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선교를 해야 하는 이유


세계선교를 지향하는 한국교회! 일본을 어찌할 것인가?

(일본 선교는 한국 교회의 기업  - 일본열도에 불어 닥치고 있는 불가사의한 기적들-

요한복음14: 12-14
2013
년 01월 24일
김안신
목사(한국CCC파송 일본선교사)

들어가는 말

 전주에서 목회할 때의 일이다. 만50세가 되던 90년 4월 어느 날 한 밤중, 나는 꿈 속에서 3일간 연속으로 “김안신! 일본으로 가라”는 이상한 음성을 들었다. 첫날 밤에는 “누가 헛소리를 하는고? 새벽 예배를 인도하려면 눈을 좀 붙여야 하는데” 하면서 짜증을 냈다. 이튿날에도 계속되는 부름에 급기야 일어나 문을 열어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3일째에는 “아, 이건 하나님의 부르심이구나!” 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일본에 갈 수 없는 10 가지 이유를 들어 거절했었다. “50이 넘었습니다. 장남입니다. 부모님은 8순이십니다. 아내는 6남매 장녀입니다. 처부모님은 7순이십니다. 일본말을 못합니다. 교회서 안 놔줄 겁니다. 아직 어린 자녀들의 교육 문제가 물가가 비싼 일본에서는 불가능 합니다. 이미 제가 5명의 선교사들을 돕고 있습니다. 가는 선교사가 아니라 보내는 선교사가 되겠습니다. 일본은 회개할 줄 모르는 나라이니 멸망 받아 마땅합니다. 저를 놔주십시오!”

 

 하나님은 크게 책망하셨다. “나는 일본열도를 사랑한다. 일본은 내가 택한 내 백성이 사는 내 땅이다. 나는 이들의 복음화를 위해 네 몸이 필요하다. 일본으로 가겠느냐 내게로 오겠느냐. 양자 택일하라” “제가 일본에 안 간다면 저를 죽이실 작정이십니까?” “오냐! 네게 영원한 안식을 주겠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고 판단한 나는 교회에 사표를 제출하였으나 받아주지 아니함으로 그 해 6월 도망치듯 미국으로 건너갔다. 2개월간의 짧은 단기 선교 훈련을 받고 귀국, 한국 CCC로 원대 복귀하여 90년 10월 1일 일본 선교사로 파송장을 받았다.

 

길고 지루한 시간, 비자를 기다렸다가 드디어 91년 1월 3일, 일본의 관문인

나리따 공항에 상륙하게 되었다. 당시 나는 일본어라고는 [사요나라]와 [빠가야로] 밖에 할 줄 몰랐다. 언어학교의 등록이 마감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3개월 동안 소일하다가 그 해 4월부터 일본어를 기초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외국어에 소질이 없는 내게 [아, 이, 우, 에, 오] 에서 시작된 일본어 공부는 너무도 큰 짐이 되었다. “젊고 유능한 선교사를 더 많이 보낼 테니 저를 원 위치 시켜주십시오” 라고 2년간 날마다 졸랐으나 하나님께서는 이 기도에 대한 응답을 하지 않으셨다. 별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린 나는 악착같이 공부하여 1년 4개월만에 75명이 모인 교또의 복음자유교회에서 일본어로 설교할 수 있었다.

 

 자녀들 교육 때문에 아내는 한국에 머물고 있었기에 혼자서 거의 2년을 살았다. 답답하고 컬컬했던 나는 일본이 복음화되지 않으면 안될 이유와 내가 일본에 있어야 할 까닭을 하나님께 따지듯 물었다. 하나님께서는 너무도 확실하게 “일본은 21세기에 세계 선교의 무거운 짐을 져야 할 나라이다.”고 하셨다. 나는 이런 말 즉 “일본이 21세기 세계 선교의 무거운 짐을 져야 할 나라” 라는 말을 세계 선교 전문가들의 책에서나 강연 등을 통해서 읽어본 일도 들어본 적도 없었다. 정말 말도 안 된다는 말씀이라는 생각으로 많은 시간을 고민하였다. 나는 정부간행물을 뒤적이면서 일본의 국력을 조사하다가 “만일 일본이 예수 믿고 복음화 되기만 한다면 세계는 바로 복음화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12년도 12월 31일 현재 지구상에 244개의 나라가 존재한다 지도상에 나와 있는 나라가 239개이다. UN 총회에 가입된 나라가 193개, CCC가 활동하고 있는 나라가 198개, 콜라가 팔리고 있는 나라가 200개, 한국이 무역하고 있는 나라가 225개인데 일본은 지도에 나와 있는 239 개의 모든 나라에 진출하여 넓은 토지, 큰 건물, 유가증권, 현지통화를 대량으로 소유하고 있었다. 이런 자산가들이 우리의 전도를 받고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는 자녀가 된다면 현지의 넓은 토지는 캠프장이 되고, 큰 건물은 교회와 기도원과 선교센터가 되며 현지의 유가증권이나 통화는 선교기금도 될 수 있다.

 

 나는 일본 선교 22년의 세월을 통해 토지와 건물과 재산을 아낌없이 바치는 신자들을 수 없이 보았다. (99년도 시즈오까-찌라시 한 장으로 자살 직전의 부부를 살린 사건) 세계 선교전선에서 일본의 역할에 대한 가능성을 보게 되었다는 말이다. 일본인들은 일단 확신을 하게 되면 자기 목숨이라도 버릴 각오로 우리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기질 즉 기마에(気前-시원스런 기질)와 근성(根性-곤죠)이 있다. 편도 휘발유만을 넣은 비행기를 타고 가 진주만을 공격한 카미카제(神風) 특공대를 기억해 보라. 이는 5천년의 전생역사를 통해 유일무이한 사건이다.

 그러나 나는 일본 선교의 장애물들이 열도를 지배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첫째, 일본에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성삼위 하나님의 개념이 없다.

카미사마(神様)라고 말할 때, 그 카미사마는 인격신이 아니라 인간을 초월한 위력을 가진 숨어있는 존재, 일본의 신화에 등장하는 인간 신, 최고의 지배자 천황, 진자(神社) 등에서 제사를 받는 영, 인간에게 위해(危害)를 끼치고 공포를 주는 자 곧 천둥, 호랑이, 늑대, 뱀 등을 가리켜 ‘카미사마’ 라고 부른다. 따라서 성경이 가르치는 인격신인 삼위일체(三位一体) 하나님의 개념이 없기 때문에 이를 설명하여 가르치는 일이 아주 어려운 실정이다.

둘째, 공짜를 싫어하는 민족이기에 거저 주시는 구원의 복음을 거부한다.

 값없이 주시는 구원의 은혜에 대하여 거부감을 갖는다. 이들은 신사에 가서 구멍 뚫린 동전 5엔(고엔이라 읽는데 이는 ‘신사의 하나님이시여! 좋은 인연을 맺고 삽시다’ 라는 소원이 담긴 돈임)을 던지며 복을 비는 그런 정성이라도 있어야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은 공짜이다. 이 사실을 모르는 일본인들이 가엾다.

셋째, 자기 나라를 지상천국으로 생각하는 현실주의자들이다.

 “돈, 여행, 쾌락, 자유 등을 마음껏 누리고 있는 여기가 바로 천국이 아닌가. 나는 이대로의 삶에 최고로 만족한다. 다른 천국 관심 없다. 더 이상 나를 번거롭게 하지 말아 달라” 라는 말로 생명의 복음을 거절한다. 착각에는 커트라인이 없다는 말들을 하지만 바로 이런 경우에 해당되지 않을까?

넷째, 타테샤카이(縦社会)라는 높은 장벽이다.

일본사회의 구조적 특징이라 할 수 있는 타테샤카이(종사회) 즉 인간 관계에 있어 상하의 질서와 서열이 아주 중요시 되는 사회이기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노라”는 고백을 하기가 극히 어려운 실정이다. 주위의 사람들과 단절되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의 소속사회로부터의 단절은 죽음을 의미하는 까닭에 사회의 일원이 되어 있는 사람이 예수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세례를 받으면 그는 개밥의 도토리가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다섯째, 8백만 귀신을 섬기는데다 진화론에 입각한 교육이 큰 문제이다.

일본인들은 조상 대대로 8백만의 신을 섬긴다. 특히 조상 신을 더욱 열심히 섬긴다. 인간은 윤회설 속에서 환생을 거듭하는 존재로 죽으면 끝난다는 사고방식 속에서 인간의 가치가 과소평가 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진화론에 입각한 교육을 시키는 까닭에 조금 어려운 일이나 부끄러운 일이 생기면 자살로 인생을 마감하는 풍조가 심하여 자살왕국으로 불리 울 정도이다.

 

여섯째, 하나님 보다 주일 성수보다 일에 우선 순위를 두는 민족이다.

“시고또의 오니(仕事の鬼, 일에 미친 사람, 일 벌레)”들이기 때문에 일이 하나님보다 교회보다 앞서 버린다. 따라서 주일날 일이 있거나 일감이 생기면 예배는 뒷전으로 물러가 버린다. 특히 5월말이나 6월 첫 주일에 행해지는 소학교 운동회 때는 예배당이 텅텅 빈다. 물론 전부는 아니고 주일 성수를 강조하는 교회는 예외이다.

일곱째, 예배가 너무나 부족하고 모이기를 힘쓰지 않는 교회이다.

 심방과 구역예배가 없고 대부분 주일 예배 한 번만 드리기 때문에 성장이 더디다. (주일날 10:30분의 모임은 예배, 수요일 모임은 기도회, 목요일 모임은 성서연구회이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절대적 신앙이 아니라 상대적 상황 신앙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라는 통로를 통해서 예비하신 복을 주심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여덟째, “일본은 안 된다”는 목회자들의 부정적인 사고 방식이다.

 91년 1월, 일본에 당도했으나 언어학교의 등록이 마감된 뒤라 3개월 쉬는 동안, 먼저 온 선교사의 안내로 동경, 오사카, 나고야, 센다이, 삿뽀로, 후꾸오까, 교오또 등 7개의 도시를 순회하며 한 교회에서 20년 이상 목회한 일본 목회자들과 교제하는 기회를 가졌다. 그들의 말은 한결 같았다.

 “우리는 교회의 부흥을 위하여 새벽기도, 철야기도, 금식기도, 노방전도, 축호전도, 성서연구, 세미나, 제자훈련, 특별집회, 부흥회, 한국과 미국교회의 견학 등 이것 저것 다 해 보았으나 잘 되지 아니하므로 포기하고 말았다. 다는 아니지만 일본교회의 형편이 이렇다” 이 말을 듣고 나는 “일본 교회의 미래는 어둡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 말은 일본 목회자들의 전부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다. 더러는 복음주의 신학과 신앙에 입각하여 크게 성장하는 교회도 있었다. 그런 교회들의 특징은 목회자가 복음은 보수하되 현대적인 상황을 이해하면서 유연성 있게 이끌어 간다. 찬양의 능력이 넘치며 열정적으로 기도한다. 더 나아가 모든 프로그램을 선교적 마인드로 운영하면서 성경 말씀에 기초한 제자훈련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기에 이런 결과를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무엇(WHAT?)을 가지고 어떻게(HOW?) 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누가(WHO!) 하느냐에 따라서 결과가 판이하게 나타난다는 말이다. 교회는 삼각형으로 하나님은 정점에 있는 목회자를 통해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교회는 담임 목회자 이상 성장할 수 없다는 것은 기독교의 2천년 역사가 증명하고 있는 사실”이다.

 

2003년에 CIS(교회정보센터)에서 “지금 현재 1%미만의 크리스천 인구를 5%로 올리려면 1,390년 걸린다” 라는 통계를 발표하였다. 나는 이 통계를 읽고 분개하였다. 이 통계가 발표된 2년 반 후인 06년 2월 20일, OCC빌딩에서 CIS 주최로 열린 세미나에 참석했다. 순서가 다 끝난 다음 “질문이 있느냐?”는 사회자의 말에 나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일어나 “비싼 비용을 들여 이런 어이 없는 통계를 만들어 내어 일본 교회를 기 죽이는 당신들도 문제이지만 이런 웃기는 통계를 보면서 ‘그래 우리 교회의 부흥은 안돼! 일본은 틀렸어! 일본복음화는 불가능해!’라고 절망하는 일본 교회 목회자들은 더욱 불쌍하다”고 쏘아붙이고 이렇게 말했다. “왜 하나님 편에서 일본 교회를 생각하지 않는가? 현재의 상황을 참고하여 계산해 보면 이런 통계가 나올 수 있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께서 일본인들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면 이런 통계는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다.” 이런 부정적인 사고 방식으로 팽대한 일본 지도자들의 문제를 극복하는 것이 가장 큰 과제 중의 하나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지금 일본열도에는 불가사의한 징조들이 일어나고 있음을 본다.

 

첫째, 복음주의 교회들이 계속 성장하고 있다.

 세계 제2차 대전이 끝나던 1945년에는 일본의 자유주의 교회와 복음주의 교회의 비율은 26:1이었다. 그러나 두 진영 교회들의 성장 속도를 보면 1990년에는 26:26이었고, 2000년이 지난 지금은 정반대로 1:26이 되었다. 자유주의 교회의 성장은 크게 줄어들고 복음주의 교회는 계속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지금 일본열도에는 무목(無牧) 교회가 1,000개가 넘는다는 통계가 나와 있는데 대부분이 자유주의 신학을 가진 교회들이다.

둘째, 젊은이들 가운데 헌신자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

 지난 91년부터 13년 1월까지 김준곤 목사께서 뉴라이프라는 이름으로 훈련된 한국CCC 대학생들을 북해도, 군마, 사이따마, 이바라끼, 동경, 시즈오까, 나고야, 오사까, 후꾸오까, 큐우슈, 오끼나와 지역 등의 수많은 교회들에 파송, 일본 교회를 섬긴 결과, 22년 동안에 적어도 젊은이들 백 명이 헌신하여 신학을 졸업하고 안수를 받았거나 지금 신학교에 다니고 있고 또 신학교에 입학할 준비를 하고 있다. 해외 선교사로 헌신한 젊은이들도 상당히 많다. 일반적으로 “일본 교회에는 1년이 다 가도 구도자가 한 사람도 아니 오고 5 년이 지나도 세례 받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던 일본 교회에 이렇게 많은 헌신자가 나왔다는 것은 가히 기적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셋째, 한국과 자매결연을 맺은 일본교회들의 괄목할 성장이다.

 자매결연을 맺고 한국을 왕래하고 있는 교회는 지역에 상관 없이 어느 곳이든지 급성장하고 있음을 보았다. 이는 한국 교회가 성경적인 방법으로 교회성장을 도모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믿는다. 일본 교회의 부흥은 물론이고 자매결연의 상대인 한국 교회도 동반 성장하고 있음을 보았다. (일궁시의 한 교회)

넷째, 한국인 선교사들의 수가 계속 증가하고 있다.

 서양선교사들은 그 수가 현저히 줄어가는 반면 한국인 선교사들은 놀라운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91년도에 825명이던 것이 2012년 1월 9일 현재 한국인 선교사 1,347명이 일본열도에서 사역하고 있다. 조국의 경제사정이 아직도 여의치 않은 상황임에도 그렇다. 또 한국인 선교사들은 사역의 열매가 현저히 나타나 10년 전후하여 대개 자체건물을 구입하여 예배를 드리고 있다.

다섯째, 기독교의 큰 집회들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일본 전국에서 60년도 이후 1천명 이상 모이는 집회가 열리려면 10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60년대 빌리 그레이함 대회, 70년대의 밥 피얼스대회, 80년대의 루이스 파라오대회, 94년 초의 빌리 그레이함 대회 때에 그렇게 모였다. 그러나 90년대 중반부터는 보통 2, 3천명씩의 집회는 아주 간단히 이루어지고 있다. 이것은 뉴라이프가 일본에서 시작된 이후 두드러진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여섯째, 최근 VIP라는 실업인 중심의 평신도운동이 왕성히 일어나고 있다.  

1,500명에서 1,800명씩 모이는 성탄축하나 대중 전도집회들이 그들에 의해 빈번히 일어나고 있다. 동경, 요꼬하마, 오사카, 나고야, 쿄또, 후꾸오까, 삿뽀로 등지에서 이렇게 모이고 있다. 이 모임은 점점 전국화 되어가고 있다.

일곱째,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은 분들이 공석에서 신앙 고백하고 있다.

전에는 자기가 크리스천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살던 지위 높은 사람들 즉 정부의 고관이나 은행장이나 전무 또는 기업체의 장들이 대중 앞에서 “나는 이러이러한 과정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되었노라”고 공석에서 신앙고백을 하고 있다. 이것은 진짜 기적이라고 해야 할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여덟째, 공공연한 장소에서 기도회가 열리고 있다.

 동경 시내의 근 30 곳에서 평신도들 중심으로 직장이나 호텔에서 매주 한번씩 모여 기도한다. 이들의 열심은 대단하다. 각 도시에서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09년도에 조사한 바에 의하면 전국적으로 조찬기도회가 157개 정도 있는데 이들은 전국의 모든 지역에 이 기도회를 조직할 계획을 세워 추진하고 있다. 또 CCC 자매간사가 중심이 되어 예능인 전도가 이미 시작되었다.

아홉째, HOMELESS 전도가 왕성해지고 있다.

 일본 국내에는 공원이 전국적으로 약 550 여 개가 있다. 이 공원들에는 여지 없이 홈리스(노숙자)들이 살고 있다. 이들을 상대로 한 전도가 주로 한국인 선교사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는데 1백 명, 2백 명, 4백 명, 6백 명 등을 모아놓고 열심히 전도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대부분의 대 중 도시에서는 이런 전도활동이 전개되고 있다. 또 동경에는 홈리스들을 위한 신학교도 생겨서 열심히 가르치며 배우고 있다.

열째, 사회에서 버림받은 야쿠자들의 전도가 활발해지고 있다.

 야쿠자들을 중심으로 한 “밋션바라바” 라는 선교회가 일본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주는 활동을 하고 있다. 그들은 “오야붕은 예수님”이라는 영화를 한일합작으로 만들어 상영함으로써 메스미디어 전도를 시도하고 있다. 범법자들에게는 비자를 내주지 않는 미국임에도 불구하고 클린턴 대통령 취임식에 이들이 초청되어 문신을 내보이며 찬양을 하고 간증을 하여 많은 감동을 끼쳤다.

 

열한 번째, 동경성서전시회(00.11/2-19까지)에 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으리만큼 많은 인파 (55,324명이 관람)가 몰려들었다.

 물론 사해사본이 전시된 까닭도 있었겠지만 일본인들이 성경이 무엇인가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를 보인 것이다. 그런데 이 많은 관람객들 가운데 넌 크리스천들도 많이 있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열 두 번째, 매스컴에 변화의 조짐이 보이고 있다.

NHK의 교육방송국에서는 소노 아야꼬 라는 카톨릭 신자의 성경강좌를 일년 이상 계속 방영했다. 또 2000년 12월에는 일본 전역을 커버하는 중앙 TV 6 채널과 지방 28개의 TV에서 예수영화를 상영했다. 2002년도 여름에는 동경의 한 복판에 위치한 긴자(銀座)의 일반극장에서 예수영화를 상영한 바 있다. 04년도 5월부터 일본의 150여 개의 일반극장에서 “그리스도의 수난(the Passion of the Christ)”이 2개월간 상영되었고 3백만 명 이상이 관람했다. 교회들이 입장권을 구입, 불신 이웃들에게 선물하여 관람토록 한 결과였다.

열세 번째, 복음성가(GOSPEL SONG)가 크게 유행하고 있다.

