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언어적 본능을 갖고 있다. 이를 두고 사람을
호모 로쿠엔스(Homo loquens)라고 한다.
세계적 인문학자 스티븐 핀컨은 사람의 언어본능은 후천적인 것이 아니라
원초적 본능이라고 했다. 몸으로 교감하는 호모섹스쿠스(Homo Sexcus)와 함께 인간이 살아가는 기본이라는 인식이다.
언어적
본능을 극대화시키고 있는 것이 휴대폰이다. 덩달아 발달한 것이 말을 축약한 모바일 문자이다. 언어를 통한 소통은 음성통화에서
문자메시지로, 다시 SNS메신저로 진화하고 있다. 머지않아 서로 휴대전화로 연결만 되면 말을 하지 않아도 뇌파로 상대의 의사를 알
수 있는 시절이 올지도 모른다. 최근 미국에서 유행하고 있는 모바일 메신저 Yo는 그러한 세태를 잘 반영하고 있다.
요즘은
스마트폰이 대세이다. 움직이면서도 모든 정보를 실시간으로 검색하고 소통하며 기록으로 남겨둘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첨단이 오히려 화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세상의 모든 비밀이 비밀이 아닌 시대가 돼 편리하게 이용한 것이 부메랑이 돼 족쇄로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데칼트(René Descartes, 1596. 3. 31-1650. 2. 11)는 회의론을 대표하는 철학자입니다. 데칼트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정의하였다.
어려운 시대를 살았던 어르신들에게는 언어에 대한 공통적인 이해를 갖고 있다는 유머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용변이 급하여 화장실을 찾아가서 화장실 문을 두드렸더니 그 안에 대답에 따라 그 사람의 직업을 알게 한다는 아주 우스운 이야기입니다.
데이비드
R. 호킨스 호킨스 박사는 영적으로 진화한 의식 상태 및 참 나로서의 신의 현존의 각성이라는 주제에 관한, 국제적으로 명성이 높은
저자이며 강사이다. 그의 강연과 저서들은 과학자이자 의사였던 저자에게 일어난 대단히 진보한 영적 앎의 상태에 대해, 이해
가능하며 명료한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독특한 것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그의 초기 3부작에서는 보통의 에고 상태에서
에고의 소멸에 이르기까지에 관해 묘사하고 있으며, 이 책 『호모 스피리투스』는 완결편에 해당한다.
앞서 나온 두 책,
『의식혁명』(마더 데레사에게서 상찬을 받기조차 했던)과 『나의 눈』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으며 외국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적으로
읽히고 있다. 3부작의 출간에 앞서 의식의 본성 Nature of Consciousness에 대한 연구가 선행되었으며, 이는 인간
역사상 처음으로 진실과 거짓을 식별할 수 있는 수단을 드러내준 방법이라는 측면에서 성취를 이뤘다.
작품의 중요성은 《뇌/마음
회보Brain/Mind Bulletin》에서, 그리고 ‘과학과 의식에 관한 국제회의’와 같은 곳에서 인정받았으며, 운동역학
테스트에 관한 세미나와 워크숍은 옥스퍼드 포럼을 포함한 미국 전역과 세계의 다양한 기관, 단체, 영적 회의, 교회 모임 등에서
수차례 열렸다. 숱한 영적 진실이 설명의 부족으로 인해 오랜 세월 동안 오해받아온 것을 관찰해온 호킨스 박사는 매달 하루 종일
하는 세미나를 열고 있으며 이는 비디오로 기록되고 있다. ‘깨달음에 이르는 길의 스승’으로 불리는 호킨스 박사의 평생에 걸친
작업의 전체적 목적은 의식의 진화라는 측면에서 인간 경험을 재맥락화하고, 생명과 존재의 토대이자 계속적 근원인 내재적 신성의
표현들로서의 마음과 영, 양자에 대한 이해를 통합시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진화한 영적 신인류인 ‘호모 스피리투스(Homo
Spiritus)’의 탄생과 전망에 대한 감동적인 비전을 제시하는 영적 교사로서 헌신하고 있다.
호킨스 박사의 모든 저서의 서두와
말미를 장식하는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Gloria in Excelsis! Deo!)”이라는 진술은 그 봉헌을
나타낸다.
옮긴이 백영미 서울대 간호학과를 졸업했으며,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마더 데레사의 단순한
길』 『히말라야에서 만난 성자』 『죽음 너머의 세계는 존재하는가』 『감각의 박물학』 『황금 두루마리의 비밀』 등이 있다.
데이비드
호킨스 박사의 저작을 차례로 읽고, ‘더이상 세상을 향해 화낼 일이 없어지는’ 체험을 하면서부터 박사의 저작물을 번역하고
출판하는 일에 헌신하고 있다. 미국 세도나에 거주하는 호킨스 박사와의 감동적인 만남을 갖기도 했다.
Publisher Description
이 책은 <의식혁명>에서 <나의눈>으로 이어지는저자의 초기3부작 완결편이다. 저자는 인간의식 진화과정을 짚어가며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체계적으로 제시한다. 또한 구도자들과 행한 폭넓은 질의응답을 통해 영적수행 여정에서 품게되는 질문에 대한 명쾌한 답과 실용적인 지침을 제공하고 있다.
이 책은 인류 전체 의식수준이 부정성의 190에서 긍정의 207로 도약한 지금, 생명출현에서부터 영적깨달음과 에고의 초월에 이르기까지진화를 거듭해온 의식토대 및 본질을 되짚어본다. 또한 내재와 초월을 넘어선 깨달음의 나, 무한한 나에 이르는 질의 응답을 통해 영적 신인류에 대한 전망을 제시한다.
성인 성, 성스러울 성(聖), 낳을 탄, 태어날 탄(誕) - 성(聖) / 귀 이(耳) + 입 구(口) + 북방 임(壬) / 북방 임(크다, 성대하다) '성(聖)'이란 한자의 의미 "크게 듣고 크게 말하다" "타인의 말에도 귀를 기울일 줄 아는 현명한 사람"
- 탄(誕) / 말씀 언(言) + 길 연, 늘일 연(延)
'탄(誕)'이란 한자의 의미 "말을 널리 늘이는 것" "말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것"
성탄(聖誕)이란 한문자의 의미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요한 1:14) 크게 듣고 크게 말하여 세상에 널리 알리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2022년 성탄주일을 맞이하여 "오늘의 미국의 영적 수준이 어느 단계라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첫째, 상(上), 둘째, 중(中), 셋째, 하(下)
막연하게 미국 사회의 영적 수준을 개인의 느낌에 따라 판단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판단하기 위한 정확한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그 기준을 "언어(言語)"라고 하겠습니다.
언어를 기준으로 판단하려는 몇 가지 이유를 소개합니다.
언령신앙(言靈信仰)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처럼 언어가 갖는 어떤 신비한 힘이 있다고 믿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화분에 꽃을 심고 똑같은 조건과 환경에서 하나의 화분은 아침마다 물을 주며 지난 밤에 잘 잤니? 오늘은 더 아름답구나! 이렇게 긍정적인 인사말을 합니다. 그리고 다른 화분은 물을 주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라든지 말든지 이렇게 무관심한 자세로 대하면 얼마 후에 화분에서 자라는 식물의 모양이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또 다른 예를 들면 유리병에 물을 담아놓고 하나의 물병을 향해서 너는 참 좋은 물이야! 이렇게 긍정적인 반응을 하고 다른 물병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반응을 하면 긍정적인 반응으로 대하는 물병의 물은 육각수 형태의 좋은 물로 바뀐다고 합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반응으로 대한 물병의 물은 아무런 변화를 기대할 수 없다고 합니다.
언어(言語)는 존재(存在)의 집
불란서의 회의론을 창시한 철학자 데칼트(Renatus Cartesius, 1596. 3. 31-1650. 2. 11)는 "언어는 존재의 집" 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는 것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을 살펴보면 그 사람이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화장실 문을 두드릴 때 그 안에 있는 사람이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에 의해서 그 사람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가늠할 수 있다고 합니다.
똑똑똑, "들어오세요!" 이런 사람은 비서라고 합니다.
똑똑똑, "통화중!" 이런 사람은 전화교환원이라고 합니다.
똑똑똑, "올라갑니다" "내려갑니다" 이런 사람은 백화점과 호텔의 엘리베이커 걸이라고 합니다.
똑똑똑, "오라이" 이런 사람은 버스 안내양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목사는 어떻게 반응할까요? 똑똑똑, "믿습니까?"
호모 로쿠엔스(언어를 사용하는 존재)
"호모 로쿠엔스(Homo Loquens)"라는 말은 인간은 "언어를 사용하는 존재" 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사례를 오늘의 시대에 적용해 보겠습니다.
기독교의 3대 절기는 "부활절" "추수감사절" "성탄절"입니다. 이와 같은 절기를 맞이하면 어떻게 서로 인사하셨습니까?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해피 이스터(Happy Easter)" "해피 땡스기빙(Happy Thanksgiving)" "메리 크리스마스(Merry Christmas)"를 "해피 할러데이(Happy Holiday)"라고 해야 한다는 사회적 여론이 점점 더 크게 부각되고 있으며 심지어 메리 크리스마스 라고 인사말을 하면 거부반을을 나타내는 현실입니다.
미국의 현재 기독교 인구 비율이 대략 64%라고 합니다. 물론 이 수치는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한 통계입니다. 아직도 기독교인의 비율이 전체 인구의 절반을 능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인 여론은 기독교식의 인사말을 거부하는 것에 대해서 교회의 반응은 조용합니다.
또 한가지 사례는 바이든 대통령에 의해서 동성결혼법이 법적으로 인정한다고 결정된 것입니다. 만일 어느 교회 설교자가 동성애와 동성결혼은 비성경적이라고 부정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면 법적으로 제재를 받게 된다는 것을 예고한 것입니다.
사회의 이러한 분위기를 그 시대에서 통요하는 언어를 갖고 진단하는 것을 "언령신앙(言靈信仰, language is spiritual belief)" 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에서 말이 씨가 된다는 것은 '말에 생명이 있다"는 뜻으로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통해서 그 사람의 인품을 알 수 있고 그 시대에 사용하는 언어를 통해서 시대적 분위기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말 한마디에 천냥 빚도 갚는다!"
그러므로 해피 이스터, 해피 땡스기빙, 메리 크리스마스와 같은 인사말을 사회가 요구하는 언어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 사회의 영적 수준이 분명하게 낮아지고 있다는 현상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현상을 어떻게 받아드려야 할까요?
불교(佛敎)에서 불자(佛者)들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南無阿彌陀佛 觀世音菩薩)" 이라는 염불(念佛)을 사용하여 간단하게 기도합니다. 모두 열 여섯 글자로 아주 간단한 기도문입니다.
물론 기독교에도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문이 있습니다. 그런데 주기도문이 초신자들을 물론 기존 기독교인들에게도 즐겁게 사용할 수 있는 기도문은 아닙니다. 더구나 교회에서 주기도문은 모임을 마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南無阿彌陀佛 觀世音菩薩)" 이 의미는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께 귀의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것을 염불(念佛)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이 분들께 귀의한다는 뜻과 함께 이 분들처럼 살겠다는 다짐이기도 합니다.
기독교에는 염불과 같은 아주 간단하면서도 분명한 신앙을 고백하는 기도가 없을까? 물론 동방교에서 수행하는 신자들을 위하여 사용하던 "예수님의 기도" 즉 "주여,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Lord, have mercy on me!)" 라는 기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목회 현장에서 보다 더 아주 간단한 기도가 없을까 고민하던 중 예수님의 이름에서 기도문을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예수(Jesus) 둘째는 그리스도(Christ) 셋째는 임마누엘(Immanuel)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러면 어떻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을까요?
첫째는 예수(마태복음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저희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He will be save us from sin)"라고 합니다.
죄에서 구원한다는 것은 죄에 대한 용서를 말합니다.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용서를 위한 제물을 바쳐야 합니다. 제물이 되려면 반드시 피를 흘려야 하고 죽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의 죄를 위한 속죄의 제물이 되셨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죄에서 구원한다는 것은 죄로 말미암아 사망에 이르게 되었으나 죄에 대한 용서를 받았으므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을 말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이 생전에 아무리 훌륭한 일을 하였어도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사람일지라도 그 시신은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그런데 물고기는 죽은 사람의 몸보다 더 가치가 있습니다. 수 많은 물고기, 짐승, 동물의 죽은 몸둥아리는 가격에 따라 팔려갑니다. 그렇지만 죽은 사람의 몸을 어느 누구도 돈을 주고 거래하지 않습니다.
예수 라는 이름에서 얻은 기도는 "예수 내 구주!" 라고 하겠습니다.
예수 내 구주! Jesus is my Savior!
둘째는 그리스도(마태복음 1: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그리스도라는 이름의 뜻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be anointed people) " 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기름이란 성령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육체의 생명으로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하신 영원한 생명으로 오셨습니다.
죄에서 구원을 얻은 사람은 생명을 얻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라는 이름에서 얻은 기도는 "예수 내 생명!" 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 내 생명! Jesus is my Life! 요한일서 2:27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셋째는 임마누엘(마태복음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임마누엘이란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God be with us)"라고 합니다.
임마누엘은 세 개의 말을 합성하여 만든 단어라고 하겠습니다.
‘임’(함께, with) ‘마누’(우리와, us) ‘엘’(하나님, God)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진 게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은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날 때부터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은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예언된 것이었습니다(이사야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임마누엘 예수님은 구원자로 우리 곁에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 17절에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누구든지
예수그리스를 구세주로 믿고 고백하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치료자로
오셨습니다. 마태복음 4장 24절에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에 걸려서 고통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예수님을 만나면 변화가 일어나고 해방과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고
자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위로자로 오셨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8∼29절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은 ‘하나님의 사랑’ 외에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임마누엘이란 이름에서 얻은 기도는 "예수 내 권세!" 라고 하겠습니다. 예수 내 권세! Jesus is Power!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아주 쉽게 설명한다면 여기 아주 얇은 종이 한장이 있습니다. 이 종이는 어린아이들도 쉽게 찢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종이를 철판과 합친 후에 찢으라고 하면 어느 누구도 찢을 수 없습니다. 종이가 강해진 것이 아니라 철판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음므로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은 연약한 내가 이 세상을 창조하신 능력의 하나님에게 붙어 있는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강한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이 강하시기 때문에 어떤 질병도 환난도 근심과 걱정도 두려워 할 이유가 없습니다.
실예 /
울주군 온산면 덕신리 625번지 신경부락에 대략 450년 된 소나무 한 그루가 있습니다. 마을 주민들은 이 나무가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과 같은 나무라고 믿고 정월 대보름이 되면 마을 주민들이 돈을 모아 제를 지내고 심지어 무당을 불러 밤새도록 굿판을 벌렸습니다.
그런데 그 당수나무 바로 옆에 교회를 세웠으므로 마을 주민들의 반대는 아주 심각했습니다. 어느 해에 마을 이장이 찾아와서 정월 대보름 날 제를 지내려면 당수나무에 전기불을 켜야 하는데 마침 교회가 바로 옆에 있으므로 전선을 연결하여 전등을 켤 수 있도록 협조해 달라고 합니다.
이때 교인들은 어떻게 당수나무 제사를 지내는데 교회 전기불을 줄 수 있느냐? 제사는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것이므로 전기를 빌려주면 안 된다고 단호하게 반대합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교회 전기불을 밝히면 당수나무에 제를 지내는데 귀신이 겁이나서 오겠습니까? 그러자 교인들이 목사님 알아서 하십시오 하고 모두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마을 이장이신 작고하신 이수엽씨를 찾아가서 제가 당수나무에 전선을 연결하여 전등을 달았으니 마음대로 사용하라고 일러주었더니 이장은 전기세를 지불하겠다고 합니다. 밤새도록 백열전구 켜봐야 전기세가 얼마나 나오겠습니까? 그런 걱정 마시고 편하게 사용하라고 일러주었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되었을까요? 정월 대보름이 지난 후에 마을 주민들이 모여서 마을 주민 회의를 하였는데 당시 마을 사람들을 주도하던 서울 무당이 주민들에게 당수나무 신을 위하여 동제를 지내야 한다며 동제를 지낼 돈을 거둬드렸다고 합니다. 문제는 서울무당이 굿판을 크게 벌였으니 그 결론은 당수나무 귀신이 마을을 떠났기 때문에 더 이상 이곳에 머물 수 없다며 그 마을에서 떠나갔다는 것입니다.
저희가 와이스톤(Whitestone)이라는 지역에서 거주할 때 한번은 어느 수맥을 진단하는 사람이 방문하여 집에 수맥이 흐르는지 찾아주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엘보 모양의 금속 막대기를 손에 들고 이 방 저 방을 옮겨 다니면서 하는 말이 분명히 수맥이 있는데 잡히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더니 혹시 예수를 믿습니까? 그래서 예 제가 목사입니다. 그러자 그 분이 집안에 성경책이 있는 것을 보고 성경책만 놔두어도 수맥이 잡히지 않습니다. 하고 떠났습니다.
어떻습니까? 예수를 믿는 사람이 강한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에 우리는 오직 주님만 믿고 따라가면 될 것입니다. 2022년 성탄은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는 신앙으로 무장하여 다가오는 2023년 주와 동행하는 신앙생활에 승리하는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언령신앙(言灵信仰)은 동북아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오랜 전통으로 말에는 영혼이 깃들어 있어 불가사의한 힘이 있다는 믿음이다. 즉 말에 혼(魂)과 영(靈), 즉, 보이지 않는 '힘'이 깃들어 있어 그 말대로 길흉화복(吉凶禍福)이 좌우되고 평생의 운명(運命)까지도 영향을 받는다는 믿음이었다.
고대 일본 역시
마찬가지로 언어에는 신비한 영적인 힘이 깃들어 있고, 그 힘은 현실세계에 큰 영향력을 갖는다고 여겼다. 그러한 힘을 믿고, 그
힘으로 현실을 바꾸려 하는 것을 '고토다마신코(言灵信仰)'이라 한다. 고대의 일본인들은 좋은 말이나 아름다운 말을 하면 행복이
오고, 반면 나쁜 말을 하면 재앙이 온다고 믿었던 것이다.
한편, 고대 일본인들은 사람의 이름에도 '언령'이 머물고 있다고 믿었다. 특히 사람의 이름은 그 사람 자신의 혼이라 여겨,
남성이 여성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구혼을 의미한다. 따라서 여성이 남성에게 자신의 이름을 가르쳐 준다는 것은 구혼을 승낙했다는
것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또 염불(念佛)을 외면서 징이나 북에 맞춰서 추는 '염불 오도리'의 경우 '남무아미카불'의 명호를
주문으로 외어 말로써 악령을 물리치는 언령신앙이 깃들어있다. 이처럼 고대 일본에서는 언령신앙이 일상 생활의 구석구석까지 스며들어
있었다.
언령신앙의 영향을 받아 고대에 일본의 제사 의식에서 신을 제사 지낼 때의 언어는 아름답고 엄숙하게 미화되어 문학적 성격을 띄게 되었다. 제사를 연행하는 자는 산 위에 올라가 나라의 땅이 얼마나 기름지고 풍요로운가를 노래로 표현하고는 했는데,
이것은 말의 힘으로 현실 세계의 풍작이 이루어지도록 하려는 기원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풍성한 열매를 맺고 있는 풍작의 모습을
노래로 표현하는 것으로, 그 노래, 바로 말에 담긴 힘이 현실의 풍작을 가져온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러한 언령신앙의 전통은 '노리토(祝詞)'와 '센묘(宣命)'라는 일본 상대의 고유한 문학 양식을
발달시킨다. '노리토(祝詞)'는 기년제(祈年祭) 등의 궁정제사에서 읊어진 신전에서 부르는 노래를 말한다. 본래는 간단한
주문(呪文)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집단 제사를 올릴 때 선미(善美)를 다한 말들을 봉헌하고, 사람들의 번영과 행복을 기원하고
신의 위력에 감사하는 행사를 거듭하는 동안에 점차 '노리토'의 형식을 갖추게 된 것이다.
노리토의 주 내용은 신의 이름을 부르고, 제사를 지내는 이유, 제신(祭神)의 내력과 업적의 설명, 진설(陳設物)의 열거,
기원하는 일 등이다. 이러한 내용을 음률과 성조에 유의하여 반복, 대구, 열거, 마쿠라 고토바(일본 전통 시가인 '와카''에서 어떤 말 앞에 붙이는 특수한 수식어), 비유 등을 사용하여 장중미(莊重美)를 살려 읽는 과정을 통해 노리토의 형식을 완성하였다. 문헌상 현존하는 '노리토'는 『엔기시키 (延喜式)』에 수록된 27편과 『타이키 (台記)』에 수록된 1편으로 총 28편이 전해지고 있다.
한편 '센묘(宣命)'는 천황이 신하에게 내리는 조칙(詔勅)을 말한다. 천황의 즉위나 양위, 황후를 세우는 일, 연호를 바꾸는
일, 황태자를 세우거나 폐하는 일, 상을 주거나 벌을 주는 일 등 국가의 중대한 일에 관하여 작성한 문서이다. '노리토'가 신과
인간 사이에 이루어진 것이라면, '센묘'는 임금과 신하 사이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장도 그 내용이 구체적으로 표현되었을 뿐만 아니라 감정도 분명하게 드러나 있는 특징이 있다. 현존하는 센묘는 『쇼쿠니혼키 (續日本記)』 62편이 수록되어 있고 그 밖의 문헌에 3편이 수록되어 있다.
한국에도 '언령신앙'의 전통이 있어, 우리 조상들은 말조심을 강조했다. 특히 설날부터 대보름까지의 기간에는 아예 남에게 듣기 좋은 덕담만 하는 풍습이 형성되기도
하였다. 또한 언령 신앙은 중국이나 한국 등지에서 볼 수 있는 '휘(諱)', '피휘(避諱)'의 풍습과도 연결된다. 원래 '휘'는
죽은 사람의 생전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것을 말하였으나, 나중에는 생전의 이름 자체가 '휘'로 와전되는 바람에 이름을 부르지
않는 행위는 따로 '피휘'라고 명명하였다. '피휘'의 풍습은 범위가 확대되어 살아있는 사람에게까지 미쳤다.
한국 문학의 경우 『삼국유사』 등에서 언령신앙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삼국유사 중 '혜공과 혜숙'의 일화에서 광덕이
아미타불을 향하여 극락왕생을 기원하고 달을 증인으로 삼는다. 여기에는 자신이 바라는 바를 미리 질문으로 던져버려 이루어지리라고
여기는 충류도 계통의 언령신앙이 담겨있다고 말 할 수 있다. "말이 씨가 된다"와 같은 속담도 언령 신앙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불자들에게는 불경을 모두 읽거나 암송하지 않아도 아주 간단하게 기도할 수 있는 불경이 있습니다. 그 불경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南無阿彌陀佛 觀世音菩薩)" 모두 16자로 구성된 기도문이라고 하겠습니다.
Q : 스님이나 어른들이 기도 할 때 또는
텔레비전에서 스님들이 나와 염불 하는 모습을 보면 흔히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라고 합니다. 어떤 뜻입니까?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께 귀의하는 것
A :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은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 두 분에게 귀의한다는 말입니다. ‘나무’는
귀의한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 두 분에게 귀의한다는 것 입니다. 아미타불은 극락에 계신
부처님이고, 관세음보살은 대자대비한 마음으로 중생들을 구제하고 제도하는 분입니다. 또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것을 염불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이 분들께 귀의한다는 뜻과 함께 이 분들처럼 살겠다는 다짐이기도 합니다.
