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한경직 목사가 1945년 9월 평안북도 상황을 알린 비밀청원서 발견 | 한국 교회 이야기와 선교 이야기


"소련군에게 무기 넘겨받은 공산주의자들, 라디오 방송국과 지역신문 빼앗고 있다… 반대세력 학살 위협하고 대낮에 총살"

이선민 선임기자

입력 : 2017.08.16 06:07 | 수정 : 2017.08.16 08:30

[오늘의 세상]

故한경직 목사가 1945년 9월 평안북도 상황을 알린 비밀청원서 발견

"청원서 받은 美군정 정치고문… '소련군 활동, 믿을 만한 첫 증언'
소련군, 도시에 들어가면서 현금 강탈·부녀자 강간 일삼아"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우리는 평화와 민주주의를 기대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소련군이 진주해 우리 백성을 약탈하고 많은 비행을 자행하고 있다. 게다가 이 모든 것이 공산당 지배를 예고하고 있다. 우리는 '공산 한국'을 원하지 않는다(We do not want red Korea).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북한 지역은 완전히 황폐질 것이다. (연합군이) 즉각 위원회를 파견해서 상황을 조사해 달라."

    2012  종교·정치·사회 등 광범위하게 20세기 한국사에 큰 자취를 남긴 한경직 목사. 그는 평양과 신의주에서 활동했으며, 1945년 11월 서울로 온 뒤에는 영락교회를 세워서 월남한 서북 개신교 세력의 구심점이 됐다. 사진은 한경직 목사의 삶을 그렸던 2012년 다큐멘터리‘한경직’. /마운틴픽처스

20세기 후반 한국을 대표하는 개신교 지도자인 한경직(1902~2000) 목사가 광복 직후인 1945년 9월 26일 서울의 미군정에 소련군이 점령한 평안북도 일대의 정치 상황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한 영문(英文) 비밀청원서가 발견됐다. 한국기독교사를 연구하는 박명수 서울신학대 교수가 최근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소(NARA)에서 찾아낸 이 문서는 일본이 패망한 뒤 신의주에서 소련군 및 공산당과 마찰을 빚던 한 목사가 서울로 내려와 미군정 당국에 제출한 것이다. 당시 미군정 정치고문이었던 베닝호프는 비밀청원서를 자신의 평가를 담은 보고서와 함께 미국 국무부에 보냈다. 베닝호프는 이 청원서가 "38도선 이북을 점령한 소련군의 정치 활동에 관한 최초의 믿을 만한 목격자 증언"이라고 평가했다. 베닝호프의 보고서는 미 국무성 외교문서집(FRUS)에 수록됐지만 한 목사의 비밀청원서는 포함되지 않아 그동안 전문이 알려지지 않았다.

 윤하영 목사

한경직 목사가 신의주제1교회 담임인 선배 윤하영(1889~1956) 목사와 연명으로 작성한 A4용지 3장 남짓 분량의 청원서에 따르면, 일본이 항복한 다음 날인 8월 16일 신의주의 지도급 인사들은 질서 유지를 담당할 자치위원회를 구성했고, 8월 25일 평안북도 각 시·군 대표들이 참여하는 평북 자치위원회로 확대됐다. 8월 30일 소련군이 신의주에 들어오면서 시태가 급변했다. 소련군은 인민정치위원회를 새로 만들고 급조된 두 개의 소규모 공산주의 조직과 자치위원회가 함께 참여하도록 지시했다. 곧 공산주의자들이 인민정치위원회의 다수를 차지했다.

소련군은 일본군을 무장해제시킨 뒤 그들에게서 빼앗은 무기를 공산주의자들에게 넘겨주었다. 며칠 뒤 조직된 공산당은 법원 건물을 무력으로 차지해 본부로 사용했고 라디오 방송국과 유일한 지역신문을 빼앗아 공산주의 선전 선동을 시작했다. 공장과 농촌 마을에는 공산당 조직이 만들어져 무력으로 공장과 농지를 접수했다. 소련군은 비행기로 선전 유인물을 살포하면서 공산당을 지원했다.

이런 사태 전개에 놀란 개신교 지도자들은 '기독교사회민주당'을 만들었다. 이를 알게 된 공산당은 그들이 공식 활동을 하면 소련군이 대량 학살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한경직 목사는 신의주에서 벌어진 테러 현장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9월 16일 대낮에 거리에서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발언을 한 사람이 공산당원인 경찰의 총을 맞고 죽었다. 살인자는 풀려났고, 평상시처럼 일하고 있다. 사회민주당 지도자들이 이에 항의하자, 다음 날 경찰이 몰려와 체포했다."

비밀청원서는 "사람들은 압도적 다수가 공산주의에 반대하지만 공포와 테러 분위기에 사로잡혔고,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알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공산주의자를 제외하고는 살 수 없게 될 것이다. 소련군은 철수하기 전 북한 전역을 공산화하려고 결심한 것이 분명하다"고 적었다.

     1945 9 26               한경직 목사가 윤하영 목사와 함께 1945년 9월 26일 미군정에 제출한 비밀청원서(왼쪽). 북한에 소련군이 진주한 뒤 스탈린과 김일성의 대형 사진을 들고 행진하는 평양 주민들(오른쪽). /박명수 교수 제공·조선일보 DB

이어 소련군의 비행이 "상상을 넘어선다"며 자세히 설명한다. 소련군은 도시에 들어가면 먼저 은행에 가서 현금을 강탈한다고 했다. "신의주에서 소련군은 (은행에서) 120만엔을 가져갔다. 가정집에 침입해 시계부터 여성복까지 귀중품을 약탈하고 부녀자를 강간한 사례는 셀 수조차 없이 많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가는 사람은 38선을 넘으면서 소련군에게 약탈과 강간을 당한다고 폭로했다.

1932년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유학에서 돌아와 신의주 제2교회에서 목회하던 한경직 목사는 일제 말 교회를 사임한 뒤 고아원과 양로원을 설립해 운영했다. 광복 후 신의주 자치위원회 부위원장, 기독교사회민주당 부위원장으로 활동한 한 목사는 비밀청원서를 제출한 뒤 평양으로 돌아갔지만 10월 말 윤하영 목사와 함께 북한을 탈출했다. 그가 북한을 떠난 뒤 용암포 지역의 기독교사회민주당 창립 모임을 공산당이 습격하자 신의주 일대의 개신교 학생이 중심이 돼 저항한 사건이 신의주학생의거이다.

박명수 교수는 "이 비밀청원서는 평안북도 개신교 지도자들이 소련군 진주 후 한 달간 직접 목격한 증언이라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아 미군정이 소련군과의 관계를 재고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8/16/2017081600252.html





구약 각 책의 개론(시작 수요성경여행 01-05-2022 /


창세기(創世記)

1. 표제

유대인들은 히브리어 성경의 첫 글자를 따서 창세기를 “브레시트”(bereshith, 태초에)라고 부른다.
그러나 유대인의 탈무드에는 이 책을 “세계 창조의 책”이라고 하였다.
“창세기”(創世記:  Genesis)라는 이름은 70인역에서 번역한 것으로써, 헬라어 “게네시스”는 “기원” 또는 “근원”을 뜻하는 단어이다.
이것이 70인역에 처음으로 사용될 때, 그 의도는 그 책의 내용을 암시하기 위한 것이다.
부제로 자주 붙어다니는 “모세의 첫번째 책”이란 명칭은 히브리어 성경의 원본에 처음부터 붙어있던 것이 아니라, 여러 세기가 지난 뒤에 덧붙여진 것이다.

2. 저자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은 공히 출애굽 당시의 히브리인들의 위대한 입법자요, 지도자인 모세를 창세기의 저자로 간주해 왔다.
이러한 확신은 기독교 초기에 몇몇 이교적 반대자들에 의하여 약간의 도전을 받기는 하였으나, 18세기 중엽까지는 유대인이나 그리스도인 사이에서 한 번도 심각하게 의심된 적이 없었다.
200여년 전부터 하나의 새로운 사조가 시작되어, 인간의 모든 사고 영역 가운데서 전통적인 신앙과 견해들은 일단 의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미지의 영역에서 새로운 것들을 발견하고 발명해 냄으로써 이 세상의 생활의 방법을 많이 변경시켜 놓았다.
이와 같은 탐구 또는 취조(取調) 정신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비평적인 성질을 가진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의 기초로서의 성서의 확실성을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창세기는 근대에 있어서 비평적인 시험을 당한 첫 책이 되었으며 이러한 시험은 성경의 고등 비평 시대의 출발점이 되었다. 1753년에 프랑스의 궁중 의사 장 아스트뤼크(Jean Astruc)는‘추측’(推測)이라는 책을 출판하였는데, 거기서 그는 창세기에 나타나는 신격에 대한 각기 다른 이름들이 발견된 것을 지적하고, 이것은 창세기가 여러가지 자료들의 수집임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아스트뤼크는 모세가 바로 그 자료들의 수집가요, 이 책의 편찬자라고 추측하였으나, 그의 후계자들은 이윽고 모세를 창세기의 편집자로 단정하였다. 비평적인 마음을 가진 신학자들은 창세기의 가정된 자료들을 각기 분리하고 그것들을 서로 다른 저자별로 분류하거나 적어도 그 자료들이 형성, 수집, 변화, 편집되어 마침내는 하나의 책으로 묶여졌을 것으로 추측되는 시기별로 자료들을 분류하기 위하여 근 200년 동안이나 애써 왔다. 이와 같은 비평적인 견해들을 추종하는 여러 학자들은 하나의 커다란 원칙에 있어서 의견 일치를 보았는데, 그것은 즉 이 책의 가치와 저자와 유래된 시기 등이 각각 다른 많은 문서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 자체 내에서도 어느 것이 어느 시기에 해당되는지에 대하여 광범위한 의견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엄청난 견해 차이는 비평적인 학자들의 가정(假定)의 기초가 얼마나 불확실하고 불건전한 것인지를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많은 비평적인 논쟁들의 거짓됨이 지난 100년간의 고고학적 발견들에 의하여 드러났다. 비평자들은 그들의 이론과 주장을 끊임없이 바꾸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중의 다수는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 창세기의 저자가 모세임을 아직도 부인하고 있다. 그들이 내세우는 이유들 중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의 각기 다른 이름 세 가지가 사용된 것은 이 책의 저자가 둘 이상임을 가리킨다. 특히 그 이름들이 각기 특정한 부분에 두드러지게 자주 사용된 것은 그 부분의 저자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야훼”(Yahweh) 곧 “여호와”(Jehovah)라는 이름이 사용되는 부분의 저자를 비평적인 학자들은 “야비스트”(Jahvist)라고 일컫고, “엘로힘”(Elohim) 곧 “하나님”이란 칭호가 주로 사용되는 부분의 저자를 “엘로히스트”(Elohist)라고 일컫는다. 그 외에도 창세기의 내용을 기록한 고대의 저자들 중에는 제사장 저자도 있었고, 또 그 모든 자료들을 편집한 편집자도 있었을 것이다.
(2) 이 책에 포함된 이야기들이 여러 번 반복된 것은, 이미 존재하던 평행 자료들을 후대의 편집자가 한데 묶어 전체적인 하나의 이야기로 엮었으나, 근원이 다른 자료들을 사용한 사실을 숨기지 못한 결과이다.
(3) 창세기의 이야기들 가운데 반영된 여건들은 시간적으로 그 당시와 부합하지 않고 오히려 휠씬 후기와 부합한다.
(4) 지명(地名)을 사용함에 있어서, 초기에는 그렇게 불리우지 않은 지방들이 후기에 사용된 이름으로 일컬어졌다.
(5) 고대 바벨론에 존재하던 창조, 홍수, 그리고 부조들의 생활에 관한 전설들이 성경 기록과 매우 흡사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현대 신학자들은 히브리인 저자들이 포로 기간 동안에 이러한 설화들을 바빌로니아인들에게서 빌어 와서 자기들이 믿는 일신론적인 형태로 새로 편집했다고 주장한다. 보수적인 그리스도인은 다음과 같은 이유들로써 이러한 견해들을 배격한다.
(1) 하나님, 주, 그리고 여호와 등의 성호(聖號)들은 히브리어 성경 전체를 통하여 별로 차별없이 사용되었으며, 비평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저자가 다른 사실을 나타내는 증거로 볼 수 없다. 70인역과 대부분의 고대 히브리어 성경 사본들, 그리고 근래에 발견된 이사야 두루마리 등에서는 어느 한 사본에 나타나는 “하나님”이란 칭호가 그 같은 구절의 다른 사본에서는 “주” 또는 “여호와”로 되어 있고, 또한 그 반대로 된 것도 찾아볼 수 있다.
(2) 설화들에 나타나는 반복은 그것이 바로 저자가 다른 여러 자료들을 사용한 증거라고는 할 수 없다. 모세의 책들의 통일성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허다한 성서 이외의 예증들로써 동일한 저자가 기록한 고대의 문학작품 및 심지어 현대의 작품들 중에서도 유사한 반복들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3) 고대의 역사와 여건들에 관한 지식이 점차로 증가함에 따라서 창세기의 저자가 그 당시의 형편에 대하여 정통한 정보를 갖고 있었으며, 따라서 부조들의 생활에 관한 서술은 그들의 시대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사실이 계속 드러나고 있다.
(4) 지명들은 경우에 따라서 독자들의 이해를 위하여 복사자(複寫者)들에 의하여 후대의 이름으로 대치되어 왔다.
(5) 바빌로니아인들이 히브리인들의 기록과 어느 정도 흡사한 전설들을 가졌다는 사실이 바로 한 민족이 다른 민족에게서 빌어왔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 오히려 그 두 기록들에 대한 공통적인 근원이 있다고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 따라서 창세기의 영감된 기록은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신 완전하고도 순수한 형태의 것이요, 바빌로니아인의 기록들은 동일한 사건들을 저열한 이교적인 배경 속에서 이야기한 것이다.
고등 비평가들이 그들의 이론을 내세우기 위하여 주장하는 것들을 구태여 논박하려고 대항할 필요는 없으나, 모세가 창세기의 저자임을 믿을 수 있는 증거를 포착하는 일은 퍽 중요하다.
출애굽기의 저자가 창세기의 저자였음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오경(五經)의 둘째 책은 첫째 책의 연속이요, 동일한 정신과 의도가 아주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출애굽기의 저자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그 책을 “모세의 책”(막 12:26)이라고 일컬으셨을 때에 분명하게 확증되었으므로, 그에 선행하는 책인 창세기 또한 모세의 기록인 것은 명백하다. 애굽인의 단어와 표현들의 사용, 그리고 요셉의 역사에 나타난 애굽인의 생활과 관습에 정통함 등은 모세가 받은 교육 및 경험과 조화를 이룬다. 창세기가 모세의 저술이라는 증거가 오경의 나머지 책들이 가진 증거보다는 덜 명백하고 덜 직접적이긴 하지만, 모세 오경에 시종 공통적인 언어의 독특성들과 신약의 증언은 다름아닌 모세가 성령의 영감하에 이 책을 기록했음을 보여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창세기로부터 몇 구절을 인용하신 사실은 그분이 그 책을 성서의 일부로 간주하신 분명한 증거가 된다. 창 1:27; 2:24을 인용하시면서 예수께서는 “(너희가) 읽지 못하였느냐”라는 공식적인 언사를 사용하셨다(마 19:4, 5).이것은 여기에 인용한 구절들이 여전히 구속력과 타당성을 가지는 진리를 내포하고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예: 이혼에 관한 바리새인들의 질문과 예수의 대답(막 10:2-9; 창 1:27; 2:24).
다른 여러 경우에 있어서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창세기에만 묘사된 사건들을 언급하심으로써 친히 이 책을 하나의 정확한 역사적인 기록으로 간주하셨음을 보여 주셨다(눅 17:26-29; 요 8:37 등).
또한 사도들의 기록들 가운데 발견되는 수많은 창세기의 인용구들은 사도들이 모세를 그 책의 저자로 확신한 사실과 그 책이 영감으로 기록된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롬 4:17; 갈 3:8; 4:30; 히 4:4; 약 2:23).
이러한 증거에 비춰볼 때, 그리스도인은 모세가 창세기의 저자임을 마음놓고 믿어도 좋다.

3. 역사적 배경
창세기는 B.C. 1500년경, 히브리인들이 아직도 애굽의 속박하에 있던 동안에 기록되었다. 이 책에는 실로 많은 세기들에 뻗쳐 통하는 세계 역사의 소묘(素描: sketch)가 포함되어 있다. 창세기의 초반은 우리가 역사에 관하여 상례적으로 생각하는 그러한 역사적인 배경 속에 넣어질 수가 없다. 우리는 모세가 기록한 것 이외에 홍수 이전의 세계의 역사를 아무것도 갖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화석들의 묵묵(默默)하고도 때때로 모호한 증언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고고학적인 기록들을 갖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홍수 이후에는 경우가 다르다. 고고학자들의 발굴은 창세기의 후반이 차지하는 기간 동안의 사람들과 그들의 관습과 정부의 형태 등에 관한 많은 기록들을 밝혀 내었다. 예컨대, 아브라함의 시대는 이제 상당히 잘 알 수 있게 되었으며, 이스라엘의 속박 기간 동안의 애굽의 역사는 비교적 정확하게 재구성될 수 있다. 이 시대 동안, 즉 아브라함으로부터 출애굽까지의 시대에는 고등한 문명이 만개(滿開)해 있었으며 특히 메소포타미아의 계곡과 나일 강의 제방 연변에는 더욱 그러했다. 북방에서는 헷 족속이 세력을 얻고 있었으며, 팔레스틴에는 군소(群小) 왕들의 지도하에 호전적인 민족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전반적인 관습은 이 모든 민족들의 암흑한 이교주의를 반영하고 있었다.
창세기의 부조들과 하부 및 상부 메소포타미아의 셈 족속들 사이에는 강한 인종적인 유대(紐帶)가 잠재해 있었다. 싯딤 골짜기에서의 왕들의 싸움(14장), 평지에 있는 도성들의 멸망(18, 19장), 그리고 전대미문(前代未聞)의 대기근을 겪는 동안 애굽의 백성들을 보존한 일(41장)과 같은 초기의 큼직한 사건들 가운데서 부조들이 감당한 역할들이 소상하게 묘사되어 있다. 창세기의 인물들은 목자와 전사(戰士)로, 도회지 거주자와 광야의 유목민으로, 정치가와 망명객 등으로 나타난다. 그들의 경험을 기록한 이야기들은 그 책을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아득한 고대의 열강(列强)들과 특히 히브리인들이 이따금씩 접촉하던 군소 백성들의 형편이 어떠했는지를 느끼게 한다.
애굽과 메소포타미아에 일어났던 위대한 문명들에 관해서는 창세기에 기록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에 대한 증거는 부조들의 경험 가운데서 강하게 느낄 수가 있다. 하나님의 백성은 정치적 혹은 사회적 진공 상태에 있는 화려한 격리 지대에 살지 않았다. 그들은 열국이 어울려 있는 사회의 부분이었으며, 그들의 문명과 문화 역시 주위의 다른 백성들의 그것과 크게 다른 것이 없었다. 다른 것이라고는 종교의 차이뿐이었다. 그들은 여호와의 진정한 경배자들 가운데서 남아 있는 가장 중요한 사람들이었으며, 따라서 영감을 받은 저자 모세가 염두에 두고 있는 세계의 중심부를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명백한 관찰과 인식은 자연적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유도하게 된다. 모세가 이 책을 기록한 주된 목적은 무엇이었던가?

