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장례식 준비와 절차 그리고 비용 / 죽음의 준비



(미국) 장례식 준비와 절차 그리고 비용 


1. 돌아가시면 어디로 연락을 할까요?


요양원 (Hospice) 포함 병원에서 돌아가시면 의사/간호사의 사망 선고후 미리 연락해둔 혹은 연락이 안되어 있다고 해도 근처 아무 장례를 준비해주는 funeral service에 연락을 하면 됩니다.
그러면 어느 시간이든지 와서 고인을 모시고 갑니다.
다만 새벽에 돌아가시면 고인을 모시고 갈때까지 시간이 많이 걸릴 수 있으므로 미리 연락처를 교환해두는것이 좋습니다. 


집에서 돌아가시면 911에 연락을 합니다.
그러면 경찰이 와서 사안을 간단하게 작성합니다.
그리고 funeral service에 연락을 하면 고인을 모시고 갑니다.
다만 경찰에 의해 고인 사망에 의심이 가는 부분이 있다면 경찰이 시신 검사하는 곳에 연락을 하여 고인을 모시고 갑니다.
그후 연락을 받으면 funeral service에 연락하여 고인을 모시고 옵니다.


2. Funeral Service 장례 서비스는 무엇을 제공합니까?

기본적으로 고인을 모시고 가는 것부터 시작해서 장례의 모든 부분을 처리해준다고 보면 됩니다.
그리고 사망 신고까지 해줍니다.
그러기에 개개인이 느끼기에는 비싸다 혹은 괜찮다라고 다르게 느낄 수 있습니다.
지역에 따라서 가격이 다르지만 같은 지역내에서 여러군데 전화를 하여 액수를 물어보면 담합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거의 비슷합니다. 그러니 funeral service를 이용하시기로 마음 먹었다면 가격보다는 장례에 대해서 부드럽고 문제없이 해줄 곳을 찾는게 낫습니다.
특히 진행하시는 분께서 한국어 영어에 능통하면 더욱 도움이 됩니다.

식구중 연세가 드신 분이나 아픈 분이 계시다면 하루 정도 시간내서 직접 찾아보고 장례식을 할 장소와 주차등을 미리 보시고 절차를 확인하면 도움이 많이 됩니다.


3. 장례식의 절차는 어떤식으로 진행되는지요?

3.1 Viewing (고인을 단장하여 장례 서비스하는 곳에서 마지막 얼굴을 보며 장례를 진행하는 것) 을 포함한 장례식을 돌아가신 후 2-5일 후에 진행이 보편적.

3.2 그리고 원하는 분들은 교회/성당에서 그 다음날 예배/미사를 진행. 이때에도 고인의 Viewing을 같이 할 수 있음. 혹은 3.1의 장례식을 하지 않고 곧바로 예배/미사로 진행 가능. (사찰/절은 경험이 없어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3.3 매장 (Burial) 을 하는 경우에는 묘지로 옮기고 거기서 예배/미사 한번한 뒤 매장. 혹은 3.1과 3.2 모두 스킵하고 Burial을 진행 할 수 있음. 즉 하관식과 장례식을 동시에 진행 가능.

**한국분들은 3.1, 3.2 혹은 3.3 후에 조문객에게 식사 제공을 하고는 합니다.
   작년 팬데믹 이후에는 주로 떡이나 답례품 증정하더군요.

3.4 화장 (Cremation) 을 하는 경우 고인을 모시고 가서 화장을 한 뒤 며칠 후 연락이 오면 유골을 모심.
      마찬가지로 3.1과 3.2 스킵 가능.

3.5 화장을 하고 유골을 받아오면 묘지에 매장하거나 납골당에 모실 수 있음. 혹은 집에 보관도 가능. 묘지 공원 근처나 바다에 뿌릴 수 있는 옵션도 있으나 허가 없이 뿌리는 것은 불법. 필히 가능한 곳에 미리 연락해야함


4. 이 모든 절차에 드는 비용은 어떻게 되는지요?

 (아래 가격은 미국 뉴저지 기준입니다. 환율 익숙치 않은 분들은 1불 1000원에 생각하시면 편합니다. 1000불은 100만원)

4.1 묘지 비용 : 미국에 계시는 분들은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이제 묘지의 비용도 상당히 비쌉니다.
그러므로 매장을 하겠다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미리 늦지않게 준비하시길 바랍니다.
가격은 지역마다 달라 딱 말할 수 없지만 적어도 최소 5천불이상입니다.
장례 비용중 상당히 많은 비중을 차지합니다.

묘지 비용 : 최소 5000불 이상, 지역마다 가격이 크게 다르므로 2-3만불이 넘는 곳도 많습니다.
그리고 가격은 계속 올라갑니다.
필요하다면 꼭 미리 준비하세요.
저희는 미리 준비하였습니다.

4.2 묘지 매장 비용 : 묘지를 구매하면 그 다음으로 준비할 것은 장례식 후 매장 서비스입니다.
땅을 파는 것부터 시작하여 묘비를 세울 곳을 정돈해주는 것까지 해줍니다.
이때 땅에 물이 차지 않게 해주는 서비스는 별도인 곳도 존재합니다.
매장 비용 역시 지역마다 다 다르지만 이 역시 적어도 최소 3000불이상입니다. 당연히 묘비는 별도 입니다.

매장 서비스 비용 : 최소 3000불 이상
묘비 가격 : 천차만별 500불 이상 조금 괜찮아보인다 싶으면 2000불 이상

4.3 장례 서비스 Funeral service 비용 : 위에 언급한 3.1부터 3.5까지 모두 관리해주는 서비스의 댓가입니다.
포함된 부분중 생각나는 것은 아래와 같습니다.

4.3.1
장례 기본 서비스 비용과 고인 운송 비용 (모든 장례 용품 운송 비용)
4.3.2
3.1과 3.2에 Viewing에 필요한 고인 단장 비용과 냉장/방부처리 보관 비용. 다만 viewing에 필요한 옷은 따로 준비해야 함.
4.3.3
3.1 viewing service에 필요한 장소 제공 및 관리 혹은 3.2에 필요한 서비스와 물품 제공 비용
4.3.4 이외에 장례 전반적인 부분의 물품과 서비스 제공/따로 구매 가능
4.4 관 비용 : 관의 가격은 정말 천차만별입니다. 대략적인 가격 1000불부터 시작하여 3-4만불이 넘는 관도 존재합니다. 위에 언급한 viewing을 하고 싶다면 관의 뚜겅이 반 정도만 열리는 것으로 준비하면 괜찮고 이 관의 시작 가격은 대략 2000불 이상입니다. 그리고 관에 물이 안차도록 해주는 것 역시 별도 입니다.

Funeral service 대략적인 비용 : viewing 장례식, 교회/성당 장례식 그리고 하관식까지 다 하면 최소 7천불 이상

**지역내 정확한 장례 비용은 구글 검색에서 General price list 지역으로 하면 이를 공개한 funeral homes의 가격을 볼 수 있습니다.

관 비용 : 천차만별 1000불 이상 viewing을 할 경우 2000불 이상

5. 화장을 할 경우의 비용 : 대략 500불 정도입니다. 화장을 한다면 최소한의 나무 관 (대략 500불 이상) 이 필요하고, 당장 묘지나 매장이 필요치 않습니다. 납골당에 모시면 되기 때문입니다. 혹은 때에 따라서 집에 모셔도 됩니다. 그러므로 전반적인 funeral service가 없어도 문제 없습니다. 다만 화장할 곳과 그곳으로 고인을 모시고 갈 운송 서비스를 따로 알아보셔야 합니다.

화장만을 원하시는 경우에는 Direct Cremation으로 알아보시면 됩니다.

화장 후에도 장례식이나 예배 혹은 미사가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에 이런 것을 못할까 걱정 크게 안하셔도 됩니다. 남의 시선때문에 큰 빚을 남겨가면서 장례를 진행할 필요는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다.

6. 하관식과 장례식을 같이 진행하는 경우 : 위에 언급한 많은 서비스가 없어도 됩니다. 특히 funeral service 제공 비용에서 많은 절약을 할 수 있습니다. 경우는 다르지만 작년에는 코로나때문에 빌딩안에서 많은 인원의 집합이 금지되어 장례식을 야외 하관식과 같이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야외는 집합 금지 예외인 곳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하관식과 장례식을 같이 하시길 원하는 경우에는 Immediate Burial Service 로 알아보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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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의 죽음을 소천(召天)이라고 하는 것은 합당한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이 가장 혐오하는 것은 죽음이요, 그래서 죽음을 나타내는 데는 어느 나라 말에서나 완곡어법(婉曲語法)을 쓴다.
그 완곡어법은 또한 고인의 신분이나 종교 등에 따라 달리 쓰이기도 한다.
‘죽었다’는 말이나 ‘죽을 사(死)’자를 피하는 것은 물론 ‘별세’ ‘타계’ ‘운명’ 등 일반적인 말 외에 귀족들의 죽음을 나타내는 ‘훙거’ 왕의 죽음을 가리키는 ‘승하’ 외에 불교인의 ‘입적’ 가톨릭교인의 ‘선종’, 그리고 기독교인들이 쓰는 ‘소천’ 등이 있다.

여기서 우리가 고찰하고자 하는 것은 ‘소천’이라는 말이 언어학적인 면에서 가능하냐는 것이다.
국어사전에도 없는 이 말이 언제 누구에게서부터 쓰였는지는 몰라도 우리는 이미 보편화된 이 말에 언어학적인 해석을 붙여 바른 뜻을 알고 쓰지 않으면 안 된다.

먼저 ‘소천’(召天)이라는 한자어의 일반적인 구성 면에서 보면 “하늘을 부르다”라는 뜻으로서, ‘天’(하늘)을 ‘神’(=하나님)으로 대치하더라도 그것은 ‘부르다’(召)라는 동사의 목적어가 되므로 결국 “하늘을 불렀다”라는 뜻이 되므로 바른 말이 될 수 없다.

이것은 가톨릭교회에서 쓰는 ‘피정’(避靜; 소란한 세상을 피하여 고요한 고요한 곳으로 가는 것)의 경우와도 같지 않다.
즉 “하늘에로 부르다”로 풀이하여 쓴다면 “소천하다”가 아니라 “소천되시다” 또는 “소천을 맞으셨다”로 할 수 있고, 다른 한 가지 대안으로는 “서천(逝천)하시다”(하늘로 가시다)를 쓸 수 있다.

* 갈 서(逝) / 가다, 죽다.
(예) 서거(逝去) / 갈 서, 갈 거 - 죽음의 높임말
(예) 서자(逝者) / 갈 서, 놈 자 - 죽은 사람
(예) 서세(逝世) / 갈 서, 인간 세 - 별세(別世)의 높임말
(예) 서천(逝天) / 하늘로 가시다
이 경우는 ‘상경’(上京)이나 ‘입성’(入城)과 유사한 경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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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달 심리학에서 죽음의 다섯 가지 요소

1. 불변성 : 죽으면 다시 살아날 수 없다.
2. 필연성 : 죽음은 피할 수 없다.
3. 중단성 : 죽으면 모든 것이 중단 된다.
4. 적용성 : 죽음은 살아있는 것에 적용된다.
5. 원인성 : 죽음은 원인이 있다(신체 기능의 정지)


죽음의 다섯 단계

개요 / Five stages of grief

스위스 출신의 미국의 정신과 의사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Elisabeth Kübler-Ross, 1926-2004)가 1969년에 저술한 《죽음과 죽어감》(On Death and Dying)에서 선보인 모델로서, 사람이 죽음을 선고받고 이를 인지하기까지의 과정을 5단계로 구분지어 놓은 것이다.

영어로는 각 단계들을 줄여서 DABDA(다브다)라고도 한다.

다섯 가지 단계 / 부정(denial), 분노(anger), 협상(bargaining), 우울(depression), 수용(acceptance)

부정(Denial)

한 사람이 큰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는 등 큰 충격을 받았을 경우, 제일 먼저 자신의 상황을 부정한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와 비슷한 말을 입에 달고 다니며, 검사가 잘못된 것 아닌가 하는 의심으로 수많은 병원을 돌아다니고, 다른 사람이 자신에 대해 물어보면 별 일 아니라는 식으로 얘기한다.
상태가 심해지면 다른 환자와 결과가 바뀐 것 아닌가 의심하며, 자신은 나을 수 있다며 치료를 거부하기도 한다.

이 단계에서 다른 사람은 당사자가 사실을 받아들이도록 해야 한다. 다만 성급하게 당사자의 상태를 말했다가는 당사자가 더 부인할 수 있으니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가진 후에 말해줘야 한다.

분노(Anger)

분노의 단계에서는 자신 주변의 모든 것이 분노의 대상이 된다.
"왜 그 수억명의 사람들 중에 나지?" 라는 식의 말을 하며 돌봐주는 가족, 친구, 의사나 간호사, 혹은 신에게까지 분노를 표출한다.
이 시기 환자는 감정 기복이 심하고 무슨 행동을 해 주든 그게 분노로 연결되어 굉장히 다루기 어렵다.
넓게 보자면 이 단계는 자신이 갖지 못한 '여생'을 가진 일반 사람들에 대한  질투로도 볼 수 있다.

협상(Bargaining)

상황도 받아들였고 분노도 충분히 표출했으면 더 이상 상황이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는 걸 깨닫고 상황을 미루려 한다.
이것이 협상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가장 익숙한 예로는 "이번 한 번만 살려주시면 앞으로 정말 착하게 살게요!" 이런 식이다.
죽음을 앞둔 사람의 경우 생명의 연장이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신에게 맹세하는 경우가 많다.
나아가 무신론자가 종교에 귀의하는 경우도 있다.
간혹 이 단계에서 장기기증을 약속하는 경우도 있다.

환자들의 절박함은 상상을 초월한다.
이 소망은 무시할 수도 있고, 무시하지 않을 수도 있다.
다만 무시하든, 무시하지 않든 이 단계에서 환자가 다음 단계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
이 단계는 짧게 지나간다.

우울(Depression)

결국 협상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으면 "틀렸어 이제 꿈이고 희망이고 없어" 라는 생각이 드는 등, 극심한 "우울증" 증세가 나타난다. 이 단계에선 증상이 더욱 확실하게 나타나 환자도 알아차릴 수 있다.
모든 일에 초연해지고, 하루 종일 멍한 표정으로 있기도 한다.
이 단계의 우울함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뉘는데, 자기가 죽으면 남겨질 사람들에 대한 걱정으로 발생하는 반작용적인 우울증과 친구, 가족, 애인이나 소중한 물건들을 잃는다는 생각에 발생하는 예비적 우울증으로 나뉜다.

이 단계에서 환자는 별 말을 하지 않지만, 가끔 슬픔을 표현할 때 옆에 있어주는 것은 큰 도움이 된다.
우울함을 예민하게 받지 말고, 최대한 부드럽게 받거나 혼자 감정을 표현하도록 하는 것이 좋다.

수용(Acceptance)

모든 감정이 지나가면 이젠 피할 수 없는 것을 깨닫고 "이대로 조용히 아침을 맞이하자." 현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 단계에선 우울하지도 않고 활기차지도 않으며, 차분하게 자신의 감정을 정리하는 시간이다.
그렇다고 좋은 기분인 것은 아니고, 이때까지 겪었던 모든 감정들 때문에 지친 것이다.
환자는 눈에 띄게 약해지고, 뭔가 의미있는 일을 하려 한다.
사람을 만나는 것을 그렇게 반가워하지 않고 말수가 줄어들며, 침묵이 소통을 대신하게 된다.

이 단계를 거친다는 것은 그 전 단계들을 거쳐왔다는 것인데 그 과정에서 환자는 자신이 끝까지 버려지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위로를 받기도 하며, 역으로 자신이 죽은 후 남겨질 사람들의 슬픔을 재발견하기도 한다.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이란 무엇인가?

‘나이 듦과 죽음의 준비’

죽음에 대하여

“의학적으로 임사체험(Near Death Experience)을 경험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사랑했는지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했는지 두 가지 질문을 만나는 것이었다”며 “죽음에 대해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이 있다.

한 번 죽음은 정해진 것(히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Just as man is destined to die once, and after that to face judgment.

돌아가는 것(시 90:3)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You turn men back to dust, saying, "Return to dust, O sons of men."



죽음을 준비하는 지혜는 사랑(요 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It was just before the Passover Feast. Jesus knew that the time had come for him to leave this world and go to the Father. Having loved his own who were in the world, he now showed them the full extent of his love.

주 안에서 죽는 자는 복이 있다(계 14:13).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Then I heard a voice from heaven say, "Write: Blessed are the dead who die in the Lord from now on." "Yes," says the Spirit, "they will rest from their labor, for their deeds will follow them."

시편 116:15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
Precious in the sight of the LORD is the death of his saints.

* 죽음은 마지막으로 전도하는 기회이어야 하고 마지막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기회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웰다잉

사람들은 되도록 죽음을 외면하고 회피하려 하지만,
죽음은 삶의 자연스러운 과정일 뿐이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며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그렇게 낯설지 않은 삶의 과정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죽음이 천국으로 들어가는 관문이고 하나님을 다시 만나는 통로이자,
먼저 천국에 가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죽음은 오히려 반갑고도 기대할 만한 것이 된다.

하늘나라에 가는데 순서가 없듯,
웰다잉에 대한 묵상은 노년의 삶에만 필요한 것도 아니고,
젊은이나 나이든 사람이나 누구나 매일의 삶을 믿음으로 잘 살아내는 과정에 있는 것이다.

모두가 믿음 안에서 이 땅에서 주어진 마지막 시간까지 주변 사람들에게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웰다잉과 웰빙의 삶을 보여주는 모델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아름다운 죽음

임종의 형태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예측하지 못한 사망의 경우,
예측 가능한 경과를 걸쳐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에 사망하는 경우,
특정 질병으로 주기적인 위기를 마주하다 갑작스럽게 사망하는 경우

예측하지 못한 사망의 경우가 30%”라며 “20년 넘는 시간 동안 말기 환자를 돌보며 임종과정에 독특한 변화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갑작스래 돌아가시는 분이나 시간을 두고 돌아가시는 분이나 어린시절부터 지금까지 마치 필름, 파노라마가 돌아가듯 과거를 돌아본다는 것이다.
마치 심판대 앞에 서기 전 자신의 인생을 마지막으로 돌아보는 것 같은 모습을 보았다”며 히브리서 9장 27절을 언급했다.


죽음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

죽음이란 완성의 과정이자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다. 

죽음, 부활· 하느님 나라의 삶 위한 전초적 단계

수난 죽음 부활의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인간은 출산에서부터 죽어가고 있으며,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을 출발하여 이승의 종결점인 죽음을 향해 매일 한 발짝씩 다가가는 과정에 있고, 이것이 끝나는 순간이 죽음이다”(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397~401).

사람은 단 한번 죽게 마련이다(히브리서 9:27).
교회는 죽음이 인간의 원죄로부터 왔다고 가르친다.
인간의 교만으로 하느님을 거스른 원죄를 통해서 죽음의 세력이 인간을 지배했으며 인간의 죄의 결과가 바로 죽음이라는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인간 스스로 지은 죄로 인해 모든 인간은 예외 없이 죽음의 세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또한 죽음이란 부활과 하느님 나라의 삶을 위한 하나의 전초적 단계이며 동시에 신앙으로 이끄는 요소다.
그래서 세례로 시작된 새 생명이 완성되며, 영원한 생명에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은총을 간직하고 죽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게 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러한 가르침을 재천명한다. 공의회는 “죽음 앞에서 인간 운명의 수수께끼는 절정에 이른다”(사목 18항)며 “믿음이 부족하면 죽음의 수수께끼는 풀리지 않은 채로 남아 있을 것”(21항)이라고 했다.

죽음에 관한 가장 최근 교회의 입장은 1979년 신앙교리성의 ‘종말론의 몇 가지 문제점에 관한 서한’(1979)에 나타나 있다.
여기서는 ‘그리스도인의 죽음과 부활 사이에 무엇이 발생하는가’라는 질문에 “죽음은 인격적이며 영성적 위격인 인간에 관한 사건이며 인간 전체에 관한 사건으로서 긍정적이며 적극적인 인간 행위의 문제”라고 했다.

교회의 이같은 가르침의 핵심은 인간이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죽음, 그리고 그 죽음을 넘어서는 참 생명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그로 인한 부활의 희망 뿐인 것이다.
죽음과 정면 대적한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이 그리스도를 이겼다고 생각한 바로 그 순간에 죽음을 넘어선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에게 결코 죽음은 없다고 선포한다.
그럼으로써 죽음은 이제 더 이상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완성을 향한 과정이며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을 이긴 방법이 바로 그 죽음을 통해서였다는 것이다.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의 고통과 죽음 앞에서 고민한다.
그래서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마르 14, 36)라고 기도했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결국 그 고통과 죽음을 통해서 생명을 얻는다. 죽음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간 예를 우리는 순교자들의 삶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인간적으로 불행이며 참을 수 없는 고통과 두려움의 대상인 죽음을, 수많은 순교자들이 스승인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기꺼이 받아들였고 그럼으로써 생명을 얻었다는 것을 교회는 가르친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은 그리스도를 구세주요 주님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고통과 죽음에 동참할 것을 요청한다. 하지만 영원을 향하기보다는 현세의 풍요로운 삶을 꿈꾸는 인간들에게 그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임이 분명하다.

여기에 대해 예수는 분명히 말한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 23).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하는 것, 자신을 죽이고 생명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얻을 것은 바로 영원한 생명이며 구원의 희망임을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하게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진정한 죽음은 없다. 그리스도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요한 11, 25~26)

교회는 전례를 통해 이러한 그리스도의 계시를 탁월하게 재해석해내고 있다.

“주님,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오니, 세상에서 깃들이던 이 집이 허물어지면 하늘에 영원한 거처가 마련되나이다”(위령 감사송 1).

■ 임종자의 수호성인들

어린 시절, 우리들의 어머니들은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수호천사가 항상 너를 지켜줄 거야.” 그 천사들 중에서도 으뜸인 세 대천사가 있다. 우리는 그들을 가브리엘, 미카엘, 라파엘이라고 부른다. 가브리엘이 전령이고, 라파엘이 의료, 순례자와 관련한 천사라면 미카엘은 임종자들의 수호성인이다. 미카엘 대천사는 외경에 더 많이 등장하는데 주로 천상군대의 장수, 그리스도인의 보호자, 특히 임종자들의 수호자로 나타난다.

요셉 성인도 임종하는 이의 수호자다. 노동자, 가정, 동정녀 등의 수호자로도 꼽히는 요셉 성인이 특별히 임종자들과 연결되는 것은 요셉 성인이 ‘예수 그리스도가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을 떠났을 것’이라는 가능성 때문이다. 성경에 요셉은 예수 탄생시기와 성장기에만 잠깐 나타난다. 예수 공생활 이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음을 추정할 수 있는 대목. 따라서 요셉은 성모와 예수님의 간호를 받으며 마지막 죽음을 맞았을 것이고, 초기 교회부터 이러한 요셉의 모습은 다른 어떤 성인에게서 찾을 수 없는 특별한 은혜로 여겨졌다. 이밖에 동정 순교자인 성녀 바르바라도 갑작스런 죽음을 맞는 이들의 수호자다.

무엇보다도 임종을 생각할 때, 성모 마리아를 빼놓을 수 없다. 아들의 십자가 죽음을 지켜본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죽음 앞둔 이들을 한없이 자애로운 눈으로 내려다 보시는 분, 바로 성모 마리아다.

■ 죽음 묵상에 도움을 주는 성구(聖句)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 당신께서 제 목숨을 죽음에서 건지시어 제 발이 넘어지지 않게 해 주셨으니 하느님 앞에서, 생명의 빛 속에서 걸어가도록 하심입니다(시편 56, 14).

▲ 하느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하느님. 주 하느님께는 죽음에서 벗어나는 길이 있네(시편 68, 21).

▲ 주님께서 나를 그토록 벌하셨어도 죽음에 내버리지는 않으셨네(시편 118, 18).

▲ 주님을 경외함은 생명의 샘이니 죽음의 올가미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잠언 14, 27).

▲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로마 6, 4).

▲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 38~39).

▲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2코린 4, 10).

▲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폐지하시고, 복음으로 생명과 불멸을 환히 보여 주셨습니다(2티모 1, 10).

▲ 우리는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는 것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죽음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습니다(1요한 3, 14).

▲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요한 5, 24).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요한 8, 51).

▲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요한 11, 25~26)


죽음을 준비하기

히브리서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어느 집에 종이 한 사람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그 종이 너무나 어리석어 보였습니다.
어느 날 주인은 그에게 지팡이 하나를 주면서 ‘밖에 나가서 돌아다니다가 너보다 더 어리석은 자가 보이거든 지팡이를 그에게 주라’고 분부했다고 합니다.
종은 지팡이를 받았습니다.
몇 달 후에 주인이 심한 병에 걸려 누워 있었습니다.
‘주인님, 세상을 떠날 모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라고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주인은 ‘아니, 그거야 아직 준비하지 못했지’ 라고 답했답니다.
그러자 종은 ‘아니, 사람들이 하루 여행길에도 완벽하게 준비하고 떠나는 법인데 영원을 위해 준비한 것이 없어요?
이렇게 어리석은 사람은 처음 보았네.
자 여기 지팡이가 있습니다.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주인님이니, 여기 이 지팡이를 가지세요’ 라며 되돌려 주었다고 합니다.

현명한 사람은 남보다 자신이 먼저 철저하게 준비하는 사람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하나님의 말씀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단어가 두 개라고 하겠습니다. 

첫째 단어는 죽음

죽음은 확실한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힘도 죽음의 손을 멈추게 할 수 없습니다.
의술이 아무리 발달했어도 한사람도 죽음에서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돈을 다 가지고도 죽음의 때가 올 때 죽음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착함도 죽음을 막지 못합니다.

다윗은 『죽음과 나 사이는 한 발자욱 거리밖에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사무엘상 20:3
다윗이 또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네게 은혜 받은 줄을 네 부친이 밝히 알고 스스로 이르기를 요나단이 슬퍼할까 두려운즉 그로 이를 알게 하지 아니하리라 함이니라 그러나 진실로 여호와의 사심과 네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나와 사망의 사이는 한 걸음 뿐이니라.
But David took an oath and said, "Your father knows very well that I have found favor in your eyes, and he has said to himself, 'Jonathan must not know this or he will be grieved.' Yet as surely as the LORD lives and as you live, there is only a step between me and death."

둘째 단어는 심판

전쟁터에서 고참 병사가 총탄에 쓰러지자 군목이 달려와서 ‘병사, 죽는 것이 두렵지 않는가?’라고 묻자 병사는 눈을 크게 치켜 뜨고 불쾌하다는 듯이 대답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에서 수없이 싸우면서 죽음을 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닌데 두렵다니요, 저는 겁장이가 아닙니다. 그런데 왜 하필 죽어 가는 시간에 나의 감정을 건드리십니까?’ ‘하지만 병사, 죽음 후의 일은 준비되었나?’ 병사는 한숨을 쉬었습니다.‘목사님, 바로 그것이 나를 두려움에 떨게 합니다.’ 기독교인이 아닌 병사는 죽음 후에 올 일을 두려워 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경험한 이 세상의 위험에는 용감했을지 모르나 하나님께서 심판을 주관하시는 문제에 대해서는 너무나 무기력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죄를 숨기고 피하여 다닐 수도 있고 구원에 대해서 무관심할 수도 있고 그리스도께 나아오라는 목사님의 호소를 비웃을 수도 있지만 그러나 어느 날 하나님을 대면해 일생의 죄를 다 내놓고 계산할 때가 반드시 옵니다.

1. 사람은 반드시 죽어야만 합니다.