자료출처 / 불교신문 2219호/
4월 12일자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
우리 속담에 “노는 입에 염불(念佛) 한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하는 일 없이 놀기보다는 무엇이든 하는 것이 낫다는 뜻으로 우리 생활에 염불이 얼마나 친숙한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다. 부처님 당시에 제자들이 부처님을 존경해 그들 마음속에 부처님을 간직하려고 했던 노력이 염불의 시초다. 이
염(念)이란 단어에는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데 대표적인 의미로는 ‘억념(憶念)하다’, ‘관념(觀念)하다’,
‘사념(思念)하다’, ‘작의(作意)하다’라는 뜻으로 ‘마음에 기억하여 잊지 않으려고 하는 의식 활동’으로 해석된다.
염(念)이란
단어가 이렇게 많은 의미로 쓰이는 이유는 염해야 할 대상인 부처님의 개념에 여러 가지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염하는 대상도 초기
원시불교에서는 석가모니 부처님 한분에 한정되어 있었지만, 부파불교와 대승불교가 일어남에 따라 아미타불, 약사여래불,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등 여러 부처님과 보살들에 대한 염불이 행해지게 되었다.
“마하남이여! 이곳에서 너는 여래를
억념(憶念)해야 한다. 이르기를, 이와 같이 저 세존은
응공(應供).정등각(正等覺).명행족(明行足).선서(善逝).세간해(世間解).무상사(無上士).조어장부(調御丈夫).천인사(天人師).불세존(佛世尊)이시다.”
(〈증일아함경〉 제11권 억념품)
위에서 보듯이 염불의 대상인 부처님을 여래십호(공양 받을 만한 님(應供),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正等覺), 지혜와 덕행을 갖추신 님(明行足), 바른 길로 잘 가신 님(善逝), 세상을 이해하는 님(世間解),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신 님(無上士), 사람들을 길들이시는 님(調御丈夫), 신들과 인간의 스승이신 님(天人師), 깨달은 님(佛),
세상에 존귀한 님(世尊))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이와같은 여래십호(如來十號)의 내용은 부처님의 공덕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으로
염불이 부처님의 공덕을 억념(憶念)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만약 어떤 비구가 몸과 뜻을 바르게 하고 결가부좌하여 생각을 묶어 앞에 두고 다른 생각이 없이 오로지 부처님을 염하여 여래의
형상을 관(觀)하는데 눈에서 떠나지 말아야 하느니라. 이미 눈에서 떠나지 않게 되면 다시 여래의 공덕을 염하라” 〈증일아함경〉
위에서 볼 수 있듯이 여래의 형상을 관하는 수행이 염(念)을 하기 위한 방편으로 제시되었음도 알 수 있다.
이
부처님을 염하는 법이 하나의 수행법으로 채택된 것이 염불수행이다. 이 염불수행이 발전하여 부처님 이외의 대상을 염하게 되어
삼념(三念 : 念佛, 念法, 念僧)이 생겨났고 다시 지키고 행해야 할 계율과 보시, 장차 태어나야 할 천상을 생각하는 육념(六念 :
念佛, 念法, 念僧, 念戒, 念施, 念天)이 되었으며, 이 육념에다 다시 마음의 조용함을 염하는 염휴식(念休息), 출입하는 숨을
세어 망상을 제거하는 염안반(念安般), 이 몸은 항상 하지 않고 무상하다는 것을 생각하는 염신(念身)과 죽음을 생각하는
염사(念死) 등이 더하여 십념(十念 : 念佛, 念法, 念僧, 念戒, 念施, 念天, 念休息, 念安般, 念身, 念死)으로 발전했다.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
죽음,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 문현공
초기경전을 중심으로
1. 들어가는 말
모든 사람은 죽는다. 행복한 사람도 불행한 사람도, 부자도 가난한 이들도. 그리고 우리 모두는 지금 이 순간에도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 어떻게 보면 아니, 바로 보면 우리는 지금 죽음과 함께 있다. 붓다는
왜 출가를 하셨는가? 불교의 시작은 무엇인가? 많은 사람이 알고 있듯이 생로병사에서 비롯된 고(苦) 때문이었다. 붓다께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출가를 하셨다기보다는 결코 피할 수 없는 괴로움을 넘어서기 위해서 출가하셨고 그 결과 깨달음, 열반에
이르셨다. 출가의 출발점은 깨달음이 아니라 바로 인간의 괴로움이었으며 괴로움의 정상에 있던 것은 ‘죽음’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붓다는 죽음이 ‘나의 죽음’임을 알았을 것이다. 이 때문에 태어나면서부터 보장되어 있던 왕의 지위도 수없이 많은 금은보화도 반갑지
않으셨을 것이다. 반면에 우리는 어떠한가? 현대사회에서 죽음을 눈앞에 둔 병실의 환자 혹은 고령의 노인들을 제외하고 많은
사람에게 죽음은 ‘나의 죽음’이 아닌 그저 ‘남의 죽음’일 것이다. 과거의 자연스럽던 죽음은 근현대 사회로 넘어오면서 차갑고
기계적인 죽음으로 변모한다. 그리고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남의 죽음’으로서 저편으로 밀어놓고 묻어놓는다.
자연스럽지 않은 죽음은 탄생과 소멸, 생과 사라는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고 자연스럽지 않은 삶을 만들어간다. 그리고 ‘남의 죽음’은
부작용의 부산물들을 낳는다. 현재 한국의 자살률은 10만 명당 33.3명으로 OECD 회원국 34개국 중에 가장 높으며 OECD
평균과 비교해 3배 가까이 많고 자살률이 가장 낮은 그리스와는 10배 이상의 차이가 난다. 또한 더 심각한 문제는 청소년
자살률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한국의 10∼19세 인구 10만 명당 자살자 수가 2001년 3.19명에서 지난 2011년
5.58명으로 57.2% 증가했으며 OECD 회원국의 청소년 자살률이 감소하는 추세인 데 비해 한국의 청소년 자살률은 급증
추세라고 한다. 인생의 괴로움과 행복이 무엇인지 앞으로 알아가야 할 아이들은 무슨 죄인가. 선진국 대열에 진입했다고
자부하는 대한민국이 불명예스럽게도 각종 죽음 지표에서는 최상위권에 속해 있다. 이러한 죽음 관련 문제들은 사실상 삶의 질
문제이다. 한국의 행복지수가 OECD 34개국 중 32위로 최하위권이라는 문제는 위의 죽음 관련 지표와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 같은 암울한 한국의 현실에서 대안은 무엇인가? 삶을 삶답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필자는 그 대안이 ‘죽음준비
교육’이라고 확신한다. 미국의 죽음연구(thanatology)는 1960년대에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 50여 년이 흘렀으며
유럽 또한 죽음 교육(death ed-ucation)이 시행 중이다. 일본 역시 1970년대부터 서양의 죽음연구를 받아들였으며
2005년 이후부터는 정부 차원에서 청소년 범죄와 자살률의 증가에 대한 대안으로 죽음 교육을 시행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불교계의
생사학(生死學)을 포함하여 죽음연구가 종종 이루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전체적인 수준에서 타 학문과 외국의 연구를 비교해 보면 가야 할
길이 아직 많이 남은 것으로 보인다. 언급했듯이 불교의 시작, 붓다의 시작은 죽음에서 출발했다. 그리고 붓다는 죽음을
넘어 깨달음을 얻었다. 삶과 죽음에 대한 우주적 분석을 제시하였다. 더욱이 단순히 문자만이 아니라 마음과 몸까지 꿰뚫어 완전히
체득시키는 수행 방법까지 제시하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죽음연구, 생사교육에 앞장서서 나아가야 할 불교계의 활동이 이웃 종교나 타
학문과 비교해 볼 때 그리 활발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현재 템플스테이를 비롯한 불교명상 붐이 일어나고 있어서 삶의 질 개선에
큰 도움을 주고 있으나 직접적인 죽음준비를 제시하는 사찰의 프로그램이나 불교계의 연구를 찾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이에 기존의
죽음연구들에 자그마한 벽돌을 하나 보태는 마음으로 초기불교 경전을 중심으로 불교적 입장에서 어떻게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가를
살펴보겠다.
2. 죽음, 생각하기
죽음을 준비하기에 앞서 죽음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며 생각의
시작은 죽음의 정의를 살펴보는 일이 될 수 있다. 먼저 의학적 죽음 정의인 심폐기능사를 살펴보자. 죽음은 전통적으로 호흡과
심장박동의 정지로 결정되었다. 심장과 폐의 기능이 정지하면 맥박, 혈류, 숨이 멈추고 이후 나머지 생체기관들의 정지가
뒤따른다.그리고 영화를 보면 가끔 의사가 사망 유무를 확인하기 위해 눈꺼풀을 들어 빛을 비추는 것이 이를 의미한다. 즉 호흡과
심장박동이 정지되고 뇌반사가 소실된 것이 ‘불가역적(不可逆的)’일 때, 그 사람은 사망한 것이다. 그러나 호흡과 심장이
멈추는 것이 죽음이라고 단순히 볼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호흡 정지와 심장의 정지 중에 어떤 것이 우선인가 하는 문제는 과거에
심각한 고민이었다. 19세기까지는 자발적 호흡의 유무만이 죽음을 판단하는 유일한 기준이었으나 1885년 이 기준에 의해 사망했던
사람이 살아난 경우가 학계에 보고되면서 죽음을 공식적으로 선언하려면 시간을 두고 관찰해야 함을 인식하게 되었다. 또한 1950년대
유럽에 소아마비가 유행하면서 아이들이 숨을 쉬지 못해 죽어가는 것을 계기로 인공호흡기가 개발되었고 인위적으로 호흡 유지가
가능해졌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오늘날에는 심장이 멈추는 것을 죽음의 판단 기준으로 삼는 것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호흡기의 개발과 같은 의료과학의 역사는 뇌사와 같은 또 하나의 죽음 기준을 만들게 된다. 뇌의 죽음이 일어나면
인간은 중요한 두 가지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첫째는, 소뇌와 뇌간에서 수행되는 생체적 통합조절기능의 상실이고 둘째는, 의식,
사고, 감각을 가능하게 하는 심리적 기능의 상실이다. 보통의 경우 뇌의 거의 모든 조직이 파괴되어 뇌가 죽으면 생체적 통합유지
기능이 상실되고 뒤이어 호흡 및 심박동의 불가역적 기능 정지가 유도되기 때문에 결국 심장사를 하게 된다. 그러나 과학기술의 발달에
의해 인공호흡기와 같은 인위적 생명유지 장치가 개발되면서 ‘살아 있는 시체’ 즉, 뇌사라는 또 다른 죽음 정의의 기준이 발생하게
되었다. 뇌사는 장기이식과 같은 무거운 생명윤리의 문제가 얽혀 있기 때문에 간단히 넘어갈 문제가 아니지만 이 글에서 자세히
다루지는 않겠다. 비록 의학적 죽음 정의를 언급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죽음 정의의 전부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의학적 죽음 정의는 육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죽음을 정의하는 데에 육체에만 초점을 맞추어
논의하기보다는 큰 틀에서 그리고 원점에서 차분히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간은 육체로만 이루어진 존재라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불교에서는 죽음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가. 잡아함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죽음을 설명하는 구절이 있다.
목숨[壽]과 체온[暖] 그리고 의식[識]은 몸[身]을 버릴 때, 함께 버려지기에 그 몸을 저 무덤에다 버리면 마음[心]이 없어 마치 나무나 돌과 같다.
이
구절에 따르면, 죽음이란 목숨[壽], 체온[暖], 식(識)의 세 가지 요소의 파괴로 인해 몸과 마음이 분리되는 현상이다. 이
같은 정의는 잡아함 외에도 중아함(中阿含) 등 초기경전 곳곳에 나타난다. 여기에서 수(壽), 난(暖), 식(識)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먼저 수는 수명(壽命)을 말하는 것으로 목숨이 지속되는 기간을 뜻하며 난(暖)이란 따뜻한 기운, 즉 체온을 말한다. 이
둘은 의학적 정의와 마찬가지로 육체적 영역에 속한다. 수명은 불교의 업사상 또는 인과법과 연결시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죽음을 판단하는 데에서 왜 심장사나 폐사 등을 언급하지 않고 체온의 상실을 언급하였는가? 추측건대, 당시의
정황에서 볼 때 시체의 판단 기준이 아마도 열기(熱氣)의 유무였을 것이다. 그리고 불교에서 더욱 중시하는 것은 바로 식(識,
vijñāna)이다. 식은 간단히 말해 사물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심리적 작용을 뜻하지만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증일아함(增壹阿含)에서는, “죽음이란 무엇인가. 여러 중생들이 되풀이하면서 받은 몸에 온기[溫]가 없어지고, 덧없이 변하여 다섯
가지 결합[五親]이 나누어져 오온[五陰]의 몸을 버리고, 명근(命根)이 끊어져 파괴되는 것을 죽음이라 한다.”라 하여 오온을
중심으로 역시 수명과 체온이 상실됨을 죽음이라 하고 있다. 여기에서 오온은 인간이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의
다섯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는 불교의 존재론이다. 이들 중에 물질 즉 육체를 의미하는 색을 제외하고 나머지 네 가지는 심리적
작용을 의미한다.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느낌[受], 마음속에 대상의 이미지를 형성함[想], 의도 또는 의지를 가짐[行]
등의 마음이 작용하기 전에 선행되어야 할 것은 대상을 감지하고 식별, 판단하는 기능인 식의 작용일 것이다. 식을 통해서 쾌(快),
불쾌(不快)의 감수작용이나 의도나 의지 등의 후단계가 진행될 수 있다. 또한 식은 십이연기(十二緣起)의 12단계 중에 세 번째에
위치하며 유식에서 말하는 육근(六根)과 연결된 육식(六識)의 식이기도 하다. 이들을 종합해 보면 인간의 마음을 지칭하는 대표적
용어가 바로 식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쉽게 보면 일반적인 말인 영혼이나 정신이라는 단어에 식의 일부 의미가 연결될 수
있으며 육체와 정신, 몸과 마음의 관계에서 후자의 위치에 있는 것이 식이기도 하다. 불교적 윤회의 관점에서 보면 죽음은 윤회라는
바다 위에서 일어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파도와 같다. 불행하게도 고통스러운 죽음은 1회로 끝나지 않는 사건이다. 그렇다면
버려지고 썩어져 자연으로 돌아가는 육체 말고 윤회하는 것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는 영혼이니 귀신이라는 말로 표현되지만 불교에서는
바로 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 덧붙여, 불교에서는 고정된 자아를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다른 말로 표현하면 반복되는 죽음,
윤회란 ‘식의 흐름’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죽음이란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데 시작 또는 기준이 되는 것은 정의를 살펴보는
일일 것이다. 정의란 어떤 존재를 명백히 밝혀 규정함을 의미하며 통상적으로 간결한 표현 방식을 취하며 한 존재를 규명하는 데에
중요한 작업이다. 그러나 정의를 내린다는 것은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왜냐하면 간결하게 어떤 존재를 규정하려 하기 때문이다.
덧붙여, 불교의 관점에 본다면 존재는 끊임없이 변화하므로 한 존재의 정의 또한 변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위의 죽음
정의와 더불어 우리에게 죽음이란 무엇인가? 떠오르는 것들은 두려움, 무서움, 불안, 공포, 고통, 슬픔, 후회 등으로 거의 좋은
것은 없다. 죽음이 아직 다가오지 않았을 때 ‘나의 죽음’을 떠올리면 무섭거나 두렵고 불안할 것이다. 또한 죽음이 나에게 가까이
왔을 때 지독한 고통에 휩싸이며 공포스러울 것이고 잠시 멀어졌을 때에는 후회를 남길 것이다. ‘너의 죽음’을 떠올리면 슬픔과
우울함에 사로잡힐 것이며 역시 후회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남의 죽음’은 잠시 애도하거나 그저 남의 죽음일 것이다. 초기경전에도 죽음에 대한 반응의 예가 종종 등장한다. 잡아함에는 다음과 같은 대화가 나온다.
여러
비구들이 물었다. “어떻게 하면, 비구가 번열(煩熱)하지 않고 죽으며 번열하지 않고 목숨을 마칠 수 있습니까?” 존자 아나율타가
대답하였다. “만일 비구가 진실되고 바르게 보며, 성스러운 사랑을 계로써 삼으면, 그 비구는 번열하지 않고 죽으며 목숨을 마칠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번열(煩熱)이란 몸이 타는 듯한 고열이 나고 가슴이 꽉 막힌 듯한 고통을 뜻하고 번열함
없이 목숨을 마칠 수 있는가 하는 질문 속에 죽음의 고통에 대한 불안감이 숨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실상 나의 죽음을
생각함에서도 가장 우려되는 부분은 고통 중의 고통, 바로 순수한 육체적 통증(痛症)이다. 다음의 구절을 살펴보자.
제
병은 차도가 없어 몸이 편안하지 않으며, 갖가지 고통은 갈수록 더 해져 나을 길이 없습니다. 만일 힘센 사람이 연약한 사람을
붙잡아 노끈으로 머리를 동여매고 두 손으로 세게 조른다면 매우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지금 제가 겪는 고통은 그보다 더합니다. 또
만일 백정이 예리한 칼로 소의 배를 가르고 내장을 끄집어낸다면 그 소의 고통이 어떻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제 복통은 그 소보다
더합니다. 또한 마치 힘센 두 사람이 연약한 한 사람을 붙들어 불 위에 매달아 놓고 두 발을 태우는 것도 고통스러울 것인데, 지금
내 두 발의 열은 그 보다 더합니다.
잡아함에 실린 위 내용은 중병으로 육체적 고통을 받고 있는 한 비구의 통증에
대한 묘사이다. 죽음에 다다르면 통증을 수반할 것이고 이 통증은 당사자뿐 아니라 주변의 사람들에게도 불안과 공포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통증의 유형에는 날카로운, 아리는, 욱신거리는, 타는 듯한, 쏘는 듯한, 찌르는 듯한 등의 종류가 있으며 기간에
따라 급성통증, 만성 통증이 있다. 또한 통증은 단순히 고통을 육체적으로 감각하게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여러 심리질환을 수반하기도
한다. 통증은 어떻게 본다면 죽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도 볼 수 있다. 또한 알폰스 데켄(Alfons
Deeken)은 그의 저서에서 죽음의 공포와 불안의 유형들을 보다 상세하게 다음과 같이 9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①고통에 대한
공포, ②고독에 대한 공포, ③불쾌한 체험에 대한 공포 ④가족에게 부담을 준다는 불안, ⑤미지의 세계를 눈앞에 둔 불안, ⑥인생에
대한 불안과 연결된 죽음에 대한 불안, ⑦인생을 미완성인 채로 끝낸다는 것에 대한 불안, ⑧자기 소멸에 대한 불안, ⑨사후의
심판이나 벌에 대한 불안 등이다. ③의 불쾌한 체험에 대한 공포는 육체적으로 쇠약해진 모습을 남에게 보이기 싫어하는 것 그리고
자신의 존엄성을 잃어버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의미하며 ⑥의 인생에 대한 불안과 연결된 죽음에 대한 불안은 사는 동안에 삶과
죽음에 대한 왜곡된 인생관이 이후에 죽음에 대한 불안과 연결되는 경우라고 말한다. 결론적으로 이 같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 불안에
대한 극복의 방법으로서 저자는 죽음준비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와 같은 죽음에 대한 부정적이고 왜곡된 이미지들을 극복하기 위해서, 혹은 실제로 이 이미지들이 찾아와서 ‘나의 죽음’ 그리고 ‘너의 죽음’이 되어 우리를 뒤흔들기 전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3. 죽음, 대면하기
1) 자신‐죽음, 명상하기
불교에서 가장 핵심적인 결론은 무엇인가? 실천, 즉 수행이 아닌가. 불교의 입장에서 죽음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도 그 답은 수행이라 생각한다.
초기경전의
대표적인 죽음과 관련된 수행으로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부정관(不淨觀) 둘째는 사념(死念)수행
부정관은 시체가
부패하면서 해골이 되어가는 과정을 관찰하는 수행으로 탐욕을 다스리기 위한 수행이다. 부정관도 죽음을 대비하는 수행이 될 수도
있지만 감각적인 욕망을 제어하는 것에 주목적이 있는 것으로 판단되므로 본 글의 취지상 이를 자세히 다루지는 않겠다.
이 글에서는
죽음을 준비한다는 취지에 보다 가까운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인 사념(死念)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불교의
마음챙김(mindfulness, vipassanā, 念) 명상은 한국은 물론, 미국 및 해외에서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마음챙김의 연장선상에서 사념은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을 의미한다. 사념은 10가지 마음챙김[十念] 가운데 하나로 한역에서는
염사(念死)로 번역되어 있다. 앙굿따라니까야(Aṅguttara-nikāya)에서는 “비구들이여,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을 닦으면 큰
과보와 공덕이 있고 불사(不死)에 이르게 되며 불사를 목적으로 한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사념을 닦고 있는가.”라 하며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 명상이 죽음을 넘어서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에 대해 붓다는 다음과 같이 사념을 닦아야 한다고
설하고 있다.
①내가 하루 ‘밤낮 동안만 살더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정신을 기울이면, 나는 많은 것을 이룬 것이다. ②내가 하루 ‘낮 동안만 살더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정신을 기울이면, 나는 많은 것을 이룬 것이다. ③내가 ‘한 끼 음식을 먹는 동안만 살더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정신을 기울이면, 나는 많은 것 을 이룬 것이다. ④내가 ‘네다섯 모금을 씹어 삼키는 동안만 살더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정신을 기울이면, 나는 많은 것을 이룬 것이다. ⑤내가 ‘한 모금을 씹어 삼키는 동안만 살더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정신을 기울이면, 나는 많 은 것을 이룬 것이다. ⑥내가 ‘숨을 내쉬고 들이쉬는 동안만 살더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정신을 기울이면, 나는 많은 것을 이룬 것이다.
또한 붓다는 위의 6종류의 사념을 닦는 방식에 대해서 ①-④까지의 방식은 게으르게 사념을 닦는 것이라고 하며 ⑤와 ⑥의 방식은 부지런히 모든 번뇌의 소멸을 위한 사념을 민첩하게 닦는 것이라 설한다. 사람의
마음은 안과 밖의 대상의 하인이 되어 이곳저곳을 흘러다니면서 기억, 경험과 맞물리거나 쾌(快), 불쾌(不快)의 감정과 연결되고
또다시 다른 대상을 접촉하고 흘러다니면서 업력을 형성한다. 그리고 이 과정이 시간과 농도에 비례해서 인생 전체에 영향을 주면서
각자의 인생을 만들어 간다. 마음챙김 명상은 마음의 주인이 되어 이리저리 흘러다니는 마음에 휩쓸리며 실려 다니지 않고 쾌, 불쾌와
같은 감응이나 다른 판단이 없이 고요하게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관찰하는 명상이다. 이에 관찰의 내용을 죽음으로 하는 것이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 명상이다. 다른 불교수행과 같이 올바른 자세와 올바른 호흡법을 기본으로 해서 내 마음속의 내용을 죽음으로 두고
정기적으로 수행하는 것이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 명상이다. 글의 서두에서 말했듯이 현대사회에서 죽음은 사회 전체나 개인에게
회피의 대상이고 은폐의 대상이다. 그저 ‘남의 죽음’이다. 그러나 생과 사, 탄생과 죽음은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이치이다.
