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하는 영



  • 거짓의 아비 마귀(요한복음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죄를 조장하는 원조 범죄자 마귀

오늘 본문은 마귀를 ‘처음부터 살인한 자’, ‘거짓말쟁이’, ‘거짓의 아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3:8절은 마귀를 ‘처음부터 범죄한 자’로 소개합니다. 처음부터라는 말은 마귀가 존재하기 시작할 때부터라는 말이 아니라, 역사의 시작 부분들에서부터 악했다는 말입니다.

마귀는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선악과 열매를 따 먹으면 ‘하나님 같이’된다고 거짓말을 하여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선악과를 범하게 함으로써 인류를 죽음으로 이끌었습니다. 거짓말을 했으니 거짓말쟁이요, 죽음에 이르게 했으니 살인자이며, 죄를 낳았으니 거짓의 아비가 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라는 말은 지금도 그렇다는 말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마귀는 환상이나 소설이나 동화 속 존재가 아니라 실존입니다. 오늘도 끊임없이 범죄의 원흉이 되어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에서 멀어지게 하는 일을 범하고 있습니다.

마귀는 사탄, 루시퍼 등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악한 자’ (요일 5:19) ‘불량한 자 (벨리알)’ (고후 6:15), 시험하는 자 (살전 3:5), ‘형제들을 참소하는 자’ (계 12:10) 등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이 이름들은 마귀가 사람들에게 하고 있는 짓을 잘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마귀는 오늘도 갖은 속임수로 성도들을 속이고 있습니다. 자신의 가치를 지나치게 부각시켜 교만에 빠지게도 하고, 자신의 가치를 지나치게 하락시켜 열등감과 자괴감에 빠지게도 합니다. 마귀는 또한 거짓 교리를 지어내어 믿는 자마저도 미혹하고자 하며, 하나님 대신 신으로 위장하여 대신 경배를 받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귀의 거짓에 속지 않기 위하여 진리를 명확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오직 진리가 마귀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입니다.

마귀에게 속한 세상

오늘 본문은 예수님을 완고하게 대적하던 유대인들에게 한 말입니다.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그들을 마귀의 자식이라고 표현을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마귀의 자식이란 말은 ‘마귀에게 속한 자’를 의미합니다. 요한은 이에 대해 요한일서에서 더욱 명확히 설명을 합니다.

“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9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10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요일 3:8-10).

요한은 하나님에게서 나지 않은 자들을 마귀의 자녀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또한 마귀의 자녀들의 특성을 마귀의 영향력과 탐욕에 종속된 자들로 규정을 합니다. 같은 의미로 성경은 마귀를 ‘이 세상의 임금’이라고 (요 12:31)이라고 부릅니다. 사실 마귀는 이 세상의 임금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임금은 당연히 하나님이시고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왕이신 하나님이 아닌 반역자 마귀를 왕으로 섬기며 살아갑니다. 마귀가 불법적으로 세상 사람들의 왕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마귀가 아닌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이 왕이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온전히 우리를 다스리신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입으로는 예수님을 왕이라고 고백하면서 다른 것을 왕으로 삼고 살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마귀는 사람들을 속여 자신이 왕처럼 행세하는 일에 능수능란한 기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창세 이래로 쭈욱 그 일을 해왔으며 사람의 모든 패턴과 심리와 역사를 잘 알고 있습니다. 돈, 명예, 권력, 사람 등의 물질이나, 지성, 감정, 의지, 사상 등의 정신, 그리고 언행과 습관과 문화 등 행동까지 인간의 모든 영역을 통해 각 사람의 약점이 무엇인지를 너무나도 잘 알고 그것을 활용합니다. 그것에 넘어가면 인간은 예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왕으로 모시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자신이 스스로 왕인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왕이 되는 법은 없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도록 디자인 되어 있고, 마귀는 그 왕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려 들기 때문입니다. 이 때 마귀가 시전하는 궁극의 스킬이 바로 “네가 네 인생의 주인이야”라는 거짓입니다. 그 속임에 넘어가는 순간 인간은 자신이 왕이 되어 사는 것으로 착각하지만, 사실 마귀를 왕으로 모시는 결과를 초래하고 맙니다. 마귀의 덫에 넘어갔으니, 그 자체로 마귀에게 예속된 것일 뿐 아니라, 이후의 인생에서도 마귀가 그를 떡 주무르듯 주무르게 됩니다.

3. 인간을 지배하려는 마귀

마귀의 세력은 오늘날도 불신자나 신자들에게 끊임없이 그 영향력을 미치고 있습니다. 불신자들은 완전히 사단의 지배 아래 놓인 사람들입니다. 에베소서 2:1은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베소 교인들은 예수 믿기 전 세상 풍조를 따라 살았습니다. 세상의 풍조는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 즉 마귀가 사람들을 장악하는 수단입니다. 마귀는 지금도 여전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입니다. 여기에서 불순종의 아들들이란 불신자들을 의미합니다. 마귀는 불신자들을 장악하고 하나님이 아닌 세상의 풍조를 좇아 살도록 유혹을 하여 그들의 삶이 마귀에게 예속되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 풍조를 좇아 사는 것은 곧 마귀에게 속한 자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마귀의 세력은 신자들을 향해서도 공격을 늦추지 않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며 경고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벧전 5:8). 요한 역시 “용(사탄)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라고 성도를 대적하는 마귀에 대해 말해주고 있습니다 (계 12:17). 우리는 우리의 인식 여부와 상관없이 무차별적인 마귀의 공격 아래 놓여져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가치가 아닌 세상의 가치를 가지고 세상의 풍습을 따라 사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이 괜찮다고 얘기한다 해서 정말 괜찮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을 거슬러 사는 자들이 되어야 하며, 세상과 구분된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의 풍습은 마귀가 걸어 놓은 덫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만약 말씀을 따라 살지 않고 세상 풍습이나 마귀가 주는 유혹에 따라 산다면 그것은 아직 우리가 마귀에게 속한 상태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함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마귀를 대적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우리가 마귀를 대적하면 마귀는 우리를 피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안에 마귀를 이길 힘을 예수님께서 주셨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원하는 것

1.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 “사탄”

마귀의 첫 번째 의도는 사탄(대적자)이라는 이름의 뜻처럼 하나님을 대적하여 하나님의 일이 이 땅에 이루어지지 않게 방해를 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인간과 아름다운 교제를 나누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방해하기 위해 하와를 유혹하여 범죄하게 만들었습니다. 마귀는 인간의 구원과 마귀의 멸망을 동시에 가져올 예수님의 탄생을 막기 위해 발악을 해왔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탄생했을 때에 예수님을 죽이려는 시도를 했으며, 아담을 유혹했던 동일한 방식으로 예수님마저 유혹하여 구원자의 자격을 빼앗으려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사람들을 격동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들을 이용하여 결국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여셨으며, 또한 마귀의 일을 모두 멸하셨습니다.

2. 인간을 중상하는 자 “마귀”

마귀의 두 번째 의도는 마귀(중상자)라는 이름의 뜻처럼 사람이 범죄하게 한 후, 그 죄를 빌미로 하나님 앞에서 인간을 참소하는 것입니다. 그는 인간에게 죄를 범하게 한 다음 죄를 지었으니 죄값을 받게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주장을 할 근거를 마련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마귀가 당대의 의인이라 불리던 욥을 중상하여 욥에게 고통을 주었던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마귀의 꾀에 넘어가 욥에게 고통을 주신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깨서는 마귀 따위에게 속임을 당하실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욥에게는 고통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신앙의 지경이 있었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가능케 하고자 섭리하셨을 뿐입니다. 또한 욥을 통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악인의 형통과 의인의 고통이라고 하는 난제에 대한 빛을 주고, 고통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바라볼 수 있게 해주시고자 한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려는 자 “루시퍼”

마귀의 세 번째 의도는 “루시퍼(빛을 가진 자)”라는 이름의 뜻처럼 하나님께서 받을 빛난 영광을 자신이 대신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원래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기 위해 하나님을 대적했던 자입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쫓겨난 이후에도 여전히 인간으로부터 숭배받고 영광받기를 갈망합니다.

우리는 모든 거짓말고 속임수를 통해 주인행세를 하려고 하는 마귀를 대적해야 할 것입니다. 그의 의도는 우리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왕으로 모시고 살게 하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떠나게 하는 것이며, 결국 하나님 대신 자신이 영광을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마귀 숭배자에게만 숭배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사랑하는 모든 행위가 바로 마귀를 숭배하는 행위이며, 그것이 바로 마귀의 의도입니다. 마귀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 우리를 통해 이땅에 이루어지는 삶을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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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 하는 영 / 성경 전체에서 4개 구절

열왕기상 22:22-23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어떻게 하겠느냐?’ 하시니 그가 말하기를 ‘내가 나가서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그의 모든 선지자들의 입에 있겠나이다.’ 하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그를 설득하여 이루라. 나가서 그렇게 하라.’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이제 보소서, 주께서 이 모든 왕의 선지자들의 입에 거짓말하는 영을 넣으셨고, 또 주께서 왕에게 재앙을 말씀하셨나이다.” 하더라.

And the LORD said unto him, Wherewith? And he said, I will go forth, and I will be a lying spirit in the mouth of all his prophets. And he said, Thou shalt persuade him, and prevail also: go forth, and do so.
Now therefore, behold, the LORD hath put a lying spirit in the mouth of all these thy prophets, and the LORD hath spoken evil concerning thee.

역대하 18:21-22

그가 말하기를 ‘내가 나가서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그의 모든 선지자들의 입에 있겠나이다.’ 하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그를 꾀고 또 이루라. 나가서 그렇게 하라.’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이제 보소서, 주께서 이들 왕의 선지자들의 입에 거짓말하는 영을 넣으셨고 또 주께서 왕에 대하여 재앙을 말씀하셨나이다.” 하더라.

And he said, I will go out, and be a lying spirit in the mouth of all his prophets. And the LORD said, Thou shalt entice him, and thou shalt also prevail: go out, and do even so.
Now therefore, behold, the LORD hath put a lying spirit in the mouth of these thy prophets, and the LORD hath spoken evil against t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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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하 ​​​​​​​​​​​​​
18:21 "그가 이르되 내가 나가서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그의 모든 선지자들의 입에 있겠나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꾀겠고 또 이루리라 나가서 그리하라 하셨은즉"
22절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왕의 이 모든 선지자들의 입에 넣으셨고 또 여호와께서 왕에게 대하여 재앙을 말씀하셨나이다 하니"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이 적대적인 관계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여호사밧과 아합 사이에는 혼인을 맺을 정도로 화친의 관계를 가지고 있을 때도 있었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이었을까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아합의 요청으로 여호사밧이 북이스라엘로 올라온다.
그리고 길르앗 라못을 되찾는 전쟁에 함께 나아갈 것을 요청한다.
여호사밧은 이것이 과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인지 묻기를 바란다.
사백명이 넘는 수많은 선지자들은 아합왕이 원하는 대답대로 아첨한다.
하지만 한 선지자 미가야만이 반대되는 예언을 한다.
권력에 눈치를 보고 사람이 원하는 방법, 방향, 세상의 관례를 따르는 것이 곧 거짓말하는 영을 따르는 모습이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도 쉽게 거짓말하는 영을 따라 가버린다.
오직 한사람 미가야만이 거짓말하는 영을 따르지 않는다.
그것은 목숨을 거는 문제였고 엄청난 고통의 문제였다.
그렇기에 거짓말하는 영에 따르지 않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문제인지 생각하게 된다.

​​​​​​​​​​​​​​​​​​​​​​​삶에 적용 :

목사와 장로들이 모두 관례를 따지고 다들 그렇게 했다는 논리로 우리도 그렇게 해 오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때에야 준비해야할 서류가 무엇인지 말한다.
거짓말하는 영을 따르는 모습이다.
교회가 믿는 자들이 온통 거짓말하는 영에 싸여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양 살아간다.
물론 다행인것은 그들이 요구하는 것들이 터무니없고 말도 안되는 이야기이지만 그들이 요구를 마땅히 따르기 위해 거짓말을 하거나 하지 않아도 되도록 해 주셨다는 것에 감사하다.
하지만 진정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다시 바라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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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하 18장

19.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가 이스라엘 왕 아합을 꾀어 그에게 길르앗 라못에 올라가서 죽게 할까 하시니 하나는 이렇게 하겠다 하고 하나는 저렇게 하겠다 하였는데 
20. 한 영이 나와서 여호와 앞에 서서 말하되 내가 그를 꾀겠나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어떻게 하겠느냐 하시니 
21. 그가 이르되 내가 나가서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그의 모든 선지자들의 입에 있겠나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꾀겠고 또 이루리라 나가서 그리하라 하셨은즉 
22.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왕의 이 모든 선지자들의 입에 넣으셨고 또 여호와께서 왕에게 대하여 재앙을 말씀하셨나이다 하니 

 ㅡ> 21절에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와
22절 '거짓말하는 영을'에서

일반적으로 알기는 거짓말하는 영은 타락한 천사 즉 악령을 의미한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위의 거짓말하는 영은 하늘에 있는 천사(즉 돕는 영)가 잠시 거짓말하는 영으로 그 역할을 하는 것입니까?

오늘날도 거짓말하는 영은 대체로 타락한 천사 즉 악령의 역사로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유일신을 믿었고 그래서 세상 만사를 하나님이 주관한다고 믿었습니다.
실제로 사람을 죽일 능력이 있는 사탄마저도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섭리에 따른 허락이 있어야만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욥기 1장) 하나님은 당신의 거룩하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악한 세력을 얼마든지 동원하실 수 있습니다.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을 징계 심판하기 위해서 우상(사탄)을 숭배하는 이방나라로 이스라엘을 침략 정복 도륙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이 사탄으로 사람을 죽이는 일까지 허락하셨는데 거짓말의 영도 당신의 절대적인 뜻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도 가룟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눅 22:3) 예수님을 밀고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질문하신 주제에 관한 가장 대표적인 케이스로는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사탄은 예수님을 죽여 없애면 자기가 승리할 줄 착각하고 유다를 비롯한 유대종교지도자들과 우매한 군중들을 배후에서 조종하여 십자가 처형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오히려 그 모든 것이 사탄에 미혹되어 죄로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였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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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사밧과 아합의 결혼 동맹

여호사밧에게는 한가지 연약한 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북 왕조 아합 가문과의 결혼동맹이었습니다(1).
여호사밧은 아합의 딸을 며느리로 맞아들임으로 남북 분열 이후 계속되어 온 긴장 관계를 해소하고 화해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또한 이것은 외세로 둘러싸인 두 나라의 존립과 번영에 도움을 얻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자 이 같은 혼인관계가 어떤 악영향을 끼치는지가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여호사밧이 사돈을 만나러 갔을 때 아합은 큰 잔치를 준비하고 함께 길르앗 라못을 치러 가기를 설득했습니다(2).
아합과의 전쟁에서 패한 아람 왕 벤하닷이 과거 자기 부친이 빼앗은 모든 북 이스라엘의 성읍들을 반환한다는 조건으로 평화조약을 체결했는데(왕상 20:34), 길르앗 라못을 반환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호사밧은 이 같은 사돈의 제안을 “나는 당신과 다름이 없고 내 백성은 당신의 백성과 다름이 없으니 당신과 함께 싸우리이다”라고 하며 선뜻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3).

물론 여호사밧은 이 말 끝에 “먼저 여호와의 말씀이 어떠하신지 오늘 물어보소서”라고 단서를 달고 있습니다(4).
하지만 이미 악인과 관계를 맺었고 동업을 하기로 한 마당에서 이 같은 점검은 찜찜함을 달래기 위한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 나에게는 아합과 동맹을 맺은 여호사밧의 연약함은 없습니까?

거짓 선지자들과 참 선지자

아합은 즉시 선지자 사백 명을 모으고 길르앗 라못과 싸울지 말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들 선지자들은 모두 이구동성으로 올라가라고 화답했습니다(5).
이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이세벨의 우상숭배와 타협한 자들로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권력자의 뜻을 위해 입의 혀처럼 움직이는 존재였던 것입니다.

특별히 시드기야는 철로 뿔들을 만들어 와서는 ‘ 여호와께서 이것들로 아람사람을 찔러 진멸케 하라’ 는 작전까지 주셨다면서 아부를 떨었습니다(10-11).

하지만 여호사밧은 한결같은 저들의 말에 의심을 표하며 믿을만한 다른 여호와의 선지자를 찾았습니다(6).

그러자 아합은 자기에게 나쁜 일만 예언하기 때문에 미워하는 선지자가 있다고 털어놓았고, 여호사밧은 속히 미가야를 불러주기를 요청했습니다(7-8).
말씀을 자기에게 맞추려고 하는 사람은 아합입니다.
나에게 좋던 나쁘던 말씀에 나를 맞추고 사랑하는 사람이 참된 신자입니다.

● 나는 말씀을 자기에게 맞추려고 합니까?
말씀에 자기를 맞추고 사랑하는 사람입니까?







오늘은 그동안 성도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는 주님의 성품에 대해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이는 매우 엄중하고도 무서운 경고요, 성도들이 마음 속 깊이 명심해야 할 진리입니다. 성도들이라면 누구나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에 대한 설교와 간증을 많이 듣지만 주께서 악인을 더욱 완악하게 하시고, 심판할 자들을 속이신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익숙하지 않습니다. 저희 교회 성도들은 이미 이런 설교와 성경 구절들에 익숙할 줄로 압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심판하기로 정하신 한 죄인 아합 왕에게 수십번에 걸쳐 기회를 주시고, 말씀을 주셨습니다. 몇 차례나 엘리야를 통해 말씀하셨고, 다른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내시기도 하셨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여호사밧 왕의 권고로 미가야 대언자를 통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 듣게 되었습니다. 미가야는 아합도 인정하는 하나님의 대언자였습니다. 그러나 아합은 단지 그가 자신에게 좋지 않는 대언을 한다는 이유로 그를 배척하였습니다. 덕분에 그의 주위에는 자신의 비위를 맞추어 줄 줄 아는 그런 대언자들로만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진리는 언제나 소수였으며 이는 지금이나 앞으로도 변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이는 성경적인 설교를 싫어하는 오늘날의 성도들의 모습과도 비슷합니다.

드디어 미가야가 왕 앞으로 불려 왔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그가 왕에게 나오니 왕이 그에게 이르되, 미가야야, 우리가 라못길르앗으로 싸우러 가랴, 아니면 삼가랴? 하니 그가 왕께 이르되, 올라가서 성공하소서. 이는 주께서 그곳을 왕의 손에 넘겨주실 것임이니이다, 하매](15). 이것은 왕이 원했던 답입니다. 지금까지 미가야는 다른 대언자들처럼 아합이 원하는 대답을 할 줄 몰라서 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대언자였기에 하나님의 말씀만 한 것입니다. 아합은 즉시 미가야가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는 미가야가 평소대로 ‘주의 이름으로...’ 또는 ‘주께서 이르시기를...’이라고 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모든 대언자들이 왕의 눈치를 보고, 왕을 기쁘게 해 주기 위해 충성 경쟁을 벌일 때, 미가야는 오히려 그 말을 가지고 조롱하였습니다. 다른 대언자들은 눈에 보이는 왕을 두려워하고 눈에 보이는 왕을 기쁘게 해 주려고만 할 뿐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님을 두려워하고 기쁘시게 할 줄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미가야는 만군의 주시며, 만왕의 왕을 바라보았습니다. 진리의 편에 선 사람은 언제나 소수입니다. 아합이 찾을 수 있는 성경적인 설교자,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은 미가야 한 명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아합은 미가야를 미워했습니다. 자기 기분을 맞춰 주지 않고 사실을 사실대로 말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조언이나 충고를 들을 때 내게 힘을 주고, 나를 합리화해 주고, 변호해주고, 정당화해 주는 말을 얼마나 좋아합니까? 그것이 진리냐? 아니냐?의 유무보다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이냐? 아니냐?에 따라서 판단했던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말세의 특징은 자기의 가려운 귀를 긁어 줄 선생들을 많이 두는 것입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왕이 그에게 이르되, 내가 몇 번이나 너로 하여금 맹세하게 하여야 네가 주의 이름으로 오직 진실한 것만을 내게 고하겠느냐? 하니](16). 왕은 미가야의 말이 조롱이란 사실을 알고 주의 이름으로 말해 보라고 했습니다. 대언자 미가야는 다른 400명의 대언자들과 달리 ‘주의 이름으로’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잘못을 잘못이라 하지 않고 그럴 수도 있다고 하고, 죄를 죄라 하지 않고 육신의 연약함이라 변명해 주는 것은 다 거짓이요, 진실이 아닙니다. 흔히들 사람들의 입에서 ‘불쌍한 죄인’이란 말을 잘 씁니다. 그러나 성경은 단 한 곳도 불쌍한 죄인이란 말이 없습니다. 죄인이면 죄인이고, 악한 죄인이면 악한 죄인이지 불쌍한 죄인이라고 죄에 대해 연민과 동정을 베풀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용서받은 죄인이요, 회개한 죄인일 수 있지만 불쌍한 죄인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조언은 언제나 성경적이어야 하며 주의 이름으로 오직 진실한 것만을 말해야 합니다. 아합은 미가야에게 주의 이름으로 오직 진실한 것만을 고하라고 명했습니다. 이는 주의 말씀을 듣고 싶거나,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 한 말이 아니라, 네가 감히 이번에는 나에게 뭐라고 말하나 보자 하는 식의 객기로 말한 것입니다. 아합은 주의 뜻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때로 아합과 같이 자신의 뜻을 정해 두고 요식 행위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습니까? 믿고 순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자신이 결정한 일을 복 주시기만을 구하지는 않습니까? 자신의 마음에 맞지 않는 충고나 조언을 할 때면 성질을 내거나 그 사람을 미워하지는 않습니까?

