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섭리(攝理)와 하나님

하나님의 섭리(攝理)

1. 섭리의 정의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만물을 그 작정의 목적에 합당하게 유지 보전시키실 필요가 있는데, 이의 전 과정이 바로 섭리(providence)이다.

신학자들 마다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정의가 조금씩은 다르지만 그 전체적인 뜻은 거의 동일하다.

벌콥은 ‘창조주가 자기의 모든 피조물을 유지하시며 세계에 생성하는 만사를 공작하시며 만물을 그 정명(定命)된 목적에 향하여 지도하시는 신적 정력의 계속적 활동이다.’

찰스 핫지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제11)의 진술에 따라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들은 그의 모든 피조물들과 그것들의 모든 행동들 위에 그의 가장 거룩하며 지혜로우며 능력 있는 보전과 통치이다. 그러므로 섭리는 보전과 정치를 포함한다.’

섭리란 작정의 실현으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들을 창조의 목적대로 유지하고 보존하실 뿐 아니라 그 목적을 이룰 수 있도록 끊임없이 간섭하고 통치하시는 행위를 의미한다.
  
2. 섭리의 대상

정신적·물리적 사건을 포함하여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 세계의 모든 일이 하나님 섭리의 대상이나 그 가운데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다.


  1) 모든 우주(시 103:19 ; 단 5:35)
  2) 물질적 세계(시 104:14 ; 마 5:45)
  3) 동물계(시 104:21,28 ; 마 6:26 ; 10:29)
  4) 국가적 사건(욥 12:23 ; 행 17:26)
  5) 사람의 출생과 운명(삼상 16:1 ; 시 139:16 ; 사 45:5 ; 갈 1:15,16)
  6) 인간의 성공과 실패(시 75:6,7 ; 눅 1:52)
  7) 우발적인 듯한 사소한 사건(마 10:23)
  8) 의인의 보호(시 2:8 ; 5:12 ; 롬 8:28)
  9)악인의 적발과 형벌(시 7:12,13 ; 11:6)
  10) 하나님 백성의 필요에 대한 공급(창 2:8,14 ; 신 8:3 ; 빌 4:19)
  11) 기도의 응답(삼상 1:19 ; 사 20:5,6 ; 대하 33:13 ; 시 65:2 ; 마 7:7)

3. 섭리의 성질   


  1) 보편성(普遍性)
  하나님의 섭리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
섭리의 범위는 보편적이다. 성경은 모든 자연의 법칙들, 역사의 진정(進程), 개인들의 다양화복(多樣禍福)이 항상 하나님의 섭리적 관할에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히1:3, 행17:20, 엡4:16). 하늘과 땅의 모든 만물과 만사가, 스랍들로부터 작은 원자에 이르기까지 그의 끊임없는 섭리에 의해 정돈되고 유지되고 진행 된다.


  2) 주밀성(周密性)
  보편성이 섭리의 넓이를 말한다면, 이것은 섭리의 깊이와 관계 있다.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사와 자연사 모두에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마 10:29). “공중에서 떨어지는 빗방울과 눈송이, 움직이는 벌레, 자라나는 식물, 공중에 떠도는 먼지의 가루 하나도 의미 없이 그냥 되는 것이 없고 각각 일정한 원인과 일정한 효과들을 가진다.

  3) 주권성(主權性)
  하나님의 섭리는 다른 그 어떠한 것의 간섭이나 영향을 받지 않는다.
하나님의 섭리적 관할은 주권적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님은 세계와 모든 인간사변들을 주권적으로 주관하신다.

  4) 허용성(許容性)
  모든 것이 섭리의 대상이지만 죄는 아니다. 하나님은 죄를 조성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하용 하실뿐이다.
지금도 이 세상에는 죄가 자행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온전히 거룩하시기 때문에 죄의 조성자가 아니시다. 다만 죄를 허용하실 뿐이다.
  
4. 섭리의 요소

섭리는 자연계 전반에 대한 하나님의 보편적 관할을 다루는 일반 섭리와 택한 성도의 구원과 관련된 특별 섭리로 나눌 수 있다. 또한 그 섭리의 시행 방법상 통상 섭리로 나누기도 한다. 이것은 섭리의 성격에 의한 구분 방법이고 이제 보다 중요한 섭리의 요소를 구분하면 다음과 같다.


  1) 보존(Preservation)
  하나님은 만물 창조 후 자연 법칙을 세우셨지만, 여전히 변치 않으시고 만물을 유지하고 계심을 말한다. 그런데 만일 이러한 신적 활동이 없다고 한다면, 육체적 생명이나(시 66:8,9). 정신 생활의 유지(딤전 6:3)가 불가능하다. 인간의 극심한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속시키고 계시는 것은 노아의 언약에 따른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은혜 때문이다(창 8:21,22 ; 9:10,12,16 ; 벧전 3:20).

보전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그 성질과 능력과 함께 계속 유지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창조가 우주의 존재를 설명한다면 보전은 그것의 계속을 설명한다. 보전을 창조의 지속으로 생각하는 자들이 있지만-하나님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새롭게 창조하시고 모든 것이 이와 같은 방식으로 보존되고 유지된다는 주장(조나단 에드워즈)- 창조와 보전은 구분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땅의 모든 짐승들을 끊임없이 창조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생명을 유지하고 이미 창조된 것들을 보존하고 계신다.

  2) 협력(Concurrence)
  보전이 피조물의 존재를 유지시키는 신적 사역이라고 한다면, 협력은 피조물의 활동 배후에서 이를 가능케 하는 신적 사역이다. 즉, 협력은 하나님의 절대적 의지와 능력이 자연 세력이나 인간 의지와 같은 종속적 능력과 합력(合力)하여 일을 이루시는 신적 사역이다. 따라서 인간이나 자연의 모든 활동은, 제 2원인과 동시적으로 섭리하시는 제 1원인, 즉 하나님이 직접적인 신적 협력을 따라서만 가능하다(행 17:28). 

하나님의 섭리는 피조물의 존재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활동(공작)에도 해당된다. (창 45:5, 출4:11-12, 수11:6, 잠21:1, 신8:18, 벧전1:4, 빌2:12,13). 이렇게 피조물들의 활동에 주권적으로 관계하여 그들과 합작하는 것을 하나님의 협력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피조물들에게 그들이 존재할 수 있는 어떤 원리들과 작용의 법칙들을 부여하셨지만 그것이 스스로 독립적이고 자동적으로 진행되게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 자신의 능력으로 그것을 친히 지배하시고 주도하신다(초연신론에 반대). 그러나 이것이 피조물들의 활동이 종속적이고 기계적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하나님의 협력은 직접적이며 또한 동시적이다. 즉 신적 능력은 사람의 능력과 서로 통하되 그것을 파멸하거나 흡수함이 없이 한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작업은 자연적 능력들로 하여금 자기와 함께 작업케 하기를 마치 붓과 손이 함께 역사하여 기록을 산출함과 같이 한다. 하나님의 협력은 제일원인의 부정(초연신론 또는 무신론)과 제이원인의 부정(계속적 창조설 곧 범신론)이라는 두 오류를 다 거부하고 두 원인의 합작을 지지한다.

  3) 통치(Government)
  우주의 통치자이신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존재 목적에 맞게 다스리시는 신적 활동이다. 그런데 이러한 통치는 외면적 세계(마 4:45 ; 행 14:17). 이성적이거나 비이성적 피조물(시 104:21 ; 잠 21:1), 큰 일과 작은 일(시 126:2,3 ; 마 10:29), 일반적 일과 특별한 일(시 127:2 ; 잠 16:33). 선행과 악행(행 14:16 ; 빌 2:15), 이스라엘과 열국(시 47:9 ; 사 33:22) 등의 모든 영역이 그 대상이다. 따라서 이러한 하나님의 통치는 인간으로서는 그 통치의 양식을 알 수 없고, 또한 그 누구도 이 역사를 막을 수 없다. 비록 하나님에 대한 대적이 있다고 할지라도 도리어 그것은 그분의 위대한 목적을 이루는 데 이용될 뿐이다.

정치란 하나님이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만물을 목적 있게 통치하시어 자신의 신적계획의 성취를 확실케 하는 하나님의 계속적인 활동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온 우주를 왕으로 통치하시는데 그리스도를 통하여 통치하시며, 피조물들의 성질에 적응하여 통치하신다. 피조물들의 성질에 적응해서 통치한다는 말은 물리적 영역에서는 자연법칙을 방편으로 하고, 정신적 세계는 간접적으로 마음의 특성들과 법칙들을 통하며, 직접적으로는 성령의 공작을 통하여 정치하신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정치는 우주적이어서 만세와 만대의 모든 피조물들과 그들의 행동들을 다 대상으로 한다.(딤전1:17, 6:15, 단4:34, 시22:28, 103:19). 이 통치는 시간적, 공간적 경계도 없다. 이성적 및 비이성적 피조물들, 큰일과 작은 일들, 사람의 선행과 악행도 다 신적 관할 속에 있다. 뿐만 아니고 하나님의 정치는 극히 장엄하여 사람의 지혜로 다 측량할 수 없다(사55:8,9, 시77편).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과 칼빈, 댑니, 핫지, 딕, 셰드, 맥퍼슨과 같은 개혁파 교의학자들은 섭리의 요소로 보전(보존)과 정치(통치)를 드는 2구분법을 취했으나 17세기 이후 화란 개혁파 교의학자들 곧 브라켈, 프랑켄, 카이퍼, 바빙크, 보스, 호니히 등은 이 두 요소에 “협력”을 추가한 3구분법을 취했다. 한국의 박형룡박사도 3요소로 구분하였다. 그러나 통상적으로 2요소와 3요소는 내용상 큰 차이가 있지 않다. 화란 개혁파 신학자들이 2요소 대신 3요소로 구분한 것은 범신론과 초연신론의 위험을 경계하여 섭리에 대한 인간의 노력의 요소를 강조하려는 이유 때문이었다. 중요한 것은 섭리의 3요소가 서로 구별되지만 분리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보전은 만물의 실유(實有)에 관설(觀設)하고 협력은 그 활동(活動)에, 정치는 그 지도(指導)에 관계하나 이것은 결코 배타적 의미로 이해될 것이 아니다. 보전에도 정치의 요소가 있고, 정치에도 협력의 요소가 있으며, 협력에 보전의 요소가 있는 것이다.

 

5. 일반섭리와 특별섭리

하나님의 섭리는 먼저 일반섭리와 특별섭리로 구별된다. 하나님은 일반섭리에 의하여 우주의 만사만물을 질서 있고 조화되게 유지하여 가시며, 특별섭리를 통하여 우주의 각사각물로 하여금 우주 전체와의 관련에서 뜻있게 전진하게 하신다. 즉 일반섭리가 우주 전체를 향한 하나님의 관할을 의미한다면 특별섭리는 그 각부를 전체와 관련하여 세밀하게 간섭하심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두 섭리는 두 종류가 아니고, 같은 섭리의 두 활동이다. 특별섭리는 자주 이성적 피조물들을 위한 특별한 돌보심과 간섭으로 나타나는데 여기에는 기도에 대한 응답, 고통에서의 구출, 위험에서의 보존 등이 있다.

6. 비상 섭리(非常 攝理)

이것은 자연법칙에 따라 역사 되어지는 통상 섭리(通常 攝理)와는 반대로 일반 법칙을 초월하는 임시적 역사로서, 제 2원인의 매개 없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능력에 따라 일어나는 이적을 말한다. 이러한 이적은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드러내시기 위한 특별한 수단이므로, 가시적(可視的)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통상섭리와 비상섭리(이적)

섭리는 또한 통상섭리와 비상섭리로 구별된다. 보통의 경우 하나님은 기정 자연법칙을 주관하시면서 제이원인을 통하여 역사하신다. 이것을 통상섭리라고 한다. 그러나 비상섭리에서는 그가 직접적으로, 제이원인의 통상공작의 매개 없이 일하시어 이적을 행하신다. 이것은 자연을 거슬러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역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적과 관련하여 문제가 되는 것은 계시와 기적의 관계이다. 이적 시대는 지나갔다고 믿는 것이 개신교 교회의 일반적인 태도다(칼빈도 이렇게 주장한다). 계시가 완성된 신약시대에 이후 새로운 계시가 불필요하기에 기적이 필요없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기적을 계시의 관점에서 보지 않고 비상섭리의 관점에서 본다면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위해 이적을 행하실 가능성은 언제나 있을 것이다.

 

7.섭리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

하나님의 섭리는 경외하는 마음으로 지켜져야 한다. 하나님을 자신을 만드신 분이요 우주를 조성하신 분으로 생각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그를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자가 아니면 그 누구도 하나님의 섭리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유익하게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를 책임에서 벗어나게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섭리를 말하면서 자신의 악함과 연약함을 하나님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또 다른 죄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의 사악함을 무죄로 만들어주는 교리가 아니다. 한편으로 섭리의 교리는 우리에게 참으로 큰 위로를 준다. 만사가 하나님의 작정 가운데 이루어지고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친히 돌보시고 다스리신다는 것은 얼마나 큰 위로인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삶은 견디기 힘든 것이 될 것이지만 섭리에 대한 확신 때문에 신자는 많은 악에 둘러싸여 있어도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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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GOD) 

1. 창조주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다.  

창세기의 첫머리에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하였다. '태초에'(בראשית,베레시트)는 시간의 시작이 있었고, 공간이 만들어졌으며, 물질이 만들어졌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창조’는 무슨 의미인가? 구약 성경에는 '창조하다'란 뜻의 단어가 세 종류가 나온다. 첫째 '바라(ברא)'는 무(無)에서 유(有)에로의 완전한 창조와 보존하고 완성한다는 뜻이 있다. 때로는 특수한 목적으로 여러 재료를 사용하여 건축하거나 만들 때에도 사용되었다. 둘째, '아사(עשה)'는 이미 창조된 물질을 재료로 더 나은 물체를 만드는 것.(창1:16, 25, 26절). 세째, '야차르'(יצר)는 '아사'와 비슷하나 특별한 목적에 따라 기존 사물을 새롭고 완벽히 영적 존재로 조성하는 것(창2:7.9)이다. 이처럼 성경에서는 ‘창조’라는 하나의 말도 정확무오한 단어로 명확히 구별되어 사용되었다.(마 5:18).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신론 진화론자들은 성경을 부인하기 위해 창조주가 없다는 결론을 정해놓고 그 결론에 증거를 끼워 맞추는 억지 주장을 펴 왔다. 하지만 과학은 창조주가 없거나 창조주가 개입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입증하지 못했다. 무신론 과학자들도 무(無)에서 유(有)가 생겨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들은 무(無)의 상태에 대한 정의를 왜곡한다. 즉, 무(無)를 어떠한 공간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양자 진공의 상태라고 정의를 하고 자신의 주장을 시작한다. 그러나 물리학에서 '양자 진공'은 무(無)가 아니다.5)

 

 태양을 도는 지구는 일년에 365일 5시간 461분 46초로 주기적으로 공전하고 23시간 56분 4.09초로 자전한다. 생명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행성,태양, 달의 크기, 온도, 거리, 화학적 구성도 정교하게 정확하게 조정되어야 한다. 만일 우연의 사고로 지구와 태양과의 거리가 조금이라도 가까워지면 사람이 타 죽고 멀어지면 얼어 죽는다. 지구의 균일 대기권6)에는 질소 78%, 산소21%, 기타1%의 균일한 공기로 구성되어 있다. 이 비율이 조금이라도 변형되면 사람이 살 수 없다. 산소가 없으면 물이 존재할 수 없고 물이 없다면 농작물이 자랄 수 없고 그러면 어떤 생명체도 살 수 없다. 이처럼 공기중의 수소,질소,나트륨,탄소,칼슘,인과 같은 요소들은 생명을 위한 필수 요소이다.

  지구 중력은 적당히 지구를 잡아 주면서 대기권을 유지시켜 준다. 만약에 지구의 크기가 지금보다 작으면 대기권이 형성되지 않으며 너무 크도 수소가 많이 생성되어 사람이 살 수 없다. 성층권에서는 오존층으로 지구를 덮어주어 태양의 지외선으로부터 지구의 생명체를 지켜주고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이 모든 것이 저절로 되어지는 일인가? 무신론 과학자들이 우연한 '빅뱅'(우주폭발)로 우주가 생성되었고 인간의 생명이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그들의 주장들을 입증하기 위한 확율은 얼마나 될까?