자연의 섭리를 은폐하고 조작하면 부작용이 발생하여 다시 돌아오고 망각하면 감당하기 힘든 충격을 감내해야 한다. 죽음에 대해
망각하지 않고 순간순간 자신은 죽음으로 향하고 있다는 진실을 자각하고 알아차리는 것이 바로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 명상이다. 《청정도론(淸淨道論)》에서도
이러한 사념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죽음이란, 한 생에 포함된 생명기능이 끊어지는 것이다”라 말하며 “생명기능이 끊어진 것이라
불리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을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이라고 한다”라고 이르고 있다.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을 닦고자 하는 사람은
조용한 곳에 혼자 머물면서, ‘죽음이 올 것이고, 생명기능이 끊어질 것이다’ 혹은 ‘죽음, 죽음’ 하면서 이치에 맞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하여 사념을 언급하고 있다. 이와 같이 사념 수행은 매우 직접적이고 적극적인 불교의 죽음준비 훈련의 하나라 볼 수
있으며 자신과 죽음의 거리를 멀리 두고 숨겨두는 심리를 넘어 죽음을 바로 내 ‘곁’에 앉혀두게 한다. 그러나 여기에
반드시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만약, 불교교리에 낯선 사람이나 우울증 같은 정신질환으로 인해 심약한 상태의 사람 그리고 낮은
연령대의 학생들에게 위와 같은 죽음대비 명상을 단계적 조정 과정이 없이 바로 시행한다면 생각지 못한 비극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혹시 본격적으로 어떤 프로그램을 개설하려 한다면 반드시 부작용이 없는 단계적 조정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은 삶 속에서 마음 훈련을 통해 죽음을 부정적인 이미지로 각인하는 인식과정에 영향을 미쳐서 죽음의 부정적 이미지를
변화시키는 역할을 할 것이다. 죽음을 가까이하면서 막연한 혐오, 공포, 두려움 또는 지금 여기에는 없는 별개의 존재 등으로 죽음을
취급하는 심리를 개선시킬 것이다.
2) 타인―죽음, 돌보기
자기의 죽음이 아닌 타인의 죽음은 어떻게 준비시켜야
하는가? 앞의 죽음대비 명상을 함께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말기환자와 같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죽음으로 향하는 사람에게
죽음준비를 위한 명상을 권유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닐 수도 있다. 말기환자에게 더욱 필요한 것은 다른 사람의 힘이라 생각한다.
경전을 보면 타인의 죽음을 대하는 태도도 곳곳에서 나타난다. 붓다는 “병든 사람을 돌보아주는 것은 곧 나 부처를 돌보는 것이요,
병자를 간호하는 것은 곧 나를 간호하는 것이다”라 하여 환자를 돌보는 일이 곧 부처를 돌보는 것과 같이 거룩하고 성스러운 것이라
설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돌보아야 한다고 설했을까? 증일아함에서는 다음과 같이 간호인에게 필요한 다섯 가지 덕목을 제시하고
있다.
어떤 것이 그 다섯 가지 법인가? 간호하는 사람이 의사를 잘 분별할 줄 아는 것, 게으르지 않으며 먼저
일어나고 뒤에 자는 것, 항상 이야기하기를 좋아하고 잠을 적게 자는 것, 법공양(法供養)을 하고 음식을 탐하지 않는 것, 병든
사람을 위하여 설법해 주는 것이다.
위에서 붓다는, ①의사를 올바르게 판단할 것, ②환자보다 부지런할 것, ③대화를
자주 하고 잠을 적게 잘 것, ④환자의 음식이나 물건을 탐하지 않고 자신이 법공양(法供養)을 할 것, ⑤환자를 위하여 설법할
것이라는 다섯 가지 덕목을 제시하고 있다. ①은 간병인이 무조건적으로 의사를 신뢰하지 말며 혹은 진정으로 환자를 위하는
의사인지 아닌지를 잘 판단해야 함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④에서 법공양을 하라는 것은 환자에게 주어진 공양물을 취하지
말고 오히려 간병인이 공양물을 올리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음식, 재물 등의 공양물 중에 가장 수승한 공양물이 법공양 즉, 진리를
베푸는 것이며 마치 부처님에게 공양물을 올리듯이 환자에게 보시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⑤항은 환자를 위해 설법하라는 내용인데
이것이 어떻게 보면 가장 중요한 항목이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상담을 통해서 환자에게서 심리적 변화를 이끌어 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경전에는 붓다가 고통 속에 있는 환자를 위해 설법을 베풀고 심리적 변화를 유도하는 예를 자주 볼 수 있다.
그는 몸에 중병이 걸려 매우 괴로워하고 있었다. (중략) 부처님께서 이 법을 말씀하시자, 존자 아습파서는 어떤 번뇌도 일으키지 않고 마음이 해탈을 얻게 되어 기뻐하며 좋아하였다.
그때
세존께서 그 병든 비구를 위해 갖가지 방법으로 설법하여 가르쳐 보이시고 기쁘게 해주신 뒤에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가셨다. 병든
비구는 세존께서 떠나신 뒤에 이내 목숨을 마쳤는데, 그 비구가 임종할 때에 모든 감각기관이 기쁨에 차 있었고 얼굴은 청정하며
살빛은 곱고 희었다.
대만의 저명한 죽음학자 푸웨이쉰(傅偉勳)은 그의 저서에서 빅터 프랑클(Victor E.
Frankl)의 로고테라피(logotherapy, 意味療法)는 말기환자에게 효과적인 정신치료법이 될 수 있음을 주장하였다.
정신의학자였던 프랑클은 죽음과도 같았던 자신의 경험에서 창안한 로고테라피를 통해 기존의 심리치료와는 다른 치료법을 제시하였다.
의미 요법을 뜻하는 로고테라피는 치료자가 환자와의 상담을 통해서 환자의 인생 의미를 추출하여 자각게 함으로서 환자 스스로
내면으로부터 인생의 의미를 찾고 심리적으로 안정을 취하게 하는 치료법이다. 이렇게 볼 때, 위 붓다의 상담도 의미치료와 맥락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말기환자의 지속적인 통증은 심리에도 악영향을 미칠 것이며 죽음이 얼마 남지 않음에 대한 생각에도
계속적인 영향을 받을 것이다. 이에 환자 내면으로부터 힘을 끌어내 줄 수 있게 하는 전문상담가 혹은 스님, 신부님과 같은
종교지도자의 상담은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종교지도자, 의사, 간호사, 호스피스 그리고 가족의 역할은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
환자에게 마치 주사와 같이 외부로부터 주입되는 생명력과도 같을 것이다. 특히 환자의 죽음을 자주 접하는 의사, 간호사 또는
호스피스 시설에 종사하는 사람은 전문적인 상담 능력을 키워나가야 할 것이다.
4. 죽음, 넘어서기−받아들이기, 바로 보기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Elizabeth Kübler-Ross)는 현대죽음학의 선구자로서 최근에 국내에도 그녀의 저서 《인생수업》이 출간되어
베스트셀러를 기록한 바가 있다.
그녀는 의사인 자신이 직접 수많은 말기환자들을 관찰하면서 기록한 저서인 《죽음과 죽어감(On
Death and Dying)》을 통해 인간은 부정 및 고립, 분노, 타협, 우울, 수용의 5단계를 거쳐 죽음을 맞이한다고
주장하였다.
먼저 암과 같은 불치병으로 죽음을 선고받은 사람은 자신의 죽음을 부정하고 의사의 오진을 의심하며 타인에게 이 사실을
숨기기도 하면서 고립이 된다. 다음으로 병증으로 인한 육체적 초라함이나 심신의 쇠약함을 가족을 포함한 지인, 의사, 심지어 신앙의
대상에게까지 분노로써 표출한다. 셋째는, 타협 단계로 좀 더 살았으면 하는 바람에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거나 의사에게 잘
협조하고, 획기적인 신약을 기대하기도 한다. 넷째는, 우울 단계이다. 이때 자립능력 저하 등이 일어나며 위축된다. 마지막은
죽음을 수긍하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수용 단계로서 타인과의 접촉, 자기신뢰의 증가 및 극적인 자기변화가 일어나는
단계이다. 퀴블러로스는 모든 사람이 위의 순서대로 단계를 거치지는 않지만 분노나 우울의 단계를 넘어 수용의 단계로 신속하게
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수용 즉 ‘받아들이기’는 단지 죽음뿐만이 아니라 삶의 모든 괴로움에서도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강력한 수용의 힘이 있다면 어떤 불행한 사건도 그 사람을 무너뜨리지 못할 것이다. 파산, 은퇴, 이혼, 불구, 상실, 실패, 암
선고와 같은 인생의 지독한 고통이 들이닥쳤을 때,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발버둥치거나 애써 묻어두려고 한다면 더 깊이 진흙 구덩이
속으로 빠져들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를 온전히 받아들인다면, 구덩이를 벗어나 이전보다 더 드넓고 환한 저 언덕으로 갈 수
있지 않을까? 이에서 볼 때 미리 죽음을 받아들이게 하는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 명상은 단순히 죽음을 준비하는 것을 넘어서 ‘수용의
힘’을 기르는 데도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붓다는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출가했으며 죽음을 극복하여 열반에
이르셨다. 만약 붓다가 죽음을 극복하지 못했다면 불교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붓다는 어떻게 죽음을 극복하였는가?
육체적 영생을 통해 불사(不死)에 이르렀는가? “모든 존재는 영원하지 않으니, 이것이 곧 생하고 멸하는 생멸의 법칙이다. 생과
멸이 모두 멸한다면, 적멸의 즐거움을 깨달을 것이다”라는 《열반경》의 게송은 바로 죽음 극복의 문제에 대한 궁극적 지향점을
제시한다. 이 게송의 의미, 붓다 가르침의 의미는 삶과 죽음이 모두 없어져야[生滅滅已], 죽음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는
것[寂滅爲樂]이다. 즉 삶과 죽음 모두를 없앤 것이 붓다가 얻은 깨달음인 것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붓다가 깨달은
십이연기설(十二緣起說)을 통해 보다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십이연기설은
무명(無明)→행(行)→식(識)→명색(名色)→육입(六入)→촉(觸)→수(受)→애(愛)→취(取)→유(有)→생(生)→노사(老死)의
12단계를 말하며 이들 각각은 순서대로 원인과 결과의 관계로 얽혀 있다. 이에서 볼 때 죽음이라는 결과가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태어남[生]이라는 원인이 없어야 가능하고 생 또한 이전의 원인들에 의해 연기(緣起)된 것이므로 죽음을 없애기 위해서는
단순히 생만 없애는 것이 아니라 다시 역으로 이전의 각각의 단계를 올라가서 최초의 지점인 무명까지 가야 한다. 무명은 어떠한
실체가 아니라 깊은 무의식적 본능에까지 뿌리내린 원초적 무지의 마음을 의미한다. 이 무명이 만약 진리의 체득으로 인해 명(明)으로
바뀌면 각각의 인과관계 연결들은 차례로 소멸되고 죽음도 소멸된다. 바로 생도 없고 사도 없는 열반에 이를 수 있다. 즉, 붓다는
육체적 죽음을 극복한 것이 아니라 생과 사를 일으키는 무명을 넘어 열반에 이른 것이다. 열반(涅槃, nirvāṇa)은
원초적 무명이 사라진 상태로서 영어로 “to blow out” 또는 “to quench”로 표현되며 이들 각각은 취멸(吹滅)과
갈증 해소의 결과 등을 의미한다. 불어서 완전히 꺼진 대상은 죽음과 삶, 시작과 끝, 탄생과 소멸 등을 만들어내는 이분법적 생각
그리고 이 생각을 넘어 심층의식에까지 미친 이분법적 본능, 삶의 괴로움들을 생산해내는 원초적 어둠을 말한다. 또한 이 어둠 속에는
죽음, 공포, 두려움, 슬픔, 애착, 분노 등 삶의 고통을 만들어 내는 세 가지 원초적인 본능[三毒]이 숨어 있다. 즉 열반은
붓다가 깨달은 불교의 궁극적 지향점으로서 괴로움과 죽음이라는 모든 번뇌가 전멸(全滅)된 상태이다. 이 같은 교설은 근원적인
측면에서 죽음준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할 것이다. 보통의 죽음에는 반드시 육체적 죽음이 강하게 자리 잡게 되고 이를
중심으로 여러 가지 왜곡된 심리와 현상들이 파생되기 마련인데, 불교의 생사관은 죽음극복의 진정한 의미가 마음의 세계에서 다시
다루어져서 죽음을 바로 보고 나아가 삶과 죽음을 함께 바로 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5. 나가는 말
지금까지
초기불교 경전을 중심으로 불교의 입장에서 죽음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를 살펴보았다. 본문에서는 각 장의 제목에 따라 자세한
내용들을 언급하였지만 단순히 보면 각장의 제목과 순서, 즉 ‘죽음, 생각하기→, 죽음, 대면하기→죽음, 받아들이기, 바로 보기’
자체가 하나의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이 될 수 있다고 본다. 또한 효과적인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위 차례의 반복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죽음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고 이후에 죽음을 가까이하는 명상을 실천하고 죽음을 내 안으로 받아들이고 죽음을 다시 바로
보아서 죽음과 삶을 함께 보는 것이 죽음을 준비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 본다. 서두에서 언급하였듯이
현재 국내에서는 죽음교육 프로그램이 연령별로 보다 다양하고 체계적으로 시행되고 있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에 불교계에서
앞장서서 국내와 국외 그리고 불교계 내외에서 연구되고 있는 많은 죽음연구들을 반영하여 다양하고 체계적인 죽음준비 프로그램을
개설해야 할 것이다. 또한 법회 또는 템플스테이와 같은 기존의 프로그램의 틀 위에서 죽음명상과 같은 죽음준비 프로그램을 추가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도 있다. 이 글에서는 초기불교 경전만을 중심으로 불교의 죽음관을 살펴보았으며 초기 이후의
다른 불교문헌들을 다루지는 않았다. 특히 《티베트 사자의 서(Bardo Thӧdol)》와 정토계 경전들은 임종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문헌들이지만 본 글에서는 살펴보지 않았다. 차후에 이들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와 더불어 효과적으로 현대사회에 적용시킬 수
있는 맥락적 연구를 진행할 것이다. 이제까지 단순히 글을 통해서만 죽음을 가까이 두어야 한다고 하였으나 개인적으로도 계속해서
실천과 수행을 할 것이라 다짐하며 또한 본 글의 부족한 연구를 넘어 보다 심도 있는 연구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앞으로
나에게 죽음이 올 때까지 죽음공부를 놓지 않겠다는 다짐을 한다.
1880년대 후반, 러시아의 한 시골 청년이 쓴 것으로 알려진 이 책은 ‘쉬지 않고 기도하는’ 삶이 어떤 삶인지를 보여준다. 책의
주인공은 어느 날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을 읽고 어떻게 하는 것이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인지, 그 방법을 찾기 위해
순례의 길을 떠난다. 그러던 중 순례자는 큰 스승을 만나 “예수의 기도”(주여,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를 배우고, 하루에
3,000번씩, 6,000번씩, 나중에는 1만 2,000번씩 반복하여 기도를 함으로써 기도가 마음 깊은 곳에 이르며 평온해지고
하나님과 합일되는 황홀의 경지를 체험하게 된다. 이 책은 이렇게 깊은 영성을 체험하게 된 순례자의 기도 여행에 관한 이야기이다.
미국의 저명한
종교학자 휴스턴 스미스 교수는 “러시아 영성의 고전”이라 했고, 샌프란시스코 대학 종교학자 제이콥 니들먼 교수는 “지난 100년
동안 나온 가장 영향력이 큰 종교 서적으로 사람의 삶을 바꾸어 주는 희귀한 책들 중 하나”라고 칭송했다.
심지어는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와 더불어 러시아 혁명 이전 “러시아 문학의 3대 걸작”이라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역자 오강남 박사는 1970년대 초 캐나다에 유학하면서 이 책을 처음으로 접했는데 그 당시 기독교에도 불교의 ‘염불’과
같은 종교적 수행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그 후 캐나다 대학에서 가르치면서 종교학 개론 과목을 담당할
때에는 언제나 학생들에게 이 책을 읽고 독후감을 써오라는 과제를 냈다. 그리고 한국 독자들에게도 이 책을 알리고 싶은 마음에
영어본으로 나온 모든 번역본들을 참고해 한국어로 번역했다.
책은 무엇보다 문장이 간결하고, 평온한 느낌을 갖게 하여
조용하게 묵상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사람들 앞에 소리를 내어 기도하는 것에 익숙해진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처음에 책의 주인공이
행하는 기도 방식, 즉 “예수의 기도”가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책을 읽다보면 어느새 예수의 기도, 우리가 알지
못했던 혹은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던 예수의 기도가 책의 주인공에게 주었던 느낌, ‘팔다리로 감미로운 쾌감이 퍼지고’, ‘기쁨으로
심장에 거품이 이는’ 그 느낌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쉬지 말고 기도하는 삶을 꿈꾸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도로 영적인 성장을 꿈꾸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의 기도”는 새로운 희망이 될 것이다.
성인 성, 성스러울 성(聖), 낳을 탄, 태어날 탄(誕) - 성(聖) / 귀 이(耳) + 입 구(口) + 북방 임(壬) / 북방 임(크다, 성대하다) 따라서 '성(聖)'이란 한자의 의미는 "크게 듣고 크게 말하다"
聖자는 ‘성인’이나 ‘임금’, ‘거룩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聖자는 耳(귀 이)자와 口(입 구)자, 壬(천간 임)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聖자는 본래 ‘총명한 사람’을 뜻하기 위해 만든 글자였다. 聖자의 갑골문을 보면 큰 귀를 가진 사람 옆에 口자가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누군가의 말을 귀 기울여 듣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聖자는 타인의 말에도 귀를 기울일 줄 아는 ‘현명한 사람’이나 ‘총명한 사람’을 뜻했었다. 하지만 후에 뜻이 확대되면서 지금은 ‘성인’이나 ‘거룩하다’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壬자는 ‘북방’이나 ‘천간’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壬자는 士(선비 사)자가 부수로 지정되어 있지만 ‘선비’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왜냐하면, 士자와는 기원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壬자의 기원에 대한 해석도 제각각이다. 일부에서는 실을 엮던 도구로 보기도 하고 또 다른 해석에서는 북쪽에 있는 별과 땅을 연결한 모습이라고도 한다. 壬자에 ‘북방’이라는 뜻이 있으니 그런 해석도 가능하리라 본다.
또 壬자를 工(장인 공)자와 같은 자였던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당시의 工자()는 壬자와( ) 달랐기 때문에 같은 글자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러나 이런 논쟁이 무의미한 것은 지금의 壬자는 유래와는 상관없이 천간(天干)의 아홉 번째라는 뜻으로만 쓰이고 있다는 것이다. 또 때로는 다른 글자와 결합해 ‘사람’과 관계된 뜻을 전달하기도 한다.
타인의 말에도 귀를 기울일 줄 아는 현명한 사람 또는 총명한 사람
탄(誕) / 말씀 언(言) + 길 연, 늘일 연(延) 말을 널리 늘이는 것(세상에 말을 널리 알리는 것)
誕자는 ‘태어나다’나 ‘거짓’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誕자는 言(말씀 언)자와 延(끌 연)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延자는 발을 길게 늘여 걷는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늘이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誕자는 이렇게 ‘늘이다’라는 뜻을 가진 延자와 言자가 결합한 것으로 ‘말을 길게 늘이다’라는 뜻으로 만들어졌다.
誕자에서 말하는 ‘말을 길게 늘이다’라는 것은 남을 속이기 위해 이리저리 말을 늘여놓는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誕자는 본래 ‘거짓’을 뜻했지만, 후에 ‘말을 만든다’라는 뜻이 확대되면서 ‘태어나다’라는 뜻도 갖게 되었다.
지난 12월 4일 황목사님께서 "내 신앙의 월드컵"이란 주제로 설교했습니다. 예배 후 식탁의 교제 시간에 마침 한국에서 어느 후배가 유투브 속보를 보내왔는데 제가 확인하지도 않고 브라질에 대해서 부전승이라고 전했는데 결국은 어느 유투버의 돈벌이 용 가짜 뉴스이었습니다.
12월 5일(월) 다니엘 간닥터와 예약된 검진을 위하여 콜 택시를 불러 전화번호부에서 확인한 주소를 알려주고 이동을 했습니다. 접수부에서 전부한 후 안내원이 그런 의사가 없다고 합니다. 급하게 병원 밖으로 나와서 사무엘에게 주소를 받아서 다시 콜택시를 불러서 병원을 찾아가서 모든 검사 결과와 앞으로 진료 방향을 확인하고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어떤 정보든지 반드시 검증이 필요하다는 것을 다짐하는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성탄이란 절기도 성경적인 검증이 필요한 시대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현재 미국에서 모든 휴일을 어느 특정 종교의 용어가 사용되는 것을 금하고 있기 때문에 부활절, 추수감사절, 성탄절을 해피 할러데이(Happy Holiday) 라고 말하라고 합니다.
미국의 기독교 인구가 몇 %일까요? 2020년 기준 미국 내 기독교인(아동 포함)은 전체 인구 중 약 64%로 추산됐다. 같은 해 무종교인은 약 30%는
유대교, 이슬람교, 불교 등 기타 종교인은 약 6%로 집계됐다. 현재 미국 종교 인구 변화 속도와 트렌드에 따라 기독교인 비율은
2070년 전체 인구의 약 54%에서 최저 약 35%까지 급락할 가능성이 있다.
기독교 인구가 64%라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부활절을 왜 해피 할러데이라고 사용해야 합니까? 기독교 인구가 64%라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추수감사절을 왜 해피 할러데이라고 사용해야 합니까? 기독교 인구가 64%라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성탄절을 왜 해피 할러데이라고 사용해야 합니까?
침묵할 때가 있고 외쳐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외쳐야 할 때라고 하겠습니다.
당당하게 외치려면 외칠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합니다. 그 힘이란 성탄절을 맞이하여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 예수님을 맞이할 수 있는 "마음의 구유"가 준비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구유가 준비되셨습니까? 마음의 구유를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요?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예수 이름을 믿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예수 둘째는 그리스도 셋째는 임마누엘
언령신앙(言靈信仰)
언령 신앙은 일본에서 특히 발전된 것으로 일본에서는 ‘코토다마(言霊)’라고 부른다. 말에 보이지 않는 힘이 깃들어 좋은 말을 하면 행복이 오고, 나쁜 말을 하면 불행이 온다고 믿는 것이다. 학자들은 ‘말(言, 코토)’와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事, 코토)’이 발음이 같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일본의 신 고토시로누시(事代主)가 고사기(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책)에서는 고토시로누시(言代主)라고 쓰이기도 했다고 한다. 일본 일상 생활 깊숙히 스며든 언령 신앙의 사례를 찾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 말이 씨가 된다.
기독교 인구가 64%라고 하는 미국에서 크리스마스를 왜 해피 할러데이라고 해야 하는가? 이런 사회현상에 대해서 교회는 침묵하고 있는가?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앞으로 10년 이내에 커다란 변화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는 미국 전역에서 동성애자들의 결혼을 합법적으로 인정하기 때문에 교회에서 동성결혼에 대하여 부정적인 가르침을 강조하면 분명한 저항을 받게 될 것입니다.
추수감사절, 부활절, 성탄절은 기독교의 3대 명절입니다. 이러한 절기를 해피 할러데이라고 말해야 한다는 주장이 점점 더 강세로 드러나는 것은 언어에 감춰져 있는 힘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불자들에게는 불경을 모두 읽거나 암송하지 않아도 아주 간단하게 기도할 수 있는 불경이 있습니다. 그 불경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南無阿彌陀佛 觀世音菩薩)" 모두 16자로 구성된 기도문이라고 하겠습니다.
