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영상 설교 자료 / 12-25-2022 성탄주일 설교
성탄의 의미(마태복음 1:21)
12월 25일 성탄주일 설교(12/25/2022)
뉴욕 파트리스교회 이승혁목사
성탄(聖誕)
성인 성, 성스러울 성(聖), 낳을 탄, 태어날 탄(誕)
- 성(聖) / 귀 이(耳) + 입 구(口) + 북방 임(壬) / 북방 임(크다, 성대하다)
'성(聖)'이란 한자의 의미
"크게 듣고 크게 말하다"
"타인의 말에도 귀를 기울일 줄 아는 현명한 사람"
- 탄(誕) / 말씀 언(言) + 길 연, 늘일 연(延)
'탄(誕)'이란 한자의 의미
"말을 널리 늘이는 것"
"말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것"
성탄(聖誕)이란 한문자의 의미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요한 1:14) 크게 듣고 크게 말하여 세상에 널리 알리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첫째, 상(上), 둘째, 중(中), 셋째, 하(下)
막연하게 미국 사회의 영적 수준을 개인의 느낌에 따라 판단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판단하기 위한 정확한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그 기준을 "언어(言語)"라고 하겠습니다.
언어를 기준으로 판단하려는 몇 가지 이유를 소개합니다.
언령신앙(言靈信仰)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처럼 언어가 갖는 어떤 신비한 힘이 있다고 믿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화분에 꽃을 심고 똑같은 조건과 환경에서 하나의 화분은 아침마다 물을 주며 지난 밤에 잘 잤니? 오늘은 더 아름답구나! 이렇게 긍정적인 인사말을 합니다.
그리고 다른 화분은 물을 주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라든지 말든지 이렇게 무관심한 자세로 대하면 얼마 후에 화분에서 자라는 식물의 모양이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또 다른 예를 들면 유리병에 물을 담아놓고 하나의 물병을 향해서 너는 참 좋은 물이야! 이렇게 긍정적인 반응을 하고 다른 물병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반응을 하면 긍정적인 반응으로 대하는 물병의 물은 육각수 형태의 좋은 물로 바뀐다고 합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반응으로 대한 물병의 물은 아무런 변화를 기대할 수 없다고 합니다.
언어(言語)는 존재(存在)의 집
불란서의 회의론을 창시한 철학자 데칼트(Renatus Cartesius, 1596. 3. 31-1650. 2. 11)는 "언어는 존재의 집" 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는 것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을 살펴보면 그 사람이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화장실 문을 두드릴 때 그 안에 있는 사람이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에 의해서 그 사람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가늠할 수 있다고 합니다.
똑똑똑, "들어오세요!"
이런 사람은 비서라고 합니다.
똑똑똑, "통화중!"
이런 사람은 전화교환원이라고 합니다.
똑똑똑, "올라갑니다" "내려갑니다"
이런 사람은 백화점과 호텔의 엘리베이커 걸이라고 합니다.
똑똑똑, "오라이"
이런 사람은 버스 안내양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목사는 어떻게 반응할까요?
똑똑똑, "믿습니까?"
호모 로쿠엔스(언어를 사용하는 존재)
"호모 로쿠엔스(Homo Loquens)"라는 말은 인간은 "언어를 사용하는 존재" 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사례를 오늘의 시대에 적용해 보겠습니다.
기독교의 3대 절기는 "부활절" "추수감사절" "성탄절"입니다.
이와 같은 절기를 맞이하면 어떻게 서로 인사하셨습니까?
부활절에는 "해피 이스터(Happy Easter)"
추수감사절에는 "해피 땡스기빙(Happy Thanksgiving)"
크리스마스에는 "메리 크리스마스(Merry Christmas)"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해피 이스터(Happy Easter)" "해피 땡스기빙(Happy Thanksgiving)" "메리 크리스마스(Merry Christmas)"를 "해피 할러데이(Happy Holiday)"라고 해야 한다는 사회적 여론이 점점 더 크게 부각되고 있으며 심지어 메리 크리스마스 라고 인사말을 하면 거부반을을 나타내는 현실입니다.
미국의 현재 기독교 인구 비율이 대략 64%라고 합니다.
물론 이 수치는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한 통계입니다.
아직도 기독교인의 비율이 전체 인구의 절반을 능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인 여론은 기독교식의 인사말을 거부하는 것에 대해서 교회의 반응은 조용합니다.
또 한가지 사례는 바이든 대통령에 의해서 동성결혼법이 법적으로 인정한다고 결정된 것입니다.
만일 어느 교회 설교자가 동성애와 동성결혼은 비성경적이라고 부정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면 법적으로 제재를 받게 된다는 것을 예고한 것입니다.
사회의 이러한 분위기를 그 시대에서 통요하는 언어를 갖고 진단하는 것을 "언령신앙(言靈信仰, language is spiritual belief)" 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에서 말이 씨가 된다는 것은 '말에 생명이 있다"는 뜻으로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통해서 그 사람의 인품을 알 수 있고 그 시대에 사용하는 언어를 통해서 시대적 분위기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말 한마디에 천냥 빚도 갚는다!"
그러므로 해피 이스터, 해피 땡스기빙, 메리 크리스마스와 같은 인사말을 사회가 요구하는 언어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 사회의 영적 수준이 분명하게 낮아지고 있다는 현상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현상을 어떻게 받아드려야 할까요?
불교(佛敎)에서 불자(佛者)들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南無阿彌陀佛 觀世音菩薩)" 이라는 염불(念佛)을 사용하여 간단하게 기도합니다.
모두 열 여섯 글자로 아주 간단한 기도문입니다.
물론 기독교에도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문이 있습니다.
그런데 주기도문이 초신자들을 물론 기존 기독교인들에게도 즐겁게 사용할 수 있는 기도문은 아닙니다.
더구나 교회에서 주기도문은 모임을 마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南無阿彌陀佛 觀世音菩薩)"
이 의미는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께 귀의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불자들은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에게 귀의합니다 이렇게 염불을 외우면서 기도합니다.
'나무’는
귀의한다는 뜻입니다.
아미타불은 극락(極樂)에 계신
부처님을 말합니다.
관세음보살은 대자대비한 마음으로 중생들을 구제하는 부처님을 말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것을 염불(念佛)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이 분들께 귀의한다는 뜻과 함께 이 분들처럼 살겠다는 다짐이기도 합니다.
기독교에는 염불과 같은 아주 간단하면서도 분명한 신앙을 고백하는 기도가 없을까?
물론 동방교에서 수행하는 신자들을 위하여 사용하던 "예수님의 기도" 즉 "주여,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Lord, have mercy on me!)" 라는 기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목회 현장에서 보다 더 아주 간단한 기도가 없을까 고민하던 중 예수님의 이름에서 기도문을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예수(Jesus)
둘째는 그리스도(Christ)
셋째는 임마누엘(Immanuel)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러면 어떻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을까요?
첫째는 예수(마태복음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저희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He will be save us from sin)"라고 합니다.
죄에서 구원한다는 것은 죄에 대한 용서를 말합니다.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용서를 위한 제물을 바쳐야 합니다.
제물이 되려면 반드시 피를 흘려야 하고 죽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의 죄를 위한 속죄의 제물이 되셨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죄에서 구원한다는 것은 죄로 말미암아 사망에 이르게 되었으나 죄에 대한 용서를 받았으므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을 말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이 생전에 아무리 훌륭한 일을 하였어도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사람일지라도 그 시신은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그런데 물고기는 죽은 사람의 몸보다 더 가치가 있습니다.
수 많은 물고기, 짐승, 동물의 죽은 몸둥아리는 가격에 따라 팔려갑니다.
그렇지만 죽은 사람의 몸을 어느 누구도 돈을 주고 거래하지 않습니다.
예수 라는 이름에서 얻은 기도는 "예수 내 구주!" 라고 하겠습니다.
예수 내 구주!
Jesus is my Savior!
둘째는 그리스도(마태복음 1: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그리스도라는 이름의 뜻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be anointed people) " 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기름이란 성령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육체의 생명으로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하신 영원한 생명으로 오셨습니다.
죄에서 구원을 얻은 사람은 생명을 얻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라는 이름에서 얻은 기도는 "예수 내 생명!" 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 내 생명!
Jesus is my Life!
요한일서 2:27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셋째는 임마누엘(마태복음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임마누엘이란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God be with us)"라고 합니다.
임마누엘은 세 개의 말을 합성하여 만든 단어라고 하겠습니다.
‘임’(함께, with)
‘마누’(우리와, us)
‘엘’(하나님, God)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진 게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은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날 때부터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은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예언된 것이었습니다(이사야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임마누엘 예수님은 구원자로 우리 곁에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 17절에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누구든지
예수그리스를 구세주로 믿고 고백하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치료자로
오셨습니다.
마태복음 4장 24절에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에 걸려서 고통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예수님을 만나면 변화가 일어나고 해방과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고
자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위로자로 오셨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8∼29절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은 ‘하나님의 사랑’ 외에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임마누엘이란 이름에서 얻은 기도는 "예수 내 권세!" 라고 하겠습니다.
