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닫다(수니에미) συνίημι(마 16:12), 기노스코(γινώσκω) 행 8:30 / 성경공부 인도자를 위한 바른 성경 해석의 원칙들


가끔 성경을 읽은 후에 또는 설교를 듣고 "깨달았다!" 라고 말하는 경우에 과연 무엇을 깨달은 것일까?
많은 회의를 갖게 합니다.
왜냐하면 깨달았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예전의 행동과 언어와 습관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을 목격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적인 깨달음에 대해 묵상하는 동기가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16:12
그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 깨달으니라.

* συνίημι  4920

1. 깨닫다,  2. 이해하다,  3. 통찰하다

발음 / 수니에미(süniēmi) 
어원 / 미래 συνησω, 제1부정과거 συνῆ- κα, 제1부정과거 가정법 συνῆτε, συ- νῶσιν, 제2부정과거 명령 2인칭복수 σύνετε,
4862와 ἵημι ‘보내다’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깨닫다(마 13:13, 막 4:12, 롬 3:11), 이해하다(엡 5:17), 지혜가 있다(고후 10:12)
신약 성경 / 26회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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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 인도자를 위한 바른 성경 해석의 원칙들

성경이 우리에게 주어지기까지

성경 66권 중 구약의 39권은 그리스도시대 이전에 유대인들이 성경으로 확인(確因)한 것으로 대부분 히브리어(Hebrew Language)로 쓰였다. 구약 원문(原文)은 히브리어로 기록되었고 극히 일부분만이 아람어(Aramaic language)로 기록되었다. 또 신약 27권 중 21권은 그리스도의 부활 승천 후 ‘사도들이 쓴 편지’(The Apostles’ Letter)로 당대의 공용어(公用語) 중 하나인 헬라어(Greek language)로 기록됐다.  

구약은 모세를 비롯한 약 30명의 성경 기자가 ‘성령의 감동’을 받아 기록했고 신약은 약 10명의 기자가 기록했다. 성경의 원저자(原著者)이신 하나님은 다윗과 같은 왕으로부터 정치가, 정부 관리, 군대 장관, 제사장, 학자, 의사, 농부와 목자, 베드로 같은 보통 어부 출신들까지 각양각색(各樣各色)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사용하셨다.

이 같은 성경의 신비(神祕)는 66권이 ‘시대’와 ‘저자’와 ‘양식’(樣式)이 다른데도 그 내용은 완전 하나로 통일성(統一性)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성경의 원저자(原著者)가 한 분 하나님이심을 성경이 스스로 증거 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성경은 어떤 사람의 의도(意圖)나 고안(考案)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확실히 나타내 주고 있다. 성경은 영원히 변함없으신 하나님의 뜻과 계시(啓示)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성경 기록 연대(年代)는 구약이 기원전 1500년경부터 400년경까지 약 1100년에 걸쳐서 기록되었고, 신약은 기원후 50년경부터 100년경까지 약 50년에 걸쳐서 기록되었다. 그리하여 구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가 기록된 때로부터 신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이 기록되기까지는 약 1600년의 긴 기간이 걸렸다.

 성경 기록을 위해 하나님께서 긴 세월을 거치고 40여 명의 저자와 3대륙의 기록 장소들을 사용하신 목적은 모든 세대와 모든 시대의 환경을 초월해서 적용될 초세대적(超世代的), 초지역적(超地域的)인 말씀이 되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있었다. 그동안 성경 내의 수천 가지 예언이 정확히 이루어졌고 나머지도 장차 이루어질 것이다. (32,500여 약속, 초림 456번, 재림 1518번 예언) 그러므로 온 세상 책 중 성경만이 지상의 유일한 절대(絶對) 진리임을 나타내신 것이다.

성경 번역 약사(略史)

성경 번역은 애굽의 프톨레미 필라델푸스 왕(Ptolemy II Philadelphus, BC 309-246) 때 왕실의 도서관장 데메트리우스(Demetrius)가 헬라어로 번역된 유대인들의 율법이 별로 없다는 보고를 하자 구약을 헬라어로 번역하라는 지시를 내림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헬라어를 사용하는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의 유대인들은 히브리어를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구약 성경의 헬라어 번역은 유대인들에게 중요한 일이었다.

그래서 유대인 12지파에서 각 지파대로 6명의 랍비가 대표로 선출되어 모두 72명이 이집트의 수도 알렉산드리아로 모여 히브리어 두루마리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했다. 이렇게 번역된 이 최초의 번역 성경을 ‘70인경’(七十人經, Septuagint, LXX, Greek Old Testament)이라고 한다.

그러나 아이러니(irony)한 건 유대인 학자들이 심혈을 다해 구약 성경을 번역해놓고 보니 ‘70인경’이 그들이 싫어하는 기독교인에게 좋은 번역 성경이 되어 오히려 기독교인들에게 외경(外經, Apocrypha)을 외의 적극적으로 환영받는 책이 되었다. 그리고 주전 90년 유대인 랍비들은 ‘얌니아회의’(Council of Jamnia, BC 90)에서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구약 39권을 정경(正經,  Canon)으로 확인했다.    

이 ‘70인경’의 언어와 메시지가 초기 기독교에 큰 영향을 끼치고 기독교 내로 헬라문화가 들어오는 통로가 된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사도들을 비롯한 초기 기독교인들은 이 ‘70인경’을 주로 사용했고 그 결과로 그들의 구약 인용(引用)은 대부분이 ‘70인경’에서 왔다. 결과적으로 ‘70인경’이 기독교 부흥에 크게 공헌하는 기독교인의 성경이 되고 말았으니 유대교 입장에서는 기막힌 일인 된 것이다. 그렇게 되니까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번역한 이 ‘70인경’을 버렸다.

