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개론 /





창세기(創世記 /    )

- 창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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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出埃及記 /    )

- 출애굽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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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레위기 /    )

- 레위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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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民數記 /    )

- 민수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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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申命記 / דְּבָרִים 데바림, / Δευτερονόμιον 데우테로노미온 /   Book of Deuteronomy)

- 신명기는 17:16
말을 사지 말라,
율법책을 등사(복사)하여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우라!

신명기는 타나크의 율법서 토라의 다섯 번째 책.
구약 성경의 다섯 번째 책이다.
이스라엘인들이 가나안 땅에 도착하기 전, 모세가 야훼의 가르침을 마지막으로 전하고 죽기까지의 내용을 담고 있다.
대부분 출애굽기와 민수기 등에 등장했던 가르침이 반복되는 내용이기 때문에 신명기라는 이름이 붙었다.

창세기 / 아들의 이야기 -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죽이려는 사건에서 예수 십자가

출애굽기 / 십계명 이야기 - 성막

레위기 / 거룩의 이야기 -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 피가 흐르는 성막 히브리서의 피흘림과 죄사함

민수기 / 광야의 이야기(백성의 수를 계수) 

신명기 / 순종 이야기

  1. 신약에서 가장 자주 인용하는 책 / 80번 언급
 
  * 존 스타트 : 성경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

 모든 성경의 중심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
 예수의 강 위로 66개의 다리가 놓였다.
 
  2. 모세의 설교 3편

  1차 설교 / 1-4:43
  2차 설교 / 4:44-29:1
  십계명 : 출애굽기 20장 안식일(창조), 신명기(구속을 이야기, 애굽에서)
  3차 설교 / 29:2-30:20
  결론 / 31-34

  * 왜 출애굽을 시켰나? 약속의 땅에 들어가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광야에서 1세대들은 죽었다.
    광야에서 태어진 2세들만 가나안 땅에 들어간다.

1. 재판 / 신명기 16:19 - 법정에서

너는 재판을 굽게 하지 말며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며 또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지혜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인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2. 저울 / 25:13-15 한결같지 않은 추 - 시장에서

너는 네 주머니에 두 종류의 저울추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넣지 말 것이며.
네 집에 두 종류의 되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두지 말 것이요.
오직 온전하고 공정한 저울추를 두며 온전하고 공정한 되를 둘 것이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 날이 길리라.

3. 진실 / 32:4, 20

그는 반석이시니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

그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얼굴을 그들에게서 숨겨 그들의 종말이 어떠함을 보리니 그들은 심히 패역한 세대요 진실이 없는 자녀임이로다.

  * 십계명이 실천되는 사회가 건강한 공동체가 된다.


신명기 신학

신명기 30:15-20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로 행하며 그의 명령 규례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 다른 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내가 오늘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너희의 이 길지 못할 것이니라.내가 오늘 하늘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이삭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

신명기 30:16은 신명기 신학이라고 한다.

* 땅은 구약의 역사서의 주제가 된다.
  땅에서 쫓겨나는 사건이 일어난다.

가나안 - 공동체 - 건강한가? 아닌가?
건강한 공동체가 되려면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는 것이다.

요한복음 14:21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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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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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사람이란 누구인가?
고린도전서 2:10~16



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11.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16.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하나님께 받은 것이 무엇인가요?
사도 바울 시대에도 그렇고 오늘날에도 ‘성령’님에 대한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성령 충만 대 성회, 폭포수 같은 성령을 경험하세요. 이 집회에서 성령 충만을 경험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령 충만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장소에서, 그곳에서 인도하는 누군가가 ‘성령’을 준다는 인상을 준다는 것입니다.

제가 너무 부정적인지 모르지만, 그 집회와 강사가 그래서 특별히 신령하다는 듯한 인상을 준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표현하기는 민망한 부분도 있는데, 마치 무당이 굿을 하며 선전하듯이, 점쟁이가 자신의 능력이 얼마나 되는지를 자랑하듯이, 무슨 부적을 써주는 스님이 영험하다든지.
제가 이렇게 표현한 것이 민망한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본문의 구절이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영적인 일’이 무엇인가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혹은 학교에서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이신 일입니다.
신앙의 본질을 흐트러뜨리는 일들은 하나님의 것을 영적으로 알려고 하지 않고 세상의 방법으로 알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누군가 대신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통하지 않고 조금 쉽게 알고자 하는 얄팍한 욕망은 아닐까요?

2천 년 전 초대교회에서 있었던 문제가 어떻게 우리와 이렇게 같은지, 종교개혁을 공부하며 그 시대의 개혁이 오늘의 개혁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과 1960년대 가장 강력하게 복음을 전했던 A. W. 토저의 책을 보면서 그 시대를 향한 예언자의 외침이 오늘날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교회도 너무 빈약하고 참 초라했던 때, 영성가였던 이용도 목사님의 삶과 설교가 어떻게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그렇게 적절하게 교훈이 되는지 말입니다.

한국교회 초대사에 영성가로 알려진 이용도 목사님이 1930년에 썼던 일기의 내용입니다.

현대의 교인은 ‘괴이한 예수’를 요구하매 현대 목사는 괴이한 예수를 전하다.
참 예수가 오시면 꼭 피살될 수밖에 없다.
참 예수는 저희들이 죽여 버리고 말았구나.
그리고 죄의 요구대로 마귀를 예수와 같이 가장하여 가지고 선전하는구나.
화 있을진저 현대 교회여!
저희의 요구하는 예수는 육(肉)의 예수, 영(榮)의 예수, 부(富)의 예수, 고(高)의 예수였고
예수의 예수는 영(靈)의 예수, 천(賤)의 예수, 빈(貧)의 예수, 비(卑)의 예수였나이다.

예수를 요구하느냐?
하나님의 아들을 찾으라,


인(人)의 예수 - 너희가 만들어 세운 예수 말고!

예수를 갖다가 너희 마음에 맞게 할 것이 아니라
너를 갖다가 예수에게 맞게 할 것이니라.
 
이용도 목사님의 일화입니다.
만주 용정에 신학교 동기이자 형 같았던 이호빈 목사님께서 목회하시던 교회에 초청을 받아 부흥회를 인도하게 되었답니다.
설교하기 전 준비 찬송을 하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이용도 목사님이 강단에 오르지 않는 겁니다.
그저 강단 중앙 의자에 쪼그려 앉아 기도만 합니다.
시간이 자꾸 지나 강사 목사님을 쳐다보았지만, 요지부동입니다.
그때 쪽지가 하나 올라왔습니다.

형님, 오늘은 주님께서 말씀을 주시지 않네요.”

그래서 그날 저녁 그렇게 찬양만 하다가 사람들이 돌아갔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부터 강력한 성령님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했답니다.

주님이 주셔야 하는 것,
성령이 오셔야 하는 것,
이것이 복음의 이야기가 아닐까요?

쉐인 클레어본(Shane Claiborne)
저서 "믿음은 행동이 증명한다"

우리가 가난한 사람을 도우면 사람들이 우리를 착하다 칭찬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처럼 살려고 하면 십자가에 매달 것입니다.”

영적인 흉내를 내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영적으로 산다는 것은 그렇게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여기서 “통달하신다”라는 말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신다’라는 말입니다.

통달’이란 단어를 국어사전에서 보니까 ‘어떤 것을 막힘이 없이 환히 다 알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영어 성경에는 이 부분을 ‘search’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것은 ‘구석구석 다 검색해서 알아낸다’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어 인터넷에 엠파스나 네이버와 같은 search engine이 있습니다.
이것은 바다와 같은 인터넷을 샅샅이 이 잡듯이 뒤져서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정보를 찾아주는 검색 사이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가장 주목해 보아야 하는 것은 성령께서 ‘통달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라고 말씀합니다. 강력한 search engine을 가지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도록 우리를 인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어떤 부분에 어떻게 관여하시는지를 알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영적인 사람이 되어 갑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이 세상에 계실 때 우리에게 약속하신 부분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6~17절에서 예수님은 성령님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그럼 우리에게 궁금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깊은 곳에 무엇이 있을까요?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죄인 하나까지도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주신 ‘사랑’이 있습니다.
그 사랑은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다 기록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깊은 곳에 무엇이 있을까요?

거룩하심’입니다.
더러운 죄가 하나님 앞에서 대낮같이 드러납니다.
그 거룩하심 앞에서 우리의 존재가 순결해져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앞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머리를 들 수 없는 겸손함이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교만하게 머리를 뻣뻣하게 들고 있다면 하나님에 대하여 알고 있지 못하다는 증거입니다.
아니, 지식적으로는 알아도 영적으로 하나님을 깊이 알지 못한다는 증거입니다.

사도 바울이 주님을 영적으로 알게 된 후에 어떤 고백을 하나요?
빌립보서 3장 8절 말씀에서 그는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아는 특권을 누리게 된 후에 자신이 자랑스럽게 여기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쓰레기통에 버렸습니다.

“가장 귀한 것을 위해 가장 귀하지 않은 것을 버리는 것!”
이것이 영적인 일이 아닐까요?

"삶의 어떤 순간에도 하나님"
페리 노블(Perry Noble)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면 지옥에 간다고 말한다.
인생 최대의 문제점은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가장 시급한 문제는 잘못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상상 이상으로 사랑하시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만나면 말 그대로 십자가를 건너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아간다.
그런데 십자가 오른편으로 넘어가기만 하면 삶이 편해진다는 오해가 교회 안팎에 만연해 있다.

사람들은 크리스천이 완벽한 삶을 산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우리가 술 담배를 전혀 하지 않고 종일 찬양만 부르는 줄로 안다. 하지만 내가 20년 넘게 목회를 하면서 보니 십자가 저편만큼이나 이편에도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

그리스도를 만나면 죄의 형벌에서는 완전한 구원을 받지만, 죄의 효과에서는 벗어나지 못한다.
구원을 받은 뒤에도 우리는 스스로 죄를 짓고 남들의 죄에 상처를 입으며 여전히 이 망가진 세상에서 살아간다.
그리스도를 만나 십자가 너머로 건너간 뒤에 우리가 할 일은 완벽한 이미지를 가꾸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님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사실을 더 절실히 깨닫고 날마다 그분과 더 깊은 사랑에 빠져야 한다.

예수님은 아무런 문제점이 없는 완벽한 사람들과 동행하시지 않았다.
그분이 완벽한 사람들을 부르시지 않았는데 왜 우리는 그분의 몸에 완벽한 사람들만 가득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육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일

영적이라는 말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 충만해져서, 하나님과 함께 인격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성령께서 가능케 하시는 사역이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안에는 ‘영적’인 것과 ‘영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 사이에 혼동이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조금 더 명백하게 ‘육적인 사람’과 ‘영적인 사람’을 대비하여 말하는 듯합니다.

13~14절을 보세요.

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육적인 사람을 희랍어에서는 ‘프쉬키코스 안드로포스’라고 말하는데,
성경에서는 ‘영적인 사람’과 대조되는 개념입니다.

즉 감각적 성질, 자신의 욕구와 격정의 지배를 받는 사람입니다.
앞부분과 연결해서 보면 성령님을 모르기 때문에,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즉 구원받지 못한 자들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특징이 무엇인가요?
하나님 없이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치는 말로 하지 않습니다.
지혜가 필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지혜를 넘어선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합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만 분별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의 특징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성령께서 하시는 일들이 어리석게 보입니다.
육적인 사람들에게는 세상의 욕심과 육혹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는 것이 어리석게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이 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모릅니다.

지난해 알래스카에 가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한국에서 온 신혼부부가 당한 비참한 소식입니다.
앵커리지 인근 바다는 밀물과 썰물이 있습니다.
그런 바다의 갯벌에는 먹을 것이 많지요.
한국에서 온 사람들에게 갯벌에 펼쳐진 커다란 조개를 마음껏 주울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매력적인 일이겠습니까?
물이 들어오는 시간이 순식간이기 때문에 함부로 들어가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신혼부부가 갯벌에서 조개를 잡다가 그만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고 말았습니다.
매력적인 일이 눈에 보이면 지켜야 할 것들이 우습게 보이는 모양입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말을 우리가 잘 듣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육적인 눈으로만 세상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영적인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별이 되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14절)

언젠가 이 부분을 묵상하며 적었던 글이 있습니다. 좋은 예가 될 듯하네요.
고린도전서 2장 후반부에서 사도바울의 이야기를 유진 피터슨은 메시지 성경에서 이렇게 풀어쓰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아는 것은, 책을 읽거나 학교에 다녀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직접 배웠기 때문입니다. 영에 속하지 않은 사람은 본질상 하나님의 영의 선물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영을 알 수 있는 통로는 영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과 우리의 영은 막힘없이 서로 통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을 가졌습니다."

영적이다!
이 말은 때로 ‘우리가 이해하기 힘들다!’라는 말일 수도 있죠.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이 우리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미국신학교 이사회에 참석했을 때 케노샤라는 지역에 사는 한인 가정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미국에 이민 와서 어느 정도 성공도 하고 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가정입니다.
그래서 14년 전 한국에서 온 한 가정을 열심히 전도했답니다.
그러다 보니 미국에 온 첫해 절에서 운영하는 수련회에 참석하고 온 아이들이 바로 교회 수련회를 가게 되었고 혼란스러웠죠.
계속해서 전도하는 이 가정 때문에 새로 이사 온 한국 분은 이렇게 말을 했답니다.

"나는 교회는 안 다녀 혹시 아이 아빠가 목사가 되면 그 교회나 다닐까?"