4. 주제
창세기의 주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충성스런 작은 무리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취급하시는지에 관한 서술이요, 둘째는 하나님을 떠나서 그분의 교훈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 빠진 타락의 심연을 묘사한 것이다. 창세기는 인간에게 허락된 최초의 영원한 계시이며, 신령한 기록이다.
이 책은 또한 교의적(敎義的)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거기에는 이 세계와 그 안에 있는 삼라만상의 창조, 죄가 들어온 경로, 그리고 하나님의 구속의 허락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은 인간이 자유스러운 도덕적 존재요, 자유 의지의 소유자임을 가르쳐 주고,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것이 인간의 모든 재화(災禍)의 근원임을 가르쳐 준다. 또한 이 책에는 휴식과 예배의 날로서의 거룩한 안식일(安息日)을 준수해야 할 것과 결혼의 신성성과 가정 제도의 수립, 그리고 순종에 대한 보상과 범죄에 대한 형벌 등에 관한 교훈들이 주어져 있다.
이 책은 흥미있는 문체로 기록되어 있어서 젊은이들의 상상력에 호소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 속에 담긴 숭고한 도덕적인 주제들은 성인들을 위해서도 정신적 양식이 되며, 만인을 위한 교훈이 된다. 그리스도인이면 어느 누구도 그것의 연구를 게을리할 수 없고, 하나님의 자녀이면 누구나 그 속에서 광채를 발하는 모범적인 인물들을 본받아야 하는 책, 그 책이 바로 창세기이다.

5. 개요
Ⅰ. 천지 창조로부터 아브라함에 이르기까지 1:1-11:26
    1. 천지 창조 1:1-2:25
       (1) 창조의 6일간 1:1-31
       (2) 안식일을 제정함 2:1-3
       (3) 인간의 창조와 에덴 동산에 관한 세부적 설명 2:4-25
    2. 타락의 역사와 그에 따른 결과 3:1-5:32
       (1) 유혹과 타락 3:1-8
       (2) 에덴에서 추방당함 3:9-24
       (3) 가인과 아벨 4:1-15
       (4) 가인의 후예들 4:16-24
       (5) 아담으로부터 노아에 이르기까지 4:25-5:32
    3. 대홍수 6:1-9:17
       (1) 대홍수 이전의 타락상 6:1-13
       (2) 방주 건조 6:14-22
       (3) 홍수에 관한 이야기 7:1-8:14
       (4) 노아의 언약 8:15-9:17
    4. 노아로부터 아브라함에 이르기까지 9:18-11:26
       (1) 노아의 아들들의 운명 9:18-29
       (2) 국가 목록 10:1-32
       (3) 바벨에서의 언어 혼란 11:1-9
       (4) 셈으로부터 아브라함에 이르기까지의 세대 11:10-26
Ⅱ. 부조 아브라함과 이삭 11:27-26:35
    1. 아브람 11:27-16:16
       (1) 소명과 가나안으로의 여행 11:27-12:9
       (2) 애굽에서의 경험 12:10-20
       (3) 롯과의 이별 13:1-18
       (4) 롯을 구출하고 멜기세덱을 만남 14:1-24
       (5) 하나님과의 언약 15:1-21
       (6) 하갈과의 결혼, 이스마엘의 출생 16:1-16
    2. 아브라함 17:1-25:18
       (1) 언약의 갱신, 아브라함이 할례를 시작함 17:1-27
       (2) 아브라함과 천사들, 소돔과 인접도시들의 멸망 18:1-19:38
       (3) 그랄에서의 체험, 이삭의 출생, 이스마엘 축출 20:1-21:34
       (4) 아브라함의 극심한 시험 22:1-24
       (5) 사라의 죽음과 장례 23:1-20
       (6) 이삭이 리브가와 결혼함 24:1-67
       (7) 아브라함의 후예들 25:1-18
    3. 이삭 25:19-26:35
       (1) 이삭의 아들들 25:19-34
       (2) 이삭과 그랄의 아비멜렉 26:1-35
Ⅲ. 부조 야곱 27:1-36:43
    1. 찬탈자 야곱 27:1-31:55
       (1) 야곱이 속임수로 축복을 받음 27:1-46
       (2) 야곱의 도망과 벧엘에서의 이상 28:1-22
       (3) 야곱이 자기 아내들을 위하여 봉사함, 가족을 형성함 29:1-30:43
       (4) 야곱이 라반으로부터 도망함 31:1-55
    2. 이스라엘, 하나님과 겨루어 이김 32:1-36:43
       (1) 야곱이 가나안으로 돌아옴, 브니엘의 체험 32:1-33:20
       (2) 세겜에서의 수치, 가족 문제 34:1-35:29
       (3) 에서의 후예들 36:1-43
Ⅳ. 구원자 요셉 37:1-50:26
    1. 요셉과 그의 형제들 37:1-36
    2. 유다의 타락 38:1-30
    3. 요셉이 원칙 위에 굳게 섬 39:1-40:23
    4. 요셉이 애굽을 구원함 41:1-57
    5. 요셉과 그의 형제들 42:1-45:28
    6. 야곱이 애굽으로 감 46:1-47:31
    7. 야곱의 축복 48:1-49:33
    8. 야곱과 요셉의 죽음 50:1-26








출애급기(出埃及記) Exdous

出 날 출, 埃 티끌 애, 及 미칠 급, 記 기록할 기


대제사장 위임식 순서 /
 

위임식의 순서를 살펴보면

1. 위임식에 소요될 제물을 준비하고(1~3)
2. 물로써 몸을 청결케 하고(4)
3. 아론에게 성의를 입히며(5~6)
4. 관유를 그 머리에 바르고(7)
5. 아론의 아들들에게 옷을 입히고(8~9)
6. 속죄제, 번제, 화목제 등의 제사를 드렸습니다(10~34).








출애굽기의 기원과 성격

출애굽기라는 명칭은 구약성서의 헬라어 역본인 칠십인역(LXX)에서 나온 것이다. 본래 맛소라 텍스트(MT)는 "그리고 이름은 이러하니라"는 말로 책이름이 붙여져 있었다. 그러나 칠십인역(LXX)과 벌게이트(Vulgate)역 등 대부분의 영역본들은 '길을 떠나다' (ex + odos)라는 의미를 담아 'Exodus'라 부르고 있다. 한글 개역은 '출애굽기'라고 보다 구체적으로 표현한다. 그러나 출애굽기는 애굽 탈출기라기보다는 오히려 성막 건축기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스라엘이 애굽에 거주할 당시의 애굽의 역사를 족장들의 행적과 관련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출애굽기는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야기를 신학적으로 조명한 이스라엘의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출애굽기는 모세의 이야기와 이스라엘 신앙의 기초인 유월절 신앙과 시내산에서의 전통 그리고 성막에 관한 전승을 이어 주는 기록으로서 이스라엘의 구원 개념과 역사 이해를 살펴볼 수 있는 정경이다(Canon).


내용 분해

 

Ⅰ. 애굽에서의 이스라엘 민족(1:1-12:36)

  1. 애굽에서의 노예 생활(1:1-22)

  2. 하나님께서 구원자 모세를 택함(2:1-4:31)

  3.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킴(5:1-12:36)

Ⅱ.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민족(12:37-18:27)

  1. 출애굽과 애굽 군대의 추격(12:37-18:27)

  2. 시내산에 도착(15:22-17:16)

  3. 이드로의 방문(18:1-27)

Ⅲ. 시내산에서의 이스라엘 민족(19:1-40:38)

  1. 율법을 주심(19:1-24:18)

  2. 성막의 제도(25:1-31:18)

  3. 율법을 어긴 백성들(32:1-34:35)

  4. 성막의 건축(35:1-40:38)














레위기

 

1. 저자

레위기서의 저자는 모세오경의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 모세이다.
레위기가 모세의 저작이 아니라는 일부 본문 비평가들의 주장도 있었지만 다음과 같은 주장에 의해 반박되었다.

첫째, 레위기 자첵의 증거이다.

레위기에서는 56번이나 "여호와께서 모세이게 일러 가라사대"(레 1:1; 레 4:1; 레 5:14; 레 6:1)라는 말이 사용되었다.
이는 레위기가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를 받은 모세의 저작임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예수님께서 친히 레위기가 모세의 저작임을 증거하셨다는 점이다.

마태복음 8:4에 예수님께서는 문둥병자를 고치신 후에 그에게 명하시기를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고 하심으로 레위기에 나오는 문둥병에 관한 규례가 모세의 저작임을 증거하셨다.

셋째, 사도들의 증거이다.

누가는 2:22에서 '결례의 법'을 '모세의 법'이라 증거함으로 레위기의 결례가 모세의 저작임을 증거하였다.
또한 히브리서 기자 역시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히 8:5)라고 증거함으로 레위기의 저작설에 관한 논쟁을 결정지었다.

따라서 레위기는 본문 비평가들의 주장대로 여러 문서의 편집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를 모세가 저술한 직접적인 저작이다.

2. 기록 연대

레위기의 기록 연대는 레위기가 기록될 당시에 이스라엘의 머물렀던 장소와 출 40:17과 민 10:17을 비교해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먼저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레위기의 율법을 계시받았을 때 머물렀던 장소는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십계명을 받고 15개월 동안 머물렀던 시내산 근처의 시내 광야였다(레 7:38; 레 25:1; 레 26:46; 레 27:34).

이러한 사실은 레위기서가 이스라엘이 시내 광야에 도달한 후로부터 그들이 거기서 떠날 때까지의 사이에 기록된 것임을 보여 준다. 따라서 출애굽의 연대를 주전 1445년으로 추정할 때 레위기의 기록 연대는 이스라엘이 시내 광야에 도달한 후로부터 시내 광야를 떠날 때까지의 기간인 주전 1445-1444사이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혹자는 이와 달리 레위기의 기록연대를 '모세가 죽기 직전에 자신의 모든 기록을 완성했다'는 신 31:24의 말씀을 근거하여 모세의 광야 40년 생활의 마지막 부분인 주전 1440년경에 기록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후 40넌 광야 생활을 지내고 나서 다시 기억하여 썼다는 무리가 있다.
그리고 신명기 31:24의 말씀은 모세가 그의 생애를 마치는 그 순간까지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모든 계시의 기록을 완성하였다는 말이지, 결코 레위기만의 완성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신빙성이 결여된다.

3. 기록 목적

레위기는 조직된 하나님의 백성을 종교적·사회적으로 통치하는 데 필요한 율법등을 포함하고 있는 중요한 책이다.
특히 시내산에서 정식으로 신정 국가로 조직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새로운 언약 관계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율법과 언약을 지키기 위해서 여러 가지 규례를 제시한 책이 레위기인 것이다.
즉 레위기를 통해 기본 율법이 주어졌으며, 언약이 비준되었고, 성막이 설립된 것이다. 따라서 레위기의 기록 목적을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역사적인 기록 목적으로 선택되고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이 살아가야 할 거룩한 삶의 방법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레위기는 먼저 그들이 어떻게 해야 정결해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을 가르쳐 주며(레 1-17장),
그 후에 그들이 거룩한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구체적인 삶의 방향을 제시하여 준다(레 18-27장).

둘째, 교리적인 목적으로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오직 제사장에 의해 시행되는 희생 제사의 규례를 통해서만이 가능함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죄인들에게 자신들의 죄가 깨끗함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중보의 사역과 희생의 사역이 있어야 함을 깨닫게 한다.
레위기는 이러한 교리적인 목적을 위해서 제사와 절기의 상세한 규례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희생 제물의 선택과 잡는 방법 그리고 제사를 집행하는 제사장의 정결 의식 등을 가르쳐 준다.

셋째, 기독론적인 목적으로 하나님과 죄인 사이의 완전한 희생 제물 그리고 속죄 제물과 화목 제물인 동시에 영원한 대제사장인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이다.

즉 레위기는 여러 가지 희생 제물과 지켜야 할 규례 그리고 대제사장을 통해 신약에 오실 인류의 대속주이며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암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처럼 레위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야 할 단순한 제사 규례에 대해서 포괄적으로 제시한 책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대제사장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속죄양의 피가 필요함을 예표해 주고 있다.

4. 레위기의 특징

레위기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지루할 정도의 세밀한 기록과 동일한 내용의 반복된 기록이다.
예를 들면 번제에 대한 내용이 레 1:3-17에 기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레 6:8-13에 또다시 반복 언급되었으며,
소제는 레 2:1-16레 6:14-23,
화목제는 레 3:1-17레 7:11-34등으로 여러 차례 반복되어 기록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반복적 기록뿐만 아니라 제사 규례에 대한 상세한 기록(레 1-7장)과 절기 준수의 자세한 기록(레 23장),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에 관한 구별(레 11장) 그리고 문둥병과 그 밖의 여러 가지 정결의식에 관한 규례(레 12-15장) 등 거의 모든 내용이 상세하며 반복되게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특이한 점은 이러한 많은 반복적 기록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내용의 반복은 거의 없고 모든 기록이 새롭고 기억될 만한 내용으로 일관되어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레위기의 특징은 여러 율법과 규례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통해 이후에 기록되는 모든 역사서와 지혜서 그리고 신약에서 파생되는 많은 문제들의 해결을 위한 열쇠의 역할을 한다는 점에 있다.

또한 이러한 반복적인 의미 전달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끊임없는 구원의 섭리와 인도하심을 나타내는 중요한 특징을 보여 주고 있다.

1. 레위기의 주제

레위기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 중에 하나가 '거룩'이다.
이 단어는 무려 90번이나 나오고 있다(레 11:44, 45; 레 19:3),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레 11:45)라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너희 또한 거룩한 백성이 되라는 요구와 명령이 주제가 된다. 하나님은 당신의 택한 백성들에게 계속적으로 요구하고 계신다. 거룩은 성도와 불신자를 구별해 주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인의 생활 속에서 표출되어야 할 신앙의 모습이다(스 6:10; 겔 20:41; 고후 2:15).  

2. 레위기와 출애굽기의 관계

레위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 광야에 거하고 있을 때에 기록되었다(레 7:38; 레 25:1).
레위기가 시내 광야에서 기록된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율법을 주시기 전에 약속하신 말씀이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약속은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 19:6)는 것이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스라엘은 그 약속이 실현되기까지 시내 광야에 거할 수밖에 없었다.
즉 레위기에서는 제사장 나라가 되는 규례와 거룩한 백성이 되는 규례가 기록되었기에, 이 규례가 주어진 후에야 비로소 그들이 시내 광야를 떠났던 것이다(민 10:11).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레위기의 배경이 되는 장소가 출애굽기와 동일한 시내 광야였으며, 그 기록 연대 역시 출애굽기와 거의 동시대의 기록임을 보여 주어서 출애굽기와 레위기의 불가분적 관계를 쉽게 느낄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출애굽기와 레위기의 관계가 매우 밀접하다고 해서 레위기를 출애굽기의 보충적 설명 또는 출애굽기의 부록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비록 레위기의 배경이 출애굽기와 같은 장소, 시기라 할지라도 각각 분명한 목적을 지닌 독립된 정경이다.
즉 출애굽기가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을 말해 주는 책이라면, 레위기는 구원받은 이스라엘의 '성화'를 말해 준다.
그리고 출애굽기가 구원의 시작을 '하나님의 의롭다 하시는 선언'으로 해석한다면 레위기는 구원의 완성을 '의롭다 하심을 입은 자들을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으로 해석한다.
그러므로 출애굽기와 레위기는 가장 밀접하고 비슷한 성격을 지닌 정경이지만, 부록이나 보충된 것이 아닌 서로 독립된 정경이다.

3. 레위기의 중심 사상

레위기는 희생 제사의 규례와 제사장이 지켜야 할 성결, 정결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의 선택등이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레위기의 중심 사상은 성결(Holi-ness), 희생(Sacrifice) 그리고 속죄(Atonememt)로 요약할 수 있다.

1) 성결

하나님은 그의 백성의 완전한 순종을 원하고 계신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성결'이다. 성결이란 말은 '분리하다, 잘라내다'의 의미를 가진 히브리어 vdq(카도쉬)에서 유래된 말이다. 이는 음식과 제사 의식의 규례들이 이방 다른 민족들과 구분하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세상으로부터(이방 민족, 속된 것)분리된 성결되고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함을 시사한다.

2) 희생

이스라엘 민족의 제사는 '회생 제물'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다. 희생의 본래의 의미는 '선물'이란 뜻을 가진, 즉 여호와께 드리는 사랑과 감사의 표시였다. 그러나 피를 흐리는 희생은 단순한 선물 이상의 의미를 가진 자신의 희생을 뜻한다. 제사를 드리는 자는 희생 제물의 피가 있어야 하는데, 자신의 생명 대신 상징적으로 짐승의 피를 가져와 바쳤다. 즉 흠 없고 순전한 제물의 생명이 죄 많고 타락한 인간을 대신하여 희생되어진 것이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는 예수그리스도가 희생 제물이 되심으로 구원의 완성을 이루셨다.

3)  속죄

레위기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16장에 '속죄일에 관한 율법'에서 찾아볼 수 있다. 속죄의 궁긍적 의미는 죄로 인한 저주와 악을 제거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을 속죄하기 위해, 대신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고 죄를 전가시킨 후 아사셀이 있는 광야에 보냈다. 이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지른 모든 죄악이 깨끗하게 씻음 받았다. 이 속죄 행위는 우리의 모든 죄가 그리스도에게 맡겨지고 그가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심을 재현한 것이다. 그분은 우리의 모든 죄를 도말하시고 깨끗하게 하셨다. 따라서 레위기의 속죄가 없었다면 십자가의 의미는 명확하게 이해될 수 없었을 것이다.

4. 레위기의 구조와 내용

레위기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즉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이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지켜야 할 제사법과 각종 정결 예법에 관련된 의식법에 관한 내용이 1장에서부터 17까지에서 나오고

18장에서부터 언약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삶에서 이방 나라 사람들과 구별된 삶을 살게 하기 위한 지침으로서 여러 가지 도덕법에 속한 규범들과 연중 절기, 안식년 제도, 토지 등에 관한 규례들이 나오고 있다.

 26장에서는 순종에 대한 축복과 불순종에 대한 징벌(저주)에 대해 기록되 있다.  

1-17장 :  제사와 정결 의식을 통한 거룩 / 의식법들
18-25장 : 삶을 통한 거룩의 추구 /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26-27장 : 순종에 따른 축복과 불순종에 대한 징벌과 저주


민수기(民數記)


1. 민수기 주제

민수기는 영어로 Numbers라고 표현합니다.
'백성의 수를 센다'라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실제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광야에서'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의 제목은 내용의 가장 처음 단어를 제목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민수기의 주된 내용은 인구조사입니다.
또한 다른 한편으로는 지리적 배경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40년동안 생활하면서 일어나는 사건을 다루고 있는데, 광야 생활의 목적은 무엇인지, 이집트를 떠나왔던 1세대 백성들과 새로운 땅으로 들어가는 2세대 백성들의 세대교체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 민수기 개관

민수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 광야를 출발하여 모압평지를 지나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장소는 크게 시내 광야, 모압 평지로 구분됩니다.
또한 1세대와 2세대 간의 세대 구분에 따라 전반부와 후반부로 내용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민수기에서는 인구조사가 두번 진행됩니다.
1장과 26장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전쟁에 나갈 수 있는 인구를 조사합니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수치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이는 측정한 기준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1장에서 말하고 있는 인구조사는 이집트를 떠난 이후 남자들의 숫자입니다.
반면 26장에서의 인구조사는 그들의 자손들인 출애굽 2세대들을 뜻합니다.
따라서 두 차례에 걸친 인구수 조사를 통해 세대교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민수기 1장부터 25장까지는 출애굽을 했던 1세대의 이야기입니다.
인구조사를 한 후 전쟁 준비를 위해 진영 배치를 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레위지파를 중심으로 하며, 다양한 법이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광야를 지나게 되면서 예배와 하나님과의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광야 생활에 불만족했던 1세대들은 가나안 땅을 미리 보고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로 인해 약속을 믿었던 두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새로운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게 됩니다. 