프랑스의 미술 전문 잡지인 '일뤼지옹'(Illusion)지에 중세의 귀부인이 화장하는 그림이 실렸습니다. 그녀는 화려한 옷을 입고 온갖 보석으로 치장한 채 거울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울에 비친 그녀의 얼굴은 겉모습과는 달리 흉측한 해골의 모습이었습니다. 이 그림에는 누구나 세월이 지나면 늙고, 겉모습을 치장하는 것만으로는 자신의 거짓된 삶을 속일 수 없다는 엄숙한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사회학자 토니 캄폴로는 ‘모든 인간은 죽음 앞에 섰을 때 이루지 못한 업적을 바라보며 후회하지 않는다. 단지 바르게 살지 못했음을 후회한다’ 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장래에 있을 죽음의 순간을 잊고 외형의 업적을 이루는 데 인생을 허비합니다. 그러나 죽음 앞에 서면 인간은 본능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예감하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됩니다. 요즘 당신은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진실을 버린 채 눈앞에 보이는 업적만을 좇아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케네디 대통령은 차기 대통령에 당선되려고 선거유세차 달라스 시에 갔을 때 환영하는 군중들에게 손을 흔들어 답례하다가 괴한의 총탄에 맞아 쓰러졌습니다. 누가 그 머리로 총탄이 꿰뚫고 나갈 줄 알았겠는가? 아무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의 달라스 행은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저승길이 되고 말았습니다. 또한 케네디 대통령의 동생 로버트 케네디 상원 의원도 미국 전역에 선풍을 일으키며 대통령 예비선거에 승리의 깃발을 날리며 나아가다가 켈리포니아의 어느 호텔에서 자기를 위하여 수고한 사람들과 환담을 나누던 중 총탄에 맞아 쓰러졌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는 대통령이 될 꿈에만 부풀어 있었을 뿐 그의 출마가 저승길이 될 줄은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죽음이란 아무도 모르는 세계입니다. 한치 앞도 보지 못하는 게 인생입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4:14)

한 때 세계를 제패했던 알렉산더(Alexander)대왕의 아버지 필립 2세는 이상한 종을 데리고 있었는데, 그 종은 아침마다 첫 인사를 하면서 ‘대왕이여, 당신은 죽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 말이야말로 모든 인간이 꼭 기억해야 될 말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피할 수 없는 엄숙한 사실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고 자기는 죽음과는 상관이 없는 줄로 착각하고 살아갑니다. 지난 번 미국 9.11 테러사건 때, 참사를 당한 6,000여 명의 사람들도 그 날 아침 자기들이 죽으리라고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날 아침 갑자기 죽음을 당했습니다.

죽음은 흔히 찾아옵니다. 자동차 사고, 비행기 추락, 치명적인 싸움, 전쟁, 홍수, 등등.... 우리가 건강하며 힘이 충만할 때는 죽음에 대하여 그렇게 많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참으로 뜻밖에 올 수 있습니다. 어떻게 죽음을 준비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우리의 인간관계를 미완성으로 남겨두지 않음으로써 죽음을 준비할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을 상하게 한 사람을 내가 용서해 주었는가. 또한 내가 마음을 상하게 한 사람으로부터 용서를 구했는가 하는 문제는 죽음에 앞서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입니다. 내 생애의 한 부분인 사람들과 내가 화평하다고 느낄 때, 비록 나의 죽음이 큰 슬픔을 불러올 수는 있으나 죄나 분노는 불러일으키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어느 순간이고 죽을 준비가 되어 있을 때, 우리는 또한 어느 순간이고 살 준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리더쉽과 동기 연구가로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로빈 S. 샤르마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가 쓴 책의 이름이 너무 재미있어서 소개합니다. "내가 죽을 때 누가 울어줄까?" 라고 하는 책입니다. 아주 성공적인 삶을 위해서 그는 백 한 가지 지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이 그 책에 있습니다. ‘네가 태어났을 때, 너는 울음을 터뜨렸지만 너를 지켜보는 모든 사람은 기뻐했단다. 그런데 네가 죽을 때는 많은 사람이 울겠지만 그때 네 자신은 기뻐할 수 있도록 살아야한다.’ 대단히 중요 한 얘기입니다. 우리가 베풀 수 있을 때 베풀지 아니하면 베풀고저 할 때에 할 수 없게 됩니다.

어느 신학교교수가 학생들에게 “내일 죽는다”라는 가정을 하고 유서를 써 보라고 했습니다. 변호사를 통해 재산 분배에 대해 써 놓는 그런 유서가 아니라,“자신이 죽기 전에 남기고 싶은 중요하고 유일한 말이 무엇이냐”라는 데 초점이 맞춰진 것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도 내 삶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나의 죽음”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과연 나는 죽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내 마음대로 살았던 많은 날들이 덧없이 느껴집니다. 후회하고 회개해도 나를 과거로 되돌릴 수는 없다. 이제 남은 삶을 최대한 활용해서 알차게 사는 것이 죽음을 준비하는 삶일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불려 갔을 때 하나님이 나를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불러 주신다면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앞으로 나는 이렇게 살아갈 것입니다. 첫째, 빚진 자의 심정으로 살아야겠습니다. 둘째, 육신의 움직임이 가능할 때 하나님의 일을 더 많이 해야겠습니다. 셋째, 세상 것에 미련을 두지 않기 위해 필요 없는 것, 어쩌다 필요한 것 같아 보관하고 있는 것을 모두 버려야겠습니다. 넷째, 세상 것에 매달리지 말아야겠습니다. 다섯째, 죽을 때 웃으며 아름답게 죽을 수 있도록 늘 기도해야하겠습니다. 나는 아름다운 순교나 위대한 죽음을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평범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로서 부끄럽지 않게 주님의 일을 위해 최선을 다하며 살고 싶습니다. 남은 인생을 주님께 드리는 것만이 내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입니다. 아마 내가 남길 유서는 ‘하나님, 감사합니다’ 가 요지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는 천년만년 살 줄 알고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고 자기와는 상관이 없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에게나 조만 간에 죽음이 찾아옵니다. 대통령한테도 찾아오고 재벌한테도 찾아오고 튼튼한 사람에게도 찾아옵니다. 요사이 사극에 나오는 태조 이성계도 죽었고, 고려 태조 왕건도 죽었고, 불사약을 구해오라고 했던 진시황도 죽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전혀 죽음을 준비하지 않고 살며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사람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영생하는 존재이며 또 영생하는 길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영생하는 길을 찾으려고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화대학의 최화숙 교수가 쓴 『아름다운 죽음의 안내서』란 책에 보면 모든 사람들이 죽음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살다가 갑자기 의사의 사형선고 진단을 받고야 당황하며 허둥대는 모습을 본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돈도 있고 지식도 있는 사람인데 죽은 다음에 꽃 한 송이 가져오는 사람이 없고 울어주는 사람도 없이 고독하게 죽어 가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남의 눈에 피눈물나게 하며 부정직하게 살았기 때문에악하게 굴더니 드디어 죽고 말았구나 하고 속시원해 하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부디 정직하게 살고 불쌍한 사람에게 사랑과 자비도 베풀고 이웃과 나누며 살라고 간곡히 부탁하는 말도 읽을 수가 있습니다.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내일 일을 자랑치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함이니라’ (잠27:1)고 하셨습니다.

옛날에 한 부자가 땅을 많이 가지고 있었는데, 큰 풍년이 드니까 곡식을 다 쌓을 곳이 없어서 곡간을 크게 짓고 곡식을 많이 쌓아두고 말하기를 ‘영혼아 여러 해 쓸 양식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라고 말했는데, 그 날 밤에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고 그 영혼을 그 날 밤에 데려갔습니다.(눅12: 16- 21) 집도 땅도 저금 통장도 다 두고 가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죽음의 안내서』에 보면 사람이 죽을 때는, 장갑을 끼었다가 벗을 때 약간의 시간이 걸리는 것처럼, 사람의 영혼이 몸에서 빠져나갈 때 약간의 시간이 걸리는데 그 때에 현세와 내세를 동시에 보며 신비의 세계를 말해준다고 합니다.

교회에 다니던 17세 난 소년은 죽기 직전에 ‘아! 베드로가 보인다. 그 옆에 빛나는 분은 누구냐’ 고 엄마에게 묻기도 하고, 아무 것도 안 보인다고 하니까, ‘큰일났다. 나는 천국 가는데 우리 엄마는 지옥 가겠다’ 고 걱정을 하다가 ‘엄마, 나는 먼저 천국에 갈테니 엄마는 나중에 오세요’ 하며 천사 같은 얼굴로 세상을 떠나더랍니다.

김연준 씨란 분은 세 회사를 경영하는 분인데 간암 말기에 접어들면서 온 몸이 굳어져 말을 못했고 누워서 무릎을 세운 채 와들와들 떠는데, 이빨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무서우냐고 했더니, ‘지옥에 갈까봐요’ 그러더랍니다. 그래서 지옥에 안 가는 법을 가르쳐 드렸더니, 예수님을 영접하고 나서 온 몸이 풀리면서 화평한 얼굴로 세상을 떠났는데 숨을 거두기 전에 ‘빛이 보인다’고 하면서 ‘지옥에 안 가는 법을 가르쳐 줘서 감사하다는 말을 꼭 전해 달라’고 부탁하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사람은 반드시 죽습니다.

2. 죽음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미국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어른이 된 아들 넷을 둔 한 어머니가 병상에서 임종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병상에 둘러 서 있는 아들들에게 작별의 키스를 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첫째, 둘째, 셋째에게는 굿나잇 키스를 하라고 했으나 막내아들에게만 굿바이 키스를 하라고 했습니다. 막내아들은 이상해서 어머니께 물었습니다.

“어머니 왜 형들에게는 굿나잇 키스를 하라 하시고 저는 굿바이 키스를 하라고 하시나요?” “얘야, 너의 형들은 머지않아 저 좋은 천국에서 엄마와 다시 만나게 된단다. 그러나 너는 이게 마지막이란다” “왜요?” “엄마는 너를 예수님께 인도하고자 최선을 다했지만 너는 끝내 네 멋대로 살고 있다. 헌데 어떻게 너와 내가 만날 수가 있니? 그래서 네 형들과는 굿나잇이고 너와는 굿바이란다” 막내아들이 눈물을 흘리며 한 말입니다.

“어머니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저도 굿나잇 키스를 할래요. 엄마, 굿나잇”

사람이 피할 수 없는 엄숙한 사실은 죽음 후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심판이 있는 것입니다. 곡식 알갱이가 땅에 죽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수 십 배, 수 백 배로 다시 살아나는 것같이 사람이 죽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이 있고 부활 후에 심판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5장 28-29절에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아오리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하나는 생명의 부활이요, 다른 하나는 심판의 부활입니다. 생명의 부활을 얻는 사람은 영생을 얻어 천국에서 영원히 복락을 누리게 되고 심판의 부활을 얻는 사람은 평생 지은 죄를 낱낱이 드러내놓고 심판을 받고 그 지은 죄만큼 고통을 끼며 영원히 지옥의 형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을 얻게 된다고 했는데, 여기서 ‘선한 일’이란 사람 보기에 착한 일, 선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일을 말하는데, 그것은 곧,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고 영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선한 일이며, 하나님이 가장 악하게 보시는 일은 마음이 녹아지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회개하지 않고 예수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악한 일은 없습니다.

D. L. 무디(Moody)라고 하는 유명한 부흥사가 있었습니다.
그가 맡고 있던 젊은이들은 거의 다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했는데, 유독 한 청년만은 고집을 부리며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무디 선생님, 나는 서부로 가야합니다.
나중에 돈을 많이 벌어 가지고 온 다음에 그리스도를 영접하겠습니다하고 돌아가 버렸습니다.
몇 일 후에 이 젊은이가 몹시 아파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무디 선생은 병원에 찾아가서 기도해 주면서 예수님을 영접하라고 간곡히 부탁했더니, ‘무디 선생님, 나는 이대로 죽지 않습니다.
전에 말한 대로 서부로 가서 돈을 많이 벌어 가지고 온 다음에 그리스도인이 되겠습니다’ 하더랍니다.
하는 수 없이 무거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청년은 몇 일 후에 건강을 회복해 가지고 찾아와 인사를 했습니다.
‘선생님, 마지막 인사를 하려고 왔습니다’
무디 선생은 다시 어깨에 손을 얹고 간곡히 예수님을 영접하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청년은 화를 버럭 내면서 무디 선생의 손을 뿌리치고 ‘무디 선생님, 내 영혼 구원에 대해서 다시는 이야기하지 마십시오.
제가 다시 돌아와서 결심하겠다고 약속드립니다.
그러나 그 전에는 절대로 안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그 젊은이가 떠나가는 모습을 보며 무디의 마음에 무슨 불길한 예감이 들었습니다.
그 날 밤 큰 소리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서 깨어 일어나 창밖으로 머리를 내밀어 보았더니, 그 청년의 부인이 울면서 ‘무디 선생님, 빨리 좀 저희 집에 가 주세요’, ‘내 남편이 몹시 아픕니다. 빨리 좀 가주세요’, 무디는 ‘가야 소용이 없습니다.
당신의 남편은 오늘 오후 마지막 거절의 말을 했습니다.
이미 위험선을 넘어 섰습니다.
내가 가야 소용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여자가 울면서 간청하기 때문에 옷을 입고 따라갔습니다.
그 집 계단에 올라가는데, 그 청년이 침대에 누워서 눈을 번쩍 뜬 채 의식을 잃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너무 늦었어! 너무 늦었어!(Too late! Too late!)’ 하는 말만 되풀이했습니다.
그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꼭 쥐어주며, 성경을 읽어주고 기도를 따라 하라고 하는데도 알아듣지 못하고, ‘너무 늦었어! 너무 늦었어!’ 하는 말만 되풀이 하다가, 정신을 못 차린 채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린도후서 6:2).
바로, 오늘, 지금이 구원받을 기회입니다.
죽은 다음에는 기회가 없습니다.
교회의 문도 닫히는 때가 옵니다.
전도하는 사람도 없어지는 때가 옵니다.
계속 거절하면 성령의 역사도 끝나는 때가 옵니다.
요한계시록 20:11-15에 보면 하나님의 크고 흰 보좌 앞에 생명의 책들이 있고, 첫째 부활이 있고, 둘째 부활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 보면 두 가지 책이 있는데, 생명책과 행위의 책들입니다.
생명책은 단수로 되어 있고, 한 권입니다.
이 책은 천국의 호적과 같은 책으로 예수를 믿고 죄사함 받아 구원받은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된 책이고, ‘행위의 책들’이란 예수 믿지 않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모든 행위가 기록된 책들인데 각 사람에 하나씩 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예수님 재림하실 때 부활하게 되는데 그것이 첫째 부활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담당하여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에 죄의 심판을 받지 않고 상급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지 않고 영접하지 않는 사람은 천년 왕국 시대가 지난 후 둘째 부활을 얻게 되는데 영원히 죽지도 않고 고통을 받기에 합당한 몸으로 부활하며, 평생 지은 죄를 다 드러내놓고 심판을 받아 형벌이 결정된 후 둘째 사망 즉 불 못에 던지워지게 됩니다.
예수를 믿고 확실히 영접하면 이 순간부터 생명책에 기록되었다가 아무 때 죽어도 낙원에 갔다가 예수님 재림하실 때 부활한 몸과 낙원에 있던 영혼이 결합하게 됩니다.

주 예수여, 나의 구주로 믿습니다.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정말 구원받은 사람인지 아닌지는 이 후에 교회에 출석하며 신앙 생활하는지 안 하는지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죄 사함 받지 아니하면, 반드시 둘째 부활을 얻어 죄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전도서 12장 14절에도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화해하셨습니까?
그리스도는 당신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며 지금 당신의 손을 하나님께서 붙잡으시도록 요청하십니다.
그렇게 하면 당신에게 구원이 있고 용서가 있고 천국이 있습니다.
당신이 그리스도 앞으로 나오지 않으면 영원한 죽음밖에는 남을 것이 없습니다.
지금 그리스도께로 나오시면 당신은 결코 심판대 앞에 서게 되지 않을 것입니다.
죽음과 심판이 확실하기 때문에 우리는 준비가 필요한 것입니다.
언제 준비할까요?
그 때는 바로 「지금」입니다.

많은 나라에 가 본 경험을 갖고 있던 영국군장교가 어느 날 친구들이 모여서 경험담을 말해달라고 해서 여러 나라에서 본 것들을 얘기 해주고 나서 그의 말에 홀린 청중에게 말하기를,『나는 이것들보다 더 놀라운 일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죽어서 주님 앞에 선후 5분 후에 일어날 일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죽은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까?

성경은 두 가지 심판을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크리스천들의 심판

이 심판은 구원이냐 멸망이냐를 결정하는 심판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했으면 이미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심판은 구원받느냐 못 받느냐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성도가 지상에 사는 동안 행한 일에 대한 심판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한 모든 것에 대해서 상급이 주어질 것입니다.

둘째는 구원받지 못할 사람들을 위한 심판

이 심판을 『크고 흰 보좌의 심판』이라고 합니다.
그 자리에서는 사람들은 천국이냐 지옥이냐를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모두 지옥으로 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믿기를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오직 지상에서 행한 모든 행실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형벌을 받느냐를 결정하는 심판입니다.
하나님은 누구나 어느 날 심판에 직면해야 한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 만날 준비를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해야 될까요?
세상은 『착하게 살면 천국에 간다』고 할 것입니다.
또는 『다른 사람을 바르게 대하라. 네 돈을 남에게 주라. 빚을 갚으라. 그러면 천국에 간다』고 세상은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반드시 그리스도를 통해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죄를 회개하고 성실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의지해야 하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좀 더 바르게 지혜로운 삶을 위하여 승리하시는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전 3:2-3)

넬슨 만델라 남아공 전 대통령이 2013년 95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는 대학 졸업 후 변호사 사무실을 내면서 본격적으로 인종 차별 정책 철폐 운동에 뛰어들었는데, 그 일로 27년간이나 감옥에서 옥수수 죽으로 연명하며 매일 채석장에서 노역하고, 간수들이 뿌려 대는 똥오줌 세례를 받아야 했습니다.
출옥 후 만델라는 남아공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되었고, 임기를 마친 1999년에는 "내가 연락하기 전엔 내게 연락하지 말라."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미련 없이 정계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세계 곳곳의 분쟁 지역을 찾아다니며 평화 협상 중재, 빈민 구제 사업에 몰두했습니다.
전 세계인들에게 존경받던 그는 임종을 앞두고 "난 대단한 인간이 아니다. 단지 노력하는 노인일 뿐이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여전히 부족함 많은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120세를 사는 동안 눈이 흐리지 않고 기력도 쇠하지 않은 모세는 죽음을 앞두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외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 90:10).

우리 모두는 한 번은 죽는 존재입니다.
죽은 뒤에는 심판을 받게 됩니다.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지금 하려는 것을 하겠습니까?
죽음을 망각한 삶과 죽음이 시시각각 다가오는 것을 아는 삶은 다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부끄러울 것이 없는 자로 설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 한 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불안한 현실 속에서 하나님이 베풀어 주셨던 은혜를 생각해 봅니다.
저 자신의 경험과 능력을 의지했던 교만을 꺾으시고, 가난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소서.
오늘 인생의 종말을 맞이한다 해도 주님 앞에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삶을 살아가는 종말 신앙의 소유자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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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철학 : 삶과 죽음


죽음은 여전히 인간에게 있어서 어려운 문제 중에 하나다.
죽음은 삶의 마지막 끝으로써 우리 인식의 영역을 넘어선 단계다.
죽지 않는다면 우리는 생명이라고 할 수 없다.
헤겔(2005)은 “신체의 죽음이야 말로 개인(개체)이 공동체를 위한 마지막 노동”이라고 했다.
모든 개체가 도달하는 보편성이 죽음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그 것을 알 수가 없다.
쇼펜하우어는 “죽음에 대해 무관심 하라”고 했지만 누구든지 가끔은 좋은 죽음을 생각하며 살아간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건강을 잘 유지하면서 죽음을 초월하려는 것이 인간의 현세적 목표다.
기쁨, 초월적 힘, 영혼의 불멸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 실존이다.
살아있는 사람 모두는 영혼을 소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죽어도 영혼의 영원성을 추구한다.

​죽음의 철학(philosophy of death)은 모든 사람이 결국 죽는 다는 데서 출발한다.(Kamath, 1993), 다뤄지는 주제 역시 다양하다.
죽음에 대한 형이상학적 질문들, 즉 죽음이 무엇인가? 
죽음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죽음의 순간을 수없이 넘기면서 느끼는 인간의 실존은 무엇인가?
실존주의적 죽음에 대한 형태와 범위는 무엇인가?
아니면 죽음이 좋은 일인가 나쁜 일인가?
영혼은 존재하는가?
죽음은 우리가 사는 방식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등이 망라된다.

 

​사실상 죽음보다 더한 보편적인 주제를 상상하기 어렵다. 이 세상에서 죽음만큼 확실한 것은 없지만 죽기를 두려워한다. 실제 우리 생활 속에서 문학과 예술에서, 사회규범과 윤리에서 다뤄지지만 익숙하지 않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전문가로써 살기는 어렵겠지만 죽음과 죽어감(dying)에 대한 관심은 누구나 빼놓을수 없는 대상이다. 공자는 “삶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했다. 불교에서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살 것인지도 모르는 것”이라고 했다. 그 만큼 죽음에 대한 이해는 우리 삶의 현실적 문제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죽음을 둘러싼 철학적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인생에서 죽음이란 무엇인가? 하는 큰 질문 말이다. 죽어감과 죽음은 누구에게나 최대의 관심 대상이니 그렇다. 철학자 혹은 철학자가 아니든 죽음의 문제를 다루는 데는 큰 차이가 없는 것 아닐까. 그동안 죽음에 대한 논의가 은유적이거나 금기시되는 주제였기에 가장 취약한 문제이고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죽음을 모르면 언젠가 찾아올 죽음을 배울 수 없다. 인간으로써 최대 관심은 건강과 생존 및 죽음 이후의 내세와 영혼의 문제인 것이다.

 

□ 죽음이 왜 철학의 주제인가

 

​죽음은 철학의 주제다. 죽음의 철학은 자연과 죽음의 의미에 대한 탐구다. 철학은 진리를 찾는 것, 그리고 우리가 진실 되게 살아가도록 돕는 학문이다. 그러나 늘 그랬듯이 철학적 문제는 논쟁의 세계다. 인간은 동물과 크게 다를 바 없지만 특별한 실존으로써 ‘나’를 인식하는 장대한 존재이다. 인간은 호모사피엔스(생각하는 인류, 이성인)다. 인간의 동물이 아닌 것은 본질적으로 자기 인식 능력에 있다. 자기 인식 없이는 존재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생명의 가치는 다르지 않다는 것, 다만 종(種)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는 주장도 있지만(Singer, 1994) 인간은 정신적 존재(mental being)라는 점에서 동물과 다르다. 짐승들도 자신들의 고유 방식으로 의사소통하지만 이성적 정신적 존재는 아닌 것이다.

 

​독일 정치 철학자 헤겔은 말했다. 인간의 실체는 동물적인 것이지만 그것은 본질적으로 사유하는 존재자의 실체라고. 그는 인간사고가 세계정신 자체의 사고로 전제하고 현실이 곧 이성임을 강조한다. 정신은 본질적으로 현실적인 것이어서 이성의 눈으로 철학하기를 강조한다. 이성은 곧 정신으로써 이는 또한 영혼의 삶과 연결돼 있다.(비앙키, 2014) 또한 프랑스 아날학파의 필립 아리에스(Aries, 2004) 역시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동시에 삶의 완성이라면서 인간은 자신이 죽게 될 것이라는 것을 인지하는 유일한 동물이라고 했다.

 

​따라서 죽음의 철학에서는 무엇을 이해 할 것인가? 하는 것이 핵심주제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이 시작되는 삶의 동반자이지만 정작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작용해왔다. 그런 점에서내 우리의 몸과 의식이 깊은 침잠에 깨어나야 한다. 죽음을 잘 관리하고 맞이하기 위해서는 삶의 의미를 꾸준히 찾아내 대처하는 일이다. 삶이 펼쳐지는 시공간 속에서 몸과 마음, 그리고 지각을 온전히 유지하는 일이 건강한 삶이다. 영혼의 질병을 잘 치유하면서 죽음을 준비해 나가는 것이 노년기의 지혜다.

이와 관련해 죽음의 철학에서 우리가 배우고 실천해야 할 요소들이 무엇인가 찾아보자.

​첫째, 죽음의 의미(meaning)를 아는가?

죽음은 각자 독특한 형태를 갖는다.
인간으로 하여금 생명을 부여했던 조건들이 상실 돼가는 과정 속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예를 들면 생물학적으로 건강이 약해지면서 기침이 잦아지고 가래가 끊는다.
앉고 일어날 때도 힘들다.
결국 생명의 끝을 맞는다.
죽음의 끝은 개인 자신의 종말이다.
과거 현재 미래로 가는 시간속에서 ‘지금-순간’에 물질적인 존재 뿐만 아니라 비물질적인 영혼의 문제까지 깨닫는 일이다.

둘째, 몸의 소멸인 죽음의 모습은 어떤가?

몸과 죽음의 관계로서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눠진다.
그것은 다른 이의 타자화 된 죽음과 주체적인 ‘나’의 죽음으로 나눌 수 있다.
자신의 죽음에는 또 죽임을 당함(타살됨)과 스스로 자연 순리에 내 맡기는 죽음(순명)이 있다.
죽음의 형태는 자연사 뇌사 병사 안락사 자살 타살 변사 의문사 고독사 사형 등 다양하다.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식물들, 그리고 이 땅위에 살고 있는 동물들, 모두가 죽음과 동시에 해체된다는 사실을 성찰하는 일이다.

셋째, 죽음에 대한 공포, 두려움, 불안, 허무함(무로 돌아감)과 같은 감정이 어디서 오고 어떻게 이해 할 것인가?

죽음에서 오는 본능적인 두려움 같은 것을 어떻게 멀리할까? 하는 것이다.
어떤 이는 영적 위로를 받지 못하고 심한 압박감과 미몽 속에서 죽어갈 것이다.
물론 죽는 그 순간 육체와 뇌는 죽게 됨으로 죽음 자체는 인식 또는 학습 할 수 없다.
죽음이라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라고 느낄 시간적 심적 여유가 없다는 의미로 죽음의 순간에 의식은 상실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음에 근접한 한 사람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지고 더 잘 살기를 원하게 마련이다.

넷째, 죽어가면서 후회하는 것이 무엇인가?

후회(regret)는 우리 생활과정에서 실패한 것, 낭비한 것, 해보지 못한 것 등 다양할 것이다.
죽음 앞에서 후회는 눈물로 변한다.
인간이기에 후회하는 것이다.
일본의 호스피스 전문의 오츠 슈이치(2015)는 ‘죽을 때 후회하는 것“들을 말한다.
그것은 △미안하다 고맙다는 말을 못한 것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한 것 △지금 순간에 충실하지 못한 것 △부정적인 감정을 다스리지 못한 것 등을 제시하고 있다.
말인즉 마지막 순간까지 후회 없이 잘 살아왔는가를 묻는 것이다.

다섯째, 죽음의 질이 무엇인가?

삶의 질과 죽음의 질이 다른 것은 아니다.
죽음을 알면 삶이 잘 보이기 마련이다.
잘 죽는 법을 알지 못하면 잘살지도 못한다.(Critchley, 2008)
마지막 순간까지 고통 없이 가족들에게 좋은 기억을 남기고 떠나는 것이 좋은 죽음이고 세상과 화해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죽음의 순간이 오는 방식은 매우 비극적이다.
치매 등을 앓다가 죽으면 가족들에 대한 영원한 수치가 된다.
존엄한 죽음을 맞이하기란 매우 어렵다는 뜻이다.
마지막 임종단계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 고통을 완화하며 개인의 존엄성을 지키는 죽음이 좋은 죽음이다.

여섯째, 생명/죽음에 대한 윤리적 판단이 무엇인가?

죽음과 관련해서 신체에 대한 병리의학적으로 치료하고, 그리고 죽음에 대한 합리적인 태도를 갖도록 하는 것이 윤리적 판단이다.(Morhaim, 2012)
그러나 장수사회에서 죽음과 관련된 윤리논쟁(자살, 장기기증, 안락사 등)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
예를 들어 식물인간 상태(뇌사상태)에 있는 삶에 대해 죽음을 재촉할 수 없는 일이다.
이와 관련해 최근에는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막아 웰다잉을 유도한다는 법안들도 마련되고 있다.
무리한 생명 연장 때문에 존엄성이 짓밟혀서는 안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일곱째, 죽음 관련기술의 발전이 무엇이고 어느 수준인가?

