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創世記)
유대인들은 히브리어 성경의 첫 글자를 따서 창세기를 “브레시트”(bereshith, 태초에)라고 부른다.
그러나 유대인의 탈무드에는 이 책을 “세계 창조의 책”이라고 하였다.
“창세기”(創世記: Genesis)라는 이름은 70인역에서 번역한 것으로써, 헬라어 “게네시스”는 “기원” 또는 “근원”을 뜻하는 단어이다.
이것이 70인역에 처음으로 사용될 때, 그 의도는 그 책의 내용을 암시하기 위한 것이다.
부제로 자주 붙어다니는 “모세의 첫번째 책”이란 명칭은 히브리어 성경의 원본에 처음부터 붙어있던 것이 아니라, 여러 세기가 지난 뒤에 덧붙여진 것이다.
2. 저자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은 공히 출애굽 당시의 히브리인들의 위대한 입법자요, 지도자인 모세를 창세기의 저자로 간주해 왔다.
이러한 확신은 기독교 초기에 몇몇 이교적 반대자들에 의하여 약간의 도전을 받기는 하였으나, 18세기 중엽까지는 유대인이나 그리스도인 사이에서 한 번도 심각하게 의심된 적이 없었다.
200여년 전부터 하나의 새로운 사조가 시작되어, 인간의 모든 사고 영역 가운데서 전통적인 신앙과 견해들은 일단 의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미지의 영역에서 새로운 것들을 발견하고 발명해 냄으로써 이 세상의 생활의 방법을 많이 변경시켜 놓았다.
이와 같은 탐구 또는 취조(取調) 정신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비평적인 성질을 가진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의 기초로서의 성서의 확실성을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창세기는 근대에 있어서 비평적인 시험을 당한 첫 책이 되었으며 이러한 시험은 성경의 고등 비평 시대의 출발점이 되었다. 1753년에 프랑스의 궁중 의사 장 아스트뤼크(Jean Astruc)는‘추측’(推測)이라는 책을 출판하였는데, 거기서 그는 창세기에 나타나는 신격에 대한 각기 다른 이름들이 발견된 것을 지적하고, 이것은 창세기가 여러가지 자료들의 수집임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아스트뤼크는 모세가 바로 그 자료들의 수집가요, 이 책의 편찬자라고 추측하였으나, 그의 후계자들은 이윽고 모세를 창세기의 편집자로 단정하였다. 비평적인 마음을 가진 신학자들은 창세기의 가정된 자료들을 각기 분리하고 그것들을 서로 다른 저자별로 분류하거나 적어도 그 자료들이 형성, 수집, 변화, 편집되어 마침내는 하나의 책으로 묶여졌을 것으로 추측되는 시기별로 자료들을 분류하기 위하여 근 200년 동안이나 애써 왔다. 이와 같은 비평적인 견해들을 추종하는 여러 학자들은 하나의 커다란 원칙에 있어서 의견 일치를 보았는데, 그것은 즉 이 책의 가치와 저자와 유래된 시기 등이 각각 다른 많은 문서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 자체 내에서도 어느 것이 어느 시기에 해당되는지에 대하여 광범위한 의견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엄청난 견해 차이는 비평적인 학자들의 가정(假定)의 기초가 얼마나 불확실하고 불건전한 것인지를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많은 비평적인 논쟁들의 거짓됨이 지난 100년간의 고고학적 발견들에 의하여 드러났다. 비평자들은 그들의 이론과 주장을 끊임없이 바꾸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중의 다수는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 창세기의 저자가 모세임을 아직도 부인하고 있다. 그들이 내세우는 이유들 중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의 각기 다른 이름 세 가지가 사용된 것은 이 책의 저자가 둘 이상임을 가리킨다. 특히 그 이름들이 각기 특정한 부분에 두드러지게 자주 사용된 것은 그 부분의 저자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야훼”(Yahweh) 곧 “여호와”(Jehovah)라는 이름이 사용되는 부분의 저자를 비평적인 학자들은 “야비스트”(Jahvist)라고 일컫고, “엘로힘”(Elohim) 곧 “하나님”이란 칭호가 주로 사용되는 부분의 저자를 “엘로히스트”(Elohist)라고 일컫는다. 그 외에도 창세기의 내용을 기록한 고대의 저자들 중에는 제사장 저자도 있었고, 또 그 모든 자료들을 편집한 편집자도 있었을 것이다.
(2) 이 책에 포함된 이야기들이 여러 번 반복된 것은, 이미 존재하던 평행 자료들을 후대의 편집자가 한데 묶어 전체적인 하나의 이야기로 엮었으나, 근원이 다른 자료들을 사용한 사실을 숨기지 못한 결과이다.
(3) 창세기의 이야기들 가운데 반영된 여건들은 시간적으로 그 당시와 부합하지 않고 오히려 휠씬 후기와 부합한다.
(4) 지명(地名)을 사용함에 있어서, 초기에는 그렇게 불리우지 않은 지방들이 후기에 사용된 이름으로 일컬어졌다.
(5) 고대 바벨론에 존재하던 창조, 홍수, 그리고 부조들의 생활에 관한 전설들이 성경 기록과 매우 흡사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현대 신학자들은 히브리인 저자들이 포로 기간 동안에 이러한 설화들을 바빌로니아인들에게서 빌어 와서 자기들이 믿는 일신론적인 형태로 새로 편집했다고 주장한다. 보수적인 그리스도인은 다음과 같은 이유들로써 이러한 견해들을 배격한다.
(1) 하나님, 주, 그리고 여호와 등의 성호(聖號)들은 히브리어 성경 전체를 통하여 별로 차별없이 사용되었으며, 비평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저자가 다른 사실을 나타내는 증거로 볼 수 없다. 70인역과 대부분의 고대 히브리어 성경 사본들, 그리고 근래에 발견된 이사야 두루마리 등에서는 어느 한 사본에 나타나는 “하나님”이란 칭호가 그 같은 구절의 다른 사본에서는 “주” 또는 “여호와”로 되어 있고, 또한 그 반대로 된 것도 찾아볼 수 있다.
(2) 설화들에 나타나는 반복은 그것이 바로 저자가 다른 여러 자료들을 사용한 증거라고는 할 수 없다. 모세의 책들의 통일성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허다한 성서 이외의 예증들로써 동일한 저자가 기록한 고대의 문학작품 및 심지어 현대의 작품들 중에서도 유사한 반복들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3) 고대의 역사와 여건들에 관한 지식이 점차로 증가함에 따라서 창세기의 저자가 그 당시의 형편에 대하여 정통한 정보를 갖고 있었으며, 따라서 부조들의 생활에 관한 서술은 그들의 시대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사실이 계속 드러나고 있다.
(4) 지명들은 경우에 따라서 독자들의 이해를 위하여 복사자(複寫者)들에 의하여 후대의 이름으로 대치되어 왔다.
(5) 바빌로니아인들이 히브리인들의 기록과 어느 정도 흡사한 전설들을 가졌다는 사실이 바로 한 민족이 다른 민족에게서 빌어왔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 오히려 그 두 기록들에 대한 공통적인 근원이 있다고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 따라서 창세기의 영감된 기록은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신 완전하고도 순수한 형태의 것이요, 바빌로니아인의 기록들은 동일한 사건들을 저열한 이교적인 배경 속에서 이야기한 것이다.
고등 비평가들이 그들의 이론을 내세우기 위하여 주장하는 것들을 구태여 논박하려고 대항할 필요는 없으나, 모세가 창세기의 저자임을 믿을 수 있는 증거를 포착하는 일은 퍽 중요하다.
출애굽기의 저자가 창세기의 저자였음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오경(五經)의 둘째 책은 첫째 책의 연속이요, 동일한 정신과 의도가 아주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출애굽기의 저자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그 책을 “모세의 책”(막 12:26)이라고 일컬으셨을 때에 분명하게 확증되었으므로, 그에 선행하는 책인 창세기 또한 모세의 기록인 것은 명백하다. 애굽인의 단어와 표현들의 사용, 그리고 요셉의 역사에 나타난 애굽인의 생활과 관습에 정통함 등은 모세가 받은 교육 및 경험과 조화를 이룬다. 창세기가 모세의 저술이라는 증거가 오경의 나머지 책들이 가진 증거보다는 덜 명백하고 덜 직접적이긴 하지만, 모세 오경에 시종 공통적인 언어의 독특성들과 신약의 증언은 다름아닌 모세가 성령의 영감하에 이 책을 기록했음을 보여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창세기로부터 몇 구절을 인용하신 사실은 그분이 그 책을 성서의 일부로 간주하신 분명한 증거가 된다. 창 1:27; 2:24을 인용하시면서 예수께서는 “(너희가) 읽지 못하였느냐”라는 공식적인 언사를 사용하셨다(마 19:4, 5).이것은 여기에 인용한 구절들이 여전히 구속력과 타당성을 가지는 진리를 내포하고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예: 이혼에 관한 바리새인들의 질문과 예수의 대답(막 10:2-9; 창 1:27; 2:24).
다른 여러 경우에 있어서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창세기에만 묘사된 사건들을 언급하심으로써 친히 이 책을 하나의 정확한 역사적인 기록으로 간주하셨음을 보여 주셨다(눅 17:26-29; 요 8:37 등).
또한 사도들의 기록들 가운데 발견되는 수많은 창세기의 인용구들은 사도들이 모세를 그 책의 저자로 확신한 사실과 그 책이 영감으로 기록된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롬 4:17; 갈 3:8; 4:30; 히 4:4; 약 2:23).
이러한 증거에 비춰볼 때, 그리스도인은 모세가 창세기의 저자임을 마음놓고 믿어도 좋다.
