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삼서(세 사람) / 가이오, 디오드레베, 데메드리오


사람은 행복에 대해서 몸이 먼저 반응한다.
반면에 불행하면 몸이 먼저 반응하므로 그 사람의 표정을 보면 현재의 상태를 알 수 있다.
신앙생활은 불행을 행복으로 마음을 회복하는 힘을 공급받는 것이라고 하겠다.

나이가 들면 웃음이 점점 없어진다.
그러나 신앙의 어른들에게는 항상 웃음이 넘쳐야 한다.

힘을 섬김으로 사용해야 한다.
힘을 권력으로 사용하면 모두에게 불행이 될 것이다.


요한삼서(세 사람) / 가이오, 디오드레베, 데메드리오

가이오 / 기쁨, 환희 라는 뜻

1절, 참으로 사랑하는 자
2절, 사랑하는 자여
3절, 진리 안에서 행한다
4절, 진리안에서 행한다

사도 요한의 세번째 편지는 매우 개인적인 것으로 수신자 가이오에 대한 깊은 애정과 관심이 글 전반에서 발견됩니다.
이 편지는 바울이 빌레몬에게 보냈던 것과 성격상 유사합니다.

요한은 본절에서 자신의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장로'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장로'는 사제나 감독처럼, 일정지역에서 영향있는 지도력을
행사 할 수 있었던 직임을 나타내는 듯합니다.

한편 수신자인 '가이오'는 당시에 흔한 이름이었으며 그 뜻은 '기쁨', '환희'입니다.
가이오라는 이름은 세 사람에게서 발견되는데...

1. 바울이 세례를 주고,후에 데살로니가의 첫 감독이 되었다고 전해지는
     고린도의 가이오 (롬 16:23; 고전 1:14).

2. 바울의 동역자로 데살로니가와 아리스다고
     그리고 에베소에서 고난을 같이 한 마게도냐의 가이오(행19:29).

3. 바울의 마지막 선교 여행에서 그리스로부터 마게도냐를 지나 드로아까지 동행한
     더베의 가이오 (행 20:4).

4세기 경의 사도적 관행에 보면
이 세번째 가이오가 나중에 요한 사도에 의해서 버가모의 첫 감독으로 임명되어진 것으로 보아 이 가이오가 본서의 수신자인 듯합니다

 곧 나의 참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
'나의'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고'는 1인칭 대명사로 흔히 생략되기 쉬우나 본절에서는 강조되어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는 가이오에 대한 요한의 개인적인 사랑이 돈독함을 시사합니다.

'참으로'의 헬라어 '엔 알레데이아'는 문자적으로 '진리 안에서'라는 의미로 가이오에 대한 요한의 사랑이 '진리 안에서' 혹은 '진리로' 행하는 사랑임을 시사합니다.


* 네 영혼이 잘 됨같이 : 여행 길에 사용하는 용어 / 유도어
여행 길에 인도함을 잘 받는 것
인생을 살아갈 때 인도함을 잘 받아 잘 되기를 바란다.

범사에 잘 되고 : 모든 일에

강건하기를 :

영혼 :

가이오가 현재 무엇인지

누가복음 7장 백부장이 자기 종이 병들었을 때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도움을 청한다.
이때 백부장의 집에 오려고 할 때 우리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할 수 없다.
이스라엘에 이만한 믿음을 볼 수 없다.
종이 강건하여 졌더라.

복음으로 사람을 낳고 진리 안에서 성장하는 것을 기쁨으로 여긴다.

디오드레베 / 스스로 높이고 군림하는 악한 본

디오드레베라는 이름은 디오스(dios, 그리이스의 신전에 있는 신들 중의 우두머리인 제우스의 이름에서 옴)와
트레포(trepho, 양육하다라는 뜻)로 구성된다.

요한삼서 9절부터 12절까지에서 요한은 두 본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디오드레베의 부정적인 본(9절)과 데메드리오의 긍정적인 본(12절)입니다. 9절에서 언급된 교회는 가이오가 한 지체로서 속해 있던 교회입니다. 디오드레베라는 이름은 디오스(dios, 그리이스의 신전에 있는 신들 중의 우두머리인 제우스의 이름에서 옴)와 트레포(trepho, 양육하다라는 뜻)로 구성된다. 따라서 그 의미는 ‘제우스가 양육하는’입니다. 이것은 자칭 그리스도인인 디오드레베가 그의 이교도 이름을 버리지 않았음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 당시 침례받을 때 그리스도인의 이름을 택했던 초기의 신자들의 실행과는 반대되는 행위였습니다. 역사에 의하면 디오드레베는 그리스도의 인격을 훼방하는 그노시스이단을 옹호했습니다. 요한은 디오드레베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 중에 으뜸 되기를 좋아하고 사도를 접대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디오드레베가 요한을 영접하거나 대접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는 마태복음 20장 25절부터 27절까지, 23장 8절부터 11절까지에 있는 주님의 말씀과 반대됩니다. 그 말씀은 모든 믿는 이들을 같은 위치, 즉 형제의 위치에 둡니다. 요한이서 9절에서 케린티안 그노시스교는 교리에 있어서 그리스도에 관한 교훈을 지나치는 데에 앞장섰습니다. 여기 요한삼서 9절에는 그노시스적인 이단적 교리에 영향을 받고 교회 안에서 으뜸이 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노시스 교리의 문제는 지적(知的)인 교만에 속한 것이고 으뜸이 되기를 좋아하는 것은 행동에 있어서 스스로를 높이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악은 하나님의 대적인 사탄이 하나님의 경륜에 반대되는 악한 계획을 실천하기 위해 사용하는 날카로운 무기들입니다. 전자는 신성한 실재 안에 있는 믿는 이들의 믿음을 해치고, 후자는 하나님의 움직이심에 있어서 믿는 이들의 일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두 가지 문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이 두 가지 문제가 여전히 존재합니다. 첫째 문제인 사상 안에서 다른 사람들 위에 있고자 하는 갈망은 교리에 관계됩니다. 둘째 문제인 으뜸 되기를 좋아함은 실행에 관계됩니다. 교리면에서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전진하고 지내치기를 갈망합니다. 실행면에서 많은 사람들이 으뜸 되기를 좋아합니다. 그런 갈망은 심지어 ‘교황’이 되고자 하는 갈망을 갖게 합니다. 가끔 이 악한 원칙이 교회생활 안에 잠입합니다. 예를 들면, 간증하려고 일어섰을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이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전진되고 지나친 것을 말하기를 원할지 모릅니다. 더욱이 교회생활 안에서 우리는 으뜸, 즉 머리가 되기를 갈망할지 모릅니다. 원칙적으로 이것은 디오드레베의 악한 영입니다. 디오드레베는 그노시스교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노시스주의를 옹호했고 발전시켰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삼일 하나님의 누림을 파괴하려고 노력하는 대적의 간교함을 봅니다. 간교한 사탄은 우리를 삼일 하나님의 누림에서 벗어나게 하거나 우리를 이 누림에서 끊어 내고 심지어 그 전체를 파괴하기 원합니다.


12절.

데메드리오(Demetrius) /  뜻 : 백성의 어머니

뭇 사람의 거울에게
진리의 거울에 비춰볼 때에도

데메(여신) + 테레(숭배하는 자) = 여신을 숭베하는 사람으로 우상을 숭배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진리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에베소 사람으로 은장색으로서 우상을 만들어 이익을 보다가 바울의전도 때문에 영업에 방 해가 되자 동업자들을 충동하여 바울에게 항의하였다(행 19:24).


▶ 데메드리오 Demetrius. [Deme'trius]

1.  Silversmith of Ephesus, who made silver shrines of the temple. Fearing that the preaching of Paul against idolatry would lessen the gains of himself and others, he raised an uproar. Acts 19:2438.

(행19:24, 38 24 즉 데메드리오라 하는 어떤 은장색이 아데미의 은감실을 만들어 직공들로 적지 않은 벌이를 하게 하더니 24 For a certain [man] named Demetrius, a silversmith, which made silver shrines for Diana, brought no small gain unto the craftsmen; 38 만일 데메드리오와 및 그와 함께 있는 직공들이 누구에게 송사할 것이 있거든 재판 날도 있고 총독들도 있으니 피차 고소할 것이요

2.  A convert who was borne witness to by all, and by the truth itself. 3 John 12.

(요삼01:12 데메드리오는 뭇사람에게도, 진리에게도 증거를 받았으매 우리도 증거하노니 너는 우리의 증거가 참된 줄을 아느니라


종교개혁자 루터는 1546년 2월 18일 새벽 3시 쯤 임종을 하면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걸하는 사람이다.
믿음생활의 본질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걸하는 것 즉 구하는 것이며, 하나님은 이런 은혜를 사모하는 자를 믿음의 사람으로 인정해 주십니다.

노아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가 있습니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창 06:09). 노아의 모든 행위가 완벽하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살겠다는 고백의 평가입니다.

 

전 07:20 선을 행하고 전혀 죄를 범하지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없기 때문이로다.

 

가이오와 함께 믿음으로 섬기는 교회에 두 사람의 지도자가 있습니다. 한 사람은 디오드레베이고, 또 한 사람은 데메드리오입니다. 이들은 나름 교회를 위해 일을 하였는데, 지나고 보니 디오드레베는 그만 순회 전도자들을 배척하는 자리에 서고 말았습니다.

반면 데메드리오는 디오드레베가 배척한 사람들을 믿음으로 섬기는 일을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디오드레베는 사도 요한으로부터 징계의 대상이 되었고, 데메드리오는 모든 일에 인정을 받고 본받을 만한 사람으로 추천까지 받았습니다.

어떤 일로 데메드리오가 요한의 인정을 받고 본을 받을 사람으로 추천 받게 되었는지를 오늘 말씀으로 살펴보겠습니다. 함께 은혜 받는 시간되기를 축원합니다. 

1. 데메드리오는 어떤 사람입니까?


 

12 데메드리오는 뭇 사람에게도, 진리에게서도 증거를 받았으매 우리도 증언하노니….

 

성경은 데메드리오에 대해 두 사람을 소개 합니다. 에베소의 은장색(행 19:24~27,38) 데메드리오와, 오늘 말씀에 나오는 데메드리오입니다. 성경학자들 중에 더러는, 에베소에서 아데미 신전의 모형을 만들어 은장색 우상 장사를 하던 데메드리오와, 요한삼서의 믿음의 일꾼 데메드리오가 동일인이라고 합니다.

행 19:24~27,38절에 의하면 사도 바울의 3차 선교 여행 때 에베소의 데메드리오가 복음 사역에 크게 걸림돌이 되었으나, 곧 예수님을 믿고 요한삼서의 믿음의 일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편에서는 두 사람의 데메드리오를 각각 다른 사람이라고 주장합니다. 오늘 말씀의 데메드리오를 사도행전 19장의 데메드리오와 연관시킬 근거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저도 동일 인물이 아닌 각각의 인물로 보고 말씀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러면 데메드리오가 요한삼서의 주인공 가이오와는 어떤 관계인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본서의 저자 사도 요한이 가이오와 데메드리오를 연계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데메드리오에 대하여 2가지로 생각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부분은 본서의 저자 요한과의 관계로 보아, 데메드리오를 요한이 파송한 순회 전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보는 관점입니다. 전해오는 이야기 가운데는 데메드리오가 요함삼서 편지를 요한으로부터 받아 가이오에게 전달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눈치를 채고 시기를 한 나머지 순회 전도자 데메드리오를 맞아들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른 부분은 데메드리오가 가이오와 함께 교회를 기쁨으로 섬기는 멤버로 보는 관점입니다. 가이오처럼 교회를 위해 봉사를 하다 특별히 순회 전도자가 오면 기쁨으로 대접을 하였는데 이 일을 디오드레베가 시기하여 교회에서 내 쫓았다는 것입니다(10).

 

10 ….그가 악한 말로 우리를 비방하고도 오히려 부족하여 형제들을 맞아들이지도 아니하고 맞아들이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쫓는 도다.

 

교회생활에서 제일 힘든 부분이 무엇일 것 같습니까? 충성하는 일에 대하여 다른 사람으로부터 시기와 견제를 받는 일입니다. 교회 밖에서 믿음을 지키기 위해 핍박 받는 것은 은혜로 받아들이면 능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같은 믿음의 가족들로부터 훼방과 조롱을 받는다면 그때는 견디기가 무척 힘이 듭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교회를 섬기는 원리는 꼭 같습니다. 언제나 격려를 하는 사람과 훼방을 하는 사람이 공존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힘들고 지쳐 쓰러질 것 같은 상황을 만날 때 위로가 되는 메시지를 안내해 줍니다.

 

갈 06:0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요한은 가이오에게 믿음의 본이 된 인물, 믿음의 향기와 감동이 있는 인물 데메드리오를 멘토로 삼으면 좋을 것이라고 권면을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교회의 부흥의 요소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 지를 이제 알 수 있습니다.

디오드레베와 같은 사람이 있으면 교회는 혼란을 만나게 될 것이고, 데메드리오와 같은 사람이 있으면 교회는 사랑이 넘치고 부흥이 올 것입니다. 디오드레베와 데메드리오를 통해서 목회자를 지치게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목회자에게 힘이 되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능히 짐작 할 수 있습니다.

 

 

  2. 데메드리오는 모든 일에 인정을 받았습니다.

 

12 데메드리오는 뭇 사람에게도, 진리에게서도 증거를 받았으매 우리도 증언하노니 너는 우리의 증언이 참된 줄을 아느니라.

 

공동체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 것 같습니까? 서로가 서로를 알아주고 인정을 해 주는 것입니다. 특히 신령한 부분을 다루는 교회에서 꼭 필요한 덕목이라면 서로가 상대방을 인정해 주고, 또 인정을 받는 일입니다. 12절을 보면 요한은 데메드리오에 대하여 세 가지 차원에서 인정받은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뭇 사람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진리로부터 인정을 받고, 요한으로부터 인정을 받은 일입니다.

 

뭇 사람에게도 증거를 받았으매. 모든 사람보다는 모든 일에 라는 의미로서, 데메드리오는 그가 행하는 일마다 신실하게 감당하여 인정을 받았습니다.

진리에게서도 증거를 받았으매. 데메드리오는 진리 안에서 행한 가이오처럼, 자신도 진리의 말씀을 따라 순회 전도자들을 대접한 것이 인정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증언하노니. 데메드리오는 교회에서, 순회 전도자들로부터, 특별히 순회 전도자를 파송한 요한으로부터 인정을 받았습니다.


