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과 이적의 사건들


오병이어의 이적

‘오병이어’는 번역 실수가 만든 기적?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
예수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여명을 먹이고도 남은 빵이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는 <신약성서>의 네 공관복음서에 모두 나오는 놀라운 이야기.

믿기 어려운 기적의 진실은 무엇일까?

1976년부터 예루살렘 히브리대학에서 성서학과 고대 셈어, 이집트학, 아시리아학을 공부하고 수메르어로 학위를 받은 뒤 10여년간 히브리대에서 가르쳤던 성서학의 국제적 권위자 조철수(60) 교수의 <예수 평전>은 눈이 번쩍 뜨이는 설명을 제시한다.

조 교수는 마르코 복음서 6장의 이 기적 이야기 일부를 이렇게 인용한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명령하여 각자 동료들끼리 풀밭에 앉게 했다. 백 명의 동료지간의 백부장과 오십 명의 동료지간의 오십부장이 끼리끼리 자리잡았다. 예수는 다섯 개의 빵과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하늘을 향해 쳐다보며 축복하고 빵을 떼어 그의 제자들에게 주며 그들 앞에 나누게 했다.”

공동번역 성서의 마르코 복음서는 이 가운데 ‘백명의~’ 부분을 이렇게 옮겨놓았다. “군중은 백 명씩 또는 오십 명씩 모여 앉았다.”
마태오나 루가 등 다른 복음서들에는 이들이 끼리끼리 모여 앉았다는 표현 자체가 아예 없다.
이 표현의 차이에 주목하라.


‘오병이어’는 번역 실수가 만든 기적?

조 교수가 인용한 마르코 복음서 내용은 자신이 따로 번역한 것이다.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신약성서 원문은 그리스어로 쓰여 있는 게 가장 오래된 사본이다.
그런데 이 그리스어 원본 자체가 번역본일 가능성이 높다.
원래 복음서나 사도들 편지는 히브리어나 아람어로 기록됐고 적어도 그 수십년 뒤에야 그리스어 본들이 만들어졌다.
히브리어와 아람어는 같은 계열이지만 그리스어는 전혀 다른 언어체계다.
따라서 아람어와 히브리어 텍스트들을 자신이 직접 번역한 조 교수의 인용문이 당시 이스라엘(유대)의 언어행위 실상과 사회상에 더 근접할 가능성이 높다.

조 교수는 1947년 발굴된 ‘사해 두루마리’ 등의 옛 전적들을 성서와 하나하나 대조하면서 예수의 실상을 재구성한다.

조 교수에 따르면 공관복음서에서 ‘오천 명’이라 옮긴 단어는 아람어 본(페시타) 신약성서에는 ‘오천’이라고만 돼 있다.
오천은 히브리어로 ‘아메쉐트 알라핌’이다.
그런데 이를 ‘하메쉐트 알루핌’으로 읽으면 ‘다섯 천부장’이라는 뜻이 된다.
당시 히브리어나 아람어에는 모음부호가 없었기 때문에 알라핌을 알루핌으로 읽는 식의 바꿔 읽기는 유대교 성서 해석에 종종 활용됐다. 따라서 오천을 오천명의 군중이 아니라 ‘다섯 천부장’으로 읽을 수 있다면 ‘백 명씩 오십 명씩’은 백부장, 오십부장으로 옮길 수 있다.
조 교수는 ‘빵을 먹은 이들이 다섯 천부장이었다’는 말은 백부장과 오십부장들이 참석한 그날의 특별한 만찬 의례에서 그들 가운데 다섯명의 천부장을 선출했다는 얘기고 예수가 그들에게 성찬의례를 베풀었다는 뜻이라고 풀이한다.
천부장들은 당시 예수가 한때 소속돼 있던 에세네파 공동체의 최고의결기관에서 재판관들과 사제장들, 부족장 등과 함께 그 조직 주요 구성원이었다.

사해 문헌 중의 에세네파 예식에 대한 규례들 중에도 “이스라엘의 천명의 장과 백 명, 오십 명, 십 명의 지도자와 재판관” 등이 재판 청문회에 참석한다는 내용들이 들어 있다. 나중에 에세네 공동체의 한계를 지적하며 떠나간 예수의 공동체 역시 성찬의례를 통해 다섯 천부장을 뽑고 그들이 열두 제자들 모임에 합류하는 좀더 발전된 상부조직을 갖게 된다. 열두 광주리의 12라는 숫자도 이스라엘 12지파, 12제자처럼 당시 사회의 현실을 반영하는 상징성을 갖고 있고, 메시아의 도래를 알리러 각지에 파견한 72제자의 72라는 숫자도 당시 천문관념에 따라 지파당 6명씩 배치한 결과로 읽힌다.

그렇다면 오병이어 기적의, 외딴곳 그 많은 군중을 어떻게 먹이느냐는 제자들 질문이나, 다 먹이고 남은 빵과 물고기가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는 복음서들 얘기는 오역을 그럴듯하게 포장하기 위해 후대에 추가되고 윤색된 내용일 가능성이 있다. 그날 성찬의례 참석자, 빵과 물고기를 단합과 사명과 정체성 확인 차원의 의례행위로 받아먹은 사람들은 예수 공동체의 소수 지도급 인사들이었다. 마르코 8장의 일곱개 빵으로 사천 명을 먹였다는 얘기도 일곱명의 원로들 모임에 합세할 네명의 천부장을 선출한 것으로 읽는 게 훨씬 더 설득력이 있다.

루가 6장의 “가난한 자는 복 받을 것입니다.
천국이 그들 것입니다”라는 예수의 말은 마태오 5장에서는 “마음으로 가난한 자는…”으로 돼 있다.
‘마음’의 히브리어는 ‘레브’다. 그런데 레브는 특정 맥락에서 모세 오경 또는 하느님의 말씀을 가리키는 ‘토라’의 은유적 표현으로도 사용된다. 따라서 ‘마음으로 가난한 자’라는 말은 토라 공부 때문에 가난한 자, “하느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는 데 전념하여 돈벌이에 급급하지 않아 구차한 삶을 사는 사람”을 뜻한다는 게 조 교수 풀이다. 따라서 ‘마음이 가난한 자’로 옮기는 건 의역이란다.

이런 식으로, 복음서들의 갖가지 치유기적의 의미, 두드리면 무엇이 열린다는 것인지, 첫째가 나중 되고 나중이 첫째 된다는 게 뭔지, 일 많이 하나 적게 하나 모두 같은 삯을 지불하는 포도밭 주인의 비유, 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가는지, 카이사르 것은 카이사르에게 주라는 건 무슨 의미인지, 왜 유다는 마지막 순간 예수에게 입 맞췄는지 등 성서 속의 많은 비유와 예화들이 전혀 새롭게 해석된다. 중요한 건 그것이 막연한 추론이 아니라 구체적인 문헌 근거들을 토대로 이뤄진다는 점이다.

사해문헌 중의 <하박국서 해석>엔 ‘진리’의 이름으로 불린 사제가 등장한다. 그는 이스라엘을 지배할 때 교만해져서 하느님을 떠났으며 재산 때문에 법규들을 배반하고 반동폭력배와 백성들의 재산을 훔쳐간 ‘악한 사제’로 로마 법정에 선동 혐의로 넘겨져 사형당한다. 조 교수는 그 사나이가 바로 예수라고 본다. 그를 악한으로 묘사한 하박국서 해석은 예수가 자신들을 배신했다고 본 이 해석서의 작성 주체인 에세네파의 시선이다.

바리새, 사두개는 물론이고 한때 자신이 그 사제요 교사로 복무했던 에세네파의 한계까지 과감하게 뛰어넘었고 결국 그 때문에 죽임을 당한 예수. 900쪽의 두툼한 <예수 평전>은 당대의 문헌자료들과 문화적 배경설명을 토대로 그 생애를 치밀하게 재해석한다.

에세네 ‘사해 두루마리’ 다양한 성서 해석 근거로

1947년 사해 북서쪽 쿰란의 계곡 언덕에서 잃어버린 염소를 찾던 두 젊은 양치기가 동굴 속의 항아리에서 일곱 개의 양피지 두루마리를 발견했다.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발견’으로 일컬어졌던 ‘사해 두루마리’들은 11개 동굴에서 모두 813가지가 나왔다. 이 가운데 223개가 히브리 성경 사본들이며, 나머지는 외경들과 공동체 규례, 법규, 예언서 등을 해석한 해석서, 종교절기에 관한 지침서와 감사 시편 등이었다. 대부분이 히브리어로 씌어졌고 96개 문서는 아람어, 7개가 그리스어 문서였다. 히브리 성경 사본 중 82개가 모세 오경 사본이었고 예언서 사본 41개 중 21개가 이사야 사본이었다. 하지만 온전한 것은 12개 정도.

에세네 ‘사해 두루마리’ 다양한 성서 해석 근거로

국내 유일의, 그리고 세계 11번째 앗시리아학 학위 소지자 조철수 교수에 따르면, 매년 100여개의 관련논문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사해문헌의 작성자들은 엣세네파 사람들. 1세기의 유대 역사학자 요세푸는 기원전 150년부터 서기 70년까지 유대 지방에는 바리새와 엣세네, 사두개라는 세 주요 분파가 있었다고 기록했다. 사두개는 사제들과 그 친인척 등으로 구성된 상류 기득권층으로 로마 제국 체제에 적극 가담한 자들이었고, 바리새는 전통적인 모세 법규에 집착하면서 사회참여를 주장한 타협적 중산층 지식계급이었다. 1세기께 형성된 랍비 유대교는 바리새의 후예들이다. 바리새를 비판한 엣세네는 종말론에 입각해 메시아가 도래할 새 세상을 꿈꾸는 신흥 자치공동체 세력. 이밖에 로마정권에 무력으로 저항한 열심당과 예수를 메시아로 믿은 예수 공동체 등이 등장해 첨예하게 충돌한 당시 이스라엘은 몹시 혼란스러웠다. 일제 패망 뒤에도 외세의 영향이 지속되고 있는 한반도 상황과도 닮은 점이 많다.

항상 그리스나 로마 등 외세와 결탁하면서 모세 오경의 내용을 글자 그대로 지키려 했던 사두개. 서기 2세기 저항세력을 격파한 로마는 유대인들의 예루살렘 입성을 막았고 성전이 없어진 상황에서 사두개도 사라졌다. 그리하여 유대교는 사제 없는 종교가 됐다.

토라에 집착하면서도 사제계층과 권력층에 반발한 바리새들은 1세기 말 모세 법규를 그대로 지키려는 샴마이파와 개혁적인 힐렐파로 나뉜다.

재산을 공동관리하며 가난한 삶을 찬양했던 내세적·자립적 공동체를 여러 도시들에 세웠던 엣세네 사람들은 로마 네로 황제의 폭정에 항거해 들고 일어선 서기 66년의 열성파 유대인들의 독립항쟁에 합세했다. 그러나 처절했던 마짜다(마사다) 항전으로도 널리 알려진 그 저항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진 엣세네들은 배우고 가르치던 두루마리들을 근처 동굴들에 숨기고 피신했다. 그렇게 해서 살아남은 것이 사해 두루마리다.

앞서 기원전 7년 12월 1일 태생일 가능성이 높은 예수는 20대에 엣세네파 사제가 됐고 개혁적인 바리새의 힐렐파 신조를 많이 받아들였다. 예수 공동체는 그러나 엣세네파의 율법주의를 거부하고 불치의 병자나 불구자, 무식쟁이들을 과감하게 받아들이는 등 기성체제 전반에 반기를 들었고 사랑과 평화를 설파했으며, 혈연·지연 중심의 민족종교 틀을 넘어 믿음에 바탕을 둔 신앙공동체로서 보편종교를 지향했다. 이 혁명적 행보는 사두개와 바리새, 엣세네파에게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으며, 결국 그들은 예수 제거를 공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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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오병이어의 기적(五餠二魚─奇蹟)은[1]예수의 기적 가운데 하나로, 예수가 한 소년으로부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취하여 5천 명의 군중을 먹였다는 기적을 가리킨다.[2] 간단히 오병이어라고도 한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빵과 물고기를 취하여 군중을 먹인 예수의 두 기적들 가운데 하나로, 마르코의 복음서 8장과 마태오의 복음서 15장에는 이와 유사하지만 다른 기적이 서술되어 있다.

    본문

    5,000명의 군중을 먹이신 기적인 이 기적은 신약성서의 사복음서에 모두 등장하는데, 각각 다음과 같다.

    의미

    가난한 이들에 대한 예수의 지극한 마음을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마르코의 복음서에서 이르기를 예수께서는 가난한 이들을 보면서 불쌍히 여기셨다고 말하는데, 이는 "장이 끊어질 것처럼 고통스럽다"라는 뜻을 가진 '스플랑크니조마이'를 옮긴 것이다. 로마제국, 로마제국의 간접통치자인 헤로데 왕실, 예루살렘 성전 제사장 세력들의 수탈 때문에 굶주리는 불쌍한 민중들의 처지를 헤아리면서 예수는 무척 마음이 쓰렸던 것으로 의미된다.

    유사한 기적

    빵과 물고기를 취하여 군중을 먹인 다른 유사한 기적으로서 4,000명의 군중을 먹이신 기적이 있으며 다음 복음서들에 있으며 루가복음과 요한복음에는 없다.

    • 마르코복음 8장 1~9절
    • 마태오복음 15장 32~39절

    이 기적에서 예수는 군중에게 빵 일곱 개와 작은 물고기 몇 마리를 취하여 군중을 먹이는 기적을 보이셨다.[3]

    각주

  2. 한자적인 해석 그 자체로는 빵(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이지만, 당시에는 실제로 빵과 물고기가 쓰였다.
  3. John Clowes, 1817, The Miracles of Jesus Christ published by J. Gleave, Manchester, UK, page 109
  4. John Clowes, 1817, The Miracles of Jesus Christ published by J. Gleave, Manchester, UK, page 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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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프스 트라이얼(A. Scopes Trial)
하나의 기적을 믿으면 또 하나의 기적을 믿기도 쉽다.

성경은 예수님이 행하신 놀라운 기적들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오병이어의 기적이다.
이 기적은 마태복음 14:13∼21, 누가복음 9:10∼17, 요한복음 6:1∼13 등 4복음서에 모두 기록이 될 정도로 복음서의 저자들이 아주 중요하게 다룬 사건이다.

떡은 아주 어린아이의 한 끼 식량이고, 놀랍게도 그 어린아이는 그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자기의 도시락을 예수님께 드렸다. 기적은 여기서부터 시작이 되었다. 이 아이가 예수님께 드린 보리떡은 히브리어로 ‘마슈나’다. 이 떡은 일반적으로 사람이 아닌 짐승이 먹는 것이었다. 그리고 두 마리의 물고기를 드렸는데 이 고기는 ‘이크수스’다. 갈릴리 호수에서 어부들은 잡은 고기를 추려서 큰 고기는 집으로 가져가고 너무 작아서 먹을 수 없는 것은 해변에 버리는데 그 고기가 바로 ‘이크수스’다. 이 아이가 드린 물고기는 바로 ‘이크수스’다. 떡 중에 가장 하급의 떡 ‘마슈나’, 물고기 중에 너무 작은 물고기 ‘이크수스’였다.

아마 어린아이가 예수님을 따라가서 말씀을 듣겠다고 하니까 부모가 해변에 다니며 버린 고기를 주워다가 도시락을 싸 주었는지 모르겠다. 그것을 아이는 예수님께 드렸다. 그것이 5천명을 배부르게 먹게 하고 열두 광주리가 남았다. 가장 작은 것으로부터 가장 큰 기적이 일어났다. 

헌신이 기적

예수님께 드리는 헌신 위에 하나님의 기적이 임했다. 예수님 앞에 소년의 정성으로 1인분의 도시락이지만, 그것을 드렸을 때 많은 생명에게 유익하게 쓰였다. 우리에게 무엇이 있는가? 크고 작고, 많고 적고의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에게 무엇이든지 드리기만 하면 가장 유익하고, 가치 있게 사용된다. 예수님께 드리는 작은 헌신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한 사람의 헌신을 통해서 위대한 일을 이루실 수 있다. 보리떡 다섯 개, 생선 두 마리가 주님의 손에 들어갔을 때 그것은 5천명을 먹이고도 남았다. 무슨 뜻인가? 작지만, 보잘것없지만 예수님께 온전히 헌신하면 이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문제는 내가 온전히 헌신하는 데 있다. 자기의 것을 모두 주님께 드리는 데 있다. 그러면 결국 자기도 살고 다른 사람도 사는 것이다.

자기의 희생과 봉사가 없이 다른 사람을 구할 수 없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나 보고 기대하기 전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찾고 생각해 보아야 한다. 아이는 특별한 것을 드린 것이 아니다. 그저 자기가 가지고 있던 것을 드린 것 뿐이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이 무슨 특별한 것이 아니다. 그저 우리에게 있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드리는 것을 요구하신다. 시간, 달란트, 지식, 물질, 무엇이든지 있는 그대로를 온전히 드리면 된다. 주님을 위하여 드릴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는가? 내게 주신 물질이 있는가? 하나님이 내게 주신 물질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시기를 바란다.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땀 흘리게 하셨고 그 대가로 내게 주신 물질들을 귀하게 사용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시기를 바란다. 나를 위해서도 선용해야 하지만, 특별히 ‘하나님께서 지금 원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갖고 있는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을 하자.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날 것이다. 내게 무슨 재능이 있는가? 그 재능을 주님을 위하여 ‘필요하시다’ 할 때에 드리자. 미미한 재능이지만 하나님은 크게 사용하셔서 많은 사람들에게 크게 유익을 주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오병 이어의 기적에는 헌신이 있었다. 좋은 것은 아니지만 있는 그대로 주님 앞에 드렸다. 그냥 믿고 드릴 때 기적이 임한다.

감사가 기적

오병이어의 기적에는 감사가 있었다.
감사할 때 기적이 일어났다.
기적은 적은 것이라도 하나님을 향해 감사할 때 일어난다.

마가복음 6:41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시매. 

예수님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하늘을 우러러 보시며 감사기도를 드렸다.
어떻게 보면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늘을 우러러 감사기도를 드리셨다.

이 때에 기적이 일어났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감사로부터 시작되었다.
지금 우리의 생활이 길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는가?
생활이 온갖 흑암과 공허와 환난이 나를 둘러싸고 있는가?
그로 인하여 삶이 답답한 환경에서 몸부림치고 있는가?
그럴수록 하늘을 향해 감사하기 바란다.
그러면 기적이 일어난다.
감사와 불평은 자신에게 달려 있다.
하지만 감사할 조건이 수두룩해도 감사하지 않는다.
그렇게 불평만 하면 계속 불평할 일만 생긴다.
그러나 원망스럽고 괴로워도 감사하기 시작하면 감사의 조건이 얼마든지 생기게 된다.

마태복음 25: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있는 것 까지도 빼앗기리라.

지금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하나님을 향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 감사 위에 하나님의 기적적인 축복이 임할 것이다.

순종이 기적

오병이어의 기적에는 믿고 따르는 순종이 있었다.
어린 소년의 순종이 있었다.
제자들의 찾음에 자신이 갖고 있었던 것을 예수님께 드리는 순종이 있었다.
기적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리고 제자들의 믿음의 순종이 귀했다.

마가복음 6:39-40
제자들에게 명하사 그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시니 떼로 백 명씩 또는 오십 명씩 앉은지라.

주님은 제자들에게 명령하셨다.
제자들로 하여금 사람들이 제대로 무리를 지어 앉도록 질서를 위해서 잘 정리시키셨다.

어떤 제자들은 어떻게 처리할까 두려워했을지 모른다.
‘도대체 어떻게 하시려고 할까?’ 하는 의아심이나 궁금함 말이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이 무엇인가를 하실 것을 믿었다.
엄청난 일을 이루실 줄로 믿고, 그들은 그 일을 순종하여 자신들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다.
하나님은 이런 바탕 위에서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신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작은 헌신과 믿음의 순종을 기다리신다.
시도하는 사람을 통해 축복의 역사가 일어난다.
희생하는 사람을 통해 축복의 역사가 일어난다.
주님의 축복을 통해 축복의 역사가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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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성에 '바늘 귀'는 실재했을까?



예루살렘 성에 '바늘 귀'는 실재했을까?


예수가 살던 시대의 예루살렘 성에 '바늘 귀'라 불리는 성문이 실재했을 것이라는 생각은 아주 오랜 전부터 있어 왔다.
다른 성문보다 매우 작기에 '바늘 귀'라 불린 암문(혹은 개구멍)이 존재했으리라는 생각은 사실 그럴싸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에 덧붙여진 말들도 그럴듯했으니, 그 문의 크기는 사람은 여하히 통과할 수 있지만 낙타의 경우는 짊어진 물건을 모두 내려놓고 알몸뚱이가 되어야만 겨우 통과할 수 있는 정도라는 것이었다.
만일 그렇다면 이 말은 앞에서 인용한 마태복음의 문장을 쉽게 이해시킬 수 있다.
그 문장 다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제자들이 듣고 몹시 놀라 이르되,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마태복음 19: 23-25)*

 * 이 문장은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도 실려 있는데, 내용은 거의 같다.