3. 역사적 배경
창세기는 B.C. 1500년경, 히브리인들이 아직도 애굽의 속박하에 있던 동안에 기록되었다. 이 책에는 실로 많은 세기들에 뻗쳐 통하는 세계 역사의 소묘(素描: sketch)가 포함되어 있다. 창세기의 초반은 우리가 역사에 관하여 상례적으로 생각하는 그러한 역사적인 배경 속에 넣어질 수가 없다. 우리는 모세가 기록한 것 이외에 홍수 이전의 세계의 역사를 아무것도 갖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화석들의 묵묵(默默)하고도 때때로 모호한 증언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고고학적인 기록들을 갖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홍수 이후에는 경우가 다르다. 고고학자들의 발굴은 창세기의 후반이 차지하는 기간 동안의 사람들과 그들의 관습과 정부의 형태 등에 관한 많은 기록들을 밝혀 내었다. 예컨대, 아브라함의 시대는 이제 상당히 잘 알 수 있게 되었으며, 이스라엘의 속박 기간 동안의 애굽의 역사는 비교적 정확하게 재구성될 수 있다. 이 시대 동안, 즉 아브라함으로부터 출애굽까지의 시대에는 고등한 문명이 만개(滿開)해 있었으며 특히 메소포타미아의 계곡과 나일 강의 제방 연변에는 더욱 그러했다. 북방에서는 헷 족속이 세력을 얻고 있었으며, 팔레스틴에는 군소(群小) 왕들의 지도하에 호전적인 민족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전반적인 관습은 이 모든 민족들의 암흑한 이교주의를 반영하고 있었다.
창세기의 부조들과 하부 및 상부 메소포타미아의 셈 족속들 사이에는 강한 인종적인 유대(紐帶)가 잠재해 있었다. 싯딤 골짜기에서의 왕들의 싸움(14장), 평지에 있는 도성들의 멸망(18, 19장), 그리고 전대미문(前代未聞)의 대기근을 겪는 동안 애굽의 백성들을 보존한 일(41장)과 같은 초기의 큼직한 사건들 가운데서 부조들이 감당한 역할들이 소상하게 묘사되어 있다. 창세기의 인물들은 목자와 전사(戰士)로, 도회지 거주자와 광야의 유목민으로, 정치가와 망명객 등으로 나타난다. 그들의 경험을 기록한 이야기들은 그 책을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아득한 고대의 열강(列强)들과 특히 히브리인들이 이따금씩 접촉하던 군소 백성들의 형편이 어떠했는지를 느끼게 한다.
애굽과 메소포타미아에 일어났던 위대한 문명들에 관해서는 창세기에 기록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에 대한 증거는 부조들의 경험 가운데서 강하게 느낄 수가 있다. 하나님의 백성은 정치적 혹은 사회적 진공 상태에 있는 화려한 격리 지대에 살지 않았다. 그들은 열국이 어울려 있는 사회의 부분이었으며, 그들의 문명과 문화 역시 주위의 다른 백성들의 그것과 크게 다른 것이 없었다. 다른 것이라고는 종교의 차이뿐이었다. 그들은 여호와의 진정한 경배자들 가운데서 남아 있는 가장 중요한 사람들이었으며, 따라서 영감을 받은 저자 모세가 염두에 두고 있는 세계의 중심부를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명백한 관찰과 인식은 자연적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유도하게 된다. 모세가 이 책을 기록한 주된 목적은 무엇이었던가?
4. 주제
창세기의 주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충성스런 작은 무리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취급하시는지에 관한 서술이요, 둘째는 하나님을 떠나서 그분의 교훈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 빠진 타락의 심연을 묘사한 것이다. 창세기는 인간에게 허락된 최초의 영원한 계시이며, 신령한 기록이다.
이 책은 또한 교의적(敎義的)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거기에는 이 세계와 그 안에 있는 삼라만상의 창조, 죄가 들어온 경로, 그리고 하나님의 구속의 허락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은 인간이 자유스러운 도덕적 존재요, 자유 의지의 소유자임을 가르쳐 주고,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것이 인간의 모든 재화(災禍)의 근원임을 가르쳐 준다. 또한 이 책에는 휴식과 예배의 날로서의 거룩한 안식일(安息日)을 준수해야 할 것과 결혼의 신성성과 가정 제도의 수립, 그리고 순종에 대한 보상과 범죄에 대한 형벌 등에 관한 교훈들이 주어져 있다.
이 책은 흥미있는 문체로 기록되어 있어서 젊은이들의 상상력에 호소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 속에 담긴 숭고한 도덕적인 주제들은 성인들을 위해서도 정신적 양식이 되며, 만인을 위한 교훈이 된다. 그리스도인이면 어느 누구도 그것의 연구를 게을리할 수 없고, 하나님의 자녀이면 누구나 그 속에서 광채를 발하는 모범적인 인물들을 본받아야 하는 책, 그 책이 바로 창세기이다.
5. 개요
Ⅰ. 천지 창조로부터 아브라함에 이르기까지 1:1-11:26
1. 천지 창조 1:1-2:25
(1) 창조의 6일간 1:1-31
(2) 안식일을 제정함 2:1-3
(3) 인간의 창조와 에덴 동산에 관한 세부적 설명 2:4-25
2. 타락의 역사와 그에 따른 결과 3:1-5:32
(1) 유혹과 타락 3:1-8
(2) 에덴에서 추방당함 3:9-24
(3) 가인과 아벨 4:1-15
(4) 가인의 후예들 4:16-24
(5) 아담으로부터 노아에 이르기까지 4:25-5:32
3. 대홍수 6:1-9:17
(1) 대홍수 이전의 타락상 6:1-13
(2) 방주 건조 6:14-22
(3) 홍수에 관한 이야기 7:1-8:14
(4) 노아의 언약 8:15-9:17
4. 노아로부터 아브라함에 이르기까지 9:18-11:26
(1) 노아의 아들들의 운명 9:18-29
(2) 국가 목록 10:1-32
(3) 바벨에서의 언어 혼란 11:1-9
(4) 셈으로부터 아브라함에 이르기까지의 세대 11:10-26
Ⅱ. 부조 아브라함과 이삭 11:27-26:35
1. 아브람 11:27-16:16
(1) 소명과 가나안으로의 여행 11:27-12:9
(2) 애굽에서의 경험 12:10-20
(3) 롯과의 이별 13:1-18
(4) 롯을 구출하고 멜기세덱을 만남 14:1-24
(5) 하나님과의 언약 15:1-21
(6) 하갈과의 결혼, 이스마엘의 출생 16:1-16
2. 아브라함 17:1-25:18
(1) 언약의 갱신, 아브라함이 할례를 시작함 17:1-27
(2) 아브라함과 천사들, 소돔과 인접도시들의 멸망 18:1-19:38
(3) 그랄에서의 체험, 이삭의 출생, 이스마엘 축출 20:1-21:34
(4) 아브라함의 극심한 시험 22:1-24
(5) 사라의 죽음과 장례 23:1-20
(6) 이삭이 리브가와 결혼함 24:1-67
(7) 아브라함의 후예들 25:1-18
3. 이삭 25:19-26:35
(1) 이삭의 아들들 25:19-34
(2) 이삭과 그랄의 아비멜렉 26:1-35
Ⅲ. 부조 야곱 27:1-36:43
1. 찬탈자 야곱 27:1-31:55
(1) 야곱이 속임수로 축복을 받음 27:1-46
(2) 야곱의 도망과 벧엘에서의 이상 28:1-22
(3) 야곱이 자기 아내들을 위하여 봉사함, 가족을 형성함 29:1-30:43
(4) 야곱이 라반으로부터 도망함 31:1-55
2. 이스라엘, 하나님과 겨루어 이김 32:1-36:43
(1) 야곱이 가나안으로 돌아옴, 브니엘의 체험 32:1-33:20
(2) 세겜에서의 수치, 가족 문제 34:1-35:29
(3) 에서의 후예들 36:1-43
Ⅳ. 구원자 요셉 37:1-50:26
1. 요셉과 그의 형제들 37:1-36
2. 유다의 타락 38:1-30
3. 요셉이 원칙 위에 굳게 섬 39:1-40:23
4. 요셉이 애굽을 구원함 41:1-57
5. 요셉과 그의 형제들 42:1-45:28
6. 야곱이 애굽으로 감 46:1-47:31
7. 야곱의 축복 48:1-49:33
8. 야곱과 요셉의 죽음 50:1-26
출애급기(出埃及記) Exdous
出 날 출, 埃 티끌 애, 及 미칠 급, 記 기록할 기
대제사장 위임식 순서 /
1. 위임식에 소요될 제물을 준비하고(1~3)
2. 물로써 몸을 청결케 하고(4)
3. 아론에게 성의를 입히며(5~6)
4. 관유를 그 머리에 바르고(7)
5. 아론의 아들들에게 옷을 입히고(8~9)
6. 속죄제, 번제, 화목제 등의 제사를 드렸습니다(10~34).
출애굽기의 기원과 성격
출애굽기라는 명칭은 구약성서의 헬라어 역본인 칠십인역(LXX)에서 나온 것이다. 본래 맛소라 텍스트(MT)는 "그리고 이름은 이러하니라"는 말로 책이름이 붙여져 있었다. 그러나 칠십인역(LXX)과 벌게이트(Vulgate)역 등 대부분의 영역본들은 '길을 떠나다' (ex + odos)라는 의미를 담아 'Exodus'라 부르고 있다. 한글 개역은 '출애굽기'라고 보다 구체적으로 표현한다. 그러나 출애굽기는 애굽 탈출기라기보다는 오히려 성막 건축기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스라엘이 애굽에 거주할 당시의 애굽의 역사를 족장들의 행적과 관련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출애굽기는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야기를 신학적으로 조명한 이스라엘의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출애굽기는 모세의 이야기와 이스라엘 신앙의 기초인 유월절 신앙과 시내산에서의 전통 그리고 성막에 관한 전승을 이어 주는 기록으로서 이스라엘의 구원 개념과 역사 이해를 살펴볼 수 있는 정경이다(Canon).
내용 분해
Ⅰ. 애굽에서의 이스라엘 민족(1:1-12:36)
1. 애굽에서의 노예 생활(1:1-22)
2. 하나님께서 구원자 모세를 택함(2:1-4:31)
3.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킴(5:1-12:36)
Ⅱ.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민족(12:37-18:27)
1. 출애굽과 애굽 군대의 추격(12:37-18:27)
2. 시내산에 도착(15:22-17:16)
3. 이드로의 방문(18:1-27)
Ⅲ. 시내산에서의 이스라엘 민족(19:1-40:38)
1. 율법을 주심(19:1-24:18)
2. 성막의 제도(25:1-31:18)
3. 율법을 어긴 백성들(32:1-34:35)
4. 성막의 건축(35:1-40:38)
레위기
1. 저자
레위기서의 저자는 모세오경의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 모세이다.
