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고고학 자료 모음



역사를 증언하는 최초의 고고학 발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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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초만 해도 사람들은 땅 속을 파헤쳐 옛 유물을 찾는다는 생각을 미처 못했다. 19세기 중엽에 이르러서야 고고학자들이 옛 문헌에 비추어 심증이 가는 지역의 땅 속을 파보기 시작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이렇게 성서에서 실마리를 찾으려는 고고학자들 덕분에 발견됐다.  

1840년 모술에 프랑스 영사관이 들어섰다. 영사로 폴 에밀 보타가 취임했다. 지금은 이라크 땅이 된 모술은 당시 교통의 요지였다. 모술 강 건너 마을에 높다란 둔덕들이 띄엄띄엄 있었다. 보타는 저녁마다 말을 타고 둔덕들을 둘러보며 집집마다 점토판이나 골동품을 수소문했다. 

이미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7년 동안 외교관으로 근무하며 고대 유적에 익숙해진 보타는 모술 시장에서 골동품들을 사들였다. 그의 목적은 유물의 출처를 알아낸 후 유적지 자체를 발굴하는 것이었다. 

예언자 요나의 무덤 사원이 있는 네비 유누스 언덕에 집을 짓고 사는 사람들이 많은 골동품을 캐내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보타는 그곳을 발굴하려 했다. 하지만 예언자의 신성을 훼손시킨다는 이유로 마을 사람들의 반대에 부딪쳤다. 보타는 할 수 없이 그곳에서 약간 떨어진 퀸지크(양떼) 언덕을 파 보기로 했다.

 

그는 본디 의사였다. 고고학자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둔덕을 파 보려는 까닭은, 부친이 역사학자로 평소 역사에 관심이 많았던 차에 독일인 아시아학자 줄리우스 몰이 부탁한 말 때문이었다. “대영박물관에 가면 메소포타미아 벽돌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쐐기모양 문자가 새겨져 있소. 아마도 수천 년 간 땅 속에 묻혀 있는 엄청난 문명을 풀 실마리가 될 겁니다. 그러니 모술에 가거든 쐐기문자가 새겨진 벽돌을 찾아보고 가능하면 거기 널린 둔덕들을 파보시오.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가 거기 묻혀 있을지도 모릅니다.”

 

보타는 일꾼을 모아 둔덕을 1년 가까이 팠으나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다. 비록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할 만한 보물들을 찾아낼 수 없어서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1842년의 니느웨 발굴은 메소포타미아 고고학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모술에서 16㎞ 떨어진 코르사바드에서 사람이 찾아왔다. “우리 마을에는 당신이 찾고 있는 점토판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보타는 일꾼 두세 명을 딸려 보냈다. 1주일쯤 지나 일꾼 한 사람이 헐레벌떡 돌아왔다. “삽질을 하자마자 벽이 나타났는데 이상한 그림들이 새겨져 있더군요.” 보타는 허겁지겁 말에 뛰어올라 그곳으로 달렸다.

 

 

* 최초의 발굴품, 사람 얼굴에 날개 달린 짐승

  

 

 

 

 

몇 시간 뒤 그는 그 때까지 누구도 본 적이 없는 유물들을 캐냈다. 턱수염이 무성한 사람 얼굴에 날개 달린 짐승의 몸뚱이였다. 그것은 이집트에서도 보지 못한 새로운 조각 예술이었다. 보타의 가슴은 터질 듯했다. 그리고 발굴현장에 쪼그리고 앉아 조각품들을 모사했다. 너무도 생소한 것이었다. 

      

 

며칠 후 탐사대 전체를 코르사바드로 불렀다. 성벽이 드러났다. 땅을 팔 때마다 새로운 성벽이 나타났다. 마침내 보타는 고대 아시리아 왕궁 가운에 하나를 발견했다고 확신했다. 그는 이 사실을 얼른 파리로 알렸다. 1843년 5월24일이었다. 신문에 아시리아 유적이 발견됐다고 대서특필되었다. 현대 고고학 발굴의 효시가 된 에밀 보타의 ‘땅 파기’에 프랑스는 열광했다.

   

*  전설을 역사의 세계로 끌어내다

 

      

  (백향목이라 불리는 레바논 삼나무를 배로 운반하고 있는 수메르인들) 

 

 

 

그 무렵 이집트가 인류의 발상지라고 알려져 있었다. 에덴동산은 다만 전설일 뿐이었다. 성경에 무려 152차례나 언급된 아시리아 제국 또한 전설에 지나지 않았다. ‘니네베’라는 말은 성경에 20군데, ‘아시리아’라는 말은 132군데나 나온다. 그런데 그 아시리아가 정말 있었다. 메소포타미아에 이집트보다 더 오래된 문명이 있었다. 학자들은 긴장했고, 기독교 신자들은 흥분했다. 

 

* 니네베 근교의 여름궁전

 

           (제사장과 사르곤 2세, 루브르 박물관)

 

프랑스 정부는 거금 14만 프랑을 모아 보내면서 발굴한 유물을 스케치할 화가까지 딸려 보냈다. 아직 사진기가 없을 때였다. 힘을 얻은 보타는 1843년부터 4년 동안 메마른 날씨와 말라리아에 시달리며 발굴에 모든 힘을 쏟았다. 보타가 코르사바드에서 찾아낸 것은 기원전 709년 니네베 근교에 세워진 여름 궁전이었다. 성벽이 잇따라 나오고, 방과 정원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돌을 깎아 만든 사람이나 짐승 모습의 ‘조상(彫像)’과 편평한 돌 따위에 어떤 모양을 반입체적으로 돋을새김 한 ‘부조(浮彫)’들도 쏟아져 나왔다.

 

* 거대 도시가 5년 만에 건설되다

 

           (사르곤 왕의 청동 두상)

 

이 도시는 기원전 8세기 아시리아 제국의 왕 사르곤 2세가 통치할 때의 수도였다. 도시 중심의 거대한 왕궁으로 700개의 방이 안뜰을 둘러싸고 있는 궁전이었다. 여기 궁전 도서관에서 약 2만 여 개의 고문서를 발견함으로써 아시리아학이 탄생하였다. 왕궁 벽에는 수렵과 전쟁 모습이 채색타일로 묘사되어 있었다. 그리고 거대한 부조로 장식된 성벽의 길이만 사방 1.6 킬로미터에 달하였다. 놀라운 것은 이런 거대 도시가 5년 만에 건설되었다는 사실이다. 3천 년 전 나라가 그토록 짧은 기간에 거대 도시를 완성할 만한 국력을 가졌던 것이다.

 

* 급류가 삼켜버린 인류 유산들

 

           (축복하는 지니 신)

 

보타는 30여 톤에 달하는 거상을 4 조각으로 나누어 뗏목에 실었다. 그런데 뗏목이 티그리스 강 급류에 휘말려 가라앉고 말았다. 어둠 속에서 수천 년 만에 부활한 아시리아의 석조 신과 왕들은 또다시 현실세계로부터 사라졌다. 그러나 보타는 낙심하지 않았다. 새로운 배를 띄워 더 많은 유물을 파리로 실어 보냈다. 2500년 전 역사에서 사라졌던 대제국의 자취들은 이렇게 해서 루브르박물관에 자리 잡게 되었다.

