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녀 이스라엘<베툴라 이스라엘> (예레미야 18:13, 이사야 7:14) 예레미야 31:1-6

* 참조 자료 /  류호돈 성경교실
https://blog.daum.net/ryu19991212/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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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 이스라엘(예레미야 31:1-6)


흔히 성경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묘사합니다.
우리와 주님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계명을 버렸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하며 바알과 아세라와 몰록에게 몸을 더렵혔습니다.
사치하고 방탕하고 교만하고 타락하여 하나님의 혹독한 진노를 산 것입니다.
결국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남왕국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망하여 나라도 빼앗기고 포로로 끌려가 혹사 당하는 망국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이 그들을 여전히 <처녀 이스라엘아>(4절)하며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는 <베툴라 이스라엘>인데, <베툴라>란 <순결한 처녀>를 가리킵니다.
창세기 24장 16절은 이삭의 아내가 될 리브가에 대해 <베툴라>라고 했습니다.

춤추며 나오리라

<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다시 너를 세우리니 네가 세움을 입을 것이요 네가 다시 소고를 들고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춤추며 나오리라>(4절). 

<내가 다시 너를 세우겠다>,
<네가 세움을 입을 것이라>,
<네가 소고를 들고 즐거워 할 것라>는 말씀은 늘 넘어지고 실패하고 반역하는 이스라엘이지만 내가 다시 세워주고 그들로 하여금 춤추며 즐거워하게 하겠다는 희망의 약속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주님은 못난 우리를 늘 다시 세우십니다.
엎어지고 자빠지기를 밥 먹듯 하는 못난 자식들이지만 <처녀 이스라엘>이라 부르시며 다시 회복시켜 주십니다.
마치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저주한 베드로를 찾아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며 첫 사랑을 회복시켜 주셨듯 그렇게 우리를 늘 새출발하게 하십니다.
패배와 슬픔과 고통 속에서 헤어나 희망을 보며 춤추고 또 즐거워하게 하십니다. 

그 열매를 따리라

<네가 다시 사마리아 산들에 포도나무들을 심되 심는 자가 그 열매를 따기 시작하리라>(5절).

전에는 애써 가꾸어 놓은 포도 열매를 다른 나라 군대가 침략하여 다 노략질해 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결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주신 말씀에도 이런 예언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오른손 그 능력의 팔로 맹세하시되 내가 다시는 네 곡식을 네 원수들에게 식물로 주지 아니하겠고 너의 수고하여 얻은 포도주를 이방인으로 마시지 않게 할 것인즉 오직 추수한 자가 그것을 먹고 나 여호와를 찬송할 것이요 거둔 자가 그것을 나의 성소 뜰에서 마시리라 하셨느니라>(사 62:8-9).

그렇습니다.
아무리 완벽하게 심고 완전하게 가꾸어 최상품의 열매를 맺게 했을지라도 하나님이 그 수확을 보장해 주시지 않으면 단 한 톨도 건질 수 없지만 반대로 아무리 열악하고 불리한 환경이나 조건이라 해도 하나님이 주관하시면 반드시 제 손으로 심은 포도나무에서 제 손으로 열매를 따되 풍성한 수확을 본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포도나무나 혹은 나의 수고, 나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개입과 역사라는 것입니다.
부디 올해도 하나님의 축복으로 풍성한 열매를 따게 되시길 바랍니다.
결코 내가 심은 나무에서 남이 수확하는 불행이 없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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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31장 21~22절

처녀 이스라엘아 너를 위하여 길표를 세우며 너를 위하여 표목을 만들고 대로 곧 네가 전에 가던 길에 착념하라 돌아오라 네 성읍들로 돌아오라 패역한 딸아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안으리라.

성경은 비유와 비사, 상징으로 기록되어 있고(마 13:34, 요 16:25) 거울과(약 1:23) 그림자(히 10:1) 같은 말씀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문자적으로 알려고 하면 하나님의 뜻을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이 말씀 가운데에는 우리의 구원의 확실한 도가 말씀 속에 숨겨져 있습니다.

성경 속에 숨어있는 은비한 비밀의 말씀을 마치 금이 나오는 금광의 광산에서 금맥 줄기를 따라서 금을 캐내듯이(욥 28:1~11) 진리의 말씀으로 큰 깨달음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원합니다.

예레미야 14:17
너는 이 말로 그들에게 이르라 내 눈이 밤낮으로 끊치지 아니하고 눈물을 흘리리니 이는 처녀 딸 내 백성이 큰 파멸 중한 창상을 인하여 망함이라.

말씀 중에서 「처녀 이스라엘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면 이스라엘이지 처녀 이스라엘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처녀라는 뜻은 남자를 가까이 한 사실이 없는 여자를 처녀라고 합니다.
아프리카의 숲이 많은 전인미답(前人未踏)의 산 속을 처녀림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발을 들여놓은 사실이 없는 장소를 처녀림이라고 합니다.

오늘날 저 중동의 이스라엘은 처녀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미 결혼해서 많은 환난과 역경과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했던 이스라엘입니다. 이 말씀은 처녀 이스라엘에 관해서 말씀하심인 줄 믿습니다.

처녀는 순진하고, 순박하고, 순수한 성품의 겸손과, 교양이 겸비된,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않은 여자를 처녀라고 칭함과 같이 전쟁에 시달리고 온갖 고행을 격은 이스라엘이 아닌 새로 탄생된 새 이스라엘이 처녀 이스라엘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않은 이스라엘은 어떤 이스라엘인가 하면 지금까지 있었던 이스라엘이 아닌 새로운 이스라엘의 탄생을 말합니다. 저 유대민족의 이스라엘이 아닌 영적인 이스라엘 민족의 탄생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호세아 10:1
이스라엘은 열매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라 그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을 많게 하며 그 땅이 아름다울수록 주상을 아름답게 하도다

포도나무는 요한복음 15장 1절에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참 포도나무요」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열매맺는 포도나무라면 참 포도나무는 예수님이시니까 오늘날 예수님의 열매가 참 이스라엘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전 세계 기독교인들을 전부 다 합쳐도 참 이스라엘은 될 수가 없습니다. 왜 참 이스라엘이 될 수 없는지 보시겠습니다.

요한복음 15:5~6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여기서 말하는 가지는 나무의 원체에 붙지 않고 예수님의 피가 통하지 않으며 포도나무의 뿌리로부터 올라오는 그 수액이 통하지 않는 부러진 가지입니다. 부러진 가지는 살았다고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기독교인들이 많이 있지만 예수님과 혈맥이 통하지 않은 기독교인이 많습니다.
껍질만 기독교의 옷을 입고 성경을 들고 교회는 다니지만 예수님이 누군지, 십자가의 비밀이 무엇인지, 우리의 구원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하는 혈맥이 통하지 않는 자는 참 이스라엘이 될 수가 없습니다.

맥을 짚어보면 맥이 뛰어야 되는데 맥이 뛰는지 뛰지 않는지 뛰는 것 같기도 하고 뛰지 않는 것 같기도 한, 이런 사람은 한의사가 맥을 짚어 보고“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 입니다, 장례식을 준비하십시오.”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사람은 참 이스라엘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참 포도나무에 참 포도 열매가 달려야 하는데 들포도 열매가 달렸다면 참 이스라엘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열매 가운데서“주여! 주여”하는 자가 아닌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는 그리스도인이 참 이스라엘이 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하기를 이스라엘을 다시 택할 것을 말했습니다.

이사야 14:1
여호와께서 야곱을 긍휼히 여기시며 이스라엘을 다시 택하여 자기 고토에 두시리니 나그네 된 자가 야곱 족속에게 가입되어 그들과 연합할 것이며

기록된 말씀에서 다시 택한 이스라엘에게 나그네 된 자들이 가입한다고 하였는데 오늘날 기독교인들 대부분이 나그네의 신앙을 하고 있습니다.
나그네라는 것은 주인이 아니고 왔다갔다 하는 손님에 해당된 자들이 나그네 신앙을 가진 자들입니다. 남의 집에 머물러 있다가 떠날 수밖에 없는 자가 나그네입니다.

이런 찬송을 부릅니다.
“세월이 흘러가는데 이 나그네 된 나는 괴로운 세월 가는 것 금할 길 아주 없네”

전 세계 모든 기독교인들이 이 땅에 대하여「나그네」된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그네 된 기독교인들이 참 이스라엘이 아니요 나그네 된 자들이므로 예수 포도나무에 참된 가지가 되기 위하여 성경에 기록된 말씀과 같이 다시 택한 이스라엘에 접붙임으로 가입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 말씀은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깊이 생각을 해 봐야 됩니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나그네 신앙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한 가족이 되지 않은 자가 나그네 신앙을 가진 자입니다.

예수님과 한 가족이 되어야지 예수님과 한 가족이 되지 못하고 세상에 속한 자는 이미 나그네 신앙의 신세를 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과 한 가족이 되어있지 않은 자가 바로“나그네다”이렇게 설명을 드릴 수가 있습니다.

에베소서 2: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나그네 신앙으로 있던 자들이 영적 야곱 족속(야곱이 얍복강에서 이스라엘이란 새 이름을 받음)에게 가입됨으로써 나그네 신세를 면하는 자가 되고, 하나님의 권속이 되는 줄 믿습니다.
나그네 신세를 면하고 다시 택한 이스라엘에 가입된 자들이 처녀 이스라엘입니다.

이사야 14:2
민족들이 그들을 데리고 그들의 본토에 돌아오리니 이스라엘 족속이 여호와의 땅에서 그들을 얻어 노비를 삼겠고 전에 자기를 사로잡던 자를 사로잡고 자기를 압제하던 자를 주관하리라

기록된 말씀에서 노비가 무엇인가 하면 사내종과 계집종입니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노비가 된 종의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의 대부분이 스스로 주의 종으로서 종의 신앙을 가진 자들입니다.
전에 자기를 사로잡아서 가르쳤던 그 선생이 종님이었고 말씀의 종, 은사의 종, 자칭 종의 종이 되어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입니다.

아들은 자기를 가르치고 지도하고 억눌렀던 자 곧 주의 종을 주관하리라고 했습니다(사 14:2).
이는 자기를 가르친 자는 주의 종이었고(갈 4:8) 가르침을 받은 종은 양자의 영을 받아서(롬 8:15) 하나님의 권속이 되고(엡 2:19) 아들이 되었습니다(갈 4:6).

