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洗禮) 마태복음 3:11 오순절 사건은 일회적 사건인가?

   파트리스교회 수요 성서 연구 #. 1 물세례와 불세례(2020-06-10)

세례(洗禮) 마태복음 3: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

구약의 마지막 책은 “말라기”입니다.
신약의 첫 번째 책은 “마태복음”입니다.
구약 ‘말라기’와 신약 ‘마태복음’은 종이 한 장의 차이로 느껴집니다. 그러나 성경의 역사를 살펴보면 구약 말라기와 신약 마태복음
사이는 “대략 400년” 이란 긴 세월이 있었습니다.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가 40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타날 징조가 전혀 보이지 않았던 시대이었습니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구약 말라기와 신약 마태복음의 400년의 기간을 “암흑의 시기” 또는 “침묵의 시기” 라고 합니다.
‘암흑의 시기’ 또는 ‘침묵의 시기’를 “신구약 중간 시대”라고도 합니다.

기독교 이외에 가톨릭교회와 유대교에서는 신구약 중간 시대에도 하나님은 말씀하셨다는 것을 강조하여 “외경”이란 말씀을 인정하고 사용합니다.

오래 동안 기다리던 메시아가 나타날 징조가 전혀 보이지 않던 때에 어느 날 광야에 낙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광야에 거주하는 낯선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 라고 외쳤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광야로 나와 요한의 외치는 소리를 들을 때 바로 이 사람이 메시아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요한은 나는 너희들이 기다리는 메시아가 아니라 다만 물로 세례를 주는 사람이다. 그러나 내 뒤에 오실 그 분은 너희들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며 실망하던 유대인들에게 메시아 신앙을 깨우쳤습니다. 요한의 외침을 듣고 많은 유대인들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외침에서 세 종류의 세례를 생각합니다.

첫째는 물세례(Water Baptism) ; 회개와 구원을 위한 세례
둘째는 성령세례(Holy Spirit Baptism) ; 구원의 확신과 보증을 위한 세례
셋째는 불세례(Fire Baptism) ; 심판을 위한 알곡과 죽정이를 구분하는 세례(불심판)

그런데 요한이 세례를 베풀었던 것은 분명하게 성경에 소개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풀 것이라고 하셨던 말씀은 어느 누구도 예수님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언제 예수님께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셨을까요?

세 종류의 세례를 베푸셨던 수여자(授與者)를 살펴봅시다.

첫째는 물세례(Water Baptism)는 누가 베풀었을까요?

예수님 당시에는 세례자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마태복음 3:5∼6,
이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그러나 오늘날은 교회에서 목사가 세례를 베풉니다.
주 예수를 믿는 (아무개)에게 내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베드로전서 3:21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둘째는 성령세례(Holy Spirit Baptism)는 누가 베풀었을까요?

성령째는 성령세례(Holy Spirit Baptism)는 누가 베풀었을까요?세례는 요한의 증거대로 분명히 예수님께서 베푸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언제 성령세례를 베푸셨으며 예수님께서 성령세례를 베푸셨다는 증거가 무엇일까요?

요한복음 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 하실 것이요. 

성령세례는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사람들에게 보내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성령을 “보혜사(保惠師)” 라고 합니다.

“보혜사(保惠師)”란 무엇인가?
- 지킬 보(保), 은혜 혜(惠), 스승 사(師)
보혜사란 “지켜주시고 은혜를 베푸시며 가르치시는 선생님” 이란 뜻입니다.

보혜사를 영어 성경에서 찾아보면 NIV에서는 “상담자(the Counselor)”, KJV에서는 “위로자(the Comforter)”, NASB에서는 “돕는자(the Helper)” 라고 합니다.

보혜사를 헬라어 성경에서는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 paraklétos)” 라고 합니다.

1. 옹호자(an advocate), 중보자(intercessor),
2. 위로자(a consoler), 위로자(a comforter), 돕는자(helper),
3. 변호사(Paraclete)

예수님께서 언제 누구에게 성령세례를 베푸셨습니까?

사도행전 2:1∼4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오순절날 성령 강림 사건은 예수님께서 성령세례를 베푸셨던 사건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때 불세례도 함께 베푸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복음서를 자세히 관찰하면 성령과 불이라는 용어가 마태복음 3장과 누가복음 3장에서는 사용하였으나 마가복음 1장과 요한복음 1장에서는 성령이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성령과 불로 라고 모든 복음서에서 말씀하셨다면 불세례도 오순절 날 임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하셨을까요? 그러므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바르게 읽어야 합니다.

셋째는 불세례(Fire Baptism)는 누가 베푸셨을까요?

세례자 요한에 의하면 성령세례와 불세례는 예수님께서 베푸실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성경을 폭 넓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령과 불세례에 대한 말씀을 마태복음 3장과 누가복음 3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서는 성령세례만을 말씀합니다.

이제 성경을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3: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12절,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불세례”는 불로 심판하실 것을 의미합니다.

마가복음 1: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 

9절,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리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누가복음 3:16,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17절,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요한복음 1: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34절,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하니라.  

참조 / 성령세례(사도행전 1:5, 11:16, 고린도전서 12:3)

“성령세례와 불세례”에 대해서 언급한 성경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이외 성경에서는 오직 “성령세례”만을 말씀합니다.

이와 같은 성경의 증거에서 성령세례는 예수님께서 베푸신 것이 분명하게 소개되었습니다. 그러나 불세례는 예수님께서 베푸신 것이 아닙니다.

다만 불의 혀 같이 갈라진다는 것은 불이 다양하게 갈라져서 오순절 날 한 자리에 모여 있었던 다양한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재 했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불세례는 누가 베푸셨을까요?
사도행전 2:1∼3,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 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오순절 날 성령의 임재가 나타났을 때 마치 성령은 강한 바람 소리로 들렸습니다. 불의 혀가 갈라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바람이 아닙니다. 성령은 불이 아닙니다. 다만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은 모여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 임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성령세례와 불세례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지워버려야 합니다.

헬라어 성경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
(βαπτίσει ἐν Πνεύματι Ἁγίῳ καὶ πυρί)
- will baptize with the Spirit Holy and fire  

세례 요한은 요단강에서 많은 유대인들에게 세례를 베풀면서 장차 오실 그 분께서는 “성령(프뉴마)과 불(푸르)”로 세례를 베풀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이렇게 외쳤던 요한의 증언은 공생애 기간 동안 예수께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세례를 베풀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시는 그 분이 그토록 기대하던 “메시아”라고 기다렸으나 예수께서 세례를 베풀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으며 사십일 후에는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사도행전 1:3).

이렇게 번역된 데는 헬라어 접속사 “카이(καὶ)”의 뜻을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는데 “카이”는 “등위 접속사”로서 “그리고(and)” 라고 하여 앞의 것과 뒤의 것을 동등하게 생각합니다.