 

천문학자인 휴 로스(Hugh Ross)는 그 확율을 “우주와 인간의 생명이 우연히 저절로 생겨 날 확률보다 눈가림을 한 사람이 한 사람이 세계의 모든 해변 중에서 특별히 표시된 모래알 한 개를 발견하는 것이 훨씬 쉬울 것이다”7)고 했다.

​그동안 무신론 우주과학자들은 우주의 기원이 빅뱅으로 시작되었다고 주장해 왔다. 하지만 우주폭발이 더이상 생명을 가져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존재는 믿지 않으려고 하면서도 '최고지성' '창조자''최고 존재자'라 생각되는 어떤 설계자가 우주의 시작을 설계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스티븐 호킹은 "만약 빅뱅후 1초간 팽창속도가 10억에서 한 부분이라도 더 작았으면 우주는 현재의 크기에 도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반대로 팽창률이 그것보다 더 큰 것이었다면 은하,별,행성들은 결코 형성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숫자들의 수치가 생명의 발전을 가능케 하기 위해 매우 정교하게 조정된 것 같다."8)고 하였다.

 

영국의 천체 물리학자인 무신론자 과학자인 폴 데이비스(Paul Davies)는 "나에게는 그 모든 것 뒤에 무엇인가 진행되고 있다는 강력한 증거가 있다. 누군가 우주를 만들기 위해 자연의 숫자로 세밀하게 조정해 놓은 것 같다.설계에 대한 인상은 압도적이다." 9) 지구 물리학자인 스티븐 C 마이어(Stephen C. Meyer)10)는 수년간의 과학 연구 끝에 우리의 창조물 뒤에는 단순히 지적인 디자이너가 있을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강철로 만든 자동차 엔진도 수십년 지나면 부식하여 교체하거나 폐차해야 한다. 하지만 인간의 심장은 하루에 십만번 이상 펌프질하고 70년간 27억번이나 뛴다. 심장이 평생동안 하는 일은 3만 kg의 무게의 물체를 메고 세계에서 가장 높은 에베레스트 산을 정상을 올라가는 힘이 된다. 어떻게 그토록 심장이 손상되지 않고 버틸 수 있는가? 인간은 단 몇 분도 공기를 마시지 않으면 죽는다. 하루에 1만 리터가 넘는 공기로 호흡해야만 살 수 있다. 들판의 소들은 평생 풀만 뜯어 먹는데 어떻게 큰 덩어리의 고기를 만들어 낼 수 있는가? 이게 저절로 되어지는 일인가? 인간의 두뇌와 지혜로는 상상할 수 없는 초월한 누군가가 그렇게 되도록 설계를 해 놓았기 때문이 아닌가.

 

분자 생물학자들은 DNA의 미세한 세계에서 복잡한 디자인을 발견했다. DNA 공동 발견자인 프랜시스 크릭(Francis Crick)은  "그것이 지구상에서 자연적으로 기원한 적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고 하였다. DNA 속의 코딩은 상상력을 위축시킬 정도로 엄청난 지능을 드러내었다. DNA 핀 하나에는 지구를 5,000번 애워싸는 종이책 더미에 해당하는 정보가 들어 있다. 마이크로소프트 설립자 빌 게이츠는 "DNA 소프트웨어는 우리가 개발한 어떤 소프트웨어보다 훨씬 더 무섭다"11)말했다.

 

 21세기 선도적인 무신론자 안토니우스 플뢰(Antony Flew)는 DNA를 연구하면서 "내가 생각하기에 DNA 물질은 지성이 엄청 뛰어난 어떤 존재가 다양한 요소들을 한데 모으는데 관여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 결과가 도출된 엄청난 복잡성은 마치 지성의 작업처럼 보인다.12) 고 하였다.

노벨상 수상자인 미국의 예일 대학교의 헨리 마그뉴(Henry Margnau)교수는 “자연에 존재하는 수많은 법칙 중에 한가지 확실한 답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창조주에 의한 창조다”라고 하였다. 아이작 뉴톤(Isaac Newton)은 “인체의 신비, 우주의 신비를 보고서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미친 사람이거나 정직하지 못한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루이 파스퇴르(Louis Pasteur)는 “나는 자연을 더 많이 연구할수록 창조주에 대하여 더 많이 놀라게 된다”라고 하였다.


​작은 손목시계가 정확한 시간을 맞추며 돌아가는 것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시계 기술자가 정밀한 두뇌와 기술과 능력으로 그렇게 만들어져야 가능하다.  우주에는 존재의 시작이 있다. 모든 시작에는 원인이 있다. 원인없는 결과가 없고 시작없이 저절로 되어진 일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다.

저절로 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무질서요 혼돈의 세계이다. 모든 우주와 인간의 생명의 질서는 지금 현재에도 하나님의 섭리로 질서정연하게 움직이고 있다.  성경은 “집마다 지으신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라.”(히브리서3;4)하였다.


2. 섭리하시는 주 

 요셉은 형들의 미움을 받아 죽임을 당할 뻔 하였으나 유다의 권유로 죽음만은 면하여 애굽으로 팔려가서 많은 고생을 하다가 하나님의 섭리로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마침 그때에 이스라엘에 흉년이 들어 그의 부모형제들이 애굽으로 피난오게 되어 요셉을 상봉하게 되었다.요셉은 그들에게 "나는 당신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자라 당신들이 나를 이곳으로 팔았음으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창45:4-7)하였다.

요셉은 자기를 팔아 넘겼던 형들에게 미워하거나 하지않고 너그럽게 대해주며 그 곳에서 살도록 도와 주었다.

요셉은 하나님의 섭리를 알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천지 만물의 주인시기 때문에 그의 피조물을 섭리하신다. 섭리(攝理)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을 보존하고 세상 모든 일에 관여하시며 만물을 정해진 목적에 맞도록 이끄시는 하나님의 사역이다. 하나님의 섭리에는 세가지 요소가 있는데 보존, 협력, 통치이다. '보존'은 만물을 유지하시는 하나님의 계속적인 사역이다. 하나님의 보존이 없으면 만물은 무(無)로 돌아 갈 것이다. '협력'이란 하나님께서는 그의 모든 피조물과 협력하시며 피조물로 하여금 그들이 해야 할 일들을 행하도록 이끌며 역사하시는 사역이다.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의 선악간의 모든 행위 속에서 간섭하시고 역사하신다.  '통치'란 만물을 그들이 존재하는 목적에 맞도록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계속적인 활동이다. 하나님의 통치는 우주적이며(시103:19,단4;34-35) 가장 무의미한 것까지도 포함하며(마10:29-31) 얼른 보기에 우연적인 것 까지도 포함하며(잠16:33) 인간의 선악간의 행위까지도 하나님의 통치 속에 들어가 있다.(빌2:2;13,창50:20,행14:16) 그래서 피조물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맞게 운행될 수 있도록 다스린다. 성어거스틴은 “조물주의 능력은 모든 피조물이 존속하는 원인이니 만일 그의 능력이 피조물을 다스리기를 그친다면 피조물 전체가 허무로 돌아 갈 것이라”고 하였다..

 

  섭리의 대상에 따라 일반섭리와 특별섭리가 있다. 일반섭리(一般攝理)는 온 우주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이다.(마5:45). 특별섭리(特別攝理)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의 삶과 활동에 대한 하나님의 돌보심이다.(롬8:32). 하나님은 모든 섭리의 중심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받은 자에 대한 기도 응답, 고통에서의 구원과 위험에서의 보호 등으로 나타난다.

섭리의 방법에 따라 통상섭리와 비상섭리가 있다. 통상섭리(通常攝理)는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되, 물질계에서는 하나님이 정하신 자연법칙을 통해, 정신계(또는 영계)에서는 하나님이 주신 마음의 특성에 따라 그 목적하신 바가 이뤄지는 것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제2원인(第二原因)의 매개를 통하지 않고 이뤄지는 것을 말한다. 비상섭리(非常攝理)는 하나님이 만드신 통상적인 법칙을 초월하여 일어나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이며 임시적인 역사를 말한다. 하나님은 자연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기 때문에 비상시에는 초자연적인 행위로 특별섭리를 하시는 분이시다,(민16:28,렘32:20,요2;11,5:36) 즉, 이는 제2원인의 피조물 자체가 주체가 되지 않고, 또 피조물의 작용이나 활동을 거치지 않고 하나님께서 직접 역사하심을 통해 일어나는 특이한 결과를 말한다. 이를 흔히 '이적'(異蹟)이라 일컫기도 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의 섭리를 거역하는 것은 범죄이고 그 결과 슬픔과 고통이 따른다. 하지만 하나님의 섭리에 순응하는 자에게는 온갖 고난속에서도 용기있게 승리하며 살아 갈 수 있다.

성경속의 인물인 욥이가 왜 위대한가? 그에게 극심한 고난이 닥쳤을 때에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내가 모태에서 적신으로 나왔은즉 또한 적신이 그리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이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1:21)하며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사도 바울은 온갖 핍박과 고난을 당하면서도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9)하였다.


3. 살아계신 주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소경이 보지 못했다고 태양과 공기가 없다고 하는 것과 같다.우리는 따뜻한 햇볕을 받으며 바람부는 것을 보고 호흡하며 태양과 공기와 산소가 있음을 고마워 한다.

우리는 자연 만물과 성경과 생활에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알 수 있다.


 ​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금지한 선악과를 먹어 범죄함으로 두려워 숲속에 숨었다. 성경은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창3:8)하였다. 하나님은 그날도 평소처럼 동산에 거니셨다가 아담과 하와가 숨은 것을 알고 그들을 부르셨다. "네가 어디 있느냐?"(창3:9) 아담은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 하여 숨었나이다"(창3:10)답하였다. 벌거벗은 아담과 하와는 범죄하고부터 눈이 밝아져 부끄럽고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동안 그들은 에덴동산에서 일상에서 살아계신 하나님과 인격적인 의사소통을 가져왔다.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과 행위를 다 보고 계셨고, 하나님의 음성도 들려주시고 그들의 기도도 들어 주셨다. 이러한 소통은 살아 있는 인격체간에만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하나님은 믿음 좋다고 소문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아브라함아!"부르셨다. 아브라함은 "내가 여기 있나이다" 답하였다. 하나님은 "네 사랑하는 아들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하셨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이삭을 제물로 드려려 그를 결박하고 제단 나무 위에 누이고 칼을 들었다. 그때에 하나님은 긴급히 말씀하셨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화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라"(창22:1-18)하셨다.


하나님은 호렙산 떨기나무 불속에서 나타나 모세를 부르셨다. "모세야!" "예,내가 여기 있나이다" "애굽에서 고통 당하는 내 백성을 그 땅에서 건져내어 아름답고 광대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라.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출3:4-12) 하나님은 지금까지 그를 믿는 모든 백성들에게 나타나셔서 가르치고 인도하셨고 미래에도 그러하실 것이다.


 인도에서 어느 선교사가 야외에서 설교를 하고 있는데 이슬람교도 한 사람이 끼어 들어 말했다.“우리 이슬람교도는 당신들이 가지지 못한 것을 한 가지 가지고 있습니다.” 선교사는 "그게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는 “우리는 메디나에 가면 관이 있는데 그 안에는 모하메트 시신이 있어서 그가 살아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그리고 당신들의 기독교인들은 예루살렘에 가도 빈 무덤밖에 없지 않습니까?” 선교사는 “고맙습니다. 당신 말이 옳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말씀이야말로 엄청난 차이를 보입니다. 그리스도의 무덤이 빈 것은 우리가 믿는 주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세상의 많은 다신교 종교에서 믿는 신은 무인격적인 죽은 신이다. 그들의 교주들은 죽어 무덤 속에 있다. 추종자들은 그 무덤을 순례하고 참배하며 신심을 더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무덤은 빈 무덤이었다.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무덤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부활하여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물었을 때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답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마16:15-17)하셨다. 예수님 스스로도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요14:9)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죄로 멸망한 인류를 구원하시려 십자가에 죽으시려 세상에 내려 온 참 하나님이시다.

당시 예수님을 핍박하며 죽이려고 안달했던 대제사장도 예수님을 ‘살아 계신 하나님“(마26:63)이라 고백하였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3일만에 다시 살아 나리라고 스스로가 예언을 하였다. 이 예언을 들은 당시 제사장과 총독은 만에 하나라도 예수님이 무덤에서 나오지 못하게 하려고 큰 돌로 무덤을 막고 거기에 봉인하고 군대들로 지키게 하였다. 제자들은 모두 자기 목숨까지 위험을 느껴 숨어 있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3일만에 돌문을 굴리고 무덤에서 나와 부활하셨다. 무덤을 지키던 병사들은 혼비백산하며 모두 도망가버렸다. 지금까지 그들은 예수님의 무덤을 증명하지 못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직접 눈으로 본 제자들은 그제사 믿음이 부족했던 자신을 회개하며 두려움없이 밖으로 뛰쳐 나가 그리스도의 살아나심을 증거하였다. ​그러기에 그들은  모두가 예수님의 부활을 전파하다가 순교할 수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죄를 이기고 죽음을 이긴 살아계신 하나님의 증거이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 고난 받으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늘로 올라가셨다!  


하나님은 살아있는 인격체로서 세상을 사랑하고 인간에게 말하며 교제하는 인격신이시다. 사도 바울도 ”살아 계신 하나님“ (롬9:26,고전3:3,6:16,딤전3:15,4:10,히3:12,9:14)이라 전하였다. 지금도 하나님은 살아 계신 영이신 성령을 통하여 인격적으로 우리안에 계셔서 지혜,지식,깨달음을 주시고 위로하시고 인도하시고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신다.

 

4. 초월하시는 주

하나님은 시공을 초원하신다.

 

  태양과 달이 한 개이지만 지구상 76억 인류가 어디에 가 있던지 거기에 똑 같이 비추고 있다. 하나님은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지금도 운행하시는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가까이 계시며 우주의 어디에나 계시는 무소부재하신 분이시다.

성경은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나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 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시139:7-10)하였다.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기 위해 오신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 앞에서 말씀하셨다. “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14:16-17)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14:19-20)하셨다. 바로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위로하시고 변호하시고 우리와 함께 거하시며(요 14:17), 가르치시고 기억나게 하시며(요 14:26), 증거하시며(요 15:26), 죄를 깨닫게 하시며(요 16:8), 인도하시며 말씀하시며 알리신다(요 16:13, 15). 그리고 성경을 깨닫게 하시며, 성령으로 말하게 하시며(행 1:16; 벧후 1:21), 사역자를 부르시며(행 13:2), 사역자들과 말씀하시며(행 8:29), 일꾼을 보내시며(행 13:4), 복음 사역의 방향을 정해주시며(행 16:6-7), 중재하신다(롬 8:26). 또한 성령은 의지(고전 12:11), 마음(롬 8:27), 생각, 지식, 말(고전 2:10-13), 사랑(롬 15:30) 등 인격적 속성을 가지고 계신다. 따라서 거짓말이나 시험하는 행위(행 5:3-4, 9), 거스리는 행동(행 7:51), 슬프게 하는 것(엡 4:30), 욕되게 하는 것(히 10:29), 훼방하는 것(마 12:31)은 모두 성령을 근심되게 하는 죄악에 해당한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 하셨다.그러므로 그리스인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나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행하며 세상 누구보다 지혜롭고 정의롭고 배려하고 사랑하며 정직하고 담대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5. 전지전능하신 주

 

  하나님은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것을 완전하고도 불변하게 알고 계신다.(시139:1-8; 147:5; 잠15:11; 사46:10). 따라서 하나님의 눈동자 앞에서 우리 인간이 숨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나님은 어떤 일이든 하지 못하는 것이 없이 무슨 일이든지 능히 할 수 있는 절대적인 능력자이시다.(창17:1; 고후6:18; 계4:8).

하나님은 우주와 하늘과 땅의 창조자이시므로 모든 것을 완전히 아신다.