종의 멍에를 벗어나서 아들이 되었기 때문에(갈 4:7) 아들이 종들을 주관하자면 주관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될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아들이 된 자는 종보다 열 배, 백 배 능가하는 말씀의 능력이 있어야 주의 종들을 주관하고 다스릴 줄 믿습니다. 그들을 성경은 노비라고 했습니다(사 14:2).

갈라디아서 4:7
그러므로 네가 이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기록된 말씀과 같이 이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들이 되었다는 것은 이제는 나그네가 아니요 하나님의 권속이 되었다는 것입니다(엡 2:19).
전 세계 목자들이 주의 종이었고, 신도들은 종의 종이 되어 오늘날까지 종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종이 아니라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종이 아들이 되지 못하고 아직까지 노비로 있던 자들이 야곱 족속에게 가입되어 다시 돌아올 때 나라와 족속과 민족들이 다시 택한 새 이스라엘로 몰려 올 것입니다.

새 이스라엘은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했던, 이천 년 동안 전쟁이 있던 중동의 유태 민족의 이스라엘이 아닌 줄 믿습니다.

말씀이 하나님이요(요 1:1)
말씀이 예수님이라고 하였으므로(요 5:39)
예수님을 믿는 극상품 포도나무로서 온전한 참 종자의 귀한 참 포도나무의 열매만이(렘 2:21) 참 이스라엘이 될 것입니다.

예레미애 31:21
처녀 이스라엘아 너를 위하여 길표를 세우며 너를 위하여 표목을 만들고 대로 곧 네가 전에 가던 길에 착념하라 돌아오라 네 성읍들로 돌아오라

길표가 무엇인가 보시면 길에 가다 보면 이정표의 길표가 있습니다. 자동차를 운전하고 가다 보면 갈림길에 길표가 있고 거리를 표시하는 이정표가 있습니다. 부산 430㎞, 서울 400㎞, 서울 300㎞, 서울 200㎞ 등 이렇게 쓰여 진 것을 길표 혹은 이정표라고 합니다. 「너를 위하여 표목을 만들고」 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우리의 옛 조상들은 길표의 말뚝을 박아 놓고 길의 방향을 표시하였습니다.

직진하면 서울, 우측으로 가면 경주, 좌측으로 가면 대구… 이렇게 길표가 있었던 것처럼 우리의 신앙도 길표가 있어야 합니다. 앞으로 가면 천국, 옆으로 가면 이단, 그 옆으로 가면 삼단, 뒤로 가면 사단… 이것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처녀 이스라엘을 위해서 길표를 세우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내가 예수님을 믿은 지 10년, 20년 되었고 죄인으로 왔다가 죄인이 아닌 자가 되었으며 천국 가는 신앙을 하긴 하는데, 내가 지금 천국에 중간쯤 왔는지 다 와 가는지 아직까지 천국 문 앞에도 못 오고 천리만리 밖에 있는지 알 수가 없다.”라는 것입니다.

왜 알 수가 없는가 하면 성경이 말하는 이정표의 길표가 없는 신앙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길표가 없는 신앙이 무슨 신앙이었는가 하면 산길과 들길, 좁은 길, 가시 밭 길을 다닌 자들입니다. 산에 길은 있으되 길표가 없고, 들에 길은 있으되 길표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산길, 들길, 좁은 길의 신앙을 하여 온 것이 사실입니다.(찬송 427장 : 좁은 길을 걸으며 밤낮 기뻐하는 것)

길표는 대로에 나가야 있는 줄 믿습니다. 그래서 길표가 없는 신앙은 대로의 신앙을 갖지 못하고 나그네의 신앙인 종의 신앙을 가진 자들의 신앙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과 같이 하나님께서 처녀 이스라엘을 위해서는 길표를 세우실 줄 믿습니다(렘31:21). 그런데 길표가 있는 대로에는 두 가지 대로가 있습니다. 길표가 없는 대로의 길은 사막의 길이고 길표가 있는 대로만이 구원의 길인 줄 믿습니다.

오늘날 어떤 기독교인들은 “좁은 길을 걸으며 밤낮 기뻐하는 것 주의 영이 함께 함이라 성령이 계시네 할렐루야 함께 하시네”라는 찬송을 하고 있지만 성령이 계시면 좁은 길이 아닌 넓은 대로의 길이 열릴 줄 믿습니다.

성경은 좁은 길이 아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였습니다. 좁은 문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라고 하였습니다(마7:14). 좁은 길은 발람의 길로써 불순종의 길이요 사망의 길입니다(민22:23~33).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좁은 문을 좁은 길로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좁은 길을 다니는 자는 강도나 도적떼들입니다. 좁은 길은 산길과 들길이고, 가시가 있고, 독사가 나오는 길입니다. 대로의 길은 독사가 나오지 않습니다. 구원의 길은 좁은 길이 아니요 대로의 길입니다.

이사야 35:8
거기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바 되리니 깨끗지 못한 자는 지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된 것이라 우매한 행인은 그 길을 범치 못할 것이며

거룩한 자가 다니는 길이 거룩한 길입니다. 도둑놈이나 사기꾼이 다니는 길은 거룩한 길이 될 수가 없습니다.

요한복음 17:17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라고 하였으므로 거룩한 길은 진리의 길인 줄 믿습니다. 진리의 성령으로(요 16:13~16) 말씀을 좇아가는 길입니다.

이사야 35:9~10
거기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그리로 올라가지 아니하므로 그것을 만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얻은 자만 그리로 행할 것이며 여호와의 속량함을 얻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로다

구원받을 자들을 위해서 대로의 길, 진리의 길, 거룩한 길을 열어 주신 줄 믿습니다. 그 진리의 길, 대로의 길이 있는 곳에는 길표와 표목이 있다는 것을 깨닫기를 원합니다.

처녀 이스라엘은 처녀와 같이 순진하고 순박하고, 순수하고, 흠과 티가 없는 깨끗한 신앙을 가진 자를 말합니다. 이 세상에는 깨끗한 자가 없습니다. 진리의 말씀으로만이 깨끗하게 될 수가 있는 줄 믿습니다.

예레미야 31:21
처녀 이스라엘아 너를 위하여 길표를 세우며 너를 위하여 표목을 만들고 대로 곧 네가 전에 가던 길에 착념하라 돌아오라 네 성읍들로 돌아오라

「착념하라」는 것은 돌이켜 생각해 보라는 뜻으로서“돌아오라 네 성읍들로 돌아오라 거기는 너희가 갈 길이 아니고 길표와 표목이 없는 곳은 구원의 길이 아니니 돌아오라”는 것이요, 우리의 옛 조상들도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말고 말 같은 말이 아니면 듣지도 말라고 하였습니다.

천국 길에 길표가 없고 가다가도 길이 아니면 돌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서울에 가기 위해 대구에서 열차를 탔는데 길표를 보니까 서울이 아니고 경주가 나오면 서울의 반대 방향의 열차를 탔으므로 열차를 잘못 탄 것입니다. 열차를 잘못 탔다면 다음 정거장에서 바꿔 타는 것이 정상인데 이왕 잘못 탄 것이니 끝까지 타고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잘못된 신앙의 길을 간 자들입니다. 지리를 잘 아는 자들은 직행열차를 탈 수 있는데 무식한 자들은 수없이 열차를 갈아타야 합니다.

이와 같이 천국행 열차의 신앙을 가지지 못한 자들은 평생에 수없이 많은 교회만 바꾸는 것입니다. 이미 천국행 열차를 탄자들은 일등석에 타는 사람이 있고, 삼등석에 타는 사람이 있고, 화물칸에 숨어서 타는 사람도 있습니다.

화물칸에 숨어서 탔어도 내리지만 않으면 그 열차는 천국행으로 갈 줄 믿습니다. 차에서 내리면 일등석에 탄 사람이나 이등석에 탄 사람이나 화물차에 탄 사람이나 다 똑같습니다. 좀 편안할 뿐이지 차이는 없습니다.

이 진리의 말씀을 듣고 큰 깨우침이 있는 사람은 일등석에 탄 사람이고 깨우침을 덜 받은 사람은 이등석에 탄 사람이며 무슨 말인지 모르는 사람은 화물칸에 탄 사람입니다.

그런데 내리지만 않으면 천국행 열차가 천국에 도착할 때에 일등석에 탔던지 화물칸에 탔던지 상관이 없이 함께 내릴 줄 믿습니다.

예레미야 31:22
패역한 딸아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 …

「패역한 딸아 네가 어느 때까지 마음이 흔들려서 방황하겠느냐」이는 말씀을 들을 때는“아멘”하고 나가서는 생활의 환경 곧 가정생활 때문에 방황하는 자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렘31:22 …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안으리라

하나님이 길표를 세우고 새 일을 세상에 행할 때에 여자가 남자를 안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여자가 남자를 안을 때가 되면 이미 구원의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여자가 남자를 안으리라」는 것이 무슨 뜻인지 보시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2:5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여자가 아들을 해산해서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를 낳았습니다. 그러므로 여자가 남자를 안을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미 여자가 아들을 낳았는데 이 아기가 조금만 더 크면 이제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역사가 이루어질 것인데“왜 방황 하느냐! 패역한 딸아! 더 이상 방황하지 말고 진리를 찾아 달려와서 만국을 철장으로 다스릴 아들을 잘 키우라”는 하나님의 뜻인 줄로 믿습니다.

이 패역한 딸이라고 말하는 자는 누구인가 보시겠습니다.

이사야 54:5
이는 너를 지으신 자는 네 남편이시라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시라 온 세상의 하나님이라 칭함을 받으실 것이며

기록된 말씀에서 하나님은 모든 믿는 자의 남편입니다. 하나님께서 처녀 이스라엘을 아들로 삼고자 하는데 네가 왜 하나님을 저버리고 세상에 속하여 자꾸 돌아다니는지, 너는 분명히 처녀 이스라엘 하나님의 백성이 될 사람인데 왜 방황하고 돌아다니는지 빨리 하나님 참 남편에게로 돌아오라고 한 것입니다.