그런데 어제 끝까지 신앙을 갖지 않은 그 사람이 식사를 도우려 함께 하게 되었고, 또 자연스럽게 전도하는 분위기가 되었죠.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도저히 목회는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한 말이었는데, 그 집 아기 아빠가 지금 신학을 공부하며 목회를 준비하고 있네요.

제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자매님! 당신 한 사람을 위해 저분이 목회를 하게 되었네요. 14년 전 한 그 말을 잘 지키세요."

참으로 신기하죠.
그때 상황을 모면하려고 한 말을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구원하시려는 계획 말입니다.
그분이 왜 목회를 하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어쩌면 하나님의 계획 속에 한 사람을 향한 사랑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의 이야기가 그런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의 이야기는 영으로 보이는 것과 이해되는 것이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가 영의 눈을 들어보며, 나 하나를 위해 일하시는 세밀한 하나님의 손길도 경험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 세상에 일어나는 육적인 일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영적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영에 속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됩니다.


영분별은…
이제 중요한 문제가 남게 됩니다.

우리가 세상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기 위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하는데 어떻게 분별하느냐는 것이죠.

신앙생활의 영역에서 가장 어려운 일 중의 하나가 ‘분별’입니다.

오늘 본문 15~16절을 보세요.
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16.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참 오해하기 쉬운 부분입니다.
대개 영적이라는 사람들이 하는 말입니다.

2천 년의 기독교 역사 가운데 모든 이단이 주장하는 것이 “영적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 많은 사람이 판단할 근거가 없기에 맹목적으로 따라가기도 합니다.

지난해 또 한 번 세상을 현혹시킨 여자 선지자가 있습니다.
“자칭 선지자”입니다.
아무리 봐도 무당 같은데 말입니다.
영적이라고 주장하고, 또 하나님께로부터 계시를 받았다고 하니 사람들이 쉽게 판단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아주 중요한 근거가 있습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영적인 것의 기준은 우리가 알아들을 수 없는 모호한 이야기들이 아니라 아주 명백하게 하나님의 마음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홍혜선 자칭 전도사의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대한민국에 12월 14일 오전 4시 30분에 전쟁이 일어날 것이므로 피신하자는 것입니다.
미국에 있는 누군가의 집이 노아의 방주가 될 것이니, 그곳으로 피신하자는 것입니다.
전쟁이 일어나는데 자기 혼자 살기 위해 한국을 떠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 있는 것인가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조국과 가정을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요?
그렇게 영적이라고 생각하면서 ‘노아의 방주’란 단지 이생의 목숨을 건지는 것인가요?

참으로 신기한 말을 합니다.
땅굴을 부정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말입니다.
어떻게 땅굴의 존재로 인간의 구원이 좌우됩니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념이 있고, 조국이 있지만 어떻게 공산주의자들은 용서받지 못하고 지옥에 가야 합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인가요?

영적인 것처럼 보이는데 주님의 마음이 없다면, 하나님의 영이 아닌 것이 분명하지 않나요?
매번 이야기하지만,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치시면서 돈을 요구한 적이 있으신가요?
삭개오의 집에 방문하셔서, 회당장의 딸을 고치시고, 돈을 요구하신 적이 있으신가요?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왜 이렇게 무지한가요?
영적인 것을 영적으로 분별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인격적이지 않기 때문에 누군가의 말에 쉽게 놀아나는 것은 아닌가요?

바울은 로마서 8장 9절에서 분명하게 말합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한, 로마서 8장 15절에서도 다시 말합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養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이전에 우리가 살펴보았던 ‘육에 속한 사람’이 감각적이고, 육신적이고, 욕망적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본성의 지배를 받기 때문입니다. 이와 반대로 ‘신령한 자’는 영적인 사람인데, 성령을 받아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성령의 지배를 받을 수 있을까요?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셔야 합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더러운 곳에 거하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구원받은 거듭난 성도들을 향해 말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이 거룩한 성전임을 알지 못하느냐?”

구원받은 자의 진정한 고백이 있을 때,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십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성령님을 초청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하는 말입니다. 성령님은 인격적이십니다. 우리 속에 들어오실 수도 떠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일에 대하여 인격적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영적인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성령님을 초청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주사 세상을 ‘판단하고 분별’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그렇게 하나님께 신실한 사람들이 변하는 것을 봅니다.
어떻게 그렇게 훌륭한 사역자가 욕심이 생길 수 있는가?
어떻게 그렇게 자기중심적일 수 있는가?
이유가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영이 떠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사람이 되면 성령이 떠나간 사람들에 대하여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담대해야 합니다. 영적으로 분별하여 하나님의 마음이 아닌 것을 명확히 해야 합니다.

이것은 ‘비난’과 다른 것입니다.
진리를 말하는 것과 비난하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단순한 비난은 상처로 사람을 아프게 하고 죽이게 하지만, 성령님께서 깨닫게 하시는 아픈 지적은 죽은 살을 제거하고 새살을 돋게 합니다. 그러므로 비난이 있는 곳에는 어둠과 죽음이 지배하지만, 성령님께서 임하시는 곳에는 새로운 생명을 향한 창조적 아픔이 있을 뿐입니다.

오늘 중요한 말씀이 있죠?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15절)
이것은 교만이 아니라 오직 성령님께만 판단을 받겠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세상의 정욕과 사탄의 유혹에 쉽게 흔들리지 않겠다는 다짐입니다. 적어도 성도라면 이런 자신감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도’가 무엇입니까? 목사의 말을 따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다른 성도의 말을 따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성도와 목사에게 돈으로 사기를 당하고, 어떻게 그렇게 쉽게 성적인 유혹에 넘어갑니까? 하나님의 마음이 아닌 육신의 소욕으로 접근하는 데 말입니다.
다시 한 번 요한복음 14장 16~17절 말씀에 주목하십시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입니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오늘 본문 13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현재 고린도 교회가 처한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는 ‘분열’입니다. 이 문제의 근원이 무엇일까요? 신령한 판단이 아니라 사람의 판단 때문이라는 것이죠.
사람의 판단은 자기 기준에 의해 정죄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기준에 의해 자신을 드러내려는 이기심과 교만입니다. 육적인 판단은 남을 배려하기보다는 자신의 이기심을 충족시키려고 합니다. 이것이 분열의 가장 큰 원인입니다.

‘영적인 것’이 무엇일까요?
성령이 가르치시는 것을 아는 것,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가 흔히 착각하는 것은 ‘신앙적 열심’을 영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제가 만나 교회에서 지난 일들을 생각하며 깨닫게 된 것이 있습니다.
교인들과 장로님들을 설득해야겠다고, 가르쳐야겠다고, 변화시켜야겠다고 생각했던 적이 많습니다.
그런데 가르치고 변화시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런 생각의 깊숙한 곳에는 내가 ‘힘’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목회를 하면서 가장 편안했던 때가 언제인가를 생각해 보니, 제가 약하고 힘들 때였던 것 같습니다.
목사인 제가 누구를 이해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교인들이 저를 이해하고 도와주려고 할 때 말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영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것 같지 않나요? 이 세상은 절대로 ‘힘’ ‘정의와 공평’의 논리로 하나 된 적이 없습니다.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또 하나의 힘의 원리가 작용했을 뿐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신령한 자의 마음은 ‘하나 됨’에 있습니다. 신령한 사람은 신령한 것을 생각하며 신령한 시각으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받은 자라야 그리스도인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 보면,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로마서 8장 9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선포하였습니다.

마음속에 성령님이 계신 사람이라야 신령한 사람이 되고, 신령한 생각을 합니다. 신령한 사람들이 모여야 분열이 치유됩니다. 성령님의 역사는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입니다. 12절의 말씀을 보세요.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영을 가진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은 ‘은혜’를 압니다.
여러분은 경험하듯이 어린아이들은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을 기가 막히게 압니다. 이것은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아는 것입니다. 괜히 달라고도 안 하는데 미운 사람이 있고, 그냥 마구 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지식의 차원이 아니라 마음의 문제인 것을 아시지요.
우리가 하나님께 영을 받으면 마음이 압니다. 가슴으로 믿어지기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고 용서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열린 가슴은 다른 사람을 향해서도 열리게 됩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보혜사 성령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고 가르치실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속에 계실 때, 비로소 은혜를 은혜로 알게 됩니다. 여러분의 삶의 모든 것이 은혜로 고백되기 시작할 때, 신령한 것이 여러분 속에 존재합니다.

여러분은 여름이 되면 가장 싫은 것이 무엇인가요?
더위죠?
더운 것이 은혜라는 것을 아시나요?
그 더위가 없으면 우리는 다 굶어 죽습니다.
더위가 있어야 가을의 감사가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더위를 불평하지 않습니다.
불평하는 사람들은 늘 불평하고, 늘 사람들이 맘에 들지 않는데, 성령님이 마음속에 계신 사람은 늘 감사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누리는 그 많은 것이 여러분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온 것임을 고백하는 사람들의 겸손이야말로 신령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당하는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를 보는 사람이야말로 신령한 것이 가득한 사람입니다.

어느 날 여러분의 삶에서 감사가 사라졌습니까?
모든 것이 허무하고 고통스럽게 느껴지십니까?
이제는 하나님이 여러분의 아바 아버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주 근본적으로 성령을 받으면 우리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만족의 문제, 기쁨의 문제, 자기 존재의 문제, 자기실현의 문제 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에서 아바 아버지로 고백되기를 바랍니다.
아바 아버지께서 여러분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감사로 고백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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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로메로의 본을 따라
Óscar Arnulfo Romero y Galdámez
(오스카르 아르눌포 로메로 이 가르다메스)
1917년 8월 15일 ~ 1980년 3월 24일 (62세)


우편 폭탄 테러의 희생자로서 살바도르 성인의 순교를 되돌아보다.

- 미셸 랍슬리


이 글은 플라우 출판사의 영적 안내 시리즈 중 《구속의 스캔들 :하나님이 가난한 자를 해방하고 죄인을 구원하며 나라를 해방할 때》 (한국어 미발간)의 서문입니다. 


오스카 로메로에 관한 나의 견해는 내가 겪은 인생 행로에 의해 형성되었다.
1980년 3월 24일 미사를 집전하던 로메로가 총격을 당했을 때 나는 로메로와 다른 많은 종교 지도자들처럼 불의에 항거하는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추방되어 전면이 남아프리카 공화국 영토에 완전히 둘러싸인 작은 산악 왕국 레소토에 살고 있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아파르트헤이트라는 합법화된 인종차별 정책을 시행했던 나라다.
유엔은 아파르트헤이트를 반인도적 범죄라고 선언했고, 국제 기독교 사회는 이를 이단이나 어긋난 교리라고 했지만, 남아공은 여전히 아파르트헤이트가 신성한 기독교적 정책이라고 강조했다. 

로메로처럼 나도 어릴때부터 예수님을 따르려는 소망을 품었다.
열일곱 살에 나는 뉴질랜드를 떠나 호주로 가서 성공회 사제직 훈련을 시작했고 성공회 수도회인 신성 선교 협회에도 가입했다.

수도회는 1973년에 나를 남아프리카로 파송했다.
그곳에 도착하면 나는 세 부류의 사람들과 만나게 되리라 상상했다.
억압받는 이들과 억압하는 이들 그리고 내가 속하게 될 세 번째 부류인 ‘사람’.
그러나 나는 내가 원하지 않더라도 내 피부색이 나를 압제자 집단의 일부로 만든다는 불쾌한 현실에 먼저 눈뜨게 됐다.
남아프리카에 도착한 날, 나는 사람이 아닌 백인이 되었다.

Michael Lapsley

미셸 랍슬리 

1976년 9월 나는 남아프리카에서 추방되었다. 불과 3개월 전인 6월 16일 경찰과 군인들이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총을 쏘기 시작했다. 이것이 내 인생의 본질을 바꾸어놓았다.

로메로 대주교에게 전환점은 1977년 3월 12일 발생한 루틸리오 그란데 신부의 암살이었다. 로메로는 이렇게 말했다. "죽은 루틸리오의 누워있는 모습을 보면서 ‘그가 자신이 행한 일 때문에 죽음을 당했다면 나 역시 같은 길을 걷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로메로 대주교와 달리 나는 정치적 해방 운동에 참여하기로 했다. 하지만 나도 로메로처럼 오직 내 혀만을 유일한 무기로 사용하였다. 내게 해방 투쟁에 참여한다는 것은 기본 인권을 위해 투쟁하는 유색인들과의 연대에서 나의 인간성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거리에 어린이들의 피가 쏟아진 직후, 나는 성공회 대학생들의 대표 사제로 선출되었고 어린이 살해와 만연한 구금과 고문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로메로의 암살 소식에 나는 멈춰 서서 내 행동이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될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 전 세계에서 정의를 위해 비슷한 투쟁을 하는 신앙인들도 분명 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하지만 로메로의 말과 증거는 그런 생각을 뛰어넘어 우리가 직면한 상황에 예수님의 말씀을 더욱 분명하고 담대하게 적용할 수 있는 용기와 결단을 주었다. 1982년 마세루에서 남아공 군대의 총격으로 42명이 사망한 대학살이 일어났다. 그 당시 나는 그곳에 없었지만 몇 명의 교회 관계자를 통해 내가 그 학살의 표적 중 한 명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아파르트헤이트를 종식시키고 어린이들이 안전하게 자고 일어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서약했던 때였다.

