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를
승(昇), 하늘
천(天) 1.
하늘에 오름2. 가톨릭(catholic)에서는 "
죽음"을 의미
예수님의 승천이 주는 의미
신앙고백으로 사용하는 사도신경에는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예수님의 승천에 대한 고백이 있다.
열왕기하 2:11
두 사람이 행하며 말하더니
홀연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격하고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더라. 아멘
올라가다(승하다) / 알라(ʽâlâh)(עָלָה)
- 옮겨가다(삼상 6:21), 오르다(창 49:4, 신 5:5)
창세기 5: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데려가시므로(라카, lâqach)(לָקַח)
취하다, 잡다, 데리고가다
사도행전 1:9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리워가시니(에페르데, eperthe) ἐπήρθη
- ἐπαίρω /epairó to lift up
마태복음 24:40
그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데려감을 당하고(파라람바노, paralambanó)
(παραλαμβάνω)
승천하더라(올라가다) / 알라(왕하 2:11) 데려가시므로(취하다) / 라카(창 5:24) 올리워가시니(올라가다) / 에파이로(행 1:9) 데려감을 당하고(데려가다) / 파라람바노(마 24:40) 외경 지혜서 4:7
의인은 제명을다하지 못하고 죽더라도 안식을 얻는다. 노인은 오래 살았다고 해서 영예를 얻는 것이 아니며 인생은 산 햇수로 재는 것이 아니다.
현명이 곧 백발이고,
티없는 생활이 곧 노 년기의 결실이다.
그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 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악에 물들어서
바른 이성을 잃지 않기를 원한다.
마태복음 25: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오늘의 기도
지혜로운 믿음으로
등과 기름을 예비하자!
장사되신 그리스도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장사되심을 믿습니다"라고 반드시 고백해야 할 필요가 있는가?
사도신경은 왜 그리스도의 죽음만을 기록하고 장사되었다는 사실을 생략한 채 바로 부활에 대한 논의로 넘어가지 않는가?
그
이유는 성경 자체가 주님의 장사되심을 묘사하는데 상당한 노력을 기울인다는데서 찾을 수 있다.
각 복음서는 모두 이것을
언급하는데, 복음서 기자는 각기 다른 사람이 빠뜨린 사항을 추가하고 있다.
예를 들면, 마태만이 무덤을 제공한 요셉이 부자였다고
말한다.
또 마가 혼자만이 그가 존귀한 공회원 이었음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장사되심에 대해서는 서신서들에도 언급되어 있다.
고린도전서 15장 3, 4절에서 바울은 복음의 핵심적인 항목에 그리스도의
장사되심을 포함시켰다.
바울은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다시 살아나사"라고 했다.
왜 그리스도의 장사되심의 기사가 이처럼 중요한가?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첫째, 그리스도의 장사되심은 그리스도가 실제로 죽었음을 확증해 준다.
회의론자는 그리스도는 죽은 것이 아니라 현기증을 일으킨 것뿐이며, 그러므로 그가 죽음에서 부활한 것이 아니라 의식을 다시 회복한
것뿐이라고 말함으로 그리스도의 부활 신앙의 기원을 설명하려고 했다.
그러나 복음서는 그가 죽었으며 그를 박해한 자들이 그의
죽음을 확인했으며, 또한 로마 총독 빌라도는 시체를 장사 지내도록 허락했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둘째, 그리스도의 장사되심은 죽은 몸을 잘 돌봐야 한다는 교훈을 주기 때문에 중요하다.
사람들은 가끔 자기들이 죽을 때, 자기 몸이 땅에 묻히든 쓰레기 더미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지든 상관없다고 경솔히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시체를 중시하고 있다.
스데반이 순교당했을 때, 경건한 사람들이 그의 몸을 장사지냈다.
도르가의 몸은 당시의 관습에 따라
씻어져 장사되기 위해 다락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죽은 몸보다 더 따뜻한 보살핌을 받은 시체는 없었을 것이다.
로마
제국 내에 기독교의 영향력으로 인해 화장 제도가 없어지고 매장 제도가 행해졌음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이방 세계에 살았던
그리스도인은 주님이 장사되었던 방식대로 장사되기를 바랐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부활에 대한 소망을 표현하는 극적인 방법으로
믿었다.
그러나
몸이 그대로 보존되어 장사되는 것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 어떤 몸이든지 분해된다.
상어에게 잡아먹힌 사람도
납으로 만들어진 관 속에 넣어져 흙에 묻힌 사람과 똑같이 전능자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장차 부활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일을 가능케 하는지 우린 알지 못한다.
단지 우리는 그것을 행하는 분이 누구인지 아는 것으로 족하다.
그리스도의
장사되심은 몸소 죽으심으로 인류 구원을 위해 성취하신 구속 사역의 중요한 한 부분이었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성취하신 일이 무엇이었는가?
여러 가지 중에서도 그가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진노를 자기 몸에 짊어진 일이다.
모든 죄는 그리스도에게 치워졌으며 그의 죽으심으로 죄는 심판받았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하였다(요 1:29)
여기서 죄를 "지고가는"이란 표현은 구약의 속죄 의식에서 예시되었다.
대제사장은 속죄 염소의
머리에 손을 얹고 자기와 백성의 죄를 자백하고 그 염소를 광야로 내보내었다.
레위기 16:22은 이것을 잘 설명해 준다.
"염소가
그들의 모든 불의를 지고 무인 지경에 이르거든 그는 그 염소를 광야에 놓을지니라."
분명히
그 염소가 실제로 인간의 죄에 대한 책임을 질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극적인 형태로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표현하기 위해
이러한 제도를 만드셨다.
집으로 돌아가기엔 너무 먼 광야에 놓여진 속죄 염소는 묵묵히 죄를 "지고가는"그리스도의 사역을 묘사하며
그의 장사되심과 상통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죄에 대한 마지막 처분은 그의 장사되심에서 이루어졌다.
그는 죄의 결과로 주어진 죽음에 바쳐진 대속 제물로서 무덤에까지 들어가셨다.
그리고 죄의 짐과 전혀 상관없이 부활하여 무덤에서 나오셨다.
이것이 "장사한지 사흘만에..."라는 구절의 교리적 중요성이다.
광야에 놓여진 속죄 염소의 생명과 존재를 규명하지 않듯이 무덤에서 성취된 죄에 대한 처분도 규명할 수 없다.
믿는 자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사역의 한 양상이었던 장사되심 속에는 자신에게 주어진 죄의 심판에 대한 처분도 분명히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이
글이 좀 어렵게 느껴진다면, 죤 번연의 작품이 도움이 될 것이다.
<천로역정>(The Pilgrim's
Progress)에서 번연은 등에 짐을 지고 있는 어떤 사람이 결국 그것을 벗어버리게 되는 방법을 말해준다.
그 짐은 그의 죄와
죄의식을 상징한다.
그 사람이 갈보리라고 부르는 언덕에 올라가 십자가를 바라볼 때, 자기를 위해 거기 달리신 구세주에 대한 감사의
눈물이 눈에 고이게 된다.
"복되도다, 십자가여"라고 그는 말을 시작한다.
그리고나서 그는 자신의 잘못을 고친다.
"나를 위해
고난 당하신 이여 다 복되시도다"라고 소리친다.
그 후에 그는 자기 등에 있는 무거운 짐을 묶고 있던 밧줄이 끊어지는 것을 꿈에서
보았다.
그 짐은 언덕 아래로 굴러내려가 빈 무덤에 들어갔다.
그리고나서 다시는 그가 그 짐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우리는 때때로 이 진리를 나타내 주는 다음과 같은 합창을 하게 된다.
살아계셔서 나를 사랑하신 주님,
죽으셔서 나를 구원하신 주님,
장사되셔서 내 죄를 씻으신 주님.
-월버 챔프맨의 "어느날"
그리스도는 지옥에 내려가셨을까?
사도신경에
논쟁의 여지가 있는 구절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지옥에 내려가셨다가"라는 표현이다.
