일은 무교절의 첫날, 즉 특별한 안식일이며, 누가복음 23:56에 나오는 안식일은 주일이다. 두 구절 모두 같은 날 (여인들이 향품을 사고 준비한 날)을 의미하지만, 각 구절에 나오는 안식일의 의미가 다르게 사용된 것이다.

예수님께서 묻히신 사흘 낮과 사흘 밤은 두 가지 의미의 안식일, 즉 특별한 안식일과 주일을 포함하는 것이 확실하니, 이제 마태복음 28:1-2를 통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시간에 대해 알아보자.

특별히 주의해서 읽어야 할 중요한 구절은 “새벽에”이다.
이 구절은 그리스어 동사 "epifosko"를 번역한 것인데 “해가 지다”를 의미한다.
누가복음 23:53-54에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땅에 묻힌 시간을 언급하실 때 이 동사를 사용하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해당 구절을 읽어보자.

누가복음 23:53-54
"[요셉]이 이[시체]를 내려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넣어 두니 이 날은 준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epifosko]."

신약에서 이 두 구절 외에 동사 "epifosko"를 써서 시간을 표현한 부분은 없다.
다시 마태복음 28:1로 돌아가보면, 이 구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시간은 사흘 낮과 사흘 밤 전에 예수님께서 묻히신 시간과 일치하는 해질 무렵이다. 그 시간 무렵,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으로 찾아왔다. 그러나 이들은 무덤을 보기만 하고 돌아갔으며, 마가복음 16:1-2와 같이 자신들이 떠난 후 무슨 일이 일어난지 모른 채, 다른 날 향품을 가지고 돌아왔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2-4절을 살펴보자.

마태복음 28:1-4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즉, 예수께서는 그 사흘 낮 사흘 밤 전 같은 시각에 묻히셨다]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이 일은 언제 일어난 것일까?
1절에 보면,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즉, 예수님께서 사흘 낮과 사흘 밤을 무덤에서 계시기를 마치신 그 시간이다.
그러면 처음부터 다시 정리해보자.

예수님께서는 몇 시에 묻히셨는가?
요한복음 19:31의 준비일과 다른 구절의 특별한 안식일인, 무교절의 첫날이 되기 전 해질 무렵, 즉, 니산 제 14일 해질 무렵이다.

얼마나 땅 속에 계셨는가?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2:40에서 언급하신 사흘 낮과 사흘 밤, 즉, 72시간이다.

예수님께서는 언제 부활하셨는가?
예수님께서는 “안식 후 첫날[일요일]이 되기 전 해질 무렵, 즉, 무덤 안에서 사흘 낮과 사흘 밤을 보낸 후 토요일 오후에 부활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언제 돌아가셨는가?
토요일 오후부터 사흘 낮과 사흘 밤을 거꾸로 계산해 보면, 토요일6이 예수님께서 묻히신 셋째 낮과 밤이고, 금요일이 둘째, 목요일이 첫째가 된다. 따라서, 예수님은 수요일 오후 3시에 돌아가셨고, 같은 날 오후에 묻히셨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그리고 목요일은 무교절의 첫날인 특별한 안식일이 된다. 여인들이 향품을 사고 준비했던 금요일은 평일이었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주일인 안식일은 토요일이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흘 낮과 사흘 밤을 땅 속에서 계실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모순이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면, 전혀 없다.

따라서 결론은 다음과 같다.
날짜 자체에 큰 의미가 없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정확한지 확인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말씀 중 어떤 주제라도 정확성에 오류가 있다는 비난을 받지 않도록 면밀히 검증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진실로 문제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의 전통에는 분명히 부주의성과 잘못된 추정이 있고, 성경의 명확성을 왜곡하는 문제점들이 존재한다.

참고문헌

E.W. Bullinger: The Companion Bible, Kregel Publications, Grand Rapids, MI 49501, 1990

Ralph Edward Woodrow: "Babylon Mystery Religion: Ancient and Modern", Ralph Woodrow Evangelistic Association Inc., 1992

 



각주

1. 출애굽기 12:2, 13:4와 에스더 3:7 참조.

2. 이는 기일이 아닌 첫 달 제 14일, 즉 미리 정해진 날짜였다.