호세아 2:19~20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기록된 말씀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장가를 오시면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했습니다. 이는 성령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비유한 말씀입니다(고전2:10).

요한복음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성령을 받아서 성경을 알고(고전2:10) 영생의 비밀을 깨달으면 하나님이 내게 장가오는 것인데, 하나님이 장가가려고 하니까 이 패역한 딸들이 예수님을 믿었다가 안 믿었다가,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주일날이면 온갖 다른데 돌아다니고 전도자와 만나기로 약속한 주일날 오지 않고, 수요일 날도 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패역한 딸아 시간이 없다.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 빨리 하나님 되신 남편에게 돌아오라”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구원받을 하나님의 백성들을 처녀로 비유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1:2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한 남편인 그리스도에게 중매한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중매쟁이가 된 것 같이 필자도 중매쟁이입니다.“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 이로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너를 위하여 길표를 세우리라! 이것이 구원의 길이고 이것이 패망의 길이다. 이것이 생명의 길이고 사망의 길이다”하는 길표를 확실하게 세워서 보여 주신 줄 믿습니다.
그러면 길표와 표목에 관한 말씀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예레미야 31:27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뿌릴 날이 이르리니

사람의 씨를 뿌리고 짐승의 씨를 뿌릴 날이 올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레미야 31:28
내가 경성하여 그들을 뽑으며 훼파하며 전복하며 멸하며 곤란케 하던 것같이 경성하여 그들을 세우며 심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방송국에서 방송을 하면 그 방송이 TV화면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사람은 뭐라고 말하는가 하면 TV에서 소리가 나왔다가 나오지 않았다가 라고 합니다. 그것은 TV에서 나오는 소리가 아니고 방송에서 나오는 소리입니다.

목회자는 TV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하늘 방송국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에게 대언하는 TV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기를 원합니다.

TV에서 나오는 말씀, 곧 증거되는 이 말씀이 바로 하늘 방송국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목회자는 말씀을 전달하는 기계에 불과합니다.

사람의 씨는 구원받을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한 것이고, 짐승의 씨는 지옥으로 떨어질 악한 백성들을 비유한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사람의 씨에 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도행전 13:22~23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하나님은 다윗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룰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 곧 다윗이란 사람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예수라고 하였습니다.

이로써 성경은 예수님이 사람의 씨에서 나올 것을 말씀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씨에서 나왔으니까 우리 또한 예수님께로부터 나왔을 때에 그리스도로부터 나온 참 사람의 씨가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사람의 씨라 하였고 사단에게 속한 자들을 짐승의 씨라고 비유했습니다(렘31:27).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알고 씨를 보고서 열매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짐승의 씨는 무슨 말을 하고 하나님의 씨는 무슨 말을 하는가 하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짐승부터 알아보겠습니다.

디도서 1:12
그레데인 중에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장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장이라 하니

마태복음 23:32~33
너희가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사람을 짐승과 뱀으로 비유했습니다.

요한계시록 20:2~3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 잡아 일천 년 동안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다가 그 후에는 반드시 잠간 놓이리라

용이란 놈을 잡고서 보니 옛날에 아담과 여자를 꼬였던 그 뱀이요, 천년 감옥에 들어가기 위해서 잡히자면 아담으로부터 육천 년 동안을 살아있어야 됩니다. 뱀도 종류에 따라서 수명이 다른데 가장 장수하는 뱀은 20년에서 25년까지 살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육천 년 사는 뱀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육천 년 사는 뱀이 있습니다. 이는 사람 뱀의 후손입니다. 용을 잡고서 보니 이놈이 마귀란 이름을 가지고 있는 자요 이놈이 바로 사단이요 바로 옛 뱀이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6:7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기록된 말씀에 가룟 유다를 마귀라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23:32~33
너희가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율법사 바리새인들을 보고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말했습니다(마23:32~33).“너희들은 산지옥에 떨어질 판결을 피할 수 있겠느냐”고 했습니다. 옛날 옛적에 뱀과 사람이 대화할 때에 뱀이 말했습니다. “여자야, 하나님께서 동산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하더냐(창3:1)”라고 하자“하나님이 동산 중앙의 나무 실과는 먹지 말라고 하였느니라(3:3)”이렇게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저는 그 대화가 실제로 옛날에 뱀이 대화를 한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어릴 때에 밭이나 논둑길을 가다가 뱀을 만나면“이놈! 아담과 하와를 꼬였던 뱀 요놈”하고 막대기를 가지고 끝까지 따라가서 잡았습니다. 마귀 한 마리 잡으려고 끝까지 따라간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뱀이나 독사는 파충류의 뱀이나 마귀가 아닌데 어릴 때 신앙은 파충류의 뱀이 사단이라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진짜 뱀, 사단은 가룟 유다 같은 사람입니다. 뱀은 사람과 대화를 할 수가 없습니다.

시편 140:3
뱀같이 그 혀를 날카롭게 하니 그 입술 아래는 독사의 독이 있나이다

시편 58:4
저희의 독은 뱀의 독 같으며 저희는 귀를 막은 귀머거리 독사 같으니

사람이 독사며 뱀인 것입니다. 실상의 뱀은 귀 자체가 없는 귀머거리 입니다. 귀가 없는 뱀이 어떻게 사람과 대화를 할 수 있겠습니까? 뱀은 땅의 진동으로 모든 것을 감지합니다. 귀머거리 뱀은 하와와 대화할 수 없습니다.

성경을 보고 독사를 사전에서 찾아보니까 뱀은 귀가 아예 생기지 않았습니다. 귀가 없는 것입니다. 귀가 있는 귀머거리가 아니라 귀가 아예 없습니다. 귓구멍이 없고 청각 장치가 없는 동물이 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뱀에 해당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어도 알지 못합니다. 소 귀에 경 읽기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없으니까 하나님 말씀을 깨우침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귀머거리가 바로 뱀입니다.

가룟 유다를 마귀요(요6:70) 곧 사단, 뱀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날도 깊고 오묘한 하나님의 말씀이 아무리 폭포수 같이 쏟아진다고 할지라도 뱀에 속한 귀머거리는 들어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알 수 없는 귀머거리들이 예수님 당시에 살아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님 당시에 있었던 율법사와 바리새인들입니다.

마태복음 13:13~15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으면 엄청나게 좋은 하나님의 축복인데 이 축복을 받고도 도리어 예수님을 판 역도가 된 것입니다.
이들은 모두가 영적인 뱀들이요 독사들이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31:27~30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뿌릴 날이 이르리니 내가 경성하여 그들을 뽑으며 훼파하며 전복하며 멸하며 곤란케 하던 것같이 경성하여 그들을 세우며 심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 때에 그들이 다시는 이르기를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들의 이가 시다 하지 아니하겠고 신 포도를 먹는 자마다 그 이가 심같이 각기 자기 죄악으로만 죽으리라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다고 아들의 이가 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말씀이 나왔는가 하면 우리의 아버지 된 즉 우리의 조상된 아담이 죄를 지었으니까 내가 유전적인 죄인이다 라는 이것이 오늘날까지 유전된 기독교의 교리였습니다.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가 다시 뿌려지는 그날에는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다고 해서 아들의 이가 시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각각 자기 죄악으로만 죽는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성령을 거역하는 죄 더하기 성령거역 죄를 지었어도 내가 죄를 짓지 아니하였으니 아버지의 죄를 아들이 전수 받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부산에 있는 아버지가 포도주를 먹고 술에 취하면 서울에 있는 술을 먹지 않은 아들이 포도주에 취해서 흔들흔들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각각 자기 죄악으로만 죽으리라고 한 줄 믿습니다. 이는 오늘날 기독교의 정통 교리가 된“유전 죄”를 부정하는 내용입니다. 성경적으로 보면 오늘날 기성교회의 유전 죄에 대한 교리는 잘못된 교리가 분명합니다.

에스겔 18:2
너희가 이스라엘 땅에 대한 속담에 이르기를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함은 어찜이뇨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의 잘못된 교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원죄(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은 죄)가 있고 유전 죄(조상의 죄)가 있습니다. 아담 이후로부터 시작해서 내 아버지까지 지은 모든 조상의 유전 죄가 얼마나 크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대를 이어가면서 지은 죄가 아담부터 시작된 죄인데 6천년 동안 우리 조상이 지은 죄는 한 대를 30년으로 본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유전 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자범죄(자기가 지은 죄)입니다. 아버지가 죄인이기 때문에 내가 죄인이고, 우리 조상이 범죄했기 때문에 내가 죄인이라고 함은 어찌된 말인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죄인 중에 죄인이 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비의 죄를 아들에게 넘길 수가 없다고 하였으므로 이제는 유전 죄의 신앙에서 확실하게 벗어나야 합니다.

에스겔 18:3~4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이스라엘 가운데서 다시는 이 속담을 쓰지 못하게 되리라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비의 영혼이 내게 속함같이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

각자 범죄하는 영혼이 죽는 것이지, 조상이 죄를 지었고 아버지가 이단이라고 해서 아들도 이단이 되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가 참 단이라고 해서 아들이 참 단이 되는 것도 아니라 각각 자기 죄악으로만 죽으리라고 한 줄 믿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법도가 이 땅 위에서 성취될 때는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뿌릴 때라고 성경에서 비유한 것을 깨닫기를 원합니다. 이는 유전 죄를 주장하는 자들은 짐승의 씨를 뿌리는 자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서 9:27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찌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실상의 유대 민족의 이스라엘은 그 땅에 사는 사람이 오백만 명밖에 되지 않습니다. 서울 인구의 절반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바다의 모래 같이 많아질 수가 없습니다. 천년이 가고 만년이 가며 억만 년이 가도 바다 모래 같이 많아질 수가 없습니다.

저 이스라엘은 중동에 있는 히브리 민족이 아니요 예수님을 믿는 자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열매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요(호10:1) 포도나무는 예수님이요(요15:1) 예수님의 열매가 영적인 이스라엘인 줄 믿습니다.

지금 천주교, 기독교의 신도가 20억이나 됩니다. 바다의 모래 같이 많아졌습니다. 하지만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라고 하셨고, 이 남은 자가 바로 새 이스라엘인 줄 믿습니다.

