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誓願) / 맹세할 서(誓), 원할 원(願)

서원(誓願)

  • 1. 맹세(盟誓)하여 소원(所願)을 세움. 또는 그 소원(所願)

  • 2. 보살(菩薩)이 수행(修行)의 목적(目的)인 원망(願望)을 밝히고 그 달성(達成)을 맹세(盟誓)하는 일. 보살(菩薩)의 공통(共通)된 원(願)인 사홍서원(四弘誓願), 아미타(阿彌陀)의 48원(願), 석가(釋伽)의 500대원(大願) 등(等)

  • 3. 구약(舊約) 시대(時代)의 풍습(風習)으로, 하나님에게 어떤 은혜(恩惠)를 빌고, 그 보답(報答)으로 하나님에게 어떤 행위(行爲), 곧 헌물(獻物)을 바칠 것을 맹세(盟誓)하던 일


사사기 11:29

  이에 여호와의 신이 입다에게 임하시니
입다가 길르앗과 므낫세를 지나서
길르앗 미스베에 이르고
길르앗 미스베에서부터
암몬 자손에게로 나아갈 때에.


사사기 11:30

 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가로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붙이시면.


사사기 11:31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

 사사기 11:34

  입다가 미스바에 돌아와
자기 집에 이를 때에
그 딸이
소고를 잡고 춤추며 나와서 영접하니
이는 그의 무남독녀라.

사사기 11:35

 입다가 이를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슬프다
내 딸이여
너는 나로 참담케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이로다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

레위기 27:1-8 / 서원 예물의 값

20세-60세 / (남자) 은 50세겔, (여자) 은 30세겔
5세-20세 / (남자) 20세겔, (여자) 10세겔
1개월-5세 / (남자) 5세겔, (여자) 3세겔
60세 이상 / (남자) 15세겔, (여자)  10세겔

가난한 사람 : 제사장이 그 값을 결정

레위기 18:21

너는 결단코 자녀를 몰렉에게 주어
불로 통과케 말아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레위기 20:4-5

그가 그 자식을 몰렉에게 주는 것을
그 지방 사람이 못본체하고
그를 죽이지 아니하면.
내가 그 사람과 그 권속에게 진노하여
그와 무릇 그를 본받아
몰렉을 음란히 섬기는 모든 사람을
그 백성 중에서 끊으리라.    

예레미야 32:35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에
바알의 산당을 건축하였으며
자기들의 자녀를
몰렉의 불에 지나가게 하였느니라
그들이 이런 가증한 일을 행하여
유다로 범죄케 한 것은
나의 명한 것도 아니요
내 마음에 둔 것도 아니니라.

창세기 28:20
  야곱이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 서원(네데르, neder) נֶדֶר / 남성명사
- 맹세, 서원
- 하나님께 자신을 바치는 행위
제물을 바치는 것(레 27장), 어떤 일을 삼가는 것(시 132:2)

창세기 28:20-22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시편 15:4

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며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

히브리서 11:32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미브타(mibṭâʽ) מִבְטָא 
스트롱번호 4008

1. 서원
2. 경솔한 발언
3. 민수기 30:7
그의 남편이 그것을 듣고 그 듣는 에 그에게 아무 말이 없으면 그 서원을 이행할 것이요 그가 결심한 서약을 지킬 것이니라.


네데르( neder)  נֶדֶר 스트롱번호 5088

1. 맹세
2. 서원한 것  

옴무오(ŏmnüō) ὀμνύω 스트롱번호 3660

1. 맹세하다
2. 서원하다
3. 마태복음 5:34

유케(ĕuchē)  εὐχή, ῆς, ἡ 스트롱번호 2171

1. 기도
2. 맹세

사사기 11:29-33

29. 이에 여호와의 신이 입다에게 임하시니 입다가 길르앗므낫세를 지나서 길르앗 미스베에 이르고 길르앗 미스베에서부터 암몬 자손에게로 나아갈 때에
30. 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가로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에 붙이시면
31.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
32. 이에 입다가 암몬 자손에게 이르러 그들과 싸우더니 여호와께서 그들을 그 에 붙이시매
33. 아로엘에서부터 민닛에 이르기까지 이십 성읍을 치고 또 아벨 그라밈까지 크게 도륙하니 이에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 항복하였더라.


서원이란 히브리어로 "이싸르" 또는 "네데르"이며, 헬라어로는 "유케"이다.

위의 용어들은 본래 '말해진 말', '약속', '입에서 나가는 것'을 시사하였다.
일반적으로 "이싸르"는 인생의 향락을 금하는 것, 즉 야웨의 영광을 위해 자기 부정의 생활을 하는 서원을 가리키는 것
"네데르"는 서원자가 무엇인가를, 심지어 자신까지도 하나님께 바치는 서원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와 같은 서원은 옛적부터 있었는데, 하나님 앞에 하는 자발적 언약(맹세)이었다.

서원의 기본적인 관념은 하나님과의 평화(화해)를 위한 것으로, 어떤 일을 실행할 것을 하나님께 약속하는 것, 또는 금욕 생활을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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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하나님께 서원을 드린다고 하는데 서원이란 무엇인가요? 그리고 서원을 드리면 반드시 지켜야 하나요?

(대답)  ‘서원’이란 이행을 전제로 한 하나님과의 약속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을 해주십시오’, ‘…을 하겠습니다’라는 간구와 약속을 ‘서원 기도’라고 합니다.

성경에는 서원과 관련된 사건이 많습니다.

야곱의 경우를 보겠습니다.
형 에서를 속이고 장자권을 차지한 후유증으로 고향을 떠나 하란으로 가던 그가 벧엘 광야에서 노숙하게 됩니다.
그날 밤 거기서 하나님의 임재를 발견하고 서원기도를 드립니다.

“나를 지켜 주십시오.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십시오.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해 주십시오.”

세 가지를 간구한 뒤 그렇게 해주시면
“여호와를 나의 하나님으로 섬기겠습니다.
돌기둥을 세운 이곳이 하나님의 전이 되게 하겠습니다.
반드시 십일조를 드리겠습니다”라는 약속을 합니다.

이것은 야곱의 서원기도였습니다(창 28:20∼22).

하나님은 야곱의 기도대로 이루어 주셨습니다.
하란 생활 20년 동안 지켜주셨고, 갑부가 되게 해주셨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서원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딸 디나는 성폭행을 당했고, 아들들은 세겜 주민을 대량 살상하는 살인죄를 범했습니다.

그 외에도 입다의 서원(삿 11:29∼31)
한나의 서원(삼상 1:10∼11) 등 사례는 많습니다.

대부분 서원기도는 위급할 때나 하나님의 도우심과 응답이 절박할 때 이루어졌습니다.

입다의 경우는 이스라엘의 사사로 암몬과의 결전을 앞두고 하나님이 암몬과의 싸움에 승리를 주신다면 이기고 돌아올 때 맨 먼저 내 집 문에 나와 영접하는 자를 번제물로 드리겠다고 서원했습니다.
그가 암몬을 이기고 개선할 때 맨 먼저 나와 영접한 사람은 입다의 무남독녀였고 그는 서원대로 실행했습니다.

한나의 경우는 아들을 주시면 그를 여호와께 드리겠다고 서원한 뒤 사무엘을 낳았고 젖 뗀 후 곧바로 드렸습니다.

서원은 반드시 이행할 것을 전제로 한 하나님과의 언약입니다.
함부로 서원하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고 일단 서원한 것은 이행하는 것이 신실한 신앙의 징표입니다.