26장에서 두번째 인구조사가 진행된 뒤에는 2세대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위한 준비를 합니다. 그리고 모압 평지에서 미래를 준비하게 됩니다.


3. 민수기 읽는방법

민수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총 3가지를 중심적으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1. 민수기는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2. 민수기는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3. 민수기는 약속의 땅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민수기에서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살아남기 힘든 광야에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통해 인간을 돌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죄를 저지르는 인간들을 심판하시면서도 용서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삶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순종하며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불평하고 세상과 타협할 때 하나님의 진노가 있음을 알게 하십니다.

마지막으로 가나안 땅을 차지하기 위해 많은 어려움이 따름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미리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따라서 믿음과 순종하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민수기는 우리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보여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의지하고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하며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Kadesh Barnea  40

신명기(申命記)





사사기(士師記)

판관기(判官記, ספר שופטים 세페르 소프팀, Κριτές 크리테스, Book of Judges)
사사기(士師記)는 원래 히브리어로 쓴 성경이며
히브리어 성경(타나크)과 기독교 구약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제목과 내용에 따르면, 판관기는 성경의 판관(현대의 재판관과 혼동되지 않기 위한 표현)과 그들이 고대 이스라엘을 통솔하는 동안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판관기는 공동번역성서천주교 성경의 표기로 표준새번역, 개역개정판, 한글개역판에서는 사사기로 표기되어 있다.

판관은 오늘날의 재판관처럼 재판하는 일을 했는데, 판관기에서 언급하는 마지막 판관은 삼손이며, 뒤이은 두 이야기가 더 있기는 하지만, 전통적인 관점은 삼손의 업적과 사무엘상 1:1부터 7:2에 나오는 대제사장이자 판관인 엘리의 바로 앞 시기와 완전히 일치한다.


사사기는 약속의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여호수아 후부터 왕정 시대를 시작하는 사무엘 전까지 사이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사사기는 히브리 원본에 룻기와 같은 책이었습니다.
사사는 위기의 상황이 있을 때 임시로 이스라엘의 리더가 되는 인물입니다.
사사라는 단어는 히브리 원어 שֹֽׁפְטִ֑ים(쇼펫)으로 “재판하다”, “다스린다”, 혹은 “구원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영어의 Judges 즉 재판관, 심판관보다는 구원자로 해석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모세, 여호수아, 그리고 후에 이스라엘 왕들은 이스라엘 전체를 구원하거나 다스린 반면 사사들은 부족이나 지역을 구원합니다.
그들은 (삿 3:10)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임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백성을 구원합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실질적인 사사, 구원자는 하나님이십니다.

사사기

저자 (시기) : 사무엘 (BC 1000 경)
시대 배경 : BC 1380 - 1030 (사울 왕 세움) 약 300년 (삿 11:26)
목적 : 신정 통치 시대 이스라엘의 실패의 경험 기록
사사기에서 보는 하나님의 성품: 죄를 벌하심, 오래 참으시며 용서와 은혜를 배푸심
주요 인물 : 기드온, 삼손, 입다
지리적 배경 : 이스라엘 (가나안)

사사기 패턴

사사기 책은 여러 사사 이야기를 소개하는데 이야기 패턴은 모두 같습니다. (1) 백성이 하나님께 순종치 않음으로, (2) 적들의 침략을 당합니다. (3) 고통 중에 백성이 회개하고 하나님께서 백성의 통곡을 듣습니다. (4) 하나님께 사사를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합니다.

  • (삿 2:16) 여호와께서 사사들을 세우사 노략자의 손에서 그들을 구원하게 하셨으나

하나님의 구원으로 백성은 평안을 누립니다. 그러나 백성은 곧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1)의 패턴으로 돌아가는 악순환을 합니다.

이야기가 뒤로 갈수록 사사들조차 타락하고 있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리고 사사기는 마지막을 이렇게 맺고 있습니다.

  • (삿 21: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1 13   12



기원전 1200년경~1050년경은 '후기-청동기시대'가 끝나고 '전기-철기시대'가 시작되는 시기로, 성서에서는 '사사 시대'입니다.

사사 시대를 단순 계산하면 모두 410년이 됩니다. 그런데 열왕기상 6장 1절("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지 사백팔십 년이요 솔로몬이 이스라엘 왕이 된 지 사 년 시브월 곧 둘째 달에 솔로몬이 여호와를 위하여 성전 건축하기를 시작하였더라")과 비교해 보면 심각한 문제가 생깁니다. 솔로몬 성전 건축이 이집트를 탈출한 지 480년이 되는 해에 시작되었다면, 사사 시대 410년을 빼고 70년 동안 가나안 정복, 제사장 엘리와 사무엘의 통치 등이 모두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단순 계산으로 나온 593/591년은 열왕기상 6장 1절의 480년보다 더 긴 기간입니다.

여기에 사도행전 13장 19-20절을 비교해 보면 또 다른 문제가 생깁니다.

"가나안 땅 일곱 족속을 멸하사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시기까지 약 사백오십 년간이라 그 후에 선지자 사무엘 때까지 사사를 주셨더니(행 13:19-20)."

여기에서는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무려 450년이 흐른 뒤 사사 시대가 시작됩니다(NIV도 같음). 그렇게 되면 사사 시대 이전에 450년이 더해져 열왕기상 6장 1절을 근거로 출애굽 후 480년이라는 기간과 전혀 맞지 않게 됩니다.

KJV는 이러한 모순을 피하기 위해, 사무엘 이전에 사사들의 기간을 450년 동안이라고 번역했습니다(13:20).

이것을 해결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 가장 좋은 방법은 사사들 통치 기간인 20년, 40년, 80년이라는 숫자들을 실제 통치 기간이 아닌 상징적인 숫자로 보는 것입니다. 옷니엘 40년, 에훗 80년, 드보라 40년, 기드온 40년이 실제로 40년, 80년이라기보다 '충분한 기간', '온전한 통치'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구약성경에서 숫자 4는 여호와(YHWH)의 알파벳 개수와 같은 수입니다. 4의 배수인 12·40·80·480 등 상징적으로 많이 쓰입니다.

둘째, 각 지파 사사들의 통치 기간이 서로 겹친다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12지파 여러 사사들이 각 시기에 겹쳐서 활동했으며, 따라서 이들의 통치 기간을 수직적으로 더하지 않고 일정 기간 중복된 것으로 계산하면 됩니다.
돼지 뼈

주목할 만한 사사 시대 고고학 자료가 있습니다.

에발산·실로·길갈 등지에서 기원전 12세기 것으로 추정되는 뼈가 발견되었는데, 주로 염소와 양의 뼈였습니다. 특이하게 이스라엘 지역에서 돼지 뼈는 거의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인류학자 마빈 해리스(Marvin Harris)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면서 산림지대가 벌채되어 자연적인 먹이를 구하기 어려웠고, 사람들이 먹는 것을 돼지도 함께 먹었기에 부족한 식량을 염려해 돼지를 금지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이 살던 고지대의 산지는 상수리나무 덕에 그늘이 많고 나무에서 떨어지는 열매를 돼지가 좋아했기 때문에 돼지를 키우기 좋은 환경이었습니다. 레위기 11장 7절("돼지는 굽이 갈라져 쪽발이로되 새김질을 못하므로 너희에게 부정하니")이 제시하는 율법을 지킨 것은 이스라엘의 식생활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가장 큽니다. 이스라엘과 가까운 블레셋에서는 상당히 많은 돼지 뼈가 발견되었다는 사실이 그러한 학설을 뒷받침해 줍니다.

* 사사들을 통하여 장차 오실 메시아 신앙
즉 선지자, 왕, 제사장의 모습을 묵상하며 신앙의 길을 사사답게 걸어가야 하겠다.

룻기


룻기는 나오미와 룻, 보아스라는 세 명의 평범한 사람의 생애와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보여주신 신실하심에 대한 비범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그들이 경제적 어려움과 번영을 겪는 동안, 우리는 풍성한 농산물 생산을 위한 노동, 모든 사람의 유익을 위한 인색하지 않은 자원 관리, 동료를 존중하는 태도,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보이는 재간, 자녀 임신과 양육에서 가장 분명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본다. 모든 것을 통해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결실 맺는 일을 위한 기회를 창출해 내고,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는 그들은 서로에게, 그들 주변 사람에게 공급과 안정 이라는 복을 가져다준다.

 

   룻기의 주요 사건은 보리 추수기에 일어나는데(룻 1:22 2:17, 23 3:2, 15, 17), 그때는 하나님의 축복과 사람의 수고를 축하하고 기념하는 시기였다. 율법서(토라)에 나오는 두 구절이 이 절기의 배경을 제공한다(강조는 필자가 한 것임).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말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출 23:16).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칠칠절을 지키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있는 레위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이 규례를 지켜 행할지니라(신 16:10-12).

 

   이 구절들이 룻기에 나오는 사건의 신학적 토대를 구축한다.

 

1.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 인간의 생산력의 원천이다(“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2.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노동(수고)를 통해 풍성함이라는 자신의 복을 부어 주신다(“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 열매들).

3.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과 취약한 사람을(“객과 고아와 과 부”) 위한 산물을 내시기 위해 일할 기회를 주시려고 사람 을 부르신다(“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 애굽에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해방하신 것과 광야와 가나안에서 그들에게 양식을 공급해 주신 것을 예시).

 

   요약하면, 인간이 노동한 것에 대한 생산성과 풍요함은 세상 안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연장이며, 사람의 노동에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것은 스스로 먹고살 방도가 없는 사람들에게 넉넉히 베풀어 주라는 하나님의 명령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이런 원리가 룻기의 기저가 된다. 그러나 이 책은 신학 논문이 아니라 내러티브(이야기)이며, 매우 흥미진진하다. 


가정에 비극이 닥치다(룻기 1:1-22)

 

   이야기는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룻 1:1)에 일어난 기근으로 시작한다. 이때는 사사기에서 들려준 대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도를 버리고 우상숭배와 최악의 사회 상황, 재앙 수준의 내전에 빠져 있던 때였다. 전반적으로 그때는 일이나 다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율법(토라)의 교훈을 따르지 않고 있었다.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 가운데 적어도 나오미는 이로 인해 하나님의 복을 상실했음을 인정했다(룻 1:13, 20-21). 그 결과 사회 경제적 구조가 붕괴되고 있었고, 기근이 그 땅을 덮쳤다.

 

   기근에 대처하기 위해 엘리멜렉과 그의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은 모압으로 이주했다. (이스라엘과 모압의 오랜 적대관계를 생각해 본다면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선택이었다.) 그들 생각에 거기라면 일의 전망이 훨씬 더 좋을 것이라고 봤다. 그들이 거기서 성공적으로 일자리를 찾았는지 여부는 모르나 어쨌든 그 아들들은 둘 다 모압에서 장가를 들었다. 그러나 10년 이내에 그들은 사회, 경제적 비극을 경험했다. 가족 중 남자가 전부 죽어 나오미와 두 며느리가 과부가 된 것이다(룻 1:3-5). 그 뒤로 세 명의 과부는 당시 남자에게만 주어지던 법적, 경제적 권리를 전혀 갖지 못한 채 자기 힘으로 벌어서 먹고 살아야 했다. 한마디로 남편도 없고, 땅에 대한 명확한 소유권도 없고, 생계를 이어갈 아무 자원이 없었다.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돌이켜 보면서 나오미는 “나를 마라[쓰다, 괴롭다]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라고 탄식한다(룻 1:20).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는 이스라엘 율법에서 상당한 관심을 받는다.[1] 남편의 보호와 지지를 상실한 그들은 사회 경제적 학대와 착취의 대상이 되기 쉬웠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단지 먹고살아야 하는 이유 때문에 창녀로 전락했는데 이는 오늘날 취약계층의 여성에게도 아주 흔히 일어나는 상황이다. 나오미는 과부가 됐을 뿐 아니라 모압에서는 나그네이기도 했다. 그러나 만약 그녀가 두 며느리를 데리고 베들레헴으로 돌아간다면, 이스라엘에서는 그 젊은 며느리가 과부면서 동시에 나그네가 될 터였다.[2] 어디에 살든 그들이 부딪칠 취약성에 대한 대책으로 나오미는 며느리에게 그들의 모국에 있으라고 강권하고,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며느리들이 모압에서 안정을 얻도록 도우시기를 기도했다(룻 1:8-9). 그러나 그중 룻은 아무리 어려워도 시어머니를 떠나는 것을 견딜 수 없어 했다. 룻이 나오미에게 한 말은 그녀의 사랑과 충성심이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 주는 노래다.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룻 1:16-17).

 

   누구에게나 인생은 고달플 수 있으나, 이 여인들은 그중에서도 최악의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하나님의 축복이 풍성함의 원천(룻기 2:1-4)

   나오미와 룻은 견디기 힘든 역경에 처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라면 역경은 절망이 아니다. 룻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분명한 기적적인 개입을 만나게 되지는 않지만, 결코 하나님의 손길이 없던 게 아니었다. 하나님은 항상 역사하셨고, 특히 신실한 사람들을 통해 그렇게 하셨다.

 

   오래전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약속하셨다.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창 17:6). 여호와는 자기 백성이 신실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농업 생산성을 회복해 주심으로써(룻 1:6) 그분이 약속하셨던 것을 선하게 이루셨다. 그 소식을 듣고 나서 나오미는 식량을 구하기 위해 베들레헴에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룻은 자신이 한 말을 충실하게 지켜서 자신과 나오미의 생계를 위한 일자리 찾으리라 작정하고 시어머니와 같이 길을 나섰다.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하나님의 축복이 룻이 한 일과 그 일의 결과로 그들 위에 (결국은 온 인류 위에) 쏟아 부어진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모든 생산성의 기반이다.

 

   대체로 히브리 성경은 하나님을 일하시는 거룩하신 분, 사람의 일에 대한 패러다임을 제공하시는 분으로 그린다. 성경은 말씀하시고, 창조하시고, 조성하시고, 지으시는 모습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으로 시작한다. 히브리 성경 전체를 통해 하나님은 ‘일하다’와 비슷한 의미를 가지는 수많은 동사의 주어로 등장하실 뿐만 아니라, 사람들도 하나님을 부를 때 종종 은유적으로 “일하시는 분”(Worker)이라고 부른다. 히브리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많은 일에 직접 관여하실 뿐만 아니라,[3] 또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패턴을 따라 일하라고 명령하신다(출 20:9-11).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직접 일하시고, 또 사람을 통해서도 일하신다.

 

   룻기의 주요 등장인물은 반복적인 신앙 고백으로, 또 서로를 축복하는 것을 통해 자신이 일하는 토대가 하나님이심을 인정한다.[4] 이런 표현 가운데 어떤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하신 행동을 찬양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인자를 거두지 않으셨다(룻 1:20). 그분은 기업 무를 친족을 주셨다(룻 4:14). 다른 어떤 표현은 하나님의 축복이나(룻 2:4, 19 3:10) 임재나(룻 2:4) 인자를(룻 1:8) 바라는 청원이다. 세 번째 표현은 하나님 행동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간구다. 하나님이 위로(NIV에는 “rest”) 주시기를 바라고(룻 1:9), 룻을 라헬이나 레아와 같게 하시기를 바라는 것이다(룻 4:11-12). 룻기 2장 12절의 축복은 특히 의미심장하다.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이 모든 축복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공급하시기 위해 일하신다는 확신을 표현한다.

 

   룻은 하나님이 직접 주시는 것이든(룻 2:12), ‘은혜를 입게 할’(룻 2:2) 사람을 통해서 오는 것이든 풍성함이라는 하나님의 복을 갈망했다. 모압 여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룻은 자신이 하는 일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인정하는 데 많은 이스라엘 사람보다 더 지혜로웠다.

 

   이야기에 나오는 사건을 볼 때 하나님에게서 온 가장 중요한 복 중 하나가 하나님께서 보아스의 추수가 넉넉하도록 축복해 주신 것이다(룻 2:3). 그가 반복적으로 한 여호와의 축복 간구에서 보이듯, 보아스는 자신이 하는 노동에서 하나님의 역할을 온전히 인식했다(룻 2:4 3:10). 

 

 

우리 일에 힘을 실어 주기 위해 명백하게 우연처럼 보이는 사건을 사용하신다.

 

   하나님이 풍성케 하시겠다는 그분의 약속을 이루기 위해 사용하시는 방법 중 하나는 모든 상황에 대한 그분의 통제력이다. 룻기 2장 3절에 나오는 “her chance chanced upon”(우연히 발견된 그녀의 기회)이라는 묘한 문장구조는 다분히 의도적이다(NRSV에서는 ‘공교롭게도, 마침’이라는 뜻으로 쓰여 있으며, 개역개정에는 “우연히”로 번역되어 있다 - 옮긴이 주). 구어체 영어로 말한다면 “As luck would have it”(운 좋게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진술은 역설적이다. 이야기의 화자(narrator)는 독자가 자리에 앉아서 도대체 어떻게 룻이 자애로울 뿐 아니라(룻 2:2) 기업 무를 친족(룻 2:1)인 사람의 밭에 “우연히” 가게 됐느냐고 묻게 만드는 것이다. 이야기가 펼쳐지면서 우리는 룻이 보아스의 밭에 이른 것이 하나님 섭리의 손길의 증거였음을 본다. 룻기 4장 1-2절에서 보아스가 성문에 앉아 있는데 마침 그다음 기업 무를 자가 나타난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우리 힘으로만 성취할 수 있는 것 외에 더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으면서 매일매일 출근한다면 그것처럼 삭막한 세상살이가 어디 있겠는가! 우리는 다른 사람이 한 일, 예상치 못한 기회, 창의성의 갑작스런 발현, 눈에 보이지 않는 복 같은 것들도 의지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따름으로써 오는 가장 안심되는 축복 중 하나는 바로 우리가 일하러 갈 때 그분도 우리와 함께 가시며 우리가 지는 짐을 함께 져 주신다는 그분의 약속이다. “나의 멍에를 메고 ……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29-30). 룻은 예수님께서 해 주신 말씀을 듣지 못했으나, 하나님의 날개 아래서 자신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찾으리라는 믿음으로 살았다(룻 2:12).

 

 

 

풍성한 인생은 우리가 하나님께 보인 신실함의 열매다.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나오미를 신실하게 대하는 룻의 모습에 투영되어 있다. 룻은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룻 1:16)라고 약속했다. 룻의 약속은 엘리멜렉 가문에 그저 식량만 축내는 수동적인 한 식구로 남아 있겠다는 간청이 아니라, 자기능력이 닿는 데까지 시어머니를 봉양하겠다는 헌신의 간청이었다. 그녀는 이스라엘 족속이 아니었는데도, 마치 “네 부모를 공경하라”라는 십계명의 제5계명에 구체화되어 있던 이스라엘 율법에 따라 살아가는 듯 보인다. 룻과 그녀의 가족을 위해 풍성하게 일이 회복되는 복이 임한 것은 하나님의 율법대로 신실하게 일한 룻의 헌신에서 시작됐다. 

 


사람의 수고를 통해서 풍성함의 복을 주신다(룻기 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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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사람이 누리는 풍성함의 원천이지만, 실제로 일은 사람이 해야만 한다. 이것은 처음부터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이었다(창 1:28 2:5, 15). 룻은 시어머니와 함께 먹고살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싶어 했다. “밭으로 가게 해 주세요”라고 룻은 간청했고, 그녀에게 일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 옆에서 같이 일하던 사람이 “아침부터 와서는 잠시 집에서 쉰 외에 지금까지 계속하는 중이니이다”(룻 2:7)라고 보고할 정도로 열심히 일했다. 룻이 일한 결과는 유난히 풍성했다. 첫날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주운 보리 이삭을 달아 봤을 때, 추수한 양은 한 에바쯤 됐다(룻 2:17). 이것은 대략 보리 5갤런(약 19리터 - 편집자 주)에 해당하는 양이었다.[5] 하나님께서도 보아스도 모두 룻의 믿음과 부지런함을 칭찬하고 보상했다(룻 2:12, 17-23; 3:15-18).

