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사(Elisha) 하나님은 구원 / 엘리야(Elijah) 여호와는 하나님


엘리사(Elisha) / 하나님의 구원

소명 : 아벨므홀라인 사밧의 아들로 소12겨리로 밭을 갈고 있을 때 엘리야가 지나 가다가 겉옷을 벗어던지며 부르니 농구를 불살라 소한 겨리를 잡아 백성에게 주어 먹이고 엘리야를 따라가 제자가 되었다(왕상 19:16-21). 8년후 엘리야가 승천하려 할 때에 세번이나 작별 인사를 하여도 듣지 않고 끝까지 따르매 네 요구가 무엇이냐고 물은즉 당신의 영감을 배나 달라고 구하여 받아 가지고 또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겉 옷을 주어가지고 돌아와서 선지자의 직분을 행하였다.

이적 : 이스라엘왕 여호람부터 요아스 시대까지 그가 행한 이적은 다음과 같다.

1. 엘리야 에게서 떨어진 겉옷으로 요단 강물을 쳐서 갈라지게 하고 건너왔다(왕하 2:13-14).
2. 불결한 몸에 소금을 넣어 음료수를 만들었다(왕하 2:20).
3. 벧엘로 가는 길에서 아이들이 대머리라고 조롱할때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여 암곰 두 마리가 숲에서 나와 42명의 아이들을 찢었다(왕하2:23-24).
4. 유대와 에돔이 동맹하여 모압왕과 싸울때 물이 없어 고생하는 것을 보고 물을 내어 그 지경에 가득하게 하였다(왕하3:20)
5. 선지자의 생도의 아내에게 기름을 만들어 주어 빚을 갚게 하였다(왕하4:7)
6. 사렙지방 여인에게 아들을 낳게하고 그 아들이 죽은 것을 다시 살렸다(왕하4:17,35)
7. 우물 물의 독을 제거 하였다(왕하4:41). 
8. 바알살리사에서 보리떡 20개로 백명을 먹이고 남았다(왕하4:40-44)
9. 나아만의 문둥병을 고쳐 주었다(왕하5:24 눅4:27).
10. 자기 종 게하시에게 문둥병을 주었다(왕하5:27)
11. 물에 빠진 도끼를 떠오르게 하였다(왕하 6:6).
12. 자기 사환의 눈을 밝게하여 불말과 불 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호위한 것을 보여 주었다(왕하 6:17).
13. 아람 군사의 눈을 어둡게하여 사마리아로 인도하고 그 눈을 다시 밝게하여 사마리아 성중에 있는 것을 보게 하였다(왕하 6:18-20).
14. 엘리사가 죽은 다음 해에 어떤 사람이 죽은 시체를 엘리사의 무덤에 던져 놓았더니 그 시체가 엘리사의 뼈에 닿는 순간 다시 살아났다 (왕하 13:2-21)


예언 :
1. 아람군사가 사마리아를 포위했을 때 물가가 폭동하여 배가 고파서 자식을 잡아먹는 자가 생겼다(왕하 6:24-29)
2. 엘리사가 곡가가 폭락할 것을 예언하였더니 주가 아람군대에게 병거와 병마의 소리와 군대의 큰 소리를 들리게 하시니 그 소리에 놀라 다 도망가니 예언대로 곡가가 폭락 하였다(왕하 7:1-7,16)
3. 하사엘이 아람왕이 되어 이스라엘 자손에게 행할 것을 예언함( 왕하 8:1-15)
4. 선지자의 생도중 한명을 불러 길르앗 라못에 가서 예후 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될 것을 예언하게 하였다(왕하 9:1-10)
5. 임종에 이르러서도 이스라엘왕 요아스에게 아람을 세번쳐서 이길 것을 예언한 후 별세하였다(왕하 13:18)
그는 천성이 청렴 강직했고(왕하 5:15-16),
엘리야는 왕가의 핍박을 받으면서 지냈으나 그는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왕이 되게한 관계로 왕가로부터 특별 대우를 받았다.
그가 엘리야를 따른 것은 베드로와 비슷하고 이적을 많이 행한 것은 예수님의 비교할 수 있다.

엘리사의 사역은 엘리야의 사역을 계승한 구국과 애족의 선지자였다.
엘리사는 여리고 지역의 폐수를 소 금을 섞어 양질의 물로 변화시켰다.
그후 여리고 지역은 농산 물과 식수의 염려가 없게 되었다.
그외에도 신비한 기적을 어느 선지자보다도 많이 경험 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초자연적인 사역을 크게 나타낸 선지자였다.

그 중에서도 아람 왕의 군대장관 나아만이 문둥병자가 되었을때 요단강에 일곱번 씻게하여 그의 병을 고쳐준 사건은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왕하 5장).
이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권위를 나타냈고 나라의 체통을 세웠으며 아무런 예물을 받지 아니하므로 선민의 품위를 드러내기도 하였다. 또한 아람군 대가 엘리사를 체포하기 위해 도단성을 포위했을때 아람 군대보다 하나님의 군대(불말과 불병거)가 더 많은 것을 확인시킨 일도 있었다.

그뒤 아람군대가 사마리아성을 포위했을때 기근으로 주려 죽게될 무렵 엘리사가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고운 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을 하고 보리 두 스아에 한 세겔을 하리라](왕하 7:1) 한 예언과 같이 병거소리와 말소리,큰 군대의 소리로 인해 아람군대가 도주하여 이 예언이 성취되었다.

엘리사는 66년간 큰 선지자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냈다.

교훈과 적용

첫째, 선지자는 선견자일뿐만 아니라 한 시대와 한 민족을 깨우치고 지도하는 영적인 안내자이다.

둘째, 엘리사의 권고를 듣지않은 북조 이스라엘이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 권고를 듣자.

[엘리사] (하나님은 구원이심이란 뜻) 

요단강 아벧므홀라 사람 사밧의 아들인데 북왕국에서 봉사한 이스리엘 초기의 2대 선지자 중 한사람이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엘리야를 대신하는 선지자로 세우도록 엘리야에게 명하셨다(왕상 19:16,19).

엘리야는 12겨리 소와 같이 아버지의 밭을 갈고 있던 엘리사를 만나 겉옷을 그에게 걸쳐 주었다. 그 뜻을 깨달은 엘리사는 집에 올아와 사람들을 모 아 송별언을 베풀고 즉시 엘리야를 수종들었다.(왕상19:19-21)요단강가에서 야훼께서 회리바람으로 엘리야를 하늘로 올리고자 하실때 엘리사는 엘리야의 만류에도 불구, 그를 떠나지 않았다.엘리사는 엘이랴에게 [당신의 영감 이 갑절이나 내게 있기를 구하나이다]라고 청원했다.

엘리사는 받은 겉옷을 주워들고 요단강물을 치니 물이 좌우로 갈라졌으므로 그곳을 건너게 되었다. (왕하 2:1-18) 그후 그의 생애는 야훼의 이름으로 행한 일련의 기적이나 지혜 또는 능력으로 나타나 있다. 야훼의 종교와 바알의 종교가 사투를 벌이고 있을 때 엘리사가 행한기적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케 했다. 그 뒤에도 엘리사는 예 수님처럼 많은 기적을 행했다.

여리고의좋지 않은 물을 야훼의 이름으로 소금을 물 근원에 넣어 좋은 물로 바꾸었다.(왕하 2:19-22)엘리사가 거기서 벧엘로 올라가는 도중 젊은 아이들이 성에서 나와 엘 리사를 조롱하므로 야훼의 이름으로 저주하니 수풀에서 암콤 둘이 나와아이들 중 42명을 찢어 죽였다.(왕하 2:23-25)

한번은 엘리사가 수넴에 갔다가 한 귀한 여인의 정성스런 음식을 대접받았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엘리사는 그 곳을 지날 때마다 들렸다. 엘리사는 여인의 무자하믈 알고 득남의 축복을 하였다. 예언이 적중하여 돐이 돌아오니 아들을 낳았다. 그 아이가 돌연 죽었으나 엘리사는 그아이를 살리는 기적을 베풀었다. (왕하 4:8-37)

또한 아람 왕의 군대장관 나아만의 문둥병을 고쳐주었다. 엘리사는 선지자로서 66년간 계속 활동했다. 처음 20년간은 활동기였으며 다음 45년간은 장기간 침묵하다가 마지막에 병석에서 예언했다. 이 때의 예언은 엘리사의 주요 기적의 예언이 되었다. 엘리사의 주요 사업은 애국적 선지자로서의 활동이다. 그에게는 이스라엘의 사건, 즉 이스라엘 대 수리아(아람) 의 사간은 야훼 대 수리아의 사건이었다. 엘리사는 여호람의 치세와 예후 가문의 첫 세 왕의 시대에 이스라엘의 모압, 수리아에 대한 모든 싸움에서 더 힘있게 애국자로서 활동했다.

사마리아에 대한 전쟁기록이 남아있는 회의 사건에 있어서 그는 이스라엘을 위해 중요한 조력을 했다. (왕하 6:8) [하나님의 사람]으로서그의 이름은 이스라엘 밖까지 떨쳤으며 다메섹에서는 [하나님의 사람] 으로서 환영받은 듯하다. 그리고 이 방문 때에 엘리야에게 위임되었던 사명도 수행했다. 즉 하사엘에게 벤하닷의 후계자로 될 것을 알리고 다메섹의 왕조를 개변시켰다.(왕상 19:15) 이렇게 엘리사는 엘리야의 사업을 계승했을 뿐만 아니라 두 선지자의 이별때에 보인 것과 같이 스승에대한 완전한 충성으로 그것을 완성했다.

양자의 중요한 차이점은 엘리야가 개척자로서의 위대한 독창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대하여 엘리사는 친히 백성과 접촉하여 그들에게 환영을받고 (왕하 4;23) 그 감화를 보급시키는데 엘리야보다 더 나은 지위에 있었다. 이상 에서 볼 때 예언자는 야훼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또는 이방인과의 관계를 이어주고 야훼의 뜻을 알리는 중재자였다. 그 메시지의전달 과정에서 많은 이적을 행한 것은 야훼의 초능력을 보여주어 그 분의 대한 신뢰를 더한층 높이는 데 있었다.

엘리사(Elisha) : B.C 9 C경 북이스라엘의 예언자로서 아합왕 때 아벧므홀라(Abel-Meholah) 에서 농사일을 하다가 엘리야를 만나 그가 여호람왕 때 죽은 후 그의 뒤를 이어 북이스라엘의 요아스왕 초반기까지 활동하였다.

엘리사의 생애

1. 요단 동편 강가에서

엘레야의 겉옷을 받아 본격적으로 예언자의 활동을 시작한 엘리사는 겉옷을 가지고 요단강 물을 쳐 갈라 건넌 후 여리고로 돌아왔다.

2. 엘리사가 요단강을

갈라 건넌 것을 본 선지자의 생도들은 엘리사에게 엎드려 경배하고 자신들의 지도자 위치에 놓았다. 그곳에서 엘리사는 물이 좋지 못하여 산물이 익지 못하고 떨어진다는 성읍 사람들의 말을 듣고 소금을 물근원에 던져 토산이 자라는 좋은 물로 고쳐 주었다.

3. 그리고 벧엘로

올라 가려고 성에서 나왔을 때 대머리라고 조롱하는 젊은 아이들을 저주하여 암콤 2마리가 나와 그들 42명을 죽이게 하였고 그 곳에서 갈멜산으로 갔다가 사마리아로 돌아왔다.

4. 사마리에서

다시 에돔광야에 내려 갔는데 이곳에서 엘리사는 여호람 과 남유다의 여호사밧의 연합군이 모압 원정을 가는 도중 물이 없어 큰 위 기를 겪게 되었을 때 나타나 여호사밧의 얼굴을 생각하여 큰물이 흘러내릴 것을 예고해 주었고 물이 에돔편에서 흘러 내려 연합군을 구했다.

5. 엘리사가 에돔광야에서

종군한 후부터 수넴으로 오기까지의 사건에 대해서는 특별한 내용이 없고 다만 왕하4:1-7 에서 죽은 선지자 생도의 아내 중 빚으로 두아들이 종이될 어려움에 있는 여인을 빌려온 기름 그릇에다 채우게 하여 기적으로 빚을 갚게 해주고 생활까지 할 수 있게 한 내용이 있다. 하루는 엘리사가 수넴에 이르렀을 때에 한 여인으로부터 귀한 대접을 받고 아들이 있을 것을 축복해 주었고 축복대로 그 여인은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아이가 어느 정도 자랐을 때 죽어 버렸다.

6.7. 그래서 그 모친은 자기 사환과 함께 갈멜산에 가서

엘리사를 만나 자기 집으로 같이 왔다. 이에 엘리사는 여호와께 기도한 후 입과 눈, 손을 아이의 몸과 같이 대니 아이의 몸이 따뜻해지다가 일곱번 재채기를 한 후 살아났다.

8. 수넴에서

아이를 살린 엘리사는 길갈에 내려와 흉년이 들어 고생하는 선지자 생도들을 위해 사환을 시켜 국을 끊이게 하였다. 그러나 선지자 중한 사람이 들외를 국속에 넣어 독이 생기게 되었다. 이에 무리들은 독이 있음을 엘리사에게 알렸고 엘리사는 가루를 넣어 독을 제거하였다. 그리고 나서 바알살리사에서 한 사람의 가져온 보리떡 20개와 채소 1자루로 100명을 먹였다.

9. 엘리사가 길갈에서 도단으로 가기까지

성서에 나오는 사건은 아람왕 벤하닷2세(벤하닷 1세의 아들인듯) 의 군대장관인 나아만의 문둥병을 고친 것과 빠진 도끼를 나무가지를 던져 떠오르게 하여 건져 준 것이 왕하 5:1-6:7 에 나온다.

10. 엘리사가 도단에 있을때

아람왕 벤하닷 1세가 이스라엘 (여호람)를 치기를 위해 이스라엘진영에 여러번 내려왔으나 그때마다 엘리사는 정보를 미리 왕에게 기별하여 방비하게 하였다. 이것을 아람왕의 신복이 알고 왕에게 고하자 아람왕의 신복이 알고 왕에게 고하자 아람왕 벤하닷은 엘리사를 잡기 위해 많은 군대를 보내 밤에 도단을 포위하였다. 아침에 포위 당함을 안 엘리사는 그들의 눈을 어둡게 하였다.

11. 그리고 엘리사는 그들을 이끌고 사마리아로 오게 한 후

눈을 뜨게 하였다. 그리고나서 그들을 죽이지 않고 음식을 주어 먹게한 후 고국으로 돌려 보냈다.

이일후 아람왕 벤하닷은 다시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사마리아를 포위하였다. 그들의 포위가 장기간 계속되자 성안은 굶주려 모든 양식값은 폭등하였고 그나마도 없어 자기 자식을 삶아 먹는 비참한 상황에 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때 엘리사는 하루만에 성문에서 보리와 가루 가격이 폭락할 것을 말 했으나 한 장관은 믿지를 않았다.

그러나 성밖에 있던 아람 군대는 말소리와 군대의 소리를 듣고 이스라엘 이 뇌물을 주고 헷사람과 애굽 군대에 구원을 요청하여 오는 줄 알고 장막 과 말과 모든 장비와 양식들을 남겨두고 급히 도망하였다. 이에 성밖에 있 던 문둥이들은 아람군대가 있는 곳으로 가서 (죽을 각오를 가지고 갔다) 마음껏 먹은 후 이 소식을 성안에 있는 백성들에게 알려 주었다.

그러나 여호람왕은 아람의 매복전술인 줄 알고 머뭇거리다가 신복들의 말대로 정탐꾼들을 보내 사실인지를 확인하고 나가 물건들은 취하였다. 이 때백성들은 엘리야의 말을 믿지 않았던 한 장군을 밟아 죽였다. 사마리아에 서위기를 넘긴 에리사는 전에 아들을 살려준 수넴여인에게 가서 7년동안 기 근이 있을 것을 알려주고 살만한 곳으로 가서 살도록 알려 주었다.

그리고 7년이 지난 후 여인은 본집으로 돌아 왔으나 자기집과 토지가 다른사람에게 넘어가 있었는데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이스라엘 왕에게 엘리 사의 이제까지 행한 일을 고하는 중 여인의 사건도 이야기 함으로 여인은 다시 자기집과 토지를 찾을 수 있었다.

12. 이후 엘리사는 다메섹에 갔을 때

아람왕 벤하닷이 병이 들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던 어느날 벤하닷의 군대장관 하사엘이 벤하닷의 명령으로 찾아와 병의 치료 유무를 알기 위해 막대한 예물을 가지고 엘리사를 찾아왔다.

이때 엘리사는 하사엘이 아람왕이 되어 이스라엘의 장정을 죽이고 아이 와아이밴 부녀들을 죽이는 잔악한 침략 행위를 할 것을 알고 울었다. 하사엘은 엘리사로부터 왕이 될 것이라는 말을 듣고 돌아와 이튿날 벤하닷에게 적신 이불을 덮어 죽게 했다.(왕하 8:7-15) 이일 후에 있은 엘리사의 행적 에대해서는 지명으로 연결할 수 없으나 소년 선지자 생도를 길르앗 라못으로보내 여호람의 장관 중 하나인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왕을 삼게 하였다.

그리고 엘리사는 이스라엘 요아스왕이 죽을 병에 들어 찾아와 슬퍼하는 요아스에게 그의 손을 안찰한 후 활을 쏘고 땅을 치게 하였다. 그리고 땅을 세번 친 만큼 아람을 세번쳐서 승리할 것을 예언한 후 죽어 장사되었다. 해 가바뀐후 사람을 장사하는 사람들이 시체를 엘리사의 묘실에 던졌는데 시체 가엘리사의 뼈에 닿자 회생하여 일어서는 기적이 일어났다.



엘리야(Elijah) / 여호와는 하나님



이스라엘의 예언자 중 가장 무서웠던 예언자.
북왕국 아합왕(B.C. 876-854)과 아하시야왕 시대에 걸쳐 사역하였다.

1. 디셉 사람(왕상 17:1).
2. 아합왕에게 예언하기를 내 말이 없으면 수년동안 비가 내리지 않으리라 하고 그릿 시냇가에 숨어있을 때 여호와가 가마귀를 시켜 조석 식물을 날라다 주게했다(왕상 17:1-7)
3. 사르밧과부집에 유숙하는 중에 한줌의 보리가루와 적은 기름으로 여러 날을 먹었어도 없어지지 않게 하고 그 과부의 아들이 죽은 것을 다시 살려 주었다(왕상 17:8-24)
4. 아합왕 때에 왕과 백성이 바알우상과 아세라우상을 숭배함으로 견책하고 아합왕에게 참신과 거짓 신을 가려내자 하여 바알선지 4백명과 아세라의 선지 4백5십명을 데리고 갈멜산에 올라가 송아지로 재물을 삼고 각기 자기의 신에게 기도하여 불로 응답함을 보자하여 먼저 바알과 아세라 선지 850명이 정오가 지나도록 외쳤으나 응답이 없고 엘리야가 여호와한테 부르짖을 때 불이 내려와 제물과 도랑의 물까지 모두 태워 버렸다. 즉시 백성들을 시켜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 850명을 기손 시내로 끌고 내려가 모두 죽였다.(왕상18:19-40)
5. 왕후 이세벨이 이 소식을 듣고 엘리야를 죽이려하므로 주의 천사가 어루만지고 식물을 주고 호렙 산굴에 있을 때는 여호와가 강한 바람과 지진과 작은 소리의 세가지로 보이시고 명령하시기를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왕이 되게 하고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왕이 되게하고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네 대신 선지자가 되게하라 하셨다(왕상 19:1-6)
6. 농부 엘리사가 경작하고 있을때 자기 겉 옷을 던져 따라오게 하였다 (왕상 19:19-21)
7. 아합이 나봇을 돌로 쳐 죽이고 포도원을 뺏었을 때 왕 앞에 나타나서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으리라 하였다(왕상 21:17-19)
8. 이스라엘왕 아하시야가 사자 50명씩 두번 보내어 오라 하는 것을 천화로 사루게 하고 세번째에야 가서 왕이 죽을 것을 예언했다 (왕하 1:9-16)
9. 승천하게 되어 엘리사에게 세번이나 작별 인사를 하였으나 떠나지 않으므로 무엇을 구하느냐 물으니 당신의 영감을 배나 원한다 하므로 내가 승천하는 것을 보면 성취하리라 하고 겉옷을 떨어 뜨리고 홀연히 불 수레와 불말이 두 사람을 갈라놓고 엘리야는 회오리 바람을 타고 승천하였다(왕하 2:1-11)
10. 그의 심정과 재능이 세례 요한과 비슷하다 하였다(눅 1:17)
11. 예수님이 변화하실 때에 모세와 같이 나타나서 주님과 말씀하셨다 (마 17:3)
12. 야고보는 간절히 기도하면 응답하여 주신다고 엘리야을 비유로 권면하였다(약 5:17)

*그는 험상한 모습과 탈속한 옷차림,비호같이 빠른 걸음, 기근도 걱정하지 않을 정도의 건장한 모습, 굴에서도 살수있는 억센 습관이 그의 특색이었다. 여호와 신의 예배에 절대적인 선지자였고 국가 운명에 대하여 예민한 통찰과 염려를 한 애국적인 인물이며 구약 선지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베냐민의 족장(대상 8:7)

  레위사람(대상 23:19, 24:23)

엘리야의 생애

1. 엘리야의 등장 (왕상 17;1)


엘리야선지는 오므리 왕자의 아합왕이 이스라엘을 다스릴 요단 북편에있 는 길르앗(Gilead) 지방의 디셉에서 등장하여 아합에게 수년동안 가품이있을 것을 경고하였다.

2. 그릿시냇가에서 (왕상 17:2-7)

아합에게 가뭄이 있을 것을 경고한 후 엘리야선지는 하나님의 명대로 아합을 피해 요단강 앞 그릿시냇가로 가서 숨고 까마귀들이 가져다 주는 떡과 고기를 먹고 시냇물을 마셨으니 계속된 가뭄자므로 시냇물이 말라 더 이상 마시지 못하였다.

* 그릿시냇가 (Cherith brook):그 위치에 대해서는 정확한 이론은 없으나 중세시대에는 요단 동편 길갈 근처로 현재의 와디켈트(Wadi Qekt) 로 생각 했고 오늘날의 대부분 학자들은 엘리야의 고향에 있는 여러 강줄기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아마 성서에 언급된 요단 앞과 그 내용전개를 보면 디셉에서 그리 멀지 아니한 요단강 근처의 한 조그마한 와디(Wadi) 강줄기였을 가능성이 크다.

3. 사르밧에서 과부의 공궤를 받음(왕상 17:8-24)

그릿시냇물이 마르자 하나님의 명대로 시돈지역에 속한 사르밧 (두로와시 돈의 중간지점)으로 올라갔다. 그가 사르밧의 성문에 이를 때에 아들과 같이 떡 하나를 만들어 먹고 죽으려고 하는 과부를 만나 그 떡을 자신이 먼저 먹은 다음 그 과부의 집에 가뭄이 마칠 때까지 기름과 밀가루가 부족하지 않을 만큼 먹을 수 있는 기적을 베풀어 주었다. 이일 후 하루는 그 과부의 아들이 병으로 죽자 엘리야는 그 아이 위에 몸을 세번 펴서 엎드린후 하나님께 기도하여 낫게 하였다.

사르밧에서 3년을 지낸후에 엘리야는 가뭄이 끝날 것을 아합에게 고하기 위하여 사마리아로 내려가는 궁내대신 오바다를 만났다. 이 자리에서 오바댜는 엘리야로 아합에게 안 가기를 청하였으나 엘리야는만나기를 맹세했고 이에 오바댜가 할수없이 아합에게 엘리야를 고했다. 아합은 나가 엘리야 앞에 이르고 엘리야는 바알과 아세라 신과의 대결을 갈멜산에서 갖기로 제의하였다.

4. 갈멜산의 대결 (왕상 18: 19-46)

엘리야선지의 제의를 수락한 아합은 바알선지 450명과 아세라 선지 400명을 갈멜산으로 나오게 하였다. 마침내 엘리야와 바알과 아세라 선지 850명 은 제단을 쌓아놓고 불의 임함으로 대결을 시작하였다.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이 먼저 단을 쌓고 제물을 올려 놓고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며 부르짖었으나 아무런 응답이 없자 단 주위에서 뛰어 놀았고 이에 오정쯤 되어 엘리야는 저들에게 너희 신이 묵상하고 있는지 잠깐 나갔는지 혹은 길을 가는지 아니면 잠이 들었는지 모르니 큰 소리로 부르라고 조롱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더 큰 소리로 부르며 자신들의 규레대로 창과 칼로자해하여 피를 흐르게 하며 부르짖었으나 저녁 때까지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이에 엘리야는 주위의 모든 백성들을 모이게 하고 돌로 여호와의 단을 쌓고 주위에 도랑을 만들고 송아지로 각을 떠서 제단의 나무위에 놓았다.

그리고 물을 가져다가 번제물과 나무위에 여러번 갖다부어 도랑에 물이 가득하게 될 때까지 분 다음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여호와여 내게 응답 하소서하며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자 하늘에서 불이 내려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까지 태우고 도랑의 물도 다 마르게 하였다.

이에 백성들은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외쳤고 엘리야의 명령대로 바알과 아세라선지자를 잡아 기손시내로 데려다가 모두 죽였다. 그리고 나서 엘리야는 아합에게 비가 올 것을 알려 주었고 강이 범람하기 전에 마차를 탸고 내려가라고 말하였다. 이 말과 동시에 큰 비가 내렸고 아합은 속히 서둘러 이스라엘로 갔다. 이때 엘리야는 이스르엘 입구까지 아합왕 앞에 행하였다.

5. 이세벧을 피해 브엘세바로(왕상 19:1-3)

이세벧은 엘리야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를 갈멜산에서 죽인 것을 알고 사자를 보내 엘리야를 죽이려고 하였다. 이 소식을 엘리야가 듣고 그곳을 피해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자기 사람과 함께 갔다.

6. 로뎀나무에서의 통곡(왕상 19:4-7)

이세벧을 피해 브엘세바로 온 엘리야는 자기 사람을 그곳에 놓고 다시남으로 하룻길을 걸어 한 로뎀나무가 있는 곳에 이르러 하나님 앞에 죽기를간 구하다가 잠이 들었는데 천사가 와서 깨운 후 숯불에 구운떡과 물을 먹고다시 잠이 든 후 천사에 의해 일어나 다시 음식을 먹고 힘을 얻었다.

7. 호렙산으로 (왕상 19:8-18)

로뎀나무 아래서 천사가 가져다 준 음식을 먹고 힘을 얻는 엘리야는 40일을 행하여 하나님의 산호헵산에 가서 한 굴에 거하였다. 그곳에서 다메섹의 하사엘과 예후와 엘리사에게 각각 기름을 부어 아람왕과 이스라엘의 왕과 자신의 후게자로 세우라는 명을 받았다.

8. 엘리사를 만남 (왕상:19:19-21)

호렙산에서 명을 받은대로 엘리야는 그곳을 떠나 아벧므홀라에서 열 두겨리의 소로 밭을 갈고 있는 엘리사를 만나 자기 겉옷을 던져 자기를 따라오 게 하였으며 엘리사는 이때부터 엘리야는 따라 다니며 그의 수종을 들었다.

9. 나봇의 포도밭

사건으로 아합이 죽을 것을 예고함(왕상 21:1-26)엘리야가 엘리사를 만난 후 아합은 아람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부친(오므리) 이 빼앗겼던 성읍을 도로 찾았다. 이일후 아합은 자기궁 가까이에있는 나봇의 포도밭을 사는데 실패하자 근심하다가 왕후인 이세벧의 모략으로 돌로 쳐 죽인후 그 포도밭을 차지하였다.

이 일을 엘리야가 하나님으로부터 듣고 아합 앞에 나가 그가 죽어 그 피를나봇이 죽은 곳에서 개들이 핥을 것을 예고하였다. 이에 아합은 잘못을 뉘우치고 옷을 찢고 금식하며 행보를 천천히하며 겸손하자 하나님은 그 재앙을 아들의 시대에 내리게 하셨다.

그리고 아합이 아람을 물리쳐 승리한 후 3년째에 아합은 남유다의 여호사밧 왕과 연합군을 조직하여 아람의 길르앗 라못을 치러 올라갔다. 이 싸움에서 아합은 부상을 당해 저녁에 죽어 사마리아에 장사되었고 그 병거는 사마리아의 창기들이 목욕하는 곳에 부으니 개들이 그 피를 핥았다.

10. 아하시야에게 경고함(왕하1:1-4)

사마리아에서 여호사박 17년에 즉위한 아하시야왕은 통치기간 중 악행과 바알신 숭배와 그 아비의 온갖 악행을 저질렀다. 통치말년 그가 다락난간에서 떨어져 병이 들었을 때 에글론 신에게 치료 유무를 알아보기 위해사자를 보냈는데 엘리야를 통해 침상에서 죽을 것을 보고 받고 오십부장 50인을 엘리야가 보냈으나 불에 타서 죽었다. 이에 다시 오십부장 50인을 보냈으나 마찬지로 불에 타죽었고 세번째로 보낸 오십부장 50인들은 간절히생명을 간구하매 죽지 않고 엘리야와 함께 왕에게 갔다.

왕 앞에서 엘리야는 말하기를 네가 바알세불에게 물으려 하니 이스라엘에 그 말을 물을 만한 하나님이 없음이냐. 그러므로 네가 그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찌라고 하였고 그 말대로 아하시야는 죽고 그 아들 여호람이 왕이 되었다.

11. 엘리사와 함께 승천 직전의 노정(왕하2:1-5)

아사히야가 죽고 여호람이 북이스라엘의 왕이 된 때 엘리야선지는 하나님이 명령대로 길갈로 갔으며 그곳에서 엘리사를 머물게 하고자 했으나 엘리사는 끝까지 반대하였다. 그리고 난후 엘리야는 벧엘과 여리고로 갔고 그때마다 엘리사를 떼어 놓으려고 하였다.

12. 엘리야의 승천(왕하2:6-11)

여리고에서 요단을 건넌후 곧 승천하기를 앞둔 엘리야선지는 엘리사에게 구할 것을 말하라고 하였고 이에 엘리사는 스승이 가졌던 영감의 갑절을 구했다. 그리고 난 후 엘리야는 홀연히 불수레와 불말이 내려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였고 엘리사는 엘리야의 겉옷을 취하였다.

이스라엘 선지자-- 이방종교 [바알] 추방 큰공아합의 왕권과 정면대결한 이스라엘의 위대한 선지자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당시 빈자의 상징이었던 털옷을 어깨에 걸치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다니면서 바알숭배와 아세라 경배 타도를 부르짖었다(왕하 1:1-8).

이스라엘 왕 아합이 바알의 사당을 건축하고 아세라 목상을 만들어 여호와의 노를 격발하였을 때 그는 왕앞에 나타나 바알숭배의 대가로 이스라엘 땅에 수년동안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을 예언했다.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고하되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왕상 17:1절).

그후 엘리야는 왕의 박해를 피하여 요단 동편에 있는 그릿 시냇가에 몸을 숨겼으며 여호와께서는 매일 그에게 까마귀를 통하여 떡과 고기를 공급하게 하셨다(왕상 17:2-7). 계속 땅에 비가 없으므로 시내가 말라 버리자 엘리야는 시돈 땅 사르밧으로 가서 한 과부가 공궤하는 떡과 물을 먹고 마시므로 목숨을 연명할 수 있었다(왕상 17:8-16).

