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성에 '바늘 귀'는 실재했을까?



예루살렘 성에 '바늘 귀'는 실재했을까?


예수가 살던 시대의 예루살렘 성에 '바늘 귀'라 불리는 성문이 실재했을 것이라는 생각은 아주 오랜 전부터 있어 왔다.
다른 성문보다 매우 작기에 '바늘 귀'라 불린 암문(혹은 개구멍)이 존재했으리라는 생각은 사실 그럴싸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에 덧붙여진 말들도 그럴듯했으니, 그 문의 크기는 사람은 여하히 통과할 수 있지만 낙타의 경우는 짊어진 물건을 모두 내려놓고 알몸뚱이가 되어야만 겨우 통과할 수 있는 정도라는 것이었다.
만일 그렇다면 이 말은 앞에서 인용한 마태복음의 문장을 쉽게 이해시킬 수 있다.
그 문장 다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제자들이 듣고 몹시 놀라 이르되,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마태복음 19: 23-25)*

 * 이 문장은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도 실려 있는데, 내용은 거의 같다.

아울러 이렇게 보면 위 예수의 말은 매우 설득력 있는 주문이 된다.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으나 재물에 대한 욕심으로 가기가 힘들니 그 욕심을 모두 내려놓으라는 말이 성립되기 때문이다.(부자를 폄훼하는 것은 아니지만, 9원을 가진 자가 10원을 채우기 위해 가난한 자의 1원을 뺏는다는 인식은 동서가 비슷하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하면 이것은 어불성설이며 본말 또한 전도돼 있다.

'바늘 귀'는 통과할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그 욕심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예수가 강조하고자 한 것은 낙타의 통과 여부가 아니라 그 낙타에 실린 재물이었을 터, 하지만 그림에서 보다시피 부자는 자신의 욕심을 버리지 않는다.
그저 짐을 잠시 내려놓았다 다시 싣는 수고가 뒤따랐을 뿐이다.
예수가 원한 것은 분명 이런 형태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문의 통과 주체는 사람이지 낙타가 아니다.
사람이 욕심을 버리는 게 중요하지 낙타 등 위의 수하물을 내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런 의미를 몰랐는지, 아니면 알고도 모른 척 밀어붙인 것인지 역대로 천국을 갈망하는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벽에서 아래와 같은 '바늘 귀'들을 찾아냈다. 물론 역사적 근거는 없는 것들이다.(굳이 장소를 명시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오해

성경이 기록된 사건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은, 막연히 성경의 내용을 상상하는 것과는 분명 큰 차이가 많다. 이스라엘에서 성경 현장학습을 인도하면서, 자주 받는 질문들과 오해들이 있는데, 그 중에 몇 가지를 간추려 여기에 소개한다.

바늘 귀 (the eye of a needle)

마태복음 19:24절에 예수님은 “낙타가 바늘 귀(the eye of a needle)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는 말씀을 하셨다. 여기에서 성전으로 들어가는 여러 문 가운데 ‘바늘 귀’라는 문이 있다는데 그 문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을 받고 한다.

그런 문은 없다. ‘바늘 귀’ 문은 예전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다. 일부 설교자들은 ‘바늘 귀’ 문을 말하면서, 낙타가 성전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지고 있던 모든 짐을 내리고 무릎을 꿇어야만 들어가는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모든 짐을 내리고, 겸손하게 무릎을 꿇어야만 들어갈 수 있다고 설교한다고 한다.

예수님 당시 헤롯 성전 뜰로 들어가는 몇 개의 문이 있었으며, 지금도 그 문의 흔적은 찾을 수 있다. 남쪽에서 성전 뜰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은 훌다 문(the gate of Hulda)이 있다. 훌다 문은 삼중 문(triple gate-위의 사진)과 이중 문(double gate)을 가리킨다. 삼중 문은 성전 남쪽의 동쪽에 있었는데, 주로 입구로 이용되었고, 이중 문은 성전 남쪽의 서쪽에 있었는데, 출구 또는 상을 당한 가족의 성전 입구로 이용되었다.

서쪽에서 성전 뜰로 들어가는 두 개의 통로인 로빈슨 아치(Robinson’s arch- 아래 사진)와 윌슨 아치(Wilson’s arch-사진)가 있었다. 윌슨 아치는 성전과 예루살렘의 서쪽 언덕에 위치한 헤롯 궁, 대제사장의 주거지, 상위 계층의 생활 근거지를 서로 연결했던 통로로써 왕, 대제사장 및 상위 계층이 주로 이용했던 통로였다.

그리고 북쪽 베데스다 연못 근처에서 성전 뜰로 들어가는 문이 있었는데, 이 문은 요한복음 5:2절에 양문(Sheep gate)으로 기록되었다. 성경 어디에도 ‘바늘 귀’ 문은 없다. ‘바늘 귀’ 문은 15세기 이후부터 설교자들을 통해 강단에서 선포되어 온 대표적인 허구에 속한다. ‘바늘 귀 문’은 없다고 이야기해 주어도 여전히 반신반의한다.

대제사장 발목에 맸다는 끈

유대 월력으로 일곱 번째 달, 제 십 일은 대속죄일 (욤 키푸르)이다. 이 날은 대제사장이 자신의 죄와 백성들의 죄를 사하기 위하여 속죄 의식을 행하는 날이다 (레 23:27-32). 대제사장이 속죄 의식을 위하여 지성소로 들어갈 때, 그의 발목에 끈을 맸다는데, 끈을 맨 이유는 대제사장이 죽으면 끌어내기 위한 것이라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히브리어 성경, 신약 성경, 사해 문서, 요세푸스의 기록, 교부들의 기록, 미쉬나, 탈무드 어디에도 대제사장의 발목에 끈을 맸다는 기록은 없다.