예수 내 권세!
Jesus is Power!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아주 쉽게 설명한다면 여기 아주 얇은 종이 한장이 있습니다.
이 종이는 어린아이들도 쉽게 찢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종이를 철판과 합친 후에 찢으라고 하면 어느 누구도 찢을 수 없습니다.
종이가 강해진 것이 아니라 철판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음므로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은 연약한 내가 이 세상을 창조하신 능력의 하나님에게 붙어 있는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강한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이 강하시기 때문에 어떤 질병도 환난도 근심과 걱정도 두려워 할 이유가 없습니다.
울주군 온산면 덕신리 625번지 신경부락에 대략 450년 된 소나무 한 그루가 있습니다.
마을 주민들은 이 나무가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과 같은 나무라고 믿고 정월 대보름이 되면 마을 주민들이 돈을 모아 제를 지내고 심지어 무당을 불러 밤새도록 굿판을 벌렸습니다.
그런데 그 당수나무 바로 옆에 교회를 세웠으므로 마을 주민들의 반대는 아주 심각했습니다.
어느 해에 마을 이장이 찾아와서 정월 대보름 날 제를 지내려면 당수나무에 전기불을 켜야 하는데 마침 교회가 바로 옆에 있으므로 전선을 연결하여 전등을 켤 수 있도록 협조해 달라고 합니다.
이때 교인들은 어떻게 당수나무 제사를 지내는데 교회 전기불을 줄 수 있느냐?
제사는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것이므로 전기를 빌려주면 안 된다고 단호하게 반대합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교회 전기불을 밝히면 당수나무에 제를 지내는데 귀신이 겁이나서 오겠습니까?
그러자 교인들이 목사님 알아서 하십시오 하고 모두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마을 이장이신 작고하신 이수엽씨를 찾아가서 제가 당수나무에 전선을 연결하여 전등을 달았으니 마음대로 사용하라고 일러주었더니 이장은 전기세를 지불하겠다고 합니다.
밤새도록 백열전구 켜봐야 전기세가 얼마나 나오겠습니까?
그런 걱정 마시고 편하게 사용하라고 일러주었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되었을까요?
정월 대보름이 지난 후에 마을 주민들이 모여서 마을 주민 회의를 하였는데 당시 마을 사람들을 주도하던 서울 무당이 주민들에게 당수나무 신을 위하여 동제를 지내야 한다며 동제를 지낼 돈을 거둬드렸다고 합니다.
문제는 서울무당이 굿판을 크게 벌였으니 그 결론은 당수나무 귀신이 마을을 떠났기 때문에 더 이상 이곳에 머물 수 없다며 그 마을에서 떠나갔다는 것입니다.
저희가 와이스톤(Whitestone)이라는 지역에서 거주할 때 한번은 어느 수맥을 진단하는 사람이 방문하여 집에 수맥이 흐르는지 찾아주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엘보 모양의 금속 막대기를 손에 들고 이 방 저 방을 옮겨 다니면서 하는 말이 분명히 수맥이 있는데 잡히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더니 혹시 예수를 믿습니까?
그래서 예 제가 목사입니다.
그러자 그 분이 집안에 성경책이 있는 것을 보고 성경책만 놔두어도 수맥이 잡히지 않습니다. 하고 떠났습니다.
어떻습니까?
예수를 믿는 사람이 강한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에 우리는 오직 주님만 믿고 따라가면 될 것입니다.
2022년 성탄은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는 신앙으로 무장하여 다가오는 2023년 주와 동행하는 신앙생활에 승리하는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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言靈信仰 (ことだましんこう, 언령신앙)
언령신앙(言灵信仰)은 동북아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오랜 전통으로 말에는 영혼이 깃들어 있어 불가사의한 힘이 있다는 믿음이다.
즉 말에 혼(魂)과 영(靈), 즉, 보이지 않는 '힘'이 깃들어 있어 그 말대로 길흉화복(吉凶禍福)이 좌우되고 평생의 운명(運命)까지도 영향을 받는다는 믿음이었다.
고대 일본 역시
마찬가지로 언어에는 신비한 영적인 힘이 깃들어 있고, 그 힘은 현실세계에 큰 영향력을 갖는다고 여겼다.
그러한 힘을 믿고, 그
힘으로 현실을 바꾸려 하는 것을 '고토다마신코(言灵信仰)'이라 한다.
고대의 일본인들은 좋은 말이나 아름다운 말을 하면 행복이
오고, 반면 나쁜 말을 하면 재앙이 온다고 믿었던 것이다.
한편, 고대 일본인들은 사람의 이름에도 '언령'이 머물고 있다고 믿었다.
특히 사람의 이름은 그 사람 자신의 혼이라 여겨,
남성이 여성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구혼을 의미한다.
따라서 여성이 남성에게 자신의 이름을 가르쳐 준다는 것은 구혼을 승낙했다는
것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또 염불(念佛)을 외면서 징이나 북에 맞춰서 추는 '염불 오도리'의 경우 '남무아미카불'의 명호를
주문으로 외어 말로써 악령을 물리치는 언령신앙이 깃들어있다.
이처럼 고대 일본에서는 언령신앙이 일상 생활의 구석구석까지 스며들어
있었다.
언령신앙의 영향을 받아 고대에 일본의 제사 의식에서 신을 제사 지낼 때의 언어는 아름답고 엄숙하게 미화되어 문학적 성격을 띄게 되었다.
제사를 연행하는 자는 산 위에 올라가 나라의 땅이 얼마나 기름지고 풍요로운가를 노래로 표현하고는 했는데,
이것은 말의 힘으로 현실 세계의 풍작이 이루어지도록 하려는 기원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풍성한 열매를 맺고 있는 풍작의 모습을
노래로 표현하는 것으로, 그 노래, 바로 말에 담긴 힘이 현실의 풍작을 가져온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러한 언령신앙의 전통은 '노리토(祝詞)'와 '센묘(宣命)'라는 일본 상대의 고유한 문학 양식을
발달시킨다.
'노리토(祝詞)'는 기년제(祈年祭) 등의 궁정제사에서 읊어진 신전에서 부르는 노래를 말한다.
본래는 간단한
주문(呪文)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집단 제사를 올릴 때 선미(善美)를 다한 말들을 봉헌하고, 사람들의 번영과 행복을 기원하고
신의 위력에 감사하는 행사를 거듭하는 동안에 점차 '노리토'의 형식을 갖추게 된 것이다.
노리토의 주 내용은 신의 이름을 부르고, 제사를 지내는 이유, 제신(祭神)의 내력과 업적의 설명, 진설(陳設物)의 열거,
기원하는 일 등이다. 이러한 내용을 음률과 성조에 유의하여 반복, 대구, 열거, 마쿠라 고토바(일본 전통 시가인 '와카''에서 어떤 말 앞에 붙이는 특수한 수식어), 비유 등을 사용하여 장중미(莊重美)를 살려 읽는 과정을 통해 노리토의 형식을 완성하였다. 문헌상 현존하는 '노리토'는 『엔기시키 (延喜式)』에 수록된 27편과 『타이키 (台記)』에 수록된 1편으로 총 28편이 전해지고 있다.
한편 '센묘(宣命)'는 천황이 신하에게 내리는 조칙(詔勅)을 말한다. 천황의 즉위나 양위, 황후를 세우는 일, 연호를 바꾸는
일, 황태자를 세우거나 폐하는 일, 상을 주거나 벌을 주는 일 등 국가의 중대한 일에 관하여 작성한 문서이다. '노리토'가 신과
인간 사이에 이루어진 것이라면, '센묘'는 임금과 신하 사이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장도 그 내용이 구체적으로 표현되었을 뿐만 아니라 감정도 분명하게 드러나 있는 특징이 있다. 현존하는 센묘는 『쇼쿠니혼키 (續日本記)』 62편이 수록되어 있고 그 밖의 문헌에 3편이 수록되어 있다.
한국에도 '언령신앙'의 전통이 있어, 우리 조상들은 말조심을 강조했다.
특히 설날부터 대보름까지의 기간에는 아예 남에게 듣기 좋은 덕담만 하는 풍습이 형성되기도
하였다.
또한 언령 신앙은 중국이나 한국 등지에서 볼 수 있는 '휘(諱)', '피휘(避諱)'의 풍습과도 연결된다.
원래 '휘'는
죽은 사람의 생전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것을 말하였으나, 나중에는 생전의 이름 자체가 '휘'로 와전되는 바람에 이름을 부르지
않는 행위는 따로 '피휘'라고 명명하였다.
'피휘'의 풍습은 범위가 확대되어 살아있는 사람에게까지 미쳤다.
한국 문학의 경우 『삼국유사』 등에서 언령신앙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삼국유사 중 '혜공과 혜숙'의 일화에서 광덕이 아미타불을 향하여 극락왕생을 기원하고 달을 증인으로 삼는다. 여기에는 자신이 바라는 바를 미리 질문으로 던져버려 이루어지리라고 여기는 충류도 계통의 언령신앙이 담겨있다고 말 할 수 있다. "말이 씨가 된다"와 같은 속담도 언령 신앙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문학비평용어사전 "고토다마신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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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
불자들에게는 불경을 모두 읽거나 암송하지 않아도 아주 간단하게 기도할 수 있는 불경이 있습니다.
