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성경목록

구약전서 The Old Testament

 

창세기 - Genesis (제너시스)

출애굽기 - Exodus (엑소더스)

레위기 - Leviticus (리비티커스)

민수기 - Numbers (넘벌즈)

신명기 - Deuteronomy (두털라너미)

여호수아 - Joshua (자슈아)

사사기 - Judges (저지스)

룻기 - Ruth (루쓰)

사무엘 상 - 1 Samuel (쌔무엘)

사무엘 하 - 2 Samuel

열왕기 상 - 1 Kings (킹스)

열왕기 하 - 2 Kings

역대 상 - 1 Chronicles (클로니클리즈)

역대 하 - 2 Chronicles

에스라 - Ezra (이즈라)

느헤미야 - Nehemiah (니허마이아)

에스더 - Esther (에스털)

욥기 - Job (죱)

시편 - Psalms (샴즈)

잠언 -  Proverbs (프라벌브스)

전도서 - Ecclesiastes (이클리지어스티)

아가 - Song of Songs (쏭 오브 쏭즈)

이사야 - Isaiah (아이자이어)

예레미야 - Jeremiah (제러마이아)

예레미야애가 - Lamentations (레멘테이션스)

에스겔 - Ezekiel (이지키얼)

다니엘 - Daniel (대니엘)

호세아 - Hosea (호지어)

요엘  - Joel (조엘)

아모스 - Amos (에이모스)

오바댜 - Obadiah (오버다이어)

요나 - Jonah (죠나)

미가 - Micah (마이커)

나훔 - Nahum (너이험)

하박국 - Habakkuk (해벅컥)

스바냐 - Zephaniah (제퍼나이어)

학개 - Haggai (해가이)

스가랴 - Zechariah (제커라이어)

말라기 - Malachi (맬러카이)

 

신약성경 The New Testament

 

마태복음 - Matthew (매튜-)

마가복음 - Mark (맠-)

누가복음 - Luke (눜-)

요한복음 - John (좐-)

사도행전 - Acts (액츠)

로마서 - Romans (로먼즈)

고린도 전서 - 1 Corinthians (펄스트 커린씨언즈)

고린도 후서 - 2 Corinthians (쎄칸드 커린씨언즈)

갈라디아서 - Galatinas (걸레이션즈)

에베소서 - Ephesians (이피젼즈)

빌립보서 - Philippians (필리피언즈)

골로새서 - Colossians (컬라시언즈)

데살로니가 전서 -  1 Thessalonians (펄스트 데설로니언즈)

데살로니가 후서 - 2 Thessalonians (쎄칸드 데설로니언즈)

디모데 전서 - 1 Timothy (펄스트 티모씨-)

디모데 후서 - 2 Timothy (쎄칸드 티모씨-)

디도서 - Titus (타이투스)

빌레몬서 - Philemon (필리먼)

히브리서 - Hebrews (히브루-즈)

야고보서 - James (제임스)

베드로 전서 - 1 Peter (펄스트 피터ㄹ)

베드로 후서 - 2 Peter (쎄칸드 피터ㄹ)

요한 1서 - 1 John (펄스트 좐-)

요한 2서 - 2 John (쎄칸드 좐-)

요한 3서 - 3 John (써드 좐-)

유다서 - Jude (쥬-드)

요한계시록 - Revelation (레벌레이션)








술 주(酒) / 술 주(酒) / 물 수(水) + 닭 유(酉)


술 주(酒) / 물 수(水) (氵) + 닭 유(酉)

酒(주) 
부수(닭유, 7획)
모양자
酉(닭 유) + 氵(삼수변 수)


酒자는 ‘술’이나 ‘술자리’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酒자는 水(물 수)자와 酉(닭 유)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酉자는 술을 담는 술병을 그린 것이다. 이렇게 술병을 그린 酉자에 水자가 더해져 있으니 酒자는 ‘술’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사실 고대에는 酒자와 酉자의 구별이 없었다. 酉자도 ‘술’이라는 뜻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酉자가 십이지(十二支)의 열째 글자인 ‘닭’을 뜻하게 되면서 지금은 酒자가 ‘술’이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촌(寸)
진한 술 주(酎) - 소주 주(酎)  / ( 燒酒 )

소주(燒酒)(燒酎)

(전국술 주)의 한자 유래
한자 구성원리 | 형성문자

불사를 소
1. 불사르다(불에 태워 없애다), 불태우다 2. 타다 3. 익히다
부수 火  (불화, 4획)
총획 16획

전국술 주
1. 전국술(全-: 군물을 타지 아니한 진국의 술) 2. 세 번 빚은 술 3. (술을)빚다
부수 酉  (닭유, 7획)
총획 10획
뜻을 나타내는 닭유(酉 ☞ 술, 닭)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주(月+寸)의 생략형(省略形)이 합(合)하여 이루어짐.
  • (→燒酒(소주))


술은 알코올 성분이 있어서 먹으면 취하게 하는 모든 음료수를 통틀어 한 말입니다. 구약시대에 일반 민중에게는 취하지 말라고 했으나 성별되어야 할 나실인이나 왕이나 제사장이나 선지자는 아예 먹지 못하게 했습니다 (민6;3, 잠31:4-5, 사28:7, 레10:9). 나실인에게는 생포도든 건포도든 포도 씨든 포도 껍질이든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민6:3-4). 경건하게 살기를 원하는 부모들은 자녀에게 술은 보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잠23:31). 술에 즐기는 자와는 사귀지 말라고 했습니다 (잠23:20). 그 결과가 패망이라는 사실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잠23:21, 사5:11). 신약성경에도 감독(목사)나 집사 등 하나님의 일을 맡은 사람들은 술을 즐기거나 인박이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딛1:7, 딤전3:8). 누구든지 술에 취하는 자와는 사귀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고전5:11, 15:33).

오늘날 우리가 음주의 동기와 목적과 방법과 양 등에 대한 논란을 벌이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바로 살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술을 마시지 말라고 한 이유를 알게 되면 자연히 변론의 여지가 없어집니다.

① 영적 타락을 가져오게 하기 때문입니다. 술은 분별력이 없어지게 합니다. 만일 제사장이 술을 먹게 되면 제사 규례를 잊어버려 제사를 바로 드릴 수 없게 됩니다 (레10:8-11). 혹 왕이 마시게 되면 하나님의 율법을 잊어 버리고 재판을 공의롭게 할 수 없게 됩니다 (잠31:4-5). 선지자가 먹게 되면 하나님의 이상을 바로 해석할 수 없습니다 (사28:7). 호세아서에는 술이 마음을 빼앗아 음행하게 하고 우상을 섬기게 했다고 했습니다 (호4:11-13). 결국 술이 분별력을 없이 하고 하나님에게서 떠나게 만듭니다.

② 정신적 타락을 가져오게 하기 때문입니다. 술은 방탕하게 하고 덕을 상실하게 합니다. 로마서13:13에는 방탕과 술취하지 말며 라고 했고 에베소서 5:18에는 술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라 고 했습니다. 노아는 술에 취하여 장막에서 벌거벗고 있게 되었고, 아들 함이 그것을 보고 누설했다가 저주를 받았습니다 (창9:20-23). 롯은 소돔성에서 나와 굴에 있을 때 술취한 것 때문에 두 딸과 행음하고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두 아들이 이스라엘의 대적인 모압과 암몬 족속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창19:30-38). 술이 도덕적으로 타락을 가져오게 한 예입니다. 술로 인한 타락은 종말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마24:38-39).

③ 육체적 패망을 가져오게 하기 때문입니다. 술은 한번 먹게 되면 습관이 되고 그 습관은 물질을 탕진하게 하고 몸이 병들게 하고 정신적으로 황폐하게 합니다. 잠언21:17에 연락을 좋아하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술과 기름을 좋아하는 자는 부하게 되지 못하느니라 고 했고, 23:21에는 술 취하고 탐식하는 자는 가난하여질 것이요 라고 했고 호세아7:5에는 우리 왕의 날에 방백들이 술의 뜨거움을 인하여 병이 나며 라고 했습니다. 술취하는 생활은 개인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많은 손해를 보게 합니다.

술은 영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해악을 가져오게 하는 매개체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은 술에 취하는 자는 화가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술은 한번 입에 대기 시작하면 절제하기가 힘들고 마침내는 습관화 되게 됩니다. 김유신 장군의 말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아예 보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잠언23:31-35에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 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이것이 마침내 뱀같이 물 것이요 독사같이 쏠 것이며 -또 네 눈에는 괴이한 것이 보일 것이요 네 마음은 망령된 것을 발할 것이며 -너는 바다 가운데 누운 자 같을 것이요 돛대 위에 누운 자 같을 것이며 -네가 스스로 말하기를 사람이 나를 때려도 나는 아프지 아니하고 나를 상하게 하여도 내게 감각이 없도다 내가 언제나 깰까 다시 술을 찾겠다 하리라 고 했습니다.