다른 한편 신약성경은 주 후 397년 제3차 카르타고공의회(The Third Council of Carthage, 397)에서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신약 27권을 정경으로 확인했다. 오늘날까지 성경은 계속 각 종족의 언어들로 번역 중인데 세계성서공회연합회(United Bible Societies, UBS)의 2011년의 발표에 따르면 전 세계 인구가 사용하는 언어는 6,600개이다. 그중 구약과 신약이 모두 번역된 언어는 500개 미만이고 쪽 복음이라도 번역된 언어는 2,527개 언어이다.

성경은 영적 계기판(計器板)을 바로 보는데 필요한 몇 가지 원칙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이 원칙들은 성경 해석(解釋)과 이해(理解)에 필요한 기본원칙이다. 우리가 전자제품을 사면 따라 오는 사용설명서와 같다. 귀찮다고 설명서를 무시하고 마음대로 작동하면 제품의 기능을 다 사용할 수 없거나 아예 망가뜨리게 되는 것처럼 딱딱한 내용이지만 기본원칙이기에 익숙해질 때까지 따라야 유익하다.

그런데 기독교 이단(異端)들도 성경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기본원칙 즉 말씀을 벗어나(고전 4:6) 교주(敎主)의 가르침을 주장하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그래서 이단(異端)이란 정통(正統)과 끝이 다르다는 뜻이다. 이제 그 원칙들을 차례로 설명하겠다.

 1. 경외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대하라.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하기에 인간의 반응은 부차적이며 종속적(從屬的)이다.
인간이 복을 받기 위해서, 어떤 문제해결을 위해서 예를 들면 병 낫거나 혹은 삶이 잘 풀리기 위해 혹은 능력 받고 축복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창조주요 구속(救贖) 주시며 통치자이신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이해하며 경외(敬畏)하고 순종이 따라야 할 것이다. 성경은 수용자(受用者)인 인간이 중심이 아니라 계시자(啓示者)이신 하나님이 중심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해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마음을 읽고 깨닫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것이 성경을 맛보아 아는 것이다.(시 34:8) 

순종하지 않는 성경 지식은 오히려 당신을 넘어지게 하는 독이 될 수도 있다. 이에 관해 한 예를 들면 예수께서 영생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하우테 데 에스틴 헤 아이오니오스 조에 히나 기노스코신 세 톤 모논 알레디논 데온 카이 혼 아페스테일라스 예순 크리스톤.
αυτη δε εστιν η αιωνιος ζωη ινα γινωσκωσιν σε τον μονον αληθινον θεον και ον απεστειλας ιησουν χριστον


헬라어에 ‘안다’는 말은 ‘오이다’(οiδα)와 ‘기노스코’(γινώσκω)가 있다.
‘오이다’는 이성적(理性的) 이해의 의미이다.
‘기노스코는’ 전인적(全人的) 경험과 영성으로 전 존재를 다 안다는 의미이다.

예로서 내가 뉴스를 통해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활동을 알지만(오이다),
‘기노스코’의미로는 그분과 나는 서로 모르는 관계인 것과 같다.

‘기노스코’에 상응하는 히브리어 ‘야다’(Yadah) 동사는 부부의 성적 연합을 의미한다.(창 4:1) 따라서 부부간에 서로 ‘안다’는 것은 육체적이고 심리적이고 영적인 연합을 말한다. 그러므로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하여 전 인격으로 연합하고 교제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개념이다. 즉 아는 것이 믿는 것이고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永生)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는 죽은 자요 살았으나 생명이 없는 자이고 하나님을 ‘아는 자’ 곧 하나님을 ‘믿는 자’는 영생을 소유한 사람이다. 죽어서만 영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시간이 영생의 시간이며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시간부터 영생이 천국까지 계속되는 것이며 천국에서도 영원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체험해서 영생을 얻고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선교하는 삶으로 살지 않으면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고 알아도 단지 지식일 뿐이다.

18세기 영적 대각성 운동을 이끈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는 디모데전서 1:17 말씀을 읽던 중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말씀을 강렬하게 체험했고 이 체험은 에드워즈 개인에게만 아니라 개 교회 그리고 전 사회를 진정한 부흥의 불길과 거룩한 개혁으로 이끌어갔으며 사회 구석까지 이른바 각성의 불길로 번졌고 윤리적 차원에서도 성결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한 사람의 하나님 임재(臨在) 체험은 세상과 역사를 바꾸는 불씨가 되었다.  

‘인간 중심’의 성경 이해는 종종 ‘하나님의 주권’을 인간의 선택(選擇)이나 수용(受容)에 좌우되는 것처럼 오해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선 인생은 처음부터 끝까지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바르게 듣고 이해하며 믿고 영광 돌리는 것이 성도의 마땅한 의무이다. 인간의 복과 보상과 대가를 먼저 생각하고 성경에 접근하는 것은 운동선수가 먼저 열심히 훈련해서 실력 쌓을 생각은 않고 시합 후 받을 상금부터 계산하는 것보다 더 잘못된 생각이다.

왕의 명령을 어명(御命)이라 했다. 어명이면 사약(死藥)이라도 받아먹고 죽어야 했다. 성경은 사람의 손으로 쓴 일반 책과 달리 전지전능하신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책이므로 하나님을 대하는 경건한 마음으로 읽고 배우고 따라야 한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고 공부할 때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 성경을 펼쳐야 한다.(신 31:9-13) 우리는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삼상 3:9) 사무엘처럼 말씀을 듣고 순종하기 위해 성경을 대해야 할 것이다.

2. 성경 저자의 기록 목적을 이해하라.