그 불경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南無阿彌陀佛 觀世音菩薩)"
모두 16자로 구성된 기도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께 귀의하는 것
A :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은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 두 분에게 귀의한다는 말입니다.
‘나무’는 귀의한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 두 분에게 귀의한다는 것 입니다.
아미타불은 극락에 계신 부처님이고, 관세음보살은 대자대비한 마음으로 중생들을 구제하고 제도하는 분입니다.
또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것을 염불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이 분들께 귀의한다는 뜻과 함께 이 분들처럼 살겠다는 다짐이기도 합니다.
자료출처 / 불교신문 2219호/ 4월 12일자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
이 말은 하는 일 없이 놀기보다는 무엇이든 하는 것이 낫다는 뜻으로 우리 생활에 염불이 얼마나 친숙한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다.
부처님 당시에 제자들이 부처님을 존경해 그들 마음속에 부처님을 간직하려고 했던 노력이 염불의 시초다.
이 염(念)이란 단어에는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데 대표적인 의미로는 ‘억념(憶念)하다’, ‘관념(觀念)하다’, ‘사념(思念)하다’, ‘작의(作意)하다’라는 뜻으로 ‘마음에 기억하여 잊지 않으려고 하는 의식 활동’으로 해석된다.
염(念)이란 단어가 이렇게 많은 의미로 쓰이는 이유는 염해야 할 대상인 부처님의 개념에 여러 가지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염하는 대상도 초기 원시불교에서는 석가모니 부처님 한분에 한정되어 있었지만, 부파불교와 대승불교가 일어남에 따라 아미타불, 약사여래불,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등 여러 부처님과 보살들에 대한 염불이 행해지게 되었다.
“마하남이여! 이곳에서 너는 여래를 억념(憶念)해야 한다.
이르기를, 이와 같이 저 세존은 응공(應供).정등각(正等覺).명행족(明行足).선서(善逝).세간해(世間解).무상사(無上士).조어장부(調御丈夫).천인사(天人師).불세존(佛世尊)이시다.” (〈증일아함경〉 제11권 억념품)
위에서 보듯이 염불의 대상인 부처님을 여래십호(공양 받을 만한 님(應供),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正等覺), 지혜와 덕행을 갖추신 님(明行足), 바른 길로 잘 가신 님(善逝), 세상을 이해하는 님(世間解),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신 님(無上士), 사람들을 길들이시는 님(調御丈夫), 신들과 인간의 스승이신 님(天人師), 깨달은 님(佛), 세상에 존귀한 님(世尊))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이와같은 여래십호(如來十號)의 내용은 부처님의 공덕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으로 염불이 부처님의 공덕을 억념(憶念)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만약 어떤 비구가 몸과 뜻을 바르게 하고 결가부좌하여 생각을 묶어 앞에 두고 다른 생각이 없이 오로지 부처님을 염하여 여래의 형상을 관(觀)하는데 눈에서 떠나지 말아야 하느니라. 이미 눈에서 떠나지 않게 되면 다시 여래의 공덕을 염하라” 〈증일아함경〉
위에서 볼 수 있듯이 여래의 형상을 관하는 수행이 염(念)을 하기 위한 방편으로 제시되었음도 알 수 있다.
이 부처님을 염하는 법이 하나의 수행법으로 채택된 것이 염불수행이다. 이 염불수행이 발전하여 부처님 이외의 대상을 염하게 되어 삼념(三念 : 念佛, 念法, 念僧)이 생겨났고 다시 지키고 행해야 할 계율과 보시, 장차 태어나야 할 천상을 생각하는 육념(六念 : 念佛, 念法, 念僧, 念戒, 念施, 念天)이 되었으며, 이 육념에다 다시 마음의 조용함을 염하는 염휴식(念休息), 출입하는 숨을 세어 망상을 제거하는 염안반(念安般), 이 몸은 항상 하지 않고 무상하다는 것을 생각하는 염신(念身)과 죽음을 생각하는 염사(念死) 등이 더하여 십념(十念 : 念佛, 念法, 念僧, 念戒, 念施, 念天, 念休息, 念安般, 念身, 念死)으로 발전했다.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
죽음,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 문현공
초기경전을 중심으로
1. 들어가는 말
모든 사람은 죽는다. 행복한 사람도 불행한 사람도, 부자도 가난한 이들도. 그리고 우리 모두는 지금 이 순간에도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 어떻게 보면 아니, 바로 보면 우리는 지금 죽음과 함께 있다.
붓다는
왜 출가를 하셨는가? 불교의 시작은 무엇인가? 많은 사람이 알고 있듯이 생로병사에서 비롯된 고(苦) 때문이었다. 붓다께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출가를 하셨다기보다는 결코 피할 수 없는 괴로움을 넘어서기 위해서 출가하셨고 그 결과 깨달음, 열반에
이르셨다. 출가의 출발점은 깨달음이 아니라 바로 인간의 괴로움이었으며 괴로움의 정상에 있던 것은 ‘죽음’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붓다는 죽음이 ‘나의 죽음’임을 알았을 것이다. 이 때문에 태어나면서부터 보장되어 있던 왕의 지위도 수없이 많은 금은보화도 반갑지
않으셨을 것이다. 반면에 우리는 어떠한가? 현대사회에서 죽음을 눈앞에 둔 병실의 환자 혹은 고령의 노인들을 제외하고 많은
사람에게 죽음은 ‘나의 죽음’이 아닌 그저 ‘남의 죽음’일 것이다.
과거의 자연스럽던 죽음은 근현대 사회로 넘어오면서 차갑고
기계적인 죽음으로 변모한다. 그리고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남의 죽음’으로서 저편으로 밀어놓고 묻어놓는다.
자연스럽지 않은 죽음은 탄생과 소멸, 생과 사라는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고 자연스럽지 않은 삶을 만들어간다. 그리고 ‘남의 죽음’은
부작용의 부산물들을 낳는다. 현재 한국의 자살률은 10만 명당 33.3명으로 OECD 회원국 34개국 중에 가장 높으며 OECD
평균과 비교해 3배 가까이 많고 자살률이 가장 낮은 그리스와는 10배 이상의 차이가 난다. 또한 더 심각한 문제는 청소년
자살률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한국의 10∼19세 인구 10만 명당 자살자 수가 2001년 3.19명에서 지난 2011년
5.58명으로 57.2% 증가했으며 OECD 회원국의 청소년 자살률이 감소하는 추세인 데 비해 한국의 청소년 자살률은 급증
추세라고 한다. 인생의 괴로움과 행복이 무엇인지 앞으로 알아가야 할 아이들은 무슨 죄인가.
선진국 대열에 진입했다고
자부하는 대한민국이 불명예스럽게도 각종 죽음 지표에서는 최상위권에 속해 있다. 이러한 죽음 관련 문제들은 사실상 삶의 질
문제이다. 한국의 행복지수가 OECD 34개국 중 32위로 최하위권이라는 문제는 위의 죽음 관련 지표와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 같은 암울한 한국의 현실에서 대안은 무엇인가? 삶을 삶답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필자는 그 대안이 ‘죽음준비
교육’이라고 확신한다.
미국의 죽음연구(thanatology)는 1960년대에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 50여 년이 흘렀으며
유럽 또한 죽음 교육(death ed-ucation)이 시행 중이다. 일본 역시 1970년대부터 서양의 죽음연구를 받아들였으며
2005년 이후부터는 정부 차원에서 청소년 범죄와 자살률의 증가에 대한 대안으로 죽음 교육을 시행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불교계의
생사학(生死學)을 포함하여 죽음연구가 종종 이루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전체적인 수준에서 타 학문과 외국의 연구를 비교해 보면 가야 할
길이 아직 많이 남은 것으로 보인다.
언급했듯이 불교의 시작, 붓다의 시작은 죽음에서 출발했다. 그리고 붓다는 죽음을
넘어 깨달음을 얻었다. 삶과 죽음에 대한 우주적 분석을 제시하였다. 더욱이 단순히 문자만이 아니라 마음과 몸까지 꿰뚫어 완전히
체득시키는 수행 방법까지 제시하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죽음연구, 생사교육에 앞장서서 나아가야 할 불교계의 활동이 이웃 종교나 타
학문과 비교해 볼 때 그리 활발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현재 템플스테이를 비롯한 불교명상 붐이 일어나고 있어서 삶의 질 개선에
큰 도움을 주고 있으나 직접적인 죽음준비를 제시하는 사찰의 프로그램이나 불교계의 연구를 찾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이에 기존의
죽음연구들에 자그마한 벽돌을 하나 보태는 마음으로 초기불교 경전을 중심으로 불교적 입장에서 어떻게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가를
살펴보겠다.
