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비어스 선교정책(宣敎政策)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는 1866년 9월 2일


네비어스 선교정책(宣敎政策)

선교사 네비어스(John L.   Nevius)가 중국에서의 선교활동을 위하여 창안한 선교방법론.

네비어스 선교방법.


네비어스 선교정책은 ‘3자 원칙’

첫째, 자전(自傳, self-propagation)

토착인이 토착인에게 전도하도록 하는 ‘자전’(自傳, self-propagation)

둘째, 자립(自立, self-supporting)

토착 교인이 토착 교회 목회자의 생활비와 교회 운영을 책임지도록 하는 ‘자립’(自立, self-supporting)

셋째, 자치(自治, self-governing)

토착 교회 문제를 토착 교인들이 처리하도록 하는 ‘자치’(自治, self-governing)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위 ‘3자 원칙’은 네비어스보다 먼저 제시했던 인물들이 있었다.
그들은 1840∼70년대 영국 교회와 미국 교회의 해외 선교 정책을 입안했던 헨리 벤(Henry Venn)루퍼스 앤더슨(Rufus Anderson) 등이었고, 네비어스는 그 원칙을 중국 선교 현장에 적용하여 보다 구체적인 방법론으로 정립하였다고 할 수 있다

연원 및 변천

네비어스 선교정책의 창안자로 알려진 네비어스는 미국 뉴욕 출생으로, 유니언대학과 프린스턴신학교(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를 졸업하였다.

이후 북장로회 중국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1854년 중국 남부 닝보(寧波)에 도착해 선교를 시작,
1871년 동북부 옌타이(煙臺)로 옮겨가 1893년 별세하기까지 40년간 선교사로 활동하였다.

초기 닝보 선교에서는 실패와 좌절을 경험했지만 그 경험을 바탕으로 옌타이에서는 성공적인 선교 결과를 얻었다.
그는 의료선교와 교육선교도 추진했지만, 주로 복음전도와 토착 교회 육성에 중점을 두었다.

그래서 연중 대부분의 시간을 지방교회 순회에 할애했으며, 여름에는 옌타이 선교부에 토착 교회 지도자들을 모아 성경을 가르쳤다. 또한 피폐해진 중국 농촌의 경제적 환경개선을 위한 농업개량 사업도 적극 추진하여 직접 과수원을 조성하고, 포도와 배 등 서양 과수를 들여와 중국인 농가에 보급하기도 했다.
따라서 이러한 네비어스의 선교는 중국 교회뿐 아니라 일반사회 지도자들로부터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네비어스는 자신의 선교 경험을 바탕으로 중국 선교 전략과 방법론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1885년 『차이니즈 레코더(Chinese Recorder)』에 발표한 「선교사의 토착교회 설립 및 육성방안(Planting and Development of Missionary Churches)」이 대표적인데, 이 글은 1886년 1월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단행본으로 인쇄되었고, 미국 북장로회 해외 선교부는 그 책을 ‘해외선교 문고’에 포함시켜 선교사 필독서로 출판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네비어스의 선교 방법론은 중국 이외의 지역에도 알려지게 되었다. 네비어스는 1890년 봄 상하이에서 개최된 제2차 중국 선교 10주년 연차대회에서 자신의 선교 정책을 발표한 후, 6월 안식년 휴가를 얻어 귀국하던 중 언더우드의 요청을 받고 서울을 방문하였다. 그는 2주간 머물면서 언더우드(H. G. Underwood)와 마펫(S. A. Moffett), 게일(J. S. Gale), 기포드(D. L. Gifford) 등 북장로회 선교사들에게 자신의 선교 경험과 방법론을 소개하였는데, 1885년부터 선교를 시작한 30대 초반의 한국 선교사들에게 40년 선교 경력의 60대 선교사 네비어스의 경험과 지혜는 큰 도움이 되었다. 한국 선교사들은 네비어스가 제시한 선교 이론과 방법론을 ‘네비어스 선교정책’으로 정리해서 한국 선교에 적용하기로 결의했다. 그리고 뒤에 들어온 미국 남장로회와 호주장로회, 캐나다장로회 선교부에서도 네비어스 선교정책을 수용하기로 했고, 공식 결의는 하지 않았지만 미국 북감리회와 남감리회도 큰 틀에서 네비어스 선교정책을 받아들임으로써 한국 개신교회의 대표적인 선교정책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내용

네비어스가 제시한 선교정책은 다섯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교회 지도자들은 자기 동네에서 직업을 갖고 자립생활을 하면서 동역자와 이웃에게 복음전도 사역을 해야 한다.
둘째, 선교사는 토착 교회에 필요하고 또한 운영해 나갈 수 있는 사역과 기관들을 개발해 주어야 한다.
셋째, 토착 교회가 스스로 목회자를 세우고 생활비를 부담해야 한다.
넷째, 예배당은 토착 교회 교인들의 헌금과 노력으로 마련하되 토착 양식으로 지어야 한다.
다섯째, 매년 토착 교회 지도자들에게 집중 과정으로 성경과 교리를 가르쳐야 한다.

결국 네비어스의 선교정책은 선교부나 선교사의 간섭과 통제는 최소화하면서 토착 교회 지도력 육성을 통해 토착 교회가 스스로 성장하고 발전하도록 돕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언더우드를 비롯한 초기 한국 선교사들은 이러한 네비어스 선교정책을 적극 수용하여 한국 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꾀하였다.
특히 1903∼1907년 초기 부흥운동을 거치면서 한국 교회는 그 지도력이 급성장했고, 결과적으로 스스로 전도하고 자립하며 자치하는 토착 교회로서 위상을 정립할 수 있었다.
그래서 1920년대 미국의 경제공황과 1940년 선교사들의 강제 귀국, 그리고 1960년대 후반 선교사 철수로 외부의 선교지원이 약화된 상황에서도 한국 교회는 위축되지 않고 부흥,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네비어스 선교정책에 대한 비판도 있었다.
우선 경제적 자립 원칙이 토착 교회 유지와 관리에 초점을 맞추어 ‘교회 중심’ 체제가 되면서 사회봉사나 구제사업, 사회적 현안에 대해서는 소극적이 된다는 견해였다.
그리고 봉건적 인습이 남아 있던 한국 교회 안에서의 자치 원칙은 임원 조직의 위계질서로 작용하여 교회의 민주적 운영을 저해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토착 교회 지도자 양성(성경공부와 신학교육)에 관한 권한과 역할을 선교사들이 독점함으로써 한국 교회 목회자의 지적 수준과 신학 발전에 한계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이처럼 비판받는 부분들도 있지만 네비어스 선교정책이 한국 교회의 부흥과 성장에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였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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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에게 난폭하게 굴어 불태웠다? 그 진실은…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는 1866년 9월 2일 대동강 변에서 당시 평양 군민들의 공격을 받고 불에 타버렸다. 이때 영국인 로버트 토머스 선교사도 순교했다. 약 한 달이 지나고 중국 지푸의 미국 영사 샌포드에게 이 소식이 전해졌다. 미국은 제너럴셔먼호가 왜 공격받았는지, 선원은 어떻게 죽었는지, 생존자는 있는지 등을 알고자 했다.

미국은 1867년 1월 아시아함대 와추세트호의 슈펠트 함장을 보내 이 사건을 조사했다. 하지만 조선은 협조하지 않았다. 그러나 평양감사 박규수는 분명히 미국이 다시 올 것이며, 그때를 위해 소위 ‘의답조회’를 작성해 같은 대답을 하도록 했다. 문서는 조선 정부가 미국에 전달한 이 사건에 관한 유일한 공식문서였다. 그러면 이 문서는 얼마나 진실을 말하고 있을까.

조선 후기 지리학자 김정호가 1834년 제작한 지도 '청구도'에 그려진 대동강 하류 일대. 박명수 교수 제공

박규수는 ‘의답조회’에서 제너럴셔먼호가 처음부터 조선인에게 난폭하게 행동했기 때문에 이런 사건이 일어났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초기 제너럴셔먼호와 조선인 사이에 심각한 갈등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들은 배에 몰려와 이양선을 구경하고 서로 물건을 매매하기도 했다. 토머스는 이들에게 과자와 성경을 나눠줬다.

제너럴셔먼호와 조선 측이 충돌한 이유는 중군(中軍, 일종의 지역 사령관) 이현익이 납치됐기 때문이다. ‘의답조회’는 이현익이 제너럴셔먼호와 조선인의 마찰을 막고자 배를 타고 감시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제너럴셔먼호가 이현익을 납치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현익의 구술을 기록한 ‘패강록’을 보면 제너럴셔먼호는 조선 측이 자신들을 유인해 상륙시킨 다음에 섬멸하려 한다는 것을 알았고, 이것을 막기 위해서 이현익을 납치했다고 했다. 이 사건을 연구했던 제임스 게일 선교사도 먼저 조선 측이 공격을 해왔기 때문에 제너럴셔먼호가 이현익을 납치했다고 본다.

