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智慧), 명철(明哲), 지식(知識)의 차이 / 성경의 중요 용어 정리(고르반) (교만, 겸손)

지혜(智慧), 명철(明哲), 지식(知識)의 차이

- 지식은 아는 능력(정보)
- 지혜는 행하는 능력(문제 해결하는 힘)
- 명철은 분별하는 능력(진리와 거짓을 분별)

성령충만한 사람의 특징(11-22-2022, 추수감사절. 출애굽기 31장 브살렐과 오홀리압)  참조

    지혜(知慧) :
발명과 창조의 능력
                     - 행하는 능력

    총명(聰明) :
사물을 정확히 파악하는 능력
                    - 분별하는 능력(명철)

    지식(知識) :
경험을 구체적으로 적용하는 능력
                      - 아는 능력

    재조(才操) :
모든 능력을 종합적으로 발휘하는 기술


지식(비나)이란?
아는 능력

비나 / 
בִּינָה

스트롱번호 998
1. 이해,  2. 총명

발음 : 비나(bîynâh)
어원 : 99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지식(신 4:6), 총명(대상 22:12, 욥 34:16, 사 29:14), 명철(대하 2:12, 잠 2:3, 23:23), 지혜(욥 39:26, 잠 7:4, 23:4),
지각(사 27:11), 뜻(단 8:15)
구약 성경 : 37회 사용

잠언 2:3 / 지식을 불러 구하며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며.
                and if you call out for insight and cry aloud for understandin.

세상에서는 학문을 비롯하여 다양한 분야에서 아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을 말합니다.

지혜(호크마)란?
행하는 능력


호크마 / חָכְמָה

스트롱번호 2451

1. 숙련,  2. 지혜, 3. 다양한 학식
발음 : 호크마(chokmâh)
어원 : 244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지혜(출 28:3, 삼하 20:22), 슬기(출 35:26), 유능한 기술자(대상 28:21)
구약 성경 : 153회 사용

출애굽기 28:3 / 너는 무릇 마음에 지혜 있는 자 곧 내가 지혜로운 으로 채운 자들에게 말하여 아론의 옷을 지어 그를 거룩하게하여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라.
                         Tell all the skilled men to whom I have given wisdom in such matters that they are to make garments for Aaron, for his consecration, so he may serve me as priest.

인생의 경험이 많은 노인들은 어떤 어려운 문제를 만났을 때 자기의 경험에 비추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방법을 찾아내는 것을 말합니다.

지혜는 영적, 도덕적 능력을 모두 포함합니다.

명철(테부나)이란?
분별하는 능력


테부나 / תְּבוּנָה

스트롱번호  8394

1. 지식, 2. 욥기 32:11
발음 :테부나(tebûwnâh)
어원 : 99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총명(출 31:3, 왕상 4:29, 겔 28:4), 분별력(신 32:28), 명철(욥 12:12, 시 49:3, 잠 2:2), 지혜(욥 26:12, 시 136:5),
통달(사 40:14), 지각(옵 1:7). 능숙함(시 78:72, 호 13:2). [형] 명철한(잠 10:23, 20:5)
구약 성경 : 42회 사용

잠언 2:2 / 네 귀를 지혜에 기울이며 네 마음을 명철에 두며
                turning your ear to wisdom and applying your heart to understanding.

모양이 같은 쇠뭉치를 보고 어떤 사람은 그것이 납이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그것을 고철이라고 합니다.
정확한 구별을 위하여 자석을 사용하듯이 명철이란 사물을 보고 그 본질을 정확하게 분별하는 것을 말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이러한 용어를 설명하려고 다양한 방법을 시도하였다.
예를 들면,

첫째는 히브리어 원전에서(잠언 2:2~3)

“호크마”를 ‘지혜’,
“비나”를 ‘지식’,
“테부나”를 ‘명철’
이 단어들은 동사형 명사(동사에서 만들어진 명사)라고 보시고 동사의 뜻을 알면 명사의 의미가 풍성해질 것입니다.