노화문제와 관련된 줄기세포 복제 유전자치료 인간 게놈 염기 서열 조작을 통한 생명 연장술들이 발전하고 있다.
생명공학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는데 수명연장술, 냉동보존술, 바이오 산업 등 생물 의학적 영역에서 크게 발전하고 있다.
그러나 100세 시대 “나는 언제까지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갖게 한다.

​여덟번째, 인간의 불멸성(indestructibility)은 가능한가?

흔히 인생의 유한성과 불멸성의 논쟁은 끝이 없다.
유한성은 물질에 기초한 것이고 불멸성은 정신(spirit)의 개념이다.
육신은 죽더라도 영혼은 계속된다는 개념이다.
인간 속에 생명의 본질인 불멸성이 깃들어 있다는 얘기다.(Fischer, 2013)
이러한 불멸의 희망은 종교가 그러하듯이 영혼의 존재를 반영한다.
사이몬 크리츨리(Critchley, 2008)는 내세에 대한 믿음, 불멸에 대한 갈망은 죽음의 두려움에 대한 극복의 열망이라고 진단한다.
우리 신체는 사유하는 존재지만 우리 삶은 영혼의 삶과 연결돼 있다는 것이다

​아홉 번째, 죽음이후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가?

우리 대부분은 사후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모른다. 다만 타인들의 죽음을 통해서 막연히 이해 될 뿐이다. 그런데 매우 제한적이지만 우리가 죽으면 소멸(無의 상태), 영혼 정신의 계속성(부활), 불교 힌두교에서 말하는 환생, 윤회설 등을 알고 있다. 기독교의 성경, 불교 경전의 능가경(楞伽經)과 금강경(金剛經) 등 모든 경전들이 죽음이후의 다른 세상을 얘기한다. 종교적 믿음, 영성, 수행의 길을 인도하고 있다. 죽음 이후에 천당 혹은 지옥에 갈수 있다는 교리에 따라 살아가면서 죄를 짓지 않는, 지속적인 정화가 필요한 존재들이 바로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려 준다.

​정말 큰 질문들이다.
죽음, 죽어감에 대한 철학적 이해 그리고 죽음 이후에 우리 영혼은 어디로 가는가의 궁극적 개념들조차 난해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죽음의 철학을 논하는 것은 우리가 죽음에 잘 대비하기 위한 것이다.
소멸의 공포를 직시하고 이를 극복하도록 돕는 것이 죽음 철학의 과제다.(Critchley, 2008)
현자들은 죽음을 영적으로 해방되는 재탄생(환생), 부활을 통해 영생의 길로 나갈 수 있는 여정으로 설명한다.
말인즉 죽음을 완전히 준비하기 위해서 살아있는 동안 끊임없는 수행을 요구한다.
죽음과 영혼의 상실은 생명의 에너지가 단절 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에서 한 평생 통찰과 깨달음이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에피쿠로스는 사람들에게 현재의 “삶에 신경 좀 쓰라”고 권면하지 않았던가.
죽음이라는 예정된 시간은 미래에 일어날 사건이 아니라 지금 현재 삶의 형태에 따라 결정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

□ 죽음의 설교자들

철학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위한 준비’라고 했다.
죽은 다음의 생이 없다는 철학자도 물론 있다.
하지만 많은 철학자들이 초월(형이상학)보다 일상을 하늘 저편 대신 땅위의 삶을 더 강조한다.
내가 없는데 천당도 지옥도 없다면서 내가 절대유일의 존재가 아닌가 묻는다.
어떤 이는 죽음에 대해 무관심 하듯 죽음 앞에서 유언도 싫고 무덤도 싫다는 반응이다.
공자 역시 “삶에 대해서 모르는데 어찌 죽음에 대해 알 수 있는가“라며 죽음의 문제를 적극 다루지 않았다.
한마디로 죽음과 영혼에 대한 문화적 종교적 철학적 견해는 다양하다.
죽음의 의미, 영혼불멸에 대한 철학적 주제는 끝이 없는 논쟁의 세계인 것이다.

​까다롭지만 죽음의 문제는 철학자들의 주요 관심사였다.
철학적 입장에서 우리 모두는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논리실증적으로 우리는 언젠가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예상한다.
죽음의 본질, 내세로의 영원가능성, 죽음의 대한 수용태도 등 '죽음학' 입장에서 보면 매우 중요한 주제다.
이러한 죽음의 문제는 플라톤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에피쿠로스, 스피노자의 작품들에 이어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 칼 야스퍼스, 비트겐슈타인 등에서 잘 나타난다.

O 하이데거의 현존재와 죽음

​죽음의 설교자 중에서 우선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Heidegger)가 있다.
그는 “인간은 무엇으로 존재하는가”라는 질문부터 시작한다.
살아있는 실존적 의미에서 인간존재를 다른 존재들과 구별해서 ‘현존재’(Dasein)라는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
현존재란 다름아닌 죽음을 향한 존재다.
죽음이란 자신의 실존이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게 되는 상태다.
이는 인간을 ‘세계-내-존재’(being-in-the-world)에 초점을 맞추고 인간을 이 세상에 내 ‘던져진 존재’로써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이 세상에 태어나고 살다가 죽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 누구도 국가 부모 성별 출생일을 택할 수 없이 태어났기에 자기 맘대로 결정할 수 없는 존재이다.
인간은 현실세계를 살아가는 것, 어느 상황에 처해 있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존재에 대해 ‘책임을 지는 존재’라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죽음에 대한 분석에서 생물학적으로 죽음 또는 죽어감에 대해 관심이 없다. 다만 죽음의 현상에 대해서도 인간 현존재는 ‘죽음에 이르는 존재’(being-towards-death)입장에서 접근한다. 이때에 현존재란 자신의 한계, 자신의 불안을 극복하며 자신의 본래적 모습을 찾아가는 존재를 의미한다. 그의 관심은 현존재인 인간은 “아직 오지 않은 죽음”(yet-to-come' death)의 상태, 즉 죽음으로 ‘미리 달려가 봄’으로써 자신의 유한성을 깨닫고 자기 고유한 본래적인 전체적인 삶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존재의 관점에서 자신의 존재를 인식할 때 죽음은 실존으로서 다가오게 된다는 논리다.

​더구나 하이데거의 죽음에 대한 입장은 ‘존재와 시간’(Being and Time)속에서 설명한다. 하이데거는 존재론적 죽음에서는 타락(fallenness), 내던져짐(thrownness), 죄(guilty) 등의 문제로 설명하면서 단순한 존재가 아닌 인간의 현존재(Dasein)을 설정한다.(하이데거, 1998) 그는 현상학적으로 죽음에 대한 종교적 프레임에서 벗어나 ‘존재와 시간’에서는 하나님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인간실존을 내세운다. 인간의 존재를 종교적으로 신 또는 불멸에 관계없이 순수 형상으로 보았다. 인간은 죽음에 이르는 존재로 본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며 피할 것이 아니라 죽음을 직접 대면하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 성찰하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죽음이 저 멀리(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음은 늘 생의 바로 옆에 거리 없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이데거는 죽음에 대해 실존적으로 분석하고 있는데 그것은 ▷죽음은 목격 될 뿐 자신은 결코 경험될 수 없다는 것, ▷인간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점에서 죽음은 언제나 한계상황으로 존재한다는 것, ▷죽음에 대한 경험이나 예측도 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죽음은 늘 인간에게 있어서 현존재일수 없다는 입장이다. 사람은 아직 죽지 않은 상태에서, 즉 삶이란 자신이 태어난 후 지금까지 죽음이 아직 찾아오지 않은 시간 속에 살아갈 뿐이다.

​하이데거의 이러한 죽음에 대한 근본적 성격 때문에 인간은 ▷원치 않는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데 이때 ‘불안’한 마음을 갖게 된다는 점, ▷인간은 불안을 부정하기 위해 현재 자신의 상태를 외면하려한다는 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죽음의 가능성을 늘 안고 살아가는 존재로써 ‘한정된 시간’ 속에서 살아간다는 입장이다. 인간은 죽기 전에까지는 자신의 죽음을 경험할 수 없고 이해 할 수도 없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죽으면 더 이상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죽음은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죽음 자체를 전할 수 없다. 다만 주변 사람들이 죽어가는 모습에서 자기 자신도 언젠가 죽을 것이라는 것을 예상 할 뿐이다. 사람들은 자기 죽음이 멀리 있다는 생각을 하며 “아직은 아니다”라며 살아갈 뿐이라고 강조한다.

결국 하이데거의 죽음에 대한 실존적 개념은 두 가지로 요약되는데 그것은 주체적 으로 받아들이는 죽음이고, 또 하나는 비주체적, 비존재 상태로 도피하려는 태도다. 전자는 최종적인 죽음을 향한 존재, 죽음에 이르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주체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후자는 죽음은 ‘세계-내 존재’로부터 분리되는 소멸성이 인간의 한계이지만 살아있는 동안 자기존재 불가능성에 대한 두려움, 불안, 허무함, 무화(nothing)의 가능성으로부터 도피하려는 존재들이다. 즉 ‘죽음에 임하는 존재’로부터 도피하려는 인간의 나약함을 지적 하고 있다.

O 야스퍼스의 한계상황에서의 존재의 죽음

​하이데거의 현존재(Dasein)는 시간차원에서 경험자체로 자신의 존재를 말한다. 실존적 분석이 곧 하이데거의 철학이다. 그러기에 존재가 알려지지 않은 한 우리는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수많은 과오 속에서 살아간다. 반면에 칼 야스퍼스(Jaspers)는 하이데거와 다르게 ‘인간의 존재론적 구조’를 말하지 않는다. 존재(dasein)의 죽음에서 죽어가는 존재를 넘는 초월성, 궁극적인 내세, 불멸을 말하지 않는다. 죽음에 대해 종교적 관점에서 보는 것은 아니지만 초월하는 존재(existenz)로서의 실존적 개념으로써 비인격적인 신을 상정한다.(Filiz, 2008) 하이데거와 야스퍼스가 같은 시대를 살았지만 하이데거는 신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고 야스퍼스는 인간이 신의 품에 안기게 된다고 함으로써 유신론적 실존주의 입장을 취한다.

아울러 인간은 한계상황에 처하게 되는데 그것은 죽음, 우연, 투쟁(다툼), 고뇌, 죄책(부채)이다. 죽음은 존재로서의 피할 수 없는 조건이다. 야스퍼스의 실존철학(philosophy of Existence)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이 겪는 한계상황은 고통과 죽음의 문제다. 한계상황은 어떤 벽(사회제도 규범)에 맞서지 못하는 인간의 나약함을 의미한다. 이런 한계상황(critical situation, Grenzsituation)은 인간의 ‘세계 내 존재’(being-in-the-world)의 끝을 의미하기 때문에 죽음은 우리의 안정감 존재의 기반을 위협하는 것이다.

​알아차리기 쉽지 않지만 죽음은 삶의 적이다. 생명은 본질에서 있어서 창조이고 자발성이지만 사실 생사문제는 어떤 예정이나 예상도 허락 하지 않는다. 야스퍼스가 말하는 죽음에 대한 태도는 3가지로 요약되는데 이를테면 ▷죽음은 절대 끝이 아니다, ▷육체의 죽음은 절대 끝난다, ▷죽음을 회피하고 무관심 해 진다는 것이다. 인간은 무엇이 일어날지 전혀 예상이 불가능한 한계상황에서 좌절하며 생존해 가는 존재들임을 말한다. 즉 야스퍼스는 인간이 늘 필연적 한계상황에 늘 놓여 있다는 판단이다. 여기서 한계상황인 죽음 고뇌 투쟁 죄책 등 숙명적인 한계상황을 극복 못하고 오히려 이런 한계상황을 감내하며 세상에서 버텨내는 것이 실존의 본질이다.(Filiz, 2008)

​특히 야스퍼스는 죽음을 인간존재의 피할 수 없는 한계상황으로 보고 인간이 죽음에 직면해 취할 수 있는 태도를 두 가지로 설명한다. 그것은 우선 객관적 사실로 특정 한계상황에서의 존재의 죽음이다. 야스퍼스가 말하는 한계상황은 피 할 수 없는 상황 즉 실존이 당면하고 있는 현실을 의미한다. 죽음은 고유한 것, 남과 바꿀 수없는 것, 반드시 찾아오는 것을 변경할 수 없는 것이 한계상황이다. 그러나 우리가 피 할 수 없는 한계상황에 있더라도 그것을 넘어 진정한 자신을 찾게 되고 초월적 능력을 갖는, 즉  죽음을 모르는 불멸(deathlessness)의 실존임을 강조한다. 죽음을 허망한 종말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 즉 자기의 한계상황을 인식하며 희망을 잃지 않도록 대처하는 것이 인간의 능력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죽음을 모르는 존재라는 사실은 죽음을 초월해서 살 수 있는 영원성이다. 영원성은 시간을 초월한 비물질적 자유 그자체이다. 죽음을 초월해서 영적세계를 경험하는 것이다. 인간 실존을 초월하여 신에게 다가가는 것, 신에 의한 초월, 구원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런 상태에 이를 때 사람은 비로써 불안을 극복할 수 있는 ‘자유로서의 실존’ 이 주어진다. 주체적인 자기존재를 초월하여 영원히 살고 싶다는 욕구는 인간의 궁극적 관심이며 이는 종교에서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죽음은 인류역사 이래 중대한 의미로 인식되어온 것이다.

​그러므로 야스퍼스는 인간의 죽음의 필연성과 비존재 개념을 이해 할 것을 요구한다. 야스퍼스는 실증주의적 과학과 지식에 대한 과신을 경고하면서 인간의 비합리성에 기초한 본래적인 인간존재의 문제를 실존철학이라는 방법으로 설명한다. 하이데거는 인간존재라는 개념을 사용했다면 야스퍼스는 ‘자기 실존’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특히 ‘자기실존’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하는 근본적 물음과 관련돼 있다. 결국 ‘나’는 실존적 불안, 소외와 고독, 죽음의 문제들을 극복해 가는 존재로써 여기에는 자기인식, 정체감, 타인과의 관계 찾기 등을 모색하고 재정립 해 가는 ‘나’를 강조한다.

​덧붙이면 야스퍼스의 실존이라는 의미는 객관적 존재, 자아존재, 그리고 존재자체를 말한다. 여기서 ‘객관적 존재’란 사람 짐승 건물 등 모든 대상들이 존재하는 것이고, ‘자아존재’란 나 자신이 세계에 존재하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 옳고 그름의 이치를 깨닫는 자아를, 그리고 ‘존재자체’란 현존재에 관계하는 초월적 시원적 본질로써의 존재를 말한다. 이들 세 가지 형태는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전체로 묶여져 결속되는 실존을 구성한다. 말인즉 모든 존재는 자체만으로 소중하고 아름답고 사랑받아야할 존귀한 존재들이다.

​결국 야스퍼스는 죽음에 대한 포괄적이고 실존적 개념에 매달리지 않고 죽음에 직면해서 겪는 다양한 심상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다시 말해 나는 죽음에 대해 어떤 의식과 태도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죽음에 대한 이해와 해석이 달라진다는 입장이다. 한계상황에서 자기가 유한하다고 인식 할 때 초월자(또는 포괄자, Periechontolgie)와의 실존적 소통이 가능하게 된다. 죽음의 사실을 자각할 때 현실의 삶을 더 돌아보게 하고 본래의 자기를 주체적으로 인식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 인간으로써 ‘모든 것’들이 불가능하다는 것, 바로 그러한 사실 때문에 유한성을 받아들이고 죽음을 학습해야 한다는 것이다.(끝)

<참고자료>

비앙키, 올리비아(Olivia Bianchi, 2014), 『헤겔의 눈물』, 김동훈(역),

서울: 열린책들.

아리에스, 필립(Aries, 2004), 『죽음 앞의 인간』, 고선일(역), 서울: 새물결

오츠 슈이치(2015), 『죽을 때 후회하지 않는 사람들의 습관』, 황소연(역),

서울: 한국경제신문사.

하이데거, 마르틴(1998), 『존재와 시간』, 이기상(역), 서울: 까치.

헤겔, 게오르크 빌헤름 프리드리히(2005), 『정신현상학』(2), 임석진(역),

서울: 한길사.

Critchley, Simon(2008), The Book of Dead Philosopher, New York: Random House.

Filiz, Peach(2008), Death, Deathlessness and Existenz in Karl Jaspers' Philosophy, Edinburgh: Edinburgh University Press.

Fischer, John Martin(2013), "Immortality", in Bradley, Ben, Fred, Feldman(2013), The Oxford Handbook of Philosophy of Death,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pp.336-353.

Kamath, M.V(1993), Philosophy of Life and Death, Mumb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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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rhaim, Dan(2012), The Better End: Surviving(and Dying) On Your Owen Terms in Today's Modern Medical World, Maryland: The John Hopkins University Press.

Singer, Peter(1994), Rethinking Life & Death: The Collapse of Our Traditional Ethics(2nd ed), New York: St Martin's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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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智慧), 명철(明哲), 지식(知識)의 차이 / 성경의 중요 용어 정리(고르반) (교만, 겸손)

지혜(智慧), 명철(明哲), 지식(知識)의 차이

- 지식은 아는 능력(정보)
- 지혜는 행하는 능력(문제 해결하는 힘)
- 명철은 분별하는 능력(진리와 거짓을 분별)

솔로몬과 시바 (Solomon and the Queen of Sheba)

참조 / 열왕기상 10:1-13

시바 여왕이 솔로몬의 명성을 듣고, 까다로운 문제로 그를 시험해 보려고 찾아왔다.
여왕은 많은 수행원을 거느리고, 향료와 엄청나게 많은 금과 보석을 낙타에 싣고 예루살렘에 왔다.
여왕은 솔로몬에게 와서 마음속에 품고 있던 것을 모두 물어보았고, 솔로몬은 여왕의 물음에 다 대답하였다.
시바 여왕은 솔로몬의 모든 지혜를 지켜보고 그가 지은 집과 음식들, 복장, 시종들, 그리고 주님의 집에서 드리는 번제물을 보고 넋을 잃었다.
“임금님의 하느님께서 임금님이 마음에 드시어 임금님을 이스라엘의 왕좌에 올려놓으셨으니 찬미 받으시기를 빕니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영원히 사랑하셔서, 임금님을 왕으로 세워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게 하셨습니다.” (열왕기상 10:9)고 축복한 뒤, 여왕은 금 백이십 탤런트와 아주 많은 향료와 보석을 임금에게 주었다.
시바 여왕이 솔로몬 임금에게 준 것만큼 많은 향료는 다시 들어온 적이 없다.
한편 솔로몬 임금은 시바 여왕에게 선물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여왕이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을 청하는 대로 다 주었다.
여왕은 신하들을 거느리고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로몬은 이스라엘의 세 번째 왕으로, 다윗과 밧세바의 아들이다.
솔로몬은 하느님께 백성을 통치할 수 있는 지혜를 구했고, 그는 특별한 지혜를 부여받았다.
시바 왕국은 B.C 950년에서 B.C 115년까지 아라비아 반도 남쪽 끝에 위치한 지금의 예멘 부근에 있던 나라로, 한창 전성기를 누릴 때 그 영토가 에디오피아에서 소말리아를 포함해서 홍해까지 뻗어나갔다고 한다.
열왕기에 등장하는 시바의 여왕은 B.C. 10세기 무렵 활동한 시바 왕국의 지배자로 본명은 마케다 라고 전한다.
그녀가 솔로몬을 찾아와 지혜를 시험한 것이 BC.950-930년 경이라고 하는데, 역사가들은 시바 여왕의 방문이 고대 이스라엘과 아라비아 사이의 상업적 관계가 있었음을 시사한다고 본다.
또 시바의 여왕이 솔로몬 왕을 시험하기 위해 직접 방문한 것 자체가 시바 왕국이 이스라엘 왕국보다 더 강대한 나라였음을 암시한다고 한다.
신심 깊은 왕과 이교도 여왕 간의 만남은 동방박사의 경배의 예시로 여겨지기도 한다.


"스바의 여왕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미암 은 솔로몬의 명성을 듣고 와서 어려운 문제 로 그를 시험하고자 하여"(왕상 10:1)

솔로몬의 지혜가 뛰어나다는 소문을 듣고 지금의 예멘지역인 멀리 스바에서 여왕이 많은 선물을 낙타에 싣고 예루살렘을 방문하였다.
스바의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시험하는 문제를 내지만, 솔로몬은 스바의 여왕이 묻는 말에 몰라서 대답하지 못한 것이 없었다(왕하 10:3).

스바의 여왕이 무슨 질문을 하였고 솔로몬은 어떤 대답을 하였을까?

우리는 솔로몬의 지혜에 대하여 많은 말을 하나 성경에서 알 수 있는 이야기는 '솔로몬의 지혜'로 알려져 있는 명쾌한 판결 하나뿐이다. 한 아이를 놓고 서로 자기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두 여인에게 솔로몬이 진 짜 어머니를 찾아 준 것이다(왕상 3:25).

스바의 여왕은 더 어려운 문제들을 솔로몬에게 물어보았다.

1. 한 여인이 그녀의 아들에게 '네 아버지가 내 아버지이고 네 할아버지가 내 남편이며 네가 내 아들이고 나는 네 누이라'고 말하는 데 어떻게 된 사이냐?

 -
롯의 딸과 그 아들 관계

2. 똑 같은 옷을 입은 똑 같은 키의 남자와 여자를 여러 명 세워 놓고 남녀를 구별해 보시오.

-
대야에 물을 담그고 손을 씻으라고 하면 남자들은 그냥 씻는데 여자들은 옷 소매가 젖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씻는다.

3. 할례자들과 무할례자들이 뒤섞인 여러 명의 남자들 중에서 할례 자를 구별해 보시오.

-
언약궤를 열어 보였을 때 할례자들은 몸을 반쯤 굽혀 절을 했고 그때 그들의 얼굴은 쉐키나의 광채로 가득 찼다.
  그러나 무할례자들 은 그렇지 않았다.

 4. 태어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은 자가 누구냐?

만군의 여호와

5. 단 한 번만 태양을 본 적이 있는 땅은 어디에 있느냐?

-
홍해가 갈라지던 날 드러냈던 바다 밑 땅

6. 톱으로 벤 백향목 나무가 있는데 어느 쪽 끝에 뿌리가 있었고 어느 쪽 끝에 가지가 붙었었는가?

-
백향목을 물에 던져서 가라 앉은 쪽이 뿌리가 있던 쪽이 고 수면 위에 떠 있는 쪽이 가지가 있던 부분이다.

7. 진짜 꽃과 똑 같은 조화가 많이 섞여 있는데 어떻게 구별하나?

- 꽃들을 창가에 놓아서 벌이나 나비가 앉는 쪽이 진짜 꽃들이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지혜와 총명을 심히 많이 주셨기 때문에 솔로몬의 지혜는 누구보다 더 뛰어났다.
"솔로몬의 지혜가 동쪽 모든 사람의 지혜와 애굽의 모든 지혜보다 뛰어난지라"(왕상 5:30)





성령충만한 사람의 특징(11-22-2022, 추수감사절. 출애굽기 31장 브살렐과 오홀리압)  참조

    지혜(知慧) :
발명과 창조의 능력
                     - 행하는 능력

    총명(聰明) :
사물을 정확히 파악하는 능력
                    - 분별하는 능력(명철)

    지식(知識) :
경험을 구체적으로 적용하는 능력
                      - 아는 능력

    재조(才操) :
모든 능력을 종합적으로 발휘하는 기술


지식(비나)이란?
아는 능력

비나 / 
בִּינָה

스트롱번호 998
1. 이해,  2. 총명

발음 : 비나(bîynâh)
어원 : 99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지식(신 4:6), 총명(대상 22:12, 욥 34:16, 사 29:14), 명철(대하 2:12, 잠 2:3, 23:23), 지혜(욥 39:26, 잠 7:4, 23:4),
지각(사 27:11), 뜻(단 8:15)
구약 성경 : 37회 사용

잠언 2:3 / 지식을 불러 구하며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며.
                and if you call out for insight and cry aloud for understandin.

세상에서는 학문을 비롯하여 다양한 분야에서 아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을 말합니다.

지혜(호크마)란?
행하는 능력


호크마 / חָכְמָה

스트롱번호 2451

1. 숙련,  2. 지혜, 3. 다양한 학식
발음 : 호크마(chokmâh)
어원 : 244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지혜(출 28:3, 삼하 20:22), 슬기(출 35:26), 유능한 기술자(대상 28:21)
구약 성경 : 153회 사용

출애굽기 28:3 / 너는 무릇 마음에 지혜 있는 자 곧 내가 지혜로운 으로 채운 자들에게 말하여 아론의 옷을 지어 그를 거룩하게하여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라.
                         Tell all the skilled men to whom I have given wisdom in such matters that they are to make garments for Aaron, for his consecration, so he may serve me as priest.

인생의 경험이 많은 노인들은 어떤 어려운 문제를 만났을 때 자기의 경험에 비추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방법을 찾아내는 것을 말합니다.

지혜는 영적, 도덕적 능력을 모두 포함합니다.

명철(테부나)이란?
분별하는 능력


테부나 / תְּבוּנָה

스트롱번호  8394

1. 지식, 2. 욥기 32:11
발음 :테부나(tebûwnâh)
어원 : 99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총명(출 31:3, 왕상 4:29, 겔 28:4), 분별력(신 32:28), 명철(욥 12:12, 시 49:3, 잠 2:2), 지혜(욥 26:12, 시 136:5),
통달(사 40:14), 지각(옵 1:7). 능숙함(시 78:72, 호 13:2). [형] 명철한(잠 10:23, 20:5)
구약 성경 : 42회 사용

잠언 2:2 / 네 귀를 지혜에 기울이며 네 마음을 명철에 두며
                turning your ear to wisdom and applying your heart to understanding.

모양이 같은 쇠뭉치를 보고 어떤 사람은 그것이 납이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그것을 고철이라고 합니다.
정확한 구별을 위하여 자석을 사용하듯이 명철이란 사물을 보고 그 본질을 정확하게 분별하는 것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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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28:28

또 사람에게 이르시기를 주를 경외함이 곧 지혜(호크마)  악을 떠남이 명철이라(비나) 하셨느니라.
  
    * 지식(知識) : 아는 능력(경험을 구체적으로 적용)
    * 지혜(智慧) : 행하는 능력(발명과 창조)
    * 명철(明哲) :  분별하는 능력(사물을 정확히 파악)


이러한 용어를 설명하려고 다양한 방법을 시도하였다.
예를 들면,

첫째는 히브리어 원전에서(잠언 2:2~3)

  • 네 귀를 지혜에 기울이며 네 마음을 명철에 두며
  • 지식을 불러 구하며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며.
  • turning your ear to wisdom and applying your heart to understanding,
  • and if you call out for insight and cry aloud for understanding



  • “호크마”를 ‘지혜’,
    “비나”를 ‘지식’,
    “테부나”를 ‘명철’
    이 단어들은 동사형 명사(동사에서 만들어진 명사)라고 보시고 동사의 뜻을 알면 명사의 의미가 풍성해질 것입니다.

    “호크마”의 동사형은 “하캄”으로 지혜롭다, 지혜롭게 행동하다는 뜻
    “비나”와 “테부나”는 “빈”이라는 동사에서 온 것으로 모양은 판이하나 히브리어에서 어미나 접두어를 붙여서 명사로 만든다고 보시면 이해가 쉬울 듯

    동사 “빈”이란 의미는 ~사이를 식별(구별)하다는 의미로서 즉 구별하고 식별할 수 있으니  지식이나 이해 혹은 깨달음 등으로 될 수 있을 것이고 통찰력이 있어야 되는 문제이니 명철로 더 나아가 지혜로 해석이 가능해집니다.
     
    “하캄”과 “빈”은 내용을 들여다보면 동의어에 가깝습니다.
    우리말에선 식별과 지혜는 별개처럼 정의 되지만...
    통상적으로 어떤 단어를 얘기할 때 ‘이것이다’라고 번역하지만 여러 뜻이 있고 심지어 우리말의 하나의 단어에서 여러 의미가 있듯이...  그래서 문맥 안에서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원전문맥으로 들어가 보면

    [1절~2절] 아들아! 하고서 ‘임’(만약~ 한다면),
    [3절] ‘키 임’(그래서 ‘만약~ 한다면),
    [4절] ’임’(만약~ 한다면),
    [5절] ‘아쯔’(then)로 귀결이 됩니다.