물을 담을 목적으로 만든 컵으로 전화를 하려고 하면 되지 않는 것처럼 성경도 성경을 기록한 목적대로 이해하고 읽어야 한다. 디모데후서 3:15-17에 성경 전체의 목적들을 명시하고 있다.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성경의 목적은 첫째, 성경을 통해 구원받고 둘째, 삶의 변화를 받아 셋째,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해 구원을 받았고 예수를 닮아가며 선한 일을 행하기 위해서 준비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선한 일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심판받아 지옥 갈 영혼을 예수께 인도하는 일이다. 이보다 더 급하고 중요한 일은 없다.(마 16:26) 

이상의 세 가지 ‘구원 얻는 생명 문제’, ‘구원받은 후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삶 문제’,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사명 문제’가 성경 이해의 기본(基本, basic)이다. 그러므로 이 같은 성경 이해의 기본을 놓치고 성경을 대하는 것은 알맹이를 놓치고 껍데기 붙잡는 우(愚)를 범하는 것이고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다.  

성경은 또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는 구속사(救贖史)이기에 이 같은 눈으로 성경을 보지 않으면 성경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즉 성경은 복음(예수 그리스도)을 증거 하는 선교의 책이다. 그래서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모든 성경에서 ‘선교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롬 16:25,26)  예수를 영접하고 구원받은 자는 누구나 하나님께 나아가 산 제사 드리는 예배자로 사는 것처럼 예수를 구주로 믿는 순간부터 누구나 만인의 제사장으로 영적 군사로 복음 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그리고 성경의 각 권마다 그 목적과 의도를 파악하고 누구를 대상으로 기록되었는지 바로 이해해야 한다.(요일 5:13) 예를 들면 열왕기나 역대기는 얼핏 보면 중복된 내용이 많아 필요 이상으로 역사서가 두꺼운 느낌이지만 역대기는 열왕기의 단순한 중복이 아니고 기술 관점(觀點)이 다른 것이다. 열왕기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선지자(先知者)의 관점에서 기록하고 있는 반면에 역대기는 제사장의 관점에서 기록하고 있다. 그리하여 열왕기에는 하나님의 공의와 성결로 인간의 죄악상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반면에 역대기는 인간의 패역(悖逆)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믿는 자를 구속하시는 구속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와 함께 성경을 읽는 가운데 결국 성경이 나를 연구하고 변화시키도록 말씀이 주인이 되도록 끊임없이 나를 부인하고 비워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과 행동을 다스릴 모든 원리를 성경에서 발견해야 한다.(살전 4:1-12, 5:12-22)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을 통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완전 무장을 할 수 있다.(시 19:7,8, 딤후 3:16,17) 하나님 말씀 자체에 힘과 생명력이 있기에 우리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 힘을 성경에서 얻어야 한다.  

  3. 성경을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이해하라.

성경 계시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과 인내심으로 마치 어머니가 어린아이에게 말과 걸음마를 가르치듯 그 진리의 뜻을 점진적(漸進的)으로 넓혀가고 있다. 예수를 증거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곧 하나님의 계시인데 하나님의 계시는 완전하나 인간의 인식 능력의 한계로 하나님은 그의 계시를 한 시대의 한 사람에게 전하지 않고 점진적 계시를 하셨다.

그러므로 성경 계시의 특성에는 내용의 통일성(統一性)과 함께 계시 전달 형식과 방법에는 계시의 점진성(漸進性)이 있다. 이는 마치 창세기라는 시발역(始發驛)으로부터 요한계시록이라는 종착역(終着驛)까지 놓여있는 선로(線路)와 같다. 그러므로 성경은 나눌 수도 없고 한 권이라도 떼어놓을 수도 없다. 우리가 66권의 성경 전체의 핵심을 잘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뼈대 있는 신앙이 되어서 견고하게 설 수가 있는 것이다.

성경의 원저자(原著者)는 하나님이시다. 또 그분은 성경 안의 모든 사건과 역사의 주관자(主管者)이시고 집행자(執行者)이시다. 그러므로 그분의 성품(性稟)을 잘 이해하는 것이 성경 각 권을 이해하는데 지름길이다. 왜냐면 그분의 성품과 뜻과 권세와 영광은 영원히 변치 않기 때문이다.(약 1:17) 구약 노아시대 때 물로 심판하신 하나님은 신약시대 현장에 간음한 여인을 정죄하지 않으신 그 예수님과 똑같으신 분이시다.

그런데 우리가 구약의 하나님은 무서운 하나님으로 느껴지고 신약의 예수님은 한없이 자비로우신 하나님으로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계시의 시간의 차이 때문이다. 구약은 계시의 실체인 예수 그리스도와 눈에 보이지 않은 형이상학적인 진리를 모형으로 보여주는 계시 방법이 필요한 시대여서 우상숭배라는 죄의 삯은 사망임을 보여주기 위해 돌로 쳐 죽이는 것이다.(레 20:2) 그리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은 장수, 건강, 부귀, 자손의 번영 등으로(신 28장) 눈에 보이게 계시하셨다.

그러나 계시의 실체인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육신을 입고 오셔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성도의 내세 존재를 분명히 계시하셨기에 그 후로는 복음을 위해 바울처럼 처자식 없고 핍박받고 순교 당하는 것까지 영원한 축복과 면류관으로 드러내신 것이다.(딤후4:8) 

성경을 처음 대하는 초신자들이 구약을 읽을 때 어려워하고 “이스라엘 역사 이야기가 지금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고 하며 구약을 이스라엘 역사 이야기로 간주하여 멀리한다. 하나님은 구약과 신약을 합쳐 한 권의 성경을 우리에게 주셨다. 하나님은 원래 언어가 필요 없으신 분이시다. 그러나 인간들이 알아볼 수 있는 문자가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계시할 수 없다.  

그리고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이 왕 되신 신정국가(神政國家)의 본이 되어 만방에 복음을 전파할 목적으로 한 민족을 먼저 택하셨다.(출19:5,6) 그 민족이 이스라엘 백성이고 성경의 저자이신 하나님은 그 민족이 사용하는 언어를 사용하여 구약을 기록하게 하셨다.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실 때 당신의 형상으로 지었기에 인간의 인격을 존중하신다. 그래서 인간과 대화하시며 그분의 뜻을 계시하셨다.