엘리야의 절정적 사역은 갈멜산에서 바알의 선지자 4백50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4백명과 대결하여 승리한 일이다.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 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 지라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 엘리야가 저희에게 이르되 바알의 선지자를 잡되 하나도 도망하 지 못하게 하라 하매 곧 잡은 지라 엘리야가 저희를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거기서 죽이니라](왕상 18:38-40).

엘리야의 능력의 기도는 3년6개월간 가뭄이 계속되던 땅에 단비를 내리게 했으며 그리고 아합과 이세벨의 학살령을 피하며 호렙산 동굴에 은둔하고 있을때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서

⑴ 예후를 세워 종교개혁을 단행케 함으로 바알숭배를 청산했으며 ⑵아람왕 하사엘을 통하여 아합의 왕조를 진멸케 했고⑶엘리사를 후계자로 삼아 이스라엘의 회복과 신앙부흥을 일으키게 했다.

이 과업을 끝낸후 그는 제자가 지켜 보는 가운데 불말과 불수레를 타고 하늘로 승천했다(왕상 19:15 -21, 왕하 2:11).

갈멜산에서 바알숭배자 물리쳐성경:열왕기상 17~18장

엘리야는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라는 뜻이다. 엘리야는 길르앗의 디셉 사람이며 큰 선지자였다. 그는 털이 많은 사람이며 허리에 가죽 띠를 두르는 것이 특징이었다. 엘리야는 순수하면서도 엄격하고 조용하면서도 담대한 사람이었다. 아합왕의 죄로 수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않을 것을 선포하고 그릿 시냇가에 은신하며 까마귀의 도움으로 생존하였다. 그후 시돈의 사르밧 과부의 집에서 기적으로 살았고 죽은 아들을 소생시키기도 하였다. 엘리야의 큰 헌신은 3년후 오바댜를 통해 아합을 만나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선지자 4백50인과 아세라의 선지자 4백인을 갈멜산에 모아 모든 백성 앞에서 참 신을 분별하도록 제안하였다. 바알의 선지자들은 자기들의 규례대로 몸을 상하며 바알을 불렀으나 실패했다. 저녁 때에 엘리야가 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수축하고 열두지파를 위해 열두 돌을 취하였으며 열두 통의 물을 붓고 [여호와께서 하나님이 되심과 종이 주의 종인 것과 이 일이 주의 일인 것을 알게 하옵소서]하고 기도할 때 불로 응답하셨다.

결국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은 기손강에서 살해되었다. 그후 흡족한 비가 허락되었다. 엘리야는 엘리사를 후계자로 지명하였고 하사엘과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왕이 되게 한 후 요단강 동쪽에서 불 말과 불 수레를 타고 승천 하였다.

교훈과 적용 첫째, 엘리야는 하나님의 종으로 헌신의 모범을 보인 사람이다. 환경과 상황을 초월한 순종이었다. 하나님을 사랑하자.

둘째, 하나님께 자신을 온전히 위임할 때 하나님이 책임져 주셨다. 참된 충성은 하나님의 큰 손이 함께하신다.

최후의 하나님의 권고(왕상 17 - 22장)이스라엘은 특별한 나라였습니다. 곧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라는 점에서 아주 특이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국가 자체가 하나님을 위한 종교기관입니다. 곧 종교와 국가가 분리될 수 없는 혼연일체의 나라인 것입니다. 이러한 요소는 결코 간과되어서는 안됩니다. 오늘날의 국가는 종교와 국가와는 서로 다른 위치와 이념이 있습니다. 그래서 서로 돕는 다든지, 적대관계가 되든지 하는 관계가 형성될 수 밖에 없습니다.

자유 국가들에게서는 종교를 인정하고 서로 독립한 가운데서 돕고 있습니다. 반면에 공산국가에서는 적대시하고 탄압을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철두철미하게 종교가 곧 국가요 국가가 곧 종교였습니다. 그래서 왕으로부터 제사장 그리고 모든 백성들에게 이르기까지 오직 하나님만을 위하고 섬기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국가 유지를 위한 헌법이란게 따로 독립되어 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제정해 주신 율법이 곧 국가의 헌법입니다. 그리고 왕의 위치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다스리시기 위한 대리자였으며, 제사장은 그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복을 전달해 주는 중보자였습니다. 선지자는 혹 왕이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방종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되새기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떠나지 못하게 하는 파숫군이었습니다. 따라서 왕이 올바른 통치를 하지 못한다든지 제사장이나 선지자들이 자기 직무를 다하지 못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방자해져서 부패해지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의 참된 모습들도 상실해 버리게 됩니다. 이런 점들을 볼 때 백성들을 위하여 세워진 직분자들의 위치는 아주 막중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들 하나가 잘못될 때 파급되는 악이라는 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솔로몬이 지혜를 얻어 당시에 유력한 통치자로 세인들의 부러움과 존경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정략적으로 이웃 나라들과 맺은 정략결 혼으로 말미암아 이방신들이 이스라엘 안으로 들어오게 되자 커다란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백성들이 이방신들의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기도 하며, 하나님만을 섬기는데 있어서 등한시 하게 되었고 우상숭배나 하나님 숭배나 별반 다른게 없다라고 여겨질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만을 섬기도록 세워진 이스라엘 국가 자체의 설립 의도가 무너지게 되며 이스라엘이라는 독특한 존재 이유마저도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왕 한 사람의 실수가 나라 전체를 무의미하게 타락시킬 수가 있었기에 모세는 신명기에서 왕제도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았으며 사무엘 역시 경고를 했던 바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울이라는 왕을 택하셔서 왕제도 자체가 가지고 있는 불합리한 모습의 실례를 보여주시기까지 하였던 것입니다.

이와같이 이스라엘이 종교적으로 타락하게 되어 이스라엘의 본래의 목적을 잃어버릴 것을 우려하신 하나님은 여로보암을 택하시어 10지파를 갈라 북 이스라엘왕국을 세워주셨습니다. 그리고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율례와 명령을 지키면 견고한 집을 세워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왕상 11:30). 그러나 여로보암은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을 금송아지로 바꾸어 섬길 뿐만 아니라 전 백성들도 그와 함께 경배하도록 종용하였고 따라서 하나님은 그를 폐하고 말았습니다. 그 뒤를 이은 이스라엘의 왕들도 역시 여로보암의 정책을 그대로 답습했기 때문에 계속된 찬탈과 반목의 역사가 지속됩니다.

이런 참혹한 상태에서 강력하게 왕권을 쥔 사람이 오므리였습니다. 오므리는 국방을 튼튼히 하고 자신의 왕권을 강력하게 세워나갔으므로 당시 주변 국가들로부터 경계의 대상이 될 정도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초 강대국가였던 앗시리아에까지도 오므리의 명성이 들릴 정도였습니다. 이처럼 오므리는 외적으로 아주 강력한 이스라엘 국가를 건설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로보암의 정책과 별반 다른 점이 없었으며 특히 북방의 두로와 시돈과 화친정책을 썼습니다. 그 이유는 당시에는 아람이 이스라엘에 대한 가장 위협적인 세력이었는데 아람 배후에 있는 두로와 시돈과 화친을 맺음으로 아람이 쉽게 이스라엘을 침공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러한 화친정책으로 오므리는 아들 아합을 시돈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과 결혼시켰습니다.

그리고 아합은 오므리를 이어 북 이스라엘왕국의 왕이 되었습니다. 이 아합에 대해 성경은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 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로 아내 를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숭배하고 사마리아에 건축한 바알의 산당 속에 바알을 위하여 단을 쌓으며 또 아세라 목상을 만들었으니 저는 그 전의 모든 이스라엘 왕보다 심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노를 격발하였더라(16:30-33)고 기록합니다. 여기에서 이스라엘의 앞날이 결정적인 변화를 갖게 됩니다.

곧 이전의 왕들은 하나님을 섬기되 하나님의 형상을 바꾸어 섬겼습니다. 그러나 아합시대에 와서는 아예 여호와에 대한 어떤 종교 행사도 하 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아합의 아내 이세벨은 철저하게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을 제거하고, 오히려 바알과 아세라를 위한 제사장을 세우며 모든 백성들로 하여금 여호와를 떠나 바알과 아세라에게 경배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배도의 시기는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 전 모든 왕보다 아합이 악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자 당시의 상황은 완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버리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 당시의 영적 상태를 단적으로 표현해주는 기록이 곧 그 시대에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를 건축하였는데 저가 그 터를 쌓을 때에 맏아들 아비람을 잃었고 그 문을 세울 때에 말째 아들 스굽을 잃었으니 여호와께 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로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16:34)는 말씀입니다. 여리고성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 최초로 하나님의 권능으로 점령했던 곳입니다.

그때 여호수아는 여리고성을 다시 건축하는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했었습니다(수 6:26). 그런데도 불구하고 히엘이 여리고성을 재건하던 중 그 아들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여리고성을 쌓고 있음을 볼 때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상태가 어떠했는지를 단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시대가 여호와의 말씀을 떠나 깊은 어둠에 빠지게 된 것은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세라의 우상에 깊이 빠진 결과였으며 바로 이러한 일이 아합과 이세벨에 의해 자행 되었던 것입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나라로 세움을 받은 이스라엘이 철두철미하게 하나님을 떠나 버리고 배역해버린 상태에서 하나님을 대변하는 선지자로 세 움을 받은 이가 곧 엘리야였습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엘리야는 아합을 찾아가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 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17:1)고 선포 합니다. 이미 하나님을 떠나고 바알숭배에 빠진 이스라엘에게 기근이 선포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근이란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합니다. 약속의 땅에서의 전쟁이나 기근은 곧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레위기 26장 참조). 그후 과연 3년 6개월간 이스라엘 지방에는 비가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극심한 기근에 시달렸습니다. 그러자 속이 탄 아합이 엘리야를 찾아 나섭니다. 엘리야는 여호와를 경외하고 선지자들을 이세벨의 박해 가운데서도 보살펴 준 군대장관 오바댜를 통해 아합을 만납니다.

엘리야를 본 아합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네냐(18:17)고 하자 엘리야는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비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좇았음이라(18:18)고 지적하면서, 바알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 명을 모아 갈멜산에서 누가 진정한 하나님인가를 드러내도록 대결을 하자고 선언합니다.

그러자 모든 백성들과 선지자들이 갈멜산에 모이게 되 었습니다. 그곳에서 엘리야는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 를 좇을지니라(18:21)고 신앙의 촉구를 합니다. 그러나 이미 하나님을 떠나 바알과 아세라에 길들여진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엘리야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 대결을 벌입니다. 먼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이 하늘로부터 불을 내려 준비해 놓은 제물을 태우도록 하였습니다만 저녁이 다 되도록 아무런 응답도 얻을 수 없었습니다.

엘리야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 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 여호와여 내게 응답 하소서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18:36-37)라고 기도합니다.

그러자 하늘로서 불이 내려와 번제물을 태우고 모든 백성이 엎드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18:39)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을 잡아 기손강에서 처단합니다. 이 대결의 목적은 누가 진정한 하나님이시며 이스라엘의 통치자이신 것을 밝히고 이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의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을 신앙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후 비가 내려 그간의 기근이 종식됩니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이세벨은 아직도 의기양양해서 오히려 엘리야를 잡아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모습을 본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그러자 엘리야는 혈혈단신으로 40일간의 광야길을 걸어 시내산으로 들어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앞에선 엘리야는 하늘로서 불이 내리는 증거를 목도한 이스라엘이 아직도 신앙으로 바로 서지 못하고 여전히 이세벨의 눈치를 보는 연약하고 패역한 모습을 심판해 주실 것을 기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크고 강한 권능이 개입하셔서 과연 하나님이야말로 온 우주의 왕이시며 이스라엘의 진정한 주인이신 것을 나타내 주시기를 바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크고 강한 바람과 지진 가운데서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세미한 소리 가운데 앨리야에게 응답하십니다.

먼저 다메섹에 가서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으로 삼고, 이스 라엘의 왕으로는 예후를 기름붓고, 선지자로서는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19:17)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을 배도한 이스라엘 위에 커다란 심판이 있을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런 후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19:18)고 하시면서 특별히 주를 위해 남은 자를 남기시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결코 어느 시대나 그의 백성들을 버리시지 않으십니다. 모두가다 바알 앞에 무릎을 꿇을지라도 하나님의 백성들만은 특별한 섭리와 보 호 아래 그들의 신앙을 지켜 나갈 수 있도록 돌보아 주시는 법입니다. 믿음을 지키기가 힘이 들고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일지라도 하나님 의 백성들은 결코 그러한 상황이나 환경을 탓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자기들의 신앙을 지켜나갑니다. 비록 생명을 내놓는 한이 있더라도 박해가 심하고 믿음을 지키기가 고달프다해서 배신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세상을 더 불쌍히 여기고 위하여 기도하며 연약한 성도들이 신앙을 잃지 않도록 위해 기도하며 힘씁니다. 엘리야 시대에도 모든 사람 들이 다 하나님을 떠난 것 같았지만 하나님은 그 가운데서도 순전한 7천명의 성도들을 남겨 놓으셨습니다. 우리가 어떤 이유에서라도 믿음을 저버리는 것은 그러므로 하나의 핑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라도 정당화시킬 수 없습니다. 성도는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법입니다.

그 당시 상황이 얼마나 악했느냐 하는 것은 나봇의 포도원을 이세벨이 탈취하는 사건에서도 잘 나타납니다(21장). 나봇의 포도원은 기업으로 주어진 땅입니다. 한 번 기업으로 주어진 땅은 결코 팔 수도 없었으며다른 이에게 어떤 이유에서라도 명의 변경이 되질 않는 법입니다. 왜냐하면 그 땅 가나안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된 이스라엘에게 값없이 기업으로 주신 땅이기 때문에 사거나 팔 수 없었습니다.

혹시 팔았다 하더라도희년까지의 남은 햇수를 계산하여 값을 치루되 희년이 되면 원 소유자에게 돌려 주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합은 나봇이 기업으로 받은 땅을 차지하려고 했고 이세벨은 악한 수법으로 나봇을 죽이고 차지하고야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하나님의 계율을 어긴 아합에게 네가 죽 이고 또 빼앗았느냐(21:19)고 하시면서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네 피 곧 네 몸의 피도 핥으리라(21:19)고 저주하셨습니다. 참으로 그 시대는 불법이 난무하는 시대요 공의가 잠자는 암흑의 시대였습니다. 과연 이러한 나라를 하나님은 어떻게 처리하실까요?

 



고(故) 이동훈목사(Pastor Jacob Lee)

이동훈목사 죽음에 대한 신앙적 이해

조카 고(故) 이동훈목사(Pastor Jacob Lee)
05. 04. 1984∼09. 28. 2020 am 9:42
New Life Drseher Church https://newlifedresher.org/

진리가 자유케 하리라(요한복음 8:32)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Then you will know the truth, and the truth will set you free.

진리가 자유하게 합니다.
진리는 예수님입니다(요한복음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Jesus answered, I am the way and the truth and the life. No one comes to the Father except through me.

진리가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아는 것으로 만족한다면 이것은 신앙의 초보적 단계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영이시기 때문입니다(고린도후서 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Now the Lord is the Spirit, and where the Spirit of the Lord is, there is freedom.

진리가 자유케 한다는 말씀은 곧 영이 자유케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영을 체험해야 합니다.
영을 체험하는 것은 성령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을 받아야만 진리가 되시며 영으로 세상에 오신 주님의 은혜를 힘입어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신앙인들이 영으로 예수님을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혼과 몸으로 체험하는 정도로 멈추고 있습니다.

몸으로 체험하는 예수 몸으로 체험하는 예수는 "기적의 예수" 라고 하겠습니다.

기적의 예수란 벳새다 들판에서 굶주렸던 사람들에게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개고 오천 명을 먹이셨고 남은 광주리가 12개 이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몸으로 체험하는 예수는 육신의 몸을 갖고 살아갈 때 육신의 문제에 부딪칠 때마다 기적을 기대하고 기다리기 때문에 육체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때는 예수에 대한 믿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면 암으로 고생하는 암 환우가 예수를 믿는다면 기적같이 암 덩어리가 모두 몸에서 없어지는 것만이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복음서에 나타났던 기적의 사건에 참여했던 그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 사건 앞에서 모두 외면했습니다.

혼으로 체험하는 예수 혼으로 체험하는 예수는 "이성적 예수"라고 하겠습니다.

혼이란 정신을 말합니다.
신앙을 정신적인 영역에 가두고 믿음을 형성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바리새인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찾아와서 내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요 질문할 때 예수님께서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때 니고데모는 어른이 된 후에 어떻게 어머니의 모태에 들어갔다 다시 나올 수 있을까 하며 머리를 흔들고 돌아갑니다.

정신적인 위로자가 되는 예수님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온전한 영으로 세상에 오셔서 영으로 회복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어떤 부인은 남편을 잃고 세상살이가 힘들고 어려울 때 주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며 어려움을 극복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사업의 어려움에 자살을 시도했으나 극적으로 회복되어 주님을 만났다며 새 힘을 얻었으나 다시 사업이 기울고 어려워 질 때 왜 나를 버리셨느냐 하며 절망에 다시 붙잡히는 경우는 혼으로만 예수를 믿는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영으로 체험하는 예수

영으로 체험하는 예수는 "신령한 예수" 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었고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사람의 도리를 감당하려고 30세까지는 전혀 하늘의 일에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30세가 되었을 때 세례를 받은 후 하늘의 일에 전념하셨습니다.

공생애 3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에게 기적과 같은 사건을 보여주며 메시아가 되심을 전하셨습니다. 그러나 아직 성령께서 임하지 않은 시대이었기에 예수님을 영으로 이해하고 믿을 수 있는 길이 쉽게 열리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제자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도 제자로 부름을 듣기 전에 일을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후에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 보혜사 성령을 기다리라는 말씀에 제자들이 모여서 기도할 때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일어난 후 베드로를 위시하여 그 자리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모두 영으로 예수를 체험하였고 그때부터 완전히 변화된 삶이 시작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오늘날은 이미 성령강림이 일어난 이후의 시대이므로 직접 성령의 임재를 기도해야 하며 성령 체험이 있어야만 예수를 영적으로 믿을 수 있는 단계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죽음이란 생명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두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몸과 혼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영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은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이란 영원한 생명을 회복하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임종을 맞이하는 환자들에게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영적인 예수를 믿었다면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육체의 몸은 이 세상에서 온갖 질병과 사건과 사고로 인하여 고통과 아픔을 갖게 되지만 죽음 후에는 이 모든 질병과 사건과 사고 그리고 고통과 아픔으로부터 자유하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동훈목사의 경우 36세의 젊은 나이입니다.
더구나 가족들은 아내 라헬과 두 아들 그리고 딸이 살아가야 할 과정이 너무 힘들게 느껴집니다.

이동훈목사 Jacob Lee(1984. 5. 4- 09. 28. 20 am 9:42) 36세
Wife / Rachel Tan Lee(1989. 12. 17-) 31세
Son / Zephaniah(2015. 9. 9-) 5세
Son / Jayden(2017. 6. 25-) 3세
Daughter / Kaelyn(2019. 6. 30-) 1세

몸과 혼으로만 생각하면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런데 영으로 생각하면 가장 좋으신 하나님께서 몸과 혼으로는 알 수 없는 놀라운 계획을 갖고 있으므로 남은 가족들과 우리가 위로를 받습니다. 이제부터는 놀라운 주님의 계획에 따라 살아갈 수 있는 믿음을 기도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The Spirit gives life; the flesh counts for nothing. The words I have spoken to you are spirit and they are life.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I tell you the truth, whoever hears my word and believes him who sent me has eternal life and will not be condemned; he has crossed over from death to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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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10월 10일 토요일입니다.
오늘 어머님 김은신권사님(92세)에게 손자 이동훈목사(36세)의 죽음을 알렸습니다.
처음에는 몹시 당황해 하시면 놀란 얼굴 표정으로 “세상에.........!” “세상에........!”만 연발하셨습니다.

연로하신 어머님에게 손자의 죽음을 알리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로부터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면 가슴에 묻고 살아간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자식이 아니라 손자가 그것도 목사가 되어 모두에게 사랑을 받아야 할 때에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알려주는 것은 망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죽은 자식을 부모의 가슴에 묻는다는 것은 신앙적인 자세가 아니기 때문에 오늘 아침 기도를 마치고 故 이동훈목사 천국환송예배 라는 하관 예식 순서를 보여주므로 간접적으로 알렸습니다.

평소에 잘 듣지 못하시는 어머님께서 “언제 죽었니?” 라고 물으시기에 “9월 28일” 이라고 말했는데 정확하게 “28일” 하고 확인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럼 장례는?” 하시기에 이미 장례를 마쳤으며(10월 1일 하관예식) 나중에 알려 드리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분명한 의식을 갖고 받아드리고 인정한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충격적인 소식일지라도 정말 믿음이라면 충격을 완화시킬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점심 식사를 하였는데 평소보다 조금 적게 드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고 평소와 마찬가지로 즐겨 읽으시던 책을 읽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지켜보며 이동훈목사의 죽음에 대한 두 번째 글을 올립니다.

성경은 사람을 세 종류로 구분합니다.

첫째는 육에 속한 사람(고린도전서 2:14)
- The man without the Spirit,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 영적이 아닌 사람, 자연에 속한 사람.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둘째는 신령한 사람(고린도전서 2:15)
- The spiritual man, 영적인 사람.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셋째는 육신에 속한 사람(고린도전서 3:1)
- worldly, 세속적인 사람, 육적인 사람, 육에 속한 사람.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가족들 중에서 어린 자녀들이 먼저 세상을 떠났을 때 믿음의 어른들이 보여주어야 할 믿음의 자세는 분명합니다.

나는 어떤 종류의 사람으로 신앙생활을 하였는지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하겠습니다.

신령한 사람(The spiritual man, 영적인 사람)의 특징은 “모든 것을 판단합니다. 그러나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않습니다.”

판단한다는 것은 죽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 죽음 때문에 신앙의 흔들림이 없으므로 판단을 받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역시 믿음이란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확실한 소망 즉 영생의 소망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디도서 1:2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디도서 3:7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영생의 소망이란 죽음의 세계에서 분명하게 빛을 발할 것이며 완벽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령한 사람만이 어떤 죽음이라도 신앙으로 받아드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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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1일 2020년
주일 오후 시간입니다.
온라인 예배를 마치고 가족들이 점심 식사를 마쳤습니다.
오후 2시경 이경혁, 전한영 내외가 어머님을 찾아왔습니다.
아들을 가슴에 묻은 부모의 마음은 무겁습니다.

더구나 손자를 먼저 보낸 할머니의 마음은 “왜 나와 같은 사람은 살려두고 할 일이 많은 사람은 데려 가셨는가?” 하며 깊은 탄식의 질문을 던집니다.
이어서 “동훈이는 행복하지! 아무 걱정도 없는 곳에서 평안히 머물고 있지만 라헬과 아이들은 어떻게 하니? 죽은 사람은 행복하다! 그런데 남아 있는 가족들은 어떻게 하니?” 그러자 동훈 애비가 “살아 있는 사람은 더 행복합니다!” 하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도록 차단의 벽을 칩니다.

여러 시간 그간의 이야기를 나누며 암 투병의 과정을 듣습니다.
듣기만 하는 것이 위로가 됩니다.

왜냐하면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애비와 어미의 심정에 “하나님의 뜻이니 위로 받으세요!” 라는 형식적인 말은 위로가 아니라 오히려 아픔의 대못을 가슴에 내리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젊은 아들이 군목으로 활동하던 중 말기 암으로 통증을 호소하며 고통을 받으면서도 병원에 누워있기 보다는 기도원(대한수도원)에 기거하며 마지막 순간까지 육체적인 고통을 진통제보다는 주님을 닮아가려고 몸부림 쳤던 아들 목사가 세상을 떠났을 때 교인들이 어머니 전도사님(김용준)에게 “하나님의 뜻이니 위로를 받으세요!” 하며 형식적인 인사를 할 때 그 어머니 전도사님은 마음속으로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네 아들이 이렇게 죽어봐라! 그런 소리가 위로가 되는가!”

이런 고통과 아픔의 소리가 3년이 지난 어느 날 비슷한 아픔을 겪게 된 교인을 만났을 때 그의 두 손을 붙들고 “내가 다 알아! 그 아픔을....... 나도 그 고통의 터널에 갇혀 있었지. 참고 견디자!” 하며 위로할 때 그 교인은 얼굴을 전도사님의 품에 묻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그때 어머니 전도사님께서 깨달은 것은 이런 고통과 아픔을 겪는 사람들을 어떻게 위로 할 수 있는지 먼저 경험하게 하셨구나! 하며 아들의 죽음을 통한 하나님의 깊은 섭리를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왜 생각지도 못한 아픔과 고통을 경험해야 합니까?

왜 예수님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내가 예수를 알기도 전에 십자가의 아픔과 고통을 당해야 했습니까?

세상에서 잠간 경험하게 하신 그 아픔과 그 고통으로 인하여 십자가의 주님을 더 가깝게 뜨겁게 진정으로 만날 수 있는 은총의 기회가 되도록 인도하시는 주님의 세계를 생각하며 고통의 진한 향기 속에서 풍겨나는 영생의 기쁨과 소망을 기대하며 슬픔의 자리를 위로의 자리로 변화시킬 수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거듭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I tell you the truth, whoever hears my word and believes him who sent me has eternal lifeand will not be condemned; he has crossed over from death to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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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3일(화)

고린도후서 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Therefore we do not lose heart. Though outwardly we are wasting away, yet inwardly we are being renewed day by day. 

겉사람(outwardly)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약해지고 병들어 갈 것입니다. 그러나 속사람(inwardly)은 겉사람과 반비례로 진행될 수 있습니다.

죽음을 겉사람이라고 비유하면 영생은 속사람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겉사람은 죽음을 안타깝다고 하며 슬퍼하거나 절망합니다. 그렇지만 속사람은 죽음 앞에서 담대합니다. 왜냐하면 속사람은 영생에 대한 믿음이 분명하기 때문에 죽음은 잠시 겉사람과의 이별이지만 속사람은 더 건강하고 질병이 없는 가장 행복한 나라에서 다시 만날 때를 기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영생에 대한 소망을 쉽게 허락하지 않습니다. 넘어야 할 고비가 시도 때도 없이 다가올 것입니다. 생각도 할 수 없었던 어려움이 부딪치면 대부분 후회하고 낙심합니다. 이와 같은 모습이 일반적인 사람들의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영생의 소망을 현실에서 실현시키려면 엄청난 노력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라헬의 경우 이제 시작입니다.
5살 아들 재원(Zephaniah. 2015. 9. 9), 3살 아들 재선(Jayden. 2017. 6. 25) 그리고 1살 딸 재은(Kaelyn. 2019. 6. 30)을 양육하려면 경제적으로도 부담스럽습니다. 육신적으로도 힘들 것입니다.

이러한 부담을 나눌 수 있는 보살핌이 필요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보살핌이 서로에게 불편하지 않고 부담이 없이 지속될 수 있는지 지혜를 모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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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에 그들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시니”(마가복음 16:12)

성경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 중 여러 경우에 있어서 처음에는 그를 잘 알아보지 못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막달라 마리아도 순간적으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고(요 20:14), 물고기 잡던 제자들도 처음 한 동안은 알아보지 못하였다(요 21:4). 심지어는 예수님을 눈앞에 두고도 계속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자들도 있었다(마 28:17).


또한 본문사건에 대한 좀 더 자세한 기록인 누가복음 24장에서도 두 제자들이 한 동안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다고 확인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이유는 그들의 눈이 가리어졌기 때문이었다고 설명한다(눅 24:16).


그러나 죽은 자의 부활이라는 정말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실을 직면했을 때의 혼란스런 반응이라는 것을 감안할지라도, 예수님과 오랜 시간 함께했던 제자들이 그와 동행하면서 한 동안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는 것은 합리적으로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에 대한 주요한 이유를 본문이 증언하고 있다. 예수님의 부활 후의 모습은 그 전과 ‘다른 모양’이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다른 모양’의 사람이 ‘다른 사람’은 아니었기에 그들은 주님이신 예수님을 결국 확실히 알아보고 믿게 된다. 그렇다면 부활 후 예수님의 ‘다른 모양’이라는 말은 어떤 상황을 나타내는 것일까?


마가복음 16장 12절의 ‘다른 모양’에서 사용된 헬라어 ‘모르페(μορφῇ)’는 겉으로 드러난 피상적이고 외관적인 모양보다는 내면을 드러내고 내면을 투영하는 모양을 나타낼 때 일반적으로 쓰인 용어이다.


또한 헬라의 종교와 철학에서 신이 인간의 모습으로 올 때의 온전한 변화의 모습을 위해서도 쓰였다.


신약성경에서는 본문 외에는 빌립보서에서만 두 군데 발견되는데, 2:6절에서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에서와 2:7절에서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에서 ‘본체’와 ‘형체’로 각각 번역되어 쓰였다.


즉, 예수님은 온전한 하나님이셨고, 온전한 종이 되셨다는 표현에 모두 ‘모르페’를 사용하였다. 마가복음 16장 본문도 ‘모르페’라는 단어와 함께, 부활을 통해 온전한 변화를 겪은 예수 그리스도의 달라진 ‘모양’이 나타나졌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시기 전의 예수와 동일한 바로 그 분이셨다. 그래서 결국 모두가 그를 알아보게 된다.


그 몸은 만져볼 수도 있는 실재하는 몸이었으며(눅 24:39), 심지어 십자가의 상흔도 남아 있었고(요 20:27), 음식을 잡수시기도 하셨다(눅 24:41~43).


그러나 그 몸은 완전히 변화된 몸이었다. 죽음을 이미 넘어선, 고통, 아픔, 연약함이 더 이상 함께 하지 않는 몸이었다.


인간으로 오셔서 ‘종의 형체’(빌 2:7)로 나타나신 부활 전 예수님의 ‘모양’은 이사야에서 묘사하듯 약하고, 거칠고, 볼품이 없었을 것이다(53:2).


밤과 낮을 가리지 않으신 사역에서 오는 육체적 피로와 온 인류의 죄 문제를 감당하셔야 하는 정신적 고통은 그 분의 육체를 여위게 하고,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파이게 했을 것이다.


그래서 어떤 유대인들은 당시 30을 갓 넘으신 예수님을 향해 “네가 아직 오십 세도 못되었는데”라는 말을 할 정도였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 어떤 연약함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모양’으로 나타나셨던 것이다. 가장 젊고, 건강한 몸으로의 ‘변화된 모양’이다.


바울은 이 부활의 몸에 대해 ‘썩지 아니할, 영광스러운, 강한, 신령한 몸’(고전 15:42~44)이라고 감격으로 선포한다. 그 부활체의 모습이 장래에 우리가 함께 누리게 될 영광스러운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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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훈목사 죽음에 대한 신앙적 이해

조카 고(故) 이동훈목사(Pastor Jacob Lee, 36세)
New Life Drseher Church https://newlifedresher.org/

진리가 자유케 하리라(요한복음 8:32)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Then you will know the truth, and the truth will set you free.