영적으로 볼 때 무엇이든지 세상 문화와 문명에 관한 것들을 사랑하거나 그것에 도취되면 술취하는 것과 같은 결과에 빠지게 됩니다 (계17:2, 18:3). 그러므로 무엇에든지 그것들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취하려거든 성령께 취하도록 해야 합니다 (삼상1:12-15, 행2:13-15, 엡5:18).








원시복음(창세기 3:15) Original Gospel. Protevangelium / 06-09-2021(수)


원시 복음(창세기 3:15) Original Gospel, Protevangelium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

창세기에서 처음으로 예언된 메시아(창 3:15)는 최초의 복음이었습니다.
이것을 원시복음(Protevangelium, Proto - ‘원래의’, evanglium - ‘기독교복음’)이라고 합니다.

마리아의 몸에서 출생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심으로
메시아 예언은 실현되었습니다(마 1:18∼23, 2:11).
이제 남은 메시아 예언은 부활 후 하늘로 오르신 예수님께서
다시 구름을 타고 오실 것이란 예언입니다(마 24:30, 26:64, 막 13:26, 14:62, 눅 21:27, 행 1:11, 계 1:7).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를 아담과 하와가 따 먹음으로
죄와사망이 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이 사망으로 망하게 된 것을 그대로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죄의 담을 허시고 다시 낙원을 회복시켜 주실 것을 약속해 주신 것이
바로 원시 복음인 것입니다.

첫째 아담이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우리가 모두 죄인이 된 것입니다(원죄).
둘째 아담인 예수님이 우리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우리 모두는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롬 5: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표하여 죽으신 것은 결국 우리 모두가 각자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받으신 것이며 그로 인하여 우리는 영원한 형벌을 면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구원받기 위해 해야 할 것이 꼭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 믿음이 있을 때에 우리는 구원의 기쁨과
죄에서 해방된 즐거움을 누릴 수 있으며
우리의 신앙생활은 보다 활기가 넘치게 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성경에 기록된 족보는 4복음서 중에 마태복음 1장에 아브라함부터 예수에 이르기까지 기록되었으며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는 족보가 없고 누가복음 3장에서 예수께로부터 하나님에 이르기까지
남자가 낳은 후손들의 대략이 기록되었다. 그러므로 성경에 기록된 족보는 남자가 낳은 후손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3장 15절에서 말하는 여자의 후손이라 기록한 말씀이 단 한곳 마태복음 1장 16절에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셨다는 것입니다.
이에 관하여 자세한 내용을 누가복음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눅1:25-36).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들어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정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그에게 들어가 가로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고 생각하매
천사가 일러 가로되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 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유일하게 하나님으로부터 아브라함의 후손을 낳은 남자가 아닌 여자가 있었으니
다윗의 후손 (마1:16) 야곱이 낳은 요셉과 정혼한 마리아로 그에게 (마 1:18)
성령이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그를 덮으시리니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여기 ‘덮으시다’라는 뜻은 감싸다라는 뜻으로
닭이 알을 품듯(창 1:2)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심과 같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동정녀의 몸에 잉태되시고 나신 것은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으로 죽은 자 가운데 계신 예수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신 것과 같다

어쨌든 여자의 후손은 약속의 말씀대로(미 5:2. 눅 2:4. 마 2:11)
떡집이라 일컫는 베들레헴에서 나셨고(호 11:1. 마 2:15)
약속의 말씀대로 애급으로 피신하셨다가(마2:23)
약속의 말씀대로 나사렛에서 성장하셨다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께서(고전 15:3)
성경대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고전 15:4)
성경대로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한 것이다.
이는 궁극적으로 사단의 권세 아래 놓인 세상과
그리스도 안으로 불러냄을 받은 자들과의 전쟁이라 할 것이다

사단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이기신 세상을 다시금 회복하려고 안간힘을 다할 것이다.
또한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계 17:17)
하나님께로부터 권세를 받아 다스릴 환란까지이다.
얼마남지 않은 마지막 시간이 될 것을 아는 그들은 끝까지 하나님의 일을(계 2:9. 13:6. 16:9. 11. 21)
훼방할 것이며 회개치 않고(계 20:14) 불 못을 선택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최후의 날이 임하기까지 복음의 말씀을 변질시키고 왜곡하여
진리에서 비켜서도록 할 것이다.

그 하나는 동정녀에 관하여서이고
둘은 창조론에 대적하는 진화론이며
셋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을 부정하는 종교다원주의이며
넷은 홍해바다에 길을 내신 일이며
다섯은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축소하려는 미련한 자들의 대적이며
여섯은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형벌을 부인하는 일이며
일곱은 예수그리스도의 재림이다

그러므로 그들은(마 24: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으켜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고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그러므로 그 어떤 유혹에도 쉬 동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며
처음 듣고 믿은 복음의 말씀인 ‘십자가의 도’에서 떠나지 말고 오히려 굳게 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사랑의 대상자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을 창조하신 후, 마지막으로 사람을 지어 하나님 대신 세상을 통치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고 시도하는 순간 인간은 죄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므로 인간은 죽음에 이르게 되었고, 그로인해 영원히 살도록 창조된 자가 그만 구원이 필요한 자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사랑하시기에 사랑의 대상자인 사람들을 향해 구원의 손길을 내밀지 않으실 수 없었습니다. 죄로 인하여 사람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날 때에 하나님께서는 한가지 특이한 약속을 주십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 창세기 3:15.

인류를 죄악에 빠뜨린 뱀에게 한 말입니다. 뱀은 사실 뱀의 모습으로 나타난 마귀를 말합니다. 마귀는 여자의 후손의 발뒤꿈치를 상하게 하겠지만, 여자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으깰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성경에서 모든 인류는 남자의 후손입니다. 창세기에도, 역대기에도, 마태복음에도, 누가복음에도 모든 인류는 남자의 후손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두 남자를 통해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상 여자의 후손이 딱 한명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마귀는 예수님 십자가에 매달아 죽게 하였지만, 예수님을 죽음에 가둬 두지를 못했습니다. 즉 머리를 상하게 하려 시도하였지만 예수님께서 죽었다 살아나시는 부화사건을 통해, 겨우 발뒤꿈치만 상하게 한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반면, 부활을 통해 마귀는 자신의 궁극의 무기인 죽음이라고 하는 무기가 깨지는 것 보아야 했습니다. 즉 머리가 으깨어져 버린 것이지요. 죽음으로도 어쩔 수없는 마귀는 이제 예수 이름 앞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의 형편없는 상태는 예수의 이름을 가진 모든 자들 앞에서 동일하게 적용되는 상태가 되어 버렸습니다. 즉 예수를 품은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구원이 임한 것이지요.

이것을 원시복음이라 부릅니다. 여자의 후손, 즉 남자의 몸을 빌지 않고 처녀의 몸에서 태어난 인간이 모든 인간을 구원할 것이라는 최초의 구원 예언인 것이지요. 그렇다면 왜 하필 처녀의 몸에서 태어난 자라 할까요?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죄가 없어야 합니다. 하지만 모든 인간은 죄인입니다. 바로 죄가 유전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죄의 유전은 남자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즉 남자의 몸을 타고 태어난 모든 인간은 죄인인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을 위해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구원의 길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피의 대속 제사입니다. 다른 죄없는 생명체가 대신 죽음으로써 생명을 대신하면 된다는 것이지요.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레위기 17:11).

즉 죄를 없애는 방법은 바로 대속의 제사였습니다. 대속이란 죄를 ‘대신 속한다’는 뜻입니다. 제사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죄인을 위해 대신 죽어줄 제물이었습니다. 이때 사용되는 대속 제물의 조건은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어린 양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하나 생깁니다. ‘짐승이 인간을 대신해서 죽을 수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럴 수없다라고 말합니다. 상식적으로도 당연히 그럴 수 없지요. 그래서 제사에 사용되었던 희생양은 그저 상징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 용어로는 예표라고 부릅니다. 즉,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어린 양이란, 죄도 없고 허물도 없는 사람 제물을 뜻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죽을 수 있는 구원자는 다음과 같은 자격을 갖추어야 합니다.

1. 인간을 대표해서 죽어야 하므로 사람이어야 한다.

2. 죄도 없고 허물도 없어야 하므로, 남자의 피를 받으면 안된다

3. 죽음을 이겨야 한다. 즉, 그저 대신 죽는 것으론 부족하고 죽었다가 살아나야 한다.

이러한 존재를 보내 주겠다는 약속이 바로 창세기 3:15절의 원시복음인 것입니다.