그리스도의 영이 실제로 죽은 영들의 장소에
내려가셨다는 사실을 모든 그리스도인이다 믿는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지옥(hell)이라는 말은 사도신경이 처음 영어로 번역될 때
의미했던 그 의미가 아니다.
지옥(hell)이라는
영어 단어는 "보이지 않는", 또는 "덮여진" 장소 라는 뜻의 앵글펄 색슨어인 "Hellan"이라는 단어에서 나온 것이다.
수백년 전에는 이 단어가 히브리어 스올(Sheol)이나 헬라어 하데스(hades)와 똑같은 의미의 단어였다.
그래서 그것은 죽음
이후의 모든 영혼이 가는 장소를 의미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단어는 악인들이 형벌받는 곳을 의미하게 되었다.
즉 그
뜻이 죄인이 사후에 가서 영원히 거하는 비탄의 장소로 한정되었다.
그래서 현대 영어 지옥(hell)은 성경의 단어 스올이나
하데스와는 다른 뜻이며, 또 사도신경에도 적당치 않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라면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에 그는 분명히 지옥으로
가시지 않았다.
그러면
그리스도가 어디로 가셨는가?
분명한 것은 명확한 사실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 사실을 기록한 구절을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2:24-31절은 이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후에 베드로가 한 첫
설교이다.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다윗이 저를 가리켜 가 로되...내 육체는 희망에 거하리니 이는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베드로는 시편을 해석하고 있다.
그는 다윗을 선지자라고 하면서, 그가 "미리 보는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리라"고 했다.
시편에서
인용된 이 말씀의 의미는 시편 본문처럼 분명하지는 않다.
따라서 우리는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영이 음부에 내려가셨음을 뜻한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사도신경 기사의 근거가 되는 중요한 두 세
개의 구절 가운데 하나이다.
다시
한번 의문을 제기해 보자.
그리스도의 영이 과연 음부에 내려 가셨는가?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 있었던 장소는 명확히 알고 있다.
그는 못 박히시던 근처에 있는 동산 안의 새로 만든 무덤 속에 계셨다.
그러면 그의 영은 어디로 가셨는가?
주님께서는
친히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주님 옆에서 십자가에 달린 강도가 주님께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자기를 기억해 달라고
하자, 예수께서는 그 때까지 기다리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 하셨다.
그리고는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셨다(눅
23:43).
그 낙원이란 어디인가?
어떤 학자는 그것을 하늘로 믿는다.
이 단어는 신약 성경에 다시 두번 사용되는데, 각기 경우에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 장소를 말하는 것 같다.
예를 들면 요한계시록은 생명나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다고 한다(계 2:7, 계
22:2).
이 해석에 의할 것 같으면, 우리 주님은 죽으실 때 그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셨으며 거기서 몸의 부활을 기다리셨다는
것이다.
이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주님이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라고 하신 말씀이
그것을 가리킨다고 믿는다.
이런
해석은 분명히 가능성이 있는 해석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용된 본문이 원래 뜻하는 바가 아니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자기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했을 때, 그는 하나님의 뜻 대로 처분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한 것뿐이었을지도
모른다.
더구나 구약의 헬라어 번역에는 신약의 "낙원"(Paradise)에 해당하는 단어가 "동산"(garden)이나
"숲"(grove)으로 번역되었다.
예를 들면, 에덴 동산이 하나의 낙원이었다(창 2:8 참고; 느 2:8: 전 2:5; 아
4:13).
따라서 이 말은 유대인에게 있어서 복되게 죽은 자들의 장소를 묘사하는 시적인 표현인 "아브라함의 품"과 동의어일지도
모른다.
그리스도가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기간 동안 어디에 계셨는가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만약 문제가 된다면 성경은 그것을 보다 더
분명하게 기록했을 것이다.
성경이 강조하는 바는 그리스도가 3일 동안을 어디에서 보내셨는가 하는 장소가 아니다.
성경에서 강조되는
것은 그가 머문 장소가 아니라 제자들에게로 다시 돌아왔다는 사실이다.
그는 자기가 말했던 대로 죽음에서 부활하셨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혼이 음부에 갔었다고 믿어야 하는가 아닌가를 결정해야 할 필요가 없다.
정작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그의
영혼이 음부에 버려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육체적, 영적 모든 면에서 죽음은 일시적일 뿐이었다.
장사지낸지
사흘만에 그는 육체와 영혼을 그대로 지닌 채로 무덤에서 나오셨다.
이 위대한 진리에 대하여 성경은 매우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사도신경이 말하는 바와 같이, 만약 예수께서 음부에 내려가셨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떤
사람들은 예수께서 음부에 내려가심으로 인성을 완성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우리 중의 하나와 같이 되셨다.
그는 태어나시고
자라나셨으며 또한 이 땅에서 사시다가 죽으셨으며 몸이 장사되어졌으며 그의 영혼은 부활을 기다리기 위해 보이지 않는 세계로 가셨다.
그리고 삼일 후에 다시 살아나셨고 하늘로 올라가셨다.
부활과 승천을 경험하신 사실만이 우리와 다를 뿐 다른 것은 다른 인간의
경험과 동일한 것이다.
웨스트코트(B.F.Westcott)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해설했다.
그 사실은(그리스도께서 음부에 내려가셨다는 교리는) 주님의 죽음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완전하게 해준다.
죽음이란 영과 육의 분리이다.
이런 개념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죽음으로서 우리와 같은 운명을 맞이하셨다.
그의 몸은 무덤에 놓였고 그의 영혼은 앞으로 우리들이 들어가리라 생각되는 그 나라로 들어가셨다.
그는 인간의 모든 상태를 다 겪으셨고 하나님을 위하여 승리하셨다.
우리가 있는 곳은 어디나 그가 계셨던 곳이다.
그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우리의 상태에 참여하셨다.
그리스도는
죽은 자의 거처에 계시게 되는 일을 포함하여 인간의 모든 경험을 다 맛보셨다.
그래서 그는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셨다"(히
2:17).
그러나 인격적으로나 경험하신 바에 있어서는 우리와는 달랐다.
왜냐하면 그는 단순히 인간이 아니었으며, 죽음이 그를
매어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무덤에서 승리를 거두고 부활, 승천하셨다.
여러
구절들을 비교해 보면, 부활하신 구주께서 복되게 죽은 자를 음부에서 풀어주시고 그들을 영광으로 인도하셨다(엡 4:8; 히
11:40;히 12:18, 23).
만약 그렇다면 음부는 복되게 죽은 자들의 거처는 아닌 것이다.
그곳은 영원한 형벌을
기다리는 악인만을 위하여 준비되어 있는 곳이다.
음부가 지옥이 되는 곳이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자들의 영혼은 그들이 죽을 때에 즉시 천국으로 올라간다.
그들은 결코 음부로 "내려가지" 않는다.
그들은 주님과
함께 "올라간다" 바울이 노년에 로마 감옥에서 그의 친구들에게 편지를 쓸 때에,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졌다고
했다.
그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천국에서의 재연합을 의미했다.
그래서 그것이 "더욱 좋은 것"이 되는 것이다(빌 1:23).
따라서
우리가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마다 이 사실들에 대해 생각하게 되면 의심스런 마음이 생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내용이 사도신경의
위대한 기사 속에 포함되어 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지옥에 내려가셨다가 장사한지 사흘만에..."라는 사도신경 기사는
구세주가 고난당하심으로 인하여 우리를 위하여 이루어 놓으신 구원 사역에 대한 신앙을 확인하는 것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라고 고백하는 것은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사도신경보다 훨씬
후에 생겨난 여러 신조들과 신앙 고백문들은 보다 정확을 기하기 위하여 이 구절을 더 길게 만들었다. 예를 들면, 성공회의 39개
조항의 신앙 고백 중 제2조는 이렇게 표현된다. "그리스도는 실제로 죽음에서 부활하시고 살과 뼈와 그리고 사람의 본성에 속하는
모든 것을 구비한 신체를 다시 취하셨다."
이 조항은 세 가지 중요한 진리를 강조하고 있다. 첫째는 부활 사실이다("그리스도는 진정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둘째는 몸이 다시 부활했음을 확인한 것이다. 셋째는 부활한 몸의 변화이다.