그러므로 인간의 역사와 시간 속에서 그의 심판도 정확하게 이루어 가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말과 마음과 생각까지도 아신다. 듣지 않고도 우리의 은밀한 생각과 소망과 수고하고 무거운 것들을 아신다.

예언 성취

 다른 종교에는 예언성취라는 것이 없다. 기독교 성경에만 1,817개의 예언이 8,352 구절에 들어있으며 이는 전체 성경 내용의 27%나 된다. 그 예언들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성취된 것을 보면서 역사와 모든 만물을 주관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다. 구약 성경에는 메시아 예수님에 대해 약 350개의 예언과 프로필이 있다

피터 스터너((Peter Stoner) 14)박사는 예수님에 관한 예언 8가지가 한 사람에게 우연히 성취될 가능성을 수학의 확률로 계산했다. 예수님의 경우에 8가지가 동일인에게 우연히 성취될 가능성은 우리나라의 3배 넓이가 되는 넓은 땅에, 동전을 두자 높이(약 60㎝)로 깔아 놓고, 그중에 표시해 놓은 단 하나의 동전을 단 한 번에 집어내는 것과 같다고 했다. 확률적으로 따지면 예수님의 탄생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도 8개가 아니라 350개가 다 들어맞으려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되는 것이다.


우주


달의 공전으로 인해 만들어지는 밀물과 썰물은 바닷물이 고여 있지 않게 만들어 썩는 것을 막아 준다. 만약 달이 없었다면 바닷물은 진작에 썩어서 생명을 살리기는커녕 생명을 파괴했을 것이다.

달이 지금보다 더 컸거나 가까웠다면 조수 간만이 너무 심해서 육지 전체가 갯벌처럼 되었어야 한다. 또 대기의 변화가 너무 심하다던가 지구 자전의 속도가 너무 빨라져서 생기는 문제들이 생기고, 자기장의 약화 등으로 태양으로부터 오는 유해한 빛들을 차단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지구의 자전축 역시 달의 중력에 의해 안정적으로 고정된다. 만약 달이 없었다면 지구는 쓰러져 가는 팽이처럼 자전축이 크게 흔들리거나 아예 똑바로 서 있어야 한다. 그리고 두 상황 모두 생명체가 살 수 없는 극한의 환경을 만들게 된다.

   

 ​또 달이 없어지면 지구의 자전이 빨라진다. 그래서 하루는 8시간 정도로 줄어들게 된다. 그뿐 아니라 자전 속도가 너무 빨라서 바람이 엄청나게 강해 지고, 역시 인간이나 새 같은 동물들은 살기 힘들어지게 된다.

    만약 지구가 목성처럼 컸다면 강한 중력으로 인해 몸을 움직이기도 서 있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또 메탄이나 암모니아 같은 독성 물질들이 지표면에 붙어서 호흡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만약 지구가 너무 작았다면 달에서 움직이는 것처럼 불편하게 움직였을 것이고, 물이나 대기를 지금과 같이 적합한 수준으로 보유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지구    

 하나님께서는 자전 속도도 적당하게 관리하고 계신다. 자전이 너무 빨랐다면 바람이 너무 심해지고 자전이 너무 느렸다면 온도의 차이가 너무 심해져 생존이 힘들었을 것이다. 지각의 두께 역시 너무 두꺼웠다면 대기 중의 산소가 지각으로 흡수되어서 산소 부족에 시달렸을 것이고, 너무 얇았다면 화산 활동이나 지진 활동이 너무 심해서 살기 어려웠을 것이다.

    예를 들어 목성이나 토성이 지구와 조금만 더 가까웠거나 컸다면 지구의 공전 궤도가 중력에 의해 불안정 해졌을 것이고, 지구 혹은 태양계가 은하의 중심에 더 가까웠다면 혹은 주위에 더 많은 천체들이 있었다면 지구와 충돌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 또 비슷한 이유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은하가 다른 은하와 더 가까웠다면 은하끼리 충돌하거나 중력에 의해 많은 것들이 불안정해졌을 것이다.

      

지구는 왜 23.5도로 기울어져 있는가? 이 때문에 우리가 사는 지구는 항상 태양빛을 받는 각도가 달라지므로 4계절이 생기는 것이다. 여름에는 북극얼음이 녹아 수증기가 되며 겨울에는 남극 얼음이 녹고 반대로 부극은 얼고 이렇게 태양을 한바퀴 돌면서 봄,여름,가을,겨울이 되도고 만드셨다.“땅이 있을 동안엔,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창8:22)

 

노아 대홍수 때에 에덴의 나무들이 지하로 들어 갔음이 성경에 언급해 있다.(겔31:16-18) 기름을 바위에서 빨며(신32:13)

인체


한의학의 기본 이론에 따르면 우리 몸은 반사구라는 전신의 축소판이 있는데, 오장육부와 팔다리가 모두 이 축소판 안에 연결 부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축소판을 통해 몸 구석구석의 상태를 측정하거나 몸 여기저기에 자극과 신호를 보낼 수 있다. 인체의 대표적인 반사구인 손이나 발, 귀 등은 전신의 각 부위와 연결되어 정보를 주고받고 조절한다고 한다.

현대과학

 

북편 하늘의 거대한 허공

우리 태양계가 속해 있는 은하계의 지름은 약 10만 광년, 두께는 15,000광년이 된다. 그러나 은하의 헤일로(halo)까지 따지면 20만 광년이 훨씬 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우리 이웃 은하계인 안드로메다의 지름은 약 40만 광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우리 은하에는 약 천억 개가 넘는 태양들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천억이라면 얼마나 많은 걸까? 만약 1초에 하나씩 세어서 천억을 세자면 무려 3,170년 이상이 걸린다.

 

1981년 10월 미국 과학회에서 발간되는 Chemical and Engineering N-ews에서 북극성 주위에 약 2000여 개의 은하수가 들어갈 수 있을 만한 거대한 공간이 있다는 것을 발표했다. 즉 아무 별이나 은하계가 없는 텅빈 공간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경은 기원전 1500년 전에 이미 그 사실을 말했다는 것이다. "그는 북편 하늘을 허공에 펴시며" (욥 26:7).

 

하나님은 지구의 보호막을 만들어 놓으셨다.

​오존층은 지구로부터 약 25km~30km 상공에 위치해 있다. 오존층이 하는 역할은 태양으로부터 날아오는 모든 해로운 광선을 차단해 주는 것이다. 오존층은 피부암과 조기 노화, 면역성 약화 등 각종 질병으로부터 우리를 지켜 준다. 과학자들은 1902년에 들어서야 비로소 지상에서 약 30km 지점에 오존층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러나 성경은 기원전 1055년 경에 이미 그 사실을 말했다. "그가 하늘을 차일(遮日)같이 펴셨으며 거할 천막같이 베푸셨고" (사 40:22, BC 700).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주께서…하늘을 휘장 같이 치시며" (시 19:4, 104:2, BC 1055).

    

  그동안 사람들은 대륙이 원래부터 여섯 개로 나뉘어져 있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질학자였던 웨게너(Wegener)는 1914년 대륙이동설을 발표하여. 지구의 대륙은 원래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다.

 성경은 기원전 1,500년 경에 이미 그 사실을 말하였다. "그가 땅을 움직여 그 자리에서 미신즉 그 기둥이 흔들리며(he shakes the "earth" from…)" (욥 9:6). "주께서 땅을 진동시키사 갈라지게 하셨사오니 그 틈을 기우소서 땅이 요동함이니이다." (시 60:2, BC 1055). "그 지식으로 해양이 갈라지게 하셨으니" (잠 3:20, BC 700).

   

공기에도 무게가 있다.

​대기권을 채우고 있는 공기에도 무게가 있다. 우리가 그 압력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우리 몸 안의 기압때문이다.갈릴레오의 제자였던 에반젤리스타 토리첼리는 1644년 실험을 통해 공기에도 무게가 있음을 증명하였다. 성경은 기원전 1,500년 경에 이미 그 사실을 말하였다. "바람의 경중(무게)을 정하시며" (욥 28:25).

 

 만일 태양이 지구를 놓아 버려 지구가 그 중력을 잃어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아수라장이 되고 말 것이다. 모든 물질에는 잡아당기는 힘이 있어서 그것으로 인해 서로를 지탱해 주고 있다. 뉴턴에 의해 만유인력의 법칙이 증명된 것은 1666년경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미 AD 62년경에 그 사실을 말하였다.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섰느니라(by him all things consist - 다른 번역엔 "서로 잡아 준다"로 나옴)" (골 1:17).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up-holding all things - 서로 지탱해 주고 있다는 뜻)" (히 1:3).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이사야 40:22),

​거의 무한대로 큰 우주(이사야 55:9), 질량 에너지 보존 법칙(베드로후서 3:7), 물의 순환(전도서 1:7), 엄청나게 많은 별(예레미야 33:22), 물질과 에너지의 동등성(히브리서 1:3),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시편 102:25-27), 생명체의 활동에 있어서 피가 제일 중요하다는 사실(레위기 17:11), 대기의 순환(전도서 1:6), 중력장(욥기 26:7) 등등. 물론 이와 같은 것들은 현대 과학의 전문 용어로 기록되어 있지 않고 우리 사람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용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들은 현대 과학에서 가장 최근에 발견한 사실들과 완전히 일치한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성경이나 과학이나 역사나 기타 다른 어떤 분야에 속한 문제에 있어서 성경의 내용이 정말로 잘못되었음을 증명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성경에는 요한계시록 11:17에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노릇 하시도다"하였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놓아 주지 않는 애굽에 10가지의 무서운 재앙을 내리게 된다.

그 재앙들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큰 재앙들이었다. 당대의 사건을 기록한 파피루스 문서가 약 1세기 전에 발견되었다. ‘아이퓨어(Ipuwer) 파피루스’라 불리우는 이 문서는 이집트 사카라 피라밋 근방인 멤피스 지역에서 ‘아나스타시’라는 사람에 의해 발견되어 1828년 네덜란드 레이덴 박물관으로 옮겨 보관중이다.

그 기록된 내용인즉 “이집트 전역에서의 역병, 나일강이 피처럼 변한 것과 물에 갈증이 난 사람들, 전 지역에서 곡물들이 고사된 것, 가축들이 신음함, 빛이 없던 땅, 군주들의 자녀들의 죽음 및 귀금속과 보석들이 여자 노예들의 목에 걸려짐”등이었다.

 

애굽의 가정들의 모든 장자들이 죽는 10번째 재앙으로 바로의 항복을 받은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오면서 또 진퇴양난의 위기에 빠졌다.뒤에는 애굽 군대의 병거들이 추적하고 있었고, 앞에는 바로 앞에는 홍해가 가로 막고 있었다. 모세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기도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뇨 이스라엘 자손을 명하여 앞으로 나가게 하고,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으로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리라.(중략)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어민대 여호와께서 큰 동풍으로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고 물은 그들의 좌우에 벽이 되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을 다 건너자 하나님은 바닷물을 다시 닫으시니 애굽 병거들과 기병들을 덭어 하나도 남지 않았다“(출14:16-28)고 했다.

 

홍해는 수심이 1200m 이다. 물이 갈라졌다고 하더라도 건너가지를 못하는 절벽이다. 그런데 모세가 건너갔던 딱 그부분만 경사 1도에 수심 120m로 완만한 바닷길이었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에서 해양학을 연구하는 나움 볼칭어와 독일 함부르크의 연구자 알렉세이 안드로소프에 따르면, 바람이 초당 68마일(109km)속도로 밤새도록 불었다면 바다가 거의 바닥을 보일 만큼 갈라질 수 있다고 한다. 볼칭어는 3500년 전 4시간 가량 바람이 불어 바다에 길이가 7킬로미터인 틈이 생겨났고, 30분 뒤 합쳐졌을 것이라고 밝혔다.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물리학자이자 《출애굽기에 나온 기적(The Miracles of Exodus)》을 저술하기도 했던 콜린 험프리는 "딱 그 순간 모든 조건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는 게 기적"이라고 했다. 2000년 봄, 바다 속에서는 3,500년 전 이집트 병사들과 병거들이 고고학자 론 와이어트15)에 의해 발견되었고, 발견된 그 병거들은 현재 이집트 박물관에 ​전시되었다.

. 홍해에는 모세의 기적을 지지하는 고고학적 증거들이 있는가?


 

 미국 메릴랜드 주 커티스 기계회사 사장이며 우주계획고문인 헤롤드 힐(Herold Hill)씨는 놀라운 사실을 발표했다.어느날 회사에서 10만년 전까지 컴퓨터로 달과 태양의 궤도진횅의 시간 측정을 하게 되었다. 정확한 궤도를 추적해야 인공위성 궤도를 작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가 컴퓨터가 작동을 멈추며 비상 신호를 보냈다. 그래서 조사를 해 보았더니 어느 역사 속에서 하루(24시간)가 사라졌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며칠 후 젊은 과학자가 조사하면서 어릴 때 들었던 성경이야기를 하였는데 태양이 멈춘 사실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성경을 찾아 본 결과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 거의 종일토록 속히 내려가지 아니하였느냐?”(수10:13)

이 말씀은 여호수아를 지도자롤 한 이스라엘 민족과 아모리 족속과의 싸움이 길어질 때 여호수아가 하나님께 기도한 결과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할지니라”(수10:12) 는 말씀이었다. 과학자들이 조사한 결과 그때에 태양이 멈춘 시간은 정확히 23시간 20분간이었다는 사실을 밝혀내었다. 그러나 컴퓨터에는 24시간이 없어졌는데 나머지 40분은 어찌됐는가? 또 다시 청년의 말을 토대로 성경 어디엔가 태양이 뒤로 머물렀다는 기록을 찾아내었다. “선지자 이사야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아하스의 일형표 위에 나아갔던 해 그림자도 10도를 물러 가게 하셨더라”(왕하20:11) 히스기야 왕이 병들었을 때 눈물로 기도한 결과 하나님께서 15년의 생명을 연장을 허락하셨다.그 웅답의 확신으로 일형표의 그림자를 십도 뒤로 물러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는데 응답한 것이다. 일형표 10도는 40분이었다.이렇게 해서 잃어버린 24시간을 찾았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나이다.”(시139:1-4)

 

6. 만물의 아버지시다.


하나님은 그가 지으신 모든 피조물의 아버지시기 때문이다.하나님은 그를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아버지이시다.

세상의 아버지는 별의 별 성격의 아버지가 있지만 하나님 아버지는 사랑과 자비와 공의와 거룩한 아버지시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게시도다”(엡4;6) 하였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지 않았다.왜냐하면 하나님은 너무나도 거룩하고 위엄있고 거룩하신 분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불렀다.(마6:9)

그리스도도인들이 기도할 때 먼저 ‘오 하나님 아버지“라고 기도한다.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아버지가 되신다.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예수님은 죄인도 하나님 앞에 나와서 회개하고 용서 받으면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인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가르쳤다. 예수님도 기도하실 때에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라고 기도하셨다.이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는 친근한 관계이기 때문이다.

 

 

7.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웨스터 민스터 신앙고백서 16) 제2장 3항에는 “단일한 신성에는 삼위가 계시는데 본질과 권능과 영원성이 동일하신 성부 하나님,성자 하나님,성령 하나님이시다. 성부는 누구로부터 말미암지 않았고 낳으신 바 되지도 않았고 나오시지도 않았으며 성자는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영원히 낳으신 바 되셨으며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영원히 나오신다”고 하였다.

 (In the unity of the Godhead there be three persons, of one substance, power, and eternity: God the Father, God the Son, and God the Holy Ghost. The Father is of none, neither begotten, nor proceeding; the Son is eternally begotten of the Father; the Holy Ghost eternally proceeding from the Father and the Son.)


​삼위(三位)란 무엇인가?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다. 하나님은 각각 독립된 세 분의 실재적 개체(성부, 성자, 성령)이면서 동시에 본질에 있어서는 서로 완전 동일한 일체가 되신다.(창 1:26; 고전 8:6; 고후 13:13).즉, 창조주이신 하나님,구세주이신 예수그리스도, 내 속에 계시며 위로하시고 가르치시고 인도하시며 지혜를 주시는 성령님이 모두 등등하신 한 하나님이시다.