로마서 9:28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셨느니라

바다의 모래 같이 많은 기독교인들이 다 구원받을 자들은 아닙니다. 씨라는 것은 종자입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여자를 주셨고 또 이 땅 위에 그 씨앗을 심으려고 했는데 하와가 처음 낳은 아들이 가인이었습니다. 가인이 사단의 씨가 된 것입니다. 다시 세 번째 셋이라는 씨를 주셨습니다.

셋 자손이 바로 노아입니다. 노아 당시에 수많은 사람이 살고 있었으나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가족을 세상 모든 사람의 조상이 되는 씨로 삼았습니다. 노아 홍수 심판 때에 노아의 여덟 식구만 살아남고 나머지는 다 죽었습니다. 그래서 노아의 가족이 홍수 이후에 열린 새 하늘과 새 땅의 씨가 된 것입니다.

마태복음 24:37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이 세상의 심판이 있을 때에 영적인 노아의 가족이 인류의 제 2의 조상으로서 씨가 된 것입니다.

이사야 27:6
후일에는 야곱의 뿌리가 박히며 이스라엘의 움이 돋고 꽃이 필 것이라 그들이 그 결실로 지면에 채우리로다

움이라는 것은 싹입니다. 이스라엘이란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낳은 야곱이 얍복 나루에서 하나님의 사람과 씨름하여 이김으로써 이스라엘이란 새 이름을 얻었으며 야곱의 열 두 아들을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을 통하여 탄생한 것입니다. 이러한 야곱족속 곧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나무 둥지에서 새로운 움이 하나 나온 것입니다.

이“움”이“싹”이요“순”입니다. 이는 곧 그리스도를 통한 기독교가 새 이스라엘의 움으로 될 것을 예언한 말씀입니다(호10:1, 요15:1). 이것이 새 이스라엘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너희 중에 뿌릴 날이 이르리라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짐승이 무엇인가 하면 쉽게 설명할 수 있는 짐승인 개와 여우 등의 짐승들로 비유한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이사야 13:22
그 궁성에는 시랑이 부르짖을 것이요 화려한 전에는 들개가 울 것이라 그의 때가 가까우며 그의 날이 오래지 아니하리라

이사야 56:11
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요 그들은 몰각한 목자들이라 다 자기 길로 돌이키며 어디 있는 자이든지 자기 이만 도모하며

개가 무엇인가 하면 몰각한 목자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에 들개가 울면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빌립보서 3:2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라

기록된 말씀에서 개들을 삼가 하라고 하였습니다. 행악자가 성경에는 개로 비유된 줄 믿습니다.
그래서 이 개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의 나라가 이루어질 때에(계 21:1~5) 거룩한 성 밖으로 쫓겨나게 되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2:15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으리라

술객들, 행음자들, 살인자들, 우상 숭배자들,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들이 다 사람인데 개는 사람이 아니면서 왜 그 속에 개가 들어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56:11
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요 그들은 몰각한 목자들이라 다 자기 길로 돌이키며 어디 있는 자이든지 자기 이만 도모하며

이 개들은 몰각한 목자들입니다. 몰각이라는 것은 깨달음이 없는 자를 말합니다. 깨달음에서 떨어진 자입니다. 깨닫지 못한 자는 귀머거리며 독사입니다.

그래서 몰각한 목자는 거짓 목자를 비유한 것인 줄로 믿습니다. 이런 것을 성경에는 짐승으로 비유했습니다.

아가 2:15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니라

포도원은 이사야 5장 7절에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5:7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의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공평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의로움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아가 2:15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니라

포도원을 팔아보았자 포도 값이 얼마나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우 한 마리 잡으면 요즘 600만원, 천만 원 한다는데 차라리 여우 한 마리 잡는 것이 더 낫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록된 말씀은 실상의 여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우로 비유한 말씀인 것입니다.

에스겔 13:1~3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의 예언하는 선지자를 쳐서 예언하되 자기 마음에서 나는 대로 예언하는 자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본 것이 없이 자기 심령을 따라 예언하는 우매한 선지자에게 화가 있을찐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 외에 자기가 계시 받았다고 하는 우매한 선지자들, 마음에 나는 대로 거짓을 예언하는 자들이 모두가 여우들입니다. 아무리 계시를 받아봐야 성경에 기록된 계시의 내용을 능가할 수가 없는 줄 믿습니다.

에스겔 13:4
이스라엘아 너의 선지자들은 황무지에 있는 여우 같으니라

거짓 선지자를 여우로 비유한 것입니다. 사람인데 하나님의 씨로 나온 자가 있고 짐승의 씨를 뿌릴 때가 있습니다.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다고 해서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하는 유전 죄를 주장하는 자들은 짐승의 씨요,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어도 아들의 이가 시다 하지 않다고 하는 자는 유전죄를 인정하지 않는 자들로서 사람의 씨로 축복되는 줄 믿습니다.

예수님이 복음을 전하러 왔습니다. 그런데 어떤 바리새인이 찾아왔습니다.“헤롯이 지금 당신을 죽이려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화가 나서 하신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누가복음 13:31~32
곧 그 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이르되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가라사대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귀신을 쫓아내고 기사와 이적과 능력을 행하신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서 삼일 만에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화가 나니까 예수님이“헤롯”을 여우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우라고 하면 여우가 되는 줄 믿습니다.

이사야서는 구약에 있는 신약이라고도 합니다. 신약에 있는 모든 말씀들이 거의 다 이사야서를 인용해서 말씀했습니다.

마태복음 8: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들도 거처가 있는데 인자되신 예수님은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한 것은 예수님이 누구하고 협력하고, 대화하고, 의논해서 하나님 나라를 이룰지 하는 의논할 상대자가 없는 선지자의 외로움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같이 예수님은 머리를 둘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 머리를 갖다 놓을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공중의 새는 사단입니다. 예수님이 뿌린 씨를(마13:37)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마13:4), 포도원을 헌 여우는 바로 헤롯왕이었던 줄 믿습니다(눅 3:31~32).

여우도 공중의 새들도 다 거처가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은 진리를 받아주는 자가 없어서 가슴 아픈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를 통해서 볼 때에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가 뿌려지는 때가 바로 오늘날 이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사람은 무슨 사람인가 보시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4:4~5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인간으로서 처음 익은 열매입니다. 진리 말씀에 흠이 없는 자, 사람 가운데 첫 열매 된 자들은 사람의 씨인 줄 믿습니다. 참 사람은 그리스도 한 분 밖에 없습니다. 누가 이 땅에 참 사람이라고 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참 사람의 씨앗을 받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빌립보서 3:21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성경은 예수님을 증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의 씨를 받은 자가 말씀의 씨앗이 자라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줄 믿습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귀한 자들로서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가 뿌려지는 이때에 길표와 표목이 있는 교회에서 천국 길을 달려가는 귀한 자들로 하나님의 씨가 된 아들로서 축복되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영어성경목록

구약전서 The Old Testament

 

창세기 - Genesis (제너시스)

출애굽기 - Exodus (엑소더스)

레위기 - Leviticus (리비티커스)

민수기 - Numbers (넘벌즈)

신명기 - Deuteronomy (두털라너미)

여호수아 - Joshua (자슈아)

사사기 - Judges (저지스)

룻기 - Ruth (루쓰)

사무엘 상 - 1 Samuel (쌔무엘)

사무엘 하 - 2 Samuel

열왕기 상 - 1 Kings (킹스)

열왕기 하 - 2 Kings

역대 상 - 1 Chronicles (클로니클리즈)

역대 하 - 2 Chronicles

에스라 - Ezra (이즈라)

느헤미야 - Nehemiah (니허마이아)

에스더 - Esther (에스털)

욥기 - Job (죱)

시편 - Psalms (샴즈)

잠언 -  Proverbs (프라벌브스)

전도서 - Ecclesiastes (이클리지어스티)

아가 - Song of Songs (쏭 오브 쏭즈)

이사야 - Isaiah (아이자이어)

예레미야 - Jeremiah (제러마이아)

예레미야애가 - Lamentations (레멘테이션스)

에스겔 - Ezekiel (이지키얼)

다니엘 - Daniel (대니엘)

호세아 - Hosea (호지어)

요엘  - Joel (조엘)

아모스 - Amos (에이모스)

오바댜 - Obadiah (오버다이어)

요나 - Jonah (죠나)

미가 - Micah (마이커)

나훔 - Nahum (너이험)

하박국 - Habakkuk (해벅컥)

스바냐 - Zephaniah (제퍼나이어)

학개 - Haggai (해가이)

스가랴 - Zechariah (제커라이어)

말라기 - Malachi (맬러카이)

 

신약성경 The New Testament

 

마태복음 - Matthew (매튜-)

마가복음 - Mark (맠-)

누가복음 - Luke (눜-)

요한복음 - John (좐-)

사도행전 - Acts (액츠)

로마서 - Romans (로먼즈)

고린도 전서 - 1 Corinthians (펄스트 커린씨언즈)

고린도 후서 - 2 Corinthians (쎄칸드 커린씨언즈)

갈라디아서 - Galatinas (걸레이션즈)

에베소서 - Ephesians (이피젼즈)

빌립보서 - Philippians (필리피언즈)

골로새서 - Colossians (컬라시언즈)

데살로니가 전서 -  1 Thessalonians (펄스트 데설로니언즈)

데살로니가 후서 - 2 Thessalonians (쎄칸드 데설로니언즈)

디모데 전서 - 1 Timothy (펄스트 티모씨-)

디모데 후서 - 2 Timothy (쎄칸드 티모씨-)

디도서 - Titus (타이투스)

빌레몬서 - Philemon (필리먼)

히브리서 - Hebrews (히브루-즈)

야고보서 - James (제임스)

베드로 전서 - 1 Peter (펄스트 피터ㄹ)

베드로 후서 - 2 Peter (쎄칸드 피터ㄹ)

요한 1서 - 1 John (펄스트 좐-)

요한 2서 - 2 John (쎄칸드 좐-)

요한 3서 - 3 John (써드 좐-)

유다서 - Jude (쥬-드)

요한계시록 - Revelation (레벌레이션)








술 주(酒) / 술 주(酒) / 물 수(水) + 닭 유(酉)


술 주(酒) / 물 수(水) (氵) + 닭 유(酉)

酒(주) 
부수(닭유, 7획)
모양자
酉(닭 유) + 氵(삼수변 수)