성경의 주류(主流)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역사의 흐름이다. 구약은 오실 메시아를 예언적이고 예표적으로 내다보았고 신약은 구약의 예언대로 오신 메시아를 증거 하고 있다. 그러므로 항상 예수님이 역사의 중심인 동시에 성경의 중심이다. 그는 하나님 자신이시고 또 계시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라고 말씀하셨다.(요 5:39) 

이렇게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성경을 이해한다는 것은 또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 전체를 염두에 두고 이해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어린양이 되신 메시아로서의 고난의 주도 보아야 하지만 우리를 날마다 승리하게 하시는 우리와 함께하시는 위대하신 능력의 임마누엘 되신 하나님으로 그리고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실 왕으로서의 메시아도 동시에 믿음으로 보아야 한다.

구속(救贖)이 성경의 중요한 대 주제임이 분명하나 그것이 모든 것을 다 포괄하는 주제는 아니다. 모든 것을 포괄하는 주제는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영광’이다. 하나님의 영광 안에 구속도 포함되고 대계명(The Great Commandment), 대사명(The Great Commission), 천사와 사탄에 대한 계획, 천년왕국에 대한 계획, 심판과 지옥,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계획도 모두 포함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성경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적으로 계시하기에 해석도 또한 그리스도 중심으로 해야 한다.

구약은 율법을 통하여 만왕의 왕(King of Kings)이 오셔야 할 필요성을 말하며 계속해서 “왕이 오신다!”고 증거 했고 신약은 복음으로 왕이 오심으로 이루어진 소식 “왕이 오셨다!”(마 1:1) 그리고 “왕이 다시 오신다!”(계 22:20)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初臨) 사역(구원)에 근거하여 재림(再臨) 약속(완성)을 기다리며 말씀을 지키며 살도록 하셨다. 또 우리는 왕의 명령인 대사명(선교)을 준행하는 왕의 증인이 되어 왕과 함께 왕의 나라를 확장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경의 진리는 하나이다. 우리가 다시 오실 주님을 대망하고 믿는 것처럼 구약은 메시아로 오실 주님의 그림자(예표)를 보고 믿었다. 구약의 성도들은 보지 못한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았고(요 8:56) 우리도 보지 못한 오신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았다. 도마는 보고 믿었으나 우리는 보지 않고도 믿으니 도마보다 더 복된 자들이다.(요 20:29) 

구약과 신약은 사람이 구분한 것이지 그 내용은 연속적(連續的)이며 그리스도로 일관되어있다. 구약의 성도가 믿었던 구세주 메시아를 우리는 지금 믿고 있고 또 그들이 대망(大望)한 재림의 주(主)를 우리도 믿고 전파하면서 기다리고 있다.(유 1:15,16, 요 8:56, 시 22-24편 참고)

4. 성경으로 성경을 이해하라.

하나님은 위대한 설계자시며 창조자로서 다양한 재료들로 성경이란 웅장한 건물을 지으셨다. 따라서 성경의 각 부분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성경의 한 부분을 볼 때 동시에 다른 부분과의 연결 속에서 보아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해야 한다. 성경 각 부분의 유기적(有機的) 통일성은 신약과 구약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씨가 자라서 떡잎을 나고 줄기와 가지와 잎이 생긴 다음 꽃을 피우고 마침내는 열매를 맺는 것처럼 신구약 말씀은 전자제품의 기술이 개발되고 신기술이 개발되면 과거의 제품은 생산하지 않은 그런 발전이 아니라 유기적 생명체로서의 진전인 것이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 1:1,2)

이처럼 성경 전체적으로 알지 못하면 마치 장님이 코끼리 발목 잡고 발목을 코끼리로 생각하는 것과 같은 오류(誤謬)를 범할 수 있다. 우리 몸 각 부분이 한 몸을 이루듯 성경 각 권이 한 성경을 이루기에 성경 전체의 맥락 속에서 각 권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면 해석이 되어야 할 본문을 어떻게 하면 전체의 구조 속에서 파악할 수 있는가?  

먼저 평행구조와 내용을 찾아야 한다. 예를 들면 히브리서 7:20의 “또 예수께서 제사장 된 것은 맹세 없이 된 것이 아니니”라는 이 말씀에서 멜기세덱에 관한 이해는 그 평행구조의 창세기 14장과 시편 110:4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班次)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에서 찾을 수 있다.

많은 성경 구절이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그렇게 어려운 성경 말씀을 성경의 다른 구절이 설명해줌으로써 명확해진다. 이같이 성경은 그 자체가 가장 훌륭한 해석자가 된다. 성경은 많은 주제에 대해 한 문장 이상으로 설명하고 있다. 때때로 성경은 한 주제에 대해 어느 부분에서는 간략히 다루며 또 다른 부분에서는 길게 다루기도 한다.

그러므로 성경 전체의 맥락 속에서 성경의 각 본문을 풀어야 한다. 성경의 해석은 성경 안에 들어있다. 마태복음 7:21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라고 한 이 말씀을 생각할 때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갖춘 사람은 아무도 없다.(갈 2:16) 그 이유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그 해답은 성경 안에 있다. 요한복음 6:39,40에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라고 했다. 마태복음 7:21에 말씀하신 하나님의 뜻이 요한복음 6:39,40에 보면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 얻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이처럼 성경이 스스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성경 전체 내용을 알아야 하고 성경 전체의 맥을 보는 눈을 가져야 한다. 한 국가의 모든 법의 정신과 기초가 헌법에 있고 헌법은 모든 다른 법의 상위(上位)에 있음과 같이 전체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性稟)과 그분만의 영원한 자연적인 속성(屬性)은 모든 성경 해석의 헌법(憲法)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신 속성에 근거하여 선악과를 에덴동산에 두신 것은 인간을 향한 선하신 동기임을 믿는다. 왜냐면 우리가 죄인으로 있을 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아낌없이 주신 선하신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모든 계획과 행하심은 그의 속성상 항상 선하시다. 왜냐면 그분은 원래부터 영원히 선하신 분이신 것이 전체 성경을 통해 알게 된 하나님의 한 성품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에 하나님이 선악과(善惡果)를 두신 이유가 자세히 서술되어 있지 않았을지라도 그분의 성품을 믿음으로 그 성품 안에서 우리는 자유 하며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성경 66권을 부지런히 읽고 66권 전체에서 현현(顯現)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인격으로 만나야 한다. 편식(偏食)하면 우리 몸이 건강할 수 없듯이 성경을 편식하면 우리의 신앙이 건강하게 성장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가 그분의 성경에 연구되고 변화 받아야 한다.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형상을 닮아가야 한다.

