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榮光)을 위하여


영광(榮光) : 영화 영(榮), 빛 광(光)
- 경쟁(競爭)에서 이기거나 남이 하지 못한 어려운 일을 해냈을 때의 빛나는 영예(榮譽)

덮을 멱(冖) / 덮다
불 화(火) / 불, 열과 빛
사람 인(人) / 사람, 인간, 다른 사람, 타인
열 십(十) / 열, 열번
빛 광(光) / 빛, 어둠을 물리치는 빛


גֵּאוּת 1348 [gêʼûwth]
  • 1. 명사 영광, 광채, 사 28:1,3.
  • 2. 명사 들어올림, 올려진 것, 사 9:17(18)
  • 3. 명사 위엄[하나님의], 시 93:1.

כָּבוֹד 3519 [kâbôwd]
  • 1. 남성형 명사 영광, 명예.
  • 2. 남성형 명사 위엄, 장엄, 권위, 광영, 영광, 존귀, 겔 1:28, 3:12,23, 8:4, 10:4,18, 11:23.
  • 3. 남성형 명사 [인간의] 삼상 4:21, 욥 19:9, 시 8:6(5).

נֶצַח 5331 [netsach]
  • 1. 명사 영광, 휘광, 대상 29:11, 삼상 15:29
  • 2.  명사 진실, 정직, 합 1:4, 잠 21:28.
  • 3. 명사 신앙, 확신, 애 3:18.

גֵּאוּת 1348 [gêʼûwth]
  • 1. 명사 영광, 광채, 사 28:1,3.
  • 2. 명사 들어올림, 올려진 것, 사 9:17(18)
  • 3.명사 위엄[하나님의], 시 93:1.

גָּאוֹן 1347 [gâʼôwn]
  • 1. 명사 장식, 영광, 화려함, 사 4:2, 60:15, 시 47:5(4), 암 8:7.
  • 2. 명사 장대함, 위엄[하나님의], 출 15:7, 사2:10, 19,21, 24:14
  • 3. 명사 교만, 오만, 거만, 잠 16:18, 암 6:8, 나 2:3(2), 욥 35:12, 사 13:11, 16:6.


5331 [netsach) נֶצַח
  • 명사 영광, 휘광, 대상 29:11, 삼상 15:29

  • 2. 명사 진실, 정직, 합 1:4, 잠 21:28.
  • 3. 명사 신앙, 확신, 애 3:1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종교개혁자인 마틴 루터가 쓴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유명한 논문이 있습니다.
루터는 이 논문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요점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지극히 자유로운 만물의 지배자이며 아무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지극히 충성스러운 만물의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된다.”

​마틴루터는 1520년 로마 교황청의 위협속에서도

8월에 '독일 크리스찬 귀족에게 보내는 글'
10월에 '교회의 바벨론 감금'
11월에 '크리스챤의 자유' 라는 논문을 출판하였다.


루터의 3대 대표 논문의 마지막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입니다.
1520년대 마지막 세 번째 논문이자 루터의 신학을 맛볼 수 있는 정점에 있는 논문입니다.
다른 논문도 비슷한 특징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이 논문은 루터가 심혈을 기울였고, 독일과 중세교회를 향한 자신의 의지를 분명히 드러낼 목적으로 기록된 것입니다.
공개서한으로 작성되었고, 라틴어뿐 아니라 독일어로 동시에 공개된 논문입니다. 당시 교황이었던 레오 10세에게 보낸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아직 종교개혁의 바람이 불지 않았던 시기였습니다. 루터는 마지막까지 가톨릭 중세교회와 결별하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작센(Sachsen)의 귀족 출신이자 교황의 시종인 칼 폰 밀티츠(Karl von Miltitz)는 루터와 교황을 중재시키기 위해 루터에게 간곡하게 부탁했던 결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루터는 그 요구에 응하기는 했지만 자신이 주장했던 중세 교회의 신학적 모순과 타락에 대해서는 조금도 철회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강경하게 주장합니다.

