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가저택(破家瀦宅)
조선시대에 반역(反逆) 죄인에 대한 극형(極刑)이나 연좌(緣坐)율의 적용은 『대명률』에 근거한 것이었다.
* 《대명률》(大明律)은 1397년에 반포되어 명·청시대의 약 500년간을 통하여 형률(刑律)의 근본(根本)이 된 중국의 법전이다. 총 3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전에도 당률을 바탕으로 하여 종종 편찬개정이 이루어졌으나, 결국 그 체계가 현실에 맞지 않아 원의 법률서 《원전장》(元典章)의 편목을 따랐다. 행정 관청인 이(吏)·호(戶)·예(禮)·병(兵)·형(刑)·공(工)에 따라 율(律)도 6부로 나눈 뒤에 명례(名例)를 더하여 7률(律)로 했다. 그 후 시세의 추이에 맞지 않는 것이 있어 1550년 《문형조례》(問刑條例) 249조를 반포하여 이를 보충하였다. 이 대명률은 조선·일본·안남(安南)의 법률에 영향을 끼쳐 법률사상 당률과 함께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조선 왕조에서는 그 외에도 파가저택(破家瀦宅)이라고 하여 이러한 죄를 범한 자들이 살던 집을 헐고 그 곳에 못을 만드는 형벌을 부가하고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조선초기에는 백성들이 감사(監司) 및 수령(守領)을 업신여기는 것을 강상(綱常)에 위반하는 것으로 보아 해당 죄인을 고을에서 추방시키고 파가저택하게 한 사례들이 많이 확인된다. 1439년(세종 21)에 의금부(義禁府)에서는 백성들이 수령을 능욕(凌辱)한다며 고려시대에도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범하거나 비속(卑屬)이 존속(尊屬)을 업신여기는 경우에는 보통 사안보다 가중 처벌하는 뜻에 따라 해당자를 추방하고 집은 파가저택을 했다고 하였는데, 이를 통해 파가저택이 고려시대에도 시행되었던 형벌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450년(문종 즉위)에도 수령(守令)을 업신여기고 백성들을 괴롭힌 아전(衙前)에 대해서 파가저택하고 함길도에 영속(永屬)시키도록 한 사례가 있다.
그런데 조선중기 이후가 되면 파가저택이 적용되는 사례는 이전과는 달리, 국가에 대한 반역(反逆) 죄인이나 부모를 살해한 비속(卑屬), 주인을 살해한 노복(奴僕) 등을 처벌하는 사례가 눈에 띈다. 가령, 1586년(선조 19)의 부(父)와 계모(繼母)를 살해한 아들에 대한 처벌이나, 1617년(광해군 9)에 역적(逆賊) 죄인에 대한 처벌 사례가 그것이다.
파가저택에 대한 명문 규정은 『속대전』 「형전(刑典)」 추단조(推斷條)에서 찾아볼 수 있다. 동 규정에는 부모와 남편을 살해하거나, 노비가 주인을 살해한 경우, 관노(官奴)가 관장(官長)을 살해한 경우에는 죄인을 사형에 처하고, 처와 자녀는 노비가 되게 하며, 죄인이 살던 집을 파가저택하며 읍호를 강등(降等)하며 수령을 파직할 것을 정해두고 있다. 그리고 반역(反逆) 죄인에 대해서도 파가저택 이하의 규정을 적용할 것을 규정해 두고 있다.
이처럼 조선후기에 등장하는 강상(綱常)죄를 범한 자에 대한 연좌 처벌이나, 파가저택과 같은 처벌은 조선 왕조에서 반역(反逆)죄나 강상(綱常)죄를 범한 자를 매우 엄격하게 처벌했음을 보여준다.
성경에서는 소금을 뿌리는 것으로 연결된다.
사사기 9:45
아비멜렉이 그 날 종일토록 그 성을 쳐서 필경은 취하고 거기 있는 백성을 죽이며 그 성을 헐고 소금을 뿌리니라.
소금은 식물이 자라나는 것을 훼방하여 결실을 맺지 못하게 한다.
결국 소금을 뿌린다는 것은 그곳을 황폐화하는 것이다.