동경에는 200명의 인원을 가진 복음 성가단이 있다. 그 중 크리스천은 지휘자와 단원 한 사람 등 2명뿐이다. 그러나 그들은 열정적으로 복음 송을 부르고 있다. NHK에서는 몸집이 아주 큰 흑인 여가수 수명을 출연시켜 수 주간 “Oh Happy Day”라는 곡으로 복음송 부르는 방법을 가르치기도 했다. 이는 시민의 취향에 대한 매스컴의 예민한 반응인 것이다. 특히나 블랙 가스펠(Black Gospel)팀이 등장하기라도 하면 그들은 거의 광적이 된다.

열네 번째, 미우라 아야꼬(三浦綾子)의 작품이 지금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다.

 어느 때부터인가 “미우라 아야코는 한 특정 종교 즉 기독교의 변증가” 라고 알려져 있었기에 일반 시민들이 그의 저서들을 읽지 않았다. 그러나 1996년 “총구(銃口)”라는 작품(한국어로 번역이 되었음)으로 일본문학상 가운데서 두 번째로 권위를 가진 “이하라사이카크상(井原西鶴償)”을 받은 후 그녀의 작품이 재평가 되어 일반 시민들이 읽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 상을 받고 “비로소 내 작품이 일본인들에게 인정되어 기쁘다”라고 말했고 얼마 후 하늘 나라로 옮겨갔다. 미우라 아야꼬(三浦 綾子) 작품은 거의 모두가 복음에 관한 생생한 메시지를 담고 있기 때문에 빈 마음으로 그의 작품을 읽는 자들은 반드시 감동을 받을 뿐 아니라 변화되게 되어 있다. (왕 간사 박성록 교수의 전도)

열다섯 번째, 십자가의 장식이 눈에 뜨이게 많아졌다.

 거의 모든 여자들의 목이나 귀에 십자가가 걸려 있다. 십자가의 의미를 아느냐고 물으면 “모른다. 보기가 좋아서 달고 다닌다”고 한다. 이것 역시 보통 일이 아니다. 주님의 때가 오고 있다는 증거 중의 하나라고 본다. 나는 길거리에서 십자가를 달고 다니는 한 젊은 여인에게 “십자가는 보기 좋아 장식으로 달고 다니는 것이 아니다. 당신과 우리 모든 인류의 죄 값을 대신 지고 죄 없으신 예수님이 달려 죽으신 증거물이다! 이 예수님을 믿으면 축복이고 그렇지 않으면 저주 받는다. 십자가는 천국과 지옥의 갈림길 임을 명심하라” 라고 말했다. 그녀는 부르르 떨며 창백해진 모습으로 떠나간 일이 있었다.

 

열여섯 번째, 자동차에 붙이는 부적들이 사라져 가고 있다.

 매년 정초, 신사나 절에 가서 비싼 부적을 사다가 자동차 번호판 위에 달고 다녔는데 최근에는 그런 것들을 거의 볼 수 없다. 그런 것을 부착하고 다녀도 사고는 난다는 증거일 것이다. 신사나 절간에 가지 않는다는 증거다. 20년 전만 해도 정초가 되면 대문에 이상스러운 장식들을 많이 해 놓았는데 그것도 많이 줄었다. 또 정초 밤거리에 촛불을 켜놓고 점쳐주는 여인들이 많았는데 그 수도 현저히 줄어들어 최근에는 거의 불 수 없는 현실이다.

열 일곱 번째, 일본의 모든 호텔 가운데 50,000개에는 채플이 지어져 있다.

 젊은이들의 결혼식을 호텔로 꼬시어 피로연을 열게 함으로써 돈을 벌기 위해 세워진 것이 채플이다. 그러나 최근에 이 호텔 채플에서 평일에 예배가 드려지고 있다. 이 일이 계속된다면 일본의 5만개의 호텔 채플은 모두 교회가 되어 일본열도에는 일시에 5만개의 교회가 불어나 한국교회의 수와 맞먹는 교회가 존재하게 된다는 계산이 가능해진다.

열 여덟 번째, 지금 일본열도에는 CHURCH SCHOOL이 계속 생겨나고 있다.

진화론에 입각한 일본에는 지금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자살인구가 매년 3만4천명이 넘었고 사람의 목숨을 초개처럼 가볍게 여기는 풍조로 인해 살인과 자살이 자행되고 있다. 이제 일본은 교육으로 또는 법으로 컨트롤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때 뜻있는 목회자들에 의해 교회학교가 여기저기 세워지고 있다. 현재 일본열도에는 50여 개 세워져 있고 점점 늘어나고 있다. 아마도 10년 후가 되면 적어도 몇 백 단위의 교회교가 세워질 전망이다. 오끼나와의 세계선교교회에서 운영하는 국제교회학교에서는 04년에 9명의 고등학생이 졸업을 하였는데 그 가운데 7명이 미국과 일본의 신학교에 진학하였다. 그들은 돌아와서 일본의 교회학교 성장 발전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계속해서 해마다 졸업생들 가운데서 헌신자가 많이 배출되고 있다. 이 교회에서는 미구에 대학까지 세울 계획을 세우고 있다.

열 아홉 번째, 일본열도에 김치 붐이 일어나고 있다.

 한국 교회를 배우려는 인본인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한일간의 장벽은 무너져 가고 있다. 일본 성도들이 한국에 올 때 김치 담그는 법을 배우려는 불신자들을 동반하도록 하여 믿음 좋은 가정에 민박시켜 전도의 기회를 찾는 가운데 좋은 열매를 맺고 있는 교회도 있다. 03년도에 만 70세의 나이에 8,848m의 에베레스트산을 등반한 일본인 미우라(三浦 雄一郞)씨는 “어떻게 그 나이에 그렇게 높은 산을 올라갈 수 있었느냐?”고 묻는 기자들에게 “등산할 때 30Kg의 김치를 가지고 가다가 머무는 곳에서는 반드시 김치 찌개를 해먹고 기운이 나면 등산을 계속했기 때문에 성공했다”고 말해서 그는 무료로 김치 홍보 대사의 역할을 했다. 그는 만 75세의 나이로 08년 5월 26일 또 다시 에베레스트산을 정복하는 역사를 이루었다. 그 뿐이랴? 수년 전에 동남아를 휩쓸었던 사스(신형 폐렴)로 인하여 무수한 사람들이 죽었는데 한국인들은 한 사람도 걸리거나 죽은 일이 없었다는 뉴스가 보도된 이후로 김치는 대단한 인기를 끌고 있다. 세계 5대 먹거리 중의 하나로 선정되기도 했다.

스무 번째, 한국 열풍이 불고 있다.

 한국영화, 연속극들이 인기 절정에 놓여있다. 특히 배용준이 주연한 ‘겨울연가’는 위성으로 지상 파로 계속 일본인들의 심금을 울렸다. ‘대장금’도 대인기였다. 한국어 배우려는 무리가 급증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인 크리스천들과 교제하는 가운데 자연적으로 복음을 접할 기회가 많아지고 있다. 한국인 교회에는 한글을 배우려는 일본인들이 방문해오고 있다. 사실 야쿠자의 전도도 한국인 자매들을 만난 그들이 복음을 듣고 신자가 되고 목사가 된 케이스이다. 지금 일본의 거의 모든 TV는 한국의 연속극을 방영하고 있다. 대개 7년이면 열풍은 끝난다는데 한국열풍은 제2기로 접어들어도 식을 줄을 모른다. 더구나 최근에는 소녀 시대 등 한국의 젊은 여가수 그룹들이 인기절정에 이르러 10대와 20대의 젊은이들 그리고 30대 이상 4, 50때 이상까지 열광시키고 있다.

 

스물 한 번째, 요즈음 일본의 청소년, 대학생, 청년들이“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수가 접점 더 늘어나고 있다.

 이 사실은 갤럽조사에서 밝혀졌다. 몇 년 전 미국의 갤럽조사에서 내 놓은 통계에 의하면 일본의 청소년들 가운데 거의 37%가 자기 자신은 그리스도인이라는 고백을 했다고 했다. 교회에 다니느냐고 물으면 “다니지는 않지만 나는 분명히 그리스도인이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스물 두 번째, 요즈음 홈 처치, 셀 처치가 왕성히 생겨나고 있다.

 기성교회의 모임은 점점 약해져 가고 있는 반면 그룹으로 모이는 모임은 점점 왕성해가고 있다. 물론 평신도들 사이에서 이런 모임이 자주 일어나고 있다. 이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20여년 전에 짐 몽고메리 라는 선교 전문가가 “일본의 지역적, 인간 관계적인 특성으로 볼 때 일본에는 1천명당 교회가 1개씩 필요한 나라다” 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의 말이 타당하다면 일본에는 130,000개의 교회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나는 그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스물 세 번째, 러브 소나타 등의 영향으로 신자들이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07년부터 온누리교회가 주최자가 되어 “러브소나타” 라는 주제로 문화를 통한 전도를 시도하여 오끼나와, 후꾸오까, 오사카, 동경, 센다이, 삿뽀로, 아사히카와 등지에서 작게는 2천명 이상, 많게는 2만 명 이상이 모였다. 두드러진 현상은 일본인 성도들이 일본복음화도 가능하다는 자신감을 가짐과 동시에 이웃 사람들에게 전도해야 한다는 거룩한 부담감을 갖게 되었다는 점이다. 러브 소나타가 시작될 무렵에는 일본교회도 일본에서 사역하고 있는 선교사들도 반대입장이었으나 그 결과가 너무 좋기 때문에 지금은 그 지역의 목회자들이 나서서 “비용은 우리가 부담할 것이니 그냥 와서 열어달라”고 한다.

스물 네 번째, 비전을 가진 외국인 선교사들이나 기도하는 일본인 목회자들이 일본열도에 복음의 계절이 다가오고 있음을 환상으로 보고 있다.

 지금 일본열도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 영적 변화를 보며 기도할 때, 앞으로 빠르면 10년, 늦어도 30년 전후에 지난 2천 년간 그 어떤 나라에서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엄청난 영적 부흥이 일본열도에서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감에 가슴이 설렌다. 이것은 나만의 환상이나 꿈이 아니다. 일본을 위해 애통하며 깊이 기도하고 있는 선교사들이나 일본인 목회자들의 공통적인 견해들이다. 심지어는 영적으로 깨어있는 평신도들 가운데서도 그런 환상을 보며 목숨을 걸고 기도하고 있다. 하나님이 일본열도에 사는 일본인들이 회개하고 주님의 품으로 돌아와 구원받기를 원하시는데 누가 감히 일본은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일본을 복음화하여 인류의 발을 씻는 종의 나라로 만드실 그 날이 반드시 속히 올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보다 효과적인 방법으로 일본 선교에 힘써야 한다.

 CIS(교회정보센터)의 조사에 의하면 일본에는 2012년 11월 1일 현재 7,932개 교회가 있다(전년비 96개회가 문은 닫음). 등록신자의 수가 544,259명으로 전 인구 126,672,365명의 0.43%, 주일 예배 출석수가 278,856명으로 전 인구의 0.22%, 연간 수세자 7,257명, CS 학생들 52,498명, 한 교회당 평균 등록수 69명(예배출석신자 36명), 788개 도시 가운데 26개시에는 교회가 하나도 없고 그나마 1 교회 밖에 없는 시가 98개나 된다. 인구 2만 명 이상 사는 지역 가운데 42곳에는 교회가 없다. 정촌부(町村部) 929가운데 521에는 교회가 없다. 1교회가 전도해야 할 대상은 16,174명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작고 약하다고 해서 일본인 교회를 제쳐놓고 타국의 선교사들만 쓰지 않으신다. 일본 교회를 통해 일본을 복음화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본 교회를 깨우고 격려하여 스스로 자국복음화를 하도록 도와야 한다.

 

첫째, 우리는 일본 교회에 성경에 목숨을 거는 신앙을 전수해 주어야 한다.

 91년 7월, 후지산 등산기도회에 참석키 위해 일본에 오신 25명의 한국 목회자들 앞에서 동경성서교회의 오야마 레이지목사(한일 국교가 정상화 된 이후 바로 1천 만 엔을 모금하여 수원 제암리교회를 재건한 목회자)는 특강 때 다음과 같이 귀한 말씀을 하셨다. [한국 신자들은 성경에 목숨을 걸고 절대 순종하는 신앙을 갖고 있기에 그렇게 강합니다. 성경이 가라 하면 가고, 멈추라 하면 멈추고, 바치라 하면 바치고, 돌아서라 하면 돌아섭니다. 버리라고 하면 버립니다. 그러나 일본신자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이 그렇게 명령함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절대성에 대한 신뢰의 부족으로 이 핑계 저핑계 대면서 순종하지 않습니다. 제발 여러분께 부탁 드립니다. 한국교회와 같이 성경에 목숨을 거는 신앙을 일본 교회에 전해 주십시오!]

 

그는 일어나 90도로 두 번이나 절을 하며 부탁했다. 나는 큰 격려를 받았었다. 이것은 바로 내가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이 말씀을 실감하고 있다. 일본 교회는 3B(Bart, Brunner, Bultmann)가 망쳤다는 말이 있다. 그들 3인은 성경을 비 신화화한 장본인들로써 성경의 가치를 떨어뜨린 사람들이었다. 일본신학이 독일신학의 영향을 크게 받아 이렇게 연약한 상태에 이르게 되었음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둘째, 한일 양국 간에 자매결연 운동을 극대화하는 일이다.

 일본 교회를 깨우는 최선의 방법 중에 하나는 양국 교회가 자매결연을 맺고 피차 왕래하며 복음의 은혜를 나누면서 양국교회의 장점을 서로 배우며 영성을 동질화 하는데 있다. 감사한 것은 일본 교회가 한국 교회 목사들을 존경하고 모셔다가 말씀을 듣고자 한다는 것이다. 일본 신자들을 한국교회에 데려다가 민박을 통해 가정예배, 새벽예배, 철야예배, 금식기도, 산기도, 구역예배, 제자훈련, 영성 훈련, 헌금과 찬양훈련 등을 체험시키고 섬기는 교회에 돌아가서 그대로 실천하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일본의 중요한 거점지역을 돌아 본 나는 성경말씀을 사랑하고 그 가르침 대로 살고 있는 한국 교회와 자매결연을 맺고 내왕하는 일본교회는 어느 지역에서나 예외 없이 착실히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일본인들은 자기가 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일이라면 목숨을 걸고 실천하는 사람들이다.

 

3개의 시가 합병하여 인구 75만 명의 도시로 커진 하마마츠(浜松)의 어느 교회는 S라는 목사가 자기 가족과 함께 4.5조 다다미 방에서 개척한 교회였다. 6년이 지났으나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새 신자는 물론 손님도 친구도 오지 않았다. 개척사역을 그만 둘까 고민하고 있는데 친구 하나가 찾아왔다. “교회를 부흥시킬 맘이 있으면 한국교회를 배워라”며 한국교회 통합측의 S 목사를 소개해 줬다. 그때부터 그는 생쥐가 풀 빵 바구니에 드나들 듯 한국을 왔다 갔다 하였다. 그로부터 12년 후에는 350명의 신자가 되었고 본당 200평의 예배당을 지었으며 11개의 교회를 개척하였다. 해외에 5명의 선교사를 파송했다. 이것은 95년도의 이야기이다. 2천 년도에 그 교회를 다시 방문했을 때 개척교회가 39개로 증가해 있었고 미국에 연방정부가 인정하는 선교사 훈련센터를 설립해 놓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350명 수용 가능한 큰 관광호텔을 인수하여 캠프장으로 쓰고 있었으며 65,000평의 산을 구입하여 전원교회를 지을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정말 기적 같은 역사가 그 교회를 통해서 여기 저기 나타나고 있었다.

 

셋째, 일본대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이 지구촌에는25,000 정도의 대학이 있다. 그 가운데 5천명 이상의 대학생을 가진 대학이 8천 개에 6천만 명의 대학생이 있다. 세계인구의 1%인 셈이다. 그 가운데 소위 일류대학이 1,548개, 그 가운데 88개가 일본에 있다. 일본에는 4년제 대학생만도 230만 명 이상이나 된다. 고향집을 떠나 도시로 유학 온 학생들은 타테샤카이(종사회)의 지배아래 있지 않기 때문에 비교적 자유스럽게 복음을 수용하고 있다.

 80년대 말경 국영 텔레비전인 NHK가 18세에서부터 24세까지의 젊은이들 수 천명에게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만일 내가 종교를 택한다면?”이라는 질문에 신사가 5%, 불교가 11%, 기독교가 33%였다. 이들이야말로 황금어장이다. (어떤 다른 단체의 통계에 의하면 기독교를 택하겠다는 수가 50%를 넘고 있는 있음)

 

 나는 2년간(94-95)에 걸쳐 매주 평균 5, 600명 정도의 노숙자들을 상대로 전도활동을 전개한 일이 있었다. 멀리 떨어진 온천을 하루 임대하여 대형버스 8대에 도시락 8백개를 싸가지고 350명을 싣고 가서 세례를 베풀었다. 2년간에 이렇게 많은 신자가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은 반드시 일본 개신교 역사에 기록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노숙자들의 전도를 받고 예수 믿을 사람은 별로 없다. 영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학생은 전 인구의 1% 밖에 되지 않으나 만일 그들 중 한 사람이 변화되면 나머지 99명에게 영향을 끼칠 수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몰몬교나 통일교나 옴진리교 등 이단들이 젊은이들을 목표로 비상침투 작전을 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시사적인 교훈이다.

 

넷째, 재일한국인 2, 3세들의 제자화로 동포와 일본인 전도를 하거나 더 나아가 일본의 젊은이들 가운데서 헌신된 자들을 한국의 신학대학에 보내어 훈련시켜 역 파송한다면 더욱 놀라운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일본에 살고 있는 동포들은 국적만 한국인이지 사고 방식이나 생활자세는 완전히 일본인이다. 그들의 일본어 구사는 일본인만큼 완벽하다. 이들을 복음으로 무장시켜 동포와 일본인들을 전도케 한다면 더 놀라운 결과를 얻게 될 것이다. 만일 한국 교회가 재일 동포 가운데서 헌신자가 생길 경우 입양하여 한국의 연세어학당이나 이화어학당에서 한국어를 1년쯤 배우게 한 다음 그를 한국의 여러 신학대학에 장학금을 주면서 신학을 연수케 한 후, 일본으로 역 파송한다면 선교사 한 사람을 일본에 보내어 언어훈련부터 시켜가면서 선교하는 비용보다 훨씬 적은 비용으로 놀라운 열매를 거두게 될 것이다.

또 한가지 한국교회가 시도해야 할 사항은 일본 교회의 젊은이들을 한국의 신학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게 한 다음 선교사로 임명하여 한국 교회가 후원하여 일본으로 다시 보낸다면 이것이야말로 1석2조의 효과를 얻게 될 것이다.

 

다섯째, 유학생, 주재원, 상사원들을 통한 일본인 선교를 모색해야 한다.

 한국에서 일본에 와 있는 유학생은 3만 명을 넘어서고 있다. 취학생, 연수생 등을 포함시킨다면 훨씬 더 많은 숫자가 될 것이다. 한국 교회는 이들에게 평신도 선교사의 사명의식을 심어 보내는 일이다. 주재원이나 상사원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이 일본서 자비량선교사의 직임을 잘 감당할 때 붙잡혀 간 히브리소녀가 나아만 장군의 집에서 선교사의 사명을 수행했던 것처럼, 봐이킹족에게 습격 당해 노예나 첩이 되었던 스페인의 경건한 여인들이 영국을 예수 믿는 신사의 나라로 만든 것처럼 참으로 상상을 초월한 생명의 열매를 주 앞에 드릴 수 있다. 만일 젊고 발랄한 크리스천들에게 평신도 선교사라는 제도적 장치를 해서 보내지 않으면 그들은 빠르면 2, 3개월 안에 늦을 경우, 반년 안에 일본의 저질 문화에 빠져버리고 만다.

 

여섯째, 일본 교회의 지도자들을 격려하고 도전하여 자기 교회의 청년들을 신학훈련을 시켜 개척교회를 극대화 하는 일이다.

