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주간 단상(주보 칼럼)


매월 첫 주일은 간증주일

8월 1일은 제1회 간증주일로 지키려고 합니다.
간증주일이란 주일 예배 후 한 주일동안 삶의 현장에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적용하며 실천하면서 경험했던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지난 16개월 동안 함께 모일 수 없어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8월부터는 매월 첫 주일은 함께 모여 예배하므로 인도자의 지휘를 따르는 예배 형식이 아니라 팬데믹 시대를 지내며 느끼고 경험한 나의 이야기를 소개하며 함께 기도하려고 합니다.
개혁교회의 예배가 설교 중심으로 진행되었으나 함께 모일 때는 삶의 현장에서 느끼고 경험하며 실패한 것도 서로 이야기하여 신앙의 삶을 진솔하게 나누며 더 많은 경험을 쌓아가려고 합니다.
예배를 위하여 그동안 경험했던 개인의 간증을 짧게 준비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준비한 간증을 서로 나누며 친교의 의미를 먹고 마시는 것에서 나의 삶을 소개하므로 더 친밀한 교제를 기대합니다.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하리라.”(누가복음 12:9)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고린도후서 10:18) 
어려운 시기를 지나면 비록 서로 모이지 못할지라도 관심과 사랑으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앞으로 다가올 환난의 시대를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도록 함께 결단하고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가정에서는 남편과 아내와의 관계가 가장 중요합니다. 이 관계가 먼저 바로 되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입니다. 자녀들은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해야 합니다(엡 6:1). 무조건 부모가 시키는 대로 복종하라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요구하시는 대로 부모가 교훈하고 지도할 때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부모가 하나님의 뜻대로 가르칠 때 그대로 순종하는 것이 자녀가 복 받는 길입니다. 옳은 가르침과 지도에 순종할 때 그의 인격과 생애가 바로 되어 장수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많은 사람에게 유익을 줄 수 있습니다. 이것이 5계명에 따르는 약속된 축복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출 20:12). 
      자녀를 어릴 때부터 바르게 교훈하고 지도해서 바른 심성(心性)과 관계와 행동을 가질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부모의 의무입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잠 22:6). 자녀의 가장 훌륭한 교사는 부모입니다. 학원과 학교에서는 바른 마음을 가지고 행동할 수 있도록 효과적으로 교훈 받기 어렵습니다. 부모가 어려서부터 바른 교훈으로 지도하여야 합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엡 6:4)고 하셨습니다. 
      자녀가 어릴 때는 자기 부모를 최고로 여깁니다. 그 때에 잘 가르쳐야 합니다. 자녀가 크면 부모가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부모는 자녀가 어렸을 때 더 뜨거운 사랑으로 자녀를 양육합니다. 자녀들이 보모를 존경하고 전적 의지할 때, 부모들도 자녀를 희생적으로 사랑할 때는 자녀가 어릴 때입니다. 그 때 바른 방향을 잡아주어야 합니다. 
      초달(회초리로 볼기나 종아리를 때림)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잠 13:24).
성경은 회초리로 때리는 것을 캐캐묵은 옛날 제도로 인정하지 않고 아이들을 징계하는 원칙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회초리를 때리면 그것으로 반성하고 교정이 되는 것보다는 반발심으로 더 악해지는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회초리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잘못할 때 심신에 타격을 주어서 잘못에 대한 결과로 이런 고통을 받는 것임을 배우도록 할 필요가 있습니다. 죄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징벌하신다는 것을 어렸을 때부터 가르치면 그것이 가장 효과적입니다.

 

      자녀에 대한 부모의 책임 
      교회에서는 어린이들과 젊은이들을 직접적으로 바로 잡는 식의 교훈으로는 효과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부모만이 네가 잘못했다. 그 벌로 회초리를 맞아라 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목사나 교사가 그렇게 한다면 당장에 반발할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 어머니도 나를 이런 식으로 대하지 않는데 당신이 뭐길래 나를 때리려고 하느냐 고 하면서 나갈 것입니다. 세상은 점점 그렇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가정만큼 효과적인 학교는 없습니다. 교회나 사회의 교육기관이 해주기를 바라지말고 가정이 그 자녀들을 맡아서 사랑으로 교정하여 바른 사람을 길러내어야 합니다. 교회에서와 사회에서 문제아로 기르지 않아야 합니다. 
      가정은 이 세상에 하나님의 백성을 길러내는 기관입니다. 그리스도인 남녀가 결혼하여 이루게 하신 가정은 하나님의 백성을 길러내는 그릇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모든 가정이 다 생물학적인 생육과 번성의 임무를 이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녀가 없는 가정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정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단순한 생물적인 생육과 번성만이 가정의 존재 목적은 아닙니다. 생육과 번성 그 자체는 단순히 생물학적인 현상에 불과합니다. 거기서 멈추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을 발판으로 해서 하나님의 백성을 길러내야 합니다. 
      자녀를 위해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쳐야하는 부모의 책임을 잘 감당하지 못한 결과로 생육해 나온 자녀가 마귀에게 속한 죄악의 사람들이 된다면 생육과 번성이 없는 편이 더 낫습니다.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반대하는 세력에 가담한 개악한 자녀들이 나온다면 자녀를 낳아 기른 의미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도 자식은 꼭 필요하다는 것은 순전히 이 세상 믿지 않는 자들의 생각이지 신앙적인 생각은 아닙니다.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어 공부시키는 것으로 부모의 양육 책임을 다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자녀를 노엽게 하지말고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엡 6:4)고 하셨습니다. 내 자녀이기 전에 하나님의 자녀인 줄 알아야 합니다. 자기가 맡아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지 자기의 소유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을 주의 교양과 훈계로 잘 양육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자녀를 양육할 때 자녀 개개인의 인격을 존중해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성장할 수 있도록 잘 돌보아야 합니다. 자녀가 어렸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매사에 하나님께 순종하고 또 의지하는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세상을 살면서 의지할 이는 부모도 형제도 친구도 사회 기구도 아닌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신 사실을 삶을 통해 배우도록 해야 합니다. 기도하면서 자녀에게 좋은 본을 보이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부모가 원하는 대로 양육되기 어렵지만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잠 22:6) 하신 약속을 굳게 믿고 부모의 양육책임을 이행해야 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얻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진리로 살아가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이것이 자녀에 대한 부모의 의무입니다. 부모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어린 시절에 특별히 많이 가르쳐야 합니다. 장성한 다음에는 효과적으로 가르치기가 어렵습니다. 
      어릴 때 진리를 가르쳐 놓으면 장성한 후 탕자의 길을 가더라도 나중에 반성하고 돌아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정성껏 가르치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손에 부탁해야 합니다. 모세의 부모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데로 최대한 모세를 양육하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손에 의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맡아 잘 길러 귀하게 쓰셨습니다. 
      자녀에게 부당한 요구를 하여 자녀를 노엽게 해서는 안됩니다. 밤낮 오냐 오냐 하여 저 밖에 모르는 인간으로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자녀의 인격을 존중하여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칭찬해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의 장점만 믿고 우쭐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가정에서 존경받지 못하고 멸시를 받으면서 자라면 열등감을 갖게 됩니다. 열등감과 우월감을 갖지 않고 겸손할 줄 알고 존경할 줄 아는 인격자로 길러야 합니다.

 

      맺는 말 
      가정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가정이라는 그릇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를 양육해 내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를 길러내는 것은 생각지 않고 인간의 욕망만 채우려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결혼의 거룩한 목적을 무시해 버리는 것입니다. 
      가정의 목적으로서 더 근본적인 것은 부부가 동일한 인생 목적을 가지고 협력해 가는 것입니다. 자녀가 없을지라도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할 가정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하고 참된 사명에 부부가 협력함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할 때에 가정이라는 이상적인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할 수 있습니다. 부부가 함께 하나님의 계시 진리를 지키며 그것을 전해 나가는 것이 가정의 가장 근본적인 목적입니다. 부부가 다같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진리의 길에 서서 순종으로 나아갈 때, 그 가정은 참된 교회의 아름답고 힘있는 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5월 30일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믿지 않는 자의 가정과 다릅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그리스도께서 주인이십니다.
그러므로 가족은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에 있어서 모범이 되는 사람, 즉 신앙에서 앞선 가족을 따라가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고, 피차 복종하는 남편과 아내가 되어야 합니다.      
아내들은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고, 남편들은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하라고 했습니다.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 같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남편이 무슨 주장을 해도 복종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순종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뜻인 진리 안에서 지도할 때 복종하라는 뜻입니다. 남편과 아내는 피차 복종하고 사랑하되 그리스도의 지체로 알고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고, 그리스도께 복종하듯 피차 순종하여야 합니다.

 
    








5월 23일

"가정(家庭)" 이란 한자의 훈(訓)은 "집 가(家)" "뜰 정(庭)"으로 "집에 있는 뜰"을 말합니다.
뜰에는 각종 식물과 나무를 심어 가꿉니다.
가정이란 뜰에는 특별한 식물과 나무가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아버지라는 나무(父)와 어머니라는 나무(母)에서 태어난 아들이란 나무(子)와 딸이란 나무(女)가 자랍니다.      

성경적인 가정은 혈통 관계와 사랑의 관계로 맺어집니다.
가정의 구성은 부부(夫婦)로 시작하여 자녀(子女) 그리고 손자(孫子)와 손녀(孫女)로 번성합니다.
전통적인 가정의 개념이 현대 사회에서는 다양한 구도로 나타납니다.

성경적 가족 관계는 동일한 믿음이 대를 이어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지는 것입니다(딤후 1:3-5).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라 하셨습니다(마 12:46-50).
단순한 혈통관계보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에 협력하는 관계를 더 중요하게 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모친 마리아를 제자 요한에게 부탁하면서 "보라 저가 내 모친" 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모친을 자기 집에 자기 모친으로 모셨습니다(요 19:26-27).

가정 제도를 내신 하나님의 목적은 하나님을 뜻을 이루는 일에 가족 구성원들이 서로 협력하게 하신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께 사명을 받은 자요, 하와는 하나님께 받은 사명 수행의 협력자로 아담과 한 가정을 이루게 하신 것입니다.      
가족들이 함께 연대하여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다면 그 가정은 하나님 보시기에 진정한 요건을 갖추지 못한 가정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함께 하는 가정이 되려면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는 일에 협력하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5월 16일 스승의 주일

스승의 주일을 맞이하며

스승의 주일을 맞이하여 스승의 노래 가사를 소개합니다.
작사자는 “강소천” 작곡자는 “권길상”입니다.

1절, 스승의 은혜는 하늘같아서 우러러 볼수록 높아만 지네
참되거라 바르거라 가르쳐 주신 스승은 마음의 어버이시다
아아 고마워라 스승의 사랑 아아 보답하리 스승의 은혜
2절, 태산같이 무거운 스승의 사랑 떠나면은 잊기 쉬운 스승의 은혜
어디간들 언제인들 잊사오리까 마음을 길러주신 스승의 은혜
아아 고마워라 스승의 사랑 아아 보답하리 스승의 은혜
3절, 바다보다 더 깊은 스승의 사랑 갚을 길은 오직 하나
살아생전에 가르치신 그 교훈 마음에 새겨
나라 위해 겨레 위해 일하오리다
아아 고마워라 스승의 사랑 아아 보답하리 스승의 은혜

철학자 플라톤은 그의 인생에서 세 가지 감사는 “첫째는 헬라인으로 태어난 것, 둘째는 남자로 태어난 것, 셋째는 소크라테스를 만난 것”이라고 합니다.
소크라테스와 같은 스승을 만났기 때문에 플라톤이 있었다는 것은 스승의 가르침이 얼마나 위대했는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인의 영원한 스승입니다.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렸을지라도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인생은 어리석은 부자와 같습니다.
오래 전에 어느 가정에서 성경 과외 공부를 부탁하여 두 자녀에게 성경을 가르쳤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성경 과외공부를 생각했던 부모님의 마음처럼 자녀들에게 영원한 스승이신 예수님을 보여주는 삶을 회복하여 세상을 변화시켜 봅시다.