사람끼리의 약속도 지키는 것이 건강한 인격인의 자세입니다.
약속을 무시하고 파기하고 없었던 일로 치부하는 사람들은 믿고 사귀기 어려운 사람들입니다.
하물며 하나님과의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장막에 유하며 성산에 거할 수 있는 사람의 자격을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않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시 15:4).

지키지 못할 서원은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럴 경우는 그냥 기도해도 됩니다.
그러나 서원 후 응답을 받았다면 지켜야 합니다.
나는 서원을 잊고 살 수 있지만 하나님은 서원을 기억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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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부흥회에 참석을 했다가 은혜를 받고 목회자가 되겠다는 서원을 하였습니다.
그 서원이 굳이 잘못이라는 것 보다 과연 건전한 서원일까요?
목회자가 되는 것은 은혜 한 번 받고 서원한다고 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목회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부르심, 즉 소명이 있어야 합니다.
이 소명은 두 가지로 나눌 수가 있는데 내적 소명과 겉으로 드러난 외적 소명입니다.

이 두 소명이 조화를 잘 이룰 때 그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소명감을 잘 살피지 못한 체 즉흥적인 서원을 하고서 괴로워하는 경우는 진정한 서원이라기보다 즉흥적인 감정의 자기 다짐 수준입니다.

서원에는 여러 형태가 있습니다.

자신이 목회자가 되어 하나님께 목회를 하겠다는 서원이 있고, 결혼을 포기하면서까지 교회를 섬기겠다는 독신의 서원도 있습니다.
또 교회를 건축하여 하나님께 봉헌을 하겠다는 서원이 있고, 아들을 낳으면 하나님께 나실인으로 드리겠다는 나실인 서원도 있습니다. 이런 여러 형태의 서원들은 기도하면서 자신의 모든 여건을 따라 하여야 하고, 하였으면 지켜야 합니다.

그저 생각 없이 쉽게 서원을 하고 쉽게 파기를 한다면 그것은 덕이 안 되는 저급한 수준의 코미디와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하여 서원이 무엇인지?
서원을 하였으면 그 서원을 어떻게 감당 할 것인지에 대해 성경을 바탕으로 강론하겠습니다.

서원(誓願)이란 무엇일까?

신명기 23:21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 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그것이 네게 죄가 될 것이라.

서원이 무엇입니까?

처음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이나 또 신앙생활을 오래 하지 않은 분들은 이 서원이라는 특별 기도에 대해 잘 모르실 수 있습니다.
이 서원(Vow)이라는 의미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맹세, 혹은 굳은 약속이라는 뜻의 기도입니다.

맹세라는 차원에서 볼 때 서원이란 영적으로 성숙한 신앙인이 하나님의 은혜를 크게 받고, 봉사와 헌신을 드리겠다는 자발적인 약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서원이란 자기 자신을 드리는 경우, 자녀를 드리는 경우, 가축들을 드리는 경우, 가옥을 드리는 경우, 자기의 토지를 드리는 경우에 사용되었습니다. 

서원이란 내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자신의 가장 귀중한 것들을 자발적으로 드리겠다는 약속기도입니다.

성경에 보면 서원에 대한 여러 사례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서원들이 다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실천하였다는 점입니다.

우선 몇 가지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첫째, 야곱이 형과 아버지를 속이고 밧단 아람으로 도망을 가던 중 벧엘이란 곳에 도착하여 잠을 자다 꿈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체험하고 서원을 합니다.

창세기 28:20-22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21.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22.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둘째, 한나가 아들을 낳지 못하여 작은 부인으로부터 아들 낳지 못한다고 심한 스트레스를 당한 후에 성전에 나와 아들 달라고 기도를 합니다. 대신 아들 주시면 나실인으로 드리겠다는 서원입니다.

사무엘상 1:10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11 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셋째, 선지자 요나는 자기의 허물 때문에 바다에 던짐을 당하였지만 다시금 물고기 뱃속이라는 극한 상황에 갇혀서 살려달라고 서원기도로 매어달립니다.

요나 2:4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09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넷째, 사도 바울도 고린도의 선교 현장에서 1년 6개월을 머물다 다음 선교지로 이동하면서 겐그레아라는 항구도시에서 비장한 각오로 서원기도를 드립니다.

사도행전 18:18
바울은 더 여러 날 머물다가 형제들과 작별하고 배타고 수리아로 떠나갈 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 바울이 일찍이 서원이 있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

여러 서원 가운데 특별히 사람을 서원의 대상으로 삼을 때는 아주 신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서원은 정당성 여부에 따라서 그 사람에게 큰 축복으로 열매를 맺기도 하고, 때로는 아주 엄청난 비극을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사사기 11:30~36).


30. 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이르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에 넘겨 주시면
31.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
32. 이에 입다가 암몬 자손에게 이르러 그들과 싸우더니 여호와께서 그들을 그의 에 넘겨 주시매
33. 아로엘에서부터 민닛에 이르기까지 이십 성읍을 치고 또 아벨 그라밈까지 매우 크게 무찌르니 이에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 항복하였더라
34. 입다가 미스바에 있는 자기 집에 이를 때에 보라 그의 딸이 소고를 잡고 춤추며 나와서 영접하니 이는 그의 무남독녀라
35. 입다가 이를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어찌할꼬 내 딸이여 너는 나를 참담하게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로다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 하니
36. 딸이 그에게 이르되 나의 아버지아버지께서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여셨으니 아버지의 입에서 낸 말씀대로 내게 행하소서 이는 여호와께서 아버지를 위하여 아버지의 대적 암몬 자손에게 원수를 갚으셨음이니이다 하니라.

조급하고 경솔한 서원을 하지 마십시오. 


네 입으로 네 육체가 범죄하게 하지 말라 천사 앞에서 내가 서원한 것이 실수라고 말하지 말라 어찌 하나님께서 네 목소리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네 손으로 한 것을 멸하시게 하랴.  

사람들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위급한 일을 만나거나 어떤 어려운 상황 속에 놓여 있을 때 그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서원기도를 더러 합니다. 하나님, 이렇게, 이렇게 해 주십시오. 응답을 주시면 제가 이렇게 하겠습니다. 라는 식의 조건부 기도입니다.

그런데 그 서원을 하고 난 후가 문제입니다. 서원을 해 놓고도 안 지키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이 진노의 대상이 된다고 경고를 합니다.

아마 서원을 하고도 안 지킨다면 그것은 의미도 모르고 그저 분위기에 휩쓸렸거나 집회 때의 강사의 강요에 못 이겨 한 신중성 없는 것일 것입니다. 신중성 없이 한 서원은 평생 그 서원이라는 것에 발목이 잡힐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서원의 성격을 띠는 맹세에 관한 일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을 해 주십니다.

마태복음 5:33-34, 37
33. 또 옛 사람에게 말한바 헛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37. 오직 너희 말은 옳다옳다, 아니라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헛맹세, 지키지 못할 서원을 하여 지키지 못함으로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 것을 피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주변을 잘 살펴보십시오. 함부로 서원을 해 놓고 지키지 못하여 자기 인생에 족쇄가 되고, 발목이 잡혀서 심적으로 많은 고통 가운데 지내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또 자식을 하나님 앞에 너무 성급한 마음이나 충동적인 마음으로 드리겠다고 서원을 해 놓고 정말 고통 가운데 지내는 분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불건전한 기도원에 가서 서원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분위기에 휩쓸려서 서원을 강요당하거나 충동적으로 서원을 하고 오기도 합니다.