    아들아! [1~4절]까지 만약~ 한다면, [5절]하나님을 제대로 알 수 있을 것이다.
    5절을 사역하면 “여호와의 경외를 구별할(빈) 것이고 // 하나님의 지식을 찾을 것이다”
    결국 역으로 말하면 1장의 내용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머리,시작)이어늘
    (1:7) 이는 먼저 여호와 경외 곧 하나님 지식을 찾음으로 파생되는 모든 것 즉 지혜, 지식, 명철 등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을 보실 때 특히 시편이나 잠언 등에서 자세히 보시면 단어나 문장 두 개를 나란히 놓습니다.
    반복 구절처럼 놓는데 그들의 특성입니다.
    이렇게 하므로 뜻을 풍성히 하거나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는 두 개의 내용을  함축하는 것으로써 각자의 뜻으로 보는 게 아니라 서로 잡아주어 하나의 내용으로 보셔야 합니다.

    [2절] 네 귀를 지혜에 기울이며 //  네 마음을 명철에 두며
    [3절] 지식을 불러 구하며 //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며’
    [5절] 여호와의 경외와 하나님의 지식도 나란히 놓였음을 볼 수 있고...
      그러므로 여기서 지혜와 지식과 명철은 위에 언급된 것처럼 개별적이나 서로 합하여 풍성과 강조를 더한 하나의 뜻으로 보아야 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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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혜는 사건의 해결 능력

    우리가 이 세상의 유혹이나 삶의 문제들 앞에서 넘어지지 않고 승리해 나갈 수 있는 지혜는 하나님 말씀으로부터 옵니다.

    명철(insight or understanding)은  사물에 대한 통찰력과 이해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묵상할 때” 명철함이 스승보다 그리고 노인보다 더 뛰어나다고 말합니다(시 119: 99-100). 

    스승은 세속적 지식을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세상 지식은 영적 지식과는 다릅니다.
    아무리 세상의 박사 학위를 가진 자도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십자가의 구속과 복음에 대한 영적인 일을 이해할 수 없지만, 초등학교 밖에 안 나온 크리스천이라도 성령님께서 깨우치시면 복음의 깊은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노인은 이 세상의 갖가지 경험을 다 한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처세에 밝고 인생사는 법을 잘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을 사랑하고 묵상하는 사람은 공부를 많이 한 스승보다, 지혜와 명철이 뛰어났던 것은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창 41:39).
    다니엘과 세 친구는 바벨론의 모든 자보다 모든 학문과 재주 뿐 아니라 지혜와 총명이 훨씬 뛰어났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외과 의사이며 "Think Big"(크게 생각하라)의 저자인 벤 카슨은 학창 시절부터 매일 잠언을 하루에 1장씩 읽었다고 합니다. 잠언을 읽으면 삶의 참된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는 “140억개의 뇌세포는 우리가 마주치는 모든 것을 수용한다”고 말하면서 어떤 것을 뇌에 입력하느냐가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저속적인 책들이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는 세상적인 대중매체를 입력하느냐,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뇌 속에 입력하느냐 하는 것은 어떤 인생을 사느냐를 좌우하는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많은 지식보다 또 어떤 능력보다 중요한 것은 지혜와 명철입니다. 이러한 지혜와 명철을 갖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마음속에 내면화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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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혜는 상황에 맞게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잠언 9:10)

    -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The fear of the LORD is the beginning of wisdom, and knowledge of the Holy One is understanding.

    지식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잠언 1:7)

    -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The fear of the LORD is the beginning of knowledge, but fools despise wisdom and discipline.

    명철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예레미야 9:24)

    -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찌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에 행하는 자인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but let him who boasts boast about this: that he understands and knows me, that I am the LORD, who exercises kindness, justice and righteousness on earth, for in these I delight," declares the LORD.

    1. 지혜(智慧)
    히. 호크(chokma), 헬. 소피아(sophia), 영. 위즈덤(wisdom)

    관찰, 경험, 반성에 의해 얻어지는, 적절한 생활에 대한 지식과 감정을 말한다.
    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며(고전 2:6,7),
    머릿속 지식이 아니라 행동으로 이어져야 하는 총체적 삶의 양식으로,
    하나님에의 신앙과 복종을 지혜의 중심으로 생각했다(시 111:10; 잠 1:7,9:10).

     ①.  습득한 지식을 이용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②.  미래형(未來形)이다.
     ③. 명철로 주소를 삼으며 지식을 통하여 얻는다(잠 8:12)

     2. 명철(明哲)
    히. 비나(beenah), 헬. 순네시스(sunesis), 영. 언더스텐딩(understanding)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예리한 분별력(욥 6:30,32:9),
    어떤 주제를 예리하게 파악하고 이해하는 지적 능력(욥 6:24,15:9,18:2,23:5)
    지혜에 이르는 길을 하나님께서 '깨달으신다'(욥 28:23)는 말을 이 단어로 표현하고 있다.

     ①. 지식과 지혜를 이용하여 사물의 성질을 분별하는 것이다.
     ②. 현재형(現在形)이다.
     ③. 거룩하신 자를 알고(잠 9:10), 악을 떠나는 것이다(욥 28;28)

    * 예레미야 9:24, 여호와를 아는 것 

    3. 지식(知識)
    히. 다드(daath), 헬. 그론시스(gnosis), 영. 나리지(knowledge)  

    사물에 관한 명확한 인식이나 판단.
    어떤 사물에 관하여 알고 있는 것 또는 그 내용을 이르는 것.
    인간의 심리적 3요소(지정의, 知情意) 중 하나, 지식 없이는 인간답게 살아갈 수 없다.

     ①. 사물을 있는 그대로만 파악하여 습득하는 것이다.
     ②. 과거형(過去形)이다.
     ③. 절제가 없으면(벧후 1:6), 사람을 교만하게 한다(고전 8;1)

     '지혜'와 '명철'은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었으며, '명철'은 '지혜'의 대구(對句, 비슷한 어조나 어세를 가진 것으로 짝을 맞춘 글귀)로 사용되고 있다. (잠언 4:5,7, 7:4, 9:10, 16:16; 욥 28:12, 20, 28; 1:20; 사 11:2).

     ①.  모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다(잠 1:7,9:10; 시 111:10).
     ②. 모두 하늘로서 내리시는 선물이다(전 2:26).
     ③. 모두 긴밀한 관계에 있다(잠 18:15,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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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크마” - ‘지혜’
    “비나” - ‘지식’
    “테부나” - ‘명철’

    이 단어들은 동사형 명사(동사에서 만들어진 명사)라고 보시고 동사의 뜻을 알면 명사의 의미가 풍성해질 것입니다.

    호크마”의 동사형은 “하캄”으로 지혜롭다, 지혜롭게 행동하다
    비나”와 “테부나”는 “”이라는 동사에서 온 것
    모양은 판이하나 히브리어에서 어미나 접두어를 붙여서 명사로 만든다고 보시면 이해가 쉬울 듯합니다.

    동사 “”이란 의미는 ~사이를 식별(구별)하다는 의미로서 즉 구별하고 식별할 수 있으니  지식이나 이해 혹은 깨달음 등으로 될 수 있을 것이고 통찰력이 있어야 되는 문제이니 명철로 더 나아가 지혜로 해석이 가능해집니다. 

    “하캄”과 “빈”은 내용을 들여다보면 동의어에 가깝습니다.

    우리말에선 식별과 지혜는 별개처럼 정의 되지만...
    통상적으로 어떤 단어를 얘기할 때 ‘이것이다’라고 번역하지만 여러 뜻이 있고 심지어 우리말의 하나의 단어에서 여러 의미가 있듯이...  그래서 문맥 안에서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원전문맥으로 들어가 보면

    [1절~2절] 아들아!!!하고서 ‘임’(만약~ 한다면),
    [3절]에서 ‘키 임’(그래서 ‘만약~ 한다면),
    [4절]에 ’임’(만약~ 한다면).
    [5절] ‘아쯔’(then)로 귀결이 됩니다.

    아들아! [1~4절]까지 만약~ 한다면,
    [5절]하나님을 제대로 알 수 있을 것이다.

    5절을 사역하면 “여호와의 경외를 구별할(빈) 것이고// 하나님의 지식을 찾을 것이다”

    결국 역으로 말하면 1장의 내용으로 돌아가는 것일테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머리,시작)이어늘~~~(1:7)
    이는 먼저 여호와경외 곧 하나님지식을 찾음으로 파생되는 모든 것 즉 지혜,지식,명철등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보실 때 특히 시편이나 잠언 등에서 자세히 보시면 단어나 문장 두 개를 나란히 놓습니다.

    반복 구절처럼 놓는데 그들의 특성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뜻을 풍성히 하거나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는 두 개의 내용을  함축하는 것으로써 각자의 뜻으로 보는 게 아니라 서로 잡아주어 하나의 내용으로 보셔야 합니다.

    [2절]을 보시면 ‘네 귀를 지혜에 기울이며// 네 마음을 명철에 두며
    [3절]지식을 불러 구하며//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며’

    [5절]도 보시면 여호와의 경외와 하나님의 지식도 나란히 놓였음을 볼 수 있고...
     그러므로 여기서 지혜와 지식과 명철은 위에 언급된 것처럼 개별적이나 서로 합하여 풍성과 강조를 더한 하나의 뜻으로 보아야 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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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을 믿고 전도하라.”
    “신구약 성서 가운데 여러 말씀을 지키는 자가 어찌 나의 유언은 지키지 않겠는가.”
    “이잣돈 욕심 말라. 금전은 1원이라도 저금하라.”
    “교육을 양성하는 일만 경영하라.”

    1930년 경남 함안 조씨의 한 가문이 작성한 ‘교육조합(敎育組合)’ 문서에 담긴 내용이다.
    교육조합은 함안 군북면 사촌리에 거주하던 조좌규(1854~1936)씨가 다섯 아들과 함께 결성한 조합이다.
    집안의 경제적 부침과 상관없이 문중의 인재를 끝까지 교육하기 위해 다섯 섬 두 마지기의 땅을 내놓아 여기서 나오는 산출로 후손을 교육하라는 뜻이 담겨 있다.
    핵심은 기독교 인재 양성이다.

    함안 조씨는 영남의 명문가다.
    효성그룹 조홍제 회장이 이 문중의 일가이고 인근 지수초등학교는 삼성 이병철, LG 구인회, 효성 조 회장 등을 1회 졸업생으로 배출한 곳으로 유명하다. 조용기 여의도순복음교회 목사 역시 함안 조씨다.

    구한말 외세에 의해 국권이 흔들리던 상황에서 조동규 조좌규 형제는 기독교를 받아들인다. 봉건적인 유교 전통에서 벗어난 일이라고 문중에서는 족보를 퇴출하는 등의 아픔을 겪었지만, 이들은 굳건하게 믿음을 이어갔다.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 소속 함안 사촌교회는 1897년 설립돼 125년 역사를 이어왔는데 호주 선교사 앤드루 애덤슨(손안로)이 조동규씨에게 전도하면서 설립됐다.

    당시 조동규씨는 애덤슨 선교사에게 “우리가 개종하면 조선이 독립될 수 있는지” 물었고, 애덤슨 선교사는 “조선 사람 100만명이 예수를 믿으면 독립이 가능할 것이오”라고 답했다. 조씨는 즉각 조카 조용관과 함께 논 1980㎡를 헌납해 사촌리에 최초로 교회당을 세웠다. 조동규의 아들 조용석은 호러스 G 언더우드 선교사의 서울 경신학교에 다니며 3·1운동의 주역으로 나섰다가 투옥됐고, 훗날 일본 와세다대를 졸업했다. 문중에서 배출한 대표 목회자로는 대한기독교서회 총무(지금의 사장 직위)를 네 번 연임한 조선출 목사가 있다.

    1930년 작성된 교육조합 서문.

    교육조합 문서는 1부 서문, 2부 규칙, 3부 유서로 작성돼 있다. 문중을 일으키기 위해 영특한 자손을 교육하는 기금을 내고 이를 운용하는 규칙과 더불어 신앙을 지키라는 특별한 유언을 남겼다. 허경진 전 연세대 국문과 교수가 한문 번역을 도왔다. 허 교수는 “동서고금 유언은 생전엔 효력이 없고 죽은 뒤에 효력이 있다는 히브리서 9장 16~17절 말씀으로 유언이 시작된다”면서 “전도를 당부하고 금전 대부를 금지하며 정의와 가규(家規)를 강조하는 등 기독교 신앙과 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20일 오후엔 사촌저수지가 내려다보이는 고갯길 문중의 산에서 교육조합비 제막식이 열렸다. 교육조합 문서를 한글로 번역해 후손들이 쉽게 읽도록 돕는 비석이 세워졌다. 이어 박병연 사촌교회 목사의 인도로 기념 예배가 드려졌다. 문중을 대표해 조종석(78) 안수집사가 인사말을 했다.

    1930년 작성된 교육조합 규칙.

    “당시 문중의 어른들은 독립된 나라를 되찾는 길이 새 세계의 조류에 합류하는 것이라 확신하고 교육조합을 창설해 ‘주 안에서 교육에 힘을 다하라’고 하셨습니다. 저희는 이런 뜻을 받들어 가풍으로 삼고자 이 기념비를 봉헌합니다.”

    사촌교회 앞마당에는 1928년 조동규씨의 교회와 관련한 헌신을 기록한 비석도 남아 있다. 비석의 글은 3·1운동을 배후에서 주도하고 투옥 후 당시 마산 문창교회에서 시무하던 함태영 목사가 썼다.
    법관에서 독립운동가로, 이후 목사에서 정치가로 계속 거듭난 함 목사는 서울 남대문교회, 연동교회와 인연이 있고 한국신학대 학장을 역임하다 이승만정부에서 부통령까지 지냈다.

    사촌교회 박 목사는 “함안 출신 산돌 손양원 기념관과 세브란스 출신 의사이자 독립운동가인 이태석 기념관, 그리고 사촌교회와 교육조합 비석까지 함께 기독교 역사 순례지로 찾아와 달라”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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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르반


    κορβᾶν 스트롱번호 2878

    1. 고르반.  2. 예물. 3. 막 7:11.
    발음 [ kŏrban ]

    어원 / 히브리어 7133에서 유래

    관련 성경 

    성전고(마 27:6), 고르반(막 7:11).

    * 7133 קָרְבָּן 스트롱번호7133

    1. 제단.  2. 희생 제물.  3. 레 2:1
    발음 [ qorbân ]
    어원 / 7126에서 유래, 연계형 :קָרְבַּן
    구약 성경 / 80회 사용

    뜻풀이부

    • 1.  명사, 남성 제단, 희생 제물, 레 2:1, 4,12,13, 7:13, 9:7, 15.
    • 관련 성경

      ☞예물(레 1:2, 27:9, 민 5:15), 제물(레 4:32, 겔 20:28), 희생(겔 40:43).
      [동] 드리다(레 2:12, 느 10:34).

    * 7126. 카라브 [ qârab ] קָרַב 스트롱번호7126

    1. 접근하다.  2. 시 69:19. 3.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감
    발음 [ qârab ]
    구약 성경 / 291회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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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어야 할 도서




    플라톤 '국가'에 나타난 사상

    "국가"는 플라톤 대화편 전체 저작 중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담고 있으며, 초기에서 중기까지 이어지는 방대한 사상과 방법론을 담고 있다. 이 책은 문체나 내용으로 미루어볼 때, 제1권을 제외하고는 모두 중기 이후에 속한다. 미하엘 보르트는 중기 대화편으로 본다. 그러나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제1권은 초기 후기, 제2편~제10편은 중기 후기의 것이라는 점은 확실하다. 그 이유는 이데아(idea), 관여(methexis), 결합(koinonia), 변증법(dialektike) 등의 개념이 제1권에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1) 제1권

    제1권을 ‘트라시마코스 편’이라고도 한다. 소피스트인 트라시마코스가 정의(正義)는 ‘강한 자가 얻는 이익’이라는 주장에 대해 대화 참여자 소크라테스가 이를 논박하는 과정으로 나타난다. 소크라테스는 올바름(정의)이 이익이 될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강한 자의 이익을 위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의술이나 조타술을 예로 들어서 거기에 사용되는 기술(techne)은 기술의 시혜를 입을 약자를 위한 것이라고 하면서 기술이나 힘을 강자의 이익을 위해 사용하는 것은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트라시마코스 주장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2) 제2권

    글라우콘은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을 연결해서 ‘올바름’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고자 트라시마코스의 편에 서서 소크라테스의 생각을 말하도록 한다. 제2권에서는 ‘올바름(정의)’을 논의하기 위해서 그 자체로서 ‘좋은 것’과 좋은 것들 사이의 차이를 검토한다. ‘올바름’을 이해하기 위해 이론상 작은 나라에서 큰 나라로 가는 것을 예시하면서, 분업과 전쟁, 수호자 교육 등의 필요성을 제시한다. 플라톤은 수호자를 선발하기 위해 교육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그 교육 내용으로서 시가(詩歌)교육에 대해 논한다. 그는 아동 교육에서 신화나 설화, 신들의 다툼 등을 다루는 부분을 비교육적인 것으로 규정하여 제외할 것을 주장한다.

    3) 제3권

    여기에 플라톤은 시가교육에서 영웅, 죽음과 저승 등의 묘사에서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할 부분들을 언급한다. 또 그는 모방(mimesis)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여기에서는 어린이들은 모방을 하게 되므로 거짓된 것, 비극적인 것, 질병, 만취, 좌절, 느슨하고 나쁜 리듬(음악) 등을 배우지 않도록 하고 용기, 절제, 경건, 자유인다움 등을 배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점이 강조된다. 이는 일종의 동일시(identification)를 통하여 아이들이 배운다는 점, 태도는 말보다 행위를 통해서 배운다는 점, 음악교육에서 어린이에 맞는 교육이 필요하다는 데에 시사점을 준다. 지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서 ‘철학(philosophy)’ 개념도 나온다.

    4) 제4권

    여기에서는 올바른 나라에 대한 논의를 확대해 나간다. 올바른 나라는 아름다운 나라(kallipolis)이며, 시민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나라이고, 지혜로운 나라이다. 여기에서 올바름과 아름다움은 궁극적으로 동일한 성격을 지닌다는 플라톤의 생각이 들어 있다(kalepa ta kala. 아름다움은 어렵다). 정의로운 나라는 세 계층의 사람들로 구성되는데, 각각의 구성원에게는 각각의 덕성이 필요하다. 통치자는 지혜를, 군인은 용기를, 생산자는 절제의 덕성을 필요로 한다. 특히 절제는 화음(harmonia)과 같아서 지혜와 용기의 덕성과 달리 전 나라에 고루 필요한 덕성이라고 한다. 이들을 위한 교육(paideia)의 개념이 나타난다.

    5) 제5권

    여기에서는 수호자의 교육에 필요한 6세 교육이 논의된다. 제4권에서 나온 처자 공유의 문제가 교육의 문제로 이어진다. 어릴 적부터 공동체 교육을 위해서 공동 출산과 공동 양육, 여자들에게 평등한 교육의 필요성이 제시된다. 중요한 논술개념인 토론(dialektos)과 쟁론(eris)의 차이에 대한 구분이 나온다. 토론은 사고의 ‘분할(diairesis)’로서 요즘 말하는 마인드맵과 같은 사고훈련과 같다. 쟁론은 ‘낱말(onoma)에 붙들려 있는 것’으로서 요즘 말하는 말꼬투리 잡기와 같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소피스트적 논박'에서 쟁론적 논의를 '말싸움'이라고 하였고 스피노자는 그의 '논쟁에서 이기는 38가지 방법'에서 '이기는 방법'으로 규정했다. 토론의 목적은 참된 앎을 추구하는 과정이지 승리법은 아니다.

    6) 제6권

    이 권에서 특히 중요한 유비가 나오는데, 태양의 비유와 선분의 비유가 그것이다. 태양의 비유를 통해서 보이는 것들과 그것들을 볼 수 있게 하는 근원(dynamis.힘)을 논하며, 눈의 힘은 태양에서 분배 받는 것(methexis)라는 것. 혼에 유비시켜도 마찬가지인데, 진리와 실재에 대해 감각적인 것과 지성적인 것을 대비시킨다. 선분의 비유에서는 억측(doxa)이나 확신(pistis)은 가시적이고 감각적인 것이고, 추론적 사고와 참된 앎(epistēmē)은 오직 지성(noesis)에 의해서만 알 수 있는 것으로 대비시킨다.

    참고로 유비는 A와 B의 관계는 C와 D의 관계와 같다. 비유는 A와 C가 같거나, 유사하거나 포함관계가 있어야 한다(유비와 비유의 차이).

    7) 제7권

    여기에서는 지식과 교육의 중요한 개념들이 가장 많이 나온다. 동굴의 비유를 통해서 무지한 상태를 벗어나 참된 앎의 세계로 나아가기까지 교육의 힘이 강조된다. 파이데이아(paideia)는 원래 귀족 자제의 교육을 돕는 노복(奴僕)을 뜻한다. 고통스럽고 힘들더라도 참된 이데아의 세계를 알리려는 교사의 태도, 자유인의 교육, 놀이교육, 변증술의 교육까지 중요한 개념들이 나온다. 특히 혼이 위를 바라보도록 하는 교육은 오늘날 교육에서 목적 있는 교육이 중요함을 시사한다.

    8) 제8권

    여기에서는 잘못된 정치 체제 4가지(명예정체, 과두정체, 민주정체, 참주정제)와 최선의 정치(철학자가 다스리는 정치체제)를 비교한다.

    9) 제9권

    참주와 최선자(철인왕)의 극명한 대비를 한다. 특히 제1권에서 트라시마코스가 주장한 정의로운 나라가 강자가 이익이 되는 법정체계라는 주장이 논박된다.

    10) 제10권

    시에 대하여, 침상 제작자 유비를 통하여 이데아를 말하고, 후반부에서는 사후 세계에 대해 논한다. 레테(lethe) 강의 비유를 통해서 이데아로의 회귀를 이야기한다. 특히 이 장에서는 윤회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 도표는 플라톤의 "국가(Politeia)" 전권을 주제와 방법으로 간략하게 분석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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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쇠렌 키르케고르, 『죽음에 이르는 병』

    절망이라는 이름의 인간 존재에 대한 가장 깊은 해부

    1. 들어가며

    『죽음에 이르는 병』은 흔히 “소설”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이 작품은 철학적·신학적 사유가 극도로 응축된 실존 철학의 결정체에 가깝다. 
    덴마크의 사상가 쇠렌 키르케고르가 1849년에 발표한 이 저작은 인간 존재를 규정하는 가장 근원적인 병, 즉 절망을 다룬다. 
    여기서 말하는 절망은 감정적 우울이나 일시적인 좌절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 자신과 맺는 관계에서 발생하는 존재론적 병이다.

    이 작품은 이야기적 서사나 극적인 사건 대신, 인간 내면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사유의 구조를 지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에 이르는 병』은 소설적 독해가 가능한 텍스트다. 
    인간이라는 ‘등장인물’이 절망이라는 상태 속에서 어떻게 분열되고, 어떻게 스스로를 잃어버리는지를 하나의 내적 드라마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2. 작품의 개요와 기본 구조

    『죽음에 이르는 병』은 ‘안티-클리마쿠스(Anti-Climacus)’라는 가명으로 발표되었다. 
    키르케고르는 여러 가명을 통해 서로 다른 실존 단계의 목소리를 연기했는데, 이 가명은 그중에서도 가장 철저히 기독교적 이상에 도달한 시점을 상징한다.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1부에서는 절망이 무엇인가를 철학적으로 정의하고 유형화한다.
    2부에서는 절망이 곧 죄라는 신학적 결론으로 나아간다.

    이 구조는 단순한 이론 전개가 아니라, 독자가 자기 자신의 내면을 점점 더 깊은 층위에서 직면하도록 이끈다. 

    3. 줄거리 : 서사가 없는 서사

    이 작품에는 전통적인 의미의 줄거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 존재의 내적 여정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분명한 흐름이 있다.

    키르케고르는 인간을 “자기 자신과의 관계이자, 그 관계가 자기 자신과 관계하는 관계”라고 정의한다. 
    인간은 단순히 육체와 정신의 결합이 아니라, 이 둘을 끊임없이 조정하고 인식하는 존재다. 
    문제는 이 관계가 어긋날 때 발생한다.

    절망은 크게 세 가지 형태로 제시된다.

    첫째, 자신이 절망 상태에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절망
    둘째, 자기 자신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 절망
    셋째, 자기 자신이 되기를 원하지만 하나님 없이 그렇게 하려는 절망

    이러한 절망의 단계는 점점 더 의식적이고, 더 깊은 차원으로 나아간다. 
    가장 위험한 절망은 고통을 느끼지 않는 절망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는 절망이다. 
    이때 인간은 스스로를 신처럼 여기며, 동시에 가장 깊은 자기 상실에 빠진다. 

    4. 주제의식 : 절망이라는 실존의 병

    『죽음에 이르는 병』의 핵심 주제는 단연 절망이다. 
    그러나 이 절망은 죽음으로 끝나는 병이 아니다. 
    오히려 죽을 수 없음, 끝낼 수 없음이 이 병의 본질이다.

    키르케고르는 말한다. 
    이 병은 육체를 죽이지 않지만, 영혼을 끊임없이 소멸 상태에 머물게 한다. 
    인간은 자기 자신이 되지 못한 채 살아가며, 그 상태가 지속되는 한 절망은 계속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절망이 특정한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성공한 사람, 도덕적인 사람, 종교적인 사람조차도 절망 속에 있을 수 있다. 
    절망은 외적 조건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하나님 앞에서의 관계에서 발생한다. 

    5. 인물 분석 : 등장인물 없는 인간 유형들

    이 작품에는 이름을 가진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다양한 인간 유형이 분석의 대상이 된다.

    가장 먼저 등장하는 인물형은 무의식적 절망자다. 
    이들은 사회적으로 잘 적응하고, 문제없이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으며, 타인의 기준과 사회적 역할 속에서만 자신을 규정한다.

    다음은 자기 자신이 되기를 거부하는 인간이다. 
    이들은 자신의 한계, 약함, 불완전함을 견디지 못하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친다. 책임, 자유, 선택이 이들에게는 고통이다.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인간형은 자기 자신이 되기를 원하지만 하나님 없이 그렇게 하려는 인간이다. 
    이 유형은 가장 고차원적인 절망의 형태다. 
    이들은 강한 자아의식과 주체성을 지녔지만, 그 중심에 하나님이 아닌 자기 자신을 둔다. 

    6. 역사적 사상적 배경

    『죽음에 이르는 병』은 19세기 유럽, 특히 헤겔 철학이 지배하던 시대에 쓰였다. 
    당시 철학은 이성과 체계를 통해 인간과 세계를 완전히 설명할 수 있다고 믿었다.

    키르케고르는 이러한 흐름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다. 
    그는 인간 존재를 체계로 환원할 수 없으며, 실존은 언제나 불안과 선택, 책임 속에 놓여 있다고 보았다.

    또한 덴마크 국교회가 형식적 신앙에 머물러 있던 상황 역시 이 작품의 중요한 배경이다. 
    키르케고르는 제도화된 기독교가 개인의 실존적 결단을 마비시키고 있다고 비판했다. 

    7. 감상 : 읽는 것이 아니라 직면하게 되는 책

    『죽음에 이르는 병』은 편안하게 읽히는 책이 아니다.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변명 없이 마주하는 일에 가깝다. 
    문장을 이해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그 문장이 가리키는 자신의 내면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다.

    이 책이 주는 가장 큰 충격은, 우리가 흔히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상태보다 훨씬 더 깊은 절망이 아무 문제 없어 보이는 삶 속에 숨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동시에 이 책은 절망을 통해 희망을 말한다. 
    절망을 끝내는 길은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 
    이는 자기 부정이 아니라, 자기 존재를 올바른 근원에 다시 연결하는 행위다. 

    8. 맺으며

    『죽음에 이르는 병』은 인간 존재에 대한 잔혹할 정도로 정직한 진단서다. 
    그러나 그 진단은 파괴를 위한 것이 아니라, 회복을 위한 것이다. 
    키르케고르는 절망을 숨기지 말고 끝까지 인식하라고 말한다. 
    그 지점에서 비로소 인간은 자기 자신이 될 가능성과 마주하게 된다.

