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레니우스(라틴식 이름 : Irenaeus. 헬라식 이름 : Εἰρηναῖος)


이레니우스(라틴식 이름 : Irenaeus. 헬라식 이름 : Εἰρηναῖο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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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애

 이레네우스는 2세기 말, 지금의 프랑스 남부 도시 리용(Lyon. 라틴지명: Lugdunum)의 주교였다.
‘이레네우스’라는 이름은 헬라어(=희랍어. 그리스어) ‘평화’를 의미하는 ‘에이레네’에서 파생된 단어로써 ‘화평자’를 의미한다.
최초의 기독교 역사가 유세비우스(Eusebius)는 그를 가리켜 ‘화평케 하는 자’(Εἰρηνοπιος)라 불렀다.

그는 자신이 어린시절 서머나(Smyrna. 스미르나)의 주교이며 순교자인 폴리캅(Polycarp. 폴리카르포스)에게서 배웠다고 언급했기 때문에 폴리캅의 제자로 알려져 있는데, 이 폴리캅은 사도 요한의 마지막 제자였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레네우스의 출생지를 소아시아의 서머나 혹은 그 주변 지역으로 추정하는데, 그곳은 지금 터키의 이즈미르(Izmir)이다.

그가 태어난 시기는 학자들에 따라 115-145 사이로 추정된다.

이레네우스가 무슨 이유로 동방에서 서유럽으로, 즉 프랑스 남부에 있는 골(Gaul) 지방의 리용으로 이주하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추정되는 이유는 두 가지로 압축한다.

첫째는 상업적인 용무 때문이었다
둘째는 선교적 열심 때문이었다

그가 리용의 주교 포티누스(Pothinus = Potheinus) 아래 그곳의 사제로 임명되어 장로가 된 것만은 분명하다.

177년에 포티누스는 당시 유행하던 이단 사상인 몬타누스주의(Montanism)에 대한 골 지역 그리스도인들의 생각을 담은 편지 한 통을 로마 주교 엘류테리우스(Eleutherius)에게 전달하기 위해 이레네우스를 로마로 파송했다.
그런데 이 시기에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재임기간: 161-180)의 혹독하고 잔인한 박해가 리용을 덮쳤고, 결국 178년에 포티누스 주교는 90세가 넘는 고령의 나이로 순교를 당하고 말았다.

리용의 기독교 공동체는 이레네우스가 로마에서 돌아오자 순교자 포티누스를 이어 그를 리용의 새로운 감독, 즉 주교로 선출했다. 그의 주교권 구역은 리용뿐만 아니라 비엔나(Vienne)를 포함하여 리용 주변 지역에 있는 교회들에까지 확대되었다. 후대의 한 저술에 의하면 이레네우스는 단기간에 리용 전체를 기독교로 개종시킨 탁월한 감독이었던 것으로 전해지지만 대부분의 교부 연구가들은 이러한 진술을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이레네우스는 당시 교회 사이에 논란이 많았던 부활절 날짜 문제와 관련하여 로마 주교인 빅토로(Victor. 재임기간: c. 189- c. 199)에게 편지를 보내여 14일파(Quartodeciman. 유대력 니산월 14일을 부활절로 정하고 그 날을 기념하여 지키는 사람들)를 파문하지 말고 그들에게 관용을 베풀어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이레네우스의 정확한 사망 연도는 알 수 없고 다만 약 200-202년경으로 추정한다. 라틴어 성경 불가타(Vulgata)를 번역한 제롬(Jerome), 즉 히에로니무스(Hieronimus)는 그가 순교했다고 전한다. 그는 리용의 성 요한 교회에 장사되었는데, 후에 이 교회는 성 이레네우스 교회로 개명되었다. 그의 무덤과 유물들은 1562년 프랑스 개신교도들인 위그노(Huguenots)에 의해 깡그리 파헤쳐지고 파괴되었는데, 위그노들이 그렇게 한 이유는 그것들이 우상으로 숭배되었기 때문이다.
 
2. 저술

독일의 교부 연구 대가인 한스 폰 캄펜하우젠(Hans von Kampenhausen)은 이레네우스가 헬라어를 사용하는 동방 출신이라는 점과 그의 모국어와 저술 언어가 헬라어라는 점을 고려하여 그를 동방교부, 즉 헬라교부로 분류한다. 사실 헬라어는 그 당시 로마 제국의 동쪽 지역에서만 사용된 것이 아니라 로마 제국에 사는 대부분의 그리스도들이 공통으로 사용하는 교회의 언어였다. 하지만 이레네우스는 로마 제국의 서쪽 지역인 골 지방의 리용에서 사역했기 때문에 모국어인 헬라어뿐만 아니라 당시 로마 언어였던 라틴어에도 능통했다.

이레네우스의 저작들 가운데 잔존해 있는 것은 두 권이다. 하나는 흔히 <이단 논박>(Adversus haereses. 영어: Against Heresies)으로 알려진 <사칭되는 ‘영지’에 대한 폭로와 반박>(Detectio et eversio falso cognominatae gnosis = Ἔλεγχος και ἀντροπη της ψευδωνυμου γνωσεως)이라는 저술이다. 이 저술을 히에로니무스가 <이단 논박>이라는 명칭으로 인용한 이후 줄곧 원제목 보다 이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지게 되었다. 5권으로 구성된 이 책의 내용은 라틴어 번역판으로는 완전본이 남아 있지만 헬라어 본문으로는 일부 단편만 남아 있다.

그의 대표적인 저술인 <이단 논박>에서 이레네우스는 ‘지식’을 뜻하는 헬라어 ‘그노시스’(gnosis. 영지)에서 노스티시즘(Gnosticism), 즉 영지주의, 특히 그 중에서도 영지주의적 이단 발렌티누스(Valentinus)의 체계를 철저하고 광범위하게 조사하고 반박하면서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진리의 표준’(canon veritatis)과 ‘신앙의 규범’(regula fidei)을 변호한다. 또한 당시 교회의 가장 위협적이었던 마르시온(Marcion. 마르키온; 말시온) 이단뿐만 아니라 몬타누스(Montanus) 이단에 대해서도 논박한다.

잔존해 있는 다른 하나의 저술은 <에피데익시스>(Epideixis)로 알려진 <사도적 선포에 관한 논증>(Ἐπιδειξις του ἀποστολικου κηρυγματος)이라는 책인데 단지 아람어 번역본만 존재한다. 여기서 이레네우스는 구약의 예언들이 신약의 복음서에서 성취되었다는 점을 증명하고 싶어 한다.
 
3. 사상

이레네우스는 교회의 전통적인 요소들을 강조했는데, 특히 주교직과 성경과 전통을 강력하게 변호했다. 그는 로마 교회의 전통과 일치하는 교리적 전통의 권위만이 교회의 통일성을 유지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로마 주교직의 수위권을 강력하게 옹호했는데, 이것은 후에 로마 교황의 수위권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모든 주교들의 의견을 듣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장 크고 오래되었으며 사도 바울과 베드로에 의해 설립되고 교훈을 받은 로마 교회가 사도들로부터 이어받은 전통과 그들의 주교들을 통하여 지금 우리에게까지 전해져 온 신앙을 본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로마 교회의 강력한 권위 때문에 모든 교회, 즉 모든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은 로마 교회에 따르고 있으며, 로마 교회 안에서 사도들로부터 유래한 전통이 수호되고 있기 때문이다.(<이단 논박> III.3.2.)

이레네우스는 마르시온에 반대하여 구약과 신약의 밀접한 상관성을 주장했으며 마르시온이 신약 가운데 정경에서 제외시킨 4 복음서 모두를 영감된 정경임을 강력하게 지지했다: “복음서들이 네 개 이상도 이하도 될 수 없다.”(<이단 논박> III.11.8) 그는 <이단 논박>에서만 빌레몬서, 베드로후서, 요한삼서, 유다서 외의 모든 신약 성경으로부터 무려 1,075개의 성경 구절을 인용했이다. 이런 점에서 이레네우스가 오늘날 신약 성경 27권 모두를 영감된 한 권의 성경으로 간주했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기독론과 관련하여 이레네우스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에비온주의자들(Ebionites)과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인하는 발렌티누스주의(Valentianism) 모두를 반박하면서 ‘하나이며 동일한’(εἶς και αὐτος)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 간의 통일성을 주장하였다.(<이단 논박> III.16.3.)
삼위일체론과 관련하여 이레네우스는 경륜적 삼위일체론자로 분류된다. 이러한 분류는 그의 가장 유명한 신학 사상인 ‘총괄갱신’(recapitulatio = ἀνακεφαλαιωσις)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이 총괄갱신의 핵심은 ‘그 자신 안에서 만물을 완성하시는 한 분 그리스도’라는 개념이다.
말씀은 친히 인간이 되시어 자신 안에서 만물을 완성하신다. 하늘 위의 것들과 영적이고 비가시적인 세계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최고이신 것처럼 그 말씀은 또한 가시적이고 물질적인 영역에서 으뜸이 되실 것이다.(<이단 논박> III.16.6.)

 주님은 자신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사람들을 생명의 낙원으로 이끄시고 그 자신 안에서 만물, 하늘에 있는 것들이나 땅에 있는 것들을 완성하신다.(<이단 논박> III.18.1.) 


최초의 교부 위대한 조직신학자  이레나우스의 생애와 신학
최초의 교부였던 이레나우스는(Irenaeus, Born AD 130 Smyrna, Died 202 Lugdunum) 소아시아 동북 지중해안의 서머나 지방에서 출생 했다. 당시 소아시아의 안디옥은 다양한 종교, 철학, 문화의 접촉지로서 로마 제국의 중요한 도시 중의 하나였다. 이레니우스는 170년경 고울 지방의 리용에 정착하면서 177년 그곳의 장로가 되었고 당시 리용의 감독이었던 포티누스의 순교로 인해 리용의 감독으로 선출되었다.

이레나우스가 활동했던 소아시아의 팔레스틴, 안디옥에서는 이그나티우스, 폴리캅, 파피아스, 데오빌로, 유스틴 등의 신학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이레나우스는 이들의 영향을 받았고 이 일련의 학자들은 훗날 안디옥 학파로 불린다. 그중에서도 특히 서머나 지방의 감독 폴리캅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이레나우스의 기독론 해석에서 잘 나타나 있다. 이레나우스는 헬레니즘적인 학문과 철학적 통찰력과 실천의 지혜 및 중용의 요소가 조화된 훌륭한 목회자였고 그의 저술 또한 목회적인 입장을 많이 반영하고 있다.

‘교의학의 아버지’ 또는 ‘교회의 최초의 위대한 조직신학자’라 불리는 이레나우스는 교회의 전통, 구속사, 신구약의 권위 등 여러 분야에서 업적을 찾을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2세기 영지주의자들과 논쟁에서 중요성 때문에 기독교회사에서의 의미심장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레나우스는 일생동안 영지주의를 논박하고 하나님의 구원 역사계획을 역사 신학 내에서 진지하게 설정하였으며 신약을 구약과 같은 권위로 보면서 성경을 총체적으로 사용한 최초의 그리스도인이었다.
이레나우스는 기독교를 진정한 철학으로 보 려는 변증가들의 견해에 반대하였으며 헬라적 사색의 도움을 동원하지 않았고 계시의 내용이 단순히 새로우면서도 보다 나은 철학에 불과하 다는 자들과도 견해를 달리했다. 그에게는 성경 적 전통만이 신앙의 유일한 근원이었다.

목회적 소질을 타고난 이레니우스는 고울에서 복음을 전파하며 이단으로부터 양들을 변호하는데 관심을 쏟았다. 다른 한편으로 이레나우스는 변방에 있는 켈트족의 복음화와 리용의 교회 평화를 위해 노력했다. 후기 자료에 의하면 이레나우스는 리용에 있는 기독교인들이 죽임을 당하던 202년에 순교하였다.

이레나우스는 사도적인 전통(가르침)은 성경에서 발견되며 교회에 보존되어 왔으며 따라서 “진리를 보기 원하는 사람은 온 세계에 분명하게 된 사도들의 전통을 어느 교회에서나 분면하게 볼 수 있다.”고 보았다. 교회의 전통에 대한 이레나우스의 호소는 정경(正經) 형성과 깊은 관련을 갖는다. 이레니우스는 4복음서를 의심 없이 수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4복음서가 이레니우스 시대에 교회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레나우스의 역사관을 언급해보면 이레나우스가 구속사관을 제시한 최초의 역사 신학자로 평가 받는 이유는 그가 창조와 구속을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이해함으로써 구속사(救贖史)라는 관점에서 구약과 신약을 통일시 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그의 통시적인 역사 이해는 창조주와 그리스도의 아버지는 하나이며 같은 하나님임을 확신하는데서 출발한다.

이레니우스는 수많은 저술을 기록한 것으로 보이지만 지금까지 보존되어 오는 것은 ‘소위 영지주의의 고발과 논박’과 ‘사도적 설교의 논증’이다. 전자는 영지주의자들에 대항하여 기술된 작품으로 ‘이단 논박’(Adversus haereses)으로 알려졌다. 다섯 권으로 되어있는 이단 논박은 주제에 따라 다름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권 영지주의의 해설, 2권 이성에 의거하여 논박함, 3-5권 선지서, 주의 말씀과 사도들에기초한 성경으로부터의 논박이다.

이 책에서 이레나우스는 영지주의의 대표적인 유형인 발렌티누스(Valentinus, AD100-160)의 제자인 플톨레매우스(ptolemaeus)의 제자들의 가르침을 집중적으로 파헤치고 있다. 역사적 성육신에 기초한 이런 통시적인 구속사와 신구약의 연속성의 개념은 ‘에피데이키스’(Epideixis)라고 불리는 단편작품 ‘사도설교의 논증’에 더욱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이 작품에서 이레니우스는 창조에서 최후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구원의 역사를 제시했다.(*)

이레니우스는 170년경 고울 지방의 리용에 정착하면서 177년 그곳의 장로가 되었고, 당시 리용의 감독이었던 포티누스의 순교로 인해 리용교회의 감독으로 선출된다. 이레니우스가 활동했던 소아시아(팔레스틴, 안디옥)에서는 이그나티우스, 폴리캅, 파피아스, 데오빌로, 저스틴 등의 신학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이레니우스는 이들의 영향을 받았고, 이 일련의 학자들은 훗날 “안디옥 학파”로 불린다. 그중에서도 특히 서머나 지방의 감독 폴리캅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이레니우스의 기독론 해석에서 잘 나타나 있다.

이레니우스는 헬레니즘적인 학문과 철학적 통찰력과 실천의 지혜 및 중용의 요소가 조화된 훌륭한 목회자였고, 그의 저술 또한 목회적인 입장을 많이 반영한다.
이레니우스에 따르면 복음의 첫째 기초는 우주를 창조하신 한 분의 하나님이시며,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시다. 이레니우스는 영지주의를 비판하면서 최고신과 창조신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두 손'이라는 원리를 주장했다. 이는 '아들'과 '성령'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창조 역사에 성자와 성령이 함께 활동 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비유(알레고리)이다.

뿐만 아니라 이레니우스는 교부들 중 가장 많이 성경을 인용하여 이단들을 공박한다. 이레니우스에 있어서 성경은 그가 활동하면서 생각하고 판단하는 유일한 기준과 법칙이었다. 아울러 이레니우스는 성령의 영향으로 생산되는 것은 무오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성경은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그는 그의 저술에 신구약 성경 중에서 상당히 많은 구절을 인용하거나 언급하였다. 예컨대,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상, 사무엘하, 열왕기하, 시편, 잠언, 아가, 이사야, 예레미야, 예레미야 애가, 에스겔, 다니엘, 호세아, 요엘, 아모스, 요나, 미가, 하박국, 스가랴, 말라기,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사도행전, 로마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서, 데살로니가후서,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 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전서, 베드로후서, 요한일서, 요한이서, 유다서, 요한계시록 등을 인용하였음을 그의 저서들 곳곳에 나타난다. 이레니우스는 “복음서는 그 수에 있어서 더하거나 덜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 이유로 세상에는 동서남북이라는 네 개의 지역이 있고, 교회는 모든 세상에 흩어져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레니우스가 이렇게 말한 것은 4 복음서의 완벽성을 설명하기 위함인 것으로 보여진다.
4 복음서는 그 수에 있어서 더하거나 덜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고 틀림이 없고 오류가 없다는 그의 확신을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구약성경과 동일한 정경인 신약성경에 대하여 거의 명확하게 말한 첫 번째 사람이었다. 이레니우스는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 것과 옛 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 주인과 같으니라”(마 13:52)는 예수님의 말씀을 해석하면서, 예수님은 옛 것과 새 것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그것들은 하나이며 동일한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해석은 구약과 신약의 저자는 동일하고 그 목적도 동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새 것과 옛 것은 두 언약인데, 옛 언약의 대표적인 것은 율법이고, 새 언약의 대표적인 것은 복음이라는 의미”이다. 아울러 이레니우스는 성령의 영향으로 생산되는 것은 무오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성경은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최초의 조직신학자로 인정한다.

이레니우스 신학의 중심점은 기독론이다.
“그리스도는 창조와 구속의 연속성을 나타내는 근거가 되신다.
그리스도는 새 아담으로서 창조의 계속이며 동시에 완성이다”.

이레니우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새로운 인간상의 총화로서 표현한다.
이것을 가리켜서 “총괄갱신(recapitulate)”이라고 한다.
총괄갱신은 이레니우스 신학에서 가장 뛰어난 주제 중의 하나로서 그리스도의 탄생에서 부터 최후의 심판에 이르는 그리스도의 구속사역과 관련된 모든 것을 지칭하는 말이다.

즉 총괄갱신은 창조의 회복을 뜻한다.
첫 사람 아담이 상실한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회복이며, 완전 혹은 완성(perfection)을 의미하기도 한다.
예수는 새 아담이며 사탄에게 굴복하지 않은 새 인간의 시작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 그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성을 향한 새로운 역사에 동참하게 된다.
교회는 이러한 총괄갱신의 사역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는 세례와 성찬을 통해서 총괄갱신 사역을 진행 시키시고, 세례와 성찬은 인간을 그리스도 자신에게 연합시킨다.
즉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로서 그 머리 아래로 모인 인간의 공동체를 이룬다는 것이다.

성경에 대한 이레니우스의 접근은 터툴리안 및 오리겐과 전혀 다르다.
속사도 시대의 교부들은 성경을 비유적으로 해석하기를 아주 즐겼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의 비유'를 예로 들어보자.
선한 사마리아인을 예수로, 강도맞은 사람을 구원받은(을)자로, 강도는 사탄 내지 마귀로, 여관은 교회로, 나귀는 복음의 도구 등등. 하지만 이레니우스는 이러한 해석들을 단호히 배격한다.
그의 근본적인 관점은 역사를 통해 그의 백성을 인도하시는 하나님, 곧 목자이신 하나님의 관점에서 본다는 점이다.
즉 성경은 이스라엘이라는 특정한 백성의 역사 속에 펼쳐지는 하나님의 역사를 증거하기 때문에 그는 철저히 성서에 대한 비유적(알레고리적) 해석을 배척한다.

