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교회(移民敎會)와 영성(靈聖)


09-11-2022(주일 주보)

바울의 비전

바울은 디아스포라 유대인(a Diaspora Jew)입니다.
고향인 유대 땅을 떠나 당시 로마제국에 흩어져 살았던 유대인 가운데 한 명입니다.
곧 바울은 이민자인 것입니다.
바울은 유대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로마 헬라 문화권(the Greco-Roman world)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유대문화와 로마헬라문화 모두에 익숙하면서도 이 두 문화에 대해 비판적인 거리를 두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중간인의 삶으로 인해 바울은 창조적인 비전을 보게 됩니다.

바울의 비전은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의 메시아로 보았던 예수님이 이방인을 포함한 ‘온 세상의 주’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비전은 몇몇 부분에서 예루살렘 중심의 유대계 그리스도인들과 충돌하였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에 소개되는 이방인들의 할례나 식사 규례(Kosher)에 관한 예루살렘 지도자들과의 논쟁이 그 분명한 예입니다.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은 새로 시작된 예수운동을 유대교의 상황에서 이해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유대인이면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기 시작하면서부터 였습니다. (다음 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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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8-2022(주일 주보)

문제는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기 시작하면서부터 였습니다.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은 자연스럽게 새로 예수님을 믿은 이방인들에게 자신들처럼 유대의 관습을 지킬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만큼 초기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의 분파처럼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의 생각에 반대했습니다.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데에 유대인이 되는 조건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의 이러한 생각은 1세기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대단히 혁신적이고 급진적인 생각이었습니다.
바울의 이러한 창조적인 생각은 그가 가진 중간인의 정체성으로부터 나왔습니다.
유대인이지만, 로마헬라문화 속에서 자라고 교육받은 바울은 유대문화에 대한 비판적 거리로부터 이러한 창조적인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바울의 비전은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바울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과 헬라인의 주님이실 뿐만 아니라, 피조물을 포함해 온 세상을 구원하시는 주님입니다.
바울의 종말론은 로마서에 나타나듯이 유대인과 헬라인은 물론, 신음하는 피조물까지도 고대하는 구원(롬 8장)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에서 이야기하는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계 21:5)입니다.
따라서 바울의 교회관을 한 마디로 말하면 ‘세상을 위한 교회’입니다.
교회는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차별없이 불러 모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온 세상의 구원을 향해 힘써 가는 공동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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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5-2022(주일 주보)

이민교회(移民敎會)와 영성(靈性)

미국에서 이민목회를 하면서 ‘이민교회와 그 목회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과 고민의 울타리를 벗어날 수 없다.
왜냐하면 미국에 있는 한인이민교회는 분명 한국교회와 다른데, 그 차이를 이해하고 그에 맞는 목회를 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기 때문이다.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 이민자의 삶을 살았던 바울의 씨름과 영성은 미국에서 한인 이민자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이민교회와 한국교회

미국을 방문한 어느 목사님께서 그가 시무하던 교회의 부목사가 이민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 고전하고 있을 때 “아니, 이민교회 하나 목회 못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라고 핀잔을 주었다고 한다.

한국의 큰 교회에서 다양한 목회 프로그램과 많은 성도들을 관리하던 부목사가 몇 명 안 되는 작은 교회에서 고전하는 것을 이해하기어려웠던 것 같다.

한국교회와 이민교회를 모교회와 지교회의 관계처럼 생각하는 것은 한국에 있는 교회는 신앙의 뿌리와 같고 이민교회는 이 뿌리에서 나와 미국에 자리 잡은 가지와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민교회는 중간자(中間子)로 시작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철학자 파스칼은 사람을 중간자라고 정의 하였다.

첫째는 시간적인 중간자
인간은 괴가와 미래라는 중간 즉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

둘째는 형태적인 중간자
인간은 천사도 아니고 사탄도 아닌 중간자로 존재하고 있다.

셋째는 공간적 중간자
인간은 하늘 위도 아니고 땅 속도 아닌 하늘과 땅 사이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민교회의 구성원들은 미국인도 아니고 한국인도 아닌 중간자로 하루 하루를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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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6-2022(주일 주보)

이민교회의 비전

이민교회의 비전은 바울처럼 ‘세상을 향한 교회’가 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중간인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인 이민교회가 비교적 수월하게 감당할 수 있는 비전입니다.
왜냐하면 이민교회는 문화와 세상을 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실존적으로 깨달은 사람들이 모여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문화와 미국문화의 두 문화 사이를 살아가는 한인이민교회들은 두 문화를 모두 끌어 안는 훈련을 통해 세상 전체를 끌어안는 하나님의 비전을 품고 나아가야 합니다.

이와 더불어 중간인이 가진 ‘비판적 창조성’ 또한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요즘의 한국교회의 모습을 보면 이민교회가 가진 비판적 창조성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요청되는 때인 것 같습니다.
지금의 한국교회는 성장주의의 폐해로 인해 대형화, 물질화, 세속화의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의 이민교회는 그 작은 규모와 한계로 인해 적어도 한국교회가 겪고 있는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조금 더 자유로운 모습을 보입니다.
이민교회들은 자신들의 영세함과 연약함을 부끄럽게 여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연약함을 극복해 대형교회로 성장하려는 맹목적인 목표를 세워서도 안 됩니다.
오히려 이민교회의 연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지혜가 나타나는 진정한 교회상을 세우도록 기도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과 바울이 보여준 ‘약하고자 하는 용기’(courage to be weak)로 대변되는 영성의 모습은 대형화된 한국교회보다 연약함을 자랑하는 이민교회에서 보다 수월하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민교회가 보여 줄 세상을 위한 교회, 연약함의 영성은 한국교회와 미국교회 모두를 건강하게 만들 수 있는 중간인의 사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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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 04 / 2022(대강절 제2주)

말씀을 묵상(默想)하라!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란 하나님(혹은 성령)이 불러 주신 내용을 성경의 저자들이 기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묵상하려면 먼저 성령의 도움을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을 기록하게 하셨던 성령의 감동이 말씀을 읽는 사람에게 임재하면 그 말씀의 깊은 의미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깨달은 후에는 그 말씀을 삶에 적용해야 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창세기 1:1-2).

이 말씀을 읽었을 때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혼돈과 흑암에 하나님의 성령이 임재하신다면 어떤 현상이 일어날 수 있을까?
 
나에게 닥쳐온 혼돈과 흑암이 무엇인가?
심한 독감으로 인한 육체의 질서가 파괴된 상태와 일상생활이 순조롭지 못한 것이구나!
주여, 지금 이곳에 주의 영이 임재하여 창조의 은혜를 만끽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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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 11 / 2022(대강절 제3주)

성경을 기도로 열어라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 7. 15~1669. 10. 4)는 바로크 시대의 네덜란드 화가로 그의 첫 제자인 헤릿 도우(Gerrit Dou. 1613-1675)는 "빛의 화가"라고 하며 그의 작품 “예언자 안나”라는 성화에서 성경을 읽는 하나의 방법을 생각합니다.
이 그림은 누가복음 2장에 나오는 84세의 과부였던 예언자 안나를 모델로 안나의 성경 읽기를 그린 것입니다.
'예언자 안나'라는 그림에서 '도우'가 강조하는 것은 손입니다.
성경을 받쳐 든 손은 ‘기도하는 손’입니다.
성경를 읽고 있는 안나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읽고 있습니다.
빛의 화가 '도우'에게 성경의 뜻이 드러나는 순간은 기도 속에서 성경을 읽을 때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묵상과 지적인 노력만으로 그 뜻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가운데 그 뜻을 보다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때로 성경지식이 풍부한 사람 가운데 성경의 내용이 지식의 차원에 머무르고 그 영적인 깊이가 드러나지 않는 경우는 바로 기도 가운데서 성경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경 말씀을 기도 가운데 가져갈 때 보다 깊은 영적인 의미를 깨닫고 그 의미를 머리에서 마음으로 옮겨갈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성경으로 기도할 때에 말씀을 통해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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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 18 / 2022(대강절 제4주)

성경을 실천하라

렘브란트에게도 성경의 안나를 그려낸 “예언자 안나”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렘브란트의 그림에서는 항상 빛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 그림에서는 빛이 등 뒤에서 와서 성서를 밝힙니다.
이 빛이 비치는 중심에 위치하는 것은 성서와 손입니다.
렘브란트는 안나의 손을 믿기지 않을 만큼 정교한 붓질로 그려냈습니다.
자세히 보면 안나의 손에서 주름과 혈관마저 보일 정도입니다.
여기에서 렘브란트는 성서를 ‘손으로 읽는” 장면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안나의 눈은 뜬 것인지 감은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습니다.
마치 맹인을 위한 점자책을 읽듯이 안나는 손으로 성서를 매만지며 읽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손으로 성서를 읽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그것은 몸으로 읽는다는 의미입니다.
곧 삶에서 실천한다는 의미와 다르지 않습니다.
성서의 뜻은 지적인 노력을 통해서만 이해되거나, 기도를 통해서만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서는 몸으로 읽을 때에 그 뜻이 드러나게 되는 거룩한 책입니다.
성서를 읽는 동안 이해하고 깨닫게 된 것을 온몸으로 삶에서 실천할 때에 성서의 의미는 비로소 완전하게 우리에게 드러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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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5일 성탄주일

성탄 편지
- 이해인

친구여, 알고 계시지요?
사랑하는 그대에게 제가 드릴 성탄 선물은
오래 전부터 가슴에 별이 되어 박힌 예수님의 사랑
그 사랑 안에 꽃피고 열매 맺은 우정의 기쁨과 평화인 것을.
슬픈 이를 위로하고,
미운 이를 용서하며,
우리 모두 누군가의 집이 되어 등불을 밝히고 싶은 성탄절
잊었던 이름들을 기억하고
먼데 있는 이들을 가까이 불러들이며 문을 엽니다.
죄가 많아 숨고 싶은 우리의 가난한 부끄러움도
기도로 봉헌하며 하얀 성탄을 맞이해야겠지요?
자연의 파괴로 앓고 있는 지구와 구원을 갈망하는 인류에게
구세주로 오시는 예수님을 우리 다시 그대에게 드립니다.
일상의 삶 안에서 새로이 태어나는 주님의 뜻을
우리도 성모님처럼 겸손히 받아 안기로 해요.
그 동안 못다 부른 감사의 노래를 함께 부르기로 해요.
친구여, 알고 계시지요?
아기예수의 탄생과 함께 갓 태어난 기쁨과 희망이
제가 그대에게 드리는 아름다운 새해 선물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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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토론하라

렘브란트가 이야기하는 성서의 뜻이 드러나는 방법을 베드로와 바울을 그린 그림에서 살펴봅시다. 원래는 “논쟁하는 두 노인”이라고 제목이 적혀 있지만, 이 그림의 등장인물은 베드로와 바울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작품에서 얼굴이 보이는 백발의 노인이 바울이고, 등을 보이고 있는 단단한 체격의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이 그림에도 역시 빛이 쏟아지고 있는 중심에 성서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 위로 바울과 베드로의 손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듯합니다.

이 그림에서 둘은 성서의 내용에 대해 서로 토론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손가락으로 성서를 가리키며 열심히 무언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도 그저 바울의 이야기만 듣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바울의 말이 끝나기만 기다리고 있는 듯합니다. 베드로는 바울의 이야기가 끝나는 대로 반론을 펼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손을 보십시오. 성경 곳곳에 손가락을 끼워놓고 자신의 주장을 펼칠 성경 구절들을 찾아 놓고 있습니다.

이 그림을 통해 렘브란트는 성서란 공동체로 서로 토론할 책이라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성서는 개인적으로만 묵상하고, 기도하고,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로 함께 질문하고 토론하는 가운데 그 의미를 깨닫게 되는 책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향해 질문하고, 우리의 삶과의 관계성을 끊임없이 묻고, 그 내용을 서로 토론하고 나눌 때에 성경은 비로소 그 의미가 완전히 드러납니다. 우리가 공동체로 함께 말씀을 묵상하고, 성경 공부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성서를 어떻게 읽습니까? 새해에 우리가 성서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기도하고, 몸으로 실천하며, 공동체로 나누고 토의할 때에 성경은 우리 삶을 뒤흔드는 하나님의 말씀 사건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 참고문헌: 김학철, 렘브란트 성서를 그리다 (서울 : 대한기독교서회,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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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교회(移民敎會)와 영성(靈性)

이러한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는 한국의 목회자들이 한국교회의 지교회를 해외에 창설하고, 이민교회 목회자들 가운데 한국에서 유행하는 목회전략을 무분별적으로 모방하려는 분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렇습니까?
이민교회는 한국교회라는 모교회의 지교회에 불과합니까?
이민교회는 미국이라는 새로운 땅에 하나님께서 세워 주신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한국교회가 동북아시아에 위치한 한국에서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목회하듯이, 미국의 이민교회는 북아메리카에 위치한 미국에서 이민자들과 1.5세, 2세를 대상으로 목회하는 교회입니다.

한국교회와 이민교회는 그 문화적인 상황이나 성격이 전혀 다른 교회입니다.
이것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한국교회의 목회를 수출하려는 한국의 교회나, 혹은 성장이라는 단순한 목표를 위해 한국의 목회전략과 목회자를 직수입하려고 하는 미국의 이민교회는 결국 어려움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워 주신 교회에는 그 상황과 문화에 맞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명이 있습니다.
한국교회와 이민교회는 각자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명을 발견해야 합니다.

창조적인 중간인

그렇다면 이민교회가 발견해야 할 사명은 무엇입니까?
이 질문을 숙고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민자들이 가진 삶의 특징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 특징을 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중간인의 삶”입니다.
미국에 사는 한인 이민자들은 한국문화와 미국문화의 ‘중간’(혹은 ‘사이 between’)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가끔 한국을 방문하면, ‘아, 이제 내 생각과 삶의 방식이 한국 사람들과 많이 달라졌구나.’ 하는 것을 절감합니다.
그렇다고 미국에서 미국사람과 똑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도 아닙니다.
미국에서 한국적 신학을 설파했던 이정용 교수는 이러한 이민자의 특수성을 ‘중간인의 삶’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민자는 두 문화의 중간에 끼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양쪽 모두의 문화에 속해 있으면서 동시에 어느 문화에도 완전히 속해 있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중간인은 사실 설움을 많이 경험하는 사람들입니다.
한국을 떠나면서 삶의 뿌리를 옮겨 오는 경험을 거친 후, 이제는 한국의 문화와도 거리가 생겨 생소한 마음의 아픔을 안고 살아갑니다. 미국에서는 여전히 주류에 속하지 못하고, 주변부에 머무르게 됩니다.
1세대 이민자들은 대부분 영어도 수월하지 않고, 힘든 일을 하는 경우들이 많아서 그 고달픔은 배가 됩니다.
게다가 때때로 겪게 되는 인종차별은 이 사회에서 이민자의 위치가 주변부에 있다는 것을 절감하게 합니다.

하지만 이정용 교수는 이러한 중간인의 삶에 설움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중간인이 받은 축복은 ‘비판적 창조성’입니다.
중간인은 양쪽 문화 모두에 속해 있으면서 양쪽 모두에 대해 거리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두 문화를 객관적이고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비판적 거리로부터 창조적인 생각이 가능합니다.
한국과 미국사회의 핵심적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가진 권력과 욕심에 눈이 멀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 때, 이에 대해 바른 말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주변부에서 약하게 살아온 중간인들 입니다.
한국이나 미국 문화가 어떤 특정한 가치와 생각을 편애하며 나아갈 때, 이에 대한 균형을 잡아 줄 수 있는 사람들 또한 양쪽 모두를 알면서도 비판적 창조성을 가진 이민자들입니다.
이러한 이민자들이 가진 실존적인 정체성에서 나오는 ‘비판적 창조성’을 대표적으로 보여 주는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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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영성’은 한국교회에서최근 하나의 유행처럼 논의되고 있습니다.
영성에 대한 많은 책들과 워크샵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반면, 이러한 모습을 견제하는 우려의 목소리 또한 적지 않은 것이 한국교회의 현실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모든 논의의 중심에 영성에 대한 오해가 자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영성을 교회 성장을 위해 유행하는 프로그램처럼 여기는 사람들에게서도, 또한 영성에 대한 위험성을 지적하는 사람들에게서도 기독교영성에 대한 적잖은 오해가 발견됩니다.
이 시간에는 한국교회에 자리하고 있는 ‘기독교영성의 오해’가 무엇인지 살펴보고, 이러한 오해를 넘어서는 성경에 근거한 건강한 영성의 예로 사도 바울의 영성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한국교회가 가진 영성에 대한 오해

한국교회의 영성에 대한 오해를 드러내는 가장 단적인 예는 최근 10월에 이루어진 한국의 주요 교단 총회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한국의 일부 교단은 총회를 통해 공식적으로 영성에 대한 위험성을 지적했습니다.

‘뉴스앤조이’라는 매체는 주요 교단들의 총회 소식을 전하는 기사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보도했습니다.
“예장합동 신학부는 ‘관상기도’가 불건전한 신비주의, 종교다원주의, 이교적 영향이 혼합되어 있어 복음의 순수성을 해칠 위험성이 있다고 보고했다.
예장합신 신학연구위도 ‘관상기도’를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위험하다고 했다.
이승구 교수(합신대)는 ‘관상기도는 기본적으로 가톨릭교회의 정화, 은혜의 주입, 신과의 합일이라는 생각에 뿌리 내리고 있다. 신학적으로 오류가 있는 부분이다.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해 하나님과 교제하는 기도를 배우고 추구해야 한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2011년 10월 6일) 비록 여기에서 논점은 ‘관상기도’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만, 이것은 관상기도로 대표되는 영성 전체에 대한 시각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신비주의, 문화와의 관계, 그리고 가톨릭의 영향입니다. 이 문제들은 직접적으로 한국교회가 가진 영성에 대한 오해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실 이 세 가지 모습들은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태도들입니다. 이제 각각의 요소들이 가진 영성에 대한 오해가 무엇인지 알아 보고, 이에 대해 바울의 영성은 어떤 입장을 취하는지 간단히 살펴 보고자 합니다.

영성의 목표

먼저 신비주의에 얽힌 오해를 살펴봅시다.
이것은 영성의 목표에 대한 오해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신비주의’는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와 계시를 추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직통 계시를 추구할 때, 개인의 영성이 강조되어서 이것을 통제하거나 판단할 근거가 약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자신만의 직통 계시를 주장하면서 이를 통해 자신의 이익을 챙기고 공동체에 해를 끼치기도 합니다. 이러한 위험성으로 인해 기독교 안에는 성경의 계시를 모든 계시의 우월한 근거로 두는 전통이 생겼습니다. 기독교영성 또한 이러한 신비주의적 경향을 배제할 수 없기에, 성경의 계시에 우월성을 두는(심지어는 문자화된 계시인 성경 이외에는 어떠한 계시도 인정하지 않는) 한국교회로서는 영성이 가진 이러한 신비주의적 성향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영성이나 신비주의가 하나님과의 직통 계시나 신비한 경험을 그 목표로 하고 있습니까? 이것은 영성에 대한 첫번째 오해입니다.