고린도전서 2:12,13에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 선언하신 문맥의 원리를 보여준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이것은 성경을 이해하는 방법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이다. 성경을 설명하는 데는 오직 한 가지 방식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곧 성경으로 성경을 설명하는 방식인 것이다. 성경의 조명은 성경 자체를 통하여 온다. 그것이 바로 문맥 원리의 원칙이고 가치인 것이다.

문맥(文脈)에는 가까운 근접문맥(近接文脈, immediate context)과 먼 거리의 원접문맥(遠接文脈, remote context)이 있다. 근접문맥은 가까이 접해있는 단어들과 문장들로 구성된 한 두 개의 문단의 흐름이다. 흔하게 드는 예로 ‘GODISNOW-HERE’를 말할 수 있다.(‘아버지가방에들어가신다.’와 같은 말) 이 문장은 문맥에 따라 ‘God is now here’(하나님은 지금 여기에 계신다.)도 될 수 있고 ‘God is nowhere’(하나님은 아무 데도 없다.)가 될 수 있다.

이같이 한 문장이 문맥의 해석방법의 차이로 무신론(無神論)과 유신론(有神論)으로 갈리는 하늘과 땅 차이를 가져오기도 한다. 그러므로 올바른 성경 해석에 있어 상하 문맥을 이해하는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문맥은 단순히 의미를 이해하는 데 도움 되는 정도가 아니라 사실상 의미를 만들어 낸다.

원접문맥은 그보다 멀리 연결되는 문맥으로 책 전체나 한 저자의 여러 책이나 제일 크게는 성경 전체의 흐름이다. 원접문맥을 파악하는 방법의 예를 들면 빌립보서의 한 구절을 이해하려고 하면 먼저 빌립보서의 저자인 바울이 어디에서(어떤 상황에서) 어떤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썼는가를 생각하면서 전체의 대의를 파악해야 한다.

사실상 우리가 현재 보고 있는 성경의 장(章), 절(節) 구별은 원래부터 그렇게 되어 있던 게 아니라 사람이 구분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의 장(章), 절(節)을 넘어서 ‘문맥의 원리’로 문장의 상하를 잘 살펴 해석하고 이해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성경 해석의 우선순위를 따른다. ‘성경 전체의 대의’(大意) —> ‘성경 각 권의 대의’(大意) —> ‘각 장의 대의’(大意) —> ‘각 절의 의미’(意味) —> ‘각 단어의 뜻’ 순서다. 참고 : 최초 성경 전체를 1,189장으로 나눈 사람은 스티븐 랭톤(Stephen Lengton, 1150-1228), 1553년 최초 성경 전체를 31,163절로 나눈 사람은 인쇄업자 스테파누스(Robert Stephanus 일명 Robert Estienne, 1503-1559)이다.

5. 성경 본문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라.

모든 언어는 크게 두 가지 표현방식이 있는데 ‘문자적’(文子的) 표현과 ‘수사적’(修辭的) 표현이다. 이중 일차적인 표현이 ‘문자적’ 표현이다. 우리는 누구와 대화 할 때나 글을 읽을 때 문자적인 해석으로 이해가 될 때까지 먼저 문자적으로 이해한다. 여기에는 다음 두 가지 원칙이 문자적인 해석과 이해가 필요하다.

(1) 인간의 언어 관습이 문자적인 해석을 요구한다.

두 사람이 대화할 때 그 대화를 서로 이해하려면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약속한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한 사람이 ‘빵’을 말할 때 상대방도 먹는 ‘빵’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럴 때 피차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병원에서 의사가 환자를 진단한 후 X-Ray 사진 등을 보여주며 “폐암이니 빨리 입원하고 수술 준비하십시오.”라고 말했는데 듣는 사람이 폐암을 폐암으로 알아듣지 않고 수사적인 표현 즉 “감기 기침을 저런 식으로 표현을 했겠지…”하고 자기 임의대로 해석하여 이해한다면 이 환자는 앞으로 어떻게 되겠는가?

(2) 성경 목적이 문자적인 해석을 요구한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계시인 성경을 인간에게 주신 이유는 인간이 그 계시를 읽고 이해해서 구원받고 구원받은 후 변화 받아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예수를 증거 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누구나 관심을 가지고 성경을 읽는 사람은 그 읽는 성경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성경에 부분적으로 사용된 수사적(修辭的) 표현도 신비(神祕)를 추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성경 독자로 이해를 돕기 위한 목적에 있다.