또 더러는 주변 사람들이 영웅적인 심리로 서원을 하니 나도 서원을 하는 일들도 종종 일어납니다. 잘못된 서원을 해서 자신의 인생을 그릇치고, 가족들이나 주변 사람들까지도 어려움에 처하는 경우를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또 더러는 부모님이 뱃속에 있을 때부터 너는 장차 목회자가 되어라 하면서 서원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정말 좋은 일이기도 합니다. 또 아들이 없고 딸만 있는 집에서는 일찍부터 목회자에게 딸을 보내겠다는 서원도 합니다. 다 믿음으로 하는 일인 만큼 복 받을 일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당사자에게 물어보지 않고 한 서원하다 보니 자칫 부모님의 기대와는 달리 지키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부모님의 욕심을 아들에게 강요해서 건강한 목회자가 되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아들의 인생에 걸림돌을 놓는 결과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서원이란 신중하고 조심스러워야 합니다. 부모님의 기대와는 달리 목회의 길이 아니라 사업의 길로 나아가면 더욱 불안정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업이란 성공 할 때도 있고 실패 할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일이 좀 안 되면 심리적으로 부모님이 서원한 것을 내가 지키지 않아서 하나님이 막으신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으로 늘 불안한 생활을 합니다. 혼란 속에 빠지게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서원한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게 하지 말라.
하나님은 우매한 자들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서원한 것을 갚으라.

성도 여러분, 부모님이 자녀를 놓고 서원을 한 것은 완벽한 서원으로 볼 수 없습니다.
서원의 성격상 그 자녀가 지킬 수고 있고 못 지킬 수도 있습니다.
혹 이런 일에 해당이 되어도 너무 염려할 필요 없습니다.

그것은 성경적인 서원도 아니며,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고백에서도 그런 식의 서원은 하지 말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혀 소명감 없는 사람이 충동적으로, 혹은 주변의 강요로 서원을 실천하였다고 합시다.
그 길을 걸어가는 본인도 한 평생 고달프고, 교인들도 고달프고, 가족들도 고달플 것입니다.

대신 사람이 아닌 물질에 관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서원을 하였으면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예를 들면 건축헌금이나 이와 같은 것들을 마음에 가지고 있을 때는 상관없겠으나 하나님께 작정하고 공회에서 공개하였을 때는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서원한 일을 자꾸 뒤로 미루면 나중에는 그 서원을 지키지 않게 되는 큰 허물을 남기고, 복이 오는 통로도 막혀 버립니다.더러는 이런 말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언젠가는 갚겠다고. 그것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서원을 하였다면 속히 지키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서원의 성격에 해당하는 것은 일상생활에서 최우선 순위에 올려놓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작정을 하고 난 뒤에 성의 없이 시간을 보내는 자를 향하여 우매자라고 규정하십니다. 이런 우매자에게는 채찍만이 합당합니다(잠언 26:3).

 

05 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보다 서원하지 아니하는 것이 더 나으니.

 

서원이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단 서원을 하였으면 그 일을 미루지 말라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미루다가 보면 마음이 바뀌게 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도 오늘날 우리 교인들이 저지르는 잘못처럼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도 쉽게 그 마음이 변하였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04절은 그런 사람들 때문에 기록 된 것입니다. 서원을 하고 실행에 옮기지 않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이고,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하나님께서 분명 진노하사 모든 복된 길을 차단해 버립니다(06). 성도 여러분, 예물을 바치고자 하나님 앞에 굳게 작정을 하였습니까? 그렇다면 더디 하지 말고 마음에 작정한 대로 속히 실행에 옮기십시오.

자칫 서원을 해놓고 실행하지 않음으로 다른 형제에게 아, 서원을 하여도 적당히 넘어가면 되는 것이구나. 라는 잘못된 생각을 심어 줄 수 있습니다. 상대방을 실족시키는 것, 이거 무서운 일입니다. 나도 너도 함께 복이 오는 길을 막는 결과가 될 수 있습니다.

 

강화도에는 유독 교회가 많습니다.
그래서 왜 교회가 많은지 조사를 하였는데 이런 결과가 나왔습니다.
1900년대 강화 북부마을에 종순일이라는 돈 많은 유학자가 살았습니다.
그는 부자였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그에게 돈을 빌려 쓰고 살았습니다.
이 유학자가 복음을 받고 기독교인이 되어 성경을 읽었습니다.
마태복음 18장에 나오는 무자비한 종의 비유인데 이런 내용입니다.
임금님에게 1만 달란트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이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빚을 갚지 않는다고 옥에 가둡니다.
그러자 그 소식을 들은 임금님이 화를 내면서 그 사람을 다시 잡아다 감옥에 가두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종순일이 이 말씀을 읽다가 충격을 받고 며칠 고민에 빠졌습니다.
자기도 많은 사람들에게 빚을 놓고 있는데 그 이야기가 자기에게 하는 말로 들린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주일날 예배를 마치고 채무자들을 다 불러 모았는데 채무자들은 빚을 갚으라는 줄 알고 모두 떨고 있습니다.

그때 종순일이 채무자들에게 마태복음 18장 읽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나는 마태복음 18장을 읽고 충격을 받았소.
여기 무자비한 종이 바로 나 자신인 것을 알았소.
나는 오늘부터 여러분의 빚을 모두 탕감하기로 하였소 하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빚 문서를 모두 불태워 버렸습니다.

또 마태복음 19:21,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읽고 자기의 재산을 처분하여 강화주변에 교회를 세우기로 서원하고 실행에 옮김으로 강화에 교회가 많다고 합니다.

말씀은 듣고 아는 것보다 말씀을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명기 23:23
네 입으로 말한 것은 그대로 실행하도록 유의하라 무릇 자원한 예물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 네가 서원하여 입으로 언약한 대로 행할지니라.


말씀대로 살고자 빛 문서를 불태운 부자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마태복음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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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무렵,강화 북부 해안 홍의마을종순일(種純一)이란 교인이 있었다.
전통 유학자 출신으로 땅도 많고 여유 있던 부자였다.
그가 사는 마을에 그에게 돈을 빌려다 쓰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런 그가 마을 훈장 박능일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리고 성경을 읽다가 마태복음 18장 23절 이하에 나오는 ‘용서할 줄 모르는 무자비한 종에 대한 비유’ 대목에서 멈추었다.

임금에게 1만 달란트 빚 진 신하가 그 빚을 탕감받고 나가다가 자기에게 1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만나 그의 빚을 탕감해주지 않고 옥에 가두었는데, 그 사실을 안 임금이 화를 내며 그를 다시 잡아 옥에 가두었다는 내용의 말씀이었다.

‘마을 부자’ 종순일은 이 말씀을 읽고 며칠 동안 고민하다가 주일 오후, 예배를 마치고 자기에게 돈을 빌려간 마을 사람들을 집으로 불러들였다.

마을 사람들은 ‘빌린 돈을 갚으라는 것인가? 아니면 이자를 높이려는가?’하는 두려운 마음으로 모였다.
종순일은 성경을 펴서 마태복음 18장 말씀을 읽은 후에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오늘 이 말씀에 나오는 무자비한 종이 바로 나다. 내가 그리스도의 은혜로 죄 사함을 받은 것이 1만 달란트 빚 탕감 받은 것보다 더 크거늘, 여러분에게 돈을 빌려주고 그 돈을 받으려 하는 것이 1백 데나리온 빚을 탕감해주지 못한 것보다 더 악한 짓이요. 그러다 내가 천국을 가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오늘부로 여러분들에게 빌려준 돈은 없는 것으로 하겠오.”