“호크마”의 동사형은 “하캄”으로 지혜롭다, 지혜롭게 행동하다는 뜻
“비나”와 “테부나”는 “빈”이라는 동사에서 온 것으로 모양은 판이하나 히브리어에서 어미나 접두어를 붙여서 명사로 만든다고 보시면 이해가 쉬울 듯

동사 “빈”이란 의미는 ~사이를 식별(구별)하다는 의미로서 즉 구별하고 식별할 수 있으니  지식이나 이해 혹은 깨달음 등으로 될 수 있을 것이고 통찰력이 있어야 되는 문제이니 명철로 더 나아가 지혜로 해석이 가능해집니다.
 
“하캄”과 “빈”은 내용을 들여다보면 동의어에 가깝습니다.
우리말에선 식별과 지혜는 별개처럼 정의 되지만...
통상적으로 어떤 단어를 얘기할 때 ‘이것이다’라고 번역하지만 여러 뜻이 있고 심지어 우리말의 하나의 단어에서 여러 의미가 있듯이...  그래서 문맥 안에서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원전문맥으로 들어가 보면

[1절~2절] 아들아! 하고서 ‘임’(만약~ 한다면),
[3절] ‘키 임’(그래서 ‘만약~ 한다면),
[4절] ’임’(만약~ 한다면),
[5절] ‘아쯔’(then)로 귀결이 됩니다.

아들아! [1~4절]까지 만약~ 한다면, [5절]하나님을 제대로 알 수 있을 것이다.
5절을 사역하면 “여호와의 경외를 구별할(빈) 것이고 // 하나님의 지식을 찾을 것이다”
결국 역으로 말하면 1장의 내용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머리,시작)이어늘
(1:7) 이는 먼저 여호와 경외 곧 하나님 지식을 찾음으로 파생되는 모든 것 즉 지혜, 지식, 명철 등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을 보실 때 특히 시편이나 잠언 등에서 자세히 보시면 단어나 문장 두 개를 나란히 놓습니다.
반복 구절처럼 놓는데 그들의 특성입니다.
이렇게 하므로 뜻을 풍성히 하거나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는 두 개의 내용을  함축하는 것으로써 각자의 뜻으로 보는 게 아니라 서로 잡아주어 하나의 내용으로 보셔야 합니다.

[2절] 네 귀를 지혜에 기울이며 //  네 마음을 명철에 두며
[3절] 지식을 불러 구하며 //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며’
[5절] 여호와의 경외와 하나님의 지식도 나란히 놓였음을 볼 수 있고...
  그러므로 여기서 지혜와 지식과 명철은 위에 언급된 것처럼 개별적이나 서로 합하여 풍성과 강조를 더한 하나의 뜻으로 보아야 할 듯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지혜는 사건의 해결 능력

우리가 이 세상의 유혹이나 삶의 문제들 앞에서 넘어지지 않고 승리해 나갈 수 있는 지혜는 하나님 말씀으로부터 옵니다.

명철(insight or understanding)은  사물에 대한 통찰력과 이해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묵상할 때” 명철함이 스승보다 그리고 노인보다 더 뛰어나다고 말합니다(시 119: 99-100). 