5월 9일 어버이주일


어버이 주일을 맞이하며

한문자의 “효도 효(孝)”자의 유래를 살펴봅니다.

어느 마을에 연로하신 어머니와 아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장날이 되어 아들은 지게에 나뭇단을 짊어지고 장으로 팔러 나갔습니다.

어느 덧 해가 기울기 시작하며 장으로 갔던 마을 사람들이 하나 둘씩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아들을 기다리던 어머니는 힘든 걸음으로 마을 앞 언덕 위까지 걸어갔습니다. 아들은 걸음이 불편한 어머니가 언덕 위까지 걸어오시느라 얼마나 힘 드셨을까 안타까워하며 어머니를 지게에 앉혔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를 짊어진 후에 집으로 돌아옵니다.

아들은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어머니 다음부터는 언덕에서 기다리지 마시고 집에서 기다리세요!”


“효도 효(孝)”자를 분해하면 “늙을 노(耂)”와 “아들 자(子)” 두 글자가 합성하여 만든 것으로 아들이 노인을 업고 가는 형상이라고 하겠습니다.


“너희는 나이 많은 노인을 공경하며 높이 받들어 모시고
나를 두려운 마음으로 섬겨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이다.”
(현대인의 성경, 레위기 19:32)


불편한 걸음으로 아들을 기다리기 위하여 언덕을 올랐던 연로하신 어머니처럼 효도는 자식의 입장에서 부모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입장에서 자식을 생각하는 그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 아닐까요?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이 없다”는 속담처럼 근심과 걱정의 대상이 되는 자녀가 아니라 편한 마음을 갖도록 바람이 불어도 흔들림이 없는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다짐해 봅니다. 왜냐하면 이런 날을 맞이할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어느 누구도 정확하게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










한문자의 "효도 효(孝)"자의 유래를 살펴봅니다.

어느 마을에 연로하신 어머니와 아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장날이 되어 아들은 지게에 나뭇단을 짊어지고 장으로 팔러 나갔습니다.
어느 덧 해가 기울기 시작하며 장으로 갔던 마을 사람들이 하나 둘씩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아들을 기다리던 어머니는 힘든 걸음으로 마을 앞 언덕 위까지 걸어갔습니다.
아들은 걸음이 불편한 어머니가 언덕 위까지 걸어오시느나 얼마나 힘 드셨을까 안스러워 하며 어머니를 지게에 앉혔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를 짊어진 후에 집으로 돌아옵니다.
아들은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어머니 다음부터는 언덕에서 기다리지 마시고 집에서 기다리세요!"

"효도 효(孝)"자를 분해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늙을 노(耂)"와 "아들 자(子)" 두 글자가 합성하여 만든 것입니다.
아들이 늙은이를 업고 가는 형상이라고 하겠습니다.

"너희는 나이 많은 노인을 공경하며 높이 받들어 모시고 나를 두려운 마음으로 섬겨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이다."(현대인의 성경, 레위기 19:32)

불편한 걸음으로 아들을 기다리기 위하여 언덕을 올랐던 연로하신 어머니처럼 효도는 자식의 입장에서 부모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입장에서 자식을 생각하는 그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 아닐까요?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이 없다"는 속담처럼 근심과 걱정의 대상이 되는 자녀가 아니라 편한 마음을 갖도록 바람이 불어도 흔들림이 없는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다짐해 봅니다. 

왜냐하면 이런 날을 맞이할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어느 누구도 정확하게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시편 90:12)





물맛이 가장 좋을 때의 온도는 섭씨 13도라고 합니다.
약수터의 물 또는 깊은 우물의 물이 시원하고 맛있게 느껴지는 것은 물의 온도가 13도에서 15도 사이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예전에 어른들이 식사 후에 숭늉을 마시면서 "아 시원하다!"고 말했습니다.
이때 숭늉물의 온도는 70도 라고 합니다.
찬물은 13도에서 더운 물은 70도에서 물의 맛이 최고라고 합니다.
그런데 가장 맛이 없는 물의 온도는 40도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체온을 기준으로 물의 온도가 나타날 때(35도-40도) 그 물이 가장 맛이 없다고 합니다.

즐겨 마시는 커피의 맛은 63도 또는 64도라고 합니다.
커피잔에 뜨거운 커피를 붓고 그 안에 설탕과 밀크를 넣어서 젓게 되면 대략 64도가 된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은 가장 큰 계명입니다.
가장 큰 계명을 실천할 수 있는 누구에게나 공통된 것은 부모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부모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부모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이웃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최고의 가랑은 100도에서 시작합니다.
사랑의 온도가 낮아지면 낮아질수록 가정은 점점 더 냉랭해 질 것입니다.
세상은 점점 더 잘못된 방향으로 흔들릴 것입니다.

어버이주일을 맞아 사랑의 온도를 최고로 높일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음식에는 종류에 따라 가장 맛있게 느껴지는 온도라는 것이 있다.
예컨대 물맛은 수돗물이나 약수터 물의 경우 섭씨 13도 일 때가 가장맛있다고 한다.
깊은 우물의 물이 시원하고 맛있게 느껴지는 이유 역시 그 온도가 13도에서 15도 사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땅 속의 물을 정화시키고 나서 그 온도까지 인간이 먹기 알맞도록 만드셨다.

또한 이 온도 이외 물에는 또 하나의 맛의 온도가 있다.
70도가 그것이다.
지금은 아깝게도 사라진 풍경이지만 옛날 우리 조상들이 식후에 즐겨서 마시던 숭늉의 온도가 바로 그 온도이다.
이런 것들을 볼 때에 우리 조상들의 지혜가 얼마나 특출했는가를 알 수 있다.그러나 현대의 지혜자라고 자부하는 우리가 그러한 좋은 것들을 다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 참으로 어리석은 행동이며 안타까운 일이다.그리고 물이 가장 맛이 없는 온도가 바로 35도에서 40도 사이이다.즉 우리의 체온(37도)을 중심으로 하는 온도일 때가장 맛이 없는 것이다.

 또 커피에도 맛의 온도가 있다.63도에서 64도 사이다.미국의 경우 커다란 커피잔에 펄펄 꿇는 커피를 붓고 설탕 한스픈을 넣고 밀크를 한두 방울 떨어 뜨린후 휘저으면 바로 64도가 된다고 한다.커피잔 하나만드는 데도 기가 막히게 과학의 지혜가 가미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도 적당한 온도가 있다.그것은 바로 차든지 아니면 뜨겁든지라고 요한 사도가 지적하는 것처럼 분명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토해 버리겠다고 주님은 말씀하셨다.신앙적인 바른 온도는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100도로 뜨거워야 한다.차거운 것도 문제이다.그런 사람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차거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계3:15-16 보면 신앙인의 온도를 잘 알수있다.







5월 2일 어린이주일

가정(家庭)의 달 5월을 맞이하며

“5월을 계절의 여왕”이라고 합니다.
‘어린이 날, 어버이 날, 스승의 날, 입양의 날, 성년의 날, 부부의 날’과 같은 가족 또는 인간관계를 위한 기념일을 정하고 화합과 친목을 강조합니다.
가정은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혈연이라는 인연을 맺고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삶의 안식처로서 삶이 시작되고 끝나는 곳입니다.
예로부터 가정의 평화가 만사(萬事)를 이룰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家和萬事成).
그러나 오늘날은 가정에 대한 이해가 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공업화, 도시화, 세계화라는 경제적 변화에 따라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워졌으나 정신적으로는 상대적으로 빈곤해졌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미국 국무장관을 역임한 "콜린 파월" 대장이 군 생활을 마치고 유력한 대통령 후보로 거론될 때 그의 부인은 “나는 대통령보다 가정이 더 소중하기 때문에 대통령 출마를 반대했다.”는 이야기는 가정의 가치가 세상의 지위와 명예보다 더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이야기가 아닐까요?

5월 가정의 달을 맞이하면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가정이 사랑과 신뢰의 공동체로 세워져서 세속의 가치에 따라 흔들림이 없는 천국 가정으로 세워지기를 기도합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시편 127:1)


1월 3일 신년주일

그 말씀 그 찬송(시편 106:12)
“이에 저희가 그 말씀을 믿고 그 찬송을 불렀도다.”

2021년 신년주일을 맞이하며 신앙생활을 위한 표어 “그 말씀 그 찬송”을 소개합니다.
중국 우한 땅에서 시작한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 세계로 확산되어 “팬데믹” 골짜기로 몰고 갔습니다.
죽음의 골짜기와 같은 아골 골짜기에서 “그 말씀 그 찬송”은 희망을 갖게 합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은 “주님의 말씀”이며 “그 찬송”은 주님을 찬송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은 죽음의 골짜기에 갇힌 우리들에게 “저가 그 말씀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사 위경(危境)에서 건지시는도다.” 라고 약속합니다(시 107:20).

“그 찬송”은 죽음의 골짜기에 가득한 마른 뼈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수많은 하나님의 군대로 일으키신 능력의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

1월의 성구를 소개합니다(요한복음 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한 알의 밀알로 시작합시다. 그리고 동지섣달을 맞이할 때는 열매 맺은 것을 함께 나누며 찬송을 불러봅시다.

1월의 찬송을 소개합니다(432장 너 근심 걱정 말아라)
Civilla D. Martin (1866-1948)이 작사하고 Walter S. Martin (1862-1935)이 작곡한  ‘너 근심 걱정 말아라’ 찬송가입니다.

이 찬송가는 Martin 부부가 New York 주 Lestershire 에 있는 성경학교( Practical Bible Training School)에 John A. Davis 교장과 합동으로 찬송가를 제작하기 위하여 방문하였을 때 작사 작곡된 찬송입니다.

잘 알려진 침례교 부흥사였던 남편 Martin 목사는 학교로부터 상당히 떨어진 교회에서 주일 저녁 설교를 부탁받았습니다.
설교를 맡은 주일 아침에 부인 Civilla는 갑자기 아프게 되어 남편과 함께 갈 수가 없었습니다.
Martin 목사는 아픈 아내를 두고 자리를 비우는 것이 염려되 설교 약속을 취소할까도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때 이를 보고 있던 9살 된 어린 아들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아빠, 하나님께서 오늘 아빠가 설교하길 원하신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그렇다면 아빠가 자리를 비우더라도 하나님께서 엄마를 돌봐주시지 않겠어요?”

아들의 말에 공감한 Martin 목사는 그 날 주일 설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고, 그의 아내는 무척 호전되어 있었습니다.
사실 그녀는 남편이 설교하러 가 있는 동안 그녀도 아들이 했던 말에 영감을 받아 글을 적었습니다.
그 글을 보고는 Martin 목사는 다음 날이 되기 전까지 그 가사말에 곡을 붙였습니다.

Civilla는 작곡된 찬송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너 근심 걱정 말아라’ 찬송 가사는 제 남편이 설교하러 갔던 주일 오후에 쓰여졌습니다.
그가 돌아왔을 때, 저는 남편에게 가사를 주었죠. 그는 즉시 풍금에 앉아 곡을 썼습니다.
그 날 저녁, 남편과 두 명의 선생님은 완성된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준비하던 Practical Bible Training School의 노래집에 수록되게 되었죠.”