요한은 데메드리오가, 교회에서 분명 믿을 만한 사람, 가장 신뢰가 가는 사람이라고 확신이 섰기 때문에 가이오에게 데메드리오의 이런 선한 행동을 본받으라고 합니다. 주변의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데메드리오, 진리의 말씀을 따라 모든 것을 믿음으로 이해하는 데메드리오, 비록 힘들어도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일을 기쁨으로 감당하는 데메드리오, 이런 사람이 들어가면 교회는 살아납니다.  

그런데 데메드리오와 같은 믿음의 성품은 저절로 형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악한 성품을 익히는 것은 힘들이지 않고도 쉽게 이루어집니다. 반면 믿음의 성품을 익히려면 믿음의 좋은 성품을 가진 사람과 친해야 가능합니다.

요한이 데메드리오의 선한 성품을 가이오에게 본받으라고 하는 것은 그만큼 믿음의 준비와, 믿음의 몸부림을 치라는 뜻입니다. 어떤 일이든지 공짜는 없습니다.

 

종편 채널A 천개의 비밀 “어메이징 스토리” 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이 가운데 7월 5일 방영된(155회) 태종의 아들 양녕대군 두 얼굴의 진실 편은, 세자로 생활을 하다 온갖 스캔들로 폐세자가 된 장자 양녕대군의 이야기입니다.

그 내용 가운데 양녕대군 제가 아버지 태종에게 세자의 자리를 내어 놓으면서 세자 복을 벗고는 이제 익선관도 벗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러분 익선관(翼善冠, 翼蟬冠)이란 말을 아십니까? 익선관이란 조선시대 왕과 세자가 평상복이나 집무 복을 입을 때 함께 쓰는 모자로서 거기에 매미의 날개 모양을 형상화 하였습니다.

 

매미에게는 오덕이 있다는 것입니다 ①매미의 머리 모양이 선비의 의관을 닮았다고 선비의 덕(文德))이라 하고, ②맑은 이슬과 수액만 먹고 사니 청덕(淸德)이라 하고, ③농부가 가꾼 채소와 곡식을 애벌레나 메뚜기처럼 해치지 않는 겸손함이 있다고 겸덕(謙德)이라 하고,

④날짐승과 들짐승, 곤충 등 모든 생명체들이 집을 짓는 것과 달리 매미는 집을 짓지 않는 검소한 덕을 갖췄다고 검덕(儉德)이라 하고, ⑤철 맞춰 왔다가 가을이면 때를 봐 떠날 줄 아는 믿음을 갖췄다고 해서 신덕(信德)이라고 하였습니다.

조선시대 왕들이 익선관을 쓰고서 선한 것을 본받으려고 힘썼던 것처럼, 우리도 데메드리오의 선한 모습을 본받으면서 범사에 인정을 받도록 힘써야겠습니다.

 

 

  3. 나는 믿음으로 인정을 받는 생활입니까?

 

딤후 02:15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인정된 자(δόκιμος). 다양하게 번역되는 단어로서 일정한 시험을 거친 후에 인정되고 받아들여 진 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의 원문을 보면 이 단어가 문장 구조상 하나님 앞에(τῷ θεῷ)와 결합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인정 보다는 하나님이 인정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초대교회 시절 성도들을 혼란하게 하였던 요소들 대부분이 하나님으로부터 인정 보다는 사람으로부터의 인정을 받으려 함이었습니다. 그 결과는 교회의 분란만 가져왔습니다.

 

이스라엘의 3대 조상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완벽한 믿음입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 모두가 상당한 허물들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조상의 자리에 세워진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믿는 믿음 때문입니다.

인정을 받는 믿음에는 회개가 따르고, 자신을 주님께 드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덕을 세우는 일이 따릅니다. 잘 아는 말씀 한 번 돌아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과 사이에 하인들로 인해 다툼이 일어나자 이보게 조카,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창 13:08)고 제안을 하였습니다.

 

잠언 17:14
다투는 시작은 둑에서 물이 새는 것 같은즉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시비를 그칠 것이니라.

믿음의 인정을 받는 자리에 나아가려면 하나님의 신뢰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시험을 잘 통과하여야 합니다. 편당이 생기지 않게 하여야 합니다(고전 11:19). 어느 시대나 가짜가 진짜 행세를 합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진리를 가장하여 찾아와서 멸망에 빠지도록 넘어뜨리려는 계략을 동원합니다. 믿음의 자리에 세워진 자, 믿음의 인정을 받은 자는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분별하고, 진리와 오류를 정확하게 구분하여 진리의 길을 굳게 걸어갑니다. 믿음으로 인정을 받는 일꾼은 분별력을 필요로 합니다. 분별력은 사물의 이치를 바로 깨닫고, 문제를 풀어 갈 수 있는 원동력입니다. 이런 분별력이 따를 때 하나님의 인정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일꾼의 특징은 자신을 하나님께 드림에 있습니다. 그 드림은 자신과 눈물과 땀방울입니다. 이런 드림이 없는 사람이 지도자로 세워지면 바리새인처럼 되기가 알맞습니다. 바리새인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말로서는 열심히 일을 하나 실제는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는 것이고, 드리기는 하지만 정의와 긍휼과 믿음이 없는 생활이고(마 23:23), 말과 생활이 일치하지 않는 삶입니다.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사자성어 퀴즈를 내었습니다. 내용은 술을 먹고 길거리에서 큰 소리로 떠들며 노래 부르는 것을 뭐라고 할까요? 입니다. 학생들이 맞히지 못하자 사회자는 네 글자이고 끝이 가로 끝납니다. 라는 힌트를 주었습니다.

정답은 고성방가 인데 한 학생이 고음 불가, 라고 답하였습니다. 이어 다른 학생은 이럴 수가, 라고 답하자, 다른 학생은 미친 건가, 라고 답하였습니다. 이때 마지막으로 한 학생이 답을 하는데 그가 말한 답은 아빠인가, 이었습니다. 사회자와 모든 방청객들은 뒤집어지고 말았습니다.

예, 이런 이야기는 우리의 일상의 단면입니다. 우리는 누구로부터 어떻게 인정을 받고 있으며, 또 어떻게 인정을 받고 살아갑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는 생활 쪽에 믿음의 에너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런데 혹 아빠인가? 이런 평가가 되지 않는 삶을 살자는 말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요한삼서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느낄 수 있습니까?
교회 안에는 가이오와 데메드리오 같은 일꾼이 있고, 디오드레베 같은 훼방꾼 스타일도 있습니다.
교회의 각 직분은 권력이 아닌 섬김의 도구입니다.

그러나 세상적인 성공의 기준이 교회에 들어오면 성스러운 직분이 개인의 명예와 일종의 권력으로 추락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교회의 일을 봉사하는 일에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면서 충성하기 원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기도를 드리는 사람을 통하여서 자신과 주변의 사람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 모두가 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교회 안에서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좋은 일꾼들 되기를 축원합니다.

마태복음 13:43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헌신(출애굽기 32:32, 열왕기하 23:12) 10 / 04 / 2021(월)


헌신에 대한 묵상
10 / 04 / 2021(월)


헌신(출애굽기 32:32, 열왕기하 23:12)

출애굽기 32:32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주옵소서.

20절 / 모세가 그들의 만든 송아지를 가져 불살라 부수어 가루를 만들어 에 뿌려 이스라엘 자손에게 마시우니라.

열왕기하 23:12
유다 열왕이 아하스의 다락지붕에 세운 단들과 므낫세가 여호와의 전 두 마당에 세운 단들을 왕이 다 헐고 거기서 빻아내려서 그 가루를 기드론 시내에 쏟아버리고.

왜 그송아지를 불에 태워 백성들에게 마시라고 하셨나?

1. 우상을 먹어 똥으로 나오게 한다.
너희가 섬기는 그 우상이 가장 더러운 것이다.

2. 금을 주신이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우상을 섬기는가?
섬김의 대상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3. 먹어서 없이 한다.
영원히 없애버린다.

4. 순수한 금가루를 물에 넣었을 때 물의 색상이 붉은 빛이 되었다.
보혈의 피를 상징하는 것이다.


사사기 5:2
이스라엘의 두령이 그를 영솔하였고 백성이 즐거이 헌신하였으니 여호와를 찬송하라.

사사기 5:9
내 마음이 이스라엘의 방백을 사모함은 그들이 백성 중에서 즐거이 헌신하였음이라 여호와를 찬송하라 .

출애굽기 32:29
모세가 이르되 각 사람이 그 아들과 그 형제를 쳤으니 오늘날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날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시편 110:3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마가복음 12:30


계명을 지키는 믿음(마가복음 12: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다하여(ὅλης)
ὅλος, η, ον / holos: whole, complete

공동번역 /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현대인 / 너는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새번역 /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이신 주님을 사랑하여라.

첫째, 마음(καρδίας)

kardia: heart
Original Word: καρδία, ας, ἡ

마음을 다하는 믿음이란?

인심난측(人心難測) 사람 인, 마음 심, 여러울 난, 잴 측

마음처럼 깊게 사랑하라!
사랑이 너무 얄팍하다.
쉽게 사랑하고 쉽게 헤어지고 헤어져도 마음 아파하지 않는다.


둘째, 목숨(ψυχῆς)

psuché : breath, the soul
Original Word: ψυχή, ῆς, ἡ



셋째, 뜻(διανοίας)

dianoia: the mind, disposition, thought
Original Word: διάνοια, ας, ἡ



넷째, 힘(ἰσχύο)

ischus: strength, might
Original Word: ἰσχύς, ύος, ἡ















대한민국 미국 이스라엘의 건국


09 / 26 / 2021(주일)

기독교 신앙으로 세워진 나라 자유대한민국

국제정치학자들은 세계 모든 나라들(대략 220개국) 중에서 “하나님의 도움으로 세워진 나라”들은 “미국(1789. 4, 30. United States of America)” “이스라엘(1948. 5. 14. State of Israel)” “대한민국(1945. 8. 15. 大韓民國)”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미국은 청교도들에 의해서 건국되었기 때문이며, 이스라엘은 구약의 예언에 따라 독립국가로 출발했기 때문입니다. 한편 대한민국은 정통적인 기독교 신앙으로 거듭난 “이승만박사”에 의해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오늘부터 대한민국은 하나님이 세워주신 나라인 것을 소개합니다.

첫째, 개천절(開天節. Gaecheonjeol. National Foundation Day)

개천절은 10월 3일이다. 단군 왕검이 고조선을 세운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개천(開天)”이란 “하늘을 열었다”는 뜻이다.
“환웅”이 하늘에서 백두산의 신단수 아래로 내려온 것을 말합니다. 기원전 2333년 단군이 고조선을 처음 건국한 날이며 국경일로 정하여 태극기를 게양합니다.

성경에서 “하늘이 열리다”는 것은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1.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고 물 위로 올라올 때(마 3:16, 눅 3:21)
2. 베드로가 기도 시간에 기도할 때(행 10:11)
3. 에스겔이 바벨론 그발 강가에 있을 때(겔 1:1)

10 / 03 / 2021(주일)

기독교 신앙으로 세워진 나라 자유대한민국

지난주에는 첫 번째 개천절(開天節)을 통한 건국의 의미를 소개했습니다.

오늘은 두 번째로 애국가(愛國歌)에서 건국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애국가의 가사를 원문(原文)으로 소개합니다.

1. 東海 물과 白頭山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保佑하사 우리나라 萬歲

2. 南山 위에 저 소나무 鐵甲을 두른 듯 바람서리 不變함은 우리 氣像일세

3. 가을 하늘 空豁한데 높고 구름 없이 밝은 달은 우리 가슴 一片丹心일세

4. 이 氣像과 이 맘으로 忠誠을 다하여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

(후렴) 無窮花 三千里 華麗 江山 大韓 사람 大韓으로 길이 保全하세

애국가의 가사 1절에는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라고 하였습니다. “하느님” 또는 “하나님” 어느 것이 맞느냐? 하는 논쟁도 합니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하느님)” “단 한 분이신 하나님”이라고 하면 어느 단어를 선택하느냐 하는 것은 논쟁거리가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많은 나라들이 국가를 부르지만 대한민국처럼 기독교국가가 아님에도 가사에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라고 노래하는 것은 인간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가 감추어진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자유대한민국의 기상을 세계  만방에 널리 알려 예수 한국 복음 통일 세계 선교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그 날을 기대하며 오늘의 혼돈과 시련을 믿음으로 극복해야 합니다. 거친 광야와 같은 시절을 지나면 반드시 모두가 좋아할 새 날이 다가올 것입니다.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시편 144:15)

10 / 10 / 2021(주일)

기독교 신앙으로 세워진 자유대한민국

지난주에는 “애국가(愛國歌)”에서 건국의 의미를 소개했습니다.
오늘은 나라꽃이란 “국화(國花)”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한국의 국화는 “무궁화(無窮花)”입니다.
“무궁화는 영원히 피고 또 피어서 지지 않는 꽃”이라는 뜻입니다.

무궁화는 고조선(古朝鮮) 이전부터 하늘나라의 꽃으로 귀하게 여겼고, 신라는 스스로를 “근화향(槿花鄕, 무궁화 나라)”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중국에서도 우리나라를 오래 전부터 “무궁화가 피고 지는 군자의 나라”라고 칭송했습니다.

이처럼 오랜 세월 동안 우리 민족과 함께해 온 무궁화는 조선말 개화기를 거치면서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란 노랫말이 애국가에 삽입된 이후 더욱 국민들의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무궁화에 대한 우리 민족의 한결 같은 사랑은 일제강점기에
시련을 겪게 되었는데 일제는 무궁화를 “눈에 피꽃”이라 하여
보기만 해도 눈에 핏발이 선다거나 또는 “부스럼꽃”이라 하여
손에 닿기만 해도 부스럼이 생긴다고 하는 등 무궁화를 탄압했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우호익(禹浩翊), 남궁억(南宮檍) 등이 무궁화의 가치인식 및 무궁화 보급운동 등에 헌신하였으며, 동아일보에서는 1923년부터 10년 간 매년 무궁화 사진을 게재하는 등 우리 민족은 무궁화 보존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1백여 품종의 무궁화가 자라고 있는데, 꽃 색깔에 따라 단심계, 배달계, 아사달계 등으로 분류합니다.

정부는 이들 가운데서 꽃잎 중앙에 붉은 꽃심이 있는 단심계(丹心系) 홑꽃을 보급 품종으로 지정했습니다.

무궁화는 7월 초순에서 10월 하순까지 매일 꽃이 피며, 옮겨 심거나 꺾꽂이를 해도 잘 자라고 공해에도 강한 특성을 지니고 있어 민족의 무궁한 발전과 번영을 기원하는 마음을 잘 나타내 주기도 합니다.


