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갓끈 이론


김일성 갓끈 이론

"사람의 머리에 쓰는 갓은 두 개의 끈 중에서 하나만 잘라도 바람에 날아간다.”
김일성이 1972년 김일성정치대학 졸업식 연설에서 강조한 이른바 ‘갓끈 전술’이다.
김일성은 “남조선 정권은 미국과 일본이라는 두 개의 끈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남조선 정권은 미국이라는 끈과 일본이라는 끈 중에서 어느 하나만 잘라버리면 무너지고 말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국으로 망명한 북한의 주체사상 창시자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도 “북한 정권은 김일성의 갓끈 전술에 따라 한·미동맹과 한·일 우호관계를 약화시키려는 통일전선전술을 구사하고 있다”고 지적했었다.

북한 정권은 그동안 한국에서 반일 감정을 부추기고, 일본과의 관계 강화를 강조하는 한국의 인사들을 친일파로 몰아세우는 등 선전·선동 공작을 벌여왔다. 실제로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을 비롯한 북한 관영 언론매체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일본의 과거 식민 지배를 비판하는 등 철저하게 반일 노선을 주장해왔다.

특히 북한 관영 언론매체들은 군사·외교 등의 분야에서 한·일 관계의 강화에 대해 신랄하게 비난해왔다.


친일파 일색 북한 초대내각의 진실
북한 정권은 또 한국은 친일파가 득세해 정통성이 없고 자신들은 친일파를 청산하고 항일독립투사인 김일성이 세운 나라이니까 정통성이 있다고 말해왔다.

때문에 북한 정권은 친일파가 세운 한국보다 도덕적으로 우위에 있다는 입장이다. 그런데 북한 정권의 이런 주장은 전적으로 거짓말이라는 것이 역사적으로 증명됐다. 김일성 정권의 초대내각과 군부 등의 주요 인사들 가운데 16명이 친일파였다.

특히 김일성의 동생인 김영주 부주석은 일제강점기 헌병 보조원으로 근무했다. 김일성 모친 강반석의 7촌인 강양욱은 일제강점기 때 도의원을 지냈다. 강양욱은 북한 인민위원회 상임위원장을 지냈다.

부수상 홍명희는 일제의 전쟁 비용 마련을 위한 임전(臨戰)대책협의회에서 적극 활동했다. 사법부장 장헌근은 중추원 참의 출신이었고, 북한 초대 공군사령관 이활, 북한 인민군 9사단장 허민국, 북한 인민군 기술 부사단장 강치우 등은 모두 일본군 나고야 항공학교 출신들이었다.

반면 한국의 이승만 정권 초기 내각은 임시정부 내무총장을 지낸 이시영 부통령, 광복군 참모장이었던 이범석 국방장관, 광복군 총사령관을 역임한 이청천 무임소장관 등 임시정부와 광복군 출신인사들로 구성됐다. 친일파는 한 명도 없었다.

김일성은 “남조선(한국)은 친일 부역배들인 한민당과 이승만이 결탁하여 세운 미제의 괴뢰(傀儡)정부이므로 정통성을 인정받을 수 없다”면서 민족사적 정통성은 북한에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 근거로 항일 빨치산 투쟁을 했던 자신을 구심점으로 내세워왔다. 하지만 북한 정권이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들 가운데 가장 큰 업적으로 주장해온 ‘보천보전투’ 역시 완전한 조작이다.

북한 정권의 주장에 따르면 보천보전투는 김일성이 1937년 6월 4일 조선인민혁명군(동북항일연군) 소속 부대를 이끌고 함경남도 갑산군 보천면 보천보(현재 양강도 보천군 보천읍)를 습격해 주요기관을 일시적으로 점령했던 사건을 말한다.

북한의 중학교 교과서는 “김일성이 1937년 3월 경찰주재소, 면사무소를 비롯한 일제의 통치기관들을 습격하고 보천보 일대를 해방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당시 보천보에는 일본인이 26호에 50명, 조선인이 280호에 1323명, 중국인이 2호에 10명 등 총 308호에 1383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무장인원으로는 5명의 경찰이 주재소에 있었을 뿐이다.

