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한 십일조(말라기 3:10)


말라기 3:10 / 온전한 십일조(콜 함마아셀) all the tithes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Bring the whole tithe into the storehouse, that there may be food in my house. Test me in this," says the LORD Almighty, "and see if I will not throw open the floodgates of heaven and pour out so much blessing that you will not have room enough for it.

온전한(3605) כֹּל 

1. 전체,  2. 모두,  3. 온통

발음 / 콜(kôl)
어원 / 3634에서 유래
구약 성경 / 5408회 사용

* 3634. כָּלַל 

1. 완성하다,  2. 왕관을 쓰다

발음 / 카랄(kâlal)
관련 성경 / 온전하게 하다(겔 27:4, 11).
구약 성경 / 2회 사용

1. (동사) 완성하다, 성취하다, 숙달시키다, 완전히 하다, 겔 27:4,11
2. (동사)  왕관을 쓰다, 왕관을 씌우다.

십일조(4643) מַעֲשֵׂר  

1. 십분의 일,   2. 십일조,  3. 열번째

발음 / 마아셀(maʽăsêr) 
어원 / 624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십일조(민 18:21, 대하 31:6, 느 10:37), 십분지 일(겔 45:11, 14).
구약 성경 / 32회 사용

(명사) 남성  - 십분의 일, 십일조, 열 번째, 창 14:20, 신 14:23, 28,  26:12, 느 10:37

* 6240. עָשָׂר 
1. 열,  2. אַחַד עָשָׂר

발음 / 아사르(ʽâsâr) 
구약 성경 / 337회 사용

뜻풀이부

1. 수사, 남성 열 [다른문자와 함께 사용].
a. 수사, 남성   [주]אַחַד עָשָׂר, 열하나, אַרְבָּעָה עָשָׂר: 열넷. שִׁשָּׁה עָשָׂר: 열여섯.

온전한 십일조
전체에 대한 1/10 이라는 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온전한 십일조는 10/10 모두가 하나님의 것이라고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1/10이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가장 작은 것 즉 최소한의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전체를 바칠 수 없는 이 세상에 속한 아주 연약한 질그릇과 같은 인생이 1/10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통로가 되는 것이라고 하겠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온전한 십일조가 무엇인지 알려면 ​먼저 성경에 나오는 온전(穩全)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성경의 "온전"이란 티끌만큼도 죄가 없는 무흠한 상태를 온전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누구도 온전할 수 없는 죄인이며 오직 하나님만이 죄가 없어 "온전"하십니다.
예수께서도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 하시며 하나님께서는 죄 없는 온전하신 분임을 말씀 하셨습니다.

"온전"에 대한 성경 말씀입니다.

​히브리서 12:2.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베드로전서 5:10.  그리스도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너희를 친히 "온전케"하시며

데살로니가전서 5: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잠언 20:7.  온전하게 행하는 자가 의인이다.

누가복음 6:40.   무릇 온전하게 된 자는 그 선생(그리스도)과 같으리라.

히브리서 10:14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온전한 십일조"란 흠 없고 죄 없는 제물을 뜻하며 그리스도를 뜻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했다고 꾸짖으셨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건강한 양과 소와 물질의 십일조를 드리지 않아서 하나님께서 십일조를 도적질했다고 꾸짖으셨을까요?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드리지 않는 제물은 받지 않으십니다.

"소를 잡아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고 어린 양으로 제사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꺽음과 다름이 없고"(사 66:3)
그리스도가 담기지 않은 제물을 꾸짖으셨습니다.

말라기 3:7-11을 살펴보며 도적질한 십일조가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7.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열조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도다"

​핵심은 "내게로 돌아오라"입니다.
물질의 십일조를 내면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은 예수를 믿는 방법 뿐이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바울도 믿음의 선진들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갔다고 말하고 우리도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신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라고 말합니다(히 12:2)

구약의 이스라엘도 믿음의 선진들을 따라 장차 오실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십일조와 헌물을 드렸다면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의 행위에는 철저했으나 제물의 참뜻인 예수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도가 없는 헛된 제물로 헛된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 돌아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말라기를 통해 십일조의 참뜻인 예수를 믿고"내게로 돌아오라"고 명령 하신 것입니다. 

8.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하나님께서는 십일조와 헌물을 도적질했다고 하십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이스라엘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이렇게 죽으실 것이다"라는 믿음으로 짐승을 죽여 제사를 드리고 십일조와 헌물을 드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제사장들은 그리스도가 빠진 헛된 제물을 드리며 행위에만 열중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빠진 예물은 하나님께서 결코 받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향해 하나님의 것인 그리스도를 도적질했다고 꾸짖으신 것입니다.

​"도적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를 영어로 번역하면 '커버"(COVER)라고 합니다.
커버(COVER)는 "덮다""감추다"라는 뜻 외에"속이다"라는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즉, 제사장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일조와 헌물이 나타내고 있는 그리스도를 "덮고,감추고,행위에만 매달리게 하여 헛된 제물을 드린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행위에는 철저했습니다.
그들은 막대기 아래로 지나가는 양들 중 열 번째 양이나 소를 가져갔을 것입니다.
이 제물은 우열을 교계하거나 바꾸지 못합니다(레 27:32-33).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더러운 떡'"눈먼 희생'"병든 것' "흠있는 것으로 사기하여 내게 드리는 것' "토색한 물건'과 "저는 것"(말 1:7-13)

이렇게 책망하시고 저주하신 이유는 제물이 예표하는 그리스도를 덮고 감추고 훔치고(토색) 눈먼 희생에만  열심을 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향해'십일조 도적'이라고 저주하셨습니다.
구약시대가 끝나고 그리스도가 밝히 드러난 오늘날도 십일조에 나타난 예수를 카바(COVER)하여 덮어버리고, 십일조를 돈으로 요구하는 자들은 십일조 도적들입니다.

9.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그리스도를 도적질하고 행위에만 열중한 육적 이스라엘은 늘 가뭄과 흉년에 시달리고 외세의 침입으로 포로로 끌려다니는 등,저주를 받았으며 끝내는 오신 그리스도마저 죽이고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창고" "나의 집에 양식""하늘 문을 열고""복"의 뜻이 무엇인지도 살펴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창고"와 "나의 집"은 하나님 나라를 비유로 말씀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양식"은 무엇일까요? 
예수께서 "양식"에 대해 말씀하신 것을 찾아 보고 하나님의 양식이 무엇을 뜻하는지 살펴봅시다.

예수께서는 사마리아를 지나가시다가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 간 사이에(요 4:8)물을 길러 나온 사마리아 여자에게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내시고 믿게 하셨습니다(요 4:26).
이때 제자들이 돌아와 먹을 것을 드리며 "랍비여 잡수소서"라며 음식을 권하자 예수께서는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요 4:32)라고 하셨습니다.

​어리둥절한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4:34)

즉, 하나님이 받으시는 양식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오르셔서 몸찟고 피흘려 성도들을 구원하시는 것이며 이로 말미암아 구원 받은 성도들을 양식이라고 표현하신 것입니다.
인간들이 양식을 모아 창고에 저장하듯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나의 집" "창고"인 하늘 곳간에 모으는 일을 하십니다.
즉,구원 얻은 성도들을 양식이라는 비유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하늘 문을 열고 쌓을 곳이 없도록 붓는 복"

하늘 문이 무엇일까요?
하늘 문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있는 문이며 천국의 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예수를 통해서만 들어갑니다.
하늘 문은 천국 열쇠를 가지신 예수입니다.
믿음의​ 선진이며 신약성도를 상징하는 야곱은 꿈에 하늘에 닿은 사닥다리를 보았습니다(창 28:12)
즉, 예수를 본 것입니다.
야곱은 예수를 보고 하늘 문이라고 고백했습니다(창 28:17)
즉 예수님이 하늘 문입니다.
예수께서도 야곱이 본 사닥다리가 자신임을 말씀하셨습니다(요 1:51)

즉, 하늘 문인 예수를 통해서 쌓을 곳이 없도록 "복"을 주시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늘 문을 열고 내리는 하늘 보화는 물질이 아니라 구원의 복입니다.
구원보다 더 큰 복이 무엇이겠습니까?

​복음에 눈이 가려진 삯군들은 온전한 십일조를 내면 쌓을 곳이 없도록 돈을 부어주신다며 신도들을 기복신앙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삯군들에게 미혹된 신도들은 구원의 복이 얼마나 귀하고 큰 것인지 모르고 물질 복을 좇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이란 모든 것을 다 팔고 목숨까지 바쳐서라도 소유해야하는 값진 진주인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신도들은 재물복을 받으려 십일조에 열심을 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본체이시며 성경의 주인이신 예수께서는 단 한번도 물질 복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모든 것을 더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하나님나라에 들어 갈 수 있는 십자가의 의를 구하는 것이 먼저라고 말씀하시고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고 하시며 세상 복을 좇지 말라고 하셨으며 또한 물질에 대해서는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를 먹이고 입히시는데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라고 말씀하시며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1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황충을 금하여 너희 토지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성경에 나오는"황충"은 하나님과 성도들을 대적하는 마귀,사단을 뜻합니다.
그리고 "토지,"밭.은 마음 밭인 심령을 뜻합니다.
또 소산과 과실(열매)는 심령에 맺힌 믿음의 열매를 뜻하며(요 15:16)
포도나무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라고 말씀하신 예수를 가리키는 비유입니다.
또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는 성도들이 천국에 이르기 전에는 결단코 실족하여 떨어지지 않게 지키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12. "너희 땅이 아름다와지므로 열방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땅은 세상의 땅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아름다운 땅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며 가나안 땅, 궁극적으로는 천국을 뜻합니다.
예수님과 성도들이 거하는 천국이 얼마나 아름다울지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옥에 떨어진 수많은 사람들은 천국에 있는 성도들을 "복되다"할 것입니다.

​말라기서는 구약의 마지막 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보내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말라기를 통하여 십일조에 담겨진 온전한 제물이신 예수를 믿고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강조하시는 말씀이 바로 말라기 3:7-12입니다.

선지자 말라기가 말하는 온전한 십일조오직 죄 없이 온전하신 예수그리스도뿐입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말라기서에 나타난 십일조에 대한 책망은 표면적으로는 수입의 십일조를 하지 않은 것에 대한 책망인 것 같지만 포괄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대한 불경건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온전히 경배하지 않는 태도에 대한 책망이다.

수입의 십일조를 하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으로 보았겠지만 더욱 큰 도둑질은 하나님을 온전히 경배하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태도였다. 하나님을 온전히 경배하지 않으므로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 하는 신앙에서 파생되어 나온 열매가 온전한 수입의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말라기 3장 9절에 보면 온 나라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였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가 수입의 십일조를 하지 않았다기보다는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가 하나님을 온전히 경배하지 않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율법주의와 형식주의와 관습주의에 빠져서 하나님을 온전히 경배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탄식의 소리다. 말라기 3장 10절을 보면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고 말씀한다.

온전한 십일조는 문자 그대로 수입의 온전한 십일조를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선적으로 요구하시는 것은 수입의 온전한 십일조 이전에 하나님을 온전히 경배하는 관계를 요구 하신다. 즉 하나님을 온전히 경배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 열매로 수입의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복”에 대한 해석도 성경 전체가 말하고 있는 복의 개념에서 해석을 해야 할 것이다. 성경 전체가 말하는 복의 개념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가지므로 공급받게 되는 그리스도의 생명의 풍성함을 가리킨다. 10절에서 말하는 “양식”도 결국은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생명의 양식이라고 말씀하신 바로 그 진리의 말씀으로 연결해야 한다. 시험해보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하나님이 정말 물질적 축복을 주는지 아니 주는지 시험해보라는 그런 취지로만 해석을 하면 온전한 해석이 되지 못한다. 하나님은 자신을 온전히 경배하고 온전히 사랑하므로 온전한 수입의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는 자에게 복을 주신다.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복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이 땅의 물질세계에서 얻는 복이다. 두 번째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복이다. 이 영원한 복은 구체적으로 인간의 언어로는 설명이 곤란하지만 한마디로 말한다면 하나님 자신이 곧 궁극적 복의 핵심이 된다. 이 땅에서 얻는 물질적 축복은 하나님을 온전히 경배 하면서 수입의 온전한 십일조를 드린다 할지라도 받을 수도 있고 받지 못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고난의 과정을 지나게 하면서 그 고난의 과정을 통해서 인격을 다듬어서 성품의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쪽에서는 성품의 열매 없이 물질의 복을 누리는 것보다는 물질이 빈곤한 과정을 통해서라도 성품의 열매를 맺도록 하는 것이 목표다. 빈곤한 과정의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의 요구에 잘 순응하여서 성품의 열매를 맺는다면 하나님은 얼마든지 물질로도 복을 주실 수 있으실 것이다. 이렇게 이 땅에서 누리는 물질의 복은 받을 수도 있고 받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복은 하나님을 온전히 경배하는 자에게 반드시 주어지게 된다. 하나님께서 원래 받고 싶은 온전한 십일조는 눈에 보이는 물질 이전에 하나님의 백성들 자신이다. 원래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져야 하는 헌물인데 대신하여 표면적으로 수입의 십일조로 구별하여 드리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언제나 흠 없고 점 없는 제물을 원하신다. 그런데 사람은 죄로 인하여 그렇지 못하다. 사람 스스로는 하나님께 온전한 제물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죄 있는 사람을 대신하여 드려진 제물이 그리스도 예수다. 그러므로 수입의 십일조를 드릴 때는 먼저 그리스도 예수로 충만한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그리스도 예수로 충만히 채워진 자기 자신과 함께 그 표징으로 수입의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진짜 양식이 되시는 그리스도 예수로 가득 찬 성도들로 성전이 가득 채워지기를 바라신다. 하나님을 시험해보라는 말씀은 정말 그러한지 아니한지 테스트 해보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을 온전히 경배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복되게 하실 것에 대한 확신과 신뢰를 가지라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정말 그런지 아니 그런지 실험해보라는 의미는 충분한 해석이 될 수가 없다. 그런 해석들이 지난날 한국교회에 기복신앙을 낳게 한 원인중의 하나가 되어 오지 않았는가? 정말 그리스도 예수로 충만하고 하나님을 온전히 경배하고 온전히 사랑한다면 바로 그것 자체가 곧 복이 되는 것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온전한 십일조란 어떤 것인가요?


성도의 생활은 감사하는 생활이 특징이다. 성도에게는 구원의 은혜와 일상생활에서 베푸시는 은혜에 대한 감사로 범사가 감사의 대상이 된다. 마음속에서 느껴지는 감사는 보통 몸을 드리는 것과 물질을 드리는 것을 통해 밖으로 표현이 된다. 물질을 드리는 것의 대표적인 것은 십일조이다. 그래서 성도들은 당연히 십일조 생활을 해야 하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온전한 십일조의 액수를 정하는 과정에 있어서는 모든 수입의 십일조를 드릴 것인가, 필요 경비를 제외한 순수입의 십일조를 드릴 것인가. 손해를 보는 경우에도 십일조를 해야 하는가 하는 등의 여러 가지 관련된 문제들로 인해 어려움을 겪을 때가 있다.

이제 무엇이 온전한 십일조인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1. 십일조의 기원

고대 이집트나 시리아를 중심한 많은 나라들에서는 국민들에게 정치적인 성격의 십일조를 요구했다. 사무엘 선지자의 예언을 보면, 이스라엘 왕들도 왕실을 유지하기 위해 국민들에게 십일조를 요구했던 것으로 보인다(삼상 8:15, 17). 현재에도 우리나라나 다른 여러 나라들은 부가가치세 등에서 보는 것과 같은 정치적 세금 형태의 십일조를 여전히 국민들에게 부과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명령하고 있는 십일조란, 재산이나 소득의 십분의 일을 종교 기관이나 종교적 목적을 위해, 또는 기업(재산이나 직업)이 없는 레위인(목회자)들을 부양하기 위해 바치는 것을 의미한다.

십일조에 관한 규정은 광야에 머물고 있던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여러 하나님의 계명들과 함께 처음으로 등장한다(민수기 18장과 레위기 27장). 그리고 가나안을 눈앞에 둔 여리고 맞은편에서 다시 한 번 십일조에 대한 계명이 반복된다(신명기 14, 26장). 하지만 십일조 제도는 이미 오래 전부터 시행되고 있었다. 아브라함은 전쟁에서 노획한 전리품 중에서 십분의 일을 제사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는 사람인(히 7:1) 살렘 왕 멜기세덱에게 드렸다(창 14:20). 이 전통에 따라 야곱도 벧엘에서, 모든 소득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릴 것을 서약했다(창 28:22).

십일조는 신약 시대에도 계속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십일조 제도가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무관하게 행해지는 것을 안타까워하시면서,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지니라”(눅 11:42)고 십일조를 지칭해서 말씀하셨다. 이것은 십일조 제도가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함께 지켜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신 것이었다. 그러나 죄로 어두워진 사람들은 심지어 우상에게까지 십일조를 바쳤다(암 4:4). 또 부패한 대제사장의 탐욕 때문에 가난해진 제사장들은 백성들에게서 강제로 십일조를 강탈하다가 예수님께로부터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 23:23, 33 참조)라는 책망을 듣기도 했다.

초대교회 이후부터는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군이 저 먹는 것을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마 10:10), “일군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눅 10:7), “누가 자비량 하고 병정을 다니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실과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때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고전 9:7)고 하신 말씀들을 근거로 해서, 드려진 십일조를 목회자의 생활비를 충당하는 데 아무런 이의 없이 사용을 해왔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예에서 보는 것 같이, 일부의 사람들은 자기의 생활비를 스스로 마련하는 경우도 없지는 않았다.