17절을 보십시오. [그가 이르되 내가 보매 온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같이 산에 흩어졌는데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들에게 주인이 없으니 각각 평안히 자기 집으로 돌아가게 하라, 하셨나이다.](17). 미가야는 아합에게 전쟁을 일으키지 말고 여기서 중단하고 군대를 해산하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뜻이며, 명령입니다. 아합은 언제나 마찬가지로 최소한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몰라서 못한 것이 아닙니다. 아합은 주의 뜻을 들었고, 알았습니다. 그러나 들었을 뿐 믿지 않았습니다. 알았지만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문제많은 성도들의 특징이 바로 이것입니다. 설교를 들을 뿐 그것을 믿지 않습니다. 성경의 말씀을 알지만 순종하지 않습니다. 아합에게는 주의 말씀이 주어졌고, 순종과 불순종의 선택은 그의 몫이었습니다. 아합은 전에 두 차례에 걸쳐 시리아를 상대로 대승한 경험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승리를 주셨기 때문에 적은 군대로도 크게 이겼습니다. 이는 아합이 잘나서 이긴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이길 수 있다고 믿었을 것입니다. 시리아를 상대로 하는 싸움은 패배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싶었고, 나름대로 외교를 펼쳐 유다 왕 여호사밧까지 끌어 들여 대군을 이끌고 전쟁을 준비하였습니다. 때로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것을 자신의 능력으로 오해하거나 과신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승리를 주신 하나님보다 승리 자체에 마음이 빼앗긴 결과입니다. 나에게 베푸신 은혜와 긍휼이 크다해도 그것은 나의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성품 때문이란 사실을 알 때 겸손한 마음으로 감사와 찬양을 돌려 드릴 수 있지만 받은 은혜만 기억하면 그것은 이미 빗나간 것입니다.

아합은 대언자 미가야의 말을 어떻게 들었습니까? 그가 보인 반응이 바로 그 사람의 마음 상태입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왕이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그가 나에 관하여 좋게 대언하지 아니하고 나쁘게 대언하려 한다고 당신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매](18). 아합은 벌컥 화를 내었고, 분노에 찼습니다. 그런 가운데도 미가야에게 먼저 화를 내기에 앞서 여호사밧을 향해 말했습니다. 만약 여호사밧이 이 말을 듣고 군대를 철수하거나 전쟁에 못나가겠다고 하면 큰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의 대언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했던 여호사밧은 말씀을 듣는 즉시 전쟁을 포기하고 유다로 돌아가야 했지만 아합에게 그대로 걸려들어 전쟁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속지 말라, 악한 사귐은 선한 습성을 부패시키느니라.](고전15:33). 그는 아합과의 사귐을 통해 한 순간이지만 주님의 말씀보다 아합의 말에 따라 행동하게 되었고, 전쟁에서 목숨이 날아갈 뻔한 큰 위험에 처했습니다. 우리는 주의 말씀과 사람의 말들 중에 올바른 선택을 위해 주님과의 친교뿐만 아니라 교회 내에서 영적 사귐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주일에 와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형제, 자매들과 영적 교제를 갖는 일 역시 매우 중요합니다. 성도들은 서로 권면하고, 서로 가르치고, 서로 세워주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집회가 필요하고 모임이 중요한 것입니다. 삶에서 배우고 터득한 것, 성경을 통해 체험한 것, 패배한 것, 잘못한 것 들을 함께 나눌 수 있습니다. 형제들의 힘을 빼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워 주기 위해서입니다.

19-22절은 아합을 죽이기 위해 하나님께서 천상의 신탁 회의를 하는 장면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은혜와 용서의 빛만을 보내 주셨던 주님께서 드디어 죽이기로 결심하셨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죽이는가?에 관한 회의입니다. 아합은 지금이라도 대언자 미가야의 말에 순종해서 얼마든지 살아날 기회가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회개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순간, 죽음을 보내는 그 순간까지 주님은 자신의 종을 통해 말씀하시는 말씀의 하나님이십니다. 19절을 보십시오. [미가야가 이르되, 그런즉 왕은 주의 말씀을 들으소서. 내가 보니 주께서 자신의 왕좌에 앉으셨고 하늘의 모든 군대가 그분 옆으로 오른쪽과 왼쪽에 서 있는데](19). 이 장면은 하나님께서 군사 회의를 주제하는 자리입니다. 주님은 전사(戰士)이시며, 구원의 대장이십니다. 지금까지 아합이 이길 수 있었던 것도 이 자리에서 아합의 군대를 지원하도록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땅의 모든 일은 하늘에서 결정됩니다. 특히 성도들의 생활은 저 하늘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빌립보서 3:20, [이는 우리의 생활권(conversation)이 하늘이기(in heaven-하늘 안에 있기) 때문이라...](빌3:20a). 이 땅에서의 우리의 생활은 저 하늘에서 그대로 기록됩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뭔가를 구하고, 청원하고,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미가야를 통해 하늘의 군사회의가 이 땅에 생 중계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모든 일은 저 하늘에 그대로 보여지고, 중계됩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이르시되, 누가 아합을 설득하여 그로 하여금 라못길르앗에 올라가 엎어지게 할까? 하시니 하나는 이렇게 하겠다 하고 다른 하나는 저렇게 하겠다 하였는데](20). 이 부분을 주목해서 보십시오. 하나님은 마귀를 이용하시지 않고 자신의 군대에서 직접 이 일을 진행시키고 있습니다. 천군 천사들 가운데 지원자를 받고 있습니다. 이 땅의 일에 주님은 침묵하시는 듯이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다니엘이 기도할 때 즉시 응답을 가지고 가도록 가브리엘을 보내셨습니다. 때로는 주의 천사가 직접 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도 천사를 보내셨습니다. 다니엘이 사자굴에 던져질 때도 천사를 보내셔서 지키셨습니다. 히스기야가 기도했을 때는 주의 천사가 직접 하룻밤에 앗시리아 군대를 전멸시켜 버렸습니다. 주님은 좌, 우편에 세워둔 군대를 이 땅에 파견하십니다. [누가 아합을 설득하여 그로 하여금 라못길르앗에 올라가 엎어지게 할까?]하고 주님이 묻습니다. 저마다 의견을 내었지만 한 명이 자원했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한 영이 나아와 주 앞에 서서 이르되, 내가 그를 설득하겠나이다, 하매](21). 이 땅과 저 하늘의 통신 수단이 없다면 이런 사실은 도무지 알래야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아합이 꿈엔들 이런 사실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자신이 하시는 일을 미리 대언자 미가야를 통해 알려 주셨습니다. 아모스 3:7, [분명히 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은밀한 일을 자신의 종 대언자들에게 계시하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암3:7). 주님의 이 원칙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성령의 조명을 통해 주님의 계시를 받습니다. 사람이 속는 경우는 세 가지이입니다. 첫째, 스스로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둘째, 마귀에게 속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에게 속는 경우입니다. 하나님이 속이시면 아무도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아합을 속이시려고 하십니다. 문제는 듣지 못해서가 아니라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는 것이 재앙입니다. 지금도 주의 오심과 공중 들림, 대환란, 천년 왕국, 불 심판 등과 같은 수많은 성경의 경고들을 말해 주지만 듣지 못해서가 아니라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믿지 않기 때문에 멸망당하고 있습니다.

22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어떻게 하겠느냐?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나가서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그의 모든 대언자의 입에 있겠나이다, 하매 그분께서 이르시되, 너는 그를 설득하겠고 또 이기리라, 나가서 그와 같이 하라, 하셨사오니](22). 드디어 하늘의 보좌 앞에 있던 한 영이 하나님의 재가를 얻어 아합의 곁에 있는 사 백명의 대언자들의 입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무슨 말을 해도 거짓말입니다. 이는 거짓말하는 영이 그 입에 붙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한영은 주의 대언자의 입이 아니라 ‘그(아합)의 모든 대언자의 입’에 있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지금 400백 명의 아합의 대언자와 한 명의 주의 대언자 미가야가 있는데 400명의 입에는 거짓말하는 영이 들어갔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보소서, 이제 주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왕의 이 모든 대언자의 입에 넣으셨고 또 주께서 왕에 관하여 화를 말씀하셨나이다, 하니라.](23). 미가야는 주님께서 주신 말씀을 있는 그대로 다 전했습니다. 그것도 자신을 미워하는 왕 앞에서 주의 말씀을 하나도 가감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미기야가 대언한 이 구절을 깊이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제 주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왕의 이 모든 대언자의 입에 넣으셨고]

주님께서 과연 사람들에게 거짓말하는 영을 보내시는가? 주님께서 사람을 속이시는가? 주님께서 자기 백성들도 속일 수 있는가? 답은 그렇다입니다. 주님은 계속해서 불순종하면서도 회개하지 않는 사울에게 악한 영을 보내셨습니다. 그는 처음에 왕이 될 때 기름부음을 받았고, 성령으로 충만하여 대언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런 그가 주의 말씀을 버렸을 때 무슨 일이 났습니까? 사무엘상 16:14, [그러나 주의 영께서 사울을 떠나고 주께로부터 온 악한 영이 그를 괴롭게 하므로](삼상16:14). 성령 충만이 기쁨과 담대함을 주는 반면 악한 영은 괴로움을 줍니다. 사무엘상 18:10, [그 다음날 하나님께로부터 온 악한 영이 사울 위에 임하매 그가 자기 집 한 가운데서 대언을 하더라....](삼상18:10). 사울이 질투심에 사로 잡혔을 때 악령이 찾아 왔습니다. 악령이 임해도 대언을 한다는 점에서 성령과 유사한 점이 있습니다. 이는 표적과 기사가 모두 주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란 점을 분명히 보여 주는 예입니다. 재판관기 9:23, [하나님께서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 사이에 악한 영을 보내시매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배반하였으니](판9:23). 아비멜렉은 아버지 기드온의 자식들이요, 자기 형제들을 하룻만에 73명이나 죽였습니다. 주님은 그를 심판하시기 위해 악령을 보내셨습니다. 주님이 말세에 하실 일 가운데 하나는 이 세상에 강한 미혹을 보내셔서 거짓을 믿게 하시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11, [이런 까닭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강한 미혹을 보내사 거짓말을 믿게 하시리니](살후2:11). 지금 아합의 경우가 바로 여기에 해당할 것입니다. 주님은 거짓말하는 영을 보내셔서 대언자들이 거짓말로 대언할 때 자신들조차 자신들이 속은 것을 알지 못합니다. 만약 지금 교회들에 주님께서 이런 역사를 하셨다면 대부분의 교회는 성경과 상관없는 거짓 교리를 설교하고, 가르치고, 성도들에게 거짓말을 믿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순절 교회, 은사주의 교회, 귀신쫓는 교회, 성공 신학, 축복 신학으로 무장한 교회들을 시무하는 목사들의 입에는 이미 거짓말하는 영이 그 입에 들어갔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은 악령으로부터 영원히 안전한가? 그렇지 않습니다. 몇몇 근본주의자들은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절대로 악령에 들릴 수 없다, 마귀들림은 오직 거듭나지 않는 자들에게만 한정된다는 교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성도들이라도 언제든지 마귀에게 속을 수 있고, 마귀 들릴 수 있습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속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뿐만 아니라 ‘아무도 어떤 방법으로든지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살후2:3)고 말씀합니다. 마귀는 인류 6,000년 역사에서 사람을 속이는데 단 한 명(예수 그리스도)을 제외하고 실패해 본 적이 없습니다. 마귀는 사람을 속이는데는 고도의 전문가입니다. 특히 마귀의 전공 분야가 바로 기독교인들과 성경 문제입니다.

성도들이 자기 마음 속에 우상을 세워둔다면 그는 분명히 속습니다. 하나님은 마음 속에 우상이 가득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속이셨습니다. 에스겔 14:4, 9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의 집에서 자기 우상들을 마음 속에 세우며 자기 불법의 걸림돌을 자기 얼굴 앞에 두고 대언자에게 나아오는 모든 자에게 나 주가 그 우상들의 많은 수효대로 응답하리니](4), [만일 대언자가 어떤 일을 말할 때에 속임을 당하였으면 나 주가 그 대언자를 속인 것이니 내가 내 손을 그 위로 내밀고 그를 멸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의 한 가운데 그치게 하리라.](9). 이런 이유로 오늘날 너무나 많은 성도들이 체험이란 이름 아래 성경적 진리에서 이탈하고 있습니다. 마음 속에 우상을 가지고 기도할 때 주님께서 그대로 응답하심으로 그들은 다 하나님께서 그대로 응답하신 줄로 압니다. 예를 들어 돈을 많이 버는 것, 집 한 채 장만하는 것, 좋은 차를 굴리고, 좋은 직장을 잡는 것 등 이런 것들이 마음에 가득한 채 주님께 왔을 때 주님은 그래도 응답하실 수 있습니다. 기도 응답으로 받은 것들이 자기를 파멸로 몰고 가는 줄을 모르고, 주님께 속은 줄도 모르고 성경과는 동떨어진 삶을 삽니다. 하나님께서 No로 응답하시는 편이 속이시는 경우가 얼마나 더 큰 은혜인 줄 아셔야 합니다.

① 마귀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속입니다. 마귀는 매우 종교적인 존재입니다. 모든 종교는 같은 것이다. 어느 종교에나 구원이 있다. 기독교는 너무 배타적이고 편협하다...

② 자기에게 죄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다 속은 것입니다(요일1:8). 구원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다(구원파)고 말하는 사람은 모두 속은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내가 죄인 중의 우두머리니라”(현재)고 했지 “우두머리였느니라”(과거)고 하지 않았습니다(딤전1:15).

③ 죄를 지어도 자백하면 깨끗하게 되기 때문에 죄를 지어도 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속은 것입니다(갈6:7). 물론 자백하면 용서를 받고 깨끗하게 되겠지만 이 세상에서나 오는 세상에서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다윗, 삼손, 바울...)

④ 자신이 뭔가 된줄로 아는 교만한 사람은 속은 것입니다(갈6:3).

⑤ 세상 지혜로 인해 속을 수 있습니다(고전3:18). 철학, 과학, 전통, 문학, 고고학, 역사학, 천문학 등의 학문이나 히브리어, 헬라어, 고대 아람어, 라틴어 등에서 박사 학위를 몇 개씩 땄다고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에도 지혜롭다고 생각하면 속은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하나님 앞에 어리석은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⑥ 우리가 영적 성장을 멈추면 속습니다. 자신의 현재 신앙 수준에 만족하고 말씀을 읽고 공부하고 진리의 지식의 보화를 캐는 일을 멈추면 속게 됩니다(엡4:14). 현재 우리를 속이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교리의 풍조는 수없이 많습니다.

⑦ 이 세상에 완전 무오한 성경은 없다고 생각하면 이미 속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진리의 말씀에 꾸준히 거하면 진리를 알게 되고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며, 그 말씀으로 인해 자라나고 튼튼하게 세워지고, 깨끗하게 되며, 마귀를 대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기록된 주의 말씀에 가감없이 읽고, 읽는 그대로 믿는다면 주님께서 거짓 영을 내게 보내시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은 능력과 사랑과 건전한 생각의 영입니다. 하지만 마음 가운데 우상을 두고, 주의 율법에서 귀를 돌이킨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상실한 마음 가운데 내버려두시거나 속이실 것입니다.

24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나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가 가까이 나아와 미가야의 뺨을 치며 이르되, 주의 영께서 나를 떠나 어느 길로 가서 네게 말씀하시더냐? 하니](22). 미가야의 말을 듣고 있던 사백명의 대언자들 중 하나인 시드기야가 미가야의 뺨을 쳤습니다. 때로 거짓 대언자들은 자신들의 믿음이 너무나 확고하여 주의 대언자들을 압도해 보입니다. “주의 영께서 나를 떠나 어느 길로 가서 네게 말씀하시더냐?”는 말은 그가 얼마나 자기 확신에 차 있는지, 얼마나 철저히 속았는지를 웅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뺨을 맞으셨습니다(요18:22). 미가야의 뺨을 친 사람이 같은 대언자였듯이 바른 성경으로 바른 신앙 생활을 하겠다고 할 때 가장 박해하는 자들 역시 같은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진리를 전하는 일은 핍박과 모욕과 위협이 뒤따릅니다. 미가야에게 돌아온 것은 무엇입니까? 감옥 생활이었습니다. 아합은 미가야를 지하 감옥에 가두고 변장한 채 전쟁에 나갔지만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 살기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 보았지만 주의 말씀은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을 죄인들이라고 말한다는 이유로 미워합니다. 죄에 대해서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을 미워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미가야와 같이 죄에 대해서 성경이 말하는대로 말해 주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사람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죄 가운데서 태어났으며, 그들의 마음은 악으로 가득하며, 전적으로 부패하고 타락했다는 말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미가야처럼 사람의 죄성과 죄악을 있는 그대로 전해 주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구원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구원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미가야처럼 있는 그대로 말해 주어야 합니다. 도덕적인 의와 행위가 아니라 구주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사람들은 분리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사람들은 섬김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자매들은 남편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말을 듣기 싫어합니다. 아이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부모에게 절대 복종해야 한다는 사실을 싫어합니다. 사람들은 지옥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미가야처럼 말해야 합니다. 그 결과가 감옥이든 죽음이든 있는 그대로를 말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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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성경말씀은 모두가 거짓말할 때에 오진 진실만을 말했던 주의 선지자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때는 우상숭배가 성행하던 때였습니다. 사람들은 오직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우상숭배에 빠졌습니다. 그로 인해서 자신의 유익과 욕심을 추구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서 자신이 받은 축복을 전부 잃어버리고 있었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것은 처음에는 자신의 욕심과 필요를 만족시켜주지 않지만 나중에는 하나님의 상급과 축복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따라야만 하는데 그들은 욕심에 이끌려 이방신들을 따라갔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고통의 원인이었습니다.   

이러한 우상숭배의 심각한 문제와 어려움을 보여주는 장면이 본문에 나옵니다. 그 때는 이스라엘 왕이 남유다 왕과 더불어 아람왕을 공격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하나님의 예언을 듣고자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것이었기에 모든 선지자가 총출동되었습니다.

  

“[왕상]22:10       이스라엘의 왕과 유다의 여호사밧 왕이 왕복을 입고 사마리아 성문 어귀 장에서 각기 왕좌에 앉아 있고 모든 선지자가 그들의 앞에서 예언을 하고 있는데

  

[왕상]22:11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는 자기를 위하여 철로 뿔들을 만들어 가지고 말하되 여호와의 말씀이 왕이 이것들로 아람 사람을 찔러 진멸하리라 하셨다 하고”

  

모든 선지자들은 전부 거짓된 예언을 하고 있었고 그들 중에서 특별히 시드기야는 유난하게 철로 뿔들을 만들어 가지고 와서 여호와의 말씀이 이것들로 진멸하리라 하셨다고 용감하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거짓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전혀 다른 것을 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선지자들은 오직 사람이 듣던 듣지 않던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즐겁게 하고자 하면서 자신의 말을 하고자 했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사람들의 구미와 필요를 채우려고 하면서 세상의 영향을 받습니다. 그것은 처음에는 원하는 것을 이루어주니까 좋게 보이지만 나중에는 그 결과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고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모든 좋은 것을 빼앗기게 됩니다. 왜냐하면 욕심을 채우고자 하면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듣기 좋은 말을 하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결국은 욕구로 말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원하신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전하라 하신 것만 말하는 삶입니다. 좋게 보이려고 하지 않고 옳게 하려고 할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진실한 뜻을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변에는 사람들의 욕구를 채워주려고 하는 노력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것이 아니고서는 아무 것도 되지 못할 것 같게 보이기도 합니다. 그게 대세였기 때문에 많은 다른 선지자들도 이러한 시드기야의 말에 동참했습니다. 아마 시드기야처럼 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지막으로 남은 미가야 선지자에게도 그러한 거짓을 요구했습니다.

  

“[왕상]22:12       모든 선지자도 그와 같이 예언하여 이르기를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가 승리를 얻으소서 여호와께서 그 성읍을 왕의 손에 넘기시리이다 하더라

  

[왕상]22:13        미가야를 부르러 간 사신이 일러 이르되 선지자들의 말이 하나 같이 왕에게 길하게 하니 청하건대 당신의 말도 그들 중 한 사람의 말처럼 길하게 하소서”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을 즐겁게 하지 않으면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리라는 우려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화나게 하거나 실망시키는 일은 쉽게 행하기 어렵습니다. 그러한 우려 때문에 우리 속에는 사람들을 즐겁게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미가야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께서 전하게 하시는 말씀에만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뜻을 증거하고 전달해주는 것입니다. 미가야는 오직 자기가 아는 진실만을 이야기했습니다.