사실 일반적인 신앙인들이 이러한 신비한 경험을 추구하지, 영성가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에서 감정적인 확신을 가지길 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뜨겁게 경험하고, 부인할 수 없는 모습으로 하나님을 만나길 바랍니다. 자신이 고민하는 문제에 대해 하나님이 직접적인 음성을 들려 주시길 원합니다. 그래서 신령한 목회자들을 찾아가 특정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를 받기도 합니다. 일반적인 신앙인들이 이러한 부정적인 의미의 신비주의를 추구하는 것에 비해 영성가들이 신비주의라는 이름 하에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와 삶입니다. 영성가들은 스스로 대단한 신비를 경험한 사람들이지만, 자신들의 신비경험을 자랑거리로 내세우지 않습니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이러한 경험이 가르쳐 주는 신앙과 삶에 대한 의미입니다. 그래서 어떤 영성가들은 자신의 삶에서 경험한 신비를 평생토록 묵상한 후에 삶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비로소 그 경험이 가진 의미를 책으로 남깁니다. 영성가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와 변화되는 삶이지, 신비한 경험 자체가 아닙니다. 이러한 경험은 영성적 삶을 시작하게 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곧 경험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아니라, 관계와 삶에 관심을 갖는 것이 영성입니다.

바울의 삶이 이러한 모습을 잘 드러내 줍니다. 바울만큼 신비한 경험을 많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신비한 경험을 했습니다. 이 신비체험은 바울의 삶을 송두리째 뒤바꾸어 놓았습니다. 바울은 세상과 삶을 이 경험의 빛 아래에서 새롭게 해석하기 시작합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바로 이 신비경험이 가르쳐 준 하나님과의 관계와 이것에 뒤따르는 삶에 관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 외에도 많은 신비체험을 한 것이 분명합니다. 다른 사람의 경험인 것처럼 언급하는 삼층천에 올라간 사건도 그 예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의 신비체험을 직접 말하는 것을 극도로 자제합니다. 바울의 삶을 뒤바꾸어 놓은 다메섹 사건도 사도행전을 통해서 겨우 알 수 있을 정도입니다.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신비체험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의 목적은 이러한 경험들이 자신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 하나님에 대해 무엇을 깨닫게 해주었는지를 전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의 영성은 우리가 지향해야 할 영성의 목표를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영성의 목표는 체험을 추구하는 신비주의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와 이에 따르는 삶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영성이 입어야 할 옷

두번째, 한국교회는 영성과 문화의 관계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영성이 입고 있는 옷과 관계된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영성에서 종교다원주의의 위험성을 지적하는 이유는 영성훈련의 모습 가운데 뉴에이지의 명상이라든지, 불교의 수련과 유사한 소위 ‘이교적 요소’가 있어서 종교혼합주의 성격이 가능하다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이것 또한 영성에 대한 오해입니다. 영성훈련에 나오는 명상과 수련 방법들은 기독교의 역사적인 전통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영성가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와 이에 따르는 삶을 증진시켜 주는 방법과 개념을 자신들이 살아가던 문화 속에서 찾았습니다. 당시의 철학, 세계관, 통용되던 훈련들을 영성가들이 자신의 영성이 입어야 할 옷으로 취한 것입니다. 영성가들은 영성의 목표와 방법을 잘 설명해 주는 문화적 개념과 훈련 방법의 창조적 수용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부인할 수 없는 것은, 모든 기독교의 신학과 영성은 당시의 문화의 옷을 입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어떤 영성훈련이 새로운 옷을 입고 기독교의 복음을 묵상한다고 하면, 그것을 혼합주의라는 잣대로 보기보다 그 옷이 내용을 얼마나 잘 담아내고 있는가를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문화의 옷을 입고 자신의 복음과 영성을 설명하는 창조적인 영성가였습니다. 바울은 헬라문화에서 태어나고 교육 받은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서, 이러한 두 문화 속에 살아가는 그의 정체성은 유대 땅에서 시작된 복음을 헬라의 새로운 옷으로 덧입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는 헬라문화 속에서 이방인을 위해 유대교와 복음을 재해석한 신학자였습니다. 바울의 유일한 관심은 자신이 발견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라는 복음을 어떻게 바르게 해석하고 삶에서 실천할 것인지였습니다. 바울은 그 내용을 입히기 위한 문화의 옷을 창조적으로 수용했던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가진 영성에 대한 오해는 속의 내용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그것을 감싸고 있는 옷에만 집중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한국교회는 옷 안에 숨겨진 영성의 의미와 목표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뿐만아니라, 한국교회에 맞는 영성의 옷이 무엇인지 창조적으로 고민해야 할 때입니다.


2012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한 해가 시작되면 저마다 새해의 소망을 마음에 품게 됩니다. 각자 새해에 기대하는 것이 다르겠지만, ‘기쁨이 가득한 한 해’를 꿈꾸는 것은 모두의 공통된 소망이라 생각합니다. 2012년에는 정말 좋은 일만 가득한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분들의 삶 속에 기쁨과 행복이 가득하고, 웃음꽃이 활짝 피어나는 새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쁨과 웃음이 가득한 한 해를 소망하는 것은 대단히 영적인 일이기도 합니다. 사실 기쁨과 웃음은 우리의 신앙생활과 밀접한 관계에 있습니다. 최근 출간된 제임스 마틴(James Martin)의 책, 『천국과 웃음 사이 (Between Heaven and Mirth)』는 기쁨과 웃음이 왜 신앙생활에 중요한지를 유쾌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 책의 내용을 소개해 드리면서 2012년을 웃음과 기쁨을 통해 더욱 깊어지는 신앙을 체험하는 새해로 만드는 방법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신앙은 기쁨이 가득한 것

요즘 미국의 가톨릭계에서 가장 각광 받는 작가 중의 한 명이 제임스 마틴입니다. 마틴은 펜실베니아대 와튼스쿨을 졸업하고 승승장구하던 중에 채워지지 않는 삶의 갈증으로 고민하던 중, 20세기의 영성가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의 영향을 크게 받아 가톨릭 예수회 사제가 된 사람입니다. 그의 책은 영성가들의 지혜를 다양한 삶의 이야기와 함께 풀어내는데, 그 방식이 항상 유머러스한 것이 매력적입니다.

평소에 마틴의 책을 즐겨 읽던 저는 어느 날, 제가 살고 있는 보스톤의 한 대학(Boston College)에서 마틴의 공개강연이 있다는 광고를 보고 한걸음에 달려가게 되었습니다. 큰 강당을 가득 메운 사람들 앞에 나타난 제임스 마틴은 강연의 시작을 몇 가지의 재미있는 이야기들로 풀어나갔습니다. 얼마나 그 이야기가 재미있던지 내가 예수회가 운영하는 대학에서 한 가톨릭 사제에게 강연을 듣고 있다는 것을 송두리째 잊어버릴 정도였습니다. 온 청중을 들었다 놨다 웃긴 후에 제임스 마틴은 강연의 첫번째 포인트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신이 농담만 늘어놓고 강연은 시작하지 않은 것 같지만, 사실 이 농담들이 자신의 강연의 전부라는 것입니다. 신앙은 사실 즐겁고 행복한 것인데, 우리는 신앙을 너무 심각한 것으로 만들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진지하고 심각해 보이는 사람의 신앙은 좋아 보이고, 밝고 발랄해 보이는 사람은 왠지 경박하고 믿음이 없는 사람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앙은 기쁨이 가득한 것입니다. 신앙에는 웃음꽃이 피어나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마틴의 그 날 강연은 결국 오늘 소개하는 책으로 출간되었고, 이 책에서 마틴은 기쁨과 유머가 왜 우리의 신앙생활에 그렇게 중요한 것인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 중의 몇 가지를 여기에 소개해 봅니다.

유머보다 좋은 전도는 없습니다

신앙생활에서 유머가 중요한 이유는 전도의 좋은 방법이 되기 때문이라고 마틴은 말합니다. 기쁨과 행복은 사람들을 그 주변으로 불러 모읍니다. 그 누구도 우울하고 인상을 쓰고 있는 사람의 곁에는 가고 싶어하지 않지만, 밝고 행복한 기운을 뿜어내는 사람 곁에는 다가가 머무르고 싶어합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기쁨과 유머와 웃음이 있기 마련입니다. 교회 공동체에 이러한 웃음과 기쁨이 가득하면 비록 아무도 전도하지 않을지라도 주변의 사람들은 그 공동체에 끌려오게 됩니다.

마틴은 자신의 경험을 하나 소개합니다. 예수회의 사제가 되기 위해서 훈련을 받고 있을 때에 그 지역 예수회의 감독이 마틴이 속한 공동체를 방문합니다. 마틴과 동료 수사들은 그 감독에게 한 가지씩 질문을 할 수 있었습니다. 마틴은 오랫동안 고민하다가 감독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합니다. “감독님, 요즘 사제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이 적은데, 어떻게 하면 그 수를 늘릴 수 있을까요?” 마틴의 질문을 들은 감독은 예상밖의 대답을 했습니다. 그의 간단하면서 지혜로운 대답은 “당신의 사제 직분을 즐겁게 살아가십시오.”였습니다. 기쁨은 사람들을 매료시키고, 결국 하나님께로 이끌어 갑니다. 교회의 가장 최고의 전도방법은 기쁨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유머는 겸손의 표현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듣는 유머 중많은 것들은 자기 자신을 낮출 때에 가능합니다. 경직되고 자신의 것을 움켜쥔 사람들은 유머를 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자신을 솔직히 드러내고, 자신을 웃음거리의 소재로 만들 마음의 여유가 있는 사람은 따뜻한 유머를 구사할 줄 압니다. 그래서 유머는 겸손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고, 겸손한 마음의 표현이 됩니다. 마틴이 소개하는 유머 중에 저를 가장 웃게 만들었던 이야기가 바로 이러한 모습을 잘 보여 줍니다.

뉴욕에 있는 예수회가 운영하는 한 병원에 그 지역의 감독이 방문했습니다. 이 감독은 그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는 은퇴한 예수회 사제들을 모아 놓고 대화를 하였습니다. 감독은 이들 앞에서 자신의 고충을 털어놓았습니다. 뉴욕 지구에 은퇴하고 나이 많은 사제들이 얼마나 많은지, 이들을 관리할 시설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한 사제가 벌떡 일어서며 말했습니다. “감독님, 걱정 마세요. 여기 있는 우리 모두는 최선을 다해서 빨리 죽으려고 합니다.”

그저 웃음을 주는 이야기만이 아니라, 이 유머에선 은퇴한 사제가 가진 삶의 여유와 겸손이 묻어납니다. 삶을 움켜쥐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죽음을 소재로 한 이러한 유머를 도저히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깊은 신뢰와 믿음 속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것에 주저함이 없는 사람은 이러한 유머로 자신의 겸손을 드러낼 줄 압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유머는 겸손을 배우게 하는 좋은 영적 훈련입니다.

유머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게 합니다

마틴이 말하는 ‘기쁨의 영성’(Spirituality of Joy)의 가장 중요한 대목이 바로 이것입니다. 유머와 기쁨은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를 더욱 깊고 풍성하게 만들어 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지나치게 엄격한 분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저 하늘 위에서 우리를 내려다보시고, 우리가 잘못하면 벌을 주시는 엄격하고 멀리 계신 분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에게 우리가 농담을 하거나 따뜻한 대화를 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랑이 많고 따뜻한 분이십니다. 마틴은 이에 덧붙여 장난기 많으신 하나님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유머 감각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따뜻하고 생동감 있는 것으로 만들어 줍니다.

마틴이 소개하는 아빌라의 테레사(St. Teresa of Avila) 이야기를 예로 들어 봅니다. 테레사가 어느날 자신이 타고 있던 나귀에서 떨어져 진흙구덩이에 처박히면서 다리를 다쳤습니다. 테레사는 하나님께 기도 중에 불평하듯이 말합니다. “하나님, 참 더할 나위 없이 안 좋은 때에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셨네요. 왜 이런 일을 내게 일어나게 하셨습니까?” 테레사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이것이 내가 친구들을 대하는 방식이다.” 그러자 테레사가 하나님께 응답합니다. “그렇군요. 하나님께 친구가 많지 않은 이유가 이것이군요.”

영성가 테레사의 유명한 이 이야기는 테레사와 하나님의 관계 속에 들어 있는 유머와 기쁨을 잘 보여 줍니다. 이 이야기에 담긴 테레사의 하나님을 향한 태도를 보십시오. 경직되거나 긴장된 것이 아닌 마치 가까운 가족과 친구를 대하는 듯한 다정함과 장난기가 어려 있습니다. 이러한 테레사를 대하는 하나님 또한 사랑과 장난기가 가득한 모습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오고가는 이러한 모습은 우리의 신앙생활을 더욱 깊은 차원으로 이끌어 줍니다. 우리의 기도는 내면의 깊은 감정들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장소가 되고, 그 속에서 경험하는 기쁨과 친근함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더욱 친밀하고 깊은 단계로 이끌게 됩니다.

기쁨의 새해를 만드십시오

16세기의 영성가 필립 네리(St. Philip Neri)는 “기쁨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선물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기쁨의 원천이시고, 우리가 삶에서 누리는 기쁨은 그것의 원천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선물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삶에서 경험하는 기쁨은 다른 사람을 매료시켜 결국은 기쁨의 원천이신 하나님께로 이끌어 가게 되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겸손함이 이 기쁨을 경험하게 하며, 이러한 기쁨은 결국 그 원천이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게 하는 매개체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쁨이 가득한 새해를 만드는 것은 우리 모두의 소망만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영적인 삶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권고합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살전 5:16). 2012년 새해는 이러한 해가 되어야겠습니다. 항상 기뻐하는 해, 웃음꽃이 가득한 한 해!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살전 5:18)입니다.

* 참고문헌

James Martin, Between Heaven and Mirth: Why Joy, Humor, and Laughter Are at the Heart of the Spiritual Life (New York: HarperOne, 2011)


새해를 시작하면서 기독교인들이 다짐하는 것들 중에 공통적인 것은 “성경 읽기”라고 하겠습니다. 새해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 많이 읽고 그 안에서 신앙의 성숙을 다지고자 하는 결심을 많이 하게 됩니다. 오늘은 이러한 새해의 결심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책을 한 권 소개하고자 합니다. 한 신약성서 학자가 쓴 “렘브란트, 성서를 그리다”라는 책입니다. 이 책은 화가 렘브란트가 그린 성화들을 묵상하면서 렘브란트가 어떻게 성서를 해석하여 성서 속의 장면을 그의 그림 속에 그려냈는가를 연구한 책입니다. 오늘은 이 책의 내용 가운데 “성서의 뜻이 드러나는 법”이라는 장을 살펴보면서 우리의 성서읽기가 어떠해야 할지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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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와 영성

사람은 저마다 마음 속에 분노를 품고 삽니다.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에 대한 분노, 나를 이용하고 저버린 조직에 대한 분노, 내가 변화시킬 수 없는 답답한 상황에 대한 분노, 그리고 이 모든 것에 나약하며 스스로 받아들이기 어렵고 싫은 모습을 가진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가 때로 우리의 마음을 소용돌이치게 만듭니다. 우리가 내면에서 경험하는 이러한 분노를 이해하고, 이것을 잘 다루는 것은 우리의 정신건강에 필수적일 뿐만 아니라 영성형성을 위해서도 중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분노는 결국 하나님에 대한 분노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에 대해 분노할 수 있느냐고 비록 인정하고 싶지 않을지라도 일상에서 경험하는 분노는 이러한 일을 일어나게 허락하신 하나님에 대한 원망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과 삶에 이렇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분노의 문제를 어떻게 다룰 수 있을 것인가? “분노와 영성”에 대해 이 시간 함께 생각해봅시다..

분노의 긍정적인 역할

캐슬린 그라이더(Kathleen Greider)라는 목회상담학자는 분노를 다룰 때에 이것이 가진 긍정적인 역할을 먼저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우리는 흔히 분노를 부정적인 어떤 것으로 생각하지만, 분노에는 우리를 위한 긍정적인 모습이 많다고 그라이더는 말합니다. 분노는 먼저 삶의 에너지와 활력을 주는 역할을 합니다. 분노의 모습 중의 하나가 공격성(aggression)입니다. 우리에게 어느 정도의 공격성이 없다면 삶은 수동적이고, 우울하며, 가라앉은 모습으로 일관될 수 있습니다. 삶에 활력이 넘칠 때는 우리가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도전하고 성취해 갈 때입니다. 이러한 도전정신은 인간이 가진 기본적인 성향 중의 하나인 공격성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분노의 또 다른 긍정적인 모습은 상처에 대한 아픔을 치유하는 기능입니다. 우리가 성인이 아니고서야 일반적으로 분노하지 않고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나, 조직, 환경에 대해서 충분히 불평하고 분노한 후에야 우리 안에 있는 독이 밖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분노하고 불평한 사람만이 용서하고 치유하는 과정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분노에는 불의에 대한 정당한 분노가 있습니다. 정당한 분노는 세상의 정의와 공평함을 세우는 데 필수적인 요소가 됩니다.

분노가 가진 이러한 긍정적인 역할에도 불구하고, 어떤 분노가 오랫동안 지속되면 이것은 우리에게 부정적인 기능을 수행하며 우리의 정신건강과 영성을 해치게 됩니다. 독자 여러분에게는 최근 자신을 가장 힘들고 분노하게 한 사건이 있습니까? 이 분노 속에서 치를 떠는 동안 온몸의 뼈가 녹아내리는 것 같은 경험을 하지 않았습니까? 스캇 펙(Scott Peck)은 “분노란 결국 자신의 뼈를 갉아 먹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분노로 피해를 받는 사람은 내 분노의 대상이 아니라, 결국은 자기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이렇게 분노하게 된 것만으로도 억울한 일인데, 분노하는 동안 자기 자신을 상하게 한다면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지속되는 분노가 우리를 상하게 할 때, 우리는 이 분노의 문제를 잘 다루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분노의 치유는 어떻게 가능할까요?

분노의 치유

분노를 치유하는 첫번째 단계는 나를 분노하게 한 대상에 대해 정당한 비판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분노는 격정적이고 감정적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분노가 감정적으로만 치우칠 때, 우리는 분노의 의미를 잘 모르게 될 경우가 많습니다. 분노의 대상에 대해 정당한 비판을 하는 것은 나의 분노를 이해하는 과정입니다.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것입니다. 정당하게 비판하는 동안 왜 내가 분노하게 되었는지, 무엇이 나를 힘들게 하였는지 이해하게 됩니다.