죄인이 아닌 인간이 될 수있는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인간이기 위해서 인간의 육신을 받아야 한다

2. 죄가 없기 위해서 남자의 피를 받으면 안된다. 죄는 남자를 통해서 유전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건을 모두 만족시키기 위해 구원자는 우선 남자의 몸을 받지 않고 여자에게서만 태어났어야 했습니다. 인간의 몸에서 태어나야 인간이 되어 인간을 대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죄가 없는 순결한 영혼이어야 했고, 죄와 죽음을 이기는 능력을 가져야 했으므로 그 영은 하나님으로부터 와야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자가 처녀의 몸에서 성령으로 잉태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남자의 후손이 아니라 여자의 후손이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구원자는 완벽하게 인간이면서, 또한 완벽하게 하나님이어야 했던 것입니다.

아무도 믿지 않을 사실, 믿음을 주기 보다는 오히려 조롱거리가 될 수 밖에 없는 사실, “처녀가 애를 낳은 것이 우리가 모시는 구원자라네”라고 하는 이야기가 당당하게 성경에 자리 잡을 수밖에 없었던 사연은 바로 대속제물의 조건을 만족시켜야 하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최초로 복음의 약속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하여 타락한 이후, 즉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와 뱀에게 벌주시는 종말론적 심판의 광경을 보이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심판의 선언 속에 하나님은 긍휼을 잊지 않으셨다. 여인의 후손을 통한 구원 약속을 주셨기 때문이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마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3:15) 여기서 구원에 관한 중요한 진리를 발견한다.

첫째, 우리 구원을 인간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전적 능력으로 이루신다는 선언을 본다. 사람의 노력의 보태기로 이루어지지 않고 하나님의 일방적인 구원의 역사를 본다. 진정한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단독역사로만 가능하다. 우리의 구원도 전적인 은혜로 되는 것이지 나의 어떤 장점으로서 이루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 하나님의 주권적 구원 원리는 역사속에 일관하게 나타난다. 신약의 구원 역시 주께서 루디아의 마음을 여신 것처럼 우리 마음을 여실 때 믿게 되고 회개하고 구원을 받는다.

둘째, 그의 구원은 마귀와의 단절로 이루어진다. 마귀의 말에 귀가 솔깃하여 독을 마시듯이 자기 것이 되어버린 인생은 하나님이 마귀와 원수가 되게 하심으로서 구원이 성립되게 하신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마귀와 대적하는 입장에 서있는 전쟁터에 있는 것이다. 기회를 엿보고 있는 일곱 마귀의 역사를 대적해야한다. 평강의 하나님이 속히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시리라는 약속을 받고 있는 자들이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할 일은 주님이 마련하신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여 입는 일만이 남았다.

마지막으로 구원이란 연합을 가리킨다. 하나님과의 연합이 구원이란 말이다. 마귀와 원수가 되고 하나님과 연합한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르던 신분이 오직 주님을 따르는 신분으로 바꾸어진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아 그리스도 안에서의 승리 자리로 올라가는 것이 구원이다. 그리스도인의 구원은 죄에서 건짐 받는 초보적 부분에서 하나님과 떨어질 수 없는 연합의 자리로 나가는 것이다.

이 예언은 정말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구원은 바로 이 3가지 절대적 요소를 골자로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적 은혜로 구원받은 자이다. 우리는 마귀와의 대적하는 용사로서 부름 받았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영원한 연합을 함으로서 우리의 구원이 완성됨을 안다. 이 놀라운 원시복음의 골자가 내 속에 있는지를 살피자. 정말 내가 믿는 복음이 바로 이것 향해 나가고 있는가?



원시복음(元始福音, Protoevangelium)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박윤선 박사는
(1) 사람과 마귀(계 12:9, 20:2)가 서로 원수되게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라는 것,
(2) 사람이 마귀와 원수 된 상태가 구원이라는 것,
(3) 여자 후손과 뱀 후손이 상호적대행위를 계속한다는 것,
(4) 택한 백성구원은 그 백성이 마귀머리 상하게 함으로 성립된다는 네가지 중요 요소를 지적했다.

여자 후손은 택한 백성 대표할 메시아가 나실 것을 가리킨다(사 7:14, 마 1:23, 갈 4:4).
원시복음을 포함 에덴동산의 일을 기록한 창 1-3장은 구속사의 네 과정을 암시하고 있다.

1. 창조적 은혜와 축복 :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우주만물 가운데, 생존환경에 적합한 지 구와 그 안에 동물·식물을 만드시고, 인간은 하나님 형상에 따라 하나님 모양대로 남녀로 디자인하여, 손수 빚어 만들어 자신의 생기를 불어넣어 생명이 되게 하시고, 가정을 이루게 하시고, 생육 번성 땅에 충만, 정복, 다스림, 이름을 짓는 명명권(命名權)을 주셔서 그것들을 누리며, 생명과 선악과로 아담과 하와의 언약, 교제, 소통하시고, 순종과 영광 받으시고, 그들을 영원히 살게하심은, 한마디로 창조적 축복의 은혜요, 감사 찬송 기쁨의 주제다(창 1:1-28, 2:15-17, 19, 23, 사 43:7, 21)

2. 창조질서를 어긴 인간 범죄 :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 형상대로 모양대로 지음받은 정체성, 축복을 누림을 받은 사명, 하나님 축복의 약속을 잊고, 아담은 한 몸된 아내 보호 돌봄 간수하는 남편 역할을, 하와는 한 몸된 남편 돕는 내조 배필로서 협의하는 아내역할 등한하고, 하나님을 언약 어기고, 하나님과 대화보다는 다스려야 할 뱀을 대화 상대로 자기와 동격에 두어, 하나님 말씀보다 뱀말에 귀 기울임으로, 뱀에게 틈탈 기회를 주었다(시 1:1-2, 엡 4:27). 결국 하와는 하나님 금하신 선악과를 먼저 따먹고 아담으로 먹게 해서, 부창부수(婦唱夫隨)를 범죄했다. 그 죄 결과는 두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고, 그들이 대표하는 온 인류에게 비극을 가져다주었다(롬 5:12).
 
3. 하나님께서 미리 경고하신 심판(창 2:17) :

인간의 죄의식, 수치심, 핑계, 하나님 원망, 노고(勞苦), 죄성(罪性), 사망의 실존적 변화와 에덴동산에서 쫓겨남, 저주받은 땅 경작, 하나님 한탄하신 죄악관영(貫盈)한 생의 정황 변질로, 하나님 관계, 인간 관계, 자연 관계의 훼손, 실존과 상황이 사람과 악한 사탄마귀의 영적 전투상태 전시상황으로 바뀌었다(창 3:7-19, 22-24, 4:7, 6:5-6).

4. 무조건적 은혜 원시복음(창 3:15)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구원을 선포하셨다.
뱀 후손과 여자 후손 적대 관계는 궁극적으로 여자 후손이 승리하나, 피흘림을 통해서다.
피흘림은 수치(羞恥) 가림, 죄 씻음이다.
여자 후손 피흘림으로 그가 대표하는 백성들 죄씻음, 죄가려줌, 궁극적 승리를 가져오게 됨을 하나님 손수 실천해 보여 주셨다(창 3:21, 레 17:11, 힙 9:22).

그러나 뱀 후손은 하나님 허락 하에 제한받는 힘으로 최후 심판때까지 여자 후손 공격하기를 멈추지 않음으로, 하나님 자녀는 하나님 절대의존 신앙과 그 열매인 예배와, 삶의 자리에서 죄를 다스림 죄와 더불어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한다(창 4:7, 욥 1:6-12, 마 4:1-11, 눅 22:31-32, 힙 12:4).
그래서 모이기를 힘씀, 믿음의 선한 싸움(딤전 6:12, 힙 10:25), 하나님의 전신갑주 영적무장을 취하라 한다.
악한 사탄마귀 우는 사자같이 삼킬 자 두루 찾아 헤매고 다니지만, 성령의 검 하나님말씀과 성령 안에서 함께 더불어 기도 교제로 마귀를 대적하면 물러가고, 마귀 물리친 다음 하나님을 의지 가까이함이 영전의 필승전법 이다(엡 6:10-20, 힙 4:12, 약 4:7-8, 벧전 5:7-8; 신 4:7, 시73:28, 145:18).

원시복음은 구약의 메시야 예언(사 7:14)과 그 메시야의 피흘림(창 3:21, 4:4, 15:6-18, 9-14, 출 12:13, 24:1-8, 레 17:11, 사 53:4-6) 두 방면으로 예언되어 오던 것이, 신약의 때가 되어 메시아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로 성취되었다(마 1:16, 23, 눅 1:34-35, 2:10-11, 요 4:25, 19:30, 갈 4:4, 31). 이 구원사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계획, 완성, 우리에게 적용된 것인데, 하나님 말씀을 듣고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믿음으로 영접할 때, 성령께서 우리 영혼에 인 치심으로 중생 구속(救贖) 영생을 얻고, 하나님 자녀의 영, 권세, 명분받아 하나님 아바아버지라 부르며,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후시가 되게 하신 것이다. 이 구속사는 에덴동산 실낙원에서 새하늘 새땅 복락원에 이르기까지 한결 같다. 구원받은 하나님 자녀는 ‘나 같은 죄인 구원하시기 위해서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선택하사 나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나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들이 되게 하셨으니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내게 그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며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기를 소원해야한다(요 1:12-13, 갈 4:4-7, 엡 1:4-14). 원시복음이 결국 내 구원 위함이라 믿어짐으로, 모세가 죽기전 이스라엘자손을 축복하고 불렀던 찬양을, 천국 갈 때까지 나도 부르지 않을 수 없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오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신 33:29).