  

“[왕상]22:19       미가야가 이르되 그런즉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내가 보니 여호와께서 그의 보좌에 앉으셨고 하늘의 만군이 그의 좌우편에 모시고 서 있는데

  

[왕상]22:20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가 아합을 꾀어 그를 길르앗 라못에 올라가서 죽게 할꼬 하시니 하나는 이렇게 하겠다 하고 또 하나는 저렇게 하겠다 하였는데

  

[왕상]22:21        한 영이 나아와 여호와 앞에 서서 말하되 내가 그를 꾀겠나이다

  

[왕상]22:22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어떻게 하겠느냐 이르되 내가 나가서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그의 모든 선지자들의 입에 있겠나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꾀겠고 또 이루리라 나가서 그리하라 하셨은즉”

  

그는 거짓말하는 영의 존재를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진실을 보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는 바로 이러한 거짓말 하는 영이 존재합니다. 그 영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노력을 중단해야 합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할 때에 거짓말 하는 영의 영향을 받게 됩니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오직 그 영을 제어하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럴 때 거짓을 넘어서서 진질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해서 문제를 극복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세상의 지혜는 사람의 마음을 좋게 해주기 위해서 결과를 왜곡시키고 문제를 변질시킵니다. 그 결과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먼저 마음이 좋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아무런 열매가 없습니다. 하지만 먼저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따른다면 귀한 열매를 얻을 수 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생명을 얻게 합니다. 또한 사망에 이르지 않게 합니다. 이스라엘 왕은 미가야의 말을 듣지 않았을 때 결국 자신의 생명을 잃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만을 따르고 그 지혜에만 순종하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참으로 여러분을 열매 맺게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만 섬기면서 그 살아있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진실하고 기뻐하시는 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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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이스라엘 아합 왕이 남유다 왕 여호사밧과 동맹을 맺어 아람을 치기로 약속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호사밧은 먼저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야 할 것을 제의했습니다. 이렇게 성도는 항상 하나님께 먼저 묻는 기도가 있고 난 뒤에 행동해야 합니다.

북이스라엘 아합 왕이 선지자들을 다 불러서 아람을 쳐야 할지 말아야 할지 물었을 때, 선지자들은 한결같이 치러 올라가서 아람을 취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는, 이러한 예언들이 결국 아합 왕을 꾀어 길르앗 라못에 올라가게 해서 아람 왕의 손에 죽게 하려는 악한 영의 간계에서 나온 거짓 예언임을 말해줍니다.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가 아합을 꾀어 그를 길르앗 라못에 올라가서 죽게 할꼬. 한 영이 나아와 말하되, 내가 나가서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그의 모든 선지자들의 입에 있겠나이다.여호와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왕의 이 모든 선지자의 입에 넣으셨고 또 여호와께서 왕에 대하여 화를 말씀하셨나이다(19∼23절).”

거짓말하는 악한 영들의 간계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에게도 나타나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이 악한 영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거짓말하는 영의 간계에 넘어가서 거짓된 말을 하고 거짓된 행동을 하게 됩니다. 물론 하나님은 사람들의 거짓된 말이나 행동에 대해서 아주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거짓말이나 거짓증거하지 못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성도는 거짓말하게 하는 악한 영들의 유혹과 간계를 분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런 분별력을 갖추기 위하여 말씀과 기도의 삶을 쉬지 않고 계속해야 합니다. 그리고 거짓말하게 하는 악한 영의 유혹이 올 때 그것을 이길 수 있는 용기와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미가야 선지자는 거짓 선지자들의 협박과 좋은 소리만 듣기 원하는 왕의 위협에도, 생명을 걸고 진실을 왕에게 말하는 용기와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미가야 선지자가 가졌던 용기와 믿음을 얻고자 우리도 기도해야 합니다.


사단의 악한 영 가운데는 거짓말하는 영이 있습니다. 이 거짓말하는 영은 거짓말을 하는 사람과 거짓말을 듣는 모든 사람을 파멸로 이끌어 가고 있는 영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천지 만물과 모든 천사와 모든 영의 창조자이십니다. 마귀도 역사 하나님으로부터 지음을 받은 천사가 하나님을 배반하여 마귀가 되었고, 거짓말하는 영도 역시 마귀와 같이 하나님을 배반한 하나님의 창조함을 받은 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영으로, 사람들을 거짓말을 믿게 하여 인간을 파멸로 몰아가는 마귀의 영입니다. 

   

지금 현재는 모두 마귀에게 속한 영들이 최후로 악하게 발동을 하고 있습니다. 적그리스도 영, 미혹의 영, 다른 영, 귀신의 영, 거짓말하는 영 등이 지금 우는 사자같이 돌아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심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딤전4:2)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요한 계시록 21장 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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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원어 사이트



성경 원어 사이트 



히브리어 성경을 성경 책명과 장절을 치면 나옵니다.

히브리어 성경 Interliner 가 나옵니다. 

헬라어 성경 Interliner 가 나옵니다

- Blue Letter Bible
http://www.blueletterbible.org/Bible.cfm?b=Gen&c=1&t=KJV

성경을 공부하기에 너무나 잘 만들어진 사이트입니다. 이 사이트를 발견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어, 헬라어 원어 분해 뿐만 아니라 다른 성경 번역본과 대조 기능, Commentaries, 사전, 등 조금만 사용에 익숙해지면 너무 좋은 사이트입니다. 강추합니다.

- Parallel Bible
http://bible.cc/genesis/1-1.htm

한국어 성경만 아니라면 이렇게 잘 갖추어진 성경 사이트도 찾기 힙듭니다. 각종 영어성경과 히브리어, 헬라어 성경이 총망라되어 있습니다. (Parallel로 볼수는 없지만 다국어 성경에 한국어 성경도 개역성경 하나는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Atlas, Concordance, Dictionary, Encyclopedia, 지도, 등 모든 것이 두루 잘 갖춰진 사이트입니다.

- 인터넷 매일 성경 연구원
http://www.biblenara.org/
한글 사이트로 성경공부에 관한 자료들을 잘 분류하여 관련 사이트에 연결해 놓았습니다. 한글로 성경을 공부하는데 매우 유용한 사이트입니다.

- 오디오 성경
http://www.drimi.com/bible/audio.htm#
눈이 피곤하여 쉬고 싶을 때, 드러누워 성경을 듣고 싶을 때^^ 좋은 사이트입니다. C3TV 오디오 성경(개역성경)을 사용하기 쉽게 편집하여 한 눈에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해 놓았습니다. 음향효과도 집어 놓고 잘 녹음되어 있습니다. 

- 온라인 개역 관주 성경
http://www.sihong.pe.kr/
온라인 한글 관주 성경을 찾던 중에 관주 성경을 저처럼 좋아하시는 어떤 분이 개인적으로 만들어 놓은 사이트입니다. 이 사이트도 한 눈에 성경 전체에서 원하는 장절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해 놓았습니다. 관주는 옛 뉴톰슨 주석 성경을 따른 것으로 보입니다.

- StudyLight
http://www.studylight.org/com/
Public domain에 있는 성경 주석을 총망라해서 모아 놓은 곳입니다. 성경 해석서가 필요할 때 유용한 사이트입니다.

- NET Bible
http://net.bible.org/bible.php?book=Gen&chapter=1
성경에 간단 명료한 주석을 달아 놓아서 흔히 평신도들이 쓰는 주석 성경을 대신할 수 있는 좋은 사이트입니다. 그리고 다른 관련된 성경사전, 지도, 성경단어연구, 관주, 히브리어-헬라어 reference 등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강추입니다.

- Mybible
http://mybible.hompee.com/hompee/home_A.asp?User=&SiteID=62573&SkinID=ARE
평신도가 개발한 성경 프로그램입니다. 이 프로그램은 가입하신 후에 다운로드 받아서 자기 컴퓨터에서 실행해서 쓰는 프로그램입니다. 이 프로그램의 장점은 단순하고, 빠르고, 사용하기 쉽다는 점입니다. 저도 별일이 없으면 주로 이 프로그램을 쓰고 있습니다. 위의 미국 사이트처럼 많은 주변 자료들이 갖추어져 있지는 않지만 기본적인 검색기능, 간단한 인물/지명사전, 책갈피 기능, 등 기본적인 것은 갖추어져 있습니다. 
포함된 성경은 한글로는 개역, 개역개정, 쉬운성경, 공동번역, 표준새번역, 현대어 성경이 있고 영어 성경으로는 KJV, NIV가 있습니다. 최근 버젼에는 저작권 문제로 개역, 개역개정, 공동번역, 표준새번역, 현대어 성경, 그리고 KJV만 제공된다고 합니다.

다른 것들은 다 온라인이지만 이 프로그램은 인터넷이 안되어도 언제나 쓸 수 있어서 좋습니다. 찬송가 프로그램도 따라옵니다.^^

- World Language Bible
http://www.yawill.com/
한영 대조 성경을 찾는다면 이 사이트가 사용하기 쉽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한글로는 개역성경, 영어버전으로는 KJV, NIV, NASB, AMP, ASV가 있습니다. 그 외에도 중국, 일본, 스페인, 독일, 프랑스, 히브리, 헬라 성경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 Internatioanl Bible Society
http://www.ibs.org/bibles/translations/#CEV
영어 성경 번역본끼리 어떤 차이가 있는지 잘 설명되어 있는 사이트입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대한성서공회
http://www.bskorea.or.kr/about/default.aspx
우리말 성경번역 역사와 세계 성경 번역 역사가 시대로 구분되어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http://hebrew.pe.kr 허성갑 목사의 사이트로서 히브리대학에서 
히브리어를 전공하였답니다. 모세오경의 히브리어 성경을 보고 들을 수 있음. 

http://bible.ort.org/ 영어사이트 입니다. 들어가셔서 왼쪽에 있는 English를 

누릅니다. 다음에 Calender(달력)를 누르셔서 들어가면 오늘 날짜가 영어로 
나옵니다. 거기에서 달과 날를 선택하면 그 날에 읽을 성경장절을 보여주니 
그 장절을 누르면 히브리어성경이 보입니다. 스피커 그림을 누르면 음성이 
들립니다. 영어로 12개의 달과 이름과 30일의 날자가 나옵니다. 아무거나 
선택하면 됩니다. 성경전부가 12달 365일로 나눠진 모양입니다. 

http://www.jiscast.com/demo/freelecture/free_hebrew.htm 
김경래교수의 사이트로서 무료와 유료강좌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기초를 무료로 
다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http://www-users.cs.york.ac.uk/~fisher/gnt/chapters.html 
헬라어 성경의 텍스트를 보여줍니다. 음성은 없음. 
그리고 파일을 눌러서 저장하면 됩니다. 

http://www.ccel.org/a/anonymous/gnt/mp3/ 
헬라어 성경을 읽어주는 사이트 입니다. MP3 으로 저장도 가능합니다. 

http://unbound.biola.edu/zips/index.cfm?lang=English 
히브리어성경, 헬라어, 영어성경 전체 다운 가능 

http://www.sacrednamebible.com/index2.htm 킹 제임스 바이블 읽기 

http://www.inthebeginning.org/ntgreek/lesson3/gl3.htm 
여기는 헬라어를 기초부터 가르쳐줍니다. 헬라어 알파벧트를 자세히 
가르쳐 줍니다. 왼쪽을 보시면 Learn , NT Greek 에 마우스를 가져가면 
1과에서 6과까지 나오는데 그중 하나를 누르고 다운을 받으면 됩니다. 

http://www.inthebeginning.org/ntgreek/phonics/alphainstruction.htm 
헬라어 아파?을 읽어줍니다 

http://www.audio-bible.com/bible/bible.html 
킹 제임스 바이블을 보고 들을 수 있는 사이트입니다. 

http://www.onnuritv.com/education/bible_english/ 
온누리 교회 TV 의 영어강좌입니다. 성경본문을 읽고 해설합니다. 

http://www.onnuritv.com/education/with_jesus/main_2002_0507.htm 
온누리 Tv 의 어린이 영어입니다. 아이들과 어른이 함께 배울 수 있습니다. 

http://www.ncctv.co.kr/zboard/zboard.php?id=engbible 
영어 성경 공부해설 25개 자세함 

http://www.sarangtv.com/edu/aca_bible.asp#listfocus 
사랑의교회 영어성경공부 고성삼 목사가 인도합니다. 




사도 바울의 인간관


창세기 2:21
여호와 하나님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본질(本質)


잠(3462)  יָשֵׁן 

1. 미완료형 יָשֵׁן       
2. 잠에 곯아 떨어지다, 3. 시편 44:24

발음 /  야센(yâshên) 
관련 성경 / 오래 살다(신 4:25), 오래다(레 13:11), 잠자다(시 13:3), 자다(왕상 19:5, 사 5:27), 잠들다(렘 51:39, 창 2:21), 주무시다(시44:23, 121:4).
구약 성경 / 25회 사용

깊은 잠(8639) תַּרְדֵּמָה 

1. 깊은 잠,  2. 창세기 2:21,  3. 창세기 15:12

발음  / 타르데마(tardêmâh) 
어원 / 729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깊은 잠(창 15:12, 욥 4:13).
구약 성경 / 7회 사용

아담을 만드신 후 잠을 재우셨다는 것은 아담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죽은 아담의 옆구리에서 갈빗대를 취하여 하와를 만드셨다.
십자가의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피를 흘리신 사건으로 신랑이 되신 예수님의 신부가 되는 교회를 세우신 것을 예표한다.

본질(本質)

라틴어 / 나투라(natura), 영어 / 에쎈스(essence)

한글사전 / 1. 본디부터 가지고 있는 사물 자체의 성질이나 모습.                 
                 2. 사물이나 현상을 성립시키는 근본적인 성질.               
                 3. 철학 실존(實存)에 상대되는 말로, 어떤 존재에 관해 ‘그 무엇’이라고 정의될 수 있는 성질.

기독교의 본질은 "예수" "십자가"

1. 자연인(自然人) / (Ψυχικὸς δὲ ἄνθρωπος)
-
φυσικό πρόσωπο

2. 성령인(聖靈人) / 프뉴마티코스(πνευματικὸς)
-
Άγιο πνεύμα

3. 세속인(世俗人) / 사르키노이스(σαρκίνοις)
-
κοσμικός

자연인(自然人)

육에 속한 사람(고린도전서 2:14)
-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현대인의 성경 /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은 하나님의 성령이 주시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적으로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일 뿐만 아니라 그들은 그것을 깨달을 수도 없습니다.

성령인(聖靈人)

신령한 사람(고린도전서 2:15)
-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현대인의 성경 / 적인 사람은 모든 것을 제대로 평가하지만 세상 사람은 그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합니다.

세속인(世俗人)


육신에 속한 사람(고린도전서 3:1-3)
-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현대인의 성경 /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적인 사람을 대하듯이 말할 수가 없어서 세속적인 사람,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를 대하듯 말합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젖을 먹이고 단단한 음식을 먹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그것을 소화시킬 능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직도 여러분은 세상 사람들처럼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시기와 다툼이 있는데 어찌 육적인 세상 사람들처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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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에 있는 자냐 영에 있는 자냐(롬 8:8-9)'의 기준은, 거듭났느냐 아니냐로 결정됩니다.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말한 육으로 난 것과 영으로 난 것의 기준(요 3:6)이나 천국 입성의 자격도, 성령으로 거듭났느냐 여부에 있습니다(요 3:5).

바울 사도가 에서(Esau)를 '육체를 따라 난 자'로, 야곱(Jacob)을 '성령을 따라 난 자'로 구분한 기준도 거듭남 이었습니다(갈 4:29).

영역본 성경은 거듭나지 못한 '육신에 속한 자'를 자연인(natulal man)이라 번역했고(고전 15:46),
윌리엄 쉐드(William G. T. Shedd, 1820-1894) 역시 그의 명저 "Sernons to the Natulal man"에서, 육신에 속한 자를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the natulal man)으로 풀이했습니다.

식품은 자연산 그대로가 좋지만, 사람은 아담으로부터 난 자연산 그대로는 부패하고 더럽습니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부정한 짐승의 상징으로 언급한 돼지는(마 7:6), 거듭나지 못한 유대인들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유대인처럼 율법에 완벽한 이들이 없다고 공인되던 시대에, 그들이 부정함의 상징이 된 것은 파격입니다.
이는 부정하고 정결함의 기준이 인간 윤리가 아닌 거듭남의 여부에 달려있음을 말해주며, 기독교 윤리의 코페르니쿠스적인 새 기준의 출현이었습니다.

성경이 육신에 있는 자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한 것도(롬 8:8),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은 행위 이전에 존재 자체로 하나님을 불쾌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를 미워한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라는(롬 9:11) 원천적 이유 외에, 성령을 따라 났느냐가 관건이었습니다.

이는 기독교 인간론이 행위론적(behavioral) 이전에 존재론적(ontological)이며 관계론적(relational)이라는 확증이며,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물이고 하나님 의존적인 존재라는 사실과 직결됩니다.

인간은 고결한 덕행자냐 아니냐를 불문하고, 존재론적(ontological)으로 다시 나지 않는 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썩은 오물은 그 악취와 추한 몰골만으로도 능히 사람을 불쾌하게 하듯,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존재 그 자체로 하나님을 불쾌하게 만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더 핑크(A. W. Pink, 1886-1952)가 "인간의 행위적인 죄는 부패한 인간 존재에서 나온 열매일 뿐, 하나님을 불쾌하게 만드는 근본 요인은 타락한 인간 존재 자체"라고 한 것은 올바른 지적입니다.

"인간은 교양이 있고 교육받고 세련되었고 종교적이기 조차 할지라도 그의 마음은 '심히 부패'하였다(렘 17:9).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행해지는 것은 하나도 없기에... 아담의 모든 후손들은 다 타락한 자들이고 인간의 존재의 모든 부분은 죄로 인해 오염돼 있다. ... 그의 성향은 변질되어 버려서 그는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을 사랑하고 사랑하시는 것을 미워한다.

그것은 몇 개의 잎사귀가 시들어버린 것이 아니라 나무 전체의 뿌리와 가지까지 썩어버린 것을 의미한다. ... 인간 안에는 그 존재의 근원과 기질 안에 본래부터 부패되고 원래 악마적인 것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죄는 그 열매에 지나지 않는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미워하심을 받을 뿐더러, 그 자신도 하나님을 본능적으로 싫어합니다.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롬 3:10)"는 말씀은 다만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소극적인 무관심(무지)을 넘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롬 1:28)' 의도적 반감을 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막 9:40)'는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며, 하나님에 대한 노골적인 적개심을 표하지 않는 단순 무관심자는 기독교의 적대자가 아니라는 낙관론을 폅니다.

그러나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마 12:30)"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사실 그들의 무관심은 포장된 적대감의 표출입니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우리 의식 세계는 자신이 싫어하는 것에 대해선 의도적으로 눈을 감는 속성이 있다고 합니다. 인간이 자기를 창조한 하나님께 대해 무관심(무지)으로 일관 할 수 없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는 이사야 선지자의 책망대로 미물 짐승보다 못합니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사 1:3)."

성경이 하나님 무지(무관심)에 대한 인간의 변명이 심판 때에 그를 변호해주지 못할 것이라고 한 것은(롬 1:20), 그들의 숨겨진 적개심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직설 화법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을 심판받을 죄로 선언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살후 1:8)." 그들의 하나님 무지가 비의도적이고 소극적인 것이 아닌, 부러 잊으려는(willingly are ignorant, 벧후 3:5) 의도적인 것임을 명백하게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진주와 돼지 비유에서 사람이 진주를 던지면 돼지가 그것을 발로 밟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던져준 사람에게 덤비기까지 하는 것은(마 7:6),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무관심 뒤에 적개심이 도사리고 있음을 은유적으로 표현 한 것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 드러내는 사람들의 냉소와 무반응은, 사실은 하나님에 대한 숨겨진 적개심의 표출입니다. 복음 전도자나 설교자들이 전도를 녹록한 태도로 접근할 수 없게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육신에 속한 자들의 하나님에 대한 적개심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반감으로도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자신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감이 하나님을 미워한 데서 연유됐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 나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요 8:42)."

그는 세상이 제자들을 미워하는 이유 역시, 그들이 자신에게 속한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9).",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요 15:18)."

동생 아벨을 형 가인이 돌로 쳐 죽인 것은, 가인을 미워해서라기보다는 아벨이 믿는 하나님을 미워한 때문입니다. 동생의 제사는 받고 자신의 제사는 안 받는 하나님에 대한 적개심이, 동생을 향한 질투심으로 나타났습니다(창 4:3-8). 그리스도를 전하는 스데반에게, 유대인들이 귀를 막고 달려들어 돌로 쳐 죽인 것은 스데반이 전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적개심 때문이었습니다(행 7:57).