그는 빚 문서를 꺼내 모두가 보는 앞에서 불살라 없앴다. 행여나 빚 독촉을 받는 것인 아닌가, 두려운 마음으로 왔던 마을 사람들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곤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요즘 없는 빚도 있다고 우겨서 남의 돈을 빼앗는 세상인데 어찌하여 예수교 하는 사람은 자기 돈까지 버려 남을 도우니 참 이상한 일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1900년 4월, 홍의 마을의 복음화는 급속하게 이루어졌다.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였다.
종순일은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마 19:21)는 말씀을 읽고 찔림을 받아 자기 재산을 처분하여 교회에 헌납했다.

그리고 나서 얼마 있다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각 지방과 고을에 보내셨다”(눅 10:1)는 말씀을 읽고 아내와 함께 괘나리 봇짐 하나씩 메고 아직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남쪽 길상 면으로 전도 여행을 떠났다.
그가 찾아 간 “땅 끝”(행 1:7)은 강화 주변의 작은 섬들이었다.

아직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강화 남부 길상면으로 가서 전도한 결과 길직, 길촌, 온수, 선두, 넙성, 덕진 등지에 교회가 설립되었다.
그리고 나서 석모도와 주문도, 영종도 같이 교통이 불편한 섬들을 찾아다니며 전도하고 목회했다.

1917년 감리교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강화 남쪽 주문도 진촌교회(현 서도중앙교회)에 부임했고, 그곳에서도 교인들이 목사의 신앙을 본받아 서로 빚을 탕감해 주는 일이 일어났다.

마을 사람들 모두 감동하였고 교회를 보는 눈이 달라졌다.
오래지 않아 당시 섬 주민 181호 가운데 134호가 교회에 나오게 되었으니 전 주민의 75%가 교인이 되는 일이 일어났다.
지금도 면소재지인 주문도가 ‘술집과 다방이 없는’ 성역으로 남게 된 데는 이러한 감동적인 복음 역사가 크게 작용하였던 것이다.
그는 그렇게 강화, 옹진 섬 지역을 돌며 수십처 교회를 개척하였고 평생 가난한 전도자로 생을 마쳤다.

[출처] 2017. 03월 이달의 인물(국내): 종순일[種純一, 1876-1950]


종순일 목사의 ‘빚 탕감 잔치’


                                                   이덕주(감신대 교수/ 한국교회사)


 요즘은 그런 일이 거의 없지만, 해방 전만 해도 세례 받은 기념으로 뭔가를 하는 전통이 있었다. 세례를 받고 정식 교인이 된 기념으로 교회에 필요한 물품을 기증하거나 예배당 마당에 나무를 심기도 했다. 세례를 일생에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인식하여 이를 기념하는 흔적을 남기고자 했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선교 초기에 세례를 받으면서 ‘이름을 바꾼’ 교인들이 있었다. 개신교회는 그 전통을 버렸지만 천주교회나 정교회, 성공회 같은 ‘가톨릭’ 전통의 교회들은 세례를 받으면서 성인(聖人)의 이름을 따 ‘프란체스코’, ‘베로니카’, ‘베네딕또’, ‘마리아’ 같은 서양식 이름으로  ‘본명’(세례명)을 지어 받았다. 그런데 이런 서양식 이름이 아닌, 한국식으로 이름을 바꾼 개신교인들이 있다. 강화도 북부 해안 마을, 홍의에서 처음 믿은 교인들이 그 주인공들이다.


예수 믿고 이름을 바꾼 사람들


 홍의 마을에 복음이 들어간 것은 1897년 어간이다. 이 마을 서당 훈장이 이웃 서사면 다리목(지금 교산) 마을에서 복음을 접하고 돌아와 동네 사람들에게 전도하고 서당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것이 오늘 홍의교회 출발이다. 훈장의 전도를 받고 믿기로 결심한 홍의 마을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면서 개명(改名)하기로 하였다.

 “우리가 예수 믿고 세례를 받는 것은 거듭난 증거다. 아기가 새로 태어나면 새 이름을 지어주듯 우리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이름을 새로 짓는 것은 당연하다.”

 이들은 신생(新生)과 중생(重生)의 표시로 이름을 바꾸기로 한 것이다. 그러면서 같은 돌림자를 쓰기로 하였다.

 “우리가 마을에서 처음 믿었고, 한 날 한 시에, 함께 믿어, 한 형제가 되었으니 한 일(一) 자로 돌림자를 쓰자.”

 성은 부모님이 준 것이라 바꿀 수 없었고, 이름의 마지막 글자를 한 일자로 통일하였으니 가운데 자만 정하면 되었다. 그래서 신앙적으로 좋은 의미를 지닌 ‘애’(愛), ‘신’(信), ‘능’(能), ‘순’(純), ‘충’(忠), ‘봉’(奉), ‘은’(恩), ‘경’(敬) 같은 자를 적은 종이를 주머니에 넣고 기도한 후에 하나씩 뽑았다. ‘애’ 자가 뽑히면 ‘애일’, ‘신’ 자가 뽑히면 ‘신일’, ‘경’ 자가 뽑히면 ‘경일’이 되었다. 그런 식으로 홍의 마을에 처음 복음을 전한 훈장은 박능일(朴能一)이 되었고 김경일(金敬一), 권신일(權信一), 장양일(張良一), 주광일(朱光一) 같은 홍의 교회 개척교인들이 그렇게 해서 나왔다. 이들은 교회 안에서 쓰는 명칭만 바꾼 것이 아니라 호적과 족보까지 새 이름으로 바꾸었다.

 그런데 복잡한 문제가 생겼다. 같은 집안의 아버지와 아들, 삼촌과 조카가 같은 날 세례를 받은 것이다. 예외는 없었다.

 “육적으로는 부모지간, 숙질지간이지만 영적으로는 같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가? 같은 돌림자를 쓰는 것이 마땅하다.”

 그 결과 부자간, 숙질간에 같은 돌림자를 쓰게 되었다. 권신일의 아들은 권충일(權忠一), 조카는 권혜일(權惠一)이 되었고 정천일(鄭天一)의 아들은 정서일(鄭瑞一), 김봉일(金奉一)의 아들은 김환일(金還一)이 되었다. 믿지 않는 사람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전통적으로 돌림자는 친족 간의 촌수와 항렬을 알려주는 단서였다. 상하간의 서열이 분명하여 ‘윗대’의 돌림자를 ‘아랫대’에서 쓸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질서가 교회에서 깨졌다.

 이처럼 파격적으로 이름을 바꾼 교인들을 보고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예절도, 촌수를 모르는 상것들이라”며 “검정개”(그 때 교인들은 검은 옷을 입고 다녔다)라고 조롱했지만 ‘육적 질서’ 대신 ‘영적 질서’를 따르기로 한 교인들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오히려 홍의 마을에서 시작된 개명 전통은 강화 전 지역으로 확산되어 선교 초기 ‘일’자 돌림으로 개명한 강화 일대 교인들은 60여명에 달한다. 이들 개명한 교인들은 이름을 바꾼 만큼 신앙에서도 철저하였다. 홍의교회 개척 교인 종순일(種純一)이 대표적이다.


 마을 빚을 탕감해준 부자 교인


 종순일은 예수 믿기 전 ‘마을 부자’ 소리를 들을 정도로 재물에 여유가 있었다. 그래서 그 마을 사람 가운데 그에게 돈을 빌려 간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세례 받고 이름을 바꾼 그는 교회 속장이 되어 성경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였다.