여기에 피가 빠져 있다는 점을 주목해 보자. 그리스도의 부활은 단순히 소생이 아니라 진짜 부활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나사로나 다른 어떤 사람이 생명을 다시 얻었던 것과는 다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진리는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브룬너 (E.Brunner)의 견해에 의할 것 같으면 "모든 것은 부활 사건에
의존하고 있다. "또 프로이드 필슨(Floyd Filson)은 "신약 성경 전체가 부활 사건을 감안하여 기록되었다"고 했다.
이러한 말들은 매우 대담한 주장이지만 어떤 학자도 이것을 반박하지 못할 것이다.
부활의
중요성에 대한 바울의 평가는 여러 성경 구절을 통하여 살펴볼 때 매우 정확하다. 고전 15:3, 4절고전 15:3에서 그는
복음을 이렇게 요약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 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이렇게 쓴 후에 이어서 바울은 주님께서 사도들과 자기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에게 나타나셨던 일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내나 저희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고전
15:11)라고 했다.
또
다른 성경에서 바울은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 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롬 10:9)라고 했다. 이 두 구절을 연관시켜 생각해 보면, 죽는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그
진리의 중요성을 알게 될 것이다. 모든 사도들은 그 일이 실제로 발생한 것으로 믿었다. 또한 그들은 부활에 대한 신앙이 구원에
필요 불가결한 것이라는 중요한 결론을 내렸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사도신경으로 재확인한다. 분명한 증거가 그리스도 부활 사실을
지지하고 있다. 지금까지 부활을 믿는 확실한 이유에 대해 들어보지 못했다면, 기독교 서적을 판매하는 서점에 가보라. 기독교
변증이나 기독교 신앙의 내용을 소개하는 책들을 꽃아 놓은 서가에서 부활 신앙에 대해 도움이 되는 책을 많이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부활 신앙을 지지하는 여러 증거들 중에 예수님의 생애와 인격이 그 중의 하나이다. 분명히 참 인간이셨던 예수께서 자신의 부활을 분명하게 예언하셨다. 만약 그가 부활하지 못하셨다면 그의 진실성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
또
다른 증거는 빈무덤과 시체가 사라진 사실이다. 그것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것이거나,
아니면 사람들의 손에 의해 시체를 도둑맞았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만약 시체를 도둑맞았다면 누구의 짓인가? 그의 대적자들인가?
그들이 시체를 가져갔다면 사도들이 예수께서 살아나셨다고 모든 사람들에게 말했을 때 왜 그 시체를 내보이지 않았겠는가?
그러면 제자들이 그것을 가져갔는가? 그럴 수 없다. 시체가 있던 무덤은 육중한 돌로 박혀 있었으며, 인봉되었고 군대가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제자들 중 누가 분명한 비진리의 메시지를 옹호하기 위해 자기 생명을 바치겠는가?
그리스도께서
부활을 예언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제자들은 사실상 부활에 대해 전혀 준비하고 있지 않았다. 몇몇 여인들도 부활을 위해서가
아니라 시체가 썩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예수님의 몸에 향유를 바르려고 했을 뿐이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증거가 점차
많아짐에도 불구하고 믿기를 싫어한 제자들이 많았다. 그들의 마음이 부활을 확신하는 것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은 부활 사실을 강력히
지지해 준다. 제자들이 부활을 믿었음은 불신자들까지도 인정했다. 분명히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훔치지 않았다.
부활에 대한 불신앙적인 비판자조차 빈무덤과 시체가 없어진 사실을 성공적으로 설명한 적이 없다. 그리스도의 대적자들의 이러한 침묵이 그리스도의 친구들의 부활 증거만큼이나 중요한 것이다.
바울의
회개가 부활에 대한 또 하나의 강력한 증거이다. 초대 교회의 그 오만한 박해자가 예수님을 믿으리라고는 누구도 생각지 못했다.
학문과 재능을 겸비한 그는 예수님의 이름에 철저히 대적했었다. 그러나 그도 제자가 되었다. 그리고 자기를 의심하는 사람들의 의심을
풀기 위하여,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이 자기에게 나타나셨던 그 체험을 이야기했다. 다메섹 도상의 경험이 그의
생애를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아그립바왕 앞에서 그는 자기의 회심을 이야기했으며, 또한 부활 사건의 요점을 말하자 베스도는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행 26:24)고 하며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바울의
회심은 그리스도 부활을 증거하는 참으로 중요한 사실이다. 바울은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차린 말을
하나이다"라고 했다. 그리고나서 그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들은 바를 아그립바 왕에게 증거하면서, "이 일은 한 편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로소이다"라고 했다(행 26:25, 26).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일보다 우리에게 더 큰 부활의 확신을 주는 증거는 아마 없을 것이다. 복음서에는 이에 대한
기사가 많이 나온다. 그러나 단순히 복음서의 기사 때문이 아니라,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여러 차례의 나타나셨다는 사실 그 자체가
부활에 대한 초기교회의 신앙을 설명해 준다. 제임스 데니(Jamas Denny) 는 그것을 이렇게 말했다.
복음서 기자가 쓴 부활 기사는 우리가 취급해야 할 많은 중요한 증거들 중에서 가장 작은 부분에 불과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 범위(복음서-역자주) 밖에 놓여 있는 사실을 토대로 하여 부활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복음서 자체에 나타난 사실을 근거하여서도 그리스도의 부활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여도 과장은 아닐 것이다.
부활에 대한 보다 확고한 역사적 증거는 이렇다. 부활은 믿어졌고, 전파되었고, 퍼져나갔으며, 또한 그 열매를 맺어 복음이 기록되기 오래 전에 이미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기독 교회가 생겨났다는 것이다. 이 말은 복음서를 무시하 려는 것이거나 복음서가 말하는 내용을 과소 평가하려는 것이 아닐 뿐 아니라 복음서 내용의 진실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도 아니다. 부활에 대한 신앙은 신약의 어느 성경도 기록되기 전에 이미 널리 퍼져 있었으며 대단히 힘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스도는 두 장소를 배경으로 나타나셨는데, 하나는 예루살렘이며, 다른 하나는 갈릴리이다. 이것 또한 부활이 실제로 있었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그리피스 토마스(W.Griffth Thomas)는 <기독교와 그리스도>(Christianity is Christ)라는 작은 책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지지하는 여러 가지 증거를 제시한 후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여러 가지 증거들은] 따로따로 살펴보면 확고한 내용이며, 함께 모아보면 그 주장은 중복적이고 충족한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모든 비판의 망치가 두들겨도 하나의 파편도 내지 못했던 반석인 것이다.
역사상 그 어느 누구도 부활을 지지해 주는 이런 압도적인 증거를 논박하는 일에 성공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따라서 믿기를 거부하는 자들을 주로 기적이란 발생하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함으로 자기의 불신앙을 변호한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을 믿는다. 우리가 사도신경을 같은 목소리로 고백한다 할지라도 우리 각 사람은 그리스도 부활에 대한 개인의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다.
승천하신 그리스도
부활하신
후에 그리스도는 하늘로 올라가셨다.
사도신경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일을 언급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사실을 옹호하는
것이 사도신경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신경은 이를 생략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사실만을 간략하게 말하고
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던 때인 유월절(Passover)과 승천하신 때인 오순절(Pentecost) 사이에는 50일의 간격이 있다(현대
교회에서는 유월절과 오순절 대신에 부활절<Easter>과 성령 강림절<Whitsun.
Whitsunday>이라고 부른다).
누가는
"해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40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라고 말했다(행 1:3).그래서 성경학자들은 주님께서는 부활하신지 40일 후, 즉 오순절 며칠 전에 승천하셨다고 결론 내린다.
주님께서
왜 부활 후 40일간 이 땅에 머무셨는가?
적어도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40이라는 단어가 성경에서 자주 사용되는데
그것은 주로 "시련"이나 "시험"과 관련된 경우가 많다.
한 예로는 출 애굽한 이스라엘의 광야 유랑 생활 40년이다.