주님이 돌보심을 순종함으로 체험한 부부의 감사와 헌신이 만들어낸 귀한 찬송가입니다.

1월 10일 성탄 후 제3주

북한어 성경 보내기 운동에 참여하면서
파트리스교회를 시작하면서 우리의 다짐은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교회의 본질은 “선교”와 “구제”로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세워지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설립 취지에 따라 북한의 결핵환자에게 약품과 식량을 공급하는 일에 참여했습니다(유진벨 재단 주관 환자 1인당 매월 $270). 그리고 북한어 성경을 북한 주민들과 중국에 흩어져 있는 탈북인들 그리고 지하교회 성도들에게 공급하는 일에 동참한 것이었습니다(모퉁이돌 선교회 주관 성경 1권당 $15). 2020년에는 매월 6권($90)을 후원했습니다.
북한어 성경을 보급하는 사역자를 “성경 밀수꾼”이라고 합니다.
20년 12월호 카타콤소식지에 소개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해방 전부터 예수를 믿었던 할머니를 만났다. 이제 90세가 넘은 할머니는 43년 동안 지하교회 리더로 활동해 왔고 지금도 여전히 활동하고 있다고 합니다. “어떻게 예배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있느냐?” 라는 밀수꾼의 질문에 “우리야 자유롭게 예배할 수 없으니 그냥 옛날과 같이 산에 올라가서 손으로 써서 묻어 놓은 말씀을 꺼내서 읽기도 하고 통째로 외운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디요. 우리 조선에서 가장 안전한 방법은 성경 없이도 통째로 외운 말씀을 묵상하는 거이디요.” 일꾼은 다시 할머니에게 “그럼 성경을 얼마나 외우십니까?” 라고 질문했습니다. 그러자 그 할머니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 4복음서와 신약, 시편, 이사야, 전도서를 암송하디요. 우리 북조선 성도들 대부분이 4복음서를 외우디요.” 이렇게 이야기하는 할머니는 성경 밀수꾼에게 “선생, 남조선 성도들도 우리처럼 이렇게 성경을 외우면 신앙생활을 하면 환난이 다가와도 끄떡없을 것입니다.” 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북한어 성경을 중국에 흩어져 있는 탈북자들과 북한의 성도들에게 생명의 양식인 성경을 보내는 일은 우리 모두의 사명입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행하실 통일을 위해 북한 사람들이 이해하기 쉬운 그들의 언어로 번역된 북한어성경을 배달하는 일에 기쁨으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북한의 590만 모든 가정에게(2013년 통계청 자료) 북한어 성경 한 권씩을 보내기까지 이 사역을 계속 지원할 것입니다.
지난 성탄 선물로 북한어성경 160권($2,400)을 지원할 수 있도록 관심을 갖고 함께 협력하신 모든 성도들에게 감사합니다. 또한 이 사역을 담당하는 선교회를 위하여 기도로 도와주시기 바라며 통일의 준비를 기도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작은 힘으로 모아 직접 참여하므로 통일을 준비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1987년 10월의 어느 날 동독과 서독을 가로막은 베를린 장벽 앞에서 안내하던 독일 목사님(Dr. Fritz)은 제게 이런 조언을 하셨습니다.

"너희들은 통일을 위하여 온갖 기도를 다 하고 있다.
철야기도, 금식기도, 연합기도, 릴레이 기도 등과 같이 수 십년을 기도하지만 하나님은 너희들에게 통일을 주시지 않았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느냐?
통일을 준비하지 않는 것이다.
준비 없이 통일을 맞이하면 더 큰 혼란만 다가올 것이므로 교회가 먼저 앞장 서서 통일을 기도하며 준비해야 할 것이다."

준비 없는 막연한 기도가 아니라 통일을 준비하며 기도하는 믿음이 무엇일까?
준비하는 작업을 위하여 통일 기금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교인 1인당 1주일에 1불씩 적립하는 운동입니다.
그리고 북한 사역에 참여하기 위하여 결핵 환자 돕기와 북한어 성경 보내기 운동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1월 17일(성탄 후 제4주)

"그 말씀 그 찬송"은 2021년 신앙생활을 위한 표어입니다.
표어 성구는 "이에 저희가 그 말씀을 믿고 그 찬송을 불렀도다."(시편 106:12)

지금은 정지(Stop)가 아니라 녹음중(On Recording) 입니다.

팬데믹(Pandemic) 세상에서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고 주일을 맞이하게 하신 임마누엘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날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을 붙잡고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주님의 은혜를 직접 체험하므로 이전 보다 더욱 주님을 사랑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멋지게 세워지기를 기대합니다.

녹음기의 일시 정지 버튼은 녹음 작동을 멈춘 것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다음 진행을 위한 대기 상태라고 하겠습니다.
정지 버튼을 눌렀다고 녹음기가 고장난 것이 아니라 잠시 멈춘 것 뿐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모든 것이 멈춘 것같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같지요?
그러나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하나님의 일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단지 우리의 눈에 멈춘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녹음기의 정지 버튼을 누르면 빨간 불이 깜빡이며 작동하고 있다는 신호를 보냅니다.
너무 익숙하게 계속되던 일상적인 것들이 코로나 바이러스 정지 버튼에 의해서 멈춘 것같지만 하나님의 일은 지금도 계속 진행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누가 진행할까요?
새벽을 깨우는 일에 참여합시다.
파트리스 공동체의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이지는 못하지만 여전히 각자의 맡은 자리에서 자기 일을 성실하게 감당하고 있음에 감사할 뿐입니다. 비록 몸은 서로 떨어져 있어도 마음은 그 말씀을 믿고 그 찬송을 부르며 한자리에 모인 영적인 즐거움을 함께 누려야 하겠습니다.

모두 주 안에서 평안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샬롬!


하루를 시작하는 이른 시간 모두가 새벽을 깨우는 일에 동참하여 그 말씀 그 찬송의 은혜를 함께 나누며 하루의 삶을 계획하시기 바랍니다.  

카톡 이야기(01-17-2021 / 주일 아침)
신묘막측한 하나님의 섭리

시편  139: 14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I praise you because I am fearfully and wonderfully made; your works are wonderful, I know that full well.

“심히 기묘하심”이란 말을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신묘막측[神妙幕測" 이라고 번역 하였다.

신묘막측이란 “엄위하고 기이하며, 비상하여 감히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묘하다”는 뜻이다.

영어 성경에서는 "경이롭고(Fearfully)" 또는 "놀랍고(wonderfully)" 라고 번역하였다. .

하나님께서 인간을 신묘막측하게 지으셨다.
심리학자들이 실험을 통하여 발견한 것은 사람이 좋은 일이 있어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기뻐하면 좋은 일이 생긴다고 한다.  

마음이 울적하고 몸이 힘들 때  거울을 보고 활짝 웃으며 하나님께 감사하면 우울한 마음이 사라지고 몸도 가벼워진다고 한다.

그 이유는 웃을 때 움직이는 얼굴 근육이 뇌를 자극하여 몸에 좋은 호르몬을 유발시키기 때문이라고 한다.

기분이 좋아서 감사하며 미소 짓는 것이 아니다.
감사하며 미소를 짓기 때문에 기분이 좋아진다는 원리라고 하겠다.

팬데믹 세상에서 신묘막측하게 지음 받은 성도들은 웃으며 감사하므로 어둠의 세력들을 몰아내야 한다. 이와 같은 파장이 도처에서 일어나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은혜를 함께 누려야 하겠다.

1월 20일은 미국 대통령 취임식을 거행하는 매우 중요한 날이다. 각종 언론들은 자기들의 이익을 위한 사람이 대통령이 되기를 원하여 자기들에게 유익한 것만 선택하여 사람들을 혼란하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반드시 성취하실 것이다. 믿음이란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일을 신묘막측하게 이루실 것을 믿고 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우리지 말고 하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를 열어봅시다.


1월 24일(성탄 후 제5주)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猖獗)하므로 팬데믹(Pandemic)이란 사슬로 온 세상을 묶어버렸습니다.
늘 반복하던 것들을 멈추어야 하고 자주 만나던 사람들까지도 사회적 거리를 유지해야 합니다.
이러한 삶이 지속되므로 모두가 어렵다고 합니다.
그래도 우리들은 조금 불편하지만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혹독한 추위가 몰아쳐도 양말 한컬레라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북한 주민들을 생각하면 우리들의 양말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북한 지하교회의 일꾼이 보낸 편지를소개합니다.
추위에 고생하는 이웃들에게 양말 한컬레라도 주면서 예수님을 소개하려고 자신은 구멍난 양말을 신고 있으면서도 새양말을 구하여 가까운 이웃에게 나눠주며 겨울을 잘 견디라우! 이렇게 격려할 때 그 양말을 받은 이웃이 "형님은 구멍난 양말을 신고 있으면서 어떻게 나에게 이런 새양말을 주십니까?" 하고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한 표정으로 쳐다볼 때 "나는 우리 아버지가 또 주실 것이야요. 그러니 걱정마시라요!" 하며 당당하게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구주가 되신 예수님을 소개하려고 밑밥을 던질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얼마 후 그 사람과 산에 올라갔을 때 "아버지! 아버지! 도와주세요!" 하며 부르짖을 때 그 사람은 "이 형님 아버지가 당 간부쯤 되는가?"하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산에서 내려 올 때 그 사람이 "형님, 아버지가 당에서 무슨 일을 하십네까?" 하고 묻기에 "우리 아버지는 모든 것을 다 하실 수 있지!" 하고 아버지 자랑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 기도하기를 이 사람에게 아버지 하나님을 소개할 수 있는 복음의 문을 열어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한다고 합니다. 복음의 문이 열려질 그 때를 기다리는 설레는 마음에 샘솟는 기쁨이 구멍난 양말 사이로 찬바람이 몰려오듯 밀려왔다고 합니다.

1월 31일(성탄 후 제6주)

북조선(北朝鮮)에서 온 어느 성도(聖徒)의 편지(便紙) 제1부

나는 처음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접수하기 힘들었고, 또 죄인이라는 말을 듣기가 싫었습니다.
그래서 제게 성경을 가르쳐 주는 선생님깨 "나는 십계명을 몰랐지만 어긋나게 산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면서 부인하였습니다.
점차 성경을 배우고 보니 하나님을 모르고 산 것이 큰 죄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싫어하는 모든 것을 하며 살았습니다.
저의 한 생은 마귀의 영에 사로잡혀 마귀에게 종 노릇하며 살아온 인생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내가 다 주인이었습니다.
내 운명의 주인은 나 자신이고, 내 운명을 개척하는 힘도 나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확실히 믿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무엇이나 제 열심으로 남보다 더 많이 알고, 더 앞서고 싶었고, 또 그렇게 사는 것이 의미 있는 인생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물론 사업에서 겅과도 있었습니다.
제가 일하는 분야에서 최고라는 평가도 받았습니다.
가정적으로 부족한 것이 없이 어려운 사람들도 많이 도와주었고 주변 사람들로부커 존경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부럼없이 아무런 고통도 없이 살던 저의 가정에 갑자기 시험이 닥쳐왔습니다.
저희 부부는 누리며 살았기 때문에 죽어도 여한이 없었지만 앞길이 구만리 같은 자식들 때문에 잠들 수 없었고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업었습니다.
저는 있는 힘을 다하여 뛰었고 또 뛰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제가 똑똑해서 자식들을 지켰다고 말했습니다.
그때 저도 그렇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와서 보니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였습니다.