 

   크든 작든 어느 정도는 우리도 모두 생계를 꾸리기가 어렵거나 불가능한 상황에 빠질 수 있다. 자연재해, 정리해고, 편견, 부상, 질병, 파산, 부당대우, 법적 제제, 언어 장벽, 직무 연관 훈련이나 경험 부족, 나이, 성별, 정부나 기업의 잘못된 경제 운용, 지리적 장벽, 가족 부양의 필요성, 그 외 여러 요소가 우리 자신과 우리를 의지하는 사람을 부양하기 위해 일하는 것을 가로막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가 할 수 있는 능력만큼 일하길 기대하신다(출 20:9).

 

   혹 우리가 우리 필요를 채워 주는 일자리를 찾지 못할지라도, 우리는 할 수 있는 최고 수준으로 일할 필요가 있다. 룻은 정해진 근무 시간이나 정해진 급여를 받을 수 있는 정규직이 아니었다. 룻은 자기 처지가 일터에서 누군가의 “은혜”를 입기에 충분할지(룻 2:13) 알 수 없어 불안했고, 자기 가족을 먹이기에 충분한 식량을 반드시 얻을 것이라는 기대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어쨌든 룻은 일하러 나갔다. 오늘날 실업 때문에 직면하는 많은 상황이 이와 비슷하고, 우리 역시 이런 문제로 낙심할 때가 있다. 고도로 숙련된 일자리가 부족해서 하찮은 기회만 남았는가? 우리가 어떤 특정 일자리에 적합한데도 단지 차별 때문에 그 자리를 놓쳤는가? 여건이 허락되지 않아 훌륭한 일자리에 필요한 교육을 못 받았는가? 주변 상황이 일을 소망없게 만드는가? 룻의 사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일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다른 사람을 돕는 자원 봉사를 한다거나, 가족을 돌보는 일, 교육과 훈련 받기, 가사 돌보기처럼 우리 일이 처음에는 아무 수입도 올리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우리에겐 유리한 점이 있다. 하나님이 우리 일 배후에 있는 힘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자기 능력이나 주변의 여건에 의지하지 않는다. 대신 풍성함의 약속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우리가 하는 일이 (심지어는 최악의 상황에서 하는 일조차) 가치 있다는 확신을 주는 것을 알고, 우리는 능력이 닿는 대로 충성스럽게 일하는 것이다. 대개의 경우 우리가 하는 일을 어떻게 하나님이 그분의 목적 성취에 사용하시는지를 우리는 미리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의 능력은 언제나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을 훨씬 넘어선다. 

 

 

동료를 존중하는 문화 만들기(룻기 2:8-16)

 

   룻기 2장 1절이 말하는 것처럼 보아스는 “유력한” 사람이었다. 오늘날 그것이 어떤 의미를 내포하던 간에 보아스의 경우는 그가 성경에 나오는 탁월한 리더 중 하나임을 의미한다. 보아스의 리더십 스타일은 존중에서 시작한다. 자기 일꾼이 일하는 밭으로 나왔을 때 보아스는 그들에게 축복하며 인사하고(“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하시기를 원하노라”) 일꾼들도 친절하게 응대한다(“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 룻 2:4). 보아스의 일터는 여러 면에서 아주 놀라운 곳이다. 보아스는 고용된 일꾼의 노동력에 의지해야 하는 기업을 소유해 경영했다. 그는 다른 사람의 근로 환경을 관리하고 있었다. 감독관과 소유주가 자신이 고용한 근로자를 경멸하고, 근로자 역시 자신의 상사를 존경하지 않는 많은 일터와는 대조적으로, 보아스는 신뢰와 상호 존중의 관계를 만들었다.

 

   보아스는 일꾼이 일할 때 물을 제공하고(룻 2:9), 그들과 함께 식사하며, 무엇보다 그들 가운데 가장 하찮은 존재로 여겨지던 사람에게 음식을 나눠 줌으로써(룻 2:14) 자기 일꾼을 실질적으로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 줬다. 심지어 추수기 때는 지주인 보아스가 수확한 자기 곡식을 키질하고, 들판에서 일꾼과 같이 잠까지 잔다(룻 3:2-4, 14).

 

   보아스는 자기 일터의 이방 여인을 아주 사려 깊게 대해 줌으로써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로(창 1:27 잠 14:31; 17:5) 본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보아스가 일꾼 가운데서 그 여인을 봤을 때 그는, 그녀가 어떤 한 남자의 아내이거나 딸인 줄 알고 온유하게 “이는 누구의 소녀냐” 하고 묻는다. 그 여자가 나오미와 함께 모압에서 돌아온 모압 여인이라는 말을 듣고, 또 자기 추수꾼 뒤에서 이삭을 주울 수 있게 해 달라는 간청을 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충격적이게도 그가 한 첫마디는 “내 딸아 들으라”였다(룻 2:5-8). 자신의 음식을 외국 여자와 나누는 것(룻 2:14)은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의미심장한 행동이다. 룻이 감탄하며 말했듯이 존경받는 지주가 외국 여인과 대화하는 것은 관례상 흔히 있는 일이 아니었다(룻 2:10).[6]사회적 체면과 사업 기회에만 관심이 있던 남자라면,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 대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별로 없던 사람이라면, 모압 여자를 자기 땅에서 당장 쫓아냈을 것이다. 그러나 보아스는 일꾼들 가운데서도 더 딱한 형편인 그 일꾼을 위해 기꺼이, 다른 사람이 어떤 반응을 보이든 상관하지 않고 그녀 편에 섰다.

 

   실제로 이 이야기에서 어쩌면 우리는 세계 최초로 직장 내에서의 성희롱 반대 정책에 대한 기록을 접하게 된다. 어쩌면 그는 많은 농장주와 일꾼들이 사람들을 착취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7]어쩌면 이것이 바로 보아스가 룻에게 자신이 자기 일꾼에게 그녀를 건드리지 못하도록 일러두었다고 알려 주는 이유일 것이다(룻 2:9). 나오미가 “내 딸아 너는 그의 소녀들과 함께 나가고 다른 밭에서 사람을 만나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라”(룻 2:22)라고 한 말은 그녀가 자기 며느리의 안전을 걱정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보아스의 정책에 나타난 조건은 아주 분명하다.

 

1. 남자 일꾼은 이 여자를 ‘괴롭혀서는’ 안 된다. 일반적으로 ‘naga’라는 단어는 ‘건드리다’라는 뜻이지만, 여기서 그 단어는 대개 ‘때리다, 괴롭히다, 이용하다, 학대하다’라는 의미를 가진다.[8]보아스는 ‘건드리다’라는 것의 의미는 피해자가 그것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을 알았다.

2. 룻은 똑같이 물(룻 2:9)과 점심식사 자리(룻 2:14)를 이용할 수 있었다. 식사 시간에 보아스는 룻에게 자신과 자기일꾼 쪽으로 와서 그녀가 가져온 빵 조각을 자기 소스에 찍어 먹으라고 권유했다. 그런 다음 보아스는 그녀가 배부르고 남을 정도로 그녀를 친히 챙겨 줬다. ‘가까이 오다, 다가가다’라는 뜻의 동사로 ‘nagash’를 고른 것은 이방인인 룻이 의도적으로 적당한 거리를 두고 앉아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성희롱을 방지하는 보아스의 정책은 단순히 제한적이지 않았고 적극적인 것으로, 학대를 당할 위험에 처한 사람의 반응이 무엇이 학대고 아닌지를 정할 수 있는 기준임을 의미했다. 보아스는 그녀가 필요로 하는 보호를 제공할 때 룻이 얼마나 안정감을 느끼는지를 기준으로 삼았다. 그는 취약한 여성 근로자가 어떻게 존중되어야 하는지 실례로 증명해 보인 것이다.

3. 보아스의 정규직 일꾼은 룻을 책망하거나(룻 2:15) 꾸짖지(룻 2:16) 말아야 했다. 2장 9절에 나오는 ‘괴롭게 말라’(NRSV에는 “bother”, 개역개정에는 “건드리지 말라”)라는 단어와 함께 이런 표현은 신체적 학대, 정서적 학대, 언어적 학대 등 여러 형태로 학대가 온다는 것을 증명한다. 실제로 감정을 실어 룻에게 한 그의 축복 선언으로(룻 2:12) 보아스는 극적으로 그 모델을 확정한다.

4. 정규직 일꾼은 룻의 근로환경을 최대한 안정적으로 만들어 주고 룻이 이삭을 충분히 주울 수 있도록 지원하기 위해 의무 이상을 해야 했다(룻 2:15-16). 일터에서 학대를 금지한다는 것은, 안전한 환경을 조성하는 것은 물론이고 위험에 노출될 수 있는 근로자에게 생산성이 있는 환경을 조성해줘야 한다는 뜻이다. 생산성과 승진, 포상에 참여하는 것을 막는 장벽은 반드시 제거되어야 한다. 보아스는 남자 일꾼에게서 룻을 멀리 떼어놓아 룻의 안전을 지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해버리면 그녀가 물이나 음식도 먹지 못했을 것이고, 그녀가 주워 단으로 묶기 전에 바람이나 짐승이 이삭을 가져가 버렸을 수도 있다. 보아스는 자신이 만든 안전장치가 룻이 생산성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게 해 줄 것을 확실히 했다.

 

   보아스의 일꾼들은 그의 너그러운 정신을 알아차린 것 같다. 그들의 상사가 그들에게 축복의 인사를 건넸을 때 그들도 축복의 말로 화답했다(룻 2:4). 보아스가 자기 밭에 나타난 여인의 정체를 물었을 때 인력 감독관은 룻이 모압 여인이라는 것을 밝히긴 했지만, 너그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룻 2:6-7). 룻이 집에 있는 나오미에게 보리 한 에바를 가져왔다는 사실은 룻을 잘 대해 주라는 보아스의 명령에 일꾼들이 긍정적으로 반응했다는 것을 증거한다. 일꾼들은 그녀를 위해 상당히 많은 곡식을 잘라두었을 뿐 아니라, 그들은 이 모압 여인을 추수기간 동안 자신의 동료 일꾼으로 받아줬다(룻 2:21-23).

 

   보아스가 보인 리더십의 긍정적인 측면은 일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나오미가 룻이 수고한 결과를 봤을 때, 나오미는 룻에게 일자리를 준 사람을 축복하며 그의 인자와 너그러움을 인해 하나님을 찬양한다(룻 2:20). 나중에 그 공동체 안에서 보아스가 가진 높은 명성이 사회적 조화와 하나님께 영광을 가져온다는 게 명백해진다(룻 4:11-12). 모든 지도자, 아니, 사실상 모든 근로자는 그들이 속해서 일하는 문화를 형성한다. 비록 우리는 우리 문화에 의해 불공평하고, 무의미하거나, 생산적이지 못한 방식의 일에 동화하라는 강요를 받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상 우리가 일하는 방식이 다른 사람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부패하고 신실치 못한 사회(룻기 1장 1절의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라는 말은 부패한 사회를 간략히 서술한 것이다) 가운데서 재력가였던 보아스는 정직하고 성공적인 사업을 창출해 낸다. 추수 감독관은 여자를 싫어하고 인종 차별이 심하던 사회에서 평등주의를 실천하고 있다. 룻과 나오미는 끔직한 상실과 어려움 앞에서도 사랑이 넘치는 가정을 만든다. 우리가 나쁜 근로 환경에 동화하라는 압박을 느낄 때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약속은 우리 주변의 문화적 사회적 역기능 때문에 우리가 갖게 되는 모든 의심을 이길 수 있게 해 준다. 

 

가난한 자에게 경제적 기회를 주신다(룻기 2:17-23)

   하나님께서 우리의 결실을 가로막는 장벽들을 극복하시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통해서이다. 룻기에서 우리는 사회 안에서의 하나님의 율법과 하나님께서 개인들을 인도하시는 것 모두에서 그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율법은 수단을 가진 사람을 부르셔서 가난한 자에게 경제적 기회를 주신다(룻기 2:17-23)

   룻기는 이삭줍기를 중심으로 전개되는데, 이삭줍기는 가난하고 취약한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율법의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다. 선행조건이 레위기, 신명기, 출애굽기에 나와 있다.

 

너희가 너희의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 19:9-10 23:22). 이 책 4장의 “레 19:9-10” 부분을 보라.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말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리라 네가 네 감람나무를 떤 후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고 그 남은 것은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 두며 네가 네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 두라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령하노라(신 24:19-22).

 

너는 여섯 해 동안은 너의 땅에 파종하여 그 소산을 거두고 일곱째 해에는 갈지 말고 묵혀 두어서 네 백성의 가난한 자들이 먹게 하라 그 남은 것은 들짐승이 먹으리라 네 포도원과 감람원도 그리할지니라(출 23:10-11). 이 책 3장의 “출 22:21-27”, “출 23:10-11” 부분을 보라.

 

   이 율법의 토대는 사람이 그들 자신과 가족을 부양하는데 필요한 풍성함의 수단에 누구나 접근할 수 있게 하려는 의도다. 일반적으로 모든 가정은 (십일조와 제물로 살아야 하는 레위인 가문의 제사장만 제외하고) 절대 양도할 수 없는 항구적인 땅의 분깃을 소유해야 한다(민 27:5-11 36:5-10 신 19:14 27:17 레 25장). 따라서 이스라엘에서 모든 사람은 곡식을 기를 수단을 가졌다. 그러나 외국인과 과부와 고아는 땅을 물려받지 못했고, 그들은 가난과 학대에 빠지기 쉬웠다. 이삭줍기법은 그들에게 밭 가장자리에서 추수 초기에 덜 익은 곡식이나 산물과, 정해진 어떤 해에 윤작으로 비어 있던 들판에 솟아난 것은 무엇이든지 추수함으로써, 그들 스스로 먹고살 기회를 줬다. 모든 땅 주인은 값을 받지 않고 이삭에 접근할 수 있게 해 줘야 했다.

 

   이 구절은 이삭줍기법에 대한 세 가지 토대를 제공한다. 가난한 자를 향한 너그러움은 (1) 하나님께서 사람이 손으로 하는 일에 복 주시기 위한 전제 조건이었다(신 24:19). 또한 (2) 잔인하고도 모질게 학대하는 애굽의 노예주를 경험한 이스라엘의 기억에 힘입어(신 24:22a), (3) 하나님 뜻에 대한 순종의 문제다(신 24:22b). 우리는 이런 세 가지 동기를 보아스의 행동에서 모두 볼 수 있다. (1) 그는 룻을 축복해 줬고, (2)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너그러우심을 기억했으며, (3) 룻이 자기 인생을 하나님의 손안에 맡긴 것을 칭찬해 줬다(룻 2:12). 고대 이스라엘에서 그 땅과 추수를 얼마나 완전하게 시행했는지는 의문이지만 보아스는 하나의 본이 되기에 충분하게 그것을 지켰다.

 

   이삭줍기법은, 적어도 그 법이 실제로 실행됐다는 점에서, 가난한 자와 소외된 사람을 위한 놀라운 복지망을 제공해 줬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께는 사람이 일해서 그분의 결실을 얻게 하려는 의도가 있으시다는 것을 살펴봤다. 그것은 구걸을 하거나 노예로 살거나 성매매를 해야 하거나 아니면 다른 천박한 방식으로 살 수밖에 없는 사람에게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이삭을 줍는 사람들은 결혼, 입양, 또는 출신 국가로 돌아가게 해주는 기회를 대비해서 일반 농장 일에서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있는 기술과 자존감, 신체조건 및 일하는 습관 등을 유지했다. 지주는 기회를 제공하긴 했으나 착취할 수 있는 기회를 얻지는 못했다. 강제 노동은 없었다. 그 혜택은 번거롭고 부패하기 쉬운 관료주의를 필요로 하지 않았고, 나라 어디에서나 지역별로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이삭줍기법을 성취하려는 지주의 인격과 양심에 달려 있었고, 우리는 고대 이스라엘에서 가난한 사람이 처했던 환경을 낭만적으로 다뤄서는 안 된다.

 

   보아스와 룻과 나오미의 경우에, 이삭줍기법은 의도했던 대로 작용했다. 이삭을 주울 기회가 없었더라면, 보아스는 나오미와 룻의 가난을 알고 난 후에 두 가지 선택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그들을 굶게 내버려 뒀거나 미리 만들어 놓았던 음식(빵)을 집으로 배달해 주었을 것이다. 전자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후자는 그들의 굶주림을 면하게는 해주겠지만, 그들이 더욱 보아스에게 의존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이삭을 주울 기회가 있었기 때문에 룻은 추수를 위해 일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수고로 곡식을 사용해 빵을 만들 수 있었다. 그 과정은 그녀의 존엄성을 지켜줬다. 또한 룻의 기술과 능력을 활용해 룻과 나오미는 장기간의 의존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며 그들을 착취에 덜 취약하도록 만들어 줬다.

 

   오늘날 빈곤에 대한 공적, 사적 대응과 사회적, 정치적, 신학적 논쟁에 있어 이런 이삭줍기에 담긴 구제원리는 마음에 새겨둘 만하고, 열렬히 토의할 만한 가치가 있다. 크리스천끼리도 개인 대 사회의 책임, 사적인 수단 대 공적인 수단, 수입의 분배에 관한 질문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룻기를 잘 살펴봐도 이런 의견 차이가 해소될 것 같지는 않지만, 어쩌면 그것은 공유된 목표와 공동의 토대를 분명하게 밝혀줄 수는 있다. 오늘날 사회에 문자 그대로의 이삭줍기는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사회가 오늘날의 가난한 자와 취약한 자를 돌봐주는 방식에 있어서는 적용할 수 있는 측면이 있다. 특히 우리는 어떻게 사람들이 타인의존이나 착취에 의해 질식당하는 삶을 사는 대신 생산적인 일자리를 얻을 수 있도록 기회를 갖게 해줄 수 있을까? 

 

개개인을 인도하셔서 가난한 자와 췽ㄱ한 자에게 경제적 기회를 주신다(룻기 2:17-23)

 

   영감을 받은 보아스는 가난한 자와 취약한 자에게 공급하기 위해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훨씬 더 뛰어넘었다. 이삭줍기 율법은 지주에게 외국인과 고아와 과부가 이삭을 주울 수 있도록 밭에 얼마간의 산물을 남겨 놓을 것만 요구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가난하고 취약한 사람들이 잡초가 무성한 밭이나 높은 감람나무 위에서 산물을 수확해야 하는 어렵고 위험하고 불편한 일자리를 갖는다는 의미였다. 이런 식으로 얻은 산물은 대개는 땅에 떨어졌거나 덜 익은 것으로 질이 안 좋았다. 그러나 보아스는 자기 일꾼에게 일부러 너그러운 행동을 하라고 말해 두었다. 그들은 가장 질 좋은 이삭을 벤 다음 그루터기 위에 놓아두어서 룻이 그냥 줍기만 하면 되게 해 놓았다. 보아스의 관심은 법으로 규정한 최소한의 의무를 다하는 데 있었던 게 아니라 진정으로 룻과 그녀의 가족을 위해 양식을 공급하는 데 있었다.

 

   더 나아가 보아스는 룻이 자기 밭에서만 이삭을 주워야 하며 자기 일꾼 곁에 붙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연히 룻이 수확한 것은 그녀와 나오미 것으로 가져가게 했다. 그는 자기 밭에서 이삭을 주울 수 있게 해줬을 뿐 아니라 자신이 고용한 일손의 하나로 여겨줬고, 더군다나 그녀가 추수한 것에 따른 일정한 비율의 몫을 확실히 가져갈 수 있게 해 주기까지 했다(룻 2:16).