이레니우스가 말하는 역사는 하나님께서 인류와 관계를 맺으시는 역사를 가르쳐주는 것으로서 신적 경세(oikonomia 오이코노미아)라고 말한다.
이는 역사 내에 진보와 연속성, 구체성이 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레네우스의 가장 큰 공헌은 교회 내부에서 일어나는 이단을 막기 위하여 싸웠다는 점이다.
그는 성경을 자유롭게 인용하면서도 신약을 충분히 활용함으로써 구약과 신약의 통일성을 보여 주었으며, 사복음과 거의 모든 서신을 말시온의 이단들을 정경(Canon)과 대조하여 논증하는데 승리했다.
그가 주로 논쟁한 주요 이단은 영지주의(Gnostcism 그노시스)였다.
이레니우스는 교회의 교리에 대한 해석자이며 또한 영지주의 이단에 대한 방어자 역할을 했다.

영지주의에 대한 이레네우스의 작품으로는 <이단 논박>(Adversus Haereses)이 가장 유명하다.
이 책은 다섯권으로 되어 있다.
제1권에서 여러 이단들을 해설하고,
제2권에서 이들에 대한 철학적 논리적 논박을 전개하고,
제3권에서 성경과 전통에 있어서의 기독교 교리의 기초를 제시하고, 또 그 본질적인 부분 즉 하나님의 통일성과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속을 해명한다.
제4권에서 두 언약(言約)의 통일성을 주장하고 마르키온을 논박한다.
제5권에서 구속론을 다시 취급하며 종말관과 내세의 소망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

아쉽게도 헬라 원전은 소실되었으나 라틴어 번역이 온전이 남아있다.






마지막 시대의 징후



말세의 징조를 나타내는 7가지 징후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마태복음 16:2-3)

위의 말씀은 이미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많은 표적들을 보여주셨음에도, 또 다른 표적을 요구하고 있는 당시의 종교지도자 바리새인 서기관들에게 주신 말씀이다.
표적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 많은 표적들을 보고도 이것을 분별하지 못하는 저들의 무지함, 혹은 표적을 표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완고함이 문제라는 것이다.

초림의 주님이 공생애를 통해 하나님의 아들 되신 많은 표적들(signs)을 보여주셨듯이, 성경은 예수님의 재림 직전에도 많은 시대의 징조들(signs)이 있을 것을 말씀하고 있다.
이런 징조들이 일어나는 모습들을 볼 때면 ‘그 날이 가까움’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은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종말의 진행 상황을 보여주는 7가지 지표들이다.

1. 이스라엘의 회복

종말에 대한 예언의 중심에 이스라엘이 있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마 24:32,33)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이스라엘의 회복은 종말의 역사가 시작되는 출발점이라는 것이다.

1948년 5월 14일 성경의 예언대로(겔37장) 고토로 돌아와 나라를 재건한 이스라엘은 재건의 순간부터 이스라엘을 진멸하려는 대적들과 전쟁을 치루어왔다.

지금까지 4차례의 중동전쟁을 치룬 이스라엘은 성경의 예언대로라면 앞으로도 시편 83편의 전쟁, 곡과 마곡의 전쟁, 아마겟돈의 전쟁을 더 치루게 될 것이다. 종말을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은 시편 83편의 전쟁(이스라엘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주변국가와의 전쟁)과 곡과 마곡의 전쟁(이스라엘과 온 아랍세력 + 러시아가 참여하는 전쟁)을 전후로 해서 휴거사건이 있을 것이고, 곡과 마곡의 전쟁 직후 적그리스도와 7년간의 평화 협약을 맺음으로 7년 대환난이 시작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중동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을 보면 종말의 Time Table이 어느 시점에 와 있는지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2. 자연의 재앙

감람산 강화(마24,25, 막13, 눅21)에서 예수님은 종말의 때가 되면 처처에 지진과 기근과 온역이 있을 것이고, 일월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우는 소리를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할 것(눅21:25)이라 하신다.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큰 자연의 재앙이 있을 것을 경고하고 있다.

 

마태복음 28장 8절에서는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고 소개하고 있다. 여기서 사용된 재난이라는 단어는 birth pain이라는 뜻이 있다. 산통(birth pain)은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까지 점점 강도가 세지고, 빈도가 잦아지는 특징이 있다. 마찬가지로 종말의 때에 찾아오는 자연의 재앙도 점점 그 강도가 세지고, 빈도가 잦아지다가 결국 예수님의 재림으로 끝나게 된다는 것이다. 요즘 한 번 비가 오거나 추위가 찾아오면 일기예보에서 ‘관측이래’ 최대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된다. 성경의 예언처럼 자연의 재앙이 점점 그 강도가 세지고 빈도가 잦아지는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이다.

3. 배도

성경에서 소개하고 있는 마지막 때의 교회의 모습은 결코 낙관적인 모습이 아니다.
감람산 강화에서 예수님은 교회 안에서 많은 거짓 선지자와 거짓 그리스도가 일어날 것이라 했고, 데살로니가후서 2장 3절에서 사도 바울은 종말의 때에 교회가 배도의 길을 갈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요한계시록 3장 14절에 소개된 라오디게아교회가 종말의 때에 나타날 교회의 모습이라면 이 말씀들도 결코 교회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지 않고 있다.

오늘날 성장지상주의에 빠진 많은 교회들이 진리인 말씀을 버리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세상의 철학들과 뉴에이지에 물든 신비적인 영성을 전파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바로 배도의 시대임을 깨닫게 된다.

4. 도덕적 타락

누가복음 17장에서는 종말의 때를 ‘노아의 때와 롯의 때’로 묘사하고 있다. 노아의 때, 롯의 때는 도덕적, 성적 타락이 극에 이른 때이다. 특히 롯의 때의 배경이 되고 있는 소돔성은 동성애가 만연한 도성이었다.
이런 소돔성은 여러 면에서 오늘날 화려한 도시들의 모습들을 많이 닮아 있다.
노아의 때와 롯의 때와 같은 시대인 것이다.

5. 과학 기술의 발달

다니엘서 12장 4절에서는 종말의 때가 되면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고 묘사하고 있다.
종말의 시대는 교통기술이 발달하고 정보지식 산업이 발달한 시대가 될 것임을 예견하는 말씀인 것이다.
요한계시록 13에서는 종말의 때가 되면 사람들을 감시하고 화폐의 기능을 대신할 수 있는 ‘표’가 등장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오늘날과 같이 과학 기술이 고도로 발달된 시대인 것이다.

6. 전쟁

“난리와 난리의 소문을 듣겠으며,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리라.”(마 24:6,7). 동서냉전의 시대가 끝나고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나라와 나라 민족과 민족 같의 분규가 큰 골칫거리가 되고 있다. 미국이 주도하고 있는 ‘테러와의 전쟁’과 현재 중동에서 일어나고 있는 내전들이 결국 또 다른 전쟁을 불러오게 될 것이다.

7. 세계정부의 등장

다니엘서 2장에 등장하는 철과 진흙이 섞인 발로 묘사되는 나라, 다니엘서 7장에서 묘사하고 있는 열 뿔을 가진 네 번째 짐승, 또 요한계시록 17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큰 성 바벨론’은 모두 주님이 재림하여 주의 나라(천년왕국)를 이 땅에 세우시기 전에 등장할 마지막 제국, 적그리스도의 나라를 설명하는 말씀들이다.

현재 전세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세계화’가 결국 세계정부의 탄생(New World Political Order)으로 이어질 것이고, 이 세계정부가 바로 적그리스가 다스리는 마지막 제국이 될 것이다.

이 모든 일들(성경에서 제시하는 7가지 지표들)이 되어지는 모습들을 보면서 성경이 예언한 ‘그 날’ 종말의 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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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재난

 

 

누가복음 21:10-11 /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지진이 있으리니
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부터 큰 징조가 있으리라.

2. 미혹(거짓선지자 출현)

 

 

<대표적 이단 목록>  -신천지 -구원파  -몰몬교  -하나님의 교회  -여호와의 증인 등

* 특징 :  교주가 존재함 ("내가 예수다")  /  물질강요와 성적 타락  /  열매(결실)가 좋지 못함.

데살로니가후서 2:11 /  이러므로 하나님이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마태복음 24:4~5  /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마태복음 24:11 /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3. 예수믿는 자의 박해

 

 마태복음 24:9~10 /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 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예수)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4. 불법이 난무하고, 사랑이 없음

 

마태복음 24:9~10 /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5. 돈과 자기사랑/ 교만함/ 하나님 비방/ 부모를 거역

 

디모데후서 3:1-2 /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6. 사람들간의 빠른 왕래/ 지식이 증가

다니엘 12: 4 /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 . 

7.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

 

마태복음 24:13~14 /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구원을 얻으리라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8. 종말에 일어날 일들

 

 

데살로니가전서 4:16-17 / 주께서 호령천사장의 소리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요한계시록 21:1-4 /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 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거(居)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哭)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베드로후서 3:10 /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땅덩어리)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요한계시록 6:7-8 /

네째 인을 떼실 때에 청황색 말이 나오고 그 탄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 했습니다. 그들은흉년사망땅의 짐승으로서 죽이더라

 

 

 

 

 

 

 
마태복음 24:13 /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 구원을 얻으리라"



예수의 피 & 금송아지 가루

 예수님의 피 바로 알기

이러한 진리를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는 또 다른 충격적인 예는 백성이 시내 산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함으로써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뒤에 이루어졌던 속죄 안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모세와 여호수아는 십계명을 받기 위해 사십 주야 동안 시내 산 위에 머물렀습니다.
그들이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자,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이 죽은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론에게 그들의 갈 길을 인도해 줄 신을 만들어 줄 것을 요구했고 그 결과 금송아지 상이 만들어졌습니다.
증언의 돌 판을 손에 들고 산에 내려왔을 때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미 하나님의 첫째가는 두 명령을 범하여 스스로 자신들을 하나님의 저주 아래 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피에 의한 속죄 이외의 그 어느 것도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닥칠 재앙을 막을 수 없음을 알았고 그래서 이 부분에서 이스라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독특한 희생을 드릴 것을 명령했습니다.

그는 백성들에게 이렇게 외쳤습니다.
너희가 큰 죄를 범하였고 따라서 죽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께 속죄를 드리겠다.
나는 과연 이것이 효과가 있을는지 알 수 없지만 너희가 구원을 받고 용서될 수 있도록 시도해 보겠다.
이 사건의 전말은 출애굽기 32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가 그들이 만든 송아지를 취하여 불에 태우고 그것을 부수어 가루로 만들어 물에 뿌려 이스라엘 자손이 그것을 마시게 하니라(출32:20).
이 기사로부터 우니는 모세가 금송아지를 취해 다음과 같이 했던 것을 발견합니다.

1. 먼저 그것을 녹였다.
2. 그 다음 그것을 가루로 만들었다.
3. 가루를 물에 뿌렸다.
4.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그것을 마시도록 했다.

신명기 9장에는 그 동일한 사건이 좀 더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너희 죄 곧 너희가 만든 송아지를 취하여 불로 태워 빻고 아주 작게 즉 티끌같이 작게 갈아 그 가루를 산에서 흘러내리는 시내에 뿌렸느니라(신 9:21).

우리는 신명기 9장 21절에서 모세가 행한 것을 좀 더 자세히 볼 수 있으며,

갈보리의 의미

이 금송아지에 대해 다음의 여섯 가지 사실이 언급되어 있음을 발견합니다.
1. 그는 그것을 녹였다.
2. 그는 그것을 찧었다.
3. 그는 그것을 갈았다.
4. 그는 그것을 다시 갈았다.
5. 그는 그것을 시내에 뿌렸다.
6. 그는 그것을 이스라엘 자손들이 마시도록 했다.
그 뒤에 그는 시냇물에서 물을 조금 떠다가 이스라엘의 죄로 인한 피의
속죄를 위해 하나님 앞에 드렸습니다.
화학에 관한 모세의 지식
이 기록에서 우리는 모세가 초자연적으로 주어진 화학 분야의 지식을
갖고 있었음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은 왜 모세가 금송아지를 가져다가
불에 녹여 찧고 빻아 물에 탔는지 의아하게 생각했었을 것입니다. 그 결과로
인해 만들어진 탁한 용액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대한 생생한
모형이 되었습니다. 화학에서 우리는 보통 세 종류의 혼합체를 다루게 됩니다.
그것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기계적 혼합물(A mechanical mixture) :

만일 제가 금속체인 금 한 조각을 물에 떨어뜨린다면 아무런 용액도 생기지 않습니다.
금은 물속에서 그대로 있습니다.
왜냐하면 순금 덩어리 자체는 물에서 녹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2. 현탁액 혹은 유상액(A suspension or emulsion) :

금속 매체의 매우 고운 가루는 다른 화학 물질이 첨가될 때 물속에서 뜰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용액이 아닙니다.
단지 고운 가루들이 물속에 유화되어 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용액이 아니며 부유물(emulsion)이라고 불립니다.

3. 화학적 용액(A chemical solution) :

만일 제가 설탕 한 숟가락을 취해 물 컵에 넣으면, 설탕은 혼합되지도 않고 유화되지도 않은 수용액이 되며, 그 결과로 무게는 증가하지만 부피는 별로 늘어나지 않습니다.
설탕은 녹아서 원자들이 물 안에 있는 원자 사이의 공간에 자리 잡게 되며 이것이 바로 용액입니다.

물에 녹지 않는 금

금은 비중이 19.5로서 물보다 열아홉 배나 무거우므로 결코 물속에서 녹을 수가 없습니다.
고운 가루 상태에서 금은 아교질의 상태(교상물질, 콜로이드)를 취하며 물에 첨가되면 용액처럼 보이는 색조를 띠게 됩니다.
입자들이 더 곱게 만들어짐에 따라 부피가 상당히 늘어나게 되고 결국 그 입자들은 물속에서 부유물로서 뜰 수 있는 ‘외견상’의 비중을 갖게 되며 - 즉 실제 비중은 변하지 않지만 고운 가루가 되어 물에 뜰 수 있게 됨 - 물이 어두운 적색을 갖게 만듭니다.
물속에서 ‘아교질 상태’에 있는 금은 입자의 크기가 10미크론(약 0.01mm)정도입니다.
또한 물과 1대 100,000의 비를 이루는 희석액을 이루게 될 때 그것은 빨간 장미 빛을 띠게 된다고 과학자들은 기록합니다.
이 같은 사실로부터 우리는 먼지만한 크기의 금가루가 물을 ‘피’와 같은 빛깔을 내게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최소한 이백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마실 만큼 충분한 양의 물을 핏빛으로 물들이기 위해 필요한 그 금송아지가 그리 크지 않아도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콜로이드 상태의 금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만들어질 수 있었지만, 모세가 이용했던 방법이 광야와 같은 환경 하에서는 최상의 것이었을 것입니다.
불에 태움으로써 금의 불순물이 제거될 수 있었습니다. 금의 유연성을 이용해서 그것을 찧으면 금박의 얇은 판을 형성할 수 있습니다.
금박은 아주 얇게 만들 수 있습니다.
금박 10만 장을 합쳤을 때 두께가 1cm 정도가 될 수 있도록 얇게 만들 수도 있으며 이것은 곧 0.00001mm 두께의 금박 종이를 만들었음을 의미합니다.
그 뒤 그 금박 종이를 가는 것은 매우 쉬운 일입니다.
그 기사는 계속해서 모세가 그것을 콜로이드 상태의 금 입자 크기가 되도록 즉 먼지처럼 가는 입자가 되도록 갈았음을 보여 줍니다.
이것을 시냇물에 뿌리자 물이 핏빛 같은 붉은 색을 띠게 되었습니다. 불순물이 태워져서 제거되었으므로 이 물은 전혀 독성이 없으며 병원균도 살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물은 피처럼 붉은색을 띠게 되었고 정결케 하는 특성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모형으로 꼭 들어맞는 것이었습니다.2)


* 자료출처 / 예수님의 피
file:///C:/Users/Victor/Downloads/62_%EC%98%88%EC%88%98%EB%8B%98%EC%9D%98%ED%94%BC%EB%B0%94%EB%A1%9C%EC%95%8C%EA%B8%B0.pdf



어버이주일


묵상 자료 / 12-06-2021(월) 
* 자료출처 - 사사기, 오늘의 묵상(2021 4/4분기

어긋난 모정(母情)  시스라의 어머니
사사기 5:28-31


28. 시스라
의 어미가 창문으로 바라보며 살창에서 부르짖기를 그의 병거가 어찌하여 더디 오는고 그의 병거 바퀴가 어찌하여 더디 구는고 하매
29. 그 지혜로운 시녀들이 대답하였겠고 그도 스스로 대답하기를
30. 그들이 어찌 노략물을 얻지 못하였으랴 그것을 나누지 못하였으랴 사람마다 한 두 처녀를 얻었으리로다 시스라는 채색옷을 노략하였으리니 그것은 수놓은 채색옷이리로다 곧 양편에 수놓은 채색옷이리니 노략한 자의 목에 꾸미리로다 하였으리라
31.  여호와여 주의 대적은 다 이와 같이 망하게 하시고 주를 사랑하는 자는 가 힘있게 돋음 같게 하시옵소서 하니라 그 땅이 사십년 동안 태평하였더라.

시스라(Sisera)
뜻 : 전장을 배열함

하솔 왕 야빈의 군대장관(삿 4:2). 드보라와 바락의 군사에게 패하여 달아나다가 야엘에게 암살되었다(삿 4:12-24). 그러나 다른 곳에는 시스라 자신이 독립한 왕인것 처럼 되어 있다(삿 5: 28, 30, 삼상 12:9).

* 시스라는 굽어진 모정을 교훈합니다.
내 아들이 소중하면 다른 자식들도 소중한 자녀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Grhard Tersteegen
게르하르트 터스티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당신의 은혜로운 임재를
우리 안에 새롭게 일깨워 주십시오
그리하여 인생의 순례 길을 가는 동안
우리 안에 평화와 진실함과 용기가
끊임없이 일어나게 하여 주십시오

당신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마음으로
당신을 굳세게 붙들게 하시고
당신에 대한 사랑이 식지 않게 해주십시오
그리하여 당신과 연합된 우리의 마음이
살든지 죽든지
우리가 하는 무슨 일에든지
항상 이어지게 해주십시오

우리에게
마음을 다해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십시오
마음 속에서 들리는
당신의 목소리를 듣게 해주시고
당신께서 주시는 경고를 묵살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보십시오.
우리의 가난한 마음을
당신께 제물로 드립니다.
오서서 당신의 지성소를 채워 주시고
그곳에 더러운 것이 들어가지 못하게 지켜 주십시오

오 사랑의 주님,
당신의 거룩한 영이 우리의 모든 영혼 속에 강같이 흐르게 하시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때까지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여 주십시오. 아멘.