3. “그 저녁부터 이튿날 저녁”은 이 구절에서 시간 계산에 대해 논했던 바와 일치한다.

4. 이 특별한 안식일이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 즉 주일과 같을 때는 일치한다고 말할 수 있다.

5. 이러한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유일한 구절은 마가복음 16:9,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이다. 그러나 고대 필사본에 구두점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부활하셨다는 결론은, 전적으로 쉼표를 찍은 위치에 좌우될 수 밖에 없다. 예수님께서 일요일 아침에 부활하셨다면, 예수님은 무덤 안에서 하루 밤을 더 머무시는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쉼표를 “부활하셨다”는 단어 다음에 찍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함으로서, 해당 구절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로 이해할 수 있으며, 이는 다른 성경 구절의 내용과 완벽하게 일치하게 된다.

6. 그 시대의 시간 계산법을 적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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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개혁자 루커와 칼빈의 성경 해석 차이

루터의 해석

루터의 성서해석은 그의 신학의 근간을 이룬다.
그는 말씀에 기초한 신학을 전개하였다.
그의 성서해석은 ‘문자적 의미 강조’, ‘그리스도 중심적 해석’, ‘실존적-실천적 해석’이라는 세 가지 핵심어로 요약할 수 있다.
이러한 루터의 성서해석의 특성은 시편 51편 해석에서 대표적으로 고찰된다.
그의 시편 51편 해석은 ‘죄인으로서의 인간’, ‘예수 그리스도 를 통한 구원’, ‘의인으로서의 삶’이라는 주제어 아래 의로우신 하나님과 죄인인 인간에 대한 신학적 주제를 부각시키고 있다.

칼빈의 해석

칼빈의 성서해석도 ‘원문을 중요시함’, ‘그리스도 중심적 해석’, ‘목회-실천적 해석’이라는 세 가지 핵심어로 요약된다.
시편을 자신의 영혼을 모습을 보여주는 해부도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삶을 이끌어 가는 모범이라고 인식한 칼뱅은 시편 51편에 대한 해석에서 ‘원문에 철저함’, ‘삶의 근본적 변화를 위한 해석’, ‘교회를 위한 해석’의 특징을 보여준다.

루터와 칼뱅의 성서해석이 보여준 특징들은 당대의 종교개혁을 이루는 원천과 동력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다음과 같은 의미 있는 시사점을 제공한다.

첫째, 본문의 일차적 의미를 중시하라(문자적-역사적 해석)
둘째, 성서가 성서를 해석하게 하라(그리스도 중심적 해석과 성령의 조명).
셋째, 삶의 변화를 일으키는 해석이 되게 하라(실존 - 실천적 해석)

칼빈의 시편연구
1.  칼빈의 시편 이해

칼빈의 시편에 대한 평가는 ‘영혼의 모든 부분에 대한 해부’(anatomiaom-niumanimaepartium)라는 말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사람이 의식할 수 있는 영혼의 정서들 가운데 시편에서 거울에 비추듯 묘사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시편에 나타난 다윗의 삶이 자신의 본보기가 된다고 말한다.
칼빈에게 시편은 자신의 영혼을 모습을 보여주는 해부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삶을 이끌어 가는 모범이기도 하였다.

2. 시편 51편의 해석
(1) 원문에 철저함칼뱅은 자신의 주석에서 무엇보다 원문의 표현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해석한다.
그는 표제어에서 ‘오다’라는 동사가 반복 사용되지만 대조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다윗이 밧세바에게 ‘들어간 후’ 나단이 다윗에게 ‘왔을 때’라는 언급에서 ‘들어감’과 ‘옴’이 히브리어 표현에서는 모두 동일한 동사 <보> (awb)로 표현된다.
동일한 동사의 반복으로 대조적인 의미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그는 시편 51편 4절에 대한 해설에서 먼저 이 구절에 대한 다양한 입장들이 있었음을 언급한 후 이 구절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다.
그는 첫 부분을 “당신께, 오직 당신께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번역한다.
이것은 원문의 순서까지도 고려한 사려 깊은 번역이다.
다윗이 이 진술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현재 자신의 눈과 온 영혼이 하나님께 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께서 말씀하실 때에 당신이 의로우시고, 당신께서 판단하실 때에 당신이 깨끗하실 것입니다.”라는 후반절의 내용도 전반절과 함께 올바른 이해가 필요함을 지적한다.