 

단에게 내린 저주인 동시에, 타락한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입니다. 다시 말해, 여자의 후손 중에서 메시아가 태어나 인류를 구원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원시복음’(Original Gospel)

원시복음이란 최초의 복음을 말합니다. 성경에서 최초로 메시아, 그리스도에 대해 언급된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신약에 4복음서가 있듯이 구약에는 원시복음이 있습니다. 


그러면 원시복음의 핵심은 무엇인가? 

아주 중요한 3가지 핵심 메시지가 있습니다. 


1. 그리스도가 여자의 후손으로 와서 마귀를 멸한다는 것입니다.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사단과 여자의 후손이 원수관계, 곧 적대관계가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마귀를 멸할 여자의 후손은 누구인가? 그는 분명 인간입니다. 하지만 보통 인간이 어떻게 영물인 사단을 이길 수 있는가? 사단을 이기려면 사단보다 더 강해야 합니다. 결국 사단을 이길, 여자의 후손은 성육신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결국 원시복음은 여인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아를 예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 가운데서 메시야가 태어나 마귀를 멸하시고 인간을 구원할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요일 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 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또한 여자의 후손 가운데서 그리스도가 태어난다는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더욱 구체적으로 예언되었습니다. 

(사 7:14)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 예언대로 처녀에서서 여자의 후손으로 태어난 분이 누구인가? 

(마 1: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 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우리가 사도신경에서 늘 고백하는 대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신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요, 구원자인 것입니다. 

그러면 왜 메시아는 ‘여자의 후손’이어야 하는가? 다시 말해 왜 처녀가 낳아야 하는가? 인류를 죄에서 구원할 자는 아담의 후손, 즉 남자의 씨로 태어나면 안됩니다. 왜요? 아담의 혈통을 타고 난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원죄 아래 있고 그 죄로 인해 저주와 심판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롬 5:12)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그래서 성경은 구원자로 오실 분은 여자의 후손, 즉 처녀에게 태어날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이 예언대로 예수님께서는 동정녀에게 성령으로 잉태되어 탄생하셨습니다. 인류를 대대로 묶고 있던 원죄와 상관없이 의롭고 순전하고 거룩한 사람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일하게 죄 없는 사람입니다. 

(히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이 예수님만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할 메시아이심을 믿습니다. 

(마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또한 하나님은 사단에게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사단과 적대관계를 가지고 싸우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예언대로 예수님은 사단과 크게 세 번 싸우시는데 두 번은 이미 싸우셨고 한 번은 앞으로 싸우실 것입니다. 


첫 번째 사단과의 싸움은 언제였는가? 

세례를 받은 후 광야에서 40일 금식기도를 한 후 사단으로부터 받은 3가지 시험입니다. 예수님은 이 시험을 말씀으로 다 물리치시고 승리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단이 지배하고 있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 운동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마 4:17)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두 번째 싸움은 언제였는가? 

십자가에 고난당하심입니다. 십자가의 수난 당하심은 사단과의 영적 싸움입니다. 이 싸움이 처음에는 예수님이 지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승리하셨습니다. 

세 번째 싸움은 언제 있게 되는가? 

예수님의 재림 때 치러질 싸움입니다. 이 싸움에서 사단은 완전히 패하게 되며, 영원히 유황불에 갇히게 될 것입니다. 

(계 20:10)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여자의 후손으로 오셔서 마귀를 멸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합니다. 


2. 사단이 발꿈치를 상하게 함은 예수 십자가의 고난을 말합니다.

(창 3:15)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사단이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자의 후손이 뱀에게 발꿈치를 물리는 고통을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사단의 계략 가운데서 십자가에 고난당하심을 뜻합니다. 실제 사단은 예수님을 상하게 하기 위해 집요하게 역사했습니다. 무엇보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습니다. 

(요 13: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수제자 베드로에게는 예수를 부인할 생각을 넣었습니다. 대제사장들에게는 예수를 죽이려는 생각을 넣었고 거짓 증인들에게는 고소할 생각을 넣었습니다. 그리고 빌라도에게 예수를 정죄하여 십자가에 내어 줄 생각을 넣어 주었습니다. 사단은 메시아를 죽임으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무산시키려 했습니다. 아기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때는 헤롯을 사주하여 2살 이하의 죄 없는 아기들을 학살하게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려는 예언의 성취입니다. 

  

3. 예수님이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하심은 부활과 속죄를 말합니다. 

(창 3:15)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여자의 후손으로 오시는 예수님이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앞서 말씀 드린 대로 사단은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합니다. 하지만 발꿈치는 신체 기능면에서 크게 중요치 않은 부분입니다. 따라서 발꿈치를 상하게 한다는 것은 비록 해를 당하지만 치명적이지는 못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여인의 후손이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는 것은 치명적인 상처를 준다는 것입니다. 머리는 아주 중요한 부위로써 한번 상하게 되면 거의 회복 불능의 치명적인 손상을 입게 됩니다. 이 말을 실감 있게 표현하면 예수님이 ‘사단의 머리통을 박살낸다.’는 것입니다. 

이 예언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하셨습니다. 사단과 그의 왕국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원수 사탄의 세력을 꺾고 승리하셨습니다.

(골 2:15)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히 2: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지금 활동하고 있는 사단도 머리에 치명상을 입은 사단입니다. 우리의 사단과의 싸움은 이겨 논 싸움입니다예수 이름으로 나가면 사단은 꼼짝 못합니다. 사단은 ‘예수 십자가’에 대한 악몽, 트라우마가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 이름으로 사단을 대적하기를 바랍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음으로 끝났다면 이것은 예수님의 패배요, 사단의 승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죄를 이기고 사망을 이기고 사단을 이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단에게 치명상을 입히게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고전 15:55)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고전 15: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살이 찢기시고 물과 피를 다 쏟으신 다음 선포하셨습니다. 

(요 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예수님은 속죄의 피 흘리심으로 죽었던 우리의 영혼을 살리셨고 가시와 엉겅퀴의 저주에서 해방시키셨으며, 온갖 질병에서 구원하시는 일을 다 이루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속량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셨습니다. 

(갈 4:5)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하사 속죄를 이루시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구주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4. 이 원시복음에서 인류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열심을 봅니다.

원시복음은 수천 년 전의 메시아 예언의 약속입니다. 수많은 선지자들이 메시아 예언을 했습니다. 이 약속이 과연 어떻게 성취되었는가? 드디어 때가 찼을 때 하나님이 그 아들을 구원자로 보내주셨습니다. 

(갈 4: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여기 ‘때가 찼다’는 것은 메시아를 보낼 적기가 됐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언은 더딜지라도 반드시 이루어짐을 믿으십시오. 성경의 나머지 모든 예언도 그대로 이루어 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틀림없습니다. 

(마 5:18)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마 24:35)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방금 전 말씀에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원시복음의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다는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께서 여인의 후손으로 성육신하여 오신 것입니다. 영원 전부터 계획하신 하나님의 구원 경륜이 성취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원시복음에서 인류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열심을 보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죄악 세상에 보내신 이유가 무엇인가? 사랑하는 아들을 그 참혹한 십자가에 내어주신 이유가 무엇인가? 저 사망의 음부에 당신의 아들을 사흘씩이나 가두어두신 이유가 무엇인가?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과 저를 죄에서 건지시고 구원과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열심이 아니고 무엇인가? 하나님의 이 열심이 아니라면 어찌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었으리요. 하나님의 열심은 지치지 않으십니다.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끝까지 이루십니다. 이 사랑으로 나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여러분도 사랑하는 자식을 잃어버렸다면 이런 열심으로 찾을 것입니다. 결코 포기 하지 않을 것입니다. 끝까지 찾을 것입니다. 

우리도 이 하나님의 열심을 본받기를 원합니다. 이 하나님의 열심이 우리 마음에 불붙기를 원합니다. 

이 하나님의 열심이 사도바울에게 불붙었습니다. 

(고후 11:2)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과연 바울은 어떤 일에 열심이었는가? 영혼 구원을 위한 열심입니다. 각 사람을 정결한 처녀로써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중매하고자 하는 열심입니다.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의 신부로써 혼인 잔치에 들어가게 하려는 열심입니다. 바울에게 불붙은 하나님의 열심은 1세기에 소아시아와 유럽 전 대륙을 십자가로 물들게 했습니다. 