2. 죽음, 생각하기
죽음을 준비하기에 앞서 죽음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며 생각의
시작은 죽음의 정의를 살펴보는 일이 될 수 있다. 먼저 의학적 죽음 정의인 심폐기능사를 살펴보자. 죽음은 전통적으로 호흡과
심장박동의 정지로 결정되었다. 심장과 폐의 기능이 정지하면 맥박, 혈류, 숨이 멈추고 이후 나머지 생체기관들의 정지가
뒤따른다.그리고 영화를 보면 가끔 의사가 사망 유무를 확인하기 위해 눈꺼풀을 들어 빛을 비추는 것이 이를 의미한다. 즉 호흡과
심장박동이 정지되고 뇌반사가 소실된 것이 ‘불가역적(不可逆的)’일 때, 그 사람은 사망한 것이다.
그러나 호흡과 심장이
멈추는 것이 죽음이라고 단순히 볼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호흡 정지와 심장의 정지 중에 어떤 것이 우선인가 하는 문제는 과거에
심각한 고민이었다. 19세기까지는 자발적 호흡의 유무만이 죽음을 판단하는 유일한 기준이었으나 1885년 이 기준에 의해 사망했던
사람이 살아난 경우가 학계에 보고되면서 죽음을 공식적으로 선언하려면 시간을 두고 관찰해야 함을 인식하게 되었다. 또한 1950년대
유럽에 소아마비가 유행하면서 아이들이 숨을 쉬지 못해 죽어가는 것을 계기로 인공호흡기가 개발되었고 인위적으로 호흡 유지가
가능해졌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오늘날에는 심장이 멈추는 것을 죽음의 판단 기준으로 삼는 것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호흡기의 개발과 같은 의료과학의 역사는 뇌사와 같은 또 하나의 죽음 기준을 만들게 된다.
뇌의 죽음이 일어나면
인간은 중요한 두 가지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첫째는, 소뇌와 뇌간에서 수행되는 생체적 통합조절기능의 상실이고 둘째는, 의식,
사고, 감각을 가능하게 하는 심리적 기능의 상실이다. 보통의 경우 뇌의 거의 모든 조직이 파괴되어 뇌가 죽으면 생체적 통합유지
기능이 상실되고 뒤이어 호흡 및 심박동의 불가역적 기능 정지가 유도되기 때문에 결국 심장사를 하게 된다. 그러나 과학기술의 발달에
의해 인공호흡기와 같은 인위적 생명유지 장치가 개발되면서 ‘살아 있는 시체’ 즉, 뇌사라는 또 다른 죽음 정의의 기준이 발생하게
되었다. 뇌사는 장기이식과 같은 무거운 생명윤리의 문제가 얽혀 있기 때문에 간단히 넘어갈 문제가 아니지만 이 글에서 자세히
다루지는 않겠다.
비록 의학적 죽음 정의를 언급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죽음 정의의 전부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의학적 죽음 정의는 육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죽음을 정의하는 데에 육체에만 초점을 맞추어
논의하기보다는 큰 틀에서 그리고 원점에서 차분히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간은 육체로만 이루어진 존재라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불교에서는 죽음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가. 잡아함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죽음을 설명하는 구절이 있다.
목숨[壽]과 체온[暖] 그리고 의식[識]은 몸[身]을 버릴 때, 함께 버려지기에 그 몸을 저 무덤에다 버리면 마음[心]이 없어 마치 나무나 돌과 같다.
이
구절에 따르면, 죽음이란 목숨[壽], 체온[暖], 식(識)의 세 가지 요소의 파괴로 인해 몸과 마음이 분리되는 현상이다. 이
같은 정의는 잡아함 외에도 중아함(中阿含) 등 초기경전 곳곳에 나타난다. 여기에서 수(壽), 난(暖), 식(識)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먼저 수는 수명(壽命)을 말하는 것으로 목숨이 지속되는 기간을 뜻하며 난(暖)이란 따뜻한 기운, 즉 체온을 말한다. 이
둘은 의학적 정의와 마찬가지로 육체적 영역에 속한다.
수명은 불교의 업사상 또는 인과법과 연결시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죽음을 판단하는 데에서 왜 심장사나 폐사 등을 언급하지 않고 체온의 상실을 언급하였는가? 추측건대, 당시의
정황에서 볼 때 시체의 판단 기준이 아마도 열기(熱氣)의 유무였을 것이다. 그리고 불교에서 더욱 중시하는 것은 바로 식(識,
vijñāna)이다.
식은 간단히 말해 사물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심리적 작용을 뜻하지만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증일아함(增壹阿含)에서는, “죽음이란 무엇인가. 여러 중생들이 되풀이하면서 받은 몸에 온기[溫]가 없어지고, 덧없이 변하여 다섯
가지 결합[五親]이 나누어져 오온[五陰]의 몸을 버리고, 명근(命根)이 끊어져 파괴되는 것을 죽음이라 한다.”라 하여 오온을
중심으로 역시 수명과 체온이 상실됨을 죽음이라 하고 있다. 여기에서 오온은 인간이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의
다섯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는 불교의 존재론이다. 이들 중에 물질 즉 육체를 의미하는 색을 제외하고 나머지 네 가지는 심리적
작용을 의미한다.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느낌[受], 마음속에 대상의 이미지를 형성함[想], 의도 또는 의지를 가짐[行]
등의 마음이 작용하기 전에 선행되어야 할 것은 대상을 감지하고 식별, 판단하는 기능인 식의 작용일 것이다. 식을 통해서 쾌(快),
불쾌(不快)의 감수작용이나 의도나 의지 등의 후단계가 진행될 수 있다. 또한 식은 십이연기(十二緣起)의 12단계 중에 세 번째에
위치하며 유식에서 말하는 육근(六根)과 연결된 육식(六識)의 식이기도 하다. 이들을 종합해 보면 인간의 마음을 지칭하는 대표적
용어가 바로 식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쉽게 보면 일반적인 말인 영혼이나 정신이라는 단어에 식의 일부 의미가 연결될 수
있으며 육체와 정신, 몸과 마음의 관계에서 후자의 위치에 있는 것이 식이기도 하다. 불교적 윤회의 관점에서 보면 죽음은 윤회라는
바다 위에서 일어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파도와 같다. 불행하게도 고통스러운 죽음은 1회로 끝나지 않는 사건이다. 그렇다면
버려지고 썩어져 자연으로 돌아가는 육체 말고 윤회하는 것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는 영혼이니 귀신이라는 말로 표현되지만 불교에서는
바로 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 덧붙여, 불교에서는 고정된 자아를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다른 말로 표현하면 반복되는 죽음,
윤회란 ‘식의 흐름’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죽음이란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데 시작 또는 기준이 되는 것은 정의를 살펴보는
일일 것이다. 정의란 어떤 존재를 명백히 밝혀 규정함을 의미하며 통상적으로 간결한 표현 방식을 취하며 한 존재를 규명하는 데에
중요한 작업이다. 그러나 정의를 내린다는 것은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왜냐하면 간결하게 어떤 존재를 규정하려 하기 때문이다.
덧붙여, 불교의 관점에 본다면 존재는 끊임없이 변화하므로 한 존재의 정의 또한 변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위의 죽음
정의와 더불어 우리에게 죽음이란 무엇인가? 떠오르는 것들은 두려움, 무서움, 불안, 공포, 고통, 슬픔, 후회 등으로 거의 좋은
것은 없다. 죽음이 아직 다가오지 않았을 때 ‘나의 죽음’을 떠올리면 무섭거나 두렵고 불안할 것이다. 또한 죽음이 나에게 가까이
왔을 때 지독한 고통에 휩싸이며 공포스러울 것이고 잠시 멀어졌을 때에는 후회를 남길 것이다. ‘너의 죽음’을 떠올리면 슬픔과
우울함에 사로잡힐 것이며 역시 후회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남의 죽음’은 잠시 애도하거나 그저 남의 죽음일 것이다.
초기경전에도 죽음에 대한 반응의 예가 종종 등장한다. 잡아함에는 다음과 같은 대화가 나온다.
여러 비구들이 물었다. “어떻게 하면, 비구가 번열(煩熱)하지 않고 죽으며 번열하지 않고 목숨을 마칠 수 있습니까?” 존자 아나율타가 대답하였다. “만일 비구가 진실되고 바르게 보며, 성스러운 사랑을 계로써 삼으면, 그 비구는 번열하지 않고 죽으며 목숨을 마칠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번열(煩熱)이란 몸이 타는 듯한 고열이 나고 가슴이 꽉 막힌 듯한 고통을 뜻하고 번열함 없이 목숨을 마칠 수 있는가 하는 질문 속에 죽음의 고통에 대한 불안감이 숨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실상 나의 죽음을 생각함에서도 가장 우려되는 부분은 고통 중의 고통, 바로 순수한 육체적 통증(痛症)이다. 다음의 구절을 살펴보자.
제 병은 차도가 없어 몸이 편안하지 않으며, 갖가지 고통은 갈수록 더 해져 나을 길이 없습니다. 만일 힘센 사람이 연약한 사람을 붙잡아 노끈으로 머리를 동여매고 두 손으로 세게 조른다면 매우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지금 제가 겪는 고통은 그보다 더합니다. 또 만일 백정이 예리한 칼로 소의 배를 가르고 내장을 끄집어낸다면 그 소의 고통이 어떻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제 복통은 그 소보다 더합니다. 또한 마치 힘센 두 사람이 연약한 한 사람을 붙들어 불 위에 매달아 놓고 두 발을 태우는 것도 고통스러울 것인데, 지금 내 두 발의 열은 그 보다 더합니다.
