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날(제 삼일)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날부터 부활하시기 전까지 땅에 묻혀 계셨던 시간에 관한 내용이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날 자체가 중요하지는 않지만, 그에 대한 찬반론이 많았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 연구는 매우 흥미로워진다.
그 이유는 기존의 우세한 견해의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금요일 오후에 돌아가셔서 일요일 아침에 부활하신 것이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2:40에 하신 말씀과 상반된다고 지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해당 구절을 읽어보자.

마태복음 12:40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사람들은 금요일 늦은 오후부터 일요일 이른 아침까지를 어떻게 사흘 밤낮으로 볼 수 있느냐는 이유로 많이 혼란스러워 했다.

사흘 낮과 사흘 밤은 얼마의 시간인가?

예수님께서 무덤 안에 계셨던 시간을 아무리 계산해도 사흘 낮과 사흘 밤이 되지 않는다고 믿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루 낮과 하루 밤”이 하루의 일부가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이 견해에 근거해서 다시 말하자면, 하루의 한 시간도 “하루 낮과 하루 밤”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사흘”의 개념에 대해 명확하게 말씀하지 않으신 것이 사실이라 해도, 예수님께서 분명히 사흘 낮과 사흘 밤 동안 무덤에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금요일 늦은 오후부터 일요일 이른 아침까지의 시간(금요일과 토요일)이 하루(토요일)와 다른 하루의 단 몇 시간(금요일의 한 두시간) 즉, 이틀 밤이 채 되지 않기 때문에, 이 주장은 분명 논란의 소지가 있으며 연구가 좀 더 필요하다.

요한복음 19:31과 누가복음 23:50-54

예수님께서 금요일에 십자가 책형을 당하셨다는 논리는 요한복음 19:31과 누가복음 23:54-56, 두 구절에 근거하고 있다.
해당 구절은 다음과 같다.

요한복음 19:31
이 날은 준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누가복음 23:50, 52-53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그가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여 이를 내려 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넣우 두니 이날은 준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다 되었더라.

여기에서 “안식일이 거의 다 되었더라”는 구절이 자정이 거의 다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는데 대해, 독자들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사실, 그 시대의 시간 계산법으로 추정해보면, 하루는 자정이 아니라 해가 지는 시각에 시작되었으며, 4월에는 그 시각이 대략 7시 경이었다.

마태복음 27:46에 보면, 예수님은 “제 9시경”에 돌아가셨고, 이는 현대의 시간으로 말하면 오후 3시경이므로, 성경의 다른 사건과 마찬가지로 위에 기록된 사건에서 예수님이 돌아가신 시간부터 묻히신 시간은 오후 3시경부터 7시경 사이가 된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시간에 대해 모든 사람들이 금요일이었다고 믿는 이유는, 위의 성경 구절에서 말하는 안식일이 그 주의 안식일, 즉 한 주의 7번째 날인 십자가에 못박히신 날의 다음 날이라고 정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안식일”은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이 아니라 다른 특별한 준비일로 사람들이 이를 혼돈했던 것 뿐이다.

2.1 두 가지 종류의 안식일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과는 별도로 다른 특별한 안식일이 있다는 사실은 이스라엘 자손이 지켜야 할 절기의 규정에 대해 언급한 레위기 23장을 통해 알 수 있다. 4-8절 말씀을 함께 읽어보자.

레위기 23:4-8
이것이 너희가 그 정한 때에 성회로 공포할 여호와의 절기들이니라. 첫째 달 열나흗날 저녁은 여호와의 유월절이요. 이 달 열닷새날은 여호와의 무교절이니 이레 동안 너희는 무교병을 먹을 것이요. 그 첫 날에는 너희가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며 너희는 이레 동안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 것이요 일곱째 날에도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니라.

히브리 달력의 첫번째 달은 아빕으로 후에 니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1.
요한복음 19:31과 누가복음 23:53에서 말하는 준비는 유월절과 무교병 절기에 대한 준비였다.
마태복음 27:46에 의하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유월절 규례에 따라 어린 양을 번제로 드리는 니산 제 14일, “9시 경”, 즉 오후 3시 경에 돌아가셨다. 같은 날 저녁 유월절 음식을 먹고, 무교절이 시작되었다. 따라서 안식일이 “거의 다 되었다(누가복음 23:53)”는 것은, 레위기 23:7의 무교절 첫째날을 의미한다.

레위기 23:7
"그 첫 날에는 너희가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며"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며”라는 구절로 인해 무교절 첫째날을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의 개념으로 인식하게 했다. 하지만, 이 날은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2이 아니라, 규례에서 모든 노동을 금하는 특별한 안식일, 즉, 준비일이다. 요한복음 19:31을 보면, 이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요한복음 19:31
"이 날은 준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즉, 안식일은 주마다 돌아오는 안식일이 아니라 준비일, 특별한 안식]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마가복음 15:42에서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날과 해가 저문 후 시체를 받은 날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마가복음 15:42-43
"이 날은 준비일 곧 안식일 전날이므로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경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날은 니산 제 14일로, 아직 유월절을 준비하는 무교절이었다. 위의 성경 구절에서 살펴보았듯이, 이 날은 항상 [“곧”이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안식일 전날”로, 요한복음 19:31과 누가복은 23:52-54의 안식일, 즉 무교절의 첫째 날이며, 그 다음 날이 항상 안식일이 되는 날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날은 (니산 제 15일로) 정해진 날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논하는 구절의 안식일은 매주 돌아오는 날이 아닌 특별한 안식일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무교절 첫째날만이 특별한 안식일이 아니었다. 성경에서는 더 많은 날을 명확하게 “안식일”이라는 단어를 사용해 표현하고 있다. 레위기 23:23-32를 함께 읽어보자.

 

레위기 23:23-3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일곱째 달 곧 그 달 첫 날은 너희에게 쉬는 날이 될지니 이는 나팔을 불어 기념할 날이요 성회라 어떤 노동도 하지 말고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일곱째 달 열흘날은 속죄일이니 너희는 성회를 열고 스스로 괴롭게 하며 여호와께 화제를 드리고 이 날에는 어떤 일도 하지 말 것은 너희를 위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 속죄할 속죄일이 됨이니라 이 날에 스스로 괴롭게 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라 이 날에 누구든지 어떤 일이라도 하는 자는 내가 그의 백성 중에서 멸절시키리니 너희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거주하는 각처에서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 이는 너희가 쉴 안식일이라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 이 달 아흐렛날 저녁 곧 그 저녁부터 이튿날 저녁3까지 안식을 지킬지니라."

 

안식일로 묘사된 일곱번째 달의 첫 날이나 열흘날은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을 의미하지 않으며, 미리 정해진 날짜나 기일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 날을 “안식일”이라 부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주일은 아니었지만 특별한 안식일, “어떤 일”도 하지 말아야 할 준비일로, 주님의 죽음 다음날인 무교절 첫날에는 말그대로 “어떤 일”도 하지 말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특별한 안식일에 대해 언급한 또 다른 구절인 레위기 23:33-36을 읽어보자.

 

레위기 23:33-3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일곱째 달 열 닷샛날은 초막절이니 여호와를 위하여 이레 동안 지킬 것이라 첫 날에는 성회로 모일지니 너희는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며 이레 동안에 너희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 것이요 여덟째 날에도 너희는 성회로 모여서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이는 거룩한 대회라 너희는 어떤 노동도 하지 말지니라"

 

이 성경 구절에 나와 있듯이, 초막절 첫 날과 여덟째 날 모두 “어떤 노동도” 하지 말아야 할 특별한 안식일, 즉, 준비일로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과는 다른 개념이다4.

그러나 “안식일”이라는 단어는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 즉 미리 정해진 날짜의 준비일에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1년 내내 주일과 일치할 필요가 없이 사용되었다. 레위기 25:1-4의 말씀을 읽어보자.