진리가 자유하게 합니다.
진리는 예수님입니다(요한복음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Jesus answered, I am the way and the truth and the life. No one comes to the Father except through me.

진리가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아는 것으로 만족한다면 이것은 신앙의 초보적 단계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영이시기 때문입니다(고린도후서 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Now the Lord is the Spirit, and where the Spirit of the Lord is, there is freedom.

진리가 자유케 한다는 말씀은 곧 영이 자유케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영을 체험해야 합니다.
영을 체험하는 것은 성령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을 받아야만 진리가 되시며 영으로 세상에 오신 주님의 은혜를 힘입어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신앙인들이 영으로 예수님을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혼과 몸으로 체험하는 정도로 멈추고 있습니다.

몸으로 체험하는 예수 몸으로 체험하는 예수는 "기적의 예수" 라고 하겠습니다.

기적의 예수란 벳새다 들판에서 굶주렸던 사람들에게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개고 오천 명을 먹이셨고 남은 광주리가 12개 이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몸으로 체험하는 예수는 육신의 몸을 갖고 살아갈 때 육신의 문제에 부딪칠 때마다 기적을 기대하고 기다리기 때문에 육체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때는 예수에 대한 믿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면 암으로 고생하는 암 환우가 예수를 믿는다면 기적같이 암 덩어리가 모두 몸에서 없어지는 것만이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복음서에 나타났던 기적의 사건에 참여했던 그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 사건 앞에서 모두 외면했습니다.

혼으로 체험하는 예수 혼으로 체험하는 예수는 "이성적 예수"라고 하겠습니다.

혼이란 정신을 말합니다.
신앙을 정신적인 영역에 가두고 믿음을 형성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바리새인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찾아와서 내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요 질문할 때 예수님께서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때 니고데모는 어른이 된 후에 어떻게 어머니의 모태에 들어갔다 다시 나올 수 있을까 하며 머리를 흔들고 돌아갑니다.

정신적인 위로자가 되는 예수님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온전한 영으로 세상에 오셔서 영으로 회복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어떤 부인은 남편을 잃고 세상살이가 힘들고 어려울 때 주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며 어려움을 극복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사업의 어려움에 자살을 시도했으나 극적으로 회복되어 주님을 만났다며 새 힘을 얻었으나 다시 사업이 기울고 어려워 질 때 왜 나를 버리셨느냐 하며 절망에 다시 붙잡히는 경우는 혼으로만 예수를 믿는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영으로 체험하는 예수

영으로 체험하는 예수는 "신령한 예수" 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었고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사람의 도리를 감당하려고 30세까지는 전혀 하늘의 일에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30세가 되었을 때 세례를 받은 후 하늘의 일에 전념하셨습니다.

공생애 3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에게 기적과 같은 사건을 보여주며 메시아가 되심을 전하셨습니다. 그러나 아직 성령께서 임하지 않은 시대이었기에 예수님을 영으로 이해하고 믿을 수 있는 길이 쉽게 열리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제자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도 제자로 부름을 듣기 전에 일을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후에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 보혜사 성령을 기다리라는 말씀에 제자들이 모여서 기도할 때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일어난 후 베드로를 위시하여 그 자리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모두 영으로 예수를 체험하였고 그때부터 완전히 변화된 삶이 시작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오늘날은 이미 성령강림이 일어난 이후의 시대이므로 직접 성령의 임재를 기도해야 하며 성령 체험이 있어야만 예수를 영적으로 믿을 수 있는 단계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죽음이란 생명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두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몸과 혼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영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은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이란 영원한 생명을 회복하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임종을 맞이하는 환자들에게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영적인 예수를 믿었다면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육체의 몸은 이 세상에서 온갖 질병과 사건과 사고로 인하여 고통과 아픔을 갖게 되지만 죽음 후에는 이 모든 질병과 사건과 사고 그리고 고통과 아픔으로부터 자유하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동훈목사의 경우 36세의 젊은 나이입니다.
더구나 가족들은 아내 라헬과 두 아들 그리고 딸이 살아가야 할 과정이 너무 힘들게 느껴집니다.

이동훈목사 Jacob Lee(1984. 5. 4- 09. 28. 20 am 9:42) 36세
Wife / Rachel Tan Lee(1989. 12. 17-) 31세
Son / Zephaniah(2015. 9. 9-) 5세
Son / Jayden(2017. 6. 25-) 3세
Daughter / Kaelyn(2019. 6. 30-) 1세

몸과 혼으로만 생각하면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런데 영으로 생각하면 가장 좋으신 하나님께서 몸과 혼으로는 알 수 없는 놀라운 계획을 갖고 있으므로 남은 가족들과 우리가 위로를 받습니다. 이제부터는 놀라운 주님의 계획에 따라 살아갈 수 있는 믿음을 기도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The Spirit gives life; the flesh counts for nothing. The words I have spoken to you are spirit and they are life.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I tell you the truth, whoever hears my word and believes him who sent me has eternal life and will not be condemned; he has crossed over from death to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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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10월 10일 토요일입니다.
오늘 어머님 김은신권사님(92세)에게 손자 이동훈목사(36세)의 죽음을 알렸습니다.
처음에는 몹시 당황해 하시면 놀란 얼굴 표정으로 “세상에.........!” “세상에........!”만 연발하셨습니다.

연로하신 어머님에게 손자의 죽음을 알리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로부터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면 가슴에 묻고 살아간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자식이 아니라 손자가 그것도 목사가 되어 모두에게 사랑을 받아야 할 때에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알려주는 것은 망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죽은 자식을 부모의 가슴에 묻는다는 것은 신앙적인 자세가 아니기 때문에 오늘 아침 기도를 마치고 故 이동훈목사 천국환송예배 라는 하관 예식 순서를 보여주므로 간접적으로 알렸습니다.

평소에 잘 듣지 못하시는 어머님께서 “언제 죽었니?” 라고 물으시기에 “9월 28일” 이라고 말했는데 정확하게 “28일” 하고 확인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럼 장례는?” 하시기에 이미 장례를 마쳤으며(10월 1일 하관예식) 나중에 알려 드리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분명한 의식을 갖고 받아드리고 인정한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충격적인 소식일지라도 정말 믿음이라면 충격을 완화시킬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점심 식사를 하였는데 평소보다 조금 적게 드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고 평소와 마찬가지로 즐겨 읽으시던 책을 읽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지켜보며 이동훈목사의 죽음에 대한 두 번째 글을 올립니다.

성경은 사람을 세 종류로 구분합니다.

첫째는 육에 속한 사람(고린도전서 2:14)
- The man without the Spirit,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 영적이 아닌 사람, 자연에 속한 사람.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둘째는 신령한 사람(고린도전서 2:15)
- The spiritual man, 영적인 사람.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셋째는 육신에 속한 사람(고린도전서 3:1)
- worldly, 세속적인 사람, 육적인 사람, 육에 속한 사람.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가족들 중에서 어린 자녀들이 먼저 세상을 떠났을 때 믿음의 어른들이 보여주어야 할 믿음의 자세는 분명합니다.

나는 어떤 종류의 사람으로 신앙생활을 하였는지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하겠습니다.

신령한 사람(The spiritual man, 영적인 사람)의 특징은 “모든 것을 판단합니다. 그러나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않습니다.”

판단한다는 것은 죽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 죽음 때문에 신앙의 흔들림이 없으므로 판단을 받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역시 믿음이란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확실한 소망 즉 영생의 소망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디도서 1:2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디도서 3:7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영생의 소망이란 죽음의 세계에서 분명하게 빛을 발할 것이며 완벽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령한 사람만이 어떤 죽음이라도 신앙으로 받아드릴 수 있습니다.

10월 13일(화)

고린도후서 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Therefore we do not lose heart. Though outwardly we are wasting away, yet inwardly we are being renewed day by day. 

겉사람(outwardly)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약해지고 병들어 갈 것입니다. 그러나 속사람(inwardly)은 겉사람과 반비례로 진행될 수 있습니다.

죽음을 겉사람이라고 비유하면 영생은 속사람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겉사람은 죽음을 안타깝다고 하며 슬퍼하거나 절망합니다. 그렇지만 속사람은 죽음 앞에서 담대합니다. 왜냐하면 속사람은 영생에 대한 믿음이 분명하기 때문에 죽음은 잠시 겉사람과의 이별이지만 속사람은 더 건강하고 질병이 없는 가장 행복한 나라에서 다시 만날 때를 기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영생에 대한 소망을 쉽게 허락하지 않습니다. 넘어야 할 고비가 시도 때도 없이 다가올 것입니다. 생각도 할 수 없었던 어려움이 부딪치면 대부분 후회하고 낙심합니다. 이와 같은 모습이 일반적인 사람들의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영생의 소망을 현실에서 실현시키려면 엄청난 노력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라헬의 경우 이제 시작입니다.
5살 아들 재원(Zephaniah. 2015. 9. 9), 3살 아들 재선(Jayden. 2017. 6. 25) 그리고 1살 딸 재은(Kaelyn. 2019. 6. 30)을 양육하려면 경제적으로도 부담스럽습니다. 육신적으로도 힘들 것입니다.

이러한 부담을 나눌 수 있는 보살핌이 필요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보살핌이 서로에게 불편하지 않고 부담이 없이 지속될 수 있는지 지혜를 모아야 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Dear lovely Rachel!

It should not be forgotten that there are many different people who comfort the sorrow of sending their beloved husband into the arms of God first.

An employee (Han Woo-mi) of my bank sent $200 upon hearing the news of Pastor Jacob Lee(Dong Hoon).

I send it by check.


After receiving it, I would like to inform Han Umi that you received it.


Woo Mi Han

136–88 39th Avenue

Flushing, NY 11354


Pastor Seunghyuk Lee
(Patris Church Pastor Victor S Lee)





  




결혼 주례사(이상훈, Edward Lee)

이상훈 결혼 서약식
04-02-2022(토) 오후 6시

마가복음 10:6-9
      6.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7.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8.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9.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

고린도전서 7:1-9

  1. 너희가 쓴 문제에 대하여 말하면 남자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2. 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3. 남편은 그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4. 아내는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그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5.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가 절제 못함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6. 그러나 내가 이 말을 함은 허락이요 명령은 아니니라
  7.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이 사람은 이러하고 저 사람은 저러하니라
  8. 내가 결혼하지 아니한 자들과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9.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결혼하라 정욕이 불 같이 타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이 나으니라.
결혼(結婚)
 첫째, 그 부모를 떠나라
 둘째, 둘이 한 몸이 되라
 셋째, 하나님이 짝을 지은 것

결혼(結婚)이란 의미는 무엇인가?

한문자의 "결(結)"이란 "묶는다"는 뜻이다.
한문자의 "혼(婚)"이란 "영혼"이란 뜻이다.

남자와 여자의 몸을 하나로 묶는다.
이것을 육체적 결합이라고 한다.

그 다음에는 정신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
이것을 영혼의 결합이라고 한다.
따라서 두 사람이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 결혼이다.

두 사람을 어떻게 묶을 수 있을까?

첫째는 믿음이다.
둘째는 소망이다.
셋째는 사랑이다.

솔로몬 왕은 세 겹줄은 능히 끊을 수 없다고 하였다.
결혼으로 하나가 된 몸이 나누어지면 어떻게 되는가?
나누어지는 것을 이혼이라고 한다.
이혼은 하나가 나누어진 것이므로 반쪽이 된다.
따라서 이혼 후에는 반쪽으로 살아가야 한다.
하나가 된 후에는 서로 인정해야 한다.
인정하려면 이해해야 한다.
이해라는 영어 단어는 내가 그 사람 아래에 서는 것이다.
내가 상대방보다 높은 곳에 서면 무시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내가 상대방보다 아래에 서면 존중하게 된다.
이해는 상대방을 존중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먼저 상대방을 이해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사랑받기 보다는 이해하라!"
"이해하기 보다는 믿어라!"
"믿기 보다는 인정하라!"

What does marriage (結婚) mean?
The Chinese character "Gyeol (結)" means "to bind"."to tie" 
The Chinese character "soul" means "soul" 

It binds the body of a man and a woman into one.
This is called physical bonding.

Then the mind must become one.
This is called the union of souls.
Thus, marriage is when two people become one physically and mentally.

How can I tie the two together?

The first is faith.
The second is hope.
The third is love.

King Solomon said that a three-fold cord cannot be broken.
What happens when a body united by marriage is divided?
Divorce is called divorce. Divorce is halved because one is divided.
So, after divorce, you have to live in half.

After becoming one, we must acknowledge each other.
To admit it, you have to understand it.
The English word for understanding is to stand under the person.

If I stand taller than the other person, I have no choice but to ignore it.
But if I stand below the other person, I will respect them.
Understanding begins with respect for the other.
First of all, if you live with an understanding of the other person, there is no problem.

"Understand rather than be loved!"
"Believe rather than understand!"
"Accept rather than believe!"

결혼(結婚)

맺을 결(結) : tie. bine
혼인 할 혼(婚) : marriage, metrimony, wedding, union

1. 남녀(男女)가 부부(夫婦) 관계(關係)를 맺음.
2. 혼인(婚姻)




연애는 크리스천이 맺는 여러가지 인간관계 중에서 가장 낭만적인 측면을 차지한다. 
그러나 달콤한 연애를 즐기던 남녀가 결혼해 가정을 이루어 자녀를 갖게 되고, 치열한 직업 전선에 뛰어들기 시작하면 여러가지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크리스천 부부가 신앙 안에서 결혼 생활을 헤쳐나간다면 서로를 더 깊이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그들은 성경 속 가르침을 통해 서로의 추한 모습을 받아들이는 법과 서로가 갖고 있는 가장 큰 장점을 축하해주는 법을 배우게 된다.

무엇보다 크리스천 부부는 하나님을 사랑할 때 가장 진실된 형태의 사랑을 경험하게 된다.
기독교 결혼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전진하는 두 사람의 사랑을 기념한다.

하나님과 개인적인 사랑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두 사람이 결혼을 행복하게 유지시켜주는 유일한 연결고리다.

미국의 작가이자 복음주의 목사인 게리 토마스(Gary Thomas)는 기독교 결혼의 특징에 관해 많은 부부들에게 강연해왔다.
그는 자신의 저서 '신성한 결혼'(Sacred Marriage)에서 "우리는 완벽한 행복, 갈등 없는 결혼생활, 서로에 대한 우상숭배적 집착 등 하나님이 결코 우리에게 하라고 허락하신 적 없는 것들을 결혼에게 요구하는 행동을 멈춰야 한다"고 지적했다.

크리스천 부부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서로의 모든 행복이 완벽하지는 않다는 점을 받아들여야 한다.
완벽하지 않은 우리 모습을 용서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서로와 함께 결혼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이다.
토마스는 "배우자가 자신을 완성시켜주는 존재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영적으로 우상숭배"라며 "배우자가 자기에게 '하나님'이 되기를 기대한다면 결혼생활은 매일 실패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렇다면 크리스천에게 결혼은 무엇이며 어떤 의미를 지닐까?

해외 연애사이트 'Yourtango'가 성경구절을 통해 제시한 내용을 바탕으로 이를 알아보자.

1. 공유된 단일한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

마가복음 10:8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크리스천은 결혼을 통해 교회 안에서 단일한 독립체가 된다.
이것은 창조에 관한 이야기다.
하나님은 아담의 갈비뼈로 이브를 만드셨다.
둘은 함께 지내기 전까지 불완전한 존재였다.
단일한 정체성을 통해 크리스천 부부는 서로에 대한 존경과 헌신을 드러낼 수 있다.

2. 두 사람의 가치관이 일치해야 한다.

베드로전서 3:8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 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종교적 결혼에는 여러 층위가 존재하지만 기본적으로 부부는 자신들의 공유된 믿음(가치관)에 기초해야 한다.
하나님은 당신을 섬기라는 큰 계명에 우리가 도달할 수 있게끔, 그 과정에서 서로의 생각과 믿음을 나누라고 우리에게 파트너를 주셨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애로운 마음을 타인에게 열어주고, 믿음의 길에서 떨어진 사람들을 믿음의 길로 재합류시키기 위해 우리를 부르셨다.
부부는 가장 책임이 큰 동반자다.
남편과 아내 모두 서로가 믿음 안에 머물도록 격려해야 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큰 목적을 서로가 달성하도록 도와야 한다.

3. 부부는 서로를 가지고 있다.

전도서 4:9-10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겁임이라.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결혼한 크리스천은 교회의 지원 속에서 유대감을 형성시킨다.
그들은 앞으로도 계속 성공적인 결혼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각자가 가지고 있는 사랑을 통해 좋은 시간이든 나쁜 시간이든 서로를 응원한다.
떨어져 있을 때보다 함께 있으면 더 행복하다.
그들은 서약을 통해 서로를 응원하겠다고 약속한 사이다.
그들은 서로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자신들을 인도해주실 것을 믿어야 한다.

승천(昇天)



승천(昇天)

- 오를 승(昇), 하늘 천(天)

1. 하늘에 오름
2. 가톨릭(catholic)에서는 "죽음"을 의미

예수님의 승천이 주는 의미

신앙고백으로 사용하는 사도신경에는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예수님의 승천에 대한 고백이 있다.

열왕기하 2:11

두 사람이 행하며 말하더니
홀연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격하고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더라. 아멘 

올라가다(승하다) / 알라(ʽâlâh)(עָלָה)
- 옮겨가다(삼상 6:21), 오르다(창 49:4, 신 5:5)

 창세기 5: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데려가시므로(라카, lâqach)(לָקַח)
취하다, 잡다, 데리고가다 

  • 평균 수명 : 900세 / 에녹 365년  


사도행전 1:9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리워가시니(에페르데, eperthe) ἐπήρθη
- ἐπαίρω /epairó to lift up

마태복음 24:40

그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데려감을 당하고(파라람바노, paralambanó)
(παραλαμβάνω)


  승천하더라(올라가다) / 알라(왕하 2:11)
  데려가시므로(취하다) / 라카(창 5:24)
  올리워가시니(올라가다) / 에파이로(행 1:9)
  데려감을 당하고(데려가다) / 파라람바노(마 24:40) 

외경 지혜서 4:7

의인은 제명을다하지 못하고 죽더라도 안식을 얻는다. 노인은 오래 살았다고 해서 영예를 얻는 것이 아니며 인생은 산 햇수로 재는 것이 아니다.
현명이 곧 백발이고,
티없는 생활이 곧 노 년기의 결실이다.
그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 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악에 물들어서
바른 이성을 잃지 않기를 원한다.

마태복음 25: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오늘의 기도
지혜로운 믿음으로
등과 기름을 예비하자!


장사되신 그리스도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장사되심을 믿습니다"라고 반드시 고백해야 할 필요가 있는가?
사도신경은 왜 그리스도의 죽음만을 기록하고 장사되었다는 사실을 생략한 채 바로 부활에 대한 논의로 넘어가지 않는가?
 
그 이유는 성경 자체가 주님의 장사되심을 묘사하는데 상당한 노력을 기울인다는데서 찾을 수 있다.
각 복음서는 모두 이것을 언급하는데, 복음서 기자는 각기 다른 사람이 빠뜨린 사항을 추가하고 있다.
예를 들면, 마태만이 무덤을 제공한 요셉이 부자였다고 말한다.
또 마가 혼자만이 그가 존귀한 공회원 이었음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장사되심에 대해서는 서신서들에도 언급되어 있다.
고린도전서 15장 3, 4절에서 바울은 복음의 핵심적인 항목에 그리스도의 장사되심을 포함시켰다.
바울은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다시 살아나사"라고 했다.
 
왜 그리스도의 장사되심의 기사가 이처럼 중요한가?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첫째, 그리스도의 장사되심은 그리스도가 실제로 죽었음을 확증해 준다.

회의론자는 그리스도는 죽은 것이 아니라 현기증을 일으킨 것뿐이며, 그러므로 그가 죽음에서 부활한 것이 아니라 의식을 다시 회복한 것뿐이라고 말함으로 그리스도의 부활 신앙의 기원을 설명하려고 했다.
그러나 복음서는 그가 죽었으며 그를 박해한 자들이 그의 죽음을 확인했으며, 또한 로마 총독 빌라도는 시체를 장사 지내도록 허락했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둘째, 그리스도의 장사되심은 죽은 몸을 잘 돌봐야 한다는 교훈을 주기 때문에 중요하다.

사람들은 가끔 자기들이 죽을 때, 자기 몸이 땅에 묻히든 쓰레기 더미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지든 상관없다고 경솔히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시체를 중시하고 있다.
스데반이 순교당했을 때, 경건한 사람들이 그의 몸을 장사지냈다.
도르가의 몸은 당시의 관습에 따라 씻어져 장사되기 위해 다락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죽은 몸보다 더 따뜻한 보살핌을 받은 시체는 없었을 것이다.
 
로마 제국 내에 기독교의 영향력으로 인해 화장 제도가 없어지고 매장 제도가 행해졌음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이방 세계에 살았던 그리스도인은 주님이 장사되었던 방식대로 장사되기를 바랐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부활에 대한 소망을 표현하는 극적인 방법으로 믿었다.
 
그러나 몸이 그대로 보존되어 장사되는 것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 어떤 몸이든지 분해된다.
상어에게 잡아먹힌 사람도 납으로 만들어진 관 속에 넣어져 흙에 묻힌 사람과 똑같이 전능자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장차 부활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일을 가능케 하는지 우린 알지 못한다.
단지 우리는 그것을 행하는 분이 누구인지 아는 것으로 족하다.
 
그리스도의 장사되심은 몸소 죽으심으로 인류 구원을 위해 성취하신 구속 사역의 중요한 한 부분이었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성취하신 일이 무엇이었는가?
여러 가지 중에서도 그가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진노를 자기 몸에 짊어진 일이다.
모든 죄는 그리스도에게 치워졌으며 그의 죽으심으로 죄는 심판받았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하였다(요 1:29)
여기서 죄를 "지고가는"이란 표현은 구약의 속죄 의식에서 예시되었다.
대제사장은 속죄 염소의 머리에 손을 얹고 자기와 백성의 죄를 자백하고 그 염소를 광야로 내보내었다.
레위기 16:22은 이것을 잘 설명해 준다.
"염소가 그들의 모든 불의를 지고 무인 지경에 이르거든 그는 그 염소를 광야에 놓을지니라."
 
분명히 그 염소가 실제로 인간의 죄에 대한 책임을 질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극적인 형태로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표현하기 위해 이러한 제도를 만드셨다.
집으로 돌아가기엔 너무 먼 광야에 놓여진 속죄 염소는 묵묵히 죄를 "지고가는"그리스도의 사역을 묘사하며 그의 장사되심과 상통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죄에 대한 마지막 처분은 그의 장사되심에서 이루어졌다.
그는 죄의 결과로 주어진 죽음에 바쳐진 대속 제물로서 무덤에까지 들어가셨다.
그리고 죄의 짐과 전혀 상관없이 부활하여 무덤에서 나오셨다.
이것이 "장사한지 사흘만에..."라는 구절의 교리적 중요성이다.
광야에 놓여진 속죄 염소의 생명과 존재를 규명하지 않듯이 무덤에서 성취된 죄에 대한 처분도 규명할 수 없다.
믿는 자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사역의 한 양상이었던 장사되심 속에는 자신에게 주어진 죄의 심판에 대한 처분도 분명히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이 글이 좀 어렵게 느껴진다면, 죤 번연의 작품이 도움이 될 것이다.
<천로역정>(The Pilgrim's Progress)에서 번연은 등에 짐을 지고 있는 어떤 사람이 결국 그것을 벗어버리게 되는 방법을 말해준다.
그 짐은 그의 죄와 죄의식을 상징한다.
그 사람이 갈보리라고 부르는 언덕에 올라가 십자가를 바라볼 때, 자기를 위해 거기 달리신 구세주에 대한 감사의 눈물이 눈에 고이게 된다.
"복되도다, 십자가여"라고 그는 말을 시작한다.
그리고나서 그는 자신의 잘못을 고친다.
"나를 위해 고난 당하신 이여 다 복되시도다"라고 소리친다.
그 후에 그는 자기 등에 있는 무거운 짐을 묶고 있던 밧줄이 끊어지는 것을 꿈에서 보았다.
그 짐은 언덕 아래로 굴러내려가 빈 무덤에 들어갔다.
그리고나서 다시는 그가 그 짐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우리는 때때로 이 진리를 나타내 주는 다음과 같은 합창을 하게 된다.

살아계셔서 나를 사랑하신 주님,
죽으셔서 나를 구원하신 주님, 
장사되셔서 내 죄를 씻으신 주님.
-월버 챔프맨의 "어느날"

그리스도는 지옥에 내려가셨을까?
 
사도신경에 논쟁의 여지가 있는 구절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지옥에 내려가셨다가"라는 표현이다.
그리스도의 영이 실제로 죽은 영들의 장소에 내려가셨다는 사실을 모든 그리스도인이다 믿는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지옥(hell)이라는 말은 사도신경이 처음 영어로 번역될 때 의미했던 그 의미가 아니다.
 
지옥(hell)이라는 영어 단어는 "보이지 않는", 또는 "덮여진" 장소 라는 뜻의 앵글펄 색슨어인 "Hellan"이라는 단어에서 나온 것이다.
수백년 전에는 이 단어가 히브리어 스올(Sheol)이나 헬라어 하데스(hades)와 똑같은 의미의 단어였다.
그래서 그것은 죽음 이후의 모든 영혼이 가는 장소를 의미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단어는 악인들이 형벌받는 곳을 의미하게 되었다.
즉 그 뜻이 죄인이 사후에 가서 영원히 거하는 비탄의 장소로 한정되었다.
그래서 현대 영어 지옥(hell)은 성경의 단어 스올이나 하데스와는 다른 뜻이며, 또 사도신경에도 적당치 않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라면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에 그는 분명히 지옥으로 가시지 않았다.
 
그러면 그리스도가 어디로 가셨는가?
분명한 것은 명확한 사실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 사실을 기록한 구절을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2:24-31절은 이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후에 베드로가 한 첫 설교이다.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다윗이 저를 가리켜 가 로되...내 육체는 희망에 거하리니 이는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베드로는 시편을 해석하고 있다.
그는 다윗을 선지자라고 하면서, 그가 "미리 보는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리라"고 했다.
 
시편에서 인용된 이 말씀의 의미는 시편 본문처럼 분명하지는 않다.
따라서 우리는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영이 음부에 내려가셨음을 뜻한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사도신경 기사의 근거가 되는 중요한 두 세 개의 구절 가운데 하나이다.
 
다시 한번 의문을 제기해 보자.
그리스도의 영이 과연 음부에 내려 가셨는가?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 있었던 장소는 명확히 알고 있다.
그는 못 박히시던 근처에 있는 동산 안의 새로 만든 무덤 속에 계셨다.
그러면 그의 영은 어디로 가셨는가?
 
주님께서는 친히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주님 옆에서 십자가에 달린 강도가 주님께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자기를 기억해 달라고 하자, 예수께서는 그 때까지 기다리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 하셨다.
그리고는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셨다(눅 23:43).
 
그 낙원이란 어디인가?
어떤 학자는 그것을 하늘로 믿는다.
이 단어는 신약 성경에 다시 두번 사용되는데, 각기 경우에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 장소를 말하는 것 같다.

예를 들면 요한계시록은 생명나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다고 한다(계 2:7, 계 22:2).
이 해석에 의할 것 같으면, 우리 주님은 죽으실 때 그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셨으며 거기서 몸의 부활을 기다리셨다는 것이다.
이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주님이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라고 하신 말씀이 그것을 가리킨다고 믿는다.
 
이런 해석은 분명히 가능성이 있는 해석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용된 본문이 원래 뜻하는 바가 아니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자기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했을 때, 그는 하나님의 뜻 대로 처분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한 것뿐이었을지도 모른다.

더구나 구약의 헬라어 번역에는 신약의 "낙원"(Paradise)에 해당하는 단어가 "동산"(garden)이나 "숲"(grove)으로 번역되었다.
예를 들면, 에덴 동산이 하나의 낙원이었다(창 2:8 참고; 느 2:8: 전 2:5; 아 4:13).
따라서 이 말은 유대인에게 있어서 복되게 죽은 자들의 장소를 묘사하는 시적인 표현인 "아브라함의 품"과 동의어일지도 모른다.
 
그리스도가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기간 동안 어디에 계셨는가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만약 문제가 된다면 성경은 그것을 보다 더 분명하게 기록했을 것이다.
성경이 강조하는 바는 그리스도가 3일 동안을 어디에서 보내셨는가 하는 장소가 아니다.
성경에서 강조되는 것은 그가 머문 장소가 아니라 제자들에게로 다시 돌아왔다는 사실이다.
그는 자기가 말했던 대로 죽음에서 부활하셨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혼이 음부에 갔었다고 믿어야 하는가 아닌가를 결정해야 할 필요가 없다.
정작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그의 영혼이 음부에 버려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육체적, 영적 모든 면에서 죽음은 일시적일 뿐이었다.
장사지낸지 사흘만에 그는 육체와 영혼을 그대로 지닌 채로 무덤에서 나오셨다.
이 위대한 진리에 대하여 성경은 매우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사도신경이 말하는 바와 같이, 만약 예수께서 음부에 내려가셨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떤 사람들은 예수께서 음부에 내려가심으로 인성을 완성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우리 중의 하나와 같이 되셨다.
그는 태어나시고 자라나셨으며 또한 이 땅에서 사시다가 죽으셨으며 몸이 장사되어졌으며 그의 영혼은 부활을 기다리기 위해 보이지 않는 세계로 가셨다.
그리고 삼일 후에 다시 살아나셨고 하늘로 올라가셨다.
부활과 승천을 경험하신 사실만이 우리와 다를 뿐 다른 것은 다른 인간의 경험과 동일한 것이다.
 
웨스트코트(B.F.Westcott)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해설했다.

 
그 사실은(그리스도께서 음부에 내려가셨다는 교리는) 주님의 죽음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완전하게 해준다.
죽음이란 영과 육의 분리이다.
이런 개념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죽음으로서 우리와 같은 운명을 맞이하셨다.
그의 몸은 무덤에 놓였고 그의 영혼은 앞으로 우리들이 들어가리라 생각되는 그 나라로 들어가셨다.
그는 인간의 모든 상태를 다 겪으셨고 하나님을 위하여 승리하셨다.
우리가 있는 곳은 어디나 그가 계셨던 곳이다.
그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우리의 상태에 참여하셨다.

그리스도는 죽은 자의 거처에 계시게 되는 일을 포함하여 인간의 모든 경험을 다 맛보셨다.
그래서 그는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셨다"(히 2:17).
그러나 인격적으로나 경험하신 바에 있어서는 우리와는 달랐다.
왜냐하면 그는 단순히 인간이 아니었으며, 죽음이 그를 매어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무덤에서 승리를 거두고 부활, 승천하셨다.
 
여러 구절들을 비교해 보면, 부활하신 구주께서 복되게 죽은 자를 음부에서 풀어주시고 그들을 영광으로 인도하셨다(엡 4:8; 히 11:40;히 12:18, 23).
만약 그렇다면 음부는 복되게 죽은 자들의 거처는 아닌 것이다.
그곳은 영원한 형벌을 기다리는 악인만을 위하여 준비되어 있는 곳이다.
음부가 지옥이 되는 곳이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자들의 영혼은 그들이 죽을 때에 즉시 천국으로 올라간다.
그들은 결코 음부로 "내려가지" 않는다.
그들은 주님과 함께 "올라간다" 바울이 노년에 로마 감옥에서 그의 친구들에게 편지를 쓸 때에,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졌다고 했다.
그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천국에서의 재연합을 의미했다.
그래서 그것이 "더욱 좋은 것"이 되는 것이다(빌 1:23).
 