루터의 3대 논문 가운데 마지막에 해당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자유’를 개진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영적인 자유이며, 사람의 내부에서 온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됨으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루터는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근거는 ‘오직 믿음으로’와 ‘오직 성경으로’라는 명제를 통해 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주장은 인간의 행위와 공로, 거짓된 교리와 성경에 근거하지 않는 중세 성례 등과 상관없는 것임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통해 다시 한번 모든 신자들은 사제가 아닌 오직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자유가 아니라 철저히 내면적이며 영적인 자유입니다.

루터가 주장했던 자유는 독일인의 관념적 신앙과 맥락을 같이합니다. 루터는 영적인 자유에 과도하게 치중함으로 삶이 결여된 형태로 발전하게 됩니다. 철학사에서도 일어났던 대륙의 관념철학이 독일에서 일어난 것은 루터의 영향이 적지 않았습니다. 독일의 신비주의 신학과 필립 야콥 스페너'(Philip Jacob Spener)를 중심으로 일어났단 독일의 경건주의 운동(Pietismus)은 루터의 ‘자유’의 개념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운동은 다시 진젠도르프를 통해 일어난 모라비안주의들을 통해 관념적이며 신비주의를 표방한 부흥 운동의 틀을 다지게 됩니다. 루터의 뒤를 이은 칼뱅의 신학은 루터의 이신칭의를 넘어 ‘성화’를 강조합니다. 종교개혁의 신학은 루터에 의해 시작되어 칼뱅에 의해 완성되었습니다.

논문 초기에 논문에 함께 덧붙여진 교황에 대한 이야기는 오해의 소지가 많습니다. 루터는 교황인 레오 10세를 건전하고 경건한 사람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레오 10세는 이미 루터에게 1520년 6월 15일 ‘주여 일어 나소서(Exsurge Domine)’라는 파문 경고 교서를 루터에게 발송했습니다. 루터는 10월 10일 교서를 받습니다. 그리고 정확히 한 달 후인 11월 12일 경에 루터는 본 논문인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발표하게 됩니다. 이러한 정황들은 루터가 교황에게 절대 호의적이지 않았음을 반증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황에 대한 호의적인 표현들은 타협하기 위한 목적보다는 일종의 ‘경고’로 볼 수 있습니다. 즉 ‘당신이 진정 진리의 수호자라면 내가 지금 당신을 표현하고 있는 그대로 거룩한 교황으로 살아야 하며, 부패한 중세교회를 개혁시켜야 한다’로 읽는 것이 타당합니다. 이제 루터의 논문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은 이형기가 번역한 <루터 저작선>에 담긴 것을 인용했으며, 번역이 모호하거나 어색한 부분은 지원용이 번역한 <종교개혁 3대 논문>을 참고했음을 밝힙니다.

2. 간략한 요약

[교황 레오 10세게 보내는 공개서한]

로마에 계신 교황 레오 10세에게 마르틴 루터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이 있으시기를 바라나이다. 아멘.

3년째 이 세대의 괴물들과 싸우면서 그들 가운데 살고 있는 복된 아버지 레오를 우러러 보며 귀하게 생각합니다. 전임자들인 피우스(Pius)와 율리우스(Julius)의 칙령에도 불구하고 나에 대한 귀하의 불경건한 아첨꾼들의 부당한 광란은 나로 하여금 귀하의 교황직과 미래의 공의회에 호소하지 않을 수 없게 했습니다. 나는 귀하는 바벨론에 있는 다니엘로 불렀습니다. 저는 모두에게 칭찬 받는 당신에게 돌을 던질 만큼 어리석지 않으며, 첫 번째 사람도 아닙니다.(요 8:1-11) 로마 교황청은 공의회를 몹시 싫어하고 개혁을 두려워합니다. 한때는 하늘의 문이었던 로마 교황청은 이제 지옥의 열린 입구가 되었습니다.