우리도 이 하나님의 열심을 회복하기를 원합니다. 이 하나님의 열심이 우리 마음에 불붙기를 원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피가 헛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열심은 세상의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열방의 모든 족속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예배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은 지금도 세계 곳곳에 하나님의 사람들을 일으키시고 계십니다.




부활의 날(제 삼일)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날부터 부활하시기 전까지 땅에 묻혀 계셨던 시간에 관한 내용이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날 자체가 중요하지는 않지만, 그에 대한 찬반론이 많았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 연구는 매우 흥미로워진다.
그 이유는 기존의 우세한 견해의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금요일 오후에 돌아가셔서 일요일 아침에 부활하신 것이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2:40에 하신 말씀과 상반된다고 지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해당 구절을 읽어보자.

마태복음 12:40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사람들은 금요일 늦은 오후부터 일요일 이른 아침까지를 어떻게 사흘 밤낮으로 볼 수 있느냐는 이유로 많이 혼란스러워 했다.

사흘 낮과 사흘 밤은 얼마의 시간인가?

예수님께서 무덤 안에 계셨던 시간을 아무리 계산해도 사흘 낮과 사흘 밤이 되지 않는다고 믿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루 낮과 하루 밤”이 하루의 일부가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이 견해에 근거해서 다시 말하자면, 하루의 한 시간도 “하루 낮과 하루 밤”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사흘”의 개념에 대해 명확하게 말씀하지 않으신 것이 사실이라 해도, 예수님께서 분명히 사흘 낮과 사흘 밤 동안 무덤에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금요일 늦은 오후부터 일요일 이른 아침까지의 시간(금요일과 토요일)이 하루(토요일)와 다른 하루의 단 몇 시간(금요일의 한 두시간) 즉, 이틀 밤이 채 되지 않기 때문에, 이 주장은 분명 논란의 소지가 있으며 연구가 좀 더 필요하다.

요한복음 19:31과 누가복음 23:50-54

예수님께서 금요일에 십자가 책형을 당하셨다는 논리는 요한복음 19:31과 누가복음 23:54-56, 두 구절에 근거하고 있다.
해당 구절은 다음과 같다.

요한복음 19:31
이 날은 준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누가복음 23:50, 52-53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그가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여 이를 내려 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넣우 두니 이날은 준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다 되었더라.

여기에서 “안식일이 거의 다 되었더라”는 구절이 자정이 거의 다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는데 대해, 독자들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사실, 그 시대의 시간 계산법으로 추정해보면, 하루는 자정이 아니라 해가 지는 시각에 시작되었으며, 4월에는 그 시각이 대략 7시 경이었다.

마태복음 27:46에 보면, 예수님은 “제 9시경”에 돌아가셨고, 이는 현대의 시간으로 말하면 오후 3시경이므로, 성경의 다른 사건과 마찬가지로 위에 기록된 사건에서 예수님이 돌아가신 시간부터 묻히신 시간은 오후 3시경부터 7시경 사이가 된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시간에 대해 모든 사람들이 금요일이었다고 믿는 이유는, 위의 성경 구절에서 말하는 안식일이 그 주의 안식일, 즉 한 주의 7번째 날인 십자가에 못박히신 날의 다음 날이라고 정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안식일”은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이 아니라 다른 특별한 준비일로 사람들이 이를 혼돈했던 것 뿐이다.

2.1 두 가지 종류의 안식일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과는 별도로 다른 특별한 안식일이 있다는 사실은 이스라엘 자손이 지켜야 할 절기의 규정에 대해 언급한 레위기 23장을 통해 알 수 있다. 4-8절 말씀을 함께 읽어보자.

레위기 23:4-8
이것이 너희가 그 정한 때에 성회로 공포할 여호와의 절기들이니라. 첫째 달 열나흗날 저녁은 여호와의 유월절이요. 이 달 열닷새날은 여호와의 무교절이니 이레 동안 너희는 무교병을 먹을 것이요. 그 첫 날에는 너희가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며 너희는 이레 동안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 것이요 일곱째 날에도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니라.

히브리 달력의 첫번째 달은 아빕으로 후에 니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1.
요한복음 19:31과 누가복음 23:53에서 말하는 준비는 유월절과 무교병 절기에 대한 준비였다.
마태복음 27:46에 의하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유월절 규례에 따라 어린 양을 번제로 드리는 니산 제 14일, “9시 경”, 즉 오후 3시 경에 돌아가셨다. 같은 날 저녁 유월절 음식을 먹고, 무교절이 시작되었다. 따라서 안식일이 “거의 다 되었다(누가복음 23:53)”는 것은, 레위기 23:7의 무교절 첫째날을 의미한다.

레위기 23:7
"그 첫 날에는 너희가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며"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며”라는 구절로 인해 무교절 첫째날을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의 개념으로 인식하게 했다. 하지만, 이 날은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2이 아니라, 규례에서 모든 노동을 금하는 특별한 안식일, 즉, 준비일이다. 요한복음 19:31을 보면, 이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요한복음 19:31
"이 날은 준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즉, 안식일은 주마다 돌아오는 안식일이 아니라 준비일, 특별한 안식]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마가복음 15:42에서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날과 해가 저문 후 시체를 받은 날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마가복음 15:42-43
"이 날은 준비일 곧 안식일 전날이므로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경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날은 니산 제 14일로, 아직 유월절을 준비하는 무교절이었다. 위의 성경 구절에서 살펴보았듯이, 이 날은 항상 [“곧”이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안식일 전날”로, 요한복음 19:31과 누가복은 23:52-54의 안식일, 즉 무교절의 첫째 날이며, 그 다음 날이 항상 안식일이 되는 날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날은 (니산 제 15일로) 정해진 날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논하는 구절의 안식일은 매주 돌아오는 날이 아닌 특별한 안식일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무교절 첫째날만이 특별한 안식일이 아니었다. 성경에서는 더 많은 날을 명확하게 “안식일”이라는 단어를 사용해 표현하고 있다. 레위기 23:23-32를 함께 읽어보자.

 

레위기 23:23-3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일곱째 달 곧 그 달 첫 날은 너희에게 쉬는 날이 될지니 이는 나팔을 불어 기념할 날이요 성회라 어떤 노동도 하지 말고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일곱째 달 열흘날은 속죄일이니 너희는 성회를 열고 스스로 괴롭게 하며 여호와께 화제를 드리고 이 날에는 어떤 일도 하지 말 것은 너희를 위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 속죄할 속죄일이 됨이니라 이 날에 스스로 괴롭게 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라 이 날에 누구든지 어떤 일이라도 하는 자는 내가 그의 백성 중에서 멸절시키리니 너희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거주하는 각처에서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 이는 너희가 쉴 안식일이라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 이 달 아흐렛날 저녁 곧 그 저녁부터 이튿날 저녁3까지 안식을 지킬지니라."

 

안식일로 묘사된 일곱번째 달의 첫 날이나 열흘날은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을 의미하지 않으며, 미리 정해진 날짜나 기일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 날을 “안식일”이라 부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주일은 아니었지만 특별한 안식일, “어떤 일”도 하지 말아야 할 준비일로, 주님의 죽음 다음날인 무교절 첫날에는 말그대로 “어떤 일”도 하지 말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특별한 안식일에 대해 언급한 또 다른 구절인 레위기 23:33-36을 읽어보자.

 

레위기 23:33-3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일곱째 달 열 닷샛날은 초막절이니 여호와를 위하여 이레 동안 지킬 것이라 첫 날에는 성회로 모일지니 너희는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며 이레 동안에 너희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 것이요 여덟째 날에도 너희는 성회로 모여서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이는 거룩한 대회라 너희는 어떤 노동도 하지 말지니라"

 

이 성경 구절에 나와 있듯이, 초막절 첫 날과 여덟째 날 모두 “어떤 노동도” 하지 말아야 할 특별한 안식일, 즉, 준비일로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과는 다른 개념이다4.

그러나 “안식일”이라는 단어는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 즉 미리 정해진 날짜의 준비일에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1년 내내 주일과 일치할 필요가 없이 사용되었다. 레위기 25:1-4의 말씀을 읽어보자.

 

레위기 25:1-4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간 후에 그 땅으로 여호와 앞에 안식하게 하라 너는 육 동안 그 밭에 파종하며 육 년 동안 그 포도원을 가꾸어 그 소출을 거둘 것이나 일곱째 해에는 그 땅이 쉬어 안식하게 할지니 여호와께 대한 안식이라 너는 그 밭에 파종하거나 포도원을 가꾸지 말며”

 

위에 살펴본 구절들을 통해 성경에서 말하는 안식일은, 일반적인 주일인 “한 주의 일곱째 날”과, 어떤 노동도 하지 말아야 할 준비일인 특별한 안식일의 두 가지 종류가 있음을 알았다.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은 기일인 반면, 특별한 안식일은 미리 정해진 날짜로, 주중 어떤 날도 될 수가 있다. 특별한 안식일은 무교절의 첫 날로,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다음 날이었다. 그래서 요한복음 19:31에서는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라고 표현하였고,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이 아닌, 주중 어떤 날도 될 수 있는 특별한 안식일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언제 부활하셨는가?