그리고 성경이 육신에 속한 자를 '육신을 좇는 자(롬 8:5)'로 지칭하는 것은, 그가 유별나게 저급한 육욕을 좇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타고난 본성에 충실한 거듭나지 못한 모든 자연인을 뜻합니다. 영적으로 죽은 자들은 신령한 것에 대한 감각과 갈망이 없기에 본성적인 것만을 쫓기 마련입니다.

마치 사자가 풀을, 돼지가 진주를, 까마귀가 깨끗한 고기를 좋아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창 8:7-9). 망령된 에서가 장자의 기업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먹는 것은(창 25:33-34), 영적인 것의 가치를 모르고, 땅의 것만 탐하는 거듭나지 못한 자의 속성을 드러낸 것입니다.

이어서 거듭나지 못한 자의 '육신의 생각'과 그것이 갖다 주는 '사망'에 대해 언급하고자 합니다. 성경이 육신의 생각이 사망이라고 한 것은(롬 8:6),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의 생각의 허망함(엡 4:17)과 거기에 따르는 심판을 말한 것입니다. 죄와 허물로 죽은 자들의(엡 2:1) 모든 생각은 죽음같이 허망하고, 그 허망한 생각이 그를 사망에 빠뜨립니다.

성경이 죄 된 행실을 죽은 행실과 동일시하고 있음도(히 6:1; 9:14) 같은 맥락이며, 그 생각의 내용은 선악을 불문합니다. 악하고 더러운 생각뿐만 아니라, 불쌍한 자들을 향한 선한 연민의 마음도 사망의 범주를 벗어나게 못합니다.

이는 그 선한 마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는 동기의 발로가 아닌, 자연인의 본성과 자기 의(義)의 발로에서이고, 선행의 원천적인 힘도 육신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선악을 불문하고 본능으로 행하는 모든 것을 멸망 받을 짓거리로 폄하합니다. "또 저희는 이성 없는 짐승 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유 1:10)."

계신대학원대학교 설립자 이병규 박사가 '짐승 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을 해석하여-유별나게 짐승 같은 추잡한 속성을 쫓는 것이 아닌-짐승과 같이 오관(五官)으로 느껴지는 본능 따라 행하는 자기 자랑, 자기중심, 자기만족을 위해 하는 것이라 하고, '이성'을, 중생한 영혼이 사용하는 선한 기관으로 풀이한 것은 적절합니다.

죄인은 악을 행하면서도 죄를 쌓을 뿐더러 선을 행하면서도 죄를 쌓습니다. 이는  그의 선행 동기가 자기 본성과 의의 구현에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롬 14:23)"고 한 것도 같은 관점입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참된 행위를, '성령으로 행하며 예수를 높이고 육체의 힘으로 하지 아니하는 것'이라 규정했습니다(빌 3:3). 이 기준에 맞출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거듭난 사람뿐입니다.

그러나 '육신의 생각'이, 다만 거듭나지 못한 자에게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거듭난 사람임에도 그 안에 남아있는 옛사람이 내는 생각도 육신의 생각입니다. 베드로가 분노하며 말고의 귀를 자른 것(마 26:51), 외식(갈 2:13-14), 십자가를 지실 예수님의 대업 앞에서 하나님의 일보다 사람의 일을 생각한 것(마 16:22-23) 역시 다 육신의 생각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심히 다투어 갈라선 것(행 15:39),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작정한 연보를 떼어먹은 것(행 5:1-10),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파당을 짓고 경쟁심과 교만에 빠진 것(고전 1:11-13)도 다 육신의 생각입니다.

그런 육신의 생각들로 인해 사망의 악취를 풍겨내며 타인을 실족케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거듭나지 못한 자들의 육신의 생각처럼 사망의 판결을 받게 하지는 않습니다. 거듭난 자들에게는 성화의 판결은 있겠지만 더 이상 칭의의 심판은 없기 때문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이 갖는 육신의 생각이 하나님과 원수 된다는 것도(롬 8:7) 말하고자 합니다. 죄로 죽은 인간은 본성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합니다(고후 10:5). 성경이 사람의 계획하는 바가 어릴 때부터 악하고(창 8:21), 마음의 생각이 항상 악하다(창 6:5)는 말은, 단지 인간은 어려서부터 도덕적으로 부패하다는 뜻이 아니라, 아담의 원죄를 유전 받은 인간은 날 때부터 하나님을 부인하고 대적하는 존재로 난다는 뜻입니다.

존 번연(John Bunyun, 1628-1688)도 같은 견해를 피력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원수가 되나니(롬 8:7; 골 1:21)'는, '본래 인간은 하나님에 대하여 원수이고 그의 마음에서 원수 된 자'라는 뜻이다."

나아가 거듭나지 못한 자의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법(롬 8:7)'에 굴복할 수 도 없습니다. 이 하나님의 법은 단순히 율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고 구원 얻는 '믿음의 법(롬 3:27)'이 그 핵심이며, 오직 성령으로만 받아들여집니다(고전 12:3). 거듭나지 못한 자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일 뿐입니다(고전 2:9). 동물이 사람의 생각을 알 수 없듯, 성령 없는 자연인에게는 믿음의 법이 어처구니없게 보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전 2:9)." 오직 예수가 위하여 죽은 구원 예정을 받은 자, 곧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으로 거듭난 자만 예수 믿고 구원 얻는 도리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48).",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반면 영의 사람이 갖는 '영의 생각(롬 8:6)'도 있습니다. 이는 타계주의자들의 세속사를 초탈한 생각, 혹은 신비주의자들의 소위 탈혼(입신) 상태에서 나오는 계시 같은 것이 아닙니다. 이는 자연인의 본성에는 없는, 성령의 거듭남으로 우리 안에 부어진 하나님을 향한 생각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가 정의한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영적인 사람들이 이전에는 전혀 몰랐던 새로운 것을 영혼이 의식하게 되는 것은 결과적으로 마음에 전적으로 새로운 지각이나 감각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 참된 성도는 새로운 영적 지각과 감각의 원리가 생긴다, 그리고 참된 성도는 이 새로운 감각으로 영적이고 신령한 것들을 알게 된다."

존 오웬(John Owen, 1616-1683) 의 견해 역시 같은 취지로 보입니다. "영의 생각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마음 자세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는 유일한 마음 상태이다."

'영과 영의 생각'에 대한 그의 견해도 탁월합니다. "성경에서 영은 '성령(롬8:9)'이나 '성령에 의해 신자 속에 생성되는 새로운 영적 생명(요 3:6)'을 뜻한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영의 생각이란 '신자 속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영적 생명의 활동'을 뜻한다. 이 새로운 영적 생명은 신자가 영적인 생각을 하게하며 기뻐하게 한다. 회심하기 전에는 이런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불신자는 땅의 일들을 좋아하지만, 신자는 하나님의 일들을 우선시한다."

이렇게 성령으로 거듭나고 하나님과 화목한 영의 사람의 생각에는 생명과 평안이 깃들어 있습니다. 이는 마인드 콘트롤(Mind-Control)이나 종교 수양으로 만들어진 심리학적인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하나님과의 화평과 초자연적인 성령으로 말미암아 마음에 이루어진 하나님나라의 경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 5:1).",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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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령한 사람 (고린도전서 2:13~16)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성령을 받았느냐? 라는 질문은 그리스도인이 되었느냐? 아니면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했느냐? 하는 기준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이란 호칭은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에서 약 일년간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 후 복음을 믿고 삶이 변화된 사람들에게 처음 붇여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바로 영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을 가리켜 부르는 호칭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주위에는 영적인 삶이란 무엇인지 참된 영적인 삶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고 영적인 삶을 살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참된 영적인 삶을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떻게 하면 예수님처럼 현실에 확실하게 발을 딛고 살면서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영적인 사람이 될 수 있을까’하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예) 예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참된 영적인 삶이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질적인 삶을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완전히 기쁘시게 하고 영화롭게 해드린 유일한 분은 그리스도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이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닮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영적인 삶란 예수 그리스도를 철저히 닮아가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그리스도 중심의 종교입니다.
내가 성화된다는 것도 그리스도 중심이요 영적이라고 하는 것도 그리스도 중심이며 그리스도인의 삶 자체가 바로 그리스도 중심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1)고 고백했습니다.

바울은 참된 영적인 삶을 제대로 깨달은 분이었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한 순간부터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도록 일하고 계십니다.   
모든 여건을 통해 모든 방법을 통해서 역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화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 안에서는 이 순간에도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성품이 형성되고 있습니다. 이것을 신학에서는 거룩됨 또는 성화라고 부릅니다.
  
사람의 모습을 육에 속한 자 곧 육적인 사람(고전 2:14) 육신에 속한 자(고전 3:1) 그리고 신령한 자 곧 영적인 사람(고전 2:15)으로 말씀 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자연인) 고린도전서 2:14 / 불신자

육에 속한 사람(프쉬코스 데 안드로스)
새 생명을 얻지 못한 상태의 자연인(표준역)을 뜻하는 거듭나지 못한 사람 자연인(현대인의 성경)으로 영적이지 못한 사람(공동번역)으로 불신자에 해당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육적인 삶을 삽니다.
그러나 영적인 삶에 있어서는 영적으로 살고 있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육으로 한번 태어난 자연인은 영적인 진리를 잘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미련하게 보이며 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연인에케는 영적인 진리들이 바보처럼 우스꽝스럽게 보인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대해 사도 바울이 지적한 말씀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2:14 /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예수님께서도 니고데모에게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네가 한 번 더 태어나야 하겠다는 말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그 말씀이 이해가 안되어서 어머니의 배속에 들어 갔다 나와야 하느냐고 하였습니다.
한번 태어난 육신과 지성으로 한 차원 위인 영적인 것에 대해 이해를 하려니 안된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예수님을 찾아다닌 무리들이 그 전날 예수님께서 수 많은 사람을 먹이셨던 것 때문에 다시 찾아온 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썩을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썩지 않을 양식을 구하라”고 하셨습니다(요 6: 27).

예수님이 떡을 먹이신 것은 떡에 목적을 두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생명의 떡임을 알게 하려고 행하신 것입니다.
자연인은 예수를 믿고 성령으로 거듭나야 복음에 대해 이해가 가능해집니다.

예수님께서도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습니다(요 3:3).

따라서 안 믿는 사람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게 화를 내고 욕하는 것에 대해 속상해 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이해가 안되어서 그러는 것입니다.

육적인 사람의 본성은 자기 중심적입니다.
심지어 선한 일을 해도 그 안에 이기적인 동기가 숨어 있습니다.
자아가 마음 보좌에 앉아 있고 예수님은 그의 삶 밖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육적인 사람은 영적인 진리를 잘 받아들이지 않을 뿐더러 하나님의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고전 2:14). 
이것은 자연인이 무식하다는 소리가 아니라 영적인 것을 이해할 능력이 없다는 말입니다.
  
목사님이 기독교에 대한 강의를 하는데. 한사람이 자꾸 엉뚱한 질문을 해대고 반론을 하면서 강의를 방해하더랍니다.
그래서 참다 참다 “전공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핵공학이라고 하여서 “핵이 소금으로 만들어진 것을 아시요?” 했더니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린가 하고 의아해하더랍니다.
그래서 ’핵에 대해 전혀 모르는 내가 핵이 어쩌고 저쩌고 하면 얼마나 웃깁니까? 마찬가지로 기독교에 대한 것은 내가 전공했으니 내가 좀 얘기하게 놔두시오”라고 했더니 그 사람은 무안해서 그냥 나가버리고 말더랍니다.

육적인 사람 영적인 생명이 그 안에 없어 진리에 대하여 이해 할 수가 없습니다.

육신에 속한 자(세속인) 고린도전서 3: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육신에 속한 자(사르키노이스)는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이라고 하는 표현에서 보듯 성령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성숙하지 못한 신앙 때문에 성령에 사로잡혀 있지 않고 자연인의 본성에 더 지배 받아 육신적 기준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이들을 의미 한다고 봅니다.

예수는 믿는데 생각하고 사는 모습이 예수 안 믿는 것같은 사람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표준역)으로 아직도 영적인 신앙인이 아니기 때문에 영적인 사람에게처럼 말해봤자 못 알아들을 것이므로 그 수준에 맞게 말하겠다고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서신에서 사도 바울은 이야기합니다.

육신에 속한 자의 본성은 자아가 마음 중심에 자리잡고 예수님은 한편구석에 위치하고 있는 세속적인 사람(현대인의 성경)입니다.
  
거듭났다는 자체가 성화된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가끔 혼동되는데 거듭났다는 것은 영적으로 태어났다는 것이지 영적으로 성숙한 것은 아닙니다.
마치 아이가 태어났다는 것과 성인이 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육신에 속한 자의 특징은  미성숙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린 아이 다루듯이 잘 보살피고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또한 영적인 진리를 아직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잘 설명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교인들에 대해 질투심이 많고 잘 비판한다는 것입니다.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은 남에 대해 못마땅한 것이 많습니다.


신령한 사람(성령인) 고린도전서 2: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신령한 자(프뉴마티코스) 성령께서 내주 하시는 영적인 사람(공동번역 현대인의 성경) 성령으로 거듭난 새 생명의 사람 성령 충만한 사람마음의 중심 보좌에 주님을 모시고 섬기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어떡하든지 나 자신이 점점 없어지고 그 대신 예수님이 성령님이 점점 내 삶을 점령하시게 됩니다.
  
성령은 예수 믿는 사람에게 임합니다.

고린도전서 3: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 합니다.

그러나 내재하시되 얼마만큼 성령이 내 삶을 점령하셨는가는 또다른 이야기입니다.
만약 내 가슴 속에 질투,분노 욕심 등이 확 차 있다면 성령님이 눌려서 활동하시기 어려워집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를 믿자마자 마음속의 욕심,악독,분노,질투 같은 것을 자꾸 내버러서 비워 드릴 때 성령께서 더 강하게 역사하십니다

에베소서 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에게 성령이 임하십니다.
성령은 말씀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감화로 기록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씀만 철저히 알아도 성령의 뜻을 대부분 알 수가 있습니다.
말씀과 기도 외에는 신앙이 성장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신령한 사람 곧 영적인 사람은 진리릍 배우고 싶어할 뿐 아니라이해를 잘 합니다.
설교를 들은 후 그 설교가 귀에 쏙쏙 들어오며 참 좋은 것 배웠다고 기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설교자가 특별히 설교를 잘했기 때문이라기 보다 그 사람에게 들을 귀가 있기 때문입니다.
머리로 들은 것들이 금방 가슴으로 전해 집니다.
    
신령한 사람 영적인 사람은 또한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은 마음이 있습니다.
영적인 사람은 시간이 흐를수록 예수를 닮아갑니다.
그것은 지식이 늘어난다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예수를 닮는 것과 지식이 느는 것이 비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식이 는다고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은 마음을 갖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가야 할 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지식적으로 하나님 아는가 얼마나 봉사하고 있는가를 놓고 우리의 신령성을 가늠하시지 않습니다. 

평생 조용히 산골에 묻혀 살면서도 예수를 많이 닮아 신령성을 가진 사람이 기독교 역사에는 많이 있었습니다.
크게 이름 내며 일하지 않았어도 그저 자그마한 일이나마 예수님을 닮은 신앙으로 묵묵히 해내며 죽어간 사람들이 구석구석 많이 잇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모릍지라도 하나님은 그들을 기뻐하셨고 그들을 통해 영광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께 헌신(devotioo)하였나로 신령성의 척도틀 삼으십니다.
'헌신’(devotion)은 단순한 헌신이 아니라 헌신과 깊은 사랑이 합해진 상태를 말합니다.
나 자신을 바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자신을 바친다고 하는 것은 나의 재주와 찬송과 열정뿐 아니라 나의 고민과 슬픔도 바치는 것입니다.
찬송은 바치면서 고민은 내가 붇들고 있으면 온전한 헌신이 아닙니다.
제일 사랑하는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숨길 것 하나 없이 다 드리는 것 그것이 바로 헌신입니다.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얼마나 친숙한가 하는 친숙도로 하나님은 신령성을 판단하십니다. 
  
신령성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친숙합니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만큼 친숙한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신령성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과 친숙하며 하나님의 말씀과 친숙하며 하나님께 기도하기에 친숙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기에 친숙합니다.
하나님과 더 깊이 친숙할수록 아들이 아버지를 닮아가듯 하나님을 더 많이 닮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이 얼마나 예수님을 닮았는가 하는 것으로 신령성을 분별하십니다.
신령성은 주님을 얼마나 닮았는가 하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참된 사랑을 나누는 두 부부가 서로를 닮아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친숙할수록 부부는 더 깊은 사랑과 교제률 나누게 되며 마침내 얼굴과 식성과 성격까지 닮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말과 행동과 인격이 얼마나 예수님을 닮았나 하는 것으로 우리는 그가 신령성을 가졌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영적 신앙인인지 아닌지 또 어느 정도 영적인지 알아 보기릍 원한다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합니다.
내가 그 분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
여기서 ‘안다’고 하는 것은 막연히 상대방의 배경이나 현실을 아는 정도가 아니라 얼마나 친숙하게 상대방에 대해 아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분을 얼마나 사랑하는가?
스스로에게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많은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
새벽기도도 열심히히 다니고 성경공부를 열심히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열심인 사람일수록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느냐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의 마음 깊은 곳에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이 모든 것은 헛된 것입니다.

신령성은 얼마나 그분을 닮았는가입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닮고 딸도 어머니를 닯습니다.
아버지만큼 아들을 사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머니만큼 자기 딸을 사랑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아내는 남편을 알고 남편은 아내를 압니다. 부부 사이만큼 서로를 잘 알고 서로를 사랑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을 잘 알고 사랑한다면 알게 모르게 그 사람을 닮아가게 됩니다.
  
참된 영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예수님을 닮은 모습일 것입니다.
참된 영성이란 예수님을 닮아가는 데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영적인 사람 곧 신령한 사람은 성령에 감화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성령의 조명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는 보이는 세계가 모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압니다.
그는 보이는 세계 저 너머에 보다 본질적이고 궁극적이며 영원한 세계가 있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관한 일보다는 저 세상에 관한 일에 삶의 비중을 두고 힘을 쓰고 노력을 합니다.
한마디로 그는 이 세상 사람들이 가진 '육안'에 믿음의 눈인 '영안'을 하나 더 가진 사람입니다.

영에 속한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은 영적 분별력을 갖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이 세상과 저 세상,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구분합니다.
그는 이 세상 일을 멸시하거나 포기하지 않지만 거기에 얽매이거나 크게 영향 받지 않습니다.
세상일을 추구하거나 쾌락에 몰두하는 일이 하나님과 원수가 됨을 알기 때문에(약 4:4) 세상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삽니다. 

반면 그는 하나님이 요구하고 성령이 불러일으키는 거룩한 소욕에는 적극적입니다.
그는 '영원'과 비교하여 이 세상에서의 삶이 지극히 짧다는 것을 앎으로 이 세상에서의 삶을 '영원'을 위하여 과감하게 투자합니다.
그는 삶에 있어서 모든 일의 우선순위를 압니다.
그에게는 모든 일의 판단 기준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으므로 그의 판단은 정확하며 오류가 없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 만족할 만큼 실수 없이 사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로부터 지탄받고 비난받을 만큼 실수투성이의 삶은 살지 않습니다(15절).

영에 속한 신령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습니다.
신령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대속 교리와 가르침의 진정성을 압니다.
그의 가르침에 동조하고 굴복하며 순복하며 그 뜻에 따릅니다.
그에게는 그리스도의 내주하시는 영이 계시므로(롬 8:9) 그 영의 활동에 의하여 그는 그리스도의 생각을 알게 되며(11절) 그 뜻에 굴복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성이란 말은 성경에 없습니다.
신령함이 영성입니다.
신령한 사람으로서 참된 영성의 사람으로서 하나님께 영광돌리며 사명 감당하는 이 시대가 요구하는 그리스도인으로 무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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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영적인 사람인가?

들어가는 말 

우리의 몸을 축구 공으로 비유하여 보자 겉 가죽은 사람의 몸튜브는 혼공기는 영을 가리킨다.

또한 바울은 사람을 세 종류로 구분합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 세속인(고전 3:1-3)
육에 속한 사람, 자연인(고전 2:14)
영적인 사람, 거듭난 사람, 성령인(고전 3:1)

예를 들어 봅시다.

사람을 축구공으로 비유해 봅시다.
축구공의 겉가죽은 사람의 육체
축구공의 튜브는 혼
튜브안에 채워진 공기는 영이라고 하겠습니다.

육체라는 몸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을 보고, 느끼는 감각기관으로써 물질 세계를 접하고 있다.
혼은 육체의 다섯 가지 감각기관을 이용하여 물질 세계를 연구하고 사고하여 자기 자신을 표현하고 외부와 교류를 갖는 역할을 한다. 혼으로 들어가는 문은 상상, 의식, 기억, 사고, 감정이다. 

상상의 문(Imagination)은 육체의 시각에 해당되는 것으로서,  혼에 있어서 보는 눈과 같은 것이다.
의식의 문(Gate of Conscience)은 육체의 후각에 해당되며 혼이 선악의 존재를 구별하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기억의 문(Memory)은 청각에 해당되며 전에 들은 것을 혼이 재생하도록 한다.
이성(사고)의 문(Reason)은 미각에 해당되며 맛으로 음식을 비교하듯이 혼이 사실을 비교하게 해준다.
감정(애정)의 문(Affection)은 촉각에 해당되는데.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을 만져서 알 수 있듯이 혼이  느끼는 것이다.