    이 책은 한 번 읽고 끝낼 수 있는 작품이 아니다. 
    삶의 국면이 바뀔 때마다, 신앙과 자아에 대한 질문이 깊어질 때마다 다시 돌아오게 되는 텍스트다. 
    그리고 그때마다 『죽음에 이르는 병』은 다른 목소리로, 그러나 언제나 동일하게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진정으로 자기 자신으로 살고 있는가?” 

    쇠렌 키르케고르
    실존의 불안을 끝까지 사유한 고독한 사상가

    쇠렌 아뷔에 키르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는 19세기 덴마크를 대표하는 철학자이자 신학자, 그리고 문학적 사상가이다. 
    그는 흔히 실존주의의 선구자로 불리지만, 그 스스로는 철학 체계를 세우기보다 한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평생을 바친 사상가였다. 
    키르케고르의 글은 언제나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살아 있는 개인의 고통과 선택, 불안과 책임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1. 생애와 개인적 배경

    키르케고르는 1813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엄격한 신앙인이었으며, 깊은 죄의식과 종말론적 신앙을 지닌 인물이었다. 이 가정환경은 키르케고르에게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고, 훗날 그의 사상 전반에 흐르는 죄, 불안, 절망의 정조로 이어졌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비범한 지적 능력을 보였으며, 코펜하겐 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목회자가 되기보다는 글을 통해 시대와 개인을 향해 질문을 던지는 길을 선택했다. 특히 약혼자였던 레기네 올센과의 파혼은 그의 삶과 사상에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으며, 개인적 사랑과 신 앞에서의 결단이라는 주제를 더욱 깊이 탐구하게 만들었다. 

    2. 가명 저술과 문학적 전략

    키르케고르의 가장 독특한 특징 중 하나는 가명 저술이다. 그는 자신의 철학적·신학적 사유를 직접 설교하거나 주장하지 않았다. 대신 서로 다른 관점과 실존 단계에 서 있는 인물들을 가명으로 등장시켜, 독자가 스스로 선택하고 사유하도록 유도했다.

    대표적인 가명들로는

    • 미적 삶의 관점을 보여주는 인물

    • 윤리적 책임을 강조하는 인물

    • 신 앞에서의 단독자를 대변하는 인물

    등이 있다. 이러한 방식은 키르케고르가 진리를 교리로 전달하기보다, 개인의 내적 결단으로 체화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3. 사상의 핵심: 실존, 선택, 단독자

    키르케고르 사상의 중심에는 언제나 개인이 있다. 그는 인간을 집단이나 체계 속에서 설명하려는 시도를 강하게 비판했다. 특히 헤겔 철학이 당대 유럽을 지배하던 상황에서, 키르케고르는 보편적 이성보다 개인의 실존이 우선한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인간은 선택하는 존재이며, 그 선택에는 언제나 책임과 불안이 따른다. 선택을 회피하는 삶은 편안해 보일 수 있지만, 그것은 진정한 삶이 아니다. 키르케고르는 이를 비실존적 삶이라 보았다.

    또한 그는 인간을 하나님 앞에 홀로 서 있는 단독자로 이해했다. 신앙은 제도나 관습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걸고 감행하는 결단이라는 점에서 철저히 개인적인 사건이다. 

    4. 기독교 이해와 시대 비판

    키르케고르는 열렬한 기독교 사상가였지만, 동시에 당시의 교회 제도를 가장 날카롭게 비판한 인물이었다. 그는 국교회가 신앙을 사회적 관습과 도덕 규범으로 축소시키고 있다고 보았다.

    그에게 기독교는 편안한 위안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는 삶이었다. 예수를 따르는 것은 사회적으로 성공하거나 인정받는 길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과 긴장 관계에 놓이는 길이다. 이러한 관점은 그의 후기 저작들에서 더욱 급진적으로 드러난다. 

    5. 문학적 영향과 현대적 의의

    키르케고르는 철학자이면서 동시에 탁월한 문장가였다. 그의 글은 논문처럼 건조하지 않고, 에세이·일기·설교·문학적 독백의 형식을 넘나든다. 이 때문에 그의 작품은 철학, 신학, 문학의 경계를 자유롭게 가로지른다.

    그의 사상은 이후 사르트르, 하이데거, 야스퍼스 등 실존주의 철학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으며, 현대 문학과 신학, 심리학에서도 여전히 중요한 참조점으로 남아 있다. 

    6. 맺으며

    쇠렌 키르케고르는 정답을 제시하는 사상가가 아니다. 그는 독자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사상가다. 그의 글을 읽는다는 것은 지식을 쌓는 일이 아니라, 자기 삶의 태도를 점검하는 일에 가깝다.

    그가 평생 붙들었던 질문은 단순하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러나 그 질문에 진지하게 답하려는 순간, 인간은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살 수 없게 된다. 바로 그 지점에서 키르케고르의 사상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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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칸트 3대 비판서 도해

    대학생이 읽어야 할 고전  
    칸트의 3대 비판서폭넓은 문제의식으로 객관성과 보편성 추구
     … 오늘날에도 유효한 철학적 의문 제시

    흔히 고전이라 하면 해묵은 이야기책이나 옛날 사람들이 쓴 작품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고전은 오랜 시간을 거쳐 널리 애독되는 시대를 초월한 걸작으로 오늘날을 사는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는 책이다. 이에 우리신문에서는 각 학문 분야별로 고전으로 불리는 책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편집자

    칸트의 3대 비판서로 불리는 ‘순수이성비판’(1781), ‘실천이성비판’(1788), ‘판단력비판’(1790)이 세상에 나온 이후의 독일은 그 이전과 다른 문화를 형성하게 된다. 18세기경 독일은 유럽에서 정치·경제·문화·학문적으로 선도적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칸트의 비판철학, 칸트 철학의 영향으로 성립된 독일관념론, 이와 연관관계에서 형성된 낭만주의 운동 및 질풍노도 운동 등과 더불어 독일의 학문 및 문화는 유럽에서 선도적 역할을 하게 된다.
    칸트의 철학은 이미 그의 생애뿐 아니라, 그의 사후 200여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기까지 세계 철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것은 칸트 자신이 철학 이론을 정립함에 있어 폭넓은 문제의식과 깊이 있는 탐구자세로써 임함에서 기인하며, 또한 철저한 객관성과 보편성을 추구하는 그의 정신에서 결과한다. 칸트 철학의 체계는 크게 자연의 객관적 법칙, 인간 행위의 실천적 법칙, 그리고 아름다움의 법칙 및 우주 전체의 궁극적인 목적을 다루고 있는 3대 비판서로 분류된다.
    자연의 객관적 법칙의 정당성을 논하고 있는 ‘순수이성비판’은 칸트의 철학의 방향을 전통적 이론의 전승이라는 역할로부터 완전히 끊는 역할을 하고 있다. 전통적 철학에서뿐만 아니라 근대 자연과학에서도 자연을 탐구할 때, 자연 법칙은 자연의 ‘사물 자체’에 적용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칸트는 우리의 인식능력으로는 결코 사물 자체의 본질을 인식할 수는 없고 단지 사물의 ‘현상’을 인식할 수 있을 뿐이라고 언명한다. 우리의 인식 능력을 사물 자체에까지 적용하려 한다면, 그것은 결국 독단적 주장에 불과하다고 논함으로써 전통적 이성론(합리론)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한다. 칸트는 자신의 이러한 학문적 태도를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칸트의 윤리학도 현대 윤리학에서 여전히 중요한 근간을 형성하고 있는데, 칸트의 윤리학 이론을 체계화한 책이 바로 ‘실천이성비판’이다. 현대 윤리학을 형성하고 있는 두 개의 근본적 이론을 말한다면, 그것은 공리주의적 윤리학과 칸트의 윤리학이다. 공리주의가 인간의 경험적 감정 및 계산적 이기심에 바탕을 두고 있다면, 칸트의 윤리학은 인간의 존엄성을 시인하면서 인간의 존엄성을 실현할 것을 각자 스스로에게 의무로 명령하는 윤리학이다. 이것이 바로 정언명법(定言命法)이다.
    흔히 인간의 고차원적인 마음 및 문화를 우리들은 진선미(眞善美)로 구분한다. ‘순수이성비판’이 진의 영역을 논한다면, ‘실천이성비판’은 선의 영역을, 그리고 ‘판단력비판’은 미의 영역을 논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판단력비판’에서 칸트는 우리가 아름다움 및 숭고함을 느낀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논하며, 나아가 아름다움 및 숭고함을 느끼는 마음은 전체로서의 자연의 궁극적 목적과 관계되어 있다. 칸트의 예술철학 및 미학 이론은 근대 미학을 형성·발전시키는 데 근본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은 웬만한 결심을 하지 않는다면 독파한다는 것 자체가 용이하지 않다. 그러나 이 책들에 쉽게 접근하는 길들을 참조하면서 파악을 시도한다면, 그 책들에서 논하고 있는 문제들은 우리들이 세계를 생각할 때 천착할 수밖에 없는 문제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며, 나아가 현재에도 생각해야 할 근본적인 소재들을 제공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최 인 숙
    문과대학 철학과 교수 


    칸트가 3대 비판서를 집필한 이유는 무엇인가?


    칸트가 살던 18세기 후반은 노동 및 사회 분화, 학문 및 가치 분화가 활발히 일어나던 시기였다. 철학도 이 시기에 과학 일반과 분리되어 자신의 고유한 위상을 찾아야만 했다. 칸트는 철학의 근대적 위상과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친 철학자다.


    과학의 본업이 미지의 세계를 향하여 지식을 확장해가는 데 있다면, 철학의 본업은 어디에 있는가? 칸트에 따르면 그것은 과학과 경쟁하여 미지의 것을 아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것은 우리가 이미 아는 것을 비판하는 데 있다.

    이때 비판한다는 것은 근거나 전제를, 다시 말해서 가능 조건을 밝히는 작업에서 시작한다. 비판이란 우리 경험 일반의 가능 조건을 드러내고, 그 조건에 비추어 개별적인 경험의 보편성 주장이 정당한지 판정하는 일이다. 가령 과학자가 부의 확장을 꾀하는 상인에 비유될 수 있다면, 철학자는 상업적 활동의 법률적 조건을 따지는 변호사에 해당한다.

    또한 18세기 후반은 이론, 실천, 예술이 각각 서로 다른 가치를 추구하며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해가는 시대였다.이론은 진의 가치를, 실천은 선의 가치를, 예술은 미의 가치를 추구한다. 칸트의 3대 비판서는 각각 이론적 지식, 실천적 행위, 예술적 창조가 어떻게 서로 다른 가능 조건 위에 서 있는지 밝히고, 따라서 각각의 타당성 영역이 어떻게 다른지 입증했다.

    가령 우리는 이론적 지식을 추구할 때는 윤리적 규범의 관점을 배제해야 한다. 예술적 아름다움을 판정할 때는 이론적 객관성의 기준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 윤리적 행동의 가치를 판정할 때는 과학성이나 예술성을 문제 삼을 때와는 다른 원리에 의거해야 한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Wikimedia: Foto H.-P.Haack) / 《실천이성비판》

    칸트는 3대 비판서를 통해 이론적 지식의 객관성을 따질 때의 기준, 실천적 행동의 도덕성을 문제 삼을 때의 근거, 예술적 창작의 심미적 가치를 판정할 때의 원리를 차례대로 해명하고자 했다.

    자연에 대한 과학적 지식은 어떻게 가능한가, 보편적 타당성을 지닌 도덕적 행위는 어떻게 가능한가, 심미적 판단이 과학적 지식만큼 보편성을 띨 수 있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세 가지 물음에 차례로 답하고자 했던 것이다.

    칸트는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원리들이 모두 우리 마음에 내재한다고 보았다. 칸트의 비판철학은 결국 마음을 해부하여 이론적, 실천적, 예술적 보편성이 어떻게 서로 다른 조건에 근거하며 따라서 어떻게 서로 다른 타당성 범위를 거느리는지를 보여주는 작업이다.


    칸트(Kant) 3대 비판철학 완전 정복 -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ㅣ칸트 300주년ㅣ칸트 생애ㅣ선험적 인식론(feat.a priori)ㅣ독일관념철학






    인생 최고의 목적은 행복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인생 최고의 목적은 행복이다

    -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류우현

    한 때 서양에서 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벤담과 밀의 공리주의, 존 롤즈와 마이클 샌델의 정의론, 매킨타이어 덕윤리학과 같은 가치와 사상에 관한 탐구 열풍이 일었던 적이 있다. 이 학자들의 사상은 우리들의 삶의 방향과 태도에 영향을 주는 중요한 것들이다. 이 사상가들에게 귀중한 아이디어를 제공해 온 2천여 년 전의 책이 있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나는 바로 그것을 소개하려고 한다. 원래 유명한 고전이란 그 이름이 잘 알려진 것과 달리 의외로 가장 읽히지 않는 책들이다. 그러나 그 고전은 우리 삶과 가치 판단에 어떻게든 작용하고 있기에 소중한 것들이다. 다소 난해한 책이지만 나는 과감하게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철학서 한 권,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소개하려고 한다. 이 글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에 나온 사상을 요약한 것이 아니므로 원본 독파를 권유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원 전 384년 마케도니아의 왕궁 도시 스타게이로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니코마코스는 왕실의 의사였는데, 니코마코스의 손자, 곧 아리스토텔레스의 아들 이름도 니코마코스였다.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던 플라톤이 소크라테스 사후에 아테네에 ‘아카데메이아.Academeia’라는 학당을 개설하였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17세부터 플라톤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플라톤의 이 학당에서는 철학을 비롯해 수학, 천문학, 음악 등의 학문을 중요하게 여겼다. 20년 간 아카데메이아에서 학문에 정진하던 그가 학당을 떠났는데 플라톤이 섭섭하게 여겼는지 ‘아리스토텔레스는 나를 차버리고 말았다. 마치 망아지가 낳은 어미를 그렇게 하듯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오늘날 학문의 전당을 일컫는 아카데미.Academy는 플라톤 학당에서 유래한 말이다.

    다른 설(說)도 있다. 헤르미포스에 의하면 필립 왕의 사절로 가 있는 동안 다른 사람이 학당의 수석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돌아와서 자리를 찾지 못한 아리스토텔레스는 회랑.Peripatos을 오가며 사람들과 철학을 논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를 따르던 학파를 소요학파(逍遙學派)라고 불렀다. 또 기원 전 347년 플라톤이 죽고 그의 조카 스페우시포스가 새로운 학원장이 되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아테네를 떠나 아소스에 아카데메이아 분교를 열고 스승과 다른 독자적인 철학을 펼쳤다고도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원전 343년에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Philipos의 요청으로 아들 알렉산드로스.Alexandros의 스승이 되어 그를 가르쳤다. 알렉산드로스가 아시아 정복을 꿈꾸자 그는 마케도니아를 떠나 아테네에 뤼케이온.Lycheion이란 학당을 개설했다. 프랑스 중등학교를 일컫는 리세.Lycée는 바로 이 뤼케이온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류사에 미친 업적은 플라톤 못지않다. 플라톤이 제시한,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감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세계.visible world이고, 다른 하나는 오로지 이성으로 파악할 수 있는 세계.invisible world, idea이다. 플라톤은 감각적 경험의 세계는 가짜이고, 참된 세계는 이데아의 세계라고 하였다. 이와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참된 존재의 본질인 우시아.ousia는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세계에 존재한다고 하였다.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 앎과 행함의 관계를 주지주의(主知主義) 관점에서 보고, 참으로 알면 행하게 된다고 본 데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참으로 안다고 해도 의지의 훈련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참된 행위를 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또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소피스트의 수사술(修辭術)을 논리성과 윤리성이 없다는 점을 들어 격렬히 비판했으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술을 논리적으로 재구성하면서 수사학(修辭學)으로 발전시켰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학문의 분야를 크게 세 가지로 나누었다. 그는 내용의 학문에서는 물리학과 정치학이 있고, 방법의 학문에서는 변증법(논리학)이 있다고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 분류는 지식의 분류와 맥락을 같이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지식을 이론지.apodeiksis, 실천지.phronesis, 제작지.thechnē 세 가지로 분류하고 저술하였다. 이론지에는 형이상학, 철학, 수학, 자연학 등을 포함한다. 실천지에는 정치학, 니코마케아 윤리학, 니코마코스 윤리학이 들어 있다. 제작지에는 수사학과 시학이 있다. 이외에 특별히 오르가논.organon(분석론)이 있는데 이는 모든 학문의 바탕이 되는 학문으로서 요즘 말로 논리학.logics과 논술에 관한 책이다. 오르가논은 정의와 명제, 삼단논법, 논증, 논박, 오류론 등이 대단히 중요한 학문의 기초로 여겨져 오늘날에도 여전히 활용되고 있다. 근대 이후 임마누엘 칸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 분류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칸트는『도덕형이상학 기초놓기』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분류한 자연학(물리학), 윤리학, 논리학은 주제의 본성에 완벽하게 맞으며, 더 개선할 점이 없다고 선언하였다.

    그는 또한 생물학 분야에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탁월한 업적을 남겼으며, 이외에도 그의 저작들은 분량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방대하다. 어쩌면 그의 동료와 제자들의 노력이 보태어진 것일 수 있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가 쓴 『그리스 철학자 열전』에 등록된 저술 목록만 살펴보아도 무려 390권이 넘으며 행으로 따지면 44만 5,720줄에 이른다. 하지만 여러 학자의 연구에 따르면 발견되지 않은 저작을 포함하여 실제로 무려 660권에 이른다고 알려져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이 전 세계에 족적을 남길 수 있게 된 것은 아랍계 스콜라 철학자인 아베로에스.Averroes(이븐 루시드)의 공로가 컸다. 그는 무슬림 지배 하의 알 안달루스에서 의학, 신학, 철학, 어학에 뛰어난 학자였으며, 아리스토텔레스의 뛰어난 주해자(註解者)였고 아리스토텔레스를 전파한 사람이었다. 아베로에스는 단테의 『신곡(지옥편)』에서 뛰어난 아리스토텔레스 주석가로 등장하며, 이슬람 사상가로는 라파엘로의 천장화 ‘아테네 학당’에 등장하는 유일한 인물이다. 한편 교부철학에서 스콜라철학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이 이단성 논쟁으로 매우 시끄러웠고, 이 다툼의 환경을 소재로 수도원의 살인 사건을 다룬 소설이 유명한 움베르코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다.

    이제까지 아리스토텔레스와 관련된 사회ㆍ역사적 맥락과 업적들을 살펴보았다. 그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는 ‘최고선(最高善)’이다. 최고선이란 바로 ‘행복.eudaimonia’이란 개념으로 표현된다. 고대 그리스 어에서 접두사 eu-는 ‘좋음(good)’을 뜻한다. 다이모니아는 다이몬 신을 뜻한다. 다이몬이란 말에서 ‘신적인 것은 최상, 최선, 곧 최고선을 뜻하는 것’임을 함의하고 있다. 최고선은 모든 도덕과 윤리가 궁극적 목적으로 삼는 것이다. 행복이 최고선이 될 수 있는 근거는 궁극적 목적인가에 있다. 예컨대 어떤 학생이 공부는 왜 하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대학진학을 위해서 한다고 대답한다. 그럼 대학엘 왜 가려는 거지? 라고 물으면 그는 나중에 좋은 직장에 취직하기 위한 것이라고 대답한다. 또 취직은 왜 하려는 거지? 라고 물으면 돈 벌어서 집도 마련하고 결혼해서 자녀를 낳고 잘 살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말인가? 그것은 행복한 삶을 의미한다. 여기서 공부의 여러 목적들인 진학, 취직, 축재, 주택 구입, 결혼, 자녀 양육이 열거된다. 이것들은 목적인 동시에 다른 어떤 것들의 수단이 된다. 그러나 ‘행복’은 다른 목적을 가지지 않는다.

    최고선은 다른 어떤 것들의 수단이 되지 않는 것 궁극적인 것이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이야말로 다른 어떤 것들의 수단이 되지 않는 그 자체로서 목적인 최고선이라고 하였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언급되는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의 최종 관심은 ‘어떻게 하면 가장 훌륭한 사람이 되는가?’이며, 이 질문의 바탕에는 ‘인간에게 최고선은 무엇인가?’가 있다. 다시 말하면 인생의 궁극적 목적으로 여기는 진정한 행복은 무엇이며, 그것에 도달하려면 어떻게 살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의 물음에 대한 논의와 탐구가 이 책에 실려 있다. 행복은 인생의 궁극적 목적이므로 다른 어떤 것들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이 추구하던 많은 것들, 곧 즐거움과 유익한 것들은 자체로서 행복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이 책은 그리스 사회에서 통속적으로 생각해 왔던 돈, 권력, 명예, 힘, 건강, 쾌락, 덕 등이 행복이라는 생각과, 그러한 것들을 쟁취하고 유지하려고 했던 많은 노력들이 오류를 안고 있음을 알려준다. 그는 좋은 품성이나 심지어 그것을 가지고 있는 상태(품성 상태)마저 궁극적 목적이 아니라고 한다. 이런 관점에 관한 좋은 질문이 있다. “인간은 잠을 자고 있을 때에도 행복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의식하고 있지 않은(이성에 의해 궁극적 목적을 자각하지 않은 비활동적인) 상태라면 그것은 행복이 아닐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또 진정한 행복에 도달하는 데 필요한 아레테.arete를 강조한다. 아레테는 덕, 또는 탁월성으로 번역되지만 고대 그리스 인들이 생각하는 아레테는 도덕적 덕만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그 의미가 훨씬 더 넓다. 아레테 ‘잘 하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arete는 ‘art’ 곧, 기술, 예술을 말하는 것으로 영혼의 기능을 잘 발휘하는 탁월함, 뛰어남을 뜻한다. 덕(품성) 자체는 행복이 아니지만 그것을 발휘하는 활동성은 행복에 도달하는 중요한 길이다. 덕, 또는 품성은 지적이고 실천적이며 지속적인 것이어야 한다. 그는 탁월함을 발휘하는 것은 중용의 덕을 습관화함으로써 가능하다고 보았다. 중용은 ‘최적인 상태’를 뜻한다. 그는 중용이란 무엇인지, 어떻게 그것을 취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진지하고도 세밀하게 논술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중용’은 지나침과 모자람이 없는 상태, 곧 적절한 때에 적절한 분량으로 적절한 행위를 하는 것을 뜻한다. 예컨대 용기는 모자람(비겁)과 넘침(만용) 사이의 적절함이다. 그는, 중용의 덕이나 행복은 ‘제비 한 마리가 날아 왔다고 해서 봄이 온 것이 아닌 것처럼’ 단 번에 이루어질 수 없다고 한다.

    이 책을 소개하려고 생각했을 때 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전체적인 내용들을 좁은 지면에 모두 소화하여 담기가 매우 어려웠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여러 덕성의 개념에 대해 다양하면서도 심도 있는 정의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그의 도덕적 개념들을 일일이 검토하면 좋겠으나 여기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다만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윤리학의 큰 두 개의 강물인 의무론과 목적론 중에서 목적론의 기원이 된 고전 중의 고전이라는 점이다. 이 사실을 고려하면 2천여 년 전에 쓰인 책이 가진 역사적, 사회적, 윤리적, 정치적 의미가 현대적 삶에 비중 있게 적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독자도 읽고 탐구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오늘날 쾌락주의나 웰빙(well-being, 잘 삶)으로 일컬어지는 행복의 관점을 덕윤리학(德倫理學)이라는 렌즈를 통해서, 또는 그 반대편에 서서 진지하게 검토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한 문장으로 ‘덕의 길을 걸어 행복에 이른다.’라고 표현하면 될지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2,300여 년 전의 아리스토텔레스를 소환하게 하는 프랑스 대입자격시험인 바칼로레아의 기출문제를 소개한다. 이걸 풀어내야 하는 학생들이 프랑스의 대학입학자격 수험생(고등학생)이라는 점도 염두에 두면 좋겠다.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행복이 가능한가?”

    -1998년 Baccalauréat 문제 중에서

    <참고한 책들>

    아리스토텔레스(이창우 외 2인 역), 『니코마코스 윤리학』 , 이제이북스 (주 텍스트)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전양범 역), 『그리스 철학자 열전』, 동서문화사

    플라톤(박종현 역), 『국가』, 서광사

    플라톤(김인곤 역), 『고르기아스』, 정암학당

    아리스토텔레스(이종오,김용석 역), 『수사학』, 리젬

    아리스토텔레스(김재홍 역), 『소피스트적 논박』, 한길사

    임마누엘 칸트(이원봉 역), 『도덕형이상학 기초놓기』, 책세상

    움베르토 에코(이윤기 역), 『장미의 이름』, 열린책들

    최병권・이정옥, 『세계의 교양을 읽는다(종합편)』, Humanist

    장 마리 장브(김임구), 『학문의 정신 아리스토텔레스』, 한길사

    단테 알리기에리(김운찬), 『신곡(지옥편)』, 열린책들

    박병기 외, 『고등학교 고전과 윤리』, 전라북도교육청

    박성창, 『수사학』, 문학과지성사

    이양수, 『롤스와 매킨타이어, 정의로운 삶의 조건』, 김영사

    김필영, 『평범하게 비범한 철학에세이』, 스마트북스
















    이민교회(移民敎會)와 영성(靈聖)


    09-11-2022(주일 주보)

    바울의 비전

    바울은 디아스포라 유대인(a Diaspora Jew)입니다.
    고향인 유대 땅을 떠나 당시 로마제국에 흩어져 살았던 유대인 가운데 한 명입니다.
    곧 바울은 이민자인 것입니다.
    바울은 유대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로마 헬라 문화권(the Greco-Roman world)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유대문화와 로마헬라문화 모두에 익숙하면서도 이 두 문화에 대해 비판적인 거리를 두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중간인의 삶으로 인해 바울은 창조적인 비전을 보게 됩니다.

    바울의 비전은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의 메시아로 보았던 예수님이 이방인을 포함한 ‘온 세상의 주’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비전은 몇몇 부분에서 예루살렘 중심의 유대계 그리스도인들과 충돌하였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에 소개되는 이방인들의 할례나 식사 규례(Kosher)에 관한 예루살렘 지도자들과의 논쟁이 그 분명한 예입니다.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은 새로 시작된 예수운동을 유대교의 상황에서 이해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유대인이면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기 시작하면서부터 였습니다. (다음 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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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9-18-2022(주일 주보)

    문제는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기 시작하면서부터 였습니다.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은 자연스럽게 새로 예수님을 믿은 이방인들에게 자신들처럼 유대의 관습을 지킬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만큼 초기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의 분파처럼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의 생각에 반대했습니다.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데에 유대인이 되는 조건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의 이러한 생각은 1세기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대단히 혁신적이고 급진적인 생각이었습니다.
    바울의 이러한 창조적인 생각은 그가 가진 중간인의 정체성으로부터 나왔습니다.
    유대인이지만, 로마헬라문화 속에서 자라고 교육받은 바울은 유대문화에 대한 비판적 거리로부터 이러한 창조적인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바울의 비전은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바울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과 헬라인의 주님이실 뿐만 아니라, 피조물을 포함해 온 세상을 구원하시는 주님입니다.
    바울의 종말론은 로마서에 나타나듯이 유대인과 헬라인은 물론, 신음하는 피조물까지도 고대하는 구원(롬 8장)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에서 이야기하는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계 21:5)입니다.
    따라서 바울의 교회관을 한 마디로 말하면 ‘세상을 위한 교회’입니다.
    교회는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차별없이 불러 모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온 세상의 구원을 향해 힘써 가는 공동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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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9-25-2022(주일 주보)

    이민교회(移民敎會)와 영성(靈性)

    미국에서 이민목회를 하면서 ‘이민교회와 그 목회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과 고민의 울타리를 벗어날 수 없다.
    왜냐하면 미국에 있는 한인이민교회는 분명 한국교회와 다른데, 그 차이를 이해하고 그에 맞는 목회를 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기 때문이다.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 이민자의 삶을 살았던 바울의 씨름과 영성은 미국에서 한인 이민자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이민교회와 한국교회

    미국을 방문한 어느 목사님께서 그가 시무하던 교회의 부목사가 이민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 고전하고 있을 때 “아니, 이민교회 하나 목회 못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라고 핀잔을 주었다고 한다.