 

보타는 1843년부터 4년 동안 발굴에 힘을 쏟았는데 이 유적지의 발굴은 후임자 빅토르 플라스(1858~65)와 미국의 시카고대학 탐험대(1928~35)에 의해 계속되었다. 성곽의 훌륭한 부조, 상아 조각품, 거대한 날개달린 황소상들이 발견되었지만, 가장 귀중한 발견은 BC 1700년경부터 BC 11세기 중반 무렵까지의 아시리아 왕들에 관한 기록인 '아시리아 왕 명부'이다. 보타의 후임인 빅토르 플라스는 톱질을 하지는 않았지만 강에서 마주치는 재앙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1856년 루브르에 도착한 유물은 이때도 수백 점 가운데 불과 26점 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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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2020년) 성서고고학 '10가지 유적' 발굴 쾌거
- 사해사본 진위, 므낫세, 오므리, 4대 족장, 라오디게아 교회 등 유적 발굴


2021년 1월 15일 크리채니티투데이는 2020년도에 성서 역사에 나타난 10가지 고고학적 위대한 발굴에 대하여 소개하였다.
발굴의 위대한 순서는 10위부터 1위까지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10. 아시리아 신 조각

이탈리아와 쿠르드 고고학자들은 신성한 동물의 등에 서 있는 아시리아 왕과 일곱 아시리아 신을 묘사한 15피트 바위 조각을 발견했다. 이 작품은 이라크 북부 쿠르드 지역의 운하를 따라 절벽에 부조로 조각되었다. 왕은 기원전 722년에서 705년까지 통치하고 이스라엘 북부 왕국을 정복한 사르곤 2세로 여겨진다(왕하17 : 6). 발굴된 운하는 사르곤 2세의 노예가 된 이스라엘 사람들이 파낸 것으로 여겨진다.

9. 단단한 바위 위에 지어진 교회 유적

이스라엘 북부의 바니아스를 발굴한 것으로 일반적인 관행처럼 다른 신의 성지 꼭대기에 지어진 4세기 교회의 유적이다. 바니아스는 판 신의 숭배의 중심지였으며, 이 신사는 그리스 신을 숭배하기 위한 곳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어떤 고고학자는 이곳을 4세기의 기독교인들은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주는 그리스도입니다”라고 고백하였고, 예수님께서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다”(마태복음 16: 13-19)라고 말씀하신 빌립보로 추측하기도 한다. 폐허의 한 돌에는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공식 종교가 된 직후 교회를 방문한 순례자들이 남긴 십자가 표시가 되어 있다.

8. 다윗 왕과 동맹을 맺은 요새

고고학자들은 기원전 1,000년경 다윗 왕의 통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골란 고원에서 요새화된 건물을 발견했다. 요새의 큰 현무암 돌에는 팔을 뻗은 두 개의 뿔이 있는 인물이 새겨 져 있다.

고고학자들은 이 건물이 다윗 왕의 동맹인 게슈르 왕국의 전초 기지라고 추측하였다. 압살롬의 어머니인 다윗의 아내 마아가는 바로 이 지역인 그술왕의 딸이었다.

7. 성스러운 연기 잔류물(4대 족장들의 제단)

기원전 8세기 제단의 불에 탄 표면에 있는 유기물에 대한 새로운 테스트에서 마리화나의 잔류 물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대마초가 고대 이스라엘의 모든 형태의 숭배와 관련이 있으며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마리화나 의식 사용과 관련이 있다는 최초의 증거이다. 제단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께 제사드린 곳이다.

아라드 사막 요새에ㅍ있는 예배당은 1960년대에 처음 발굴되었다. 반세기 전에 실시된 테스트로는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그러나 작년에 새로운 장비와 기술을 사용하여 새로운 테스트가 수행되었다. 현장의 두 번째 제단에는 유향의 흔적이 있었다.

6. 예루살렘에 버금가는 성전

텔아비브 대학 고고학자들은 예루살렘 근처의 이스라엘 1번 고속도로를 재건하는 동안 발견된 사원이 기원전 900년경에 지어졌다고 추정한다. 모차 사원의 크기는 솔로몬이 반세기 전에 지은 사원과 비슷하고 동쪽으로 불과 5마일 떨어져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예루살렘 성전에 버금가는 이 사원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낸 하나님을 숭배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것 같다고 추정한다.

5. 가나안의 신들

이스라엘의 고고학자 요세프 가르핀켈은 기원전 12세기부터 가나안 사원의 폐허를 발견했다.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구약 도시 중 하나인 라기 쉬에 위치한 발굴 현장은 보석을 포함하여 가나안 숭배에 사용된 유물(단검, 청동 조각상) 등을 발굴했다.

특히, 이곳 사원전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은 은으로 코팅된 청동 홀이다. Garfinkel은 가나안의 신 바알의 인간 크기의 동상이 그것을 가지고 있다고 추측된다. 동상 자체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고대 가나안 신의 큰 동상은 발굴하기는 매우 드문 현상이다.

4. 잘 보존된 오므리와 아합 궁전

현대 도시 아풀라 외곽의 이즈르엘 계곡에서 도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고고학자들은 오므리와 아합과 같은 이스라엘 왕을 섬기는 왕실 단지를 발견했다. 이 단지는 아합왕의 또 다른 궁전이 있는 텔 이즈르엘에서 불과 6km 떨어져 있었다. 그들이 발견한 커다란 기둥 건물은 “이스라엘에서 발견된 가장 잘 보존된 오므리 가문 건물”라고 했다. 현장에서 발견된 저장 용기는 중앙 집중식 식품 유통 시스템으로 추측하고 있다.

3. 라오디게아에 한 집에 교회

터키 고고학자 Celal Şimşek은 라오디게아의 한 집을 발굴하면서 기독교 숭배에 사용되는 신성한 물건을 발견했다. 중앙 정원이나 안뜰 주변에 지어진 페리 스타일 하우스는 극장 옆에 있었으며 부유한 사람들이 소유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사도 바울은 라오디게아에 있는 교회에 서신을 보냈는데, 이는 골로새서에 언급되었지만 잃어버린 것으로 보인다. 이 교회는 또한 요한계시록에 예수님께서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계 3장 17절)라고 말씀하신 곳과 연관이 있다.

심섹은 그가 발굴한 종교적 항목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지만 교회가 있는 집은 학자들이 “1 세기 중반부터 라오디게아에서 기독교가 전파된 방법”에 대한 잘 이해하게 될 소중한 유물이라고 결론지었다.

2. 성경 사본 및 유물의 진위 여부 확인 및 발견(사해 두루마리 파편은 가짜 판명)

성서 고고학자들이 겪고 있는 한 가지 문제는 그들이 개인적으로 발굴하지 않은 유물, 즉 유물 시장에서 판매되는 품목의 진위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다. 2020년도는 최첨단 기술이 어떻게 도움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몇 가지 주요 사례를 보았다. 한때 모조품으로 여겨졌던 점토 물범 인상은 진품인 것으로 나타 났으며, 한때 진짜라고 믿었던 사해 두루마리의 파편은 가짜로 밝혀졌다.

Ben Gurion 대학의 Yuval Goren 교수와 그의 팀은 포효하는 사자를 묘사한 "불라" 또는 점토 물개 상이 기원전 788-748 년에 통치했던 여로보암 2세의 통치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추측했다.