영명하신 레오 성하여, 청컨대 이번 한 번만 나의 주장을 변호하고 귀하의 진짜 원수들을 고발하는 것을 허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귀하의 특사 세인트 시스토의 추기경이 나를 어떻게 대했는지 아실 겁니다. 그는 자기 명예만을 구하고, 나에게 일방적으로 나의 의견들을 취소하라고만 했습니다. 그는 야비한 자로 일을 더 꼬이게 만들었습니다. 다음으로 교황의 사절인 칼 밀티즈의 경솔함을 아실 것입니다. 에크 또한 거짓과 속임수로 이전보다 더 악하고 혼란하게 만들었습니다. 복되신 아버지여, 귀하게 빈손으로 나아가지 않으려고 나의 화평과 좋은 소망을 담은 이 작은 논문을 보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

그리스도인은 전적으로 자유로운 만물의 주이며 아무에게도 예속되어 있지 않다.
그리스도인은 전적으로 충실한 만물의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되어 있다.

이 두 명제는 서로 모순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이것들은 서로 잘 조화되며 우리의 목적에 이바지할 것이다. 이 두 말은 바울의 말이다. 그는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 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전 9:10)했고,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라 했다. 사랑은 본질상 사랑의 대상이 되는 사람을 섬기고 그 사람에게 예속되고자 한다. 그리스도는 만물의 주였지만 여자에게 나셨고, 율법 아래 나셨다.(갈 4:4)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과 “종의 형상”(빌 2:6-7)을 입은 자유자이시며 종이셨다.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은 믿는 이들의 영혼을 먹이고 의롭게 하여 자유롭게 하고 구원하는 것이다. 우리가 입으로 주를 시인하며 구원을 얻는다.(롬 10:9) 또한 주님의 부활을 믿으며, 의롭게 된다.(롬 10:4) 바울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했다. 그러므로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되며, 자유를 얻는다.

믿음은 행위와 관련하여 그 무엇도 관계될 수 없다. 행위에 의해 의롭게 된다면 믿는 것은 바알과 여호와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것이다.(왕상 18:21)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그로 인해 죄사함을 받고 의롭게 된다. 구원을 위해서 우리가 행해야할 일은 무엇인가? 없다. 오직 하나,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다.(요 6:29)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신앙은 완전한 구원을 가져오면 인간을 모든 악에서 구원하는데 비할 데 없는 보화이다.

그렇다면 성경이 가르치는 계명은 무엇인가? 계명은 사람에게 자기 자신을 알라고 가르친다. 계명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무력을 알고 자신에 대해 절망한다. 이것은 옛 계약이며, 새 언약을 예비한다. 예를 들면 탐내지 말라(출 20:17)는 계명은 우리가 모두 죄인임을 입증한다. 어느 누구든 탐내지 말라는 계명을 지키지 못한다. 그로 인해 우리는 절망하고 외부에서 도움을 구해야 한다. 일점일획도 변함없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모든 이들은 정죄 된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야 한다. 그 안에 은혜와 의와 평화와 자유가 약속되어 있다. 바울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롬 11:32) 밝힌다. 이것은 하나님의 새 언약이다. 그리스도인은 신앙 가운데서 자기가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며 자기를 의롭게 하기 위하여 어떤 행위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하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이요 그리스도인의 자유다.

