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렛 예수와 다윗의 자손 예수


나사렛 예수 & 다윗의 자손 예수


마가복음 10:46~52

46.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48.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9.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50.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51.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사도행전 3: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사도행전 4:10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철학자 하이덱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 이라고 정의합니다.

그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를 살펴보면 그 언어에 그 사람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가늠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느 기업의 회장 비서로 근무하는 사람이 화장실에서 용무를 보고 있었는데 누군가 화장실 문을 두드립니다.
그러자 용무를 보던 사람이 "예, 들어오세요!" 하더랍니다.
직업 의식이 화장실에도 나타난 현상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사람의 직업이 무엇인지 아시겠지요?

또 하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또 다른 사람이 화장실에서 용무를 보고 있는데 또 누군가 화장실 문을 두드립니다.
그러자 용무를 보던 사람이 "예, 통화중! 통화중!" 이라고 하더랍니다.
그 사람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아시겠지요?
전화교환수라고 합니다.

나사렛 예수인가?
다윗의 자손 예수인가?

예수님과 관련하여이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다른 몇 가지 예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왜 그렇게 했습니까?

중요한 조상

단순한 대답은 유대인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 인 다윗 왕이 예수의 조상 중 하나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마태 복음 1장에서 예수 계보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이런 식으로, "다윗의 자손"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예수님이 다윗의 왕의 계보의 후손임을 의미했습니다.

이것은 고대 세계에서 흔히 말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지상의 아버지는 요셉입니다.

요셉이나 예수님은 다윗의 문학적 자녀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조상과의 관계를 보여주기 위해 "아들"과 "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그 날의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그렇지만 천사가 요한을 묘사하는 "다윗의 자손"이라는 용어와 예수님을 묘사하기 위해 "다윗의 자손"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시각 장애인의 사용 사이에 차이가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장님의 묘사는 제목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은 현대 번역본에 대문자로 쓰여졌습니다.

메시아를 위한 예언

예수님 당시, "다윗의 자손"이라는 용어는 오랫동안 기다려온 의로운 왕인 메시야의 표제였습니다.
그분은 단호하게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모든 승리를 얻었습니다.
그리고이 용어의 이유는 다윗 자신과 모든 관계가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그의 후손 중 하나가 영원히 하나님의 왕국의 통치자가 될 메시야가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사무엘하 7:11-16

다윗은 예수의 시대보다 약 1,000 년 전에 이스라엘의 왕으로 다스렸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수세기가지나면서 위의 예언을 잘 알고있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야가 이스라엘의 운명을 회복하기를 간절히 원했으며, 메시야가 다윗의 선에서 올 것이라고 알고있었습니다.
그러한 모든 이유 때문에 "다윗의 자"라는 용어는 메시아의 칭호가되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시대에 이스라엘 왕국을 발전시킨 지상 왕 이었지만, 메시아는 영원 토록 통치했습니다.

구약의 다른 메시아 예언들은 메시아가 병자를 고치고 눈먼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도와주고 절름발이가 걷게한다는 것을 분명히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자손"이라는 용어는 치유의 기적과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는이 사건에서 예수님의 공개 사역의 초기 부분에서 그 관계가 실제로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2
그들은 눈 멀고 벙어리가있는 귀신 들린 남자를 데려왔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를 고쳐 주셨다.

23
모든 사람들이 놀라서 "다윗의 자손이 될 수 있겠 느냐?"하고 외쳤다.

마태복음 12:22-23 

복음서의 나머지 부분은 신약 성서와 함께 전체적으로 그 질문에 대한 답이 명확한 "예"라는 것을 보여 주려고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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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예수만 바라 보고 그 분만 섬기며 그 분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는 삶을 사는데 자신을 가로 막는게 있으면 다 버려야만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 보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 하고 말합니다.

주님이 제자들이 한 커다란 믿음의 순종을 알아주기를 원했죠.

그러자 주님은 29~30절에서 대답하시기를

29.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30.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역시 믿는 자들 삶의 우선 순위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 보고 그 분의 말씀에 따라 믿음의 삶을 사는데 있어 오직 주님을 믿고 찬양하며 그분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왜 이걸 요구하시냐면 주님이 본을 보이신 삶을 따르는 사람들은 죄를 짓지 않습니다.
죄를 짓는 것이 자연히 싫어집니다.
그러나 죄라는 것이 알고도 짓고 모르고도 짓는 것이기 때문에 주님만을 바라보는 삶을 살면 죄에 대해서 알고 늘 회개하는 삶을 삽니다.

엄청난 복인데,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는 믿는 사람 누구나 주님께서 자기의 영광을 위해 은사를 주셨는데 주님께서 보내주신 자리에 있는 사람이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하는 자신의 은사

전도하는 것, 말씀 가르치는 것, 기도하는 것, 봉사, 재물 등 모든 것을 더해주시는다는 복을 말씀하신 겁니다.

이렇게 살아있을 때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순종의 삶을 사는 사람이라면 주님과 같이 살 때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리라 고 하셨습니다.

31.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32.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기워 희롱을 받고 능욕을 받고 침 뱉음을 받겠으며
33. 저희는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일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34.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추였으므로 저희가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

그리고 자신이 십자가에서 능욕 당하심을 가르치시는데 세번 째 언급하시는거죠.

누가복음 12:49-50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불은 사람을 살리시는 성령의 불을 의미하기도 하며 심판의 불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오신 것만으로도 불이 붙어야만 하는데도 하나님의 뜻은 창세 이후로 다시 심판이 있을 그날까지의 온 인류의 죄를 씻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받으실 죽음이 남아 있으니 그 기간 동안 가르쳐도 가르쳐도 깨닫지 못한 사람들을 생각하니 참으로 민망하셨음을 토로하신 겁니다. 

31~34 말씀은 마지막 유월절을 보내시기 전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며 하신 말씀입니다.

세번 째 언급했지만 제자들이 하나도 깨닫지 못했고 이유는 그 말씀이 감추였으므로 저희가 가르침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아직 때가 안되어 드러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성경 말씀의 본 뜻이 드러나기 위해서는 성령의 사역이 있어야 합니다.
이들이 알기 위해서는 성령의 가르침이 있어야만 했던 겁니다.
때가 맞지 않을 때에 사람들이 아무리 학문적 연구를 하더라도 주님께서 말씀하신 뜻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오순절 날 성령을 받은 후에야 주님의 가르치심을 깨달을 수 있었던 겁니다.

결국 성령 충만의 문제 입니다.
말씀을 바르게 깨닫기 위해서는 성령이 충만해야만 됩니다.
충만하지 못하면 이게 정말 큰 문제로 대두되게 됩니다.
특히나 사역자들은 성령충만해서 성령의 이끌림에 의해서 말씀을 바르게 깨달아야만 되고 바르게 가르쳐야만 되는데 늘 이게 오늘 날까지도, 앞으로도 있을 문제 입니다.

성경은 성령 충만함을 받으라고 강력하게 권합니다.
충만하지 못하면 믿음의 생활에 있어서 늘 어린 아이일 뿐입니다.
이게 바리새인들, 즉 종교인들의 문제였습니다.

가장 성경을 잘 안다고 한 그들이 사실은 성경을 몰랐던거죠.

그래서 구약에 문자적으로 기록된 예언의 말씀들을 그들은 스데반이 행 7 : 51에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증언한대로 말씀을 바르게 깨달을 수 없었고 자신들의 세상의 안목과 정욕의 안목으로 볼 때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은 엄청난 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매일같이 성경을 상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봉사가 봉사를 가르치면 안되는게 여기에서 오는건데

제가 제일 두려워하는 점이기도 합니다.

봉사 주제에 봉사를 양산하게 되는건지나 않은지 정말 두려운 문제죠.

이 함정에 빠져 들지 않기 위해서는 말씀과 기도를 양 축으로 삼아 날마다 성령님만이 역사하심을 간구하여 성령 충만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성경은 한번 말씀에 비추이고 성령을 받은 자도 배도한다고 경고하며 사도 요한은 요한1서 5장에서 사망에 든 자들이 있으니 그들을 위해 기도하지 말라고 썼습니다.

 

지금은 복음에 너무 유사한 것들이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심리학이고 뉴 에이지들이 교묘하게 스며 들어와 복음인 양 지금 수도 없이 선포되고 있씁니다.

가장 흔하면서도 가장 교묘한 속임수가 긍정적 사고 로 대변되어지는 것들이지요.

" 주 안에서 너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

믿음만 있으면 너는 네 뜻대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 라고 선포되는데요

그에 앞서서 꿈을 가지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네가 자기 노력과 희생을 다해가며 나아가다 보면 다 이루어진다 라는 가르침 입니다.

그리고 그 끝을 들여다 보면 예수님은 온데간데 없고 자기의 노력으로 인한 성취감의 뿌듯함인한 교만감만이 있습니다.

자기 인생의 지배자가 주님이 아니라 자기인, 즉 자기가 하나님이 되어 똬리를 틀고 앉아 있는겁니다.

" 나는 죽을 때 까지 내 힘, 내 능력으로는 이룰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 가 올바른 고백입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여리고로 들어가십니다.

35 : 여리고에 가까이 오실 때에 한 소경이 길 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36 : 무리의 지남을 듣고 이 무슨 일이냐고 물은대

37 : 저희가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신다 하니

38 : 소경이 외쳐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39 : 앞서 가는 자들이 저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저가 더욱 심히 소리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0 :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명하여 데려오라 하셨더니 저가 가까이 오매 물어 가라사대

41 :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42 : 예수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

43 :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좇으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

 

여리고는 참 중요한 의미를 지닌 말입니다.

구약에서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여리고를 무너뜨릴 때 한 일이라고는 하나님이 명하신대로 그대로 행하는 순종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눈으로 보는 시각으로 인한 생각에는 도저히 무너뜨릴 수 없는 것 같은 여리고성을 믿음의 순종으로 무너뜨렸습니다.

 

예, 믿는 사람들에게는 여리고성을 무너뜨리는 것과 같은 영적 싸움이 앞에 놓여 있습니다.

첫관문 입니다.

주님만을 향한 믿음을 무너뜨리려는 사탄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방해들이 성도들을 삼키려고 늘, 언제나 덤벼들고 있지요.

이것을 무너뜨리는게 바로 믿음 입니다.

