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 예방



75세 미만이면 이 운동하라...치매 막는 ‘뇌 회춘 법 3가지’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치매는 한번 걸리면 회복이 힘들다. 최고의 치료법은 예방에 있다. 치매는 두뇌 기능 이상에 의해 발생하므로 두뇌 활성화를 통해 신경세포와 이들의 연결망인 신경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것이 치매 예방의 첫걸음이다. 뇌 조직이 굵어지면 노화와 치매에 저항성이 생기는 원리다. 매일 진료실에서 치매 환자를 살피는 정지향 이대서울병원 신경과 교수는 최근 조선일보 의학 전문 유튜브 콘텐츠 ‘이러면 낫는다’에 출연하여 치매를 예방하고 뇌 노화를 늦추는 뇌 회춘법을 소개했다.

그래픽=이철원

◇인지 활동과 운동이 치매 백신

정 교수가 추천하는 뇌 회춘 3대 축은 인지 활동, 운동, 마인드 다이어트다. 새로운 정보를 접하고 새로운 학습을 하는 것은 뇌신경 세포를 연결하는 신경 돌기 효율을 증가시켜 뇌를 싱싱하게 만든다. 정 교수는 “뇌의 기능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언어 능력 회로와 손 운동 관할 영역”이라며 “이 둘을 동시에 사용하는 활동이 뇌 기능을 크게 증진시킨다”고 말했다. 즉 손으로 새롭게 얻은 정보를 써보거나 그려 보라는 것이다. 정 교수는 “매일 신문을 보고 새로 접한 것을 누가, 무엇을, 어떻게 등 6하 원칙에 따라 손으로 직접 1000자 정도로 쓰는 것을 추천한다”며 “실제 인지 기능이 떨어진 환자를 대상으로 이런 천자 쓰기를 시도한 결과, 석 달 후에 천자 쓰기 그룹의 인지 기능이 월등히 좋아졌다”고 말했다. 아울러 주 2회 이상 여럿이 모여서 사회 활동을 하는 것이 인지 기능 향상에 매우 도움이 된다고 정 교수는 전했다.

뇌 회춘 둘째 축은 운동이다.
뇌 무게는 1.5㎏밖에 안 되지만 심장에서 박출되는 혈액의 25%가 뇌로 간다.
그만큼 뇌는 혈류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작동한다.
운동은 이런 뇌혈류를 증가시킨다.
75세 미만이라면 매일 150분 정도의 경보나 배드민턴 같은 중강도 운동이 권장된다.
한 번 할 때 15~20분 정도 운동을 지속해야 효과가 있다.
달리기 같은 고강도 운동은 하루 75분 정도면 충분하다.
80세 이상이거나 지병이 있다면 집 안에서 가볍게 걷는 운동이나, TV를 보면서 하루 두 번 정도 30분간 제자리걸음을 해도 도움이 된다고 정 교수는 전했다.
정 교수는 “국민체조 영상 등을 틀어 놓고 매일 체조나 스트레칭을 하는 것도 좋다”며 “운동할 때 영어 공부도 같이 하는 식으로 머리를 쓰면서 운동을 하면 총명함을 늘리는 데 최고 효과를 낸다”고 말했다.

◇고혈압, 고지혈증 줄이는 식단

뇌 회춘 셋째 축은 음식이다.
고혈압과 고지혈증을 줄여서 궁극적으로 치매를 예방하는 이른바 마인드(mind) 다이어트다.
이는 뇌혈관 동맥경화를 줄여서 뇌혈류 감소로 생기는 혈관성 치매를 막는다.
매일 아몬드, 호두와 같은 견과류 한 주먹, 채소 한 움큼, 들기름 한 스푼 먹기가 권장된다.
정 교수는 “빨간 육류 섭취를 주 2회 이하로 줄이고, 대신 가금류와 생선을 자주 먹는 게 좋다”며 “베리류 과일을 주 3회 이상 섭취하기를 권한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뇌는 근육과 같아서 많이 사용할수록 튼튼해지고, 신경세포 사이사이에 시냅스라는 돌기들이 촘촘히 연결되어, 나이 들어도 남아 있는 한 개가 일당백의 역할을 수행한다”며 “인생 말년으로 갈수록 삶의 목표가 줄어드는데 죽을 때까지 치매에 걸리지 않게 살아보자고 마음먹으면, 하루가 바쁘고, 삶도 풍요로워진다”고 말했다.



치매 막는 ‘마인드 다이어트’... 뇌건강 식단 9계명

입력 2023.06.07. 20:37업데이트 2023.11.30.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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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사과나 감자만 먹는 원 푸드(one food) 다이어트, 고기만 먹는 황제 다이어트, 공복 시간을 늘리는 간헐적 단식, 특정 시간대에만 식사를 하는 시간 제한 다이어트 등 그동안 수많은 다이어트가 나왔다. 모두 효율적으로 체중을 줄이거나 살을 안 찌게 하려는 게 목적이었다.

이런 체중 관리 일변도의 다이어트계에 새롭게 등장한 것이 있다. 인지기능 개선을 위한 마인드(MIND) 다이어트다. 살이 아니라 뇌 건강이 목표다. 마인드 다이어트는 이른바 지중해 식단과 심혈관 질환 예방을 위해 나온 다이어트 합작품이다.

2015년 미국 하버드대와 러시대 메디컬센터는 시카고 지역 은퇴자 커뮤니티와 노인 주거 단지를 대상으로 치매가 없는 노인 1000여 명을 최대 10년 동안 추적하면서 그들의 식사 패턴과 인지기능 변화의 관계를 추적했다. 어떻게 먹어야 치매가 덜 걸리는지를 본 것이다. 그 결과 마인드 다이어트를 적극적으로 실천한 노인은 하지 않은 사람에 비해 인지기능 저하 속도가 현저히 줄었다. 이후 마인드 다이어트 식단에 대한 연구가 줄을 이었고, 인지기능을 높이는 식단으로 전 세계적인 관심을 끌었다.

그래픽=이지원

마인드 다이어트 핵심은 야채와 채소, 통곡물, 생선 중심의 지중해식 다이어트와 심혈관 질환 예방을 위해 고기를 피하는 식단의 조합이다. 산화 스트레스와 염증을 줄여 뇌세포를 보호하는 비타민, 카로티노이드 및 플라보노이드가 풍부한 식품을 많이 먹어 뇌 염증을 줄이고, 동맥경화를 줄여서 뇌혈류량을 늘리자는 의도다.

구체적인 지침을 보면, 통곡물은 하루 3회 이상 섭취를 권한다. 야채는 하루 한 번 이상 먹고, 특히 녹색잎 채소는 일주일에 6회 이상 먹어야 한다. 견과류는 일주일에 5회 이상, 콩은 4회, 딸기나 블루베리 등 베리류 과일은 2회 이상, 닭고기 살 등 가금류는 2회 이상, 생선은 1회 이상 먹기를 권한다. 식물성 기름 올리브 오일은 자주 섭취하는 게 좋다.

섭취 자제를 촉구하는 기준도 있다. 기본적으로 지방질 고기 속 포화 지방과 한 번 튀겼다가 식은 트랜스 지방은 피해야 한다. 아울러 단맛의 가공 빵과 과자는 일주일에 5회 미만, 쇠고기, 양고기, 베이컨, 소시지 등은 4회 미만, 치즈와 튀긴 음식은 1회 미만으로 섭취하길 권한다. 버터와 마가린은 하루 한 티스푼 이내로만 먹어야 한다.

알코올 중에는 적당한 양의 와인이 인지기능을 올린다고 해서 추천됐다. 개인의 알코올 섭취 능력을 감안해야 하고, 하루 한 잔 이내 섭취를 권한다. 마인드 다이어트는 뇌졸중 같은 뇌질환이 이미 있는 사람에게도 인지기능 감소를 줄이는 효과를 낸다.

다만 마인드 다이어트 식단의 식재료는 주로 스스로 조리해서 먹어야 하는 것이기에 식사 준비 시간이 더 늘어날 수 있다. 외식을 자주 하는 사람들은 실천이 힘들 수 있다. 고령자 스스로 요리를 해서 먹는다면, 인지기능 개선 효과는 더 올라가기에, 자신의 취향에 맞게 조리법을 개발해 마인드 다이어트를 즐긴다면, 나이 들어도 좋은 기억력을 오래 유지할 수 있다고 영양 정신학자들은 말한다.

☞마인드 다이어트

마인드(MIND)는 지중해식 식단과 심혈관 질환 예방 식단으로 기억력이나 신경기능 저하를 늦추자는 뜻의 영어 약자 조합이다. 맨 앞의 M은 지중해식(Mediterranean)이고, 맨 뒤의 D는 딜레이(delay, 지연)를 의미한다. 나이 들수록 감소하는 인지기능을 체내 염증을 줄이고, 뇌혈류는 늘리는 식사를 통해 최대로 지켜보자는 목적으로 개발됐다.





하나님의 섭리(攝理) God's providence


하나님의 섭리(攝理) God's providence


성경에는 "섭리(攝理)"라는 단어가 없다.
섭리란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그 세상을 하나님이 의도하신대로 다스리시고 인도하신다는 뜻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드러난다.

예를 들면 누가복음 15장에 작은 아들은 자기가 상속받을 유산을 미리 요구하고 그 모든 것을 갖고 아버지의 집을 떠나려고 할 때 아버지가 타이르고 깨우쳐서 안 된다고 하시지 않았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요구할 때 왜 안 된다고 하지 않으셨나?

원래 인간(아담과 하와)은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을 떠나려는 강한 욕망을 이기느냐 이기지 못하느냐에 따라 그 삶이 결정될 것이다.

하나님의 의도
하나님이 주신 환경
하나님의 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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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16:33 /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섭리(Providence)는 "모든 피조물과 그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가장 거룩하고 현명한 그리고 능력있는 보존과 통치"를 의미한다(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 제11문).

만약 '창조'가 세상을 존재하게 한 신적 능력의 독특한 행사였다
'섭리'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 동일한 능력의 계속적인 행사를 통하여 자신의 뜻을 따라
1. 모든 피조물을 존재하게 하시고
2. 모든 사건을 친히 간섭하시며
3. 만물을 그 정한 목적에 따라 운행하시는 것을 말한다.

세상과 인간의 기원과 그 유지는 하나님의 힘에 의존한다. 
우주는 결코 그 자체의 힘에 의하여 존속하거나 운행될 수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계속적을 그 세상을 유지하시고 새롭게 하시며 질서를 주실 수 있다.