신명기 29:23
여호수아 6:26
파가저택(破家瀦澤)과 연좌죄
우리나라의 경우 전란(戰亂) 이전에 이를 따라 아비를 죽인 집에만 이 법을 시행하였는데, 그 당시 영중추부사 신(臣) 윤승훈(尹承勳)이 그 내력을 상세히 기억하여 분명하게 말했을 뿐 아니라, 신 또한 그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전란 후에 상신(相臣) 유영경(柳永慶)이 남편을 죽인 자에게도 파가저택해야 한다는 의논을 제창하였고, 한때 대신(大臣)들도 ‘삼강(三綱)은 하나’라고 논의하여, 마침내 남편을 시해한 자의 집에도 파가저택을 시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의 생각은 그렇지 않습니다.……대체로 지금 이 파가저택의 법을 우리나라에서 취하여 근거로 삼아 시행하는 것은 다만 주 정공의 논(論)에 의거한 것이요, 다른 경(經)에는 나타나지 않은 것입니다. 어찌 별도로 의견을 내세워 가지 위에 가지를 더 만들어서 행해지지 않은 법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 파가저택 이 한 조항은 신이 항상 불가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원문 |
백사(白沙) 이항복이 파가저택 시행의 부당성에 대해 논한 글이다. 파가저택은 반역(反逆)을 도모하거나 강상(綱常)에 저촉된 중죄인의 집을 헐고 그 자리에 연못을 파던 형벌이다. 백사에 따르면 파가저택은 법전이나 경전에도 그 근거가 없고, 주 정공(邾定公) 때에 처음으로 시행되었다고 한다. 『예기(禮記)』 「단궁 하(檀弓下)」에서, 주루국의 정공(定公) 때 그 아비를 시해한 자의 처벌에 대해 “신하가 임금을 시해하면 관직에 있는 자는 용서 없이 죽이고, 아들이 아비를 죽이면 집에 있는 자는 용서 없이 죽인다. 그 사람을 죽이고 그 집을 허물고 그 집터를 깊이 파서 연못으로 만든다.[臣弒君, 凡在官者殺無赦, 子弒父, 凡在宮者殺無赦. 殺其人, 壞其室, 洿其宮而豬焉.]”라고 하였는데 파가저택은 여기에 근거를 두고 있다.
조선에서도 초기부터 파가저택이 시행되었으나 적법성 여부와 관련하여 찬반의 논의가 적지 않게 이루어졌다. 백사의 지적처럼 파가저택의 근거를 형서에서 찾기 힘드니 그 적용에 신중해야 한다는 점, 이를 확대 적용하여 아내가 남편을 죽인 경우에까지 시행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점 등을 내세우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처형만으로는 대악(大惡)에 대한 형벌로 부족하며 ‘고려의 고사(故事)’, ‘전조(前朝)의 고사(故事)’, ‘구례(舊例)’ 혹은 ‘죄가 극악하면 목을 베고 가족을 멸하고 그 집은 웅덩이를 판다.’라는 『당률(唐律)』 십악(十惡) 조를 근거로 파가저택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고려시대부터 백성이 수령을 능범한 죄인에 대해 파가저택해왔고, (『세종실록 10년 5월 26일』) 조선에 와서도 고려 때부터 행해오던 이러한 규례를 따르다가, 중종 36년에 이르러 항법(恒法)으로 정해진 듯하다. (『중종실록 36년 6월 21일』)
그 이후 강상죄인에 대해 처자를 노비로 삼고[妻子爲奴], 가산을 적몰하고[籍沒家産], 파가저택하고, 수령을 파직하고[罷其守令], 읍호를 강등시키는 일[降其邑號]을 해사(該司)가 승전(承傳)을 받들어 거행하는 형식으로 법제화 과정을 밟아갔다. (『승정원일기 숙종 13년 4월 25일』)
파가저택은 중국에서도 신하가 임금을 시해하거나 자식이 아비를 시해한 경우에만 적용되었고 『대명률(大明律)』에도 관련 법규가 없으나, 조선에서는 『속대전』 형전 추단(推斷) 조에 정식 율문으로 실리면서 조선시대 말기까지 역모와 강상범죄에 대한 연좌율로서 기능하게 되었다.