둘째,
그리스도께서 공 생애를 시작하실 때 사단에게 시험받으신 40일과 그 기간이 일치한다.
그리스도께서
수 많은 사람 중 몇몇 사람에게 나타나셨다는 기록 외에는 그 40일간 무엇을 하셨는지 우리가 알지 못한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부활이 그의 존재 양식을 바꾸었다는 점이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주님은 십자가 지실 것을 예상하시면서 굶주림과 목마름과
피곤함, 그리고 슬픔 등과 같은 한계를 스스로에게 가하셨다.
그러나 부활 후에는 모든 상황이 변하였다.
하몬드(Canon
T.C.Hammond)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우리 주님은 육체와 영으로 새로운 실존에 들어가셨다.
그러나 주님은 이전 비하의 상황하에 있었던 자신을 완전히 탈피하지 아니하시고, 오류없이 실재적인 부활을 증거하기 위하여 인간들에게 찾아오셔서 필연적 관계를 재개하셨다.
이와 같은 부활이후 그리스도의 "현현"하심은 "많은 증거"을 요구하는 우리의 요구를 응하시는 사락과 고귀한 겸손을 보여 주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제자들과 함께 땅 위에서의 마지막 날을 보내셨다.
그들은 함께 예루살렘을 떠나 기드론 시내를 건너 겟세마네 동산을
지나서 감람산이라는 산등성이에 올라가서 베다니 동쪽에 머물러 있었다.
잠시 담소하신 후에 주님은 손을 들어 그들을 축복하시고
하늘로 들리우셨다.
누가는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행 1:9)
그들이 자세히 구름을 쳐다볼 때,
횐 옷을 입은 두 사람이 나타나서 하늘로 올리우심을 본 그대로 다시 오신다고 그들에게 약속했다(행 1:10, 11).
이처럼
그리스도의 승천 기록은 놀랄만큼 단순한 것이다.
어떤 수식도 덧붙지 않았고, 의심하는 사람을 확신시키기 위한 어떤 시도도 없다.
제자들은 그들이 본 바만을 말하고 있다.
누구도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직접 보지 못했다.
제자들은 오직 부활의 결과, 즉 부활
하여 살아계신 주님만을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승천에 있어 서는 그 결과가 아니라 승천 그 자체를 보았다.
그들은
주님께서 승천하신 후 하늘에서 무엇을 하실 것인가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에 대해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셨고, 또한 성령을 통하여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기자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첫째, 그리스도는 "승천하셨다"(히 4:14)
둘째, 그는 "참 하늘로 들어가셨다" (히 9:24)
첫째
구절은 아마 그리스도께서 공간의 한계를 초월하여 영원한 실재 속으로 들어가신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그러므로 천국이 "저
밖에"나 "저 위에" 있을 수 없다고 궤변하는 자들의 반대는 헛된 것이다.
성경은 불가피하게 천국을 "위의 것"으로 말하고
있는데, 그 까닭은 다른 방도로는 땅에 매어있는 사람들에게 뜻이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구절, 즉 그리스도께서 "참 하늘로 들어가셨다"는 구절은 하나님의 처소인 하늘이 존재함을 보증해 준다.
실로 성경은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을 말씀하고 있다.
솔로몬은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늘"(왕상 8:27)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하나님이 "계신 곳"(왕상 8:43)으로서 하늘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하늘은 관념이나 꿈, 혹은 환상이
아니다.
그것은 장소이며, 지금도 예수께서 계시는 곳이다.
그는 승천하셨으며 하늘로 들어가셨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면전에 들어가셨다(히 9:14).
바울이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예수 그리스도시니 그는 하나임
우편에 계신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고 말한 것은 조금도 무리가 아니다(롬 8:34).
사도신경은 신앙의 다른 사실, 즉 주님의 죽음이나 부활에 대해서 처럼 승천에 대해서도 똑같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이로 보아 사도 신경을 만든 사람들은 승천의 중요성을 믿었음이 분명하다.
성경
역시 그리스도 승천의 중요성을 명백히 말하고 있다.
사실 신약 성경의 중요한 한 부분인 히브리서는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기록되었다.
히브리서는 부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리피스 토마스(W.Griffith Thomas)는 그것을 이렇게
논평했다.
"우리 주님께서 제사장과 왕으로서의 사역을 시작하신 것은 승천하심에서였다.
그리고 이 때문에 주님의 제사장 직임에
관하여 집중적으로 다루는 히브리서의 교리적 입장이 승천 사실에 중심을 두고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서는
승천에 대하여 적어도 12번이나 언급하고 있다.
요한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확실한 말씀을 기록했다.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요 16:7, 요 1:51, 요 3:13, 요 13:3, 요 17:11, 요 20:17).
그러나 그 말씀을
들을 당시 제자들은 주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나중에 그 말씀을 이해 했으며 그래서 승천이 진정
자기들의 유익을 위한 것이었다고 동의하며 글을 쓴 것이다.
승천의 유익
첫째, 믿는 자로 하여금 진정한 기쁨의 원인
주님께서는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면 나의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요 14:28).
그래서 그들은 기뻐하였다.
누가는 주님께서 그들을 떠나시던 때(승천시)에 "저희가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갔다"(눅
24:52)
둘째, 강한 신앙심을 고취시켜 역경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한다
바울의 말에 의하면, 당시에 널리 부르던
찬송가는 아마도 "참으면 또한 함께 왕노릇 할 것이요"등과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딤후 2:12).
(그리스도의 왕으로서의 통치와
하나님으로서의 신분의 회복인 승천과의 관계는 매우 분명한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독자들에게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기"를
촉구하는데, 그 까닭은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자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라고 하였다(히 4:14).
승천을
떼어놓고 그리스도의 부활 그 자체만으로는 별 의미가 없다.
베드로는 자신의 첫 설교를 부활로 시작하여 승천으로 마무리짓고 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하나님이 오른 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주셨느니라"(행 2:32-33).
그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고 하늘로
올리우셨다.
이 두 사건은 실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 부활 승천하심으로 승천하지 않았을 경우보다 우리를 위해 훨씬 더 활발하게 일하신다. 이렇게 생각해 보자. 만약 주님께서 승천하지 않으셨다면 그는 어디에 계실 것인가? 또한 무엇을하고 계실 것인가?
만약
하늘로 올라가지 않으셨다면 그의 처소는 어느 한 지방에 제한받게 되었을 것이다.
때로는 예루살렘, 때로는 다른 곳에 계시지만
동시에 모든 곳에 계시지는 못했을 것이다.
주님은 자신이 부활하셔서 하늘로 올라가심에 대하여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승천하신 그리스도는 두 세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다(마 18:20).
만일 승천하지 않았다면 성령과 성령의 은사를 교회에 주시지도 않았을 것이다.
성령과 성명의 은사를 사람들에게 주신 이는 승천하신 주님이셨다(행 2:32, 33, 엡 4:5-12).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지 않았다고 가정해 보자. 그가 우리의 큰 대 제사장이 될 수 있었을까?
땅에서 그는 하나님의 대언자이기는 했지만 제사장은
아니었다.
히브리서는 그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예수께서 만일 땅에 계셨더면 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였을 것이니"(히 8:4).
그가 참 하늘에 들어가심으로 비로소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제사장이 되셨던 것이다(히 9:24).
우리는
제사장을 필요로 한다.
히브리서는 그것을 분명하게 말한다.
우리 모두를 불행하게 만드는 죄와 연약함을 지니고 있는 땅 위의
제사장이 아니라, 우리 죄를 위하여 자신을 제물로 바치신 하늘의 제사장이 우리를 위해 중보하고 계신다.
그가 하늘로 올라가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큰 대제사장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태초에 사람이 하나님에 의해 지음을 받았을 때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에 흙으로 지으시고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생령이 되었다고 했다.
생령이란 말은
살아 있는 생명체가 되었다는 의미다.
그런데 이 때의
생령은 사람이 무죄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죄와는 무관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였을 때에 하나님의 형상은 상실했고 아담의 형상으로 계속 이어지게 되었다(창 5:1-3).