2월 7일 

북조선(北朝鮮)에서 온 어느 성도(聖徒)의 편지(便紙) 제2부

저는 하나님을 영접한 때부터 하나님이 저를 지켜 주시는 줄로만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메섹으로 가는 사울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을 통하여 내가 하나님을 영접하기 전에도 하나님을 우리 모두를 알고 계시고 굽어 보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하나님은 제가 하나님을 알게 된 시점부터가 아니라 그전부터 나를 알고 계셨고 우리 가정이 겪는 어려움도 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안중에 없이 저 잘났다고 하는 저를 고난에 들게 하시어 하늘을 찌를 것 같던 저의 자존심을 땅바닥까지 떨어트렸습니다. 하나님을 정말 제가 바닥까지 내려가도록 내버려 두신 것 같습니다. 내 죄가 컸으니 응답한 징벌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내가 똑똑해서 자식들을 지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켜 주신 것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고난에 들게 하지 않았다면 저는 지금도 거짓 자녀로 헛되고 헛된 길을 고달프게 달리고 있을 것입니다.
내가 지식이 있으면 얼마나 있고 잘 했으면 얼마나 잘했겠습니까? 제가 가지고 있는 지식의 높이가 바늘 끝자리만이나 하겠는지요. 보잘 것 없는 나를 내가 높이며 교만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 같은 죄 덩어리를 은혜로 한 품에 안아 주시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원히 해처럼 밝게 살게 하였습니다.

북조선에서 000 올림

2월 14일
최고(最高)의 존엄(尊嚴)과 존엄(尊嚴)

북한(北韓)에서는 "김정은"을 가리켜 "최고의 존엄" 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존엄(尊嚴)"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 때문이라고 합니다.

첫째는 핵무기(核武器)를 갖고도 전염병(傳染病) 바이러스를 막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북중(北中) 국경(國境)을 폐쇄(閉鎖)하여 물건(物件) 반입(返入)이 어려워 시장 경제(市場 經濟)가 완전히 마비(痲痺)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김일성과 김정일 그리고 김정은으로 연결되는 삼대 세습 정치에서 인간의 통치는 최고의 존엄이 될 수 없다는 확실한 증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경(聖經)은 최고(最高)의 존엄(尊嚴)을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최고(最高)의 존엄(尊嚴)으로 믿고 인정(認定)하는 나라가 부강(富强)한 나라가 될 것입니다.
미국(美國)이나 한국(韓國) 어느 나라가 성경(聖經)의 가르침에 따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나라가 될지 예측(豫測)하기 어려운 시대(時代)에 그리스도인들은 성경(聖經)대로 믿고 성경(聖經)대로 실천(實踐)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나라가 세워질 수 있도록 정신(精神)을 차리고 기도(祈禱)해야만 합니다.

"여호와로 자기 하나님을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빼신바 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시편 33:12)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시편 144:15)

부강(富强)한 나라가 세워지기를 소망(所望)하는 사람들이 투표권(投票權)을 바르게 행사(行事)할 때 성경(聖經)의 가르침에 따라 복(福)을 받은 나라가 이 땅에 세워질 것입니다. 이러한 나라가 세워질 수 있도록 모든 성도(聖徒)들이 깨어나야 합니다. 타락(墮落)한 나라를 공의(公義)가 실현(實現)되는 나라로 반드시 세워야 하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사명(使命)이며 소명(召命)입니다.

2월 21일

사순절(四旬節, Lent)은 재(災)의 수요일부터 시작합니다.
사순절은 부활주일(Easter Sunday)을 맞이하기 전 주일을 제외한 40일 기간을 말합니다.
이러한 결정은 AD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춘분(春分)이 지난 만월(滿月) 첫번째 주일"을 "부활주일(復活主日)"로 지키기로 정(定)했습니다.
2021년 사순절은 2월 17일부터 시작합니다.
속죄(贖罪)에 대한 성경적 의미를 소개합니다.

"나의 모든 죄는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Thou hast cast all my sins behind thy back)"(이사야 38:17b)

사탄의 취미(趣味)는 "죄(罪)를 드러내어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면 천사의 특기(特技)는 "죄(罪)를 예수님 등 뒤로 던져버리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죄(罪)가 예수님의 등 뒤로 던져지면 나의 죄(罪)는 전혀 보이지 않고 오직 예수님만 보입니다.
나의 눈에는 무엇이 먼저 보일까?
만일 그 사람의 죄가 또렷하게 보인다면 아직도 나는 사탄과 같은 취미생활을 즐기고 있는 것이 아닐까?
사순절 경건 생활은 취미를 바꾸는 것입니다.
사탄이 좋아하는 취미를 함께 즐겼던 삶을 포기(抛棄)하고 천사가 좋아하는 취미로 바꾼 후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만 바라보는 신앙의 심오(深奧)한 경지(境地)에 함께 올라갑시다.

2월 28일

사순절 두번째 주일을 맞이합니다.
지난 주일에는 "속죄(贖罪)"에 대한 첫번째 용서하시는 사랑으로 "죄(罪)를 등 뒤로 던져버린다"는 말씀을 소개했습니다(사 38:17b).
오늘은 "도말(塗抹)"이란 속죄(贖罪)를 소개합니다.
"도말(塗抹)"이란 한자는 "진흙을 발라 덮어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진흙 塗, 바를 抹)(blot something out, 을 완전히 덮다) .

도말(塗抹)이란 단어가 구약 이사야서에서 2회 사용되었습니다(사 43:25, 44:22).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이사야 43:25)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 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 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이사야 44:22)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방바닥과 벽에 무슨 글자인지 그림인지 이해할 수 없는 흔적(痕跡)들을 남깁니다.
어른들은 그 흔적(痕跡)을 지우려고 벽지 위에 다른 벽지를 바르기도 하고 새롭게 칠을 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벽지를 바르고 칠을 하는 것이 도말(塗抹)이라고 합니다. 

죄(罪)는 더럽고 추(醜)한 흔적(痕跡)만을 남깁니다.
속죄(贖罪)란 보기 싫은 낙서(洛書)와 흔적(痕跡)을 십자가(十字架)의 피로 말끔하게 지워버리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보기 싫은 흔적(痕跡)들이 순식간(瞬息間)에 사라지고 새 것과 같이 드러나는 신비(神秘)한 용서(容恕)의 은혜(恩惠)를 이번 사순절(四旬節) 기간(其間)에 체험(體驗)하기를 기도합니다.

3월 7일

사순절 세번째 주일을 맞이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출발점은 "죄(罪)를 용서받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죄를 "예수님의 등 뒤로 던져버림으로 내 죄는 보이지 않고 오직 주님만 보이는 속죄의 은총"
죄를 "모두 지워버림으로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 것이 되는 도말이란 속죄의 은총"을 소개했습니다.
오늘은 "죄를 씻어버리는 속죄의 은총"에 대해서 소개합니다.

예수의 피로 죄를 씻어야 합니다(계 7:14).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요한계시록 7:14)

하나님의 말씀으로 죄를 씻어야 합니다(엡 5: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에베소서 5:26)

죄를 씻으면 생각과 마음이 정결케 됩니다(렘 4:14)

예루살렘아 네 마음의 악을 씻어 버리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네 악한 생각이 네 속에 얼마나 오래 머물겠느냐(예레미야 4:14)


죄를 씻으면 행동이 거룩하게 됩니다(시 73:13)

내가 내 마음을 정히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시편 73:13)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사랑의 주만 보이도다"
사순절 경건의 날들이 이와 같은 찬송을 즐거이 부르며 모두가 부활의 언덕을 향하여 올라갑시다.
 
3월 7일 사순절 세번째 주일

지난 2월 25일(목) 미국 하원의회에서 평등법(Equality Act, H.R5)을 표결에 의해 찬성 224표와 반대 206표에 의해 가결(可決)하였다.
이 법안은 상원의회로 상정(上程)되어 표결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이 법안(法案)이 가결(可決)될 것인가? 아니면 부결(否決)될 것인가? 하는 것보다는 미국과 같은 자유민주국가에서 이러한 법안(法案)이 의회(議會)에서 논의(論議)되는 것이라 하겠다.

미국은 청교도(淸敎徒) 신앙(信仰)에 의해서 법(法)을 제정(制定)한 대표적(代表的)인 자유민주국가(自由民主主義國家) 이다. 기독교(基督敎) 신앙(信仰)을 기초(基礎)로 시작(始作)한 나라가 평등법(平等法)과 같은 법안(法案)을 논의(論議)할 수 있는 사회적(社會的) 분위기(雰圍氣)가 조성(助成)되었다는 것은 앞으로 기독교(基督敎) 신앙(信仰)의 위기(危機)가 닥쳐오고 있다는 것을 예고(豫告)하는 것이라 하겠다.

신앙생활(信仰生活)을 현실화(現實化) 할 수 없는 법(法)이 제정(制定)된 후(後)에 대처(對處)하는 것은 어리석은 자세(姿勢)라고 하겠다. 교회(敎會)는 평등법(平等法)이 제정(制定) 될 수 없도록 기도(祈禱)하면서 동시에 행동(行動)해야 한다.

미국 자유수호연맹(Alliance Defending Freedom, ADF)의 부회장인 제프리 밴트렐라 변호사는 “국가는 하나님의 법을 무효로 하는 독립적 권한을 갖고 교회나 기독교인을 다룰 수 없다. 국가는 하나님과 사회에 봉사하기 위해 제한된 범위 안에서 관할권을 위임 받는다”며 “다시 말해 크리스천은 성경에서 하나님이 악하다고 하시는 것을 공개적으로 칭찬할 수 없다. 악을 방조하는 행위는 좋은 목적이 있을지라도 항상 정의를 왜곡시킨다. 왜냐하면 잘못된 불공평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특히 “교회의 역할은 그런 상황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정치적, 법적 분야도 여기에 포함 된다. 하나님의 말씀에 반하는 법령이 발의되면, 교회는 그것을 반대하고 비판하는 선포를 하는 게 의무”라며 “교회는 정치적 영역에 관여할 바는 아니라는 생각이 하나님의 모든 변호를 선포하는 사역에 오해를 하는 것”이라고 했다.

3월 14일 사순절 네번째 주일

북한 성도의 간증을 소개합니다.
중국으로 식량을 구하러 나왔다가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중국과 북한의 국경이 막힘으로 중국에서 체류하는 동안 성경을 가르치는 비밀 장소에 머물며 성경을 깊이 읽고 묵상하며 공부하는 중에 깨닫게 된 고백입니다.

처음 하나님을 접했을 때 북한에서는 강하게 반발하는 문제이므로 우려가 컸습니다.
한편으로는 도대체 하나님이 진짜 살아계신가? 하는 의문이라기보다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그러다 이곳에서 성경을 공부하며 예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루하루 지나면서 젊은 시절 '나 잘났노라!' 소리 칠 때, 시련을 겪을 때 항상 같이 하여 주신 하나님, 또 더 올라가서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나를 보신 하나님, 나를 위해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기록하여 주신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날 무엇이든 결심만 하면 내 힘으로 다 할 수 있다고 당당해 하던 내 모습이 얼마나 허황된 것이었는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나의 하나님께서는 내가 어머니 배 안에서 만들어질 때부터 지금도 앞으로도 계속 지켜 보시고 이끌어 주신다는 생각이 확고해 졌습니다.

북한 성도들의 회개와 결단을 생각하며 우리들도 성경적인 회개와 결단을 회복하여 팬데믹 세상에서도 항상 함께 하시는 그 은혜를 깊이 깨닫는 경건의 사순절이 되었으면 합니다.