그에 따른 행위가 내 뜻은 단 하나도 섞이지 않는 주님 뜻에 순종하는거죠.

그럼 하나님이 여리고성을 무너뜨리신 것같이 우리의 모든 사탄의 방해들을 하나님께서 직접 무너뜨려주시는 겁니다.

즉 영적 싸움은 내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면 무너뜨릴 수 없다는 사실 입니다.

가장 염려스러운 일은

자기 영적 상태는 도외시한 채 남의 영적 상태를 염려하는 겁니다.

성경이 없으면 바리새인이나 예수의 제자들이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베드로이지요.

그는 예수님과 함께했을 때 주님과 함께라면 지옥엔들 못가겠냐고 장담을 합니다.

제자들도 따라서 장담을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에수님이 말씀하신대로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을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성령충만하지 못하면 자기 분수를 모르고 장담을 하게 되고 성령충만하지 못해 지킬 수가 없게 됩니다.

성령충만하면 분수를 모르는 장담을 하지 않게 되고 모든 것을 주님이 이루시는 것을 믿음으로 순종하며 지켜 보게 되고 감사드리는 겁니다. 

 

그 영적 싸움의 현장인 여리고 성을 들어가기에 앞서 소경 하나를 만났는데

그 소경에게 사람들이 나사렛 예수가 지나간다고 가르쳐 줍니다.

나사렛 예수로 부르는 것은 경멸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구원의 메시야가 태어나겠느냐는 조롱 입니다.

그런데 소경은 나사렛 예수란 말을 듣고는 "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 하고 외칩니다.

여러분들도 외치세요.

"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

이스라엘 사람 소경이 " 다윗의 자손 예수여 " 하는 부르짖음은 지금 시각으로서는 예수를 모르는 시각이지만 이 소경은 당시로서는 성경을 알고 바르게 부른 것입니다.

이 호칭이 성령 받아야만 나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라고 바뀌는 것입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를 조롱하는 자와 예수에게 자기의 모든 것을 의탁하는 자와의 대비입니다.

예수님은 부르짖는 자에게 대답하시지 않는 경우는 단 한번도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리새인, 서기관들과 소경의 차이입니다.

그들의 영적 상태는 같았습니다.

다만 소경은 믿었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다.

 

결과는 믿음입니다.

성경의 모든 것을 믿어라 이겁니다.

믿으면 성령께서 알게해 주시고 깨닫게 해주시고 순종할 수 있는 힘을 주시는겁니다.

믿음은 뭘까요? 최고의 믿음은 두 손을 들고 주님 앞에 나옵니다.

백기 퉁항, 하나님 앞에 무조건 적인 항복을 말합니다.

 

베드로가 성령이 왔을 때 완전하게 두 손을 들고 항복을 했죠.

영어로는 소렌드(?) 즉 포위 당하다 라는 뜻인데 성령에 포위 당하면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여 역사하시옵소서 하고 항복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네가 포기해라.

네가 포기하면 하나님이 직접 하시겠다.

네가 포기 안하면 나는 일하지 않는다.  

 

믿음이 모든 것의 열쇠 입니다.








성경에 태어날 때부터 가진 이름보다는 나중에 붙여진 이름이 더 유명해진 이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별명이든 바뀐 이름이든 그 사람을 연상시키는 말이 됩니다.
그 이름은 나름대로 의미가 담겨져 있기에 대상을 취급하는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서 행동이 느리거나 말이 느린 사람을 ‘느림보’ 혹은 ‘거북이’라고 부른다면 그 혹은 그녀는 뭔가 느리게 행동하는 이임을 인정하게 됩니다.

스스로가 부인하지 않은 경우 그 다른 이름은 그 혹은 그녀의 성격이나 행동 양식을 나타냅니다.
때문에 사람들이 자의건 타의건 간에 다른 이름을 지어 부른다는 것은 그 사람의 존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포함되어 있어서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에 대하여 자부심을 가진 이들은 이름에 대해 소중하게 여기고 자신의 가치를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합니다.
명예의 상징인 이름을 함부로 한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감이 부족하거나 자존감이 낮은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남이 불러주는 것이 이름이라면 그 이름은 귀하고 의미가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 이름의 대상은 귀하고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때로는 무명의 사람들이 가치 있는 삶을 사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들 무명의 영웅들은 우리 주변에 많이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분명 존재하였고 그 자취를 이웃에게 남겼으며 그 이야기가 전해질 때마다 그 이름도 빛나게 될 것입니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살다간 무명의 인사들이 세계와 사회, 나라와 민족을 위해 자신의 삶을 헌신하였다는 것에 깊이 감사하면서 이런 이들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립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이들을 통해서 역사를 운행하시고 섭리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사람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복음으로서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여리고로 길을 가시는 예수님과 제자들에 대한 소문이 온 동네에 쫘~악 퍼졌습니다.
거기 채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이 구걸을 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지나가신 다는 소문이 들렸습니다.
곧 오신다는 소리에 길 가에 앉아 있다가 소리를 질러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질책에도 불구하고 간절히 예수를 부른 그 사람은 이름이 없었습니다.
그냥 사람들에게 디매오의 아들, 바-디매오라고 불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간절히 주님을 찾았고 주님은 그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시고 그를 불러서 원하는 대로 눈을 보게 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길에서 예수님을 따라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구원사역에 산 증인이 된 것입니다.

복음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그는 그리스도의 산 증인이 되어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이고 또한 그런 사람을 만나고 길러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우리가 믿는 믿음에 만족하고 전도하거나 선교하지 않으면 우리의 믿음은 우리가 죽음으로서 빛을 잃게 될 것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게 되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영적인 원리를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먼저 받아 가진 빛을 다음 사람에게 전해주어야 합니다.
그게 전도고 복음을 맡은 우리의 사명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을 통해 주 예수님의 복음을 증언하는 이유는 우릴 통해 복음을 듣는 이들로 하여금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먼저 부르심을 입은 까닭은 단지 주님의 은혜로 그렇게 된 것이지 다른 이들보다 나은 것이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의 모습을 먼저 닮아가고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되어서 그리스도의 향기로서 역할을 감당하라고 부르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디매오는 그 일로 부르심을 입었고 그 역할을 위해 길을 떠났습니다.
그가 가진 체험은 그를 주님께로 붙들려 살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주님을 만난 경험이 있으십니까?
없다면 구하십시오.
그리고 만사 가운데 역사하시는 주님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가능할까요?
우선 믿음으로 만사가 주님의 섭리 가운데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세상을 보십시오.
그 사랑과 은혜가 충만한 세상을 보시면 아시게 될 것 입니다. 이론이나 이성적으로 이것을 증명하거나 설명할 수 없습니다. 단지 믿음을 가지고 보면 달리 보이고 달리 보이면 달리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바디매오의 입장에서,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기에 그가 그토록 간절히 예수를 불렀을까요?
그가 예수님을 부른 호칭에서 그 의미를 찾아보겠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나사렛에서 오신 분이라고 불렀습니다.
‘나사렛’은 천하고 경멸받는 곳을 의미하였으며 가난하고 빈약한 출신이라는 오명(汚名)을 가지게 할 정도로 무시 받는 촌이었습니다. 그런 곳에서 위대한 빛이 세상에 비취게 되었습니다.
가난한 사람 무시당하는 사람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의 희망이 예수님이셨습니다. 비방거리의 이름이 동경과 희망의 이름으로 변한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라는 말은 사실 좋은 의미로 여겨지지는 않습니다.
귀하고 높으신 이의 이름에 걸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다윗의 혈통을 가진고 나신 분이셨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가르침에나 삶에서 본이 되시는 분이었습니다.
왕궁에서 태어나 온갖 귀한 대접을 받아야 할 분이셨지만 그렇지 않고 낮고 낮은 자리에서 나시고 자라셨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예수님을 업신여길 이유는 없었습니다.
그분의 능력과 나타난 이적은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도록 이끄는 데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사렛 출신 예수라는 이름은 항상 주님을 따라 다녔습니다.
그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예수께서는 온전히 비천하고 가난하고 무시 받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셨고 친구삼아 주셨으며 그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리고 선포하시길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저들은 천국의 주인들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예수님 때문에 무시당하고 박해를 받는 사람에게 복이 있다고 하셨고 상을 받게 되고 저들이 천국을 소유한 이들이라고 하셨습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가 성경을 어떻게 들었는지 혹은 이해하고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예수님에 대하여 들은바가 유별하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갈릴리 출신으로 유다지파가 아닌 스불론 지파의 땅이었습니다.
그곳은 이스라엘 사람들로부터 이방인의 땅으로 여겨 불신과 멸시의 대상이 되는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바디매오는 정확하게 예수님의 출신을 유다지파 다윗의 자손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 의미는 다윗의 위가 영원하리라는 약속에 의지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구원자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으로 오리라는 약속의 말씀을 믿고 있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행하신 일과 가르침에 대해 소문을 들었고 그 내용에 비추어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그 지식은 예수에 대한 믿음에 이르기에 충분하였습니다.

그는 다윗의 자손 예수여 라고 부르짖고 있었습니다.
그 믿음은 메시아 대망에 대한 믿음이었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눈으로 그를 보기를 원하는 그는 다른 것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눈으로 메시아를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게 됩니다.

우리의 모습을 살펴봅시다.
정말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으로 온 세상의 구주로 믿습니까?
아니라면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는다고 멸시하고 조롱하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할 마음이 있습니까?
모든 사람은 예수님의 구원역사를 필요로 합니다.
누구나 구원 받을 수 있으며 누구든지 구원받아야 합니다.
이 일에 주님은 우리를 여기에 부르셨고 이 시대에 나게 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믿습니까?
여러분과 저의 믿음의 고백이 주님 앞에서 한 것임을 기억하시고 말씀과 기로로 거룩한 삶을 살고 우리의 구세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우선을 두시길 축복합니다.
주님이 우리의 복이며 은혜입니다.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 그 날이 속히 오기를 기대합니다.


죽어가는 사람 뇌 관찰했더니… “주마등처럼 인생이 스쳐가더라”

죽어가는 사람 뇌 관찰했더니… “주마등처럼 인생이 스쳐가더라”


사람이 죽기 전 그동안 살아왔던 삶이 눈앞에 스쳐 지나가는 일이 사실일 수도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미국 루이빌대 연구진은 “사망한 87세 환자의 뇌 활동 기록을 통해 죽음 전후로 기억을 회상하는 뇌파 패턴이 확인됐다”라고 22일(현지 시각) 국제학술지 ‘노화신경과학 최신연구’에 밝혔다.