    한국의 큰 교회에서 다양한 목회 프로그램과 많은 성도들을 관리하던 부목사가 몇 명 안 되는 작은 교회에서 고전하는 것을 이해하기어려웠던 것 같다.

    한국교회와 이민교회를 모교회와 지교회의 관계처럼 생각하는 것은 한국에 있는 교회는 신앙의 뿌리와 같고 이민교회는 이 뿌리에서 나와 미국에 자리 잡은 가지와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민교회는 중간자(中間子)로 시작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철학자 파스칼은 사람을 중간자라고 정의 하였다.

    첫째는 시간적인 중간자
    인간은 괴가와 미래라는 중간 즉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

    둘째는 형태적인 중간자
    인간은 천사도 아니고 사탄도 아닌 중간자로 존재하고 있다.

    셋째는 공간적 중간자
    인간은 하늘 위도 아니고 땅 속도 아닌 하늘과 땅 사이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민교회의 구성원들은 미국인도 아니고 한국인도 아닌 중간자로 하루 하루를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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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16-2022(주일 주보)

    이민교회의 비전

    이민교회의 비전은 바울처럼 ‘세상을 향한 교회’가 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중간인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인 이민교회가 비교적 수월하게 감당할 수 있는 비전입니다.
    왜냐하면 이민교회는 문화와 세상을 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실존적으로 깨달은 사람들이 모여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문화와 미국문화의 두 문화 사이를 살아가는 한인이민교회들은 두 문화를 모두 끌어 안는 훈련을 통해 세상 전체를 끌어안는 하나님의 비전을 품고 나아가야 합니다.

    이와 더불어 중간인이 가진 ‘비판적 창조성’ 또한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요즘의 한국교회의 모습을 보면 이민교회가 가진 비판적 창조성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요청되는 때인 것 같습니다.
    지금의 한국교회는 성장주의의 폐해로 인해 대형화, 물질화, 세속화의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의 이민교회는 그 작은 규모와 한계로 인해 적어도 한국교회가 겪고 있는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조금 더 자유로운 모습을 보입니다.
    이민교회들은 자신들의 영세함과 연약함을 부끄럽게 여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연약함을 극복해 대형교회로 성장하려는 맹목적인 목표를 세워서도 안 됩니다.
    오히려 이민교회의 연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지혜가 나타나는 진정한 교회상을 세우도록 기도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과 바울이 보여준 ‘약하고자 하는 용기’(courage to be weak)로 대변되는 영성의 모습은 대형화된 한국교회보다 연약함을 자랑하는 이민교회에서 보다 수월하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민교회가 보여 줄 세상을 위한 교회, 연약함의 영성은 한국교회와 미국교회 모두를 건강하게 만들 수 있는 중간인의 사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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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 04 / 2022(대강절 제2주)

    말씀을 묵상(默想)하라!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란 하나님(혹은 성령)이 불러 주신 내용을 성경의 저자들이 기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묵상하려면 먼저 성령의 도움을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을 기록하게 하셨던 성령의 감동이 말씀을 읽는 사람에게 임재하면 그 말씀의 깊은 의미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깨달은 후에는 그 말씀을 삶에 적용해야 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창세기 1:1-2).

    이 말씀을 읽었을 때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혼돈과 흑암에 하나님의 성령이 임재하신다면 어떤 현상이 일어날 수 있을까?
     
    나에게 닥쳐온 혼돈과 흑암이 무엇인가?
    심한 독감으로 인한 육체의 질서가 파괴된 상태와 일상생활이 순조롭지 못한 것이구나!
    주여, 지금 이곳에 주의 영이 임재하여 창조의 은혜를 만끽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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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 11 / 2022(대강절 제3주)

    성경을 기도로 열어라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 7. 15~1669. 10. 4)는 바로크 시대의 네덜란드 화가로 그의 첫 제자인 헤릿 도우(Gerrit Dou. 1613-1675)는 "빛의 화가"라고 하며 그의 작품 “예언자 안나”라는 성화에서 성경을 읽는 하나의 방법을 생각합니다.
    이 그림은 누가복음 2장에 나오는 84세의 과부였던 예언자 안나를 모델로 안나의 성경 읽기를 그린 것입니다.
    '예언자 안나'라는 그림에서 '도우'가 강조하는 것은 손입니다.
    성경을 받쳐 든 손은 ‘기도하는 손’입니다.
    성경를 읽고 있는 안나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읽고 있습니다.
    빛의 화가 '도우'에게 성경의 뜻이 드러나는 순간은 기도 속에서 성경을 읽을 때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묵상과 지적인 노력만으로 그 뜻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가운데 그 뜻을 보다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때로 성경지식이 풍부한 사람 가운데 성경의 내용이 지식의 차원에 머무르고 그 영적인 깊이가 드러나지 않는 경우는 바로 기도 가운데서 성경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경 말씀을 기도 가운데 가져갈 때 보다 깊은 영적인 의미를 깨닫고 그 의미를 머리에서 마음으로 옮겨갈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성경으로 기도할 때에 말씀을 통해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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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 18 / 2022(대강절 제4주)

    성경을 실천하라

    렘브란트에게도 성경의 안나를 그려낸 “예언자 안나”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렘브란트의 그림에서는 항상 빛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 그림에서는 빛이 등 뒤에서 와서 성서를 밝힙니다.
    이 빛이 비치는 중심에 위치하는 것은 성서와 손입니다.
    렘브란트는 안나의 손을 믿기지 않을 만큼 정교한 붓질로 그려냈습니다.
    자세히 보면 안나의 손에서 주름과 혈관마저 보일 정도입니다.
    여기에서 렘브란트는 성서를 ‘손으로 읽는” 장면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안나의 눈은 뜬 것인지 감은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습니다.
    마치 맹인을 위한 점자책을 읽듯이 안나는 손으로 성서를 매만지며 읽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손으로 성서를 읽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그것은 몸으로 읽는다는 의미입니다.
    곧 삶에서 실천한다는 의미와 다르지 않습니다.
    성서의 뜻은 지적인 노력을 통해서만 이해되거나, 기도를 통해서만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서는 몸으로 읽을 때에 그 뜻이 드러나게 되는 거룩한 책입니다.
    성서를 읽는 동안 이해하고 깨닫게 된 것을 온몸으로 삶에서 실천할 때에 성서의 의미는 비로소 완전하게 우리에게 드러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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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월 25일 성탄주일

    성탄 편지
    - 이해인

    친구여, 알고 계시지요?
    사랑하는 그대에게 제가 드릴 성탄 선물은
    오래 전부터 가슴에 별이 되어 박힌 예수님의 사랑
    그 사랑 안에 꽃피고 열매 맺은 우정의 기쁨과 평화인 것을.
    슬픈 이를 위로하고,
    미운 이를 용서하며,
    우리 모두 누군가의 집이 되어 등불을 밝히고 싶은 성탄절
    잊었던 이름들을 기억하고
    먼데 있는 이들을 가까이 불러들이며 문을 엽니다.
    죄가 많아 숨고 싶은 우리의 가난한 부끄러움도
    기도로 봉헌하며 하얀 성탄을 맞이해야겠지요?
    자연의 파괴로 앓고 있는 지구와 구원을 갈망하는 인류에게
    구세주로 오시는 예수님을 우리 다시 그대에게 드립니다.
    일상의 삶 안에서 새로이 태어나는 주님의 뜻을
    우리도 성모님처럼 겸손히 받아 안기로 해요.
    그 동안 못다 부른 감사의 노래를 함께 부르기로 해요.
    친구여, 알고 계시지요?
    아기예수의 탄생과 함께 갓 태어난 기쁨과 희망이
    제가 그대에게 드리는 아름다운 새해 선물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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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을 토론하라

    렘브란트가 이야기하는 성서의 뜻이 드러나는 방법을 베드로와 바울을 그린 그림에서 살펴봅시다. 원래는 “논쟁하는 두 노인”이라고 제목이 적혀 있지만, 이 그림의 등장인물은 베드로와 바울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작품에서 얼굴이 보이는 백발의 노인이 바울이고, 등을 보이고 있는 단단한 체격의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이 그림에도 역시 빛이 쏟아지고 있는 중심에 성서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 위로 바울과 베드로의 손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듯합니다.

    이 그림에서 둘은 성서의 내용에 대해 서로 토론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손가락으로 성서를 가리키며 열심히 무언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도 그저 바울의 이야기만 듣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바울의 말이 끝나기만 기다리고 있는 듯합니다. 베드로는 바울의 이야기가 끝나는 대로 반론을 펼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손을 보십시오. 성경 곳곳에 손가락을 끼워놓고 자신의 주장을 펼칠 성경 구절들을 찾아 놓고 있습니다.

    이 그림을 통해 렘브란트는 성서란 공동체로 서로 토론할 책이라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성서는 개인적으로만 묵상하고, 기도하고,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로 함께 질문하고 토론하는 가운데 그 의미를 깨닫게 되는 책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향해 질문하고, 우리의 삶과의 관계성을 끊임없이 묻고, 그 내용을 서로 토론하고 나눌 때에 성경은 비로소 그 의미가 완전히 드러납니다. 우리가 공동체로 함께 말씀을 묵상하고, 성경 공부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성서를 어떻게 읽습니까? 새해에 우리가 성서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기도하고, 몸으로 실천하며, 공동체로 나누고 토의할 때에 성경은 우리 삶을 뒤흔드는 하나님의 말씀 사건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 참고문헌: 김학철, 렘브란트 성서를 그리다 (서울 : 대한기독교서회,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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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민교회(移民敎會)와 영성(靈性)

    이러한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는 한국의 목회자들이 한국교회의 지교회를 해외에 창설하고, 이민교회 목회자들 가운데 한국에서 유행하는 목회전략을 무분별적으로 모방하려는 분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렇습니까?
    이민교회는 한국교회라는 모교회의 지교회에 불과합니까?
    이민교회는 미국이라는 새로운 땅에 하나님께서 세워 주신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한국교회가 동북아시아에 위치한 한국에서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목회하듯이, 미국의 이민교회는 북아메리카에 위치한 미국에서 이민자들과 1.5세, 2세를 대상으로 목회하는 교회입니다.

    한국교회와 이민교회는 그 문화적인 상황이나 성격이 전혀 다른 교회입니다.
    이것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한국교회의 목회를 수출하려는 한국의 교회나, 혹은 성장이라는 단순한 목표를 위해 한국의 목회전략과 목회자를 직수입하려고 하는 미국의 이민교회는 결국 어려움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워 주신 교회에는 그 상황과 문화에 맞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명이 있습니다.
    한국교회와 이민교회는 각자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명을 발견해야 합니다.

    창조적인 중간인

    그렇다면 이민교회가 발견해야 할 사명은 무엇입니까?
    이 질문을 숙고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민자들이 가진 삶의 특징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 특징을 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중간인의 삶”입니다.
    미국에 사는 한인 이민자들은 한국문화와 미국문화의 ‘중간’(혹은 ‘사이 between’)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가끔 한국을 방문하면, ‘아, 이제 내 생각과 삶의 방식이 한국 사람들과 많이 달라졌구나.’ 하는 것을 절감합니다.
    그렇다고 미국에서 미국사람과 똑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도 아닙니다.
    미국에서 한국적 신학을 설파했던 이정용 교수는 이러한 이민자의 특수성을 ‘중간인의 삶’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민자는 두 문화의 중간에 끼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양쪽 모두의 문화에 속해 있으면서 동시에 어느 문화에도 완전히 속해 있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중간인은 사실 설움을 많이 경험하는 사람들입니다.
    한국을 떠나면서 삶의 뿌리를 옮겨 오는 경험을 거친 후, 이제는 한국의 문화와도 거리가 생겨 생소한 마음의 아픔을 안고 살아갑니다. 미국에서는 여전히 주류에 속하지 못하고, 주변부에 머무르게 됩니다.
    1세대 이민자들은 대부분 영어도 수월하지 않고, 힘든 일을 하는 경우들이 많아서 그 고달픔은 배가 됩니다.
    게다가 때때로 겪게 되는 인종차별은 이 사회에서 이민자의 위치가 주변부에 있다는 것을 절감하게 합니다.

    하지만 이정용 교수는 이러한 중간인의 삶에 설움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중간인이 받은 축복은 ‘비판적 창조성’입니다.
    중간인은 양쪽 문화 모두에 속해 있으면서 양쪽 모두에 대해 거리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두 문화를 객관적이고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비판적 거리로부터 창조적인 생각이 가능합니다.
    한국과 미국사회의 핵심적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가진 권력과 욕심에 눈이 멀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 때, 이에 대해 바른 말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주변부에서 약하게 살아온 중간인들 입니다.
    한국이나 미국 문화가 어떤 특정한 가치와 생각을 편애하며 나아갈 때, 이에 대한 균형을 잡아 줄 수 있는 사람들 또한 양쪽 모두를 알면서도 비판적 창조성을 가진 이민자들입니다.
    이러한 이민자들이 가진 실존적인 정체성에서 나오는 ‘비판적 창조성’을 대표적으로 보여 주는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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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영성’은 한국교회에서최근 하나의 유행처럼 논의되고 있습니다.
    영성에 대한 많은 책들과 워크샵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반면, 이러한 모습을 견제하는 우려의 목소리 또한 적지 않은 것이 한국교회의 현실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모든 논의의 중심에 영성에 대한 오해가 자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영성을 교회 성장을 위해 유행하는 프로그램처럼 여기는 사람들에게서도, 또한 영성에 대한 위험성을 지적하는 사람들에게서도 기독교영성에 대한 적잖은 오해가 발견됩니다.
    이 시간에는 한국교회에 자리하고 있는 ‘기독교영성의 오해’가 무엇인지 살펴보고, 이러한 오해를 넘어서는 성경에 근거한 건강한 영성의 예로 사도 바울의 영성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한국교회가 가진 영성에 대한 오해

    한국교회의 영성에 대한 오해를 드러내는 가장 단적인 예는 최근 10월에 이루어진 한국의 주요 교단 총회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한국의 일부 교단은 총회를 통해 공식적으로 영성에 대한 위험성을 지적했습니다.

    ‘뉴스앤조이’라는 매체는 주요 교단들의 총회 소식을 전하는 기사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보도했습니다.
    “예장합동 신학부는 ‘관상기도’가 불건전한 신비주의, 종교다원주의, 이교적 영향이 혼합되어 있어 복음의 순수성을 해칠 위험성이 있다고 보고했다.
    예장합신 신학연구위도 ‘관상기도’를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위험하다고 했다.
    이승구 교수(합신대)는 ‘관상기도는 기본적으로 가톨릭교회의 정화, 은혜의 주입, 신과의 합일이라는 생각에 뿌리 내리고 있다. 신학적으로 오류가 있는 부분이다.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해 하나님과 교제하는 기도를 배우고 추구해야 한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2011년 10월 6일) 비록 여기에서 논점은 ‘관상기도’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만, 이것은 관상기도로 대표되는 영성 전체에 대한 시각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신비주의, 문화와의 관계, 그리고 가톨릭의 영향입니다. 이 문제들은 직접적으로 한국교회가 가진 영성에 대한 오해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실 이 세 가지 모습들은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태도들입니다. 이제 각각의 요소들이 가진 영성에 대한 오해가 무엇인지 알아 보고, 이에 대해 바울의 영성은 어떤 입장을 취하는지 간단히 살펴 보고자 합니다.

    영성의 목표

    먼저 신비주의에 얽힌 오해를 살펴봅시다.
    이것은 영성의 목표에 대한 오해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신비주의’는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와 계시를 추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직통 계시를 추구할 때, 개인의 영성이 강조되어서 이것을 통제하거나 판단할 근거가 약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자신만의 직통 계시를 주장하면서 이를 통해 자신의 이익을 챙기고 공동체에 해를 끼치기도 합니다. 이러한 위험성으로 인해 기독교 안에는 성경의 계시를 모든 계시의 우월한 근거로 두는 전통이 생겼습니다. 기독교영성 또한 이러한 신비주의적 경향을 배제할 수 없기에, 성경의 계시에 우월성을 두는(심지어는 문자화된 계시인 성경 이외에는 어떠한 계시도 인정하지 않는) 한국교회로서는 영성이 가진 이러한 신비주의적 성향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영성이나 신비주의가 하나님과의 직통 계시나 신비한 경험을 그 목표로 하고 있습니까? 이것은 영성에 대한 첫번째 오해입니다.

    사실 일반적인 신앙인들이 이러한 신비한 경험을 추구하지, 영성가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에서 감정적인 확신을 가지길 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뜨겁게 경험하고, 부인할 수 없는 모습으로 하나님을 만나길 바랍니다. 자신이 고민하는 문제에 대해 하나님이 직접적인 음성을 들려 주시길 원합니다. 그래서 신령한 목회자들을 찾아가 특정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를 받기도 합니다. 일반적인 신앙인들이 이러한 부정적인 의미의 신비주의를 추구하는 것에 비해 영성가들이 신비주의라는 이름 하에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와 삶입니다. 영성가들은 스스로 대단한 신비를 경험한 사람들이지만, 자신들의 신비경험을 자랑거리로 내세우지 않습니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이러한 경험이 가르쳐 주는 신앙과 삶에 대한 의미입니다. 그래서 어떤 영성가들은 자신의 삶에서 경험한 신비를 평생토록 묵상한 후에 삶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비로소 그 경험이 가진 의미를 책으로 남깁니다. 영성가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와 변화되는 삶이지, 신비한 경험 자체가 아닙니다. 이러한 경험은 영성적 삶을 시작하게 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곧 경험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아니라, 관계와 삶에 관심을 갖는 것이 영성입니다.

    바울의 삶이 이러한 모습을 잘 드러내 줍니다. 바울만큼 신비한 경험을 많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신비한 경험을 했습니다. 이 신비체험은 바울의 삶을 송두리째 뒤바꾸어 놓았습니다. 바울은 세상과 삶을 이 경험의 빛 아래에서 새롭게 해석하기 시작합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바로 이 신비경험이 가르쳐 준 하나님과의 관계와 이것에 뒤따르는 삶에 관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 외에도 많은 신비체험을 한 것이 분명합니다. 다른 사람의 경험인 것처럼 언급하는 삼층천에 올라간 사건도 그 예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의 신비체험을 직접 말하는 것을 극도로 자제합니다. 바울의 삶을 뒤바꾸어 놓은 다메섹 사건도 사도행전을 통해서 겨우 알 수 있을 정도입니다.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신비체험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의 목적은 이러한 경험들이 자신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 하나님에 대해 무엇을 깨닫게 해주었는지를 전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의 영성은 우리가 지향해야 할 영성의 목표를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영성의 목표는 체험을 추구하는 신비주의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와 이에 따르는 삶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영성이 입어야 할 옷

    두번째, 한국교회는 영성과 문화의 관계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영성이 입고 있는 옷과 관계된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영성에서 종교다원주의의 위험성을 지적하는 이유는 영성훈련의 모습 가운데 뉴에이지의 명상이라든지, 불교의 수련과 유사한 소위 ‘이교적 요소’가 있어서 종교혼합주의 성격이 가능하다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이것 또한 영성에 대한 오해입니다. 영성훈련에 나오는 명상과 수련 방법들은 기독교의 역사적인 전통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영성가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와 이에 따르는 삶을 증진시켜 주는 방법과 개념을 자신들이 살아가던 문화 속에서 찾았습니다. 당시의 철학, 세계관, 통용되던 훈련들을 영성가들이 자신의 영성이 입어야 할 옷으로 취한 것입니다. 영성가들은 영성의 목표와 방법을 잘 설명해 주는 문화적 개념과 훈련 방법의 창조적 수용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부인할 수 없는 것은, 모든 기독교의 신학과 영성은 당시의 문화의 옷을 입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어떤 영성훈련이 새로운 옷을 입고 기독교의 복음을 묵상한다고 하면, 그것을 혼합주의라는 잣대로 보기보다 그 옷이 내용을 얼마나 잘 담아내고 있는가를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문화의 옷을 입고 자신의 복음과 영성을 설명하는 창조적인 영성가였습니다. 바울은 헬라문화에서 태어나고 교육 받은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서, 이러한 두 문화 속에 살아가는 그의 정체성은 유대 땅에서 시작된 복음을 헬라의 새로운 옷으로 덧입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는 헬라문화 속에서 이방인을 위해 유대교와 복음을 재해석한 신학자였습니다. 바울의 유일한 관심은 자신이 발견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라는 복음을 어떻게 바르게 해석하고 삶에서 실천할 것인지였습니다. 바울은 그 내용을 입히기 위한 문화의 옷을 창조적으로 수용했던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가진 영성에 대한 오해는 속의 내용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그것을 감싸고 있는 옷에만 집중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한국교회는 옷 안에 숨겨진 영성의 의미와 목표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뿐만아니라, 한국교회에 맞는 영성의 옷이 무엇인지 창조적으로 고민해야 할 때입니다.


    2012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한 해가 시작되면 저마다 새해의 소망을 마음에 품게 됩니다. 각자 새해에 기대하는 것이 다르겠지만, ‘기쁨이 가득한 한 해’를 꿈꾸는 것은 모두의 공통된 소망이라 생각합니다. 2012년에는 정말 좋은 일만 가득한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분들의 삶 속에 기쁨과 행복이 가득하고, 웃음꽃이 활짝 피어나는 새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쁨과 웃음이 가득한 한 해를 소망하는 것은 대단히 영적인 일이기도 합니다. 사실 기쁨과 웃음은 우리의 신앙생활과 밀접한 관계에 있습니다. 최근 출간된 제임스 마틴(James Martin)의 책, 『천국과 웃음 사이 (Between Heaven and Mirth)』는 기쁨과 웃음이 왜 신앙생활에 중요한지를 유쾌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 책의 내용을 소개해 드리면서 2012년을 웃음과 기쁨을 통해 더욱 깊어지는 신앙을 체험하는 새해로 만드는 방법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신앙은 기쁨이 가득한 것

    요즘 미국의 가톨릭계에서 가장 각광 받는 작가 중의 한 명이 제임스 마틴입니다. 마틴은 펜실베니아대 와튼스쿨을 졸업하고 승승장구하던 중에 채워지지 않는 삶의 갈증으로 고민하던 중, 20세기의 영성가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의 영향을 크게 받아 가톨릭 예수회 사제가 된 사람입니다. 그의 책은 영성가들의 지혜를 다양한 삶의 이야기와 함께 풀어내는데, 그 방식이 항상 유머러스한 것이 매력적입니다.

    평소에 마틴의 책을 즐겨 읽던 저는 어느 날, 제가 살고 있는 보스톤의 한 대학(Boston College)에서 마틴의 공개강연이 있다는 광고를 보고 한걸음에 달려가게 되었습니다. 큰 강당을 가득 메운 사람들 앞에 나타난 제임스 마틴은 강연의 시작을 몇 가지의 재미있는 이야기들로 풀어나갔습니다. 얼마나 그 이야기가 재미있던지 내가 예수회가 운영하는 대학에서 한 가톨릭 사제에게 강연을 듣고 있다는 것을 송두리째 잊어버릴 정도였습니다. 온 청중을 들었다 놨다 웃긴 후에 제임스 마틴은 강연의 첫번째 포인트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신이 농담만 늘어놓고 강연은 시작하지 않은 것 같지만, 사실 이 농담들이 자신의 강연의 전부라는 것입니다. 신앙은 사실 즐겁고 행복한 것인데, 우리는 신앙을 너무 심각한 것으로 만들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진지하고 심각해 보이는 사람의 신앙은 좋아 보이고, 밝고 발랄해 보이는 사람은 왠지 경박하고 믿음이 없는 사람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앙은 기쁨이 가득한 것입니다. 신앙에는 웃음꽃이 피어나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마틴의 그 날 강연은 결국 오늘 소개하는 책으로 출간되었고, 이 책에서 마틴은 기쁨과 유머가 왜 우리의 신앙생활에 그렇게 중요한 것인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 중의 몇 가지를 여기에 소개해 봅니다.

    유머보다 좋은 전도는 없습니다

    신앙생활에서 유머가 중요한 이유는 전도의 좋은 방법이 되기 때문이라고 마틴은 말합니다. 기쁨과 행복은 사람들을 그 주변으로 불러 모읍니다. 그 누구도 우울하고 인상을 쓰고 있는 사람의 곁에는 가고 싶어하지 않지만, 밝고 행복한 기운을 뿜어내는 사람 곁에는 다가가 머무르고 싶어합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기쁨과 유머와 웃음이 있기 마련입니다. 교회 공동체에 이러한 웃음과 기쁨이 가득하면 비록 아무도 전도하지 않을지라도 주변의 사람들은 그 공동체에 끌려오게 됩니다.

    마틴은 자신의 경험을 하나 소개합니다. 예수회의 사제가 되기 위해서 훈련을 받고 있을 때에 그 지역 예수회의 감독이 마틴이 속한 공동체를 방문합니다. 마틴과 동료 수사들은 그 감독에게 한 가지씩 질문을 할 수 있었습니다. 마틴은 오랫동안 고민하다가 감독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합니다. “감독님, 요즘 사제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이 적은데, 어떻게 하면 그 수를 늘릴 수 있을까요?” 마틴의 질문을 들은 감독은 예상밖의 대답을 했습니다. 그의 간단하면서 지혜로운 대답은 “당신의 사제 직분을 즐겁게 살아가십시오.”였습니다. 기쁨은 사람들을 매료시키고, 결국 하나님께로 이끌어 갑니다. 교회의 가장 최고의 전도방법은 기쁨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유머는 겸손의 표현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듣는 유머 중많은 것들은 자기 자신을 낮출 때에 가능합니다. 경직되고 자신의 것을 움켜쥔 사람들은 유머를 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자신을 솔직히 드러내고, 자신을 웃음거리의 소재로 만들 마음의 여유가 있는 사람은 따뜻한 유머를 구사할 줄 압니다. 그래서 유머는 겸손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고, 겸손한 마음의 표현이 됩니다. 마틴이 소개하는 유머 중에 저를 가장 웃게 만들었던 이야기가 바로 이러한 모습을 잘 보여 줍니다.

    뉴욕에 있는 예수회가 운영하는 한 병원에 그 지역의 감독이 방문했습니다. 이 감독은 그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는 은퇴한 예수회 사제들을 모아 놓고 대화를 하였습니다. 감독은 이들 앞에서 자신의 고충을 털어놓았습니다. 뉴욕 지구에 은퇴하고 나이 많은 사제들이 얼마나 많은지, 이들을 관리할 시설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한 사제가 벌떡 일어서며 말했습니다. “감독님, 걱정 마세요. 여기 있는 우리 모두는 최선을 다해서 빨리 죽으려고 합니다.”

    그저 웃음을 주는 이야기만이 아니라, 이 유머에선 은퇴한 사제가 가진 삶의 여유와 겸손이 묻어납니다. 삶을 움켜쥐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죽음을 소재로 한 이러한 유머를 도저히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깊은 신뢰와 믿음 속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것에 주저함이 없는 사람은 이러한 유머로 자신의 겸손을 드러낼 줄 압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유머는 겸손을 배우게 하는 좋은 영적 훈련입니다.

    유머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게 합니다

    마틴이 말하는 ‘기쁨의 영성’(Spirituality of Joy)의 가장 중요한 대목이 바로 이것입니다. 유머와 기쁨은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를 더욱 깊고 풍성하게 만들어 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지나치게 엄격한 분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저 하늘 위에서 우리를 내려다보시고, 우리가 잘못하면 벌을 주시는 엄격하고 멀리 계신 분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에게 우리가 농담을 하거나 따뜻한 대화를 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랑이 많고 따뜻한 분이십니다. 마틴은 이에 덧붙여 장난기 많으신 하나님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유머 감각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따뜻하고 생동감 있는 것으로 만들어 줍니다.

    마틴이 소개하는 아빌라의 테레사(St. Teresa of Avila) 이야기를 예로 들어 봅니다. 테레사가 어느날 자신이 타고 있던 나귀에서 떨어져 진흙구덩이에 처박히면서 다리를 다쳤습니다. 테레사는 하나님께 기도 중에 불평하듯이 말합니다. “하나님, 참 더할 나위 없이 안 좋은 때에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셨네요. 왜 이런 일을 내게 일어나게 하셨습니까?” 테레사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이것이 내가 친구들을 대하는 방식이다.” 그러자 테레사가 하나님께 응답합니다. “그렇군요. 하나님께 친구가 많지 않은 이유가 이것이군요.”