따라서 “성령과 불”이라고 할 때 성령과 불을 동등한 것으로 해석합니다. 이제까지 성령과 불을 이렇게 등위 접속사로 해석한 것입니다. 그러나 등위 접속사가 아니라 우위 접속사로 해석하면 전혀 그 의미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직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만 성령과 불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불세례는 특별한 용법으로 사용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위 접속사”인 “또는(or)”의 뜻으로도 사용된다. 여기서는 바로 우위 접속사로 사용된 것이다. 따라서 '성령과 불로'로 번역된 “엔 프뉴마티 하기오 카이 퓌리(ἐν Πνεύματι Ἁγίῳ καὶ πυρί)”는 “성령 또는 불안에서” 라는 뜻이다.

이러한 사실은 성경 본문의 문맥과 사(四)복음서를 비교하여 연구해보면 더욱 확실히 증명된다. 먼저 우리는 “성령과 불로”라는 말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만 나오고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는 “성령과 불로”가 아닌 “성령으로” 라고만 표현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또한 사도행전 1:5에서도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고 하여 불에 대한 언급 없이 “성령으로” 라고만 되어 있으며 사도행전 11:16과 고린도전서 12:13에서도 역시 “성령으로”라고말씀합니다.

이와 같은 여러 성구들을 참조할 때 주님이 신자들에게 주시는 세례는 오직 “성령으로” 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불”의 의미는 별도의 뜻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세례” 라는 것은 “성령 안에 잠기운다”라는 뜻으로 여기서 보더라도 “침례” 라는 말이 의미를 더 잘 통하게 한다. 만일 “세례”라고 하면 “성령으로 씻긴다”는 말이 되므로 오히려 이해하기 힘들게 된다.

성령은 영으로 다시 오시는 그리스도(요 14:18∼19)이므로 '성령 안에서 침례'라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을 상징하되 '생명의 연합'을 뜻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 함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성령 안에서 침례'는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행 2:38, 행 19:2)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 되는 것(고전 3:16-17)'과도 같은 말이 되는데 결국 우리와 주님과의 상호내주(Inter-Residence)를 뜻한다.

한편 요 4:24의 "하나님은 영이시니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에서 '신령으로'라는 말은 “엔 프뉴마”로서 원 뜻은 “성령 안에서”라는 뜻이다. 이 말씀의 의미 역시 '성령을 받음'으로 '주님을 모시는 것'이 되며 이는 곧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하는 뜻이다.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아버지께 예배를 드려야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자는 아무리 열심히 예배드려도 소용없다는 것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서는 예배드리는 자가 먼저 주님과 하나가 될 때만 가능한 것이다.

이상으로 볼 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요 3:5)'고 할 때 '물'과 '성령'의 의미가 모두 해석되는 것이다. 즉 '물'은 죄를 씻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물 안에 잠김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의 연합'을 상징하는 뜻이며 '성령'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상징하는 것으로 성령 안에 잠긴다는 뜻은 '그리스도와 생명의 연합'을 상징하는 것이다. 즉 죽었다가 살아나는 원리가 포함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불로 세(침)례를 주신다'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알아볼 차례가 되었다. '불로 세례를 주신다'라는 말씀은 직역하면 '불 속에서 세례를 주신다'는 말로서 신자와는 전혀 관계없고 불신자에게만 해당하는 말씀이다. 즉 불신자는 성령 안에 잠기게 하는 대신에 '불 속에 잠기게 한다'라는 의미로서 결국 '심판을 받는다'는 뜻이다.

이제 세례에 대한 용어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세례(밥티조)란 물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을 말합니다.
물속에 들어갔다는 것은 완전히 죽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물 위로 다시 올라올 때는 과거의 나 즉 옛 사람은 죽었고 이제부터는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물세례는 회개와 구원의 표시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회개와 구원의 표를 받았지만 공중권세를 잡은 사탄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 살면서 때로는 알게 모르게 죄를 짓게 됩니다. 이렇게 죄를 짓게 될 때 사탄은 정말 네가 구원을 받았느냐?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아직도 그렇게 살아가느냐? 하며 조롱하고 비난할 때 정말 내가 회개하고 구원을 받았는가? 하고 의심할 때가 있습니다. 이때 성령세례가 구원을 보증합니다.

고린도후서 1:22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고린도후서 5: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히브리서 7:22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성령세례가 보증하는 것은 "생명"입니다.
로마서 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불세례는 심판 즉 소멸하는 것을 말합니다.

신명기 4:24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오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

히브리서 12:29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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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약 자료

주제 ; 세례
- 세례(씻을 세, 예도 예)와 침례(잠길 침, 예도 예)
- 밥티조(물속에 잠기다)

성경 ; 마태복음 3:11

종류 ;

 1. 물세례(회개와 구원) 베드로전서 3:21

 2. 성령세례(생명의 보증) 보혜사(요한복음 15:26)
 - 로마서 8:2, 요한복음 6:63, 고린도후서 1:22, 5:5, 히브리서 12:29

 3. 불세례(심판, 알곡과 죽정이)
- 신명기 4:24, 히브리서 12:29
- 마태복음 3:12, 누가복음 3:17

*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요
- 전치사 "과"(카이)
 등위접속사로 해석할 때는 성령과 불을 같은 것으로 이해
 우위접속사로 해석할 때는 성령과 불은 서로 다른 것으로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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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1-2022(금)
성령세례

"오순절 사건은 더 이상 일어날 수 없다"

이와 같은 주장은 "비성경적"이다.
왜냐하면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첫째,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은 '전지전능(全知全能) 무소부재(無所不在)' 하신다.
이 속성은 한 마디로 "영원성(永遠性)"이다.
영원이란 어느 시대에는 나타나고 어느 시대에는 소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오순절 사건은 지금도 앞으로도 마지막 그 날까지 지속될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이름

"아니 엘 샤다이"라는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은 영으로 존재하시며 그 영은 지금도 계속적으로 역사하는 영이다.

셋째, 바울의 증거


고린도전서 2:9-10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바울의 성령은 통찰하는 영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영은 구약에서 이미 말씀하신 것을 통하여 계속된다.

신명기 29:4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신명기 30:6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레위기 18:5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로마서 11:8
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까지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

구약에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주셨다.
그런데 그 율법을 그의 백성들이 지킬 수 없다고 하였다.
그 이유는 그의 백성들에게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킬 수 없기 때문에 구원을 받을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마음에 할례를 받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강조하였다.

로마서 2:28-29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조선족


중국에서는 ‘조선족’이라 부르고, 한국에서는 ‘중국 동포’라고 부른다.

1949년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졌다. 중국 동포는 그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1949년 이전은 다시 1910년(경술국치)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다.