아울러 이렇게 보면 위 예수의 말은 매우 설득력 있는 주문이 된다.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으나 재물에 대한 욕심으로 가기가 힘들니 그 욕심을 모두 내려놓으라는 말이 성립되기 때문이다.(부자를 폄훼하는 것은 아니지만, 9원을 가진 자가 10원을 채우기 위해 가난한 자의 1원을 뺏는다는 인식은 동서가 비슷하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하면 이것은 어불성설이며 본말 또한 전도돼 있다.

'바늘 귀'는 통과할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그 욕심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예수가 강조하고자 한 것은 낙타의 통과 여부가 아니라 그 낙타에 실린 재물이었을 터, 하지만 그림에서 보다시피 부자는 자신의 욕심을 버리지 않는다.
그저 짐을 잠시 내려놓았다 다시 싣는 수고가 뒤따랐을 뿐이다.
예수가 원한 것은 분명 이런 형태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문의 통과 주체는 사람이지 낙타가 아니다.
사람이 욕심을 버리는 게 중요하지 낙타 등 위의 수하물을 내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런 의미를 몰랐는지, 아니면 알고도 모른 척 밀어붙인 것인지 역대로 천국을 갈망하는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벽에서 아래와 같은 '바늘 귀'들을 찾아냈다. 물론 역사적 근거는 없는 것들이다.(굳이 장소를 명시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오해

성경이 기록된 사건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은, 막연히 성경의 내용을 상상하는 것과는 분명 큰 차이가 많다. 이스라엘에서 성경 현장학습을 인도하면서, 자주 받는 질문들과 오해들이 있는데, 그 중에 몇 가지를 간추려 여기에 소개한다.

바늘 귀 (the eye of a needle)

마태복음 19:24절에 예수님은 “낙타가 바늘 귀(the eye of a needle)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는 말씀을 하셨다. 여기에서 성전으로 들어가는 여러 문 가운데 ‘바늘 귀’라는 문이 있다는데 그 문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을 받고 한다.

그런 문은 없다. ‘바늘 귀’ 문은 예전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다. 일부 설교자들은 ‘바늘 귀’ 문을 말하면서, 낙타가 성전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지고 있던 모든 짐을 내리고 무릎을 꿇어야만 들어가는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모든 짐을 내리고, 겸손하게 무릎을 꿇어야만 들어갈 수 있다고 설교한다고 한다.

예수님 당시 헤롯 성전 뜰로 들어가는 몇 개의 문이 있었으며, 지금도 그 문의 흔적은 찾을 수 있다. 남쪽에서 성전 뜰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은 훌다 문(the gate of Hulda)이 있다. 훌다 문은 삼중 문(triple gate-위의 사진)과 이중 문(double gate)을 가리킨다. 삼중 문은 성전 남쪽의 동쪽에 있었는데, 주로 입구로 이용되었고, 이중 문은 성전 남쪽의 서쪽에 있었는데, 출구 또는 상을 당한 가족의 성전 입구로 이용되었다.

서쪽에서 성전 뜰로 들어가는 두 개의 통로인 로빈슨 아치(Robinson’s arch- 아래 사진)와 윌슨 아치(Wilson’s arch-사진)가 있었다. 윌슨 아치는 성전과 예루살렘의 서쪽 언덕에 위치한 헤롯 궁, 대제사장의 주거지, 상위 계층의 생활 근거지를 서로 연결했던 통로로써 왕, 대제사장 및 상위 계층이 주로 이용했던 통로였다.

그리고 북쪽 베데스다 연못 근처에서 성전 뜰로 들어가는 문이 있었는데, 이 문은 요한복음 5:2절에 양문(Sheep gate)으로 기록되었다. 성경 어디에도 ‘바늘 귀’ 문은 없다. ‘바늘 귀’ 문은 15세기 이후부터 설교자들을 통해 강단에서 선포되어 온 대표적인 허구에 속한다. ‘바늘 귀 문’은 없다고 이야기해 주어도 여전히 반신반의한다.

대제사장 발목에 맸다는 끈

유대 월력으로 일곱 번째 달, 제 십 일은 대속죄일 (욤 키푸르)이다. 이 날은 대제사장이 자신의 죄와 백성들의 죄를 사하기 위하여 속죄 의식을 행하는 날이다 (레 23:27-32). 대제사장이 속죄 의식을 위하여 지성소로 들어갈 때, 그의 발목에 끈을 맸다는데, 끈을 맨 이유는 대제사장이 죽으면 끌어내기 위한 것이라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히브리어 성경, 신약 성경, 사해 문서, 요세푸스의 기록, 교부들의 기록, 미쉬나, 탈무드 어디에도 대제사장의 발목에 끈을 맸다는 기록은 없다.

이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13세기 유대인 조하르(Zohar)의 기록에서 찾아볼 뿐이다. 조하르는 이렇게 말하였다. “대제사장의 발목에 금으로 된 줄을 묶어 두었는데, 이는 그가 지성소에서 죽었을 경우, 그를 끌어내기 위한 것이다.” 조하르는 그리 신뢰할 유대 학자가 아니다. 발목에 끈을 맸다는 것은, 레위기 16:3-4절에 기록된 지성소로 들어가는 대제사장의 예복에 위반될 수 있다: 아론이 성소로 들어오려면 수송아지로 속죄 제물을 삼고 수양으로 번제물을 삼고 거룩한 세마포 속옷을 입으며 세마포 고의를 살에 입고 세마포 띠를 띠며 세마포 관을 쓸지니 이것들은 거룩한 옷이라 물로 몸을 씻고 입을 것이며. 일부 기독교 학자들은 출애굽기 28:35절 과 히브리서 9:7절 을 주석하면서 조하르의 글을 인용하기도 한다. 특히 히브리서 9:7절에서 요한 길(John Gill)은 조하르의 글을 소개하며 이렇게 주석하였다: “유대인들은 말하기를, 대제사장이 지성소로 들어갈 때, 그의 발에 끈이나 가죽 띠를 묶어 두었는데, 이는 대제사장이 지성소에서 사망하게 되면, 그를 끌어내기 위함이다. 다른 제사장이 지성소로 들어가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었기 때문에 대제사장이 죽으면 누구도 대제사장의 속죄 의식을 대신할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하르나 요한 길이 말하는 대제사장의 발목에 끈을 맸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이것 역시 설교자들의 대표적인 허구에 속한다.

만약 대제사장이 속죄 의식을 행하다 지성소에서 죽는 일이 발생하면 대제사장의 직무를 대신할 제사장은 있었다. 누가복음 1:8절의 세례 요한의 부친 사가랴는 ‘그 반열의 차례대로 제사장의 직무를 하나님 앞에 행할 쌔 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제비를 뽑아 주의 성소에 들어가고’라는 말씀이 있다. 만약 지성소에서 대제사장이 죽으면, 그의 발목에 맨 끈을 당기므로 시신을 끌어낸 것이 아니라 대제사장의 직무를 대행할 사람이 지성소로 들어가 대제사장의 시신을 끌어내는 것이다. 허구는 또 다른 허구를 만들어 낸다. 그러면,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이상해 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인 YHWH를 기록하는 서기관

성경의 소중한 사본이 대량으로 발견된 쿰란 유적지를 여행할 때, 간혹 서기관들에 대한 질문을 받곤 한다. 서기관들이 성경을 필사하면서, 하나님의 이름 YHWH을 기록할 때마다 붓을 꺾어 버리고 새로운 펜을 사용하였으며, 온 몸을 정결케 하는 정결 의식 또는 손을 씻은 후에 기록했다는 말이 있는데, 사실인가라는 질문을 받는다. 이것 역시 사실이 아니다. 유대인들의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드러내기 위하여 서기관들의 열심을 강조한 말이기는 하지만, 붓을 버리고 새 붓을 사용했다거나 목욕을 한 후에 다시 기록하기 시작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서기관(sofer)을 뜻하는 히브리어는 소페르이다. 소페르는 세다(count)를 뜻하는 사파르(safar)에서 온 단어이다. 서기관이란 말은, 서기관이 성경을 필사할 때, 자신이 기록한 단어를 정확하게 셌던 것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한다. 서기관이 사본의 글자 수를 세었던 것은, 사본의 원본 글자 수와 자신이 기록한 글자 수를 세므로 정확하게 기록했는지를 판단했기 때문이다.

▲기브온.
기브온 위에 멈췄던 태양

기브온(사진)은 예루살렘 다윗성에서 북서쪽 약 5-6마일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솔로몬의 일천 번제에 대한 배경과 여호수아 10장에 기록된 이스라엘 백성들과 아모리 족속들 간의 전쟁에 대한 배경을 살펴 보면서 여호수아의 기도를 묵상할 때가 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신 때가 이렇게까지 없었는데, 당일 여호수아의 기도는 이랬다: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할 찌어다 (수 10:12). 일부 목회자들은 여호수아의 태양이 멈추게 된 기도와 열왕기하 20:10-11절에 기록된 히스기야의 기도로 해가 10도 뒤로 물러간 배경을 이야기하면서, 나사(NASA) 과학자들이 잃어버린 하루를 찾았다고 말하는데 그것이 사실이냐고 묻는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강조하고 싶을 지라도, 나사(NASA) 과학자들이 잃어버린 하루를 찾았다는 잘못된 정보를 인용해 가며 하나님의 능력을 강조하는 것은 옳지 않다. 성경에서 잃어버린 하루를 찾기 위한 노력은 NASA가 존재하기 이전에도 있었다.

그러나 본문에서 이것은 생각해 볼 수 있다. ‘태양은 기브온 위에, 달은 아얄론 골짜기 위에 머무르라’는 여호수아의 기도에서, 기브온은 아얄론 골짜기의 동쪽에 있다. 다시 말하면, 기브온은 태양이 뜨는 동쪽에, 그리고 아얄론 골짜기는 태양이 지는 서쪽에 있다. 그리고 태양과 달은 하늘에 같이 떠 있었는데, 이런 일이 일어날 시간은 점심 때도 저녁 때도 아닌 아침 시간이다. 여호수아는 이른 아침에 태양이 여전히 기브온 위에 있고, 달은 서쪽 아얄론 골짜기에 있을 때에 아모리 족속들과 전쟁을 시작하면서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하였다.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할 찌어다 (수 10:12).



자비량 목회(自費糧, one's own expense), 자비량 선교


자비량 목회(自費糧, one's own expense)

교회의 목회, 교육, 전도, 선교 사역에 있어서 목회자 및 사역자가 교회나 해당 단체에 소속되거나 단독으로 활동할 때 어떠한 사례나 대가를 받지 않고 자신이 해결하는 방식을 말한다.
이와 반대되는 용어는 삯군 목회 또는 생계형 목회가 있다.

자비량(전문인) 선교사는 직업적 전문성, 사역적 전문성을 가져야 한다.

자비량 선교(tent-making mission)는 선교사 입국의 제한이나 선교지 상황의 어려움 따른 창의적 접근지역을 위해서 개발된 전략이다.
이는 전문인 선교라고도 할 수 있다.
미국전문인선교협의회는 “전문인 선교사는 자신의 기술이나 전문성을 소유하고 타 문화권에서 접근하여 거주하면서 현지인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삼는데 최우선권을 두며, 가능한 곳에서는 교회를 개척하고 견고하게 하는 그리스도의 증인이다.”라고 전문인 선교를 정의한다.

전문인 선교는 기본적으로 직업적 전문성과 사역적 전문성을 두 기둥으로 하고 있다.
직업적 전문성은 현재 자신의 직업을 복음 전도하는 일에 전략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사역적 전문성은 제자를 양육하여 교회를 개척하는 일, 제자를 양육하는 일 등 사역에 전문성을 개발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자비량(自備糧)

자기가 쓸 양식이나 물품을 스스로 갖춤, ‘자취’의 방언(함북)

자비량(自備糧, tent maker)

길을 떠날 때 자기가 직접 양식을 가지고 가거나 또는 그 양식.

 

자기 스스로 준비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교에서의 이 용어는 선교나 선교사에 붙여진용어이다.
자비량 선교사란 직업을 가진 선교사, 즉 다른 문화권 속에서 직업을 가지고 자신의 생활비를 벌면서 동시에 선교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들의 직업이 생활비를 벌기 위한 수단만은 아니다. 그들은 직업을 통하여 만나는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복음도 전하는 것이다. 이 일은 선교와 직업 모두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

즉, 하느님이 직업으로 자신을 부르고 인도했다는 확신이 필요하고 자비량 선교사가 되는 것은 마음의 원함만 가지고는 안된다. 자신이 타문화권 사역자로 부름을 받았다면, 그 문화로 부른 하느님의 인도하심을 증거로서 확증해야만 한다.

 

자비량 사역자(선교사)라는 말은 선교지에서 직업을 가지고 생활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섬겨 선교하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어왔다. 이 용어는 《사도행전》 18장 3절에서 장막 만드는 일을 하면서 선교사역을 했던 바울로의 예에서 연유한 것이다. 자비량 사역자는 사역을 하려는 목적으로 새로운 문화나 나라에서 일자리를 얻은, 이른바 이중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다.

 

 

< 사도행전 > 18장

 

1 그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2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3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4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

 

 

1 After these things Paul departed from Athens, and came to Corinth;

2 And found a certain Jew named Aquila, born in Pontus, lately come from Italy,

  with his wife Priscilla; (because that Claudius had commanded all Jews to depart from

  Rome:) and came unto them.

3 And because he was of the same craft, he abode with them, and wrought: for by their

   occupation they were tentmakers.

4 And he reasoned in the synagogue every sabbath, and persuaded the Jews and the

  Greeks.

 

 

< 고린도전서 > 9장

 

6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리가 없겠느냐

7 누가 자기 비용으로 군 복무를 하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열매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6 Or I only and Barnabas, have not we power to forbear working?

7 Who goeth a warfare any time at his own charges? who planteth a vineyard, and eateth

  not of the fruit thereof? or who feedeth a flock, and eateth not of the milk of the fl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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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비량 (自備糧/tentmaker)

* 자비량 목회자 (Tentmaking Pastor)

* 자비량 선교사 (Tentmaking Missionaries)

 

21세기 해외선교의 상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분석이 나옵니다.

첫째로, 인구성장과 다원화되는 사회의 변화를 생각한다면 복음을 받아야 할 사람들에 대해 선교사의 수는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둘째로, 목회자 선교사의 입국을 제한하는 폐쇄지역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셋째로, 종족과 문화적 장벽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넷째로, 늘어나는 선교자금의 문제가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뚫고 지속적이고도 적극적으로 해외선교를 섬길 바람직한 방안으로 자비량 선교가 제시되고 있습니다. 전 교인의 99.5%를 차지하는 평신도들이 동원되고 이들이 스스로 생활비를 벌어 자급하며 선교하는 평신도 자비량 선교가 활성화될 때, 이상의 문제들이 해결될 뿐 아니라 세계선교는 사도행전시대와 같은 새로운 물결이 일어날 것입니다.

 

 

자비량 선교

성경에서 '자비량'이라는 용어는 고린도전서 9:7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자비량'(self-supporting)이란 일군이 스스로 경비를 댄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자비량하는 수단으로 장막만드는 일(tent-making)을 하였다.
텐트 메이킹 미선 tent-making mission 을 물질 후원구조로 이해할 때 '자비량 선교'가 되며, 사역형태로 이해할 때 '전문인 선교'가 되는 것이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일군이 물질적 지원을 받을 권리가 있음을 알았지만, 자발적으로 자비량하며 복음을 전하기로 작정했던 것입니다. 관련된 주요 구절들은 살후 3:7-9, 사도행전 20:33-35절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자비량 선교를 한 이유를 정리해 보면,

첫째로, 복음의 신뢰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둘째로, 스스로 모범을 보이므로 개척된 교회들이 재정적으로나 영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하고자,

셋째로, 복음전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고,

넷째로, 직음을 통해 동질성을 가진 사람들을 이해하고 섬길 수 있으므로,

다섯째로, 그리스도인들이 일반직업에 종사한다는 이유로 영적 사역에 깊이 참여할 수 없다는 변명이 타당치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여섯째로, 새 신자들에게 근면한 노동으로 수익으로 곤경에 처해있는 그리스도인이나 비그리스도인을 도와야 한다는 점을 가르치고자, 일곱째로, 예수 그리스도께 빚졌다는 강한 채무의식 때문에, 여덟째로, 가장 큰 이유는 자비량하면서 선교하는 것이 예수님의 주는 정신, 선교정신에 부합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자비량 선교의 장점들

첫째, 평신도 자비량 선교사들은 우선 타문화권에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습니다.

둘째, 오늘날 목사나 선교사의 신분으로 들어갈 수 없는 어떤 나라에도 평신도 자비량 선교사들은 자유로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셋째, 막대한 선교비 문제가 없습니다.

넷째, 평신도 자비량 선교는 선교사 자원의 풍부함이 큰 장점입니다. 한국교회의 99.8%가 평신도들입니다.

다섯째, 평신도 자비량 선교사들은 투철한 신앙과 선교의 열정이 넘칩니다.

여섯째, 평신도 자비량 선교사는 자기 자신의 직업에서 얻는 성취감과 만족을 통해, 복음을 전하기 어려운 지역에서 사역의 실패로 겪는 좌절과 실망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일곱째, 평신도 자비량 선교사들은 민간 외교관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여덟째, 평신도 자비량 선교사들은 선교지에서 화해자요 중재자의 역할을 다양하게 감당할 수 있습니다.

아홉째, 평신도 자비량 선교사들이 부득이 귀국하게 되었을 때 이들은 본국에서도 훌륭한 지도자들이 되어 교회와 사회에 봉사할 수 있습니다.

열째, 유학생 선교사들의 경우 현지에서 공부하면서 현지인 학생들에게 선교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들이 학위를 받은 후 현지에서 직장을 얻어 선교할 경우 매우 이상적인 '장기 체류' 평신도 자비량 선교사가 될 수 있습니다.

 

평신도 자비량 선교사들의 직업별 유형

1. 파견근무
2. 의사
3. 고용인
4. 해외 청년 봉사단
5. 사업(자영업)
6. 교수
7. 외교관
8. 교사
9. 간호사
10. 성악가
11. 컴퓨터 프로그램어
12. 태권도 사범
13. 유학생
14. 이민
15. 단기선교사
16. 건축기사
17. 스튜디어스
18. 사진기술자
19. 약사
20. 목축업
21. 선원
22. 선장
23. 항해사
24. 이용사
25 . 미용사
26. 임상병리사
27. 조리사
28. 침술사
29. 사회복지 분야

이상의 예들은 모든 분야의 직업을 가진 분들이 선교사로서 소명을 받고 충분한 훈련만 받아 준비된다면 훌륭한 평신도 자비량 선교사들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동시에 21세기는 평신도 자비량 선교의 시대가 되리라는 비전을 보여줍니다.

한국에서 파송된 자비량 선교사 1639명을 직업별로 분류한 통계가 다음과 같았습니다.
(1)의료직
1)간호사 104명 6.34%,
2)의사 18명 1.09%,
3)임상병리사 3명 0.18%,
4)치과의사 2명 0.12%,
5)치과기공사 2명 0.12%,
6)한의사 3명 0.18%,
7)물리치료사 1명 0.06%,
약사 4명 0.24%,
약물치료사 1명 0.06%,

(2)교육직
1)유학생 633 38.6%,
2)어학연수 6명 0.36%,
3)교수 13명 0.79%,
4)교사 24명 1.46%,
5)대학강사 2명 0.12%,
6)대학사무원 3명 0.18%,
7)연구원 3명 0.18%,

(3)금융직
1)금융전문가 1명 0.06%,
은행원 7명 0.42%

(4)정부파견
1)외교관 44명 2.68%,
2)청년봉사단 15명 0.91%,
3)평화봉사단 1명 0.06%,

(5)일반직장 29명 1.78%(파견근무, 법률고문, 등)

(6)엔지니어 26명 1.76%(건축사, 건축업, 컴퓨터프로그래머, 토목기사, 자동차수리, 전자기사 등)

(7)스포츠 182명 11.06%(태권도, 합기도 등)

(8)사업 63명 3.77%, (무역업, 자영업, 농장, 사진현상소, 인쇄소, 재단사, 재봉사, 디자이너, 운전사, 미용사, 번역사, 상업 등)

(9)기타 448명 27.2% (사회사업, 취업이민, 배우자, 기타 등)

 

UBF의 자비량 선교 사례들

1. 파견근무 :
L 선교사는 대학시절에 성경 공부를 통해서 예수님을 영접하였고, 1987년에 H 중공업 뉴델리 지사 주재원으로 파견을 받았습니다. 그는 대학시절에 제자훈련을 받고 선교사명을 영접하였으며, 선교사 훈련을 받고 하나님께서 길 열어 주시기를 기다리며 준비하였습니다. 그러던 차에 상사 주재원으로 파견될 때 선교사로 임명을 받고, 처음 몇 개월간은 호텔에서 머물며 회사 일을 보았고, 근무 시간 후의 개인 시간에는 기도하며 인도 학생들에게 복음 전할 길을 찾았습니다. 주말이면 대학을 방문하여 학생들을 접촉하였고, 후에 가족이 오게 됨으로 개인 주택을 얻어 생활하면서 학생들을 가정으로 초대하여 좋은 관계성을 맺으며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믿음으로 회사일도 하니 회사 일도 좋은 성과를 거두어 계속 머물게 되었고, 본부의 인정을 받아 승진도 하였습니다. 그의 사역으로 지금은 150여명의 인도 대학생들이 매주일 모여서 함께 예배를 드리며 인도 대학선교에 동역하고 있습니다.