그는 이 부분을 바울이 로마서 3장 4절에서 인용하고 있음을 말하며, 바울이 히브리어 원문과는 다른 70인경을 인용하고 있음도 지적한다.59) 하지만 이렇게 정확한 문자적 인용이 되지 않고 있다 하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바울의 구약성경 인용이 정확한 문자적 인용에 목적이 두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칼빈은 저자의 의도에서 벗어나지 않는 범주에서 안에서 인용의 자유로움을 인정했다.
이처럼 칼빈은 저자 다윗의 생각이 분명하게 드러날 수 있도록 원문에 근거하여 문법이나 일련의 사고과정, 사회적 환경들을 고려하여 주석한다.
그는 시편 51편을 죄로 물든 인간의 관점에서 해석한다.
그리고 다윗의 상황을 뛰어 넘는 기독론적 해석을 거부하였다.

(2) 삶의 근본적 변화를 위한 해석 칼뱅은 자신의 시편 서문에서 자신의 경험이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를 밝힌다.
자신이 겪은 고통과 갈등의 경험이 시편을 적용하거나 이해하는 데에 매우 큰 도움이 되었다고 말한다.
시편 51편의 해석에서도 자신의 고통스러웠던 실존적 경험이 시편 해석을 위한 좋은 자양분이 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그러한 모든 진술은 삶의 근본적 변화를 목표로 한다.

예컨대, 칼뱅은 1절의 간구가 한 마디 애원으로 끝나지 않음을 지적하며 그 이유를 설명한다.

다윗이 그렇게 “하나님, 당신의 인애(ds,x,)를 따라 나에게 자비를 베푸소서(!n:x').
당신의 긍휼(~ymix]r;)의 풍성함을 따라 내 죄과들([v;P,)을 도말(塗抹)하소서.”라고 반복해서 호소하는 것은 그가 저지를 죄악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두 개의 진술을 연이어 말하는 단순한 평행법이 아니라 죄의 심각성을 인지한 다윗이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자비와 긍휼만을 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70인경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당신이 말씀하실 때 당신은 의롭게 될 것이며, 당신이 판단 받으실 때 당신은 이기실 것입니다.
마지막 부분이 ‘깨끗하실 것이다’에서 ‘이기실 것이다’의 적극적인 의미로 번역되었다.

여기에서 루터와 칼뱅의 차이점을 발견한다.
루터는 위에서도 살펴본 바와 같이 시편 51편을 철저하게 기독론적 관점을 통해 해석하고 있으나 칼빈은 본문의 역사적 의미를 밝히는데 주력하고 있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해설에서 칼뱅의 내면의 변화를 강조한다.
“보소서, 당신께서는 ‘마음속에서’ 진실을 기뻐하십니다.”라는 언급은 표면적 인식으로는 변화의 모습이 부족함을 말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래서 그는 신자의 내적 변화 촉구하며 신자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칼뱅은 제사란 하나님의 은혜를 보증하는 표시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감각적인 존재들이기 때문에 외적으로 드러나는 의식(儀式)적인 활동을 통해 완전한 설득으로 나아간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슬초로 정결하게 하는 의식은 그 자체로 머물러 있지 않고 그것의 본래 목적인 죄용서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지향한다는 것이다(7절). 또한 칼뱅은 10-12절의 진술이 ‘새 피조물’에 대한 간구라고 평가한다. 이전의 진술들이 용서하심에 대한 간구였다고 한다면, 지금부터는 성령의 은혜가 회복되기를 간구하는 내용이라고 말한다. 이때 ‘창조하소서’라는 간구는 기적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을 말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것은 한편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다윗이 자신의 온전한 회복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로 거듭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완전한 회복은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인정할 때 가능하다.64) 그래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고 말한다(17절).