사람이 다시 흙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하나님의 선언은 사람은 이제 범죄한 아담의 후손으로 모두가 다 죄인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죄라는 것과 하나님의 형상은 동시에 존립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이 다시 하나님과 교제하고 죄를 극복하는 상태가 된다는 것은 영원한 하나님의 형상을 갖추어야 한다.
그러나 죄인이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회복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 일이 외부, 즉 하나님 편에서 가능케 하지 않으면 사람에게는 희망이 없는 그런 상태가 되었다.
즉 이 땅의 존재가 아닌 하늘에서 메시아가 오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이다.
이것 때문에 하나님은 아담이 범죄한 후에 사람을 죄에 빠지게 한 사탄을 쳐부술 후손을 약속하신 것이었다(창 3:15).
시편 16편에 보면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8-10절/개역한글판)라고 말씀하고 있다. 다윗이 바라고 기다리는 메시아는 육체가 되어서 흙으로 돌아가는 자가 아니라고 한다.
여기에 메시아직의 원리가 깔려 있다. 즉 메시아란 죄라는 차원을 넘어서서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나타나는 자라야 한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에 동정녀의 몸에서 성령으로 잉태되어 오셨다는 것은 완전한 한 인간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죄와는 상관없이 오시는 모습이었다. 그러므로 메시아란 그 몸이 다시 흙으로 돌아가지 아니하는 분이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승천이 어떤 의미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예수님은 부활 후 40일 만에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셨다. 그 40일 동안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고(행 1:3),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셨다(행 1:4-5). 그리고 승천하시면서 “내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의미를 정리하자면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예수님 자신의 십자가 사역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가 온전히 이루어졌으니 이제 승천하는 것이고 그 승천의 결과로 말미암아 성령을 너희에게 보내신다. 그러니 너희들은 내 증인이 되라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구원(하나님 나라)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완성되었으니 너희들은 이제 거기에 더 보태려고 하는 자세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는 증인이 되면 된다는 말씀이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예수님의 승천의 의미는, 예수님은 이 땅에 속한 존재가 아니라 하늘에 속한 존재로 하나님의 형상이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하늘에 속한 존재로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했고 완벽한 승리를 가지게 되었음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 승천이다. 이 사실을 우리는 베드로가 증인의 사역을 감당하는 것에서 명확히 드러나고 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미 종말이 이루어졌다고 선언하였다. 이 종말의 때에 구원의 이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라고 선언하였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행 2:21).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온전히 이루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에 십자가를 지는 자가 예수님뿐이었는가? 십자가를 지는 많은 사람들 중에서 메시아가 될 자는 죽음에 매여 있는 자가 아니었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베드로는 구약에서 다윗의 시편 16편을 인용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위치 변화를 말씀하고 있다. 즉 예수님이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는 것은 예언이 성취된 것이며, 바로 메시아 되심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는 것은 구속 사역을 완성하셨다는 뜻이고 또한 오른쪽이란 영광과 권능의 자리에 앉으셨음을 의미한다. 구약에서 제사장들이 성막이나 성전에서 제사 직무를 수행할 때에 앉을 수 있는 자리는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대제사장으로서 사역을 온전히 감당하셨으므로 보좌에 앉으실 수 있었다.
“내가(예수) 항상 내(예수) 앞에 계신 주(여호와)를 뵈웠음이여 나(예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여호와) 내(예수) 우편에 계시도다”(행 2:25). “요동치 않게”라는 것은 확고한 자리 확보를 위하여 죽음과 음부로부터 피해를 보지 않게 하신다는 것이다(행 2:27-28). 여기서 “나”라고 하는 사람이 이 시편을 기록한 다윗이 될 수 없음은 다윗은 아직 음부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행 2:29).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의 성취임이 명백하다. 이제 예수님은 구원사역의 완성으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계속적으로 대언하고 계신다. “예수께서 만일 땅에 계셨더라면 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셨을 것이니”(히 8:4/참고 요일 2:1).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의 사역을 통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일련의 사건들은 메시아 되심의 증거로 제시하고 있다.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신 그분이 친히 사람이 되셨고, 죄인들을 대표하여(롬 5:17-18) 죄악을 담당하시고 죄인들이 받아야 할 진노를 십자가에서 홀로 담당하심으로 가장 낮은 자리까지 내려가셨다(빌 2:6-8). 이러한 저주를 받은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높이셨고, 창세 전에 누리던 영광의 자리로 회복시키셨다.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형상임을 증거하신 것이다(골 1:15). 따라서 예수님의 승천이란 주님의 자리로의 회복이다. 주님의 자리로의 등극이다.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만 구원을 얻게 되어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오늘날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단순히 구원을 얻기 위하여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행하였듯이 주님의 증인된 사역을 감당하는 것까지 포함하는 말이다. 무엇의 증거자여야 하는가? 지금 우리가 예수님의 승천을 증거한다고 해서 그것을 듣는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승천이 있게 된 원인을 바로 증거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십자가 사건을 부활과 승천의 최종적 영광을 위한 하나의 추억거리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바울 사도는 말하기를 “너희 중에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라고 했고, 갈라디아서 3:1에서도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세상과 성도와의 칸막이가 부활 사건이나 승천이 아니라 십자가 사건으로 말해지는 것이다. 그 안에 부활과 승천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그러므로 언제나 그리스도 구원 사역의 중심은 십자가이다. 승천의 영광만 바라보고 우리가 그 하늘나라에 앉을 영광만 생각한다면 구원에 대하여 크게 오해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십자가의 은혜로 베풀어지는 구원이란 이 땅의 것을 날마다 더 얻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 것이다. 하늘로 가신 그분이 이 땅과 이 땅의 모든 것을 버리고 가셨다면 성도의 삶은 이 땅과 이 땅의 것을 날마다 버리면서 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지금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그분을 위하여 이 세상과 세상의 것을 버리며 사는 자라야만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살 자격이 있다. 버리면 자격이 주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성도 안에 있는 생명이 세상과 세상의 것을 밀어내고 버리도록 되어 있다는 말이다(막 10:29-30).
세상 것을 버리면서 산다는 것은 세상의 것을 버리는 일로 기쁨을 삼는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만족하기에 그분만 증거하는 삶으로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승천하신 하늘만 쳐다보고 있을 수 없었듯이 오늘 우리 역시 예수님의 승천에 대해 묵상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증거자로 살아가야 한다. 오늘 우리의 삶의 의미는 바로 예수님이 우리를 십자가에 날마다 못 박을 때에 의미가 있는 삶이다. 그 십자가에 날마다 못 박히는 자만이 진정한 주님의 증거자가 될 수 있다. 십자가에 죽어보지 않은 자는 십자가의 의미를 알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증거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영, 혼, 몸에 대한 성경적 이해
사람의 본질
사람은 흙으로 만든 몸(육)에 하나님이 숨(영)을 불어넣은 살아있는 혼이다.
창세기 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the LORD God formed the man from the dust of the ground an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fe, and the man became a living being.
히브리어로 영은 “루아흐”, 혼은 “네페쉬”
히브리어 성경에는 "혼" 이라는 단어인 “네페쉬”가 사용되었다.
데살로니가살전서 5: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
“May God himself, the God of peace, sanctify you through and through.
May your whole spirit, soul and body be kept blameless at the coming of
our Lord Jesus Christ. ”
혼이란 사람 그 자체를 말한다.
출애굽기 12장 15절
“너희는 칠 일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그 첫날에 누룩을 너희 집에서 제하라
무릇 첫날부터 칠일까지 유교병을 먹는 자는 이스라엘에서 끊쳐지리라.”
** 원어 성경에는 (먹는 자는)에서 자가 혼을 나타내는 “네페쉬”로 되어 있음.
For seven days you are to eat bread made without yeast.
On the first day remove the yeast from your houses,
for whoever eats anything with yeast in it from the first day through
the seventh must be cut off from Israel.
에스겔 18장 20절
“범죄 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비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하리니.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The soul that sinneth, it shall die.