酒자는 ‘술’이나 ‘술자리’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酒자는 水(물 수)자와 酉(닭 유)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酉자는 술을 담는 술병을 그린 것이다. 이렇게 술병을 그린 酉자에 水자가 더해져 있으니 酒자는 ‘술’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사실 고대에는 酒자와 酉자의 구별이 없었다. 酉자도 ‘술’이라는 뜻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酉자가 십이지(十二支)의 열째 글자인 ‘닭’을 뜻하게 되면서 지금은 酒자가 ‘술’이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촌(寸)
진한 술 주(酎) - 소주 주(酎)  / ( 燒酒 )

소주(燒酒)(燒酎)

(전국술 주)의 한자 유래
한자 구성원리 | 형성문자

불사를 소
1. 불사르다(불에 태워 없애다), 불태우다 2. 타다 3. 익히다
부수 火  (불화, 4획)
총획 16획

전국술 주
1. 전국술(全-: 군물을 타지 아니한 진국의 술) 2. 세 번 빚은 술 3. (술을)빚다
부수 酉  (닭유, 7획)
총획 10획
뜻을 나타내는 닭유(酉 ☞ 술, 닭)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주(月+寸)의 생략형(省略形)이 합(合)하여 이루어짐.
  • (→燒酒(소주))


술은 알코올 성분이 있어서 먹으면 취하게 하는 모든 음료수를 통틀어 한 말입니다. 구약시대에 일반 민중에게는 취하지 말라고 했으나 성별되어야 할 나실인이나 왕이나 제사장이나 선지자는 아예 먹지 못하게 했습니다 (민6;3, 잠31:4-5, 사28:7, 레10:9). 나실인에게는 생포도든 건포도든 포도 씨든 포도 껍질이든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민6:3-4). 경건하게 살기를 원하는 부모들은 자녀에게 술은 보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잠23:31). 술에 즐기는 자와는 사귀지 말라고 했습니다 (잠23:20). 그 결과가 패망이라는 사실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잠23:21, 사5:11). 신약성경에도 감독(목사)나 집사 등 하나님의 일을 맡은 사람들은 술을 즐기거나 인박이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딛1:7, 딤전3:8). 누구든지 술에 취하는 자와는 사귀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고전5:11, 15:33).

오늘날 우리가 음주의 동기와 목적과 방법과 양 등에 대한 논란을 벌이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바로 살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술을 마시지 말라고 한 이유를 알게 되면 자연히 변론의 여지가 없어집니다.

① 영적 타락을 가져오게 하기 때문입니다. 술은 분별력이 없어지게 합니다. 만일 제사장이 술을 먹게 되면 제사 규례를 잊어버려 제사를 바로 드릴 수 없게 됩니다 (레10:8-11). 혹 왕이 마시게 되면 하나님의 율법을 잊어 버리고 재판을 공의롭게 할 수 없게 됩니다 (잠31:4-5). 선지자가 먹게 되면 하나님의 이상을 바로 해석할 수 없습니다 (사28:7). 호세아서에는 술이 마음을 빼앗아 음행하게 하고 우상을 섬기게 했다고 했습니다 (호4:11-13). 결국 술이 분별력을 없이 하고 하나님에게서 떠나게 만듭니다.

② 정신적 타락을 가져오게 하기 때문입니다. 술은 방탕하게 하고 덕을 상실하게 합니다. 로마서13:13에는 방탕과 술취하지 말며 라고 했고 에베소서 5:18에는 술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라 고 했습니다. 노아는 술에 취하여 장막에서 벌거벗고 있게 되었고, 아들 함이 그것을 보고 누설했다가 저주를 받았습니다 (창9:20-23). 롯은 소돔성에서 나와 굴에 있을 때 술취한 것 때문에 두 딸과 행음하고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두 아들이 이스라엘의 대적인 모압과 암몬 족속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창19:30-38). 술이 도덕적으로 타락을 가져오게 한 예입니다. 술로 인한 타락은 종말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마24:38-39).

③ 육체적 패망을 가져오게 하기 때문입니다. 술은 한번 먹게 되면 습관이 되고 그 습관은 물질을 탕진하게 하고 몸이 병들게 하고 정신적으로 황폐하게 합니다. 잠언21:17에 연락을 좋아하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술과 기름을 좋아하는 자는 부하게 되지 못하느니라 고 했고, 23:21에는 술 취하고 탐식하는 자는 가난하여질 것이요 라고 했고 호세아7:5에는 우리 왕의 날에 방백들이 술의 뜨거움을 인하여 병이 나며 라고 했습니다. 술취하는 생활은 개인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많은 손해를 보게 합니다.

술은 영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해악을 가져오게 하는 매개체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은 술에 취하는 자는 화가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술은 한번 입에 대기 시작하면 절제하기가 힘들고 마침내는 습관화 되게 됩니다. 김유신 장군의 말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아예 보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잠언23:31-35에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 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이것이 마침내 뱀같이 물 것이요 독사같이 쏠 것이며 -또 네 눈에는 괴이한 것이 보일 것이요 네 마음은 망령된 것을 발할 것이며 -너는 바다 가운데 누운 자 같을 것이요 돛대 위에 누운 자 같을 것이며 -네가 스스로 말하기를 사람이 나를 때려도 나는 아프지 아니하고 나를 상하게 하여도 내게 감각이 없도다 내가 언제나 깰까 다시 술을 찾겠다 하리라 고 했습니다.

영적으로 볼 때 무엇이든지 세상 문화와 문명에 관한 것들을 사랑하거나 그것에 도취되면 술취하는 것과 같은 결과에 빠지게 됩니다 (계17:2, 18:3). 그러므로 무엇에든지 그것들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취하려거든 성령께 취하도록 해야 합니다 (삼상1:12-15, 행2:13-15, 엡5:18).








부활의 날(제 삼일)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날부터 부활하시기 전까지 땅에 묻혀 계셨던 시간에 관한 내용이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날 자체가 중요하지는 않지만, 그에 대한 찬반론이 많았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 연구는 매우 흥미로워진다.
그 이유는 기존의 우세한 견해의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금요일 오후에 돌아가셔서 일요일 아침에 부활하신 것이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2:40에 하신 말씀과 상반된다고 지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해당 구절을 읽어보자.

마태복음 12:40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사람들은 금요일 늦은 오후부터 일요일 이른 아침까지를 어떻게 사흘 밤낮으로 볼 수 있느냐는 이유로 많이 혼란스러워 했다.

사흘 낮과 사흘 밤은 얼마의 시간인가?

예수님께서 무덤 안에 계셨던 시간을 아무리 계산해도 사흘 낮과 사흘 밤이 되지 않는다고 믿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루 낮과 하루 밤”이 하루의 일부가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이 견해에 근거해서 다시 말하자면, 하루의 한 시간도 “하루 낮과 하루 밤”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사흘”의 개념에 대해 명확하게 말씀하지 않으신 것이 사실이라 해도, 예수님께서 분명히 사흘 낮과 사흘 밤 동안 무덤에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금요일 늦은 오후부터 일요일 이른 아침까지의 시간(금요일과 토요일)이 하루(토요일)와 다른 하루의 단 몇 시간(금요일의 한 두시간) 즉, 이틀 밤이 채 되지 않기 때문에, 이 주장은 분명 논란의 소지가 있으며 연구가 좀 더 필요하다.

요한복음 19:31과 누가복음 23:50-54

예수님께서 금요일에 십자가 책형을 당하셨다는 논리는 요한복음 19:31과 누가복음 23:54-56, 두 구절에 근거하고 있다.
해당 구절은 다음과 같다.

요한복음 19:31
이 날은 준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누가복음 23:50, 52-53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그가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여 이를 내려 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넣우 두니 이날은 준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다 되었더라.

여기에서 “안식일이 거의 다 되었더라”는 구절이 자정이 거의 다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는데 대해, 독자들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사실, 그 시대의 시간 계산법으로 추정해보면, 하루는 자정이 아니라 해가 지는 시각에 시작되었으며, 4월에는 그 시각이 대략 7시 경이었다.

마태복음 27:46에 보면, 예수님은 “제 9시경”에 돌아가셨고, 이는 현대의 시간으로 말하면 오후 3시경이므로, 성경의 다른 사건과 마찬가지로 위에 기록된 사건에서 예수님이 돌아가신 시간부터 묻히신 시간은 오후 3시경부터 7시경 사이가 된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시간에 대해 모든 사람들이 금요일이었다고 믿는 이유는, 위의 성경 구절에서 말하는 안식일이 그 주의 안식일, 즉 한 주의 7번째 날인 십자가에 못박히신 날의 다음 날이라고 정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안식일”은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이 아니라 다른 특별한 준비일로 사람들이 이를 혼돈했던 것 뿐이다.

2.1 두 가지 종류의 안식일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과는 별도로 다른 특별한 안식일이 있다는 사실은 이스라엘 자손이 지켜야 할 절기의 규정에 대해 언급한 레위기 23장을 통해 알 수 있다. 4-8절 말씀을 함께 읽어보자.

레위기 23:4-8
이것이 너희가 그 정한 때에 성회로 공포할 여호와의 절기들이니라. 첫째 달 열나흗날 저녁은 여호와의 유월절이요. 이 달 열닷새날은 여호와의 무교절이니 이레 동안 너희는 무교병을 먹을 것이요. 그 첫 날에는 너희가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며 너희는 이레 동안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 것이요 일곱째 날에도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니라.

히브리 달력의 첫번째 달은 아빕으로 후에 니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1.
요한복음 19:31과 누가복음 23:53에서 말하는 준비는 유월절과 무교병 절기에 대한 준비였다.
마태복음 27:46에 의하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유월절 규례에 따라 어린 양을 번제로 드리는 니산 제 14일, “9시 경”, 즉 오후 3시 경에 돌아가셨다. 같은 날 저녁 유월절 음식을 먹고, 무교절이 시작되었다. 따라서 안식일이 “거의 다 되었다(누가복음 23:53)”는 것은, 레위기 23:7의 무교절 첫째날을 의미한다.