남아공 정부의 암살 대상자 목록에 들어있던 나는 하루 24시간을 무장 경찰과 함께 짐바브웨에서 수 년간 살아야 했다. 그곳에서 넬슨 만델라가 석방된지 3개월이 지난 1990년 4월, 나는 두 권의 종교 잡지 속에 숨겨진 폭탄을 우편으로 받았다. 그 폭발로 인해 두 손과 한 눈을 잃었고 고막은 산산조각 났다.

폭탄이 터졌을 때 나는 하나님께서 나의 시련에 함께 하고 계시며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께서도 내가 겪는 일을 이해할 것이라고 느꼈다. 전 세계 사람들의 기도와 사랑은 하나님께서 그 폭발을 죽음에서 생명을, 악에서 선을 이끌어 내는 구속의 도구로 쓰시게 했다.

그 당시, 로메로의 모범이 다시 한번 내게 강하게 다가왔다. 나는 그가 총에 맞기 직전 제단에서 했던 마지막 말을 기억했다. “인류를 위하여 제물로 바쳐진 이 몸과 육체가 자양분이 되어 그리스도께서 하신 대로, 우리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이 백성에게 정의와 평화가 임하도록 우리의 몸과 피를 고난과 고통에 바치게 하여 주소서."

로메로 대주교가 죽음을 당하기 며칠 전에 했던 한 인터뷰에서 나는 특별한 도전과 영감을 받았다. 그는 자신을 죽일 사람이 누구든 이미 용서 받았다는 사실을 알기 바란다고 말했다. 나는 지금까지도 1990년 4월에 내게 폭탄을 보낸 이가 누군지 모른다. 그러나 그 사람이 자신이 저지른 일로 지금까지 죄의 포로로 있다면 내가 가진 열쇠로 그를 풀어 주리라.

나의 회복과 남아프리카 공화국 사람들에 대한 성찰을 통해 기억치유 협회(Institute for Healing of Memories) 가 설립되었다. 이 비정부 기구의 국제적 작업의 일환으로 나는 2016년 11월, 이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세상의 구세주(El Salvador)라는 이름을 가진 오스카 로메로의 나라를 처음으로 방문했다. 살바도르 사람들의 치유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2016년, 모든 성인의 축일에 산살바도르에 있는 진리와 기억의 벽 앞에서 열린, 수 만명의 살바도르 내전 실종자와 사망자를 위한 세계교회 추도식에 참여했다. 그리고 오스카 로메로의 무덤과 그의 암살과 순교가 일어났던 곳에 무릎을 꿇었다.

비극적이게도, 구세주의 땅은 여전히 거대한 사회적 폭력과 불평등이 만연하다. 그러나 로메로의 증언은 살아있다. 엘살바도르 성공회의 호세 오스발도 로페즈는 다음과 같이 썼다.

로메로의 생애와 행적을 통해 나는 예수께서 친히 엘살바도르 한 가운데를 지나셨고, 로메로는 한 사람이자 목회자로서 삶의 모범을 보임으로 분명하고도 강한 메시지를 우리에게 남겼다고 확신합니다. 로메로는 내게 단순한 목회적 모델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기독교인으로서 사회적, 구조적 불의에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라고 요구하는 엄청난 도전입니다. 불의에 대해 비난만 하라고 하는게 아닙니다. 그보다는 내 주변 사람들을 사랑하라고 강력하게 부릅니다. … 형제자매들을 사랑함으로써 로메로를 본받을 뿐 아니라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게 예수님과 함께 할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이 땅에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일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인류라는 가족의 치유에 겸손하게 이바지할 길을 찾는 과정에서 오스카 로메로의 삶과 유산에서 계속 영감을 얻을 것이다. 그가 이 책을 통해 의에 주리고 목마른 다른 세대에게도 같은 일을 할 수 있기를 바라며 기도한다. 당신이 열린 마음으로 이 책을 읽는다면 정의와 모두를 위한 하나님의 꿈에 참여하겠다는 믿음과 헌신이 더욱 깊어질 것이라 의심치 않는다.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원래 병약했고 학교도 12살 때까지만 다녔다고 한다. 이후에는 목수 일을 배우는 등 노동자로 일하다가 신학교에 입학, 사제의 길을 걷게 된다. 이후 유럽에 유학하기도 하면서 자신의 고향에서 오랫동안 사목했고, 알콜 중독자의 재활을 지원하는 등 일반적인 사제의 길을 걸었다.

원래는 상당히 보수적인 인물이었다. 그가 1977년 대주교가 되었을 때는 군사정권 측에서 환영했을 정도로 사회정의운동에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같은 사제이며 친구로 농민운동을 하던 그란데 신부가 암살당한 사건을 계기로 반 독재운동에 가담하였다..[2] 이후 1979년 쿠데타로 들어선 엘살바도르의 독재 정권에 항거하여 빈곤층을 돕고 인권침해를 고발했다. 그러다 1980년 프로비덴시아 병원 경당에서 미사 성찬기도 중 무장괴한 4명에게 저격을 받아 암살당했다.피격 직후 사진(노약자 클릭 주의) 당시 독재정부가 그의 죽음에 개입했지만, 사후 30년이 지나 2009년에야 엘살바도르 정부가 이 사실을 인정하였다. 독재정권이 무너졌기 때문에 인정도 가능했다.

사실 로메로 주교가 처음부터 진보 성향은 아니었다. 그는 본래 전통주의자였고, 독재정권의 무자비한 인권 탄압에 그리스도인으로 인권을 옹호했을 뿐, 해방신학과는 거리가 있던 보수적인 주교였다. 일례로, 로메로 주교는 해방신학의 오류를 교리적으로 반박하는 임무를 맡은 오푸스 데이의 성 십자가 사제회와 교류하며 영적 도움을 받았다. 그가 순교한 날 아침에도 오푸스 데이 협력 사제 모임에 참가한 후 미사 집전 중에 피격을 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순교 후에 해방신학 추종자들이 자신들의 이미지를 덮어씌운 것이다. 그 결과 이젠 그가 해방신학의 아이콘처럼 인식되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

이런 이유로 진작에 시성이 되어야 했지만, 해방신학 추종자들이 이를 자신들의 교리를 정당화하는 데 악용할까 우려한 교황청에서 이를 늦춘 것이다. 인권 탄압에 저항하는 것은 가톨릭에서는 보수건 진보건 당연한 일이다. 이를 두고 소련을 위시한 공산진영에 맞서는 것은 장려하면서, 반공을 명분으로 자국민을 탄압한 남유럽(예: 프랑코 치하의 스페인)과 중남미 국가의 군부 독재정권에 대해서는 소극적이었던 20세기 천주교회의 이중적인 모습을 드러낸 것이라는 비판, 지적을 받기도 한다. 물론 프랑코 정권 문제는, 스페인 극좌파들에 의해 저질러진 옥석을 가리지 않는 무차별 교회 탄압과 학살 문제도 함께 고려해야 할 일이다. 장례식장에 신자들 25만 명이 운집했는데 폭탄 테러와 총격전이 벌어져 40명이 죽었음 역시 비극이었다.

그의 오랜 친구이자 동료였던 그레고리오 로사 차베스 신부가 2017년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엘살바도르 천주교회 사상 첫 번째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다. 그는 1992년 엘살바도르의 오랜 내전을 종식시키는 과정에 기여했으며, 추기경이 된 2017년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교황청 시성성 장관 안젤로 아마토 추기경이 집전한 오스카 로메로의 시복 미사, 2015년 5월 23일
20세기순교자 중의 한 사람으로 런던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성공회)에 동상이 건립되었으며, 요한 바오로 2세 때 '하느님의 종'[3]으로 인정되었으나 그가 종교적 문제가 아닌 정치적 문제로 죽었다는 점을 이유를 내세운 교황청 내의 반대 의견 때문에 절차가 지지부진했는데,[4]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출된지 6주만에 시성 절차가 재개되었다.[5] 기사

그리하여 2015년 2월 3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로메로 대주교의 죽음을 순교로 선포함에 따라 시복시성에 가속도가 붙었다.[6] 마침내 동년 5월 23일 시복식거행되었다. 엘살바도르의 수도 산살바도르의 살바도르 델 문도 광장에서 거행된 이번 시복 미사는 교황을 대리한 교황청 시성성 장관 안젤로 아마토 추기경이 집전했으며, 30만 명이 넘는 군중이 운집해 로메로 대주교의 시복을 기념했다. 축일은 3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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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니 애플시드

- 비어리 훌리엇


영적 각성운동이 미국 전역을 휩쓸고 있었던 1829년 무렵, 오하이오주에 있는 맨스필드에서 한 설교자가 청중들을 향해 도전의 말씀을 전하며 누군가를 찾았다.

“지금 맨발로 천국을 향해 순례길을 걷고 계신 분이 어디에 있나요?” 
“여기 있습니다.”

셔츠 대신에 커피 자루를 입고 있던 맨발의 한 사내가 앞으로 나왔다.
그 사내의 이름은 바로 존 채프만(1774-1845)이었다.
그는 미국 개척시대에 살면서 가는 곳마다 많은 사과 농장을 일구고 천국의 복음소식을 전했다. 훗날 사람들은 그를 조니 애플시드(Johnny Appleseed)라 부르며 미국의 국민 영웅으로 여기게 된다. 채프만은 미국 서부지역으로 개척여행을 떠나면서 사과 농장 관리인으로 여러 지역들에 많은 과수원들을 만들고 경작하였다. 그의 사업은 큰 성공을 거두었고 세상을 뜰 무렵에는 사백만 제곱미터에 달하는 넓은 땅을 소유했지만 성공을 즐기지 않고 고되고 외로운 삶의 길을 끝까지 걸었다. 채프만은 꿀과 야생 딸기 그리고 우유와 옥수수 가루로 만든 음식들을 먹었고 이러한 그의 삶의 방식은 세례 요한을 생각나게 했다. 음식을 버리는 한 여인을 향해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선물을 버리는 것은 죄입니다.’ 라고 말했던 일화를 통해서도 채프만은 세례 요한과 같은 하나님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살았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채프만은 친절한 사람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너무나 가난해서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사과 묘목들을 무상으로 제공했으며, 어느 한겨울에는 서부로 여행 중인 한 가족에게 자신이 가진 유일한 신발 한 켤레를 거저 주었다. 심지어 뱀이나 곤충과 같은 동물들에게까지 친절을 베풀었고 이러한 그의 태도로 인해 여행하면서 만났던 미국의 인디언 원주민들은 그를 존경했다. 채프만이 가지고 있던 자연을 향한 경외심은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보다 훨씬 깊었다. 당시 사람들은 과일 나무들이 잘 자라도록 좋은 나무에 있는 어린 가지를 잘라 튼튼한 나무 줄기에 접붙이는 작업들을 했는데, 채프만은 그러한 접붙임은 하나님의 창조 섭리에 벗어나는 죄로 여겼다. 그런데 그가 심은 나무에서 수확한 사과들은 먹기에 적합하지 않아서 발효한 사과주스나 애플 브랜디(사과주를 증류시켜 만든 독한 술)를 만드는데 사용되었다. 
채프만은 항상 성경과 함께 윌리엄 블레이크나 랠프 에머슨과 같은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던 엠마누엘 스베덴보리의 책들을 지니고 다녔다. 나그네들을 위한 숙소를 찾아가 여러 밤을 지내면서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자주 읽어 주기도 했다. 채프만은 이타적인 친절을 베풂으로 진정으로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자신의 삶 속에서 살아냈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볼 때에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보여질 수 있지만 거칠고 고된 그의 삶이 그를 특별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채프만이 젊은 시절 말에게 머리를 차인 적이 있다는 등의 이야기들을 들먹거리며 정신이 이상한 사람으로 여겼지만, 아이들은 채프만이 자신의 집을 방문하기를 학수고대할 만큼 그를 좋아했다. 채프만은 여자 아이들을 위해서 리본을 가지고 다녔고, 남자 아이들을 위해서는 불타는 숯불 위를 맨발로 걸어 다니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그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채프만에 대한 믿을 만한 정보들이 워낙 드물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 그를 전설적인 인물로 묘사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조니 애플시드는 원래의 존 채프만과는 많은 부분이 다르게 그려졌다. 사실, 그에 대한 이야기는 훨씬 더 굉장하다. 1881년 오하이오주의 한 역사가였던 힐(N. N. Hill)은 “지난 백 년 동안 채프만처럼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사람은 없었다.” 라고 평가했다.

 
 

존 채프만의 실제적인 삶에 대해서 더 알고 싶으신 분은 하워드 민스(Howard Means)가 지은 Johnny Appleseed: The Man, the Myth, the American Story (Simon and Schuster, 2011)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이 글은 하워드 민스의 연구의 바탕 아래 쓰여졌습니다.





신약 개론 - 요한계시록, 유다서, 요한3서.... / 요한이서 / 교회 공동체(사랑과 진리)





마태복음 개론(1:1-28:20)

* 마태(Matthew) /  아람어로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
*
Ματθαῖος(맛다이오스)

알패오 + 마리아 = 마태

히브리식으로 하면 ‘맛다냐’(헤만의 아들로 성가대장, 대상 25:4) 혹은 ‘맛다니야’(시드기야 왕의 본명, 왕하 24:17)로 둘 다 ‘여호와의 선물’이란 뜻이다.

마가복음 2:13-15


15. 예수
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무리가 다 나아왔거늘 예수께서 저희를 가르치시니라.
16.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17.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저희가 많이 있어서 예수를 좇음이러라.