특별히 이러한 정당한 비판은 나의 상처와 대면하도록 만들어 줍니다. 우리는 자신을 분노하게 만든 사람이나 사건을 대면하는 것을 피하려고 합니다. 그 일이나 사람에 대해서 말도 꺼내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를 상처받게 한 그 사람을 다시 마주치거나 상처받았던 일과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되면, 우리의 분노는 여지 없이 다시 폭발하게 됩니다. 분노는 피하거나 미룬다고 저절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분노하게 된 대상에 대해 정당한 비판을 한다는 것은 나의 분노와 상처를 미루지 않고 대면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정당한 비판은 우리에게 정당하게 분노할 기회를 제공합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우리는 충분히 불평하고 분노한 후에야 치유될 수 있습니다. 내가 겪은 일에 대해 그 사람이 잘못했다, 내가 억울한 일을 당하였다고 정당하게 분노한 후에야 우리의 가슴 속에서 이 아픔의 감정을 내보낼 수 있게 됩니다. 이제 이렇게 분노의 의미를 이해하고, 자신의 분노 속에 숨은 상처를 대면하고, 정당한 비판을 통해 이 감정을 내보낸 사람은 치유를 위한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은 용서입니다.


『오두막』이라는 소설을 보면 자신의 딸을 납치 살해한 범인을 용서하기를 촉구하는 하나님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주인공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용서하길 바란다. 용서란 너를 지배하는 것으로부터 너 자신을 해방시키는 일이야.” 용서는 용서받게 된 대상보다 용서하는 사람 자신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치는 행위입니다. 용서는 결국 자신의 뼈를 갉아먹는 숨막히는 상황에서 자신을 해방시키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용서할 때 우리의 분노가 치유됩니다.

하나님과 함께 춤추기

분노의 문제에 있어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과의 화해입니다. 우리가 삶에서 경험한 분노는 결국 이러한 일을 일어나게 허락하신 하나님에 대한 원망을 불러일으키고, 곧바로 영적인 침체와 시험으로 이어집니다. 헨리 나우웬은 원망을 ‘차가운 분노’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차가운 분노를 치유하기 위해 헨리 나우웬은 한 조각상을 묵상해 보라고 권고합니다. 안토니오 카노바의 <춤추는 여인>(1809-1812년경)이라는 작품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조각가가 이 작품을 처음 만들고 있을 때의 상황을 상상해 보라고 합니다. 커다란 돌덩이가 한 조각 한 조각 떨어져 나가면서 점차 춤추는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으로 변해 갑니다. 영성형성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의 돌덩이를 깎아서 ‘원망의 돌조각을 파내시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라고 헨리 나우웬은 말합니다.

삶이란 이렇게 깎아낸 빈 공간 속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춤을 추는 것입니다. 춤의 신비는 그 안에 모든 발자국이 있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느리게,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격정적이게. 이 모든 발자국이 모여 하나의 아름다운 춤이 됩니다. 삶에도 이렇게 다양한 발자국이 있습니다. 때로는 슬프고, 때로는 기뻐하며, 때로는 분노하고, 때로는 행복해합니다. 이 모든 삶의 발자국이 모여 삶이라는 아름다운 춤을 만들어 갑니다. 우리의 과제는 이 모든 발자국을 인도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삶이라는 춤을 추는 것입니다.

삶이란 결국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롬 8:28)을 신뢰하며, 이 하나님과 더불어 함께 추는 춤입니다. 삶에 대한 이러한 신비를 깨달은 사람은 원망을 넘어서 감사로 나아가게 됩니다. “삶의 모든 것이 은혜”라는 고백이 우리의 분노를 감사로 변하게 만듭니다. 감사는 우리의 모든 분노를 치유합니다.

* 참고문헌

Kathleen Greider, Reckoning With Aggression (Louisville: WJK, 1997)

스캇 펙, 끝나지 않은 여행 (서울: 열음사, 2007)

윌리엄 폴 영, 오두막 (파주: 세계사, 2009)

헨리 나우웬, 두려움에서 사랑으로 (서울: 두란노, 2011)

화평의 영성

얼마 전 한 이민교회를 다녀왔습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던 교회에서 어려움을 겪다가 끝내는 그 교회에서 갈라져 나와 이제 막 새롭게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개척교회였습니다. 교인들은 그 전에 있던 교회에서 받았던 상처 때문에 아직도 많이 힘들어 하는 눈치였습니다. 이런 모습은 이민교회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민교회가 겪고 있는 수많은 문제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쉽게 교회가 갈라지고 분열되는 모습입니다. 아마도 이민자들이 겪고 있는 삶의 고달픔 때문인지, 이민교회는 이민자의 삶의 아픔들이 쉽게 표면화되는 장소이고, 이 표출된 아픔들로 인해 생기는 분쟁을 해결할 능력과 인내심이 때로 부족해 보입니다. 서로 다른 생각들과 오해들 때문에 서로를 비난하다가, 그 결과는 교회가 쉽게 갈라지고 나뉘어지는 모습입니다.

오늘 ‘영성가 이야기’에서는 이러한 이민교회의 모습을 묵상하며, 바울의 영성이 주는 통찰력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교회 안에서 약한 자나 강한 자나 하나의 예배공동체로 설 것을 촉구합니다. 이 평범하게 들리는 말에는 엄청난 힘이 담겨 있습니다. 바울은 이 주장을 쉽게 하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모든 상황을 깊이 숙고하고, 어느 무리에도 편들지 않으면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원하시는 뜻을 분명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살펴 볼 본문은 로마서 14장과 15장의 말씀입니다. 먼저 본문을 들여다 보기 전에 이 본문을 이해하기 위한 상황을 잠시 소개해야 하겠습니다.

로마에 돌아온 유대계 그리스도인들

초기 기독교는 아마도 유대교의 한 부분처럼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유대인이셨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대부분 유대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에 세워진 교회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로마교회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가운데 예수를 주로 고백했던 사람들, 곧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을 중심으로 새로 예수를 믿게 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섞여 있는 형태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로마교회에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로마의 황제는 유대인들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를 종종 보이곤 했는데, 대표적으로 황제 글라우디오는 49년에 발표한 칙령을 통해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을 모두 추방하였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글라우디오 황제 때 유대인들 사이에 ‘크레스투스’(Chrestus)와 관계된 충돌이 잦았는데, 이것이 황제의 심기를 거스른 것이었습니다. 학자들은 아마도 ‘크레스투스’가 ‘그리스도’(Christ)를 의미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곧 유대인들 사이에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계 그리스도인들과 전통적인 유대인들 사이에 논쟁과 충돌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칙령의 결과로 모든 유대인들이 로마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바울이 고린도에서 만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행 18:2)도 이때에 로마에서 쫓겨난 유대인이었습니다.

문제는 글라우디오 황제가 54년에 죽으면서 생기게 됩니다. 황제가 죽자 추방당했던 유대인들이 다시 로마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5년 동안 로마교회는 쫓겨난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의 자리를 대신해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지도자의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5년간 로마교회는 이방인 그리스도인 중심의 교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글라우디오 사후 로마교회에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돌아오게 되자, 긴장과 갈등이 조성됩니다. 갈등의 요소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5년간 성장해온 이방인 그리스도인과 다시 돌아온 유대계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서로 화합하고 지도력을 나누는가의 문제입니다. 두번째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로 유대인의 관습에 우호적인 유대계 그리스도인들과 이러한 문제에 자유로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바울은 로마에 있는 교회에 편지를 보내게 됩니다. 바울도 익히 이 두 무리의 사람들이 서로 불편한 관계에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제 바울은 유대계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해 로마서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루게 됩니다.

약한 자와 강한 자

바울은 로마서 14장과 15장에서 로마교회에서 골머리를 앓고 있었던 약한 자들과 강한 자들의 분쟁을 다룹니다. 바울이 의미하는 약한 자는 유대인의 관습에 매여 있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를 누리고 있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약한 자들로 바울은 채식주의자(롬 14:2)와 ‘날을 중히 여기는 자’(롬 14:5)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음식에 대해서 특별한 규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고기는 적절한 방식으로 도축되고 손질되어야 하고, 적절한 방법으로 요리가 되어야 하며, 적절한 그릇에 담겨야 하는 정결예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로마에 만연한 우상에게 바쳤던 고기는 절대로 먹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아직도 유대의 음식규정에 대해 호의적이었던 사람들은 어떤 고기를 먹을 때 이것이 먹기에 적절한 것인지 의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고기를 먹지 않는 채식주의자로 돌아선 것입니다. ‘날을 중히 여기는 자’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여전히 유대의 절기들을 중히 여겨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약한 자들은 모두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아직도 유대의 율법과 관습에 매여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에 반해 강한 자는 바울처럼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를 누리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약한 자와 강한 자를 구분하는 데 있어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로 나누어 표현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애매하게 보이는 약한 자와 강한 자라는 두루뭉술한 말로 로마교회의 나누어진 무리를 표현합니다. 이것은 아마도 바울의 세심한 배려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약한 자라고 해서 모두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만 있을 것도 아니고, 이방인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유대의 관습에 호의적인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약한 자를 유대인 그리스도인으로, 강한 자를 이방인 그리스도인으로 구분해 버리면, 가뜩이나 두 무리 사이에 긴장이 있는 판에 둘 사이의 갈등을 표면화시켜 긴장관계를 더욱 심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약한 자와 강한 자라는 모호한 표현으로 조심스럽게 로마교회 내에서 갈등을 겪고 있는 두 무리의 문제에 접근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의 예배공동체

바울이 이 문제를 다루는 데에 있어서 위대한 점은 어느 한 쪽의 편을 들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이 주목하는 것은 누가 옳다, 그르다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를 대하는 ‘태도’에 관한 것입니다. 바울이 두 무리 모두에게 권하는 태도는 세 가지의 모습입니다. 첫째, 두 무리 모두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것임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롬 14:6). 약한 자들도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것이고, 자유를 누리는 강한 자도 모두 하나님을 위해서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할 때 서로를 존중할 수 있게 됩니다. 둘째,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14:15). 아무리 자신이 하는 행동이 하나님을 위한 것일지라도 이것이 다른 사람들을 힘들게 할 때에는 자제할 줄 아는 배려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서로 배려하는 마음에서 이루는 평화와 기쁨이 그 핵심이기 때문입니다(롬 14:17, 19). 마지막으로 바울은 그리스도처럼 서로 용납하라고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롬 15:7). 그리스도께서 아직 죄인이었던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실 정도로 우리를 받으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를 그렇게 용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엄청난 사랑과 용서를 받은 빚진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나와 생각이 다른 그 무리를 위해서도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셨기에, 사랑에 빚진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그들을 받아들이고 사랑해야 함이 마땅합니다.

바울이 이야기하는 약한 자와 강한 자에 대한 이 모든 조언의 목표는 하나입니다.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롬 15:6). 곧 하나의 예배공동체입니다. 약한 자나 강한 자나 신앙의 색깔이 어떠하든지, 삶에 어떤 아픔이 있든지, 생각의 차이가 어떠하든지, 모두가 하나 되어 하나의 예배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구속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강조하는 이러한 ‘화평의 영성’은 오늘의 이민교회가 추구해야 할 중요한 영성의 모습입니다.

얼마 전 방문했던 갈라져 나온 이민교회를 보며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그 교인들이 겪었던 마음의 상처가 많이 안쓰러웠습니다. 새로 시작한 그 개척교회에도 하나님이 주시는 사명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픔과 상처를 넘어서 하나님이 그 교회에 주시는 사명을 발견하고 나아갈 수 있기를 기도하고 왔습니다. 하지만 현재 갈등 속에 있는 교회가 있다면 오늘 바울이 들려 준 이야기를 깊이 가슴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교회 내에 갈등이 있다고 교회를 나가 새로운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 능사는 아닐 것입니다. 갈등과 분쟁 속에 있는 교회는 바울이 조언하는 ‘하나의 예배공동체를 이루라’는 조언을 분별하며 숙고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결국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롬 15:17)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모든 분쟁과 갈등을 넘어서 성령의 능력을 통해 드러나는 평화와 기쁨이 넘치는 하나의 예배공동체를 이룰 때에 우리는 그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묵상하며, 바울의 영성이 주는 통찰력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교회 안에서 약한 자나 강한 자나 하나의 예배공동체로 설 것을 촉구합니다. 이 평범하게 들리는 말에는 엄청난 힘이 담겨 있습니다. 바울은 이 주장을 쉽게 하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모든 상황을 깊이 숙고하고, 어느 무리에도 편들지 않으면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원하시는 뜻을 분명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살펴 볼 본문은 로마서 14장과 15장의 말씀입니다. 먼저 본문을 들여다 보기 전에 이 본문을 이해하기 위한 상황을 잠시 소개해야 하겠습니다.

로마에 돌아온 유대계 그리스도인들

초기 기독교는 아마도 유대교의 한 부분처럼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유대인이셨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대부분 유대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에 세워진 교회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로마교회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가운데 예수를 주로 고백했던 사람들, 곧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을 중심으로 새로 예수를 믿게 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섞여 있는 형태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로마교회에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로마의 황제는 유대인들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를 종종 보이곤 했는데, 대표적으로 황제 글라우디오는 49년에 발표한 칙령을 통해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을 모두 추방하였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글라우디오 황제 때 유대인들 사이에 ‘크레스투스’(Chrestus)와 관계된 충돌이 잦았는데, 이것이 황제의 심기를 거스른 것이었습니다. 학자들은 아마도 ‘크레스투스’가 ‘그리스도’(Christ)를 의미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곧 유대인들 사이에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계 그리스도인들과 전통적인 유대인들 사이에 논쟁과 충돌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칙령의 결과로 모든 유대인들이 로마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바울이 고린도에서 만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행 18:2)도 이때에 로마에서 쫓겨난 유대인이었습니다.

문제는 글라우디오 황제가 54년에 죽으면서 생기게 됩니다. 황제가 죽자 추방당했던 유대인들이 다시 로마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5년 동안 로마교회는 쫓겨난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의 자리를 대신해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지도자의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5년간 로마교회는 이방인 그리스도인 중심의 교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글라우디오 사후 로마교회에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돌아오게 되자, 긴장과 갈등이 조성됩니다. 갈등의 요소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5년간 성장해온 이방인 그리스도인과 다시 돌아온 유대계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서로 화합하고 지도력을 나누는가의 문제입니다. 두번째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로 유대인의 관습에 우호적인 유대계 그리스도인들과 이러한 문제에 자유로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바울은 로마에 있는 교회에 편지를 보내게 됩니다. 바울도 익히 이 두 무리의 사람들이 서로 불편한 관계에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제 바울은 유대계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해 로마서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루게 됩니다.

약한 자와 강한 자

바울은 로마서 14장과 15장에서 로마교회에서 골머리를 앓고 있었던 약한 자들과 강한 자들의 분쟁을 다룹니다. 바울이 의미하는 약한 자는 유대인의 관습에 매여 있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를 누리고 있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약한 자들로 바울은 채식주의자(롬 14:2)와 ‘날을 중히 여기는 자’(롬 14:5)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음식에 대해서 특별한 규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고기는 적절한 방식으로 도축되고 손질되어야 하고, 적절한 방법으로 요리가 되어야 하며, 적절한 그릇에 담겨야 하는 정결예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로마에 만연한 우상에게 바쳤던 고기는 절대로 먹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아직도 유대의 음식규정에 대해 호의적이었던 사람들은 어떤 고기를 먹을 때 이것이 먹기에 적절한 것인지 의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고기를 먹지 않는 채식주의자로 돌아선 것입니다. ‘날을 중히 여기는 자’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여전히 유대의 절기들을 중히 여겨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약한 자들은 모두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아직도 유대의 율법과 관습에 매여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에 반해 강한 자는 바울처럼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를 누리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약한 자와 강한 자를 구분하는 데 있어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로 나누어 표현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애매하게 보이는 약한 자와 강한 자라는 두루뭉술한 말로 로마교회의 나누어진 무리를 표현합니다. 이것은 아마도 바울의 세심한 배려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약한 자라고 해서 모두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만 있을 것도 아니고, 이방인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유대의 관습에 호의적인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약한 자를 유대인 그리스도인으로, 강한 자를 이방인 그리스도인으로 구분해 버리면, 가뜩이나 두 무리 사이에 긴장이 있는 판에 둘 사이의 갈등을 표면화시켜 긴장관계를 더욱 심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약한 자와 강한 자라는 모호한 표현으로 조심스럽게 로마교회 내에서 갈등을 겪고 있는 두 무리의 문제에 접근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의 예배공동체

바울이 이 문제를 다루는 데에 있어서 위대한 점은 어느 한 쪽의 편을 들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이 주목하는 것은 누가 옳다, 그르다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를 대하는 ‘태도’에 관한 것입니다. 바울이 두 무리 모두에게 권하는 태도는 세 가지의 모습입니다. 첫째, 두 무리 모두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것임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롬 14:6). 약한 자들도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것이고, 자유를 누리는 강한 자도 모두 하나님을 위해서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할 때 서로를 존중할 수 있게 됩니다. 둘째,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14:15). 아무리 자신이 하는 행동이 하나님을 위한 것일지라도 이것이 다른 사람들을 힘들게 할 때에는 자제할 줄 아는 배려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서로 배려하는 마음에서 이루는 평화와 기쁨이 그 핵심이기 때문입니다(롬 14:17, 19). 마지막으로 바울은 그리스도처럼 서로 용납하라고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롬 15:7). 그리스도께서 아직 죄인이었던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실 정도로 우리를 받으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를 그렇게 용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엄청난 사랑과 용서를 받은 빚진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나와 생각이 다른 그 무리를 위해서도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셨기에, 사랑에 빚진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그들을 받아들이고 사랑해야 함이 마땅합니다.

바울이 이야기하는 약한 자와 강한 자에 대한 이 모든 조언의 목표는 하나입니다.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롬 15:6). 곧 하나의 예배공동체입니다. 약한 자나 강한 자나 신앙의 색깔이 어떠하든지, 삶에 어떤 아픔이 있든지, 생각의 차이가 어떠하든지, 모두가 하나 되어 하나의 예배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구속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강조하는 이러한 ‘화평의 영성’은 오늘의 이민교회가 추구해야 할 중요한 영성의 모습입니다.