또한 ‘의답조회’는 평양 군민이 이현익을 구출하기 위해서 땔나무에 불을 붙여 제너럴셔먼호를 공격하니 배에 저장된 폭약이 굉음을 내며 폭발했고 사람은 다 죽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정부의 공식문서인 ‘평양감영계록’에는 배가 불타고 있을 때, 토머스와 중국인 조능봉이 배에서 나와서 살려 달라고 요청했으나 군민에 의해 살해당했다고 기록됐다. 1884년 평양에 가서 이 사건을 조사한 미국공사관 무관 버나돈은 토머스는 평양 감영에 끌려갔으며, 이곳에서 중국으로 보내 줄 것을 요청했으나 평양감사는 이를 무시하고 처형했다고 했다.

제너럴셔먼호 사건의 또 다른 문제는 생존자 여부다. 제너럴셔먼호를 조선에 보낸 메도우사에 의하면 이 배에는 24명이 타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 측은 죽은 사람이 모두 20명이라고 밝혔다. 그러면 나머지 4명은 어떻게 됐을까. 미국은 생존자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런 상황에서 20년 이상을 청과 조선 사이 밀무역에 종사했고, 지푸의 외국인들과 잘 아는 중국인 우문태는 1867년 여름 평양에 갔을 때, 오랫동안 알고 있던 조선 상인 김자평(金子平)으로부터 평양에서 서양인 2명과 중국인 2명을 봤다는 말을 들었다. 이 소식은 북경의 외교가를 뒤흔들어 놓았다.

1868년 봄, 미국은 셰넌도어호 페비거 함장을 조선에 파송해 우문태의 말이 사실인지 확인하고자 했다. 조선 측은 이에 대해 자신들은 김대청(金大靑)은 알아도 김자평은 모른다고 대답했다. 김대청은 1867년 초 슈펠트가 조선에 왔을 때, 함께 와서 장연 육도에서 우문태를 만난 적이 있었다. 조선 측은 이 김대청을 우문태에게 생존설을 말한 김대평이라고 간주하고 체포해 미국 측과 함께 심문했다. 조선 측은 김대청에게 우문태를 만난 적이 있냐고 물었고 그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우문태에게 서양인 2명과 중국인 2명의 생존설을 말했는가를 물었고, 김대청은 그런 적이 없다고 대답했다. 조선 정부는 미국 측에 우문태의 주장은 거짓이라고 말했다.

여기에 대해 미국 측은 김대청에게 언제 우문태를 만났는지 물었다. 그는 1867년 초라고 답했다. 우문태가 김자평을 만난 것은 1867년 여름이었다. 만난 날짜가 다른 것이다. 또 미국 측은 김대청에게 주소와 직업을 물었다. 그는 장연 육도에 사는 어부라고 했다. 하지만 김대평은 작도에 사는 상인이었다. 미국 측은 조선 측이 데리고 온 사람은 김자평이 아니라 김대청이라고 생각했다.

조선 측은 김대청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황해 감사는 대원군의 명령으로 셰넌도어호가 정박해 있는 바다 앞에서 김대청을 효수해 버렸다. 이런 사건을 본 셰넌도어호 선원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페비거는 조선의 이야기를 믿을 수 없다고 보고했다.

제너럴셔먼호의 진상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당시 기록을 면밀하게 살펴본다면 우리는 좀 더 진실에 접근할 수 있다. 한미수교 140주년을 맞이해 한국 기독교는 제너럴셔먼호 사건의 실체를 밝혀 한·미 관계의 첫 단추를 바로 채우고, 한국 개신교의 시작을 바로 알려야 할 것이다.

[출처] - 국민일보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239414&code=23111111&sid1=chr





한국기독교역사(초기 한국선교사들을 통해 배우는 교훈)
-조슈아

1.머리말

조선! 꼬레아!(Corea!) 한국은 120년전(1885년)만 해도 동양의 숨겨진 작은 나라였다.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조선은 누구와도 통상을 맺지 않고 혼자만의 고립가운데 갇혀있었다. 중국과 일본사이에서 늘 괴롭힘을 당하는 힘없고 의지할 데 없는 작은 나라였다. 미국, 러시아, 프랑스, 독일등 열강들은 조선과의 통상을 주장하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고, 조선은 내부적으로도 수구파와 개화파등으로 나뉘어져 분열과 싸움의 위기상황가운데 있었다. 그로부터 120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한국은 세계에서 경제규모 10위안에 드는 나라, OECD회원국, 선교역사 120년만에 세계에서 2번째로 많은 선교사를 파송한 나라, 세계50개의 대형교회중 25개이상이 한국에 있으며, 인구 중 기독교인이 차지하는 비율이 20%가 넘는 세계에서 비슷한 류를 찾아볼 수 없는 그야말로 특이한 나라로 인식된다. 최근의 한류열풍은 언론의 플레이가 아니며, 중국에서 피부적으로 느낄 수 있는 그야말로 열풍이다. 한국영화와 드라마는 언론과 생활속으로 파고 들었고, 삼성 LG는 부의 상징처럼 되고 있다. 2002년 월드컵을 통해 온 민족이 하나되는 모습을 전세계에 보여준 짜릿한 감동이 아직도 남아있다. 얼마전 세계에서 제일 먼저 줄기세포 분화에 성공한 서울대 황우석 박사의 뉴스에 온 세계가 요란했다. 

중국으로부터 늘 영향을 받기만 했던 힘없던 한국이, 36년이라는 일제식민지배를 경험하며 고통가운데 눌렸던 이땅이, 한국전쟁이라는 참혹한 민족상잔을 겪으면서 아무것도 없던 곳에서 다시 시작한 한국이 어떻게 오늘날 이처럼 우뚝 서게 되었을까? 오늘의 대한민국이 되기까지 기독교가 한국사회, 경제, 정치, 교육, 문화등 사회전반에 미친 영향은 상상을 넘어선다. 물론 오늘날 기독교가 많이 세상과 불의와 타협하여 욕을 많이 먹고 있긴 하다만.. 초기 한국에 복음을 들고 와서 생명을 바친 많은 외국의 선교사들, 이 땅의 사역자들.. 그들이 땀과 피를 흘려 헌신한 기초위에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거의 모든 것들이 세워졌다. 우리는 지금 그들의 헌신과 생명의 열매를 먹고 있는 것이다. 

오늘 이 시간에 우리는 한국에 어떻게 기독교가 들어오게 되었고, 이 땅에 와서 생명을 바쳐 일하며 복음을 전했던 선교사들의 삶과 사역과 죽음의 이야기들과, 또 복음을 들은 이 땅의 우리의 선조들이 어떻게 복음을 위해 수고하며 애썼는지, 그들의 헌신을 통해 이루어진 오늘날의 우리의 현재모습을 돌아보고자 한다. 이 짧은 시간안에 한국기독교역사에 대한 모든 것을 다룰 수는 없어서 1910년 한일합방이전까지에 focus를 맞추어서 나누려고 한다. 나름대로 열심히 연구해보면서 이 땅에 온 초기선교사들과 우리의 선조들에 대한 감사와 감동이 있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은둔해 있던 조선을 세우셨는지, 어떻게 복음으로 이 땅을 회복시키시고 부흥케 하셨는지 참 기가 막힌다. 마음을 편안하게 가지면서 함께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보자. 오늘 몇가지 주제를 가지고 시대별로 정리해서 나누려고 한다. 주님께서 동일한 감동과 은혜를 주시기를 바란다.


2.복음의 씨앗을 받다

-기독교가 처음에 어떻게 한국으로 들어오게 되었는가를 살펴본다. 1.경교와 2.조선을 방문한 최초의 선교사, 귀츨라프 그리고 3.최초의 순교자 토마스선교사를 살펴본다.

635. 네리우스파 동양선교 시작함. 
한국이 기독교를 처음 접하게 된 시기를 잡는 여러 가지 가설이 있다. 그 중에 하나를 소개한다. 중국 당태종때 베리우스파는 중국으로 선교사를 파송한다. 1세기(100년) 이상 왕성하다가 쇠퇴한다. 중국에서 경교(景敎)라고 불렸다. 서안 비림박물관에 대진경교유행비가 있다.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초기에 한국으로 경교가 전래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경주 불국사지에서 발견된 돌십자가를 통해 경교의 영향이 미쳤을 가능성이 언급되어진다. 경주 불국사의 석굴암등 대부분의 불교유적에 경교의 흔적이 남아있다는 학자들의 견해가 있다. (사진-서안 경교비)(사진-경주 돌십자가)


1832. 조선을 방문한 최초의 선교사, 귀츨라프(K.F.A Gutzlaff,1803~1851. 네덜란드선교회).

