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誓願) / 맹세할 서(誓), 원할 원(願)

서원(誓願)

  • 1. 맹세(盟誓)하여 소원(所願)을 세움. 또는 그 소원(所願)

  • 2. 보살(菩薩)이 수행(修行)의 목적(目的)인 원망(願望)을 밝히고 그 달성(達成)을 맹세(盟誓)하는 일. 보살(菩薩)의 공통(共通)된 원(願)인 사홍서원(四弘誓願), 아미타(阿彌陀)의 48원(願), 석가(釋伽)의 500대원(大願) 등(等)

  • 3. 구약(舊約) 시대(時代)의 풍습(風習)으로, 하나님에게 어떤 은혜(恩惠)를 빌고, 그 보답(報答)으로 하나님에게 어떤 행위(行爲), 곧 헌물(獻物)을 바칠 것을 맹세(盟誓)하던 일


사사기 11:29

  이에 여호와의 신이 입다에게 임하시니
입다가 길르앗과 므낫세를 지나서
길르앗 미스베에 이르고
길르앗 미스베에서부터
암몬 자손에게로 나아갈 때에.


사사기 11:30

 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가로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붙이시면.


사사기 11:31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

 사사기 11:34

  입다가 미스바에 돌아와
자기 집에 이를 때에
그 딸이
소고를 잡고 춤추며 나와서 영접하니
이는 그의 무남독녀라.

사사기 11:35

 입다가 이를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슬프다
내 딸이여
너는 나로 참담케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이로다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

레위기 27:1-8 / 서원 예물의 값

20세-60세 / (남자) 은 50세겔, (여자) 은 30세겔
5세-20세 / (남자) 20세겔, (여자) 10세겔
1개월-5세 / (남자) 5세겔, (여자) 3세겔
60세 이상 / (남자) 15세겔, (여자)  10세겔

가난한 사람 : 제사장이 그 값을 결정

레위기 18:21

너는 결단코 자녀를 몰렉에게 주어
불로 통과케 말아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레위기 20:4-5

그가 그 자식을 몰렉에게 주는 것을
그 지방 사람이 못본체하고
그를 죽이지 아니하면.
내가 그 사람과 그 권속에게 진노하여
그와 무릇 그를 본받아
몰렉을 음란히 섬기는 모든 사람을
그 백성 중에서 끊으리라.    

예레미야 32:35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에
바알의 산당을 건축하였으며
자기들의 자녀를
몰렉의 불에 지나가게 하였느니라
그들이 이런 가증한 일을 행하여
유다로 범죄케 한 것은
나의 명한 것도 아니요
내 마음에 둔 것도 아니니라.

창세기 28:20
  야곱이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 서원(네데르, neder) נֶדֶר / 남성명사
- 맹세, 서원
- 하나님께 자신을 바치는 행위
제물을 바치는 것(레 27장), 어떤 일을 삼가는 것(시 132:2)

창세기 28:20-22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시편 15:4

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며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

히브리서 11:32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미브타(mibṭâʽ) מִבְטָא 
스트롱번호 4008

1. 서원
2. 경솔한 발언
3. 민수기 30:7
그의 남편이 그것을 듣고 그 듣는 에 그에게 아무 말이 없으면 그 서원을 이행할 것이요 그가 결심한 서약을 지킬 것이니라.


네데르( neder)  נֶדֶר 스트롱번호 5088

1. 맹세
2. 서원한 것  

옴무오(ŏmnüō) ὀμνύω 스트롱번호 3660

1. 맹세하다
2. 서원하다
3. 마태복음 5:34

유케(ĕuchē)  εὐχή, ῆς, ἡ 스트롱번호 2171

1. 기도
2. 맹세

사사기 11:29-33

29. 이에 여호와의 신이 입다에게 임하시니 입다가 길르앗므낫세를 지나서 길르앗 미스베에 이르고 길르앗 미스베에서부터 암몬 자손에게로 나아갈 때에
30. 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가로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에 붙이시면
31.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
32. 이에 입다가 암몬 자손에게 이르러 그들과 싸우더니 여호와께서 그들을 그 에 붙이시매
33. 아로엘에서부터 민닛에 이르기까지 이십 성읍을 치고 또 아벨 그라밈까지 크게 도륙하니 이에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 항복하였더라.


서원이란 히브리어로 "이싸르" 또는 "네데르"이며, 헬라어로는 "유케"이다.

위의 용어들은 본래 '말해진 말', '약속', '입에서 나가는 것'을 시사하였다.
일반적으로 "이싸르"는 인생의 향락을 금하는 것, 즉 야웨의 영광을 위해 자기 부정의 생활을 하는 서원을 가리키는 것
"네데르"는 서원자가 무엇인가를, 심지어 자신까지도 하나님께 바치는 서원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와 같은 서원은 옛적부터 있었는데, 하나님 앞에 하는 자발적 언약(맹세)이었다.

서원의 기본적인 관념은 하나님과의 평화(화해)를 위한 것으로, 어떤 일을 실행할 것을 하나님께 약속하는 것, 또는 금욕 생활을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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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하나님께 서원을 드린다고 하는데 서원이란 무엇인가요? 그리고 서원을 드리면 반드시 지켜야 하나요?

(대답)  ‘서원’이란 이행을 전제로 한 하나님과의 약속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을 해주십시오’, ‘…을 하겠습니다’라는 간구와 약속을 ‘서원 기도’라고 합니다.

성경에는 서원과 관련된 사건이 많습니다.

야곱의 경우를 보겠습니다.
형 에서를 속이고 장자권을 차지한 후유증으로 고향을 떠나 하란으로 가던 그가 벧엘 광야에서 노숙하게 됩니다.
그날 밤 거기서 하나님의 임재를 발견하고 서원기도를 드립니다.

“나를 지켜 주십시오.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십시오.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해 주십시오.”

세 가지를 간구한 뒤 그렇게 해주시면
“여호와를 나의 하나님으로 섬기겠습니다.
돌기둥을 세운 이곳이 하나님의 전이 되게 하겠습니다.
반드시 십일조를 드리겠습니다”라는 약속을 합니다.

이것은 야곱의 서원기도였습니다(창 28:20∼22).

하나님은 야곱의 기도대로 이루어 주셨습니다.
하란 생활 20년 동안 지켜주셨고, 갑부가 되게 해주셨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서원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딸 디나는 성폭행을 당했고, 아들들은 세겜 주민을 대량 살상하는 살인죄를 범했습니다.

그 외에도 입다의 서원(삿 11:29∼31)
한나의 서원(삼상 1:10∼11) 등 사례는 많습니다.

대부분 서원기도는 위급할 때나 하나님의 도우심과 응답이 절박할 때 이루어졌습니다.

입다의 경우는 이스라엘의 사사로 암몬과의 결전을 앞두고 하나님이 암몬과의 싸움에 승리를 주신다면 이기고 돌아올 때 맨 먼저 내 집 문에 나와 영접하는 자를 번제물로 드리겠다고 서원했습니다.
그가 암몬을 이기고 개선할 때 맨 먼저 나와 영접한 사람은 입다의 무남독녀였고 그는 서원대로 실행했습니다.

한나의 경우는 아들을 주시면 그를 여호와께 드리겠다고 서원한 뒤 사무엘을 낳았고 젖 뗀 후 곧바로 드렸습니다.

서원은 반드시 이행할 것을 전제로 한 하나님과의 언약입니다.
함부로 서원하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고 일단 서원한 것은 이행하는 것이 신실한 신앙의 징표입니다.

사람끼리의 약속도 지키는 것이 건강한 인격인의 자세입니다.
약속을 무시하고 파기하고 없었던 일로 치부하는 사람들은 믿고 사귀기 어려운 사람들입니다.
하물며 하나님과의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장막에 유하며 성산에 거할 수 있는 사람의 자격을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않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시 15:4).

지키지 못할 서원은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럴 경우는 그냥 기도해도 됩니다.
그러나 서원 후 응답을 받았다면 지켜야 합니다.
나는 서원을 잊고 살 수 있지만 하나님은 서원을 기억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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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부흥회에 참석을 했다가 은혜를 받고 목회자가 되겠다는 서원을 하였습니다.
그 서원이 굳이 잘못이라는 것 보다 과연 건전한 서원일까요?
목회자가 되는 것은 은혜 한 번 받고 서원한다고 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목회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부르심, 즉 소명이 있어야 합니다.
이 소명은 두 가지로 나눌 수가 있는데 내적 소명과 겉으로 드러난 외적 소명입니다.

이 두 소명이 조화를 잘 이룰 때 그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소명감을 잘 살피지 못한 체 즉흥적인 서원을 하고서 괴로워하는 경우는 진정한 서원이라기보다 즉흥적인 감정의 자기 다짐 수준입니다.

서원에는 여러 형태가 있습니다.

자신이 목회자가 되어 하나님께 목회를 하겠다는 서원이 있고, 결혼을 포기하면서까지 교회를 섬기겠다는 독신의 서원도 있습니다.
또 교회를 건축하여 하나님께 봉헌을 하겠다는 서원이 있고, 아들을 낳으면 하나님께 나실인으로 드리겠다는 나실인 서원도 있습니다. 이런 여러 형태의 서원들은 기도하면서 자신의 모든 여건을 따라 하여야 하고, 하였으면 지켜야 합니다.

그저 생각 없이 쉽게 서원을 하고 쉽게 파기를 한다면 그것은 덕이 안 되는 저급한 수준의 코미디와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하여 서원이 무엇인지?
서원을 하였으면 그 서원을 어떻게 감당 할 것인지에 대해 성경을 바탕으로 강론하겠습니다.

서원(誓願)이란 무엇일까?

신명기 23:21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 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그것이 네게 죄가 될 것이라.

서원이 무엇입니까?

처음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이나 또 신앙생활을 오래 하지 않은 분들은 이 서원이라는 특별 기도에 대해 잘 모르실 수 있습니다.
이 서원(Vow)이라는 의미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맹세, 혹은 굳은 약속이라는 뜻의 기도입니다.

맹세라는 차원에서 볼 때 서원이란 영적으로 성숙한 신앙인이 하나님의 은혜를 크게 받고, 봉사와 헌신을 드리겠다는 자발적인 약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서원이란 자기 자신을 드리는 경우, 자녀를 드리는 경우, 가축들을 드리는 경우, 가옥을 드리는 경우, 자기의 토지를 드리는 경우에 사용되었습니다. 

서원이란 내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자신의 가장 귀중한 것들을 자발적으로 드리겠다는 약속기도입니다.

성경에 보면 서원에 대한 여러 사례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서원들이 다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실천하였다는 점입니다.

우선 몇 가지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첫째, 야곱이 형과 아버지를 속이고 밧단 아람으로 도망을 가던 중 벧엘이란 곳에 도착하여 잠을 자다 꿈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체험하고 서원을 합니다.

창세기 28:20-22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21.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22.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둘째, 한나가 아들을 낳지 못하여 작은 부인으로부터 아들 낳지 못한다고 심한 스트레스를 당한 후에 성전에 나와 아들 달라고 기도를 합니다. 대신 아들 주시면 나실인으로 드리겠다는 서원입니다.

사무엘상 1:10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11 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셋째, 선지자 요나는 자기의 허물 때문에 바다에 던짐을 당하였지만 다시금 물고기 뱃속이라는 극한 상황에 갇혀서 살려달라고 서원기도로 매어달립니다.

요나 2:4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09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넷째, 사도 바울도 고린도의 선교 현장에서 1년 6개월을 머물다 다음 선교지로 이동하면서 겐그레아라는 항구도시에서 비장한 각오로 서원기도를 드립니다.

사도행전 18:18
바울은 더 여러 날 머물다가 형제들과 작별하고 배타고 수리아로 떠나갈 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 바울이 일찍이 서원이 있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

여러 서원 가운데 특별히 사람을 서원의 대상으로 삼을 때는 아주 신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서원은 정당성 여부에 따라서 그 사람에게 큰 축복으로 열매를 맺기도 하고, 때로는 아주 엄청난 비극을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사사기 11:30~36).


30. 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이르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에 넘겨 주시면
31.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
32. 이에 입다가 암몬 자손에게 이르러 그들과 싸우더니 여호와께서 그들을 그의 에 넘겨 주시매
33. 아로엘에서부터 민닛에 이르기까지 이십 성읍을 치고 또 아벨 그라밈까지 매우 크게 무찌르니 이에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 항복하였더라
34. 입다가 미스바에 있는 자기 집에 이를 때에 보라 그의 딸이 소고를 잡고 춤추며 나와서 영접하니 이는 그의 무남독녀라
35. 입다가 이를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어찌할꼬 내 딸이여 너는 나를 참담하게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로다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 하니
36. 딸이 그에게 이르되 나의 아버지아버지께서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여셨으니 아버지의 입에서 낸 말씀대로 내게 행하소서 이는 여호와께서 아버지를 위하여 아버지의 대적 암몬 자손에게 원수를 갚으셨음이니이다 하니라.

조급하고 경솔한 서원을 하지 마십시오. 


네 입으로 네 육체가 범죄하게 하지 말라 천사 앞에서 내가 서원한 것이 실수라고 말하지 말라 어찌 하나님께서 네 목소리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네 손으로 한 것을 멸하시게 하랴.  

사람들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위급한 일을 만나거나 어떤 어려운 상황 속에 놓여 있을 때 그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서원기도를 더러 합니다. 하나님, 이렇게, 이렇게 해 주십시오. 응답을 주시면 제가 이렇게 하겠습니다. 라는 식의 조건부 기도입니다.

그런데 그 서원을 하고 난 후가 문제입니다. 서원을 해 놓고도 안 지키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이 진노의 대상이 된다고 경고를 합니다.

아마 서원을 하고도 안 지킨다면 그것은 의미도 모르고 그저 분위기에 휩쓸렸거나 집회 때의 강사의 강요에 못 이겨 한 신중성 없는 것일 것입니다. 신중성 없이 한 서원은 평생 그 서원이라는 것에 발목이 잡힐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서원의 성격을 띠는 맹세에 관한 일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을 해 주십니다.

마태복음 5:33-34, 37
33. 또 옛 사람에게 말한바 헛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37. 오직 너희 말은 옳다옳다, 아니라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헛맹세, 지키지 못할 서원을 하여 지키지 못함으로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 것을 피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주변을 잘 살펴보십시오. 함부로 서원을 해 놓고 지키지 못하여 자기 인생에 족쇄가 되고, 발목이 잡혀서 심적으로 많은 고통 가운데 지내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또 자식을 하나님 앞에 너무 성급한 마음이나 충동적인 마음으로 드리겠다고 서원을 해 놓고 정말 고통 가운데 지내는 분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불건전한 기도원에 가서 서원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분위기에 휩쓸려서 서원을 강요당하거나 충동적으로 서원을 하고 오기도 합니다.