한 87세 남성이 낙상으로 뇌출혈이 발생해 병원 응급실에 입원했다.
연구진은 87세 환자의 간질 발작을 감지하고 치료를 위해 뇌파 검사를 진행했다.
그러던 중 환자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우연히 죽어가는 사람의 뇌 활동을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연구진은 사망 당시 측정한 뇌 활동 900초 가운데 심장박동이 멈춘 전후 30초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조사했다.
분석 결과 환자의 마지막 순간에 감마 뇌파를 비롯해 알파·베타·델타 등 다양한 유형의 뇌파가 변화했다.
여러 뇌파 간의 상호 작용이 뇌로 흐르는 혈액이 멈추고 나서도 계속됐다.

뇌파는 살아있는 인간에서 볼 수 있는 뇌의 활동 패턴이다.
감마를 포함한 다양한 유형의 뇌파는 기억회상, 꿈, 명상, 정보처리 등 높은 인지 기능에 관여한다.

루이빌대 신경외과의사 아즈말 젬마 박사는 “죽음에 가까워졌을 때 중요한 삶의 마지막 기억을 회상하는 것일 수 있다”라고 추측했다. 앞서 인간이 아닌 동물 실험에서도 쥐가 죽기 전 뇌에서 감마 뇌파가 관찰된 바 있다.

이번 해외 연구에 대해 KIST 뇌과학연구소 조일주 박사는 “세포는 죽기 전 평소보다 더 활발한 신호를 보내는데 기억을 담당하는 부분의 세포가 죽으면 기억회상, 시야를 담당하는 부분이라면 환한 빛을 보게 된다”라며 “임사(거의 죽음에 이르는 단계) 경험도 뇌가 극한에 갔을 때 발생한 뇌 신호를 통한 것일 수 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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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4-2022

한국인의 죽음에 대한 이해는 그 표현에서 엿볼 수 있다.

돌아가셨습니다
떠났습니다

돌아가셨다는 표현은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가야 할 곳으로 가셨다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떠나셨다는 표현은 지금까지 머물던 곳을 떠났다는 의미라고 하겠다.

그런데 죽음이란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대부분의 지식은 몇 가지 경로로 얻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배움의 과정
둘째는 경험의 과정

배움의 과정을 학습이라고 합니다.
경험의 과정을 체험학습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죽음은 체험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배우는 것도 온전한 배움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던 사람이 내가 죽었을 때 그 현상을 설명해야 합니다.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경우 대부분 기절의 상태를 말합니다.
따라서 죽음을 이해하려면 특별한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신앙"이라고 합니다.

셋째는 신앙
신앙의 과정을 성경에서는 죽음 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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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 죽이겠다” 6·25 공산당 학살 사실 확인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232879&code=11131100&sid1=soc

한국전쟁 당시 북한 공산당이 종교 탄압과 집단학살을 자행했다는 국가기관의 공식 연구 결과가 나왔다.
1950년 유엔군의 인천 상륙 당시 전세가 불리해진 북한이 각 지역에 “반동세력을 제거하고 퇴각할 것”을 명령했고, 이후 종교인을 다수 포함한 전국적인 학살이 이뤄졌다는 것이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6·25전쟁 전후 기독교 탄압과 학살 연구’ 용역 보고서를 22일 발간했다.
보고서는 한국전쟁 기간 기독교인 1026명, 천주교인 119명이 북한에 의해 희생됐다고 집계했다.
연구를 맡은 서울신학대 박명수 교수팀은 문헌 자료 등을 토대로 교인들의 피해 정황을 찾아낸 뒤 해당 교회를 방문해 생존자들로부터 관련 증언을 확보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충남 논산의 병촌교회에서는 1950년 9월 27일과 28일 사이 신자 66명이 북한군에 의해 집단학살됐다.
사형 판결을 받고 극적으로 도망친 생존자는 당시 상황에 대해 “공산당원들이 ‘예수를 믿으면 다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삽과 몽둥이, 죽창 등으로 구타하고 구덩이에 파묻었다.
젖먹이를 가슴에 안고 죽은 임산부도 있었다”고 진술했다.

좌우 갈등이 심했던 전북 군산 지역의 여러 교회에서도 피해가 컸다.
원당교회 신자 14명과 해성교회 신자 7명은 방공호에서 살해됐다.
당시 상황을 목격했던 피해자의 손자는 “‘지금이라도 예수를 모른다고 말하면 살려주겠다’고 협박받았다.
이를 거절한 교인 일부는 방공호에 매장됐다”고 진술했다.

이런 피해에도 불구하고 교인들은 가해자를 용서하고 복수하지 않는 기독교 정신을 보여줬다고 보고서는 기술했다.
66명이 희생된 병촌교회는 가해자들을 용서했고, 22명이 희생된 전북 정읍 두암교회는 가해자를 기독교 신자로 만들어 같이 신앙생활을 했다고 한다.

연구팀은 “한국전쟁 시기의 기독교인에 대한 숙청은 북한 당국의 공식적인 지시사항”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면서 “기독교인들은 각종 우익단체에서 활동했고, 공산주의자들은 기독교를 적대 세력으로 간주해 탄압했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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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바빙크(1854~1921) / 네덜란드 신칼뱅주의 신학자/ 개혁교의학(Reformed Dogmatics)


헤르만 바빙크(1854~1921)


“지난 10년간 네덜란드 신칼뱅주의 신학자인 바빙크라는 새로운 별이 궁창에서 떠오르는 중”이라며 “그의 저작들의 번역본이 영어 포르투갈어 한국어 스페인어 러시아어 중국어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밝혔다.

네덜란드 캄펜개혁신학교와 암스테르담자유대학교 교의신학 교수를 지낸 바빙크는 개혁신학 전통에 깊이 뿌리 박은 신학자로 알려져 있다.

네덜란드 사회가 급속히 세속화되던 시기에 정통주의 신학과 기독교 세계관을 설파했다.
‘개혁교의학’ ‘믿음의 확신’ 등이 대표작이며 2003년 영어로 번역된 ‘개혁교의학’(Reformed Dogmatics)은 바빙크의 세계화에 일조했다.

100년 전 칼뱅주의 신학자가 오늘날 다시 전 세계 교회에 소환되는 이유를 분석하면서 당대 그의 개혁파 동료들보다 더 컸던 크로스오버의 견인력과 사람을 끌어들이는 특성 등을 꼽았다.

에든버러대 제임스 에글린턴 선임강사는 “바빙크는 21세기 독자들도 눈에 띌 정도로 균형 잡힌 방식의 글을 썼다”며 “기독교 전통의 폭과 깊이에 대한 전망을 놀랍도록 명료하게 제공했다”고 말했다.

그는 “바빙크는 장로교 개혁주의 전통을 가진 신학자였지만 협소하거나 종파적이지 않았고, 오히려 문화와 세기를 뛰어넘은 전체 기독교 신앙의 표현을 추구했다”며 “확고한 칼뱅주의 교리를 하나로 묶으면서도 ‘칼뱅주의가 유일한 진리는 아니다’라고 공개적으로 확언한 바 있다”고 했다.

이런 이유로 바빙크의 책들은 한국 장로교인뿐 아니라 미국 남침례교 신자, 오순절 교단의 10대들에까지 널리 읽히고 있으며 칼 바르트를 따르는 교파에는 신학 역사에 대한 지침으로서 바빙크를 의존하고 있다고 CT는 짚었다.

바빙크는 당시 신학계를 초월해 정치 교육 여성인권 저널리즘 분야에서 목소리를 내며 사회적 격변 속에서 기독교적 가치관을 강조했다.

인종차별주의에 저명한 비평가로 활동했고 도시 빈곤에 반대하며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이를 위해 주택 기준과 세법의 변경까지 요구하는 등 구체적인 대안까지 제시했다. 가난한 공장 노동자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이라는 이유로 그들 편에 서기도 했으며, 소녀들을 위한 평등한 교육과 여성 투표권도 요구했다.

바빙크가 기독교 신앙을 ‘범기독교적’(catholic) ‘맥락적’(contextual) ‘공적’(public)이라고 정의한 부분도 21세기 기독교에 여전히 영향을 줄 수 있는 중요한 교훈이라고 언급했다.

에든버러대 신학부 사이먼 시미언 수 연구원은 “바빙크가 제시한 기독교 신앙의 공적 성격은 세상에 순응하는 것도,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는 것도 아니라 ‘세상 속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며 “그는 인간의 모든 생활과 영역 속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기를 바랐다”고 말했다.

밧세바가 아니라 우리아의 아내라고 하셨을까?

예수님의 족보(마태복음 1:6)

이새다윗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성경을 읽을 때 주의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1. 선입견(先入見)
2. 편견(偏見)
3. 고정관념(固定觀念)

미국 영화의 등급제

G(General) 등급은 누구나 관람할 수 있다는 영화.

PG(Parental Guidance) 등급은 부모의 감독을 받아야만 볼 수 있는 영화
예를 들면 PG 13은 13세 이하는 부모의 감독을 받아야 한다는 영화

R(Restricted)의 약자로 폭력적이고 성적인 내용이 많아 16세 이상이 관람할 수 있는 영화  

영화의 등급에 따라 성경의 이야기를 적용한다면 상당한 어떤 내용은 R 등급에 속한 것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대표적인 이야기는 우리아(Urias 또는 우리야, Urias. 여호와는 빛)의 아내 밧세바(Paddan, 맹약의 여자)에 대한 이야기라고 하겠습니다.

"우리야의 아내" 글자 수로는 여섯 글자입니다.
그러나 여섯 글자 안에 엄청난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우리야 또는 우리아라고도 합니다.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빛이시다"
우리아를 "헷 사람" 이라고 합니다.
헷 사람이 누구인지 살펴야 합니다.

"헷 사람 우리아"라는 짧은 문구에서 우리는 여섯 글자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밧세바엘리암의 딸이요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사무엘하 11:2-5)
우리아는 다윗의 37인 용사에 속한 인물이었으며(삼하 23:39) 밧세바는 다윗의 충성된 신하의 아내이었습니다.
 