● 세리로 알려진 마태는 예수님의 열두 사도 중 한 명이며, 마태복음을 기록한 사도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막상 마태가 어떤 인물인가? 하고 물어보면, 우리는 그에 대해서 별로 할 말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굉장히 친숙한 제자의 한 사람 같은데, 세리였고, 마태복음을 기록했다는 말 외에는 그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다.

마태는 성경에 오직 두 사건에만 나타난다.
세관에서 세리로 일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 부름받는 장면과, 곧 이어 예수님과 동료 세리들, 죄인들을 자기 집에 초대하여 잔치를 베푼 장면이다.

그 외에는 공관복음에 기록된 열두 사도의 명단에 이름이 나오며, 예수 승천 후 마가의 다락방 기도 모임에 참석한 제자들의 이름에 나올 따름이다.

특히 그는 열두 사도 가운데 가장 많은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 어디에도 그의 목소리를 단 한 군데도 남기지 않았다.

세리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일행의 회무는 가룟 유다가 맡았다.
한마디로, 마태는 우리에게 그 이름이 잘 알려진 것에 비해 그와 관련된 사건은 많지 않으며 자기의 목소리를 드러내지 않은, 요즘 말로 하면, 제자들 중 튀지 않는 조용하고 겸손한 인물이었다.

마태에 대한 기록이 충분하지 않지만, 성경과 교회의 역사 기록을 바탕으로 마태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몇가지 살펴보도록 하자.

1. 마태는 아람어로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

히브리식으로 하면 ‘맛다냐’(헤만의 아들로 성가대장, 대상 25:4) 혹은 ‘맛다니야’(시드기야 왕의 본명, 왕하 24:17)로 둘 다 ‘여호와의 선물’이란 뜻이다.

주로 레위지파와 관련되어 많이 나타나는 이름이다.
본명은 ‘레위’(결합됨)라고 한다.
사도로 부름받은 이후 개명된 이름인 듯하다.
가버나움 태생으로 알패오의 아들이며, 또 다른 야고보(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구별하기 위해 ‘작은 야고보’라 불린다)의 동생이었다.

이상의 기록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히브리인이긴 했으나 유대인은 아니라는 점이다.
레위라고 하는 그의 이름은 그가 유다나 베냐민 지파에 속한 사람이 아니고 레위 지파에 속한 사람임을 암시하고 있다.
다시말해 그는 변절한 레위인이거나 제사장이었다는 것이 보다 설득력 있다.

그의 부친은 알패오였는데, 알패오란 ‘지도자’란 뜻이다.
뿐만 아니라 알패오는 엠마오 도상에서 예수를 만난 두 제자 중 한 사람이었던 ‘글로바’와 동일 인물로 알려져 있는데,
글로바’란 이름이 ‘유명한 아버지’란 뜻이다.

그러므로 마태의 부친 알패오는 당시 백성들 사이에서 상당한 식견을 가지고 지도자 역할을 했던 사람임에 틀림없다.
레위인은 이스라엘 전역에 흩어져 살면서 백성들에게 구약 율법을 비롯 전승되어오는 유대인의 지혜를 가르치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이끌어 가는 지도자 역할을 했다.

그의 모친의 이름은 마리아이다.
마리아란 이름은 히브리어 미리암의 헬라식 표기로 ‘높은, 고상한’이란 뜻을 가지고 있으며 당시 가장 흔한 여성의 이름이었다.

마태작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는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님을 수종하며 따랐던 여러 경건한 여인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십자가 바로 밑에까지 따라갔으며,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던 날 새벽, 향품과 향유를 가지고 무덤에 갔던 경건한 여인 중의 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마태는 경건한 가정교육 아래서 자랐을 가능성이 크다.

2. 마태가 어찌하여 세리가 되었을까?

마태의 고향 가버나움은 동서를 잇는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에 세금을 징수하기 위한 국립세관이 있었다.
바로 이곳에서 마태는 세리로 일했다.
그런데 당시 세관에 근무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동족들이 사용했던 아람어나 히브리어는 물론, 헬라어, 또 로마사람들이 사용하던 라틴어를 구사할 줄 알아야 했다.
그리고 장부를 기록하고 정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만 했다.

당시 세리들의 일반적인 행태는 나라에서 정한 것보다 더 많은 세금을 거두어, 그 웃돈은 자기 호주머니에 챙겨 부당한 이득을 취하는 것이 상례였다.

그래서 회개를 외치는 세례 요한의 날카로운 경고에 양심이 찔린 세리들이 요한에게,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고 물었을 때, “정한 세 외에 늑징치 말라”고 말했던 것이다.

애국심이 강한 유다인은 적대국을 위해 세금을 징수할 뿐만 아니라, 그 지위를 이용해 사리사욕을 채웠으며, 우상숭배하는 수많은 이방인들과 접촉했기 때문에, 세리야말로 대표적인 매국노요, 창기나 죄인, 이방인과 같은 부류요 개. 돼지처럼 천시하고 혐오하였다.

마태가 왜 세리가 되었을까?

비록 사람들의 눈총을 받으며 산다고 해도, 재물만 있으면 모든 것이 보상된다고 생각하는 현실주의자였는지, 아니면, 동족에게 부당한 세금을 징수하는 그릇된 관행의 세관을 자신이 변혁시키려고 했던 개혁자였는지, 그 사연을 자세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만일 자신의 직업에 큰 만족을 하고 있었다면, 마태는 예수님께서 부르실 때, 그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따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즉, 그가 그토록 의지했던 재물이 그에게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했을 것이며, 세관의 개혁은 커녕 날로 마비되어 가는 자신의 양심을 바라보며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마태의 형 작은 야고보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전, 유대인 애국단체였던 ‘젤롯당’ 단원이었다.
따라서 마태는 세리로 있으면서도 엄청난 갈등을 겪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그의 마음에 평안과 기쁨이 있었을 리가 없었다.

3. 마태는 철저히 종교적인 사람이었다

마태복음을 살펴보면, 다른 복음서에 비해 구약을 많이 인용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사실 나머지 세 복음서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이 구약성경을 인용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마태는 구약과 직접 연관된 99번의 인용 외에도, 히브리 성경을 형성했던 모든 기록들, 토라, 율법서, 느빔, 예언서, 그두빔, 성문서 등 모든 기록들을 인용하여, 예수님의 탄생에서부터 부활에 이르기까지 모든 역사에 끊임없이 구약성경을 언급하면서,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과 왕 되심을 증언하고 있다.

그가 비록 같은 시대의 사람들에게 변절자요 매국노로 보였을지 모르나,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에서 완전히 떠난 사람이 아니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는 다른 모든 제자들보다 두드러지게 구약의 문헌들을 연구하였으며, 엄밀한 의미에서 메시야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던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비록 세관에 앉아 있었으나,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소문, 사람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수많은 소문 가운데서, 예수님의 소문을 이미 듣고 있었을 것이다.

구약성경 말씀에 통달했던 그에게 예수님의 소문, 예수님의 메시지, 예수님의 행적은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방황하고 있던 한 젊은이에게, 예수님께서 다가가신다.
그리고 긴 말 없이 그를 부르신다.

“나를 좇으라.”
비록 예수님의 말은 간단했으나, 이 말은 마태의 심령 가운데 천둥번개처럼 들렸을 것이다.
그의 머리끝에서부터 손끝, 발끝까지 온통 전기에 마비된 듯, 주체할 수 없는 힘에 이끌려, 마태는 즉시 자기가 앉아 있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예수님을 따른다.

그는 이 기쁨을 혼자만 느낄 수 없어 동료 세리와 죄인들을 부르고, 주님과 그 제자들을 맞아들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 자리를 마련했다.

자기가 구원을 받은 것은 남을 구원하기 위해서이다.
자기만 구원받고 이웃의 구원에 대해 무관심한 사람은 참으로 구원받은 자라고 생각할 수 없다.
이 모임은 대단히 은혜스러워 자리를 함께 한 세리나 죄인들이 대부분 주님을 따르게 되었다(막 2:15).

이때 놀라고 의아하게 생각한 것은 학자나 바리새인들이었다.
뱀처럼 혐오했던 세리의 집에 예수와 그 제자들이 초대를 받아 참석하고 동석한 자들은 모두가 세리와 죄인들이니, 명색이 그리스도라고 자처하는 자가 이 무슨 꼴인가 하고 그들은 비난했다.

이에 대해 주님의 입에서는 참으로 귀한 말씀이 흘러나왔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막2:17).”

얼마나 귀한 위로의 말씀인가?
인류에게 이보다 더 반가운 소식이 있을까?
세상에 죄인이 아닌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인간은 잠든 죄인이거나 아니면 깨어난 죄인이다.
자기가 죄인인 줄 알고 있는 사람보다 죄가 없다고 자부하고 남을 얕보는 사람은 더욱 큰 죄인이다.
자기가 죄인인 줄 알게 된 세리나 창녀들은 자칭 의인보다 훨씬 의로워졌다고 주님은 가르치셨다.
‘죄인의 친구인 예수님’이야말로 멸망해 가는 인류의 유일한 희망이다.

마태는 은혜 안에서 자기의 과거를 깨끗이 청산하여 12사도의 한 사람으로 뽑혔다.

마태는 전승에 기록된 대로 15년 동안은 예루살렘에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 여러 사도들은 복음을 들고 각지로 흩어진 유대인이나 이방인들에게로 나아갔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로 인하여 주님을 알게 되고 교회가 세워진다는 좋은 소식들이 들려왔으며 거기에서 용기를 얻어 마태도 마침내 복음을 들고 길을 떠났다.

마태는 아람어로 마태복음을 기록했으며 당시 북부 팔레스틴 사람들은 아람어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후에 그는 히브리어로 많은 사본을 만들어 그가 다녔던 곳마다 복음의 소식을 나눠주었음이 분명하다.
마태가 히브리어로 된 복음을 가지고 사역을 했다는 것이 이방인들보다도 유대인들을 더욱 많이 개종시킨 이유 중의 하나로 들 수 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을 통하여 성취될 메시야에 관한 구약의 예언을 많이 다루고 있다.
그러한 구약의 인용구들은 이방인들에게는 이렇다 할 감명을 불러일으키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마태도 종국에는 유대인의 분노를 불러 일으켰다.
이리하여 그의 발길은 들을 귀를 가진 이방인들에게도 향했다.
마태가 여러 명의 왕들과 고위 관리들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많은 전승과 전설들이 있다.
그는 학식 있는 사람이었고 주님을 따르기 이전에 관리로서의 그의 경력을 상기해 볼 때 의심의 여지는 없다.
그는 고위 관리들이나 왕족들의 세계를 잘 알고 있었기에 그들에게 적절하게 복음을 제시할 수 있었을 것이다.

로마 카톨릭 전승에 기록된 대로 마태가 아프리카에 있는 이디오피아에도 복음을 들고 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그의 시신이 언제 어떠한 방법으로 발견되었는지는 분명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아다나시우스파의 한 수도사가 발견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후 교회는 마태의 시신을 이탈리아 살레르노로 가져오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 후에 사도의 유해를 모실 웅장한 성당이 세워졌다.
마태 사도의 유해의 일부분이 로마로 옮겨졌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로마로 유해의 일부분을 옮겨간 것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오늘날까지도 마태 사도의 대부분의 유해는 살레르노에 보존되어 있다.

마태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각기 분분해서 그가 정확히 어디에서 죽었는지 규명되지는 않았다.

산헤드린 전설은 마태가 이집트와 관련이 있음을 시사한다.
이것으로 미루어 마태는 아프리카에 있는 이디오피아에서 돌아와 이집트에서 순교를 했다는 추론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도출된 결론이 확실한 것은 아니다.

다른 대부분의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마태 또한 여러 나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것으로 보인다.

이레니우스는 마태가 히브리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고 말한다.
이레니우스가 말한 히브리인들이란 팔레스틴에 있는 유대인들인지 아니면 저 멀리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을 말하는 것인지 분명하지가 않다.

아마도 이들 유대인들을 모두 가리키는 듯 하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마태가 복음을 들고 수고한 햇수는 15년이라고 말했다.
클레멘트는 또한 마태가 이디오피아, 그리스 북부에 있는 마케도니아, 시리아, 그리고 페르시아까지 갔다고 증언하고 있다.
초기의 그리스도인 작가들은 헤라클레온의 말을 인용하여 마태는 순교하지는 않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다른 작가들은 그가 고통스럽게 죽어갔다고 주장한다.

마태는 마태복음서를 기록할 때에 과거 자기의 부끄러운 모습이 될 수도 있는 ‘세리’라는 칭호를 자신의 이름 앞에 겸손히 덧붙이고, 또 자신은 드러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의 왕되심만을 신실히 증거하였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할 자로서 택함 받은 우리는 겸손히 나를 감추고, 오직 그리스도의 이름만이 존귀히 드러나도록 애써야 하겠다.

마태는 과거 자신이 세리로 있을 때에 유대 공동체로부터 죄인 취급당하며 소외받았지만, 오히려 유대 성도들을 위해 히브리어로 마태복음을 기록한 것으로 보아 동족에 대한 사랑이 각별했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 마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즉시 예수님을 좇았다.
뿐만 아니라 자신과 같이 죄인 취급을 받는 여러 동료들에게도 주님을 만날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이와 같이 주님의 부름을 받은 우리들은 어쩔 수 없이 주를 따르는 것이 아닌, 열정에 찬 뜨거운 감사와 순종으로 주를 따라야 하겠다. 또한 나 혼자만의 구원 받음에 만족하지 말고, 나와 같이 힘들어 하는 여러 이웃들에게도 새로운 삶, 곧 복된 소망의 길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

소명을 받은 순간부터 묵묵히 예수님을 따르던 마태도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붙잡히실 때 도망치는 연약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성령을 체험한 후에는 사도로서의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였고, 마태복음을 기록하여 복음을 전파하기까지 했다.