또 성경의 예언(豫言)은 성취의 시간을 체계적으로 분류하여 기록해 놓은 것이 아니라 미래의 여러 가지 사건을 함께 취급하고 있기에 어느 예언이 어느 시대를 가리키는지에 유의하지 않으면 혼란에 빠질 수도 있다. 예를 들면 바벨론 포로, 주의 날과 연관된 사건들, 바벨론에서 귀환, 이스라엘의 흩어짐과 회복 등이 시간과 장소 구별 없이 성경에는 섞여져 있다.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이 특히 많은 혼동을 하게 한다. 오늘날의 우리가 볼 때 2,000년 이상의 간격(間隔, gap)이 있는 사건이 성경에는 동시에 언급되어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이사야 61:1,2 말씀을 주님께서는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 하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라고 누가복음 4:18,19에 인용하고 계신 데 두 곳을 비교해보면 주님이 이사야 61:2의 첫 부분에서 인용을 생략하고 계신 것을 보게 된다. 그 이유는 2절의 첫 부분까지는 주님의 초림 때 그리고 그 이하는 주님의 재림 때 성취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는 달리 이사야 61:1 이하에서는 시간의 차가 없이 함께 예언하고 있으나 주님은 2절 상반 절까지와 그 이하 사이에는 상당한 시차가 있음을 인정하고 계신 것이다.  

그리고 율법은 율법의 실체이신 예수님이 오심으로 폐하여진 내용이 있다.(히 10:9) ‘온전한 것이 올 때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기’ 때문이다.(고전 13:10) 영화 예고편은 본 영화가 나오기 전까지 광고용이다. 본 영화가 상영되기 시작하면 예고편은 폐기되는 것처럼 구약의 복잡한 여러 가지 제사(祭祀)들을 지금은 마땅히 폐하여야 할 예고편과 같은 것들인데 오늘날도 유월절을 고집하는 어리석은 이단도 적지 않다. 이와 달리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율법은 오늘날도 계속 지켜야 할 계명이다.(레 19:18, 마 5:17) 

또 구약의 결론은 오실 메시아의 예언으로 끝나지 않는다. 오신 메시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승천하신 주님이 보내사 우리 안에 임하실 성령 하나님을 증거 하고 있다.(렘 36:26,27, 욜 2:28,29) 그리고 성령님이 우리 안에 충만히 임하시면 우리가 비로소 주의 말씀을 온전히 순종하며 살게 된다는 것이다.

또 성결(聖潔)의 소극적인 개념은 죄를 범하지 않는 것이고 적극적인 개념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하나님의 성결 명령은 모든 시대의 도덕률의 표준이다. 그러므로 구약의 십계명은 신약의 예표가 아니고 영원한 도덕률의 규범이기에 신약의 성도들도 준수하여야 할 주의 명령이다.(참고, 마 22:34-40) 이러한 중요한 계명들은 문자 그대로 받으면 된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 충만 받아 성령님에 취하여 살 때 성결한 삶 곧 계명을 지키는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예수님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해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셨고 그래서 아버지의 뜻대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셨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본을 보이신 예수님 삶을 본받아(롬 8:29)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제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마 16:24) 예수님의 대속(代贖)의 죽음과 부활 승천 후 약속하신 대로(요 16:7) 성령님을 이 땅에 보내심으로 오늘날의 교회가 탄생했고 모든 족속으로 제자 삼아 땅끝까지 나아가는 세계 선교사역이 현재 진행형으로 계속되고 있음을 신약은 보여주고 있다.

 6. 성경 배경을 참고하여 성경을 이해하라.

성경은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3개 대륙에 걸쳐 3개의 상이(相異)한 언어로 상이한 배경에서 약 1,500년 간의 긴 세월에 걸쳐서 기록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그 당시 생활을 자세히 바르게 이해하는 게 바른 성경 해석에 아주 중요하다. 그러므로 성경 기록 당시의 역사, 지리, 정치, 종교, 경제, 풍습, 문화 등으로 돌아가야 한다. 성경은 이같이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예기를 기록한 것이 아니라 인간 역사적 사람의 현장에 주어진 말씀이기 때문에 역사적 해석과 이해가 필요하다. 성경 배경을 연구한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1) 성경 그 자체에서 실제적 증거를 얻는다.

예로서 고린도서는 고린도 교회의 역사적 배경과 상황을 반영한 바울의 서신이다. 우리는 고린도 전후서를 자세히 관찰하면 고린도 교회 당시 상황을 알 수 있다.(고전 1:6,12, 2:1, 6:1,6, 7:1-24, 8장, 10장, 11:13, 12장-14장) 

창세기는 하나님의 창조와 모든 인류 역사의 기원을 기록함으로 이 창세기 역사적 배경에서 인류의 역사는 시작된다. 즉 성경 자체가 역사적 배경을 기초로 하나님의 뜻을 전한다. 그러므로 성경 자체가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는데 표준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관주(貫珠) 성경을 사용하는 것은 역사적 배경 자료를 얻는데 좋은 방법의 하나다.

(2) 해당 전문 자료들을 통해 증거를 얻는다.

또 역사, 지리, 문화, 사회 등을 다루는 신구약 성경 배경 역사서 성경 사전이나 백과사전, 지리서 등을 통해 성경의 역사적 배경 이해가 가능하다. 몇 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① 역사적 배경

말씀 뒤의 감추어진 역사를 이해함으로써 성경을 더욱 완전하게 이해하게 된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2장의 배경의 역사를 살펴보면 헤롯 대제(Herod the Great, B.C. 73-4)가 그의 학정 말기에 너무 불안해서 처남을 죽이고 두 아들을 죽이고 마지막에는 첫 부인과의 사이에 태어난 가장 총애하고 신임하던 맏아들까지 죽였다. 이런 상황에서 동방의 박사들이 나타나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하고 물었을 때 헤롯은 뒤통수를 맞는 듯했을 것이다. 이러한 당시 헤롯의 입장으로 돌아가 보면 마태복음 2장의 내용이 더욱 실감 나게 이해가 된다.

② 문화적 배경(사회, 정치, 풍습, 예술. 종교, 문학, 과학, 경제 등)

예를 들면 사도행전 3:1에 “제 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의 배경은 무엇인가? 유대인과 로마인은 시간관념의 차이가 있었다. 복음서에서 요한복음은 로마인 시간으로 기록했고 기타 공관 복음서는 유대인(일몰에서 다음 날 일몰까지)으로 기록한 것이다. 로마인 시간은 유대인 시간에 6시간을 더하면 된다.