얼마 전 방문했던 갈라져 나온 이민교회를 보며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그 교인들이 겪었던 마음의 상처가 많이 안쓰러웠습니다. 새로 시작한 그 개척교회에도 하나님이 주시는 사명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픔과 상처를 넘어서 하나님이 그 교회에 주시는 사명을 발견하고 나아갈 수 있기를 기도하고 왔습니다. 하지만 현재 갈등 속에 있는 교회가 있다면 오늘 바울이 들려 준 이야기를 깊이 가슴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교회 내에 갈등이 있다고 교회를 나가 새로운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 능사는 아닐 것입니다. 갈등과 분쟁 속에 있는 교회는 바울이 조언하는 ‘하나의 예배공동체를 이루라’는 조언을 분별하며 숙고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결국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롬 15:17)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모든 분쟁과 갈등을 넘어서 성령의 능력을 통해 드러나는 평화와 기쁨이 넘치는 하나의 예배공동체를 이룰 때에 우리는 그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얼마 전 한 이민교회를 다녀왔습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던 교회에서 어려움을 겪다가 끝내는 그 교회에서 갈라져 나와 이제 막 새롭게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개척교회였습니다. 교인들은 그 전에 있던 교회에서 받았던 상처 때문에 아직도 많이 힘들어 하는 눈치였습니다. 이런 모습은 이민교회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민교회가 겪고 있는 수많은 문제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쉽게 교회가 갈라지고 분열되는 모습입니다. 아마도 이민자들이 겪고 있는 삶의 고달픔 때문인지, 이민교회는 이민자의 삶의 아픔들이 쉽게 표면화되는 장소이고, 이 표출된 아픔들로 인해 생기는 분쟁을 해결할 능력과 인내심이 때로 부족해 보입니다. 서로 다른 생각들과 오해들 때문에 서로를 비난하다가, 그 결과는 교회가 쉽게 갈라지고 나뉘어지는 모습입니다.

오늘 ‘영성가 이야기’에서는 이러한 이민교회의 모습을 묵상하며, 바울의 영성이 주는 통찰력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교회 안에서 약한 자나 강한 자나 하나의 예배공동체로 설 것을 촉구합니다. 이 평범하게 들리는 말에는 엄청난 힘이 담겨 있습니다. 바울은 이 주장을 쉽게 하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모든 상황을 깊이 숙고하고, 어느 무리에도 편들지 않으면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원하시는 뜻을 분명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살펴 볼 본문은 로마서 14장과 15장의 말씀입니다. 먼저 본문을 들여다 보기 전에 이 본문을 이해하기 위한 상황을 잠시 소개해야 하겠습니다.

로마에 돌아온 유대계 그리스도인들

초기 기독교는 아마도 유대교의 한 부분처럼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유대인이셨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대부분 유대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에 세워진 교회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로마교회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가운데 예수를 주로 고백했던 사람들, 곧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을 중심으로 새로 예수를 믿게 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섞여 있는 형태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로마교회에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로마의 황제는 유대인들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를 종종 보이곤 했는데, 대표적으로 황제 글라우디오는 49년에 발표한 칙령을 통해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을 모두 추방하였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글라우디오 황제 때 유대인들 사이에 ‘크레스투스’(Chrestus)와 관계된 충돌이 잦았는데, 이것이 황제의 심기를 거스른 것이었습니다. 학자들은 아마도 ‘크레스투스’가 ‘그리스도’(Christ)를 의미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곧 유대인들 사이에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계 그리스도인들과 전통적인 유대인들 사이에 논쟁과 충돌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칙령의 결과로 모든 유대인들이 로마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바울이 고린도에서 만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행 18:2)도 이때에 로마에서 쫓겨난 유대인이었습니다.

문제는 글라우디오 황제가 54년에 죽으면서 생기게 됩니다. 황제가 죽자 추방당했던 유대인들이 다시 로마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5년 동안 로마교회는 쫓겨난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의 자리를 대신해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지도자의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5년간 로마교회는 이방인 그리스도인 중심의 교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글라우디오 사후 로마교회에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돌아오게 되자, 긴장과 갈등이 조성됩니다. 갈등의 요소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5년간 성장해온 이방인 그리스도인과 다시 돌아온 유대계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서로 화합하고 지도력을 나누는가의 문제입니다. 두번째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로 유대인의 관습에 우호적인 유대계 그리스도인들과 이러한 문제에 자유로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바울은 로마에 있는 교회에 편지를 보내게 됩니다. 바울도 익히 이 두 무리의 사람들이 서로 불편한 관계에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제 바울은 유대계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해 로마서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루게 됩니다.

약한 자와 강한 자

바울은 로마서 14장과 15장에서 로마교회에서 골머리를 앓고 있었던 약한 자들과 강한 자들의 분쟁을 다룹니다. 바울이 의미하는 약한 자는 유대인의 관습에 매여 있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를 누리고 있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약한 자들로 바울은 채식주의자(롬 14:2)와 ‘날을 중히 여기는 자’(롬 14:5)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음식에 대해서 특별한 규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고기는 적절한 방식으로 도축되고 손질되어야 하고, 적절한 방법으로 요리가 되어야 하며, 적절한 그릇에 담겨야 하는 정결예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로마에 만연한 우상에게 바쳤던 고기는 절대로 먹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아직도 유대의 음식규정에 대해 호의적이었던 사람들은 어떤 고기를 먹을 때 이것이 먹기에 적절한 것인지 의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고기를 먹지 않는 채식주의자로 돌아선 것입니다. ‘날을 중히 여기는 자’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여전히 유대의 절기들을 중히 여겨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약한 자들은 모두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아직도 유대의 율법과 관습에 매여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에 반해 강한 자는 바울처럼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를 누리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약한 자와 강한 자를 구분하는 데 있어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로 나누어 표현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애매하게 보이는 약한 자와 강한 자라는 두루뭉술한 말로 로마교회의 나누어진 무리를 표현합니다. 이것은 아마도 바울의 세심한 배려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약한 자라고 해서 모두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만 있을 것도 아니고, 이방인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유대의 관습에 호의적인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약한 자를 유대인 그리스도인으로, 강한 자를 이방인 그리스도인으로 구분해 버리면, 가뜩이나 두 무리 사이에 긴장이 있는 판에 둘 사이의 갈등을 표면화시켜 긴장관계를 더욱 심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약한 자와 강한 자라는 모호한 표현으로 조심스럽게 로마교회 내에서 갈등을 겪고 있는 두 무리의 문제에 접근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의 예배공동체

바울이 이 문제를 다루는 데에 있어서 위대한 점은 어느 한 쪽의 편을 들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이 주목하는 것은 누가 옳다, 그르다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를 대하는 ‘태도’에 관한 것입니다. 바울이 두 무리 모두에게 권하는 태도는 세 가지의 모습입니다. 첫째, 두 무리 모두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것임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롬 14:6). 약한 자들도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것이고, 자유를 누리는 강한 자도 모두 하나님을 위해서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할 때 서로를 존중할 수 있게 됩니다. 둘째,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14:15). 아무리 자신이 하는 행동이 하나님을 위한 것일지라도 이것이 다른 사람들을 힘들게 할 때에는 자제할 줄 아는 배려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서로 배려하는 마음에서 이루는 평화와 기쁨이 그 핵심이기 때문입니다(롬 14:17, 19). 마지막으로 바울은 그리스도처럼 서로 용납하라고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롬 15:7). 그리스도께서 아직 죄인이었던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실 정도로 우리를 받으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를 그렇게 용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엄청난 사랑과 용서를 받은 빚진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나와 생각이 다른 그 무리를 위해서도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셨기에, 사랑에 빚진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그들을 받아들이고 사랑해야 함이 마땅합니다.

바울이 이야기하는 약한 자와 강한 자에 대한 이 모든 조언의 목표는 하나입니다.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롬 15:6). 곧 하나의 예배공동체입니다. 약한 자나 강한 자나 신앙의 색깔이 어떠하든지, 삶에 어떤 아픔이 있든지, 생각의 차이가 어떠하든지, 모두가 하나 되어 하나의 예배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구속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강조하는 이러한 ‘화평의 영성’은 오늘의 이민교회가 추구해야 할 중요한 영성의 모습입니다.

얼마 전 방문했던 갈라져 나온 이민교회를 보며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그 교인들이 겪었던 마음의 상처가 많이 안쓰러웠습니다. 새로 시작한 그 개척교회에도 하나님이 주시는 사명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픔과 상처를 넘어서 하나님이 그 교회에 주시는 사명을 발견하고 나아갈 수 있기를 기도하고 왔습니다. 하지만 현재 갈등 속에 있는 교회가 있다면 오늘 바울이 들려 준 이야기를 깊이 가슴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교회 내에 갈등이 있다고 교회를 나가 새로운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 능사는 아닐 것입니다. 갈등과 분쟁 속에 있는 교회는 바울이 조언하는 ‘하나의 예배공동체를 이루라’는 조언을 분별하며 숙고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결국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롬 15:17)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모든 분쟁과 갈등을 넘어서 성령의 능력을 통해 드러나는 평화와 기쁨이 넘치는 하나의 예배공동체를 이룰 때에 우리는 그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과 헌신의 영성

오늘 “영성가 이야기”에서는 헌신에 대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사실 ‘헌신’이라는 주제는 대단히 무거운 주제입니다. 사람들은 무언가에 헌신하는 것을 두려워 하고 부담스러워 합니다. 남녀 사이에서도 그렇게 서로 뜨겁게 사랑하고, 그(혹은 그녀)가 없으면 죽을 것 같다가도 막상 결혼을 결정할 때가 되면 고민을 하는 커플을 보곤 합니다. 이들이 고민하는 것 또한 헌신의 문제입니다. ‘내가 과연 이 남자, 혹은 이 여자만 바라보고 평생을 살 수 있을까?’ 한번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하는 결단과 헌신의 순간인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두렵고 부담스러운지 결혼식 전날 도망가는 신랑 신부가 생기기도 합니다.

남녀간의 헌신도 이렇게 두려울진대, 우리가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은 얼마나 더 부담스럽고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원하시는 헌신은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만을 바라보고 살기로 결단하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기로 결단하는 것이 바로 헌신입니다. 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하나님 안에서 내 삶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 삶의 변화가 신앙생활의 핵심입니다. 오늘 이 헌신에 담겨 있는 신앙생활의 비밀을 삭개오의 이야기(누가복음 19:1-10)에서 묵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철저한 헌신을 이룬 삭개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여리고라는 곳으로 들어가신 장면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께서 여리고에 오셨다는 소식에 흥분하였고,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삭개오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삭개오에 대한 소개를 본문은 아주 짧게 “세리장”이요, “부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주 짧은 소개지만, 이 소개를 듣는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삭개오가 어떤 사람인지 고개를 끄덕이며 충분히 알 수 있었습니다. 삭개오는 한 마디로 상종해서는 안 될 인간이었습니다. 삭개오의 직업은 세금을 걷어들이는 세리였습니다. 당시의 세리는 침략자인 로마제국을 대신해서 세금을 걷어 로마황제에게 바치는, 로마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시의 세리들은 보통 걷어들여야 할 세금보다 더 많은 돈을 걷어서 남은 돈을 자기 호주머니에 채웠습니다. 요즘 세상에도 세금을 낼 때마다 “아니, 무슨 세금을 이렇게 많이 떼어가나” 하면서 툴툴거리는데, 로마제국의 앞잡이 노릇을 하면서 게다가 웃돈을 얹어 걷어들이는 세리들을 얼마나 사람들이 욕을 해댔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삭개오를 그런 세리요, 부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온갖 욕을 먹을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셈입니다. 삭개오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말할 수 없는 미움과 조롱의 대상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삭개오의 삶은 항상 외로웠습니다. 주위에 친구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자기의 주위에 있는 사람이라고는 자기의 돈을 노리고 아첨하는 사람들이거나, 아니면 노골적으로 경멸의 시선을 보내며 자신을 욕하는 사람들뿐이었습니다. 부자였던 삭개오의 삶은 풍요로웠지만, 그 많은 재산이 삭개오의 마음에 기쁨을 가져다 주지는 못했습니다. 마음의 한 구석에 커다란 구멍이 나있는 것 같았습니다. 비록 욕을 먹는 직업이었어도 안정된 직업에, 넘치는 재산에, 사랑하는 가족들까지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라고는 없었지만, 삶에서 느끼는 이 공허함은 삭개오의 힘으로는 도무지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삭개오는 자신의 삶의 공허함 속에 예수님을 보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예수께서 삭개오의 삶의 문제를 치유해 주시기를 기대하는 간절한 소망으로 나아갑니다. 하지만 키가 작았던 삭개오는 수많은 사람들로 인해 예수님을 볼 수 없어서 예수님을 보기 위해 근처에 있는 뽕나무에 올라갑니다. 삭개오의 위대함은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의 공허함에 머물러 있지 않고, 간절한 소망 가운데 예수께로 나아간 것입니다. 뽕나무 위에까지 기어 올라갈 만큼 간절했습니다.

마침내 예수께서 삭개오가 있는 나무 밑에 이르러 삭개오를 쳐다보십니다. 예수께서는 나무에 매달려 있는 삭개오의 모습에서 그 마음의 공허함과 갈급함,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소망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삭개오를 초대하십니다. “삭개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내가 오늘 너의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예수님의 초대를 받고 삭개오는 곧바로 나무에서 내려와 예수님을 집으로 모셔들입니다. 삭개오는 이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기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다른 사람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다면 네 배로 갚겠다고 약속합니다. 삭개오의 변화는 철저하고 즉각적이었습니다. 삭개오는 삶의 완전한 변화, 철저한 헌신을 이룬 사람입니다.

오직 사랑에 매여

그렇다면 한 가지 질문이 떠오릅니다. 어떻게 삭개오에게 이런 철저한 헌신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요? 그 모든 비밀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작은 한 단어에 담겨 있습니다. 본문 6절에 나오는 “즐거워하며”라는 단어입니다.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표준새번역은 이것을 “기뻐하면서”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삭개오에게 “어서 내려오너라” 말씀하시자, 삭개오는 엄청나게 기뻐하면서 나무에서 내려왔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삭개오가 큰 기쁨을 누린 것은 오늘의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삭개오가 경험한 기쁨은 자기를 찾아오신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감격이었습니다. 그 누구도 삭개오를 인간 취급하지 않았고, 모두가 욕을 하는 삭개오였지만,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10절)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은 삭개오를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삭개오를 예수께서 찾아가셨습니다. 삭개오의 마음의 중심에 있는 공허함을 연민의 눈으로 보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가 죄인인 삭개오와 어울린다는 사람들의 수근거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삭개오에게 “내가 오늘 너의 집에서 머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삭개오에게는 이 짧은 순간이 예수님의 엄청난 사랑을 체험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자신의 전 존재를 채워 주시는 예수님을 감격적으로 만나고, 직접적으로 보는 순간이었습니다. 이 사랑의 감격이 기쁨이 되고, 이 기쁨은 삭개오의 변화의 모든 이유가 됩니다.

삭개오를 찾아가신 예수님처럼,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먼저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흔히 착각을 하는데,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찾아갈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의 곁을 떠난다고 할지라도, 우리를 다시 찾아오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늘 우리를 먼저 찾아오시기에,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을 찾아 나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에게서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입니다.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하나님이 항상 나를 사랑하시고 함께 계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때로 삶에서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삶에서 시험과 고통을 당할 때에는 마치 하나님이 나를 떠나서 이 어려움 속에 홀로 내버려 둔 것같이 느낄 때가 있습니다. 봉사를 하다가 지쳐서 힘이 들 때에는 나의 신앙생활에서 하나님이 사라져 버린 것같이 느껴집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사랑 속에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뜨겁게 체험하고, 이 기쁨에 거하는 사람만이 삭개오처럼 삶의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삭개오의 헌신의 비밀은 하나님의 사랑의 기쁨에 사로잡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충만하면 그 기쁨과 감격이 헌신의 삶을 부담감이 아니라 넉넉히 할 만한 것, 기쁘게 할 만한 것으로 만듭니다. 하나님 사랑에 매인 그 감격이 우리의 사명을 넉넉히 짊어지게 합니다. 외롭지 않습니다. 힘들지 않습니다. 늘 기쁨과 찬양이 넘칩니다.

가끔 교회에서 봉사하는 제직들이나, 성가대원, 교사들을 보면 봉사하는 데 지쳐서 시험에 드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그런데 제 경험으로는, 그렇게 힘들게 봉사하시는 분들이 일이 많다는 이유만으로 시험에 드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경우에 이 하나님의 사랑의 기쁨에 사로잡힌 영적 에너지가 부족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늘 새롭게 감격하면, 모든 봉사와 관계에 의미와 활력이 돋아납니다.

헨리 나우웬은 봉사는 마치 잔에서 물이 흘러 넘치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잔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흘러 넘쳐서, 그 넘치는 것을 조금 나누어 주는 것이 봉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잔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흘러 넘치기는 커녕, 그 잔을 아무리 들여다 보고 바닥을 박박 긁어 보아도 퍼줄 것이 없으면, 도대체 무엇을 나눌 수 있겠습니까? 봉사는 하나님의 사랑의 기쁨에 사로잡혀서 내 잔에 흘러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를 주위의 사람들과 나누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봉사하는 가운데 지치고 회의에 빠지면, 하나님의 사랑을 새롭게 발견하기 위해 신앙의 점검을 해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교회 부서에서 충돌이 생기고 봉사에 회의가 들면, 자꾸 모여서 회의를 합니다. 자꾸 회의만 하면 더 회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오히려 기도를 해야 합니다. 내 잔을 하나님 사랑의 기쁨으로, 은혜의 감격으로 채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늘 새롭게 느낀다면, 우리의 봉사에도 언제나 기쁨이 가득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 사랑의 기쁨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헌신의 삶을 살아가기를 독자 여러분과 함께 소망해 봅니다.

* 더 자세한 내용을 원하시는 분은 저자의 『하나님 만나기』(대한기독교서회, 2010) 3부를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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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는 아버지의 영성

누가복음 15장에 등장하는 “탕자의 비유”를 함께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이 비유는 한 가족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한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 둘째 아들이 집을 나갔다 돌아오는 이야기입니다. 이 둘째 아들을 나의 삶과 비교하며 읽어 보면, 이 둘째 아들이 바로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쉽게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자신의 영적인 여정에 대한 이야기를 발견하게 됩니다.