 

   어느 나라 어느 사회든 일할 기회를 찾는 실직자가 있는 세상에서 크리스천은 어떻게 보아스 같은 사람이 되려고 애쓸 수 있을까? 일자리를 구하는 사람을 생산적으로 일할 수 있게 해 주는 재화와 서비스를 창출하는데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기술과 은사를 사용하도록 어떻게 우리는 권면할 수 있을까? 어떻게 우리는 사회의 자원을 소유하고 관리하는 사람들의 인격을 형성해서, 그들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에게 적극적이고 창의적으로 기회를 제공하게 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은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되는가? 우리가 보아스처럼 부유하지는 않더라도 축복의 도구로 쓰임받을 수 있는가? 가난한 사람에게 기회를 줘야 할 수단과 책임이 중산층에게 주어져 있는가? 또 가난한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나님이 다른 근로자와 앞으로 근로자가 될 다른 사람에게 그분의 결실이라는 축복을 안겨 주기 위해 우리 각자에게 무엇을 하라고 인도하시는 것일까?

 

하나님 방식으로 일할 때 복이 배가한다(룻기 3:1-4:18)

   보아스 밭에서 이삭을 줍는 룻의 놀라운 에피소드에서 우리는 보아스의 긍휼한 마음과 너그러움, 인종에 대한 관용의 생생한 증거를 본다. ‘어째서 보아스는 룻을 향해 그렇게 부드러운 마음을 가졌으며, 어째서 보아스는 누구든, 심지어 외국인인 모압 여인까지 자기 집처럼 편안하게 느끼게 하는 그런 환경을 만들었을까’라는 의문을 갖게 한다. 보아스의 증언에 의하면, 룻은 참되신 하나님에 대한 고결한 마음과 신실함을 가지고 있었다(룻 3:10-11). 그 결과 보아스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호와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그녀에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했다’(룻 2:12). 룻은 모압에서 태어났지만 구원받기 위해 이스라엘의 하나님께로 돌아섰다(룻 1:16).

 

   보아스는 그녀를 덮는 여호와의 날개를 인식했고 자신이 그녀를 향한 하나님의 축복의 도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절망에 빠진 외국인을 돌봐 줌으로써 보아스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 것이다. 잠언에는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공경하는 자니라”(잠 14:31 17:5)라는 말이 있다. 사도 바울도 수 세기가 지나 이 주제를 이렇게 표현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갈 6:10).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보아스는 룻을 단순히 부지런한 일꾼과 나오미의 신실한 며느리 이상으로 보기 시작한다. 시간이 흘러서 보아스는 룻에게 자기 옷자락을 펴 덮어주게 된다(룻 3:9). 이는 결혼에 꼭 맞는 은유로 하나님의 날개로 대표되는 사랑과 만족을 반영한다. 그런데 이 사랑 이야기에는 일과 관련된 측면이 있다. 부동산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오미는 죽은 남편 소유의 땅에 대한 권리를 아직은 주장할 수 있었고, 이스라엘 율법에 의하면 그의 다음 친족이 나오미와 결혼해서 그 땅을 획득할 권리가 있었으며, 가족이 그 땅을 지킬 수 있게 해줘야 했다(룻 2:1). 보아스는 이 권리 행사 순서에서 실제로는 두 번째였다. 보아스는 그 권리를 가진 바로 다음 사람에게 연락했으나, 그 사람이 그 땅의 권리를 주장하려면 모압 여인 룻도 자기 가문으로 데려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권리를 포기했다(룻 4:1-6). 

 

   그와는 대조적으로 보아스는, 룻이 인종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열등함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에게 호의를 베풀 수 있는 사람으로 자신이 하나님께 택함받았다는 것을 기뻐했다(룻 4:1-12). 보아스는 편의상 늙은 나오미와 결혼하지 않고, 대신 나오미의 허락 하에 사랑과 존경의 마음을 가지고 룻과 결혼함으로써 그 재산을 구속하기 위한 권리를 행사했다. 이 모압 여인과 결혼을 함으로써 보아스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창 22:18)라는 약속의 일부를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성취했다. 또한 보아스는 더 많은 재산도 얻게 되었는데, 기존에 가졌던 재산을 생산적이고 너그럽게 관리한 것처럼 똑같이 관리했을 것이다. 이는 더 나아가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막 4:25)라는 예수님의 말씀의 전조가 된다. 곧 우리가 배우겠지만, 보아스는 딱 예수님의 선구자 역할을 하고 있다. 한편 그 이야기의 사건은 하나님께서 선을 위해 세상에서 어떻게 아직도 일하시는지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사람의 담력을 통해 하나님은 일하신다(룻기 3:1-18)

   보아스와 룻의 결혼을 서두르기 위해 필연적으로 다시 한번 나오미는 통념을 넘어서 행동한다. 나오미는 룻을 밤중에 보아스의 타작하는 밭으로 보내 “그의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우라”(룻 3:4)라고 한다. 룻기 3장 4, 7, 8, 14절에 나오는 “발”의 뜻은 성관계에 대한 완곡어법일 수도 있는데,[9] 나오미가 꾸며낸 계략은 당시 풍습과 도덕성에 비춰 보면 의심스럽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만남을 위한 룻의 준비와 장소 선택은 창녀가 하는 행동을 암시한다. 정상적인 상황에서라면, 자신을 존중하고 도덕적으로 고결한 성품을 가진 보아스 같은 사람이 타작마당에서 자다가 밤중에 일어나 자기 옆에 여자가 있는 것을 알았을 때, 그런 여자와 자신은 아무 관계도 없다고 항변하며 분명히 그녀를 돌려보냈을 것이다. 보아스한테 자신과 결혼을 해달라는 룻의 요구도 당시 관점에서 볼 때 마찬가지로 아주 대담한 것이다. 외국인이 이스라엘 사람에게, 여자가 남자에게, 젊은 사람이 나이든 사람에게, 하잘것없는 일용직 노동자가 부유한 지주에게 제안한다는 점 등에서 볼 때 그렇다.

 

   하지만 룻의 당돌함에 기분 나빠하는 대신 보아스는 그녀를 축복해줬고, 가족의 행복을 위한 그녀의 헌신을 칭찬했다. 또한 그녀를 “내 딸”이라고 부르며 두려워하지 말라고 안심시켜줬고, 요구한 것은 뭐든지 다 들어 주겠다고 약속했으며, 그녀를 “현숙한 여자”라 선언했다(룻 3:10-13). 이런 예외적인 반응은 보아스가 잠에서 깼을 때 그의 마음과 말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보는 게 가장 타당하다. 


법적인 절차를 통해 하나님은 일하신다(룻기 4:1-12)

   보아스는 만약 자신보다 먼저 기업 무를 권리를 가진 사람이 그 권리를 포기한다면 자신과 결혼해 달라는 룻의 요구를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보아스는 지체없이 그 문제를 법적으로 해결하는 절차에 돌입했다(룻 4:1-12). 이쯤에서 독자들은 지금까지 룻기에 일어난 어떤 사건도 우연히 일어나지 않았음을 알았을 것이다. 바로 다음날 보아스가 성문에 앉아 있을 때 그 친척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이것 역시 하나님의 예비하심인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룻이 그 성문에서 진행되던 법적인 절차 현장에 있었더라면, 처음에 그 친척이 엘리멜렉의 기업을 무르겠다고 선언했을 때 가슴이 철렁했을 것이다. 그러나 보아스가 룻도 그 기업과 함께 가야 한다는 사실을 그 사람에게 알렸을 때, 그는 마음을 바꿨다. 그제야 룻의 희망은 다시 살아났을 것이다.

 

   그 친척이 마음 바꾼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는 자신이 위반한 법적인 의무가 있다는 사실이 생각났다고 말한다.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룻 4:6)라고 하지만 그 핑계는 빈약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보아스에게는 충분했고, 그가 판결을 수용하면서 한 말은 명료성과 논리성의 좋은 모본이다. 사건은 얼마든지 다른 방향으로 갈 수 있었지만, 그 결과는 처음부터 하나님에 의해 인도된 것으로 보인다. 

 


출산의 결실을 통해 하나님은 일하신다(룻기 4:13-18)

룻기에서 하나님의 손길 때문에 사건이 일어난 것을 두 번째로 룻기 4장 13절에서 분명히 본다(처음 사례는 1장 6절에 나온다).

“보아스가 룻을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그에게 들어갔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게 하시므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
본문의 ‘임신/잉태’를 뜻하는 히브리 단어(herayon)는 여기 말고는 창세기 3장 16절과 호세아 9장 11절에만 나타나지만, ‘임신하게 [허락]하다’라는 특별한 숙어는 오직 여기서만 나타난다.

말론과 결혼해 10년을 사는 동안(룻 1:4) 분명히 아이가 없었던 룻의 배경을 염두에 두고 해석해야 한다.
나오미와 함께 이스라엘로 옴으로써 룻이 신실함을 보인 후에, 룻이 자기 밭에서 이삭을 줍도록 보아스가 신실함을 보인 후에, 보아스가 친족 중 기업 무를 자로서 소임을 충실하게 한 후에, 성문에 있는 모든 백성과 장로들이 증인으로서 한 신실한 기도 후에(룻 4:11-12), 룻과 보아스가 결혼한 후 관계를 가지자마자 하나님은 룻에게 아이를 주셨다. 모든 사람의 노력, 심지어는 성관계까지 의도하거나 바라는 목표의 달성 여부는 하나님께 달려있다(룻 4:13-15 1:4).

어떤 아이든 그 태어남은 하나님에게서 온 선물이지만, 룻과 보아스의 아들인 오벳의 출생에는 더 큰 이야기가 있다. 오벳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위대한 왕인 다윗의 할아버지가 될 것이며(룻 4:22), 궁극적으로는 메시아 예수님의 조상이 된다(마 1:5, 16-17). 이런 방법으로 이방인 룻은 이스라엘에, 또 오늘날까지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축복이 됐다. 

 

룻기 결론

   룻기는 자기 백성을 돌보시기 위해, 더욱 중요하게는 그분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사방에서 이끄시며 일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강력한 이야기를 전한다.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하나님을 향한 백성의 신실함 모두 일과 그 일의 결실을 통해 활성화된다. 이 책의 등장인물은 부지런히, 정직하게, 너그럽게, 창의적으로 하나님의 율법과 영감에 따라 일한다. 그들은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인지했고 조화를 이루며 긍휼한 마음으로 다 같이 일했다.

 

   룻기에서 벌어지는 여러 사건에서 우리는 오늘날 크리스천이 일의 존엄성은 물론 그 일의 가치도 반드시 인정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우리는 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 일은 다른 사람에게 혜택을 주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섬긴다. 오늘날 크리스천인 우리는 목사나 선교사, 전도사가 하는 일에서 가장 분명하게 하나님의 손길을 인식하는게 익숙할 수 있지만, 그들이 하는 일만이 하나님 나라의 합법적인 일은 아니다. 룻기는 부유한 지주가 하든 가난에 찌든 이방인이 하든 간에, 농사짓는 것과 같은 평범한 일도 충만한 믿음을 요하는 소명이라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것은 거룩한 일이며, 다른 사람이 그의 가족을 부양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단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다. 모든 합법적인 직업은 하나님의 일이다. 우리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만드시고, 디자인하시고, 조직하시고, 아름답게 하시며, 도와주시고, 인도하시고, 경작하시고, 돌보시고, 치유하시고, 힘을 실어주시며, 알려주시고, 장식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랑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날개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근무 환경을 만들 힘이 있든지 아니면, 다른 사람 편이 되기 위해 스스로 위험을 감수하든지 간에, 우리가 동료를 귀하고 존엄하게 대할 때 우리가 하는 일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우리가 동료의 유익을 위해 일할 때, 특히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소외된 사람을 위해 일할 때 우리는 하나님과 언약한 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이익을 추구하고 모든 힘을 다해 그들이 하는 일이 인간다운 일이 되게 하고 그들의 행복을 키운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불낙지교회 / 불(不) ∙ 낙(落) ∙ 지(遲) ∙


불(不) ∙ 낙(落) ∙ 지(遲) ∙ 교회
불 ∙ 낙 ∙ 지 ∙ 교회

불∙낙∙지∙교회

불신자(不信者)
낙심자(落心者)
지체자(遲滯者)

아니 불(不), 믿을 신(信), 놈 자(者)
- 불신(不信) :  믿지 아니함

떨어질 낙(落), 마음 심(心), 놈 자(者)
- 낙심(落心) :  바라던 일이 이루어지지 않아 마음이 풀어짐.  

더딜 지(遲), 막힐 체(滯), 놈 자(者)
- 지체(遲滯) :
1. 기한(期限)에 뒤짐.
2. 어물어물하여 시간(時間)이 늦어짐.



티쿤 올람(Tikkun Olam) / 티쿤(세상) + 올람(고친다) / 나의 작은 실천이 세상을 치유한다


티쿤 올람(Tikkun Olam)


유대인의 사상과 삶의 방식 저변에는 ‘티쿤 올람’(Tikkun Olam)의 정신이 깔려 있습니다.
여기서 ‘티쿤’은 ‘세상’을 말하고, ‘올람’은 ‘고친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이것을 유대인의 방식대로 의역하자면 “나의 작은 실천이 세상을 치유한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해 세상 속에 사람을 보내셨다면, 사람은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들어야 하며, 하나님을 도와서 창조의 역사를 완성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자 사람의 의무다.’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계획에 자기들이 유용한 도구로 동참하는 협력자임을 믿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구약의 토라를 믿는 유대인들의 삶의 모습이라면, 구약과 함께 구원자 예수님까지 믿는 우리는 더더욱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도 우리에게 “나는 세상의 빛이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는 사람은 어둠 속에 다니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 8:12)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생명의 빛을 얻은 자들입니다.
아무리 작은 빛이라도 어둠을 몰아내고, 접근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어둠은 곧 죄악입니다.
악의 영은 어둠의 권세요, 사단은 암흑의 세력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지금 암흑천지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곧 빛이 없다는 뜻입니다.
마치 기독교의 등불이 꺼진 것이 아닌가 하고 지금 우리는 아주 깊은 고민 가운데 빠져들고 있습니다.

조동화

나 하나 꽃피어
풀밭이 달라지겠냐고
말하지 말아라
네가 꽃피고 나도 꽃피면
결국 다른 방식으로 풀밭이 온통
꽃밭이 되는 것 아니겠느냐

나 하나 물들어
산이 달라지겠냐고도
말하지 말아라
내가 물들고 너도 물들면
결국 온 산이 활활
타오르는 것 아니겠느냐

세상을 탓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내가 바로 꽃이 되고, 내가 바로 단풍이 되어 이 세상을 거룩한 예수님의 정신으로 물들이는 것, 바로 이것이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입니다.

세상이 점점 오리무중, 캄캄한 곳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진리의 불꽃은 사라지고 빛이 없는 세상 가운데 사람들은 점점 더 방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깜깜한 어둠 속에 반딧불이 하나만 있어도 어둠은 그 주위에서 물러갑니다.
어둠은 한 번도 빛을 이겨본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빛을 받아 이 세상을 환히 비추는 사명이 오늘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티쿤 올람(Tikkun Olam)


이 정신으로 이 세상을 환하게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인이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티쿤 올람은 세상을 개선한다(To improve the world)는 뜻이다.

복음성가 중에  “오라 우리가 세상을 변화시키자” 라는 메세지와 유사하다.

티쿤 올람 사상에 따르면 “세상은 있는 그대로”가 아닌 “개선시켜 완성해야 할 대상”이다.
티쿤 올람 사상은 유대교 신앙의 기본원리로 “세상을 고친다”는 뜻이다.

곧 인간은 하나님의 동역자(파트너)로 세상을 개선해 좀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야 하는 책임과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했지만 미완성인 상태로 놓아두었기 때문에 불완전한 상태를 더 좋은 상태로 개선하는 창조적 과업과 행위를 인간의 종교적 신앙 의무라고 보았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했지만 이것은 아직 미완성의 상태이다.
하나님은 천지창조를 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셨지만 인간이 살기 좋은 환경의 창조가 완전히 끝났다고 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인류를 위해 계속 창조하시고 계신다.
때문에 인간은 더 좋은 세사을 만들기 위해 계속되는 하나님의 창조행위를 도와야 한다.
하나님을 도와서 창조의 역사를 완성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자 인간의 의무라는 설명이다.
이렇게 종교적인 신념이 강한 유대인들은 창의적인 사고와 창조적인 행위를 통해 성공한 인물들을 많이 배출하고 있다.
그 이유는 창조적인 성공이 곧 종교적 의무라고 보는 것이다.

 

후츠파(Chutzpah)정신 (토론과 반론의 교육으로 개선할 점을 찾다)

유대인의 창의성의 방법 - 후츠파(Chutzpah)정신
(토론과 반론의 교육으로 개선할 점을 찾다)

히브리어로 후츠파상식적으로 통용되는 활동의 한계를 넘어선 사람들을 말한다.
뻔뻔함, 무례함으로 생각하면 좋을 듯하다.
부정적인 언어로 사용되던 과거와는 달리 현재는 긍정적으로 사용된다.
배짱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래서 유대인의 후츠파 정신은 배짱있게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개진하고 밀고 나가는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뻔뻔함이나 무례함이 반드시 나쁘다고 할 수 없다.

동양의 유교문화는 수직적 문화이어서 우리나라는 나이나 직위를 상관하지 않고 말 한마디 잘 못했다가는 큰 봉변을 당하기 쉽다.
그러나 수평적 문화에 익숙한 유대인들에게는 서로 끊임없이 질문하고 토론하면서 상대방과 의견을 조율한다.  

그 누구도 상대방의 생각을 관리하려 하지 않는다.

유대인들은 <티쿤사상>으로 창조적인 생각을 가지며 <후츠파정신>으로 창조의 사고력(마인드)을 넓혀가는 것이다.


유대인의 역사는 고난의 역사이다.

2차 세계대전의 가장 큰 희생자는 유대인들이다.

미국으로 이민간 유대인들은
No Niggers(깜둥이 반대)!
No Jews(유대인 반대)!
No Dogs(강아지 반대)!
No Jews allowed(유대인 출입금지)! 라고 비난을 당했다.

유대인들은 황금을 좋아하며, 배우는 교육을 중시한다.
왜냐하면 유사시에는 황금이 바로 삶이요 생존이라는 사실을 고난의 역사를 통해 배웠고,

돈이 없으면 지혜 즉 교육을 해야한다고 생각하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결국 부자가 되려고 노력하고 공부에 천재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하나님이 인간을 불완전하게 만들었듯이 인간의 몸도 불완전한 상태로 태어낫기 때문에 질병에 노출되며 질병을 치료하는 의료행위가 곧 세상을 이롭게 한다는 것과 일맥상통하고, 이러한 행동이 곧 종교적 실천이므로 그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유대인 사회에서는 정신적 지도자인 랍비가 존경의 대상이 되는 만큼 의료의술을 담당하는 의사가 존경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유대사회에서는 불완전하게 창조되어 각종 질병으로부터 고통받는 인간의 몸을 치료하는 의학과 의료산업이 매우 가치있는 일로 여기고 많은 연구와 개발을 통해 좋은 의약품들을 만들어 많은 부자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각종 소아바미를 비롯한 감기 독감 백신 개발, 페니실린, 인슐린, 비타민 C도 모두 유대인들이 개발한 의약품으로 전세계를 놀라게 하고 있다.