성경은 다음과 같은 영역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적인 통치를 가르치고 있다.
1. 우주 전체에 대하여(시 103:19, 엡 1:11)
2. 물리적 세계에 대하여(욥 37:15,10, 마 5:45)
3. 동물계에 대하여(시104:21, 28, 마 6:26)
4. 국가의 일에 대하여(욥 12:23, 행 17:26)
5. 인간의 출생과 삶의 방향에 관하여(삼상 16:1, 갈 1:15~16)
6. 인간 삶의 외적인 성공과 실패에 관하여(시 75:6~7, 눅 1:52)
7. 외관상 우연적이거나 사소한 일에 관하여(잠 16:33, 마 10:30)
8. 의인을 보호하심(시 4:8, 롬 8:28)
9. 하나님의 백성들의 필요를 채워 주심(창 222:8,14, 빌 4:19)
10. 기도에 응답하심(삼상 1:19, 마 7:7, 눅 18:7~8)
11. 악한 자를 벌하심(시 7:12~13, 시 11:6)

하나님의 이러한 통치의 범위는 우주적이다. 
가장 하찮은 일(마 10:29~31)과 우연으로 보이는 일(잠 16:33), 그리고 사람들의 악한 행실(행 14:16)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선한 행실(빌 2:13), 이 모두 하나님의 통제 아래에 있다. 


하나님의 선하신 통치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인간 스스로의 행동과 자연적인 재난, 그리고 사탄의 행위일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통치하고 계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 에스더서의 분명한 메시지이다.
  하나님의 명시적인 뜻에 반역하여 일어나는 일일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그 일에 대한 자신의 뜻을 이루어 가신다(엡 1:11). 인간의 악행을 사용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시다(창 50:20, 행 2:23). 물론 하나님의 주권 하에서 인간이 범죄할지라도 하나님이 죄의 조성자는 아니시다(약 1:13~17). 하나님은 항상 죄의 심판자이시다.
  하나님은 악을 허용하시나(행 14:16), 그 악을 악으로 벌하신다(시81:11~12, 롬 1:26~32). 하나님은 악으로부터 선을 이끌어 내시며(창 50:20, 행 2:23, 행 4:27~28, 고전 2:7~8), 그 악을 통하여 사랑하는 자들을 훈련하시고 연단 시키신다(마 4:1~11), 히 12:4~14). 그리고 어느 날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그 모든 악으로부터 완전히 구원하실 것이다.(계21:27, 22:14~15).

  섭리의 교리는 우리가 결코 그 어떤 맹목적인 힘(운명, 우연 등)에 사로잡히지 않으며,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음을 알게 한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실상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사랑이기에 우리로 하여금 더욱더 하나님을 의지하고 복종하며 늘 기뻐하도록 하는 새로운 설교와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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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심음과 거둠의 법칙

모든 일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는 사실이 사람들에게 오해와 혼란을 불러 일으키곤 합니다.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주관하시고 섭리 가운데 다스리스는데 우리가 무엇인가를 할 필요가 있는가라는 의문을 갖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오해는 결국 믿음의 행위나 전도나 기도 등에 미온적인 태도를 갖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동을 통해 섭리하시고, 하나님의 섭리가 이루어지는 방편으로 우리의 기도를 활용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행동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심음과 거둠의 법칙을 만들어 두셨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두게 됩니다. 육체를 위해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둡니다. 물론 인생사가 꼭 심는대로 거둬지는 것은 아닙니다. 열심히 일을 해도 가난하게 사는 사람이 있고, 빈둥대도 편하게 먹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육체로 심고 썩을 것을 거둔다는 법칙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영적인 것을 심고 영원한 곳에서 누릴 영광을 얻게 된다는 데에도 변함이 없지요. 따라서 인간은 어떠한 형태로든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합니다. 어떤 일에 대해서는 이 세상에서 열매를 따기도 하고, 또 어떤 문제에 대해서는 죽음 이후에 열매를 따기도 할 뿐, 심는대로 거둔다는 법칙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6장에서 사도 바울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당장 열매가 안 보여도 때가 되면 열매를 거둘 날이 온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적극적으로 선을 행해야 합니다.

2. 결과를 위해 필요한 것, 행동

요셉의 일생은 하나님의 섭리를 설명하는 좋은 예가 됩니다. 그러나 심은 대로 거둔다는 측면에 있어서도 그의 일생은 좋은 예가 될 수 있습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결국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그의 형제들은 그의 앞에 와서 머리를 조아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오래전에 이미 그의 꿈을 통해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것이 실현된 것이었습니다. 그를 통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배양하시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결정은 변화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형제들의 행동과 그 결과를 유심히 보면, 하나님의 섭리대로 모든 것이 진행되면서도, 인간은 각자의 행동에 책임을 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르우벤은 장자였지만 아버지 야곱의 첩인 빌하와 통간을 하여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습니다. 르우벤 지파는 결국 장자권을 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12지파 중 가장 먼저 멸망하는 운명을 맞아야 했습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잔인하게 피의 복수를 함으로써 아버지를 곤궁으로 내몰았습니다. 그들은 그로 인해 지파끼리 모여 살지 못하고 다른 지파들 사이에 흩어져서 사는 운명을 맞이해야 했습니다. 또한 요셉의 형들은 동생인 요셉을 시기하여 살해음모를 꾸몄습니다. 반면 요셉은 많은 고난을 받았지만, 결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고 사람들을 해치는 일도 범하지 않았습니다. 결과적으로 요셉은 형들 위에 우뚝 서며 11번째 아들임에도 장자권을 얻게 되지만, 형들은 동생 앞에 찾아와 절을 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각자의 인간 행동에 대한 책임 역시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야곱과 에서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로마서 9:13에 보면 하나님께서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심지어 그것은 야곱과 에서가 아직 태어나기 전에 결정된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행위로 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대로 야곱이 택정된 것이지요. 그러나 야곱과 에서의 행위를 보면 여전히 각자가 심은 대로 거두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에서는 육체의 것만 소중히 여기고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을 무시하는 자였습니다. 반면 야곱은 이기적이고 욕심많은 부정적인 성정을 가졌지만, 하나님을 몹시 갈망하는 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갈망하는 야곱의 영적 심음을 영적 거둠으로 갚으시기도 하셨던 것입니다.

에스더서에는 하나님이란 단어가 전혀 등장을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기도라는 단어도 등장을 하지 않지요. 그래서 에스더서는 정경에서 빠질 위험에 처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에스더서는 하나님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어도 개인과 역사를 주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너무도 잘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보존하고 지키시려는 하나님의 섭리는 이스라엘이 아닌 페르샤에서도 여전히 이행되고 있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유대인을 멸족시키려 했던 하만은 자신이 만든 교수대 위에 매달리는 형벌을 당하게 됩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법칙이 여전히 유효한 것이지요.

심음과 거둠의 법칙은 성경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도 얼마든지 발견되어 집니다. 담배를 피우면 폐암에 걸리고, 탄 음식을 습관처럼 먹으면 대장암에 걸리며, 바이러스에 노출되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아파야 합니다. 이것은 성도라고 하더라도 여전히 피해갈 수 없는 법칙입니다. 신앙 생활에 있어서도 심음과 거둠의 법칙은 극명합니다. 말씀을 늘 접하는 사람은 말씀을 더 많이 알 수밖에 없고, 기도를 옳게 많이 하는 사람은 그만큼 하나님의 임재를 깊이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 안에서 선을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악을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픔이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을 선한 길로 인도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섭리 안에서 각자가 걸어야 하는 행로는 각자의 선택과 행동에 따라 달라집니다.

3. 가장 확실한 신앙 행동, 기도

성경은 하나님의 계획이 일정하게 고정되어 있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뜻은 결코 변화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또한 성도가 기도할 것을 명하며, 믿음의 기도가 결과를 바꿔놓을 수 있음을 명백히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명령하시며 또한 기도가 가치가 있는 것임을 보여 주신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의 기도를 수단으로 활용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4:14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행하신다 약속하셨습니다. 마태복음 7:7은 구하면 주실 것이요 찾으면 찾아낼 것이고 두드리면 열릴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야고보서 4:2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밝히고 있으며, 요한복음 16:2는 구하면 받을 것이고, 그로 인해 기쁨이 충만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시기 위해서 다양한 수단들을 활용하십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진공 상태에서 이뤄지지 않고, 피조물들과의 협력을 통해 이뤄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에 보존과 통치 뿐 아니라 협력이라는 주제를 아예 따로 넣는 학자들이 있는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주님의 섭리를 이루시기 위해 사용하시는 가장 중요한 협력 수단은 바로 성도들의 기도입니다. 물론 기도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섭리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어가는 과정에 성도들과 협력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음이 이유들로 인해 우리가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1)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기를 원하십니다.

2) 기도를 통해 우리와 깊이 교제하기를 원하십니다.

3)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기를 원하십니다.

4)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원하십니다.

4. 믿음과 기도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

성경은 구약과 신약에서 모두 기도가 하나님의 행동 방식을 변화시키는 행위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열재앙과 홍해가 갈라지는 놀라운 기적들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멸시하는 언행들을 서슴치 않았습니다. 입만 열면 원망투성이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분노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그들을 멸하겠다고 선언하신 적이 있으십니다. 그때 모세는 백성들에게 화를 내리지 말아달라고 기도를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게서는 뜻을 돌이키셔서 그 백성에게 벌을 내리지 않으십니다 (출 32:14).

역대하 7:14는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백성이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듣고 용서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의 약속을 주십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일 1:9) . 우리가 자백하면 하나님께서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자백하지 않으면 용서가 보장되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지요.

예수님께서는 고향 나사렛을 찾아가 말씀도 전하시고 치유도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소수의 병든 사람을 치료하는 것 외에는 하실 수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오락가락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과 기도라고 하는 행동을 통해서 일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앙의 행동이 행해지는 곳에서 일을 하시기 원하시는데, 그런 행동있는 신앙이 나사렛에서는 결여되었기 때문에 예수님도 일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 없음으로 인해 “amazed” 되셨습니다. 믿음이 너무 없어서 깜짝 놀라신 것이지요.