또한, 예술 위조 탐사 전문 회사는 성경 박물관 컬렉션에 있는 사해 두루마리 조각 16개가 모두 현대 위조품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70개 이상의 다른 가능성 위조 조각 2002년 이후 복음주의 수집가에게 제공되었다고 보고있다.

1. 므낫세 통치의 유적

왕하 21장의 통치자인 므낫세 왕에게 속한 궁전 유적의 발견을 발굴했다. 이 유적은 남쪽에서 템플 마운트와 예루살렘 구시가지를 내려다보는 아르몬 하나 치브 산책로에 위치해 있다. “원시적인” 석조물은 첫 번째 사원 시대의 왕실 건물과 관련이 있다. 그 구조는 그의 아버지 히스기야 왕으로부터 남쪽 왕국을 점령한 므낫세의 55년 통치로 거슬러 올라간다.

새로 지어진 미국 대사관 근처에서 몇 블록 떨어진 고고학자들은 대형 창고의 잔해도 발견했다. 중앙 집중식 식량 유통 시설로 여겨지며 아마도 농업 잉여 저장고로도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0년 전 고고학자들은 라 마트 레이첼 근처에 있는 궁전과 행정 센터의 유적을 발견하였다. 그런데 2020년의 발굴 보고서와 새로운 발굴 보고서를 통해 학자들은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을 따라 이 지역이 유다 왕국의 후대 통치자들의 주요 활동 중심지였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뉴스파워 해설*

2020년 성서 고고학자들의 노력으로 위대한 발굴의 쾌거를 이룬 한 해였다. 특별히, 구약 성경의 중요한 유물의 발굴과 신약 계시록의 7교회 중 한 곳이 라오디게 교회의 발굴로 성경의 기록이 역사적 사실음을 과학적으로 입증해 주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 말씀의 놀라운 구원역사와 그 위대성에 다시 한번 놀라움과 찬사를 드릴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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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산 호렙



하나님의 산 호렙

성경 기록에 의하면 호렙산은 종종 언약의 산으로서, 십계명을 부여받았던 시내산과 혼용되고 있다.
즉 성경은 두 산의 지리적 구별을 엄밀히 하고 있지 않다.
이런 견지에서 두 산의 관계에 대한 몇몇 견해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산의 총칭은 호렙인데 특별히 정상 부분만을 일컬어 '시내'라 한다.
2. 한 산에 두 봉우리가 있어 하나는 호렙이고 다른 하나는 시내이다.
3. 두 산은 동일한 산으로서 두 가지 이름을 갖는다.

이처럼 각 견해를 종합해 보더라도 두 산의 관계를 엄밀히 구분하기란 어렵다.

한편 유대 전승에 의하면 오늘날 호렙(시내)산은 시내 반도 최남단에 위치한 해발 2, 291m의 '예벧 무사'(jebel Musa, 모세의산)에 해당한다고 전한다.

그런데 이곳을 특별히 하나님의 산이라고 명명한 것은 혹자의 주장처럼 이곳에 '이드르'의 신전이 있었기 때문(pulpit commentary)도 아니고, 그 이전부터 거룩한 곳으로서 그렇게 불려왔기 때문(Knobel)도 아니다.

그것은 출애굽 직전 모세가 이 산 정상에서 하나님께로부터 거룩한 소명을 부여받았기 때문이고, 나아가 출애굽 직후에 하나님께서 이 산에 현현하사 언약의 증표로 율법을 수여했기 때문이다(Keil).

따라서 이 산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나시기 위해 자신을 드러내신 현현의 장소로 간주되어 이스라엘 백성에게 거룩한 산으로 성별되어 영영히 기억되었던 것이다.


주여 삼창으로 기도하는 성경적 근거


주여 삼창으로 시작하는 기도 / 성경적 근거

우리들은 간절히 기도할때 “주여” 삼창을 부르짖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있을까요?
성경에는 분명히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니엘 9:19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 지체하지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
O Lord, listen! O Lord, forgive! O Lord, hear and act! For your sake, O my God, do not delay, because your city and your people bear your Name.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들으시고 행하소서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다니엘이 황폐한 상황을 하나님께 아뢰며
자기의 기도를 들어 달아고 간청할때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첫번째 “주여”는 나의 기도를 들어 달라고 강청하는 “주여”입니다.

두번째 “주여”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부르짖는 “주여”입니다.

세번째 “주여”는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주님께서 속히 행동으로 옮겨 달라고 부르짖는 “주여”입니다.

우리가 기도할때 아무런 생각없이
“주여”라고 삼창을 부르짖기 보다는
“들으시고”, “용서하시고”, “행하시 옵소서”라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서 “주여” 삼창을 부르짖으면 은혜가 더 충만할 것이며 응답을 기다리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겠습니다.

자료 사용 / 11-27-200(주일) 파트리스교회 주보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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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삼창과 엄마 삼창, 글 김문수


제가 어릴 때 다니던 교회는 예배 분위기가 항상 엄숙하고 조용하며 질서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러 나아갈 때에는 항상 깨끗하고 단정한 모습을 해야 한다고 배웠기에, 다들 마음 뿐만
아니라 차림새에도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깨끗한 옷, 단정한 머리 모양, 바른 자세는 기본이었고, 아무리
날씨가 더워도 슬리퍼, 초미니스커트, 민소매 옷은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예배 음악을 위해서는 피아노와 오르간만 쓸 수 있었고, 드럼, 기타, 신디싸이저 등은 쓸 수 없었습니다.
회중들이 다 모여서 드리는 공적인 예배시간에는 손뼉을 치면서 찬양하는 것이나 옆사람에게 들릴 정도로
큰 소리로 기도하는 것도 금했습니다.

그러다가 고등학생 시절에 새로 전도사님 한 분이 오셨는데, 그 분과 학생회 수련회에 가서 처음으로 목소리를
높여 크게 외치며 기도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 분은 목소리를 높여서 통성으로 기도를 시작할 때에는 항상
"주여! 주여! 주여~" 라고 주를 크게 세 번 부르고 기도하도록 가르쳤습니다. 그 때에는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별로 생각해 보지도 않고, 그래야 하나보다 생각하고 그대로 따라했습니다. 그 후, 부흥회나 수련회와
같이 교회에서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에는 그렇게 "주여 삼창"을 하면서 기도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왜 기도할 때 "주여 삼창"을 해야 하는지, 이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저도 이해를 못했고,
"주여 삼창"을 가르치는 분들에게 물어봐도 선명한 대답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분들의 답변이라는 게
대부분 "크게 외쳐야 하나님이 잘 들어주신다"는 정도였으니까요.
성경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나 그 분의 사도들이 혹은 구약시대 믿음의 선배들이 기도하기 전에,
"주여 삼창"을 했다는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도대체 한국 교회에만 있는 이 "주여 삼창"이라는 것은
어떤 배경에서 등장한 것인지, 또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 과연 성경의 가르침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1. "주여 삼창"을 가르치는 자들의 주장
"주여 삼창"이란, 기도를 시작하기 전에 "주여! 주여! 주여~" 하고 세 번 외치는 것을 말합니다. 본래
창(唱)이란 "노래하다"라는 뜻이기 때문에, 이 경우 삼창이라고 하기보다는 "연호(連呼): 구호를 연이어 외침"
라고 하는 것이 맞겠지만, 이 글에서는 현재 통용되는 용어 그대로 "주여 삼창"이라고 쓰겠습니다.
"주여 삼창"을 가르치는 자들은 그 근거를 다음과 같은 두 가지로 들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삼위일체이시기 때문에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 이렇게 세 분을 부르는 것이라고 합니다.
둘째는, 다니엘 9장 19절을 근거로 이것이 성경적 근거가 있다고 합니다.
(단 9:19, 킹흠정) 오 주여, 들으소서. 오 주여, 용서하소서. 오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 오 내 하나님이여,
주를 위하여 지체하지 마옵소서. 주의 도시와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불리나이다.
또한 "주여 삼창"을 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서는, 목소리를 높여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며(렘 33:3),
크게 외쳐서 우리의 답답하고 억울한 마음을 하나님 앞에 있는 그대로 쏟아놓아야 한다는 등의 이유를
들기도 합니다.
이런 주장들이 과연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하는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기도할 때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각각 한 번씩 불러야 하는가?
성경에는 우리가 기도할 때에 성삼위 하나님을 각각 따로 부르고 기도하라는 가르침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늘날 신비주의자, 은사주의자들은 "성령이여~ 성령이여~" 하고 성령께 기도하고, 성령께 영광을 돌리기도
하지만 이는 성경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멉니다(요 16:14). 성경 어디에도 성도들이 "성령님께" 기도한 사례가
없습니다. 성령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며 우리를 위해 친히 중보하시는 분입니다.
(롬 8:26, 킹흠정)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성령께서 말로 할 수 없는 신음으로 친히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마 6:6, 킹흠정) 오직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으로 들어가 네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그리하면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네게 드러나게 갚아 주시리라.