우리아는 가나안 족 즉 이방인으로 여호와의 신앙을 받아드린 인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이름의 의미가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아라는 이름의 의미는 "여호와는 나의 빛" 이라는 뜻입니다.
 
우리아헷 사람이라고 상기시킴으로 이방인인 그가 이스라엘의 왕보다 더 의로움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그렇게 전사했다.
아니 살인을 당했다.
그것도 자신의 아내를 빼앗은 자에게, 자신이 그렇게 충성을 다 바쳤고 신뢰했던 자에게서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마태복음 1장 6절의 예수님의 족보를 보면 다윗은 우리아(개역한글판의 마태복음에서는 우리야라고 표기하고 있음)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라는 대목이 나온다.

두 가지의 의미를 묵상해 볼 수 있다.

먼저 밧세바라고 해도 되는 것을(마 1:5, 라합, 룻) 우리아의 아내라고 하므로 우리아에 대한 명예 회복적인 의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비록 비명에 죽었으나 족보에 언급됨으로써 그를 기억해 주는 기능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삶을 산 사람을 궁극적으로 높이시는 분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다윗 개인의 삶에는 커다란 오점이요, 다윗의 집안에는 칼이 떠나지 않게 한(삼하 12:10) 우리아 사건을 상기시킴으로써 결국 이러한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강조하고 있다.

그분은 불완전한 인간들을 통해 오셔서 그 가운데 구원을 베풀러 오셨음을 그분의 족보를 통해 상기시켜 준다.
동시에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감당하신 그분의 사랑과 은혜의 깊이를 느낄 수 있게 한다.

인간적 관점에서 우리아는 비록 억울하게 죽었지만 하나님 앞에 끝까지 충성스러운 종의 삶을 살았다(삼하 11장). 
이 점에서 그는 하나님 앞에서 큰 상을 얻었습니다.
우리아가 받은 상급은 밧세바라고 기록되야 할 자리에 밧세바가 아니라 우리아의 아내라고 우리아의 이름이 예수님의 족보 즉 왕의 족보 구세주의 족보에 이방 사람이었으나 하나님을 믿고 따름으로 받은 상급이라고 하겠습니다.
 
그의 삶과 죽음은 성군 다윗이 속으로부터 부패한 인간 존재로서 하나님 앞에 죄인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주었고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라면 성군 다윗도 아무 것도 아님을 증명해 주었다.

헷 사람이란 헷 족속에 속한 사람을 말합니다.
헷 족속은 노아의 세 아들 셈과 함과 야벳 중에서 함의  아들 가나안의 아들을 말합니다.
노아와의 관계는 손자가 됩니다.
헷 족속은 오래 전부터 가나안 땅에 거주하던 원주민이었습니다(창세기 15:20)
헤브론 지역(창 23:3-20))과 가나안 중앙 산지에 거주(민 13:29)하였으며 가나안에 가주한 족속 중에서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한 족속이었습니다(수 1:4).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하수 유브라데에 이르는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지는 편 대해까지 너희 지경이 되리라.

헷 족속으로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1. 에서의 아내 유딧과 바스맛(창세기 26:34)
2. 에브론(창세기 23:10)
3. 아히멜렉(사무엘상 26:6)
4. 우리아(사무엘하 23:39)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거주할 때 막벨라 굴을 팔았습니다(창세기 23:9)

이제까지 예수님의 족보를 소개 할 때마다 예수님의 족보에는 네 명의 여자들의 이름이 소개되었다고 소개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7월29일(수) 마태복음 1장을 오늘의 묵상을 위한 말씀으로 읽으면서 네 명의 여자들이 아니라 세 명의 여자들이었고 한 명의 남자 이름이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물론 예수님을 낳은 마리아를 포함하면 네 명의 여자와 한 명의 남자라고 하겠습니다.

헷(Hittites) 사람 우리야(우리아)

가나안의 아들들 가운데 두 번째로 이름이 나오는 사람인 의 자손으로 이루어진 민족(15,  18).

15, 가나안은 장자 시돈을 낳고.
18, 아르왓 족속스말 족속하맛 족속의 조상을 낳았더니 이 후로 가나안 자손의 족속이 흩어져 처하였더라.

따라서 그들은 함족이었다(창세기 10:6).

의 아들은 구스미스라임가나안이요.

우리아의 충성

첫째, 헷 사람

헷 사람이란 이방인을 의미합니다.
이방인이면서도 예수님의 족보에 기록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사건입니다.
헷 사람이란 노아의 아들 함의 후손으로 함이 낳은 아들 가나안의 후손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상당한 강한 세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서 막벨라 굴을 구입할 때 막벨라 굴이 헷 사람의 땅이었습니다.

모세가 죽은 후에 후계자 여호수아에게 명하셨던 이야기를 여호수아 1:1∼4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시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일러 가라사대.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하수 유브라데에 이르는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 지는 편 대해까지 너희 지경이 되리라.   

둘째 충성(忠誠)

우리아 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빛이시다"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처럼 우리아는 빛과 삶을 실천했던 충성스런 사람이었습니다.

우리아의 충성스런 모습은 전쟁터에 나가라고 명하면 그 명령에 따라 전쟁터에 나갔습니다. 전쟁터에서 돌아오라고 하면 전쟁터에서 돌아왔습니다. 다시 전쟁터로 나가라고 하면 전쟁터로 나갔습니다. 가장 치열한 전투에 참가하라고 하면 그 전투에 앞장서서 싸우다가 전사했습니다.

그러나 다윗 왕이 전쟁터에서 불러 왕궁에서 맛있는 음식과 더불어 술을 주어 마시고 취하게 한 후에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 집으로 돌아가라고 명했으나 그 명령을 거역하고 왕궁에서 머물렀습니다. 다윗 왕은 우리아의 강직한 모습에 두려움을 느끼고 전쟁터에서 지휘를 하던 요압 장군에게 편지를 쓰고 그 편지를 우리아에게 전달하게 했습니다. 다윗 왕의 편지 내용은 우리아를 가장 치열한 전투 맨 앞에 내세워 죽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아는 결국 치열한 전투에 앞서서 나갔다가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우리아는 개죽음을 당한 것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잊혀 질 수밖에 없는 우리아라는 이름을 예수님의 족보에 올려주셨습니다. 밧세바라는 이름이 기록되어야 할 그 자리에 헷 사람 우리아라고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충성하라는 주님의 명령

충성(忠誠)이란 무엇입니까?
우리아를 통해 볼 수 알 수 것은 우리아는 매우 우직한 사람이었습니다.
전투에 나가라면 나가고, 궁궐에 오라면 오고, 편지를 써서 가져가라면 가져가고, 성 밑에 가서 싸우라면 싸우고, 죽으라면 죽는 철저한 군인정신을 가졌던 우직한 사람이었습니다.

현대 사회의 특징은 "우직한 사람이 적다"는 것입니다.
정보의 홍수 시대를 살아가기 때문에 보고 듣는 정보의 양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 실천할 능력이 부족합니다. 이런 현상이 사람들을 이상하게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잔 꾀" 라는 말을 들어보셨지요?
"잔 머리 굴리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정보의 양은 많은데 많은 정보를 소화하지 못하고 실천하지 못하므로 나타나는 기현상이라고 하겠습니다.

우직하게 기도하는 사람이 충성스런 사람입니다.
우직하게 성경을 읽는 사람이 충성스런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셨습니다.
소금으로 살아야 합니다.
소금은 음식에 들어가면 완전히 녹아서 없어집니다.
나라고 하는 모습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나를 고집합니다.
내가 없어지면 나는 망하는 줄 알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빛은 어두운 곳에서 방향을 알려줍니다.
세상의 빛이 되기 위하여 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빛으로 드러나야 할 텐데 빛이 아니라 오히려 빛을 덮어버려 더 어둡게 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는 헷 사람 우리아처럼 충성스런 사람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우리의 조국 자유대한민국이 헷 사람 우리아와 같은 일군을 찾고 있습니다.
우리가 거주하고 있는 뉴욕이 헷 사람 우리아와 같은 일군을 찾고 있습니다.

우리아는 모든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전쟁터에 나가 있는 요압 장군과 군사들을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가서 아내와 잠자리를 가지라는 명령에는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왜 거절했을까요?

이것을 알기 위해 전쟁이 도대체 무엇인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 전쟁이란 거룩한 싸움이었습니다.
거룩한 싸움을 "성전(聖戰)" 이라고 합니다.
전쟁은 거룩한 싸움이었기 때문에 전쟁터에 나갈 때 항상 하나님의 궤를 갖고 나갔습니다.
전쟁은 하나님의 진 가운데서 진행되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거룩한 진이 있기 때문에 여자들은 진에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우리아는 지금 진과 함께 있으므로 집으로 돌아가 아내와 동침하라는 명령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충성해야 할까요?

성령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도움을 약간만 받는 것이 아니라 아주 많이 받아야 합니다.
너무 많이 받아서 내 속에서 흘러넘쳐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기도하겠습니다.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이 시간 저희들에게 성령으로 넘치도록 채워주셔서
우리가 하는 말이 주님의 언어와 같이 들려지게 하시고
우리가 하는 행동이 주님이 베푸시는 사랑과 같이 나타나게 하셔서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에 시달리는 많은 영혼들에게 소망이 되며 위로가 되고
우리와 더불어 영생의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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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성스런 일군 모세(민수기 12:7)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라.

히브리서 3:5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히브리서 3:6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

시편 101:6
내 눈이 이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거하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수종하리로다.


잠언 25:13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하느니라.

잠언 28:20
충성된 자는 복이 많아도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는 형벌을 면치 못하리라.

누가복음 16:10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갈라디아서 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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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은 가나안으로 이주했을 때 그곳에 거주하고 있던 헷 사람들과 얼마의 접촉을 가졌다.
그 전에 여호와께서는 헷 민족을 포함해서 여러 나라 사람들이 살고 있는 가나안 땅을 아브라함의 씨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신 적이 있었다(창 15:18∼21).
그렇지만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아모리 사람들(종종 가나안에 있는 나라들을 전체적으로 지칭하는 데 사용된 용어)의 잘못이 아직 온전히 차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다(창 15:16).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그 땅에 대한 헷 사람들의 소유권을 존중해 주었으며, 자기 아내 사라가 죽자 사라를 장사 지낼 동굴을 얻기 위해 헷 사람 소할의 아들 에프론과 거래하였다(창 23:1∼20).