2. 의사 :
Y선교사는 대학 1학년 때 예수님을 영접하고 제자훈련을 받았으며 선교사명을 영접하고 길 열어 주시기를 기다렸습니다. 본국에서 의사요 교수로서의 안정된 직장과 삶을 버리고 1992년에 예수님의 사랑과 희생정신을 본받아 아프리카에 선교사로 나아갔습니다. 그는 한국정부에서 생활비를 보조받으며 우간다 병원에서 환자들을 진료하고, 의대생들을 가르치면서, 현지 대학생선교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을 가정에 초청하여 정기적으로 성경을 가르치고 함께 기도하기 시작한 결과 지금은 30여명의 학생들을 열매로 얻고 우간다 대학선교를 위하여 함께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에이즈 환자들이 많고, 신변의 위험이 있으나 예수님을 생각하고 순교정신으로 사명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는 매 주일 예배에서 설교도 하고, 학생들을 제자로 양육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본국의 선교후원단체의 지원으로 작은 병원을 세우고자 준비하고 있습니다.

3. 고용인 :
S 선교사는 대학에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선교사명을 영접한 후, 1991년에 대사관 행정보조 고용인으로, 아내는 가정부로 취업하여 몽골에 복음을 전하고자 선교사로 파송받았습니다. 그는 직장에서 근무하며 대학에서 몽골어를 공부하였고, 다른 동역자들과 함께 몽골 대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구약성경을 번역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150여명의 몽골 대학생들이 매 주일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있으며, 이들 중 수 십명의 제자들이 훈련을 받고 직접 현지 대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동역자들이 되었습니다.

4. 해외 청년 봉사단 :
A선교사는 대학시절에 예수님을 영접하고 선교사명을 영접하였으며, 선교사 훈련을 받고 선교사로 나갈 수 있는 길을 찾고 있는 중 한국 청년 해외 봉사단 모집에 응모하여 목공선생으로 스리랑카에 파견받게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목공선생으로 봉사단 일을 열심히 하면서 현지 대학생을 접촉하여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봉사단의 일은 일면 한국의 민간외교차원에서 개발도상국에 한국인들이 무임금(생활비는 한국정부가 감당함으로)으로 봉사하는 것이므로 현지인들로부터 좋은 영접을 받고 있습니다.

5. 사업(자영업) :
W 선교사는 한국과 중국이 수교도 되지 않은 때인 1988년부터 비지니스 비자로 여러 차례 정탐 여행을 하였으며, 한중 합작 회사운영을 하게 되어 사업 비자로 중국에 나아가 장기 체류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현지 대학생들과 개인적으로 사귐을 가지며 은밀하게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여러 처소에서 일대일 성경공부로 제자훈련을 하고 있는 중국 대학생들이 50여명에 이르렀습니다.

6. 교수 :
Z 선교사는 한국에서 대학원을 마친 후 일본에 유학생으로 나?【? 선교활동을 해왔습니다. 그곳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후에 현지 대학에서 교수 보조로서 일하면서 대학생 선교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평소에는 교수로서 강단에서 가르치고 일과 후와 주말에는 학생들을 아파트로 초청하여 성경을 공부시키며 제자 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7. 외교관 :
O 선교사는 대학시절부터 제자 훈련을 받았으며, 외무고시를 합격하여 외교관으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현지에서 훌륭한 외교관으로서의 공무를 수행하고 있으며, 일과 후와 주말을 이용하여 현지 대학생들을 만나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의 전도로 복음을 영접하고 제자가 되어 현지 대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열매들을 많이 얻었습니다.

8. 교사 :
A 선교사는 초등교사로서 러시아의 현지 한인학교 한국어 교사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녀는 훈련받은 선교사 후보생이었으며 교사 선교사로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얻고자 오랫동안 기도하며 찾고 있던 중에 정보를 얻어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9. 간호사 :
K 선교사는 선교사명을 영접하고 간호사로서 선교사로 나아갈 길을 찾는 중에 사우디에서 한국 해외 협력단을 통해서 간호사를 모집하는 기회에 한국에서의 안정된 직장을 사표내고 이곳에 지원하여 나아갔습니다. 병원에서 일하면서 환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으며, 외국에서 취업하여 온 간호사들을 그룹으로 매주 모여서 성경을 공부하며 복음을 심고 있습니다.

10. 성악가 :
C 선교사는 한국에서 대학 성악과를 졸업하고 독일에 유학생 선교사로 파송되었습니다. 그는 현지에서 성악을 공부하여 디플롬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현지 시의 오페라단에 단원으로 입단을 하여 활동하면서 현지 대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로 헌신하고 있습니다. 한국인 최초로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 전곡을 CD로 제작하였고, 독일내 14개 도시 순회 독창회도 열었습니다. 또한 독일어로 찬송가 테이프도 제작하여 보급하며 찬양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역도 감당하고 있습니다. 또한 성경의 본문을 중심으로 한 오페라를 직접 작사하여 오페사 공연을 통한 선교사역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습니다.

11. 컴퓨터 프로그램어 :
K 선교사는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캐나다에 나아가 현지 직장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컴퓨터 프래그러머로 일하면서 현지 대학생들에게 일대일 성경공부로 복음을 전하면서 제자양성을 하고 있습니다.

12. 태권도 사범 :
L 선교사는 태권도 사범으로서 현지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는 태권도 도장에서 제자들을 수련하면서 기도와 성경공부를 동시에 시키고 있습니다.

13. 유학생 :
C 선교사는 대학 1학년 때 대학생선교기관에서 성경을 공부하던 중 예수님을 영접하고 제자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선교 명령및 선교사들의 보고를 통해서 선교 사명을 영접하고 소명을 받았고, 77년부터 3년간 믿음과 제자양성 및 선교사 훈련을 받고, 1980년 1월 독일 Bonn대학으로 선교사 유학생으로 파송받았습니다. 이곳에서 공부하며 독일 대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50여명의 독일 학생들 가운데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사는 자들을 열매 맺었습니다. 그는 1985년에 약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고, 계속하여 독일 대학생 선교에 헌신하고 있습니다. 그는 독일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며 자연스럽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고, 처음에는 아파트에서 성경 공부를 시작했고, 지금은 건물을 세로 얻어서 활발한 복음 전파및 제자양성을 하고 있습니다.

14. 이민 :
L 선교사는 선교를 하기 위해서 1988년 가족과 함께 파라과이로 이민을 떠났습니다. 이를 위해 본국에서 안정된 직장을 버린 것은 물론입니다. 선교사로 파송을 받은 후 처음에는 언어를 습득하기 위해 학교에 들어가 공부하였고,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물질의 자립을 이루었습니다. 그후 농장을 만들어 목축을 하면서 현지 대학생 선교활동을 꾸준히 하고 있는데 지금은 20여명의 파라과이 대학생들이 꾸준히 함께 주일 예배를 드리며, 제자훈련을 받고 있습니다.

15. 단기선교사 :
방학을 이용하여 자비로 해외에 나가서 전도를 하거나 현지 선교사들을 돕는 학생들, 자원봉사로 해외에서 일정기간 봉사하는 의료팀들도 자비량 평신도 선교사의 유형에 속합니다.

 

평신도 자비량 선교에서 유의할 점

첫째, 자기 직업을 갖고 자립 생활을 하면서 선교를 해야 하는 직분이기 때문에 그만큼 굳은 신앙과 예수 그리스도의 헌신적인 삶을 배우는 준비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둘째, 평신도 선교사가 본국의 상사 주재원이거나 현지에 취업을 한 경우 등은 자기가 속해 있는 기관이나 회사에서 선교 활동을 반대할 수가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셋째, 파송교회 혹은 선교 기관에서는 평신도 선교사들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갖고 항상 형편을 살피며 기도 지원을 전폭적으로 해야 할 것이다.

넷째, 가능한 한 임지와 그 나라의 역사, 지리, 정치, 경제, 등에 관한 책들을 읽고 자료를 수집하는 것이 필요하다.

맺는 말

평신도 자비량 선교의 전망

크리스티 윌슨은 성경의 역사에서 하나님의 구속사에 쓰임 받은 사람들이 자비량하며 선교한 인물들이었다고 전제하면서 아담(에덴동산을 가꾸는 자)으로부터 그 예를 들고 있습니다.
평신도 자비량 선교사들은 하나님의 구속역사의 주변 인물들이 아니요, 중심줄기(main stream)에서 하나님께 쓰임 받은 인물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는 평신도 자비량 선교를 신학화하고 과감하게 도입하여 이를 실천함으로서 21세기의 세계 선교를 섬겨야 할 것입니다. 한국 교회의 1,200만 성도 중 수 백 만 명은 평신도 자비량 선교의 자원들이며, 선교사 후보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시대에 한국 교회를 통하여 이루고자 하시는 세계 선교의 장엄한 사역을 위하여 한국 교회가 평신도 자비량 선교를 활발하게 논의하고 실천해야 될 것입니다. 로럴드 알렌의 말로서 이 글을 맺습니다. "강력하고도 깊은 선교정신을 가진 남녀 평신도들을 선교사로 나가도록 독려하는 길 외에는 세계복음화를 성취할 다른 방법은 없다."

 


성서의 지명 / 갈릴리,



성서의 지명






갈릴리 어부들은 가난한 어부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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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 호수의 동편에 자리 잡은 엔게브 키부츠에 동유럽 러시아의 라트비아 출신의 한 어부가 살고 있었다. 그는 1920년대 이스라엘로 이민 와서 자신의 성을 ‘물고기’라는 뜻의 ‘눈’으로 바꿀 정도로 평생을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잡이로 일생을 살아왔습니다. 나이 일흔이 다 되어 은퇴할 무렵인 지난 1971년부터 그는 둘레가 66km나 되는 호수 변을 샅샅이 뒤지며 고대 항구들의 흔적을 조사하여 발표했습니다. 근 20년간의 직접 발로 뛰면서 연구한 그의 업적이 1992년에 출판됐을 때 모든 이들은 갈릴리 호수에 자그마치 16군데의 고대 항구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더욱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비록 그가 유대교인임에도 불구하고 신약성경의 복음서를 집중적으로 연구했고 나아가 ‘복음서에 나타난 고기잡이의 모습이 너무나도 자세하고도 정확했다’고 그는 고백 하므로서 성경의 이야기를 실제로 증명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세계 1차 대전 이후 형성된 양식비평을 포함한 최근의 성경 연구방법들은 대부분 복음서 내용의 신빙성에 이의를 제기했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예수를 직접 대면했던 제자들의 기억과 기록 능력에 의구심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도 베드로와 요한이 원래 ‘학문 없는 범인’이라고 조롱하기도 했다(행 4:13)는 것이다. 그러나 이 어부의 발견은 이들의 의구심을 부끄럽게 하였으며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성경의 상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일깨우는 것이었습니다.

 

그 일예로 당시 생선을 상당히 비싼 식품이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신약 시대 지중해 지역의 기본적인 식사는 올리브기름과 포도주를 곁들인 빵과 생선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자했던 갈릴리 호수 변의 한 어린아이의 도시락도 빵과 생선이었으며 예수님의 비유에서도 생선과 고기잡이가 자주 등장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더운 지역에서 싱싱한 생선은 항상 수요에 공급이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에 값이 비싼 편이었습니다. 교통이 발달되지 못한 당시 생선은 상품성을 높이기 위해 잡은 즉시 가공해서 보관해야만 상품성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대부분 소금에 절이거나 말리고 연기로 훈제를 했고 작은 생선으로는 젖을 담갔을 것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지역의 고고학 발굴에서 이탈리아 ‘쿠메’산 생선 젖이라고 기록된 항아리의 손잡이가 출토된 적도 있습니다. 국제무역을 통해 여러 유통단계를 거치는 생선의 값은 더욱 비쌌을 것입니다. 주후 1세기의 그리스의 역사가 플루타르크는 로마에서 훈제생선 한 수레의 가격이 ‘한 마리의 황소가 이끄는 양 100마리’와 맞먹는다고 기록도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신약시대 갈릴리 호수의 어부들은 값비싼 상품을 취급하는 고급 상인들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나아가 이들은 이방인들에 비해서 이윤을 더 얻을 수 있는 장점을 갖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음식율법인 카슈룻트(신 14:9-10)를 지키기 위해 지중해의 이방인 어부들보다는 갈릴리 호수의 유대인 어부들이 공급하는 생선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갈릴리의 어부들은 예루살렘 시장에서 생선을 팔기 위해 나흘 길을 마다 않고 판로를 개척했을 것이며, 유대인 특수 때문에 호황을 누렸을 것입니다. 따라서 갈릴리 호수에는 여러 군데에 항구가 발달되고 어업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갈릴리 호수의 대표적인 생선은 베드로 고기를 비롯해서 메기, 정어리, 잉어 등입니다. 정어리는 젖을 담그는데 오늘날까지도 대량으로 잡히며 한해 어획량의 절반인 1000톤을 차지합니다. 잉어는 정어리를 미끼로 해서 낚시로 잡으며 정어리와 베드로 고기는 그물을 이용해서 잡습니다. 베드로 고기는 지느러미가 빗같이 생겼다고 해서 아랍어로 ‘무슛트’로 불리는데 길이가 40센티미터까지 자라며 어미가 수정된 알을 입에 넣은 채 치어가 될 때까지 2-3주 동안 보호하는 독특한 습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 물고기는 히브리어로는 ‘물고기를 돌본다’는 의미로 ‘암눈’이라 불리웁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 베드로와 안드레, 그리고 빌립은 벳세다 출신입니다. 갈릴리의 벳새다는 분봉왕 헤롯 빌립이 주후 30년경 로마식 도시 ‘율리아스’로 재건했으며 수많은 갈릴리 사람들이 이곳으로 이주해왔습니다. 자연히 생선의 수요도 늘어났을 것이고 근처의 가버나움에는 대규모 시장이 형성됐을 것입니다. 실제로 벳새다를 발굴했을 때 한 저택에서 수많은 그물추와 낚시 바늘들이 발견됐습니다. 함께 출토된 로마산 고급 수입식기들을 통해서 이 집의 주인은 어업과 관련된 부유한 상인으로 추정되었습니다.

 

안드레, 빌립 등은 원래부터 헬라식 이름이며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헬라 사람들과 대화할 정도로 고급문화에 익숙한 자들이었습니다(요 12:20-21). 시몬 베드로는 전문적인 어부로서 동생 안드레는 물론이거니와 이웃 형제인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동업자로서 두 척의 배를 이용하여 조직적으로 고기를 잡았던 선주겸 어부입니다(눅 5:10). 야고보와 요한의 집에는 일당을 받고 일하는 품꾼들도 있었습니다(막 1:19-20). 이처럼 예수님의 제자들은 경제적으로 자립한 비교적 부유한 어부들로서 생업에 얽매이지 않고 언제든지 자유 의지대로 고기잡이를 떠나 예수의 제자가 될 수도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왜 자신의 활동 중심지를 벳새다에서 가버나움으로 옮겼을까요? 복음서에는 이 도시에 그의 처가가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갈릴리 호수 어업 현장에서의  사업장의 위치는 곧 경제적 이윤과 직결되는 것이었습니다.

티베리아스 북쪽 5km 지점에는 신약시대의 어촌 막달라가 있는데 헬라어 지명은 ‘생선 가공공장’이라는 뜻의 타리케아(Tarichea)입니다. 좀 더 높은 이익을 올리려는 어부들은 생선을 잡은 즉시 타리케아로 수송해서 소금에 절이거나 훈제가공용으로 넘겼을 것입니다. 벳새다의 어부들은 헤롯 빌립의 지배 하에 있었기 때문에 헤롯 안티파스의 관할인 타리케아로 생선을 수송하려면 가버나움 세관에서 막중한 통관세를 지불해야만 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시몬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은 어업의 근거지를 가버나움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가버나움은 타리케아와 같은 헤롯 안티파스의 영토이기 때문에 감세의 혜택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이러한 점을 생각하면서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에 대하여 설교를 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적대시 하였던 바리새인들중 특히 예루사렘의 제사장들의 입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을 하대하는 비꼬는 말을 진실인양 할고 배우지 못하고 가난한 제자라고 하는 설교를 하시는 목사님들도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도 다시한번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김성 교수의 글)


* 예수 당시의 갈릴리 상황 *

http://blog.daum.net/chakage2473/7150447


헤롯 대왕의 아들 안티파스가 만들어낸 작은 구리 동전들, 즉 예수와 그의 추종자들이 틀림없이 매일같이 갈릴리 마을의 큰 마당이나 시장에서 만지작거렸을 주머니 속의 동전들은 현대에 고고학 발굴이 진행되는 곳에서 흙을 체로 칠 때, 초록색과 회색이 어우러진 녹슨 금속 조각들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 동전들을 잘 씻은 후 자세하게 조사해보면, 최초의 교회가 맞붙어 싸웠던 강력한 정치적 상징들이 드러난다. 즉 동전 한쪽 면에는 종려나무 가지가 찍혀 있고(이스라엘 땅의 풍요로움에 대한 성서의 묘사를 상기시킨다), 또 다른 면에는 로마의 월계관이 찍혀 있는데(세계를 정복하는 티베리우스 황제의 권위와 위엄을 상징한다), 헤롯 안티파스가 발행한 이 동전들은 그 자신의 정치적 야심과 메시아에 대한 꿈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즉 대부분의 사람들이 양피지나 파피루스에 빽빽하게 잉크로 기록된 문장들을 통해서보다는 왕의 휘장에서 보다 분명하게 종교적이며 정치적인 선언을 읽을 수 있었던 시대에,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이용하는 동전에 안티파스가 그런 문양(紋樣)을 새겨 넣은 것은, 그가 로마 황제의 공식적 왕관(월계관)의 권위 아래 이스라엘의 이 부분을 소유한 당사자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알리기 위한 교활한 방법이었다.

비록 헤롯 안티파스가 복음서에서는 단지 잠시 나타났다 사라진 인물에 불과할지라도, 그가 갈릴리와 요르단 강 동쪽의 베레아 지역의 통치자로 등극하게 된 과정의 이야기는, 그의 경우처럼 드러나지 않았을 경우라면 아마도 잊혀져버렸을 헤롯 왕조의 음모와 로마의 궁정 정치가 어떻게 특정한 정치 경제적 상황을 만드는 데 역할을 맡았는지를 보여주는데, 세례요한과 예수 그리고 그들의 추종자들은 바로 그런 특정한 정치 경제적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안티파스는 헤롯 대왕의 여섯 번째 아들로서 기원전 20년경, 사마리아 귀족 출신의 말타스(Malthace)에게서 태어났으며, 아마도 그가 소년기에는 갈릴리 땅을 밟아본 적이 없었을 것이거나 혹은 그 주민들의 독특한 전통에 대해서는 평생동안 별로 잘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헤롯 왕가의 응석받이로 키워져, 예루살렘, 여리고, 마사다, 가이사랴 등지의 왕궁들 사이를 계속 왕복하다가, 열 살 정도가 되어서는 공식적인 교육을 받기 위해 로마로 보내졌다. 기원전 4년에 그의 아버지가 사망하고 이어서 그의 형 아켈라오에 맞서 대규모 폭동이 일어난 다음, 이스라엘의 정치적 사태가 그의 인생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은 그의 나이가 고작 열 여섯 살 때였다. 헤롯 왕의 유언에 대한 서로 다른 주장을 놓고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는 가운데, (또한 아켈라오가 유대 지역에 질서를 유지할 능력이 있는가에 대한 논쟁 가운데), 이 젊은 안티파스는 아우구스투스 황제 앞에서 대담하게도, 아켈라오나 그의 또 다른 형 빌립(Philip)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 선왕의 우선적 계승자로 인정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그 주장을 거절하고, 그 형제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결정한 채, 선왕의 왕국을 그 형제들 사이에 분할해줌으로써 유대의 정치적 판도를 바꾸어놓았다. 즉 큰아들 아켈라오는 "부족왕"(ethnarch), 혹은 수장으로 강등되어, 유대, 사마리아, 그 남부의 이두매를 통치하도록 허락받았다. 그 다음 빌립은 "분봉왕"(tetrarch) 혹은 지역 통치자라는 칭호를 받아, 골란니티스, 트라코니티스, 바타내, 파내스(지금의 골란 지역, 요르단과 이스라엘의 가장 북부 지역, 레바논의 가장 남부지역을 포함한다)를 할당받았다. 안티파스는 비록 가장 큰 야심을 품고 있었지만, 역시 분봉왕 칭호를 받아 베레아와 갈릴리 지역의 로마 속국 통치자가 되었다.