또 더러는 주변 사람들이 영웅적인 심리로 서원을 하니 나도 서원을 하는 일들도 종종 일어납니다. 잘못된 서원을 해서 자신의 인생을 그릇치고, 가족들이나 주변 사람들까지도 어려움에 처하는 경우를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또 더러는 부모님이 뱃속에 있을 때부터 너는 장차 목회자가 되어라 하면서 서원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정말 좋은 일이기도 합니다. 또 아들이 없고 딸만 있는 집에서는 일찍부터 목회자에게 딸을 보내겠다는 서원도 합니다. 다 믿음으로 하는 일인 만큼 복 받을 일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당사자에게 물어보지 않고 한 서원하다 보니 자칫 부모님의 기대와는 달리 지키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부모님의 욕심을 아들에게 강요해서 건강한 목회자가 되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아들의 인생에 걸림돌을 놓는 결과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서원이란 신중하고 조심스러워야 합니다. 부모님의 기대와는 달리 목회의 길이 아니라 사업의 길로 나아가면 더욱 불안정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업이란 성공 할 때도 있고 실패 할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일이 좀 안 되면 심리적으로 부모님이 서원한 것을 내가 지키지 않아서 하나님이 막으신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으로 늘 불안한 생활을 합니다. 혼란 속에 빠지게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서원한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게 하지 말라.
하나님은 우매한 자들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서원한 것을 갚으라.

성도 여러분, 부모님이 자녀를 놓고 서원을 한 것은 완벽한 서원으로 볼 수 없습니다.
서원의 성격상 그 자녀가 지킬 수고 있고 못 지킬 수도 있습니다.
혹 이런 일에 해당이 되어도 너무 염려할 필요 없습니다.

그것은 성경적인 서원도 아니며,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고백에서도 그런 식의 서원은 하지 말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혀 소명감 없는 사람이 충동적으로, 혹은 주변의 강요로 서원을 실천하였다고 합시다.
그 길을 걸어가는 본인도 한 평생 고달프고, 교인들도 고달프고, 가족들도 고달플 것입니다.

대신 사람이 아닌 물질에 관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서원을 하였으면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예를 들면 건축헌금이나 이와 같은 것들을 마음에 가지고 있을 때는 상관없겠으나 하나님께 작정하고 공회에서 공개하였을 때는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서원한 일을 자꾸 뒤로 미루면 나중에는 그 서원을 지키지 않게 되는 큰 허물을 남기고, 복이 오는 통로도 막혀 버립니다.더러는 이런 말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언젠가는 갚겠다고. 그것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서원을 하였다면 속히 지키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서원의 성격에 해당하는 것은 일상생활에서 최우선 순위에 올려놓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작정을 하고 난 뒤에 성의 없이 시간을 보내는 자를 향하여 우매자라고 규정하십니다. 이런 우매자에게는 채찍만이 합당합니다(잠언 26:3).

 

05 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보다 서원하지 아니하는 것이 더 나으니.

 

서원이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단 서원을 하였으면 그 일을 미루지 말라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미루다가 보면 마음이 바뀌게 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도 오늘날 우리 교인들이 저지르는 잘못처럼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도 쉽게 그 마음이 변하였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04절은 그런 사람들 때문에 기록 된 것입니다. 서원을 하고 실행에 옮기지 않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이고,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하나님께서 분명 진노하사 모든 복된 길을 차단해 버립니다(06). 성도 여러분, 예물을 바치고자 하나님 앞에 굳게 작정을 하였습니까? 그렇다면 더디 하지 말고 마음에 작정한 대로 속히 실행에 옮기십시오.

자칫 서원을 해놓고 실행하지 않음으로 다른 형제에게 아, 서원을 하여도 적당히 넘어가면 되는 것이구나. 라는 잘못된 생각을 심어 줄 수 있습니다. 상대방을 실족시키는 것, 이거 무서운 일입니다. 나도 너도 함께 복이 오는 길을 막는 결과가 될 수 있습니다.

 

강화도에는 유독 교회가 많습니다.
그래서 왜 교회가 많은지 조사를 하였는데 이런 결과가 나왔습니다.
1900년대 강화 북부마을에 종순일이라는 돈 많은 유학자가 살았습니다.
그는 부자였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그에게 돈을 빌려 쓰고 살았습니다.
이 유학자가 복음을 받고 기독교인이 되어 성경을 읽었습니다.
마태복음 18장에 나오는 무자비한 종의 비유인데 이런 내용입니다.
임금님에게 1만 달란트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이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빚을 갚지 않는다고 옥에 가둡니다.
그러자 그 소식을 들은 임금님이 화를 내면서 그 사람을 다시 잡아다 감옥에 가두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종순일이 이 말씀을 읽다가 충격을 받고 며칠 고민에 빠졌습니다.
자기도 많은 사람들에게 빚을 놓고 있는데 그 이야기가 자기에게 하는 말로 들린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주일날 예배를 마치고 채무자들을 다 불러 모았는데 채무자들은 빚을 갚으라는 줄 알고 모두 떨고 있습니다.

그때 종순일이 채무자들에게 마태복음 18장 읽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나는 마태복음 18장을 읽고 충격을 받았소.
여기 무자비한 종이 바로 나 자신인 것을 알았소.
나는 오늘부터 여러분의 빚을 모두 탕감하기로 하였소 하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빚 문서를 모두 불태워 버렸습니다.

또 마태복음 19:21,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읽고 자기의 재산을 처분하여 강화주변에 교회를 세우기로 서원하고 실행에 옮김으로 강화에 교회가 많다고 합니다.

말씀은 듣고 아는 것보다 말씀을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명기 23:23
네 입으로 말한 것은 그대로 실행하도록 유의하라 무릇 자원한 예물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 네가 서원하여 입으로 언약한 대로 행할지니라.


말씀대로 살고자 빛 문서를 불태운 부자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마태복음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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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무렵,강화 북부 해안 홍의마을종순일(種純一)이란 교인이 있었다.
전통 유학자 출신으로 땅도 많고 여유 있던 부자였다.
그가 사는 마을에 그에게 돈을 빌려다 쓰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런 그가 마을 훈장 박능일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리고 성경을 읽다가 마태복음 18장 23절 이하에 나오는 ‘용서할 줄 모르는 무자비한 종에 대한 비유’ 대목에서 멈추었다.

임금에게 1만 달란트 빚 진 신하가 그 빚을 탕감받고 나가다가 자기에게 1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만나 그의 빚을 탕감해주지 않고 옥에 가두었는데, 그 사실을 안 임금이 화를 내며 그를 다시 잡아 옥에 가두었다는 내용의 말씀이었다.

‘마을 부자’ 종순일은 이 말씀을 읽고 며칠 동안 고민하다가 주일 오후, 예배를 마치고 자기에게 돈을 빌려간 마을 사람들을 집으로 불러들였다.

마을 사람들은 ‘빌린 돈을 갚으라는 것인가? 아니면 이자를 높이려는가?’하는 두려운 마음으로 모였다.
종순일은 성경을 펴서 마태복음 18장 말씀을 읽은 후에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오늘 이 말씀에 나오는 무자비한 종이 바로 나다. 내가 그리스도의 은혜로 죄 사함을 받은 것이 1만 달란트 빚 탕감 받은 것보다 더 크거늘, 여러분에게 돈을 빌려주고 그 돈을 받으려 하는 것이 1백 데나리온 빚을 탕감해주지 못한 것보다 더 악한 짓이요. 그러다 내가 천국을 가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오늘부로 여러분들에게 빌려준 돈은 없는 것으로 하겠오.”

그는 빚 문서를 꺼내 모두가 보는 앞에서 불살라 없앴다. 행여나 빚 독촉을 받는 것인 아닌가, 두려운 마음으로 왔던 마을 사람들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곤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요즘 없는 빚도 있다고 우겨서 남의 돈을 빼앗는 세상인데 어찌하여 예수교 하는 사람은 자기 돈까지 버려 남을 도우니 참 이상한 일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1900년 4월, 홍의 마을의 복음화는 급속하게 이루어졌다.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였다.
종순일은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마 19:21)는 말씀을 읽고 찔림을 받아 자기 재산을 처분하여 교회에 헌납했다.

그리고 나서 얼마 있다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각 지방과 고을에 보내셨다”(눅 10:1)는 말씀을 읽고 아내와 함께 괘나리 봇짐 하나씩 메고 아직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남쪽 길상 면으로 전도 여행을 떠났다.
그가 찾아 간 “땅 끝”(행 1:7)은 강화 주변의 작은 섬들이었다.

아직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강화 남부 길상면으로 가서 전도한 결과 길직, 길촌, 온수, 선두, 넙성, 덕진 등지에 교회가 설립되었다.
그리고 나서 석모도와 주문도, 영종도 같이 교통이 불편한 섬들을 찾아다니며 전도하고 목회했다.

1917년 감리교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강화 남쪽 주문도 진촌교회(현 서도중앙교회)에 부임했고, 그곳에서도 교인들이 목사의 신앙을 본받아 서로 빚을 탕감해 주는 일이 일어났다.

마을 사람들 모두 감동하였고 교회를 보는 눈이 달라졌다.
오래지 않아 당시 섬 주민 181호 가운데 134호가 교회에 나오게 되었으니 전 주민의 75%가 교인이 되는 일이 일어났다.
지금도 면소재지인 주문도가 ‘술집과 다방이 없는’ 성역으로 남게 된 데는 이러한 감동적인 복음 역사가 크게 작용하였던 것이다.
그는 그렇게 강화, 옹진 섬 지역을 돌며 수십처 교회를 개척하였고 평생 가난한 전도자로 생을 마쳤다.

[출처] 2017. 03월 이달의 인물(국내): 종순일[種純一, 1876-1950]


종순일 목사의 ‘빚 탕감 잔치’


                                                   이덕주(감신대 교수/ 한국교회사)


 요즘은 그런 일이 거의 없지만, 해방 전만 해도 세례 받은 기념으로 뭔가를 하는 전통이 있었다. 세례를 받고 정식 교인이 된 기념으로 교회에 필요한 물품을 기증하거나 예배당 마당에 나무를 심기도 했다. 세례를 일생에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인식하여 이를 기념하는 흔적을 남기고자 했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선교 초기에 세례를 받으면서 ‘이름을 바꾼’ 교인들이 있었다. 개신교회는 그 전통을 버렸지만 천주교회나 정교회, 성공회 같은 ‘가톨릭’ 전통의 교회들은 세례를 받으면서 성인(聖人)의 이름을 따 ‘프란체스코’, ‘베로니카’, ‘베네딕또’, ‘마리아’ 같은 서양식 이름으로  ‘본명’(세례명)을 지어 받았다. 그런데 이런 서양식 이름이 아닌, 한국식으로 이름을 바꾼 개신교인들이 있다. 강화도 북부 해안 마을, 홍의에서 처음 믿은 교인들이 그 주인공들이다.


예수 믿고 이름을 바꾼 사람들


 홍의 마을에 복음이 들어간 것은 1897년 어간이다. 이 마을 서당 훈장이 이웃 서사면 다리목(지금 교산) 마을에서 복음을 접하고 돌아와 동네 사람들에게 전도하고 서당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것이 오늘 홍의교회 출발이다. 훈장의 전도를 받고 믿기로 결심한 홍의 마을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면서 개명(改名)하기로 하였다.

 “우리가 예수 믿고 세례를 받는 것은 거듭난 증거다. 아기가 새로 태어나면 새 이름을 지어주듯 우리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이름을 새로 짓는 것은 당연하다.”

 이들은 신생(新生)과 중생(重生)의 표시로 이름을 바꾸기로 한 것이다. 그러면서 같은 돌림자를 쓰기로 하였다.

 “우리가 마을에서 처음 믿었고, 한 날 한 시에, 함께 믿어, 한 형제가 되었으니 한 일(一) 자로 돌림자를 쓰자.”

 성은 부모님이 준 것이라 바꿀 수 없었고, 이름의 마지막 글자를 한 일자로 통일하였으니 가운데 자만 정하면 되었다. 그래서 신앙적으로 좋은 의미를 지닌 ‘애’(愛), ‘신’(信), ‘능’(能), ‘순’(純), ‘충’(忠), ‘봉’(奉), ‘은’(恩), ‘경’(敬) 같은 자를 적은 종이를 주머니에 넣고 기도한 후에 하나씩 뽑았다. ‘애’ 자가 뽑히면 ‘애일’, ‘신’ 자가 뽑히면 ‘신일’, ‘경’ 자가 뽑히면 ‘경일’이 되었다. 그런 식으로 홍의 마을에 처음 복음을 전한 훈장은 박능일(朴能一)이 되었고 김경일(金敬一), 권신일(權信一), 장양일(張良一), 주광일(朱光一) 같은 홍의 교회 개척교인들이 그렇게 해서 나왔다. 이들은 교회 안에서 쓰는 명칭만 바꾼 것이 아니라 호적과 족보까지 새 이름으로 바꾸었다.

 그런데 복잡한 문제가 생겼다. 같은 집안의 아버지와 아들, 삼촌과 조카가 같은 날 세례를 받은 것이다. 예외는 없었다.

 “육적으로는 부모지간, 숙질지간이지만 영적으로는 같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가? 같은 돌림자를 쓰는 것이 마땅하다.”

 그 결과 부자간, 숙질간에 같은 돌림자를 쓰게 되었다. 권신일의 아들은 권충일(權忠一), 조카는 권혜일(權惠一)이 되었고 정천일(鄭天一)의 아들은 정서일(鄭瑞一), 김봉일(金奉一)의 아들은 김환일(金還一)이 되었다. 믿지 않는 사람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전통적으로 돌림자는 친족 간의 촌수와 항렬을 알려주는 단서였다. 상하간의 서열이 분명하여 ‘윗대’의 돌림자를 ‘아랫대’에서 쓸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질서가 교회에서 깨졌다.