 

레위기 25:1-4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간 후에 그 땅으로 여호와 앞에 안식하게 하라 너는 육 동안 그 밭에 파종하며 육 년 동안 그 포도원을 가꾸어 그 소출을 거둘 것이나 일곱째 해에는 그 땅이 쉬어 안식하게 할지니 여호와께 대한 안식이라 너는 그 밭에 파종하거나 포도원을 가꾸지 말며”

 

위에 살펴본 구절들을 통해 성경에서 말하는 안식일은, 일반적인 주일인 “한 주의 일곱째 날”과, 어떤 노동도 하지 말아야 할 준비일인 특별한 안식일의 두 가지 종류가 있음을 알았다.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은 기일인 반면, 특별한 안식일은 미리 정해진 날짜로, 주중 어떤 날도 될 수가 있다. 특별한 안식일은 무교절의 첫 날로,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다음 날이었다. 그래서 요한복음 19:31에서는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라고 표현하였고,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이 아닌, 주중 어떤 날도 될 수 있는 특별한 안식일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언제 부활하셨는가?

안식일이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다음 날이며 주일이 아닌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사흘 낮과 사흘 밤을 (금요일 늦은 오후부터 일요일 이른 아침까지) 40시간에 끼워 맞추려할 필요가 없어졌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를 그대로 믿으면 돌아가신 날짜를 찾는 것 또한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진실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예수님께서 “땅 속에” 사흘 낮과 사흘 밤을 계셨다면, 예수님께서는 해가 질 때 땅 속에 묻히셨고, 사흘 낮과 사흘 밤, 즉 정확하게 72시간 후, 땅 속에 묻히신 시각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시각에 부활하셨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시각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던 일요일 아침이 아닌 오후, 즉, 해가 질 무렵이 되는 것이다.

사실,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일요일 아침이라고 생각하는 유일한 이유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시각이 여인들이 무덤을 찾아갔던 새벽 바로 직전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기 때문이다 (마가복음 16:1-8).
모두가 알고 있듯이, 여인들이 무덤이 비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여인들이 빈 무덤을 발견한 것이 일요일 아침이라고 해서 예수님께서 무덤을 떠나신 시점이 일요일 아침이 될 수는 없다5.

그렇다면 정확히 언제 부활하셨는가?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정확히 사흘 낮과 사흘 밤을 “땅 속에서” 보내시고, 토요일 오후 해질 무렵, 즉 땅에 묻히신 시각과 일치하는 그 시각에 부활하신 것이 된다.

예수님께서 일요일 새벽이 아닌 토요일 오후에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마태복음 28:1-2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마태복음 28:1-2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위 구절에서 안식일은 무교절 첫날,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준비일”인 특별한 안식일이 아니다.
일주일의 일곱째 날인 주일이다. 주님께서 “땅 속에서” 계셨던 사흘 낮과 밤이 특별한 안식이었던 동시에 주일이었다는 사실은 마가복음 16:1과 누가복음 23:56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마가복음 16:1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누가복음 23:56
"[마가복음 16:1과 동일한 여인들이 (누가복음 24:10 참조)]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더라 계명을 따라 안식일에 쉬더라"

마가복음에서는 안식일이 지나매 여인들이 향품을 샀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누가복음에서는 안식일 전에 (여인들이 미리 향품을 샀다는 의미로) 향품을 준비했다고 되어 있다. 이 두 구절 사이에 모순이 있을까? 그렇지 않다. 왜냐 하면 이 두 안식일은 같은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가복음 16:1에 나오는 안식일은 무교절의 첫날, 즉 특별한 안식일이며, 누가복음 23:56에 나오는 안식일은 주일이다. 두 구절 모두 같은 날 (여인들이 향품을 사고 준비한 날)을 의미하지만, 각 구절에 나오는 안식일의 의미가 다르게 사용된 것이다.

예수님께서 묻히신 사흘 낮과 사흘 밤은 두 가지 의미의 안식일, 즉 특별한 안식일과 주일을 포함하는 것이 확실하니, 이제 마태복음 28:1-2를 통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시간에 대해 알아보자.

특별히 주의해서 읽어야 할 중요한 구절은 “새벽에”이다.
이 구절은 그리스어 동사 "epifosko"를 번역한 것인데 “해가 지다”를 의미한다.
누가복음 23:53-54에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땅에 묻힌 시간을 언급하실 때 이 동사를 사용하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해당 구절을 읽어보자.

누가복음 23:53-54
"[요셉]이 이[시체]를 내려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넣어 두니 이 날은 준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epifosko]."

신약에서 이 두 구절 외에 동사 "epifosko"를 써서 시간을 표현한 부분은 없다.
다시 마태복음 28:1로 돌아가보면, 이 구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시간은 사흘 낮과 사흘 밤 전에 예수님께서 묻히신 시간과 일치하는 해질 무렵이다. 그 시간 무렵,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으로 찾아왔다. 그러나 이들은 무덤을 보기만 하고 돌아갔으며, 마가복음 16:1-2와 같이 자신들이 떠난 후 무슨 일이 일어난지 모른 채, 다른 날 향품을 가지고 돌아왔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2-4절을 살펴보자.

마태복음 28:1-4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즉, 예수께서는 그 사흘 낮 사흘 밤 전 같은 시각에 묻히셨다]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이 일은 언제 일어난 것일까?
1절에 보면,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즉, 예수님께서 사흘 낮과 사흘 밤을 무덤에서 계시기를 마치신 그 시간이다.
그러면 처음부터 다시 정리해보자.

예수님께서는 몇 시에 묻히셨는가?
요한복음 19:31의 준비일과 다른 구절의 특별한 안식일인, 무교절의 첫날이 되기 전 해질 무렵, 즉, 니산 제 14일 해질 무렵이다.

얼마나 땅 속에 계셨는가?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2:40에서 언급하신 사흘 낮과 사흘 밤, 즉, 72시간이다.

예수님께서는 언제 부활하셨는가?
예수님께서는 “안식 후 첫날[일요일]이 되기 전 해질 무렵, 즉, 무덤 안에서 사흘 낮과 사흘 밤을 보낸 후 토요일 오후에 부활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언제 돌아가셨는가?
토요일 오후부터 사흘 낮과 사흘 밤을 거꾸로 계산해 보면, 토요일6이 예수님께서 묻히신 셋째 낮과 밤이고, 금요일이 둘째, 목요일이 첫째가 된다. 따라서, 예수님은 수요일 오후 3시에 돌아가셨고, 같은 날 오후에 묻히셨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그리고 목요일은 무교절의 첫날인 특별한 안식일이 된다. 여인들이 향품을 사고 준비했던 금요일은 평일이었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주일인 안식일은 토요일이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흘 낮과 사흘 밤을 땅 속에서 계실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모순이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면, 전혀 없다.

따라서 결론은 다음과 같다.
날짜 자체에 큰 의미가 없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정확한지 확인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말씀 중 어떤 주제라도 정확성에 오류가 있다는 비난을 받지 않도록 면밀히 검증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진실로 문제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의 전통에는 분명히 부주의성과 잘못된 추정이 있고, 성경의 명확성을 왜곡하는 문제점들이 존재한다.

참고문헌

E.W. Bullinger: The Companion Bible, Kregel Publications, Grand Rapids, MI 49501, 1990

Ralph Edward Woodrow: "Babylon Mystery Religion: Ancient and Modern", Ralph Woodrow Evangelistic Association Inc., 1992

 



각주

1. 출애굽기 12:2, 13:4와 에스더 3:7 참조.

2. 이는 기일이 아닌 첫 달 제 14일, 즉 미리 정해진 날짜였다.

3. “그 저녁부터 이튿날 저녁”은 이 구절에서 시간 계산에 대해 논했던 바와 일치한다.

4. 이 특별한 안식일이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 즉 주일과 같을 때는 일치한다고 말할 수 있다.

5. 이러한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유일한 구절은 마가복음 16:9,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이다. 그러나 고대 필사본에 구두점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부활하셨다는 결론은, 전적으로 쉼표를 찍은 위치에 좌우될 수 밖에 없다. 예수님께서 일요일 아침에 부활하셨다면, 예수님은 무덤 안에서 하루 밤을 더 머무시는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쉼표를 “부활하셨다”는 단어 다음에 찍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함으로서, 해당 구절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로 이해할 수 있으며, 이는 다른 성경 구절의 내용과 완벽하게 일치하게 된다.