1910년 이전에는 수해와 가뭄 등 자연재해로 인한 조선인의 만주 이주가 아주 활발히 이루어졌다. 당시 청나라는 봉금령을 폐지하고, 만주 일대를 전문 개간 구역으로 지정했다. 황무지를 개간하기 위해서였다. 많은 조선인이 건너가 특유의 근면성으로 황무지를 개간해 농사를 지었다. 농작물을 추수할 때가 되면 청나라 관리들이 와서 약탈을 했다. 부패한 관리들을 관청에 신고하고 투쟁하며 자신의 권리를 찾는 과정이 중국 기록에도 남아 있다.
만주, 특히 간도 지방은 역사적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지역이었다. 국경 개념도 애매해 당시에는 자유롭게 오가던 곳이었다.
1905년에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 전초 단계가 됐다.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는 애국자들이 만주로 급격하게 이주했고, 만주는 항일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됐다.
당시 청나라는 서방 외세의 침략과 일본의 침략을 동시에 받고 있었다. 외국인 선교사는 만주 일대에서 자유롭게 선교 활동을 했다. 만주에 살던 우리 민족도 자연스럽게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됐다. 1907년 간도의 용정촌에 윤동주 시인이 다녔던 명동학교가 설립되는 등 종교와 교육 기관 등이 생겨났다.
청나라는 쇠퇴해 결국 멸망했고, 1912년 신해혁명으로 중화민국이 수립됐다. 1945년 우리나라는 해방됐고, 이어서 남과 북으로 분단됐다. 남한에는 자유민주주의, 북한에는 공산주의가 들어왔다.
중국은 1949년에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했다. 1952년에는 연변 조선족 자치구를 인정했다. 1954년에 조선족은 소수 민족으로 인정됐고, 중국 국민으로 정식 등록됐다.
그 전만 해도 조선족은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를 자유롭게 왕래했다. 일제 강점기 때는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투쟁한 우리 민족이었다. 생활 터전은 만주땅이었지만, 만주와 한반도는 언제든지 오갈 수 있었다. 본인의 선택이 아니라 역사적 상황 때문에 중국 동포가 된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 냉전 시대에 한국과 중국은 외교 관계가 없었다. 조선족은 북한하고만 왕래하며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해야했다. 한국에는 올 수가 없었다. 1992년 한중 수교가 되고 나서야, 중국 동포가 일자리를 찾아서 한국으로 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3개월짜리 비자만 허용해 불법 체류자가 대다수였다. 2007년 방문 취업제도를 시행해 비로소 합법적인 한국 입국과 취업이 가능해졌다.


백향목(柏香木, cedar) 송백나무


백향목(柏香木, cedar) 송백나무

백향목의 3대 특징

1. 고산식물
해발 2,000m 지역에서 곧게 성장한다.

2. 상향성 열매
대부분의 식물의 열매는 아래로 형하여 열매를 맺는다.
그러나 백향목의 열매는 하늘을 향하여 열린다.
하늘을 바라본다(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듯한 모습).

3. 지향성 뿌리
뿌리만 자라는데 30년이 걸린다.
뿌리가 자리를 잡은 후에 위로 성장한다고 한다.


[성경의 식물] 백향목(柏香木, cedar) 송백나무

1. 용어

히브리어로 ‘에레즈’이며, 학명은 ‘Cedrus libani Loudon’이다. 레바논 삼나무를 말한다. 침엽수속(屬)의 소나뭇과(科)로서 키가 40m까지 자라는 거대한 상록교목(常綠喬木)이다. 주로 기온이 낮은 고산지대에서 잘 자란다. 우리나라의 소나무와 모양이 약간 다르다. 열매는 잣나무와 히말리야시다를 섞어 놓은 듯한 모양이다. 모양이 우람하고 수령(樹齡)이 2,000~3,000년이나 된 것들도 있어서 ‘수목(樹木)의 왕’으로도 불린다. 뿌리는 지상의 높이만큼 깊이 들어가 결코 뽑히지 않는 나무이다. 최대40m까지 자라는 거대한 수목 중 하나이다. 수지(樹脂)는 향이 좋아 상쾌함을 주며, 방부제와 방충제로 사용된다. 고대 로마나 이집트에서는 수지(송진)책이나 집 주변에 발라 벌레를 쫓는데 사용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솔잎은 떡을 만들 때나 약재로도 사용한다. 잣과 비슷한 열매는 10-15cm나 되며 완전히 자라나는데 3년 정도가 걸린다.

성경에 기록된 나무 중에서 가장 중요한 나무 가운데 하나이며, 솔로몬이 성전을 짓는데 사용했다. 주로 건축용으로 사용된다. 백향목은 일반 소나무에 비해 재질이 단단하고 물에 강하다. 가구나 집을 짓는데 최고의 목재였다. 페니키아 사람들은 백향목이 수분에 강하다는 것을 알고 배판을 만드는데 사용했다고 한다. 큰 목재인 덕에 거대한 갤리선(galley)을 만들어 해상무역을 주도했다.

레바논은 국기에는 백향목이 있을 만큼 국가에서 중요하게 여긴다. 백향목은 레바논 근방에서 자란 나무들이 가장 질이 좋기 때문에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레바논 백향목을 가장 비싼 가격에 거래되었다. 이집트, 앗수르, 바벨론, 로마까지도 레바논 백향목의 사랑을 그치지 않았다. 앗수르와 에베소의 경우는 신전의 중요한 부분을 레바논 백향목을 사용했다.

성경에 기록된 나무 중에서 가장 중요한 나무 가운데 하나이며, 솔로몬이 성전을 짓는데 사용했다. 주로 건축용으로 사용된다. 백향목은 일반 소나무에 비해 재질이 단단하고 물에 강하다. 가구나 집을 짓는데 최고의 목재였다. 페니키아 사람들은 백향목이 수분에 강하다는 것을 알고 배판을 만드는데 사용했다고 한다. 큰 목재인 덕에 거대한 갤리선(galley)을 만들어 해상무역을 주도했다. 

 

페니키아 갤리선

 

2. 성경 속의 백향목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할 때 수입해 사용했다. 두로왕 히람에게 부탁하여 백향목을 수입하고 목수를 데려와 성전과 궁전을 짓는 데 사용했다.(왕상 7:2) 거대한 수십 미터에 이르는 거대하고 무거운 나무를 어떻게 옮겼는지 미스터리다. 산에서 벌목하여 레바논에서 뗏목처럼 만들어 욥바항으로 가져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스룹바벨 성전을 건축할 때도 레바논 백향목을 사용했다.(스 3:7)

 

레바논의 백향목

 이에 석수와 목수에게 돈을 주고 또 시돈 사람과 두로 사람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과 기름을 주고 바사 왕 고레스의 명령대로 백향목을 레바논에서 욥바 해변까지 운송하게 하였더라
백향목은 우람한 모양과 쓸모 때문에 하나님의 축복과 부를 상징한다. 성경에서 백향목과 관련된 다양한 상징들이다.