믿음으로 우리의 영혼과 그리스도는 한 몸이 된다.(엡 5:31-32) 만약 결혼하여 한 몸이 된다면 서로의 것을 공유한다.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하나 되며 그리스도와 함께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것을 공유한다. 그리스도는 은혜와 생명과 구원으로 충만하시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은 죄와 죽음과 저주로 가득 차 있다. 이제는 믿음으로 죽음과 저주는 그리스도의 것이 되고 은혜와 생명과 구원은 신자의 것이 된다. 그리스도는 한 위격 안에서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시다. 신앙의 결혼반지로 그(그리스도)는 그의 신부(신자)의 것인 죄와 죽음과 지옥의 고통에 동참하신다. 그것이 마치 자신의 것인 양 고난을 받으시고, 음부에 내려가셨다. 그러나 죽음과 지옥이 그를 삼킬 수 없었다. 그의 의는 모든 사람들의 죄보다 더 크고 그의 생명은 죽음보다 더 강하며 그의 구원은 지옥보다 더 강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자는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영화롭게 된다. 믿음만이 그리스도인의 의이며 모든 계명의 성취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제사장들이며 왕들이다. 베드로는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벧전 2:9)이라고 선언한다. 또한 신자는 그분의 “거룩한 나라”이며, “그의 소유된 백성”이다. 그렇다. 신자들은 왕들이다. 모든 만물을 지배한다. 이는 훌륭한 특권이고 얻기 어려운 것이며, 참으로 전능한 능력인 영적 지배권이다. 동시에 제사장들이다. 우리는 제사장으로서 하나님 앞에 나가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거룩한 일들을 서로에게 가르칠 자격이 있다. (히 10:19,22) 그리스도인들은 만물로부터 자유로우며 만물에 대하여 자유롭다. 교회에서 사용되는 ‘사제’ ‘성직자’ ‘신분계층’은 ‘사역자’이며, ‘종’이고 ‘청지기’들이다. 이런 칭호는 사역의 의미를 부여하지만 신분의 차이를 말하지 않는다. 바울은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고전 4:1)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제 겉 사람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우리의 육신은 불완전하다. 육 가운데 살아갈 동안 장래에 완성될 것을 기대하며 어느 정도 진보를 향해 나아갈 뿐이다. 인간은 유한하고 불완전한 삶을 지나야 한다. 그러므로 현세를 살아가는 동안 자신의 육신을 제어해야 한다. 금식, 절제, 노동, 및 다른 적합한 훈련을 통해 자신의 육신을 잘 다스리고 육신을 성령의 지배 아래 두도록 힘써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의 육신은 속사람과 신앙에 복종하고 순응하며 신앙에 항거하지 않고 속사람을 훼방하지 않게 될 것이다. 제어하지 않으면 그렇게 행하는 것이 육신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육신은 절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오히려 육신은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 (갈 5:24) 인간이 자신들의 행위로 의롭게 된다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좋은 열매가 좋은 나무를 만들지 못한다. 이처럼 악인은 선을 행하지 못한다. 선은 선인에게 나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하면 그들의 선은 거짓이며, 아무것도 아니다. 선한 행위를 구하기 전에 먼저 선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인이 되면 선행은 자연히 흘러넘친다. 믿음으로 사는 자들은 자신만을 위하여 살지 않고 이웃을 돌아본다. 강요나 조건이 아닌 자발적인 선행을 통해 사랑을 드러낸다. 바울은 말한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7-8) 그리스도인은 필연적으로 이웃과 대면하고 관계를 맺는다. 자신의 손으로 일하고,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을 찾는다. (엡 4:28) 자, 이와 같은 믿음으로부터 주님 안에서의 사랑과 기쁨이 흘러나오며, 사랑으로부터 이웃을 기쁘게 섬기고 감사나 배은망덕, 칭찬이나 비난, 이득이나 손실을 고려치 않고 기쁘고 자발적이고 자유로운 생각이 흘러넘친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유롭게 살아간다. 강요나 억지로 율법을 행하지 않는다. 자원하고 기쁨으로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한다. 마라아의 자발적인 결례 행함, 디모데의 자발적 할례, 그리스도의 세근 납부와 그리스도인의 세속 권위에 대한 순종은 성령의 자유 가운데 행한 것들이다. 이러한 행위들은 의롭게 되려는 노력이 아니라 자발적인 선행이며 그리스도인으로서 기쁨으로 행하는 것들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 (고전 13:5) 그리스도인은 사랑의 원리를 따른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행위로부터 우리를 해방하지 않고 그릇된 견해에서 해방한다. 믿음은 우리를 양심을 구속(救贖)하고 바르게 보존(保存)하여 의(義)가 행위에서 비롯되지 않음을 안다.

인간의 본성과 자연적인 이성은 본질적으로 미신적이다. 의를 율법과 행위를 통해 얻으려 한다. 그러나 거듭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비밀 가운데 숨겨져 있는 지혜를 우리 마음에 가르치시지 않는다면 인간의 본성은 그것을 어리석은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렇게 기도하자.

“하나님이여, 영원히 복되신 하나님이여, 우리가 땅 위에서 그의 길을 알고 만민 중에서 그의 구원을 알도록 마침내 그들과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주의 얼굴을 우리에게 비추소서! 아멘”

3. 나가면서

루터가 말하는 ‘자유’는 이렇게 정리될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역설적 존재로서의 자유를 주장합니다.