6. 그 시대의 시간 계산법을 적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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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개혁자 루커와 칼빈의 성경 해석 차이

루터의 해석

루터의 성서해석은 그의 신학의 근간을 이룬다.
그는 말씀에 기초한 신학을 전개하였다.
그의 성서해석은 ‘문자적 의미 강조’, ‘그리스도 중심적 해석’, ‘실존적-실천적 해석’이라는 세 가지 핵심어로 요약할 수 있다.
이러한 루터의 성서해석의 특성은 시편 51편 해석에서 대표적으로 고찰된다.
그의 시편 51편 해석은 ‘죄인으로서의 인간’, ‘예수 그리스도 를 통한 구원’, ‘의인으로서의 삶’이라는 주제어 아래 의로우신 하나님과 죄인인 인간에 대한 신학적 주제를 부각시키고 있다.

칼빈의 해석

칼빈의 성서해석도 ‘원문을 중요시함’, ‘그리스도 중심적 해석’, ‘목회-실천적 해석’이라는 세 가지 핵심어로 요약된다.
시편을 자신의 영혼을 모습을 보여주는 해부도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삶을 이끌어 가는 모범이라고 인식한 칼뱅은 시편 51편에 대한 해석에서 ‘원문에 철저함’, ‘삶의 근본적 변화를 위한 해석’, ‘교회를 위한 해석’의 특징을 보여준다.

루터와 칼뱅의 성서해석이 보여준 특징들은 당대의 종교개혁을 이루는 원천과 동력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다음과 같은 의미 있는 시사점을 제공한다.

첫째, 본문의 일차적 의미를 중시하라(문자적-역사적 해석)
둘째, 성서가 성서를 해석하게 하라(그리스도 중심적 해석과 성령의 조명).
셋째, 삶의 변화를 일으키는 해석이 되게 하라(실존 - 실천적 해석)

칼빈의 시편연구
1.  칼빈의 시편 이해

칼빈의 시편에 대한 평가는 ‘영혼의 모든 부분에 대한 해부’(anatomiaom-niumanimaepartium)라는 말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사람이 의식할 수 있는 영혼의 정서들 가운데 시편에서 거울에 비추듯 묘사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시편에 나타난 다윗의 삶이 자신의 본보기가 된다고 말한다.
칼빈에게 시편은 자신의 영혼을 모습을 보여주는 해부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삶을 이끌어 가는 모범이기도 하였다.

2. 시편 51편의 해석
(1) 원문에 철저함칼뱅은 자신의 주석에서 무엇보다 원문의 표현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해석한다.
그는 표제어에서 ‘오다’라는 동사가 반복 사용되지만 대조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다윗이 밧세바에게 ‘들어간 후’ 나단이 다윗에게 ‘왔을 때’라는 언급에서 ‘들어감’과 ‘옴’이 히브리어 표현에서는 모두 동일한 동사 <보> (awb)로 표현된다.
동일한 동사의 반복으로 대조적인 의미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그는 시편 51편 4절에 대한 해설에서 먼저 이 구절에 대한 다양한 입장들이 있었음을 언급한 후 이 구절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다.
그는 첫 부분을 “당신께, 오직 당신께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번역한다.
이것은 원문의 순서까지도 고려한 사려 깊은 번역이다.
다윗이 이 진술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현재 자신의 눈과 온 영혼이 하나님께 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께서 말씀하실 때에 당신이 의로우시고, 당신께서 판단하실 때에 당신이 깨끗하실 것입니다.”라는 후반절의 내용도 전반절과 함께 올바른 이해가 필요함을 지적한다.

그는 이 부분을 바울이 로마서 3장 4절에서 인용하고 있음을 말하며, 바울이 히브리어 원문과는 다른 70인경을 인용하고 있음도 지적한다.59) 하지만 이렇게 정확한 문자적 인용이 되지 않고 있다 하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바울의 구약성경 인용이 정확한 문자적 인용에 목적이 두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칼빈은 저자의 의도에서 벗어나지 않는 범주에서 안에서 인용의 자유로움을 인정했다.
이처럼 칼빈은 저자 다윗의 생각이 분명하게 드러날 수 있도록 원문에 근거하여 문법이나 일련의 사고과정, 사회적 환경들을 고려하여 주석한다.
그는 시편 51편을 죄로 물든 인간의 관점에서 해석한다.
그리고 다윗의 상황을 뛰어 넘는 기독론적 해석을 거부하였다.

(2) 삶의 근본적 변화를 위한 해석 칼뱅은 자신의 시편 서문에서 자신의 경험이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를 밝힌다.
자신이 겪은 고통과 갈등의 경험이 시편을 적용하거나 이해하는 데에 매우 큰 도움이 되었다고 말한다.
시편 51편의 해석에서도 자신의 고통스러웠던 실존적 경험이 시편 해석을 위한 좋은 자양분이 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그러한 모든 진술은 삶의 근본적 변화를 목표로 한다.

예컨대, 칼뱅은 1절의 간구가 한 마디 애원으로 끝나지 않음을 지적하며 그 이유를 설명한다.

다윗이 그렇게 “하나님, 당신의 인애(ds,x,)를 따라 나에게 자비를 베푸소서(!n:x').
당신의 긍휼(~ymix]r;)의 풍성함을 따라 내 죄과들([v;P,)을 도말(塗抹)하소서.”라고 반복해서 호소하는 것은 그가 저지를 죄악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두 개의 진술을 연이어 말하는 단순한 평행법이 아니라 죄의 심각성을 인지한 다윗이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자비와 긍휼만을 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70인경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당신이 말씀하실 때 당신은 의롭게 될 것이며, 당신이 판단 받으실 때 당신은 이기실 것입니다.
마지막 부분이 ‘깨끗하실 것이다’에서 ‘이기실 것이다’의 적극적인 의미로 번역되었다.

여기에서 루터와 칼뱅의 차이점을 발견한다.
루터는 위에서도 살펴본 바와 같이 시편 51편을 철저하게 기독론적 관점을 통해 해석하고 있으나 칼빈은 본문의 역사적 의미를 밝히는데 주력하고 있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해설에서 칼뱅의 내면의 변화를 강조한다.
“보소서, 당신께서는 ‘마음속에서’ 진실을 기뻐하십니다.”라는 언급은 표면적 인식으로는 변화의 모습이 부족함을 말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래서 그는 신자의 내적 변화 촉구하며 신자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칼뱅은 제사란 하나님의 은혜를 보증하는 표시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감각적인 존재들이기 때문에 외적으로 드러나는 의식(儀式)적인 활동을 통해 완전한 설득으로 나아간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슬초로 정결하게 하는 의식은 그 자체로 머물러 있지 않고 그것의 본래 목적인 죄용서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지향한다는 것이다(7절). 또한 칼뱅은 10-12절의 진술이 ‘새 피조물’에 대한 간구라고 평가한다. 이전의 진술들이 용서하심에 대한 간구였다고 한다면, 지금부터는 성령의 은혜가 회복되기를 간구하는 내용이라고 말한다. 이때 ‘창조하소서’라는 간구는 기적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을 말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것은 한편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다윗이 자신의 온전한 회복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로 거듭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완전한 회복은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인정할 때 가능하다.64) 그래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고 말한다(17절).