여호수아 시대에 헷 사람들은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강 유프라테스 강까지, 곧 헷 사람들의 모든 땅”을 망라하는 지역에 거주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수 1:4). 그들은 주로 산간 지방에 살고 있었던 것 같은데, 여기에는 레바논과 어쩌면 시리아의 여러 지역도 포함되었을 것이다(민 13:29, 수 11:3)

노아의 저주 아래 있게 되다 헷 사람들은 가나안의 자손이기 때문에 노아가 가나안에게 내린 저주 아래 있었으며, 이스라엘이 그들을 복종시켰을 때 창세기 9:25∼27에 있는 노아의 말이 성취되었다. 헷 사람들의 종교는 다른 가나안의 종교들처럼 틀림없이 남근 숭배를 행하는 이교였을 것이다. 아브라함의 손자 에서가 헷 여자들과 결혼했을 때, 이것은 에서의 아버지와 어머니인 “이삭과 리브가에게 영의 비통함의 근원”이었다(창 26:34∼35, 27:46)

하느님께서는 헷 사람들과 그들과 함께 언급되는 여러 나라들이 차지하고 있던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묘사하셨다(출 3:8). 하지만 이러한 나라들은 매우 타락하게 되어, 그 땅에 그들이 있는 것으로 인해 그 땅은 더럽혀졌다(레 18:25, 27).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교제하여 그들의 타락하고 불결한 행위에 빠지는 것의 위험성에 관해 이스라엘에게 많은 경고를 하셨다. 그분은 여러 가지 부도덕한 행위들을 열거하시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러한 행위들을 행하는 것을 금하신 다음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것들 가운데서 어떤 것으로도 너희 자신을 부정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헷 사람들을 포함하여] 내가 너희 앞에서 쫓아내는 나라들이 이 모든 것으로 자신을 부정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레 18:1-30.

멸망이 선고되다 헷 사람들은 멸망에 바쳐져야 할 것으로 이름이 언급된 일곱 나라 가운데 하나였다. 이 나라들은 이스라엘보다 “인구가 더 많고 강대한” 것으로 묘사되었다. 따라서 당시 이 일곱 나라는 틀림없이 인구가 삼백만 명이 넘었을 것이며, 산악 지방을 본거지로 삼고 있는 헷 사람들은 만만찮은 적이었을 것이다. (신 7:1, 2) 그들은 이스라엘이 요르단 강을 건넜고 도시들인 예리코와 아이를 멸망시켰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가나안의 다른 나라들과 모여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과 싸움으로 적의를 나타냈다.(수 9:1-2, 24:11). 그러므로 헷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잃게 만드는 일이 없게 하려면, 그들의 도시는 멸망되어야 했고 그 주민들은 멸절되어야 하였다. (신 20:16-18)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명령을 철저히 이행하지 않았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 그들은 불순종하여 이 나라들을 제거하지 않았으며, 이 나라들은 옆구리의 가시로 그리고 그들을 항상 괴롭히는 것으로 남아 있었다.—민 33:55, 56.

후기 역사 이스라엘이 가나안 나라들을 완전히 멸망시키지 않았고 그래서 하느님께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선언하셨다. “나는 말한다.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지 않을 것이니, 그들은 정녕 너희에게 올무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은 너희에게 유혹물이 될 것이다.’” (판 2:3) 이스라엘 가운데 남아 있던 가나안 사람들은 관대한 대우를 받았으며, 드문 경우이지만 존경받고 책임 있는 지위를 받기까지 하였다. 가나안 나라들 중에서는 헷 사람들만이 하나의 나라로서 지위와 세력을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왕첫 10:29; 왕둘 7:6.

다윗 군대에 속한 군인 중에는 두 명의 헷 사람 즉 아히멜렉과 우리아가 있었는데, 이들은 장교들이었던 것 같다. 우리아는 이스라엘이 적들에게 승리를 거두는 일을 위해 열심을 나타내는 인물이었고,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관계를 가졌고, 뒤이어 우리아를 전투에서 위험한 위치에 배치하여 그곳에서 죽게 하였다. 이 때문에 다윗은 하느님께 처벌을 받았다.—삼첫 26:6; 삼둘 11:3, 4, 11, 15-17; 12:9-12.

솔로몬 왕은 헷 사람들 가운데 남자들을 동원하여 노예처럼 강제 노역을 하게 하였다. (대둘 8:7, 8) 그런데 헷 여자들을 포함한 솔로몬의 타국인 아내들은 솔로몬이 자신의 하느님 여호와에게서 돌아서게 만들었다. (왕첫 11:1-6) 헷 사람들은 이스라엘 왕 여호람 통치(기원전 917-905년경) 때에는 왕도 있었고 전투 능력도 보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성서에 언급되어 있다. (왕둘 7:6) 하지만 시리아와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가 그 땅을 정복했을 때 하나의 세력으로서 헷 사람들은 무력해진 듯하다.

이스라엘이 기원전 537년에 유배에서 회복된 뒤에, 이스라엘 백성과 심지어 일부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은 가나안 민족들의 여자들과 결혼하고 자기들의 딸을 가나안 사람들에게 주었는데 그중에는 헷 사람들도 있었다. 이것은 하느님의 율법을 범하는 일이었다. 이 때문에 에스라는 그들을 질책하고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 그들이 타국인 아내들을 내보내기로 합의하게 하였다.—라 9:1, 2; 10:14, 16-19, 44.

비유적 용법 여호와께서는 예언자 에스겔을 통해 말씀하시는 가운데, 예루살렘에 대한 말씀에서 “헷 사람”이라는 표현을 비유적으로 사용하셨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의 근본과 태생은 가나안 사람의 땅이었다. 네 아버지는 아모리 사람이었고, 네 어머니는 헷 사람이었다.” (겔 16:3) 여호와께서 자신의 이름을 그 위에 두신 나라의 수도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이 그 땅에 들어왔을 당시 여부스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던 도시였다. 하지만 가장 두드러진 부족이 아모리 사람들과 헷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이들이 여부스 사람들을 포함한 가나안 나라들을 대표하는 사람들로 사용된 듯하다. 따라서 그 도시의 유산은 보잘것없었지만, 여호와께서는 그 도시를 아름답게 하셨다. “여호와의 왕좌”에 앉은 다윗 왕을 통해(대첫 29:23), 그리고 시온 산 위에 있던 계약의 궤와, 끝으로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지은 찬란한 성전으로 인해, 예루살렘의 명성은 나라들 가운데 널리 퍼지게 되었다. 하지만 예루살렘은 그 주변의 가나안 나라들처럼 타락하고 부도덕해졌으며, 이 때문에 여호와께서는 결국 그 도시를 황폐시키셨다.—겔 16:14, 15.

정체를 밝혀내려는 세속 학자들의 노력 역사가들과 고고학자들은 성서에 나오는 헷 사람들이 세속 역사에 나오는 어떤 민족들인지를 밝혀내려고 애써 왔다. 그들은 주로 언어학적인 방법 즉 소리나 철자가 비슷해 보이는 단어들을 비교하는 방법을 근거로 같은 민족을 밝혀낸다.

아시리아의 설형 문자 문헌들에는 “하티”가 자주 언급되어 있는데, 대개의 경우 문맥에서는 하티가 시리아나 팔레스타인에 있었음을 알려 준다. 그러한 내용들은 성서에 나오는 헷 사람들을 언급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이 “하티”라는 표현에 근거하여, 학자들은 성서에 나오는 헷 사람들(Hittites)을, 가나안 땅에서 북쪽으로뿐 아니라 서쪽으로도 멀리 떨어져 있는 소아시아에 수도를 둔 소위 히타이트(Hittite) 제국과 동일시하려고 한다. 그들이 그렇게 하면서 사용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은데, 그렇게 하는 가운데 그들은 서로 다른 세 부류의 사람들을 관련시킨다.

헷 사람들과 “동일시되는” 세 민족 집단 소아시아의 아나톨리아(현재 터키로 불리는 지역의 일부)에서는 이전에 “하투샤시”라고 불리던 보가즈쾨이에서 많은 고대 문헌들이 발굴되었다. 이곳은 현대의 학자들이 하티라고 불러 왔고 그 주민이 “하티어”를 사용하던 나라의 수도였다. 초기의 이 민족은 정복자들에게 침략을 당한 것 같은데, 그 정복자들은 다른 언어, 즉 학자들에 의하면 인도·유럽 어족에 속하는 한 언어를 들여왔다고 한다. 이 언어는 설형 문자를 사용했으며, “설형 문자 히타이트어”라고 불린다. 후에 이 설형 문자는 상형 문자를 사용하는 또 다른 인도·유럽 어족 언어로 대치되었는데, 이 언어는 “상형 문자 히타이트어”라고 불린다. 이 언어로 쓰여진 실례가 될 만한 문헌들은 소아시아와 시리아 북부, 이 두 곳 모두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학자들은 이 세 가지 언어가 세 개의 민족 집단이 존재하였음을 보여 준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가운데 어떤 사람들도 성서에 나오는 헷 사람들이었다는 증거가 없다. 소위 설형 문자 히타이트어에 관해서, 마르틴 노트는 이렇게 기술하였다. “‘히타이트’라는 용어는 고대 문헌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현대의 연구가들이 이 언어와 소아시아의 하티 왕국 사이의 역사적 관련성에 의거하여 만들어 낸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히타이트 상형 문자”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히타이트라는 관례적인 용어를 그 문자들에 적용시키는 것은 부적절하며 혼란을 초래한다.” (「구약 성서의 세계」 The Old Testament World, 1966년, 231면) 또 다른 역사가인 E. A. 스파이저는 이렇게 결론짓는다. “성서에 나오는 헷 사람들에 관한 문제는 ··· 복잡하다. 우선, 성서 어느 구절에 헷 사람들(Hittites)이 나오든 간에, 그것이 어떤 히타이트인들을 말하는 것인지, 즉 하티인들인지, 설형 문자 기록을 사용한 인도·유럽 어족의 히타이트인들인지, 아니면 상형 문자를 사용한 히타이트인들인지부터가 문제이다.”—「유대 민족의 세계사」(The World History of the Jewish People), 1964년, 1권, 160면.