 

* 유대인들은 창의성의 원천인 티쿤 올람(Tikkun Olam) 사상으로 창의력을,
창의성의 원천인 후츠파(Chutzpah)정신으로 토론과 비판을 중시하면서 교육의 창의력을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선물

2021년 12월 26일 성탄 및 송년주일

나의 선물은 무엇으로(마태복음 2:11)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On coming to the house, they saw the child with his mother Mary, and they bowed down and worshiped him. Then they opened their treasures and presented him with gifts of gold and of incense and of myrrh.

시대를 상징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한국의  경제 성장과 발전을 위한 세 개의 단어를 살펴봅니다.
"개발"이란 "경제개발 1차년 계획"으로 시작하여 2차, 3차까지 계속된 결과 오늘의 경제 성장과 부흥을 이루었습니다.
경제의 발전에 이어 "개혁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정치 개혁은 민주화 운동으로, 경제 개혁은 노동조합 운동으로 일어났습니다.
오늘의 시대가 요구하는 것은 "변화"라고 하겠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 여러 분야에서 변화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최근 전기 자동차가 등장하여 앞으로 자동차 사업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예측합니다.
자동차 한 대에 사용하는 부품이 대략 3만개라고 합니다.
3만개의 부품을 생산하는 공장과 납품하는 업체가 경제 기반을 형성하였으나 앞으로는 이런 구조가 완전히 무너져서 새로운 구조가 형성될 것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이런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시대에 뒤떨어진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변화의 시대에 교회도 변화될 것이 분명합니다.
문제는 교회가 변화될 것이 분명한데 아직 교회가 변화에 대해 준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변화의 시대에 파트리스교회를 시작한 것입니다.

2022년부터 황선민목사님은 수요성경공부를 담당할 것입니다.
이호승목사님은 주일 설교를 담당할 것입니다.
제가 새벽기도회를 맡게 될 것입니다.

파트리스교회가 변화를 위하여 건물을 중심으로 모이던 모임을 온라인으로 대체하면서 2022년 한 사람 또는 한 가정이 구역으로 출발합니다. 구역장이 된 사람과 가정에서 구역원을 늘려야 하겠습니다.

구역을 초장(green pastures)이라고 하겠습니다.
회를 먹을 때 사용하는 초장이 아니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신다는 시편의 말씀에서 작은 초장이 형성되면 그 초장들이 모여서 들판이 될 것입니다.

변화의 특징은 매우 빠르다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어느 지역에 유행병이 발생하면 그 지역에 국한된 것으로 크게 전염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어느 지역에서 발생한 유행병은 순식간에 전 세계로 번져나갑니다.
이러한 변화가 굉장히 빠르게 진행되므로 아차하는 순간에 변화의 물결속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황금(Gold)은 왕을 상징, 유향(Incense)은 제사장을 상징, 몰약(Myrrh)은 선지자를 상징


도입 이야기 / 선물

어느 고을에 착하고 예의바른 농부가 살았다. 

그는 매우 가난했다. 

농사라곤 손바닥만한 밭뙈기를 부치는 게 전부였다. 

그 밭에 무씨를 뿌렸더니 정말 좋은 무가 났다. 

착한 농부는 “농사가 잘 된 것은 모두가 원님 덕분”이라며 제일 큰 무 하나를 원님에게 바쳤다.

원님도 이렇게 착한 사람이 내 고을에 있는 것을 신통방통해하며 관리를 시켜 선물을 주라고 했다. 

농부는 큰 황소 한 마리를 선물로 받아 부자가 됐다.


심술궂은 농부가 이 소문을 들었다. 

무를 바쳐 황소를 받았다면 자신이 기르는 황소를 바치면 더 큰 선물을 받겠다 싶었다. 

과연 이 농부는 “저희가 잘 사는 것은 다 원님 덕분입니다”라며 기르던 황소를 바쳤다. 

원님은 이처럼 착한 백성이 많다고 칭찬하며 “창고에 무엇이 있느냐”고 관리에게 물었다. 

창고에는 착한 농부가 바친 무가 있었다. 

원님은 심술궂은 농부에게 그 무를 선물했다.

사람은 언제나 진실해야 한다는 교훈이다. 


2022년을 1년을 가장 귀한 선물을 예비하며 살아봅시다.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가져온 세 사람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황금을 바친 사람은 “멜키오르(Melchior)”라고 하며 가장 나이가 많은 노인이었다고 합니다. 유향을 바친 사람은 “카스파르(Caspar)”라고 하며 가장 젊은 청년이었다고 합니다. 몰약을 바친 사람은 “발타사르(Balthasar)”라고 하며 중년의 나이로 죽음과 부활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첫째는 역사의 변화


예수님의 탄생으로 예수님 이전의 시대를 BC(Before Christ)라고 합니다.

예수님 이후의 시대를 AD(Anno Domini)라고 합니다.


둘째는 삶의 변화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요한복음 11: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셋째는 심판의 변화


사람은 누구나 한 번은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죽음 이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히브리서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죽음 후에 반드시 거쳐야 할 심판의 자리에서 영벌과 영생으로 구분될 것입니다(마태복음 25:46)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메시아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세 가지 변화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역사의 변화, 삶의 변화, 심판의 변화


이렇게 좋은 약속을 우리끼리만 즐기는 것은 신앙이 아니라 집단이기주의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린 동방의 박사들처럼 예물을 준비해야 합니다.


어떤 예물을 준비해야 할까요?


누가복음 19:10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누가복음 15:1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2022년 성탄주일을 맞이할 때까지 잃어버린 사람을 찾아내어 함께 예배할 수 있는 은혜를 준비하려고 합니다.

내가 찾아야 할 잃어버린 사람은 누구인가?

그 사람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사람을 위하여 하루 세 번씩 기도합니다.

기도를 시작한 날과 기도가 응답된 날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결론을 위한 이야기 / 아빠의 선물

오래 전 미국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신앙의 도전을 주었던 어린 소년 ‘라이언 화이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라이언은 13살 때 혈우병을 앓아서 수술을 받았는데, 수혈을 잘못 받아서 그만 에이즈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잘못도 아닌 어른들의 부주의로 소년의 인생은 죽음의 길에 놓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곧 죽을 것을 알면서도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변함없이 밝게 학교생활을 했습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아주 친절하게 대하였고, 그를 염려하는 부모님을 위로하면서 기쁘게 지냈습니다.
 

이러한 사실이 신문 기자들에게 알려지게 되면서 소년의 이야기가 신문에 매일 게재되었습니다. 텔레비전 등의 매체에서도 보도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라이언은 그렇게 5년 동안 살다가 결국 18세에 죽었습니다. 

소년이 죽기 전에 그의 아버지와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 내용이 한 기독교 잡지에 실렸습니다. 


“아들아, 미안하다. 이제는 네게 아무것도 해 줄 것이 없구나. 이 아빠가 더 이상 어떤 선물도 줄 수 없음을 용서해다오.” 


“아빠, 전 지금까지 많은 선물을 받았지만, 아무도 아빠처럼 귀한 선물을 준 사람은 없었어요. 아빠는 저에게 천국에 갈 수 있는 티켓을 선물로 주셨잖아요. 바로 예수님을 소개해 주셨어요. 아빠 때문에 교회에 나가서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선물로 얻었는걸요. 이보다 더 위대한 선물은 없을 거예요.”


예수님보다 위대한 선물은 없습니다. 

예수님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습니다. 

이 예수님을 담고 있는 복음으로 무장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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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권한

로마에는 `파트리아 포테스타스`라는 법률이 있다.
그 말의 뜻은 `아버지의 권한`이라는 뜻이다.
자녀가 갓 태어나면 아버지의 양발사이에 놓는 풍습이 있었다.
그런데 그 아버지가 허리를 굽혀 그 아이를 안아 올리면 그 아이는 가정에서 기르게 되지만 반대로 그 아버지가 돌아서서 가 버리면 그 아이는 버려져 버렸다.

한 마디로 자식의 운명을 아버지에게 맡기는 법이었다.
로마의 이 법은 자식을 아버지의 소유물로 보는 악법이었다.

그러나 반대로 그만큼 아버지의 절대권위가 인정되는 법이었으며 아버지의 책임이 큰 법이었다.

코넬대학의 최근 조사에 의하면 미국의 아버지들이 자녀와 같이 놀아주거나 대화하는 시간이 하루 평균 30초라고 한다.

생일선물

미국의 한 성공적인 변호사가 평생 잊을 수 없는 생일선물을 말했습니다.

크리스마스 때 아버지가 작은 선물상자를 주셨는데 그 속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답니다.
“아들아, 금년에 365시간의 선물을 네게 주겠다.
매일 저녁 식사 후 한 시간씩을 네게 준다.
그것은 네 것이다.
네가 원하는 이야기도 할 수 있고, 네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갈 수도 있고, 네가 원하는 오락을 할 수도 있고, 그 시간은 네 것이란다”라고 적혀 있었는데.
“물론 나의 아버지는 그 약속을 지키실 뿐 아니라 날마다 새롭게 그 선물을 주시곤 했습니다.
내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선물이었습니다. 나는 그 시간의 결과로 오늘의 내가 된 것입니다” 고 고백했다고 합니다.

자기 자녀에게 존경을 받을 수 없는 사람은 어디를 가서도 존경받는 것은 위선이요, 가짜입니다.
무디 선생은 "세상의 모든 사람의 존경을 다 잃더라도 나는 불행하지 않다. 그러나 자식에게서 존경심을 잃으면 나는 불행할 것이다"고 했습니다.

 

이 시대 아버지상

"29살..열 네 시간을 기다려서 자식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지만, 당신도 모르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37살...자식이 학교에 들어가 우등상을 탔습니다.
당신은 그 액자를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걸어 두었습니다.

44살...약수터에서 이웃 사람들이 자식이 아버지를 닮았다고 인사를 건넸습니다.
당신은 괜히 기분이 좋았습니다.

48살...자식이 대학 시험을 보러 갔습니다.
당신은 평소와 같이 출근했지만, 하루 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54살...자식이 첫 월급을 타서 내의를 사왔습니다.
당신은 내의가 있는데 사왔다고 했지만, 밤이 늦도록 그 내의를 입어보고 또 입어 봤습니다.

61살...딸이 시집가는 날이었습니다.
딸은 도둑 같은 사위 얼굴을 보고 함박 웃음을 피웠습니다.
당신은 나이 들고 처음으로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오직 하나 자식 잘되기만을 바라며 살아온 한평생 이제는 희끗희끗 머리로 남으신 당신...우리는 당신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선물

어느 고을에 착하고 예의바른 농부가 살았다.
그는 매우 가난했다.
농사라곤 손바닥만한 밭뙈기를 부치는 게 전부였다.
그 밭에 무씨를 뿌렸더니 정말 좋은 무가 났다.
착한 농부는 “농사가 잘 된 것은 모두가 원님 덕분”이라며 제일 큰 무 하나를 원님에게 바쳤다.
원님도 이렇게 착한 사람이 내 고을에 있는 것을 신통방통해하며 관리를 시켜 선물을 주라고 했다.
농부는 큰 황소 한마리를 선물로 받아 부자가 됐다.

심술궂은 농부가 이 소문을 들었다.
무를 바쳐 황소를 받았다면 자신이 기르는 황소를 바치면 더 큰 선물을 받겠다 싶었다.
과연 이 농부는 “저희가 잘 사는 것은 다 원님 덕분입니다”라며 기르던 황소를 바쳤다.
원님은 이처럼 착한 백성이 많다고 칭찬하며 “창고에 무엇이 있느냐”고 관리에게 물었다.
창고에는 착한 농부가 바친 무가 있었다.
원님은 심술궂은 농부에게 그 무를 선물했다.
사람은 언제나 진실해야 한다는 교훈이다.

2022년올 1년을 가장 귀한 선물을 예비하며 살아봅시다. 


링컨의 선물

옛날 미국의 백악관 옆에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있었다.
링컨 대통령은 가끔 백악관 창가에서 아이들이 뛰어노는 모습을 보았다.
어느 날 울타리에 한 무리의 아이들이 몰려있었다.
몇 명의 아이들이 한 소년을 가난뱅이라고 놀려댔다.
그 소년의 아버지는 전사했고, 어머니는 청소부였다.
선생님이 구두를 반질반질하게 닦고 등교하라고 했으나 소년의 구두는 너무 낡아서 광을 낼 수가 없어 놀림을 당한 것이다.
링컨은 이 소년에게 선물을 해주기로 결심했다.
이튿날 소년의 집에는 카다란 선물 보따리가 하나가 배달됐다.
가족들이 입을 멋진 새 옷과 구두와 식료품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소년은 광채나는 구두와 멋진 새 옷을 입고 등교했고 친구들의 두 눈은 휘둥그래졌다.
더욱 놀라운 것은 링컨대통령이 교실에 나타난 것이다.
링컨은 칠판에 이렇게 적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마태복음 25:40)

링컨이 존경받는 것은 사랑을 실천하는 일에 망설임이 없었다는 것이다.
사랑은 미루지 않는다.
사랑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시작된다.

선물... 그리고 기쁨

선물을 받고 기뻐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날마다 선물을 한아름씩 받는 다면 매일 매일의 삶이 기쁨으로 가득 차겠지요?
아침에 눈을 떴을 때 '하루'라는 포장속에 많은 선물들이 내 앞으로 배달되었습니다.
순서에 따라 하나씩 열어 봅니다.
그런데 나는 어떤 마음으로 선물꾸러미를 열어 보고 있을까요?
보내 준 사람의 마음도, 선물에도 별 관심없이 습관적으로 열어보고는 별 신통한 것이 없다고 한쪽으로 밀쳐듭니다.
혹은 값비싼 선물만을 잔뜩 기대하고, 그렇지 않을 때 몹시 실망하여 주신 분을 원망합니다.
선물을 주시는 분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그분은 내게 무엇이 필요한지, 어떤 것이 적당한지를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런 분이 주시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받을 수 있습니다.
때로는 내 마음에 들지 않을 지라도요.
나의 삶은 선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기쁨은 어떤 선물을 받느냐가 아니라 어떤 태도로 선물을 받는가, 곧 나한테 달려 있습니다.
삶은 선물입니다.
그리고 기쁨입니다.

위문품

옛날 이맘 때면 군인들에게 위문품을 보내던 시절이 있었다.
연필에 침을 묻혀가며 호롱불 밑에서 편지를 써 위문품과 함께 보냈던 기억이 생생하다.
추운 겨울 철책을 지키는 군인을 생각하며 장갑과 목도리를 짜보내던 학생들도 있었다.
작은 정성이 모여 위문품 자루가 만들어지고 전방부대로 보내질 때 나의 마음이 함께 가는 것 같아 좋았다.
세월이 흘러 군대에 가서 받은 위문품은 한 해의 결실인 것처럼 고마웠다.
위문품을 보관해두고 고향의 냄새를 맡는 기분으로 겨울을 나던 추억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선물뿐 아니라 함께 담겨온 편지들은 접은 곳이 해어지도록 읽고 또 읽었던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초병의 추운 밤은 왜 그리도 긴지.
“파수꾼이여 밤이 어떻게 되었느뇨 파수꾼이여 밤이 어떻게 되었느뇨”란 성경구절처럼 군인들이 아침을 기다리는 것은 작은 소망이다.
나이가 들어가니 더욱 걱정이 된다. 추운 이 시각 자식들이 골바람과 강바람 그리고 바닷바람을 맞으며 나라를 지키는 모습들을 생각하니 뼈가 아려오는 것을 느낀다.

200개의 가위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변호사였던 이태영 여사는 이화여전을 졸업하고 평양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때 평생의 반려인 정일형 박사를 만나 결혼했지만 그녀는 오랜 시간 남편의 옥바라지를 해야 했다.
미국 유학까지 하고 온 남편은 항일운동을 한다는 명목으로 항상 일본 경찰의 감시 대상이었던 것이다.
결국 이태영 여사는 남편의 옥바라지와 식구들의 생계를 위해 교사일을 그만두고 누비이불 장사를 시작했다.
이불보를 만드느라 밤새 가위질을 하고 낮에는 이불을 이고 집집마다 다니며 팔았다.
전차삯을 아끼려고 이불 보따리를 이고 수십 리를 걷는 날이 허다했다.
남편의 옥살이는 광복이 될 즈음에야 끝났다.
그런데 감옥에서 나와 아내의 손을 잡은 남편은 눈물을 왈칵 쏟을 뻔했다.
아내의 오른손 엄지가 90도 넘게 뒤로 제껴지고 검지와 중지도 크게 휘어져 있었던 것이다.
일제시대 말기 전쟁무기를 만들기 위해 쇠붙이를 죄다 쓸어가 이불보를 자를 제대로 된 가위가 없었다.
그렇게 날이 무디기만 한 가위질을 어찌나 많이 했던지 손가락이 휘어 기형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 동안 아내의 고생이 어떠했는지 그 휘어진 손가락으로 짐작하고도 남았다.
그런 아내를 위해 이제 자신이 무거운 보따리를 바꿔 질 때였다.
그렇게 남편의 격려로 이태영 여사는 1946년 서른 셋의 나이로 법학 공부를 시작했다.
훗날 남편 정일형 박사는 외국을 나가거나 멀리 여행을 다녀올 때면 아내를 위한 선물을 꼭 하나 사 왔는데, 그것은 바로 가위였다.
잘 드는 가위 하나 가져보는 것이 소원이었던 아내의 옛 소망을 그렇게나마 풀어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사 모은 가위가 200개가 넘었다.

남편의 생일선물

제가 잘 아는 분의 실제 이야기 입니다. 오 간사님은 교회 전도사님을 만나서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살아가고 계신분입니다. 시어머니를 모시고 네식구가 어려운 살림을 하시느라 늘 적은돈 얼마도 아쉬울때가 많으십니다. 언제부터인가 남편이 평상시보다 일찍 집을 나서며 출근을 해서 의아해 하셨답니다. 출근시간이 바뀐것이겠거니 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지요. 그러던 어느날 남편이 오간사님께 하얀 봉투를 하나 건네더랍니다.
"여보 생일 축하해. 그리고 사랑해."
"어머! 제 생일이 오늘이에요?"
간사님은 바쁘게 사시느라 생일조차 잊고 계셨답니다. 고마운 마음에 봉투를 열어보니 10,000원이 들어있었데요.
"어... 내가 한달동안 아침에 마을버스를 안타고 걸어다니면서 모은돈이야."
간사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고여 말을 이을수 없었데요. 그리고 남편이 준 생일선물 10,000원은 해가 지나도, 정말 아쉬울 때도 쓰지 않으시고 고이 간직하고 계시답니다.


땅 끝에 남은 자

한 선교사 부부가 있었습니다.
황무한 외국 땅에 교회를 개척하는 동안, 부부의 결혼기념일이 여러 번 지났습니다.
그때마다 남편은 아내에게 선물 한번 하지 못했습니다. 결
혼 10주년을 앞두고 남편은 아내에게 특별한 선물을 해주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스페셜 메뉴를 손수 만들어주고 설거지와 빨래까지 모든 집안일을 대신 해주는 선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내가 선물을 받고 기뻐하는 모습을 볼 수 없었습니다.
결혼 10주년을 한 달 앞두고, 집에 침입한 괴한들이 아내를 살해한 것입니다.
아내가 없어 결혼기념일에 어쩔 수 없이 집안일을 하고 있자니, 아내를 향한 미안함과 그리움이 그의 가슴에 사무칩니다.

"여보, 내게는 지금의 이 세상이 예전에 당신과 함께할 때에 보던 세상이 아닌 것 같다..."