2. 십일조의 종류

성경에는 다음 세 가지 경우의 십일조를 바치도록 명령되어 있다.
그러나 이 세 종류의 십일조는 모두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께 드려진 것이기 때문에, 셋으로 나눌 수 없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1)  땅의 소산과 육축의 십일조(레위기 27:30~33)

모든 소유가 하나님의 것임을 표하고, 또 늘어나는 소득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임을 표하는 십일조이다. 땅에서 추수한 곡식과 나무에서 수확한 열매의 기름을 하나님께 십일조로 바쳤다. 만일 이것을 속하려면, 그것의 가격에 오분의 일을 더해야 했다. 소나 양은 막대기 아래로 지나는 열 번째 것으로 십일조를 드렸다. 십일조의 성물로 정해진 소나 양은 어떠한 경우에도 다른 것으로 바꿀 수 없었다. 만일 바꾸게 되면, 둘 다 거룩하게 여겨져 일체 속할 수 없도록 했다. 이 십일조는 신 26:1~15에 나오는 첫 이삭을 드리는 명령과 동일하게 여겨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미 족장 시대부터 이러한 십일조가 드려졌다고 할 수 있다.

십일조는 반드시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예루살렘)에서 바치고 먹어야 했다. 따라서 멀고 행로가 어려울 경우에는 그것을 돈으로 바꾸고, 예루살렘에 가서는 그 돈으로 다시 마음에 드는 것을 구하여 바쳤다.

2) 레위인을 위한 십일조(민수기 18:21~32)

가나안에 들어 간 이후, 모든 지파들에게는 땅이 분배되었다. 그러나 레위인에게는 예외적으로 땅을 분배하지 않고, 전적으로 성전의 일만을 맡게 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른 지파의 사람들이 십일조를 드려 레위인의 생활을 책임지도록 했다. 레위인은 땅의 소유주이시며 땅의 소산을 주시는 하나님을 대표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이 십일조도 결국은 하나님께 드리는 십일조였다. 한편, 레위인은 자기들이 받은 십일조 중에서 다시 십분의 일을 구별하여 제사장들에게 바쳤다.

3) 가난한 자를 위한 십일조(신명기 14:28~29)

매 삼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일조를 드려 저축하였다가,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 성중에 우거하는 고아와 과부들을 배부르게 하는 데 사용한 십일조이다. 매 삼년마다 가난한 자를 위한 별도의 십일조를 했는지, 아니면 다른 두 해의 십일조 중에서 일정량을 모아두었다가 가난한 자들을 돌보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3. 십일조의 목적

십일조의 목적은 앞에 말한 십일조의 종류에서 잘 드러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가진 모든 소유물이 하나님의 것임을 깨닫게 하기 위해, 소득의 증가가 하나님의 복에 의한 것임을 깨닫게 하기 위해, 종교적 일에만 전념하는 레위인의 생활을 유지하게 하기 위해, 그리고 소득도 돌볼 사람도 없는 가난한 사람들을 돌아보게 하기 위해 십일조를 명령하셨다. 그러나 이러한 목적들은 하나님의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도록 하기 위한 것, 즉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확인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소유물을 사용하게 하려는 한 가지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십일조를 전혀 드리지 않거나,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 심각한 책망과 저주가 뒤따르게 된다(말 3:8, 9). 반면에,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반드시 그 소유의 복을 넘치도록 주실 것임에 대한 확신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말라기 선지자의 입을 통해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암 3:10)고 말씀하셨다.

4. 온전한 십일조

온전한 십일조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모든 헌금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액수보다는 그 정신에서 찾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의도가 빠진 십일조는 온전한 십일조가 될 수 없다.
십일조에는 반드시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 베풀어 주신 복에 대한 감사, 내리신 명령에 대한 즐거운 순종이 배어 있어야 한다.

자원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드리는 자세 또한 온전한 십일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께서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7)

온전한 십일조는 정해진 액수대로 하는 십일조여야 한다.
자기 소유와 소득의 십분의 일이 그 정해진 액수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의 삶은 과거와는 달리 정해진 액수를 계산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이런 경우에는 세금이나 공제금을 포함하여 필요 경비를 제외한 순수입의 십일조를 하면 무난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정해진 액수를 계산할 때, 무엇보다 먼저 우리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임에 유념을 해야 한다.

십분의 일뿐만 아니라 십분의 십 전체가 하나님의 것이다.

십분의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최소한의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십분의 일을 계산하기 어려울 때에는 십분의 일 이상이라도 드리겠다는 넉넉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래서 십분의 이를 드리겠다는 목표를 가져 볼 수도 있다.
이런 자세를 갖는다면, 손해를 보는 경우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생각에서 조금도 부담을 갖지 않고 일정액의 십일조를 드릴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액수의 세밀한 계산은 정확한 순종의 믿음에서 나오기보다 인색함에서 비롯되는 것이 대부분임을 쉽게 경험하고 있다.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는 생활은 복을 받기 위한 조건이라기보다, 성도가 해야 할 마땅한 본분이다.

성도는 십일조를 통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는 믿음을 확인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이웃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야 한다.
그리고 자원하는 즐거운 마음으로, 정해진 액수의 온전한 십일조를 드림으로써, 예수님을 기쁘시게 했던 과부의 두 렙돈 같은 십일조가 되게 해야 한다.
우리는 십일조가 어떻게 사용되는가에 대한 관심으로 자신의 역할을 계산하기에 앞서서, 하나님의 것을 마땅히 하나님께 드린다는 생각을 가져 한다.
십일조를 드린 사람에게 쌓을 곳이 없도록 복을 주시지 아니하나 시험하여 보라고까지 함에야, 어찌 십일조 생활을 주저할 수 있겠는가!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온전한 십일조의 정신

 

① (8절)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 (메시지성경) “정직한 일부터 시작하여라. 정직한 자들은 하나님의 것을 훔치지 않는다. 그러나 너희는 날마다 내 것을 훔친다. 너희가 묻는다. ‘저희가 어떻게 주님의 것을 훔쳤단 말씀인가요?’ 십일조와 헌물이다!” 하나님께서 책망하시는 말씀에 대해 또다시 반항하며 항변한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드러내는 신앙의 척도는 물질(돈, 보화)이다. ‘척도(scale, 尺度)’는 자로 재는 길이의 표준이나 평가하고 측정하는 기준을 말한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준행하는 삶의 바로미터다. ‘바로미터(barometer, 기압계)’는 사물의 수준이나 상태를 측정하는 기준이다. “네 보물이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6:21)” 하나를 보면 열을 알 듯 물질을 어디에 사용하는지 보면 무엇을 섬기며 사는지 알 수 있다.

 

② (마23장23절)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 구약의 십일조에 관한 신약의 유일한 말씀이다.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외식을 책망하시며 십일조의 정신을 ‘정의, 긍휼, 믿음’이라고 하셨다. ‘정의(正義)’는 정직한 계산이다. 십일조의 정신은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정직한 고백이다. 땅은 하나님의 것이기에 땅에서 거둔 소산물도 하나님의 소유다. 삶에서 누리는 생명과 건강, 물질과 자녀는 하나님의 선물 곧 은혜의 결과물이다. 이 고백 위에 감사와 기쁨으로 자원하여 드리는 예물이 십일조를 비롯한 하나님께 드리는 봉헌물이다.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모든 피조물이 가져야 할 마땅한 자세다. 말라기 시대 신앙인들과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의 공통점은 형식적인 십일조를 드리면서 여전히 물질을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말라기가 하나님의 것을 마치 제 것처럼 여기는 부정직한 행위를 불의한 도둑질로 정죄하고, 하나님께 돌이키는 회개의 조건으로 온전한 십일조를 제시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③ (9절)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 (메시지성경) “지금 너희와 너희 모두가 저주 아래 있는 것은, 너희가 내 것을 훔쳤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온 세상과 모든 인류에게 일용할 양식을 허락해주셨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서 왜 한해에 수십 만 명이 굶어 죽게 내버려 두실까? 오늘날 빈익빈 부익부의 경제 양극화로 인한 절대 빈곤의 원인은 일용할 양식을 베푸시는 하나님 탓이 아니다. 일용할 양식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필요이상의 것을 추구하는 탐욕에 빠져 있는 사람들 때문이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만물은 우리의 필요를 채우기에는 충분하지만 인간의 탐욕을 채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까닭이다. 하나님께서는 일용할 양식을 채울 수 있을 만큼을 충분한 양식을 인류에게 허락하셨다. 다만 타인의 일용할 양식을 빼앗아 이기적인 욕심을 채우는 탐욕으로 인해서 세상은 빈곤과 가난으로 신음하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자신을 위해 일용할 양식을 구할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얻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마땅하다. 이것이 십일조의 두 번째 정신인 ‘긍휼’이다.

 

 

3. 하나님의 명예를 건 보증

 

① (10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 예수께서 말씀하신 십일조의 세 번째 정신은 ‘믿음’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말씀대로 준행하는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반드시 축복으로 보답하신다는 언약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다. 성경은 말씀대로 준행하는 삶에 따라오는 하나님의 축복을 누누이 강조한다. 온전한 십일조는 말씀대로 준행하는 삶의 척도다. 이 말씀을 근거로 십일조를 단지 물질적인 축복의 수단으로 오해해선 안 된다. 이 언약이 전하는 본뜻은 하나님께서 만복의 근원 되시고 만물의 주관자이심을 뚜렷하게 증거 하시는 말씀이다. 이는 하나님의 통치에 최우선 과제를 두고 사는 이들에게 만물의 주관자가 친히 약속하는 확실한 보증(保證, guarantee)으로 읽어야 한다. 기독교는 언약의 종교다. 언약을 준행하면 그 언약대로 축복하시는 약속 위에 세워진 신앙이다. 구약과 신약, 지난 이천년 동안 이 약속은 수많은 삶에서 성취되고 이루어져왔다. 이 사실을 믿지 못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명예를 걸고 친히 보증하신다.

 

② (11절~12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황충을 금하여 너희 토지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열방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6:33)” 예수께서도 삶의 우선순위를 하나님의 통치에 두고 사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을 친히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확언하셨다. 말라기 시대의 신앙인들과 예수님 시대의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문제는, 십일조를 드리면서도 삶의 우선순위를 하나님보다 물질에 두고 살았다.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에 대한 바리새인의 태도에서 속내가 드러난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눅16:13~14)” 그들은 십 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고, 나머지 열의 아홉은 자신의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해서 부의 축적을 스스로 정당화하면서 삶의 목적을 물질적인 부요에 두고 살았다. 십일조를 물질적 축복의 수단으로 오해하는 건 그들의 오류를 반복하는 일이다.

 

③ 「강단과 목회」, <온전한 십일조의 정신>, 김명섭, 2021년 9‧10월호에서 인용.

▶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23:23)”는 예수님의 선명한 가르침 앞에서 십일조에 대한 논란은 일말의 여지없이 종결된다. 하지만 오늘날 십일조에 대한 논쟁에서 자주 언급되는 ‘교회의 부요가 교회의 타락을 부추겼다’는 비판을 뼈아프게 반성해야 한다. 한국교회가 철저한 십일조로 인해 크고 강한 교회가 되었지만 동시에 오만과 타락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날이 선 비난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교회 재정에 대한 건전성과 투명성을 철저하게 재고하고 재정립하는 데 더 힘써야 한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에게 십일조가 복이 아니라 도리어 화가 되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십일조를 안 드린 것이 아니라 십일조의 정신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나의 처소에서 명한 나의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의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스스로 살찌게 하느냐(삼상2:29)” 제사장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거룩하게 드려진 제물을 사리사욕의 수단으로 남용했다. 이러한 종교지도자들의 타락은 성경 속에만 나오는 추태가 아니다. 십일조를 온전하게 구별하여 드리는 것만큼 하나님께 바쳐진 십일조를 온전하게 선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십일조의 준수와 더불어 십일조의 정신을 온전하게 실천하는 자리까지 성숙해야 한다. 그때야 비로소 온전한 십일조로 하나님의 통치를 삶에서 체험하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축복의 주인공이 될 것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성경에서는 십일조를 드려야 하나님의 도움과 복을 받는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십일조를 드리고 정의와 긍휼과 믿음도 가져야 된다고 말씀하셨다.

믿음이 없는 십일조나 정의가 없는 십일조가 아니라, 정의롭고 올바른 물질로 드리는 온전한 십일조라야 복이 된다.
그래서 아무리 수가 많다 할지라도 십일조 안 드리는 성도보다는, 수가 적어도 전 성도가 하나님 앞에 시간의 십일조, 재능의 십일조, 물질의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중요하다.

로마의 신학자 성 어거스틴은 “하나님께서는 성경 말씀에 기록된 대로 온전한 십일조와 헌물을 통해서 그의 자녀를 복되게 하신다”라고 말했다.
하나님 앞에 십일조를 안 드리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 세상 마귀 사탄의 탐욕과 욕심의 자녀가 된다. 하나님의 자녀는 반드시 하나님 앞에 감사할 줄 알아야 된다.

영국의 역사학자 토마스 풀러도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복을 받기에 합당하지 않다”고 말했다. 세금을 안 내고 등록금을 안 내고 자기 의무를 지키지 않은 학생은 아무리 공부를 잘 해도 명단에서 빠지는 것처럼, 하나님의 복의 반열에서 빠지게 되고 이탈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나는 교회 성도다”라고 주장하고 하나님께 아무리 기도하고 부르짖고 외쳐도, 허공에 소리 지르는 것과 같다.

자기 의무를 다하지 않는 자와 하나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 하나님께 드릴 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것이다. 자기 혼자만을 위한 부는 복이 되지 않는다. 정직하고 깨끗한 부자가 하나님 앞에 복 받고 사람에게 칭찬 받는다.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이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을 주는지 안 주는지 시험하라고 하셨다. 온전한 십일조를 가지고 자기 마음대로 쪼개서 선교비 쓰고 구제하고 밥 사먹고 혼자서 인심 쓰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십일조는 손대면 안 된다. ‘성물’, 즉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께 드리는 십일조가, 억지로 마지못해서가 아닌 온전한 것이 되어야 한다.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서 받는 복이 진짜 복이 된다. 하나님이 복되게 하셔야 그 사람의 재물이나 재능 등이 진정한 복이 되는 것이다.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온전한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려야 된다.

호모 로쿠엔스(Homo Loquens), 호모 스피리투스(Homo Spiritus),


人間에 대한 여러가지 표현 : 호모(homo)

희랍의 철학자 소크라테스

호모 로쿠엔스(Homo Loquens)

Loquens(로쿠엔스) : "말하기" 라는 뜻

인간은 언어적 본능을 갖고 있다.
이를 두고 사람을 호모 로쿠엔스(Homo loquens)라고 한다.

세계적 인문학자 스티븐 핀컨은 사람의 언어본능은 후천적인 것이 아니라 원초적 본능이라고 했다.
몸으로 교감하는 호모섹스쿠스(Homo Sexcus)와 함께 인간이 살아가는 기본이라는 인식이다.

언어적 본능을 극대화시키고 있는 것이 휴대폰이다.
덩달아 발달한 것이 말을 축약한 모바일 문자이다.
언어를 통한 소통은 음성통화에서 문자메시지로, 다시 SNS메신저로 진화하고 있다. 머지않아 서로 휴대전화로 연결만 되면 말을 하지 않아도 뇌파로 상대의 의사를 알 수 있는 시절이 올지도 모른다.
최근 미국에서 유행하고 있는 모바일 메신저 Yo는 그러한 세태를 잘 반영하고 있다.

요즘은 스마트폰이 대세이다.
움직이면서도 모든 정보를 실시간으로 검색하고 소통하며 기록으로 남겨둘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첨단이 오히려 화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세상의 모든 비밀이 비밀이 아닌 시대가 돼 편리하게 이용한 것이 부메랑이 돼 족쇄로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데칼트(René Descartes, 1596. 3. 31-1650. 2. 11)는 회의론을 대표하는 철학자입니다.
데칼트"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정의하였다.

어려운 시대를 살았던 어르신들에게는 언어에 대한 공통적인 이해를 갖고 있다는 유머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용변이 급하여 화장실을 찾아가서 화장실 문을 두드렸더니 그 안에 대답에 따라 그 사람의 직업을 알게 한다는 아주 우스운 이야기입니다.

"예, 들어오세요!"
- 비서라고 합니다.

"통화중!"
- 전화 교화원이라고 합니다.

"오라잇!"
- 버스 안내양이라고 합니다. 

"올라갑니다!" "내려갑니다!"
- 엘리베이트 안내양입니다.

"아멘! 할렐루야!"
- 목사라고 합니다.

"믿습니까?" "믿으면 아멘"
- 부흥사라고 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호모 스피리투스(Homo Spiritus) : 성령인



저자 정보 

데이비드 R. 호킨스
호킨스 박사
는 영적으로 진화한 의식 상태 및 참 나로서의 신의 현존의 각성이라는 주제에 관한, 국제적으로 명성이 높은 저자이며 강사이다.
그의 강연과 저서들은 과학자이자 의사였던 저자에게 일어난 대단히 진보한 영적 앎의 상태에 대해, 이해 가능하며 명료한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독특한 것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그의 초기 3부작에서는 보통의 에고 상태에서 에고의 소멸에 이르기까지에 관해 묘사하고 있으며, 이 책 『호모 스피리투스』는 완결편에 해당한다.