로마의 기준에 따르면, 안티파스의 몫은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통치 지역도 변두리 지역이며 지리적으로도 그 두 지역이 서로 상당히 떨어져 있고, 두 지역 어디에도 큰 도시가 없었으며,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지하자원도 없었고, 왕궁에 속한 대규모 농지도 없었다. 베레아는 요르단 강 동편에 그 강을 따라 북에서 남으로 길게 형성된 좁은 농지 지역으로서, 북부의 높은 지역으로부터 좁은 계곡들을 지나 뱀처럼 흐르는 요르단 강을 따라 메마른 요르단 계곡을 지나 사해 동부 해변으로 이어지는 지역이었다. 한편 훨씬 북쪽에 있는 갈릴리는 보다 비옥하고 게네사렛 호수 혹은 "갈릴리 바다"의 북부와 서부 해변 지역을 포함하고 있는데, 충분한 물과 어장(漁場)을 제공했다. 그러나 갈릴리의 북부 산악지역은 곡물 생산에 적합하지 않았으며, 억척스런 농민들만이 바위가 많은 고지에서 농사를 지었다. 갈릴리 남부지역에는 언덕들이 가파르지 않고 평지도 많아 대규모 농원에 적합했으며, 나사렛, 가나, 얍파, 나인 등지의 마을 농민들은 전통적인 농사법을 고수하면서 자신들의 소규모 포도원, 과수원, 가족용 채소밭을 가꾸었다. 100년이 넘도록 하스몬 가문과 헤롯 왕조의 관리들이 행정을 맡았음에도 불구하고, "고지대"(Upper) 갈릴리와 "저지대"(Lower) 갈릴리 모두의 주민들은 적어도 로마의 관점에서 보면 매우 뒤떨어진 상태였다. 그들은 외부인의 개입을 원망하는 미개한 변경 사람들이라는 평판을 받고 있었다. 요세푸스는 나중에 이 지역과 그 주민들에 대해 "갈릴리의 두 지역은 항상 적들의 침략에 저항했는데, 그것은 아이들부터 전쟁에 단련되었고 언제나 그 숫자가 많았기 때문이며, 시골 사람들조차 용기가 넘쳤다"고 표현했다.

안티파스는 재빨리 로마 스타일의 질서를 부과하고자 했다. 그의 첫 번째 조치는 현대적인 행정센터를 확립하여, 경찰력, 시장 감시원, 세금 징수원들을 쉽게 인근 마을에 파견할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갈릴리의 예전 행정수도였던 셉포리스가 최근의 폭동으로 인해 폐허가 되었기 때문에, 안티파스는 그 도시를 현대의 로마식 도시로 재건하여 왕궁, 국고(國庫), 문서보관소, 광장을 갖추도록 명령했다. 건축공사가 끝났을 때, 그는 예전의 주민들이 바루스의 군단병력에 의해 살해되거나 노예로 팔려나갔기 때문에, 충성스런 공무원들과 노동자들을 그 도시에 이주시켰다. 그는 이 새로운 도시를 '오토크라토리스'(Autocratoris)라 이름 붙였는데, 그 문자적인 뜻은 "제국의" 혹은 "황제에게 속한" 도시라는 뜻이다. 이 새로운 도시는 전망이 좋은 높이에 자리잡고 있어서, 주변의 마을들과 농경지에 둘러싸여, 갈릴리의 유일한 중심 도시로서 지역의 시장, 세금 보관, 군대 사령부의 기능을 결합한 도시가 되었다. 셉포리스에 대한 최근의 발굴을 통해 안티파스의 대규모 재건사업의 증거가 드러났는데, 그 거리와 광장, 로마식 대형극장을 포함하여 인상적인 공공 구조물을 보여준다. 이 때문에 요세푸스는 그 후 몇 십 년이 지난 다음에 이 도시를 "모든 갈릴리의 광채"라 불렀다. 그러나 셉포리스-오토크라토리스는 단지 장식으로서만 건축된 것이 아니었다. 새로 즉위한 분봉왕의 왕좌로서, 또한 안티파스가 어려서부터 존경하도록 배웠던 로마식 정부의 본부로서, 이 도시는 그 주변 농민들에 대한 끊임없는 감시와 세금 강화, 교역 확대를 통해 연간 수입을 극대화할 수 있는 유리한 장소였다.

셉포리스에서 동쪽으로 약 15마일 떨어진 갈릴리 해변가 성읍 막달라(성서전통에 따르면 막달라 마리아의 고향)에서 행해진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헤롯 왕족이 다스리던 갈릴리에서 적어도 어업 생산이 급증했었을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증거가 드러났다.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잡이하는 광경은 흔히 성경의 그림이나 교회학교 교재에서 어부가 홀로 노 젓는 작은 배 위에 서서 평화롭게 그물을 던지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지만, 갈릴리 어업의 규모와 목적은 안티파스 시대에 이르러 많은 변화를 겪었던 것으로 보인다. 수천 년 동안 갈릴리에서 고기잡이하는 일은 그 지역 농민들이 파종기와 수확기 사이의 중간에 비교적 한가한 때 했던 일이었다. 생선은 장거리 교역이 불가능했던 이유가 쉽게 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로마시대에 이르러서는 생선을 소금에 절이는 기술이 발전되어, 어업이 산업 규모로 발전하기에 이르렀다. 생산기술의 발전에 따라 시장이 커지게 되었고, 로마제국 전역의 도시인들이 맵고 냄새가 강한 '가룸' (garum)이라는 생선 소스와 생선의 머리와 몸통을 잘게 썰어 소금에 절인 스튜로 만든 '살사멘툼'(salsamentum)을 좋아하게 되었는데, 이 두 가지는 일상적인 조미료로서 매우 값비싼 것이 되었다.

안티파스의 시대에 이르러, 막달라는 어업의 중심지가 되어 흔히 "소금에 절인 생선의 성읍"이라 불려졌다. 따라서 예수 당시 갈릴리 바다의 어부들이 단지 노 젓는 작은 배 위에서 일하던 농민들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 어부들이 매일 잡아 올려야 했던 생선들의 엄청난 무게를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며, 또한 그 생선들을 막달라로 보내 소금에 절이고 눌러 발효시킨 후 맑게 하여 '가룸'과 '살사멘툼'으로 만들어 커다란 항아리에 담아 해외로 팔았던 과정을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처럼 어업이 하나의 산업으로 발전함에 따라, 몇몇 사람들은 많은 돈을 벌었지만 또 다른 사람들은 더욱 비참하게 되었다. 막달라의 발굴을 통해 그 성읍에서 비린내나는 일을 했던 건물들, 좁은 도로들, 저수조들이 드러났으며, 큰 저택에서는 그 주인이 자신을 부자가 되도록 만들어준 원천, 곧 배와 큰 물고기 모습을 자기의 저택 현관 바닥에 모자이크로 만들어 과시했던 모습도 드러났다.

그러나 어업의 발전만이 갈릴리의 농촌 풍경, 곧 올리브 과수원, 포도원, 채소밭, 농경지의 광경을 어지럽게 만든 것은 아니었다. 당시 대부분의 속국 왕들처럼, 안티파스 역시 그 지역을 더욱 생산적으로 만들기 위해 두 가지 방법에 의존했는데, 더욱 악랄하게 세금을 징수하고, 농민들을 동원하여 공공사업에 투입하고 자신의 개인 영지를 개간하도록 만들었다. 안티파스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서 갈릴리와 베레아에서 세금을 징수할 권리를 얻었는데, 이것은 요세푸스에 따르면, 매년 금(金) 200 달란트(약 9톤)를 얻을 수 있는 특권이었다. 물론 그의 영토에는 금광이 없었고, 단지 밀, 보리, 포도, 올리브, 채소와 가축만이 생산되었다. 따라서 그는 수확기에 모든 마을에 감시원, 세금 징수원, 군인들을 보내 자신의 몫을 확보했는데, 현대 학자들은 그가 대략 전체 생산량의 1/3을 챙긴 것으로 계산한다.  

그 이전에 갈릴리 지역이 멀리 있던 제국들 혹은 예루살렘에 기반을 둔 왕국들에 의해 통치되고 세금이 부과되었을 때에는, 세금 징수가 한결같지 않았었다. 그래서 좀더 독립적인 주민들은 헤롯 대왕 시절에 세금 징수원들이 갈릴리 지역에 도착하면, 폭력으로 맞서거나 산으로 도피하거나 했었다. 그러나 이제 안티파스가 갈릴리를 자신의 주요 수입원으로 간주하고, 갈릴리 중심부인 셉포리스-오토크라토리스에 그의 관리들이 상주(常住)하는 상황에서는, 세금 징수가 더욱 빈번해지고 무거워졌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복음서 안에는 세리, 현물세 징수원, 통행세 징수원, 장원(莊園)의 청지기, 그림자와 같은 "헤롯 당원"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런 역사적 인물들은 단순히 악당들로 무시할 수 없는 자들이었다. 왜냐하면 예수 당시에는 안티파스의 궁정과 밀접하게 연관된 관료체제가 더욱 커짐에 따라, 갈릴리의 거의 모든 농민 가족들이 빚더미에 올라앉게 되거나 알거지로 내몰리게 된 데에는 그 관료체제가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예수와 그의 갈릴리 이웃들과 친척들에게는 안티파스의 도시 건설 사업과 중과세가 단순히 그들의 생계에 대한 위협과 전통적 농경방식 및 어업방식에 대한 위협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갈릴리 사람들이 수백 년 동안 유지해왔던 마을 문화의 토대 자체를 허물어버리는 것이기도 했다. 최근에 로마가 지배하기 시작한 초기 시대의 갈릴리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 결과 그 지역의 거의 전부가 농경지였으며, 구릉지대와 계곡들마다 농민들과 목동들이 작은 밭과 목초지 안쪽으로 조잡한 돌집들을 짓고 마당들을 잇대어 작은 공동체들을 열 군데 정도씩 이루고 있어서, 아마도 전체적으로 200개의 공동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마을들 가운데 일부는 철기시대 이스라엘 국가가 생성될 때부터 존속해왔으며, 어떤 마을들은 비교적 훨씬 후대에 만들어졌는데, 모든 마을들이 매우 비슷한 구조로서 단순한 집들(집의 크기나 구조가 특별난 것이 거의 없다)과 혼합경제, 곧 밭농사와 가축 사육, 직물, 가죽, 토기 생산의 구조였다. 실제로 고고학적인 발굴조사 결과는 성경의 최초의 법령과 사회법규에 규정된 생활방식과 매우 흡사하다. 즉 가족과 친척 중심의 혈연 공동체들이 좀 더 큰 씨족과 지역의 부족들로 집단을 이루어 소규모 농경생활을 영위하였는데, 이것은 가뭄, 전쟁, 자연재해로 인한 흉작의 위험을 감수해야만 했던 생활방식이었다. 

이런 농경문화는 인류학자들과 사회학자들이 거의 모든 시대와 장소에 걸쳐 자세하게 연구한 바에 따르면, 단 하나의 목표를 갖고 있었는데, 그것은 조상들의 땅에서 가족이 생존하는 것으로서, 조상 대대로 내려온 옛 전통과 사회제도들을 간직하고 다음 세대에 충실하게 전수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우리가 복음서들, 랍비 문헌들, 그리고 요세푸스의 단편적 묘사들을 통해 얻은 증거들에 따르면, 갈릴리 사람들 역시 조상들의 전통을 열심히 고수했으며, 자신들이 이스라엘 백성의 구성원들로서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위대한 약속들의 상속자들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만일 그들이 자신들의 율법과 전통을 충실하게 지키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아지게"(창 22:17) 될 것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땅을 영원히 소유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들의 조상들의 율법, 곧 사회적 관계, 재산권, 개인 도덕, 축제일, 안식일, 안식년 등에 관한 율법은 앞서 말한 것처럼, 추상적인 종교적 도그마나 개인윤리의 기준이 아니었다. 그 율법들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와 지역 공동체들에게 현실적 헌법이며 행동강령과 지침을 제공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그것을 지키면 그들의 가족과 마을이 살아남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물리적인 상황의 도전 속에서도 번성할 수 있었던 것으로 믿어졌다.

여러 세기를 거치면서, 갈릴리의 주민들도 다른 지역의 주민들과 마찬가지로, 왕들과 그 관리들이 자신들에게 부과하는 무거운 짐을 점차 받아들이게 되었으며, 세금과 공물의 요구에 부응하고 자신들의 가족을 부양할 만큼 충분히 생산하게 되었다. 그러나 왕에게 바치는 세금만이 유일한 강제징수는 아니었다. 갈릴리의 주민들은 (이스라엘의 다른 지역 주민들 모두와 마찬가지로) 생산물의 상당부분을 제사장들에게 바치는 십일조로, 첫 열매의 헌물로, 그밖에 예루살렘 성전의 신성한 여러 기부를 위해 떼어놓도록 가르쳐졌다. 1세기에 이르러서는 모든 이스라엘 남자들이 성전을 위해 십일조 이외에도 매년 반 세겔을 바치도록 되어 있었는데, 주민들이 반 세겔의 동전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곡식이나 농산물과 교환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심지어 가뭄이나 병충해로 인해 수확이 대폭 줄어든 때조차도 세금 징수원들과 제사장을 대신하는 사람들이 모든 타작 마당과 올리브 기름을 짜는 곳에 나타나 자신들의 몫을 챙겨갔다. 만일 특정한 마을이나 지역의 농민들이 헤롯 왕족과 예루살렘 성전이 요구하는 세금을 기꺼이 바치지 않을 경우에는 그 처벌이 매우 엄했고 난폭했다.   

역사가 마틴 굿만(Martin Goodman)은 고고학적 증거들과 문헌상의 증거들을 토대로 당시 유대의 마을들에서 공동체가 해체되는 과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과정이었는지를 분석하였는데, 이것은 복음서들이 갈릴리의 경제적 상황을 묘사한 것과 끔찍할 만큼 똑같았다. 이스라엘 전역의 농업생산량은 아무리 작황이 좋은 해였다 해도 특별히 증가하지는 않았으며, 곡식 생산이 조금만 줄어도 수많은 농민들이 가족을 부양하고 동시에 세금을 납부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더욱 많은 농민들이 다음 해의 수확을 담보로 해서 곡식을 빌려야만 그 다음해까지 가족들과 가축들이 버틸 수 있었다. 실제로 랍비문헌들과 당시의 법적인 문서들에 나타난 증거들을 보면, 헤롯 왕족 시대를 거치면서 시골 농민들의 부채가 급증하였으며, 기댈 곳이 없던 농민들은 심지어 헤롯 왕족의 관리들과 제사장 귀족들로부터도 대부를 받으려 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처럼 임시방편으로 당장 구멍을 틀어막는 방법은 조만간 재앙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는데, 일단 농민들이 다음해의 수확 가운데 더욱 많은 부분을 떼어내어 빚을 갚기로 작정을 하면, 그 다음해에 더욱 큰 빚더미 위에 올라앉게 되기 마련이기 때문이었다. 농민들이 대부를 받기 위해 담보로 잡힐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토지뿐이었기 때문에, 그 부채를 갚지 못할 경우에는 그 가족이 오랜 세대를 거쳐 경작해왔던 그 토지를 빼앗기고 말았다. 수많은 경우에 이런 법적인 조치로 인해 한때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땅에서 자작농으로 살았던 농민들이 영원히 소작농으로 전락하여, 당시 급속하게 증가하던 귀족들의 대규모 농지에 빌붙어서 겨우 생계를 이어가게 되었다.

만일 성경의 율법이 엄격하게 집행되었다면, 이런 상황은 벌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신명기 15장 2절의 분명한 규정에 따르면, 매 7년마다 "이웃에게 돈을 꾸어 준 사람은 그 빚을 면제하여 주십시오. 주님께서 면제를 선포하였기 때문에 이웃이나 동족에게 빚을 갚으라고 다그쳐서는 안 됩니다"고 했기 때문이다. 레위기의 성결법전(Holiness Code)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왜 빚을 탕감해야 하며 재산권을 원 소유자에게 되돌려 주어야 하는지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유일한 진정한 소유주이며, "땅을 아주 팔지는 못한다. 땅은 나의 것이다. 너희는 다만 나그네이며, 나에게 와서 사는 임시 거주자일 뿐이다"(레 25:23). 그러나 헤롯 왕족 시대에 이 율법을 해석한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힘겹게 발버둥치는 농민들에게 꾸어 준 돈을 되돌려 받고 그 이자도 받아내기 위해, 이 명백한 율법규정을 우회할 방법을 찾아냈다. 랍비문헌에서 차압동의서(prosbul)로 알려진 이 계략을 종교 당국과 법 당국자들이 받아들임으로써, 개인 대출을 그 지역 법정에 등록한 경우에는, 심지어 안식년에 상환하도록 된 경우일지라도, 강제로 (법원을 통해 - 옮긴이) 상환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로 인해 대출이 더욱 쉬워짐에 따라, 부채와 차압의 위기는 더욱 심해졌다는 사실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다. 따라서 한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가족들, 씨족들, 부족들에게 적절하고 엄숙하게 분배했던 이스라엘의 마을들이 서서히 귀족 가문들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는데, 귀족들은 왕족들과 제사장 집단 혹은 유휴 동산을 많이 지닌 부자들에게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이런 현실은 안식일과 축제일에 정기적으로 읽던 율법 두루마리의 친숙한 출애굽 이야기와 가나안 정복 이야기를 완전히 뒤집어엎는 현실이었다. 이런 경제적 상황은 영적인 위기를 초래했다. 즉 이스라엘 전역에서 많은 농민들이 생계가 위협 당하게 되자, 왜 하나님께서는 이런 일이 벌어지도록 허용하시는가 하는 긴박한 물음에 직면하게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물음에 대해 종교의례적인 설명을 하여, 백성들의 당면 문제는 하나님의 심판으로서, 그들이 종교의례적 순결의 높은 수준을 유지하지 않았거나 레위기 법전에 명시된 십일조와 헌물을 제대로 온전하게 바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또 다른 사람들은 그들이 그토록 고통을 당하는 것을 귀신이나 악령의 조화 탓으로 돌렸는데, 민간전승에 따르면, 이들 귀신이나 악령은 타락한 천사들로서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탐욕과 분란, 불행을 가져오는 것을 기뻐한다고 했다.

그러나 또 다른 사람들은 폭력적인 보복에 대한 환상에서 위로를 찾았는데,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이런 모든 악을 씻어내고, 하나님께서 노아 홍수 당시에 보여준 것처럼, 부자들과 악한 자들, 우상숭배자들에게 벌을 내릴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 날이 오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단순하고 의로운 사람들에게 영원한 통치를 확립할 것이며, 이사야의 예언처럼, "천한 사람들이 주님 안에서 더없이 기뻐하며 사람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안에서 즐거워할 것이다. 포악한 자는 사라질 것이다. 비웃는 사람은 자취를 감출 것이다. 죄 지을 기회를 엿보던 자들이 모두 끝장 날 것이다"(사 29:19-20). 이런 사람들에게 심판의 날은 이미 지평선 위에 흐릿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그 이후의 사태는 갈릴리의 많은 사람들이, 다른 지역의 사람들처럼, 묵시문학 속에 그처럼 생생하게 예언된 사건들이 나타날 징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또한 그들은 그들 가운데 적어도 일부는 그 하나님의 복수를 지금이라도 피할 수 있으며 하나님 나라의 약속을 물려받을 수 있다고 설교한 예언자들의 음성에 진지하게 귀기울였다.


호슬리 &실버만, 2장에서

 

 

갈릴리(Galilee) 

 

 

 샤론의 백합 | 향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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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 동편에 잇는 남북 14마일 동서 9마일의 호수다.

(1) 구약에는 긴네렛(수13:27).

(2) 신약에서는 게네사렛(눅5:1).

(3) 갈릴리 바다, 디베랴 바다 (요6:1) 단지 바다(마4:18).

(4) 풍랑을 잔잔케 함(마8:26).

(5)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의 4제자를 이 바다에서 불렀다(마4:18).

(6) 이 바다에서 일곱 비유를 가르쳤다(마13:).

(7) 바다 위를 걸으심(마14:22).

(8) 부활 후에 이 바닷가에 나타나서 그물을 배 우편에 던지라 햐여 많은 고 기를 잡음(요21:). 예수님이 갈릴리 도에서 행한 24회 이적 가운데 18회를 이 바다에서 행하셨다.

갈릴리 바다가 특별히 유명한 이유는 예수님이 전도와 이적을 많이 행하셨고 다음은 바다의 수면이 지중해 보다 208미터나 낮은 점이다.

 

갈릴리 바다 위의 그리스도 : 이 작품에 보이는 격렬한 표현주의로 보아 이 그림의 작자는 최고로 재능이 풍부한 틴토레토의 정신적 후계자였던 엘 그레코라고 생각될 정도이다. 확실히 흑암의 하늘에 떠 있는 흰구름의 표현은 엘 그레코의 시정에 극히 유사하고 음화처럼 표현된 묵시록적 공간이 격정을 풍겨내고 있다.캔버스 117*168.5cm.

 

 

갈릴리(Galilee)

뜻:둥글다

1) 구약 시대에는 요단강 서쪽 팔레스틴의 북부를 보통 갈릴리라 하였다(수20:7,왕상9:11, 왕하15:29,대상6:26).


2) 이스라엘 백성이 처음 가나안에 들어왔을 때 스불론(수19:10-16)아셀 (수19:32-39)자손들이 제비를 뽑아 차지 하였으며 여러번 혈투를 하였지 만 가나안 족속을 완전히 물리치지 못하엿다(삿1:30-33,4,).


3) 예수님이 12제자중 11제자를 이곳에서 택하였다.


* 신약 시대에 팔레스틴을 3도로 나누어 갈릴리의 경게는 동은 요단강과 갈릴리해, 서는 지중해 남은 사라리아도, 서는 지중해 남은 사마리아도 서북은 베니게로서 남북이 50마일,동서가 25마일 내지 35마일로 북방은 산지가 많고 남쪽은 평원이다.

토지가 비옥하고 경치가 아름다우며 404개의 중소도시 및 촌락이 있다.