선교지에서 아내를 잃은 한재성 선교사의 고백록 <땅 끝에 남은 자>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오늘 곁에 있는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 사랑을 표현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안타깝지만 시간은 당신의 사랑을 기다려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사랑의 선물

오 헨리의 '크리스마스 선물' 이야기입니다.
미국에 델라와 짐이라는 부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피차가 사랑하기는 하지만 너무나 가난했습니다.
그들이 특별히 가진 것이 있다면 그것은 부인 델라에게는 훌륭한 머리칼이었고, 남편 짐에게는 아버지로부터 물려 받은 금시계뿐이었습니다.
크리스마스 전날 부인 델라는 남편 짐을 위하여 선물을 사야겠는데 가진 돈이라고는 몇 푼 안되었습니다.
그래서 델라는 그의 머리칼을 잘라 그것을 팔아서 남편의 백금 시계줄을 선물로 샀습니다.
짐을 사랑하는 아내 델라는 남편을 기쁘게 하기 위해 그의 훌륭한 머리칼을 깎는 것도 아깝지 아니하였습니다.
집에 돌아온 남편 짐은 머리를 박박 깍은 그의 아내를 보고 깜짝 놀라서 발걸음을 멈추었습니다.
잠시 후에 짐은 그의 아내를 위해서 준비한 크리스마스 선물을 손에 쥐어 주었습니다.
그 선물은 아내의 훌륭한 머리칼에 꽂을 보석 장식품 그것도 자기의 금시계를 팔아서 마련한 선물이었습니다.
결국은 쓰지 못하는 선물들!
그 남편과 부인은 사랑하는 남편을 위해,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서로가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기쁨마음으로 선물로 주었습니다.

성경에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상속하거니와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느니라”(잠 19:14)

아내는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엡 5:33)

▣ 가장 좋은 선물

화가 이중섭이 하루는 병을 앓고 있는 친구의 문병을 갔습니다. 친구가 아픈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의 문병이었기에 그는 늦게 찾아온 것을 미안해하며 친구에게 작은 도화지를 건넸습니다.
"자네 주려고 가지고 왔네. 이걸 가지고 오느라 늦었네.
자네가 좋아하는 복숭아라네."
그는 친구가 좋아하는 복숭아를 사다 줄 돈이 없어 직접 그림을 그려 선물한 것입니다. 친구는 이중섭의 우정에 감사하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선물은 돈이 있어야만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내 소중한 시간과 땀과 마음을 담아 전할 때 그것이 가장 좋은 선물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은 무엇일까요?
영국의 정치가요 저술가였던 밸푸어(1848-1930)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의 원수에게는 용서를, 그대의 적대자에게는 관용을, 그대의 친구에게는 자신의 마음을, 그대의 아들에게는 모범을, 그대의 아버지에게는 효도를, 그대의 어머니에게는 어머니가 그대를 자랑할 일을 행하라 그대 자신에게는 존경을, 모든 사람에게는 인애를 주는 것이 가장 좋은 선물이다."

▣ 고귀한 선물- 자녀

나는 하나님이 주신 많은 선물 중에서도 고귀한 선물로는 자녀를 주신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오래 전 중국 남방에 송(宋)씨 성을 가진 신실한 크리스천이 있었습니다. 그는 빈곤한 환경 가운데서도 교회에 헌신하며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는 끼니를 거르는 일이 있었지만 기도를 거르는 일은 없었습니다. 특히 그는 네 명의 자녀들을 "위대한 하나님의 선물"로 보고 희망 속에서 키웠습니다. 그 결과 아들 자문은 중국의 재정총장이 되었고 큰 딸 경령은 "중국의 위인" 손문의 아내가 되었으며 둘째 딸 애령은 남경정부 수석 공상희의 아내가, 셋째 딸 미령은 장개석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성경에 "자식은 야훼의 선물이요, 태중의 소생은 그가 주신 상급이다"(시127:3) 라고 하였습니다.
부모는 자식이 자기의 생명의 연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식이 잘 되는 것을 시기하지도, 질투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자식이 잘되면 자신의 일보다 더욱 기뻐하고 자랑스러워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자식이 하나님을 잘 섬기고 의롭고 선한 행실로 사람들의 칭찬을 받으면, 그것이 아버지의 면류관이 됩니다. 또한 자식이 지혜로워서 모든 일을 잘 처리하면, 그 자식을 낳은 부모는 여간 자랑스럽고 기쁘지 않습니다. 실로 그 자식을 낳은 보람을 느끼고 참 기쁨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육신의 부모에게 자랑이 되는 자녀가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잠23:25)

▣ 벼룩이 준 선물

세계적인 선교사역자인 코리 텐 붐 여사의 자서전에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유태인을 숨겨준 죄목으로 나치의 수용소로 잡혀간 코리는 언니 베스와 함께 벼룩이 들끓는 방에 수감되었습니다. 베스는 범사에 감사하라는 성경 말씀을 생각하며 벼룩에게도 감사 기도를 드렸지만 코리는 도저히 그 기도에 아멘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 방에서 한 마음으로 사랑을 베풀고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둘씩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얼마후 그 방은 그리스도인의 교제가 넘쳐나기 시작했습니다. 그제서야 코리도 벼룩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 감방에는 벼룩이 많다고 알려져 간수들이 접근조차 하지 않았기에 안전한 공간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감사하는 마음 밭에는 결코 실망의 씨가 자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감사를 느껴라”가 아니라 “감사하라”고 말씀하셨음을 잊지 맙시다.
/김남준 목사(열린교회)


동방 박사의 선물


동박박사가 아기 예수님께 바친 선물은 황금 유향 몰약이다.
황금은 왕이신 예수님을, 유향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몰약은 사람으로 돌아가실 것을 나타내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아기 예수는 인간을 아끼고 사랑한 하나님의 선물 중의 선물입니다.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마 2:11)

뇌물과 선물

십여년전에 어느 교회에서 시무를 하던 장로가 형사사건에 말려서 교도소에 가게 된 일이 있는데, 그때 판사가 사건을 잘 해결해 주어서 무사하게 된 일이 있었다.
그 장로는 판사에게 사례를 하고 싶었으나 무엇을 선물할까 고민하였다.
그 판사는 강직하기로 소문이 난 사람이어서 선물같은 것은 문전에서 거절하기가 십상이었다.
장로 내외는 여러가지로 생각을 하다가 쌀을 보내기로 하였다.
호남에서 제일가는 고장에 가서 쌀 두 가마니를 사왔다.
제일 좋은 쌀을 사온 것이다.
그들은 이 쌀 두가마니를 방 안에 들여 놓고 좋은 쌀알만 고르기 시작하였다.
돌은 물론이요 뉘라던가 이그러지고 떨어져 나간 성하지 않은 쌀의 낟알은 골라내고 제일 성한 알찬 쌀만 모으기 시작하였다.
밤이나 낮이나 시간이 나는 대로 장로 부부는 쌀을 고르는데 전심하여 쌀 두가마니를 마침내 한 가마니로 만들었다.
골라낸 나쁜 쌀은 자기들이 먹고 좋은 쌀은 판사에게 갖다 주기로 하였다.

"주여 그 판사에게 복을 주옵소서. 이 쌀 하나하나마다 저희들의 정성을 쏟았습니다. 주여 그 판사가 잘 되게 해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면서 쌀을 골랐던 것이다.
남을 시키지 않고 직접 손수레에 싣고 판사집에 가서 쌀을 주었다.
판사가 출근하고 없는 낮에 판사 부인에게 주고 돌아 온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튿날 아침에 판사가 사람을 시켜서 그 쌀을 돌려 보냈다. 이튿날 장로 부부는 다시 쌀을 판사 집에 갖다 주었다.
그 이튿날 판사는 사람을 시켜서 쌀을 다시 돌려보냈다.

"쌀을 돌려 주는데 드는 사람 품삯을 감당하기 힘드니 이제 쌀을 그만 가져오시오, 내가 당신의 정성을 아니까, 쌀을 안 보내도 됩니다. 제발 나를 괴롭히지 마시오."

이러한 편지와 함께 판사에게서 쌀이 되돌아 왔다.
이번에는 장로가 판사에게 쌀을 보내게 된 내력을 쓰고, 쌀 낟알 하나하나에 정성어린 기도가 들어있노라고 설명하였다.
며칠 후에 판사가 장로 내외를 초대하면서, 이런 정성을 물리치면 자기가 죄를 짓는것 같아서 처음으로 선물을 받았노라고 말했다.
그리고 자기도 어려서 교회에 다녔는데. 이제 본격적으로 교회에 나가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지금 두사람은 선배 장로, 후배 장로 하면서 교회 생활을 잘 하고 있다고 한다.

미화원을 초청한 대통령

1974년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파리 엘리제 궁(대통령 관저) 뒷길인 마리니 가에서 환경 미화원들이 일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그들에게 대통령의 비서가 나와 정중히 인사하며 말했습니다.
부부 동반으로 오실 수 있습니까?
미화원들은 어리둥절해 했습니다.
"어째서 부르시는 것입니까?" 비서는 간단히 대답했습니다.
"대통령께서 원하셔서 베푸시는 초청입니다".
이 초청은 미화원들로서는 기대할 수 없는 선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신 은혜도 인간으로서는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선물입니다.
자격을 따져 초청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격은 없으나 하나님께서 은혜로 불러주시는 것입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 55:1)

첫 월급의 선물

남편이 병들어 실직하고 지하셋방으로 전전하며 박집사가 생계 꾸려나가던 시절, 두 딸 초등학교 다닐 때 새 옷 한 벌 제때 사줄 형편이 안돼 좀 넉넉히 살던 언니 집에 갔다. 조카아이들 안 입는 옷 챙겨 깨끗이 빨아 입혀주었더니 엄마에게 고맙다고 한다. 가난한 것 내색 않고 헌옷 갖다 입힌 엄마에게 투정 한번 안하고 아빠 병수발하며 식사 차려드렸다. 눈물이요 기쁨인 두 딸이 대학을 나와 큰 딸은 간호사로 취직하고, 둘째 달은 초등학교 교사로 임용됐다. 두 딸이 취직돼 첫 월급 받는 날 큰딸은 고운 원피스 한 벌,둘째 딸은 속옷을 셋트로 사왔다. 그때마다 박집사는 문닫고 들어가 딸들이 사준 옷을 품에 안고 울었다. 엄마는 감수성이 가장 예민한 그 나이 때 너희들에게 한번도 변변한 새 옷을 사 입혀 키우지 못했는데 너희들은 새 옷을 사왔구나.
"눈물로 씨를 뿌리면 기쁨으로 거두리로다"(시126:6). 가난은 약간의 불편을 주나 성공과 승리를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은총이다.

선생님의 선물

어느 선생님이 자기가 가장 아끼는 귀한 시계를 아이들에게 주고 싶었습니다.
먼저 시계를 꺼내 보이며 제일 키가 큰 아이에게 말했습니다.
"네가 이것을 갖고 싶으면 내가 주겠다."
그러자 그 아이는 선생님이 농담을 한다고 생각했는지 생글생글 웃기만 했습니다.
선생님은 다른 어린이에게도 똑같이 말했습니다.
그 아이는 손을 내밀면 남들의 웃음거리가 될 것 같아서 그랬는지 웃기만 했습니다.
선생님은 제일 키가 작은 아이에게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아이는 얼른 시계를 받아 제 호주머니에 넣으면서 꾸벅 인사를 했습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선생님은 말했습니다.
"참 고맙다. 네가 내 말을 믿어 주었구나. 이제 그 시계는 네 것이니 잘 보관해라. 태엽감는 것 잊지 말고..."
그제야 두 아이는 후회했습니다.
"정말 주시는 거예요? 그런 줄 알았으면 진작 내가 가졌을 것을..."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 선물을 준비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많은 댓가를 지불하셔야만 했습니다. 당신은 간절한 마음으로 그것을 갖고 싶어할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 하나님의 선물에 대해 알지 못하며, 또 안다고 할지라도 이 선물의 값을 마련하기 위해 스스로 노력하고 있는 모습은 안타깝기 짝이 없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선물이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까? 그것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로마서 6:23)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요한일서 2:25)
우리는 죄에서 구원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선물을 감사함으로 받으면 됩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에베소서 2:8)

나눔의 선물

성탄절인 25일,열 두 살 소녀가 하늘나라로 떠나면서 8명에게 장기를 기증,「잊지 못할 크리스마스 선물」을 남겼다.
울산 명정초등학교 5학년 정영주양이 친구와 놀다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져 뇌사 상태에 빠진 것은 지난 18일.독실한 신앙인인 아버지 정병호씨(34)는 딸의 죽음을 헛되이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장기기증을 결심 했고 15 일 새벽 의사들은 급히 정양의 심장과 폐,간,신장,각막 등을 환자들에게 이식,제2의 삶을 살게 한 것.경제한파 속에서 핀 아름다운 「나눔의 꽃」이었다.

▣ 생명은 무상 선물

대부분의 지구상의 종교는 그의 신들에게 제물을 바친다. 일본의 한 할머니는 고맙게 해 준 목사님에게 신정에 정성스럽게 포장한 떡과 술과 고기를 가지고 와서 늘 불단 앞에 드렸듯이 교회 신단에 신공을 드려달라고 했다. 하나님께는 그런 것 필요 없이 그냥 오면 된다고 해도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하더라는 말을 들었다. 기원 원년 예수 시대 이후는 신이 인간에게 제물이나 의를 요구하던 시대가 끝났다. 구약 율법 시대는 끝나고 신약의 은혜와 복음 시대가 온 것이다. 사람들은 신 앞에 갈 때 선행이나 성심같이 자격이나 조건을 갖추고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최상급 종교인 니고데모도 0.99 % 일지는 몰라도 율법 표준으로는 100% 영점 하의 실격 죄인이었다. 거지 고아를 왕자 삼은 경우처럼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은혜로 우리를 자녀삼으신다고 약속한다. 그것이 복음이다. 율법이나 선악의 양심 법정에서의 우리 모두는 형사 법정의 죄수일 뿐인데 예수 안에서는 그의 의와 신분을 바꿔 입혀 주신다. 생명은 무상 선물이다. 생명의 주를 믿으라.

▣ 아버지의 마음

어느 초등학교 선생님이 상처를 하고 열두 살난 딸을 키우느라 어머니 몫까지 다 해주었다. 딸을 정성껏 구김살없이 키워보려고 애를 썼지만 학교일에 바빠서 시간을 내기가 어려웠다. 그러다가 방학이 되어 크리스마스 전 사흘 동안 시간을 내어 이제는 딸하고 더불어 놀기도하고 이야기도 하리라, 생각을 하고 딸을 찾았는데 딸은 제 방에 들어가서 문을 잠가버리고 사흘 동안 나오지를 않았다. 밥만 먹고 또 들어가고... 영 자리를 같이 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섭섭했다. 그래, 무슨 곡절이 있겠지, 그동안 내가 너무 등한히 해서 마음이 상했나보다고 생각했다. 크리스마스날이 되었다. 딸은 기쁜 얼굴이 되어 눈을 빛내면서 "아버지, 크리스마스 축하해요"하고 인사하더니 제가 뜬 장갑 하나를 내놓는 것이었다. 크리스마스날 아버지에게 장갑 선물하기 위해서 사흘 동안 뜬 장갑이었다. 고맙게 받기는 했으나 아버지는 내심 섭섭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장갑이 아닌데, 나는 너와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여러분, 참으로 부모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그 심중을 잘 헤아려 잘 들어드리는 것이 중요하다.
/곽선희 목사 설교예화

▣ 크리스마스 선물

10여년전 김사장은 집에 틀어박혀 앉아 술과 담배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사업은 부도가 나고 되는 일이 없었다. 가족 친구 등을 만나기 싫었다. 세수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그저 하루에 담배를 3갑씩이나 피우게 되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던 어느날 아들과 딸이 김사장에게 이야기했다. “아빠, 크리스마스 선물 하나 해주세요” 아이들의 말에 김사장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크리스마스 선물, 그래 아빠가 어떤 크리스마스 선물을 해줄까?” 아이들은 “아빠 꼭 해주셔야 해요”하면서 “아빠, 크리스마스 선물로 담배를 끊어주세요. 아빠의 건강이 저희들에게는 가장 소중한 선물이에요”라고 말했다. 그 순간 김사장은 눈물이 핑 돌았다. 자신의 건강을 생각하는 아이들에게 김사장은 고마움과 더불어 미안함을 느꼈다. “그래 크리스마스 선물로 아빠가 오늘부터 담배를 끊겠다” 김사장은 가족들 앞에서 담배를 끊겠다고 굳게 공약했다. 가족은 박수을 치면서 좋아했다. 모처럼 가정에 생기가 감돌았다. 다음날부터 김사장은 담배를 끊었다. 담배 생각이 나면 가족을 생각했다. 자신의 건강을 생각하는 가족을 생각하면서 멋진 크리스마스 선물을 꼭 주겠다고 결심했다. 그 이후 김사장은 담배를 끊은 것은 물론 사업도 재기할 수 있었다. 가족에게 줄 멋진 크리스마스 선물을 준비하라. 물건만이 선물이 아니다. 공약을 가족 앞에서 하라. 행복한 크리스마스를 맞게 될 것이다.

▣ 크리스마스 선물이 된 아기

보웬 부인은 결혼한 후로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오면 일을 구해서 며칠동안 일하곤 했습니다. 그것은 크리스마스에 남편에게 정성껏 준비한 선물을 주고 싶어서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해에는 크리스마스 한달 반 전에 첫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일하러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남편에게 놀라운 선물을 주었습니다. 크리스마스 날 아기를 새옷으로 갈아 입히고 아름다운 리본을 매어 남편에게 선사한 것입니다. 그들이 아기를 선물로 주고 받고 하면서 즐겁게 즐길 때, 그녀는 갑자기 이런 생각이 났습니다. ‘이 아기를 내 남편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선물로 준다며 우리 마음은 어떠할까?’
우리는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실 때의 하나님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아들을 죽음에 내주는 부모의 괴롭고 아픈 심정을 조금은 알 수 있었습니다.

▣ 선물을 준 자의 마음

조 집사님께서 커다란 책장 2개를 주셨다. 책장의 길이는 무려 240cm, 높이는 180cm 정도의 크기이다. 작은 우리집에 들어오질 않아서 다시 줄여서 넣어주셨다. 그런데 1주일 정도 지난 후 우리 집에 들르셔서 그 책장이 넣어주신 그대로 놓여 있는 것을 보시고 좋지도 않은 책장을 준 것이 아니냐고 마음 쓰시는 것이었다. 그것이 아닌데, 도저히 책장을 정리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어서인데…. 우리 책꽂이는 거의 다 내려앉아서 버릴 수밖에 없는 상태였고 주신 그 책장은 우리에게 가장 요긴한 선물이었다. 이 일을 통해 선물 주신 자의 마음을 생각하게 되었다. 선물을 주신 분은 받은 자가 기쁨으로 사용하고 요긴해 하는 것을 보면서 기뻐하고 그것을 감사의 응답으로 여기신다고 생각했다. 그 이상은 아무것도 요구하시지 않는데, 받은 자가 제대로 활용하지 못할 때 섭섭함이 생기는 것이다.
하나님도 이러한 마음이 아닐까! 우리에게 그의 가장 소중한 아들을 주시고, 믿음을 주시고, 영생을 주시고, 복음의 선물을 주셨다. 그 선물을 받은 우리가 어떻게 하면 가장 기뻐하실까?


▣ 성령의 은사

은사란 선물이란 뜻이다. 선물은 받으면 기쁘다. 선물은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선물보다 귀한 것은 선물을 주신 분이다. 교인으로부터 초록색 넥타이 하나를 선물받았다. 부활절 주일에 밝은색 양복에 그 넥타이를 착용했다. 그 때 나를 가장 기쁨으로 맞이한 사람은 다름 아닌 넥타이를 선물한 심준화 집사님이었다. 선물은 서로의 관계를 아름답게 한다. 넥타이를 맬 때마다 선물해 준 사람을 생각한다. 성령님이 우리 각 그리스도인에게 은혜의 선물을 주셨다. 어떤 이에게는 지혜의 말씀을, 다른 이에게는 병 고치는 은사와 지혜의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과 통역의 은사를 주셨다. 교회의 공동 유익을 위해서 쓰라고 주신 것이다.
선물을 받고도 쓰지 않으면 그것은 선물을 주신 분을 업신여기는 행위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선물을 주와 복음을 위해 써야 한다. 방언으로 기도하고 사랑으로 섬기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든 자를 고쳐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선물을 주신 성령님을 기쁘시게 해야 한다.