"영"(spirit)은 "혼"(soul)과 "몸"(body)을 통하여  외부의 물질을 이해한다.
영의 감지능력은 영적인 것으로서, 믿음, 소망, 경배, 기도 등의 일을 한다.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는 인간의 영은 하늘로부터 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아담이 타락하자 죄는 영의 창문을 닫고 커텐을 쳐버렸으며 "영의 방"은 "죽음의 방"이 되어버렸다.
지금도 거듭나지 못한 영은 죽은 상태로 남아 있다.

성령의 능력으로 "빛"과 "생명"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생명이 그 방안에 거해야 빛과 생명으로 가득차게 될 것이다.
그때서야 비로소 우리는 왜 "자연인"이 "영적인 일"들을 이해할 수 없었는가를 알게 된다.
영적인 본성이 거듭나기까지는 영적인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자연인의 영은 어둠속에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의지(Will)"가 문 앞에 있다가 성령이 들어오려는 것을 방해한다.
성령이 그 사람의 "영"에 들어와  거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칼"인 "하나님의 말씀" 앞에 의지가 굴복해야만 한다.

 "선"과 "악"의 전쟁터는 인간의 "혼"이다. 성령이 사람의 "영"에 자리잡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성령은 "혼"과 "육"에도 접근해야 한다.
그 때까지는 사람이 성화될(Sanctified) 수 없는데, 이는  "거룩함"이라는 것은 영과 혼과 몸이 "성령으로 충만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건강한 혼과 영은 건강한 몸을 필요로 한다.
몸이 육신의 정욕으로 넘겨지거나  또는 심지어 몸을 쇠약하게 하는 지나친 금식으로  혼과 영이 함께 고통을 받으면 전체 인간이  영적으로 병들게 된다. 

이제 혼과 영이 몸을 떠나 뒤의 상태를 살펴보자 "부자와 나사로"에 관한 기사에서  우리는 지하 세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지하 세계"는 둘로 나뉘어져 있는데 그 사이는 건널 수 없는 구렁이 있으며 그것을 "끝없이 깊은   구렁"이라 한다. 이 곳은 악한 영들(마귀들)이 일시적으로 묶여 있을 곳이다. 그 곳의  왕은 "아폴루온(Apollyon)"인데 하나님께서 가두어 두셨다가 원하실 때에 천사를 시켜 잠깐 풀어 주실 것이다(계 9:1-11;17:8;20:1-3).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기 전에 죽은 의로운 사람들의 혼과 영은 "지하 낙원"에 있었다. 거기서 그리스도는 십자가 상에서 죽었던 "회개한 강도"를 만나셨다. 그리스도의 혼과 영은 그가 부활하신 날 지상으로 돌아 오셨으나 주님은 혼자 오신 것이 아니었다. 낙원에 있던  자들을 함께 데리고 올라오셨으며, 그후 낙원의 문은 잠그셨고 지금은 사망과 지옥의 열쇠를 갖고 계신다.(계 1:18) 여기에서 "사망"은 지하 세계의 "무덤"과 "하데스"를 나타낸다. 

그들은 몸을 입고 무덤에서 일어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한 첫 열매들로 주님과 함께 하늘로 올라갔다(마 27:52,53). 그들은 "셋째 하늘"로 올라갔는데, 그곳은 사도 바울이 갔던 곳이었다(고후 12:1-4).  바울은 그곳을 낙원이라 불렀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이후 죽은 모든 의로운 자들은 그곳으로 가서 "주와 함께" 있을 것이다(빌 1:23,고후 5:8). 

자신의 신부인 교회를 만나시려고 공중에 오실때 주님은 "셋째 하늘"의 낙원으로부터 이 의로운 혼들을 데려오실 것이다. 데살로니가전서 4:14에는 "예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을 우리가 믿는다면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예수 안에서 잠든 자들"도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땅으로 내려와 자신들의 몸을 되찾아 무덤에서 일어나서 "변화 받은 성도들"과 함께 올라가 공중에서 그리스도를 만날 것이다.

 

  그러나 죽은 "악한 자"의 혼은 계속 "지하 세계"의 "한 부분"인 지옥에  갇혀 있다가, 두 번째 부활이 이루어질 때에야  땅으로 돌아와 자신들의 몸을 다시 입고 "큰백보좌 심판석" 앞에서 심판 받게 된다. 그들은 그 심판에서 "둘째 사망"의 선고를 받게 되며, 그 의미에서  그들은 다시 죽어서 육신을 잃게 되며, 몸에서 이탈된 혼은 불못에 던져져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 가운데서 고통을 받게 된다. 혼은 불에 타지 않으므로 악한자의 혼은 불못(둘째 사망)에 던져져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 가운데서 고통을 받게 된다. 혼은 불에 타지 않음으로, 악한 자의 혼은 글자 그대로 영원히 불 가운데  있게 된다.

 

땅이 "불로써 타버리면(Renovated)" 사탄을 비롯한 하늘의 모든 "악한 권세들"은 갇히게 될 것이며 그때 하늘은  반란을 일으켰던 모든 악한 영들로부터 "깨끗하게" 될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사람은 타락이전의 아담의 상태로 회복되며 자연계와 영의 세계 사이를 나누고 있던 "휘장"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2. 들어가는 말

 

 교회(모임체)에서는 "영적인 사람"은 그것을 알지만 영적인 사람이 아닌 사람은 이것을 모른다고 하면서 성별되어있는 채  회자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보다 더 잘못된 생활을 하면서 당당할까?  왜 그들은 비성경적인 사업과 비리와 사회의 비난을 받으면서도 영적인 사람으로 허세를 부리며 허풍를 떨까? 많은 의문이 난다. 하여, 성령이 가르쳐주시는대로 "영적인 사람"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하자!

 

 1)  『사람의 일을 그 사람 안에 있는 사람의 영이 아니면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이 아니면 아무도 모르느니라』(고전 2:11).

 

  (1)  영에는 세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의 영이며, 세 번째는 더러운 영, 즉 사탄의 영이다. 성경은 또 짐승에게도 영이 있다고 말씀한다. 『사람의 영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영은 땅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누가 알리요?』(전 3:21). 이렇게 보면, 이 우주에는 네 가지 유형의 영이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지만, 짐승은 영적인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육체적인 필요를 충족하고 자신의 몸이 편안하기만 하면 나머지는 운명에 맡긴 채 행복할 수 있느냐 하면, 절대로 그렇지가 않다. 그것은 인간이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짐승은 육신적인 욕구만 충족하면 그것으로 충분히 행복하다. 인간도 육신을 갖고 태어났지만, 그것이 타고난 모든 요소의 핵심이 될 수 없다.

육신이 인간이 타고난 모든 요소의 핵심이 될 수 없다는 것은 그것이 죽어 썩으면 벌레들의 밥이 된다는 것을 알기에, 육신만이 아닌 다른 무엇인가를 위해서도 살려고 한다는 것을 보면 자명하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기에 그 중심에 영이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인간은 육신의 필요를 충족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만족할 수가 없으며, 인간은 그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영적인 필요를 충족해야만 비로소 행복을 느낀다. 인간은 육신을 위하여 밥만 먹으면 되는 존재가 아니다. 그러나 짐승은 밥만 먹으면 한없이 행복하다. 인간은 육신을 위해 밥을 먹지만, 영에게도 무엇인가를 먹여야만 비로소 행복을 느낀다.

 

  (2)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도 새들은 갖가지 아주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인간과 짐승들 사이에 완전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느냐 하면, 결코 그게 아니다. 아무리 훈련을 잘 시키고 아무리 집에서 함께 산다고 해도 인간과 짐승들 사이에는 어딘가 건널 수 없는 간격이 있기 마련이다.

이 틈은 인간이 영적인 존재인데 반하여 짐승들은 그렇지가 않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생기는 간격이며, 이 간격은 도저히 뛰어 넘을 수 없는 틈이다. 그래서 짐승은 사람의 일을 결코 알 수가 없다. 사람의 일은 사람의 영이 아니면 결코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짐승이 사람의 일을 알려면 사람의 영을 소유해야만 한다. 그것이 만일 가능하다면 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이 아니면 인간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인간이 하나님의 일을 알려면 하나님의 영을 소유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다행히도 하나님께서는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을 소유할 수 있도록 해놓으셨다.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새 생명을 얻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하나님의 영을 넣어 주시는 것이다. 구원받은 우리는 세상의 영을 버리고 하나님의 영을 받았다. 구원받은 우리들에게 이처럼 하나님의 영을 넣어 주시는 까닭이 무엇인가?

 

 2)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 (12절).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12절).

 

   (1)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을 받도록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 말은, 우리가 새롭게 태어나면, 전에는 알지 못했던 무엇인가를 알게 된다는 뜻이다. 우리가 거듭나지 못했을 때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조차도 알지 못했고,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창조하셨다는 사실도 몰랐으며,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나에게 진리를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도 몰랐고, 그분께서 거룩하신 분이며, 진실하시며, 신실하시다는 사실들, 그 어느 것도 알지 못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거듭나지 않고는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었다. 도무지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는 명철이 터럭만큼도 없었으며, 하나님께서 내 인생에 어떻게 개입하시는가에 대해서 눈꼽만치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은 말할 것도 없으려니와, 마귀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마귀가 얼마나 막강한 힘을 갖고 있는지도 알 길이 없다. 그러나 거듭나고 구원받은 우리는 이제 이러한 모든 것들에 대해서 잘 알게 되었다. 어떻게?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을 받았기 때문이다.

 

  (2)  하나님께로부터 온 이 영은 삼위일체의 한 분이신 인격적인 성령, 그분을 지칭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분”이 아니라 “그것”(it)으로 표현되는 “영” 그 자체를 의미하기도 한다는 것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시거니와』라고 말씀하고 있는 로마서 8:16에서 성령을 대문자 “Spirit”로 표기하여 인격적인 분으로서의 그분을 나타내고는 있지만, “성령이 친히”에서 “Spirit himslef”가 아니라 “Spirit itself”로 표기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성령 그분 자신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성령 그것 자체가”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경우에는 성령님을 인격적인 분으로서의 성령님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역사하심, 또는 성령님의 영향력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처럼 “그것”으로 표현되는 하나님의 영을 소문자로 표기한 곳도 성경에는 나온다. 출애굽기 31:3,4이나 출애굽기 35:31,32에 보면 『하나님의 영으로 그를 충만케 하시어 지혜와 명철과 지식과 온갖 솜씨로 정교한 기술을 고안하여 금과 은과 놋으로 일하게 하시며』에서 하나님의 “영”을 소문자 “spirit”로 표기하고 있다.

이처럼 소문자로 표기한 “영”은 하나님의 영의 영향력, 또는 그분이 행하시는 사역 자체를 의미한다. 고린도전서 2:12에서도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을 소문자로 표기하고 있거니와, 이것은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거듭난 사람들에게 인격체이신 성령님으로 오셔서 인도하시기도 하지만, 능력의 “영”을 주셔서 그 영향력으로 지혜를 깨닫도록 하시기도 한다.

캠벨주의자들은 인격적인 분으로서의 성령님을 인정하지 않고 어느 경우에나 성령은 하나의 “영향력”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한 인격체이신 것을 부정하고 하나의 에너지적 존재로 간주하는 배교자들의 발상이다. 성령님은 인격체이시며, 또 사역을 행하는 영향력이시다.

 

 3)  영적인 일들을 영적으로 비교 (13절).

 

『또한 우리가 그것들을 말하되 인간의 지혜가 가르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성령께서 가르치시는 말로 하나니 영적인 일들을 영적으로 비교하여 말하느니라』(13절).

 

『성령께서 가르치는 말』이란 곧 성경 말씀을 의미한다. 나블레 고블레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이나 지껄이는 은사주의자들이 환각 속에서 들었다고 곧잘 주절대는 그런 말이 아니라 성령님께서는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신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방언이 아니라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분명한 말로 말을 한다.

 

『영적인 일들을 영적으로 비교하여 말하느니라.』 이 구절은 꼭 배워두어야 할 말씀이다. 영적인 일들이란 영적인 성경 말씀들을 의미한다. 이것은 바로 앞에서 『또한 우리가 그것들을 말하되 인간의 지혜가 가르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성령께서 가르치시는 말로 하나니』에서 “성령께서 가르치시는 말”이 곧 성경을 의미한다는 데서 자명하다. 이처럼 영적인 일들에 관해서 말씀하는 성경은 영적으로 말씀하는 성경으로 비교해 보아야 이해할 수가 있다. 다시 말해서, 말씀은 말씀으로 비교될 때 그 말씀의 온전한 뜻이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들을 육신적이거나 인간의 지혜에서 나온 세상적인 지식에 비추어서 이해하려고 하면, 아무리 해도 이해될 수가 없는 것이다.

 

 4)  자연인은 영의 일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14절)

 

『그러나 자연인은 하나님의 영의 일들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일들이 그 사람에게는 어리석게 여겨지기 때문이요, 또 알 수도 없나니 이는 그 일들이 영적으로만이 분별되기 때문이니라』(14절).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자연인 그대로 내팽겨쳐진 사람이다. 따라서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일들을 알 수도 없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무지하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들이 모두 어리석게만 보인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영의 일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들은 사람의 일을 이해하지 못하는 짐승들이나 마찬가지다.

한편, 거듭났다고 해서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하나님의 영의 일들을 받아들이느냐 하면, 결코 그렇지가 않다.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육신적인 사람은 자연인이나 마찬가지로 성령의 일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성령을 따르지 않으면 그 사람은 성령의 일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이런 사람들은 여전히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다. 『육신을 따르는 사람들은 육신의 일들을 생각하나 성령을 따르는 사람들은 성령의 일들을 생각하느니라』(롬 8:5).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은 구원받지 못한 “자연인”과 구별되어야 하지만, 성령을 따르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자연인이나 마찬가지다.

 

 5)  영적인 사람은 판단하나 (15절)

 

 『영적인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15절).

 

   (1)  꼭 기억해 두어야 할 위대한 구절이다. “영적인 사람”이란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을 말한다.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는 지혜를 소유한다.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하나님의 영을 받고 하나님의 영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이 자신에게 무어라고 지껄여도 거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기 때문이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지혜나 인간의 생각으로 무엇을 판단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올바르게 판단하는 사람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인간의 생각으로 자신에게 이러쿵 저러쿵 판단하려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반면에 그리스도인은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판단해서도 안된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가치 기준은 오직 성경 말씀에 있기 때문에 사람의 생각으로 함부로 형제를 판단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판단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도 판단받지 않을 것이라』(마 7:1). 『그런즉 우리가 더 이상 서로를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형제들 앞에 거치는 것이나 방해물을 놓지 아니하였는지 판단해야 하리라』(롬 14:13).  

 

   (2) 『판단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도 판단받지 않을 것이라.너희가 판단하는 그 판단으로 너희도 판단받을 것이며, 너희가 재는 그 자로 너희도 다시 측정을 받으리라. 어찌하여 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생각지 못하느냐? 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도 ‘네 눈에서 티를 빼내 주마.’라고 네 형제에게 말할 수 있느냐?』(마 7:1-4) 


   ① 이 구절 역시 많은 기독교인들의 입에서 회자되는 말로써, 누가 누군가를 판단한다고 생각되면 즉시 이 구절을 들고 나와 “네 눈에서 들보를 먼저 빼내라.”고 말한다. 물론 이 구절은 어느 시대 누구에게나 미덕으로 사용될 수 있는 구절이다. 우리는 남을 함부로 비판하고, 함부로 공격해서는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도 그러한 잘못을 저질렀을 수 있고, 또 저지를 가능성이 충분히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구절을 지나치게 적용하려는 사람들은 진리를 가지고 오류를 판단하는 것조차 “비판”이라고 생각하여, 스스로의 무지를 정당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그리스도인들은 판단할 수 있다. 만약에 우리가 판단할 수 없다면 어떻게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그 사람이 구원받지 못했다는 판단하에, 적어도 그 사람이 구원받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판단”하에 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또 오류에 빠진 사람을 진리로 바로 잡으려면 그 사람의 오류를 “판단”해야 하며, 누군가에게 지식을 전달하거나 교육할 때 그들의 잘못을 “판단”해야만 그들을 올바로 가르칠 수 있다. 특별히 영적인 문제에 있어서 “판단”은 더욱 명확하게 행해져야 하는데, 그것은 고린도전서 2:15의 말씀 때문이다. 『영적인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고전 2:15). 영적인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다. 그는 판단하여 사람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해 주어야 한다.

 

   ② 마태복음 7:1의 말씀과 고린도전서 2:15의 말씀이 서로 상충이 되는 것은 우리가 마태복음 5장에서 살펴보았듯이 이 두 말씀이 서로 다른 경륜(또는 세대)에서 사용되기 때문이다. 즉 고린도전서 2:15의 말씀은 교회 시대의 성도가 행해야 할 말씀이고, 마태복음 7:1은 왕국 시대의 백성들이 행해야 할 말씀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도 함부로 비판만 해서는 안될 것이다.

고린도전서 2:15의 전제는 “영적인 사람”이다. 자신이 영적인 사람이 아니라면 그는 함부로 판단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육신적인 판단은 또 다른 판단을 낳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3장에서 육신적인 판단을 금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자신을 영적인 상태, 즉 성령충만한 상태로 유지하여 모든 것을 올바로 판단하는 가운데, 진리를 전파해야 한다. 절대진리, 즉 하나님의 말씀의 잣대로 모든 것을 과감히 판단하라.  

 

  (3)  『그런즉 우리가 더 이상 서로를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형제들 앞에 거치는 것이나 방해물을 놓지 아니하였는지 판단해야 하리라』(롬 14:13).

『우리가... 서로를 판단하지 말고 ...것이나 ...아니하였는지』, 그 일을 판단해야 한다고 말씀한다. 쉽게 말해서, 사람을 판단하지 말고 어떤 “것,” 즉 “일”을 판단하라는 말씀이다. 우리가 판단해야 할 “것”으로는 가령, 『형제들 앞에 거치는 것이나 방해물을 놓지 아니하였는지』 하는 것들이다. 형제들 앞에 방해물을 놓아 그들이 실족하기라도 한다면 당신은 이에 대해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해명해야 할 것이고 이로 인해서 진땀을 흘려야 할 뿐더러 당신에게 돌아오는 상은 없다. 당신은 이것을 결코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6)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각을 가졌느니라 (16절)

 

『누가 주의 생각을 알았다고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각을 가졌느니라』(16절).

 

   (1)  당신이 구원받고 성령님께서 당신 안에 들어오시면, 당신이 그리스도와 동일한 생각을 하도록 그분께서 인도해 주신다. 당신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때, 당신은 주님께서 생각하시는 것과 똑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는 말이다. 『너희 안에 이 생각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도 있는 생각이라.』(빌 2:5)고 성경은 말씀한다.

거듭난 사람에게 성령님께서 들어오시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와 똑같은 생각과 마음을 가져야 하고, 주님께서 보시는 대로 보아야 하며, 지난날의 생각과 안목은 모두 버려야 한다. 『너희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써 변화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롬 12:2). 그런데, 그리스도의 생각을 갖고는 있으면서도 그리스도의 생각을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생각대로 행하지 않는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로마서 12:2를 보라. 『너희는 이 세상과 일치하지 말고 너희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써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입증하도록 하라.』고 성경은 명령하고 있다.

 

   (2)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생각을 가졌다. 그러나 그 생각을 행동으로 나타내어 입증할 수 있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이런 사람은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써 변화를 받은” 사람이 아니라 단지 그리스도의 생각을 머리 속으로 상상만 하고 있는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생각을 갖고 그 생각대로 행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머리 속으로 생각만 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은 구원받고 생각할 수 있는 두뇌를 되돌려 받은 것이 아니라 마음이 새롭게 회복된 사람들이다. 새롭게 된 마음으로 변화되어 그리스도의 생각과 똑같은 생각대로 살아가는 데에 대해서 겁먹을 필요는 하나도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영이 아니라 능력과 사랑과 건전한 생각의 영이라.』(딤후 1:7)고 말씀하고 있지 않은가!

 

 

3.  마치는 말

 

 1) 『너희는 이 세상과 일치하지 말고 너희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써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입증하도록 하라』(롬 12:2).

『이 세상과 일치하지 말고...』.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어려운 문제가 이것이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답게 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바로 세상 문제다. 마귀가 그리스도인에게 제공하는 가장 큰 걸림돌이 이것이고, 여기에 걸려 넘어져 세상과 일치하게 하려는 것이 마귀의 유일한 목표다. 당신이 비록 그리스도인이지만 세상과 일치하려고만 한다면 마귀는 당신에게 거의 모든 것을 제공할 것처럼 유혹해 온다.

