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렛 예수 & 다윗의 자손 예수
마가복음 10:46~52
46.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48.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9.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50.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51.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사도행전 4:10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철학자 하이덱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 이라고 정의합니다.
그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를 살펴보면 그 언어에 그 사람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가늠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느 기업의 회장 비서로 근무하는 사람이 화장실에서 용무를 보고 있었는데 누군가 화장실 문을 두드립니다.
그러자 용무를 보던 사람이 "예, 들어오세요!" 하더랍니다.
직업 의식이 화장실에도 나타난 현상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사람의 직업이 무엇인지 아시겠지요?
또 하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또 다른 사람이 화장실에서 용무를 보고 있는데 또 누군가 화장실 문을 두드립니다.
그러자 용무를 보던 사람이 "예, 통화중! 통화중!" 이라고 하더랍니다.
그 사람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아시겠지요?
전화교환수라고 합니다.
나사렛 예수인가?
다윗의 자손 예수인가?
예수님과 관련하여이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다른 몇 가지 예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왜 그렇게 했습니까?
중요한 조상
단순한 대답은 유대인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 인 다윗 왕이 예수의 조상 중 하나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마태 복음 1장에서 예수 계보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이런 식으로, "다윗의 자손"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예수님이 다윗의 왕의 계보의 후손임을 의미했습니다.
이것은 고대 세계에서 흔히 말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지상의 아버지는 요셉입니다.
요셉이나 예수님은 다윗의 문학적 자녀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조상과의 관계를 보여주기 위해 "아들"과 "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그 날의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그렇지만 천사가 요한을 묘사하는 "다윗의 자손"이라는 용어와 예수님을 묘사하기 위해 "다윗의 자손"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시각 장애인의 사용 사이에 차이가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장님의 묘사는 제목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은 현대 번역본에
대문자로 쓰여졌습니다.
메시아를 위한 예언
예수님 당시, "다윗의 자손"이라는 용어는 오랫동안 기다려온 의로운 왕인 메시야의 표제였습니다.
그분은 단호하게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모든 승리를 얻었습니다.
그리고이 용어의 이유는 다윗 자신과 모든 관계가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그의 후손 중 하나가 영원히 하나님의 왕국의 통치자가 될 메시야가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사무엘하 7:11-16
다윗은 예수의 시대보다 약 1,000 년 전에 이스라엘의 왕으로 다스렸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수세기가지나면서 위의 예언을 잘 알고있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야가 이스라엘의 운명을 회복하기를 간절히 원했으며, 메시야가 다윗의
선에서 올 것이라고 알고있었습니다.
그러한 모든 이유 때문에 "다윗의 자"라는 용어는 메시아의 칭호가되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시대에 이스라엘 왕국을 발전시킨 지상 왕 이었지만, 메시아는 영원 토록 통치했습니다.
구약의 다른 메시아 예언들은 메시아가 병자를 고치고 눈먼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도와주고 절름발이가 걷게한다는 것을 분명히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자손"이라는 용어는 치유의 기적과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는이 사건에서 예수님의 공개 사역의 초기 부분에서 그 관계가 실제로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2 그들은 눈 멀고 벙어리가있는 귀신 들린 남자를 데려왔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를 고쳐 주셨다.
23 모든 사람들이 놀라서 "다윗의 자손이 될 수 있겠 느냐?"하고 외쳤다.
마태복음 12:22-23
복음서의 나머지 부분은 신약 성서와 함께 전체적으로 그 질문에 대한 답이 명확한 "예"라는 것을 보여 주려고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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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예수만 바라 보고 그 분만 섬기며 그 분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는 삶을 사는데 자신을 가로 막는게 있으면 다 버려야만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 보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 하고 말합니다.
주님이 제자들이 한 커다란 믿음의 순종을 알아주기를 원했죠.
그러자 주님은 29~30절에서 대답하시기를
29.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30.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역시 믿는 자들 삶의 우선 순위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 보고 그 분의 말씀에 따라 믿음의 삶을 사는데 있어 오직 주님을 믿고 찬양하며 그분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죄를 짓는 것이 자연히 싫어집니다.