Q : 스님이나 어른들이 기도 할 때 또는
텔레비전에서 스님들이 나와 염불 하는 모습을 보면 흔히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라고 합니다. 어떤 뜻입니까?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께 귀의하는 것
A :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은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 두 분에게 귀의한다는 말입니다. ‘나무’는
귀의한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 두 분에게 귀의한다는 것 입니다. 아미타불은 극락에 계신
부처님이고, 관세음보살은 대자대비한 마음으로 중생들을 구제하고 제도하는 분입니다. 또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것을 염불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이 분들께 귀의한다는 뜻과 함께 이 분들처럼 살겠다는 다짐이기도 합니다.
자료출처 / 불교신문 2219호/
4월 12일자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
물론 기독교에도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문이 있습니다. 그런데 주기도문은 너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과 비교하면 길다고 하겠습니다. 초신자들에게 주기도문을 암송하여 기도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기도하던 중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단하게 기도할 수 있는 기도문을 만들었습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모두 15자 글자 입니다.
뉴욕으로 이주하여 처음에는 이 기도문에 대해서 소개했었기에 그동안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다시 한 번 더 강조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성탄절을 메리 크리스마스! 라고 말하지 말라고 하는 사회적인 분위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당당하게 메리 크리스마스 라고 외쳐야 합니다.
무슨 말을 이 세상에 확장시켜야 할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서 찾아내려고 합니다.
오래 전에 교회가 토지수용법에 의하여 철거될 위기에서 마침 지역 경찰서 정보과장이 군청을 담당하는 형사를 소개해주며 함께 군청 직원을 만나라고 주선했습니다. 그때 군청의 담당 직원이 제안하기를 교회를 위해서 건축부지 300평을 새로운 도시가 형성되는 중심부에 허락해 주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교회로 돌아왔는데 마을 대표 몇 사람이 찾아와서 도와달라고 합니다. 자기들은 힘이 없으니 교회가 자기들과 더불어 함께 고등법원에 항소하면 좋겠다고 합니다. 마을 주민들의 안타까운 사정을 외면하면 그만입니다. 더구나 그 주민들은 교회가 세워질 때 교회를 건축하지 못하도록 주도한 사람들입니다. 만일 교회가 주민들과 더불어 함께 행동하면 약속된 교회부지는 받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결국 마을 주민들과 더불이 고등법원에 행정소송을 제기하므로 군청의 제안은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이때 제가 결정할 수 있었던 힘은 예수님은 약자의 편에 설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교회에 대해서 핍박하던 것을 생각하면 도저히 마을 주민들의 하소연에 귀를 기우릴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약자를 위한 길을 선택했을 때 마을의 주민들은 새로운 생각을 갖고 교회에 대한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Christmas 크리스마스는 라틴어 "그리스도"(Christus)와 "모임"(massa)의 합성어 '그리스도 모임' 즉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모임'으로 종교적인 예식을 의미한다. 동방 정교회나 개신교에서는 "그리스도의 예배"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의 미사"로 번역한다.
크리스마스(Christmas)란 기독교의 창시자인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기념일을 뜻합니다. 다른 말로는 성탄일이라고도 한다.
크리스마스는 영어로 ‘그리스도(Christ)의 미사(mass)’라는 의미로 고대 영어인 Cristes maesse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크리스마스는 X-mas라고 표기하는 경우도 있는데요. 여기서의 X는 그리스어로 그리스도(크리스토스: ΧΡΙΣΤΟΣ)의 첫 글자를 뜻하는 것
크리스마스의 유래에 대한 주정은 크게 두 개의 시각이 있다.
첫째는 교회의 전통으로 교회 내에서 시작으로 보는 시각 둘째는 로마제국의 전통으로 로마의 절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시각
첫째는 교회의 전통으로 교회 내에서 시작으로 보는 시각
교회의 전통에서 크리스마스가 유래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말에 따르면, 신약성서에는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해 기록되어 있지만 탄생일에 대해서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대문에 초기 기독교도들은 1월 1일과 1월 6일, 3월 27일에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해왔다고 하는데요. 이후 4세기를 거치면서 신학자이자 주교인 아우구스티누스와 기독교의 이단으로 구분되었던 도나투스주의자들 간의 논쟁에서 교회가 공인되기 전부터 12월 25일을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지켰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특히 아우구스티누스의 기록인 삼위일체론을 살펴보면 "예수께서는 3월 25일에 수태되셨다. (중략) 전통에 따르며 예수께서는 12월 25일에 태어나셨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미 12월 25일이 전통 즉 초대교회부터 내려온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요. 교회의 전통에서 수난일이며 동시에 수태일인 3월 25일부터 상징적인 9개월 이후인 12월 25일을 기독교의 그리스도론적 개념으로 탄생일로 본다는 기록입니다.
둘째는 로마제국의 전통으로 로마의 절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시각
로마제국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는 이들은 크리스마스 축제가 로마 연감의 기록에 따라 336년경 로마제국에서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로마교회 대주교 율리우스 1세가 12월 25일을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선포한 350년부터 그리스도의 탄생제가 공식적인 '기독교'의 축제로 인정되기 시작하였고, 오늘날까지 전통으로 굳어지게 되었다는 것이죠.
2022년 성탄절은 코로나 시대에 맞이한다는 특이한 절기라는 것입니다.
코 - 코로 숨을 쉬게 하신 하나님께서 숨을 쉬는 것도 부자연스럽게 하셨지요 로 - 노동하는 것이 곧 기도하는 것이라고 깨우치며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먹지로 말라고 하셨는데 나 - 나 보다 더 약한 것 같은 사람도 건강하게 지내는 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일러라.
1. 새로운 것을 적극 받아들이기보다는 재래의 풍습이나 전통을 중히 여기어 유지하려고 함 2. 보전하여 지킴
Ⅰ. 보수와 진보는 무엇이 다를까? - 한국경제(2017. 1. 20)
최근 들어 보수와 진보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된다. 이념적 편 가르기가 심할수록 특히 사용하는 빈도가 잦은 단어다. 그렇지만 정작 보수와 진보의 차이점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적다. 자기와 생각이 조금만 달라도 상대를 보수적 또는 진보적이라고 규정하는 일이 자주 벌어지는 것은 이런 이유라고 하겠다.
흔히 자유와 평등이 보수와 진보를 구분하는 핵심 가치로 꼽힌다.
일반적으로 보수는 자유의 가치관을 우선하고, 진보는 평등의 가치관을 중시한다. 보수주의자들은 경제를 시장의 자율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보수는 자유 시장경제와 작은 정부를 지지한다. 진보주의자들은 시장을 자율에 맡기기보다 정부가 개입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까닭에 진보는 일반적으로 ‘큰 정부’를 선호한다. 또 보수는 대체적으로 성장을 진보는 분배를 우선한다.
보수
우익
자유
자유 시장경제
성장
개인
성과주의, 개인주의, 사유재산
진보
좌익
평등
정부 개입
분배
집단
집단주의, 분배주의, 공유
비슷한 맥락에서 보수는 개인의 가치를, 진보는 집단의 가치를 더 중시한다. 성과주의, 개인주의, 사유재산권은 보수가 지지하는 가치이고, 분배주의, 집단주의, 공유는 진보적 가치에 가깝다. 보수정당이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정책을 펴고, 진보정당은 평등을 실현할 정책을 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물론 보수와 진보는 상대적 개념이다. 진보적 가치를 배제하는 보수나, 보수적 가치를 무시하는 진보는 편향적인 이념일 뿐이다. 보수는 우익, 진보는 좌익이라는 도식적 구분 역시 바람직하지 않다. 보수든 진보든 개혁과 혁신을 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역사적으로 보수와 진보는 공존하면서 경쟁해왔다.
Ⅱ. 보수와 진보는 무엇이 다를까?
우리나라는 유독 이념갈등이 심하다. 소위 보수와 진보는 경제, 복지, 세금, 외교 등 곳곳에서 충돌한다. 지역, 세대, 계층 갈등보다 더 골이 깊은 것이 이념대립 이다. 그러나 무엇이 보수이고 무엇이 진보인지 이해가 부족한 것 또한 사실이다. 보수와 진보의 구별법을 알아보자.
보수는 자유, 진보는 평등 중시
보수는 무엇보다 자유와 자율을 중시한다.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할 때 민주주의가 발전하고 경제도 성장한다고 생각한다. 시장경제 아버지로 불리는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이나 자유주의 경제학자 하이에크의 ‘자생적 질서(spontaneous order)’는 보수적 가치를 뒷받침하는 이론이다. 의도하지 않고, 계획하지 않더라도 자유를 최대한 보장할 때 ‘바람직한 질서’가 형성된다는 믿음이다.
보수는 개인의 가치를 중시한다. 집단을 위해 개인 희생을 강요하는 건 옳지 않다고 믿는다. 따라서 ‘작은 정부’를 선호한다. 중소기업이나 서민층을 위해 대기업이나 부유층에서 많은 세금을 걷는 것은 공평하지 않다고 반대한다. 정당하게 이룬 성과에 대해선 정당한 대우를 해줘야 한다는 입장이다. 보수는 개인의 사유재산권을 중시한다.
진보는 평등의 가치를 우선한다. 따라서 개인보다는 집단의 논리를 중시한다. 성장보다는 분배에 가치를 부여한다. 마르크스의 ‘계급 투쟁론’은 진보가치를 대변한다. 최저임금제, 농어촌전형, 차별금지법, 법인세 인상 요구 등은 진보 이념의 성격이 짙다. 특히 진보는 개인의 불행을 사회구조 탓으로 여긴다.
진보주의자들은 국가의 역할을 국민 삶을 보장하는 데까지 확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맥락에서 진보는 보편적 복지, 노동자 보호, 부자 증세, 공영화 등을 선호한다. 진보의 세계관에는 ‘세상이 점점 나빠진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진보가 보수보다 상대적으로 ‘큰 정부’를 선호하는 이유다.
복지, 세금, 노동 등 곳곳에서 견해차
최근 우리나라에서 정치, 경제, 사회 등 다양한 곳에서 대립의 목소리가 커지는 이유는 보수와 진보간 이념 갈등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진보와 보수는 모두 정치적 자유를 존중한다. 그러나 경제적 자유에 대해서는 관점이 크게 다르다.
진보주의자들은 설계주의(인간의 선험적 이성으로 목표한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 관점에서 시장은 불완전하다고 본다. 따라서 시장은 늘 감시와 교정의 대상이다. 그러니 국가는 개인의 이기심과 탐욕을 억제하고 ‘공익’을 도모해야 한다.
진보는 공동체적 책임감을 개인의 자율에만 맡기면 부(富)의 불평등이 심화된다고 믿는다. 개인의 자비심을 믿기보다는 정부가 나서 분배 문제 등을 인위적으로 조정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정부의 역할은 점점 커지게 된다.
반면 보수는 자생적 질서가 형성되는 시장에 국가가 개입하면 더 나쁜 결과가 초래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시장 중심의 경제, 작은 정부를 선호한다. 큰 정부를 옹호하는 진보가 시장의 실패를 우려하는 반면, 작은 정부를 선호하는 보수는 정부의 실패를 비판한다.
개인의 삶을 보는 시각도 다르다. 보수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한다고 보는 데 비해 진보는 사회적 조건이 개인의 삶을 크게 좌우한다고 생각한다.
북한 미사일이나 핵에 대응하기 위한 사드(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의 경우 보수는 상대적으로 찬성 쪽이 많고, 진보는 반대쪽이 많다. 보수는 넓은 세원에 낮은 세율을 선호하고, 진보는 부자·대기업 증세를 주장한다. 보수는 대한민국을 성공한 국가로 보는 시각이 강하고, 진보는 실패한 나라로 보는 시각이 강하다. 보수는 대체로 선별적 복지를, 진보는 보편적 복지를 선호한다.
“어느 나라든 보수의 특징은 위기를 되풀이해서 맞는다는 데 있다. 보수의 원류로 300년 된 영국 보수당도 되풀이해서 위기를 맞았다. 19세기에는 자유당 글래드스턴에게 20여 년간 정권을 뺏겨 물러나 있다가 디즈레일리라는 걸출한 지도자가 나와 재집권했다. 20세기에 들어서도 정권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처칠이라는 걸출한 지도자를 만나 대세를 회복했다. 되풀이해서 위기를 맞으면서도 나아가는 것이 보수다.”
― 보수가 위기를 되풀이해서 맞는 이유는?
“보수는 미래지향적이기 때문이다. 과거는 이미 지나가 되돌릴 수 없는 것이므로 싸워봐야 소용없다. 과거와 싸우면 현재가 죽고 미래가 사라진다. 이것이 영국 보수당의 시관(time-perspective), 즉 시간에 대한 신념이다. 그래서 미래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고 여긴다. 그러나 미래는 불확정적이다. 그렇다 보니 누구나 다 지지하는 목표를 갖기 어렵고 조직은 이완되기 쉽다.”
보수의 또 다른 특징으로 정직과 성실을 강조했다.
“미국 초대 조지 워싱턴 대통령은 정직이 가장 효율적이라고 여겨 ‘정직이 최고의 정책(Honesty is the best policy)’이라고 말했다. 성실이란 무슨 일이든 온 마음을 기울여 하는 것이다. 중용의 25장이 내세우는 가치가 불성무물(不誠無物)이다. 성실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보수는 ‘무(無)정직’하고 ‘무(無)성실’한 포퓰리즘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것도 어려움을 초래하는 원인 중 하나다.”
“과거와 싸우면 미래 사라진다”
― 본래 진보가 미래지향적이지 않은가.
“진정한 진보도 보수처럼 미래지향적이다. 다만 우리나라 진보는 자기들끼리 말로만 진보이지 실은 과거지향적이다. 그래서 수구 좌파라 부르는 것이 맞다. 과거지향의 대표적인 것이 적폐청산이다. 과거를 지향하면 미래를 지향할 때에 비해 공격할 목표가 확실하고 결속력이 강해진다. 이런 진보와 대결해야 하는 것이 보수의 어려움이다.”
― 적폐청산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적폐란 과거에 쌓인 폐단이다. 잘못된 제도 법규 관행이다. 그것을 바꾸는 게 뭐가 잘못이겠나. 그러나 실제로는 그 제도 법규 관행에서 일했던 사람을 몰아내는 데 주력한다. 이것을 사회학에서 목적전치(目的顚置)라고 부른다. 목적과 수단이 뒤집혀 자리가 완전히 바뀌는 것이다. 잘못된 제도 법규 관행의 개혁이 원래 목적인데 그 목적이 되는 제도 법규 관행은 그대로 둔 채 그 목적을 수단으로 해서 거기서 일하지 않을 수 없었던 사람을 몰아내는 것이다.”
― 개혁은 어떠해야 하는가.
“미래는 불확실하기 때문에 개혁도 점진적일 수밖에 없다. 점진적 개혁은 서서히 가되 확실히 가는 것이다. 한국인은 이런 개혁관을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개혁은 밑뿌리부터 바꾸는 것이고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여긴다. 그러나 보수주의자는 경험주의자다. 경험해 보니까 새 술을 새 부대에 담듯이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안다.”
“극한의 위기에서 변화가 온다”
― 문재인 정부의 정책에 대한 우려가 많다.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찾는 연목구어(緣木求魚)란 표현을 쓰고 싶다.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 같은 경제정책도 그렇고 탈(脫)원전 같은 기술의 문제도 그렇고 사회 통합도 그렇다. 맹자 양혜왕(梁惠王) 편에 이런 말이 나온다. 개인이 연목구어를 하면 저만 손해 보고 말지만 나라가 연목구어를 하면 후필재앙(後必災殃), 후일에 반드시 재앙을 맞게 돼 있다.”
― 재앙을 피할 수 있다고 보는가.
“궁즉변(窮則變)” 또는 “궁즉통(窮則通)”이란 말이 있다. 국민은 대개 참고 기다리지만 위기 상황에서는 무섭게 반응한다. 노무현 정권이 끝날 때 즈음 이명박 대통령이 약 500만 표차로 이겼다. 역대 그렇게 큰표차가 없었다. 10월 3일 광화문 집회도 이러다 죽겠다 싶어 뛰어나온 것이다. 견딜 수 없게 되는 시점이 오고 궁즉변 궁즉통이 일어날 것이다.
― 보수 통합은 가능할까.
“위기의 극한까지 가서야 정신을 차릴 것이다. 내년 총선 직전에 가서 ‘총선에서 지면 연목구어식 정책이 연장돼 나라가 망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면 달라질 것이다. 내년 4월이 총선이니까 내년 2월 정도에는 변화가 있지 않을까. 정치에선 모든 것이 한때다. 더불어 민주당이 득세하고 문재인 정부의 연목구어식 정책이 횡행하는 것도 한때다. 차일시피일시(此一時彼一時), 다 지나가게 돼 있다. 너무 초조해하고 절망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많은 국민이 이미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지 않은가.”
* 연목구어(緣木求魚) ; 나무에 올라 물고기를 구한다는 뜻으로, 불가능한 일을 무리해서 굳이 하려 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 젊은이들이 보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예나 지금이나 젊은이들이 보수를 좋아하면 그게 이상한 거다. 젊은이들은 경험적이지 않고 이상적이니까 진보가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현 상태대로의 좌파 정당을 지지한다는 것도 이상하다. 실은 진보적이지 않으니까.”
― 2030세대가 더 많이 국회에 진출해야 하지 않을까.
“내가 고등학교 대학교 다닐 때 20대가 굉장했다. 그때 스무 살은 서른 살이 되면 세상이 끝장나는 줄 알고 서른 살은 마흔 살이 되면 죽는 줄 알았다. 그만큼 세대가 짧았다. 지금은 100세 시대다. 20대는 시대의 주인의식을 갖기 어려울 정도로 어린 나이가 되고 말았다. 2030세대의 국회 진출보다 중요한 것은 2030세대를 위한 정책 마련이다.”
― 국회에서 정책 대결이 보이지 않는다.
“2030세대 정책만 해도 2030세대와의 끊임없는 대화 속에서 현 정부의 것이 뭐가 틀렸다 지적할 수 있어야 한다. 지난번 한국당이 민부론(民富論)이란 걸 내놓았는데 아는 사람이 없다. 보수정당이 싸우는 방법은 정책 대결밖에 없다.”
― 한일 관계, 한미 관계 등 주요한 국제 관계도 어려워지고 있다.
“약속은 준수돼야 한다(Pacta sunt servanda)는 것이 17세기 이래 국제관례다. 국가 간 약속이 국내적으로 지지를 받지 못하더라도 지켜야 한다는 원칙이다. 세계로 나가야 먹고사는 나라가 그 원칙을 지키지 못해 외교적으로 어려운 상황을 맞았다.”
― 우리나라가 취할 외교 전략은?
“구한말, 약 130년 전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朝鮮策略)이 주장한 바와 달라지지 않았다. 일본에 주재하던 중국 외교관 황준헌이 쓴 조선책략을 1880년 김홍집이 일본에 수신사로 갔다가 가져왔다. 몇 쪽 되지도 않는다. 결일연미(結日連美)가 조선의 살길임을 강조한 내용에 위정척사파가 들고일어나고 조선은 쇠망의 길로 들어섰다. 오늘날도 우리 곁에 중국이 민주화하지 않고 패권국가로 남아 있는 한 결일연미 할 수밖에 없다.”
송 교수는 결일연미의 정신을 확대해 해외지향성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박정희 때도 구한말의 선택과 비슷한 상황이 있었다. 1960년대 초 서울대 교수들을 포함해 거의 모든 경제학자들이 수입 대체 산업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을 때 박 대통령이 수출입국을 외치고 나왔다. 그때 경제학자들이 ‘군바리들이 판타지 속에 살고 있다’고 비웃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1965년까지 1억 달러 수출 목표를 한 해 앞당겨 달성함으로써 경제학자들의 탁상머리 주장을 우습게 만들었다. 우리나라는 바깥으로 향해야 미래를 열어갈 수 있는데 현 정부 들어 해외지향성이 위축되는 느낌이 든다.”
“결국 다 노심초사 속 평화”
― 문재인 정부는 평화만은 지켰다고 자부한다.
“휴전 이후에 지금과 같은 평화는 늘 지속돼 왔다. 다만 그 평화가 ‘깨지지 않을까’ 노심초사(勞心焦思)하는 가운데의 평화일 뿐이다. 지금의 평화라고 특별한 게 있나. 특별한 게 있다면 오히려 핵을 가진 북한 앞에서 더 노심초사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북한에 가장 중요한 것은 체제 안전이다. 체제 안전을 위해 핵을 개발했는데 핵을 포기하겠는가. 그렇다면 우리로서는 핵 속의 평화를 추구할 수밖에 없다. 전술핵이든 전략핵이든 핵 공유든 핵을 핵으로 막는 것만이 우리에게 가능한 평화다.”
유학자 류성룡을 연구하는 서애학회를 발족할 준비에 바쁘다고 한다. 퇴계 율곡 등 유학자의 호를 내건 학회는 대개 사학자들이 주도하지만 서애학회는 사회학자이면서 ‘위대한 만남 서애 류성룡’이란 책을 쓴 송 교수가 주도한다.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참여해 충무공 이순신과 함께 보기 드문 구국의 리더십을 보여준 서애 정신을 연구하는 학회다.
송 교수는 징비록에 담긴 ‘서애 정신’을 강조하면서 말을 맺었다.
“징비(懲毖)의 주체는 나다.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않는다. “징(懲)은 내 책임을 깨닫고 뉘우쳐 나를 철저히 징계한다는 것이다.” “비(毖)는 또 다른 실패나 파탄이 일어나지 않도록 경계하고 준비해서 새로운 내일을 만들어 간다는 것이다.”
비가 가장 경계하는 것이 과거지향이다. 임진왜란은 새 정권이 들어서면 전 정권 사람들을 어김없이 감옥에 보내는 처절한 당파싸움에 매몰돼 미래를 망각함으로써 초래된 비극이었다.
*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징비(懲毖) ; 이전의 잘못을 뉘우치고 삼감 - 혼날 징(懲) 1. 혼나다, 2. 혼내다, 3. 징계, 4. 그치다, 5. 혼이 나서 잘못을 뉘우치거나 고침
- 삼갈 비(毖) 1. 삼가다, 2. 고달프다, 3. 샘이 좁은 틈새로 흘러 내리는 모양, 4. 잘못이 없도록 긴장함, 5. 위로하다
성인 성, 성스러울 성(聖), 낳을 탄, 태어날 탄(誕) - 성(聖) / 귀 이(耳) + 입 구(口) + 임금 왕(王) 또는 북방 임(壬), 천간 임
임금님처럼 듣고 말한다. 북방 임(크다, 성대하다) 크게 듣고 크게 말하다
聖자는 ‘성인’이나 ‘임금’, ‘거룩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聖자는 耳(귀 이)자와 口(입 구)자, 壬(천간 임)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聖자는 본래 ‘총명한 사람’을 뜻하기 위해 만든 글자였다. 聖자의 갑골문을 보면 큰 귀를 가진 사람 옆에 口자가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누군가의 말을 귀 기울여 듣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聖자는 타인의 말에도 귀를 기울일 줄 아는 ‘현명한 사람’이나 ‘총명한 사람’을 뜻했었다. 하지만 후에 뜻이 확대되면서 지금은 ‘성인’이나 ‘거룩하다’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壬자는 ‘북방’이나 ‘천간’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壬자는 士(선비 사)자가 부수로 지정되어 있지만 ‘선비’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왜냐하면, 士자와는 기원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壬자의 기원에 대한 해석도 제각각이다. 일부에서는 실을 엮던 도구로 보기도 하고 또 다른 해석에서는 북쪽에 있는 별과 땅을 연결한 모습이라고도 한다. 壬자에 ‘북방’이라는 뜻이 있으니 그런 해석도 가능하리라 본다.