마태복음 14장은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어오신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을 본 베드로는 자신도 물 위를 걷고 싶다는 요청을 했고, 그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물위를 걸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위에 있던 모든 제자들로 하여금 물 위를 걷게 하실 수 있었지만, 베드로에게만 그 혜택을 주셨습니다. 오직 베드로만 주님께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혈루증으로 12년을 고통받던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나음을 얻으리라는 믿음으로 나음을 얻었고, 백부장은 시공을 초월하여 역사하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믿었으므로 예수님을 집으로 모시지 않고도 자신의 종이 치유되는 기적을 맛보았습니다. 예수님 앞에 나아오고 치유를 받지 못한 사람이란 도무지 없었습니다. 반면 예수님을 믿지 못하거나 구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치유함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치유하시기 원하실 때, 하나님께서 고치실 수 있다는 믿음과 고쳐주기를 간청하는 기도도 함께 원하십니다. 즉 목적을 원하시면서 수단도 함께 원하시는 것이지요. 기도는 하나님의 목적이 우리의 삶에 이루어지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간구하라고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결국 기도는 하나님께서 행하시기로 하신 일을 변경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의 기도를 통해 일하시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목적이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모세의 기도를 통해 백성들을 멸하지 않으신 것 역시, 모세의 기도에 의해 하나님의 뜻이 변경되었다기 보다는 모세의 기도를 통해 백성들을 용서하시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 정확한 것입니다. 다만 인간의 입장에서는 하나님께서 마음을 변경시킨 것으로 보이므로 성경에 그렇게 기록된 것 뿐입니다. 그것을 어려운 말로 신인동형론이라고 부릅니다. 인간이 알아듣기 쉬운 방식으로 설명을 하신 것이지요.

5. 기도보다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

우리를 당황스럽고 낙심되게 만드는 것은 우리의 기도대로 되지 않을 때가 많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런 일은 우리만 경험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의 잔을 피하게 해달라 세 번이나 기도했지만, 결국 십자가에 달리셔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야 모든 인류가 구원받는 궁극적 선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통해 그러한 아버지의 뜻에 전적으로 동의하였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그의 질병을 고쳐달라 세 번이나 기도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고 하는 말씀을 주시면서 바울의 질병을 그대로 남겨 두셨습니다. 그 질병으로 인해 사도바울은 엄청난 기적들을 행하면서도 자고하지 않고 겸손히 주님을 섬길 수 있었습니다. 치유의 능력이 자신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잊지않게 하는 역할을 그 질병이 해주었던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기도를 통해 스스로의 질환이 하나님의 은혜로 남겨진 것임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기도도 우리의 뜻대로 응답이 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기도응답에는 Yes, No, Wait의 세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는 주로 Yes를 원합니다. 그러나 No나 Wait 역시 하나님의 선하신 응답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실 기도에 대해 응답이 No일 경우가 더 멋진 응답일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지성을 뛰어 넘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보다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도에 대한 응답이 속히 오지 않는다 할지라도 낙심도 말고, 쉬지도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알 수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나면 응답이 No라 할지라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또한 응답이 되지 않는 기나긴 Wait의 시간 동안 우리는 하나님과의 친밀함이라고 하는 기도 본연의 목적을 이룰 수가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를 통해 우리와 아름다운 교제를 나누기 원하시며,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이루어 가시는데 우리를 파트너로 세우시기 원하십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섭리에 우리가 중요한 일부가 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배려입니다. 그 위대하고 아름다우신 초대에 우리는 어떻게 응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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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신앙은 천지만물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음을 고백한다.
창세기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시작된다.
예배마다 외우는 사도신경에도 천지의 창조주인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만유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기독교신앙의 첫째 조항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주만물을 창조했다는 신앙도 중요하지만 그것 못지 않게 중요하거나 어쩌면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계를 친히 섭리하신다는 신앙이다.

섭리란 무엇인가?
섭리를 막상 정의해 보라고 하면 잘 못한다. 중국에서 강의를 하니 '섭리'라는 말자체가 없다. 중국사람에게 없는 단어이다. 섭리란 삼위일체 하나님이 그가 지으신 모든 세계를 그가 계획하신 목적에 이르도록 그의 주권과 사랑과 지혜와 권능과 공의로 계속하여 보존하시고 다스리시고 인도하시는 행위를 가르키는 말이다. 섭리란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존재가 창조의 목적에 이르도록 친히 당신의 주권과 사랑과 지혜와 능력과 공의로 계속하여 보존하시고 다스리시고 인도하신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섭리의 신앙이다.

'섭리'라는 말은 성경에는 나오지 않는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신앙은 완전히 성경적인 신앙이다. 사람은 옛날부터 이 세상이 어떻게 운행되며 어떤 원리에 의해 다스려지는가 하는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물음에 대해 여러가지 대답들을 제시해 왔다.

그 중 하나가 '이신론'이라 불리는 것이다. 이신론은 신이 이 세상을 창조하기는 했으나 창조한 후에는 세상에 대해 더이상 상관하지 않으며 관심도 가지지 않고 이 세상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면 이 세상은 어떻게 운행되어 가느냐 하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때 세상에 부여하신 원리에 의해 운행된다는 것이다. 세상을 다스리는 신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원리가 곧 신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신론이다. 이신론의 '이'자는 둘 이가 아니라 이치 이(理)이다. 원리에 의해 다스려지는 것이지 신이 이세상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이신론이다. 이신론은 세상이 자체의 원리에 의해 돌아가기에 하나님이 설 자리가 없다.

세상이 어떻게 운행되며 어떤 원리에 의해 다스려지는가 하는 다른 하나의 대답은 숙명론이다. 숙명론은 세상만사 세상자체의 인과율, 원인과 결과의 법칙에 의해 다 결정되어 있다는 사고이다. 숙명론이 우리가 말하는 예정론이 아닌가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둘은 전혀 다른것이다. 예정론은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고 안받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안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 예정론이다. 숙명론은 세상 자체의 인과율에 의해 모든것이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그곳에도 하나님이 끼여들 여지가 없다. 예정론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말하기에 완전히 다른 것이다.

또 다른 하나의 대답은 우연론이다. 우연론은 이 세상이 어떤 일정한 목표나 방향을 향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법칙에 의해 지배되는 것도 아니라 그저 순간순간의 우연에 의해 이끌려 진다는 주장이다. 그밖에도 이세상은 악이 지배하거나 악신에 의해 다스려진다고 보는 악지배론도 있다. 이런 4가지 사고들은 서로 다른것이지만 공통점은 다같이 하나님이 간섭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세상자체의 원리, 자체의 인과율, 우연, 악이 지배하는 세상이라는 사고들에는 하나님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 그 모든 주장들은 거짓된 것이다.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신앙

성경은 이러한 4가지 이론들을 일시에 거부하는 섭리신앙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하나님이 모든것을 창조하시고 모든것을 존재하게 하시고 모든것을 다스리시고 모든것을 창조의 목적에 이를때까지 친히 인도하시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섭리신앙이기에 앞서 말한 모든 사고는 잘못된 것이라는 것이다.

욥기 33장 4절은 "하나님의 영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를 지으셨을뿐만 아니라 우리가 계속해서 살아있게 하시는 이도 하나님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느헤미야 9장 6절은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라고 말하고 있다. 지으시기만 하고 너희들이 알사서 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계속 살아있는 것과 보전되는 것은 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것이다. 히브리서 1장 3절에서도 만물을 붙드는 것은 주님이라고 증거하고 있고, 사도행전 17장 28절에서는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고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이세상 만물을 단지 존재하게 하시고 살아 움직이게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것을 세상자체에 맡겨놓지 않으시고 간섭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시편 103편 19절을 보면 "호와께서 그의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의 왕권으로 만유를 다스리시도다"라고 하신다. 역대상 29장 12절은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물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사람을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 한사람 한사람에 대해 무관심하시며 각자가 가는대로 내버려두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시편 113편 6-9절을 보면 시편기자는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가난한 자를 먼지 더미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더미에서 들어 세워 지도자들 곧 그의 백성의 지도자들과 함께 세우시며 또 임신하지 못하던 여자를 집에 살게 하사 자녀들을 즐겁게 하는 어머니가 되게 하시는도다 할렐루야"라고 말씀하고 있다. 시편 146편 6-9절을 보면 "여호와는 천지와 바다와 그 중의 만물을 지으시며 영원히 진실함을 지키시며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정의로 심판하시며 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이시로다 여호와께서는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는도다 여호와께서 맹인들의 눈을 여시며 여호와께서 비굴한 자들을 일으키시며 여호와께서 의인들을 사랑하시며 여호와께서 나그네들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들의 길은 굽게 하시는도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외에도 성경은 기쁨을 주시는 이도 하나님이시고, 위로도 주시는 이도 하나님이시고, 힘을 주시는 이도 하나님이시고, 복을 주시는 이도 하나님이시고, 단잠을 주시는 이도 하나님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사도바울은 당대의 숙명론자들이라 할수 있는 스토아 학파들과 우연론자라 할수 잇는 에피쿠르스 학파사람들이 우글거리는 아테네에서 그들에게 정면으로 맞서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증언했다. 사도행전 17장 24절에는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이라고 했으며, 25절 뒤에는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라고 했으며, 26절에는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라고 함으로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과 흥망성쇠 또한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는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렇듯 하나님은 그가 지으신 세상만물을 그가 계획하신 목표에 이르도록 주권적인 사랑과 지혜 능력 공의로 계속해서 보존하시고 다스리며 인도하신다는 것을 믿고 고백하는 것이 섭리신앙이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섭리신앙과 어긋나는 언어과 행동은 삼가해야 한다. 예를 들면 '팔자소관'이라는 말이 있다. 예수믿는 사람도 별생각없이 그렇게 말하는데 우리가 할 말이 아니라 숙명론자들이나 사용할 말이다. 결코 숙명론자가 될수없는 우리가 쓸 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팔자에 따라 사는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계획에 따라 사는 사람이다. 앞으로 '팔자소관'이라는 말은 우리입에서 일체 사라져야 한다. 또 '재수가 있다, 없다' 라든가 '운이 좋았다, 나빴다'는 말을 사용해서도 안된다. 그런 말들은 우연론자들이 할수 있는 말로서 우연론자가 될수 없는 우리들이 사용할수 있는 말이 아니다. 섭리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에게 '재수'니 '우연'이니 하는 말은 모순된것이다. 우리는 재수가 좋아서 존재하거나 운이 나빠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속에 살아왔고 지금 이자리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경우에 할수 있는 유일한 말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합니다"라는 말 밖에 없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고 감사할수 밖에 없는 일들이다.

상당수의 우연론자들이 빠질수 밖에 없는 길인 쾌락주의 또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섭리신앙과는 조화할수 없다. 사람의 일정한 목표도 삶의 법칙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그때그때 최대한의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현명한 삶으로 여겨질지 모른다. 그래서 옛날 에피쿠르스 학파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쾌락주의에 빠졌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계획하신 영원히 복된 삶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는 신앙인이기에 순간순간의 무절제한 쾌락추구는 단호히 배제해야 한다. 우리는 영원한 복락의 삶을 향하여 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우리에게 약속된 삶이다.