10 / 17 / 2021(주일)

세상 모든 나라들은 나라를 상징하는 국화(國花)와 국조(國鳥)를 갖고 있습니다. 한국의 국화는 무궁화(無窮花)입니다. 1960년에 개최된 국제 조류 보호회의 결의로 세계 각국의 국조(國鳥)를 정하였는데 영국은 울새, 일본은 일본꿩, 중국은 참새, 호주는 강강앵무, 프랑스는 수닭, 미국은 흰머리 독수리, 독일은 붉은 머리 황새, 벨기에 국조는 황조롱이, 노르웨이는 까마귀, 덴마크는 종달새라고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국의 국조를 "까치"라고 알고 있지만 대한민국 정부에서 지정한 국가 상징물 중에 국조는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우호익(禹浩翊), 남궁억(南宮檍) 등이 무궁화의 가치인식 및 무궁화 보급운동 등에 헌신하였으며, 동아일보에서는 1923년부터 10년 간 매년 무궁화 사진을 게재하는 등 우리 민족은 무궁화 보존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1백여 품종의 무궁화가 자라고 있는데, 꽃 색깔에 따라 단심계, 배달계, 아사달계 등으로 분류합니다.

정부는 이들 가운데서 꽃잎 중앙에 붉은 꽃심이 있는 단심계(丹心系) 홑꽃을 보급 품종으로 지정했습니다.

무궁화는 7월 초순에서 10월 하순까지 매일 꽃이 피며, 옮겨 심거나 꺾꽂이를 해도 잘 자라고 공해에도 강한 특성을 지니고 있어 민족의 무궁한 발전과 번영을 기원하는 마음을 잘 나타내 주기도 합니다.


세상 모든 나라들은 나라를 상징하는 국가(國歌)와 국화(國花) 그리고 국조(國鳥)를 갖고 있습니다.
한국의 국화는 무궁화(無窮花)
한국의 국가는 애국가(愛國歌)
한국의 국조는 없습니다.

1960년에 개최된 국제 조류 보호회의 결의로 세계 각국의 국조(國鳥)를 정하였는데 영국은 울새, 일본은 일본꿩, 중국은 참새, 호주는 강강앵무, 프랑스는 수닭, 미국은 흰머리 독수리, 독일은 붉은 머리 황새, 벨기에 국조는 황조롱이, 노르웨이는 까마귀, 덴마크는 종달새라고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국의 국조를 "까치"라고 알고 있지만 대한민국 정부에서 지정한 국가 상징물 중에 국조는 없다고 합니다.


10 / 24 / 2021(주일)

제헌국회 이윤영의원 기도문

이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여,
이 민족을 돌아보시고 이땅에 축복하셔서 감사에 넘치는 오늘이 있게 하심을 주님께 저희들은 성심으로 감사하나이다. 
오랜 시일동안 이 민족의 고통과 호소를 들으시사 정의의 칼을 빼서 일제의 폭력을 굽히시사 하나님은 이제 세계만방의 양심을 움직이시고 또한 우리민족의 염원을 들으심으로 이 기쁜 역사적 환희의 날을 이 시간에 우리에게 오게 하심은 하나님의 섭리가 세계만방에 성시하신 것으로 저희들은 믿나이다.
하나님이시여, 이로부터 남북이 둘로 갈리어진 이 민족의 어려운 고통과수치를 신원(伸寃)하여 주시고 우리 민족 우리 동포가 손을 같이 잡고 웃으며 노래 부르는 날이 우리 앞에 속히 오기를 기도하나이다. 
하나님이시여 원치 아니한 민생의 도탄은 길면 길수록 이 땅에 악마의 권세가 확대되나,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광은 이땅에 오지 않을 수밖에 없을 줄 저희들은 생각하나이다.
원컨데 우리 조선독립과 함께 남북통일을 주시옵고 또한 우리 민생의 복락과아울러 세계평화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에 의지하여 저희들은 성스럽게 택함을 입어가지고 글자 그대로 민족의 대표가 되었습니다.
그러하오나 우리들의 책임이 중차대한 것을 저희들은 느끼고 우리자신이 진실로 무력한 것을 생각할 때 지와 인과 용과 모든 덕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 앞에 이러한 요소를 저희들이 간구하나이다.
이 제 이로부터 국회가 성립이 되어서, 우리 민족의 염원이 되는 모든 세계만방이 주시하고 기다리는 우리의 모든 문제가 원만히 해결되며 또한 이로부터 우리의 완전 자주독립이 이 땅에 오며 자손만대에 빛나고 푸르른 역사를 저희들이 정하는 이 사업을 완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이 회의를 사회하시는 의장으로부터 모든 우리 의원일동에게 건강을 주시옵고 또한 이겨서 양시의 정의와 위신을 가지고 이 업무를 완수하게 도와 주시옵기를 기도하나이다.
역사의 첫걸음을 걷는 오늘의 환희와 감격에 넘치는 이 민족적 기쁨을 다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를 올리나이다. 
이 모든 말씀을 주 예수그리스도 이름을 받들어 기도하나이다.

10 / 31 / 2021(주일)

넷째, 대통령 취임선서


"나는 憲法을 遵守하고 國家를 保衛하며 祖國의 平和的 統一과 國民의 自由와 福利의 增進 및 民族文化의 暢達에 努力하여 大統領으로서의 職責을 誠實히 遂行할 것을 國民앞에 嚴肅히 宣誓합니다."


헌법 제69조에서는 "대통령은 취임에 즈음하여 다음의 선서를 한다.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 및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고 규정하고 있다.



대통령 취임식은 1987년 직선제 개헌 이후 매번 2월 25일 열려 이날 대통령 취임선서가 진행됐다. 그러나 2017년 3월 10일 대한민국 헌정사 최초의 현직 대통령(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이 이뤄지면서 5월 9일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다. 선거 결과 19대 대통령에 당선된 문재인 대통령은 당선인 신분 없이 2017년 5월 10일 취임선서를 하고 대통령직 임기를 시작했다.


취임식 개요]

 

초대 이승만대통령은 1948년 7월 20일 국회에 의해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1948년 7월 24일 당시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되던 중앙청(옛 조선총독부) 광장에서 우리나라 헌정사상 최초의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대통령 취임식은 개식, 애국가제창 및 국기에 대한 경례, 취임선서, 대통령 취임사, 부통령 취임사, 축사 및 축전 낭독, 만세삼창, 폐회 등의 식순으로 진행되었다.

11 / 7 / 2021(주일)
초대 이승만 대통령 취임사(1948년 7월 24일 토요일) #. 1

 여러 번 죽었던 이 몸이 하느님 은혜와 동포들의 애호로 지금까지
살아 있다가 오늘에 이와 같이 영광스러운 추대를 받는 나로서는 일변 감격한 마음과 일변 감당키 어려 운 책임을 지고 두려운 생각을 금하기 어렵습니다.

기쁨이 克(극)하면 웃음이 변하여 눈물이 된다는 것을 글에서 보고 말로 들었던 것입니다. 요즘 나에게 치하하러 오는 남녀동포 가 모두 눈물을 씻으며 고개를 돌립니다. 각처에서 축전 오는 것을 보면 모두 눈물을 금하기 어렵습니다.

나는 본래 나의 감상(感想)으로 남에게 촉 감될 말을 하지 않기로 매양 힘쓰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목석간장(木石肝腸)이 아닌 만치 나도 뼈에 사무치는 눈물을 금하기 어렵습니다. 이것은 다름 아니라 40년 전에 잃었던 나라를 다시 찾은 것이요, 죽었던 민족이 다시 사는 것이 오늘에야 표명(表明)되는 까닭입니다.

오늘 대통령으로서 선서하는 이 자리에 하느님과 동포 앞에서 나의 직책을 다하기로 한층 더 결심하며 맹서합니다.

따라서 여러 동포들도 오늘 한층 더 분발해서 각각 자기의 몸을 잊어버리고 민족 전체의 행복을 위하여 대한민국(大韓民國)의 시민으로서 영광스럽고 신성한 직책을 다하도록 마음으로 맹서하기를 바랍니다.


11 / 14 / 2021(주일)

여러분이 나에게 맡기는 직책은 누구나 한 사람의 힘으로 성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중대한 책임을 내가 감히 부담할 때에 내 기능이나 지혜를 믿고 나서는 것이 결 코 아니며 오직 전국 애국남여(愛國男女)의 합심 합력으로써만 수행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 바입니다.
이번 우리 총선거의 대성공을 모든 우방(友邦)들이 축하하기에 이른 것은 우리 애국남여(愛國男女)가 단단한 애국성심(愛國誠心)으로 각각 의 책임을 다한 때문입니다.

그 결과로 국회(國會) 성립 또한 완전무결한 민주제도로 조직 되어 2, 3 정당(政黨)이 그 안에 대표가 되고 무 소속과 좌익 색채로 지목받는 대의원이 또 한 여럿이 있게 된 것입니다.
기왕의 경험으로 추측하면 이 많은 국회의 원 중에서 사상(思想) 충돌로 분쟁분열을 염려한 사람들이 없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중대한 문제에 대하여 극렬한 쟁론(爭論)이 있다가도 필경 표결(表決)될 때에는 다 공정한 자유의견을 표시하여 순리적으로 진행하게 되므로 헌법과 정부조직법을 다 민의(民意)대로 종다수로 통과된 후에는 아무 이의 없이 다 일심(一心)으로 복종하게 되므로 이 중대한 일을 조속한 한도 내에 원만히 해 결하여 오늘 이 자리에 이르게 된 것이니 국회의원 일동과 전문위원 여러분의 애국성심(愛國誠心)을 우리가 다 감복하지 않을 수 없는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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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 28 / 2021(주일)

나는 국회의장(國會議長)의 책임을 이에 사면(辭免)하고 국회에서 다시 의장을 선거할 것인데 만 일 국회의원 중에서 정부 부처장으로 임명 될 분이 있게 되면 그 후임자는 각기 소관 투표구역에서 재선(再選,) 보결(補缺)하게 될 것이니 원만히 보결된 후에 의장을 선 거하게 될듯하며 그동안은 부의장 두 분이 사무를 대임(代任)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 부의장 두 분이 그동안 의장을 보좌해서 각 방면으로 도와 협조 진행케 하신 것을 또한 감사히 생각합니다.

국무총리와 국무위원 조직에 대해서 그동안 여러 가지로 낭설이 유포되었으나 이는 다 추측적(推測的) 언론에 불과하며 며칠안 으로 결정 공포될 때에는 여론상 추측과 크 게 다를 것이니 부언낭설(浮言浪說)에 현혹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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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5일

우리가 정부를 조직하는 데 제일 중대히 주 의할 바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일할 수 있는 기관을 만드는 것입니다.

둘째는 이 기관이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사회적 명망(名望)이나 정당단체의 세력이나 간에 오직 국회에서 정하는 법률을 민의(民意)대로 준행해 나갈 기능 있는 사람끼리 모이는 기관이 되어야 할 것이니 우리는 그런 분들을 물색 하는 중입니다.

 

어떤 분은 인격이 너무 커 서 작은 자리에 채울 수 없는 이도 있고 혹은 작아서 큰 자리에 채울 수 없는 이도 있 으나 참으로 큰 사람은 큰 자리에도 채울 수 있고 작은 자리에도 채울 수 있을 뿐 아 니라 작은 자리 차지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참 큰 인물들이 있어 무 슨 책임을 맡기든지 大小와 高下를 구별치 않고 적은 데서 성공해서 차차 큰 자리에 오르기를 도모하는 분들이 많아야 우리의 목적이 속히 도달될 것입니다. 이런 인격들이 함께 책임을 분담하고 일해 나가면 우리 정부 일이 좋은 시계(時計) 속처럼 잘 돌아가는 중에서 이재(理財)를 많이 나 타낼 것이요,

 

세계의 신망과 동정이 날로 증진될 것입니다. 그런 즉 우리가 수립하는 정부는 어떤 부분적이나 어떤 지역을 한하지 않고 전민족의 뜻대로 전국(全國)을 대표하는 정부가 될 것입니다. 기왕에도 말한 바이지만 민주정부(民主政府)는 백성이 주장하지 않으면 그 정권이 필경 정객과 파당의 손에 떨어져서 전국이 위험한데 빠지는 법이니 일반국민은 다 각각 제 직책을 행해서 먼저 우리 정부를 사랑하며 보호해 야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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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2일

내 집을 내가 사랑하고 보 호하지 않으면 필경은 남이 주인노릇을 하 게 됩니다.

과거 40년 경험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의(義)로운 자를 보호하고 불의(不義) 한 자를 물리쳐서 의(義)가 서고 사(邪)가 물러가야 할 것입니다.
전에는 임금이 소인(小人)을 가까 이 하고 현인(賢人)을 멀리하면 나라가 위태하다 하였으나 지금은 백성이 주장이므로 민중(民衆) 이 의(義)로운 사람과 불의(不義)한 사람을 명백히 구 별해야 할 것입니다.

승인(承認) 문제에 대하여는 그 권리가 우리 에게 있는 것이 아니므로 우리가 판단할 수 는 없으나 우리의 순서가 이대로 계속된다면 모든 우방(友邦)의 호의(好意)로 속히 승인(承認)을 얻을 줄로 믿는 바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시하는 바는 승인(承認)을 얻는 데 있지 않고 먼저 국위(國威)를 공고히 세우는 데 있나니 모든 우방(友邦)이 기대하는 바 를 저버리지 아니하고 우리가 잘만 해 나가 면 우리의 요청을 기다리지 않고 자발적으 로 후원할 것이니 이것도 또한 우리가 일 잘하기에 달린 것입니다.  

9월에 파리에서 개회하는 유엔 총회에 파견 할 우리 대표단은 특별히 긴급한 책임을 가 지니 만치 가장 외교상 적합한 인물을 택하 여 파견할 터인데 아직 공포는 아니하였으 나 몇몇 고명(高名)한 인격으로 대략 내정되고 있 으니 정부 조직 후에 조만간 완정(完定) 공 포될 것입니다.

우리의 대표로 레이크 석세스에 가서 많은 성적(成績)을 내고 있는 임영신(任永信) 여사에 대해서는 우리가 다 고맙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재정후원(財政後援)도 못하고 통신상으로 밀접히 후원(後援)도 못하는 중에 중대한 책임을 그만치 진취시 킨 것을 우리는 다 영구히 기념하게 될 것 입니다.


12월 19일

 

이북(以北) 동포 중 공산주의자들에게 권고 하노니 우리 조국을 남의 나라에 부속(附屬)하자는 불충한 사상(思想)을 가지고 공산당(共産黨)을 빙자하여 국권(國權)을 파괴하려는 자들은 우리 전 민족이 원수로 대우하지 않을 수 없나니 남 의 선동을 받아 제 나라를 결단내고 남의 도움을 받으려는 반역(反逆)의 행동을 버리 고 남북(南北)의 정신통일로 우리 강토를 회복해 서 조상의 유업(遺業)을 완전히 보호하여 우리끼리 합하여 공산(共産)이나 무엇이나 민의(民意)를 따라 행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기왕에도 누누이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공산당(共産黨)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공산당(共産黨)의 매국주의(賣國主義)를 반대하는 것이므로 이북(以北)의 공산주의자(共産主義者)들은 이것을 절실히 깨닫고 일제히 회심해서 우리와 같이 같은 보조를 취하여 하루 바삐 평화적으로 남북을 통일 해서 정치와 경제상 모든 복리를 다 같이 누리게 하기를 바라며 부탁합니다.