앞서 나온 두 책, 『의식혁명』(마더 데레사에게서 상찬을 받기조차 했던)과
『나의 눈』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으며 외국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적으로 읽히고 있다.
3부작의 출간에 앞서 의식의 본성 Nature of Consciousness에 대한 연구가 선행되었으며, 이는 인간 역사상 처음으로 진실과 거짓을 식별할 수 있는 수단을 드러내준 방법이라는 측면에서 성취를 이뤘다.

작품의 중요성은 《뇌/마음 회보Brain/Mind Bulletin》에서, 그리고 ‘과학과 의식에 관한 국제회의’와 같은 곳에서 인정받았으며, 운동역학 테스트에 관한 세미나와 워크숍은 옥스퍼드 포럼을 포함한 미국 전역과 세계의 다양한 기관, 단체, 영적 회의, 교회 모임 등에서 수차례 열렸다. 숱한 영적 진실이 설명의 부족으로 인해 오랜 세월 동안 오해받아온 것을 관찰해온 호킨스 박사는 매달 하루 종일 하는 세미나를 열고 있으며 이는 비디오로 기록되고 있다. ‘깨달음에 이르는 길의 스승’으로 불리는 호킨스 박사의 평생에 걸친 작업의 전체적 목적은 의식의 진화라는 측면에서 인간 경험을 재맥락화하고, 생명과 존재의 토대이자 계속적 근원인 내재적 신성의 표현들로서의 마음과 영, 양자에 대한 이해를 통합시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진화한 영적 신인류 ‘호모 스피리투스(Homo Spiritus)’의 탄생과 전망에 대한 감동적인 비전을 제시하는 영적 교사로서 헌신하고 있다.

호킨스 박사의 모든 저서의 서두와 말미를 장식하는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Gloria in Excelsis! Deo!)”이라는 진술은 그 봉헌을 나타낸다.

옮긴이 백영미
서울대 간호학과를 졸업했으며,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마더 데레사의 단순한 길』 『히말라야에서 만난 성자』 『죽음 너머의 세계는 존재하는가』 『감각의 박물학』 『황금 두루마리의 비밀』 등이 있다.

데이비드 호킨스 박사의 저작을 차례로 읽고, ‘더이상 세상을 향해 화낼 일이 없어지는’ 체험을 하면서부터 박사의 저작물을 번역하고 출판하는 일에 헌신하고 있다.
미국 세도나에 거주하는 호킨스 박사와의 감동적인 만남을 갖기도 했다.

Publisher Description

이 책은 <의식혁명>에서 <나의눈>으로 이어지는저자의 초기3부작 완결편이다.
저자는 인간의식 진화과정을 짚어가며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체계적으로 제시한다.
또한 구도자들과 행한 폭넓은 질의응답을 통해 영적수행 여정에서 품게되는 질문에 대한 명쾌한 답과 실용적인 지침을 제공하고 있다.

이 책은 인류 전체 의식수준이 부정성의 190에서 긍정의 207로 도약한 지금, 생명출현에서부터 영적깨달음과 에고의 초월에 이르기까지진화를 거듭해온 의식토대 및 본질을 되짚어본다.
또한 내재와 초월을 넘어선 깨달음의 나, 무한한 나에 이르는 질의 응답을 통해 영적 신인류에 대한 전망을 제시한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 : 지혜있는 사람 - 인간의 學名

현생인류를 지칭하는 學名이다. 유인원과 구분되는 특징은 도구를 사용하고, 말을 하며,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호모 사피엔스의 조상은 크로마뇽 인으로 직립보행을 했으며, 불을 사용했고, 언어와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호모 루덴스(homo ludens) : 놀이하는 사람

네델란드 역사가 호이징아(Johan Huizinga)가 저서 <호모 루덴스>(1938)를 통해서 제창한 개념이다. 호이징아는 문화 속의 놀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놀이를 통해서 문화가 발생한다고 하여 기존의 주장을 뒤집었다.


호모 로쿠엔스(Homo Loquens) : 말하는 사람

소크라테스(Socrates) - 인간은 말하는 동물이다.

호모 폴리티쿠스(Homo Politicus) : 정치적인 사람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 인간은 도시국가(Polis)에서 나서 도시국가(Polis)에서 죽는다.

호모 날리지언(Homo Knowledgian) : 신지식인

창의적이고 미래 지향적이며 실용적인 지식인

1) 지식사회와 지식경제를 능동적으로 이끌 수 있는 지식 마인드
2) 정보기술 능력과 관찰, 추론, 통합의 사고력
3) 전문성과 보편성의 조화시킬 수 있는 능력
4) 세계 다양한 문화에 대한 안목

호모 파베르(Homo Faber) : 만드는 사람

호모 에렉투스
(Homo Erectus) : 직립하는 사람

호모 하빌리스
(Homo Habilis) : 손재주 있는 사람

호모 모벤스
(Homo Movence) : 적극적인 사람

고도로 발달한 정보화 사회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새로운 개념의 인간

호모 섹스쿠스(Homo Sexcus)
: 몸으로 교감하는 사람

호모 텔레포니쿠스(Homo Telephonicus)
: 전화하는 인간

휴대 전화가 없으면 생활하는데 불편을 느끼는 현대인의 모습을 빗대어 표현

호모 에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 : 경제적 인간
미래의 이익을 위해 순간의 격정을 억누르고 냉정하게 계산하는 근대인







2022 성탄의 의미(12-25-2022)



동영상 설교 자료 / 12-25-2022 성탄주일 설교
성탄의 의미(마태복음 1:21)


12월 25일 성탄주일 설교(12/25/2022)
뉴욕 파트리스교회 이승혁목사

성탄(聖誕)

성인 성, 성스러울 성(聖), 낳을 탄, 태어날 탄(誕)
- 성(聖) / 귀 이(耳) + 입 구(口) + 북방 임(壬) / 북방 임(크다, 성대하다)

'성(聖)'이란 한자의 의미
"크게 듣고 크게 말하다"

"타인의 말에도 귀를 기울일 줄 아는 현명한 사람"

- 탄(誕) /
말씀 언(言) + 길 연, 늘일 연(延)

'탄(誕)'이란 한자의 의미
"말을 널리 늘이는 것"
"말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것"


성탄(聖誕)이란 한문자의 의미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요한 1:14) 크게 듣고 크게 말하여 세상에 널리 알리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2022년 성탄주일을 맞이하여 "오늘의 미국의 영적 수준이 어느 단계라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첫째, 상(上),  둘째, 중(中),  셋째, 하(下)

막연하게 미국 사회의 영적 수준을 개인의 느낌에 따라 판단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판단하기 위한 정확한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그 기준을 "언어(言語)"라고 하겠습니다.

언어를 기준으로 판단하려는 몇 가지 이유를 소개합니다.

언령신앙(言靈信仰)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처럼 언어가 갖는 어떤 신비한 힘이 있다고 믿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화분에 꽃을 심고 똑같은 조건과 환경에서 하나의 화분은 아침마다 물을 주며 지난 밤에 잘 잤니? 오늘은 더 아름답구나! 이렇게 긍정적인 인사말을 합니다.
그리고 다른 화분은 물을 주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라든지 말든지 이렇게 무관심한 자세로 대하면 얼마 후에 화분에서 자라는 식물의 모양이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또 다른 예를 들면 유리병에 물을 담아놓고 하나의 물병을 향해서 너는 참 좋은 물이야! 이렇게 긍정적인 반응을 하고 다른 물병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반응을 하면 긍정적인 반응으로 대하는 물병의 물은 육각수 형태의 좋은 물로 바뀐다고 합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반응으로 대한 물병의 물은 아무런 변화를 기대할 수 없다고 합니다.

언어(言語)는 존재(存在)의 집

불란서의 회의론을 창시한 철학자 데칼트(Renatus Cartesius, 1596. 3. 31-1650. 2. 11)는 "언어는 존재의 집" 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는 것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을 살펴보면 그 사람이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화장실 문을 두드릴 때 그 안에 있는 사람이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에 의해서 그 사람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가늠할 수 있다고 합니다.

똑똑똑, "들어오세요!"
이런 사람은 비서라고 합니다.

똑똑똑, "통화중!"
이런 사람은 전화교환원이라고 합니다.

똑똑똑, "올라갑니다" "내려갑니다"
이런 사람은 백화점과 호텔의 엘리베이커 걸이라고 합니다.

똑똑똑, "오라이"
이런 사람은 버스 안내양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목사는 어떻게 반응할까요?
똑똑똑, "믿습니까?"

호모 로쿠엔스(언어를 사용하는 존재)

"호모 로쿠엔스(Homo Loquens)"라는 말은 인간은 "언어를 사용하는 존재" 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사례를 오늘의 시대에 적용해 보겠습니다.

기독교의 3대 절기는 "부활절" "추수감사절" "성탄절"입니다.
이와 같은 절기를 맞이하면 어떻게 서로 인사하셨습니까?

부활절에는 "해피 이스터(Happy Easter)"
추수감사절에는 "해피 땡스기빙(Happy Thanksgiving)"
크리스마스에는 "메리 크리스마스(Merry Christmas)"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해피 이스터(Happy Easter)" "해피 땡스기빙(Happy Thanksgiving)" "메리 크리스마스(Merry Christmas)""해피 할러데이(Happy Holiday)"라고 해야 한다는 사회적 여론이 점점 더 크게 부각되고 있으며 심지어 메리 크리스마스 라고 인사말을 하면 거부반을을 나타내는 현실입니다.

미국의 현재 기독교 인구 비율이 대략 64%라고 합니다.
물론 이 수치는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한 통계입니다.
아직도 기독교인의 비율이 전체 인구의 절반을 능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인 여론은 기독교식의 인사말을 거부하는 것에 대해서 교회의 반응은 조용합니다.

또 한가지 사례는 바이든 대통령에 의해서 동성결혼법이 법적으로 인정한다고 결정된 것입니다.
만일 어느 교회 설교자가 동성애와 동성결혼은 비성경적이라고 부정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면 법적으로 제재를 받게 된다는 것을 예고한 것입니다.

사회의 이러한 분위기를 그 시대에서 통요하는 언어를 갖고 진단하는 것을 "언령신앙(言靈信仰, language is spiritual belief)" 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에서 말이 씨가 된다는 것은 '말에 생명이 있다"는 뜻으로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통해서 그 사람의 인품을 알 수 있고 그 시대에 사용하는 언어를 통해서 시대적 분위기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말 한마디에 천냥 빚도 갚는다!"

그러므로 해피 이스터, 해피 땡스기빙, 메리 크리스마스와 같은 인사말을 사회가 요구하는 언어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 사회의 영적 수준이 분명하게 낮아지고 있다는 현상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현상을 어떻게 받아드려야 할까요?

불교(佛敎)에서 불자(佛者)들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南無阿彌陀佛 觀世音菩薩)" 이라는 염불(念佛)을 사용하여 간단하게 기도합니다.
모두 열 여섯 글자로 아주 간단한 기도문입니다.

물론 기독교에도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문이 있습니다.
그런데 주기도문이 초신자들을 물론 기존 기독교인들에게도 즐겁게 사용할 수 있는 기도문은 아닙니다.
더구나 교회에서 주기도문은 모임을 마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南無阿彌陀佛 觀世音菩薩)"
이 의미는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께 귀의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불자들은 아미타불관세음보살에게 귀의합니다 이렇게 염불을 외우면서 기도합니다.
'나무’
귀의한다는 뜻입니다.
아미타불극락(極樂)에 계신 부처님을 말합니다.
관세음보살은 대자대비한 마음으로 중생들을 구제하는 부처님을 말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것을 염불(念佛)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이 분들께 귀의한다는 뜻과 함께 이 분들처럼 살겠다는 다짐이기도 합니다.

기독교에는 염불과 같은 아주 간단하면서도 분명한 신앙을 고백하는 기도가 없을까?
물론 동방교에서 수행하는 신자들을 위하여 사용하던 "예수님의 기도"  즉 "주여,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Lord, have mercy on me!)" 라는 기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목회 현장에서 보다 더 아주 간단한 기도가 없을까 고민하던 중 예수님의 이름에서 기도문을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예수(Jesus)
둘째는 그리스도(Christ)
셋째는 임마누엘(Immanuel)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러면 어떻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을까요?

첫째는 예수(마태복음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저희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He will be save us from sin)"라고 합니다.

죄에서 구원한다는 것은 죄에 대한 용서를 말합니다.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용서를 위한 제물을 바쳐야 합니다.
제물이 되려면 반드시 피를 흘려야 하고 죽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의 죄를 위한 속죄의 제물이 되셨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죄에서 구원한다는 것은 죄로 말미암아 사망에 이르게 되었으나 죄에 대한 용서를 받았으므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을 말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이 생전에 아무리 훌륭한 일을 하였어도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사람일지라도 그 시신은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그런데 물고기는 죽은 사람의 몸보다 더 가치가 있습니다.
수 많은 물고기, 짐승, 동물의 죽은 몸둥아리는 가격에 따라 팔려갑니다.
그렇지만 죽은 사람의 몸을 어느 누구도 돈을 주고 거래하지 않습니다.

예수 라는 이름에서 얻은 기도는 "예수 내 구주!" 라고 하겠습니다.

예수 내 구주!
Jesus is my Savior!

둘째는 그리스도(마태복음 1: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그리스도라는 이름의 뜻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be anointed people) " 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기름이란 성령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육체의 생명으로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하신 영원한 생명으로 오셨습니다.

죄에서 구원을 얻은 사람은 생명을 얻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라는 이름에서 얻은 기도는 "예수 내 생명!" 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 내 생명!
Jesus is my Life!

요한일서 2:27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셋째는 임마누엘(마태복음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임마누엘이란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God be with us)"라고 합니다.

임마누엘은 세 개의 말을 합성하여 만든 단어라고 하겠습니다.

‘임’(함께, with)
‘마누’(우리와, us)
‘엘’(하나님, God)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진 게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은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날 때부터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은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예언된 것이었습니다(이사야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임마누엘 예수님은 구원자로 우리 곁에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 17절에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누구든지 예수그리스를 구세주로 믿고 고백하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치료자로 오셨습니다.
마태복음 4장 24절에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에 걸려서 고통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예수님을 만나면 변화가 일어나고 해방과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고 자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위로자로 오셨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8∼29절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은 ‘하나님의 사랑’ 외에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임마누엘이란 이름에서 얻은 기도는 "예수 내 권세!" 라고 하겠습니다.

예수 내 권세!
Jesus is Power!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아주 쉽게 설명한다면 여기 아주 얇은 종이 한장이 있습니다.
이 종이는 어린아이들도 쉽게 찢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종이를 철판과 합친 후에 찢으라고 하면 어느 누구도 찢을 수 없습니다.
종이가 강해진 것이 아니라 철판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음므로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은 연약한 내가 이 세상을 창조하신 능력의 하나님에게 붙어 있는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강한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이 강하시기 때문에 어떤 질병도 환난도 근심과 걱정도 두려워 할 이유가 없습니다.

실예 /

울주군 온산면 덕신리 625번지 신경부락에 대략 450년 된 소나무 한 그루가 있습니다.
마을 주민들은 이 나무가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과 같은 나무라고 믿고 정월 대보름이 되면 마을 주민들이 돈을 모아 제를 지내고 심지어 무당을 불러 밤새도록 굿판을 벌렸습니다.

그런데 그 당수나무 바로 옆에 교회를 세웠으므로 마을 주민들의 반대는 아주 심각했습니다.
어느 해에 마을 이장이 찾아와서 정월 대보름 날 제를 지내려면 당수나무에 전기불을 켜야 하는데 마침 교회가 바로 옆에 있으므로 전선을 연결하여 전등을 켤 수 있도록 협조해 달라고 합니다.

이때 교인들은 어떻게 당수나무 제사를 지내는데 교회 전기불을 줄 수 있느냐?
제사는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것이므로 전기를 빌려주면 안 된다고 단호하게 반대합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교회 전기불을 밝히면 당수나무에 제를 지내는데 귀신이 겁이나서 오겠습니까?
그러자 교인들이 목사님 알아서 하십시오 하고 모두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마을 이장이신 작고하신 이수엽씨를 찾아가서 제가 당수나무에 전선을 연결하여 전등을 달았으니 마음대로 사용하라고 일러주었더니 이장은 전기세를 지불하겠다고 합니다.
밤새도록 백열전구 켜봐야 전기세가 얼마나 나오겠습니까?
그런 걱정 마시고 편하게 사용하라고 일러주었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되었을까요?
정월 대보름이 지난 후에 마을 주민들이 모여서 마을 주민 회의를 하였는데 당시 마을 사람들을 주도하던 서울 무당이 주민들에게 당수나무 신을 위하여 동제를 지내야 한다며 동제를 지낼 돈을 거둬드렸다고 합니다.
문제는 서울무당이 굿판을 크게 벌였으니 그 결론은 당수나무 귀신이 마을을 떠났기 때문에 더 이상 이곳에 머물 수 없다며 그 마을에서 떠나갔다는 것입니다.

저희가 와이스톤(Whitestone)이라는 지역에서 거주할 때 한번은 어느 수맥을 진단하는 사람이 방문하여 집에 수맥이 흐르는지 찾아주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엘보 모양의 금속 막대기를 손에 들고 이 방 저 방을 옮겨 다니면서 하는 말이 분명히 수맥이 있는데 잡히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더니 혹시 예수를 믿습니까?
그래서 예 제가 목사입니다.
그러자 그 분이 집안에 성경책이 있는 것을 보고 성경책만 놔두어도 수맥이 잡히지 않습니다. 하고 떠났습니다.