그러나 죄라는 것이 알고도 짓고 모르고도 짓는 것이기 때문에 주님만을 바라보는 삶을 살면 죄에 대해서 알고 늘 회개하는 삶을 삽니다.
엄청난 복인데,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는 믿는 사람 누구나 주님께서 자기의 영광을 위해 은사를 주셨는데 주님께서 보내주신 자리에 있는 사람이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하는 자신의 은사
전도하는 것, 말씀 가르치는 것, 기도하는 것, 봉사, 재물 등 모든 것을 더해주시는다는 복을 말씀하신 겁니다.
이렇게 살아있을 때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순종의 삶을 사는 사람이라면 주님과 같이 살 때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리라 고 하셨습니다.
31.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32.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기워 희롱을 받고 능욕을 받고 침 뱉음을 받겠으며
33. 저희는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일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34.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추였으므로 저희가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
그리고 자신이 십자가에서 능욕 당하심을 가르치시는데 세번 째 언급하시는거죠.
누가복음 12:49-50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불은 사람을 살리시는 성령의 불을 의미하기도 하며 심판의 불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오신 것만으로도 불이 붙어야만 하는데도 하나님의 뜻은 창세 이후로 다시 심판이 있을 그날까지의 온 인류의 죄를 씻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받으실 죽음이 남아 있으니 그 기간 동안 가르쳐도 가르쳐도 깨닫지 못한 사람들을 생각하니 참으로 민망하셨음을 토로하신 겁니다.
31~34 말씀은 마지막 유월절을 보내시기 전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며 하신 말씀입니다.
세번 째 언급했지만 제자들이 하나도 깨닫지 못했고 이유는 그 말씀이 감추였으므로 저희가 가르침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아직 때가 안되어 드러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성경 말씀의 본 뜻이 드러나기 위해서는 성령의 사역이 있어야 합니다.
이들이 알기 위해서는 성령의 가르침이 있어야만 했던 겁니다.
때가 맞지 않을 때에 사람들이 아무리 학문적 연구를 하더라도 주님께서 말씀하신 뜻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오순절 날 성령을 받은 후에야 주님의 가르치심을 깨달을 수 있었던 겁니다.
결국 성령 충만의 문제 입니다.
말씀을 바르게 깨닫기 위해서는 성령이 충만해야만 됩니다.
충만하지 못하면 이게 정말 큰 문제로 대두되게 됩니다.
특히나 사역자들은 성령충만해서 성령의 이끌림에 의해서 말씀을 바르게 깨달아야만 되고 바르게 가르쳐야만 되는데 늘 이게 오늘 날까지도, 앞으로도 있을 문제 입니다.
성경은 성령 충만함을 받으라고 강력하게 권합니다.
충만하지 못하면 믿음의 생활에 있어서 늘 어린 아이일 뿐입니다.
이게 바리새인들, 즉 종교인들의 문제였습니다.
가장 성경을 잘 안다고 한 그들이 사실은 성경을 몰랐던거죠.
그래서 구약에 문자적으로 기록된 예언의 말씀들을 그들은 스데반이 행 7 : 51에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
바리새인들은 매일같이 성경을 상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봉사가 봉사를 가르치면 안되는게 여기에서 오는건데
제가 제일 두려워하는 점이기도 합니다.
봉사 주제에 봉사를 양산하게 되는건지나 않은지 정말 두려운 문제죠.
이 함정에 빠져 들지 않기 위해서는 말씀과 기도를 양 축으로 삼아 날마다 성령님만이 역사하심을 간구하여 성령 충만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성경은 한번 말씀에 비추이고 성령을 받은 자도 배도한다고 경고하며 사도 요한은 요한1서 5장에서 사망에 든 자들이 있으니 그들을 위해 기도하지 말라고 썼습니다.
지금은 복음에 너무 유사한 것들이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심리학이고 뉴 에이지들이 교묘하게 스며 들어와 복음인 양 지금 수도 없이 선포되고 있씁니다.