갈릴리는 예수님의 복음 선교 활동의 중심지 였다. 제자들도 대부분 이곳에서 부르심을 받았으며 베드로가 살던 집도 이곳 갈릴리 해변의 가버나움 마을이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시던 들판도 바로 갈릴리 호수의 북쪽 연안이었으며 유명한 산상보훈의 설교도 이곳 언덕 위에서 였다. 믿음이 부족했던 베드로가 풍랑 속에 빠진 것도 이 갈릴리 호수에서 였다. 해면보다 그 수면이 200m 나 낮은 갈릴리 호수. 평상시에는 잔잔하고 맑으나 때때로 큰 폭풍으로 성난 파도를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

예수님 당시의 갈릴리 호수 연안은 중요한 교통의 요지 이면서 아름다운 경치와 기름진 옥토를 갖고 있어서 주변 인구가 매우 많았다고 한다. 지금도 이곳은 바나나, 목화, 오렌지, 올리브 등 갖가지 농산물이 풍부하게 재배되고 있으며 갈릴리 호수의 물은 전 이스라엘 땅의 음료수는 물론 농업용수와 공업용수까지 대부분 충당하는 생명선이 되고 있다. 심지어 남쪽으로 360Km나 떨어져 있는 네게브 사막의 세데보케(Ssede Boque)까지 물을 공급해 준다. 호수에서 처음 시작되는 송수관은 큰 자동차가 드나들 정도로 크지만 점차 가늘어 지면서 흡사 사람 몸의 혈관처럼 이리 저리 연결되어 전 국토를 적셔 주는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낮은 갈릴리 호수, 바다의 수면보다 700피트 아래에 위치하며 이스라엘 북부 납달리 지파의 땅에 속한 이 담수호수는, 하프의 모양같이 생겼기에 히브리어로 키노르라 불리었고 이는 게네사렛의 어원이 되었다. 지난 25년 동안이나 주후 1세기의 갈릴리를 연구한 고고학자는, 최근에 와서 예수님 당시에 사용하던 배와 배를 고정시키기 위한 돌들과 파도를 막기 위해 항구에 쌓은 방파제(눅 8:23)들을 갈릴리에서 발견함으로써, 과거 초대교회의 역사를 고스란히 21세기의 문턱에 올려 놓았다. 예수님 당시 갈릴리는 수산업이 크게 번창한 곳으로서, 남방 출신인 가롯유다를 제외한 예수님의 제자 대부분이 어업에 종사했던 것만 보아도 이를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다. 


최근 고고학적인 연구에 따르면, 주후 1세기경의 갈릴리 호수내의 항구는 최소 15개나 되는데 그 중에 가버나움, 게네사렛, 막달라, 디베랴, 거라사 등 우리에게 친숙한 지명 모두가 항구에 속한 도시로 밝혀지게 됐다. 당시 갈릴리 호수를 중심으로 퍼져있는 여러개 항구들을 통해 많은 여행객들과 상인들이 배를 이용하여 동서편을 왕래하곤 했던 것이다. 로마시대 때에는 오늘날보다 갈릴리 호수의 수면이 약 4피트 정도가 더 낮았다고 전한다. 특히, 베드로와 안드레가 고기 잡던 곳으로서 가버나움 항과 막달라항 사이에 위치한 타브가 항구는 초대교회의 사적지로 아주 유명한 곳이다. 이 타브가에서 예수님은 '나를 따르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소명을 주셨고(막 1:17), 또 부활 후 이른 새벽에 이 항구에 나타나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으로 유명하다. 타브가란 헬라어로 '일곱개의 샘물'이란 뜻으로 이곳에 따뜻한 미네랄 온천이 솟아올랐기에 전통적으로 가버나움 출신의 어부들은 겨울철에 꼭 이곳에 와서 어업을 했다고 전한다. 따라서 이 타브가는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처음으로 만난 곳이고 부활 후에도 마지막으로 이곳에 와서 제자들과 조반을 먹었던 장소로 확증된다(눅 5:1-7; 요 21:1-8).

갈릴리의 예수님의 발자취

갈릴리 바다 주변은 온통 예수님의 발자취로 가득하다 . 예수님은 특별히 갈릴리 사람들에게 애착심을 가지셨다. '이방의 갈길리에 먼저 복음이 전해질 것을 암시한 이사야의 예언 (이사야 9:1)을 생각지 않는다고하더라도 공생애 이전의 삼십여 년의 세월을 보내신 갈릴리에 대한 예수님의 애착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 갈릴리를 답사하는 우리는 발걸음 하나마다 예수님을 생각지 않을 수 없었고 , 숨 한번 들이쉴 때마다 같은 공기를 숨쉬셨을 주님을 묵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

갈릴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은 그 때까지 세상에 존재하던 모든 복의 개념을 뒤집어 엎으시고 , 새로운 복의 나라를 선언하신 팔복산이다 . 이 곳은 산이라기 보다는 갈릴리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야트막한 구릉이다 . 예수님은 여기서 여덟 가지 복을 말씀하셨다 . 구릉 위에는 팔각형으로 된 교회가 있다 . 그리고 교회당 꼭대기에는 작은탑이 서있는데 , 이 교회를 설계한 이탈리아 건축가는 그 탑을 통하여 아홉 번째 복을암시하고자 했다고 한다 . 그가 생각한 아홉 번째 복은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라는 말씀이었다고 한다 . 그렇게 생각해 보면 팔복의 내용 전체가 아홉 번째 복에 귀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그내용 모두가 고난에 귀결되지 않는가 ? 그리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삶이야 말로 모든 복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다 . 작은탑이 교회 맨 꼭대기를 장식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 여겨졌다 . 그리고 그 고난의 십자가는 하늘을 향해 온 몸을 뻗치고 있는 것이다 . 오늘 우리 신앙의 마지막 표현은 바로 그 아홉 번째 복을 통해 드러난 그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팔복 교회의 아름답고 평화로운 정경을 뒤로 한 우리의 발걸음이 닿은 곳은 오병이어 교회였다 . 1930 년대 초에 독일 고고학 발굴팀은 갈릴리 바다의 북서쪽에 있는 다브가 (Tabgha)란 곳에서 매우 소중한 유적을 발굴했다 . 그것은 약 400 년경에 건축된 교회의 유적이었는데 , 그 교회는 아랍인에 의해 파괴되어 1000 년이 넘는 세월을 땅속에 묻혀 있었다 . 특이 이 유적이 의미가 있는 것은 그 교회 바닥에서 모자이크로된 오병이어 모자이크였다 . 그림은 두 마리의 물고기 사이에 둥근 떡들이 그려진 모습 이었다 . 독일 캐톨릭 교회는 발굴된 모자이크를 기념하고 보호하기 위해 그 위에 교회를 지었는데 , 이것이 오병이어 교회인것이다 . 교회당 안에서 우리 마음속에는2천년 전 어느날 예수님 앞에 둘러앉아 있었을 군중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 어린아이가 음식을 내놓을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았던 이기적인 사람들 , 그리고 떡과 고기를 받아먹은 후 배신하여 예수님을 떠난사람들,이런 식으로 우리는 그들을 비난해왔지만 , 그 보다 먼저 은총의 떡을 먹은 그들이 부럽다는 생각이 더 먼저 드는 것은 왜일까 ? 그들은 그래도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하루 종일 어두워질 때까지 말씀을 들었다. 그 사모함과 인내심만으로도 떡과 고기를 먹을 자격이 충분히 있다. 오늘날 예수님께로 잘 가지도 않고, 사모하지도 않으며, 짧은 한 시간 예배도 인내치 못하는 우리들에 비하면 충분히 자격이 있다. '주여 저희에게도 생명의 양식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한 후, 내려오는 길에 기념품 가게에 들러 모자이크가 그대로 새겨진 잔 두 개를 샀다. 집에 돌아올 때까지 그 잔을 깨지지 않게 보관하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지!

  오병이어 교회 근처에 우리를 붙들고 놓아 주지 않는 한 자그마한 교회가 있었다 . 검은색 돌로 지어진 이 작은 예배당은 베드로교회였다 . 교회 안에는 바닥에 넓은 바위가 눈에 들어온다, 안내인은 그 바위 위에서부활하신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가 있었다고 한다. 에수님과 베드로의 대화라기 보다는 예수님과 시몬의 대화였다고 하는 것이 더 옳겠지만, 시몬은 아직 제자답지 못한 불완전한 자연인의 모습을 암시하고, 베드로는 성숙한 예수님의 제자를 암시한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그날 바위 위에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었던 사람은 스승을 부인한 부끄러운 시몬이었던 것이다. 그 순간 그는 베드로라고 불리울 수 없었다. 그는 여전히 부족한 죄인 시몬일 따름이었다. 그리고 그 시몬은 오고 오는 모든 시몬들의 대표이다. 그와 예수님의 대화는 우리 모두와 예수님의 대화이다. 시몬이 예수님과 나눈 대화는 곧 우리가 예수님과 나눈 대화이다. 예수님은 영원한 질문을 던지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 질문 앞에서 숙연해진다. 사랑하지 않으시고 사랑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죽기까지 먼저 사랑하신 후 던지신 질문이기에 그 누가 이 질문 앞에 숙연하지 않겠는가? 우리 일행은 그 바위 앞에서 모두 2천년 전으로 돌아간 듯 숨죽인 채 깊은 묵상속으로 들어갔다, 과연 나는 그 질문에 진실된 사랑의 고백을 드릴 수 있는지? 그러나 예배당을 뒤로하고 나오면서 우리 마음이 어둡지 만은 않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사랑을 묻기 전에 제자들을 숯불가의 만찬으로 초청하셔서 사랑의 떡을 먹이셨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김운성 목사)

 

 

 갈릴리바다가 위치하고 있는 중앙계곡은 지형적으로 갈릴리바다 자체와 갈릴리바다 주변의 비옥한 계곡형 평원으로 나눌 수 있다. 갈릴리바다 주변의 계곡형 평원들은 갈릴리바다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벳세다평원, 갈릴리 바다의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게노사렛평원, 그리고 갈릴리 바다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야르묵-요르단평원 등이다.

 

1. 갈릴리바다

   동쪽으로는 바산고원, 서쪽으로는 하부 갈릴리산지로 둘러 싸여있는 갈릴리바다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큰 자연 담수호이다. 이곳은 일반 바다가 아닌 호수임에도 불구하고 바다라는 명칭이 붙게 된 것은 이스라엘에서의 바다 개념이 우리들이 알고 있는 일반적 바다와 다르기 때문이다. 즉 바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얌'은 바다와 호수의 구분 없이 많은 양의 물이 모여있는 곳을 의미한다. 솔로몬이 지은 성전 뜰에 있었던 물두멍을 '바다'라고 이름하였던 것도 이런 '얌'의 의미와 관련이 있다.(왕상 7:23) 갈릴리바다는 그 자체의 아름다움과 주변의 비옥한 해변으로 인하여 고대로부터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던 지역이다.

 

  (1) 갈릴리바다의 명칭

   역사적으로 갈릴리바다는 여러 가지 다른 명칭으로 지칭되었다. 신약성경에서도 갈릴리바다를 가리키는 데에 네 가지의 다른 이름이 사용되었다. 그 이름은 다음과 같다. 

     ㄱ) 갈릴리바다 (Sea of Galilee): 신약성경에서 이 바다는 주로 '갈릴리바다'라는 명칭으로 통용되었다. 이 명칭은 오늘날에도 기독교인 사이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는 명칭이다.

     ㄴ) 긴레렛바다 (Sea of Kinneret): 구약성경에서는 갈릴리바다를 '긴네렛'이라고 불렀다. 이

                            명칭은 현재 이스라엘에서 이 바다에 대한 공식 명칭이다. '긴네렛'이라는 

                            이름의 기원은 확실치 않다. 일부에서는 하프 모양을 띄고 있는 갈릴리바다와 연관

                            시키기도 하는데, 그것은 하프를 의미하는 히브리어가 '키노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다 정확하게는 갈릴리바다의 북서쪽 해안에 위치하였던 '키나로트'

                            라는 도시에서 기원된 것으로 보고 있다. 초기 이곳에는 뵈니게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그들은 '키나르'라는 신을 섬겼다.

     ㄷ) 디베랴바다 (Sea of Tiberias): 갈릴리바다의 또 다른 명칭은 '디베랴바다'이다. 이것은 

                            갈릴리바다의 서쪽 해안에 안티파스에 의하여 건설된 티베리아스'에서 기원된 

                            명칭이다. 안티파스는 당시 로마왕제였던 티베리우스의 이름을 빌어 이곳 이름을

                            붙였다. 신약성경 뿐 아니라 유대인 경전에서도 이곳을 '티베랴'라고 불렀으며,

                            오늘날 아랍사람들도 이곳을 '바하르 타바리아'라고 부르고 있다.

     ㄹ) 게네사렛바다 (Sea of Gennesaret): 신약성경에서 언급된 갈릴리바다의 네 번째 명칭은 

                           '게네사렛'이다. '게네사렛'은 '지방장관의 정원'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명칭은 갈릴리바다의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게노사르평원에서 연유된 명칭이다.  신약시대와 동시대인이었던 유대인 역사학자 요세푸스 역시 갈릴리바다를   '게네사렛'이라고 기록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갈릴리바다에 대한 여러 가지 명칭들은 이 바다를 둘러싸고 있는 지역이나 그 지역에 있었던 중요한 도시 이름들과 연관되어 있다. 헬라의 지리학자였던 스트라보(Strabo)는 갈릴리바다 남동쪽 야르묵강 근처에 위치하고 있었던 도시의 이름과 관련하여 이 바다를 '가다라'(Gadara)라고 명명한 적이 있다.

 

  

(2) 갈릴리바다의 지형

   갈릴리바다의 남북간 최장 길이는 21km이며, 티베리아와 막달라 근처에서의 동서간 폭은 각각 8km과 12km가 된다. 갈릴리바다 전체 면적은 약 165km2 이다. 갈릴리의 해수면은 지중해보다 210m나 낮다. 그러나 갈릴리바다의 해수면 높이는 계절과 년간 강우량에 따라 기복이 있다. 갈릴리바다의 수심은 가장 깊은 곳이 49m인데, 서쪽보다 동쪽이 더 깊으며 남쪽보다 북쪽이 더 깊다. 이것은 동쪽에 있는 골란고원의 경사면이 서쪽에 있는 갈릴리산지 경사면보다 더 가파르기 때문에 생긴 결과이다. 갈릴리바다의 전체 수량은 약 45억6천2백만m2에 달하고 있다.

   갈릴리바다로 유입되는 요단강을 비롯한 그 외의 다른 유입 물줄기들은 모두가 깨끗한 담수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릴리바다에는 약간의 염분이 포함되어 있다. 대략적으로 1리터의 물 속에 약 250-400mg의 염분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염분 농도는 건조기에는 조금 더 높아지고, 우기에는 낮아진다. 갈릴리바다 물에 포함된 염분은 바다 주변과 바다 밑바닥에 있는 광천수 샘들에서 나오는 염분성분 때문에 생긴 것이다. 그런 요인과 더불어 건조한 날씨로 인한 물의 증발도 염분 형성의 한 원인이 되고 있다. 현재는 이러한 샘들에서 나오는 염분을 갈릴리바다 속으로 유입되지 않도록 특별 수로를 만들어 갈릴리바다 아래 지역으로 빼내고 있다.

   갈릴리바다 주변지역은 언제나 인구가 밀집되어 있었다. 제2 성전시대 갈릴리 주변에는 어림잡아 50만 정도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갈릴리바다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게노사렛평원은 특별히 비옥한 땅으로 유명하였다. 요세프스의 기록에 의하면(유대전쟁사 3:7-8), 이곳은 비옥하고 좋은 토양 덕분으로 잘 맺지 못하는 과실이 없을 정도였으며, 주민들은 모든 종류의 작물을 재배하며 살았다. 이곳은 기후도 알맞아 많은 종류의 생물이 서식할 수 있었다. 이러한 자연의 놀라운 혜택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경쟁적으로 이 지역의 지배권을 차지하려고 노력하는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헬라시대와 로마시대에 갈릴리바다 근방에는 많은 도시들이 세워졌다. 바다 주변에서는 그리스와 로마식으로 지어진 궁전, 원형 경기장, 극장, 그리고 목욕탕의 유적들이 발견되었다. 가버나움, 타브가, 고라신, 아르벨, 벳세다, 수시타, 엘하마, 가다라 같은 도시들의 유적은 당시 이 지역이 얼마나 번창하였던 유대인 지역이었는가를 보여주는 역사적 유산들이다. 높은 문명 수준을 지녔던 헬라와 로마시대의 번영과 갈릴리바다 주변에서 꽃피었던 신약성경 및 초기 기독교의 역사, 그리고 탈무드와 같은 경전을 통하여 나타나고 있는 유대인의 영적 유산은 갈릴리바다 주변의 좋은 자연의 조건 속에서 크게 발전했음이 분명하다.

   갈릴리바다 주변은 300m 이상 되는 가파른 산지로 둘러 싸여 있어 마치 깊은 분지 속의 바다 같은 지형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산지의 급경사는 주변 산지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급작스러운 돌풍으로 바뀌게 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갑작스런 기상의 변화는 특히 헬몬산의 차가운 공기가 나무가 별로 없는 완만한 골란고원의 경사지를 거쳐 갈릴리바다까지 내려오는 과정에서 자주 일어난다. 이러한 돌풍현상은 오늘날도 자주 만나게 된다. 예나 지금이나 물을 크게 요동시키는 갑작스러운 폭풍은 어부와 바다를 항해하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위협적인 요소이다. 예수께서는 이런 돌풍으로 일어난 풍랑을 잔잔케 하신 기적을 보여주셨다.(마 8:26) 

   갈릴리바다에는 많은 종류의 고기들이 서식하고 있다. 울리는 소리를 내는 메기종류인 '바르부트'도 이곳에서 서식한다. 호수에서 서식하는 여러 종류의 고기를 잡아들이는 어업은 주변의 비옥한 평원에서 이루어지는 농업과 함께 이 지역의 중요한 경제적 수단이었다. 이러한 좋은 여건 때문에 고대로부터 사람들은 바다 가까운 주변 지역에 정착하게 되었다. 바다 물이 흘러나가는 출구 근처에서 발견된 인간의 두개골은 10만년전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것은 이 지역에서의 인간 거주가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신약성경과 유대인의 탈무드가 보여주는 것에 의하면, 헬라와 로마 통치시대에 갈릴리 해변가에는 많은 유대인 어부들이 정착하여 살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 역시 갈릴리 주변에서 바다를 배경으로 살았던 어부들이다. 바다에서 잡은 고기는 이곳에서 개발된 저장하는 방법에 따라 상품화되었고 이런 사업은 이 지역에서 크게 번성하였다. 특히 소금에 절여 말린 고기는 로마에까지 수출할 정도로 잘 알려졌었다.



히브리 사고의 원리 / 키아즘(Chiasm), 히브리 문장구조



히브리 사고의 원리

 

[제1원리] 키아즘(Chiasm), 히브리 문장구조로 성경을 해석하라.

 

 역사 속에서 성경을 연구하는 신학자들이나 설교자들은 신약 성경과 바울이 기록한 서실들에 대하여, 그 내용이 이해하기 어렵고 또한 그의 문장 표현력이 당시 전통적인 헬레니즘의 수사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때로는 중복되는 것이 많고 조잡스럽기까지 하다고 혹독한 비평을 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성경을 기록한 언어의 독특한 히브리 문장구조를 모르는 무지한 이방인의 시각을 가진 사람들의 편가에 불과하다. 만약 그들이 바울 서신에 나타난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들과 중복 표현된 부분들이 대부분 ‘교차 병행 구조’ 라고 부르는 히브리 문장구조의 형식인 히브리 사고방식을 가지고 기록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자신들의 무지에 대하여 인정하지 결코 그런 혹평을 가할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고 분석하여 해석하기 이해서는 성경을 기록한 히브리 사고를 가진 성경의 기자들이 사용한 히브리 문장구조의 틀을 먼저 배운 다음에 접근해야 한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사도 바울 이후에 유대인들이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상황에서, 헬라 사고의 문화권에 속해 있는 이방인의 신학자들이 자신들의 전통적인 헬레니즘의 사고방식인 수사학적 접근으로 바울 서신을 해석하여 왔기 때문에 본문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다가 이백여 년 전부터 예수를 믿기 시작한 유대인들에 의해서 자신들의 문학적인 시각을 회복하기 위하여 히브리 문장구조의 새로운 시각으로 성경에 접근하여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히브리 사고로 성경을 다시 해석하기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불분명하고 이해하기 어려웠던 많은 문제적이 해결되는 경험을 갖게 되었다. 이처럼 저자는 히브리 사고에 입각한 히브리 문장구조의 성경해석을 이 책에서 처음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제까지 성경해석의 본문의 개념을 도출하는 작업은 극히 일부분의 전문적인 학자들에게 해당되는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하지만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신약 성경에 나타난 대표적인 히브리 문장구조의 틀로 성경을 해석하는 과정을 체계화하고 시각화하여 성경의 원어를 모르는 사람들까지 쉽게 하나님의 말씀을 접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자 한다. 특별히 저자는 히브리 사고가 무엇인지를 누구나 알 수 있도록 정리하고 이를 토대로 히브리 문장구조로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까지 쉽게 설명할 것을 약속한다. 저자의 이러한 의도를 따라 이 책을 읽는 모든 사람들도 히브리 문장구조의 설교를 활용하는 계기가 될 것을 기대하고 이 책을 쓴다.