마찬가지로 무당을 불러 푸닥거리로 악귀를 내쫓겠다고 하는 행위는 말할것도 없고, 점이나 토정비결을 보러 다니는 것은 결단코 그리스도인들이 할 일이 아니다. 그리고 신앙의 탈을 쓰기는 했지만 사실은 점치는 행위나 다름없는 예언기도를 받겠다고 여기저기 쫓아다니는 일은 섭리주이신 하나님을 모독하거나 우리의 삶을 온전히 하나님의 섭리에 맡기지 못하는 불신앙적인 행위임을 알아야 한다.

섭리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언제 어디서 무슨일을 하든지,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만사가 내뜻대로 되든지 안되든지, 장래일을 알지못하든 상관없이 언제나 옳으시고 선하신 하나님에 대한 흔들리지 않은 신뢰속에서 평안함을 누리고 승리하는 삶을 살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것이 기독교신앙이고 섭리신앙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법 4가지

그런데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일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인도이다. 우리의 삶을 하나님이 목적하시는 곳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몇가지 방법을 이해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신학자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법을 4가지로 정의했다. 허락, 방해, 방향, 결정이다.

1. 허락

하나님께서는 어떤때는 우리가 하는 일을 하는대로 허락하심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우리가 가는 길과 하는 일이 하나님이 뜻하신바와 일치할때는 그대로 내버려 두신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로 가기에 허락하신다는 말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인도하는 방법이다. 하나님의 이러한 인도방법을 안다면 만사가 내가 원하는대로 순조롭고 형통할때 내가 잘하는 것이라고 교만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이 허락하셔서 그런것이라는 겸손함과 모든것을 하나님께 감사를 돌리는 믿음의 자세를 가지게 된다. 하나님이 허락하심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것을 모르면, 잘되면 자기가 잘나고 잘해서 그런것이라고 교만해지기 쉽다. 사람은 교만해지면 하나님을 잊어버린다. 그래서 하나님은 교만을 가장 싫어하신다.

2. 방해

하나님은 어떤때는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을 막으심으로서 우리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로 인도하시기도 한다. 잘생각해 보니 이것이 제일 좋고 기도해 보아도 좋은것 같아도 그것으로 가는데 하나님이 막으신다.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안된다. 할수없이 갈수있는 다른 길로 가면 된다. 하나님이 다 막으셔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로 가도록 모는 것이다. 방해도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법이다. 예를 들면 사도바울이 아시아에서 선교하려고 애를 썼는데 길이 다 막혔다. 성령께서 길을 막았다. 마게도니아 사람이 환상중에 나타나 와서 도와달라고 하는 것을 보고 성령의 지시하심으로 깨닫고 마게도니아로 간다.

그래서 유럽전체가 복음화되는 유럽선교의 길을 연 것이다.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신것이다. 하나님은 그것을 위해 다른데로 가는 길을 막으셨다. 하나님의 이러한 인도방법을 이해한다면 무엇이 우리뜻대로 되지않을때 좌절하고 원망하고 하나님을 의심하고 버리지를 앓고,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 보다 하고 하나님의 뜻을 다시 생각하고 내가 가야할길을 보여달라고 기도하게 되고 그럼으로 응답을 받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로 감으로 형통의 역사가 일어난다. 이러한 하나님의 인도방법을 알면 실패해도 낙심하지 않는다.

3. 방향

어떤때는 하나님이 기뻐하셔서 허락하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좋지못한 일임에도 막지 않으시고 내버려 두셔서 마지막에 그 결과를 하나님이 원하시는데로 방향을 바꾸어 놓으셔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더 큰일을 이루는 방법으로 인도하신다. 그것을 방향이라고 한다.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요셉이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팔았다. 하나님이 좋은 일이라고 허락하신 것이 아니다. 나쁜일임에도 하나님이 막지도 방해하지도 않으셨다. 그렇게 함으로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고 7년간의 기근에 잘 대비하여 애굽의 백성을 살리고 인근의 백성들도 살리고 아버지와 집안형제를 살리는 역사를 이루었다. 하나님은 이렇게도 인도하신다.

이러한 하나님의 인도방법을 이해할때 이세상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부조리와 악때문에 분노하고 하나님이 계신지 안계신지 의심하지 않게된다. 도대체 왜 하나님은 저런 악당을 안데려가시고 내버려두시는가, 하나님은 무엇을 하시는가, 저렇게 착한 사람이 고생을 당하게 내버려 두시는가 하고 이 세상의 악과 불의와 부조리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고 의심할수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방법을 이해한다면 이 세상에 난무하는 악과 부조리에도 불구하고 기다릴수가 있다. 하나님이 더 크신 선을 이루려고 하시는구나 하며 참고 기다릴수 있다. 이러한 섭리신앙이 없으면 세상이 조금만 어둡고 어지롭고 잘못되면 금방 왜 그런가 불평하고 원망하고 의심하게 된다. 세상이 뒤숭숭해도 하나님을 믿고 기다리게 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하나님의 인도방법을 이해하는 것이다.

4. 결정

하나님이 근본적으로 우리를 향하신 목적이 있다.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안에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다. 이제 우리가 신앙의 양심을 가지고 판단하고 자유롭게 행동한다. 그러한 자유로운 행동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큰결정은 변함이 없다. 하나님의 이러한 인도방법을 받아들이면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 예수안에서 얻는 선물이 자유함이다. 진리가 너희들을 자유케 하리라고 하셨다. 다는 아니지만 늦게 예수믿은 사람을 보면 예수믿기전에는 자기 멋대로 살다가 예수믿고 작은것 하나도 자기마음대로 못한다. 어떤 넥타이를 매고 나갈까 또는 오늘 점심은 무엇을 먹을까 같은 것도 반드시 기도하고 묻는다.

그렇게 까지 할 것 없다. 그런것은 우리 구원과 아무 상관없다. 그런것들은 마음대로 하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다. 우리가 마음대로 하지만 구원못받게 하지는 않으신다.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결정은 이미 이루어지신 것이고 그 은혜안에서 자유함을 주신것이다. 서울에서 부산가는 KTX를 탔다. 그러면 기차안에서 앞으로 가든 뒤로 가든 기차는 여전히 부산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다. 아무리 기차가는 방향과 반대편 좌석에 앉아도 부산에 간다. 하나님이 이미 우리를 천국가는 기차를 태워주셨다. 기차안에서 마음대로 자유롭게 다니라는 것이다. 기차안에서 마음대로 왔다갔다 한다고 내리라 하고 바깥으로 던지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지금까지 잘되던 일이 갑자기 안될때

이러한 하나님의 인도 섭리를 믿는다면 우리는 어떤일을 바라거나 행할때라도 그 일때문에 조바심내거나 불안할 필요가 없다. 일이 뜻대로 안된다고 낙심하거나 죄절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인내할수 있다. 주위에서 옳지못한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의심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더 큰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기를 기다릴수 있게 된다. 섭리신앙은 비록 지금 내가 이해할수 없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만사는 하나님에게 달려있고 하나님은 언제나 변함없이 선하시고 지혜로우시고 능력있으시고 공의로운 분이고 지금 일이 내뜻대로 안되는 것은 내뜻이 하나님의 뜻에 함당하지 않거나 아니면 하나님이 더 좋은 것을 주시려고 하신다는 것을 믿을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섭리신앙이고 그런 섭리신앙을 가진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수 있다.

어떤 신학자는 "그리스도인이라 함은 사건들의 이해되지 않음을 견딜수 있음을 의미한다"고 정의했다. 의미심장한 말이다. 그리스도인이란 뭔가하면 사건들이 이해되지 않은 일들이 일어나는데 어떤 사건은 우리도 이해하지만 어떤 사건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사건들의 이해되지 않음을 견딜수 있음을 의미한다.

딸이 셋이 있고, 48세에 얻은 늦둥이 아들이 있다. 아들이 어렸을때 즐겨하던 장난은 차를 타면 차창을 열고 닫는 버튼을 누르며 장난하는 것을 좋아했다. 차만 타면 장난한다. 어느날 보니 장난을 치다가 창을 열고 몸이 절반이 나가있었다. 그 다음부터는 아들이 장난치기 전에 운전석에 있는 잠금버튼을 누른다. 그러면 아들이 아무리 버튼을 만져도 창이 꼼짝도 않는다. 아들은 아무리 버튼을 눌러도 창이 움직이지 않자 나중에는 짜증이 나서 버튼을 두들기고 운다. 그것을 보면서 섭리신앙을 다시 생각했다.

우리도 살다보면 지금까지 잘되던 일이 갑자기 안될때가 있다. 갑자기 왜 그런지 이해할수 없다. 그런데 잘 움직이든 창이 갑자기 움직이지 않는 뒤에는 아들을 보호하려는 아버지의 사랑이 있다. 그냥 내버려 두면 무슨 화를 당할지 모르니 아들을 보호하려니 창이 움직이지 못한다. 우리도 만사형통하다 보면 교만해져서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브레이크 고장난 기관차 처럼 무슨 사고가 날지를 모르기에 미리 하나님이 브레이크를 걸어주신다.

그럴때는 하나님의 뜻과 다르게 살아온 것이 아닌가, 내가 지금 해온일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법이 아닌것이 아닌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기에 뭔가 손을 쓰신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수 있다. 그런 생각을 하게 하는 것이 섭리신앙이다. 우리는 역경속에서 오히려 하나님께 돌아서고 하나님을 생각해야 한다. 너무 만사형통하면 하나님을 다 잊어버린다. 그것이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잊어버리지 않도록 신앙의 길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도록 하나님이 붙들어 주시는 것이다. 요즘에 사업이 잘안되거나, 갑자기 집안의 우환이 겹치고, 뜻하지 않는 일이 일어나 속이 상한 분들은 그 뒤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과 더 큰 하나님의 선한 계획이 있음을 믿고 위로받고 힘을 내기 바란다.