이와 같이 연약한 성도를 담대케 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셨으며 성령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신다는 사실이다.
우리도 이 사실을 늘 기억할 때만이 담대하게 주의 일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유다서 개론(1:1-25)

* 유다(Judas)

신약 성경에 등장하는 유다

1. 가룟 유다(Judas Iscariot)

1) 예수를 판 제자(마 27:5)
2) 그 이름은 12제자중에 언제나 맨 끝에 적혀 있다(마 10:4), (막 3:19), (눅 6:16)
3) 회계를 맡아 보았다 (요 12:6, (요 13:29)
4)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는 여인을 책망하였다 (요 12:4 5) 귀신을 쫓아 내고 병을 고친 일도 있다 (마 10:1), (눅 9:1)

가롯유다는 가롯 시몬의 아들이며 (요 6:7) 주께서 택한 열두 사도 중에 한 사람이다.
가롯 유다는 복음서에 나오는 인물들 중에 가장 불가사의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의 이름의 뜻과 배경, 성품 그리고 예수님을 배반한 동기와 죽은 방법등 모든 것들이 아직까지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가롯이라는 이름에는 다양한 설명들이 제시되어 왔다.
즉 "그리욧 사람" "암살자" "가짜, 거짓말장이, 위선자" 등의 여러가지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설명되었다.

이 가운데 일반적인 설명은 두 가지이다.

첫째, "그롯사람"이란 견해로12사도 중에 11사도가 갈릴리지방 사람인데 반해 유일하게 가롯유다만이 유다 지방의 사람이라는 것을 근거로 삼고 있다.

둘째는 가장 가능성있는 견해로는 가롯이라는 말이 "가짜, 거짓말장이,위선자"를 뜻하는 "세케르"라는 아 람어의 어근에서 나온 것으로 이 말이 당시 아람어를 사용하던 기독교인들이 예수의 배반자를 부를 때 사용한 별명이었다는 견해이다.

막3:14,요6:70을 미루어 보면 예수님은 복음을 전도할 사도를 신중히 선택하심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요6:64를 보면 유다를 택한 것은 매우 곤혹스 러움을 느끼게 한다. 이것은 예수가 속죄적 죽음을 하기 위해 하나님의 계획에 의식적으로 복종한 것이라고 하여 이를 설명하려고 하는 바도 있지만 공관복음은다른 해결을 요구하고 있다. 예수께서 유다를 제자로 선택하신 것은 그를 유망하게 보고 또 그의 성격을 통찰하고 크게 쓰여질 가능성을 갖고 있음을 발견하여 사랑하는 마음에서 그를 받아들이고 그에게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또 이 무리안에 배신자가 있으면 누구인지 처음부터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여하튼 그의 성격을 생각하여 볼 때 아마 그리스도의 왕국이 건설될때 지상에 있어서 어떤 이들일 얻게 되리라고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가롯 유다는 예수의 제자단의 회계일을 보면서 일행의 전대를 맡았다. 그래서 그는 자기 호주머니를 채우기 위해 부정을 행했다. 베다니의 마리아 집에서 그녀가 예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표시로서 지극히비싸고 순수한 나도향유를 예수의 발에 부었을 때 제자들 특히 유다는[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서 주지아니하였으냐]라고 투덜거렸다. 그러나 그의 본심은 그 돈으로 자신의주머니를 채우러는 생각이었다.

이에 예수께서 부드럽게 충고한즉 그는 오히려 분격하여 제사장들에게 가서 예수를 팔아 넘길 것을 제의했다. 제사장들은 이에 동의하여은 30개를 지불했다. 그것은 당시 노예한 사람의 시세인데 약 9달러 50센트에 달한다고 한다. 이때부터 유다는 예수를 넘겨주려고 기회를 엿보고있었다. 유월절 만찬 석상에서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릴 때가 다가오는 것을 알고 유다에게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 말씀했다. 마귀가 그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던 것이다.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라고 예수게서 조용히 말씀했을 때 제자들은 모두 근심하면서 저마다 [내니이까?] 라고 반문하였다. 베드로는 예수의 품에 기대어 누워있는 요한에게 머릿짓를 하며[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고 졸랐다. 그러자 예수께서는[나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요13:26)라고 말씀했다. 그것은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라고 한 성경말씀의 성취였다 (요13:18,시41:9) 그리고 예수께서는 한 조각을 찍어서 유다에게 주었다. 유다가 그것을 받자마자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갔다.

뻔뻔스럽게도 유다는 시치미를 뚝 떼고 [랍비여 내니이까]라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네가 말하였도다]라고 말씀하셨다(마26:21-25) 네 하는일을 속히 하라(요13:27). 제자들까지도 예수께서 왜 유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는지 아무도 몰랐다.(요13:28) 어떤 자는 유다가 돈 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쓸 문건을 사라고 하시는 것으로 혹 무엇을 나누어주라고 하시는 줄로 생각하였다. 이에 유다는 곧 나가서 제사장들에게달려갔다. (요13:28-30)

최후의 만찬이 끝나자 예수께서는 11제자와 같이 겟세마네 동산으로갔다(마26:36). 기도가 끝났을 때 유다의 선도검과 몽둥이를 들고왔다. 야암이 기 때문에 누가 예수인지 알리는 신호로서 유다는 예수에게 입맞추었다. 이리하여 예수께서는 체포되었다.(마28:47-50)유다가 예수를 배신한 동기가 무엇인지 명확히 밝혀진 것은 없다. 그러나 초대교회가 사도들 중의 한 사람을 주인공으로 삼아 그토록 악명높고 수치스러운 일화를 인위적으로 지어냈을 리는 없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의 이름은 더욱더 더럽혀져 제4복음서는 그를 사탄이나, 적그리스도와 동일시하고 있는 정도이다. 그러나 이런 유다에 대한 적개심이 유다가 예수를 배반한 사건 자체의 사실성을 왜곡시켰다고는 보기 어렵다.

앞에서도 약간 언급되었지만 유다는 아마 단순히 욕심이 많고 부정직하여 사사로운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유혹을 이기지 못하여 예수를 배반했을수도 있다. 그런데 그렇게 흉악한 반역으로 얻게 되는 돈이란 하찮은 소액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예수를 배반한 동기를 전적으로 이런식으로 생각 하기에는 조금 무리인 것으로도 여겨진다. 오히려 유다자신이 예수님에 대하여 많은 기대를 한 것에 대한 실망과 거짓예언자들과 거짓메시야를 공격하는 유대교의 율법 및 제도에 대한집착으로 그러한 행동을 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이튿날 아침 어느 정도 냉정해진 유다는 예수께서 정죄되어 사형을 선고 받았다는 것, 자기가 죄없는 사람의 피를 판 것을 알고 후회하면서 제사장 과 장로들에게 가서 은 30개를 돌려 주면서 [내가 무죄한 피를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라고 말했다. 그의 양심은 제자들의 양심처럼마비되어 있지 않았다. 제사장들은 그에게 말했다. [그것이 우리에게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리라] 그래서 유다는 은을 성소에 던져놓고나가서 목매어 죽었다. 제사장들은 [피값]을 성전 재정에 넣는 것을싫어하여 그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산다.

이 밭은 [피밭]으로 알려지게되었다 (마27:3-5). 사도행전에서는 이 부분을 상당히 다르게언급하고 있다. (행 1:18,19) 즉 사도행전에 따르면 유다 자신이 그 밭을샀으며, 그의 몸이 곤두박질하여 (혹 부풀어 올라?) 배가 터져 창자가다 흘러나왔다고 한다. 유다의 비참한 죽음은 초기 기독교 설교자들과 저자들에 의하여 수없이 인용되곤 하였다. 그리고 또 유다의 죽음이 보다 무섭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 소름이 끼치는 종류의 설명을 덧붙이기도 했다.

유다의 죽음에 관한 신약의 두 기사는 유다가 배신행위의 결과로 횡사를 당했다는 것과 예루살렘에 있는 작은 땅을 샀으나 배신행위의 결과로 인하여 [피밭]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것은 서로 일치한다. 구약 시편 109편을 보면 유다의 죽음에 대한 것이 예시되어 있다. 이것은 원리 작자와 동시대에 된 일에 대하여 노래한 것이었으나 사실은 가롯 유다에게서 이루어진 예언 이었던 것이다.(시109:8,행01:20)그리고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만이 멸망했다(요17:12). 이 두 장을 살펴보면 그는 하나님에게 강요되어 멸망의자식이 된 것이 하나님의 긍휼을 거부해서였으며 그리고 그것을 구하지도 않아서 멸망했음을 알 수 있다.
2. 사도 유다(

3. 초대교회 지도자 유다(

4. 예수님의 형제 유다(





▶ 유다(Judas)

뜻 : 찬송

[1] 야곱(Jacob)의 4째 아들(창29:35, (마01:2).

이스라엘 12지파 -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스불론, 잇사갈, 단, 갓, 아셀, 납달리, 요셉 (에브라임, 므낫세), 베냐민

(1) 레아가 B.C 1755년에 하란에서 낳았다. 여러형제가 어린 동생 요셉을 죽이려고 하는 것을 미디안 상인에게 팔게 했다(창37:26-27).

(2) 흉년에 양식을 사러 애굽에 갔을때 요셉이 베냐민을 가두려 하는고로 애걸하였다(창44:18-34).

(3) 출애굽시에 12지파중 이 지파의 자손수가 가장 많고 세력도 가장 강하여 광야에 있을 때나 가나안에 들어갈 때 늘 선봉이 되었다

  (민01:27, (민02:9)

(4) 그후 온가족이 애굽에 내려갈 때는 세 아들을 데리고 갔다(창46:12).
(5) 그 본영의 기호는 사자(Lion)이다(창49:9, (계05:5).

(6) 그 기업지는 가나안 남방인데 다른 지파보다 광대하고 예루살렘 시온산 성전,왕궁들이 다 이지방에 있고 국명도 유다라 하고 왕통도 다윗으로 부터 23대 시드기야왕까지도 계승하였고 만왕의 왕 예수님도 이 지파에 서 탄생하셨으니 야곱의 축복이A하였다(창49:10).

(7) 여러가지 미덕이 있었으나 크게 실수한 것은 그 자부 다말에게 실수하였는데 그 아들 쌍둥이가 베레스는 다윗의 10대조이다(창38: (마01:3-6)

[2] 예수의 조상으로 바벨론 포로 이전 사람(눅03:30).
      관련인물 -> [요셉] [시므온]

[3] 사도중 한 사람으로 일명 다대오라고도 하고 (요14:22, (마10:3).
      야고보의 형제인데 유다서를 쓴 사람이다(유01).

[4] 예수의 동생이다(마13:55).

[5] 가롯인 유다로서 돈 주머니를 맡아보던 12제자중 하나로서 은 30에 은사 예수를 팔고 로마 병정에게 잡아준 죄악으로 인하여 자살하였다(마26:14-51, (마27:5, (행01:18).

[6] 바사바라하는 유다로서 예루살렘교회의 유력자로 공회의 결의안을 가지고 실라와 같이 회신사가 되어 안디옥 교회에 갔다(행15:22).

[7] 갈릴리 유다로서 주후 6년에 호적할 때 백성을 속여 모반하다가 패망하였다 (행05:37).

[8] 다메섹성 직가에 사는 유다로 그는 유대인이었다. 바울이 회심하던 날 그 집에 유숙하였다(행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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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의 이름은 찬송한다는 뜻입니다.
레아의 소생으로 야곱의 넷째 아들이 었습니다.
유다는 일처리에 신중한 사람이었고 설득력이 있고 이론이 정연한 변론가였습니다.
어린 동생 요셉을 형들이 죽이기로 모의할 때에 그를 구하기 위해 이스마엘 상인에게 팔도록 제안한 사람이 유다였습니다(창 37:26-27).

또한 그의 형 시므온과 레위가 세겜사람들을 속여 할례를 실시하게 한 후 그 성민을 도륙할 때에 유다는 거기에 가담하지 않았습니다. 그 뒤에 양식을 구하러 애굽에 내려갔을 때에 베냐민을 볼모로 잡아두려 하자 요셉에게 베냐민을 놓아주도록 호소력있게 긴 설명을 조리있게 전개한 사람도 유다였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물려진 혈통적으로 계승된 축복을 르우벤을 제쳐놓고 요셉이 받았다면 영적인 구속의 혈통을 계승한 대표적인 지파는 유다였습니다.
그러므로 유다를 사자라 호칭했고 또 유다가 남조의 국명이 되기도 했습니다.

다윗으로부터 시드기야까지 23대의 모든 왕이 유다의 혈통이요 예수님도 유다지파를 통해 오셨습니다(창 49:10).
그러나 유다가 본의 아니게 자기 며느리 다말의 계획적인 유혹에 넘어갔던 것은 큰 실수였습니다.
이 사건이 담고있는 교훈도 기억해야 합니다.


교훈과 적용

첫째, 신중하게 일을 처리하는 사람으로 열두형제중에 대표적인 인물이 되었습니다.
항상 신앙과 기도를 앞세워 문제를 다루어야 합니다.

둘째, 유다와 다말의 사건은 구속의 원리를 밝혀 주었습니다.
한마디로 인류는 다 죄의 혈통입니다.
이는 구원의 가능성을 확인시킨 교훈입니다.