The son shall not bear the iniquity of the father,
neither shall the father bear the iniquity of the son:
the righteousness of the righteous shall be upon him,
and the wickedness of the wicked shall be upon him. ”
혼이란 생명체를 말한다.
민수기 31장 28절
“싸움에 나갔던 군인들로는 사람이나 소나 나귀나 양 떼의
오백분지 일을 여호와께 드리게 하되”
* 개역 성경에는 빠져 있지만 원어 성경에는 사람이라는 단어가 “네페쉬”가 포함되어 있음.
“From the soldiers who fought in the battle,
set apart as tribute for the LORD one out of every five hundred,
whether persons, cattle, donkeys, sheep or goats.”
사람이 죽으면 영은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전도서 12장 7절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 원어 성경에는 신이 영을 나타내는 “루아흐”로 되어 있음.
“and the dust returns to the ground it came from,
and the spirit returns to God who gave it.”
* 개역의 "신"은 개역개정판에서 "영"으로 개정되었음
누가복음 23장 46절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
“Jesus called out with a loud voice,
"Father, into your hands I commit my spirit."
When he had said this, he breathed his last.”
사람이 죽으면 혼은 낙원이나 지옥에 간다.
누가복음 16장 22절~23절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The time came when the beggar died and
the angels carried him to Abrahams side. The rich man also died and was buried. /
In hell, where he was in torment,
he looked up and saw Abraham far away, with Lazarus by his side.
특별한 경우 (예수님과 요나)
마태복음 12장 40절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For as Jonah was three days and three nights in the belly of a huge fish,
so the Son of Man will be three days and
three nights in the heart of the earth.”
요나 2장 6절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To the roots of the mountains I sank down;
the earth beneath barred me in forever.
But you brought my life up from the pit, O LORD my God.”
* 예수님의 혼은 땅의 중심부에,
요나의 혼은 산들의 밑바닥까지 내려갔다고 기록되어있다 (밤낮으로 3일 동안)
* 예수님의 몸은 돌무덤에 있고,
요나의 몸은 큰 물고기 뱃속에서 있었다. (밤낮으로 3일 동안
사람이 죽으면 몸은 흙으로 돌아간다.
창세기 3장 19절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By the sweat of your brow you will eat
your food until you return to the ground,
since from it you were taken;
for dust you are and to dust you will return."
영은 살과 뼈가 없다
누가복음 24장 39절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 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Look at my hands and my feet.
It is I myself! Touch me and see;
a ghost does not have flesh and bones, as you see I have."
*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은 영, 혼, 몸이 다 있는 모습니다.
영, 혼 , 몸의 관계
(예 - 한나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태를 닫으셨다고 생각하자,
그녀의 영이 슬퍼하였고, 그녀의 혼이 괴로워하고,
자기 혼을 주 앞에 쏟아놓았으며,
그의 몸은 음식을 거부하고 눈물 흘리고 통곡하며 기도함)
사무엘상 1장 10절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In bitterness of soul Hannah wept much and prayed to the LORD. ”
사무엘상 1장 15절
“한나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 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나의 심정을 통한 것뿐이오니”
*원어 성경에는 마음은 영을 나타내는 “루아흐”로 번역되어 있고,
심정은 혼을 나타내는 “네페쉬”로 번역되어 있음.
"Not so, my lord," Hannah replied,
"I am a woman who is deeply troubled.
I have not been drinking wine or beer;
I was pouring out my soul to the LORD.“
영, 혼, 몸의 기능
영: 하나님과 소통. 믿음, 소망, 경외함, 기도
혼: 인격을 갖추고 생각, 기억, 양심, 판단, 의지. 인격체인 사람을 대표함,
몸: 생명체로서의 기능 유지
“영은 하나님을 의식하고, 혼은 자기를 의식하고, 몸은 세상을 의식한다.”
* 개역성경에서 "영(spirit)" 은 생기, 영, 신, 혼, 마음, 유령, 영혼 등으로 번역되었고,
"혼(soul)"은 생령, 산 영, 심정, 마음 등으로 번역되었다.
개역성경에서는 영과 혼과 육에 대해 명확하게 분별하기 어렵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개역성경을 주로 사용하는 우리나라에는 많은 이단적 사상과 오류들,
동양사상과 그리스의 헬레니즘 문화에 크게 영향을 받는 것 같습니다.
* NIV 성경은 "영"은 spirit, ghost 으로 "혼"은 soul, living being 으로 번역 되었다.
* 하나님의 이름은 KJV, NIV 성경은 "the LORD" 로 표기 했고 개역성경은 "여호와" 로 표기했다.
그리스도의 승천 교리가 기독론 5대 교리 중 하나
‘칼빈주의 5대 교리’는 칼빈주의의 전체 교리는
아니다.
칼빈주의의 핵심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이다.
칼빈의 이중예정론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대변하는 개념이다.
이것이 아르미니안들이
항론한 이슈가 되었다.
그리고 칼빈주의 5대 강령은 칼빈이 세운 것이 아닌 1618-1619년 도르트 회의(The Canons
of Dordt)에서 아르미니안의 다섯 가지 항론에 변호 성격으로 작성한 것이다.
도르트 회의에서 아르미니안은 개혁 교회에서
퇴출당했다.
예정론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처음으로 주장했다.
그리고 예정론을 칼빈이 이중예정으로 체계화시켰다.
예정은
하나님 작정(decretum horrible)의 불변성을 근거로 나왔다.
칼빈은 예정을 선택과 유기로 확정하는
이중예정(duplex praedestinatio)을 주장했다.
도르트 회의는 아르미니안의 주장에 반대하여 세운 5가지
교리인 전적타락, 무조건적 선택, 제한된 구속, 불가항력적 은혜 그리고 성도의 견인으로 확립했다.
이 다섯 가지 교리는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신다’는 구원 교리에서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네덜란드의 상징이기도 한 튤립(TULIP)의
이니셜로 정리되어, ‘튤립 교리(The Five Points of Calvinism, TULIP)’라고도 한다.
1. 전적타락(전적타락과 무능력, Total depravity) 로마서 5:12-21
‘전적타락’이란
인간은 선을 행할 의지나 능력이 없으며 인간의 공로가 전혀 불가능하도록 전적으로 부패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아담의 원죄로 인해서
모든 사람은 죄에 오염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이다. 이 죄는 한 사람의 의지뿐 아니라 그 감정과 지성, 신체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전적이라는 표현은 타락한 각 사람이 최악의 상태에 있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의 어떤 측면도 죄의
영향을 받지 않은 부분이 없음을 의미한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전적 무능력이라고 한다. 구원시작과 구원진행과 구원완성에서
인간의 공로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알미니안은 부분적 타락(partial depravity)으로 항론했다.
2.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로마서 4:4-8
‘무조건적
선택’이란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자기의 기쁘신 뜻에 따라 인간을 선택하거나 유기하시도록 예정해 두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우리의 윤리적 행위나 우리가 믿을 것을 아시고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무조건적 선택이라는 것이다.
알미니안의 조건적 선택(Conditional election)에 대조되는 구분이다. 절대예정(Absolute
predestination)과 예지예정(foreknowledge predestination)으로 대조를 이루기도 한다. 알미니안은
예지예정을 주장한다.
역사적으로 개혁파 전통에 속한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점을 온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보편적인
부르심과 나란히 언급하면서, 하나님의 주권과 자비, 그분의 은혜와 인간의 전적 타락의 빛 아래에서 이 교리를 설명해 왔다. 이것은
아담이 하나님을 배반하여 타락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죄인 중에서 일부를 선택하셨다는 것이다. 조건 없이 선택하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은혜가 되는 것이다.
3. 제한 속죄(Limited atonement) 제한적이며 특별한 속죄 에베소서 1:4, 마태복음 1:21
제한된
구속이란 말은 오직 선택된 자만이 그리스도의 속죄에 의해 구원을 받는 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능력을 제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오직 구원에 이르도록 예정된 자들에게만 효력을 지닌다는 의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것이 아닌 선택받은 자를 위해서 피를 흘리셨다. 알미니안은 무제한적 속죄(Unlimited
atonement)이다. 보편구원론은 제한 속죄와 어울리지 않고 무제한 속죄와 어울린다.