레위기가 모세의 저작이 아니라는 일부 본문 비평가들의 주장도 있었지만 다음과 같은 주장에 의해 반박되었다.
첫째, 레위기 자첵의 증거이다.
레위기에서는 56번이나 "여호와께서 모세이게 일러 가라사대"(레 1:1; 레 4:1; 레 5:14; 레 6:1)라는 말이 사용되었다.
이는 레위기가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를 받은 모세의 저작임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예수님께서 친히 레위기가 모세의 저작임을 증거하셨다는 점이다.
마태복음 8:4에 예수님께서는 문둥병자를 고치신 후에 그에게 명하시기를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고 하심으로 레위기에 나오는 문둥병에 관한 규례가 모세의 저작임을 증거하셨다.
셋째, 사도들의 증거이다.
누가는 2:22에서 '결례의 법'을 '모세의 법'이라 증거함으로 레위기의 결례가 모세의 저작임을 증거하였다.
또한 히브리서 기자 역시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히 8:5)라고 증거함으로 레위기의 저작설에 관한 논쟁을 결정지었다.
따라서 레위기는 본문 비평가들의 주장대로 여러 문서의 편집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를 모세가 저술한 직접적인 저작이다.
2. 기록 연대
레위기의
기록 연대는 레위기가 기록될 당시에 이스라엘의 머물렀던 장소와 출 40:17과 민 10:17을 비교해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먼저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레위기의 율법을 계시받았을 때 머물렀던 장소는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십계명을 받고 15개월 동안
머물렀던 시내산 근처의 시내 광야였다(레 7:38; 레 25:1; 레 26:46; 레 27:34).
이러한 사실은 레위기서가 이스라엘이 시내 광야에 도달한 후로부터 그들이 거기서 떠날 때까지의 사이에 기록된 것임을 보여 준다. 따라서 출애굽의 연대를 주전 1445년으로 추정할 때 레위기의 기록 연대는 이스라엘이 시내 광야에 도달한 후로부터 시내 광야를 떠날 때까지의 기간인 주전 1445-1444사이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혹자는 이와 달리 레위기의 기록연대를 '모세가 죽기 직전에 자신의 모든 기록을 완성했다'는 신 31:24의 말씀을 근거하여 모세의 광야 40년 생활의 마지막 부분인 주전 1440년경에 기록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후 40넌 광야 생활을 지내고 나서 다시 기억하여 썼다는 무리가 있다.
그리고
신명기 31:24의 말씀은 모세가 그의 생애를 마치는 그 순간까지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모든 계시의 기록을 완성하였다는 말이지,
결코 레위기만의 완성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신빙성이 결여된다.
3. 기록 목적
레위기는 조직된 하나님의 백성을 종교적·사회적으로 통치하는 데 필요한 율법등을 포함하고 있는 중요한 책이다.
특히 시내산에서 정식으로 신정 국가로 조직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새로운 언약 관계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율법과 언약을 지키기 위해서 여러 가지 규례를 제시한 책이 레위기인 것이다.
즉 레위기를 통해 기본 율법이 주어졌으며, 언약이 비준되었고, 성막이 설립된 것이다. 따라서 레위기의 기록 목적을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역사적인 기록 목적으로 선택되고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이 살아가야 할 거룩한 삶의 방법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레위기는 먼저 그들이 어떻게 해야 정결해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을 가르쳐 주며(레 1-17장),
그 후에 그들이 거룩한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구체적인 삶의 방향을 제시하여 준다(레 18-27장).
둘째,
교리적인 목적으로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오직 제사장에 의해 시행되는 희생 제사의 규례를 통해서만이 가능함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죄인들에게 자신들의 죄가 깨끗함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중보의 사역과 희생의 사역이 있어야
함을 깨닫게 한다.
레위기는 이러한 교리적인 목적을 위해서 제사와 절기의 상세한 규례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희생 제물의 선택과
잡는 방법 그리고 제사를 집행하는 제사장의 정결 의식 등을 가르쳐 준다.
셋째,
기독론적인 목적으로 하나님과 죄인 사이의 완전한 희생 제물 그리고 속죄 제물과 화목 제물인 동시에 영원한 대제사장인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이다.
즉 레위기는 여러 가지 희생 제물과 지켜야 할 규례 그리고 대제사장을 통해 신약에 오실 인류의 대속주이며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암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처럼 레위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야 할 단순한 제사 규례에 대해서 포괄적으로 제시한 책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대제사장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속죄양의 피가 필요함을 예표해 주고 있다.
4. 레위기의 특징
레위기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지루할 정도의 세밀한 기록과 동일한 내용의 반복된 기록이다.
예를 들면 번제에 대한 내용이 레 1:3-17에 기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레 6:8-13에 또다시 반복 언급되었으며,
소제는 레 2:1-16과 레 6:14-23,
화목제는 레 3:1-17과 레 7:11-34등으로 여러 차례 반복되어 기록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반복적 기록뿐만 아니라 제사 규례에 대한 상세한 기록(레 1-7장)과 절기 준수의 자세한 기록(레 23장),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에 관한 구별(레 11장) 그리고 문둥병과 그 밖의 여러 가지 정결의식에 관한 규례(레 12-15장) 등 거의 모든 내용이 상세하며 반복되게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특이한 점은 이러한 많은 반복적 기록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내용의 반복은 거의 없고 모든 기록이 새롭고 기억될 만한 내용으로
일관되어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레위기의 특징은 여러 율법과 규례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통해 이후에 기록되는 모든 역사서와 지혜서
그리고 신약에서 파생되는 많은 문제들의 해결을 위한 열쇠의 역할을 한다는 점에 있다.
또한 이러한 반복적인 의미 전달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끊임없는 구원의 섭리와 인도하심을 나타내는 중요한 특징을 보여 주고 있다.
1. 레위기의 주제
레위기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 중에 하나가 '거룩'이다.
이 단어는 무려 90번이나 나오고 있다(레 11:44, 45; 레 19:3),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레 11:45)라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너희 또한 거룩한 백성이 되라는 요구와 명령이 주제가 된다. 하나님은 당신의 택한
백성들에게 계속적으로 요구하고 계신다. 거룩은 성도와 불신자를 구별해 주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인의 생활 속에서 표출되어야 할 신앙의
모습이다(스 6:10; 겔 20:41; 고후 2:15).
2. 레위기와 출애굽기의 관계
레위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 광야에 거하고 있을 때에 기록되었다(레 7:38; 레 25:1).
레위기가 시내 광야에서 기록된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율법을 주시기 전에 약속하신 말씀이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약속은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 19:6)는
것이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스라엘은 그 약속이 실현되기까지 시내 광야에 거할 수밖에 없었다.
즉 레위기에서는 제사장 나라가
되는 규례와 거룩한 백성이 되는 규례가 기록되었기에, 이 규례가 주어진 후에야 비로소 그들이 시내 광야를 떠났던 것이다(민 10:11).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레위기의 배경이 되는 장소가 출애굽기와 동일한 시내 광야였으며, 그 기록 연대 역시 출애굽기와 거의 동시대의
기록임을 보여 주어서 출애굽기와 레위기의 불가분적 관계를 쉽게 느낄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출애굽기와 레위기의 관계가 매우
밀접하다고 해서 레위기를 출애굽기의 보충적 설명 또는 출애굽기의 부록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비록
레위기의 배경이 출애굽기와 같은 장소, 시기라 할지라도 각각 분명한 목적을 지닌 독립된 정경이다.
즉 출애굽기가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을 말해 주는 책이라면, 레위기는 구원받은 이스라엘의 '성화'를 말해 준다.
그리고 출애굽기가 구원의 시작을 '하나님의
의롭다 하시는 선언'으로 해석한다면 레위기는 구원의 완성을 '의롭다 하심을 입은 자들을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으로
해석한다.
그러므로 출애굽기와 레위기는 가장 밀접하고 비슷한 성격을 지닌 정경이지만, 부록이나 보충된 것이 아닌 서로 독립된
정경이다.
3. 레위기의 중심 사상
레위기는
희생 제사의 규례와 제사장이 지켜야 할 성결, 정결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의 선택등이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레위기의 중심 사상은
성결(Holi-ness), 희생(Sacrifice) 그리고 속죄(Atonememt)로 요약할 수 있다.
1) 성결
하나님은 그의 백성의 완전한 순종을 원하고 계신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성결'이다. 성결이란 말은 '분리하다, 잘라내다'의 의미를 가진 히브리어 vdq(카도쉬)에서 유래된 말이다. 이는 음식과 제사 의식의 규례들이 이방 다른 민족들과 구분하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세상으로부터(이방 민족, 속된 것)분리된 성결되고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함을 시사한다.
2) 희생
이스라엘 민족의 제사는 '회생 제물'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다. 희생의 본래의 의미는 '선물'이란 뜻을 가진, 즉 여호와께 드리는 사랑과 감사의 표시였다. 그러나 피를 흐리는 희생은 단순한 선물 이상의 의미를 가진 자신의 희생을 뜻한다. 제사를 드리는 자는 희생 제물의 피가 있어야 하는데, 자신의 생명 대신 상징적으로 짐승의 피를 가져와 바쳤다. 즉 흠 없고 순전한 제물의 생명이 죄 많고 타락한 인간을 대신하여 희생되어진 것이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는 예수그리스도가 희생 제물이 되심으로 구원의 완성을 이루셨다.
3) 속죄
레위기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16장에 '속죄일에 관한 율법'에서 찾아볼 수 있다. 속죄의 궁긍적 의미는 죄로 인한 저주와 악을 제거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을 속죄하기 위해, 대신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고 죄를 전가시킨 후 아사셀이 있는 광야에 보냈다. 이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지른 모든 죄악이 깨끗하게 씻음 받았다. 이 속죄 행위는 우리의 모든 죄가 그리스도에게 맡겨지고 그가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심을 재현한 것이다. 그분은 우리의 모든 죄를 도말하시고 깨끗하게 하셨다. 따라서 레위기의 속죄가 없었다면 십자가의 의미는 명확하게 이해될 수 없었을 것이다.
4. 레위기의 구조와 내용레위기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즉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이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지켜야 할 제사법과 각종 정결 예법에 관련된 의식법에 관한 내용이 1장에서부터 17까지에서 나오고
18장에서부터 언약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삶에서 이방 나라 사람들과 구별된 삶을 살게 하기 위한 지침으로서 여러 가지 도덕법에 속한 규범들과 연중 절기, 안식년 제도, 토지 등에 관한 규례들이 나오고 있다.