어머니의 기도

이해인(1945-)


낡은 기도서와
가족들의 빛 바랜 사진
타다 남은 초가 있는
어머니의 방에 오면

철없던 시절의
내 목소리 그대로 살아 있고
동생과 소꿉놀이하며 키웠던
석류빛 꿈도 그대로 살아 있네

어둡고 고달픈 세월에도
항상 희망을 기웠던
어머니의 조각보와
사랑을 틀질했던
어머니의 손재봉틀을 만져보며

이제 다시
보석으로 주워담는
어머니의 눈물
그 눈물의 세월이

나에겐 웃음으로 열매 맺었음을
늦게야 깨닫고 슬퍼하는
어머니의 빈방에서
이젠 나도 어머니로 태어나려네



어머니의 기도

이 땅에는
오늘도
기도하는
어머니가 계십니다.

자식을 위해
눈물로 기도 드리는
어머니가 계십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
어머니가 계십니다.

오늘만이 아니라
영원까지 계속될
간절한 기도입니다.

(지산 고종만·시인, 전남 구례 출생)


어머니의 기도

캐리 마이어스

아이들을 이해하고
아이들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고
묻는 말에 일일이 친절하게
대답해 주도록 도와주소서.
면박을 주는 일이 없도록 도와주소서.

아이들이 우리를 공손히
대해 주기를 바라는 것같이
우리가 잘못을 저질렀다고 느꼈을 때
아이들에게 잘못을 말하고
용서를 빌 수 있는 용기를 주옵소서.

아이들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비웃거나 창피를 주거나
놀리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들의 마음속에
비열함을 없애 주시고
아이들에게 잔소리를
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어머니의 기도

너에게 내 몸을 굽힌다.
나의 사랑스러운 아이야, 어쩌면 이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있니? 이 작은 것아.
너는 많은 사람과 비슷하지만,
그러나 나는 분명히 믿는다.
너를 쳐다보지 않고 네 목소리만 듣고도
수천의 사람 가운데서 너를 알아볼 수 있고,
귀 기울이지 않아도 나의 젖가슴을 빠는
너의 입술을 알 수 있음을.
이 지상에서 너는 나의 유일한 존재니까...

나는 말 없이도 너를 이해하고,
큰소리 없어도
너는 깊은 잠에서 나를 깨운단다.
단지 하나의 눈빛과 하나의 소망으로.

나의 아이야, 너는 나의 인생에 진실하고도 유일한 진리란다.
너는 나에게 슬픈 기억이며, 다정한 그리움이며,
희망이요, 확신이란다.

아이야 행복하거라.
(야누쉬 코르착·폴란드 고아들의 아버지)


+ 어머니의 기도

어머니라는 특권에 대해
당신께 감사를 드립니다.

당신께 감사를 드립니다
당신 사랑을
아이들과 나눌 수 있는 은총에 대해.
그들에게 당신에게서 받은 생명을 나누고
그들을 돌보아서 성장시키고
옳은 길을 걷도록 교육시키며
그들에 대한
당신 사랑의 소중한 도구가 되는
이 황송한 은총에 대해
당신께 감사를 드립니다.

당신이 제게 두신 신뢰,
이 세상의 모든 보석보다 더 소중한
당신의 자녀들을 돌보도록
제가 맡겨놓으신 당신의 신뢰에 대해
당신께 감사를 드립니다.

저의 가족들에 대해
그리고 사랑으로 우리를 지원하는 모든 이에 대해
당신께 감사를 드립니다
매일, 우리가 받는 헤아릴 수 없는 선물들에 대해
특별히, 사랑하고 용서하며
서로를 돌볼 수 있는 힘을 주심에
당신께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소홀했던 시간들에 대해
당신께 용서를 청합니다
저의 약함과 배은망덕과 죄들을 용서하십시오.

당신은 결코 저를 눈밖에 두지 않으신다는 것,
당신은 말로 다할 수 없는 부드러우심으로
저의 사랑하는 아이들을 살피신다는 것을
늘 기억하게 해주십시오.
당신이 저의 창조주이시기에
제가 바로 저 자신인 모든 것
제가 사랑하는 모두가 당신의 선물입니다.
당신은 저의 아버지이시고
저의 구세주이시며, 저의 친구이십니다
그러기에
당신 사랑이 결코 저를 내버려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당신께 저의 신뢰를 둡니다
당신으로부터 저의 아이들을 받았사오니
당신께 그들과 그들의 미래를 맡겨드립니다.

당신 손의 보호 아래
저희를 지켜 주십시오.

더 이상 눈물이 없고
더 이상 분열도
악의 그림자도 없는
행복한 본향에 이를 때까지
저희를 인도하여 주십시오.
어머니의 사랑보다 더 커다란 사랑으로
당신이 마련하신 영원한 집에 이를 때까지.
(조만나스·신부)


+ 엄마인 자신을 주님께 바치는 기도

주님, 제 아이들에게
현명하고 선량한 어미가 되게 해주십시오.

아이들이 힘들고 지칠 때 제게 돌아와
쉴 수 있도록 늘 평화를 유지하게 해주시고
아이들이 분별력 없이 행동하거나
삶을 불성실하게 살아갈 때
엄격한 질책으로 바로잡을 수 있도록
강인함을 주소서

저는 실행하지도 않는 것들을
말로만 가르치지 않게 해주시고
제가 원하고 이루기를 바라는 바를 밀어붙여
아이들의 꿈을 짓밟지 않게 해주소서.

가족들에게는 평온함과 따뜻한 애정,
분별 있는 행동으로 울타리가 되게 하시고
이웃들에게는 나눌 수 있고
용서를 청할 수 있는
진실한 사람이 되게 해주소서.

주님, 제 가족만 감싸며 친지들의 아픔을
모른 척하지 않고 그들의 기쁨을 질투하지 않으며
우주와 세상을 껴안을 수 있는
품 넓은 어미가 되게 해주소서.
(미리암. H.·미국 생태 영성가이며 동화작가)


+ 어머니의 기도

천상에 계신 이여 나의 기도 들어주소서
그 사람을 사랑하니 그이를 내게 주소서
이 내 마음 진실하니 이 내 사랑 믿으소서
그이의 불행한 모든 허물을
목숨 다 바쳐 사랑하리니
도와주소서. 아직은 어둠 속에 울고 있나이다.

나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굽어보소서
내 가슴엔 그 사람의 이름만 가득합니다.
사랑으로 생긴 슬픔 내 것으로 받으리니
사랑을 맹세한 내 입술로는
세상 누구도 허물지 않으리
간청하오니 소중한 인연으로 살게 하옵소서.
(작자 미상)


+ 어머니의 기도

어머니는 칠순이 가깝도록 예수님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계절이 바뀔 때마다 양잿물로 박박박 문질러
반짝반짝 빛나는 놋그릇에 찰랑찰랑 맑은 물을 담아
장독대에 두고, 달 신에게, 산 신에게, 물 신에게
집 신에게 두 손이 닳도록 빌고 또 빌었습니다.

아버지 병고로 거동 못하실 때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빌고 또 빌었는데
아버지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떠나가셨습니다.

자식들이 말썽을 부릴 때도 기도를......
자식들이 돌아왔을 때도 기도를......
자식들이 하나, 둘 품을 떠날 때도 기도를......
아들이 수도원에 간다고 고집을 부릴 때도 눈물의 기도를
정화수에 담아 빌고 또 빌었습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더니, 당신의 생신도 잊고
지내는 수도원 아들 뭐가 그리 예쁜지, 아들 잘 살라고
예수님만 뺀 당신이 좋아하는
모든 신들에게 여전히 빌고 또 빌더니,

아들 종신서원 후, 보이지 않게 이끌어주신 분의
손길에 이끌려 세례를 받고...
일년에 한두 번 아들이 당신을 찾아올 때면,
잠든 아들 머리맡에 앉아 예수님, 예수님, 예수님....
이름만 부르며 기도를 합니다

어머니, 당신의 그 기도 덕분에 제가 자랐고,
어머니, 그 기도 덕분에 예수님을 나의 신부요,
신랑으로 삼고 살아갑니다.
어머니의 기도는 당신 품안에서 먹던 젖처럼
제 푸근한 양식입니다.

그때에도, 또 지금도 한결같이......
어머니 사랑합니다.
(이봉하 디모테오·수사)






어머니

 이 해 인


당신의 이름에선
색색의 웃음 칠한
시골집 안마당의
분꽃 향기가 난다

안으로주름진 한숨의 세월에도
바다가 넘실대는
남빛 치마폭 사랑

남루한 옷을 겇친
나의 오늘이
그 안에 누워 있다

기워 주신 꽃골무 속에
소복히 담겨 있는
幼年의 추억

당신의 가리마같이
한 갈래로 난 길을
똑바로 걸어가면

나의 연두 갑사 저고리에
끝동을 다는
다사로운 손길

까만 씨알 품은
어머니의 향기가
바람에 흩어진다.





사랑하는 까닭

- 한용운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홍안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백발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그리워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디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미소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눈물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기다리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건강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죽음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바보 천사

- 김원석(아동문학가)

알면서도
모르는 척

듣고도
못 들은 척

보고도
못 본 척

좋아도
안 좋은 척

맛있어도
맛없는 척

엄마는
엄마는
그렇게
키웠다.


히말라야의 노새
- 박경리(소설가, 1926-2008)


히말라야에서
짐 지고 가는 노새를 보고
박범신은 울었다고 했다
어머니!
평생 짐을 지고 고달프게 살았던 어머니
생각이 나서 울었다고 했다

그때부터 나는 박범신을
다르게 보게 되었다
아아
저게 바로 토종이구나




어머니
- 한하운(1920-1975)

어머니
나를 낳으실 때
배가 아파서 울으셨다

어머니
나를 낳으신 뒤
아들 뒀다고 기뻐하셨다

어머니
병들어 죽으실 때
날 두고 가는 길을 슬퍼하셨다.

어머니
흙으로 돌아가선
말이 없는 어머니.


 밥
- 이무원(1942-)

어머니 누워 계신 봉분(封墳)
고봉밥 같다

꽁보리밥
풋나물죽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픈데
늘 남아도는 밥이 있었다

더 먹어라
많이 먹어라
나는 배 안 고프다
남아돌던
어머니의 밥

저승에 가셔도 배곯으셨나
옆구리가 약간 기울었다

어머니
- 정한모(1923-1991)

어머니
지금은 피골만이신
당신의 젖가슴
그러나 내가 물고 자란 젖꼭지만은
지금도 생명의 샘꼭지처럼
소담하고 눈부십니다.

어머니
내 한 뼘 손바닥 안에도 모자라는
당신의 앞가슴
그러나 나의 손자들의 가슴 모두 합쳐도
넓고 깊으신 당신의 가슴을
따를 수 없습니다.

어머니
새다리같이 뼈만이신
당신의 두 다리
그러나 팔십 년 긴 역정(歷程)
강철의 다리로 걸어오시고
아직도 우리집 기둥으로 튼튼히 서 계십니다.
어머니!


어머니
- 조태일(1941-1999)

어머니

열일곱에 시집오셔
일곱 자식 뿌리시고
서른일곱에
남편 손수 흙에 묻으신 뒤,

스무 해 동안을
보따리 머리에 이시고
이남 땅 온 고을을
당신 손금인 양 뚝심으로 누비시고
훤히 익히시더니,

육십 고개 넘기시고도
일곱 자식 어찌 사나
옛 솜씨 아슬아슬 밝히시며
흩어진 자식 찾아
방방곡곡을 누비시는 분.

에미도 모르는 소리 끄적여서
어디다 쓰느냐 돈 나온다더냐
시 쓰는 것 겨우 겨우 꾸짖으시고,

돌아앉아 침침한 눈 비비시며
주름진 맨손바닥으로
손주놈의 코를 행행 훔쳐주시는 분.

(조태일·시인, 1941-1999)


+ 어머니, 나의 어머니

내가 내 자신에게 고개를 들 수 없을 때
나직이 불러본다 어머니
짓무른 외로움 돌아누우며
새벽에 불러본다 어머니
더운 피 서늘하게 거르시는 어머니
달빛보다 무심한 어머니

내가 내 자신을 다스릴 수 없을 때
북쪽 창문 열고 불러본다 어머니
동트는 아침마다 불러본다 어머니
아카시아 꽃잎 같은 어머니
이승의 마지막 깃발인 어머니
종말처럼 개벽처럼 손잡는 어머니

천지에 가득 달빛 흔들릴 때
황토 벌판 향해 불러본다 어머니
이 세계의 불행을 덮치시는 어머니
만고 만건곤 강물인 어머니
오 하느님을 낳으신 어머니
(고정희·시인, 1948-1991)  


+ 어머니  

그럭저럭 견딜 만한
인생살이 같다가도

세상살이가 힘겨워
문득 쓸쓸한 마음이 들 때

나지막이 불러보는
세 글자





당신의 그 여린 몸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지어낸

이 몸
이 소중한 생명이기에

꽃잎 지듯
쉽게 무너질 수는 없어요
(정연복·시인, 1957-)


+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하루 종일 밭에서 죽어라 힘들게 일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찬밥 한 덩이로 홀로 대충 부엌에 앉아 점심을 때워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한겨울 냇물에서 맨손으로 빨래를 방망이질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배부르다, 생각 없다, 식구들 다 먹이고 굶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발뒤꿈치 다 헤져 이불이 소리를 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손톱이 깎을 수조차 없이 닳고 문드러져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화내고 자식들이 속 썩여도 전혀 끄떡없는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외할머니가 보고싶다 외할머니가 보고싶다 그것이 그냥 넋두리인 줄만

한밤중에 자다 깨어 방구석에서 한없이 소리 죽여 울던 어머니를 본 후론
아! 엄마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심순덕·시인, 강원도 평창 출생)


+ 나에게 만일

나에게 만일 좋은 점이 있다면
그건 아버지를 만났기 때문이다

내게 부족한 게 있다면
그 아버지 만난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이승신·시인)


+ 아비
    
밥 대신 소금을 넘기고 싶을 때가 있다
밥 먹을 자격도 없는 놈이라고
스스로에게 다그치며
굵은 소금 한 숟갈
입 속에 털어넣고 싶을 때가 있다
쓴맛 좀 봐야 한다고
내가 나를 손보지 않으면 누가 손보냐고
찌그러진 빈 그릇같이
시퍼렇게 녹슬어 있는 달을 올려다보며
내가 나를 질책하는 소리,
내 속으로 쩌렁쩌렁 울린다
이승이 가혹한가,
소금을 꾸역꾸역 넘길지라도
그러나 아비는 울면 안 된다
(김충규·시인, 1965-)


+ 아버지의 등을 밀며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아들을 데리고 목욕탕엘 가지 않았다
여덟 살 무렵까지 나는 할 수 없이
누이들과 함께 어머니 손을 잡고 여탕엘 들어가야 했다
누가 물으면 어머니가 미리 일러준 대로
다섯 살이라고 거짓말을 하곤 했는데
언젠가 한 번은 입 속에 준비해둔 다섯 살 대신
일곱 살이 튀어나와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나이보다 실하게 여물었구나, 누가 고추를 만지기라도 하면
어쩔 줄 모르고 물 속으로 텀벙 뛰어들던 목욕탕
어머니를 따라갈 수 없으리만치 커버린 뒤론
함께 와서 서로 등을 밀어주는 부자들을
은근히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곤 하였다
그때마다 혼자서 원망했고, 좀 더 철이 들어서는
돈이 무서워서 목욕탕도 가지 않는 걸 거라고
아무렇게나 함부로 비난했던 아버지
등짝에 살이 시커멓게 죽은 지게자국을 본 건
당신이 쓰러지고 난 뒤의 일이다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까지 실려온 뒤의 일이다
그렇게 밀어 드리고 싶었지만, 부끄러워서 차마
자식에게도 보여줄 수 없었던 등
해 지면 달 지고, 달 지면 해를 지고 걸어온 길 끝
적막하디적막한 등짝에 낙인처럼 찍혀 지워지지 않는 지게자국
아버지는 병원 욕실에 업혀 들어와서야 비로소
자식의 소원 하나를 들어주신 것이었다
(손택수·시인, 1970-)


+ 아버지의 안경

무심코 써 본 아버지의 돋보기
그 좋으시던 눈이
점점 나빠지더니
안경을 쓰게 되신 아버지,
렌즈 속으로
아버지의 주름살이 보인다.

아버지는
넓고 잔잔한 바다 같은 눈으로
자식의 얼굴을 바라보신다.

그 좋으시던 눈이 희미해지고
돋보기 안경을 쓰시던 날
얼마나 가슴 찡하셨을까.