아버지의 품을 떠난 둘째 아들

본문이 시작되면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청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재산 중에 내가 나중에 상속받을 재산을 지금 나에게 나누어 주십시오.” 둘째 아들이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받게 될 유산을 미리 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런 요구는 자칫하면 “아버지가 죽기를 바란다.”는 말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둘째 아들의 이 말은 사실 생각할수록 괘씸한 말입니다. 하지만 오늘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이 아들의 말을 들어 줍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아버지의 사랑은 달랐습니다. 이 아버지는 아들을 무조건 잡는 것만이 사랑이 아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아들의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 이 아버지가 가진 큰 사랑이었습니다. 사실 이것을 이해하기가 어려울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아들이 집 나가는 것을 허락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이 아버지의 사랑은 자신의 생각을 아들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아버지가 사랑한 방식은 아들을 존중하고, 떠날 자유를 허락하는 것이었습니다. 떠날 자유를 허락한 아버지만이 돌아올 자유도 줄 수 있습니다. 떠날 자유를 주지 않는 아버지는 훗날 아들이 돌아온다 해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러한 자유를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곁을 떠날 수 있는 것 또한 ‘떠날 자유'를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오늘 누가복음의 탕자 이야기는 시작부터 하나님의 사랑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둘째 아들은 왜 아버지의 곁을 떠나려고 했을까요? 우리는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 집에서는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집을 떠나 재산에 의지해 즐기며 살고자 합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집을 나와서 가기로 작정한 곳을 본문 13절에서는 ‘먼 나라'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아들은 아버지의 품을 떠나서 가장 ‘먼 나라', 곧 아버지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최대한 먼 곳으로 달아나서 그곳에서 재산과 자신의 능력에 의지하여 행복과 자유를 즐기며 살아가기로 작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 위젤의 작품 중에 다음과 같은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늘보좌에 앉은 하나님 앞에 가서 물었다고 합니다. “하나님, 사람 노릇과 하나님 노릇 중에 어떤 것이 더 힘들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랬더니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물론 하나님 노릇이 더 힘들지. 인간인 그대야 가족과 직장 등의 일밖에 신경 쓸 것이 없지만, 나야 온 우주와 은하계와 별들을 신경 써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이 사람은 하나님께 계속 물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하나님께는 무한한 시간과 능력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 인간이야 한정된 능력과 짧은 인생살이 속에서 모든 일을 해내야 하지요. 그게 힘들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 사람은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하나님 노릇이 더 어렵다고 생각하신다면, 딱 1초 동안만 서로 역할을 바꿔 보면 어떨까요?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게 되실 겁니다.” 하나님은 내키지 않았지만, 그 사람이 워낙 졸라대는 바람에 마지못해 서로의 역할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십니까? 일단 하나님의 자리에 앉은 그 사람은 그 자리를 돌려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멀리 쫓아내고 그때부터 이 세상의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이 우화는 우리들의 본성 속에 있는 숨은 욕망을 잘 보여 줍니다. 우리들은 모두 하나님을 떠나서, 나의 삶의 중심에서 내가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며 살아가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의 품에선 자유가 없으니까 그 품을 떠나서 나의 힘과 자유, 세상의 성공에 의지하며 살아갈 때 기쁨이 있으리라는 욕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둘째 아들의 선택이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이 아들은 아버지에게 유산을 미리 받아서 아버지의 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먼 곳으로 달아나, 가진 재산에 의지하며, 그 속에서 인생의 의미와 행복을 찾아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둘째 아들이 경험하는 것은 삶에서의 기쁨과 자유와 행복이 아니라, 실패와 절망과 무의미뿐입니다. 둘째 아들은 먼 나라에서 허랑방탕한 삶을 삽니다. 가지고 간 재물을 금방 다 써버리고 맙니다. 이제 둘째 아들을 채우고 있는 것은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삶의 공허함과 무의미함입니다. 둘째 아들의 상태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 주는 모습이 바로 돼지우리에서 돼지가 먹는 밥을 빼앗아 먹으려는 모습입니다. 구약시대부터 이스라엘 사람들은 돼지를 부정한 동물로 여겼습니다(레 11:7). 랍비들은 유대인들이 돼지 기르는 것을 금지하였습니다. 그런데 유대인인 이 둘째 아들이 돼지를 치러 돼지우리 속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리고 너무 배가 고파 돼지가 먹는 음식을 빼앗아 먹으려고까지 하고 있습니다. 이 장면은 둘째 아들이 겪고 있는 삶의 곤고함과 공허함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둘째 아들의 돌아섬

이제 새로운 돌아섬이 시작됩니다. 자신이 겪고 있는 삶의 무의미와 절망을 넘어서는 둘째 아들의 새로운 여행이 시작됩니다. 둘째 아들은 돼지우리의 절망 속에서 비로소 제 정신이 돌아옵니다. 본문 17절에서 “이에 스스로 돌이켜”라고 적혀 있는데, 영어성경을 보면 그 의미가 보다 분명합니다. “When he came to his senses.” 한 마디로 제 정신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다가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둘째 아들에게는 돼지우리가 자신의 삶의 한계를 볼 수 있도록 도와 준 축복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도 삶에서 실패와 아픔을 경험할 때, 비록 우리를 힘들게 하지만, 실패의 경험은 우리가 붙잡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알게 해주고 제정신이 들게 해줍니다.

둘째 아들은 이제 아버지의 집에 있었던 풍요로움을 생각합니다. 자유가 없다고 생각했던 아버지의 품에 있었을 때에 자신이 얼마나 자유롭고 풍요롭게 살았는지 그 따뜻함을 기억해 냅니다. 이 기억이 둘째 아들로 하여금 아버지께 돌아갈 것을 결심하게 합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이러한 기억이 있습니다. 비록 의식하지는 못할지언정, 우리 모두에겐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 가운데 있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들입니다.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와의 사귐을 기뻐하시던 하나님, 그 안에서 누리던 완전한 의미와 행복에 대한 기억이 우리 본성 가운데 숨겨져 있습니다. 삶이 아무리 안정되어 있어도 우리의 마음 한구석이 허전한 것은 이 숨겨져 있는 기억 때문입니다. 어느 순간 제정신이 들어 하나님을 찾아 나서게 되는 것도 바로 우리의 본성 가운데 숨겨져 있는 이 기억 때문입니다. 이 본능 속에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품에 대한 기억이 우리로 하여금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시 42:1) 하나님을 찾아 나서도록 만듭니다.

이제 둘째아들은 자신의 돌아섬을 행동에 옮깁니다. 여기에 둘째 아들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자신의 삶의 방식에서 돌아서는 것입니다. 자신의 절망적인 삶의 자리에서, 세상적인 욕심을 향해 달려가던 삶의 방식에서 돌아서서 아버지의 품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기다리는 아버지

마침내 돌아온 둘째 아들 이야기의 절정적인 장면을 읽어 봅니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바로 20절 말씀에 있습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기다리는 아버지” 입니다. 처음 이야기를 시작할 때, 둘째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버지의 품을 떠나는 것을 허락했던 사랑의 하나님은 이 아들이 떠나 있는 동안 내내 돌아오기를 기다렸던 분입니다. 본문은 이러한 기다리는 아버지의 모습을 ‘아직 거리가 먼 데'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둘째 아들이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아니 마을에 들어오기도 전에 먼 거리에서 아버지는 아들이 오는 것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먼 거리에서 아들이 오는 것을 볼 수 있었던 이유는 매일같이 그를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큰 상처를 주고 떠난 아들이었지만, 이미 아들을 용서하고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였습니다. 아들이 언제 올까 매일같이 기다리면서 눈물 흘리던 아버지였습니다. 그리고 먼 곳에서 아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자 사랑의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서 달려 나가 그를 안고 입을 맞춥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만나면 하려고 연습하고 준비한 말들을 채 다 듣지도 않습니다.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아버지는 아들에게 좋은 옷을 입히고, 신을 신기고, 반지를 끼우고, 기뻐하며 잔치를 베풉니다. 이 아버지는 아들이 떠난 그 순간부터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던 사랑의 아버지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이야기에 나오는 아버지와 같은 분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곁을 떠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가 돌아오기를 한결같이 기다리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누가복음의 돌아온 탕자 이야기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사랑의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곁을 떠날 때에 그 속에서도 우리의 자유를 허락하시는 사랑의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올 때에 우리의 모습이 어떠하건 상관하지 않고 맞아 주시는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의 곁을 떠나 있을 때에도 한결같은 사랑으로 우리를 기다리시는 하나님. 이 하나님의 사랑의 품으로 돌아갈 때에 우리의 삶에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 삶은 하나님의 품에 있을 때 행복해집니다. 사랑의 하나님의 품에서 우리는 우리의 상처를 치유해 주시고, 회복시켜 주시고, 삶의 의미와 만족으로 채워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http://www.kcjlogos.org/news/articleView.html?idxno=7655 


창세기


창세기 1:1
태초하나님천지창조하시니라.
בְּרֵאשִׁית בָּרָא אֱלֹהִים אֵת הַשָּׁמַיִם וְאֵת הָאָרֶץ

베레쉬트 바라 엘로힘 엩 핫솨마임 웨엩 하아레츠


태초에(בְּרֵאשִׁית - 베레쉬트)

‘베레쉬트’는 '베'와 ‘레쉬트’의 합성어이다.
'베'는 명사들과 결합하여 그 명사와 관련된 특정한 때를 가리키는 불분리 전치사로서 영어의 ‘IN’에 해당한다.
그리고 레쉬트는 '근원'(2:10), '머리'(3:15), '꼭대기'(왕상 18:42) 등의 의미를 가진 어근 '로쉬'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시작'(10:10),
'근본'(시 111:10),
‘으뜸’(욥 40: 19) 등의 의미를 갖는다.

이처럼 ‘베’ 와 ‘레쉬트’의 합성어인 ‘베레쉬트’는 직역하면 시간이 막 흐르기 시작한,
시간의 시작인 '시초에'라는 뜻이며 인간 역사의 시작을 의미한다. 

'태초에'는 시간의 시작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주 공간 자체와 우주 만물의 구성 재료가 될 모든 기본 물질들을
'무'에서 '유'로 한 순간에 생겨나게 하신 ‘때’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요한복음 1:1에도 '태초에'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헬라어 '엔 아르케'를 번역한 말로 '영원부터'라는 뜻이다.
요한복음 1:1의 '태초에'인 '엔 아르케'는 시간이 시작되기 이전의 영원한 때를 가리킨다.
창세기 1:1의  '태초에'인 '베레쉬트'는 시간이 시작되었던 때, 즉 영원과 시간의 시작이 접촉되는 때를 가리킨다.   

따라서 두 단어 모두 한글로는 '태초에'로 번역되었지만 그것이 가리키는 근본적인 의미는 조금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정리하면 '태초에'는 하나님이 천지 창조를 개시함으로 시작된 '역사적 시간의 출발점'을 가리킨다.
이는 창세기가 영원 전 사건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우주 및 인류가 탄생하는 시점으로부터 시작되는 역사에 관한 서술임을 보여준다.

하나님이(אֱלֹהִים - 엘로힘)

'태초에'는 천지가 언제 창조되었는지를 밝힌 것
'하나님'은 천지를 누가 창조하였는지를 밝히는 것이다.

엘로힘은 ‘권세 있다’, ‘강하다’란 뜻을 가진 '울'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권세 있고 힘 있는 뛰어난'이란 뜻을 가진 '엘로아흐'의 복수형이다.
즉, 엘로힘은 '두려워해야 할 강하고 능력있는 자', '경외해야 할 최고의 존재'라는 의미이다. 

'여호와'란 명칭이 '언약을 지키시는 자', '택한 백성을 구속하는 자'란 의미로 쓰였다면(출 6:3),
'엘로힘'이란 명칭은 성경에서 주로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을 강조할 때 쓰였다(출 20:1; 신 6:4; 삼하 22:32).

한편 일부 학자는 '엘로힘'이 '엘로아흐'의 복수형인 점을 들어 이를 다신론적 사상의 반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엘로힘'이라는 단어는 비록 형태는 복수형이나 실질적으로는 단수로 사용되었다.
왜냐하면 이 '엘로힘' 뒤에 나오는 '창조하시니라'란 동사가 단수 형태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엘로힘'으로 표현한 것은 삼위이시나 일체이신 하나님의 존재 양식에 대한 암시로 볼 수 있다(26절).
그리고 존귀하거나 장엄한 것을 표현할 때 복수형을 쓰는 히브리인의 독특한 관습에 따라 이를 장엄의 복수형으로도 볼 수 있다.

천지를(אֵת הַשָּׁמַיִם וְאֵת הָאָרֶץ - 엩 핫솨마임 웨엩 하아레츠)

창조의 대상이 무엇이었는지를 밝힌다.
히브리어 '엩'는 우리말 '~을', '~를'이고 '핫솨마임'은 복수로 '그 하늘들'이라는 뜻이다.
'그리고'에 해당하는 접속사 '웨'와 '엩'가 결합하여 '웨엩'가 되었고 '하아레츠'는 '그 땅'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 문장을 직역하면 '그 하늘들을 그리고 그 땅을'이다.

하늘이 복수형으로 표기된 것은 고대 히브리인들의 하늘 개념이 반영된 것이다.
고대 히브리인들은 하늘을 세 개의 층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았다.
새들이 날아다니는 우리 눈에 보이는 공중인 첫째 하늘
우리들이 살고 있는 땅을 반원형으로 둘러싸고 있는 것으로 해, 달, 별 등이 붙어 있는 궁창(Firmament)과 그 위에 보관된 엄청난 양의 물로 구성된 둘째 하늘
그 너머의 순수한 영적 존재들인 천사들이 하나님의 영광의 현현을 매일 보며 거하는 셋째 하늘.

이렇게 히브리인들은 하늘이 모두 세 개의 층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하늘을 표현할 때에 복수로 표현했다. 

'땅’을 표현하는 ‘아레츠’도 하늘과 대조된 의미에서의 ‘온 땅’ 곧 우리들이 발붙이고 사는 이 '지구' 뿐만 아니라
넓게는 땅 아래의 ‘지하 세계(the Underworld)’까지 가리킨다. 

천지를 만드셨다는 뜻은 문자적으로 하늘과 땅만 만드신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다 만드셨다는 의미이다.
성경에는 ‘해 돋는 데서부터 해 지는 데까지'(시 113:3), ‘단에서 브엘세바까지’(삼하 17 :11) 등과 같이 양 극단을 사용하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은 그 양극단 뿐만 아니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다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천지를 만드셨다는 표현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창조하셨다는 뜻이다. 


히브리인들의 하늘 개념(그랜드종합주석 p.194)

창조하시니라(בָּרָא - 바라)

창세기 1장 1절에서 '태초에'는 '언제(when)'를, '하나님이'는 '누가(who)' 를, ‘천지를’은 ‘무엇(what)'을, 끝으로 ‘창조하시니라’는 ‘어떻게(how)'를 보여 준다. 

‘창조하시니라’에 해당하는 히브리 원어는 ‘바라’인데 이 단어의 어원은 불명확하다.
그러나 용례상 대략 '자르다(cut)', '새기다 (carve)' 그리고 '낳다' 또는 '출생하다(bear or be born)', 그리고 '먹다(eat)', '양육하다(bring up)', '살이 오르다(get weight)' 등의 뜻으로 쓰였다.

그런데 이 '바라'가 '만들다', '지어 내다'라는 뜻으로 쓰일 때에는 오직 하나님과만 관련되어 쓰였다.
그리하여 그 이전과는 자르듯이 완전히 단절된 상태에서 전혀 새로운 것을 만드시고 또 있게 하시는 하나님만의 절대 주권적 행위를 나타낸다(신 4:32; 시 89:12; 사 43:1; 렘 31:22).
따라서 '바라'는 이전에는 전혀 없었던 일을, 이전의  그 어떤 것과도 상관없이 새로이 있게 하는 절대적 창조 행위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창조 활동은 그분의 자유로운 의지에서 기인한 단독 사역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 능력은 제한적이거나 부차적이지 않고 완전한 무에서 유에로의 창조를 가능케 하는 새롭고 신비한 성격의 것이다. 또한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존재인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의 주인으로서 그 모든 것을 자신의 기쁘신 뜻에 따라 말씀으로 만드셨다(시33:6-9; 렘10:12).

절대적 창조 행위는 만물을 초월하여 자존하시는 절대 주권자이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인 우리 인간도 우리의 능력을 활용하여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수는 있으나 그것은 과거와의 연속성 안에서, 이미 있는 것을 활용해서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바라'는 '만들다', '지어내다'라는 뜻으로 구약에서 총 44회 쓰였는데, 이 때에는 오직 ‘하나님’을 가리키는 단어와만 짝을 이루어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절대적 창조 행위를 가리키고 있다.

창세기 1장 1절의 '창조하시니라' 곧 '바라'는 무에서 유로 광대한 우주 공간은 물론 그 안의 천하 만물을 구성할 재료가 될 모든 기본 물질들을 동시에 존재하게 하신 하나님의 절대적 창조 행위를 가리킨다.



미국 공휴일 및 축제(할로윈 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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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평 원룸 크기 공간서 300명 깔려... 사망자 여기서 다 나왔다

폭 3.2m 좁은 내리막길 골목
넘어지며 수백명 6~7겹 쌓여

20대 이모씨는 “사람들 사이에 뒤엉킨 채 모르는 사람 손을 붙잡고 ‘우리 살아 나가자’라고 말하며 30분을 버텼다”면서 “신고를 할 수도 없을 만큼 팔 하나도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라, 계속 살려달라고 소리를 쳤다”고 했다.
또 다른 이모(25)씨도 “바로 옆에서 몸집이 작고 숨 쉬기가 어렵다며 우는 20대 초반 여성을 봤고, 실신하는 외국인 여성도 있었다”고 했다.

김모(28)씨는 “나는 키가 크니까 숨을 쉴 수 있었는데 키가 작은 여성들은 가슴 부분이 끼어서 숨쉬기가 더 힘들어 보였다”면서 ”끼어 있어서 손을 못 쓰니까 숨 막혀 죽을까 봐 서로 옆 사람의 마스크를 내려주기도 했다.
숨을 쉬려면 배가 나왔다 들어갔다 해야 되는데 그럴 공간조차 없었다”고 했다.
또 다른 김모(27)씨도 “양옆으로 기절한 사람이 너무 많았고 밀지 말라 소리를 마구 질렀는데도 사람이 많아서 전달도 잘 안 되는 것 같았다”고 했다.

오후 11시쯤 인파를 뚫고 현장에 간신히 도착한 구급대원들이 깔린 사람들을 꺼내며 구조를 시작했다.
하지만 30분 이상 사람들 아래 눌렸던 피해자들은 대부분 의식이 없거나 숨진 상태였던 경우가 많았다.
오후 11시 30분쯤부터는 이태원역 주변 길가에서 구급대원과 경찰, 시민 등 수십명이 길 위에 쓰러진 사람들을 눕혀두고 심폐소생술(CPR)을 하기 시작했다.
모포나 비닐 등으로 얼굴을 가린 시신들이 길가에 놓이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다.

30일 오전 1시쯤 열린 소방 브리핑에서 집계된 피해자 수는 사망 2명, 부상 22명으로 총 24명이었다.
그러나 1시간쯤 뒤인 2시 15분 브리핑에서는 사망이 59명으로 늘었다.
부상자도 150명으로 급격히 늘었다.
30분 뒤쯤에 열린 브리핑에서는 사망자가 120명으로 늘었고 부상이 100명에 달했다.
오전 4시엔 사망자가 146명, 부상자가 150명으로 늘었다는 발표가 나왔다.
피해자를 구조하고 사망 여부를 확인하는 과정이 오래 걸렸고, 심폐소생술을 하면서 병원으로 이송되는 사람 중 적지 않은 수가 사망한 탓이었다.