26장에서는 순종에 대한 축복과 불순종에 대한 징벌(저주)에 대해 기록되 있다.
1-17장 : 제사와 정결 의식을 통한 거룩 / 의식법들
18-25장 : 삶을 통한 거룩의 추구 /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26-27장 : 순종에 따른 축복과 불순종에 대한 징벌과 저주
민수기(民數記)
1. 민수기 주제
민수기는 영어로 Numbers라고 표현합니다.
'백성의 수를 센다'라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실제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광야에서'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의 제목은 내용의 가장 처음 단어를 제목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민수기의 주된 내용은 인구조사입니다.
또한 다른 한편으로는 지리적 배경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40년동안 생활하면서 일어나는 사건을 다루고 있는데, 광야 생활의 목적은 무엇인지, 이집트를 떠나왔던 1세대 백성들과 새로운 땅으로 들어가는 2세대 백성들의 세대교체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 민수기 개관민수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 광야를 출발하여 모압평지를 지나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장소는 크게 시내 광야, 모압 평지로 구분됩니다.
또한 1세대와 2세대 간의 세대 구분에
따라 전반부와 후반부로 내용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민수기에서는 인구조사가 두번 진행됩니다.
1장과 26장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전쟁에 나갈 수 있는 인구를 조사합니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수치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이는 측정한 기준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1장에서 말하고 있는 인구조사는 이집트를 떠난 이후 남자들의 숫자입니다.
반면 26장에서의 인구조사는 그들의 자손들인 출애굽
2세대들을 뜻합니다.
따라서 두 차례에 걸친 인구수 조사를 통해 세대교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민수기 1장부터 25장까지는 출애굽을 했던 1세대의 이야기입니다.
인구조사를 한 후
전쟁 준비를 위해 진영 배치를 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레위지파를 중심으로 하며, 다양한 법이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광야를 지나게
되면서 예배와 하나님과의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광야 생활에 불만족했던 1세대들은 가나안 땅을 미리 보고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로 인해 약속을 믿었던 두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새로운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게 됩니다.
26장에서 두번째 인구조사가 진행된 뒤에는 2세대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위한 준비를 합니다. 그리고 모압 평지에서 미래를 준비하게 됩니다.
3. 민수기 읽는방법
민수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총 3가지를 중심적으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 민수기는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 민수기는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 민수기는 약속의 땅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민수기에서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살아남기
힘든 광야에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통해 인간을 돌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죄를 저지르는 인간들을
심판하시면서도 용서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삶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순종하며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불평하고 세상과 타협할 때 하나님의 진노가 있음을 알게 하십니다.
마지막으로 가나안 땅을 차지하기 위해 많은 어려움이 따름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미리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따라서 믿음과 순종하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민수기는 우리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보여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의지하고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하며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신명기(申命記)
사사기(士師記)
판관기(判官記, ספר שופטים 세페르 소프팀, Κριτές 크리테스, Book of Judges)
사사기(士師記)는 원래 히브리어로 쓴 성경이며
히브리어 성경(타나크)과 기독교 구약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제목과 내용에 따르면, 판관기는 성경의 판관(현대의 재판관과 혼동되지 않기 위한 표현)과 그들이 고대 이스라엘을 통솔하는 동안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판관기는 공동번역성서와 천주교 성경의 표기로 표준새번역, 개역개정판, 한글개역판에서는 사사기로 표기되어 있다.
판관은 오늘날의 재판관처럼 재판하는 일을 했는데, 판관기에서 언급하는 마지막 판관은 삼손이며, 뒤이은 두 이야기가 더 있기는 하지만, 전통적인 관점은 삼손의 업적과 사무엘상 1:1부터 7:2에 나오는 대제사장이자 판관인 엘리의 바로 앞 시기와 완전히 일치한다.
사사기는 약속의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여호수아 후부터 왕정 시대를 시작하는 사무엘 전까지 사이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사사기는 히브리 원본에 룻기와 같은 책이었습니다.
사사는 위기의 상황이 있을 때 임시로 이스라엘의 리더가 되는 인물입니다.
사사라는 단어는 히브리 원어 שֹֽׁפְטִ֑ים(쇼펫)으로 “재판하다”, “다스린다”, 혹은 “구원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영어의 Judges 즉 재판관, 심판관보다는 구원자로 해석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모세, 여호수아, 그리고 후에 이스라엘 왕들은 이스라엘 전체를 구원하거나 다스린 반면 사사들은 부족이나 지역을 구원합니다.
그들은 (삿 3:10)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임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백성을 구원합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실질적인 사사, 구원자는 하나님이십니다.
저자 (시기) : 사무엘 (BC 1000 경)
시대 배경 : BC 1380 - 1030 (사울 왕 세움) 약 300년 (삿 11:26)
목적 : 신정 통치 시대 이스라엘의 실패의 경험 기록
사사기에서 보는 하나님의 성품: 죄를 벌하심, 오래 참으시며 용서와 은혜를 배푸심
주요 인물 : 기드온, 삼손, 입다
지리적 배경 : 이스라엘 (가나안)
사사기 패턴
사사기 책은 여러 사사 이야기를 소개하는데 이야기 패턴은 모두 같습니다. (1) 백성이 하나님께 순종치 않음으로, (2) 적들의 침략을 당합니다. (3) 고통 중에 백성이 회개하고 하나님께서 백성의 통곡을 듣습니다. (4) 하나님께 사사를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합니다.
- (삿 2:16) 여호와께서 사사들을 세우사 노략자의 손에서 그들을 구원하게 하셨으나
하나님의 구원으로 백성은 평안을 누립니다. 그러나 백성은 곧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1)의 패턴으로 돌아가는 악순환을 합니다.
이야기가 뒤로 갈수록 사사들조차 타락하고 있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리고 사사기는 마지막을 이렇게 맺고 있습니다.
- (삿 21: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사사 시대를 단순 계산하면 모두 410년이 됩니다. 그런데 열왕기상 6장 1절("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지 사백팔십 년이요 솔로몬이 이스라엘 왕이 된 지 사 년 시브월 곧 둘째 달에 솔로몬이 여호와를 위하여 성전 건축하기를 시작하였더라")과 비교해 보면 심각한 문제가 생깁니다. 솔로몬 성전 건축이 이집트를 탈출한 지 480년이 되는 해에 시작되었다면, 사사 시대 410년을 빼고 70년 동안 가나안 정복, 제사장 엘리와 사무엘의 통치 등이 모두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단순 계산으로 나온 593/591년은 열왕기상 6장 1절의 480년보다 더 긴 기간입니다.
여기에 사도행전 13장 19-20절을 비교해 보면 또 다른 문제가 생깁니다.
"가나안 땅 일곱 족속을 멸하사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시기까지 약 사백오십 년간이라 그 후에 선지자 사무엘 때까지 사사를 주셨더니(행 13:19-20)."
여기에서는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무려 450년이 흐른 뒤 사사 시대가 시작됩니다(NIV도 같음). 그렇게 되면 사사 시대 이전에 450년이 더해져 열왕기상 6장 1절을 근거로 출애굽 후 480년이라는 기간과 전혀 맞지 않게 됩니다.
KJV는 이러한 모순을 피하기 위해, 사무엘 이전에 사사들의 기간을 450년 동안이라고 번역했습니다(13:20).
이것을 해결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 가장 좋은 방법은 사사들 통치 기간인 20년, 40년, 80년이라는 숫자들을 실제 통치 기간이 아닌 상징적인 숫자로 보는 것입니다. 옷니엘 40년, 에훗 80년, 드보라 40년, 기드온 40년이 실제로 40년, 80년이라기보다 '충분한 기간', '온전한 통치'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구약성경에서 숫자 4는 여호와(YHWH)의 알파벳 개수와 같은 수입니다. 4의 배수인 12·40·80·480 등 상징적으로 많이 쓰입니다.
둘째, 각 지파 사사들의 통치 기간이 서로 겹친다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12지파 여러 사사들이 각 시기에 겹쳐서 활동했으며, 따라서 이들의 통치 기간을 수직적으로 더하지 않고 일정 기간 중복된 것으로 계산하면 됩니다.
돼지 뼈
주목할 만한 사사 시대 고고학 자료가 있습니다.
에발산·실로·길갈 등지에서 기원전 12세기 것으로 추정되는 뼈가 발견되었는데, 주로 염소와 양의 뼈였습니다. 특이하게 이스라엘 지역에서 돼지 뼈는 거의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인류학자 마빈 해리스(Marvin Harris)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면서 산림지대가 벌채되어 자연적인 먹이를 구하기 어려웠고, 사람들이 먹는 것을 돼지도 함께 먹었기에 부족한 식량을 염려해 돼지를 금지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이 살던 고지대의 산지는 상수리나무 덕에 그늘이 많고 나무에서 떨어지는 열매를 돼지가 좋아했기 때문에 돼지를 키우기 좋은 환경이었습니다. 레위기 11장 7절("돼지는 굽이 갈라져 쪽발이로되 새김질을 못하므로 너희에게 부정하니")이 제시하는 율법을 지킨 것은 이스라엘의 식생활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가장 큽니다. 이스라엘과 가까운 블레셋에서는 상당히 많은 돼지 뼈가 발견되었다는 사실이 그러한 학설을 뒷받침해 줍니다.
* 사사들을 통하여 장차 오실 메시아 신앙
즉 선지자, 왕, 제사장의 모습을 묵상하며 신앙의 길을 사사답게 걸어가야 하겠다.
룻기
룻기의 주요 사건은 보리 추수기에 일어나는데(룻 1:22 2:17, 23 3:2, 15, 17), 그때는 하나님의 축복과 사람의 수고를 축하하고 기념하는 시기였다. 율법서(토라)에 나오는 두 구절이 이 절기의 배경을 제공한다(강조는 필자가 한 것임).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말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출 23:16).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칠칠절을 지키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있는 레위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이 규례를 지켜 행할지니라(신 16:10-12).
이 구절들이 룻기에 나오는 사건의 신학적 토대를 구축한다.
1.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 인간의 생산력의 원천이다(“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2.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노동(수고)를 통해 풍성함이라는 자신의 복을 부어 주신다(“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 열매들).