 

 히브리 사람들에 의해 기록된 신구약 성경이 갖고 있는 다양한 문학적인 운율과 구조의 독특성은 오래 전부터 학자들에 의해 연구되었다. 이렇게 정리된 히브리 문장구조의 성경 해석할 수 있는 보편적인 원리들이 이 책을 읽는 목회자들에 의해서 신구약 성경 적용하여 설교로 선포될 것이다. 이제 이 책을 통해서 이방인들의 사고를 가지고 있는 우리도 히브리 사고에 입각해서 하나님이 말씀을 기록하실 때의 본래의 의도와 사상을 전체적으로 조감해 볼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이 히브리 문장구조의 성경해석의 원리는 성경 해석학에 있어서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될 것이 틀림없다. 우리는 신약 성경의 바울 서신뿐만 아니라 계시록과 사복음서 및 공동 서신들을 넘어 구약의 모든 내용을 포함하여 특히 시문학의 범주에 속한 말씀을 가지고 히브리 문장구조로 적용하는 설교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교회가 낳은 세계적인 신학자인 풀러 신학대학원의 김세윤 교수는 “주기도문 강해”에서 히브리 문장 구조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마태복음의 주기도문은 매우 치밀한 히브리 문학 구조 속에 담겨 있습니다. 특별히 마태는 히브리 문장 구조의 특성을 좇아 본문을 문장의 가장 핵심이 되는 중앙에 해당하는 위치에 구성하고 있습니다. 왜 마태는 주기도문을 산상 수훈의 핵심 중의 핵심에 위치하도록 구조하고 있는 것일까요? 마태는 이러한 문학적 구조를 통해서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요? 마태가 히브리 문장 구조의 틀을 통해서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를 기록한 것은 우리로 하여금 주기도문의 중요한 내용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마태복음의 문장 구조 자체가 우리에게 이 주기도문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모종의 암시를 미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주기도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청원과 마지막 송영이 짝을 이루고 있는데, 우리는 이것을 인클루지오(Inclusio) - 앞과 뒤의 문장의 일치(짝) - 라고 합니다. 마태가 기록한 주기도문은 이러한 히브리 문장 구조를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김세윤 교수가 주기도문을 강해하는 처음 부분에 히브리 문장구조의 틀을 자세히 설명한 것은, 그것이 우리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를 바로 이해하고 해석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러한 히브리 문장 구조의 원리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성경을 정확히 해석할 수 없을 것이다. 저자가 이 책에서 정의한 ‘히브리 문장구조’ (Chiasm)라는 용어는 이 부분을 연구한 많은 학자들은 ‘교차 병행 구조’라고 언급하고 있다는 것을 먼저 밝힌다.

 

 1. 히브리 사고의 시작, 히브리 문장구조

 

 히브리 사고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 히브리 문장구조를 설명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저자는 알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성경에 나타난 예를 들어 설명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저자는 먼저 히브리 문장구조의 특징을 설명하고 난 다음에 성경의 구체적인 예를 들어 쉽게 설명하는 방법으로 이 글을 진행할 것이다. 히브리 문장구조는 히브리 문학에서 나타나는 문장의 기본적인 형태로 성경의 한 문장 안에서 각 단어가 교차적으로 배열되어진 것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이 분야에 많은 연구를 한 일랜드(Yelland)는 그의 책에서 “히브리 문장구조란 글의 후반부가 전반부에 관해서 도치되고 평형을 이루는 구정을 말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것을 교차 병행 구조라고 부르는 병행적인 형태나, 혹은 반의적인 형태로 기록된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한편 히브리 문장의 원리인 교차 구조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 요소가 나타나는데 이는 역(반의)과 편행이다. 하지만 모든 문장마다 역에 해당하는 반의가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후반부는 전반부에 관해 서로 반의적일 수도 있고, 또는 서로 보충적인 수도 있다. 이는 히브리 문장이 기본적으로 구절, 문장 또는 문장 구조의 전체 내용 중에서 단어나 혹은 생각들이 도치되어 나타나는 병행 구조이기 때문이다.

 

 히브리 문장구조의 가장 간단한 예는 아래에 나타난 구조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구약 성경에는 이런 교차 구조의 요소가 풍부하게 존재한다,. 이 구조는 첫 줄과 마지막 줄이 서로 대응되고, 둘째와 마지막 전의 요소가 대응한다. 이러한 형태는 히브리 문장에서 짧은 길이에서부터 몇 문장, 그리고 심지어 성경의 각 권의 전체의 시작부터 끝ㄲ지 나타나기도 한다. 이런 복잡한 구조는 문법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구조나 성경을 기록한 저자의 의도에서도 조직적으로 언제나 심미적 표현에 집중하게 한다. 히브리 문장의 교차 구조를 이루는 평가 기준은 도치 순서, 병행, 그리고 중심부이다.

 

 히브리 문장구조가 점점 연구되고 발전되면서 다양한 형태의 교차구조를 언급하고 있다. 교차 구조의 종류는 형태에 따라 다음과 같이 연구한 학자가 붙인 이름을 따라 다르다. 그 구체적인 이름을 살펴보면 에파노도스(epanodos), 또한 내향적 병행구조(introverted parallelism) 확대된 내향구조(extended introversion), 집중 구조(concentrism), 키 구조 (the chi-form), 페리스트로페(palistrophe), 봉투구조(envelope conetruction), 델타구조(the delta-form), 반복구조(recursion) 등의 여러 가지 으름으로 불리고 있다. 이 모든 형태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은 교차구조가 두 부분으로 구성되고 후반부가 전반부의 거울상을 가지는 것이다. 그리고 교차구조는 강조하려는 내용을 중심부에 위치시키며, 다른 부분은 병행적인 틀로 배치되어 이를 보충 설명하는 문장의 구조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히브리 문장구조는 이렇게 다양한 방법으로 발전하여 왔다.

 

 지금까지 설명한 내용을 간단한 것부터 성경을 통하여 예를 들어 보자.

 

예) 마가복은 2장 27절

  A 안식일은

   B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B` 사람이

  A`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

 

예) 마태복은 7장 6절

  A 거룩한 것을 게에게 주지 말며

   B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B` 돼지들이 진주를 발로 밟고

  A` 개들이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이 글에서 마태복음의 기자는 히브리 문장구조를 기록하면서 마지막 요소와 문장의 중앙으로부터 처음이 서로 내용상 그것이 설명되어 있고, 마찬가지로 중간은 중간끼리 서로 같은 내용이 설명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한편 마가복음에서는 동일한 단어가 교차적으로 나타나지만, 마태복음에서는 유사한 단어가 역으로 나타난다.

 

 아래의 시편에서 히브리 문장구조는 조금 독특하게 병행되어 있다.

 

 그는 너를 도와 주시고 / 성소에서             도와주시고 / 붙드시며

              시온에서 / 그는 너를 붙드시며       시온에서 / 성소에서

       그는 기억하시며 / 네 모든 소제를         기억하시며 / 원하노라

           너의 번제를 / 받으시기를 원하노라       번제를  / 소제를

      그는 너를 주시고 / 너의 마음대로              주시고 / 이루시고

      너의 모든 도모를 / 그는 이루고                도모를 / 마음대로

  우리가 개가를 부르며 / 당신의 구원 안에서         부르며 / 세우리니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 우리 기를 세우리니       이름으로 / 구원 안에서

 

 위 문장의 시편 20편 2-5절에서 보면 명사와 동사가 쌍으로 도치되어 히브리 문장구조로 병행되고 있다. 시편의 저자는 히브리 문장에서 두 문단끼리 서로 쌍을 이루어 명사와 명사가 서로 병행되어 있고, 동사와 동사가 서로 도치되어 교차하고 있다. 만약 이러한 교차와 도치 구조로 배치된 것을 모르고 해석하게 되면 엉뚱한 방행으로 설교할 가능성이 높다.

 

 예) 시편 135편 15-18절

 

   A 열방의 우상은 은금이요

    B 사람의 수공물이라

     C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D 눈이 있어도 듣지 못하며

      D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C` 그 입에는 아무 기식도 없나니

    B` 그것들을 만든 그들은 그것들과 같고

   A` 그들의 신뢰를 그것들에 두는 그들과 같도다

 

 예) 골로새서 3장 3-4절

 

  A : 이는 너희가 죽었고

   B : 너희 생명이

    C : 감추어져 있음이니라

     D : 그리스도와 함께

      E : 하나님 안에서 

     D` : 그리스도께서

    C` : 나타나실 때

   B` : 너의 생명이

  A` :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이 구절은 A B C D-E-D` C` B` A`의 대칭적 구조로 병행을 이루고 있다. 바울은 이 문장의 중앙으로부터 시작하여 밖으로 확산되면서 서로의 관계를 보완하는 대칭적 히브리 문장구조를 사용하였다. 우리가 이 문장을 가지고 짧은 메시지를 만든다고 한다면 다음과 같이 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이 문장 구조의 중심 주제를 제목으로 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E)라고 말하는 것은 본문의 교차대친 구조를 적용해 보면, ‘그리스도와 함께’ (D-D`)라고 선언하고 있다. 이런 신비한 영적인 연합은 복음 안에서 ‘감추어진 것으로’ (C) 이것은 그리스도계서 ‘나타나실 때’ (C`)에 ‘우리의 생명’ (B-B`)도 함께 나타날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이런 일은 ‘우리가 죄로 인해 죽었고’ (A) 다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스러운 주인공으로 나타날 때 (A`)만 가능하게 된다. 이상에서 히브리 문장의 교차 구조를 따라 본문 그대로 간단하게 저자는 설교로 적용해 보았다.

 

예) 로마서 2장 12-15절

 

 A(12)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B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B`(13)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A`(14)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15)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병하며

 

 이 구절은 A B-B` A` 의 교차 병행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12절에서 두 개의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전체가 언급되어 있고, 이것은 대칭적인 교차 구조를 가지고 13-15절에서 각각 율법에 관해 변증하는 내용을 볼 수 있다.

 

 예) 디모데전서 1장 19절

 

  A 믿음과

   B 착한 양심을 가지라

   B`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A`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 하였느니라

 

예) 갈라디아서 2장 7–8절

 

 A 도리어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기고

  B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이 한 것을 보고

  B`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A`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예) 고린도후서 1장 3절

 

  A 찬송하리로다 하나님을

   B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시오

   B` 자비의 아버지시오

  A`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오

 

예) 로마서 11장 21-23절

 

 A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 즉

  B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C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D 엄위를 보라

    D`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C`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B`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A` 저희도 믿지 아니하는데 거하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얻으리니 이는 저희를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이상의 성경의 예들은 모두 교차 구조에 대해서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2. 히브리어, 히브리 문장구조

 

 히브리 문장구조란 용어는 고대의 수사학적인 용어로 일부 사용되다가 르네상스 이후에 널리 퍼지기 시작하였다. 히브리 문장구조는 특히 구약 성경에 많이 나타나며, 다른 히브리어(셈어) 문서들에서도 같은 패턴의 히브리 문장구조로 언급되어지고 있다. 이 분야를 연구한 독일 신학자 룬드(Lund)에 의해서 신약 성경에도 히브리 문장구조가 나타난다고 발표하였다. 이때부터 시작하여 히브리 문장구조의 연구는 활발하게 진행되어 현재까지 왔다고 볼 수 있다. 한편 히브리 문장구조의 형태는 나름대로 연구한 신학자들에 의해 다른 이름의 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이런 일은 아직까지 히브리 문장구조의 형태가 발전하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저자는 보고 있다. 하지만 이제부터 저자가 모든 용어를 통일하여 히브리 문장구조 즉 키아즘이라고 부를 것이다. 비록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부르지만 그 내용적인 의미는 거의 같기 때문이다.

 

 히브리 문장구조는 몇 가지 특징적인 형태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성경에 가장 많이 나타나는 교차구조라고 부르는 A B – B` A` 의 현태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시편 8편 3-4절에 잘 나타나 있다. 이 형태는 신구약 성경에 가장 많이 나타나는 형태로, 앞에 나와 있는 내용이 다시 뒤에서 대칭적 구조를 가지고 같은 의미를 반복할 뿐 아니라 부연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이런 대칭 구조는 히브리 문장의 대표적인 형태로 우리가 이런 구조를 모르면, 문장의 내용이 단순히 긴 것으로만 이해할 수 있고 복잡한 문장 구조로만 받아들여 서로 연관성이 없이 해석하고 설교할 수 있는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다. 이처럼 우리가 신구약 성경의 히브리 문장구조의 핵심이 되는 교차 병행구조를 모르면 말씀을 바르게 해속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히브리어 문장구조의 틀

 

 키아즘(Chiasm) 즉 히브리 문장 구조한 용어는 고대의 수사학적인 용어로 일부 사용되다가 르네상스 이후에 널리 퍼지기 시작하였다. 키아즘에 해당하는 병행 구조는 많은 구약성경과 다른 히브리어(셈어) 문서들에서 언급되어지고 있다. 이는 독일신학자 룬드(Lund)에 의해서 신약성경에 나타난 것이 제시되었으며 히브리 민족(셈어족)으로부터 서장으로 문화적인 유산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독일 신학자 바레이는 히브리 별행 구조로부터 자신의 병행 구조를 세웠으며, 그는 신약성경에 있는 문학적인 구조의 형태를 분류하였다. 그는 키아즘을 연구하고 결론 내리기를 도치구조(Inversion)형태야 말로 성경에서 발견되는 가장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구조라고 말했다. 초기 키아즘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히브리 문장 병행 구조’가 학자들에 따라 약간씩 의미가 다른 여러 가지의 용어로 다음과 같이 사용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히브리 병행 구조를 연구한 신학자들의 분류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그들이 연구한 이름은 대침구조, 도치 병행구조(Inverted parallelism), 내향적 병행구조(Introverted parallelism), 회귀구조(regression), 원격 병행구조(봉투 구조, envelope figure), 대응구조(correspondence)등 여러 가지로 연구한 학자들마다 다른 이름으로 자신의 책에 붙였다.

 

 한편 ‘히브리 문장구조’는 그 이름에 따라 다음과 같은 형태를 갖는다. 예를 들어 우리가 키아즘의 ‘대칭구조’라고 말하는 것은 가장 기초적인 AB-A`B`의 구조의 현태를 가지고 있다. 이는 신구약 성경에 가장 많이 나타나는 형태로 앞에 나와 있는 내용이 다시 뒤에서 대칭적 구조를 가지고 같은 의미를 반복할 뿐 만 아니라 부연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이런 ‘대칭병행구조’는 히브리 문장의 대표적인 형태로 우리가 이런 구조를 모르면 문장의 내용이 단순히 긴 것으로만 이해할 수 있고, 복잡한 문장 구조로만 받아들이는 관계로 서로의 연관성이 없이 해석되고 설교될 수 있는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신구약 성경의 히브리 문장구조의 핵심이 되는 히브리 문장구조인 ‘병행 구조’를 모르면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책은 키아즘의 기본적인 형태부터 시작해서 복잡한 내용들조차 히브리 문장구조로 인해 하나님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처음부터 차근 차근 쉬운 구조부터 복잡한 구조까지 하나씩 배우면 여러분도 성경의 전문가가 될 것을 기대해도 좋다.

 

시편을 예로 들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예) 시편 8편 3-4절

 

3절  A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B  주의 하늘과

     A` 주의 베풀어 두신         B`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4절  A  사람이 무엇이관대        B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A` 인자가 무엇이관대        B`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시편 기자는 독특한 히브리 문장구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우주와 사람이 어떤 존재가 가치가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A의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셨다는 것에 대하여 A`는 주께서 이 땅에 베푸신 하늘과 별들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4절에 가면 사람과 인자가 병행되고 있고 주께서 생각하고 권고하는 것이 키아즘이 되어 반복적인 설명을 하고 있는 히브리 문장구조를 살펴볼 수 있다.

 

  3. 히브리 문장구조 – 키아즘의 역사

 

 17세기부터 산발적이기는 하지만 몇 명의 신학자들에 의해서 히브리 문장구조의 현태에 관한 연구는 간간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연구는 대개 성경의 원어에 관심이 있는 몇 사람으로 그들은 히브리 문장구조의 현태 정도 찾는 것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 관련된 학자들은 대부분 히브리 문장구조의 형태를 찾는데 있어서 바울 서신과 복음서에 집중하는 정도였다. 그들의 문제점은 자신들이 히브리인이 아니기 때문에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배워서 문장의 구조를 연구하는 수준에 있어 아주 초보적인 단계로 접근한 한계가 분명하였다. 그들의 접근방법도 대부분 전통적 방법을 히브리 문장구조에 익숙한 유대인들의 책을 통해서 적용하는 정도였다. 그러므로 히브리 문장구조의 형태 연구는 역사적으로 세 시기로 분류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초기 교부시대, 종교 개혁시대, 그리고 근대와 현대에 이르는 연구로 구분한다.

 

 키아즘에 대한 관심이 17세기가 되면서 증폭되어 독일과 영국 신학자들에 의해서 히브리 문장구조에 대한 과학적 연구가 시작되었다. 초대교회 역사가인 요세푸스(Josephus)는 구약 성경에 대해서 나름대로 구분하여 춥애굽기 15장, 신명기 32장의 모세의 노래가 “운문 절”의 형태로 기록되어 있고, 다윗의 시편들이 “여러 종류의 운문”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하여 어거스틴과 동시대를 살았던 제롬(Jerome)도 유사한 말을 했다. 그렇지만 히브리 문장구조에 대하여 연구한 학자들은 이것들이 단순히 히브리 문학의 시 형태라고만 보면서, 이런 키아즘은 그리스와 로마의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히브리인들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문장 구조라고 말했다.

 

 어거스틴(Augustine)도 수사학의 교사로서 성경의 문체에 대해 연구하였다. 그는 특별히 구약의 예언서들과 바울 서신에 관심을 가졌다. 한편 제롬도 히브리적인 문장 구조에 많은 관심을 가졌으며, 그는 특히 바울 서신 중에서 디도서 1장 12절, 고린도전서 15잘 33절, 사도행전 17장 28절 등을 깊이 연구했다. 그렇지만 초대교부들은 주로 성경 안에서 이러한 히브리적인 문장구조를 찾으려는 노력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았다. 그 가운데 오리겐(Origen), 크리소스톰(Chrysosto)과 락탄티우스(Lactantius)도 같은 입장을 취하였다. 이런 현상은 초대 교부들이 주로 우리와 같은 이방인의 시각으로 성경을 처음으로 설교하는 입장에서 당연한 결과로 보여 진다. 그 이유는 그들 스스로가 히브리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히브리적인 문장 구조에 무지한 결과로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교부인 오리겐이 이방인의 시각으로 설교하면서 최초로 영해라고 알려진 알레고리로 해석을 시도한 것에 대하여, 우리는 쉽게 그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무지했던가를 유추할 수 있다.

 

콘스탄틴(Constantine)시대에 교회는 만개한 그리스 문화에 동화되어 점차 수사적 방법론의 사조에 밀려 히브리 문장구조의 연구가 점점 더 사라지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르네상스 시대 전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다가 르네상스에 의해 성경에 기록된 히브리 문장구조의 연구가 주로 독일 신학자들에 의해서 관심을 가졌다. 특별히 독일의 로이흐린(Reuchlin)과 종교 개혁자인 루터(Luther)가 히브리 문장구조에 깊은 관심을 두고 연구했다. 하지만 그들이 관심을 갖는 것과 히브리 문장구조를 아는 것에는 많은 제약이 있었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 히브리 문장구조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었거니와 그 어떤 책에도 소개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사운데도 에라스무스(Erasmus)는 신약 성경을 히브리 문장구조를 연구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새로운 흥미를 불러 일으켰다.

 

 근대에 와서 블래스(Blass)는 신약 성경에서 바울 서신은 다른 성경들과 구분되어 문장의 구조에서 독특한 히브리 리듬이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광범위한 형태의 바울 서신의 히브리 문장구조 연구는 요하네스 바이스(Johannes Weiss)에 의해서이다. 그는 히브리 문장구조를 연구한 결과 바울 서신들이 눈이 위함이 아니라 귀를 위하는 문체임을 발견하였다. 특히 바이스의 공헌은 바울의 설교가 병행요소를 많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복음서의 연구에 있어서 저스틴마티(Justin Marty)는 히브리 성경과 헬라의 그리스 회상록을 비교하여 많은 차이점이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 후 마틴 알버츠(Martin Albertz)는 성경은 문학 작품의 일반적인 역사 즉 양식사에 포함 될 수 없다고 했다.

 

 한편 그때까지 만해도 그들이 신약성경에서 헬라어의 수사학 양식의 관점을 가지고 관찰해도 히브리 문장구조(chiasmus)라고 알려진 문학 양식에 관한 연구가 발견되지 않았다. 이 특수한 문학적 양식은 성경 사전에 의하여 “내향적 병행구조”라고 불리 운다. 이것은 브리그(Briggs)와 몰튼(Moulton)의 작품에서 언급되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체계화 작업은 정통 유대인으로 신학자였던 로우스(Lowth)에 의해서 히브리 문장구조의 비약적인 발전과 함께 설교에 적용하게 되었다. 로우스는 신약성경이 전총적인 헬라 문화뿐만 아니라 히브리어의 유산이 함께 융화되어 있다고 했다. 이때부터 우리는 지금까지 전통적인 해석 방법의 헬라의 수사학을 배제하고 히브리어 즉 유대인의 문학 양식인 병행 구조를 현대까지 발전시킴으로 성경 이해에 대한 진일보하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에 나타나는 병행 구조는 그것이 산문이던 운문이던 간에 히브리 문장 구조의 핵심임을 알아야 한다.