(요 15:16, 킹흠정) 너희가 나를 택하지 아니하고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것은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남아 있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그분께서 그것을 너희에게 주게 하려 함이라.
(요 16:23, 킹흠정)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게 구하지 아니하리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면 그분께서 그것을 너희에게 주시리라.
그러므로, 기도할 때에 삼위일체 하나님을 각각 불러서 기도해야 한다는 것은 성경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옳지 않습니다. 우리는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성경에는 "주 너의 하나님", "주 예수 그리스도" 라는 표현은 있지만, 성령님을 가리켜서
주님이라고 부른 예는 없습니다.

둘째로, 다니엘 9:19은 "주여 삼창"의 근거가 될 수 있는가?
다니엘 9:19을 그 앞에 나오는 17, 18절과 같이 비교해 보면, 그들의 주장과는 달리 다니엘은 "주여"를
세 번 연호한 적이 없습니다.
(단 9:17-19, 킹흠정) [17] 오 우리 하나님이여, 그러하온즉 이제 주의 종의 기도와 그의 간구를 들으시고
주를 위하여 주의 얼굴이 황폐한 주의 성소에 빛을 비추게 하옵소서.
[18] 오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귀를 기울여 들으시며 주의 눈을 여사 우리의 황폐함과
주의 이름으로 불리는 도시를 보시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의로 인하여 주 앞에서 우리의
간구를 드리지 아니하고 주의 크신 긍휼로 인하여 간구를 드리나이다.
[19] 오 주여, 들으소서. 오 주여, 용서하소서. 오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 오 내
하나님이여, 주를 위하여 지체하지 마옵소서. 주의 도시와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불리나이다.
다니엘 9:19에 나오는 "오 주여, 들으소서" 이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기도이지 "주여"라는 구호가 아닙니다.
이는 9:17에 나오는 "주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소서"라는 내용의 기도입니다. "오 주여, 용서하소서"
이것 역시 그 자체가 하나의 기도입니다. 이는 18절에 나오는 "주의 긍휼로 인하여 간구하오니 그 긍휼로
우리를 용서하소서"라고 용서를 비는 기도입니다. "오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라는 것도
19절 후반부에 기록된 바와 같이 "주의 도시와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으니 주님 자신을 위하여
이 일을 지체하지 말고 행하소서"라고 하는 기도입니다.
따라서, 다니엘 9:19은 "주여 삼창"의 근거가 되지 못하며, "주여 삼창"을 가르치는 자들이 자기들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주여"라는 단어가 세 번 등장하는 구절을 찾아서 갖다 붙인 것에 불과합니다.

2. "주여 삼창"의 기원
"주여 삼창"을 외치는 의식은 성경의 가르침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 기원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이는 동양의 제사의식과 무속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여 삼창"의 모태가 되는 것은 "만세 삼창"인데, 이 만세 삼창은 중국에서 한무제가 숭산에서 제사를 지낼때
신하와 백성들이 만세를 삼창한데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고대 중국의 황실을 다룬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신하들이 황제 앞에서 충성을 맹세하거나 은혜에 감사할 때 "만세, 만세, 만만세"라고 외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아래 시는 김소월의 "초혼(招魂)"이라는 시 중 일부입니다.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 허공중(虛空中)에 헤어진 이름이여! / 불러도 주인(主人)없는 이름이여! /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 심중(心中)에 남아 있는 말 한 마디는 /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였구나 /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초혼이란 죽은 이의 혼령(넋)을 불러들이는 의식인데, 사람이 죽으면 죽은 이의 저고리를 왼손에 들고
지붕이나 마당에 서서 북쪽을 향하여 망자(亡者)의 이름을 크게 세 번 부른다고 합니다.
"주여 삼창"이라는 것은 전혀 성경적인 근거가 없는 동양 문화의 산물이며, 동양의 제사의식, 황제 숭배,
초혼의식 등을 혼합하여 만든 종교의식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3. "주여 삼창"을 하고 기도해야 하는가?
(1)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기도를 들으시는가?
(렘 33:3, 개역)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렘 33:3, 킹흠정) 나를 부르라. 그리하면 내가 네게 응답하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능력 있는 일들을 네게 보이리라.
(렘 33:3, KJV) Call unto me, and I will answer thee, and shew thee great and mighty things, which thou knowest not.
개역은 "부르짖으라"라고 번역했지만, 킹제임스성경에 나오는 call 이라는 단어는 목청 터지게 외쳐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귀머거리가 아닙니다. 그 분은 우리의 작은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이시는 분입니다.
(사 59:1, 킹흠정) 보라, 주의 손이 짧아져서 구원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요, 그분의 귀가 둔하여서 듣지
못하는 것도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우리는 주의 공로를 힘입어
은혜의 왕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서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주의 뜻대로 기도할 때
그 분의 긍휼로 인하여 기도 응답을 받는 것이지, 우리의 목소리 크기가 기도 응답을 결정짓는 것이 아닙니다.

(2) "주여 삼창"으로 마음의 답답함과 억울함을 토로하는가?
피난처이신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우리의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은 필요합니다.
(시 62:8, 킹흠정) 백성들아, 너희는 언제나 그분을 신뢰하고 그분 앞에 너희 마음을 쏟아 놓으라.
하나님은 우리를 위한 피난처시로다. 셀라.

그러나, 기도는 하나님 앞에 쏟아놓는 넋두리나 신세한탄이 아니며, 하나님은 우리의 감정적 화풀이 대상도
아닙니다. 위로자이신 성령님께서 우리를 위로해 주실 때, 참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는 "주여"라는
구호를 세 번 크게 외쳐서 얻는 감정의 발산과는 감히 비교할 수도 없는 크신 위로입니다.
(요 14:26, 킹흠정) 위로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님 그분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말하였든지 너희가 그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하시리라.