먼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로 인해 자유를 얻었고, 만물의 주가 되었다. 그러므로 아무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 둘째, 그리스도인은 더할 수 없는 충만한 만물의 종이며, 다른 사람에게 예속된다.

루터는 모순처럼 보이는 두 명제를 통해 그리스도인이 갖는 자유의 실체를 드러냅니다. 그리스도가 만물의 주이시며,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하나님이시지만, 죄인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스스로 종이 되어 율법 아래 나심으로 고난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십니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한 은혜와 생명을 공유합니다. 즉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됩니다. 그렇다면 믿음으로 얻게 된 ‘의’는 타락한 인간의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주입된 것입니다. 루터는 바로 이 지점, 외부로부터 주입된 의가 인간의 본성을 바꾸고 진정한 선행을 가능하게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어리석고 타락한 중세 교회는 자신의 본질을 바꾸려 하지 않고 타락한 자신이 행한 행위를 통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려는 우를 범합니다. 그들의 “행위는 양의 옷을 입고 약탈하는 이리들과 같이 사람들을 속이며 사람들을 서로 속이게 만”들고 맙니다.

아직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인데도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명징하고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5년 후인 1525년 에라스무스와 ‘자유의지 논쟁’을 하게 될 것입니다. 5년이란 시간이 무색할 만큼 루터의 자유 관념은 완전한 성숙에 이르렀음을 발견합니다. 아직 어거스틴의 글을 인용하고 있지 않지만 어거스틴의 ‘은총론’이 루터의 신학 속에 완벽하게 스며있습니다. 타락한 인간에게는 소망이 없으며,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선언합니다. 그렇다면 의는 인간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서 온 것이며, 그리스도로 인한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새 창조의 결과입니다. 루터는 신약 성경이 ‘그리스도 중심’인 것을 확고히 합니다. 이는 교부들의 전통을 완벽히 인식했다는 증거이며, ‘새 언약’의 관점에서 성경을 읽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의 자유에는 관념적 ‘이신칭의’ 개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이 보입니다. 어쩌면 이러한 약점은 종교개혁의 시작점에 있던 루터에게는 불가피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중세교회의 타락으로 인해 행위에 대해 부정적으로 볼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선행’도 축소해야 했을 것입니다. 루터의 급선무는 행위를 통해 의롭게 되고자 했던 왜곡된 중세의 신학을 타파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직 완숙한 단계는 아니었지만, 루터의 자유에 대한 신학적 정의는 성경에 깊이 뿌리내린 것이었으며, 앞으로 전개될 다음 세대의 종교개혁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지금의 개혁교회야말로 다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 참된 개혁​의 정신을 회복해야 되기 때문이다.
마틴루터의 종교개혁 3대 논문은 개신교인이라면, 특히 목회자라면 꼭 한번은 읽어봐야 하는 책이다.
이 책을 통해, 종교개혁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마틴루터는 1520년 로마 교황청의 위협속에서도

8월에 '독일 크리스찬 귀족에게 보내는 글'
10월에 '교회의 바벨론 감금'
11월에 '크리스챤의 자유' 라는 논문을 출판하였다.

​​1. 독일 크리스챤 귀족에게 보내는 글

​이 논문은 다른 세 편의 글과 비교했을 때  로만 가톨릭에 대해 가장 공격적이고, 로마 교황에 대해​ 가장 비판적인 글이다.
그 이유는, 마틴 루터가 이 논문을 통하여, 독일 크리스챤 귀족들의 구체적인 행동을 촉구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이 논문에서, 마틴 루터는 로만 가톨릭이 여태껏 세 가지 담을 쌓아 놓고 그 뒤에서 이제까지 자신들을 방어해가며, 부패했다고 비판한다. 

첫째 담 세속적 계급 위에 있는 영적 계급(성속의 구분)
둘째 담 성서해석자인 교황과 교황무오설(성서해석 독점)
셋째 담 교황과 공의회(교황은 처벌받지 않음) 

​마틴 루터는 교황의 허위, 그리고 사제들의 특권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그들이 평신도보다 거룩하거나 뛰어난 존재가 결코 아님을 주장한다.