“선 채로 당한 희생자 많다” 증언들... 전문가들이 추정한 사인은

“호흡은 갈비뼈 사이 근육과 횡경막의 ‘흉곽 운동’
그 공간 확보 안 되면 질식… 서나 앉으나 무관”
”인파에 휩쓸렸다면 가장 자리로 가 기둥 잡고 버텨야”

29일 서울 이태원 핼러윈 참사 희생자 상당수는 선 채로 압사(壓死)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 언론은 소방당국을 인용, “희생자들이 밟혀서 압사당한 게 아니라 서 있는 상태에서 짓눌려 압사당했다”고 보도했다. 온라인에도 “선 채로 실신한 사람이 있었다”는 현장 목격담이 올라왔다. 실제로 한 인터넷 방송 운영자가 참사 발생 당시 현장에서 실시간으로 올린 영상에서는, 한 여성이 선 상태 그대로 사방에서 밀려드는 압력에 고통받으며 비명을 지르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힘을 잃은 듯 늘어지는 장면이 포착되기도 했다.

29                                     TV
29일 밤 서울 이태원에서 압사 사고가 벌어질 당시 현장 상황을 생중계한 영상의 한 장면. 사람들이 사방에서 밀려드는 압력으로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오른쪽 맨 아래 모자이크 처리된 여성은 "살려달라"고 비명을 지른 뒤, 맥이 빠진 모습으로 더는 말이 없었다. /아프리카TV

네티즌들은 충격적으로 받아들였다. 믿을 수 없다는 반응도 나왔다. 일반적으로 압사를 생각할 때 ‘넘어져 깔린 상황’을 떠올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선 채로 압사당하는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서중석 전 국립과학수사연구원장은 30일 조선닷컴 통화에서 “사망자 상당수는 ‘압착성 질식사’로 추정되며, 이는 서 있거나 쓰러져 있거나 등 자세와는 무관하게 벌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인간은 갈비뼈와 갈비뼈 사이 근육과 횡경막을 움직여서 호흡을 하는데, 이번 사고 희생자들은 선채 사방에서 밀려든 강력한 압력으로 흉곽운동에 필요한 공간을 확보하지 못해 숨졌을 것이란 추정이었다.

서 원장은 “물론 부검을 해보기 전엔 단언하기 어렵다. 바닥에 깔린 상태로 충격이 가해져 심장 등 장기 파열이 일어났을 수도 있고, 목뼈가 부러지는 경우도 있을 수는 있다”며 “그러나 당시 상황으로 미뤄봤을 때, 가장 가능성이 높은 사인은 압착성 질식사”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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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 오후 대규모 압사사고가 벌어진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해밀턴호텔 뒷골목의 모습. /뉴스1

공하성 우석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도 비슷한 해석을 내놨다. 공 교수는 “서서 껴있는 채로도 압박을 강하게 받을 수 있고, 압사당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사람이 몸을 가누지 못하는 상황은 최소한 자신의 몸무게의 1.5배 이상 압력이 외부에서 가해졌다는 의미인데, 이번 사고에선 좁은 골목에 한꺼번에 수백명 사람이 몰리면서 그 압력이 급증했다”며 “선채로 갈비뼈가 부러지는 상황도 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직장 인증을 통해 운영되는 익명 커뮤니티 블라인드에도 ‘의사’로 인증한 인물이 비슷한 글을 올렸다. 그는 “압사의 주된 사망 원인은 장기파열도 아니고 혈복강도 아닌 단순 호흡부전”이라며 “호흡공간이 없는 상태에서 호흡근이 이기지 못할 압력으로 눌리면 숨을 못쉬어서 질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상황을 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공하성 교수는 “가장자리가 그래도 하중이 제일 적은 편이기 때문에 인파에 휩쓸리면 가장자리로 빨리 이동해야 한다”며 “가장자리에 도착했다면 거기서 간판, 벽을 붙잡고 버티는 게 좋다”고 했다.

공 교수는 이어 “넘어지면 그야말로 최악”이라며 “만약 넘어졌다면 빨리 몸을 동그랗게 웅크려 머리와 가슴, 몸을 보호하면서 숨 쉴 공간을 확보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태원 사망자 또 늘어 153명... 부상자는 133명


29일 밤 서울 용산구 이태원역 일대에서 발생한 압사 참사로 인한 사망자가 30일 153명으로 늘어났다.

30                     153   24  79   1031
30일 오후 서울 용산구 이태원 압사 사고 현장에 한 시민이 꽃을 놓고 있다. 이태원 압사사고로 발생한 인명피해는 이날 오후 현재 사망 153명이었다.
부상자는 중상 24명, 경상 79명 등으로 총 103명이다./뉴스1

행정안전부와 소방청에 따르면, 이날 오후 6시 기준 이태원 핼러윈 참사로 인한 사망자가 153명으로 집계됐다.
앞서 오전 10시에 발표한 사망자 수(151명)보다 2명이 늘었다.
부상자는 중상 37명, 경상 96명 등으로 총 133명이다.

외국인 사망자는 20명, 부상자는 15명으로 외국인 사상자는 총 35명으로 집계됐다.
외국인 사망자의 구체적인 국적으로는 중국과 이란, 우즈베키스탄과 러시아 등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2022년 10월 29일 할로윈 데이 축제를 맞아 서울 이태원에서 일어난 참사

이태원과 관련된
슬프고 아픈 역사에 관한 글을 공유합니다.

이번 참사를 계기로 더 이상의 아픔이
반복되지 않기를 염원하며,
국민 모두 애도와 함께 자숙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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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이태원의 유래]

'이태원'은 한자로 '梨泰院'이라 씁니다.

이태원의 이름은  한자만 3번 변했습니다.
조선 초에는 '오얏나무 李'를 써서  '李泰院'
→임진왜란 이후에 '異胎院'
→효종 이후에는 '梨泰院'으로
글자와 의미가 변합니다.

원래 이태원은 서울을 벗어나 처음 만나는
원(院)이었습니다.

서쪽의 홍제원.
동쪽의 보제원.
남쪽의 이태원과 인덕원은
서울 부근의 중요한 첫번째 원이었습니다.

이태원은 지금의 용산고등학교 자리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이태원의 역사를 살피다 보면
슬픈 이 땅의 역사가 떠오릅니다.

슬픈 역사하면
역시나 조선 시대의 '양대 칠푼이'
선조와 인조가 등장합니다.

아시다시피 임진왜란 때
고니시 유키나카(소서행장)와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 부대는
경쟁적으로 진격하여
가토 기요마사 부대는 남대문으로
유키나카부대는 동대문으로 입성합니다.

그 결과 이들이 처음 통과한 문이라는
상징성을 바탕으로 조선총독부는
남대문과 동대문을 조선고적 1.2호로 지정했습니다.
결국 이 문들은
오늘날 대한민국 국보 1호와 보물 1호가 되었습니다.
(이런 아픈역사가 있음에도 불에 타버려
졸속 복구한 남대문을 국보 1호라고
전 세계에 자랑하는 나라 꼴이나,
한술 더 떠서 궤변으로 그를 합리화시키는
일부 학자들을 보면 한심스럽습니다.)

한양에 들어온 '가등청정'은
이태원에 주둔을 합니다.

주둔 중에 '가등청정과 부대'는
여자들을 겁탈하기 시작하는데,
대분분의 여자들은 피난을 가버린 상황이라
그 대상은 피난을 가지 못한 여자와
이태원 황학골에 있는 '운정사'의 비구니들이
주대상이었습니다.

천주교 신자이자 반전론자인
상인 출신의 소서행장과
불교신자이자 주전론자인
장수 출신의 가등청정은
일본에서부터 라이벌이었는데,
오히려 불교신자인 가등청정은
여승들을 겁탈하고
운정사까지 불살라 버립니다.
(가등청정 이 놈은 불국사도 불질러 버린 놈입니다.)

문제는 이 비구니들과 여인들이
임신을 하여 아이를 낳게 됩니다.

절이 사라진 상태에서
비구니들의 아이들과
왜놈에게 겁탈당한 부녀자 등이 애를 낳고
기를 보육원을 지어 정착케 하였는데,
당시 왜병들의 피가 많이 섞인 곳이라하여
이태원(異胎圓=다른 민족의 태를 가지고 있는 곳)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후,
임진왜란이 끝나자
일본에 잡혀갔다 돌아온 조선여자와  
왜란 중에 성폭행을 당한 여성과
그들이 낳은 아이들이 사회적 문제로 등장합니다.

선조는 이에 이들과 그 자식들
그리고, 임진왜란 이후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한
포로나 귀화한 일본인들을 한 곳에 몰아서
일종의 이방인 공동체 지역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곳이 이태원입니다
<출처 : 임하필기(林下筆記) 동국여지비고>

여기에 칠푼이 2호인 인조까지 가세하게 됩니다.
병자호란에 끌려갔던 여인과 그 자식들까지
상당수가 결국은 이곳으로 들어옵니다.

이후,
북벌을 준비하던 효종은 지명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이곳을 배나무가 많은 곳이라는 이름의 梨泰院이라
고쳐 부르게 하여 오늘날까지 이르렀습니다.

이태원은 우리 역사에서
오랜 기간 '이방인의 땅'으로 인식되기 시작합니다.

조선시대부터 용산 일대는 군사 관련 시설이 많았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들어 군용지로 이용되면서
조선 주둔 일본군 사령부가 이곳에 머문 이후
이태원은 군사지역으로서 본격적인 정체성을
나타내기 시작합니다.

임오군란을 진압하러 조선에 온 청나라 부대는
1882∼1984년 이태원에 주둔했고,
이후 일본군 조선사령부가 1910∼1945년에
주둔하기 시작합니다.
이때부터 근대식 마을이 본격적으로 형성됩니다.

광복 이후엔 미군이 이곳을 차지했습니다.
6.25전쟁이 끝나고 나서 이태원 상권은
사실상 미군이 주도했습니다.

1957년 미군의 외박과 외출이 허용되면서
기지촌까지 생겨났습니다.
1970년대 미군기지에서 나온 물품들로
상권이 형성된 이태원은
이후 미군을 위한 유흥가로 거듭나
기지촌과 미국식 클럽이 우후죽순 들어섰습니다.

한편으로 정부는 이태원 미군기지 중심으로
서빙고동, 한남동, 동부이촌동 일대에
외국인 전용주택과 아파트는
물론 고급 외국인 주택단지까지 건설합니다.

그러자 1960년대 이후
한국에 들어온 각국의 대사관이
이태원 지역에 대거 입주했고,
그 영향으로 1970년대까지 지속적으로
고급주택단지도 조성됐습니다

이태원은 1990년대 이후
아프리카인의 유입이 늘면서
현재는 판잣집과 대저택이 공존하는
독특한 경관을 연출합니다

기지촌 단속으로 퇴폐업소가 사라지면서
경리단길과 더블어
한국 속의 외국으로 변화하는 '이태원'

웬지 가까와지지 않는
이방인의 느낌이 드는 도심지 이태원.

그 바탕에는 아픈 역사가 있었습니다.

WSJ “아이들이 사탕 얻는 핼러윈, 한국선 클럽 가는 날 됐다”

각국 외신이 29일 밤 발생한 이태원 압사 사고를 집중 조명 중인 가운데, 한국 내 핼러윈 문화가 변질되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29일(현지 시각)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일대에서 벌어진 참사를 자세히 전한 뒤 “한국에서 핼러윈은 아이들이 사탕을 얻으러가는 날이 아니다”라며 “최근 몇 년 간 20대를 중심으로 코스튬을 차려입고 클럽에 가는 행사로 정착됐다”고 전했다.

이어 “이태원 지역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주한미군이 주둔했던 곳으로 세계 각국 요리를 선보이는 바, 클럽, 레스토랑이 즐비한 장소”라며 “사고 전 서울 중심부에 있는 이곳에 약 10만명의 인파가 몰릴 것으로 예상됐다”고 했다.

또 “영업시간 제한과 마스크 착용 의무화 등 코로나 관련 규제가 해제된 이후 첫 핼러윈이라는 점 때문에 참여율이 더 높았다”며 “한국의 핼러윈 악몽은 가장 큰 비극 중 하나로 전 세계에서 애도의 뜻을 표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미국 축제로 잘 알려진 핼러윈은 고대 켈트족이 새해(11월 1일)에 치르는 사윈(Samhain) 축제에서 유래된 것으로 전해진다.
켈트족은 이날 사후 세계 경계가 흐릿해지며 악마나 망령이 세상에 나타날 수 있다고 여겼으며, 사자의 혼을 달래고자 모닥불을 피우고 음식을 내놨다.
망령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분장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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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로윈(Halloween)의 정체 / 10월 31일

글을 시작하면서

매년 10월 31일은 종교개혁의 날이다.
독일의 종교개혁자 루터(Martin Luther, 1484~1546년) 1517년에 독일 비텐베르크대학 교회의 정문에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붙인 것으로 시작으로 종교개혁의 불길이 일어난 날이다.
그러므로 이날은 우리 기독교의 역사에서는 아주 중요한 날이다.
교회에서는 종교개혁자들의 발자취와 역사적 의미를 설교하며 개혁의 정신을 이어가고자 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10월 31일은 종교개혁의 날이기보다는 ‘할로윈 데이(Halloween day)’로 더 많이 알려졌다는 느낌을 받고 있다는 데 있다. 즉 이날이 되면 ‘할로윈 데이(Halloween day)’ 축제로 세상 사람들은 즐기며 지낸다.
그런데 문제는 이날에 일부 교인들마저도 함께 즐기려고 동참한다는 슬픈 소식이 들려지기 때문이다.
귀신 분장을 하며, 호박 등을 들고 마법 모자를 쓰고 아이들이 유치원 등에서 이 귀신의 축제에 동참하는 그리스도인 자녀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물론 영적인 무지 때문일 수도 있으나 그러한 무지에 대해 깨우쳐주지 않는 영적인 지도자들의 책임도 있을 것이라는 자책을 하면서 할로윈에 대한 정체를 알려야 할 필요성을 느끼면서 이 글을 시작한다.

할로윈(Halloween) 용어의 의미

멕시코의 전통명절 중 대표적인 것이 매년 10월 31일부터 11월 2일까지 지키는 ‘죽은 자들의 날’이란 것이 있다.
명절 중에 11월 1일‘어린 영혼을 위한 날’이고 2일 ‘어른 영혼을 위한 날’이라 한다.

이 이간에 이 나라 사람들은 집 안에 특별한 제단을 꾸며 죽은 자들을 위한 선물을 올려놓는다.
또 죽은 자의 영혼을 불러들이는 준비과정으로 무덤을 꽃과 선물로 장식한다.
이러한 축제는 죽은 자들이 이승으로 돌아와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 머문다는 내세관에서 출발하였다.

떠난 이들의 영혼을 기리는 행사로 수 세기 동안 지속되면서 멕시코의 전통 축제로 자리매김한 이 기간에 칼라베라(calavera)라고 불리는 설탕으로 만들어진 해골 모양의 장식을 준비한다.
이것은 매우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으며 이마에는 죽은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놓는다.
이러한 명절에 먹는 음식으로는 ‘죽은 자의 빵(pan de muerto)’초콜릿 음료가 대표적이며, 설탕으로 만든 색색깔의 해골 과자를 만들기도 한다.
이렇게 멕시코에서의 ‘죽은 자의 날’이란 귀신과 연관된 날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이와 유사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할로윈 데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여기에 쓰이는 할로윈(Halloween)이란 단어를 풀어서 쓸 때 첫 단어인 hallow는 고대 앵글로색슨족의 언어로 성인을 뜻한다.
여기에 전야제를 뜻하는 even과 만나 hallow’s even 혹은 hallow’s evening으로 쓰고 있으며, 문자적으로 보면 ‘거룩한 전야’라는 뜻이다. 그리고 정확한 뜻은 만성절 전야제이다.

이것이 한국의 종교용어로 ‘만성제’라고 부르기도 한다.
바로 10월 31일은 모든 성인 대축일 전날로, 죽은 사람의 영혼이 이승으로 돌아오는 시기로 여겨진다.
그리고 이러한 할로윈(Halloween)이란 ‘모든 성인 대축일 전야제(All Hallows’ Day evening)’의 줄임말이다.

할로윈(Halloween)의 유래

할로윈데이의 기원은 대체로 켈트족의 이교도 풍습과 로마카톨릭 전통의 성인 대축일 전야제가 결합된 혼합 문화로 일반적으로 알려진 그 유래를 살펴보고자 한다.
‘환락과 유희의 밤’으로 변화된 오늘날의 할로윈은 아일랜드 켈트족의 ‘삼하인’이라 하는 의식에서 비롯되었다고 알려졌다.
삼하인은 죽음의 제왕인 샤먼을 섬기는 신성한 의식이었다.
당시의 사람들은 성인(聖人)의 날 하루 전날인 10월의 마지막 밤을 여기저기에서 온갖 요정들이 세상으로 나오는 날이라고 생각했으며, 인간이 ‘영(靈)의 세계’에 가장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날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실상 할로윈 데이는 귀신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됐다.
기원전 500년경 영국과 아일랜드, 프랑스 북서부 지방에 살던 켈트족은 죽은 영혼이 자신의 몸속에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귀신 복장을 하고 집안을 차갑게 만들었다.
이들은 열 달을 1년으로 하는 달력을 사용해서 11월 1일은 한 해의 시작이자 겨울이 시작되는 첫날이었다.
당시 한 해의 마지막 날이었던 10월 31일은 저승의 문이 열려 죽은 자의 영혼과 악마들이 이승을 올라와 자신이 머무를 다른 사람을 찾으러 다니는 날이라고 믿었다.
이렇게 할로윈은 고대 브리튼과 아일랜드에 거주했던 켈트족의 문화에서 유래했다.
켈트족은 한 해에 네 번 축제를 열었다.
매년 10월 31일에 열리는 ‘삼하인(Samhain) 축제’가 그중 하나다.
켈트족은 이 축제 때 동물의 머리나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어 분장을 했고, 동물이나 곡식, 사람을 제물로 바쳐 불에 태웠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삼하인 축제는 로마카톨릭교회가 아일랜드에 전파된 후 6세기 무렵에 로마카톨릭교회에 흡수되었다.
835년경 교황 그레고리오 4세는 모든 성인 대축일을 5월 13일에서 11월 1일로 정식 변경했다.
이후 할로윈은 모든 성인 대축일 전날에 치르는 축제로 굳어졌다.
이렇게 로마카톨릭교회에서 11월은 세상을 떠난 이들의 영혼을 기억하며 기도하는 ‘위령성월’로 전통적인 삼하인 축제와도 연결되는 측면이 있다.
모든 성인 대축일 다음 날인 11월 2일은 ‘위령의 날’로 죽은 이들을 기리며 연옥에서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기도한다.