잡아함에 실린 위 내용은 중병으로 육체적 고통을 받고 있는 한 비구의 통증에
대한 묘사이다. 죽음에 다다르면 통증을 수반할 것이고 이 통증은 당사자뿐 아니라 주변의 사람들에게도 불안과 공포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통증의 유형에는 날카로운, 아리는, 욱신거리는, 타는 듯한, 쏘는 듯한, 찌르는 듯한 등의 종류가 있으며 기간에
따라 급성통증, 만성 통증이 있다. 또한 통증은 단순히 고통을 육체적으로 감각하게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여러 심리질환을 수반하기도
한다. 통증은 어떻게 본다면 죽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도 볼 수 있다.
또한 알폰스 데켄(Alfons
Deeken)은 그의 저서에서 죽음의 공포와 불안의 유형들을 보다 상세하게 다음과 같이 9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①고통에 대한
공포, ②고독에 대한 공포, ③불쾌한 체험에 대한 공포 ④가족에게 부담을 준다는 불안, ⑤미지의 세계를 눈앞에 둔 불안, ⑥인생에
대한 불안과 연결된 죽음에 대한 불안, ⑦인생을 미완성인 채로 끝낸다는 것에 대한 불안, ⑧자기 소멸에 대한 불안, ⑨사후의
심판이나 벌에 대한 불안 등이다. ③의 불쾌한 체험에 대한 공포는 육체적으로 쇠약해진 모습을 남에게 보이기 싫어하는 것 그리고
자신의 존엄성을 잃어버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의미하며 ⑥의 인생에 대한 불안과 연결된 죽음에 대한 불안은 사는 동안에 삶과
죽음에 대한 왜곡된 인생관이 이후에 죽음에 대한 불안과 연결되는 경우라고 말한다. 결론적으로 이 같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 불안에
대한 극복의 방법으로서 저자는 죽음준비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와 같은 죽음에 대한 부정적이고 왜곡된 이미지들을 극복하기 위해서, 혹은 실제로 이 이미지들이 찾아와서 ‘나의 죽음’ 그리고 ‘너의 죽음’이 되어 우리를 뒤흔들기 전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3. 죽음, 대면하기
1) 자신‐죽음, 명상하기
불교에서 가장 핵심적인 결론은 무엇인가?
실천, 즉 수행이 아닌가.
불교의 입장에서 죽음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도 그 답은 수행이라 생각한다.
초기경전의
대표적인 죽음과 관련된 수행으로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부정관(不淨觀)
둘째는 사념(死念)수행
부정관은 시체가
부패하면서 해골이 되어가는 과정을 관찰하는 수행으로 탐욕을 다스리기 위한 수행이다.
부정관도 죽음을 대비하는 수행이 될 수도
있지만 감각적인 욕망을 제어하는 것에 주목적이 있는 것으로 판단되므로 본 글의 취지상 이를 자세히 다루지는 않겠다.
이 글에서는
죽음을 준비한다는 취지에 보다 가까운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인 사념(死念)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불교의
마음챙김(mindfulness, vipassanā, 念) 명상은 한국은 물론, 미국 및 해외에서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마음챙김의 연장선상에서 사념은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을 의미한다. 사념은 10가지 마음챙김[十念] 가운데 하나로 한역에서는
염사(念死)로 번역되어 있다. 앙굿따라니까야(Aṅguttara-nikāya)에서는 “비구들이여,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을 닦으면 큰
과보와 공덕이 있고 불사(不死)에 이르게 되며 불사를 목적으로 한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사념을 닦고 있는가.”라 하며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 명상이 죽음을 넘어서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에 대해 붓다는 다음과 같이 사념을 닦아야 한다고
설하고 있다.
①내가 하루 ‘밤낮 동안만 살더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정신을 기울이면, 나는 많은 것을 이룬 것이다.
②내가 하루 ‘낮 동안만 살더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정신을 기울이면, 나는 많은 것을 이룬 것이다.
③내가 ‘한 끼 음식을 먹는 동안만 살더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정신을 기울이면, 나는 많은 것 을 이룬 것이다.
④내가 ‘네다섯 모금을 씹어 삼키는 동안만 살더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정신을 기울이면, 나는 많은 것을 이룬 것이다.
⑤내가 ‘한 모금을 씹어 삼키는 동안만 살더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정신을 기울이면, 나는 많 은 것을 이룬 것이다.
⑥내가 ‘숨을 내쉬고 들이쉬는 동안만 살더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정신을 기울이면, 나는 많은 것을 이룬 것이다.
또한 붓다는 위의 6종류의 사념을 닦는 방식에 대해서 ①-④까지의 방식은 게으르게 사념을 닦는 것이라고 하며 ⑤와 ⑥의 방식은 부지런히 모든 번뇌의 소멸을 위한 사념을 민첩하게 닦는 것이라 설한다.
사람의
마음은 안과 밖의 대상의 하인이 되어 이곳저곳을 흘러다니면서 기억, 경험과 맞물리거나 쾌(快), 불쾌(不快)의 감정과 연결되고
또다시 다른 대상을 접촉하고 흘러다니면서 업력을 형성한다. 그리고 이 과정이 시간과 농도에 비례해서 인생 전체에 영향을 주면서
각자의 인생을 만들어 간다. 마음챙김 명상은 마음의 주인이 되어 이리저리 흘러다니는 마음에 휩쓸리며 실려 다니지 않고 쾌, 불쾌와
같은 감응이나 다른 판단이 없이 고요하게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관찰하는 명상이다. 이에 관찰의 내용을 죽음으로 하는 것이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 명상이다. 다른 불교수행과 같이 올바른 자세와 올바른 호흡법을 기본으로 해서 내 마음속의 내용을 죽음으로 두고
정기적으로 수행하는 것이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 명상이다.
글의 서두에서 말했듯이 현대사회에서 죽음은 사회 전체나 개인에게
회피의 대상이고 은폐의 대상이다. 그저 ‘남의 죽음’이다. 그러나 생과 사, 탄생과 죽음은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이치이다.
자연의 섭리를 은폐하고 조작하면 부작용이 발생하여 다시 돌아오고 망각하면 감당하기 힘든 충격을 감내해야 한다. 죽음에 대해
망각하지 않고 순간순간 자신은 죽음으로 향하고 있다는 진실을 자각하고 알아차리는 것이 바로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 명상이다.
《청정도론(淸淨道論)》에서도
이러한 사념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죽음이란, 한 생에 포함된 생명기능이 끊어지는 것이다”라 말하며 “생명기능이 끊어진 것이라
불리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을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이라고 한다”라고 이르고 있다.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을 닦고자 하는 사람은
조용한 곳에 혼자 머물면서, ‘죽음이 올 것이고, 생명기능이 끊어질 것이다’ 혹은 ‘죽음, 죽음’ 하면서 이치에 맞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하여 사념을 언급하고 있다. 이와 같이 사념 수행은 매우 직접적이고 적극적인 불교의 죽음준비 훈련의 하나라 볼 수
있으며 자신과 죽음의 거리를 멀리 두고 숨겨두는 심리를 넘어 죽음을 바로 내 ‘곁’에 앉혀두게 한다.
그러나 여기에
반드시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만약, 불교교리에 낯선 사람이나 우울증 같은 정신질환으로 인해 심약한 상태의 사람 그리고 낮은
연령대의 학생들에게 위와 같은 죽음대비 명상을 단계적 조정 과정이 없이 바로 시행한다면 생각지 못한 비극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혹시 본격적으로 어떤 프로그램을 개설하려 한다면 반드시 부작용이 없는 단계적 조정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은 삶 속에서 마음 훈련을 통해 죽음을 부정적인 이미지로 각인하는 인식과정에 영향을 미쳐서 죽음의 부정적 이미지를
변화시키는 역할을 할 것이다. 죽음을 가까이하면서 막연한 혐오, 공포, 두려움 또는 지금 여기에는 없는 별개의 존재 등으로 죽음을
취급하는 심리를 개선시킬 것이다.
2) 타인―죽음, 돌보기
자기의 죽음이 아닌 타인의 죽음은 어떻게 준비시켜야
하는가? 앞의 죽음대비 명상을 함께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말기환자와 같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죽음으로 향하는 사람에게
죽음준비를 위한 명상을 권유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닐 수도 있다. 말기환자에게 더욱 필요한 것은 다른 사람의 힘이라 생각한다.
경전을 보면 타인의 죽음을 대하는 태도도 곳곳에서 나타난다. 붓다는 “병든 사람을 돌보아주는 것은 곧 나 부처를 돌보는 것이요,
병자를 간호하는 것은 곧 나를 간호하는 것이다”라 하여 환자를 돌보는 일이 곧 부처를 돌보는 것과 같이 거룩하고 성스러운 것이라
설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돌보아야 한다고 설했을까? 증일아함에서는 다음과 같이 간호인에게 필요한 다섯 가지 덕목을 제시하고
있다.