(3) "주여 삼창"으로 하나님의 관심과 주목을 끌 수 있는가?
주께서 내 행동과 생각과 말을 다 알고 계시는데, 그 분의 관심을 끌기 위한 목적으로 "주여"를 외칠
필요가 있을까요?
(시 139:1-4, 킹흠정) [1] (악장에게 준 다윗의 시) 오 주여, 주께서 나를 살피시고 나를 아셨나이다.
[2]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서는 것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이해하시오며
[3] 나의 행로와 나의 눕는 것을 둘러싸시므로 나의 모든 길을 익히 아시오니
[4] 보소서, 오 주여, 내 혀의 말 중에 주께서 알지 못하는 것이 하나도 없나이다.
만약 여러분이 믿고 있는 하나님이 다른 손님과 만나 이야기하고 있거나, 누군가를 쫓아가고 있거나,
여행 중에 있거나, 자고 있다면 크게 소리 질러서 깨우시기 바랍니다.
(왕상 18:27-28, 킹흠정) [27] 정오에 엘리야가 그들을 조롱하여 이르되, 큰 소리로 부르라. 그는 신이므로
지금 이야기하고 있거나 쫓아가고 있거나 여행 중에 있거나 혹은 자고 있으니 반드시 깨워야
하리라, 하매 [28] 그들이 큰 소리로 부르고 자기들의 규례에 따라 몸에서 피가 철철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자기 몸을 찢었더라.
바알 숭배자들은 큰 소리로 자기 신들의 이름을 부르고, 신의 주목을 끌기 위해서 칼과 창으로 피가 흐르도록
자기 몸을 상하게 하였습니다. 반면, 엘리야는 그렇게 목 놓아 외쳐 부른 것이 아니라 보통 때와 같이
주께 말했습니다. 왕상 18:36에는 "엘리야가 가까이 가서 이르되"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엘리야는 주의
이름을 크게 외쳐 부르거나, 제단 주변에서 날뛰거나 하면서 주의 관심을 끌고자 하지 않고 그냥 평범하게
주께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기도는 응답되었습니다.

(4) "주여, 주여" 연호한 사례
성경에는 "주여, 주여"라고 주를 연이어 부른 사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이렇게 연이어
"주여, 주여" 라고 부른 구절들은 아래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부정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성경의 용례에 의하면, 주로 주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자들이 "주여, 주여"하고 외칩니다.
(마 7:21, 킹흠정) 내게, 주여, 주여, 하는 자가 다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오직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 7:22, 킹흠정)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내게 이르기를,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대언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주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내쫓지 아니하였나이까? 주의 이름으로 많은
놀라운 일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마 25:11, 킹흠정) 그 뒤에 다른 처녀들도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하나
(눅 6:46, 킹흠정)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들은 행하지 아니하느냐?

이 글의 취지는, 기도할 때 주님께 "주여~" 라고 부르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 갈급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주를 찾으시는 분들은 "주여~" 라고 부르며 기도하십시오. 저는 그런 분들을
향하여 비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근거도 알 수 없는 "주여 삼창"이라는 종교 의식이 마치 성경적인 것처럼
교회 예배에 들어와 있고, 또 그 의미도 모른 채 목회자들이 가르치니까 그렇게 해야 한다고 믿고
무작정 따라 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이런 의미없는 외침이 관습적으로 행해지고 있다는 점이 문제라는 겁니다.
성경적 근거도 없고, 의미도 없이 통성기도 시작할 때마다 습관을 따라 혹은 기도의 분위기를 고조시키기 위해
"주여 삼창"이라는 구호를 외치는 것은 허공에 떠도는 공허한 부르짖음이 될 뿐입니다.
이제는 주여 삼창이 한국교회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한국 교회에서 외국으로 "주여 삼창"이라는
문화를 전파하여 외국에서도 "주여 삼창"을 외치는 교회가 있다고 합니다.
http://www.christiantoday.co.kr/view.htm?id=203784

참고로, 로마카톨릭의 미사에서는 그들이 하늘의 여왕이라고 믿고 숭배하는 마리아에게 "엄마 삼창"을
바친다고 합니다.



주여 삼창(三唱)?

말씀을 바르게 알고 , 바르게 믿고 , 바르게 행하

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기에 많은 그리스도인들

이 알면서도 바르게 행하지 못하고 때론 알지 못하여 

바르게 행하지 못하는 부분도 많이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세 번 부르는 삼창(三唱?)을 

신학적 의미가 '있다' '없다'의 측면에서 생각해보기 

보다는 “주여!“ 삼창의 의미를 더 자세히 알고 간절

히 기도한다면 은혜가 되지 않을까 생각하며 아래의 

글을 올려봅니다..



주여 삼창의 배경은 

성경 다니엘서 9장 19절에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들으시

고 행하소서 지체치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

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 라는 말씀에서


1. 주여 들으소서 

2. 주여 용서하소서 

3. 주여 들으시고 행하소서


이러한 의미를 품고 주여 삼창을 부르며 기도한다는 

설과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을 각 위마다 지

칭하여 부른다’는 설과 



중국에서 제사 지낼 때의 "만세(萬歲)!" 삼창(三唱)

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의식에 사용되어 왔으며, 이를 

새벽 기도할 때에 부흥사들이 원용(援用) 하여 "주

여!" 삼창이 이어져 왔다는 가능성을 기록된 곳이 있

으나, 신뢰할 만한 문서 기록으로 남겨진 것은 없습니

다. 




다음은 우주현 목사의 한국인의 기도!(KOREAN 

PRAYER!)에 대한 글인데 많은 공감이 되어 올려봅니

다.


KOREAN PRAYER!

-우주현 목사- 

제발! 주여~주여~주여~ 만세삼창하듯 부르짖지 마십시

오. 이는 무당들이 귀신 부를 때 하는 짓(?)들과 같습

니다. 제발! 교회안에서 기도할 때 큰소리로 부르짖

어 다른 성도의 기도에 방해 되지 않도록 배려하십시

오. 정말로 부르짖고 싶으십니까? 그러면 개인기도방

으로 옮겨 부르짖으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신

음소리도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분이시며 또한 예수님

도 그렇게 부르짖으며 기도하라고 가르치지 않으셨습

니다.


귀 먹지 않으신 하나님

한때 한국교회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교회성장

신학’ 의 본산으로 유명한 미국의 풀러신학교 피터 

와그너 교수로 아주 유명한 교수인데, 그는 특히 한국

교회의 성장을 주목하고 자시의 교회성장의 한 모델

로 한국교회를 지목했습니다. 물론 한국에도 여러번 

다녀갔었으며 풀러신학교는 아마 가장 많은 한국학생

이 유학하고 있는 학교일 겁니다.


그런데 그 분의 과목중에 교회성장과 기도에 대한 과

목이 있는데, 그 과목의 수업시간에 피터 와그너 교수

는 자신의 학생들에게 ‘KOREAN PRAYER’ 라는 이름으

로 한국 특유의 기도를 소개하고, 또 학생들에게 실습

도 시켰답니다. 피터 와그너 교수가 교회성장을 위한 

특별한 기도로 소개하고 보급하려 했던 ‘KOREAN 

PRAYER’, 도대체 그게 뭘까요? ‘KOREAN PRAYER’로 

소개된 그 기도는 ‘주여!’ 를 세 번 크게 부르고 이

어서 큰 소리로 통성기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재밌는 

것은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실습을 시키면서, 한국

말 그대로 ‘주여!’ 를 세 번 부르게 했다는 것이지

요. 미국 학생들이 ‘O, Load!' 가 아니라 한국말

로 ’주여를 세 번 큰소리로 부르는 것, 상상해 보십

시오. 재밌지 않습니까? 태권도의 용어에 이어 한국

말 그대로 수출되고 있는 몇 안되는 우리의 문화수출

상품으로 ‘KOREAN PRAYER’ 당당히 자리하고 있습니

다. 