우리의 위대한 종교개혁자 칼뱅 선생은 이런말을 했다. "번영할때에는 감사한 마음을, 역경속에서는 인내를, 미래에 관해서는 염려로 부터의 놀라운 자유를 얻게하는 것"이라고 섭리신앙의 요점을 정리했다. 참 작절한 정리이다. 번영할때는 자기가 잘나서 그런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로 허락하심으로 그런것으로 믿고 감사할줄 알고, 역경속에서는 하나님의 더 크고 좋은 계획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 뜻이 나타나도록 기다리고 인내하고, 미래는 우리가 알지못하는 세상이기에 아주 불안해진다. 그러나 미래의 염려로 부터 놀라운 자유를 얻게 해주는 것이 섭리신앙이다. 그 보다 1,500년전에 사도 베드로가 베드로전서 5장 7절에서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고 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이 돌보고 계신다. 돌보고 계시지 않는 것 같아도 돌보고 계신다. 염려하지 말고 모든것을 하나님에게 맡기고 늘 순종과 평안함 가운데 사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고 그렇게 우리를 해주는 것이 섭리신앙이다.

전도서 11장 5절을 보면 "바람의 길이 어떠함과 아이 밴 자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지를 네가 알지 못함 같이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네가 알지 못하느니라"이라고 했다. 뒤집어 말하면 우리가 알지못해도 하나님은 만사를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간다고 하신다. 이사야서 55장 8절에는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했다. 본문 말씀에서 사도바울은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라고 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길은 우리의 길과 다르다고 했다. 하나님의 판단은 우리 생각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은 모든 일을 선하게 아름답게 이루어가고 계심을 믿으라고 하신다. 신명기 32장 4절은 "그는 반석이시니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라고 말한다.

이수영 목사의 몇가지 경험을 통한 '섭리신앙' 적용

1. 군대경험

군대생활을 공군에서 했다. 공군장교는 4년 복무로 길었다. 그럼에도 공군장교로 간 것은 학과 4년 선배가 공군장교로 입대하여 공군사관학교에서 교관으로서 철학을 가르쳤다. 그가 제대할때 내가 군대에 가야 할 때가 되었다. 선배는 내가 공군에 오면 자신의 자리에 오면 된다고 했다. 4년이라는 시간이 길어도 전공과목을 생도들에게 가르치고 대학원을 다니면 절대 손해보는 것이 아니라 이익이라는 말에 넘어가 공군에 들어갔다.

군대에 들어가서야 군대보직이 선배가 결정하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공군사관학교에서 교관이 되려면 교육특기를 얻어야 한다. 다행히 교육특기를 받고 2달간 공군대학에서 교육장교로서 전문훈련을 받고 공군사관학교 배속이 되었다. 학교내 교수부로 발령나면 선배와 같이 가르칠수가 있었는데 생도전대에 발령이 났다. 생도들의 생활훈련과 군사훈련을 담당하는 곳이다. 직함은 군사훈련 교관으로 생도들과 4년간 연병장에서 뛰게 되자 앞이 캄캄해졌다.

더구나 입대한 68년에는 1.21사태가 있었다. 그래서 공군역사상 최고의 고된 훈련을 받았다. 공군장교 입대 몸무게 한계가 53키로인데 53.5키로로 입대한 약한 몸으로 훈련받기가 힘이 들었다. 교관을 시작했는데 대통령 특명으로 전군정예화를 위해 공군에도 공수훈련과 유격훈련을 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차출되어 실미도로 유명한 오류동 공군정보부대에서 훈련을 받고 부대에 돌아와 생도들을 훈련시켰다. 엄청난 훈련을 받자 세상이 무서운것이 없어졌다. 내성적이고 부끄러움을 잘타는 성격인데 매일 연병장에서 수백명 생도들에게 호령하고 굴리고 뛰게했다.

당시에는 너무 힘들었지만 지나고 나서 돌이켜 보니 그 일을 통해 몸이 건강해지고 매사에 자신감이 생겨 어떠한 역경도 정면돌파할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성도들을 훈련시키면서 많은 사람앞에 서서 이야기하는 훈련을 동시에 받았다. 돌이켜 보면 목사를 만들려고 하나님이 그런 경험을 미리하게 하신 것이다. 처음에는 일이 안되고 뒤틀리는 것 같지만 하나님은 그런것을 통해서도 더 큰일을 계획하시고 우리를 더 귀하게 쓰시려고 한다는 것을 확신하게 하는 경험이다. 당장 어려운일이 생기고 귀찮은 일이 생기고 힘들다고 해도 잘 견디면 하나님이 크게 쓰실날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2. 장신대 교수 경험

장신대에서 교수생활 16년을 했다. 군대에 있을때는 엄하고 무서운 교관이었다. 그때 얻은 교육철학은 교육자는 학습자가 학교문을 나가기 전에 학생으로 부터 평가를 받고 칭찬을 받고 인기를 얻으려고 하면 교육자로서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교육자에 대한 진정한 평가는 학습자가 졸업한 이후에 주어지는 것이다. 유학을 마치고 신학교에 학생들을 가르쳤다. 군대에서 얻은 교육철학으로 신학생들을 가르치니 인기가 없었다. 더우기 운동권 학생들을 반대해여 운동권들의 공격을 받았다. 장신대 16년간이 즐겁기 보다는 운동권 학생들과 싸우면서 보냈다.

돌이켜보니 이러한 장신대 16년 경험이 하나님이 준비하신 것이다. 연단시킨 것이다. 새문안교회에서의 목회를 위해 연단시킨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새문안교회에서 가보니 쉽지 않았다. 공군사관학교 교관으로서의 훈련경험과 장신대에서 교수하면서 싸웠던 경력이 없었다면 새문안교회 목회가 힘들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새문안교회 힘든 목회를 잘견디기 위한 훈련을 하나님께서 시키셨다는 생각이 든다.

3. 실패의 경험

제 자랑이 아니라 제가 각종시험에서 떨어져 본적이 없다. 그런데 운전면허 시험에서 떨어졌다. 운전을 못해서가 아니라 너무 잘했다. 그런데 앞에서 긴장하여 헤매는 아주머니에게 훈수하다가 괘심죄로 떨어진 것이다. 실패라는 것은 한번도 겪어보지 않아 떨어지니 기분이 이상했다. 시험장을 나오며 문득 생각나는 것은 "네가 실패한 사람들의 마음을 아는가" 하는 음성이 들렸다. 교회와서 생각해보니 교회안에도 실패를 겪은 사람이 많았다. 목회를 하려면 실패자들의 마음을 이해하는것이 필요할텐데 모르고 있었다. 그때서야 그것도 목회위해 준비하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4. 암의 경험

1997년 대장암 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1년을 쉬면서 항암치료를 받았다. 대장암으로 판정받는 순간 "왜 접니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이때까지 하나님이 하지말라시는 것을 안하고 반듯하게 살아왔는데 왜 내가 암이 걸려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장신대 교수생활을 하면서 아쉬운것은 신학대학 교수가 기도하고 성경을 볼 시간이 없었다. 너무나 가르쳐야 할 과목과 강의시간이 많었다. 주당 25시간을 가르쳤다. 그래서 3시간 이상을 잘수 없을 정도였다. 교수중 어떤 분은 설교하다가 "죄를 안지고 감옥에 갔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감옥에 가면 남는게 시간이니 기도하고 성경보겠다는 것이다. 나도 같은 심정이었다. 그런데 암걸리고 1년동안 투병하다보니 시간이 남았다. 눈뜨면 기도하고 성경보고 기도하고 그자리에서 잠들고 깨면 기도하고 성경읽었다. 기도하고 성경읽기 위해 감옥가고 싶다는 것이 이루어졌다.

그러다가 큰 은혜를 받았다. 하나님이 암에 걸리게 하신 이유를 알았다. 다른것이 아니라 육심의 암을 통해 내속에 숨어있는 영적인 암을 발견하게 하셨다. 당시에 동료교수중에 저에게 불편하게 하는 교수가 있었는데 용서를 해야지 하는데 사실은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하고 있었다. 학생들에게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설교하면서 나는 동료교수를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하고 있는 것이 내속에 숨어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눈뜨는 첫시간에 그분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하게 되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이 말씀은 그렇지만 실제는 어떻게 할수 있겠는가 했던것이 가능해졌다. 내힘으로는 안되는데 셩령님이 원수를 사랑하게 해주고, 가장 미워하는 사람을 위해 가장 많이 기도하게 하는 은혜를 체험하니 얼마나 기쁘고 감격스러운지 모른다. 놀라운 은혜였다.

그 이후로 암은 아무나 걸리는 것은 아니다. 진짜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사람이 암이 걸리며, 암은 은혜받는 기회라고 늘 간증한다. 저는 암이 안걸리면 큰일날뻔 했다고 고백한다. 그렇다면 영적인 암을 숨기고 목사로서 살았을 것이 아닌가. 암이 걸린것이 목회에도 도움이 됐다. 목회지로 나오니 교인중에 암에 걸린 사람이 많다. 중환자는 수술실에 들어가기전에 기도하는데 암이 걸려 사색이 된 교인에게 가서 위로할말이 별로 없다. 저도 몇년전에 암에 걸려 수술을 했다며 깊은 은혜를 받을 기회이니 감사하라.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는줄 알라고 하면 사색이 된 교인들의 입이 벌어지고 화색이 돌며 할렐루야 하며 수술실에 들어간다. 그런분들을 위로하고 목회하라고 암이라는 훈련을 시켜주신 것을 깨닫게 된다.

뒤돌아보면 우리의 삶은 다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인도하신 삶이다. 우리의 삶의 어느 한순간도 하나님이 한눈팔거나 내버려두신 순간이 없다.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으신 하나님이 우리를 항상 선한 길로 인도하심을 굳게 믿으라. 그래서 늘 감사와 기쁨과 순종으로 가득한 삶을 사시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란다.




성경의 연대순 배열



성경, 특징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면서, 사람이 쓴 글이다.
성경이 지닌 신성은 100%우리가 고백하는 바이다.
이것은 케리크마의 측면에서 선포되는 것이 바로 진리이기에 논쟁이 되지 않는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사람이 쓴 글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구약에서 십계명을 제외한 모든 글은 인간이 쓴 글이다.
사람이 쓴 글이라서 문학적인 수사법이있고, 대구법도 있고 이야기와 개념들이 충만하기도 한다.
성경은 또한 각 책마다 각자의 양식이 있다.
문학적인 양식도 있고 논리적인 글들도 있다.

성경, 하나님의 의도

셩경을 읽으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뜻은 보통 ‘계시’라고 불려지는 초월적인 것들이다. 그러나 거기서 끝이 아닌다. 하나님은 우리의 회복을 이루기 위해서 ‘제사’제도를 제안하신다.