3.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과 취약한 사람을(“객과 고아와 과 부”) 위한 산물을 내시기 위해 일할 기회를 주시려고 사람 을 부르신다(“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 애굽에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해방하신 것과 광야와 가나안에서 그들에게 양식을 공급해 주신 것을 예시).
요약하면, 인간이 노동한 것에 대한 생산성과 풍요함은 세상 안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연장이며, 사람의 노동에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것은 스스로 먹고살 방도가 없는 사람들에게 넉넉히 베풀어 주라는 하나님의 명령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이런 원리가 룻기의 기저가 된다. 그러나 이 책은 신학 논문이 아니라 내러티브(이야기)이며, 매우 흥미진진하다.
이야기는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룻 1:1)에 일어난 기근으로 시작한다. 이때는 사사기에서 들려준 대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도를 버리고 우상숭배와 최악의 사회 상황, 재앙 수준의 내전에 빠져 있던 때였다. 전반적으로 그때는 일이나 다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율법(토라)의 교훈을 따르지 않고 있었다.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 가운데 적어도 나오미는 이로 인해 하나님의 복을 상실했음을 인정했다(룻 1:13, 20-21). 그 결과 사회 경제적 구조가 붕괴되고 있었고, 기근이 그 땅을 덮쳤다.
기근에 대처하기 위해 엘리멜렉과 그의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은 모압으로 이주했다. (이스라엘과 모압의 오랜 적대관계를 생각해 본다면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선택이었다.) 그들 생각에 거기라면 일의 전망이 훨씬 더 좋을 것이라고 봤다. 그들이 거기서 성공적으로 일자리를 찾았는지 여부는 모르나 어쨌든 그 아들들은 둘 다 모압에서 장가를 들었다. 그러나 10년 이내에 그들은 사회, 경제적 비극을 경험했다. 가족 중 남자가 전부 죽어 나오미와 두 며느리가 과부가 된 것이다(룻 1:3-5). 그 뒤로 세 명의 과부는 당시 남자에게만 주어지던 법적, 경제적 권리를 전혀 갖지 못한 채 자기 힘으로 벌어서 먹고 살아야 했다. 한마디로 남편도 없고, 땅에 대한 명확한 소유권도 없고, 생계를 이어갈 아무 자원이 없었다.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돌이켜 보면서 나오미는 “나를 마라[쓰다, 괴롭다]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라고 탄식한다(룻 1:20).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는 이스라엘 율법에서 상당한 관심을 받는다.[1] 남편의 보호와 지지를 상실한 그들은 사회 경제적 학대와 착취의 대상이 되기 쉬웠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단지 먹고살아야 하는 이유 때문에 창녀로 전락했는데 이는 오늘날 취약계층의 여성에게도 아주 흔히 일어나는 상황이다. 나오미는 과부가 됐을 뿐 아니라 모압에서는 나그네이기도 했다. 그러나 만약 그녀가 두 며느리를 데리고 베들레헴으로 돌아간다면, 이스라엘에서는 그 젊은 며느리가 과부면서 동시에 나그네가 될 터였다.[2] 어디에 살든 그들이 부딪칠 취약성에 대한 대책으로 나오미는 며느리에게 그들의 모국에 있으라고 강권하고,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며느리들이 모압에서 안정을 얻도록 도우시기를 기도했다(룻 1:8-9). 그러나 그중 룻은 아무리 어려워도 시어머니를 떠나는 것을 견딜 수 없어 했다. 룻이 나오미에게 한 말은 그녀의 사랑과 충성심이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 주는 노래다.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룻 1:16-17).
누구에게나 인생은 고달플 수 있으나, 이 여인들은 그중에서도 최악의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나오미와 룻은 견디기 힘든 역경에 처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라면 역경은 절망이 아니다. 룻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분명한 기적적인 개입을 만나게 되지는 않지만, 결코 하나님의 손길이 없던 게 아니었다. 하나님은 항상 역사하셨고, 특히 신실한 사람들을 통해 그렇게 하셨다.
오래전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약속하셨다.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창 17:6). 여호와는 자기 백성이 신실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농업 생산성을 회복해 주심으로써(룻 1:6) 그분이 약속하셨던 것을 선하게 이루셨다. 그 소식을 듣고 나서 나오미는 식량을 구하기 위해 베들레헴에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룻은 자신이 한 말을 충실하게 지켜서 자신과 나오미의 생계를 위한 일자리 찾으리라 작정하고 시어머니와 같이 길을 나섰다.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하나님의 축복이 룻이 한 일과 그 일의 결과로 그들 위에 (결국은 온 인류 위에) 쏟아 부어진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모든 생산성의 기반이다.
대체로 히브리 성경은 하나님을 일하시는 거룩하신 분, 사람의 일에 대한 패러다임을 제공하시는 분으로 그린다. 성경은 말씀하시고, 창조하시고, 조성하시고, 지으시는 모습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으로 시작한다. 히브리 성경 전체를 통해 하나님은 ‘일하다’와 비슷한 의미를 가지는 수많은 동사의 주어로 등장하실 뿐만 아니라, 사람들도 하나님을 부를 때 종종 은유적으로 “일하시는 분”(Worker)이라고 부른다. 히브리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많은 일에 직접 관여하실 뿐만 아니라,[3] 또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패턴을 따라 일하라고 명령하신다(출 20:9-11).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직접 일하시고, 또 사람을 통해서도 일하신다.
룻기의 주요 등장인물은 반복적인 신앙 고백으로, 또 서로를 축복하는 것을 통해 자신이 일하는 토대가 하나님이심을 인정한다.[4] 이런 표현 가운데 어떤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하신 행동을 찬양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인자를 거두지 않으셨다(룻 1:20). 그분은 기업 무를 친족을 주셨다(룻 4:14). 다른 어떤 표현은 하나님의 축복이나(룻 2:4, 19 3:10) 임재나(룻 2:4) 인자를(룻 1:8) 바라는 청원이다. 세 번째 표현은 하나님 행동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간구다. 하나님이 위로(NIV에는 “rest”) 주시기를 바라고(룻 1:9), 룻을 라헬이나 레아와 같게 하시기를 바라는 것이다(룻 4:11-12). 룻기 2장 12절의 축복은 특히 의미심장하다.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이 모든 축복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공급하시기 위해 일하신다는 확신을 표현한다.
룻은 하나님이 직접 주시는 것이든(룻 2:12), ‘은혜를 입게 할’(룻 2:2) 사람을 통해서 오는 것이든 풍성함이라는 하나님의 복을 갈망했다. 모압 여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룻은 자신이 하는 일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인정하는 데 많은 이스라엘 사람보다 더 지혜로웠다.
이야기에 나오는 사건을 볼 때 하나님에게서 온 가장 중요한 복 중 하나가 하나님께서 보아스의 추수가 넉넉하도록 축복해 주신 것이다(룻 2:3). 그가 반복적으로 한 여호와의 축복 간구에서 보이듯, 보아스는 자신이 하는 노동에서 하나님의 역할을 온전히 인식했다(룻 2:4 3:10).
우리 일에 힘을 실어 주기 위해 명백하게 우연처럼 보이는 사건을 사용하신다.
하나님이 풍성케 하시겠다는 그분의 약속을 이루기 위해 사용하시는 방법 중 하나는 모든 상황에 대한 그분의 통제력이다. 룻기 2장 3절에 나오는 “her chance chanced upon”(우연히 발견된 그녀의 기회)이라는 묘한 문장구조는 다분히 의도적이다(NRSV에서는 ‘공교롭게도, 마침’이라는 뜻으로 쓰여 있으며, 개역개정에는 “우연히”로 번역되어 있다 - 옮긴이 주). 구어체 영어로 말한다면 “As luck would have it”(운 좋게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진술은 역설적이다. 이야기의 화자(narrator)는 독자가 자리에 앉아서 도대체 어떻게 룻이 자애로울 뿐 아니라(룻 2:2) 기업 무를 친족(룻 2:1)인 사람의 밭에 “우연히” 가게 됐느냐고 묻게 만드는 것이다. 이야기가 펼쳐지면서 우리는 룻이 보아스의 밭에 이른 것이 하나님 섭리의 손길의 증거였음을 본다. 룻기 4장 1-2절에서 보아스가 성문에 앉아 있는데 마침 그다음 기업 무를 자가 나타난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우리 힘으로만 성취할 수 있는 것 외에 더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으면서 매일매일 출근한다면 그것처럼 삭막한 세상살이가 어디 있겠는가! 우리는 다른 사람이 한 일, 예상치 못한 기회, 창의성의 갑작스런 발현, 눈에 보이지 않는 복 같은 것들도 의지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따름으로써 오는 가장 안심되는 축복 중 하나는 바로 우리가 일하러 갈 때 그분도 우리와 함께 가시며 우리가 지는 짐을 함께 져 주신다는 그분의 약속이다. “나의 멍에를 메고 ……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29-30). 룻은 예수님께서 해 주신 말씀을 듣지 못했으나, 하나님의 날개 아래서 자신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찾으리라는 믿음으로 살았다(룻 2:12).
풍성한 인생은 우리가 하나님께 보인 신실함의 열매다.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나오미를 신실하게 대하는 룻의 모습에 투영되어 있다. 룻은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룻 1:16)라고 약속했다. 룻의 약속은 엘리멜렉 가문에 그저 식량만 축내는 수동적인 한 식구로 남아 있겠다는 간청이 아니라, 자기능력이 닿는 데까지 시어머니를 봉양하겠다는 헌신의 간청이었다. 그녀는 이스라엘 족속이 아니었는데도, 마치 “네 부모를 공경하라”라는 십계명의 제5계명에 구체화되어 있던 이스라엘 율법에 따라 살아가는 듯 보인다. 룻과 그녀의 가족을 위해 풍성하게 일이 회복되는 복이 임한 것은 하나님의 율법대로 신실하게 일한 룻의 헌신에서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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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사람이 누리는 풍성함의 원천이지만, 실제로 일은 사람이 해야만 한다. 이것은 처음부터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이었다(창 1:28 2:5, 15). 룻은 시어머니와 함께 먹고살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싶어 했다. “밭으로 가게 해 주세요”라고 룻은 간청했고, 그녀에게 일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 옆에서 같이 일하던 사람이 “아침부터 와서는 잠시 집에서 쉰 외에 지금까지 계속하는 중이니이다”(룻 2:7)라고 보고할 정도로 열심히 일했다. 룻이 일한 결과는 유난히 풍성했다. 첫날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주운 보리 이삭을 달아 봤을 때, 추수한 양은 한 에바쯤 됐다(룻 2:17). 이것은 대략 보리 5갤런(약 19리터 - 편집자 주)에 해당하는 양이었다.[5] 하나님께서도 보아스도 모두 룻의 믿음과 부지런함을 칭찬하고 보상했다(룻 2:12, 17-23; 3:15-18).