 이처럼 파격적으로 이름을 바꾼 교인들을 보고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예절도, 촌수를 모르는 상것들이라”며 “검정개”(그 때 교인들은 검은 옷을 입고 다녔다)라고 조롱했지만 ‘육적 질서’ 대신 ‘영적 질서’를 따르기로 한 교인들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오히려 홍의 마을에서 시작된 개명 전통은 강화 전 지역으로 확산되어 선교 초기 ‘일’자 돌림으로 개명한 강화 일대 교인들은 60여명에 달한다. 이들 개명한 교인들은 이름을 바꾼 만큼 신앙에서도 철저하였다. 홍의교회 개척 교인 종순일(種純一)이 대표적이다.


 마을 빚을 탕감해준 부자 교인


 종순일은 예수 믿기 전 ‘마을 부자’ 소리를 들을 정도로 재물에 여유가 있었다. 그래서 그 마을 사람 가운데 그에게 돈을 빌려 간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세례 받고 이름을 바꾼 그는 교회 속장이 되어 성경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였다.

 하루는 마태복음 18장 23절 이하에 나오는 비유 말씀을 읽었다. 1만 달란트 빚진 신하가 임금에게 빚을 탕감 받은 후 나가다가 자기에게 1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만나 빚을 갚으라며 감옥에 가두었는데, 그 소식을 들은 임금이 화가 나서 빚 탕감을 취소하고 그 신하를 감옥에 가두었다는 이야기였다. 이 구절을 읽은 종순일은 며칠 고민하다가 자기에게 돈 빌려 간 마을 사람들을 집으로 불러 모았다. 그리고 자신이 읽은 마태복음 말씀을 들려주었다.

 “오늘 내가 예수 믿고 죄 사함 받은 것이 천만 냥 빚 탕감 받은 것보다 크거늘, 여러분에게 백 냥, 천 냥 돈 빌려주고 그걸 받으려 한다면 이는 성경 말씀에 나오는 악한 종이라 할 것이요. 이 시간 후로 여러분이 갚을 빚은 없소.”

 그는 문갑에서 빚 문서들을 꺼내 보는 앞에서 불태워 없앴다. 행여나 빚 독촉을 받는 것인 아닌가, 두려운 마음으로 왔던 마을 사람들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곤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요즘 없는 빚도 있다고 우겨서 남의 돈을 빼앗는 세상인데 어찌하여 예수교 하는 사람은 자기 돈까지 버려 남을 도우니 참 갸륵한 일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홍의 마을의 복음화는 급속하게 이루어졌다. 1900년 4월에 일어난 일이었다.

 거기서 끝난 것은 아니다. 종순일은 ‘부자 청년’에 대한 말씀(마태 19:16-30)을 읽은 후 자기 재산을 모두 처분하여 마을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남은 것은 교회에 기부하였다. 그리고는 부인과 함께 고향을 떠나 전도 길에 나섰다. 종순일은 전대도, 식량 주머니도 차지 않은 ‘가난한 전도자’가 되어 남이 가지 않는 ‘땅 끝’(행 1:7)을 찾아 전도하였다. 아직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강화 남부 길상면으로 가서 전도한 결과 길직, 길촌, 온수, 선두, 넙성, 덕진 등지에 교회가 설립되었다. 그리고 나서 석모도와 주문도, 영종도 같이 교통이 불편한 섬들을 찾아다니며 전도하고 목회하였다.

      

재현된 빚 탕감 잔치

종순일은 1917년 감리교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강화 남쪽 주문도 진촌교회(현 서도중앙교회)에 부임했다.
주문도에는 1893년 성공회 신부가 와서 복음을 처음 전했고 1902년 김근영 전도사가 와서 감리교회를 설립했는데, 주문도를 호령하던 ‘밀양 박씨 충헌공파’ 집안의 박두병 ․ 박순병 형제가 교회 주역으로 활동하였다.

그런 진촌교회에 박두병 ․ 박순병과 같은 집안사람으로 아버지가 박두병에게 ‘2천원’(현 시가로 1억 원 정도) 빚을 진 채 별세하여 그 빚을 고스란히 유산으로 물려받은 가난한 교인이 있었다. 그는 아버지 빚을 갚기 위해 8년 동안 쓸 것을 쓰지 않고, 먹을 것을 먹지 않고 절약하여 16원을 모았으니 그런 식으로 하면 평생 가도 갚을 수 없을 것은 분명했다. 그가 하루는 교회 목사와 박두병 ․ 박순병을 비롯한 박씨 문중 교인들을 집으로 초청하였다.

 “여러 어르신, 아버님께서 지신 빚을 갚기 위해 8년 동안 애써 모았으나 16원 밖에 모으지 못했습니다. 이런 식이라면 제가 죽기 전에 빚을 다 갚지 못하게 될뿐더러 빚 때문에 도무지 제 맘이 편치 못하여 기도도 할 수 없으니 어찌 하면 좋습니까? 여러 어르신의 처분을 따르겠습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침묵을 깬 것은 종순일 목사였다. 그는 성경을 펴서 마태복음 18장 20절 이하 말씀을 읽고 나서 ‘두 세 사람이 마음을 합하여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것’과 ‘1만 달란트 빚 탕감 받고도 1백 데나리온 빚을 탕감해 주지 않은 신하가 받은 형벌’에 대해 이야기 해 주었다.

 그리고 다시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침묵을 깨고 동생 박순병이 입을 열었다.

 “형님, 오늘 이 자리에서 이 문제가 난 것도 하나님의 뜻인 듯 합니다. 형님은 그 돈을 받지 않아도 사는데 지장이 없지 않습니까? 받아야겠다는 형님 마음과 갚아야 된다는 저 사람의 근심이 서로 다르니 어찌 합심하여 기도가 되겠습니까? 기도 할 때 서로 거리낌이 없어야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시지 않겠습니까?”

 박두병이 무릎을 치며 대답했다.

 “그럼세. 그렇게 함세. 자네 부친이 내게 진 빚은 아니 갚아도 되네.”

 박순병이 다시 이어 받았다.

 “형님이 2천원 빚을 탕감해 주었으니 저 사람 부친이 내게 진 빚 60원을 어찌 받겠소? 나도 그 빚을 탕감해 주렵니다.”

 아버지 빚을 물려받았던 가난한 교인은 물론이고 그 자리에 있던 마을 사람들 모두 감동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주문도 섬사람들이 교회를 보는 눈이 달라졌다. 오래지 않아 당시 섬 주민 181호 가운데 134호가 교회에 나오게 되었으니 전 주민의 75%가 교인이 되는 놀라운 결과를 얻게 된 것이다. 지금도 면소재지인 주문도가 ‘술집과 다방이 없는’ 성역(聖域)으로 남게 된 데는 이러한 감동적인 복음 역사가 크게 작용하였다.

 이런 감동의 연극을 연출한 장본인은 종순일 목사였다. 그는 17년 전 고향(홍의)에서 했던 것과 똑같은 연극을 이제 목회자가 되어 주문도에서 재현한 것이다. 그 때 ‘빚잔치’ 주연배우였던 그가 지금 같은 내용의 ‘빚잔치’ 연극의 연출자가 되었다. 17년 전의 감동이 장소만 바꾸어 그대로 재현된 셈이다. 은혜는 은혜를 낳는 법이다. 그런 그에게 ‘성자’ 목사 칭호가 붙여진 것은 당연하다.

 부요한 양반 집에서 태어났으나 예수를 믿으면서 이름을 바꾸고, 마을 빚을 탕감해 주고,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가난한 전도자가 되어 ‘땅 끝’을 찾아 복음을 전하는데 일생을 바친 종순일 목사는 1926년 목회 일선에서 은퇴한 후 주문도에서 조용한 말년을 보내다 별세하였다.


성경에 이름이 바뀐 사람이 종종 있습니다. 

야곱이 대표적이지요. 

'발뒤꿈치를 잡는다'는 의미의 폐쇄적이고 부정적인 호칭에서 '하나님의 승리를 담보한 자'라는 의미의 이스라엘로 바뀝니다. 

시몬이 베드로가 되고, 요셉이 바나바로, 사울이 바울로 바뀝니다. 

단지 호칭만 바뀌지 않고 그들의 삶 자체가 이름에 걸맞게 바뀌었음은 성경이 증언하는 사실입니다.

한국 개신교 초기 역사에도 그렇게 이름을 바꾼 사람들이 있습니다. 

1890년대 후반, 강화도 북단 홍의 마을이라는 곳에 복음이 들어왔습니다. 

마을 훈장으로 있던 박능일이란 분이 가장 먼저 복음을 받아들여 서당을 예배당으로 바꾸어 교회를 시작했습니다. 

훈장님이 그러니까 마을 사람들도 훈장님 말씀에 따르자 하며 예수를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세례를 받으며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훈장님 말씀이, "우리가 예수 믿고 교인된 것은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새로 태어난 아기에게 이름을 지어 주듯 거듭난 우리가 새 이름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모두 이름을 바꾸기로 했습니다. 

비록 집안은 다르지만 한날 한시에 함께 세례를 받아 한 형제가 되었고, 또 그 마을에서도 처음 믿은 사람들이니 모두 한 '일'(一) 자를 돌림자로 해서 이름을 바꾸자고 했습니다. 

성은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니 바꿀 수 없고 마지막 자만 한 '일' (一) 자로 통일하기로 했습니다. 

가운데 자는 각자 정하고요.

그래서 믿을 '신', 사랑 '애', 능력 '능', 은혜 '은', 은혜 '혜', 충성 '충', 거룩할 '성', 바랄 '희', 받들 '봉', 착할 '순', 하늘 '천' 등. 

이런 글자들을 적은 쪽지를 주머니에 넣고 함께 기도한 후 한 사람씩 주머니에서 꺼냈습니다. 

제비뽑기입니다. 

훈장님이 먼저 뽑았는데, '능' 자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박능일이 되었고, '신' 자가 뽑힌 사람은 신일, '순' 자가 뽑힌 사람은 순일, '애' 자가 뽑힌 사람은 애일, '천' 자가 뽑힌 사람은 천일 등. 

그래서 홍의교회 역사에 나오는 초기 교인들의 이름은 모두 끝이 '일' 자로 끝납니다. 

박능일, 권신일, 권인일, 권문일, 권천일, 권혁일, 권혜일, 김경일, 김부일, 종순일, 주광일, 그리고 장양일 등.

이 분들은 이름만 바뀐 것이 아니라 삶 자체도 바뀌었습니다. 

종순일이라는 교인은 그 마을에서 가장 큰 부자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그에게서 돈을 빌려다 쓰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18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비유 말씀을 읽게 되었습니다. 

임금에게 1만 달란트 빚진 신하가 그 빚을 탕감 받고 나가다가 자기에게 1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만나 그의 빚을 탕감해 주지 않고 옥에 가두었는데, 그 사실을 알게 된 임금이 화를 내며 그를 잡아 다시 옥에 가두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마을 부자 종순일 성도가 이 말씀을 읽고 며칠 동안 기도하며 고민했습니다. 

그러다 주일 오후 예배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는 자기에게 돈 빌려간 사람들을 모두 불러들였습니다. 

불안한 마음으로 떨고 있는 사람들 앞에 종순일 성도가 섰습니다. 

믿지 않는 그들에게 마태복음 18장을 들려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 이 말씀에 나오는 악한 종이 바로 나외다. 내가 주님의 은혜로 죄사함을 받은 것이 1만 달란트 빚 탕감 받은 것보다 더 크거늘, 내가 여러분에게 돈을 빌려 주고 그 돈을 받으려 하는 것이 1백 데나리온 빚을 탕감해 주지 못한 것보다 더 악한 짓이오. 그러다 내가 천국에 가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오늘 부로 여러분들에게 빌려 준 돈은 없는 것으로 하겠소."

그리고 빚 문서를 꺼내 모두 보는 앞에서 불살랐습니다. 

동석하고 있던 선교사에게 증인이 되어 달라고 부탁까지 하면서요. 

그 사람들 모두 그날 교인이 된 것은 말할 것 없고, 마을 전체가 거의 믿게 되었습니다.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종순일은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는 마태복음 19장 21절 말씀을 읽고 재산을 모두 처분해 교회에 바쳤습니다. 

그 돈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교회 묘지를 구입하게 했습니다. 

또 얼마 있다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각 지방과 고을에 보내셨다는 말씀이 적힌 누가복음 10장 1절을 읽고 아내와 함께 괴나리봇짐을 하나 메고 강화도 남쪽 길상면으로 전도 여행을 떠나고, 사도행전 1장 8절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주님의 마지막 명령을 읽고 강화도 섬 각지로 다니며 복음 전하고, 나중에는 주문, 옹진 등 서해안 외딴 섬들을 돌며 십 여개 교회를 개척하고 평생 가난한 복음 전도자로 살았습니다.

새사람 종순일 성도입니다.

종순일 목사님은 2남 1녀을 두었고 장녀 종보희(평양신학교 졸업) 장남 종명원 차남 종명준이었다.
종명준과 그의 부인(인천 창녕교회의 반정순 권사였음)은 1남 6녀를 두었고 자녀들 모두 믿음 생활을 잘 하고 있으며 
장녀 종광순은 현재 필라델피아 새한장로교회를 담임하는 고택원 목사의 사모이다.
고목사의 장녀(정한나)와 사위(정피터)는 둘다 Main Line Health Care의 내과의사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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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 기도에 관한 연구 / 최세창 목사

(풍성교회, 인천여신, 기독교방송 신학 강좌 강사)

Ⅰ. 시작하는 말

신앙 생활에 있어서 많은 문제가 있는데, 그 중 하나로 '서원'을 들 수 있다.
서원이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모르면서 너무 쉽게 서원하고, 서원한 것을 지키지 못해서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심지어 서원의 중압감에 못 이겨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도 보게 된다.

이러한 비극적인 현상을 염두에 두고서, 서원에 관한 성경적 교훈을 고찰하여 서원의 참 의미를 제시함으로써 서원의 오용 또는 남용 그리고 그로 인한 비극을 막고자 한다.

Ⅱ. 서원의 정의

서원이란 히브리어로 "이싸르" 또는 "네데르"이며, 헬라어로는 "유케"이다.
위의 용어들은 본래 '말해진 말', '약속', '입에서 나가는 것'을 시사하였다.
일반적으로 "이싸르"는 인생의 향락을 금하는 것, 즉 야웨의 영광을 위해 자기 부정의 생활을 하는 서원을 가리키는 것
"네데르"는 서원자가 무엇인가를, 심지어 자신까지도 하나님께 바치는 서원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와 같은 서원은 옛적부터 있었는데, 하나님 앞에 하는 자발적 언약(맹세)이었다.

서원의 기본적인 관념은 하나님과의 평화(화해)를 위한 것으로, 어떤 일을 실행할 것을 하나님께 약속하는 것, 또는 금욕 생활을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 등이다.