ㄱ. 힘찬 기상과 아름다움

아1:16-17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어여쁘고 화창하다 우리의 침상은 푸르고 우리 집은 백향목 들보, 잣나무 서까래로구나

렘 22:14

그가 이르기를 내가 나를 위하여 큰 집과 넓은 다락방을 지으리라 하고 자기를 위하여 창문을 만들고 그것에 백향목으로 입히고 붉은 빛으로 칠하도다

 

ㄴ. 장엄함

열왕기상 4:33
그가 또 초목에 대하여 말하되 레바논의 백향목으로부터 담에 나는 우슬초까지 하고 그가 또 짐승과 새와 기어다니는 것과 물고기에 대하여 말한지라

ㄷ. 힘과 위엄

ㄹ. 영화로움

ㅁ. 강대국과 권세

ㅂ. 이스라엘의 번영

ㅅ. 의인의 영원한 성장과 번성

ㅇ. 교만과 사치로 표현되기도 한다.







교회(敎會)


사무엘하 7:1-16

솔로몬에게 성전을 건축하게 하신 것의 깊은 의미는 무엇인가?
12-13절 /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네 몸에서 날 자식은 당시에는 솔로몬이었다.
그러나 이 예언은 훗날 메시아를 의미하신 말씀이다.

현대인의 성경

  1. 이제 다윗은 그의 궁전에 정착하였고 여호와께서는 주변의 모든 원수들에게서 그를 안전하게 지켜 주셨다.
  2. 그때 다윗이 예언자 나단에게 '보시오. 나는 백향목 궁전에 살고 있는데 여호와의 궤는 천막 속에 있소.' 하였다.
  3. 그러자 나단이 '여호와께서 왕과 함께 계시니 왕의 마음에 좋을 대로 하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4. 그러나 그 날 밤 여호와께서 나단에게 말씀하셨다.
  5. '너는 가서 내 종 다윗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너는 내 성전을 지을 자가 아니다
  6. 나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인도해 낸 부터 지금까지 성전이 있어 본 적이 없고 이리저리 옮겨 다니면서 천막을 내 거처로 삼아 왔다.
  7. 내가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어느 곳으로 옮겨 다니든지 나는 내 백성의 목자들인 이스라엘 지도자들에게 어째서 나에게 백향목 성전을 지어 주지 않느냐고 말한 적이 없다.
  8. 그러므로 너는 내 종 다윗에게 전능한 나 여호와가 이렇게 말한다고 일러 주어라. 내가 들에서 을 치던 너를 택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의 통치자로 삼았고
  9. 또 네가 어디로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앞에서 너의 모든 대적을 파멸시켰다. 앞으로 나는 네 이름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의 이름처럼 높여 주겠다.
  10.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해 정착지를 마련해 주었으므로 그들이 다시는 옮겨 다니지 않아도 될 것이다. 사사들이 나라를 다스리던 시대부터 그들은 악한 민족들의 침략으로 많은 괴로움을 받아왔으나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다. 너는 전쟁이 없는 태평 세월을 누리고 네 자손들은 계속 이스라엘을 다스릴 것이다.
  11. (10절과 같음)
  12. 네가 죽어도 나는 네 아들 하나를 왕으로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겠다.
  13. 바로 그가 나를 위해 성전을 건축할 자이다. 그리고 나는 그의 나라가 영원히 지속되게 할 것이다.
  14.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될 것이다. 만일 그가 범죄하면 나는 사람을 막대기와 채찍으로 사용하여 그를 벌하겠다.
  15. 그러나 내가 네 앞에서 제거한 사울에게서 내 자비를 거둔 것처럼 그에게서는 내 자비를 거두지 않을 것이다.
  16. 그리고 네 집안과 네 왕조는 끊어지지 않고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17. 그래서 나단다윗에게 가서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그대로 전해 주었다.
하나님은 성전을 짓는 것보다 항상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거하는 것을 원하셨다.
그러나 인간의 욕망이 나는 좋은 궁에서 살고 있고 언약궤는 천막에 머무는 것이 마치 좋은 생각이나 더 좋은 방법이라고 착각하므로서 성전을 지음으로 마치 신앙이 한 단계 올라갔다고 생각하는 것이로 발전하였다.




교회(敎會)

성막과 성전과 교회  

성막 / 미쉬칸(mishkan, מִשְׁכָּן)
   장막(출 25:9, 레 15:31, 대하 1:5)
   성막(출 26:1, 민 3:26, 대상 23:26)

성전 / 바이트(bayith, בַּיִת)
   성전(왕하 16:18, 대상 29:3)
   집(창 7:1, 레 14:35, 삼상 1:7)

교회 / 카할(qâhal, קָהַל)
   모이다(레 8:4, 대하 20:26, 에 9:18)
   함께 모이다(에 8:11)

에클레시아 ἐκκλεσία

정치적인 모임이라는 의미가 강한, 고대 헬라 도시국가(폴리스)의회-아테네의 민회를 가리키는 말이었던 라틴어 '에클레시아'.
사도 바울은 헬라의 시의회를 의미하는 에클레시아를 교회라는 뜻의 용어로 사용하였지만 사실 그 단어는 원래 정치적인 용어였다.

이 단어를 교회라는 의미로 처음 쓴 사람은 공식적으로 사도 바울이며, 기존의 유대교의 회당 및 종교적 모임을 칭하는 "쉬나고게(시나고그)"에 대응하는 단어로 만들어졌다.

에클레시아를 한국어로는 “교회”라고 합니다.
영어에서는 “Church”라고 합니다.

에클레시아는 전치사 에크(ἐκ) - out of, from, by, away from
동사 칼레오(καλέω) - to call, to name, by name, to be called
두 단어가 결합하여 만든 여성형 명사입니다.
따라서 에클레시아는 "부르심을 받음, 택하심을 받음, 초대 받음" 이라고 합니다.

“에클레시아”는 하나의 공동체입니다(마태복음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에클레시아”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 이십니다(에베소서 1:23)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에클레시아” 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로마서 16장 16절을 헬라어 성경에서 보면, 모든 “에클레시아” 가 하나의 공동체로 기록되어 있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의 “에클레시아스(복수형)” 가 다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사도행전 11장 전체에 걸처서, 

“에클레시아”가 이방인에게 확장되는 모습을 알 수 있게 됩니다.
29절, 30절에서는 형제의 필요에 따라 물질을 나누는 공동체성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에클레시아”의 정의는
1. 주님께로 돌아간(주님께서 받으신) 모든 성도들의 모임
2. 땅 위에 있는 모든 성도들을 합한 공동체 또는 전부

교회란?

교회론에 들어가면서         

교회가 무엇인가를 바르게 안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개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신앙생활만 잘하면 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갖는 사람들이 간혹 있지만 그것은 바른 이해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교회는 신앙인을 낳고 기르는 어머니와 같고 교회는 신앙인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교회는 그 본질에서 이탈하지 말아야 하고 그 형태는 본질을 바르게 담아 나가는 그릇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교회가 무엇인가를 바르게 알고 자기가 속해 있는 교회를 바람직한 교회로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

2천년 교회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면 교회는 시대의 변천에 따라서 끊임없이 변해 오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교회 그리고 에클레시아                

영어 : church
독일어 : Kirche
스웨덴어 : kyrka
희랍어 kyrike에서 나온 말이다. 