어떤 것이 그 다섯 가지 법인가? 간호하는 사람이 의사를 잘 분별할 줄 아는 것, 게으르지 않으며 먼저 일어나고 뒤에 자는 것, 항상 이야기하기를 좋아하고 잠을 적게 자는 것, 법공양(法供養)을 하고 음식을 탐하지 않는 것, 병든 사람을 위하여 설법해 주는 것이다.
위에서 붓다는, ①의사를 올바르게 판단할 것, ②환자보다 부지런할 것, ③대화를
자주 하고 잠을 적게 잘 것, ④환자의 음식이나 물건을 탐하지 않고 자신이 법공양(法供養)을 할 것, ⑤환자를 위하여 설법할
것이라는 다섯 가지 덕목을 제시하고 있다.
①은 간병인이 무조건적으로 의사를 신뢰하지 말며 혹은 진정으로 환자를 위하는
의사인지 아닌지를 잘 판단해야 함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④에서 법공양을 하라는 것은 환자에게 주어진 공양물을 취하지
말고 오히려 간병인이 공양물을 올리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음식, 재물 등의 공양물 중에 가장 수승한 공양물이 법공양 즉, 진리를
베푸는 것이며 마치 부처님에게 공양물을 올리듯이 환자에게 보시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⑤항은 환자를 위해 설법하라는 내용인데
이것이 어떻게 보면 가장 중요한 항목이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상담을 통해서 환자에게서 심리적 변화를 이끌어 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경전에는 붓다가 고통 속에 있는 환자를 위해 설법을 베풀고 심리적 변화를 유도하는 예를 자주 볼 수 있다.
그는 몸에 중병이 걸려 매우 괴로워하고 있었다. (중략) 부처님께서 이 법을 말씀하시자, 존자 아습파서는 어떤 번뇌도 일으키지 않고 마음이 해탈을 얻게 되어 기뻐하며 좋아하였다.
그때 세존께서 그 병든 비구를 위해 갖가지 방법으로 설법하여 가르쳐 보이시고 기쁘게 해주신 뒤에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가셨다. 병든 비구는 세존께서 떠나신 뒤에 이내 목숨을 마쳤는데, 그 비구가 임종할 때에 모든 감각기관이 기쁨에 차 있었고 얼굴은 청정하며 살빛은 곱고 희었다.
대만의 저명한 죽음학자 푸웨이쉰(傅偉勳)은 그의 저서에서 빅터 프랑클(Victor E.
Frankl)의 로고테라피(logotherapy, 意味療法)는 말기환자에게 효과적인 정신치료법이 될 수 있음을 주장하였다.
정신의학자였던 프랑클은 죽음과도 같았던 자신의 경험에서 창안한 로고테라피를 통해 기존의 심리치료와는 다른 치료법을 제시하였다.
의미 요법을 뜻하는 로고테라피는 치료자가 환자와의 상담을 통해서 환자의 인생 의미를 추출하여 자각게 함으로서 환자 스스로
내면으로부터 인생의 의미를 찾고 심리적으로 안정을 취하게 하는 치료법이다. 이렇게 볼 때, 위 붓다의 상담도 의미치료와 맥락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말기환자의 지속적인 통증은 심리에도 악영향을 미칠 것이며 죽음이 얼마 남지 않음에 대한 생각에도
계속적인 영향을 받을 것이다. 이에 환자 내면으로부터 힘을 끌어내 줄 수 있게 하는 전문상담가 혹은 스님, 신부님과 같은
종교지도자의 상담은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종교지도자, 의사, 간호사, 호스피스 그리고 가족의 역할은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
환자에게 마치 주사와 같이 외부로부터 주입되는 생명력과도 같을 것이다. 특히 환자의 죽음을 자주 접하는 의사, 간호사 또는
호스피스 시설에 종사하는 사람은 전문적인 상담 능력을 키워나가야 할 것이다.
4. 죽음, 넘어서기−받아들이기, 바로 보기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Elizabeth Kübler-Ross)는 현대죽음학의 선구자로서 최근에 국내에도 그녀의 저서 《인생수업》이 출간되어
베스트셀러를 기록한 바가 있다.
그녀는 의사인 자신이 직접 수많은 말기환자들을 관찰하면서 기록한 저서인 《죽음과 죽어감(On
Death and Dying)》을 통해 인간은 부정 및 고립, 분노, 타협, 우울, 수용의 5단계를 거쳐 죽음을 맞이한다고
주장하였다.
먼저 암과 같은 불치병으로 죽음을 선고받은 사람은 자신의 죽음을 부정하고 의사의 오진을 의심하며 타인에게 이 사실을
숨기기도 하면서 고립이 된다.
다음으로 병증으로 인한 육체적 초라함이나 심신의 쇠약함을 가족을 포함한 지인, 의사, 심지어 신앙의
대상에게까지 분노로써 표출한다.
셋째는, 타협 단계로 좀 더 살았으면 하는 바람에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거나 의사에게 잘
협조하고, 획기적인 신약을 기대하기도 한다. 넷째는, 우울 단계이다. 이때 자립능력 저하 등이 일어나며 위축된다.
마지막은
죽음을 수긍하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수용 단계로서 타인과의 접촉, 자기신뢰의 증가 및 극적인 자기변화가 일어나는
단계이다. 퀴블러로스는 모든 사람이 위의 순서대로 단계를 거치지는 않지만 분노나 우울의 단계를 넘어 수용의 단계로 신속하게
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수용 즉 ‘받아들이기’는 단지 죽음뿐만이 아니라 삶의 모든 괴로움에서도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강력한 수용의 힘이 있다면 어떤 불행한 사건도 그 사람을 무너뜨리지 못할 것이다. 파산, 은퇴, 이혼, 불구, 상실, 실패, 암
선고와 같은 인생의 지독한 고통이 들이닥쳤을 때,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발버둥치거나 애써 묻어두려고 한다면 더 깊이 진흙 구덩이
속으로 빠져들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를 온전히 받아들인다면, 구덩이를 벗어나 이전보다 더 드넓고 환한 저 언덕으로 갈 수
있지 않을까? 이에서 볼 때 미리 죽음을 받아들이게 하는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 명상은 단순히 죽음을 준비하는 것을 넘어서 ‘수용의
힘’을 기르는 데도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붓다는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출가했으며 죽음을 극복하여 열반에
이르셨다. 만약 붓다가 죽음을 극복하지 못했다면 불교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붓다는 어떻게 죽음을 극복하였는가?
육체적 영생을 통해 불사(不死)에 이르렀는가? “모든 존재는 영원하지 않으니, 이것이 곧 생하고 멸하는 생멸의 법칙이다. 생과
멸이 모두 멸한다면, 적멸의 즐거움을 깨달을 것이다”라는 《열반경》의 게송은 바로 죽음 극복의 문제에 대한 궁극적 지향점을
제시한다. 이 게송의 의미, 붓다 가르침의 의미는 삶과 죽음이 모두 없어져야[生滅滅已], 죽음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는
것[寂滅爲樂]이다. 즉 삶과 죽음 모두를 없앤 것이 붓다가 얻은 깨달음인 것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붓다가 깨달은
십이연기설(十二緣起說)을 통해 보다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십이연기설은
무명(無明)→행(行)→식(識)→명색(名色)→육입(六入)→촉(觸)→수(受)→애(愛)→취(取)→유(有)→생(生)→노사(老死)의
12단계를 말하며 이들 각각은 순서대로 원인과 결과의 관계로 얽혀 있다. 이에서 볼 때 죽음이라는 결과가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태어남[生]이라는 원인이 없어야 가능하고 생 또한 이전의 원인들에 의해 연기(緣起)된 것이므로 죽음을 없애기 위해서는
단순히 생만 없애는 것이 아니라 다시 역으로 이전의 각각의 단계를 올라가서 최초의 지점인 무명까지 가야 한다. 무명은 어떠한
실체가 아니라 깊은 무의식적 본능에까지 뿌리내린 원초적 무지의 마음을 의미한다. 이 무명이 만약 진리의 체득으로 인해 명(明)으로
바뀌면 각각의 인과관계 연결들은 차례로 소멸되고 죽음도 소멸된다. 바로 생도 없고 사도 없는 열반에 이를 수 있다. 즉, 붓다는
육체적 죽음을 극복한 것이 아니라 생과 사를 일으키는 무명을 넘어 열반에 이른 것이다.
열반(涅槃, nirvāṇa)은
원초적 무명이 사라진 상태로서 영어로 “to blow out” 또는 “to quench”로 표현되며 이들 각각은 취멸(吹滅)과
갈증 해소의 결과 등을 의미한다. 불어서 완전히 꺼진 대상은 죽음과 삶, 시작과 끝, 탄생과 소멸 등을 만들어내는 이분법적 생각
그리고 이 생각을 넘어 심층의식에까지 미친 이분법적 본능, 삶의 괴로움들을 생산해내는 원초적 어둠을 말한다. 또한 이 어둠 속에는
죽음, 공포, 두려움, 슬픔, 애착, 분노 등 삶의 고통을 만들어 내는 세 가지 원초적인 본능[三毒]이 숨어 있다. 즉 열반은
붓다가 깨달은 불교의 궁극적 지향점으로서 괴로움과 죽음이라는 모든 번뇌가 전멸(全滅)된 상태이다.