 지금 일본에 있는 신학교들은 헌신자가 없어 대부분 문 닫을 지경에 이르렀다. 이렇게 된 원인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일본 교회에 젊은이가 너무 적을 뿐 아니라 일본교회의 목회자들이 자기 교회의 젊은이들에게 헌신하도록 도전을 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한국인 선교사들이 일본인 교회의 목회자들에게 용기와 담력을 주고 방법을 가르쳐 주어 젊은이들 전도와 양육에 함께 진력을 다한다면 일본교회의 문제들이 해결될 것이다. 한국교회에서 보냄 받은 선교사들은 현지 일본인들의 교회를 도와가며 선교하는 Win-Win 체제를 실현해 간다면 정말 놀라운 결과를 보게 될 것이다.

 

일곱째, 단기 선교를 극대화 해야 한다.

 한국CCC에서는 뉴라이프2000(새생명 2000)이라는 프로젝트로 1991년 7월에 오사카에 400명의 대학생들을 보내어 33교회에서 현지교회를 섬기게 한 것을 기점으로 하여 2013년 1월까지 22년 동안에 오사카(関西), 후꾸오까(九州), 나고야(東海), 동경(関東), 삿뽀로(北海道), 요꼬하마(横浜), 교오또(京都), 코오베(神戸), 시가(滋賀), 오끼니와(沖縄), 시즈오까(静岡), 군마(群馬), 이바라끼(茨城) 사이따마(琦玉)등 201지역 1,677교회와 인근의 대학들에 연인원 20,113명을 보내어 2주에서 4주씩 전도 봉사케 하였다. 물론 여기 언급한 인원들 가운데는 대학생뿐 아니라 청장년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이 프로젝트는 일본 교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현지교회 목사의 목회계획에 순종하며 종의 자세를 가지고 섬겼다. 1년 내내새 사람이 하나도 오지 아니하고 5년이 가도 세례 받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던 일본 교회가 뉴라이프 단기 선교팀을 받아들여 전도한 결과 어떤 교회는 19명이 세례를 받는 이변이 일어났다. 교회에 와서 예수 믿겠다는 신앙고백을 하면 바로 다음 주일에 세례를 주는 것이 일본 교회이다. 최소한 2, 3명에서 십 7, 8명씩 세례를 받는 일은 일상다반사로 나타났다. 어떤 교회는 5년 동안에 4배가 되기도 하였고 2배가 된 교회도 여러 곳에 많이 생겼다.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목회자들의 사고 방식이 180도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20년 전에는 “일본은 안 된다” 말하던 그들의 입에서 뉴라이프 단기 선교가 시작된 5년째인 95년부터는 “일본도 가능하다. 나도 할 수 있다”라고 바뀐 것이다. 이것은 정말 천지개벽과도 같은 변화이다.

 

 그뿐 아니다. 평신도들의 생각도 판이하게 달라졌다. “전도는 목사나 전도사의 전유물인 줄 알았는데 이 뉴라이프를 통해 모든 신자의 신성한 의무이자 특권이라는 사실을 배웠다” 라고 공공연히 말하는 것을 들을 수가 있었다. 전에는 목회자의 지시여서 마지 못해 따르던 신자들이 이제는 자발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교회의 분위기가 완전히 바뀐 것이다. 그들은 “전도는 행동하는 믿음이다”라는 사실을 체득하고 그대로 실천하여 교회의 부흥성장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92년도 관서지역에 2,020명의 한국대학생들을 초청, 137교회에서 2주에서 4주씩 전도 봉사케 했을 때 일본어를 네 마디 밖에 모르던 여학생이 지나가는 신사에게 말을 걸었다. “곤니찌와(안녕하세요)” 사영리를 내밀면서 “욘데 쿠다사이(읽어주세요)” 다 읽고 나니까 “와까리마스까(아시겠어요?)” 예! 라고 대답하자 “신지나시이(믿으세요)” 라고 말한 후 그를 데리고 자기가 섬기는 교회로 갔다. 그날은 한국 음식을 잘 차려 놓고 그 동안 접촉된 사람들을 초청하여 대접하면서 결신을 재확인시키는 Korean Night였다. 그는 단기 선교팀원들이 유니폼을 입고 율동을 하면서 부르는 “사-산비시요 수쿠이누시 예수니! (자 찬미합시다 구세주 우리 예수께)”라는 찬송을 들었다. 그는 성경이나 찬송가와는 전혀 관계가 없던 완전한 넌 크리스천이었다.

 

 2시간 반 정도의 예배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서부터 문제가 생겼다. 그 찬송 소리가 걸을 때도 운전할 때도 사무를 볼 때도 자리에 누울 때도 끊임없이 주야로 들려오는 것이었다. 이비인후과병원을 두 세 곳에 가서 진찰을 받았으나 이상이 없다고 했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던 그는 다음 주일에 끌려갔던 그 교회에 갔다. 전도하던 한국 대학생들은 이미 다 귀국해버린 후였다.

 그는 담임목사님께 구세주 예수님에 대해서 자세히 가르쳐 달라고 말했다. 그 목사님에게서 4영리를 한 번 더 듣고 신자가 되었다. 그는 다음 주일 부하 6명을 데려다가 등록시켰다. 오사카에서 제일 큰 회사의 공장장이었다. 그가 출석하는 교회는 3년 동안에 35명의 신자가 늘었는데 그 사람이 32명을 전도했다. 그의 이름이 한국 말로 전중(田中)씨인데 일본말로는 다나까이다. 그 이름대로 다나까 씨가 “다 나까” 버린 것이다.

 

 96년도에 단기선교가 시작되어 12년으로 17년째 진행된 북해도 뉴라이프 전도는 그 어느 해보다도 열매가 풍성하였다. 삿뽀로 시내의 M여자대학은 아예 여름의 정기 프로그램에 편입하여 매년 단기 선교팀을 맞이하겠다는 결정을 했다. 에베츠시에 있는 낙농대학은 원래 미선스쿨이었으나 지금은 형식적인 채플만 있어 학점을 이수하기 위해 평일의 채플에 12, 3명씩 참석했는데 단기 선교팀이 가면 보통 2백명 이상이 주 3회씩 모이는 진풍경이 일어났다. 금년에는 무려 5백명 이상이 채플에 참석하는 기적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 뿐이 아니다. 2012년에 참가한 7교회에 일반 시민 이외에 가장 적게 참여한 대학생이 3명에서 5명, 8명, 9명, 10명, 11명이었고, 많게는 62명의 대학생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와 4시간씩 단기선교 팀 멤버들과 함께 예배 드리며 찬양하고 설교 들으며 식사하며 깊은 교제를 나누었다. 그들 가운데 결신자도 많이 생겼다. 이건 정말 놀라운 기적이 아닐 수 없다.

 

 94년도에 시작된 큐우슈(九州) 지역에서는 7월 6일부터 8월 17일까지 42일간 15교회가 참여하여 단기 선교팀과 함께 전도하였다. 대학생들뿐 아니라 국악팀들과 찬양팀 그리고 요리전문가들이 함께 참여함으로써 입체적인 전도가 이루어졌다. 특히 지역 별로 진행되는 축제행사에 참여함으로써 한일문화 교류의 차원에서 매우 좋은 반응을 얻게 되었다. 일종의 문화 전도가 먹혀 들어간 것이다. 태권도 공연을 통한 스포츠 교류, 홈스테이 등을 통한 일본 문화 익히기 등은 한일간의 높은 장벽은 낮추는 데 한 몫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런 단기 선교 사역을 통해 집계된 결신자 만도 수 십 명에 이르고 있다. 지진과 해일로 인한 동일본 지역의 피해와는 거리가 멀리 덜어져 있는 큐우슈지역이지만 이들도 방사능 피해에 대해 많은 염려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들이 가난해진 상태에서 복음을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 외 동경, 요꼬하마, 나고야, 오사까, 교오또, 고오베, 시가, 오끼나와 등에서는 주로 대학생들을 전도하여 많은 열매를 얻게 되었다. 부족한 우리들을 쓰셔서 큰 역사 이루시는 주님의 성호를 찬양한다.

 

 신약성경 요 14:12-14을 보자.“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하나님께서 어느 날 당신께서 말씀으로 창조하신 이 세상의 모든 새들을 모아놓고 날기 대회를 하셨다. 맨 먼저 하나님 발 앞에 앉아 있던 장닭은 정원을 몇 바퀴 돌고 왔다. 다음에는 하나님 어깨에 앉아 있던 참새가 이 집 저 집 건너 집 등 세 집을 돌다가 왔다. 세 번째는 건너 편 나무 가지에 앉아 있던 비둘기가 이 마을 저 마을 건너 마을 등 세 마을을 날아다니다 왔다. 오늘 괜히 날기 대회를 개최했다고 후회 막심하고 계시는 하나님 앞에 독수리가 나타났다. “네 번 째는 제가 날아 보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하나님은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은 채 “그래 날 테면 날아보렴?” 이라고 시큰둥하게 말씀하셨다. 독수리는 후닥닥 공중으로 몇 백 미터 치솟아 오른 후 한 바퀴 비잉 돌더니 해 뜨는 동쪽으로 사라졌다. 다섯 번째, 열 번째, 백 번째, 이백 번째, 삼백 번째, 삼백오십 번째, 맨 나중에는 낮에는 기어 다니고 밤에는 날아다니는 박쥐까지 모든 새의 날기 대회가 끝났을 때는 태양이 서쪽으로 기울어져 온 바다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 때 독수리가 서쪽 하늘에서 나타났다. 놀라신 하나님께서 “너 어디 갔다 이제 오느냐?”라고 묻자 “예, 하나님! 저는 오대양 육대주를 돌고 왔습니다!” 이 말에 감동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상기된 모습으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모든 새들은 다 모여라! 오늘 너희들에게 주는 상급은 날은 만큼이다!” 그리하여 장닭은 정원을, 참새는 세 채의 집을, 비둘기는 세 마을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독수리는 5 대양 6대 주를 자기의 것으로 만들었다.

 

 이 이야기는 오늘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여러분과 우리 모두에 관한 이야기이다. 우리 교회와 우리 자녀들의 이야기이다. 꿈과 비전을 가지고 민족과 세계를 달라고 기도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그 시대의 큰 일들을 맡기신다는 말씀이다.

 시편 81:10b를 보면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고 하였다. 여러분들이 “지구촌 24,000종족 70억 만민 구원을 우리들에게, 우리 교회에 맡기십시오!” 라며 그렇게 해 주실 줄 믿고 기도한다면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렇게 해 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이다. 여러분이 아무리 크게 요청한다 할지라도 우리 주님께서는 “건방지다! 웃기지 말아라! 라는 말씀을 하지 않으신다. 성경전서와 3위 하나님의 대답은 “오냐!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이다.

 

 교회의 청년들 40명 이상을 목사로 양육한 형제단 소속의 나고야교회의 케도 켄지(毛戸健二)목사는 “CCC의 뉴라이프가 일본교회와 손을 잡고 일본복음화에 힘을 쏟아준다면 일본 교회 부흥은 시간문제”라고 말했다. 사변적이고 깊은 지식을 추구하는 일본 교회, 우상과 혼합종교의 온상에서 그 사고의 카테고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듯한 일본 교회가 한국 교회 젊은이들로 구성된 뉴우라이프를 왜 그리도 환영하는가? 그 이유는 오직 한 가지뿐이다. 그것은 복음(예수님의 유일성)에 대한 확신과 단순한 증거이다. 복음은 설명이 아니라 선포이다. 종교인이 전 인구의 212%를 상회하는 일본의 정신풍토 속에서 복음의 단순한 전달은 그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다.

 

 “선교사와 목사의 무덤”이라고 일컬어지는 일본에서, 또 “일본은 전도가 자살한 나라”라고 소문나 있지만 그런 것에 아랑곳 하지 아니하고 언어와 전통의 두꺼운 장벽과 문화화된 종교의 틈바구니에서, 신학훈련도 받지 아니한 풋내기 대학생들이, 때로는 비 내리는 길 바닥에 꿇어앉아 “일본을 복음화시켜 주십시오” 라고 울부짖는 모습으로, 축호전도 하면서 구 일본군 장교출신의 집을 방문하여 초인종을 눌렀을 때 “감히 죠센진(朝鮮人)이 일본에 와서 거리를 활보하고 다니며 일본인의 대문을 두드려?” 라는 호통을 맞으면서도 “오직 예수! 우리 주님의 사랑”으로 열심히 전도하는 모습에서 일본 교회의 성도들은 큰 충격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일본은 안 된다. 일본복음화는 불가능하다” 라는 말은 지상 최대의 거짓말이다. 사탄의 속임수이다. 사탄의 음흉하기 짝이 없는 술책이다. 50평짜리 예배당 안에 쥐 한 마리가 들어왔다고 가정하자. 100명이 이 쥐를 잡으려고 끝이 날카로운 막대기를 두 개씩 가지고 있다. 이 쥐에게는 적이 얼마인가? 200개? 아니다. 두 발까지 합하면 400이다. 쥐가 자기를 죽이려는 400개의 적에게 초점을 맞추면 오금이 저려 멍청히 멈춰 있다가 밟혀 죽을 것이다. 그러나 이 쥐가 살아남을 수 있는 비결은 어느 곳에 구멍이 있는가를 찾는 일이다. 그 구멍이 벽에 있는 지, 피아노 뒤에 있는 지, 창문이 열려 있는 지, 또는 천정에 있는 지, 현관이 열려있는지 구멍 하나만 찾으면 이 쥐는 살 수 있다.

 

 일본복음화를 불가능케 하는 방해물이 8백만 개, 1천만 개 있다 할지라도 한 가지 가능성만 있으면 일본복음화는 가능하다. 그 가능성이 무엇인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일본인들이 구원 받기를 원하고 계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일본인들을 구원 하시려고 독생자까지 주셨는데 누가 일본복음화는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하나님이 OK 하시면 만사는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 일본 교회의 영성은 무섭게 변하고 있다. 태풍전야의 고요함 같은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지도자와 성도들이 기지개를 펴고 자신감을 갖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21세기를 맞이하여 각종 이벤트가 교단 별로, 초교파적으로 계획되고 또 진행되고 있다. 연합 금식기도회가 열리는가 하면 전도대회가 자주 열리고 있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일본 땅에 편만할 날이 조금씩 다가오고 있음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더구나 2011년 3월 11일 14:46분에 동일본에서 일어난 지진과 해일로 일본은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다. 동일본에서 전도하면 10명 가운데서 한 사람이 반응을 보일까 말까 했는데 지금은 7, 8명이 예수를 믿겠다고 눈물 흘리며 다가오고 있다. 일본은 지진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전문가들의 말이 전역에 퍼져있기 때문에 지금 일본은 복음 전도의 최고 좋은 기회를 맞고 있는 것이다.

 

 나가는 말

 일본에는 세계 수십 개국에서 파송된 베테랑급 선교사 2천 여명이 사역하고 있다. 열매가 크게 나타나지 않았을 지라도 그들이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열매를 거둘 때가 되어가고 있다. 복음파(JEA), 은사파(NRA), 교회협의회(NCC-자유주의), 그리고 여기에도 저기에도 속하지 아니한 제 4의 그룹에 속한 분들이 뉴라이프 프로젝트를 도입하고 있다. 우리는 오직 한 권 성경과 참 하나님, 구주와 주님이신 예수님,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성령님 즉 삼위 하나님을 일본인들에게 전해 줘야 한다.

 

 일본의 W. 성결교단 교단 대표인 미네노 목사(요도바시교회)는 한국 교회의 선교사들(자비량 등 평신도 선교사들도 포함하여)에게 당부하고 있다.

첫째, 과거와 현재의 일본 문화, 일본인의 정신구조, 기질에 대해 알아야 한다.

둘째, 파송된 지역의 고유 문화와 정신 구조, 기질을 파악해야 한다.

셋째, 일본 예절을 배우고 일상생활 속에서 그 예절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넷째, 지역사회의 필요를 파악, 주민의 불만과 반감을 사지 않아야 한다.

다섯째, 일본인에게 맞게 복음을 전하려면 일어를 능숙하게 구사해야 한다.

여섯째, 두 나라의 생활 습관의 차이를 잘 이해, 불필요한 마찰을 피해야 한다.

일곱째, 기도 및 선교에 대한 열정과 철저한 신앙훈련 등 한국의 좋은 영적 풍토가 일본 기독교계를 더 많이 자극해 주기를 바란다.

여덟째, 영성 및 지성과 더불어 사랑으로 균형 잡힌 전인적 복음전도가 필요하다. 단순한 열정은 경원시 되고 때로는 무시 당할 수 있다.

아홉째, 모든 연령층과 계층에 다양하게 복음을 제시해야 한다.

열 째, 명망 있는 일본 목회자나 건전 교단, 교회들과 협력관계를 맺어달라. (05.5.30. 국민일보)

 

 세계 선교를 지향하는 한국 교회는 일본을 어떻게 할 것인가?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 일본인의 94%는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들의 후예이다. 일본 사람들의 DNA는 한국인들의 그것과 일치한다. 일본선교는 먼 옛날 우리 조상들의 후예를 복음화하는 일이다. 1천년 전에는 한일 양국 간에 통역 없이 자유롭게 왕래하였다. 지금 일본어는 세종대왕이 한글 창제하기 이전의 우리 나라 이두문자와 비슷하다.

 

 동방의 로마요 근대의 니느웨이며 현대의 아테네라고 일컬어지는 일본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를 정복하고 땅끝까지 가기 위해서 반드시 통과해야만 하는 사마리아 땅이다. 일본인들을 복음화하면 그들이 가진 239개의 모든 나라의 토지와 건물과 현지 통화들은 참으로 놀라운 선교 자원이 될 것이다.

 

 돈이 많이 들고 열매가 쉽게 나타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가장 중요한 일본 선교를 너무도 쉽게 포기해 버리는 한국 교회들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다. 태국에서는 남자 신자 한 사람 얻는데 19년, 여자 신자 한 사람 얻는데 21년 걸렸다고 한다. 달마다 해마다 빈 탕 보고서를 보내면서도 언젠가는 열매를 거둘 것을 바라보면서 20년씩 전도한 선교사도 위대하지만 결신자 보고가 없어도 끝까지 후원한 서양 교회는 더욱 위대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앞으로 빠르면 10년, 늦어도 30년 전후에 일본열도에서 지난 2천년 동안 어떤 나라도 겪지 못했던 영적 부흥이 일어날 것을 환상으로 보고 있다. 일본이 복음화되면 세계만민의 발을 씻는 주님의 몸종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지상 최대의 사랑의 복수가 될 것이다.

 

 일본이 부르고 있다. “와서 도우라”고 손짓하고 있다. 월드컵2002 공동주최로 한일간의 장벽이 무너졌다. 워킹홀리데이 비자 등 양국의 젊은이들이 1년씩 돈벌이해 가면서 공부할 수 있는 이런 분위기는 역사상 일찍이 없었던 일이다. 한류열풍이 강하게 일본 열도를 흔들고 있다. 05년 3월 아이찌현의 만국박람회 이후 우리는 비자 없이 6개월간의 체재가 가능하게 되었다.

 

한일 양국간에 6개월이 아닌 더 긴 기간을 노비자로 자유롭게 왕래할 날이 반드시 오게 될 것이다. 비자 문제가 자유스러워지는 까닭은 한국 교회가 일본복음화를 위해 한 몫을 담당해야 하는 영적인 측면도 배제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일본선교에 뜻을 가진 한국 교회들이 정책적으로 이런 기회를 이용하여 일본인들을 초청하고 또 일본에 단기 선교단을 파송하여 열심히 전도한다면 놀라운 결과를 얻을 것이다.