 하루는 마태복음 18장 23절 이하에 나오는 비유 말씀을 읽었다. 1만 달란트 빚진 신하가 임금에게 빚을 탕감 받은 후 나가다가 자기에게 1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만나 빚을 갚으라며 감옥에 가두었는데, 그 소식을 들은 임금이 화가 나서 빚 탕감을 취소하고 그 신하를 감옥에 가두었다는 이야기였다. 이 구절을 읽은 종순일은 며칠 고민하다가 자기에게 돈 빌려 간 마을 사람들을 집으로 불러 모았다. 그리고 자신이 읽은 마태복음 말씀을 들려주었다.

 “오늘 내가 예수 믿고 죄 사함 받은 것이 천만 냥 빚 탕감 받은 것보다 크거늘, 여러분에게 백 냥, 천 냥 돈 빌려주고 그걸 받으려 한다면 이는 성경 말씀에 나오는 악한 종이라 할 것이요. 이 시간 후로 여러분이 갚을 빚은 없소.”

 그는 문갑에서 빚 문서들을 꺼내 보는 앞에서 불태워 없앴다. 행여나 빚 독촉을 받는 것인 아닌가, 두려운 마음으로 왔던 마을 사람들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곤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요즘 없는 빚도 있다고 우겨서 남의 돈을 빼앗는 세상인데 어찌하여 예수교 하는 사람은 자기 돈까지 버려 남을 도우니 참 갸륵한 일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홍의 마을의 복음화는 급속하게 이루어졌다. 1900년 4월에 일어난 일이었다.

 거기서 끝난 것은 아니다. 종순일은 ‘부자 청년’에 대한 말씀(마태 19:16-30)을 읽은 후 자기 재산을 모두 처분하여 마을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남은 것은 교회에 기부하였다. 그리고는 부인과 함께 고향을 떠나 전도 길에 나섰다. 종순일은 전대도, 식량 주머니도 차지 않은 ‘가난한 전도자’가 되어 남이 가지 않는 ‘땅 끝’(행 1:7)을 찾아 전도하였다. 아직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강화 남부 길상면으로 가서 전도한 결과 길직, 길촌, 온수, 선두, 넙성, 덕진 등지에 교회가 설립되었다. 그리고 나서 석모도와 주문도, 영종도 같이 교통이 불편한 섬들을 찾아다니며 전도하고 목회하였다.

      

재현된 빚 탕감 잔치

종순일은 1917년 감리교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강화 남쪽 주문도 진촌교회(현 서도중앙교회)에 부임했다.
주문도에는 1893년 성공회 신부가 와서 복음을 처음 전했고 1902년 김근영 전도사가 와서 감리교회를 설립했는데, 주문도를 호령하던 ‘밀양 박씨 충헌공파’ 집안의 박두병 ․ 박순병 형제가 교회 주역으로 활동하였다.

그런 진촌교회에 박두병 ․ 박순병과 같은 집안사람으로 아버지가 박두병에게 ‘2천원’(현 시가로 1억 원 정도) 빚을 진 채 별세하여 그 빚을 고스란히 유산으로 물려받은 가난한 교인이 있었다. 그는 아버지 빚을 갚기 위해 8년 동안 쓸 것을 쓰지 않고, 먹을 것을 먹지 않고 절약하여 16원을 모았으니 그런 식으로 하면 평생 가도 갚을 수 없을 것은 분명했다. 그가 하루는 교회 목사와 박두병 ․ 박순병을 비롯한 박씨 문중 교인들을 집으로 초청하였다.

 “여러 어르신, 아버님께서 지신 빚을 갚기 위해 8년 동안 애써 모았으나 16원 밖에 모으지 못했습니다. 이런 식이라면 제가 죽기 전에 빚을 다 갚지 못하게 될뿐더러 빚 때문에 도무지 제 맘이 편치 못하여 기도도 할 수 없으니 어찌 하면 좋습니까? 여러 어르신의 처분을 따르겠습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침묵을 깬 것은 종순일 목사였다. 그는 성경을 펴서 마태복음 18장 20절 이하 말씀을 읽고 나서 ‘두 세 사람이 마음을 합하여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것’과 ‘1만 달란트 빚 탕감 받고도 1백 데나리온 빚을 탕감해 주지 않은 신하가 받은 형벌’에 대해 이야기 해 주었다.

 그리고 다시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침묵을 깨고 동생 박순병이 입을 열었다.

 “형님, 오늘 이 자리에서 이 문제가 난 것도 하나님의 뜻인 듯 합니다. 형님은 그 돈을 받지 않아도 사는데 지장이 없지 않습니까? 받아야겠다는 형님 마음과 갚아야 된다는 저 사람의 근심이 서로 다르니 어찌 합심하여 기도가 되겠습니까? 기도 할 때 서로 거리낌이 없어야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시지 않겠습니까?”

 박두병이 무릎을 치며 대답했다.

 “그럼세. 그렇게 함세. 자네 부친이 내게 진 빚은 아니 갚아도 되네.”

 박순병이 다시 이어 받았다.

 “형님이 2천원 빚을 탕감해 주었으니 저 사람 부친이 내게 진 빚 60원을 어찌 받겠소? 나도 그 빚을 탕감해 주렵니다.”

 아버지 빚을 물려받았던 가난한 교인은 물론이고 그 자리에 있던 마을 사람들 모두 감동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주문도 섬사람들이 교회를 보는 눈이 달라졌다. 오래지 않아 당시 섬 주민 181호 가운데 134호가 교회에 나오게 되었으니 전 주민의 75%가 교인이 되는 놀라운 결과를 얻게 된 것이다. 지금도 면소재지인 주문도가 ‘술집과 다방이 없는’ 성역(聖域)으로 남게 된 데는 이러한 감동적인 복음 역사가 크게 작용하였다.

 이런 감동의 연극을 연출한 장본인은 종순일 목사였다. 그는 17년 전 고향(홍의)에서 했던 것과 똑같은 연극을 이제 목회자가 되어 주문도에서 재현한 것이다. 그 때 ‘빚잔치’ 주연배우였던 그가 지금 같은 내용의 ‘빚잔치’ 연극의 연출자가 되었다. 17년 전의 감동이 장소만 바꾸어 그대로 재현된 셈이다. 은혜는 은혜를 낳는 법이다. 그런 그에게 ‘성자’ 목사 칭호가 붙여진 것은 당연하다.

 부요한 양반 집에서 태어났으나 예수를 믿으면서 이름을 바꾸고, 마을 빚을 탕감해 주고,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가난한 전도자가 되어 ‘땅 끝’을 찾아 복음을 전하는데 일생을 바친 종순일 목사는 1926년 목회 일선에서 은퇴한 후 주문도에서 조용한 말년을 보내다 별세하였다.


성경에 이름이 바뀐 사람이 종종 있습니다. 

야곱이 대표적이지요. 

'발뒤꿈치를 잡는다'는 의미의 폐쇄적이고 부정적인 호칭에서 '하나님의 승리를 담보한 자'라는 의미의 이스라엘로 바뀝니다. 

시몬이 베드로가 되고, 요셉이 바나바로, 사울이 바울로 바뀝니다. 

단지 호칭만 바뀌지 않고 그들의 삶 자체가 이름에 걸맞게 바뀌었음은 성경이 증언하는 사실입니다.

한국 개신교 초기 역사에도 그렇게 이름을 바꾼 사람들이 있습니다. 

1890년대 후반, 강화도 북단 홍의 마을이라는 곳에 복음이 들어왔습니다. 

마을 훈장으로 있던 박능일이란 분이 가장 먼저 복음을 받아들여 서당을 예배당으로 바꾸어 교회를 시작했습니다. 