당신이 세상에 일치하기만 하면 당신에 대하여 마귀가 할 일은 그것으로 종결되어 임무 끝이다. 그러나 당신이 세상과 일치하지 않고 있는 한 마귀는 당신에 대한 자신의 일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신에 대한 공략을 계속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이 그리스도인에게는 최대의 골칫거리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무슨 일이 있어도 세상과 일치하려고 하지 않는 바람에 박해를 받고 고문당하고 끝내는 순교까지 당하고 만 초기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처하였던 갖가지 상황을 책을 통해 읽고 연구하면 할수록 그들이 안고 있던 큰 문제가 무엇이었는지 더욱 여실히 발견되는데, 이른바 “인류에 대한 증오심”이라는 문제가 그것이었다. 초기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로마 측과는 사이좋게 지내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는데, 바로 이것 때문에 그들은 죽임을 당했던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몸을 산 제물로 드려야 마땅한 이유는 롬 11:36이었다. 모든 것이 그분께로부터 나온다는 사실, 이것이 헌신해야 하는 첫 번째 합당한 사유였다. 우리의 몸을 산 제물로 드려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12:1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셨다. 이것이 헌신해야 하는 두 번째 정당한 사유다.

그리고 그 세 번째 합당한 이유가 여기 2절이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 이것이 당신의 몸을 산 제물로 드려야 하는 정당한 사유인 것이다. 이 세 번째 이유를 분명히 알기 위해서라도 당신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당신은 확실하게 찾아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려야 하는 합당한 이유는 이렇게 세 가지로 집약된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는 사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자비를 베푸셨다는 사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어떻게 하기를 원하시는지 분명한 뜻을 갖고 계시다는 사실, 이 세 가지가 당신의 헌신을 요구할 수 있는 정당한 근거인 것이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롬 12:2).

당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세 가지 뜻이 모두 개진되고 있다.

선하신 뜻(good will)
기뻐하시는 뜻(acceptable will)
온전하신 뜻(perfect will)

하나님의 뜻은 선하라 선하게 행하라

첫 번째는 그릇되게 행하여 죄를 짓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선하라, 선하게 행하라,” 이것이 하나님의 첫 번째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누구도 그릇되게 생각하고 죄 짓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어떤 뜻을 갖고 계실 때, 그 뜻의 첫 번째는 언제나 “선하라.”는 것, 이것이다.

 

하나님의 두 번째 뜻은 선한 행동

당신이 덮어놓고 어떤 “선한 행동”을 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과연 그것을 기뻐하시느냐 하는 것은 완전히 별개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은 당신이 생각했던 것과는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그러므로 당신은 어떤 “선한 행동”을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인가를 먼저 정확하게 헤아려 알고 난 다음에 그 선한 일에 착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당신이 아무리 많은 선행을 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에 부응하는 것이 아니었다면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전혀 평가되지 않을 터인즉, 당연히 그에 대한 상도 없다.

​하나님의 세 번째 뜻은 온전하신 뜻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선하기를 바라시고 선한 행동을 하기 바라신다.
그래서 당신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행이 무엇일까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고 선한 일이라도 어떤 선한 일을 해야만 주님께서 기뻐 받으실까를 정확하게 알기 위해 성경을 읽고 하나님의 말씀들을 상고하면서 기도하고 묵상한다.
그런 다음 당신은 마침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알게 되고 그 뜻에 따라 행동한다.
따라서 당신이 행한 모든 선한 것들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에 온전히 부합된다.
이것이 바로 당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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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靑瓦臺)와 용산 국방부 청사(國防部 廳舍)


청와대(靑瓦臺)와 용산 국방부 청사(國防部 廳舍)


#. 1 국방부에서 근무했던 분이 쓴 글

현 국방부는 옛 건물이라서 낡았지만 워낙 건물을 튼튼히 지어서 여전히 쓸만합니다.

입구는 A, B 현관으로 나누어졌고 계급에 따라 출입문이 다르며 헌병 근무자가 밖으로 나와 거수 경례 마중하는 시스템이고 청사내 전체가 보안구역이긴 하지만 사무공간이나 다름없습니다.
특별한 무슨 군사시스템이 갖추어진 것도 아닙니다.

전시에는 건물은 하나도 필요없으며 청사 바로 붙어서 ㅇㅇ 벙커가 전쟁지휘소 역할을 하며 옥상에는 대공발칸포가 있습니다.
또 국방부 옆 합참 건물은 원래 한미연합사가 들어가려고 신축한 것인데 평택으로 가는 바람에 합참이 입주하고 거의 절반은 공실입니다.
따라서 합참과 국방부가 한 건물에 입주해도 충분하며 남서쪽으로 옛 육본과 여군단본부로 광활하게 넓습니다.
여기에다 대통령관저를 신축하고 잠시만 한남동공관에서 출퇴근하면 됩니다.
영빈관도 있고 한번에 수백명 수용이 가능한 초대형 식당도 있으며 헬기장, 축구장 등 없는게 없습니다.
용산공원부지 절반되는 크기입니다.

국방부 내 근무 부대라고 해봐야 사이버작전사령부, 헌병경비중대, 수송대, 보안대, 조사대 정도이고 전투부대는 하나도 없습니다.
육본이 계룡대로 가고나서 가용 공간이 무궁무진하고 이태원쪽, 용산공원쪽, 서빙고동 남쪽은 전부 미군부대였거나 공원부지입니다.
또한 국방부 인근 삼각지 근처는 어차피 지금도 고도제한구역으로 고층건물 신축이 안 됩니다.
다만 삼각지 너머 남영동부터 용산역 거쳐 한강까지는 청와대 이전해도 고층건물이나 아파트 재건축하는데 아무 문제 없습니다.
합참건물과 국방부청사는 지하로 서로 연결되어 국군통수권자로서 유사시 즉각 대응이 가능하며 국가 위기관리센터에 버금가는 시스템이 지하벙커에 구축되어 있지요.

이전 비용 떠드는데 국방부는 바로 옆 건물 합참으로 가는데 무슨 엄청난 비용이 들 것처럼 민주당이 부풀리는데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국방부내 전투부대 한개도 없습니다.

국가안보를 위해서도 이보다 더 좋은 장소가 없습니다.
유사시 대통령이 국방장관, 합참이 한 자리에서 지휘 통솔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 아닌가 생각합니다.
아니면 합참사령부만 놔두고 실무부대는 최신 지휘센터가 있는 남태령쪽으로 가는게 국방에 훨씬 더 유리합니다.

민주당 말대로 청와대 경비여단과 북악산 페트리어트 미사일 전부 다 옛 육본 자리에 들어갈 수 있으며 장병들 숙소부터 모든 문제를 해결할 최적의 장소라고 판단합니다.

국방부와 합참 옥상에 대공무기 신형으로 교체 설치하고 광화문 근처 건물 옥상, 여의도 ㅇㅇ 빌딩 등 서울시내 어지간한 건물 옥상에는 지금도 대공포 즐비하게 다 설치되어 있습니다.

군사기밀도 아닌 비밀이지만, 이미 수도방위를 위해 수많은 대공무기들이 우리들 생활 주변에 거미줄처럼 배치되어 있습니다.
민주당은 쓸데없이 국민 불안감 조성하려고 하는게 아닌지 의심이 듭니다.

명색이 장군 출신이란 사람이 정파가 다르다고 해서 말도 안되는 억지가 너무 심하네요.

용산 주민들 걱정 마세요.
대통령실 그 쪽으로 가도 절대 재건축이나 고층건물 불가하지 않습니다.
용산과 이태원쪽 서빙고 그리고 청사 서남쪽은 어차피 전부 국유지이거나 미군부대가 있어서 일반 시민들의 재산권을 침해할 이유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말도 안되는 무슨 1조원 이야기는 너무 나간거 아닌가요?

감사합니다.

ps 국방부는 입구, 출구, 정문으로 나뉘고 옛 육본 자리는 따로 정문만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攝理)와 하나님

하나님의 섭리(攝理)

1. 섭리의 정의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만물을 그 작정의 목적에 합당하게 유지 보전시키실 필요가 있는데, 이의 전 과정이 바로 섭리(providence)이다.

신학자들 마다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정의가 조금씩은 다르지만 그 전체적인 뜻은 거의 동일하다.

벌콥은 ‘창조주가 자기의 모든 피조물을 유지하시며 세계에 생성하는 만사를 공작하시며 만물을 그 정명(定命)된 목적에 향하여 지도하시는 신적 정력의 계속적 활동이다.’

찰스 핫지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제11)의 진술에 따라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들은 그의 모든 피조물들과 그것들의 모든 행동들 위에 그의 가장 거룩하며 지혜로우며 능력 있는 보전과 통치이다. 그러므로 섭리는 보전과 정치를 포함한다.’

섭리란 작정의 실현으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들을 창조의 목적대로 유지하고 보존하실 뿐 아니라 그 목적을 이룰 수 있도록 끊임없이 간섭하고 통치하시는 행위를 의미한다.
  
2. 섭리의 대상

정신적·물리적 사건을 포함하여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 세계의 모든 일이 하나님 섭리의 대상이나 그 가운데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다.


  1) 모든 우주(시 103:19 ; 단 5:35)
  2) 물질적 세계(시 104:14 ; 마 5:45)
  3) 동물계(시 104:21,28 ; 마 6:26 ; 10:29)
  4) 국가적 사건(욥 12:23 ; 행 17:26)
  5) 사람의 출생과 운명(삼상 16:1 ; 시 139:16 ; 사 45:5 ; 갈 1:15,16)
  6) 인간의 성공과 실패(시 75:6,7 ; 눅 1:52)
  7) 우발적인 듯한 사소한 사건(마 10:23)
  8) 의인의 보호(시 2:8 ; 5:12 ; 롬 8:28)
  9)악인의 적발과 형벌(시 7:12,13 ; 11:6)
  10) 하나님 백성의 필요에 대한 공급(창 2:8,14 ; 신 8:3 ; 빌 4:19)
  11) 기도의 응답(삼상 1:19 ; 사 20:5,6 ; 대하 33:13 ; 시 65:2 ; 마 7:7)

3. 섭리의 성질   


  1) 보편성(普遍性)
  하나님의 섭리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
섭리의 범위는 보편적이다. 성경은 모든 자연의 법칙들, 역사의 진정(進程), 개인들의 다양화복(多樣禍福)이 항상 하나님의 섭리적 관할에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히1:3, 행17:20, 엡4:16). 하늘과 땅의 모든 만물과 만사가, 스랍들로부터 작은 원자에 이르기까지 그의 끊임없는 섭리에 의해 정돈되고 유지되고 진행 된다.


  2) 주밀성(周密性)
  보편성이 섭리의 넓이를 말한다면, 이것은 섭리의 깊이와 관계 있다.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사와 자연사 모두에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마 10:29). “공중에서 떨어지는 빗방울과 눈송이, 움직이는 벌레, 자라나는 식물, 공중에 떠도는 먼지의 가루 하나도 의미 없이 그냥 되는 것이 없고 각각 일정한 원인과 일정한 효과들을 가진다.

  3) 주권성(主權性)
  하나님의 섭리는 다른 그 어떠한 것의 간섭이나 영향을 받지 않는다.
하나님의 섭리적 관할은 주권적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님은 세계와 모든 인간사변들을 주권적으로 주관하신다.

  4) 허용성(許容性)
  모든 것이 섭리의 대상이지만 죄는 아니다. 하나님은 죄를 조성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하용 하실뿐이다.
지금도 이 세상에는 죄가 자행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온전히 거룩하시기 때문에 죄의 조성자가 아니시다. 다만 죄를 허용하실 뿐이다.
  
4. 섭리의 요소

섭리는 자연계 전반에 대한 하나님의 보편적 관할을 다루는 일반 섭리와 택한 성도의 구원과 관련된 특별 섭리로 나눌 수 있다. 또한 그 섭리의 시행 방법상 통상 섭리로 나누기도 한다. 이것은 섭리의 성격에 의한 구분 방법이고 이제 보다 중요한 섭리의 요소를 구분하면 다음과 같다.


  1) 보존(Preservation)
  하나님은 만물 창조 후 자연 법칙을 세우셨지만, 여전히 변치 않으시고 만물을 유지하고 계심을 말한다. 그런데 만일 이러한 신적 활동이 없다고 한다면, 육체적 생명이나(시 66:8,9). 정신 생활의 유지(딤전 6:3)가 불가능하다. 인간의 극심한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속시키고 계시는 것은 노아의 언약에 따른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은혜 때문이다(창 8:21,22 ; 9:10,12,16 ; 벧전 3:20).

보전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그 성질과 능력과 함께 계속 유지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창조가 우주의 존재를 설명한다면 보전은 그것의 계속을 설명한다. 보전을 창조의 지속으로 생각하는 자들이 있지만-하나님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새롭게 창조하시고 모든 것이 이와 같은 방식으로 보존되고 유지된다는 주장(조나단 에드워즈)- 창조와 보전은 구분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땅의 모든 짐승들을 끊임없이 창조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생명을 유지하고 이미 창조된 것들을 보존하고 계신다.

  2) 협력(Concurrence)
  보전이 피조물의 존재를 유지시키는 신적 사역이라고 한다면, 협력은 피조물의 활동 배후에서 이를 가능케 하는 신적 사역이다. 즉, 협력은 하나님의 절대적 의지와 능력이 자연 세력이나 인간 의지와 같은 종속적 능력과 합력(合力)하여 일을 이루시는 신적 사역이다. 따라서 인간이나 자연의 모든 활동은, 제 2원인과 동시적으로 섭리하시는 제 1원인, 즉 하나님이 직접적인 신적 협력을 따라서만 가능하다(행 17:28). 

하나님의 섭리는 피조물의 존재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활동(공작)에도 해당된다. (창 45:5, 출4:11-12, 수11:6, 잠21:1, 신8:18, 벧전1:4, 빌2:12,13). 이렇게 피조물들의 활동에 주권적으로 관계하여 그들과 합작하는 것을 하나님의 협력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피조물들에게 그들이 존재할 수 있는 어떤 원리들과 작용의 법칙들을 부여하셨지만 그것이 스스로 독립적이고 자동적으로 진행되게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 자신의 능력으로 그것을 친히 지배하시고 주도하신다(초연신론에 반대). 그러나 이것이 피조물들의 활동이 종속적이고 기계적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하나님의 협력은 직접적이며 또한 동시적이다. 즉 신적 능력은 사람의 능력과 서로 통하되 그것을 파멸하거나 흡수함이 없이 한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작업은 자연적 능력들로 하여금 자기와 함께 작업케 하기를 마치 붓과 손이 함께 역사하여 기록을 산출함과 같이 한다. 하나님의 협력은 제일원인의 부정(초연신론 또는 무신론)과 제이원인의 부정(계속적 창조설 곧 범신론)이라는 두 오류를 다 거부하고 두 원인의 합작을 지지한다.

  3) 통치(Government)
  우주의 통치자이신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존재 목적에 맞게 다스리시는 신적 활동이다. 그런데 이러한 통치는 외면적 세계(마 4:45 ; 행 14:17). 이성적이거나 비이성적 피조물(시 104:21 ; 잠 21:1), 큰 일과 작은 일(시 126:2,3 ; 마 10:29), 일반적 일과 특별한 일(시 127:2 ; 잠 16:33). 선행과 악행(행 14:16 ; 빌 2:15), 이스라엘과 열국(시 47:9 ; 사 33:22) 등의 모든 영역이 그 대상이다. 따라서 이러한 하나님의 통치는 인간으로서는 그 통치의 양식을 알 수 없고, 또한 그 누구도 이 역사를 막을 수 없다. 비록 하나님에 대한 대적이 있다고 할지라도 도리어 그것은 그분의 위대한 목적을 이루는 데 이용될 뿐이다.

정치란 하나님이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만물을 목적 있게 통치하시어 자신의 신적계획의 성취를 확실케 하는 하나님의 계속적인 활동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온 우주를 왕으로 통치하시는데 그리스도를 통하여 통치하시며, 피조물들의 성질에 적응하여 통치하신다. 피조물들의 성질에 적응해서 통치한다는 말은 물리적 영역에서는 자연법칙을 방편으로 하고, 정신적 세계는 간접적으로 마음의 특성들과 법칙들을 통하며, 직접적으로는 성령의 공작을 통하여 정치하신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정치는 우주적이어서 만세와 만대의 모든 피조물들과 그들의 행동들을 다 대상으로 한다.(딤전1:17, 6:15, 단4:34, 시22:28, 103:19). 이 통치는 시간적, 공간적 경계도 없다. 이성적 및 비이성적 피조물들, 큰일과 작은 일들, 사람의 선행과 악행도 다 신적 관할 속에 있다. 뿐만 아니고 하나님의 정치는 극히 장엄하여 사람의 지혜로 다 측량할 수 없다(사55:8,9, 시77편).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과 칼빈, 댑니, 핫지, 딕, 셰드, 맥퍼슨과 같은 개혁파 교의학자들은 섭리의 요소로 보전(보존)과 정치(통치)를 드는 2구분법을 취했으나 17세기 이후 화란 개혁파 교의학자들 곧 브라켈, 프랑켄, 카이퍼, 바빙크, 보스, 호니히 등은 이 두 요소에 “협력”을 추가한 3구분법을 취했다. 한국의 박형룡박사도 3요소로 구분하였다. 그러나 통상적으로 2요소와 3요소는 내용상 큰 차이가 있지 않다. 화란 개혁파 신학자들이 2요소 대신 3요소로 구분한 것은 범신론과 초연신론의 위험을 경계하여 섭리에 대한 인간의 노력의 요소를 강조하려는 이유 때문이었다. 중요한 것은 섭리의 3요소가 서로 구별되지만 분리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보전은 만물의 실유(實有)에 관설(觀設)하고 협력은 그 활동(活動)에, 정치는 그 지도(指導)에 관계하나 이것은 결코 배타적 의미로 이해될 것이 아니다. 보전에도 정치의 요소가 있고, 정치에도 협력의 요소가 있으며, 협력에 보전의 요소가 있는 것이다.

 

5. 일반섭리와 특별섭리

하나님의 섭리는 먼저 일반섭리와 특별섭리로 구별된다. 하나님은 일반섭리에 의하여 우주의 만사만물을 질서 있고 조화되게 유지하여 가시며, 특별섭리를 통하여 우주의 각사각물로 하여금 우주 전체와의 관련에서 뜻있게 전진하게 하신다. 즉 일반섭리가 우주 전체를 향한 하나님의 관할을 의미한다면 특별섭리는 그 각부를 전체와 관련하여 세밀하게 간섭하심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두 섭리는 두 종류가 아니고, 같은 섭리의 두 활동이다. 특별섭리는 자주 이성적 피조물들을 위한 특별한 돌보심과 간섭으로 나타나는데 여기에는 기도에 대한 응답, 고통에서의 구출, 위험에서의 보존 등이 있다.

6. 비상 섭리(非常 攝理)

이것은 자연법칙에 따라 역사 되어지는 통상 섭리(通常 攝理)와는 반대로 일반 법칙을 초월하는 임시적 역사로서, 제 2원인의 매개 없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능력에 따라 일어나는 이적을 말한다. 이러한 이적은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드러내시기 위한 특별한 수단이므로, 가시적(可視的)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통상섭리와 비상섭리(이적)

섭리는 또한 통상섭리와 비상섭리로 구별된다. 보통의 경우 하나님은 기정 자연법칙을 주관하시면서 제이원인을 통하여 역사하신다. 이것을 통상섭리라고 한다. 그러나 비상섭리에서는 그가 직접적으로, 제이원인의 통상공작의 매개 없이 일하시어 이적을 행하신다. 이것은 자연을 거슬러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역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적과 관련하여 문제가 되는 것은 계시와 기적의 관계이다. 이적 시대는 지나갔다고 믿는 것이 개신교 교회의 일반적인 태도다(칼빈도 이렇게 주장한다). 계시가 완성된 신약시대에 이후 새로운 계시가 불필요하기에 기적이 필요없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기적을 계시의 관점에서 보지 않고 비상섭리의 관점에서 본다면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위해 이적을 행하실 가능성은 언제나 있을 것이다.

 

7.섭리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

하나님의 섭리는 경외하는 마음으로 지켜져야 한다. 하나님을 자신을 만드신 분이요 우주를 조성하신 분으로 생각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그를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자가 아니면 그 누구도 하나님의 섭리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유익하게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를 책임에서 벗어나게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섭리를 말하면서 자신의 악함과 연약함을 하나님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또 다른 죄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의 사악함을 무죄로 만들어주는 교리가 아니다. 한편으로 섭리의 교리는 우리에게 참으로 큰 위로를 준다. 만사가 하나님의 작정 가운데 이루어지고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친히 돌보시고 다스리신다는 것은 얼마나 큰 위로인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삶은 견디기 힘든 것이 될 것이지만 섭리에 대한 확신 때문에 신자는 많은 악에 둘러싸여 있어도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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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GOD) 

1. 창조주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다.  