어떻습니까?
예수를 믿는 사람이 강한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에 우리는 오직 주님만 믿고 따라가면 될 것입니다.
2022년 성탄은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는 신앙으로 무장하여 다가오는 2023년 주와 동행하는 신앙생활에 승리하는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참조 /

言靈信仰 (ことだましんこう, 언령신앙)

언령신앙(言灵信仰)은 동북아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오랜 전통으로 말에는 영혼이 깃들어 있어 불가사의한 힘이 있다는 믿음이다.
말에 혼(魂)과 영(靈), 즉, 보이지 않는 '힘'이 깃들어 있어 그 말대로 길흉화복(吉凶禍福)이 좌우되고 평생의 운명(運命)까지도 영향을 받는다는 믿음이었다.

고대 일본 역시 마찬가지로 언어에는 신비한 영적인 힘이 깃들어 있고, 그 힘은 현실세계에 큰 영향력을 갖는다고 여겼다.
그러한 힘을 믿고, 그 힘으로 현실을 바꾸려 하는 것을 '고토다마신코(言灵信仰)'이라 한다.
고대의 일본인들은 좋은 말이나 아름다운 말을 하면 행복이 오고, 반면 나쁜 말을 하면 재앙이 온다고 믿었던 것이다.
 

한편, 고대 일본인들은 사람의 이름에도 '언령'이 머물고 있다고 믿었다.
특히 사람의 이름은 그 사람 자신의 혼이라 여겨, 남성이 여성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구혼을 의미한다.
따라서 여성이 남성에게 자신의 이름을 가르쳐 준다는 것은 구혼을 승낙했다는 것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또 염불(念佛)을 외면서 징이나 북에 맞춰서 추는 '염불 오도리'의 경우 '남무아미카불'의 명호를 주문으로 외어 말로써 악령을 물리치는 언령신앙이 깃들어있다.
이처럼 고대 일본에서는 언령신앙이 일상 생활의 구석구석까지 스며들어 있었다.
 

언령신앙의 영향을 받아 고대에 일본의 제사 의식에서 신을 제사 지낼 때의 언어는 아름답고 엄숙하게 미화되어 문학적 성격을 띄게 되었다.
제사를 연행하는 자는 산 위에 올라가 나라의 땅이 얼마나 기름지고 풍요로운가를 노래로 표현하고는 했는데, 이것은 말의 힘으로 현실 세계의 풍작이 이루어지도록 하려는 기원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풍성한 열매를 맺고 있는 풍작의 모습을 노래로 표현하는 것으로, 그 노래, 바로 말에 담긴 힘이 현실의 풍작을 가져온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러한 언령신앙의 전통은 '노리토(祝詞)''센묘(宣命)'라는 일본 상대의 고유한 문학 양식을 발달시킨다.
'노리토(祝詞)'는 기년제(祈年祭) 등의 궁정제사에서 읊어진 신전에서 부르는 노래를 말한다.
본래는 간단한 주문(呪文)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집단 제사를 올릴 때 선미(善美)를 다한 말들을 봉헌하고, 사람들의 번영과 행복을 기원하고 신의 위력에 감사하는 행사를 거듭하는 동안에 점차 '노리토'의 형식을 갖추게 된 것이다.

노리토의 주 내용은 신의 이름을 부르고, 제사를 지내는 이유, 제신(祭神)의 내력과 업적의 설명, 진설(陳設物)의 열거, 기원하는 일 등이다. 이러한 내용을 음률과 성조에 유의하여 반복, 대구, 열거, 마쿠라 고토바(일본 전통 시가인 '와카''에서 어떤 말 앞에 붙이는 특수한 수식어), 비유 등을 사용하여 장중미(莊重美)를 살려 읽는 과정을 통해 노리토의 형식을 완성하였다. 문헌상 현존하는 '노리토'는 『엔기시키 (延喜式)』에 수록된 27편과 『타이키 (台記)』에 수록된 1편으로 총 28편이 전해지고 있다.
 

한편 '센묘(宣命)'는 천황이 신하에게 내리는 조칙(詔勅)을 말한다. 천황의 즉위나 양위, 황후를 세우는 일, 연호를 바꾸는 일, 황태자를 세우거나 폐하는 일, 상을 주거나 벌을 주는 일 등 국가의 중대한 일에 관하여 작성한 문서이다. '노리토'가 신과 인간 사이에 이루어진 것이라면, '센묘'는 임금과 신하 사이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장도 그 내용이 구체적으로 표현되었을 뿐만 아니라 감정도 분명하게 드러나 있는 특징이 있다. 현존하는 센묘는 『쇼쿠니혼키 (續日本記)』 62편이 수록되어 있고 그 밖의 문헌에 3편이 수록되어 있다.
 

한국에도 '언령신앙'의 전통이 있어, 우리 조상들은 말조심을 강조했다.
특히 설날부터 대보름까지의 기간에는 아예 남에게 듣기 좋은 덕담만 하는 풍습이 형성되기도 하였다.
또한 언령 신앙은 중국이나 한국 등지에서 볼 수 있는 '휘(諱)', '피휘(避諱)'의 풍습과도 연결된다.
원래 '휘'는 죽은 사람의 생전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것을 말하였으나, 나중에는 생전의 이름 자체가 '휘'로 와전되는 바람에 이름을 부르지 않는 행위는 따로 '피휘'라고 명명하였다.
'피휘'의 풍습은 범위가 확대되어 살아있는 사람에게까지 미쳤다.
 

한국 문학의 경우 『삼국유사』 등에서 언령신앙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삼국유사 중 '혜공과 혜숙'의 일화에서 광덕이 아미타불을 향하여 극락왕생을 기원하고 달을 증인으로 삼는다. 여기에는 자신이 바라는 바를 미리 질문으로 던져버려 이루어지리라고 여기는 충류도 계통의 언령신앙이 담겨있다고 말 할 수 있다. "말이 씨가 된다"와 같은 속담도 언령 신앙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문학비평용어사전 "고토다마​신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참조 /

불자들에게는 불경을 모두 읽거나 암송하지 않아도 아주 간단하게 기도할 수 있는 불경이 있습니다.
그 불경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南無阿彌陀佛 觀世音菩薩)"
모두 16자로 구성된 기도문이라고 하겠습니다.

Q : 스님이나 어른들이 기도 할 때 또는 텔레비전에서 스님들이 나와 염불 하는 모습을 보면 흔히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라고 합니다. 어떤 뜻입니까?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께 귀의하는 것

A :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은 아미타불관세음보살 두 분에게 귀의한다는 말입니다.
‘나무’는 귀의한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 두 분에게 귀의한다는 것 입니다.
아미타불은 극락에 계신 부처님이고, 관세음보살은 대자대비한 마음으로 중생들을 구제하고 제도하는 분입니다.
또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것을 염불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이 분들께 귀의한다는 뜻과 함께 이 분들처럼 살겠다는 다짐이기도 합니다.

자료출처 / 불교신문 2219호/ 4월 12일자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

우리 속담에 “노는 입에 염불(念佛) 한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하는 일 없이 놀기보다는 무엇이든 하는 것이 낫다는 뜻으로 우리 생활에 염불이 얼마나 친숙한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다.
부처님 당시에 제자들이 부처님을 존경해 그들 마음속에 부처님을 간직하려고 했던 노력이 염불의 시초다.
이 염(念)이란 단어에는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데 대표적인 의미로는 ‘억념(憶念)하다’, ‘관념(觀念)하다’, ‘사념(思念)하다’, ‘작의(作意)하다’라는 뜻으로 ‘마음에 기억하여 잊지 않으려고 하는 의식 활동’으로 해석된다.

염(念)이란 단어가 이렇게 많은 의미로 쓰이는 이유는 염해야 할 대상인 부처님의 개념에 여러 가지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염하는 대상도 초기 원시불교에서는 석가모니 부처님 한분에 한정되어 있었지만, 부파불교와 대승불교가 일어남에 따라 아미타불, 약사여래불,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등 여러 부처님과 보살들에 대한 염불이 행해지게 되었다.

“마하남이여! 이곳에서 너는 여래를 억념(憶念)해야 한다.
이르기를, 이와 같이 저 세존은 응공(應供).정등각(正等覺).명행족(明行足).선서(善逝).세간해(世間解).무상사(無上士).조어장부(調御丈夫).천인사(天人師).불세존(佛世尊)이시다.” (〈증일아함경〉 제11권 억념품)

위에서 보듯이 염불의 대상인 부처님을 여래십호(공양 받을 만한 님(應供),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正等覺), 지혜와 덕행을 갖추신 님(明行足), 바른 길로 잘 가신 님(善逝), 세상을 이해하는 님(世間解),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신 님(無上士), 사람들을 길들이시는 님(調御丈夫), 신들과 인간의 스승이신 님(天人師), 깨달은 님(佛), 세상에 존귀한 님(世尊))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이와같은 여래십호(如來十號)의 내용은 부처님의 공덕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으로 염불이 부처님의 공덕을 억념(憶念)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만약 어떤 비구가 몸과 뜻을 바르게 하고 결가부좌하여 생각을 묶어 앞에 두고 다른 생각이 없이 오로지 부처님을 염하여 여래의 형상을 관(觀)하는데 눈에서 떠나지 말아야 하느니라. 이미 눈에서 떠나지 않게 되면 다시 여래의 공덕을 염하라” 〈증일아함경〉

위에서 볼 수 있듯이 여래의 형상을 관하는 수행이 염(念)을 하기 위한 방편으로 제시되었음도 알 수 있다.

이 부처님을 염하는 법이 하나의 수행법으로 채택된 것이 염불수행이다. 이 염불수행이 발전하여 부처님 이외의 대상을 염하게 되어 삼념(三念 : 念佛, 念法, 念僧)이 생겨났고 다시 지키고 행해야 할 계율과 보시, 장차 태어나야 할 천상을 생각하는 육념(六念 : 念佛, 念法, 念僧, 念戒, 念施, 念天)이 되었으며, 이 육념에다 다시 마음의 조용함을 염하는 염휴식(念休息), 출입하는 숨을 세어 망상을 제거하는 염안반(念安般), 이 몸은 항상 하지 않고 무상하다는 것을 생각하는 염신(念身)과 죽음을 생각하는 염사(念死) 등이 더하여 십념(十念 : 念佛, 念法, 念僧, 念戒, 念施, 念天, 念休息, 念安般, 念身, 念死)으로 발전했다.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

죽음,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 문현공

초기경전을 중심으로

1. 들어가는 말

모든 사람은 죽는다. 행복한 사람도 불행한 사람도, 부자도 가난한 이들도. 그리고 우리 모두는 지금 이 순간에도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 어떻게 보면 아니, 바로 보면 우리는 지금 죽음과 함께 있다.
붓다는 왜 출가를 하셨는가? 불교의 시작은 무엇인가? 많은 사람이 알고 있듯이 생로병사에서 비롯된 고(苦) 때문이었다. 붓다께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출가를 하셨다기보다는 결코 피할 수 없는 괴로움을 넘어서기 위해서 출가하셨고 그 결과 깨달음, 열반에 이르셨다. 출가의 출발점은 깨달음이 아니라 바로 인간의 괴로움이었으며 괴로움의 정상에 있던 것은 ‘죽음’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붓다는 죽음이 ‘나의 죽음’임을 알았을 것이다. 이 때문에 태어나면서부터 보장되어 있던 왕의 지위도 수없이 많은 금은보화도 반갑지 않으셨을 것이다. 반면에 우리는 어떠한가? 현대사회에서 죽음을 눈앞에 둔 병실의 환자 혹은 고령의 노인들을 제외하고 많은 사람에게 죽음은 ‘나의 죽음’이 아닌 그저 ‘남의 죽음’일 것이다.
과거의 자연스럽던 죽음은 근현대 사회로 넘어오면서 차갑고 기계적인 죽음으로 변모한다. 그리고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남의 죽음’으로서 저편으로 밀어놓고 묻어놓는다. 자연스럽지 않은 죽음은 탄생과 소멸, 생과 사라는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고 자연스럽지 않은 삶을 만들어간다. 그리고 ‘남의 죽음’은 부작용의 부산물들을 낳는다. 현재 한국의 자살률은 10만 명당 33.3명으로 OECD 회원국 34개국 중에 가장 높으며 OECD 평균과 비교해 3배 가까이 많고 자살률이 가장 낮은 그리스와는 10배 이상의 차이가 난다. 또한 더 심각한 문제는 청소년 자살률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한국의 10∼19세 인구 10만 명당 자살자 수가 2001년 3.19명에서 지난 2011년 5.58명으로 57.2% 증가했으며 OECD 회원국의 청소년 자살률이 감소하는 추세인 데 비해 한국의 청소년 자살률은 급증 추세라고 한다. 인생의 괴로움과 행복이 무엇인지 앞으로 알아가야 할 아이들은 무슨 죄인가.
선진국 대열에 진입했다고 자부하는 대한민국이 불명예스럽게도 각종 죽음 지표에서는 최상위권에 속해 있다. 이러한 죽음 관련 문제들은 사실상 삶의 질 문제이다. 한국의 행복지수가 OECD 34개국 중 32위로 최하위권이라는 문제는 위의 죽음 관련 지표와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 같은 암울한 한국의 현실에서 대안은 무엇인가? 삶을 삶답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필자는 그 대안이 ‘죽음준비 교육’이라고 확신한다.
미국의 죽음연구(thanatology)는 1960년대에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 50여 년이 흘렀으며 유럽 또한 죽음 교육(death ed-ucation)이 시행 중이다. 일본 역시 1970년대부터 서양의 죽음연구를 받아들였으며 2005년 이후부터는 정부 차원에서 청소년 범죄와 자살률의 증가에 대한 대안으로 죽음 교육을 시행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불교계의 생사학(生死學)을 포함하여 죽음연구가 종종 이루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전체적인 수준에서 타 학문과 외국의 연구를 비교해 보면 가야 할 길이 아직 많이 남은 것으로 보인다.
언급했듯이 불교의 시작, 붓다의 시작은 죽음에서 출발했다. 그리고 붓다는 죽음을 넘어 깨달음을 얻었다. 삶과 죽음에 대한 우주적 분석을 제시하였다. 더욱이 단순히 문자만이 아니라 마음과 몸까지 꿰뚫어 완전히 체득시키는 수행 방법까지 제시하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죽음연구, 생사교육에 앞장서서 나아가야 할 불교계의 활동이 이웃 종교나 타 학문과 비교해 볼 때 그리 활발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현재 템플스테이를 비롯한 불교명상 붐이 일어나고 있어서 삶의 질 개선에 큰 도움을 주고 있으나 직접적인 죽음준비를 제시하는 사찰의 프로그램이나 불교계의 연구를 찾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이에 기존의 죽음연구들에 자그마한 벽돌을 하나 보태는 마음으로 초기불교 경전을 중심으로 불교적 입장에서 어떻게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가를 살펴보겠다.


2. 죽음, 생각하기

죽음을 준비하기에 앞서 죽음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며 생각의 시작은 죽음의 정의를 살펴보는 일이 될 수 있다. 먼저 의학적 죽음 정의인 심폐기능사를 살펴보자. 죽음은 전통적으로 호흡과 심장박동의 정지로 결정되었다. 심장과 폐의 기능이 정지하면 맥박, 혈류, 숨이 멈추고 이후 나머지 생체기관들의 정지가 뒤따른다.그리고 영화를 보면 가끔 의사가 사망 유무를 확인하기 위해 눈꺼풀을 들어 빛을 비추는 것이 이를 의미한다. 즉 호흡과 심장박동이 정지되고 뇌반사가 소실된 것이 ‘불가역적(不可逆的)’일 때, 그 사람은 사망한 것이다.
그러나 호흡과 심장이 멈추는 것이 죽음이라고 단순히 볼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호흡 정지와 심장의 정지 중에 어떤 것이 우선인가 하는 문제는 과거에 심각한 고민이었다. 19세기까지는 자발적 호흡의 유무만이 죽음을 판단하는 유일한 기준이었으나 1885년 이 기준에 의해 사망했던 사람이 살아난 경우가 학계에 보고되면서 죽음을 공식적으로 선언하려면 시간을 두고 관찰해야 함을 인식하게 되었다. 또한 1950년대 유럽에 소아마비가 유행하면서 아이들이 숨을 쉬지 못해 죽어가는 것을 계기로 인공호흡기가 개발되었고 인위적으로 호흡 유지가 가능해졌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오늘날에는 심장이 멈추는 것을 죽음의 판단 기준으로 삼는 것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호흡기의 개발과 같은 의료과학의 역사는 뇌사와 같은 또 하나의 죽음 기준을 만들게 된다.
뇌의 죽음이 일어나면 인간은 중요한 두 가지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첫째는, 소뇌와 뇌간에서 수행되는 생체적 통합조절기능의 상실이고 둘째는, 의식, 사고, 감각을 가능하게 하는 심리적 기능의 상실이다. 보통의 경우 뇌의 거의 모든 조직이 파괴되어 뇌가 죽으면 생체적 통합유지 기능이 상실되고 뒤이어 호흡 및 심박동의 불가역적 기능 정지가 유도되기 때문에 결국 심장사를 하게 된다. 그러나 과학기술의 발달에 의해 인공호흡기와 같은 인위적 생명유지 장치가 개발되면서 ‘살아 있는 시체’ 즉, 뇌사라는 또 다른 죽음 정의의 기준이 발생하게 되었다. 뇌사는 장기이식과 같은 무거운 생명윤리의 문제가 얽혀 있기 때문에 간단히 넘어갈 문제가 아니지만 이 글에서 자세히 다루지는 않겠다.
비록 의학적 죽음 정의를 언급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죽음 정의의 전부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의학적 죽음 정의는 육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죽음을 정의하는 데에 육체에만 초점을 맞추어 논의하기보다는 큰 틀에서 그리고 원점에서 차분히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간은 육체로만 이루어진 존재라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불교에서는 죽음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가. 잡아함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죽음을 설명하는 구절이 있다.
 