(3) 교회를 위한 해석칼뱅은 주석 서론에서 시편 51편이 하나님께 범죄한 사람들이 교훈을 얻게 하기 위한 예시임을 밝힌다.
그는 ‘의인법(擬人法)’(prosopopoeia)이라는 고전적 개념을 받아들이고 다윗을 ‘표본’으로 이해한다.65) 다윗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신자들이 하늘의 종국적인 처벌에 의해 놀라게 될 때까지 죄 아래 머물러 있지 말고 회개의 요청에 겸손히 따를 것을 가르친다고 말한다.66) 시편이 신자들의 현재의 삶을 위해 실제적인 가르침이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그의 시편 주석에는 51편의 저자를 ‘시인’이라고 명명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으며(예컨대, 7절), ‘우리’라는 주어가 자주 등장한다. 이것은 시편 51편을 다윗 개인의 차원에만 머물게 하지 않게 하며, 독자들을 ‘우리’라고 명명함으로써 시편이 가지고 있는 현재적 의미를 분명히 드러낸다. 특별히 시편 51편 18절이하에 나타난 시인의 간구가 집단적 의미의 교회에 대한 간구로 해석된다. 칼빈은 시인의 눈이 영적인 성전에 고정되어 있다고 말하며, 시인의 간구가 하나님 나라를 위한 간구로 이해된다고 말한다. 7절의 우슬초에 관한 해석에서도 그의 교회적 관심을 볼 수 있다. 칼빈은 우슬초를 뿌리는 행위를 의도적으로 사돌레트(Sadolet, 1477-1547)처럼 성례전과 연결시키지도 않고, 멜랑히톤(Melanchthon, 1497-1560)과 같이 그리스도의 선포와 연결시키지도 않는다. 그는 우슬초에 관한 언급을 당시의 외적 표지가 실제로 지시하는 목적과 연결시켜 “하나님의 은혜”로 해석한다. 칼뱅은 다윗이 범한 윤리적 죄에 대한 회개와 용서를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의 회복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한다. 관계의 회복은 어떤 객관적인 성례가 담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죄인의 ‘찢겨진 심장’만이 필요할 뿐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러한 관계 회복은 교회의 회복을 위한 간구의 출발점이 된다. 이처럼 칼뱅은 자신의 주석에서 단지 시편의 세계에 머물러 있지 않고 당시의 교회와의 연결을 통해 교회를 위한 해석을 시도하였다.

IV. 루터와 칼뱅의 성경해석과 그 함의위에서 우리는 루터와 칼뱅의 성경해석이 보여주는 특징들을 살펴보았다.

루터와 칼뱅의 성경해석이 보여준 특징들은 당대의 종교개혁을 이루는 원천과 동력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의미 있는 시사점을 제공한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위기가 중세시대의 로마 가톨릭 교회가 초래하고 직면해야 했던 위기 상황과 유사하다는 평가 속에서 루터와 칼뱅의 성경해석은 한국교회의 개혁과 갱신을 위한 원천과 동력이 될 수 있을 것이다.70)67)위의 책, 307.68)양신혜, 『칼빈과 성경해석: 교회공동체를 위한 겸손의 해석학』, 260.69)위의 책, 261.70) 2016년 한국기독교학회 제45차 정기학술대회 “종교개혁과 후마니타스(Humanitas): 기독교는 ‘헬조선’ 시대에 희망을 줄 수 있는가?”의 주제발표를 참조하라. 배덕만, “‘헬조선’과 하경택 | 루터와 칼뱅의 성서해석과 그 함의(含意)311. 일차적 의미를 중시하라: 문자적-역사적 해석루터의 성경해석 원칙은 아우구스티누스의 해석학의 근본원리인 성경의 명료성을 수용하여 ‘단순성과 명료성’(brevitasetfacilitas)에 있었다.71) 이러한 성경해석의 원리는 칼뱅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루터와 칼뱅 모두 역사적 어의를 성경해석의 출발점으로 삼았고, 문자적 의미를 그 무엇보다도 중요시했다. 필자는 이것을 본문의 문자적-역사적 의미이며, 본문의 ‘일차적 의미’라고 부른다. 본문의 문자적-역사적 의미(whatitmeant)가 해명되지 않고서는 본문이 오늘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whatitmeans)가 드러날 수 없다.본문의 문자적-역사적 의미를 제대로 규명하지 않은 채 교리적 해석이나 알레고리적 해석에 치우쳐 본문이 오늘날 독자들에게 주는 교훈을 찾는 데에 빠져 있는 한국교회 성경해석의 경향을 경험한다. ‘본문을 정당하게 대하지’ 않고 자기가 일고 싶은 대로 읽고 보고 싶은 대로 보는 경우를 흔하게 목격한다. 그러나 본문 자체에 대한 분명한 이해 없이는 그 다음 단계의 해석과 적용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 종교개혁자들은 본문의 어의에 충실한 이해와 해석으로 그릇된 교회의 모습을 개혁할 수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능한 원전을 살펴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종교개혁자들은 불가타 라틴어 성경 이면에 있는 원전의 의미를 밝혀내어 ‘근원으로 돌아가자’는 모토를 실행할 수 있었다. 원전의 의미를 밝히고 본문이 말하는 바에 충실하게 귀 기울임으로 그동안 성경에 대한 잘못된 해석과 교회의 전통으로 가려져 있던 말씀의 의미를 좀 더 바르고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다. 2. 성경이 성경을 해석하게 하라: 그리스도 중심적 해석과 성령의 조명종교개혁자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성경해석의 원리가 있다면 것은 ‘성경이 성경의 해석자이다’(Scriptura Scripturaeinterpres)는 원리다. 이것은 성경‘개독교’ 시대에 한국교회와 인문주의” 「한국기독교학회 제45차 정기학술대회 발표논문집」 제1권 (2016), 69-113. 임희국은 라가츠(Ragaz)의 해석을 토대로 ‘성령의 내적 증언’이라는 해석학적 원리가 ‘오직 성경’의 종교개혁 원리를 계승하는 한국장로교회의 축자영감설 문자주의와 역사비평학의 성경해석의 극단적 대립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한다. 임희국, “루터 종교개혁의 유산인 ‘오직 성경’에 대한 성찰, ‘성경의 부활’을 기다림,” 『장신논단』 48-4 (2016), 13-35. 71)정기철, “칼빈 해석학의 현대적 의미,” 73. 또한 다음을 참고하라. W. J. Bouwsma, Calvin: A Sixteenth-Century Portrait, 이양호, 박종속 역, 『칼빈』 (도서출판 나단: 서울, 1993), 263.32장신논단|Vol. 50 No. 2을 전체적으로 읽는 안목을 가지라는 요청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성경에 대한 이해가 편중되거나 편파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특별히 중세가 보여주었던 잘못대로 교회의 전통이나 특정 교파의 입장이 성경의 의미를 제한하거나 왜곡해서는 안 된다. 교회가 성경이 무엇을 가르치는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교회가 무엇을 가르쳐야 할지를 결정하게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이 성경을 해석하도록 해야 한다. 성경 본문이 자의적으로 이해되지 않고 다른 성경 본문에 의해서 해석되고 통제되어야 한다. 이러한 해석원리가 지켜지기 위해서 루터와 칼뱅에게는 성경해석에서 두 가지 원리가 있었다. 하나는 ‘그리스도 중심적 해석’이라는 원리이고, 다른 하나는 ‘성령의 조명’이라는 원리이다. 루터와 칼뱅은 이 두 가지 원리에 대한 강조점이 다르긴 했지만, 두 사람에게 모두 두 가지 원리는 매우 중요했다. 이러한 원리는 성경을 통일성을 가진 책으로 보게 하였으며, 성경의 중심 메시지를 놓치지 않게 하면서도 해석자들을 겸손하게 하는 해석학적 제어장치 기능을 하였다. 그리스도 중심의 해석은 성경의 중심을 잃지 않게 하는 변증적 기능을 하였다. 성령은 말씀을 통해서 그리고 말씀 안에서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통해 열광주의적 신앙으로 나아가지 않게 하였으며, 하나님 안에 계신 분으로서 지혜의 전달자 이신 성령은 성경해석의 주체이자 참된 해석자라는 인식을 통해 해석자는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게 된다.이러한 원리들은 해석자가 본문의 주인이 되지 못하게 한다. 해석자는 본문을 좌지우지하는 주인의 자리에서 내려와 본문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경청자의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말씀의 주인이 아니라 말씀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3. 삶의 변화를 일으키는 해석이 되게 하라.