(3) 교회를 위한 해석칼뱅은 주석 서론에서 시편 51편이 하나님께 범죄한 사람들이 교훈을 얻게 하기 위한 예시임을 밝힌다.
그는 ‘의인법(擬人法)’(prosopopoeia)이라는 고전적 개념을 받아들이고 다윗을 ‘표본’으로 이해한다.65) 다윗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신자들이 하늘의 종국적인 처벌에 의해 놀라게 될 때까지 죄 아래 머물러 있지 말고 회개의 요청에 겸손히 따를 것을 가르친다고 말한다.66) 시편이 신자들의 현재의 삶을 위해 실제적인 가르침이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그의 시편 주석에는 51편의 저자를 ‘시인’이라고 명명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으며(예컨대, 7절), ‘우리’라는 주어가 자주 등장한다. 이것은 시편 51편을 다윗 개인의 차원에만 머물게 하지 않게 하며, 독자들을 ‘우리’라고 명명함으로써 시편이 가지고 있는 현재적 의미를 분명히 드러낸다. 특별히 시편 51편 18절이하에 나타난 시인의 간구가 집단적 의미의 교회에 대한 간구로 해석된다. 칼빈은 시인의 눈이 영적인 성전에 고정되어 있다고 말하며, 시인의 간구가 하나님 나라를 위한 간구로 이해된다고 말한다. 7절의 우슬초에 관한 해석에서도 그의 교회적 관심을 볼 수 있다. 칼빈은 우슬초를 뿌리는 행위를 의도적으로 사돌레트(Sadolet, 1477-1547)처럼 성례전과 연결시키지도 않고, 멜랑히톤(Melanchthon, 1497-1560)과 같이 그리스도의 선포와 연결시키지도 않는다. 그는 우슬초에 관한 언급을 당시의 외적 표지가 실제로 지시하는 목적과 연결시켜 “하나님의 은혜”로 해석한다. 칼뱅은 다윗이 범한 윤리적 죄에 대한 회개와 용서를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의 회복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한다. 관계의 회복은 어떤 객관적인 성례가 담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죄인의 ‘찢겨진 심장’만이 필요할 뿐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러한 관계 회복은 교회의 회복을 위한 간구의 출발점이 된다. 이처럼 칼뱅은 자신의 주석에서 단지 시편의 세계에 머물러 있지 않고 당시의 교회와의 연결을 통해 교회를 위한 해석을 시도하였다.