훈장님이 그러니까 마을 사람들도 훈장님 말씀에 따르자 하며 예수를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세례를 받으며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훈장님 말씀이, "우리가 예수 믿고 교인된 것은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새로 태어난 아기에게 이름을 지어 주듯 거듭난 우리가 새 이름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모두 이름을 바꾸기로 했습니다. 

비록 집안은 다르지만 한날 한시에 함께 세례를 받아 한 형제가 되었고, 또 그 마을에서도 처음 믿은 사람들이니 모두 한 '일'(一) 자를 돌림자로 해서 이름을 바꾸자고 했습니다. 

성은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니 바꿀 수 없고 마지막 자만 한 '일' (一) 자로 통일하기로 했습니다. 

가운데 자는 각자 정하고요.

그래서 믿을 '신', 사랑 '애', 능력 '능', 은혜 '은', 은혜 '혜', 충성 '충', 거룩할 '성', 바랄 '희', 받들 '봉', 착할 '순', 하늘 '천' 등. 

이런 글자들을 적은 쪽지를 주머니에 넣고 함께 기도한 후 한 사람씩 주머니에서 꺼냈습니다. 

제비뽑기입니다. 

훈장님이 먼저 뽑았는데, '능' 자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박능일이 되었고, '신' 자가 뽑힌 사람은 신일, '순' 자가 뽑힌 사람은 순일, '애' 자가 뽑힌 사람은 애일, '천' 자가 뽑힌 사람은 천일 등. 

그래서 홍의교회 역사에 나오는 초기 교인들의 이름은 모두 끝이 '일' 자로 끝납니다. 

박능일, 권신일, 권인일, 권문일, 권천일, 권혁일, 권혜일, 김경일, 김부일, 종순일, 주광일, 그리고 장양일 등.

이 분들은 이름만 바뀐 것이 아니라 삶 자체도 바뀌었습니다. 

종순일이라는 교인은 그 마을에서 가장 큰 부자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그에게서 돈을 빌려다 쓰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18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비유 말씀을 읽게 되었습니다. 

임금에게 1만 달란트 빚진 신하가 그 빚을 탕감 받고 나가다가 자기에게 1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만나 그의 빚을 탕감해 주지 않고 옥에 가두었는데, 그 사실을 알게 된 임금이 화를 내며 그를 잡아 다시 옥에 가두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마을 부자 종순일 성도가 이 말씀을 읽고 며칠 동안 기도하며 고민했습니다. 

그러다 주일 오후 예배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는 자기에게 돈 빌려간 사람들을 모두 불러들였습니다. 

불안한 마음으로 떨고 있는 사람들 앞에 종순일 성도가 섰습니다. 

믿지 않는 그들에게 마태복음 18장을 들려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 이 말씀에 나오는 악한 종이 바로 나외다. 내가 주님의 은혜로 죄사함을 받은 것이 1만 달란트 빚 탕감 받은 것보다 더 크거늘, 내가 여러분에게 돈을 빌려 주고 그 돈을 받으려 하는 것이 1백 데나리온 빚을 탕감해 주지 못한 것보다 더 악한 짓이오. 그러다 내가 천국에 가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오늘 부로 여러분들에게 빌려 준 돈은 없는 것으로 하겠소."

그리고 빚 문서를 꺼내 모두 보는 앞에서 불살랐습니다. 

동석하고 있던 선교사에게 증인이 되어 달라고 부탁까지 하면서요. 

그 사람들 모두 그날 교인이 된 것은 말할 것 없고, 마을 전체가 거의 믿게 되었습니다.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종순일은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는 마태복음 19장 21절 말씀을 읽고 재산을 모두 처분해 교회에 바쳤습니다. 

그 돈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교회 묘지를 구입하게 했습니다. 

또 얼마 있다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각 지방과 고을에 보내셨다는 말씀이 적힌 누가복음 10장 1절을 읽고 아내와 함께 괴나리봇짐을 하나 메고 강화도 남쪽 길상면으로 전도 여행을 떠나고, 사도행전 1장 8절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주님의 마지막 명령을 읽고 강화도 섬 각지로 다니며 복음 전하고, 나중에는 주문, 옹진 등 서해안 외딴 섬들을 돌며 십 여개 교회를 개척하고 평생 가난한 복음 전도자로 살았습니다.

새사람 종순일 성도입니다.

종순일 목사님은 2남 1녀을 두었고 장녀 종보희(평양신학교 졸업) 장남 종명원 차남 종명준이었다.
종명준과 그의 부인(인천 창녕교회의 반정순 권사였음)은 1남 6녀를 두었고 자녀들 모두 믿음 생활을 잘 하고 있으며 
장녀 종광순은 현재 필라델피아 새한장로교회를 담임하는 고택원 목사의 사모이다.
고목사의 장녀(정한나)와 사위(정피터)는 둘다 Main Line Health Care의 내과의사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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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 기도에 관한 연구 / 최세창 목사

(풍성교회, 인천여신, 기독교방송 신학 강좌 강사)

Ⅰ. 시작하는 말

신앙 생활에 있어서 많은 문제가 있는데, 그 중 하나로 '서원'을 들 수 있다.
서원이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모르면서 너무 쉽게 서원하고, 서원한 것을 지키지 못해서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심지어 서원의 중압감에 못 이겨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도 보게 된다.

이러한 비극적인 현상을 염두에 두고서, 서원에 관한 성경적 교훈을 고찰하여 서원의 참 의미를 제시함으로써 서원의 오용 또는 남용 그리고 그로 인한 비극을 막고자 한다.

Ⅱ. 서원의 정의

서원이란 히브리어로 "이싸르" 또는 "네데르"이며, 헬라어로는 "유케"이다.
위의 용어들은 본래 '말해진 말', '약속', '입에서 나가는 것'을 시사하였다.
일반적으로 "이싸르"는 인생의 향락을 금하는 것, 즉 야웨의 영광을 위해 자기 부정의 생활을 하는 서원을 가리키는 것
"네데르"는 서원자가 무엇인가를, 심지어 자신까지도 하나님께 바치는 서원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와 같은 서원은 옛적부터 있었는데, 하나님 앞에 하는 자발적 언약(맹세)이었다.

서원의 기본적인 관념은 하나님과의 평화(화해)를 위한 것으로, 어떤 일을 실행할 것을 하나님께 약속하는 것, 또는 금욕 생활을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 등이다.

Ⅲ. 서원의 종류

1. 약속

집을 도망쳐 나온 야곱은,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계셔서 여행길을 보호해 주시고, 의식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고향 집으로 편안히 돌아가게 해 주시면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삼아 그 곳에 하나님의 전을 봉헌하고 십일조를 바치겠다고 벧엘에서 약속하였다(창 28:20-22). 이 서원은 구약에 나타난 서원 중에 매우 오래 된 것이다.

압살롬은 아람 그술에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자기를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하시면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약속하였다(삼하 15:7). 아들을 얻기 위해 기도한 한나는, 아들을 주시면 그를 성전에 바치겠다고 약속하였다(삼상 1:11). 요나와 같은 배를 타고 있던 사람들은 안전을 바라면서 서원하였다(욘 1:16). 시편 기자도 "하나님이여 내 서원을 들으시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의 얻을 기업을 내게 주셨나이다"(61:5. 참조:61:6-7)라고 하였다.