목숨[壽]과 체온[暖] 그리고 의식[識]은 몸[身]을 버릴 때, 함께 버려지기에 그 몸을 저 무덤에다 버리면 마음[心]이 없어 마치 나무나 돌과 같다. 
 
이 구절에 따르면, 죽음이란 목숨[壽], 체온[暖], 식(識)의 세 가지 요소의 파괴로 인해 몸과 마음이 분리되는 현상이다. 이 같은 정의는 잡아함 외에도 중아함(中阿含) 등 초기경전 곳곳에 나타난다. 여기에서 수(壽), 난(暖), 식(識)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먼저 수는 수명(壽命)을 말하는 것으로 목숨이 지속되는 기간을 뜻하며 난(暖)이란 따뜻한 기운, 즉 체온을 말한다. 이 둘은 의학적 정의와 마찬가지로 육체적 영역에 속한다.
수명은 불교의 업사상 또는 인과법과 연결시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죽음을 판단하는 데에서 왜 심장사나 폐사 등을 언급하지 않고 체온의 상실을 언급하였는가? 추측건대, 당시의 정황에서 볼 때 시체의 판단 기준이 아마도 열기(熱氣)의 유무였을 것이다. 그리고 불교에서 더욱 중시하는 것은 바로 식(識, vijñāna)이다.
식은 간단히 말해 사물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심리적 작용을 뜻하지만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증일아함(增壹阿含)에서는, “죽음이란 무엇인가. 여러 중생들이 되풀이하면서 받은 몸에 온기[溫]가 없어지고, 덧없이 변하여 다섯 가지 결합[五親]이 나누어져 오온[五陰]의 몸을 버리고, 명근(命根)이 끊어져 파괴되는 것을 죽음이라 한다.”라 하여 오온을 중심으로 역시 수명과 체온이 상실됨을 죽음이라 하고 있다. 여기에서 오온은 인간이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의 다섯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는 불교의 존재론이다. 이들 중에 물질 즉 육체를 의미하는 색을 제외하고 나머지 네 가지는 심리적 작용을 의미한다.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느낌[受], 마음속에 대상의 이미지를 형성함[想], 의도 또는 의지를 가짐[行] 등의 마음이 작용하기 전에 선행되어야 할 것은 대상을 감지하고 식별, 판단하는 기능인 식의 작용일 것이다. 식을 통해서 쾌(快), 불쾌(不快)의 감수작용이나 의도나 의지 등의 후단계가 진행될 수 있다. 또한 식은 십이연기(十二緣起)의 12단계 중에 세 번째에 위치하며 유식에서 말하는 육근(六根)과 연결된 육식(六識)의 식이기도 하다. 이들을 종합해 보면 인간의 마음을 지칭하는 대표적 용어가 바로 식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쉽게 보면 일반적인 말인 영혼이나 정신이라는 단어에 식의 일부 의미가 연결될 수 있으며 육체와 정신, 몸과 마음의 관계에서 후자의 위치에 있는 것이 식이기도 하다. 불교적 윤회의 관점에서 보면 죽음은 윤회라는 바다 위에서 일어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파도와 같다. 불행하게도 고통스러운 죽음은 1회로 끝나지 않는 사건이다. 그렇다면 버려지고 썩어져 자연으로 돌아가는 육체 말고 윤회하는 것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는 영혼이니 귀신이라는 말로 표현되지만 불교에서는 바로 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 덧붙여, 불교에서는 고정된 자아를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다른 말로 표현하면 반복되는 죽음, 윤회란 ‘식의 흐름’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죽음이란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데 시작 또는 기준이 되는 것은 정의를 살펴보는 일일 것이다. 정의란 어떤 존재를 명백히 밝혀 규정함을 의미하며 통상적으로 간결한 표현 방식을 취하며 한 존재를 규명하는 데에 중요한 작업이다. 그러나 정의를 내린다는 것은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왜냐하면 간결하게 어떤 존재를 규정하려 하기 때문이다. 덧붙여, 불교의 관점에 본다면 존재는 끊임없이 변화하므로 한 존재의 정의 또한 변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위의 죽음 정의와 더불어 우리에게 죽음이란 무엇인가? 떠오르는 것들은 두려움, 무서움, 불안, 공포, 고통, 슬픔, 후회 등으로 거의 좋은 것은 없다. 죽음이 아직 다가오지 않았을 때 ‘나의 죽음’을 떠올리면 무섭거나 두렵고 불안할 것이다. 또한 죽음이 나에게 가까이 왔을 때 지독한 고통에 휩싸이며 공포스러울 것이고 잠시 멀어졌을 때에는 후회를 남길 것이다. ‘너의 죽음’을 떠올리면 슬픔과 우울함에 사로잡힐 것이며 역시 후회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남의 죽음’은 잠시 애도하거나 그저 남의 죽음일 것이다.
초기경전에도 죽음에 대한 반응의 예가 종종 등장한다. 잡아함에는 다음과 같은 대화가 나온다.

여러 비구들이 물었다. “어떻게 하면, 비구가 번열(煩熱)하지 않고 죽으며 번열하지 않고 목숨을 마칠 수 있습니까?” 존자 아나율타가 대답하였다. “만일 비구가 진실되고 바르게 보며, 성스러운 사랑을 계로써 삼으면, 그 비구는 번열하지 않고 죽으며 목숨을 마칠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번열(煩熱)이란 몸이 타는 듯한 고열이 나고 가슴이 꽉 막힌 듯한 고통을 뜻하고 번열함 없이 목숨을 마칠 수 있는가 하는 질문 속에 죽음의 고통에 대한 불안감이 숨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실상 나의 죽음을 생각함에서도 가장 우려되는 부분은 고통 중의 고통, 바로 순수한 육체적 통증(痛症)이다. 다음의 구절을 살펴보자.

제 병은 차도가 없어 몸이 편안하지 않으며, 갖가지 고통은 갈수록 더 해져 나을 길이 없습니다. 만일 힘센 사람이 연약한 사람을 붙잡아 노끈으로 머리를 동여매고 두 손으로 세게 조른다면 매우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지금 제가 겪는 고통은 그보다 더합니다. 또 만일 백정이 예리한 칼로 소의 배를 가르고 내장을 끄집어낸다면 그 소의 고통이 어떻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제 복통은 그 소보다 더합니다. 또한 마치 힘센 두 사람이 연약한 한 사람을 붙들어 불 위에 매달아 놓고 두 발을 태우는 것도 고통스러울 것인데, 지금 내 두 발의 열은 그 보다 더합니다.

잡아함에 실린 위 내용은 중병으로 육체적 고통을 받고 있는 한 비구의 통증에 대한 묘사이다. 죽음에 다다르면 통증을 수반할 것이고 이 통증은 당사자뿐 아니라 주변의 사람들에게도 불안과 공포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통증의 유형에는 날카로운, 아리는, 욱신거리는, 타는 듯한, 쏘는 듯한, 찌르는 듯한 등의 종류가 있으며 기간에 따라 급성통증, 만성 통증이 있다. 또한 통증은 단순히 고통을 육체적으로 감각하게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여러 심리질환을 수반하기도 한다. 통증은 어떻게 본다면 죽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도 볼 수 있다.
또한 알폰스 데켄(Alfons Deeken)은 그의 저서에서 죽음의 공포와 불안의 유형들을 보다 상세하게 다음과 같이 9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①고통에 대한 공포, ②고독에 대한 공포, ③불쾌한 체험에 대한 공포 ④가족에게 부담을 준다는 불안, ⑤미지의 세계를 눈앞에 둔 불안, ⑥인생에 대한 불안과 연결된 죽음에 대한 불안, ⑦인생을 미완성인 채로 끝낸다는 것에 대한 불안, ⑧자기 소멸에 대한 불안, ⑨사후의 심판이나 벌에 대한 불안 등이다. ③의 불쾌한 체험에 대한 공포는 육체적으로 쇠약해진 모습을 남에게 보이기 싫어하는 것 그리고 자신의 존엄성을 잃어버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의미하며 ⑥의 인생에 대한 불안과 연결된 죽음에 대한 불안은 사는 동안에 삶과 죽음에 대한 왜곡된 인생관이 이후에 죽음에 대한 불안과 연결되는 경우라고 말한다. 결론적으로 이 같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 불안에 대한 극복의 방법으로서 저자는 죽음준비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와 같은 죽음에 대한 부정적이고 왜곡된 이미지들을 극복하기 위해서, 혹은 실제로 이 이미지들이 찾아와서 ‘나의 죽음’ 그리고 ‘너의 죽음’이 되어 우리를 뒤흔들기 전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3. 죽음, 대면하기

1) 자신‐죽음, 명상하기

불교에서 가장 핵심적인 결론은 무엇인가?
실천, 즉 수행이 아닌가.
불교의 입장에서 죽음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도 그 답은 수행이라 생각한다.

초기경전의 대표적인 죽음과 관련된 수행으로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부정관(不淨觀)
둘째는 사념(死念)수행

부정관은 시체가 부패하면서 해골이 되어가는 과정을 관찰하는 수행으로 탐욕을 다스리기 위한 수행이다.
부정관도 죽음을 대비하는 수행이 될 수도 있지만 감각적인 욕망을 제어하는 것에 주목적이 있는 것으로 판단되므로 본 글의 취지상 이를 자세히 다루지는 않겠다.

이 글에서는 죽음을 준비한다는 취지에 보다 가까운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인 사념(死念)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불교의 마음챙김(mindfulness, vipassanā, 念) 명상은 한국은 물론, 미국 및 해외에서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마음챙김의 연장선상에서 사념은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을 의미한다. 사념은 10가지 마음챙김[十念] 가운데 하나로 한역에서는 염사(念死)로 번역되어 있다. 앙굿따라니까야(Aṅguttara-nikāya)에서는 “비구들이여,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을 닦으면 큰 과보와 공덕이 있고 불사(不死)에 이르게 되며 불사를 목적으로 한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사념을 닦고 있는가.”라 하며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 명상이 죽음을 넘어서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에 대해 붓다는 다음과 같이 사념을 닦아야 한다고 설하고 있다.

①내가 하루 ‘밤낮 동안만 살더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정신을 기울이면, 나는 많은 것을 이룬 것이다.
②내가 하루 ‘낮 동안만 살더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정신을 기울이면, 나는 많은 것을 이룬 것이다. 
③내가 ‘한 끼 음식을 먹는 동안만 살더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정신을 기울이면, 나는 많은 것 을 이룬 것이다.
④내가 ‘네다섯 모금을 씹어 삼키는 동안만 살더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정신을 기울이면, 나는 많은 것을 이룬 것이다.
⑤내가 ‘한 모금을 씹어 삼키는 동안만 살더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정신을 기울이면, 나는 많 은 것을 이룬 것이다.
⑥내가 ‘숨을 내쉬고 들이쉬는 동안만 살더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정신을 기울이면, 나는 많은 것을 이룬 것이다.
 
또한 붓다는 위의 6종류의 사념을 닦는 방식에 대해서 ①-④까지의 방식은 게으르게 사념을 닦는 것이라고 하며 ⑤와 ⑥의 방식은 부지런히 모든 번뇌의 소멸을 위한 사념을 민첩하게 닦는 것이라 설한다.
사람의 마음은 안과 밖의 대상의 하인이 되어 이곳저곳을 흘러다니면서 기억, 경험과 맞물리거나 쾌(快), 불쾌(不快)의 감정과 연결되고 또다시 다른 대상을 접촉하고 흘러다니면서 업력을 형성한다. 그리고 이 과정이 시간과 농도에 비례해서 인생 전체에 영향을 주면서 각자의 인생을 만들어 간다. 마음챙김 명상은 마음의 주인이 되어 이리저리 흘러다니는 마음에 휩쓸리며 실려 다니지 않고 쾌, 불쾌와 같은 감응이나 다른 판단이 없이 고요하게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관찰하는 명상이다. 이에 관찰의 내용을 죽음으로 하는 것이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 명상이다. 다른 불교수행과 같이 올바른 자세와 올바른 호흡법을 기본으로 해서 내 마음속의 내용을 죽음으로 두고 정기적으로 수행하는 것이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 명상이다.
글의 서두에서 말했듯이 현대사회에서 죽음은 사회 전체나 개인에게 회피의 대상이고 은폐의 대상이다. 그저 ‘남의 죽음’이다. 그러나 생과 사, 탄생과 죽음은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이치이다. 자연의 섭리를 은폐하고 조작하면 부작용이 발생하여 다시 돌아오고 망각하면 감당하기 힘든 충격을 감내해야 한다. 죽음에 대해 망각하지 않고 순간순간 자신은 죽음으로 향하고 있다는 진실을 자각하고 알아차리는 것이 바로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 명상이다.
《청정도론(淸淨道論)》에서도 이러한 사념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죽음이란, 한 생에 포함된 생명기능이 끊어지는 것이다”라 말하며 “생명기능이 끊어진 것이라 불리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을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이라고 한다”라고 이르고 있다.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을 닦고자 하는 사람은 조용한 곳에 혼자 머물면서, ‘죽음이 올 것이고, 생명기능이 끊어질 것이다’ 혹은 ‘죽음, 죽음’ 하면서 이치에 맞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하여 사념을 언급하고 있다. 이와 같이 사념 수행은 매우 직접적이고 적극적인 불교의 죽음준비 훈련의 하나라 볼 수 있으며 자신과 죽음의 거리를 멀리 두고 숨겨두는 심리를 넘어 죽음을 바로 내 ‘곁’에 앉혀두게 한다.
그러나 여기에 반드시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만약, 불교교리에 낯선 사람이나 우울증 같은 정신질환으로 인해 심약한 상태의 사람 그리고 낮은 연령대의 학생들에게 위와 같은 죽음대비 명상을 단계적 조정 과정이 없이 바로 시행한다면 생각지 못한 비극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혹시 본격적으로 어떤 프로그램을 개설하려 한다면 반드시 부작용이 없는 단계적 조정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은 삶 속에서 마음 훈련을 통해 죽음을 부정적인 이미지로 각인하는 인식과정에 영향을 미쳐서 죽음의 부정적 이미지를 변화시키는 역할을 할 것이다. 죽음을 가까이하면서 막연한 혐오, 공포, 두려움 또는 지금 여기에는 없는 별개의 존재 등으로 죽음을 취급하는 심리를 개선시킬 것이다.

2) 타인―죽음, 돌보기

자기의 죽음이 아닌 타인의 죽음은 어떻게 준비시켜야 하는가? 앞의 죽음대비 명상을 함께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말기환자와 같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죽음으로 향하는 사람에게 죽음준비를 위한 명상을 권유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닐 수도 있다. 말기환자에게 더욱 필요한 것은 다른 사람의 힘이라 생각한다. 경전을 보면 타인의 죽음을 대하는 태도도 곳곳에서 나타난다. 붓다는 “병든 사람을 돌보아주는 것은 곧 나 부처를 돌보는 것이요, 병자를 간호하는 것은 곧 나를 간호하는 것이다”라 하여 환자를 돌보는 일이 곧 부처를 돌보는 것과 같이 거룩하고 성스러운 것이라 설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돌보아야 한다고 설했을까? 증일아함에서는 다음과 같이 간호인에게 필요한 다섯 가지 덕목을 제시하고 있다.  

어떤 것이 그 다섯 가지 법인가? 간호하는 사람이 의사를 잘 분별할 줄 아는 것, 게으르지 않으며 먼저 일어나고 뒤에 자는 것, 항상 이야기하기를 좋아하고 잠을 적게 자는 것, 법공양(法供養)을 하고 음식을 탐하지 않는 것, 병든 사람을 위하여 설법해 주는 것이다.

위에서 붓다는, ①의사를 올바르게 판단할 것, ②환자보다 부지런할 것, ③대화를 자주 하고 잠을 적게 잘 것, ④환자의 음식이나 물건을 탐하지 않고 자신이 법공양(法供養)을 할 것, ⑤환자를 위하여 설법할 것이라는 다섯 가지 덕목을 제시하고 있다.
①은 간병인이 무조건적으로 의사를 신뢰하지 말며 혹은 진정으로 환자를 위하는 의사인지 아닌지를 잘 판단해야 함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④에서 법공양을 하라는 것은 환자에게 주어진 공양물을 취하지 말고 오히려 간병인이 공양물을 올리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음식, 재물 등의 공양물 중에 가장 수승한 공양물이 법공양 즉, 진리를 베푸는 것이며 마치 부처님에게 공양물을 올리듯이 환자에게 보시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⑤항은 환자를 위해 설법하라는 내용인데 이것이 어떻게 보면 가장 중요한 항목이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상담을 통해서 환자에게서 심리적 변화를 이끌어 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경전에는 붓다가 고통 속에 있는 환자를 위해 설법을 베풀고 심리적 변화를 유도하는 예를 자주 볼 수 있다.

그는 몸에 중병이 걸려 매우 괴로워하고 있었다. (중략) 부처님께서 이 법을 말씀하시자, 존자 아습파서는 어떤 번뇌도 일으키지 않고 마음이 해탈을 얻게 되어 기뻐하며 좋아하였다.