Ⅲ. 서원의 종류

1. 약속

집을 도망쳐 나온 야곱은,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계셔서 여행길을 보호해 주시고, 의식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고향 집으로 편안히 돌아가게 해 주시면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삼아 그 곳에 하나님의 전을 봉헌하고 십일조를 바치겠다고 벧엘에서 약속하였다(창 28:20-22). 이 서원은 구약에 나타난 서원 중에 매우 오래 된 것이다.

압살롬은 아람 그술에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자기를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하시면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약속하였다(삼하 15:7). 아들을 얻기 위해 기도한 한나는, 아들을 주시면 그를 성전에 바치겠다고 약속하였다(삼상 1:11). 요나와 같은 배를 타고 있던 사람들은 안전을 바라면서 서원하였다(욘 1:16). 시편 기자도 "하나님이여 내 서원을 들으시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의 얻을 기업을 내게 주셨나이다"(61:5. 참조:61:6-7)라고 하였다.

특히, 서원으로 인한 처절한 비극은 사사인 입다 때문에 발생하였다. 그는 암몬과의 전쟁에서 이기게 해 주시면,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자기 집 문에서 나와 영접하는 자를 산 제물로 바치겠다고 약속했는데, 불행히도 그의 서원대로 자기의 사랑하는 딸을 희생시킬 수밖에 없었다(삿 11:30-31).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약속으로서의 서원이란, 대체로 심각한 위기에 처한 인간이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목적으로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이기적 목적을 조건 삼는 헌신인 것이다. 따라서, 이 서원에는 비극적인 결과가 따를 수도 있다.

2. 비이기적 헌신

다윗은 법궤가 예루살렘에 세워지기까지 집에도 가지 않고, 침상에도 오르지 않고, 잠도 자지 않겠다고 서원함으로써 새 수도 예루살렘에 법궤를 모셔 하나님의 법과 인간의 법을 일치시키려는 자신의 계획을 추진하고자 하였다(시 132:2-5).

바울이 서원한 것이 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다(행 18:18)고 했는데, 그의 신앙 인격과 철저한 사명감을 미루어 비이기적인 헌신의 약속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서원은 순수한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 하나님께 대한 헌신을 나타내는 것이다.

3. 절제

가나안 사람 곧 아랏의 왕이 이스라엘을 쳐서 그 중 몇 사람을 포로로 잡은 일이 있었다. 그때에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아랏을 자기들의 손에 붙이시면, 그들과 그들의 성읍을 다 멸하겠다고 서원하였다. 즉, 전리품이나 승전의 영예를 취하지 않겠다고 서원한 것이다(민 21:1-3). 사울과 그의 백성들도 원수인 블레셋에게 복수하는 때까지 아무 음식이든지 먹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하였다(삼상 14:24).

신약의 경우,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기로 맹세한 사십 여 명의 유대인들에 관한 기록이 있다(행 23:21). 아마도 이러한 서원은 지켜질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고찰해 온 세 종류의 서원은 모두 기도의 강화를 수반하거나, 그러한 의도로 행해진 것이 분명하다.

4. 나실인의 서원

서원 중에서 매우 특별한 것으로 나실인의 서원이 있다.
남자나 여자가 나실인의 서원을 하고,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면 그 기간 동안에는 다음과 같은 규례를 준수해야만 한다.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하고, 포도주의 초나 독주의 초나 포도즙도 마시지 말아야 하며, 생포도나 건포도도 먹지 말아야 한다.
심지어 포도나무 소산은 씨나 껍질도 먹지 말아야 한다. 머리털을 깎지 말아야 하고, 시체라면 부모 형제 자매라도 가까이하지 말아야 한다. 만일 누가 갑자기 그 곁에서 죽어서 스스로 구별한 자의 머리를 더럽히게 되면, 그 몸을 정결케 하는 날 곧 제칠 일에 머리를 밀어야 한다. 그리고 제팔 일에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 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가지고 회막 문에 와서 제사장에게 주어야 하고, 제사장은 그 하나를 속죄 제물로, 하나를 번제물로 드려서 그의 시체로 인한 죄를 속하고, 또 그는 당일에 그의 머리를 성결케 해야 한다. 그 뿐만 아니라, 자기 모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릴 날을 새로 정하고, 일년 된 수양을 가져다가 속건제를 드려야 한다. 그 까닭은 지나간 기간이 무효가 되기 때문이다.

몸을 구별한 날이 차게 되면, 그 사람을 회막 문으로 데리고 가서 그로 하여금 번제물로 일년 된 흠 없는 수양 한 마리와 속죄 제물로 일년 된 흠 없는 어린 암양 한 마리와 화목 제물로 흠 없는 수양 한 마리와 무교병 한 광주리와 고운 가루에 기름 섞은 과자들과 기름 바른 무교전병들과 그 소제물과 전제물을 드리도록 해야 한다.

제사장은 그것들을 여호와 앞에 가져다가 속죄제와 번제를 드리고 화목 제물로 수양에 무교병 한 광주리를 아울러 여호와께 드리고 그 소제를 전제를 드려야 한다.

자기 몸을 구별한 나실인은 회막 문에서 그 머리털을 밀고, 그것을 화목 제물 밑에 있는 불에 두어야 한다. 자기 몸을 구별한 나실인이 그 머리털을 민 후에, 제사장이 삶은 수양의 어깨와 광주리 속에 있는 무교병 하나와 무교전병 하나를 취하여 나실인의 두 손에 두고 여호와 앞에 요제로 흔들 것이며, 그것과 흔든 가슴과 든 넓적다리는 성물이므로 다 제사장에게 돌려야 한다. 그 후에야 비로소 나실인이 포도주를 마실 수 있었다(민 6:1-20).

위에 언급한 것처럼, 나실인이란 하나님께 헌신을 표시하는 금욕적인 사람이다. 특이한 것은 나실인이 될 아이들을 낳을 때까지는 어머니들도 나실인의 규약을 지켜야 했다는 것이다.

나실인의 계급에는 자의로 된 자와 부모의 뜻으로 된 자가 있었다.

나실인은 신약 시대에도 계속 나타났다. 세례 요한은 나면서(눅 1:15) 성별되었으나, 정작 나실인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안나가 나실이이었던 것 같다(눅 2:36).

Ⅳ. 서원 예물

일반적으로 서원의 경우에는 예물을 바쳐야 하였다(레 22:18, 민 29:39, 신 12:6, 삼상 1:21). 서원에 사용되는 모든 제물은 흠이 있어서는 안 되었다. 흠 있는 제물을 바칠 경우에는 하나님께 열납되지 못하는 것은 물론(레 22:21-23), 바친 서원자는 저주를 받게 된다(말 1:14). 이와 관련하여 창기의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하나님께 가증한 것이므로 서원하는 일로 바칠 수 없었다(신 23:18). 이러한 규례는 서원의 순결성과 거룩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특이한 것으로 사람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서원하는 일이 있다. 이 경우에는 남녀, 연령, 재산의 다소에 따라 돈으로 환산하여 바치게 하였다.(레 27:1-8).

서원한 화목제의 제물은 2일 이내에 먹어야 하고, 남은 것은 제 3일에 불살라 버려야 했다(레 6:16-17). 잠언 기자는 "내가 화목제를 드려서 서원한 것을 오늘날 갚았노라"(7:14)라고 하였다.

Ⅴ. 서원 이행의 문제

하나님께 서원한 것은 신성한 것이므로 반드시 이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민 30:2, 시 22:25, 50:14, 61:5, 65:1, 116:14, 나 1:15 등). 매일이라도 서원은 반드시 이행되어야 한다(시 61:7-8). 또, 서원자에게 해로울지라도 변치 않고 지켜야 하는 것이다(시 15:4).

서원을 이행함에 있어서 더딘 것은 분명히 죄라고 했으므로(신 23:2-23), 서원을 더디 갚는 인간은 우매자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전 5:4).

그러나, 서원 이행에 있어서 예외가 있다. 부모의 슬하에 있는 처녀가 서원했을 때에 아버지가 허락하지 않으면, 그 서원은 성립되지 않으므로 이행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민 30:3-5). 아내가 서원했을 때에도 남편이 허락하지 않으면 그 서원 역시 성립되지 않으므로 이행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민 30:6-8, 10-12).

그런데, 위의 두 가지 경우에 딸 또는 아내의 서원을 듣고도 아버지나 남편이 아무 말이 없으면, 그 서원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다(민 30:4, 7). 또, 만일 남편이 아내의 서원을 들은 지 얼마 후에 그 서원을 무효케 하면, 그가 아내의 죄를 담당하게 된다(민 30:15).

같은 여자라 할지라도 과부나 이혼녀는 서원 이행에 있어서 예외가 없다(민 30:9). 애굽 백성들도 여호와를 경배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서원을 하고 그 서원들을 이행해야 한다(사 19:21). 마찬가지로, 배교한 이스라엘인들은 하늘의 여신에게 제물을 드리고, 그들이 서원한 것을 이행해야 한다(렘 44:25).

결국 서원은 누구나가 다 반드시 지켜야 하지만, 딸이나 아내의 경우에는 아버지나 남편의 허락이 없으면 무효가 되는 것이다.

Ⅵ. 서원에 대한 경계

유대인들에게는 일상적인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서원이기는 하지만, 그다지 장려된 것 같지는 않다.
잠언 기자는 "함부로 이 물건을 거룩하다 하여 서원하고 그 후에 살피면 그것이 그물이 되느니라"(잠 20:25)라고 하였고, 전도서 기자는 "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보다 서원하지 아니하는 것이 나으니 네 입으로 네 육체를 범죄케 말라 사자 앞에서 내가 서원한 것이 실수라고 말하지 말라 어찌 하나님으로 네 말소리를 진노하사 네 손으로 한 것을 멸하시게 하랴"(5:5-6)라고 하였다.

사실상 유한한 인간으로서, 그것도 다급한 일 또는 위기의 상황에서 하나님께 서원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많은 문제를 내포할 수밖에 없다. 설사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서원이라 할지라도, 모든 것을 포괄적으로 그리고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인정하시겠는가 하는 문제가 따르게 마련이다. 오히려 서원자 자신에게 해로울 경우도 있고, 심지어 입다의 경우처럼 자식을 죽여야 하는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서원으로 인한 문제가 많이 나타나고 있다. 그 유형은 성경에 나타난 유형과 거의 유사하다. 어떤 면에서는, 이 시대에 서원이 더욱 남발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축복을 앞당기기 위해서, 위기를 속히 모면하기 위해서, 그리고 목사 또는 사모가 되기 위해서, 혹은 목사나 사모를 만들기 위해서 등등 이루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이다. 어떤 이들은 남에게 서원을 유도하거나 강권하기도한다.

실제로 서원에 얽매여 전전긍긍하는 사람들이 결코 적지 않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서원을 하지 않아도 이루어 주실 것이므로 서원이란 가급적 하지 않는 것이 좋고, 부득이한 경우에는 아주 신중하게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어차피 인생을 주관하시는 이는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인생의 모든 때와 기한도 하나님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고, 또 그렇게 되어야 참된 의미에서 우리에게 유익한 것이다. 가장 바람직한 신앙 자세란 자신 혹은 자식의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발견하고 그 뜻과 계획을 좇는 것이다. 잠언 기자는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16:9)라고 하였다.

Ⅶ. 맺음말

서원이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기 부정의 생활을 약속하는 것이며, 무엇인가를, 심지어 자기 생명까지도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약속이다.

이스라엘인들의 서원은 약속과 비 이기적 헌신, 그리고 절제로 구분할 수 있다.
특이한 것으로는, 하나님께 전적 헌신을 표시하는 나실인의 서원이 있다.

일반적으로 서원자는 흠이 없는 예물을 하나님께 바쳤고, 사람으로 바칠 경우에는 돈으로 환산하여 바쳤다.

모든 서원은 손해가 되더라도 반드시 이행해야 했으며, 더디게 이행하는 것은 죄로 간주되었다.
단, 딸이나 아내의 서원은 아버지나 남편이 허락하지 않으면 무효가 되었다.

대체로 서원은 다급한 때나 위기의 상황 또는 이기적인 목적 달성 등을 위해서 하는 것이므로 많은 문제를 내포하게 되고, 실제로 커다란 피해나 엄청난 비극을 초래할 수 있다.
서원 이행의 어려움 때문에, 그리고 부모가 자식을 위해 서원한 것이 그 자식의 적성 및 소질 등에 맞지 않아서 매일 매일을 괴로워하며 사는 예도 적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함부로 서원하지 말아야 하며, 부득이한 경우에는 신중하게 하나님의 뜻을 고찰하고, 자기 자신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해 심사숙고한 후에 지킬 수 있는 서원을 해야 할 것이다.
이 점은 다른 사람을 위해 서원할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차라리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묵묵히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훨씬 더 바람직한 신앙 생활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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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수께끼 임신처럼 서원을 한 것도 모르고 살아갈 수 있다!



메스꺼움, 구토 등 흔하다는 입덧도 없었다. 평소처럼 생리도 거르지 않고 했다. 갑자기 배가 아파 화장실에 갔다가 아기를 낳았다. 그는 출산 직전까지 임신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주장했다. 일하고 돌아온 남편은 경악했다. 인도네시아에서 이른바 '수수께끼 임신(cryptic pregnancy)' 사건이 또 발생했다.

17일 트리분뉴스에 따르면 서부자바주(州) 팡안다란 지역의 치히등 마을에 사는 루스미아(33)씨가 9일 오전 11시쯤 화장실에서 혼자 아기를 낳았다. 그는 "복통을 느껴 화장실에 볼일을 보러 갔다가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아기를 낳았다"며 "임신 중에 느꼈던 증상이나 신체적 변화가 전혀 없었고 생리도 계속해 임신 사실을 몰랐다"고 현지 매체에 말했다.

건설 노동자로 일하는 남편 다르시토(39)씨는 "오후에 퇴근하고 집에 돌아왔는데 갓난아기 울음소리가 들려 깜짝 놀랐다"며 "열 살인 첫째와 두 살인 둘째 아이를 임신했을 때랑 너무 차이가 나서 아내가 셋째 아이를 임신한 사실을 몰랐다"고 했다. 그는 "첫째 아들이 출산 뒤처리를 도왔고 뒤늦게 산파가 와서 아기 상태를 확인했다"고 덧붙였다.