이 같은 교설은 근원적인
측면에서 죽음준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할 것이다. 보통의 죽음에는 반드시 육체적 죽음이 강하게 자리 잡게 되고 이를
중심으로 여러 가지 왜곡된 심리와 현상들이 파생되기 마련인데, 불교의 생사관은 죽음극복의 진정한 의미가 마음의 세계에서 다시
다루어져서 죽음을 바로 보고 나아가 삶과 죽음을 함께 바로 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5. 나가는 말
지금까지
초기불교 경전을 중심으로 불교의 입장에서 죽음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를 살펴보았다. 본문에서는 각 장의 제목에 따라 자세한
내용들을 언급하였지만 단순히 보면 각장의 제목과 순서, 즉 ‘죽음, 생각하기→, 죽음, 대면하기→죽음, 받아들이기, 바로 보기’
자체가 하나의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이 될 수 있다고 본다. 또한 효과적인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위 차례의 반복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죽음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고 이후에 죽음을 가까이하는 명상을 실천하고 죽음을 내 안으로 받아들이고 죽음을 다시 바로
보아서 죽음과 삶을 함께 보는 것이 죽음을 준비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 본다.
서두에서 언급하였듯이
현재 국내에서는 죽음교육 프로그램이 연령별로 보다 다양하고 체계적으로 시행되고 있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에 불교계에서
앞장서서 국내와 국외 그리고 불교계 내외에서 연구되고 있는 많은 죽음연구들을 반영하여 다양하고 체계적인 죽음준비 프로그램을
개설해야 할 것이다. 또한 법회 또는 템플스테이와 같은 기존의 프로그램의 틀 위에서 죽음명상과 같은 죽음준비 프로그램을 추가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도 있다.
이 글에서는 초기불교 경전만을 중심으로 불교의 죽음관을 살펴보았으며 초기 이후의
다른 불교문헌들을 다루지는 않았다. 특히 《티베트 사자의 서(Bardo Thӧdol)》와 정토계 경전들은 임종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문헌들이지만 본 글에서는 살펴보지 않았다. 차후에 이들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와 더불어 효과적으로 현대사회에 적용시킬 수
있는 맥락적 연구를 진행할 것이다. 이제까지 단순히 글을 통해서만 죽음을 가까이 두어야 한다고 하였으나 개인적으로도 계속해서
실천과 수행을 할 것이라 다짐하며 또한 본 글의 부족한 연구를 넘어 보다 심도 있는 연구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앞으로
나에게 죽음이 올 때까지 죽음공부를 놓지 않겠다는 다짐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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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1880년대 후반, 러시아의 한 시골 청년이 쓴 것으로 알려진 이 책은 ‘쉬지 않고 기도하는’ 삶이 어떤 삶인지를 보여준다.
책의
주인공은 어느 날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을 읽고 어떻게 하는 것이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인지, 그 방법을 찾기 위해
순례의 길을 떠난다.
그러던 중 순례자는 큰 스승을 만나 “예수의 기도”(주여,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를 배우고, 하루에
3,000번씩, 6,000번씩, 나중에는 1만 2,000번씩 반복하여 기도를 함으로써 기도가 마음 깊은 곳에 이르며 평온해지고
하나님과 합일되는 황홀의 경지를 체험하게 된다. 이 책은 이렇게 깊은 영성을 체험하게 된 순례자의 기도 여행에 관한 이야기이다.
미국의 저명한
종교학자 휴스턴 스미스 교수는 “러시아 영성의 고전”이라 했고, 샌프란시스코 대학 종교학자 제이콥 니들먼 교수는 “지난 100년
동안 나온 가장 영향력이 큰 종교 서적으로 사람의 삶을 바꾸어 주는 희귀한 책들 중 하나”라고 칭송했다.
심지어는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와 더불어 러시아 혁명 이전 “러시아 문학의 3대 걸작”이라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역자 오강남 박사는 1970년대 초 캐나다에 유학하면서 이 책을 처음으로 접했는데 그 당시 기독교에도 불교의 ‘염불’과
같은 종교적 수행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그 후 캐나다 대학에서 가르치면서 종교학 개론 과목을 담당할
때에는 언제나 학생들에게 이 책을 읽고 독후감을 써오라는 과제를 냈다. 그리고 한국 독자들에게도 이 책을 알리고 싶은 마음에
영어본으로 나온 모든 번역본들을 참고해 한국어로 번역했다.
책은 무엇보다 문장이 간결하고, 평온한 느낌을 갖게 하여
조용하게 묵상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사람들 앞에 소리를 내어 기도하는 것에 익숙해진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처음에 책의 주인공이
행하는 기도 방식, 즉 “예수의 기도”가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책을 읽다보면 어느새 예수의 기도, 우리가 알지
못했던 혹은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던 예수의 기도가 책의 주인공에게 주었던 느낌, ‘팔다리로 감미로운 쾌감이 퍼지고’, ‘기쁨으로
심장에 거품이 이는’ 그 느낌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쉬지 말고 기도하는 삶을 꿈꾸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도로 영적인 성장을 꿈꾸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의 기도”는 새로운 희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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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聖誕) :
성인 성, 성스러울 성(聖), 낳을 탄, 태어날 탄(誕)
- 성(聖) / 귀 이(耳) + 입 구(口) + 북방 임(壬) / 북방 임(크다, 성대하다)
따라서 '성(聖)'이란 한자의 의미는 "크게 듣고 크게 말하다"
聖자는 ‘성인’이나 ‘임금’, ‘거룩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聖자는 耳(귀 이)자와 口(입 구)자, 壬(천간 임)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聖자는 본래 ‘총명한 사람’을 뜻하기 위해 만든 글자였다.
聖자의 갑골문을 보면 큰 귀를 가진 사람 옆에 口자가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누군가의 말을 귀 기울여 듣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聖자는 타인의 말에도 귀를 기울일 줄 아는 ‘현명한 사람’이나 ‘총명한 사람’을 뜻했었다.
하지만 후에 뜻이 확대되면서 지금은 ‘성인’이나 ‘거룩하다’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壬자는 ‘북방’이나 ‘천간’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壬자는 士(선비 사)자가 부수로 지정되어 있지만 ‘선비’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왜냐하면, 士자와는 기원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壬자의 기원에 대한 해석도 제각각이다.
일부에서는 실을 엮던 도구로 보기도 하고 또 다른 해석에서는 북쪽에 있는 별과 땅을 연결한 모습이라고도 한다.
壬자에 ‘북방’이라는 뜻이 있으니 그런 해석도 가능하리라 본다.
또 壬자를 工(장인 공)자와 같은 자였던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당시의 工자()는 壬자와( ) 달랐기 때문에 같은 글자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러나 이런 논쟁이 무의미한 것은 지금의 壬자는 유래와는 상관없이 천간(天干)의 아홉 번째라는 뜻으로만 쓰이고 있다는 것이다.
또 때로는 다른 글자와 결합해 ‘사람’과 관계된 뜻을 전달하기도 한다.
타인의 말에도 귀를 기울일 줄 아는 현명한 사람 또는 총명한 사람
탄(誕) / 말씀 언(言) + 길 연, 늘일 연(延)
말을 널리 늘이는 것(세상에 말을 널리 알리는 것)
誕자는 ‘태어나다’나 ‘거짓’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誕자는 言(말씀 언)자와 延(끌 연)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延자는 발을 길게 늘여 걷는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늘이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誕자는 이렇게 ‘늘이다’라는 뜻을 가진 延자와 言자가 결합한 것으로 ‘말을 길게 늘이다’라는 뜻으로 만들어졌다.
誕자에서 말하는 ‘말을 길게 늘이다’라는 것은 남을 속이기 위해 이리저리 말을 늘여놓는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誕자는 본래 ‘거짓’을 뜻했지만, 후에 ‘말을 만든다’라는 뜻이 확대되면서 ‘태어나다’라는 뜻도 갖게 되었다.
지난 12월 4일 황목사님께서 "내 신앙의 월드컵"이란 주제로 설교했습니다.
예배 후 식탁의 교제 시간에 마침 한국에서 어느 후배가 유투브 속보를 보내왔는데 제가 확인하지도 않고 브라질에 대해서 부전승이라고 전했는데 결국은 어느 유투버의 돈벌이 용 가짜 뉴스이었습니다.
12월 5일(월) 다니엘 간닥터와 예약된 검진을 위하여 콜 택시를 불러 전화번호부에서 확인한 주소를 알려주고 이동을 했습니다.
접수부에서 전부한 후 안내원이 그런 의사가 없다고 합니다.