돋보기 안경을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아버지의 주름살이
자꾸만 자꾸만
파도가 되어 밀려온다.
(이탄·시인, 1940-)


+ 아버지의 밥그릇  

언 발, 이불 속으로 밀어 넣으면
봉분 같은 아버지 밥그릇이 쓰러졌다
늦은 밤 발씻는 아버지 곁에서
부쩍 말라가는 정강이를 보며
나는 수건을 들고 서 있었다
아버지가 아랫목에 앉고서야 이불은 걷히고
사각종이 약을 펴듯 담요의 귀를 폈다
계란부침 한 종지 환한 밥상에서
아버지는 언제나 밥을 남겼고
우리들이 나눠먹은 그 쌀밥은 달았다
이제 아랫목이 없는 보일러방
홑이불 밑으로 발 밀어 넣으면
아버지, 그때 쓰러진 밥그릇으로
말없이 누워 계신다
(안효희·시인, 1958-)


+ 한 벌의 양복

한 벌의 그가 지나간다
그는 늘 지나가는 사람  
늘 죄송한 그가
늘 최소한의 그가  
목이 없는 한 벌의 양복이
허공에 꼬치 꿰인 듯
케이블카처럼 정확한 구간을 지키듯
신호등을 지나 빵집을 지나
장미연립을 지나
가끔 양복 속의 목을 꺼내    
카악- 가래를 뱉기도 하며
한 벌의 양복으로 지나간다
대주 연립 206호 앞에서 양복이 멈췄다
길게 초인종을 눌렀으나 대답이 없었다    
양복이 열쇠를 비틀어 철문 한 짝을 떼어내자
철문 속에 안전하게 보관된 가족들이
TV를 켜놓고 웃고 있었다
가족들이 양복을 향해 엉덩이를 조금 떼더니
이내 TV 속으로 빠져들었다  
양복이 조용히 구두를 벗었다
한 벌의 그가 양복을 벗었다
모든 것을 걸어두고 나니
그저 그런 늙은 토르소에 지나지 않았다
한 벌도 아닌 양복도 아닌 아무것도 아닌 그가
어두운 식탁에서 최대한의 정적을 식사한다
(손순미·시인, 1964-)


+ 저녁식사 풍경

어금니 반쯤은 빠지고
남은 이도 흔들리기 때문에
좋아하는 총각김치를 와드득
깨물어 먹지 못하는 아버지
맛있는데 맛있는 건데
허탈하게 말하며, 그 총각무같이
씁쓸한 웃음을
흐흐흐 흐흐흐
며느리는 총각김치를 맛있게 먹다가
잠시 입맛을 잃었고
아버지는 왜 안 먹냐며
자꾸 권했다
맛있어, 먹어봐 먹어
흐흐흐 흐흐흐

우린 간신히 밥숟가락을 들었다 내려놓았다
음식의 氣만 빨아먹는 귀신같이
헛것을 먹고 있는 아버지의 웃음
어느새 그에게도 죽음의 힘이 스몄구나
오싹한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내렸다
아무도 우겨넣은 밥을 넘기지 못했다
(윤의섭·시인, 1968-)


아버지와 숫돌
- 백영호(1955-)

아버지는 날마다
소먹이는 꼴을 베어내는
낫을 숫돌에 가셨다
아버지가 낫을 가실 때는
수도승처럼 보였다

울 아버지는
너무나 진지하고 엄숙하게
얼굴에 땀방울 쏟으시며
정성 다해 힘을 들여 낫을 가시는 것을
어째서 그리도 반복하시는 것일까

가끔은 빼먹어도 되고
며칠은 아니 갈아도 되실 텐데
아버지는 하루도 빠짐없이
낫을 가셔서 푸른 날을 세우셨다

이제
저 멀리 북간도보다도 머나먼
피안의 세계에서 안식하시는 아버지
그리워 할 적마다
내 눈가에 숫돌이 보인다

숫돌은 스스로 자기 몸을 헐어서
낫의 푸른 날을 살렸고
아버지는 스스로 당신 몸을 갈아서
튼튼한 울타리를 치신 뒤

숫돌에 낫을 매일 가시듯
하루도 빠짐없이 자식들 향해
지금도 사랑스런 웃음 띄어 지켜보신다



아버지
- 이문조

아버지는
아무리 힘이 들어도
힘들다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당연히 힘들지 않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아파도 아프다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당연히 아프지 않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돈이 없어도 돈 없다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항상 돈이 많은 줄 알았습니다

이제
내가 아버지 되어보니
우람한 느티나무처럼
든든하고
크게만 보였던
아버지
그 아버지도

힘들 때가 있다는 것을
아플 때가 있다는 것을
돈 없을 때도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가장이니까
가족들이 힘들어할 까봐
가족들이 실망할 까봐

힘들어도
아파도
돈 없어도
말을 못했을 뿐이었습니다



어버이주일

레위기 19:32
너는 센 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인간에게는 자신을 이 세상에 존재(存在)하게 만들어준 두 주체로서 무조건적으로 순종하여야 할 대상이 둘 있다.
이 두 주체가 없었다면 인간은 그 누구도 세상에 태어나 살아갈 길이 없다.
그것은 바로 천지 만물을 지으신 여호와 하나님과 오직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살과 피를 나에게 나누어 주심으로 나를 낳고 키워주신 부모님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세시며 우리를 끝없이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시는 사랑으로 우리를 돌보신다.
또한 부모님도 이 땅에서는 더 이상 찾을 길 없는 헌신으로 우리를 낳고 키워 주신다.
따라서 인간은 그분들이 나에게 갖는 존재론적 의미와 아울러 그분들이 자신에게 쏟아주신 사랑으로 인하여 그 분들께 복종하여야 하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늙고 죽기 마련이다.
그리고 노년기(老年期)에는 영육이 약해지기 마련이다.
따라서 자식된 자는 부모님의 은혜를 십분지 일이나마 보답하는 기회로서, 나아가 자신의 자녀들에게 본을 보이기 위해서도 부모님을 기리고 봉양하여야 한다.
성경도 거듭하여 효도(孝道)와 순종의 당위성 및 그에 따른 상급을 하나님의 직접적 계명으로 규정하고 있다(출 20:12; 엡 6:1-3).

어버이의 날을 정하여 부모의 은혜를 새삼 기리고 부모께 대하 자녀로서의 자신의 태도를 정기적으로 점검하는 절기가 교회에 있는 것은 매우 선한 전통이라 하겠다.
물론 일년 365일 부모를 기려야 하겠지만 이 날을 기점으로라도 부모께 대한 자세를 새로이 가다듬어야 하겠다.

어버이 주일의 원래 명칭은 어머니 주일이었다.
왜냐하면 그 본래 취지가 아래 유래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돌아가신 어머니를 추모하며 어머니의 은혜를 되새기기 위한 날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머니와 더불어 부모로서 아버지의 역할과 은혜도 항상 기억해야 될 것이므로 이날을 어버이 주일로 부르는 것은 타당하다 할 수 있다.

어머니 주일이 어버이 주일로 바꾸어진 유래

어버이 주일은 본래 어머니 주일이라는 명칭으로 미국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미국 버지니아 주에 있는 웹스터 교회에는, 이 교회 주일 학교에서 26년간이나 꾸준히 봉사해 온 자비스(Jarvis)라는 부인이 있었다.
훌륭한 주일학교 교사였던 그녀가 나이들어 세상을 떠나게 되었는데, 그녀의 가르침을 잊지 못한 제자들이 선생님인 자비스 부인을 기념하기 위한 추도식을 갖기로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멀리 사는 자비스 부인의 딸을 추도식에 초청했다.
뜻밖의 소식을 접한 자비스 부인의 딸 안나는 기쁜 마음으로 그 초대에 응했다.
추도식이 있던 날, 식순의 하나로 안나에게 어머니인 자비스 부인에 대하여 이야기할 기회를 주었다.
그때 안나는 그녀의 어머니인 자비스 부인이 주일학교 학생들에게 제 5계명인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성경 말씀을 가르치면서 어머니의 위대한 사랑에 감사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늘 생각해 보라고 했던 것에 대하여 말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어머니를 생각하며 카네이션 꽃을 추도식 제단에 바쳤다.
추도식에 모였던 사람들은 자비스 부인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실천하는 안나의 말과 태도에 크게 감동을 받았다.
그래서 추도식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이 날을 어머니의 사랑을 기리는 날로 정할 것을 그 자리에서 결의 하였다.

이를 계기로 시작된 어머니 날 운동은 특히 부인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다른 지역으로 퍼져 나갔다.

백화점 왕으로 불리는 존 와너메이커도  이 운동의 취지에 적극 동의하여 그 활동을 도왔다.
그는 1908년 5월 둘째 주일에 자신이 경영하는 백화점에서 어머니의 사랑에 감사하는 모임을 주최하기도 했다.

미국 역사에 있어서 험난했던 시대의 어머니들은 지혜와 용기로 가정 생활을 이끌어 감으로 현재의 미국을 이룩하는데 큰 힘이 되었었다.
따라서 미국인들에게 '어머니 날' 운동은 금새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회 여론이 형성되자 1914년 미국 국회는 5월 둘째 주일을 어머니 주일로 정하여 이 날을 기념일로 지키기로 결정하였다.
어머니 주일은 그후에 가정에서의 아버지의 역할 또한 중요함이 강조되면서 그 명칭이 어버이 주일로 바뀌어 현재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지켜지고 있다.

한국에서 어버이 주일이 지켜지기 시작한 것은 1930년 6월 15일 구세군에 의해 어머니 주일을 지키면서부터 였다.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 대통령은 어머니 주일의 정신을 일반 대중에게도 전한다는 의미에서 5월 8일 (1955년 당시 어머니 주일)을 어머니날로 제정, 공포하였다.

그후 교회에서는 1960년 어머니 주일을 어버이 주일로 개칭하여 어머니뿐 아니라 아버지의 은혜도 기리는 날로 삼았으며 그 이후 1974년에 이르러 정부에서도 어머니 날을 어버이 날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우리나라에서는 어버이 주일은 일반인들의 기념일로 함께 지켜지고 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에베소서 6:1-3)   

 

십계명의 제 1계명부터 제 4계명까지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계명이며 제 5계명부터 제 10계명까지는 인간과의 관계에 적용되는 계명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관련된 계명 다음으로, 인간과 관련된 계명중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입니다. 이러한 제 5계명의 위치는 육신의 부모에 대한 공경, 즉 효도의 중요성을 잘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효(孝)가 왜 중요한지 말씀을 통해 살펴보도록 합시다.

 

  ① 하나님의 명령입니다(1절) -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부모에 대한 순종은 곧 이를 명하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② 인간의 도리입니다(2절) - 자신을 낳아주고 길러 주신 부모님께 순종하며 효도하는 것은 가지가 그 가지를 낸 뿌리, 즉 그 근본을 인정하는 것으로서 이는 인간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③ 가정과 사회 질서의 기초가 됩니다(3절) - 부모님 뿐 아니라 나아가 모든 웃어른을 공경하는 것은, 위와 아래를 명백히 구분하여 인정하는 것으로 이는 가정과 사회의 질서를 세우는 기초가 됩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에게 부모님을 공경하라고 명령하시면서 이와 더불어 이 말씀에 순종하면서 장수와 풍요의 축복을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나 요즘 많은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면서 부모님께 대한 효도를 소홀히 하고 있습니다. 나 자신은 진정 어떻게 부모님께 대해왔는지 반성해 봄과 동시에 진정 우리를 낳아 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의 은혜에 깊이 감사하는 마음을 갖기를 다짐하는 어버이 주일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효심(누가복음 2:51-52)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몸을 통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극히 높으신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처럼 지극히 높으신 신분을 가지셨으나 한낱 피조물에 불과한 육신의 부모를 공경하였습니다. 성경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부모님을 어떻게 섬기셨는지 살펴 보도록 합시다.

 

  ① 순종하며 받드셨습니다(눅 2:51) - 예수님은 모든 행위에 있어 부모님의 권위를 인정하며 섬기는 자세를 보이셨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가나 혼인 잔치에서 자신을 드러낼 때가 이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요구에 응하여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첫 번째 이적에서도 잘 드러납니다(요 2:3-8)

  ② 끝까지 보살피셨습니다(요 19:26,27) -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는 순간까지도 어머니를 염려하여 당신 대신 어머니를 돌봐줄 것을 제자 요한에게 부탁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자식으로서 행할 봉양의 의무를 죽는 그 순간까지 생각하셨습니다.

 

  당신은 혹 당신의 부모님이 못 배우고, 권력이나 명예가 없다고 해서 무시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인류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은 영적인 구속 사역의 바쁘신 중에도 육신의 부모님도 잘 섬기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을 본받아 열심히 부모님을 섬기며 자신의 생각이나 주관만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 말씀에 순종하며 봉양하는 자녀가 되도록 합시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삼상 1:1-28)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요 대선지자로서 이스라엘 왕정 시대 초기의 위대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섬겼으며 죽는 그날까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충성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위대한 사무엘 뒤에는 그의 어머니 한나가 있었습니다. 하나가 기도의 응답으로 사무엘을 갖게 되고, 그를 하나님께 바치는 과정을 통해 과연 위대한 인물의 어머니의 모습은 어떠했으며, 자녀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본문을 통해 살펴보도록 합시다.

 

  ① 인내하는 사람이었습니다(6-8절) - 한나에게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런 그녀를 괴롭히는 브닌나로 인하여 그녀는 많은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한나는 쉽게 요동하여 대적하지 않고 끝까지 인내했습니다.

  ②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10,11절) - 고통과 괴로움 속에서 한나는 더욱더 열심히 하나님을 찾았으며 자식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며 서원했습니다.

  ③ 실천하는 사람이었습니다(26-28절) - 마침내 기도의 응답으로 사무엘을 갖게 되었고, 사무엘을 낳자 하나님께 바치기로 서원하였던 것을 주저함 없이 실천하였습니다.

 

  어머니 한나의 이러한 영향으로 사무엘은 인내할 줄 아는 강한 사람, 하나님과 깊이 교제를 나누는 신실한 사람, 하나님의 명령을 실천하는 행동하는 사람으로 자라났습니다. 부모된 우리의 모습은 알게 모르게 자녀에게 많은 영향을 줍니다. 우리 또한 한나와 같은 바람직한 신앙인의 모습을 갖추어 자녀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는 부모가 됩시다. 

(1) 부모의 의무

  •   자녀를 양육함(골 3:21)
  •   자녀를 교육함(신 6:7; 잠 22:6)
  •   자녀를 훈계함(잠 23:13)
  •   자녀의 잘못을 징계함(잠 13:24)
  •   자녀를 위로함(사 66:13)
  •   자녀를 다스림(딤전 3:4)
  •   자녀를 사랑함(딛 2:4)

 

(2) 자녀의 의무

  •   부모님께 순종함(창 28:7)
  •   부모님을 공경함(출 20:12)
  •   부모님을 기쁘게 함(잠 15:20)
  •   부모님을 사랑함(창 46:29)
  •   부모님을 돌봄(창 45:9-11)
  •   부모님의 은혜에 보답함(딤전 5:4)

 

(3) 자녀에 대한 부모의 영향

 

    1. 좋은 영향

  •   바른 행위의 본을 보임(왕상 9:4)
  •   신앙의 본을 보임(대하 17:3,4)
  •   정직의 본을 보임(대하 24:4)

 

    2. 악한 영향

  •   악행의 본이 됨(왕상 22:52)
  •   자식을 꾀어 악한 길로 행하게 함(대하 22:2,3)
  •   세상 풍속을 쫓음(엡 2:2)
  •   우상 숭배의 본이 됨(렘 9:14; 겔 20:18)
  •   불순종의 본이 됨(암 2:4)

 

(4) 자녀 교육의 바른 자세

  •   자녀는 하나님이 준 선물이라는 인식을 가짐(시 127:3)
  •   어렸을 때부터 교육시켜야 함(출 2:7-9)
  •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해야 함(잠 22:6,15)
  •   부지런히 가르침(신 4:9)
  •   항상 언제든지 가르침(신 11:19)
  •   사랑의 채찍으로 가르침(신 11:19)
  •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만 하지 않음(행 20:32)
  •   자발적으로 주님을 따르도록 가르침(요 6:60-71)
  •   먼저 믿음의 본을 보여줌(딤후 1:5)

 

(5) 부모의 징계

  •   행할 바를 알게 함(잠 22:6)
  •   자녀의 미련을 쫓아냄(잠 22:15)
  •   자녀의 영혼을 구원케 함(잠 23:13,14)
  •   자녀의 유익을 위해 필요함(히 12:8-10)
  •   주의 교양과 훈계로 함(엡 6:4)
  •   악한 마음으로 하면 안됨(잠 19:18)
  •   노엽게 해서는 암됨(골 3:21)
  •   생명의 길로 인도함(잠 10:17)

 

(6) 부모의 징계에 대한 자녀의 자세

  •   훈계를 지켜 행함(잠 13:18)
  •   명철을 얻기에 주의함(잠 4:1)
  •   업신여기지 않음(잠 15:4)
  •   귀 기울여 들음(잠 23:12)

 

(7) 부모의 잘못

  •   편애(창 25:28)
  •   허영(에 5:11)
  •   자녀의 죄를 방치함(삼상 3:13)
  •   자녀를 노엽게 함(엡 6:4)

 

(8) 성경의 가정관

  •   하나님이 세우신 제도(창 2:22-25)
  •   사회의 기본 단위(수 13:15-31)
  •   생명과 출산과 보호처(창 1:22)
  •   자녀 양육의 터전(신 6:6-9)
  •   신앙 교육의 터전(신 4:9)
  •   기쁨과 안식의 처소(시 128:3)
  •   노년의 의지처(딤전 5:8)

 

(9) 성경에 나타난 부모의 실례

  •   믿음의 아버지 아브라함(창 18:18,19)
  •   자식을 편애한 부모 이삭과 리브가(창 25:28)
  •   경솔히 맹세한 아버지 입다(삿 11:30-39)
  •   거룩한 어머니 한나(삼상 1:19-28)
  •   엄하지 못한 아버지 엘리(삼상 2:22-25;29)
  •   자식을 잃고 비통해하는 아버지 다윗(삼하 18:32,33)
  •   정직히 행한 요담의 아버지 웃시야(대하 27:2)
  •   딸에게 살인을 시킨 어머니 헤로디아(마 14:8)
  •   자식을 용서한 탕자의 아버지(눅 15:17-24)

 

(10) 효를 행한 자녀의 실례

  •   식물을 주어 공궤(供饋)한 요셉(창 47:12)
  •   환난중에 가족을 피신시킨 다윗(삼상 22:3,4)
  •   모친을 위해 자리를 베푼 솔로몬(왕상 2:19)
  •   부모에게 먼저 예의를 갖춘 엘리사(왕상 19:20)
  •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한 요나답의 아들(렘 35:8)
  •   부모님께 순종하며 받든 예수(눅 2:51)

 

(11) 노인을 공경해야 할 이유

  •   하나님의 권위를 나타내는 자이기 때문임(레 19:32)
  •   연약한 자이기 때문(신 28:50)
  •   성숙한 지혜를 나타내는 자이기 때문임(왕상 12:6-8)
  •   하나님을 경화하는 삶을 산 자이기 때문임(시 34:11-14)
  •   의로운 길을 걸어온 자이기 때문임(잠 16:31)
  •   후손들을 돌본 자이기 때문임(딤전 5:4)
  •   영적 교훈을 가르쳐 주는 자이기 때문임(딤후 1:5)
  •   먼저 하늘나라에 들어갈 자이기 때문임(벧후 1:12-15)  

                                                                        






어린이주일


어린이주일

05-01-2022(어린이주일 설교)

어린 아이의 일을 버리자(고린도전서 13: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도입 이야기)

아프리카 속담에 “아이를 키우는 데는 마을 하나가 필요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모만 자녀를 키우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들은 사회적 존재로 자랍니다.
온 사회가 관심을 가지고 자신의 자녀처럼 키워야 합니다.
아이 하나를 키우려면 온 교회가 나서야 합니다.
어른들이 나서서 신앙적으로 모범이 되고 인격적으로 깨우쳐 주어야 합니다.