이것은 말하자면 모든 크리스찬은 참으로 "영적 계급"에 속하며 그들 가운데는 직무상의 차별 이외에 아무것도 없다. 구두 수선공, 대장장이, 농부는 각기 자기들의 일과 직무를 맡고 있으면서도 그들은 다 성별받은 사제와 주교와 같다. -29~34p 

​마틴 루터는 이 논문에서 그 당시 혁명적인 평등사상을 전개한다.
어떻게, 그 당시에 하늘같은 교황과 땅같은 농부가 같은 크리스챤이라고 말하며, 교황이 그들보다 결코 우월하지 않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지금의 그리스도인은 마틴 루터가 가졌던, 혁명적 평등사상을 망각한 건 아닐까?
인간 사회의 비인간적 불평등과, 교회내의 비성경적 불평등에 너무 익숙해진건 아닐까?

이 논문을 통해, 마틴 루터가 주장하는 '만인 사제설'의 의미와 그 효과에 대해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있다.​

2.교회의 바벨론 감금

​15​20년 10월에 나온 이 논문은 마틴루터의 성례관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글이다.
설교가 들려지는 말씀이라면, 성례전은 보여지는 말씀이다.
그러나 로만 가톨릭은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들려지는 말씀보다 보여지는 말씀인 성례전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마틴루터는 성례전보다 본질적으로 중요한 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그곳에 교회가 있다(ubi est verbum ibi est ecclesia)라고 주장하며,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의 본질임을 강조했다.

마틴루터는 이 논문에서 로만 가톨릭이 많이 하는 성례중에 성찬과 세례를 예수님께서 제정하셨기에 남겨두고, 나머지는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

마틴​ 루터는 성찬식에서 잔을 주지 않고 떡만 주는 것이 비성경적이라고 이야기하며 얀 후스를 언급한다.
체코의 종교개혁자 얀 후스는 성도들과 떡뿐만 아니라 잔을  나누며 성찬식을 하다가 화형을 당하였기 때문이다.

마틴 루터는 자신이 존 위클리프와 얀 후스의 사상적 후예라고 이야기 한다.

​​나는 이러한 나의 가르침이 위클리프적이고 후스적이고 이단적이고 또 교회의 규정에 배치된다고 부르짖을 사람들에게 대하여 조금도 귀를 기울이거나 중요시하지 않으려고 한다. -185p

​우리는 흔히 종교개혁이 1517년 마틴루터에 의해서 시작되었고, 그 전에는 종교개혁자가 없었던 것처럼 생각하지만, 실제로 마틴루터 이전에 존 위클리프와 얀 후스와 같은 선구적 종교개혁자들이 존재하였다. ​

영국의 존 위클리프가 성경을 자국어인 영어로 번역하였고, 얀 후스가 위클리프의 영향을 받아 성경을 자국어인 체코어로 번역하였고, 마틴 루터가 얀후스의 영향을 받아 성경을 자국어인 독일어로 번역하였다. ​

3. 크리스챤의 자유

​1520년 11월에 쓴 '크리스챤의 자유'는 앞의 두권의 논문보다는 다소 온건한 어조다. 마틴 루터는 이 논문에서 크리스챤으로서 어떻게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지 이야기 한다. 크리스챤은 본질적으로 자유인이면서 또한 봉사자다.

크리스찬은 더할 수 없이 자유로운 만물의 주이며 아무에게도 예속하지 않는다.
크리스챤은 더할 수 없이 충의로운 만물의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한다. -295p 

​크리스챤은 매우 자유로운 존재이지만, 매우 부자유한 존재이다. 이런 모순이 왜 발생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크리스챤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율법에서 도달할 수 없는 자유를 얻지만, 그 자유로 이웃을 적극적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종이되기 때문이다.