이후 1840년대의 대기근을 피해 온 아일랜드계 이주민에 의해서 할로윈은 미국에 전해지게 되었다.
그런데 현재의 할로윈 문화가 정착한 것은 20세기 초반부터다. 이전까지는 미국으로 이주한 소수의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출신 이민자들이 벌이는 작은 행사에 불과했다.
1930년대 이후부터는 아이들이 분장하고 집마다 돌아다니며 사탕과 과자를 얻는 풍습도 자리 잡았다.
이렇게 19세기 중반부터 아일랜드 출신의 이민자가 급증하자 전통 축제인 할로윈도 미국 내에서 빠르게 퍼지기 시작하면서 지금은 미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축제가 되어 있다.
이러한 할로윈은 미국 땅에 상륙하여 맘몬(돈의 신)과 결탁한다.
그 이후 할로윈 의상 등 각종 할로윈 상품과 막대한 양의 주류 판매 등으로 거대상권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막을 수 없을 정도로 할로윈 문화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할로윈(Halloween)의 정체

할로윈(Halloween)은 이교적인 풍습이다.

할로윈 데이는 켈트족의 이교도 풍습과 함께 다신교 문화였던 로마를 한 번에 기독교 문화로 바꾸기가 힘들어 점진적인 변화를 위해 로마카톨릭교회에서 채용한 방법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여전히 그 축제 속에는 성경적 근거보다는 다신교적 정신이 스며들어 있다. 따라서 성경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이 할로윈 축제는 비성경적이다.
더 나아가 반기독교적인 축제일 뿐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경계하고 단호하게 거부해야 한다.

할로윈(Halloween)은 사탄적인 문화이다.

할로윈의 정점은 바로 귀신 의상을 입고, 귀신 놀이를 하는 것이다.
마귀상, 귀신상, 도깨비 상, 해골상 등 의상으로 변장해서 집집마다 방문하면서 “Trick or treats” 놀이를 한다.
이러한 “트릭 올 트릿”(Trick or Treat!)은 켈트족들이 죽은 조상 영혼들이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방황하며 가을 수확물에 대해 장난(trick)을 일삼으며 저주를 가져다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들을 저승으로 평안히 보내기 위해서는 술, 음식, 수확한 곡식 등으로 달래주는 일(treat)이 필요한데 이런 의식을 일 년에 한 번 행하는 미신적이고 사탄적인 행위이다.

이렇게 10월 31일에 할로윈(Halloween)을 적극적으로 즐기는 사람들은 기괴한 가면 등의 복장을 하고 있다.
무서운 이빨을 드러낸 모습의 호박 등을 켜고 동네를 누비며 사람을 놀라게 한다.
캔디 구걸 또는 구입을 해 나눠 먹는 관습도 있다.
더 기분을 내느라 아주 섬뜩한(spooky) 장면, 또는 흉갓집(haunted house) 놀이, 공포영화(horror movies) 따위를 즐기기도 한다.
이러한 할로윈은 켈트족의 이교도 풍습이 결합된 사탄적인 것으로 문화라는 광명의 옷을 입고 살며시 사람들에게 스며들고 있다.

옛날 켈트족의 지도자로 동물 희생의 제사장으로 있다가 예수를 믿게 된 탐 생귀네트(Tom Sanguinet)라는 사람은 「할로윈의 어두운 면」(The Dark Side of the Halloween) 이라는 책에서 “할로윈은 사탄이 마음 놓고 활보하는, 사탄이 가장 좋아하는 날”이라고 하였다.

김명도는 할로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할로윈은 어두움과 사단의 소산이다.
어린애들이 재미를 보는 흥겨운 민속놀이가 아닌가?
그게 뭐 그리 대단한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겉으로는 어린애들이 놀이를 즐긴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영적으로 애들은 사단의 노예로서 ‘사단 놀이’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고 보면 이는 크리스천으로 묵과할 수 없는 심각한 문제임이 틀림없다.”

할로윈(Halloween)은 인신 제사와 관련되어 있다.

할로윈(Halloween)의 기원은 인신(人身) 제사를 지냈던 유럽의 고대 켈트족이 지켜온 이교적 풍습에서 유래한다.
당시 켈트족은 폭력적이고 야만성이 있어서 희생 제사를 바칠 때 사람까지 번제로 바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특히 종교집단이던 드루이드교를 신봉하던 드루이드파들은 검은 옷과 검은 두건 차림으로 횃불을 들고 마을을 돌아다니며 강제로 처녀를 공양받아 사람의 모양으로 지은 목조건물에 가두어두고 불태워 삼하인(Samhain)에게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켈트족들은 마법에 걸린 사후의 인간 영혼은 드루이드가 섬기는 신(神)인 삼하인(Samhain)에 의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삼하인은 인간의 죽음과 사후 세계를 관장하는 죽음의 신이었기에 사람들은 당연히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러므로 이때 드루이드파들은 마을을 방문할 때마다 “(처녀를) 바칠 것인가 아니면 죽을 것인가?”라고 묻고는 처녀를 바치지 않는 마을 전체를 불태워버리는 등 대단히 폭력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켈트족은 정령을 숭배하는 드루이드교를 신봉하였던 그들은 죽은 자의 영혼을 두려워했다고 한다.
무덤 속에서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영혼들이 복수하기 위해서 돌아온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인신 제사를 지냄으로써, 악령으로부터 화를 면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할로윈의 상징은 ‘잭-오-랜턴(Jack-o’Lantern)’으로 불리는 ‘호박 등’이다. 큰 호박의 속을 도려낸 뒤 도깨비 얼굴을 새기고, 그 속에 양초를 켜서 도깨비 눈이 반짝이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 호박 등이 바로 ‘잭-오-랜턴’이다. 전설에 의하면 술 잘 먹고, 교활한 잭이라는 사람이 마귀를 속여 골탕 먹인 뒤 죽었다. 앙심을 품은 마귀에 의해 잭의 영혼은 천국도 지옥도 가지 못하고, 아일랜드의 추운 날씨 속에서 암흑 속을 방황하게 되었다. 결국, 추위에 지친 잭은 마귀에게 사정하여 숯을 얻었고, 온기를 유지하기 위해 호박 속을 파내고 이 숯을 넣어 랜턴을 만들었다. 이것이 할로윈을 상징하는 ‘잭-오-랜턴’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신(人身) 제사를 지내던 고대 이교도의 풍습에 의하면, 이 호박 등에 넣는 기름의 원료는 제물로 희생된 처녀의 몸에서 짜낸 기름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할로윈 때 아이들이 사탕을 얻어내기 위해서 집집마다 떼지어 돌아다니며 외치는 소리도, “제물을 바치지 않으면 화를 당할 것이야!”라고 협박하던 고대의 인신제사 풍습에서 기원한 것이라고 한다.

할로윈(Halloween)에 대한 비판적 견해와 제언

10월 31일은 종교개혁일이다.
이러한 종교개혁일 전인 전야제 행사가 공개적으로 사탄을 찬양하고, 악령들을 초청하는 날로 인식되어 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필자에게는 매우 당혹감이 들지만, 현실에서는 오히려 할로윈이 기독교 문화로 포장되어 퍼져감에도 그리스도인들은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 입장에서 보면 분명 로마카톨릭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종교개혁 기념일인 10월 31일에 귀신과 악마, 좀비 등이 출몰하는 ‘할로윈 데이’는 기독교인들이 즐기기 매우 곤란한 기념일이다.

그런데도 할로윈(Halloween)은 미국이나 한국에서 점점 더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할로윈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도 문제이지만 기독교인들이 할로윈을 하나의 문화로 생각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본다. 여기에는 할로윈이 재미가 있다고 생각하다 보니 거기에서 어떤 해로운 것도 보지 못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할로윈은 단순한 문화행사가 아니다. 기독교인 시각에서 보면 분명 할로윈(Halloween)은 사탄을 찬양하는 행사이다. 그러므로 멀쩡한 사람들이 마귀로 분장하여 사탄과 놀아나는 것은 철저하게 배격해야 할 사탄문화임을 인식하고 대처해야 한다.

이렇게 문화라는 이유만으로 귀신 분장과 혐오스러운 도구, 소품 등을 활용해 행사를 즐기는 것은 기독교 신앙에 유익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악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는 일에 불과하거나 사탄을 좋게 만드는 행위이다.

할로윈(Halloween) 데이는 죽음의 영혼들의 모습으로 분장하고 귀신 놀이, 사탄 놀이하는 것은 영적으로 매우 심각한 문제이다. 여기에 아이들에게 사탕을 안 주면 이 집을 그냥 두지 않겠다는 보복성, 폭력적 심리를 자극할 수 있다. 이것은 재미, 흥미의 놀이가 아니라 아이들에게 욕심을 불러일으키고, 협박에 대한 보상 심리의 쾌감을 얻게 하는 것도 교육적으로 바르지 않다고 정준모는 지적하고 있다.

사탄교 창시자인 안톤 라비(Anton LaVey)는 “나는 크리스천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적어도 1년에 한 번 사탄을 숭배하도록 허락한 것에 대해 기뻐한다”라고 말한 바 있다. 또한 예수의 복음을 영접하기 전 사탄교의 고위 성직자였던 존 라미레즈(John Ramirez)는 할로윈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다.

“우리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사탄을 숭배하는데 발 빠르게 움직인다. 왜냐하면 그것이 즐겁기 때문이다. 우리는 할로윈 복장을 하며 얼굴에 색칠하고, 심지어 교회까지도 할로윈을 축하하기 위해 호박으로 교회 정문을 장식한다. 이런 행동은 마치 ‘내 교회가 여기 있다. 네가 가져도 좋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존 라미레즈(John Ramirez)는 계속해서 “우리는 사탄의식을 행한다거나 인간 희생의 의식을 하지 않기 때문에 안전하다고 생각하지만 당신이 할로윈 복장을 하는 순간 사탄이 당신을 소유한다는 사실을 아는가?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은 당신의 법적 권리를 사탄에게 양도하고 당신과 당신의 아이들이 사탄의 휴일을 축하하는 것이다. 당신은 아이들에게 할로윈 복장을 허락함으로써 당신의 아이들을 영적인 희생물로 바치는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이러한 할로윈의 가장 큰 위험은 어린이들에게 사탄, 귀신, 그리고 여러 악한 생각을 친구처럼 만들어 버린다는 것에 있다. 그리고 그것을 재미로 즐기는 동안 어린이들은 선과 악에 대한 개념을 혼동하게 한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어린이들은 ‘재미’가 선악의 기준이 되어 버렸다. 재미가 있으면 모든 것이 용납되고 재미가 없으면 아무리 옳은 것이라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따라서 부모들은 우리의 자녀들에게 선과 악을 분명히 구별하도록 훈련시킬 필요가 있다고 제언하고 있다.

또한 정준모는 이러한 할로윈의 정체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 할로윈은 일종의 우상 숭배이다.

* 할로윈은 다른 신을 인정하고 혹은 섬기는 행위이다.

* 할로윈은 결국 귀신을 좋게 하고 섬기는 일이다.

* 할로윈은 사탄을 일종 사탄을 섬기는 일이다.

또한 정준모는 할로윈에 대한 성경적 비판과 올바른 방향을 위해 다음과 같이 제언하고 있다.

* 할로윈은 유일신 하나님만을 숭배하는 성경적 진리와 어긋난다. 십계명에 하나님 외 다른 신을 섬기지도 말고, 어떤 형상과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했다. 하나님 절대 신앙을 가진 성도로서 할로윈을 지내는 것을 문화적 행사나 놀이가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영성은 바로 귀신을 섬기고 숭상하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 할로윈은 이교적 문화이다. 귀신, 사탄, 우상 숭배의 문화이다. 상업주의, 세속화의 영향이다. 흥미를 유발하는 놀이 행사, 문화 행사가 아니다. 순전한 아이들과 청소년들이 귀신, 사탄, 해골 흉내를 내는 것은 심각한 영적인 문제요, 교육적 문제이다. 이러한 날을 기점으로 가정적으로 교회적으로 대안적 문화 계발과 행사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절대 신앙을 교육할 기회로 삼아야 한다.”

* 할로윈 이교 문화에 대하여 수용하고 관용적 입장을 취하는 것은 일종의 종교다원주의를 추구하는 것이다. 이교문화와 기독교 진리와 문화는 마치 석가모니 출생을 기념하기 위해 목사나 신부가 가서 합장하고 축하하는 행위와 같다.

* 이스라엘 민족이 패망한 역사적 현장을 볼 때, 그들은 아침에는 하나님을 찾고 저녁에는 바알과 아세라를 찾는 혼합주의 신앙행태에서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우리는 문화라는 탈, 어린아이들의 놀이라는 포용성 때문에 절대 양보할 수 없는 하나님 절대 신앙에 흠결이 생겨서는 안 된다.

* 어떤 한인 교회나 미국 교회에서는 10월 31일 ‘할로윈’(Halloween)을 이날을 ‘홀리윈’(Holyween), ‘추수제’(Harvest Festival), ‘할렐루야 나이트’(Hallelujah Night)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여 가족 중심의 행사로 방향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그것도 신앙적 반사 효과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 할로윈 날에 교회에서 그런 행사를 시도하는 자체가 그날을 인정하는 의미도 있다.

* 이스라엘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쉐마교육을 하였듯이, 이날에 가정에서 혹은 교회에서 특별히 휠로윈의 허구성과 거짓 우상에 대한 성경적 진리를 가르치는 시간이 되어야 하겠다.

이제 여호수아는 출애굽 이후 가나안에 입성한 백성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은 말씀을 통하여 분명한 선택을 하라고 경고하였다.

(수24:15)“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는 10월 31일에 대하여 분명히 결단해야 한다. 이날 10월 31일은 종교개혁의 날이다. 그러므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이날을 귀신과 사탄의 날로 즐기는 할로윈 데이로 지낼 것이 아니다. 중세시대 타락한 로마카톨릭교회의 부패로부터 성경으로 돌아가고자 일어난 종교개혁의 날로 알고 지내야 한다.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은 할로윈을 맞아 즐기며 논다고 해서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종교개혁의 날을 뒤로하고 할로윈을 향해 달려간다면 그것은 사탄이 좋아하는 우상을 섬기는 행태가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할로윈은 영적인 싸움에 대상이다. 이에 바울 사도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실천해야 할 것이다.

(엡6:11-13)“(11)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12)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13)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참고문헌

“망자(死者)의 빵”(Pan de muerto - 멕시코 전통명절 “죽은 자들의 날”에 먹는 빵), https://blog.naver.com/myatomgogo/100061017995

“멕시코 죽은 자들의 날”, https://blog.naver.com/ending-note/222029333114

“할로윈 데이(Halloween Day)는 사탄의 날이다.”, http://cafe.daum.net/jrcalvin/LOIV/59

“할로윈, 그리고 모든 성인의 날 만성절”, https://altisimo.tistory.com/54

“할로윈데이 Halloween Day”, http://cafe.daum.net/kcmc91/Pkb8/1163

김명도, “기독교인과 할로윈(Halloween)”, http://cafe.naver.com/solideogloriafaith/1459

김성훈, “할로윈(할로윈)의 정체”, https://cafe.daum.net/kcmc91/Qi6n/60

다음백과, “할로윈 축제”,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42XXXXX00067

다음백과, “할로윈”,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b24h3121a

박혜정, “할로윈데이, 크리스천들에게도 ‘축제’일까?”, 「데일리굿뉴스」, 2018. 10.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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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혜란, “할로윈(Halloween) 축제 - 한 수상한 외래 풍속의 한국 정착기”, http://cafe.daum.net/kcmc91/Pkb8/1158

이대웅, “할로윈 데이와 기독교 신앙: Trick or Treat?”, 「크리스천투데이」, 2019. 10. 31.

장길남, “전 사탄숭배자 “크리스천들의 할로윈 축하에 충격”,「뉴스앤넷」, 2017. 10. 7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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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산나, “할로윈은 마귀 축제 철저하게 배격하라”, http://cafe.daum.net/ilmak/5OwK/8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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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럼버스의 날(Columbus Day)

크리스토퍼 콜럼버스1492년 8월 3일 항해를 시작해 같은 해 10월 12일에 현재의 바하마 제도(諸島)에 있는 산살바도르섬(추정)에 도착함으로써 처음으로 아메리카 대륙에 발을 딛었다. 미국중앙아메리카 일부 국가에서는 이 날을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날이라 하여 매년 10월 12일을 콜럼버스의 날로 정해 기념한다.

특히 미국에서는 10월의 두 번째 월요일을 국경일로 지정해 신대륙 미국의 건국과 번영에 헌신한 이탈리아계(系) 미국인들의 공헌에 감사하고, 이들의 희생을 기리는 행사를 한다.

그러나 베네수엘라를 비롯한 일부 중앙아메리카 국가들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한 이래 150년 동안 1억 명에 달하던 원주민들이 300만 명으로 줄어들었는데, 이 모두가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상륙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콜럼버스는 인류 역사상 가장 큰 학살을 촉발한 침략자이지 존경할 만한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이 날을 '원주민 저항의 날'로 바꾸자.'는 움직임도 일고 있다.[1]

미국의 기념일

콜럼버스의 날은 1906년콜로라도주의 공식 휴일이었으며 1934년에 연방 휴일로 지정되었다.
하지만 미국인들은 콜럼버스의 항해를 식민지 시대부터 기념일로 여겼다.
1792년 뉴욕을 비롯한 미국내 다른 도시에서는 콜럼버스아메리카대륙 상륙 이후 300주년 기념을 자축했다. 1892년 벤자민 해리슨 대통령은 시민들에게 콜럼버스의 날 400주년 기념일을 축하하도록 강조했다.
400주년 기념일에 교사, 성직자, 시인, 정치가들은 콜럼버스의 날 기념일을 통해 사람들에게 애국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애국적 행사는 국가에 대한 충성, 시민권 행사, 사회 발전 축하 등을 위한 방향으로 많이 행해졌다.

19세기 중반 로마 가톨릭 이민자들이 미국으로 들어오면서 쿠 클럭스 클랜(Ku Klux Klan)과 같은 이민을 반대하는 단체가 생겨났다. 이민 반대 시위에 대항한 많은 미국 이민자들과 마찬가지로 가톨릭 이민자들은 이민에 대한 차별에 대항 할 수 있도록 조직을 형성하였으며 반이민 시위에 투쟁하는 동료 이민자들을 지원했다. 조직명은 콜럼버스 기사단(Knights of Columbus)이었다. 이러한 이름을 선택하게 된 동기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가톨릭 신자였고 이민자의 시민권을 상징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당.

일부 이탈리아계 미국인은 1866년 10월 12일 뉴욕시에서 콜럼버스의 날을 축제일이라고 주장하였다.처음에 콜럼비아의 날은 덴버(Davner)에서 이탈리아계 이민자 1세 안젤로 노스(Angelo Noce)의 로비 활동을 통해 미국의 공휴일로 유명해졌다. 1905년 콜럼버스의 날은 맥도날드 제시(Jesse F. McDonald) 콜로라도 주지사의 공식 선언으로 공휴일로 지정되었고 1907년에는 토요일 또한 공휴일로 지정되었다. 샌프란시스코(San Fransico)는 1869년부터 이탈리안계 미국인 들이 기념해왔고 콜럼버스의 날에 대해 두 번째로 기 역사를 갖고 있다. 1934년 콜럼버스 기사단(Knights of Columbus), 민중, 루즈벨트 대통령의 로비 활동을 계기로 같은 해 10월 12일 '콜럼버스의 날'이란 명칭으로 공식 연방 공휴일로 지정되었다.