(도입 이야기)

1889년 두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한 아이는 오스트리아인 부부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그들은 사촌 남매였기 때문에 불법 부부였습니다. 아버지는 몹시 성미가 급했고, 어머니는 주부로서의 일이나 엄마로서의 일에는 흥미가 없고, 바깥 사교 생활에만 흥미를 느껴 나다니기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아버지는 죽고 어머니는 이 아이를 알코올 중독자인 숙모에게 맡기고 달아났습니다.

16세가 된 소년은 학교를 중퇴하고 가출했습니다. 그는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연명하다가, 결국 독일 군대에 들어갔습니다. 제 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이 패전한 후, 그는 정치계에 투신하여 극렬 분자가 되었습니다. 반란 음모에 참여했다가 투옥되어 다시는 정치계에 나서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고, 감형 출옥의 혜택을 받았으나 더욱 맹렬히 정치 활동을 했고, 결국 1933년에 독일 국민의 절대 영도자인 총통이 되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아돌프 히틀러였고, 그로 인해 독일과 전세계가 전쟁에 휘말렸고, 그 후 오늘날까지도 수많은 인류가 이 아이가 내뿜은 독기의 후유증을 앓고 있습니다.

1889년에 다른 한 아이가 미국 텍사스에서 태어났습니다. 이 소년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을 흡족히 받으며 자라났습니다. 부모는 이 아이를 데리고 캔자스 농촌으로 이사했는데, 그 이유는 농촌 생활이 아이의 신앙 교육에 유익하리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소년에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가훈을 전해 주었고, 가족 모두가 교회의 가장 적극적인 봉사자로서 이름이 높았습니다. 소년은 어른으로 성장해서도 어머니의 두 팔에 안겨 간곡하게 기도하던 매일 저녁의 일과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이 소년도 군대에 흥미를 느끼고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1944년 이들 두명의 동갑내기는 전투에서 대면하였습니다.
11개월에 걸쳐 히틀러는 연합군 사령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와 싸웠습니다.
패전한 히틀러는 1945년 4월 30일 지하 방공 대피소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이 소식을 접한 전세계는 박수 갈채를 보냈습니다.
한편 아이젠하워는 1969년 80세에 평화롭게 눈을 감았고, 그의 죽음을 전세계가 애석해 했습니다.

이 두 동갑내기 아이의 이야기는 부모들의 신앙과 불신이 아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 가를 웅변적으로 증명해 줍니다






파트리스교회 공동체가 관심을 갖고 기도해야 할 어린이들은 이현호, 김은미, 김유미, 김태오 모두 4명 입니다.
어린이주일을 맞이하여 교회에서 어린이들에게 20불씩 현금으로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이렇게 선물을 현금으로 준비한 것에는 그 목적과 이유가 있습니다.

20불씩을 아이들에게 건네주며 반드시 가르쳐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십일조 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

어린아이들이 용돈을 받을 때 그 용돈에서 십일조를 바칠 수 있는 신앙훈련을 반드시 가르쳐야 합니다.
이렇게 훈련받지 않으면 훗날 성인이 되었을 때 십일조 신앙에 든든히 세워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왜 십일조일까?
공수부배원들이 높은 고공에서 낙하산을 타고 하강하기 위하여 점프하는 훈련장의 타워 높이가 10미터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인간이 높은 곳에 대한 공포심이 최고로 극대화 되는 높이가 11미터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10미터 타워 위에 올라서면 사람의 키가 있기 때문에 최고의 공포심을 갖게 된다고 합니다.
10미터에서 뛰어내리는 연습을 보통 300회 정도 반복하다보면 몸에 자연스럽게 익숙해져서 아무리 높은 고공에서도 두렵지 않다고 합니다.

어린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이와 같은 흔련을 잘 받으면 성인이 된 후에도 결코 흔들림이 없는 신앙의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어린이주일을 맞이하여 교회에서 20불을 선물로 주었는데 20불을 받았으면 제일 먼저 어떻게 해야 할까?
이렇게 질문하시기 바랍니다.
어린아이들이 각자 자기 의견을 이야기 할 때 그것도 중요하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십일조를 바치는 것이라고 가르쳐야 합니다.
이런 훈련은 아이들에게 매우 유익한 신앙훈련이 될 것입니다.
만일 어린 아이의 이름으로 십일조를 바치면 교회학교에서 다른 아이들도 보고 듣고 배울 것입니다.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세 통의 편지를 남겼다고 합니다.
그런데 첫번째 서신은 전해지지 않고 두번째 편지 고린도전서, 세번째 편지 고린도후서라고 합니다.
고린도전서와 후서는 고린도교회가 신앙의 갈등을 갖고 분쟁할 때 이 분쟁을 해결하려고 보낸 편지입니다.
교회의 문제는 신앙의 대상이 되는 예수님의 문제가 아닙니다.
교회의 문제는 예수를 믿는 교인들의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교인은 누구인가를 설명하려고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육체에 속한 사람(自然人)
둘째는 육신에 속한 사람(信仰人)
셋째는 성령에 속한 사람(聖靈人)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려야 한다는 것은 "육신에 속한 사람"이 "성령에 속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성령에 속한 사람이 되려면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장에서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려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1. 말하는 것
 2. 깨닫는 것
 3. 생각하는 것

유치(幼稚)하다
: 수준이 낮거나 미숙하다.
 - 유치한 언어와 유치한 행동 

어린아이의 일을 버리려면 몇 가지 변화가 필요합니다.

첫째는 음식의 변화

어린 아이는 모유 또는 우유를 먹지만 어른이 되면 우유를 먹지 않습니다.
어릴 때는 위에서 우유를 소화할 수 있는 소화액이 나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인이 우유를 마시려면 적어도 6개월 이상 매일 우유를 마실 때 위에서 우유를 소화시킬 수 있는 소화액이 나오므로 그때부터 우유를 마시는 효과를 몸에서 느끼게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급한 사람은 몇 개월 우유를 마셨지만 변화를 느끼지 못하여 우유를 마시지 않는다고 합니다.

(예) 부산대학교 식품여양학과 서명자교수의 연구 결과 / 우유 소화를 위한 제안

둘째는 행동의 변화

어린 아이는 사랑을 받는 것으로 만족하고 즐거워 합니다.
그러나 어른은 사랑을 주는 것 즉 사랑하는 것으로 즐거워 합니다.

제 후배가 어느 사찰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하여 축하하려고 몇 사람이 사찰을 방문했습니다.
결혼식을 마치고 그 자리에 연회석을 만들고 음식을 먹게 되었는데 바로 제 앞에 그 사찰의 주지 스님 즉 주례를 맡았던 스님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 옆에 친구가 좌우에 앉았습니다.
그런데 제 바로 앞에는 불상이 보였습니다.
음식을 먹기 전에 제가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음식을 먹으려는데 주지 스님이 "교회에 다니십니까?" 라고 묻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습니다 라고 대답했지요.
그러나 그 스님이 여기에서 많은 결혼식을 합니다.
그런데 음식을 먹으면서 기도하는 사람은 오늘 처음 만났습니다.

무슨 이야기일까요?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런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기도할 수 없는 환경과 같은 자리에서도 어린 아이는 쑥 스럽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이 어렵게 느낄 것입니다.
그러나 어른은 분명 그와 같은 자리에서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고린도교회는  은사를 강조하면서 은사를 사용하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셋째는 생각의 변화

어린 아이는 내 손에 쥐는 것 즉 내가 갖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어른은 베푸는 즐거움을 좋아합니다.

어린 아이의 특징은 자기 중심적 사고를 합니다.
모든 것이 자기 중심입니다.

어린 아이의 특징은 이분법적 사고를 합니다.
우 아니면 좌, 블랙 아니면 화이트....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장"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2장은 "은사장"이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은사 중에서 가장 귀한 은사는 "사랑"이라고 합니다.

은사는 열매를 맺기 위한 선물(베드로전서 4:10)

각각 은사를 받은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은사를 헬라어 성경에서 "카리스마(χάρισμα)"라고 합니다.

χάρισμα, ατος, τό 5486 [charisma]

선물, 은사, 부여된 은총, 롬 11:29, 고전 1:7, 딤전 4:14, 벧전 4:10.

카리스마의 어근은 "카라(χαρά)"입니다.
'카라'는 "기쁨"이란 뜻입니다.

χαρά, ᾶς, ἡ 5479

1. 기쁨, 2. 고후 2:3, 3. 기쁨을 주는 사람

χάρις, ιτος, ἡ 5485

1. 우아함, 2. 은총, 3. 은혜로운 행위

성령은 예수를 주라 고백하는 믿음의 선물(고린도전서 12:3b)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오늘날 교회와 교계에서 일어나는 각종 사건들은 예수님 때문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일으킨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예를 들면 어느 교단의 연합 모임에 대표 회장이 공석이 되었을 때 이 사건을 법원에서 맡았습니다.
법원에서는 대표회장을 변호사로 선임했습니다.
그 변호사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대표회장을 맡으면 매월 300만원씩 받습니다.
자리를 지키고 있으면 됩니다.

또 다른 사례를 소개합니다.
미주 어느 교회에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법원에서 판결하기를 예수를 믿는 사람들끼리 서로 자기 주장이 맞는다고 하므로 어느 누구의 편을 들어줄 수 없으니 교회를 매각 처분하여 공평하게 반반씩 나누어 갖고 서로 싸우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문제들은 아직도 예수를 믿는 교인들이 육신에 속한 예수를 믿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어린 아이의 일을 버리라고 판결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린 아이의 일을 버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첫째는 말하는 것

교회 공동체 안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언어를 세 가지로 설명하겠습니다.

"기도하는 언어"
"찬송하는 언어"
"성경을 읽는 언어"
"서로 대화하는 언어"

언어는 곧 그 존재라고 정의한 철학자는 데칼트입니다(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어떤 언어를 사용하느냐를 주의 깊게 살펴보면 그 사람이 무슨 일에 종사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문을 두드릴 때 나타나는 반응에서

"예, 들어오세요!"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비서라고 합니다.

"통화중, 통화중"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전화교환원이라고 합니다.

"올라갑니다, 올라갑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승강기 안내원이라고 합니다.

"오라잇, 오라잇"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버스 안내양이라고 합니다.

기도하는 언어와 찬송하는 언어가 성경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깨우치는 유머러스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어느 말을 조련하는 유능한 조련자가 두 가지 언어로 말을 훈련시켰다고 합니다.
"할렐루야!" 라고 하면 말은 힘차게 달립니다.
"아멘!" 하면 말이 즉시 멈춥니다.

이런 말을 구입한 사람이 그 말을 타고 "할렐루야!" 하고 소리쳤더니 정말 말이 신나게 달립니다.
너무 좋아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하고 소리치며 달렸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벼랑이 나타났습니다.
말을 멈추어야 하는데 갑자기 아멘!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결국 신나게 달리던 말과 함께 벼랑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고 합니다.

어린 아이와 같은 기도의 언어를 버리고 장성한 사람의 기도 언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장성한 사람의 기도 언어를 성 프래시스의 "평화의 도구" 라는 시에서 찾아봅니다.

The Prayer of Saint Francis

Lord, make us instruments of your peace.
주여, 우리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Where there is hatred, let us sow love;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where there is injury, pardon;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where there is discord, union;
분열이 있는 곳에 화합을,
where there is doubt, faith;
의심이 있는 곳에 믿음을,
where there is despair, hope;
절망이 있는 곳에 소망을,
where there is darkness, light;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을,
where there is sadness, joy;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O divine Master,
오 신령의 주여,
grant that we may not so much seek to be consoled as to console;
우리가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 하며
to be understood as to understand;
이해 받기 보다는 이해 하며,
to be loved, as to love;
사랑 받기 보다는 사랑하며,
through the love of thy Son who died for us, Jesus Christ our Lord. Amen.
우리를 위해 죽으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언어는 어느 파에 속하였나?

그리스도파, 게바파, 바울파, 아볼로파.....(1:12)
어느 파에 속하였나를 확인하려는 것은 분쟁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날도 세례 문제를 두고 분쟁합니다.
반드시 예수님 당시에 세례는 침례이기 때문에 침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주장을 자주 듣다보면 세례를 받은 것은 마치 구원을 받지 못한 것처럼 인식된다고 합니다.
구원은 침례에 의한 것도 아닙니다.
구원은 세례에 의한 것도 아닙니다.
침례와 세례는 구원하는 표가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둘째는 깨닫는 것

고린도교회는 십자가에 대한 깨달음에서 문제가 드러났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1:18)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예수님께서 겪으셨던 십자가의 과정은 싫고 오직 십자가와 죽음 후에 얻게 된 부활의 영광과 기쁨만을 좋아합니다.

성도들이 깨닫는 것에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받은 것에 대한 감사"라고 하겠습니다.

은혜로운 세상
시인 임보(1940- )

앞은 못 보는 장님을 보면서
내 두 눈의 밝음을 늦게야 본다

소리를 못 듣는 귀머거리를 보면서
내 두 귀의 총명함을 비로소 듣는다

다리를 잃은 불구의 장애자를 보면서
두 다리의 고마움을 아프게 느낀다

비록 가진 것 많지 않아도
산천초목에, 가족이며 이웃들

주신 은혜가 얼마나 넘치는가를
이순의 문턱에서야 뒤늦게 깨닫는다.

기도한 대로는 아니지만
시인 정용철

내가 기도한 대로는 아니지만
지금의 내 모습에 만족합니다
정말 멋있고 예쁜 모습의 나이기를 바랐지만
만약 그렇게 되었으면
나는 지금보다 더 교만하고 외모에 치중하여
겸손과 소박함의
아름다운 삶을 모른 채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지금의 내 모습에 감사할 뿐입니다

내가 기도한 대로는 아니지만
지금 우리집의 모든 것에 만족합니다
더 잘 살고 여유 있는 가족이기를 바랐지만
만약 그렇게 되었으면 지금 우리 가족은
화목과 사랑을 누리지 못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지금의 우리 가족 이대로 감사할 뿐입니다

내가 기도한 대로는 아니지만
지금 나의 직장생활에 만족합니다
환경이 더 좋고 보수가 높은 직장이기를 바랐지만
만약 그렇게 되었다면
나는 노동의 가치와 삶의 의미를 모른 채
안일에 젖어 나태해져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지금의 직장생활에 감사할 뿐입니다

내가 기도한 대로는 아니지만
지금 내가 걸어가고 있는 길에 만족합니다
더 쉽고 빠른 길로 가게 되기를 바랐지만
만약 그렇게 되었으면
지금의 소중한 것을 보지 못한 채
외롭고
지친 몸으로 앞만 보고 달려가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지금 걷고 있는 나의 길에 대하여 감사할 뿐입니다

내가 기도한 대로는 아니지만
지금 내가 소유한 물질에 만족합니다
더 많은 물질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랐지만
만약에 그렇게 되었다면
나는 마음의 아름다움보다
물질의 풍요가 더 귀한 줄 알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만큼의 내 것에 감사할 뿐입니다

셋째는 생각하는 것

어린 아이의 생각은 유치하다고 합니다.

유치하다는 것은 수준이 낮고 미숙하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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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생활을 할 때도 성장의 단계가 있습니다.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에는 어린아이와 같은 미성숙의 단계로부터 시작합니다.
믿음의 성장은 육신의 살아온 나이와 상관없는 영적 성장을 의미합니다.
처음에는 다른 이들의 돌봄을 받으며 성장하게 되지만, 나중에는 다른 신앙인들의 성장을 위해서 살피고 돌봐주는 믿음으로 성숙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신 목적을 깨달아서 살아가는 성숙한 신앙인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어떠한 모습이 신앙적으로 미숙한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인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보다 장성한 믿음의 사람으로서 성장하기 위해서 사도바울과 같이 버려야 할 어린아이와 같은 일은 어떠한 일들이 있는지 말씀 드리겠습니다.

어린 아이의 말을 버리자(고린도전서 13:1-2) 

사람이 할 수 있는 아름답고 신령한 말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 그리고 또한 예언하는 신령한 말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말들을 하는 사람을 본다면, 그 사람은 믿음이 참 성숙하고 장성한 자의 말을 한다고 여길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아무리 듣기에 신령한 말을 한다고 할지라도, 사랑이 없다면, 그것이 성숙한 신앙인의 말이 아니라, 한낱 소리 나는 구리, 울리는 꽹과리와 같은 소음과 같은 말이 될 수 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 중에서 하나가 은사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교회에 영적인 은사를 받는 이들이 많아 졌습니다.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합니다. 말들은 잘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으로 인해서 사람들이 교만해 지게 되었고,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자신이 받은 은사가 더 귀하고 중요하다고 주장하면서 교회 안에서 다툼을 일으켰습니다. 신령한 말을 하지 못할 때에는 그러한 일이 없었는데, 도리어 성령의 은사를 받은 후에 교회가 시끄러워진 것입니다.

사랑없이 자신의 능력과 아름다움을 드러내려고, 시기하고 다투는 말들은 어린아이와 같은 말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제자요, 사랑의 사도'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에게도 어린아이와 같이 말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이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가고 있었습니다.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빨리 가기 위해서는 두 지역 사이에 있는 사마리아 땅을 지나서 가면 됩니다. 그런데 보통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생각할 때에 상종하지 못할 부정한 사람들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사마리아 땅을 지나지 않고, 그 땅을 피해 멀리 돌아서 오고 가곤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사마리아지역을 지나가시다가, 한 촌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런데 그 마을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맞이하지 않고 거부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사마리아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제자 야고보와 요한의 마음에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말합니다.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요한의 말은 사랑이 전혀 없는 무자비한 말입니다. 자신들을 영접하지 않았다고 불을 내려서 그들을 태워 멸하는 게 어떠냐고 묻는 것입니다. 이러한 요한의 말에 예수님은 꾸짖으시면서, 야고보와 요한에게  “보아너게, 곧 우뢰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십니다. 그러니 “보아너게”라는 별명은, 요한이 어린아이와 같은 말을 할 때에 가졌던 별명인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 요한이 장성한 후에는 그러한 말을 버렸습니다. 도리어  사도요한은 요한복음과 요한서신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고, 사랑할 것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던 것입니다.

장성한 자의 말은 사랑의 말인 것입니다. 사랑이 있을 때에 방언과 예언과 천사의 말들이 성숙한 자의 말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장성한 자의 말은 사랑을 가지고 상대방을 이해하고 배려하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사정을 살피고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말이 아니라, 사랑을 가지고 상대방에게 유익되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 장성한 자의 말이 됩니다.

어린 아이처럼 깨닫는 것을 버리자 

어린 아이들은 순수하고 천진난만한데 비해, 어떤 것을 깨닫는 이해력은 어른만 못합니다.
그래서 그저 눈에 보이는 현상에 의존해서 해석하기 때문에 때로는 잘못된 판단을 내리기가 쉽습니다.