그때 세존께서 그 병든 비구를 위해 갖가지 방법으로 설법하여 가르쳐 보이시고 기쁘게 해주신 뒤에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가셨다. 병든 비구는 세존께서 떠나신 뒤에 이내 목숨을 마쳤는데, 그 비구가 임종할 때에 모든 감각기관이 기쁨에 차 있었고 얼굴은 청정하며 살빛은 곱고 희었다.

대만의 저명한 죽음학자 푸웨이쉰(傅偉勳)은 그의 저서에서 빅터 프랑클(Victor E. Frankl)의 로고테라피(logotherapy, 意味療法)는 말기환자에게 효과적인 정신치료법이 될 수 있음을 주장하였다. 정신의학자였던 프랑클은 죽음과도 같았던 자신의 경험에서 창안한 로고테라피를 통해 기존의 심리치료와는 다른 치료법을 제시하였다. 의미 요법을 뜻하는 로고테라피는 치료자가 환자와의 상담을 통해서 환자의 인생 의미를 추출하여 자각게 함으로서 환자 스스로 내면으로부터 인생의 의미를 찾고 심리적으로 안정을 취하게 하는 치료법이다. 이렇게 볼 때, 위 붓다의 상담도 의미치료와 맥락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말기환자의 지속적인 통증은 심리에도 악영향을 미칠 것이며 죽음이 얼마 남지 않음에 대한 생각에도 계속적인 영향을 받을 것이다. 이에 환자 내면으로부터 힘을 끌어내 줄 수 있게 하는 전문상담가 혹은 스님, 신부님과 같은 종교지도자의 상담은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종교지도자, 의사, 간호사, 호스피스 그리고 가족의 역할은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 환자에게 마치 주사와 같이 외부로부터 주입되는 생명력과도 같을 것이다. 특히 환자의 죽음을 자주 접하는 의사, 간호사 또는 호스피스 시설에 종사하는 사람은 전문적인 상담 능력을 키워나가야 할 것이다. 
 

4. 죽음, 넘어서기−받아들이기, 바로 보기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Elizabeth Kübler-Ross)는 현대죽음학의 선구자로서 최근에 국내에도 그녀의 저서 《인생수업》이 출간되어 베스트셀러를 기록한 바가 있다.

그녀는 의사인 자신이 직접 수많은 말기환자들을 관찰하면서 기록한 저서인 《죽음과 죽어감(On Death and Dying)》을 통해 인간은 부정 및 고립, 분노, 타협, 우울, 수용의 5단계를 거쳐 죽음을 맞이한다고 주장하였다.

먼저 암과 같은 불치병으로 죽음을 선고받은 사람은 자신의 죽음을 부정하고 의사의 오진을 의심하며 타인에게 이 사실을 숨기기도 하면서 고립이 된다.
다음으로 병증으로 인한 육체적 초라함이나 심신의 쇠약함을 가족을 포함한 지인, 의사, 심지어 신앙의 대상에게까지 분노로써 표출한다.
셋째는, 타협 단계로 좀 더 살았으면 하는 바람에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거나 의사에게 잘 협조하고, 획기적인 신약을 기대하기도 한다. 넷째는, 우울 단계이다. 이때 자립능력 저하 등이 일어나며 위축된다. 
마지막은 죽음을 수긍하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수용 단계로서 타인과의 접촉, 자기신뢰의 증가 및 극적인 자기변화가 일어나는 단계이다. 퀴블러로스는 모든 사람이 위의 순서대로 단계를 거치지는 않지만 분노나 우울의 단계를 넘어 수용의 단계로 신속하게 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수용 즉 ‘받아들이기’는 단지 죽음뿐만이 아니라 삶의 모든 괴로움에서도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강력한 수용의 힘이 있다면 어떤 불행한 사건도 그 사람을 무너뜨리지 못할 것이다. 파산, 은퇴, 이혼, 불구, 상실, 실패, 암 선고와 같은 인생의 지독한 고통이 들이닥쳤을 때,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발버둥치거나 애써 묻어두려고 한다면 더 깊이 진흙 구덩이 속으로 빠져들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를 온전히 받아들인다면, 구덩이를 벗어나 이전보다 더 드넓고 환한 저 언덕으로 갈 수 있지 않을까? 이에서 볼 때 미리 죽음을 받아들이게 하는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 명상은 단순히 죽음을 준비하는 것을 넘어서 ‘수용의 힘’을 기르는 데도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붓다는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출가했으며 죽음을 극복하여 열반에 이르셨다. 만약 붓다가 죽음을 극복하지 못했다면 불교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붓다는 어떻게 죽음을 극복하였는가? 육체적 영생을 통해 불사(不死)에 이르렀는가? “모든 존재는 영원하지 않으니, 이것이 곧 생하고 멸하는 생멸의 법칙이다. 생과 멸이 모두 멸한다면, 적멸의 즐거움을 깨달을 것이다”라는 《열반경》의 게송은 바로 죽음 극복의 문제에 대한 궁극적 지향점을 제시한다. 이 게송의 의미, 붓다 가르침의 의미는 삶과 죽음이 모두 없어져야[生滅滅已], 죽음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는 것[寂滅爲樂]이다. 즉 삶과 죽음 모두를 없앤 것이 붓다가 얻은 깨달음인 것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붓다가 깨달은 십이연기설(十二緣起說)을 통해 보다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십이연기설은 무명(無明)→행(行)→식(識)→명색(名色)→육입(六入)→촉(觸)→수(受)→애(愛)→취(取)→유(有)→생(生)→노사(老死)의 12단계를 말하며 이들 각각은 순서대로 원인과 결과의 관계로 얽혀 있다. 이에서 볼 때 죽음이라는 결과가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태어남[生]이라는 원인이 없어야 가능하고 생 또한 이전의 원인들에 의해 연기(緣起)된 것이므로 죽음을 없애기 위해서는 단순히 생만 없애는 것이 아니라 다시 역으로 이전의 각각의 단계를 올라가서 최초의 지점인 무명까지 가야 한다. 무명은 어떠한 실체가 아니라 깊은 무의식적 본능에까지 뿌리내린 원초적 무지의 마음을 의미한다. 이 무명이 만약 진리의 체득으로 인해 명(明)으로 바뀌면 각각의 인과관계 연결들은 차례로 소멸되고 죽음도 소멸된다. 바로 생도 없고 사도 없는 열반에 이를 수 있다. 즉, 붓다는 육체적 죽음을 극복한 것이 아니라 생과 사를 일으키는 무명을 넘어 열반에 이른 것이다.
열반(涅槃, nirvāṇa)은 원초적 무명이 사라진 상태로서 영어로 “to blow out” 또는 “to quench”로 표현되며 이들 각각은 취멸(吹滅)과 갈증 해소의 결과 등을 의미한다. 불어서 완전히 꺼진 대상은 죽음과 삶, 시작과 끝, 탄생과 소멸 등을 만들어내는 이분법적 생각 그리고 이 생각을 넘어 심층의식에까지 미친 이분법적 본능, 삶의 괴로움들을 생산해내는 원초적 어둠을 말한다. 또한 이 어둠 속에는 죽음, 공포, 두려움, 슬픔, 애착, 분노 등 삶의 고통을 만들어 내는 세 가지 원초적인 본능[三毒]이 숨어 있다. 즉 열반은 붓다가 깨달은 불교의 궁극적 지향점으로서 괴로움과 죽음이라는 모든 번뇌가 전멸(全滅)된 상태이다.
이 같은 교설은 근원적인 측면에서 죽음준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할 것이다. 보통의 죽음에는 반드시 육체적 죽음이 강하게 자리 잡게 되고 이를 중심으로 여러 가지 왜곡된 심리와 현상들이 파생되기 마련인데, 불교의 생사관은 죽음극복의 진정한 의미가 마음의 세계에서 다시 다루어져서 죽음을 바로 보고 나아가 삶과 죽음을 함께 바로 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5. 나가는 말

지금까지 초기불교 경전을 중심으로 불교의 입장에서 죽음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를 살펴보았다. 본문에서는 각 장의 제목에 따라 자세한 내용들을 언급하였지만 단순히 보면 각장의 제목과 순서, 즉 ‘죽음, 생각하기→, 죽음, 대면하기→죽음, 받아들이기, 바로 보기’ 자체가 하나의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이 될 수 있다고 본다. 또한 효과적인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위 차례의 반복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죽음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고 이후에 죽음을 가까이하는 명상을 실천하고 죽음을 내 안으로 받아들이고 죽음을 다시 바로 보아서 죽음과 삶을 함께 보는 것이 죽음을 준비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 본다.
 서두에서 언급하였듯이 현재 국내에서는 죽음교육 프로그램이 연령별로 보다 다양하고 체계적으로 시행되고 있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에 불교계에서 앞장서서 국내와 국외 그리고 불교계 내외에서 연구되고 있는 많은 죽음연구들을 반영하여 다양하고 체계적인 죽음준비 프로그램을 개설해야 할 것이다. 또한 법회 또는 템플스테이와 같은 기존의 프로그램의 틀 위에서 죽음명상과 같은 죽음준비 프로그램을 추가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도 있다.   
이 글에서는 초기불교 경전만을 중심으로 불교의 죽음관을 살펴보았으며 초기 이후의 다른 불교문헌들을 다루지는 않았다. 특히 《티베트 사자의 서(Bardo Thӧdol)》와 정토계 경전들은 임종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문헌들이지만 본 글에서는 살펴보지 않았다. 차후에 이들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와 더불어 효과적으로 현대사회에 적용시킬 수 있는 맥락적 연구를 진행할 것이다. 이제까지 단순히 글을 통해서만 죽음을 가까이 두어야 한다고 하였으나 개인적으로도 계속해서 실천과 수행을 할 것이라 다짐하며 또한 본 글의 부족한 연구를 넘어 보다 심도 있는 연구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앞으로 나에게 죽음이 올 때까지 죽음공부를 놓지 않겠다는 다짐을 한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참조

        -

1880년대 후반, 러시아의 한 시골 청년이 쓴 것으로 알려진 이 책은 ‘쉬지 않고 기도하는’ 삶이 어떤 삶인지를 보여준다.
책의 주인공은 어느 날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을 읽고 어떻게 하는 것이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인지, 그 방법을 찾기 위해 순례의 길을 떠난다.
그러던 중 순례자는 큰 스승을 만나 “예수의 기도”(주여,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를 배우고, 하루에 3,000번씩, 6,000번씩, 나중에는 1만 2,000번씩 반복하여 기도를 함으로써 기도가 마음 깊은 곳에 이르며 평온해지고 하나님과 합일되는 황홀의 경지를 체험하게 된다. 이 책은 이렇게 깊은 영성을 체험하게 된 순례자의 기도 여행에 관한 이야기이다.

미국의 저명한 종교학자 휴스턴 스미스 교수“러시아 영성의 고전”이라 했고, 샌프란시스코 대학 종교학자 제이콥 니들먼 교수“지난 100년 동안 나온 가장 영향력이 큰 종교 서적으로 사람의 삶을 바꾸어 주는 희귀한 책들 중 하나”라고 칭송했다.

심지어는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와 더불어 러시아 혁명 이전 “러시아 문학의 3대 걸작”이라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역자 오강남 박사는 1970년대 초 캐나다에 유학하면서 이 책을 처음으로 접했는데 그 당시 기독교에도 불교의 ‘염불’과 같은 종교적 수행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그 후 캐나다 대학에서 가르치면서 종교학 개론 과목을 담당할 때에는 언제나 학생들에게 이 책을 읽고 독후감을 써오라는 과제를 냈다. 그리고 한국 독자들에게도 이 책을 알리고 싶은 마음에 영어본으로 나온 모든 번역본들을 참고해 한국어로 번역했다.

책은 무엇보다 문장이 간결하고, 평온한 느낌을 갖게 하여 조용하게 묵상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사람들 앞에 소리를 내어 기도하는 것에 익숙해진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처음에 책의 주인공이 행하는 기도 방식, 즉 “예수의 기도”가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책을 읽다보면 어느새 예수의 기도, 우리가 알지 못했던 혹은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던 예수의 기도가 책의 주인공에게 주었던 느낌, ‘팔다리로 감미로운 쾌감이 퍼지고’, ‘기쁨으로 심장에 거품이 이는’ 그 느낌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쉬지 말고 기도하는 삶을 꿈꾸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도로 영적인 성장을 꿈꾸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의 기도”는 새로운 희망이 될 것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성탄(聖誕) :

성인 성, 성스러울 성(聖), 낳을 탄, 태어날 탄(誕)
- 성(聖) / 귀 이(耳) + 입 구(口) + 북방 임(壬) / 북방 임(크다, 성대하다)
따라서 '성(聖)'이란 한자의 의미는 "크게 듣고 크게 말하다"

聖자는 ‘성인’이나 ‘임금’, ‘거룩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聖자는 耳(귀 이)자와 口(입 구)자, 壬(천간 임)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聖자는 본래 ‘총명한 사람’을 뜻하기 위해 만든 글자였다.
聖자의 갑골문을 보면 큰 귀를 가진 사람 옆에 口자가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누군가의 말을 귀 기울여 듣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聖자는 타인의 말에도 귀를 기울일 줄 아는 ‘현명한 사람’이나 ‘총명한 사람’을 뜻했었다.
하지만 후에 뜻이 확대되면서 지금은 ‘성인’이나 ‘거룩하다’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壬자는 ‘북방’이나 ‘천간’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壬자는 士(선비 사)자가 부수로 지정되어 있지만 ‘선비’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왜냐하면, 士자와는 기원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壬자의 기원에 대한 해석도 제각각이다.
일부에서는 실을 엮던 도구로 보기도 하고 또 다른 해석에서는 북쪽에 있는 별과 땅을 연결한 모습이라고도 한다.
壬자에 ‘북방’이라는 뜻이 있으니 그런 해석도 가능하리라 본다.

또 壬자를 工(장인 공)자와 같은 자였던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당시의 工자()는 壬자와( ) 달랐기 때문에 같은 글자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러나 이런 논쟁이 무의미한 것은 지금의 壬자는 유래와는 상관없이 천간(天干)의 아홉 번째라는 뜻으로만 쓰이고 있다는 것이다.
또 때로는 다른 글자와 결합해 ‘사람’과 관계된 뜻을 전달하기도 한다.

타인의 말에도 귀를 기울일 줄 아는 현명한 사람 또는 총명한 사람

탄(誕) / 말씀 언(言) + 길 연, 늘일 연(延)
  말을 널리 늘이는 것(세상에 말을 널리 알리는 것)

誕자는 ‘태어나다’나 ‘거짓’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誕자는 言(말씀 언)자와 延(끌 연)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延자는 발을 길게 늘여 걷는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늘이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誕자는 이렇게 ‘늘이다’라는 뜻을 가진 延자와 言자가 결합한 것으로 ‘말을 길게 늘이다’라는 뜻으로 만들어졌다.

誕자에서 말하는 ‘말을 길게 늘이다’라는 것은 남을 속이기 위해 이리저리 말을 늘여놓는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誕자는 본래 ‘거짓’을 뜻했지만, 후에 ‘말을 만든다’라는 뜻이 확대되면서 ‘태어나다’라는 뜻도 갖게 되었다.

지난 12월 4일 황목사님께서 "내 신앙의 월드컵"이란 주제로 설교했습니다.
예배 후 식탁의 교제 시간에 마침 한국에서 어느 후배가 유투브 속보를 보내왔는데 제가 확인하지도 않고 브라질에 대해서 부전승이라고 전했는데 결국은 어느 유투버의 돈벌이 용 가짜 뉴스이었습니다.

12월 5일(월) 다니엘 간닥터와 예약된 검진을 위하여 콜 택시를 불러 전화번호부에서 확인한 주소를 알려주고 이동을 했습니다.
접수부에서 전부한 후 안내원이 그런 의사가 없다고 합니다.
급하게 병원 밖으로 나와서 사무엘에게 주소를 받아서 다시 콜택시를 불러서 병원을 찾아가서 모든 검사 결과와 앞으로 진료 방향을 확인하고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어떤 정보든지 반드시 검증이 필요하다는 것을 다짐하는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성탄이란 절기도 성경적인 검증이 필요한 시대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현재 미국에서 모든 휴일을 어느 특정 종교의 용어가 사용되는 것을 금하고 있기 때문에 부활절, 추수감사절, 성탄절을 해피 할러데이(Happy Holiday) 라고 말하라고 합니다.

미국의 기독교 인구가 몇 %일까요?
2020년 기준 미국 내 기독교인(아동 포함)은 전체 인구 중 약 64%로 추산됐다.
같은 해 무종교인은 약 30%는 유대교, 이슬람교, 불교 등 기타 종교인은 약 6%로 집계됐다.
현재 미국 종교 인구 변화 속도와 트렌드에 따라 기독교인 비율은 2070년 전체 인구의 약 54%에서 최저 약 35%까지 급락할 가능성이 있다.

기독교 인구가 64%라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부활절을 왜 해피 할러데이라고 사용해야 합니까?
기독교 인구가 64%라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추수감사절을 왜 해피 할러데이라고 사용해야 합니까?
기독교 인구가 64%라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성탄절을 왜 해피 할러데이라고 사용해야 합니까?

침묵할 때가 있고 외쳐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외쳐야 할 때라고 하겠습니다.