​이 세 분은 이름은 다르지만 본체는 하나이시고 함께 일하신다. 삼위 하나님은 태초부터 함께 세상을 창조하셨다. 영원전부터 영원까지 함께 존재하신다. 성부는 창조와 역사를 주관하시고  예수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고 교회를 세우시고 역사를 완성하게 하신다. 성자는 성육신하셔서 인간과 함께 하시기 위해 인간으로 오셔서 인류의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스스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셨다가 세상 마지막 날에는 재림하여 최후 심판을 주관하신다. 성령은 태초부터 성부와 성자와 함께 계시다가 예수의 부활 승천후 교회 안에서 신자들을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살 수 있도록 이끄시며 함께 하신다.


삼위는 항상 동시에 역사하신다. 삼위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실 때에 함께 동참하셨고 구속사역에서도 동참하셨으며 지금도 함께 역사하신다. 신앙이란 지식이 아니라 경험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동시에 역사하시는 것을 보았다. 성자 예수님께서 세레를 받으실 때에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심을 보았고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막1:11)는 성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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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dnote>

1) '엘'과 결합된 이름을 보면, 〈엘 로이〉('감찰하시는 하나님', 창16:13), 〈엘 샤다이〉('전능하신 하나님', 출6:3; 창17:1; 28:3), 〈엘 엘로헤 이스라엘의 하나님', 창33:20), 〈엘 엘욘〉('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창14:17-22; 민24:16; 시78:35), 〈엘 올람〉('영생하시는 하나님', 창21:33)이 있다.

2)형태는 복수형이지만 단수로 취급되며, 온 우주와 세상과의 관계에서 탁월하고 절대적이며 참된 하나님을 지칭한다.(창1:1; 출20:7). 이와 관련해 '신', '하나님'을 지칭하는 '엘로아흐'는 '엘'의 연장형으로서 구약에서는 시어에 주로 쓰인다.(신32:15-17; 욥12:6; 사44:8; 합1:11).

3) 가장 신성하고 탁월한 성호(聖號)로 인정되어 왔다. 히브리어로는 네 개의 자음으로 이뤄져 있으나 본래의 그 발음은 알려져 있지 않다. 유대인들은 3계명을 엄수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기 위해 B.C.300년경에 이것을 전혀 발음하지 않기로 했다. 만약 피치 못해 발음할 경우 '주님'(Lord)을 뜻하는 '아도나이'(אךני Adonai, '전능하신 통치자'라는 뜻을 함축함)로 읽었다.(포로기 이후).

4)〈여호와 닛시〉('여호와는 나의 깃발', 출17:15), 〈여호와 삼마〉('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다', 겔48:35), 〈여호와 샬롬〉('여호와는 평강', 삿6:24), 〈여호와 이레〉('여호와께서 준비하심', 창22:8,14), 〈여호와 치드케누〉('여호와는 우리의 의', 렘23:6; 33:16), 〈여호와 체바오트〉('만군의 여호와', 삼상1:3; 시24:10), 〈여호와 엘로헤 이스라엘〉('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삿5:3). 이외에 〈네차흐 이스라엘〉('이스라엘의 지존자', 삼상15:29), 〈아비르 이스라엘〉('이스라엘의 전능자', 사1:24), 〈케도쉬 이스라엘〉('이스라엘의 거룩한 자', 사1:4).등이 있다.

5) 알렉산더 빌렌킨 강의 중, The Kalam Cosmological Argument5)

6) 대략 80km까지는 여러 기체가 지구상 어디서나 일정하게 분포되어 있다. 이 층을 균질권(homosphere)이라 한다.

   ​균질권은 대류권‧성층권‧중간권을 포함하는 대기층을 말한다

대기의 존재로 인해 지구는 태양의 직사광선에 무한히 가열되지 않는다. 야간에는 복사냉각에 의해 극저온으로 떨어지지 않는다. 또 대기는 유성이나 우주선(cosmic rays), 태양의 미립자, 복사 등 높은 에너지 입자의 침입으로부터 지구를 보호하고, 인류가 살아갈 수 있도록 산소와 맑은 공기를 공급해 준다.대기권의 수증기를 제외한 건조공기의 성분은 전체 부피의 약 78%가 질소(N2), 약 21%가 산소(O2)이며, 0.9%가 아르곤(Ar)이다. 이산화탄소(CO2)가 0.03% 있으며, 나머지는 미소량의 네온(Ne), 헬륨(He), 크립톤(Kr), 크세논(Xe), 오존(O3)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7) Hugh  Ross, the Creator and the Cosmos (Colorado Springs, CO: NavPress, 2001), 198.

8) 스티븐 호킹 ,ABrief Hawking,A Brief History of Time(뉴욕:반탐,1990),125.

9).폴 데이비스, The Cosmic Blueprint (뉴욕: Simon & Schuster, 1988), 203.

10)스티븐 C 마이어(Stephen C. Meyer,1956~ ) 지구물리학자로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다윈의 의심(Darwin’s Doubt)'의 저자다.​1919년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단서와 원인: 생명 연구의 기원에 대한 방법론적 해석"(Of clues and causes: A methodological interpretation of origin of life studies.)이란 논문으로 Ph.D.학위를 취득"  휘트워스와 '크리스찬 팜 비치 애틀랜틱'( Christian Palm Beach Atlantic University)대학 교수.지적 설계운동의 주조직인 디스커버리 연구소( Discovery Institute)(DI)의 DI의 선임 연구원이자 '과학문화센터'(CSC)의 국장. 

11).William A에서 인용. 뎀스키와 제임스 M. 쿠시너, Eds, Signs of Intelligence (Grand Rapids, MI: Brazos, 2001), 108.

​12) 게리 해버마스에서 인용한 "아테교에서 신학으로 가는 나의 순례": 안토니우스 플뢰, 철학자인 크리스티와의 인터뷰 (겨울, 2005).

13). Fuz Rana와 Michael Ruse의 토론, 생명의 기원, 2013.05.16

14) 피터 스터너(Peter Stoner, 1888-1980) 1953년까지 패서디나 시립대학 수학천문학과 이사장, 웨스트몬트 대학 과학과 명예교수, 패서디나 시립대학의 수학천문학과 명예교수였다. 그의 저서 "과학은 말한다(Science Speaks )"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이 책은 무엇보다도 성경의 예언에 대한 시각적 확률 추정과 계산을 논하였다.

15)론 와이어트,(Ron Wyatt,1939-1999년) 미국 테네시 주 매디슨 시의 한 병원에서 간호사 마취사로 일하고 있던 1960년, 아라랏(5,137m) 산 근처의 한 산에서 배 모양인 두루피나르(Durupınar)유적지의 라이프 오브 더 라이프에서 사진을 보았다. 이로 인해 복음주의 기독교계에서는 이것이 노아의 방주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퍼지면서 와이트는 아마추어 고고학자로서의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1977년부터 1999년 사망할 때까지 그는 100번 이상의 중동 순방을 했고, 그는 1999년 사망할 때까지 성경과 성서 고고학과 관련된 여러 유적과 유물들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16)​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1643년 영국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 소집된 신학자들의 총회에서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교회의 통일된 신앙고백서로 작성되었다. 그 회의는 1,163회 회집되었다. 거기에 참여한 신학자들은 98명이었고 그 외에 스코틀랜드 교회 총회 대표 11명이 있었다. 이 신앙고백서는 1647년 에딘버러에서 모인 영국교회 총회에서 승인되었고 1649년 영국 의회에서 인준되었고 1690년에 재확인되었다.


타락(駝酪)


타락(駝酪)
- 떨어질 타, 떨어질 락(낙)

1. 품행(品行)이 나빠서 못된 구렁에 빠짐.
2. 도심(道心)을 잃고 속심(俗心)으로 떨어짐.
3. 죄(罪)를 범(犯)하여 불신(不信)의 생활(生活)에 빠짐.


부패(腐敗)
- 썩을 부, 패할 패

1. 부패균(腐敗菌)에 의(依)해 단백질(蛋白質) 및 유기물(有機物)이 유독(有毒)한 물질(物質)과 악취(惡臭)를 발생(發生)하게 되는 변화(變化).
2. 법규(法規), 제도(制度) 등(等)이 문란(紊亂)해 바르지 못함.
3. 정신(精神)이 타락(墮落)함.

예레미야 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창세기 6:11-12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


변화(變化)
- 변할 변, 될 화

1. 모양(模樣)이나 성질(性質)이 바뀌어 달라짐.

누가복음 9:29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로마서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고린도전서 15:51-52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고린도후서 3: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변질(變質)
- 변할 변, 바탕 질

1. 질이 달라짐.

예레미야애가 4:1
슬프다 어찌 그리 금이 빛을 잃고 순금이 변질하였으며 성소의 돌들이 거리 어귀마다 쏟아졌는고.



결혼이 파경에 이를 때, 부부는 사랑하고, 약혼하고, 결혼하던 시절의 기억이 없습니다.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던 시절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립니다.
사랑은 식어버리고, 불륜을 저질러서 이혼에 이르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타락을 결혼에 비유하여 말씀하실 때가 잦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따랐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땅을 더럽히고, 기업을 가증하게 하였습니다.
생활의 편안함으로 인해 무료함을 느꼈으며, 무언가 재미있고 신나는 일을 찾았을지 모릅니다.
그들이 선택한 것은 우상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엄격하고, 쾌락을 쫓아다니는 것에 대하여 금지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이방 종교는 그들에게 새로운 모험이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런 행위는 불륜이며,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행동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멸망은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지 못하는 데 있었습니다.
사막과 구덩이 땅 건조하고 사망의 음침한 땅, 사람이 다니지 아니하고, 거주하지 아니하는 땅을 통과하게 하셨습니다.
죽음의 고비에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지켜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잊어버렸습니다.
당신이 구원을 받았을 때, 감격스럽고 기뻤던 기억을 떠올려보십시오.
지금 바로 그런 감격이 있습니까?
우리는 그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노라고 맹세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렇게 살고 있습니까?
다시 세상의 신을 따라 욕망을 따라 살고 있지 않습니까?
처음 사랑이 식고, 열정이 식을 때, 신앙은 타락합니다.

우리는 사랑이 한결같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한결같지 않은 것이 사랑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잘못을 보편적인 것으로 만들어 죄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처음 사랑할 때를 기억하고, 그때의 사랑, 열정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우상을 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습니다.
재물을 섬기는 사람은 올바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할 수 없습니다.
성공을 우상으로 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공을 위해서는 온갖 잔인한 수단도 다 동원합니다.
그렇게 남을 짓밟고 올라서는 것을 성공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성공 자체가 우상일 수 없지만, 온갖 음모와 거짓말을 해서라도 성공을 추구하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온갖 쾌락, 도박, 마약, 술, 이런 것들에 빠진 것도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들은 우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면서 이런 잘못된 우상에 빠져 있습니다.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고 행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죄가 만연하면 죄가 죄로 느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하는 것을 죄라고 한다면 율법처럼 복음이 우리를 옥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사실 우리를 정직하게 살펴본다면 우리에게 우상이 있음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너무 지나쳐서 취미생활을 우상이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이 음악을 좋아하거나 독서를 하거나 무엇을 수집하는 행위를 우상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런 것을 하나님은 금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물은 위로부터 아래로 흐릅니다.

종교의 타락도 위에서부터 타락하여 백성까지 타락하게 합니다.
제사장은 여호와가 어디 계신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존재마저 의심하는 상황을 말합니다.
율법을 가르친 자는 하나님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가르치는 서구신학이 있습니다.
부활도 천국도 믿지 않습니다.
결국, 유럽은 이런 잘못된 신학 때문에 교회가 텅 비게 되었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것은 예수 믿어 부자 되고, 성공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없는 말씀을 가르칩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을 안다고 한다면 커다란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선지자들은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였습니다.
요즘은 과거처럼 예언한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과거에 예언한다고 하면서 잘못된 길로 인도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결국은 자신이 재림 예수라고 하고,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하는 웃지 못할 일들이 있었습니다.
예언은 교회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교인을 미혹하고, 선동하여 자신의 추종자로 만들려고 주신 은사가 아닙니다.

나는 첫 사랑을 회복하자는 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너무 뻔한 구호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나는 신앙이 나태하고 게으른 사람에게 이런 구호가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
왜냐하면, 알면서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종교의 타락은 처음 사랑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에 있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것에 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의 타락에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 중심, 예수 중심, 성령 중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있어야 할 자리에 버젓이 우상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에 인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자리에 심령술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의 신앙은 타락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대신에 다른 것을 섬길 때 교회는 타락합니다.
예수 중심일 때 결코 타락하는 일이 없습니다.
성령 중심일 때 교회의 부흥이 멈추지 않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삼위일체 하나님 중심의 신앙이어야 합니다.

타락의 결과


타락의 결과는 한 마디로 죽음이다.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사람이 스스로 자기를 구원할 수 없는 비참한 상태에 떨어진 것이다.
이 죽음이라고 하는 말은 네 가지 영역에서의 분리, 부조화 및 불일치를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첫째,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

“영적인 죽음”이라는 말로 설명되는 영적 상태로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것을 말한다.
타락 전에는 아담과 이브가 에덴 동산을 거니시는 하나님을 두려워 하거나 피하거나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께서 동산에 나타나시면 자연스럽게 그 하나님의 임재를 즐거워하며 함께 동산 안을 거닐었을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아름답고 평화롭고 행복한 그림을 연상할 수 있다.

아담의 범죄는 그런 아름다운 하나님과의 교제를 더 이상 상상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에덴 추방 이후, 그들에게 비록 “제사”라고 하는 방편을 통하여 하나님의 얼굴을 구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두셨지만,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통하여 볼 수 있는 것처럼 그것은 제물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고, 인간 쪽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구해야 하는 모습이다.
그나마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으시면 가인의 경우와 같이 그 제사는 열납되지 않았다.

타락 이후,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가 파기됨으로 사람이 영적 죽음의 상태,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가 단절된 상태에 들어 가게 되었다는 것을 바르게 이해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왜 거듭남을 이야기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화목을 이야기 하는지를 쉽게 이해 할 수 있다.

영적 죽음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것을 뜻한다면, 중생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것을 뜻한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대적하는 상태에 있던 사람의 의식 속에 하나님과 화목하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즐거워 하는 심령의 변화가 일어난 것을 뜻한다. 살아 있는 영성이란 이런 속사람의 변화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롭고 거룩한 성품이 언행 속에 반영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다른 사람들로부터의 분리

아담과 이브의 온전해 보였던 인간 관계는 선악과를 먹은 사건을 중심으로 결렬되었다.
이런 사실은 쉽게 창세기 앞 부분에 나타나는 아담과 이브,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통하여 살펴 볼 수 있다.
하나님의 계명을 범한 죄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는 하나님의 질문들에 대한 아담의 대답은, 아담이 어떻게 자신의 죄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과 이브에게 떠 넘기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남자와 여자 사이의 조화는 비참하고도 잔인하게 깨어졌다.
아벨을 돌로 쳐 죽인 가인의 이야기는 한 인간으로서 다른 사람을 대하는 관계의 균형이 얼마나 무참하게 무너져 내렸나 하는 것을 그림처럼 보여준다.

성경은 타락 이후 인간의 역사가 그렇게 시작하여 어떻게 세계 역사를 미움과 증오, 살인과 전쟁, 변명과 모함, 불신과 불화로 채색해 왔는지에 대하여 증언한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평화를 원하지만, 평화를 외치는 그 사람들 속에 진정한 평화는 없다. 오히려 평화를 갈구한다고 하는 것은 사람들이 얼마나 불화하며 살고 있는지를 역설적으로 반증 할 뿐이다.

이것은 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하나님과의 화목을 선포할 뿐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화목을 요구하는 지 쉽게 이해 할 수 있도록 해준다.

셋째, 만물로부터의 분리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저주는 인간 세계와 다른 피조물들의 세계에도 치명적인 변화를 가져 왔다.
사람을 위하여 지음을 받은 피조 세계는 하나님의 저주로 말미암아 그들의 본성과 일치하지 않는 부자유함 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도 탄식하며 고통한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라고 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몸의 구속함을 받는 날 그들도 죽고 썩는 것으로 부터 놓임을 받아 자유하게 될 것을 소망하고 있다(로마서 8:20-22).