가장 흔하면서도 가장 교묘한 속임수가 긍정적 사고 로 대변되어지는 것들이지요.
" 주 안에서 너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
믿음만 있으면 너는 네 뜻대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 라고 선포되는데요
그에 앞서서 꿈을 가지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네가 자기 노력과 희생을 다해가며 나아가다 보면 다 이루어진다 라는 가르침 입니다.
그리고 그 끝을 들여다 보면 예수님은 온데간데 없고 자기의 노력으로 인한 성취감의 뿌듯함인한 교만감만이 있습니다.
자기 인생의 지배자가 주님이 아니라 자기인, 즉 자기가 하나님이 되어 똬리를 틀고 앉아 있는겁니다.
" 나는 죽을 때 까지 내 힘, 내 능력으로는 이룰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 가 올바른 고백입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여리고로 들어가십니다.
35 : 여리고에 가까이 오실 때에 한 소경이 길 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36 : 무리의 지남을 듣고 이 무슨 일이냐고 물은대
37 : 저희가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신다 하니
38 : 소경이 외쳐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39 : 앞서 가는 자들이 저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저가 더욱 심히 소리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0 :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명하여 데려오라 하셨더니 저가 가까이 오매 물어 가라사대
41 :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42 : 예수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
43 :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좇으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
여리고는 참 중요한 의미를 지닌 말입니다.
구약에서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여리고를 무너뜨릴 때 한 일이라고는 하나님이 명하신대로 그대로 행하는 순종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눈으로 보는 시각으로 인한 생각에는 도저히 무너뜨릴 수 없는 것 같은 여리고성을 믿음의 순종으로 무너뜨렸습니다.
예, 믿는 사람들에게는 여리고성을 무너뜨리는 것과 같은 영적 싸움이 앞에 놓여 있습니다.
첫관문 입니다.
주님만을 향한 믿음을 무너뜨리려는 사탄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방해들이 성도들을 삼키려고 늘, 언제나 덤벼들고 있지요.
이것을 무너뜨리는게 바로 믿음 입니다.
그에 따른 행위가 내 뜻은 단 하나도 섞이지 않는 주님 뜻에 순종하는거죠.
그럼 하나님이 여리고성을 무너뜨리신 것같이 우리의 모든 사탄의 방해들을 하나님께서 직접 무너뜨려주시는 겁니다.
즉 영적 싸움은 내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면 무너뜨릴 수 없다는 사실 입니다.
가장 염려스러운 일은
자기 영적 상태는 도외시한 채 남의 영적 상태를 염려하는 겁니다.
성경이 없으면 바리새인이나 예수의 제자들이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베드로이지요.
그는 예수님과 함께했을 때 주님과 함께라면 지옥엔들 못가겠냐고 장담을 합니다.
제자들도 따라서 장담을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에수님이 말씀하신대로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을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성령충만하지 못하면 자기 분수를 모르고 장담을 하게 되고 성령충만하지 못해 지킬 수가 없게 됩니다.
성령충만하면 분수를 모르는 장담을 하지 않게 되고 모든 것을 주님이 이루시는 것을 믿음으로 순종하며 지켜 보게 되고 감사드리는 겁니다.
그 영적 싸움의 현장인 여리고 성을 들어가기에 앞서 소경 하나를 만났는데
그 소경에게 사람들이 나사렛 예수가 지나간다고 가르쳐 줍니다.
나사렛 예수로 부르는 것은 경멸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구원의 메시야가 태어나겠느냐는 조롱 입니다.
그런데 소경은 나사렛 예수란 말을 듣고는 "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 하고 외칩니다.
여러분들도 외치세요.
"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
이스라엘 사람 소경이 " 다윗의 자손 예수여 " 하는 부르짖음은 지금 시각으로서는 예수를 모르는 시각이지만 이 소경은 당시로서는 성경을 알고 바르게 부른 것입니다.
이 호칭이 성령 받아야만 나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라고 바뀌는 것입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를 조롱하는 자와 예수에게 자기의 모든 것을 의탁하는 자와의 대비입니다.