그런데 [교회]라는 말로서 에클레시아(ekklesia)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kyrike(주님께 속한)를 사용한 것은 어떤 이유에서 일까? 

그것은 루터가 교회(에클레시아)라는 말을 싫어하고 [공동체]라는 말을 즐겨 썼기 때문에 그 영향을 많이 받은 독일 교회와 가까운 교회들이 [주님께 속한 공동체]라는 뜻으로 church(영), Kirche(독), kyrka(스웨덴)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로마를 중심한 나라들은 희랍어 [에클레시아(ekklesia)]를 따라서 라틴어 ecclesia, 스페인어 iglesia, 불어 eglise, 이태리어 chiesa 등등의 말로 교회를 표시했다. 

종교개혁 당시 개혁 교회들은 [공동체]라는 개념을,
로마 교회는 보편적인 교회(에클레시아)라는 개념을 강조한 것으로 본다.
개신교회는 [주님께 속한 공동체]라는 의미를 좀 더 깊이 생각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카할과 에다                     

구약 성경에서는 [교회]라는 말이 직접 쓰이지 않았다. 
그러나 [교회]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는 단어는 "카할"과 "에다"라고 한다.

"카할" : 의논하기 위해서 소집된 공동체라는 뜻으로 이스라엘 "회중"을 말한다.
"에다" : 택함을 받아 모인 집단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70인역에서는 [카할]이라는 히브리어를 [에클레시아]라는 헬라어로 번역했고
[에다]라는 히브리어는 [시나고게]라는 희랍어로 번역하였다. 

신구약 성경에서 [교회]라는 말에는 [카할]과 [에클레시아]를 사용해서 [하나님께서 특별히 부르셔서 모인 공동체] 라는 뜻으로 굳어졌고, [에다]와 [시나고게]는 [유대인들이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모이는 집] (회당)으로 의미가 제한되었다.

그래서 기독교의 교회는 [에클레시아]로, 유대인의 회당은 [시나고게]로 구별해서 부르게 되었다.
이것은 유대교와 기독교가 구별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에클레시아                     

에클레시아라는 헬라어는 본래 [일반적인 모임]을 뜻했다.
이 말은 기독교가 [그리스도인들이 모이는 공동체] 라는 뜻으로 사용하면서 "그리스도의 교회" "하나님의 교회" "주님의 교회"등으로 말을 붙여서 종교적인 전문용어로 사용하게 되었다. 

에클레시아라고 하는 그리스도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신자들의 공동체이며, 사람들만 모인 공동체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임재하셔서 머리가 되어 주시고, 성령께서 다스리시며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인이 되심으로 성삼위 하나님의 소유가 되어서, 이 세상의 어떤 권세 아래에도 있지 않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교회는 신인공동체(神人共同體)이며, 살아 있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여기에서 교회의 존엄성을 찾아야 한다.

에클레시아와 가정교회
사도 바울의 에클레시아와 가정교회

가정교회를 논의할 때 소그룹 모임과 지역교회를 구별하여 정의해야 한다.
초기 기독교는 소그룹 가정교회들이 서로 네트워크가 되어 지역교회를 이루었고, 지역교회는 가정 교회들의 개별적인 가치를 인정하였다.

최근 초대교회 가정교회(오이코스 house church)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소위 가정에서 모였던 가정 모임(house church)과 지역 교회(에클레시아 local church) 사이에 분명한 차이를 발견하지 못하고 초대 교회에서 가정 교회의 중요성, 정의 그리고 그 역할만 강조해 왔다. 

대부분 학자들은 가정교회가 예배를 위한 규칙적인 모임을 가졌고, 이런 가정교회 모임이 전도 중심적이었으며, 가르침이 있었고, 세례·성찬과 잔치가 베풀어졌고, 기도와 교제가 있었다고 동의한다. 그러나 가정 모임과 지역교회를 정의하는데 무엇이 소그룹이며 무엇이 대그룹인지 분명히 구별하지 못하는 혼돈을 불러일으켜 왔다.

지역교회라고 볼 수 있는 에클레시아 교회가 가정교회 안에서 어떻게 함께 공존하였는지 살펴봅니다.

에클레시아 용어의 정의    

사도 바울은 헬라의 시의회를 의미하는 에클레시아를 교회라는 뜻의 용어로 사용하였지만 사실 그 단어는 원래 정치적인 용어였다. 

고대 헬라 도시국가(폴리스)의회를 가리키는 말이었던 에클레시아는 사도행전 19장 39절에서 에베소 시의회가 지니는 법적인 집회를 가리키기도 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하는 히브리어로 ‘카할’은 백성들의 모임과 정치적 단체(body)를 의미한다.
헬라어 구약 성경인 셉투아진트(the LXX)는 하나님의 총회를 에클레시아로 번역한다(신 9:10; 23:3; 사 21:5,8; 미 2:5).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회중인 에클레시아는 땅에서 하나님의 증인으로서 그 은혜와 진리를 보존하며, 모든 민족에게 야웨 하나님을 나타내기 위하여, 영광과 진리와 은혜를 구체적으로 드러내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공동체였다.

사도 바울과 에클레시아     

사도 바울의 에클레시아인 교회는 세상의 미신 종교와 종교 의식이 전혀 달랐다.

1세기 당시 많은 종교 사상과 이방 숭배 의식 중에서 예수 운동은 이 종교적 용어인 에클레시아란 용어를 사용하였다.
이것은 그들의 공동체가 다른 세상적 모임과 종교 사상과는 전혀 다른 공동체임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다.

* 그리스도인의 모임과 유대인의 모임   

신약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교회로 사용된 하나님의 에클레시아가 유대인의 회당(쉬나고게)과 다른 공동체임을 생각하며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을 에클레시아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유대인의 회당은 유대인들이 건물 중심으로 모였고, 회당이란 이름은 유대인의 모임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하나님의 에클레시아는 건물 중심으로 모이던 유대인의 공동체와 다른 공동체임을 나타내고자 하였던 것이다.

1세기 헬라 도시의 시의회인 에클레시아는 로마 황제 숭배에 열을 올린 로마 황제와 제국주의 숭배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로마 황제는 헬라 시의회를 지원하고, 헬라 시의회는 황제를 신으로 숭배함으로써, 충성을 맹세하는 하인과 보호와 수혜를 제공하는 황제 간의 관계를 맺었다.

사도 바울의 공동체인 에클레시아는 헬라 도시 시의회인 에클레시아와 유대인의 회당과 다른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체임을 차별화하고자 하였다.

사도 바울의 공동체인 에클레시아는 로마 황제 숭배에 지대한 공헌을 하던 헬라 도시의 시의회인 에클레시아와 분명히 다른 공동체였다. 따라서 사도 바울이 지향했던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인 에클레시아는, 로마 제국으로부터 받는 지원과 후원 관계에 열을 올린 헬라 도시의 시의회인 에클레시아(행 19:39; 정식으로 민회에서 결단할지라)와 건물 중심으로 모이는 유대주의 회당과는 다른 새로운 하나님의 사회를 만들고자 하였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에클레시아라고 부르면서, 로마 사회가 계급 사회로서 불평등 계급 사회였다면, 예수를 믿는 하나님 백성의 사회적 계급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평등 사회를 지향하는 새로운 에클레시아에 존재함을 나타내고자 하였다.