-1832년 영국 암허스트 호 통역 겸 의사로 충청도 고대도에 도착한다. 전도문서와 성경을 전하며 주민들과 접촉하다. 감자심는 법을 가르쳐주며 주민들에게 약과 전도문서등을 전했다. 관리들이 이를 금지시켰다. 한달간 정박한후에 외국과 통상할수 없다는 통보로 인해 한국을 떠나야했다. 항해기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어쨌든 조선방문은 하나님의 역사였다. 이 땅에 뿌려진 하나님의 진리의 씨가 소멸되리라고 나는 믿지 않는다.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로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비가 미칠 날이 오고야 말 것이다. 우리는 이 날을 기다리고 있다. 한편 이날을 오게 하기 위하여 십자가의 도를 애써 전파하지 않으면 아니될 것이다... 우리는 한국당에 광명의 아침이 찾아오기를 기다려야 한다.”귀츨라프의 방문이 선교와 직접적으로 연결은 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의 씨를 뿌리는 수고와 간절한 염원이 마침내 이루어졌음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사진이 참 멋있지 않냐? 그 당시에 먹을 게 없었는데 그가 심은 감자가 유용하게 음식으로 쓰여졌다 전해진다.(사진-귀츨라프,기념교회)


1866. 한국최초의 기독교순교자  - 로버트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귀츨라프가 한국을 다녀간 지 33년 후, 토마스선교사가 한국으로 들어온다. 토마스는 중국 상해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중 부인이 사망하고 그 충격으로 선교사의 임무를 그만두고 해관통역업무를 보았다.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총무 윌리암슨을 만나면서 한국선교에 대해 눈을 뜨게 되고 한국에서 온 두명의 천주교신자들을 만나서 성경을 전해줬을때 기뻐하는 그들을 보면서 한국선교를 소망하게 된다. 그 당시 한국에는 천주교가 박해를 받고 있었고 어느 누구도 성경을 갖고 있지 않았다. 두 달 반의 한국선교여행(황해도)을 하게 되고 성경배포를 하였다. 주민들이 성경을 받아들고 기뻐하는 것을 보고 다시 들어갈 때를 기다렸다. 1866년 미국의 무장된 상선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대동강에 도착했지만, 배가 무장된 상선이었기에 병사들의 폭탄에 의해 좌초되고, 배에서 내리기 전까지 갖고 있던 성경을 한권 한권 뭍으로 던졌다. 토마스와 일행들은 뭍에 끌려내리게 되고 군인들에 의해 모두 죽음을 당하게 된다. 그의 나이 27세.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병사에게 성경을 전해주며 예수를 믿으라고 외치고 이렇게 기도하였다 한다. “오! 하나님,이 사람이 자기의 하는 일을 모르오니 이 사람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조선땅에 뿌린 복음의 씨앗이 헛되지 않게 하소서.내 영혼을 받아주소서…” 아직도 복음을 알지 못하던 땅, 뒷날 그의 죽음 위에 수많은 교회가 세워질, 훗날 한국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렸던 평양의 대동강변에서 순교의 피를 흘린 것이다. (사진-토마스,토마스의 무덤)

그 때 성경을 받은 병사가 훗날 예수를 믿게 되고 평양교회의 초대장로가 된 박춘권이란 사람이다. 그의 말이다. “내가 서양사람을 죽이는 중에 한사람을 죽인 것은 내가 지금 생각할수록 이상한 감이 있다. 내가 그를 찌르려고 할 때에 그는 두손을 마주잡고 무삼 말을 한 후 붉은 베를 입힌 책 을 가지고 우스면서 나에게 밧으라 권하였다. 그럼으로 내가 죽이기는 하엿스나 이책을 밧지 않을 수가 없어셔 밧아왔노라" (사진-박춘권)

그에게 성경을 받은 이들 중에 훗날 평양의 유력한 신앙가문을 일으킨 이들이 많다. 박춘권은 평양교회의 장로가 되었고, 장사포의 홍신길은 서가교회, 석호정 만경대의 최치량은 평양교회를 창설한 인물로 지목되고 있다. 성경을 뜯어 벽지를 바른 영문주사 박영식의 집은 널다리교회의 예배처소가 되었다 한다. 하나님의 일은 결단코 성취되어진다. 

1933년 9월14일에 대동강변에 토머스기념 예배당이 세워졌다. 이 제너럴 셔먼호사건으로 인해 미국이 보복하기 위해 군함을 보내어 신미양요가 일어나고, 얼마후인 1882년 한,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면서 미국교회가 한국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기도하게 된다. 그리고 1885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를 비롯한 많은 미국선교사들이 한국으로 들어오게 된다. 하나님은 국제간의 통상등을 사용하셔서 복음의 문을 여셨다.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것과 다르다. 어쨌든 이로써 조선은 복음의 씨앗을 받게 되었다. 이때까지 어떠한 열매도 없었지만 분명히 복음의 씨앗은 뿌려졌다. 그것이 자라서 열매를 맺기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사진-토마스기념교회)

3. 기독교의 자주적 수용

-한국의 기독교는 세계의 다른나라가 기독교를 접한 것과는 많이 다르다. 한국인들의 자발적인 요청으로 복음이 들어오게 되고 선교사가 들어오게 되며, 성경이 번역되어진다. 그리고 한국최초의 교회인 소래교회(솔내교회)가 세워진다.

1885.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했을 때 깜짝 놀라게 된다. 한글로 번역된 성경을 주민들이 갖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에 오기 전에 들른 일본에서도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한글로 번역된 마가복음이 벌써 있었던 것이다. 이를 알기 위해서 만주에서 사역하던 로스와 멕킨타이어선교사, 그리고 이들과 함께 한 서상륜등 한국사역자들, 일본에서 성경을 번역한 이수정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선교사가 한국으로 들어오기 이전에 사역자들과 성경이 만주와 일본에서 이미 세워지고 번역되어서 한국으로 먼저 들어왔다. 한국은 기독교를 자주적이며 자발적으로 수용했다. 이것은 다른 나라들에 복음이 들어가는 것과는 사뭇다르다. 다른 나라는 기독교가 제국주의 침략의 앞잡이처럼 이용되었다.

1887. 최초의 한글성경인 예수셩교젼서출간- 존 로스, 멕킨타이어 선교사

-토마스에게 한국선교를 주선했던 윌리암슨이 토마스의 순교이후에 스코틀랜드교회에 선교사파송을 요청하고, 로스와 매킨타이어선교사가 중국으로 오게 된다. 위리암슨은 중국에서 사역하던 성서공회 총무로서 토마스선교사에게 한국선교를 도전했던 선교사였다. 이처럼 한국선교를 위해 숨은 사역자들이 많이 있었다. 윌리암슨은 로스에게 토마스선교사의 순교사실을 알려주며 한국선교에 대해 도전하게 되고 1874년 로스선교사는 고려문이라는 청과 조선의 국경으로 가서 한문성경을 배포하였지만 주의를 끌지 못한다. 한 상인이 찾아와서 그에게 성경을 전해주게 되고, 훗날 그의 아들인 백홍준이 로스에게 세례를 받게 된다. 오늘 우리가 뿌리는 씨앗이 어디서 어떻게 열매를 맺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사진-존로스)

-1876년 2차 고려문여행에서 의주청년 이응찬을 만나게 된다. 그와 함께 만주로 돌아와서 한국어를 공부하며 이응찬의 도움으로 1877년에 선교사를 위한 한국어교재 'Corean Primer'를 발간한다.

-1876년 이응찬, 백홍준, 이성하, 김진기 4명이 맥킨타이어에게 한국인 최초로 세례를 받음. 한국최초의 신앙공동체가 중국에서 형성됨.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다. 이 때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목숨을 내놓고 믿는다는 것이었다. 우리의 선조들은 목숨을 내어놓고 믿었다.