사람의 행복과 안녕을 위하여 지음을 받는 피조 세계가 더 이상은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 시켜 주지 않는다.
언제 어디서 지진이나 해일, 가믐이나 홍수 같은 소위 자연 재해들이 일어 날지 모른다.
사람이 환경을 가꾸려고 노력하면 하는 것 만큼 환경은 상대적으로 열악해 지고 있다.
사람의 손길이 미치는 곳에 일시적으로 인공적인 아름다움이 만들어지는 것 같지만, 그 이면에는 쓰레기가 쌓이고 시간이 지나면 썩고 악취가 난다. 환경 보호를 외치는 인간의 노력에 반하여, 역설적으로 환경 파괴 현상이 뒤따른다.
그리스도의 구원 계획 속에 만물의 구속을 포함시키고 있는 것이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저주 아래 신음하는 만물을 제자리로 돌려 놓을 수 있는 능력이 없다.

넷째, 자신으로부터의 분리

속사람과 겉사람이 분리되는 소위 육체의 죽음을 통과하게 되기 전에도 사람은 내면적인 갈등 속에서 분리 현상을 경험하며 산다.
속사람과 겉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본성적 욕구의 불일치가 심령의 평안을 무너뜨리고 육체의 건강을 상하게 한다.

마음으로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원하지도 바라지도 않는 악은 행하며 산다.
육체의 욕구가 마음을 지배하여 하나님의 법을 불순종하게 만든다.
양심의 소리가 마음의 평안을 흔들어 놓지만 자포자기 하는 심정으로 양심의 소리에 귀를 막고, 논리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는 비이성적인 선택을 한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나”라고 하는 한 사람 속에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마음의 법과 몸의 지체 속에 있는 또 하나의 법이 충돌하여 사람으로하여금 죄의 법 아래 무릅을 끓게 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로마서 7:18-23).

“내 마음 나도 몰라”가 탄식처럼 입술을 비집고 흘러 나온다.

사람이 구원자를 필요로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타락의 결과 사람이 영적으로 죽었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간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도, 사람과 만물과의 관계도, 심지어는 한 사람을 이루고 있는 속사람과 겉사람의 관계도 다 무너져 내린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말미암아 한 사람이 거듭나면, 인간 세계 뿐만 아니라 자연 세계에도 희망이 생긴다.
사람마다 심령의 참된 평안을 회복하여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진정한 평화가 깃든다면, 사람들은 불완전한 그대로 최선을 다하여 삶의 환경으로 주어진 자연을 가꾸며, 자연과 더불어 몸의 구속을 바라보는 그 날을 고대하면서 살게 될 것이다.

사람의 타락


창세기 3장에서 11장까지의 기록에 따르면 인류는 네 단계로 타락했다.

Ⅰ. 타락의 첫 번째 단계

A.원인

1. 뱀의 유혹

만일 뱀이 와서 사람을 속이거나 유혹하지 않았더라면 사람은 타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유혹하는 뱀은 사탄의 화신(化身)이다. 사탄이 유혹하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게 하는 의문을 사람에게 던지는 것이다.(창3:1,4) 사탄은 여자에게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 하시더냐?”고 말했으며, 계속해서 그는 “너희가 죽지 아니하리라”고 거짓말 시켰다. 사탄의 제의를 받아들이고 나자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그녀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 먹었다. 오늘날도 사탄을 똑같은 방법으로 사람을 유혹한다.

2. 여자가 머리의 지위를 취함

사람이 타락한 또 하나의 원인은 여자가 머리의 지위를 취한 것이다.(창3:2-3,6) 원래 하나님은 아담을 머리고 창조하셨고 하와는 아니었다. 하와의 머리는 아담이었다. 하와가 뱀에게 미혹당한 이유는 그녀가 머리의 지위를 취하여 그녀 스스로 결정함으로 사탄의 함정에 빠진 것이다. 우주가운데 유일한 머리는 그리스도 자신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을 거절하고 머리의 지위를 취할 때 사탄에게 속임을 당할 것이다.

B. 과정

타락의 과정에 있어서 첫 번째 단계는 사람이 그의 영을 사용하지 않은 것이다. 영을 따라 살 때 사람은 하나님의 보호를 받게 된다. 두 번째 단계는 혼을 사용하는 것이다. 세 번째 단계는 몸의 행동이었다. 혼을 사용할 때 몸은 자연히 따라 오게 된다. 그녀가 실과를 따 먹은 것은 몸의 행도이다. 매일의 생활에서 우리는 영을 사용해야 한다. 다음에 혼을 지배하도록 해야 한다. 우리가 혼만 사용한다면 머리의 지위를 취하게 되고 우리의 혼이 주도권을 잡게 된다.

C. 결과

타락의 첫 번째 결과는 혼이 오염되고 부패하여 점령당하게 되는 것이다.
하와는 지식나무를 먹기 전에 이미 그녀의 생각은 오염되어 있었다. 그녀가 뱀과 얘기했을 때 뱀의 관념이 그녀의 생각에 스며들어 그녀의 생각을 더렵혔다.

두 번째 결과는 몸에 사탄이 성분이 더해짐으로 그 본질이 변하여 육체가 된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원래 사람이 몸은 순수했다. 그러나 타락한 후에 육체가 된 것이다.

세 번째 결과는 사람이 영이 죽어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하나님을 향해 그 기능을 상실한 것이다.
사람의 영이 죽었을 때 사람에게는 더 이상 하나님을 접촉하거나 교통할 능력이 없었다.

네 번째 결과는 타락한 사람이 죄인으로 짜여진 것이다(롬 5:19)
사람의 타락으로 인해 죄라고 부르는 요소가 사람 안에 주입되었다(롬 5:12)
우리는 죄인으로 짜여져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죄를 짓는 것이다.

다섯 번째 결과는 타락한 사람이 정죄받은 것이다(롬 5:18)
정죄는 아담뿐 아니라 온 인류를 포함한다.

여섯 번째 결과는 저주가 들어온 것이다(창 3:17-19)
죄진 것은 사람인데 모든 피조물들이 탄식하면 진통하고 있다.
이런 것들이 다 사람의 타락으로 들어온 저주의 항목들이다.

일곱 번째 항목은 사람이 낙원에서 쫓겨난 것이다(창 3:23-24)

여덟 번째 결과는 죽음이다(창 3:19, 롬 5:1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전 15:22)

Ⅱ. 타락의 두 번째 단계

A.배경

범죄한 후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자신들을 감추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찾아오사 여자의 씨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리라고 약속하셨다.(창3:15) 아담이 이 말을 들었을 때 그는 즉시 그이 아내를 하와라 불렀다.(창3:20) 하와는 ‘산자’를 의미한다. 그 후에 창세기 4장 1절은 하와가 가인을 낳았다. 가인은 ‘얻은 자’를 의미한다. 하와의 관념에 따르면 가인은 창세기 3장 15절에서 약속된 여자의 씨였다. 이러한 배경가운데서 사람은 하나님의 긍휼로 그분의 구원을 얻었어야 했다. 그러나 사람은 다시 타락했다.

B. 원인

가인은 하나님의 구원의 길로부터 돌아서버린 후 타락의 두 번째 단계를 초래했다.

1. 마귀의 획득
가인이 계속 타락하게 된 한 가지 이유는 마귀가 그를 안에서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창세기 4장의 시점에서 가인을 더욱 더 타락하게 한 자는 사탄이었다. 가인의 타락은 교활한 자에 의해 사주된 것이다.

2. 사람이 주제넘게 하나님의 구원의 길을 스스로 버림
하나님은 사람에게 희생 양의 가죽을 입혀 주심으로써 구원의 길을 보여 주셨다.(창3:21) 그러나 가인은 주제넘게도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을 받지 않았다. 그는 사탄을 따랐다. 이것이 사람이 더욱 타락하게 된 이유였다.

C. 과정

1. 자신의 방법대로 하나님을 섬김-사람의 관념에 따른 종교를 발명함
가인은 자신의 의견에 따라 제물을 드렸고, 아벨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제물을 드렸다. 아벨은 그의 대속물인 희생의 피를 흘려 드림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을 따랐다. 그러나 가인은 자신의 봉사와 제물을 드림으로 하나님의 방법을 거절하고 자신의 생각대로 제물을 드렸다.(창4:3-5) 가인은 종교를 발명해 낸 것이다.

2. 사람의 분냄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을 쳐다보지도 않았다는 것을 알고 가인은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했다.(창4:5) 이것은 그의 관념에 따라 하나님을 섬긴 결과이다.

3. 사람이 그의 형제를 죽임
창세기 4장 8절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 여기서 볼 때 가인은 처음에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시작했다가 결국 살인하는 것으로 끝맺었다. 요한복음 16장 2절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이상한 것이 아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방법에 따라 행하느냐 자신의 의견에 따라 행하느냐이다. 우리의 관념에 따라 행한다면 결국 살인에 이를 것이다.

4. 사람의 하나님께 대한 거짓말과 오만함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창4:9) 하나님께 대한 가인의 대답은 거짓말이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오만한 자임을 보여 준다. 가인은 감히 하나님을 향하여 그이 오만함을 드러냈다.

D. 결과
두 번째 단계의 타락의 결과로서 하나님은 더 큰 저주를 선포하셨다. 즉 사람은 땅을 경작하지만 땅이 그에게 효력을 주지 아니하리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가인은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쫓겨나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게 되었다.(4:11하,12,14) 결국 가인과 그 후예들은 하나님 없는 문화를 발명했다. 이 문화는 자존을 위한 성을 쌓는 것과 생계를 위해 육축 치는 것과 오락을 위해 음악을 발명한 것과 방어를 위해 무기를 발명한 것 등을 포함한다.(창4:17, 20-22) 하나님을 잃어버렸으므로 사람은 하나님 없는 문화를 발명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사람의 타락의 결과이다.

Ⅲ. 타락의 세 번째 단계

A. 원인
첫 번째 타락에서는 하나님의 적이 사람의 밖에 있었고, 두 번 째 타락에서는 이 적이 사람 안에 있었다. 이제 적은 또 다른 단계를 취하여 사람을 더욱 더 타락하게 했다.

1. 악한 영들이 사람과 혼합함-타락한 천사들이 불법적인 결혼을 통해 사람가 결합함
창세기 6장은 하나님이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결혼했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은 천사들이다. 욥기 1장 6절과 2장 1절은 천사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불리웠음을 말해준다. 사람의 딸들과 결혼한 천사들은 유다서 6절 7절에 기록된대로 자기의 지위를 지키지 않은 자들이었다. 타락한 몇몇 천사들이 땅에 내려와서 사람의 몸을 취했다. 그들은 사람의 딸들과 불법적인 결혼을 이루었다. 인간의 본성과 악한 영들의 혼합체가 되어 버렸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홍수로 인류를 심판하기로 작정하셨다.

2. 사람이 육체가 됨
창세기 6장 3절은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다투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타락이 첫 번째 단계에서 사람은 그의 영을 사용하지 않았고, 타락의 두 번째 단계에서 사람은 자신의 뜻을 따랐으며, 그의 혼으로 살았다. 타락의 세 번째 단계에서 사람은 타락한 몸을 오용하여 육체가 되었다. 온 인류가 육체가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분의 종 노아에게 나타나시어 그분이 모든 세대를 땅과 함께 멸하시리라고 말씀하셨다(창6:11-13)

B. 과정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정욕 가운데 빠져 살았으며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했다.(창6:5) 하나님조차도 더 이상 참으실 수 없을 정도로 타락한 것이었다.(창6:11-13)

C. 결과
먼저는 하나님의 영이 그들에게서 떠나셨다. 주님은 “내 영이 영원히 사람과 다투지 아니하리라”(창6:3)고 말씀하셨다. 사람이 육체가 되었을 때 하나님의 영은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은 완전히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었으며, 하나님께 버림받았다. 그 다음으로 홍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하였다. 노아의 가족 외에는 모두 홍수에 몰살되었다.(창7;19-23)

Ⅳ. 타락의 네 번째 단계

A. 원인
타락의 각 단계에는 두 가지 요인들이 있다. 첫째 요인은 사탄이고, 둘째 요인은 사람이다.

1. 사탄의 선동
타락의 네 번째 단계에서 사탄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권위를 열국을 만드는 데에 그리고 열국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대적하여 반역하도록 선동하는 데에 이용했다. 그러므로 사람은 집단적으로 하나님께 대해 공공연하게 반역하는 상태에 떨어졌다.

2. 인류의 반역
당초 사탄의 타락에 있어서 그의 의도는 하나님의 권위를 뒤엎는 것이었지만, 그것은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자 그는 다시 타락한 인류 가운데 와서 사람 안에 똑 같은 생각을 주입시킴으로써 사람으로 하여금 집단적으로 하나님의 권위에 대항하여 일어나도록 선동했다,

B. 과정
첫 번째 단계 하나님에 대해 반역하려는 음모였다,(창11:3-4)
두 번째 단계 사람의 수고로 흙으로 벽돌을 만드는 것이었다.
세 번째 성을 건축하는 것이었다. 네 번째 단계 하나님을 거절한다는 것을 선포하기 위해 탑을 세운 것이었다. 마지막 단계는 그들이 하나님 자신을 부인하기 위해 그들의 이름을 낸 것이다.

C. 결과
먼저는 하나님이 그들을 흩으시기 위해 오셨다.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더 이상 같은 언어를 갖지 못하도록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다. 세 번째로 혼란이 들어온 것이었다. 바벨은 혼란을 의미한다. 이것은 저주와 심판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침내 하나님은 아담의 족속들을 포기하실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사람은 매우 선하고 죄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대적인 마귀에 의해 선악을 아는 지식의 나무의 실과를 따 먹도록 속임을 당했다.
따라서 그는 타락했고 죄인이 되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으며 또 한 면으로 그는 사탄의 악한 본성을 그 안에 갖게 되었다.
사람이 타락한 본성은 그이 후손들로 하여금 또 다시 계속 타락하여 마침내 하나님을 대적하여 반역하고 일어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했다.
이 단계에서 사람은 극도로 타락했으며, 하나님께 버림당했다.


부패하고 타락하는 이유

1. 부패와 타락의 한자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부패(腐敗) - 부패균에 의해 단백질 및 유기물이 유독한 물질과 악취를 발생하게 되는 변화, 법규, 제도 등이 문란해 바르지 못함, 정신이 타락함. △타락(墮落) - 품행이 나빠서 못된 구렁에 빠짐, 도심을 잃고 속심으로 떨어짐, 죄를 범하여 불신의 생활에 빠짐. 사전적 의미에서 부패와 타락은 서로 수식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보인다. 그러나 한자의 의미를 살펴보면 부패는 물질이나 제도 또는 정신의 부정적 변화의 과정을 의미하고 타락은 이같은 부정적 변화의 완료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2. 부패에 대한 성경적 의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부패는 신앙과 욕심 사이에서 갈등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러한 부패는 회개를 통해 구원으로 회복이 가능하다(신 9:12, 신31:29, 겔 23:11, 고후 11:3, 딤전 6:5). 부패가 부패균과의 결합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면 종교적인 부패는 돈과 명예와 권력에 대한 욕심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부패균을 차단하여 부패를 막는 것처럼 돈과 명예와 권력을 차단하여 종교적인 부패를 방지할 수 있다. 이른바 당회장, 노회장, 총회장 그리고 더 나아가 연합 단체의 회장 등 각종 명예직과 권력직이 난무하는 풍토는 종교적인 부패를 일으키는 온상이 되고 있다.