위의 내용을 볼 때, 성서에 나오는 헷 사람들을 하투샤시를 수도로 삼았던 “히타이트 제국”과 동일시하는 어떤 견해도 증명되지 않은 추측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불확실한 점들 때문에 본 출판물에서는 세속 역사 속의 “히타이트인들”을 언급할 때는 대개 따옴표를 사용하여, 독자에게 그들의 정체에 대한 그러한 견해가 증명되지 않은 것이며 우리는 그러한 견해가 결정적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증거가 강력하다고는 보지 않는다는 것을 상기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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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가 주는 의미

창세기 5장에는 많은 사람의 이름을 담은 족보가 나옵니다.
성경에서 족보를 자주 소개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족보는 성경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점, 그리고 유한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동시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이 성취되어 간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1975년 한국인의 평균 수명은 남성이 60세, 여성은 68세였습니다.
2005년에는 남성 76세, 여성 83세로 늘어나 평균 80세 정도가 되었습니다.
고려 시대 왕들의 평균 수명이 42세이고, 조선 시대 왕들의 평균 수명이 47세였던 것에 비하면 엄청나게 늘어난 것이고, 불과 30년 사이에 수명이 15년 이상 연장됐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의 수명은 차원이 다릅니다.
아담은 930세, 셋은 920세, 에노스는 905세, 가장 장수한 므두셀라는 969세까지 살았습니다.
365세라는 비교적 짧은 생애를 살았던 에녹을 제외하면 창세기 5장에 나타난 이들의 평균 수명은 912세나 됩니다.
홍수 이전에 장수한 사람들의 모습은 장차 천국에서 신앙인이 누릴 영원한 생명의 그림자 역할을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의 질병을 이기고 승리한 그리스도인은 주님 앞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을 소망하며 살아갑니다.
지상에서 오랫동안 사는 것은 주님의 축복입니다.
하지만 영원한 생명을 주신 주님을 생각하면 나그네 같은 땅 위의 삶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죽음이라는 운명을 피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소식은 근원적인 절망의 삶에 온전한 소망이 됩니다.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

어느 시대든 하나님은 사람을 택하고 세우셔서 그를 통해 구원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세상이 암흑으로 덮이고 인류에 죄악이 물결쳐도 시대를 거슬러 하나님을 향해 살아가는 경건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평범하게 흘러가는 족보 이야기 가운데 혜성처럼 빛나는 한 인물, 바로 에녹입니다.

그의 삶도 다른 사람들처럼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창 5:21~24).
단순한 그의 삶에 우리의 관심을 사로잡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입니다.
에녹의 삶에 동행이라는 말은 두 번이나 반복돼 그의 삶이 하나님과 전적으로 동행한 것이었음을 강조합니다.

어느 순간부터 그의 삶이 하나님께 헌신되었는지는 나타나지 않지만, 그는 365년의 생애 가운데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동행이란 ‘함께 걷다’ 또는 ‘함께 살다’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함께 걷고 살아간다는 것은 평소의 삶 자체를 보여 줍니다.

동행(同行) / 할라크(הָלַךְ)  

1. 가다
2. ㉠ 창7:18.㉡ 대하26:8.㉢ 수16:8.㉣ 느6:17.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으로 칭송받은 사람, 피조물이 창조된 목적대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그대로 실현했던 에녹이었습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 인류가 점점 죄악으로 물들어 갈 때, 에녹은 캄캄한 밤하늘에 혜성처럼 빛나는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기다리십니다.
시대의 흐름에 물들지 않고, 땅 위에 발을 디디고 살아가지만, 하늘을 향해 호흡하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자신의 행복이 최대 관심거리가 된 시대에 하나님의 영광을 향해 살아가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에녹이 평생 주님과 동행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름 아니라 매일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에녹은 매일 동행하기 위해 매 순간 주님께 의지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작은 결단입니다.
위대한 인생을 살려 하지 말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일평생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의 삶은 예수님의 일생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과 함께하셨고, 하나님 자신이셨던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셨고, 하나님의 뜻대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매 순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셨던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사람들, 이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

뿌리 없는 나무는 곧 시들어 말라버려 죽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의 뿌리가 있습니다.
Family Tree라는 말을 들어보셨는지요?
“가계도(家系圖)” 라고 합니다.
내 조상의 뿌리를 정리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의 신앙의 뿌리도 정리해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고 어떻게 봉사하며 섬겼는지 신앙의 이력서도 정리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오늘은 예수님의 족보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족보를 이야기할 때마다 예수님의 족보에는 네 명의 이방 여인의 이름이 기록되었다고 하는 설교를 자주 들었습니다. 이렇게 자주 듣던 설교 때문에 성경을 성경대로 읽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족보를 다시 살펴보면 네 명의 이방 여인의 이름이 아니라 세 명의 이방 여인의 이름과 한 명의 이방 남자의 이름이 정확하게 기록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런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성경을 읽을 때 습관적인 자세를 버려야 한다는 것을 알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성경 퀴즈 대회를 할 때에도 예수님의 족보에 나타난 이방 여인의 이름은 누구인가? 이런 질문도 있었습니다. 당연히 여리고 성의 기생 라합, 다말, 모압 여인 룻, 그리고 밧세바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런 대답에서 성경을 읽는 자세를 다시 한 번 더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세 명의 이방 여인들의 이름은 


우리아(Urias) / 뜻 - 빛

1. 헷 족속의 사람으로 다윗의 충성된 군인이요 미인 밧세바의 남편이다.

그가 랍바에 출정 중 다윗 왕이 그 처를 간통하고 그 죄의 자취를 감추려고 그를 소환 하여 집에 가서 편히 쉬라 하였으나 전쟁 중에 있는 동료들을 생각하고 불응하였다.

부득이 전쟁에 다시 보내며 대장 요압에게 편지하기를 우리아를 맹렬한 싸움의 제일 앞에 세워 죽게 하라고 하였다.

마침내 그는 전사하였다 애석하다, 충성된 군인이 불의의 화를 당함이여. 그 아내 밧세바는 다윗왕의 왕비가 되었다(삼하 11: 마 1:6).

2. 유대국 아하스 왕 때의 제사장으로 아하스 왕이 다메섹에 가서 보낸 우상의 제단 도형을 받아 그대로 만들어 왕으로 제사하게 하였다(왕하 16:20∼21).

3. 예레미야 선지자와 동시대의 선지자로서 여호야김과 나라에 대하여 예언을 하 였더니 그를 잡아 죽이려하므로 애급으로 도망하였다(렘 26:20∼21)>

밧세바(Bathsheba) / 뜻 -

밧세바는 엘리암의 딸이자 히타이트 사람으로 다윗의 부하 우리야의 아내였다. 어느 날 다윗이 밧세바가 목욕하는 것을 보고 그 아름다운 모습에 반하여 그 남편이 전쟁터에 나간 사이에 그녀와 여러 차례 정을 통하였다. 결국 밧세바가 다윗의 아이를 임신하게 되었고 다윗 왕은 밧세바를 영원히 차지하기 위해 자신의 부하이자 군대장관 요압에게 편지를 보내 도저히 살아올 수 없는 위험한 전투에 우리야를 내보내 우리야를 죽게 했다.

우리야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다윗 왕은 즉시 밧세바와 혼례를 올렸으며, 밧세바는 임신했던 첫째 아들을 낳았다. 하지만 예언자 나탄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다윗을 꾸짖고 저주하였고 아이는 일주일 만에 병으로 죽고 말았다. 이후 밧세바는 둘째 아들 솔로몬을 낳았고 이후 솔로몬은 다윗 왕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제3대 왕이 되었다.

다윗 왕 말기에 다윗의 넷째 아들 아도니야가 왕 행세를 하자 밧세바는 나단과 함께 이를 다윗에게 보고하여 아도니야의 반란에 미리 대처할 수 있었다. 밧세바에 관한 그 이후의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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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과 밧세바 - 사무엘하 11장

1. 다윗의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었던 두 사람을 꼽으라면, 아마도 골리앗과 밧세바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살펴보면 이 두 사람은 완벽한 대조를 이룹니다. 골리앗을 만난 다윗은 아직 어리고 무명 이었며, 세상 경험도 많지 않았던 반면, 밧세바를 만났을 때 다윗은 왕이었고, 충분히 나이도 들었으며, 여러 가지 시련들을 극복하며 백성들로 이미 용기 있고 지혜로운 지도자로 인정받고 있던 때 이었습니다.

2. 이 둘의 외모 또한 극과 극이지만, 다윗과의 관계 측면에서는 유사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다윗을 일종의 시험장, 곧 그의 속마음이 어떠한지 드러내는 자리로 데려갔다는 사실입니다. 골리앗과의 만남에서는 다윗이 상황에 지배받기 보다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기도의 사람이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밧세바의 경우에는 그가 기도의 자리에 있지 아니한 것을 깨닫게 되고, 이후로 기도하는 자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게 됩니다.

3. 본문 당시의 상황은 계절 상 봄이었습니다. 당시의 관습에 따르면, 봄에 주로 전쟁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출전 중이었던 이스라엘 군대를 뒤로하고, 다윗은 궁전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다가 하루는 궁전 옥상을 거닐다 우연히 한 여인의 목욕하는 장면을 목격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왕으로서의 모든 힘을 과시하며 그 여인을 불러오고, 잠자리를 같이 합니다. 이는 기도하는 자의 정체성은 온데간데없고, 오직 자신의 사욕을 채우는 권력자의 모습만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4. 당시 그 여인,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는 전쟁에 나가있을 때였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밧세바는 자신이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되고 다윗 왕에게 전갈을 보냅니다. 밧세바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된 다윗 왕은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을까요? 다윗은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불러다가 휴가를 줍니다. 이러한 다윗의 반응에서 보여 지는 다윗 왕의 모습은 이미 세상일과 처세에 능하며, 어떻게 자신의 위기를 빠져나가야 할지를 알고 있는 모습입니다.

5. 하지만, 아무리 능수능란하여 상황은 만들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사람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아는 집에 돌아왔지만 동료들을 생각하며 편하게 잠자리를 갖지 않습니다. 우리아에게 술을 먹여보아도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다윗왕은 우리아가 마음대로 되지 않자, 우리아를 다시 전쟁터에 보내며 위험한 최전방에 배치하라고 지시합니다. 그리고 우리아는 전쟁터에서 전사하게 됩니다.