-이응찬, 백홍준, 서상륜등의 도움으로 1882년 우리말 예수셩교젼서 누가복음을 출간하고 1887년 마침내 최초의 우리말 신약전서인 '예수셩교젼셔'발간됨. "한국인 학자가 한 명이라도 없었다면 나는 속수무책이었을 것"이라고 로스는 고백한다. 로스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지만 한국사역자들의 수고가 컸다는 얘기다. 그래서 ‘로스역’이라 하지 않고 ‘예수셩교젼서’라고 부른다. (사진-예수셩교젼서)

로스의 고백- “최초의 한글성서 발행이 한미조약 공표(1882)와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다. 이제 완고한 ‘고려문’이 ‘열린문’이 되면 곧바로 복음이 그 민족안으로 들어갈 것이다”

-로스선교사는 서상륜, 서경조 형제를 만나게 됨. 서상륜형제는 만주로 홍삼 장사를 하러 왔다가 병이 걸렸다. 메킨타이어선교사는 죽어가던 서상륜을 힘써 돌보아주어 병이 낫게 되고 그들이 예수를 믿게 됨. 서상륜은 의주를 대상으로 전도하다가 체포령이 내려 동생 서경조가 있는 솔내로 내려와서 힘껏 전도하여 당시 58세대 중 50세대가 예수를 믿게 되어 순전히 한국인들의 힘으로, 주체적이고 자립적으로, 한국최초의 신앙공동체인 소래교회(솔내교회)를 창설하게 된다.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교회가 세워진 것은 선교역사상 흔하지 않은 일이다. 이후에 서상륜은 계속해서 전도하여 많은 이들이 믿게 되자 1885년 언더우드가 한국에 들어온 것을 알고 찾아가서 세례를 베풀어달라고 요청하게 된다. 선교사가 복음을 전하기 전에 이미 교회와 세례받을 자가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언더우드는 이때 본국에 보낸 선교편지에 이렇게 썼다. “그 무렵은 씨를 뿌릴 시기였음에도 동시에 우리는 첫 열매들을 거둘 수가 있었습니다.” 동생 서경조는 1887년 1월 서울에서 언더우드에게 세례를 받고 그 후 그는 성직자의 길을 결심,한국 장로교회 최초의 목사 7인 가운데 한사람이 된다.(사진-서상륜, 소래교회,지도, 한국장로교 최초 목사 7인)

1880년, 로스선교사는 선교본부에 이런 편지를 썼다. “메킨타이어는 또한 4명의 학식있는 한국인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들은 앞으로 있을 놀라운 수확의 첫 열매들이라고 확신한다. 비록 현재 한국이 서구의 나라들과 어떠한 접촉도 철저하게 격리시키고 있지만, 그 쇄국은 곧 무너질 것이고, 또한 한국인들은 중국인보다 천성적으로 꾸밈이 없는 민족이고 보다 종교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으므로, 나는 그들에게 기독교가 전파되면 곧바로 급속하게 퍼져나갈 것으로 기대한다. ..작년(1979)에 모두 학식있는 4명의 한국인이 세례를 받았으며, 이들 외에도 기독교의 본질과 교리를 탐구하는 11명의 다른 사람들이 있고, 현재 동일한 수의 사람들이 한국민족을 위해 성경과 기독교문학을 준비하는 우리의 문서사업을 위해서 7-8일이 걸리는 우리 선교본부까지 기꺼이 올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므로 바로 여기에 기독교회를 향해 열려있는 새 민족, 새 나라, 새 언어가 있는 것이다.”

서상륜- 한국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당인 솔내[松川]교회 창립자. 선교사. 의주(義州) 출생. 1876년 행상으로 만주 뉴좡[牛莊]에 갔다가 로스 목사를 만나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어 세례를 받고 헤이룽장성[黑龍江省]에 사는 동포에게 전도하였다. 1884년 국내에서 전도하려고 의주로 돌아와 한국에서 최초의 종교집회를 가졌다. 그뒤 체포령이 내려 황해도 솔내로 피신, 1887년 동생 경조(景祚)와 함께 국내 최초의 교회인 솔내교회당을 세웠다.

서경조- 의주출생. 한국장로교회 최초 7명의 목사 가운데 한 사람. 일찍 부모를 여의고 독학으로 한학을 공부하였다. 1878년 처음으로 그리스도교를 접하였다. 1884년 황해도 장연의 솔내[松川]로 가, 형 상륜(相崙)과 함께 한국 최초의 교회를 건립하였다. 1900년 솔내교회에서 목사와 장로의 회합을 조직하고 한국 최초의 장로가 되어 해서지방의 교회 설립을 위해 노력하였다. 1907년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제1회로 졸업하였다. 한국 최초의 목사로 안수할 때 다른 6명과 함께 목사가 되었다. 


백홍준의 일화- 로스는 서상륜, 백홍준등에게 성경책을 짊어지고 한국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백홍준이 성경책을 등에 지고 우장을 출발하였다. 그는 10일 만에 의주 건너편에 있는 씨하지라는 마을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사정을 살펴 보는대로 역시 성경책을 그냥 가지고 들어가기란 매우 어려움을 알았다. 백홍준은 가지고 온 책을 한장씩 한장씩 종이로 풀었고, 그 종이를 말아가지고 노끈을 꼬았다. 다음은 낡은 종이를 많이 사다가 그 속에 책을 감추고 끈으로 묶어 마치 종이를 사오는 것처럼 가장하여 국경을 넘었다. 집에 도착한 그는 성경으로 된 노끈을 종이로 펼쳐 다시 책으로 만들었다. 그는 이 책을 가지고 의주를 중심하여 위원과 강계 등지를 다니면서 전도하였다. 그를 통해 10여명의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다. 백홍준은 로스가 고려문1차 여행때에 성경을 전해줬던 사람의 아들이다. 그가 아들에게 성경을 읽게 하여 백홍준은 만주로 건너가 로스에게 세례를 받게 된다. 그 후 로스와 성서번역작업을 같이 했고, 이후 1887년 언더우드가 새문안교회를 창립할 때 서상륜과 함께 초대장로로 추대되었다. 그후로 마펫,게일선교사등을 안내하며 순회전도집회를 다니다가 1892년 체포되어 모진고문을 받고 옥중에서 목에 칼을 쓴 채 죽었다. 이것이 한국 개신교 사상 최초의 순교사건이었다. 
(사진:백홍준, 매서인-책을 파는 사람-들의 전도)

백홍준- 의주출신. 1874년 만주 고려문(高麗門)을 방문했다가, 우연히 영국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선교사인 J.로스(한국명 羅約翰)와 J.매킨타이어(한국명 馬勤泰)를 만나 개신교 신자가 되었다. 선교사들의 체류지인 뉴좡[牛莊]에서 그들에게 한국어와 역사 등을 가르쳐 주고 자신은 영어를 배웠다. 1876년 이응찬·이성하 등과 함께 세례를 받고, 선교사들과 함께 한문 성경을 한국어로 옮기는 성서번역작업에 착수하였다. 1887년 H.G.언더우드가 서울 정동의 자기 집에서 14명의 신자와 함께 한국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창립하면서 서상륜(徐相崙)과 함께 장로로 추대되었는데, 이 교회가 새문안교회의 전신이다. 그후로도 선교사인 S.마펫, J.게일 등의 안내자로서 순회전도집회를 주선하다가, 1892년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고 옥중에서 목에 칼을 쓴 채 죽었다. 이것이 한국 프로테스탄트 사상 최초의 순교사건이었다. 

이성하의 일화- 1883년 이성하가 성경을 등에 지고 봉천을 떠났다. 그는 압록강 건너편까지 이르렀으나 성경책을 그대로 가지고 무사히 들어설 것 같지 아니하여 잠시 밖으로 나가 주위의 사정을 살피기 시작하였다. 이성하의 거동을 수상히 여긴 주막집 주인이 방안에 놓아 둔 짐짝을 풀어보니 그 속에 국가에서 금지하는 책이 있어 너무나 겁에 질린 집 주인은 일부는 불에 태워 없이하고 나머지는 전부 압록강 물에 내던지었다. 뒤에 이 소식을 들은 로스 선교사는 "하나님의 말씀이 던져진 압록강물을 마시는 한국 사람들은 생명수를 얻게 될 것이고, 불에 탄 성경재는 한국교회를 자라게 하는 거름이 되리라"고 예언하였다. 그 예언이 응하여 오늘날 한국교회는 세계속의 교회로 서게 된다. 이성하는 한국인 최초로 세례받은 4인중의 한명이며, 로스를 도와 성서번역사업에 힘을 썼다. 그는 성경을 몰래 숨기고 귀국하여 의주 서울 등지에서 비밀리에 전도를 하여 복음의 씨를 뿌렸다. 그 후 그의 아내는 백홍준의 아내와 함께 서상륜의 중재로 압록강에서 행해진 언더우드의 세례식에서 세례를 받고 한국교회 최초의 여자세례교인이 되었다고 전한다.