스승은 세속적 지식을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세상 지식은 영적 지식과는 다릅니다.
아무리 세상의 박사 학위를 가진 자도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십자가의 구속과 복음에 대한 영적인 일을 이해할 수 없지만, 초등학교 밖에 안 나온 크리스천이라도 성령님께서 깨우치시면 복음의 깊은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노인은 이 세상의 갖가지 경험을 다 한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처세에 밝고 인생사는 법을 잘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을 사랑하고 묵상하는 사람은 공부를 많이 한 스승보다, 지혜와 명철이 뛰어났던 것은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창 41:39).
다니엘과 세 친구는 바벨론의 모든 자보다 모든 학문과 재주 뿐 아니라 지혜와 총명이 훨씬 뛰어났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외과 의사이며 "Think Big"(크게 생각하라)의 저자인 벤 카슨은 학창 시절부터 매일 잠언을 하루에 1장씩 읽었다고 합니다. 잠언을 읽으면 삶의 참된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는 “140억개의 뇌세포는 우리가 마주치는 모든 것을 수용한다”고 말하면서 어떤 것을 뇌에 입력하느냐가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저속적인 책들이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는 세상적인 대중매체를 입력하느냐,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뇌 속에 입력하느냐 하는 것은 어떤 인생을 사느냐를 좌우하는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많은 지식보다 또 어떤 능력보다 중요한 것은 지혜와 명철입니다. 이러한 지혜와 명철을 갖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마음속에 내면화해야 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지혜는 상황에 맞게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잠언 9:10)

-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The fear of the LORD is the beginning of wisdom, and knowledge of the Holy One is understanding.

지식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잠언 1:7)

-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The fear of the LORD is the beginning of knowledge, but fools despise wisdom and discipline.

명철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예레미야 9:24)

-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찌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에 행하는 자인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but let him who boasts boast about this: that he understands and knows me, that I am the LORD, who exercises kindness, justice and righteousness on earth, for in these I delight," declares the LORD.

1. 지혜(智慧)
히. 호크(chokma), 헬. 소피아(sophia), 영. 위즈덤(wisdom)

관찰, 경험, 반성에 의해 얻어지는, 적절한 생활에 대한 지식과 감정을 말한다.
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며(고전 2:6,7),
머릿속 지식이 아니라 행동으로 이어져야 하는 총체적 삶의 양식으로,
하나님에의 신앙과 복종을 지혜의 중심으로 생각했다(시 111:10; 잠 1:7,9:10).

 ①.  습득한 지식을 이용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②.  미래형(未來形)이다.
 ③. 명철로 주소를 삼으며 지식을 통하여 얻는다(잠 8:12)

 2. 명철(明哲)
히. 비나(beenah), 헬. 순네시스(sunesis), 영. 언더스텐딩(understanding)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예리한 분별력(욥 6:30,32:9),
어떤 주제를 예리하게 파악하고 이해하는 지적 능력(욥 6:24,15:9,18:2,23:5)
지혜에 이르는 길을 하나님께서 '깨달으신다'(욥 28:23)는 말을 이 단어로 표현하고 있다.

 ①. 지식과 지혜를 이용하여 사물의 성질을 분별하는 것이다.
 ②. 현재형(現在形)이다.
 ③. 거룩하신 자를 알고(잠 9:10), 악을 떠나는 것이다(욥 28;28)

* 예레미야 9:24, 여호와를 아는 것 

3. 지식(知識)
히. 다드(daath), 헬. 그론시스(gnosis), 영. 나리지(knowledge)  

사물에 관한 명확한 인식이나 판단.
어떤 사물에 관하여 알고 있는 것 또는 그 내용을 이르는 것.
인간의 심리적 3요소(지정의, 知情意) 중 하나, 지식 없이는 인간답게 살아갈 수 없다.

 ①. 사물을 있는 그대로만 파악하여 습득하는 것이다.
 ②. 과거형(過去形)이다.
 ③. 절제가 없으면(벧후 1:6), 사람을 교만하게 한다(고전 8;1)

 '지혜'와 '명철'은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었으며, '명철'은 '지혜'의 대구(對句, 비슷한 어조나 어세를 가진 것으로 짝을 맞춘 글귀)로 사용되고 있다. (잠언 4:5,7, 7:4, 9:10, 16:16; 욥 28:12, 20, 28; 1:20; 사 11:2).