산파는 "아기는 몸무게 3㎏인 남아로 정상 상태였다"고 말했다. 루스미아씨 부부는 "알함둘릴라('신에게 감사하다'는 아랍어 표현), 모두 건강하고 똑똑한 자녀로 자라길 바란다"고 했다.

지난해 7월 임신 사실을 안 지 1시간 만에 출산한 헤니씨와 아기. 드틱닷컴 캡처

비슷한 사건은 지난해 7월에도 있었다. 서부자바주 타식말라야 한 마을에 사는 헤니 누라이니(30)씨는 배가 부은 것을 느낀 지 1시간 만에 마을 산파의 도움으로 몸무게 3.4㎏, 키 50㎝의 남자 아기를 낳았다. 루스미아씨처럼 세 번째 출산이었다. 헤니씨는 "출산 1시간 전쯤 오른쪽 배가 갑자기 부풀어 오르면서 출산을 앞둔 것처럼 통증을 느껴 산파를 불렀다"고 했다.

지역 산파협회는 두 사례처럼 임부가 임신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증상을 의학적으로 '수수께끼 임신이'라 부른다고 했다. 임부 1만 명에 한 명꼴로 발생한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산파협회 관계자는 "임신 과정은 정상적으로 진행되지만 임부가 인지하지 못하는 수수께끼 임신은 보통 임부가 성폭행 등 충격으로 인한 정서 장애와 정신 장애를 앓을 때 발생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루스미아씨도, 헤니씨도 두 가지 장애를 경험한 바 없다는 게 가족의 얘기다.

2019년 영국에서도 복통을 느낀 지 1시간 만에 출산한 수수께끼 임신 여성이 있었다.

자카르타= 고찬유 특파원 jutda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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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란목사(1966. 8. 29-)

이름 :  주경란.
생년월일:  1966. 8. 29.

북한의 함경북도 어랑군에서 비행기 조종사인 부친과 교사출신이었던 모친 사이에서  2남 3녀 중 둘째로 태어나
어린시절과 학창시절을 마쳤습니다. 

1982년부터 1985년8월까지 평안북도(중학교시절에  전근하신 부친을 따라 평안북도 구성시로 이사함)
선천교원대학 교원과를 졸업한 후
평안북도  구성시 대안중학교에서 4년간의 교사생활 후
개인사정으로 평북 신의주시로 이사해 1988년부터 2002년경까지 신의주에  주거,
평안북도 품질감독총국 산하 신발공장감독소  감독검사로 근무하였습니다.

건강 문제로 2002년 직장을 자퇴한 후 
2003년에 두차례의 결핵을 앓으면서 각혈로 죽을 고비를 겪었지만 다행히도 치료를 받아 병을 고쳤지만
더 이상 북한땅에서 살아남을 길이  막막하여
2004년 11월 초에 브로커의 도움을 받아 탈북하였습니다.

2008년 5월 한국에 입국할 때까지 중국에서 북송의 위험을 피해 이 곳 저 곳  숨어다닐 때 교회로 가게 되었습니다.
비참한 처지를 비관하던 저는 찬양으로 은혜를 받고 많은 눈물을 흘렸고
탈북민 그리스찬을 비롯한 여러 성도님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북송을 피하면서 약 3년 반동안 중국의 이곳 저곳을 전전했습니다.

옮기는 곳들에서 주로 조선족교회나 한국목사가 세운 한인교회에 출석하면서 보호 및 도움을 받으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2007년 2월에 위하이에 있는 한인교회서 선교사로 파송되어 섬기시던 강대구목사(장로교단)님께 세례를 받았고
마음속에서  올라오는 하나님의 첫번째 음성으로 롬 10 :  9 - 10절을 듣는 등 하나님의 일하심을 체험했습니다.

도피생활로 건강이 다시 악화되면서 피폐해지기 시작하여   이제는 고향에 돌아가 죽어야겠나보다고 생각되는 순간에 
어느 형제님 소개로 브로커 분을 만나게 되어 한국행을 결정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은혜로 기적같이 한국행에 성공하여 2008년 5월 한국에 무사히 입국하게 되었습니다.

입국 후 2008년부터 2011년까지 북한인권 관련 인터넷언론매체들에서 기자생활을 했고
2011  -2014년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신학공부를 하기전까지
통일부 통일교육원 강사로 활동하면서 "통일신문"에 북한과 통일 관련 글을 게재했습니다.

한국 입국 후 정착으로 바쁜 시간을 보내면서
새터민회관이란 명칭으로 운영되던 탈북민지원선교단체에  출입하다가 

2011년 7월에 여의도순복음교회로 나간 지 두주일만에 불을 받아 결핵후유증과 정착스트레스로 인한 신경통 등 병이 깨끗이 치유되었으며 

2011년 12월부터  2014년 초까지 고현교회(전북 익산 모현동에 위치)에서 신앙생활을 마치고 
2014년 3월에 하나님의 부르심으로(설교자와 통일의 사명자)
서울에 올라와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섬기는 한편 신학공부를 시작하였습니다.

신학교 4학년때 믿음으로 입국 후 모아두었던 재정을 모두 드려  "예수사랑교회"(서울시 은평구 갈현동, 서대문순복음총회 서부지방회 소속)를 개척하여 헌당예배를 드렸으며 현재 "생명나무교회/라마나욧기도원"[장로회 웨신총회(인천측) 남서울노회 소속]으로 명칭을 바꾸어 계속하여 복음통일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저는 언제든지 통일의 주인되신 주님께서 북한을 열어주시면 기도중에 하나님이  감동주신대로  평양에 주기철목사님 시무하시던 옛 "산정현교회"를 다시 세우고 북한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현재 맡겨진 사역의 자리에서 충성하고 있습니다.

간단한 신앙경력(한국입국 후).

2011. 6  -  2011. 11월 여의도순복음교회 관악교구 성도.
2011  -  2014년 초. 익산고현교회  서리집사.
2014  -  2016. 3. 여의도순복음교회.
2016. 6. 4  -  현재 생명나무교회 담임(전 예수사랑교회).

신학과정이 빠졌습니다.
2014. 9   -  2015. 12. 영산순복음신학교.
2016. 3  -  2017. 7. 대조동순복음신학교 졸업.
2017. 3  -  2017. 12. 대조동순복음신학대학원.
2018년 -2019. 2월 제자총회신학연구원(장로교단 소속) 졸업( 촐석불참일수가 남아있음).


1. 예금주 이름 : 주경란.
생년월일 : 1966. 8. 29.
교회주소 :  경기도 고양시 일산서구 일청로 4번지 3층 생명나무교회.
전화번호 :  01084590829.

2. 계좌 :  국민 024801  - 04  - 416329.


[李勝赫(Victor S Lee)] [오전 3:55] 주 목사님!
교회 현황을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1. 현재 출석 교인 수
2. 교인 현황(탈북인 또는 남한인)
3. 교회 주소
4. 교회 예배 동영상 자료
[주경란목사(부천)] [오전 4:54] ㅣ. 7명.
2. 북 3명, 남 4명.
3.  경기도 고양시 일산서구 일청로 4번지 3층 생명나무교회/라마나욧기도원.

[주경란목사(부천)] [오전 4:55] 2021. 12. 3일 금요예배영상입니다.
https://m.facebook.com/story.php?story_fbid=315184620265187&id=100015154869377&sfnsn=mo
[李勝赫(Victor S Lee)] [오전 5:03] 주목사님!
2021년 성탄주일을 맞이하여
탈북인 목회자가 섬기는 교회를
돕기로 결정하고 기도합니다.
저희가 매월 후원하는 사역은

1. 매월 북한어 성경 6권) $90
2. 북한 결핵 환자 매월 생활비 지원 $270

이번 성탄주일에는 탈북인 돕기로 결정하고
특히 탈북인 목회자를 도우려고 합니다.
결정이 되는대로 연락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끝까지
승리하시기를 기원합니다.
 
2021년 12월 12일 일요일
[李勝赫(Victor S Lee)] [오전 10:04] https://blog.naver.com/b2ige/222592871698
[주경란목사(부천)] [오전 10:17] 저는 목회자이지만 제게 그같은 일이 생긴다면 너무 힘들것  같습니다.
북에 있는 제 형제들이  안좋은 일을 당했는데 기도중에 하나님이 이 일은  저와 제 가족에 대한 시기질투로 인한 결과라고 말씀해주십니다.

사실  저 혼자 겪는 괴롬과 고통은 참을수 있지만  가족에게까지 손을 댄다니 치가 떨려  며칠동안 너무 괴로윘습니다.

그리고 원수갚는것을 내게 맡기라고 하시는  주님 말씀대로 원수  갚는것을 하나님께 올려드리고 저는 그냥 용서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가족에게 미안하고 힘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  어린 자매님은 참으로 예수님의 용서를 그대로 실천하시는 아름다운 그리스찬입니다.
[李勝赫(Victor S Lee)] [오전 10:19] 주목사님!
북한 고향이 어디인가요?
저희 부모님은 원산에서 내려오셨지요.
[주경란목사(부천)] [오전 10:19] 너희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면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죄를 용서해주고 너희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주경란목사(부천)] [오전 10:20] 네. 제 고향은 함북 어랑입니다
[주경란목사(부천)] [오전 10:20] 형제들  3형제가 모두 호위국이었는데 모두 변을 당했습니다
[주경란목사(부천)] [오전 10:21] 어랑이란 동네가 있답니다
[주경란목사(부천)] [오전 10:21] 주을 옆입니다. 바다옆이고요
[주경란목사(부천)] [오전 10:22] 어랑군이라고
[주경란목사(부천)] [오전 10:23] 아름다운 동해바다가 소도시입니다
[주경란목사(부천)] [오전 10:24] 어랑비행장이 있습니다
[주경란목사(부천)] [오전 10:25] 저희 교회는 주로 목회자들이 와서 훈련하곤 합니다.
[李勝赫(Victor S Lee)] [오전 10:25] 사진
[李勝赫(Victor S Lee)] [오전 10:26] 어랑 읍
[李勝赫(Victor S Lee)] [오전 10:26]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함경 북도
[주경란목사(부천)] [오전 10:26] 배와 추리가 맛있기로 유명합니다
[주경란목사(부천)] [오전 10:28] 비행장도 있죠. 저는 아버지가 어랑 비행장에서 비행기조종사로 근무하시기에 어랑서 어린시절을 보냈습니다
[주경란목사(부천)] [오전 10:29] 중학교 때 평북 구성  운양비행장으로 부친께서 전근하셔서 그때부터 평 안도서 살았습니다
[주경란목사(부천)] [오전 11:25] 이름 :  주경란.
생년월일:  1966. 8. 29.

북한의 함경북도 어랑군에서 비행기조종사인 부친과 교사출신이었던 모친 사이에서  2남 3녀 중 둘째로 태어나 어린시절과 학창시절을 마쳤습니다.  1982년부터 1985년8월까지 평안북도(중학교시절에  전근하신 부친을 따라 평안북도 구성시로 이사함) 선천교원대학 교원과를 졸업한 후 평안북도  구성시 대안중학교에서 4년간의 교사생활 후 개인사정으로 평북 신의주시로 이사해 1988년부터 2002년경까지 신의주에  주거, 평안북도 품질감독총국 산하 신발공장감독소  감독검사로 근무하였습니다.

건강 문제로 2002년 직장을 자퇴한 후  2003년에 두차례의 결핵을 앓으면서 각혈로 죽을 고비를 겪었지만 다행히도 치료를 받아 병을 고쳤지만 더 이상 북한땅에서 살아남을 길이  막막하여 2004년 11월 초에 브로커의 도움을 받아 탈북하였습니다.
2008년 5월 한국에 입국할 때까지 중국에서 북송의 위험을 피해 이 곳 저 곳  숨어다닐 때 ...
[주경란목사(부천)] [오전 11:27] 사진
[주경란목사(부천)] [오전 11:32] 사진
[주경란목사(부천)] [오전 11:32] 사진
[주경란목사(부천)] [오전 11:41] https://youtu.be/mqh5xqj56KU
[주경란목사(부천)] [오전 11:41] https://youtu.be/lbJXAsuyEGY
[주경란목사(부천)] [오전 11:57] 신학과정이 빠졌습니다.
2014. 9   -  2015. 12. 영산순복음신학교.
2016. 3  -  2017. 7. 대조동순복음신학교 졸업.
2017. 3  -  2017. 12. 대조동순복음신학대학원.
2018년 -2019. 2월 제자총회신학연구원(장로교단 소속) 졸업( 촐석불참일수가 남아있음).

"작은 자 섬김의 유익"

지난번 성탄절을 맞았을 때 저희 교회는 미국 뉴욕시의 베아사이드에 위치한 파트리스교회(이승혁 원로목사. 황선민 담임목사)로부터 230여만 원에 달하는 후원금을 전달받았습니다.

매 달마다 꾸준히 북한의 결핵환자 돕는 사역과 성경책 보내기를 행하시면서 또 탈북민목회자가 개척한 교회를 돕고 계신다는 이승혁 원로목사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저도 2003년 북한에서 결핵을 앓을 때 누군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보내주었을 약으로 치료받았던 기억을 떠올리게 됩니다.

우리의 작은 선행들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귀한 생명들을 살리고 그들이 영혼구원의 기회를 얻게 한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마 2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가장 작은 자를 섬기는 것이 곧 예수님 자신을 섬기는 것이라고, 이들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이 당부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또 파트리스 교회와 성도님들이 사랑으로 우리 교회를 섬겨주신 것에 감사하면서 2022년 새해부터는 우리 생명나무교회 (라마나욧기도원)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북한의 결핵환자를 섬기는 사역에 적극 동참하고자 합니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야고보서 2  :  17).

2021. 12. 30일
주경란 통일선교사(본지 기자)

출처 : 지저스타임즈 목회자칼럼




하성한묵(하루 성경 한장 묵상) 12 / 11 / 2021(Sat) -


12-11-2021(Sat)

사사기 10:16
자기 가운데서 이방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를 섬기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곤고를 인하여 마음에 근심하시니라.

사사기(Book of Judges)를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반복되는 잘못에 대한 회개가 아니라 반성이란 단계에서 멈추는 것이라고 하겠다.

자아 이미지(Self Image)를 상상하라!
반복되는 잘못을 극복하려면 반복되는 잘못을 극복한 자아 이미지를 상상하며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한다.