급하게 병원 밖으로 나와서 사무엘에게 주소를 받아서 다시 콜택시를 불러서 병원을 찾아가서 모든 검사 결과와 앞으로 진료 방향을 확인하고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어떤 정보든지 반드시 검증이 필요하다는 것을 다짐하는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성탄이란 절기도 성경적인 검증이 필요한 시대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현재 미국에서 모든 휴일을 어느 특정 종교의 용어가 사용되는 것을 금하고 있기 때문에 부활절, 추수감사절, 성탄절을 해피 할러데이(Happy Holiday) 라고 말하라고 합니다.
미국의 기독교 인구가 몇 %일까요?
2020년 기준 미국 내 기독교인(아동 포함)은 전체 인구 중 약 64%로 추산됐다.
같은 해 무종교인은 약 30%는
유대교, 이슬람교, 불교 등 기타 종교인은 약 6%로 집계됐다.
현재 미국 종교 인구 변화 속도와 트렌드에 따라 기독교인 비율은
2070년 전체 인구의 약 54%에서 최저 약 35%까지 급락할 가능성이 있다.
기독교 인구가 64%라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부활절을 왜 해피 할러데이라고 사용해야 합니까?
기독교 인구가 64%라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추수감사절을 왜 해피 할러데이라고 사용해야 합니까?
기독교 인구가 64%라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성탄절을 왜 해피 할러데이라고 사용해야 합니까?
침묵할 때가 있고 외쳐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외쳐야 할 때라고 하겠습니다.
당당하게 외치려면 외칠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합니다.
그 힘이란 성탄절을 맞이하여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 예수님을 맞이할 수 있는 "마음의 구유"가 준비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구유가 준비되셨습니까?
마음의 구유를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요?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예수 이름을 믿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예수
둘째는 그리스도
셋째는 임마누엘
언령 신앙은 일본에서 특히 발전된 것으로 일본에서는 ‘코토다마(言霊)’라고 부른다.
말에 보이지 않는 힘이 깃들어 좋은 말을 하면 행복이 오고, 나쁜 말을 하면 불행이 온다고 믿는 것이다.
학자들은 ‘말(言, 코토)’와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事, 코토)’이 발음이 같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일본의 신 고토시로누시(事代主)가 고사기(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책)에서는 고토시로누시(言代主)라고 쓰이기도 했다고 한다.
일본 일상 생활 깊숙히 스며든 언령 신앙의 사례를 찾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
말이 씨가 된다.
기독교 인구가 64%라고 하는 미국에서 크리스마스를 왜 해피 할러데이라고 해야 하는가?
이런 사회현상에 대해서 교회는 침묵하고 있는가?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앞으로 10년 이내에 커다란 변화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는 미국 전역에서 동성애자들의 결혼을 합법적으로 인정하기 때문에 교회에서 동성결혼에 대하여 부정적인 가르침을 강조하면 분명한 저항을 받게 될 것입니다.
추수감사절, 부활절, 성탄절은 기독교의 3대 명절입니다.
이러한 절기를 해피 할러데이라고 말해야 한다는 주장이 점점 더 강세로 드러나는 것은 언어에 감춰져 있는 힘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불자들에게는 불경을 모두 읽거나 암송하지 않아도 아주 간단하게 기도할 수 있는 불경이 있습니다.
그 불경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南無阿彌陀佛 觀世音菩薩)"
모두 16자로 구성된 기도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께 귀의하는 것
A :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은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 두 분에게 귀의한다는 말입니다.
‘나무’는 귀의한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 두 분에게 귀의한다는 것 입니다.
아미타불은 극락에 계신 부처님이고, 관세음보살은 대자대비한 마음으로 중생들을 구제하고 제도하는 분입니다.
또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것을 염불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이 분들께 귀의한다는 뜻과 함께 이 분들처럼 살겠다는 다짐이기도 합니다.
자료출처 / 불교신문 2219호/ 4월 12일자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
물론 기독교에도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문이 있습니다.
그런데 주기도문은 너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과 비교하면 길다고 하겠습니다.
초신자들에게 주기도문을 암송하여 기도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기도하던 중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단하게 기도할 수 있는 기도문을 만들었습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모두 15자 글자 입니다.
뉴욕으로 이주하여 처음에는 이 기도문에 대해서 소개했었기에 그동안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다시 한 번 더 강조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성탄절을 메리 크리스마스! 라고 말하지 말라고 하는 사회적인 분위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당당하게 메리 크리스마스 라고 외쳐야 합니다.
무슨 말을 이 세상에 확장시켜야 할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서 찾아내려고 합니다.
오래 전에 교회가 토지수용법에 의하여 철거될 위기에서 마침 지역 경찰서 정보과장이 군청을 담당하는 형사를 소개해주며 함께 군청 직원을 만나라고 주선했습니다.
그때 군청의 담당 직원이 제안하기를 교회를 위해서 건축부지 300평을 새로운 도시가 형성되는 중심부에 허락해 주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교회로 돌아왔는데 마을 대표 몇 사람이 찾아와서 도와달라고 합니다.
자기들은 힘이 없으니 교회가 자기들과 더불어 함께 고등법원에 항소하면 좋겠다고 합니다.
마을 주민들의 안타까운 사정을 외면하면 그만입니다.
더구나 그 주민들은 교회가 세워질 때 교회를 건축하지 못하도록 주도한 사람들입니다.
만일 교회가 주민들과 더불어 함께 행동하면 약속된 교회부지는 받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결국 마을 주민들과 더불이 고등법원에 행정소송을 제기하므로 군청의 제안은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이때 제가 결정할 수 있었던 힘은 예수님은 약자의 편에 설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교회에 대해서 핍박하던 것을 생각하면 도저히 마을 주민들의 하소연에 귀를 기우릴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약자를 위한 길을 선택했을 때 마을의 주민들은 새로운 생각을 갖고 교회에 대한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Christmas
크리스마스는 라틴어 "그리스도"(Christus)와 "모임"(massa)의 합성어
'그리스도 모임' 즉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모임'으로 종교적인 예식을 의미한다.
동방 정교회나 개신교에서는 "그리스도의 예배"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의 미사"로 번역한다.
크리스마스(Christmas)란 기독교의 창시자인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기념일을 뜻합니다.
다른 말로는 성탄일이라고도 한다.
크리스마스는 영어로 ‘그리스도(Christ)의 미사(mass)’라는 의미로 고대 영어인 Cristes maesse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크리스마스는 X-mas라고 표기하는 경우도 있는데요.
여기서의 X는 그리스어로 그리스도(크리스토스: ΧΡΙΣΤΟΣ)의 첫 글자를 뜻하는 것
크리스마스의 유래에 대한 주정은 크게 두 개의 시각이 있다.
첫째는 교회의 전통으로 교회 내에서 시작으로 보는 시각
둘째는 로마제국의 전통으로 로마의 절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시각
첫째는 교회의 전통으로 교회 내에서 시작으로 보는 시각
교회의 전통에서 크리스마스가 유래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말에 따르면,
신약성서에는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해 기록되어 있지만 탄생일에 대해서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대문에 초기 기독교도들은 1월 1일과 1월 6일, 3월 27일에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해왔다고 하는데요.
이후 4세기를 거치면서 신학자이자 주교인 아우구스티누스와 기독교의 이단으로 구분되었던 도나투스주의자들 간의 논쟁에서 교회가 공인되기 전부터 12월 25일을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지켰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특히 아우구스티누스의 기록인 삼위일체론을 살펴보면 "예수께서는 3월 25일에 수태되셨다.
(중략) 전통에 따르며 예수께서는 12월 25일에 태어나셨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미 12월 25일이 전통 즉 초대교회부터 내려온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요.
교회의 전통에서 수난일이며 동시에 수태일인 3월 25일부터 상징적인 9개월 이후인 12월 25일을 기독교의 그리스도론적 개념으로 탄생일로 본다는 기록입니다.
둘째는 로마제국의 전통으로 로마의 절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시각
로마제국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는 이들은 크리스마스 축제가 로마 연감의 기록에 따라 336년경 로마제국에서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로마교회 대주교 율리우스 1세가 12월 25일을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선포한 350년부터 그리스도의 탄생제가 공식적인 '기독교'의 축제로 인정되기 시작하였고, 오늘날까지 전통으로 굳어지게 되었다는 것이죠.
코 - 코로 숨을 쉬게 하신 하나님께서 숨을 쉬는 것도 부자연스럽게 하셨지요
로 - 노동하는 것이 곧 기도하는 것이라고 깨우치며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먹지로 말라고 하셨는데
나 - 나 보다 더 약한 것 같은 사람도 건강하게 지내는 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일러라.
십자성호를 왼쪽부터 긋는 가톨릭,
오른쪽부터 긋는 정교회,
십자성호를 긋지 않는 개신교
2023년 성탄예배
예수님이 어디에 오셔야 하는가?
주 내 안에 늘 계시고
나 주 안에 있어
예수님이 오신 곳은 어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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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후기 :
설교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참 어렵고 힘든 과정이다.
성경의 잣대로 세상을 바라보며 가야 할 방향을 올바르게 제시할 수 있는 은혜가 절실하다.
오 주여
진리의 영으로 늘 새롭게 하옵소서
기초가 흔들리면
아무리 높이 올라간 것도
이제는 기초를 다시 놓아야 하는 때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