즉 오늘날 한국 개신교 교회의 관료적 권력 구조가 부패의 원인이 된 것이다. 이른바 부패가 신앙 양심과 욕심 사이에서 방황하는 과정이라고 한다면 깊은 회개와 반성을 통해 회복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하나님의 존재를 의식하면서도 인간의 약함으로 인해 욕심에 기울었던 것은 다분히 감정적이고 단기적이며 수동적인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한국 개신교 교회는 모든 명예와 권력 구조를 벗어 버리고 오로지 봉사하고 섬기는 본연의 모습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3. 타락에 대한 성경적 의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타락은 욕심을 위하여 신앙과 양심을 버린 것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무시하고 오히려 도전하는 태도를 보인다는 것이다. 이른바 타락한 자들에게서 공통으로 보이는 뻔뻔스러운 태도는 "천벌을 받아도 좋으니…"라고 하는 것이다 (삿 2:19, 단 11:32, 딤전 4:2). 그러면 이러한 타락한 자들에게도 갱생의 길은 있는 것인가. 성경은 타락한 자들에게는 갱생의 길이 없다고 단언하고 있다(히 6:6). 타락은 이른바 양심에 화인 맞은 것으로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완전한 부패를 의미한다. 이러한 타락은 부패의 최후의 단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오직 심판과 멸망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타락한 자들에 대한 교회의 태도는 이들을 분리하고 격리하는 것이다.

4. 부패와 타락에 대한 신학적 의미

신학적 의미에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인식, 즉 신앙의 유무에 따라 부패와 타락이 구별된다고 하겠다.
즉 신앙이 있으면서 죄를 범하는 것을 부패라 하고 신앙을 잃거나 아예 신앙이 있지 않은 상태를 타락이라 하는 것이다.
즉 신학적 의미에서의 부패는 세속화(돈과 명예와 권력을 추구하는 것)를 의미하며 점차 인간의 양심과 진리의 빛을 잃어 가는 부정적 변화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부패는 인간 실존의 변화를 의미하며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 욕심을 추구하는 과정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즉 욕심이 신앙 양심을 지배하지만 어디까지나 양심의 가책은 아직 살아 있는 것이다.
타락은 이러한 부패의 끝을 의미하며 세속주의 그 자체를 신념으로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인간 양심의 말살 내지는 정의감의 상실 또는 완전한 불신이나 무신론적 태도 등 완전한 정신적 어둠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타락은 인간 실존의 변화 과정을 넘어 신념의 변화에까지 이른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잘못된 신념을 지니고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자신이 추구하는 악행에 대해 확신을 하고 전념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이른바 신념의 타락이며 또한 타락한 신념에 충실한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공산주의나 파시즘, 또는 독선적인 자국 제일주의나 민족지상주의가 여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른바 천민자본주의 내지는 환차익을 노려 국가 간의 경제적 기반을 무너뜨리는 악질적 투기 자본들의 금융 자유주의 내지는 신자본주의 등이 이에 속할 것이다.
부패한 관료는 직분과 직권을 이용하여 자신의 사리사욕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타락한 관료는 파벌과 당파의 이익이 주된 신념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이는 신념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개인적 양심의 자각이나 가책이 없이 집단의 이익을 위해 무슨 짓이든 정당화하는 것이다.
조선 시대 양반층의 집단 이기주의는 백성의 수탈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일제강점기의 학정은 조선으로부터의 수탈을 배경으로 하는 것과 같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 교회의 최대 병폐로 지목되는 개 교회 주의와 목사들의 세속적 욕심은 이제 서서히 부패의 단계를 벗어나 오히려 신념의 단계로 접어드는 것 같다.

이른바 성직의 타락이라고 할 수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부패한 관료와 타락한 관료는 그 신념에 서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
부패한 관료는 죄의식 속에서 자신의 사리사욕을 추구하지만, 타락한 관료는 국가와 사회에 공헌한다는 신념을 지니고 악행을 추구하는 것이다.

부패한 성직자와 타락한 성직자 사이에도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
부패한 성직자는 사리사욕을 추구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껴 공공연하게 자행하지 못하지만, 타락한 성직자는 그 모든 악행의 근거가 자신의 종교적 신념에서 나온 것으로 주장하여 공공연하게 악행을 자행하는 것이다.
종교개혁 당시 면죄부를 팔았던 로마가톨릭의 고위 성직자들은 이것을 비밀스럽게 그리고 은밀하게 한 것이 아니라 공공연하게 신념을 지니고 시행하였으며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지도적 위치에 있는 분들의 행태 또한 은밀하게가 아닌 오히려 신념을 지니고 사리사욕을 향해 돌진하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부패한 젊은이와 타락한 젊은이 역시 그 근본적 실상이 전혀 다르다고 할 것이다.
부패한 젊은이는 일시적인 충동과 감정에 휩쓸려 실수하게 되지만, 타락한 젊은이는 오히려 당당한 신념을 지니고 서슴없이 악행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이른바 부패한 경찰은 있어도 부패한 깡패는 없다.
경찰은 주어진 사명감과 정의감에서 출발하는 반면 깡패는 이미 사악한 신념으로부터 출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간혹 깡패였다가 회개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분들은 아직 양심이 남아 있어서 온전한 깡패로 타락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는데 이러한 분들이 회개할 은혜를 받은 경우일 것이다.

만일 경찰이 타락한다면 그것은 국민에게 절망적인 위해를 끼치게 될 것이다.
부패한 목사는 있어도 부패한 창녀는 없다.
목사란 주어진 소명에 대한 헌신에서 출발하지만, 창녀에게는 이미 그러한 소명적 희생심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간혹 창녀였다가 회개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분들은 아직 양심이 남아 있어서 온전히 창녀로 타락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는데 이러한 분들이 회개할 은혜를 받은 경우일 것이다.
그러나 만약 목사가 타락한다면 이것은 정말 회복할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이 타락한 천사로 말미암아 비롯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목사의 타락이란 이 세상에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악행이 될 것이다.
부패에서 벗어나는 길은 회개에 있으나 타락에 대해서는 심판과 저주와 영벌이 있을 뿐이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사건은 제자의 부패라고 할 수 있다.
베드로는 엉겁결에 주님을 부인했지만,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깊이 회개하였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 양 떼를 목양하는 사도로 회복될 수 있었다.

그의 이러한 경험은 훗날 초대교회를 위해 사역할 때에 커다란 교훈이 되었으며 그가 순교할 수 있는 거룩한 동력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반면 가롯 유다의 배반은 계획적이며 능동적이었으며 예수님을 배반하는 것에 대해 신념을 지니고 행동하였다.
그는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고 자살하는 것으로 생을 마쳤지만 그의 배반은 이른바 타락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결코 회개를 통해 회복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인간 타락의 원인과 결과

    
1. 서론
    
인간의 타락과 구원의 계획이 나오는 곳은 창세기 3장이다
    
가. 인간 타락의 원인 : 1~6절
나. 인간 타락의 결과 : 7~24절
다. 인간 구원의 계획 : 15절, 20절, 21절
    
2. 하나님 나라의 기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창 2:16~17)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선한 통치가 이루어지는 최종의 기준이다.
하나님은 이 명령에 대한 아담의 순종을 요구하였다.
    
3. 인간 타락의 원인(1~6절)
    
가. 뱀(사탄)의 유혹(1,4,5절)
나.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불평과 불만(2절~3절)
다.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는 인간의 교만함과 불순종(6절)
    
사탄과 하와의 대화 문제점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왜곡에 있다.
선악과 이야기는 하와를 만드시기 전에 아담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와는 아담으로부터 이 명령의 말씀을 들었을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이렇게 받아 드리는 경우가 많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편한 방식으로 받아드린다.
    
4. 사탄 : 뱀, 용, 마귀, 귀신
    
사탄의 시작은 알 수 없지만 악한 영의 존재가 있음을 알게 한다. (요8:44)
인간은 사는 동안 그와 대적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러나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뱀의 말을 더 믿었다.
결국 아담의 불순종이 인간의 타락을 불러 왔다. (창3:1~5)
    
사탄은 영원히 구원함을 받을 수가 없는 존재이다.
    
5. 죄를 지은 인간의 모습 (7~13절)
    
가. 수치심을 느낀다. (7절)
나. 두려움을 느낀다. (8~11절)
다. 들키면 핑계를 댄다. (12~13절)
    
6. 하나님의 저주 내용(14절~24절)
    
가. 뱀에 대한 저주 (14~15절)
    
(1) 배로 다니고 흙을 먹을 것이다 (14절) 이는 굴욕과 수치의 표현이다.
(2)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한다.(15절)
    
[창]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하나님이 하와를 하나님 편으로 만들겠다는 뜻이다.
이 말씀은 타락한 인간의 구원에 관한 첫 번째 말씀으로 원시복음이라고 불리우고 있다.
    
나. 여자에 대한 저주 (16절)
    
(1) 해산의 고통
(2)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다.
    
* (공동번역) 남편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싶겠지만, 도리어 남편의 손아귀에 들리라."       
* (표준새번역) 네가 남편을 지배하려고 해도, 남편이 너를 다스릴 것이다.
    
* 그래서 부부는 한 평생 갈등을 일으키며 사는 것일까?
    
다. 남자에 대한 저주 (17~19절)
    
(1) 땅이 저주를 받고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낸다.
(2)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을 수 있다.
(3)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 갈 것이다. (육체적 죽음)
(4) 에덴동산에서 쫓겨난다.
    
7. 인간 타락(원죄)의 결과
    
가. 하나님과의 관계
    
하나님에 대한 공포가 생기며, 하나님에 대한 감사가 없다.
이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으로 발전한다.
  
나. 이웃과의 관계
    
서로 적대시하며 믿지를 못한다.
서로 이기심을 갖고 이웃을 “이용해 먹으려 한다”.
인간은 습관적으로 서로를 오해하게 된다.
    
다. 남녀간의 관계
    
서로에게 수치심을 갖는다. 
벌거벗은 것을 부끄러워한다. (거리감)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긴다. 
돕는 배필에서 서로 지배하려는 관계로 변했다.
    
라. 자신과의 관계
    
인간은 항상 내적 갈등과 분열, 불안을 겪는다.
    
마. 자연피조물과의 관계
    
땅이 저주를 받아 엉겅퀴와 가시덤불을 내며 인간에게 지나친 노동이 들어온다.
인간은 자연을 파괴하고 환경을 오염시키며 청지기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한다.
    
바. 시간과의 관계
    
죄로 인해 우리는 영원을 상실하였다.
시간의 한계는 인간에게 불안을 가져온다.
죽음은 인간의 무가치와 무능을 선언한다.
    
8. 하나님은 아담이 타락할 것을 알고 있었을까?
    
아담과 하와는 순전한 상태이나 불변한 상태는 아니었다.
이 변화성은 피조물의 한계이다.
    
9. 결론
    
하나님은 죄 가운에 있는 인간을 긍휼과 용서와 은혜로 구원하시며 그 분의 영광을 드러내신다.
악인들에게는 공의의 심판으로 그 분의 영광을 드러내신다.
























이다니엘을 위한 기도문 성구(03-14-2022 / 월 -


03-14-2022(월)

마가복음 16:17-18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아멘

03-15-2022(화)

사도행전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아멘

다니엘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아
머리가 맑아질 것이며
간이 정상화 될 것이며
모든 것이 정상으로 자리를 잡을 것이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
믿으면 아멘하고
기도하자.

03-16-2022(수)

시편 39:13
주는 나를 용서하사
내가 떠나 없어지기 전에
나의 건강을 회복시키소서.

주여
보혈의 능력으로
저희들을 덮어주시고
치유하는 손길로
우리 몸의 약한 지체를
새롭고 강하게 하사
청춘의 몸으로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03-17-2022(목)

다니엘 9:23b
너는 크게 은총을 입은 자라 그런즉 너는 이 일을 생각하고 그 이상을 깨달을지니라.

전능하신 하나님!
그 옛날 다니엘 선지자와 함께 하셨던 그 은혜로
오늘의 시대를 살아야 할 다니엘에게 내려주셔서 선지자 다니엘처럼 믿음의 사람으로 당당하게 세워주시옵소서.

03-18-2022(금)

욥기 23:10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아멘

전능하신 하나님
다니엘의 약한 것이 무엇인지
의사들보다 더 정확하게
알고 계시지요
약한 것을 새롭게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의사들이 치료하지 못하는 약함을
온전하게 하심으로
모두가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머리 숙여 섬김의 길을 함께 가도록
인도하여주시옵소서. 아멘


03-19-2022(토)

전도서 3:3
죽일 때가 있고 치료 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사랑의 하나님
모든 것이 때가 있다고 하셨지요?
지금은 치료할 때 입니다.
속히 다니엘의 약한 것을 치료하여 주세요!
치료의 은혜를 힘입어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예수 믿는 기쁨을
예수 믿는 은혜를
예수 믿는 마음을 자랑하게 해주세요.
아멘

이사무엘 기도문

02-27-2022
이사무엘 대표기도

오늘도 변함없이 하나님께 간구할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회개보다 부탁할 간구가 많고, 감사보다 부탁드릴
간구가 많은 우리들의 쳇바퀴같은 신앙생활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변함없이, 오늘도 한결같이, 들어주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먼저 감사를 드립니다. 성령님의 임재하심에 우리 모든 삶의 인도하심이 있음을 믿으며,
과거나 미래를 떠나 예배의 자리에 함께 할 수 있는 지금 현재만으로도 먼저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큰 혼선없이 많은 분들이 예배의 장소로 잘 찾아오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기도가운데 성령님이
함께하시면 길바닥에서 드리는 예배라도 은혜가 가득할 것을 믿습니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도와주는 수많은
성도들이 이 자리에 함께하고 있습니다.
가까이 눈을 돌려 우리 나라인 한국과 미국 그리고 우리의 형제자매인 북한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복음의 말씀이
북한 곳곳에 스며들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대선이 다가오는 한국에서 누가 당선이 되든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로서 축복할 수 있길 바랍니다.
조금 더 멀리 내다보면 이 세상 모든 구석구석에도 하나님 복음의 말씀이 전파되길 바라며, 전쟁의 소용돌이에
있는 우크라이나에 하나님 나라의 평화가 임하게 해주세요. 온 열방이 하나님 아래에 있는데 우리민족만을
생각하지 않고, 더더욱 기도로 어려움에 처한 하나님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는 저희가 되길 간구합니다. 수많은
기적들을 경험하고도 은혜를 잊었던 옛 이스라엘 백성들과 달리, 우리는 전쟁때문에 나라가 찢겨지고 이후
회복해왔던 순간들을 잊지 않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어떤 무기보다 강력한 기도의 힘을 믿습니다.
세계에 평화가 돌아오길 기도함과 동시에,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뉴욕과 맨하탄에 복음이 구석구석 전파되게
해주세요. 각자의 가정과 직장, 학교, 그리고 텐트메이커에서 모두 복음이 번져나가게끔 해주시고 그를 이루기
위한 열정이 우리가운데 일어나게 해주세요.
순장사관학교에 참가중인 모든 성도들에게 또한 큰 은혜를 베풀어 주세요. 순장님들을 통해 우리 교회 공동체
사역의 뼈대가 이뤄집니다. 그들에게 부담의 짐을 덜어주시고 기쁨의 힘을 불어넣어주시길 간구합니다.
순모임을 위해서도 기도합니다. 순모임은 예배의 연장선으로서 여러가지 사역을 맡은 자들이 항상 순모임에
먼저 집중 할 수 있게 해주세요.
작고 사소한 일부터, 크게는 가까이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은 분까지 어려움 가운데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
어디서보다 순모임에서 가장 먼저, 가장 많이 안아 줄 수 있길 기도합니다. 순모임의 시간과 장소에 제약받지
않고 언제든지 서로의 고통을 나눌 수 있는 순모임이 되게 해주세요.
대학청년부 수련회를 통해 많은 성도들이 성령의 큰 은혜를 입게 해주세요. 코로나 위기때문에 오랜만에 다같이
모이는 수련회가 다시 돌아오게 됐습니다. 다같이 직접 모여 불같이 기도하는 가운데 그 어느때보다 뜨거운
성령님의 임재하심이 있을 줄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말씀 인도를 해주실 김성근 목사님을 위해 기도드립니다. 대륙 반대편에서 온 가족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뉴욕으로 와서 이제 적응가운데 있습니다. 목사님과 가정이 바쁜 가운데서도 하나님 말씀을
전하시느라 몸과 마음이 피로할텐데, 하나님께서 성령님의 인도 가운데 그분들에게 끊어지지 않을 기력을
주시길 간구합니다.
그리고 오늘 듣게 될 말씀을 흘려버리지 않고 우리의 삶으로 녹여낼 수 있게, 변화할 수 있게, 저희들의 완악한
마음을 누그러뜨려주실 성령님의 임재가 우리모두에게 임하길 바라며, 이 모든 말씀을 살아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榮光)을 위하여


영광(榮光) : 영화 영(榮), 빛 광(光)
- 경쟁(競爭)에서 이기거나 남이 하지 못한 어려운 일을 해냈을 때의 빛나는 영예(榮譽)

덮을 멱(冖) / 덮다
불 화(火) / 불, 열과 빛
사람 인(人) / 사람, 인간, 다른 사람, 타인
열 십(十) / 열, 열번
빛 광(光) / 빛, 어둠을 물리치는 빛


גֵּאוּת 1348 [gêʼûwth]
  • 1. 명사 영광, 광채, 사 28:1,3.
  • 2. 명사 들어올림, 올려진 것, 사 9:17(18)
  • 3. 명사 위엄[하나님의], 시 93:1.