○ 강상죄인[부(父)·모(母)·부(夫)를 시해하거나, 노(奴)로서 주인을 시해하거나, 관노(官奴)로서 관장(官長)을 시해한 자]은 결안(結案)하여 처형한 뒤에 아내, 아들, 딸은 노(奴)로 삼고, 파가저택하며, 그 읍(邑)의 호(號)를 강등하고, 수령은 파직한다.[綱常罪人[弑父·母·夫, 奴弑主, 官奴弑官長者]結案正法後, 妻·子·女爲奴, 破家瀦澤, 降其邑號, 罷其守令.] ○ 반역(反逆)의 연좌는 본율(本律)이 있으며 파가(破家) 이하는 이 율을 쓴다.[反逆緣坐, 自有本律, 破家以下用此律.] |
파가저택이 적용되는 대상은 주로 모반 대역 부도 죄인이며,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훼손한 전패작변(殿牌作變) 죄인, 시부(弑父)·시모(弑母)의 패륜죄인, 수령 등 상급 관리를 범하거나 모욕한 죄인 등이고, 남편을 죽인 아내 역시 강상죄인으로 적용 대상에 포함되었다.
파가저택은 일단 해당 죄인이 주거하던 곳이어야 한다. 죄인이 살던 곳이 자신의 집이 아니라면 파가저택할 수 없었다. 즉 아버지의 집에서 살았다면 아버지의 집을 파가저택할 수 없었고, 또 죄인이 양반호의 솔하(率下)로 한성부 안에 살고 있거나 양반의 낭하(廊下)에서 거접(居接)하고 있었다면 이 역시 파가저택 할 수 없었다. 만약 떠돌이로 살다가 역적이 되었다면 보통 역적들이 모사를 한 그 장소가 대상이 되었고, 범위를 주동자에 한정하여 역적 수범(首犯)의 집만 파가저택하기도 하였다.(『선조실록 29년 7월 25일』) 특히 역모죄로 처형된 양반가 집의 기와나 목재는 양도 많고 질도 좋아서 관아 건물, 고사(庫舍), 궁궐 수리 등에 사용되기도 하였는데 각 아문에서 이를 차지하기 위해 다투는 일도 있었다. 또 역적의 집을 방매하여 얻은 돈을 나라 경비에 보태거나 객사(客使) 행차에 쓰기도 하였다.
파가저택의 목적은 죄인의 흉악한 흔적을 없애기 위한 것이었다. 율에 없는 죄를 범하였으므로 역시 율에 없는 법으로 다스려야 하며, 그 더러운 자취를 없애기 위해 파가저택해야 한다는 것이다.(『중종실록 34년 5월 16일』)
간원이 아뢰기를, “……저와 같이 파가 저택을 하여 일찍이 살던 곳까지도 모두 없애버리는 것은 엄하게 제거하고 끝까지 다스려서, 천지간에 용납하지 않게 한다는 뜻이 매우 깊고 절실하니, 또 무엇을 더하겠습니까?”[諫院啓曰: “……彼破家瀦宅, 倂與所嘗居而盡滅之者, 痛絶極治, 不容天地之意, 至深至切, 又何加乎?”] (『중종실록 38년 4월 15일』) |
보통 죄인의 가족에 대한 연좌율로써 전가사변(全家徙邊), 즉 죄인을 포함한 가족 전체를 북쪽 평안도, 함경도, 황해도 변방으로 이주시키는 형벌이 있었으나 너무 가혹하다는 지적이 많았고, 또 변방의 경계가 안정되어 가면서 폐지되었다. 그러나 조선 말기까지 시행되었던 파가저택은 연좌율이라는 점에서 전가사변과 유사하나 실은 이보다 훨씬 더 가혹하다. 죄인을 포함 가족 전체를 이주시키는 전가사변에 비하여 파가저택은 처형된 죄인, 그리고 남은 죄인 가족들의 생활 터전, 혈연적 근거를 없애 결국 가족이 해체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가족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최후의 희망이다. 아무리 감당하기 힘든 일을 당하더라도 결국 가족의 힘으로 견디고 이겨나가지 않는가. 그러한 가족을 흔적도 없이 해체시켜버리는 것이 파가저택이다. 보통 거열이나 부관참시, 압슬형, 주뢰형 등의 신체형이 조선시대 혹형(酷刑)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모반 대역죄인, 강상죄인의 가족들을 노비로 만들어 흩어지게 하고, 함께 살아갈 여지를 전혀 남겨두지 않은 파가저택, 이 역시 참으로 가혹한 형벌인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