또 壬자를 工(장인 공)자와 같은 자였던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당시의 工자()는 壬자와( ) 달랐기 때문에 같은 글자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러나 이런 논쟁이 무의미한 것은 지금의 壬자는 유래와는 상관없이 천간(天干)의 아홉 번째라는 뜻으로만 쓰이고 있다는 것이다. 또 때로는 다른 글자와 결합해 ‘사람’과 관계된 뜻을 전달하기도 한다.
타인의 말에도 귀를 기울일 줄 아는 현명한 사람 또는 총명한 사람
탄(誕) / 말씀 언(言) + 길 연, 늘일 연(延) 말을 널리 늘이는 것(세상에 말을 널리 알리는 것)
誕자는 ‘태어나다’나 ‘거짓’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誕자는 言(말씀 언)자와 延(끌 연)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延자는 발을 길게 늘여 걷는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늘이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誕자는 이렇게 ‘늘이다’라는 뜻을 가진 延자와 言자가 결합한 것으로 ‘말을 길게 늘이다’라는 뜻으로 만들어졌다.
誕자에서 말하는 ‘말을 길게 늘이다’라는 것은 남을 속이기 위해 이리저리 말을 늘여놓는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誕자는 본래 ‘거짓’을 뜻했지만, 후에 ‘말을 만든다’라는 뜻이 확대되면서 ‘태어나다’라는 뜻도 갖게 되었다.
'시(示)'와 '복畐'의 회의문자(會意文字)이다. '시'는 하늘[天]이 사람에게 내려서 나타낸다는 신의(神意)의 상형문자이고, '복'은 복부가 불러 오른 단지의 상형문자라 한다.
해가 바뀌면 가장 많이 쓰는 인사말이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이다. 현대인들이 가장 많이 쓰는 행복(幸福)에도 복 복(福)자가
들어있다. 복이라는 글자의 자원이 궁금하다. 부수자는 제사의 뜻을 가진 보일 시(示)인데, 음식과 술을 잘 차리고(豊) 제사를
지내면 ‘하늘로부터 복을 받는다’를 뜻하는 글자이다. ‘상서(祥瑞)롭다. (복을)내리다. 돕다’ 등의 뜻이 있으며 제사 후에
술이나 음식을 먹는 것을 음복(飮福)이라 한다. ‘간직하다. 모으다. 저장하다’의 뜻으로 쓸 때는 (부)로 발음하는
회의자인데, 형성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 아주 좋은 운수나 큰 행운 등 삶에서 누리는 운 좋은 현상과 그것에서 얻어지는 기쁨과
즐거움을 복이라 한다. 복자를 파자하면 示, 一, 口, 田이 되는데 그 뜻을 풀이하면 “한입으로 밭을 가꾸는 것이다”라는 풀이도
있다. 복은 인간의 염원 속에 성숙하는 것으로 스스로 지어서 스스로 받는 것이지 누가 주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한다. 제비를
뽑아서 맞으면 일정한 상금을 타게 되는 표를 복권(福券)이라하고, 행복과 이익을 복리(福利), 또는 국가를 이룩하려고 추진되는
모든 사업을 복지(福祉)라 한다. 복이 많은 사람을 복인(福人)이라 하고, 돈을 많이 가진 승려를 복승(福僧)이라 한다. 타고난
복과 후한 마음을 복덕(福德)이라 하고, 행복이 많은 집안으로 풍수설에서 지덕(地德)이 좋은 터에 지은 집을 복가(福家)라 한다.
집이나 토지 등을 팔고 사는 일을 하는 곳을 복덕방(福德房)이라 하였으며, 길한 별이란 뜻으로'목성(木星)'을 일컫는 말로
복덕성(福德星)이라 한다. 복스럽게 생긴 얼굴을 복상(福相)이라 하고, 매우 반갑고 기쁜 소식을 복음(福音)이라 한다. 지나친
행복은 도리어 재앙의 원인이 됨을 복과화생(福過禍生)이라 하고, 복은 거듭 오지 않으며 한꺼번에 둘씩 오지도 않음을
복무쌍지(福無雙至), 복불중지(福不重至)라 한다. 복은 착한 일에서 오는 것이니, 착한 일을 하면 경사가 옴을
복연선경(福緣善慶)이라 하고, 福은 재물이 아니라, 사람을 키우는 데 있다는 뜻을 나타내는 뜻으로 복재양인(福在養人)이 있다.
착한 사람에게는 복이 오고 못된 사람에게는 재앙이 온다는 복선화음(福善禍淫)과, 복덕의 인(因)으로 말미암아 복덕의 과보를 얻는
다는 복인복과(福因福果)도 있다.
문에『福(복)』자를 거꾸로 붙이는 이유는?
경사스러운 날의 분위기를 부각시키기 위한 하나의 방법
시티뉴스
중국의 일반 가정집을 방문할 때마다 제일 먼저 마주치는 것이 문에 붙어 있는 붉은 색의 많은 한문 글귀 이다. 그 글귀
중에는 집안의 행복을 비는 내용과 돈을 많이 벌게 해달라고 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그런데 아주 난처한 것은 “福(복)”이라는
글자를 커다란 붉은 색 종이에 써서는 거꾸로 붙여 놓은 것을 발견할 때다. 처음 보았을 때는 ‘아니 글자를 잘못 붙여
놓았잖아.’하고 집주인을 속으로 나무라기도 했다. 그런데 그 내력을 알고 나서는 다른 나라 문화를, 특히 중국문화 속의 한자가
가지고 있는 깊은 의미를 알고는 內心(내심)으로 歎服(탄복)한 기억이 있다.
연말연시가 되면 중국인들은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의미로, 전통적인 풍습에 따라 대문에다 아주 커다란 “福(복)”字(자)가 써 붙이는데, 그것은 경사스러운
날의 분위기를 부각시키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가정에서 “福”자를 써서는 바르게 붙이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붙이는 데, “후다오러(福到了:복이 들어온다)”라는 덕담을, 한자가 가지고 있는 同音(동음)의 원리를
借用(차용)해서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러한 방법의 기원은 淸(청)나라 때의 恭親王府(공친왕부)에서 처음 유래되었다고 한다. 어느 해 설 전날
저녁이었다. 집안을 관리하는 집사가 주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아주 커다랗게 “福”자를 써서는 王府(왕부)의 곳곳에 있는 대문에다
붙이도록 하인들에게 분부하였다. 그런데 어떤 하인은 一字(일자) 無識(무식)이어서 그만 “福”자를 거꾸로 붙이고 말았다.
공교롭게도 이 때에 공친왕이 막 들어서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거꾸로 붙여 놓은 “福”자를 보고는 매우 화가 나서 그 종놈에게 매우
준엄한 벌을 내리려고 하였다. 이것을 보고 놀란 것은 집사도 마찬가지 였다. 왜냐하면 이 일에 자기가 연루되면 자기도 벌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가슴을 졸이며 戰戰兢兢(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궁하면 통한다더니, 별안간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서 공친왕
앞에 무릎을 꿇고는 다음과 같이 해명하였다.
“福자를 거꾸로 붙인 것은 倒(도)와 到(도)가 음이 같아서 ‘복이 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크게 길하고 크게 이롭다는 징조 입니다.”
말을 다 듣고 난 공친왕은 노여움을 풀고 오히려 기뻐하면서, 이 종놈에게 다시는 죄를 묻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를 비롯한 집사에게 열 냥이나 되는 銀(은)을 상으로 내려 주었다.
이러한 일이 민간에 전해진 후에 사람들은 “福”자를 크게 써서는 일부러 거꾸로 붙여서 복이 들어오기를 기원하게 되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이제는 이러한 행위가 하나의 풍습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일전에
공영방송 텔레비전 퀴즈프로에 이에 대한 문제가 출제된 적이 있었다. 그때 사회자의 설명이 ‘福(복)자의 음과 박쥐를 뜻하는
蝠(복)자의 음이 같아서, 복이 들오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염원이, 박쥐가 거꾸로 매달려 있는 것과 같이 福(복)자도 거꾸로
붙였다’는 설명을 하는 것을 보고는 啞然失色(아연실색)한 기억이 난다. 故事(고사)를 잘못 알고 잘못된 설명을 한 것이다.
한국인의 전통 민요 "아리랑"에 관한 신학적 고찰을 위한 소연구 논문 발표를 위한 자료를 수집합니다. 2023년 전반기 6월에 발표 예정
미국 찬송가에 실려있는 아리랑 찬송 / 이정면박사
'세계 속 아리랑' 주제로 영문서 낸 이정면 유타大 명예교수
아리랑
가락을 편곡해 영국 작곡가가 가사를 붙인 자장가, 미국 개신교 찬송가에 수록된 아리랑…. 원로 지리학자 이정면(84) 미국
유타대 명예교수가 아리랑의 유래와 세계로 퍼져 나간 아리랑 이야기를 담은 영문서 《Arirang: Song of
Korea》(이지출판사)를 펴냈다.
서울대 사범대 지리교육과를 나와 미국 미시간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이 교수는 1972년부터 유타대에서 교수로 재직하다 2002년 정년퇴직했다.
이 교수는 "아리랑 책을 쓰기 위해 자료를 수집하다가 아리랑이 미국을 비롯한 세계 곳곳에 많이 전파돼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말한다.
이 교수가 보여준 자장가 악보에는 어머니가 병든 아이를 달래는 노래라는 설명과 함께 한국 전통 민요(Korean Folk Song)라고 소개돼 있다.
이
노래를 편곡하고 가사를 쓴 이는 BBC 심포니 오케스트라 지휘자이자 작곡가였던 말콤 사전트(Sargent· 1895~1967).
이 교수는 "사전트가 1960년대 동북아지역을 여행하면서 한국을 방문했거나, 아리랑을 들은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이 교수는 또 1990년 미국 연합장로교회에서 발간한 찬송가집에 아리랑이 〈Christ, You Are the Fullness〉라는 제목 아래 수록돼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작사자는 미국 미시간주 칼빈 칼리지 음악 교수인 버트 폴만(Polman). 이 교수가 아리랑이 미국 찬송가에 들어가게 된 경위를 묻자 폴만 교수는 "멜로디가 너무 아름다워 아리랑을 찬송가에 포함하게 됐다"고 설명했다는 것.
이 교수는 헐버트, 알렌, 비숍 여사를 서구에 아리랑을 알린 선구자로 꼽는다.
이어 6·25전쟁 당시 유엔군으로 참전한 병사들을 통해 아리랑이 세계로 퍼져 나갔다고 설명한다.
미국 포크음악계의 대부이자 반전가수였던 피터 시거(Seeger)는 1964년 첫 라이브 앨범에 〈아리랑〉을 반전음악으로 수록하기도 했다.
이 교수는 2007년 아리랑의 고향 정선, 진도, 밀양 등을 찾아 《한 지리학자의 아리랑기행》을 펴냈다. 이 책을 출간한 뒤, 아리랑을 세계인들에게 소개하는 작업을 위해 영문서 출간에 매달려왔다.
이
교수의 전공은 토지 이용계획과 인구이동이다. 유타대 도서관 고문서실에서 191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유타주의 케네커트 주석
광산에서 일하던 한인 광부 411명의 명단을 찾아내는 등 미국 중서부 지역 한인 광산노동자의 역사를 발굴하기도 했다. 하와이에서
일자리를 찾아 미국 본토로 건너온 이들은 고된 광산일과 언어 문제 때문에 대개 며칠 만에 달아나버리기 일쑤였다.
이 교수는 "광산을 떠난 한인들의 다음 행로가 어땠는지 아직 찾아내지 못해서 아쉽다"고 했다.
이 교수는 "외국에서 오래 살다 보니 고국이 그립거나 외로울 때 마음을 위로해주는 노래가 아리랑"이라면서 "한국 전통문화의 정수인 아리랑을 연구하는 것은 인문 지리학의 영역"이라고 말했다.
서용순 이지출판사 대표는 "아마존 사이트를 통해 해외에 책을 보급하겠다"고 했다.
<오소운 목사의 추기>
아래
악보는 위에서 언급한 미국 북장로회 찬송가(The Presbyterian Hymnal, 1990) 346 장에 실린 아리랑
곡조의 찬송이다. 곡명(Tune Name)은 ARIRANG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 1절만 영어로 적어 소개한다.
Christ, You are the Fullness
Christ, You are the Fullness of God,
First born of everything.
For by You all things were made;
You hold them up.
You are head of the Church,
Which is Your body.
First born from the dead,
You in all things are supreme
아래에
미국 찬송가에서 스캔한 악보를 싣는다. 가사는 버트 폴만 (Bert Polman, b. 1945) 이 캐나다의
그리스도교개혁교회의 <시편찬송>(Psalter Hymnal, 1987)을 위해 1986년에 작사한 것이다. 그는 캐나다
온타리오에 있는 리디머칼레지(Redeemer College) 교수다. 또한 그는 미국과 캐나다 찬송가위원회의 실행위원이다.
ARIRANG의 편곡자는 데일 그로텐후이스(Dale Grotenhuis, b.1931)인데 <시편찬송>(Psalter
Hymnal, 1987)을 위해서 1986년에 편곡한 것이다. (source : Presbyterian Hymnal
Companion, 1991, by LindaJo H. MaKim; p. 244)
Christ you are the fullness / 그리스도찬양의기쁨 CCM악보 [북미찬송가 가사, 한국 민요 아리랑 곡]
1. Christ, You are the fullness of God, first born of everything. For by You all things were made; You hold them up. You are head of the church, which is your body. First born from the dead. You in all things are supreme!
2. Since we have been raised with You, Lord, help keep our heart and minds. Pure and set on things that build Your rule over all the earth. All our life is now hidden with You in God. When You come again we will share Your glory.
3. Help us live in peace as true members of Your body. Let Your word dwell richly in us as we teach and sing. Thanks and praise be to God through You, Lord Jesus. In whatever we do let Your name receive the praise!
아무리
타국 만리에서 반세기 넘게 살았다고 해도, 어쩌면, 처녀로 성장할 때까지 근 스무 해를 써오던 우리말을 잊을 수가 있단 말인가?
정신대(挺身隊)로 끌려갔다가 전쟁이 끝난 다음에도 돌아오지 못하고 먼 이국 땅에서 50여 년을 보내고 최근에 극적으로 돌아 온
어느 할머니가 부르는 노랫가락이다. 우리말은 한 마디도 못하면서 '아리랑'은 구슬프게 부를 줄 안다. 말은 잊었는데 노래는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살아난다. 그런데, 그것이 '아리랑'이다.
미국연합장로교회의 찬송가 346장을 보면, "주님은
하나님의 충만하심"이라는 찬송이 있다. 영어 제목은 "Christ, You Are the Fullness"라고 되어 있고, 그
밑에 ARIRANG(아리랑)이라고 영어로 쓰여있다. 미국연합장로교회 찬송가에 우리의 한국 민요 아리랑 곡이 들어 있는 것이다!
우리도 감히 우리의 아리랑 곡에다가 우리의 하나님 찬양을 싣지 못하고 있는데, 미국연합장로교회가 이런 일을 하였기에 한 편으로는
신기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이런 세속적인 노랫가락을 찬송에 도입해도 되는 것인지 하는 의구심도 생긴다.
영어가사는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라고 하는 골로새서 1장 15절 이하의 말씀을 근거로 하여 작사한 것이다. 미국연합장로교회 찬송가의 그 가사는 다음과 같다.
Christ, You are the fullness of God, first born of everything. For by You all things were made; You hold them up. You are head of the church, which is your body. First born from the dead. You in all things are supreme!
Since we have been raised with You, Lord, help keep our heart and minds. Pure and set on things that build Your rule over all the earth. All our life is now hidden with You in God. When You come again we will share Your glory.
Help us live in peace as true members of Your body. Let Your word dwell richly in us as we teach and sing. Thanks and praise be to God through You, Lord Jesus. In whatever we do let Your name receive the praise!
위 가사를 다음과 같이 우리말로 번안(飜案)하여 '아리랑'에 실어 본다. 곡조의 세속성은 친밀감으로 바뀌고 가사의 장중(莊重)함은 가락의 흥겨움과 조화를 이루어, 흥겨운 신앙고백이 가능함을 보여준다.
주님은 하나님 형상이시오 만물 중에 으뜸이신 창조주시라 부활하시어 다스리시니 주님은 교회의 머리이시라
주님과 더불어 새로 태어나 성령 님 모시는 새 생활이라 성령 열매를 풍성히 맺어 주님 다시 오실 때 반겨 맞으리
주님의 지체된 우리 몸이 생명의 말씀을 먹고사니 감사합니다 찬양합니다. 주님 이름 높이며 살렵니다
골로새서
1장 15절에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여기에서,
예수님을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라고 표현한 것을 두고서 이것이 예수님의 피조성(被造性)을 말하는 것이라고 억지를 부리는
이들이 있다. 원어인 그리스어 표현 "프로토토코스 파세스 크티세오스"는 "모든 피조물의 첫 탄생(first born of all
creation: RSV)"이라는 압축된 표현이다. 번역에 따라서는 "모든 피조물 위에 으뜸이신 맏아들(the first
born Son, superior to all created things: GNB)"이라고 번역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 본문의 전체 문맥을 읽지 않고, 다만, '나셨다 (born)'라고 하는 낱말 하나에만 집착하는 쪽에서는 그리스도도 피조물
중에 속한다는 주장을 한다. 문맥을 보면 바로 다음절에 "(16)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고 하여 그리스도는 창조자이지 피조물이 아님을 분명히 말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우리말 번역에서 '먼저 나셨다'고 할 때 그 '먼저'는 '으뜸'을 뜻하는 것이고, '나셨다'는 것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관계가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독특한 관계를 부모 자식의 관계로 표현하려고 한
것이다. 그래서 이 노랫말 번역에서는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를 '만물 중에 으뜸이신 창조주시라'라고 불러보았다.
요사이 지구촌이 들썩들썩하는 '싸이 현상'은 다시 한 번 세계의 이목을 한국으로 집중시켰다. 그동안 '한류' 열풍이 동남아와 전 세계로 퍼져서 한민족의 위상을 떨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의 기저에는 한국민족만이 가지고 있는 특성이 있다고 본다. 필자는 이 독특한 심성의 특징으로 한(韓), 고(苦), 한(恨),
복(福), 정(情), 신명 등을 들었다.( <아리랑신학> 정행업 저. 대한기독교서회. 1996.) 그리고 한국인의
정서는 ‘아리랑’이라는 민요에 포괄적으로 표현돼 있다. 한국인은 ‘아리랑’이라는 민요를 통해 독특한 정서를 발산한다.
언제나 어디서나 아리랑을 부를 때 우리는 한(韓)민족의 고유한 동질성을 자각하게 되고 한민족의 뜨거운 정감에 사로잡히며 한국인의 얼과 힘이 꿈틀거림을 느끼게 된다. 한국인에게 있어 아리랑은 제2의 애국가라고 할 수 있다.
이번에
아리랑이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선정된 것은 한국인에게 매우 뜻 깊고 자랑스러운 쾌거라 할 수 있다. 모든 인류의 가시적
유형문화재는 비가시적 무형문화의 외적 표현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무형문화재는 한 민족을 이해하는 열쇠다.
필자는
이미 한국적 신학을 '아리랑 신학'으로 표현하자고 제안한 바가 있다. '아리랑 신학'은 한민족의 역사와 문화의 접목된 주체적인
신앙고백과 신학을 말한다. '아리랑 신학'은 한국인의 종교심성에서 형성된 신학을 말한다. 한민족은 어느 민족보다도 종교심이
강하다.
오랫동안 고난의 역사를 경험했고 그래서 맺혀진 한이 있고 이 한을 풀기 위해 신을 찾았고 그에게 복을 빌고 노래하고 춤추며 신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모든 종교 행위가 '아리랑'이라고 하는 민요를 통해서 발산되었다.
이
아리랑이라고 하는 민요에 담긴 한국인의 심성이 이 땅에 기독교가 전래된 후에 그리스도인의 신앙양태와 한국교회 신학에 어떻게
영향을 끼쳤는가를 진지하게 탐구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심성을 긍정적으로 활용하여 그리스도교 선교에 활력소로 삼고, 아울러
그리스도교 문화 창달에 기여할 수 있기 위해 한국적 신학(아리랑 신학)에 대한 연구를 본격화할 때라고 본다.
크리스챤투데이 2005-11-07 07:54<또 하나의 선민 알이랑 민족> 저자 유석근 목사 인터뷰
▲<또 하나의 선민 알이랑 민족> 저자 유석근 목사 ⓒ 류정희 기자
“아리랑은
원래 ‘알이랑’이다. 그리고 ‘알이랑’은 ‘알’과 ‘이랑’으로 구분되는데, ‘알’은 ‘하느님’을 뜻하는 말이다. ‘하느님’이라는
신명(神名)은 본래 ‘알’이었는데 ‘알’ 앞에 ‘한’이라는 관형사를 붙이고, ‘알’ 뒤에는 ‘님’이라는 존칭명사를 붙여
‘한알님’이라고 했다. 이 ‘한알님’이 “한알님 → 하날님 → 하늘님 → 하느님”으로 변했다. 그래서 ‘알이랑’의 ‘알’은 성경의
‘엘(EL)’처럼 ‘하느님’을 뜻하는 말이고 ‘이랑’은 ‘~와 함께’라는 뜻으로서 영어의 ‘With’에 해당한다. 즉,
‘알이랑’은 ‘하느님과 함께(With God)’라는 말이다”
최근 민요 ‘아리랑’을 화두로 삼아 선민 한국인의 정체성을 강조한 책 <또 하나의 선민 알이랑 민족>을 펴낸 저자 유석근 목사의 말이다.
유
목사는 ‘아리랑’은 현존하는 인류 최고(最古)의 찬송가로서, ‘알이랑’이라는 말은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한마디로 알려주는 선민
한국인의 키워드(Key word)라고 주장한다. 즉, 우리 겨레는 민족사를 ‘알이랑’ 곧 ‘하느님과 함께(With God)’라는
유일신 신앙으로 시작한 욕단계 천손민족(天孫民族)이라는 사실이 민요 ‘알이랑’으로 말미암아 입증되고 있다는 것.
“이
책은 아리랑이 어떤 노래인지를 바로 해석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인은 신자나 불신자를 막론하고 누구나 일독할만한 가치가 있다.
지금까지 아리랑의 뜻이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놓고 다양한 이론들이 제시되었으나 수긍할만한 해석은 없었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아리랑이 현존하는 인류 최고(最古)의 찬송가라는 놀라운 사실을 알 수 있다”
유 목사에 따르면 ‘아리랑’에서 “알이랑 알이랑 알 알이요 알이랑 고개를 넘어 간다”라고 부르는 노랫말의 의미는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이요, 하느님과 함께 고개를 넘어 간다”라는 것.
또한
유 목사는 “아리랑은 우리 겨레의 직계조상인 셈의 현손(玄孫) 욕단 족속(창 10:21~30)이 대홍수 후 동방으로
천동(遷動)할 때 파미르고원에서 천산산맥으로, 천산산맥에서 알타이산맥을 넘어오면서 불렀던 찬송가였다. 홍수 후 산을 넘어 가장
먼저 동방으로 천동한 족속은 ‘욕단’이었으며, 창세기 10장 21절과 25절에 의하면 욕단은 선택받은 종족인 에벨의
후손이었다”라고 주장한다.