차별금지법 바로 알기아카데미(차바아) 제5회 강좌에서 ‘Good Intentions and Great Wrongs(선한 뜻, 그리고 악한 결과)’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그는 “성경에서 하나님은 공평하시니 우리도 공평하라고 하신다. 특히 공의의 영역에서도 그래야 한다. 차별금지법도 이런 잣대로 평가해야 한다”며 “기준에 부합하는 것도, 아닌 것도 있다. 오히려 선한 의도가 해를 끼칠 수 있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대니얼 드라이즈 백 교수는 “하나님은 자유를 지지하고 독재와 자의적 통치를 싫어하신다고 했다. 독재, 노예 또는 죄는 하나님의 도덕적 질서를 파괴한다. 자유는 문명사회의 소중한 자산”이라고 말했다. 더글러스 패로우 교수도 “정치적·법적 중립은 불가능하다. 또한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관련 없는 영역도 없다. 선과 악에 대한 확고한 판단을 내리지 않고,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 게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함의”라고 했다.

벤트렐라 변호사는 “국가는 하나님의 법을 무효로 하는 독립적 권한을 갖고 교회나 기독교인을 다룰 수 없다. 국가는 하나님과 사회에 봉사하기 위해 제한된 범위 안에서 관할권을 위임 받는다”며 “다시 말해 크리스천은 성경에서 하나님이 악하다고 하시는 것을 공개적으로 칭찬할 수 없다. 악을 방조하는 행위는 좋은 목적이 있을지라도 항상 정의를 왜곡시킨다. 왜냐하면 잘못된 불공평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특히 “교회의 역할은 그런 상황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정치적, 법적 분야도 여기에 포함 된다. 하나님의 말씀에 반하는 법령이 발의되면, 교회는 그것을 반대하고 비판하는 선포를 하는 게 의무”라며 “교회는 정치적 영역에 관여할 바는 아니라는 생각이 하나님의 모든 변호를 선포하는 사역에 오해를 하는 것”이라고 했다.

아울러 “오늘날 미국에선 차별을 없앤다는 명목으로 LGBT의 이익을 대변하며, 종교의 자유를 제한하는 시도가 이뤄지고 있다. 그리고 종교의 자유 옹호 집단은 혐오집단이라고 말한다”며 “그러나 이들의 공격 수단을 평가해봐야 한다. 동의하지 않음에 근거한 모든 결정이 부당한 차별이나 잘못된 행위가 되는 건 아니”라고 했다.

그는 “트럭 운송 회사나 해운사가 트럭이나 선박의 운행에 맹인 고용을 거절한다면 그것은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 아니”라며 “다른 예로 프로 농구팀에서 키가 작고 재능이 없으며 신체가 마비된 사람을 고용하지 않는 것도 차별이 아니다. 나아가 부모가 자녀를 돌봐 줄 사람에 LGBTQ를 고용하지 않는 것도 차별이 아니”라고 했다.

이어 “미국에선 차별 해소를 위한 ‘우대 조치’로 하버드(Harvard) 같은 명문대학이 아시아인을 입학에 일정 비율로 뽑는 쿼터제를 시행하도록 돼 있다”라며 “이는 아무리 좋은 의도라도 정의를 왜곡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런 제도가 누군가에게 기회를 주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기회 제공보다 결과에 초점을 맞추는 게 문제”라고 했다.

아울러 “쿼터제는 법이 승자와 패자를 미리 결정한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제도다. 모두에게 공평한 기회를 동등하게 제공해야 한다”며 “또한, 현대 차별금지법 법제화 운동은 발생하지 않는 피해를 미리 가정하여 투쟁한다. 그러나 그러한 피해는 일부이지 대다수는 아니”라고 했다.

벤트렐라 변호사는 “이들은 존엄성 침해를 내걸고 투쟁한다. 그러나 존엄성 침해는 객관적 측정이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이들은 다른 사람의 감정을 상하게 하면 안 된다며 존중을 강제하는 법을 제정한다”며 “하지만 단지 동의하지 않는 것이 불공평한 차별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몇 해 전 제빵사 잭 필립스는 LGBT 커플이 동성결혼에 케이크를 만들어 달라는 요청을 거부했다. 그는 가게에 있는 모든 상품을 팔 수 있지만 당신의 메시지에는 동의하지 않는다고 했다. 왜냐하면 자신은 크리스천이기 때문이라고 했다”며 “20년 전 미국 보이스카우트는 LGBT가 보이스카우트 리더가 될 수 없다는 정관 때문에 소송을 당했다. 그러나 보이스카우트는 ‘소년들은 LGBT 성적 취향을 가진 사람과 함께 텐트에 있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반발했다. 당시 보이스카우트는 승소했다”고 했다.

이어 “평등법은 양심과 신앙의 자유에 대한 종교적 예외가 전혀 없기에, 종교의 자유 회복법을 무력화시킬 것”이라며 “평등법은 종교의 자유를 박탈시켜 신앙을 실생활에서 실천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진리는 공적 영역에 있고 견고해야 한다. 크리스천은 불의를 해결하고 중재하려는 사람들이묘, 무너진 진리를 굳건히 세우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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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7일 사순절 세번째 주일




용서(容恕) : 얼굴 용(容),   용서할 서(恕)
용서의 한자의 의미는 "얼굴을 용서하는 것"이라고 한다.
용서를 영어로 'forgiveness"라고 합니다. "누구를 위하여(for)" "주는 것(give)"이라고 합니다.
용서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며 다른 사람을 위하면 그것이 곧 나를 위한 것으로 되돌아 올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것이 용서의 출발

많은 사람들이 용서를 해야 한다고 생각은 하지만, 선뜻 용서할 마음을 내지는 못한다. 자신에게 피해를 입히고 마음에 상처를 준 그 사람과 사건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털어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용서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다. 보다 나은 삶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통과해야만 하는 관문이다. 성경에서 용서의 주제는 하나님의 뜻을 범한 인간들이 자비를 부르짖어 구하고 얻을 때만 등장한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용서는 사람이 죄를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요일 1:9). 죄를 지은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히 회복될 때 용서가 완성된다.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이 하나님과 그의 관계를 파괴한 것과 마찬가지로 용서는 이 관계를 회복시키는 방법으로서 복음 선포 안에 중심 위치를 차지한다.

덴마크 철학자 스벤 브링크만 (Svend Brinkmann)의 ‘철학이 필요한 순간’이란 책에서 인생철학이 되어줄 10가지 원칙을 소개한다. 그 중에 한 가지는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가 말한 ‘용서는 오직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일이다.’ 공자는 사람에 대한 진심을 표현하는 방법을 충서(忠恕)라고 했다. 서(恕)는 마음 심(心)과 같을 여(如)가 합해진 글자다. 진심 어린 용서란 잘못을 저지른 사람과 피해를 본 사람의 마음(心)이 같아질 때(如) 저절로 생기는 행동이라는 의미다. 공자는 가르치기만 했지만 예수님은 친히 사람과 같이 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셨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사람이 되셨고, 우리의 허물과 죄를 사하시기 위해 대신 죽으셨다.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에는 동·서양 공통의 지혜가 담겼다. 채근담에도 나온다.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도 언급되는 말이다. 간디도 이 말을 인용했고 아우구스티누스 “죄인은 사랑하고 죄는 미워하라”라고 역설했다. 하나님은 우리 죄를 우리에게 돌리는 대신, 그 죄를 용서하시고 덮어 가리신다.

성경을 제외한 어떠한 종교적인 서적도 하나님께서 죄를 완전히 용서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헬라의 작가들은 인간의 죄 문제를 인식하고 있었지만 그 해결 방법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바가 없었다. 이성의 위대함에 호소하는 스토아 철학은 비인격적이고 기계론적인 우주론을 방탕으로 삼고 있었다. 유대교 문헌들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확인한 은총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공로에 따라 심판하는 분으로 이해된다(집회서 16:11-14).



1. 하나님은 용서하시는 아버지시다

용서는 은총의 하나님 또는 용서의 하나님이라는 이유에서만 가능하다. 느헤미야는 ‘주께서는 용서하는 하나님이라’고 표현했다. NRSV는 ‘you are a God ready to forgive’, 즉 ‘언제든지 용서할 준비가 되신 하나님’으로 번역했다. 다니엘은 “주 우리 하나님께는 긍휼과 용서하심이 있다”라고 고백한다. 구약성경 전체에서 용서를 이해하기 위해 매우 교훈적이 본문은 출애굽기 34:6 이하이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 또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의는(1:17; 3:21-22) 그 분이 불의한 자를 정당하게 의롭다 하시는 것임을 분명히 밝혔다. 의롭다는 표현은 이중적인 계산, 어떤 자에게 돌리는 것 혹은 셈을 의미한다. 긍정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와는 전혀 별개로 믿음에 의해 주시는 값없는 선물로서 우리를 의로운 자로 여기신다. 부정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은 결코 우리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않으실 것이다. 즉 죄를 사하실 것이다. 의롭다고 여기는 것은 죄를 용서한다는 것이다.

용서하는 것과 잊는 것 중에서 어느 게 더 쉬울까. 영어로 용서하다는 forgive, 잊다는 forget이다. 혹자는 주는(give) 게 얻는(get) 것보다 쉬우니 용서가 먼저라고 한다. 정반대의 논리도 만만찮다. 어찌됐든 용서하기와 잊기는 증오·원망·억울함 등과 맞물려 좀처럼 떨쳐내기 힘든 두 단어다. 데이비드 리프(David Leaf)가 지은 ‘망각 예찬(In Praise of Forgetting)’은 ‘기억하지 말고 잊어버리자’고 주장한다. 저자는 ‘기억은 폭력을 악화시키고, 화해를 방해한다’고 말한다. 모든 역사적 기억은 선별적이다. 물론 기억할 것은 기억해야 한다. 용서는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의 희생 가운데서 자기 자신을 완전히 주시고(롬 8:32; 고후 5:21)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에게 하나님의 의에 참여하게 하셨기 때문에(롬 3:21-28) 생겨난 것이다.

성경 기자는 우리에게 말한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다”(시 103:12)고 한다. 예레미야 31:34에서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말한다. 김형준은 그의 저서 ‘하나님께 돌아오는 연습’에서 용서는 새로운 미래를 맞기 위한 '선택'이라고 일괄한다. 용서는 뒤틀린 과거가 현재의 삶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며 과거를 과거로 남게 하여, 어제가 오늘의 기쁨과 감사를 빼앗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성경의 용서의 이미지는 어떤 형태로이든 죄를 제거하는 것을 말한다. 죄가 옮기울 때, 즉 용서할 때 깊은 바다에 던지우고(미 7:19), 안개같이 걷혀지고(사 44:22), 등 뒤로 던져지고(사 38:17), 옆으로 비켜지고(골 2:14), 치워진다(히 9:26)라고 표현하여 공간적인 의미를 나타낸다. 하나님만이 이렇게 죄를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신다(히 10:17). 이 용서의 주도권은 하나님 편에 있다. 용서는 자명한 이치, 즉 사물의 본질에 속한 어떤 것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용서를 받는 곳에서 용서는 감사함으로 받아야 할 어떤 것이며 경외와 놀라움으로 여겨져야 할 것이다(시 130:4). 죄는 벌을 받아야 한다. 용서는 놀라운 은총이다.



2. 하나님께서 죄를 인정하지 않으신다

용서 메커니즘이 없는 문화는 없다. 모든 문화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다시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시도를 한다. 그러나 용서가 가능하려면 전제조건이 있다. 저지른 잘못을 용서하기 위해서는 죄책감이 있어야 한다. 심리학자들은 ‘건강한 죄책감’이라 한다. 용서를 받아야 할 사람에게서 필수적인 것은 회개다(눅 17:3, 4). 용서를 주시는 하나님에게 있어 필요한 것은 생명이 다할 때까지(레 17:11) 피를 흘리는 것이다(히 9:22). 용서는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본성에 뿌리가 있다. 그러나 그의 용서는 무차별적이지 않다. 그는 결코 유죄를 없는 것처럼 하지 않는다. 인간의 측면에서 만약 용서받기를 원한다면 회개할 필요가 있다. 회개한 죄인은 용서받는다.