이성하-의주 출신. 1874년 이응찬 ·백홍준 ·김진기와 함께 중국 동북성으로 가서, 스코틀랜드 선교사인 J.로스와 알게 되었고, 이어 로스의 처남인 J.매킨타이어(한국명 馬勤奉) 선교사도 사귀게 되었다. 
1876년 마침내 이들 4인은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세례를 받고, 로스를 도와 최초의 성서 한글번역사업에 정열을 쏟았다. 그는 이후 4복음서와 《사도행전》 등을 몰래 숨기고 귀국, 의주 ·서울 등지에서 비밀리에 전도를 하여 한국에 '복음의 씨'를 뿌렸다. 그 후 그의 아내는 백홍준의 아내와 함께 압록강에서 행해진 H.G.언더우드 집례의 대세례식에서 세례를 받고 한국교회 최초의 여자세례교인이 되었다고 전한다


식자공(인쇄공) 김청송의 일화-성경을 인쇄하면서 예수를 믿게 된다. 그리고 옛 고구려의 고도인 즙안을 중심으로 쪽복음을 나눠주며 전도하였다. 1884년 즙안에는 75명의 세례받고자 하는 자들이 로스선교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11월 눈이 엄청 내리는 날 로스는 추위를 무릅쓰고 즙안으로 가서 75명 남자에게 세례식을 거행한다. 

이상에서 보듯이 한인최초의 교회의 설립과 흩어짐에서 성서중심적 특징과 자발적 복음수용과 전도라는 한국초대교회의 한 전형을 발견하게 된다. 선교사를 찾아가서 세례를 받고, 그들을 불러와서 세례를 베풀게 했던 한인촌과 의주, 그리고 소래의 신자들, 이들에 의해서 자생적인 한국교회는 세워져 나갔던 것이다. 선교사의 역할이 컸지만, 한국인들의 자발적이고 수용적인 복음수용과 전도로 한국교회가 세워져갔다. 

1882. 일본을 통한 기독교의 만남- 이수정의 개종

-하나님의 역사는 만주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다. 이수정은 1882년 신사유람단 일원으로 일본으로 건너감. 성경을 접하게 되고 읽으면서 개종하기로 결심하고, 1883년 4월 낙스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음. 전 일본기독교대회에 한국을 대표해서 참석하여 한국어로 대표기도를 하고 신앙고백을 하게 되면서 일본에 있던 미국선교사들은 한국선교에 대한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 
(사진-일본기독교대회에 참석한 이수정)

-1883. 이수정은 미국교회에 서신을 보낸다. 지난날 한국에서 생명을 무릎쓰고 천주교를 믿었던 이야기를 서두로 얼마있지 않으면 한국에서도 신앙의 자유가 올 것임을 얘기하고 미국교회에 선교사파송을 강력히 요청한 것이다. 다음은 이수정의 편지의 일부이다. “여러분의 나라는 기독교국가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우리에게 복음을 보내주지 않으면 나는 다른 나라가 그들의 교사들을 신속히 파송하리라 생각하며, 또한 그 가르침이 주님의 뜻과 일치하지 않을까 하여 걱정하는 것입니다. 비록 나는 영향력이 없는 사람이지만 여러분들이 파송하는 선교사들을 돕는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 편지가 미국 선교잡지에 소개되면서 미국선교본부는 언더우드를 선교사로 임명, 파송하게 된다. 피선교지의 사람들이 선교사를 요청하여 선교가 시작된 예는 선교역사가운데서 보기 드문 현상이다. 한국인들의 주체적이고 자발적인 복음의 수용에 대해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이러한 사람을 만난다는 게 선교사들에게 얼마나 큰 격려와 힘이 되었을까? 사역을 해 보지만, 이런 주도적인 몇 사람을 통해 사역이 힘있게 일어나게 된다. 

-1885. 마가복음서를 번역한 이수정. 성서공회 루미스목사와 함께 성경의 한국어 번역에 착수, 이른바 현토(縣吐)성서(한문 성서에 한국식 토를 단 것)인 4복음서와 사도행전을 완성하고 한글 마가복음을 출간하였는데, 이것이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등 최초로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이 가지고 온 성서로, 같은 해 만주 봉천에서 로스 목사와 백홍준이 만든 누가복음과 함께 최고(最古)의 한글판 성경이다. 한국에 들어가기 전에 일본에 들른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피선교지의 언어로 이미 성경이 번역되어 있음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는다. 선교지에 가서 성경을 번역하는 데에는 많은 노력과 시간이 걸린다. 그런데 한국인에게는 이미 그 나라 말로 성경이 번역되어 있었으며 오히려 선교사를 기다리고 있는 사정이었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 아니었겠는가! 그런고로 우리 땅에서는 복음의 씨가 속히 자라 열매를 거두기가 아주 손 쉬었다. 1885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이수정이 번역한 마가복음을 한아름씩 들고 한국으로 들어갔다. 이수정은 또 윤치호등 일본에 온 유학생들에게 전도하여 85년 7명이 모여 예배를 드린 것이 도쿄 유학생회의 모체가 되었다. 이듬해 귀국하였다가 수구파(守舊派)에게 살해되었다. (사진-이수정이 번역한 마가복음) 

이처럼 만주와 일본에서 동시에 일어난 한국인들의 자발적인 기독교의 수용과 전도, 그리고 선교사파송을 요청하면서 한국선교가 본격적으로 일어나게 될 것을 준비하였다. 


4. 초기선교사들의 입국과 활발한 선교사업

-본격적으로 외국선교사들이 입국하여 선교가 이루어지게 된 과정을 살펴보고, 초기선교사들과 그들의 선교사역을 살펴본다

-1882년 토마스선교사를 태운 제너럴셔먼호 사건으로 인해 미국은 군함을 이끌고 조선으로 와서 격전을 치른다. 이를 신미양요라 한다. 그 후 강압적인 한미수호통상조약을 맺게 된다. 이후 1883년 민영익을 대표로 한 견미사절단이 미국으로 간다. 거기에서 민영익은 미감리회의 가우처박사를 만난다. (사진-민영익을 대표로 한 견미사절단)

민영익을 만난 가우처박사는 한국선교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고, 한국선교를 위해 미국의 선교본부에 편지와 선교비를 보내게 되고 때를 같이 하여 이수정의 선교요청편지를 받으면서 이로 인해 본격적으로 한국선교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다. 미감리회는 1884년 스크랜튼(Wm. B. Scranton)박사와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그리고 스크랜튼의 어머니인 메리 스크랜튼(Mary. F. Scranton)이 한국선교사로 임명한다. 미 장로교회는 1884년 헤론(John W. Heron)을 한국최초의 선교사로 임명한다. 뒤이어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가 한국최초의 복음선교사로 임명된다. 하지만 한국땅에 가장 먼저 상륙한 선교사는 중국선교를 목표로 1883년 선교지로 떠났던 의사 알렌(Horace N. Allen)이었다. 

1884. 의료선교사 알렌(H.N. Allen) 미국공사관의 공의로 한국에 입국함
(사진-알렌,광혜원1,2,세브란스병원)
1883년에 중국에 왔지만 별다른 선교활동을 하지 못하던 알렌은 한국선교에 대한 소식을 전해듣고 한국으로 간다. 이로써 그는 한국에 상주하는 최초의 개신교선교사가 된다. 알렌은 이후에 벌어지는 수구파와 개화파사이의 싸움인 갑신정변에서 칼에 찔려 죽어가는 왕비 민비의 조카인 민영익을 살려주면서 왕실과 가까운 사이가 된다. 1885년 4월, 왕실은 알렌에게 한국최초의 서양 근대식병원인 국립병원 광혜원을 세우도록 허락한다. 이 광혜원은 후에 제중원으로 이름을 바꾸며 미국 실업가인 세브란스의 건축기금으로 현재의 연세대학교 세브란스병원이 되었다. 알렌은 왕의 어의가 되고, 광혜원은 이후에 들어오는 많은 선교사들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보호막의 역할을 하게 된다. 이같이 하나님은 국제수호통상조약이나 국내의 여러사건을 통해 선교사들이 들어오게 하시고, 사역을 시작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다.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을 통하면서도 인간이 계획하지 못했던 방법을 통해서 그의 목표를 이루어가셨다. 