아울러 “본인은 이 책의 메시지가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로서 반세기 이상 고난받고 있는
조국의 동포들에게 참된 소망과 위로를 안겨주는 매개체가 되기를 희망한다. 뿐만 아니라 전세계로 흩어진 디아스포라 564만
해외동포들과, 160여 나라에서 활동 중인 1만여 한국인 해외 선교사들에게도 격려와 용기를 북돋아주는 하늘의 소리가 되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한편, 책의 내용 중 일부는 지난해 1월부터 올해 8월까지 월간 <신앙계>에 연재되어
호평을 받은 바 있다. 유석근 목사는 현재 1992년에 개척한 상동중앙교회(예장합동 소속)을 담임하고 있으며 총신대학
신학대학원에서 구약신학을 전공했다.
아리랑은 우리 겨레의 시원과 그 기원을 함께 한 민족의 역사노래인 동시에 현존하는 인류 最古의 찬송가다!
필자는
저서 <알이랑민족>에서 아리랑은 현존하는 인류 최고(最古)의 찬송가라고 설명했다. 그것은 근거 없는 자의적 해석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객관적인 인문과학적 논거들을 다양하게 제시했다. 그러므로 아리랑 찬송가론을 부정하려면 그러한 결론을 도출한
논증에 오류가 있는지 조사해야 할 것이다. 그게 바른 순서다. 아리랑을 찬송가로 해석한 근거는 다음과 같다.
아리랑의 어원
①
우리의 문화와 역사를 논하려면 종교적인 시각으로 접근해야 한다. 배달 동이겨레는 하나님을 섬기던 제천민족(祭天民族)으로서 단순한
정치세력(민족, 국가)이 아닌 ‘종교적’ 집단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겨레는 다신숭배가 만연한 고대 세계에서 제천신앙으로 유일신
하나님을 숭배하던 독특한 민족이었다. (제천신앙에서 숭배의 대상이 된 ‘하느님’이 성경의 하나님과 동일한 신이셨다는 것은 책에서
자세히 근거를 제시했다.)
단군조선시대에는 제천의식이 북으로는 백두산에서, 남으로는 강화도 마리산 산정의 참성단에서
행하여졌다. 이 제천행사야말로 동이문화의 정수(精髓)이며, 우리 문화의 본성(本性)이다. 그러므로 동이의 후예인 우리가 부르는
‘아리랑’도 종교적인 관점에서 접근해야 그 비밀이 드러날 것이다.
② 먼저 기억해야 할 사실은 아리랑은 한자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아리랑’이라는 한자가 기록된 책이 어디선가 고서(古書) 가운데 한 권이라도 발견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도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리랑은 입에서 입으로 구전으로만 전래되어 온 순 우리말의 민요이기
때문이다.
③ ‘아리랑’의 어원은 ‘알이랑’이다(알이랑 => 아리랑).
알이랑 알이랑 알 알이요 알이랑 고개를 넘어 간다
그런데
오랜 세월동안 글자가 없을 때 구전으로만 전승되다 보니,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로 부르게 되었고 결국 ‘알이랑’이
‘아리랑’으로 고착되고 만 것이다. 따라서 아리랑이 진정 어떤 노래인지를 알려면 ‘알이랑 알이랑 알 알이요’로 잃어버린 원래의
노랫말을 되찾아야 한다. 그게 기본조건이다.
④ 아리랑의 비밀을 푸는 열쇠 ‘연음법칙’
왜 본래 “알이랑
알이랑 알 알이요”라는 가사를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로 부르게 되었을까? 우리말의 발음에는 ‘연음법칙’이라는 음절의
연결규칙이 있기 때문이다. 자음으로 끝나는 음절에 모음으로 시작되는 음절이 이어질 때 앞 음절의 끝소리가 뒤 음절의 첫소리가 되는
음운 규칙을 말한다.
(☞이제야
비로소 우리가 왜 “아리랑 아리랑 아리리요”가 아닌 “아라리요”라고 노래하고 있는지 그 의문이 해소되었다. 거기에는 문법적
이유가 있었다. 지금까지 어떤 아리랑 연구가도 이 문제를 문법적으로 설명하여 규명한 적이 없다.)
⑤ ‘알이랑’은
‘알’과 ‘이랑’으로 구분된다. ‘알이랑’은 ‘알’이라는 이름씨(명사)와 ‘이랑’이라는 도움씨(조사)가 붙어서 된 말이다(알+이랑
= 알이랑). 그러므로 ‘알’과 ‘이랑’을 각각 따로 분리해서 그 의미를 찾아야 한다.
⑥ ‘알’은
‘하느님’(하나님)을 의미한다. 우리 겨레는 잡신과 구별되는 유일신의 이름을 ‘하느님’이라고 불렀다. 이 ‘하느님’이라는
신명(神名)은 처음에 ‘알’이었다. 그런데 ‘알’ 앞에 ‘한’이라는 관형사를 붙이고, ‘알’ 뒤에 ‘님’이라는 존칭어미를 붙여서
‘한알님’이라고 했다.
그것이 [한ᄋᆞᆯ님→하ᄂᆞᆯ님→하늘님→하느님]으로 바뀐 것이다(우리말 어원사전). 그래서 ‘알’은 ‘하느님’이다. 창조주 하느님 곧 유일신을 뜻하는 원시 언어가 ‘알’이었다.
⑦
유대인의 ‘엘(EL)’, 아랍인의 ‘알아(알라)’는 바로 이 ‘알’에서 유래된 말이다(‘알라’는 아랍어로 '하나님'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렇기에 아랍 기독교도들은 성경의 유일신 하나님을 '알라'라고 아랍어 성경책에 표기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이름인 ‘엘로힘’(단수는 Eloah)은 ‘알라(alah)’라는 말에서 유래했다(벌코프 조직신학 239쪽 * 크리스천 다이제스트
간). 즉 창조주 하나님을 뜻하는 인류 최초의 신명(神名)이 ‘알’이었다. 이 ‘알’이 ‘엘(EL)’의 어원인데, 노아에 의해
홍수 이후의 세대로 전해졌다.
⑧ ‘이랑’은 ‘~와 함께’라는 토씨로서(언어학자들은 ‘~가’ ‘~이’ ‘~는’
‘~이랑’ 등과 같은 ‘토씨’는 뜻과 소리가 바뀌지 않으면서 6천년 이상 간다고 한다) 영어의 ‘With’이다(예, 갑돌이랑 =
갑돌이와 함께, 갑순이랑 = 갑순이와 함께, 벗이랑 = 벗과 함께). 그러므로 ‘알이랑’은 “하나님과 함께”(with God)라는
말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 겨레가 잃어버린 아리랑의 원의(原意)이다. 아주 숭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⑨ 왜
‘알’이 유일신 하나님을 뜻하는 말이었을까? ‘알’이 수많은 생명을 낳기 때문이다. 쌀도 볏알(볍씨)에서, 과실도 씨알에서
생기고, 하늘과 땅과 바다의 허다한 생물들이 또한 ‘알’에서 탄생한다. 그래서 ‘알’은 ‘모체(母體)’요, ‘근원(根源)’이요,
‘시작(始作)’과 같은 뜻을 갖는다. 따라서 창조주 하느님(하나님)도 ‘알’이었다. 왜냐하면 그 분은 만물의 모체이시고 근원이시며
시작이시기 때문이다.
⑩ 다만 우리 겨레는 그 ‘알’이 ‘큰 모체’이시고 ‘큰 근원’이시며 ‘커다란
시원(始原)’이시기에 ‘알’ 앞에 ‘한’이라는 관형사를 붙였다. 또한 그 ‘알’이 인격적 존재이심으로 ‘알’ 뒤에 ‘님’이라는
존칭어미를 붙였다. 그래서 창조주 유일신을 ‘한알님’이라고 부른 것이다. 이 ‘한알님’이
[한ᄋᆞᆯ님→하ᄂᆞᆯ님→하늘님→하느님]으로 소리가 변했다.
그러므로 ‘알’은 ‘엘(EL)’과 동의어로서 하나님을 뜻하는 말이다. ‘알’은 우주만물의 根源(근원)이며 始終(시종)이신 主宰主(주재주), 곧 유일신 하나님(God)을 의미하는 우리 배달겨레의 옛 말이다.
⑪
고구려, 신라 그리고 가야의 지도자들이 모두 ‘알’에서 탄생했다는 이른바 ‘난생설화’(卵生說話)가 있다. 박혁거세가 큰 알에서
나왔다는 것, 주몽이 알의 껍질을 깨고 나왔다는 것, 김수로왕이 알에서 뛰쳐나왔다는 것은 모두 그들이 ‘한ᄋᆞᆯ님’의 자손 곧
천손(天孫)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태어난 사람이란 뜻이다. 바로 이것이 난생설화의
진정한 의미이다.
난생설화의 주인공들이 말 그대로 알에서 태어났다고 이해한다면 그것은 대단히 유치한 소견이다. 실제로
알에서 태어날 수는 없다. 그렇게 파악하기보다는 하늘에서 내려온 자손 즉 천손(天孫)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난생설화는
시조의 탄생에 신적권위를 부여하기 위한 이야기인 것이다.
⑫ 더욱이 ‘하늘’은 둥글어서 ‘알’인데, ‘하늘’이라는
말도 처음에는 ‘한ᄋᆞᆯ’, 즉 ‘큰 알(大卵)’이었다. 한ᄋᆞᆯ→하날→하늘로 변한 것이다. 만물을 내신 한알님(하느님)은
한알(하늘)에 계신다. ‘큰 알(大卵)’, ‘큰 모체(母體)’, ‘큰 근원(根源)’ 같은 뜻으로서의 ‘한ᄋᆞᆯ’에 ‘하늘’이라는
말의 기원이 있다. ‘하늘’이란 단어의 어원도 ‘한알’이다.
⑬ ‘알’이라는 것은 우리 조상들에게 있어서
사물(事物)의 핵심이었다. 그리고 ‘시작’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커다란 시원(始原)’으로서의 ‘알’이 곧 한알→하날→하늘로 된
것이다. 그러한 하늘(한알)이었기에 삼라만상(森羅萬象)은 곧 당신의 것이었다. 당신이 낳으시고, 당신이 기르시고, 또 당신이
주재하시는 것이었다. 홍수 전 사람들이 창조주 유일신을 ‘알’이라고 불렀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⑭ 하나님을 뜻하는
성경 원어 ‘엘(EL)’은 바로 이 ‘알’에서 변음이 되어 나온 말이다. ‘엘’은 ‘다스리는 이’, ‘강하신 분’이란 뜻을 가진
신명(神名)으로 셈어(Shemitic)에서 전반적으로 사용된 ‘하나님’ 또는 ‘신성(Divinty)’에 관한 호칭이다. 이
‘엘’은 바로 ‘알’의 변음이다. 이 ‘알’이라는 단어는 창조주 하느님(하나님)을 뜻하는 일종의 원형언어로서 노아에 의해 홍수
이후의 세대로 구전되었다.
저명한 조직신학자 벌코프는 다음과 같이 썼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이름인
‘엘로힘’(단수는 Eloah)은 ‘알라(alah)’라는 말에서 유래했다.”(벌코프 조직신학 239쪽 * 크리스천다이제스트 간). 즉
‘엘’보다 ‘알’이 먼저였다. ‘엘’은 ‘알’의 변음이다.
⑮ 종교철학자 오강남 교수(캐나다 리자이나 대학)는 그의
저서 ‘길벗들의 대화’에서 ‘알다’는 동사가 ‘알’에서 나왔음을 가르쳤다. 알은 천지창조의 모태였다. 또 알의 열림 혹은
깨어짐은 밝음의 시작이었다. 실로 ‘알’(하나님)을 ‘앎’(지식)이 가장 큰 ‘앎’이다! 하나님(알)을 아는 지식(앎)이 가장 큰
지식이다.
16) 한국인의 무덤은 동그란 모양의 봉분인데 그것은 ‘큰 알’(大卵=한알)을 뜻한다. 셈의 후손으로서
‘한알님’께 제사지내며 삶을 영위했던 한국인의 선조들은 스스로 천손민족(天孫民族) 즉 ‘한알님’의 백성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죽음이란 ‘한알’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한국인은 누군가 죽었을 때 ‘돌아가셨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어디로 돌아가신 것인가? ‘한알님’(하느님)이 계신 한알(하늘) 나라로! 그리하여 무덤이 동그란 모양의 ‘알’인
것이다. 그들은 ‘한알님’의 백성으로서 ‘알’에서 왔으니 ‘알’로 돌아가고자 했다. 실로 한국인은 ‘알이랑 정신’으로 살고 죽는
‘알이랑민족’이 아닐 수 없다.
필자는 이상과 같이 인문과학적 논거들을 충분히 제시하면서 아리랑의 어원은
‘알이랑’이며, 그 의미는 “하나님과 함께”(with God)라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자, 여기에 논리적 비약이 있나? 논거가
빈약한 아전인수격 주장인가? 유석근 목사는 터무니없는 소리를 했나? 아리랑의 어원과 의미에 관한 <알이랑신학>의 학문적
견해에 이의가 있다면 근거를 제시하고 반박하라.
그대가 어떤 학자가 발견한 새로운 연구 결과를 부정하고 비판할 수
있다. 하지만 반론을 제기할 때에는 갖추어야 할 조건이 있다. 먼저 그러한 결과를 도출한 이론적 근거들이 오류가 있는지 찾아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왜 오류인지를 객관적으로 설명해야 한다. 즉 반론과 비평도 근거와 더불어 제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냥
‘아니다’ ‘틀렸다’ 하면 설득력이 없다. 그것은 억지다.
그런데 일부 아리랑 찬송가론을 비방하는 자들이 글을
읽어보면 누구도 타당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다. 논박 없는 반론인 것이다. 그러한 비평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 모 대학 B교수의
글도 예외가 아니다. B교수는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글에서 필자가 논리를 비약했다고 썼다. 실로 억지 주장이며, 일종의 횡포다.
나는 B교수의 국어 독해력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 그렇게 판단할 수밖에 없다. 왜? 논증 과정에서 논리적 비약은 조금도 없었기
때문이다.
B교수의 비판대로 과연 알이랑 찬송가론에 논리의 비약이 있는지 서울대 입학을 목표로 논술고사를 준비하는
똑똑한 고3 수험생들에게 확인 검증을 요청해 보았다. 필자의 저서를 정독한 학생들은 "논리가 정연하고 치밀해서" 알이랑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부정할 수 없다고 했다. 문장 이해력이 고3 수준만 되어도 논리 비약이라는 억지 주장은 안 할 것이다. 그러나 간혹
국어도 독해가 안 되는 사람이 있다. 이런 자들과는 대화가 안 되며 소통이 불가능하다.
이 정도는 그래도 양호한 편이다. 유석근 목사를 위험한 사상가로 교묘하게 날조하여 ‘이단’으로 조작한 인물들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는 조금도 요동하지 않을 것이다.
알이랑이 찬송가인 이유
앞서
설명한 바처럼 아리랑의 어원은 ‘알이랑’으로서 그 의미는 “하나님과 함께”(with God)라는 뜻이다. 그리하여 필자는
“알이랑 알이랑 알 알이요”는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이요”라는 뜻이고(with God,
with God, with God, just God), “알이랑 고개를 넘어 간다”는 가사는 “하나님과 함께 고개를 넘어
간다”라는 뜻이라고 해석했다(accompany with God, I will cross over the mountains).
그리고 “알이랑 고개를 넘어 간다”는 가사에 나오는 그 ‘고개’란 우리의 먼 조상들이 대홍수 후 동방으로 천동(遷動)할 때 넘어 온 고개들 곧 “파미르고원~천산산맥~알타이산맥”이라고 설명했다.
이것은 유석근 목사가 소설을 쓴 것이 아니다. 우리 민족이 알타이에서 왔다는 것은 역사학자들도 인정하는 것이다. 더욱이 필자는 그것이 역사적 사실임을 입증해주는 일종의 물증으로서 다음과 같은 ‘언어유물’도 제시했다:
“파미르고원을 지나(支那) 사람들은 총령(蔥嶺: 파총, 재령)이라고 하는데, 이는 한국어 파(蔥) 마루(嶺) 그대로 파마루(파미르)이다. 지리학에서도 역시 파미르고원(蔥嶺)에서는 파(蔥)가 많이 야생한다고 한다.
파미르고원은 ‘파마루’로서 파(蔥)가 많이 자생하는 산마루(嶺)이기에 파마루(파머루) 고원인 것이다. ‘파미르’의 어원이 한국어 ‘파마루’이다.”
“한국인은 남자를 사내라고 한다. 사내는 ‘산아이’가 [산아이→사나이→사내]로 변한 것이다. 우리 선조들이 고대에 산지, 파미르고원→천산산맥→알타이산맥을 넘어 동방으로 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언어적 연관성은 한국인이 참으로 아득한 옛날 ‘파미르고원’을 넘고 ‘천산산맥’과 ‘알타이산맥’을 넘어서 동방으로 이동해 왔음을 가르쳐 주는 하나의 고고학적 증거인 것이다. 그것은 ‘언어유물’로서 일종의 ‘물증’과 같다.
그렇다!
우리 배달겨레는 아득한 옛날 광명의 본원지를 찾아 수많은 고개, 파미르고원~천산산맥~알타이산맥을 넘어서 동방으로 왔다.
알타이산맥을 넘어 가면 시베리아 벌판이 펼쳐진다. 시베리아는 만주 벌판이 연장된 땅으로서 우리 민족의 역사의 고향이다.
역사학자들은 한민족은 70% 이상이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에서 내려온 북방계 아시아인이라고 말한다.
한국인은 고대에
알타이산맥과 바이칼 호수 주변의 시베리아에 넓게 퍼져 살면서 극동으로 이주해 왔다. 우리 한민족의 뿌리는 단군이며 그 정신적
고향은 북방, 특히 백두산과 바이칼(밝알)호에 있다. 한국인의 주류는 시베리아 바이칼호에서 이동해 온 북방계 아시아족이다.
우리
조상들은 빛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공경했다. 그리하여 광명의 본원지를 찾아 가는 것이 꿈이었다. 그래서 아침에 뜨는 해를 따라
알이랑(하나님과 함께) 고개(파미르고원~천산산맥~알타이산맥)를 넘어 동쪽으로 쉬지 않고 이동하다가 마침내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땅
끝에 도달하였다. 그리하여 유라시아 대륙 가운데 가장 먼저 해가 뜨는 밝은 땅에 정착해 살게 된 백성이 우리 한국인이다.
그래서
우리 겨레가 사는 땅을 ‘밝달’이라고 했고, 이 밝은 땅에 사는 우리 겨레를 “밝달겨레”라 했다. “밝달겨레”의 이두문 음이 곧
“배달겨레”인 것이다. “밝달”과 “배달”을 어원적으로 살펴보면 밝달의 ‘달’은 땅(地)이란 말인데, 그것은 곧 양달(陽達)이
양지요, 응달(陰達)이 음지요, 빗달(傾斜地)이 비스듬한 땅인 것이다. 그런고로 “배달겨레”란 “밝은 땅에 사는 겨레”라는
뜻이다.
이렇게 우리 겨레는 밝고 환한 것을 지극히 선호하여 의복도 밝고 환한 흰옷을 입고 살아 온 백의민족인 것이다. 우리 겨레의 백의 착용의 동기와 백의 숭상의 유래는 무엇인가?
우리 민족의 흰옷 선호는 민족형성 과정에서부터 시작된 원초적인 것이다. 배달겨레는 민족사를 알이랑 곧 '하나님과 함께'라는 일신 신앙으로 시작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밝고 환한 천국에 빛 가운데 계시는 빛의 근원이신 분이다.
고대
한국인은 천지만물의 주재자가 되시는 분이 빛 가운데 계시는 창조주 한알님(하나님)이시라고 알고 자기네들은 그 하나님의 자손 곧
'천손민족'이라고 믿었는데, 빛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광명’을 표시하는 의미로 흰 빛을 신성하게 알아서 밝고 환한 흰옷을 자랑삼아
입다가 온 민족의 풍속을 이루고 만 것이다.
하나님은 빛이시다(요일 1:5). 그래서 하나님 백성인 우리 겨레는 빛의 옷인 흰옷을 즐겨 입은 '백의민족'인 것이며, 사는 땅도 빛이 시작되는 동방의 땅 끝 ‘밝달’에 자리 잡은 '배달민족'인 것이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요일 1:5). 흰 색은 어두움이 조금도 없는 가장 밝은 색이다. 그렇기에
스스로를 하늘의 자손이라 믿었던 우리 민족은 흰옷을 숭상해서 일상복은 물론이고 상복으로도 밝고 환한 흰옷을 널리 입었던 것이다.
성경에 의하면 흰옷은 하늘백성의 표지이다(계 7:9,14; 계 19:7~8; 전 9:8). 지혜 있는 자는 열매로 나무를 알
것이다.
그리하여 필자는 ‘아리랑’은 대홍수 후 빛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섬기던 고대 한국인이 광명의 본원지(밝달)를
찾아 이 땅에 오기까지 수많은 산과 언덕과 고원들을 넘어 오면서 부른 ‘찬송가’였다고 해석했다. 즉 아리랑은 우리 겨레의 영아기
때의 집단적 체험을 간직하고 있는 민족의 역사노래인 동시에 현존하는 인류 최고(最古)의 찬송가인 것이다. 바로 이것이 아리랑의
비밀이다.
알이랑 알이랑 알 알이요
=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이요
(with God, with God, with God)
알이랑 고개를 넘어 간다
= 하느님과 함께 고개를 넘어 간다
(accompany with God, I will cross over the mountains.)
‘아리랑’은 창조주 하나님을 숭배하던 우리네 조상들이 동방의 새 땅을 찿아 이동할 때 수많은 산과 언덕과 고원들을 넘어 가면서 부른 ‘찬송가’였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상실한 아리랑의 始原(시원)과 原意(원의)이다.
‘아리랑’이 우리 겨레의 마음속에 그토록 크게 자리 잡고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것은 실로 인류 최고(最古)의 찬송가로서 겨레의 역사와 가장 오랫동안 함께 해온 민족의 숨결이며 역사의 맥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리랑은 당연히 ‘세계무형인류문화유산’인 것이다. 우리 민족의 전통문화만이 아닌 지구촌 문화유산이다. 아리랑은 7천만 한민족의
노래만이 아니라 70억 세계인이 함께 보존하고 같이 불러야 할 인류의 노래인 것이다. 아리랑은 현존하는 인류 最古의 찬송가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리랑의 세계화에 힘써야 할 당위성 및 근본적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아리랑이 찬송가라는 이러한 해석은 성경의 본질적 진리를 훼손했는가? 그래서 위험천만한 사상인가? 이단 수준인가? 양심 있는 목사와 성도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것이다.
<알이랑신학>의 핵심 주제인 ‘아리랑 찬송가론’은 시원한 답이 없던 아리랑의 근원과 원의에 관해 명확히 해답을 제시한 인문과학적 이론이다. 이제 우리는 잃어버린 아리랑의 始原(시원)과 原意(원의)를 바로 알게 되었다.
그러나
최근에 ‘알이랑 찬송가론’을 ‘유해물질’과 같다고 매도한 목사가 있다. <알이랑신학>을 사설로 날조, 왜곡한 음해성
문서를 유포한 인물이다. 그렇게도 존재감을 과시하고 싶을까. 알고 보니 돈키호테 같은 이런 위인들이 서너 명 더 있다.
기가
막힌다. 유해물질이라... 아리랑을 찬송가라 했으니 찬불가를 부르는 불교 승려라면 모를까 기독교 목사가 지나친 표현인 것 같다.
오, 가련한 자여! 유해물질은 그대가 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제발 독서도 공부도 좀 더 하고 사고의 폭을 넓히기 바란다.