    영성가 테레사의 유명한 이 이야기는 테레사와 하나님의 관계 속에 들어 있는 유머와 기쁨을 잘 보여 줍니다. 이 이야기에 담긴 테레사의 하나님을 향한 태도를 보십시오. 경직되거나 긴장된 것이 아닌 마치 가까운 가족과 친구를 대하는 듯한 다정함과 장난기가 어려 있습니다. 이러한 테레사를 대하는 하나님 또한 사랑과 장난기가 가득한 모습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오고가는 이러한 모습은 우리의 신앙생활을 더욱 깊은 차원으로 이끌어 줍니다. 우리의 기도는 내면의 깊은 감정들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장소가 되고, 그 속에서 경험하는 기쁨과 친근함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더욱 친밀하고 깊은 단계로 이끌게 됩니다.

    기쁨의 새해를 만드십시오

    16세기의 영성가 필립 네리(St. Philip Neri)는 “기쁨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선물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기쁨의 원천이시고, 우리가 삶에서 누리는 기쁨은 그것의 원천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선물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삶에서 경험하는 기쁨은 다른 사람을 매료시켜 결국은 기쁨의 원천이신 하나님께로 이끌어 가게 되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겸손함이 이 기쁨을 경험하게 하며, 이러한 기쁨은 결국 그 원천이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게 하는 매개체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쁨이 가득한 새해를 만드는 것은 우리 모두의 소망만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영적인 삶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권고합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살전 5:16). 2012년 새해는 이러한 해가 되어야겠습니다. 항상 기뻐하는 해, 웃음꽃이 가득한 한 해!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살전 5:18)입니다.

    * 참고문헌

    James Martin, Between Heaven and Mirth: Why Joy, Humor, and Laughter Are at the Heart of the Spiritual Life (New York: HarperOne, 2011)


    새해를 시작하면서 기독교인들이 다짐하는 것들 중에 공통적인 것은 “성경 읽기”라고 하겠습니다. 새해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 많이 읽고 그 안에서 신앙의 성숙을 다지고자 하는 결심을 많이 하게 됩니다. 오늘은 이러한 새해의 결심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책을 한 권 소개하고자 합니다. 한 신약성서 학자가 쓴 “렘브란트, 성서를 그리다”라는 책입니다. 이 책은 화가 렘브란트가 그린 성화들을 묵상하면서 렘브란트가 어떻게 성서를 해석하여 성서 속의 장면을 그의 그림 속에 그려냈는가를 연구한 책입니다. 오늘은 이 책의 내용 가운데 “성서의 뜻이 드러나는 법”이라는 장을 살펴보면서 우리의 성서읽기가 어떠해야 할지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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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노와 영성

    사람은 저마다 마음 속에 분노를 품고 삽니다.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에 대한 분노, 나를 이용하고 저버린 조직에 대한 분노, 내가 변화시킬 수 없는 답답한 상황에 대한 분노, 그리고 이 모든 것에 나약하며 스스로 받아들이기 어렵고 싫은 모습을 가진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가 때로 우리의 마음을 소용돌이치게 만듭니다. 우리가 내면에서 경험하는 이러한 분노를 이해하고, 이것을 잘 다루는 것은 우리의 정신건강에 필수적일 뿐만 아니라 영성형성을 위해서도 중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분노는 결국 하나님에 대한 분노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에 대해 분노할 수 있느냐고 비록 인정하고 싶지 않을지라도 일상에서 경험하는 분노는 이러한 일을 일어나게 허락하신 하나님에 대한 원망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과 삶에 이렇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분노의 문제를 어떻게 다룰 수 있을 것인가? “분노와 영성”에 대해 이 시간 함께 생각해봅시다..

    분노의 긍정적인 역할

    캐슬린 그라이더(Kathleen Greider)라는 목회상담학자는 분노를 다룰 때에 이것이 가진 긍정적인 역할을 먼저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우리는 흔히 분노를 부정적인 어떤 것으로 생각하지만, 분노에는 우리를 위한 긍정적인 모습이 많다고 그라이더는 말합니다. 분노는 먼저 삶의 에너지와 활력을 주는 역할을 합니다. 분노의 모습 중의 하나가 공격성(aggression)입니다. 우리에게 어느 정도의 공격성이 없다면 삶은 수동적이고, 우울하며, 가라앉은 모습으로 일관될 수 있습니다. 삶에 활력이 넘칠 때는 우리가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도전하고 성취해 갈 때입니다. 이러한 도전정신은 인간이 가진 기본적인 성향 중의 하나인 공격성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분노의 또 다른 긍정적인 모습은 상처에 대한 아픔을 치유하는 기능입니다. 우리가 성인이 아니고서야 일반적으로 분노하지 않고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나, 조직, 환경에 대해서 충분히 불평하고 분노한 후에야 우리 안에 있는 독이 밖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분노하고 불평한 사람만이 용서하고 치유하는 과정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분노에는 불의에 대한 정당한 분노가 있습니다. 정당한 분노는 세상의 정의와 공평함을 세우는 데 필수적인 요소가 됩니다.

    분노가 가진 이러한 긍정적인 역할에도 불구하고, 어떤 분노가 오랫동안 지속되면 이것은 우리에게 부정적인 기능을 수행하며 우리의 정신건강과 영성을 해치게 됩니다. 독자 여러분에게는 최근 자신을 가장 힘들고 분노하게 한 사건이 있습니까? 이 분노 속에서 치를 떠는 동안 온몸의 뼈가 녹아내리는 것 같은 경험을 하지 않았습니까? 스캇 펙(Scott Peck)은 “분노란 결국 자신의 뼈를 갉아 먹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분노로 피해를 받는 사람은 내 분노의 대상이 아니라, 결국은 자기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이렇게 분노하게 된 것만으로도 억울한 일인데, 분노하는 동안 자기 자신을 상하게 한다면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지속되는 분노가 우리를 상하게 할 때, 우리는 이 분노의 문제를 잘 다루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분노의 치유는 어떻게 가능할까요?

    분노의 치유

    분노를 치유하는 첫번째 단계는 나를 분노하게 한 대상에 대해 정당한 비판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분노는 격정적이고 감정적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분노가 감정적으로만 치우칠 때, 우리는 분노의 의미를 잘 모르게 될 경우가 많습니다. 분노의 대상에 대해 정당한 비판을 하는 것은 나의 분노를 이해하는 과정입니다.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것입니다. 정당하게 비판하는 동안 왜 내가 분노하게 되었는지, 무엇이 나를 힘들게 하였는지 이해하게 됩니다.

    특별히 이러한 정당한 비판은 나의 상처와 대면하도록 만들어 줍니다. 우리는 자신을 분노하게 만든 사람이나 사건을 대면하는 것을 피하려고 합니다. 그 일이나 사람에 대해서 말도 꺼내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를 상처받게 한 그 사람을 다시 마주치거나 상처받았던 일과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되면, 우리의 분노는 여지 없이 다시 폭발하게 됩니다. 분노는 피하거나 미룬다고 저절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분노하게 된 대상에 대해 정당한 비판을 한다는 것은 나의 분노와 상처를 미루지 않고 대면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정당한 비판은 우리에게 정당하게 분노할 기회를 제공합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우리는 충분히 불평하고 분노한 후에야 치유될 수 있습니다. 내가 겪은 일에 대해 그 사람이 잘못했다, 내가 억울한 일을 당하였다고 정당하게 분노한 후에야 우리의 가슴 속에서 이 아픔의 감정을 내보낼 수 있게 됩니다. 이제 이렇게 분노의 의미를 이해하고, 자신의 분노 속에 숨은 상처를 대면하고, 정당한 비판을 통해 이 감정을 내보낸 사람은 치유를 위한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은 용서입니다.


    『오두막』이라는 소설을 보면 자신의 딸을 납치 살해한 범인을 용서하기를 촉구하는 하나님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주인공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용서하길 바란다. 용서란 너를 지배하는 것으로부터 너 자신을 해방시키는 일이야.” 용서는 용서받게 된 대상보다 용서하는 사람 자신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치는 행위입니다. 용서는 결국 자신의 뼈를 갉아먹는 숨막히는 상황에서 자신을 해방시키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용서할 때 우리의 분노가 치유됩니다.

    하나님과 함께 춤추기

    분노의 문제에 있어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과의 화해입니다. 우리가 삶에서 경험한 분노는 결국 이러한 일을 일어나게 허락하신 하나님에 대한 원망을 불러일으키고, 곧바로 영적인 침체와 시험으로 이어집니다. 헨리 나우웬은 원망을 ‘차가운 분노’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차가운 분노를 치유하기 위해 헨리 나우웬은 한 조각상을 묵상해 보라고 권고합니다. 안토니오 카노바의 <춤추는 여인>(1809-1812년경)이라는 작품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조각가가 이 작품을 처음 만들고 있을 때의 상황을 상상해 보라고 합니다. 커다란 돌덩이가 한 조각 한 조각 떨어져 나가면서 점차 춤추는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으로 변해 갑니다. 영성형성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의 돌덩이를 깎아서 ‘원망의 돌조각을 파내시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라고 헨리 나우웬은 말합니다.

    삶이란 이렇게 깎아낸 빈 공간 속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춤을 추는 것입니다. 춤의 신비는 그 안에 모든 발자국이 있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느리게,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격정적이게. 이 모든 발자국이 모여 하나의 아름다운 춤이 됩니다. 삶에도 이렇게 다양한 발자국이 있습니다. 때로는 슬프고, 때로는 기뻐하며, 때로는 분노하고, 때로는 행복해합니다. 이 모든 삶의 발자국이 모여 삶이라는 아름다운 춤을 만들어 갑니다. 우리의 과제는 이 모든 발자국을 인도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삶이라는 춤을 추는 것입니다.

    삶이란 결국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롬 8:28)을 신뢰하며, 이 하나님과 더불어 함께 추는 춤입니다. 삶에 대한 이러한 신비를 깨달은 사람은 원망을 넘어서 감사로 나아가게 됩니다. “삶의 모든 것이 은혜”라는 고백이 우리의 분노를 감사로 변하게 만듭니다. 감사는 우리의 모든 분노를 치유합니다.

    * 참고문헌

    Kathleen Greider, Reckoning With Aggression (Louisville: WJK, 1997)

    스캇 펙, 끝나지 않은 여행 (서울: 열음사, 2007)

    윌리엄 폴 영, 오두막 (파주: 세계사, 2009)

    헨리 나우웬, 두려움에서 사랑으로 (서울: 두란노, 2011)

    화평의 영성

    얼마 전 한 이민교회를 다녀왔습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던 교회에서 어려움을 겪다가 끝내는 그 교회에서 갈라져 나와 이제 막 새롭게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개척교회였습니다. 교인들은 그 전에 있던 교회에서 받았던 상처 때문에 아직도 많이 힘들어 하는 눈치였습니다. 이런 모습은 이민교회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민교회가 겪고 있는 수많은 문제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쉽게 교회가 갈라지고 분열되는 모습입니다. 아마도 이민자들이 겪고 있는 삶의 고달픔 때문인지, 이민교회는 이민자의 삶의 아픔들이 쉽게 표면화되는 장소이고, 이 표출된 아픔들로 인해 생기는 분쟁을 해결할 능력과 인내심이 때로 부족해 보입니다. 서로 다른 생각들과 오해들 때문에 서로를 비난하다가, 그 결과는 교회가 쉽게 갈라지고 나뉘어지는 모습입니다.

    오늘 ‘영성가 이야기’에서는 이러한 이민교회의 모습을 묵상하며, 바울의 영성이 주는 통찰력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교회 안에서 약한 자나 강한 자나 하나의 예배공동체로 설 것을 촉구합니다. 이 평범하게 들리는 말에는 엄청난 힘이 담겨 있습니다. 바울은 이 주장을 쉽게 하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모든 상황을 깊이 숙고하고, 어느 무리에도 편들지 않으면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원하시는 뜻을 분명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살펴 볼 본문은 로마서 14장과 15장의 말씀입니다. 먼저 본문을 들여다 보기 전에 이 본문을 이해하기 위한 상황을 잠시 소개해야 하겠습니다.

    로마에 돌아온 유대계 그리스도인들

    초기 기독교는 아마도 유대교의 한 부분처럼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유대인이셨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대부분 유대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에 세워진 교회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로마교회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가운데 예수를 주로 고백했던 사람들, 곧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을 중심으로 새로 예수를 믿게 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섞여 있는 형태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로마교회에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로마의 황제는 유대인들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를 종종 보이곤 했는데, 대표적으로 황제 글라우디오는 49년에 발표한 칙령을 통해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을 모두 추방하였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글라우디오 황제 때 유대인들 사이에 ‘크레스투스’(Chrestus)와 관계된 충돌이 잦았는데, 이것이 황제의 심기를 거스른 것이었습니다. 학자들은 아마도 ‘크레스투스’가 ‘그리스도’(Christ)를 의미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곧 유대인들 사이에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계 그리스도인들과 전통적인 유대인들 사이에 논쟁과 충돌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칙령의 결과로 모든 유대인들이 로마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바울이 고린도에서 만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행 18:2)도 이때에 로마에서 쫓겨난 유대인이었습니다.

    문제는 글라우디오 황제가 54년에 죽으면서 생기게 됩니다. 황제가 죽자 추방당했던 유대인들이 다시 로마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5년 동안 로마교회는 쫓겨난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의 자리를 대신해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지도자의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5년간 로마교회는 이방인 그리스도인 중심의 교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글라우디오 사후 로마교회에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돌아오게 되자, 긴장과 갈등이 조성됩니다. 갈등의 요소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5년간 성장해온 이방인 그리스도인과 다시 돌아온 유대계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서로 화합하고 지도력을 나누는가의 문제입니다. 두번째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로 유대인의 관습에 우호적인 유대계 그리스도인들과 이러한 문제에 자유로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바울은 로마에 있는 교회에 편지를 보내게 됩니다. 바울도 익히 이 두 무리의 사람들이 서로 불편한 관계에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제 바울은 유대계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해 로마서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루게 됩니다.

    약한 자와 강한 자

    바울은 로마서 14장과 15장에서 로마교회에서 골머리를 앓고 있었던 약한 자들과 강한 자들의 분쟁을 다룹니다. 바울이 의미하는 약한 자는 유대인의 관습에 매여 있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를 누리고 있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약한 자들로 바울은 채식주의자(롬 14:2)와 ‘날을 중히 여기는 자’(롬 14:5)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음식에 대해서 특별한 규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고기는 적절한 방식으로 도축되고 손질되어야 하고, 적절한 방법으로 요리가 되어야 하며, 적절한 그릇에 담겨야 하는 정결예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로마에 만연한 우상에게 바쳤던 고기는 절대로 먹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아직도 유대의 음식규정에 대해 호의적이었던 사람들은 어떤 고기를 먹을 때 이것이 먹기에 적절한 것인지 의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고기를 먹지 않는 채식주의자로 돌아선 것입니다. ‘날을 중히 여기는 자’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여전히 유대의 절기들을 중히 여겨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약한 자들은 모두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아직도 유대의 율법과 관습에 매여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에 반해 강한 자는 바울처럼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를 누리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약한 자와 강한 자를 구분하는 데 있어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로 나누어 표현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애매하게 보이는 약한 자와 강한 자라는 두루뭉술한 말로 로마교회의 나누어진 무리를 표현합니다. 이것은 아마도 바울의 세심한 배려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약한 자라고 해서 모두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만 있을 것도 아니고, 이방인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유대의 관습에 호의적인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약한 자를 유대인 그리스도인으로, 강한 자를 이방인 그리스도인으로 구분해 버리면, 가뜩이나 두 무리 사이에 긴장이 있는 판에 둘 사이의 갈등을 표면화시켜 긴장관계를 더욱 심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약한 자와 강한 자라는 모호한 표현으로 조심스럽게 로마교회 내에서 갈등을 겪고 있는 두 무리의 문제에 접근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의 예배공동체

    바울이 이 문제를 다루는 데에 있어서 위대한 점은 어느 한 쪽의 편을 들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이 주목하는 것은 누가 옳다, 그르다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를 대하는 ‘태도’에 관한 것입니다. 바울이 두 무리 모두에게 권하는 태도는 세 가지의 모습입니다. 첫째, 두 무리 모두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것임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롬 14:6). 약한 자들도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것이고, 자유를 누리는 강한 자도 모두 하나님을 위해서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할 때 서로를 존중할 수 있게 됩니다. 둘째,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14:15). 아무리 자신이 하는 행동이 하나님을 위한 것일지라도 이것이 다른 사람들을 힘들게 할 때에는 자제할 줄 아는 배려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서로 배려하는 마음에서 이루는 평화와 기쁨이 그 핵심이기 때문입니다(롬 14:17, 19). 마지막으로 바울은 그리스도처럼 서로 용납하라고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롬 15:7). 그리스도께서 아직 죄인이었던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실 정도로 우리를 받으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를 그렇게 용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엄청난 사랑과 용서를 받은 빚진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나와 생각이 다른 그 무리를 위해서도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셨기에, 사랑에 빚진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그들을 받아들이고 사랑해야 함이 마땅합니다.

    바울이 이야기하는 약한 자와 강한 자에 대한 이 모든 조언의 목표는 하나입니다.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롬 15:6). 곧 하나의 예배공동체입니다. 약한 자나 강한 자나 신앙의 색깔이 어떠하든지, 삶에 어떤 아픔이 있든지, 생각의 차이가 어떠하든지, 모두가 하나 되어 하나의 예배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구속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강조하는 이러한 ‘화평의 영성’은 오늘의 이민교회가 추구해야 할 중요한 영성의 모습입니다.

    얼마 전 방문했던 갈라져 나온 이민교회를 보며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그 교인들이 겪었던 마음의 상처가 많이 안쓰러웠습니다. 새로 시작한 그 개척교회에도 하나님이 주시는 사명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픔과 상처를 넘어서 하나님이 그 교회에 주시는 사명을 발견하고 나아갈 수 있기를 기도하고 왔습니다. 하지만 현재 갈등 속에 있는 교회가 있다면 오늘 바울이 들려 준 이야기를 깊이 가슴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교회 내에 갈등이 있다고 교회를 나가 새로운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 능사는 아닐 것입니다. 갈등과 분쟁 속에 있는 교회는 바울이 조언하는 ‘하나의 예배공동체를 이루라’는 조언을 분별하며 숙고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결국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롬 15:17)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모든 분쟁과 갈등을 넘어서 성령의 능력을 통해 드러나는 평화와 기쁨이 넘치는 하나의 예배공동체를 이룰 때에 우리는 그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묵상하며, 바울의 영성이 주는 통찰력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교회 안에서 약한 자나 강한 자나 하나의 예배공동체로 설 것을 촉구합니다. 이 평범하게 들리는 말에는 엄청난 힘이 담겨 있습니다. 바울은 이 주장을 쉽게 하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모든 상황을 깊이 숙고하고, 어느 무리에도 편들지 않으면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원하시는 뜻을 분명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살펴 볼 본문은 로마서 14장과 15장의 말씀입니다. 먼저 본문을 들여다 보기 전에 이 본문을 이해하기 위한 상황을 잠시 소개해야 하겠습니다.

    로마에 돌아온 유대계 그리스도인들

    초기 기독교는 아마도 유대교의 한 부분처럼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유대인이셨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대부분 유대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에 세워진 교회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로마교회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가운데 예수를 주로 고백했던 사람들, 곧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을 중심으로 새로 예수를 믿게 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섞여 있는 형태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로마교회에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로마의 황제는 유대인들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를 종종 보이곤 했는데, 대표적으로 황제 글라우디오는 49년에 발표한 칙령을 통해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을 모두 추방하였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글라우디오 황제 때 유대인들 사이에 ‘크레스투스’(Chrestus)와 관계된 충돌이 잦았는데, 이것이 황제의 심기를 거스른 것이었습니다. 학자들은 아마도 ‘크레스투스’가 ‘그리스도’(Christ)를 의미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곧 유대인들 사이에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계 그리스도인들과 전통적인 유대인들 사이에 논쟁과 충돌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칙령의 결과로 모든 유대인들이 로마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바울이 고린도에서 만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행 18:2)도 이때에 로마에서 쫓겨난 유대인이었습니다.

    문제는 글라우디오 황제가 54년에 죽으면서 생기게 됩니다. 황제가 죽자 추방당했던 유대인들이 다시 로마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5년 동안 로마교회는 쫓겨난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의 자리를 대신해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지도자의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5년간 로마교회는 이방인 그리스도인 중심의 교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글라우디오 사후 로마교회에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돌아오게 되자, 긴장과 갈등이 조성됩니다. 갈등의 요소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5년간 성장해온 이방인 그리스도인과 다시 돌아온 유대계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서로 화합하고 지도력을 나누는가의 문제입니다. 두번째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로 유대인의 관습에 우호적인 유대계 그리스도인들과 이러한 문제에 자유로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바울은 로마에 있는 교회에 편지를 보내게 됩니다. 바울도 익히 이 두 무리의 사람들이 서로 불편한 관계에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제 바울은 유대계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해 로마서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루게 됩니다.

    약한 자와 강한 자

    바울은 로마서 14장과 15장에서 로마교회에서 골머리를 앓고 있었던 약한 자들과 강한 자들의 분쟁을 다룹니다. 바울이 의미하는 약한 자는 유대인의 관습에 매여 있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를 누리고 있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약한 자들로 바울은 채식주의자(롬 14:2)와 ‘날을 중히 여기는 자’(롬 14:5)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음식에 대해서 특별한 규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고기는 적절한 방식으로 도축되고 손질되어야 하고, 적절한 방법으로 요리가 되어야 하며, 적절한 그릇에 담겨야 하는 정결예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로마에 만연한 우상에게 바쳤던 고기는 절대로 먹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아직도 유대의 음식규정에 대해 호의적이었던 사람들은 어떤 고기를 먹을 때 이것이 먹기에 적절한 것인지 의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고기를 먹지 않는 채식주의자로 돌아선 것입니다. ‘날을 중히 여기는 자’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여전히 유대의 절기들을 중히 여겨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약한 자들은 모두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아직도 유대의 율법과 관습에 매여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에 반해 강한 자는 바울처럼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를 누리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약한 자와 강한 자를 구분하는 데 있어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로 나누어 표현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애매하게 보이는 약한 자와 강한 자라는 두루뭉술한 말로 로마교회의 나누어진 무리를 표현합니다. 이것은 아마도 바울의 세심한 배려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약한 자라고 해서 모두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만 있을 것도 아니고, 이방인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유대의 관습에 호의적인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약한 자를 유대인 그리스도인으로, 강한 자를 이방인 그리스도인으로 구분해 버리면, 가뜩이나 두 무리 사이에 긴장이 있는 판에 둘 사이의 갈등을 표면화시켜 긴장관계를 더욱 심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약한 자와 강한 자라는 모호한 표현으로 조심스럽게 로마교회 내에서 갈등을 겪고 있는 두 무리의 문제에 접근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의 예배공동체

    바울이 이 문제를 다루는 데에 있어서 위대한 점은 어느 한 쪽의 편을 들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이 주목하는 것은 누가 옳다, 그르다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를 대하는 ‘태도’에 관한 것입니다. 바울이 두 무리 모두에게 권하는 태도는 세 가지의 모습입니다. 첫째, 두 무리 모두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것임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롬 14:6). 약한 자들도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것이고, 자유를 누리는 강한 자도 모두 하나님을 위해서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할 때 서로를 존중할 수 있게 됩니다. 둘째,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14:15). 아무리 자신이 하는 행동이 하나님을 위한 것일지라도 이것이 다른 사람들을 힘들게 할 때에는 자제할 줄 아는 배려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서로 배려하는 마음에서 이루는 평화와 기쁨이 그 핵심이기 때문입니다(롬 14:17, 19). 마지막으로 바울은 그리스도처럼 서로 용납하라고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롬 15:7). 그리스도께서 아직 죄인이었던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실 정도로 우리를 받으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를 그렇게 용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엄청난 사랑과 용서를 받은 빚진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나와 생각이 다른 그 무리를 위해서도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셨기에, 사랑에 빚진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그들을 받아들이고 사랑해야 함이 마땅합니다.

    바울이 이야기하는 약한 자와 강한 자에 대한 이 모든 조언의 목표는 하나입니다.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롬 15:6). 곧 하나의 예배공동체입니다. 약한 자나 강한 자나 신앙의 색깔이 어떠하든지, 삶에 어떤 아픔이 있든지, 생각의 차이가 어떠하든지, 모두가 하나 되어 하나의 예배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구속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강조하는 이러한 ‘화평의 영성’은 오늘의 이민교회가 추구해야 할 중요한 영성의 모습입니다.

    얼마 전 방문했던 갈라져 나온 이민교회를 보며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그 교인들이 겪었던 마음의 상처가 많이 안쓰러웠습니다. 새로 시작한 그 개척교회에도 하나님이 주시는 사명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픔과 상처를 넘어서 하나님이 그 교회에 주시는 사명을 발견하고 나아갈 수 있기를 기도하고 왔습니다. 하지만 현재 갈등 속에 있는 교회가 있다면 오늘 바울이 들려 준 이야기를 깊이 가슴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교회 내에 갈등이 있다고 교회를 나가 새로운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 능사는 아닐 것입니다. 갈등과 분쟁 속에 있는 교회는 바울이 조언하는 ‘하나의 예배공동체를 이루라’는 조언을 분별하며 숙고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결국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롬 15:17)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모든 분쟁과 갈등을 넘어서 성령의 능력을 통해 드러나는 평화와 기쁨이 넘치는 하나의 예배공동체를 이룰 때에 우리는 그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얼마 전 한 이민교회를 다녀왔습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던 교회에서 어려움을 겪다가 끝내는 그 교회에서 갈라져 나와 이제 막 새롭게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개척교회였습니다. 교인들은 그 전에 있던 교회에서 받았던 상처 때문에 아직도 많이 힘들어 하는 눈치였습니다. 이런 모습은 이민교회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민교회가 겪고 있는 수많은 문제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쉽게 교회가 갈라지고 분열되는 모습입니다. 아마도 이민자들이 겪고 있는 삶의 고달픔 때문인지, 이민교회는 이민자의 삶의 아픔들이 쉽게 표면화되는 장소이고, 이 표출된 아픔들로 인해 생기는 분쟁을 해결할 능력과 인내심이 때로 부족해 보입니다. 서로 다른 생각들과 오해들 때문에 서로를 비난하다가, 그 결과는 교회가 쉽게 갈라지고 나뉘어지는 모습입니다.

    오늘 ‘영성가 이야기’에서는 이러한 이민교회의 모습을 묵상하며, 바울의 영성이 주는 통찰력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교회 안에서 약한 자나 강한 자나 하나의 예배공동체로 설 것을 촉구합니다. 이 평범하게 들리는 말에는 엄청난 힘이 담겨 있습니다. 바울은 이 주장을 쉽게 하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모든 상황을 깊이 숙고하고, 어느 무리에도 편들지 않으면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원하시는 뜻을 분명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살펴 볼 본문은 로마서 14장과 15장의 말씀입니다. 먼저 본문을 들여다 보기 전에 이 본문을 이해하기 위한 상황을 잠시 소개해야 하겠습니다.

    로마에 돌아온 유대계 그리스도인들

    초기 기독교는 아마도 유대교의 한 부분처럼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유대인이셨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대부분 유대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에 세워진 교회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로마교회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가운데 예수를 주로 고백했던 사람들, 곧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을 중심으로 새로 예수를 믿게 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섞여 있는 형태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로마교회에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로마의 황제는 유대인들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를 종종 보이곤 했는데, 대표적으로 황제 글라우디오는 49년에 발표한 칙령을 통해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을 모두 추방하였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글라우디오 황제 때 유대인들 사이에 ‘크레스투스’(Chrestus)와 관계된 충돌이 잦았는데, 이것이 황제의 심기를 거스른 것이었습니다. 학자들은 아마도 ‘크레스투스’가 ‘그리스도’(Christ)를 의미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곧 유대인들 사이에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계 그리스도인들과 전통적인 유대인들 사이에 논쟁과 충돌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칙령의 결과로 모든 유대인들이 로마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바울이 고린도에서 만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행 18:2)도 이때에 로마에서 쫓겨난 유대인이었습니다.