1:29:300의 법칙

미국 한 보험회사 직원이었던 H. W. 하인리히는 고객들을 상담하고 그들의 사고를 분석한 결과 1번의 대형 사고가 발생했을 경우 이미 그 전에 유사한 29번의 경미한 사고가 있었고, 주변에서 300번 이상 징후가 감지되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이를 1대 29대 300의 법칙이라 부릅니다.
징후들이 있고 경미한 사고들이 일어난 후에 결국 대형사고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에서도 어느 날 갑자기 무너지는 신앙은 없는 것입니다.
이미 그 전에 여러 가지 징후가 보이고, 소소한 실수들, 알면서도 대수롭지 않게 타협하거나 넘겨버렸던 문제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문제들이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수가 반복되면 큰 실패를 불러올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 27:1-12

다윗은 또 다시 실수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사울을 용서했고, 그 사울이 다윗을 인정하는 말을 하고 물러났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해보니 사울이 자신을 결코 포기할 것 같지 않은 것입니다(1절).
그 생각을 하니 또다시 답답하고 불안해진 것입니다.
계속 말씀드렸지만 불안한 마음과 두려운 마음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불신앙입니다.
다윗의 선택은 또다시 블레셋 사람들의 땅으로 도망하는 것입니다.
사울이 이스라엘 땅에서 자신을 찾다가 찾지 못하면 결국 포기할 것이라는 계산이 들어간 것입니다(1절). 그의 생각이 맞아 떨어진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사울이 더 이상 다윗을 수색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4절). 그러나 우리가 명심할 것은 당장의 상황이 좋다고 내가 가는 길이 꼭 옳은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블레셋 왕 아기스는 다윗을 받아줍니다. 그리고 시글락이라는 성을 주어서 다윗이 머물도록 배려합니다. 아기스는 다윗을 영원히 자신의 부하로 삼을 계획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부음 받은 사람이 원수와 다름없는 블레셋 왕에게 머리를 조아리면서 그의 신하를 자처하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의 반복되었던 이 실수는 결정적인 두 가지 위기를 불러오게 됩니다. 그 위기는 다윗의 삶을 송두리째 뒤바꿔 버릴만한 일들입니다. 다음 장에서 사울에 대한 특별한 이야기를 살펴본 다음에, 다윗이 맞이하게 될 두 가지 위기에 대해서 차례차례 살펴보겠습니다.

적용 : 내가 가지고 있는 약점이 무엇인가?
내가 범하기 쉬운 실수나 잘못은 무엇인가를 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에게 큰 문제나 위기가 온다면 그 약점이나 실수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와 종교다원주의

21세기의 교회가 당면한 큰 문제는 종교 다원주의라고 할 수 있다.

종교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
사회에 공존하는 종교적 믿음의 체계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태도나 원리를 말한다.
절대적인 진리의 배타성보다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전형적인 종교철학이다.

* 절대적인 유일한 진리를 포기하고 다른 종교의 진리와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다.
* 상호 배타적인 진리가 있음을 서로가 인정하는 것이다.


종교 다원포스트 모던니즘의 영향은 점점 더 단 하나의 객관적 진리를 반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는 “오직 예수” “오직 믿음” 의 복음을 과연 유효하게 선언하고 선포된 복음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영향력을 가지고, 그들의 삶과 생활을 바꿀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된다.

이제까지 기독교는 전통적으로 그리스도 혹은 교회 중심적 배타주의를 고수하며 신앙을 이끌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 모든 종교들이 자기 절대성과 적극성을 주장하고 서로 상이한 입장들이 공존하게 됐다.

종교 다원주의란 종교 다원 현상의 문화적 상황 속에서 다원적인 종교들을 동일한 지평선에서 바라보며 다원적 종교들의 궁극적인 것의 실제를 주장하는 종교적, 신학적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종교 다원주의는 기독교라는 종교를 어떤 특수하고 고유한 종교로 바라보지 않고 다양한 여러 종교들 가운데 하나라고 보는데 문제가 있다.

따라서 기독교만이 유일한 종교가 아니라 모든 종교는 나름대로의 진리가 있고 나름대로의 구원의 길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들의 주장은 기독교는 그 여러 종교들 중에 하나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종교 다원주의는 모든 종교가 상대적이며 모든 종교는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기본 명제를 전제로 한다.

기독교 신앙을 가지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믿든, 유교를 믿든, 잘만 믿으면 천국도 가고, 극락도 가는데 굳이 예수를 믿어야 하는가?

모든 종교는 다 같은 것이다.
목적지는 같지만 가는 길이 다를 뿐이라는 이야기와 같은 것이다.

이러한 여러 관점에서 볼 때 종교 다원주의는 하나님의 구원계시가 기독교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에도 구원의 일이 있다는 주장이다. 다원주의를 인정하는 상황에서는 그 어떤 종교도 더는 자기 절대성, 혹은 우월성을 주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종교 다원주의의 기본 입장은 모든 종교들이 제시하는 진리에는 그 나름대로의 타당성이 있을 뿐 아니라 적어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므로 결코 특정 종교의 기준이 타종교를 가늠하는 잣대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종교 다원주의의 기원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들이 있다.

미국 하버드대학의 비교 종교학 교수였던 Wilfred Cantwell Smith(1916~1973)
종교적 다원주의 문제는 교회가 다른 신앙과 정면으로 대결하고 있던 선교 현장의 선교사들과 비교 종교학자들에 의해 제기되었다고 한다.

18, 19세기의 그리스도교 선교 정책은 서구 식민주의와 그 궤를 같이하는 제국주의적 선교 정책이었다.
즉 서구 열강들의 군대가 약소국을 점령하면 선교사가 뒤따라 들어가 그리스도교로 그 지역을 점령하는 방식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서구 식민지 정책이 종식되고 독립국들이 점차 늘어가면서 그리스도교의 정복 선교 정책도 일대 위기를 맞게 됐다.

선교지 일부에서는 선교사들이 타종교와의 대화를 주장하며 타종교를 인정하려는 움직임까지 보이는가 하면 “세계 복음화” 와 같은 그리스도교 선교 가치는 침략적인 제국주의 정신의 산물이라고 비판하며 정통적인 그리스도교의 선교 형태를 반성하기 시작한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또한 신학적 종교 다원주의의 촉발은 에큐메니칼 운동에서 비롯됐다고 말한다.
뉴비긴은 서구 사회에서 다원주의 근원을 유럽의 계몽주의에 의해 부활한 합리주의전토에서 찾고 있다.
전통에서 이성은 진리를 확인하고 방어하는 유일한 도구가 됐다.

다원주의적 관점은 또한 과학적 방법론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이 과학적 방법론은 무엇인가?

인간의 감각에 의해 관찰 대상으로부터 사실들을 얻어내는데 있어서 이성을 수단으로 가정을 세우고 결론을 유출해 내고 계속되는 적용을 통해 그 결론을 시험하고 검증한다는 것이다.

아무튼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유일신 하나님을 믿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온 인류를 구원하시는 구세주임을 믿어야 한다.
다른 종교에는 구원이 있을 수 없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구원이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이제까지 기독교는 전통적으로 그리스도 혹은 교회 중심적 배타주의를 고수하며 신앙을 이끌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제 모든 종교들이 자기 절대성과 궁극성을 주장하고 서로 상이한 입장들이 공존하게 되었다.

종교 다원주의란 종교 다원 현상의 문화적 상황 속에서 다원적인 종교들을 동일한 지평선에서 바라보며 다원적 종교들의 궁극적인 것(the ultimate)의 실제를 주장하는 종교적, 신학적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종교 다원주의는 기독교라는 종교를 어떤 특수하고 고유한 종교로 바라보지 않고 다양한 여러 가지 종교들 가운데 하나라고 본다. 따라서 기독교만이 유일한 종교가 아니라 모든 종교는 나름대로의 길이 있고 나름대로의 구원의 길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들의 주장은 기독교는 그 여러 종교들 중의 하나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종교 다원주의는 모든 종교가 상대적이며 모든 종교는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기본 명제를 전제로 한다. 기독교 신앙을 가지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믿든, 유교를 믿든, 불교를 믿든 잘만 믿으면 천당도 가고, 극락도 가는데 굳이 예수를 믿어야 하는가?, 모든 종교는 다 같은 것이다, 목적지는 같지만 가는 길이 다를 뿐이라는 얘기와 같은 것이다. 이러한 여러 관점에서 볼 때 종교 다원주의는 하나님의 구원 계시가 기독교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에도 있으며, 기독교만이 구원의 유일한 길이 아니라 다른 종교에도 구원의 길이 있다는 주장이다.

다원주의를 인정하는 상황에서는 그 어떤 종교도 더는 자기 절대성, 혹은 우월성을 주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종교 다원주의의 기본 입장은 모든 종교들이 제시하는 진리에는 그 나름대로의 타당성이 있을 뿐 아니라 적어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므로 결코 특정 종교의 기준이 타종교를 가늠하는 잣대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종교 다원주의의 기원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다.

미국 하버드대학의 비교 종교학 교수였던 스미스(Wilfred Cantwell Smith, 1916-1973)는 종교적 다원주의 문제는 교회가 따른 신앙과 정면으로 대결하고 있던 선교 현장의 선교사들과 비교 종교학자들에 의해 제기되었다고 한다. 18, 19세기의 그리스도교 선교 정책은 서구 식민주의와 그 궤를 같이하는 제국주의적 선교 정책이었다. 즉 서구 열강들의 군대가 약소국을 점령하면 선교사가 뒤따라 들어가 그리스도교로 그 지역을 점령하는 방식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제 2차 세계대전 이후로 서구 식민지 정책이 종식되고 독립국들이 점차 늘어가면서 그리스도교의 정복 선교 정책도 일대 위기를 맞게 되었다. 선교지 일부에서는 선교사들이 타종교와의 대화를 주장하며 타종교를 인정하려는 움직임까지 보이는가 하면 ‘세계 복음화‘와 같은 그리스도교의 선교 기치는 침략적인 제국주의 정신의 산물이라고 비판하며 전통적인 그리스도교의 선교 형태를 반성하기 시작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한편 니터에 의하면 신학적 종교 다원주의의 촉발은 에큐메니칼 운동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영국의 신학자 및 철학자 죤 힉(John H. Hick. 1922. 1. 20 - 2012. 2.  9) 역시도 같은 입장에서 궁극에는 모든 종교가 한 형제라는 것을 깨닫고 종교들이 서로 협력하며 교류하는 하나의 이상세계가 올 것이라는 낙관주의적 입장을 취하였다. “이미 그리스도교를 변화시키고 있는 에큐메니칼 정신은 세계 종교간의 관계에도 더욱 영향을 미칠 것이다.

뉴비긴(L. Newbegin)은 서구 사회에서 다원주의의 근원을 유럽의 계몽주의에 의해 부활한 합리주의 전통에서 찾고 있다.
그는 기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전통에서 이성은 진리를 확인하고 방어하는 유일한 도구가 되었다. 다원주의적 관점은 또한 과학적 방법론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이 과학적 방법론은 무엇인가? 인간의 감각에 의해 관찰 대상으로부터 사실들을 얻어내는데 있어서 이성을 수단으로 가정을 세우고 결론을 유출해 내고 계속되는 적용을 통해 그 결론들을 시험하고 검증한다는 것이다. 비서구 세계에서의 모든 이슬람 국가들이 압도적으로 반 다원주의적이고, 단일성이 모든 생활의 영역에 미치고 있으며 법적으로 강요되기도 한다. 일부 국가에서는 비신자들의 거주지를 정해 놓고 그들의 활동을 엄격히 통제한다. 아시아, 아프리카에 있는 비 이슬람 국가들은 수세기 동안 인종과 문화의 다양성 속에서 살아왔다. 인종과 문화가 뚜렷이 구분되는 공동체들이 서로 근접해 있는 상황에서 긴장은 있었지만 일정 기간 서로 상대방의 존재를 관용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와 같은 사회가 발전하면서 또한 종교적 다원성을 인정하게 되고 그것을 일부 수용하게 되었다. 인도에서는 특별히 종교적 진리는 오로지 인간의 영혼에 국한되었다. 진리는 영에 의해서만 이해되어진다. 역사는 종교적 진리와 경험을 구성하게 된다. 종교 의식과 교리체계를 가지고 있는 모든 역사 종교들은 서로 연관성을 갖고 있다. 이와 같은 다원주의 정신은 힌두교가 지배적인 영향을 미쳐 온 상황에서 형성되었다. 다원주의는 서구든, 비서구든 현대 사회의 지배적인 관점인 상대주의를 낳았다고 설명한다.

Alann Bloom에 의하면 상대주의는 현대인의 도덕적인 조건이며 자유 민주 사회의 조건이라고 한다. 개방적인 사람을 상대주의에 헌신된 사람이라 규정한다. 그리고 절대주의(Absolutism)란 관용적이지 못하고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으로 규정한다. 

현대 사회는 자신도 생존함과 동시에 다른 사람도 함께 생존하게 하는 것이 가장 위대한 미덕이 되었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종교 다원주의의 기원은 합리주의적 전통과 상대주의의 대두라고 말할 수 있겠다. 종교 다원주의론자들은 종교 다원화에 대한 정의를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기 때문에 특정 학자의 말을 인용할 수 없다. 그러나 일반적인 의미는 현 시대는 모든 종교가 다양하게 공존하는 종교 다양성의 시대이므로 어느 특정 종교가 절대적 진리나 가치를 주장할 수 없다는 종교에서의 가치 중립적 태도를 의미한다. 

종교 다원주의의 신학적 기초는 현재의 제도적 교회가 신약의 참 교회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함으로 현재의 기독교를 부정하고 상대화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종교 다원주의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전오진 교수는 여섯 가지를 말하고 있다.

1st. 종교 다원주의는 기독교를 부정하고 상대화한다.
2nd. 일부 서구인들과 신학자들은 서구 식민주의와 양차대전에 대하여 강한 죄책감을 가지고 서구 문명과 기독교를 죄악시하고 비서구 문화를 찬양한다.
3rd. 종교 다원주의는 비서구인들 특히 많은 아시아인들이 서구로 이주하거나 거주함으로 서구 사회를 종교 다원주의사회로 만들었다.
4th. 비서구 국가들은 자신들의 문화적 정체감을 전통 종교에서 추구하는데서 종교 다원화를 더욱 심화시켰다.
5th. 종교 다원주의 신학은 서구 신학이 노골적으로 기독교의 절대성을 포기하는데 일차적 원인이 있다.
6th. W.C.C의 종교 대화는 전도의 목적으로 시작되었으나 인류의 평화와 복지라는 세속적 목적과 다원주의로 발전되었다. 

알랑 레이스(Alan Race)는 그리스도교와 타종교의 관계를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었다.