 

일본에는 무목 교회가 1천 개 이상 있으나 한국에는 교회가 없는 목사들이 지천으로 많다는 말을 듣고 있다. 이런 목회자들 가운데서 일본선교를 위한 헌신자가 나와 한국교회의 뜨거운 기도와 후원을 받아 일본에 온다면 이건 일본복음화에 놀라운 역사를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인들에게서 독도, 위안부, 창씨개명 문제 등 망발, 망언, 망상을 없애는 지름길은 그들의 가슴에 피 묻은 그리스도를 심어 그들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길 밖에 다른 길이 없다. 일본인도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면 우리의 형제자매가 된다. 증오심만으로는 아무 것도 해결할 수 없다. 한일 양국간의 진정한 화해는 복음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 만일 한일 두 나라가 동반하여 세계 선교를 모색한다면 지진과 폭풍 같은 역사가 나타날 것이다.


 



故한경직 목사가 1945년 9월 평안북도 상황을 알린 비밀청원서 발견 | 한국 교회 이야기와 선교 이야기


"소련군에게 무기 넘겨받은 공산주의자들, 라디오 방송국과 지역신문 빼앗고 있다… 반대세력 학살 위협하고 대낮에 총살"

이선민 선임기자

입력 : 2017.08.16 06:07 | 수정 : 2017.08.16 08:30

[오늘의 세상]

故한경직 목사가 1945년 9월 평안북도 상황을 알린 비밀청원서 발견

"청원서 받은 美군정 정치고문… '소련군 활동, 믿을 만한 첫 증언'
소련군, 도시에 들어가면서 현금 강탈·부녀자 강간 일삼아"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우리는 평화와 민주주의를 기대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소련군이 진주해 우리 백성을 약탈하고 많은 비행을 자행하고 있다. 게다가 이 모든 것이 공산당 지배를 예고하고 있다. 우리는 '공산 한국'을 원하지 않는다(We do not want red Korea).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북한 지역은 완전히 황폐질 것이다. (연합군이) 즉각 위원회를 파견해서 상황을 조사해 달라."

    2012  종교·정치·사회 등 광범위하게 20세기 한국사에 큰 자취를 남긴 한경직 목사. 그는 평양과 신의주에서 활동했으며, 1945년 11월 서울로 온 뒤에는 영락교회를 세워서 월남한 서북 개신교 세력의 구심점이 됐다. 사진은 한경직 목사의 삶을 그렸던 2012년 다큐멘터리‘한경직’. /마운틴픽처스

20세기 후반 한국을 대표하는 개신교 지도자인 한경직(1902~2000) 목사가 광복 직후인 1945년 9월 26일 서울의 미군정에 소련군이 점령한 평안북도 일대의 정치 상황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한 영문(英文) 비밀청원서가 발견됐다. 한국기독교사를 연구하는 박명수 서울신학대 교수가 최근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소(NARA)에서 찾아낸 이 문서는 일본이 패망한 뒤 신의주에서 소련군 및 공산당과 마찰을 빚던 한 목사가 서울로 내려와 미군정 당국에 제출한 것이다. 당시 미군정 정치고문이었던 베닝호프는 비밀청원서를 자신의 평가를 담은 보고서와 함께 미국 국무부에 보냈다. 베닝호프는 이 청원서가 "38도선 이북을 점령한 소련군의 정치 활동에 관한 최초의 믿을 만한 목격자 증언"이라고 평가했다. 베닝호프의 보고서는 미 국무성 외교문서집(FRUS)에 수록됐지만 한 목사의 비밀청원서는 포함되지 않아 그동안 전문이 알려지지 않았다.

 윤하영 목사

한경직 목사가 신의주제1교회 담임인 선배 윤하영(1889~1956) 목사와 연명으로 작성한 A4용지 3장 남짓 분량의 청원서에 따르면, 일본이 항복한 다음 날인 8월 16일 신의주의 지도급 인사들은 질서 유지를 담당할 자치위원회를 구성했고, 8월 25일 평안북도 각 시·군 대표들이 참여하는 평북 자치위원회로 확대됐다. 8월 30일 소련군이 신의주에 들어오면서 시태가 급변했다. 소련군은 인민정치위원회를 새로 만들고 급조된 두 개의 소규모 공산주의 조직과 자치위원회가 함께 참여하도록 지시했다. 곧 공산주의자들이 인민정치위원회의 다수를 차지했다.

소련군은 일본군을 무장해제시킨 뒤 그들에게서 빼앗은 무기를 공산주의자들에게 넘겨주었다. 며칠 뒤 조직된 공산당은 법원 건물을 무력으로 차지해 본부로 사용했고 라디오 방송국과 유일한 지역신문을 빼앗아 공산주의 선전 선동을 시작했다. 공장과 농촌 마을에는 공산당 조직이 만들어져 무력으로 공장과 농지를 접수했다. 소련군은 비행기로 선전 유인물을 살포하면서 공산당을 지원했다.

이런 사태 전개에 놀란 개신교 지도자들은 '기독교사회민주당'을 만들었다. 이를 알게 된 공산당은 그들이 공식 활동을 하면 소련군이 대량 학살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한경직 목사는 신의주에서 벌어진 테러 현장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9월 16일 대낮에 거리에서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발언을 한 사람이 공산당원인 경찰의 총을 맞고 죽었다. 살인자는 풀려났고, 평상시처럼 일하고 있다. 사회민주당 지도자들이 이에 항의하자, 다음 날 경찰이 몰려와 체포했다."

비밀청원서는 "사람들은 압도적 다수가 공산주의에 반대하지만 공포와 테러 분위기에 사로잡혔고,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알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공산주의자를 제외하고는 살 수 없게 될 것이다. 소련군은 철수하기 전 북한 전역을 공산화하려고 결심한 것이 분명하다"고 적었다.

     1945 9 26               한경직 목사가 윤하영 목사와 함께 1945년 9월 26일 미군정에 제출한 비밀청원서(왼쪽). 북한에 소련군이 진주한 뒤 스탈린과 김일성의 대형 사진을 들고 행진하는 평양 주민들(오른쪽). /박명수 교수 제공·조선일보 DB

이어 소련군의 비행이 "상상을 넘어선다"며 자세히 설명한다. 소련군은 도시에 들어가면 먼저 은행에 가서 현금을 강탈한다고 했다. "신의주에서 소련군은 (은행에서) 120만엔을 가져갔다. 가정집에 침입해 시계부터 여성복까지 귀중품을 약탈하고 부녀자를 강간한 사례는 셀 수조차 없이 많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가는 사람은 38선을 넘으면서 소련군에게 약탈과 강간을 당한다고 폭로했다.

1932년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유학에서 돌아와 신의주 제2교회에서 목회하던 한경직 목사는 일제 말 교회를 사임한 뒤 고아원과 양로원을 설립해 운영했다. 광복 후 신의주 자치위원회 부위원장, 기독교사회민주당 부위원장으로 활동한 한 목사는 비밀청원서를 제출한 뒤 평양으로 돌아갔지만 10월 말 윤하영 목사와 함께 북한을 탈출했다. 그가 북한을 떠난 뒤 용암포 지역의 기독교사회민주당 창립 모임을 공산당이 습격하자 신의주 일대의 개신교 학생이 중심이 돼 저항한 사건이 신의주학생의거이다.

박명수 교수는 "이 비밀청원서는 평안북도 개신교 지도자들이 소련군 진주 후 한 달간 직접 목격한 증언이라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아 미군정이 소련군과의 관계를 재고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8/16/2017081600252.html





구약 각 책의 개론(시작 수요성경여행 01-05-2022 /


창세기(創世記)

1. 표제

유대인들은 히브리어 성경의 첫 글자를 따서 창세기를 “브레시트”(bereshith, 태초에)라고 부른다.
그러나 유대인의 탈무드에는 이 책을 “세계 창조의 책”이라고 하였다.
“창세기”(創世記:  Genesis)라는 이름은 70인역에서 번역한 것으로써, 헬라어 “게네시스”는 “기원” 또는 “근원”을 뜻하는 단어이다.
이것이 70인역에 처음으로 사용될 때, 그 의도는 그 책의 내용을 암시하기 위한 것이다.
부제로 자주 붙어다니는 “모세의 첫번째 책”이란 명칭은 히브리어 성경의 원본에 처음부터 붙어있던 것이 아니라, 여러 세기가 지난 뒤에 덧붙여진 것이다.

2. 저자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은 공히 출애굽 당시의 히브리인들의 위대한 입법자요, 지도자인 모세를 창세기의 저자로 간주해 왔다.
이러한 확신은 기독교 초기에 몇몇 이교적 반대자들에 의하여 약간의 도전을 받기는 하였으나, 18세기 중엽까지는 유대인이나 그리스도인 사이에서 한 번도 심각하게 의심된 적이 없었다.
200여년 전부터 하나의 새로운 사조가 시작되어, 인간의 모든 사고 영역 가운데서 전통적인 신앙과 견해들은 일단 의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미지의 영역에서 새로운 것들을 발견하고 발명해 냄으로써 이 세상의 생활의 방법을 많이 변경시켜 놓았다.
이와 같은 탐구 또는 취조(取調) 정신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비평적인 성질을 가진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의 기초로서의 성서의 확실성을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창세기는 근대에 있어서 비평적인 시험을 당한 첫 책이 되었으며 이러한 시험은 성경의 고등 비평 시대의 출발점이 되었다. 1753년에 프랑스의 궁중 의사 장 아스트뤼크(Jean Astruc)는‘추측’(推測)이라는 책을 출판하였는데, 거기서 그는 창세기에 나타나는 신격에 대한 각기 다른 이름들이 발견된 것을 지적하고, 이것은 창세기가 여러가지 자료들의 수집임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아스트뤼크는 모세가 바로 그 자료들의 수집가요, 이 책의 편찬자라고 추측하였으나, 그의 후계자들은 이윽고 모세를 창세기의 편집자로 단정하였다. 비평적인 마음을 가진 신학자들은 창세기의 가정된 자료들을 각기 분리하고 그것들을 서로 다른 저자별로 분류하거나 적어도 그 자료들이 형성, 수집, 변화, 편집되어 마침내는 하나의 책으로 묶여졌을 것으로 추측되는 시기별로 자료들을 분류하기 위하여 근 200년 동안이나 애써 왔다. 이와 같은 비평적인 견해들을 추종하는 여러 학자들은 하나의 커다란 원칙에 있어서 의견 일치를 보았는데, 그것은 즉 이 책의 가치와 저자와 유래된 시기 등이 각각 다른 많은 문서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 자체 내에서도 어느 것이 어느 시기에 해당되는지에 대하여 광범위한 의견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엄청난 견해 차이는 비평적인 학자들의 가정(假定)의 기초가 얼마나 불확실하고 불건전한 것인지를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많은 비평적인 논쟁들의 거짓됨이 지난 100년간의 고고학적 발견들에 의하여 드러났다. 비평자들은 그들의 이론과 주장을 끊임없이 바꾸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중의 다수는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 창세기의 저자가 모세임을 아직도 부인하고 있다. 그들이 내세우는 이유들 중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의 각기 다른 이름 세 가지가 사용된 것은 이 책의 저자가 둘 이상임을 가리킨다. 특히 그 이름들이 각기 특정한 부분에 두드러지게 자주 사용된 것은 그 부분의 저자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야훼”(Yahweh) 곧 “여호와”(Jehovah)라는 이름이 사용되는 부분의 저자를 비평적인 학자들은 “야비스트”(Jahvist)라고 일컫고, “엘로힘”(Elohim) 곧 “하나님”이란 칭호가 주로 사용되는 부분의 저자를 “엘로히스트”(Elohist)라고 일컫는다. 그 외에도 창세기의 내용을 기록한 고대의 저자들 중에는 제사장 저자도 있었고, 또 그 모든 자료들을 편집한 편집자도 있었을 것이다.
(2) 이 책에 포함된 이야기들이 여러 번 반복된 것은, 이미 존재하던 평행 자료들을 후대의 편집자가 한데 묶어 전체적인 하나의 이야기로 엮었으나, 근원이 다른 자료들을 사용한 사실을 숨기지 못한 결과이다.
(3) 창세기의 이야기들 가운데 반영된 여건들은 시간적으로 그 당시와 부합하지 않고 오히려 휠씬 후기와 부합한다.
(4) 지명(地名)을 사용함에 있어서, 초기에는 그렇게 불리우지 않은 지방들이 후기에 사용된 이름으로 일컬어졌다.
(5) 고대 바벨론에 존재하던 창조, 홍수, 그리고 부조들의 생활에 관한 전설들이 성경 기록과 매우 흡사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현대 신학자들은 히브리인 저자들이 포로 기간 동안에 이러한 설화들을 바빌로니아인들에게서 빌어 와서 자기들이 믿는 일신론적인 형태로 새로 편집했다고 주장한다. 보수적인 그리스도인은 다음과 같은 이유들로써 이러한 견해들을 배격한다.
(1) 하나님, 주, 그리고 여호와 등의 성호(聖號)들은 히브리어 성경 전체를 통하여 별로 차별없이 사용되었으며, 비평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저자가 다른 사실을 나타내는 증거로 볼 수 없다. 70인역과 대부분의 고대 히브리어 성경 사본들, 그리고 근래에 발견된 이사야 두루마리 등에서는 어느 한 사본에 나타나는 “하나님”이란 칭호가 그 같은 구절의 다른 사본에서는 “주” 또는 “여호와”로 되어 있고, 또한 그 반대로 된 것도 찾아볼 수 있다.
(2) 설화들에 나타나는 반복은 그것이 바로 저자가 다른 여러 자료들을 사용한 증거라고는 할 수 없다. 모세의 책들의 통일성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허다한 성서 이외의 예증들로써 동일한 저자가 기록한 고대의 문학작품 및 심지어 현대의 작품들 중에서도 유사한 반복들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3) 고대의 역사와 여건들에 관한 지식이 점차로 증가함에 따라서 창세기의 저자가 그 당시의 형편에 대하여 정통한 정보를 갖고 있었으며, 따라서 부조들의 생활에 관한 서술은 그들의 시대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사실이 계속 드러나고 있다.
(4) 지명들은 경우에 따라서 독자들의 이해를 위하여 복사자(複寫者)들에 의하여 후대의 이름으로 대치되어 왔다.
(5) 바빌로니아인들이 히브리인들의 기록과 어느 정도 흡사한 전설들을 가졌다는 사실이 바로 한 민족이 다른 민족에게서 빌어왔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 오히려 그 두 기록들에 대한 공통적인 근원이 있다고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 따라서 창세기의 영감된 기록은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신 완전하고도 순수한 형태의 것이요, 바빌로니아인의 기록들은 동일한 사건들을 저열한 이교적인 배경 속에서 이야기한 것이다.
고등 비평가들이 그들의 이론을 내세우기 위하여 주장하는 것들을 구태여 논박하려고 대항할 필요는 없으나, 모세가 창세기의 저자임을 믿을 수 있는 증거를 포착하는 일은 퍽 중요하다.
출애굽기의 저자가 창세기의 저자였음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오경(五經)의 둘째 책은 첫째 책의 연속이요, 동일한 정신과 의도가 아주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출애굽기의 저자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그 책을 “모세의 책”(막 12:26)이라고 일컬으셨을 때에 분명하게 확증되었으므로, 그에 선행하는 책인 창세기 또한 모세의 기록인 것은 명백하다. 애굽인의 단어와 표현들의 사용, 그리고 요셉의 역사에 나타난 애굽인의 생활과 관습에 정통함 등은 모세가 받은 교육 및 경험과 조화를 이룬다. 창세기가 모세의 저술이라는 증거가 오경의 나머지 책들이 가진 증거보다는 덜 명백하고 덜 직접적이긴 하지만, 모세 오경에 시종 공통적인 언어의 독특성들과 신약의 증언은 다름아닌 모세가 성령의 영감하에 이 책을 기록했음을 보여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창세기로부터 몇 구절을 인용하신 사실은 그분이 그 책을 성서의 일부로 간주하신 분명한 증거가 된다. 창 1:27; 2:24을 인용하시면서 예수께서는 “(너희가) 읽지 못하였느냐”라는 공식적인 언사를 사용하셨다(마 19:4, 5).이것은 여기에 인용한 구절들이 여전히 구속력과 타당성을 가지는 진리를 내포하고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예: 이혼에 관한 바리새인들의 질문과 예수의 대답(막 10:2-9; 창 1:27; 2:24).
다른 여러 경우에 있어서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창세기에만 묘사된 사건들을 언급하심으로써 친히 이 책을 하나의 정확한 역사적인 기록으로 간주하셨음을 보여 주셨다(눅 17:26-29; 요 8:37 등).
또한 사도들의 기록들 가운데 발견되는 수많은 창세기의 인용구들은 사도들이 모세를 그 책의 저자로 확신한 사실과 그 책이 영감으로 기록된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롬 4:17; 갈 3:8; 4:30; 히 4:4; 약 2:23).
이러한 증거에 비춰볼 때, 그리스도인은 모세가 창세기의 저자임을 마음놓고 믿어도 좋다.

3. 역사적 배경
창세기는 B.C. 1500년경, 히브리인들이 아직도 애굽의 속박하에 있던 동안에 기록되었다. 이 책에는 실로 많은 세기들에 뻗쳐 통하는 세계 역사의 소묘(素描: sketch)가 포함되어 있다. 창세기의 초반은 우리가 역사에 관하여 상례적으로 생각하는 그러한 역사적인 배경 속에 넣어질 수가 없다. 우리는 모세가 기록한 것 이외에 홍수 이전의 세계의 역사를 아무것도 갖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화석들의 묵묵(默默)하고도 때때로 모호한 증언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고고학적인 기록들을 갖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홍수 이후에는 경우가 다르다. 고고학자들의 발굴은 창세기의 후반이 차지하는 기간 동안의 사람들과 그들의 관습과 정부의 형태 등에 관한 많은 기록들을 밝혀 내었다. 예컨대, 아브라함의 시대는 이제 상당히 잘 알 수 있게 되었으며, 이스라엘의 속박 기간 동안의 애굽의 역사는 비교적 정확하게 재구성될 수 있다. 이 시대 동안, 즉 아브라함으로부터 출애굽까지의 시대에는 고등한 문명이 만개(滿開)해 있었으며 특히 메소포타미아의 계곡과 나일 강의 제방 연변에는 더욱 그러했다. 북방에서는 헷 족속이 세력을 얻고 있었으며, 팔레스틴에는 군소(群小) 왕들의 지도하에 호전적인 민족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전반적인 관습은 이 모든 민족들의 암흑한 이교주의를 반영하고 있었다.
창세기의 부조들과 하부 및 상부 메소포타미아의 셈 족속들 사이에는 강한 인종적인 유대(紐帶)가 잠재해 있었다. 싯딤 골짜기에서의 왕들의 싸움(14장), 평지에 있는 도성들의 멸망(18, 19장), 그리고 전대미문(前代未聞)의 대기근을 겪는 동안 애굽의 백성들을 보존한 일(41장)과 같은 초기의 큼직한 사건들 가운데서 부조들이 감당한 역할들이 소상하게 묘사되어 있다. 창세기의 인물들은 목자와 전사(戰士)로, 도회지 거주자와 광야의 유목민으로, 정치가와 망명객 등으로 나타난다. 그들의 경험을 기록한 이야기들은 그 책을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아득한 고대의 열강(列强)들과 특히 히브리인들이 이따금씩 접촉하던 군소 백성들의 형편이 어떠했는지를 느끼게 한다.
애굽과 메소포타미아에 일어났던 위대한 문명들에 관해서는 창세기에 기록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에 대한 증거는 부조들의 경험 가운데서 강하게 느낄 수가 있다. 하나님의 백성은 정치적 혹은 사회적 진공 상태에 있는 화려한 격리 지대에 살지 않았다. 그들은 열국이 어울려 있는 사회의 부분이었으며, 그들의 문명과 문화 역시 주위의 다른 백성들의 그것과 크게 다른 것이 없었다. 다른 것이라고는 종교의 차이뿐이었다. 그들은 여호와의 진정한 경배자들 가운데서 남아 있는 가장 중요한 사람들이었으며, 따라서 영감을 받은 저자 모세가 염두에 두고 있는 세계의 중심부를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명백한 관찰과 인식은 자연적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유도하게 된다. 모세가 이 책을 기록한 주된 목적은 무엇이었던가?