레위기 23:7
"그 첫 날에는 너희가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며"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며”라는 구절로 인해 무교절 첫째날을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의 개념으로 인식하게 했다. 하지만, 이 날은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2이 아니라, 규례에서 모든 노동을 금하는 특별한 안식일, 즉, 준비일이다. 요한복음 19:31을 보면, 이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요한복음 19:31
"이 날은 준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즉, 안식일은 주마다 돌아오는 안식일이 아니라 준비일, 특별한 안식]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마가복음 15:42에서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날과 해가 저문 후 시체를 받은 날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마가복음 15:42-43
"이 날은 준비일 곧 안식일 전날이므로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경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날은 니산 제 14일로, 아직 유월절을 준비하는 무교절이었다. 위의 성경 구절에서 살펴보았듯이, 이 날은 항상 [“곧”이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안식일 전날”로, 요한복음 19:31과 누가복은 23:52-54의 안식일, 즉 무교절의 첫째 날이며, 그 다음 날이 항상 안식일이 되는 날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날은 (니산 제 15일로) 정해진 날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논하는 구절의 안식일은 매주 돌아오는 날이 아닌 특별한 안식일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무교절 첫째날만이 특별한 안식일이 아니었다. 성경에서는 더 많은 날을 명확하게 “안식일”이라는 단어를 사용해 표현하고 있다. 레위기 23:23-32를 함께 읽어보자.

 

레위기 23:23-3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일곱째 달 곧 그 달 첫 날은 너희에게 쉬는 날이 될지니 이는 나팔을 불어 기념할 날이요 성회라 어떤 노동도 하지 말고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일곱째 달 열흘날은 속죄일이니 너희는 성회를 열고 스스로 괴롭게 하며 여호와께 화제를 드리고 이 날에는 어떤 일도 하지 말 것은 너희를 위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 속죄할 속죄일이 됨이니라 이 날에 스스로 괴롭게 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라 이 날에 누구든지 어떤 일이라도 하는 자는 내가 그의 백성 중에서 멸절시키리니 너희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거주하는 각처에서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 이는 너희가 쉴 안식일이라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 이 달 아흐렛날 저녁 곧 그 저녁부터 이튿날 저녁3까지 안식을 지킬지니라."

 

안식일로 묘사된 일곱번째 달의 첫 날이나 열흘날은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을 의미하지 않으며, 미리 정해진 날짜나 기일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 날을 “안식일”이라 부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주일은 아니었지만 특별한 안식일, “어떤 일”도 하지 말아야 할 준비일로, 주님의 죽음 다음날인 무교절 첫날에는 말그대로 “어떤 일”도 하지 말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특별한 안식일에 대해 언급한 또 다른 구절인 레위기 23:33-36을 읽어보자.

 

레위기 23:33-3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일곱째 달 열 닷샛날은 초막절이니 여호와를 위하여 이레 동안 지킬 것이라 첫 날에는 성회로 모일지니 너희는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며 이레 동안에 너희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 것이요 여덟째 날에도 너희는 성회로 모여서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이는 거룩한 대회라 너희는 어떤 노동도 하지 말지니라"

 

이 성경 구절에 나와 있듯이, 초막절 첫 날과 여덟째 날 모두 “어떤 노동도” 하지 말아야 할 특별한 안식일, 즉, 준비일로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과는 다른 개념이다4.

그러나 “안식일”이라는 단어는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 즉 미리 정해진 날짜의 준비일에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1년 내내 주일과 일치할 필요가 없이 사용되었다. 레위기 25:1-4의 말씀을 읽어보자.

 

레위기 25:1-4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간 후에 그 땅으로 여호와 앞에 안식하게 하라 너는 육 동안 그 밭에 파종하며 육 년 동안 그 포도원을 가꾸어 그 소출을 거둘 것이나 일곱째 해에는 그 땅이 쉬어 안식하게 할지니 여호와께 대한 안식이라 너는 그 밭에 파종하거나 포도원을 가꾸지 말며”

 

위에 살펴본 구절들을 통해 성경에서 말하는 안식일은, 일반적인 주일인 “한 주의 일곱째 날”과, 어떤 노동도 하지 말아야 할 준비일인 특별한 안식일의 두 가지 종류가 있음을 알았다.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은 기일인 반면, 특별한 안식일은 미리 정해진 날짜로, 주중 어떤 날도 될 수가 있다. 특별한 안식일은 무교절의 첫 날로,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다음 날이었다. 그래서 요한복음 19:31에서는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라고 표현하였고,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이 아닌, 주중 어떤 날도 될 수 있는 특별한 안식일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언제 부활하셨는가?

안식일이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다음 날이며 주일이 아닌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사흘 낮과 사흘 밤을 (금요일 늦은 오후부터 일요일 이른 아침까지) 40시간에 끼워 맞추려할 필요가 없어졌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를 그대로 믿으면 돌아가신 날짜를 찾는 것 또한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진실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예수님께서 “땅 속에” 사흘 낮과 사흘 밤을 계셨다면, 예수님께서는 해가 질 때 땅 속에 묻히셨고, 사흘 낮과 사흘 밤, 즉 정확하게 72시간 후, 땅 속에 묻히신 시각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시각에 부활하셨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시각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던 일요일 아침이 아닌 오후, 즉, 해가 질 무렵이 되는 것이다.

사실,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일요일 아침이라고 생각하는 유일한 이유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시각이 여인들이 무덤을 찾아갔던 새벽 바로 직전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기 때문이다 (마가복음 16:1-8).
모두가 알고 있듯이, 여인들이 무덤이 비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여인들이 빈 무덤을 발견한 것이 일요일 아침이라고 해서 예수님께서 무덤을 떠나신 시점이 일요일 아침이 될 수는 없다5.

그렇다면 정확히 언제 부활하셨는가?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정확히 사흘 낮과 사흘 밤을 “땅 속에서” 보내시고, 토요일 오후 해질 무렵, 즉 땅에 묻히신 시각과 일치하는 그 시각에 부활하신 것이 된다.

예수님께서 일요일 새벽이 아닌 토요일 오후에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마태복음 28:1-2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마태복음 28:1-2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위 구절에서 안식일은 무교절 첫날,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준비일”인 특별한 안식일이 아니다.
일주일의 일곱째 날인 주일이다. 주님께서 “땅 속에서” 계셨던 사흘 낮과 밤이 특별한 안식이었던 동시에 주일이었다는 사실은 마가복음 16:1과 누가복음 23:56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마가복음 16:1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누가복음 23:56
"[마가복음 16:1과 동일한 여인들이 (누가복음 24:10 참조)]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더라 계명을 따라 안식일에 쉬더라"

마가복음에서는 안식일이 지나매 여인들이 향품을 샀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누가복음에서는 안식일 전에 (여인들이 미리 향품을 샀다는 의미로) 향품을 준비했다고 되어 있다. 이 두 구절 사이에 모순이 있을까? 그렇지 않다. 왜냐 하면 이 두 안식일은 같은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가복음 16:1에 나오는 안식일은 무교절의 첫날, 즉 특별한 안식일이며, 누가복음 23:56에 나오는 안식일은 주일이다. 두 구절 모두 같은 날 (여인들이 향품을 사고 준비한 날)을 의미하지만, 각 구절에 나오는 안식일의 의미가 다르게 사용된 것이다.

예수님께서 묻히신 사흘 낮과 사흘 밤은 두 가지 의미의 안식일, 즉 특별한 안식일과 주일을 포함하는 것이 확실하니, 이제 마태복음 28:1-2를 통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시간에 대해 알아보자.

특별히 주의해서 읽어야 할 중요한 구절은 “새벽에”이다.
이 구절은 그리스어 동사 "epifosko"를 번역한 것인데 “해가 지다”를 의미한다.
누가복음 23:53-54에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땅에 묻힌 시간을 언급하실 때 이 동사를 사용하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해당 구절을 읽어보자.

누가복음 23:53-54
"[요셉]이 이[시체]를 내려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넣어 두니 이 날은 준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epifosko]."

신약에서 이 두 구절 외에 동사 "epifosko"를 써서 시간을 표현한 부분은 없다.
다시 마태복음 28:1로 돌아가보면, 이 구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시간은 사흘 낮과 사흘 밤 전에 예수님께서 묻히신 시간과 일치하는 해질 무렵이다. 그 시간 무렵,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으로 찾아왔다. 그러나 이들은 무덤을 보기만 하고 돌아갔으며, 마가복음 16:1-2와 같이 자신들이 떠난 후 무슨 일이 일어난지 모른 채, 다른 날 향품을 가지고 돌아왔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2-4절을 살펴보자.

마태복음 28:1-4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즉, 예수께서는 그 사흘 낮 사흘 밤 전 같은 시각에 묻히셨다]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이 일은 언제 일어난 것일까?
1절에 보면,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즉, 예수님께서 사흘 낮과 사흘 밤을 무덤에서 계시기를 마치신 그 시간이다.
그러면 처음부터 다시 정리해보자.

예수님께서는 몇 시에 묻히셨는가?
요한복음 19:31의 준비일과 다른 구절의 특별한 안식일인, 무교절의 첫날이 되기 전 해질 무렵, 즉, 니산 제 14일 해질 무렵이다.

얼마나 땅 속에 계셨는가?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2:40에서 언급하신 사흘 낮과 사흘 밤, 즉, 72시간이다.

예수님께서는 언제 부활하셨는가?
예수님께서는 “안식 후 첫날[일요일]이 되기 전 해질 무렵, 즉, 무덤 안에서 사흘 낮과 사흘 밤을 보낸 후 토요일 오후에 부활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언제 돌아가셨는가?
토요일 오후부터 사흘 낮과 사흘 밤을 거꾸로 계산해 보면, 토요일6이 예수님께서 묻히신 셋째 낮과 밤이고, 금요일이 둘째, 목요일이 첫째가 된다. 따라서, 예수님은 수요일 오후 3시에 돌아가셨고, 같은 날 오후에 묻히셨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그리고 목요일은 무교절의 첫날인 특별한 안식일이 된다. 여인들이 향품을 사고 준비했던 금요일은 평일이었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주일인 안식일은 토요일이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흘 낮과 사흘 밤을 땅 속에서 계실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모순이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면, 전혀 없다.