영화 ‘레 미제라블’(Les Miserables)은 뮤지컬 영화다. 주인공 장 발장이 복음의 은혜 안에서 용서받은 죄인을 상징한다면, 자베르는 범죄자를 체포하여 반드시 그 범죄에 해당하는 처벌을 받게 하려고 노력하는 경찰이다. 이 두 사람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의’다. 전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을 철저하게 죄인으로 인식한다. 후자는 자신을 죄인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을 법과 정의의 편에 서 있는 사람으로만 인식하기 때문이다.

죄를 지었는데 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죄가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왜 복이 있는가.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고 죄를 벌하시는 분이 아닌가. 어떤 판결이기에 그 죄를 인정하지 않는 복을 주시는가. ‘logivzomai’(로기조마이)라는 동사를 NIV는 count, 즉 ‘계산하다, 셈하다’로 번역한다. NASB는 ‘take into account’, 즉 ‘고려하다, 계산에 넣다’로 번역한다. KJV은 ‘impute’, 즉 ‘전가하다, ...에게 돌리다’로 번역한다. 죄를 지은 사람에게 죄를 돌리지 않고 제 삼자에게 죄를 귀속시킨다는 뜻이다. 옛날 영국 왕실에서 유행했던 ‘휘핑보이(whipping boy)’, 즉 왕자가 잘못하면 대신 매를 맞는 소년이 있었다. 우리나라에도 장자나 부자 대신 매를 맞는 매품 파는 대행 관행이 있었다. ‘흥부전’에서 흥부가 김 부자 대신 볼기 30대를 맞기로 하고 그 매품의 선금을 받아 오랜만에 밥을 지어먹는 것을 이웃에 사는 꾀쇠아비가 엿보고 그 매품을 가로챈다. 중세 유럽의 귀족 가정에도 있었다. 매를 맞는 하층 계급의 아이다. ‘사랑해서 때린다는 말’이란 책에는 휘핑보이를 바라보는 귀족 아이의 두려움을 이렇게 표현한다. “내가 잘못을 하면 누가 나를 대신해서 맞는 상황이 불러일으키는 공포. 그것 역시 체벌의 다른 모습입니다.” 용서는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 사람의 죄를 그에게 묻지 않고 귀속시키는 것이다. 주인이 휘핑보이에게 매를 귀속시키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우리의 죄를 아들이신 그리스도에게 귀속시키시므로 우리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을 확증하셨다(5:8). 용서는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에서 죽으심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은 세상의 죄를 제거하신다(요 1:29; 벧전 2:21-24). 주의 만찬석상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이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피 곧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셨다(마 26:28).

죄를 ‘셈한다, 계산에 넣다’는 번역은 재무적이다. 하지만 ‘전가하다 또는 귀속시키다’라고 번역하면 법적이다. 둘 다 ‘어떤 것을 어떤 사람에게 속하는 것으로 여긴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전자는 돈이고, 후자는 죄다. 유죄가 될 수 있고 무죄가 될 수 있다. 밖으로 돌아다니는 자금 중 3분의 1 이상이 비밀주의로 유명한 스위스 은행에서 관리되고 있다. 어떤 돈이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보호해주는 곳이 바로 스위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계산이 이렇다. 죄인의 죄를 인정하지 않으신다. 탕자의 죄를 아버지는 인정하지 않으신다. 죄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아들로 선언하는 것이다. 죽었다고 살아났다고 선포한다. 탕자에게 죄를 묻지도 따지지 않는다. 그 죄를 인정하지 않는다. 즉 귀속시킨다. 어디에 또는 누구에게 귀속시키는가. 아들이신 그리스도에게 귀속시킨다. 그래서 그 죄가 인정하지 않는 사람, 바라바와 같은 사람은 복이 있다(막 15:6-15). 종교개혁가들은 주장했다. 하나님이 죄인들을 의롭다 하신다는 표현은 그분이 죄인을 의롭게 세탁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의롭다고 선언하신다는 의미다. 즉 법적으로 의롭다 여기시고 그렇게 대우하시면서 그들에게 죄를 인정하지 않는, 즉 죄를 귀속시킨다는 의미라고 주장했다.




이승희 목사 titeioslee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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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나님은 용서하시는 아버지시다

용서는 은총의 하나님 또는 용서의 하나님이라는 이유에서만 가능하다. 느헤미야는 ‘주께서는 용서하는 하나님이라’고 표현했다. NRSV는 ‘you are a God ready to forgive’, 즉 ‘언제든지 용서할 준비가 되신 하나님’으로 번역했다. 다니엘은 “주 우리 하나님께는 긍휼과 용서하심이 있다”라고 고백한다. 구약성경 전체에서 용서를 이해하기 위해 매우 교훈적이 본문은 출애굽기 34:6 이하이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 또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의는(1:17; 3:21-22) 그 분이 불의한 자를 정당하게 의롭다 하시는 것임을 분명히 밝혔다. 의롭다는 표현은 이중적인 계산, 어떤 자에게 돌리는 것 혹은 셈을 의미한다. 긍정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와는 전혀 별개로 믿음에 의해 주시는 값없는 선물로서 우리를 의로운 자로 여기신다. 부정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은 결코 우리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않으실 것이다. 즉 죄를 사하실 것이다. 의롭다고 여기는 것은 죄를 용서한다는 것이다.

용서하는 것과 잊는 것 중에서 어느 게 더 쉬울까. 영어로 용서하다는 forgive, 잊다는 forget이다. 혹자는 주는(give) 게 얻는(get) 것보다 쉬우니 용서가 먼저라고 한다. 정반대의 논리도 만만찮다. 어찌됐든 용서하기와 잊기는 증오·원망·억울함 등과 맞물려 좀처럼 떨쳐내기 힘든 두 단어다. 데이비드 리프(David Leaf)가 지은 ‘망각 예찬(In Praise of Forgetting)’은 ‘기억하지 말고 잊어버리자’고 주장한다. 저자는 ‘기억은 폭력을 악화시키고, 화해를 방해한다’고 말한다. 모든 역사적 기억은 선별적이다. 물론 기억할 것은 기억해야 한다. 용서는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의 희생 가운데서 자기 자신을 완전히 주시고(롬 8:32; 고후 5:21)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에게 하나님의 의에 참여하게 하셨기 때문에(롬 3:21-28) 생겨난 것이다.

성경 기자는 우리에게 말한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다”(시 103:12)고 한다. 예레미야 31:34에서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말한다. 김형준은 그의 저서 ‘하나님께 돌아오는 연습’에서 용서는 새로운 미래를 맞기 위한 '선택'이라고 일괄한다. 용서는 뒤틀린 과거가 현재의 삶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며 과거를 과거로 남게 하여, 어제가 오늘의 기쁨과 감사를 빼앗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성경의 용서의 이미지는 어떤 형태로이든 죄를 제거하는 것을 말한다. 죄가 옮기울 때, 즉 용서할 때 깊은 바다에 던지우고(미 7:19), 안개같이 걷혀지고(사 44:22), 등 뒤로 던져지고(사 38:17), 옆으로 비켜지고(골 2:14), 치워진다(히 9:26)라고 표현하여 공간적인 의미를 나타낸다. 하나님만이 이렇게 죄를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신다(히 10:17). 이 용서의 주도권은 하나님 편에 있다. 용서는 자명한 이치, 즉 사물의 본질에 속한 어떤 것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용서를 받는 곳에서 용서는 감사함으로 받아야 할 어떤 것이며 경외와 놀라움으로 여겨져야 할 것이다(시 130:4). 죄는 벌을 받아야 한다. 용서는 놀라운 은총이다.



2. 하나님께서 죄를 인정하지 않으신다

용서 메커니즘이 없는 문화는 없다. 모든 문화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다시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시도를 한다. 그러나 용서가 가능하려면 전제조건이 있다. 저지른 잘못을 용서하기 위해서는 죄책감이 있어야 한다. 심리학자들은 ‘건강한 죄책감’이라 한다. 용서를 받아야 할 사람에게서 필수적인 것은 회개다(눅 17:3, 4). 용서를 주시는 하나님에게 있어 필요한 것은 생명이 다할 때까지(레 17:11) 피를 흘리는 것이다(히 9:22). 용서는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본성에 뿌리가 있다. 그러나 그의 용서는 무차별적이지 않다. 그는 결코 유죄를 없는 것처럼 하지 않는다. 인간의 측면에서 만약 용서받기를 원한다면 회개할 필요가 있다. 회개한 죄인은 용서받는다.

영화 ‘레 미제라블’(Les Miserables)은 뮤지컬 영화다. 주인공 장 발장이 복음의 은혜 안에서 용서받은 죄인을 상징한다면, 자베르는 범죄자를 체포하여 반드시 그 범죄에 해당하는 처벌을 받게 하려고 노력하는 경찰이다. 이 두 사람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의’다. 전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을 철저하게 죄인으로 인식한다. 후자는 자신을 죄인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을 법과 정의의 편에 서 있는 사람으로만 인식하기 때문이다.

죄를 지었는데 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죄가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왜 복이 있는가.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고 죄를 벌하시는 분이 아닌가. 어떤 판결이기에 그 죄를 인정하지 않는 복을 주시는가. ‘logivzomai’(로기조마이)라는 동사를 NIV는 count, 즉 ‘계산하다, 셈하다’로 번역한다. NASB는 ‘take into account’, 즉 ‘고려하다, 계산에 넣다’로 번역한다. KJV은 ‘impute’, 즉 ‘전가하다, ...에게 돌리다’로 번역한다. 죄를 지은 사람에게 죄를 돌리지 않고 제 삼자에게 죄를 귀속시킨다는 뜻이다. 옛날 영국 왕실에서 유행했던 ‘휘핑보이(whipping boy)’, 즉 왕자가 잘못하면 대신 매를 맞는 소년이 있었다. 우리나라에도 장자나 부자 대신 매를 맞는 매품 파는 대행 관행이 있었다. ‘흥부전’에서 흥부가 김 부자 대신 볼기 30대를 맞기로 하고 그 매품의 선금을 받아 오랜만에 밥을 지어먹는 것을 이웃에 사는 꾀쇠아비가 엿보고 그 매품을 가로챈다. 중세 유럽의 귀족 가정에도 있었다. 매를 맞는 하층 계급의 아이다. ‘사랑해서 때린다는 말’이란 책에는 휘핑보이를 바라보는 귀족 아이의 두려움을 이렇게 표현한다. “내가 잘못을 하면 누가 나를 대신해서 맞는 상황이 불러일으키는 공포. 그것 역시 체벌의 다른 모습입니다.” 용서는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 사람의 죄를 그에게 묻지 않고 귀속시키는 것이다. 주인이 휘핑보이에게 매를 귀속시키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우리의 죄를 아들이신 그리스도에게 귀속시키시므로 우리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을 확증하셨다(5:8). 용서는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에서 죽으심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은 세상의 죄를 제거하신다(요 1:29; 벧전 2:21-24). 주의 만찬석상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이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피 곧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셨다(마 26:28).