4. 주제
창세기의 주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충성스런 작은 무리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취급하시는지에 관한 서술이요, 둘째는 하나님을 떠나서 그분의 교훈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 빠진 타락의 심연을 묘사한 것이다. 창세기는 인간에게 허락된 최초의 영원한 계시이며, 신령한 기록이다.
이 책은 또한 교의적(敎義的)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거기에는 이 세계와 그 안에 있는 삼라만상의 창조, 죄가 들어온 경로, 그리고 하나님의 구속의 허락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은 인간이 자유스러운 도덕적 존재요, 자유 의지의 소유자임을 가르쳐 주고,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것이 인간의 모든 재화(災禍)의 근원임을 가르쳐 준다. 또한 이 책에는 휴식과 예배의 날로서의 거룩한 안식일(安息日)을 준수해야 할 것과 결혼의 신성성과 가정 제도의 수립, 그리고 순종에 대한 보상과 범죄에 대한 형벌 등에 관한 교훈들이 주어져 있다.
이 책은 흥미있는 문체로 기록되어 있어서 젊은이들의 상상력에 호소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 속에 담긴 숭고한 도덕적인 주제들은 성인들을 위해서도 정신적 양식이 되며, 만인을 위한 교훈이 된다. 그리스도인이면 어느 누구도 그것의 연구를 게을리할 수 없고, 하나님의 자녀이면 누구나 그 속에서 광채를 발하는 모범적인 인물들을 본받아야 하는 책, 그 책이 바로 창세기이다.

5. 개요
Ⅰ. 천지 창조로부터 아브라함에 이르기까지 1:1-11:26
    1. 천지 창조 1:1-2:25
       (1) 창조의 6일간 1:1-31
       (2) 안식일을 제정함 2:1-3
       (3) 인간의 창조와 에덴 동산에 관한 세부적 설명 2:4-25
    2. 타락의 역사와 그에 따른 결과 3:1-5:32
       (1) 유혹과 타락 3:1-8
       (2) 에덴에서 추방당함 3:9-24
       (3) 가인과 아벨 4:1-15
       (4) 가인의 후예들 4:16-24
       (5) 아담으로부터 노아에 이르기까지 4:25-5:32
    3. 대홍수 6:1-9:17
       (1) 대홍수 이전의 타락상 6:1-13
       (2) 방주 건조 6:14-22
       (3) 홍수에 관한 이야기 7:1-8:14
       (4) 노아의 언약 8:15-9:17
    4. 노아로부터 아브라함에 이르기까지 9:18-11:26
       (1) 노아의 아들들의 운명 9:18-29
       (2) 국가 목록 10:1-32
       (3) 바벨에서의 언어 혼란 11:1-9
       (4) 셈으로부터 아브라함에 이르기까지의 세대 11:10-26
Ⅱ. 부조 아브라함과 이삭 11:27-26:35
    1. 아브람 11:27-16:16
       (1) 소명과 가나안으로의 여행 11:27-12:9
       (2) 애굽에서의 경험 12:10-20
       (3) 롯과의 이별 13:1-18
       (4) 롯을 구출하고 멜기세덱을 만남 14:1-24
       (5) 하나님과의 언약 15:1-21
       (6) 하갈과의 결혼, 이스마엘의 출생 16:1-16
    2. 아브라함 17:1-25:18
       (1) 언약의 갱신, 아브라함이 할례를 시작함 17:1-27
       (2) 아브라함과 천사들, 소돔과 인접도시들의 멸망 18:1-19:38
       (3) 그랄에서의 체험, 이삭의 출생, 이스마엘 축출 20:1-21:34
       (4) 아브라함의 극심한 시험 22:1-24
       (5) 사라의 죽음과 장례 23:1-20
       (6) 이삭이 리브가와 결혼함 24:1-67
       (7) 아브라함의 후예들 25:1-18
    3. 이삭 25:19-26:35
       (1) 이삭의 아들들 25:19-34
       (2) 이삭과 그랄의 아비멜렉 26:1-35
Ⅲ. 부조 야곱 27:1-36:43
    1. 찬탈자 야곱 27:1-31:55
       (1) 야곱이 속임수로 축복을 받음 27:1-46
       (2) 야곱의 도망과 벧엘에서의 이상 28:1-22
       (3) 야곱이 자기 아내들을 위하여 봉사함, 가족을 형성함 29:1-30:43
       (4) 야곱이 라반으로부터 도망함 31:1-55
    2. 이스라엘, 하나님과 겨루어 이김 32:1-36:43
       (1) 야곱이 가나안으로 돌아옴, 브니엘의 체험 32:1-33:20
       (2) 세겜에서의 수치, 가족 문제 34:1-35:29
       (3) 에서의 후예들 36:1-43
Ⅳ. 구원자 요셉 37:1-50:26
    1. 요셉과 그의 형제들 37:1-36
    2. 유다의 타락 38:1-30
    3. 요셉이 원칙 위에 굳게 섬 39:1-40:23
    4. 요셉이 애굽을 구원함 41:1-57
    5. 요셉과 그의 형제들 42:1-45:28
    6. 야곱이 애굽으로 감 46:1-47:31
    7. 야곱의 축복 48:1-49:33
    8. 야곱과 요셉의 죽음 50:1-26








출애급기(出埃及記) Exdous

出 날 출, 埃 티끌 애, 及 미칠 급, 記 기록할 기


대제사장 위임식 순서 /
 

위임식의 순서를 살펴보면

1. 위임식에 소요될 제물을 준비하고(1~3)
2. 물로써 몸을 청결케 하고(4)
3. 아론에게 성의를 입히며(5~6)
4. 관유를 그 머리에 바르고(7)
5. 아론의 아들들에게 옷을 입히고(8~9)
6. 속죄제, 번제, 화목제 등의 제사를 드렸습니다(10~34).








출애굽기의 기원과 성격

출애굽기라는 명칭은 구약성서의 헬라어 역본인 칠십인역(LXX)에서 나온 것이다. 본래 맛소라 텍스트(MT)는 "그리고 이름은 이러하니라"는 말로 책이름이 붙여져 있었다. 그러나 칠십인역(LXX)과 벌게이트(Vulgate)역 등 대부분의 영역본들은 '길을 떠나다' (ex + odos)라는 의미를 담아 'Exodus'라 부르고 있다. 한글 개역은 '출애굽기'라고 보다 구체적으로 표현한다. 그러나 출애굽기는 애굽 탈출기라기보다는 오히려 성막 건축기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스라엘이 애굽에 거주할 당시의 애굽의 역사를 족장들의 행적과 관련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출애굽기는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야기를 신학적으로 조명한 이스라엘의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출애굽기는 모세의 이야기와 이스라엘 신앙의 기초인 유월절 신앙과 시내산에서의 전통 그리고 성막에 관한 전승을 이어 주는 기록으로서 이스라엘의 구원 개념과 역사 이해를 살펴볼 수 있는 정경이다(Canon).


내용 분해

 

Ⅰ. 애굽에서의 이스라엘 민족(1:1-12:36)

  1. 애굽에서의 노예 생활(1:1-22)

  2. 하나님께서 구원자 모세를 택함(2:1-4:31)

  3.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킴(5:1-12:36)

Ⅱ.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민족(12:37-18:27)

  1. 출애굽과 애굽 군대의 추격(12:37-18:27)

  2. 시내산에 도착(15:22-17:16)

  3. 이드로의 방문(18:1-27)

Ⅲ. 시내산에서의 이스라엘 민족(19:1-40:38)

  1. 율법을 주심(19:1-24:18)

  2. 성막의 제도(25:1-31:18)

  3. 율법을 어긴 백성들(32:1-34:35)

  4. 성막의 건축(35:1-40:38)














레위기

 

1. 저자

레위기서의 저자는 모세오경의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 모세이다.
레위기가 모세의 저작이 아니라는 일부 본문 비평가들의 주장도 있었지만 다음과 같은 주장에 의해 반박되었다.

첫째, 레위기 자첵의 증거이다.

레위기에서는 56번이나 "여호와께서 모세이게 일러 가라사대"(레 1:1; 레 4:1; 레 5:14; 레 6:1)라는 말이 사용되었다.
이는 레위기가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를 받은 모세의 저작임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예수님께서 친히 레위기가 모세의 저작임을 증거하셨다는 점이다.

마태복음 8:4에 예수님께서는 문둥병자를 고치신 후에 그에게 명하시기를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고 하심으로 레위기에 나오는 문둥병에 관한 규례가 모세의 저작임을 증거하셨다.

셋째, 사도들의 증거이다.

누가는 2:22에서 '결례의 법'을 '모세의 법'이라 증거함으로 레위기의 결례가 모세의 저작임을 증거하였다.
또한 히브리서 기자 역시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히 8:5)라고 증거함으로 레위기의 저작설에 관한 논쟁을 결정지었다.

따라서 레위기는 본문 비평가들의 주장대로 여러 문서의 편집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를 모세가 저술한 직접적인 저작이다.

2. 기록 연대

레위기의 기록 연대는 레위기가 기록될 당시에 이스라엘의 머물렀던 장소와 출 40:17과 민 10:17을 비교해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먼저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레위기의 율법을 계시받았을 때 머물렀던 장소는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십계명을 받고 15개월 동안 머물렀던 시내산 근처의 시내 광야였다(레 7:38; 레 25:1; 레 26:46; 레 27:34).

이러한 사실은 레위기서가 이스라엘이 시내 광야에 도달한 후로부터 그들이 거기서 떠날 때까지의 사이에 기록된 것임을 보여 준다. 따라서 출애굽의 연대를 주전 1445년으로 추정할 때 레위기의 기록 연대는 이스라엘이 시내 광야에 도달한 후로부터 시내 광야를 떠날 때까지의 기간인 주전 1445-1444사이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혹자는 이와 달리 레위기의 기록연대를 '모세가 죽기 직전에 자신의 모든 기록을 완성했다'는 신 31:24의 말씀을 근거하여 모세의 광야 40년 생활의 마지막 부분인 주전 1440년경에 기록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후 40넌 광야 생활을 지내고 나서 다시 기억하여 썼다는 무리가 있다.
그리고 신명기 31:24의 말씀은 모세가 그의 생애를 마치는 그 순간까지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모든 계시의 기록을 완성하였다는 말이지, 결코 레위기만의 완성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신빙성이 결여된다.

3. 기록 목적

레위기는 조직된 하나님의 백성을 종교적·사회적으로 통치하는 데 필요한 율법등을 포함하고 있는 중요한 책이다.
특히 시내산에서 정식으로 신정 국가로 조직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새로운 언약 관계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율법과 언약을 지키기 위해서 여러 가지 규례를 제시한 책이 레위기인 것이다.
즉 레위기를 통해 기본 율법이 주어졌으며, 언약이 비준되었고, 성막이 설립된 것이다. 따라서 레위기의 기록 목적을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역사적인 기록 목적으로 선택되고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이 살아가야 할 거룩한 삶의 방법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레위기는 먼저 그들이 어떻게 해야 정결해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을 가르쳐 주며(레 1-17장),
그 후에 그들이 거룩한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구체적인 삶의 방향을 제시하여 준다(레 18-27장).

둘째, 교리적인 목적으로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오직 제사장에 의해 시행되는 희생 제사의 규례를 통해서만이 가능함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죄인들에게 자신들의 죄가 깨끗함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중보의 사역과 희생의 사역이 있어야 함을 깨닫게 한다.
레위기는 이러한 교리적인 목적을 위해서 제사와 절기의 상세한 규례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희생 제물의 선택과 잡는 방법 그리고 제사를 집행하는 제사장의 정결 의식 등을 가르쳐 준다.

셋째, 기독론적인 목적으로 하나님과 죄인 사이의 완전한 희생 제물 그리고 속죄 제물과 화목 제물인 동시에 영원한 대제사장인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이다.

즉 레위기는 여러 가지 희생 제물과 지켜야 할 규례 그리고 대제사장을 통해 신약에 오실 인류의 대속주이며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암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처럼 레위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야 할 단순한 제사 규례에 대해서 포괄적으로 제시한 책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대제사장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속죄양의 피가 필요함을 예표해 주고 있다.

4. 레위기의 특징

레위기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지루할 정도의 세밀한 기록과 동일한 내용의 반복된 기록이다.
예를 들면 번제에 대한 내용이 레 1:3-17에 기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레 6:8-13에 또다시 반복 언급되었으며,
소제는 레 2:1-16레 6:14-23,
화목제는 레 3:1-17레 7:11-34등으로 여러 차례 반복되어 기록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반복적 기록뿐만 아니라 제사 규례에 대한 상세한 기록(레 1-7장)과 절기 준수의 자세한 기록(레 23장),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에 관한 구별(레 11장) 그리고 문둥병과 그 밖의 여러 가지 정결의식에 관한 규례(레 12-15장) 등 거의 모든 내용이 상세하며 반복되게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특이한 점은 이러한 많은 반복적 기록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내용의 반복은 거의 없고 모든 기록이 새롭고 기억될 만한 내용으로 일관되어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레위기의 특징은 여러 율법과 규례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통해 이후에 기록되는 모든 역사서와 지혜서 그리고 신약에서 파생되는 많은 문제들의 해결을 위한 열쇠의 역할을 한다는 점에 있다.

또한 이러한 반복적인 의미 전달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끊임없는 구원의 섭리와 인도하심을 나타내는 중요한 특징을 보여 주고 있다.

1. 레위기의 주제

레위기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 중에 하나가 '거룩'이다.
이 단어는 무려 90번이나 나오고 있다(레 11:44, 45; 레 19:3),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레 11:45)라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너희 또한 거룩한 백성이 되라는 요구와 명령이 주제가 된다. 하나님은 당신의 택한 백성들에게 계속적으로 요구하고 계신다. 거룩은 성도와 불신자를 구별해 주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인의 생활 속에서 표출되어야 할 신앙의 모습이다(스 6:10; 겔 20:41; 고후 2:15).  

2. 레위기와 출애굽기의 관계

레위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 광야에 거하고 있을 때에 기록되었다(레 7:38; 레 25:1).
레위기가 시내 광야에서 기록된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율법을 주시기 전에 약속하신 말씀이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약속은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 19:6)는 것이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스라엘은 그 약속이 실현되기까지 시내 광야에 거할 수밖에 없었다.
즉 레위기에서는 제사장 나라가 되는 규례와 거룩한 백성이 되는 규례가 기록되었기에, 이 규례가 주어진 후에야 비로소 그들이 시내 광야를 떠났던 것이다(민 10:11).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레위기의 배경이 되는 장소가 출애굽기와 동일한 시내 광야였으며, 그 기록 연대 역시 출애굽기와 거의 동시대의 기록임을 보여 주어서 출애굽기와 레위기의 불가분적 관계를 쉽게 느낄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출애굽기와 레위기의 관계가 매우 밀접하다고 해서 레위기를 출애굽기의 보충적 설명 또는 출애굽기의 부록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비록 레위기의 배경이 출애굽기와 같은 장소, 시기라 할지라도 각각 분명한 목적을 지닌 독립된 정경이다.
즉 출애굽기가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을 말해 주는 책이라면, 레위기는 구원받은 이스라엘의 '성화'를 말해 준다.
그리고 출애굽기가 구원의 시작을 '하나님의 의롭다 하시는 선언'으로 해석한다면 레위기는 구원의 완성을 '의롭다 하심을 입은 자들을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으로 해석한다.
그러므로 출애굽기와 레위기는 가장 밀접하고 비슷한 성격을 지닌 정경이지만, 부록이나 보충된 것이 아닌 서로 독립된 정경이다.

3. 레위기의 중심 사상

레위기는 희생 제사의 규례와 제사장이 지켜야 할 성결, 정결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의 선택등이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레위기의 중심 사상은 성결(Holi-ness), 희생(Sacrifice) 그리고 속죄(Atonememt)로 요약할 수 있다.

1) 성결

하나님은 그의 백성의 완전한 순종을 원하고 계신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성결'이다. 성결이란 말은 '분리하다, 잘라내다'의 의미를 가진 히브리어 vdq(카도쉬)에서 유래된 말이다. 이는 음식과 제사 의식의 규례들이 이방 다른 민족들과 구분하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세상으로부터(이방 민족, 속된 것)분리된 성결되고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함을 시사한다.

2) 희생

이스라엘 민족의 제사는 '회생 제물'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다. 희생의 본래의 의미는 '선물'이란 뜻을 가진, 즉 여호와께 드리는 사랑과 감사의 표시였다. 그러나 피를 흐리는 희생은 단순한 선물 이상의 의미를 가진 자신의 희생을 뜻한다. 제사를 드리는 자는 희생 제물의 피가 있어야 하는데, 자신의 생명 대신 상징적으로 짐승의 피를 가져와 바쳤다. 즉 흠 없고 순전한 제물의 생명이 죄 많고 타락한 인간을 대신하여 희생되어진 것이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는 예수그리스도가 희생 제물이 되심으로 구원의 완성을 이루셨다.

3)  속죄

레위기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16장에 '속죄일에 관한 율법'에서 찾아볼 수 있다. 속죄의 궁긍적 의미는 죄로 인한 저주와 악을 제거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을 속죄하기 위해, 대신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고 죄를 전가시킨 후 아사셀이 있는 광야에 보냈다. 이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지른 모든 죄악이 깨끗하게 씻음 받았다. 이 속죄 행위는 우리의 모든 죄가 그리스도에게 맡겨지고 그가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심을 재현한 것이다. 그분은 우리의 모든 죄를 도말하시고 깨끗하게 하셨다. 따라서 레위기의 속죄가 없었다면 십자가의 의미는 명확하게 이해될 수 없었을 것이다.

4. 레위기의 구조와 내용

레위기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즉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이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지켜야 할 제사법과 각종 정결 예법에 관련된 의식법에 관한 내용이 1장에서부터 17까지에서 나오고

18장에서부터 언약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삶에서 이방 나라 사람들과 구별된 삶을 살게 하기 위한 지침으로서 여러 가지 도덕법에 속한 규범들과 연중 절기, 안식년 제도, 토지 등에 관한 규례들이 나오고 있다.

 26장에서는 순종에 대한 축복과 불순종에 대한 징벌(저주)에 대해 기록되 있다.  

1-17장 :  제사와 정결 의식을 통한 거룩 / 의식법들
18-25장 : 삶을 통한 거룩의 추구 /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26-27장 : 순종에 따른 축복과 불순종에 대한 징벌과 저주


민수기(民數記)


1. 민수기 주제

민수기는 영어로 Numbers라고 표현합니다.
'백성의 수를 센다'라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실제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광야에서'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의 제목은 내용의 가장 처음 단어를 제목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민수기의 주된 내용은 인구조사입니다.
또한 다른 한편으로는 지리적 배경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40년동안 생활하면서 일어나는 사건을 다루고 있는데, 광야 생활의 목적은 무엇인지, 이집트를 떠나왔던 1세대 백성들과 새로운 땅으로 들어가는 2세대 백성들의 세대교체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 민수기 개관

민수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 광야를 출발하여 모압평지를 지나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장소는 크게 시내 광야, 모압 평지로 구분됩니다.
또한 1세대와 2세대 간의 세대 구분에 따라 전반부와 후반부로 내용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민수기에서는 인구조사가 두번 진행됩니다.
1장과 26장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전쟁에 나갈 수 있는 인구를 조사합니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수치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이는 측정한 기준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1장에서 말하고 있는 인구조사는 이집트를 떠난 이후 남자들의 숫자입니다.
반면 26장에서의 인구조사는 그들의 자손들인 출애굽 2세대들을 뜻합니다.
따라서 두 차례에 걸친 인구수 조사를 통해 세대교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민수기 1장부터 25장까지는 출애굽을 했던 1세대의 이야기입니다.
인구조사를 한 후 전쟁 준비를 위해 진영 배치를 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레위지파를 중심으로 하며, 다양한 법이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광야를 지나게 되면서 예배와 하나님과의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광야 생활에 불만족했던 1세대들은 가나안 땅을 미리 보고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로 인해 약속을 믿었던 두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새로운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게 됩니다. 