 

대외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세계 모든 나라 와 다 친린(親隣)해서 평화를 증진하여 외 교 통상에 균평한 이익을 같이 누리기를 절대 도모할 것입니다. 만일 교제상(交際上). 친소(親疎)에 구별이 있다면 이 구별은 우 리가 시작하는 것이 아니고 타동적(他動的)으로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어느 나라든지 우리에게 친선(親善)히 한 나라는 우리가 친선(親善)히 대우 할 것이요, 친선(親善)치 않게 우리를 대우하는 나라는 우리가 친선히 대우할 수 없을 것입 니다. 과거 40년간 우리가 국제상(國際上) 상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 것은 세계 모든 나라가 우리와 접촉할 기회가 없었던 까닭 입니다.

 

일본인(日本人)들의 선전만을 듣고 우리를 판단해 왔었지만 지금부터는 우리 우방들의 도움으 로 우리가 우리 자리를 찾게 되었은즉 우리 가 우리말을 할 수 있고 우리 일도 할 수 있나니 세계 모든 나라들은 남의 말을 들어 우리를 판단하지 말고 우리가 하는 일을 보아서 우리의 가치를 우리의 습관대로만 정해 주는 것을 우리가 요청하는 바입니다 .

 

우리 정부와 민중은 외국의 선전을 중요히 여겨서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는 각국 남녀(男女)로 하여금 우리의 실정을 알려 주어서 피 차에 양해를 얻어야 정의(正義)가 상통하여 교제 가 친밀할 것이니 이것이 우리의 권리만 구 함이 아니요, 세계 평화를 보증하는 방법입 니다. 새 나라를 건설하는 데는 새로운 헌법과 새 로운 정부가 다 필요하지만 새 백성이 아니 고서는 결코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부패한 백성으로 신성한 국가를 이루지 못하나니 , 이런 민족이 날로 새로운 정신과 새로운 행동으로 구습(舊習)을 버리고 새 길을 찾아서 날로 분발 개진하여야 지나간 40년 동안 잃 어버린 세월을 다시 회복해서 세계 문명국 에 경쟁할 것이니, 나의 사랑하는 삼천만 남여(男女)는 이날부터 더욱 분투용진(奮鬪勇進) 해서 날로 새로운 백성을 이룸으로써 새로 운 국가를 만년반석(萬年盤石) 위에 세우기 로 결심합시다.

 

1948년 7월 24일

대통령 이승만(李承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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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이승만대통령의 위대한 지도자적인 모습은 "육군사관학교"를 설립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육군사관학교는 1951년에 출발합니다.
1951년은 한국전쟁이 진행중이었던 시기입니다.
한국 경제는 보릿고개를 넘지 못한 아주 가난한 나라에서 미국식 육군사관학교를 설립하도록 지시한 것은 굉장한 의미가 있습니다.
육군사관학교는 철저하게 미국의 육군사관학교(웨스트포인트)의 교육 방법을 비롯하여 모든 것을 그대로 도입하여 철저한 교육을 시켰습니다.
전쟁 중에 젊은 엘리트들을 4년 동안 훈련시킨다는 것은 주위에서 쉽게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대통령은 최고의 음식, 시설, 복장, 훈련 등을 책임질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협력한 것입니다.
물론 경제적 지원은 미국의 팬플리트 장군의(James Alward Van Fleet,  1892. 3. 19~1992. 9. 23) 도움을 받아서 진행하였다고 합니다.

유럽에서는 장교는 귀족 계급만이 임명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식 장교는 정규 사관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이 장교로 임명을 받았기 때문에 유럽과 미국식 장교의 출신 성분이 다를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한국에서 제1회 육군사관학교 졸업생들(11기, 정규 1기)은 군은 생명을 바치고 전쟁에 참여하는 사람이라는 군인정신이 뚜렷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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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조, 주기도, 십계명


사도신조

- 사도신경(복음의 7대 연합이 담겨진 내용)

사도신경(使徒信經, 라틴어: Symbolum Apostolicum) 또는 사도신조
기독교에서 사용되는 신앙고백의 하나로 주로 서방교회에서 기도문으로 활용한다.
'로마신조'서 유래한 기독교인들의 신앙고백문으로 주기도문(마태복음 6:9~13)과 달리 성경에는 나와 있지 않다.

사도신경(使徒信經), 사도신조(使徒信條), 종도신경(從徒信經)

서방교회의 주요 기독교 교파가 사용하는 신앙 고백문이다.
교회 공동체에서 기본적으로 믿어야 할 교의를 요약 정리하고, 초기 교부들과 공의회 등이 재확인하고 천명한 주요 교리 해석에 대해 동의하며 이에 대한 믿음을 약속하는 내용으로, 주로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을 대신하여 암송된다.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 대신에 사도신경을 사용하는 것은 동방교회에서는 인정하지 않는 서방교회의 고유한 전승이다.

본래 로마 지역의 교회에서 세례를 받을 때 사용하던 신앙고백문에 기초하여 발전했다고 추정한다.
하느님의 전능함, 창세의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죽음의 과정과 부활, 승천, 심판에 대한 예언, 성령과 교회 공동체에 대한 믿음, 부활과 영생에 대한 믿음을 차례로 약속한다.

2세기 무렵부터 영지주의 및 몬타누스주의 등 이단 사상이 대두되자 기독교가 신앙을 정립하고자 정했다고 보고, 이 신조에 의거하여 이단을 구분한다.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사람은 파문된다.
따라서, 사도신경을 외워 이에 대한 믿음을 선서하지 못하면 곧 이단이기 때문에 기독교 공동체 내에서 효과적인 신앙 검증 도구로 기능한다.

개신교 측에서는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복음 16:16)라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토대로 만들어졌다고 보기도 하며, 사도의 신앙고백이라는 말을 사도적 권위의, 즉 성경의 내용을 잘 요약하여 권위가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참고로 사도신경의 전해지는 이야기 중에 사도들이 예루살렘에서 만방으로 선교를 위하여 흩어지기 전에 한 구절씩 붙여서 만들었다는 전설이 있지만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에서도 이 전설이 사실이 아니라고 부정한다.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I believe in God, the Father Almighty,
Maker of heaven and earth,
and in Jesus Christ,
His Only Son our Lord,
who was conceived by the Holy Spirit,
born of the Virgin Mary,
suffered under Pontius Pilate,
was crucified, dead, and buried
He descended into hell
The third day He rose again from the dead
He ascended into heaven,
and sitteth on the right hand of God
the Father Almighty
from thence
He shall come
to judge the quick and the dead.
I believe in the Holy Spirit,
The Holy Universal Church,
The Communion of Saints,
The forgiveness of sins,
The resurrection of the body.
And the life everlasting,
Amen.

주기도

주님의 기도는 기독교의 기도문이다.
천주경(天主經, 라틴어 : Oratio Dominica), 주의 기도, 주기도문(主祈禱文)으로도 부른다.
예수가 직접 가르쳐준 기도문이며 교파를 막론하고 중요하게 여겨지는 기도문이다.

마태복음 6:9절에서 13절,
누가복음 11:2절에서 4절에 그 내용이 실려 있다.
대개는 마태복음서에 있는 내용을 위주로 채택하고 있다.
일부 기독교인들, 특히  개신교에서는 이 기도를 영광송으로 마무리한다.

그리스어 원문

Πάτερ ἡμῶν ὁ ἐν τοῖς οὐρανοῖς·
ἁγιασθήτω τὸ ὄνομά σου·
ἐλθέτω ἡ βασιλεία σου·
γενηθήτω τὸ θέλημά σου, ὡς ἐν οὐρανῷ καὶ ἐπὶ τῆς γῆς·
τὸν ἄρτον ἡμῶν τὸν ἐπιούσιον δὸς ἡμῖν σήμερον·
καὶ ἄφες ἡμῖν τὰ ὀφειλήματα ἡμῶν,
ὡς καὶ ἡμεῖς ἀφίεμεν τοῖς ὀφειλέταις ἡμῶν·
καὶ μὴ εἰσενέγκῃς ἡμᾶς εἰς πειρασμόν,
ἀλλὰ ῥῦσαι ἡμᾶς ἀπὸ τοῦ πονηροῦ.
[Ὅτι σοῦ ἐστιν ἡ βασιλεία καὶ ἡ δύναμις καὶ ἡ δόξα εἰς τοὺς αἰῶνας. ἀμήν.]


라틴어 버전[1]
Pater noster, qui es in caelis:
sanctificetur Nomen Tuum;
adveniat Regnum Tuum;
fiat voluntas Tua, sicut in caelo, et in terra.
Panem nostrum cotidianum da nobis hodie;
et dimitte nobis debita nostra,
Sicut et nos dimittimus debitoribus nostris;
et ne nos inducas in tentationem;
sed libera nos a Malo. Amen.
(Quia tuum est regnum, et potestas, et gloria in saecula saeculorum.)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들을 용서하듯이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시고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것이나이다. 아멘)

Our Father in heaven,
hallowed be your name,
your kingdom come,
your will be done,
on earth as in heaven.
Give us today our daily bread.
Forgive us our sins
as we forgive those who sin against us.
Save us from the time of trial
and deliver us from evil.
For the kingdom, the power, and the glory are yours
now and for ever. Amen.

The Study of the Lord’s Prayer (Matthew 6:9-13, Luke 11:2-4;  March, 1931)

 9"This, then, is how you should pray: "Our Father in heaven, hallowed be Your name,
 10 Your kingdom come, Your will be done on earth as it is in heaven.
 11 Give us today our daily bread.
 12 Forgive us our debts, as we also have forgiven our debtors.
 13 And lead us not into temptation, but deliver us from the evil one. For Yours is the kingdom and the power and the glory forever, Amen.

2 He said to them, "When you pray, say: " 'Father, hallowed be Your name, Your kingdom come.
3 Give us each day our daily bread. .
4 Forgive us our sins, for we also forgive everyone who sins against us. And lead us not into temptation.

1. Introduction:

To know the syllabus of Christianity in a shortest period of time, it is a reasonable method and a shortcut among others to study the Sermon on the Mount, as I already said. To achieve the same goal, it is nearer to its goal to study the Lord’s Prayer, a part of the Sermon on the Mount.

Essentially, prayer is the pulse and crystal of the religion. Where there is no prayer, there is no religion; in all ages and countries, each religion has its own style of prayer. Each prayer manifests its relative height and authenticity of the essence of that religion clearly more than any other things. Especially, Christians have this model prayer that Lord Jesus Christ Himself gave to us; this concise phrase composed of 57 words in the original text contains the great truth of whole Christianity; it provides much convenience to those who want to learn Christianity.

Like this, the Lord’s Prayer is not only an important material to study whole Christianity but also it can be viewed as a separate teaching as Luke described by looking at its location, rather than viewed as a part of the Sermon on the Mount as Matthew conveyed; by taking this opportunity, we shall study the true meaning of important words, by considering it as a supplement to His teaching about the prayer in Matthew 6:5-6 within the Sermon on the Mount. To help readers to understand, Matthew had tendency to collect Lord’s teachings in fragments originally, and systematically arranged them by their common character; like he collected parables of the kingdom of heaven in chapter 13, the prophecy of His coming back in chapters 24 and 25, he arranged the issues of deeds and motives in the first part of chapter 6; he pointed out the standard of human behaviors in three paragraphs; good deed between people, namely charitable deed in the first paragraph, good deed between people and God, namely prayer in the second paragraph, and good deed toward individual self, namely fasting for self-culture in the third paragraph. When he was discussing about prayer, he inserted the Lord’s Prayer in the middle; so the repeating clause at the end of those three phrases, ‘and your Father who sees in secret will Himself reward you openly’ was not connected orderly manner as we can see. (Matthew 6:4, 6, 18) Verses 7-15 regarding the Lord’s Prayer seem to be additional compilation of other things; consequently the timing of His teaching of the Lord’s Prayer seems not to be the early part of His missionary work around Galilee, namely the timing of the Sermon on the Mount.

On the contrary, according to Luke, “And it came to pass praying in a certain place, when He ceased, that one of His disciples said to Him, ‘Lord, teach us to pray, as John also taught his disciples.’ So He said to them, ‘When you pray, say: (Luke 11:2-4).” It is many scholars’ opinion that Luke’s quotation is probably closer to what Lord Jesus taught them originally, based on the fact that the reasoning of situations is more natural and the text is short and clear. But, they are very similar in general and there is little difference in their substance; so we will explain it by following the Book of Matthew for convenience’s sake now.

All churchgoers can recite the Lord’s Prayer; even kindergarteners learned to memorize it freely without looking at the Book. But, the name of it causes misunderstanding now and then; of course, the Lord’s Prayer does not mean that Lord Jesus used to pray like this for Himself; Lord taught a model prayer to disciples who asked for one. Since Lord taught us the Lord’s Prayer, believers should make it a model of our prayer; but "This, then, is how you should pray:” does not mean that we should repeat the outwardly ‘pattern’ of the Lord’s Prayer as it is; He was not asking us to adhere to its phrases as He taught us. If we do, it is against His original intention of teaching the Lord’s Prayer. Therefore, He taught us how to pray, simply following ‘the essential points’ and its ‘spirit’ and knowing what you pray for. While we can pray using completely different phrases for the same purpose of the Lord’s Prayer like Luther, the majority of believers recites the Lord’s Prayer many hundred times without a single mistake but their spirit runs counter to the spirit of the Lord completely just like south pole and north pole are diametrically opposed to.

The latter half of verse 13, the praise of glory, is not in the Gospel of Luke; and only recent manuscripts of the Gospel of Matthew include it; so scholars’ guess sounds reasonable that it was inserted after the Lord’s Prayer was used during a public assembly or a service; such a praising come to being at the end of this prayer is rather a manifestation of naivety, and it is not an unnatural thing like grafting a bamboo to a tree. When we exclude this praising at the end and the naming, ‘our Father in heaven’ at the beginning, the remainder in the middle is the essence of the Lord’s Prayer. The prayer consists of two sections; each section consists of three passages. In sum, the prayer consists of two sections, six passages, and fifty-seven words. This is the model of prayer for Christians, the greatest prayer of the world; the whole truth of Christianity, namely the administration of the universe, about which 66 books of the Old Testament and the New Testament convey, is completely contained in these 57 words. It is true what Luther said, “The lesser words are uttered, and the better the prayer is; the more words spoken, the worse it is.” Those, who cannot pray like a lecture with an intonation and a tune and so called a ’powerful’ prayer at great length, should be first of all relieved at the Lord’s Prayer.