야곱의 넷째아들 
하나님의 섭리 불순종 고통과 부끄러움 당해 유다는 야곱이 레아에게서 얻은 넷째 아들로서 그 이름의 뜻은 "찬양하다" 이다.
그는 열두 형제중 지도력이 탁월하여 그의 후손 중에서 치리자가 태어날 것이라는 메시야 예언의 축복을 받게 된다.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것을 찢고 올라 갔도다. 그의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 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창 49:9-10).

그는 르우벤, 시므온, 레위처럼 통간과 살인의 죄는 범치 아니 했으나 가나안의 아둘람 사람 수아의 딸과 결혼한 것이 실수였다.

유다가 거기서 가나안 사람 수아라 하는 자의 딸을 보고 그를 취하여 동침하니 그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매 유다가 그 이름을 엘이라 하니라 그가 다시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이름을 오난이라 하고 그가 또 다시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셀라라 하니라 그가 셀라를 낳을 때에 유다는 거심에 있었더라. (창 38:2-5)

아브라함에서 유다, 유다에서 다윗, 다윗에서 그리스도에게로 흐르는 혈통이 순결하지 못할때 하나님께선 그 혈맥을 끊으시고 새롭게 이어 가시는 장면을 우리는 유다를 통해 다시 한번 찾아 볼수 있다. 유다와 가나안 여인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 엘이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므로 죽임을 당했으며 그의 동생 오난도 결국 죽게 되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왕가의 혈통을 잇기 위해서 유다와 그의 자부 다말에게서 베레스를 태어나게 하셨다.

이처럼 유다의 생애를 통하여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사람의 인위적 계획이 하나님 섭리의 흐름을 막는 경우 하나님께선 그 섭리의 물꼬를 트시기 위하여 제방을 허물어 버린다는 것이며, 그리고 하나님께선 자신의 뜻과 방법대로 그 섭리를 추진해 나간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만일 유다가 가나안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지 않았더라면 자식의 죽음과 자부의 몸에서 후사를 얻는 고통과 수치는 경험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창세기 38:1-11
마태복음 5:28

1. 경솔한 결혼과 그 결과

1) 유다는 일찍 결혼하였으나 그 결혼은 경솔한 결혼이었다. 그는 불신자인 이방인 친구 아둘람 사람 히라의 소개로 수아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1) 유다의 3 아들의 이름은?(창38:3-5)
(2) 유다의 장자 엘의 아내 이름은?(창38:6)

2) 유다의 3아들 중에 두 명은 비명에 죽었다.

(1) 유다의 장자 엘이 죽은 이유는 무엇인가?(창38:7)
(2) 유다의 차남 오난은 그 당시의 관습대로 계대결혼을 하였다. 즉 자식을 얻지 못하고 죽은 형의 대를 보존하기 위하여 형수와 동침하여 자식을 낳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난이 죽은 이유는 무엇인가?(창38:8-9)

* 죄악의 피는 어떤 경우에 가정에서 대를 이어 흐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유다의 불순한 동기가 자식에게 자식은 여인에게로 계속 번져가고 있다.


2. 아내의 죽음과 근친상간
1) 유다는 술에 취하여 욕정을 이기지 못하고 거리의 창녀를 가까이 하게 되었다.
(1) 유다 앞에서 창녀로 가장한 여인은 누구였나?(창38:13-14)
(2) 그렇게 한 이유는?

2) 며느리와 시아버지의 통간은 참으로 수치스러운 일이다. 며느리 다말의 신세도 기구한 일이다.
(1) 유다가 창녀로 가장한 며느리 다말에게 어떤 제의를 하였나?(창38:16-17)
(2) 다말의 요구는?(창38:18)
(3) 그 결과는?(창38:24-26)

* 가문의 씨를 받으려는 여인의 간교함 며느리 다말을 범한 시아버지 유다의 수치스러움 등 이해할 수 없는 장면들이지만 주께서는 그런 집안도 사랑하셨다.

유다… 이스라엘 통치권을 받은자


● 이제는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 메시아의 가문을 이룬 자-유다 )
야곱의 사랑받지 못한 아내 레아가/오직 하나님을 바라보며/그 이름을 지어준/야곱의 네번째 아들,/유다/“이제는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어미의 신앙 고백이 깃든 복된 이름이라

유다의 삶은/죄 많은 허물투성이의 삶/동생 요셉에게 질투를 느껴/동생을 미디안 상인에게 노예로 팔아 넘기고/며느리 다말과의 약속을 어기고/며느리와 근친상간의 큰 죄를 졌네

하지만 하나님은/유다의 삶 속에서 남다른 지도력을 발견했네/형제들을 설득하고/아버지를 설득하고/애굽의 총리를 설득하는 유다의 모습을

그런 유다에게 하나님은/왕권의 축복을 베푸셨네/왕의 홀과 치리자의 지팡이를/그에게 주셨네/이스라엘 중에서/영광스러운 왕의 가문으로 삼으셨네

오,놀라워라/영원한 왕이신 메시아가/왕의 가문인 유다의 혈통을 통해 오신다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축복!/죄 많고 허물 많은 인간을/은총과 긍휼로 감싸안으며/야곱의 넷째 아들 유다에게/영광의 왕관을 씌워 주셨네

● 유다 -“홀(笏)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시기하기도 하고 실수하기도 하는 평범한 인물

야곱의 넷째 아들로 태어난 유다는 다른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시기하기도 하고 실수하기도 하는 일반적인 인간의 모습을 보이며 살아간다. 그는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을 한몸에 받는 동생 요셉에 대해 질투를 느껴 다른 형제들과 공모하여 동생을 애굽 땅에 팔아넘기기도 했다(창 37:26∼27). 또한 자기 아들이 성장하면 계대 결혼(繼代結婚)을 시켜 주겠다고 며느리 다말과 약속하고서도 그것을 일부러 어겼다가 다말이 꾸민 계략에 걸려들어 취중에 며느리와 불륜의 관계를 맺는다. 그 결과 쌍둥이 아이까지 생겨나는 엄청난 실수를 저지른다(창 38장).

지도력이 탁월한 인물

하지만 야곱의 넷째 아들인 유다의 행적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는 야곱의 아들 중 그가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아마도 이것은 장자 르우벤이 서모와의 간통 사건으로 장자의 명분을 잃었고 둘째 시므온과 셋째 레위는 여동생 디나 사건에서 잔혹하게 혈기(血氣)를 부린 일로 지도력을 상실한 데 따른 결과일 것이다.

그래서 유다는 다른 형제들이 동생 요셉을 피 흘려 죽이려고 할 때 그 일을 막고 요셉을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아 넘기도록 했다(창 37:26∼27). 후일에 가나안 땅에 큰 기근이 닥쳤을 때에는 형제들을 대표하여 아버지 야곱을 설득하여 막내 베냐민을 애굽으로 함께 데려갔으며(창 43:8∼10) 애굽 땅에서 베냐민이 누명을 쓰고 억류당하게 되었을 때에는 역시 형제들을 대표하여 자기 희생을 무릅쓰고 애굽의 총리를 설득하는 일을 맡았다(창 44:14∼34).

왕권의 축복을 받은 인물

형제들 중 유다의 탁월한 지도력은 아버지 야곱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음에 틀림없다. 그래서 야곱은 임종을 앞둔 마지막 유언에서 유다에게 특별한 축복을 해주었다. 유다를 ‘사자’(獅子)에 비유하면서 홀(笏)과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왕권(王權)의 축복을 해주었다(창 49:8∼12). 이러한 축복으로 인해 과연 유다의 후손들은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의 가문을 형성했으며 마침내 온 인류를 다스릴 영원한 왕이신 메시아가 유다 가문의 혈통을 타고 이 땅에 임하게 되었다. 비록 유다는 시기하고 실수하는 평범한 인간이었지만 하나님은 유다의 지도력을 높이 사서 그에게 왕권의 축복을 베푸시고 메시아(Messiah) 가문을 형성하게 하는 큰 영광을 주셨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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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 대한 의인화 용어 /


부녀, 자녀

요한이서는 주제가 "교회"라고 한다.
교회는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들의 모임"
세상적인 모임은 나라는 존제가 주체가 된다.
예를 들면 "동호회(같은 취미를 갖는 사람들)" "계(돈을 만들려는 목적으로 모인 사람들)"
이러한 사회적인 모임을 교회에서도 그대로 찾으려고 하므로 문제가 자주 발생한다.

요한 서신의 특징

1. 예수

2. 이단


세린더스(Cerinthus) / 이단의 전수자

예수님의 세례를 인정하지만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과 피와 부활을 믿지 않는다.
세례를 받을 때 그리스도가 임재하여 죽을 때는 그리스도가 떠나고 예수만 남았다.
영은 깨끗하고 육은 더럽다는 것을 긍거한다.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요이 7절)
                                              
기독교는 처음부터 두 개의 큰 적으로부터 위협을 받고 성장하였다.
그것은 밖에서 오는 핍박의 세력과 안에서 자생한 이단들이었다. 오늘날에 와서는 기독교라고 스스로 자부하는 이단파가 수도 없이 많게 되었다. 그러나 사실상 그들의 주장들은 초기의 이단들과 별로 다르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고백하느냐?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이냐? 신이냐? 예수 그리스도가 참으로 인간이 되셨느냐?  그 인성은 영구한 것이냐? 이런 문제들로 인해 초대 교회는 니케아 회의에서부터 칼케돈 회의까지 교리 논쟁으로 점철되었다.
  
본문도 예외가 아니다. 본문에서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자들에 대해 말씀한다. 그러면 그들은 누구였는가? 그들의 주장은 무엇인가?
  
그들의 주장을 인정하게 되면 어떤 결과가 되는가?
사도 요한 당시에 벌써 교회는 그노시스파의 잘못된 물질관 때문에 기독론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들의 한가지 사상은 물질과 영을 구별하되 물질은 악하며 영은 선하다는 것이었다. 이런 영향을 받은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선하신 신이시기 때문에 결코 악한 물질을 입어서는 안 되었다. 그렇게 되면 그의 육신도 물질이니 악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육신과 인성을 부인하게 되었다. 그러면 그들은 예수님의 몸(육신)을 어떻게 보았는가? 그것은 실제의 몸이나 물질이 아니라 그렇게 보였을 뿐이었다. 그리스도는 사람처럼 보였고 나타났을 뿐 실제로 인간의 몸을 입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죽으신 것도 몸과 영의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었다.
  
또 하나의 이론은 세린더스(Cerinthian)파의 이론으로 예수는 참으로 인간이시었다. 그러나 세례 때 그리스도가 임하셨으며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를 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죽지 않았다. 다만 예수만 죽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런 주장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가?
만일 그리스도가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시지 않으셨다면 죄인을 대신해서 대속의 십자가에 죽으실 수가 없으시다. 그렇다면 우리를 위한 대속은 불가능하게 된다. 또 만일 인간 예수가 죽으셨으나 그리스도는 아니라고 한다면 그의 죽음은 인간의 죽음 이상이 못될 것이다. 부활에 문제가 생길 것이다. 그가 부활하셨다면 죽지 않은 그리스도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가? 결국 성경의 가르침과 전혀 다른 결과가 되고 말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여기서 위의 두 가지 견해를 다 마음에 두고 이런 잘못된 이단과 싸웠다. 요한일서 4:2-3은 예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으로서 완전히 인간이 되셨음을 강조한다. 성육신 때에 인간이 되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며 승천하셔서도 여전히 사람의 몸을 입으신 하나님의 아들로 계신다.
  
예수는 그리스도가 아니셨고 세례 때 아들이 되신 것도 아니다. 그의 죽기 전에 그리스도나 아들되심이 끝난 것이 아니다. 예수는 육신으로 임하신 그리스도시었다. 인성과 신성의 두 성품이 그의 탄생 때 이미 연합되었으며 결코 분리되지 않았다. 완전 현재 시제의 결합은(요일 4:2과 여기) 한 인격 안에 두 성품의 영구한 연합을 강조한다.1)
  
누가 적그리스도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이나 인성을 부인하는 자다. 이런 자들은 교회에서 나간 자요 분리자다. 그는 사람들을 속이며 동시에 그리스도를 반대한다.2)  여기서 적그리스도는 이런 모든 이단들의 집합적인 이름이라고 볼 수 있다.3)  우리는 교회의 연합을 꾀해야 하며 교파간에 제각기 다른 교리들에 대해서 서로의 이해와 관용이 필요하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이나 인성을 부인하는 자들이 있다면 결코 그들과 함께 연합을 꾀하거나 일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인간이시요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개인이나 교회 그리고 단체는 참 기독교가 아니다.

   주
   1. John R.W. Stott, The Letteer of John. p.212
   2. Stephen S. Smalley, 1, 2, 3. John. p.330
   3. Simon of Kistemaker, James and I-III John, p.380



영지주의(Gnosticism)란 무엇인가?