그런데 유대인 남자들은 성인이 된 만 13세부터는 하루에 세 번 정해진 기도 시간을 꼭 지켜야만 했다. 오전 9시, 낮 12시, 오후 3시에는 반드시 하던 모든 일을 중단하고 기도드렸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 장애인을 고쳐 준 것도 바로 오후 3시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가던 시각이었다. 또 유대교의 예배와 관습은 초대 기독교회의 기초였다.

⓷ 자연환경의 배경

“오늘은 밀 베는 때가 아니냐? 내가 여호와께 아뢰리니 여호와께서 우뢰와 비를 보내사 너희가 왕을 구한 일 곧 여호와의 목전에 범한 죄악이 큼을 너희로 밝히 알게 하시리라.”(삼상 12:17) 사무엘은 밀 베는 때에 비가 내리기를 하나님께 기도하겠다고 말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4월 중순에 10월까지는 비가 오지 않는 것이 상례이다. 밀 베는 수확은 4월 중순에서 5월 중순까지였다. 따라서 사무엘의 말은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증거가 된다.

또 기본적인 신구약 성경 지도를 그릴 정도면 성경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주의할 점은 배경연구나 참고는 어디까지나 성경 이해의 보조수단이지 성경 평가의 수단이 아니다. 만일 성경과 어긋날 때는 성경의 기준으로 배경사(背景史)를 비판해야 한다. 신학은 성경을 이해하고 전파하는데 돕는 시녀와 종의 역할을 해야지 주객이 전도되면 안 된다.

⓸ 언어적 배경

히브리인들의 독특한 관용어(慣用語)나 성경 원어(原語)를 한국어로 번역하는데 언어의 차이를 살피는 것도 참고해야 한다. 예를 들면 헬라어에 사랑은 네 가지 종류의 표현 단어가 있는데 스톨게(storge)는 가족 친지 간, 동족 인연 같은 혈육의 사랑이다. 에로스(eros)는 남녀 간 좋아하는 육체적 사랑이다. 필레오(phileo)는 친구 간 우정이다. 아가페(agape) 무조건(無條件)의 천래적(天來的) 사랑이다.

요한복음 21장에 부활하신 예수께서 베드로를 찾아와 물으셨다. “네가 이 모든 사람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때 주님이 물으신 사랑은 아가페(Agape)였다. 주님의 물음에 베드로는 대답했다. “예, 주님 나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이때 베드로의 대답한 사랑은 필레오(Phileo)였다. 그는 감히 아가페(Agape)로 대답할 수 없었다. 한국어로는 모두 사랑으로 번역이 되었으나 이렇게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국 사람이 털이 검은 개 한 마리를 사서 ‘검둥이’라고 이름 짓고 부르면 우리는 그 이름의 뜻을 잘 알아도 한국어에 익숙지 않은 외국인은 우리가 느끼는 언어의 뉘앙스(nuance)를 느낄 수가 없다.

성경에 나오는 선지자들의 이름은 신기하게도 대게 그 선지자의 일생을 대변하거나 그를 통한 그 선지서의 주제를 담고 있다. 예를 들면 구약의 선지자 미가(מִיכָה, Micah)라는 이름의 뜻은 “누가 여호와와 같은가?”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미가서의 주제는 7:18의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이다. 그래서 선지자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그 선지자의 삶과 그 책의 핵심을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그리고 성경은 연대기적으로 편성된 것이 아니라 시가서(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등)는 시가서 대로 역사서는 역사서(사무엘상하, 열왕기상하, 역대기상하등) 는 역사대로 대로 문학적 양식에 따라 분류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느헤미야서나 말라기서는 배열이 같이 있지 않아 거리가 멀게 느껴지지만 거의 같은 시대에 벌어진 사건이다. 그러나 느헤미야서는 역사서 그룹에 말라기서는 선지서 그룹으로 분류했기에 배열상 거리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선지서도 분량에 따라 배열의 순위를 정하여 다니엘 이야기가 시기적으로 더 먼저 일어난 일인데 에스겔서가 분량이 많아 앞에 배치된 것이기에 각 성경의 시기를 이해하는 것도 본문을 깊이 이해하는 데 필요하다. 그래서 신구약 중간(中間)에 침묵 시대라고 하는 신구약 중간사(中間史) 공부도 신약 이해에 데 도움이 되는 것이다.

 7. 특별한 내용은 기도하며 이해하라.

하나님이 만물을 보존하시고 통치하실 때는 자연법칙(自然法則)을 사용하시지만 필요하신 때는 홍해를 가르시거나 태양을 멈추시던 것처럼 초자연적(超自然的) 일도 행하신다. 언어를 해석하는데도 일반원칙을 주로 사용하지만 특별한 형태의 언어는 특별한 해석 원칙을 적용해야 한다. “당신은 나의 충전기입니다.”라고 할 때 문자적 이해로는 그 의미 이해가 안 된다. 이것은 수사법(修辭法)을 사용한 표현으로 상대방이 말하는 자에게 큰 힘과 도움을 준다는 은유적(隱喩的) 표현이다.  

성경 해석에 있어 우리는 기본적으로 문자적(文子的) 표현법을 기초로 해석하고 이해하면서 문자적인 뜻으로는 일반해석 원칙상 해석이 불가능할 때는 이차적으로 수사적(修辭的) 표현법을 사용한 것으로 생각하여 그에 상응하는 특별 해석 원칙을 적용해야 한다.  