26장에서 두번째 인구조사가 진행된 뒤에는 2세대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위한 준비를 합니다. 그리고 모압 평지에서 미래를 준비하게 됩니다.


3. 민수기 읽는방법

민수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총 3가지를 중심적으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1. 민수기는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2. 민수기는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3. 민수기는 약속의 땅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민수기에서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살아남기 힘든 광야에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통해 인간을 돌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죄를 저지르는 인간들을 심판하시면서도 용서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삶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순종하며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불평하고 세상과 타협할 때 하나님의 진노가 있음을 알게 하십니다.

마지막으로 가나안 땅을 차지하기 위해 많은 어려움이 따름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미리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따라서 믿음과 순종하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민수기는 우리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보여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의지하고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하며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Kadesh Barnea  40

신명기(申命記)





사사기(士師記)

판관기(判官記, ספר שופטים 세페르 소프팀, Κριτές 크리테스, Book of Judges)
사사기(士師記)는 원래 히브리어로 쓴 성경이며
히브리어 성경(타나크)과 기독교 구약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제목과 내용에 따르면, 판관기는 성경의 판관(현대의 재판관과 혼동되지 않기 위한 표현)과 그들이 고대 이스라엘을 통솔하는 동안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판관기는 공동번역성서천주교 성경의 표기로 표준새번역, 개역개정판, 한글개역판에서는 사사기로 표기되어 있다.

판관은 오늘날의 재판관처럼 재판하는 일을 했는데, 판관기에서 언급하는 마지막 판관은 삼손이며, 뒤이은 두 이야기가 더 있기는 하지만, 전통적인 관점은 삼손의 업적과 사무엘상 1:1부터 7:2에 나오는 대제사장이자 판관인 엘리의 바로 앞 시기와 완전히 일치한다.


사사기는 약속의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여호수아 후부터 왕정 시대를 시작하는 사무엘 전까지 사이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사사기는 히브리 원본에 룻기와 같은 책이었습니다.
사사는 위기의 상황이 있을 때 임시로 이스라엘의 리더가 되는 인물입니다.
사사라는 단어는 히브리 원어 שֹֽׁפְטִ֑ים(쇼펫)으로 “재판하다”, “다스린다”, 혹은 “구원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영어의 Judges 즉 재판관, 심판관보다는 구원자로 해석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모세, 여호수아, 그리고 후에 이스라엘 왕들은 이스라엘 전체를 구원하거나 다스린 반면 사사들은 부족이나 지역을 구원합니다.
그들은 (삿 3:10)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임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백성을 구원합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실질적인 사사, 구원자는 하나님이십니다.

사사기

저자 (시기) : 사무엘 (BC 1000 경)
시대 배경 : BC 1380 - 1030 (사울 왕 세움) 약 300년 (삿 11:26)
목적 : 신정 통치 시대 이스라엘의 실패의 경험 기록
사사기에서 보는 하나님의 성품: 죄를 벌하심, 오래 참으시며 용서와 은혜를 배푸심
주요 인물 : 기드온, 삼손, 입다
지리적 배경 : 이스라엘 (가나안)

사사기 패턴

사사기 책은 여러 사사 이야기를 소개하는데 이야기 패턴은 모두 같습니다. (1) 백성이 하나님께 순종치 않음으로, (2) 적들의 침략을 당합니다. (3) 고통 중에 백성이 회개하고 하나님께서 백성의 통곡을 듣습니다. (4) 하나님께 사사를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합니다.

  • (삿 2:16) 여호와께서 사사들을 세우사 노략자의 손에서 그들을 구원하게 하셨으나

하나님의 구원으로 백성은 평안을 누립니다. 그러나 백성은 곧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1)의 패턴으로 돌아가는 악순환을 합니다.

이야기가 뒤로 갈수록 사사들조차 타락하고 있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리고 사사기는 마지막을 이렇게 맺고 있습니다.

  • (삿 21: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1 13   12



기원전 1200년경~1050년경은 '후기-청동기시대'가 끝나고 '전기-철기시대'가 시작되는 시기로, 성서에서는 '사사 시대'입니다.

사사 시대를 단순 계산하면 모두 410년이 됩니다. 그런데 열왕기상 6장 1절("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지 사백팔십 년이요 솔로몬이 이스라엘 왕이 된 지 사 년 시브월 곧 둘째 달에 솔로몬이 여호와를 위하여 성전 건축하기를 시작하였더라")과 비교해 보면 심각한 문제가 생깁니다. 솔로몬 성전 건축이 이집트를 탈출한 지 480년이 되는 해에 시작되었다면, 사사 시대 410년을 빼고 70년 동안 가나안 정복, 제사장 엘리와 사무엘의 통치 등이 모두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단순 계산으로 나온 593/591년은 열왕기상 6장 1절의 480년보다 더 긴 기간입니다.

여기에 사도행전 13장 19-20절을 비교해 보면 또 다른 문제가 생깁니다.

"가나안 땅 일곱 족속을 멸하사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시기까지 약 사백오십 년간이라 그 후에 선지자 사무엘 때까지 사사를 주셨더니(행 13:19-20)."

여기에서는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무려 450년이 흐른 뒤 사사 시대가 시작됩니다(NIV도 같음). 그렇게 되면 사사 시대 이전에 450년이 더해져 열왕기상 6장 1절을 근거로 출애굽 후 480년이라는 기간과 전혀 맞지 않게 됩니다.

KJV는 이러한 모순을 피하기 위해, 사무엘 이전에 사사들의 기간을 450년 동안이라고 번역했습니다(13:20).

이것을 해결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 가장 좋은 방법은 사사들 통치 기간인 20년, 40년, 80년이라는 숫자들을 실제 통치 기간이 아닌 상징적인 숫자로 보는 것입니다. 옷니엘 40년, 에훗 80년, 드보라 40년, 기드온 40년이 실제로 40년, 80년이라기보다 '충분한 기간', '온전한 통치'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구약성경에서 숫자 4는 여호와(YHWH)의 알파벳 개수와 같은 수입니다. 4의 배수인 12·40·80·480 등 상징적으로 많이 쓰입니다.

둘째, 각 지파 사사들의 통치 기간이 서로 겹친다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12지파 여러 사사들이 각 시기에 겹쳐서 활동했으며, 따라서 이들의 통치 기간을 수직적으로 더하지 않고 일정 기간 중복된 것으로 계산하면 됩니다.
돼지 뼈

주목할 만한 사사 시대 고고학 자료가 있습니다.

에발산·실로·길갈 등지에서 기원전 12세기 것으로 추정되는 뼈가 발견되었는데, 주로 염소와 양의 뼈였습니다. 특이하게 이스라엘 지역에서 돼지 뼈는 거의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인류학자 마빈 해리스(Marvin Harris)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면서 산림지대가 벌채되어 자연적인 먹이를 구하기 어려웠고, 사람들이 먹는 것을 돼지도 함께 먹었기에 부족한 식량을 염려해 돼지를 금지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이 살던 고지대의 산지는 상수리나무 덕에 그늘이 많고 나무에서 떨어지는 열매를 돼지가 좋아했기 때문에 돼지를 키우기 좋은 환경이었습니다. 레위기 11장 7절("돼지는 굽이 갈라져 쪽발이로되 새김질을 못하므로 너희에게 부정하니")이 제시하는 율법을 지킨 것은 이스라엘의 식생활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가장 큽니다. 이스라엘과 가까운 블레셋에서는 상당히 많은 돼지 뼈가 발견되었다는 사실이 그러한 학설을 뒷받침해 줍니다.

* 사사들을 통하여 장차 오실 메시아 신앙
즉 선지자, 왕, 제사장의 모습을 묵상하며 신앙의 길을 사사답게 걸어가야 하겠다.

룻기


룻기는 나오미와 룻, 보아스라는 세 명의 평범한 사람의 생애와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보여주신 신실하심에 대한 비범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그들이 경제적 어려움과 번영을 겪는 동안, 우리는 풍성한 농산물 생산을 위한 노동, 모든 사람의 유익을 위한 인색하지 않은 자원 관리, 동료를 존중하는 태도,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보이는 재간, 자녀 임신과 양육에서 가장 분명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본다. 모든 것을 통해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결실 맺는 일을 위한 기회를 창출해 내고,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는 그들은 서로에게, 그들 주변 사람에게 공급과 안정 이라는 복을 가져다준다.

 

   룻기의 주요 사건은 보리 추수기에 일어나는데(룻 1:22 2:17, 23 3:2, 15, 17), 그때는 하나님의 축복과 사람의 수고를 축하하고 기념하는 시기였다. 율법서(토라)에 나오는 두 구절이 이 절기의 배경을 제공한다(강조는 필자가 한 것임).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말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출 23:16).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칠칠절을 지키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있는 레위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이 규례를 지켜 행할지니라(신 16:10-12).

 

   이 구절들이 룻기에 나오는 사건의 신학적 토대를 구축한다.

 

1.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 인간의 생산력의 원천이다(“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2.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노동(수고)를 통해 풍성함이라는 자신의 복을 부어 주신다(“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 열매들).

3.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과 취약한 사람을(“객과 고아와 과 부”) 위한 산물을 내시기 위해 일할 기회를 주시려고 사람 을 부르신다(“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 애굽에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해방하신 것과 광야와 가나안에서 그들에게 양식을 공급해 주신 것을 예시).

 

   요약하면, 인간이 노동한 것에 대한 생산성과 풍요함은 세상 안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연장이며, 사람의 노동에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것은 스스로 먹고살 방도가 없는 사람들에게 넉넉히 베풀어 주라는 하나님의 명령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이런 원리가 룻기의 기저가 된다. 그러나 이 책은 신학 논문이 아니라 내러티브(이야기)이며, 매우 흥미진진하다. 


가정에 비극이 닥치다(룻기 1:1-22)

 

   이야기는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룻 1:1)에 일어난 기근으로 시작한다. 이때는 사사기에서 들려준 대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도를 버리고 우상숭배와 최악의 사회 상황, 재앙 수준의 내전에 빠져 있던 때였다. 전반적으로 그때는 일이나 다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율법(토라)의 교훈을 따르지 않고 있었다.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 가운데 적어도 나오미는 이로 인해 하나님의 복을 상실했음을 인정했다(룻 1:13, 20-21). 그 결과 사회 경제적 구조가 붕괴되고 있었고, 기근이 그 땅을 덮쳤다.

 

   기근에 대처하기 위해 엘리멜렉과 그의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은 모압으로 이주했다. (이스라엘과 모압의 오랜 적대관계를 생각해 본다면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선택이었다.) 그들 생각에 거기라면 일의 전망이 훨씬 더 좋을 것이라고 봤다. 그들이 거기서 성공적으로 일자리를 찾았는지 여부는 모르나 어쨌든 그 아들들은 둘 다 모압에서 장가를 들었다. 그러나 10년 이내에 그들은 사회, 경제적 비극을 경험했다. 가족 중 남자가 전부 죽어 나오미와 두 며느리가 과부가 된 것이다(룻 1:3-5). 그 뒤로 세 명의 과부는 당시 남자에게만 주어지던 법적, 경제적 권리를 전혀 갖지 못한 채 자기 힘으로 벌어서 먹고 살아야 했다. 한마디로 남편도 없고, 땅에 대한 명확한 소유권도 없고, 생계를 이어갈 아무 자원이 없었다.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돌이켜 보면서 나오미는 “나를 마라[쓰다, 괴롭다]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라고 탄식한다(룻 1:20).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는 이스라엘 율법에서 상당한 관심을 받는다.[1] 남편의 보호와 지지를 상실한 그들은 사회 경제적 학대와 착취의 대상이 되기 쉬웠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단지 먹고살아야 하는 이유 때문에 창녀로 전락했는데 이는 오늘날 취약계층의 여성에게도 아주 흔히 일어나는 상황이다. 나오미는 과부가 됐을 뿐 아니라 모압에서는 나그네이기도 했다. 그러나 만약 그녀가 두 며느리를 데리고 베들레헴으로 돌아간다면, 이스라엘에서는 그 젊은 며느리가 과부면서 동시에 나그네가 될 터였다.[2] 어디에 살든 그들이 부딪칠 취약성에 대한 대책으로 나오미는 며느리에게 그들의 모국에 있으라고 강권하고,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며느리들이 모압에서 안정을 얻도록 도우시기를 기도했다(룻 1:8-9). 그러나 그중 룻은 아무리 어려워도 시어머니를 떠나는 것을 견딜 수 없어 했다. 룻이 나오미에게 한 말은 그녀의 사랑과 충성심이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 주는 노래다.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룻 1:16-17).

 

   누구에게나 인생은 고달플 수 있으나, 이 여인들은 그중에서도 최악의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하나님의 축복이 풍성함의 원천(룻기 2:1-4)

   나오미와 룻은 견디기 힘든 역경에 처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라면 역경은 절망이 아니다. 룻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분명한 기적적인 개입을 만나게 되지는 않지만, 결코 하나님의 손길이 없던 게 아니었다. 하나님은 항상 역사하셨고, 특히 신실한 사람들을 통해 그렇게 하셨다.

 

   오래전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약속하셨다.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창 17:6). 여호와는 자기 백성이 신실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농업 생산성을 회복해 주심으로써(룻 1:6) 그분이 약속하셨던 것을 선하게 이루셨다. 그 소식을 듣고 나서 나오미는 식량을 구하기 위해 베들레헴에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룻은 자신이 한 말을 충실하게 지켜서 자신과 나오미의 생계를 위한 일자리 찾으리라 작정하고 시어머니와 같이 길을 나섰다.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하나님의 축복이 룻이 한 일과 그 일의 결과로 그들 위에 (결국은 온 인류 위에) 쏟아 부어진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모든 생산성의 기반이다.

 

   대체로 히브리 성경은 하나님을 일하시는 거룩하신 분, 사람의 일에 대한 패러다임을 제공하시는 분으로 그린다. 성경은 말씀하시고, 창조하시고, 조성하시고, 지으시는 모습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으로 시작한다. 히브리 성경 전체를 통해 하나님은 ‘일하다’와 비슷한 의미를 가지는 수많은 동사의 주어로 등장하실 뿐만 아니라, 사람들도 하나님을 부를 때 종종 은유적으로 “일하시는 분”(Worker)이라고 부른다. 히브리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많은 일에 직접 관여하실 뿐만 아니라,[3] 또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패턴을 따라 일하라고 명령하신다(출 20:9-11).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직접 일하시고, 또 사람을 통해서도 일하신다.

 

   룻기의 주요 등장인물은 반복적인 신앙 고백으로, 또 서로를 축복하는 것을 통해 자신이 일하는 토대가 하나님이심을 인정한다.[4] 이런 표현 가운데 어떤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하신 행동을 찬양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인자를 거두지 않으셨다(룻 1:20). 그분은 기업 무를 친족을 주셨다(룻 4:14). 다른 어떤 표현은 하나님의 축복이나(룻 2:4, 19 3:10) 임재나(룻 2:4) 인자를(룻 1:8) 바라는 청원이다. 세 번째 표현은 하나님 행동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간구다. 하나님이 위로(NIV에는 “rest”) 주시기를 바라고(룻 1:9), 룻을 라헬이나 레아와 같게 하시기를 바라는 것이다(룻 4:11-12). 룻기 2장 12절의 축복은 특히 의미심장하다.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이 모든 축복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공급하시기 위해 일하신다는 확신을 표현한다.

 

   룻은 하나님이 직접 주시는 것이든(룻 2:12), ‘은혜를 입게 할’(룻 2:2) 사람을 통해서 오는 것이든 풍성함이라는 하나님의 복을 갈망했다. 모압 여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룻은 자신이 하는 일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인정하는 데 많은 이스라엘 사람보다 더 지혜로웠다.

 

   이야기에 나오는 사건을 볼 때 하나님에게서 온 가장 중요한 복 중 하나가 하나님께서 보아스의 추수가 넉넉하도록 축복해 주신 것이다(룻 2:3). 그가 반복적으로 한 여호와의 축복 간구에서 보이듯, 보아스는 자신이 하는 노동에서 하나님의 역할을 온전히 인식했다(룻 2:4 3:10). 

 

 

우리 일에 힘을 실어 주기 위해 명백하게 우연처럼 보이는 사건을 사용하신다.

 

   하나님이 풍성케 하시겠다는 그분의 약속을 이루기 위해 사용하시는 방법 중 하나는 모든 상황에 대한 그분의 통제력이다. 룻기 2장 3절에 나오는 “her chance chanced upon”(우연히 발견된 그녀의 기회)이라는 묘한 문장구조는 다분히 의도적이다(NRSV에서는 ‘공교롭게도, 마침’이라는 뜻으로 쓰여 있으며, 개역개정에는 “우연히”로 번역되어 있다 - 옮긴이 주). 구어체 영어로 말한다면 “As luck would have it”(운 좋게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진술은 역설적이다. 이야기의 화자(narrator)는 독자가 자리에 앉아서 도대체 어떻게 룻이 자애로울 뿐 아니라(룻 2:2) 기업 무를 친족(룻 2:1)인 사람의 밭에 “우연히” 가게 됐느냐고 묻게 만드는 것이다. 이야기가 펼쳐지면서 우리는 룻이 보아스의 밭에 이른 것이 하나님 섭리의 손길의 증거였음을 본다. 룻기 4장 1-2절에서 보아스가 성문에 앉아 있는데 마침 그다음 기업 무를 자가 나타난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우리 힘으로만 성취할 수 있는 것 외에 더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으면서 매일매일 출근한다면 그것처럼 삭막한 세상살이가 어디 있겠는가! 우리는 다른 사람이 한 일, 예상치 못한 기회, 창의성의 갑작스런 발현, 눈에 보이지 않는 복 같은 것들도 의지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따름으로써 오는 가장 안심되는 축복 중 하나는 바로 우리가 일하러 갈 때 그분도 우리와 함께 가시며 우리가 지는 짐을 함께 져 주신다는 그분의 약속이다. “나의 멍에를 메고 ……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29-30). 룻은 예수님께서 해 주신 말씀을 듣지 못했으나, 하나님의 날개 아래서 자신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찾으리라는 믿음으로 살았다(룻 2:12).

 

 

 

풍성한 인생은 우리가 하나님께 보인 신실함의 열매다.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나오미를 신실하게 대하는 룻의 모습에 투영되어 있다. 룻은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룻 1:16)라고 약속했다. 룻의 약속은 엘리멜렉 가문에 그저 식량만 축내는 수동적인 한 식구로 남아 있겠다는 간청이 아니라, 자기능력이 닿는 데까지 시어머니를 봉양하겠다는 헌신의 간청이었다. 그녀는 이스라엘 족속이 아니었는데도, 마치 “네 부모를 공경하라”라는 십계명의 제5계명에 구체화되어 있던 이스라엘 율법에 따라 살아가는 듯 보인다. 룻과 그녀의 가족을 위해 풍성하게 일이 회복되는 복이 임한 것은 하나님의 율법대로 신실하게 일한 룻의 헌신에서 시작됐다. 