안식일이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다음 날이며 주일이 아닌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사흘 낮과 사흘 밤을 (금요일 늦은 오후부터 일요일 이른 아침까지) 40시간에 끼워 맞추려할 필요가 없어졌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를 그대로 믿으면 돌아가신 날짜를 찾는 것 또한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진실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예수님께서 “땅 속에” 사흘 낮과 사흘 밤을 계셨다면, 예수님께서는 해가 질 때 땅 속에 묻히셨고, 사흘 낮과 사흘 밤, 즉 정확하게 72시간 후, 땅 속에 묻히신 시각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시각에 부활하셨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시각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던 일요일 아침이 아닌 오후, 즉, 해가 질 무렵이 되는 것이다.

사실,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일요일 아침이라고 생각하는 유일한 이유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시각이 여인들이 무덤을 찾아갔던 새벽 바로 직전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기 때문이다 (마가복음 16:1-8).
모두가 알고 있듯이, 여인들이 무덤이 비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여인들이 빈 무덤을 발견한 것이 일요일 아침이라고 해서 예수님께서 무덤을 떠나신 시점이 일요일 아침이 될 수는 없다5.

그렇다면 정확히 언제 부활하셨는가?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정확히 사흘 낮과 사흘 밤을 “땅 속에서” 보내시고, 토요일 오후 해질 무렵, 즉 땅에 묻히신 시각과 일치하는 그 시각에 부활하신 것이 된다.

예수님께서 일요일 새벽이 아닌 토요일 오후에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마태복음 28:1-2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마태복음 28:1-2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위 구절에서 안식일은 무교절 첫날,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준비일”인 특별한 안식일이 아니다.
일주일의 일곱째 날인 주일이다. 주님께서 “땅 속에서” 계셨던 사흘 낮과 밤이 특별한 안식이었던 동시에 주일이었다는 사실은 마가복음 16:1과 누가복음 23:56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마가복음 16:1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누가복음 23:56
"[마가복음 16:1과 동일한 여인들이 (누가복음 24:10 참조)]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더라 계명을 따라 안식일에 쉬더라"

마가복음에서는 안식일이 지나매 여인들이 향품을 샀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누가복음에서는 안식일 전에 (여인들이 미리 향품을 샀다는 의미로) 향품을 준비했다고 되어 있다. 이 두 구절 사이에 모순이 있을까? 그렇지 않다. 왜냐 하면 이 두 안식일은 같은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가복음 16:1에 나오는 안식일은 무교절의 첫날, 즉 특별한 안식일이며, 누가복음 23:56에 나오는 안식일은 주일이다. 두 구절 모두 같은 날 (여인들이 향품을 사고 준비한 날)을 의미하지만, 각 구절에 나오는 안식일의 의미가 다르게 사용된 것이다.

예수님께서 묻히신 사흘 낮과 사흘 밤은 두 가지 의미의 안식일, 즉 특별한 안식일과 주일을 포함하는 것이 확실하니, 이제 마태복음 28:1-2를 통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시간에 대해 알아보자.

특별히 주의해서 읽어야 할 중요한 구절은 “새벽에”이다.
이 구절은 그리스어 동사 "epifosko"를 번역한 것인데 “해가 지다”를 의미한다.
누가복음 23:53-54에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땅에 묻힌 시간을 언급하실 때 이 동사를 사용하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해당 구절을 읽어보자.

누가복음 23:53-54
"[요셉]이 이[시체]를 내려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넣어 두니 이 날은 준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epifosko]."

신약에서 이 두 구절 외에 동사 "epifosko"를 써서 시간을 표현한 부분은 없다.
다시 마태복음 28:1로 돌아가보면, 이 구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시간은 사흘 낮과 사흘 밤 전에 예수님께서 묻히신 시간과 일치하는 해질 무렵이다. 그 시간 무렵,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으로 찾아왔다. 그러나 이들은 무덤을 보기만 하고 돌아갔으며, 마가복음 16:1-2와 같이 자신들이 떠난 후 무슨 일이 일어난지 모른 채, 다른 날 향품을 가지고 돌아왔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2-4절을 살펴보자.

마태복음 28:1-4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즉, 예수께서는 그 사흘 낮 사흘 밤 전 같은 시각에 묻히셨다]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이 일은 언제 일어난 것일까?
1절에 보면,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즉, 예수님께서 사흘 낮과 사흘 밤을 무덤에서 계시기를 마치신 그 시간이다.
그러면 처음부터 다시 정리해보자.

예수님께서는 몇 시에 묻히셨는가?
요한복음 19:31의 준비일과 다른 구절의 특별한 안식일인, 무교절의 첫날이 되기 전 해질 무렵, 즉, 니산 제 14일 해질 무렵이다.

얼마나 땅 속에 계셨는가?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2:40에서 언급하신 사흘 낮과 사흘 밤, 즉, 72시간이다.

예수님께서는 언제 부활하셨는가?
예수님께서는 “안식 후 첫날[일요일]이 되기 전 해질 무렵, 즉, 무덤 안에서 사흘 낮과 사흘 밤을 보낸 후 토요일 오후에 부활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언제 돌아가셨는가?
토요일 오후부터 사흘 낮과 사흘 밤을 거꾸로 계산해 보면, 토요일6이 예수님께서 묻히신 셋째 낮과 밤이고, 금요일이 둘째, 목요일이 첫째가 된다. 따라서, 예수님은 수요일 오후 3시에 돌아가셨고, 같은 날 오후에 묻히셨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그리고 목요일은 무교절의 첫날인 특별한 안식일이 된다. 여인들이 향품을 사고 준비했던 금요일은 평일이었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주일인 안식일은 토요일이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흘 낮과 사흘 밤을 땅 속에서 계실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모순이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면, 전혀 없다.

따라서 결론은 다음과 같다.
날짜 자체에 큰 의미가 없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정확한지 확인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말씀 중 어떤 주제라도 정확성에 오류가 있다는 비난을 받지 않도록 면밀히 검증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진실로 문제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의 전통에는 분명히 부주의성과 잘못된 추정이 있고, 성경의 명확성을 왜곡하는 문제점들이 존재한다.

참고문헌

E.W. Bullinger: The Companion Bible, Kregel Publications, Grand Rapids, MI 49501, 1990

Ralph Edward Woodrow: "Babylon Mystery Religion: Ancient and Modern", Ralph Woodrow Evangelistic Association Inc., 1992

 



각주

1. 출애굽기 12:2, 13:4와 에스더 3:7 참조.

2. 이는 기일이 아닌 첫 달 제 14일, 즉 미리 정해진 날짜였다.

3. “그 저녁부터 이튿날 저녁”은 이 구절에서 시간 계산에 대해 논했던 바와 일치한다.

4. 이 특별한 안식일이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 즉 주일과 같을 때는 일치한다고 말할 수 있다.

5. 이러한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유일한 구절은 마가복음 16:9,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이다. 그러나 고대 필사본에 구두점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부활하셨다는 결론은, 전적으로 쉼표를 찍은 위치에 좌우될 수 밖에 없다. 예수님께서 일요일 아침에 부활하셨다면, 예수님은 무덤 안에서 하루 밤을 더 머무시는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쉼표를 “부활하셨다”는 단어 다음에 찍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함으로서, 해당 구절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로 이해할 수 있으며, 이는 다른 성경 구절의 내용과 완벽하게 일치하게 된다.

6. 그 시대의 시간 계산법을 적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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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개혁자 루커와 칼빈의 성경 해석 차이

루터의 해석

루터의 성서해석은 그의 신학의 근간을 이룬다.
그는 말씀에 기초한 신학을 전개하였다.
그의 성서해석은 ‘문자적 의미 강조’, ‘그리스도 중심적 해석’, ‘실존적-실천적 해석’이라는 세 가지 핵심어로 요약할 수 있다.
이러한 루터의 성서해석의 특성은 시편 51편 해석에서 대표적으로 고찰된다.
그의 시편 51편 해석은 ‘죄인으로서의 인간’, ‘예수 그리스도 를 통한 구원’, ‘의인으로서의 삶’이라는 주제어 아래 의로우신 하나님과 죄인인 인간에 대한 신학적 주제를 부각시키고 있다.

칼빈의 해석

칼빈의 성서해석도 ‘원문을 중요시함’, ‘그리스도 중심적 해석’, ‘목회-실천적 해석’이라는 세 가지 핵심어로 요약된다.
시편을 자신의 영혼을 모습을 보여주는 해부도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삶을 이끌어 가는 모범이라고 인식한 칼뱅은 시편 51편에 대한 해석에서 ‘원문에 철저함’, ‘삶의 근본적 변화를 위한 해석’, ‘교회를 위한 해석’의 특징을 보여준다.