크든 작든 어느 정도는 우리도 모두 생계를 꾸리기가 어렵거나 불가능한 상황에 빠질 수 있다. 자연재해, 정리해고, 편견, 부상, 질병, 파산, 부당대우, 법적 제제, 언어 장벽, 직무 연관 훈련이나 경험 부족, 나이, 성별, 정부나 기업의 잘못된 경제 운용, 지리적 장벽, 가족 부양의 필요성, 그 외 여러 요소가 우리 자신과 우리를 의지하는 사람을 부양하기 위해 일하는 것을 가로막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가 할 수 있는 능력만큼 일하길 기대하신다(출 20:9).
혹 우리가 우리 필요를 채워 주는 일자리를 찾지 못할지라도, 우리는 할 수 있는 최고 수준으로 일할 필요가 있다. 룻은 정해진 근무 시간이나 정해진 급여를 받을 수 있는 정규직이 아니었다. 룻은 자기 처지가 일터에서 누군가의 “은혜”를 입기에 충분할지(룻 2:13) 알 수 없어 불안했고, 자기 가족을 먹이기에 충분한 식량을 반드시 얻을 것이라는 기대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어쨌든 룻은 일하러 나갔다. 오늘날 실업 때문에 직면하는 많은 상황이 이와 비슷하고, 우리 역시 이런 문제로 낙심할 때가 있다. 고도로 숙련된 일자리가 부족해서 하찮은 기회만 남았는가? 우리가 어떤 특정 일자리에 적합한데도 단지 차별 때문에 그 자리를 놓쳤는가? 여건이 허락되지 않아 훌륭한 일자리에 필요한 교육을 못 받았는가? 주변 상황이 일을 소망없게 만드는가? 룻의 사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일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다른 사람을 돕는 자원 봉사를 한다거나, 가족을 돌보는 일, 교육과 훈련 받기, 가사 돌보기처럼 우리 일이 처음에는 아무 수입도 올리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우리에겐 유리한 점이 있다. 하나님이 우리 일 배후에 있는 힘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자기 능력이나 주변의 여건에 의지하지 않는다. 대신 풍성함의 약속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우리가 하는 일이 (심지어는 최악의 상황에서 하는 일조차) 가치 있다는 확신을 주는 것을 알고, 우리는 능력이 닿는 대로 충성스럽게 일하는 것이다. 대개의 경우 우리가 하는 일을 어떻게 하나님이 그분의 목적 성취에 사용하시는지를 우리는 미리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의 능력은 언제나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을 훨씬 넘어선다.
룻기 2장 1절이 말하는 것처럼 보아스는 “유력한” 사람이었다. 오늘날 그것이 어떤 의미를 내포하던 간에 보아스의 경우는 그가 성경에 나오는 탁월한 리더 중 하나임을 의미한다. 보아스의 리더십 스타일은 존중에서 시작한다. 자기 일꾼이 일하는 밭으로 나왔을 때 보아스는 그들에게 축복하며 인사하고(“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하시기를 원하노라”) 일꾼들도 친절하게 응대한다(“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 룻 2:4). 보아스의 일터는 여러 면에서 아주 놀라운 곳이다. 보아스는 고용된 일꾼의 노동력에 의지해야 하는 기업을 소유해 경영했다. 그는 다른 사람의 근로 환경을 관리하고 있었다. 감독관과 소유주가 자신이 고용한 근로자를 경멸하고, 근로자 역시 자신의 상사를 존경하지 않는 많은 일터와는 대조적으로, 보아스는 신뢰와 상호 존중의 관계를 만들었다.
보아스는 일꾼이 일할 때 물을 제공하고(룻 2:9), 그들과 함께 식사하며, 무엇보다 그들 가운데 가장 하찮은 존재로 여겨지던 사람에게 음식을 나눠 줌으로써(룻 2:14) 자기 일꾼을 실질적으로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 줬다. 심지어 추수기 때는 지주인 보아스가 수확한 자기 곡식을 키질하고, 들판에서 일꾼과 같이 잠까지 잔다(룻 3:2-4, 14).
보아스는 자기 일터의 이방 여인을 아주 사려 깊게 대해 줌으로써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로(창 1:27 잠 14:31; 17:5) 본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보아스가 일꾼 가운데서 그 여인을 봤을 때 그는, 그녀가 어떤 한 남자의 아내이거나 딸인 줄 알고 온유하게 “이는 누구의 소녀냐” 하고 묻는다. 그 여자가 나오미와 함께 모압에서 돌아온 모압 여인이라는 말을 듣고, 또 자기 추수꾼 뒤에서 이삭을 주울 수 있게 해 달라는 간청을 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충격적이게도 그가 한 첫마디는 “내 딸아 들으라”였다(룻 2:5-8). 자신의 음식을 외국 여자와 나누는 것(룻 2:14)은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의미심장한 행동이다. 룻이 감탄하며 말했듯이 존경받는 지주가 외국 여인과 대화하는 것은 관례상 흔히 있는 일이 아니었다(룻 2:10).[6]사회적 체면과 사업 기회에만 관심이 있던 남자라면,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 대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별로 없던 사람이라면, 모압 여자를 자기 땅에서 당장 쫓아냈을 것이다. 그러나 보아스는 일꾼들 가운데서도 더 딱한 형편인 그 일꾼을 위해 기꺼이, 다른 사람이 어떤 반응을 보이든 상관하지 않고 그녀 편에 섰다.
실제로 이 이야기에서 어쩌면 우리는 세계 최초로 직장 내에서의 성희롱 반대 정책에 대한 기록을 접하게 된다. 어쩌면 그는 많은 농장주와 일꾼들이 사람들을 착취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7]어쩌면 이것이 바로 보아스가 룻에게 자신이 자기 일꾼에게 그녀를 건드리지 못하도록 일러두었다고 알려 주는 이유일 것이다(룻 2:9). 나오미가 “내 딸아 너는 그의 소녀들과 함께 나가고 다른 밭에서 사람을 만나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라”(룻 2:22)라고 한 말은 그녀가 자기 며느리의 안전을 걱정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보아스의 정책에 나타난 조건은 아주 분명하다.
1. 남자 일꾼은 이 여자를 ‘괴롭혀서는’ 안 된다. 일반적으로 ‘naga’라는 단어는 ‘건드리다’라는 뜻이지만, 여기서 그 단어는 대개 ‘때리다, 괴롭히다, 이용하다, 학대하다’라는 의미를 가진다.[8]보아스는 ‘건드리다’라는 것의 의미는 피해자가 그것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을 알았다.
2. 룻은 똑같이 물(룻 2:9)과 점심식사 자리(룻 2:14)를 이용할 수 있었다. 식사 시간에 보아스는 룻에게 자신과 자기일꾼 쪽으로 와서 그녀가 가져온 빵 조각을 자기 소스에 찍어 먹으라고 권유했다. 그런 다음 보아스는 그녀가 배부르고 남을 정도로 그녀를 친히 챙겨 줬다. ‘가까이 오다, 다가가다’라는 뜻의 동사로 ‘nagash’를 고른 것은 이방인인 룻이 의도적으로 적당한 거리를 두고 앉아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성희롱을 방지하는 보아스의 정책은 단순히 제한적이지 않았고 적극적인 것으로, 학대를 당할 위험에 처한 사람의 반응이 무엇이 학대고 아닌지를 정할 수 있는 기준임을 의미했다. 보아스는 그녀가 필요로 하는 보호를 제공할 때 룻이 얼마나 안정감을 느끼는지를 기준으로 삼았다. 그는 취약한 여성 근로자가 어떻게 존중되어야 하는지 실례로 증명해 보인 것이다.
3. 보아스의 정규직 일꾼은 룻을 책망하거나(룻 2:15) 꾸짖지(룻 2:16) 말아야 했다. 2장 9절에 나오는 ‘괴롭게 말라’(NRSV에는 “bother”, 개역개정에는 “건드리지 말라”)라는 단어와 함께 이런 표현은 신체적 학대, 정서적 학대, 언어적 학대 등 여러 형태로 학대가 온다는 것을 증명한다. 실제로 감정을 실어 룻에게 한 그의 축복 선언으로(룻 2:12) 보아스는 극적으로 그 모델을 확정한다.
4. 정규직 일꾼은 룻의 근로환경을 최대한 안정적으로 만들어 주고 룻이 이삭을 충분히 주울 수 있도록 지원하기 위해 의무 이상을 해야 했다(룻 2:15-16). 일터에서 학대를 금지한다는 것은, 안전한 환경을 조성하는 것은 물론이고 위험에 노출될 수 있는 근로자에게 생산성이 있는 환경을 조성해줘야 한다는 뜻이다. 생산성과 승진, 포상에 참여하는 것을 막는 장벽은 반드시 제거되어야 한다. 보아스는 남자 일꾼에게서 룻을 멀리 떼어놓아 룻의 안전을 지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해버리면 그녀가 물이나 음식도 먹지 못했을 것이고, 그녀가 주워 단으로 묶기 전에 바람이나 짐승이 이삭을 가져가 버렸을 수도 있다. 보아스는 자신이 만든 안전장치가 룻이 생산성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게 해 줄 것을 확실히 했다.
보아스의 일꾼들은 그의 너그러운 정신을 알아차린 것 같다. 그들의 상사가 그들에게 축복의 인사를 건넸을 때 그들도 축복의 말로 화답했다(룻 2:4). 보아스가 자기 밭에 나타난 여인의 정체를 물었을 때 인력 감독관은 룻이 모압 여인이라는 것을 밝히긴 했지만, 너그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룻 2:6-7). 룻이 집에 있는 나오미에게 보리 한 에바를 가져왔다는 사실은 룻을 잘 대해 주라는 보아스의 명령에 일꾼들이 긍정적으로 반응했다는 것을 증거한다. 일꾼들은 그녀를 위해 상당히 많은 곡식을 잘라두었을 뿐 아니라, 그들은 이 모압 여인을 추수기간 동안 자신의 동료 일꾼으로 받아줬다(룻 2:21-23).