가정교회와 지역교회의 정의

가정교회는 소위 가정집(오이코스)에서 소그룹으로 모였던 그리스도인의 모임이었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말할 때 지역교회인 에클레시아와 가정에서 모이는 가정 모임, 소위 가정교회를 구별하여 사용한다.

헬라어 오이코스와 오이키아는 구약을 헬라어로 번역한 셉투어진트에서 사용되며, 히브리어로는 집의 빌딩과 장소라는 의미로서 

가정 또는 가족을 의미한다.

오이코스는 하나님의 집인 성전 또는 지성소의 의미를 내포한다.
오이코스가 하나님의 공동체를 의미했을 때에는 하나님의 가족과 가정을 의미했다.

고대 그리스 로마의 개념에 따라 오이코스는 노예들을 포함했는데 공동체로서 가정은 교회 구성원들의 가장 작은 기초와 공동체의 단위였다. 

신약 성경에 언급된 가정교회들은 집을 만남의 장소로 사용했다(행 11:14; 16:15, 31, 34; 18:8; 고전 1:16; 빌 4:22; 딤후 1:16; 4:19). 

복음은 이 가정교회를 통해 확산되었고, 주님의 성찬도 이루어졌다(행 2:46). 

로마의 가정집은 로마 양식으로서 큰 홀을 가진 집이었고, 아래층에 위치한 아파트 형식의 다세대 주택을 오이코스라고 불렀다. 

대그룹인 지역교회는 가정교회가 지역교회로서 대그룹으로 모였던 모임으로 정의한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소그룹이 아닌 지역 공동체 개념의 교회인 에클레시아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사도 바울은 헬라 시의회인 에클레시아와 ‘경쟁적인 개념’으로서, 온 하나님 백성과 ‘지역 공동체’ 개념의 에클레시아란 용어를 사용하였다(살전 1:1; 고전 11:18; 16:1, 19; 고후 8:1; 갈 1:2; 살전 2:14). 

큰 집을 가지고 있는 호스트의 집에서 드려지는 대그룹인 에클레시아는 가정교회 역할을 한 것으로 여겨지며, 동시에 소위 지역 교회로서 가정교회 전체가 가정집의 큰 홀에 모여 성찬과 가르침과 기도회, 그리고 예배를 드렸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로마에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집에 있는 교회(롬 16:5),
라오디게아교회(골 4:15, 눔바의 집에 있는 교회),
빌레몬의 집에 있는 교회(몬 2),
고린도교회 가이오 집에 있는 가정에서 모인 교회만을 에클레시아라고 부른다. 

‘카토이콘’이란 표현은 모임의 ‘지역적 중요성’을 강조하는 표현이었다. 

예를 들어 로마서 16장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집에 있는 교회는 다른 그룹들과 달리 노예들과 아이들을 포함한 다양한 계층이 한데 어우러져 교회를 형성하였다.

로마서 16장의 다른 그룹들은 각자 그들의 후원자가 제공하는 전셋집에서 모이는 소그룹이었지만 이 그룹들을 교회란 용어인 에클레시아를 사용하여 부르지 않는다. 

오직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인도하는 모임만을 교회인 집에 있는 에클레시아라고 부른다.
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집에 모이는 에클레시아는 서로 다른 인종과 계층들, 그리고 아이들과 노예들이 함께 모이는 모임이었다. 
따라서 소그룹인 가정 교회만을 따로 에클레시아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바울의 교회인 에클레시아는 그룹인 가정에서 모이는 모임과 그 모임이 모여 지역 교회인 에클레시아를 이루었다고 본다.

사도 바울의 에클레시아

소그룹 모임(오이코스)과 대그룹 지역 교회(에클레시아)의 두 날개를 가진 교회 

사도 바울이 세운 교회는 가족이 중심이 된 가정교회와 그 가족, 또는 가정교회를 주축으로 도시 내의 여러 가족이나 가정교회가 모인 지역교회로 구성되었다. 

그리스 - 로마 사회에서 가족 또는 가정은 가장, 그의 남자 계보의 가족들, 자유인들 그리고 노예로 구성되었다.
크리스천 가정이나 가 교회는 집주인과 자유민 노예들로 구성되었다.
가정교회 모임은 개인의 집에서 모인 크리스천 그룹이었다.

그러나 지역교회는 마을이나 도시와 같은 지역에서 모인 모든 그리스도인을 구성한 교회였다.
만약 특정한 지역에 오직 한 교회만 있었다면 지역교회와 가정에서 모이는 모임은 지역교회이며, 동시에 가정에서 모이는 같은 그룹을 말한다. 

어떤 지역에서 ‘온 교회’라는 표현과 ‘지역 교회’란 표현은 같은 의미가 될 것이다.

보편 교회 또는 우주적인 교회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지칭하는 용어다.
사도 바울이 지역과 도시를 언급한 것은 지역교회를 지칭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겐그레아에 있는 교회’(롬 16:1),
‘고린도에 있는 지역 교회’(고전 1:2),
‘고린도에 있는 지역 교회’(고후 1:1),
‘라오디게아에 있는 지역 교회’(골 4:16),
‘데살로니가에 있는 지역 교회’(살전 1:1; 살후 1:1)가 그 예다. 

개인 후원자가 장소를 제공하는 집(오이코스)에 있는 교회들(에클레시아)이 존재했다.

로마 교회(롬 16:5,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의 집에 있는 교회),
라오디게아교회(골 4:15, 눔바의 집에 있는 교회),
빌레몬의 집에 있는 교회(몬 2),
고린도 교회(가이오 집에 있는 교회)가 이에 해당한다. 

이 집에 있는 교회들은 온 가정교회가 함께 모이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이 집에 있는 교회는 지역교회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집에 있는 교회(롬 16:5),
눔바의 집에 있는 교회(골 4:15),
빌레몬의 집에 있는 교회(몬 2),
가이오 집에 있는 교회를 제외하고는 우리가 지칭하는 가정에서 모였던 가정교회를 지역교회로서의 에클레시아라고 분명하게 부르지는 않는다. 

가정에서 모이는데  온 지역교회가 모이는 모임 장소를 제공하는 주거 공간이 있는 장소의 경우 하나님의 백성의 모임을 에클레시아라고 부른 것 같다.

따라서 지역교회 개념이었던 에클레시아가 가정에서 모였지만 이 에클레시아의 기능은 지역교회 개념이었고 모든 가정교회들이 한 장소에서 모였다. 

고린도교회에서는 이 집에 있는 교회들이 사용되고 있지 않지만 최소한 1개의 지역교회가 존재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사도 바울은 소그룹인 가정교회가 집에서 모였지만 가정교회는 지역교회에 속하여 함께 연합되기를 원했다. 