반일 앞세운 북한의 역사 조작

북한 교과서가 엄청난 전투가 있었던 것처럼 묘사하고 있지만 말 그대로 소규모 전투에 불과하다. 이명영 전 성균관대 정치학과 교수는 '김일성 열전'에서 "보천보전투의 김일성 장군은 1887년 태어난 일본 육사 출신의 김광서라는 사람"이라면서 "북한 김일성이 보천보전투의 김일성 장군으로 둔갑한 것은 소련이 광복 이후 북한의 공산 정권 수립에 용이하게 사용될 수 있는 지명도가 높은 이름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소련의 지휘하에서 훈련받았던 만주의 공산 유격대 출신인 김일성의 본명은 김성주(金聖柱)였다. 소련의 지시로 광복 후 북한으로 들어온 김성주는 김일성 장군으로 행세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북한 정권이 주장하는 김일성의 항일투쟁은 조작임을 알 수 있다. 북한 정권은 올해 100주년을 맞는 3·1운동도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1894~1926)과 평양 숭실중학교 청년학생들이 주동했다고 교과서를 비롯한 모든 역사서에 기록하고 있다.

3·1운동의 발원지도 서울의 탑골(파고다)공원이 아니라 평양의 숭덕여학교이며 평양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됐다고 역사를 왜곡·날조하고 있다. 또한 3·1운동의 성격을 3·1 인민봉기로 규정하고, 남조선의 33인 민족대표가 외세에 의존한 부르주아 상층 분자들이어서 운동 자체가 실패했다고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

더욱이 북한 정권은 김일성이 7살의 나이로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3·1운동에 참여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북한의 조선력사(고등중학교 제4학년용)는 “그때 위대한 수령 김일성 대원수님께서는 여덟 살의 어리신 나이에 시위대렬(대열)에 참가하시여 만세를 부르시며 보통문 앞까지 가시였다. 민족의 류혈(유혈)을 처음으로 목격하신 어리신 대원수님의 마음은 분노로 끓어 번지시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김일성도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여덟 살(전통적인 우리식 계산법에 따른 나이. 김일성은 1912년 4월 15일 출생)이였던 나도 다 꿰진 신발을 신고 시위대렬에 끼여 만세를 부르면서 보통문 앞에까지 갔다”고 밝혔다. 그런데 당시 김일성은 김형직과 함께 중강진에 있었다. 북한 정권이 발간한 ‘김일성 원수님의 어린 시절’이란 책을 보면 김형직이 1918년 국경지대인 중강진으로 이사했고, 이때 김일성도 함께 고향을 떠나 김형직을 도왔다고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북한 정권이 역사를 조작하면서 스스로 오류까지 저지르고 있는 셈이다.

미국·일본·한국의 해군 함정들이 동중국해에서 훈련을 실시하고 있다.

북한이 한ㆍ일 틈 벌리려는 이유

북한 정권이 이처럼 역사를 조작하면서까지 반일 노선을 추진해온 것은 김일성이 내세운 이른바 '갓끈 전술' 때문이다. 북한 정권의 일관된 목표는 한·미·일 3각 동맹을 저지하려는 것이다.

특히 북한 정권은 한·미 동맹이 굳건한 만큼 한·일 관계를 이간질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고 보고 있다. 일제강점기 시절 한반도 전체가 고통을 받아온 만큼 북한 정권은 이를 고리로 ‘우리 민족끼리’를 앞세우면서 한국에서의 반일 정서를 부추기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북한이 한·일 관계의 틈을 벌리려는 가장 큰 이유는 6·25전쟁 때의 교훈(?)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시 일본은 미군을 비롯해 유엔군의 핵심 후방기지였다. 남기정 서울대 교수의 저서 ‘기지 국가의 탄생: 일본이 치른 한국전쟁’에 따르면 1953년 1월 일본 내 미군 기지는 무려 733개에 달했다.

주일 미군 기지들은 병사 및 물자 수송 및 훈련 등 후방기지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당시 미 공군은 주일 미군 기지에서 한반도로 100만여회나 출격해 폭탄 70만t을 투하했다. 주일 미군 기지에선 인천 상륙작전을 위한 한국군 병사 8000여명이 훈련을 받았으며, 원산 상륙을 위한 기뢰 제거 및 미군 수송에 8000여명의 일본인들이 동원됐다.

이는 6·25전쟁에 참전한 유엔군 16개 국가 중 6위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일본의 이런 역할은 지금까지 과거와 동일하다. 일본은 6·25전쟁 당시나 지금이나 지리적·전략적으로 같은 자리에 있다. 게다가 한반도 유사시 미군 전력이 출동하는 유엔군 사령부 후방기지 7곳이 모두 주일 미군기지이다.

미국과 유엔군 사령부 참여국들은 한반도 전쟁 상황에 대비해 일본에 유엔사 후방기지를 유지하면서 병력과 장비를 배치하고 있다. 7곳에 있는 병력과 군수물자들을 한국으로 이동하려면 미군 단독으론 안 된다. 일본 해상자위대의 지원이 필요하다. 미국은 또 항모전단의 호송 전력이 부족해 일본 이지스함 등의 지원을 받아야만 한다.