 ①.  모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다(잠 1:7,9:10; 시 111:10).
 ②. 모두 하늘로서 내리시는 선물이다(전 2:26).
 ③. 모두 긴밀한 관계에 있다(잠 18:15, 4:7).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호크마” - ‘지혜’
“비나” - ‘지식’
“테부나” - ‘명철’

이 단어들은 동사형 명사(동사에서 만들어진 명사)라고 보시고 동사의 뜻을 알면 명사의 의미가 풍성해질 것입니다.

호크마”의 동사형은 “하캄”으로 지혜롭다, 지혜롭게 행동하다
비나”와 “테부나”는 “”이라는 동사에서 온 것
모양은 판이하나 히브리어에서 어미나 접두어를 붙여서 명사로 만든다고 보시면 이해가 쉬울 듯합니다.

동사 “”이란 의미는 ~사이를 식별(구별)하다는 의미로서 즉 구별하고 식별할 수 있으니  지식이나 이해 혹은 깨달음 등으로 될 수 있을 것이고 통찰력이 있어야 되는 문제이니 명철로 더 나아가 지혜로 해석이 가능해집니다. 

“하캄”과 “빈”은 내용을 들여다보면 동의어에 가깝습니다.

우리말에선 식별과 지혜는 별개처럼 정의 되지만...
통상적으로 어떤 단어를 얘기할 때 ‘이것이다’라고 번역하지만 여러 뜻이 있고 심지어 우리말의 하나의 단어에서 여러 의미가 있듯이...  그래서 문맥 안에서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원전문맥으로 들어가 보면

[1절~2절] 아들아!!!하고서 ‘임’(만약~ 한다면),
[3절]에서 ‘키 임’(그래서 ‘만약~ 한다면),
[4절]에 ’임’(만약~ 한다면).
[5절] ‘아쯔’(then)로 귀결이 됩니다.

아들아! [1~4절]까지 만약~ 한다면,
[5절]하나님을 제대로 알 수 있을 것이다.

5절을 사역하면 “여호와의 경외를 구별할(빈) 것이고// 하나님의 지식을 찾을 것이다”

결국 역으로 말하면 1장의 내용으로 돌아가는 것일테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머리,시작)이어늘~~~(1:7)
이는 먼저 여호와경외 곧 하나님지식을 찾음으로 파생되는 모든 것 즉 지혜,지식,명철등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보실 때 특히 시편이나 잠언 등에서 자세히 보시면 단어나 문장 두 개를 나란히 놓습니다.

반복 구절처럼 놓는데 그들의 특성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뜻을 풍성히 하거나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는 두 개의 내용을  함축하는 것으로써 각자의 뜻으로 보는 게 아니라 서로 잡아주어 하나의 내용으로 보셔야 합니다.

[2절]을 보시면 ‘네 귀를 지혜에 기울이며// 네 마음을 명철에 두며
[3절]지식을 불러 구하며//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며’

[5절]도 보시면 여호와의 경외와 하나님의 지식도 나란히 놓였음을 볼 수 있고...
 그러므로 여기서 지혜와 지식과 명철은 위에 언급된 것처럼 개별적이나 서로 합하여 풍성과 강조를 더한 하나의 뜻으로 보아야 하겠지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주님을 믿고 전도하라.”
“신구약 성서 가운데 여러 말씀을 지키는 자가 어찌 나의 유언은 지키지 않겠는가.”
“이잣돈 욕심 말라. 금전은 1원이라도 저금하라.”
“교육을 양성하는 일만 경영하라.”

1930년 경남 함안 조씨의 한 가문이 작성한 ‘교육조합(敎育組合)’ 문서에 담긴 내용이다.
교육조합은 함안 군북면 사촌리에 거주하던 조좌규(1854~1936)씨가 다섯 아들과 함께 결성한 조합이다.
집안의 경제적 부침과 상관없이 문중의 인재를 끝까지 교육하기 위해 다섯 섬 두 마지기의 땅을 내놓아 여기서 나오는 산출로 후손을 교육하라는 뜻이 담겨 있다.
핵심은 기독교 인재 양성이다.