창세기의 첫머리에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하였다. '태초에'(בראשית,베레시트)는 시간의 시작이 있었고, 공간이 만들어졌으며, 물질이 만들어졌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창조’는 무슨 의미인가? 구약 성경에는 '창조하다'란 뜻의 단어가 세 종류가 나온다. 첫째 '바라(ברא)'는 무(無)에서 유(有)에로의 완전한 창조와 보존하고 완성한다는 뜻이 있다. 때로는 특수한 목적으로 여러 재료를 사용하여 건축하거나 만들 때에도 사용되었다. 둘째, '아사(עשה)'는 이미 창조된 물질을 재료로 더 나은 물체를 만드는 것.(창1:16, 25, 26절). 세째, '야차르'(יצר)는 '아사'와 비슷하나 특별한 목적에 따라 기존 사물을 새롭고 완벽히 영적 존재로 조성하는 것(창2:7.9)이다. 이처럼 성경에서는 ‘창조’라는 하나의 말도 정확무오한 단어로 명확히 구별되어 사용되었다.(마 5:18).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신론 진화론자들은 성경을 부인하기 위해 창조주가 없다는 결론을 정해놓고 그 결론에 증거를 끼워 맞추는 억지 주장을 펴 왔다. 하지만 과학은 창조주가 없거나 창조주가 개입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입증하지 못했다. 무신론 과학자들도 무(無)에서 유(有)가 생겨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들은 무(無)의 상태에 대한 정의를 왜곡한다. 즉, 무(無)를 어떠한 공간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양자 진공의 상태라고 정의를 하고 자신의 주장을 시작한다. 그러나 물리학에서 '양자 진공'은 무(無)가 아니다.5)

 

 태양을 도는 지구는 일년에 365일 5시간 461분 46초로 주기적으로 공전하고 23시간 56분 4.09초로 자전한다. 생명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행성,태양, 달의 크기, 온도, 거리, 화학적 구성도 정교하게 정확하게 조정되어야 한다. 만일 우연의 사고로 지구와 태양과의 거리가 조금이라도 가까워지면 사람이 타 죽고 멀어지면 얼어 죽는다. 지구의 균일 대기권6)에는 질소 78%, 산소21%, 기타1%의 균일한 공기로 구성되어 있다. 이 비율이 조금이라도 변형되면 사람이 살 수 없다. 산소가 없으면 물이 존재할 수 없고 물이 없다면 농작물이 자랄 수 없고 그러면 어떤 생명체도 살 수 없다. 이처럼 공기중의 수소,질소,나트륨,탄소,칼슘,인과 같은 요소들은 생명을 위한 필수 요소이다.

  지구 중력은 적당히 지구를 잡아 주면서 대기권을 유지시켜 준다. 만약에 지구의 크기가 지금보다 작으면 대기권이 형성되지 않으며 너무 크도 수소가 많이 생성되어 사람이 살 수 없다. 성층권에서는 오존층으로 지구를 덮어주어 태양의 지외선으로부터 지구의 생명체를 지켜주고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이 모든 것이 저절로 되어지는 일인가? 무신론 과학자들이 우연한 '빅뱅'(우주폭발)로 우주가 생성되었고 인간의 생명이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그들의 주장들을 입증하기 위한 확율은 얼마나 될까?

 

천문학자인 휴 로스(Hugh Ross)는 그 확율을 “우주와 인간의 생명이 우연히 저절로 생겨 날 확률보다 눈가림을 한 사람이 한 사람이 세계의 모든 해변 중에서 특별히 표시된 모래알 한 개를 발견하는 것이 훨씬 쉬울 것이다”7)고 했다.

​그동안 무신론 우주과학자들은 우주의 기원이 빅뱅으로 시작되었다고 주장해 왔다. 하지만 우주폭발이 더이상 생명을 가져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존재는 믿지 않으려고 하면서도 '최고지성' '창조자''최고 존재자'라 생각되는 어떤 설계자가 우주의 시작을 설계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스티븐 호킹은 "만약 빅뱅후 1초간 팽창속도가 10억에서 한 부분이라도 더 작았으면 우주는 현재의 크기에 도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반대로 팽창률이 그것보다 더 큰 것이었다면 은하,별,행성들은 결코 형성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숫자들의 수치가 생명의 발전을 가능케 하기 위해 매우 정교하게 조정된 것 같다."8)고 하였다.

 

영국의 천체 물리학자인 무신론자 과학자인 폴 데이비스(Paul Davies)는 "나에게는 그 모든 것 뒤에 무엇인가 진행되고 있다는 강력한 증거가 있다. 누군가 우주를 만들기 위해 자연의 숫자로 세밀하게 조정해 놓은 것 같다.설계에 대한 인상은 압도적이다." 9) 지구 물리학자인 스티븐 C 마이어(Stephen C. Meyer)10)는 수년간의 과학 연구 끝에 우리의 창조물 뒤에는 단순히 지적인 디자이너가 있을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강철로 만든 자동차 엔진도 수십년 지나면 부식하여 교체하거나 폐차해야 한다. 하지만 인간의 심장은 하루에 십만번 이상 펌프질하고 70년간 27억번이나 뛴다. 심장이 평생동안 하는 일은 3만 kg의 무게의 물체를 메고 세계에서 가장 높은 에베레스트 산을 정상을 올라가는 힘이 된다. 어떻게 그토록 심장이 손상되지 않고 버틸 수 있는가? 인간은 단 몇 분도 공기를 마시지 않으면 죽는다. 하루에 1만 리터가 넘는 공기로 호흡해야만 살 수 있다. 들판의 소들은 평생 풀만 뜯어 먹는데 어떻게 큰 덩어리의 고기를 만들어 낼 수 있는가? 이게 저절로 되어지는 일인가? 인간의 두뇌와 지혜로는 상상할 수 없는 초월한 누군가가 그렇게 되도록 설계를 해 놓았기 때문이 아닌가.

 

분자 생물학자들은 DNA의 미세한 세계에서 복잡한 디자인을 발견했다. DNA 공동 발견자인 프랜시스 크릭(Francis Crick)은  "그것이 지구상에서 자연적으로 기원한 적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고 하였다. DNA 속의 코딩은 상상력을 위축시킬 정도로 엄청난 지능을 드러내었다. DNA 핀 하나에는 지구를 5,000번 애워싸는 종이책 더미에 해당하는 정보가 들어 있다. 마이크로소프트 설립자 빌 게이츠는 "DNA 소프트웨어는 우리가 개발한 어떤 소프트웨어보다 훨씬 더 무섭다"11)말했다.

 

 21세기 선도적인 무신론자 안토니우스 플뢰(Antony Flew)는 DNA를 연구하면서 "내가 생각하기에 DNA 물질은 지성이 엄청 뛰어난 어떤 존재가 다양한 요소들을 한데 모으는데 관여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 결과가 도출된 엄청난 복잡성은 마치 지성의 작업처럼 보인다.12) 고 하였다.

노벨상 수상자인 미국의 예일 대학교의 헨리 마그뉴(Henry Margnau)교수는 “자연에 존재하는 수많은 법칙 중에 한가지 확실한 답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창조주에 의한 창조다”라고 하였다. 아이작 뉴톤(Isaac Newton)은 “인체의 신비, 우주의 신비를 보고서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미친 사람이거나 정직하지 못한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루이 파스퇴르(Louis Pasteur)는 “나는 자연을 더 많이 연구할수록 창조주에 대하여 더 많이 놀라게 된다”라고 하였다.


​작은 손목시계가 정확한 시간을 맞추며 돌아가는 것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시계 기술자가 정밀한 두뇌와 기술과 능력으로 그렇게 만들어져야 가능하다.  우주에는 존재의 시작이 있다. 모든 시작에는 원인이 있다. 원인없는 결과가 없고 시작없이 저절로 되어진 일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다.

저절로 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무질서요 혼돈의 세계이다. 모든 우주와 인간의 생명의 질서는 지금 현재에도 하나님의 섭리로 질서정연하게 움직이고 있다.  성경은 “집마다 지으신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라.”(히브리서3;4)하였다.


2. 섭리하시는 주 

 요셉은 형들의 미움을 받아 죽임을 당할 뻔 하였으나 유다의 권유로 죽음만은 면하여 애굽으로 팔려가서 많은 고생을 하다가 하나님의 섭리로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마침 그때에 이스라엘에 흉년이 들어 그의 부모형제들이 애굽으로 피난오게 되어 요셉을 상봉하게 되었다.요셉은 그들에게 "나는 당신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자라 당신들이 나를 이곳으로 팔았음으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창45:4-7)하였다.

요셉은 자기를 팔아 넘겼던 형들에게 미워하거나 하지않고 너그럽게 대해주며 그 곳에서 살도록 도와 주었다.

요셉은 하나님의 섭리를 알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천지 만물의 주인시기 때문에 그의 피조물을 섭리하신다. 섭리(攝理)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을 보존하고 세상 모든 일에 관여하시며 만물을 정해진 목적에 맞도록 이끄시는 하나님의 사역이다. 하나님의 섭리에는 세가지 요소가 있는데 보존, 협력, 통치이다. '보존'은 만물을 유지하시는 하나님의 계속적인 사역이다. 하나님의 보존이 없으면 만물은 무(無)로 돌아 갈 것이다. '협력'이란 하나님께서는 그의 모든 피조물과 협력하시며 피조물로 하여금 그들이 해야 할 일들을 행하도록 이끌며 역사하시는 사역이다.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의 선악간의 모든 행위 속에서 간섭하시고 역사하신다.  '통치'란 만물을 그들이 존재하는 목적에 맞도록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계속적인 활동이다. 하나님의 통치는 우주적이며(시103:19,단4;34-35) 가장 무의미한 것까지도 포함하며(마10:29-31) 얼른 보기에 우연적인 것 까지도 포함하며(잠16:33) 인간의 선악간의 행위까지도 하나님의 통치 속에 들어가 있다.(빌2:2;13,창50:20,행14:16) 그래서 피조물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맞게 운행될 수 있도록 다스린다. 성어거스틴은 “조물주의 능력은 모든 피조물이 존속하는 원인이니 만일 그의 능력이 피조물을 다스리기를 그친다면 피조물 전체가 허무로 돌아 갈 것이라”고 하였다..

 

  섭리의 대상에 따라 일반섭리와 특별섭리가 있다. 일반섭리(一般攝理)는 온 우주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이다.(마5:45). 특별섭리(特別攝理)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의 삶과 활동에 대한 하나님의 돌보심이다.(롬8:32). 하나님은 모든 섭리의 중심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받은 자에 대한 기도 응답, 고통에서의 구원과 위험에서의 보호 등으로 나타난다.

섭리의 방법에 따라 통상섭리와 비상섭리가 있다. 통상섭리(通常攝理)는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되, 물질계에서는 하나님이 정하신 자연법칙을 통해, 정신계(또는 영계)에서는 하나님이 주신 마음의 특성에 따라 그 목적하신 바가 이뤄지는 것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제2원인(第二原因)의 매개를 통하지 않고 이뤄지는 것을 말한다. 비상섭리(非常攝理)는 하나님이 만드신 통상적인 법칙을 초월하여 일어나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이며 임시적인 역사를 말한다. 하나님은 자연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기 때문에 비상시에는 초자연적인 행위로 특별섭리를 하시는 분이시다,(민16:28,렘32:20,요2;11,5:36) 즉, 이는 제2원인의 피조물 자체가 주체가 되지 않고, 또 피조물의 작용이나 활동을 거치지 않고 하나님께서 직접 역사하심을 통해 일어나는 특이한 결과를 말한다. 이를 흔히 '이적'(異蹟)이라 일컫기도 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의 섭리를 거역하는 것은 범죄이고 그 결과 슬픔과 고통이 따른다. 하지만 하나님의 섭리에 순응하는 자에게는 온갖 고난속에서도 용기있게 승리하며 살아 갈 수 있다.

성경속의 인물인 욥이가 왜 위대한가? 그에게 극심한 고난이 닥쳤을 때에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내가 모태에서 적신으로 나왔은즉 또한 적신이 그리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이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1:21)하며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사도 바울은 온갖 핍박과 고난을 당하면서도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9)하였다.


3. 살아계신 주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소경이 보지 못했다고 태양과 공기가 없다고 하는 것과 같다.우리는 따뜻한 햇볕을 받으며 바람부는 것을 보고 호흡하며 태양과 공기와 산소가 있음을 고마워 한다.

우리는 자연 만물과 성경과 생활에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알 수 있다.


 ​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금지한 선악과를 먹어 범죄함으로 두려워 숲속에 숨었다. 성경은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창3:8)하였다. 하나님은 그날도 평소처럼 동산에 거니셨다가 아담과 하와가 숨은 것을 알고 그들을 부르셨다. "네가 어디 있느냐?"(창3:9) 아담은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 하여 숨었나이다"(창3:10)답하였다. 벌거벗은 아담과 하와는 범죄하고부터 눈이 밝아져 부끄럽고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동안 그들은 에덴동산에서 일상에서 살아계신 하나님과 인격적인 의사소통을 가져왔다.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과 행위를 다 보고 계셨고, 하나님의 음성도 들려주시고 그들의 기도도 들어 주셨다. 이러한 소통은 살아 있는 인격체간에만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하나님은 믿음 좋다고 소문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아브라함아!"부르셨다. 아브라함은 "내가 여기 있나이다" 답하였다. 하나님은 "네 사랑하는 아들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하셨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이삭을 제물로 드려려 그를 결박하고 제단 나무 위에 누이고 칼을 들었다. 그때에 하나님은 긴급히 말씀하셨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화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라"(창22:1-18)하셨다.


하나님은 호렙산 떨기나무 불속에서 나타나 모세를 부르셨다. "모세야!" "예,내가 여기 있나이다" "애굽에서 고통 당하는 내 백성을 그 땅에서 건져내어 아름답고 광대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라.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출3:4-12) 하나님은 지금까지 그를 믿는 모든 백성들에게 나타나셔서 가르치고 인도하셨고 미래에도 그러하실 것이다.


 인도에서 어느 선교사가 야외에서 설교를 하고 있는데 이슬람교도 한 사람이 끼어 들어 말했다.“우리 이슬람교도는 당신들이 가지지 못한 것을 한 가지 가지고 있습니다.” 선교사는 "그게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는 “우리는 메디나에 가면 관이 있는데 그 안에는 모하메트 시신이 있어서 그가 살아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그리고 당신들의 기독교인들은 예루살렘에 가도 빈 무덤밖에 없지 않습니까?” 선교사는 “고맙습니다. 당신 말이 옳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말씀이야말로 엄청난 차이를 보입니다. 그리스도의 무덤이 빈 것은 우리가 믿는 주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세상의 많은 다신교 종교에서 믿는 신은 무인격적인 죽은 신이다. 그들의 교주들은 죽어 무덤 속에 있다. 추종자들은 그 무덤을 순례하고 참배하며 신심을 더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무덤은 빈 무덤이었다.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무덤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부활하여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물었을 때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답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마16:15-17)하셨다. 예수님 스스로도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요14:9)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죄로 멸망한 인류를 구원하시려 십자가에 죽으시려 세상에 내려 온 참 하나님이시다.

당시 예수님을 핍박하며 죽이려고 안달했던 대제사장도 예수님을 ‘살아 계신 하나님“(마26:63)이라 고백하였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3일만에 다시 살아 나리라고 스스로가 예언을 하였다. 이 예언을 들은 당시 제사장과 총독은 만에 하나라도 예수님이 무덤에서 나오지 못하게 하려고 큰 돌로 무덤을 막고 거기에 봉인하고 군대들로 지키게 하였다. 제자들은 모두 자기 목숨까지 위험을 느껴 숨어 있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3일만에 돌문을 굴리고 무덤에서 나와 부활하셨다. 무덤을 지키던 병사들은 혼비백산하며 모두 도망가버렸다. 지금까지 그들은 예수님의 무덤을 증명하지 못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직접 눈으로 본 제자들은 그제사 믿음이 부족했던 자신을 회개하며 두려움없이 밖으로 뛰쳐 나가 그리스도의 살아나심을 증거하였다. ​그러기에 그들은  모두가 예수님의 부활을 전파하다가 순교할 수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죄를 이기고 죽음을 이긴 살아계신 하나님의 증거이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 고난 받으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늘로 올라가셨다!  


하나님은 살아있는 인격체로서 세상을 사랑하고 인간에게 말하며 교제하는 인격신이시다. 사도 바울도 ”살아 계신 하나님“ (롬9:26,고전3:3,6:16,딤전3:15,4:10,히3:12,9:14)이라 전하였다. 지금도 하나님은 살아 계신 영이신 성령을 통하여 인격적으로 우리안에 계셔서 지혜,지식,깨달음을 주시고 위로하시고 인도하시고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신다.

 

4. 초월하시는 주

하나님은 시공을 초원하신다.

 

  태양과 달이 한 개이지만 지구상 76억 인류가 어디에 가 있던지 거기에 똑 같이 비추고 있다. 하나님은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지금도 운행하시는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가까이 계시며 우주의 어디에나 계시는 무소부재하신 분이시다.

성경은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나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 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시139:7-10)하였다.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기 위해 오신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 앞에서 말씀하셨다. “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14:16-17)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14:19-20)하셨다. 바로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위로하시고 변호하시고 우리와 함께 거하시며(요 14:17), 가르치시고 기억나게 하시며(요 14:26), 증거하시며(요 15:26), 죄를 깨닫게 하시며(요 16:8), 인도하시며 말씀하시며 알리신다(요 16:13, 15). 그리고 성경을 깨닫게 하시며, 성령으로 말하게 하시며(행 1:16; 벧후 1:21), 사역자를 부르시며(행 13:2), 사역자들과 말씀하시며(행 8:29), 일꾼을 보내시며(행 13:4), 복음 사역의 방향을 정해주시며(행 16:6-7), 중재하신다(롬 8:26). 또한 성령은 의지(고전 12:11), 마음(롬 8:27), 생각, 지식, 말(고전 2:10-13), 사랑(롬 15:30) 등 인격적 속성을 가지고 계신다. 따라서 거짓말이나 시험하는 행위(행 5:3-4, 9), 거스리는 행동(행 7:51), 슬프게 하는 것(엡 4:30), 욕되게 하는 것(히 10:29), 훼방하는 것(마 12:31)은 모두 성령을 근심되게 하는 죄악에 해당한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 하셨다.그러므로 그리스인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나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행하며 세상 누구보다 지혜롭고 정의롭고 배려하고 사랑하며 정직하고 담대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5. 전지전능하신 주

 

  하나님은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것을 완전하고도 불변하게 알고 계신다.(시139:1-8; 147:5; 잠15:11; 사46:10). 따라서 하나님의 눈동자 앞에서 우리 인간이 숨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나님은 어떤 일이든 하지 못하는 것이 없이 무슨 일이든지 능히 할 수 있는 절대적인 능력자이시다.(창17:1; 고후6:18; 계4:8).

하나님은 우주와 하늘과 땅의 창조자이시므로 모든 것을 완전히 아신다.

그러므로 인간의 역사와 시간 속에서 그의 심판도 정확하게 이루어 가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말과 마음과 생각까지도 아신다. 듣지 않고도 우리의 은밀한 생각과 소망과 수고하고 무거운 것들을 아신다.

예언 성취

 다른 종교에는 예언성취라는 것이 없다. 기독교 성경에만 1,817개의 예언이 8,352 구절에 들어있으며 이는 전체 성경 내용의 27%나 된다. 그 예언들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성취된 것을 보면서 역사와 모든 만물을 주관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다. 구약 성경에는 메시아 예수님에 대해 약 350개의 예언과 프로필이 있다

피터 스터너((Peter Stoner) 14)박사는 예수님에 관한 예언 8가지가 한 사람에게 우연히 성취될 가능성을 수학의 확률로 계산했다. 예수님의 경우에 8가지가 동일인에게 우연히 성취될 가능성은 우리나라의 3배 넓이가 되는 넓은 땅에, 동전을 두자 높이(약 60㎝)로 깔아 놓고, 그중에 표시해 놓은 단 하나의 동전을 단 한 번에 집어내는 것과 같다고 했다. 확률적으로 따지면 예수님의 탄생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도 8개가 아니라 350개가 다 들어맞으려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되는 것이다.


우주


달의 공전으로 인해 만들어지는 밀물과 썰물은 바닷물이 고여 있지 않게 만들어 썩는 것을 막아 준다. 만약 달이 없었다면 바닷물은 진작에 썩어서 생명을 살리기는커녕 생명을 파괴했을 것이다.

달이 지금보다 더 컸거나 가까웠다면 조수 간만이 너무 심해서 육지 전체가 갯벌처럼 되었어야 한다. 또 대기의 변화가 너무 심하다던가 지구 자전의 속도가 너무 빨라져서 생기는 문제들이 생기고, 자기장의 약화 등으로 태양으로부터 오는 유해한 빛들을 차단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지구의 자전축 역시 달의 중력에 의해 안정적으로 고정된다. 만약 달이 없었다면 지구는 쓰러져 가는 팽이처럼 자전축이 크게 흔들리거나 아예 똑바로 서 있어야 한다. 그리고 두 상황 모두 생명체가 살 수 없는 극한의 환경을 만들게 된다.

   

 ​또 달이 없어지면 지구의 자전이 빨라진다. 그래서 하루는 8시간 정도로 줄어들게 된다. 그뿐 아니라 자전 속도가 너무 빨라서 바람이 엄청나게 강해 지고, 역시 인간이나 새 같은 동물들은 살기 힘들어지게 된다.

