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족


중국에서는 ‘조선족’이라 부르고, 한국에서는 ‘중국 동포’라고 부른다.

1949년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졌다. 중국 동포는 그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1949년 이전은 다시 1910년(경술국치)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다.

1910년 이전에는 수해와 가뭄 등 자연재해로 인한 조선인의 만주 이주가 아주 활발히 이루어졌다. 당시 청나라는 봉금령을 폐지하고, 만주 일대를 전문 개간 구역으로 지정했다. 황무지를 개간하기 위해서였다. 많은 조선인이 건너가 특유의 근면성으로 황무지를 개간해 농사를 지었다. 농작물을 추수할 때가 되면 청나라 관리들이 와서 약탈을 했다. 부패한 관리들을 관청에 신고하고 투쟁하며 자신의 권리를 찾는 과정이 중국 기록에도 남아 있다.
만주, 특히 간도 지방은 역사적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지역이었다. 국경 개념도 애매해 당시에는 자유롭게 오가던 곳이었다.
1905년에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 전초 단계가 됐다.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는 애국자들이 만주로 급격하게 이주했고, 만주는 항일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됐다.
당시 청나라는 서방 외세의 침략과 일본의 침략을 동시에 받고 있었다. 외국인 선교사는 만주 일대에서 자유롭게 선교 활동을 했다. 만주에 살던 우리 민족도 자연스럽게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됐다. 1907년 간도의 용정촌에 윤동주 시인이 다녔던 명동학교가 설립되는 등 종교와 교육 기관 등이 생겨났다.
청나라는 쇠퇴해 결국 멸망했고, 1912년 신해혁명으로 중화민국이 수립됐다. 1945년 우리나라는 해방됐고, 이어서 남과 북으로 분단됐다. 남한에는 자유민주주의, 북한에는 공산주의가 들어왔다.
중국은 1949년에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했다. 1952년에는 연변 조선족 자치구를 인정했다. 1954년에 조선족은 소수 민족으로 인정됐고, 중국 국민으로 정식 등록됐다.
그 전만 해도 조선족은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를 자유롭게 왕래했다. 일제 강점기 때는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투쟁한 우리 민족이었다. 생활 터전은 만주땅이었지만, 만주와 한반도는 언제든지 오갈 수 있었다. 본인의 선택이 아니라 역사적 상황 때문에 중국 동포가 된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 냉전 시대에 한국과 중국은 외교 관계가 없었다. 조선족은 북한하고만 왕래하며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해야했다. 한국에는 올 수가 없었다. 1992년 한중 수교가 되고 나서야, 중국 동포가 일자리를 찾아서 한국으로 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3개월짜리 비자만 허용해 불법 체류자가 대다수였다. 2007년 방문 취업제도를 시행해 비로소 합법적인 한국 입국과 취업이 가능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