실존-실천적 해석루터와 칼뱅 모두 실천적 성경해석을 지향하였다.
그들은 성경이 교리적 지식을 가르치는 텍스트이거나 예전적 지침을 보여주는 안내서로 머물러 있게 하지 않고 삶의 변화와 성숙을 이룰 수 있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작동하게 하였다.
두 사람이 모두 실천적 해석을 지향하였으나 루터는 좀 더 실존적이었고, 칼빈은 좀 더 목회적이었다고 평가된다.
루터의 성경해석은 학문과 경건의 조화에 그 의미가 있다.
루터는 인간의 삶을 하나님의 앞에서의 삶으로 이해하고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 삶에 대한 지침을 얻고자 하였다.
루터는 성경 안에 인간의 원초적 경험과 감정들이 다양한 상황 속에서 구체화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성경의 인물들의 통해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응답을 얻고자 하였다.
그러한 문제해결은 루터 자신이 성경을 통해 자신이 직접 체험한 내용이자 과정이었다.
그러한 면에서 루터의 성경해석은 상황적이었고, 삶에 현장에 대한 구체적인 적용으로서 그 결과가 나타났다.

칼빈은 성경이 교회의 일상에서 실현해야 할 규칙들을 담고 있다고 보았고, 성경의 언어를 기본적으로 ‘행동의 언어’라고 평가했다.
그러한 면에서 칼빈은 순종을 강조했다.
순종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인식에 이를 수 있다고 말했다.
칼빈이 실천적 성경해석의 모습은 율법을 적극적으로 해석한 것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율법이 의식적-법적 측면에서는 한계를 가지고 있으나 윤리적-도덕적 기능에서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평가했다(tertiusususlegis). 율법은 내적인 정직뿐 아니라 외적인 영적 정의를 이루는 교육적 과제를 수행한다고 말한다.
성경해석의 결과는 신자의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
성경해석은 루터와 칼뱅이 보여주었듯이 삶의 변화를 위한 해석과 적용이 되어야 한다.
이때 삶의 변화는 내면의 삶뿐만 아니라 외적인 삶까지를 포함하는 전인적인 삶의 모습을 포괄한다.

V. 결론

열왕기하 22장 8절에 따르면 요시야의 종교개혁은 성전에서 ‘토라’를 발견함으로 시작되었다.
이것은 ‘하나님 말씀의 재발견’으로 평가될 수 있다.
성경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있지만 그것이 제대로 해석되지 않고 실천되지 않으면 그것은 성전 구석에 파묻혀 있는 것과 다름없다.
‘성경의 재발견’을 통해 성경이 실제적인 영향을 미치도록 해야 한다.
루터와 칼뱅의 성경해석은 교회와 신자들의 삶에서 성경이 작동되어야 함을 가르쳐준다.
성경이 올바로 해석되고 실제적 적용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현실은 아직도 종교개혁자들의 정신과 전통을 제대로 이어가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를 할 수 밖에 없는 처지이다.

루터 종교개혁 500주년의 해를 지나오면서 종교개혁자들이 재발견한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 우리 시대에도 동일하게 살아 있는 말씀이 되길 바란다.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구석구석 흘러 들어가 죽은 바다를 소성케 하였던 물과 같이 한국교회와 성도들의 삶에 변화와 회복을 일으키는 생명 있는 말씀으로 작동되길 소망한다.


마틴 루터 킹의 비폭력 저항의 메시지





김영호 목사
    ( 역사신학 교수, 미동부크리스천 아카데미 원장, 1983년 설립)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당시 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백인들의 차별과 멸시를 받는 세대에 훅인으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백인들과 흑인들의 동등한 법적 사회적 평등과 인권회복의 실현을
전심 전력을 다해 부르짖고 활동하면서 그 수단으로 폭력과 증오범죄가 난무하던 시기에  ‘비폭력
저항운동’과  ‘원수까지 사랑 운동’을 앞장 서서 할 수 있었던 배경과  그런 특이한 메세지의 원동력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를 살펴보자.
 
자료를 찾아보면 그도 예외 없이 어린시절 흑인 어린이라고 차별과 멸시를 받았었다. 킹이 옆집의
백인 쌍둥이 형제와 놀려고 하자 그 형제의 어머니가 “넌 검둥이니까 검둥이들 하고 놀아 !”라고 했고,
킹은 울면서 집으로 돌아왔더니 어머니가 어린 킹을 달래면서 왜 흑인이 차별받게되었는가 그리고
인종차별을 이겨내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한다.
 
심지어 대학시절에 더 심각한 일을 당하였다. 그가 친구들과 식당에서 식사를 하러 갔었는데
백인 식당 주인이 “ 흑인 새끼한테는 음식 안 팔아 !”라며 총을 쏘며 난동을 피워, 경찰이 도착했지만
백인 손님들은 침묵을 지켰다. 몇몇 백인 대학생들이 증언하기로 했지만 KKK등 백인 우익/ 과격단체
들이 압력을 넣는 바람에 증언하는 것을 취소하는 아픈 경험을 했다고한다.
 
이와 비슷한 인종 차별을 당한 것으로 인해 목사가 된이후 인종차별이 반 인륜적이며 성경말씀과
하나님 뜻에 어긋남에 근거하여 인권회복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목사가 되기전 킹은 가정의 유산인 기독교 신앙과 훈련과 부모님 특히 3대째 침례교 목사인 아버지
마틴 루터 킹 시니어의 삶을 통한 기독교 지도자가 되는 가르침에 큰 영향을 받았다.1) 백인 경찰의
인종차별에 당당하고 논리적으로 항의하는 부친의 실천은 어린이였던 루터 킹에게 ‘옳지 않은 것을
보면 굴종하거나 침묵하지 말고 항의 한다’,는 가르침을 주었다. 백인 경찰이 부친에게 “어이, 꼬마
운전면허증 보여줘”라고 하자, “꼬마는 여기 있는 아들입니다. 면허증 여기 있습니다”라고 대꾸하였고,
그 말을 듣고 경찰은 자신의 무례함을 부끄럽게 여겨서 슬거머니 물러났다고 한다. 2)실제전국유색인지위향상협회(NAACP) 애틀랜타 지부장을 맡고 있던 부친은  자랑스런 흑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자주 강조하였고, 비열하고 이중적인 백인에게 당당하게 맞서라고 가르치며 본을 보였다.
3) 1935년 종교개혁 유적지를 둘러보면서 미국의 교계와 사회를 개혁하려면  본래의 이름 마이클보다는
개혁의 선봉자였던 ‘Martin Luther’가 더 좋겠다고 생각하고 본인의 이름을  Martin Luther King Sr.로하고
아들 이름도 Martin Luther King Jr.로 바꾸어 불의앞에 ‘Here I stand !’ 라고 외치며 종교개혁을 이뤄낸
루터의 삶과 정신을 이어 받게 하였다.
 
두번 째로 킹 목사에게 큰 영향을 끼친 이는  미국 사회복음의 아버지로 불리는 Walter Rauschenbusch
(1861-1918)였다.복음의 사회성과 물질성에대한 강조는 이후 킹의 사회운동에 기반을 제공해 주었다.
그는 “사회정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곳에 하나님 나라가 있을 수 없고 사회를 구원하지 못하는 그리스도교는 진정한 의미에서 예수의 가르침에  충실했다고 할 수 없다.내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봉사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고 봉사하는 것이다”라고 가르쳤다.
 
세번 째로 킹의 사상체계를 뒤흔들어 놓은 것은 하워드대학 학장 Mordecai W. Johnson(1891-19760)
박사의 강의를 통해 인도 Mahatma Gandhi(1869-1948)의 비폭력평화주의를 배운 것이었다.간디를
공부하면서 킹은 “산상수훈에 기록된 예수의 ‘비폭력 저항’이라는 메시지가 개인에게만 아니라 인종 및 국가 관계에서도실현가능한 사회적 역량이다”라고 굳게 믿게되었다. 이 영향에 힘입어  1954년
보스톤대학 기독교 윤리학박사과정을 끝내면서 킹은 “사회정의를 추구하는 피억압 대중이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비폭력적인 저항’이라고 다짐하게 되었다.  킹은  간디의 후계자 네루의
초청으로 1595년 2월 3일부터 3월 18일까지 인도여행을 하였다.  간디의 발자취를 따라 뉴델리거리를 걸어보고, 인도의고질적인 계급사회를 폭력을 사용치않고도 간디의 정신으로 개선해나는것을 확인하고 킹 은 다음과 같이 자신의 입장을공개적으로 밝혔다.