루터와 칼뱅의 성서해석이 보여준 특징들은 당대의 종교개혁을 이루는 원천과 동력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다음과 같은 의미 있는 시사점을 제공한다.

첫째, 본문의 일차적 의미를 중시하라(문자적-역사적 해석)
둘째, 성서가 성서를 해석하게 하라(그리스도 중심적 해석과 성령의 조명).
셋째, 삶의 변화를 일으키는 해석이 되게 하라(실존 - 실천적 해석)

칼빈의 시편연구
1.  칼빈의 시편 이해

칼빈의 시편에 대한 평가는 ‘영혼의 모든 부분에 대한 해부’(anatomiaom-niumanimaepartium)라는 말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사람이 의식할 수 있는 영혼의 정서들 가운데 시편에서 거울에 비추듯 묘사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시편에 나타난 다윗의 삶이 자신의 본보기가 된다고 말한다.
칼빈에게 시편은 자신의 영혼을 모습을 보여주는 해부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삶을 이끌어 가는 모범이기도 하였다.

2. 시편 51편의 해석
(1) 원문에 철저함칼뱅은 자신의 주석에서 무엇보다 원문의 표현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해석한다.
그는 표제어에서 ‘오다’라는 동사가 반복 사용되지만 대조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다윗이 밧세바에게 ‘들어간 후’ 나단이 다윗에게 ‘왔을 때’라는 언급에서 ‘들어감’과 ‘옴’이 히브리어 표현에서는 모두 동일한 동사 <보> (awb)로 표현된다.
동일한 동사의 반복으로 대조적인 의미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그는 시편 51편 4절에 대한 해설에서 먼저 이 구절에 대한 다양한 입장들이 있었음을 언급한 후 이 구절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다.
그는 첫 부분을 “당신께, 오직 당신께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번역한다.
이것은 원문의 순서까지도 고려한 사려 깊은 번역이다.
다윗이 이 진술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현재 자신의 눈과 온 영혼이 하나님께 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께서 말씀하실 때에 당신이 의로우시고, 당신께서 판단하실 때에 당신이 깨끗하실 것입니다.”라는 후반절의 내용도 전반절과 함께 올바른 이해가 필요함을 지적한다.

그는 이 부분을 바울이 로마서 3장 4절에서 인용하고 있음을 말하며, 바울이 히브리어 원문과는 다른 70인경을 인용하고 있음도 지적한다.59) 하지만 이렇게 정확한 문자적 인용이 되지 않고 있다 하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바울의 구약성경 인용이 정확한 문자적 인용에 목적이 두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칼빈은 저자의 의도에서 벗어나지 않는 범주에서 안에서 인용의 자유로움을 인정했다.
이처럼 칼빈은 저자 다윗의 생각이 분명하게 드러날 수 있도록 원문에 근거하여 문법이나 일련의 사고과정, 사회적 환경들을 고려하여 주석한다.
그는 시편 51편을 죄로 물든 인간의 관점에서 해석한다.
그리고 다윗의 상황을 뛰어 넘는 기독론적 해석을 거부하였다.

(2) 삶의 근본적 변화를 위한 해석 칼뱅은 자신의 시편 서문에서 자신의 경험이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를 밝힌다.
자신이 겪은 고통과 갈등의 경험이 시편을 적용하거나 이해하는 데에 매우 큰 도움이 되었다고 말한다.
시편 51편의 해석에서도 자신의 고통스러웠던 실존적 경험이 시편 해석을 위한 좋은 자양분이 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그러한 모든 진술은 삶의 근본적 변화를 목표로 한다.

예컨대, 칼뱅은 1절의 간구가 한 마디 애원으로 끝나지 않음을 지적하며 그 이유를 설명한다.

다윗이 그렇게 “하나님, 당신의 인애(ds,x,)를 따라 나에게 자비를 베푸소서(!n:x').
당신의 긍휼(~ymix]r;)의 풍성함을 따라 내 죄과들([v;P,)을 도말(塗抹)하소서.”라고 반복해서 호소하는 것은 그가 저지를 죄악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두 개의 진술을 연이어 말하는 단순한 평행법이 아니라 죄의 심각성을 인지한 다윗이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자비와 긍휼만을 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70인경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당신이 말씀하실 때 당신은 의롭게 될 것이며, 당신이 판단 받으실 때 당신은 이기실 것입니다.
마지막 부분이 ‘깨끗하실 것이다’에서 ‘이기실 것이다’의 적극적인 의미로 번역되었다.

여기에서 루터와 칼뱅의 차이점을 발견한다.
루터는 위에서도 살펴본 바와 같이 시편 51편을 철저하게 기독론적 관점을 통해 해석하고 있으나 칼빈은 본문의 역사적 의미를 밝히는데 주력하고 있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해설에서 칼뱅의 내면의 변화를 강조한다.
“보소서, 당신께서는 ‘마음속에서’ 진실을 기뻐하십니다.”라는 언급은 표면적 인식으로는 변화의 모습이 부족함을 말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래서 그는 신자의 내적 변화 촉구하며 신자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칼뱅은 제사란 하나님의 은혜를 보증하는 표시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감각적인 존재들이기 때문에 외적으로 드러나는 의식(儀式)적인 활동을 통해 완전한 설득으로 나아간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슬초로 정결하게 하는 의식은 그 자체로 머물러 있지 않고 그것의 본래 목적인 죄용서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지향한다는 것이다(7절). 또한 칼뱅은 10-12절의 진술이 ‘새 피조물’에 대한 간구라고 평가한다. 이전의 진술들이 용서하심에 대한 간구였다고 한다면, 지금부터는 성령의 은혜가 회복되기를 간구하는 내용이라고 말한다. 이때 ‘창조하소서’라는 간구는 기적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을 말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것은 한편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다윗이 자신의 온전한 회복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로 거듭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완전한 회복은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인정할 때 가능하다.64) 그래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고 말한다(17절).

(3) 교회를 위한 해석칼뱅은 주석 서론에서 시편 51편이 하나님께 범죄한 사람들이 교훈을 얻게 하기 위한 예시임을 밝힌다.
그는 ‘의인법(擬人法)’(prosopopoeia)이라는 고전적 개념을 받아들이고 다윗을 ‘표본’으로 이해한다.65) 다윗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신자들이 하늘의 종국적인 처벌에 의해 놀라게 될 때까지 죄 아래 머물러 있지 말고 회개의 요청에 겸손히 따를 것을 가르친다고 말한다.66) 시편이 신자들의 현재의 삶을 위해 실제적인 가르침이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그의 시편 주석에는 51편의 저자를 ‘시인’이라고 명명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으며(예컨대, 7절), ‘우리’라는 주어가 자주 등장한다. 이것은 시편 51편을 다윗 개인의 차원에만 머물게 하지 않게 하며, 독자들을 ‘우리’라고 명명함으로써 시편이 가지고 있는 현재적 의미를 분명히 드러낸다. 특별히 시편 51편 18절이하에 나타난 시인의 간구가 집단적 의미의 교회에 대한 간구로 해석된다. 칼빈은 시인의 눈이 영적인 성전에 고정되어 있다고 말하며, 시인의 간구가 하나님 나라를 위한 간구로 이해된다고 말한다. 7절의 우슬초에 관한 해석에서도 그의 교회적 관심을 볼 수 있다. 칼빈은 우슬초를 뿌리는 행위를 의도적으로 사돌레트(Sadolet, 1477-1547)처럼 성례전과 연결시키지도 않고, 멜랑히톤(Melanchthon, 1497-1560)과 같이 그리스도의 선포와 연결시키지도 않는다. 그는 우슬초에 관한 언급을 당시의 외적 표지가 실제로 지시하는 목적과 연결시켜 “하나님의 은혜”로 해석한다. 칼뱅은 다윗이 범한 윤리적 죄에 대한 회개와 용서를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의 회복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한다. 관계의 회복은 어떤 객관적인 성례가 담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죄인의 ‘찢겨진 심장’만이 필요할 뿐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러한 관계 회복은 교회의 회복을 위한 간구의 출발점이 된다. 이처럼 칼뱅은 자신의 주석에서 단지 시편의 세계에 머물러 있지 않고 당시의 교회와의 연결을 통해 교회를 위한 해석을 시도하였다.