한국교회에 큰 관심을 두었던 피터 와그너 교수의 눈

에는 그 ‘KOREAN PRAYER’가 아주 신기하기도 했으

며 또 한국교회의 성장에 크게 기여한 중요한 부분이

며, 또 아주 특별한 기도의 한 방법 이라고 생각되었

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들리는 소식은, 그 피

터 와그너 교수도 이제 한국교회의 성장은 끝났다고 

진단하고, 한국 모델을 포기하는 대신 요즘엔 자신의 

새로운 모델을 남미의 교회들에서 찾고 있다고 합니

다. ‘KOREAN PRAYER’ 도 이젠 약발(?)이 떨어졌다

고 판단한 것 같은데... 유명한 학자라서 그런지 역

시 판단도 빠릅니다. 


외국 기독교인의 눈에 그 기도는 참으로 신기하고 또 

특별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게 공식적이며 공개적

으로, 열정적이며 시끄럽게 기도하는 경우는 아마 교

회 역사에서도 두 번은 없었을 겁니다. 


주여! 삼창하고 이어서 큰소리로 통성기도 하는 것. 

구태여 기도원이 아니라도 일반적인 한국 교회에서 보

편적으로 지금도 행해지고 있는 평범한 기도회의 모습

입니다. 그리고 개교회에서의 일반적인 기도 시간에 -

특히 새벽기도나 철야기도 때 - 유독 큰 소리로 기도

하는 분들이 꼭 있어서 가끔씩은 감정적인 마찰을 빚

기도 하지요. 그러나 성경에 부르짖어 기도하라고 했

는데 왜? 라고 말하면 또 달리 할 말도 없어서 그냥 

참고 넘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과연 성

경이 그렇게 가르치고 있을까요?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가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예레미야 29장 12절도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

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부르짖으라‘라 말씀

하고 있는 대표적인 이 두 구절의 말씀을 표준 새번역

에서는 어떻게 번역하고 있는지 볼까요?

‘내가 나를 부르면, 내가 너에게 응답하겠고, 네가 

모르면 크고 놀라운 비밀을 너에게 알려 주겠습니

다.’(표준 새번역, 렘 33:3)

‘너희가 나를 부르고, 나에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의 호소를 들어주겠다’(표전 새번역, 렘 29:12)

개역 성경에서 ‘부르짖으라’고 번역된 부분이 모두 

‘부르라’로 번역된 것을 알수 있습니다.

영어성경을 보아도 ‘Call to me I will 

answer...',you will call upon me and come and 

pray...'모두 ’call'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부르짖으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카라’인데 이

는 영어의 Call로서 부르고 찾으라는 의미입니다. 그

리고 ‘부르다(Call)’와 ‘부르짖다(cry out, 

shout)'는 사실 완전히 다른 말이며, 부르짖다’에 해

당하는 히브리어는 ‘자앜’이라는 동사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카라’는 단순히 이름을 부르라는 뜻이

지 부르짖으라는 의미는 분명 아닙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하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하나님

의 존재와 성품에 대한 인격적 신뢰와 믿음을 고백하

는 것으로, 결국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

르는 - 즉 하나님의 존재와 인격에 대한 믿음을 고백

하는 - 것으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을 이 두 말씀은 우

리에게 다시 보여 주며 가르치고 있을 뿐입니다. 


이 말씀은 한국교회가 적용하듯 열심히 크게 기도하라

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출발은 믿음의 

고백, 즉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의 이름을, 그의 존재

를, 그의 인격을 부른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의 첫 마디, ‘하늘에 계신 우

리 아버지여’라고 부르는 것, 이것이 바로 ‘카라’

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올바른 지식은 없이 열심만 특심

한 것이 사실 문제입니다.


누구보다 성경을 잘 믿는다고 생각하며 성경대로를 주

장하지만 사실은 성경대로가 아니라 성경대로라 착각

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전통을 믿는다고 말해도 크게 

틀리다고는 못할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의 오류였음을 우리는 다시 환기하며 기억

해야 할 것입니다.


기도는 목소리 큰 사람들이 이기는 게임이 아닙니다. 

‘아버지’를 가진 사람들의 특권입니다.


그러면 큰 소리로 기도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까? 물

론 그렇게까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간절함 때문에 

부르짖을 수 밖에 없을 때가 물론 있다고 생각합니

다. 그러나 큰 소리로 부르짖는다고 해서 더 간절하다

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큰 소리로 부르짖는 게 더 

간절하다면 주님께서 ‘네 골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

고 기도하라(마 6:6)’고 가르치신 것이 틀린 것이 됩

니다.

그리고 여럿이 함께 기도드리는 경우에는 더욱 더 자

신의 큰 소리로 인하여 타인들이 방해받지 않게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제 경험과 관찰로는 큰 소리로 열심

히 기도하시는 분들이 대체로 이기적이었습니다. 그래

서 그들의 이기적인 본성이 기도에도 그대로 반영되

어 큰 소리로 기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제가 

판단한다면 지나친 편견일까요? 아무튼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자신보다는 타인에 대한 배려가 우선되어야 한

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상식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성경속의 인물 중 간절히 기도한 사람의 경우로 어떤 

분들이 주로 떠오르십니까?

저는 먼저 한나가 떠오릅니다. 사무엘서 1장에는 한나

의 기도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자세히 살펴 

보십시오. 1장 10절에 보면, 한나는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했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러나 13절을 보시면 한나가 어떻게 통곡(?)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녀의 통곡은 속으로만 말하여서 입술

만 동하였고 소리는 들리지 않는 이상한 통곡(?)이었

습니다. 이런걸 우리는 통곡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그

러나 개역성경은 통곡했다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부르짖다’, ‘통곡하다’ 이런 단어들은 우리의 종

교문화에서 비롯된 기도가 번역자의 선입견으로 영향

을 미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무튼 그녀는 자신의 

표현 그대로 ‘마음이 슬픈 여자(15절)’였습니다. 그

러나 그 슬픔을 안고 기도할 때에 그녀는 통곡하거나 

큰 소리로 부르짖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감정을 철저

하게 절제하면서 오히려 핀 눈물을 삼키면서 기도했습

니다. 참으로 마음이 슬펐던 여자, 한나의 기도는 한

바탕 울음과 곡성으로 한을 푸는 기도가 분명 아니었

습니다.

이어서 제게 떠오르는 인물은 당연히 엘리야입니다. 

그의 상황도 처절했음이 분명했는데... 그는 어떻게 

기도했습니까? 열왕기상 18장이 그 유명한 갈멜산의 

결투 장면인데, 특히 바알 선지자들의 기도와 엘리야

의 기도를 비교해 보십시오. 28절을 보시면 열받고 흥

분한 바알 선지자들의 기도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

다. ‘저희가 큰 소리로 부르고...’ 참 알 수 없습니

다. 오리혀 여기는 ‘큰 소리로 부르짖고...’라고 번

역해야 하는데... 그러나 역시 표준 새 번역은 ‘더 

큰 소리로 부르짖으면서...’라고 번역해야 하는데...