IV. 루터와 칼뱅의 성경해석과 그 함의위에서 우리는 루터와 칼뱅의 성경해석이 보여주는 특징들을 살펴보았다.

루터와 칼뱅의 성경해석이 보여준 특징들은 당대의 종교개혁을 이루는 원천과 동력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의미 있는 시사점을 제공한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위기가 중세시대의 로마 가톨릭 교회가 초래하고 직면해야 했던 위기 상황과 유사하다는 평가 속에서 루터와 칼뱅의 성경해석은 한국교회의 개혁과 갱신을 위한 원천과 동력이 될 수 있을 것이다.70)67)위의 책, 307.68)양신혜, 『칼빈과 성경해석: 교회공동체를 위한 겸손의 해석학』, 260.69)위의 책, 261.70) 2016년 한국기독교학회 제45차 정기학술대회 “종교개혁과 후마니타스(Humanitas): 기독교는 ‘헬조선’ 시대에 희망을 줄 수 있는가?”의 주제발표를 참조하라. 배덕만, “‘헬조선’과 하경택 | 루터와 칼뱅의 성서해석과 그 함의(含意)311. 일차적 의미를 중시하라: 문자적-역사적 해석루터의 성경해석 원칙은 아우구스티누스의 해석학의 근본원리인 성경의 명료성을 수용하여 ‘단순성과 명료성’(brevitasetfacilitas)에 있었다.71) 이러한 성경해석의 원리는 칼뱅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루터와 칼뱅 모두 역사적 어의를 성경해석의 출발점으로 삼았고, 문자적 의미를 그 무엇보다도 중요시했다. 필자는 이것을 본문의 문자적-역사적 의미이며, 본문의 ‘일차적 의미’라고 부른다. 본문의 문자적-역사적 의미(whatitmeant)가 해명되지 않고서는 본문이 오늘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whatitmeans)가 드러날 수 없다.본문의 문자적-역사적 의미를 제대로 규명하지 않은 채 교리적 해석이나 알레고리적 해석에 치우쳐 본문이 오늘날 독자들에게 주는 교훈을 찾는 데에 빠져 있는 한국교회 성경해석의 경향을 경험한다. ‘본문을 정당하게 대하지’ 않고 자기가 일고 싶은 대로 읽고 보고 싶은 대로 보는 경우를 흔하게 목격한다. 그러나 본문 자체에 대한 분명한 이해 없이는 그 다음 단계의 해석과 적용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 종교개혁자들은 본문의 어의에 충실한 이해와 해석으로 그릇된 교회의 모습을 개혁할 수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능한 원전을 살펴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종교개혁자들은 불가타 라틴어 성경 이면에 있는 원전의 의미를 밝혀내어 ‘근원으로 돌아가자’는 모토를 실행할 수 있었다. 원전의 의미를 밝히고 본문이 말하는 바에 충실하게 귀 기울임으로 그동안 성경에 대한 잘못된 해석과 교회의 전통으로 가려져 있던 말씀의 의미를 좀 더 바르고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다. 2. 성경이 성경을 해석하게 하라: 그리스도 중심적 해석과 성령의 조명종교개혁자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성경해석의 원리가 있다면 것은 ‘성경이 성경의 해석자이다’(Scriptura Scripturaeinterpres)는 원리다. 이것은 성경‘개독교’ 시대에 한국교회와 인문주의” 「한국기독교학회 제45차 정기학술대회 발표논문집」 제1권 (2016), 69-113. 임희국은 라가츠(Ragaz)의 해석을 토대로 ‘성령의 내적 증언’이라는 해석학적 원리가 ‘오직 성경’의 종교개혁 원리를 계승하는 한국장로교회의 축자영감설 문자주의와 역사비평학의 성경해석의 극단적 대립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한다. 임희국, “루터 종교개혁의 유산인 ‘오직 성경’에 대한 성찰, ‘성경의 부활’을 기다림,” 『장신논단』 48-4 (2016), 13-35. 71)정기철, “칼빈 해석학의 현대적 의미,” 73. 또한 다음을 참고하라. W. J. Bouwsma, Calvin: A Sixteenth-Century Portrait, 이양호, 박종속 역, 『칼빈』 (도서출판 나단: 서울, 1993), 263.32장신논단|Vol. 50 No. 2을 전체적으로 읽는 안목을 가지라는 요청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성경에 대한 이해가 편중되거나 편파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특별히 중세가 보여주었던 잘못대로 교회의 전통이나 특정 교파의 입장이 성경의 의미를 제한하거나 왜곡해서는 안 된다. 교회가 성경이 무엇을 가르치는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교회가 무엇을 가르쳐야 할지를 결정하게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이 성경을 해석하도록 해야 한다. 성경 본문이 자의적으로 이해되지 않고 다른 성경 본문에 의해서 해석되고 통제되어야 한다. 이러한 해석원리가 지켜지기 위해서 루터와 칼뱅에게는 성경해석에서 두 가지 원리가 있었다. 하나는 ‘그리스도 중심적 해석’이라는 원리이고, 다른 하나는 ‘성령의 조명’이라는 원리이다. 루터와 칼뱅은 이 두 가지 원리에 대한 강조점이 다르긴 했지만, 두 사람에게 모두 두 가지 원리는 매우 중요했다. 이러한 원리는 성경을 통일성을 가진 책으로 보게 하였으며, 성경의 중심 메시지를 놓치지 않게 하면서도 해석자들을 겸손하게 하는 해석학적 제어장치 기능을 하였다. 그리스도 중심의 해석은 성경의 중심을 잃지 않게 하는 변증적 기능을 하였다. 성령은 말씀을 통해서 그리고 말씀 안에서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통해 열광주의적 신앙으로 나아가지 않게 하였으며, 하나님 안에 계신 분으로서 지혜의 전달자 이신 성령은 성경해석의 주체이자 참된 해석자라는 인식을 통해 해석자는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게 된다.이러한 원리들은 해석자가 본문의 주인이 되지 못하게 한다. 해석자는 본문을 좌지우지하는 주인의 자리에서 내려와 본문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경청자의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말씀의 주인이 아니라 말씀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3. 삶의 변화를 일으키는 해석이 되게 하라.