The first section of the Lord’s Prayer is about Your (God’s) name, kingdom, and will, namely about the heaven. The second section is about our bread, forgiveness, and salvation, namely about the earth; the first section is for the heaven and the second for the earth, just like Moses’ Ten Commandments consist of two sections, one about God and another for men; He taught us that the beginning section of the prayer, that is the most important, should be about God. Indeed, the heart of what believers concerned the most should focus whether it is for the glory of God or not. Christ’s prayer did not leave this central issue at all times. Nearing the end when He was praying on the Gethsemane that if it were possible, the hour might pass from Him, sweating drops of blood in agony; and He said, “Abba, Father, all things are possible for You. Take this cup away from Me; nevertheless, not what I will, but what you will” (Mark 14:36). It was the manifestation of His most important issue, which He could not disregard for a short moment; to Jesus, it was His food and His living to do the will of God who sent Him, and to finish His work (John 4:34); His life and His prayer centered only on God from beginning to end. It does not need to explain any further that our most concerned issue should occupy the important first half of our prayer in an agreement with Him.

The second section deals with earthly issues, but only one issue is about flesh and other two deal with the issues of redemption and salvation; we should also pay attention to the fact that He prayed thinking about brothers and sisters and all other people, always expressing ‘our daily bread’, ‘our debts or sins’, and ‘lead us not into temptation’. According to our experience of daily life, a matter of flesh is more urgent than a spiritual matter; I can pray sincerely for the medical treatment of my illness, for my family living, for the sanctification of myself, and for the redemption of myself, rather than for my brethren or countrymen. We are thoroughly self-centered. Our human nature makes us to believe that our brothers and sisters exist for me, having faith is for my happiness; we even try to take advantage of God for our self. Yet, Jesus Christ taught us how to pray: Pray more about spiritual things than things of flesh, for ‘us’ rather than for ‘me’, pray for the salvation of the countrymen or the mankind rather than wishing for the happiness of one individual, and thirst for the glory of God more than for any other things.

When He gave us the model prayer, His purpose was to teach His disciples who did not know how to pray (Luke 11:1); at the same time, He clarify that there is the intrinsic difference between a babbling pagan’s prayer and a dialogic prayer to Abba Father. However, some misunderstand the meaning of ‘our’, and interpret that this prayer it should be recited together during their congregational service; or by taking ‘this is how you should pray’ literally, others read it deliberately, just like Buddhists chant ‘May Buddha’s blessing be upon us!’ for hundreds of times counting beads of a rosary; they believe they are accumulating virtuous deeds by doing so, because they completely forgot the intent of the Lord’s Prayer. So, Luther called the Lord’s Prayer ‘the greatest martyr’; ‘our’ should be understood that we should pray more for all believers and mankind rather than for one’s individual happiness.

According to the opinion of scholars, what Jesus personally taught about prayer when He was addressing the Sermon on the Mount is only Matthew 6:5-6; later when Matthew was editing the Lord’s Prayer in this section, he inserted verses 7 and 8 as the introduction of the Lord’s Prayer. Even if Matthew inserted it, it is very important; as Luke provided definite materials to understand the Lord’s Prayer outwardly about time and place, Matthew prepared indispensable materials to understand the Lord’s Prayer inwardly about its motive and purpose.

When we pray to living God, preliminary knowledge we should have is: we should not babble like those who pray to an idol that does not have either an ear or an eye; we are not praying to a god like a stranger who does not watch over us and who does not like to give us any; when we pray, we should be conscious that we are asking to Father who knows our necessities of life before we ask for them and He cannot wait to give us rather good and valuable things even if we ask for bad and mean things (Matthew 7:11). When we receive the Lord’s Prayer with such preparation, we can naturally understand the reason why there is no other comparable thing. (Refer verses 7 and 8 to the Sermon on the Mount) 

2. Calling Name:

Our Father in heaven (Matthew 6:9)

Luke wrote only ‘Father’; some scholars guess Luke’s is original form after all, and Matthew supplemented ‘our’ and ‘in heaven’ later for being concerned about confusion with gods on earth and own father; on the other hand, since no one would pray to gods on earth or to own father by calling ‘Father’, there is no chance for a confusion. So, if Matthew added ‘our’ and ‘in heaven’, other scholars think there are profound hidden meanings, and add all sorts of explanations about them. After all, let us leave details to the leisurely work of scholars; what is important to lay believers is to grasp its main point of this verse. Namely, there is no room to suggest any objection to the fact that the main point of Jesus’ teaching was to call ‘Father’ when we pray, that is common in Matthew and in Luke. Jesus told us to pray, calling ‘Father!’ to God who created universe and all things in it, who led out Israelites, and who has administered the history of the world.

By understanding one word, ‘Father’, we can understand the Lord’s Prayer; consequently, it is such an important word that we can even understand the outline of Christianity by understanding it, just like we can glance at Paul’s faith in general from Roman 1:1, whole Christianity is contained in beginning verses of Genesis, and the outset of the rest of books of the Bible manifest the most important truth. Now, depending on our attitude of taking this one word ‘Father’, we can either become one who can truly pray the Lord’s Prayer that is unique in Christianity, or else we can fall into grievous state; as an old saying goes ‘people are born Catholic’, some people try to feel ecstasy by submerging oneself into so-called religious atmosphere by turning the Lord’s Prayer into a skeleton again by chanting it ever so many times like Buddhists do, even though Jesus taught us to stop babbling.

Jesus Christ was not the first who called God as ‘Father’; according to scholars, examples had not been rare since Homer the great poet of all ages, and especially around Jesus’ time, an idea to call the creator as father was the fashion. But, the ‘fatherly god’ whom the great poet Homer imagined could not get out of the sphere of imagination after all; it was not far from the level of the ‘UNKNOWN GOD’ of people in Athens (Acts 17:23). In their imagination, they could not find One like God of Israelite who held Abraham’s wrist when he was going to sacrifice Isaac, and who had Moses to lead Israelite across Red Sea and wilderness.

In the Old Testament, God was called as ‘Father’ in many verses in the clearer sense: “You are the children of the Lord your God (Deuteronomy 14:1). “Is He not your Father, who bought you? Has He not made you and established you”(Deut. 32:6)? Their relationship was: “I will be his Father, and he shall be My son. If he commits iniquity, I will chasten with the rod of men and with the blows of the sons of men” (2 Samuel 7:14). (Refer to other verses: Isaiah 1:2, 63:16, Jeremiah 3:4, 19, Hosea 11:1 etc.) What is more, the Lord said, “Israel is My son, My firstborn.” They understood that they had special relationship.

But Israelite was son or firstborn as a whole nation, but not as an individual capacity. And, the nations other than Israelite were not included in it. In those days, His only begotten Son (John 3:16) came down to the world, to whom a voice came from heaven, “You are My beloved Son, in whom I am well pleased” (Mark 1:11, 9:7, Isaiah 42:1). After we heard His proclamation that said: ‘He who has seen Me has seen the Father’ (John 14:9), “we cry out, ‘Abba, Father’, for we did not receive the fearing spirit of bondage again, but we received the Spirit of adoption” (Roman 8:15, Galatians 4:6). Since that time, God and mankind entered into a special relationship of Father and children, which was unseen in the past. And, not being limited to Israelite, all mankind was able to call God, ‘Abba, Father’ through Jesus Christ (Matthew 5:45, Luke 6:35). We can say that the view of paternity toward God reached its climax.

As I mentioned it before, it is wrong to interpret ‘our’ to mean for us to use this prayer in the congregational assembly. The One who taught us to pray only before God ‘in the secret place’ would not teach us such an obvious contradiction. We should interpret this ‘our’ as His teaching, always to pray for brothers and sisters, for public benefits over personal happiness, to precedence of mankind over individual, even when you pray in the secret place. Of course, it does not mean that you should not pray for one individual or for personal matters. Paul prayed three times for his flesh (2 Corinthians 12:8). The main point depends on what the mental motive is.

Especially ‘Matthew used the phrase ‘in heaven’ many times, about 20 times, and Mark and Luke each used once. It is possible that he used it to distinguish Him from earthly father; those phrase ‘in heaven’ can possible remind of God who is omnipotent, omniscient, full of ‘agape’, who administers all creatures of the universe, transcending high above this world, and who is on the throne that is radiating immeasurable glory. Christ taught us to call ‘Father’ to God when believers pray. How can we possibly explain that profound and limitless secret meanings are concealed in this phrase? When Christ wanted to convey a message to mankind about Heaven, He likened it to a vineyard or a mustard seed or a grain of wheat or Him and the church as a bridegroom and a bride. For each case, Christ labored painfully about the method of His expression; ‘what parable to be used?’ or ‘how should He say it?’ When the Sadducees, who say there is no resurrection, came to Him and asked Him a difficult question to be answered; in the resurrection, what happen to woman who married to seven brothers? Jesus answered and sighed out to them, “You are mistaken, not knowing the scriptures or the power of God.” We can imagine how difficult for Him to deliver a message about things He saw in Heaven to fleshly people who did not understand it. Salt and sugar are seasonings, preservatives, and white color; but when He called Christians as ‘the salt of the earth’, there was an inevitable necessity. A father or a mother is same parent in relationship; but when He taught us the relationship with God as Father and son, there was an important reason. We do not call Him king, master, judge, or creator, etc., but we do call Him simply ‘Father’. Our relationship is completely personal; whipping for justice on the one hand but serious love at the other hand, and fearing Him but enjoying His grace, etc. If one utters this single word ‘Father’ lively, his whole prayer becomes live. Conversely, if this word becomes lifeless, those who pray are “people who draw near Me with their mouths and honor Me with their lips.”(Isaiah 29:13)

3. The First Supplication (April, 1931):

Matthew 6:9 (Refer to Luke 11:2): Hollowed be Your name.

In olden days, a governor asked to a commendable person within his jurisdiction, “What is your wish?” If his wish was suitable – if the governor could comply with it, his wish was realized. King Herod brought the daughter of Herodias and swore to her, “Ask me whatever you want, and I will give it to you. I will give you up to half of my kingdom” As Herodia instigated, the girl asked for the head of John the Baptist; so the blood of righteous man was shed (Mark 6:17-30). There was a girl of only ninth grader on a deathbed, and her bright uncle in a college was staying at her bedside. When her doctor informed him that her last moment was getting close, he asked her, “Hay, what is your wish? Tell me! I will make sure your wish come true, even if I quit my schooling or exchange my life with yours.” Girl’s wish was very simple, “I wish simply to live.” It was a genuine feeling, without any trickery, to give his life in place of hers; but it was impossible to do so. Even though he tried to emphasize ‘the doctrine of the immortality of the soul’ since Socrates, based on his knowledge gained from the introduction to philosophy class, for a considerable length of time, not only she was not much consoled but also he who was asserting emphatically was feeing emptiness himself. 

It is impossible to have a man without a wish. But, when we want our wishes to be heard, we better know who is listening to us. We should ask to the governor something within his jurisdiction, to King Herod something within the boundary of Philistine, but we should know that there is nothing out of a notebook of a college student in the introduction of philosophy class can console the soul of a young girl who was leaving this world she was so much attached.

We are asking our wishes to omnipotent God who created heaven and earth, all creatures in the universe and rule over them; we are not bowing before granite strangely formed by weathering or toward an idol shaped and plated with gold by human hands; still, we are not confessing and submitting to a powerful tyrant. We are telling our wishes to God, calling Him, “Abba, Father!” The One who hears our wishes is the omnipotent One who rules the universe, and calling Him, “Abba, Father!” reflects the mentality of whole Christians. Then, when we call Him Father, with whom we have loving personal relationship, what is our first supplication? Like the mother of Zebedee’s sons, entreating Him to grant that two sons may sit, one on His right hand and the other on the left, in His kingdom, is because we can not discriminate what to ask for (Matthew 20:20-22). We are entreating to the Ruler of the universe, being on terms of intimacy of Father and son; wishes suitable to children of Father.

The greatest and the most sincere wish should be “hollowed be Your name”; namely the name of God should be made holy. We have intimate relationship with God, when we call Him ‘Father’; that does not mean we can be too close to Him while being ill mannered. We ought to realize that the hearer of Christian’s prayer, calling Him Father, is the Almighty God who rules over the universe. He is the Holy Being, who is holy, holy, and limitlessly holy; we have to take our sandals off our feet and we cannot draw near Him (Exodus 3:5, Acts 7:33, Joshua 5:15). People hid their face before the Holy One, for not daring to see Him (Exodus 3:6, Isaiah 6:5, 1 King 19:13). When we pay reverence rightly due to God by acknowledging the Supreme and Holy One, the intimate Father-son relationship can be established justifiably. If there is the deficiency in the degree of our reverence, our Father-son relationship becomes impure. (The view of God in modern men has been deformed in this respect.) Therefore, Christian’s wish begins with adoration or worship toward God.

The phrase, “hollowed be Your name”, is to express our wishes indirectly altogether, because it is toward the Supreme Holy God Himself. We express our wishes indirectly, because the connotation of this indicates that people do not have power to make God holy or God Himself does not manifest His holiness, but God manifest His glory through mankind and all other creatures.

It is a cordial expression to call “Your name” to be hollowed, instead of directly calling “God”. Israelite who considered them to be the chosen people of Jehovah and the hair of God, they feared God too much to call God’s name, and they forgot to pronounce it. It has been a long custom in Korea too that people awe to call father’s name. Besides, ‘name’ clearly reveals the intrinsic nature of the entity; therefore, saying ’Your name’ to be hollowed, instead of ‘God’, expresses the intrinsic nature of God clearer. There are numerous such examples in the Bible: “He gave the right to become children of God, even to those who believe in His name” (John 1:12). “Let those also who love ‘Your name’ be joyful in You” (Psalm 5:11). “Through ‘Your name’ we will trample those who rise up against us” (Psalm 44:5). The ‘name’ of the Lord is a strong tower; the righteous run to it and are safe” (Proverb 18:10). “I will proclaim the ‘name’ of the Lord before you (Exodus 33:19). We can find more examples elsewhere. ‘The name of Christ’ in the New Testament also indicates the entity in the same way.

Greek word ‘hagiastheto’ is translated into ‘be hollowed’, or ‘become holy’. God becomes holy, when we render to Caesar the things that are Caesar’s, and to God the things that are God’s (Mark 12:17), when we consecrate even a earthen vessel to be used as one for an altar; namely, when we face the Most Holy God with honor and worship which are naturally due to holy entity of God.