6.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다윗왕의 모습, 특별히 지도자로서 모습을 가지고 있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으로서의 모습이 아니라, 이 순간만큼은 하나님을 완전히 떠난 자의 정체성으로 자신의 사욕을 채우고 있는 탐욕스런 왕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윗 왕은 첫째로, 간음의 죄를 저질렀고, 둘째로, 간음한 자신의 죄를 덮으려고 한 여인의 남편을 고의적으로 죽게 한 죄를 범했습니다. 자신이 죄인으로 드러나는 것이 두려워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은 셈입니다.

7. 하지만 이것이 다윗의 저지른 죄는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사무엘하 11장 본문을 살펴보면, 의도적으로 보이리만큼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보내다" 라는 단어입니다. 다윗 왕은 군대를 보내고, 신하를 보내고, 전갈을 보내고 우리아를 보내고 사람을 보내고,,,등등 이 본문에서 '보내다'는 동사/표현이 반복적으로 사용됩니다. '보낸다'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신학적/신앙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8. 그런데 바로 다음 장인 사무엘하 12장을 보면, 다윗의 죄를 깨닫게 한 선지자 나단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12장 1절에 '보내다'라는 단어가 다시 등장합니다. "여호와께서 선지자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시니..." 어쩌면 성경의 저자는 다윗의 이야기를 전하며 수 많은 상황 속에 보내는 주체로서의 다윗을 서술하다가 마침내 선지자 나단을 등장시키며, 하나님의 보내심을 말합니다. 즉, 보내는 것은 어쩌면 하나님의 영역일지 모릅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윗은 사람들의 삶에 스스로 하나님 역할을 했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을 보내고, 전갈을 보내며 사람들의 삶을 조종했습니다. 이것이 다윗의 본질적인 죄입니다.

9. 그렇다면, 다윗 왕이 이러한 죄악의 길로 빠지게 되는 통로는 무엇이었을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예를 들어, 옥상으로 올라간 다윗의 행동이 문제였는지, 혹은 다 보이는 곳에서 목욕을 한 밧세바가 더욱 문제였는지 하는 사실여부도 다시 생각해봐야 합니다. 다시 말해, 어느 순간부터 잘못되었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본문의 상황 안에서 어떠한 행동 혹은 환경이 다윗으로 하여금 죄의 길로 들어서게 했는지 살보며 우리 역시 죄의 통로를 경계해야 합니다.

10. 알다시피 다윗은 사울에 이어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일종의 군사적인 이유에서 왕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삼상 8장을 보면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사무엘을 찾아가서 왕을 세워달라고 요청할 때. 사무엘은 그들에게 왕이 생겨나면 이러저러한 어려움이 있을텐데 괜찮을지 물어봅니다. "왕이 세워진 그 때는 너희 손으로 세운 왕을 인해서 하나님께 부르짖어도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으실 것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11. 하지만 사무엘의 말에 장로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백성이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하여 가로되 아니로소이다. 우리도 우리 왕이 있어야 하리니 우리도 열방과 같이 되어 우리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 (삼상 8장 19-20절) 그들의 말에 의하면 왕의 역할은 두 가지인데, 첫 번째는 백성을 다스리는 것과 둘째는 군사를 이끌고 앞에 나가서 전쟁을 지휘하는 것이었습니다.

12. 그런데 오늘 본문 1절에서는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해가 돌아와서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매.." 즉, 전쟁의 때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인 다윗은 요압과 그 신복 온 이스라엘 군대를 전쟁터로 보냈습니다. 원문의 표현에 보면 그 다음을 이렇게 말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예루살렘에 남아있었다.” 그리고 그는 저녁에 왕궁 지붕 위를 거닐다가 한 여인을 발견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13. 그렇다면 다윗이 죄로 빠지게 된 통로가 무엇이라고 생각됩니까? 그것은 나라가 전쟁 중인데도 불구하고 전쟁을 이끌어야 할 왕이 전쟁에 나가지 않은 것입니다. 왕이 왕으로서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아니하고 자신의 몸이 편한 곳,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특별히 지도자들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끼게 됩니다.

14. 그런 의미에서, 우리도 스스로를 돌아보며 우리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물리적인 위치도 있지만, 영적이고 상황적인 위치도 있을 수 있습니다. 또한 과연 이 사회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있어야 할 곳이 어디인지도 생각해봐야 합니다. 요즘과 같은 때에 국내외 정치를 보면서 우리는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감사절과 연말이 다가오는 시점에 우리는 과연 어느 자리에 있어야 하는지 끊임없는 고민과 실행을 위한 노력이 필요한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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밧세바는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 불의하게 자신의 부인으로 취한 여인이었다(삼하 11∼12장).  그러나 위에서 언급된 아비가일과 아히노암은 다윗이 왕 되기 전 고난 중 변함없이 함께 한 여인들이다.  이 점에서 이 여인들과 비교한다면 밧세바가 어떤 여인인지  짐작된다.


그러나 나중 밧세바도 알았을 것이다. 자신의 외적 미모가 죄의 유혹을 일으켰고 그 결과 불행과 비극을 당했지만 오로지 하나님의 은총으로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정말 비싼 대가를 치르고 자신의 무가치함과 하나님의 은총의 위대성을 철저히 깨달았을 것이다.  그렇게 밧세바는 헌신적인 신앙인으로 날마다 달라졌을 것이다.


그렇지만 당연히 아비가일이나 아히노암이 밧세바보다 성경에 더 많이 기록되어야 했다. 그러나 그 반대였다. 밧세바의 기록은 자랑스럽지 않은 일로부터 시작하여 아들 솔로몬이 왕이 된 후에까지 기록된다. 사무엘하 11장부터 열왕기상 2장까지 밧세바의 삶은 성경에 계속 기록된다. 이와 비교한다면 그렇게 훌륭하고 지혜로운 여인인 아비가일은 사무엘상 25장 한 장에만 그리고 아히노암은 아비가일의 기록 중 겨우 한 줄(삼상 25:43)만 언급되었다.

상급을 공평하게 줄 하나님이 불공평하게 이들을 대한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속사는 하나님이 주인공으로 어떻게 인류의 구원을 위해 일했는가를 기록한다.  주인공 이외 다른 인물들을 조연(助演)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조연들도 하나님의 구속사에 공헌을 한다.  조연들은 이 공헌에 쓰임을 받았다는 사실에 만족하며 감사해야 한다.


조연들은 맡은 사역이 있고 그에 따른 직분이 있다.  사역이나 직분에 따라 은사도 다 달리 주어진다.  이 때문에 은사의 크기를 서로 비교하며 좋고 나쁘다는 이분법으로 조연들을 평가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그 보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어느 누가 더 자신의 역할에 충성했는가가 더 중요하고 이것이 하나님이 평가하는 기준일 것이다.  어떤 충성을 하였느냐에 따라 상급이 결정될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밧세바가 종국적으로 자신의 외적 미모 덕분에 다윗의 부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위에서 언급한 두 여인들과는 완전히 다르고 영적 차원에서 본다면 한참 저차원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밧세바는 솔로몬이라는 위대한 왕을 낳는 영광을 얻었다.  인간적 관점에서 보아 정말 하나님은 불공평한 것처럼 보인다.


밧세바 때문에 그의 남편이며 다윗에게 충성한 신하이며 용맹스런 장군이었던 우리아가 전쟁터에서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다.  물론 다윗이 꾸민 음모의 결과였다.  다윗은 참으로 비열하고 몰인정하며 가증스런 왕으로 하나님 앞에 드러났다.  그가 비록 기름 부음을 받은 그리스도였지만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와는 완전히 달랐다.  그가 모형이라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원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윗 같은 성군이라도 일단 죄를 범한다면 연이어 죄를 짓게 된다.  죄는 죄를 또 낳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죄는 그 모양이라도 버려야 했다.


인간적 관점에서 비록 억울하게 죽었지만 우리아는 하나님 앞에 끝까지 충성스러운 종의 삶을 살았다(삼하11장).  이 점에서 그는 하나님 앞에서 큰 상을 얻었을 것이다.  그의 삶과 죽음은 성군 다윗이 속으로부터 부패한 인간 존재로서 하나님 앞에 죄인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주었고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라면 성군 다윗도 아무 것도 아님을 증명해 주었다.


결국 밧세바와 그의 삶은 하나님의 은총을 강조하는 역할을 했다.  이 사실은 그녀에게서 솔로몬이 출생했다는 사실에서도 잘 증명된다.  불의한 관계로부터 출발된 다윗과 밧세바의 인연은 처음부터 하나님 앞에 불의하고 가증스러워 죄와 죄악 자체였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이 이런 불완전한 다윗과 영원한 왕국 언약을 이미 맺었다는 것이다(삼하7장).


이 언약 체결 덕분에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영광과 명예와 존귀를 얻은 다윗(삼7:18-19절)은 그만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아의 부인인 밧세바와 불의한 성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은 취소불능했다.  다윗에게 약속한 대로 하나님 나라 다윗 왕국을 계속 이어나갈 후손을 하나님은 주어야 했다(삼하7:12-1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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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족보가 서로 다른 이유는 무엇인가?

예수님의 족보는 성경의 두 곳, 즉 마태복음 1장과 누가복음 3:23∼38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으로부터 아브라함까지 계보를 추적합니다.
누가는 예수님으로부터 아담까지 계보를 추적합니다.
하지만 마태와 누가가 완전히 다른 족보를 추적하고 있다고 믿을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마태는 요셉의 아버지를 야곱(마 1:16)이라고 기록한 반면, 누가는 요셉의 아버지를 헬리(눅 3:23)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마 1:6)의 계열을 따라 추적하지만, 누가는 다윗의 아들 나단(눅 3:31)의 계열을 따라 추적하고 있습니다. 사실, 다윗과 예수님 사이에서 각 족보가 공통으로 서술하는 이름들은 스알디엘과 스룹바벨 뿐입니다(마 1:26, 눅 3:27).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차이점을 성경의 오류라고 지적합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꼼꼼한 기록 관리자들이었으며, 특히 계보와 관련해서는 더욱 세심하였습니다. 마태와 누가가 동일한 혈통에 대해 완전하게 서로 모순되는 족보를 세울 수 있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다윗으로부터 예수님까지 이어지는 계보는 각각 완전히 다릅니다. 심지어 스알디엘과 스룹바벨에 대한 언급조차도 동명이인에 대한 언급일 수 있습니다. 마태는 “스알디엘”의 아버지를 “여고냐”라고 언급하는 반면 누가는 “스알디엘”의 아버지를 “네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스알디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남자가 자기 아들의 이름을 스룹바벨이라고 짓는 것은 그런 이름을 가진 자들 중에 유명한 사람들이 많은 것을 고려할 때 일반적인 것입니다(에스라와 느헤미야를 읽어 보십시오).