특히, 서원으로 인한 처절한 비극은 사사인 입다 때문에 발생하였다. 그는 암몬과의 전쟁에서 이기게 해 주시면,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자기 집 문에서 나와 영접하는 자를 산 제물로 바치겠다고 약속했는데, 불행히도 그의 서원대로 자기의 사랑하는 딸을 희생시킬 수밖에 없었다(삿 11:30-31).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약속으로서의 서원이란, 대체로 심각한 위기에 처한 인간이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목적으로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이기적 목적을 조건 삼는 헌신인 것이다. 따라서, 이 서원에는 비극적인 결과가 따를 수도 있다.

2. 비이기적 헌신

다윗은 법궤가 예루살렘에 세워지기까지 집에도 가지 않고, 침상에도 오르지 않고, 잠도 자지 않겠다고 서원함으로써 새 수도 예루살렘에 법궤를 모셔 하나님의 법과 인간의 법을 일치시키려는 자신의 계획을 추진하고자 하였다(시 132:2-5).

바울이 서원한 것이 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다(행 18:18)고 했는데, 그의 신앙 인격과 철저한 사명감을 미루어 비이기적인 헌신의 약속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서원은 순수한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 하나님께 대한 헌신을 나타내는 것이다.

3. 절제

가나안 사람 곧 아랏의 왕이 이스라엘을 쳐서 그 중 몇 사람을 포로로 잡은 일이 있었다. 그때에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아랏을 자기들의 손에 붙이시면, 그들과 그들의 성읍을 다 멸하겠다고 서원하였다. 즉, 전리품이나 승전의 영예를 취하지 않겠다고 서원한 것이다(민 21:1-3). 사울과 그의 백성들도 원수인 블레셋에게 복수하는 때까지 아무 음식이든지 먹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하였다(삼상 14:24).

신약의 경우,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기로 맹세한 사십 여 명의 유대인들에 관한 기록이 있다(행 23:21). 아마도 이러한 서원은 지켜질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고찰해 온 세 종류의 서원은 모두 기도의 강화를 수반하거나, 그러한 의도로 행해진 것이 분명하다.

4. 나실인의 서원

서원 중에서 매우 특별한 것으로 나실인의 서원이 있다.
남자나 여자가 나실인의 서원을 하고,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면 그 기간 동안에는 다음과 같은 규례를 준수해야만 한다.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하고, 포도주의 초나 독주의 초나 포도즙도 마시지 말아야 하며, 생포도나 건포도도 먹지 말아야 한다.
심지어 포도나무 소산은 씨나 껍질도 먹지 말아야 한다. 머리털을 깎지 말아야 하고, 시체라면 부모 형제 자매라도 가까이하지 말아야 한다. 만일 누가 갑자기 그 곁에서 죽어서 스스로 구별한 자의 머리를 더럽히게 되면, 그 몸을 정결케 하는 날 곧 제칠 일에 머리를 밀어야 한다. 그리고 제팔 일에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 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가지고 회막 문에 와서 제사장에게 주어야 하고, 제사장은 그 하나를 속죄 제물로, 하나를 번제물로 드려서 그의 시체로 인한 죄를 속하고, 또 그는 당일에 그의 머리를 성결케 해야 한다. 그 뿐만 아니라, 자기 모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릴 날을 새로 정하고, 일년 된 수양을 가져다가 속건제를 드려야 한다. 그 까닭은 지나간 기간이 무효가 되기 때문이다.

몸을 구별한 날이 차게 되면, 그 사람을 회막 문으로 데리고 가서 그로 하여금 번제물로 일년 된 흠 없는 수양 한 마리와 속죄 제물로 일년 된 흠 없는 어린 암양 한 마리와 화목 제물로 흠 없는 수양 한 마리와 무교병 한 광주리와 고운 가루에 기름 섞은 과자들과 기름 바른 무교전병들과 그 소제물과 전제물을 드리도록 해야 한다.

제사장은 그것들을 여호와 앞에 가져다가 속죄제와 번제를 드리고 화목 제물로 수양에 무교병 한 광주리를 아울러 여호와께 드리고 그 소제를 전제를 드려야 한다.

자기 몸을 구별한 나실인은 회막 문에서 그 머리털을 밀고, 그것을 화목 제물 밑에 있는 불에 두어야 한다. 자기 몸을 구별한 나실인이 그 머리털을 민 후에, 제사장이 삶은 수양의 어깨와 광주리 속에 있는 무교병 하나와 무교전병 하나를 취하여 나실인의 두 손에 두고 여호와 앞에 요제로 흔들 것이며, 그것과 흔든 가슴과 든 넓적다리는 성물이므로 다 제사장에게 돌려야 한다. 그 후에야 비로소 나실인이 포도주를 마실 수 있었다(민 6:1-20).

위에 언급한 것처럼, 나실인이란 하나님께 헌신을 표시하는 금욕적인 사람이다. 특이한 것은 나실인이 될 아이들을 낳을 때까지는 어머니들도 나실인의 규약을 지켜야 했다는 것이다.

나실인의 계급에는 자의로 된 자와 부모의 뜻으로 된 자가 있었다.

나실인은 신약 시대에도 계속 나타났다. 세례 요한은 나면서(눅 1:15) 성별되었으나, 정작 나실인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안나가 나실이이었던 것 같다(눅 2:36).

Ⅳ. 서원 예물

일반적으로 서원의 경우에는 예물을 바쳐야 하였다(레 22:18, 민 29:39, 신 12:6, 삼상 1:21). 서원에 사용되는 모든 제물은 흠이 있어서는 안 되었다. 흠 있는 제물을 바칠 경우에는 하나님께 열납되지 못하는 것은 물론(레 22:21-23), 바친 서원자는 저주를 받게 된다(말 1:14). 이와 관련하여 창기의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하나님께 가증한 것이므로 서원하는 일로 바칠 수 없었다(신 23:18). 이러한 규례는 서원의 순결성과 거룩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특이한 것으로 사람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서원하는 일이 있다. 이 경우에는 남녀, 연령, 재산의 다소에 따라 돈으로 환산하여 바치게 하였다.(레 27:1-8).

서원한 화목제의 제물은 2일 이내에 먹어야 하고, 남은 것은 제 3일에 불살라 버려야 했다(레 6:16-17). 잠언 기자는 "내가 화목제를 드려서 서원한 것을 오늘날 갚았노라"(7:14)라고 하였다.

Ⅴ. 서원 이행의 문제

하나님께 서원한 것은 신성한 것이므로 반드시 이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민 30:2, 시 22:25, 50:14, 61:5, 65:1, 116:14, 나 1:15 등). 매일이라도 서원은 반드시 이행되어야 한다(시 61:7-8). 또, 서원자에게 해로울지라도 변치 않고 지켜야 하는 것이다(시 15:4).

서원을 이행함에 있어서 더딘 것은 분명히 죄라고 했으므로(신 23:2-23), 서원을 더디 갚는 인간은 우매자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전 5:4).

그러나, 서원 이행에 있어서 예외가 있다. 부모의 슬하에 있는 처녀가 서원했을 때에 아버지가 허락하지 않으면, 그 서원은 성립되지 않으므로 이행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민 30:3-5). 아내가 서원했을 때에도 남편이 허락하지 않으면 그 서원 역시 성립되지 않으므로 이행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민 30:6-8, 10-12).

그런데, 위의 두 가지 경우에 딸 또는 아내의 서원을 듣고도 아버지나 남편이 아무 말이 없으면, 그 서원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다(민 30:4, 7). 또, 만일 남편이 아내의 서원을 들은 지 얼마 후에 그 서원을 무효케 하면, 그가 아내의 죄를 담당하게 된다(민 30:15).