4.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요한복음 6:37-40, 로마서 8:18-39
‘불가항력적
은혜’란 중생은 전적으로 선택을 기초로 한 하나님의 효과적인 사역의 결과이며,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질 때 인간은 이를 거부할 수
없다는 점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산물인 것이다. 동시에 개혁파는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의 자유, 책임과 역동적으로 상호
작용하는 가운데서 역사함을 주장했다. 알미니안은 가항력적 은혜(Resistible grace)이다. 불가항력적 은혜는 성도의
견인과 한짝이다. 가항력적 은예에서는 구원의 탈락가능성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5. 성도의 견인(굳게 참고 견딤, Perseverance of the saints) 베드로전서 5:10
‘성도의
견인’이란 성도의 보전이라고도 불리는데, 한번 선택받은 성도는 한 때 타락할 수 있어도 궁극적으로 반드시 구원받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의 효과적인 부르심을 받은 자는 인간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양자로 삼은 자녀들은 구원이 보장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선택이 인간의 행위에 의해 무효화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참된 신자들이라도 일시적으로 타락할 수 있지만, 그런
반역의 상태는 최종적인 것이 아님을 주장한다. 한편 이 교리의 의도는 도덕률 폐기론을 변명할 구실을 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고뇌하는 신자들을 위로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여 순종하도록 격려하는 데 있다. 알미니안은 은혜로부터의 탈락 가능성(the
possibility of a lapse from grace)으로 항론했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예정론은
싫어하는 것 같다. 그런데 기독교 안에서도 예정론을 싫어하는 부류가 있다. 예정론을 비판하는 책을 보면 칼빈주의 5대 강령에
대해서 더 심각하게 비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많은 장로교 진영에서도 예정론을 싫어하는 부류가 있다.
예정론을
말하면서 예정론이 맞으면, 전도를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냐고 한다. 이것은 옳지 않다. 우리는 사람들이 선택받았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선택받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스스로 복음을 듣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지
않는다. 그러기 때문에 예정론이 옳기 때문에 더욱더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신다.
예정론을
기계적이나 운명론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예정론은 하나님의 구원 경륜에 관한 것이지 인간의 운명의 화복(禍福)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칼빈은 기독교강요 3권에서 기도에 대해서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우리시대에는
행위 신학이 난무하다. 인간의 인위적인 노력을 주장하는 것은 펠라기우스로부터 시작된 영향으로 볼 수 있으며, 반-펠라기우스주의,
알미니안 그리고 그 아류들에 의해서 반복된다. 인간에게 느껴지는 것을 추구하고, 감정이 벅차 눈물이 나는 현상 등을 성령의 역사로
주장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영(靈)인데, 육체인 인간의 오감(五感)으로 평가하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하나님의
예정은 인간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을 절대자로 믿는다면 절대자의 의지의 불변을 믿으며 예정을 믿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믿음은 이성의 추론에 의해서 확립하는 것이 아니라, 구주 예수의 부르심(Calling)으로 시작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로 진행해야 한다(Duplex gratia). 오직 믿음과 오직 은혜를 추구하는 장로교인은
하나님의 이중예정을 근거로한 칼빈주의 5대 교리를 믿는다. 우리의 이해가 부족해서 하나님의 경륜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기쁘게 겸손하고 믿음으로 찬양하게 한다.
그리스도 승천에 대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해설(23) :
“그리스도의 승천이 주는 유익”을 잘 해석해 놓은 글을 소개하고자 한다*
서론 /
승천은 주께서 사역하신 지상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최후의 장면임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다른 교리에 비하여 크게 다루어지지 않고 있다.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십자가와 부활이 승천과 연결되어 있어 이 승천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루신 구속사역을 완성하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도 신경에서는 이 점을 고백하도록 하였으며, 신실한 성도는 마땅히 우리 주께서 하늘에 오르셔서 완성하시는 구속의 진리를 바르게 알고 이 의미심장한 진리를 확실하게 믿어야 할 것이다.
1. 승천의 사실성
예수님의 승천에 관해서는 복음서를 통해 그 정황을 비교적 상세히 그려볼 수 있다. 부활하신 후 예수께서는 바로 하늘로 오르지 않으셨다. 주께서는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지상에 계시면서 제자들에게 여러 차례 나타나셨다.(고전 15:5-7) 주께서는 이 기간 동안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전에 수 없이 가르치셨던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진리와 그 나라의 능력을 드러내셨던 모든 사역에 대하여 모세오경과 시편 그리고 선지서들을 집중적으로 다시 복습시키셨고, 또한 그 모든 하나님의 구속의 진리들을 증명해 보이셨다.
누가는 이 점을 특별히 강조하여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 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행 1:3)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 후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데리고 감람산으로 가셔서 그들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셨다. 당시의 광경에 대하여 마태복음 저자는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마 28:16)라고 기록했고, 누가복음서 저자는 “예수께서 저희를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저희에게 축복하시더니 축복하실 때에 저희를 떠나(하늘로 올리우)시니 저희가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늘 성전에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니라.”(눅 24:50-53)라고 적었고, 사도행전에서 같은 저자는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 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행 1:9-11)라고 당시 상황을 전하고 있다.
이 구절들을 통해 승천 당시 상황을 그려 볼 수 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실을 제자들이 알게 되자, 그들은 충격 속에서 예루살렘에 있는 마가 요한의 다락방이라 생각되는 곳에 모였다. 부활의 예수께서는 그들과 함께 40일 동안 기거하시며 집중적으로 구약과 예수님의 공생에 이르는 구속의 진리 즉 하나님의 나라의 원리를 학습시키셨다. 그 결과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하여 완성되어지는 구속의 역사를 완벽하게 습득하였다. 그들은 공부하는 가운데서도 평소에 갖고 있었던 질문을 했다.(행 1:6) 그것은 민족적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에 관한 문제였다.
그러나 주님은 다른 차원 즉 영적 차원에서의 하나님의 나라의 원리를 제시하신 후 감람원에서 제자들의 앞에서 새로운 사명을 그들에게 부여 하시고 승천하셨다.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7,8)
그들에게 명하신 바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흩어지지 말고 함께 모여 아버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바 성령의 임재하심을 경험하여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행 1:8)이며, 둘째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고 주께서 그들에게 주신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대 사명을 수행하라는 것이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9,20)
이런 기록들의 사실성에 대해 사도 베드로는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분부하신 바를 제자들이 지킨 결과 오순절에 성령께서 강림하신 바를 체험하고 예수께서 승천하신 바에 대하여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행 2:32,33)라고 증언했다.
2. 승천의 교훈
한편 제자들과 많은 사람이 보는데서 하늘로 올리신 주님은 영광 가운데 하늘로 가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 이 사실에 대하여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께서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히 12:2b)고 하면서 이 예수님은 성도의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히 12:2a)이시기에 성도들은 오직 그만을 바라볼 것을 권면하였다. 그리고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의 그 어떤 대제사장보다도 완벽한 대제사장으로서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신”(히 8:1b) 분이시며,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신 분”(히 9:24)이라고 소개했다.
또한 사도 바울도 승천하신 예수께서는 항상 살아계셔서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분”(롬 8:34b)이시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처럼 신약의 저자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승천하셔서 지금 어디 계신 지를 확실하게 알려준다. 주께서는 승천하신 후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시며 성도들을 위하여 항상 기도하시고 계신다.
한편, 놀라운 점은 사도 바울은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천상에서의 신분이 성도들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 지를 잘 설명하며 교회를 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 이니라.”(엡 1:20-23)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진리를 믿는 초대교회는 항상 교회의 영광스러움을 고백하며 하늘에 올리우신 예수님을 찬양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된 신분의 변화 된 것처럼, 믿는 성도들 역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로서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된 고귀한 신분임을 인식하고, 참된 하나님의 자녀와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지체임을 인식하며 살아가야 하는 자임을 확신 가운데 고백하였던 것이다.