또 문장의 행간(行間)을 읽으라고 한다. 행간이란 문장(文章)의 행과 행 사이를 가리키는 말로 글에 직접 나타나 있지는 않으나 그 글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숨은 뜻을 깨달으라는 말이다. 우리가 행간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글이나 말속에는 단어나 문장만으로는 전하려는 뜻을 정확하게 나타내거나 다 전할 수 없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 또 우리 생활문화 속에는 구체적이거나 직접적인 표현이 아닌 완곡(婉曲)한 표현으로 뜻을 전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경의 진리는 너무 심오(深奧)해서 일반적 언어로는 표현이 어려운 경우 성경 안에도 비유법(比喩法)이 사용되었음을 알게 된다. 수사적(修辭的) 표현은 깊고 어려운 진리를 생생하고 또렷한 방법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머릿속에 어떤 이미지(image)를 제시해 준다. 또 각 표현법은 하나님의 뜻을 인간들에게 더 효과적으로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성경에는 약 200개 이상의 수사적 표현들이 있다.

그러므로 ‘문자적 표현’은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수사적 표현’은 수사적으로 해석해야 올바른 본뜻을 알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계속해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문자적 해석이 모순 또는 애매함을 가져오지 않는 한 단어들은 그들의 문자적 의미에서 이해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해석의 기본법칙이다.  

또 모형(模型, 예표, 유형, 표상)이란 하나님이 어떤 성경 진리의 예시(豫示)로 지정하신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신약성경 중 히브리서는 레위기의 해설서(解說書)라 할 수 있다.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히 8:5) 또는 ‘비유’라고 말씀하면서 “개혁(改革)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히 9:9,10) 그러므로 모형, 그림자, 비유 등을 해석할 때에 유의해야 할 점은 구약의 모든 것을 예표로 삼아 알레고리칼(allegorycal) 하게 이해하는 과장 해석이나 억지 해석을 피해야 하고 나타난 실체(實體) 즉 밝히 드러난 복음의 빛을 통해 해석하고 이해해야 한다는 점이다.

마치는 말

성경은 일반 책과 달리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계시의 말씀이다. 로마서 16:25,26에 복음을 감추어졌던 ‘비밀의 계시’라고 했다. ‘계시’(啓示, αποκαλυπσιζ)는 ‘감추인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의 눈을 열어주셔야만 보인다.(엡 1:18) 간절히 기도하며 읽으면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주시고 복음과 선교의 비밀을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성경 이해에도 성령님의 도움이 없이는 올바로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 뜻을 따르며 순종하는 자들(친구)에게 영적 계시를 보여주신다. 요한복음 15:14,15에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계명을 지키는 자가 주님의 친구라고 하셨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3:1,2에 바울이 말씀을 음식으로 비유하여 어린아이 같은 신앙의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훈계(訓戒)하며 어린애들에게 먹이는 젖으로 그들을 대했다고 했다. 영적 생명은 우리의 일생동안 자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양들은 일생동안 영의 양식을 먹어야 한다. 갓난아이가 처음에는 젖을 먹다가 나중에는 점점 단단한 음식을 먹을 수 있듯이 영의 양식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어린이도 하루아침에 다 자라나 어른이 된 자가 없듯이 영적 생명도 하루아침에 주의 진리를 더 깨달을 필요 없이 다 깨닫고 행하는 자가 없다.

이것은 우리 신앙 성장에는 시간이 필요함을 말한다. 어릴 때 부모 마음을 알지 못하다가 철들어서 부모 마음을 알고 나중에는 자신이 부모가 되어 진실로 부모의 마음을 잘 알게 되듯이 영적 생명도 성장 정도에 따라 주의 말씀이 깨달아진다. 하나님을 아는 분량이 장성한 자(엡 4:13, 고전 13:11,12)가 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히브리서 5:14에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고 했다.  

성경은 우리가 나의 것으로 삼은 영적 생명의 분량만큼 이해되고 순종할 수 있다. 우리가 주님을 닮는 것은 일생의 거룩한 목표요 추구이다. 아무리 성령 충만해도 우리의 몸이 부활하기 전까지는 여전히 하나님과 하늘에 속한 진리의 말씀을 청동거울을 보는 것처럼 이해에 한계가 있음을 바울도 고백했다.(고전 13:12) 

그러므로 성경의 깨달아지지 않는 부분은 겸손히 주 앞에 내려놓고 그의 도움을 기다려야지 억지로 풀려다가는 잘못되는 것이다.(벧후 3:16) 억지로 풀어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잘못보다 “잘 모르겠다.”고 하는 정직과 겸손이 우리를 얼마나 자유 하게 하는지 모른다.

주님이 언제 다시 재림하시는가는 아무도 모른다. 왜냐면 주께서 말씀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칼빈(John Calvin, 1509-1564)은 성경이 가는 데까지 가고 성경이 멈추는 데서 멈춘다고 했다. 이는 성경 해석에 정직하고 올바른 태도를 보여 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데는 성령님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므로 항상 다윗과 같은 기도가 필요하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시 119:18)(*) 글쓴 이 / 김다니엘 목사, 서울신대, 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Asian United Theological University, ACTS), 미국 Faith Theological Seminary(D.D), 선교사, SIM 국제 대표(I.D) ㈜ 본 글은 본지 편집에 맞도록 재편집 한 것입니다. 원문은 아래 출처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출처 : http://cafe.daum.net/flower-rainy/gb8b/200  ‘베이직 구약성경’ 김다니엘 著, 쿰란출판사 



성경을 읽으며 무엇을 깨닫는가?


사도행전 8:30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 깨닫느뇨?

* 깨닫느뇨(1097) γινώσκω  

1. 알다,  2. 신비를   3. 하나님을

발음 / 기노스코(ginōskō) 
관련 성경 / 알아보다(막 6:38), 알다(마 6:3, 12:5,7, 막 5:43, 8:17, 눅 20:19, 요 1:40), 알게 하다(마 9:30, 요 19:4), 알려지다(마 10:26, 눅12:2), 깨닫다(마 24:39, 막 5:29), 알리다(막 9:30, 요 7:17), 동침하다(마 1:25), 주다(막 4:11)
신약 성경 / 222회 사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