배타주의 (exclusivism)


배타주의란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입장이다. 그리스도교는 전통적으로 그리스도교만이 참 종교요, 절대 종교라고 믿는 그리스도교 절대주의(christian absolutism)를 견지해왔다. 그리스도교의 입장에서는 ‘종교‘라는 일반적 개념이 아예 불가능한 것일 수밖에 없다. 설령 그리스도교가 타종교를 운위한다손 치더라도 그 유일한 까닭은 계시에 근거하여 그들을 심판하기 위한 것에서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입장에 대해 종교는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며 절대종교란 있을 수 없고, 모든 종교는 상대적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종교 다원주의가 발생한 것은 분명히 충격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입장에는 전통적인 카톨릭의 입장과 칼 바르트, 크래머와 절대 다수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속한다. 

그리스도 중심의 배타주의는 구원이 예수에 대한 명시적 신앙 안에만 있다거나 교회 울타리 안에만 구원이 있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은 몇 가지 면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성경의 문자적 증언과 일치한다는 것과 그리스도 신앙의 유일성과 절대성을 확립시킨다는 점에서 유효하다. 또한 선교의 열정을 강조하고 같은 맥락에서 협조하는 것이 배타주의의 긍정적 측면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배타주의는 은총의 종교로서의 기독교를 강조하지만 기독교가 아니면서도 은총의 종교인 예를 들어 아미타불교, 바티 흰두교와 같은 교리에 대해 설명할 방법이 없다는 한계점이 있다. 또한 창조계시와 그리스도 계시를 이분함으로써 창조계시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진 점을 간과하는 것도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밖에 있는 많은 선한 것에 대해 긍정적이고 바른 평가를 할 수 없다는 것도 문제라고 볼 수 있다.


포괄주의(inclusivism) 

포괄주의는 자기 종교를 최 우위에 놓는 자기 중심적 요소가 있어 한편으로는 배타주의와 통하고 우열을 가리면서도 남의 종교의 가치를 어느 정도 인정한다는 점에서는 다원주의와도 통한다. 현재 카톨릭에서 가지고 있는 공식적인 입장이다. 즉 포괄주의는 “발전–완성“이라는 도식의 성취설을 취한다. “타종교 속에 있는 모든 진리는 본래 그리스도의 것이다“라거나 “타종교에도 구원은 있으나 궁극적으로는 그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된다.” 는 등의 사상이 모두 포괄주의적 입장에 속한다. 타종교인을 ‘익명의 그리스도인(anonymous christian)’으로 규정한 칼 라너와 제 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이후의 카톨릭 입장이 모두 이 견해를 대표한다. 포괄주의는 여전히 그리스도 중심적인 구원론의 한계 안에 갇혀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다원주의(pluralism)

다원주의는 참 종교를 하나만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여럿을 인정한다는 입장이다. 즉 궁극적으로는 형언불가능한 하나의 신적 실재를 믿되, 그 신앙의 다양한 표현으로서의 다원종교 현상을 인정하며 그것들 사이의 상호 보완적 관계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려는 태도이다. 이는 교회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타종교들을 배타하거나 포괄하려는 종래의 입장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대안이다. 따라서 종교다원주의자들은 근대 후기의 종교다원적 세계 속에서 요청되는 신학적 사고의 모형변이가 신중심주의(Theocentrism)의 입장에서 종교의 다원성을 긍정하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교회중심주의나 그리스도 중심주의(Christocentrism)의 사고에 젖어 온 그리스도 신학은 타종교에 대하여 배타적일 수밖에 없다. 기껏해야 타종교인을 익명의 그리스도인쯤으로 포괄하는데 그칠 것이다.

따라서 80년대의 다원주의적 종교신학은 소위, ‘신 중심적 모델‘을 제시하며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궁극적 실제(ultimate reality)로서의 신의 초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 다원주의에 속하는 현대 종교 사상가로는 하버드 대학의 비교 종교학 교수였던 스미스와 인도의 신학자 사마르타, 인도의 카톨릭 신학자인 파니카, 남인도 뱅갈로 에큐메니칼 선교 센터 원장이며 1986년부터 1975년까지 W.C.C.중앙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토마스, 영국 장로교 목사인 존 힉과 카톨릭 신자인 폴니터 등을 꼽을 수 있다.

 

종교다원주의 신학이란 인간이 종국적 실재와의 관계에서 자기 삶을 창조적으로 변화시키고 구원을 성취하는 양식에는 문화의 다양성에 따라 다양한 구원의 길과 종교 상징체계가 존재하며, 궁극적 실재에 대한 이름과 구원의 길의 다양성은 삶의 자리가 갖는 해석학적 제약에 기인하기 때문에 모두 상대적이며 특정 신의 이름과 구원의 방도가 배타적인 우월성을 지녔다는 주장은 용납될 수 없다는 종교신학적 이론이다.

 

1. 칼 라너(Karl Rahner, 1904. 3. 5 - 1984. 3.  30) /  익명의 그리스도인

칼 라너는 하나님의 보편적 구원의지를 강조한다.
이것은 하나님은 만민을 구원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계시고 처음부터 구원하려는 사랑과 긍휼로 사람을 만나셨다는 것이다.
이점은 배타주의에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긍휼과 사랑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만 적용된다고 주장하는 것과 비교되는 점이다.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만민을 사랑하시는 것이지 그리스도의 복음에 접목되지 않았던 사람을 모두 지옥에 떨어뜨리고하자 하는 의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스도 사건은 용서하고자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의지를 불러일으키고자 하는 행위가 아니라 용서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 사건을 지탱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칼 라너는 자연과 은총의 이분법을 거부한다.
모든 인류가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살아가고 여기에 예외 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율법으로 살아간다면 형벌로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칼 라너는 이런 의미에서 ‘익명의 그리스도인‘을 주장한다.
모든 인류가 그리스도의 은총에 의해서 살아가고 있다면 그리고 모든 인류가 그리스도의 은총을 안다면 그는 이미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은가?

라너가 말하는 익명이란 명시적이지 않기 때문에 명시적으로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익명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따라서 익명의 그리스도인들은 초월적 존재를 향해서 자기를 개방하는 사람들, 이웃을 향해서 자기를 열어 놓는 사람들, 선과 정의, 진리를 향해 그런 사람들을 포함한다.
이들이 익명의 그리스도인들이며 그들은 구원의 가능성이 충분하지 않은가 말하는 것이다. 

칼 라너의 이러한 신학은 그리스도밖에 존재하는 은총에 대해 바른 이해를 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점과 타종교와의 대화의 가능성을 열어준다는 점과 선교의 효과와 교회의 성장의 결과를 가져다준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타종교에 대한 낙관주의의 문제를 간과해서는 안되겠다. 타종교에서 말하는 자력구원 의지, 역사 퇴행적 사고 행태 등은 중요한 부정적 측면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타종교의 선한 것과 구원사이의 구분이 분명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익명의 그리스도인이 정당하다면 기독교의 순교란 불가능하다는 결과를 이끌어 내게 된다는 점에서 문제를 가지고 있다. 

2. 에른스트 트뢸취(Ernst Troeltsch, 1865-1923) /  역사적 상대주의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대표적인 종교사학자 트뢸취는 그리스도교 절대주의를 거부하고 종교 상대주의를 주장했다. 하나님은 유한한 것들과 동일시될 수 없지만 신성도 역사 속에 주어졌을 때는 상대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결코 절대적 종교가 아니며, 어떤 주어진 시점에서 그것의 환경을 구성하는 역사적 조건들로부터 자유로운, 전적으로 유일회적인 종류의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교는 결코 종교의 보편적 원리라고 생각되는 것의 분별적, 최종적, 무조건적 실현이 아니다.
다른 위대한 종교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도 그 역사의 매순간에 있어서 철저히 역사적인 현상이며, 모든 개별적 역사현상이 직면하게 되는 모든 제한에 종속되어 있다.”

이처럼 그에게는 인간에 대한 절대적이고 유일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란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교의 복음마저도 다양한 종교적 구원체험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이것은 그의 철저한 역사적 의식과 그 역사적 의식이 요청하는 바 역사적 상대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절대자는 모든 역사를 향해 현존하고 모든 역사 안에 현시되지만, 그러나 절대자에 대한 그 어떤 역사적 현시도 절대적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절대자의 본질(절대자는 항상 유한자 이상이라는)과 모순되며, 역사적인 것의 본질(역사적인 것은 항상 제한적이고 가변적이라는)과도 모순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자주 반복하는 실 수 다섯 가지

미시간주립대학 임상 정신생리학 연구소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실수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2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고정 마인드형

‘아, 이런 일 정말 싫다. 잊어버리자’라고 생각한다.

둘째는 성장 마인드형

‘이거야말로 내 인생에 울리는 경고음이다. 이런 일을 다시 겪지 않기 위해 내가 뭘 잘못했는지 살펴보자’라고 생각한다.


고정 마인드형은 자신의 실수를 직면하는 것이 부끄러워 가능한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면서 ‘다시는 이런 실수 안 하면 되지’라고 마음 편하게 생각한다.
때로는 실수라는 부정적인 생각에서 빨리 벗어나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며 자기 합리화를 하기도 한다.
이건 긍정적인 게 아니라 대책이 없는 거다.
자기 실수를 똑바로 바라보지 않고 회피한다면 자신이 왜 그런 실수를 했는지 영영 알 수 없어 결국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된다.

이 조사를 이끈 제이슨 모제는 “자신의 실수에 집중하면 실수를 고치기 위해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입하게 되고 이 결과 실수를 통해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다”고 말했다.

자신의 실수를 있는 그대로 보고 인정하는 것은 괴로운 일이나 이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야만 실수에서 배울 수 있다는 의미다.

누구나 실수한다.
성공한 사람이나 실패한 사람이나 실수에 예외는 없다.
성공하는 사람과 실패하는 사람의 차이는 실수한 이후 드러난다.
성공하는 사람은 수치스럽고 괴로워도 자신의 실수를 인정한다.
무엇을 잘못했고 그 때 왜 그랬는지 꼼꼼히 되새김질한다.
그리고 실수로 인한 결과에 책임을 진다.

필요하다면 죽기보다 싫은 일일지라도 자신의 실수를 공개적으로 시인한다.
자신의 실수를 공개하면 다음에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데 더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 내 실수를 인정하고 다시는 그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만큼 남들 눈을 의식하게 되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저자 파울로 코엘료는 “실수를 반복하면 그건 더 이상 실수가 아니다. 그 사람의 결정이다”라고 말했다.

미국의 경제전문방송 CNBC를 참조해 사람들이 자주 반복하는 실수를 5가지로 정리했다.

1. 진실이라고 믿기엔 너무 좋은 사람이나 조건을 믿는다

사람들이 사기 당하는 이유 중 하나는 도저히 가능할 것 같지 않은 사람이나 조건을 믿기 때문이다.
사기 치려고 다가오는 사람들은 달콤한 말을 하며 과분한 친절을 베푼다.
세상에 이런 좋은 사람이 없는 것 같다.
피라미드 사기는 비현실적인 수익을 약속한다.
비현실적으로 좋은 사람이나 기회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소설 같은 일은 극히 드물다.
너무 좋은 사람이나 기회, 조건에 마음을 뺏기지 말라.

2. 같은 일을 하고 다른 결과를 기대한다

내가 변하지 않았는데 변화가 일어날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비이성적이고 어리석다.
내가 변하지 않았는데 상대방이 획기적으로 변해 관계가 호전되기를 바라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먹는 음식과 생활습관이 바뀌지 않았는데 건강이 좋아지기를 바랄 수 없다.
내가 일하는 방식을 바꾸지 않고 성과를 올리지 않았는데 회사에서 인정 받고 연봉이 오르길 바랄 수는 없다.
한 번 해서 안 됐다면 다른 방식을 시도해야지 같은 방식으로 수백번 해봤자 소용이 없다.

3. 만족을 지연시키지 못한다

당장 느끼는 욕구를 참지 못하면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
당장은 욕구가 충족돼 만족스러울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 얻을 수 있는 성과가 없다.
공부할 시기에 놀고 싶은 욕구를 참지 못하면 좋은 학교에 진학할 수 없다.

담배를 참지 못하면 장기적으로 건강이 악화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현명한 사람은 단기적인 욕구와 장기적인 욕구를 구별해 더 큰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선 때로 단기적인 욕구 충족을 희생하고 뒤로 미뤄야 한다는 사실을 안다.

4. 예산을 세우지 않고 생활한다

살아가는 한 돈이 필요하다.
돈이 무한정하게 생기는 것이 아닌 만큼 늘 예산을 세워 소득 내에서 소비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산 없이 있는 대로 돈을 썼다 낭패를 당하고도 예산을 세우지 않는다면 영원히 경제적 자유를 얻을 수 없다.

5.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려 한다

나 자신도 변하기 어려운데 내가 의지를 발휘할 수 없는 다른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은 큰 착각이다.
아무리 잔소리를 해봤자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배우자나 자녀를 바꿀 수 없다.
현명한 사람은 쉽지 않은 일일지라도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려 노력한다.












파가저택(破家瀦宅)


파가저택(破家瀦宅)

조선시대에 반역(反逆) 죄인에 대한 극형(極刑)이나 연좌(緣坐)율의 적용은 『대명률』에 근거한 것이었다.

* 《대명률》(大明律)은 1397년에 반포되어 ·시대의 약 500년간을 통하여 형률(刑律)의 근본(根本)이 된 중국법전이다. 총 3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전에도 당률을 바탕으로 하여 종종 편찬개정이 이루어졌으나, 결국 그 체계가 현실에 맞지 않아 의 법률서 《원전장》(元典章)의 편목을 따랐다. 행정 관청인 이(吏)·호(戶)·예(禮)·병(兵)·형(刑)·공(工)에 따라 율(律)도 6부로 나눈 뒤에 명례(名例)를 더하여 7률(律)로 했다. 그 후 시세의 추이에 맞지 않는 것이 있어 1550년 《문형조례》(問刑條例) 249조를 반포하여 이를 보충하였다. 이 대명률은 조선·일본·안남(安南)의 법률에 영향을 끼쳐 법률사상 당률과 함께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조선 왕조에서는 그 외에도 파가저택(破家瀦宅)이라고 하여 이러한 죄를 범한 자들이 살던 집을 헐고 그 곳에 못을 만드는 형벌을 부가하고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조선초기에는 백성들이 감사(監司) 및 수령(守領)을 업신여기는 것을 강상(綱常)에 위반하는 것으로 보아 해당 죄인을 고을에서 추방시키고 파가저택하게 한 사례들이 많이 확인된다. 1439년(세종 21)에 의금부(義禁府)에서는 백성들이 수령을 능욕(凌辱)한다며 고려시대에도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범하거나 비속(卑屬)이 존속(尊屬)을 업신여기는 경우에는 보통 사안보다 가중 처벌하는 뜻에 따라 해당자를 추방하고 집은 파가저택을 했다고 하였는데, 이를 통해 파가저택이 고려시대에도 시행되었던 형벌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450년(문종 즉위)에도 수령(守令)을 업신여기고 백성들을 괴롭힌 아전(衙前)에 대해서 파가저택하고 함길도에 영속(永屬)시키도록 한 사례가 있다.