실존-실천적 해석루터와 칼뱅 모두 실천적 성경해석을 지향하였다.
그들은 성경이 교리적 지식을 가르치는 텍스트이거나 예전적 지침을 보여주는 안내서로 머물러 있게 하지 않고 삶의 변화와 성숙을 이룰 수 있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작동하게 하였다.
두 사람이 모두 실천적 해석을 지향하였으나 루터는 좀 더 실존적이었고, 칼빈은 좀 더 목회적이었다고 평가된다.
루터의 성경해석은 학문과 경건의 조화에 그 의미가 있다.
루터는 인간의 삶을 하나님의 앞에서의 삶으로 이해하고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 삶에 대한 지침을 얻고자 하였다.
루터는 성경 안에 인간의 원초적 경험과 감정들이 다양한 상황 속에서 구체화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성경의 인물들의 통해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응답을 얻고자 하였다.
그러한 문제해결은 루터 자신이 성경을 통해 자신이 직접 체험한 내용이자 과정이었다.
그러한 면에서 루터의 성경해석은 상황적이었고, 삶에 현장에 대한 구체적인 적용으로서 그 결과가 나타났다.

칼빈은 성경이 교회의 일상에서 실현해야 할 규칙들을 담고 있다고 보았고, 성경의 언어를 기본적으로 ‘행동의 언어’라고 평가했다.
그러한 면에서 칼빈은 순종을 강조했다.
순종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인식에 이를 수 있다고 말했다.
칼빈이 실천적 성경해석의 모습은 율법을 적극적으로 해석한 것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율법이 의식적-법적 측면에서는 한계를 가지고 있으나 윤리적-도덕적 기능에서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평가했다(tertiusususlegis). 율법은 내적인 정직뿐 아니라 외적인 영적 정의를 이루는 교육적 과제를 수행한다고 말한다.
성경해석의 결과는 신자의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
성경해석은 루터와 칼뱅이 보여주었듯이 삶의 변화를 위한 해석과 적용이 되어야 한다.
이때 삶의 변화는 내면의 삶뿐만 아니라 외적인 삶까지를 포함하는 전인적인 삶의 모습을 포괄한다.

V. 결론

열왕기하 22장 8절에 따르면 요시야의 종교개혁은 성전에서 ‘토라’를 발견함으로 시작되었다.
이것은 ‘하나님 말씀의 재발견’으로 평가될 수 있다.
성경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있지만 그것이 제대로 해석되지 않고 실천되지 않으면 그것은 성전 구석에 파묻혀 있는 것과 다름없다.
‘성경의 재발견’을 통해 성경이 실제적인 영향을 미치도록 해야 한다.
루터와 칼뱅의 성경해석은 교회와 신자들의 삶에서 성경이 작동되어야 함을 가르쳐준다.
성경이 올바로 해석되고 실제적 적용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현실은 아직도 종교개혁자들의 정신과 전통을 제대로 이어가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를 할 수 밖에 없는 처지이다.

루터 종교개혁 500주년의 해를 지나오면서 종교개혁자들이 재발견한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 우리 시대에도 동일하게 살아 있는 말씀이 되길 바란다.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구석구석 흘러 들어가 죽은 바다를 소성케 하였던 물과 같이 한국교회와 성도들의 삶에 변화와 회복을 일으키는 생명 있는 말씀으로 작동되길 소망한다.


마틴 루터 킹의 비폭력 저항의 메시지





김영호 목사
    ( 역사신학 교수, 미동부크리스천 아카데미 원장, 1983년 설립)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당시 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백인들의 차별과 멸시를 받는 세대에 훅인으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백인들과 흑인들의 동등한 법적 사회적 평등과 인권회복의 실현을
전심 전력을 다해 부르짖고 활동하면서 그 수단으로 폭력과 증오범죄가 난무하던 시기에  ‘비폭력
저항운동’과  ‘원수까지 사랑 운동’을 앞장 서서 할 수 있었던 배경과  그런 특이한 메세지의 원동력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를 살펴보자.
 