1885. 4. 5 미국 장로교선교사 언더우드와 미국 감리교선교사 아펜젤러 부활주일에 한국 인천에 입국함. 이때부터 본격적인 한국선교가 시작된다. 그래서 1885년을 한국선교의 원년으로 부른다. 아펜젤러는 인천 제물포에 도착즉시 이같이 기도하였다. “우리는 부활주일에 여기 왔습니다. 이 날에 죽음의 철장을 부수신 주님께서 이 백성을 얽매고 있는 줄을 끊으시고 그들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얻는 빛과 자유를 누리게 하소서!” 언더우드는 독신이었고, 아펜젤러는 임신중인 아내와 함께 제물포항에 도착한다. 현지사정의 악화로 아펜젤러는 아내와 함께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가 2개월후에 입국하게 되고, 언더우드는 알렌의 도움으로 서울에 들어오게 된다. (사진-언,아,기도문)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1859.7.19~1916) - 미장로회의 첫 번째 복음파송선교사. 
(사진-언더우드1,2, 새문안교회, 벽돌교회, 그리스도신문, 언더우드관, 언더우드가계도, 언더우드가족, 언더우드 일가, 언더우드 일가의 무덤, 노춘경)


한국명 원두우(元杜尤). 1885년 아펜젤러와 함께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가 되어 한국에 와서 광혜원(廣惠院)에서 물리·화학을 가르쳤다. 한국선교를 결정한후 약혼자에게 한국으로 같이 가자고 했을때 no라고 하자 약혼을 파기하고 혼자서 한국으로 입국하였다. 이후 광혜원 여의사로 온 릴리아스 호턴과 결혼하고, 신혼여행으로 벽지순회전도여행을 다녀온다. 잘생겼다. 엘비스 프레슬리인줄 알았다. 1886년, 언더우드에 의해 국내에서 최초로 세례를 받은 사람은 노사도라고 불려지는 노춘경이다. 그는 알렌의 집에 갔다가 책상위에 있는 한문으로 된 성경과 책 한권을 몰래갖고(훔쳐서) 집에 가서 탐독하다가 예수를 믿기로 작정을 한다. 그리고 언더우드에게 와서 세례를 받고싶다고 한다. 당시 조선은 세례를 법적으로 금지하였다. 복음에 불타오르던 언더우드는 다른선교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노춘경에게 세례를 베푼다. 어느날, 한밤중에 서상륜이 언더우드를 찾아온다. 서상륜은 만주에서 로스선교사와 함께 성경을 번역하고 국내로 들어와서 황해도 솔내에 솔내교회를 세운 장본인이다. 서상륜은 솔내에 세례받기를 원하는 많은 이들이 있다면서 세례를 베풀어주기를 부탁한다. 그 때 언더우드는 이렇게 말한다. “누가 조선땅을 잠자고 있는 땅이요 미개한 나라라고 일렀는가! 누가 조선사람들을 게으른 백성이요 무지한 민족이라 하였는가!” 언더우드는 조정의 강압적인 태도로 인해 쉬이 결정하지 못하고 몇 개월이 흐르고.. 서상륜은 훗날 한국최초의 7인목사중 한사람이 되는, 동생 서경조를 비롯한 3명을 데리고 언더우드에게 다시 나타난다. “목사님, 목사님이 못오실 것 같아서 세례를 받으러 저희들이 올라왔습니다.” 세례를 베풀고, 이로 인해 언더우드는 담대함을 갖게 된다. “목사님, 솔내에는 세례를 받아야 할 사람이 또 있습니다.” 서상륜의 요청으로 얼마 후 언더우드는 솔내로 가서  세례를 베풀려고 하는데 한국에서는 세례가 금지되어 있어서 당시 중국영토였던 압록강까지 가서 세례를 집례한다. 70여명이 세례를 받은 것으로 나와있다. 언더우드는 단지 세례만 주었을 뿐이다. 이미 국내에는 자발적으로 믿고 전도하는 성도들과 교회가 세워져 있었다. 1887년, 14명의 사람들과 함께 자신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한국최초의 장로교회인 새문안교회가 시작된다. 그리고 솔내교회의 서상륜과 백홍준은 새문안교회의 초대장로가 된다. 1889년에는 기독교서회(基督敎書會)를 창설, 1897년《그리스도신문》도 창간, 1900년 기독청년회(YMCA)를 조직하였으며, 1915년에는 경신학교(儆新學校)에 대학부를 개설, 연희전문학교(오늘 연세대학교)로 발전시켰다. 성서번역위원회를 만들어 한글성서완역하는데 기여하다. 그는 "사람이 일을 아니하면 세상사는 재미가 없다"고 하면서 많은 일을 했다. 1916년 신병으로 귀국, 미국에서 죽었다. 그의 아들,손자,증손자까지 한국선교와 교육등에 헌신하였다. 언더우드의 부인 L S 호턴(한국 이름 호돈·好敦)은 광혜원 의사와 명성황후 시의(侍醫)로 인술을 펼쳤고, 언더우드 2세(한국 이름 원한경·元漢慶)는 3·1운동 당시 일제의 제암리 교회 학살사건을 폭로해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며, 연희대학교 명예총장이 된다. 언더우드3세(원일한)는 선교사요 교육학가로서 연세대학교에서 교수로, 총장서리로, 전쟁때에 UN통역으로 한미간 우호증진에 힘을 쏟았다. 그리고 얼마전(2002년) 언더우드4세는 지난 120년동안 한국에서 언더우드일가가 해야 할 일을 다했다면서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그들의 삶과 전부를 조선을 위해 기꺼이 바쳤다. 양화진에는 언더우드 4대의 묘역이 있다. 비문에 “언더우드 일가의 정신과 공적은 우리 겨레의 사랑과 함께 영원히 살아있을 것이다”고 적혀있다. 기독교기업인 e-land는 언더우드를 기념하여 옷의 브랜드로 만들기도 했다. 언더우드 한사람을 통해 한국초기 기독교와 교육, 사회전반에 걸쳐 많은 변혁과 변화가 있었다. 그 한사람뿐 아니라 그의 아내, 아들, 며느리, 손자, 손자며느리, 증손자에 이르기까지 한국을 위해 그들의 생명을 바쳤다. 양화진에는 언더우드 일가의 무덤이 있다.

언더우드의 기도- 오 주여,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여!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들을 옮겨 와 심으셨습니다.
그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주께서 붙잡아 뚝 떨어뜨려 놓으신 듯한
이곳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한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 사람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 있는지도,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 줄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주겠다고 하면
의심하고 화부터 냅니다.

조선 남자들의 속셈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나라 조정의 내심도 보이지 않습니다.
가마를 타고 다니는 여자들을 영영 볼 기회가 없으면 어쩌나 합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해야 할 일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이
볼수 있는 날이 있을 줄 믿나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조선의 믿음의 앞날을 볼수 있게 될 것을 믿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황무지 위에 맨손으로 서 있는 것 같사오나
지금은 우리가 서양 귀신 양귀자라고 손가락질 받고 있사오나
저희들이 우리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하늘나라의 한 백성,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나이다.

지금은 예배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의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


아펜젤러[Appenzeller, Henry Gerhard, 1858.2.6~1902] 
(아펜젤러,성서번역자들,조선그리스도회보,동상,정동교회1,2,최병헌목사,배재학당,무덤,비문,전도,엘리스 아펜젤러비문)


1885년 언더우드와 함께 미감리회 파송선교사로 한국에 왔다. 배재학당(培材學堂)을 설립하였다. 배재학당은 고종이 지어준 이름으로 정부의 정식인가를 받은 한국 역사상 최초의 근대식 교육 기관이다. 감리교 최초의 교회인 정동제일교회를 세웠다. 1887년 언더우드, J.S.게일 등과 함께 성경 번역사업에 참여하였다. 그는 암기 위주인 한국의 교육방식을 이해중심적인 교육방식으로 고치는 데도 크게 공헌하였다. 언더우드와 함께 YMCA를 설립을 주도했다. 그의 행적은 서울에만 머물지 않았다. 교회가 출범하기 전인 4∼5월에는 평양을 답사, 선교요충지임을 확인하고 돌아왔고 88년 봄에는 정부의 소환명령으로 중도 포기했지만 언더우드와 함께 북부지방 전도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이후에도 수차례 여행에 나서 평생 조선팔도중 6개 도에 걸쳐 7천2백리길을 돌았다고 하니 당시 교통사정등에 미루어 그 열정이 놀랍기만 하다. 1902년 목포(木浦)에서 열리는 성경번역자회의에 참석차 배를 타고 가다가 목포 앞바다에서 충돌사고로 익사하였다. 마포구 양화진외국인묘지에 묻혔다. 아펜젤러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쓰여있다.‘사자처럼 우람하고 여인처럼 우아한가 하면, 주님을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용감하게 덤벼드는 정열의 감리교인 아펜젤러. 평생을 두고 이웃만을 섬기며 주님을 증거한 하나님의 사람, 아펜젤러. 아펜젤러의 딸인 앨리스 아펜젤러는 조선에서 태어난 최초의 서양아이이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아버지가 생명을 바친 조선으로 다시 들어와서 이화여자전문학교 초대 총장을 지내며 이화여대의 기초를 마련했다. 앨리스 아펜젤러는 1950년, 한국전쟁을 넉달 앞두고 66세의 나이에 이화여대 학생들에게 설교하다가 죽음을 맞는다. 그의 묘비에는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노라 (Not to Be ministered Unto But to Minister)”고 쓰여 있다. 아펜젤러의 막내도 이화여대 교수로 선교에 헌신하였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한국선교사적으로, 그리고 교육, 사회적으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들이 인천 제물포항에 입항한 1885년을 한국기독교의 원년으로 본다. 지난 1985년에 한국 기독교 100주년 기념식을 했다. 그들 당대에만 아니라 그들의 아들, 손자, 증손자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한국사랑은 유별나다. 그들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이곳에 있다. 