The name of God is intrinsically holy without waiting for the honor and worship of mankind. But, since the corruption of Adam, gentiles were: “What may be known of God is manifest in them, for God has shown it to them. For since the creation of the world His invisible attributes are clearly seen, being understood by the things that are made, even His eternal power and Godhead, so that they are without excuse, because, although they knew God, they did not glorify Him as God, nor were thankful, but became futile in their thought, and their foolish hearts were darkened. Professing to be wise, they became fools, and changed the glory of the incorruptible God into an image made like corruptible man and birds and four-footed beasts and creeping things. They exchanged the truth of God for the lie, and worshiped and served the creature rather than the Creator, who is blessed forever. Knowing the righteous judgment of God, that those who practice such things are worthy of death, not only do the same but also approve of those who practice them” (Roman 1:19-23, 25, 32). At the same time, Paul said to Israelite, “You who make your boast in the law, do you dishonor God through breaking the law” (Roman 2:17-29)? And, through Ezekiel God said, “I will sanctify My great name, which has been profaned among the nations, which you have profaned in their midst” (Ezekiel 36:23).

Neither honor nor worship due to intrinsic nature of God was found among either gentiles or Israelite. In such time, hallowing God’s name means gentiles and nonbelievers began to listen to the sound of conscience of each individual and the earth shall be full of the knowledge of the Lord as the waters cover the sea (Isaiah 11:9); so firstly, the glory of God will be manifested since they realized to worship the Lord who created the universe rather than all created things without exchanging the incorruptible honor of God with corruptible idols, and they honored and worshiped God appropriately by acknowledging God; secondly, the holiness of God is manifested when Jews and Christians make God pleased by obeying the words “You shall be holy, for I the Lord your God am holy” (Leviticus 19:2, 1 Peter 1:15), they present ‘their bodies as a living sacrifice’ to God (Romans 12:1). This is the relationship, “He who sees you (believers) sees Me (Christ) and he who sees Me sees Him who sent Me.” Not only Christ taught us so, but also His prayer and His whole life were centered on how God’s name could be hallowed; “Father, glorify Your name” (John 12:28) and “I have glorified You on the earth. I have finished the work, which You have given Me to do (John 17:4).

4. The Second Supplication:

Matthew 6:10 (Refer to Luke 11:2): Your kingdom come.

“Kingdom” is “Your kingdom”: Namely, a kingdom ruled by the authority of Jehovah God. And, the original word ‘basileia’ means ‘kingdom’ so it does not mean a constitutional government or a republic, but an autocratic monarchy. Then, when you unconsciously and mechanically recite Lord’s Prayer, by saying ‘Your kingdom come’, we ought to realize that we are declaring our wish that is completely contrary to the current of modern thought. The meaning of ‘Your kingdom come’ does not mean that we are praying for the completion of the self-government, the realization of socialism, or founding a communist government; on the contrary, we are entreating for God to administer an autocratic monarchy. All modern mankind, especially young Koreans are displeased with ‘dictatorship’, ‘autocracy’, or ‘kingdom’. We should realize that it is not an ordinary thing to pray for God’s kingdom to come quickly even if we understand with our clear consciousness that autocratic God rules the kingdom.

Greek word ‘elthato’ was translated as ‘arrive’ in old versions but as ‘come’ in newer versions. ‘Your kingdom come’ is one simple sentence. Its meaning seems to be self-evident but this seemingly self-evident sentence is one of rare examples which have been interpreted in many different ways from olden times till now. For example, if 500 believers recited it in unison in a church, each one would visualize different kingdom as they interpreted it 500 different ways. (Omitted about 5 lines, which explained how Japanese and Chinese translated in their Bible.)

‘Come’ can be interpreted as it comes gradually, namely it advances and progresses little by little; ‘Your kingdom come’ can be taken as ‘Heaven comes on earth gradually’, and if it is lopsided, a church turns into a superficial charity organization which devoted itself to the movement of building Heaven on earth zealously. Of course, each one will have different idea about the concept of Heaven built on earth. Everyone can picture the Heaven of his own: some religious people will imagine the mansion of a missionary as Heaven on earth; some learned people might be envious of the golden state,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as the shadow of Heaven; or Denmark in the matter of agriculture, or communist Russia, or any other thing of individual choice.

On the other hand, by rejecting such gradual, progressive view of Heaven, some pious devotees take eschatological interpretation of ‘come’ that the perfect kingdom of God will be established later on the Second Advent, for they regard the movement of building Heaven on earth as a heretic. However, in reality, every one of those who take eschatological view will of course have his own imagination and belief when it comes to detail such as the timing of the Day of Judgment, the form and substance of the kingdom after its establishment, etc. Also, some who take eschatological view do not reject progressive view at all, while some who take progressive view wish the completion of Heaven as their final object; they are subtly intertwined in reality. Each case cannot be discussed in detail here; we just want to study the substance of the meaning of ‘Your kingdom come.’

Originally, Israelites strongly have longed for the coming of the kingdom of Messiah. Therefore, when Jesus was spreading Gospel of Heaven after John the Baptist was arrested, people tried to make Jesus a king, namely they tried to establish the kingdom of Messiah; that 12 disciples dreamed of the Messianic kingdom at the end can be learned from the betrayal of Judas Iscariot, Peter’s admonition (Mark 8:32), and the request of James and John, the sons of Zebedee (Mark 10:37), etc. If we examine this thought from the Old Testament: The Lord says, “Sing and rejoice, O daughter of Zion! For behold, I am coming and I will dwell in your midst” (Zechariah 2:10). Ezekiel said, “My tabernacle also shall be with them; indeed I will be their God, and they shall be My people (37:27). “And the name of the city from that day shall be: The Lord Is There” (48:35). Isaiah said, “The stretching out of his wings will fill the breadth of Your land, O Immanuel” (Isaiah 8:8).

If we read other verses such as Isaiah 25:8, 35:10, 65:17, 19 and 2 Chronicles 6:18, etc., they prophesied repeatedly that the old shall be gone and the new will come; that God will swallow up death and will wipe away tears; that sorrow and sighing shall flee away and new heavens and a new earth will be created; that the imperfect world shall be gone and the perfect Kingdom of Messiah will come. This idea continued till the New Testament era and righteous and pious people longed for this kingdom to come. “Now there was a man in Jerusalem called Simeon, who was righteous and devout. He was waiting for the consolation of Israel, and the Holy Spirit was upon him” (Luke 2:25). Joseph of Arimathea, a prominent member of the Council, who was himself waiting for the kingdom of God, went boldly to Pilate and asked for Jesus’ body (Mark 15:43). “Those who went ahead and those who followed shouted, “Hosanna! Blessed is he who comes in the name of the Lord! Blessed is the coming kingdom of our father David! Hosanna in the highest heaven” (Mark 11:9-10)! “While they were listening to this, he went on to tell them a parable, because he was near Jerusalem and the people thought that the kingdom of God was going to appear at once” (Luke 19:11). We can understand the situation how righteous people at the time of Jesus longed for the Kingdom of God, namely the kingdom of Messiah that was promised through prophets. When this came to disciples, this heavenly news became clear as an established fact visible to us as Paul said, “Now there is in store for me the crown of righteousness, which the Lord, the righteous Judge, will award to me on that day—and not only to me, but also to all who have longed for his appearing” (2 Timothy 4:8). Of course, it was because the meaning of ‘heaven’ and ‘come’ became clearer when Jesus, who had been in God’s bosom, came down from heaven. So, let us find the meaning of ‘Your kingdom come’ as written in the New Testament with words as spoken by Jesus in the following.

The first evangelical voice of Jesus was, “Now after John was arrested, Jesus came into Galilee, proclaiming the gospel of God, and saying, “The time is fulfilled, and the kingdom of God is at hand; repent and believe in the gospel” (Mark 1:14-15). That was what John the Baptist, who came to ‘prepare the way of the Christ, and make His paths straight, proclaimed on the shore of the Jordan River, “Repent, for the kingdom of heaven is at hand” (Matthew 3:2-3)! And the first sentence of the Sermon on the Mount was, “Blessed are the poor in spirit,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Matthew 5:3). Once, on being asked by the Pharisees when the kingdom of God would come, Jesus replied, “The coming of the kingdom of God is not something that can be observed, nor will people say, ‘Here it is,’ or ‘There it is,’ because the kingdom of God is in your midst”(Luke 17:20-21); and He said, “But if it is by the Spirit of God that I drive out demons, then the kingdom of God has come upon you” (Matthew 12:28). Namely, He meant that the kingdom of God has come within us already. And, He also talked about the development and accomplishment of the kingdom of God; He told them another parable: "The kingdom of heaven is like a mustard seed, which a man took and planted in his field” (Matthew 13:31). Regarding its completion, He said, “And this gospel of the kingdom will be preached in the whole world as a testimony to all nations, and then the end will come.” And, He also said, “For I will not drink wine again until the Kingdom of God has come" (Luke 22:18. Refer to Luke 23:42, Matthew 28:9, Acts 3:21).

To conclude based on above verses, we should not be infatuated with others who said “Here it is, or “There it is,” and it has come within us or in our midst; we should not insist it to be today or tomorrow, for it has come already to believers and to people who are born again; it is not enlarged by the campaign or work of people, the kingdom of heaven become flourishing like a mustard seed while the Words of God are being spread to the world like a farmer is watering to seedlings; if we, together with all creatures in the universe, heartily long for the kingdom of God where the righteous sun shines and receive it as a little child will (Luke 18:17), we shall see that our prayer will be answered in the end.

When a Christian prays “Your kingdom come,” he does not necessarily wishing for an earthly paradise; he does not aspire to attain improved living conditions. We are praying that self belong completely under the reign of God, and that whole world obey thoroughly to the rule of God. Therefore, people who have tasted the bitter taste of life are able to do such a prayer; it should be like the prodigal son’s feelings, “But when he came to his senses, he said, “How many of my father’s hired men have more than enough bread, but I am dying here with hunger!” (Luke 15:17); it must be wailing repentance of people whom God gave over to a depraved mind because they did not like to retain the knowledge of God (Romans 1:28-32); this kind of prayer can well up from people who share the feelings of the psalmist of Psalms 13.

5. The Third Supplication (September 1931):

Matthew 6:10: Your will be done on earth as it is in heaven.

This third supplication of the Lord’s Prayer as we remember is recorded only in the Book of Matthew, not of Luke. Therefore, some people think this third supplication is relatively less important part of the Lord’s Prayer, but it is definitely not so. On the whole, as all the members of one organic body have equal value (1 Corinthians 12:12-31), no part of the Lord’s Prayer can possibly be eliminated, leaving other parts alone. When we utter the Lord’s Prayer as living words out of our mouth, the first sound ‘Father’ comprehends the whole Prayer as mentioned before. Next, the first supplication, ‘Hollowed be Your name’, is filled with great truth that cannot be expressed adequately with speech or writing. The first half of the Lord’s Prayer is claimed to be related to spiritual things or important things directly related to God, but the part belong to the second half is not entirely concerned about fleshly things, worldly things, or self-interest or selfish desire. If we can chant the last word ‘amen’ in unison with full liveliness, we may discover the complete meaning of the Lord’s Prayer and grasp the Christianity on the whole. This is not to trifle with a paradox under no circumstances. If we touch any part of a living creature, we can feel the lively throb of life.

If the Lord’s Prayer becomes ‘the greatest martyr’ as Luther called and only the skeleton of it is being recited repeatedly, part of it might be useless and other part might be particularly important phrase. If it is not such a skeleton, all parts of it should have equal importance. Therefore, instead of making the first supplication as the annotation of the second and the third supplications or including the first and the second supplications in the third supplication as some scholars’ leisure work, we want to carefully consider how the third supplication is related to our faith. If we rewrite the verse: “Your will be done on earth as it is in heaven.” Without saying who prays or what religion he has, the purpose of a prayer has been to achieve ‘the will of self’ through all ages; we pray in an attempt to attain our wishes which are secretly kept at the bottom of our hearts; in many instances, we usually pray for wealth, fame, a distinguished achievement, or the blessing of descendents. There are many remains where Sung-gye Lee (The founder of Lee Dynasty in Korea.) and other heroes prayed for 100 days to attain a throne or power; these simply show what kind of usual prayers our ancestors have had.

Yet, it is surprising that the prayer Christians should do is completely different; we should pray not for our wishes to be achieved but ‘Your will be done.’ Usually, we pray to realize our will, and we cannot pray unless our will has been moved. Nevertheless, Jesus wants us to pray ‘Your will be done’. Needless to say, ‘Your’ means ‘God’s; there is no such a contradictory concept. Therefore, a certain scholar called this phrase ‘the suicide of prayer’; he had a point. We pray to accomplish our will, but we pray for God’s will be done; it is worse contradiction than a living creature suicides. But, this contradictory concept distinguishes Christian’s prayer from that of a pagan. This is an important point that shows a unique feature of Christian’s prayer.

It does not mean that a Christian should not have a wish for himself. Paul said, “Do not be anxious about anything, but in every situation, by prayer and petition, with thanksgiving, present your requests to God” (Philippians 4:6). Request to God ‘in every situation’: It does not mean that you request only noble and spiritual things, without asking for daily bread: Of course, it does not mean that you should ask for like an adult, not like a child, does. Everything is permissible, so just ask for it. Also, do not adhere to face-saving or do not take heed to emotion arising in social circles. At times, wrestle until dawn as Jacob wrestled with God (Genesis 32:24), or we might demand persistently for a year or even for our lifetime, even if we lose our face. And, God is pleased with such a prayer of trust, enthusiasm, and honesty; it is a separate issue whether He answers our prayer or not.

However, we ought to know that we can pray to our Father. Since we are praying to Father, there should be no distance; since we are asking to our Father, we should ask without hesitation or without doubting His love, even if our honest prayer has not resulted in effective answer or it seems to be so because He delays giving His answer. Namely, Christians may demand persistently and irrationally on one hand, but appending James’ condition: "If it is the Lord's will, we will live and do this or that" (James 4:15). It is not to accomplish my will by forcing God, but to get God’s answer if my wish matches His will. Jesus’ prayer on the mount Gethsemane most clearly teaches us this point: Going a little farther, He fell to the ground and prayed that if possible the hour might pass from Him. “Abba,Father,” He said, “everything is possible for You. Take this cup from Me. Yet not what I will, but what You will” (Mark 14:35-36). He started by stating His wish prominently, but He ended obediently to God’s will as melting wax in a hot summer day. He prayed wishing His prayer to be answered, and He would not stop praying because it would not be answered. Without concerning about its effectiveness, He expressed His trust to His Abba, Father. This is Christians’ prayer. Apostle Paul prayed three times for his flesh. Though he was not healed, he rather thanked to the Lord (2 Corinthians 12:8-10).