죄를 ‘셈한다, 계산에 넣다’는 번역은 재무적이다. 하지만 ‘전가하다 또는 귀속시키다’라고 번역하면 법적이다. 둘 다 ‘어떤 것을 어떤 사람에게 속하는 것으로 여긴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전자는 돈이고, 후자는 죄다. 유죄가 될 수 있고 무죄가 될 수 있다. 밖으로 돌아다니는 자금 중 3분의 1 이상이 비밀주의로 유명한 스위스 은행에서 관리되고 있다. 어떤 돈이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보호해주는 곳이 바로 스위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계산이 이렇다. 죄인의 죄를 인정하지 않으신다. 탕자의 죄를 아버지는 인정하지 않으신다. 죄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아들로 선언하는 것이다. 죽었다고 살아났다고 선포한다. 탕자에게 죄를 묻지도 따지지 않는다. 그 죄를 인정하지 않는다. 즉 귀속시킨다. 어디에 또는 누구에게 귀속시키는가. 아들이신 그리스도에게 귀속시킨다. 그래서 그 죄가 인정하지 않는 사람, 바라바와 같은 사람은 복이 있다(막 15:6-15). 종교개혁가들은 주장했다. 하나님이 죄인들을 의롭다 하신다는 표현은 그분이 죄인을 의롭게 세탁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의롭다고 선언하신다는 의미다. 즉 법적으로 의롭다 여기시고 그렇게 대우하시면서 그들에게 죄를 인정하지 않는, 즉 죄를 귀속시킨다는 의미라고 주장했다.



질문: 용서를 받으셨습니까? 하나님께 죄 사함을 받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답변:
‘용서하다 ’라는 단어는 과거에 저지른 잘못을 덮어주고, 눈감아주며, 빚을 청산해준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그 사람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용서를 구합니다. 그런데 용서는 잘못한 사람이 용서받을 만한 사람이기 때문에 허락되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받아 마땅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용서란 사랑, 자비, 그리고 은혜의 행위입니다. 용서는 누군가 나에게 어떤 잘못을 했더라도, 그 사람에게 원한을 품지 않기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 용서받을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 죄를 범했습니다. 전도서 7장 20절은 “선을 행하고 전혀 죄를 범하지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없기 때문이로다”라고 선언합니다. 요한일서 1장 8절은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라고 말합니다. 모든 죄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입니다(시 51: 4). 결과적으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용서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만일 우리가 죄 사함을 받지 못한다면, 우리는 죄의 결과로 영원히 고통당하게 될 것입니다(마 25: 46; 요 3: 36).

용서 – 어떻게 받을 수 있습니까?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사랑과 자비가 풍성한 분이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해주시길 원하십니다! 베드로후서 3장 9절은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해주시길 바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을 친히 마련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죄에 대한 형벌은 사망뿐입니다. 로마서 6장 23절 상반절은 “죄의 삯은 사망이요…”라고 선언합니다. 영원한 죽음은 우리가 지은 죄로 인해 얻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완전한 계획 가운데 인간이 되셨는데,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요 1: 1, 14). 예수님은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죽음’이라는 형벌을 대신 지고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은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가르칩니다. 예수님이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죽음’이라는 형벌을 우리 대신 치르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용서를 베푸신 것입니다. 요한일서 2장 2절은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고 선포합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죄와 사망에 대한 승리를 선포하셨습니다(고전 15:1-28).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인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 23b).

죄 사함 받기를 원하십니까?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죄책감에 시달리고 계신가요?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인다면, 죄를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1장 7절은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용서받음을 위해 우리 죄의 빚을 다 갚아주셨습니다. 이제 남은 일은 나의 죄를 대신해 죽으신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께 예수님을 통해 나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용서해주실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17절에 이 놀라운 소식이 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용서 – 정말 그렇게 쉬운 일인가요?

그렇습니다! 용서는 우리가 노력해서 하나님께 얻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대가를 지불하고 살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통해서만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기를 원하신다면, 다음의 기도를 따라하십시오. 기억하실 것은, 우리가 이런 종류의 기도문을 읊는 것만으로 무조건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향한 신뢰만이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할 수 있습니다. 이 기도는 용서를 베푸시는 하나님께 믿음과 감사를 표현하는 간단한 방법입니다. “하나님, 저는 죄인이며 죄에 대한 벌을 받기에 합당함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의 죄값을 대신 지불하셨고 그분을 믿음으로써 제가 용서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오직 당신만이 저를 구원하실 수 있음을 신뢰합니다. 당신의 놀라운 은혜와 용서의 결과로 영생이라는 선물을 주심에 것에 감사드립니다. 아멘!”


용서를 가장 필요로 하는 대상이 가족인 경우가 많습니다. 가족은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깊은 만치 상처도 쉽게 주고받습니다. 사실 많은 자녀들이 부모로부터 받은 마음 상처를 안고 삽니다. 그러나 부모들은 상처를 주었다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수가 많습니다. 부모가 자녀들의 용서를 구할 때에 상처가 치료됩니다. 그러나 용서를 구한다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부모의 권위가 강조되는 동양 가정에서는 더 그렇습니다. '얘, 내가 잘못했다. 용서해다오.' 한마디만 해주면 한이 풀릴텐데 이것을 안 해 주어 일생동안 멍든 가슴을 안고 사는 자녀들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용서를 쉽게 구할 수가 있습니다. 자신의 죄를 용서해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고마움도 있고, 영적인 눈이 뜨여서 자신의 잘못을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용서를 빌 수 있는지 없는지를 보아서 진정으로 예수님을 영접했는지 안 했는지 판단할 수가 있습니다. 

 

꽤 한참 되었습니다. 임종을 맞을 때에 내 마음에 이웃에 관한 찌꺼기가 없고 이웃의 마음에 나로 인한 찌꺼기가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마음에 상처를 준 사건이 기억나는 즉시 편지를 쓰든지 전화를 해서 용서를 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상하게도 용서를 빌고 난 후에 억울한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쇼를 한다고 비웃습니다. 어떤 사람은 용서할 것이 없다고 잡아뗍니다. 어떤 사람은 '네가 네 죄를 깨달았구나' 의기양양한 태도를 보입니다. 이러할 때 상대방이 내게 잘못한 것들이 새록새록 생각나면서 자신이 먼저 용서를 빌었다는 사실이 억울하게 느껴집니다. 

 

 

용서를 빌어올 때에는 은혜롭게 받아 주어야 합니다. 아랫사람이 용서를 구해오면 그 용기를 칭찬해주고, 윗사람이 용서를 구해오면 그 겸손함에 감사를 표시해야 합니다. 그리고 용서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해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에 용서를 주는 사람이나 용서를 받는 사람이나 진정한 치유를 맛봅니다



작성일자 2018년 12월 17일

자신을 용서하는 법을 배우십시오

자신을 용서하는 법을 배우십시오
Learn To Forgive Yourself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1:7)

오늘의 본문 구절을 심층적으로 공부하지 않고 그냥 읽으면 킹 제임스 성경의 역자들이 번역한 방식으로 인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가진 것은 “죄의 용서”라는 결론을 내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가진 것은 죄의 용서를 완전히 능가합니다.

용서는 사면이요 심판의 면제입니다. 당신이 “용서”를 받았다는 의미는 당신이 범죄로 인해 처벌을 받지 않을 것이지만, 당신의 범죄 기록은 아직 남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죄는 용서를 받는 것은 물론이고 삭제되기도 했습니다. 헬라어 “아페시스(apphesis)”의 의미는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에 따라 죄를 완전히 삭제하거나 제거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잘못 자체가 제거되었습니다. 당신은 사면되어서가 아니라 죄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심판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잘못하여 “전 저를 용서할 수 없어요.”라고 말하는 의미는 실상 예수님과 그분의 대속적 죽음을 믿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그분은 당신에게 그저 자신을 용서하라고 요청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당신보다 크시고 심판자이시므로, 당신의 죄가 제거되었다고 당신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최후의 심판자이시고 죄로 인해 당신을 비난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믿는데도, 왜 당신은 당신이 한 잘못 때문에 그토록 좌절해야 합니까? 기도할 때마다 과거에 한 잘못 때문에 낙심하는 자처럼 굴지 마십시오. 그들은 자신이 한 잘못을 떠올려서 자신의 믿음을 소멸하게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한 잘못의 결과로 심각한 우울증에 빠졌습니다. 다른 이들은 자살할 생각에 굴복하여 수치와 굴욕을 대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은 잘못했고 일을 망쳤지만, 그것이 당신을 지배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한 잘못에 대한 책임을 지시고 그 값을 이미 치르셨습니다. 그러므로 어제 한 실패와 잘못이 당신을 계속 묶어두게 하지 마십시오.

성경이 죄가 당신을 지배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기 때문에(롬 6:14) 당신을 망치는 죄의 권능은 제거되었습니다. 사탄이 당신에게 당신의 죄를 떠올려줄 때, 당신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떠올려야 합니다. 그분의 죽음으로 인해 당신의 죄는 제거되고 완전히 삭제되었습니다. 할렐루야!

기도
사랑하는 아버지, 제 삶에 임한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와 친절과 임재로 인해 감사드립니다. 제 안에 사시면서 제게 아버지의 말씀을 밝혀주시고 제가 아버지의 완전한 뜻대로 살 수 있게 하며 의 가운데 걷게 하신 성령님으로 인해 감사드립니다. 저는 죄와 죄의 결과에 대한 저의 권세를 행사합니다.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참고 성경/
골 1:13-14) 그분께서 우리를 어둠의 권능에서 건져 내사 자신의 사랑하시는 아들의 왕국으로 옮기셨으니 그분 안에서 우리가 그분의 피를 통해 구속 곧 죄들의 용서를 받았도다

롬 6:14) 너희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므로 죄가 너희를 지배하지 못하리라.

요일 3:20) 이는 우리 마음이 우리를 정죄할진대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니라.





(1) 이사야 1:8 ( ) 사하심

(2) 이사야 44:22 ( ) 주의 등 뒤로 던지심

(3) 시편 51:9 ( ) 기억치 아니하심

(4) 이사야 38:17 ( ) 도말해 주심

(5) 히브리서 8:12 ( ) 안개같이 사라짐

(6) 요한일서 ( ) 눈과 같이 희게 해 주심


4월 24일

4월의 마지막 주일을 맞이합니다.
가정의 달 5월을 맞이할 수 있는 신앙을 "WWJD" 라고 생각합니다.
'WWJD'는 "What Would Jesus Do?"를 의미합니다.
"예수라면 어떻게 했을까?"

5월은 "어린이주일(2일), 어버이주일(9일), 스승의 주일(16일)"로 지킵니다.
한국에서는 한글을 창시한 세종대왕의 탄신일이 "5월 15일" 이라고 하여 이 날을 스승의 날로 지킨다고 합니다.
매년 10월 5일은 세계 교사의 날입니다.
미국에서는 스승의 주간(May. 9-13)이라고 하여 한 주일 동안 진행합니다.
월요일에는 꽃 한송이, 화요일에는 아이가 직접 만든 작품 하나, 수요일에는 엄마들이 자발적으로 선생님에게 식사 대접, 목요일에는 카드와 그림, 그리고 마지막 날 금요일에는 $5짜리 선물 카드, 학교 로고가 새겨진 티 셔츠를 입고 가는 것으로 함께 축하합니다.

스승이 되신 예수님에게 무슨 선물을 하면 좋을까요?
만왕의 왕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에게 어떤 것을 드려도 부족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과 같은 마음으로 살아가는 삶을 드린다면 가장 좋은 선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예수라면 어떻게 하셨을까?(What Would Jesus Do?"
매 순간 예수님이시라면 이 자리에서 어떻게 하셨을까?
이렇게 생각하고 그 다음 행동을 결정하는 생활방식을 몸에 익혀서 주님을 위한 선물을 준비해 보려고 합니다.

