에베소서에서 사도 바울은 가정교회는 하나님의 권속(household of God)이며 그들 건물마다 함께 지어져 성전이 되어 가야 한다고 권면한다(엡 2:19~22). 

따라서 개인 가정교회는 독립체로 인정되지만 함께 지역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연합하고 서로 연결되어 지역교회를 이루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할 당시 로마에 있던 지역교회인 로마교회는 가정교회들이 독립되어 서로 모이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실제로 가정교회가 모여 지역교회가 되기를 바라던 동기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6장에서 장황한 인사말로 그들에게 편지한 이유는 가정교회가 함께 모이는 지역교회로서 서로 연합하기를 바라는 의도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은 지역교회 안에 있던 가정 모임들이 서로 연합하고 유기적 관계를 맺도록 머리와 몸의 비유를 들어 서로 불가결의 관계임을 강조했다(롬 12; 고전 12). 

따라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가정 모임들이 서로 다른 지도자를 선호하고 독립된 사고를 갖는 파당을 비판한다. 그리고 그는 몸과 머리의 비유를 사용하여 가정 모임이 독립된 유기체가 아니며 고린도교회인 지역 교회 속에서 존재하며 서로 연합할 것을 강조한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보와 가이오에게 세례를 주었다(고전 1:14).

사도행전에 의하면 그리스보는 회당장으로서 “그의 온 집으로 더불어” 주를 믿었다고 했다(행 18:8).
이것은 그가 자신의 집을 가정 모임 장소로 제공했을 가능성을 보여 준다. 

가이오는 로마서에서 ‘온 교회의 식주’(롬 16:23)로 소개되었다.
이것은 가이오의 집이 가정교회로 사용되었으며, 때때로 전체 교회의 집회 장소로 제공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스데바나의 가족에게 세례를 베풀었다(고전 16:15). 

고린도에는 여러 가정 모임이 연합하여 지역교회인 고린도교회를 이루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린도에는 6~10개의 가정교회가 존재했다고 본다.

그것은 그리스보의 집(행 18:8),
스데바나의 집(고전 1:16; 16:15~18),
글로에의 집(고전 1:11),
가까운 겐그레아의 뵈뵈의 집(롬 16:1~2),
에라스도의 집(롬 16:23),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집(고전 16:19),
가이오 집(롬 16:23) 등이다.

1세기 당시 부자의 주택은 30~5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다.
뱅크스(Banks)는 고린도에 있는 ‘온 교회’는 고린도에 더 작은 가정교회가 있었다는 것을 가정한다고 지적한다.

가정교회가 온 교회에 있었고 그 가정교회들이 분리되어 존재하였다는 것은 아니다.
고린도 교회는 한 장소에서 지역교회로 모였다.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는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고전 11:18).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을 말하면”(고전 14:23). 

로마서 16장 23절에 온 고린도교회의 식주(host)인 가이오를 언급한다.
가이오는 사도행전 18장 11절의 디도 유스도(Gaius Titus Justus)로 로마 시민권을 가진 부유한 귀족 출신이든지 아니면 노예에서 해방된 자유민일 것이다. 그의 라틴 이름은 키케로와 로마 시인 호라스가 언급한 명문가인 티티안 가문(Titian family)일 것이다. 

대부분 주석가들은 가이오가 그 당시 주후 49~54년에 로마로부터 그리고 여러 지방에서 고린도로 오는 피난민 크리스천과 유대 크리스천들에게 숙식을 제공했을 것이라고 보고, 한 집에 고린도교회가 다 모이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고린도에 있는 온 가정교회가 한 가이오 집에 모이는 특별한 모임이 가이오가 호의를 베풀면서 가능했다고 보는 것도 본문에 적합한 해석이다. 

한 집에서 고린도의 모든 가정교회가 모였다면 비좁았을 것이다.
그래서 아마도 자주 모이지는 못하고 고린도의 온 교회가 가이오 집에 특별한 경우에 모였다고 가정할 수 있다. 

가이오가 온 고린도교회의 호스트였다는 표현에서 ‘온’(whole)이란 표현은 고린도에 있는 더 작은 가정교회가 존재했고 그의 집에서 넘치는 신자의 숫자 문제 때문에 규칙적으로 모이지 못했다는 추론을 해 볼 수 있다. 

고린도의 가이오와 같은 집에서는 온 도시의 가정 모임이 함께 모여 기도회, 가르치는 모임, 그리고 성찬 모임이 열렸을 것이다.

결론 사도 바울에게 교회는 소위 가정 교회 모임으로 시작하였지만 인종과 계급을 초월한 하나님의 에클레시아인 지역교회로 구성되었다.

이 집에 있는 교회들은 온 가정교회가 함께 모이는 장소이며 지역교회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가정교회를 논의할 때 이 집에 함께 모이지 않았던 더 작은 규모의 집에서 모인 모임은 소그룹 모임이었으므로, 이 소그룹 모임과 지역교회의 모임인 지역 교회를 구별하여 정의해야 한다. 

초기 기독교는 소그룹 가정교회들이 서로 네트워크가 되어 지역교회를 이루었고, 지역교회는 가정교회들의 개별적인 가치를 인정하였다. 

로마 제국의 박해로 인해 가정에서 모이던 1세기의 상황을 자유가 보장된 현대 사회와 교회에 문자 그대로 적용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 원리와 원칙은 지역 교회의 역동성을 위해 적용될 수 있다.
그 내용으로서 지역 교회 안에 있는 소그룹 모임인 가정 모임은 내부적으로 형제 사랑과 공동체적 교제의 풍성함을 제공할 수 있다.
외부적으로는 가정에서 모이는 소그룹이 불신자 전도를 위한 전도 중심적 공동체로 활용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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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에는 예수님의 이스라엘 땅 사역이나, 사도 바울의 이방지역 사역에서 말씀을 전하고 전도하는 사역의 기점으로서, 유대인 지역사회의 중요 모임 장소인 회당을 중심으로 한 것을 분명히 보게 된다.

회당이라고 번역하는 수나고게(συναγωγή)는 고전 헬라어에서 ‘모음’(collecting), ‘모임’(assembly), ‘회중’(congregation)을 뜻하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명사이다.

이 명사 형태는 동사 συνάγω에서 온 것이고, 이 동사는 접두어 ‘순’(σύν = together)과 동사 ‘아고’(άγω = lead)의 합성동사로서 그 뜻은 ‘함께 모으다’ ‘함께 가져오다’의 뜻을 가지게 된다.

물건, 책, 편지 등을 모은 것을 말하기도 하고, 군대의 소집, 축제나 잔치모임, 혹은 다양한 직종들의 단체모임(guild, union)을 뜻하는 세속용어였다.