כָּבוֹד 3519 [kâbôwd]
  • 1. 남성형 명사 영광, 명예.
  • 2. 남성형 명사 위엄, 장엄, 권위, 광영, 영광, 존귀, 겔 1:28, 3:12,23, 8:4, 10:4,18, 11:23.
  • 3. 남성형 명사 [인간의] 삼상 4:21, 욥 19:9, 시 8:6(5).

נֶצַח 5331 [netsach]
  • 1. 명사 영광, 휘광, 대상 29:11, 삼상 15:29
  • 2.  명사 진실, 정직, 합 1:4, 잠 21:28.
  • 3. 명사 신앙, 확신, 애 3:18.

גֵּאוּת 1348 [gêʼûwth]
  • 1. 명사 영광, 광채, 사 28:1,3.
  • 2. 명사 들어올림, 올려진 것, 사 9:17(18)
  • 3.명사 위엄[하나님의], 시 93:1.

גָּאוֹן 1347 [gâʼôwn]
  • 1. 명사 장식, 영광, 화려함, 사 4:2, 60:15, 시 47:5(4), 암 8:7.
  • 2. 명사 장대함, 위엄[하나님의], 출 15:7, 사2:10, 19,21, 24:14
  • 3. 명사 교만, 오만, 거만, 잠 16:18, 암 6:8, 나 2:3(2), 욥 35:12, 사 13:11, 16:6.


5331 [netsach) נֶצַח
  • 명사 영광, 휘광, 대상 29:11, 삼상 15:29

  • 2. 명사 진실, 정직, 합 1:4, 잠 21:28.
  • 3. 명사 신앙, 확신, 애 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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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자인 마틴 루터가 쓴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유명한 논문이 있습니다.
루터는 이 논문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요점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지극히 자유로운 만물의 지배자이며 아무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지극히 충성스러운 만물의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된다.”

​마틴루터는 1520년 로마 교황청의 위협속에서도

8월에 '독일 크리스찬 귀족에게 보내는 글'
10월에 '교회의 바벨론 감금'
11월에 '크리스챤의 자유' 라는 논문을 출판하였다.


루터의 3대 대표 논문의 마지막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입니다.
1520년대 마지막 세 번째 논문이자 루터의 신학을 맛볼 수 있는 정점에 있는 논문입니다.
다른 논문도 비슷한 특징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이 논문은 루터가 심혈을 기울였고, 독일과 중세교회를 향한 자신의 의지를 분명히 드러낼 목적으로 기록된 것입니다.
공개서한으로 작성되었고, 라틴어뿐 아니라 독일어로 동시에 공개된 논문입니다. 당시 교황이었던 레오 10세에게 보낸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아직 종교개혁의 바람이 불지 않았던 시기였습니다. 루터는 마지막까지 가톨릭 중세교회와 결별하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작센(Sachsen)의 귀족 출신이자 교황의 시종인 칼 폰 밀티츠(Karl von Miltitz)는 루터와 교황을 중재시키기 위해 루터에게 간곡하게 부탁했던 결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루터는 그 요구에 응하기는 했지만 자신이 주장했던 중세 교회의 신학적 모순과 타락에 대해서는 조금도 철회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강경하게 주장합니다.

루터의 3대 논문 가운데 마지막에 해당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자유’를 개진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영적인 자유이며, 사람의 내부에서 온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됨으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루터는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근거는 ‘오직 믿음으로’와 ‘오직 성경으로’라는 명제를 통해 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주장은 인간의 행위와 공로, 거짓된 교리와 성경에 근거하지 않는 중세 성례 등과 상관없는 것임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통해 다시 한번 모든 신자들은 사제가 아닌 오직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자유가 아니라 철저히 내면적이며 영적인 자유입니다.

루터가 주장했던 자유는 독일인의 관념적 신앙과 맥락을 같이합니다. 루터는 영적인 자유에 과도하게 치중함으로 삶이 결여된 형태로 발전하게 됩니다. 철학사에서도 일어났던 대륙의 관념철학이 독일에서 일어난 것은 루터의 영향이 적지 않았습니다. 독일의 신비주의 신학과 필립 야콥 스페너'(Philip Jacob Spener)를 중심으로 일어났단 독일의 경건주의 운동(Pietismus)은 루터의 ‘자유’의 개념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운동은 다시 진젠도르프를 통해 일어난 모라비안주의들을 통해 관념적이며 신비주의를 표방한 부흥 운동의 틀을 다지게 됩니다. 루터의 뒤를 이은 칼뱅의 신학은 루터의 이신칭의를 넘어 ‘성화’를 강조합니다. 종교개혁의 신학은 루터에 의해 시작되어 칼뱅에 의해 완성되었습니다.

논문 초기에 논문에 함께 덧붙여진 교황에 대한 이야기는 오해의 소지가 많습니다. 루터는 교황인 레오 10세를 건전하고 경건한 사람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레오 10세는 이미 루터에게 1520년 6월 15일 ‘주여 일어 나소서(Exsurge Domine)’라는 파문 경고 교서를 루터에게 발송했습니다. 루터는 10월 10일 교서를 받습니다. 그리고 정확히 한 달 후인 11월 12일 경에 루터는 본 논문인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발표하게 됩니다. 이러한 정황들은 루터가 교황에게 절대 호의적이지 않았음을 반증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황에 대한 호의적인 표현들은 타협하기 위한 목적보다는 일종의 ‘경고’로 볼 수 있습니다. 즉 ‘당신이 진정 진리의 수호자라면 내가 지금 당신을 표현하고 있는 그대로 거룩한 교황으로 살아야 하며, 부패한 중세교회를 개혁시켜야 한다’로 읽는 것이 타당합니다. 이제 루터의 논문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은 이형기가 번역한 <루터 저작선>에 담긴 것을 인용했으며, 번역이 모호하거나 어색한 부분은 지원용이 번역한 <종교개혁 3대 논문>을 참고했음을 밝힙니다.

2. 간략한 요약

[교황 레오 10세게 보내는 공개서한]

로마에 계신 교황 레오 10세에게 마르틴 루터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이 있으시기를 바라나이다. 아멘.

3년째 이 세대의 괴물들과 싸우면서 그들 가운데 살고 있는 복된 아버지 레오를 우러러 보며 귀하게 생각합니다. 전임자들인 피우스(Pius)와 율리우스(Julius)의 칙령에도 불구하고 나에 대한 귀하의 불경건한 아첨꾼들의 부당한 광란은 나로 하여금 귀하의 교황직과 미래의 공의회에 호소하지 않을 수 없게 했습니다. 나는 귀하는 바벨론에 있는 다니엘로 불렀습니다. 저는 모두에게 칭찬 받는 당신에게 돌을 던질 만큼 어리석지 않으며, 첫 번째 사람도 아닙니다.(요 8:1-11) 로마 교황청은 공의회를 몹시 싫어하고 개혁을 두려워합니다. 한때는 하늘의 문이었던 로마 교황청은 이제 지옥의 열린 입구가 되었습니다.

영명하신 레오 성하여, 청컨대 이번 한 번만 나의 주장을 변호하고 귀하의 진짜 원수들을 고발하는 것을 허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귀하의 특사 세인트 시스토의 추기경이 나를 어떻게 대했는지 아실 겁니다. 그는 자기 명예만을 구하고, 나에게 일방적으로 나의 의견들을 취소하라고만 했습니다. 그는 야비한 자로 일을 더 꼬이게 만들었습니다. 다음으로 교황의 사절인 칼 밀티즈의 경솔함을 아실 것입니다. 에크 또한 거짓과 속임수로 이전보다 더 악하고 혼란하게 만들었습니다. 복되신 아버지여, 귀하게 빈손으로 나아가지 않으려고 나의 화평과 좋은 소망을 담은 이 작은 논문을 보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

그리스도인은 전적으로 자유로운 만물의 주이며 아무에게도 예속되어 있지 않다.
그리스도인은 전적으로 충실한 만물의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되어 있다.

이 두 명제는 서로 모순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이것들은 서로 잘 조화되며 우리의 목적에 이바지할 것이다. 이 두 말은 바울의 말이다. 그는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 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전 9:10)했고,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라 했다. 사랑은 본질상 사랑의 대상이 되는 사람을 섬기고 그 사람에게 예속되고자 한다. 그리스도는 만물의 주였지만 여자에게 나셨고, 율법 아래 나셨다.(갈 4:4)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과 “종의 형상”(빌 2:6-7)을 입은 자유자이시며 종이셨다.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은 믿는 이들의 영혼을 먹이고 의롭게 하여 자유롭게 하고 구원하는 것이다. 우리가 입으로 주를 시인하며 구원을 얻는다.(롬 10:9) 또한 주님의 부활을 믿으며, 의롭게 된다.(롬 10:4) 바울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했다. 그러므로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되며, 자유를 얻는다.

믿음은 행위와 관련하여 그 무엇도 관계될 수 없다. 행위에 의해 의롭게 된다면 믿는 것은 바알과 여호와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것이다.(왕상 18:21)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그로 인해 죄사함을 받고 의롭게 된다. 구원을 위해서 우리가 행해야할 일은 무엇인가? 없다. 오직 하나,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다.(요 6:29)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신앙은 완전한 구원을 가져오면 인간을 모든 악에서 구원하는데 비할 데 없는 보화이다.

그렇다면 성경이 가르치는 계명은 무엇인가? 계명은 사람에게 자기 자신을 알라고 가르친다. 계명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무력을 알고 자신에 대해 절망한다. 이것은 옛 계약이며, 새 언약을 예비한다. 예를 들면 탐내지 말라(출 20:17)는 계명은 우리가 모두 죄인임을 입증한다. 어느 누구든 탐내지 말라는 계명을 지키지 못한다. 그로 인해 우리는 절망하고 외부에서 도움을 구해야 한다. 일점일획도 변함없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모든 이들은 정죄 된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야 한다. 그 안에 은혜와 의와 평화와 자유가 약속되어 있다. 바울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롬 11:32) 밝힌다. 이것은 하나님의 새 언약이다. 그리스도인은 신앙 가운데서 자기가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며 자기를 의롭게 하기 위하여 어떤 행위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하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이요 그리스도인의 자유다.

믿음으로 우리의 영혼과 그리스도는 한 몸이 된다.(엡 5:31-32) 만약 결혼하여 한 몸이 된다면 서로의 것을 공유한다.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하나 되며 그리스도와 함께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것을 공유한다. 그리스도는 은혜와 생명과 구원으로 충만하시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은 죄와 죽음과 저주로 가득 차 있다. 이제는 믿음으로 죽음과 저주는 그리스도의 것이 되고 은혜와 생명과 구원은 신자의 것이 된다. 그리스도는 한 위격 안에서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시다. 신앙의 결혼반지로 그(그리스도)는 그의 신부(신자)의 것인 죄와 죽음과 지옥의 고통에 동참하신다. 그것이 마치 자신의 것인 양 고난을 받으시고, 음부에 내려가셨다. 그러나 죽음과 지옥이 그를 삼킬 수 없었다. 그의 의는 모든 사람들의 죄보다 더 크고 그의 생명은 죽음보다 더 강하며 그의 구원은 지옥보다 더 강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자는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영화롭게 된다. 믿음만이 그리스도인의 의이며 모든 계명의 성취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제사장들이며 왕들이다. 베드로는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벧전 2:9)이라고 선언한다. 또한 신자는 그분의 “거룩한 나라”이며, “그의 소유된 백성”이다. 그렇다. 신자들은 왕들이다. 모든 만물을 지배한다. 이는 훌륭한 특권이고 얻기 어려운 것이며, 참으로 전능한 능력인 영적 지배권이다. 동시에 제사장들이다. 우리는 제사장으로서 하나님 앞에 나가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거룩한 일들을 서로에게 가르칠 자격이 있다. (히 10:19,22) 그리스도인들은 만물로부터 자유로우며 만물에 대하여 자유롭다. 교회에서 사용되는 ‘사제’ ‘성직자’ ‘신분계층’은 ‘사역자’이며, ‘종’이고 ‘청지기’들이다. 이런 칭호는 사역의 의미를 부여하지만 신분의 차이를 말하지 않는다. 바울은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고전 4:1)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제 겉 사람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우리의 육신은 불완전하다. 육 가운데 살아갈 동안 장래에 완성될 것을 기대하며 어느 정도 진보를 향해 나아갈 뿐이다. 인간은 유한하고 불완전한 삶을 지나야 한다. 그러므로 현세를 살아가는 동안 자신의 육신을 제어해야 한다. 금식, 절제, 노동, 및 다른 적합한 훈련을 통해 자신의 육신을 잘 다스리고 육신을 성령의 지배 아래 두도록 힘써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의 육신은 속사람과 신앙에 복종하고 순응하며 신앙에 항거하지 않고 속사람을 훼방하지 않게 될 것이다. 제어하지 않으면 그렇게 행하는 것이 육신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육신은 절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오히려 육신은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 (갈 5:24) 인간이 자신들의 행위로 의롭게 된다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좋은 열매가 좋은 나무를 만들지 못한다. 이처럼 악인은 선을 행하지 못한다. 선은 선인에게 나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하면 그들의 선은 거짓이며, 아무것도 아니다. 선한 행위를 구하기 전에 먼저 선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인이 되면 선행은 자연히 흘러넘친다. 믿음으로 사는 자들은 자신만을 위하여 살지 않고 이웃을 돌아본다. 강요나 조건이 아닌 자발적인 선행을 통해 사랑을 드러낸다. 바울은 말한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7-8) 그리스도인은 필연적으로 이웃과 대면하고 관계를 맺는다. 자신의 손으로 일하고,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을 찾는다. (엡 4:28) 자, 이와 같은 믿음으로부터 주님 안에서의 사랑과 기쁨이 흘러나오며, 사랑으로부터 이웃을 기쁘게 섬기고 감사나 배은망덕, 칭찬이나 비난, 이득이나 손실을 고려치 않고 기쁘고 자발적이고 자유로운 생각이 흘러넘친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유롭게 살아간다. 강요나 억지로 율법을 행하지 않는다. 자원하고 기쁨으로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한다. 마라아의 자발적인 결례 행함, 디모데의 자발적 할례, 그리스도의 세근 납부와 그리스도인의 세속 권위에 대한 순종은 성령의 자유 가운데 행한 것들이다. 이러한 행위들은 의롭게 되려는 노력이 아니라 자발적인 선행이며 그리스도인으로서 기쁨으로 행하는 것들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 (고전 13:5) 그리스도인은 사랑의 원리를 따른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행위로부터 우리를 해방하지 않고 그릇된 견해에서 해방한다. 믿음은 우리를 양심을 구속(救贖)하고 바르게 보존(保存)하여 의(義)가 행위에서 비롯되지 않음을 안다.

인간의 본성과 자연적인 이성은 본질적으로 미신적이다. 의를 율법과 행위를 통해 얻으려 한다. 그러나 거듭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비밀 가운데 숨겨져 있는 지혜를 우리 마음에 가르치시지 않는다면 인간의 본성은 그것을 어리석은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렇게 기도하자.

“하나님이여, 영원히 복되신 하나님이여, 우리가 땅 위에서 그의 길을 알고 만민 중에서 그의 구원을 알도록 마침내 그들과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주의 얼굴을 우리에게 비추소서! 아멘”

3. 나가면서

루터가 말하는 ‘자유’는 이렇게 정리될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역설적 존재로서의 자유를 주장합니다.