함안 조씨는 영남의 명문가다.
효성그룹 조홍제 회장이 이 문중의 일가이고 인근 지수초등학교는 삼성 이병철, LG 구인회, 효성 조 회장 등을 1회 졸업생으로 배출한 곳으로 유명하다. 조용기 여의도순복음교회 목사 역시 함안 조씨다.

구한말 외세에 의해 국권이 흔들리던 상황에서 조동규 조좌규 형제는 기독교를 받아들인다. 봉건적인 유교 전통에서 벗어난 일이라고 문중에서는 족보를 퇴출하는 등의 아픔을 겪었지만, 이들은 굳건하게 믿음을 이어갔다.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 소속 함안 사촌교회는 1897년 설립돼 125년 역사를 이어왔는데 호주 선교사 앤드루 애덤슨(손안로)이 조동규씨에게 전도하면서 설립됐다.

당시 조동규씨는 애덤슨 선교사에게 “우리가 개종하면 조선이 독립될 수 있는지” 물었고, 애덤슨 선교사는 “조선 사람 100만명이 예수를 믿으면 독립이 가능할 것이오”라고 답했다. 조씨는 즉각 조카 조용관과 함께 논 1980㎡를 헌납해 사촌리에 최초로 교회당을 세웠다. 조동규의 아들 조용석은 호러스 G 언더우드 선교사의 서울 경신학교에 다니며 3·1운동의 주역으로 나섰다가 투옥됐고, 훗날 일본 와세다대를 졸업했다. 문중에서 배출한 대표 목회자로는 대한기독교서회 총무(지금의 사장 직위)를 네 번 연임한 조선출 목사가 있다.

1930년 작성된 교육조합 서문.

교육조합 문서는 1부 서문, 2부 규칙, 3부 유서로 작성돼 있다. 문중을 일으키기 위해 영특한 자손을 교육하는 기금을 내고 이를 운용하는 규칙과 더불어 신앙을 지키라는 특별한 유언을 남겼다. 허경진 전 연세대 국문과 교수가 한문 번역을 도왔다. 허 교수는 “동서고금 유언은 생전엔 효력이 없고 죽은 뒤에 효력이 있다는 히브리서 9장 16~17절 말씀으로 유언이 시작된다”면서 “전도를 당부하고 금전 대부를 금지하며 정의와 가규(家規)를 강조하는 등 기독교 신앙과 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20일 오후엔 사촌저수지가 내려다보이는 고갯길 문중의 산에서 교육조합비 제막식이 열렸다. 교육조합 문서를 한글로 번역해 후손들이 쉽게 읽도록 돕는 비석이 세워졌다. 이어 박병연 사촌교회 목사의 인도로 기념 예배가 드려졌다. 문중을 대표해 조종석(78) 안수집사가 인사말을 했다.

1930년 작성된 교육조합 규칙.

“당시 문중의 어른들은 독립된 나라를 되찾는 길이 새 세계의 조류에 합류하는 것이라 확신하고 교육조합을 창설해 ‘주 안에서 교육에 힘을 다하라’고 하셨습니다. 저희는 이런 뜻을 받들어 가풍으로 삼고자 이 기념비를 봉헌합니다.”

사촌교회 앞마당에는 1928년 조동규씨의 교회와 관련한 헌신을 기록한 비석도 남아 있다. 비석의 글은 3·1운동을 배후에서 주도하고 투옥 후 당시 마산 문창교회에서 시무하던 함태영 목사가 썼다.
법관에서 독립운동가로, 이후 목사에서 정치가로 계속 거듭난 함 목사는 서울 남대문교회, 연동교회와 인연이 있고 한국신학대 학장을 역임하다 이승만정부에서 부통령까지 지냈다.