존 헤론(John W. Heron, 惠論)
테네시 의과대학을 개교이래 최고의 성적으로 졸업한 수재이다. 학교의 교수로 남아달라는 학교당국의 제안을 만류하고 주님이 말씀하신 땅끝이 어디인지 찾다가 조선으로 선교지를 정하고 준비한다. 선교본부에 조선으로 파송을 요청하다. “의약품과 의료기기 얼마를 준비할수만 있다면 나는 지금이라도 당장 조선으로 떠나겠습니다.” 1884년 장로교 최초의 조선선교사로 임명받는다. 일본으로 갔다가 알렌과 언더우드,아펜젤러가 조선으로 입국한 후에 조선땅을 밟는다. 알렌의 뒤를 이어 2대 광혜원 원장을 맡아서 생명을 아끼지 않고 환자들을 돌보다가 죽음을 맡는다. “조선과 조선사람들을 더 ..더..뜨겁게 사랑하고 싶소. 그동안 다하지 못한 것...”병원의 조수들,집안일을 돕던 일군들 모두 불러모았다. “나를 사랑해주고 도와준 친구들 감사합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은 여러분 한분 한분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셨고 그 생명을 바치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다만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1890년 7월 26일 헤론은 죽음을 맞는다. 정부에서는 양화진언덕을 허락해준다. 헤론은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처음으로 묻힌다. 양화진은 한국을 사랑했던 선교사들과 외국인들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묘비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The son of God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라고 쓰여 있다. 헤론의 아내와 자녀들도 계속해서 한국의 선교를 위해서 삶을 드렸다.

메리 스크랜톤(Scranton, Mary Fletcher Benton, 1832-1909)
미국 감리회 여선교부 최초의 여선교사이다. 남편을 일찍 여의고 의사인 아들 스크랜톤선교사와 함께 아펜젤러부부와 함께 1885년 조선땅을 밟는다. 당시 조선여자는 이름도 없었다. 1886년, 메리 스크랜톤은 1명의 거지여자아이를 시작으로 여자학교를 설립한다. 그것이 오늘날 이화여대의 전신인 이화학당이다. 오늘날의 연세대,이화여대등 처음엔 몇 명으로 시작했다. 설립한 이의 비전이 결국 성취되어지는 것을 본다. 스크랜톤의 말이다. “..나는 믿고 있다. 이곳에서 이 땅 조선의 여인들이 인간의 권리를 찾는 문이 열리기 시작할 것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바라는 것, 말씀을 믿고 바라는 그것이 실상이 되어 든든한 건물이 세워지고 그 건물속에서 어느나라 여성보다도 당당한 딸들이 늠름하게 걸어나올 날이 있을 것이다. 이 일은 주님께서 시작하신 일이다.” 메리 스크랜톤의 비전이 오늘날 성취되어서 이화여대뿐 아니라 한국의 여성기독교육에 큰 변혁을 가져온다. 비문에는 “오늘 이 땅에 자유 사랑 평화의 여성 교육이 열매 맺으니, 이는 스크랜톤 여사가 이화동산에 씨 뿌렸기 때문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사진-메리스크랜톤,이화학당,비문, )

스크래톤선교사(Scranton, B. William, 1856-1922)
미 감리회 파송 선교사. 1885년 어머니 메리 스크랜톤과 아펜젤러부부와 함께 조선땅을 밟았다. 광혜원에서 의료를 했다. 왕립병원인 광혜원(제중원)은 사회 중,상류층을 위한 병원이었다. 스크랜톤은 버림받은 계급, 가난한 사람들, 그늘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조선사람을 향한 병원을 시작한다. 1885년, 세워진 무료병원이 제동병원이다. 고종임금은 스크랜톤의 한국이름인 시린돈의 ‘시’자를 따서 시병원이라는 이름을 하사한다. 스크랜톤은 상동교회를 세우고 가난한 서민들을 위해 의료로, 교육으로 삶을 드렸다. (사진-시병원, 상동병원교회, 알렌과 스크랜톤) 

호머 헐버트(Hulbert, Homer Bezaleel, 1863-1949)
육영공원교사로, 선교사로 와서 한국의 교육에 힘썼다. 그는 “한국이 살아갈 방도는 교육뿐이며, 한국을 정복한 민족(일본)과 대등하게 될 때까지 교육에 전념해야하며, 순수한 인간성을 무기로 능력을 갖추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교육 선구자로서 23년 간(1886-1909) 봉직하면서 한국의 문화, 역사 등 각 분야에서 한국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린 열정적 선교사였다. YMCA창설을 주도했으며, 조선의 국권회복을 위해 고종의 외교고문, 밀사로 활약하며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되기도 했다. 한국전통노래인 아리랑을 서양악보로 적은 사람도 헐버트였다. 태어난지 1살이 지났을뿐인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며 아리랑을 불렀다고 한다. 묘비에는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고 자신의 조국보다 한국을 위해 헌신한 헐버트... ”이라는 추모비와 “나는 웨스트민스터 성당보다도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I would rather be buried in Korea than in Westminister Abbey)”는 어록이 있다. 
(사진-헐버트,고종의 친서,비문)


셔우드 홀 가족(Sherwood Hall)
아버지는 제임스 홀이며 평양에서 의료선교를 하다 일찍 생명을 마감하고, 어머니는 로제타 홀이며 맹인 점자교육의 창시자이며 평양 기홀병원을 세웠다. 한국최초의 여의사 김점동을 길러내었다. 고려대병원의 모체인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를 세웠다. 아들 셔우드 홀은 조선에서 태어났다. 의사요 선교사로서 1932년 크리스마스 씰을 시행하여 결핵퇴치운동을 벌였다. (사진-크리스마스 실) 위 실은 우리나라 최초의 크리스마스 실로 첫 해(1932-33)의 남대문과 두번째 해(1933-34)의 미국의 실을 모델로 한 크리스마스 캐럴을 부르는 소년 소녀의 모습 (사진-셔우드홀,셔우드홀부부,홀과 거지들,평양병원,셔우드홀부부,최초의X-mas 실, 비문) 아버지,어머니,아들,딸,며느리 모두 양화진에 묻혔다. 


사무엘 F. 무어(Moore, Samuel Forman)
1892년 한국으로 들어왔다. ‘백정해방운동의 지도자’라는 호칭으로 불리웠다. 구원받았지만 당시 양반과 서민의 차별이 존재하였고, 특히 백정에 대한 양반의 차별이 대단하였다. 양반출신 교인들은 백정들과 함께 예배드릴 수 없다고 하여 교회를 분리하여 나가는 일도 있었다. 이에 무어선교사는 교회내의 백정차별을 없애고, 오히려 서민과 백정들을 향한 사역에 헌신하여 서민과 백정선교의 열매를 많이 맺었다. 1894년 승동교회를 세운지 4년이 지났을때 세례받은 108명중 30명이 백정출신이었고 1898년 132명의 백정이 세례를 받는다. 1920년 백정자녀들에 대한 교육열이 뜨거워져서 40%가 교육을 받았는데, 당시 일반인들의 자녀들중 5%만이 교육을 받았음을 볼때 대단한 변화였다. 그의 묘비에는 우리말로 “조선 인사를 사랑하였고 또 그들을 예수께로 인도하기를 원하였다.”라 기록되었다. 그리고 영문으로 '예수그리스도의 충성된 종, 아름다운 인격과 정신의 소유자, 한국인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을 몸소 실천하셨다'라는 기록도 있다.


하디(R.A.hardie)  
-캐나다 YMCA파송 선교사. 의사요 선교사로서 강원도에서 의료개척사역을 했으나 열매를 맺지 못함.
-1903년 원산에서 열렸던 기도회에서 하디선교사는 공개적으로 선교사로서의 자신의 무력함을 고백하는 통회의 기도를 하였다. 이것이 부흥운동의 발단이 되었다. “나는 3년동안 남감리회가 강원도에 세운 교회에서 애써 일해왔으나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한국교회가 부흥이 안되는 원인이 한국인에게 있는 줄 알았는데 그 원인이 나한테 있음을 알았습니다.아무리 수고하고 정성을 다해 일을 한다고 해도 성령의 임재와 능력이 없으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나의 교만과 완악함과 신앙의 부족을 회개합니다” 한 선교사의 고백적인 기도가 발단이 된 이 운동은 그후 평양일대와 전국 각지의 부흥운동과 회개운동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대부흥운동의 불길이 점화되었다.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길선주목사가 또 외국선교사를 미워한다는 것을 회개하였을대 회개와 부흥의 역사는 전국 각지로 퍼져가게 되었다. 사역자가 먼저 회개하고 무력함을 고백할 때 그때 인간의 역사는 그쳐지고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된다. (사진-하디,길선주,장대현교회1,2, ㄱ자교회, 하디무덤)

이 부흥운동은 한국에서만 머무르지 않고 만주와 몽고 북경지방까지 확산되었다 한다. 중국을 통해 기독교를 받아들인지 채 30년이 안되어 한국교회는 그 열매를 다시 중국에 전해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후에도 보겠지만 한국은 짧은 선교역사에도 불구하고 선교사를 파송하는 일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것으로 인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는 나라가 되었다. 