                  “인도에 다녀온이후, ‘비폭력 저항’이야말로 억압된 민중이 정의회복,
                    만인평등과 인간의 존엄성을 되찾기위한 투쟁을하여 좋은 결과를
                  가져 오는 최선책임이라는 나의 확신이 더욱 궁굳어졌습니다.간디는
                  스스로의 삶을 통해 우주의 도덕적체계에 전해져 내려오는 보편적 원칙이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우리는 만유인력의 법칙을
                  벗어날 수 없듯이 그 원칙에서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극심한 인종차별과 폭력과 혐오범죄 난무 시기에  이 난제해결위해 고심하던 킹 목사가  위와 같은  교계 안팎의
선두 지도자들의 지식과 가르침에 큰 영향을 받은 사실이나 그의 삶의 배경과  가장 어려울 때  그가내린 결단의
원동력은  살아계셔서 역사를 주관하시고 억압받던 백성의 울부짖음을 들어시고 마침내 꿀과 젖이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신 능려자 하나님을 확실하게  의지하는 믿음과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에서 나왔음이 분명하다.
 
Paul Tillich가 1950년 예일대 강연, ‘존재로의 용기’’(The Courage to Be)에서 “참되고 강력한 용기는 하나밖에
없는 자기 생명을 던질 수 있는 진리와 그 대상을  만났을 때 생긴다”고 했는데  마틴 루터 킹 목사는 폭력은 ‘비폭력저항’으로, 증오문제는 ‘ 원수까지 사랑’으로, 인종 차별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만민평등’으로
해결 할 수 있다는 진리를 하나님말씀과 예수님의  산상설교와 십자가에서 찾았기에 죽음을 두려워 하지않고
흑인만이 아니라 차별받는 모든 ‘작은 자’들을 위해 투쟁해 마침내 승리하여, 1964년 7월 인종, 민족, 종교, 남녀
등의 차이에 따른 차별을 불법화한 미국 인군권법이 제정되었던 것이다.
 
킹 목사가  28세의 청년목사로 몽고메리에서 인종차별하는 버스의 승차거부 운동을 하다가 감옥에서 쓴
다음의 옥중설교의 내용을 또박또박 읽 보면 그의‘비폭력 저항’과 ‘원수까지 사랑’의 원동력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음과 예수님의 십자가 신학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그대를 사랑하리라 우리 집에
 폭탄을 던지고 우리 아이들을 위협해도
 그대를 사랑하리라

  한 밤중에 우리 마을을 습격하여
우리를 때려서 반 쯤 죽여 놓아도
그대를 사랑하리라 

그러나 우리 대장은 예수시오
우리의 깃발은 하나님이시니
결국 어느날인가 사랑이
승리하고 말 것이다

우리의 승리는 우리 흑인만의
승리가 아니라 전 세계에서 차별 받고 사는
모든 작은 자들의 승리이므로 우리는 실제
이중의 승리를 거두게 되고 말것이다 “

어떻게 폭력을 휘두르는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 라는 물음에

킹 목사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하는 일 없이 원수사랑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십자가상의 자기를 저주한 자에게
‘아버지시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일을 알지 못함이니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그들에 대한 용서와 그 극진한
사랑을 우리도 따라야한다고 생각을 바꾸면
우리를 해친 원수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구원받아야 할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고 우리를 일깨웠다

킹 목사는 예수님 말씀과 삶을 생명을 내놓고 따른 신실한 제자였고 우리 모두를 향하여
폭력은 ‘비폭력’으로,
증오는 ‘원수
까지의 사랑실천’으로,
인종차별은 ‘하나님 앞에서 만민평등’으로
승리하라고 가르친다.

도피성(여호수아 20:7-8)과 거룩한 피할 곳(이사야 8:14)

이사야 8:14
그가 거룩한 避(피)할 곳이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거치는 돌, 걸리는 磐石(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居民(거민)에게는 陷穽(함정), 올무가 되시리니.


겔11:16 그런즉 너는 말하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비록 그들을 멀리 이방인 가운데로 쫓고 열방에 흩었으나 그들이 이른 열방에서 내가 잠간 그들에게 성소가 되리라 하셨다 하고

여호수아 20:7-8
무리가 납달리의 山地(산지) 갈릴리 게데스와, 에브라임 山地(산지)의 세겜과, 유다 山地(산지)의 기럇 아르바 곧 헤브론을 區別(구별)하였고

또 여리고 東(동) 요단 저便(편) 르우벤 支派(지파) 中(중)에서 平地(평지) 曠野(광야)의 베셀과 갓 支派(지파) 中(중)에서 길르앗라못과 므낫세 支派(지파) 中(중)에서 바산 골란을 擇(택)하였으니

도피성 존재의 이유



이스라엘의 요단강을 기점으로 하여 48개의 성읍 중 6곳을 택하였습니다.

요단강 동편에 3곳(베셀, 길르앗라못, 골란) 요단강 서편에 3곳(게데스, 세겜, 헤브론)이었습니다(수 20:7-8).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 지명의 뜻까지도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동쪽의 도피성은 골란과 길르앗 라못, 그리고 베셀에 두었고 서쪽에는 게데스와 세겜, 그리고 헤브론에 세우게 되었습니다.
이 도피성은 이스라엘 지도를 참조하여 보면 이스라엘 전역 어디에서든지 32km 이내에 위치하여 있어서 부득이 도피성으로 피해 가야할 경우 하룻길 이내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 성을 향한 도로는 폭을 14m 이상이 되도록 넓게 잘 닦아 놓았으며 또 길을 잃지 않도록 미클라트(도피성)라는 안내판도 곳곳에 설치해 놓았습니다.

도피성은 무슨 이유로 세워놓은 것일까요?

사람이 지을 수 있는 가장 큰 죄는 살인죄일 것입니다.
따라서 이 죄에 대한 형벌은 무거울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이에 대한 형벌이 없다면 사회 정의는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거기에다 연속적으로 살인에 대한 끝없는 복수가 이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살인죄가 중할수록 그리고 그 형벌이 엄할수록 의도적인 살인과 과실로 발생하는 사고와는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혹은 누명을 쓴 사람이 피살자의 가족들로부터 즉각적인 보복을 당하기 전 까지 자기 결백을 증명할 수 있도록 안전하게 피신할 장소도 필요하였습니다.
하지만 아무나 다 그 도피성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고의로 이웃을 모살하였으면 살인자가 거룩한 단에 있을지라도 끌어내어 죽이라고 명령하신 바 있습니다.(출21:12-14)
따라서 이 도피성은 중한 과실죄를 지었으나 구원을 기다리는 자들의 피난처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도피성에도 운영의 원칙이 있습니다.

첫째, 살인자가 과실로 죄를 지었다는 것에 대한 판결을 받아야 합니다.

도피성에 들어가 숨는다 하더라도 자신이 의도적으로 살인하지 않았음에 대한 판결을 받아야 합니다. 살인에 대한 도구가 있거나 계획적인 살인을 하였다면 구제 받을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과실로 살인한 자는 도피성에서 얼마든지 생활할 수 있는 조건을 제공받게 됩니다.

둘째, 반드시 도피성으로 스스로 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살인자는 도피성 안에 있을 때 보호받을 수 있습니다. 피하는 도중에 보복을 당하거나 도피성에서만 생활하는 것이 지루하다 하여 밖으로 나와 있다가 죽음을 당하는 일은 도피성에 대한 규정에 따라 보호받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자기 자신이 스스로 무죄하고 또 억울한 누명을 썼다고 생각할지라도 도피성으로 피하지 않으면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도록 하는 보수(報酬)의 원칙에 따라 피해자의 가족들에게 내어준바 되어 죽임을 당하는 것으로 죄 값을 치루게 될 수 있습니다.