그러나 역시 표준 새 번역은 ‘더 큰 소리로 부르짖으

면서...’라고 번역해 놓고 있습니다. 제가 표준 새 

번역을 좋아하는 이유, 더욱 분명하지 않습니까? 


이 바알 선지자들의 기도 모습이 바로 히브리어로 

‘자앜’하는 -부르짖는, 울부짖는- 모습입니다. 반

면 엘리야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

님 여호와여!(36절)”,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부름

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기도의 사람 엘리

야의 기도 역시 기도는 열심의 문제가 아니라 바른 관

계의 문제임을 다시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는 관계의 확인이며 믿음의 확인이지 나

의 열심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며, 내 감정을 쏟아놓

는 시간도 아닙니다.


사실 예수께서 가르치신 기도의 자세는 꼭꼭 숨어서 

은밀하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기도를 가르

치실 때에 먼저 지적하신 것은 알다시피 기도하는 자

세였습니다. 기도를 가르치신 마태복음 6장 6절에 의

하면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

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말씀

하고 계십니다.



자세히 보면, 기도의 가르침인 6장 5~15절의 그 문단 

속에서 오직 6절 말씀만 ‘너(you)'가 단수로 쓰여지

고 있습니다. 즉, 너의 기도는 너 혼자서 너의 골방에

서 문가지 걸어 잠그고 오직 너의 아버지께만 은밀하

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문자 그

대로 지켜서 자신의 골방에서 자신의 아버지를 부르

며 은밀하게 기도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합

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런 개인 기도 시간과 공간

을 갖기가 우리의 주거문화와 생활여건상 사실은 쉽

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교회에서 함께 하는 기도라도 그 기도가 궁

극적으로는 각 개인들의 골방기도가 될 수 있도록 도

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결국 이같은 골방의 기도에 실

패하면 자연히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큰 소리

로 사람에게 보이려고(마 6:5)’ 기도하게 되고, 그래

서 결국 중언부언하게 되고, 큰 소리로 말만 많이 하

는 기도가 됩니다(마 6:7). 그리고 그런 기도는 성경

에서 이방인의 기도라고 하지 하나님 자녀들의 기도라

고 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혼자만의 골방에서 기도를 한다면, 때로 감정이 

격해져서 부르짖는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

까? 삼상 15:11 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 삼으

신 것을 후회하신다고 말씀하시자 그 밤에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었다’고 기록하

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분명히 ‘자앜’으로 표현되

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방에서 온 밤을 사울을 위

하여 부르짖어 기도하였습니다. 때로는 부르짖어 기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울을 위하여, 이스

라엘 민족을 위하여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는 자신만의 공간에서 혼자 드리는 기도였으

며 그가 흘린 눈물은 타인과 민족을 향한 사랑의 눈물

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조금은 문제가 되고 있는 공적 기도시

간에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과는 사실 차원을 달리하

는 기도이지요. 바울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롬 14:16)’하는 것이 성숙한 

성도의 지혜입니다.

열심히 기도한다는 그 선한 일이 왜 비방과 시비가 되

어야 합니까? 우리는 기도에서도 먼저 타인을 배려해

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열심히 부르짖어 기도했던 

대부분의 기도들이 사실은 ‘개인의 정욕에서 비롯된 

기도(약 4:3)’였음도 인정해야 할 겁니다. 그리고 때

로는 우리의 감정을 시원케하는 -심하게 말하면 스트

레스를 푸는- 기도일 때가 많았음도...


어제 성경을 읽다보니 전도서 말씀(전 5:2)에 이런 말

씀이 있더군요.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

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

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

을 적게 할 것이니라.’ 말을 적게 그리고 작은 소리

로 하는 기도를 추구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기독교의 오랜 전통 가운데 있었던, ‘고요함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묵

상하는 기도’이지요. 현대 개신교회에서는, 특히 한

국교회에서는 거의 모르고 있는 기도이기도 합니다. 

관심을 가지고 추구해 보시길 권해드립니다. 우리 아

버지는 당신의 자녀들을 향한 사랑 때문에 눈 멀기는 

하셨지만 귀 먹진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는 우리의 

신음조차 들으실 만큼 그 귀를 우리에게로 향하여 세

우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네가 나를 부르면 내가 너

에게 응답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이 부끄러

운 아들은 오늘도 가장 작고 낮은 목소리로 아버지의 

이름을 가만히 불러봅니다.

귀 밝으신 나의 아버지.



할렐루야


Everyone Knows Hallelujah, RIght?

There is probably not a single person alive who isn’t familiar with the word “Hallelujah”. We’ve all heard this word repeated time and again in various contexts. Hallelujah is a Hebrew loan word, incorporated into the English language from Hebrew. But what does this word mean in Hebrew?
What Does the Word Really Mean?

The word “Hallelujah” (הללויה) is actually a compound word (two individual Hebrew words put together): “Hallelu” (הללו) and “Yah” (יה). “Hallelu” is an exhortation to a group people to praise someone or something. The old English translation of “Praise, ye” is, therefore, a very accurate translation.

“Yah” (יה) is a version of  “YHVH” (יהוה) – an English transliteration of the covenant name of Israel’s God. Jewish belief holds that this name is too holy to be pronounced at all. In fact, no one really knows how to pronounce it correctly. Ancient Hebrew did not use vowels, but only consonants. In translating “YHVH,”, both Jewish and Christian translators substituted the word “Lord” –  a rough translation of another Hebrew name for God (אֲדונָי) – Adonai. To signify that “YHVH” was the original Hebrew word used in the text – it was printed in “all capitals,” (LORD and not simply “Lord”) in English translations.

Jewish Views of God’s Name

For many centuries, Jewish people have traditionally referred to this most holy name of God by using the Hebrew word, “HaShem” (literally, “The Name”). Occasionally, they would substitute even the longer Hebrew phrases for God’s covenant name, such as “HaKadosh Baruch Chu” (Holy One, Blessed be He).

Today’s modern Christ followers are divided over the appropriateness of the English translation (LORD). Some prefer to pronounce the actual covenant name of God (forbidden to be spoken in Judaism) believing that this makes their faith more authentic and original. Others continue with the more traditional Jewish/Christian ways of expressing their devotion. Join me and discover the practical simplicity of Hebrew Language. Understand how it speaks in through simple imagery, yet says so much.

할렐루야 다들 아시죠?
"할렐루야"라는 단어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 단어를 다양한 상황에서 반복해서 들었습니다.
할렐루야는 히브리어에서 영어로 통합된 히브리어 차용어입니다.
그러나 이 단어는 히브리어로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 말씀은 실제로 무엇을 의미합니까?

"할렐루야"(הללויה)라는 단어는 실제로 "할렐루"(הללו)와 "야"(יה)의 합성어 입니다.

"할렐루"는 그룹 사람들에게 누군가 또는 무언가를 칭찬하도록 권고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찬양하라, 너희여”의 옛 영어 번역은 매우 정확한 번역입니다.

"야"(יה)는 "YHVH"(יהוה)의 버전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언약 이름을 영어로 음역한 것입니다.