어린아이가 청년으로 성숙해 지는 과정에서 사춘기를 겪습니다. 그런데 이 때에 부모님의 사랑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탈선을 하는 청소년들이 간혹 있습니다. 부모님은 자녀가 혹시나 잘못 될까 봐 사랑하는 마음으로 야단을 치기도 합니다. 때로는 자녀가 서운할 정도로 생활을 규제하기도 합니다. 매를 들기도 합니다. 자녀들 중에는 그것이 못 마땅하고 부모님이 자신을 미워한다고 생각하기에, 부모에게 반항도 하고, 가출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 그것이 부모님의 사랑이었음을 비로서 뒤늦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생활에 있어서도 우리는 어린아이와 같이 깨닫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현상을 가지고, 피부에 느껴지는 경험을 가지고서 하나님의 온전하신 사랑과 선하심을 깨닫지 못하고 오해할 때가 있습니다.

 

메리 스티븐슨 이라는 사람이 쓴, ‘모래위의 발자국’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어느 날 나는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에서 나는 주님과 함께 바닷가를 거닐고 있었습니다.
하늘 위로는 내 인생의 여러 순간들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나는 각 장면마다 두 사람의 발자국이 모래 위에 새겨져 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중 하나는 나의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주님의 것이었습니다.
내 인생의 마지막 장면이 나와 주님에게서 사라지려는 순간,
나는 모래 위에 남겨진 발자국들을 뒤돌아 보았습니다.
내 인생의 행로에서 여러 번 오직 한 사람의 발자국만 남겨져 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이 내가 매우 슬프고 괴로웠을 때 일어났따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러한 사실로 인하여 너무나 괴로웠던 나는 주님께 물어 보았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내가 너와 함께 하리니 너는 항상 나를 따를지어다.' 이렇게 말씀하셨잖아요.
그런데 내 인생의 가장 어려웠던 시절을 돌이켜 보니 오직 나의 발자국만 남겨져 있더군요.
어느 때보다도 주님이 필요했던 바로 그 때 어찌하여 주님을 내 곁을 떠나셨는지 나는 정말로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대답하셨어요.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나는 너를 누구보다 사랑한단다.
네가 시련과 고통을 당하고 있었을 때 나는 한번도 네 곁을 떠난 적이 없었느니라.
네가 한 사람의 발자국밖에 볼 수 없었던 바로 그 때는 내가 너를 안고 가던 때였느니라.
모래 위에 새겨진 그 발자국은 너의 발자국이 아니라 내 발자국이란다."

어린아이와 같은 이들은 모래 위에 난 발자국 하나를 보고서, 주님께서 나를 떠나셨다고 착각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오해하며 섭섭해 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성장하게 되면 그 발자국 하나를 보고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으며 감사해 하며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것입니다.

성숙한 사람은 내가 눈에 보는 것이나 느끼는 감정을 가지고 판단하며 깨달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감각들은 불완전한 것이기에 그것에 근거해서 무엇인가를 깨닫고자 한다면 실수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장성한 사람은 나의 주관적인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과 말씀을 믿고서 그 상황을 깨닫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16절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고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을 말씀하십니다.

설령 환란가운데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모습이고 선한 계획이 있음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로마서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라는 말씀을 믿고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깨달음은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심을 근거로 해서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장성한 신앙인은 상황과 감정에 의존해서 깨달았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말씀에 근거해서 상황을 깨닫는 것이 장성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어린 아이의 생각을 버리자

어린아이의 생각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어린아이들은 자기 중심의 생각을 하게 마련입니다.
다른 이들을 생각하고 돌보기에는 그 생각의 틀이 협소합니다.
아직까지는 다른 사람들을 생각할 만한 성숙함이 없습니다.

성숙하기 전까지는 모든 것의 중심이 자기라고 생각합니다. 부모님, 이웃, 자신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이 자신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숙하게 되면 내 생각의 폭이 넓어집니다. 다른 사람의 생각도 관심하게 되고, 나 또한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존재함을 깨닫게 됩니다. 다른 사람이 행복할 때에 나 또한 행복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한 가정 주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녀에게는 하루 하루 사는 것이 너무 짜증스럽고 불만스러웠습니다. 왜냐하면 그 집에서 자신의 생각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집안은 날마다 지저분하게 어지럽혀져 있고, 남편과 자식들은 말도 안 듣고, 늘 말썽만 피우는 귀찮은 존재였습니다. 어느 날은 너무 지치고, 살아갈 의욕도 생기지를 않아서,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발 저를 천국으로 데려가 주세요. 더 이상 힘들어서 못살겠어요.” 그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살기 힘들지? 네 마음 다 이해한다. 네 소원을 들어주는 대신 한가지 조건이 있다. 앞으로 9일 동안 내가 말하는 대로 몇 가지 일들을 해야 한다.” 그 여인은 반가와서 그렇게 하겠다고 동의를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여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얘야! 집안이 너무 지저분한 것 같은데, 네가 죽은 후에 사람들이 와서 보면 창피하지 않겠니? 그래도 마지막 정리를 잘하고 갔다는 말을 듣도록 집안을 깨끗하게 청소 좀 해두렴” 그 후 며칠 동안, 그녀는 열심히 집안 청소를 했습니다. 그렇게 삼일이 지났습니다.

삼일 후에, 하나님께서 다시 오셔서 말씀하십니다. “얘야! 애들이 맘에 걸리지 않니? 네가 죽은 후에 아이들이 너를 기억하면서 살 텐데, 엄마가 자신들을 사랑했다는 좋은 기억은 만들어 주어야 하지 않겠니? 힘들겠지만 앞으로 삼일동안 만이라도 아이들을 최고로 사랑해 주렴”그 말을 들은 여인은 삼일 동안 최선을 다해서 아이들을 사랑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삼일이 지나고 하나님께서 다시 찾아오셔서 말씀하십니다. “이제 갈 때가 삼일 밖에 남지 않았구나. 이제 마지막 해야 할 일을 말해주마. 너 남편 때문에 상처 많이 받고 미웠지? 그래도 장례식 때 ‘참 좋은 아내였는데’라는 말은 들어야 하지 않겠니? 이제 남은 삼일 동안 남편에게 최대한으로 친절하게 대해 줘봐라.” 그 여인은 마음에 내키지는 않았지만, 천국에 빨리 가고 싶어서 삼일 동안 최대한으로 남편에게 친절을 베풀어주었습니다.

다시 삼일 후, 하나님께서 그녀를 찾아 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딸아, 천국으로 갈 시간이 다 되었구나. 그런데 가기 전에 네 집을 한번 돌아보려무나.” 이 여인이 자신의 집을 돌아다 보니, 그 전과 너무 달라져 있었습니다. 더러운 집구석은 깨끗하게 변해 있어서 보기 좋았습니다. 아이들의 얼굴에는 행복한 웃음이 있었고, 남편은 자신을 향해서 사랑스러운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자신의 집을 보면서,  “아, 내 집이 바로 천국이로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여인이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 우리 집이 어떻게 이렇게 변했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지난 9일 동안 네가 만든 거란다.”  그때 그 여인이 말합니다.  “하나님, 그러면 이제부터 우리 집을, 천국으로 만들어가며 살아 볼래요!”

믿음생활 할 때에도 나를 중심으로 해서 뭐든지 해 주기를 바라는 때가 있습니다. 처음 믿음 생활하는 단계에서는 그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나 주위의 사람들이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살아주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믿음이 성숙해지게 되면, 나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에 대해서 관심하고, 주님의 뜻하신 대로 살아가고자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을 내 삶의 진정한 가치로 여기고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나의 이기적인 생각은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에 맞게, 다른 이들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어린 아이 때와 같은 시절이 있었습니다.
신앙적으로도 어린아이와 같이 미숙한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이 말과 깨달음과 생각으로 나타납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말하는 때가 있습니다.
자신을 자랑하고 드러내고 싶어하는 때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사랑의 말을 하기 보다는 자신의 감정과 판단에 의존해서 나오는 메마른 말들이 있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깨닫는 것이 둔한 때가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현상과 느껴지는 감정에 의존해서 판단합니다.
그러기에 내면에 흐르는 영적인 의미를 깨닫기에는 둔할 때가 있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아직까지는 내 중심적으로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이 내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에 사로 잡혀 있어서, 내가 다른 사람, 특히 하나님께는 어떠한 존재인가를 생각하지 못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장성한 믿음으로 성장하기 위해 버려야 할 것들입니다.

에베소서 4:15 |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성도들의 성숙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던 그 사랑의 말과 행동으로 변화되어져 갈 때에 성장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사랑이 없는 말과 행동, 생각들을 버릴 때에 장성한 성숙한 신앙인의 역할을 감당할 수가 있습니다.

사랑할 때에 다른 이들의 형편이 내 안에 들어옵니다. 말이 달라집니다. 그들을 위로할 수 있고 축복할 수 있습니다. 장성한 자의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심을 제대로 알 때에 이 세상을 통해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심지어 나에게 오는 시련과 환란도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내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할 때에 장성한 일을 감당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을 통해 삶의 가치를 깨닫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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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한 사람과 어린아이

 

   우리 주변에는 비록 육신의 나이가 어려도 어른스러운 경우가 있고,  그 반대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런 육신과 혼의 방면 외에, 영적으로  ‘어리다’ 거나 ‘성숙하다’고 하는 곳이 있습니다.

 

   전자는 엡4:14( 더 이상 어린아이가 되지 않고), 고전3:1(그리스도 안에 있는 갓난아이들), 13:11(말하는 것이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아이와 같았으나), 후자는 엡4:13(온전한 사람 , 충분히 성장한 사람), 히5:14(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들의 것이니), 고전14:20 (깨닫는 일에는 어른이 되라) 등이 있습니다.

 

   영적으로 ‘어리다’ 또는 ‘장성하다’다고 할 때 육신의 나이나 예배당을 오고 간 세월은 중요한 변수가 아닐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최소한 하나님의 아들을 생명으로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적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어린 아이는 고사하고 ‘시작’ 자체가 없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이 ‘시작’이십니다(계22:13).

 

또한 “말과 지식이 뛰어나고”, “어떤 은사에도 뒤쳐지지 않은 사람” (고전1:5, 7)도 젖이나 먹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갓난 아이일 수 있습니다(고전3:1-2).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말한 해당 구절들은 지식이나 은사는 생명과 무관할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그렇다면 영적으로 장성한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성경 여러 곳 특히 골2:19을 근거로 정의해 보자면,  생명의 장성함은 거듭난 이후 그 안에서 '하나님이 증가하신 것’(increased with the increase of God)이 상대적으로 많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증가한다는 말이 얼른 듣기에는 이상하나 성경 자체가 그런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더 평이한 말로는 생명이 성숙하다는 말은 ‘생명을 얻고’ ‘ 더 풍성히 얻었다’는 것입니다(요10;10하).

 

    즉 사도 바울처럼 그리스도 자신이 생명과 진리(실재)이심을 본후 자기에게 유익하던 것뿐 아니라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그리스도를 얻고 더 풍성히 얻어가는 사람이 장성한 사람입니다(빌3:8, 요10:10하).

 

   그런데 이러한 자람은 각각 흩어진 개인이 각자 알아서 그리스도를 얻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모든 일에서 머리이신 ‘그분 안으로’ 자라야 합니다. 즉 한몸의 지체로서 몸 안에서 몸을 위하여 자라야 정상적인 성장입니다(엡2:21-22). 이러한 자람은 머리를 붙드는 것은 기본입니다. 그외에 각 마디(joint)의 공급을 향해 열려 있어야 합니다. 또한 각 지체(part)가 몸을 위하여 분량대로 기능을 발휘해야 합니다. 즉 영적인 자람은 주님의 몸에 대한 합당한 계시와 몸 안에서의 유기적인 연결됨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엡4: 13-16).

 

  마지막으로 생명이 자라려면 잊지 말아야 할 한 가지는 날마다 생명의 떡이신 그리스도를 먹는 것입니다 (요6:35, 57).

 

   장성한 사람의 반대인 영적으로 어리다는 것은 거듭난 이후 위와 같은 생명의 성장을 게을리한 사람들입니다.  바울이 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 배설물’을 관심하고 정작 ‘그리스도 자신’은 무관심하면 신앙의 연륜이 오래 되었어도 영적으로 여전히 어린아이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들의 특징은 ‘육신에 속한 자’라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 중에 ‘시기와 다툼과 분열’이 있습니다 (고전3:3). ‘간교한 술수’나 ‘(각종) 교리의 풍조에 이리 저리 밀려 다닙니다(엡4:14).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진리)만을 말하고자’ 함이 부족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모름으로, 잡다한 것을 붙들면서 시간을 허비합니다(엡5:16-17).

 

    하나님께서 생명의 씨앗을 땅에 심으신 목적은 싹이 난 후 이삭 안에 알찬 곡식으로 여물어 수확하시기 위함입니다. 막4:26-29는 이 전 과정을 하나님의 왕국과 동일시 합니다. 그리고 계시록 14:4는 먼저 익은 곡식을 '첫열매'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거듭난 모든 이들이 다 이 첫열매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계시록 14장은 첫열매를 언급한 후 짐승과 그 형상에게 경배를 강요하는 시기를 기록하고 그후에 추가적인 땅의 수확물을 수확하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15-16절). 이 대목은 추후 좀더 시간을 들여 심도있게 연구해 볼 가치가 있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 모두가 다 첫열매로 수확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끝으로 한 가지 사족을 붙이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보내사 이루신 구속과 구원은 이미 성취된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각 개인에게 ‘적용’되는 과정은  믿음의 분량에 따라 사람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따라서 이 ‘사실’과 ‘적용’은 구분되어야 합니다. 또는 객관적인 성취와 주관적인 체험을 나누어도 좋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경의 기록이나 사람의 영적 상태를 분별할 때 혼란이 올 수 있습니다. 가장 안전한 것은 우리가 위에서 다뤘던 것처럼 [생명(있고 없고, 어리고, 장성하고)의 관점]에서 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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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4:23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영혼의 상태가 마음으로 나타나고 마음의 상태가 육체로 드러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을 잘 지켜야 한다. 잘못 지킨 마음으로 말미암아 인생을 그르친 일들이 많고 마음을 잘 지켜서 절망의 때를 유익함으로 변화시키는 일들이 많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은 참으로 묘하다.
미국에서 보고된 사례이다.
말기 암 환자가 있었다. 임종이 눈앞에 다가온 환자이다. 의사들은 내일을 못 넘길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오늘 영국에서 그 암의 특효약이 개발이 되었다는 뉴우스가 전해지게 되었다. 이 환자가 이 소식을 듣고서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영국에서 이 약이 비행기로 공수가 되려면 이틀이 걸리게 된다. 의사가 특효약에 대하여 말을 해주고 이틀만 지나면 병원에 이 약이 도착이 되니까 희망을 가지라고 하였다. 이 환자는 이틀을 견뎌 냈다. 그런데 오기로한 약이 오지를 않았다. 이 환자의 치료 팀은 환자에게 거짓말을 하기로 하고 환자에게 치료 약이 도착했노라고하고서는 보통 식염수를 주사를 하였다. 환자는 끄떡없이 견뎠다. 아! 나는 이 새로운 약의 수혜자가 되었다.라는 마음이 그를 살게 만든 것이다.
이 약이 무슨 사정으로 계속 오지를 않고 치료 팀은 계속 거짓으로 주사약을 투여하였다. 이렇게 삼 개월이 지나갔고 이 사람의 건강은 많이 호전되었다. 이것이 의사들을 놀라게 하였고 약보다는 환자의 심리상태가 병의 치료에 더 큰 작용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입이 싼 간호원이 이 환자에게 “당신은 행운아입니다.사실은 당신에게 투여한 약이 특효약이 아니고 그냥 식염수였습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건강해 지시니 축하합니다”
그 환자는 다음 날 죽었다.
이것이 마음의 역할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교훈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마음속에는 사람을 행동 하게하는 여러 요인이 있는데 그 중에서 어린이의 마음과 어른의 마음이 있는 것을 소개를 하고자 한다.
데이빗 A.씨멘즈 라는 사람이 지은 “어린아이의 일을 버리라”라는 책 표지 그림을 보면
사십 몇 되보이는 중년 신사가 입에 우유 먹는 젖꼭지를 물고 붕붕 카를 타고 밀면서 곰인형,불럭,동화책,풍선을 가지고 노는 그림이 있다.
실재로 이런 일이 있다면 우스운 장면이다.
그러나 신앙적으로나 감정적으로 보면 많은 사람의 상태가 바로 이와 같다. 몸은 분명히 어른인데 마음속에 어린애를 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한 사람이지만 어린애와 어른이 동시에 있는 것이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어린이는 나도 모르는 순간에 나오게 되어 있다. 특히나 사회생활의 긴장이 풀어진 가정에서는 더 자주 나타나게 된다.
그러므로 가정에서 아무 것도 아닌 사소한 일들이 부부간에 갈등의 요소가 되는 것이다.
결혼한지 15일밖에 안된 부부가 이혼을 하게되었다.
감정은 극도로 격해 있고 이제 마지막으로 주례를 서준 목사님을 찾아 뵙고서 도장을 찍기로 하였다.
이들의 사정은 이렇다.
이들은 서로 사랑하여서 함께 살기로 작정을 한 것이었다.
예>,서약
서로 도우며 살기로 하고서 설걷이도 같이하였다. 문제의 아침에도 아침을 든 후에 설걷이를 같이하면서 남편이 갑자기 친구들이 온다는 것이 생각이 나서 말을 하였다.
여보! 친구들이 온대. 한 20명 정도되.
아내가 얼굴을 찡그리며 행주를 집어던지며 “혼자 해!” 그러자 더러운 물이 남편의 옷이며 얼굴에 튀겼다. 뒤에 아내의 말이 가만히 설걷이 통에다가 행주를 놓을려고 했었는데 마귀가 축복을 하므로 그렇게 된 것이었다.
그러자 남편이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못 이겨 아내를 밀었는데 넘어져서 얼굴이 깨지고 멍이 들고 부어 올랐다. 뒤에 남편의 말을 빌리면 슬쩍 밀기만 했는데 마귀가 축복을 하므로 그렇게 된 것이었다.
아내가 친정으로 전화를 하였다. 얻어맞고서 못살겠다는 것이다. 전화 받은 친정어머니가 “그런 놈하고 살 필요 없다.더 고생하기 전에 당장에 집에 오너라”
아내가 친정으로 가버리자 남편이 자기 엄마에게 전화를 한다. 그 여자 남편을 무시하고 친정으로 가버렸다고 볼멘소리로 말하였다.
남자의 엄마는 글러먹게 배웠구나. 절대로 데려올 생각 말아라. 초기에 잘 잡아야지 아니면 평생 고생이다. 잘 명심해라.“
이래서 집안끼리 감정이 악화가 되었고 이혼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고 말았다.
목사님이 잘 타일러도 들어먹지를 않았다. 마지막으로 목사님이 묻기를 둘이는 결혼할 때 사랑은 했었느냐고, 그러자 그러믄요. 우리는 떨어질 수 없는 사이었지요.
그러면 사랑하는 사이로서 그때 그 상황에 대처를 해보자.
그래서 남편이 말을 하였다.
결혼했다고 친구들이 놀러온대.“몇명이나요”한 20명정도 돼.
어쩌지요,우리 집 식기가 10명 손님 밖에 치를 수가 없는데. 아참 이렇게 하면 어때요. 오늘 십명 내일 십명씩을 초청하면은요.
“아,그게 좋겠군. ”“당신은 항상 머리가 좋아”
그러고서는 고맙다는 인사도 않고 팔장끼고서 다정하게 가버렸다는 것이다.
우리의 무엇이 행동하느냐에 따라 행위의 결과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린아이를 버려야 되는 것이다. 여러분 속에 있는 어린이를 버려야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11절에서“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하였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서 삶의 중요한 진리를 몇 가지 배우게 된다.