셋째, 대제사장이 죽으면 도피성에 피해 있던 자들에게 사면이 내려진다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이 죽어 사면령이 내려지면 보수자가 살인자를 만나도 보수의 원칙에 따라 피를 흘리게 할 수 없습니다.(민35:27,28) 대제사장의 죽음으로 대신 은총이 내려집니다. 왜냐하면 이 도피성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그림자요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에서 우리의 과실에 대한 보수를 사면 받을 수 있습니다. 그에게 오기만 하면 대제사장인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자유가 주어질 것입니다.

예수님과 도피성의 의미(게 세 헤 베 길 골)

1. 게데스 - 구별하다 (납달리 산지)

서쪽 경계지의 산들 가운데 있고 갈릴리 바다 북쪽 약 80km 지점에 있다
  예수님은 그 누구와도 구별된 그리스도요 구원자이심을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셔서 그를 믿고 그에게 나아가는 자는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구별하여 주신다는 뜻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므로 세상의 죄에서 구별되어 거룩한 성도로 사는 은혜를 받게됩니다.

2. 세겜 - 어깨 짐 (에브라임 산지)

에발산과 그리심산 사이의 동서 경계선상에 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무거운 짐을 어깨에 메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시기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내 멍에는 가볍고 쉬움이라(마11:28)고 하셨습니다.

3. 헤브론 - 연합, 동맹, 교제(유다 산지)

기럇 아르바로 알려진 곳으로 유다의 예루살렘 남쪽 약 32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 사람을 연합하게 하시는 자요 또한 우리와 연합하여 하나님을 잘 섬기고 이웃 섬기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저 안에 저가 내 안에 있으면 과실을 많이 맺으리니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리라고 하였습니다.

4. 베셀 - 요새 (르우벤 지파)

사해바다로 흘러가는 요단강 입구 동쪽 산지에 위치하고 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요새가 되십니다. 특히 환난을 당한 자에게 요새가 되십시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주신 자를 빼앗기지 않습니다. 심지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와 돌에 맞아 죽을 여인에게도 요새가 되어 주셨습니다. (시 91:2)

5. 길르앗 라못 - 언덕, 고지 (갓 지파)

길르앗 라못 산지의 약 80km이상 북쪽에 위치했다.
예수님은 언덕이요 고지가 되심으로 어떤 경우에 가까이 나가기가 어렵습니다. 예수 믿으려하니 끊을 것도 많고 버릴 것도 많고 그대로 살려고 하니 힘든 것도 많습니다. 예배 시간, 기도 시간, 봉사 시간에 참여하려하니 얼마나 힘듭니까?
때로 비난과 표적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곳이 곧 쉼의 언덕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곳이 바로 우리를 높이 세우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암사슴 발을 높은 곳에 세워주심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한나, 롯, 에스더를 높이 세워주신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6. 골란 - 기쁨 (므낫세 지파)

갈릴리바다 동쪽산지 어딘가에 있었으나 정확한 위치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예수님은 최후 승리자요 기쁨이십니다. 그에게 나아가는 자에게도 승리와 기쁨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장차 재림하심으로 모든 성도에게 큰 기쁨이요 승리요 영광이 될 줄 믿습니다.





통일 운동을 위한 제안


통일을 위한 열성적인 기도가 뜨거운 한국교회의 몸부림을 지켜 볼 때 왜 하나님은 이렇게 열정적인 통일을 위한 기도에 눈을 감으셨을까?
새벽마다 통일을 기도하고
밤을 새워저도 통일을 기도하며
심지어 금식까지 하면서 통일을 기도하는 한국교회의 실정을 생각할 때 한 가지 부족한 것은 통일을 준비하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통일을 위한 몇 가지 제안을 정리해 봅니다.

첫째, 통일 기금 모으기 운동(통기모운)

한국교회 교인들이 매 주일 1천원씩만 적립할 수 있다면 1천만 그리스도인들이 이 일에 동참할 수 있다면 1주에 100억입니다.
한 달이면 400억이며, 일년이면 1,800억입니다.
만일 이렇게 10년동안 적립하였다면 그 적립액은 정부가 할 수 없는 통일 후의 혼란과 휴유증을 교회가 감당하므로 상당한 시너지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 북한의 헐벗은 산에 나무 심기 운동(산나심운)

북한의 경제적 어려움은 산에 나무가 없다는 것도 한 원인이 될 것입니다.

나무 심기 운동에 대한 자료를 소개합니다.

I. 북한 산림 황폐화의 원인 - 가난

구소련의 붕괴로 석유공급이 중단되면서 북한 주민들은 겨울 난방을 위해 벌목을 시작했다. 북한의 군부대도 겨울 난방을 위해 주변 산에서 땔감용 벌목을 지속해왔다. 가스보일러가 아닌 땔감 난방이 북한 산림 황폐화의 가장 큰 원인이다.

국가가 북한군부대에 막사 지을 자재를 공급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20개 군단 120만 병력의 북한군 각 부대는 스스로 막사 지을 목재를 조달해왔고 그러다보니 북한 전역에서 산림이 황폐해졌다.

북한은 농지가 적고 산지가 많아 식량증산을 위해 1970년대부터 주체농법이라 하여 다락밭 개간을 시행하였고 그로 인해 산림은 줄어들었다. 1980년대 중반부터 국가의 부식물 공급이 중단되자 군부대 역시 식량을 자급하기 위하여 주변 야산에 불을 질러 부업지를 마련하면서 녹지가 더욱 줄어들었다. 1990년대부터는 민간에게도 식량배급이 중단됐고 이는 북한주민들의 다락밭 개간을 더욱 부추겼다.

소나무 재선충병은 감염속도가 빠른 일종의 나무 전염병인데 북한에는 이를 막을 약품이 충분치 않아 재선충병으로 인해 산림이 점점 더 황폐화 되어가고 있다. 이미 황폐화된 산지와 다락밭은 홍수에 취약하여 비가 오면 토사가 쓸려나가고 거름 성분이 유출돼 그만큼 나무가 자라기가 어려워졌다.

 II. 북한 산림 황폐화 현황-30%의 산지가 황폐화

1990년 820만 1000ha였던 북한 산림은 2011년 554만 ha로 줄었다. 10년 만에 북한 산림의 32.4%가 사라졌다. 한국의 국립산림과학원에 따르면 황폐화된 북한 산림면적은 총 284만ha(2008년 기준)로 총 산림면적 899만ha의 32%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됐다. 영국의 ‘메이플크로프트’가 2011년에 발표한 ‘세계 산림 황폐화 지수’를 보면 북한은 나이지리아와 인도네시아에 이어 3번째로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발표기관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으나 대개 30% 수준의 황폐화 율을 보이고 있다는데 의견을 같이 한다.

독일의 환경단체인 German Watch가 발표한 자료에서는 북한의 산림황폐화로 인한 자연재해로 가중된 사회적·경제적 피해는 연간 24억달러(2012년)로 북한 GDP의 7.6%수준이다. 국제 적십자 연맹에 따르면 지금까지 기후변화로 인한 이상기후로 세계에서 120만 명이 사망했고 북한지역에서는 45만8000여명이 사망해 북한의 이상기후 피해가 심각한 수준임을 알 수 있다.

국립산림과학원은 황폐된 북한 산림 284만ha(2008년 기준)를 복구하는 데 모두 32조1172억 원이 소요될 것으로 전망했는데, 이는 인건비를 개성공단 월 임금 약 144달러를 기준으로 추산한 것이다. 월 임금을 한국 근로자에 맞추면 복구비용은 증가한다. 직접 조림하는데 드는 돈은 7조2680억 원이지만 토지와 나무가 쓸려가지 않도록 하는 사방사업에는 23조4140억 원이 예상된다. 양묘장 조성과 복구비용도 5410억 원으로 추산된다.

III. 남한의 대북 나무심기 지원 정책 - 그린데땅트

북한에 어떠한 인도적 지원도 불가피하게 북한 군사력에 대한 간접지원 효과를 발생하지만, 나무심기지원은 군사적 오남용효과가 가장 적을 것으로 공감되고 있다. 대북지원에 대한 국내 반발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박근혜 정부에게는 북한나무심기 지원은 부담이 가장 적은 아이템이다. 이에 더하여 박근혜 정부에게는 남한의 산림녹화를 성공시킨 고박정희 대통령의 성공 사례를 북한에서 재현해보려는 희망이 강하다.