    문제는 글라우디오 황제가 54년에 죽으면서 생기게 됩니다. 황제가 죽자 추방당했던 유대인들이 다시 로마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5년 동안 로마교회는 쫓겨난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의 자리를 대신해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지도자의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5년간 로마교회는 이방인 그리스도인 중심의 교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글라우디오 사후 로마교회에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돌아오게 되자, 긴장과 갈등이 조성됩니다. 갈등의 요소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5년간 성장해온 이방인 그리스도인과 다시 돌아온 유대계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서로 화합하고 지도력을 나누는가의 문제입니다. 두번째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로 유대인의 관습에 우호적인 유대계 그리스도인들과 이러한 문제에 자유로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바울은 로마에 있는 교회에 편지를 보내게 됩니다. 바울도 익히 이 두 무리의 사람들이 서로 불편한 관계에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제 바울은 유대계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해 로마서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루게 됩니다.

    약한 자와 강한 자

    바울은 로마서 14장과 15장에서 로마교회에서 골머리를 앓고 있었던 약한 자들과 강한 자들의 분쟁을 다룹니다. 바울이 의미하는 약한 자는 유대인의 관습에 매여 있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를 누리고 있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약한 자들로 바울은 채식주의자(롬 14:2)와 ‘날을 중히 여기는 자’(롬 14:5)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음식에 대해서 특별한 규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고기는 적절한 방식으로 도축되고 손질되어야 하고, 적절한 방법으로 요리가 되어야 하며, 적절한 그릇에 담겨야 하는 정결예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로마에 만연한 우상에게 바쳤던 고기는 절대로 먹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아직도 유대의 음식규정에 대해 호의적이었던 사람들은 어떤 고기를 먹을 때 이것이 먹기에 적절한 것인지 의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고기를 먹지 않는 채식주의자로 돌아선 것입니다. ‘날을 중히 여기는 자’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여전히 유대의 절기들을 중히 여겨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약한 자들은 모두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아직도 유대의 율법과 관습에 매여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에 반해 강한 자는 바울처럼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를 누리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약한 자와 강한 자를 구분하는 데 있어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로 나누어 표현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애매하게 보이는 약한 자와 강한 자라는 두루뭉술한 말로 로마교회의 나누어진 무리를 표현합니다. 이것은 아마도 바울의 세심한 배려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약한 자라고 해서 모두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만 있을 것도 아니고, 이방인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유대의 관습에 호의적인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약한 자를 유대인 그리스도인으로, 강한 자를 이방인 그리스도인으로 구분해 버리면, 가뜩이나 두 무리 사이에 긴장이 있는 판에 둘 사이의 갈등을 표면화시켜 긴장관계를 더욱 심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약한 자와 강한 자라는 모호한 표현으로 조심스럽게 로마교회 내에서 갈등을 겪고 있는 두 무리의 문제에 접근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의 예배공동체

    바울이 이 문제를 다루는 데에 있어서 위대한 점은 어느 한 쪽의 편을 들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이 주목하는 것은 누가 옳다, 그르다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를 대하는 ‘태도’에 관한 것입니다. 바울이 두 무리 모두에게 권하는 태도는 세 가지의 모습입니다. 첫째, 두 무리 모두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것임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롬 14:6). 약한 자들도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것이고, 자유를 누리는 강한 자도 모두 하나님을 위해서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할 때 서로를 존중할 수 있게 됩니다. 둘째,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14:15). 아무리 자신이 하는 행동이 하나님을 위한 것일지라도 이것이 다른 사람들을 힘들게 할 때에는 자제할 줄 아는 배려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서로 배려하는 마음에서 이루는 평화와 기쁨이 그 핵심이기 때문입니다(롬 14:17, 19). 마지막으로 바울은 그리스도처럼 서로 용납하라고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롬 15:7). 그리스도께서 아직 죄인이었던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실 정도로 우리를 받으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를 그렇게 용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엄청난 사랑과 용서를 받은 빚진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나와 생각이 다른 그 무리를 위해서도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셨기에, 사랑에 빚진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그들을 받아들이고 사랑해야 함이 마땅합니다.

    바울이 이야기하는 약한 자와 강한 자에 대한 이 모든 조언의 목표는 하나입니다.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롬 15:6). 곧 하나의 예배공동체입니다. 약한 자나 강한 자나 신앙의 색깔이 어떠하든지, 삶에 어떤 아픔이 있든지, 생각의 차이가 어떠하든지, 모두가 하나 되어 하나의 예배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구속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강조하는 이러한 ‘화평의 영성’은 오늘의 이민교회가 추구해야 할 중요한 영성의 모습입니다.

    얼마 전 방문했던 갈라져 나온 이민교회를 보며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그 교인들이 겪었던 마음의 상처가 많이 안쓰러웠습니다. 새로 시작한 그 개척교회에도 하나님이 주시는 사명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픔과 상처를 넘어서 하나님이 그 교회에 주시는 사명을 발견하고 나아갈 수 있기를 기도하고 왔습니다. 하지만 현재 갈등 속에 있는 교회가 있다면 오늘 바울이 들려 준 이야기를 깊이 가슴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교회 내에 갈등이 있다고 교회를 나가 새로운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 능사는 아닐 것입니다. 갈등과 분쟁 속에 있는 교회는 바울이 조언하는 ‘하나의 예배공동체를 이루라’는 조언을 분별하며 숙고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결국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롬 15:17)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모든 분쟁과 갈등을 넘어서 성령의 능력을 통해 드러나는 평화와 기쁨이 넘치는 하나의 예배공동체를 이룰 때에 우리는 그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과 헌신의 영성

    오늘 “영성가 이야기”에서는 헌신에 대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사실 ‘헌신’이라는 주제는 대단히 무거운 주제입니다. 사람들은 무언가에 헌신하는 것을 두려워 하고 부담스러워 합니다. 남녀 사이에서도 그렇게 서로 뜨겁게 사랑하고, 그(혹은 그녀)가 없으면 죽을 것 같다가도 막상 결혼을 결정할 때가 되면 고민을 하는 커플을 보곤 합니다. 이들이 고민하는 것 또한 헌신의 문제입니다. ‘내가 과연 이 남자, 혹은 이 여자만 바라보고 평생을 살 수 있을까?’ 한번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하는 결단과 헌신의 순간인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두렵고 부담스러운지 결혼식 전날 도망가는 신랑 신부가 생기기도 합니다.

    남녀간의 헌신도 이렇게 두려울진대, 우리가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은 얼마나 더 부담스럽고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원하시는 헌신은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만을 바라보고 살기로 결단하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기로 결단하는 것이 바로 헌신입니다. 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하나님 안에서 내 삶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 삶의 변화가 신앙생활의 핵심입니다. 오늘 이 헌신에 담겨 있는 신앙생활의 비밀을 삭개오의 이야기(누가복음 19:1-10)에서 묵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철저한 헌신을 이룬 삭개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여리고라는 곳으로 들어가신 장면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께서 여리고에 오셨다는 소식에 흥분하였고,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삭개오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삭개오에 대한 소개를 본문은 아주 짧게 “세리장”이요, “부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주 짧은 소개지만, 이 소개를 듣는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삭개오가 어떤 사람인지 고개를 끄덕이며 충분히 알 수 있었습니다. 삭개오는 한 마디로 상종해서는 안 될 인간이었습니다. 삭개오의 직업은 세금을 걷어들이는 세리였습니다. 당시의 세리는 침략자인 로마제국을 대신해서 세금을 걷어 로마황제에게 바치는, 로마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시의 세리들은 보통 걷어들여야 할 세금보다 더 많은 돈을 걷어서 남은 돈을 자기 호주머니에 채웠습니다. 요즘 세상에도 세금을 낼 때마다 “아니, 무슨 세금을 이렇게 많이 떼어가나” 하면서 툴툴거리는데, 로마제국의 앞잡이 노릇을 하면서 게다가 웃돈을 얹어 걷어들이는 세리들을 얼마나 사람들이 욕을 해댔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삭개오를 그런 세리요, 부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온갖 욕을 먹을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셈입니다. 삭개오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말할 수 없는 미움과 조롱의 대상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삭개오의 삶은 항상 외로웠습니다. 주위에 친구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자기의 주위에 있는 사람이라고는 자기의 돈을 노리고 아첨하는 사람들이거나, 아니면 노골적으로 경멸의 시선을 보내며 자신을 욕하는 사람들뿐이었습니다. 부자였던 삭개오의 삶은 풍요로웠지만, 그 많은 재산이 삭개오의 마음에 기쁨을 가져다 주지는 못했습니다. 마음의 한 구석에 커다란 구멍이 나있는 것 같았습니다. 비록 욕을 먹는 직업이었어도 안정된 직업에, 넘치는 재산에, 사랑하는 가족들까지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라고는 없었지만, 삶에서 느끼는 이 공허함은 삭개오의 힘으로는 도무지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삭개오는 자신의 삶의 공허함 속에 예수님을 보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예수께서 삭개오의 삶의 문제를 치유해 주시기를 기대하는 간절한 소망으로 나아갑니다. 하지만 키가 작았던 삭개오는 수많은 사람들로 인해 예수님을 볼 수 없어서 예수님을 보기 위해 근처에 있는 뽕나무에 올라갑니다. 삭개오의 위대함은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의 공허함에 머물러 있지 않고, 간절한 소망 가운데 예수께로 나아간 것입니다. 뽕나무 위에까지 기어 올라갈 만큼 간절했습니다.

    마침내 예수께서 삭개오가 있는 나무 밑에 이르러 삭개오를 쳐다보십니다. 예수께서는 나무에 매달려 있는 삭개오의 모습에서 그 마음의 공허함과 갈급함,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소망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삭개오를 초대하십니다. “삭개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내가 오늘 너의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예수님의 초대를 받고 삭개오는 곧바로 나무에서 내려와 예수님을 집으로 모셔들입니다. 삭개오는 이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기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다른 사람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다면 네 배로 갚겠다고 약속합니다. 삭개오의 변화는 철저하고 즉각적이었습니다. 삭개오는 삶의 완전한 변화, 철저한 헌신을 이룬 사람입니다.

    오직 사랑에 매여

    그렇다면 한 가지 질문이 떠오릅니다. 어떻게 삭개오에게 이런 철저한 헌신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요? 그 모든 비밀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작은 한 단어에 담겨 있습니다. 본문 6절에 나오는 “즐거워하며”라는 단어입니다.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표준새번역은 이것을 “기뻐하면서”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삭개오에게 “어서 내려오너라” 말씀하시자, 삭개오는 엄청나게 기뻐하면서 나무에서 내려왔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삭개오가 큰 기쁨을 누린 것은 오늘의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삭개오가 경험한 기쁨은 자기를 찾아오신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감격이었습니다. 그 누구도 삭개오를 인간 취급하지 않았고, 모두가 욕을 하는 삭개오였지만,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10절)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은 삭개오를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삭개오를 예수께서 찾아가셨습니다. 삭개오의 마음의 중심에 있는 공허함을 연민의 눈으로 보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가 죄인인 삭개오와 어울린다는 사람들의 수근거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삭개오에게 “내가 오늘 너의 집에서 머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삭개오에게는 이 짧은 순간이 예수님의 엄청난 사랑을 체험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자신의 전 존재를 채워 주시는 예수님을 감격적으로 만나고, 직접적으로 보는 순간이었습니다. 이 사랑의 감격이 기쁨이 되고, 이 기쁨은 삭개오의 변화의 모든 이유가 됩니다.

    삭개오를 찾아가신 예수님처럼,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먼저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흔히 착각을 하는데,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찾아갈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의 곁을 떠난다고 할지라도, 우리를 다시 찾아오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늘 우리를 먼저 찾아오시기에,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을 찾아 나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에게서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입니다.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하나님이 항상 나를 사랑하시고 함께 계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때로 삶에서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삶에서 시험과 고통을 당할 때에는 마치 하나님이 나를 떠나서 이 어려움 속에 홀로 내버려 둔 것같이 느낄 때가 있습니다. 봉사를 하다가 지쳐서 힘이 들 때에는 나의 신앙생활에서 하나님이 사라져 버린 것같이 느껴집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사랑 속에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뜨겁게 체험하고, 이 기쁨에 거하는 사람만이 삭개오처럼 삶의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삭개오의 헌신의 비밀은 하나님의 사랑의 기쁨에 사로잡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충만하면 그 기쁨과 감격이 헌신의 삶을 부담감이 아니라 넉넉히 할 만한 것, 기쁘게 할 만한 것으로 만듭니다. 하나님 사랑에 매인 그 감격이 우리의 사명을 넉넉히 짊어지게 합니다. 외롭지 않습니다. 힘들지 않습니다. 늘 기쁨과 찬양이 넘칩니다.

    가끔 교회에서 봉사하는 제직들이나, 성가대원, 교사들을 보면 봉사하는 데 지쳐서 시험에 드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그런데 제 경험으로는, 그렇게 힘들게 봉사하시는 분들이 일이 많다는 이유만으로 시험에 드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경우에 이 하나님의 사랑의 기쁨에 사로잡힌 영적 에너지가 부족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늘 새롭게 감격하면, 모든 봉사와 관계에 의미와 활력이 돋아납니다.

    헨리 나우웬은 봉사는 마치 잔에서 물이 흘러 넘치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잔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흘러 넘쳐서, 그 넘치는 것을 조금 나누어 주는 것이 봉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잔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흘러 넘치기는 커녕, 그 잔을 아무리 들여다 보고 바닥을 박박 긁어 보아도 퍼줄 것이 없으면, 도대체 무엇을 나눌 수 있겠습니까? 봉사는 하나님의 사랑의 기쁨에 사로잡혀서 내 잔에 흘러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를 주위의 사람들과 나누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봉사하는 가운데 지치고 회의에 빠지면, 하나님의 사랑을 새롭게 발견하기 위해 신앙의 점검을 해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교회 부서에서 충돌이 생기고 봉사에 회의가 들면, 자꾸 모여서 회의를 합니다. 자꾸 회의만 하면 더 회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오히려 기도를 해야 합니다. 내 잔을 하나님 사랑의 기쁨으로, 은혜의 감격으로 채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늘 새롭게 느낀다면, 우리의 봉사에도 언제나 기쁨이 가득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 사랑의 기쁨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헌신의 삶을 살아가기를 독자 여러분과 함께 소망해 봅니다.

    * 더 자세한 내용을 원하시는 분은 저자의 『하나님 만나기』(대한기독교서회, 2010) 3부를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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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다리는 아버지의 영성

    누가복음 15장에 등장하는 “탕자의 비유”를 함께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이 비유는 한 가족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한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 둘째 아들이 집을 나갔다 돌아오는 이야기입니다. 이 둘째 아들을 나의 삶과 비교하며 읽어 보면, 이 둘째 아들이 바로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쉽게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자신의 영적인 여정에 대한 이야기를 발견하게 됩니다.

    아버지의 품을 떠난 둘째 아들

    본문이 시작되면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청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재산 중에 내가 나중에 상속받을 재산을 지금 나에게 나누어 주십시오.” 둘째 아들이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받게 될 유산을 미리 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런 요구는 자칫하면 “아버지가 죽기를 바란다.”는 말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둘째 아들의 이 말은 사실 생각할수록 괘씸한 말입니다. 하지만 오늘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이 아들의 말을 들어 줍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아버지의 사랑은 달랐습니다. 이 아버지는 아들을 무조건 잡는 것만이 사랑이 아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아들의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 이 아버지가 가진 큰 사랑이었습니다. 사실 이것을 이해하기가 어려울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아들이 집 나가는 것을 허락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이 아버지의 사랑은 자신의 생각을 아들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아버지가 사랑한 방식은 아들을 존중하고, 떠날 자유를 허락하는 것이었습니다. 떠날 자유를 허락한 아버지만이 돌아올 자유도 줄 수 있습니다. 떠날 자유를 주지 않는 아버지는 훗날 아들이 돌아온다 해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러한 자유를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곁을 떠날 수 있는 것 또한 ‘떠날 자유'를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오늘 누가복음의 탕자 이야기는 시작부터 하나님의 사랑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둘째 아들은 왜 아버지의 곁을 떠나려고 했을까요? 우리는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 집에서는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집을 떠나 재산에 의지해 즐기며 살고자 합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집을 나와서 가기로 작정한 곳을 본문 13절에서는 ‘먼 나라'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아들은 아버지의 품을 떠나서 가장 ‘먼 나라', 곧 아버지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최대한 먼 곳으로 달아나서 그곳에서 재산과 자신의 능력에 의지하여 행복과 자유를 즐기며 살아가기로 작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 위젤의 작품 중에 다음과 같은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늘보좌에 앉은 하나님 앞에 가서 물었다고 합니다. “하나님, 사람 노릇과 하나님 노릇 중에 어떤 것이 더 힘들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랬더니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물론 하나님 노릇이 더 힘들지. 인간인 그대야 가족과 직장 등의 일밖에 신경 쓸 것이 없지만, 나야 온 우주와 은하계와 별들을 신경 써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이 사람은 하나님께 계속 물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하나님께는 무한한 시간과 능력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 인간이야 한정된 능력과 짧은 인생살이 속에서 모든 일을 해내야 하지요. 그게 힘들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 사람은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하나님 노릇이 더 어렵다고 생각하신다면, 딱 1초 동안만 서로 역할을 바꿔 보면 어떨까요?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게 되실 겁니다.” 하나님은 내키지 않았지만, 그 사람이 워낙 졸라대는 바람에 마지못해 서로의 역할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십니까? 일단 하나님의 자리에 앉은 그 사람은 그 자리를 돌려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멀리 쫓아내고 그때부터 이 세상의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이 우화는 우리들의 본성 속에 있는 숨은 욕망을 잘 보여 줍니다. 우리들은 모두 하나님을 떠나서, 나의 삶의 중심에서 내가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며 살아가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의 품에선 자유가 없으니까 그 품을 떠나서 나의 힘과 자유, 세상의 성공에 의지하며 살아갈 때 기쁨이 있으리라는 욕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둘째 아들의 선택이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이 아들은 아버지에게 유산을 미리 받아서 아버지의 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먼 곳으로 달아나, 가진 재산에 의지하며, 그 속에서 인생의 의미와 행복을 찾아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둘째 아들이 경험하는 것은 삶에서의 기쁨과 자유와 행복이 아니라, 실패와 절망과 무의미뿐입니다. 둘째 아들은 먼 나라에서 허랑방탕한 삶을 삽니다. 가지고 간 재물을 금방 다 써버리고 맙니다. 이제 둘째 아들을 채우고 있는 것은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삶의 공허함과 무의미함입니다. 둘째 아들의 상태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 주는 모습이 바로 돼지우리에서 돼지가 먹는 밥을 빼앗아 먹으려는 모습입니다. 구약시대부터 이스라엘 사람들은 돼지를 부정한 동물로 여겼습니다(레 11:7). 랍비들은 유대인들이 돼지 기르는 것을 금지하였습니다. 그런데 유대인인 이 둘째 아들이 돼지를 치러 돼지우리 속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리고 너무 배가 고파 돼지가 먹는 음식을 빼앗아 먹으려고까지 하고 있습니다. 이 장면은 둘째 아들이 겪고 있는 삶의 곤고함과 공허함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둘째 아들의 돌아섬

    이제 새로운 돌아섬이 시작됩니다. 자신이 겪고 있는 삶의 무의미와 절망을 넘어서는 둘째 아들의 새로운 여행이 시작됩니다. 둘째 아들은 돼지우리의 절망 속에서 비로소 제 정신이 돌아옵니다. 본문 17절에서 “이에 스스로 돌이켜”라고 적혀 있는데, 영어성경을 보면 그 의미가 보다 분명합니다. “When he came to his senses.” 한 마디로 제 정신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다가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둘째 아들에게는 돼지우리가 자신의 삶의 한계를 볼 수 있도록 도와 준 축복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도 삶에서 실패와 아픔을 경험할 때, 비록 우리를 힘들게 하지만, 실패의 경험은 우리가 붙잡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알게 해주고 제정신이 들게 해줍니다.

    둘째 아들은 이제 아버지의 집에 있었던 풍요로움을 생각합니다. 자유가 없다고 생각했던 아버지의 품에 있었을 때에 자신이 얼마나 자유롭고 풍요롭게 살았는지 그 따뜻함을 기억해 냅니다. 이 기억이 둘째 아들로 하여금 아버지께 돌아갈 것을 결심하게 합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이러한 기억이 있습니다. 비록 의식하지는 못할지언정, 우리 모두에겐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 가운데 있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들입니다.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와의 사귐을 기뻐하시던 하나님, 그 안에서 누리던 완전한 의미와 행복에 대한 기억이 우리 본성 가운데 숨겨져 있습니다. 삶이 아무리 안정되어 있어도 우리의 마음 한구석이 허전한 것은 이 숨겨져 있는 기억 때문입니다. 어느 순간 제정신이 들어 하나님을 찾아 나서게 되는 것도 바로 우리의 본성 가운데 숨겨져 있는 이 기억 때문입니다. 이 본능 속에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품에 대한 기억이 우리로 하여금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시 42:1) 하나님을 찾아 나서도록 만듭니다.

    이제 둘째아들은 자신의 돌아섬을 행동에 옮깁니다. 여기에 둘째 아들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자신의 삶의 방식에서 돌아서는 것입니다. 자신의 절망적인 삶의 자리에서, 세상적인 욕심을 향해 달려가던 삶의 방식에서 돌아서서 아버지의 품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기다리는 아버지

    마침내 돌아온 둘째 아들 이야기의 절정적인 장면을 읽어 봅니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바로 20절 말씀에 있습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기다리는 아버지” 입니다. 처음 이야기를 시작할 때, 둘째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버지의 품을 떠나는 것을 허락했던 사랑의 하나님은 이 아들이 떠나 있는 동안 내내 돌아오기를 기다렸던 분입니다. 본문은 이러한 기다리는 아버지의 모습을 ‘아직 거리가 먼 데'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둘째 아들이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아니 마을에 들어오기도 전에 먼 거리에서 아버지는 아들이 오는 것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먼 거리에서 아들이 오는 것을 볼 수 있었던 이유는 매일같이 그를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큰 상처를 주고 떠난 아들이었지만, 이미 아들을 용서하고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였습니다. 아들이 언제 올까 매일같이 기다리면서 눈물 흘리던 아버지였습니다. 그리고 먼 곳에서 아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자 사랑의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서 달려 나가 그를 안고 입을 맞춥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만나면 하려고 연습하고 준비한 말들을 채 다 듣지도 않습니다.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아버지는 아들에게 좋은 옷을 입히고, 신을 신기고, 반지를 끼우고, 기뻐하며 잔치를 베풉니다. 이 아버지는 아들이 떠난 그 순간부터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던 사랑의 아버지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이야기에 나오는 아버지와 같은 분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곁을 떠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가 돌아오기를 한결같이 기다리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누가복음의 돌아온 탕자 이야기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사랑의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곁을 떠날 때에 그 속에서도 우리의 자유를 허락하시는 사랑의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올 때에 우리의 모습이 어떠하건 상관하지 않고 맞아 주시는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의 곁을 떠나 있을 때에도 한결같은 사랑으로 우리를 기다리시는 하나님. 이 하나님의 사랑의 품으로 돌아갈 때에 우리의 삶에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 삶은 하나님의 품에 있을 때 행복해집니다. 사랑의 하나님의 품에서 우리는 우리의 상처를 치유해 주시고, 회복시켜 주시고, 삶의 의미와 만족으로 채워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http://www.kcjlogos.org/news/articleView.html?idxno=7655 


    술 취하지 말라(에베소서 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Do not get drunk on wine, which leads to debauchery. Instead, be filled with the Spirit.


    취하다(3182)  

    μεθύσκω Storng number3182

    1. 술취하게 하다.  2. 술취하다. 3. 눅 12:45 
    Pronunciation [ mĕthüskō ]


    • 1.  술취하게 하다, 술취하다, 눅 12:45, 엡 5:18, 살전 5:7.
    Grammar Explanation

    제1부정과거 수동태 ἐμεθύσθην, 3184의 연장형[수동태로 쓰임]

    • 문법설명

      제1부정과거 수동태 ἐμεθύσθην, 3184의 연장형[수동태로 쓰임]

    • 관련 성경 /  취하게 되다(눅 12:45), 취하다(엡 5:18, 살전 5:7).


    충만을 받으라(4137)


    πληρόω Storng number4137
    1.

    가득하게 하다

    2.

    시간을 채우다

    3.

    마치다

    Pronunciation [ plērŏō ]
    Etymology
    미완료3인칭단수 ἐπλήρου, 미래 πληρώσω, 제1부정과거 ἐπλήρωσα, 완료 πεπ λήρωκα, 과거완료3인칭 단수 πεπληρώκει, 수동태, 미완료 ἐπλη- ρούμην, 수동태완료 πεπλήρωμαι, 수동과거완료3인칭 단수 πεπλήρωτο, 제1부정과거수동 ἐπληρώθην, 미래수동 πληρωθήσομαι, 4134에서 유래
    • 1.
      가득하게 하다, 충만하게 하다.
    • 2.
      시간을 채우다, 완성하다, [수동] 차다, 막1:15, 행7:30, 24:27.
    • 3.
      마치다, 완성하다, 롬15:19, 빌2:2, 골1:25.
    • 4.
      이루다, 성취하다, 마1:22, 3:15, 막14: 49, 요12:38.
    • 5.
      끝내다, 마감하다, 눅7:1, 행12:25.
    • 6.
      수를 채우다, 계6:11.

    Related Words

    • 관련 성경
      이루어지다(마2:23, 26:54), 이루다(마3:15, 27:9, 행3:18), 완전하게 하다(마5:17), 가득하다(마13:48, 고후7:4, 빌1:11), 채우다(마23:32, 골1:9), 차다(막1:15, 행7:30, 롬15:14), 메워지다(눅3:5), 응하다(눅4:21), 마치다(눅7:1, 행12:25, 13:25), 별세하다(눅9: 31), 충만하다(눅2:40, 요3:29, 행13:52, 엡1:23, 5:18, 골2:10), 응하게 하다(요15:25, 19:36), 지나다(행24:27), 편만하다(롬15:19), 풍족하다(빌4:18), 온전하다(계3:2).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 바울은 본절에서 어리석음의 구체적인 예로 잠 23:29-35을 인용하여 술 취함으로 인한 방탕한 생활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다. 당시 술 취하는 일은 불신자 세계에 있어서 일반화되어 있었으며 초대 교회에서도 심각한 문제 중 하나였다(딤전 3:3; 딛 1:7;2:3, Wood, Foulkes, Hendriksen). 술 취함은 단순히 그 자체에만 문제가 있는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인해 생활이 무절제하게 되고 방탕하기 쉽다는 것에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여기서 '방탕'으로 번역된 헬라어 '아소티아'(*)는 술 취함의 현상을 잘 나타내 주는 단어로 고대 헬라 세계에서는 '방종' 혹은 '돈과 육욕의 무절제한 낭비'를 의미했다(Wood). 이것은 신약성경 탕자의 비유에서 '허랑 방탕한 생활'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눅 15:13).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지혜로운 자로서 생활하려면 술 취함으로 인한 방탕한 생활 곧 어리석음의 일을 금해야 한다.

    󰃨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 '성령의 충만'은 '성령의 내주'나 '성령의 인침' 그리고 '성령 침례'와는 다르다(1:13;4:30; 요 3:5;14:16; 롬 8:9; 고전 3:16). 성령의 내주나 성령의 인침 그리고 성령 침례는 단회적 사건인 반면에 '성령 충만'은 구원의 때뿐 아니라 그후에도 계속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것으로(행 4:8, 31;6:3, 5;9:17;13:9, 52) 그리스도인이 능력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행 10:38;11:24; 살전 1:5; 벧전 4:11, Lincoln). 즉 이것은 이미 그리스도인에게 내주하신 성령께서(롬 8:9; 고전 12:3) 그리스도인을 온전히 지배하며 인도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한편 '충만을 받으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플레루스데'(*)는 현재수동태 명령형이다. 이것은 다음의 내용을 함축한다. (1) '현재 시제'는 성령 충만이 일회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채워져야 함을 시사한다(Lincoln). (2)'수동태'는 성령 충만이 인위적(人爲的) 체험이 아니라(갈 3:2, 5) 성령에 의해서 체험됨을 시사한다(Wood). (3) '명령형'은 성령 충만이 제한적인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것임을 시사한다(Woo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