따라서 우리가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마다 이 사실들에 대해 생각하게 되면 의심스런 마음이 생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내용이 사도신경의 위대한 기사 속에 포함되어 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지옥에 내려가셨다가 장사한지 사흘만에..."라는 사도신경 기사는 구세주가 고난당하심으로 인하여 우리를 위하여 이루어 놓으신 구원 사역에 대한 신앙을 확인하는 것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라고 고백하는 것은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사도신경보다 훨씬 후에 생겨난 여러 신조들과 신앙 고백문들은 보다 정확을 기하기 위하여 이 구절을 더 길게 만들었다. 예를 들면, 성공회의 39개 조항의 신앙 고백 중 제2조는 이렇게 표현된다. "그리스도는 실제로 죽음에서 부활하시고 살과 뼈와 그리고 사람의 본성에 속하는 모든 것을 구비한 신체를 다시 취하셨다."
 
 이 조항은 세 가지 중요한 진리를 강조하고 있다. 첫째는 부활 사실이다("그리스도는 진정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둘째는 몸이 다시 부활했음을 확인한 것이다. 셋째는 부활한 몸의 변화이다.
 
 여기에 피가 빠져 있다는 점을 주목해 보자. 그리스도의 부활은 단순히 소생이 아니라 진짜 부활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나사로나 다른 어떤 사람이 생명을 다시 얻었던 것과는 다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진리는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브룬너 (E.Brunner)의 견해에 의할 것 같으면 "모든 것은 부활 사건에 의존하고 있다. "또 프로이드 필슨(Floyd Filson)은 "신약 성경 전체가 부활 사건을 감안하여 기록되었다"고 했다. 이러한 말들은 매우 대담한 주장이지만 어떤 학자도 이것을 반박하지 못할 것이다.
 
 부활의 중요성에 대한 바울의 평가는 여러 성경 구절을 통하여 살펴볼 때 매우 정확하다. 고전 15:3, 4절고전 15:3에서 그는 복음을 이렇게 요약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 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이렇게 쓴 후에 이어서 바울은 주님께서 사도들과 자기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에게 나타나셨던 일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내나 저희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고전 15:11)라고 했다.
 
 또 다른 성경에서 바울은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 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롬 10:9)라고 했다. 이 두 구절을 연관시켜 생각해 보면, 죽는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그 진리의 중요성을 알게 될 것이다. 모든 사도들은 그 일이 실제로 발생한 것으로 믿었다. 또한 그들은 부활에 대한 신앙이 구원에 필요 불가결한 것이라는 중요한 결론을 내렸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사도신경으로 재확인한다. 분명한 증거가 그리스도 부활 사실을 지지하고 있다. 지금까지 부활을 믿는 확실한 이유에 대해 들어보지 못했다면, 기독교 서적을 판매하는 서점에 가보라. 기독교 변증이나 기독교 신앙의 내용을 소개하는 책들을 꽃아 놓은 서가에서 부활 신앙에 대해 도움이 되는 책을 많이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부활 신앙을 지지하는 여러 증거들 중에 예수님의 생애와 인격이 그 중의 하나이다. 분명히 참 인간이셨던 예수께서 자신의 부활을 분명하게 예언하셨다. 만약 그가 부활하지 못하셨다면 그의 진실성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
 
 또 다른 증거는 빈무덤과 시체가 사라진 사실이다. 그것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것이거나, 아니면 사람들의 손에 의해 시체를 도둑맞았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만약 시체를 도둑맞았다면 누구의 짓인가? 그의 대적자들인가? 그들이 시체를 가져갔다면 사도들이 예수께서 살아나셨다고 모든 사람들에게 말했을 때 왜 그 시체를 내보이지 않았겠는가?
 
 그러면 제자들이 그것을 가져갔는가? 그럴 수 없다. 시체가 있던 무덤은 육중한 돌로 박혀 있었으며, 인봉되었고 군대가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제자들 중 누가 분명한 비진리의 메시지를 옹호하기 위해 자기 생명을 바치겠는가?
 
 그리스도께서 부활을 예언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제자들은 사실상 부활에 대해 전혀 준비하고 있지 않았다. 몇몇 여인들도 부활을 위해서가 아니라 시체가 썩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예수님의 몸에 향유를 바르려고 했을 뿐이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증거가 점차 많아짐에도 불구하고 믿기를 싫어한 제자들이 많았다. 그들의 마음이 부활을 확신하는 것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은 부활 사실을 강력히 지지해 준다. 제자들이 부활을 믿었음은 불신자들까지도 인정했다. 분명히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훔치지 않았다.
 
 부활에 대한 불신앙적인 비판자조차 빈무덤과 시체가 없어진 사실을 성공적으로 설명한 적이 없다. 그리스도의 대적자들의 이러한 침묵이 그리스도의 친구들의 부활 증거만큼이나 중요한 것이다.
 
 바울의 회개가 부활에 대한 또 하나의 강력한 증거이다. 초대 교회의 그 오만한 박해자가 예수님을 믿으리라고는 누구도 생각지 못했다. 학문과 재능을 겸비한 그는 예수님의 이름에 철저히 대적했었다. 그러나 그도 제자가 되었다. 그리고 자기를 의심하는 사람들의 의심을 풀기 위하여,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이 자기에게 나타나셨던 그 체험을 이야기했다. 다메섹 도상의 경험이 그의 생애를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아그립바왕 앞에서 그는 자기의 회심을 이야기했으며, 또한 부활 사건의 요점을 말하자 베스도는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행 26:24)고 하며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바울의 회심은 그리스도 부활을 증거하는 참으로 중요한 사실이다. 바울은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차린 말을 하나이다"라고 했다. 그리고나서 그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들은 바를 아그립바 왕에게 증거하면서, "이 일은 한 편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로소이다"라고 했다(행 26:25, 26).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일보다 우리에게 더 큰 부활의 확신을 주는 증거는 아마 없을 것이다. 복음서에는 이에 대한 기사가 많이 나온다. 그러나 단순히 복음서의 기사 때문이 아니라,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여러 차례의 나타나셨다는 사실 그 자체가 부활에 대한 초기교회의 신앙을 설명해 준다. 제임스 데니(Jamas Denny) 는 그것을 이렇게 말했다.

 
 복음서 기자가 쓴 부활 기사는 우리가 취급해야 할 많은 중요한 증거들 중에서 가장 작은 부분에 불과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 범위(복음서-역자주) 밖에 놓여 있는 사실을 토대로 하여 부활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복음서 자체에 나타난 사실을 근거하여서도 그리스도의 부활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여도 과장은 아닐 것이다. 
부활에 대한 보다 확고한 역사적 증거는 이렇다. 부활은 믿어졌고, 전파되었고, 퍼져나갔으며, 또한 그 열매를 맺어 복음이 기록되기 오래 전에 이미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기독 교회가 생겨났다는 것이다. 이 말은 복음서를 무시하 려는 것이거나 복음서가 말하는 내용을 과소 평가하려는 것이 아닐 뿐 아니라 복음서 내용의 진실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도 아니다. 부활에 대한 신앙은 신약의 어느 성경도 기록되기 전에 이미 널리 퍼져 있었으며 대단히 힘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스도는 두 장소를 배경으로 나타나셨는데, 하나는 예루살렘이며, 다른 하나는 갈릴리이다. 이것 또한 부활이 실제로 있었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그리피스 토마스(W.Griffth Thomas)는 <기독교와 그리스도>(Christianity is Christ)라는 작은 책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지지하는 여러 가지 증거를 제시한 후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여러 가지 증거들은] 따로따로 살펴보면 확고한 내용이며, 함께 모아보면 그 주장은 중복적이고 충족한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모든 비판의 망치가 두들겨도 하나의 파편도 내지 못했던 반석인 것이다.

 
 역사상 그 어느 누구도 부활을 지지해 주는 이런 압도적인 증거를 논박하는 일에 성공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따라서 믿기를 거부하는 자들을 주로 기적이란 발생하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함으로 자기의 불신앙을 변호한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을 믿는다. 우리가 사도신경을 같은 목소리로 고백한다 할지라도 우리 각 사람은 그리스도 부활에 대한 개인의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다.

 

승천하신 그리스도
 
부활하신 후에 그리스도는 하늘로 올라가셨다.
사도신경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일을 언급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사실을 옹호하는 것이 사도신경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신경은 이를 생략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사실만을 간략하게 말하고 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던 때인 유월절(Passover)과 승천하신 때인 오순절(Pentecost) 사이에는 50일의 간격이 있다(현대 교회에서는 유월절과 오순절 대신에 부활절<Easter>과 성령 강림절<Whitsun. Whitsunday>이라고 부른다).
 
누가는 "해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40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라고 말했다(행 1:3).그래서 성경학자들은 주님께서는 부활하신지 40일 후, 즉 오순절 며칠 전에 승천하셨다고 결론 내린다.
 
주님께서 왜 부활 후 40일간 이 땅에 머무셨는가?
적어도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40이라는 단어가 성경에서 자주 사용되는데 그것은 주로 "시련"이나 "시험"과 관련된 경우가 많다.
한 예로는 출 애굽한 이스라엘의 광야 유랑 생활 40년이다.

둘째, 그리스도께서 공 생애를 시작하실 때 사단에게 시험받으신 40일과 그 기간이 일치한다. 
그리스도께서 수 많은 사람 중 몇몇 사람에게 나타나셨다는 기록 외에는 그 40일간 무엇을 하셨는지 우리가 알지 못한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부활이 그의 존재 양식을 바꾸었다는 점이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주님은 십자가 지실 것을 예상하시면서 굶주림과 목마름과 피곤함, 그리고 슬픔 등과 같은 한계를 스스로에게 가하셨다.
그러나 부활 후에는 모든 상황이 변하였다.
하몬드(Canon T.C.Hammond)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우리 주님은 육체와 영으로 새로운 실존에 들어가셨다.
그러나 주님은 이전 비하의 상황하에 있었던 자신을 완전히 탈피하지 아니하시고, 오류없이 실재적인 부활을 증거하기 위하여 인간들에게 찾아오셔서 필연적 관계를 재개하셨다.
이와 같은 부활이후 그리스도의 "현현"하심은 "많은 증거"을 요구하는 우리의 요구를 응하시는 사락과 고귀한 겸손을 보여 주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제자들과 함께 땅 위에서의 마지막 날을 보내셨다.
그들은 함께 예루살렘을 떠나 기드론 시내를 건너 겟세마네 동산을 지나서 감람산이라는 산등성이에 올라가서 베다니 동쪽에 머물러 있었다.
잠시 담소하신 후에 주님은 손을 들어 그들을 축복하시고 하늘로 들리우셨다.
누가는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행 1:9)
그들이 자세히 구름을 쳐다볼 때, 횐 옷을 입은 두 사람이 나타나서 하늘로 올리우심을 본 그대로 다시 오신다고 그들에게 약속했다(행 1:10, 11).
 
이처럼 그리스도의 승천 기록은 놀랄만큼 단순한 것이다.
어떤 수식도 덧붙지 않았고, 의심하는 사람을 확신시키기 위한 어떤 시도도 없다.
제자들은 그들이 본 바만을 말하고 있다.
누구도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직접 보지 못했다.
제자들은 오직 부활의 결과, 즉 부활 하여 살아계신 주님만을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승천에 있어 서는 그 결과가 아니라 승천 그 자체를 보았다.
그들은 주님께서 승천하신 후 하늘에서 무엇을 하실 것인가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에 대해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셨고, 또한 성령을 통하여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기자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첫째, 그리스도는 "승천하셨다"(히 4:14)
둘째, 그는 "참 하늘로 들어가셨다" (히 9:24)

첫째 구절은 아마 그리스도께서 공간의 한계를 초월하여 영원한 실재 속으로 들어가신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그러므로 천국이 "저 밖에"나 "저 위에" 있을 수 없다고 궤변하는 자들의 반대는 헛된 것이다.
성경은 불가피하게 천국을 "위의 것"으로 말하고 있는데, 그 까닭은 다른 방도로는 땅에 매어있는 사람들에게 뜻이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구절, 즉 그리스도께서 "참 하늘로 들어가셨다"는 구절은 하나님의 처소인 하늘이 존재함을 보증해 준다.
실로 성경은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을 말씀하고 있다.
솔로몬은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늘"(왕상 8:27)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하나님이 "계신 곳"(왕상 8:43)으로서 하늘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하늘은 관념이나 꿈, 혹은 환상이 아니다.
그것은 장소이며, 지금도 예수께서 계시는 곳이다.
그는 승천하셨으며 하늘로 들어가셨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면전에 들어가셨다(히 9:14).
바울이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예수 그리스도시니 그는 하나임 우편에 계신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고 말한 것은 조금도 무리가 아니다(롬 8:34).
 
사도신경은 신앙의 다른 사실, 즉 주님의 죽음이나 부활에 대해서 처럼 승천에 대해서도 똑같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이로 보아 사도 신경을 만든 사람들은 승천의 중요성을 믿었음이 분명하다.
 
성경 역시 그리스도 승천의 중요성을 명백히 말하고 있다.
사실 신약 성경의 중요한 한 부분인 히브리서는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기록되었다.
히브리서는 부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리피스 토마스(W.Griffith Thomas)는 그것을 이렇게 논평했다.
"우리 주님께서 제사장과 왕으로서의 사역을 시작하신 것은 승천하심에서였다.
그리고 이 때문에 주님의 제사장 직임에 관하여 집중적으로 다루는 히브리서의 교리적 입장이 승천 사실에 중심을 두고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서는 승천에 대하여 적어도 12번이나 언급하고 있다.
요한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확실한 말씀을 기록했다.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요 16:7, 요 1:51, 요 3:13, 요 13:3, 요 17:11, 요 20:17).
그러나 그 말씀을 들을 당시 제자들은 주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나중에 그 말씀을 이해 했으며 그래서 승천이 진정 자기들의 유익을 위한 것이었다고 동의하며 글을 쓴 것이다.
 
승천의 유익

첫째, 믿는 자로 하여금 진정한 기쁨의 원인

주님께서는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면 나의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요 14:28).

그래서 그들은 기뻐하였다.
누가는 주님께서 그들을 떠나시던 때(승천시)에 "저희가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갔다"(눅 24:52)
 
둘째, 강한 신앙심을 고취시켜 역경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한다

바울의 말에 의하면, 당시에 널리 부르던 찬송가는 아마도 "참으면 또한 함께 왕노릇 할 것이요"등과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딤후 2:12).
(그리스도의 왕으로서의 통치와 하나님으로서의 신분의 회복인 승천과의 관계는 매우 분명한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독자들에게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기"를 촉구하는데, 그 까닭은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자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라고 하였다(히 4:14).
 
승천을 떼어놓고 그리스도의 부활 그 자체만으로는 별 의미가 없다.
베드로는 자신의 첫 설교를 부활로 시작하여 승천으로 마무리짓고 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하나님이 오른 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주셨느니라"(행 2:32-33).

그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고 하늘로 올리우셨다.
이 두 사건은 실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 부활 승천하심으로 승천하지 않았을 경우보다 우리를 위해 훨씬 더 활발하게 일하신다. 이렇게 생각해 보자. 만약 주님께서 승천하지 않으셨다면 그는 어디에 계실 것인가? 또한 무엇을하고 계실 것인가?
 
만약 하늘로 올라가지 않으셨다면 그의 처소는 어느 한 지방에 제한받게 되었을 것이다.
때로는 예루살렘, 때로는 다른 곳에 계시지만 동시에 모든 곳에 계시지는 못했을 것이다.
주님은 자신이 부활하셔서 하늘로 올라가심에 대하여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승천하신 그리스도는 두 세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다(마 18:20).
 
만일 승천하지 않았다면 성령과 성령의 은사를 교회에 주시지도 않았을 것이다.
성령과 성명의 은사를 사람들에게 주신 이는 승천하신 주님이셨다(행 2:32, 33, 엡 4:5-12).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지 않았다고 가정해 보자. 그가 우리의 큰 대 제사장이 될 수 있었을까?
땅에서 그는 하나님의 대언자이기는 했지만 제사장은 아니었다.
히브리서는 그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예수께서 만일 땅에 계셨더면 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였을 것이니"(히 8:4).
그가 참 하늘에 들어가심으로 비로소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제사장이 되셨던 것이다(히 9:24). 
 
우리는 제사장을 필요로 한다.
히브리서는 그것을 분명하게 말한다.
우리 모두를 불행하게 만드는 죄와 연약함을 지니고 있는 땅 위의 제사장이 아니라, 우리 죄를 위하여 자신을 제물로 바치신 하늘의 제사장이 우리를 위해 중보하고 계신다.
그가 하늘로 올라가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큰 대제사장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태초에 사람이 하나님에 의해 지음을 받았을 때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에 흙으로 지으시고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생령이 되었다고 했다.
생령이란 말은 살아 있는 생명체가 되었다는 의미다.
그런데 이 때의 생령은 사람이 무죄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죄와는 무관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였을 때에 하나님의 형상은 상실했고 아담의 형상으로 계속 이어지게 되었다(창 5:1-3).
사람이 다시 흙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하나님의 선언은 사람은 이제 범죄한 아담의 후손으로 모두가 다 죄인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죄라는 것과 하나님의 형상은 동시에 존립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이 다시 하나님과 교제하고 죄를 극복하는 상태가 된다는 것은 영원한 하나님의 형상을 갖추어야 한다.

그러나 죄인이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회복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 일이 외부, 즉 하나님 편에서 가능케 하지 않으면 사람에게는 희망이 없는 그런 상태가 되었다.
즉 이 땅의 존재가 아닌 하늘에서 메시아가 오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이다.
이것 때문에 하나님은 아담이 범죄한 후에 사람을 죄에 빠지게 한 사탄을 쳐부술 후손을 약속하신 것이었다(창 3:15).

시편 16편에 보면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8-10절/개역한글판)라고 말씀하고 있다. 다윗이 바라고 기다리는 메시아는 육체가 되어서 흙으로 돌아가는 자가 아니라고 한다.

여기에 메시아직의 원리가 깔려 있다. 즉 메시아란 죄라는 차원을 넘어서서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나타나는 자라야 한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에 동정녀의 몸에서 성령으로 잉태되어 오셨다는 것은 완전한 한 인간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죄와는 상관없이 오시는 모습이었다. 그러므로 메시아란 그 몸이 다시 흙으로 돌아가지 아니하는 분이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승천이 어떤 의미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예수님은 부활 후 40일 만에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셨다. 그 40일 동안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고(행 1:3),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셨다(행 1:4-5). 그리고 승천하시면서 “내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의미를 정리하자면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예수님 자신의 십자가 사역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가 온전히 이루어졌으니 이제 승천하는 것이고 그 승천의 결과로 말미암아 성령을 너희에게 보내신다. 그러니 너희들은 내 증인이 되라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구원(하나님 나라)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완성되었으니 너희들은 이제 거기에 더 보태려고 하는 자세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는 증인이 되면 된다는 말씀이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예수님의 승천의 의미는, 예수님은 이 땅에 속한 존재가 아니라 하늘에 속한 존재로 하나님의 형상이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하늘에 속한 존재로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했고 완벽한 승리를 가지게 되었음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 승천이다. 이 사실을 우리는 베드로가 증인의 사역을 감당하는 것에서 명확히 드러나고 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미 종말이 이루어졌다고 선언하였다. 이 종말의 때에 구원의 이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라고 선언하였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행 2:21).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온전히 이루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에 십자가를 지는 자가 예수님뿐이었는가? 십자가를 지는 많은 사람들 중에서 메시아가 될 자는 죽음에 매여 있는 자가 아니었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베드로는 구약에서 다윗의 시편 16편을 인용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위치 변화를 말씀하고 있다. 즉 예수님이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는 것은 예언이 성취된 것이며, 바로 메시아 되심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는 것은 구속 사역을 완성하셨다는 뜻이고 또한 오른쪽이란 영광과 권능의 자리에 앉으셨음을 의미한다. 구약에서 제사장들이 성막이나 성전에서 제사 직무를 수행할 때에 앉을 수 있는 자리는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대제사장으로서 사역을 온전히 감당하셨으므로 보좌에 앉으실 수 있었다.

“내가(예수) 항상 내(예수) 앞에 계신 주(여호와)를 뵈웠음이여 나(예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여호와) 내(예수) 우편에 계시도다”(행 2:25). “요동치 않게”라는 것은 확고한 자리 확보를 위하여 죽음과 음부로부터 피해를 보지 않게 하신다는 것이다(행 2:27-28). 여기서 “나”라고 하는 사람이 이 시편을 기록한 다윗이 될 수 없음은 다윗은 아직 음부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행 2:29).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의 성취임이 명백하다. 이제 예수님은 구원사역의 완성으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계속적으로 대언하고 계신다. “예수께서 만일 땅에 계셨더라면 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셨을 것이니”(히 8:4/참고 요일 2:1).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의 사역을 통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일련의 사건들은 메시아 되심의 증거로 제시하고 있다.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신 그분이 친히 사람이 되셨고, 죄인들을 대표하여(롬 5:17-18) 죄악을 담당하시고 죄인들이 받아야 할 진노를 십자가에서 홀로 담당하심으로 가장 낮은 자리까지 내려가셨다(빌 2:6-8). 이러한 저주를 받은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높이셨고, 창세 전에 누리던 영광의 자리로 회복시키셨다.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형상임을 증거하신 것이다(골 1:15). 따라서 예수님의 승천이란 주님의 자리로의 회복이다. 주님의 자리로의 등극이다.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만 구원을 얻게 되어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오늘날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단순히 구원을 얻기 위하여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행하였듯이 주님의 증인된 사역을 감당하는 것까지 포함하는 말이다. 무엇의 증거자여야 하는가? 지금 우리가 예수님의 승천을 증거한다고 해서 그것을 듣는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승천이 있게 된 원인을 바로 증거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십자가 사건을 부활과 승천의 최종적 영광을 위한 하나의 추억거리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바울 사도는 말하기를 “너희 중에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라고 했고, 갈라디아서 3:1에서도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세상과 성도와의 칸막이가 부활 사건이나 승천이 아니라 십자가 사건으로 말해지는 것이다. 그 안에 부활과 승천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그러므로 언제나 그리스도 구원 사역의 중심은 십자가이다. 승천의 영광만 바라보고 우리가 그 하늘나라에 앉을 영광만 생각한다면 구원에 대하여 크게 오해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십자가의 은혜로 베풀어지는 구원이란 이 땅의 것을 날마다 더 얻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 것이다. 하늘로 가신 그분이 이 땅과 이 땅의 모든 것을 버리고 가셨다면 성도의 삶은 이 땅과 이 땅의 것을 날마다 버리면서 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지금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그분을 위하여 이 세상과 세상의 것을 버리며 사는 자라야만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살 자격이 있다. 버리면 자격이 주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성도 안에 있는 생명이 세상과 세상의 것을 밀어내고 버리도록 되어 있다는 말이다(막 10:29-30).

세상 것을 버리면서 산다는 것은 세상의 것을 버리는 일로 기쁨을 삼는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만족하기에 그분만 증거하는 삶으로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승천하신 하늘만 쳐다보고 있을 수 없었듯이 오늘 우리 역시 예수님의 승천에 대해 묵상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증거자로 살아가야 한다. 오늘 우리의 삶의 의미는 바로 예수님이 우리를 십자가에 날마다 못 박을 때에 의미가 있는 삶이다. 그 십자가에 날마다 못 박히는 자만이 진정한 주님의 증거자가 될 수 있다. 십자가에 죽어보지 않은 자는 십자가의 의미를 알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증거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영, 혼, 몸에 대한 성경적 이해

사람의 본질

사람은 흙으로 만든 몸(육)에 하나님이 숨(영)을 불어넣은 살아있는 혼이다. 

창세기 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the LORD God formed the man from the dust of the ground an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fe, and the man became a living being.

히브리어로 영은 “루아흐”, 혼은 “네페쉬”

히브리어 성경에는 "혼" 이라는 단어인 “네페쉬”가 사용되었다.

데살로니가살전서 5: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

“May God himself, the God of peace, sanctify you through and through.

May your whole spirit, soul and body be kept blameless at the coming of

our Lord Jesus Christ. ”

 

혼이란 사람 그 자체를 말한다.

 

출애굽기 12장 15절

“너희는 칠 일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그 첫날에 누룩을 너희 집에서 제하라

무릇 첫날부터 칠일까지 유교병을 먹는 자는 이스라엘에서 끊쳐지리라.”

** 원어 성경에는 (먹는 자는)에서 자가 혼을 나타내는 “네페쉬”로 되어 있음.

For seven days you are to eat bread made without yeast.

On the first day remove the yeast from your houses,

for whoever eats anything with yeast in it from the first day through

the seventh must be cut off from Israel.

 

에스겔 18장 20절

“범죄 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비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하리니.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The soul that sinneth, it shall die.

The son shall not bear the iniquity of the father,

neither shall the father bear the iniquity of the son:

the righteousness of the righteous shall be upon him,

and the wickedness of the wicked shall be upon him. ”

 

혼이란 생명체를 말한다.

 

민수기 31장 28절

“싸움에 나갔던 군인들로는 사람이나 소나 나귀나 양 떼의

오백분지 일을 여호와께 드리게 하되”

* 개역 성경에는 빠져 있지만 원어 성경에는 사람이라는 단어가 “네페쉬”가 포함되어 있음.

“From the soldiers who fought in the battle,

set apart as tribute for the LORD one out of every five hundred,

whether persons, cattle, donkeys, sheep or goats.”

 

사람이 죽으면 영은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전도서 12장 7절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 원어 성경에는 신이 영을 나타내는 “루아흐”로 되어 있음.

“and the dust returns to the ground it came from,

and the spirit returns to God who gave it.”

 

* 개역의 "신"은 개역개정판에서 "영"으로 개정되었음

 

누가복음 23장 46절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

“Jesus called out with a loud voice,

"Father, into your hands I commit my spirit."

When he had said this, he breathed his last.”

 

사람이 죽으면 혼은 낙원이나 지옥에 간다.

 

누가복음 16장 22절~23절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The time came when the beggar died and

the angels carried him to Abrahams side. The rich man also died and was buried. /

In hell, where he was in torment,

he looked up and saw Abraham far away, with Lazarus by his side.

 

특별한 경우 (예수님과 요나)

 

마태복음 12장 40절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For as Jonah was three days and three nights in the belly of a huge fish,

so the Son of Man will be three days and

three nights in the heart of the earth.”

 

요나 2장 6절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To the roots of the mountains I sank down;

the earth beneath barred me in forever.

But you brought my life up from the pit, O LORD my God.”

 

* 예수님의 혼은 땅의 중심부에,

요나의 혼은 산들의 밑바닥까지 내려갔다고 기록되어있다 (밤낮으로 3일 동안)

* 예수님의 몸은 돌무덤에 있고,

요나의 몸은 큰 물고기 뱃속에서 있었다. (밤낮으로 3일 동안

 

사람이 죽으면 몸은 흙으로 돌아간다.

 

창세기 3장 19절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By the sweat of your brow you will eat

your food until you return to the ground,

since from it you were taken;

for dust you are and to dust you will return."

 

영은 살과 뼈가 없다

 

누가복음 24장 39절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 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Look at my hands and my feet.

It is I myself! Touch me and see;

a ghost does not have flesh and bones, as you see I have."

 

*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은 영, 혼, 몸이 다 있는 모습니다.

 

영, 혼 , 몸의 관계

 

(예 - 한나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태를 닫으셨다고 생각하자,

그녀의 영이 슬퍼하였고, 그녀의 혼이 괴로워하고,

자기 혼을 주 앞에 쏟아놓았으며,

그의 몸은 음식을 거부하고 눈물 흘리고 통곡하며 기도함)

 

사무엘상 1장 10절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In bitterness of soul Hannah wept much and prayed to the LORD. ”

 

사무엘상 1장 15절

“한나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 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나의 심정을 통한 것뿐이오니”

 

*원어 성경에는 마음은 영을 나타내는 “루아흐”로 번역되어 있고,

심정은 혼을 나타내는 “네페쉬”로 번역되어 있음.

"Not so, my lord," Hannah replied,

"I am a woman who is deeply troubled.

I have not been drinking wine or beer;

I was pouring out my soul to the LORD.“

 

영, 혼, 몸의 기능

 

영: 하나님과 소통. 믿음, 소망, 경외함, 기도

혼: 인격을 갖추고 생각, 기억, 양심, 판단, 의지. 인격체인 사람을 대표함,

몸: 생명체로서의 기능 유지

 

“영은 하나님을 의식하고, 혼은 자기를 의식하고, 몸은 세상을 의식한다.”

 

* 개역성경에서 "영(spirit)" 은 생기, 영, 신, 혼, 마음, 유령, 영혼 등으로 번역되었고,

"혼(soul)"은 생령, 산 영, 심정, 마음 등으로 번역되었다.

 

개역성경에서는 영과 혼과 육에 대해 명확하게 분별하기 어렵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개역성경을 주로 사용하는 우리나라에는 많은 이단적 사상과 오류들,

동양사상과 그리스의 헬레니즘 문화에 크게 영향을 받는 것 같습니다.

 

* NIV 성경은 "영"은 spirit, ghost 으로 "혼"은 soul, living being 으로 번역 되었다.

* 하나님의 이름은 KJV, NIV 성경은 "the LORD" 로 표기 했고 개역성경은 "여호와" 로 표기했다.




그리스도의 승천 교리가 기독론 5대 교리 중 하나

‘칼빈주의 5대 교리’는 칼빈주의의 전체 교리는 아니다.
칼빈주의의 핵심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이다.
칼빈의 이중예정론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대변하는 개념이다.
이것이 아르미니안들이 항론한 이슈가 되었다.
그리고 칼빈주의 5대 강령은 칼빈이 세운 것이 아닌 1618-1619년 도르트 회의(The Canons of Dordt)에서 아르미니안의 다섯 가지 항론에 변호 성격으로 작성한 것이다.
도르트 회의에서 아르미니안은 개혁 교회에서 퇴출당했다.

예정론아우구스티누스가 처음으로 주장했다.
그리고 예정론칼빈이중예정으로 체계화시켰다.
예정은 하나님 작정(decretum horrible)의 불변성을 근거로 나왔다.
칼빈은 예정을 선택유기로 확정하는 이중예정(duplex praedestinatio)을 주장했다.

도르트 회의는 아르미니안의 주장에 반대하여 세운 5가지 교리인 전적타락, 무조건적 선택, 제한된 구속, 불가항력적 은혜 그리고 성도의 견인으로 확립했다.

이 다섯 가지 교리는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신다’는 구원 교리에서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네덜란드의 상징이기도 한 튤립(TULIP)의 이니셜로 정리되어, ‘튤립 교리(The Five Points of Calvinism, TULIP)’라고도 한다.