1. 우리 모두에게는 어린아이가 있다.
흔히들 성인과 어린이를 분류하는 기준을 보게되면 어린이는 감각적이고 즉흥적이며 근시적이고 생물학적인 충동에 따라 움직인다고 한다.
자기중심적이고 다른 사람의 형편을 고려하지 않는다.자랑하기를 좋아한다. 높다든가.나은 것을 과시하고자한다.
이순신 장군과 나폴레옹이 싸우면 누가 이기느냐는등,자기 아버지가 더 높다는 둥 싸움하면 이기냐는둥 인간의 세속적 관점에서 만물을 본다. ex)이발사 아버지를 둔 아이
높아야 된다는 생각. 나아야 된다는 생각.사소한 것을 가지고 자존심을 세우는 행위, 이 모든 것이 다 어린이의 행동이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 어린이의 일을 버렸노라고 하였다.
바울 사도가 이렇듯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다는 말을 하게된 배경은 고린도 성도들이 은사를 받았는데 서로의 은사가 낫다고 자랑을 하고 자기 것을 과시하고 하는 너무나도 유치한 일이 교회 내에서 벌어졌기 때문에 그들의 일이 너무나도 유치한 것을 깨우치기 위해서이다.우리 식으로 하면 내가 교회에서 하는 일이 더 훌륭한 일이라는등,교인들 간의 사소한 알력이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교회 직분은 일하라고 있는 것이고 맡은 자는 철저하게 낮아져서 섬겨야 하는 것이다.
고린도 교인들은 자신들의 은사가 교회를 유익하게하기위한 것임을 미쳐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무슨 일이 어린애의 일인가를 지적하고 있다.
④오래 참지 못하는 것
성내는 것.질투. 자랑. 교만.
무례하게 행함, 자기의 유익만을 구하는 이기주의
악한 생각.불의.불신

이런 것들이 신앙의 성장을 가로막고 한없이 작은 마음이 되게 한다.그러므로 우울과 무의미 보람된 삶의 축복을 잃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버려야 한다.

신령한 사람 - 어린 아이의 일을 버린 사람(고린도전서 13:4-7)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어른은 어린아이의 일을 버린 사람을 말한다.
어른은 책임감을 가지고 이성적으로 행동한다.
바울사도는 이 어른을 사랑의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사랑할 줄 아는 자가 어른이요. 대장부가 될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신앙 인의 올바른 모습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 사랑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성령 충만한 성도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사랑은 성령의 가장 위대한 열매이기 때문이다.

다른 은사는 성령께서 임의로 나누어주시지만 성령의 은사는 모두가 배우고 성령 충만함으로 주어지게 된다.


장성한 사람의 표상 - 예수 그리스도(빌립보서 2:5-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우리가 바라보고 닮아야 될 어린아이의 일을 버린 어른의 표상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께서는 더 이상 내려갈 데가 없는 종으로 까지 내려가셔서 섬김의 온전한 모습을 보이셨다.
항상 장성한 사람의 일을 한번 떠올린 후에 말과 행동을 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주님의 몸된 이 제단에서 어린이의 일이 더이상 생겨나지 말기를 바란다.
모두가 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러 하나님의 뜻만을 바라보고 담대하게 전진하는 은혜를 사모하는 어린이주일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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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 모두 속에 숨은 아이

언제였든 어떻게였든 당신은 아이였던 때가 있었다. 우리가 우리의 어린아이 때를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소년기 때나 10대 때의 우리는 늘 우리 안에 존재해 있기 때문에 아주 중요하다. 숨어있는 당신의 과거 아이는 확실히 살아 있으며 좋게든 나쁘게든 당신이 하는 모든 일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우리 속의 아이는 삶의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다. 그는 우리를 바로든 비뚤게든 인도할 수 있다. 어떤 이들에게는 존재하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떠들썩하고, 법석 떨며, 매우 버릇없는 역할을 하고, 그가 좋아하는 일이면 시끄럽게 뛰어들기도 한다. 결국 그는 현재 성인의 삶에 적응을 못하고 의미 있는 모든 관계 속에서 상처를 내고 이를 파괴시키게 된다. 그런가 하면 당신의 내적 아이는 너무 수줍고 겁 많고 연약하고 자기 혐오적이다. 당신이 아무리 원해도 동료를 얻지 못하게 하고, 당신이 가진 의견을 말하지 못하게 하며, 중요한 책임조차 맡지 못하게 한다. 내적 아이는 결국 당신이 되고자 하는 사람으로 되는 것을 막는다. 내적 아이가 행사하는 이 능력 때문에 당신 안에 존재하는 내적 아이를 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나는 당신이 과거를 돌아보아 내적 아이가 당신의 삶을 지배하는 행동이 무엇인가 찾아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당신에게 더 큰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변화가 필요한 부분, 용서함과 용서됨이 필요한 부분, 치유되어야 할 부분, 매일의 훈련을 필요로 하는 부분을 돌아보라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당신이 되고자 했던 모습 - 성령의 치유하시는 능력으로 자유케 된 하나님의 자녀 - 으로 회복될 수 있다. 당신의 내적 아이가 숨어 있는 부분을 찾아냄으로써 그를 내쫓을 수 있는 것이다.

변화될 수 있는 아이

약 20년 전 심리학자 휴즈 미실다인(Hugh Missildine)은 『당신 과거의 내적 아이 Your Inner Child of the Past』라는 베스트 셀러 한 권을 써냈다. 아직까지도 이 분야에서 고전으로 손꼽히고 있는 이 책은 우리의 성격 형성에 부모의 행동이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과거의 내적 아이는 가정이나 편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그 모습이 나타난다. 성숙한 삶에서 가장 힘든 부분은 친한 동료들, 룸메이트, 애인, 직장동료, 가족과의 관계이다. 왜냐하면 바로 이러한 관계를 내적 자아가 점령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공적인 모습을 띌 때 우리는 매우 공손해지고 훈련된 모습이 된다. 거리가 있는 이들과는 항상 매우 성숙하고 합리적인 만남을 갖는다. 그러나 가까운 인간관계 안으로 돌아오면 상황은 달라진다. 우정, 사랑, 결혼 또는 매우 두터운 동업 관계에서는 얼마나 빨리 내적 아이가 이를 지배해버리는지 모른다. 그는 매우 불합리하고 완고하며, 명령적이거나, 수줍어하고, 겁 많고, 연약할 수 있다.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고 말하는 것에 우리 자신이 충격 받을 정도로 우리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다.

당황해하는 아이

우리가 내적 아이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은 가정이다. 특히 부부의 애정 생활에서다. 단지 두 사람이 결혼을 한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건 틀린 생각이다.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말씀은 옳다. 그러나 문제는 네 사람이 결혼했다는 것이고 집이 뭔가로 와글와글 하다는 것이다. 두 사람의 성인과 또 두 명의 내적 아이가 함께 있는 것이다. 두 사람이 일할 때는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쉬며 우리를 털어놓는 집은 다시 과거의 아이들로 되돌아가기에 적합한 곳이다. 이러한 이유로 남편이나 아내의 내적 아이는 재미를 붙이고 집을 뛰어다니게 된다. 이 넷이 부딪치는 부분은 재정, 애정, 성생활, 아이 교육에서다.

조정될 수 있는 아이

과거에 머물고 아이 같은 반응만 하는 사슬에 묶여 있으면 우리는 가정이나 사람과의 관계 속에 사랑을 전달할 자유를 상실한 것이다. 우리는 진실한 행동은 하지 않고 반응만 할 뿐이다. 우리는 가끔 응답하지만 창조적인 사랑엔 낯설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 13장 중심에서 어린아이의 일을 버림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우리를 성숙케 하는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내고 창조적 능력과 새로움을 전달해준다. 그러나 당신 과거의 숨겨진 내적 아이를 처리하기 전에는 이런 사랑이나 성숙을 볼 수 없다. 당신의 교만함을 내려놓고, 자신을 정직하게 직시하며, 모든 일을 성령님께 맡긴다면 성령님은 당신 삶의 중심에서 일 하실 것이다. 이것을 원한다면 성령님께 당신의 실체를 보여주시길, 그리고 타인과 어떻게 관계해야 할지를 가르쳐주시길 시간을 할애하여 간구하라.

2. 기억의 치유

1966년 ‘성령과 우리 상한 감정의 치유’라는 제목으로 두려움과 망설임 속에 어느 주일 저녁 설교를 했던 것을 난 기억한다. 그 설교만큼 하나님이 보잘것없는 사람을 들어 쓰신 설교는 더 없으리라 생각된다. 그 설교 테이프는 온 세계로 퍼져나가 자신들의 감정에 속박 받던 이들을 풀어주는 도구로 쓰여졌다.

잠재의식

과거의 문제아가 확실히 나타나는 부분은 그 자신을 실제로 느낄 수 있는 곳인 우리의 기억에서이다. 당장 무의식에 대해 얘기하고픈 충동을 느끼겠지만 내 생각으로는 그것은 좀 과한 게 아닌가 생각한다. 우선 나는 잠재의식, 또는 자각 전 의식에 대해 얘기하고자 한다. 무의식에 대한 과대 강조의 이유는 우리 자신의 잘못된 행동 책임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전가’가 목적이 아닌가 한다. 아직 그 의미에 끌린다면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무의식은 실체나 어떤 물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무의식이란 당신 인격의 깊이를 표현하고자 하는 기술적 묘사 언어이다. 당신 마음의 잠재 의식층을 뭐라 부르든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경험한 어떤 것도 잊혀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당신이 혹 기억해 내지 못한다 해도 당신의 기억 속에 살아 있게 된다. 그것들은 당신의 기억 창고에 쌓이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더 멋진 사실은 당신이 성령님께 당신의 마음 깊은 곳에 존재한 잠재의식을 정결케 하며, 기억의 창고를 채우도록 허락한다면 하나님은 이것을 당신 인격의 가장 창조적인 부분으로 만들 실제적 능력을 주실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잠재의식은 악과 비극도 만들어낼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다. 잠재의식은 고통도 될 수 있다. 이것은 특별히 어릴 때의 고통스런 기억과 연관되어있다. 이런 기억을 우리 마음 밖으로 몰아내려 하면 할수록 실제적으로 기억은 더 깊이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데까지 묻혀 버리는 것이다. 그 결과 우리가 경험하고 표현 못한 감정이 상처받았을 땐 표현될 길이 막막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가슴에 살아있는 채로 묻혀 엄청난 완고함과 폭발력을 지니게 된다. 그런 기억을 의식에 떠오르지 못하도록 하는 그 엄청난 노력은 우리 에너지의 상당량을 소모하게 만든다.

잠자고 있던 그 과거의 아이가 깨어나면 개인의 행동, 반응, 외모, 행위 전반을 지배하면서 감춰졌던 감정들이 다시 살아나 깊은 우울, 분노, 걷잡을 수 없는 정욕, 열등 의식, 고독, 거절당한 느낌으로 표현되는데 그런 고통스런 기억들은 회심의 경험이나 성령 충만으로는 자동적으로 변화되지 않는다. 은혜 안에서의 성숙으로도 꼭 변화되는 것이 아니다. 사실 그런 기억들은 영적 성장에 방해가 된다. 그 기억으로부터 벗어나기 전까지는 그에게 있어 실제 성숙이란 없다. 불행히도 그런 기억들은 우리의 평범한 기도로는 미치지 못할 부분인 것 같다. 어떤 때는 기도가 고통을 더 악화시키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특별한 중보 기도와 치유가 필요하다. 그러나 당황스러운 것은 그의 현재 생활에선 아무 이상도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치유의 기도

이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필요한 것은 고통스런 기억을 치유하는 기도이다. 즉 그들의 아동기와 십대 때 일어나 그들의 성숙을 막고 있으며 성장의 한 단계를 묶어두고 있는 그런 경험들을 치유하는 기도가 필요한 것이다. 이런 모든 기억은 치유의 기도로 하나님께 드려져야 한다. 그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우리는 고통과 억압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주님은 시간에 제한을 받지 않으신다. 그분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상처받은 우리의 내적 아이를 돌보실 수 있는 영원한 현재이시다. 내 경험으로 치유가 필요한 아이는 다음 네 명의 아이들 중 하나 꼴이다. 상처받은 아이, 미움받은 아이, 부끄러움으로 가득 찬 아이, 그리고 두려워하는 아이가 그들이다.

믿음의 기도

믿음의 기도가 만병통치의 도구가 아니며, 또한 치유의 기도가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도 물론 아니지만 그럼에도 어떤 이들에게는 바로 적용된다. 그 차이는 어쩌면 우리 삶에서의 큰 각도 차이일 수 있다. 나는 성령님께서 이 같은 치유 경험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적용시키실 것을 믿는다. 기억의 치유는 마음 깊숙한 곳의 적극적 개방과 다른 이들과의 나눔을 필요로 하고 당신 행동을 위한 다른 이들의 기도를 필요로 한다. 오랜 시간 동안 당신은 성령님께 새로운 통찰을 구해야 하고 또 당신의 방어벽을 허물 준비를 해야 한다. 그리고 치유되기 원하는 부분, 즉 당신에게 고통을 주며 감정의 파장을 일으키는 모든 기억나는 것들의 목록을 적어보는 것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다음으로는 신뢰하고 진정으로 믿음의 기도를 할 줄 아는 이와 함께 기도하라. 그와 함께 주님과 대화하듯 하는 기도가 가장 좋을 것이다. 모든 느낌, 그런 기억들과 관계되어 경험한 모든 감정들을 하나님께 고백하라. 만일 새로운 것이 떠오른다면 바로 중지하고 같이 얘기하라.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심을 기억하라. 그분은 바로 여기 계신다. 그분은 시간을 초월하시기 때문에 아픈 경험으로 되돌아가실 수 있다. 그분에게 고백하며 각각의 경험들, 각각의 감정들, 각각의 행위들을 그분께 드려 당신을 사랑하시고, 위로하시고, 용서하시도록 하라. 그분께서 당신의 증오를 닦아내시고 상처를 싸매며, 음욕을 제어하고, 두려움을 내어쫓으시게 하라. 그리고 특별히 그분이 당신을 용서하시듯이 당신을 괴롭힌 사람들을 용서하라. 만일 당신이 타인을 위해 믿음의 기도를 해야 하는 입장이라면 성령님께서 당신의 영과 그의 영을 같이 녹여주시도록 기도하고 끝으로 성령님께서 그분의 일을 어떤 식으로 하실지는 요구하지 말라.

3. 어른됨을 가로막는 어린아이의 좌우명

조건 붙은 관계

우리는 우리 아이들이 최고의 수준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모든 사랑과 애정을 유보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의 수준에서 그들을 인정하는 게 아니라 ‘좀더 잘할 수 있도록’ 그들을 돕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라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이 무엇을 하든, 먹든, 예의가 바르든, 성적이 좋아지든, 또래들보다 신앙생활을 잘하든 간에 우리는 조금만 더 잘하게 되면 인정하고 사랑하리라 약속한다. 그러다가 사랑은 점차 보이지 않게 되고 희망은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현재 이룬 성취 정도는 낮추어지거나 묵살된다. 우리는 “사랑한다. 조금만 더 잘해다오.”라고 얘기하지만 그것은 번번이 “좀더 잘하면 사랑해주지.”라거나 “네가 좀더 잘해야만 우린 너를 사랑하고 기뻐해 주마.”라고 들려지게 된다.

브래드라는 목사가 열성이 있고 신앙의 기복이 심한 기독교인이었을 때의 경험을 우리에게 얘기했다. 겉으로 보면 그는 굉장한 성과를 거둔 성공적인 목사였다. 그러나 그는 내면적으로 요요(yoyo)와 같이 영성의 높낮이가 심한 사람이었다. 그는 마치 당구공 같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자신감의 한 면에서 정죄감과 죄책, 그리고 우울의 면으로 튕겨 다녔다. “한 2년 전 성령님으로부터 갑작스런 통찰이 제게 주어졌습니다. 나는 내 삶이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으로 지배되고 있지 않았음을 깨달았습니다. 그 대신 49년 동안 부모님이 내게 심어준 어린 시절의 ‘모토(Motto, 좌우명)’가 나의 삶을 이끌어가고 있었던 겁니다. 그것이 어릴 때 심어진 모토였음을 알기 전까지 나는 그리스도께서 나를 지배하고 계시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 대단한 어린 시절의 모토는 무엇이었나? 그것은 “좀더 잘해봐!”였다. 브래드는 말했다. “부모님이 내게 심어 주려고 하신 건 그것이 아닌 줄 알고 있었지만, 나는 마치 그 말이 ‘좋다. 우린 너를 사랑한다. 그러나 네가 좀 더 잘 할 수 있다면 더 사랑할 수 있을 거야!’ 라는 것처럼 들렸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성령님께선 그의 참 모습을 보게 하셨고 그의 삶의 참 동기를 보여주셨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지고 온 이 말이 하나님과의 관계까지를 포함한 모든 관계에 영향을 끼쳤음을 깨달았다. 49년 간 그는 더 이상 잘할 수 있으리란 느낌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드디어 이 모토로부터 자유로워졌고 지금은 성령님 안에서의 참 자유를 배우고 있습니다.”