    만약 지구가 목성처럼 컸다면 강한 중력으로 인해 몸을 움직이기도 서 있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또 메탄이나 암모니아 같은 독성 물질들이 지표면에 붙어서 호흡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만약 지구가 너무 작았다면 달에서 움직이는 것처럼 불편하게 움직였을 것이고, 물이나 대기를 지금과 같이 적합한 수준으로 보유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지구    

 하나님께서는 자전 속도도 적당하게 관리하고 계신다. 자전이 너무 빨랐다면 바람이 너무 심해지고 자전이 너무 느렸다면 온도의 차이가 너무 심해져 생존이 힘들었을 것이다. 지각의 두께 역시 너무 두꺼웠다면 대기 중의 산소가 지각으로 흡수되어서 산소 부족에 시달렸을 것이고, 너무 얇았다면 화산 활동이나 지진 활동이 너무 심해서 살기 어려웠을 것이다.

    예를 들어 목성이나 토성이 지구와 조금만 더 가까웠거나 컸다면 지구의 공전 궤도가 중력에 의해 불안정 해졌을 것이고, 지구 혹은 태양계가 은하의 중심에 더 가까웠다면 혹은 주위에 더 많은 천체들이 있었다면 지구와 충돌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 또 비슷한 이유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은하가 다른 은하와 더 가까웠다면 은하끼리 충돌하거나 중력에 의해 많은 것들이 불안정해졌을 것이다.

      

지구는 왜 23.5도로 기울어져 있는가? 이 때문에 우리가 사는 지구는 항상 태양빛을 받는 각도가 달라지므로 4계절이 생기는 것이다. 여름에는 북극얼음이 녹아 수증기가 되며 겨울에는 남극 얼음이 녹고 반대로 부극은 얼고 이렇게 태양을 한바퀴 돌면서 봄,여름,가을,겨울이 되도고 만드셨다.“땅이 있을 동안엔,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창8:22)

 

노아 대홍수 때에 에덴의 나무들이 지하로 들어 갔음이 성경에 언급해 있다.(겔31:16-18) 기름을 바위에서 빨며(신32:13)

인체


한의학의 기본 이론에 따르면 우리 몸은 반사구라는 전신의 축소판이 있는데, 오장육부와 팔다리가 모두 이 축소판 안에 연결 부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축소판을 통해 몸 구석구석의 상태를 측정하거나 몸 여기저기에 자극과 신호를 보낼 수 있다. 인체의 대표적인 반사구인 손이나 발, 귀 등은 전신의 각 부위와 연결되어 정보를 주고받고 조절한다고 한다.

현대과학

 

북편 하늘의 거대한 허공

우리 태양계가 속해 있는 은하계의 지름은 약 10만 광년, 두께는 15,000광년이 된다. 그러나 은하의 헤일로(halo)까지 따지면 20만 광년이 훨씬 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우리 이웃 은하계인 안드로메다의 지름은 약 40만 광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우리 은하에는 약 천억 개가 넘는 태양들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천억이라면 얼마나 많은 걸까? 만약 1초에 하나씩 세어서 천억을 세자면 무려 3,170년 이상이 걸린다.

 

1981년 10월 미국 과학회에서 발간되는 Chemical and Engineering N-ews에서 북극성 주위에 약 2000여 개의 은하수가 들어갈 수 있을 만한 거대한 공간이 있다는 것을 발표했다. 즉 아무 별이나 은하계가 없는 텅빈 공간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경은 기원전 1500년 전에 이미 그 사실을 말했다는 것이다. "그는 북편 하늘을 허공에 펴시며" (욥 26:7).

 

하나님은 지구의 보호막을 만들어 놓으셨다.

​오존층은 지구로부터 약 25km~30km 상공에 위치해 있다. 오존층이 하는 역할은 태양으로부터 날아오는 모든 해로운 광선을 차단해 주는 것이다. 오존층은 피부암과 조기 노화, 면역성 약화 등 각종 질병으로부터 우리를 지켜 준다. 과학자들은 1902년에 들어서야 비로소 지상에서 약 30km 지점에 오존층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러나 성경은 기원전 1055년 경에 이미 그 사실을 말했다. "그가 하늘을 차일(遮日)같이 펴셨으며 거할 천막같이 베푸셨고" (사 40:22, BC 700).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주께서…하늘을 휘장 같이 치시며" (시 19:4, 104:2, BC 1055).

    

  그동안 사람들은 대륙이 원래부터 여섯 개로 나뉘어져 있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질학자였던 웨게너(Wegener)는 1914년 대륙이동설을 발표하여. 지구의 대륙은 원래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다.

 성경은 기원전 1,500년 경에 이미 그 사실을 말하였다. "그가 땅을 움직여 그 자리에서 미신즉 그 기둥이 흔들리며(he shakes the "earth" from…)" (욥 9:6). "주께서 땅을 진동시키사 갈라지게 하셨사오니 그 틈을 기우소서 땅이 요동함이니이다." (시 60:2, BC 1055). "그 지식으로 해양이 갈라지게 하셨으니" (잠 3:20, BC 700).

   

공기에도 무게가 있다.

​대기권을 채우고 있는 공기에도 무게가 있다. 우리가 그 압력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우리 몸 안의 기압때문이다.갈릴레오의 제자였던 에반젤리스타 토리첼리는 1644년 실험을 통해 공기에도 무게가 있음을 증명하였다. 성경은 기원전 1,500년 경에 이미 그 사실을 말하였다. "바람의 경중(무게)을 정하시며" (욥 28:25).

 

 만일 태양이 지구를 놓아 버려 지구가 그 중력을 잃어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아수라장이 되고 말 것이다. 모든 물질에는 잡아당기는 힘이 있어서 그것으로 인해 서로를 지탱해 주고 있다. 뉴턴에 의해 만유인력의 법칙이 증명된 것은 1666년경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미 AD 62년경에 그 사실을 말하였다.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섰느니라(by him all things consist - 다른 번역엔 "서로 잡아 준다"로 나옴)" (골 1:17).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up-holding all things - 서로 지탱해 주고 있다는 뜻)" (히 1:3).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이사야 40:22),

​거의 무한대로 큰 우주(이사야 55:9), 질량 에너지 보존 법칙(베드로후서 3:7), 물의 순환(전도서 1:7), 엄청나게 많은 별(예레미야 33:22), 물질과 에너지의 동등성(히브리서 1:3),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시편 102:25-27), 생명체의 활동에 있어서 피가 제일 중요하다는 사실(레위기 17:11), 대기의 순환(전도서 1:6), 중력장(욥기 26:7) 등등. 물론 이와 같은 것들은 현대 과학의 전문 용어로 기록되어 있지 않고 우리 사람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용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들은 현대 과학에서 가장 최근에 발견한 사실들과 완전히 일치한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성경이나 과학이나 역사나 기타 다른 어떤 분야에 속한 문제에 있어서 성경의 내용이 정말로 잘못되었음을 증명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성경에는 요한계시록 11:17에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노릇 하시도다"하였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놓아 주지 않는 애굽에 10가지의 무서운 재앙을 내리게 된다.

그 재앙들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큰 재앙들이었다. 당대의 사건을 기록한 파피루스 문서가 약 1세기 전에 발견되었다. ‘아이퓨어(Ipuwer) 파피루스’라 불리우는 이 문서는 이집트 사카라 피라밋 근방인 멤피스 지역에서 ‘아나스타시’라는 사람에 의해 발견되어 1828년 네덜란드 레이덴 박물관으로 옮겨 보관중이다.

그 기록된 내용인즉 “이집트 전역에서의 역병, 나일강이 피처럼 변한 것과 물에 갈증이 난 사람들, 전 지역에서 곡물들이 고사된 것, 가축들이 신음함, 빛이 없던 땅, 군주들의 자녀들의 죽음 및 귀금속과 보석들이 여자 노예들의 목에 걸려짐”등이었다.

 

애굽의 가정들의 모든 장자들이 죽는 10번째 재앙으로 바로의 항복을 받은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오면서 또 진퇴양난의 위기에 빠졌다.뒤에는 애굽 군대의 병거들이 추적하고 있었고, 앞에는 바로 앞에는 홍해가 가로 막고 있었다. 모세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기도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뇨 이스라엘 자손을 명하여 앞으로 나가게 하고,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으로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리라.(중략)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어민대 여호와께서 큰 동풍으로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고 물은 그들의 좌우에 벽이 되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을 다 건너자 하나님은 바닷물을 다시 닫으시니 애굽 병거들과 기병들을 덭어 하나도 남지 않았다“(출14:16-28)고 했다.

 

홍해는 수심이 1200m 이다. 물이 갈라졌다고 하더라도 건너가지를 못하는 절벽이다. 그런데 모세가 건너갔던 딱 그부분만 경사 1도에 수심 120m로 완만한 바닷길이었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에서 해양학을 연구하는 나움 볼칭어와 독일 함부르크의 연구자 알렉세이 안드로소프에 따르면, 바람이 초당 68마일(109km)속도로 밤새도록 불었다면 바다가 거의 바닥을 보일 만큼 갈라질 수 있다고 한다. 볼칭어는 3500년 전 4시간 가량 바람이 불어 바다에 길이가 7킬로미터인 틈이 생겨났고, 30분 뒤 합쳐졌을 것이라고 밝혔다.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물리학자이자 《출애굽기에 나온 기적(The Miracles of Exodus)》을 저술하기도 했던 콜린 험프리는 "딱 그 순간 모든 조건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는 게 기적"이라고 했다. 2000년 봄, 바다 속에서는 3,500년 전 이집트 병사들과 병거들이 고고학자 론 와이어트15)에 의해 발견되었고, 발견된 그 병거들은 현재 이집트 박물관에 ​전시되었다.

. 홍해에는 모세의 기적을 지지하는 고고학적 증거들이 있는가?


 

 미국 메릴랜드 주 커티스 기계회사 사장이며 우주계획고문인 헤롤드 힐(Herold Hill)씨는 놀라운 사실을 발표했다.어느날 회사에서 10만년 전까지 컴퓨터로 달과 태양의 궤도진횅의 시간 측정을 하게 되었다. 정확한 궤도를 추적해야 인공위성 궤도를 작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가 컴퓨터가 작동을 멈추며 비상 신호를 보냈다. 그래서 조사를 해 보았더니 어느 역사 속에서 하루(24시간)가 사라졌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며칠 후 젊은 과학자가 조사하면서 어릴 때 들었던 성경이야기를 하였는데 태양이 멈춘 사실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성경을 찾아 본 결과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 거의 종일토록 속히 내려가지 아니하였느냐?”(수10:13)

이 말씀은 여호수아를 지도자롤 한 이스라엘 민족과 아모리 족속과의 싸움이 길어질 때 여호수아가 하나님께 기도한 결과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할지니라”(수10:12) 는 말씀이었다. 과학자들이 조사한 결과 그때에 태양이 멈춘 시간은 정확히 23시간 20분간이었다는 사실을 밝혀내었다. 그러나 컴퓨터에는 24시간이 없어졌는데 나머지 40분은 어찌됐는가? 또 다시 청년의 말을 토대로 성경 어디엔가 태양이 뒤로 머물렀다는 기록을 찾아내었다. “선지자 이사야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아하스의 일형표 위에 나아갔던 해 그림자도 10도를 물러 가게 하셨더라”(왕하20:11) 히스기야 왕이 병들었을 때 눈물로 기도한 결과 하나님께서 15년의 생명을 연장을 허락하셨다.그 웅답의 확신으로 일형표의 그림자를 십도 뒤로 물러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는데 응답한 것이다. 일형표 10도는 40분이었다.이렇게 해서 잃어버린 24시간을 찾았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나이다.”(시139:1-4)

 

6. 만물의 아버지시다.


하나님은 그가 지으신 모든 피조물의 아버지시기 때문이다.하나님은 그를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아버지이시다.

세상의 아버지는 별의 별 성격의 아버지가 있지만 하나님 아버지는 사랑과 자비와 공의와 거룩한 아버지시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게시도다”(엡4;6) 하였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지 않았다.왜냐하면 하나님은 너무나도 거룩하고 위엄있고 거룩하신 분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불렀다.(마6:9)

그리스도도인들이 기도할 때 먼저 ‘오 하나님 아버지“라고 기도한다.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아버지가 되신다.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예수님은 죄인도 하나님 앞에 나와서 회개하고 용서 받으면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인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가르쳤다. 예수님도 기도하실 때에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라고 기도하셨다.이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는 친근한 관계이기 때문이다.

 

 

7.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웨스터 민스터 신앙고백서 16) 제2장 3항에는 “단일한 신성에는 삼위가 계시는데 본질과 권능과 영원성이 동일하신 성부 하나님,성자 하나님,성령 하나님이시다. 성부는 누구로부터 말미암지 않았고 낳으신 바 되지도 않았고 나오시지도 않았으며 성자는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영원히 낳으신 바 되셨으며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영원히 나오신다”고 하였다.

 (In the unity of the Godhead there be three persons, of one substance, power, and eternity: God the Father, God the Son, and God the Holy Ghost. The Father is of none, neither begotten, nor proceeding; the Son is eternally begotten of the Father; the Holy Ghost eternally proceeding from the Father and the Son.)


​삼위(三位)란 무엇인가?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다. 하나님은 각각 독립된 세 분의 실재적 개체(성부, 성자, 성령)이면서 동시에 본질에 있어서는 서로 완전 동일한 일체가 되신다.(창 1:26; 고전 8:6; 고후 13:13).즉, 창조주이신 하나님,구세주이신 예수그리스도, 내 속에 계시며 위로하시고 가르치시고 인도하시며 지혜를 주시는 성령님이 모두 등등하신 한 하나님이시다.

​이 세 분은 이름은 다르지만 본체는 하나이시고 함께 일하신다. 삼위 하나님은 태초부터 함께 세상을 창조하셨다. 영원전부터 영원까지 함께 존재하신다. 성부는 창조와 역사를 주관하시고  예수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고 교회를 세우시고 역사를 완성하게 하신다. 성자는 성육신하셔서 인간과 함께 하시기 위해 인간으로 오셔서 인류의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스스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셨다가 세상 마지막 날에는 재림하여 최후 심판을 주관하신다. 성령은 태초부터 성부와 성자와 함께 계시다가 예수의 부활 승천후 교회 안에서 신자들을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살 수 있도록 이끄시며 함께 하신다.


삼위는 항상 동시에 역사하신다. 삼위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실 때에 함께 동참하셨고 구속사역에서도 동참하셨으며 지금도 함께 역사하신다. 신앙이란 지식이 아니라 경험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동시에 역사하시는 것을 보았다. 성자 예수님께서 세레를 받으실 때에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심을 보았고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막1:11)는 성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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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dnote>

1) '엘'과 결합된 이름을 보면, 〈엘 로이〉('감찰하시는 하나님', 창16:13), 〈엘 샤다이〉('전능하신 하나님', 출6:3; 창17:1; 28:3), 〈엘 엘로헤 이스라엘의 하나님', 창33:20), 〈엘 엘욘〉('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창14:17-22; 민24:16; 시78:35), 〈엘 올람〉('영생하시는 하나님', 창21:33)이 있다.

2)형태는 복수형이지만 단수로 취급되며, 온 우주와 세상과의 관계에서 탁월하고 절대적이며 참된 하나님을 지칭한다.(창1:1; 출20:7). 이와 관련해 '신', '하나님'을 지칭하는 '엘로아흐'는 '엘'의 연장형으로서 구약에서는 시어에 주로 쓰인다.(신32:15-17; 욥12:6; 사44:8; 합1:11).

3) 가장 신성하고 탁월한 성호(聖號)로 인정되어 왔다. 히브리어로는 네 개의 자음으로 이뤄져 있으나 본래의 그 발음은 알려져 있지 않다. 유대인들은 3계명을 엄수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기 위해 B.C.300년경에 이것을 전혀 발음하지 않기로 했다. 만약 피치 못해 발음할 경우 '주님'(Lord)을 뜻하는 '아도나이'(אךני Adonai, '전능하신 통치자'라는 뜻을 함축함)로 읽었다.(포로기 이후).

4)〈여호와 닛시〉('여호와는 나의 깃발', 출17:15), 〈여호와 삼마〉('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다', 겔48:35), 〈여호와 샬롬〉('여호와는 평강', 삿6:24), 〈여호와 이레〉('여호와께서 준비하심', 창22:8,14), 〈여호와 치드케누〉('여호와는 우리의 의', 렘23:6; 33:16), 〈여호와 체바오트〉('만군의 여호와', 삼상1:3; 시24:10), 〈여호와 엘로헤 이스라엘〉('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삿5:3). 이외에 〈네차흐 이스라엘〉('이스라엘의 지존자', 삼상15:29), 〈아비르 이스라엘〉('이스라엘의 전능자', 사1:24), 〈케도쉬 이스라엘〉('이스라엘의 거룩한 자', 사1:4).등이 있다.

5) 알렉산더 빌렌킨 강의 중, The Kalam Cosmological Argument5)

6) 대략 80km까지는 여러 기체가 지구상 어디서나 일정하게 분포되어 있다. 이 층을 균질권(homosphere)이라 한다.

   ​균질권은 대류권‧성층권‧중간권을 포함하는 대기층을 말한다

대기의 존재로 인해 지구는 태양의 직사광선에 무한히 가열되지 않는다. 야간에는 복사냉각에 의해 극저온으로 떨어지지 않는다. 또 대기는 유성이나 우주선(cosmic rays), 태양의 미립자, 복사 등 높은 에너지 입자의 침입으로부터 지구를 보호하고, 인류가 살아갈 수 있도록 산소와 맑은 공기를 공급해 준다.대기권의 수증기를 제외한 건조공기의 성분은 전체 부피의 약 78%가 질소(N2), 약 21%가 산소(O2)이며, 0.9%가 아르곤(Ar)이다. 이산화탄소(CO2)가 0.03% 있으며, 나머지는 미소량의 네온(Ne), 헬륨(He), 크립톤(Kr), 크세논(Xe), 오존(O3)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7) Hugh  Ross, the Creator and the Cosmos (Colorado Springs, CO: NavPress, 2001), 198.

8) 스티븐 호킹 ,ABrief Hawking,A Brief History of Time(뉴욕:반탐,1990),125.

9).폴 데이비스, The Cosmic Blueprint (뉴욕: Simon & Schuster, 1988), 203.

10)스티븐 C 마이어(Stephen C. Meyer,1956~ ) 지구물리학자로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다윈의 의심(Darwin’s Doubt)'의 저자다.​1919년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단서와 원인: 생명 연구의 기원에 대한 방법론적 해석"(Of clues and causes: A methodological interpretation of origin of life studies.)이란 논문으로 Ph.D.학위를 취득"  휘트워스와 '크리스찬 팜 비치 애틀랜틱'( Christian Palm Beach Atlantic University)대학 교수.지적 설계운동의 주조직인 디스커버리 연구소( Discovery Institute)(DI)의 DI의 선임 연구원이자 '과학문화센터'(CSC)의 국장. 

11).William A에서 인용. 뎀스키와 제임스 M. 쿠시너, Eds, Signs of Intelligence (Grand Rapids, MI: Brazos, 2001), 108.

​12) 게리 해버마스에서 인용한 "아테교에서 신학으로 가는 나의 순례": 안토니우스 플뢰, 철학자인 크리스티와의 인터뷰 (겨울, 2005).

13). Fuz Rana와 Michael Ruse의 토론, 생명의 기원, 2013.05.16

14) 피터 스터너(Peter Stoner, 1888-1980) 1953년까지 패서디나 시립대학 수학천문학과 이사장, 웨스트몬트 대학 과학과 명예교수, 패서디나 시립대학의 수학천문학과 명예교수였다. 그의 저서 "과학은 말한다(Science Speaks )"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이 책은 무엇보다도 성경의 예언에 대한 시각적 확률 추정과 계산을 논하였다.

15)론 와이어트,(Ron Wyatt,1939-1999년) 미국 테네시 주 매디슨 시의 한 병원에서 간호사 마취사로 일하고 있던 1960년, 아라랏(5,137m) 산 근처의 한 산에서 배 모양인 두루피나르(Durupınar)유적지의 라이프 오브 더 라이프에서 사진을 보았다. 이로 인해 복음주의 기독교계에서는 이것이 노아의 방주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퍼지면서 와이트는 아마추어 고고학자로서의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1977년부터 1999년 사망할 때까지 그는 100번 이상의 중동 순방을 했고, 그는 1999년 사망할 때까지 성경과 성서 고고학과 관련된 여러 유적과 유물들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16)​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1643년 영국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 소집된 신학자들의 총회에서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교회의 통일된 신앙고백서로 작성되었다. 그 회의는 1,163회 회집되었다. 거기에 참여한 신학자들은 98명이었고 그 외에 스코틀랜드 교회 총회 대표 11명이 있었다. 이 신앙고백서는 1647년 에딘버러에서 모인 영국교회 총회에서 승인되었고 1649년 영국 의회에서 인준되었고 1690년에 재확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