1. 전적타락(전적타락과 무능력, Total depravity) 로마서 5:12-21

‘전적타락’이란 인간은 선을 행할 의지나 능력이 없으며 인간의 공로가 전혀 불가능하도록 전적으로 부패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아담의 원죄로 인해서 모든 사람은 죄에 오염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이다. 이 죄는 한 사람의 의지뿐 아니라 그 감정과 지성, 신체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전적이라는 표현은 타락한 각 사람이 최악의 상태에 있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의 어떤 측면도 죄의 영향을 받지 않은 부분이 없음을 의미한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전적 무능력이라고 한다. 구원시작과 구원진행과 구원완성에서 인간의 공로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알미니안은 부분적 타락(partial depravity)으로 항론했다.

2.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로마서 4:4-8

‘무조건적 선택’이란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자기의 기쁘신 뜻에 따라 인간을 선택하거나 유기하시도록 예정해 두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우리의 윤리적 행위나 우리가 믿을 것을 아시고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무조건적 선택이라는 것이다. 알미니안의 조건적 선택(Conditional election)에 대조되는 구분이다. 절대예정(Absolute predestination)과 예지예정(foreknowledge predestination)으로 대조를 이루기도 한다. 알미니안은 예지예정을 주장한다.

역사적으로 개혁파 전통에 속한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점을 온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보편적인 부르심과 나란히 언급하면서, 하나님의 주권과 자비, 그분의 은혜와 인간의 전적 타락의 빛 아래에서 이 교리를 설명해 왔다. 이것은 아담이 하나님을 배반하여 타락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죄인 중에서 일부를 선택하셨다는 것이다. 조건 없이 선택하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은혜가 되는 것이다.

3. 제한 속죄(Limited atonement) 제한적이며 특별한 속죄 에베소서 1:4,  마태복음 1:21

제한된 구속이란 말은 오직 선택된 자만이 그리스도의 속죄에 의해 구원을 받는 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능력을 제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오직 구원에 이르도록 예정된 자들에게만 효력을 지닌다는 의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것이 아닌 선택받은 자를 위해서 피를 흘리셨다. 알미니안은 무제한적 속죄(Unlimited atonement)이다. 보편구원론은 제한 속죄와 어울리지 않고 무제한 속죄와 어울린다.

4.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요한복음 6:37-40, 로마서 8:18-39

‘불가항력적 은혜’란 중생은 전적으로 선택을 기초로 한 하나님의 효과적인 사역의 결과이며,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질 때 인간은 이를 거부할 수 없다는 점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산물인 것이다. 동시에 개혁파는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의 자유, 책임과 역동적으로 상호 작용하는 가운데서 역사함을 주장했다. 알미니안은 가항력적 은혜(Resistible grace)이다. 불가항력적 은혜는 성도의 견인과 한짝이다. 가항력적 은예에서는 구원의 탈락가능성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5. 성도의 견인(굳게 참고 견딤, Perseverance of the saints) 베드로전서 5:10

‘성도의 견인’이란 성도의 보전이라고도 불리는데, 한번 선택받은 성도는 한 때 타락할 수 있어도 궁극적으로 반드시 구원받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의 효과적인 부르심을 받은 자는 인간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양자로 삼은 자녀들은 구원이 보장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선택이 인간의 행위에 의해 무효화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참된 신자들이라도 일시적으로 타락할 수 있지만, 그런 반역의 상태는 최종적인 것이 아님을 주장한다. 한편 이 교리의 의도는 도덕률 폐기론을 변명할 구실을 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고뇌하는 신자들을 위로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여 순종하도록 격려하는 데 있다. 알미니안은 은혜로부터의 탈락 가능성(the possibility of a lapse from grace)으로 항론했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예정론은 싫어하는 것 같다. 그런데 기독교 안에서도 예정론을 싫어하는 부류가 있다. 예정론을 비판하는 책을 보면 칼빈주의 5대 강령에 대해서 더 심각하게 비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많은 장로교 진영에서도 예정론을 싫어하는 부류가 있다.

예정론을 말하면서 예정론이 맞으면, 전도를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냐고 한다. 이것은 옳지 않다. 우리는 사람들이 선택받았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선택받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스스로 복음을 듣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지 않는다. 그러기 때문에 예정론이 옳기 때문에 더욱더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신다.

예정론을 기계적이나 운명론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예정론은 하나님의 구원 경륜에 관한 것이지 인간의 운명의 화복(禍福)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칼빈은 기독교강요 3권에서 기도에 대해서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우리시대에는 행위 신학이 난무하다. 인간의 인위적인 노력을 주장하는 것은 펠라기우스로부터 시작된 영향으로 볼 수 있으며, 반-펠라기우스주의, 알미니안 그리고 그 아류들에 의해서 반복된다. 인간에게 느껴지는 것을 추구하고, 감정이 벅차 눈물이 나는 현상 등을 성령의 역사로 주장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영(靈)인데, 육체인 인간의 오감(五感)으로 평가하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하나님의 예정은 인간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을 절대자로 믿는다면 절대자의 의지의 불변을 믿으며 예정을 믿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믿음은 이성의 추론에 의해서 확립하는 것이 아니라, 구주 예수의 부르심(Calling)으로 시작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로 진행해야 한다(Duplex gratia). 오직 믿음과 오직 은혜를 추구하는 장로교인은 하나님의 이중예정을 근거로한 칼빈주의 5대 교리를 믿는다. 우리의 이해가 부족해서 하나님의 경륜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기쁘게 겸손하고 믿음으로 찬양하게 한다.







그리스도 승천에 대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해설(23) :
“그리스도의 승천이 주는 유익”을 잘 해석해 놓은 글을 소개하고자 한다*

서론 / 

승천은 주께서 사역하신 지상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최후의 장면임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다른 교리에 비하여 크게 다루어지지 않고 있다.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십자가와 부활이 승천과 연결되어 있어 이 승천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루신 구속사역을 완성하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도 신경에서는 이 점을 고백하도록 하였으며, 신실한 성도는 마땅히 우리 주께서 하늘에 오르셔서 완성하시는 구속의 진리를 바르게 알고 이 의미심장한 진리를 확실하게 믿어야 할 것이다.

 

1. 승천의 사실성

 

예수님의 승천에 관해서는 복음서를 통해 그 정황을 비교적 상세히 그려볼 수 있다. 부활하신 후 예수께서는 바로 하늘로 오르지 않으셨다. 주께서는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지상에 계시면서 제자들에게 여러 차례 나타나셨다.(고전 15:5-7) 주께서는 이 기간 동안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전에 수 없이 가르치셨던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진리와 그 나라의 능력을 드러내셨던 모든 사역에 대하여 모세오경과 시편 그리고 선지서들을 집중적으로 다시 복습시키셨고, 또한 그 모든 하나님의 구속의 진리들을 증명해 보이셨다.

 

누가는 이 점을 특별히 강조하여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 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행 1:3)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 후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데리고 감람산으로 가셔서 그들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셨다. 당시의 광경에 대하여 마태복음 저자는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마 28:16)라고 기록했고, 누가복음서 저자는 “예수께서 저희를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저희에게 축복하시더니 축복하실 때에 저희를 떠나(하늘로 올리우)시니 저희가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늘 성전에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니라.”(눅 24:50-53)라고 적었고, 사도행전에서 같은 저자는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 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행 1:9-11)라고 당시 상황을 전하고 있다.

 

이 구절들을 통해 승천 당시 상황을 그려 볼 수 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실을 제자들이 알게 되자, 그들은 충격 속에서 예루살렘에 있는 마가 요한의 다락방이라 생각되는 곳에 모였다. 부활의 예수께서는 그들과 함께 40일 동안 기거하시며 집중적으로 구약과 예수님의 공생에 이르는 구속의 진리 즉 하나님의 나라의 원리를 학습시키셨다. 그 결과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하여 완성되어지는 구속의 역사를 완벽하게 습득하였다. 그들은 공부하는 가운데서도 평소에 갖고 있었던 질문을 했다.(행 1:6) 그것은 민족적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에 관한 문제였다.

 

그러나 주님은 다른 차원 즉 영적 차원에서의 하나님의 나라의 원리를 제시하신 후 감람원에서 제자들의 앞에서 새로운 사명을 그들에게 부여 하시고 승천하셨다.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7,8)

 

그들에게 명하신 바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흩어지지 말고 함께 모여 아버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바 성령의 임재하심을 경험하여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행 1:8)이며, 둘째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고 주께서 그들에게 주신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대 사명을 수행하라는 것이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9,20)

 

이런 기록들의 사실성에 대해 사도 베드로는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분부하신 바를 제자들이 지킨 결과 오순절에 성령께서 강림하신 바를 체험하고 예수께서 승천하신 바에 대하여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행 2:32,33)라고 증언했다.

 

2. 승천의 교훈

 

한편 제자들과 많은 사람이 보는데서 하늘로 올리신 주님은 영광 가운데 하늘로 가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 이 사실에 대하여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께서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히 12:2b)고 하면서 이 예수님은 성도의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히 12:2a)이시기에 성도들은 오직 그만을 바라볼 것을 권면하였다. 그리고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의 그 어떤 대제사장보다도 완벽한 대제사장으로서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신”(히 8:1b) 분이시며,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신 분”(히 9:24)이라고 소개했다.

 

또한 사도 바울도 승천하신 예수께서는 항상 살아계셔서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분”(롬 8:34b)이시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처럼 신약의 저자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승천하셔서 지금 어디 계신 지를 확실하게 알려준다. 주께서는 승천하신 후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시며 성도들을 위하여 항상 기도하시고 계신다.

 

한편, 놀라운 점은 사도 바울은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천상에서의 신분이 성도들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 지를 잘 설명하며 교회를 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 이니라.”(엡 1:20-23)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진리를 믿는 초대교회는 항상 교회의 영광스러움을 고백하며 하늘에 올리우신 예수님을 찬양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된 신분의 변화 된 것처럼, 믿는 성도들 역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로서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된 고귀한 신분임을 인식하고, 참된 하나님의 자녀와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지체임을 인식하며 살아가야 하는 자임을 확신 가운데 고백하였던 것이다.

 

3. 인성은 떠나 계시나 신성으로 함께 하시는 예수님

 

주 예수께서는 승천하실 때 제자들에게 유언으로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20)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예수께서 승천하시면서 어떻게 지상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있을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이 주제는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에 대한 주제와 성찬교리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1) 참 인간이시며 동시에 참 하나님이신 예수님

 

인간의 죄로부터 구원해 줄 수 있는 존재는 참 인간이어야 하며 동시에 참 하나님이셔야 했음을 질문 36에서 살펴보았다. 그 이유는 죄 가운데 살아가는 인간에게 퍼부어진 하나님의 진노를 감당할 그 어떤 인간도 없고 하나님께로 이끌 수 있는 그 어떤 인간도 없기 때문이다. 참 인간이시며 참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그 모든 형벌을 친히 담당하셨고, 또한 이 모든 죄 값을 치르시어 죽으신 후 부활로 승리하셔서 그 얻으신 혜택을 모든 인간들에게 나주어 주시는 완벽한 구속의 역할을 감당하셨다. 이러한 신인(神人, God-Man)이신 예수께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영원한 중보자로서 충실하게 감당하셨다. 주께서는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이 은혜로운 사역을 감당하고 계신다. 그리하여 우리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이 놀라운 진리를 고백하시며 모든 성도를 위해,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요 17:24)라고 기도하셨다.

 

(2) 인성으로는 떠나 계시지만, 신성으로 함께 하심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은 이 세상에 없기에 성도들과 떨어져 있는 몸이지만 영광스러운 몸이시다. 주님은 승천하시면서 제자들과 함께 언제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신인(神人)이신 예수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시다. 과연 어떻게 이 신비스러운 일이 벌어지게 되는 것일까?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위엄 그리고 은혜와 영으로 역사하시는 신비스러운 통치는 바로 성찬에서 나타난다. 비록 예수께서는 하늘로 올라가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지만, 여전히 성찬을 통하여 주께서는 신성과 위엄과 은혜와 영으로 참여하는 성도들 가운데 계시는 것이다. 이는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께서 아버지로부터 영광의 권세를 부여 받으셔서 통치하시는 ‘신령한 나라’를 세워 가시는 것을 의미한다.

 

즉 주께서 이 신령한 나라에 초대된 성도들과 함께 신령한 교제를 나누시는 것이 성찬이다. 초대교회로부터 이 성찬은 다시 오실 재림의 주님을 기억하며 행해야 하는 거룩한 예식이었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 11:26)

 

성찬을 통하여 주님의 인성과 신성은 초대교회서부터 믿고 고백했던 것으로 이를 정리하여 천명한 칼케돈 신조(Chalcedon Creed 451AD)에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은 “혼동되거나 변하지 않고 분리되거나 나눠지지도 않는다.”라고 바르게 고백했다.

 

(3) 항상 함께 계시겠다는 약속 실현의 상황

 

그러면 예수님의 육체적인 승천을 믿는다면 항상 함께 계시겠다는 예수님의 약속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앞에서 살펴본 성찬으로 통하여 주님의 임재를 확신하게 되지만, 육체적으로는 이 세상에 더 이상 계시지 않으시는 예수께서는 항상 성령을 통하여 거듭난 성도들과 함께 계신다. 주의 영이신 성령께서는 예배를 드리는 과정에서, 말씀을 읽고 들을 때, 또한 기도와 교제 가운데 성도들과 함께 계신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에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으시며 사역에 임하셨던 그 상황으로부터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언제나 당신의 자녀들 속에 임하셔서 놀라운 구원의 사역을 이루어 가시는 것을 의미한다.

 

성도는 이 진리를 통하여 하늘에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대제사장의 중보기도 사역에 힘입어 항상 기도하며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체험하며 역동적인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히 7:25)

 

4. 예수 그리스도 승천의 유익

 

요리문답 질문 47은 승천 교리의 유익을 설명하고 있다. 그 유익을 간략하게 네 가지로 꼽을 수 있다.

 

(1) 대언자(代言者) 예수

 

승천하신 예수께서는 마치 법정에서 피고인을 위하여 변호해 주는 변호사와 같은 역할을 감당하신다. 히브리서 기자의 진술과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온전한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간구하시는 사역을 지금도 계속하는 대언자이다. 사도들은 승천하신 주님의 이 놀랍고 신비스러운 사역에 대하여,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4b)라고 하였으며 또한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라고 선언하셨다. 정말로 우리를 위하여 대언해 주시는 기도 자가 있다는 사실 얼마나 위로가 되고 감사한 일인가? 이는 우리의 죄의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해 주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완벽한 구원 사역인 것이다.

 

(2) 영적 고귀한 신분의 변화

 

성도를 향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속에는 구체적으로 믿음으로 승천하신 주를 고백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신비스러운 영적 진리가 담겨 있다. 그것은 바로 예수와 연합되어 상승된 영적 신분의 변화이다. 비록 육신은 이 땅에서 살고 있지만 성도의 영적 신분은 이미 세례 받을 때 고백한바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살아난 자인 것이다. 즉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로서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혀진 고귀한 신분으로 변화된 신분을 획득한 존재인 것이다.

 

이는 전적으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자비하심으로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신”(엡 2:5,6) 것으로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이다.(엡 2:8) 그러므로 이 진리를 받아 항상 감격하는 자는 이 세상의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이 영광된 신분의 특권을 누리며 승리의 삶을 살게 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 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 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4-39)라고 외쳤다.

 

(3) 하늘의 것을 추구하며 사는 자

 

성도의 이러한 놀라운 신분의 변화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로서 하늘에 가 있고, 또한 죽은 다음에도 주님께로 갈 것이고, 다시 주께서 오실 때 영화된 부활의 몸으로 주님과 함께 영원히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성도의 영적 신분의 상승에 대한 보증이 그리스도의 승천이다.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하여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골 3:1)고 했다. 성도들의 이 땅에서의 삶은 바로 하늘의 것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는 마땅히 예수와 연합된 자들의 당연한 삶인 것이다.

(4) 보증이신 성령님

 

히브리서의 믿음의 선조들은 이 땅에서 나그네 즉 이민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사모함이 얼마나 강했는지는 다음 구절에서 잘 나타난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 로라 증거 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다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 11:13-16)

 

이러한 성도의 길은 사도 바울이 골 3:1-5의 말씀과 같이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그는 더 이상 땅의 것을 추구하지 않고 위에 계신 그리스도의 것을 구하면서 살아가는 자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승천이 성도에게 주는 유익이다. 이는 오직 성령님의 임재로만 가능하다. 주께서는 이미 이 진리를 말씀해 주셨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 14:16-18)

 

 

5. 구속 사역의 완성인 승천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루신 구속 사역의 완성이란 의미가 담겨있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3-15) 즉 모세가 든 놋 뱀과 같이 십자가에 달리시어(민 21:9, 요 3:14), 모세의 놋 뱀을 본 사람이 목숨을 구한 것과 같이, 예수께서 달리신 십자가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다. 또한 예수께서는 공생애 마지막 순간에 동일한 십자가 사건을 언급하면서 자신이 어떠한 죽음을 죽으실 것을 말씀하시고 동시에 땅에서 들려 하늘로 올라가셔서 모든 민족을 구원하시는 사역을 수행하겠다고 말씀하셨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요 12:32-33)

 

이 점에서 승천은 바로 예수께서 수행하신 지상 사역의 완성이며 구속 사역의 완성이다.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그리스도는 하늘로부터 오신 분이시며(고전 15:49), 죄로 인하여 상실한 인간들에게 하늘에 속한 형상을 덧입혀 주시기 위하여 친히 승천하시고 지금도 구속의 사역을 수행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엡 4:8-10)

 

 

결론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은 성령의 역사로 지금도 성도들 속에서 보증이 되셔서 확실한 구속의 완성을 바라보게 한다. 이는 성령께서 이미 말씀해 주신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승천을 믿는 성도들의 마음속에서 역사하고 계심을 뜻한다.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후 1:21,22)

 

 

그러기에 성도들은 이 성령님을 의지하고 이미 우리 위하여 하나님께 대언(중보) 기도를 하고 계시는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여 이 세상에서 빛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하고 또한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을 거룩한 신부로서의 영광스러움과 순결함을 잃지 않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히 4:14)











부활(復活) 04-17-2022 부활주일 설교


2023년 부활주일 설교 주제
- 부활은 바꾸는 것이다!

04-19-2022(화) 묵상 중에
삶의 가치관과 목표를 바꾸는 것이 부활이다.

예를 들면 부활하기 전에는 철저하게 땅에 속한 삶을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땅에 속한 삶의 특징은 육체의 정욕, 이생의 자랑, 안목의 정욕이라고 하였다(요한일서 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육체의 정욕(베드로전서 2:11)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육체의 정욕을 섹스(성)라고 한다.

이생의 자랑
이생의 자랑은 물질(돈)이라고 한다.

안목의 정욕
안목의 정욕은 권력이라고 한다.


다시 사시는 그리스도

- 크리스토프 프리드리히 블룸하르트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고 말로만 외치면서 축하하는 부활절 기념은 너무 미흡합니다. 우리 역시 살아났다고 또 하늘로부터 무엇인가를 받은 게 있다고 말하지 못하면서 부활 자체만 선포하는 것은 헛된 일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라는 엄청난 사건이 반복적으로 선포되고 있지만 실제로 우리에게는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 것을 섬뜩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부활의 효력이 없습니다. 

아무런 감동도 없으면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계속 언급하는 유혹이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생겨났습니다. 마치 신문을 읽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지루하게 앉아서 듣고 있을 뿐입니다. 실은 신문이 더 흥미롭다고 느낄 겁니다. 이에 원수는 이득을 얻었습니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이 원수를 물리치고 싶다면 반드시 하나님 앞에 서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찾기 위해 기도로 싸워야 합니다.

사람들은 종교적인 질문을 가지고 엄청난 논쟁을 벌이지만, 신은 항상 죽어 있습니다. 신이 죽었다면 그들에게는 아주 잘된 일일 겁니다. 그래야만 자신들이 좋아하는 대로 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했는데 딱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나 저 세상에서나 행복한 삶을 얻기 바라지 않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아는 게 전부입니다. 저는 이 세상이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알 때까지 단 일 분의 값싼 행복도 바라지 않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엎드려 주님을 죽인 일을 통곡해야 합니다. 문제를 위해 태어났고, 투쟁하기 위해 태어난 우리입니다.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을 바늘구멍만큼 여기면서 인생은 항상 멋지고 순탄하기를 바라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미래는 우리가 기다려야만 하는 절대적으로 동떨어진 한 지점이 아니라 다가오고 있는 사건입니다. 아마 우리 대부분은 이것에 대한 의식이 없기 때문에 여간해서는 이렇게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그리스도의 미래는 현재이며, 현재가 아니라면 아무 뜻도 아닙니다.

죽음과 죽음의 한 가운데 있는 현생에서 자유롭기 위해서는 아무리 힘들어도 기꺼이 견디는 열의와 기쁨과 감사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럴 때 부활의 능력은 우리에게 더 가깝고, 그리스도는 참으로 부활하신 분이 되시며, 새 생명이 우리존재 속으로 찾아옵니다. 그것은 우리가 여태껏 추구해오던 종류의 생명이 아닙니다. 남들보다 좀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든지, 조금 덜 훔치거나 단정하게 차려 입고 품위 있게 걷거나, 범죄자의 모자를 그럴싸한 모자로 교체 하는 걸 새 삶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종류가 아닙니다. 이런 것을 새로운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말도 안됩니다.

이전보다 더 나아지는 것은 문제도 아닙니다. 새 생명이란 당신에게서 나타나는 생명의 힘이며,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것이자 거룩한 것으로 당신 안에서 자라날 수 있는 것을 뜻합니다. 죄악의 욕망은 더 이상 능력이 없고, 그리스도의 부활과 생명, 성령을 통한 능력이 우리를 온전하고 흠 없는 방향으로 인도하는 것을 실제로 볼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도대체 무엇입니까분명히 기독교 교리나 제도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을 위한 신성한 생명의 계시이며, 마음 생각 감정 가능성의 새 탄생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시려고 하나님으로부터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을 정복하시기 위해 우리 중의 한 사람처럼 되셔서 우리 속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완전히 새로운 삶과 새로운 질서를 위한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그분 안에서 우리는 완전히 다른 남자와 여자가 될 수 있습니다.

종종 그리스도인들은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들입니까!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보여줄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말문조차 열지 못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새 생명은 결코 이 세상의 일시적이고 세속적인 것에 들어 오거나 적용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완전히 새로 시작해야 합니다. 바로 이 지점으로 계속 되돌아 가야합니다. 더 깊고 더 철저히, 더 충분하게 완전한 새로운 출발을 계속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구주를 위하여 새로운 기초를 놓기까지 이 일을 지속해야 합니다. 그분의 죽음 같은 죽음으로 우리가 주님과의 연합에 이른다면 그분의 부활 같은 부활에도 반드시 연합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제서야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삶에 들어갑니다. 부활을 만난다는 것은 얼마나 엄청난 일입니까!

그리스도께서는 거듭하여 새롭게 살아나십니다.

부활은 과거 한때에 일어난 단독적 사건이거나 우연히 믿고 있는 교리 정도가 아닙니다. 그것들은 본질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만으로는 유익이 별로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믿긴 하지만 별다른 변화가 없습니다. 이런 믿음은 당신과 내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경험하지 않는 한 아무 도움이 못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기 어려워하는데 그건 최악이 아닙니다. 적어도 그 사람들은 아직까지 경솔하게 그것을 입밖에 내기에는 부활이 너무도 거대하고 엄청난 일이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실로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부활을 믿노라 주장은 하지만 실제로는 별 의미가 없을뿐더러 부활이 그들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죽음 이후 그 당시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부활이 있습니다. 부활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내면의 어떤 특정한 부분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갈 엄두도 못 내는 전혀 다른 장소에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완전히 다른 질서에 있음을 발견하는 그때 우리가 새롭게 되는 것이 현실이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거듭하여 새롭게 살아나십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새롭게 하기 원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의 뜻이 하늘에 계신 것처럼 이 땅을 위한 하나님의 뜻도 계십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그분의 실재를 전혀 모를 겁니다. 뭔가가 변화되리라는 상상도 전혀 할 수 없을 겁니다. 사람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인간으로선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영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아닙니다. 그분의 부활의 능력은 우리가 닿아 접근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새로운 가능성들이 있음을 깨닫고, 이것을 몸과 영으로 많이 감지할수록 더 요청할 수 있으며, 이 지상에서 더 높고 큰 것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사실, 아무 제한이 없습니다. 이런 연유로 우리는 일상생활에 속한 모든 영역에, 일하고 만지는 모든 것에 희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힘은 인간의 상황에 들어 올 준비가 되어 있으며 능히 그것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어둠과 악과 불완전성에 주목하지 말고, 이런 저런 문제들이 어떻게 결론 내려질지 파악해 내려고 애쓰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런 일은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넘쳐 날 때까지, 위로부터 오는 놀라운 능력이 우리의 모든 일에 작용할 때까지 예수님의 부활만을 더욱 더 구하는 게 우리의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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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부활주일을 준비하며
부활 신앙이란 주제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부활 신앙이란 사람의 존재 방식을 성경적으로 알고 믿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람의 존재 방식을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따라서 "부활이란 나의 존재 방식을 성경적으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첫째는 육체(肉體)의 사람

육체의 사람이란 현재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육체를 갖고 살아갑니다.
육체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 모두 하나 뿐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하나님 앞에서 평등합니다.

둘째는 영체(靈體)의 사람

영체의 사람이란 죽은 사람들이 존재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죽은 사람이 어디에 머물고 있는지는 모릅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한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이르리라고 하셨기에 낙원이라고 생각합니다.
또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서 부자와 거지가 죽었을 때 거지는 아브라함의 품에서 위로를 받았으나 부자는 음부에서 고통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낙원이든지 아브라함의 품이든지 또는 음부이든지 죽은 사람이 머무는 곳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셋째는 부활체(復活體)의 사람

부활체의 사람은 심판 때에 육체의 사람영체의 사람 모두가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을 말합니다.
부활체의 사람은 사도 바울은 신령한 몸이라고 하였습니다(고전 15:46)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우리들은 현재 육체의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육체의 사람이 앞으로 어떻게 변화될 것인가를 바르게 깨닫는 것이 부활 신앙입니다.

부활 신앙을 요약한 말씀이 요한복음 5장 24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I tell you the truth, whoever hears my word and believes him who sent me has eternal life and will not be condemned; he has crossed over from death to life.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영생을  얻었고(에케이)
      붙잡다, 소유하다  <현재형>

예수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습니다.
비록 우리들이 육체의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예수를 믿기 때문에 영생을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요한복음 11: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에르코마이)
      오다  <미래형>

세상 모든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히브리서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메타바이노)
      옮아가다, 옮기다  <현재완료>

예수를 믿기 시작한 것은 과거의 사건이었습니다.
이미 믿었을 때 구원을 받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지만 육체의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장차 부활의 날에 다시 살아날 것이므로 지금 받은 구원은 그 날에 다시 완성된 구원으로 드러날 것입니다(요한복음 11:25-2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사도 바울의 인간관

육(肉)에 속한 사람(고전 2:14)
The man without the Spirit

육신(肉身)에 속한 사람(고전 3:3)
You are still worldly

신령(神靈)한 사람(고전 2:15)
The spiritual man 

부활의 첫번째 정의는 나의 존재를 아는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는 육체의 사람에 속합니다.
육체의 사람은 땅에 속하였기 때문에 땅의 삶을 떠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땅에 속하였지만 땅의 것은 아닙니다.

부활의 두번째 정의는 나의 삶의 방식을 아는 것입니다.

나의 삶은 육신에 속한 삶에서 신령한 삶에 속한 방향으로 전진하여 나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아직도 육신에 속한 삶의 자리에 머물러 있다면 그 자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부활이란 육신에 속한 사람이 신령한 사람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육체의 나이와 영적인 나이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의 육체의 나이는 이미 어른이 되었으나 아직도 영적인 나이가 어른이 되지 못했다면 이것도 몹시 부끄러운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부활주일을 몇 번 맞이하셨습니까?
그만큼 영적인 나이가 성장했다면 성공적인 신앙생활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영적인 나이가 유치원생과 같다면 좀 더 분발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20:35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부활이란 죄에서 용서의 은혜를 확신하는 신앙
부활이란 죄의 결과에 따른 죽음에서 용서의 은혜에 따라 새생명을 얻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와 같은 부활 신앙 부활 생명을 일상생활에서 찾을 수 있는 몇 가지 사례로 설명하며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먼저 부활이란 "옮겨지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에덴동산에 있는 나무들 중에서 관심을 갖고 살펴야 할 두 그루의 나무는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와 "생명나무"라고 하겠습니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열매를 하와가 먼저 먹었고 그 다음에 아담에게도 주었습니다.
그 결과 아담과 하와에게 찾아온 것은 "죽음"이었습니다.

성경을 통전적(通全的)으로 읽어야 합니다.

"통전(統全)"이란 전체를 아우르고 조화시키고 통합한다는 뜻입니다.
‘통전’은 좌와 우, 아래와 위, 긍정과 부정, 개별자와 보편자, 특수성과 일반성, 그리고 믿음과 지식과 실천을 아우르고 통합하려는 것을 말합니다.

통전적 신학은 이것들을 아우르고 조화시키고 통합함으로써 단지 절충주의나 혼합주의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온전성(wholeness)을 지향한다. 한국 신학계에서 ‘통전적 신학’이란 표현을 가장 먼저 사용하고 통전적 신학의 수립을 위한 초석을 놓은 신학자가 이종성이다.

통전적 신학은 두 가지 중요한 측면이 결합된 신학이다.

통전적 신학은 방법론적으로 모든 것을 통합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 신학이다.
통전적 신학에 서 통(統)이란 말은 모든 것을 통합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통전적 신학은 모든 것을 통합하는 것(Integrity)에 머무는 신학이 아니다.

모든 것을 통합하는 것은 자칫 잘못되면 혼합주의로 흐를 위험이 있다.
통전적 신학은 모든 것을 통합해서 온전함(Wholeness)에 이르고자 하는 신학이다.
즉 통전적 신학은 온전함을 추구하는 신학이다.

통전적 신학의 영어 표기인 '통전적'(holistic)이란 말은 온전함과 관계가 깊은 단어이다.
즉 통전적 신학은 편협함을 극복하고, 중요한 정신과 관점을 소홀히 하거나 간과하지 아니하고 가능한 한 모든 진리를 통합해서 온전한 신학을 형성하고자 하는 신학이다.


성경에서 죽음의 시작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서 먹음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죽음에 대한 출발은 신약에서 사도 바울에 의하여 죄의 결과는 사망이라고 정의했습니다(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그런데 사람을 죽어야 할 길로 유혹한 존재는 사탄입니다.
사탄은 처음부터 죄를 짓게하는 타락한 천사를 말합니다(요한일서 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8:44 /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성경이 가르치는 교훈에 따라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는 죄를 짓게하는 사탄의 권세에 붙잡힌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생명나무는 영원한 삶을 약속받는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는 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두 나무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살펴보겠습니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창세기 2:17)
-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창세기 2:16-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
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선과 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죄의 결과라고 하셨습니다(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죽는다는 것은 죄의 결과라고 하겠습니다.
선악과의 열매를 따서 먹는다는 것은 죄를 범하는 것으로 선악과는 한마디로 죄의 나무 즉 사탄의 권세에 붙잡히게 하는 나무라고 하겠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모두 죽어야 합니다.
죽지 않으려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생명나무는 죽음을 해결하는 나무가 됩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가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생명나무를 따먹고 영생하는 것을 금하려고 생명나무 주위에 화염검을 두고 지키게 하셨습니다.