따라서 결론은 다음과 같다.
날짜 자체에 큰 의미가 없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정확한지 확인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말씀 중 어떤 주제라도 정확성에 오류가 있다는 비난을 받지 않도록 면밀히 검증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진실로 문제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의 전통에는 분명히 부주의성과 잘못된 추정이 있고, 성경의 명확성을 왜곡하는 문제점들이 존재한다.

참고문헌

E.W. Bullinger: The Companion Bible, Kregel Publications, Grand Rapids, MI 49501, 1990

Ralph Edward Woodrow: "Babylon Mystery Religion: Ancient and Modern", Ralph Woodrow Evangelistic Association Inc., 1992

 



각주

1. 출애굽기 12:2, 13:4와 에스더 3:7 참조.

2. 이는 기일이 아닌 첫 달 제 14일, 즉 미리 정해진 날짜였다.

3. “그 저녁부터 이튿날 저녁”은 이 구절에서 시간 계산에 대해 논했던 바와 일치한다.

4. 이 특별한 안식일이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 즉 주일과 같을 때는 일치한다고 말할 수 있다.

5. 이러한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유일한 구절은 마가복음 16:9,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이다. 그러나 고대 필사본에 구두점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부활하셨다는 결론은, 전적으로 쉼표를 찍은 위치에 좌우될 수 밖에 없다. 예수님께서 일요일 아침에 부활하셨다면, 예수님은 무덤 안에서 하루 밤을 더 머무시는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쉼표를 “부활하셨다”는 단어 다음에 찍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함으로서, 해당 구절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로 이해할 수 있으며, 이는 다른 성경 구절의 내용과 완벽하게 일치하게 된다.

6. 그 시대의 시간 계산법을 적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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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개혁자 루커와 칼빈의 성경 해석 차이

루터의 해석

루터의 성서해석은 그의 신학의 근간을 이룬다.
그는 말씀에 기초한 신학을 전개하였다.
그의 성서해석은 ‘문자적 의미 강조’, ‘그리스도 중심적 해석’, ‘실존적-실천적 해석’이라는 세 가지 핵심어로 요약할 수 있다.
이러한 루터의 성서해석의 특성은 시편 51편 해석에서 대표적으로 고찰된다.
그의 시편 51편 해석은 ‘죄인으로서의 인간’, ‘예수 그리스도 를 통한 구원’, ‘의인으로서의 삶’이라는 주제어 아래 의로우신 하나님과 죄인인 인간에 대한 신학적 주제를 부각시키고 있다.

칼빈의 해석

칼빈의 성서해석도 ‘원문을 중요시함’, ‘그리스도 중심적 해석’, ‘목회-실천적 해석’이라는 세 가지 핵심어로 요약된다.
시편을 자신의 영혼을 모습을 보여주는 해부도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삶을 이끌어 가는 모범이라고 인식한 칼뱅은 시편 51편에 대한 해석에서 ‘원문에 철저함’, ‘삶의 근본적 변화를 위한 해석’, ‘교회를 위한 해석’의 특징을 보여준다.

루터와 칼뱅의 성서해석이 보여준 특징들은 당대의 종교개혁을 이루는 원천과 동력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다음과 같은 의미 있는 시사점을 제공한다.

첫째, 본문의 일차적 의미를 중시하라(문자적-역사적 해석)
둘째, 성서가 성서를 해석하게 하라(그리스도 중심적 해석과 성령의 조명).
셋째, 삶의 변화를 일으키는 해석이 되게 하라(실존 - 실천적 해석)

칼빈의 시편연구
1.  칼빈의 시편 이해

칼빈의 시편에 대한 평가는 ‘영혼의 모든 부분에 대한 해부’(anatomiaom-niumanimaepartium)라는 말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사람이 의식할 수 있는 영혼의 정서들 가운데 시편에서 거울에 비추듯 묘사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시편에 나타난 다윗의 삶이 자신의 본보기가 된다고 말한다.
칼빈에게 시편은 자신의 영혼을 모습을 보여주는 해부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삶을 이끌어 가는 모범이기도 하였다.

2. 시편 51편의 해석
(1) 원문에 철저함칼뱅은 자신의 주석에서 무엇보다 원문의 표현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해석한다.
그는 표제어에서 ‘오다’라는 동사가 반복 사용되지만 대조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다윗이 밧세바에게 ‘들어간 후’ 나단이 다윗에게 ‘왔을 때’라는 언급에서 ‘들어감’과 ‘옴’이 히브리어 표현에서는 모두 동일한 동사 <보> (awb)로 표현된다.
동일한 동사의 반복으로 대조적인 의미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그는 시편 51편 4절에 대한 해설에서 먼저 이 구절에 대한 다양한 입장들이 있었음을 언급한 후 이 구절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다.
그는 첫 부분을 “당신께, 오직 당신께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번역한다.
이것은 원문의 순서까지도 고려한 사려 깊은 번역이다.
다윗이 이 진술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현재 자신의 눈과 온 영혼이 하나님께 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께서 말씀하실 때에 당신이 의로우시고, 당신께서 판단하실 때에 당신이 깨끗하실 것입니다.”라는 후반절의 내용도 전반절과 함께 올바른 이해가 필요함을 지적한다.

그는 이 부분을 바울이 로마서 3장 4절에서 인용하고 있음을 말하며, 바울이 히브리어 원문과는 다른 70인경을 인용하고 있음도 지적한다.59) 하지만 이렇게 정확한 문자적 인용이 되지 않고 있다 하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바울의 구약성경 인용이 정확한 문자적 인용에 목적이 두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칼빈은 저자의 의도에서 벗어나지 않는 범주에서 안에서 인용의 자유로움을 인정했다.
이처럼 칼빈은 저자 다윗의 생각이 분명하게 드러날 수 있도록 원문에 근거하여 문법이나 일련의 사고과정, 사회적 환경들을 고려하여 주석한다.
그는 시편 51편을 죄로 물든 인간의 관점에서 해석한다.
그리고 다윗의 상황을 뛰어 넘는 기독론적 해석을 거부하였다.

(2) 삶의 근본적 변화를 위한 해석 칼뱅은 자신의 시편 서문에서 자신의 경험이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를 밝힌다.
자신이 겪은 고통과 갈등의 경험이 시편을 적용하거나 이해하는 데에 매우 큰 도움이 되었다고 말한다.
시편 51편의 해석에서도 자신의 고통스러웠던 실존적 경험이 시편 해석을 위한 좋은 자양분이 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그러한 모든 진술은 삶의 근본적 변화를 목표로 한다.

예컨대, 칼뱅은 1절의 간구가 한 마디 애원으로 끝나지 않음을 지적하며 그 이유를 설명한다.

다윗이 그렇게 “하나님, 당신의 인애(ds,x,)를 따라 나에게 자비를 베푸소서(!n:x').
당신의 긍휼(~ymix]r;)의 풍성함을 따라 내 죄과들([v;P,)을 도말(塗抹)하소서.”라고 반복해서 호소하는 것은 그가 저지를 죄악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두 개의 진술을 연이어 말하는 단순한 평행법이 아니라 죄의 심각성을 인지한 다윗이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자비와 긍휼만을 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70인경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당신이 말씀하실 때 당신은 의롭게 될 것이며, 당신이 판단 받으실 때 당신은 이기실 것입니다.
마지막 부분이 ‘깨끗하실 것이다’에서 ‘이기실 것이다’의 적극적인 의미로 번역되었다.

여기에서 루터와 칼뱅의 차이점을 발견한다.
루터는 위에서도 살펴본 바와 같이 시편 51편을 철저하게 기독론적 관점을 통해 해석하고 있으나 칼빈은 본문의 역사적 의미를 밝히는데 주력하고 있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해설에서 칼뱅의 내면의 변화를 강조한다.
“보소서, 당신께서는 ‘마음속에서’ 진실을 기뻐하십니다.”라는 언급은 표면적 인식으로는 변화의 모습이 부족함을 말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래서 그는 신자의 내적 변화 촉구하며 신자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칼뱅은 제사란 하나님의 은혜를 보증하는 표시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감각적인 존재들이기 때문에 외적으로 드러나는 의식(儀式)적인 활동을 통해 완전한 설득으로 나아간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슬초로 정결하게 하는 의식은 그 자체로 머물러 있지 않고 그것의 본래 목적인 죄용서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지향한다는 것이다(7절). 또한 칼뱅은 10-12절의 진술이 ‘새 피조물’에 대한 간구라고 평가한다. 이전의 진술들이 용서하심에 대한 간구였다고 한다면, 지금부터는 성령의 은혜가 회복되기를 간구하는 내용이라고 말한다. 이때 ‘창조하소서’라는 간구는 기적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을 말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것은 한편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다윗이 자신의 온전한 회복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로 거듭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완전한 회복은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인정할 때 가능하다.64) 그래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고 말한다(17절).

(3) 교회를 위한 해석칼뱅은 주석 서론에서 시편 51편이 하나님께 범죄한 사람들이 교훈을 얻게 하기 위한 예시임을 밝힌다.
그는 ‘의인법(擬人法)’(prosopopoeia)이라는 고전적 개념을 받아들이고 다윗을 ‘표본’으로 이해한다.65) 다윗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신자들이 하늘의 종국적인 처벌에 의해 놀라게 될 때까지 죄 아래 머물러 있지 말고 회개의 요청에 겸손히 따를 것을 가르친다고 말한다.66) 시편이 신자들의 현재의 삶을 위해 실제적인 가르침이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그의 시편 주석에는 51편의 저자를 ‘시인’이라고 명명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으며(예컨대, 7절), ‘우리’라는 주어가 자주 등장한다. 이것은 시편 51편을 다윗 개인의 차원에만 머물게 하지 않게 하며, 독자들을 ‘우리’라고 명명함으로써 시편이 가지고 있는 현재적 의미를 분명히 드러낸다. 특별히 시편 51편 18절이하에 나타난 시인의 간구가 집단적 의미의 교회에 대한 간구로 해석된다. 칼빈은 시인의 눈이 영적인 성전에 고정되어 있다고 말하며, 시인의 간구가 하나님 나라를 위한 간구로 이해된다고 말한다. 7절의 우슬초에 관한 해석에서도 그의 교회적 관심을 볼 수 있다. 칼빈은 우슬초를 뿌리는 행위를 의도적으로 사돌레트(Sadolet, 1477-1547)처럼 성례전과 연결시키지도 않고, 멜랑히톤(Melanchthon, 1497-1560)과 같이 그리스도의 선포와 연결시키지도 않는다. 그는 우슬초에 관한 언급을 당시의 외적 표지가 실제로 지시하는 목적과 연결시켜 “하나님의 은혜”로 해석한다. 칼뱅은 다윗이 범한 윤리적 죄에 대한 회개와 용서를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의 회복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한다. 관계의 회복은 어떤 객관적인 성례가 담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죄인의 ‘찢겨진 심장’만이 필요할 뿐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러한 관계 회복은 교회의 회복을 위한 간구의 출발점이 된다. 이처럼 칼뱅은 자신의 주석에서 단지 시편의 세계에 머물러 있지 않고 당시의 교회와의 연결을 통해 교회를 위한 해석을 시도하였다.