예수님은 부르짖는 자에게 대답하시지 않는 경우는 단 한번도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리새인, 서기관들과 소경의 차이입니다.
그들의 영적 상태는 같았습니다.
다만 소경은 믿었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다.
결과는 믿음입니다.
성경의 모든 것을 믿어라 이겁니다.
믿으면 성령께서 알게해 주시고 깨닫게 해주시고 순종할 수 있는 힘을 주시는겁니다.
믿음은 뭘까요? 최고의 믿음은 두 손을 들고 주님 앞에 나옵니다.
백기 퉁항, 하나님 앞에 무조건 적인 항복을 말합니다.
베드로가 성령이 왔을 때 완전하게 두 손을 들고 항복을 했죠.
영어로는 소렌드(?) 즉 포위 당하다 라는 뜻인데 성령에 포위 당하면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여 역사하시옵소서 하고 항복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네가 포기해라.
네가 포기하면 하나님이 직접 하시겠다.
네가 포기 안하면 나는 일하지 않는다.
믿음이 모든 것의 열쇠 입니다.
성경에 태어날 때부터 가진 이름보다는 나중에 붙여진 이름이 더 유명해진 이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별명이든 바뀐 이름이든 그 사람을 연상시키는 말이 됩니다.
그 이름은 나름대로 의미가 담겨져 있기에 대상을 취급하는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서 행동이 느리거나 말이 느린 사람을 ‘느림보’ 혹은 ‘거북이’라고 부른다면 그 혹은 그녀는 뭔가 느리게 행동하는 이임을 인정하게 됩니다.
스스로가 부인하지 않은 경우 그 다른 이름은 그 혹은 그녀의 성격이나 행동 양식을 나타냅니다.
때문에 사람들이 자의건 타의건 간에 다른 이름을 지어 부른다는 것은 그 사람의 존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포함되어 있어서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에 대하여 자부심을 가진 이들은 이름에 대해 소중하게 여기고 자신의 가치를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합니다.
명예의 상징인 이름을 함부로 한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감이 부족하거나 자존감이 낮은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남이 불러주는 것이 이름이라면 그 이름은 귀하고 의미가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 이름의 대상은 귀하고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때로는 무명의 사람들이 가치 있는 삶을 사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들 무명의 영웅들은 우리 주변에 많이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분명 존재하였고 그 자취를 이웃에게 남겼으며 그 이야기가 전해질 때마다 그 이름도 빛나게 될 것입니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살다간 무명의 인사들이 세계와 사회, 나라와 민족을 위해 자신의 삶을 헌신하였다는 것에 깊이 감사하면서 이런 이들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립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이들을 통해서 역사를 운행하시고 섭리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사람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복음으로서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여리고로 길을 가시는 예수님과 제자들에 대한 소문이 온 동네에 쫘~악 퍼졌습니다.
거기 채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이 구걸을 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지나가신 다는 소문이 들렸습니다.
곧 오신다는 소리에 길 가에 앉아 있다가 소리를 질러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질책에도 불구하고 간절히 예수를 부른 그 사람은 이름이 없었습니다.
그냥 사람들에게 디매오의 아들, 바-디매오라고 불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간절히 주님을 찾았고 주님은 그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시고 그를 불러서 원하는 대로 눈을 보게 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길에서 예수님을 따라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구원사역에 산 증인이 된 것입니다.
복음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그는 그리스도의 산 증인이 되어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이고 또한 그런 사람을 만나고 길러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우리가 믿는 믿음에 만족하고 전도하거나 선교하지 않으면 우리의 믿음은 우리가 죽음으로서 빛을 잃게 될 것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게 되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영적인 원리를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먼저 받아 가진 빛을 다음 사람에게 전해주어야 합니다.
그게 전도고 복음을 맡은 우리의 사명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을 통해 주 예수님의 복음을 증언하는 이유는 우릴 통해 복음을 듣는 이들로 하여금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먼저 부르심을 입은 까닭은 단지 주님의 은혜로 그렇게 된 것이지 다른 이들보다 나은 것이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의 모습을 먼저 닮아가고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되어서 그리스도의 향기로서 역할을 감당하라고 부르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디매오는 그 일로 부르심을 입었고 그 역할을 위해 길을 떠났습니다.