In the phrase ‘on earth as it is in heaven’, heaven where angels carry out God’s purpose obeying His will perfectly (Psalm 103:19-20, Daniel 7:10) is contrasted with earth that has been disobedient since the first man Adam. We are to pray that God’s purpose to be accomplished even on earth perfectly. ‘On earth as is in heaven’ is an independent clause, which can modify not only the third supplication but also the second and the third ones; there might be slight difference of connotation, but the meaning is similar in general. Therefore, the kingdom of God will come where God’s purpose is accomplished, and His name will be exalted perfectly in such a nation.

6. The Fourth Supplication:

Matthew 6:11: Give us today our daily bread. (Ref. Luke 11:3)

Those up to the third supplication were about heavenly things, but three supplications starting from the fourth supplication are about earthly things or about us. Among those three, the fifth supplication and the sixth one are about spiritual things, but the fourth supplication is completely about flesh. Therefore, since olden days, reverend fathers and some scholars claimed that this clause of seeking bread was unworthy of the divine nature of the Lord’s Prayer as a whole; by interpreting ‘bread’ in different meaning, they concluded that Lord surely taught us to seek for ‘spiritual bread’, for He would not have taught us to seek for inferior bread for flesh. There are numerous clauses in the Bible that support such an opinion.

Believers have food that the world does not know about (John 4:32); food for believers is to take the words of God and to do the will of God who sent Him (John 4:34). Believers already received the right to become children of God through the authority of Him (John 1:12); ‘but our citizenship is in heaven’ (Philippians 3:20). ‘Believers already have eternal life and will not be condemned; they have crossed over from death to life’ (John 5:24). No one who is born of God will continue to sin, because God’s seed remains in Him (1 John 3:9), for everyone born of God overcomes the world (1 John 5:4). Only thing for us to seek first is ‘His kingdom and His righteousness’ (Matthew 6:33); the thing for us to do is not ‘a matter of eating and drinking’ (Romans 14:17); the work of God is to believe in the One He has sent (John 6:29).

Looking at these verses, some heretics believed that interpreting ‘daily bread’ spiritually as ‘bread of God’ or ‘the true bread from heaven’ (John 6:32) would make the word of Christ more sacred; for it is the last thing that Jesus Christ would have taught us to pray for food of flesh and other five supplications of the Lord’s Prayer are all spiritual in nature.

Even though they did so to be faithful and devout to Christ, they ended up doing wrong to Christ. ‘artos’ in Greek means bread; but it means all necessary things for our living such as clothes, food, and house, needless to mention here. Scholars who toiled to interpret a word clearly referring to flesh as spiritual meaning made an error as great as their effort.

‘The Son of Man’ who grew up in poverty must have felt keenly the necessity of bread. He was not only the Son of God but also ‘the Son of Man’ with blood and flesh. He did not talk about an impractical theory or a futile argument just for a joke. He who was going to mitigate His hunger and thirst with figs knew well that ‘hunger makes us weak and thirst makes us impatient.’ By saying ‘Man does not live on bread alone, but on every word that comes from the mouth of God,’ He knew that He was a citizen of the kingdom of heaven as well as a Man living on earth; He also knew that He was a spiritual being who eats bread made of wheat flour for His bodily living just like other ordinary people. Believers are not different in earthly living; believers as well as nonbelievers live under the control of same laws for all matters; all of us are like earthen vessels, which are to be broken and are to be returned to soil soon. We have endless hope of throbbing with eternal life at one hand (2 Corinthians 4:7), and, at the other hand, our life is full of unbearable agony even though our life will disappear like a weed that cannot be found again where it used to be (1 Peter 1:24); in a way, believers have dual life. Therefore, that Jesus taught us to pray for daily bread for us to live bodily life is not a base teaching, definitely not a slip of the tongue, but a necessary prayer for the realities of life.

Yet, if we interpret it as shown above, there are timid scholars and devout believers who are concerned about praying for things for flesh as heathens do; even if bread clearly means food needed for daily living, they hold fast to their view that this one clause out of six must be base in comparison to others, by interpreting the asking phrase, ‘give us…’ was not taught by Jesus actively but He ‘permitted’ us to pray for flesh; at the other hand, by interpreting such a way, they want to see a clear difference from heathen’s prayer that asks for things for flesh in this world only.

We already mentioned it is wrong idea that praying for necessities for bodily living is base, and it is also wrong idea to differentiate our prayer from that of heathens based on the kinds of materials in our prayer. Of course, it is true that the prayer of Christians – like Lord’s Prayer – put more emphasis on heavenly things or spiritual things, while heathen’s prayer mostly asks for only things for flesh. But, it is all right that the fourth supplication of the Lord’s Prayer and heathen’s prayer are the same; for example, they can ask for the same materials. ‘The difference should be the attitude of the prayers, not the kind of materials they are asking for.’ Christians do not call on different gods to find one god who will answer their prayer effectively; they pray to their Father even if their prayers do not get answered. They pray heartily for their daily bread not only when they are in need but also when they are millionaires already, just like a slave watches the hand of his mistress. Not only they pray when they do not have job, but also when they completed good work at the end of a day, without eating bread as their right but considering themselves as an ‘unworthy servant’ (Luke 17:10).

God causes His sun to rise on the evil, and sends rain on the unrighteous; He raises the birds in the air and the lilies of the field. Even if we do not pray, we know we will have enough food to live on. Therefore, Christians pray not because they worry that God would not give them bread, nor because they feel poor in need of bread. Believers know well that their whole livelihood depends on God’s support. So, Christian’s prayer is nothing but an expression of a child who trust his father. So called Christian’s prayer is from all born-again Christians owing to Christ, the poor or the rich, the lowly or the noble, the sick or the healthy, who cannot hold back their trust from out-flowing toward God the Father. Not only it is not base for us with flesh to ask necessary things for bodily living but also it is natural thing to depend on and to trust father for all spiritual matters as well as even fleshly things, to be sure.

The Greek word ‘epiousion’ that is translated as ‘daily’ in the fourth supplication, has been interpreted in several different ways since olden days; (1) necessary for subsistence, (2) many scholars read as ‘on that day’, (3) but it might be most appropriate to read as ‘following day’ and interpret it as a prayer asking for ‘bread needed for future days’. Namely, if we pray in the evening, it means food for tomorrow, and if we do in the morning, bread needed to sustain our life for that day.

And, ‘today’ was used in Matthew, but ‘each day’ was used in Luke, and the forms of the verb ‘give us’ are different; meaning: Instead of ‘give us once’ in Matthew, give us ‘continuously’ in Luke; but, actually both mean the same. Namely, Luke was simply ‘asking for food needed for each day, today’s portion for today and tomorrow’s for tomorrow’, definitely not ‘to store so much of it that it will be consumed in several years’. The characteristic of this prayer lies where we ask for our daily necessities to Father who demands profound relationship to His children. (Refer to the parable of a rich man who built a larger warehouse in Luke 12 and the story about manna in Exodus 16.)

Thus, it is definitely not self-centered corruption to pray for bread in order to sustain our bodily life. As far as thorough God-centeredness is concerned, the first supplication of ‘hollowed be Your name’ and the fourth supplication of ‘give us today our daily bread’ are the same in essence; they are both equal expression of faith and identical manifestation of love. And, the spiritual as well as bodily life of believers is based on daily living in each day in principle; for the life in absolute faith can not be any other than daily living in each day (James 4:13-16). One, who can kneel before Father and pray naively ‘give us today our daily bread’ as Christ did, is blessed because he is poor in spirit and the kingdom of heaven is his (Matthew 5:3).

7. The Fifth Supplication (October 1931):

Matthew 6:12: Forgive us our debts, as we also have forgiven our debtors. (Refer to Luke 11:4)

Though we are not the same as King David, who said, “…according to your great compassion, blot out my transgressions” (Psalm 51:1), all believers’ sincere desire is to request our past sins to be forgiven. The second half of the Lord’s Prayer is consist of the request of people or the supplication about earthly things; the fourth supplication prays only for daily food for body, but both fifth and sixth supplications are about spiritual things; out of those, the sixth supplication entrusts matters in the future, while the fifth supplication requests about things happened in the past. While we live in body, we need food to nourish our body and it is a reasonable demand to pray to Father as mentioned before. But, Christians are urgently compelled to pray for spiritual things more than bodily things.

It is told that we know etiquette when food and clothes are well provided, but it is also said that we can die gladly if we hear the way in the morning in certain circumstances. It is true that a day in a Lord’s courtyard is better than thousand days on earth. Experience rather than a theory proves well that Christians eagerly burn with spiritual request more than bodily one. Also, though both are supplications for spiritual things and supplication for the matters in the future is not unimportant, an earnest supplication for the forgiveness of inequities we committed in the past is a true and urgent request from the bottom of our heart; it is common fact well known to experienced Christians and we can see that it is in very natural order. Unless the relationship between God and people is restored to right relationship by disposing old sins, entrusting God to protect us from future temptation is futile, daily bread cannot be valuable, and praise and thanksgiving out of our mouth are in vain because they cannot possibly reach to God.

Therefore, if we were poets, we should begin the first verse, ‘blot out all my transgression’, like King David did; if we were in a situation where we could pray only in one verse, we should pray for His compassion so that He would first forgive our sins, like the criminal hung on the cross who said, “Jesus, remember me when You come into Your kingdom” (Luke 23:42).

Since it is our honest desire from the bottom of our heart that our past sins are forgiven and it is like a preparatory part of all prayers, all Christians without exception pray about it most vividly, naturally, and eagerly. But, to some believers who tend to think deeply, this supplication seems to contain numerous contradictions and questions, compared to other verses. Therefore, some honest believers might stop their prayer when they come to the fifth supplication. Accordingly some of them give up reciting the Lord’s Prayer loudly out of their mouth.

As it was mentioned before, the Lord’s Prayer should be our prayer to God everyday. Matthew used ‘debts’ while Luke used ‘sins’; the duties we have not fulfilled to God, namely ‘debts’ to God, are ‘sins’. Jesus taught us this in a parable of a king who settled accounts with his servants in Matthew 18:23-35. Yet, all the sins, whether they were great or small and serious or trifling, we had committed during the times of unbelievers were forgiven already when we believed Jesus. Our old self, the body of sin, was crucified with Jesus (Romans 6:6), and we became pure since that time. Therefore, it is obvious that ‘forgive us our sins’ does not refer to past sins committed before we believed in Jesus. Therefore, the sins mentioned here are evidently our sins committed knowingly or unknowingly since we became believers of Jesus, and we are praying for those to be forgiven. Sins make the space between God and people filled with dark clouds and segregate them. Not only we invigorate our energy by taking food for our body everyday, but also we should remove obstacles between God and people everyday by maintaining spiritual respiration so that sins committed on that day ought to be forgiven in the same day.

But, there arises a strong opposition against this view. All Christians have been forgiven for their sins already, ones who were really cleansed should not commit sins again, so they do not have to pray for their sins to be forgiven. Believers cannot commit sins; if they do, it is a proof that they are not really saved yet. St. John wrote, “No one lives in Him keeps on sinning. No one who continues to sin has either seen Him or known Him.” “No one who is born of God will continue to sin, because God’s seed remains in Him” (1 John 3:6, 9). So, even if same sins were committed as of old, those are not to be called sins; but, regardless how they are called, the facts remain the same sternly.

Of course, we count ourselves dead to sin but alive to God in Christ Jesus (Romans 6:11). Since the root of our sin has been cut off, ‘sin shall not be our master’ (6:14). Because our past sins have been purified with the blood of Christ, we are clean without any speckle of dirt (1 John 1:9, 2:1-2). But, it is true that we have duality in our life in the flesh. Just like remaining stump of a cut-off plant often shoot out buds and come into flowers, the plant of our sin that was cut off often regenerates its root in our spirit and attempt to graft small branches to it. The superfluous power of the flesh attempts to revive its power at all possible opportunities. Apostle Paul sincerely confessed, ‘For in my inner being I delight in God’s law, but I see another law at work in the members of my body, waging war against the law of my mind and making me a prisoner of the law of sin at work within my members.’ He lamented, “What a wretched man I am! Who will rescue me from this body of death” (Romans 7:22-24)? Honest believers experience the same feeling in common. Once we realize the fact that the law of my mind of inner being does not commit sins but another ‘law of my body’ makes us to sin, we should not sit tight vaguely, doing nothing but holding fast to a religious doctrine; going one step forward, sins we commit each day ought to be forgiven by repenting them on the very same day so that we can live a day as a regenerated being filled with lively spirit like children, or start a life journey of a day.

Because we have been educated that the secret of self-culture is to ‘examine oneself three times each day’ as a disciple of Confucius said, we are apprehensive of the teachings of Paul in a sort, “Forgetting what is behind and straining toward what is ahead, I press on toward the goal to win the prize…” (Philippians 3:13-14). However, wasting a whole night merely thinking and examining sins already committed is not the fruitful means for our life. Remembrance of accumulated sins not only makes our conscience dull but also makes us unable to understand what the redemption of the cross is, and unbelieving God’s love and power lead us to shallow faith and faithless conducts. Even if we had committed sins tens of thousand times in the past, we ought to dispose them thoroughly; after they are cleansed, we should forget those completely; when we face new sins, we should face them with a sensitive and fearing mind of a innocent maid.

As seen above, the supplication, ‘forgive us our debts’, is necessary to maintain fresh and healthy growth of our spirit each day by cleansing it. Whenever we recite the Lord’s Prayer in real life, we feel unique difficulty if we come to the fifth supplication, because a sort of condition, ‘as we also have forgiven our debtors,’ is attached, which is different from other supplications. In order to avoid this difficulty, scholars attempted different interpretations; for example, the verb ‘forgiven’ used in Matthew is ‘aphekamen’, an aorist tense to express a past action, ‘have already forgiven’ in English. At the other hand, ‘aphiomen’ was used in Luke to express present tense, ‘forgive now’ or ‘will forgive in the future’. They tried to avoid the difficulty of this supplication by taking Luke’s milder expression rather than Matthew’s stronger one; they interpret that it is sufficient for our sins to be forgiven and we would forgive others who sin against us at the same time. But, for being very cramped expedient, Jesus added verses 14 and 15 after the Lord’s Prayer, apparently He disapproved such a temporizing means; not to give us any room for an excuse, He said, “For if you forgive men when they sin against you, your heavenly Father will also forgive you. But if you do not forgive men their sins, your Father will not forgive your sins.” Elsewhere, He repeatedly said the same meaning more than a couple of times; Mark 11:25 says, “When you stand praying, if you hold anything against anyone, forgive him, so that your Father in heaven may forgive you your sins.” There are same teaching in Matthew 5:23-24 and 18:23, etc. Thus, the purport of Jesus’ teaching is very clear. If we want our sins to be forgiven by God, it is precondition for us to forgive others’ sins.