박근혜 대통령 인수위원회는 ‘그린 데탕트’를 통한 남북 환경공동체 건설을 제안한 바 있다. 그린 데땅트 국정철학을 배경으로 2014년 3월19일 창립한 아시아녹화기구(GAO)는 식량과 땔감 대책까지 포함한 ‘임농(林農)복합경영’ 방식을 북한에 제안했다.

임농복합경영이란“양묘 조림 연료(땔감) 식량 문제를 체계적으로 연결해 북한 주민이 나무를 심고 식량문제를 해결하며 소득까지 올리는 ‘농촌지역개발사업’으로 추진하는 경영방식이다. GAO의 제안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향후 10년 동안, 식량 생산단지(40만 ha) 연료림(80만 ha) 소득작물 생산단지(20만 ha) 목축용 사료 초지(30만 ha) 유지·펄프 같은 공업연료 생산림(50만 ha) 등 용도별로 녹지를 조성하는 것이며 특히 홍수에 약한 다락밭에는 속성수인 아카시아 나무를 심어 지력을 회복하면서 땔감도 공급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한국의 새마을운동에서 활용해 큰 성과를 본 방식이다.

한국정부의 해당기관 역시 박근혜대통령의 북한녹화에 적극적이다. 통일부는 “남북 공동 영농과 시범 조림으로 ‘그린 데탕트’ 발전을 앞당기겠다”고 발표하였고 산림청도 통일시대에 대비한 북한 산림 복구를 준비하겠으며 민간기구와 공조해 시범 조림·병해충 방제를 추진하겠다고 하였으며,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녹색기후기금(GCF) 글로벌녹색성장연구소(GGGI) 등 국제기구를 활용해 남북한 ‘그린 데탕트’를 앞당기겠다고 하였다.

IV. 북한 당국의 산림화 노력과 조치들 - 10년 안에 임농복합방식으로 녹화 완수

북한은 1971년부터 식수절을 정하면서 나무심기를 독려해왔다. 1990년대에는 산림황폐화문제를 종합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산림법을 제정하였다.

김정은 정권은 2012년부터 산림정책을 강화할 의지를 보였다. 김정은의 지시로 북한 당국은 현재 ‘산림 복원 10개년’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2012년 4월 27일 김정은 북한 노동당 제1비서는 “땔감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나무를 아무리 많이 심어도 그것을 망탕(마구) 찍어 땔감으로 쓰기 때문에 산림을 보호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산림 조성과 보호관리사업을 혁신해 10년 안으로 벌거숭이산을 모두 수림화(산림녹화)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 당의 확고한 결심이며 의지”라고 강조했다.

목표는 2023년까지 무입목지 168만 ha에 총 65억 그루의 나무를 심는 것이다. 단순히 나무를 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소득대책과 환경보전, 주민 생활 개선을 동시에 추구한다는 계획이다. 김정은 정권의 이 같은 산림계획은 GAO가 북한에 제안한 “임농복합경영” 방식의 북한 녹화와 내용이 동일하다. 북한이 필요로 하는 바로 그 방식 그 내용으로 남한당국과 NGO들이 지원하겠다고 하고 있어 나무심기를 매개로 하는 남북한 협력 잠재력은 작지 않다.

V. OGKM과 북한 나무심기 - 위임장에 근거한 북한나무심기운동

2013년 12월에 북한의 국토환경보호성은 재미교포인 김호진에게 <65억 그루의 나무심기와 그에 부대되는 일체의 사업에 대한 위임장>을 교부하였다. 그 위임장에는 국토환경보호성의 장관인 김경준 상의 서명이 있고 교부 전에 김정은 제일 국방위원장의 승인을 받았다고 한다. 그 위임장이 한국에 소개된 지 2년이 되어간다. 지난 2년간 OGKM의 김호진 대표는 북한의 산림관료들을 중국으로 초청하여 한국과 북한녹화를 주제로 2014년 *월과 *월에 두 차례 국제회의를 진행하였다. 2015년 *월에는 남쪽의 *** 기관이 수거 보관해온 나무씨앗 4톤을 평양으로 보냈으며 2015년 *월에는 한국교계의 인사들이 북한의 ***지역을 방문해서 나무심기행사에 참여하게 하였다.

북한당국이 교부한 위임장과 다소간의 성과를 바탕으로 OGKM은 2015년 8월에 통일부의 허가를 받아 비영리단체로 등록하였다. OGKM의 정관에는 그 설립목적이 “한반도와 국제사회의 각 층위 협력단위와 협력하여 북한나무심기를 효과적이고 평화적으로 완수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한다. 각 층위의 협력단위라 함은 국가의 정부, 준 국가기구, 각종 지자체, 언론사, 시민단체, 종교단체, 각종 회사, 국제기구, 국제NGO 및 개인들을 의미한다.”로 되어 있다. 사단법인 OGKM은 현재 북한나무심기를 통해 남북관계가 개선되도록 다방면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VI. 북한 나무 심기와 남북 화해 통일

북한지역에 발생한 소나무 재선충병은 남한의 강원도 일대로 전염돼 남측 산림자원을 훼손하였다. 북한임진강 상류에서 홍수가 났을 때에는 남한의 연천과 파주 일대에 대규모 수해가 발생하였다. 이와 같이 북한 산림의 황폐화의 피해는 남한으로 이어진다.

남북한이 분단돼 있다는 이유로 남북 산하(山河)를 푸르게 통일시키는 노력까지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특단의 대책을 서둘러 세우지 않는 한 통일한국은 황폐한 북녘 산하 때문에 시름하게 될 것이다. 북한 산림의 황폐화 실태나 속도를 보면 남북 산림 협력 사업이 지연될수록 비용과 노력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할 것이다.

한국은 산림화(山林化)에 성공한 경험을 북한에 전수해 민족의 환경재앙을 막을 수 있다. 북한 정부 역시 산림 황폐화에 고심하며 한국의 산림녹화 사업에 관심을 보이고 있어 한국이 먼저 적극적으로 손을 내밀면 남북한이 산림녹화를 매개로 협력을 강화할 수 있다. 한반도를 푸르게 만들어 <One Green Korea>를 이루면 정치통일도 보다 쉬워질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남한과의 정치군사적 대결에서 산림협력을 분리시키지 못해 왔다. 박근혜 정부 역시 북한녹화를 위하여 한미군사훈련을 줄이거나 북한인권문제에 침묵할 생각은 없다. 북한이 군사훈련을 줄이지 않고 인권문제를 계속 언급하는 남한당국과 산림녹화에 대해서만 분리 대응하여 협력하는 일은 현재로서는 상상하기 힘들다. 남북당국이 사안별 분리대응을 학습하지 못하는 한 북한나무심기는 남북관계를 개선시키는 촉매제가 아니라, 남북관계 개선의 최종 열매일 수밖에 없다. 사안별 분리대응을 지속하여 평화통일을 이룬 과거의 동서독이나 정경분리대응을 15년째 지속하면서 사실상의 통일을 거의 이루어낸 현재의 중국대만에게서 남북은 평화통일의 기본 공식을 배워야한다. 북한나무심기 사업은 남북의 현재 여건 상 협력하여 성공시키기 가장 좋은 아이템이다. 남북한 당국 공히 조금 더 성숙한 자세로 나무심기 분리대응을 실천하기를 기대한다.

셋째, 북한 사역을 일원화

현재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단체들이 활동하는 북한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통일부가 아니라 북한 전문 연구 기관을 설립하여 이 기관을 통해 모든 것을 통솔 주관하므로 북한에서 진행하는 활동을 투명하게 국제사회에 알려야 한다 .
더구나 교회는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 때문에 북한을 돕는 것도 은밀하게 진행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역은 불투명하기 때문에 북한 전 지역에 대한 사역이 될 수 없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