이에 대해 교회 역사가 “유세비우스”가 제시한 한 가지 설명은 마태가 장자 또는 생물학적 계보를 추적하는 반면 누가는 “수혼 결혼”의 경우들을 고려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한 남자가 아들을 갖지 못하고 죽으면 그 남자의 형제가 그 과부와 결혼하여 죽은 사람의 이름을 이어받을 아들을 갖게 하는 것이 전통이었습니다. 유세비우스의 이론에 따르면, 멜기(눅 3:24)와 맛단(마 1:15)은 똑같은 여인(전통에 따르면 그녀의 이름은 ‘에스다’임)에게 다른 시기에 결혼했습니다. 이에 헬리(눅 3:23)와 야곱(마 1:15)은 이부 형제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 후 헬리는 아들이 없이 죽었고, 이에 그의 이부 형제 야곱이 과부가 된 헬리의 아내와 결혼하여 요셉을 낳았습니다. 따라서 요셉은 합법적으로는 ‘헬리의 아들’이지만 생물학적으로는 ‘야곱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마태와 누가는 모두 요셉의 동일한 계보를 기록하고 있지만 누가는 법적인 계보를 따르고 마태는 생물학적인 계보를 따릅니다.


오늘날 보수적인 성서학자들은 누가는 마리아의 계보를 기록하고 있고 마태는 요셉의 계보를 기록하고 있다는 다른 견해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 견해에 따르면, 마태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을 통해 요셉(예수님의 합법적인 아버지)의 계보를 따라가며 누가는 다윗의 아들 나단을 통해 마리아(예수님과 혈연관계)의 계보를 따라갑니다. 요셉은 헬리의 딸 마리아와 결혼하면서 헬리의 사위가 되었지만 헬라어에는 ‘사위’에 해당하는 단어가 없기 때문에 “헬리의 아들”로 불립니다. 아무튼 마리아의 계통을 따르든지 또는 요셉의 계통을 따르든지 예수님은 다윗의 후손이기 때문에 메시야가 되실 자격이 있습니다. 모계 쪽으로 족보를 추적하는 것은 드문 일이지만 처녀 마리아를 통한 탄생은 더욱 그러합니다. 누가의 설명은 예수님은 요셉의 아들이었고 사람들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눅 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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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된 왕의 계보(마태복음)

* 마태는 예수님의 조상을 14대씩 3세대로 나누어 기록하였다(일반적인 유대 선택적 족보기록 법을 따름)

왕국 이전 /   
①. 아브라함, ②. 이삭, ③. 야곱, ④. 유다, ⑤. 베레스, ⑥. 헤스론, ⑦. 람, ⑧. 아미나답, ⑨. 나손, ⑩. 살몬,  ⑪. 보아스, ⑫. 오벳, ⑬. 이새,  ⑭. 다윗

왕국 시대 / 
①. 다윗, ②. 솔로몬, ③. 르호보암, ④. 아비야, ⑤. 아사, ⑥. 여호사밧, ⑦. 요람, ⑧. 웃시야, ⑨. 요담, ⑩. 아하스, ⑪. 히스기야, ⑫. 므낫세,  ⑬. 아몬, ⑭. 요시야


왕국 이후 / 
①. 여고냐, ②. 스알디엘, ③. 스룹바벨, ④. 아비훗, ⑤. 엘리아김, ⑥.아소르, ⑦. 사독, ⑧. 아킴, ⑨. 엘리웃, ⑩. 엘르아살, ⑪. 맛단, ⑫. 야곱, ⑬. 요셉, ⑭. 주 예수 그리스도 


* 다윗만 유일하게 이 족보에서 왕으로 묘사된다(마 1:6)


예수 그리스도, 그는 다윗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신 진정한 왕이셨다. 다윗조차도 그를 왕으로 불렀다(시 110:1, 참조 눅 20:43)


여호와(성부 하나님)께서 나의 주님(예수님)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 앞에 굴복시킬 때까지 너는 내 오른편에 앉아 있거라.”(시편 110:1)

4명의 이방 여인

* 마태는 4명의 이방여인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다(특별하고 독창적인 족보기록 법을 만듦) 

1. 다말(3절)   

①아람인

②첫 번째 남편 ‘엘’- 주의 눈 앞에 사악한 자, 그래서 죽음(창 38:7)

③‘오난’- 하나님을 뜻을 거역함, 그래서 죽음(창 38:10)

④ ‘셀라’- 유다는 또 죽을 까봐 시간만 질질 끔(창 38:14)


*계대결혼(수혼법) 신명기 25:5∼6 

창 38:26 / “유다가 그것을 알아보고 가로되, 그녀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녀를 내 아들 이게 워냐 니들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녀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2. 라합(5절)  

①가나안인-여리고의 창녀

②하나님의 소식을 듣고 믿음을 가짐(수 2:9상, 11하) 

③정탐꾼을 숨겨줌(수 2:10, 11, 히 11:31, 약 2:25)

* 붉은 동아줄? 

3.(5절)  

①모압인- 여호와의 회중에 들어올 수 없는 족속(신 23:3-6)

②시어머니를 따라 하나님을 섬기고자 함, 죽음 남편의 친족 보아스를 만남


* 보아스는 룻의 증손자

* 기업무를 자 : 

“여호와께서 이 젊은 여자로 말미암아 네게 상속자를 주사 네 집이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시니라”(룻 4:12)

4. 밧세바(6절)

①헷사람 - 헷사람 우리아의 아내(삼하 11:3)
* 밧세바라 하지 않고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② 솔로몬를 낳는다(간음을 통해 태어난 첫째 아들은 태어난 지 7일 만에 죽음(삼하 12:15-18)

       

* 예수는 이방인의 하나님, 이방인의 구주이시다.

* 은혜로만 구원받는다(‘라합’과 ‘밧세바’는 부도덕/ ‘다말’과 ‘라합’, ‘룻’은 믿음).

요셉과 그리스도

마태복음 1: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목록에 나오는 다른 아버지들의 경우 중요하게 사용된 용어인 “낳고”가 빠져 있다! 요셉의 이름이 법적 아버지요 계보의 연결로서 언급되는데, 이것은 1세기에 유대인들이 법적으로 요구했고 또 인식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요셉은 예수의 생물학적 아버지가 아니었다. 예수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동정녀를 통해 탄생하셨다(참조, 1:23-25; 눅 1:34-35).

*“요셉과 약혼하고”: 약혼은 두 사람의 관계를 법적으로 묶는 유대인의 관습으로서 대개 결혼에 앞서 1 년 전에 행해졌다. 두 사람이 따로 떨어져 살았지만, 계약적으로는 결혼상태로 여겨졌다. 죽음 혹은 이혼만 약혼 관계를 파할 수 있었다.


요셉

“의로운 사람이라”(1:19)

“가만히 끊고자 하여”: 요셉이 이를 위해 취할 수 있는 두 가지 법적 조치는 다음과 같았을 것이다: (1) 법정에서의 공개적인 비난 혹은 (2) 두 증인 앞에서 이혼증서를 기록하여 주는 일(참조, 신명기 24 장). 마리아는 잉태와 관련된 환상을 요셉에게 말하지 않았다. 구약의 율법은 성적으로 신실하지 못한 사람에게 사형을 선언했다(참조, 신 22:20-21,23-24).


끝까지 마리아를 지켜줌

"요셉은 잠에서 깨어나 주님의 천사가 일러 준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그러나 그는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때까지 그녀와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았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자 요셉은 이름을 ‘예수’ 라 하였다."(마태복음 1:24‭-‬25)


마리아

1.  마리아는 처녀가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말씀을 믿었다(눅 1:37-38).

2.  율법에 따라 돌에 맞아 죽을 수 있는 상황이 되는데도 그 말씀을 믿은 것이다.

마태복음의 족보와 마가복음 족보의 차이

1. 마태는 유대인의 왕이신 예수님을 위한 족보를 기록했다.
다윗과 솔로몬으로 이어지는 족보이다.
아브라함에서 예수까지 하향식족보(총 41명)이다.
마태복음 첫머리에 이 족보가 등장한다.

* 히브리어로 다윗의 이름이 갖는 수는 14를 이룸
 D(4) + V(6) + D(4) = 14 유대인들은 다윗을 상징하는 숫자를 14로 여긴다.

2. 누가는 창세기의 예언을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다(이방인 독자).
솔로몬의 동복 형인 나단(삼하 5:14, 대상 3:5, 14:4)으로 이어지는 족보이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상향식 족보 총77명).

아담- 하나님께 이어지는 족보이다(인성).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요한의 세례 이후에 기록되었다(회개의 세례 눅 3:3)

3. 마태복음에서는 요셉의 위를 야곱으로 기록합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서는 요셉의 위를 헬리(또는 엘리)로 기록합니다.
헬리는 마리아의 아버지. 즉 요셉의 장인이다.
그러나 헬리는 아들이 없어서 요셉이 데릴사위 겸 양자로 맞이하게 된다. 

4. 누가는 이 족보의 신빙성과 동정녀 탄생을 고려해 이렇게 기록합니다.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삼십세쯤되시니라.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누가복음 3:23)"  

• 참고 성경구절/

* 누가복음 3:38
"그 이상은 아담이요, 그 이상은 하나님이시니라.” 

* 창세기 49:10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 이사야 11:10 
"그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 사무엘하 7: 15~16 
"내가 네 앞에서 물러나게 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뺏은 것처럼 그에게서는 빼앗지 아니하리라.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존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 창세기 3:15
"내가 너와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니"

* 갈라디아서 4:4-5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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