당당하게 외치려면 외칠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합니다.
그 힘이란 성탄절을 맞이하여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 예수님을 맞이할 수 있는 "마음의 구유"가 준비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구유가 준비되셨습니까?
마음의 구유를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요?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예수 이름을 믿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예수
둘째는 그리스도
셋째는 임마누엘

언령신앙(言靈信仰

언령 신앙은 일본에서 특히 발전된 것으로 일본에서는 ‘코토다마(言霊)’라고 부른다.
말에 보이지 않는 힘이 깃들어 좋은 말을 하면 행복이 오고, 나쁜 말을 하면 불행이 온다고 믿는 것이다.
학자들은 ‘말(言, 코토)’와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事, 코토)’이 발음이 같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일본의 신 고토시로누시(事代主)가 고사기(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책)에서는 고토시로누시(言代主)라고 쓰이기도 했다고 한다.
일본 일상 생활 깊숙히 스며든 언령 신앙의 사례를 찾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
말이 씨가 된다.

기독교 인구가 64%라고 하는 미국에서 크리스마스를 왜 해피 할러데이라고 해야 하는가?
이런 사회현상에 대해서 교회는 침묵하고 있는가?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앞으로 10년 이내에 커다란 변화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는 미국 전역에서 동성애자들의 결혼을 합법적으로 인정하기 때문에 교회에서 동성결혼에 대하여 부정적인 가르침을 강조하면 분명한 저항을 받게 될 것입니다.

추수감사절, 부활절, 성탄절은 기독교의 3대 명절입니다.
이러한 절기를 해피 할러데이라고 말해야 한다는 주장이 점점 더 강세로 드러나는 것은 언어에 감춰져 있는 힘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불자들에게는 불경을 모두 읽거나 암송하지 않아도 아주 간단하게 기도할 수 있는 불경이 있습니다.
그 불경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南無阿彌陀佛 觀世音菩薩)"
모두 16자로 구성된 기도문이라고 하겠습니다.

Q : 스님이나 어른들이 기도 할 때 또는 텔레비전에서 스님들이 나와 염불 하는 모습을 보면 흔히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라고 합니다. 어떤 뜻입니까?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께 귀의하는 것

A :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은 아미타불관세음보살 두 분에게 귀의한다는 말입니다.
‘나무’는 귀의한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 두 분에게 귀의한다는 것 입니다.
아미타불은 극락에 계신 부처님이고, 관세음보살은 대자대비한 마음으로 중생들을 구제하고 제도하는 분입니다.
또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것을 염불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이 분들께 귀의한다는 뜻과 함께 이 분들처럼 살겠다는 다짐이기도 합니다.

자료출처 / 불교신문 2219호/ 4월 12일자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



물론 기독교에도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문이 있습니다.
그런데 주기도문은 너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과 비교하면 길다고 하겠습니다.
초신자들에게 주기도문을 암송하여 기도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기도하던 중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단하게 기도할 수 있는 기도문을 만들었습니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모두 15자 글자 입니다.

뉴욕으로 이주하여 처음에는 이 기도문에 대해서 소개했었기에 그동안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다시 한 번 더 강조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성탄절을 메리 크리스마스! 라고 말하지 말라고 하는 사회적인 분위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당당하게 메리 크리스마스 라고 외쳐야 합니다.

무슨 말을 이 세상에 확장시켜야 할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서 찾아내려고 합니다.


오래 전에 교회가 토지수용법에 의하여 철거될 위기에서 마침 지역 경찰서 정보과장이 군청을 담당하는 형사를 소개해주며 함께 군청 직원을 만나라고 주선했습니다.
그때 군청의 담당 직원이 제안하기를 교회를 위해서 건축부지 300평을 새로운 도시가 형성되는 중심부에 허락해 주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교회로 돌아왔는데 마을 대표 몇 사람이 찾아와서 도와달라고 합니다.
자기들은 힘이 없으니 교회가 자기들과 더불어 함께 고등법원에 항소하면 좋겠다고 합니다.
마을 주민들의 안타까운 사정을 외면하면 그만입니다.
더구나 그 주민들은 교회가 세워질 때 교회를 건축하지 못하도록 주도한 사람들입니다.
만일 교회가 주민들과 더불어 함께 행동하면 약속된 교회부지는 받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결국 마을 주민들과 더불이 고등법원에 행정소송을 제기하므로 군청의 제안은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이때 제가 결정할 수 있었던 힘은 예수님은 약자의 편에 설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교회에 대해서 핍박하던 것을 생각하면 도저히 마을 주민들의 하소연에 귀를 기우릴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약자를 위한 길을 선택했을 때 마을의 주민들은 새로운 생각을 갖고 교회에 대한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Christmas
크리스마스는 라틴어 "그리스도"(Christus)와 "모임"(massa)의 합성어
'그리스도 모임' 즉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모임'으로 종교적인 예식을 의미한다.
동방 정교회나 개신교에서는 "그리스도의 예배"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의 미사"로 번역한다.

크리스마스(Christmas)란 기독교의 창시자인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기념일을 뜻합니다.
다른 말로는 성탄일이라고도 한다.

크리스마스는 영어로 ‘그리스도(Christ)의 미사(mass)’라는 의미로 고대 영어인 Cristes maesse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크리스마스는 X-mas라고 표기하는 경우도 있는데요.
여기서의 X는 그리스어로 그리스도(크리스토스: ΧΡΙΣΤΟΣ)의 첫 글자를 뜻하는 것

​크리스마스의 유래에 대한 주정은 크게 두 개의 시각이 있다.

첫째는 교회의 전통으로 교회 내에서 시작으로 보는 시각
둘째는 로마제국의 전통으로 로마의 절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시각

첫째는 교회의 전통으로 교회 내에서 시작으로 보는 시각

교회의 전통에서 크리스마스가 유래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말에 따르면,
신약성서에는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해 기록되어 있지만 탄생일에 대해서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대문에 초기 기독교도들은 1월 1일과 1월 6일, 3월 27일에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해왔다고 하는데요.
이후 4세기를 거치면서 신학자이자 주교인 아우구스티누스와 기독교의 이단으로 구분되었던 도나투스주의자들 간의 논쟁에서 교회가 공인되기 전부터 12월 25일을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지켰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특히 아우구스티누스의 기록인 삼위일체론을 살펴보면 "예수께서는 3월 25일에 수태되셨다.
(중략) 전통에 따르며 예수께서는 12월 25일에 태어나셨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미 12월 25일이 전통 즉 초대교회부터 내려온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요.
교회의 전통에서 수난일이며 동시에 수태일인 3월 25일부터 상징적인 9개월 이후인 12월 25일을 기독교의 그리스도론적 개념으로 탄생일로 본다는 기록입니다.

​둘째는 로마제국의 전통으로 로마의 절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시각

로마제국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는 이들은 크리스마스 축제가 로마 연감의 기록에 따라 336년경 로마제국에서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로마교회 대주교 율리우스 1세가 12월 25일을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선포한 350년부터 그리스도의 탄생제가 공식적인 '기독교'의 축제로 인정되기 시작하였고, 오늘날까지 전통으로 굳어지게 되었다는 것이죠.






2022년 성탄절은 코로나 시대에 맞이한다는 특이한 절기라는 것입니다.

- 코로 숨을 쉬게 하신 하나님께서 숨을 쉬는 것도 부자연스럽게 하셨지요
- 노동하는 것이 곧 기도하는 것이라고 깨우치며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먹지로 말라고 하셨는데
- 나 보다 더 약한 것 같은 사람도 건강하게 지내는 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일러라.


십자성호를 왼쪽부터 긋는 가톨릭,
오른쪽부터 긋는 정교회,
십자성호를 긋지 않는 개신교 


2023년 성탄예배

예수님이 어디에 오셔야 하는가?

주 내 안에 늘 계시고
나 주 안에 있어

예수님이 오신 곳은 어디인가?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설교 후기 :

설교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참 어렵고 힘든 과정이다.
성경의 잣대로 세상을 바라보며 가야 할 방향을 올바르게 제시할 수 있는 은혜가 절실하다.

오 주여
진리의 영으로 늘 새롭게 하옵소서
기초가 흔들리면
아무리 높이 올라간 것도
쉽게 무너질 것이다.

이제는 기초를 다시 놓아야 하는 때가 아닐까?










보수와 진보



보수(保守, conservatism)와 진보(進步, progressivism)
- 보수는 전통적인 것을 옹호하는 경향이 강하다

보수(保守) ;
- 보전할 보(保), 지킬 보(保)
1. 보전하다, 2. 지키다, 3. 보증 서다, 4. 기르다, 5. 편안하다


- 지킬 수(守), 벼슬이름 수(守)
1. 지키다, 2. 벼슬 이름, 3. 임무, 4. 거두다, 5. 찾다

1. 새로운 것을 적극 받아들이기보다는 재래의 풍습이나 전통을 중히 여기어 유지하려고 함
2. 보전하여 지킴

Ⅰ. 보수와 진보는 무엇이 다를까?
- 한국경제(2017. 1. 20)

최근 들어 보수와 진보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된다. 이념적 편 가르기가 심할수록 특히 사용하는 빈도가 잦은 단어다. 그렇지만 정작 보수와 진보의 차이점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적다. 자기와 생각이 조금만 달라도 상대를 보수적 또는 진보적이라고 규정하는 일이 자주 벌어지는 것은 이런 이유라고 하겠다.

흔히 자유와 평등이 보수와 진보를 구분하는 핵심 가치로 꼽힌다.

일반적으로 보수는 자유의 가치관을 우선하고, 진보는 평등의 가치관을 중시한다. 보수주의자들은 경제를 시장의 자율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보수는 자유 시장경제와 작은 정부를 지지한다. 진보주의자들은 시장을 자율에 맡기기보다 정부가 개입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까닭에 진보는 일반적으로 ‘큰 정부’를 선호한다. 또 보수는 대체적으로 성장을 진보는 분배를 우선한다.

보수

우익

자유

자유 시장경제

성장

개인

성과주의, 개인주의, 사유재산

진보

좌익

평등

정부 개입

분배

집단

집단주의, 분배주의, 공유

비슷한 맥락에서 보수는 개인의 가치를, 진보는 집단의 가치를 더 중시한다. 성과주의, 개인주의, 사유재산권은 보수가 지지하는 가치이고, 분배주의, 집단주의, 공유는 진보적 가치에 가깝다. 보수정당이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정책을 펴고, 진보정당은 평등을 실현할 정책을 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물론 보수와 진보는 상대적 개념이다. 진보적 가치를 배제하는 보수나, 보수적 가치를 무시하는 진보는 편향적인 이념일 뿐이다. 보수는 우익, 진보는 좌익이라는 도식적 구분 역시 바람직하지 않다. 보수든 진보든 개혁과 혁신을 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역사적으로 보수와 진보는 공존하면서 경쟁해왔다.

Ⅱ. 보수와 진보는 무엇이 다를까?


우리나라는 유독 이념갈등이 심하다. 소위 보수와 진보는 경제, 복지, 세금, 외교 등 곳곳에서 충돌한다. 지역, 세대, 계층 갈등보다 더 골이 깊은 것이 이념대립 이다. 그러나 무엇이 보수이고 무엇이 진보인지 이해가 부족한 것 또한 사실이다. 보수와 진보의 구별법을 알아보자.


보수는 자유, 진보는 평등 중시


보수는 무엇보다 자유와 자율을 중시한다.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할 때 민주주의가 발전하고 경제도 성장한다고 생각한다. 시장경제 아버지로 불리는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이나 자유주의 경제학자 하이에크의 ‘자생적 질서(spontaneous order)’는 보수적 가치를 뒷받침하는 이론이다. 의도하지 않고, 계획하지 않더라도 자유를 최대한 보장할 때 ‘바람직한 질서’가 형성된다는 믿음이다.

보수는 개인의 가치를 중시한다. 집단을 위해 개인 희생을 강요하는 건 옳지 않다고 믿는다. 따라서 ‘작은 정부’를 선호한다. 중소기업이나 서민층을 위해 대기업이나 부유층에서 많은 세금을 걷는 것은 공평하지 않다고 반대한다. 정당하게 이룬 성과에 대해선 정당한 대우를 해줘야 한다는 입장이다. 보수는 개인의 사유재산권을 중시한다.

진보는 평등의 가치를 우선한다. 따라서 개인보다는 집단의 논리를 중시한다. 성장보다는 분배에 가치를 부여한다. 마르크스의 ‘계급 투쟁론’은 진보가치를 대변한다. 최저임금제, 농어촌전형, 차별금지법, 법인세 인상 요구 등은 진보 이념의 성격이 짙다. 특히 진보는 개인의 불행을 사회구조 탓으로 여긴다.


진보주의자들은 국가의 역할을 국민 삶을 보장하는 데까지 확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맥락에서 진보는 보편적 복지, 노동자 보호, 부자 증세, 공영화 등을 선호한다. 진보의 세계관에는 ‘세상이 점점 나빠진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진보가 보수보다 상대적으로 ‘큰 정부’를 선호하는 이유다.


복지, 세금, 노동 등 곳곳에서 견해차


최근 우리나라에서 정치, 경제, 사회 등 다양한 곳에서 대립의 목소리가 커지는 이유는 보수와 진보간 이념 갈등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진보와 보수는 모두 정치적 자유를 존중한다. 그러나 경제적 자유에 대해서는 관점이 크게 다르다.


진보주의자들은 설계주의(인간의 선험적 이성으로 목표한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 관점에서 시장은 불완전하다고 본다. 따라서 시장은 늘 감시와 교정의 대상이다. 그러니 국가는 개인의 이기심과 탐욕을 억제하고 ‘공익’을 도모해야 한다.


진보는 공동체적 책임감을 개인의 자율에만 맡기면 부(富)의 불평등이 심화된다고 믿는다. 개인의 자비심을 믿기보다는 정부가 나서 분배 문제 등을 인위적으로 조정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정부의 역할은 점점 커지게 된다.

반면 보수는 자생적 질서가 형성되는 시장에 국가가 개입하면 더 나쁜 결과가 초래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시장 중심의 경제, 작은 정부를 선호한다. 큰 정부를 옹호하는 진보가 시장의 실패를 우려하는 반면, 작은 정부를 선호하는 보수는 정부의 실패를 비판한다.


개인의 삶을 보는 시각도 다르다. 보수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한다고 보는 데 비해 진보는 사회적 조건이 개인의 삶을 크게 좌우한다고 생각한다.


북한 미사일이나 핵에 대응하기 위한 사드(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의 경우 보수는 상대적으로 찬성 쪽이 많고, 진보는 반대쪽이 많다. 보수는 넓은 세원에 낮은 세율을 선호하고, 진보는 부자·대기업 증세를 주장한다. 보수는 대한민국을 성공한 국가로 보는 시각이 강하고, 진보는 실패한 나라로 보는 시각이 강하다. 보수는 대체로 선별적 복지를, 진보는 보편적 복지를 선호한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송복 연세대 명예 교수

보수의 위기부터 말해야 할 것 같다.

“어느 나라든 보수의 특징은 위기를 되풀이해서 맞는다는 데 있다. 보수의 원류로 300년 된 영국 보수당도 되풀이해서 위기를 맞았다. 19세기에는 자유당 글래드스턴에게 20여 년간 정권을 뺏겨 물러나 있다가 디즈레일리라는 걸출한 지도자가 나와 재집권했다. 20세기에 들어서도 정권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처칠이라는 걸출한 지도자를 만나 대세를 회복했다. 되풀이해서 위기를 맞으면서도 나아가는 것이 보수다.”


― 보수가 위기를 되풀이해서 맞는 이유는?

“보수는 미래지향적이기 때문이다. 과거는 이미 지나가 되돌릴 수 없는 것이므로 싸워봐야 소용없다. 과거와 싸우면 현재가 죽고 미래가 사라진다. 이것이 영국 보수당의 시관(time-perspective), 즉 시간에 대한 신념이다. 그래서 미래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고 여긴다. 그러나 미래는 불확정적이다. 그렇다 보니 누구나 다 지지하는 목표를 갖기 어렵고 조직은 이완되기 쉽다.”

 
보수의 또 다른 특징으로 정직과 성실을 강조했다.

“미국 초대 조지 워싱턴 대통령은 정직이 가장 효율적이라고 여겨 ‘정직이 최고의 정책(Honesty is the best policy)’이라고 말했다. 성실이란 무슨 일이든 온 마음을 기울여 하는 것이다. 중용의 25장이 내세우는 가치가 불성무물(不誠無物)이다. 성실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보수는 ‘무(無)정직’하고 ‘무(無)성실’한 포퓰리즘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것도 어려움을 초래하는 원인 중 하나다.” 

“과거와 싸우면 미래 사라진다”

― 본래 진보가 미래지향적이지 않은가.

“진정한 진보도 보수처럼 미래지향적이다. 다만 우리나라 진보는 자기들끼리 말로만 진보이지 실은 과거지향적이다. 그래서 수구 좌파라 부르는 것이 맞다. 과거지향의 대표적인 것이 적폐청산이다. 과거를 지향하면 미래를 지향할 때에 비해 공격할 목표가 확실하고 결속력이 강해진다. 이런 진보와 대결해야 하는 것이 보수의 어려움이다.”


― 적폐청산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적폐란 과거에 쌓인 폐단이다. 잘못된 제도 법규 관행이다. 그것을 바꾸는 게 뭐가 잘못이겠나. 그러나 실제로는 그 제도 법규 관행에서 일했던 사람을 몰아내는 데 주력한다. 이것을 사회학에서 목적전치(目的顚置)라고 부른다. 목적과 수단이 뒤집혀 자리가 완전히 바뀌는 것이다. 잘못된 제도 법규 관행의 개혁이 원래 목적인데 그 목적이 되는 제도 법규 관행은 그대로 둔 채 그 목적을 수단으로 해서 거기서 일하지 않을 수 없었던 사람을 몰아내는 것이다.”