IV. 루터와 칼뱅의 성경해석과 그 함의위에서 우리는 루터와 칼뱅의 성경해석이 보여주는 특징들을 살펴보았다.

루터와 칼뱅의 성경해석이 보여준 특징들은 당대의 종교개혁을 이루는 원천과 동력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의미 있는 시사점을 제공한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위기가 중세시대의 로마 가톨릭 교회가 초래하고 직면해야 했던 위기 상황과 유사하다는 평가 속에서 루터와 칼뱅의 성경해석은 한국교회의 개혁과 갱신을 위한 원천과 동력이 될 수 있을 것이다.70)67)위의 책, 307.68)양신혜, 『칼빈과 성경해석: 교회공동체를 위한 겸손의 해석학』, 260.69)위의 책, 261.70) 2016년 한국기독교학회 제45차 정기학술대회 “종교개혁과 후마니타스(Humanitas): 기독교는 ‘헬조선’ 시대에 희망을 줄 수 있는가?”의 주제발표를 참조하라. 배덕만, “‘헬조선’과 하경택 | 루터와 칼뱅의 성서해석과 그 함의(含意)311. 일차적 의미를 중시하라: 문자적-역사적 해석루터의 성경해석 원칙은 아우구스티누스의 해석학의 근본원리인 성경의 명료성을 수용하여 ‘단순성과 명료성’(brevitasetfacilitas)에 있었다.71) 이러한 성경해석의 원리는 칼뱅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루터와 칼뱅 모두 역사적 어의를 성경해석의 출발점으로 삼았고, 문자적 의미를 그 무엇보다도 중요시했다. 필자는 이것을 본문의 문자적-역사적 의미이며, 본문의 ‘일차적 의미’라고 부른다. 본문의 문자적-역사적 의미(whatitmeant)가 해명되지 않고서는 본문이 오늘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whatitmeans)가 드러날 수 없다.본문의 문자적-역사적 의미를 제대로 규명하지 않은 채 교리적 해석이나 알레고리적 해석에 치우쳐 본문이 오늘날 독자들에게 주는 교훈을 찾는 데에 빠져 있는 한국교회 성경해석의 경향을 경험한다. ‘본문을 정당하게 대하지’ 않고 자기가 일고 싶은 대로 읽고 보고 싶은 대로 보는 경우를 흔하게 목격한다. 그러나 본문 자체에 대한 분명한 이해 없이는 그 다음 단계의 해석과 적용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 종교개혁자들은 본문의 어의에 충실한 이해와 해석으로 그릇된 교회의 모습을 개혁할 수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능한 원전을 살펴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종교개혁자들은 불가타 라틴어 성경 이면에 있는 원전의 의미를 밝혀내어 ‘근원으로 돌아가자’는 모토를 실행할 수 있었다. 원전의 의미를 밝히고 본문이 말하는 바에 충실하게 귀 기울임으로 그동안 성경에 대한 잘못된 해석과 교회의 전통으로 가려져 있던 말씀의 의미를 좀 더 바르고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다. 2. 성경이 성경을 해석하게 하라: 그리스도 중심적 해석과 성령의 조명종교개혁자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성경해석의 원리가 있다면 것은 ‘성경이 성경의 해석자이다’(Scriptura Scripturaeinterpres)는 원리다. 이것은 성경‘개독교’ 시대에 한국교회와 인문주의” 「한국기독교학회 제45차 정기학술대회 발표논문집」 제1권 (2016), 69-113. 임희국은 라가츠(Ragaz)의 해석을 토대로 ‘성령의 내적 증언’이라는 해석학적 원리가 ‘오직 성경’의 종교개혁 원리를 계승하는 한국장로교회의 축자영감설 문자주의와 역사비평학의 성경해석의 극단적 대립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한다. 임희국, “루터 종교개혁의 유산인 ‘오직 성경’에 대한 성찰, ‘성경의 부활’을 기다림,” 『장신논단』 48-4 (2016), 13-35. 71)정기철, “칼빈 해석학의 현대적 의미,” 73. 또한 다음을 참고하라. W. J. Bouwsma, Calvin: A Sixteenth-Century Portrait, 이양호, 박종속 역, 『칼빈』 (도서출판 나단: 서울, 1993), 263.32장신논단|Vol. 50 No. 2을 전체적으로 읽는 안목을 가지라는 요청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성경에 대한 이해가 편중되거나 편파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특별히 중세가 보여주었던 잘못대로 교회의 전통이나 특정 교파의 입장이 성경의 의미를 제한하거나 왜곡해서는 안 된다. 교회가 성경이 무엇을 가르치는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교회가 무엇을 가르쳐야 할지를 결정하게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이 성경을 해석하도록 해야 한다. 성경 본문이 자의적으로 이해되지 않고 다른 성경 본문에 의해서 해석되고 통제되어야 한다. 이러한 해석원리가 지켜지기 위해서 루터와 칼뱅에게는 성경해석에서 두 가지 원리가 있었다. 하나는 ‘그리스도 중심적 해석’이라는 원리이고, 다른 하나는 ‘성령의 조명’이라는 원리이다. 루터와 칼뱅은 이 두 가지 원리에 대한 강조점이 다르긴 했지만, 두 사람에게 모두 두 가지 원리는 매우 중요했다. 이러한 원리는 성경을 통일성을 가진 책으로 보게 하였으며, 성경의 중심 메시지를 놓치지 않게 하면서도 해석자들을 겸손하게 하는 해석학적 제어장치 기능을 하였다. 그리스도 중심의 해석은 성경의 중심을 잃지 않게 하는 변증적 기능을 하였다. 성령은 말씀을 통해서 그리고 말씀 안에서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통해 열광주의적 신앙으로 나아가지 않게 하였으며, 하나님 안에 계신 분으로서 지혜의 전달자 이신 성령은 성경해석의 주체이자 참된 해석자라는 인식을 통해 해석자는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게 된다.이러한 원리들은 해석자가 본문의 주인이 되지 못하게 한다. 해석자는 본문을 좌지우지하는 주인의 자리에서 내려와 본문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경청자의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말씀의 주인이 아니라 말씀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3. 삶의 변화를 일으키는 해석이 되게 하라.

실존-실천적 해석루터와 칼뱅 모두 실천적 성경해석을 지향하였다.
그들은 성경이 교리적 지식을 가르치는 텍스트이거나 예전적 지침을 보여주는 안내서로 머물러 있게 하지 않고 삶의 변화와 성숙을 이룰 수 있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작동하게 하였다.
두 사람이 모두 실천적 해석을 지향하였으나 루터는 좀 더 실존적이었고, 칼빈은 좀 더 목회적이었다고 평가된다.
루터의 성경해석은 학문과 경건의 조화에 그 의미가 있다.
루터는 인간의 삶을 하나님의 앞에서의 삶으로 이해하고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 삶에 대한 지침을 얻고자 하였다.
루터는 성경 안에 인간의 원초적 경험과 감정들이 다양한 상황 속에서 구체화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성경의 인물들의 통해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응답을 얻고자 하였다.
그러한 문제해결은 루터 자신이 성경을 통해 자신이 직접 체험한 내용이자 과정이었다.
그러한 면에서 루터의 성경해석은 상황적이었고, 삶에 현장에 대한 구체적인 적용으로서 그 결과가 나타났다.

칼빈은 성경이 교회의 일상에서 실현해야 할 규칙들을 담고 있다고 보았고, 성경의 언어를 기본적으로 ‘행동의 언어’라고 평가했다.
그러한 면에서 칼빈은 순종을 강조했다.
순종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인식에 이를 수 있다고 말했다.
칼빈이 실천적 성경해석의 모습은 율법을 적극적으로 해석한 것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율법이 의식적-법적 측면에서는 한계를 가지고 있으나 윤리적-도덕적 기능에서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평가했다(tertiusususlegis). 율법은 내적인 정직뿐 아니라 외적인 영적 정의를 이루는 교육적 과제를 수행한다고 말한다.
성경해석의 결과는 신자의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
성경해석은 루터와 칼뱅이 보여주었듯이 삶의 변화를 위한 해석과 적용이 되어야 한다.
이때 삶의 변화는 내면의 삶뿐만 아니라 외적인 삶까지를 포함하는 전인적인 삶의 모습을 포괄한다.

V. 결론

열왕기하 22장 8절에 따르면 요시야의 종교개혁은 성전에서 ‘토라’를 발견함으로 시작되었다.
이것은 ‘하나님 말씀의 재발견’으로 평가될 수 있다.
성경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있지만 그것이 제대로 해석되지 않고 실천되지 않으면 그것은 성전 구석에 파묻혀 있는 것과 다름없다.
‘성경의 재발견’을 통해 성경이 실제적인 영향을 미치도록 해야 한다.
루터와 칼뱅의 성경해석은 교회와 신자들의 삶에서 성경이 작동되어야 함을 가르쳐준다.
성경이 올바로 해석되고 실제적 적용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현실은 아직도 종교개혁자들의 정신과 전통을 제대로 이어가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를 할 수 밖에 없는 처지이다.

루터 종교개혁 500주년의 해를 지나오면서 종교개혁자들이 재발견한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 우리 시대에도 동일하게 살아 있는 말씀이 되길 바란다.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구석구석 흘러 들어가 죽은 바다를 소성케 하였던 물과 같이 한국교회와 성도들의 삶에 변화와 회복을 일으키는 생명 있는 말씀으로 작동되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