생명나무(창세기 2:9)
- the tree of life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세기 3: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세기 3:22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요한계시록 2: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요한계시록 22: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 나무가 있어 열 두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요한계시록 22:14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 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잠언 3:18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 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죄값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 생명을 얻으려면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생명나무가 상징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성경은 생명나무는 곧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는 사탄의 권세에 붙잡힌 인생
생명나무는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은 인생이라고 하겠습니다.

부활이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 즉 사탄의 권세에 붙잡힌 인생이 생명나무 즉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잡힌 인생으로 옮겨가는 것을 말합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땅에서 하늘로
마귀의 권세에서 하나님의 권세로
염소의 무리에서 양의 무리에게로

첫째는 플러그 아웃(Plug Out)에서 플러그 인(Plug In)

가정에서 가전제품을 사용하려면 먼저 가전 제품에 전원을 공급해야 합니다.
전원을 공급하려면 플러그를 꽂아야 합니다.

(예) 독일 교회 초청으로 독일행 비행기를 탑승하려고 김포 공항에 일행들이 모였습니다.
그때 작고하신 이정규목사님의 사위가 장인을 위하여 아주 성능이 좋은 전기 면도기를 선물하며 여행하는 동안 사용하라고 합니다.
당시 한국의 전압은 100V가 대세이었지요.
그런데 독일에 도착하여 몇일 후 이목사님께서 면도기를 빌려달라고 합니다.
그 성능 좋은 사위가 선물한 면도기를 사용하시지요?
코드가 맞지 않아 사용할 수 없다고 합니다.

둘째, 선악과나무에서 생명나무

에덴동산에 여러 나무들이 있었지만 특별히 두 종류의 나무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
또 다른 하나는 생명나무의 열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는 금지된 것이었습니다.
하지 말라는 것을 하라고 유혹한 것이 사탄입니다.

사탄의 정체가 무엇입니까?
사탄은 죄를 짓게하는 영적 존재입니다.

요한일서 3:8
죄를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사탄이 아담을 찾아온 것이 아니라 하와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하와를 유혹합니다.

셋째, 죄의 자리에서 용서의 자리

죄의 자리에 머물러 즐기며 살아가는 것은 염소와 같은 사람입니다.
용서의 자리에 머물며 믿음의 길을 걷는 것은 양과 같은 사람입니다.

염소는 가라고 하여도 가지 않습니다.
양은 가라고 하면 갑니다.
차이는 순종과 불순종입니다.

양은 여름철에는 가까이 다가가면 서로 덥기 때문에 흩어져서 잠을 잔다고 합니다.
염소는 겨울철이 되면 가까이 다가가면 따뜻해서 좋은 것을 알지만 상대편이 따뜻한 것이 싫어서 일부러 떨어진다고 합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염소는 섬김을 모릅니다.
반면에 양은 섬김을 압니다.

부활신앙은 섬김을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넷째, 사망에서 생명

사망은 땅에 속한 것이라면 생명은 하늘에 속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장례식 때 시신을 땅속에 안장하면서 이렇게 찬송을 부릅니다.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애급에 속한 인생이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간 것을 찬송합니다.

(예) 한승수일병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한일병은 대대장 1호차 운전병이었습니다.
관할부대 지역 지휘관들이 산정상 지휘소에 모여 작전 회의가 열리던 날 대대장을 회의장이 있는 곳으로 모신 후에 안내병의 신호에 따라 임시 주차시설이 있는 곳으로 차량을 이동하던 중 그만 1호차와 더불어 산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산 아래로 떨어진 1호차 운전병은 차밖으로 나와서 위를 바라보면 손을 흔들며 안전하다고 신호를 보냈습니다.
그 날 저녁 내무반에서 한일병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나의 생일은 오늘부터 이 날입니다."

왜 생일을 바꾸겠다고 하였을까요?
죽을 뻔 하였으나 구사일생으로 아무런 부상도 없이 살았기 때문입니다.

부활주일은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인생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삼일 후에 다시 살아나셔서 생명을 약속하신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면 누구든지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에 두 그루의 나무가 있었지요?

하나는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창세기 2:17)
-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창세기 2:16-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
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선과 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명매를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죄의 결과라고 하셨습니다(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죽는다는 것은 죄의 결과라고 하겠습니다.
선악과의 열매를 따서 먹는다는 것은 죄를 범하는 것으로 선악과는 한마디로 죄의 나무 즉 사탄의 권세에 붙잡히게 하는 나무라고 하겠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모두 죽어야 합니다.
죽지 않으려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생명나무는 죽음을 해결하는 나무가 됩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가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생명나무를 따먹고 영생하는 것을 금하려고 생명나무 주위에 화염검을 두고 지키게 하셨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생명나무(창세기 2:9)
- the tree of life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세기 3: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세기 3:22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요한계시록 2: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요한계시록 22: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 나무가 있어 열 두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요한계시록 22:14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 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잠언 3:18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 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 생명을 얻으려면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생명나무가 상징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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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위대한 복음 증거자 무디(1837-1899)는 젊었을 때 장례식 설교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장례식 설교대로 하기 위해 복음서를 살폈습니다. 

그러나 무디는 예수 그리스도의 장례식 설교가 없었으며 오히려 죽었던 사람들이 그의 말씀을 듣고 살아난 것을 확인했습니다.
예수께서 계신 곳에는 부활의 영광이 가득했던 것이다.

무디는 성경을 내려놓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크게 외쳤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파스칼은 청년 시절에 예수 그리스도와 깊은 만남을 가졌습니다.
인생을 전환시킨 이 경험은 그로 하여금 학문연구의 초점을 과학과 수학에서 신학으로 옮기게 했다고 합니다.

파스칼은 인생의 문제들에 직면하고 있는 모든 성도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훌륭한 기도문을 썼습니다.

"주님, 큰 일들을 마치 작은 일처럼 하도록 도와주소서.
제가 주님의 능력으로 그 일들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작은 일들을 마치 큰 일처럼 하도록 도와주소서.
제가 주님의 이름으로 그 일들을 하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주님이 내 안에 있는 한 작은 일은 없습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이 하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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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5년 니케아 회의에서 ‘춘분이 지나고 첫 번째 보름달이 오고 나서 첫 일요일을 부활절로 정했다’
왜 부활절에 색을 칠한 달걀을 주고받는 것일까요?

첫째 가설 : 그리스도의 고난을 추모하는 수난절 기간에는 금식이나 검소한 생활을 하도록 되어있으나 수난절이 끝나고 부활의 아침을 맞이할 때는 그 동안 먹지 않던 고기나 달걀을 먹는 데서 유래했습니다.

둘째 가설 : 죽음을 깨치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위대함과 놀라움은 바로 굳은 달걀 껍질을 깨치고 태어나는 병아리와 같다고 해서 달걀을 선물한 것입니다.

셋째 가설 : 유럽 십자군 전쟁 당시 로자린드 부인은 남편이 십자군 전쟁에 나간 뒤 사람들에게 집을 빼앗겨 먼 산골 마을에 피해 살게 되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 딱한 로자린드 부인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었고, 부인은 그 친절에 보답하는 뜻으로 부활절에 마을 아이들을 모아 맛있는 음식을 대접해주고,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상징으로 예쁘게 색칠한 달걀을 하나씩 나눠주었습니다. 그 달걀에는 로자린드 부인의 집안 가훈인 '하나님의 사랑을 믿자'라는 말을 적었고, 어느 해 부활절 날 길에서 로자린드는 병든 어머니를 찾아 간다는 어린 소년을 만나 위로하고 가지고 있던 색 달걀 하나를 주었습니다. 부인과 헤어진 그 소년은 어머니를 찾아가는 중에 한 산골에서 병든 군인을 만나 돌봐주고 로자린드 부인에게 받았던 달걀을 주었습니다. 그것을 받아든 군인은 자기집안의 가훈이 달걀에 쓰여 있는 것을 보고 소년에게 물어 그 부인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유래가 되어 오늘날에도 부활절이면 부활의 메시지가 담긴 색 달걀을 나누며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한다고 합니다.

넷째 가설 : 부활절 이전, 즉 Easter 축제일의 상징은 계란이 아니라 토끼였습니다. Easter 여신의 상징이 토끼였기 때문입니다. 이 부활절 토끼 풍습은 독일인들이 미국에 이민을 가면서 함께 들어갔으나 18세기 당시 미국의 기독교는 청교도를 위세해 엄격한 기독교가 주류를 이루었기 때문에 부활절 토끼는 전혀 발붙일 수 없었습니다.

부활절 역시 미국에서 자리 잡게 된 것은 남북전쟁 이후였습니다. 부활절을 축하하기 위해서 계란을 사용하게 된 것은 "모든 생명은 알에서부터 나온다."라는 로마의 속담을 비롯 기독교의 의미와 달걀이 연관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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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復活) :

돌아올 부(復), 다시 부(復). 살 활(活)

1.
한 번 행(行)하여지지 않게 된 것을 다시 한 번 행(行)하여 지도록 하는 것.
2. 십자가(十字架)에서 세상(世上)을 떠난 예수(Jesus)가 자신(自身)의 예언(豫言)대로 사흘만에 구주(救主) 그리스도(Kristos)로 되살아난 일. 부생(復生).
3. 톨스토이가 지은 장편(長篇) 소설(小說).
세계적(世界的) 명작(名作)의 하나.
공작(公爵) 네플류도프가 여주인공(主人公) 카추샤를 유혹(誘惑)하였으나 뒤에 양심(良心)에 가책(苛責)되어, 창부(娼婦)로 전락한 그를 갱생(更生)시키고 자신(自身)도 종교적(宗敎的)인 사랑에 의(依)하여 부활(復活)했다는 줄거리. 죄악(罪惡)과 허위(虛僞)에 찬 사회(社會)를 통렬(痛烈)히 비판(批判)했음.

revival
the Resurrection

ἔγερσις, εως, ἡ
부활
마태복음 27:53

οἰκητήριον, ου, τό  3613 [ŏikētēriŏn]
1. 거주
2. 부활 때 영광스럽게 변화 될 기독교인의 몸


ἀνάστασις, εως, ἡ  386 [anastasis]
1. 오름
2. 죽음으로부터의 부활
[과거에 있었던 예수의 부활] 행 1: 22, 2:31, 4:33, 17:18, 롬 1:4, 6:5, 빌 3:10, 히 11:35, 벧전 1:3, 3:21.

사도행전 2:31
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심판날에 있을 미래의 부활] 눅 14:14, 20:35,36, 요 11:24, 23:6,8, 24:15, 고전 15:12이하, 히 6:2, 계 20:15이하.

누가복음 14:14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3. 사도행전 1:22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ὀπτάνομαι 3700 [ŏptanŏmai]
1. 나타나다
2. 보여지다
3. 사도행전 1:3

ἐξανάστασις, εως, ἡ  1815 [ĕxanasta- sis]

1. 부활
2. 빌립보서 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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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이란 우리가 무엇을 행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누구에게 속했느냐의 문제입니다. 

죄를 지었기에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
아담에게 속해 있기에 죄를 짓게 되고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를 행하고 착하게 살았기에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속해 있기에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살게 된 것입니다. 

아담에게 속해 죄인이었던 우리를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 주시기 위해  죄가 없는 누군가의 희생과 대속의 죽음이 필요했고  그래서 주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셔서 기꺼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주께서 그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의 피가 우리를 의롭게 하였고  생명이신 주님께서 우리 안에 오심으로 영원한 새생명을 가진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  하나님의 가족이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의 희생으로 주님안에 거하여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고  용서하고 돕고 섬기는 주님의 열매를 맺는 하늘의 시민이 된것입니다. 
우리가 자녀가 되는 것은 내 의지와 상관이 없이 태어남으로 되는 것이지,  내 의지로 혹은 행위가 아름다워 누구의 자녀가 되는 것은 아니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내 의지와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택하심이요 사랑이요 은혜요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호흡이 멈추는 순간까지 반드시 기억하고 붙잡아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보혈의 피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없는 구원은 없습니다. 

구원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입니다. 
구원은 누구에게 속해 있느냐는 소속의 문제입니다. 
하늘에 속한 사람인지, 아니면 세상에 속한 사람인지... 

몸이 아프면 의사를 찾아갑니다.

환자의 의사에 대한 신뢰는 너무도 중요합니다.
의사에 대한 신뢰가 클수록 환자는 심리적인 안정뿐 아니라 치료 과정을 성실히 따를 수 있습니다.
의사를 통해 병이 낫게 되면 의사에 대한 고마움이 저절로 표출됩니다.
완치된 환자는 주변 사람들에게 자기를 치료한 의사를 조금도 의심없이 추천합니다.
이러한 선순환은 환자와 의사를 비롯해서 사회 전반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예수님의 38년된 병자를 고친 일은 당시 유대인 사회에 얼마나 강력한 영향을 미쳤을지 충분히 예상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영향력을 축소시키기 위해 신성모독이라는 당시 사회에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죄목을 뒤집어씌웁니다.
사실 여부를 떠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만들어놓은 신성모독죄를 지은 죄인이라는 소문이 빠르게 퍼져나갔고 예수님에 대한 이미지도 매우 나빠졌습니다. 예수님이 무슨 말을 해도 믿지 않는 사회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이것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살해 위협과 사회적인 반감을 온 몸으로 느끼시면서도 자신이 누구인지,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강력히 선포하셨습니다. 자신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친아들과 아버지의 관계임을 더욱 큰 목소리로 외치셨습니다. 이것을 신성모독이란 죄목으로 덮어씌워 사람들을 예수님에게서 멀리 떨어지도록 만든 유대인들을 향해 하나님의 친아들로서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러 오셨음을 천명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생명과 심판을 주실 수 있는 권한을 갖고 계셨듯이 자신도 동일한 권한을 갖고 있음을 전하셨습니다. 아무리 유대 사회가 예수님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어도 그것에 굴하지 않고 자신을 통해야만 생명을 얻을 수 있음을 외치신 모습은 너무도 인상적입니다. 이런 배경 속에서 볼 때, 본문이 말하는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에 대한 이야기는 마치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듯한 느낌으로 들렸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을 믿지 못하도록 신성모독죄를 덮어씌웠는데 예수님은 ‘내 말을 듣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씀하시니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었을까요? 적대적인 분위기로 가득한 청중에게 ‘나를 믿으라’고 한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충분히 예상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분위기 속에서 ‘내 말을 들으라’고 사람들에게 외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시 유대인들에게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라고 외치신 것처럼 지금도 이 메시지는 울려퍼져야 합니다. 사람들의 반응이 적대적일수록 영생의 메시지는 더욱 큰 목소리로 외쳐져야 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야만 우리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확증하셨듯이 지금도 이 말씀은 유효합니다. 우리는 사회적인 반감과 사람들의 무관심 내지 적대심을 극복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이것만이 우리로 심판이 아닌 영생에 이르게 하며 사망에서 벗어나 생명으로 진입할 수 있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심판과 영생, 사망과 생명이라는 커다란 틀 속에서 예수님을 믿고 살아가야 합니다. 눈 앞에 닥친 세상의 수많은 일에 파묻혀 사는 우리가 이것을 놓치고 살기가 너무도 쉽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희노애락 속에서 좌충우돌하면서 살지만 우리는 심판이 아닌 영생을, 사망이 아닌 생명을 얻은 자로서 인생의 수많은 문제들에 맞서 싸울 수 있어야 합니다. 이뿐 아니라 우리는 사회의 넘쳐나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예수님의 말씀만이 진리라는 확신을 갖고 예수님에게 귀를 기울이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영생을 얻은 자로서, 사망이 아닌 생명을 얻은 자로서 세상에 우리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가장 훌륭한 방책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금준이란 애가 있었습니다.
몸이 약하고 성격이 소심해서 늘 맞고 다니는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맞고 다니기는 고사하고 대장 노릇을 했습니다.
특별히 힘이 세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성격이 완전히 바뀐 것도 아닌데 어찌된 노릇일까?
알아 봤더니 놀라운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금준이는 자기 아버지가 동네 어른들 가운데 싸움을 제일 잘하는 무서운 사람이란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강함을 안 후로는 누구도 무섭지 않았습니다.
특히 아버지가 깡패들과의 패싸움에서 칼에 맞고도 일어나서 그들을 때려 눕힌 전설적인 이야기를 듣고부터는 무서운게 없었습니다. 이게 바로 믿음의 힘입니다.
이게 바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의 힘입니다.

그런데 이 아이에게도 위기는 닥쳤습니다.
일년 365일 매일 잘 나가는 것이 아니고 어떤 때는 신나게 터졌습니다.
대장 노릇은 고사하고 다시 옛날로 돌아갔습니다.
아버지가 병이 들어서 자리에 누웠는데, 사람들이 모두 죽을 병이라고 수군거릴 때였습니다.
그동안 금준이 아버지가 무서워 기던 아이들이 일제히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금준이 아버지가 자리에서 털고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사정이 다시 역전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금준이가 다시 동네 형들의 가방을 메고 학교에 왔다갔다 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이유는 너무나 간단했습니다.
금준이가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여름에 동네에 아이스크림 장사가 오는데, 그게 먹고 싶어서 아버지 돈 50원을 슬쩍해서 사 먹어 버린 것입니다.
이게 아이들에게 약점이 잡힌 것입니다.
아이들은 그것을 너희 아버지에게 일러 버리겠다고 겁을 줬습니다.
자기의 힘이 되고, 든든한 방패가 되었던 아버지가 이제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특히 아버지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거짓말과 도둑질이라는 것을 아는데, 걸리면 죽는다는 생각에 졸지에 대장 노릇도 끝나고 종노릇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기가막힌 영적 교훈을 보여주는 예입니다.
만약 이 친구가 아직도 예수를 안믿는다면 어릴 때 직접 겪었던 이 이야기를 해 주고 싶습니다.
성도들이 힘을 잃어버리고 마귀의 종노릇하는 것은 바로 자신의 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하지 말라고 한 것을 했을 때, 하라고 한 것을 안하고 거짓말을 했을 때, 주어진 영적 권세와 능력을 소멸되고 맙니다. 원수들은 그것을 잘 이용합니다.

금준이가 속박의 생활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딱 한 가지였는데, 그는 오랫동안 그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몸도 약한 친구가 상급생들의 가방을 메고, 용돈을 뜯기고,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보다 못한 친구가 충고를 해 주었습니다.

“아버지에게 가서 다 말하고 용서를 빌어라.
맞을 때 맞더라도 그렇게 하고 나면 동네 형들에게는 편할 것 아니냐?”

그래서 금준이는 용기를 내서 아버지한테 죄를 다 고백했습니다.
그러면서 얼마나 서럽게 울었는지, 아버지가 불쌍한 마음이 들어서인지 그것 때문에 그 마음 고생을 하고, 힘든 생활을 한 아들에 대한 연민 때문인지 아이스크림을 마음대로 사먹으라고 500원을 줬습니다.
당시에는 매우 큰 돈이었습니다.
용서의 기쁨만 얻은 것이 아니라 생각지도 못한 용돈까지 듬뿍 얻었습니다.
그 다음날부터 동네 형들의 괴롭힘을 받았겠습니까?
안 받았겠습니까?
야, 가방 매! 하는 소리에 ‘내가 미쳤나, 자식아. 너의 가방을 내가 왜 메냐?’ 이 아이가 용서를 받고, 용돈까지 얻은 사실을 모르는 아이들이 약점을 잡고 협박을 했지만, 금준이 하는 말...‘그래 가서 입 아프도록 일러라!’ - 이미 끝난 것입니다.

금준이가 지은 죄를 그 아버지가 알면 신나게 맞고 터질 줄 알았는데, 아무 일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용돈까지 듬뿍 받았다는 말에 아무도 다시 그를 건드리지 못했습니다.
이것 역시 우리의 영적 생활, 영적 원리를 기가 막히게 잘 묘사해 준 예입니다.

세상에 죽음을 이기는 사람은 없습니다.
죽음을 피한 사람도 없습니다.
자신이 영원히 살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은 누구나 피할 수 없는 것처럼 생각해 왔습니다.
솔직히 삶과 죽음의 간격은 한 발짝입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다윗은 사무엘상 20:3에서 이르기를, [..그러나 진실로 [주]께서 살아 계심과 네 혼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와 죽음 사이는 한 걸음뿐이니라.](삼상 20:3).

우리는 늘 죽음을 직면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영원이 시작되는 데 걸리는 시간은 한 순간입니다.
이 세상에 너무 바빠서 자기 장례식에 가지 못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너무 바빠서 죽을 시간이 없는 사람도 없습니다.
죽음은 나이와 건강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죽을 수 있습니다.
건강할 때든, 병들어 있을 때든, 나이가 들었든, 젊든 상관없이 죽습니다.
우리는 잠시 하나님께서 빌려준 시간 속에서 살아 갈 뿐입니다.

이 세상에 죽음보다 더 강한 권세를 가진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사람이 죽어 가는 이야기를 보고 듣고 있습니다.
누가 죽음을 이긴 사람이 있습니까?

바그다는 신밧드의 고향이요, 알라딘의 램프와 같은 신화와 전설의 고향입니다.
거기에 내려오는 상인에 대한 전설이 하나 있습니다.

“어느날 상인이 자신의 종들을 시장에 보냈습니다.
오래지 않아 종이 하얗게 질려서 벌벌 떨며 돌아왔습니다.
종은 주인에게 초조하게 간청하기를 "시장에 내려갔다가 어떤 여자에게 밀쳐져 돌아섰을 때 사람들 가운데 서 있는 저승 사자를 만났습니다.
저승 사자는 정말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저를 위협하는 자세를 취하였습니다.
주인님, 제게 주인님의 말을 한 필 내어 주십시오.
저는 급히 죽음의 사자를 피해 멀리 도망가겠습니다.
저는 사마라로 가서 거기 숨어 있겠습니다.
죽음의 사자는 저를 찾지 못할 것입니다."

상인은 종에게 말을 한 필 내어 주었고 종은 전력 질주하여 도망쳤습니다.
주인은 시장으로 내려가서 사람들 가운데 서 있는 죽음의 사자를 보았습니다.

"이보시오. 어찌하여 나의 종에게 그리 겁을 주었소?"
그러자, 죽음의 사자는 "제가 겁을 주는 자세를 취한 것이 아닙니다. 바그다드에서 그를 보고 놀란 것은 오히려 저 쪽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밤 사마라에서 그를 만나기로 약속되어 있는데 말입니다."”.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죽음은 바로 죄의 삯이기 때문입니다(롬 6:23).
한번 죽는 것은 사람들에게 정해 놓으신 하나님의 법이기 때문입니다(히 9:27).

한 가지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해드리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죽음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그 언약은 다름 아닌 죽음이 부지불식간에 모르게 찾아와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죽음이 올 때는 반드시 미리 알려 주도록 했습니다.
수년 전에 알려주고, 마지막에는 죽기 전 바로 앞에 서 있도록 했습니다.
그 노인은 갑자기 질려서 쓰러지며, "왜 당신은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거요. 당신은 분명히 미리 말하지 않고는 오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지 않소. 당신은 사전에 나에게 아무런 경고도 주지 않았소."
그러자 죽음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소!"라고 대답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나는 흰 머리가 바로 경고였소.
모든 사람들의 빠지는 이가 바로 경고였소.
눈이 침침해지는 것도 경고였소. 육신의 힘이 쇠하여 지고 정력이 감퇴하는 것도 경고였소.
모든 것이 경고였소.
나는 수 차례 끊임없이 찾아 올 것을 경고해 드렸소이다!"

죽음은 지체하지 않습니다.
실수로 어떤 사람을 띄어 넘는 법도 없습니다.

어느 민족, 어느 시대에 살던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냉철한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위의 이야기들은 회교의 본 고장에서 만들어진 죽음에 대한 이야기들입니다.
어느 종교를 믿든지 죽음을 부정하거나 이길 수는 없었습니다.
죽음을 이기지 못하는 종교는 참 종교가 아닙니다.
죽음을 이길 수 없는 종교의 기원은 모두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성경에만 죽음을 이긴 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는 이것을 부활이라고 합니다.
주님은 죽은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누구든지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결코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 11:25-26).

주님은 죽은지 나흘이나 지난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셨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친히 죽음에서 일어나심으로 죽음을 정복한 첫 사람이 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의 권세를 이기는 힘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이시기 때문에 죽음은 그를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소망이 있고, 우리의 믿음의 근거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이야말로 하나님의 권능을 가장 잘 드러낸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병든 자를 치유하시고, 자연을 마음대로 다스리는데서도 자신의 권능을 보이셨지만 하나님도 죽을 수 있을까? 하나님도 죽으면 다시 살 수 있을까? 이런 어린 아이같은 질문이지만 인간들에게는 가장 심각한 문제에 대해서 시원한 해답, 정확무오한 해결책을 몸소 보여 주신 사건이 바로 부활이란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죽을래야 죽을 수 없는 분이시지만 스스로 인간의 육체를 입고 사람의 모양으로 오시고, 완전한 사람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생명 자체이시지만 사람들과 같이 사셨고, 육신의 연약함을 다 체험하시고 죽음을 맛보셨습니다.


다만 예수님을 보노니 이 예수님께서 죽음의 고난을 당하사 천사들보다 조금 낮아지셨다가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히 2:9).

하나님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일을 하셨지만 오늘은 간단하게 히브리서 기자가 말한 세 가지를 요약하겠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십자가의 죽음의 의의를 다음 세 가지로 요약했습니다.

첫째, 죽음의 권능을 가진자 마귀를 멸하셨습니다.

[자녀들은 살과 피에 함께 참여한 자들이므로 그분도 마찬가지로 같은 것에 참여하셨으니 이것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권능을 가진 자 곧 마귀를 멸하시고]
(히 2:14).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권능을 지니신 분이시며, 죽은 자를 일으키시는 부활의 권능을 소유하신 분이신데 반해 마귀는 죽음의 권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죽음을 통해서 하실 일이 있으셨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 죽음을 이기신 것입니다.

둘째, 죽음에 메인 사람들을 건져 내신 것입니다.

[또 죽음을 두려워하여 평생토록 속박에 얽매인 자들을 건져 내려 하심이라](히 2:15).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죽음을 두려워하고, 평생토록 죽음이나 속박에 매인 자들을 건져내셨습니다.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가장 효과적이고도 무서운 말이 ‘죽여 버린다’, ‘너 죽어’란 말입니다. 아무리 태연한 척, 용감한 척 해도 막상 죽음 앞에서는 두렵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셋째, 범죄들을 대속하시고 영원한 상속의 약속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그분께서는 새 /상속/ 언약의 중재자이시니 이것은 죽음을 통하여 첫 /상속/ 언약 아래 있던 범죄들을 대속하시고 부르심을 받은 자들로 하여금 영원한 상속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히 9:15).

주님은 죽음을 통해 새 상속 언약의 중재자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첫 상속 언약 아래 있던 범죄들을 대속하시고, 부름받은 자들로 하여금 영원한 상속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런 목적을 가지고 죽으신 주님께서 부활하지 못하셨다면 십자가의 죽음은 선한 목적으로 시도되었지만 비참한 실패로 종결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심으로 죽음을 통해 이루시고자 했던 모든 것들을 이루셨고, 믿는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게 되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의 참된 의의는

첫째, 주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신 것입니다.


[거룩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사 하나님의 아들로 권능 있게 드러나셨느니라.](롬1:4). 주님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로 권능있게 선포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는 아무도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못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믿었던 제자들에게도 의심과 불신을 던졌습니다. 그를 따르던 여인들에게도 심한 슬픔과 눈물, 통곡만을 뿌려주었습니다. 한 때 그를 믿었던 사람들에게는 깊은 좌절감과 강한 배신감을 안겨 주었습니다. 주님의 이적을 맛보고, 그분의 설교를 통해 은혜를 누렸던 사람들은 십자가의 죽는 모습을 통해 모든 것은 끝이 났다고 단정지었습니다. 그러나 부활을 통해 이전에 고백했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강한 확신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선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초대 교회 때 집회의 설교 주제는 항상 부활이었습니다. 그들의 모든 관심 역시 부활이었습니다. 부활의 설교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근심을, 믿는 자들에게는 언제나 은혜를 끼쳤던 것입니다. [그들이 백성을 가르치며 또 예수님을 통하여 죽은 자들로부터의 부활을 선포하므로 근심하고](행4:2). 부활의 소식이 근심이 된 사람들은 마귀의 자녀들입니다. 이들은 이것이 사실일지라도 덮어지고,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자기 아버지가 패했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할 자녀가 없듯이, 마귀의 자녀들 역시 그러했습니다. 반면 부활의 자녀들은 이 소식을 영원히 자랑스러워하는 위대한 사건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매 큰 은혜가 그들 모두에게 임하니라.](행4:33). 우리는 부활의 소식을 통해 날마다 죽음의 권능을 가진 마귀를 멸하신 우리 주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은혜를 누립니다.

어떤 아버지는 아들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네가 이제 비로소 내 아들이 되었구나!” 처음부터 자신의 아들이었지만 어떤 어려운 일을 기필코 완성해 내었을 때, 견뎌내고 승리했을 때 그런 말을 합니다. 연속되는 패배에 굴복하지 않고 일어섰을 때 아버지는 ‘오늘 너는 내 아들로 온 세상에 알려졌구나!’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었지만, 부활을 통해 온 세상에 권능있게 당당하게 공개적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부활하지 못했다면 저와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뭐 죽고 그래? 죽는게 사람이지 어찌 하나님의 아들이야? 죽었는데 알게 뭐야? 어떻게 증명해? ...그러나 부활로 인해 이런 의심에 찬 논쟁은 더 이상 의미가 없습니다. 부활을 통해 그분은 인간의 피가 아닌 하나님의 피로 육신을 입으신 성육신이 입증되었습니다. 부활을 통해 그분의 모든 이적과 권능있는 말씀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행하셨음이 확증되었습니다. 부활을 통해 그분의 죽으심이 대속의 죽음이란 사실이 증명되었습니다. 부활을 통해 그분의 다시 오심에 관한 약속 또한 분명히 성취될 약속임이 증거되었습니다.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영을 받은 우리 역시 하나님의 아들이란 사실이 선포되었습니다.

둘째,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성도는 십자가의 피를 통해 죄의 용서를 받고, 그분의 죽으심을 통해 죄의 육신을 처리받고, 부활을 통해 생명의 능력을 받습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찬송하리로다. 그분께서는 자신의 풍성하신 긍휼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게 하심으로 우리를 다시 낳으사 산 소망에 이르게 하시며](벧전1:3). 성경은 우리의 거듭남이 주님의 부활의 결과란 점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이 거듭나는 것을 살아 계신 말씀을 통해서입니다(약1:18, 벧전1:23). 그 말씀이란 바로 주님께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복음의 말씀입니다. 부활은 바로 우리의 거듭남, 구원의 핵심입니다. 주님의 부활이 없다면 구원은 없습니다. 거듭남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주님 자신 혼자만의 부활이 아니라 바로 믿는 자들의 영을 거듭나게 하는 생명을 주는 부활이셨습니다.

우리는 영은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모두 죽은 채 태어났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우리의 죽은 영을 살리시는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살아 있는 혼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셨느니라.](고전15:45). 우리의 몸은 구속받지 못했지만 우리의 영은 살아나 주님을 인지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는 본연의 기능을 회복했습니다.