― 개혁은 어떠해야 하는가.


“미래는 불확실하기 때문에 개혁도 점진적일 수밖에 없다. 점진적 개혁은 서서히 가되 확실히 가는 것이다. 한국인은 이런 개혁관을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개혁은 밑뿌리부터 바꾸는 것이고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여긴다. 그러나 보수주의자는 경험주의자다. 경험해 보니까 새 술을 새 부대에 담듯이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안다.”


“극한의 위기에서 변화가 온다”


― 문재인 정부의 정책에 대한 우려가 많다.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찾는 연목구어(緣木求魚)란 표현을 쓰고 싶다.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 같은 경제정책도 그렇고 탈(脫)원전 같은 기술의 문제도 그렇고 사회 통합도 그렇다. 맹자 양혜왕(梁惠王) 편에 이런 말이 나온다. 개인이 연목구어를 하면 저만 손해 보고 말지만 나라가 연목구어를 하면 후필재앙(後必災殃), 후일에 반드시 재앙을 맞게 돼 있다.”


― 재앙을 피할 수 있다고 보는가.


“궁즉변(窮則變)” 또는 “궁즉통(窮則通)”이란 말이 있다. 국민은 대개 참고 기다리지만 위기 상황에서는 무섭게 반응한다. 노무현 정권이 끝날 때 즈음 이명박 대통령이 약 500만 표차로 이겼다. 역대 그렇게 큰표차가 없었다. 10월 3일 광화문 집회도 이러다 죽겠다 싶어 뛰어나온 것이다. 견딜 수 없게 되는 시점이 오고 궁즉변 궁즉통이 일어날 것이다.


― 보수 통합은 가능할까.


“위기의 극한까지 가서야 정신을 차릴 것이다. 내년 총선 직전에 가서 ‘총선에서 지면 연목구어식 정책이 연장돼 나라가 망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면 달라질 것이다. 내년 4월이 총선이니까 내년 2월 정도에는 변화가 있지 않을까. 정치에선 모든 것이 한때다. 더불어 민주당이 득세하고 문재인 정부의 연목구어식 정책이 횡행하는 것도 한때다. 차일시피일시(此一時彼一時), 다 지나가게 돼 있다. 너무 초조해하고 절망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많은 국민이 이미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지 않은가.”


* 연목구어(緣木求魚) ;
나무에 올라 물고기를 구한다는 뜻으로, 불가능한 일을 무리해서 굳이 하려 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 젊은이들이 보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예나 지금이나 젊은이들이 보수를 좋아하면 그게 이상한 거다. 젊은이들은 경험적이지 않고 이상적이니까 진보가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현 상태대로의 좌파 정당을 지지한다는 것도 이상하다. 실은 진보적이지 않으니까.”


― 2030세대가 더 많이 국회에 진출해야 하지 않을까.


“내가 고등학교 대학교 다닐 때 20대가 굉장했다. 그때 스무 살은 서른 살이 되면 세상이 끝장나는 줄 알고 서른 살은 마흔 살이 되면 죽는 줄 알았다. 그만큼 세대가 짧았다. 지금은 100세 시대다. 20대는 시대의 주인의식을 갖기 어려울 정도로 어린 나이가 되고 말았다. 2030세대의 국회 진출보다 중요한 것은 2030세대를 위한 정책 마련이다.”


― 국회에서 정책 대결이 보이지 않는다.


“2030세대 정책만 해도 2030세대와의 끊임없는 대화 속에서 현 정부의 것이 뭐가 틀렸다 지적할 수 있어야 한다. 지난번 한국당이 민부론(民富論)이란 걸 내놓았는데 아는 사람이 없다. 보수정당이 싸우는 방법은 정책 대결밖에 없다.”


― 한일 관계, 한미 관계 등 주요한 국제 관계도 어려워지고 있다.


“약속은 준수돼야 한다(Pacta sunt servanda)는 것이 17세기 이래 국제관례다. 국가 간 약속이 국내적으로 지지를 받지 못하더라도 지켜야 한다는 원칙이다. 세계로 나가야 먹고사는 나라가 그 원칙을 지키지 못해 외교적으로 어려운 상황을 맞았다.”


― 우리나라가 취할 외교 전략은?


“구한말, 약 130년 전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朝鮮策略)이 주장한 바와 달라지지 않았다. 일본에 주재하던 중국 외교관 황준헌이 쓴 조선책략을 1880년 김홍집이 일본에 수신사로 갔다가 가져왔다. 몇 쪽 되지도 않는다. 결일연미(結日連美)가 조선의 살길임을 강조한 내용에 위정척사파가 들고일어나고 조선은 쇠망의 길로 들어섰다. 오늘날도 우리 곁에 중국이 민주화하지 않고 패권국가로 남아 있는 한 결일연미 할 수밖에 없다.”


송 교수는 결일연미의 정신을 확대해 해외지향성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박정희 때도 구한말의 선택과 비슷한 상황이 있었다. 1960년대 초 서울대 교수들을 포함해 거의 모든 경제학자들이 수입 대체 산업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을 때 박 대통령이 수출입국을 외치고 나왔다. 그때 경제학자들이 ‘군바리들이 판타지 속에 살고 있다’고 비웃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1965년까지 1억 달러 수출 목표를 한 해 앞당겨 달성함으로써 경제학자들의 탁상머리 주장을 우습게 만들었다. 우리나라는 바깥으로 향해야 미래를 열어갈 수 있는데 현 정부 들어 해외지향성이 위축되는 느낌이 든다.”


“결국 다 노심초사 속 평화”

― 문재인 정부는 평화만은 지켰다고 자부한다.

“휴전 이후에 지금과 같은 평화는 늘 지속돼 왔다. 다만 그 평화가 ‘깨지지 않을까’ 노심초사(勞心焦思)하는 가운데의 평화일 뿐이다. 지금의 평화라고 특별한 게 있나. 특별한 게 있다면 오히려 핵을 가진 북한 앞에서 더 노심초사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북한에 가장 중요한 것은 체제 안전이다. 체제 안전을 위해 핵을 개발했는데 핵을 포기하겠는가. 그렇다면 우리로서는 핵 속의 평화를 추구할 수밖에 없다. 전술핵이든 전략핵이든 핵 공유든 핵을 핵으로 막는 것만이 우리에게 가능한 평화다.”


유학자 류성룡을 연구하는 서애학회를 발족할 준비에 바쁘다고 한다. 퇴계 율곡 등 유학자의 호를 내건 학회는 대개 사학자들이 주도하지만 서애학회는 사회학자이면서 ‘위대한 만남 서애 류성룡’이란 책을 쓴 송 교수가 주도한다.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참여해 충무공 이순신과 함께 보기 드문 구국의 리더십을 보여준 서애 정신을 연구하는 학회다.

송 교수는 징비록에 담긴 ‘서애 정신’을 강조하면서 말을 맺었다.


“징비(懲毖)의 주체는 나다.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않는다. “징(懲)은 내 책임을 깨닫고 뉘우쳐 나를 철저히 징계한다는 것이다.” “비(毖)는 또 다른 실패나 파탄이 일어나지 않도록 경계하고 준비해서 새로운 내일을 만들어 간다는 것이다.”

비가 가장 경계하는 것이 과거지향이다. 임진왜란은 새 정권이 들어서면 전 정권 사람들을 어김없이 감옥에 보내는 처절한 당파싸움에 매몰돼 미래를 망각함으로써 초래된 비극이었다.

*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징비(懲毖) ; 이전의 잘못을 뉘우치고 삼감
- 혼날 징(懲)
1. 혼나다, 2. 혼내다, 3. 징계, 4. 그치다, 5. 혼이 나서 잘못을 뉘우치거나 고침

- 삼갈 비(毖)
1. 삼가다, 2. 고달프다, 3. 샘이 좁은 틈새로 흘러 내리는 모양, 4. 잘못이 없도록 긴장함, 5. 위로하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한자의 파자(跛者) - 聖誕, 福,



성탄(聖誕) :

성인 성, 성스러울 성(聖), 낳을 탄, 태어날 탄(誕)
- 성(聖) / 귀 이(耳) + 입 구(口) + 임금 왕(王) 또는 북방 임(壬), 천간 임 

임금님처럼 듣고 말한다.
북방 임(크다, 성대하다) 크게 듣고 크게 말하다

聖자는 ‘성인’이나 ‘임금’, ‘거룩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聖자는 耳(귀 이)자와 口(입 구)자, 壬(천간 임)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聖자는 본래 ‘총명한 사람’을 뜻하기 위해 만든 글자였다.
聖자의 갑골문을 보면 큰 귀를 가진 사람 옆에 口자가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누군가의 말을 귀 기울여 듣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聖자는 타인의 말에도 귀를 기울일 줄 아는 ‘현명한 사람’이나 ‘총명한 사람’을 뜻했었다.
하지만 후에 뜻이 확대되면서 지금은 ‘성인’이나 ‘거룩하다’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壬자는 ‘북방’이나 ‘천간’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壬자는 士(선비 사)자가 부수로 지정되어 있지만 ‘선비’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왜냐하면, 士자와는 기원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壬자의 기원에 대한 해석도 제각각이다.
일부에서는 실을 엮던 도구로 보기도 하고 또 다른 해석에서는 북쪽에 있는 별과 땅을 연결한 모습이라고도 한다.
壬자에 ‘북방’이라는 뜻이 있으니 그런 해석도 가능하리라 본다.

또 壬자를 工(장인 공)자와 같은 자였던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당시의 工자()는 壬자와( ) 달랐기 때문에 같은 글자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러나 이런 논쟁이 무의미한 것은 지금의 壬자는 유래와는 상관없이 천간(天干)의 아홉 번째라는 뜻으로만 쓰이고 있다는 것이다.
또 때로는 다른 글자와 결합해 ‘사람’과 관계된 뜻을 전달하기도 한다.

타인의 말에도 귀를 기울일 줄 아는 현명한 사람 또는 총명한 사람

탄(誕) / 말씀 언(言) + 길 연, 늘일 연(延)
  말을 널리 늘이는 것(세상에 말을 널리 알리는 것)

誕자는 ‘태어나다’나 ‘거짓’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誕자는 言(말씀 언)자와 延(끌 연)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延자는 발을 길게 늘여 걷는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늘이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誕자는 이렇게 ‘늘이다’라는 뜻을 가진 延자와 言자가 결합한 것으로 ‘말을 길게 늘이다’라는 뜻으로 만들어졌다.

誕자에서 말하는 ‘말을 길게 늘이다’라는 것은 남을 속이기 위해 이리저리 말을 늘여놓는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誕자는 본래 ‘거짓’을 뜻했지만, 후에 ‘말을 만든다’라는 뜻이 확대되면서 ‘태어나다’라는 뜻도 갖게 되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福 - 복 복, 간직할 부


'시(示)'와 '복畐'의 회의문자(會意文字)
이다. '시'는 하늘[天]이 사람에게 내려서 나타낸다는 신의(神意)의 상형문자이고, '복'은 복부가 불러 오른 단지의 상형문자라 한다.

해가 바뀌면 가장 많이 쓰는 인사말이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이다.
현대인들이 가장 많이 쓰는 행복(幸福)에도 복 복(福)자가 들어있다. 복이라는 글자의 자원이 궁금하다. 부수자는 제사의 뜻을 가진 보일 시(示)인데, 음식과 술을 잘 차리고(豊) 제사를 지내면 ‘하늘로부터 복을 받는다’를 뜻하는 글자이다. ‘상서(祥瑞)롭다. (복을)내리다. 돕다’ 등의 뜻이 있으며 제사 후에 술이나 음식을 먹는 것을 음복(飮福)이라 한다.
‘간직하다. 모으다. 저장하다’의 뜻으로 쓸 때는 (부)로 발음하는 회의자인데, 형성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 아주 좋은 운수나 큰 행운 등 삶에서 누리는 운 좋은 현상과 그것에서 얻어지는 기쁨과 즐거움을 복이라 한다. 복자를 파자하면 示, 一, 口, 田이 되는데 그 뜻을 풀이하면 “한입으로 밭을 가꾸는 것이다”라는 풀이도 있다. 복은 인간의 염원 속에 성숙하는 것으로 스스로 지어서 스스로 받는 것이지 누가 주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한다. 제비를 뽑아서 맞으면 일정한 상금을 타게 되는 표를 복권(福券)이라하고, 행복과 이익을 복리(福利), 또는 국가를 이룩하려고 추진되는 모든 사업을 복지(福祉)라 한다. 복이 많은 사람을 복인(福人)이라 하고, 돈을 많이 가진 승려를 복승(福僧)이라 한다. 타고난 복과 후한 마음을 복덕(福德)이라 하고, 행복이 많은 집안으로 풍수설에서 지덕(地德)이 좋은 터에 지은 집을 복가(福家)라 한다. 집이나 토지 등을 팔고 사는 일을 하는 곳을 복덕방(福德房)이라 하였으며, 길한 별이란 뜻으로'목성(木星)'을 일컫는 말로 복덕성(福德星)이라 한다. 복스럽게 생긴 얼굴을 복상(福相)이라 하고, 매우 반갑고 기쁜 소식을 복음(福音)이라 한다. 지나친 행복은 도리어 재앙의 원인이 됨을 복과화생(福過禍生)이라 하고, 복은 거듭 오지 않으며 한꺼번에 둘씩 오지도 않음을 복무쌍지(福無雙至), 복불중지(福不重至)라 한다. 복은 착한 일에서 오는 것이니, 착한 일을 하면 경사가 옴을 복연선경(福緣善慶)이라 하고, 福은 재물이 아니라, 사람을 키우는 데 있다는 뜻을 나타내는 뜻으로 복재양인(福在養人)이 있다. 착한 사람에게는 복이 오고 못된 사람에게는 재앙이 온다는 복선화음(福善禍淫)과, 복덕의 인(因)으로 말미암아 복덕의 과보를 얻는 다는 복인복과(福因福果)도 있다.



문에『福(복)』자를 거꾸로 붙이는 이유는?
경사스러운 날의 분위기를 부각시키기 위한 하나의 방법
시티뉴스


 중국의 일반 가정집을 방문할 때마다 제일 먼저 마주치는 것이 문에 붙어 있는 붉은 색의 많은 한문 글귀 이다. 그 글귀 중에는 집안의 행복을 비는 내용과 돈을 많이 벌게 해달라고 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그런데 아주 난처한 것은 “福(복)”이라는 글자를 커다란 붉은 색 종이에 써서는 거꾸로 붙여 놓은 것을 발견할 때다. 처음 보았을 때는 ‘아니 글자를 잘못 붙여 놓았잖아.’하고 집주인을 속으로 나무라기도 했다. 그런데 그 내력을 알고 나서는 다른 나라 문화를, 특히 중국문화 속의 한자가 가지고 있는 깊은 의미를 알고는 內心(내심)으로 歎服(탄복)한 기억이 있다.
 
  연말연시가 되면 중국인들은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의미로, 전통적인 풍습에 따라 대문에다 아주 커다란 “福(복)”字(자)가 써 붙이는데, 그것은 경사스러운 날의 분위기를 부각시키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가정에서 “福”자를 써서는 바르게 붙이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붙이는 데, “후다오러(福到了:복이 들어온다)”라는 덕담을, 한자가 가지고 있는 同音(동음)의 원리를 借用(차용)해서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     © 시티뉴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러한 방법의 기원은 淸(청)나라 때의 恭親王府(공친왕부)에서 처음 유래되었다고 한다. 어느 해 설 전날 저녁이었다. 집안을 관리하는 집사가 주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아주 커다랗게 “福”자를 써서는 王府(왕부)의 곳곳에 있는 대문에다 붙이도록 하인들에게 분부하였다. 그런데 어떤 하인은 一字(일자) 無識(무식)이어서 그만 “福”자를 거꾸로 붙이고 말았다. 공교롭게도 이 때에 공친왕이 막 들어서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거꾸로 붙여 놓은 “福”자를 보고는 매우 화가 나서 그 종놈에게 매우 준엄한 벌을 내리려고 하였다. 이것을 보고 놀란 것은 집사도 마찬가지 였다. 왜냐하면 이 일에 자기가 연루되면 자기도 벌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가슴을 졸이며 戰戰兢兢(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궁하면 통한다더니, 별안간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서 공친왕 앞에 무릎을 꿇고는 다음과 같이 해명하였다.
 
  “福자를 거꾸로 붙인 것은 倒(도)와 到(도)가 음이 같아서 ‘복이 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크게 길하고 크게 이롭다는 징조 입니다.”
 
 말을 다 듣고 난 공친왕은 노여움을 풀고 오히려 기뻐하면서, 이 종놈에게 다시는 죄를 묻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를 비롯한 집사에게 열 냥이나 되는 銀(은)을 상으로 내려 주었다.
 
 이러한 일이 민간에 전해진 후에 사람들은 “福”자를 크게 써서는 일부러 거꾸로 붙여서 복이 들어오기를 기원하게 되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이제는 이러한 행위가 하나의 풍습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일전에 공영방송 텔레비전 퀴즈프로에 이에 대한 문제가 출제된 적이 있었다. 그때 사회자의 설명이 ‘福(복)자의 음과 박쥐를 뜻하는 蝠(복)자의 음이 같아서, 복이 들오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염원이, 박쥐가 거꾸로 매달려 있는 것과 같이 福(복)자도 거꾸로 붙였다’는 설명을 하는 것을 보고는 啞然失色(아연실색)한 기억이 난다. 故事(고사)를 잘못 알고 잘못된 설명을 한 것이다.
 




順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