2021 수요성서학당(1월 6일 -

2021 수요성서학당 제1강 / 01-06-2021

첫 사람 아담과 마지막 아담(고린도전서 15:45∼47)

45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46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47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Ⅰ. 첫째와 마지막의 의미

첫 사람 아담과 마지막 아담이란 용어에서 과 마지막은 첫째 둘째 셋째와 같은 서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대표성을 말합니다. 
따라서 첫 아담은 처음 사람을 대표하는 아담입니다. 
마지막 아담은 마지막을 대표하는 아담 즉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세상은 서열에 관심을 갖습니다.
이러한 관심은 어려서부터 경쟁 구도 가운데서 성장하며 배웠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자녀들을 양육할 때 내 아들과 딸이 공부할 때 1등하는 것이 좋아요 아니면 10등하는 것이 좋아요. 
1등하는 것을 누구나 다 좋아합니다.
그런데 10등을 했다면 좀 더 열심히 공부해서 등수를 올려라! 이렇게 말합니다. 
본인은 1등을 한 번도 못했으면서 자식에게 1등을 요구하는 것은 "욕심(慾心)"입니다.

제가 목회자가 된 배경을 정리하려고 자서전을 정리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몇몇 목사님들과 함께 신앙생활을 했던 장로님과 권사님들에게 보냈습니다. 

그 내용의 일부를 소개합니다. 
제 이름은 "이승혁(李勝赫)" 입니다.
한문자의 의미는 이겨서 빛을 낸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지내온 삶을 회고하면 "이겨서 빛을 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과연 나는 어떤 삶을 살았는가?
이런 내용이었는데 제가 받은 내용 중에 "목사님께서 이제까지 저희들에게 본이 되신 것이 결코 실패한 삶이 아닙니다. 저희는 목사님이 그 자리에 지금도 있으면서 매일 오늘의 묵상을 받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에베소서 5: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NIV, For the fruit of the light consists in all goodness, righteousness and truth.
KJV, For the fruit of the Spirit is in all goodness and righteousness and truth.

킹 제임스 버전에서는 빛의 열매를 "성령의 열매"라고 번역합니다.
 즉 이겨서 빛을 낸다는 것을 물리적인 빛, 세상적인 빛으로만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번에 자서전 원고를 정리하면서 반드시 무슨 경쟁 구도에서 1등을 하기 때문에 이겨서 빛을 내는 것이 아니구나!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열매를 맺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흔들림이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도 빛이 되는 삶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Ⅱ. 사람의 의미

서양 철학의 아버지를 "탈레스"라고 합니다.
물론 탈레스 이전에도 철학자가 있었지만 탈레스를 서양 철학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유는 처음으로 "만물의 근원"이 무엇이냐?
만물의 근원을 아르케라고 합니다.

철학의 주제가 자연에서 사람에게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헬라 철학에서 시작합니다. 
그 이전에는 주된 관심이 자연계 즉 바람, 불, 물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것에 물음표를 던지면서 철학은 시작합니다. 
그러나 철학은 질문은 하였으나 아직도 명확한 대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성경에서는 한 단어로 설명합니다. 
“안드로포스(ἄνθρωπος. 444. anthrópos)” 
안드로포스는 인간 즉 사람이란 뜻입니다(a man, human, mankind).
안드로포스의 뜻은 “위를 바라보는 존재” 라고 합니다.

윌리암 피터(William Peter)라는 사람의 글에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소년이 길을 걷다가 5달러 지폐를 주웠습니다. 
그 돈으로 유리구슬을 구입했고 먹고 싶었던 알사탕도 사서 먹었습니다. 
그때부터 소년은 길을 걸을 때마다 길바닥만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일생동안 길바닥만 걷다보니 결국에는 그가 얻었던 것들은 단추 29,519개, 머리핀 54,172개, 동전 수백 개, 반짝이는 유리구슬,  옷핀 그리고 잡다한 것들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길바닥만 보고 걷던 습관 때문에 허리가 굽었다고 합니다.

인간을 안드로포스라는 하는 것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첫째는 위를 바라보는 존재(호모 프로스팩투스, Homo Prospectus)
둘째는 희망하는 존재(호모 에스패란스, Homo Esperans)

우리들은 한국적 인간이라고 합니다(Homo Coreanicus)

* 참고 자료 : 인간에 대한 학명(學名)

호모 쿨투라(homo cultura) : 문화적 인간 
호모 코메르시움(homo commercium) : 교류하는 인간
호모 알테르나투스(homo alternatus) : 대안적 인간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is) : 손재주 있는 인간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 : 직립하는 인간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 : 지혜 있는 사람, 현명한 인간
호모 인사피엔스(homo insipiens) : 현명하지 않은 인간, 어리석은 인간
호모 라보란스(homo laborans) : 일하는 인간
호모 비블로스(homo biblos) : 기록의 인간
호모 비올로기쿠스(homo biologicus) : 생물적 존재로서의 인간
호모 아카데미쿠스(homo academicus) : 학문적 인간
호모 에스테티쿠스(homo aestheticus) : 미학적 인간
호모 아쿠아티쿠스(homo aquaticus) : 수중적 인간
호모 아르텍스(homo artex) : 예술인
호모 아토미쿠스(homo atomicus) : 원자 인간
호모 콘수무스(homo consumus) : 소비하는 인간
호모 컨버전스(homo convergence) : 융합형 인간
호모 쿠페라티부스(homo cooperativus) : 협동적 인간
호모 쿨투랄리스(homo culturalis) : 문화적 인간, 제도적 인간
호모 크레아투라(homo creatura) : 창의적 인간
호모 데멘스(homo demens) : 미친 인간, 광기의 인간
호모 듀플렉스(homo duplex) : 이중인, 이중적인 인간
호모 라피엔스(homo rapiens) : 약탈하는 사람
호모 엑세쿠탄스(homo executans) : 처형하는 인간
호모 팔락스(homo fallax) : 속이는 인간
호모 데지그난스(homo designans) : 디자인하는 존재
호모 드라마쿠스(homo dramaticus) : 드라마에 몰입하는 인간
호모 에콜로지쿠스(homo ecologicus) : 생태학적 인간
호모 에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 : 경제적 인간
호모 에로스(homo eros) : 성애적 인간
호모 에루디티오(homo eruditio) : 학습하는 인간
호모 에스페란스(homo esperans) : 희망하는 인간
호모 에티쿠스(homo ethicus) : 윤리적 인간
호모 엠파티쿠스(homo empathicus) : 공감하는 인간
호모 그라마티쿠스(homo grammaticus) : 문법적 인간
호모 루덴스(homo ludens) : 유희적 인간
호모 루두스(homo ludus) : 게임하는 인간
호모 마지쿠스(homo magicus) : 마술인
호모 파베르(homo faber) : 도구적 인간
호모 나랜스(homo narrans) : 이야기하는 사람
호모 네간스(homo negans ): 예 또는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인간
호모 로쿠엔스(homo loquens) : 언어적 인간, 말하는 사람
호모 부커스(homo bookus) : 책 읽는 인간
호모 캐리어스(homo carriers) : 매개체적 인간
호모 쿵푸스(homo kongfus) : 공부하는 인간
호모 날리지언(homo knowledgian) : 신지식인
호모 노에티쿠스(homo noeticus) : 모든 생명체를 사랑하는 인간
호모 나이트쿠스(homo nightcus) : 밤을 낮 삼아 활동하는 인간
호모 노부스(homo novus) : 새로운 인간(피조물이 아닌 인간)
호모 모벤스(homo movence) : 이동하는 인간, 적극적인 사람
호모 오일리쿠스(homo oilicus) : 석유 문명에 의존하는 존재
호모 이미지쿠스(homo imagicus) : 보아야 직성이 풀리는 인간
호모 휴리스틱쿠스(homo heuristicus) : 빠르고 쉽게 (의사)결정하는 인간
호모 노마드(homo nomad) : 유목하는 인간
호모 픽토르(homo pictor) : 기호의 인간
호모 폴리티쿠스(homo politicus) : 정치적 인간 
호모 프로그레시부스(homo progressivus) : 우주적 인간
호모 레시프로쿠스(homo reciprocus) : 호혜적 인간, 상호 의존하는 인간
호모 렐리기오수스(homo religiosus) : 종교적 인간
호모 렐리기우스(homo religius) : 종교적 인간
호모 스피리투스(homo spiritus) : 영혼인(靈魂人), 영적 인간
호모 레지스탕스(homo resistance) : 저항하는 인간
호모 사케르(homo sacer) : 벌거벗은 인간, 법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인간
호모 섹스쿠스(homo sexcus) : 몸으로 교감하는 사람
호모 포비아(homo phobia) : 동성애 공포증
호모 사커스(homo soccers) : 축구하는 인간
호모 소키에스(homo socies) : 사회적 인간
호모 심비우스(homo symbious) : 공생인(共生人), 더불어 사는 인간
호모 소시올로지쿠스(homo sociologicus) : 사회적 동물
호모 수페리오르(homo superior) : 초인, 영웅적 인간 

호모 테크니쿠스(homo technicus) : 기술적 인간
호모 워커스(homo Walkers) : (두 발로) 걷는 인간
호모 비아토르(homo viator) : 떠도는 인간
호모 자펜스(homo zappens) : 관심을 자꾸 옮기는 인간
호모 포에티쿠스(homo poeticus) : 시적인 인간
호모 그라피쿠스(homo graphicus) : 그림 그리는 인간
호모 무지쿠스(homo musicus) : 음악적 인간
호모 스투디오수스(homo studiosus) : 공부하는 인간
호모 포토쿠스(homo photocus) : 사진 찍는 인간 
호모 모빌리쿠스(homo mobilicus) : 휴대폰을 생활화한 인류
호모 무비쿠스(homo movicus) : 영화를 즐기는 인간
호모 미디어쿠스(homo mediacus) : 미디어적 인간
호모 비디오쿠스(homo videocus) : 비디오를 즐기는 인간
호모 사이버네티쿠스(homo cyberneticus) : 온라인에 연결된 인간
호모 서치쿠스(homo searchcus) : 검색형 인간
호모 인터넷티쿠스(homo interneticus) : 인터넷을 하는 인간
호모 텔레포니쿠스(homo telephonicus) : 전화하는 인간, 통신하는 인간 

- 출처 : https://leoedu.tistory.com/63 
- 참고 자료 출처 : https://moviemaker.tistory.com/72

철학자 키에르케골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란 작품에서 절망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말합니다. 
희망이 없는 인간은 곧 죽은 존재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누구나 죽어야 합니다. 
죽음 이후에 대해서는 대책이 없습니다. 
죽음 이후에 대책이 없다는 것은 결국 죽음 이후에는 소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죽음은 누구나 경험하는 것이지만 성도의 죽음은 귀중하게 보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주가 되신다는 것을 믿는 신앙으로 살다 신앙안에서 죽는다면 소망이 있다는 증거라고 하겠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장례문화를 새롭게 바꿔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그동안 관습처럼 진행하던 입관예배, 발인예배 그리고 하관예배라는 순서에 대해서 성경적인 사고를 가져야 합니다.

사람이 죽은 후에는 육체는 이미 흙과 같습니다. 
영혼은 이미 육체에서 떠나갔습니다. 
영혼이 없는 육체를 앞에 놓고 입관, 발인, 하관과 같은 예식을 진행하는 것이 과연 성경적이며 바람직한 신앙인가 깊이 성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제가 죽은 후에 가족들에게 부탁합니다.
입관, 발인, 하관과 같은 예배를 하지 말고 가족끼리 묘지에 가서 시신을 안장하고 마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되어 반드시 그렇게 하기를 부탁합니다.
죽은 시신을 앞에 놓고 예배하는 것이 비성경적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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