그는 신앙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살며, 사랑으로 그의 이웃 안에서 산다. 신앙에 의하여 그는 그 자신 이상으로 하나님께 올리워지며, 사랑에 의하여 그는 그 자신 이하로 이웃에게 내려간다. -338p







형제 자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부르셔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자유를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구실로 삼지말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 갈라디아서 5:13

크리스챤은 믿음때문에 주인이고, 사랑때문에 종이된다.
에리히프롬이 말한 것처럼, 참된 자유는 freedom from에서 freedom to로 넘어가야 한다.
크리스챤은 죄에서 해방되어, 이웃을 적극적으로 사랑하는 삶을 살게 될 때 참으로 해방된다. 

그래서 마틴 루터는 용기있게 이렇게 선포한다.

"침묵을 지킬때는 지나가고 이제는 말할 때가 왔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죄에서 자유함을 얻어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자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자유롭게 된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만물의 지배자로 아무에게도 예속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육신적으로 이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이웃과의 관계에서 종처럼 그들을 사랑하고 섬겨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이러한 이중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본문에 앞서 성도는 자기의 신앙양심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할 자유가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적인 자유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자유롭게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먹고 마시는 문제에서부터 삶의 중요한 문제까지 결정하며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상의 문제들을 선택하고 결정하는데 중요한 원리가 있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문제에 대한 사도 바울의 최종적인 결론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인들의 참된 삶의 목적에 대해 가르쳐 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참된 성도의 신앙과 생활을 정확하게 요약한 핵심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모든 행위의 기준, 전 인생의 기반 역시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음을 가리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을 지배하는 아주 기본적인 원리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든 행동, 즉 그것이 먹는 것이든지 마시는 것이든지 생업의 일이든지 봉사의 일이든지 무슨 일이든지 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아야 하나님이 영광을 위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은 ‘자신의 존재 목적과 삶의 목적을 바로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은 존재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만드실 때에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창조하셨습니다.
그 목적인 무엇인지 알아야 분명한 삶을 살고,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목적을 상실하고 있다면 존재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존재가치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가치창조의 수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적을 상실하면 자연히 존재의 가치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는 마치 땅만 허비하고 세월만 허송하는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와 같습니다. 일본의 유명한 신학자인 우찌무라 간조목사님은 말하기를 "실패하는 것이 죄가 아니라 목적이 잘못된 것이 죄"라고 했습니다. 

삶의 의미와 목적을 가장 잘 인식한 사도 바울은 빌 1:20-21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사도 바울은 이 고백을 통해 자신의 존재목적이 예수님을 존귀하게 해드리기 위함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존재목적도 역시 하나님과 주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몇 년 전 우리 한국교회에 ‘목적이 이끄는 삶’ 열풍이 불었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새들백 교회 릭 워렌 목사님을 통해 많은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열풍이 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때문에 우리 한국교회가 목적이 이끄는 교회가 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목적이 이끄는 교회가 되었다면 지금쯤 우리 한국교회는 많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인정을 받아 부흥하고 성장하는 교회가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맛을 잃은 소금과 같이 세상 사람들의 발에 밟히고 있습니다. 

높은뜻 숭의교회 김동호 목사님은 오늘 날 우리 한국교회가 이렇게 된 원인을 한국교회가 교회의 존재목적을 상실하였기 때문이라고 진단했습니다. 교회의 존재목적은 교회를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의 존재목적은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만드는 것입니다. 세상을 모든 사람들이 살기 좋은 천국, 즉 하나님 나라로 만드는 것이 교회의 소명이고 사명이며 교회의 존재목적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한국교회가 그 목적을 잊었습니다. 세상을 등졌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잊었습니다. 교회가 교회의 목적이 되었습니다. 교회의 부흥, 교회의 성장이 교회의 목적이 되었습니다. 교회의 성장이 목적이 되고, 교회의 부흥이 목적이 되어 온 교회가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그 결과 어느 정도 그 목적을 이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 세계에서 제일 큰 장로교회, 세계에서 제일 큰 감리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교회는 점점 커지는데 교회는 점점 그 생명력을 잃어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교회는 점점 그 아름다움을 잃어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세상의 존경을 받고 인정을 받던 교회는 점점 세상의 지탄을 받고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는 교회로 추락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교회가 교회의 존재목적을 잃으면서 교인들도 존재의 목적을 잃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부자 되고, 세상에서 성공하고, 세상에서 출세하는 것이 목적이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과 똑같은 목적을 갖게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과 다른 것이 있다면 그 목적을 하나님께 기도하여 얻겠다고 하는 것만 달라졌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처럼 소중한 소명을 잊었습니다. 사명을 잊었습니다. 자신의 존재목적을 상실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상실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사를 잃어버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는 하지만 예수의 능력은 상실한 사람들이 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삶의 목표와 목적을 수정해야 합니다. 자신의 성공만을 위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과 소명을 잊어버리고 살고 있는 어리석은 삶을 벗어 버리고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살아가는 목적을 다시 한 번 세우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존재하는 목적을 알게 되면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개념이 무엇인지는 잘 알아야 합니다. 영광의 개념을 생각할 때 항상 두가지 개념 즉, 하나님과 인간의 관점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께서 “그 영광을 나타내셨다”는 표현도 있고,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표현도 있습니다. 