5.초기 한국기독교의 특징

1)성서중심적 특징 - 선교사가 한국에 들어오기 전에 먼저 성경이 번역되었다. 1887년 만주에서 로스와 서상륜, 백홍준, 이응찬등을 통해 예수셩교젼서가 번역되었고, 1885년 일본의 이수정과 루미스등을 통해 마가복음이 번역되었다. 그리고 권서인,매서인들을 통해 성경이 전달되어지고 성경을 통해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고 변화되게 된다. 이후에 계속되는 부흥에는 항상 성경이 중심이 되었다. 한국기독교에는 ‘말씀사경회’라는 독특한 모임이 있었다. 말씀의 기초위에 한국의 기독교와 교회는 견고히 세워질수 있었다. 오늘날에도 동일하다. 성경이 기초이다.


2)자발적 복음수용과 전도 - 일본에서 이수정의 요청으로 언더우드를 비롯한 미국선교사들이 조선으로 오게 되었고, 인쇄공 김청송의 요청으로 로스선교사가 즙안으로 가서 75명에게 세례를 베풀고, 서상륜등의 요청으로 로스, 언더우드가 소래교회로 가서 세례를 베풀게 되는 등 한국인들의 자발적인 복음수용과 요청으로 선교사역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한국최초의 교회인 소래교회등 교회를 설립하고 전도하는데 한국인들의 주도로 되어졌다. 1907년 대부흥성회가 있었던 장대현교회는 한석진을 비롯한 한국인들에 의해 세워진 교회였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복음을 받고 가만히 있을수 없었다. 생명을 무릅쓰고 복음을 전했고, 교회를 세웠다. 로스선교사가 선교본부에 보낸 편지를 다시 보자. “또한 한국인들은 중국인보다 천성적으로 꾸밈이 없는 민족이고 보다 종교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으므로, 나는 그들에게 기독교가 전파되면 곧바로 급속하게 퍼져나갈 것으로 기대한다..”주도적이며 자발적인 태도로 복음을 수용하고 가까운 이들에게로 가서 전도했던 모습이 오늘 우리에게도 있어야 한다. 


3)초기 한국선교사들의 헌신 - 알렌,헤론,언더우드,아펜젤러,제임스홀,스크랜톤,메리스크랜톤,헐버트등 한국에 온 선교사들의 생명을 드린 헌신으로 이 땅에 많은 믿는 자들과 교회의 열매를 맺게 되었다. 조선을 사랑하여 웨스트민스트사원에 묻히기보다 한국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고 했고, 내 생명이 천이 주어진다 해도 그 모든 생명을 한국을 위해 드리기를 원하노라고 했다. 때로는 한국에 온지 한달만에 죽기도 하고, 아내를 잃어 세 번씩 결혼하기도 하고, 1살된 아들이 먼저 죽어 떠나보내며 아리랑을 부른 선교사도 있었다. 자기들 생명보다 더 한국을 사랑했던 선교사들의 헌신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여기에 있다. 선교사들 당대에서만 아니라, 그들의 아내, 아들, 손자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한국사랑은 특별했다. 우리는 지금 그들의 헌신을 먹고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생명을 드려 섬길 사람들은 누구인가?


4)짧은 선교역사이지만 선교사를 파송함 - 한국교회는 초창기부터 외지선교에 대한 열망이 높았다. 독노회 창설로 조직을 정비한 장로교의 첫 사업중의 하나도 이기풍목사를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한 일이었다. 이어 1900년에는 한석진목사를 일본 유학생 선교사로, 최관흘 목사를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선교사로, 이듬해에는 김영제 목사를 북간도 선교사로 보내 동포선교를 벌였다. 물론 감리교도 만주에 이화춘목사 배성식·손정도 목사 등을 파송했고 기타 교파들도 자체 선교를 일찍부터 벌였다. 산동성선교를 위해 1913년 박태로 사병순 김영훈 등 3인을 정식 선교사로 산동성에 파송했다. 선교사를 받아들인 피선교지가 이처럼 빨리 선교사를 파송한 선교역사는 드물다. 로스의 예언이 적중했다. 오늘날 한국은 미국을 이어 세계 제 2의 선교대국이다. (사진-장로교초대7인목사중 한석진-왼쪽아래,이기풍-왼쪽두번째-을선교사로파송, 이기풍-우학리교회)


5)고난을 통해 순전한 믿음을 가짐
초기에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생명을 걸로 믿어야 했다. 한 사람의 크리스찬은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왜냐? 순전한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다른 동기가 없었다. 고난가운데 믿음이 순전해졌다. 오로지 구원하신 주님에 대한 감사와 아직 구원받지 못한 민족에 대한 측은한 마음과 사랑으로 복음을 전하고 주를 섬겼다. 이후 일제식민지기간과 한국전쟁등 특히나 고난이 많은 나라였다. 그 고난을 통해 순전해졌다.


6.초기 한국에 온 선교사들의 삶과 사역과 죽음(동영상)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1859~1916)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J. D. 언더우드) 

아펜젤러[Appenzeller, Henry Gerhard, 1858~1902] 
-앨리스 아펜젤러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습니다" 


메리 스크랜톤(Scranton, Mary Fletcher Benton, 1832-1909)
-“오늘 이 땅에 자유 사랑 평화의 여성 교육이 열매 맺으니, 이는 스크랜톤 여사가 이화동산에 씨 뿌렸기 때문이다.

H. B. 헐버트(Hulbert, Homer Bezaleel, 1863-1949)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고 자신의 조국보다 한국을 위해 헌신한 헐버트 ”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기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I would rather be buried in Korea than in Westminister Abbey)”

존 W. 헤론(John W. Heron) 
-양화진에 최초로 묻힌 의료선교사. 광혜원원장, 고종임금 시의(侍醫). 한국체류 5년 33세 별세 
-묘비문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The son of God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제임스 홀, 로제타 홀부부, 셔우드홀
-제임스 홀 : 평양개척 의료선교사. 광성학교 설립.
-“내가 조선인의 가슴에 청진기를 댈때 언제나 나의 청진기도 그들의 심장소리와 함께 두근거렸다. 나는 아직도 조선을 사랑한다”
-로제타 홀 : 평양 기홀병원설립. 맹인 점자교육 창시자
-셔우드 홀 : 크리스마스 씰을 발행하여 결핵퇴치운동 펼침
-마펫선교사 “홀은 주님의 명령에 따라 살다가 죽었다. 주님이 명령하매 한국에 기꺼이 왔고, 다시 명령하매 세상을 떠나 하늘나라에 갔다. 그는 위대한 신앙, 위대한 사랑, 위대한 자비의 사람이다.”

W.V. 존슨(Johnson, Walter Virgil, 1874-1903)
-한달간의 선교준비기간중 천연두로 생명을 잃음
-묘비문 "하나님께 죽도록 충성을 다하였습니다"

K.R. 켄드릭(Kendrik, Ruby Rachel, 1883-1908)
-1년동안 황해도 개성에서 여학교교사로 재직함. 급성맹장염으로 죽음.
-묘비문 “만일 내게 천의 생명이 주어진다 해도 그 모두를 한국에 바치리라"
-캔드릭의 유언 : "내가 죽거든 텍사스 청년들에게 10명, 20명, 50명씩 한국으로 나오라고 일러주세요" 


J.A 젠센(Jensen, Anders Kristian, 1897-1956)
-한국 전쟁에서 고난을 극복한 A.k.젠센.
-묘비문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 "사람은 자기의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고, 조문객은 거리를 왕래하며. 육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J.P. 캠벨(Campbell, Josephine Eaton Peel, 1853-1920)
-감리회 첫 여선교사 배화(培花)의 초석 캠벨
-'내가 조선에서 헌신하였으니 죽어도 조선에서 죽는 것이 마땅하다'라 

D. A. 벙커(Bunker, Dalziel A)
-최초로 애국가 만들고 옥중 전도 시작한 벙커 선교사 
-묘비문 “날이 새이고 흑암이 물러갈 때까지”


사무엘 F. 무어(1860~1906) 
-양반과 천민 신분 제도를 철폐하며, 한국서민을 사랑하여 백정선교에 헌신
-'예수그리스도의 충성된 종, 아름다운 인격과 정신의 소유자, 한국인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을 몸소 실천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