셋째, 성도들이 하나님의 권능을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성도들에게 더 이상 죄의 권능, 사망의 권세 아래 종처럼 부림을 당하지 않고 오히려 승리하게 하는 역사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더 이상 육신의 소욕대로 살지 않고 세상의 조류대로 살지 않고 정복하는 삶을 충분히 가능하게 해 주었습니다. 아무도 이길 수 없었던 마귀를 몰아내고, 그들의 궤계를 멸하고 영적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단지 2,000년 전의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믿는 자들에게 지속적으로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바울이 이 땅에서 간절히 알고 싶어했던 한 가지는 바로 부활의 권능이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의 권능과 그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알고자 하여 그분의 죽으심과 같은 모습이 되어 어찌하든지 죽은 자들의 부활에 도달하려 하노니](빌3:10-11). 사도 바울은 이 땅에서 주님의 부활의 권능으로 살았던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스스로 고백하기를,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 대한 나의 기쁨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고 했습니다. 고로 그는 날마다 부활의 권능을 맛보았던 것입니다. 육신의 죽음과 부활은 한번 이상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영적인 여정은 날마다 죽고 날마다 살아나는 그런 삶의 연속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살아 있는 것은 육신의 생명이 죽지 않아서 살아 있는 것입니다. 반면 성도가 살아 있는 것은 육신이 죽고 영이 거듭나서 살아있는 것입니다. 이 생명은 결코 다함이나 끝이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땅에서 나는 음식으로 육신의 힘을 키우고, 종교적 신념과 교육을 통해 혼의 능력을 기릅니다. 그러나 그들의 영은 죽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우리의 영이 살아있습니다. 우리의 겉 사람은 세상 사람들과 마찬가집니다. 그러나 다시 태어난 속 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집니다. 부활의 권능은 우리의 속 사람을 새롭게, 강건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이런 까닭에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 사람은 썩어 없어지나 속 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지는도다.](고후4:16). [그분께서 자신의 영광의 풍부함에 따라 자신의 영을 통하여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엡3:16).

저는 성도들이 부활의 권능에 대한 깊은 이해와 조명이 있기를 바랍니다. 무지는 우리를 암흑 속에 가두어 둡니다. 무지는 동시에 권리를 향유하지 못하게 합니다. 권리 위에서 잠자는 자들은 법이 보호해 줄 수 없다는 어떤 판사의 판결처럼, 성도로서 성도의 권리를 전혀 누리지 못하는 것은 대부분 영적 무지에서 기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현재 우리 자신에게 미치는 영향이나 그 부활을 통해서 성도가 누릴 수 있는 영적인 권능에 대해 너무나 무지한 탓에 이름만 그리스도인일 뿐 아무런 영향력도 끼치지 못하고, 아무런 은혜도 누리지 못합니다. 십자가는 걸고 다닐 목걸이라도 있고, 장식이라도 있고, 성화(聖畵)라도 있지만 부활은 목걸이도 없습니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부활에 대해서는 해마다 부활절에만 연례 행사처럼 설교를 들을 뿐 도무지 생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저희 교회의 성도들은 그런 부류에 해당되어서는 안됩니다.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주님이 현재, 지금 바로 내 안에 살아 계시며, 영원히 함께 하고 있다는 임재(臨齋)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이는 그분께서 약하심을 통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셨으나 오히려 하나님의 권능으로 살아 계시기 때문이며 또 우리도 그분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한 하나님의 권능으로 그분과 함께 살 것이기 때문이라.](고후 13:4).

현재 우리가 사는 삶은 성령의 능력으로 사는 삶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사는 삶입니다.






기독교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십자가와 부활은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십자가의 죽음은 부활을 전제하고 있고, 부활은 십자가의 죽음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두 사건은 결코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사건’이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십자가에서 시작되었다.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는 부활을 말할 수 없고,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짊어져야 한다.

‘No cross, No crown’,
즉 고난의 십자가가 없으면, 영광의 면류관도 없다.

기독교 복음이 고난과 희생의 십자가에 머물지 않고 영광과 승리의 부활로 나아간다는 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오늘도 삶과 신앙의 현장에서 고난과 희생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우리 한국 기독교인들은 어떤 부활을 소망해야 할까?

사람의 부활을 소망하라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공생애를 통하여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가 죽어 무덤에 갇혀 있을 때 그를 다시 살리는 부활의 역사를 일으키셨다.(요 11:17-44)
그리고 자신 또한 안식일 전날인 금요일에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가 안식일 다음 날에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셨다.(막 16:1-7)
이로써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것이다.
사도 바울의 회상에 따르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게바에게 보이신 후 열두 제자에게와, 오백여 형제에게도 일시에 보이셨고 야고보에게도 보이셨으며, 맨 나중에는 자신에게도 보이셨다고 증언하고 있다.(고전 15:3-8)
이 과정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의아해하며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도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 그분의 부활을 믿게 되었다.(눅 24:13-35)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불신하던 도마조차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부활을 믿게 되었다.(요 20:24-29)
이처럼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제자들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가서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하였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수용한 한국 그리스도인들도 고난의 삶 속에서 부활에 대한 놀라운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서원보(W. C. Swearer) 선교사는 1901년 충청도 서해안에 위치한 해미 신앙공동체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이 신앙공동체의 지도자는 태풍이 왔을 때 바다에서 아들을 잃은 아픔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던 이 지도자는 천국에서 아들을 다시 볼 것이라는 부활의 소망을 굳게 가지고 있었다고 전한다.

이처럼 부활신앙은 내세에 대한 강한 믿음과 함께 현세에 선한 소망을 던져주고 있다.
그런 가운데 실제적으로 한국교회 역사 속에는 죽었던 자가 다시 살아나는 희귀한 일이 더러 있었는데, 이는 부활에 대한 예표가 되었다.

경기도 안산구역 전도사 김동일씨의 통신을 거한즉 본구역 사랑리교회 박봉근씨는 이왕 예수 믿기 전에 자기가족 중에 예수 믿는이를 원수같이 여기고 무수히 비방하더니 하루는 박씨가 믿는 형제의 집에 와서 말하기를 내 처가 사경에 이르렀으니 죽던지 살던지 찬미와 기도나 하여 달라고 간청하매 형제 몇 사람이 가 본즉 병자는 이미 죽었고 집안 식구는 장사 지낼 공론이 분분하거늘 그러나 기도하여 달라하거늘 형제들과 박봉근씨와 일심으로 찬송과 기도를 몇분동안 할 새 죽었던 사람이 차차 생기가 있어 그 아침에는 다니기도 하며 말도 하니 의연한 새사람이 되매 온 집안이 주를 독실히 믿으매 인동에 사는 외인까지 하나님의 권능을 찬송하였다더라

교회의 부활을 소망하라

사도 요한이 서신을 보냈다는 요한계시록 속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 소아시아 일곱교회는 교회로 존속하지 못하고 유적지로 변하였다.

그중 유일하게 서머나(현재 터키 이즈밀) 지역에는 순교자 폴리갑 감독을 기념한 교회가 재건되어 예배를 드리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교회 속에도 설립된 후 지금까지 그 역사를 이어가고 있는 교회들이 있지만, 설립되었다가 자취를 감춘 교회들도 결코 적지 않다. 달리 표현하자면, 궁극적으로 잃어버린 교회들이 된 것이다.

특히 해방의 봄 속에 깃든 분단의 겨울 속에서 북한 교회들도 잃어버렸다.
그리고 현재 교회 환경의 변화와 교인의 지속적인 감소 등으로 인해 다수의 농촌교회와 도시 개척교회들이 생존의 위기에 봉착해 있다.
살아 있으나 죽은 것과 진배 없는 교회들이 적지 않다는 뜻이다.

이러한 냉엄한 현실 속에서 한국교회의 역사 속에는 다 죽었던 교회가 되살아난 놀라운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강화 화도면에 자리한 문산교회의 부활 이야기이다.
1906년에 태동한 문산교회는 급속하게 성장하여 1907년 3월에는 교인들의 헌금과 미 감리회 여성해외선교회의 보조로 초가 10칸을 매입하여 독립적인 예배당까지 마련하였다.
그렇지만 교회에 큰 위기가 찾아왔다.
정미의병이 발생했을 때 일제의 강화수비병토벌대가 교회를 핍박함에 따라 교인들이 흩어져버린 것이다.
이 같은 최악의 상황 속에서 교인 박기산은 10여 년을 홀로 기도와 예배로 인내하며 교회를 지켰고, 1915년 강화도 마리산 부흥회를 계기로 문산교회는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강화군 화도면 문산동 사는 박기산(朴起山)씨는 교회 속장으로 일가의 핍박과 동리의 군축을 인하여 교우가 점점 흩어지고 교회가 없어지게 된지라 박씨가 애통하고 기도하고 십년동안을 혼자있어 기도하고 다 쓰러져가는 회당에서 매주일에 예배하고 성일을 지키더니 하나님께서 도우사 작년봄 부흥회에 자기 집안 식구들이 병도 고침을 얻고 다시 회개하는 열심도 얻어 함께 예배함으로 교우들이 차차 다시 일어나는지라 그 부친은 근본 여러해 동안에 영국종고성교회[성공회]를 믿어 그 교회의 회장으로 시무하셨으니 이름은 사가리아라 그때의 부흥회를 인하여 자기 집안 식구들이 특별히 은혜 받음을 보고 마음이 감동하는 중에 성신의 책망하심을 당하여 진리로 돌아온지라 부자형제가 단합하여 열심히 믿음에 교우들이 삼십명 달하고 금년봄부터 회당을 다시 건축하기로 시작하여 여름에 준공한지라 유월 이십구일 예배에 각 처 교우들이 모여서 회당봉헌식을 행하였는데 본지방 목사 김광국씨와 감리사 최병헌씨가 성례의 순서를 행하고 강도한지라 회당은 비록 크지 못하나 초가로 일곱간이오 당일에 모인 교우는 백여인이라 기쁨으로 찬송하고 정성으로 예배하였으니 하나님께서 박씨가 십년동안이나 잘 참고 견딘 정성을 권고하심이라 하더라

국가의 부활을 소망하라

가나안을 떠나 애굽으로 이주한 70명의 야곱의 후손은 430년 만에 애굽에서 탈출하는 해방의 기쁨을 맞이하였다.(출 12:40-42)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렘 29:10)처럼
70년 만에 고레스의 칙령에 의해 고국으로 귀환하였고, 이후 무너진 성을 재건하고 성전을 다시 건축하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크고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다.(스 1:1-4)

우리나라도 1910년 일본에 합병되는 한일병탄의 치욕을 경험하였다.
하지만 일제 치하 36년 만인 1945년 해방의 기쁨을 누렸다.
그렇지만 해방의 기쁨은 이내 남북분단의 아픔을 가져왔다. 비록 남북이 분단되었지만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역사로 남북통일이 이루어지는 새 역사를 창출해주실 것이라는 기대와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일례로, 충남 아산에 있는 구미동교회(현재 백암교회) 출신 김복희를 들 수 있다.
이화고등보통학교에 재학하던 중 3・1운동이 발생하자 학교의 휴교로 인해 고향 아산 백암리에 내려온 후 영신학교 교사 한연순과 함께 3・1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던 그녀는 일제로부터 독립이라는 ‘큰 일’을 행하신 하나님께서 남북통일의 ‘큰 일’도 반드시 이루어주시리라는 확신 속에 평생을 기도하였다.

이처럼 김복희가 가졌던 남북통일에 대한 기대와 확신은 다른 무엇보다 일제로부터 해방을 체험한 역사적 경험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만큼 조국해방은 함석헌 옹의 표현대로 느닷없이 도둑처럼 찾아온 바로 그런 것이었다.

강원용 목사는 자신의 회고록 『빈들에서』에서 느닷없이 도둑처럼 찾아온 해방에 대하여 시편 126편 1절의 표현처럼 마치 꿈꾸는 것 같았다고 회상한 바 있다.
이는 일제 말기 사상범으로 수감되었다가 가석방된 그가 재수감의 우려 속에 가족들과 함께 산속으로 들어가 생활하던 중 산에서 해방을 인지하게 되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였다. 그는 마치 꿈꾸는 것 같았다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우리는 그렇게 산속에서 외부와는 일체 단절된 채 한 열흘 정도 살았는데, 어느 날 아랫동네에서 느닷없이 애국가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아마 그때가 8월 18일 정도였던 것 같다. 깜짝 놀라서 마을 쪽을 자세히 관찰했더니 마을에서 국민학생쯤 되는 아이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뛰어다니는 것이 보였다.

나는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눈 앞에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아 우리는 어안이 벙벙한 채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어찌됐든 진짜 해방이 되었다면 우리 식구는 힘든 산속생활을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되었으므로 우리에겐 해방이 정말 실감나는 ‘해방’인 셈이다.



부자들의 파티

부활이 없는자의 삶은 소망이 없기에 방탕합니다.

옛날 어느 나라에서 부자들이 파티 할 때에 필히 관을 준비하고 그 관속에 인형을 시체대신 수의를 입혀서 눕혀 놓았다가 한창 잔치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누군가가 그 관뚜껑을 열어 제치고 그 속을 들여다 보게 하면서 “우리도 머지 않아 이렇게 관속에 들어갈 수 밖에 없는 운명인데 그러기 전에 더 잘 먹고 더 재미있게 놀다 죽읍시다. 

잔뜩 쌓아만 놓고 먹지도 놀지도 못하다 죽으면 얼마나 원통한가?” 하고 외치면 모두 미친듯이 먹고 마시고 날뛴다고 합니다. 
부활을 모르는자들의 춤과 노래와 향연은 미친듯이 날띄는 것 뿐입니다.    

뱀의 몸을 찢은 물고기 
 
“한마리의 큰 뱀이 바닷속을 헤엄치면서 많은 물고기를 집어 삼켰습니다.
그러다가 날카로운 지느러미를 가진 물고기를 집어 삼켰습니다.
날카로운 지느러미를 가진 이 물고기는 뱀의 뱃속에 들어가 너무 캄캄한지라 여기서 못살겠구나 하여 자기의 무기인 날카로운 지느러미로 그 뱀의 배를 찢고 나와 버렸습니다.
그랬더니 먼저 잡혀 먹힌 다른 물고기들도 그 뒤를 따라 나와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뱀은 죽었습니다.”

이뱀은 사망입니다.
이 뱀이 오랫동안 사람들을 잡아먹었습니다.
어느날 예수님까지 삼켰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의 무덤을 열어 헤치고 나왔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믿고 죽은자가 예수님을 따라나오게 됩니다. 
믿는자의 산 소망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무덤문은 열렸습니다.

사슴의 눈물을 먹는 이유

오래살려고 서양 사람들은  사슴의 눈물을 먹습니다.
왜냐하면 세익스피어의 희곡 “마음내키는대로”를 보면 사슴이 죽을때는 반드시 눈물을 흘리는데 그 눈물을 받아 먹으면 만병이 통치되어 오래 산다는 대사가 나오는데 그 말을 믿고 먹는답니다.
그러나 오래살 수는 있어도 늙는길 막을 수 없습니다 . 

옛시인 정철은 인생의 허무함을 이렇게 읊었습니다.

“한 손에 막대잡고 한 손에 가시쥐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려 하였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알렉산더 대왕이 흘린 세번의 눈물

옛날에 좀처럼 울지 않기로 유명했던 알렉산더 대왕도 세번 울은 적이 있답니다.

한번은 그가 페르샤 원정을 갔을때 페르샤 왕 고레스의 묘비를 보고 울었는데 “인생이 아무리 한때 부귀영화를 누려도 결국은 한개의 무덤밖에 남기는 것이 없으니 허무하구나” 하고 눈물을 흘렸다.

인도의 인더스강가에서 인더스강만 건느가면 인도를 정복할 수 있는데 지친 부하들이 따라주지 않고 다시 돌아가야만 할 때 거기서 목놓아 울었었다.

그가 부하들과 모래사장에서 씨름을 하다가 넘어졌는데 넘어진 그 자리를 보고 울었다고 합니다.
그를 넘어뜨렸던 부하가 하도 무안해 왜 우시냐고 물었더니 부하에게 져서 원통하여 운 것이 아니라, 모래 사장에 넘어진 자국을 보고 내가 지금은 이렇게 큰 나라를 가지고 부귀 권세를 누리지만 나도 죽으면 한 평의 땅속에 묻혀 버리고 말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인생이 얼마나 무상하냐고 하며 울었다고 합니다.

케파 샘팡기 목사의 부활절 주일 예배

이 사건은 아프리카 우간다 어떤 교회에서 일어났던 일입니다.
그 당시 우간다는 독재자인 이디 아민이라는 악명 높은 사람의 통치 아래 있었습니다.
이 교회의 목사인 케파 샘팡기 목사님는 종종 정부의 불의를 책망하는 예언적인 설교를 하곤 했습니다.
이 사건이 난 아침에도 7천명이나 되는 교인들이 부활절 주일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설교를 마친 후 목사님이 교회 사무실로 들어섰을 때 거기에는 5명의 비밀경찰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 중 한 사람이 “우리는 국가의 명으로 반국가 사범을 처단하기 위해 왔소”라고 하면서 목사님에게 총을 겨누었습니다.
이때 케파 목사님은 아주 담담하게 이런 부탁을 했습니다.

오늘은 부활절 아침입니다.
나는 부활을 믿는 사람으로 죽는 것이 전혀 두렵지 않지만 나에게 2분의 시간을 주신다면 잠시 주님께 기도를 드리고 생을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2분의 시간을 허락 받은 목사님은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간다의 통치자 이디 아민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그의 명령을 원하지 않으면서도 받들어야 하는 불행한 이 5명의 형제들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우간다 국민에게 자유를 주시옵소서.
내 사랑하는 조국이 사랑의 땅과 의의 땅이 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나의 죽음으로 다시는 이러한 비극이 이 땅에 되풀이되지 않도록 긍휼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기도를 마쳤을 때, 목사님의 눈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고 기도를 듣던 경찰들의 눈에서도 뜨거운 눈물이 흘렀습니다.

경찰의 통솔자인 한 사람이 무릎을 꿇으면서 “목사님, 죄송합니다. 우리가 큰 실수를 저지를 뻔했습니다. 목사님은 피신하여 교회에 계시지 않는 것으로 보고하겠습니다. 빨리 이 자리를 떠나 주십시오”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 사건을 통해 부활의 믿음은 죽은 후의 육체적인 부활의 소망을 약속할 뿐 아니라 오늘을 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승리의 삶을 살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말레이시아 최종국 선교사 "사랑합니다"

말레이시아에서 무슬림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는 최종국 선교사님이 “사랑합니다”라는 책을 쓰셨습니다.
이 책은 아직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은 부모님이나, 가족, 친구들에게 선물하기에 좋은 책입니다.

저자의 아버지가 어느 날 폐암 말기라는 진단을 받게 됩니다.
병원에서는 더 이상 손을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며 수술을 거부하였답니다.
어느 날 아들이 퇴근하면서 그동안 미뤄왔던 말을 하기로 결심했답니다.
평소에 전혀 하지 않던 말을 하려니 많이 망설여지고 또 몹시 쑥스러웠답니다.

“아버지, 저는 아버지가 참 존경스러워요.
평생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제가 많이 배운 것 같아요.”

그 말을 듣고 아버지가 대답하셨습니다.
“그래, 고맙구나! 아들아, 내가 널 많이 사랑한다.”

아버지도 그 말을 얼마나 어렵고 힘들게 꺼내셨는지는 그 표정만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답니다.
뜨거운 눈물 두 줄기가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답니다.

선교사님의 아버지는 그때까지 믿지 않으신 분인데, 집에서 가까운 교회에 나가셔서 복음의 소식을 듣고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별거 중이었던 어머니와 극적으로 화해하시고 온 가족이 함께한 가운데 감동적인 세례식을 가졌답니다.
아버지께서 세례를 받는 내내 울고 계셨답니다.
그 선교사님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이 믿어지지가 않았답니다.
어머니가 자녀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아버지가 우는 모습은 처음 본다. 저 무심한 양반이 그래도 눈물이 있었구나.” 했답니다.

다음은 그 아버지께서 하나님께 가시기 전에 남기신 신앙 간증입니다.

“그저 착하게만 살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병들어 죽어가면서 내가 아무리 착하게 살았어도 죽음 앞에서는 아무도 나를 도와줄 수 없음을 깨달았을 때, 그때서야 나는 비로소 눈을 떴습니다.
나를 도울 수 있는 분은 오직 그분, 그 한 분뿐이라는 것을! 이제 부끄럽지만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가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내 모든 부끄러움과 고집스러움을 십자가에서 다 용서해 주셨으니, 오직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말씀만 가슴에 새기고 가려합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모든 고난을 당하셨고, 나의 모든 죄를 다 갚아 주셨기에 오직 그분을 의지해서 하나님 아버지에게 가려합니다.”

“이 땅에서의 시간은 참으로 빠른 것 같습니다.
그러니, 오늘 더 많이 사랑한다고 말해야 합니다. 더 많이 기뻐하고, 더 많이 감사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분은 예수님 안에서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라는 것을 보는 눈이 열린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죽지만 예수님을 영접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죽음을 넉넉하게 이길 수 있는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죽음을 영원한 세계로 들어가는 과정으로 오히려 축복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신 부활의 능력으로 사망을 향하여,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 15:55, 57)

부활은 죽음도 어떻게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레나 마리아라는 가스펠 가수는 태어날 때부터 두 팔이 없고 한 쪽 다리가 짧은 아이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고통을 이기고 가스펠 가수로 세계인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있습니다.
언론은 그녀의 목소리를 “천상의 노래”라고 격찬했습니다.
그녀의 인생을 담은 <발로 쓴 내 인생의 악보>는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중증 장애인이지만 세계장애인수영선수권대회에서 4개의 금메달을 땄습니다.
그녀는 자신을 부활의 증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녀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자신의 육체에 대해 불평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일본에서 공연을 했을 때 일본 텔레비전에 출연한 적이 있었는데 사회자가 “레나, 당신은 왜 그렇게 밝을 수 있죠?”라고 물었답니다. 그 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내 삶을 움직이고 계시며, 내가 필요한 것을 채우시며, 또 내 곁에서 나를 위로하시고 새 힘을 주시니까요.” 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누군가 내게 ‘주님이 살아 계시고, 부활하셨다는 증거’를 대라고 말한다면 “나는 나의 약한 육신과 날마다 찬송하는 내 입술을 당당하게 보여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되었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로 죽음을 정복하고 완전한 승리를 누리게 됩니다(54∼57).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로 주님 재림하실 때 영생의 부활로 참여합니다(50∼53).
그러면 부활을 믿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첫째, 부활을 믿는 증인이라면 어떤 일을 당하여도 신앙이 흔들리지 않고 더욱 견고해져야 합니다(58).
세속화된 도시 속에 있는 고린도교회에는 갖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럴 때 부활신앙에 회의가 생길 수 있습니다.
“천국이 있다면 저렇게 할까? 부활이 있다면 저 정도 수준일까?” 신앙이 흔들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부활신앙이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 부활을 믿는 증인이라면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써야 합니다(58).

셋째, 부활을 믿는 증인이라면 우리의 수고가 헛되지 않다는 사실을 믿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수고하는 것 중에는 헛된 것들이 있는 반면에 영원히 헛되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부활이 있음으로, 내세가 있음으로, 천국이 있음으로 주님을 위한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오후 3시에 인천 제물포 앞바다에 증기선 한 척이 들어왔습니다.
한국교회 최초의 선교사 아펜젤러언더우드가 탄 배였습니다.

27살의 청년 아펜젤러(1858. 2. 6~1902. 6. 11)가 한국 땅에 첫발을 디딜 때 했던 기도가 있습니다.

“우리는 부활주일에 이곳에 도착했습니다.
이날 죽음의 철장을 부수신 주님께서 이 백성을 얽매고 있는 줄을 끊으시고 그들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빛과 자유를 얻게 하소서!”

아펜젤러 선교사는 44세가 되던 1902년에 목포에서 배가 침몰해 순교했습니다.
조선 땅에 고결한 젊음을 바친 한 청년, 그가 그토록 원했던 것은 흑암의 조선 땅에 부활의 복음을 심는 일이었습니다.
오늘 피로 뿌린 그 씨앗은 싹이 트고 열매가 맺혀 조국 강산을 그리스도의 핏빛으로 물들이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사건을 말하면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십자가가 없는 죄 사함이 없듯이 부활이 없는 영생은 없습니다.
십자가가 과거의 모든 죄 문제를 해결했다면 부활은 현재와 미래를 여는 출입문입니다.
기독교는 십자가의 아픔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기쁨으로 나아갑니다.
부활 없는 희망이 없고, 부활 없는 기독교는 없습니다.

빌리 그레함이 부활에 대해 한 말입니다.
“줄리어스 시저가 생존했거나 알렉산더 대왕이 33살에 죽은 것보다 더 확실한 부활의 증거가 있다.”

성경이 부활을 말씀하고, 주님을 만난 제자들이 부활을 증언했고, 기독교 2천 년 역사가 피로 선포한 것이 예수님의 부활이었습니다.

성경의 모든 인물 가운데 부활을 가장 극적으로 체험한 사람이 바울입니다.
바울이 쓴 고린도전서 15장은 부활장이라고 말합니다.
특이한 사실은 바울이 부활을 설교하면서 변증으로 시작하지 않고 선포로 시작한다는 점입니다.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바울에게 부활이란 너무나 확실하기에 변증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부활을 선포하고 부활을 체험한 사람들을 소개합니다.

부활을 체험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인생에 위대한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주님을 버리고 도망했다가 부활을 체험하고 생명을 드리는 헌신자들이 됐습니다.
그들을 기다린 것은 채찍과 죽음의 위협이었습니다.
그러나 부활을 체험한 사람에게 두려운 것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의 터툴리안이 한 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그가 진리를 소유한다는 확신이 없다면 기꺼이 죽을 수 없을 것이다.” 참으로 옳은 말입니다. 그것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확신이 없다면 생명을 바칠 수는 없습니다. 한두 명이 아니라 12명이 모두 동시에 목숨을 던질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정말 주님을 믿는다면 물어봐야 합니다. 내가 정말 부활을 체험했는가? 나의 죄를 위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정말 만났는가? 부활을 체험했다면 다시 물어봐야 합니다. 내 삶이 정말 말씀대로 변화를 받았는가? 부활하신 주님은 모든 것을 바꿔 놓습니다. 얼마나 많이 변화를 받았는가 하는 질문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더 변화 받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근본적으로 변화를 받았는지 물어야 합니다. 내가 죽고 내 속에 부활하신 주님이 살고 계시는지 물어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순간 내가 죽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오직 예수만이 있을 뿐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위대한 은혜를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 부활을 체험한 사람들은 죽어서 가는 내세를 강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제자로서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삶 속에 부활을 사는 사람들 그리고 변화된 삶으로 부활을 증명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하늘에 속한 사람에게 걸맞은 삶의 방식이 있습니다. 내일이 없는 것처럼 살아서는 안 됩니다. 부활의 신앙을 믿어야 신앙생활이 행복합니다. 봉사가 즐겁습니다. 주님의 교회를 위해 어떤 일을 섬겨도 기쁨이 넘칩니다.

장로교의 기초를 놓은 존 칼빈은 1509년에 태어났습니다.
그의 가르침으로 종교개혁이 꽃을 피웠고 기독교뿐 아니라 세계 역사에 가장 큰 흔적을 남긴 사람이었습니다.
칼빈을 연구하기 위해 그가 태어난 프랑스 누아용, 목회했던 프랑스 스트라스부르그와 스위스 제네바 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칼빈의 무덤은 지금까지 어느 곳에 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칼빈은 이 땅을 떠나면서 유언을 남겼습니다.
나의 무덤을 누구에게도 남기지 말라!
일생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살아간 칼빈다운 유언이었습니다.
칼빈이 마지막으로 목회했던 제네바 성 피에르 예배당 근처에는 공원묘지가 있습니다.
그곳에 가면 J.C라고 씌어진 무덤이 있습니다.
존 칼빈이라는 이름입니다.
비어있는 무덤입니다.
그의 무덤은 비어있지만, 그 무덤에서 부활의 복음이 터져 나오고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변화를 요구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사람에게는 하늘에 속한 사람다운 삶이 있습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허무에서 감격으로 바뀐 사람에게는 그들의 모든 삶 가운데 살아계신 예수의 흔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내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 나의 부활 이야기를 시작하는 부활주일을 맞이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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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삶을 살아가겠다는 결단입니다.
왜 예수님의 삶을 살아야 할까요?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제가 군 생활을 할 때 지휘관의 지프차를 운전하던 '한 일병" 이란 사병이 있었습니다.
당시 군 관할 지역의 지휘관들이 OP에 모여서 작전 회의를 하려고 모였습니다.
한 일병도 지휘관의 차를 운전하여 작전지역에 지휘관을 내려주고 주차장으로 안내를 받아 주차하던 중 주차장 아래 벼랑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지프차도 운전병도 모두 안전하게 구조되었습니다.

그 날 저녁 한 일병이 내무반에 들어와서 "내 생일은 오늘부터 이 날로 바꾼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죽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기 때문에 살아난 그 날이 그의 생일이 되었다는 이야기라고 한다면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었던 내가 예수를 믿음으로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은혜를 확신한다면 반드시 예수님처럼 살아가겠다는 결단을 요구하는 것이 부활 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보내신 것은 죄에 팔려버린 인생을 되사시기 위함이셨습니다.
인생들이 어떻게 죄에 팔렸느냐고요?
간단하게 누구든지 죄를 지으면 죄의 종이 되거든요.
이 세상에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도 궁금하시면 마가복음 7:20-23절을 읽어보세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희생의 대가로 원래의 신분인 하나님의 자녀로 되돌아 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모든 것은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생명으로 사셨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5:15절입니다.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데살로니가전서 5:10절도 봅시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베드로전서 4:2절입니다.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이것이 그의 백성 된 우리가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아야 할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부름 받은 선지자 중에서 가장 분명하고 단순한 소명을 받은 선지자가 세례 요한일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과 신약의 중간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행한 선지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세례 요한을 일컬어 "여자가 나은 자 중에서 가장 큰 자"(마11:11)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선지자의 삶을 보십시오! 그의 의복은 약대 털옷과 가죽 띠였고, 음식은 메뚜기와 간간이 들 꿀인 석청을 먹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잠자리는 하늘을 지붕 삼고, 땅을 방바닥으로 삼은 세상에서 가장 큰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의식주 문제로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관심은 오직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았다는 말입니다. 오늘의 성도들에게도 동일한 것이 요구됩니다(눅12:22-34).

우리가 잘 아는 마태복음 6:33절의 “그의 나라를 구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기를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는 일을 제일로 삼으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행할 가장 귀중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된 삶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자 하나님의 자녀이면 너무도 당연히 하나님의 뜻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말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세상의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그 말을 믿을 수가 없겠지요?


눈을 열어 주소서!

초막절은 메시아를 기다리는 절기이기도 했지만 아무도 진정한 메시아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고, 들었지만 듣지 못했다.

이 와중에 예수님은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고치심. 이러한 눈이 열리는 기적들이 우리 가족들에게 일어나길.

그렇다면 어떤 눈들이 열려야 할까?