IV. 루터와 칼뱅의 성경해석과 그 함의위에서 우리는 루터와 칼뱅의 성경해석이 보여주는 특징들을 살펴보았다.

루터와 칼뱅의 성경해석이 보여준 특징들은 당대의 종교개혁을 이루는 원천과 동력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의미 있는 시사점을 제공한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위기가 중세시대의 로마 가톨릭 교회가 초래하고 직면해야 했던 위기 상황과 유사하다는 평가 속에서 루터와 칼뱅의 성경해석은 한국교회의 개혁과 갱신을 위한 원천과 동력이 될 수 있을 것이다.70)67)위의 책, 307.68)양신혜, 『칼빈과 성경해석: 교회공동체를 위한 겸손의 해석학』, 260.69)위의 책, 261.70) 2016년 한국기독교학회 제45차 정기학술대회 “종교개혁과 후마니타스(Humanitas): 기독교는 ‘헬조선’ 시대에 희망을 줄 수 있는가?”의 주제발표를 참조하라. 배덕만, “‘헬조선’과 하경택 | 루터와 칼뱅의 성서해석과 그 함의(含意)311. 일차적 의미를 중시하라: 문자적-역사적 해석루터의 성경해석 원칙은 아우구스티누스의 해석학의 근본원리인 성경의 명료성을 수용하여 ‘단순성과 명료성’(brevitasetfacilitas)에 있었다.71) 이러한 성경해석의 원리는 칼뱅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루터와 칼뱅 모두 역사적 어의를 성경해석의 출발점으로 삼았고, 문자적 의미를 그 무엇보다도 중요시했다. 필자는 이것을 본문의 문자적-역사적 의미이며, 본문의 ‘일차적 의미’라고 부른다. 본문의 문자적-역사적 의미(whatitmeant)가 해명되지 않고서는 본문이 오늘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whatitmeans)가 드러날 수 없다.본문의 문자적-역사적 의미를 제대로 규명하지 않은 채 교리적 해석이나 알레고리적 해석에 치우쳐 본문이 오늘날 독자들에게 주는 교훈을 찾는 데에 빠져 있는 한국교회 성경해석의 경향을 경험한다. ‘본문을 정당하게 대하지’ 않고 자기가 일고 싶은 대로 읽고 보고 싶은 대로 보는 경우를 흔하게 목격한다. 그러나 본문 자체에 대한 분명한 이해 없이는 그 다음 단계의 해석과 적용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 종교개혁자들은 본문의 어의에 충실한 이해와 해석으로 그릇된 교회의 모습을 개혁할 수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능한 원전을 살펴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종교개혁자들은 불가타 라틴어 성경 이면에 있는 원전의 의미를 밝혀내어 ‘근원으로 돌아가자’는 모토를 실행할 수 있었다. 원전의 의미를 밝히고 본문이 말하는 바에 충실하게 귀 기울임으로 그동안 성경에 대한 잘못된 해석과 교회의 전통으로 가려져 있던 말씀의 의미를 좀 더 바르고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다. 2. 성경이 성경을 해석하게 하라: 그리스도 중심적 해석과 성령의 조명종교개혁자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성경해석의 원리가 있다면 것은 ‘성경이 성경의 해석자이다’(Scriptura Scripturaeinterpres)는 원리다. 이것은 성경‘개독교’ 시대에 한국교회와 인문주의” 「한국기독교학회 제45차 정기학술대회 발표논문집」 제1권 (2016), 69-113. 임희국은 라가츠(Ragaz)의 해석을 토대로 ‘성령의 내적 증언’이라는 해석학적 원리가 ‘오직 성경’의 종교개혁 원리를 계승하는 한국장로교회의 축자영감설 문자주의와 역사비평학의 성경해석의 극단적 대립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한다. 임희국, “루터 종교개혁의 유산인 ‘오직 성경’에 대한 성찰, ‘성경의 부활’을 기다림,” 『장신논단』 48-4 (2016), 13-35. 71)정기철, “칼빈 해석학의 현대적 의미,” 73. 또한 다음을 참고하라. W. J. Bouwsma, Calvin: A Sixteenth-Century Portrait, 이양호, 박종속 역, 『칼빈』 (도서출판 나단: 서울, 1993), 263.32장신논단|Vol. 50 No. 2을 전체적으로 읽는 안목을 가지라는 요청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성경에 대한 이해가 편중되거나 편파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특별히 중세가 보여주었던 잘못대로 교회의 전통이나 특정 교파의 입장이 성경의 의미를 제한하거나 왜곡해서는 안 된다. 교회가 성경이 무엇을 가르치는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교회가 무엇을 가르쳐야 할지를 결정하게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이 성경을 해석하도록 해야 한다. 성경 본문이 자의적으로 이해되지 않고 다른 성경 본문에 의해서 해석되고 통제되어야 한다. 이러한 해석원리가 지켜지기 위해서 루터와 칼뱅에게는 성경해석에서 두 가지 원리가 있었다. 하나는 ‘그리스도 중심적 해석’이라는 원리이고, 다른 하나는 ‘성령의 조명’이라는 원리이다. 루터와 칼뱅은 이 두 가지 원리에 대한 강조점이 다르긴 했지만, 두 사람에게 모두 두 가지 원리는 매우 중요했다. 이러한 원리는 성경을 통일성을 가진 책으로 보게 하였으며, 성경의 중심 메시지를 놓치지 않게 하면서도 해석자들을 겸손하게 하는 해석학적 제어장치 기능을 하였다. 그리스도 중심의 해석은 성경의 중심을 잃지 않게 하는 변증적 기능을 하였다. 성령은 말씀을 통해서 그리고 말씀 안에서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통해 열광주의적 신앙으로 나아가지 않게 하였으며, 하나님 안에 계신 분으로서 지혜의 전달자 이신 성령은 성경해석의 주체이자 참된 해석자라는 인식을 통해 해석자는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게 된다.이러한 원리들은 해석자가 본문의 주인이 되지 못하게 한다. 해석자는 본문을 좌지우지하는 주인의 자리에서 내려와 본문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경청자의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말씀의 주인이 아니라 말씀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3. 삶의 변화를 일으키는 해석이 되게 하라.

실존-실천적 해석루터와 칼뱅 모두 실천적 성경해석을 지향하였다.
그들은 성경이 교리적 지식을 가르치는 텍스트이거나 예전적 지침을 보여주는 안내서로 머물러 있게 하지 않고 삶의 변화와 성숙을 이룰 수 있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작동하게 하였다.
두 사람이 모두 실천적 해석을 지향하였으나 루터는 좀 더 실존적이었고, 칼빈은 좀 더 목회적이었다고 평가된다.
루터의 성경해석은 학문과 경건의 조화에 그 의미가 있다.
루터는 인간의 삶을 하나님의 앞에서의 삶으로 이해하고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 삶에 대한 지침을 얻고자 하였다.
루터는 성경 안에 인간의 원초적 경험과 감정들이 다양한 상황 속에서 구체화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성경의 인물들의 통해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응답을 얻고자 하였다.
그러한 문제해결은 루터 자신이 성경을 통해 자신이 직접 체험한 내용이자 과정이었다.
그러한 면에서 루터의 성경해석은 상황적이었고, 삶에 현장에 대한 구체적인 적용으로서 그 결과가 나타났다.

칼빈은 성경이 교회의 일상에서 실현해야 할 규칙들을 담고 있다고 보았고, 성경의 언어를 기본적으로 ‘행동의 언어’라고 평가했다.
그러한 면에서 칼빈은 순종을 강조했다.
순종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인식에 이를 수 있다고 말했다.
칼빈이 실천적 성경해석의 모습은 율법을 적극적으로 해석한 것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율법이 의식적-법적 측면에서는 한계를 가지고 있으나 윤리적-도덕적 기능에서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평가했다(tertiusususlegis). 율법은 내적인 정직뿐 아니라 외적인 영적 정의를 이루는 교육적 과제를 수행한다고 말한다.
성경해석의 결과는 신자의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
성경해석은 루터와 칼뱅이 보여주었듯이 삶의 변화를 위한 해석과 적용이 되어야 한다.
이때 삶의 변화는 내면의 삶뿐만 아니라 외적인 삶까지를 포함하는 전인적인 삶의 모습을 포괄한다.

V. 결론

열왕기하 22장 8절에 따르면 요시야의 종교개혁은 성전에서 ‘토라’를 발견함으로 시작되었다.
이것은 ‘하나님 말씀의 재발견’으로 평가될 수 있다.
성경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있지만 그것이 제대로 해석되지 않고 실천되지 않으면 그것은 성전 구석에 파묻혀 있는 것과 다름없다.
‘성경의 재발견’을 통해 성경이 실제적인 영향을 미치도록 해야 한다.
루터와 칼뱅의 성경해석은 교회와 신자들의 삶에서 성경이 작동되어야 함을 가르쳐준다.
성경이 올바로 해석되고 실제적 적용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현실은 아직도 종교개혁자들의 정신과 전통을 제대로 이어가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를 할 수 밖에 없는 처지이다.

루터 종교개혁 500주년의 해를 지나오면서 종교개혁자들이 재발견한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 우리 시대에도 동일하게 살아 있는 말씀이 되길 바란다.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구석구석 흘러 들어가 죽은 바다를 소성케 하였던 물과 같이 한국교회와 성도들의 삶에 변화와 회복을 일으키는 생명 있는 말씀으로 작동되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