But, how can we practice it? We do not have ability to love our enemy. Therefore, by praying for us to forgive the sins of others and by borrowing the power of Holy Spirit, we can gain experience in forgiving the little offense of our brothers; then, we praise God, knowing how great God’s love is who forgives our great sins; for we are moved by His great love, we are able to forgive the sins of others again. As Paul said, “Be kind and compassionate to one another, forgiving each other, just as in Christ God forgave you (Ephesians 4:32, Colossians 3:13), we need to practice loving others; then we try to become children who gradually resemble our Father, till we love our enemy without taking vengeance upon them, and we can ‘be perfect, therefore, as your heavenly Father is perfect’ (Matthew 5:48).

It is so obvious fact: “If anyone says, ‘I love God,’ and hates his brother, he is a liar; for he who does not love his brother whom he has seen cannot love God whom he has not seen (1 John 4:20).” First of all, we should forgive our brother whom we have seen, and go forward before God as His children to ask our sins to be forgiven. Of course, our deeds cannot be the condition of exchange with God’s forgiveness, as the Bible teaches us throughout. When we try to forgive little offense of others, we realize how great and deep our sins are and how immense the grace of God is, so that we can gradually shatter our self to pieces till we can humbly pray, “Forgive us our debtors, as we also have forgiven our debtors.” Thus, a complete relationship between God and people can be established then.

8. The Sixth Supplication:

Matthew 6:13: And lead us not into temptation, but deliver us from the evil one. For Yours is the kingdom and the power and the glory forever, Amen. (Refer to Luke 11:4)

Earnest desire of Christians from the bottom of their heart that their past sins to be forgiven is manifested as the fifth supplication, “Forgive us our debts.” But, can we be content with repeating the fifth supplication, simply because “where sin increased, grace increased all the more” (Romans 5:20)? Definitely not! Even if we have sinned tens of thousand times, if we supplicate with a little faith, God does not consider it troublesome to forgive us ten thousand times, and cleanse us with hyssop until we become whiter than snow (Psalms 51:7) as we can see vividly. But, what is sin? It is not a sphere of imagination or a conceptual one. One who really tasted the pain of ‘sin,’ one who experienced the difficulty of forgiving other’s unrighteousness against him, children who realized God’s ‘grief’ when He forgive us, cannot but desire deep in one’s heart that ‘one wishes not to fall into new sins again.’ A patient is happy when a confident doctor cured his disease with proper treatments. However, rather than tasting the same happiness again, it is wiser for him to exercise actively so that he does not fall into the pain of sickness again. Therefore, it is proper that the sixth supplication comes after the fifth supplication, and it is the end of our supplications.

Thus, looking at the order of the expression of Christians’ wishes, this sixth supplication is natural; looking at the purpose, the substance is clear. Incompetent children ask for daily bread to Father in the fourth supplication; children who committed sins against Father ask for forgiveness in the fifth supplication; children who realized their weakness ask for Father’s protection in the sixth supplication; all of these are in series which manifest the utmost trust between Father and son. Yet, if we consider the sixth supplication in detail, possibly there have been problems in several aspects from olden times.

Greek word ‘peirasmos’ has two meanings; the first meaning is ‘temptation’ into which Satan lead people, luring with suffering or pleasure in order to capture them as prisoners with evil purpose; the second meaning is ‘trial’ through which God tests and trains people with good intentions. The problem is which one of the two meanings is applicable to this verse. Whether we interpret it as ‘temptation’ or as ‘trial,’ both get into a difficulty to some extent. Firstly, if we take it as ‘temptation,’ it is meaningless to ask God not to tempt us, because “God cannot be tempted by evil, nor does He tempt anyone” (James 1:2). Secondly, if we interpret it as a trial, instead of avoiding or withdrawing from what God gives to train us, ‘we should rejoice in our sufferings’ (Romans 5:3); and Christians, who ought to ‘consider it pure joy, whenever they face trials of many kinds (James 1:2), seem to be irrational if they try to avoid any trials.

Temptation is from Satan and trial from God, so the difference in objective of those two is like the difference between heaven and earth. However, if we think it over again, it is scholars’ leisure business to pry into temptation or trial in the Lord’s Prayer. In a practical problem, we cannot differentiate Satan’s temptation from God’s trial, and we do not need to differentiate them. The temptation that Adam and Eve encountered with ended as temptation (Genesis ch.3), but the Satan’s temptation Job faced ended in God’s trial (Job chapter 1 & 2). Namely, Satan tries to tempt people by taking advantage of God’s trial, and God tries to bring loved one to trial by taking the opportunity of Satan’s temptation. Therefore, at the beginning, from a person’s point of view, it is not possible to know if it is Satan’s temptation or God’s trial. So depending on the attitude of the person who faces a problem, one can either cave in to Satan’s temptation for being unable to cope with God given trial, or at the other hand, another can willingly put up with Satan’s temptation by considering it as suffering and discipline which Heavenly Father gives to loving children in order to train them (Hebrews 12:6-12).

So, rather than wasting our effort to separate and distinguish temptation and trial from the beginning, let us accept both meanings as original Greek word has; the most urgent practical need is to determine our attitude to cope with the situation when we face a temptation or a trial. Even if God has approved the trial, mankind has to pass through it with all our strength; if it is Satan’s temptation, the more we should fight bravely until we win a victory. In fact, the most challenging problem of life is how to be victorious.

In general, the surest way to win a war is to know what the substance of enemy is before anything else; tactics of campaign are secondary issue. It is possible that others in outer world cause us temptation like Eve in the case of Adam, but as James said, “Each one is tempted when, by his own evil desire, he is dragged away and enticed” (James 1:14) in most cases. Our fleshly desire always becomes our strong enemy of our spiritual work. Needless to say, we should realize external temptation and internal desire and refrain from them, but more important thing than that is to recognize the existence of ‘Satan.’ He is not a merely personified imaginary figure of fleshly desire. Since Bunyan saw Satan with whom Luther fought and Satan tempted both Job and Jesus, our battle should start by understanding the substance of Satan clearly, who definitely exist just as God exists.

Since we have confirmed that Satan is our enemy with whom we have to fight desperately even to death, we need to fight against Satan’s schemes, putting on the full armor of God, with the belt of truth buckled, with the breastplate of righteousness in place, with our feet fitted with the readiness that comes from the gospel of peace, taking up the shield of faith, and taking the helmet of salvation and the sword of the Spirit (Ephesians 6:11-17). Yet, how strong our enemy’s fighting power? Paul said, “Our struggle is not against flesh and blood, but against the rulers, against the authorities, against the power of this dark world and against the spiritual forces of evil in the heavenly realms” (Ephesians 6:12). And Peter said, “Our enemy the devil prowls around like a roaring lion looking for someone to devour” (1 Peter 5:8).

Against such a brutal enemy’s camp, how our battle strategies should be? First of all, we need to acknowledge that enemy is as brutal as a lion but we are as weak as sheep. The first step toward victory is to fully recognize that Satan is absolutely strong one while we are powerless without any room for argument. As it is in all wars, the biggest cause of defeat in a war against Satan is to hold enemy in contempt. While fully recognizing the powerlessness of our self but without fear, we will fight with full weapons furnished, praying in the Spirit on all occasions with all kinds of prayers and requests and being alert and always keep on praying, when we cannot avoid head-on collision out of necessity against our will.

But, the head-on collision with Satan is only when we cannot avoid it; if possible, we should avoid all-out frontal attack against Satan; it is not because we are cowards but because the wise man avoids dangerous place. If Satan attacks us like a roaring lion and like the ruler of the kingdom of the air, we should not decline a battle against him even though ‘our spirit is willing, but the body is weak’ (Matthew 26:41). However, there is a great gap to cross between Satan’s tactics and our defense strategy. If Satan incites us with clear sins, it is not too difficult to refuse it. When Satan tempted Eve, he did not incite her to disobey God. As a certain scholar guessed, Satan probably praised Eve’s beauty at first. At the moment she accepted those words of praise, they were already ready to be expelled from Eden. Who possibly knew that an ordinary word really could turn out to be a huge bombshell that can determine the destiny of their whole life! To a man who called Him, “Good teacher,” Jesus answered him right away, “No one is good – except God alone”; there was a great reason for not accepting it.

Therefore, a person, who knows his weakness vividly and has seen the power of Satan, would not use brute force, like trying to catch a tiger with bare hand; he would rather choose to withstand it, avoiding a head-on collision or a battle, whenever it is possible. We believe that the sixth supplication of the Lord’s Prayer sends this message. We have praised the courage of Han Shin who crawled through under the groin of scoundrels rather than fighting with them, when they ordered him an insulting command to do so; Satan’s case is particularly so. Paul wrote, “For when I am weak, then I am strong (2 Corinthians 12:10). Peter replied, “Even if all fall away on account of you, I never will” (Matthew 26:33). And he also declared big words, “Even if I have to die with you, I will never disown you” (v. 35), but he suffered a crushing defeat before a rooster crew three times; on the other hand, Jesus, appeared like an incapable child, said, “My Father, if it is possible, may this cup be taken from me” (Matthew 26:39), wishing to escape the time of crucifixion on the Cross, but Jesus won a triumphant victory on the Cross at the end; we ought to learn a lesson from it. Satan is not an enemy we can easily fight off, but only God can easily defeat him; naturally, we ought to entrust the matter to omnipotent One.

The verse, ‘deliver us from the evil one’, is not in the Gospel Luke. Original Greek word translated as ’the evil’ means ‘evil man’, ‘devil’ if gender is masculine, or ‘evil’, ‘evil thing’ if gender is neutral. However, because it is not clear whether the gender is masculine or neutral in this verse, several interpretations have been suggested. From the context, it seems appropriate to read it as ‘devil’, by taking it as a masculine gender. The second half of this verse is neither an independent supplication nor the repetition of the first half. The first half is wishing to avoid the temptation from Satan while the second half is asking to keep us off from Satan himself (apo) in more positive expression, an idea advanced one step further.

All scholars agree in their opinion that the recitation at the end, ‘For Yours is the kingdom and the power and the glory forever, Amen’, was added afterwards. After the Lord’s Prayer lost its significance and used as a prayer recited in unison at the church for the sake of formality, it was inserted so that the congregation and the priest could harmonize with each other. Directly, it modifies the later part or the entire sixth supplication; indirectly, the Lord’s Prayer as a whole. The original source is known to be from 1 Chronicles 29:11, but it is a natural recitation overflowing from the mouth of the men who has prayed from the first supplication to the sixth whole-heartedly.

(Supplemental study of the Lord’s Prayer is completed.)


십계명(Ten Commandments)

십계명(十誡命, 히브리어. עֲשֶׂרֶת הַדִּבְּרוֹת‬ 아세레트 하디브로트, 라틴어. Decalogus 데칼로구스)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중시하는 계명이자 모세 율법의 핵심이다.

십계명은 우리가 승영하는 데 필요한 영원한 복음의 원리이다.
주님은 고대에 모세에게 그것을 알려 주셨으며(출 20:1-17), 후일의 계시에서 그것을 다시 언급하셨다.
십계명은 복음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부분이다.
이 계명에 순종하는 것은 다른 복음 원리에 순종하는 것을 쉽게 한다.


십계명은 성경에 있는 열 가지의 법으로서 하나님께서 출애굽을 한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이스라엘 국가에게 주신 것입니다. 십계명은 본질적으로 구약 성경에 포함된 613개의 계명들이 요약된 것입니다. 처음 4 개의 계명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다루고 있습니다. 나머지 6개의 계명은 우리들끼리의 서로의 관계를 다룹니다.

십계명은 성경의 출애굽기 20장 1-17절신명기 5장 6-21절에 기록되어 있으며 다음과 같습니다.

1.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이것은 유일하고 참되신 하나님 외에 어떤 다른 신을 숭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신들은 거짓된 신들입니다.

2.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이 명령은 우상, 즉, 하나님을 눈으로 볼 수 있게 나타내는 것을 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는 우상을 만드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묘사하는 우상을 만드는 것은 거짓된 신을 숭배하는 것입니다.

3.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이것은 주님의 이름을 헛되이 취하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가볍게 취급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오직 존경하고 공경하는 방법으로 하나님을 언급함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보여야 합니다.

4.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이것은 우리가 주님께 전념하고 쉬는 날로서 안식일(토요일, 한 주간에 마지막 날)을 따로 챙기라는 명령입니다.

5.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이것은 부모님을 항상 존중하고 공경하라는 명령입니다.

6. 살인하지 말라.

이것은 다른 사람을 계획적으로 죽이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7. 간음하지 말라.

이것은 자신의 배우자 외에 다른 누구와도 성관계를 하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8. 도둑질하지 말라.

이것은 자신이 소유하지 않은 그 어떤 것도 그것을 소유한 사람의 허락 없이 취하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9.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이것은 다른 사람에 대해 거짓으로 증언하는 것을 금하는 명령입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10.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이것은 자신의 것이 아니면 그 어떤 것이라도 갈망하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탐낸다는 것은 위에 열거된 계명들(살인, 간음, 그리고 도둑질에 관한 계명들) 중 하나를 어기게 할 수 있습니다.
어떤 것을 하는 것이 잘못이라면, 바로 그것을 하려는 욕구 또한 잘못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십계명을 지키면 죽은 후에 천국 가는 것을 보장하는 한 묶음의 규율로 잘못 알고 있습니다. 이와 반대로, 십계명의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 없다는 것과(롬 7:7-11) 따라서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9장 16절에 나오는 부자 청년의 주장과는 반대로 누구도 완벽하게 십계명을 지킬 수 없습니다(전 7:20). 십계명은 우리 모두가 죄를 범하였고(롬 3:23), 그러므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만이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가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십계명의 대부분은 우리가 해서는 안 되는 것들을 열거하지만, 그것들은 또한 해야 할 일들을 나타내기도 한다.

구주께서는 십계명을 두 가지 원리, 즉 주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요약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마태복음 22:37-39)


1. You Shall have no other gods before me.

2. You shall not make for yourself an idol in the form of anything. And you shall not bow down to them or worship them.

3. You shall not misuse the name of the Lord your God. 

4. Remember the Sabbath day by keeping it holy. 

5. Honor your father and your mother. 

6. You shall not murder.

7. You shall not commit adultery. 

8. You shall not steal.

9. You shall not give false testimony against your neighbor. 

10. You shall not covet your neighbor's house. 

1.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2. 너는 아무 형상이든지 너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고,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3.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4.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5. 네 부모를 공경하라. 

6. 살인하지 말지니라.

7. 간음하지 말지니라.

8. 도적질하지 말지니라.

9.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증거하지 말지니라.

10.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