보아스가 보인 리더십의 긍정적인 측면은 일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나오미가 룻이 수고한 결과를 봤을 때, 나오미는 룻에게 일자리를 준 사람을 축복하며 그의 인자와 너그러움을 인해 하나님을 찬양한다(룻 2:20). 나중에 그 공동체 안에서 보아스가 가진 높은 명성이 사회적 조화와 하나님께 영광을 가져온다는 게 명백해진다(룻 4:11-12). 모든 지도자, 아니, 사실상 모든 근로자는 그들이 속해서 일하는 문화를 형성한다. 비록 우리는 우리 문화에 의해 불공평하고, 무의미하거나, 생산적이지 못한 방식의 일에 동화하라는 강요를 받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상 우리가 일하는 방식이 다른 사람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부패하고 신실치 못한 사회(룻기 1장 1절의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라는 말은 부패한 사회를 간략히 서술한 것이다) 가운데서 재력가였던 보아스는 정직하고 성공적인 사업을 창출해 낸다. 추수 감독관은 여자를 싫어하고 인종 차별이 심하던 사회에서 평등주의를 실천하고 있다. 룻과 나오미는 끔직한 상실과 어려움 앞에서도 사랑이 넘치는 가정을 만든다. 우리가 나쁜 근로 환경에 동화하라는 압박을 느낄 때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약속은 우리 주변의 문화적 사회적 역기능 때문에 우리가 갖게 되는 모든 의심을 이길 수 있게 해 준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결실을 가로막는 장벽들을 극복하시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통해서이다. 룻기에서 우리는 사회 안에서의 하나님의 율법과 하나님께서 개인들을 인도하시는 것 모두에서 그것을 볼 수 있다.
룻기는 이삭줍기를 중심으로 전개되는데, 이삭줍기는 가난하고 취약한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율법의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다. 선행조건이 레위기, 신명기, 출애굽기에 나와 있다.
너희가 너희의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 19:9-10 23:22). 이 책 4장의 “레 19:9-10” 부분을 보라.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말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리라 네가 네 감람나무를 떤 후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고 그 남은 것은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 두며 네가 네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 두라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령하노라(신 24:19-22).
너는 여섯 해 동안은 너의 땅에 파종하여 그 소산을 거두고 일곱째 해에는 갈지 말고 묵혀 두어서 네 백성의 가난한 자들이 먹게 하라 그 남은 것은 들짐승이 먹으리라 네 포도원과 감람원도 그리할지니라(출 23:10-11). 이 책 3장의 “출 22:21-27”, “출 23:10-11” 부분을 보라.
이 율법의 토대는 사람이 그들 자신과 가족을 부양하는데 필요한 풍성함의 수단에 누구나 접근할 수 있게 하려는 의도다. 일반적으로 모든 가정은 (십일조와 제물로 살아야 하는 레위인 가문의 제사장만 제외하고) 절대 양도할 수 없는 항구적인 땅의 분깃을 소유해야 한다(민 27:5-11 36:5-10 신 19:14 27:17 레 25장). 따라서 이스라엘에서 모든 사람은 곡식을 기를 수단을 가졌다. 그러나 외국인과 과부와 고아는 땅을 물려받지 못했고, 그들은 가난과 학대에 빠지기 쉬웠다. 이삭줍기법은 그들에게 밭 가장자리에서 추수 초기에 덜 익은 곡식이나 산물과, 정해진 어떤 해에 윤작으로 비어 있던 들판에 솟아난 것은 무엇이든지 추수함으로써, 그들 스스로 먹고살 기회를 줬다. 모든 땅 주인은 값을 받지 않고 이삭에 접근할 수 있게 해 줘야 했다.
이 구절은 이삭줍기법에 대한 세 가지 토대를 제공한다. 가난한 자를 향한 너그러움은 (1) 하나님께서 사람이 손으로 하는 일에 복 주시기 위한 전제 조건이었다(신 24:19). 또한 (2) 잔인하고도 모질게 학대하는 애굽의 노예주를 경험한 이스라엘의 기억에 힘입어(신 24:22a), (3) 하나님 뜻에 대한 순종의 문제다(신 24:22b). 우리는 이런 세 가지 동기를 보아스의 행동에서 모두 볼 수 있다. (1) 그는 룻을 축복해 줬고, (2)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너그러우심을 기억했으며, (3) 룻이 자기 인생을 하나님의 손안에 맡긴 것을 칭찬해 줬다(룻 2:12). 고대 이스라엘에서 그 땅과 추수를 얼마나 완전하게 시행했는지는 의문이지만 보아스는 하나의 본이 되기에 충분하게 그것을 지켰다.
이삭줍기법은, 적어도 그 법이 실제로 실행됐다는 점에서, 가난한 자와 소외된 사람을 위한 놀라운 복지망을 제공해 줬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께는 사람이 일해서 그분의 결실을 얻게 하려는 의도가 있으시다는 것을 살펴봤다. 그것은 구걸을 하거나 노예로 살거나 성매매를 해야 하거나 아니면 다른 천박한 방식으로 살 수밖에 없는 사람에게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이삭을 줍는 사람들은 결혼, 입양, 또는 출신 국가로 돌아가게 해주는 기회를 대비해서 일반 농장 일에서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있는 기술과 자존감, 신체조건 및 일하는 습관 등을 유지했다. 지주는 기회를 제공하긴 했으나 착취할 수 있는 기회를 얻지는 못했다. 강제 노동은 없었다. 그 혜택은 번거롭고 부패하기 쉬운 관료주의를 필요로 하지 않았고, 나라 어디에서나 지역별로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이삭줍기법을 성취하려는 지주의 인격과 양심에 달려 있었고, 우리는 고대 이스라엘에서 가난한 사람이 처했던 환경을 낭만적으로 다뤄서는 안 된다.
보아스와 룻과 나오미의 경우에, 이삭줍기법은 의도했던 대로 작용했다. 이삭을 주울 기회가 없었더라면, 보아스는 나오미와 룻의 가난을 알고 난 후에 두 가지 선택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그들을 굶게 내버려 뒀거나 미리 만들어 놓았던 음식(빵)을 집으로 배달해 주었을 것이다. 전자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후자는 그들의 굶주림을 면하게는 해주겠지만, 그들이 더욱 보아스에게 의존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이삭을 주울 기회가 있었기 때문에 룻은 추수를 위해 일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수고로 곡식을 사용해 빵을 만들 수 있었다. 그 과정은 그녀의 존엄성을 지켜줬다. 또한 룻의 기술과 능력을 활용해 룻과 나오미는 장기간의 의존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며 그들을 착취에 덜 취약하도록 만들어 줬다.
오늘날 빈곤에 대한 공적, 사적 대응과 사회적, 정치적, 신학적 논쟁에 있어 이런 이삭줍기에 담긴 구제원리는 마음에 새겨둘 만하고, 열렬히 토의할 만한 가치가 있다. 크리스천끼리도 개인 대 사회의 책임, 사적인 수단 대 공적인 수단, 수입의 분배에 관한 질문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룻기를 잘 살펴봐도 이런 의견 차이가 해소될 것 같지는 않지만, 어쩌면 그것은 공유된 목표와 공동의 토대를 분명하게 밝혀줄 수는 있다. 오늘날 사회에 문자 그대로의 이삭줍기는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사회가 오늘날의 가난한 자와 취약한 자를 돌봐주는 방식에 있어서는 적용할 수 있는 측면이 있다. 특히 우리는 어떻게 사람들이 타인의존이나 착취에 의해 질식당하는 삶을 사는 대신 생산적인 일자리를 얻을 수 있도록 기회를 갖게 해줄 수 있을까?
영감을 받은 보아스는 가난한 자와 취약한 자에게 공급하기 위해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훨씬 더 뛰어넘었다. 이삭줍기 율법은 지주에게 외국인과 고아와 과부가 이삭을 주울 수 있도록 밭에 얼마간의 산물을 남겨 놓을 것만 요구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가난하고 취약한 사람들이 잡초가 무성한 밭이나 높은 감람나무 위에서 산물을 수확해야 하는 어렵고 위험하고 불편한 일자리를 갖는다는 의미였다. 이런 식으로 얻은 산물은 대개는 땅에 떨어졌거나 덜 익은 것으로 질이 안 좋았다. 그러나 보아스는 자기 일꾼에게 일부러 너그러운 행동을 하라고 말해 두었다. 그들은 가장 질 좋은 이삭을 벤 다음 그루터기 위에 놓아두어서 룻이 그냥 줍기만 하면 되게 해 놓았다. 보아스의 관심은 법으로 규정한 최소한의 의무를 다하는 데 있었던 게 아니라 진정으로 룻과 그녀의 가족을 위해 양식을 공급하는 데 있었다.
더 나아가 보아스는 룻이 자기 밭에서만 이삭을 주워야 하며 자기 일꾼 곁에 붙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연히 룻이 수확한 것은 그녀와 나오미 것으로 가져가게 했다. 그는 자기 밭에서 이삭을 주울 수 있게 해줬을 뿐 아니라 자신이 고용한 일손의 하나로 여겨줬고, 더군다나 그녀가 추수한 것에 따른 일정한 비율의 몫을 확실히 가져갈 수 있게 해 주기까지 했다(룻 2:16).
어느 나라 어느 사회든 일할 기회를 찾는 실직자가 있는 세상에서 크리스천은 어떻게 보아스 같은 사람이 되려고 애쓸 수 있을까? 일자리를 구하는 사람을 생산적으로 일할 수 있게 해 주는 재화와 서비스를 창출하는데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기술과 은사를 사용하도록 어떻게 우리는 권면할 수 있을까? 어떻게 우리는 사회의 자원을 소유하고 관리하는 사람들의 인격을 형성해서, 그들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에게 적극적이고 창의적으로 기회를 제공하게 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은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되는가? 우리가 보아스처럼 부유하지는 않더라도 축복의 도구로 쓰임받을 수 있는가? 가난한 사람에게 기회를 줘야 할 수단과 책임이 중산층에게 주어져 있는가? 또 가난한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나님이 다른 근로자와 앞으로 근로자가 될 다른 사람에게 그분의 결실이라는 축복을 안겨 주기 위해 우리 각자에게 무엇을 하라고 인도하시는 것일까?