하나님 입장에서의 영광의 개념은 “하나님의 임재나 나타내심”의 의미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영광을 보았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보았다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 2장에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는 기적을 행하실 때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셨다”(11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갈릴리 가나의 한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되신다는 사실을 나타내셨다고 하는 뜻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말이나 행동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여주고 드러나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는 일이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능력과 사랑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일을 하든지 간에 이 일을 통하여 하나님을 드러내고, 알려주고, 보여주며, 높이는 방편이 되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신원 에벤에셀 박성철 회장은 장로님입니다. 20여 년 전 남의 건물 얻어서 조그맣게 봉제공장을 시작하면서 하나님께 물질의 복을 주시면 수입의 30%를 하나님 영광을 위해 쓰겠다고 서원하였습니다. 오늘날 그 기업은 신흥재벌의 순위에 들어 있다고 합니다. 사업을 하든, 운동을 하든, 공부를 하든, 무엇을 하든 하나님의 자녀들의 일차적 목표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을 드러내고 보여주며 알려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에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삶의 의미와 가치의 전부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데 두었습니다. 

롬 14:8절에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라”고 하면서 주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제일의 목적이 바로 인간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의 목표를 하나님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마땅합니다. 하나님은 친히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을 말씀합니다. 사 43:7절에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이 목적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처럼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때 나타나는 중요한 열매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32-33절에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통해 우리의 자유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하나님의 교회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 것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성도든지 아니든지, 아니면 나와 관계있는 사람이든지 아니든지 관계없이 그들의 유익을 구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하여 그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목표는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삶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구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유익을 구하며 살아갑니다. 거미같이 자기만 위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넘어지게 하고 손해나게 하며 해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개미와 같이 부지런히 살기는 하는데 전적으로 자기만을 위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부지런히 일하는 꿀벌과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꿀벌은 부지런히 일하며 살아갑니다만 그 모든 것이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이 특징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남에게 유익을 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 삶의 결과는 반드시 영혼을 구원하는 것으로 연결되어져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많은 사람에게 전도하여 영생 얻고 구원받는 사람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가장 큰 뜻은 예수 믿고 구원 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 6:39-40절에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처럼 구원받아 영생을 소유한 우리 성도들의 삶은 어찌하든지 한 사람의 영혼이라도 구원하는 일에 목표를 두고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 믿기를 권하고, 예수 믿게 하여, 우리와 같이 영생을 얻고 구원받는 사람이 되도록 하는 것이 우리 생애의 최대의 목표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하든지 한사람에게라도 복음을 전해 그들의 영혼을 건져야합니다. 영혼 구원을 위해서 시간을 바치고 물질을 바치고 재능을 바치는 것은 참으로 가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실 때 복음을 위해 생명까지 바친다면 최고의 영광일 것입니다. 예수님도 무슨 일을 하든지 궁극적인 목표를 영혼구원에 두었습니다. 이제 우리도 무엇을 하든지 복음을 전하여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중심을 두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과 박해와 핍박을 각오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까? 내 가족, 내 친지,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혹 아직도 하나님을 영접하지 못하고, 어둠의 세계에서 방황하도록 내버려두지는 않았습니까? 

추석명절에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온 가족이 감사하시고, 우상숭배를 멀리하며 온 가족을 구원하는 전도의 기회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