 


사람의 수고를 통해서 풍성함의 복을 주신다(룻기 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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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사람이 누리는 풍성함의 원천이지만, 실제로 일은 사람이 해야만 한다. 이것은 처음부터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이었다(창 1:28 2:5, 15). 룻은 시어머니와 함께 먹고살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싶어 했다. “밭으로 가게 해 주세요”라고 룻은 간청했고, 그녀에게 일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 옆에서 같이 일하던 사람이 “아침부터 와서는 잠시 집에서 쉰 외에 지금까지 계속하는 중이니이다”(룻 2:7)라고 보고할 정도로 열심히 일했다. 룻이 일한 결과는 유난히 풍성했다. 첫날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주운 보리 이삭을 달아 봤을 때, 추수한 양은 한 에바쯤 됐다(룻 2:17). 이것은 대략 보리 5갤런(약 19리터 - 편집자 주)에 해당하는 양이었다.[5] 하나님께서도 보아스도 모두 룻의 믿음과 부지런함을 칭찬하고 보상했다(룻 2:12, 17-23; 3:15-18).

 

   크든 작든 어느 정도는 우리도 모두 생계를 꾸리기가 어렵거나 불가능한 상황에 빠질 수 있다. 자연재해, 정리해고, 편견, 부상, 질병, 파산, 부당대우, 법적 제제, 언어 장벽, 직무 연관 훈련이나 경험 부족, 나이, 성별, 정부나 기업의 잘못된 경제 운용, 지리적 장벽, 가족 부양의 필요성, 그 외 여러 요소가 우리 자신과 우리를 의지하는 사람을 부양하기 위해 일하는 것을 가로막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가 할 수 있는 능력만큼 일하길 기대하신다(출 20:9).

 

   혹 우리가 우리 필요를 채워 주는 일자리를 찾지 못할지라도, 우리는 할 수 있는 최고 수준으로 일할 필요가 있다. 룻은 정해진 근무 시간이나 정해진 급여를 받을 수 있는 정규직이 아니었다. 룻은 자기 처지가 일터에서 누군가의 “은혜”를 입기에 충분할지(룻 2:13) 알 수 없어 불안했고, 자기 가족을 먹이기에 충분한 식량을 반드시 얻을 것이라는 기대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어쨌든 룻은 일하러 나갔다. 오늘날 실업 때문에 직면하는 많은 상황이 이와 비슷하고, 우리 역시 이런 문제로 낙심할 때가 있다. 고도로 숙련된 일자리가 부족해서 하찮은 기회만 남았는가? 우리가 어떤 특정 일자리에 적합한데도 단지 차별 때문에 그 자리를 놓쳤는가? 여건이 허락되지 않아 훌륭한 일자리에 필요한 교육을 못 받았는가? 주변 상황이 일을 소망없게 만드는가? 룻의 사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일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다른 사람을 돕는 자원 봉사를 한다거나, 가족을 돌보는 일, 교육과 훈련 받기, 가사 돌보기처럼 우리 일이 처음에는 아무 수입도 올리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우리에겐 유리한 점이 있다. 하나님이 우리 일 배후에 있는 힘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자기 능력이나 주변의 여건에 의지하지 않는다. 대신 풍성함의 약속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우리가 하는 일이 (심지어는 최악의 상황에서 하는 일조차) 가치 있다는 확신을 주는 것을 알고, 우리는 능력이 닿는 대로 충성스럽게 일하는 것이다. 대개의 경우 우리가 하는 일을 어떻게 하나님이 그분의 목적 성취에 사용하시는지를 우리는 미리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의 능력은 언제나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을 훨씬 넘어선다. 

 

 

동료를 존중하는 문화 만들기(룻기 2:8-16)

 

   룻기 2장 1절이 말하는 것처럼 보아스는 “유력한” 사람이었다. 오늘날 그것이 어떤 의미를 내포하던 간에 보아스의 경우는 그가 성경에 나오는 탁월한 리더 중 하나임을 의미한다. 보아스의 리더십 스타일은 존중에서 시작한다. 자기 일꾼이 일하는 밭으로 나왔을 때 보아스는 그들에게 축복하며 인사하고(“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하시기를 원하노라”) 일꾼들도 친절하게 응대한다(“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 룻 2:4). 보아스의 일터는 여러 면에서 아주 놀라운 곳이다. 보아스는 고용된 일꾼의 노동력에 의지해야 하는 기업을 소유해 경영했다. 그는 다른 사람의 근로 환경을 관리하고 있었다. 감독관과 소유주가 자신이 고용한 근로자를 경멸하고, 근로자 역시 자신의 상사를 존경하지 않는 많은 일터와는 대조적으로, 보아스는 신뢰와 상호 존중의 관계를 만들었다.

 

   보아스는 일꾼이 일할 때 물을 제공하고(룻 2:9), 그들과 함께 식사하며, 무엇보다 그들 가운데 가장 하찮은 존재로 여겨지던 사람에게 음식을 나눠 줌으로써(룻 2:14) 자기 일꾼을 실질적으로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 줬다. 심지어 추수기 때는 지주인 보아스가 수확한 자기 곡식을 키질하고, 들판에서 일꾼과 같이 잠까지 잔다(룻 3:2-4, 14).

 

   보아스는 자기 일터의 이방 여인을 아주 사려 깊게 대해 줌으로써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로(창 1:27 잠 14:31; 17:5) 본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보아스가 일꾼 가운데서 그 여인을 봤을 때 그는, 그녀가 어떤 한 남자의 아내이거나 딸인 줄 알고 온유하게 “이는 누구의 소녀냐” 하고 묻는다. 그 여자가 나오미와 함께 모압에서 돌아온 모압 여인이라는 말을 듣고, 또 자기 추수꾼 뒤에서 이삭을 주울 수 있게 해 달라는 간청을 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충격적이게도 그가 한 첫마디는 “내 딸아 들으라”였다(룻 2:5-8). 자신의 음식을 외국 여자와 나누는 것(룻 2:14)은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의미심장한 행동이다. 룻이 감탄하며 말했듯이 존경받는 지주가 외국 여인과 대화하는 것은 관례상 흔히 있는 일이 아니었다(룻 2:10).[6]사회적 체면과 사업 기회에만 관심이 있던 남자라면,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 대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별로 없던 사람이라면, 모압 여자를 자기 땅에서 당장 쫓아냈을 것이다. 그러나 보아스는 일꾼들 가운데서도 더 딱한 형편인 그 일꾼을 위해 기꺼이, 다른 사람이 어떤 반응을 보이든 상관하지 않고 그녀 편에 섰다.

 

   실제로 이 이야기에서 어쩌면 우리는 세계 최초로 직장 내에서의 성희롱 반대 정책에 대한 기록을 접하게 된다. 어쩌면 그는 많은 농장주와 일꾼들이 사람들을 착취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7]어쩌면 이것이 바로 보아스가 룻에게 자신이 자기 일꾼에게 그녀를 건드리지 못하도록 일러두었다고 알려 주는 이유일 것이다(룻 2:9). 나오미가 “내 딸아 너는 그의 소녀들과 함께 나가고 다른 밭에서 사람을 만나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라”(룻 2:22)라고 한 말은 그녀가 자기 며느리의 안전을 걱정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보아스의 정책에 나타난 조건은 아주 분명하다.

 

1. 남자 일꾼은 이 여자를 ‘괴롭혀서는’ 안 된다. 일반적으로 ‘naga’라는 단어는 ‘건드리다’라는 뜻이지만, 여기서 그 단어는 대개 ‘때리다, 괴롭히다, 이용하다, 학대하다’라는 의미를 가진다.[8]보아스는 ‘건드리다’라는 것의 의미는 피해자가 그것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을 알았다.

2. 룻은 똑같이 물(룻 2:9)과 점심식사 자리(룻 2:14)를 이용할 수 있었다. 식사 시간에 보아스는 룻에게 자신과 자기일꾼 쪽으로 와서 그녀가 가져온 빵 조각을 자기 소스에 찍어 먹으라고 권유했다. 그런 다음 보아스는 그녀가 배부르고 남을 정도로 그녀를 친히 챙겨 줬다. ‘가까이 오다, 다가가다’라는 뜻의 동사로 ‘nagash’를 고른 것은 이방인인 룻이 의도적으로 적당한 거리를 두고 앉아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성희롱을 방지하는 보아스의 정책은 단순히 제한적이지 않았고 적극적인 것으로, 학대를 당할 위험에 처한 사람의 반응이 무엇이 학대고 아닌지를 정할 수 있는 기준임을 의미했다. 보아스는 그녀가 필요로 하는 보호를 제공할 때 룻이 얼마나 안정감을 느끼는지를 기준으로 삼았다. 그는 취약한 여성 근로자가 어떻게 존중되어야 하는지 실례로 증명해 보인 것이다.

3. 보아스의 정규직 일꾼은 룻을 책망하거나(룻 2:15) 꾸짖지(룻 2:16) 말아야 했다. 2장 9절에 나오는 ‘괴롭게 말라’(NRSV에는 “bother”, 개역개정에는 “건드리지 말라”)라는 단어와 함께 이런 표현은 신체적 학대, 정서적 학대, 언어적 학대 등 여러 형태로 학대가 온다는 것을 증명한다. 실제로 감정을 실어 룻에게 한 그의 축복 선언으로(룻 2:12) 보아스는 극적으로 그 모델을 확정한다.

4. 정규직 일꾼은 룻의 근로환경을 최대한 안정적으로 만들어 주고 룻이 이삭을 충분히 주울 수 있도록 지원하기 위해 의무 이상을 해야 했다(룻 2:15-16). 일터에서 학대를 금지한다는 것은, 안전한 환경을 조성하는 것은 물론이고 위험에 노출될 수 있는 근로자에게 생산성이 있는 환경을 조성해줘야 한다는 뜻이다. 생산성과 승진, 포상에 참여하는 것을 막는 장벽은 반드시 제거되어야 한다. 보아스는 남자 일꾼에게서 룻을 멀리 떼어놓아 룻의 안전을 지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해버리면 그녀가 물이나 음식도 먹지 못했을 것이고, 그녀가 주워 단으로 묶기 전에 바람이나 짐승이 이삭을 가져가 버렸을 수도 있다. 보아스는 자신이 만든 안전장치가 룻이 생산성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게 해 줄 것을 확실히 했다.

 

   보아스의 일꾼들은 그의 너그러운 정신을 알아차린 것 같다. 그들의 상사가 그들에게 축복의 인사를 건넸을 때 그들도 축복의 말로 화답했다(룻 2:4). 보아스가 자기 밭에 나타난 여인의 정체를 물었을 때 인력 감독관은 룻이 모압 여인이라는 것을 밝히긴 했지만, 너그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룻 2:6-7). 룻이 집에 있는 나오미에게 보리 한 에바를 가져왔다는 사실은 룻을 잘 대해 주라는 보아스의 명령에 일꾼들이 긍정적으로 반응했다는 것을 증거한다. 일꾼들은 그녀를 위해 상당히 많은 곡식을 잘라두었을 뿐 아니라, 그들은 이 모압 여인을 추수기간 동안 자신의 동료 일꾼으로 받아줬다(룻 2:21-23).

 

   보아스가 보인 리더십의 긍정적인 측면은 일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나오미가 룻이 수고한 결과를 봤을 때, 나오미는 룻에게 일자리를 준 사람을 축복하며 그의 인자와 너그러움을 인해 하나님을 찬양한다(룻 2:20). 나중에 그 공동체 안에서 보아스가 가진 높은 명성이 사회적 조화와 하나님께 영광을 가져온다는 게 명백해진다(룻 4:11-12). 모든 지도자, 아니, 사실상 모든 근로자는 그들이 속해서 일하는 문화를 형성한다. 비록 우리는 우리 문화에 의해 불공평하고, 무의미하거나, 생산적이지 못한 방식의 일에 동화하라는 강요를 받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상 우리가 일하는 방식이 다른 사람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부패하고 신실치 못한 사회(룻기 1장 1절의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라는 말은 부패한 사회를 간략히 서술한 것이다) 가운데서 재력가였던 보아스는 정직하고 성공적인 사업을 창출해 낸다. 추수 감독관은 여자를 싫어하고 인종 차별이 심하던 사회에서 평등주의를 실천하고 있다. 룻과 나오미는 끔직한 상실과 어려움 앞에서도 사랑이 넘치는 가정을 만든다. 우리가 나쁜 근로 환경에 동화하라는 압박을 느낄 때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약속은 우리 주변의 문화적 사회적 역기능 때문에 우리가 갖게 되는 모든 의심을 이길 수 있게 해 준다. 

 

가난한 자에게 경제적 기회를 주신다(룻기 2:17-23)

   하나님께서 우리의 결실을 가로막는 장벽들을 극복하시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통해서이다. 룻기에서 우리는 사회 안에서의 하나님의 율법과 하나님께서 개인들을 인도하시는 것 모두에서 그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율법은 수단을 가진 사람을 부르셔서 가난한 자에게 경제적 기회를 주신다(룻기 2:17-23)

   룻기는 이삭줍기를 중심으로 전개되는데, 이삭줍기는 가난하고 취약한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율법의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다. 선행조건이 레위기, 신명기, 출애굽기에 나와 있다.

 

너희가 너희의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 19:9-10 23:22). 이 책 4장의 “레 19:9-10” 부분을 보라.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말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리라 네가 네 감람나무를 떤 후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고 그 남은 것은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 두며 네가 네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 두라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령하노라(신 24:19-22).

 

너는 여섯 해 동안은 너의 땅에 파종하여 그 소산을 거두고 일곱째 해에는 갈지 말고 묵혀 두어서 네 백성의 가난한 자들이 먹게 하라 그 남은 것은 들짐승이 먹으리라 네 포도원과 감람원도 그리할지니라(출 23:10-11). 이 책 3장의 “출 22:21-27”, “출 23:10-11” 부분을 보라.

 

   이 율법의 토대는 사람이 그들 자신과 가족을 부양하는데 필요한 풍성함의 수단에 누구나 접근할 수 있게 하려는 의도다. 일반적으로 모든 가정은 (십일조와 제물로 살아야 하는 레위인 가문의 제사장만 제외하고) 절대 양도할 수 없는 항구적인 땅의 분깃을 소유해야 한다(민 27:5-11 36:5-10 신 19:14 27:17 레 25장). 따라서 이스라엘에서 모든 사람은 곡식을 기를 수단을 가졌다. 그러나 외국인과 과부와 고아는 땅을 물려받지 못했고, 그들은 가난과 학대에 빠지기 쉬웠다. 이삭줍기법은 그들에게 밭 가장자리에서 추수 초기에 덜 익은 곡식이나 산물과, 정해진 어떤 해에 윤작으로 비어 있던 들판에 솟아난 것은 무엇이든지 추수함으로써, 그들 스스로 먹고살 기회를 줬다. 모든 땅 주인은 값을 받지 않고 이삭에 접근할 수 있게 해 줘야 했다.

 

   이 구절은 이삭줍기법에 대한 세 가지 토대를 제공한다. 가난한 자를 향한 너그러움은 (1) 하나님께서 사람이 손으로 하는 일에 복 주시기 위한 전제 조건이었다(신 24:19). 또한 (2) 잔인하고도 모질게 학대하는 애굽의 노예주를 경험한 이스라엘의 기억에 힘입어(신 24:22a), (3) 하나님 뜻에 대한 순종의 문제다(신 24:22b). 우리는 이런 세 가지 동기를 보아스의 행동에서 모두 볼 수 있다. (1) 그는 룻을 축복해 줬고, (2)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너그러우심을 기억했으며, (3) 룻이 자기 인생을 하나님의 손안에 맡긴 것을 칭찬해 줬다(룻 2:12). 고대 이스라엘에서 그 땅과 추수를 얼마나 완전하게 시행했는지는 의문이지만 보아스는 하나의 본이 되기에 충분하게 그것을 지켰다.

 

   이삭줍기법은, 적어도 그 법이 실제로 실행됐다는 점에서, 가난한 자와 소외된 사람을 위한 놀라운 복지망을 제공해 줬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께는 사람이 일해서 그분의 결실을 얻게 하려는 의도가 있으시다는 것을 살펴봤다. 그것은 구걸을 하거나 노예로 살거나 성매매를 해야 하거나 아니면 다른 천박한 방식으로 살 수밖에 없는 사람에게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이삭을 줍는 사람들은 결혼, 입양, 또는 출신 국가로 돌아가게 해주는 기회를 대비해서 일반 농장 일에서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있는 기술과 자존감, 신체조건 및 일하는 습관 등을 유지했다. 지주는 기회를 제공하긴 했으나 착취할 수 있는 기회를 얻지는 못했다. 강제 노동은 없었다. 그 혜택은 번거롭고 부패하기 쉬운 관료주의를 필요로 하지 않았고, 나라 어디에서나 지역별로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이삭줍기법을 성취하려는 지주의 인격과 양심에 달려 있었고, 우리는 고대 이스라엘에서 가난한 사람이 처했던 환경을 낭만적으로 다뤄서는 안 된다.

 

   보아스와 룻과 나오미의 경우에, 이삭줍기법은 의도했던 대로 작용했다. 이삭을 주울 기회가 없었더라면, 보아스는 나오미와 룻의 가난을 알고 난 후에 두 가지 선택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그들을 굶게 내버려 뒀거나 미리 만들어 놓았던 음식(빵)을 집으로 배달해 주었을 것이다. 전자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후자는 그들의 굶주림을 면하게는 해주겠지만, 그들이 더욱 보아스에게 의존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이삭을 주울 기회가 있었기 때문에 룻은 추수를 위해 일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수고로 곡식을 사용해 빵을 만들 수 있었다. 그 과정은 그녀의 존엄성을 지켜줬다. 또한 룻의 기술과 능력을 활용해 룻과 나오미는 장기간의 의존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며 그들을 착취에 덜 취약하도록 만들어 줬다.

 

   오늘날 빈곤에 대한 공적, 사적 대응과 사회적, 정치적, 신학적 논쟁에 있어 이런 이삭줍기에 담긴 구제원리는 마음에 새겨둘 만하고, 열렬히 토의할 만한 가치가 있다. 크리스천끼리도 개인 대 사회의 책임, 사적인 수단 대 공적인 수단, 수입의 분배에 관한 질문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룻기를 잘 살펴봐도 이런 의견 차이가 해소될 것 같지는 않지만, 어쩌면 그것은 공유된 목표와 공동의 토대를 분명하게 밝혀줄 수는 있다. 오늘날 사회에 문자 그대로의 이삭줍기는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사회가 오늘날의 가난한 자와 취약한 자를 돌봐주는 방식에 있어서는 적용할 수 있는 측면이 있다. 특히 우리는 어떻게 사람들이 타인의존이나 착취에 의해 질식당하는 삶을 사는 대신 생산적인 일자리를 얻을 수 있도록 기회를 갖게 해줄 수 있을까? 

 

개개인을 인도하셔서 가난한 자와 췽ㄱ한 자에게 경제적 기회를 주신다(룻기 2:17-23)

 

   영감을 받은 보아스는 가난한 자와 취약한 자에게 공급하기 위해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훨씬 더 뛰어넘었다. 이삭줍기 율법은 지주에게 외국인과 고아와 과부가 이삭을 주울 수 있도록 밭에 얼마간의 산물을 남겨 놓을 것만 요구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가난하고 취약한 사람들이 잡초가 무성한 밭이나 높은 감람나무 위에서 산물을 수확해야 하는 어렵고 위험하고 불편한 일자리를 갖는다는 의미였다. 이런 식으로 얻은 산물은 대개는 땅에 떨어졌거나 덜 익은 것으로 질이 안 좋았다. 그러나 보아스는 자기 일꾼에게 일부러 너그러운 행동을 하라고 말해 두었다. 그들은 가장 질 좋은 이삭을 벤 다음 그루터기 위에 놓아두어서 룻이 그냥 줍기만 하면 되게 해 놓았다. 보아스의 관심은 법으로 규정한 최소한의 의무를 다하는 데 있었던 게 아니라 진정으로 룻과 그녀의 가족을 위해 양식을 공급하는 데 있었다.

 

   더 나아가 보아스는 룻이 자기 밭에서만 이삭을 주워야 하며 자기 일꾼 곁에 붙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연히 룻이 수확한 것은 그녀와 나오미 것으로 가져가게 했다. 그는 자기 밭에서 이삭을 주울 수 있게 해줬을 뿐 아니라 자신이 고용한 일손의 하나로 여겨줬고, 더군다나 그녀가 추수한 것에 따른 일정한 비율의 몫을 확실히 가져갈 수 있게 해 주기까지 했다(룻 2:16).