보아스 밭에서 이삭을 줍는 룻의 놀라운 에피소드에서 우리는 보아스의 긍휼한 마음과 너그러움, 인종에 대한 관용의 생생한 증거를 본다. ‘어째서 보아스는 룻을 향해 그렇게 부드러운 마음을 가졌으며, 어째서 보아스는 누구든, 심지어 외국인인 모압 여인까지 자기 집처럼 편안하게 느끼게 하는 그런 환경을 만들었을까’라는 의문을 갖게 한다. 보아스의 증언에 의하면, 룻은 참되신 하나님에 대한 고결한 마음과 신실함을 가지고 있었다(룻 3:10-11). 그 결과 보아스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호와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그녀에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했다’(룻 2:12). 룻은 모압에서 태어났지만 구원받기 위해 이스라엘의 하나님께로 돌아섰다(룻 1:16).
보아스는 그녀를 덮는 여호와의 날개를 인식했고 자신이 그녀를 향한 하나님의 축복의 도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절망에 빠진 외국인을 돌봐 줌으로써 보아스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 것이다. 잠언에는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공경하는 자니라”(잠 14:31 17:5)라는 말이 있다. 사도 바울도 수 세기가 지나 이 주제를 이렇게 표현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갈 6:10).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보아스는 룻을 단순히 부지런한 일꾼과 나오미의 신실한 며느리 이상으로 보기 시작한다. 시간이 흘러서 보아스는 룻에게 자기 옷자락을 펴 덮어주게 된다(룻 3:9). 이는 결혼에 꼭 맞는 은유로 하나님의 날개로 대표되는 사랑과 만족을 반영한다. 그런데 이 사랑 이야기에는 일과 관련된 측면이 있다. 부동산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오미는 죽은 남편 소유의 땅에 대한 권리를 아직은 주장할 수 있었고, 이스라엘 율법에 의하면 그의 다음 친족이 나오미와 결혼해서 그 땅을 획득할 권리가 있었으며, 가족이 그 땅을 지킬 수 있게 해줘야 했다(룻 2:1). 보아스는 이 권리 행사 순서에서 실제로는 두 번째였다. 보아스는 그 권리를 가진 바로 다음 사람에게 연락했으나, 그 사람이 그 땅의 권리를 주장하려면 모압 여인 룻도 자기 가문으로 데려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권리를 포기했다(룻 4:1-6).
그와는 대조적으로 보아스는, 룻이 인종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열등함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에게 호의를 베풀 수 있는 사람으로 자신이 하나님께 택함받았다는 것을 기뻐했다(룻 4:1-12). 보아스는 편의상 늙은 나오미와 결혼하지 않고, 대신 나오미의 허락 하에 사랑과 존경의 마음을 가지고 룻과 결혼함으로써 그 재산을 구속하기 위한 권리를 행사했다. 이 모압 여인과 결혼을 함으로써 보아스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창 22:18)라는 약속의 일부를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성취했다. 또한 보아스는 더 많은 재산도 얻게 되었는데, 기존에 가졌던 재산을 생산적이고 너그럽게 관리한 것처럼 똑같이 관리했을 것이다. 이는 더 나아가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막 4:25)라는 예수님의 말씀의 전조가 된다. 곧 우리가 배우겠지만, 보아스는 딱 예수님의 선구자 역할을 하고 있다. 한편 그 이야기의 사건은 하나님께서 선을 위해 세상에서 어떻게 아직도 일하시는지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보아스와 룻의 결혼을 서두르기 위해 필연적으로 다시 한번 나오미는 통념을 넘어서 행동한다. 나오미는 룻을 밤중에 보아스의 타작하는 밭으로 보내 “그의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우라”(룻 3:4)라고 한다. 룻기 3장 4, 7, 8, 14절에 나오는 “발”의 뜻은 성관계에 대한 완곡어법일 수도 있는데,[9] 나오미가 꾸며낸 계략은 당시 풍습과 도덕성에 비춰 보면 의심스럽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만남을 위한 룻의 준비와 장소 선택은 창녀가 하는 행동을 암시한다. 정상적인 상황에서라면, 자신을 존중하고 도덕적으로 고결한 성품을 가진 보아스 같은 사람이 타작마당에서 자다가 밤중에 일어나 자기 옆에 여자가 있는 것을 알았을 때, 그런 여자와 자신은 아무 관계도 없다고 항변하며 분명히 그녀를 돌려보냈을 것이다. 보아스한테 자신과 결혼을 해달라는 룻의 요구도 당시 관점에서 볼 때 마찬가지로 아주 대담한 것이다. 외국인이 이스라엘 사람에게, 여자가 남자에게, 젊은 사람이 나이든 사람에게, 하잘것없는 일용직 노동자가 부유한 지주에게 제안한다는 점 등에서 볼 때 그렇다.
하지만 룻의 당돌함에 기분 나빠하는 대신 보아스는 그녀를 축복해줬고, 가족의 행복을 위한 그녀의 헌신을 칭찬했다. 또한 그녀를 “내 딸”이라고 부르며 두려워하지 말라고 안심시켜줬고, 요구한 것은 뭐든지 다 들어 주겠다고 약속했으며, 그녀를 “현숙한 여자”라 선언했다(룻 3:10-13). 이런 예외적인 반응은 보아스가 잠에서 깼을 때 그의 마음과 말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보는 게 가장 타당하다.
보아스는 만약 자신보다 먼저 기업 무를 권리를 가진 사람이 그 권리를 포기한다면 자신과 결혼해 달라는 룻의 요구를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보아스는 지체없이 그 문제를 법적으로 해결하는 절차에 돌입했다(룻 4:1-12). 이쯤에서 독자들은 지금까지 룻기에 일어난 어떤 사건도 우연히 일어나지 않았음을 알았을 것이다. 바로 다음날 보아스가 성문에 앉아 있을 때 그 친척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이것 역시 하나님의 예비하심인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룻이 그 성문에서 진행되던 법적인 절차 현장에 있었더라면, 처음에 그 친척이 엘리멜렉의 기업을 무르겠다고 선언했을 때 가슴이 철렁했을 것이다. 그러나 보아스가 룻도 그 기업과 함께 가야 한다는 사실을 그 사람에게 알렸을 때, 그는 마음을 바꿨다. 그제야 룻의 희망은 다시 살아났을 것이다.
그 친척이 마음 바꾼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는 자신이 위반한 법적인 의무가 있다는 사실이 생각났다고 말한다.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룻 4:6)라고 하지만 그 핑계는 빈약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보아스에게는 충분했고, 그가 판결을 수용하면서 한 말은 명료성과 논리성의 좋은 모본이다. 사건은 얼마든지 다른 방향으로 갈 수 있었지만, 그 결과는 처음부터 하나님에 의해 인도된 것으로 보인다.
룻기에서 하나님의 손길 때문에 사건이 일어난 것을 두 번째로 룻기 4장 13절에서 분명히 본다(처음 사례는 1장 6절에
나온다).
“보아스가 룻을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그에게 들어갔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게 하시므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
본문의 ‘임신/잉태’를 뜻하는 히브리 단어(herayon)는 여기 말고는 창세기 3장 16절과 호세아 9장 11절에만 나타나지만,
‘임신하게 [허락]하다’라는 특별한 숙어는 오직 여기서만 나타난다.
말론과 결혼해 10년을 사는 동안(룻
1:4) 분명히 아이가 없었던 룻의 배경을 염두에 두고 해석해야 한다.
나오미와 함께 이스라엘로 옴으로써 룻이 신실함을 보인
후에, 룻이 자기 밭에서 이삭을 줍도록 보아스가 신실함을 보인 후에, 보아스가 친족 중 기업 무를 자로서 소임을 충실하게 한
후에, 성문에 있는 모든 백성과 장로들이 증인으로서 한 신실한 기도 후에(룻 4:11-12), 룻과 보아스가 결혼한 후 관계를
가지자마자 하나님은 룻에게 아이를 주셨다. 모든 사람의 노력, 심지어는 성관계까지 의도하거나 바라는 목표의 달성 여부는 하나님께
달려있다(룻 4:13-15 1:4).
룻기는 자기 백성을 돌보시기 위해, 더욱 중요하게는 그분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사방에서 이끄시며 일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강력한 이야기를 전한다.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하나님을 향한 백성의 신실함 모두 일과 그 일의 결실을 통해 활성화된다. 이 책의 등장인물은 부지런히, 정직하게, 너그럽게, 창의적으로 하나님의 율법과 영감에 따라 일한다. 그들은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인지했고 조화를 이루며 긍휼한 마음으로 다 같이 일했다.
룻기에서 벌어지는 여러 사건에서 우리는 오늘날 크리스천이 일의 존엄성은 물론 그 일의 가치도 반드시 인정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우리는 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 일은 다른 사람에게 혜택을 주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섬긴다. 오늘날 크리스천인 우리는 목사나 선교사, 전도사가 하는 일에서 가장 분명하게 하나님의 손길을 인식하는게 익숙할 수 있지만, 그들이 하는 일만이 하나님 나라의 합법적인 일은 아니다. 룻기는 부유한 지주가 하든 가난에 찌든 이방인이 하든 간에, 농사짓는 것과 같은 평범한 일도 충만한 믿음을 요하는 소명이라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것은 거룩한 일이며, 다른 사람이 그의 가족을 부양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단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다. 모든 합법적인 직업은 하나님의 일이다. 우리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만드시고, 디자인하시고, 조직하시고, 아름답게 하시며, 도와주시고, 인도하시고, 경작하시고, 돌보시고, 치유하시고, 힘을 실어주시며, 알려주시고, 장식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랑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날개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근무 환경을 만들 힘이 있든지 아니면, 다른 사람 편이 되기 위해 스스로 위험을 감수하든지 간에, 우리가 동료를 귀하고 존엄하게 대할 때 우리가 하는 일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우리가 동료의 유익을 위해 일할 때, 특히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소외된 사람을 위해 일할 때 우리는 하나님과 언약한 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이익을 추구하고 모든 힘을 다해 그들이 하는 일이 인간다운 일이 되게 하고 그들의 행복을 키운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