자료를 찾아보면 그도 예외 없이 어린시절 흑인 어린이라고 차별과 멸시를 받았었다. 킹이 옆집의
백인 쌍둥이 형제와 놀려고 하자 그 형제의 어머니가 “넌 검둥이니까 검둥이들 하고 놀아 !”라고 했고,
킹은 울면서 집으로 돌아왔더니 어머니가 어린 킹을 달래면서 왜 흑인이 차별받게되었는가 그리고
인종차별을 이겨내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한다.
 
심지어 대학시절에 더 심각한 일을 당하였다. 그가 친구들과 식당에서 식사를 하러 갔었는데
백인 식당 주인이 “ 흑인 새끼한테는 음식 안 팔아 !”라며 총을 쏘며 난동을 피워, 경찰이 도착했지만
백인 손님들은 침묵을 지켰다. 몇몇 백인 대학생들이 증언하기로 했지만 KKK등 백인 우익/ 과격단체
들이 압력을 넣는 바람에 증언하는 것을 취소하는 아픈 경험을 했다고한다.
 
이와 비슷한 인종 차별을 당한 것으로 인해 목사가 된이후 인종차별이 반 인륜적이며 성경말씀과
하나님 뜻에 어긋남에 근거하여 인권회복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목사가 되기전 킹은 가정의 유산인 기독교 신앙과 훈련과 부모님 특히 3대째 침례교 목사인 아버지
마틴 루터 킹 시니어의 삶을 통한 기독교 지도자가 되는 가르침에 큰 영향을 받았다.1) 백인 경찰의
인종차별에 당당하고 논리적으로 항의하는 부친의 실천은 어린이였던 루터 킹에게 ‘옳지 않은 것을
보면 굴종하거나 침묵하지 말고 항의 한다’,는 가르침을 주었다. 백인 경찰이 부친에게 “어이, 꼬마
운전면허증 보여줘”라고 하자, “꼬마는 여기 있는 아들입니다. 면허증 여기 있습니다”라고 대꾸하였고,
그 말을 듣고 경찰은 자신의 무례함을 부끄럽게 여겨서 슬거머니 물러났다고 한다. 2)실제전국유색인지위향상협회(NAACP) 애틀랜타 지부장을 맡고 있던 부친은  자랑스런 흑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자주 강조하였고, 비열하고 이중적인 백인에게 당당하게 맞서라고 가르치며 본을 보였다.
3) 1935년 종교개혁 유적지를 둘러보면서 미국의 교계와 사회를 개혁하려면  본래의 이름 마이클보다는
개혁의 선봉자였던 ‘Martin Luther’가 더 좋겠다고 생각하고 본인의 이름을  Martin Luther King Sr.로하고
아들 이름도 Martin Luther King Jr.로 바꾸어 불의앞에 ‘Here I stand !’ 라고 외치며 종교개혁을 이뤄낸
루터의 삶과 정신을 이어 받게 하였다.
 
두번 째로 킹 목사에게 큰 영향을 끼친 이는  미국 사회복음의 아버지로 불리는 Walter Rauschenbusch
(1861-1918)였다.복음의 사회성과 물질성에대한 강조는 이후 킹의 사회운동에 기반을 제공해 주었다.
그는 “사회정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곳에 하나님 나라가 있을 수 없고 사회를 구원하지 못하는 그리스도교는 진정한 의미에서 예수의 가르침에  충실했다고 할 수 없다.내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봉사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고 봉사하는 것이다”라고 가르쳤다.
 
세번 째로 킹의 사상체계를 뒤흔들어 놓은 것은 하워드대학 학장 Mordecai W. Johnson(1891-19760)
박사의 강의를 통해 인도 Mahatma Gandhi(1869-1948)의 비폭력평화주의를 배운 것이었다.간디를
공부하면서 킹은 “산상수훈에 기록된 예수의 ‘비폭력 저항’이라는 메시지가 개인에게만 아니라 인종 및 국가 관계에서도실현가능한 사회적 역량이다”라고 굳게 믿게되었다. 이 영향에 힘입어  1954년
보스톤대학 기독교 윤리학박사과정을 끝내면서 킹은 “사회정의를 추구하는 피억압 대중이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비폭력적인 저항’이라고 다짐하게 되었다.  킹은  간디의 후계자 네루의
초청으로 1595년 2월 3일부터 3월 18일까지 인도여행을 하였다.  간디의 발자취를 따라 뉴델리거리를 걸어보고, 인도의고질적인 계급사회를 폭력을 사용치않고도 간디의 정신으로 개선해나는것을 확인하고 킹 은 다음과 같이 자신의 입장을공개적으로 밝혔다.