 

   어느 나라 어느 사회든 일할 기회를 찾는 실직자가 있는 세상에서 크리스천은 어떻게 보아스 같은 사람이 되려고 애쓸 수 있을까? 일자리를 구하는 사람을 생산적으로 일할 수 있게 해 주는 재화와 서비스를 창출하는데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기술과 은사를 사용하도록 어떻게 우리는 권면할 수 있을까? 어떻게 우리는 사회의 자원을 소유하고 관리하는 사람들의 인격을 형성해서, 그들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에게 적극적이고 창의적으로 기회를 제공하게 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은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되는가? 우리가 보아스처럼 부유하지는 않더라도 축복의 도구로 쓰임받을 수 있는가? 가난한 사람에게 기회를 줘야 할 수단과 책임이 중산층에게 주어져 있는가? 또 가난한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나님이 다른 근로자와 앞으로 근로자가 될 다른 사람에게 그분의 결실이라는 축복을 안겨 주기 위해 우리 각자에게 무엇을 하라고 인도하시는 것일까?

 

하나님 방식으로 일할 때 복이 배가한다(룻기 3:1-4:18)

   보아스 밭에서 이삭을 줍는 룻의 놀라운 에피소드에서 우리는 보아스의 긍휼한 마음과 너그러움, 인종에 대한 관용의 생생한 증거를 본다. ‘어째서 보아스는 룻을 향해 그렇게 부드러운 마음을 가졌으며, 어째서 보아스는 누구든, 심지어 외국인인 모압 여인까지 자기 집처럼 편안하게 느끼게 하는 그런 환경을 만들었을까’라는 의문을 갖게 한다. 보아스의 증언에 의하면, 룻은 참되신 하나님에 대한 고결한 마음과 신실함을 가지고 있었다(룻 3:10-11). 그 결과 보아스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호와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그녀에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했다’(룻 2:12). 룻은 모압에서 태어났지만 구원받기 위해 이스라엘의 하나님께로 돌아섰다(룻 1:16).

 

   보아스는 그녀를 덮는 여호와의 날개를 인식했고 자신이 그녀를 향한 하나님의 축복의 도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절망에 빠진 외국인을 돌봐 줌으로써 보아스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 것이다. 잠언에는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공경하는 자니라”(잠 14:31 17:5)라는 말이 있다. 사도 바울도 수 세기가 지나 이 주제를 이렇게 표현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갈 6:10).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보아스는 룻을 단순히 부지런한 일꾼과 나오미의 신실한 며느리 이상으로 보기 시작한다. 시간이 흘러서 보아스는 룻에게 자기 옷자락을 펴 덮어주게 된다(룻 3:9). 이는 결혼에 꼭 맞는 은유로 하나님의 날개로 대표되는 사랑과 만족을 반영한다. 그런데 이 사랑 이야기에는 일과 관련된 측면이 있다. 부동산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오미는 죽은 남편 소유의 땅에 대한 권리를 아직은 주장할 수 있었고, 이스라엘 율법에 의하면 그의 다음 친족이 나오미와 결혼해서 그 땅을 획득할 권리가 있었으며, 가족이 그 땅을 지킬 수 있게 해줘야 했다(룻 2:1). 보아스는 이 권리 행사 순서에서 실제로는 두 번째였다. 보아스는 그 권리를 가진 바로 다음 사람에게 연락했으나, 그 사람이 그 땅의 권리를 주장하려면 모압 여인 룻도 자기 가문으로 데려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권리를 포기했다(룻 4:1-6). 

 

   그와는 대조적으로 보아스는, 룻이 인종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열등함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에게 호의를 베풀 수 있는 사람으로 자신이 하나님께 택함받았다는 것을 기뻐했다(룻 4:1-12). 보아스는 편의상 늙은 나오미와 결혼하지 않고, 대신 나오미의 허락 하에 사랑과 존경의 마음을 가지고 룻과 결혼함으로써 그 재산을 구속하기 위한 권리를 행사했다. 이 모압 여인과 결혼을 함으로써 보아스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창 22:18)라는 약속의 일부를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성취했다. 또한 보아스는 더 많은 재산도 얻게 되었는데, 기존에 가졌던 재산을 생산적이고 너그럽게 관리한 것처럼 똑같이 관리했을 것이다. 이는 더 나아가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막 4:25)라는 예수님의 말씀의 전조가 된다. 곧 우리가 배우겠지만, 보아스는 딱 예수님의 선구자 역할을 하고 있다. 한편 그 이야기의 사건은 하나님께서 선을 위해 세상에서 어떻게 아직도 일하시는지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사람의 담력을 통해 하나님은 일하신다(룻기 3:1-18)

   보아스와 룻의 결혼을 서두르기 위해 필연적으로 다시 한번 나오미는 통념을 넘어서 행동한다. 나오미는 룻을 밤중에 보아스의 타작하는 밭으로 보내 “그의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우라”(룻 3:4)라고 한다. 룻기 3장 4, 7, 8, 14절에 나오는 “발”의 뜻은 성관계에 대한 완곡어법일 수도 있는데,[9] 나오미가 꾸며낸 계략은 당시 풍습과 도덕성에 비춰 보면 의심스럽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만남을 위한 룻의 준비와 장소 선택은 창녀가 하는 행동을 암시한다. 정상적인 상황에서라면, 자신을 존중하고 도덕적으로 고결한 성품을 가진 보아스 같은 사람이 타작마당에서 자다가 밤중에 일어나 자기 옆에 여자가 있는 것을 알았을 때, 그런 여자와 자신은 아무 관계도 없다고 항변하며 분명히 그녀를 돌려보냈을 것이다. 보아스한테 자신과 결혼을 해달라는 룻의 요구도 당시 관점에서 볼 때 마찬가지로 아주 대담한 것이다. 외국인이 이스라엘 사람에게, 여자가 남자에게, 젊은 사람이 나이든 사람에게, 하잘것없는 일용직 노동자가 부유한 지주에게 제안한다는 점 등에서 볼 때 그렇다.

 

   하지만 룻의 당돌함에 기분 나빠하는 대신 보아스는 그녀를 축복해줬고, 가족의 행복을 위한 그녀의 헌신을 칭찬했다. 또한 그녀를 “내 딸”이라고 부르며 두려워하지 말라고 안심시켜줬고, 요구한 것은 뭐든지 다 들어 주겠다고 약속했으며, 그녀를 “현숙한 여자”라 선언했다(룻 3:10-13). 이런 예외적인 반응은 보아스가 잠에서 깼을 때 그의 마음과 말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보는 게 가장 타당하다. 


법적인 절차를 통해 하나님은 일하신다(룻기 4:1-12)

   보아스는 만약 자신보다 먼저 기업 무를 권리를 가진 사람이 그 권리를 포기한다면 자신과 결혼해 달라는 룻의 요구를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보아스는 지체없이 그 문제를 법적으로 해결하는 절차에 돌입했다(룻 4:1-12). 이쯤에서 독자들은 지금까지 룻기에 일어난 어떤 사건도 우연히 일어나지 않았음을 알았을 것이다. 바로 다음날 보아스가 성문에 앉아 있을 때 그 친척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이것 역시 하나님의 예비하심인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룻이 그 성문에서 진행되던 법적인 절차 현장에 있었더라면, 처음에 그 친척이 엘리멜렉의 기업을 무르겠다고 선언했을 때 가슴이 철렁했을 것이다. 그러나 보아스가 룻도 그 기업과 함께 가야 한다는 사실을 그 사람에게 알렸을 때, 그는 마음을 바꿨다. 그제야 룻의 희망은 다시 살아났을 것이다.

 

   그 친척이 마음 바꾼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는 자신이 위반한 법적인 의무가 있다는 사실이 생각났다고 말한다.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룻 4:6)라고 하지만 그 핑계는 빈약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보아스에게는 충분했고, 그가 판결을 수용하면서 한 말은 명료성과 논리성의 좋은 모본이다. 사건은 얼마든지 다른 방향으로 갈 수 있었지만, 그 결과는 처음부터 하나님에 의해 인도된 것으로 보인다. 

 


출산의 결실을 통해 하나님은 일하신다(룻기 4:13-18)

룻기에서 하나님의 손길 때문에 사건이 일어난 것을 두 번째로 룻기 4장 13절에서 분명히 본다(처음 사례는 1장 6절에 나온다).

“보아스가 룻을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그에게 들어갔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게 하시므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
본문의 ‘임신/잉태’를 뜻하는 히브리 단어(herayon)는 여기 말고는 창세기 3장 16절과 호세아 9장 11절에만 나타나지만, ‘임신하게 [허락]하다’라는 특별한 숙어는 오직 여기서만 나타난다.

말론과 결혼해 10년을 사는 동안(룻 1:4) 분명히 아이가 없었던 룻의 배경을 염두에 두고 해석해야 한다.
나오미와 함께 이스라엘로 옴으로써 룻이 신실함을 보인 후에, 룻이 자기 밭에서 이삭을 줍도록 보아스가 신실함을 보인 후에, 보아스가 친족 중 기업 무를 자로서 소임을 충실하게 한 후에, 성문에 있는 모든 백성과 장로들이 증인으로서 한 신실한 기도 후에(룻 4:11-12), 룻과 보아스가 결혼한 후 관계를 가지자마자 하나님은 룻에게 아이를 주셨다. 모든 사람의 노력, 심지어는 성관계까지 의도하거나 바라는 목표의 달성 여부는 하나님께 달려있다(룻 4:13-15 1:4).

어떤 아이든 그 태어남은 하나님에게서 온 선물이지만, 룻과 보아스의 아들인 오벳의 출생에는 더 큰 이야기가 있다. 오벳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위대한 왕인 다윗의 할아버지가 될 것이며(룻 4:22), 궁극적으로는 메시아 예수님의 조상이 된다(마 1:5, 16-17). 이런 방법으로 이방인 룻은 이스라엘에, 또 오늘날까지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축복이 됐다. 

 

룻기 결론

   룻기는 자기 백성을 돌보시기 위해, 더욱 중요하게는 그분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사방에서 이끄시며 일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강력한 이야기를 전한다.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하나님을 향한 백성의 신실함 모두 일과 그 일의 결실을 통해 활성화된다. 이 책의 등장인물은 부지런히, 정직하게, 너그럽게, 창의적으로 하나님의 율법과 영감에 따라 일한다. 그들은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인지했고 조화를 이루며 긍휼한 마음으로 다 같이 일했다.

 

   룻기에서 벌어지는 여러 사건에서 우리는 오늘날 크리스천이 일의 존엄성은 물론 그 일의 가치도 반드시 인정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우리는 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 일은 다른 사람에게 혜택을 주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섬긴다. 오늘날 크리스천인 우리는 목사나 선교사, 전도사가 하는 일에서 가장 분명하게 하나님의 손길을 인식하는게 익숙할 수 있지만, 그들이 하는 일만이 하나님 나라의 합법적인 일은 아니다. 룻기는 부유한 지주가 하든 가난에 찌든 이방인이 하든 간에, 농사짓는 것과 같은 평범한 일도 충만한 믿음을 요하는 소명이라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것은 거룩한 일이며, 다른 사람이 그의 가족을 부양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단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다. 모든 합법적인 직업은 하나님의 일이다. 우리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만드시고, 디자인하시고, 조직하시고, 아름답게 하시며, 도와주시고, 인도하시고, 경작하시고, 돌보시고, 치유하시고, 힘을 실어주시며, 알려주시고, 장식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랑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날개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근무 환경을 만들 힘이 있든지 아니면, 다른 사람 편이 되기 위해 스스로 위험을 감수하든지 간에, 우리가 동료를 귀하고 존엄하게 대할 때 우리가 하는 일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우리가 동료의 유익을 위해 일할 때, 특히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소외된 사람을 위해 일할 때 우리는 하나님과 언약한 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이익을 추구하고 모든 힘을 다해 그들이 하는 일이 인간다운 일이 되게 하고 그들의 행복을 키운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불낙지교회 / 불(不) ∙ 낙(落) ∙ 지(遲) ∙


불(不) ∙ 낙(落) ∙ 지(遲) ∙ 교회
불 ∙ 낙 ∙ 지 ∙ 교회

불∙낙∙지∙교회

불신자(不信者)
낙심자(落心者)
지체자(遲滯者)

아니 불(不), 믿을 신(信), 놈 자(者)
- 불신(不信) :  믿지 아니함

떨어질 낙(落), 마음 심(心), 놈 자(者)
- 낙심(落心) :  바라던 일이 이루어지지 않아 마음이 풀어짐.  

더딜 지(遲), 막힐 체(滯), 놈 자(者)
- 지체(遲滯) :
1. 기한(期限)에 뒤짐.
2. 어물어물하여 시간(時間)이 늦어짐.



티쿤 올람(Tikkun Olam) / 티쿤(세상) + 올람(고친다) / 나의 작은 실천이 세상을 치유한다


티쿤 올람(Tikkun Olam)


유대인의 사상과 삶의 방식 저변에는 ‘티쿤 올람’(Tikkun Olam)의 정신이 깔려 있습니다.
여기서 ‘티쿤’은 ‘세상’을 말하고, ‘올람’은 ‘고친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이것을 유대인의 방식대로 의역하자면 “나의 작은 실천이 세상을 치유한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해 세상 속에 사람을 보내셨다면, 사람은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들어야 하며, 하나님을 도와서 창조의 역사를 완성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자 사람의 의무다.’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계획에 자기들이 유용한 도구로 동참하는 협력자임을 믿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구약의 토라를 믿는 유대인들의 삶의 모습이라면, 구약과 함께 구원자 예수님까지 믿는 우리는 더더욱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도 우리에게 “나는 세상의 빛이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는 사람은 어둠 속에 다니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 8:12)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생명의 빛을 얻은 자들입니다.
아무리 작은 빛이라도 어둠을 몰아내고, 접근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어둠은 곧 죄악입니다.
악의 영은 어둠의 권세요, 사단은 암흑의 세력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지금 암흑천지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곧 빛이 없다는 뜻입니다.
마치 기독교의 등불이 꺼진 것이 아닌가 하고 지금 우리는 아주 깊은 고민 가운데 빠져들고 있습니다.

조동화

나 하나 꽃피어
풀밭이 달라지겠냐고
말하지 말아라
네가 꽃피고 나도 꽃피면
결국 다른 방식으로 풀밭이 온통
꽃밭이 되는 것 아니겠느냐

나 하나 물들어
산이 달라지겠냐고도
말하지 말아라
내가 물들고 너도 물들면
결국 온 산이 활활
타오르는 것 아니겠느냐

세상을 탓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내가 바로 꽃이 되고, 내가 바로 단풍이 되어 이 세상을 거룩한 예수님의 정신으로 물들이는 것, 바로 이것이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입니다.

세상이 점점 오리무중, 캄캄한 곳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진리의 불꽃은 사라지고 빛이 없는 세상 가운데 사람들은 점점 더 방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깜깜한 어둠 속에 반딧불이 하나만 있어도 어둠은 그 주위에서 물러갑니다.
어둠은 한 번도 빛을 이겨본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빛을 받아 이 세상을 환히 비추는 사명이 오늘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티쿤 올람(Tikkun Olam)


이 정신으로 이 세상을 환하게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인이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티쿤 올람은 세상을 개선한다(To improve the world)는 뜻이다.

복음성가 중에  “오라 우리가 세상을 변화시키자” 라는 메세지와 유사하다.

티쿤 올람 사상에 따르면 “세상은 있는 그대로”가 아닌 “개선시켜 완성해야 할 대상”이다.
티쿤 올람 사상은 유대교 신앙의 기본원리로 “세상을 고친다”는 뜻이다.

곧 인간은 하나님의 동역자(파트너)로 세상을 개선해 좀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야 하는 책임과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했지만 미완성인 상태로 놓아두었기 때문에 불완전한 상태를 더 좋은 상태로 개선하는 창조적 과업과 행위를 인간의 종교적 신앙 의무라고 보았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했지만 이것은 아직 미완성의 상태이다.
하나님은 천지창조를 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셨지만 인간이 살기 좋은 환경의 창조가 완전히 끝났다고 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인류를 위해 계속 창조하시고 계신다.
때문에 인간은 더 좋은 세사을 만들기 위해 계속되는 하나님의 창조행위를 도와야 한다.
하나님을 도와서 창조의 역사를 완성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자 인간의 의무라는 설명이다.
이렇게 종교적인 신념이 강한 유대인들은 창의적인 사고와 창조적인 행위를 통해 성공한 인물들을 많이 배출하고 있다.
그 이유는 창조적인 성공이 곧 종교적 의무라고 보는 것이다.

 

후츠파(Chutzpah)정신 (토론과 반론의 교육으로 개선할 점을 찾다)

유대인의 창의성의 방법 - 후츠파(Chutzpah)정신
(토론과 반론의 교육으로 개선할 점을 찾다)

히브리어로 후츠파상식적으로 통용되는 활동의 한계를 넘어선 사람들을 말한다.
뻔뻔함, 무례함으로 생각하면 좋을 듯하다.
부정적인 언어로 사용되던 과거와는 달리 현재는 긍정적으로 사용된다.
배짱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래서 유대인의 후츠파 정신은 배짱있게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개진하고 밀고 나가는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뻔뻔함이나 무례함이 반드시 나쁘다고 할 수 없다.

동양의 유교문화는 수직적 문화이어서 우리나라는 나이나 직위를 상관하지 않고 말 한마디 잘 못했다가는 큰 봉변을 당하기 쉽다.
그러나 수평적 문화에 익숙한 유대인들에게는 서로 끊임없이 질문하고 토론하면서 상대방과 의견을 조율한다.  

그 누구도 상대방의 생각을 관리하려 하지 않는다.

유대인들은 <티쿤사상>으로 창조적인 생각을 가지며 <후츠파정신>으로 창조의 사고력(마인드)을 넓혀가는 것이다.


유대인의 역사는 고난의 역사이다.

2차 세계대전의 가장 큰 희생자는 유대인들이다.

미국으로 이민간 유대인들은
No Niggers(깜둥이 반대)!
No Jews(유대인 반대)!
No Dogs(강아지 반대)!
No Jews allowed(유대인 출입금지)! 라고 비난을 당했다.

유대인들은 황금을 좋아하며, 배우는 교육을 중시한다.
왜냐하면 유사시에는 황금이 바로 삶이요 생존이라는 사실을 고난의 역사를 통해 배웠고,

돈이 없으면 지혜 즉 교육을 해야한다고 생각하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결국 부자가 되려고 노력하고 공부에 천재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하나님이 인간을 불완전하게 만들었듯이 인간의 몸도 불완전한 상태로 태어낫기 때문에 질병에 노출되며 질병을 치료하는 의료행위가 곧 세상을 이롭게 한다는 것과 일맥상통하고, 이러한 행동이 곧 종교적 실천이므로 그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유대인 사회에서는 정신적 지도자인 랍비가 존경의 대상이 되는 만큼 의료의술을 담당하는 의사가 존경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유대사회에서는 불완전하게 창조되어 각종 질병으로부터 고통받는 인간의 몸을 치료하는 의학과 의료산업이 매우 가치있는 일로 여기고 많은 연구와 개발을 통해 좋은 의약품들을 만들어 많은 부자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각종 소아바미를 비롯한 감기 독감 백신 개발, 페니실린, 인슐린, 비타민 C도 모두 유대인들이 개발한 의약품으로 전세계를 놀라게 하고 있다.

 

* 유대인들은 창의성의 원천인 티쿤 올람(Tikkun Olam) 사상으로 창의력을,
창의성의 원천인 후츠파(Chutzpah)정신으로 토론과 비판을 중시하면서 교육의 창의력을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