영지주의 종파는 1세기 말부터 2세기에 걸쳐 지중해 동해안 지역에 널리 퍼져 있었다. 영지주의란 헬라어 "지식"을 의미하는 '그노시스에서 온 말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지식을 높여 신앙 위에 두었다. 그들은 헬라의 철학과 동양의 세계관과 기독교 교리를 절충하여 하나의 혼합적 종교 철학을 세우려고 시도하였다. 그들의 중요한 문제는 우주의 기원, 죄의 문제, 죄악의 기원에 대한 철학적인 분석이었다. 또한 신앙을 경시하고 당시 유행했던 신 풀라톤주의를 바탕으로 기독교의 종교적 명제들을 해석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들의 주장은 여러 가지 사상을 혼합한 것으로 지역과 주장하는 사람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으나 원 맥은 동일하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시몬도 초기 영지주의자로 보이며, 이미 요한 당시에 에베소의 세린더스라는 영지주의 거짓 교사가 출현하여 교회를 크게 어지럽혔다. 계시록의 니골라당은 이런 영지주의의 한 무리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원을 전통적으로 초기 예루살렘 교회의 일곱 집사 가운데 하나인 안디옥 사람 니골라(행 6:5)에게 돌린다. 사도 요한은 영지주의가 오류임을 증거하기 위하여 요한 1, 2, 3서를 기록하였다.

2. 영지주의의 주장과 특성

1) 세상은 최고의 신이 지은 것이 아니라, 낮은 신(the Demiurgus)인 구약 성경의 하나님이 창조했다. 또한 물질계와 영계로 나누고 물질을 죄악시 하고 창조를 부인했다.

2) 낮은 신의 계시인 구약 성경은 자신들이 최고의 신에게서 받은 계시인 신령한 지식(靈知, gnosis)보다 낮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3) 구약의 하나님 아들인 그리스도의 사도들보다 최고 신의 사도인 자신들이 더욱 월등하다고 주장하였다.

4) 예수 그리스도의 잉태는 초자연적인 것이 아니요, 그의 몸은 보통 육신이었는데 침례 시에 참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여 메시야의 직분을 수행하다가 십자가에서 떠났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무리는 가현설(Docetism), 즉 예수는 육체로 탄생한 것이 아니요 오직 육체를 입은 것처럼 보였을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어떤 파에서는 메시야가 공적인 사역을 하는 동안 잠정적으로 육체를 빌려 쓴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5) 물질과 육신은 악하고 영(spirit)은 선하다. 그러므로 육체는 선하지 않기 때문에 학대하고 방종해도 좋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사상은 페르샤의 조로아스터교(拜火敎)의 이원론에서 온 것이다.

6) 율법은 폐지되었으므로 이제 사람은 아무 법이나 규례 또는 규정에 얽매일 필요가 없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행할 수 있다.

7) 사람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요 그들이 얻은 지식을 통하여 물질의 속박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3. 복음


4.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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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Revelation) / 최종 계시

성령께서 말씀을 조명하여 주신다.

(예) 이긴자, 14만 4천, 666, 신천지(새 하늘과 새 땅) - 이단은 계시록을 좋아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렵다고 하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새로운 해석을 좋아한다.
두려움을 심어주어 사람들을 미혹한다.

1. 내용 분석
- 하나님이 두려워하려고 아니면 이해하지 못하게 하려고 계시를 주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최종적 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

1-3장 / 첫번째 환상 - 사도 요한이 환상을 본다

높아진 그리스도,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품에 있었다
일곱 교회

4-16장 / 두번째 환상 - 천국의 중심은 보좌

어린 양이 인을 떼심
일곱 인(5:1) 
일곱 나팔 
일곱 대접

하나님과 사탄의 대결

17-21:8 / 세번째 환상
악의 세력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바벨론의 멸망(로마) - 밧모 섬에 유배된 사도요한 및 로마의 핍박을 받는 교회

21:9-22장 / 새 하늘과 새 땅


2. 저자

요한계시록 1: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하셨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이라고 부르는 것은 요한이 보았고

계시의 주체는 하나님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보여주셨다
반드시 되어질 일 - 역사속에서


기계적 영감 / 하나님이 불러주신대로 기록 - 자기 생각이 없다. 자기가 기록하였으나 설명을 할 수 없다.

유기적 영감 /
  성령의 감동 - 하늘나라를 보고 느낀 것이 있다
  자신의 감정과 지식 -

3. 관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역사
 교회(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유다서는 베드로후서와 야고보서와 흡사하다.
요한복음, 요한일서, 이서, 삼서, 요한계시록은 문맥이 비슷하다.








요한삼서(세 사람) / 가이오, 디오드레베, 데메드리오


사람은 행복에 대해서 몸이 먼저 반응한다.
반면에 불행하면 몸이 먼저 반응하므로 그 사람의 표정을 보면 현재의 상태를 알 수 있다.
신앙생활은 불행을 행복으로 마음을 회복하는 힘을 공급받는 것이라고 하겠다.

나이가 들면 웃음이 점점 없어진다.
그러나 신앙의 어른들에게는 항상 웃음이 넘쳐야 한다.

힘을 섬김으로 사용해야 한다.
힘을 권력으로 사용하면 모두에게 불행이 될 것이다.


요한삼서(세 사람) / 가이오, 디오드레베, 데메드리오

가이오 / 기쁨, 환희 라는 뜻

1절, 참으로 사랑하는 자
2절, 사랑하는 자여
3절, 진리 안에서 행한다
4절, 진리안에서 행한다

사도 요한의 세번째 편지는 매우 개인적인 것으로 수신자 가이오에 대한 깊은 애정과 관심이 글 전반에서 발견됩니다.
이 편지는 바울이 빌레몬에게 보냈던 것과 성격상 유사합니다.

요한은 본절에서 자신의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장로'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장로'는 사제나 감독처럼, 일정지역에서 영향있는 지도력을
행사 할 수 있었던 직임을 나타내는 듯합니다.

한편 수신자인 '가이오'는 당시에 흔한 이름이었으며 그 뜻은 '기쁨', '환희'입니다.
가이오라는 이름은 세 사람에게서 발견되는데...

1. 바울이 세례를 주고,후에 데살로니가의 첫 감독이 되었다고 전해지는
     고린도의 가이오 (롬 16:23; 고전 1:14).

2. 바울의 동역자로 데살로니가와 아리스다고
     그리고 에베소에서 고난을 같이 한 마게도냐의 가이오(행19:29).

3. 바울의 마지막 선교 여행에서 그리스로부터 마게도냐를 지나 드로아까지 동행한
     더베의 가이오 (행 20:4).

4세기 경의 사도적 관행에 보면
이 세번째 가이오가 나중에 요한 사도에 의해서 버가모의 첫 감독으로 임명되어진 것으로 보아 이 가이오가 본서의 수신자인 듯합니다

 곧 나의 참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
'나의'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고'는 1인칭 대명사로 흔히 생략되기 쉬우나 본절에서는 강조되어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는 가이오에 대한 요한의 개인적인 사랑이 돈독함을 시사합니다.

'참으로'의 헬라어 '엔 알레데이아'는 문자적으로 '진리 안에서'라는 의미로 가이오에 대한 요한의 사랑이 '진리 안에서' 혹은 '진리로' 행하는 사랑임을 시사합니다.


* 네 영혼이 잘 됨같이 : 여행 길에 사용하는 용어 / 유도어
여행 길에 인도함을 잘 받는 것
인생을 살아갈 때 인도함을 잘 받아 잘 되기를 바란다.

범사에 잘 되고 : 모든 일에

강건하기를 :

영혼 :

가이오가 현재 무엇인지

누가복음 7장 백부장이 자기 종이 병들었을 때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도움을 청한다.
이때 백부장의 집에 오려고 할 때 우리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할 수 없다.
이스라엘에 이만한 믿음을 볼 수 없다.
종이 강건하여 졌더라.

복음으로 사람을 낳고 진리 안에서 성장하는 것을 기쁨으로 여긴다.

디오드레베 / 스스로 높이고 군림하는 악한 본

디오드레베라는 이름은 디오스(dios, 그리이스의 신전에 있는 신들 중의 우두머리인 제우스의 이름에서 옴)와
트레포(trepho, 양육하다라는 뜻)로 구성된다.

요한삼서 9절부터 12절까지에서 요한은 두 본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디오드레베의 부정적인 본(9절)과 데메드리오의 긍정적인 본(12절)입니다. 9절에서 언급된 교회는 가이오가 한 지체로서 속해 있던 교회입니다. 디오드레베라는 이름은 디오스(dios, 그리이스의 신전에 있는 신들 중의 우두머리인 제우스의 이름에서 옴)와 트레포(trepho, 양육하다라는 뜻)로 구성된다. 따라서 그 의미는 ‘제우스가 양육하는’입니다. 이것은 자칭 그리스도인인 디오드레베가 그의 이교도 이름을 버리지 않았음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 당시 침례받을 때 그리스도인의 이름을 택했던 초기의 신자들의 실행과는 반대되는 행위였습니다. 역사에 의하면 디오드레베는 그리스도의 인격을 훼방하는 그노시스이단을 옹호했습니다. 요한은 디오드레베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 중에 으뜸 되기를 좋아하고 사도를 접대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디오드레베가 요한을 영접하거나 대접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는 마태복음 20장 25절부터 27절까지, 23장 8절부터 11절까지에 있는 주님의 말씀과 반대됩니다. 그 말씀은 모든 믿는 이들을 같은 위치, 즉 형제의 위치에 둡니다. 요한이서 9절에서 케린티안 그노시스교는 교리에 있어서 그리스도에 관한 교훈을 지나치는 데에 앞장섰습니다. 여기 요한삼서 9절에는 그노시스적인 이단적 교리에 영향을 받고 교회 안에서 으뜸이 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노시스 교리의 문제는 지적(知的)인 교만에 속한 것이고 으뜸이 되기를 좋아하는 것은 행동에 있어서 스스로를 높이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악은 하나님의 대적인 사탄이 하나님의 경륜에 반대되는 악한 계획을 실천하기 위해 사용하는 날카로운 무기들입니다. 전자는 신성한 실재 안에 있는 믿는 이들의 믿음을 해치고, 후자는 하나님의 움직이심에 있어서 믿는 이들의 일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두 가지 문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이 두 가지 문제가 여전히 존재합니다. 첫째 문제인 사상 안에서 다른 사람들 위에 있고자 하는 갈망은 교리에 관계됩니다. 둘째 문제인 으뜸 되기를 좋아함은 실행에 관계됩니다. 교리면에서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전진하고 지내치기를 갈망합니다. 실행면에서 많은 사람들이 으뜸 되기를 좋아합니다. 그런 갈망은 심지어 ‘교황’이 되고자 하는 갈망을 갖게 합니다. 가끔 이 악한 원칙이 교회생활 안에 잠입합니다. 예를 들면, 간증하려고 일어섰을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이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전진되고 지나친 것을 말하기를 원할지 모릅니다. 더욱이 교회생활 안에서 우리는 으뜸, 즉 머리가 되기를 갈망할지 모릅니다. 원칙적으로 이것은 디오드레베의 악한 영입니다. 디오드레베는 그노시스교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노시스주의를 옹호했고 발전시켰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삼일 하나님의 누림을 파괴하려고 노력하는 대적의 간교함을 봅니다. 간교한 사탄은 우리를 삼일 하나님의 누림에서 벗어나게 하거나 우리를 이 누림에서 끊어 내고 심지어 그 전체를 파괴하기 원합니다.


12절.

데메드리오(Demetrius) /  뜻 : 백성의 어머니

뭇 사람의 거울에게
진리의 거울에 비춰볼 때에도

데메(여신) + 테레(숭배하는 자) = 여신을 숭베하는 사람으로 우상을 숭배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진리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에베소 사람으로 은장색으로서 우상을 만들어 이익을 보다가 바울의전도 때문에 영업에 방 해가 되자 동업자들을 충동하여 바울에게 항의하였다(행 19:24).


▶ 데메드리오 Demetrius. [Deme'trius]

1.  Silversmith of Ephesus, who made silver shrines of the temple. Fearing that the preaching of Paul against idolatry would lessen the gains of himself and others, he raised an uproar. Acts 19:2438.

(행19:24, 38 24 즉 데메드리오라 하는 어떤 은장색이 아데미의 은감실을 만들어 직공들로 적지 않은 벌이를 하게 하더니 24 For a certain [man] named Demetrius, a silversmith, which made silver shrines for Diana, brought no small gain unto the craftsmen; 38 만일 데메드리오와 및 그와 함께 있는 직공들이 누구에게 송사할 것이 있거든 재판 날도 있고 총독들도 있으니 피차 고소할 것이요

2.  A convert who was borne witness to by all, and by the truth itself. 3 John 12.

(요삼01:12 데메드리오는 뭇사람에게도, 진리에게도 증거를 받았으매 우리도 증거하노니 너는 우리의 증거가 참된 줄을 아느니라


종교개혁자 루터는 1546년 2월 18일 새벽 3시 쯤 임종을 하면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걸하는 사람이다.
믿음생활의 본질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걸하는 것 즉 구하는 것이며, 하나님은 이런 은혜를 사모하는 자를 믿음의 사람으로 인정해 주십니다.

노아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가 있습니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창 06:09). 노아의 모든 행위가 완벽하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살겠다는 고백의 평가입니다.

 

전 07:20 선을 행하고 전혀 죄를 범하지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없기 때문이로다.

 

가이오와 함께 믿음으로 섬기는 교회에 두 사람의 지도자가 있습니다. 한 사람은 디오드레베이고, 또 한 사람은 데메드리오입니다. 이들은 나름 교회를 위해 일을 하였는데, 지나고 보니 디오드레베는 그만 순회 전도자들을 배척하는 자리에 서고 말았습니다.

반면 데메드리오는 디오드레베가 배척한 사람들을 믿음으로 섬기는 일을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디오드레베는 사도 요한으로부터 징계의 대상이 되었고, 데메드리오는 모든 일에 인정을 받고 본받을 만한 사람으로 추천까지 받았습니다.