하나님은 이야기를 통해서 ‘대속’의 원리와 함께 ‘무르기’를 친근하게 받아들이도록 도와준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은 결국은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나는 순간이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니’라고 했던 것들이 ‘자유’가 충만해지는 것이다. 자유는 그러나 마지막 최종 의도가 아니다. 자유는 ‘사랑’하기 위함이다.

성경, 영감설

성경영감설은 무오설과 연결되어서 축자설까지 간다.

그런데 영감을 준다는 의미에서 생각해볼 게 있다. 영감을 주었다는 input이후에 어떤 output이 나오는가?이다.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여진 성경은 인간의 영혼에 숨을 불어 넣고 마음의 변화와 삶의 변화를 지속적으로 유도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생각이 영감으로 불어넣어졌다는 의미에서 ‘계시’라는 것은 생명을 불어넣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성경, 내러티브(Narrative) / 이야기

그레코로만 전통에 따라서 구약은 내러티브로 쓰여져 있다.
이야기로 쓰여진 장르라는 것이다.
스토리텔링을 통해서 작가는 자신의 의도를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성경은 사람의 글이다. 중요한 것은 해당 글의 장르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시편은 장르로서는 ‘시’인데 만약 다큐멘터리처럼 하나하나 팩트를 체크해가면서 읽는다면 ‘시’로써 역할을 잃어 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내러티브는 의도가 있고, 전하고 싶은 것에 대해서 레토릭과 은유와 환유와 같은 표현법도 주의해야 한다.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지’를 함께 고민해보는 성경을 대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성경, 컨텍스트(Context) / 문맥

성경의 의도는 ‘문맥’에 있다. 문장에 있지 않고 어떤 문맥에서 이 문장이 말해지고 있는지가 중요한 것이다.

성경을 지금까지 문장에서만 그대로 현실로 가져오는 방식으로는 우리의 현실을 반대로 투영해서 성경자체를 잘못읽게 되어 버린다.

요절만 보게되면 문맥을 놓치게 되고, 그 의도를 놓치게 되면서 자기만의 편협한 하나님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다시 생각해볼 때 비판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를 가지고 하나님이 진실로 우리를 보호하신다면 우리가 성경을 보호하려고 하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이 진리로 성경을 주셨다면, 하나님께 입증부담을 묻는 것이 맞는 것이다. 그 문맥에 대해서도, 이해에 대해서도, 해석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의도와 그 글을 쓴 의도를 제대로 살펴보는 것이 성경을 읽는 사람들의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성경, 유대인의 분류

성경은 토라, 네비임, 케투빔으로 구성되어 있다. 토라는 율법로서로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이다. 네비임은 예언서로 8권인데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서, 열왕기서,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과 함께 12예언서에 호세아부터 말라기를 모아 놓았다. 케투빔은 성문서로 11권인데 시편, 욥기, 잠언, 룻기, 아가서, 전도서, 예리미야애가, 에스더, 다니엘, 에스라-느헤미야, 역대기이다.

성경, 개신교 분류

오경 5권과 역사서 12권, 시와 지혜 5권, 예언서 17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로마카톨릭의 경우 오경 5권, 역사서 16권(노피트, 유딧, 긴 에스더, 마카오상, 마카베오하 포함), 시와 지혜 7권(집회서 포함), 예언서 18권(바룩, 긴다니엘 포함) 으로 구분하고 있다. 카톨릭에서는 외경 apocrypha을 제2정경deuterocanonical book이라고 해서 구약과 신약 사이에 쓰여진 책들도 정경의 범위 안에 포함하고 있다.



정경(正經, Canon)과 외경(外徑, Apocrypha)

초대교부의 교부였던 제롬은 외경에 대항하는 책을 교육에 사용할 수는 있지만, 교리와 실천의 규범이 될 수는 없다고 여겼다. 이데 반해서 어거스틴은 외경들도 나머지 정경과 똑같은 권위를 가진 책으로 여겼다. 당시 서방 정교회와 분리되어 있던 동방정교회는 외경을 정경으로 여겼다.

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 세력들은 가톨릭 교회가 사용하던 외경의 정경적 지위를 거부하였고, 종교개혁 운동의 거부에 대한 반응으로 가톨릭은 외경 역시 정경임을 1546년의 트렌드 종교회의에서 더 확고하게 선포하였다. 루터 같은 경우 외경의 정경성은 부정하였지만, 여전히 신앙과 도덕의 유익이라는 차원에서 외경의 가치를 인정하였고, 루터가 번역한 성경에 외경도 포함되어 있었다.  

외경, 의미

외경에 대해서 정경으로 인정받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이 완전히 이단적인 것은 아니다. 부활신앙 같은 경우 구약에서는 다루지 않지만 구약과 신약 사이의 시기에 쓰여진 외경에서는 부활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 있다. 이런식으로 외경이 가지고 있는 브릿지의 역할을 고려한다면 구약과 신양이 완전히 동떨어진 것은 아니다.

정경에 대한 도전이라기 보다는 좀 더 폭넓게 이해할 수 있는 보조 도구 정도로 생각해보자. NRSV에서 with apocrypha라고 쓰여진 것들은 모든 외경이 동방정교회의 입장에서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성경, 배열

유대교의 경우 율법서는 원칙을 선포하고 기초를 정초하는 역할을 했다. 예연서는 심팜에 대한 선포와 회복에 대한 희망을 주었다. 성문서는 거룩한 이상에 따라 살아가는 삶의 일상을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반면 기독교에서는 배열을 오경-역사서-시편과 지혜서- 예언서로 진행된다. 그 이유는 예언서 마지막인 말라기의 종말에 대한 예언과 멸망이 비로소 정오의 해와 같이 예수그리스도의 등장으로 해소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배열에 대한 이해를 하게 되면 예수님을 강조하는 구약의 성경의 구조에 따라서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 그리고 구약시대을 살아가던 사람들이 꿈꾸던 하나님 나라는 어떤 것이었는지를 알게 된다. 구원에 대한 내용도 구약에서 이미 기-승-전-결로 이어져 내려와서 그리스도까지 오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민네이션, 생각

신자유주의는 감정을 사용하지 않는다. 다만 감성과 기분, 흥분을 사용한다. 감정적인 것은 부정적인 것 까지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감성이나 기분, 흥분은 대부분 긍정적인 것 그리고 자신에게 도움이 되거나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들이다.

감정이 구조 안에서 기분과 흥분의 flow가 역사를 가지고 stock이 되었다는 것이라면, 반대로 기분과 흥분은 여전히 flow상태로 있는 것이다.

기분이 집단적으로 존재하게 될 때 ‘분위기’라고 한다. 이 분위기 안에서 사람들의 ‘기분’은 대부분 존재하게 된다. 그리고 어떤 자극에 따라서 그것이 흥분이 되기도 하고, 냉소가 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기분과 흥분이 믿음이나 종교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면서 flow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제 조그만 자극에도 자신을 위해서 흡수하고 flow안에서 믿음을 위치시킨다.

그럼 노래, 음악, 드라마 같은 부분에서 우리의 감성을 얼마나 터치하는가에 따라서 좋은 예배와 좋은 시간이 결정되어 버린다. 신자유주의는 근본적으로 시간을 인질로 잡고 시간의 가속화를 통해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감성적인 부분에서 모든 근본을 가져가 버린다.

민네이션, 진리

진리에 대해서 생각할 때 진리란 무엇인가?라고 고민하기 전에 일어나는 일이 있다. ‘진리는 과연 존재하는가?’라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정리하기 전에 존재한다는 것을 가정해야만 그 다음에 관점이 생긴다. 그것이 좋은가? 나쁜가?라는 것은 그 존재가 인정되어야만 시작될 수 있는 것이다.

진리관이 잡히면 진리에 대한 수 많은 고민들이 나온다. 진리는 존재하는데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가? 우리의 생각에서인가? 우리의 삶에서인가? 구조 안에서인가? 자연에서만인가? 진리관이 인간관과 윤리관과 만나서 다양한 복층 구조를 갖는 인간의 감정과 지식과 행동을 규정하게 된다.

진리가 없다는 것도 ‘진리관’ 중의 하나이다. 진리가 없다면 진리적으로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서 자신만의 새로운 해석을 가지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은 진리가 없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 더 힘들 것이다. 자기 자신을 믿거나 어떤 철학자를 끌어오는 것의 다름 아닐 테니까 말이다.

민네이션, 케리그마

성경의 언어는 3가지로 구분된다. 선포인 ‘케리그마’, 율법과 교훈인 ‘디다케’, 일상의 언어 ‘파라클레오’이다.

선포라는 뜻의 케리그마는 논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수용하거나 배척하는 것이다. 선포되는 것은 우리의 의지를 활성화시켜서 자유의지의 회복을 가지고 온다.

디다케는 가르치는 것이고, 논리적인 것이고, 그래서 논쟁하거나 토론할 수 있는 것들이다. 배움이라는 측면에서 교훈이 되기 때문에 우리의 ‘지성’을 활성화시켜서 깨달음을 준다.

일상의 언어인 파라클레오는 친근한 안부인사와 같은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감성을 활성화시키면서 감동을 준다.

오늘 강의에서는 명확하게 ‘칸트’와 같이 선험적으로 선포된 말씀인 성경에 대해서는 ‘케리그마적 권위’를 부여하고 그외의 디다케의 목적이 있는 부분에 대해서 논쟁을 하기로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한국교회는 대부분 ‘케리그마 중독’에 빠져 있다. 강단에서 뿐아니라 일상에서도 모두 케리그마로 대응하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스스로도 자만에 빠지게 되고, 모든 범죄의 온상이 된다. 반대로 디다케 중독이나 디다케 남용이 일어나면 모든 것들에서 설명이 들어가면서 ‘자유의지’를 활성화시키지 못하고 다만 이해와 지식적인 측면에서만 깊어지는 것이다. 변화가 일어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민네이션, 멋

요즘들어 멋지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생각해보게 된다. 예전에는 멋있다라는 것은 어떤 겉모양이나 스타일이었는데, 지금은 많이 달라지고 있다. 어떤 사람이 멋있다라고 할 때 ‘내재적인 윤리’를 가지고 삶에 책임을 지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윤리는 철저하게 행동과 연결되어 있다. 행동이라하면 행위뿐 아니라 말도 포함되어 있고, 생각역시도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 하고 하지 말아야 한다는 윤리를 가지고 있을 때 안정감이 들면서, 무엇인가 신뢰감이 가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신뢰감이 가는 사람이 멋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것은 겉모습이나 스타일로 흉내는 낼 수 있으나 통합적인 삶의 각 부분에서는 흉내낼수 없고 진짜 자기것일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단지 상대적으로 훌륭한 인격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견고하게 서 있는 것이 멋지다는 것이다. 40이 다가오니깐 어떤 것을 지켜야 하는지에 대한 ‘보수’적인 조건들이 생각나는 것 같다.