 

 계속해서 히브리 문장구조인 키아즘에 관해서 유대인으로 16세기의 드로시(De Rossi)의 작품 ‘눈의 빛’(Meor Enajim)에서 최초로 성경에 나타난 내용을 중심으로 발표되었다. 그는 이 책에서 과거 교부들에 의해 간헐적으로 히브리 문장구조에 대하여 언급 되어왔던 것들과 비교하여 볼 때 획기적인 적용으로 볼 수 있다. 한편 벵겔(J.A.Bengel)dl 1742년에 저술한 주석에서 이 구조에 대해 언급 및 활용되고, 그가 처음으로 병행 구조(chiasmus)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벵겔은 사상이나 용어의 ‘병행 구조’뿐만 아니라, 아직까지 아무도 발견하지 않은 ‘교대 병행 구조’(alternating parallelism)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그는 구체적인 예로 로마서 3장 9절 – 4장 12절을 7개의 부분으로 병행 구조로 배열하고 중심에 3장 22절의 믿음이라는 단어를 배치하였다.

 

 키아즘의 비약적인 발전은 1752년 영국에서 유대인으로 기독교 신학자였던 로버트 로우스(Robert Loeth)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히브리인의 거룩한 시”라는 제목으로 일련의 강의를 시작했다. 이것이 현대적 히브리 문장구조라고 불리는 병행구조 연구의 본격적인 장이 마련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로우스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많은 부분이 히브리 문장 병행구조라는 히브리 시의 리듬의 본질을 발견한 공로가 있다. 그는 히브리 문장구조를 다음과 같이 “각 주기 안의 구성 요소간의 어떤 동일성, 닮음, 관계성으로, 같은 주기의 구성 요소들이나 줄 들 안에서, 어떠한 규칙들에 의해서 상호 간에 일 들이나 단어들이 대답되어지는 것이다”라고 정의했다. 그는 더 발전시킨 히브리 문장 병행구조를 동의적(synonymous, gradational : 눅 1:46-47), 반의적(antithetic, opposite : 잠 27:6), 종합적(synthetic, construction: 시 19:7-9)으로 세분화한 신학자로 기록된다. 이러한 많은 예들이 로우스(Robert Lowth)의 저작인 “이사야서의 새로운 번역”에 아주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일련의 일들은 그가 히브리 문장 구조에 익숙한 유대인이기 때문에 되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때부터 히브리 문장구조는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했다. 정작 로우스의 책이 세상에 나온 것은 독일 학자인 믹카엘리스(J. D. Michaelis)에 의해 수정 보완되어 1758년과 1761년에 각각 출판되었다.

 

 그들의 공로로 인해 우리는 히브리 문장 병행구조의 분야에 기초적인 토대가 마련되었다. 여기서 우리가 어떻게 로우스에 의하여 키아즘이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는가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로우스가 유대인 신학자이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점이다. 우리는 로우스의 절대적인 도움으로 히브리 문장구조에 대한 비약적인 발전과 아울러 더 많은 연구에 획기적인 계기가 되었던 점을 주목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대인 신학자들인 랍비들이 성경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원리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런 그의 유대적인 배경이 이방인 신학자들의 책상에서 성경을 연구한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가 자기 민족이 구약성경을 해석하던 원리들을 가지고 신구약 성경을 히브리적인 문장구조에 관심을 가지고 적용했기 때문에 키아즘의 비약적인 방전이 가능했다고 보면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유대인인 로우스가 기독교 신학자로 히브리 문장 구조의 핵심을 알게 된 것은 아주 우리에게 무척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때부터 그의 유대적인 배경에 입각한 해석학의 적용으로 다른 신학자들이 히브리 문장구조인 ‘교차 병행구조’에 대한 연구의 꽃을 피우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로우스의 연구를 이어 받은 영국의 존 제브(John Jebb)는 1820년에 발표된 “거룩한 문학”(Sacred Literature)에서 로우스가 말한 동의적 병행을 “같은 어원의 병행구조”(coganate parallelism)로 대치할 것을 주장했다. 또한 그는 로우스에 의해 제안된 세 가지 종류 외에 한 가지를 추가하여 이것을 “내향적 병행 구조”(introversion, introverted parallelism)라고 명명한 것이 그의 중요한 공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종의에 의하면 키아즘은 “시의 문장 가운데에 그 줄이 얼마이든 간에 처음이 끝과 병행하고, 두 번째가 마지막 전 것과, 이런 식으로 계속되어져서, 밖에서 안 쪽 중심으로 들어가는 모양”이라고 말했다. 그는 시편 135편 15-18절을 예를 들어 설명하였다. 그는 이 원리를 더욱 발전시켜 병행원리를 구약에서 신약으로 확대 적용하여 많은 문장들을 문단이나 연으로 집단화 하였다.

 

 한편 로우스는 줄 만으로의 병행 구조를 다룬 반면, 독일신학자 제브는 병행조를 긴 본문 부분에도 적용한 것이 공헌이라 하겠다. 계속해서 제브는 “앞에서 열거한 각 형태는 많은 부속 변형과 상호 결합이 존재하며, 여러 절들이 여러 가지 형태로 상호 결합되며, 분위기가 상호 문장에 생기를 띠게도 하며, 사고의 흐름을 특수하게 부각시키기도 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 외에도 병행 구조에는 여러 가지의 변형 형태가 존재하며 각 줄들은 2행 배열, 3행 배열, 4행 배영 또는 그 이상의 형태를 가진다고 하였다. 그는 이 구조를 취급하는데 있어서 American Standard Bible을 사용하였다. 따라서 제브는 실로 키아즘을 대중화시키는 일에 선구자로 간주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영국의 토마스 보이스(Thomas Boys) 목사는 1824년 그의 저서 “Tactica Sacra”와 1825년의 “Key to the Book of Psalms”에서 도치 순서(inverted order)에 관하여 연구한 것을 발표하였다. 보이스는 이러한 형태인 도치 순서 병행은 히브리인의 문학작품, 대화, 토의 등에서 두루 발견된다고 하였다. 보이스는 제브의 ‘내향적 병행구조’란 용어를 버리고 “대응(correspondence)”란 용어를 사용하였는데, 그 이유는 이러한 현상들이 줄들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문장이나 책 전체에도 적용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즉 병행 구조의 한계를 더욱 확장시켜 같은 문단에서 각 대응되는 줄들 간, 뿐만 아니라, 전체 문단 간에서도 이와 같은 상호 대응이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그는 모든 구조를 분류하면서 1) 교대적인 2)내향적인 3) ‘교대적인 + 내향적인’ 결합형의 형태로 분류하였다.

 

 스코틀랜드의 신학자인 존 포비스(John Forbes)는 1854년에 “성경의 대칭적 구조”(The Symmetrical Structure of Scripture)를 출판하여 신구약에 나타난 도치 구조를 찾아냈으며, 그의 책에는 로우스와 벵겔과 보이스 및 제브를 자주 인용하였다. 또 다른 스코틀랜드 학자인 윌리엄 밀리간(William Milligan)은 요한계시록을 연구하여 그의 저술에서 도치 순서 구조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렇지만 그는 제브나 포비스가 사용한 용어들은 사용하지 않고, 단지 “도치 병행 구조”라는 단어만 사용했으며 이러한 구조에 관해 확실한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1908년에 룬드(Nils Wilhelm Lund)가 1942년에 그의 박사학위 논문인 “Chiasmus in the New Testament”를 시작으로 이에 관련된 여러 눈문들을 다수 발표하였다. 그는 1922년에 옥스퍼드 대학 출판부에서 벌린저(E.W.Bulliger)의 감수 아래 “동료성경(The Companion Bible)”을 출간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도치 구조’를 많이 적용해서 발전시켰다. 하지만 이 책은 세대주의 입장에서 편집되어 많은 오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참고로 할 때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또한 1978년에 웰치(John W. Welch)가 “Chiasmus in Antiquity”라는 책을 통하여 그 간의 동 분야에서 이룩한 업적들을 전체를 종합해서 모았으며 여기에 자신의 연구를 포함시켜 편집 발표하였다.

 

4. 단문, 히브리 문장구조의 종류

 

 아래의 분류는 단문의 경우 나타나는 키아즘 병행구조에 적용된 기본적인 분류이다. 정말 히브리 문장구조에는 확실히 절과 간 사이에 병행구조가 있다. 여기서 각 문장의 단락들은 그 글의 중심 문단으로부터 서로 병행하고 대칭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신학자들은 이러한 대칭에 대해서 병행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문장 구조의 병행은 많은 다양성과 등급이 있다. 그렇지만 히브리 문장구조는 여러 가지의 기본적인 형태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러므로 히브리 문장 구조는 아래의 여러 가지 구조들이 교차 병행되어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생하게 구성되어 있다. 히브리 문장구조는 이 몇 가지 기본적인 병행에서 파생되어 다른 여러 가지의 다양한 병행 구조가 포함된다. 우리가 히브리 문장 구조의 기본적인 형태를 알고 있으면 성경에 나와 있는 다른 형태의 것들은 어렵지 않게 적용할 수 있다. 이제 우리가 병행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이는 병행되고 있는 내용과 단어 사이에 어떤 관계로 설명하는 가에 대한 문제이다.

동의적 병행

 

 근대의 최초로 유대인 신학자가 된 로우스는 정의하기를 히브리 문장 병행 구조로 대응하는 곳에 묘사된 단어는 서로 차이가 있어도 실제로 그 의미는 같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좀 더 쉽게 설명하면 문장의 서로 대응되는 병행구조는 같은 의미를 가지나 반복을 피하고 좀 더 이해를 돕기 위하여 동일한 의미를 가진 다른 용어를 사용해서 구체적인 뜻을 설명한다. 따라서 어떤 문장에서 한 주제가 정해지면 그 전체 또는 일부가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는 다른 용어로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단어는 서로 다르지만 그 뜻은 동일한 어원(cognate)이라는 용어가 더 적합하다고 제시했다. 하지만 후대의 이 분야를 깊이 연구한 신학자들은 같은 개념이 점진적으로 상승 또는 하강한다는 의미에서 동의적 병행을 점진적 병행(gradational)이라는 단어가 더 적합하다고 하였다.

 

동의적 병행이 되는 시편에서 그 예를 살펴보자.

 

예) 시편 8편 4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니이까

 

  사람과 인자 그리고 생각과 권고가 서로 동의적으로 병행되고 있다. 시편이나 잠언은 이런 동의적 병행이 많이 나타나는데 그 이유는 같은 문장을 단순히 반복하는 것보다 그 뜻을 더 분명하고 강조하는데 동의적 문장이나 단어를 통해서 표현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히브리 문장구조에서 동의적인 병행은 단순한 반복을 피하고 하나님께서 그 사실을 강조하고 각인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가장 많이 쓰이는 형태의 문장이다. 특히 어떤 사실을 말하고 우리로 하여금 그 의미를 잘못 이해하지 않도록 다시 한 번 동의적인 표현을 써서 그 뜻을 분명히 하기 위한 히브리 문장구조가 가지고 있는 특징이라 말할 수 있다.

 

가장 단순한 히브리 문장구조를 통해서 다시 한 번 동의적 병행을 살펴보자.

 

시편 19편 2절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말한다

 

 본문은 내용적으로 볼 때 병행되는 단어들이 서로 동의적이다. 다른 예로는 시 21:1-2; 24:3-4; 107:1, 사 55:6-7 등을 예시하였다. 동의적 병행은 성경에서 가장 많이 나타나는 히브리 문장구조의 형태로 보면 된다. 우리가 동의적 병행의 구조를 보면 하나님께서 좀 더 구체적으로 그 단어와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비슷한 단어나 같은 의미의 단어를 통해서 강조하고 반복할 때 많이 쓰이는 히브리 문장구조의 가장 일반적인 패턴이다.

 

반의적 병행

 반의적 병행은 문장 구조 안에서 서로 두 줄이 병행이 되고 있으나 서로 간에 단어나 감정이 반대로 되는 경우를 말한다. 한편 히브리 문장구조에서 반의적 병행 구조를 자주 사용하는 덧은 바로 반대적인 개념을 언급하기 때문에 다른 해석이 없어도 성경을 읽는 사람이 쉽게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흰색과 검은색을 대조하여 그 차이를 설명하기 위하는 것과 같다. 아래의 잠언에 나타난 반의적 병행은 서로 반대적인 의미로 설명하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은 쉽게 그 의도를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그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주로 잠언에서 하나님께서 자주 쓰는 방법으로 동의적 병행과 아울러 반의적 병행은 매우 중요한 히브리 문장구조의 형태이다.

 

잠언에 나타난 반의적 병행의 형태의 예를 살펴보자.

 

예) 잠언 27장 6 - 7절

 

친구의 통책은 충성에서 말미암은 것이나

원수의 자주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

배부른 자는 꿀이라도 싫어하고

주린 자에게는 쓴 것이라도 다니라

 

 본문은 서로 대칭되는 단어와 내용이 서로 반대가 되는 단어를 통해서 히브리 문장구조의 반의적 병행의 패턴을 잘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면 친구와 원수가 서로 반의적으로 병행이 되고 있고, 더 발전하여 친구는 충고할 때 충성된 마음으로 시작하지만, 원수의 가식적인 사랑의 행동은 거짓에서 출발하는 것이라고 반의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계속해서 배부른 자와 주린 자가 반의적으로 병행이 되고 있고, 꿀과 쓴 것이 반의적으로 병행되어 그 의미가 너무도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런 예들은 잠언에 주로 많이 나타나고 있는데 더 연구하고 싶으면 잠언 10장 1, 7절과 29장 26절 그리고 시편 20장 7 - 8절에서 찾아보기 바란다.

 

종합적 병행

 

 키아즘은 근대에 와서 유대인 신학자 로우스에 의하면 히브리 문장구조인 병행 구조가 건축물의 형태와 유사하다고 하였다. 그 이유는 단어와 단어, 문장과 문장사이에 동의적 병행이나 반의적 병행이 직접 존재하지 않지만, 본문의 전체 문장과 각 부분들의 주제를 더 분명하게 보여주기 위해서 구조의 형태에서 서로 대칭 및 동질적으로 종합적인 내용으로 병행의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명사는 명사에게, 동사는 동사로, 의문사는 의문사로, 구성 요소들은 구성 요소들에게, 반대는 반대로, 질문은 질문으로 등 유사성이나 동일성이 상호간에 종합적인 형태로 병행이 되는 형태를 말한다. 히브리 문장 구조에서 종합적 병행을 통해서 성경을 쉽게 이해하도록 배려하기 위함이다. 우리가 아래의 예를 보면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종합적 병행에 대한 예를 시편에서 살펴보자.

 

예) 시편 1편1절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죄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않지 아니하고

 

 본문은 단어나 동사가 직접 대칭은 되지 아니하나 비유적이거나 은유적인 같은 사상을 가지고 전개됨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시편 기자는 어떤 점진적인 병행과 종합적인 병행을 동시에 히브리 문장 구조를 사용하여 좀 더 쉽게 이해할 구 있도록 돕고 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복 있는 사람이 어떤 상태에서 살아야 하는지를 실제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고 더 나아가 죄인의 길에 서지도 아니하고 오만한 자리에 앉지 않는다는 행동의 동사를 통해서 복 있는 자가 어떤 자리에 있는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시편 기자는 복 있는 사람은 어떤 자리에 있는가에 따라 그곳이 복된 자리가 될 수도 있지만, 어떤 자리는 죄와 악인들이 있는 복 없는 자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 있는 자는 악인과 죄인 오만한 자들이 아닌 의인들의 자리에 있을 때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설명을 히브리 문장구조에서 종합적인 병행을 통해서 설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말 술 먹는 자리는 복 있는 자리라고 할 수 없고 은혜 받는 자리가 복 있는 가리라는 사실을 시편기자는 너무도 경험적으로 알고 있기에 고백하고 있다. 물론 시편 1편은 복 있는 사람과 복 없는 사람 즉 의인과 악인에 대한 종합적인 병행을 통해서 설명하고 있다.

 

교차적 병행

 

 교차적 병행은 제브에 의해 내향적 병행구조(introverted parallelism)로 제시된 4번째 구조이다. 교차적 병행은 대칭적 병행구조라고도 말하는데 이는 문장에서 줄이 아무리 길더라도 글의 중심에서부터 시작하여 첫 줄이 마지막 줄과 병행이 되고 둘째 줄은 마지막 전 줄과 병행이 되고 그런 식으로 전체가 배열되는 형태를 말한다. 키아즘은 신구약 성경을 기록하고 있는 이러한 ‘히브리 문장 병행구조’를 CHIASMUS(키아스무스, synchysis, epanodos)라고 히브리 문장구조를 연구한 신학자들이 불러왔다. 저자는 히브리 문장구조에 해당하는 이러한 형태를 ‘히브리 문장구조’ 즉 키아즘(chiasm)란 용어로 통일한다. 주님께서 저자에게 키아즘이라는 한 가지 형태의 히브리 문장구조만 배운 것이 아니라 히브리 사고의 전반적인 내용을 배웠기 때문에 이렇게 종합해서 키아즘 프리칭이라는 책을 쓸 수 있는 큰 축북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히브리 문장구조는 문장에 나타나는 글의 형태를 통해서 저자의 의도를 쉽게 파악할 수 있다. 키아즘 병행구조는 신구약 성경에 적용할 수 있는 히브리 문장구조의 핵심적인 원리가 된다. 따라서 히브리 문장구조의 원리는 성경의 모든 문장에 망라해서 적용되고 있다. 실제로 우리가 이상의 히브리 문장 병행구조를 모르면 성경을 정확히 해석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한글 성경은 번역에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병행구조의 원리는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교차적 병행구조는 우리가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예) 마태복음 6장 24절

 

A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B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B`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A`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본문은 A에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고 언급하면서 A`는 구체적인 설명의 형태로 한 사람은 우리로 적용하고 두 주인은 하나님과 재물이라고 정확한 해석을 하고 있는 형태가 교차적 병행구조의 키아즘이다. 실제로 우리가 키아즘을 모르면 두 주인이 정확히 무엇인가를 고민할 수 밖에 없다고 선언하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든지 재물을 섬기든지 하는 존재이지 둘 다 섬길 수 없도록 지음 받았다고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존재를 섬길 것인지를 선택해야 하는데 주님은 하나님을 섬길 것을 암시적으로 압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키아즘의 형태인 교차적 병행은 가장 많이 나오는 형태로 긴 문장이 아닌 짧은 문장에서 즐겨 쓰는 방법이다.  

 

마태복음에서 우리는 또 다른 예를 살펴보자.

 

예) 마태복음 10장 16절

 

A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B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고다

 B`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A`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위에 나타난 예를 보면 AB-B`A`로 기록하고 있는 교차적 병행구조를 볼 수 있다. 이러한 현태는 성경에 가장 많이 나타나는 히브리 문장 구조 형태에서 찾을 수 있다. 또한 이러한 병행 구조는 성경해석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에 해당한다.

 

교대적(alternating) 병행

 

 교대적 병행은 전반부의 내용이 그대로 후반부에서 같은 순서로 전개되는 것을 말한다. 이런 히브리 문장 병행구조 형태의 문장이 반복되면서 성경의 저자가 자신의 의도를 자연스럽게 그 뜻을 밝힘으로 이 본문을 해석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다르게 해석하는 실수를 막고자 함이다. 예를 들어 성경의 저자는 교대적 병행의 구조를 통해서 자신이 A라고 말한 것은 A`라는 의도의 뜻이기 때문에 다른 의미로 해석하지 말라는 적용된 설교의 문장구조이다. 그러므로 히브리 문장구조에서 교대적 병행의 짝을 찾으면 무엇을 설교할 것인지를 저자 자신이 분명하게 말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엉뚱한 내용으로 설교할 수 없게 해준다.

 

이제 우리는 교대적 병행구조의 예를 살펴보자.

 

예) 마태복음 6장 34절

 

 A 그러므로 내일 일을

  B 염려하지 말라

 A` 내일 일은 내일

  B` 염려할 것이요

 

 교대적 문장구조는 병행이 나타날 때 같은 순서로 반복되어 설명하는 수순을 따라 기록된다. 본문은 짧지만 AB-A`B` 교대적 병행구조로 되어있다. 다시 말해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일이기에 내일 것까지 오늘 가져다가 염려하는 어리석은 일을 반복하지 말라는 교훈을 강조하고 있다.

 

또 다른 예를 계속해서 살펴보자.

 

예) 에베소서 1장 15절

 

A 주 예수 안에서

 B 너희의 믿음과

A` 모든 성도를

 B` 향한 사랑을

 

 본문은 아주 단순한 문장이기는 하지만 AB-A`B` 교대적 병행구조를 볼 수 있다. 이제 우리는 누가복음에 나타난 교대적 병행구조의 예를 살펴보자.