북한 잠수함들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할 경우 한국으로 수송되는 병력과 물자들을 막기 위해 일본 근해로 출동할 것이 분명하다. 이때 일본 해상자위대 잠수함이 북한 잠수함로부터 수송선을 보호해야만 한다. 일본 해상자위대는 막강한 대잠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주한미군은 주일미군의 지원이 없으면 북한의 공격을 제대로 막을 수 없다. 주한미군에 반드시 제공되어야 할 항공, 해상 전력과 전략 자산을 주일 미군이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일본은 전략적으로 한국의 안보에 매우 중요한 국가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실리로 돌아선 중ㆍ일 관계의 교훈

그런데 문제는 북한의 갓끈 전략이 문재인 정부의 반일 노선과 맞아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박근혜 정부에서 체결한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합의를 정면 부정했고, 대법원의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판결에 대해서도 존중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게다가 우리 해군 광개토대왕함의 일본 해상자위대 초계기 레이더 겨냥 논란으로 한·일 관계는 더욱 악화하고 있다.

한·일 관계는 1965년 수교 이래 과거사 문제와 독도 영유권 등으로 충돌을 거듭해왔으나 안보 분야에서는 협력 기조가 유지돼왔다. 북한의 핵과 탄도미사일 도발은 한국은 물론 일본에도 가장 큰 위협이었다. 한·일 양국이 2016년 11월 군사비밀정보보호협정(GSOMIA)을 체결한 것도 북한 핵과 탄도미사일 위협 증대에 공동 대처해야 한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문재인 정부는 한·일 관계를 미래 지향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면서도 과거 지향적으로만 가고 있다. 실제로 문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지난해 3차례 정상회담을 가졌지만 일본군 위안부 등 과거사 문제를 놓고 입장 차이만 확인한 채 서로 등을 돌렸다.

물론 과거 식민 지배를 당한 한국으로선 당연히 일본에 진정성 있는 사과와 반성을 요구해야만 한다. 일본도 강제징용, 근로정신대, 군대 위안부 등 제국주의 시절 자행된 반인륜적 범죄에 대해서는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피해자인 한국이 가해자인 일본에 과거사 문제만을 물고 늘어진다면 양국 관계는 파국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문 대통령이 국내 정치만을 의식해 한·일 관계를 끌고 가서는 안 된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해 10월 베이징에서 아베 총리와 정상회담을 갖고 역사와 영토 문제로 인한 갈등과 대립에도 불구하고 경제협력을 강화하기로 합의했다. 앙숙 관계인 양국이 손을 잡은 것은 실리적인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미국과 무역전쟁을 벌이는 중국으로선 우군이 필요하고, 미국과 무역협상을 진행 중인 일본도 미국을 견제할 카드가 필요했다. 양국으로선 안보 문제 등으로 인해 밀월 관계를 맺을 수는 없지만 전략적으로 이득을 계산해 관계개선에 나선 것이다.

김일성이 광복 후 귀국해 평양 시민들에게 연설하는 모습을 그린 벽화.

문재인 정부도 대일 외교 노선을 전면 개선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한반도에서 한목소리로 반일 정서가 표출된다면 자칫하면 반미 정서로 비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일 관계를 중재할 수밖에 없는 미국에 대해 국내 일부 친북 및 종북 단체들이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식으로 반미 정서를 부추길 수 있다.

북한 정권은 이미 통일전선전략을 통해 이런 수법을 쓰고 있다. 북한 정권이 유엔사 철수를 주장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특히 한·일 관계 강화는 북한의 비핵화 실현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북한과의 대화든, 압박이든 가장 중요한 것은 한·미뿐만 아니라 한·미·일 협력이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한·일 군사 협력이 필요하다.

현 상황에서 한·미 훈련의 축소와 취소도 문제지만 한 번도 일본 자위대와 손발을 맞춰보지 않고 있는 점도 문제다. 북한의 도발이나 침공 등 한반도 유사시 한·미·일 3국의 협력이 중요한데, 한·일 간 아무런 사전준비 없이 협력할 수는 없다.

한·일 양국은 동북아 안보와 경제, 문화 등에서 교류와 협력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숙명적인 인접국이다. 한국 젊은이들이 가장 많이 여행하는 곳이 일본이다. 일본 젊은이들이 가장 열광하는 것이 한류(韓(流)다. 한·일 양국은 과거의 아픈 역사를 뛰어넘어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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