성경의 연대순 배열
구약의 배열




구약 신약은 목록 배열은 역사적 순서로 되어 있습니까?

구약의 39권 배열은 역사적 순서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문학적 형태로 분류되어 배열되어 있습니다. 
구약성경 목록은 크게 역사서, 시가서, 예언서라는 세 부류로 구분됩니다.

역사서는 17권으로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여호수아, 사사기, 룻기, 사무엘상, 사무엘하, 열왕기상, 열왕기하, 역대상, 역대하,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가 있습니다.

다섯권의 책들 즉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는 보통 모세가 기록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다섯 권을 특별히 모세오경이라고 구분하여 부릅니다.

시가서는 5권으로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로 문학적인 시나 교훈으로 표현된 지혜서입니다.

예언서 17권은 이사야, 예레미야, 예레미야 애가, 에스겔, 다니엘,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가 있습니다.  예언서를 선지서라고 부릅니다.

27권의 신약 성경 목록도 문학적 형태로 분류하고 있는데 복음서, 역사서, 서신서, 예언서로 나뉘어집니다. 

복음서 4권은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한 것으로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입니다.

역사서는 사도들을 통한 만방을 향한 복음전파의 역사를 기록한 것으로 사도행전이 역사서 입니다.

서신서가 21권으로 로마서,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서· 데살로니가후서,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 빌레몬서, 히브리서,야고보서, 베드로전서, 베드로후서,요한일서, 요한이서, 요한삼서, 유다서 가 해당됩니다.

이중 사도 바울이 13권을 기록했으며 로마서부터 빌레몬서까지는 모두 사도 바울이 기록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기록한 서신서들은 수취인이 책명이 되었고, 그 외 다른 서신서들은 발신자가 책명으로 사용됩니다. 
히브리서는 바울이 기록했다는 학자들의 주장이 있긴 하지만 누가 기록했는지 저자를 분명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예언서는 마지막에 기록된 요한 계시록으로 예수님의 재림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역사적 순서로 성경 목록을 배치해 볼까요?

구약은 1000년 동안 기록된 39권의 책입니다. 
그 중 17권의 역사서는 창조 때부터  BC 440년 경까지 수천 년의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역사를 잘 이해하기 위해선 먼저 역사서를 시대별로 분류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 5000년 역사는 크게 시대 구분을 해 보면 고조선시대, 삼국시대, 후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일제시대, 대한민국으로 나뉩니다.

우리나라가 이런 시대를 이어갈 때 옆에 있는 중국 역사는 은.주 왕조시대, 춘추 전국시대, 진나라, 한나라, 후한, 삼국시대, 수나라, 당나라, 송나라,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 중화인민공화국으로 그들의 시대가 이어져옵니다.

구약의 역사도 이렇게 먼저 시대를 구분하면 각 17권의 책이 각각 어느 시대를 다루고 있는지를 알게 되고 역사 흐름도 정확히 이해가 됩니다.  역사서를 시대별로 구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창조시대  창세기 1 ~ 11장 : 인류 일반 역사

2.  족장시대  창세기 12장 ~50장 : 이스라엘 국사의 시작

3.  모세시대  출애굽기 / 레위기 / 민수기 / 신명기

4.  사사시대  여호수아 / 사사기 / 룻기 / 사무엘 상. 하

5.  왕정시대  열왕기상.하 / 역대상/ 역대하

6. 포로시대  에스라 / 느헤미야 / 에스더

레위기나 신명기는 역사적 사건이 기록된 것이 아니지만 모세시대 기록된 책이고 그 시대에 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또한 역대기 상 .하는 열왕기상.하와 동일한 왕조역사를 다루고 있지만 기록된 목적과 방향은 다릅니다.  
에스더도 포로시대 쓰여진 책인데 에스라 전에 포로지에서 일어 났던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시가서 5권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기록한 것으로 그 시대로 넣어 주면 됩니다,

선지서 17권의 책들이 어느 시대에 기록된 것인지 그 시대로 넣어 주는 것이 약간 어렵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예언서들은 왕정시대에 기록되어졌습니다. 선지서들을 종합적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7.  선지서 17권중 12권은 왕정 시대 것이고, 5권은 포로시대 것입니다.

8. 선지저 12권중 호세아, 아모스, 요나만 북방 이스라엘의 선지서이고 나머지는 남방 유다에서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9. 북방 이스라엘에서 활동한 선지자는 호세아, 아모스, 요나인데 이 세 사람은 공교롭게도 활동한 때가 같은 북방 이스라엘의 왕 중 전성기였던 여로보암 2세 왕 때이다. 
여로보암 2세(B.C. 760년) 는 북 이스라엘이 멸망하기(B.C. 721) 약 40년 전입니다.  후기에 활동한 선지자들 입니다.

10. 남방 유다 선지자들도 왕국 후기에 활동하기는 거의 마찬가지 입니다. 
오바댜와 요엘 두 선지자만 제외하고 모든 선지자들이 유다 왕국 후기에 활동합니다.

11.  왕국 후기의 선지자 대표는 이사야와 예레미야입니다.

12.  이사야 때는 미가가, 예레미야 때는 나훔, 스바냐, 하박국이 같이 활동합니다.

13. 오바댜와 요엘을 제외한 유다 왕국 후기에 활동한 모든 선지자들이란 바로 이사야, 미가, 예레미야, 나훔, 스바냐, 하박국입니다.

 한 눈으로 보는 성경 연대기적 도표

위의 도표는 성경 전체를 쉽게 이해하기 위해 만든 것인데 먼저 성경의 역사를 500년 단위로 크게 나누어 봅니다.
성경에서 역사 연도 추정이 가능한 시기는  BC 2000 경으로 대략적으로 아브라함이 살았고, BC1500 년경은 모세, BC1000 년 경은 다윗, BC 500년경은 왕조의 멸망으로 먼저 크게 구분합니다. 
이 축을 중심으로 해서 창조시대, 족장시대, 사사시대, 왕조시대 포로시대, 신약시대가 들어갑니다. 
위에서 우리가 구분한 것 처럼 구약 성경의 각 권이 각 시대별로 배치하면 창세기가 창조시대와 족장시대를 다루고 있고 모세시대는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가 있습니다.
여호수와서를 비롯한 4권의 책이 사사시대를 다루고 열왕기와 역대기가 왕조시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포로시대를 다루는 책이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가 되는 것입니다.

17권의 선지서는 왕조시대에 몰려있고 5권은 포로시대에 있는데 각 선지서를 시대별로 북왕조와 남조 유다를 구별하여 배치하면 도표와 같이 한 눈으로 볼 수 있어 역사를 구분하기 쉬울 것입니다.  


성경의 연대순 배열
신약의 배열

신약 성경은 쓰여진 순서가 아니라 논리적인 순서에 따라 배열되었다.
역사적인 순서도 아니다.
그래서 신약복음서들을 쓰여진 연대순으로 재 배열해 봅니다.

성경을 읽으시면서 참고 하십시오.

1. 야고보서 A.D. 46-49년

2. 데살로니가 전. 후서 A.D. 51년

3. 고린도전.후서 A.D. 55년

4. 갈라디아서 A.D. 56년

5. 로마서 A.D. 57년

6. 마가복음 A.D. 55-68년

7. 누가복음 A.D. 60-63년

8. 마태복음 A.D. 60-70년

9. 에베소서 A.D. 61-62년

10. 빌립보서, 골로세서 A.D. 62-63년

11. 사도행전 A.D. 63-64년

12. 디모데전서 A.D. 63-65년

13. 베드로전서 A.D. 64년 이후

14. 히브리서 A.D. 60년 대 이후

15. 디도서 A.D. 66년

16. 베드로 후서 A.D. 66-67년

17. 디모데 후서 A.D. 66-67년

18. 유다서 A.D. 65-70년

19. 요한복음 A.D. 85-90년

20. 요한 1.2.3서 A.D. 90년

21. 계시록 A.D. 81-90년












우슬초 / 에조브(’êzôwb) אֵזוֹב / 후스소포스(hüssōpŏs) ὕσσωπο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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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슬초

우슬초(231)
에조브(’êzôwb) אֵזוֹב 

1. 우슬초
2. 출애굽기 12:22.
발음 / 에조브[ ’êzôwb ]
어원 / 시리아어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임
관련 성경 / 우슬초(출 12:22, 레 14:51, 시 51:7).
구약 성경 / 10회 사용

1. [출애굽기 12:22]
너희는 우슬초 묶음을 취하여 그릇에 담은 피에 적시어서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리고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밖에 나가지 말라

2. [레위기 14:4]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명하여 정한 산 새 두마리와 백향목과 홍색실과 우슬초를 가져오게 하고

3. [레위기 14:6]
다른 새는 산대로 취하여 백향목과 홍색실과 우슬초와 함께 가져다가 흐르는 물위에서 잡은 새 피를 찍어

4. [레위기 14:49]
그는 그 집을 정결케 하기 위하여 새 두마리와 백향목과 홍색실과 우슬초를 취하고

5. [레위기 14:51]
백향목과 우슬초와 홍색실과 산 새를 가져다가 잡은 새의 피와 흐르는 물을 찍어 그 집에 일곱번 뿌릴 것이요

6. [레위기 14:52]
그는 새의 피와 흐르는 물과 산 새와 백향목과 우슬초와 홍색실로 집을 정결케 하고

7. [민수기 19:6]
동시에 제사장은 백향목과 우슬초와 홍색실을 취하여 암송아지를 사르는 불가운데 던질 것이며

8. [민수기 19:18]
정한 자가 우슬초를 취하여 그 물을 찍어서 장막과 그 모든 기구와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뿌리고 또 뼈나 죽임을 당한 자나 시체나 무덤을 만진 자에게 뿌리되

9. [열왕기상 4:33]
저가 또 초목을 논하되 레바논 백향목으로부터 담에 나는 우슬초까지 하고 저가 또 짐승과 새와 기어 다니는 것과 물고기를 논한지라

10. [시편 51:7]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우슬초(5301)

후스소포스(hüssōpŏs)  ὕσσωπος, ου, ἡ 

1. 우슬초.  2. 히습풀.  3. 요한복음 19:29
발음 / 후스소포스[ hüssōpŏs ]
어원 / 외래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우슬초(요 19:29, 히 9:19)
신약 성경 / 2회 사용

요한복음 19:29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히브리서 9:19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와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책과 온 백성에게 뿌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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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절과 우슬초

성경에서 우슬초는 참회 겸손 정결의 상징이다. 우슬초에 대한 성경의 첫 언급은 최초의 유월절 때, 어린 양의 피를 이스라엘 백성들 집의 문 인방에 칠하기 위한 솔로 사용한 ‘우슬초 묶음’이다. “우슬초 묶음을 가져다가 그릇에 담은 피에 적셔서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리고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밖에 나가지 말라.”(출 12:22) 애굽에서 처음 태어난 사람, 동물이 죽는 ‘장자의 재앙’이 내린 밤, 모두가 두려움에 떨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명령을 따랐다.