지금까지
18판이 리프린트된 필자의 저서 '알이랑민족'은 기독교적 관점에서 성경으로 우리의 문화와 역사를 해석한 책이다. 이와 같은
연구는 기독교 토착화와 민족복음화를 위해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실로 그것은 조로 현상을 보이며 성장이 멈춘 한국교회의 시급한
숙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성경의 본질적 진리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복음을 한국인의 정서와 문화에 맞게 어떻게 수용할지 연구해야 한다. 그래야만 기독교가 한국에서 뿌리를 내리고 많은 열매를 부단히 맺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한국교회의 미래가 달려 있는 문제다. 여기에 실패하면 한국교회는 작금의 조로 현상을 극복할 수 없을 것이다.
<알이랑신학>은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는 한국적 토착화 신학이다. 우리는 언제까지 서구신학만 카피해서 가르쳐야
하나? 예수원 설립자 대천덕 신부님(성공회)은 한국교회를 향해 이렇게 도전한 바 있다:
“우리가 선교사들에게서
전수받은 성경 해석은 서양의 입장에서 해석한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한국사람 자신의 내부로부터 우러나오는 복음과 한국과의 새로운
대결을 통해서만 기독교가 한국에서 뿌리를 내리고 많은 열매를 내릴 수 있다는 점을 깊이 생각해볼 때이다. 오직 이런 대결을
통해서만 예배가 진정 한국인 자신의 예배가 될 것이며, 성경이 진정 한국인 자신의 성경이 될 것이다. 이것은 한국 문화와의 진지한
대화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한국의 참된 주체성을 발견하는 문제인 것이다.” (대천덕, 「대천덕 신부와의 대화」, 생명의
샘터, 1987, pp.71~72 ) (대천덕, 「우리와 하나님」, 도서출판 예수원, 1988, p.161)
<알이랑신학>은 대천덕 신부님의 지적에 잘 부합한다. 문화평론가 안준배 목사(기독교문화예술원장)는 <알이랑신학>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향후 한국교회의 두 가지 어젠다를 집약하면 기독교의 토착화를 통해 민족문화형성과 분단조국의 통일에의 접근이다. 유석근 목사의 저서 '알이랑민족'은 한국교회의 과제를 풀어주고 있다.
한민족이 살고 있는 지역마다 아리랑은 민족의 뿌리임을 증거 하는 바 ‘아리랑은 찬송가’라는 신학적 해석은 기독교가 가졌던 타종교에 대해 문화적 콤플렉스를 근원적으로 해소한 것이다.
더욱이 남북의 동질감형성의 주제가인 아리랑에 대한 신학적 성과는 통일신학을 배양하는 토대가 되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알이랑신학>을 사설로 매도하는 인물들이 있다. 그들은 우리의 전통문화는 죄다 이교도적이고 악마적인 것이라는 그릇된
편견을 갖고 있다. 민요 아리랑은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문화이다. 아리랑의 어원은 '알이랑'이며, 그 의미는 "하나님과
함께"(with God)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전혀 이교도적이지 않다. 오히려 '알이랑'은 기독교적이다. "하나님과
함께"(with God)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한국신학인 <알이랑신학>의 핵심 사상이다.
서울신대 전 총장 강근환 박사(역사신학, 사진)는 “한국교회가 지향해야 할 회개운동의 하나”라는 소논문에서 토착화 신학의 필요에 대해 다음과 같이 역설했다.
“우리는 기독교가 서양에서 발전한 종교이지만, 그 실질인 복음을 ‘서양문화적’ 형식과 동일시 할 수 없음에도 이를 절대화함으로서 선교가 일종의 ‘문화제국주의’로 전락해 버린 것을 비판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토착신학적’인 관점에서 한국교회의 문화적인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 기독교가 전해지기 이전의 한국문화를 온통 악마적인 것으로
또는 이교도적인 것으로 심판해버린 것은 확실히 자학행위요, 서구역사주의 신학에 세뇌된 자들의 오만한 태도이다. 그러기에 한국문화가
지니고 있는 일반 계시적 의미와 존재론적 자연신학의 가치를 인정하고 계시의 빛 가운데 이를 뚜렷이 밝혀 주어야 할 과제가
성립된다.
우리의 회개운동의 하나는 한국문화를 온통 악마적인 것으로 또는 이교도적인 것으로 매몰차게 심판하였던 지난날의 ‘왜곡된 회개’의 잘못을 바로 잡는 ”토착화 신학 지향적인 회개”여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전통문화’에 대한 무비판적 배타성에 대한 성찰이 요청된다. 한국교회가 가져온 기독교 복음이 서구적 포장지에 싸인 채
들어와서 우리 문화까지를 서구화 시켜버린 현상을 치유해야 한다. 더 이상 우리 전통문화를 죄다 악마적인 것으로 정죄하지 말라!”
한국적
토착화 신학인 <알이랑신학>을 사설로 매도하는 일부 사고가 경직된 신학자들이 경청해야 할 충고이다. 서구 문화와
신학에는 박사 급의 지식이 있으나 우리의 역사와 전통문화에 대해서는 무지몽매한 자들이 적지 않다. 그러니 평생 오직 서구신학만
카피해서 가르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 이상 서구신학이 전부일 수는 없다. 이제 한국교회는 세계교회 앞에 한국의
신학을 소개할 수 있어야 한다. 윤사무엘(미주장로회신학대학 교수, 올리벳신학교 총장) 박사는 최근 출간한 그의 저서 "한국교회와
신학"(쿰란출판사刊)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한국교회가 서구 기독교 선교를 받은 지 130년이 지났다. 이제 한국교회는 세계 앞에 한국적 신학을 내놓아야 한다.”
성민 코리아의 키워드 ‘알이랑’
앞서
고찰했듯이 아리랑의 어원은 ‘알이랑’이며 그 의미는 “하나님과 함께”(with God)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알이랑’은
“하나님중심사상”이며 “신본주의정신”이다. 이 숭고한 ‘알이랑 정신’이 바로 한국인의 ‘근본 사상’이요 ‘뿌리 정신’인 것이다.
‘알이랑’은 우리 한민족의 원형과 정체성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우리 겨레는 민족사를 ‘알이랑’ 즉 “하나님과
함께”라는 유일신 신앙으로 시작한 존귀한 백성이다. 그러나 한국인은 자신의 참 모습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렸다. 그리하여 마치
기억상실증 환자와 같은 상태에 있다.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지금 우리 한국교회는 마이너스 성장을 하고 있다. 필자가 단언컨대
한국 백성이 스스로를 자각하지 못하는 한 한국교회의 성장과 부흥은 한계가 있을 것이다. 이미 한국교회는 그 한계를 노출하고 있다.
50여 년 전 강원도 태백의 오지에 예수원을 설립하고 일생을 기도와 말씀으로 한국교회를 섬기신 대천덕(Reuben Archer Torrey 3세 / 1918~2002) 신부(성공회)는 일찍이 이렇게 역설한 바 있다:
“교회의
우선적 과제가 그리스도를 한국에 소개하는데 있다는 것은 두 말 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한국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인지,
한국의 진정한 사명이 무엇인지, 그리고 세계무대에서 한국이 담당할 역할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는 한 -다시 말해서 스스로를
자각하지 못하는 한- 그런 한국에 그리스도를 소개한다는 것은 무익한 일이다.
내가 보기엔 한국은 자신의 참모습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린, 흡사 기억상실증 환자와 같은 인상을 준다. 만일 우리가 진정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께서 한국 백성에게 공동의
선(善)에 기여할 수 있도록 어떤 특별한 역할을 부여하셨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다. 그러니만큼 한국으로서의 가장 긴급한 과제는
스스로를 재발견하고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는 일이다.” (대천덕, ‘기독교는 오늘을 위한 것’, 「생명의 샘터」, 1987,
70쪽)
그렇다! 우리 겨레는 안타깝게도 자신의 참모습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린 집단적 기억상실증에 걸려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토레이 신부의 지적과 같이 스스로를 재발견하고 민족 본연의 모습을 회복해야 한다. 그것은 실로 긴급을 요하는
한국인의 최우선적 과제이다.
한국인,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민족사를 ‘알이랑’ 곧 “하나님과 함께”(with God)라는 유일신 신앙으로 시작한 동방의 聖民 “알이랑민족”이다.
성경상으로는
셈의 셋째 아들 아르박삿의 손자 에벨의 둘째 아들 욕단의 가계가 알이랑민족 우리 한국인의 조상이다(창 10:21~30). 그들은
대홍수 후 가장 먼저 산악지대를 넘어서 동방의 새벌(스발, 새발)로 천동했다. 욕단이 아라비아 남단에 정착해 아랍 부족의 선조가
되었다는 서구 주석가들의 이론은 틀린 것이다.
트리니티 칼리지의 구약학 교수인 고든 웬함(Gordon
Wenham)은 창세기 10장30절을 해석하면서 욕단의 영토가 아리비아 남부에 위치한다는 대다수 주석가들의 견해는 "추측"으로서
확실한 것이 아니라고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 “그들이”는 앞 구절에 논의된 욕단의 아들들 모두를 가리킨다.
불행하게도 이 구절은 대단히 모호하다. ‘메사’와 ‘스발’과 ‘동편 산’은 모두 명확하게 확인할 수 없다. 스발은 아라비아 남부의
차파르(saphar)라는 해안 도시일 수 있지만, 서로 다른 첫머리의 치찰음 때문에 이 제안은 의심스럽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메사는 욕단족의 서쪽 경계를, 스발은 동쪽 경계를 나타내며 그 영토는 아라비아 남부에 위치한다고 추측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고든 웬함 지음, 박영호 옮김, 「WBC성경주석 창세기 상」, 서울: 솔로몬, 2006, p.425)
고든 웬함
박사가 바로 설명했다. 한국교회 성도들은 추측에 불과한 서구 신학의 낡은 이론을 더 이상 맹종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욕단의
가계는 아라비아 남부로 가지 않았다. 그들은 동양으로 천동(遷動)하여 우리 배달민족의 조상이 되었다.
어떤 새로운
이론에 반대를 표명할 수 있다. 그러나 앞서 지적했듯이 반론과 비평도 근거와 더불어 제시되어야 한다. 그런데 아리랑의 어원이
‘알이랑’이며, 그 뜻은 "하나님과 함께"라는 <알이랑신학>의 핵심 내용을 매도하는 일부 글들을 확인해보면 논박 없는
비평들뿐이다. 학문적 가치가 없는 편협한 주장인 것이다.
어떤 글은 유치할 정도로 작문 수준이 떨어지는 함량 미달의
글도 있다. 앞서 언급한 유해물질 운운한 음해성 날조 기사가 그런 문서다. 그렇게 엉성한 글을 반론이라고 작성해 포털사이트에
올리는 인물도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돈키호테가 연상되는 이유다. 애석하게도 듣는 귀가 둔한 사람은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필자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늘 견지하고 있다: “들을 귀 있는 자만 들어라!”
무형문화유산(無形文化遺産, 문화어: 비물질문화유산(非物質文化遺産), 영어: Intangible cultural heritage, ICH)은 유네스코의 사업 중 하나이다. 유네스코 사업인 세계유산이 건축물 등 유형 문화재의 보호와 계승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반면, 민속, 전통 등 무형 (무형문화재)을 보호 대상으로 하는 것을 목표로 한 것이다.
아랑전설(阿娘傳說)은 억울하게 죽은 아랑이 원령이 되어 자신의 원한을 푼 뒤 변고가 없어졌다는 이야기이다. 아랑은
경상도 밀양부사의 딸로, 이름은 윤동옥(尹東玉)이다.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유모에게서 자랐는데, 어느 날 밤 통인(通引)과
작당한 유모의 꼬임에 빠져 달구경을 나갔다. 통인 주기가 아랑을 겁간하려 했고, 아랑은 끝까지 항거하다가 끝내는 칼에 맞아 죽고,
대숲에 버려졌다. 부사는 아랑이 외간 남자와 내통하다 함께 달아난 것으로 알고 벼슬을 사직하였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 밀양에
오는 신임 부사마다 부임하는 첫날 밤 의문의 주검으로 발견되어 모두 그 자리를 꺼리게 되었다.
이때 이상사(李上舍)라는 담이 큰 사람이 밀양부사를 자원하여 왔다. 부임 첫날밤에 나타난 아랑의 원혼에게서 억울한 죽음을 들은
그는 원한을 풀어주기로 약속하였다. 이상사는 곧 주기를 잡아 처형하고 아랑의 주검을 찾아 장사를 지내주니 그 뒤로는 원혼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도 영남루 밑에는 아랑의 혼백에게 제사지낸 아랑각(阿娘閣)이 있고, 《밀양아리랑》도 이 영남루 비화(悲話)에서 발생하였다 한다.
아리랑은 구전으로 전승되고 재창조되어 온 한국의 전통 민요이다. ‘아리랑~’ 또는 ‘아라리~’ 및 이들의 변이를 여음(후렴 또는 앞소리)으로 지니고 있는 일군의 민요를 통칭하는 말이다. 정선·밀양·진도 아리랑을 3대 아리랑으로 부르지만 장단·박자·가사가 서로 다른 수많은 아리랑이 한국은 물론 우리 민족이 사는 세계 곳곳에 존재한다. 다양한 가락과 넋두리 같은 2행시 표현 속에 사회와 시대의 변화를 증언하면서 주제사적인 문제까지 제기하는 아리랑은 한국의 문학사와 예술사에서 질기고 굵은 맥을 전승해오고 있는 유일무이한 사례이다.
개설
아리랑은 ‘아리랑……’ 또는 ‘아라리……’ 및 이들의 변이를 여음(후렴 또는 앞소리)으로 지니고 있는 일군(一群)의 민요로, 아리랑이라는 명칭은 이들 여음에서 비롯하고 있다.
아리랑은 전국에 고루 분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해외에도 널리 퍼져 있어서 이른바 「독립군아리랑」을 비롯하여 「연변아리랑」 등의 이름이 쓰이고 있을 정도이며, 멀리 소련의 카자흐스탄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교포들의 아리랑도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확인할 수 있는 가요들을 토대로 하여 주로 강원도 일대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 「정선아리랑」, 호남지역의 「진도아리랑」, 그리고 경상남도 일원의 「밀양아리랑」을 묶어서 삼대아리랑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것은 이들 세 가지 아리랑이 각 지역 민요의 기본적 음악언어를 간직하고 있는, 지역 내의 자생적인 전통민요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이 경우, 이른바 「경기아리랑」 또는 「서울아리랑」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은 특정인의 창의적인 윤색을 거쳐 인위적으로 변이되었다는 뜻에서 ‘신민요아리랑’으로 분류함으로써 삼대 ‘전통아리랑’과 구별된다.
역사
1. 지역적 분포
「정선아리랑」은 원래 「아라리」로 일컬어지던 노래이다. 정선을 비롯해서 이웃 영월과 평창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아라리」는 이 지역의 민요적 음악언어를 가장 충실하게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태백산맥의 동서를 따라 길게 설정될 수 있는 이른바 메나리토리권에서 민요 「메나리」(또는 메노리)의 음악언어와 가장 밀착된 노래로 「정선아라리」가 평가될 때, 메나리야말로 가장 전통성 짙은 민요이면서 동시에 주어진 지역의 민요적 음악언어의 기층성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물론 메나리→어산영(경상도지역)→산아지(호남지방)의 연계를 고려한다면 「정선아라리」의 전통성은 보다 더 넓은 지역에 걸쳐 논란될 수 있을 것이다. 아리랑 가운데 「정선아라리」가 유일하게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이유는 바로 이 점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강원도 영동·영서일대에서는 「정선아라리」 외에 「강원아리랑」 또는 「자진아리」로 일컬어지고 있는 또 다른 아리랑이 있다.
「정선아라리」에 비해 훨씬 장단이 빠르고 “아리아리 쓰리쓰리 아라리요, 아리아리 고개로 넘어간다.”라는 여음을 지닌 이 「자진아리」는 영서·인제 지방의 「뗏목아리랑」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 「뗏목아리랑」이 그렇듯이 일노래로서의 쓰임새를 진하게 지니고 있다.
학산과 같은 강릉 교외 일대에서는 논노래 또는 들노래로 쓰이고 있지만, ‘어루리’며 ‘아라성’이라는 특수한 여음을 지닌 횡성·원주·여주·이천 일대의 아리랑과 충주지역의 아리랑도 기본적으로는 이 「자진아리」에 속하여 있다고 보이는 들과 논의 일노래들이다. 이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정선아라리」는 놀이노래라는 성격이 강하다.
「정선아라리」에서는 엮음 아라리라는 특수한 형식의 아라리를 지적할 수 있다. 이것은 노랫말이 일반 아라리보다 훨씬 길어서, 노래의 첫머리에서 중간 정도까지 상당한 부분이 빠른 말투로 사설을 엮어가는 노래이다. 그래서 일반 아라리에 엮음 아라리를 대비시킬 경우, 평시조와 사설시조의 대비를 연상하게 된다.
호남 일대는 국악학계에서 육자배기토리권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것은 이 지방 민요들이 육자배기를 기층적인 음악언어로 삼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지만 「진도아리랑」은 육자배기토리에 속하면서도 그 음악언어의 특색이 육자배기와는 다소간의 차이를 보여 주고 있다. 그것은 후대에 약간의 윤색이 가하여졌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해석되고 있다.
「진도아리랑」은 호남지역, 충청남도 일부, 경상남도 서부지역, 그리고 제주도 등지에 분포되어 있으나, 밀집 분포지역은 진도이다.
한편 정자소리토리권인 영남을 배경으로 삼고 있는 「밀양아리랑」의 경우에도 그 음악언어의 특성이 정자소리의 음악언어에 대하여 다소간의 차이를 보여 주고 있음이 지적되고 있다.
「밀양아리랑」의 분포는 밀양을 중심으로 하여 경상남도 동북지방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어 다른 두 지역 아리랑에 비하여 그 분포가 비교적 제한되어 있는 셈이다.
2. 역사와 변화
정선과 진도 그리고 밀양 등 3대 아리랑을 전통민요 아리랑으로 잡을 경우 그 가운데서도 「정선아리랑」은 메나리조의 밀착성이 짙어, 주어진 지역 민요의 음악적 문법의 기층성을 가장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그것은 「정선아리랑」이 민요적 지역성과 전통성을 으뜸으로 간직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달리 말하면 「정선아리랑」은 짙은 민요적 원형성을 간직하고 있다.
오늘날 정선의 현지 주민들에게서 그 기원이 고려 말에까지 소급될 것으로 믿을 만큼, 오랜 역사를 지닌 아리랑의 정통을 이은 계승자로서의 긍지를 실감할 수가 있다. 그들은 아리랑의 남상이 그들의 생활공간인 태백산맥의 중허리일 것으로 믿고 있다.
「정선아리랑」이 지닌 민요적 원형성과 그리고 현지 주민의 믿음 및 그 전승태도 등을 묶어서 생각할 때 아리랑을 산간의 ‘흙의 노래’로서 비교적 쉽게 규정지을 수 있게 된다.
이 경우 ‘흙의 노래’는 ① 지역적으로나 역사적으로 토착성이 강할 것, ② 지역적인 일상생활성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을 것, ③ 민간 전승다운 전통성을 지니고 있을 것, ④ 주어진 지역사람들의 보편성이 큰 노래 또는 소리일 것 등, 네 가지 속성을 갖추고 있음을 뜻하고 있다.
그러나 네 속성을 통틀어서 단일한 명제를 엮어낸다면, 오래 전부터 전하여진 것으로 믿고 지역주민 대다수가 그들의 지역 내 일상생활을 실어서 노래하고 있는 소리가 곧 ‘흙의 소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흙의 소리’로서 아리랑은 그 기층구조가 메나리나 정자소리와 마찬가지로 밭과 논, 그리고 물이며 산에서 부른 ‘일노래’라는 성격을 갖추고 있다. 이 경우 산과 들을 통틀어서 흙이라는 말로 포괄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흙의 소리인 아리랑은 산과 들·밭에서 부르는, 혹은 집안에서 부르는 ‘놀이노래’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흙의 소리’로서 아리랑은 애원성·탄성(嘆聲) 등이 실린 개인적인 소리라는 속성을 강하게 갖추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소박한 주관적인 서정이 흙의 소리로서 아리랑이 지녔던 시정신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신세타령과 팔자한탄 등이 우세한 넋두리나 푸념에 견줌직한 소리였다고 생각된다. 그런가 하면 개인생활 주변 일상성의 묘사를 ‘흙의 소리’로서 아리랑이 갖추었을 또 다른 속성으로 생각하여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아리랑의 기원설과 전설들은 대원군의 경복궁 공사와 관련된 아리랑에서 말하여 주고 있다. 『매천야록 梅泉野錄』에 고종이 궁중에서 아리랑을 즐겼다고 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대원군·고종 때 당시 서울에도 이미 아리랑이 전해져 있었음을 헤아릴 수 있다.
경복궁 공사를 위한 징용의 가혹함과 이 공사 경비조달을 위한 가렴주구가 아리랑에 얽혀서 전해지고 있음을 고려한다면 적어도 대한제국 말기의 가혹한 정치와 사회현상을 타고 아리랑은 ‘흙의 소리’에서 ‘역사와 사회의 소리’로 탈바꿈해 나갈 결정적 단서 내지 동기를 잡은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이것은 대원군 시대를 계기로 해서 비로소 아리랑이 역사성·사회성를 갖추게 되었다는 것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아리랑의 기원을 고려 말 유신들의 망국의 한에서 찾고 있는 아리랑의 기원설 내지 전설이, 이미 아리랑이 원천적으로 지니고 있을 역사·사회성에 대하여 시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리랑의 흙다움과 역사·사회다움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비중의 우세를 지적할 때 제기될 수 있는 개념들이다. 그것은 아리랑이 원천적으로 지니고 있었던 역사·사회성이 대원군 시대와 같이 역사적 충격을 받아 상대적으로 흙다움보다 훨씬 목소리를 높였음을 뜻하는 것이다.
아리랑이 사회화하고 역사화하는 제2의 충격은 일제의 침략에 의하여 촉발된 것이라고 가정해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표현이 나운규(羅雲奎)가 제작한 영화 「아리랑」이었다고 더불어 가정해 볼 수 있다. 그와 같은 아리랑의 사회화와 역사화는 8·15광복과 6·25전쟁을 거치면서 중첩되어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아리랑의 자체 변화는 민간전승이 역사적 변화에 적응한 결과라고만 설명될 이상의 또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민간전승이 민간전승으로서, 다른 차원으로 옮겨 갔음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민간전승이 민간전승의 테두리를 떠나 다른 문화영역으로 옮겨 갔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아리랑은 농어촌 전통사회의 민간전승에서 좁게는 도시 민간전승, 넓게는 사회 민간전승으로 탈바꿈해간 것이다. 이와 같은 일은 다른 민간전승에서 그 유사한 사례를 찾기 힘든 것이다. 이 경우, 사회 민간전승이란 동시대의 한국사회 전체가 공유한 민간전승임을 뜻한다.
그런 한편, 아리랑은 그 사회화와 역사화를 통하여 대중문화·상업소비문화, 그리고 창조적인 예술문화에까지 그 영역을 확대해 간 것이다.
이 같이 ‘흙의 소리’ 아리랑이 역사화·사회화해 간 사실은 제2차세계대전을 전후해서, 이른바 제3세계들에 걸쳐 광범위하게 일어난 민족주의적 문화운동으로서 일어난 민요운동과 동궤의 것으로 평가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기도 한 것이다.