콤플렉스

‘어린아이의 일을 버리는 것’과 ‘자라감’의 총체적인 과정을 성격 콤플렉스 측면에서 살펴보자. 콤플렉스의 의미는 ‘인격 전반에 지배력을 발휘하는 억눌려진 욕구와 기억의 묶음’이다. 유해한 아동기의 모토와 연관시켜볼 때, 콤플렉스란 우리의 과거로부터의 건전하지 못한 감정의 공격이라 하겠다. 우선적으로 “좀 더 잘해.”라는 모토에서의 병든 내적 공격으로 파생된 콤플렉스는 두 가지이다. 먼저 우리에게 무력감을 주며 자기 비하로 채우는 ‘열등 콤플렉스’가 있다. 또 우리가 이룬 것보다 더 잘해내야 하고 해낼 수 있다라고 느끼게 하며 자기 무시의 감정을 느끼게 하는 ‘완벽 콤플렉스’가 있다. 하나님의 말씀의 훈련과 연습이 영적 어린아이됨에서 떠나 성인으로 자라감에 기본이다. 이것은 혼자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당신이 신뢰하는 친구나 목사 또는 기독교 상담자가 필요하다. 성령님과 협력하여 “좀 더 잘해.” 콤플렉스에 따라다니는 양 극단의 감정 진폭을 좁히도록 노력하라.

다음은 자신들의 불안한 결혼생활에 도움을 얻기 위해 찾아왔던 로저와 바브 부부의 이야기다. 정기적인 가정 예배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깊은 헌신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결혼은 파경에 이르게 되었다. 신실한 신자로서 주님을 수년간의 결혼생활 가운데 모시려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더욱 더 낙심하고 낙담했다. 개인적으로 만나보니 둘은 “좀 더 잘해.”의 피해자들이었다. 그는 완고한 기독교 가정 출신이었고 그녀는 비신자 가정 출신이었지만 기본적 환경은 거의 같았다. 어떤 모양으로든 우수한 업적을 나타내면 그들은 인정이라는 대가를 받았지만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실패하거나 아주 작은 실수라도 저지르게되면 그들 부모는 그들을 걱정과 실망으로 대했다. “남들이 뭐라고 말하겠니? 부모인 우리가 엉터리라고 생각하지 않겠니?” 그들 부모의 안정감과 자존감은 로저와 바브의 성공적인 업적에 달려 있었기 때문에 그것은 그들에게 ‘무거운 짐’이었다. 그러므로 “좀 더 잘해.”의 의미는 “네가 실패하면 우리 얼굴에 먹칠하는 거다.”라는 것으로 그들 성격 안에 자리잡게 되었다. 그들이 결혼 첫 해 그 어렵고 많은 적응을 위해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상상할 수나 있겠는가? 그 후 마침내 그들은 둘 사이에 일어난 일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 그러자 그들은 서로의 고통과 요구에 대해 깊이 나눌 수 있었다. 특별한 의미에서의 기도는 로저와 바브가 어린아이 같은 행위를 버리도록 해 주었고 하나님 외엔 기대할 수 없는 완전함을 서로에게 요구하지 않게 되었다.

4. 또 다른 어린아이의 잘못된 생각

또 다른 해악이 되는 어린아이의 모토는 잘못 지도된 문화에서 온다. “용감한 아이는 울지 않는다.” 이것이 얼마나 많은 남성들과 수백만 결혼을 무너뜨렸는지 모른다. 이 빡빡한 어린아이의 모토가 삶에 깊은 영향을 끼쳐 어른이 되어서도 자신의 진정한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어린아이의 모토는 “좋은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진정한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다.”, 또는 “좋은 그리스도인은 어떤 부정적인 감정도 표현해선 안 된다.”라고 해석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파괴적인 모토를 살펴봄이 더 좋을 듯하다. 예수님의 감정 생활을 살펴보고 그분의 삶에서 과연 어떤 감정이 표현되었고 또 그것이 어떻게 다루어졌는가를 살펴보자.

예수님께서 우리들 중 하나이셨음을 나는 기쁘게 생각한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복음주의적 그리스도인보다 그의 감정에 대해서 더 인간적이셨다. 진정으로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항상 조용하고, 고요하며, 냉정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절대 슬퍼하거나, 화내거나, 애곡하거나, 노여워하거나 무엇에 의해서도 요동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승리하는 그리스도인됨의 뚜렷한 증거로서 ‘큰 바위 얼굴’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만일 예수님께서 이런 모습이어야 한다면 이것은 매우 혐오스러운 거짓 인상이 되는 것이다. 아직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거기에 다다르려고 노력하고 필요없는 죄책감에 직면하며 살아가고 있다. 예수님께선 그분의 감정을 표출하시는 데 전혀 두려움이 없으셨고 그분의 감정에 대해 타인들의 이목에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다.

슬픔과 비탄

예수님께서 비탄과 슬픔을 어떻게 다루셨는지 우리에게 실마리를 줄 수 있는 두 사건이 있다. 첫 번째 사건은 예수님께서 깊이 존경하던 세례 요한이 목베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으셨을 때이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들에 가시니.”(마 14:13) 바로 이것이 우리가 슬픈 소식을 들었을 때 처음 취하는 행동이 아닌가? 두 번째 사건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의 예수님의 모습이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슬픔을 다루시는 두 번째 통찰을 얻게된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요 11:35) 예수님께선 그분의 슬픔을 울음으로 표현하는데 대해 한 점 부끄러움이 없이 공개적으로 우셨음을 알 수 있다.

분노

더욱더 우리가 다루기 어려운 것은 그리스도인 사이에 가장 터부시되고 있는 분노의 감정이다. 예수님께선 화를 내신 적이 있는가? 안식일에 손 마른 한 사람을 고치시려 할 때였다.“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보시고.”(막 3:5) 나는 그리스도의 분노가 그의 완전함의 일부분임을 믿으며 그분의 이 같은 분노보다 더 정확하게 표현된 분노는 결코 없다고 믿는다. 분노란 죄가 되는 감정이 아니다. 사실 죄가 되는 감정이란 없다. 단지 감정의 죄된 사용이 있을 뿐이다. 분노는 우리 감정의 바닥에서 진흙을 끌어올리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분노는 진정한 거룩함과 인간에 대한 사랑에서 작열하여 넘치는 것이어야 한다.

분노와 동정

분노와 동정은 동전의 양면이다. 분노는 꼭 사랑의 반대가 아니다. 어떤 때는 사랑의 결과이기도하며 가장 명확한 표현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절대 분노를 당신에게서 지우도록, 또는 떨어져나가도록 기도하지 말라. 성질을 없애 달라기보다는 성령님의 지배 아래 놓여지도록 기도하라.

문제 안은 마음

우리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을 때의 감정을 뭐라 칭할 수 있을까? 그건 그분의 생명을 위해 하나님의 완전한 뜻을 찾고 행하고자 했던 고초라는 의미에서 ‘문제 안은 마음’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분의 고초는 많은 감정의 혼합이어서 뭐라 표현할 수 없다. 거기엔 고독이 있었다. 거기엔 시험이 있었다.

온전함과 거룩

성숙함이란 온전함과 거룩을 이야기한다. 성숙된 거룩은 우리의 참 인간성 회복을 뜻한다. 거룩함과 온전함의 중심은 타인과 하나님과 우리 자신에 대한 앎과 사랑에 있다.

5. 사랑과 결혼에 대한 어린아이 같은 생각

미국의 결혼한 사람의 거의 200만이 감정적으로나 영적으로 이혼 상태에서 살아가고 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어린아이같이 구혼을 하고 어린아이 같은 생각, 이해심, 교통함으로 결혼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 이 환상은 침대에 들기 전 어머니나 아버지의 무릎 위에서 듣던 것처럼 멋진 왕자가 아름다운 공주와 결혼한다는 동화에서 시작한다.

사랑과 결혼 분야에서 심리학자들은 사도 바울이 ‘어린아이의 일’이라 부른 그것을 ‘로맨틱한 발육 부진’이라 부른다. 환상으로 가득 찬 자기 중심적인 사랑으로서의 로맨틱한 발육 부진과 성경에서 얘기하는 사랑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성숙한 결혼은 ‘에로스’, ‘필리아’, ‘아가페’가 융합되어 있는 것이다. 결혼은 이 셋의 매우 값지고 불안정한 균형이다.

결혼에서의 가장 큰 문제는 의견 교환이다. 결혼이 불행하게 되는 최대의 이유는 배우자가 상대방과 마음의 문을 열어놓고 사랑스럽게 대화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너무도 많이 어린아이의 수준에 남아 있는 것이다. 당신이 부정적인 감정을 표현하게 되는 것 같더라도 두려워하지 말라. 그런 감정이 넘쳐나다 보면 깊은 긍정적 감정도 표현하게 된다.

6. 하나님의 뜻에 대한 어린아이 같은 생각

‘하나님의 뜻’을 여러 의미로 사용하기 때문에 혼돈이 오는데, 여기엔 최소한 세 가지가 있다. 하나님의 계획으로서의 완전한 뜻, 하나님의 상황 변화에 맡겨놓은 허락 가능한 뜻,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과 목적․계획으로서의 하나님의 뜻은 당신과 이 세계를 향하신 하나님의 완전하신 뜻이다. 상황에 따라 변화될 수 있는 이 허락 가능한 하나님의 뜻은 이 타락한 우주에 작용되는 것이다. 궁극적인 하나님의 뜻은 절대로 좌절되지 않는다. 사고나 비극, 그리고 도덕적 악은 무서운 고통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그분의 목표를 이루어 가는 우리에게는 고난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분리시키거나 우리 삶 속에서 이루시는 하나님의 뜻을 꺾지 못한다.

7. 기도에 대한 어린아이 같은 생각

하나님의 뜻에 관해 계속 살펴보면서 특히 우리의 기도, 즉 우리에게 가장 영향을 끼치는 부분에 적용시켜보자. 거짓되고 미성숙한 기도의 개념은 성숙하고자 노력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생활 속에서 가장 파괴적인 요소가 된다.

하나님의 불가능성

우리가 늘 듣던 “하나님 안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라는 구절의 다른 면, 즉 어떤 것은 하나님께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것이 회교도의 신앙과 기독교 신앙의 근본적인 차이점이다. 이슬람에선 하나님은 어떤 것이든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분의 능력은 절대적이고 임의적이기에 무제한적이란 얘기가 된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쪽에 서서 하나님의 능력은 그분 자신의 도덕적 성품과 그분이 창조하신 도덕적 존재를 포함한 그분의 세계에 심어 놓으신 어떤 자기제한의 한계로 인해 제한된다라고 얘기한다. 하나님이 하실 수 없는 것과 하지 않으시는 것들을 보자.

- 하나님은 자신의 성품을 거역하지 못하신다.

- 하나님은 자신의 법을 침해하실 수 없다.

-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실 수 없다.

성숙한 기도

죠지 뮬러는 “성경에서 빗나간 기도는 90퍼센트가 환상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어린아이 때는 상상의 환상에서 산다 해도 전혀 문제될 것이 없지만 그들이 성장했을 때에는 그런 것들을 버려야 하는 것이다.

반 진실은 죽음을 가져올 수 있다

인디아에서 있었던 젊은 선교사의 죽음(맹장염인데 치유 기도하다 사망)도 ‘하나님이 기도로 치유하시느냐.’가 아니라 ‘이 치유를 하나님이 어떻게 이루어 내시느냐.’인 것이다.

신앙과 기도 그리고 자만

기도에 대한 우리의 생각에 진정한 성숙이 없이는 ‘자만(presumption)'에 대해 성경이 어떻게 말하는지를 모르게 된다. 우리는 우리 걸음을 과하게 떼어놓고는 하나님도 그렇게 하시도록 구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이 자만의 문제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모든 면에서 자만은 하나님께 대항하고 그분과의 관계에서 이탈하는 죄로 규정되어 있다.

응답되지 않은 기도의 문제

성경 안에서조차도 응답되지 않은 기도가 많은데(모세, 하박국, 시편기자, 바울....) 응답되지 않은 우리 기도의 이유를 살펴보자.

- 우리가 바른 것을 구하지 않는 이유에서다.

- 우리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것을 구하기 때문이다.

- 우리가 하나님의 응답에 준비되어 있지 않은 이유에서다.

수용됨과 인정됨의 차이

우리는 많은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수용됨(acceptance)과 인정됨(approval) 사이의 혼동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아이들이 한 일에 대한 부모의 불만족이 그들의 하나의 인격체됨까지 거절하는 것이 아님을 설명하지 않은 가정 안에서 흔히 나타난다. 인정은 수용이고 불만족은 수용, 거절, 아니면 추방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시험과 죄의 차이

어떤 이들은 시험과 죄에 대한 근본적이고 극심한 혼동으로 고통을 받는다. 우린 성경을 자세히 살펴봄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죄책감을 느끼게 하고 정죄 아래 있게 하는 사단의 간교한 먹이인 시험(temptation)에 대한 실제적 개념을 가질 수 있다. 우선 모든 사람이 시험을 받는다는 것을 마음에 두자.

아픔과 손상의 차이

고통(hurt)당하는 것과 손상(harm)받는 것 사이의 혼동은 우리 아동기와 십대에서의 또 하나의 부작용이다. 그러나 아픔과 손상의 차이를 모르는 가정, 즉 훈계와 처벌의 차이, 알코올과 분노의 차이, 야단침과 포기해버림이 마구 뒤섞여 있는 가정에서는 아픔을 당하면 손상받게 된다.

어린아이같이 감정에 의지함

사도 바울이 사용한 ‘어린아이같이’라는 말은 성경에 흔히 쓰이는 말이다. 이 말은 성인이 어린아이의 무책임한 행동을 나타내고 있거나 성장이 중단된 어른을 얘기할 때 쓰여졌다.

감정과 인격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신앙 경험으로 그들의 인격, 성향, 기질을 모두 바꿀 수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에 깨진 환상으로 고통을 겪는다. 하나님은 당신의 근본적인 인격 구조는 바꾸시지 않는다. 그분은 당신 그대로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실 수 있다. 감정은 우리 성격 중에 가장 다양하고 신뢰하지 못할 부분이다. 우리는 감정을 만들어 낸다.

감정과 확신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구원 확신의 근거를 감정에 전적으로 매달린다. 감정이란 지극히 가변적이고 신뢰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의지한다는 것은 위험스러운 일이다.

감정과 인도하심

많은 사람들이 인도하심의 기본을 감정에 의지하고 있다. 그러나 신앙생활의 가장 위대한 약속은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4)는 것이다. 인도하심은 이렇게 전해진다.

- 하나님의 말씀

- 외적인 환경(열리고 닫힌 창문)

- 당신 자신의 가장 이상적인 사고

- 다른 그리스도인의 충고

- 당신 감정의 내적 음성

감정과 선행

어떤 사람들은 선을 행하는 동기를 감정에 의지한다. 죤 웨슬레는 ‘선을 행하기 전 좋은 느낌을 기다리는 죄’를 공격하는 설교를 했다. 선행을 하기에 앞서 좋은 느낌을 기다린다는 것은 죄다. 당신은 지금 꼭 필요하다고 느끼는 선행과 봉사의 어떤 것이라도 시작할 수 있다.

10. 자아와 자기 포기의 어린아이 같은 개념

자아(self)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어떤 의미로 쓰이는가? 자기 포기, 자아를 십자가에 못박음, 자아의 죽음, 십자가 위에 버린 자아와 보좌에 앉으신 그리스도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는가? 우리가 자아와 자기 포기의 잘못된 마음의 지도를 가지고 있다면 당신의 신앙생활은 실망과 비탄으로 끝나게 될 것이다.

자기소멸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 그러나 나는 그대로 살아있으며, 없어지거나, 흡수되거나, 녹아진 것이 아니다. 나는 사라지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구원의 최고의 절정에 이르게 되더라도 당신과 나의 자아됨은 소멸되어지는 것이 절대 아니다. 하나님 그분에게서 당신에게 주어진 당신의 에고(ego)는 영원히 당신 마음에 심겨져 있고 자아됨은 소멸되어지는 것이 절대 아니다.

자기멸시

자기 부인을 자기 멸시로 착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그것은 신앙생활에서 자기 사랑의 알맞은 부분을 찾지 못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들은 자기 사랑을 바로 죄의 시작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거부하는 것이다.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과 내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는 자존과 존경, 그리고 고결과 주체성 안에 자신의 자아됨을 붙드는 자기 수용과 자기 사랑이 필요하다.

자기실현

낙관주의의 팽창과 더불어 요즘에 나타난 또 하나의 부적당한 자아의 반응은 바로 자기 실현이다.

자기포기

나 자신을 하나님 앞에 포기하고 내 삶의 중심을 그분께 드려 그분의 권위 밑에 나 자신을 바칠 때만이 나는 내 모든 자아와 더불어 그분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11. 삶의 궁극적인 고민

궁극적인 영적 전투

자기 포기는 그것이 궁극적인 영적 전투를 대표하고 있음으로 해서 삶의 궁극적 고민이다. 예수님의 성육신(kenosis), 자기 비움(self-emptying)과 자기 포기의 첫 단계는 무엇이었는가? 그분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빌 2:6)로 자신을 비우셨다. 그것이 첫 단계였다.

모든 것을 포함한 고민

자기 포기는 삶의 다른 고민과 비교해볼 때 모든 것을 포함한 고민이다. 내가 갈등을 느낄 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나의 감정을 하나님께 있는 그대로 말씀드리는 것이다.

삶의 본질

자기 포기는 이것이 삶의 본질적인 비밀이기 때문에 궁극적인 고민이다. 이것은 나의 진정한 자아를 찾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존재가 되는 것이고, 나의 유일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자기 포기는 부활이 따르는 죽음이다. 생명을 잃으면 얻게 되고, 얻으려 노력하면 잃게 된다는 역설이다.

12. 재구성하시는 은혜

책임

예수님께서는 타인을 희생양으로 삼고자 하는 모든 시도나 핑계들을 물리치는 놀라운 방법을 알고 계셨다. 그분은 항상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책임을 통감하게 만드셨다. 우리가 정직하다면 모든 문제는 우리 자신에게 있음에 동의할 것이다.

용서된 자아

그리스도인이 성인기에 들어서는 첫걸음은 용서되고 잊혀진 죄에 대한 자기 정죄와 어떤 왜곡된 형태의 내적인 속죄라도 그것을 끝마치는 것이다. 죄책감에 물든 자아는 용서된 자아가 되어야 한다.

치유된 자아

- 분노의 빨간 깃발

- 두려움의 노란 깃발

- 폭행의 검은 깃발

포기를 뜻하는 백기

어린아이 같은 것들이 없어지는 과정엔 크든지 작든지 마찰이 있다. 그리고는 최후로 무조건 포기의 백기를 들기까지 자신을 쳐 복종케 하는 결정적인 전투를 치른다. 그 후에 그리스도의 깃발이 게양되고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주권을 선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