먼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로 인해 자유를 얻었고, 만물의 주가 되었다. 그러므로 아무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 둘째, 그리스도인은 더할 수 없는 충만한 만물의 종이며, 다른 사람에게 예속된다.

루터는 모순처럼 보이는 두 명제를 통해 그리스도인이 갖는 자유의 실체를 드러냅니다. 그리스도가 만물의 주이시며,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하나님이시지만, 죄인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스스로 종이 되어 율법 아래 나심으로 고난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십니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한 은혜와 생명을 공유합니다. 즉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됩니다. 그렇다면 믿음으로 얻게 된 ‘의’는 타락한 인간의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주입된 것입니다. 루터는 바로 이 지점, 외부로부터 주입된 의가 인간의 본성을 바꾸고 진정한 선행을 가능하게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어리석고 타락한 중세 교회는 자신의 본질을 바꾸려 하지 않고 타락한 자신이 행한 행위를 통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려는 우를 범합니다. 그들의 “행위는 양의 옷을 입고 약탈하는 이리들과 같이 사람들을 속이며 사람들을 서로 속이게 만”들고 맙니다.

아직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인데도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명징하고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5년 후인 1525년 에라스무스와 ‘자유의지 논쟁’을 하게 될 것입니다. 5년이란 시간이 무색할 만큼 루터의 자유 관념은 완전한 성숙에 이르렀음을 발견합니다. 아직 어거스틴의 글을 인용하고 있지 않지만 어거스틴의 ‘은총론’이 루터의 신학 속에 완벽하게 스며있습니다. 타락한 인간에게는 소망이 없으며,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선언합니다. 그렇다면 의는 인간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서 온 것이며, 그리스도로 인한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새 창조의 결과입니다. 루터는 신약 성경이 ‘그리스도 중심’인 것을 확고히 합니다. 이는 교부들의 전통을 완벽히 인식했다는 증거이며, ‘새 언약’의 관점에서 성경을 읽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의 자유에는 관념적 ‘이신칭의’ 개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이 보입니다. 어쩌면 이러한 약점은 종교개혁의 시작점에 있던 루터에게는 불가피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중세교회의 타락으로 인해 행위에 대해 부정적으로 볼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선행’도 축소해야 했을 것입니다. 루터의 급선무는 행위를 통해 의롭게 되고자 했던 왜곡된 중세의 신학을 타파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직 완숙한 단계는 아니었지만, 루터의 자유에 대한 신학적 정의는 성경에 깊이 뿌리내린 것이었으며, 앞으로 전개될 다음 세대의 종교개혁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지금의 개혁교회야말로 다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 참된 개혁​의 정신을 회복해야 되기 때문이다.
마틴루터의 종교개혁 3대 논문은 개신교인이라면, 특히 목회자라면 꼭 한번은 읽어봐야 하는 책이다.
이 책을 통해, 종교개혁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마틴루터는 1520년 로마 교황청의 위협속에서도

8월에 '독일 크리스찬 귀족에게 보내는 글'
10월에 '교회의 바벨론 감금'
11월에 '크리스챤의 자유' 라는 논문을 출판하였다.

​​1. 독일 크리스챤 귀족에게 보내는 글

​이 논문은 다른 세 편의 글과 비교했을 때  로만 가톨릭에 대해 가장 공격적이고, 로마 교황에 대해​ 가장 비판적인 글이다.
그 이유는, 마틴 루터가 이 논문을 통하여, 독일 크리스챤 귀족들의 구체적인 행동을 촉구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이 논문에서, 마틴 루터는 로만 가톨릭이 여태껏 세 가지 담을 쌓아 놓고 그 뒤에서 이제까지 자신들을 방어해가며, 부패했다고 비판한다. 

첫째 담 세속적 계급 위에 있는 영적 계급(성속의 구분)
둘째 담 성서해석자인 교황과 교황무오설(성서해석 독점)
셋째 담 교황과 공의회(교황은 처벌받지 않음) 

​마틴 루터는 교황의 허위, 그리고 사제들의 특권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그들이 평신도보다 거룩하거나 뛰어난 존재가 결코 아님을 주장한다.

이것은 말하자면 모든 크리스찬은 참으로 "영적 계급"에 속하며 그들 가운데는 직무상의 차별 이외에 아무것도 없다. 구두 수선공, 대장장이, 농부는 각기 자기들의 일과 직무를 맡고 있으면서도 그들은 다 성별받은 사제와 주교와 같다. -29~34p 

​마틴 루터는 이 논문에서 그 당시 혁명적인 평등사상을 전개한다.
어떻게, 그 당시에 하늘같은 교황과 땅같은 농부가 같은 크리스챤이라고 말하며, 교황이 그들보다 결코 우월하지 않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지금의 그리스도인은 마틴 루터가 가졌던, 혁명적 평등사상을 망각한 건 아닐까?
인간 사회의 비인간적 불평등과, 교회내의 비성경적 불평등에 너무 익숙해진건 아닐까?

이 논문을 통해, 마틴 루터가 주장하는 '만인 사제설'의 의미와 그 효과에 대해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있다.​

2.교회의 바벨론 감금

​15​20년 10월에 나온 이 논문은 마틴루터의 성례관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글이다.
설교가 들려지는 말씀이라면, 성례전은 보여지는 말씀이다.
그러나 로만 가톨릭은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들려지는 말씀보다 보여지는 말씀인 성례전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마틴루터는 성례전보다 본질적으로 중요한 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그곳에 교회가 있다(ubi est verbum ibi est ecclesia)라고 주장하며,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의 본질임을 강조했다.

마틴루터는 이 논문에서 로만 가톨릭이 많이 하는 성례중에 성찬과 세례를 예수님께서 제정하셨기에 남겨두고, 나머지는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

마틴​ 루터는 성찬식에서 잔을 주지 않고 떡만 주는 것이 비성경적이라고 이야기하며 얀 후스를 언급한다.
체코의 종교개혁자 얀 후스는 성도들과 떡뿐만 아니라 잔을  나누며 성찬식을 하다가 화형을 당하였기 때문이다.

마틴 루터는 자신이 존 위클리프와 얀 후스의 사상적 후예라고 이야기 한다.

​​나는 이러한 나의 가르침이 위클리프적이고 후스적이고 이단적이고 또 교회의 규정에 배치된다고 부르짖을 사람들에게 대하여 조금도 귀를 기울이거나 중요시하지 않으려고 한다. -185p

​우리는 흔히 종교개혁이 1517년 마틴루터에 의해서 시작되었고, 그 전에는 종교개혁자가 없었던 것처럼 생각하지만, 실제로 마틴루터 이전에 존 위클리프와 얀 후스와 같은 선구적 종교개혁자들이 존재하였다. ​

영국의 존 위클리프가 성경을 자국어인 영어로 번역하였고, 얀 후스가 위클리프의 영향을 받아 성경을 자국어인 체코어로 번역하였고, 마틴 루터가 얀후스의 영향을 받아 성경을 자국어인 독일어로 번역하였다. ​

3. 크리스챤의 자유

​1520년 11월에 쓴 '크리스챤의 자유'는 앞의 두권의 논문보다는 다소 온건한 어조다. 마틴 루터는 이 논문에서 크리스챤으로서 어떻게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지 이야기 한다. 크리스챤은 본질적으로 자유인이면서 또한 봉사자다.

크리스찬은 더할 수 없이 자유로운 만물의 주이며 아무에게도 예속하지 않는다.
크리스챤은 더할 수 없이 충의로운 만물의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한다. -295p 

​크리스챤은 매우 자유로운 존재이지만, 매우 부자유한 존재이다. 이런 모순이 왜 발생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크리스챤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율법에서 도달할 수 없는 자유를 얻지만, 그 자유로 이웃을 적극적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종이되기 때문이다.

그는 신앙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살며, 사랑으로 그의 이웃 안에서 산다. 신앙에 의하여 그는 그 자신 이상으로 하나님께 올리워지며, 사랑에 의하여 그는 그 자신 이하로 이웃에게 내려간다. -338p







형제 자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부르셔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자유를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구실로 삼지말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 갈라디아서 5:13

크리스챤은 믿음때문에 주인이고, 사랑때문에 종이된다.
에리히프롬이 말한 것처럼, 참된 자유는 freedom from에서 freedom to로 넘어가야 한다.
크리스챤은 죄에서 해방되어, 이웃을 적극적으로 사랑하는 삶을 살게 될 때 참으로 해방된다. 

그래서 마틴 루터는 용기있게 이렇게 선포한다.

"침묵을 지킬때는 지나가고 이제는 말할 때가 왔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죄에서 자유함을 얻어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자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자유롭게 된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만물의 지배자로 아무에게도 예속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육신적으로 이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이웃과의 관계에서 종처럼 그들을 사랑하고 섬겨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이러한 이중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본문에 앞서 성도는 자기의 신앙양심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할 자유가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적인 자유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자유롭게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먹고 마시는 문제에서부터 삶의 중요한 문제까지 결정하며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상의 문제들을 선택하고 결정하는데 중요한 원리가 있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문제에 대한 사도 바울의 최종적인 결론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인들의 참된 삶의 목적에 대해 가르쳐 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참된 성도의 신앙과 생활을 정확하게 요약한 핵심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모든 행위의 기준, 전 인생의 기반 역시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음을 가리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을 지배하는 아주 기본적인 원리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든 행동, 즉 그것이 먹는 것이든지 마시는 것이든지 생업의 일이든지 봉사의 일이든지 무슨 일이든지 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아야 하나님이 영광을 위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은 ‘자신의 존재 목적과 삶의 목적을 바로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은 존재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만드실 때에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창조하셨습니다.
그 목적인 무엇인지 알아야 분명한 삶을 살고,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목적을 상실하고 있다면 존재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존재가치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가치창조의 수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적을 상실하면 자연히 존재의 가치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는 마치 땅만 허비하고 세월만 허송하는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와 같습니다. 일본의 유명한 신학자인 우찌무라 간조목사님은 말하기를 "실패하는 것이 죄가 아니라 목적이 잘못된 것이 죄"라고 했습니다. 

삶의 의미와 목적을 가장 잘 인식한 사도 바울은 빌 1:20-21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사도 바울은 이 고백을 통해 자신의 존재목적이 예수님을 존귀하게 해드리기 위함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존재목적도 역시 하나님과 주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몇 년 전 우리 한국교회에 ‘목적이 이끄는 삶’ 열풍이 불었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새들백 교회 릭 워렌 목사님을 통해 많은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열풍이 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때문에 우리 한국교회가 목적이 이끄는 교회가 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목적이 이끄는 교회가 되었다면 지금쯤 우리 한국교회는 많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인정을 받아 부흥하고 성장하는 교회가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맛을 잃은 소금과 같이 세상 사람들의 발에 밟히고 있습니다. 

높은뜻 숭의교회 김동호 목사님은 오늘 날 우리 한국교회가 이렇게 된 원인을 한국교회가 교회의 존재목적을 상실하였기 때문이라고 진단했습니다. 교회의 존재목적은 교회를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의 존재목적은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만드는 것입니다. 세상을 모든 사람들이 살기 좋은 천국, 즉 하나님 나라로 만드는 것이 교회의 소명이고 사명이며 교회의 존재목적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한국교회가 그 목적을 잊었습니다. 세상을 등졌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잊었습니다. 교회가 교회의 목적이 되었습니다. 교회의 부흥, 교회의 성장이 교회의 목적이 되었습니다. 교회의 성장이 목적이 되고, 교회의 부흥이 목적이 되어 온 교회가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그 결과 어느 정도 그 목적을 이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 세계에서 제일 큰 장로교회, 세계에서 제일 큰 감리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교회는 점점 커지는데 교회는 점점 그 생명력을 잃어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교회는 점점 그 아름다움을 잃어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세상의 존경을 받고 인정을 받던 교회는 점점 세상의 지탄을 받고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는 교회로 추락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교회가 교회의 존재목적을 잃으면서 교인들도 존재의 목적을 잃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부자 되고, 세상에서 성공하고, 세상에서 출세하는 것이 목적이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과 똑같은 목적을 갖게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과 다른 것이 있다면 그 목적을 하나님께 기도하여 얻겠다고 하는 것만 달라졌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처럼 소중한 소명을 잊었습니다. 사명을 잊었습니다. 자신의 존재목적을 상실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상실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사를 잃어버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는 하지만 예수의 능력은 상실한 사람들이 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삶의 목표와 목적을 수정해야 합니다. 자신의 성공만을 위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과 소명을 잊어버리고 살고 있는 어리석은 삶을 벗어 버리고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살아가는 목적을 다시 한 번 세우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존재하는 목적을 알게 되면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개념이 무엇인지는 잘 알아야 합니다. 영광의 개념을 생각할 때 항상 두가지 개념 즉, 하나님과 인간의 관점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께서 “그 영광을 나타내셨다”는 표현도 있고,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표현도 있습니다. 

하나님 입장에서의 영광의 개념은 “하나님의 임재나 나타내심”의 의미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영광을 보았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보았다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 2장에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는 기적을 행하실 때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셨다”(11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갈릴리 가나의 한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되신다는 사실을 나타내셨다고 하는 뜻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말이나 행동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여주고 드러나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는 일이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능력과 사랑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일을 하든지 간에 이 일을 통하여 하나님을 드러내고, 알려주고, 보여주며, 높이는 방편이 되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신원 에벤에셀 박성철 회장은 장로님입니다. 20여 년 전 남의 건물 얻어서 조그맣게 봉제공장을 시작하면서 하나님께 물질의 복을 주시면 수입의 30%를 하나님 영광을 위해 쓰겠다고 서원하였습니다. 오늘날 그 기업은 신흥재벌의 순위에 들어 있다고 합니다. 사업을 하든, 운동을 하든, 공부를 하든, 무엇을 하든 하나님의 자녀들의 일차적 목표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을 드러내고 보여주며 알려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에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삶의 의미와 가치의 전부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데 두었습니다. 

롬 14:8절에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라”고 하면서 주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제일의 목적이 바로 인간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의 목표를 하나님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마땅합니다. 하나님은 친히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을 말씀합니다. 사 43:7절에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이 목적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처럼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때 나타나는 중요한 열매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32-33절에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통해 우리의 자유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하나님의 교회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 것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성도든지 아니든지, 아니면 나와 관계있는 사람이든지 아니든지 관계없이 그들의 유익을 구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하여 그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목표는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삶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구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유익을 구하며 살아갑니다. 거미같이 자기만 위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넘어지게 하고 손해나게 하며 해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개미와 같이 부지런히 살기는 하는데 전적으로 자기만을 위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부지런히 일하는 꿀벌과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꿀벌은 부지런히 일하며 살아갑니다만 그 모든 것이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이 특징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남에게 유익을 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 삶의 결과는 반드시 영혼을 구원하는 것으로 연결되어져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많은 사람에게 전도하여 영생 얻고 구원받는 사람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가장 큰 뜻은 예수 믿고 구원 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 6:39-40절에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처럼 구원받아 영생을 소유한 우리 성도들의 삶은 어찌하든지 한 사람의 영혼이라도 구원하는 일에 목표를 두고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 믿기를 권하고, 예수 믿게 하여, 우리와 같이 영생을 얻고 구원받는 사람이 되도록 하는 것이 우리 생애의 최대의 목표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하든지 한사람에게라도 복음을 전해 그들의 영혼을 건져야합니다. 영혼 구원을 위해서 시간을 바치고 물질을 바치고 재능을 바치는 것은 참으로 가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실 때 복음을 위해 생명까지 바친다면 최고의 영광일 것입니다. 예수님도 무슨 일을 하든지 궁극적인 목표를 영혼구원에 두었습니다. 이제 우리도 무엇을 하든지 복음을 전하여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중심을 두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과 박해와 핍박을 각오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까? 내 가족, 내 친지,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혹 아직도 하나님을 영접하지 못하고, 어둠의 세계에서 방황하도록 내버려두지는 않았습니까? 

추석명절에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온 가족이 감사하시고, 우상숭배를 멀리하며 온 가족을 구원하는 전도의 기회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