어떤 일로 데메드리오가 요한의 인정을 받고 본을 받을 사람으로 추천 받게 되었는지를 오늘 말씀으로 살펴보겠습니다. 함께 은혜 받는 시간되기를 축원합니다. 

1. 데메드리오는 어떤 사람입니까?


 

12 데메드리오는 뭇 사람에게도, 진리에게서도 증거를 받았으매 우리도 증언하노니….

 

성경은 데메드리오에 대해 두 사람을 소개 합니다. 에베소의 은장색(행 19:24~27,38) 데메드리오와, 오늘 말씀에 나오는 데메드리오입니다. 성경학자들 중에 더러는, 에베소에서 아데미 신전의 모형을 만들어 은장색 우상 장사를 하던 데메드리오와, 요한삼서의 믿음의 일꾼 데메드리오가 동일인이라고 합니다.

행 19:24~27,38절에 의하면 사도 바울의 3차 선교 여행 때 에베소의 데메드리오가 복음 사역에 크게 걸림돌이 되었으나, 곧 예수님을 믿고 요한삼서의 믿음의 일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편에서는 두 사람의 데메드리오를 각각 다른 사람이라고 주장합니다. 오늘 말씀의 데메드리오를 사도행전 19장의 데메드리오와 연관시킬 근거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저도 동일 인물이 아닌 각각의 인물로 보고 말씀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러면 데메드리오가 요한삼서의 주인공 가이오와는 어떤 관계인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본서의 저자 사도 요한이 가이오와 데메드리오를 연계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데메드리오에 대하여 2가지로 생각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부분은 본서의 저자 요한과의 관계로 보아, 데메드리오를 요한이 파송한 순회 전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보는 관점입니다. 전해오는 이야기 가운데는 데메드리오가 요함삼서 편지를 요한으로부터 받아 가이오에게 전달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눈치를 채고 시기를 한 나머지 순회 전도자 데메드리오를 맞아들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른 부분은 데메드리오가 가이오와 함께 교회를 기쁨으로 섬기는 멤버로 보는 관점입니다. 가이오처럼 교회를 위해 봉사를 하다 특별히 순회 전도자가 오면 기쁨으로 대접을 하였는데 이 일을 디오드레베가 시기하여 교회에서 내 쫓았다는 것입니다(10).

 

10 ….그가 악한 말로 우리를 비방하고도 오히려 부족하여 형제들을 맞아들이지도 아니하고 맞아들이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쫓는 도다.

 

교회생활에서 제일 힘든 부분이 무엇일 것 같습니까? 충성하는 일에 대하여 다른 사람으로부터 시기와 견제를 받는 일입니다. 교회 밖에서 믿음을 지키기 위해 핍박 받는 것은 은혜로 받아들이면 능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같은 믿음의 가족들로부터 훼방과 조롱을 받는다면 그때는 견디기가 무척 힘이 듭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교회를 섬기는 원리는 꼭 같습니다. 언제나 격려를 하는 사람과 훼방을 하는 사람이 공존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힘들고 지쳐 쓰러질 것 같은 상황을 만날 때 위로가 되는 메시지를 안내해 줍니다.

 

갈 06:0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요한은 가이오에게 믿음의 본이 된 인물, 믿음의 향기와 감동이 있는 인물 데메드리오를 멘토로 삼으면 좋을 것이라고 권면을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교회의 부흥의 요소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 지를 이제 알 수 있습니다.

디오드레베와 같은 사람이 있으면 교회는 혼란을 만나게 될 것이고, 데메드리오와 같은 사람이 있으면 교회는 사랑이 넘치고 부흥이 올 것입니다. 디오드레베와 데메드리오를 통해서 목회자를 지치게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목회자에게 힘이 되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능히 짐작 할 수 있습니다.

 

 

  2. 데메드리오는 모든 일에 인정을 받았습니다.

 

12 데메드리오는 뭇 사람에게도, 진리에게서도 증거를 받았으매 우리도 증언하노니 너는 우리의 증언이 참된 줄을 아느니라.

 

공동체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 것 같습니까? 서로가 서로를 알아주고 인정을 해 주는 것입니다. 특히 신령한 부분을 다루는 교회에서 꼭 필요한 덕목이라면 서로가 상대방을 인정해 주고, 또 인정을 받는 일입니다. 12절을 보면 요한은 데메드리오에 대하여 세 가지 차원에서 인정받은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뭇 사람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진리로부터 인정을 받고, 요한으로부터 인정을 받은 일입니다.

 

뭇 사람에게도 증거를 받았으매. 모든 사람보다는 모든 일에 라는 의미로서, 데메드리오는 그가 행하는 일마다 신실하게 감당하여 인정을 받았습니다.

진리에게서도 증거를 받았으매. 데메드리오는 진리 안에서 행한 가이오처럼, 자신도 진리의 말씀을 따라 순회 전도자들을 대접한 것이 인정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증언하노니. 데메드리오는 교회에서, 순회 전도자들로부터, 특별히 순회 전도자를 파송한 요한으로부터 인정을 받았습니다.


요한은 데메드리오가, 교회에서 분명 믿을 만한 사람, 가장 신뢰가 가는 사람이라고 확신이 섰기 때문에 가이오에게 데메드리오의 이런 선한 행동을 본받으라고 합니다. 주변의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데메드리오, 진리의 말씀을 따라 모든 것을 믿음으로 이해하는 데메드리오, 비록 힘들어도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일을 기쁨으로 감당하는 데메드리오, 이런 사람이 들어가면 교회는 살아납니다.  

그런데 데메드리오와 같은 믿음의 성품은 저절로 형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악한 성품을 익히는 것은 힘들이지 않고도 쉽게 이루어집니다. 반면 믿음의 성품을 익히려면 믿음의 좋은 성품을 가진 사람과 친해야 가능합니다.

요한이 데메드리오의 선한 성품을 가이오에게 본받으라고 하는 것은 그만큼 믿음의 준비와, 믿음의 몸부림을 치라는 뜻입니다. 어떤 일이든지 공짜는 없습니다.

 

종편 채널A 천개의 비밀 “어메이징 스토리” 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이 가운데 7월 5일 방영된(155회) 태종의 아들 양녕대군 두 얼굴의 진실 편은, 세자로 생활을 하다 온갖 스캔들로 폐세자가 된 장자 양녕대군의 이야기입니다.

그 내용 가운데 양녕대군 제가 아버지 태종에게 세자의 자리를 내어 놓으면서 세자 복을 벗고는 이제 익선관도 벗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러분 익선관(翼善冠, 翼蟬冠)이란 말을 아십니까? 익선관이란 조선시대 왕과 세자가 평상복이나 집무 복을 입을 때 함께 쓰는 모자로서 거기에 매미의 날개 모양을 형상화 하였습니다.

 

매미에게는 오덕이 있다는 것입니다 ①매미의 머리 모양이 선비의 의관을 닮았다고 선비의 덕(文德))이라 하고, ②맑은 이슬과 수액만 먹고 사니 청덕(淸德)이라 하고, ③농부가 가꾼 채소와 곡식을 애벌레나 메뚜기처럼 해치지 않는 겸손함이 있다고 겸덕(謙德)이라 하고,

④날짐승과 들짐승, 곤충 등 모든 생명체들이 집을 짓는 것과 달리 매미는 집을 짓지 않는 검소한 덕을 갖췄다고 검덕(儉德)이라 하고, ⑤철 맞춰 왔다가 가을이면 때를 봐 떠날 줄 아는 믿음을 갖췄다고 해서 신덕(信德)이라고 하였습니다.

조선시대 왕들이 익선관을 쓰고서 선한 것을 본받으려고 힘썼던 것처럼, 우리도 데메드리오의 선한 모습을 본받으면서 범사에 인정을 받도록 힘써야겠습니다.

 

 

  3. 나는 믿음으로 인정을 받는 생활입니까?

 

딤후 02:15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인정된 자(δόκιμος). 다양하게 번역되는 단어로서 일정한 시험을 거친 후에 인정되고 받아들여 진 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의 원문을 보면 이 단어가 문장 구조상 하나님 앞에(τῷ θεῷ)와 결합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인정 보다는 하나님이 인정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초대교회 시절 성도들을 혼란하게 하였던 요소들 대부분이 하나님으로부터 인정 보다는 사람으로부터의 인정을 받으려 함이었습니다. 그 결과는 교회의 분란만 가져왔습니다.

 

이스라엘의 3대 조상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완벽한 믿음입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 모두가 상당한 허물들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조상의 자리에 세워진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믿는 믿음 때문입니다.

인정을 받는 믿음에는 회개가 따르고, 자신을 주님께 드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덕을 세우는 일이 따릅니다. 잘 아는 말씀 한 번 돌아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과 사이에 하인들로 인해 다툼이 일어나자 이보게 조카,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창 13:08)고 제안을 하였습니다.

 

잠언 17:14
다투는 시작은 둑에서 물이 새는 것 같은즉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시비를 그칠 것이니라.

믿음의 인정을 받는 자리에 나아가려면 하나님의 신뢰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시험을 잘 통과하여야 합니다. 편당이 생기지 않게 하여야 합니다(고전 11:19). 어느 시대나 가짜가 진짜 행세를 합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진리를 가장하여 찾아와서 멸망에 빠지도록 넘어뜨리려는 계략을 동원합니다. 믿음의 자리에 세워진 자, 믿음의 인정을 받은 자는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분별하고, 진리와 오류를 정확하게 구분하여 진리의 길을 굳게 걸어갑니다. 믿음으로 인정을 받는 일꾼은 분별력을 필요로 합니다. 분별력은 사물의 이치를 바로 깨닫고, 문제를 풀어 갈 수 있는 원동력입니다. 이런 분별력이 따를 때 하나님의 인정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일꾼의 특징은 자신을 하나님께 드림에 있습니다. 그 드림은 자신과 눈물과 땀방울입니다. 이런 드림이 없는 사람이 지도자로 세워지면 바리새인처럼 되기가 알맞습니다. 바리새인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말로서는 열심히 일을 하나 실제는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는 것이고, 드리기는 하지만 정의와 긍휼과 믿음이 없는 생활이고(마 23:23), 말과 생활이 일치하지 않는 삶입니다.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사자성어 퀴즈를 내었습니다. 내용은 술을 먹고 길거리에서 큰 소리로 떠들며 노래 부르는 것을 뭐라고 할까요? 입니다. 학생들이 맞히지 못하자 사회자는 네 글자이고 끝이 가로 끝납니다. 라는 힌트를 주었습니다.

정답은 고성방가 인데 한 학생이 고음 불가, 라고 답하였습니다. 이어 다른 학생은 이럴 수가, 라고 답하자, 다른 학생은 미친 건가, 라고 답하였습니다. 이때 마지막으로 한 학생이 답을 하는데 그가 말한 답은 아빠인가, 이었습니다. 사회자와 모든 방청객들은 뒤집어지고 말았습니다.

예, 이런 이야기는 우리의 일상의 단면입니다. 우리는 누구로부터 어떻게 인정을 받고 있으며, 또 어떻게 인정을 받고 살아갑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는 생활 쪽에 믿음의 에너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런데 혹 아빠인가? 이런 평가가 되지 않는 삶을 살자는 말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요한삼서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느낄 수 있습니까?
교회 안에는 가이오와 데메드리오 같은 일꾼이 있고, 디오드레베 같은 훼방꾼 스타일도 있습니다.
교회의 각 직분은 권력이 아닌 섬김의 도구입니다.

그러나 세상적인 성공의 기준이 교회에 들어오면 성스러운 직분이 개인의 명예와 일종의 권력으로 추락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교회의 일을 봉사하는 일에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면서 충성하기 원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기도를 드리는 사람을 통하여서 자신과 주변의 사람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 모두가 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교회 안에서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좋은 일꾼들 되기를 축원합니다.

마태복음 13:43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헌신(출애굽기 32:32, 열왕기하 23:12) 10 / 04 / 2021(월)


헌신에 대한 묵상
10 / 04 / 2021(월)


헌신(출애굽기 32:32, 열왕기하 23:12)

출애굽기 32:32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주옵소서.

20절 / 모세가 그들의 만든 송아지를 가져 불살라 부수어 가루를 만들어 에 뿌려 이스라엘 자손에게 마시우니라.

열왕기하 23:12
유다 열왕이 아하스의 다락지붕에 세운 단들과 므낫세가 여호와의 전 두 마당에 세운 단들을 왕이 다 헐고 거기서 빻아내려서 그 가루를 기드론 시내에 쏟아버리고.

왜 그송아지를 불에 태워 백성들에게 마시라고 하셨나?

1. 우상을 먹어 똥으로 나오게 한다.
너희가 섬기는 그 우상이 가장 더러운 것이다.

2. 금을 주신이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우상을 섬기는가?
섬김의 대상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3. 먹어서 없이 한다.
영원히 없애버린다.

4. 순수한 금가루를 물에 넣었을 때 물의 색상이 붉은 빛이 되었다.
보혈의 피를 상징하는 것이다.


사사기 5:2
이스라엘의 두령이 그를 영솔하였고 백성이 즐거이 헌신하였으니 여호와를 찬송하라.

사사기 5:9
내 마음이 이스라엘의 방백을 사모함은 그들이 백성 중에서 즐거이 헌신하였음이라 여호와를 찬송하라 .

출애굽기 32:29
모세가 이르되 각 사람이 그 아들과 그 형제를 쳤으니 오늘날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날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시편 110:3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