                  “인도에 다녀온이후, ‘비폭력 저항’이야말로 억압된 민중이 정의회복,
                    만인평등과 인간의 존엄성을 되찾기위한 투쟁을하여 좋은 결과를
                  가져 오는 최선책임이라는 나의 확신이 더욱 궁굳어졌습니다.간디는
                  스스로의 삶을 통해 우주의 도덕적체계에 전해져 내려오는 보편적 원칙이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우리는 만유인력의 법칙을
                  벗어날 수 없듯이 그 원칙에서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극심한 인종차별과 폭력과 혐오범죄 난무 시기에  이 난제해결위해 고심하던 킹 목사가  위와 같은  교계 안팎의
선두 지도자들의 지식과 가르침에 큰 영향을 받은 사실이나 그의 삶의 배경과  가장 어려울 때  그가내린 결단의
원동력은  살아계셔서 역사를 주관하시고 억압받던 백성의 울부짖음을 들어시고 마침내 꿀과 젖이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신 능려자 하나님을 확실하게  의지하는 믿음과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에서 나왔음이 분명하다.
 
Paul Tillich가 1950년 예일대 강연, ‘존재로의 용기’’(The Courage to Be)에서 “참되고 강력한 용기는 하나밖에
없는 자기 생명을 던질 수 있는 진리와 그 대상을  만났을 때 생긴다”고 했는데  마틴 루터 킹 목사는 폭력은 ‘비폭력저항’으로, 증오문제는 ‘ 원수까지 사랑’으로, 인종 차별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만민평등’으로
해결 할 수 있다는 진리를 하나님말씀과 예수님의  산상설교와 십자가에서 찾았기에 죽음을 두려워 하지않고
흑인만이 아니라 차별받는 모든 ‘작은 자’들을 위해 투쟁해 마침내 승리하여, 1964년 7월 인종, 민족, 종교, 남녀
등의 차이에 따른 차별을 불법화한 미국 인군권법이 제정되었던 것이다.
 
킹 목사가  28세의 청년목사로 몽고메리에서 인종차별하는 버스의 승차거부 운동을 하다가 감옥에서 쓴
다음의 옥중설교의 내용을 또박또박 읽 보면 그의‘비폭력 저항’과 ‘원수까지 사랑’의 원동력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음과 예수님의 십자가 신학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그대를 사랑하리라 우리 집에
 폭탄을 던지고 우리 아이들을 위협해도
 그대를 사랑하리라

  한 밤중에 우리 마을을 습격하여
우리를 때려서 반 쯤 죽여 놓아도
그대를 사랑하리라 

그러나 우리 대장은 예수시오
우리의 깃발은 하나님이시니
결국 어느날인가 사랑이
승리하고 말 것이다

우리의 승리는 우리 흑인만의
승리가 아니라 전 세계에서 차별 받고 사는
모든 작은 자들의 승리이므로 우리는 실제
이중의 승리를 거두게 되고 말것이다 “

어떻게 폭력을 휘두르는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 라는 물음에

킹 목사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하는 일 없이 원수사랑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십자가상의 자기를 저주한 자에게
‘아버지시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일을 알지 못함이니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그들에 대한 용서와 그 극진한
사랑을 우리도 따라야한다고 생각을 바꾸면
우리를 해친 원수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구원받아야 할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고 우리를 일깨웠다

킹 목사는 예수님 말씀과 삶을 생명을 내놓고 따른 신실한 제자였고 우리 모두를 향하여
폭력은 ‘비폭력’으로,
증오는 ‘원수
까지의 사랑실천’으로,
인종차별은 ‘하나님 앞에서 만민평등’으로
승리하라고 가르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