▣ 좋은 선물

선물이란 말처럼 가슴을 설레게 하는 말도 드물 것이다. 남에게 주어버리는 것임에도 한없이 기쁘고, 내가 받으면 더없이 행복해 지는 것이 선물이다. 주는 사람 우선이 아니라 받을 사람 우선으로 정해지는 것이 선물이고,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 정성으로 마련하여 건네는 것이 선물이다.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빛은 내 사랑하는 마음, 내 고마운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마음이 아닐까.
- 최원현의《오렌지색 모자를 쓴 도시》 중에서 -

* 좋은 선물의 가치는 값에 있지 않습니다. 마음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마음, 고마운 마음에 있습니다. 마음이 담긴 작은 선물 하나가 사람의 가슴을 뜨겁게 데워줍니다. 더 큰 사랑과 행복을 창조해 냅니다.

▣ 대단한 선물

우리는 흔히 삶의 소중함을 잊고 산다. 삶이 더없이 소중하고 대단한 선물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그래서 생일선물에는 고마워하면서도 삶 자체는 고마워할 줄 모른다. 삶이 무상(無償)으로 주어진 보물이라는 것을 모르고 아무렇게나 산다. 흘러가는 대로 산다.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일들에 매달려 하루하루를 보낸다.
- 김광수의 《삶에 관한 철학적 성찰-둥근 사각형의 꿈》 중에서 -

* 보석같은 선물을 받고도 그 값어치를 모르거나 내팽겨쳐 버린다면 참으로 우둔한 일입니다. 그 우둔한 일을 하루하루 반복한다면 더욱 한심한 일입니다. 오늘 하루 나에게 주어진 삶이 얼마나 소중하고 값진 것인지를 깨닫는 순간 오늘부터의 나의 삶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왕의 생각

조엘 오스틴이라는 목사님이 쓴 책이 있습니다.
우리 말 번역은 “긍정의 힘‘입니다.
그 책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유명한 골프선수가 사우디아라비아 왕의 초대를 받았습니다.
왕은 자신의 전용 비행기를 미국까지 보내 그를 데려왔습니다.
둘은 며칠 동안 골프를 즐기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골프선수가 돌아갈 때가 되자, 왕은 비행기에 오르려는 그를 세워놓고 물었습니다.
“귀중한 시간을 내서 저를 찾아주셨으니 선물을 드리고 싶습니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말씀하십시오.”
골퍼는 “아닙니다.
이렇게 환대해 주신 것으로 충분합니다.
제가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그러나 왕은 고집을 꺾지 않았습니다.
“아닙니다. 꼭 선물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래야 선생님이 이 여행을 평생 기억하실 테니까요.”

골프선수는 왕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골프채가 좋겠습니다.”
고국으로 돌아가는 내내 골퍼는 왕이 어떤 골프채를 보낼까 궁금했습니다.
'내 이름을 새긴 순금 골프채? 다이아몬드 보석이 여기저기 박힌 골프채? 세계 최고 갑부인 사우디아라비아 왕이 보내는 선물을 얼마나 대단할까?' 골퍼는 궁금해 견딜 수 없었습니다. 집에 돌아온 골퍼는 날마다 우편함을 확인 했지만 골프채는 좀처럼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몇 주 후에 사우디아라비아 왕이 서명한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아니, 기대하던 골프채는 어디가고 달랑 편지 한 장이라니!” 그는 실망하면서 봉투를 열었습니다. 그 안에 무엇이 있었을까? 놀랍게도 안에는 미국에 있는 커다란 골프코스를 선물로 주는 기증서가 들어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하면서 조엘 오스틴은, “왕의 생각은 우리와 차원이 다르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왕 중의 왕이시다.
우리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섬긴다.
그렇기에 우리 인생을 향하신 하나님의 꿈은 우리의 상상보다 훨씬 크고 넓다.
그런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큰 꿈을 그렇게 꾸지 말라는 법은 없다.” 고 말합니다.

은혜의 선물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미국의 한 도시에서 떨어진 옷을 입은 한 신문팔이 소년이 주일 아침에 신문을 팔고 있었습니다. 그가 길을 따라 내려가다가 도시 중앙부의 아름다운 집 앞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도 모르는 새에 현관에서 서 있었으며 자기도 깜짝 놀라면서 얼떨결에 초인종을 눌렀습니다. 실업계의 거물인 로우리씨가 문을 열면서 그 소년을 보았습니다. 그 소년은 놀란 나머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저씨, 아저씨에게는 아이가 있으신가요?” “
아니, 나의 아내와 함께 있을 뿐 아이들은 없단다.”
“아, 그렇다면 저는 아저씨의 아들이 되고 싶어요."
그는 무척 놀라서 그의 아내를 불렀습니다. 그는 부인에게 몸을 돌려 말했습니다.“
여보. 작은 아이를 하나 갖고 싶소.” 그녀는 “예”라고 대답했습니다. 작은 소년은 소망을 가지고 말했습니다. “
아저씨, 만약 저를 아저씨의 아이로 삼아주신다면, 저는 제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드리겠어요.”
그는 아이에게 가정이 있는지, 아버지나 어머니가 있는지 물었습니다. 소년은 “아니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 남자는 말했습니다. “얘야 그러면 너는 어디에서 자니.” 소년은 대답했습니다. “길에서요.” 그러자 아내가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이 아이를 맞이해요.” 그들은 그 소년을 아들로 맞아들였습니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그 소년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 신문과 13페니를 그 남자에게 주었습니다. 그 자비한 남자는 그것을 내려다보면서 말했습니다.
“아들아. 그것을 가지고 있으렴. 나는 우리 둘을 위해서 충분한 것을 가지고 있어.”
이 이야기에서 무엇을 느낄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내가 무엇을 하였다고 자랑하는 것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살아가는 것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오늘도 이와 같은 아름다운 자세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숯과 다이아몬드

숯과 다이아몬드는 그 원소가 똑같은 탄소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 똑같은 원소가 하나는 아름다움의 상징인, 다이아몬드가 되고 다른 하나는 보잘 것 없는 검은 덩어리에 머물고 만다는 사실... 놀랍지 않습니까?
어느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지는 하루 24시간이라는 원소.
그 원소는 누구에게나 주어지지만, 그것을 다이아몬드로 만드느냐 숯으로 만드느냐는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삶은 다이아몬드라는 아름다움을 통째로 선물하지는 않습니다. 단지 가꾸는 사람에 따라 다이아몬드가 될 수도 있고 숯이 될 수도 있는 씨앗을 선물할 뿐입니다.

소중한 선물들

아내는 하나님께서 남편에게 준 소중한 선물입니다.
남편은 하나님께서 아내에게 준 소중한 선물입니다.
자녀는 하나님께서 부부에게 준 소중한 선물입니다.
부모는 하나님께서 자녀에게 준 소중한 선물입니다.
우리 모두는 서로 서로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소중한 선물들입니다.


오늘이라는 최고의 선물

아침에 잠이 깨면 아직 눈을 감은 채로 일어나 앉아 잠시 짧은 기도를 드립니다.
"주님! 오늘 하루를 선물로 주셔서 고맙습니다. 오늘도 눈을 뜨게 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도를 마치고 살며시 눈을 뜨면 눈앞에 드디어 찬란한 하루가 열립니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께 '오늘'이라는 선물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오늘'은 바로 '생명'입니다. 오늘을 받지 못하면 생명이 없습니다.
내일은 모릅니다. 내일도 선물로 주실지 안주실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오늘'이라는 선물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한 사람의 고유한 인격이 형성되고 삶의 모습과 빛깔이 결정됩니다.
오늘을 바쁘게 사용하면 그 사람은 바쁜 사람이 됩니다.
오늘을 사랑하며 살면 그 사람은 사랑의 사람이 됩니다.
오늘을 미워하며 살면 미움의 사람이 된다는 당연한 사실!
지금 내 모습과 현실은 그동안 내가 '오늘'이라는 선물을 지속적으로 어떻게 사용하였는지의 열매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을 살면 거저 주시는 '하늘 자원'으로 풍성하고 넉넉한 '오늘'이 될 것입니다.
이세상 자원을 의지해서 사는 삶은 뺏고 빼앗기는 치열한 싸움을 통해 쟁취해야 하는 고달픈 '오늘'이 될 것입니다.

최고의 선물

나에게 있어 그는 주님이 주신 최고의 선물입니다.
나에게 예고도 없이 주신 선물이기에 한 없이 소중합니다.
때론, 주님이 주신 그 선물로 인해 힘들어 눈물 흘리기도 하지만 주님을 원망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주님이 처음 저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
끝까지 주관하시사 나에게서 영원히 변치않게 하옵소서.....

감동의 선물

어떤 소년이 학교에 가기를 싫어했다.
운동화 때문이었다.
가난한 생활에다 엄마도 일찍 잃었다.
일용직을 하는 아버지는 지체 부자유자였고 아버지는 아들의 고민을 알고 있었다.
며칠 후 어느날 아침에 소년은 학교에 가려고 신발을 찾았다가 깜짝 놀랐다.
새 운동화는 아니지만 자신의 발에 맞는 깔끔한 운동화가 놓여 있었다.
새벽에 나간 아버지는 운동화 밑에 이런 글을 남겨 놓았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신발은 아니지만 세상에서 가장 가치있는 발걸음으로 살거라』

아빠의 선물

오래 전 미국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신앙의 도전을 주었던 어린 소년 ‘라이언 화이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라이언은 13살 때 혈우병을 앓아서 수술을 받았는데, 수혈을 잘못 받아서 그만 에이즈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잘못도 아닌 어른들의 부주의로 소년의 인생은 죽음의 길에 놓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곧 죽을 것을 알면서도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변함없이 밝게 학교 생활을 했습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아주 친절하게 대하였고, 그를 염려하는 부모님을 위로하면서 기쁘게 지냈습니다.
이러한 사실이 신문 기자들에게 알려지게 되면서 소년의 이야기가 신문에 매일 게재되었습니다.
텔레비전 등의 매체에서도 보도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라이언은 그렇게 5년 동안 살다가 결국 18세에 죽었습니다.
소년이 죽기 전에 그의 아버지와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 내용이 한 기독교 잡지에 실렸습니다.

“아들아, 미안하다. 이제는 네게 아무것도 해 줄 것이 없구나. 이 아빠가 더 이상 어떤 선물도 줄 수 없음을 용서해다오.”

“아빠, 전 지금까지 많은 선물을 받았지만, 아무도 아빠처럼 귀한 선물을 준 사람은 없었어요. 아빠는 저에게 천국에 갈 수 있는 티켓을 선물로 주셨잖아요. 바로 예수님을 소개해 주셨어요. 아빠 때문에 교회에 나가서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선물로 얻었는걸요. 이보다 더 위대한 선물은 없을 거예요.”

예수님보다 위대한 선물은 없습니다.
예수님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습니다.
이 예수님을 담고 있는 복음으로 무장하시기 바랍니다.


선물에 관한 성경 말씀

0 선물은 그 사람의 길을 너그럽게 하며 또 존귀한 자의 앞으로 그를 인도하느니라(잠 18:16)
0 너그러운 사람에게는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고 선물 주기를 좋아하는 자에게는 사람마다 친구가 되느니라(잠 19:6)
0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상속하거니와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느니라(잠 19:14)
0 은밀한 선물은 노를 쉬게 하고 품의 뇌물은 맹렬한 분을 그치게 하느니라(잠 21:14)
0 선물한다고 거짓 자랑하는 자는 비 없는 구름과 바람 같으니라(잠 25:14)
0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알았도다(전 3:13)
0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 55:1)
0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롬 5:15)
0 베드로가 이르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행 8:20)
0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0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엡 3:7)
0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 1:17)

선물에 관한 금언

0 선물의 고마움을 알려면 가난해야 한다.(죠지 엘리옷)
0 선물은 교환이다. 선물을 하지 않았다면 받을 생각를 하지 말라.
0 선물은 없는 것이 바람직하다.
0 선물은 신도 설득 시킨다고 한다.(에우리피데스)
0 선물 하나를 잘 주면 많은 손실을 메운다.(토마스 풀러)
0 선물은 갈구리와 같다.(마르티알리스)
0 선물을 하려면 오래 간직하는 것으로 하라. 그것을 볼 때마다 오래 그대를 기억하리라(토마스 풀러)
0 친구가 선물을 구하면 내일로 미루지 말라(죠지 허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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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세상 최고의 선물, 예수 그리스도(마태복음 1:18-25)

예수님의 육신의 아버지가 되는 복을 누리는 요셉을 만나게 됩니다. 

요셉은 혈통적으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입니다.

그는 비록 갈릴리 지방의 작은 마을 나사렛이란 곳에 거하는 사람이었고

그 당시에 그리 알아주지 않는 목수라는 직업을 가졌지만

그 누구보다 귀한 하나님의 약속의 계보를 잇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본문 19절 보시면,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

 

성경은 요셉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여기 ‘의로운 사람’으로 번역된 ‘디카이오스’는

요셉이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율법을 좇아 경건하게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것과

부정한 것을 용납하지 않는 곧은 성격의 소유자라는 것을 성경은 말씀합니다.

 

본문 19절의 하반절과 20절의 앞부분을 보시면,

“...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

 

20절의 ‘이 일’이 단수로 나와 있으나

원어성경에는 ‘타우타’란 복수형으로 나와 있습니다.

 

주의 사자가 나타나서 요셉에게 이야기 할 때까지

상황이 마리아를 오해할 수밖에 없었던 요셉은

마리아와의 관계를 비밀히 끊고자 결정은 하였으나

당시 요셉의 고민이 매우 심했음을 보여줍니다.

 

본문 20절을 보시면,

“...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어 요셉을 향해 ‘다윗의 자손 요셉아’라고 부르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요셉을 거룩한 구원 역사의 도구로 인정하셨음을 뜻합니다.

마리아가 낳게 될 아들은 다윗의 혈통에서 나오게 될 메시야라는 사실을 인지시킴으로써

마리아와 파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우리의 본문 2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임마누엘의 주님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이 복된 소식이 성탄의 메시지입니다.

 

우리의 본문 24절을 보면 요셉은 주님의 사자가 그에게 명한 그대로 행하였습니다.

요셉은 주님의 사자를 통해 받은 하나님의 계시대로 순종하여

그 아내 마리아를 데려왔습니다.

요셉은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이 후에 아들을 낳았을 때 이름을 ‘예수’라고 한 것이나

헤롯의 위협을 피해 애굽에 내려간 것도

주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한 요셉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요셉이 우연히 예수님의 육적 아버지가 된 것이 아닙니다.

비록 인간으로서의 한계와 약점을 가졌지만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역사에 사용될 준비가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요셉은 철저히 순종의 삶을 산 사람입니다.

 

우리도 준비되고 순종하는 삶을 살면 하나님의 놀라운 뜻에 사용될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의 탄생은 은혜의 사건입니다.

 

요한복음 1:14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이 세상 최고의 선물이십니다.

 

우리 삶의 이유이고 소망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이천년전,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성탄절을 앞두고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할 세 가지는 무엇일까요?

 


첫째, 이 세상 최고의 선물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시오.


1967년 여름, 당시 17세의 꿈 많은 소녀였던 조니 에릭슨 타다는 다이빙 사고로

목을 제외한 전신마비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한 순간의 사고로 꿈 많은 어린 소녀는 평생 휠체어에 몸을 맡기고 살아야 했지만

그녀는 하나님이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깨닫고

그분의 사랑 안에서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그녀는 구필화가로서 활동하며 믿음의 여정을 걷고 있습니다.

 

그녀의 저서 ‘나의 연인, 주님과의 친밀한 사귐’ 이라는 책에서

이천년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날을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주님이 태어나신 곳은 아름다운 벽지의 깨끗한 방이 아니었으며

새 침대와 탁자, 일회용 기저귀와 베이비파우더,

음악소리가 나는 기린 모빌과 곰인형,

벽에 걸린 분홍색과 파란색의 자수도 없었다.

 

주님은 냄새나는 외양간을 통하여 역사에 들어오셨으며 한줌의 건초를 베개로 삼으셨다.

주님의 코에 가득한 첫 향기는 곰팡내나는 짚단과 동물의 배설물이었다.

주님의 첫 침대는 여물통이었다.

아기이신 주 예수님은 사명이 있으셨다.

주님은 이 땅의 여행의 시작부터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셨다.

주님은 하나님의 사랑의 넓이가 어떠한지를 보여 주셨다.”

 

그녀의 표현처럼 낮고 천한 말구유를 통하여 주님은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단 한가지입니다.

그것은 죄인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함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성경 로마서 3:23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로마서 6:23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

 

인류의 시작인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이후로

우리는 모두 죄인이고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죽음에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멸망할 수 밖에 없는 인간들을 위해 하나님은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어린 아기로 세상에 오신 날이 성탄절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 은혜를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지 못한 우리들을 의롭다고 인정해 주셔서

영원한 소망을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요한복음 5:24을 보시면, 예수님은 영생에 관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니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다시 태어나는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신실한 크리스챤 이기도한 미국의 지미카터 대통령이

1976년 3월16일 로버트 L. 터너와의 인터뷰에서 이런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처음 아기로 태어나면서 인간의 생명을 부여받았다고 믿으며,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일 때 새 생명이 된다고 믿는다.

그것이 ‘다시 태어난다’ 라는 의미이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는 새생명을 소유하게 됩니다.

 

성탄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인간을 구원하시는 성육신이라는 은혜로 나타난 날입니다.

성육신하여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우리의 구세주로 받아들여 영접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생의 소망을 따라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2013년도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저는 여러분 모두가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믿음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둘째, 이 세상 최고의 선물인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십시오.

 


‘빈자의 어머니’로 불리던 테레사 수녀는

1,800여 명의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섬기는데 힘썼습니다.

그녀는 평생을 빈민, 고아, 나병 환자,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곁을 지키며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저는 백만 달러를 줘도 테레사 수녀님의 일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라고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들은 테레사 수녀는

“나도 백만달러를 받고 이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합니다.” 라는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 세상을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사랑의 선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

그 놀라운 사랑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분을 전해야 합니다.

 

여러분!

바쁘게 달려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숨을 고르며 우리의 주위를 돌아보면

가난하고 소외받고 절망으로 신음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그리고 우리 모두는 그분들을 향한 기도와 구제를 멈출수 없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좀 더 그분들의 가까이로 나아가야 합니다.

 

나눔의 삶, 이것은 놀라운 축복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눈을 들어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가깝게는 여러분의 주위를 돌아보십시오.

거기에는 여러분의 이웃이 있습니다.

 

물질적으로 헐벗고 굶주리고 있는 사람들,

이 사회의 한 모퉁이에서 소외된 사람들,

우리들이 돌아보아야 할 이웃들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분들이 예수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도록

예수님의 사랑을 전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만이 그분들의 삶을 진정으로 변화시키고,

치유하고, 회복시키시기 때문입니다.

 

실패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면

기쁨으로 소망의 노래를 부르게 될 것입니다.

그분의 사랑을 전하십시오.

이 세상 최고의 선물인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셋째, 이 세상 최고의 선물인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십시오.

 


필립 훅 교수는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 광풍이 내 인생의 배를 삼키려 합니다.

이제 바람에 날려 침몰할 것 같은 내 배에 평화의 왕을 모시겠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에는 언제나 광풍이 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