게티이미지뱅크

우슬초 잎의 뒷면과 줄기의 잔털이 어린 양의 피를 흡수해서 뿌리기에 적합했다. 우슬초에 적신 양의 피 뿌림은 죽음의 사자를 지나가게 했다. 우슬초의 히브리어 ‘에조브’는 ‘지나가다’ ‘넘어가다’란 의미가 있어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깊은 뜻을 묵상하게 한다.

우슬초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의 현장에도 있었다. 예수님이 목마르다고 신음하실 때 한 사람이 신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 가지에 매달아 예수님의 입술을 적셨다. 예수님의 목마름을 해결하는 중요한 도구로도 쓰임받은 것이다.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요 19:29) 예수님은 신포도주를 드신 후 말씀하셨다. “다 이루었다.” 예수님은 우슬초에 적신 어린양의 피로 상징되는 포도주를 마시고 인류의 죄를 대속하셨다. 이 장면은 이탈리아의 화가 조토 디 본도네가 그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에 잘 묘사됐다. 십자가 오른쪽에 신포도주로 예수님의 마른 입술을 적셔준 해면을 꽂은 우슬초 가지를 들고 있는 남자가 보인다. 고난의 현장에 우슬초 같은 신앙인이 필요하다.

백향목과 우슬초

또한 유대인들은 정결 예식에 다발로 묶은 우슬초를 사용했다. 한센병의 성결(레 14:4, 6, 49, 51, 52)과 붉은 암송아지 의식(민 19:6, 18)을 위한 레위인의 율법은 ‘백향목’ ‘홍색 실’과 함께 우슬초를 사용하도록 했다.

성경은 한센병을 포함해 모든 악성 피부병을 불순종의 결과로 기록한 때도 있다. 한센병자가 치유돼 공동체로 돌아가고자 했을 땐 제사장이 베푸는 정결 예식을 거쳐야 했다. 이때 제사장은 백향목 가지와 우슬초 묶음으로 새의 피를 찍어 병에서 정결함을 받은 자에게 일곱 번 뿌려 “정하다”라고 선포해야 한다. 그래야 회중 안에 들어와 자유롭게 살 수 있었다. 그 정결 예식에 사용된 식물이 백향목과 우슬초였다는 것이 매우 상징적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나음을 입었으니 교만함을 버리고 우슬초처럼 겸손하게 살라는 의미가 내포됐다.

솔로몬의 해박한 지식을 표현할 때도 백향목과 우슬초가 등장한다. “그가 또 초목에 대하여 말하되 레바논의 백향목으로부터 담에 나는 우슬초까지 하고 그가 또 짐승과 새와 기어 다니는 것과 물고기에 대하여 말한지라.”(왕상 4:33) 여기서 ‘백향목에서 우슬초까지’란 말은 아주 큰 것에서부터 작은 것에 이르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그만큼 우슬초는 식물 중에 가장 작은 것이었다. 성경에서 백향목은 ‘교만’, 우슬초는 ‘겸손’을 상징하는 대조적인 식물이다.

이탈리아 화가 조토 디 본도네가 그린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 오른쪽에 우슬초 가지를 들고 있는 남자가 보인다.

다윗이 자신의 충성스러운 신하의 아내인 밧세바를 범하고, 그 신하를 죽이는 죄를 저지른 후 울부짖으며 자신의 죄를 정결케 해달라는 기도에서도 우슬초가 등장한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시 51:7) 다윗은 우슬초처럼 겸손한 자였던 자신이 어느새 모든 나무의 왕이며 교만의 상징인 백향목처럼 교만해져 죄를 범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침상이 젖도록 눈물의 회개 기도를 했다. “내 죄를 회개하오니 나를 용서하시어 병에서 나음을 얻은 자에게 제사장이 백향목과 우슬초로 일곱 번 새의 피를 뿌려 정했다고 선포하였듯이 영적인 병에 걸린 저를 하나님께서 우슬초로 정결케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슬초는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정화할 수 있는 풀로 여겼다. “정결한 자가 우슬초를 가져다가 그 물을 찍어 장막과 그 모든 기구와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뿌리고 또 뼈나 죽임을 당한 자나 시체나 무덤을 만진 자에게 뿌리되.”(민수기 19:18)

우슬초는 작은 풀에 불과하지만 강인한 생명력을 가졌다. 지금도 예루살렘의 ‘통곡의 벽’ 돌 틈에, 세계인들의 기도 소리를 들으며 키가 작은 품종의 우슬초가 피고 있다. 많은 사람이 죄를 씻고 정결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하듯 말이다. 현대는 몸과 마음이 찢기고 상처받아 치유가 필요한 사람이 너무 많다. 작고 부드러워 쓰임받은 우슬초 같은 그리스도인이 필요한 시대이다.

이지현 뉴콘텐츠부장 겸 논설위원 jeehl@kmib.co.kr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가나안 땅에는 향이 있다. 팔레스타인 산야에 산들바람이 불어올 때면 진한 마르미에향과 우슬초향이 뒤섞여 코끝을 자극한다. 건기의 시기에 접어들면 향은 더욱 짙어진다. 팔레스타인 땅의 강한 햇빛과 건조함이 빚어낸 향은 이곳에 살아가는 이라면 누구나가 알아챈다. 바로 성지의 향이다.

우슬초는 정결의 향이다. 대부분의 차는 향을 즐기지만 우슬초는 향과 맛뿐 아니라 박테리아를 제거하는 살균 소독 작용으로 인해 정결케하는 식물로도 알려졌다. 우슬초가 성경에 처음 등장한 것은 출애굽의 유월절이다. 애굽에 내린 열가지 재앙으로 죽음의 영이 온 애굽을 뒤엎을 때 히브리인들의 집만은 죽음이 넘어갔다. 유월절의 어린양의 피를 히브리인들의 집 문마다 뿌린 덕분이다.

문 인방과 좌우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뿌릴 때 왜 하필이면 우슬초로 뿌리라 했을까? 만일 우슬초를 그 밤에 구할 수가 없었다면 수 많은 히브리인들이 난리가 났을 것이다. 그러나 히브리인들은 큰 어려움 없이 우슬초로 피를 찍어 문가에 뿌렸다. 당시 애굽의 히브리인들의 모든 집에 우슬초가 있었다는 뜻이다. 우슬초의 용도는 무엇이었을까?

당시의 애굽 땅에도 우슬초가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출애굽과 같은 시기의 애굽 왕 바로였던 투탕카문의 무덤에서 우슬초의 성분이 발견되었다. 이로 보아 애굽의 히브리인들 뿐만 아니라 애굽 땅에서도 구할 수 있었던 식물이었다. 그런데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뿌리는데 왜 우슬초 묶음으로 뿌려야 한다고 했을까.

고대로부터 우슬초는 박테리아를 제거하는 살균작용으로 인해 염증을 제거하고 피를 맑게하는 민간요법의 치료제이다. 우슬초의 정결효능은 성경 속에서 정결예식의 식물로 자리잡았다. 레위기에서는 나병환자가 나았으면 제사장은 정결한 새의 피를 우슬초로 일곱 번 뿌리며 정하다 외쳤다.(레14장). 민수기에서는 시체를 만져 부정하게 되면 정결한 자가 불사른 재를 흐르는 물에 섞은 것을 우슬초로 뿌려 정결하게 했다.(민19장). 우슬초는 다윗의 회개의 기도에서도 언급된다. 밧세바를 범한 다윗은 회개를 하며 우슬초로 자신을 정결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시51:7).

우슬초를 히브리어로 '에조브'라고 한다. 아랍어로 '자타르'라고 불린다. 자타르라는 이름으로 이미 알려져서 유대인들도 자타르라고 부른다. 우슬초는 싱싱한 것에서부터 건조하여 장기간 사용한다. 우슬초는 말려 두면 몇 년이 지나도 그 향기나 약효가 지속된다. 우슬초를 만지고 나면 꽤 오래도록 강한 향이 손에 배어있다.

특히 야생으로 자라는 야생 우슬초는 이 땅의 상징으로 이스라엘은 사라져가는 야생 우슬초를 보호하고자 채취금지법을 만들었다. 그간 채취해 온 아랍인들은 야생 우슬초 채취금지법이야 말로 가장 심한 반-아랍법이라고 반발했지만 팔레스타인 정부도 곧이어 이 법을 만들어 보호하고 있다. 야생 우슬초를 불법으로 채취한 이에게는 벌금을 부과하며 이스라엘 군 검문소에서는 발견되면 압수하기도 한다.

재배된 우슬초는 성지에서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다. 재래시장에서는 싱싱한 것과 건조시킨 것을 팔고 있고 향료집에서는 곱게 간 우슬초가루를 판매한다. 예루살렘 성문마다 베겔빵에 소금 섞은 우슬초 가루를 곁들여준다. 우슬초피자라는 것도 있다. 특히 레바논의 우슬초피자 '마누쉐 자타르'는 중동에서도 가장 맛있는 피자로 알려져있다. 성지를 방문한 순례객들에게 우슬초피자 한 조각 나누는 것은 특별한 맛과 향의 체험이다.

중요한 것은 우슬초가 갖는 상징이다. 애굽의 유월절에 우슬초가 있었다면 예수님의 유월절 골고다의 그 현장에도 우슬초가 있었다. 십자가에 달려 고통스러워하는 예수님의 입에 쓸개 탄 신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입에 대어드릴 때 사용된 것이 우슬초다.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요19:29).

복음서 중 유일하게 요한복음만이 신포도주를 찍어 입에 대준 것이 우슬초라고 밝힌다. 하마터면 잊혀질 뻔 한 사실이었다. 출애굽의 구원과 예수님의 구원에 사용된 정결한 식물 우슬초는 이렇게 기독교인들의 기억에도 자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