 

 예) 마태복음 7장 7 - 11절 [기도의 명령]

 

A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B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C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요

 

A`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B` 찾은 이가 찾을 것이요

  C`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라

 

 이 문장의 예는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내용으로 ABC-A`B`C`의 순서로 교대적 병행구조로 본문이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저자는 몇 가지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첫째로 이 본문은 앞에 등장하는 ABC의 문장과 A`B`C`의 교대적 병행구조가 단순히 강조하기 위한 서술인가 아니면 그 이상의 다른 의미의 설명인가 하는 문제이다. 둘째로 이 본문이 기도에 대한 약속인데 같은 내용을 다른 내용으로 설명하는 것인가 아니면 전혀 다르게 표현한 기도의 점층적 표현인가 하는 문제이다. 실제로 이 본문은 히브리 문장구조의 키아즘의 진수를 알려주는 기법으로 우리가 이 패턴을 잘 이해하면 다른 성경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먼저 ABC는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불변적인 약속임과 동시에 히브리 문장구조에서 명령형 동사로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명령형 동사는 히브리 문장구조에서 아주 독특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명령형 동사가 하나님께서 약속한 말씀이라고 할지라도 그 명령의 약속대로 순종할 것을 전제함과 동시에 순종할 때 그 말씀이 실행이 되도록 결정해 놓았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말씀을 백번 천 번 암송하고 가슴에 품고 있어도 이 말씀은 아무런 일을 할 수 없다. 그 이유는 히브리 사고에서 명령형 동사는 순종할 때 일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직접 그 기도하라는 약속을 붙잡고 기도하는 그 시간이 바로 하나님께서 직접 그 기도를 응답하시는 타이밍이다. 하나님은 기도에 대해서 순종에 대해서 믿음에 대해서 아는 것에는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으신다. 도리어 우리가 기도할 때, 순종할 때, 믿음의 반응을 할 때 일을 시작하신다. 그것이 명령형 동사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의 실행 원칙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기도하는 자를 찾으시고 그 사람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역을 진행하신다. 이 원칙은 히브리 사고의 명령형 동사가 가지고 있는 전제이며 원칙이다. 이 원칙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변할 수 없는 진리이다.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하는 사실은 ABC가 주님께서 보편적인 모든 사람들에게 약속하는 명령형 약속이라는 사실이다. 실제로 ABC 단계는 기도와 응답에 대해서 약속하는 명령일 뿐 응답 자체는 A`B`C`의 단계에서 우리 자신이 기도할 때 성취되는 응답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히브리 문장구조에서 ABC가 보편적인 기도하라는 명령의 약속일 뿐이다. 이 단계에서는 기도의 능력이나 응답이 있을 수 없다. 기도의 응답은 A`B`C`의 단계에서 그 약속의 말씀을 믿고 실천하는 자들이 경험하는 세계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것이 본문의 히브리 문장 교대구조를 통해서 주님께서 가르쳐 주고자 하는 분명한 목적이다. 이 본문은 성경 각권을 다룰 때 마태복은 키아즘 편에서 아주 자세히 언급할 것이다.

 

교대적 병행구조의 예를 하나 더 살펴보자.

 

예) 고린도전서 3장 6-7절

 

 A 나는 심었고

  B 아폴로는 물을 주었으되

   C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느리라

 

A` 그런즉 심는 이나

 B`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C`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분쟁은 언급하고 해결하려는 과정에서 일어난 분쟁의 원인을 근본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본문의 핵심 키아즘 구조이다. 고린도 교회에 일어난 분쟁의 원인은 제일 먼저 지도자들에 대한 왜곡에서 시작된 것을 바울은 잘 알고 있었다. 이 교회를 개척한 바울을 지지하는 바울파가 득세했고, 그 다음은 초대교회의 정신적 지주인 베드로를 지지하는 베드로파가 도전했고, 바울을 이어 목회학 아볼로를 지지하는 아볼로파가 만만치 않았고, 마지막으로는 예수를 믿기 때문에 자신은 누구의 파도 아닌 그리스도파라고 만날 때마다 큰 파벌 싸움이 있었던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바울은 이 분쟁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고 히브리 문장구조인 교대적 병행구조를 가지고 한 방에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관점에서 출발하고 있다.

 

 바울은 A에서 나무로 고린도 교회의 개척을 비유하면서 자신은 심었을 뿐인데 그 심었다는 의미를 A`에서 심은 자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설명하고 있다. 바울이 자신을 지지하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교회의 지도자인 목회자의 위치가 어떤 존재인지를 스스로가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선언하고 있다는 점이다. 많은 교회가 지도자의 문제로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현 시대의 상황에서 본문에서 바울 자신이 자신의 존재의 위치를 부정하는 것은 목회자의 현재의 위치가 어떤 모습인지를 깨닫고 적용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복적인 관계를 설명하는데 완벽한 샘플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지도자란 자리의 문제가 아니고 역할의 문제만 있다는 인식이 고착화된다면 많은 교회의 자리의 갈등이 해결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바울은 계속해서 B에서 아볼로를 지지하는 성도들을 향해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나, B`에서 설명하기를 물주는 이도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대단한 존재가 결코 아니라 바울 자신처럼 아볼로도 아무 것도 아니라고 선언하는 키아즘 구조인 것이다. 지도자가의 자기 부인은 오늘날 메가톤급 교회의 목회자가 하나님의 위치처럼 높아진 상황에서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하고 깨닫게 하는 고백이 아닐 수 없다. 교회의 지도자는 단지 심는 일과 물주는 일의 역할만 존재하고 결국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설명은 오늘날 우리 교회의 모순을 단번에 해결할 수 있는 원리가 아닌가 여겨진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모든 갈등과 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결정문을 선언하는 히브리 문장 교대적 병행구조를 보여준다. 바울은 C에서 ‘오진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였으니’라는 선전포고 같은 말씀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다. 바울은 여기서 오직이라는 유일무의한 단어를 선포하고 있는데 이 단에서 반발하거나 거부할 자가 없어야 한다는 경고적인 말씀이다. 오직 고린도 교회가 성장하고 자라는 것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이고, 또한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이지 그 어떤 개인의 교회가 될 수 없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바울은 C`에서 오직 고린도 교회를 자라게 하신 이는 하나님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말씀은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뿐 그 누구도 교회의 주인이 될 수 없다는 의미이다. 교회의 성도인 양떼도 주님의 양이지 그 어떤 지도자나 목회자의 양이 될 수 없고, 교회 자체도 하나님만이 주인이라는 선언적인 병행구조의 설명이다. 이런 사실을 망각하고 그 어떤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자리에 앉은 것은 사탄적인 발상이라고 주님은 말씀하고 계신다. 결국 바울은 심는 자나 물을 준 자는 하나님께 그 행한대로 상급을 받을 뿐, 이 땅의 그 어떤 목회자라고 할지라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설명하였다.(고전3:8)

 

5. 장문, 히브리 문장구조의 형태

 

순차적 병행

 

 순차적 병행은 저자가 신구약 성경에서 제일 먼저 발견한 히브리 문장구조의 형태이다. 또한 저자는 히브리 문장구조의 전체를 키아즘(Chiasm)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통일시켜 신학적으로 처음으로 붙여 말하는 것이다. 저자가 보기에 순차적 병행구조는 헬라 사고에 익숙한 사람들이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문장구조임에 틀림없다. 지금까지는 그 어떤 사람도 성경이 히브리 문장구조로 병행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가장 쉬운 구조조차 설교로 발전시키지 못했던 것이다. 저자도 키아즘을 배우고 설교에 적용하고 가르치면서 마지막까지 풀리지 않았던 것이 바로 순차적 병행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키아즘을 연구하면 할수록 지금까지의 병행적 분류로 해결할 수 없는 본문이 많다는 것에 대한 문제에 봉착했다. 그러다가 순차적 병행 문장으로 설명한 본문이 있다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발견했다. 그 후 신구약 성경 가운데 순차적 병행이 많이 있을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본문의 병행구조들을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발견은 저자가 우직스럽게 성경 본문만을 붙잡고 한길만을 걸어온 것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의 결과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히브리 문장구조에서 순차적 병행은 긴 본문 안에서 각 절 별로 병행적 구조가 같은 패턴으로 계속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A 와 A`가 순서적으로 설명되어지고 계속해서 B 와 B`의 패턴으로 C C`, D D`로 연속적으로 설명되어지는 구조이다. 이런 구조는 헬라 사고에 익숙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만들어진 특별한 구조임을 저자가 찾아낸 원리이다. 순차적 병행구조는 이야기 형태의 글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짧은 본문만 가지고 키아즘의 형태를 찾았다면, 긴 본문에서 순차적 병행구조로 접근할 때 전체적 내용이 한눈에 들어오는 병행구조라는 사실이다. 앞으로 이런 예들은 이 책에서 많이 접하겠지만 이렇게 글로 설명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점을 인식해 주면 좋겠다.

 

 히브리 문장구조의 순차적 병행은 지금까지 획일적인 형태만을 고집한 사람들의 선입관을 깨고 새롭게 성경을 접근하고 해석할 수 있는 획기적인 틀을 마련해주었다는 점이다. 저자는 이런 히브리 문장구조의 형태를 새롭게 분류하여 키 구조와 브이 구조로 구분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성경이 히브리 문장구조로 되어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의 문제를 알아야 한다. 이는 성경이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그 시대에 주신 설교의 현태를 가진 문장의 형태로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볼 때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라는 문장으로 우리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이미 성경 자체가 하나님에 의해서 해석되어진 말씀으로 받아야 한다. 그러면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은 무조건 해석하고 주석해서 오늘날의 환경에 적용을 덧붙여 설교한 모든 행위에 대하여 다시 한 번 되물어 보아야 마땅하다. 지금까지 수천 년간 설교해 온 것을 정당화하는 것이 마땅한가 말이다. 저자는 이제부터 히브리 문장구조를 이해한 목회자는 자신의 의지를 따라 해석한 설교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설교한 문장구조를 가지고 선포하는 자리로 돌아와야 한다는 믿는다.

 

히브리 문장의 키(X, Chi) 구조

 

 히브리 문장구조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는 교차병행구조라는 부르는 키 구조이다. 이 형태는 신구약 성경의 많은 분량이 키 구조의 형태라고 보면 틀림없다. 이것은 히브리 문장에서만 나타나는 형태로 다른 언어에서는 그 유래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만약 우리가 이런 히브리 문장구조로 글을 쓰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성경을 번역해보면 이런 구조로만 번역이 가능하게 되어 히브리 문장의 형태로 글이 구성된다. 성경이 이런 형태로 기록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의 형태로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기록된 글이기 때문에 필연적인 결과였다. 결국 이런 히브리 문장구조의 형태는 하나님의 사고로만 기록할 수 있는 유일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설교 형식의 문장에서는 반복과 점층적인 상승과 설명이 필수적인 것이기 때문에 이런 히브리 사고의 문장 구조가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키 구조의 예들은 앞에서 많이 언급했고 앞으로도 성경의 각권에 나타나는 예들을 구체적으로 제시할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히브리 사고의 문장의 현태가 나올 때 해석자가 가장 주의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망각하면 그는 설교자의 자격이 없다. 키 구조의 해석은 이미 성경 자체가 해석적인 문장의 구조로 설명을 하고 있기 때문에, 해석자는 그 구조의 분석만 잘해도 이미 설교의 내용은 다 준비된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이렇듯 키 구조의 형태는 우리가 많은 실습을 통해 습관적으로 찾을 수 있는 준비가 되어야 한다. 저자는 이 책을 읽는 모든 분들이 히브리 문장구조의 키 구조에 전문적인 안목의 사람이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히브리 문장의 순차적 구조(V구조)

 

 브이 구조의 히브리 문장구조는 저자가 새롭게 찾아낸 히브리 문장구조의 틀이다. 저자는 브이 구조를 키 구조에 넣기 보다는 너무 다른 형태이기 때문에 새로운 히브리 문장구조 안에 배치하였다. 특히 브이 구조는 순차적 병행이라는 이름으로 저자가 분류하였다. 물론 브이 구조는 키 구조의 형태에서 변형된 것으로 헬라 사고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친숙한 히브리 문장구조이다. 이는 저자가 십년동안 키아즘 즉 히브리 문장구조를 연구하면서 찾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의 결과하고 고백하고 싶다. 이런 형태는 앞으로 설교자가 앞 뒤 문장의 형태를 잘 보면 찾을 수 있는 원리이다. 정말 좋은 설교자가 되길 원하면 이런 브이 형태의 키아즘을 찾으면 된다. 한편 브이 구조의 설교의 형태는 실제로 헬라 사고의 문장에 길들여진 우리에게 익숙한 문장의 구조이기 때문에 우리가 더욱더 쉽게 친숙할 수 있다.

 

  브이 구조의 형태의 문장은 아주 단순하게 성경의 기록자가 한 문장을 설교하고 바로 다음 문장에 연속해서 자신의 해석을 달아 놓은 형태이기 때문에 찾기도 쉽고 접근하기도 쉬운 글이 분명하다. 이방인의 문장의 사고에도 아주 숙달된 문장으로 우리가 좀 더 찾기 쉬운 것이 특징이다. 브이 구조의 문장 형태는 특별히 논리성이 강한 서신서에 가장 두드러진 현상이라고 보면 된다. 그 이유는 서신서가 주로 내러티브 문장이 아닌 서술적인 문장으로 된 설교의 형태이기 때문에 이런 구조로 작성할 때 좀 더 쉽게 이 편지를 읽어주고 들려주고 이해하는데 훨씬 더 효과적인 문장의 형태이기 때문이다.    

 

 브이 구조의 키아즘의 해석은 키 구조의 해석보다는 우리에게 좀 더 친숙하고 익숙한 형태로 접근할 수 있다. 성경의 기록자가 이미 설교로 해석해서 적어 놓았기 때문에, 설교자가 억지로 해석하려고 애쓰지 않고도 쉽게 설교할 수 있는 형태이다.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은 브이 구조만 찾으면 이미 성경의 원저자가 기록해 놓은 순서대로 설교의 뼈대가 완전하게 있기에 우리가 억지로 해석하려고 힘쓸 필요가 없이, 설교자는 그 내용의 순서를 따라 잘 적용하여 설교하면 될 수 있다. 이번에 저자는 이 책에서 성경 전체를 통해 브이 구조의 형태의 설교를 많이 접하게 되고 익숙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정말 특이한 점은 브이 구조가 다시 키 구조의 문장 형태로도 도치된다는 사실이다.

 

이제 브이구조의 본문을 가지고 그 예를 살펴보자.

 

예) 눅 16장 17-31정

 

A(19절) 한 부자                   A`(20절) 한 거지 나사로

B(22절) 그 부자의 죽음            B`(22절) 그 거지도 죽음

C(23절) 그 부자가 음부에서 고통   C`(23절) 그 거지는 아브라함의 품에 있음

D(24절) 아버지에게 처음으로 간구  D`(25절) 하늘 아버지의 대답

E(27절) 또 다른 간구(영혼구원)    E`(29절) 하늘 아버지의 또 다른 대답

                     F(29,31절)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들으라

 

 본문은 히브리 문장의 순차적 구조를 가장 명확하게 보여 준다. 비록 히브리 문장의 순차적 구조를 전혀 모르는 사람조차 저자가 작성한 본문의 구조만 보아도 하나님께서 이 본문을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특히 본문은 처음에는 두 사람의 대칭적 관계를 대비하면서 말씀하고자 하는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면, 중반부에 가면서 천국과 지옥의 병행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도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후반부에서는 한 부자와 주님의 대화를 통해서 이 땅의 사람들을 구원하는 방법에 대한 이여기로 마무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렇듯 히브리 문장의 순차적인 구조는 도표로 표현되고 그 주제나 제목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하나님께서 무엇을 의도하고 말씀하고자 하는 내용이 무엇인지를 이것을 보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알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는 것이 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순차적 병행구조를 모르고 읽거나 설교하면 그 내용이 명확히 드러나지 않을 가능성이 너무 크다는 사실이다. 결국 히브리 문장구조의 원리를 알고 어떤 구조인가를 아는 것은 하나님의 의도하신 말씀의 핵심을 한 눈에 파악하는 것이 키아즘의 특징이라 말할 수 있다. 이 본문은 누가복음 키아즘 편에서 아주 자세히 다룰 것이다.

 

6. 히브리 문장구조의 성경 해석 및 적용

 

 히브리 문장구조의 ‘키아즘의 병행구조’는 현 시대에서 보면 비효율적이고 문장이 너무 복잡하게 보일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이것을 가볍게 취급하고 간단히 넘길 문제가 아니다. 특별히 히브리 문장구조가 이렇게 독특한 양식을 갖고 있는 것은, 성경을 읽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기억하기 쉽고 강렬한 인상을 심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는 문서가 발달하였으나 그 당시는 구전 문화로 모든 것이 구전에서 구전으로 전해진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이런 당시 문화적인 역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히브리 문장 구조는 아주 독특한 특성을 가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히브리 문장구조는 그 특성상 한번 들으면 쉽게 잊어버릴 수 없는 구조로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그 이유는 당시 히브리인들에게 성경은 모든 사람등의 필수적인 법과 질서를 가진 경전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히브리 문장 구조를 모르면 본문을 정확히 해석할 수 없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하나님께서 직접 해석해 놓은 책 성경

 

 하나님께서는 각 시대의 형편을 따라 시대에 맞게 적용해서 히브리 기록자들을 통해서 직접 설교한 본문을 기록한 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이다. 따라서 성경은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신 설교의 기록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의지를 따라 단어와 문장을 잘못 해석하는 일은 더 이상하면 안된다. 물론 목회자 자신도 이런 설교를 하는 것을 조심하고 또한 설교를 듣는 청중들도 인위적인 설교를 더 이상 용납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제부터 지향해야 할 설교를 더 이상 용납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제부터 지행해야 할 설교는 하나님께서 직접 작성하는 히브리 문장구조를 따라 충실히 전달하는 역할을 해야 마땅하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직접 말씀하신 설교를 제쳐두고, 자기의 신학의 틀을 가지고 전통적인 방법으로 설교하는 것은 자신도 괴롭고 듣는 사람도 괴로운 일이기 때문에 더욱 곤란하다. 그러면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신 설교의 원고를 가지고 설교자인 우리가 현 시대의 쉬운 언어로 적당한 예화를 삽입하여 잘 전달하는 순간,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설교 가운데 자신도 느끼고 듣는 사람들도 공통적으로 경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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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2:5-11

5-11절은 키아즘(Chiasm)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키아즘 구조란 헬라어 알파벳의 X를 크히(Chi)라고 읽는데서 나왔는데, A-B-C-B’-A’로 짝이 맞는 구조를 말합니다.
C를 중심으로 좌우가 짝(연관, 관계)이 맞는 것인데, 하나님의 창조 디자인, 구속 디자인, 성막 디자인이 모두 키아즘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DNA와 RNA구조도 키아즘 구조로 되어 있으며, 우리 인체가 좌뇌는 목아래 우측을, 우뇌는 목아래 좌측와 연결되어 있는 것도 키아즘 구조입니다.

5절(A) - 6절(B) - 7절(C) - 8절(D) - 9절(C’) - 10절(B’) - 11절(A’)

 A. 5절 너희 안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

   B. 6절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을 사양.

      C. 7절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심

             D. 8절 사람의 모양으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십자가)

      C'. 9절 하나님께서 그분을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심

  B'. 10절 하늘과 땅과 땅 아래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심.

A'. 11절 모든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 시인.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돌림.

8절의 십자가(Stauru) 사건이 전환점(turning point)되어, 5-7절은 점차 낮아지심(descending), 9-11절은 점차 회복되심(ascending)되는 키아즘 구조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자신을 비우시고 낮아지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시는 “겸비kenosis=emptify”의 모습이며, 하나님께서는 역으로 예수님의 모든 것을 회복하셔서 이전 영광보다 나중 영광이 더욱 크시게 하십니다. 세 단계 낮아지심과 세 단계 영광받으심이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렇게 짝을 맞추어 성경을 읽으면 초대교회 때부터 이단으로 규정된 가현설(Decetism, 예수님의 신성만 인정하고 인성은 가까라는 것)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빌 2:7-8에 예수님은 자기를 하나님의 본체로부터 비었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하신 예수님은 가짜 예수라는 몰몬교 및 사신(신은 죽었다) 신학 및 자유신학이 큰 잘못을 저지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본체(Morphe)를 포기하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낮아지시고 비우셔서 성육신하신 것을 하나님께서 회복시켜(glorification) 더 높은 영광으로 승천하시고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계시다가 재림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을 키아즘 구조를 염두해 두고 읽으시면 난해구절이 해결되고 성경의 문서설이나 고등비평의 위험성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6절의 원문을 다시 번역하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므로 하나님과 동등됨을 탈취물로 여기지 않으셨으나.” 예수님께서는 본래 하나님과 동등되신 분이시지, 그분의 선행에 대한 보상으로 그것을 얻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비우셨다는 말은 그분의 신성(神性)을 포기하셨다는 뜻이 아니고, 그분께서 신적 속성들의 사용을 일시적으로 보류하셨다는 뜻입니다. 비천한 베들레헴 짐승 밥통(구유 manger)에서 사람으로 출생하셨고, 인간 부모 밑에서 30년 동안 조용하게 순종하며 사셨고, 공적인 전도 사역을 하실 때에도 죄인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가난한 생활을 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입니다(요 1:14). 마침내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는데 이것이 예수님의 놀라운 겸손입니다.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죽기까지 아버지께 겸손하게 복종하셨던 것입니다.

9-11절은 인간 예수님의 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입니다. 예수님의 신성(神性)은 성육신 이전이나 이후나, 부활 전이나 부활 후나 변함이 없으시지만, 그분의 인성(人性)은 부활 전과 후에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후에 지극히 크신 영광 곧 신성의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딤후 2:11-12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님과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노릇할 것”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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