1. 예수를 볼 수 있는 믿음의 눈
-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v.1)
- 원문에서는 그 사람을 지칭하는 관사가 없다: 특정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 눈이 먼 그 당시의 유대인들, 그리고 오늘날의 우리를 지칭하는듯
- 선악과를 먹음으로서 정녕 죽었던 인간, 영의 눈이 감겨버렸다. 그리고 태어나는 모든 인간들은 영의 눈이 감긴채로 태어난다.
- 예수님이 보이기 시작하면 예수님의 말씀이 들린다. 그렇다면 이 땅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해석이 된다. 해석이 바뀌면 생각이 바뀌고 생각이 바뀌면 삶이 바뀐다.


2. 세상을 볼 수 있는 의 눈
-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v.5)
- 생명의 빛되신 예수님. 예수님이라고 하는 패러다임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을 바로 볼 수 있다.
- 진흙을 이겨 눈에 발라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창조주의 모습을 보다: 눈을 재창조해주시는 예수님.
>>> 영적인 눈이 뜨여지면 얼마나 두렵기도 하고 놀라울까
>>> 보는 것은 똑같지만 영의 눈이 열렸느냐에 따라 해석이 완전히 달라진다
- 많은 사람이 허상에 잡혀 산다 (특히 물질). 그러한 허상은 죽을 때 깨어진다.



3. 해야 할 일을 보는 사명의 눈
-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v.7)
- 눈을 뜬 맹인은 논쟁하는 것이 아니라 증언한다. 예수님을 드러낸다.
- 내 생각이 어떻게 바꼈는데, 내 삶이 어떻게 바꼈는지 간증하는 삶이 되길.

출처: https://hoseastory.tistory.com/2008 [호.세.아. - 사람을 세우는 가정]






십자가(Cross)는 라틴어 '크룩스(crux)'라는 말에서 온 것으로 '고문대(拷問臺)'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는 인간이 만든 형벌 가운데 가장 참혹한 것이었습니다.
십자가의 형벌은 고대 여러 민족들 사이에서 이미 통용되어 왔던 사형법 이었습니다.
알렉산더 왕도 그가 점령한 지역에서 반기를 드는 사람들을 즐겨 십자가에 매달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드로 사람 일 천명을 십자가에 처형했다고 합니다.

에스라 6:11에는 파사의 다리오 왕이 조서를 내리는데 자기의 명령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십자가에 달아 매어 죽이라고 명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로마제국에 와서는 노예만을 십자가에 죽였으나 때로는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라도 중죄(로류)를 범한 경우 이를 적용시켰습니다. 그러나 너무도 참혹했기 때문에 로마 본국 내에서는 가급적 십자가 형을 실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콘스탄틴 황제가 십자가 형벌 금지령을 내렸고, 그 후 이 사형법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릴 죄인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구속 사업을 성취하기 위하여 그 참혹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이미 구약에서 예표로 알려진 것과 같이, 십자가를 쳐다보는 사람은 죽지 않으리라는 그 말씀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류 구원이란 신학적 의미를 가진 사건이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립보서 2:6-7)

십자가 위에서 남기신 예수님의 일곱마디 말씀 (架上七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린 것이 오전 9시이고, 운명한 것이 오후3시니 십자가 위에서 6시간 동안 생명이 유지되어 있었습니다.
빨리 죽지 않고 모든 고통을 겪으며 서서히 죽기 때문에 십자가 처형은 가장 고통스러운 처형 방법인 것입니다.
이 6시간 동안에 예수는 일곱 마디 밖에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4복음서에 나타난 것을 종합해서 순서대로 적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말 -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 : 34).
              이것은 용서의 기도였습니다.

둘째말 -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 : 43).
              이것은 파라다이스(낙원)의 약속이었습니다.

셋째말 - "어머니 보십시오, 당신의 아들입니다. " "보라, 네 어머니다"(요 19 : 26-27).
               이것은 아들로서의 효도였습니다.

넷째말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마 27 . 46).
              이것은 영적인 고민이 었습니다.

다섯째말 - "목 마르다"(요 19 : 28).
                이것은 육신적인 고통이었습니다.

여섯째말 - "다 이루었다"(요 19 : 30).
                이것은 승리의 선언이었습니다.

일곱째말 -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눅 23 : 46),
                 이것은 최후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이상 일곱 마디 중 처음 세 마디는 9시부터 12시 사이에 말씀하셨고, 12시부터 3시까지 세 시간 동안 갑자기 온 땅이 어두워졌습니다. 그 세 시간 동안 예수는 한마디도 말씀하지 않으셨고 오후 3시에 예수께서는 나머지 네 마디 말씀을 연거푸하시고 운명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사실로 이루어진 구약의 예언
 
십자가 사후에 일어 난 사실들
     
    (1) 지진으로 성전 휘장이 찢어짐(마 27 : 51).
    (2) 무덤이 열림(마 27 : 52).
    (3) 백부장의 증거(마 27; 54).
    (4) 무리들의 확신(눅 23; 48).
    (5) 도적의 다리를 꺾음(요 19 : 31-32).
    (6) 옆구리 찌름(요 19 : 34).
    (7) 장사 지냄(요 19 : 38-42).
    (8) 무덤 봉하고 파수꾼 세움(마 27 : 66).
 
고난에 관한 금언 ·격언 ·속담
     
    (1) "고난은 축복을 갖다 주는 지름길이다. " -M. 루터-
    (2) "하나님 앞에 진실되게 살려고 하는 이는 고통을 보석으로 삼는다. " -하천풍언-
    (3) "고난은 성공의 축대를 쌓는 것과 같다. " -M.NL. 영안-
    (4) "고생보다 더 중요한 교육은 없다. " -지스레지-
    (5) "고난을 모르는 사람보다 더 불쌍한 사람은 없다. " -도미트 아쓰 -
    (6) "고난이 크면 클수록 그 영광도 크다. " -M. T시세로
    (7) 초년 고생은 말년 낙의 근본이라. 네가 자라면 오복이 구비하고 남이 우러러보는 사람이 되리라." -이광수 -
    (8) "대부분의 생의 고난은 우리 자신이 햇빛에 서 있기 때문에 생긴다" -에머슨-
    (9) "고난은 하나님의 심부름꾼이다. 어려움이 우리에게 찾아 왔을 때,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물로써 하나님의 신임의 증거 라고 간주해야 한다. " -비쳐(H.W. Beecher)-
    (10) 고난이란? 좋은 것이다.
    • 고난은 좋은 훈련이다.
    • 고난은 사람이 살기에 귀찮을 정도다.
    • 고난은 여행하는 것과 같다.
    • 고난은 자신이 깨뜨려지는 것이다.
    • 고난은 나쁜 문제들을 안고 있는 것이다.
    • 고난은 한 성도가 받으면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고통을 겪게 된다.
    • 고난은 하나의 체험이다.
    • 고문을 받는 것도 심한 고난이다.







2022년 고난주간 일정


일요일
  • 예수가 나귀 타시고 예루살렘 입성(마 21 : 1 - 11, 막 11 : 1 - 11).

주일

** 예루살렘에서의 승리의 입성(마21:1-11, 막11:1-11, 눅19:29-44, 요12:12-19)

주님의 고난은 예루살렘의 입성과 함께 시작된다.

유월절을 며칠 앞두고 예루살렘의 거리는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유월절 양되신 예수님은 제자들이 구해온 어린양을 타고 감람산 쪽에서 들어 오셨다.

전에 갈릴리에 계실 때에 그의 교훈을 듣고 도움을 받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특별히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 떡을 얻어 먹었던 사람들은 이 기회에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호산나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다. 군중들은 흥분하기 시작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승리의 표시인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예수님을 호위하고 어떤 사람들은 옷을 벗어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며 외치었다.

예루살렘의 거리는 예수님의 입성으로 진동하였다.

예수님은 스가랴 9:9에 있는 말씀대로 왕으로 그의 도성에 입성하신 것이다

그러나 군중이 원하는 왕과 예수님의 왕되심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었다.

군중들은 제한된 한 민족의 왕, 육체의 왕로마의 압제에서 해방과 빵문제를 해결으로 생각하 였으나 예수님의 왕되심은 우주의 왕이요, 영원한 왕으로 입성하신 것이다.

 

월요일
  • 열매 없는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심(마 21. 18 - 19, 막 11 : 12 - 14).
  • (세금의 질문에 설명) 성전 청결케 함(마 21 : 12 - 13, 막 11 : 15 - 19).

월요일

*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다 (마 21:18-20,막11:12-14,20,21)

성밖 베다니에서 하루 저녁을 쉬신 예수님은 이른 아침에 예루살렘으로 향하시었다.

도중에 시장기를 느끼신 예수님을 때마침 길 가에 있는 무화과나무 밑으로 가셨다

그러나 잎만 무성했지 열매를 얻을 수 없었다. 실망하신 예수님은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고 저주하셨다.

* 성전을 정결케 하시다(마 21:12,13,막11:15-17,눅19:45,46)

성안에 들어오신 예수님을 그 길로 곧 성전에 가시었다

예수님은 성전 안에서 사람들이 돈을 바꾸고 짐승을 파느라고 소란한 것을 보셨다

채찍을 들지 않을수 없으셨다. 짐승을 내몰고 장사하는 사람을 내 쫒았다.

돈 바꾸는 상도 뒤집어 엎으셨다.

그리고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가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고 꾸짖으셨다.

그러나 책망을 듣는 자들의 눈길은 회개의 빛대신에 시기와 원망의 눈으로 가득 채워져

“어디 두고 보자식의 노기였다

예수님은 해가 저물어 전과 같이 쉬시기 위하여 성 밖으로 나가셨다.

 


화요일
  • 무화과나무 마름(마 21 : 19 - 22, 막 11 : 20 - 25).
  • 제사장 바리새인의 질문(막 11 : 27 - 33, 눅 20 : 1 - 8).
  • 경고의 세 가지 비유, 포도원 비유(마 21 : 28 - 22 : 14, 막 12 : 1 - 12).
  • 바리새인과 헤롯 왕이 예수께 질문(마 22 : 15 - 40).
  • 메시야에 대한 예수의 질문(눅 20 : 41 - 44).
  • 예수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 책망(막 12 : 38 - 40).
  • 과부연보에 대하여 칭찬함(막 12 : 41 - 44, 눅 21 : 1 - 4)
  • 유대인이 예수를 배척함. 예루살렘 멸망과 말세를 예언함(눅 21 : 5 - 38, 요 12 : 37 - 50).

수요일
  • 예수가 밤마다 베다니에 나가시니 이 날은 거기서 기도했을 것임.(성경에 수요일은 기록이 없음.)


유다가 배반하다(마26:14-16,막14:41-45,눅22:1-6,요18:1-11)

예수님은 아직 성밖에 계시면서 제자들에게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우리라고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교훈하고 계실 때

한편 성안 가야바 대제사장 아문에서는 예수님을 궤계로 잡아 죽이려고 모의하고 있었다.

그리고 제자중 하나인 가룟유다는 제자들 사애에서 빠져 나와 대제사장의 회의장으로 달려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고 협상한다

제사장들은 기회가 왔다는 듯이 은 30을 달아 가룟 유다에게 주었다.

유다는 이때부터 예수님을 넘겨 줄 기회를 노리고 있게 된다.



화요일

* 무화과나무의 교훈을 하시다 (막 11:20)

그 이튿날 제자들은 성으로 들어오는 도중 놀라운 것을 보았다.

어제 예수님께로 저주를 받은 그 무화과나무가 뿌리부터 말라 죽었다.

성급한 베드로는 놀라운 얼굴로 선생님,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이에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으라,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하면

그 말하는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믿음의 교훈을 해 주시었다

* 성전 안에서 힐란을 받으시다(마21:23-27,막 11:27-33,눅20:1-8)

성안에 들어오신 예수님은 어제의 그 성전으로 가시었다.

책망을 듣고 회개할 줄 모르는 서기관과 장로들이 예수님을 힐란한다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시기에 찬 질문이요,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모르는 무지에 찬 질문이었다

예수님은 이들의 악함을 안타까이 여기시고 여러가지 비유로 저들을 깨우치려 말씀하셨다.

말 안 듣는 맏아들의 비유(마 21:28-32),

사악한 농부의 비유(마 21:33-41,마12:1-9,눅20:9-16),

왕자의 잔치를 거절한 악한 사람들의 소(행22:1-14)등을 말씀하시었다.

그러나 저들은 계속해서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질문을 하였다.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까불가하니이까”

“부활때 일곱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어떻게 해서든지 넘어뜨리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놀라운 지혜로 답변하시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에수님은 말세에 되어질 일들(마24,막13장, 눅21장)과

주의 재림의 때에 되어질 일들(마25)을 교훈하여 주시었다.


목요일
  • 최후 성만찬, 예수 그리스도의 고별사(마 26 : 31 - 35, 막 14 : 12 - 26, 눅 22 : 31 - 38).
 목요일

* 제자들의 발의 씻기다(요13:1-17)

유대인의 최대 명절인 유월절이 되었다.

저녁이 되자 예수님을 제자들이 미리 준비한 성내의 한 여성도의 집 이층 다락방으로 가시 었다

거기에는 유대인의 법을 따라 유월절을 지키기 위한 누룩없는 떡과 포도주가 준비되어 있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상가에 둘러 앉아 식사를 하기 시작하셧다.

식사를 하시던 예수님은 갑자기 일어서더니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떠 오시어 그 물로 제자들의 발을 하나 하나 씻기기 시작하셨다.

제자들은 어리둥절하였다

베드로의 차례가 왔을때 베드로는 내 발은 절대로 씻기지 못하리이다”

그때에 예수님은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고 답하시었다

그리고 예수님은 계속해서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의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고 겸손에 대하여 교훈해 주시었다.

* 반역자를 지목하시다(마26:21-25,막14:18-21,눅22:21-23,요13:21-30)

예수님은 서로 발을 씻기라는 말씀을 하신 후에 심히 민망한 표정으로

“너희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하시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여 누구오니이까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며 가룟유다에게 떡을 주셨다

이 말을 들은 가룟유다는 기분 나쁘다는 듯이 나가 버렸다

자기의 할 일을 하기 위하여 나간 것이다.

이제 사단은 완전히 유다의 마음을 사로 잡은 것이다.

* 마지막 만찬이 베풀어지다(마26:26-29,막14:22-25,눅22:19)

이와같은 일이 있은 후 예수님은 저희 가운데서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며 받아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다 이것을 마시라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첫번 성만찬식을 베풀었다.

그리고 죽음을 앞두신 예수님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려 가노라고 제자들 을 위로하시었다.

*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다(마26:36-46,막14:32-42,눅22:39-46,요18:1)

모든 말씀을 마치신 에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나가셨다

이 산 서쪽 기슭 아래에는 겟세마네라는 동산이 있었고

예수님은 이곳에서 최후의 고난의 쓴 잔을 마시기 위하여 기도하셨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있으라

예수님은 제자들과 돌던질만한 거리로 나가서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셨다

그의 이마에서는 피와 같은 땀이 떨어졌다.

 



금요일
  •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반역과 예수의 포박(마 26 : 36 - 47, 막 14 : 32 - 52).
  • 안나스와 가야바의 심문(막 14 : 53 - 72, 요 18 : 13 - 27).
  • 빌라도의 심문(마 27 : 2 - 11, 31, 요 18 : 13 - 29).
  • 십자가의 고난(마 27 : 32 - 56, 눅 23 : 26 - 45).
  •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를 장사함(마27 : 57 - 61, 막 15 : 43-47).
금요일

* 예수님이 잡히시다.(마26:4,7,56,막14:43-52,눅22:47-53,요18:3-13)

예수님은 기도중 대제사장이 보낸 사람들이 가까이 온 것을 느끼셨다.

그리하여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때가 온 것을 환기시키고 있을때

무리들은 몽치와 검을 가지고 올라오고 있었다.

그 중에는 열두 제자 중 하나였던 가룟 유다가 있었다.

그가 예수님께 다가서더니 랍비여 안녕하십니까하고 입을 맞추었다.

물론 이것은 예수님을 넘겨주기 위한 군호의 간사한 입맞춤이었다.

이로써 예수님은 악당들에게 잡히셨고 제자들은 모두 흩어지고 말았다.

* 심문을 받으시다(마26:57,27:26,30,막14:53,15:15,눅22:54,23:24,요18:13,19:16)

예수님을 잡아 결박한 유대인의 하속들은 먼저 예수님을 안나스와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에게 끌고 갔다.

거기에는 이미 많은 서기관과 제사장들이 모여 있었다.

저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찾고 있었으나 찾지 못하였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리라는 예수님 자신의 증거가 있을 때

저들은 분을 내며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주먹으로 치고 손바닥으로 때렸다.

그러나 재판권이 없는 저들은 당시의 총독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끌고 갔다.

저들은 여러 말로 예수님을 고소하였으나 역시 죄를 찾지 못하였다.

빌라도는 저들이 시기하여 예수님을 자기에게 넘겨준 줄 알고 석방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저들의 소리는 한층 높아졌다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그 피를 우리와 우리의 자손에게 돌리소서

저들은 너무도 무지하나이다


토요일
  • 무덤을 파수군이 굳게 지킴(마 27 : 62 - 66).
일요일
  • 부활의 새벽(마 28 : 1 - 10, 막 16 : 1 - 17).
  • 파수군이 부활의 사건을 제사장에게 보고(마 28 : 11 - 15, 눅 24 : 13 - 35).
  • 엠마오 도상의 예수(눅 24 : 13 - 35).
  • 도마와 다른 제자들에게 예수 나타남(막 16 : 14, 요 20 : 19 - 25).

종교개혁자 루터의 이야기입니다.
당시 독일에서는 고학생들 중에 노래를 잘하는 학생들은 남의 집 앞에서 노래를 불러 돈을 받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루터가 부잣집 창문 아래서 큰 소리로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노래를 시작하자마자 체격이 크고 무섭게 생긴 사나이가 창문을 열고 뛰어나오는 것이었습니다. 루터는 그 험상궂게 생긴 사나이가 주먹질이라도 할 줄 알고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사나이는 계속 쫓아왔고 결국 붙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공포심에 벌벌 떨고 있는 루터에게 그 사람은 주먹이 아닌 돈 뭉치를 내밀었습니다. 장학금을 주려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루터는 그때를 회고하면서 “두려움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만사가 모두 걱정과 염려로 가득 차 있고,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이 감사하고 좋게 보이며, 하나님의 손길이 보인다”고 하였습니다. 

 

루터의 말처럼 우리가 환경을 어떤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해석이 다르고, 그 해석에 따라 삶이 행복하게 느껴질 수도, 불행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찰스 엘 알렌(Charles L. Allen)이라는 사람은 사람에게는 세 가지의 시력을 갖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첫째는 신체적 시력
이것은 누구나 볼 수 있는 시각입니다.
옷, 집, 자동차, 음식, 남자와 여자, 건물 등

둘째는 정신적 시력
이것은 합리적으로 사물을 판단하고 이해할 수 있는 힘입니다.
정신적 시력이 없이는 진리를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영적인 시력
이것은 영적 시각입니다.
하나님을 알아볼 수 있는 영의 눈입니다. 

 


 

한해를 살면서 우리 삶에 펼쳐지는 모든 일들을 육체적 정신적 시력으로만 보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많지만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다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오늘 예배드리시는 여러분 믿음의 눈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감사와 찬송의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의 말씀은 아람과 이스라엘의 적대인 관계속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열왕기하 6장 8절을 보면 아람왕이 이스라엘을 침공하기 위해서 자기의 신복들과 함께 의논하여 우리가 아무데 아무데 진을 치리라하였습니다. 이때 엘리사는 이스라엘 왕에게 사람을 보내어 왕은 삼가 아무 곳으로 지나가지 마소서 아람 사람이 그곳으로 내려올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왕은 엘리사가 말한 장소로 사람을 보내 철저히 경계하게 하였는데 이렇게 한 것이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아람왕의 마음이 불안하여 그 신복들을 불러 우리 가운데 누가 이스라엘 왕과 내통하고 있는지 말하라고 하였습니다. 

 

12절에 그때 그 신복 중에 하나가 “우리 주 왕이여 아니로소이다. 오직 이스라엘 선지자 엘리사가 왕의 침실에서 하신 말씀조차도 이스라엘 왕에게 알려준다고” 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람왕은 “너는 가서 엘리사가 어디 있는가 보라! 내가 잡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신하들은 엘리사가 도단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아람왕은 최정예 군대를 총동원해서 도단성을 겹겹이 둘러쌌습니다.

 

다음날 아침 엘리사의 사환이 일어나서 보니까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읍을 에워싸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사환은 엘리사에게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하고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때 엘리사는 아무런 두려움도 갖지 않고 사환을 진정시키면서 “두려워 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종의 눈을 열어 보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사환의 눈을 열어 주셨습니다. 17절을 보면 “불말과 불 마차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18절에 아람 사람이 엘리사에게 다가오자 엘리사는 저사람들이 눈이 멀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람 군대의 눈을 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엘리사는 아람 군대를 사마리아로 데리고 갔습니다. 이스라엘이 왕은 아람 군대를 위해 큰 잔치를 베풀어 먹고 마시게 한뒤 그들을 돌려보냈습니다. 23절을 보면 이로부터 아람 군사의 부내다 다시는 이스라엘 땅에 들어오지 못하였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한해를 살아가면서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어떤 믿음의 원리를 배워야 할까요? 

 

첫째로 신체적 시선이 아닌 믿음의 시선을 가져야 합니다. 

 

사환은 도단을 둘러싸고 있는 수 많은 군사들을 보고 두려워하며 절망하였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보고 평안해 하였습니다.

 

시편 91편 11절에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주를 경외하는 자를 위해서 하늘의 사자들을 동원해서 지키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잠언 29장 25절에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똑같은 상황이라도 어떤 시선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결과도 달라집니다.

 

러시아의 우주 비행사 티토브라는 사람은 달에 다녀온후에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우주에서 하나님을 찾아보려고 했지만 그 어디에도 하나님은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우주비행사 맥디브는 “나는 우주의 신비 속에서 창조주 하나님이 분명히 계신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고 느끼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똑같이 우주에 다녀왔는데 한 사람은 예수를 믿지 않은 사람이고 또 한사람은 예수를 믿고 거듭난 사람이었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았더니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의 세계속에서 하나님이 분명히 계시다는 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믿음의 시선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환경만을 보면 절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내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들을 만나면 사람은 낙심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 보다 크신 하나님을 믿음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하나님이 문제를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시고 길을 열어주십니다. 

 

하나님은 항상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여호수아와 갈렙은 믿음의 시선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가데스 바네아에서 12명의 가나안 정탐꾼을 보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돌아와서 보고하기를 저들은 거인이고 우리는 메뚜기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민수기 13장 33절에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민수기 14장 7-8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회중들의 원망의 소리를 들으시고 여호수아와 갈렙외에는 약속하신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눈으로 보는대로 생각하며 판단하는 것이 옳은 것 같고 객관적 사실인 것 같지만 하나님은 믿음의 시선을 갖고 생각하며 행동하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신명기 31장 6절에 보면 “너희는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가시며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삶에서 이루실 것들을 믿음의 눈으로 기대하며 바라보는 살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믿음의 시선은 기도와 말씀을 통해 열린다는 것입니다. 

17절에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라고 말씀합니다. 

엘리사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사환의 눈을 열으셔서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러싸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리처드 포스터는 기도에 대해서 정의하기를 “하늘의 문을 여는 열쇠”라고 하였습니다.하나님께서 축복의 문, 은혜의 문, 사랑의 문을 열어주시도록 하는 것이 기도라는 것입니다. 

 

하늘의 문을 여는 기도의 열쇠는 아무에게 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에게만 주시는 특권입니다. 

 

마태복음 7장 7-8절에 (7:7)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7:8)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고 말씀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의 기초 위해서 기도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과 다른 것은 세상 사람들은 떡으로만 살지만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말씀을 의지하고 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살 동안에는 떡으로만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홍해를 건너서 광야로 들어갔을 때는 떡으로 살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 말씀만 바라보았습니다. 모세가 하나님 말씀을 받아서 전하고 그 말씀을 믿을 때 말씀을 통해서 만나도 오고 메추라기도 오고 물도 생겨나고 병도 낫고 의복도 낡아지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눈을 열어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하며 마음에 새기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기초로 믿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낙도선교회에서 펴낸 『교회 하나만 주고 가이소』에 실린 이야기를 소개해 드립니다. 

 

신학생들이 매년 여름 농촌에 복음을 전하러 가는데, 한번은 마을 주민들이 부정 탄다며 아예 마을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했습니다. 선교 팀은 하는 수 없이 마을 밖에 텐트를 치고 아이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했습니다. 다행이 아이들이 예수님을 영접했고, 선교 팀과 함께 여름성경학교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선교팀원들은 어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이끌고 성황당그늘에서 주무시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향해 갔습니다. 아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척하면서 할아버지, 할머니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속셈이었습니다.

“얘들아, 저 나무와 꽃들은 누가 만드셨지?”<하나님이요>

“그래, 하나님이시란다. 하나님은 전능하셔서 뭐든지 못하시는 것이 없으셔. 너 희들 모두 믿지?”<아멘>

 

그러자 주무시던 할아버지들 가운데 한 분이 일어났습니다.

“어이 젊은이, 하나님이 정말 전능하신가? 뭐든지 못하시는 일이 없으신가?”

<그럼요, 하나님은 뭐든지 못하시는 일이 없으세요.>

“그럼 내 다리 한번 고쳐 보거라. 나는 어릴 때부터 소아마비에 걸려 이 다리를 못 썼다.” 그러면서 할아버지가 다리를 내밀었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선교팀원들은 덜컥 겁이 났습니다. 팀원들 중에는 병자를 치유하는 기적을 행하거나 체험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팀장은 하나님이 고쳐 주실 것을 믿고 팀원들과 다리 하나를 붙잡고 한참 동안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주여, 낫게 해 주옵소서. 믿습니다!”

 

기도가 끝난 후 팀장은 하나님이 다리를 낫게 하셨다고 담대히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웬 낭패입니까? 할아버지가 “이놈들아, 이 다리가 아니야. 아픈 다리는 이쪽 다리야!”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팀장과 팀원들은 다시 다른 다리를 붙잡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주여, 이쪽 다리랍니다. 낫게 해 주옵소서. 믿습니다.!” 한 참 동안 기도한 후 팀장이 다시 외쳤습니다.

“할아버지. 일어나 보세요.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 걸어라!” 그러나 할아버지가 팔짝팔짝 뛰면서 “신기하네. 내가 다 나았다! 내가 다 나았다!”라고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기도한 팀원들도 다 놀랐습니다. 자기들이 기도해 놓고도 진짜로 기적이 일어난 것을 보자 너무 놀란 것입니다. 결국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은 그 마을에 복음의 뿌리가 내리게 하셨고, 마침내는 교회를 세우게 하셨습니다.

 

100% 확신을 가지고 한 기도가 아니지만 하나님의 말씀에는 능력이 있고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 신학생들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신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와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예수님도 공생애 사역을 하시면서 사탄의 수 없는 공격을 받으실 때에도 기도와 말씀의 능력으로 마귀를 물리치셨습니다. 

 

기도와 말씀의 능력을 회복하는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영국의 영성 작가 안소리 블룸은 “우리는 하나님께 겨우 몇 분 내드리면서 그 시간에 그분이 임재하지 않는다고 불평한다. 하지만 우리의 문을 두르드시는 하나님께 죄송하지만 바쁩니다 라고 말하는 나머지 23시간 50분의 시간은 어떤가 심지어 전혀 반응이 없을 때도 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양심과 삶의 문을 두드리시는 하나님의 노크 소리를 아예 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때로 우리는 하나님의 주배에 대해 불평할 권리가 없다. 그분보다 우리가 더 부재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잠깐 기도하고 하나님이 내 삶에 아무것도 안해주신다고 불평하고 원망할 때가 참 많은 것 같습니다.  

 

올한해 “하나님 믿음의 눈을 열어주소서”라고 기도할 때 믿음안에서 담대하게 살아가는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셋째로 믿음의 능력으로 매일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엘리사는 기도의 능력으로 아람 군대의 공격을 물리쳤습니다. 우리도 매일 믿음의 능력으로 힘있게 살아가야 합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항상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시편 27편 1절에 “야훼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야훼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생명이 우리에게 들어올 때 우리는 두려움이 아닌 강하고 담대함을 가지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비행기 조종사들이 비행 훈련을 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계기판을 절대 신뢰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비행을 하다 보면 수 많은 변수가 작용을 합니다. 안개가끼고 구름속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하늘로 올라가면 주변에 무슨 건물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해서 그 위치가 어디인지를 도저히 분간 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계기판에 나타난 정보를 통해서 지금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분간할 수 있습니다. 전투기 조종사들이 빠른 속도로 비행을 하면서 비행기 위 아래를 바꿔서 비행할 때가 있는데 순간적으로 방향 감각을 잃어버려서 바다나 땅바닥으로 향할 때가 있다고 합니다. 이때도 자기의 감각을 믿는 것이 아니라 계기판을 신뢰하고 움직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런 것처럼 우리 삶의 나침반 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합니다. 

 

앨리슨 래퍼(Alison Lapper)는 1965년에 영국에서 태어났습니다. 해표지증이라고 팔과 다리가 없이 손과 발만 몸에 붙어서 태어나는 병을 갖고 태어났습니다. 생후 6주 만에 부모님이 기르는 것을 포기하고 보호시설에 맡겨졌습니다. 팔과 다리가 없이 자라야 하니 그 어린 시절도 사춘기 청소년 시절을 지나면서 우울한 시기를 보냈습니다. 결혼을 했는데 남편을 잘못 만나서 남편이 몸도 장애를 가진 이 여인을 심하게 때렸습니다. 아이를 가져도 번번이 유산합니다. 그런데 주변에서 “당신은 선천적인 장애가 있기 때문에 임신하면 아이도 문제고 당신도 문제”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런 주변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오히려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런 가운데 건강한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입에 붓을 물고 그림을 그리고 발로 그림을 그리는 구족화가가 되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녀가 고백하기를 “하나님은 우리에게 감당할 만큼의 고통을 주십니다. 큰 고통을 주는 것은 크게 쓰이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부족한 장애를 갖고 태어났지만, 긍정의 힘과 강인한 의지로 저의 장애를 극복했습니다. 긍정적인 생각과 습관이 저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나에게 무엇인가를 할 수 없다고 말할 때마다 더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저의 부족한 1%의 의지가 99%의 도전을 가능케 하고 마침내 세상을 움직이는 동력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장애가 있는 지금이 행복하고 감사합니다. 어려운 상황은 언젠가 끝나며 앞으로 나가다 보면 꿈도 이룹니다. 고통도 축복입니다. 극복할 수 없는 장애는 없습니다. 장애는 마음속에 있는 것일 뿐 마음의 장애를 이겨내고 새로운 것에 도전한다면 많은 것을 이룰 수 있습니다”

 

진정한 장애는 마음의 장애입니다. 스스로 절망하고 낙심하고 포기하는 것이 문제이지 믿음의 눈으로 절대 긍정의 믿음을 가지면 어떤 문제도 이길 수 있습니다. 

 

2021년 한해를 살아가실 때 순간 순간마다 믿음의 눈을 열어 주십시오. 믿음의 눈을 열어 주십시오, 믿음의 눈을 열어주십시오라고 기도하셔서 문제 보다 크신 하나님이 문제를 이기게 하시고 우리의 마음에 꿈꾸고 소원하고 기도하는 모든 것에 차고 넘치게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