이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13세기 유대인 조하르(Zohar)의 기록에서 찾아볼 뿐이다. 조하르는 이렇게 말하였다. “대제사장의 발목에 금으로 된 줄을 묶어 두었는데, 이는 그가 지성소에서 죽었을 경우, 그를 끌어내기 위한 것이다.” 조하르는 그리 신뢰할 유대 학자가 아니다. 발목에 끈을 맸다는 것은, 레위기 16:3-4절에 기록된 지성소로 들어가는 대제사장의 예복에 위반될 수 있다: 아론이 성소로 들어오려면 수송아지로 속죄 제물을 삼고 수양으로 번제물을 삼고 거룩한 세마포 속옷을 입으며 세마포 고의를 살에 입고 세마포 띠를 띠며 세마포 관을 쓸지니 이것들은 거룩한 옷이라 물로 몸을 씻고 입을 것이며. 일부 기독교 학자들은 출애굽기 28:35절 과 히브리서 9:7절 을 주석하면서 조하르의 글을 인용하기도 한다. 특히 히브리서 9:7절에서 요한 길(John Gill)은 조하르의 글을 소개하며 이렇게 주석하였다: “유대인들은 말하기를, 대제사장이 지성소로 들어갈 때, 그의 발에 끈이나 가죽 띠를 묶어 두었는데, 이는 대제사장이 지성소에서 사망하게 되면, 그를 끌어내기 위함이다. 다른 제사장이 지성소로 들어가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었기 때문에 대제사장이 죽으면 누구도 대제사장의 속죄 의식을 대신할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하르나 요한 길이 말하는 대제사장의 발목에 끈을 맸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이것 역시 설교자들의 대표적인 허구에 속한다.

만약 대제사장이 속죄 의식을 행하다 지성소에서 죽는 일이 발생하면 대제사장의 직무를 대신할 제사장은 있었다. 누가복음 1:8절의 세례 요한의 부친 사가랴는 ‘그 반열의 차례대로 제사장의 직무를 하나님 앞에 행할 쌔 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제비를 뽑아 주의 성소에 들어가고’라는 말씀이 있다. 만약 지성소에서 대제사장이 죽으면, 그의 발목에 맨 끈을 당기므로 시신을 끌어낸 것이 아니라 대제사장의 직무를 대행할 사람이 지성소로 들어가 대제사장의 시신을 끌어내는 것이다. 허구는 또 다른 허구를 만들어 낸다. 그러면,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이상해 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인 YHWH를 기록하는 서기관

성경의 소중한 사본이 대량으로 발견된 쿰란 유적지를 여행할 때, 간혹 서기관들에 대한 질문을 받곤 한다. 서기관들이 성경을 필사하면서, 하나님의 이름 YHWH을 기록할 때마다 붓을 꺾어 버리고 새로운 펜을 사용하였으며, 온 몸을 정결케 하는 정결 의식 또는 손을 씻은 후에 기록했다는 말이 있는데, 사실인가라는 질문을 받는다. 이것 역시 사실이 아니다. 유대인들의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드러내기 위하여 서기관들의 열심을 강조한 말이기는 하지만, 붓을 버리고 새 붓을 사용했다거나 목욕을 한 후에 다시 기록하기 시작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서기관(sofer)을 뜻하는 히브리어는 소페르이다. 소페르는 세다(count)를 뜻하는 사파르(safar)에서 온 단어이다. 서기관이란 말은, 서기관이 성경을 필사할 때, 자신이 기록한 단어를 정확하게 셌던 것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한다. 서기관이 사본의 글자 수를 세었던 것은, 사본의 원본 글자 수와 자신이 기록한 글자 수를 세므로 정확하게 기록했는지를 판단했기 때문이다.

▲기브온.
기브온 위에 멈췄던 태양

기브온(사진)은 예루살렘 다윗성에서 북서쪽 약 5-6마일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솔로몬의 일천 번제에 대한 배경과 여호수아 10장에 기록된 이스라엘 백성들과 아모리 족속들 간의 전쟁에 대한 배경을 살펴 보면서 여호수아의 기도를 묵상할 때가 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신 때가 이렇게까지 없었는데, 당일 여호수아의 기도는 이랬다: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할 찌어다 (수 10:12). 일부 목회자들은 여호수아의 태양이 멈추게 된 기도와 열왕기하 20:10-11절에 기록된 히스기야의 기도로 해가 10도 뒤로 물러간 배경을 이야기하면서, 나사(NASA) 과학자들이 잃어버린 하루를 찾았다고 말하는데 그것이 사실이냐고 묻는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강조하고 싶을 지라도, 나사(NASA) 과학자들이 잃어버린 하루를 찾았다는 잘못된 정보를 인용해 가며 하나님의 능력을 강조하는 것은 옳지 않다. 성경에서 잃어버린 하루를 찾기 위한 노력은 NASA가 존재하기 이전에도 있었다.

그러나 본문에서 이것은 생각해 볼 수 있다. ‘태양은 기브온 위에, 달은 아얄론 골짜기 위에 머무르라’는 여호수아의 기도에서, 기브온은 아얄론 골짜기의 동쪽에 있다. 다시 말하면, 기브온은 태양이 뜨는 동쪽에, 그리고 아얄론 골짜기는 태양이 지는 서쪽에 있다. 그리고 태양과 달은 하늘에 같이 떠 있었는데, 이런 일이 일어날 시간은 점심 때도 저녁 때도 아닌 아침 시간이다. 여호수아는 이른 아침에 태양이 여전히 기브온 위에 있고, 달은 서쪽 아얄론 골짜기에 있을 때에 아모리 족속들과 전쟁을 시작하면서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하였다.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할 찌어다 (수 1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