같은 여자라 할지라도 과부나 이혼녀는 서원 이행에 있어서 예외가 없다(민 30:9). 애굽 백성들도 여호와를 경배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서원을 하고 그 서원들을 이행해야 한다(사 19:21). 마찬가지로, 배교한 이스라엘인들은 하늘의 여신에게 제물을 드리고, 그들이 서원한 것을 이행해야 한다(렘 44:25).

결국 서원은 누구나가 다 반드시 지켜야 하지만, 딸이나 아내의 경우에는 아버지나 남편의 허락이 없으면 무효가 되는 것이다.

Ⅵ. 서원에 대한 경계

유대인들에게는 일상적인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서원이기는 하지만, 그다지 장려된 것 같지는 않다.
잠언 기자는 "함부로 이 물건을 거룩하다 하여 서원하고 그 후에 살피면 그것이 그물이 되느니라"(잠 20:25)라고 하였고, 전도서 기자는 "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보다 서원하지 아니하는 것이 나으니 네 입으로 네 육체를 범죄케 말라 사자 앞에서 내가 서원한 것이 실수라고 말하지 말라 어찌 하나님으로 네 말소리를 진노하사 네 손으로 한 것을 멸하시게 하랴"(5:5-6)라고 하였다.

사실상 유한한 인간으로서, 그것도 다급한 일 또는 위기의 상황에서 하나님께 서원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많은 문제를 내포할 수밖에 없다. 설사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서원이라 할지라도, 모든 것을 포괄적으로 그리고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인정하시겠는가 하는 문제가 따르게 마련이다. 오히려 서원자 자신에게 해로울 경우도 있고, 심지어 입다의 경우처럼 자식을 죽여야 하는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서원으로 인한 문제가 많이 나타나고 있다. 그 유형은 성경에 나타난 유형과 거의 유사하다. 어떤 면에서는, 이 시대에 서원이 더욱 남발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축복을 앞당기기 위해서, 위기를 속히 모면하기 위해서, 그리고 목사 또는 사모가 되기 위해서, 혹은 목사나 사모를 만들기 위해서 등등 이루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이다. 어떤 이들은 남에게 서원을 유도하거나 강권하기도한다.

실제로 서원에 얽매여 전전긍긍하는 사람들이 결코 적지 않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서원을 하지 않아도 이루어 주실 것이므로 서원이란 가급적 하지 않는 것이 좋고, 부득이한 경우에는 아주 신중하게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어차피 인생을 주관하시는 이는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인생의 모든 때와 기한도 하나님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고, 또 그렇게 되어야 참된 의미에서 우리에게 유익한 것이다. 가장 바람직한 신앙 자세란 자신 혹은 자식의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발견하고 그 뜻과 계획을 좇는 것이다. 잠언 기자는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16:9)라고 하였다.

Ⅶ. 맺음말

서원이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기 부정의 생활을 약속하는 것이며, 무엇인가를, 심지어 자기 생명까지도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약속이다.

이스라엘인들의 서원은 약속과 비 이기적 헌신, 그리고 절제로 구분할 수 있다.
특이한 것으로는, 하나님께 전적 헌신을 표시하는 나실인의 서원이 있다.

일반적으로 서원자는 흠이 없는 예물을 하나님께 바쳤고, 사람으로 바칠 경우에는 돈으로 환산하여 바쳤다.

모든 서원은 손해가 되더라도 반드시 이행해야 했으며, 더디게 이행하는 것은 죄로 간주되었다.
단, 딸이나 아내의 서원은 아버지나 남편이 허락하지 않으면 무효가 되었다.

대체로 서원은 다급한 때나 위기의 상황 또는 이기적인 목적 달성 등을 위해서 하는 것이므로 많은 문제를 내포하게 되고, 실제로 커다란 피해나 엄청난 비극을 초래할 수 있다.
서원 이행의 어려움 때문에, 그리고 부모가 자식을 위해 서원한 것이 그 자식의 적성 및 소질 등에 맞지 않아서 매일 매일을 괴로워하며 사는 예도 적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함부로 서원하지 말아야 하며, 부득이한 경우에는 신중하게 하나님의 뜻을 고찰하고, 자기 자신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해 심사숙고한 후에 지킬 수 있는 서원을 해야 할 것이다.
이 점은 다른 사람을 위해 서원할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차라리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묵묵히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훨씬 더 바람직한 신앙 생활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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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수께끼 임신처럼 서원을 한 것도 모르고 살아갈 수 있다!



메스꺼움, 구토 등 흔하다는 입덧도 없었다. 평소처럼 생리도 거르지 않고 했다. 갑자기 배가 아파 화장실에 갔다가 아기를 낳았다. 그는 출산 직전까지 임신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주장했다. 일하고 돌아온 남편은 경악했다. 인도네시아에서 이른바 '수수께끼 임신(cryptic pregnancy)' 사건이 또 발생했다.

17일 트리분뉴스에 따르면 서부자바주(州) 팡안다란 지역의 치히등 마을에 사는 루스미아(33)씨가 9일 오전 11시쯤 화장실에서 혼자 아기를 낳았다. 그는 "복통을 느껴 화장실에 볼일을 보러 갔다가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아기를 낳았다"며 "임신 중에 느꼈던 증상이나 신체적 변화가 전혀 없었고 생리도 계속해 임신 사실을 몰랐다"고 현지 매체에 말했다.

건설 노동자로 일하는 남편 다르시토(39)씨는 "오후에 퇴근하고 집에 돌아왔는데 갓난아기 울음소리가 들려 깜짝 놀랐다"며 "열 살인 첫째와 두 살인 둘째 아이를 임신했을 때랑 너무 차이가 나서 아내가 셋째 아이를 임신한 사실을 몰랐다"고 했다. 그는 "첫째 아들이 출산 뒤처리를 도왔고 뒤늦게 산파가 와서 아기 상태를 확인했다"고 덧붙였다.

산파는 "아기는 몸무게 3㎏인 남아로 정상 상태였다"고 말했다. 루스미아씨 부부는 "알함둘릴라('신에게 감사하다'는 아랍어 표현), 모두 건강하고 똑똑한 자녀로 자라길 바란다"고 했다.

지난해 7월 임신 사실을 안 지 1시간 만에 출산한 헤니씨와 아기. 드틱닷컴 캡처

비슷한 사건은 지난해 7월에도 있었다. 서부자바주 타식말라야 한 마을에 사는 헤니 누라이니(30)씨는 배가 부은 것을 느낀 지 1시간 만에 마을 산파의 도움으로 몸무게 3.4㎏, 키 50㎝의 남자 아기를 낳았다. 루스미아씨처럼 세 번째 출산이었다. 헤니씨는 "출산 1시간 전쯤 오른쪽 배가 갑자기 부풀어 오르면서 출산을 앞둔 것처럼 통증을 느껴 산파를 불렀다"고 했다.

지역 산파협회는 두 사례처럼 임부가 임신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증상을 의학적으로 '수수께끼 임신이'라 부른다고 했다. 임부 1만 명에 한 명꼴로 발생한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산파협회 관계자는 "임신 과정은 정상적으로 진행되지만 임부가 인지하지 못하는 수수께끼 임신은 보통 임부가 성폭행 등 충격으로 인한 정서 장애와 정신 장애를 앓을 때 발생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루스미아씨도, 헤니씨도 두 가지 장애를 경험한 바 없다는 게 가족의 얘기다.

2019년 영국에서도 복통을 느낀 지 1시간 만에 출산한 수수께끼 임신 여성이 있었다.

자카르타= 고찬유 특파원 jutda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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