그가 가진 체험은 그를 주님께로 붙들려 살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주님을 만난 경험이 있으십니까?
없다면 구하십시오.
그리고 만사 가운데 역사하시는 주님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가능할까요?
우선 믿음으로 만사가 주님의 섭리 가운데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세상을 보십시오.
그 사랑과 은혜가 충만한 세상을 보시면 아시게 될 것 입니다. 이론이나 이성적으로 이것을 증명하거나 설명할 수 없습니다. 단지 믿음을 가지고 보면 달리 보이고 달리 보이면 달리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바디매오의 입장에서,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기에 그가 그토록 간절히 예수를 불렀을까요?
그가 예수님을 부른 호칭에서 그 의미를 찾아보겠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나사렛에서 오신 분이라고 불렀습니다.
‘나사렛’은 천하고 경멸받는 곳을 의미하였으며 가난하고 빈약한 출신이라는 오명(汚名)을 가지게 할 정도로 무시 받는 촌이었습니다. 그런 곳에서 위대한 빛이 세상에 비취게 되었습니다.
가난한 사람 무시당하는 사람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의 희망이 예수님이셨습니다. 비방거리의 이름이 동경과 희망의 이름으로 변한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라는 말은 사실 좋은 의미로 여겨지지는 않습니다.
귀하고 높으신 이의 이름에 걸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다윗의 혈통을 가진고 나신 분이셨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가르침에나 삶에서 본이 되시는 분이었습니다.
왕궁에서 태어나 온갖 귀한 대접을 받아야 할 분이셨지만 그렇지 않고 낮고 낮은 자리에서 나시고 자라셨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예수님을 업신여길 이유는 없었습니다.
그분의 능력과 나타난 이적은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도록 이끄는 데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사렛 출신 예수라는 이름은 항상 주님을 따라 다녔습니다.
그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예수께서는 온전히 비천하고 가난하고 무시 받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셨고 친구삼아 주셨으며 그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리고 선포하시길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저들은 천국의 주인들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예수님 때문에 무시당하고 박해를 받는 사람에게 복이 있다고 하셨고 상을 받게 되고 저들이 천국을 소유한 이들이라고 하셨습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가 성경을 어떻게 들었는지 혹은 이해하고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예수님에 대하여 들은바가 유별하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갈릴리 출신으로 유다지파가 아닌 스불론 지파의 땅이었습니다.
그곳은 이스라엘 사람들로부터 이방인의 땅으로 여겨 불신과 멸시의 대상이 되는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바디매오는 정확하게 예수님의 출신을 유다지파 다윗의 자손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 의미는 다윗의 위가 영원하리라는 약속에 의지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구원자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으로 오리라는 약속의 말씀을 믿고 있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행하신 일과 가르침에 대해 소문을 들었고 그 내용에 비추어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그 지식은 예수에 대한 믿음에 이르기에 충분하였습니다.
그는 다윗의 자손 예수여 라고 부르짖고 있었습니다.
그 믿음은 메시아 대망에 대한 믿음이었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눈으로 그를 보기를 원하는 그는 다른 것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눈으로 메시아를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게 됩니다.
우리의 모습을 살펴봅시다.
정말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으로 온 세상의 구주로 믿습니까?
아니라면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는다고 멸시하고 조롱하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할 마음이 있습니까?
모든 사람은 예수님의 구원역사를 필요로 합니다.
누구나 구원 받을 수 있으며 누구든지 구원받아야 합니다.
이 일에 주님은 우리를 여기에 부르셨고 이 시대에 나게 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믿습니까?
여러분과 저의 믿음의 고백이 주님 앞에서 한 것임을 기억하시고 말씀과 기로로 거룩한 삶을 살고 우리의 구세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우선을 두시길 축복합니다.
주님이 우리의 복이며 은혜입니다.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 그 날이 속히 오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