그런데 조선중기 이후가 되면 파가저택이 적용되는 사례는 이전과는 달리, 국가에 대한 반역(反逆) 죄인이나 부모를 살해한 비속(卑屬), 주인을 살해한 노복(奴僕) 등을 처벌하는 사례가 눈에 띈다. 가령, 1586년(선조 19)의 부(父)와 계모(繼母)를 살해한 아들에 대한 처벌이나, 1617년(광해군 9)에 역적(逆賊) 죄인에 대한 처벌 사례가 그것이다.

파가저택에 대한 명문 규정은 『속대전』 「형전(刑典)」 추단조(推斷條)에서 찾아볼 수 있다. 동 규정에는 부모와 남편을 살해하거나, 노비가 주인을 살해한 경우, 관노(官奴)가 관장(官長)을 살해한 경우에는 죄인을 사형에 처하고, 처와 자녀는 노비가 되게 하며, 죄인이 살던 집을 파가저택하며 읍호를 강등(降等)하며 수령을 파직할 것을 정해두고 있다. 그리고 반역(反逆) 죄인에 대해서도 파가저택 이하의 규정을 적용할 것을 규정해 두고 있다.

이처럼 조선후기에 등장하는 강상(綱常)죄를 범한 자에 대한 연좌 처벌이나, 파가저택과 같은 처벌은 조선 왕조에서 반역(反逆)죄나 강상(綱常)죄를 범한 자를 매우 엄격하게 처벌했음을 보여준다.

성경에서는 소금을 뿌리는 것으로 연결된다.

사사기 9:45
아비멜렉이 그 종일토록 그 성을 쳐서 필경은 취하고 거기 있는 백성을 죽이며 그 성을 헐고 소금을 뿌리니라.

소금은 식물이 자라나는 것을 훼방하여 결실을 맺지 못하게 한다.
결국 소금을 뿌린다는 것은 그곳을 황폐화하는 것이다.

신명기 29:23
여호수아 6:26



파가저택(破家瀦澤)과 연좌죄

우의정 이항복(李恒福)이 의논드리기를 “파가저택(破家瀦澤)의 법은 형서(刑書)에는 보이지 않고, 주 정공(邾定公) 때에 처음으로 시행되었습니다. 그 또한 주 정공 자신이 처음 만든 법이 아니라, 대체로 삼대(三代) 무렵에 서로 따라서 시행되었던 것입니다. 주 정공의 말을 보면, 신하가 임금을 시해하거나 자식이 아비를 시해한 경우만을 들어서 파가저택의 법으로 삼았고, 아내가 남편을 시해한 일 한 가지는 거론하지 않았으니, 그리 한 뜻이 분명 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전란(戰亂) 이전에 이를 따라 아비를 죽인 집에만 이 법을 시행하였는데, 그 당시 영중추부사 신(臣) 윤승훈(尹承勳)이 그 내력을 상세히 기억하여 분명하게 말했을 뿐 아니라, 신 또한 그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전란 후에 상신(相臣) 유영경(柳永慶)이 남편을 죽인 자에게도 파가저택해야 한다는 의논을 제창하였고, 한때 대신(大臣)들도 ‘삼강(三綱)은 하나’라고 논의하여, 마침내 남편을 시해한 자의 집에도 파가저택을 시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의 생각은 그렇지 않습니다.……대체로 지금 이 파가저택의 법을 우리나라에서 취하여 근거로 삼아 시행하는 것은 다만 주 정공의 논(論)에 의거한 것이요, 다른 경(經)에는 나타나지 않은 것입니다. 어찌 별도로 의견을 내세워 가지 위에 가지를 더 만들어서 행해지지 않은 법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 파가저택 이 한 조항은 신이 항상 불가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원문
右議政李恒福議: “破家瀦澤之法, 不見於刑書, 始行邾定公之時. 亦非定公所自創爲, 三代之際, 相因而行之者也. 觀定公之言, 只擧臣弑君·子弑父者爲破家瀦澤之典, 不擧妻殺夫一節, 則意必有在. 而我國亂前, 亦因玆而只行於弑父之家, 不唯其時領府事臣尹承勳詳記而明言之, 臣亦能記之. 亂後相臣柳永慶倡爲殺夫者亦當破瀦之議, 一時大臣有三綱一也之說, 至行於殺夫之家. 臣意不然.……大槪今此破瀦之法, 我國所取爲據而行之者, 只依邾定公之論, 而不見於他經, 則何可別立意見, 枝上生枝, 行所未行之法乎? 此一款, 臣常以爲不可也.”


백사(白沙) 이항복이 파가저택 시행의 부당성에 대해 논한 글이다. 파가저택은 반역(反逆)을 도모하거나 강상(綱常)에 저촉된 중죄인의 집을 헐고 그 자리에 연못을 파던 형벌이다. 백사에 따르면 파가저택은 법전이나 경전에도 그 근거가 없고, 주 정공(邾定公) 때에 처음으로 시행되었다고 한다. 『예기(禮記)』 「단궁 하(檀弓下)」에서, 주루국의 정공(定公) 때 그 아비를 시해한 자의 처벌에 대해 “신하가 임금을 시해하면 관직에 있는 자는 용서 없이 죽이고, 아들이 아비를 죽이면 집에 있는 자는 용서 없이 죽인다. 그 사람을 죽이고 그 집을 허물고 그 집터를 깊이 파서 연못으로 만든다.[臣弒君, 凡在官者殺無赦, 子弒父, 凡在宮者殺無赦. 殺其人, 壞其室, 洿其宮而豬焉.]”라고 하였는데 파가저택은 여기에 근거를 두고 있다.

 

   조선에서도 초기부터 파가저택이 시행되었으나 적법성 여부와 관련하여 찬반의 논의가 적지 않게 이루어졌다. 백사의 지적처럼 파가저택의 근거를 형서에서 찾기 힘드니 그 적용에 신중해야 한다는 점, 이를 확대 적용하여 아내가 남편을 죽인 경우에까지 시행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점 등을 내세우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처형만으로는 대악(大惡)에 대한 형벌로 부족하며 ‘고려의 고사(故事)’, ‘전조(前朝)의 고사(故事)’, ‘구례(舊例)’ 혹은 ‘죄가 극악하면 목을 베고 가족을 멸하고 그 집은 웅덩이를 판다.’라는 『당률(唐律)』 십악(十惡) 조를 근거로 파가저택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고려시대부터 백성이 수령을 능범한 죄인에 대해 파가저택해왔고, (『세종실록 10년 5월 26일』) 조선에 와서도 고려 때부터 행해오던 이러한 규례를 따르다가, 중종 36년에 이르러 항법(恒法)으로 정해진 듯하다. (『중종실록 36년 6월 21일』)
   그 이후 강상죄인에 대해 처자를 노비로 삼고[妻子爲奴], 가산을 적몰하고[籍沒家産], 파가저택하고, 수령을 파직하고[罷其守令], 읍호를 강등시키는 일[降其邑號]을 해사(該司)가 승전(承傳)을 받들어 거행하는 형식으로 법제화 과정을 밟아갔다. (『승정원일기 숙종 13년 4월 25일』)
   파가저택은 중국에서도 신하가 임금을 시해하거나 자식이 아비를 시해한 경우에만 적용되었고 『대명률(大明律)』에도 관련 법규가 없으나, 조선에서는 『속대전』 형전 추단(推斷) 조에 정식 율문으로 실리면서 조선시대 말기까지 역모와 강상범죄에 대한 연좌율로서 기능하게 되었다.
○ 강상죄인[부(父)·모(母)·부(夫)를 시해하거나, 노(奴)로서 주인을 시해하거나, 관노(官奴)로서 관장(官長)을 시해한 자]은 결안(結案)하여 처형한 뒤에 아내, 아들, 딸은 노(奴)로 삼고, 파가저택하며, 그 읍(邑)의 호(號)를 강등하고, 수령은 파직한다.[綱常罪人[弑父·母·夫, 奴弑主, 官奴弑官長者]結案正法後, 妻·子·女爲奴, 破家瀦澤, 降其邑號, 罷其守令.]
○ 반역(反逆)의 연좌는 본율(本律)이 있으며 파가(破家) 이하는 이 율을 쓴다.[反逆緣坐, 自有本律, 破家以下用此律.]

 

   파가저택이 적용되는 대상은 주로 모반 대역 부도 죄인이며,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훼손한 전패작변(殿牌作變) 죄인, 시부(弑父)·시모(弑母)의 패륜죄인, 수령 등 상급 관리를 범하거나 모욕한 죄인 등이고, 남편을 죽인 아내 역시 강상죄인으로 적용 대상에 포함되었다.

 

   파가저택은 일단 해당 죄인이 주거하던 곳이어야 한다. 죄인이 살던 곳이 자신의 집이 아니라면 파가저택할 수 없었다. 즉 아버지의 집에서 살았다면 아버지의 집을 파가저택할 수 없었고, 또 죄인이 양반호의 솔하(率下)로 한성부 안에 살고 있거나 양반의 낭하(廊下)에서 거접(居接)하고 있었다면 이 역시 파가저택 할 수 없었다. 만약 떠돌이로 살다가 역적이 되었다면 보통 역적들이 모사를 한 그 장소가 대상이 되었고, 범위를 주동자에 한정하여 역적 수범(首犯)의 집만 파가저택하기도 하였다.(『선조실록 29년 7월 25일』) 특히 역모죄로 처형된 양반가 집의 기와나 목재는 양도 많고 질도 좋아서 관아 건물, 고사(庫舍), 궁궐 수리 등에 사용되기도 하였는데 각 아문에서 이를 차지하기 위해 다투는 일도 있었다. 또 역적의 집을 방매하여 얻은 돈을 나라 경비에 보태거나 객사(客使) 행차에 쓰기도 하였다.

 

   파가저택의 목적은 죄인의 흉악한 흔적을 없애기 위한 것이었다. 율에 없는 죄를 범하였으므로 역시 율에 없는 법으로 다스려야 하며, 그 더러운 자취를 없애기 위해 파가저택해야 한다는 것이다.(『중종실록 34년 5월 16일』)
간원이 아뢰기를, “……저와 같이 파가 저택을 하여 일찍이 살던 곳까지도 모두 없애버리는 것은 엄하게 제거하고 끝까지 다스려서, 천지간에 용납하지 않게 한다는 뜻이 매우 깊고 절실하니, 또 무엇을 더하겠습니까?”[諫院啓曰: “……彼破家瀦宅, 倂與所嘗居而盡滅之者, 痛絶極治, 不容天地之意, 至深至切, 又何加乎?”] (『중종실록 38년 4월 15일』)
   처형되어 이미 벌을 받았어도 그 죄를 다 씻지 못하였다는 것, 그래서 파가저택하여 그 악을 매우 미워한다는 뜻을 보여주는 것이 파가저택의 명분이었다. 그러나 실상 파가저택은 결국 가족들에 대한 연좌율이었다.

 

보통 죄인의 가족에 대한 연좌율로써 전가사변(全家徙邊), 즉 죄인을 포함한 가족 전체를 북쪽 평안도, 함경도, 황해도 변방으로 이주시키는 형벌이 있었으나 너무 가혹하다는 지적이 많았고, 또 변방의 경계가 안정되어 가면서 폐지되었다. 그러나 조선 말기까지 시행되었던 파가저택은 연좌율이라는 점에서 전가사변과 유사하나 실은 이보다 훨씬 더 가혹하다. 죄인을 포함 가족 전체를 이주시키는 전가사변에 비하여 파가저택은 처형된 죄인, 그리고 남은 죄인 가족들의 생활 터전, 혈연적 근거를 없애 결국 가족이 해체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가족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최후의 희망이다. 아무리 감당하기 힘든 일을 당하더라도 결국 가족의 힘으로 견디고 이겨나가지 않는가. 그러한 가족을 흔적도 없이 해체시켜버리는 것이 파가저택이다. 보통 거열이나 부관참시, 압슬형, 주뢰형 등의 신체형이 조선시대 혹형(酷刑)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모반 대역죄인, 강상죄인의 가족들을 노비로 만들어 흩어지게 하고, 함께 살아갈 여지를 전혀 남겨두지 않은 파가저택, 이 역시 참으로 가혹한 형벌인 듯싶다.


성구 단상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Yet to all who received him, to those who believed in his name, he gave the right to become children of God.

영접하는 자 / 과거완료형

 did receive
ἔλαβον (elabon)
Verb - Aorist Indicative Active - 3rd Person Plural
Strong's 2983: (a) I receive, get, (b) I take, lay hold of.

믿는 자 / 현재형

 who believed
πιστεύουσιν (pisteuousin)
Verb - Present Participle Active - Dative Masculine Plural
Strong's 4100: From pistis; to have faith, i.e. Credit; by implication, to entrust.

 권세
 the right
ἐξουσίαν (exousian)
Noun - Accusative Feminine Singular
Strong's 1849: From exesti; privilege, i.e. force, capacity, competency, freedom, or mastery, delegated influence.


요한복음의 중심 용어


1. 말씀 /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육신이 된 말씀(요한복음 1:14) : 예수 그리스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기록된 말씀(성경)(계 22:19)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신명기 12:32 /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모든 말을 너희는 지켜 행하고 그것에 가감하지 말찌니라.
 
 선포되어진 말씀(설교)(

 요한복음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사도 요한은 가장 오랫동안 살았다(105세)
 1.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를 봉양하였다.
 2. 에베소교회를 목회하였다.
 3. 성경 다섯 권을 기록하였다(요한, 요한계시록, 요한 1, 2, 3)

2. 생명

 부모로부터 타고난 생명(비오스)
 예수를 믿음을 얻게 된 생명(조에)

 요한복음 10:10 /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3. 사랑



4. 믿음

믿음 / 98회 반복

요한복음은 믿음의 책, 말씀의 책, 생명의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