3. 인성은 떠나 계시나 신성으로 함께 하시는 예수님
주 예수께서는 승천하실 때 제자들에게 유언으로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20)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예수께서 승천하시면서 어떻게 지상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있을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이 주제는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에 대한 주제와 성찬교리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1) 참 인간이시며 동시에 참 하나님이신 예수님
인간의 죄로부터 구원해 줄 수 있는 존재는 참 인간이어야 하며 동시에 참 하나님이셔야 했음을 질문 36에서 살펴보았다. 그 이유는 죄 가운데 살아가는 인간에게 퍼부어진 하나님의 진노를 감당할 그 어떤 인간도 없고 하나님께로 이끌 수 있는 그 어떤 인간도 없기 때문이다. 참 인간이시며 참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그 모든 형벌을 친히 담당하셨고, 또한 이 모든 죄 값을 치르시어 죽으신 후 부활로 승리하셔서 그 얻으신 혜택을 모든 인간들에게 나주어 주시는 완벽한 구속의 역할을 감당하셨다. 이러한 신인(神人, God-Man)이신 예수께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영원한 중보자로서 충실하게 감당하셨다. 주께서는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이 은혜로운 사역을 감당하고 계신다. 그리하여 우리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이 놀라운 진리를 고백하시며 모든 성도를 위해,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요 17:24)라고 기도하셨다.
(2) 인성으로는 떠나 계시지만, 신성으로 함께 하심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은 이 세상에 없기에 성도들과 떨어져 있는 몸이지만 영광스러운 몸이시다. 주님은 승천하시면서 제자들과 함께 언제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신인(神人)이신 예수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시다. 과연 어떻게 이 신비스러운 일이 벌어지게 되는 것일까?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위엄 그리고 은혜와 영으로 역사하시는 신비스러운 통치는 바로 성찬에서 나타난다. 비록 예수께서는 하늘로 올라가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지만, 여전히 성찬을 통하여 주께서는 신성과 위엄과 은혜와 영으로 참여하는 성도들 가운데 계시는 것이다. 이는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께서 아버지로부터 영광의 권세를 부여 받으셔서 통치하시는 ‘신령한 나라’를 세워 가시는 것을 의미한다.
즉 주께서 이 신령한 나라에 초대된 성도들과 함께 신령한 교제를 나누시는 것이 성찬이다. 초대교회로부터 이 성찬은 다시 오실 재림의 주님을 기억하며 행해야 하는 거룩한 예식이었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 11:26)
성찬을 통하여 주님의 인성과 신성은 초대교회서부터 믿고 고백했던 것으로 이를 정리하여 천명한 칼케돈 신조(Chalcedon Creed 451AD)에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은 “혼동되거나 변하지 않고 분리되거나 나눠지지도 않는다.”라고 바르게 고백했다.
(3) 항상 함께 계시겠다는 약속 실현의 상황
그러면 예수님의 육체적인 승천을 믿는다면 항상 함께 계시겠다는 예수님의 약속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앞에서 살펴본 성찬으로 통하여 주님의 임재를 확신하게 되지만, 육체적으로는 이 세상에 더 이상 계시지 않으시는 예수께서는 항상 성령을 통하여 거듭난 성도들과 함께 계신다. 주의 영이신 성령께서는 예배를 드리는 과정에서, 말씀을 읽고 들을 때, 또한 기도와 교제 가운데 성도들과 함께 계신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에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으시며 사역에 임하셨던 그 상황으로부터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언제나 당신의 자녀들 속에 임하셔서 놀라운 구원의 사역을 이루어 가시는 것을 의미한다.
성도는 이 진리를 통하여 하늘에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대제사장의 중보기도 사역에 힘입어 항상 기도하며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체험하며 역동적인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히 7:25)
4. 예수 그리스도 승천의 유익
요리문답 질문 47은 승천 교리의 유익을 설명하고 있다. 그 유익을 간략하게 네 가지로 꼽을 수 있다.
(1) 대언자(代言者) 예수
승천하신 예수께서는 마치 법정에서 피고인을 위하여 변호해 주는 변호사와 같은 역할을 감당하신다. 히브리서 기자의 진술과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온전한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간구하시는 사역을 지금도 계속하는 대언자이다. 사도들은 승천하신 주님의 이 놀랍고 신비스러운 사역에 대하여,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4b)라고 하였으며 또한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라고 선언하셨다. 정말로 우리를 위하여 대언해 주시는 기도 자가 있다는 사실 얼마나 위로가 되고 감사한 일인가? 이는 우리의 죄의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해 주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완벽한 구원 사역인 것이다.
(2) 영적 고귀한 신분의 변화
성도를 향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속에는 구체적으로 믿음으로 승천하신 주를 고백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신비스러운 영적 진리가 담겨 있다. 그것은 바로 예수와 연합되어 상승된 영적 신분의 변화이다. 비록 육신은 이 땅에서 살고 있지만 성도의 영적 신분은 이미 세례 받을 때 고백한바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살아난 자인 것이다. 즉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로서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혀진 고귀한 신분으로 변화된 신분을 획득한 존재인 것이다.
이는 전적으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자비하심으로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신”(엡 2:5,6) 것으로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이다.(엡 2:8) 그러므로 이 진리를 받아 항상 감격하는 자는 이 세상의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이 영광된 신분의 특권을 누리며 승리의 삶을 살게 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 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 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4-39)라고 외쳤다.
(3) 하늘의 것을 추구하며 사는 자
성도의 이러한 놀라운 신분의 변화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로서 하늘에 가 있고, 또한 죽은 다음에도 주님께로 갈 것이고, 다시 주께서 오실 때 영화된 부활의 몸으로 주님과 함께 영원히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성도의 영적 신분의 상승에 대한 보증이 그리스도의 승천이다.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하여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골 3:1)고 했다. 성도들의 이 땅에서의 삶은 바로 하늘의 것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는 마땅히 예수와 연합된 자들의 당연한 삶인 것이다.
(4) 보증이신 성령님
히브리서의 믿음의 선조들은 이 땅에서 나그네 즉 이민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사모함이 얼마나 강했는지는 다음 구절에서 잘 나타난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 로라 증거 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다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 11:13-16)
이러한 성도의 길은 사도 바울이 골 3:1-5의 말씀과 같이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그는 더 이상 땅의 것을 추구하지 않고 위에 계신 그리스도의 것을 구하면서 살아가는 자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승천이 성도에게 주는 유익이다. 이는 오직 성령님의 임재로만 가능하다. 주께서는 이미 이 진리를 말씀해 주셨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 14:16-18)
5. 구속 사역의 완성인 승천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루신 구속 사역의 완성이란 의미가 담겨있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3-15) 즉 모세가 든 놋 뱀과 같이 십자가에 달리시어(민 21:9, 요 3:14), 모세의 놋 뱀을 본 사람이 목숨을 구한 것과 같이, 예수께서 달리신 십자가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다. 또한 예수께서는 공생애 마지막 순간에 동일한 십자가 사건을 언급하면서 자신이 어떠한 죽음을 죽으실 것을 말씀하시고 동시에 땅에서 들려 하늘로 올라가셔서 모든 민족을 구원하시는 사역을 수행하겠다고 말씀하셨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요 12:32-33)
이 점에서 승천은 바로 예수께서 수행하신 지상 사역의 완성이며 구속 사역의 완성이다.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그리스도는 하늘로부터 오신 분이시며(고전 15:49), 죄로 인하여 상실한 인간들에게 하늘에 속한 형상을 덧입혀 주시기 위하여 친히 승천하시고 지금도 구속의 사역을 수행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엡 4:8-10)
결론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은 성령의 역사로 지금도 성도들 속에서 보증이 되셔서 확실한 구속의 완성을 바라보게 한다. 이는 성령께서 이미 말씀해 주신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승천을 믿는 성도들의 마음속에서 역사하고 계심을 뜻한다.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후 1:21,22)
그러기에 성도들은 이 성령님을 의지하고 이미 우리 위하여 하나님께 대언(중보) 기도를 하고 계시는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여 이 세상에서 빛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하고 또한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을 거룩한 신부로서의 영광스러움과 순결함을 잃지 않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히 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