유대인의 믿음은 이 이름이 너무 거룩해서 전혀 발음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사실 정확하게 발음하는 법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고대 히브리어는 모음을 사용하지 않고 자음만 사용했습니다.
"YHVH"를 번역할 때 유대인과 기독교인 번역가 모두 "주"라는 단어를 대치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에 대한 다른 히브리어 이름(אֲדונָי)의 대략적인 번역인 Adonai입니다.

"YHVH"가 본문에 사용된 원래 히브리어 단어임을 나타내기 위해 영어 번역에서 "모든 대문자"(LORD가 아니라 단순히 "Lord")로 인쇄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에 대한 유대인의 견해 수세기 동안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히브리어 "HaShem"(문자 그대로 "이름")을 사용하여 이 가장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을 언급했습니다.

때때로 그들은 "HaKadosh Baruch Chu"(거룩한 자, 찬송하리로다)와 같이 하나님의 언약 이름을 더 긴 히브리어 구로 대체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현대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영어 번역(LORD)의 적절성에 대해 의견이 분분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실제 언약의 이름(유대교에서는 금지됨)을 발음하는 것이 그들의 믿음을 더 진실하고 독창적으로 만든다고 믿기를 선호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헌신을 표현하는 보다 전통적인 유대교/기독교 방식을 계속 사용합니다. 저와 함께 히브리어의 실용적인 단순성을 발견하십시오. 간단한 이미지를 통해 그것이 어떻게 말을 하는지 이해하면서도 많은 것을 말해줍니다.



아상블라주(assemblage) 불어 - 모으기, 집합, 조림 / Junk Art



버려지는 폐품·고물이 예술작품으로 새롭게 탄생

‘아상블라주’란 프랑스어로 집합 ·집적을 의미하며, 특히 조각 내지 3차원적 입체작품의 형태를 조형하는 미술상의 방법을 말한다.
종이나 베의 조각 등을 화면에 풀로 붙이는 큐비즘의 콜라주에서 비롯되었지만, 콜라주가 평면적인 데 대하여 아상블라주는 3차원적이다.

1961년 뉴욕에서 열린 아상블라주전(展)의 기획자 W.사이츠는 “아상블라주는 무엇보다도 먼저 예술품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 물체의 집적이어야만 한다”고 정의하였다.

피카소의 《압생트 술병》(1912) 등이 선구적 작품이지만, 본격적인 개화(開花)는 다다이즘 및 초현실주의, 특히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네오다다이즘, 팝아트, 누보레알리즘 및 환경예술 등에서 이루어졌다.

D.스페리(1930∼ ), F.아르망(1928∼ ) 등은 폐품을 소재로 예술화한다는 데서 더 나아가, 오히려 ‘잡동사니’ 폐품이 지닌 표현력을 끌어내려는 데 예술활동의 중점을 두고 있다.

또한 공업제품의 폐품을 주로 사용한 정크 아트(junk art)도 이에 속한다.



아상블라주
폐품이나 일용품을 비롯하여 여러 물체를 한데 모아 미술작품을 제작하는 기법 및 그 작품

정크(Junk. 고물)가 예술가의 손에 의해 아트(Art. 작품)로 탄생하는 것이 정크아트(Junk Art.  폐품예술)라고 한다.
즉 폐기물, 쓰레기로 버려질 물건들이 예술작품이 되는 것이다.
망가진 오토바이가 나비로 변하고, 못쓰게 된 손잡이가 로봇의 눈이 되어 움직이는 작품으로 변신한다.
정크아트가 지닌 예술적인 면과 교육적인 면, 그리고 환경적인 면 등의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다면 참으로 가치가 있는 장르다.
자전거, 오토바이, 자동차 등에서 발생되는 각종 고철을 비롯한 현대 문명이 토해낸 산업폐기물을 이용하여 예술가들의 손을 통해 작품으로 탄생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김치냉장고, 폐타이어, 숟가락, 냄비 등등 주변에서 버려진 쓰레기들이 멋진 로봇으로, 나무로, 놀이기구로, 동물로, 우리들이 좋아하는 캐릭터로 재탄생되는 예술이 정크아트다.

버려지는 고물들, 쓰레기 더미에 버려지는 그 어떤 물건들도 어떻게 사용하고 활용하느냐에 따라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는 곳, 그리고 새롭게 탄생시키는 사람이 있다. 충북 음성의 변두리 용바위골 가섭산 중턱에 자리 잡은 정크아트미술관과 오대호 관장이 주인공이다. 오 관장은 지난 2003년 10월, 생활 속에서 버려진 고물들이 예술작품으로 재탄생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정크아트를 처음으로 국내에 선보이기 시작해, 춘천 마임축제(2003년), 서울시 지구촌한마음축제(2004년), 청남대 호반축제(2005년)에 초대작가로 활동하면서 사람들에게 정크아트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정크아트는 일상생활에서 버려지는 잡동사니 및 도시문명과 폐기물을 소재로 이용하는 경향으로 입체주의·다다의 콜라주·오브제 등에 그 근본을 두었다고 한다.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50~1960년대에 유럽과 미국에서 전통적 조소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전위적 미술경향으로 여러 종류의 폐품을 끌어 모은다는 의미에서 스크랩 아트(Scrap Art)라고도 한다.

정크아트의 초기경향은 컴바인 페인팅의 창시자인 라우센버그의 ‘컴바인(Combine)’ 이나 ‘오달리스크(Odalisk)’ 등에서 찾을 수 있다는 설명이다. 그들은 헌 신문지 조각에서부터 망가진 전기제품까지 주로 도시문명의 폐기물을 이용해 회화와 조소의 중간 형태를 창조해 냈다.

정크아트를 본격적으로 전개시킨 작가로는 세자르를 비롯해 일부 누보레알리즘 작가들과 리처드 스탠키위츠, 존 체임벌린, 마르크 디 수베로, 리 본티쿠, 루이즈 네벨슨, 파올로치 등이 있다. 이들은 산업쓰레기나 고장난 부품, 파손된 부재 등을 예술적 기지로 재구성하였는데, 특별한 조소재료는 있을 수 없다는 사고가 바탕이 되었다.

미술가들은 이러한 산업폐기물을 용접하거나 혹은 발견된 오브제로 제시하면서 예술작품으로 승화한다. 여기에는 대리석을 조각하거나 청동을 주조 한 것보다는 용접된 철제와 강철이 기계시대에 보다 걸맞은 조각의 재료라는 사고가 함축돼 있다.

몇몇 작가들은 발견된 오브제를 제시하기도 하였지만 일부의 작가들은 이것을 변형시켜서 추상적이고 서정적인 조각을 창조하기도 한다.

오대호 관장은 “재활용을 주제로 한 세계 최대 규모의 환경조각공원을 조성하고, 정크아트박물관, 세계예술축제장, 체험학습장, 생태체험장 등을 만들어 전국의 아이들이 모여 체험할 수 있는 동화속의 꿈의 랜드를 만들고 싶은 것이 정말로 실현하고 싶은 꿈”이라고 전하고 “버려진 고물들에 새 생명을 불어 넣는 꿈의 랜드를 만들어 누구나 자연스럽게 환경과 재활용에 대한 소중함을 배울 수 있도록 하는 공간마련이 과제이자 숙제”라고 밝히는 오 관장의 포부가 어떻게 펼쳐질지가 벌써부터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