1971년부터 콜럼버스의 날은 10월 둘째 주 월요일로 변경이 되었으며 우연히 캐나다추수 감사절과 같은 날이 되었다. 현재 은행, 채권 시장, 우체국, 연방 조직, 대부분의 정부 사무실, 학교는 콜럼버스의 날에 쉰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기업 및 증권 거래소는 쉬지 않으며 미국내 몇몇 주는 공휴일로 준수 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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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고고학 자료 모음



역사를 증언하는 최초의 고고학 발굴 

https://m.cafe.daum.net/kphpi21/HoLI/647

19세기 초만 해도 사람들은 땅 속을 파헤쳐 옛 유물을 찾는다는 생각을 미처 못했다. 19세기 중엽에 이르러서야 고고학자들이 옛 문헌에 비추어 심증이 가는 지역의 땅 속을 파보기 시작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이렇게 성서에서 실마리를 찾으려는 고고학자들 덕분에 발견됐다.  

1840년 모술에 프랑스 영사관이 들어섰다. 영사로 폴 에밀 보타가 취임했다. 지금은 이라크 땅이 된 모술은 당시 교통의 요지였다. 모술 강 건너 마을에 높다란 둔덕들이 띄엄띄엄 있었다. 보타는 저녁마다 말을 타고 둔덕들을 둘러보며 집집마다 점토판이나 골동품을 수소문했다. 

이미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7년 동안 외교관으로 근무하며 고대 유적에 익숙해진 보타는 모술 시장에서 골동품들을 사들였다. 그의 목적은 유물의 출처를 알아낸 후 유적지 자체를 발굴하는 것이었다. 

예언자 요나의 무덤 사원이 있는 네비 유누스 언덕에 집을 짓고 사는 사람들이 많은 골동품을 캐내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보타는 그곳을 발굴하려 했다. 하지만 예언자의 신성을 훼손시킨다는 이유로 마을 사람들의 반대에 부딪쳤다. 보타는 할 수 없이 그곳에서 약간 떨어진 퀸지크(양떼) 언덕을 파 보기로 했다.

 

그는 본디 의사였다. 고고학자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둔덕을 파 보려는 까닭은, 부친이 역사학자로 평소 역사에 관심이 많았던 차에 독일인 아시아학자 줄리우스 몰이 부탁한 말 때문이었다. “대영박물관에 가면 메소포타미아 벽돌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쐐기모양 문자가 새겨져 있소. 아마도 수천 년 간 땅 속에 묻혀 있는 엄청난 문명을 풀 실마리가 될 겁니다. 그러니 모술에 가거든 쐐기문자가 새겨진 벽돌을 찾아보고 가능하면 거기 널린 둔덕들을 파보시오.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가 거기 묻혀 있을지도 모릅니다.”

 

보타는 일꾼을 모아 둔덕을 1년 가까이 팠으나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다. 비록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할 만한 보물들을 찾아낼 수 없어서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1842년의 니느웨 발굴은 메소포타미아 고고학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모술에서 16㎞ 떨어진 코르사바드에서 사람이 찾아왔다. “우리 마을에는 당신이 찾고 있는 점토판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보타는 일꾼 두세 명을 딸려 보냈다. 1주일쯤 지나 일꾼 한 사람이 헐레벌떡 돌아왔다. “삽질을 하자마자 벽이 나타났는데 이상한 그림들이 새겨져 있더군요.” 보타는 허겁지겁 말에 뛰어올라 그곳으로 달렸다.

 

 

* 최초의 발굴품, 사람 얼굴에 날개 달린 짐승

  

 

 

 

 

몇 시간 뒤 그는 그 때까지 누구도 본 적이 없는 유물들을 캐냈다. 턱수염이 무성한 사람 얼굴에 날개 달린 짐승의 몸뚱이였다. 그것은 이집트에서도 보지 못한 새로운 조각 예술이었다. 보타의 가슴은 터질 듯했다. 그리고 발굴현장에 쪼그리고 앉아 조각품들을 모사했다. 너무도 생소한 것이었다. 

      

 

며칠 후 탐사대 전체를 코르사바드로 불렀다. 성벽이 드러났다. 땅을 팔 때마다 새로운 성벽이 나타났다. 마침내 보타는 고대 아시리아 왕궁 가운에 하나를 발견했다고 확신했다. 그는 이 사실을 얼른 파리로 알렸다. 1843년 5월24일이었다. 신문에 아시리아 유적이 발견됐다고 대서특필되었다. 현대 고고학 발굴의 효시가 된 에밀 보타의 ‘땅 파기’에 프랑스는 열광했다.

   

*  전설을 역사의 세계로 끌어내다

 

      

  (백향목이라 불리는 레바논 삼나무를 배로 운반하고 있는 수메르인들) 

 

 

 

그 무렵 이집트가 인류의 발상지라고 알려져 있었다. 에덴동산은 다만 전설일 뿐이었다. 성경에 무려 152차례나 언급된 아시리아 제국 또한 전설에 지나지 않았다. ‘니네베’라는 말은 성경에 20군데, ‘아시리아’라는 말은 132군데나 나온다. 그런데 그 아시리아가 정말 있었다. 메소포타미아에 이집트보다 더 오래된 문명이 있었다. 학자들은 긴장했고, 기독교 신자들은 흥분했다. 

 

* 니네베 근교의 여름궁전

 

           (제사장과 사르곤 2세, 루브르 박물관)

 

프랑스 정부는 거금 14만 프랑을 모아 보내면서 발굴한 유물을 스케치할 화가까지 딸려 보냈다. 아직 사진기가 없을 때였다. 힘을 얻은 보타는 1843년부터 4년 동안 메마른 날씨와 말라리아에 시달리며 발굴에 모든 힘을 쏟았다. 보타가 코르사바드에서 찾아낸 것은 기원전 709년 니네베 근교에 세워진 여름 궁전이었다. 성벽이 잇따라 나오고, 방과 정원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돌을 깎아 만든 사람이나 짐승 모습의 ‘조상(彫像)’과 편평한 돌 따위에 어떤 모양을 반입체적으로 돋을새김 한 ‘부조(浮彫)’들도 쏟아져 나왔다.

 

* 거대 도시가 5년 만에 건설되다

 

           (사르곤 왕의 청동 두상)

 

이 도시는 기원전 8세기 아시리아 제국의 왕 사르곤 2세가 통치할 때의 수도였다. 도시 중심의 거대한 왕궁으로 700개의 방이 안뜰을 둘러싸고 있는 궁전이었다. 여기 궁전 도서관에서 약 2만 여 개의 고문서를 발견함으로써 아시리아학이 탄생하였다. 왕궁 벽에는 수렵과 전쟁 모습이 채색타일로 묘사되어 있었다. 그리고 거대한 부조로 장식된 성벽의 길이만 사방 1.6 킬로미터에 달하였다. 놀라운 것은 이런 거대 도시가 5년 만에 건설되었다는 사실이다. 3천 년 전 나라가 그토록 짧은 기간에 거대 도시를 완성할 만한 국력을 가졌던 것이다.

 

* 급류가 삼켜버린 인류 유산들

 

           (축복하는 지니 신)

 

보타는 30여 톤에 달하는 거상을 4 조각으로 나누어 뗏목에 실었다. 그런데 뗏목이 티그리스 강 급류에 휘말려 가라앉고 말았다. 어둠 속에서 수천 년 만에 부활한 아시리아의 석조 신과 왕들은 또다시 현실세계로부터 사라졌다. 그러나 보타는 낙심하지 않았다. 새로운 배를 띄워 더 많은 유물을 파리로 실어 보냈다. 2500년 전 역사에서 사라졌던 대제국의 자취들은 이렇게 해서 루브르박물관에 자리 잡게 되었다.

 

보타는 1843년부터 4년 동안 발굴에 힘을 쏟았는데 이 유적지의 발굴은 후임자 빅토르 플라스(1858~65)와 미국의 시카고대학 탐험대(1928~35)에 의해 계속되었다. 성곽의 훌륭한 부조, 상아 조각품, 거대한 날개달린 황소상들이 발견되었지만, 가장 귀중한 발견은 BC 1700년경부터 BC 11세기 중반 무렵까지의 아시리아 왕들에 관한 기록인 '아시리아 왕 명부'이다. 보타의 후임인 빅토르 플라스는 톱질을 하지는 않았지만 강에서 마주치는 재앙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1856년 루브르에 도착한 유물은 이때도 수백 점 가운데 불과 26점 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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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2020년) 성서고고학 '10가지 유적' 발굴 쾌거
- 사해사본 진위, 므낫세, 오므리, 4대 족장, 라오디게아 교회 등 유적 발굴


2021년 1월 15일 크리채니티투데이는 2020년도에 성서 역사에 나타난 10가지 고고학적 위대한 발굴에 대하여 소개하였다.
발굴의 위대한 순서는 10위부터 1위까지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10. 아시리아 신 조각

이탈리아와 쿠르드 고고학자들은 신성한 동물의 등에 서 있는 아시리아 왕과 일곱 아시리아 신을 묘사한 15피트 바위 조각을 발견했다. 이 작품은 이라크 북부 쿠르드 지역의 운하를 따라 절벽에 부조로 조각되었다. 왕은 기원전 722년에서 705년까지 통치하고 이스라엘 북부 왕국을 정복한 사르곤 2세로 여겨진다(왕하17 : 6). 발굴된 운하는 사르곤 2세의 노예가 된 이스라엘 사람들이 파낸 것으로 여겨진다.

9. 단단한 바위 위에 지어진 교회 유적

이스라엘 북부의 바니아스를 발굴한 것으로 일반적인 관행처럼 다른 신의 성지 꼭대기에 지어진 4세기 교회의 유적이다. 바니아스는 판 신의 숭배의 중심지였으며, 이 신사는 그리스 신을 숭배하기 위한 곳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어떤 고고학자는 이곳을 4세기의 기독교인들은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주는 그리스도입니다”라고 고백하였고, 예수님께서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다”(마태복음 16: 13-19)라고 말씀하신 빌립보로 추측하기도 한다. 폐허의 한 돌에는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공식 종교가 된 직후 교회를 방문한 순례자들이 남긴 십자가 표시가 되어 있다.

8. 다윗 왕과 동맹을 맺은 요새

고고학자들은 기원전 1,000년경 다윗 왕의 통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골란 고원에서 요새화된 건물을 발견했다. 요새의 큰 현무암 돌에는 팔을 뻗은 두 개의 뿔이 있는 인물이 새겨 져 있다.

고고학자들은 이 건물이 다윗 왕의 동맹인 게슈르 왕국의 전초 기지라고 추측하였다. 압살롬의 어머니인 다윗의 아내 마아가는 바로 이 지역인 그술왕의 딸이었다.

7. 성스러운 연기 잔류물(4대 족장들의 제단)

기원전 8세기 제단의 불에 탄 표면에 있는 유기물에 대한 새로운 테스트에서 마리화나의 잔류 물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대마초가 고대 이스라엘의 모든 형태의 숭배와 관련이 있으며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마리화나 의식 사용과 관련이 있다는 최초의 증거이다. 제단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께 제사드린 곳이다.

아라드 사막 요새에ㅍ있는 예배당은 1960년대에 처음 발굴되었다. 반세기 전에 실시된 테스트로는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그러나 작년에 새로운 장비와 기술을 사용하여 새로운 테스트가 수행되었다. 현장의 두 번째 제단에는 유향의 흔적이 있었다.

6. 예루살렘에 버금가는 성전

텔아비브 대학 고고학자들은 예루살렘 근처의 이스라엘 1번 고속도로를 재건하는 동안 발견된 사원이 기원전 900년경에 지어졌다고 추정한다. 모차 사원의 크기는 솔로몬이 반세기 전에 지은 사원과 비슷하고 동쪽으로 불과 5마일 떨어져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예루살렘 성전에 버금가는 이 사원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낸 하나님을 숭배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것 같다고 추정한다.

5. 가나안의 신들

이스라엘의 고고학자 요세프 가르핀켈은 기원전 12세기부터 가나안 사원의 폐허를 발견했다.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구약 도시 중 하나인 라기 쉬에 위치한 발굴 현장은 보석을 포함하여 가나안 숭배에 사용된 유물(단검, 청동 조각상) 등을 발굴했다.

특히, 이곳 사원전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은 은으로 코팅된 청동 홀이다. Garfinkel은 가나안의 신 바알의 인간 크기의 동상이 그것을 가지고 있다고 추측된다. 동상 자체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고대 가나안 신의 큰 동상은 발굴하기는 매우 드문 현상이다.

4. 잘 보존된 오므리와 아합 궁전

현대 도시 아풀라 외곽의 이즈르엘 계곡에서 도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고고학자들은 오므리와 아합과 같은 이스라엘 왕을 섬기는 왕실 단지를 발견했다. 이 단지는 아합왕의 또 다른 궁전이 있는 텔 이즈르엘에서 불과 6km 떨어져 있었다. 그들이 발견한 커다란 기둥 건물은 “이스라엘에서 발견된 가장 잘 보존된 오므리 가문 건물”라고 했다. 현장에서 발견된 저장 용기는 중앙 집중식 식품 유통 시스템으로 추측하고 있다.

3. 라오디게아에 한 집에 교회

터키 고고학자 Celal Şimşek은 라오디게아의 한 집을 발굴하면서 기독교 숭배에 사용되는 신성한 물건을 발견했다. 중앙 정원이나 안뜰 주변에 지어진 페리 스타일 하우스는 극장 옆에 있었으며 부유한 사람들이 소유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사도 바울은 라오디게아에 있는 교회에 서신을 보냈는데, 이는 골로새서에 언급되었지만 잃어버린 것으로 보인다. 이 교회는 또한 요한계시록에 예수님께서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계 3장 17절)라고 말씀하신 곳과 연관이 있다.

심섹은 그가 발굴한 종교적 항목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지만 교회가 있는 집은 학자들이 “1 세기 중반부터 라오디게아에서 기독교가 전파된 방법”에 대한 잘 이해하게 될 소중한 유물이라고 결론지었다.

2. 성경 사본 및 유물의 진위 여부 확인 및 발견(사해 두루마리 파편은 가짜 판명)

성서 고고학자들이 겪고 있는 한 가지 문제는 그들이 개인적으로 발굴하지 않은 유물, 즉 유물 시장에서 판매되는 품목의 진위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다. 2020년도는 최첨단 기술이 어떻게 도움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몇 가지 주요 사례를 보았다. 한때 모조품으로 여겨졌던 점토 물범 인상은 진품인 것으로 나타 났으며, 한때 진짜라고 믿었던 사해 두루마리의 파편은 가짜로 밝혀졌다.

Ben Gurion 대학의 Yuval Goren 교수와 그의 팀은 포효하는 사자를 묘사한 "불라" 또는 점토 물개 상이 기원전 788-748 년에 통치했던 여로보암 2세의 통치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추측했다.

또한, 예술 위조 탐사 전문 회사는 성경 박물관 컬렉션에 있는 사해 두루마리 조각 16개가 모두 현대 위조품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70개 이상의 다른 가능성 위조 조각 2002년 이후 복음주의 수집가에게 제공되었다고 보고있다.

1. 므낫세 통치의 유적

왕하 21장의 통치자인 므낫세 왕에게 속한 궁전 유적의 발견을 발굴했다. 이 유적은 남쪽에서 템플 마운트와 예루살렘 구시가지를 내려다보는 아르몬 하나 치브 산책로에 위치해 있다. “원시적인” 석조물은 첫 번째 사원 시대의 왕실 건물과 관련이 있다. 그 구조는 그의 아버지 히스기야 왕으로부터 남쪽 왕국을 점령한 므낫세의 55년 통치로 거슬러 올라간다.

새로 지어진 미국 대사관 근처에서 몇 블록 떨어진 고고학자들은 대형 창고의 잔해도 발견했다. 중앙 집중식 식량 유통 시설로 여겨지며 아마도 농업 잉여 저장고로도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0년 전 고고학자들은 라 마트 레이첼 근처에 있는 궁전과 행정 센터의 유적을 발견하였다. 그런데 2020년의 발굴 보고서와 새로운 발굴 보고서를 통해 학자들은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을 따라 이 지역이 유다 왕국의 후대 통치자들의 주요 활동 중심지였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뉴스파워 해설*

2020년 성서 고고학자들의 노력으로 위대한 발굴의 쾌거를 이룬 한 해였다. 특별히, 구약 성경의 중요한 유물의 발굴과 신약 계시록의 7교회 중 한 곳이 라오디게 교회의 발굴로 성경의 기록이 역사적 사실음을 과학적으로 입증해 주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 말씀의 놀라운 구원역사와 그 위대성에 다시 한번 놀라움과 찬사를 드릴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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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산 호렙



하나님의 산 호렙

성경 기록에 의하면 호렙산은 종종 언약의 산으로서, 십계명을 부여받았던 시내산과 혼용되고 있다.
즉 성경은 두 산의 지리적 구별을 엄밀히 하고 있지 않다.
이런 견지에서 두 산의 관계에 대한 몇몇 견해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산의 총칭은 호렙인데 특별히 정상 부분만을 일컬어 '시내'라 한다.
2. 한 산에 두 봉우리가 있어 하나는 호렙이고 다른 하나는 시내이다.
3. 두 산은 동일한 산으로서 두 가지 이름을 갖는다.

이처럼 각 견해를 종합해 보더라도 두 산의 관계를 엄밀히 구분하기란 어렵다.

한편 유대 전승에 의하면 오늘날 호렙(시내)산은 시내 반도 최남단에 위치한 해발 2, 291m의 '예벧 무사'(jebel Musa, 모세의산)에 해당한다고 전한다.

그런데 이곳을 특별히 하나님의 산이라고 명명한 것은 혹자의 주장처럼 이곳에 '이드르'의 신전이 있었기 때문(pulpit commentary)도 아니고, 그 이전부터 거룩한 곳으로서 그렇게 불려왔기 때문(Knobel)도 아니다.

그것은 출애굽 직전 모세가 이 산 정상에서 하나님께로부터 거룩한 소명을 부여받았기 때문이고, 나아가 출애굽 직후에 하나님께서 이 산에 현현하사 언약의 증표로 율법을 수여했기 때문이다(Keil).

따라서 이 산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나시기 위해 자신을 드러내신 현현의 장소로 간주되어 이스라엘 백성에게 거룩한 산으로 성별되어 영영히 기억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