헬라어 수나고게(συναγωγή)는 구약헬라어 성경 셉투아진트(LXX)에 약 200번 나타나는데, 히브리어 카할(קָהַל)의 번역어로 약 35번, 에다(עֵדָה)의 번역어로 약 130번 정도 쓰였다. 특이한 점은 히브리어 에다(עֵדָה)는 항상 수나고게(συναγωγή)로 번역되었고, 에클레시아(ἐκκλησία)로 가끔 번역된 히브리어는 카할(קָהַל)이다.

70인경에서 쓰인 수나고게는 고전 헬라어에서 쓰인 뜻과 별로 다르지 않고, 가을수확을 거두어들이는 수장절(the Feast of Ingathering, 출 34:22), 물건들의 ‘모음’이나(욥 8:17), 사람들을 ‘불러 모음’을 뜻한다(습 3:8).

회중(congregation)을 뜻하는 말로도 쓰였다(출 17:1; 민 16:33).

구약성경의 헬라어 번역자들은 적어도 수나고게를 출애굽기와 레위기에서 사용할 때, 민족적이고 율법적이고 종교적 공동체의 의미로서 히브리어 에다(עֵדָה)를 수나고게(συναγωγή)로 번역하고 있다.

하지만 신약시대 이전에 유대교에 나타난 유대인 지역회당이나 회당건물로서의 수나고게를 셉투아진트에서는 결코 말하지 않는다.

유대교 회당의 존재는 바벨론 포로 시대에 성전이 파괴된 후에, 이방 땅에 살던 유대인들에게서 먼저 시작되고, 귀환하게 된 유대인들이 이스라엘 땅에 회당들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유대인들이 사는 마을이나 도시에는 회당들이 있음을 증거하고 있다.
가버나움(막 1:21), 나사렛(막 6:2), 비시디아 안디옥(행 13:14), 이고니온(행 14:1), 데살로니가(행 17:1) 베뢰아(행 17:10) 아덴(17:17) 고린도(행 18:4, 7), 에베소(행 18:19), 빌립보(16:13), 갈릴리의 여러 회당들(막 1:39; 마 9:35), 예루살렘의 회당들(행 6:9; 24:12), 다메섹(행 9:2, 20) 등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 땅이나 디아스포라 지역에서 유대인의 회당은 한 도시 안에서 하나 이상의 많은 회당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유대교 회당들은 이미 제 2 성전시대에 성전과 함께 존재하면서, 지역사회에서 모세의 율법과 장로들의 전통(마 15:2)을 가르치고 지키던 역할을 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과 바울의 사역처럼 회당은 율법과 선지자자의 글을 읽고(눅 4:17), 가르치는 강론을 하는 장소임을 보여준다(행 17:2). 또한 회당은 기도하는 곳이었고(마 6:5, 행 16:13), 구제를 하는 곳이었다(마 6:2).

유대교 회당은 두루마리 토라를 평소에 한 쪽 방에 두어 커튼으로 가리고 있다가, 예배와 강독 시간에 사람들에게 보게 하고, 강연자는 나무나 돌로 만든 강대상 뵈마(βῆμα)에 서서 읽거나 강독하였다.

회당의 리더가 앉는 상석이 있었고(막 12:39; 눅 11:43), 토라를 모신 법궤(ark)를 올려놓는 모세의 자리(마 23:2)도 있음을 보면, 유대교의 회당은 이미 성전의 제사와 함께 같은 권위를 가지기 시작하였다.

유대교 회당들은 작은 성전으로서의 기능을 하였고, 모든 회당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여 창문을 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예루살렘에도 다수의 회당들이 존재하고 있었고, 그 중에 디아스포라 지역에서 온 자유민들(Libertinus, 라틴 차용어)의 회당도 존재하였다(행 6:9).

유대교 회당은 안식일과 평일에도 예수님에게는 가르침과 축귀 혹은 치유사역의 장소였고(눅 4:15, 44), 바울에게는 이방선교를 위한 전도와 가르침의 장소였다(행 13:14).
예수님은 유대교 회당들을 사용하여 메시야의 천국운동과 가르침을 하신 것이 분명하지만, 당시의 회당들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회당의 높은 자리’(막 12:39)를 차지하는 것에 대해서는 분명히 비판적이었다.
회당이 외식을 위한 자리(기도와 구제)로 오용되는 것에 비판하신 예수님이었다.
결국 이 회당들이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는 유대교 지도자들의 모임으로 상징되기에,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미래예언에서 결국 지방의 작은 산헤드린들(공회들)과 함께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적대자들임을 분명히 한다(막 13:9).
마태복음은 병행구절에서 "그들의 회당에서 매질을 할 것이다"(10:17) 라는 말을 강조하며, 주후 1세기 말로 가면서, 기독교인들이 유대교 회당과 심리적 물리적 단절을 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바울의 고린도 사역을 서술하는 사도행전 18장에서 바울은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강론하면서 예수를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는 가운데, 유대인 대적들이 바울의 강론과 전도를 거부할 때에, 회당 유대인들과 결별한다.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행 18:6). 또한 바울은 에베소에서 석 달 동안 유대교 회당에서 하나님 나라를 강론하고 권면하였지만, 마음이 굳어 있고, 순종하지 않는 회당의 유대인들로부터 결국 분리하여, 두란노 서원에서 제자들을 따로 세워 강론하였다(행 19:8-9).

말하자면 회당선교를 포기하고, 제자들을 위한 에클레시아(ἐκκλησία)를 세운 것이다. 회당선교에서 받은 자신의 고난을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으며"(고후 11:24) 라고 말하며, 결국 회당에서 분리되어지는 자신과 제자들, 교회공동체의 필연적인 성립과정을 고백하고 있다. 유대교 회당과 교회의 분리를 보여주는 요한복음의 1세기 말 상황은 회당출교를 뜻하는 아포시나고고스(ἀποσυνάγωγος, = from the synagogue, 요 9:22; 12:42; 16:2) 라는 단어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또한 요한계시록 2장에서 도시 서머나와 빌라델비아에 존재하는 유대인의 회당을 ‘자칭 유대인이라 하지만,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시나고게 뚜 사타나, συναγωγὴ τοῦ σατανα, 계 2:9; 3:9) 라고 한 사실을 보면, 회당의 유대인들은 기독교 박해에 동조자가 된 것임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1세기 말에 확실히 유대교의 회당과 기독교인의 교회는 분리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교의 종교적 사회적 구심점이었던 수나고게(συναγωγή)를 예수님도 바울도 사역의 중심지로 이용하셨지만, 이 회당이 결국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백성 위에 군림하는 탐욕과 명예를 위한 장소가 되고, 하나님의 뜻과 상관이 없는 위선과 기만으로 가득 찬 아편종교가 될 때에, 회당의 상석에 앉은 자들을 비판하였다.

로마제국과 연합한 유대인의 회당을 ‘사탄의 회당’이라고 요한계시록은 사탄화하며, 교회를 그들로부터 분명히 분리한다. 오늘 이 시대의 교회는 세상과 연합한 사탄의 회당(συναγωγή)인지, 아니면 예수의 복음이 구현되는 교회(ἐκκλησία)인지 자기성찰의 시간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