3. 신민요아리랑의 파장
아리랑은 앞서 언급한 삼대 전통 아리랑이 그 원류라고 보여진다. 그러나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에서 비롯하였을 것으로 짐작되는 「경기아리랑」 또는 「서울아리랑」은 신아리랑 또는 신민요아리랑이 잇따라 발생할 수 있는 동기 구실을 다한 것으로 생각된다.
신아리랑 또는 신민요아리랑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대중가요화한 아리랑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민요아리랑 또는 전통아리랑으로 하여금 새로운 시대, 말하자면 상업시대 및 산업사회의 대중들의 노래로서 살아남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 것이다.
가령 「아리랑삼천리」(박시춘 곡)를 효시로 삼아서, 일제강점기에 창작된 다섯 편 가량의 대중가요 아리랑에서 오늘날의 「영암아리랑」(하춘화 노래)에 이르기까지 ‘대중가요 아리랑’의 맥이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노래로서 아리랑은 전통민요→신민요→대중가요의 길을 걸어갔으며, 한편 ‘가곡 아리랑’의 흐름도 있다. 노래로서 아리랑은 그만큼 다양한 장르들을 포괄하게 된 것이다.
신민요아리랑의 효시라고 보아도 무관한 「경기아리랑」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난다.
라는 노랫말로 유명하지만, 음악언어의 원류는 대체로 「정선아라리」에서 찾을 수 있다.
1930년대 이후 숱한 신민요아리랑이 잇따라 창작되었을 때, 「경기아리랑」은 달리 「본조아리랑」으로도 호칭되었거니와 그것은 「경기아리랑」이 신민요아리랑의 본조, 곧 본류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경기아리랑」 이 외의 나머지 신민요아리랑들은 「별조아리랑」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삼대 아리랑을 중심으로 일어난 아리랑의 물살은 시대의 차이, 갈래의 차이를 넘어서서 우리의 근대사회에 널리 또는 깊게 파장을 미쳐간 것이지만, 「종두(種痘)아리랑」이나 「한글아리랑」으로 이름지을 만한 특수한 아리랑의 파생을 보기도 하였던 것이다.
「종두아리랑」은 천연두 예방주사를 널리 보급시키기 위하여, 「한글아리랑」은 문명퇴치교육의 보급을 위하여 각기 창안된 것들이다.
이들 두 가지 보기들은 아리랑이 특정한 목적을 위해 의도적으로 창조되기도 하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나, 「독립군아리랑」이라는 또 다른 보기와 함께 이들은 아리랑이 민요의 텃밭인 민간전승 밖으로 벗어나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가령, 이와 같은 아리랑의 탈민요 내지 탈민간전승을 크게 보아 아리랑의 원심력 방향 확산이라고 부르게 된다면, 앞에서 이미 언급한 대중가요화나 가곡화도 그 같은 확산의 일례로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아리랑의 탈민간전승운동이 굳이 한 방향, 한 범주로 묶여서 제약받을 수는 없다. 가령 상업화하는 경향, 예술(문학·음악 등)사에 편입되는 성향, 실용성 높게 사회화하는 경향 등을 지적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립군아리랑」의 경우는, 가령 그것이 집단적 의지에 의하여 자연발생적으로 자체 내에서 창작되어 집단의식의 독자성을 강하게 향유하고 있었다면, 전통민속이 아닌 새로운 시대의 민속으로 평가하여도 좋을 것이다.
원심적 확산의 다양화는 민요아리랑의 사회화 내지 역사화로 표현할 수도 있는데, 이것은 아리랑이 원형 지향적 전통성(구심성) 이외에, 시대변화에 적응하는 높은 정도의 가변성을 향유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구심성과 원심성의 극대화된 사례를 다른 전통민요에서 찾아보기 힘들다는 사실을 지적한다면, 다른 민요와 상대적으로 아리랑이 가지게 되는 개성이 그만큼 크게 두드러져 보이게 될 것이다.
결국 신민요아리랑의 파장은 급기야 천파만파를 불러 일으켜, 여러 방향으로 동시에 또 다른 파장이 일어나게 한 것이다.
아리랑의 어원 및 구조
1. 여러가지 후렴과 그 어원론
여음의 대표적 어휘인 ‘아리랑’의 어원에 대해서는 ‘아리랑(我離郎)’을 비롯해서 신라의 ‘알영비(閼英妃)’, 밀양 전설의 인물인 ‘아랑(阿娘)’ 등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의미 없는 사설(nonsence verse)로 흥을 돕고 음조를 메워 나가는 구실을 할 뿐이다.
즉, 아리랑의 여음은 여러 가지이며 그 쓰임새 또한 다양하다. 노래의 머리에서 앞소리 또는 내드름소리로 쓰이는가 하면, 노래의 꼬리에서 뒷소리 또는 받음소리로도 쓰이고 있다. 또는 앞사람의 노랫말이 끝난 뒤, 다른 사람이 그 뒤를 이어 다른 노랫말로 넘겨받는 넘김소리로도 쓰인다.
쓰임새의 다양성은 당연히 여음이 노랫말에서 차지할 자리의 다양성에 대하여 말해 주는 것이다. 다른 민요의 여음은 대체로 일정한 마디(節) 구성을 지니고 있고, 또 그 쓰임새며 노랫말에서 차지하게 될 자리가 일정하다. 그러나 아리랑의 경우 여음은 다른 면의 다양성과 더불어 마디 구성상의 다양성을 아주 특이하게 드러내 보이고 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고개로 나를 넘겨주소. (정선)
아리 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낫네. 아리랑 어절시구 날 넘겨 주소. (밀양)
아리 당다중 쓰리 당다중 아라리가 낫네. 아리랑 어절시구 잘 넘어간다. (밀양)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 낫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낫네. (진도)
아리아리 쓰리쓰리 아라리요 아리아리 고개로 넘어간다. (강원도)
아라리요 아라리요 아리랑 어헐사 아라성아. (여주)
이와 같이 다양한 여음은 ‘아·이’, ‘아이·으이’, ‘ㄹ·ㅇ’, ‘ㄹ·ㅅ’ 등의 대립적 내지 대조적 음운교체의 엮어짐이 주류를 이루고 있거니와, 그것은 그와 같은 대립·대조적 음운교체가 한국인의 시적(詩的)인 ‘쾌감있는 음상(音相)’을 자극하면서 동시에 아리랑이 지닌 지배적 정서에 호응하는 것이라고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아리랑 여음의 어원론적 설명은 그 같은 음운들의 엮어짐이 뜻이 있는 실사(實辭)로 간주됨으로써 다양하게 시도되어 왔고, 또 그 시도에 따라 이설이 분분한 아리랑 기원론이 제시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가령, ‘我離郎’·‘啞而聾’·‘我難離’ 같은 보기는 아리랑의 여러 가지 여음을 각기 실사로 보고 한자로 옮겨놓은 것들이다.
여음 해설을 계기로 삼은 여러 가지 아리랑 기원론은 아리랑이라는 전승 자체 및 일부 노래말에 얽혀서 전하여져 있는 전설(설명 전설)과 함께, 크게 본 아리랑 전승을 이루고 있는 것이라고 보여진다.
즉 아리랑 전승은 아리랑이 노래말로만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노래말이 주축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주축을 세워서 각종 기원론과 전설도 의젓한 아리랑 전승의 일부를 이룩하고 있는 것이다.
다양한 기원론은 진지한 노력이나 부분적인 상당한 설득력에도 불구하고 민간어원설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원론의 언어학적인 타당성과는 별도로 정서론 내지 주제론적인 타당성은 상당한 정도로 함유하고 있다.
그것은 크게는 어원설을 제기하는 사람들의 주관적인 감정이 투사된 결과이기는 하지만, 아리랑 전승 내부에 몸과 삶을 담고 살아온 사람으로서 경험론적인 실감이 거기에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아리랑의 기원설은 대체로 보아 아리랑을 오랜 역사적 유래를 가진 노래로, 그러면서 아리랑을 비창감이 진하게 서린 노래로 부각시키려는 두 가지 경향성을 보여 주고 있다.
전자를 아리랑 기원설의 역사주의, 후자는 비창지향성이라고 부를 수 있다. 물론, 예외는 있으나 그 두 가지 경향성을 함께 고려할 때 아리랑 기원설에는 민족의 역사성 짙은 상흔이 간직되어 있다고 말하여도 좋을 것이다.
그것을 아리랑 기원론이 간직하고 있는 민족의 역사적 원상의식(原傷意識)이라고 바꾸어 말하여도 무방할 듯하다. 아리랑을 푸념·넋두리라고 부를 수 있을 때 아리랑이 역사적 원상을 풀어나가는 양식상의 특색에 대하여 말하게 된다.
아울러, 서러움·애달픔·원한을 말하게 되며 아리랑이 지닌 역사적 원상이 불러일으킬 감정 및 정조를 지적하는 것이 되며, 애원성이라고 하게 되면 역사적 원상의 노래인 아리랑이 지닌 소리로서의 특색을 지적하는 것이 될 것이다.
2. 시형식과 수사
아리랑의 시형식은 기본적으로 2행시, 곧 두 줄 시라고 볼 수 있으며, 가장 간결한 시형식이다. 따라서 아리랑의 시형식은 민요형식의 단순성 매력을 갖추고 있다. 이 경우 여음은 따로 계산하고 뜻 있는 실사로 엮어진 시행만 문제 삼고 있는 것이다.
두 줄 시로서 한 줄이 대체로 3∼5음보 정도로 엮어져 있다. 전체적으로 모두 10음보를 넘지 않는 짧고 간결한 시형식을 갖추고 있다. 당연히 예상되는 중문과 복문 이 외에 단문으로만 된 두 줄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면 아리랑의 단순성은 더욱 강조될 수 있을 것이다.
두 줄 시는 「캐지량」이나 「강강술래」의 한 줄 시에 비하면 양식의 안정도 크다는 장점을 지니게 된다. 그런가 하면 세 줄 시와 네 줄 시에 견주어서 기억하기 좋고 즉흥성을 가미하기 쉽다는 양식상의 특색을 지적할 수 있다.
본질적으로 민요 두 줄 시는 속담이나 속신 등 이른바 ‘민중의 신념’ 또는 ‘민중의 판단’이라고 총칭할 수 있는 ‘문장 구술 전승’과 한 범주에 들거나 아니면 서로 이웃할 수 있는 서술형식상의 속성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팥 심은 데 팥나고 콩심은 데 콩난다.”고 하는 속담이나 “아침 까치가 울면 손님이 오고 저녁 까치가 울면 사람이 죽는다.” 라는 속신 따위는 아리랑의 두 줄 구성과 구별하기가 어렵게 되어 있다.
속신과 속담은 ‘민간 수사’라고 부를 만한 것의 최소 단위이다. 사물을 인지하고 판단하고 하는 데 쓰일 수 있는 민간 수사의 가장 작은 단위이다. 아리랑의 두 줄 구성은 실제로 민간 수사를 총망라하고 있기도 한 것이다.
이 점이 아리랑이 지닌 형식상 또는 수사상의 큰 장점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아리랑의 배후에 속신과 속담 등에 견줄 수 있는 민간 수사가 있다고 하는 것은 아리랑이 각종 민간 수사의 보고임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아리랑은 그 양식이 단순하여 강한 암기성과 즉흥성을 촉발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추고 있음과 함께, 속담이나 속신에 견줄 수 있는 민간 수사의 보고라는 사실이 어울려서 무수한 아리랑 노래말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것은 다양한 노래말의 문체적 원천 내지 동기에 대한 설명이 될 수 있다.
아리랑 노래말이 오늘날 많게는 한 지방의 경우 400∼500가지가 보고되어 있다. 그러나 노래말의 가짓수가 많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으로는 큰 의미가 없다. 요는 그렇게 다양하게 계속 지어지고 있는 바탕, 큰 시문법이나 초구조가 제시되어야 하는 것이다.
아리랑의 두 줄 구성에서 대구법이 가장 우세한 것으로 지적될 수 있다. 그것을 ‘대구적 두 줄 구성’이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경우 대구는 대조와 대비의 대구로 크게 양분될 수 있다. 두 가지 사물 또는 존재의 차이가 상대적으로 강조된 것이 대조의 대구법이라면, 이와는 달리 큰 것들 사이의 공질성이 강조된 것이 대비의 대구법이다.
“앞남산의 실안개는 산허리를 감고요 정든님 두 팔은 내허리를 감는다.”가 전자의 보기라면, “오릉촉단(吳綾蜀緞) 능라조(綾羅調)로 날 감지 말고 대장부 긴긴팔로 날 감아 주게.”는 후자의 보기로 알맞을 것이다.
두 가지 노랫말에서 다 같이 ‘임에 의한 허리감기’는 사람이 충족된 상태를 뜻하고 있다. 이미 충족되어 있는 사람은 ‘임에 의한 허리감기’와 동형동질의 것을 찾아 짝을 맞추고 있고, 이와는 달리 충족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동행이질의 것을 찾아서 짝맞추기를 하고 있음을 쉽게 찾아낼 수가 있다.
이것을 아리랑의 짝맞추기, 정확하게는 아리랑 두 줄 대구의 짝맞추기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짝맞추기에 의해 아리랑은 ‘도시(부)·농어촌(가난)’, 사회계층과 신분계층의 ‘위·아래’, ‘가짐·안 가짐’, ‘밝음·어둠’, ‘잘남·못남’ 등 종횡무진으로 노래부르는 것이다. 그 짝 맞추기에 따라 아리랑은 때로는 밝은 양지의 노래가 되고 때로는 어두운 음지의 노래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짝맞추기 대구법을 기본으로 삼고, 거기에 반복법·말놀음·쌍소리·문답법·독백체 등이 간간이 활용되면서 무수한 변이를 낳게 되고, 오늘날 3,000여 가지가 넘는 노래말이 수집, 보고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 결과 아리랑은 한국인이 말할 수 있는 온갖 말투와 말씨를 총동원한 소리의 소리, 노래의 노래가 될 수 있었다.
3. 장단과 가락
민요·신민요 유행가에 ‘아리랑’이라는 제목이 붙거나 뒷소리에 아리랑이라는 말이 붙는 노래는 매우 많다.
그러나 오늘날 세상에 널리 불리는 민요 가운데 아리랑은 「강원도아리랑」·「정선아리랑」·「밀양아리랑」·「진도아리랑」이라 할 수 있으며, 「서울긴아리랑」·「남도긴아리랑」·「해주아리랑」은 부르는 일이 극히 드물다. 「어랑타령(신고산타령)」·「긴아리」·「자진아리」는 오늘날 아리랑으로 꼽지 않고 있다.
「강원도아리랑」은 강원도 영동지방에서 모내기소리로 불려지는 아라리에서 나온 것으로 강원도자진아라리이다. 이 아리랑은 8분의 10박자로 엇모리장단에 맞으며 엇모리 4장단에 메기고, 엇모리 4장단에 “아리아리 스리스리 아라리요 아리아리 고개로 넘어간다.”하고 뒷소리를 받는다.
선율은 구성음이 미·솔·라·도·레로 되어 있고, 미나 라로 종지하며 미는 작게 떨고 레에서 도로 꺾는 목을 쓰는 메나리토리로 되어 있다. 「강원도아리랑」은 소박하고 구슬픈 느낌을 주어 서울에서 불리는 것보다 강원도 영동지방에서 불리는 것이 훨씬 향토적인 맛이 난다.
「정선아리랑」은 강원도 영서지방에서 모내기소리로 불려지는 강원도 긴아라리를, 촘촘히 엮어 엮음 아라리로 불려지던 것이 세상에 퍼진 것이다.
메기는 소리는 자유리듬으로 촘촘히 노랫말을 엮어가다가 세마치 8장단으로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로 날 넘겨주소.”하고 받는다.
선율은 메나리토리로 되어 있다. 엮지 않는 것은 매우 처량한 느낌을 주며 엮는 것은 노랫말을 빠르게 촘촘히 엮어나가며 감정을 고조시키다가 끝에 높은 소리로 길게 질러내어 감정을 퍼버리며 뒷소리로 느리게 흐느끼는 느낌을 준다.
아리랑은 세상에서 가장 널리 불리던 것으로 서울의 「구조아리랑」에서 나온 것이며, 장단은 세마치로 되어 있으나 흔히 4분의 3박자로 불러 신민요의 리듬으로 부른다. 세마치 8장단을 메기고 8장단을 받는다. 선율은 구성음이 솔·라·도·레·미로 되어 있고 솔이나 도로 마치는 경토리로 되어 있으며, 유창하고 명랑한 느낌을 준다.
조선 말기에 성창하던 「구조아리랑」은 이 아리랑과 장단과 토리가 같으며 곡조가 약간 다를 뿐이다. 「긴아리랑」은 「구조아리랑」과 장단과 토리는 같으나 훨씬 느리고 곡조가 약간 변동되어 있다. 「아롱타령」은 장단과 토리는 「구조아리랑」과 같지만 곡조가 높은 음역에서 부르도록 바뀌어 있다.
「밀양아리랑」은 서울의 「아롱타령」에서 파생된 것이다. 장단은 8분의 9박자 세마치 장단으로 되어 있고 8장단을 메기며 8장단을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에 아리랑 어헐시구 아라리가 났네.” 하고 뒷소리를 받는다. 선율은 경토리와 메나리토리가 뒤섞여 있으며, 매우 경쾌하고 씩씩한 느낌을 준다.
「진도아리랑」은 「남도긴아리랑」을 변창한 것이다. 8분의 9박자 세마치장단으로 되어 있으며, 8장단을 메기고 8장단을 뒷소리로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하고 받는다.
선율은 구성음이 미·라·시·도로 되어 있고 라로 마치며 미에서 세게 떨고, 도에서 시로 꺾고 레보다 낮은 음에서 도·시로 흘러내리는 육자배기토리로 되어 있다. 이 아리랑은 구슬프고 구성진 느낌을 준다. 「남도긴아리랑」은 서울 「구조아리랑」을 육자배기토리로 바꾼 것으로 장단은 세마치장단으로 되어 있다.
4. 다양성과 초역사성
아리랑은 말할 것도 없이 일차적으로 전통민요이다. 따라서 구술과 암기에 의한 전승, 자연적 습득 등과 같은 민속성 외에 지역공동체집단의 소산이라는 민속성을 가지게 되고, 그 집단성은 시대성과 사회성을 내포하게 된다.
“쓰라린 가슴을 움켜 쥐고 백두산 고개로 넘어 간다.”, “감발을 하고서 백두산 넘어 북간도 벌판을 헤매인다.”, “이천만 동포야 어데 있느냐 삼천리 강산만 살아 있네.”, “지금은 압록강 건너는 유랑객이요 삼천리 강산도 잃었구나.”, “36년간 피지 못하던 무궁화꽃은 을유년 8월 15일에 만발하였네.”, “사발그릇 깨어지면 두세 쪽이 나는데 삼팔선이 깨어지면 한덩어리로 뭉친다.”
이와 같이 몇 가지의 노랫말을 나열해 놓는 것만으로도 「아리랑」이 근세의 민족사를 반영하고 있음이 일목에 드러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뗏목꾼은 뗏목꾼대로, 광부들은 광부들대로, 심메마니는 또 그들대로 각기 그들 생활의 애환의 순간순간을 아리랑에 담고 있다. 직업공동체나 사회공동체의 문화적 독자성이 강하게 아리랑에 담기게 되는 것이다. 민족이 위기에 처한 시대에 아리랑은 민족적 동질성을 지탱하는 소리였다.
아리랑은 거시적으로 민족의 독자성에 이바지하였으나, 그보다 좀 작은 규모의 지역공동체이며 이익공동체의 독자성에도 상당한 기여를 한 것이다.
그런 뜻에서 아리랑은 분명히 공동체의 휘장(徽章) 내지 민중의 휘장 노릇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럴 경우 애원성(哀願聲)이나 한탄의 소리인가 하면, 항거요 비판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체념의 하소연인가 하면 강한 삶의 의지의 표백이었고, 모가 난 말싸움인가 하면 익살떨기의 넉살부림이기도 하였다. 구시렁거리는 불만인가 하면 지독한 악담이요 욕이요 쌍소리이기도 하였다.
한마디로 집단과 민중의 휘장이라고 하지만, 아리랑은 이 같은 다양한 목청과 소리투로 그 휘장을 노래한 것이다. 그러나 아리랑은 바로 그것이 지녔던 집단 내지 민중의 휘장이라는 성격으로 말미암아 사회문화인 민요운동을 우리 민요사에서 유일하게 도맡을 수 있었던 것이다.
흙의 민속성에서 사회와 역사의 민속성을 향하여 아리랑은 자신을 확대할 것이다. 아리랑이 근대사를 살게 된 한국인의 사랑을 받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아리랑의 집단성은 앞소리와 뒷소리, 매김소리와 받음소리 등으로 나뉘어 부르는 형식에도 곧잘 드러나 있다. 한데 어울려 일하고 놀이하는 사람들이 그 소리의 가름을 따라 제창이나 윤창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리랑에서 그 집단성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옳은 일이 못 된다. 그것은 동시에 매우 강한 개인성을 갖추고도 있었기 때문이다. 아리랑은 주관성 높은 감정을 자연스럽게 토로하는 서정시이면서 원한과 아픔을 풀이하는 넋두리나 푸념이기도 하였다.
유사 대화체나 독백체가 이 속성을 강하게 뒷받침할 수 있었다. 아리랑은 ‘떼소리’ 또는 ‘무리소리’이면서도 ‘혼자소리’이기도 하다.
절로 한숨 짓듯이, 더운 숨결을 토하듯이, 혹은 매인 중치를 터놓듯이 혼자소리로 부르는 것이 아리랑이다. 소리꾼은 그 혼자소리로 삶을 달래고 애간장을 삭이면서 목숨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혼자 소리 아리랑은 삭임의 소리, 푸는 소리 구실을 한 것이다.
이와 같은 집단성과 개인성은 아리랑이 지닌 또 다른 원심력과 구심력이지만, 그 양면성을 갖추고 있는 데에, 아리랑이 지닌 복합성을 읽게 되는 단서의 하나를 얻게 된다.
아리랑은 결코 단일한 장르의 민요가 아니다. 아리랑은 그 다양한 복합성 때문에 역사의 변화와 사회의 변화 속에서도 살아남는 강한 적응력을 향유할 수 있었다. 그냥 단순히 과거의 화석으로 전해지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근대의 흐름 속에서 그때그때 새로이 새 삶을 얻으며 살아남은 것이다.
한국의 문학사와 예술사에서 단일한 민요의 소재를 들자면 아리랑만큼 질기고 굵은 맥을 지켜온 보기를 구할 수 없다. 그것도 사회와 시대의 변화를 증언하면서 주제사적인 문제까지 더불어 제기하는 소재사의 맥을 구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내일의 한국의 시대, 그리고 사회에서 아리랑의 소재사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예언하기는 힘들다. 다만 소재사의 맥이 더욱 굵어지고 더욱 길게 이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2003년 제32회 유네스코 총회에서 채택된 무형문화유산 보호협약 제2조에서는 "무형문화유산은 관습, 묘사, 표현, 지식 및 기술 및 이와 관련된 기구, 물품, 가공품 및 문화 공간이며, 사회 집단 및 경우에 따라서는 개인이 자기의 문화 유산의 일부로 인정
동 협약에서는 무형문화유산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을 향상시키기 위해 유네스코에 설치된 무형 문화 유산 보호에 관한 정부 간 위원회에 의해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Representative List of the Intangible Cultural Heritage of Humanity)을 작성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제16조). 또한 조약 채택 전에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Masterpieces of the Oral and Intangible Heritage of Humanity)으로 선언된 것은 표에 기재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제31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