사촌교회 박 목사는 “함안 출신 산돌 손양원 기념관과 세브란스 출신 의사이자 독립운동가인 이태석 기념관, 그리고 사촌교회와 교육조합 비석까지 함께 기독교 역사 순례지로 찾아와 달라”고 당부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고르반


κορβᾶν 스트롱번호 2878

1. 고르반.  2. 예물. 3. 막 7:11.
발음 [ kŏrban ]

어원 / 히브리어 7133에서 유래

관련 성경 

성전고(마 27:6), 고르반(막 7:11).

* 7133 קָרְבָּן 스트롱번호7133

1. 제단.  2. 희생 제물.  3. 레 2:1
발음 [ qorbân ]
어원 / 7126에서 유래, 연계형 :קָרְבַּן
구약 성경 / 80회 사용

뜻풀이부

  • 1.  명사, 남성 제단, 희생 제물, 레 2:1, 4,12,13, 7:13, 9:7, 15.
  • 관련 성경

    ☞예물(레 1:2, 27:9, 민 5:15), 제물(레 4:32, 겔 20:28), 희생(겔 40:43).
    [동] 드리다(레 2:12, 느 10:34).

* 7126. 카라브 [ qârab ] קָרַב 스트롱번호7126

1. 접근하다.  2. 시 69:19. 3.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감
발음 [ qârab ]
구약 성경 / 291회 사용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세례(물 세례와 성령 세례)

세례요한이 베푼 세례의 의미는 무엇인가?


요한의 물 세례와 성령 세례

세례요한이 잉태될 때부터 그의 역할은 정해져 있었다.
그는 “주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다.
그는 항상 “내 뒤에 오실 이가 나보다 더 위대하다”고 하면서 백성들이 예수님을 맞을 수 있도록 준비시켰다(막 1장).
그리고 스스로를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라고 하면서, “회개하라”고 외쳤다(막 1:4).
이것이 바로 세례요한이 맡은 사명이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선행되어야 할 것이 “회개”이다.
죄인임을 자각하고 생각과 마음을 깨끗하게 했을 때에 비로소 예수님을 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례요한이 베푼 세례는 예수님을 영접하기 위한 “회개”의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세례와 어떻게 비교할 수 있을까?

오늘날의 세례에서 이전의 죄(원죄 포함)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고백하는 것은, 세례요한이 베푼 세례와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 즉, 예수님을 육으로 맞이할 때(세례요한의 때)나 영으로 맞이할 때(예수님 부활 이후 오늘날)나,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진정한 “회개”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점은 동일하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히 다른 점이 있다.
세례요한의 세례를 통해서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또는 하나님과 동일”하다는 것만 믿고 고백하면 되었으나,
오늘날의 세례를 통해서는, 여기에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는다는 고백이 더해진다.

세례요한이 물로 세례를 줄 때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있기 전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이땅에 오셨다는 것만을 믿으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은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목격한 이후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의미하는 바(복음)를 믿고 모든 사람 앞에서 시인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은 “물과 성령”으로 세례 받아야 한다.
즉, 요한의 물세례(회개)와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성령세례(복음)가 모두 함께 이루어져야 진정한 세례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는 지금까지 성경을 통하여 성령 하나님이 인격이시라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하나님의 성품을 지닌 성령님의 신성에 대하여 살펴보겠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성품을 지니셨고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들을 하신다.

성경에서는 분명하게 성령님이 하나님이라고 증거 한다. 성령님은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과 늘 연관이 있다. 이것이 삼위일체의 신비이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성품을 갖고 계신다.



  성령님의 신성에 관하여 우선 살펴볼 것은 성령님은 하나님의 성품을 갖고 계시다는 사실이다. 성령님은 영원하시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을 통하여 흠 없는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죽은 행실에서 너희 양심을 정결케 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뇨?』(히9:14)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는 것은 영원하신 성령님을 받아들임으로만이 가능하다.



성령님은 무소부재하시다.



  성령님은 무소부재하시다. 『내가 주의 영으로부터 벗어나 어디로 가며, 주의 임재에서 벗어나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로 올라갈지라도 주께서는 거기 계시며, 내가 지옥에 잠자리를 마련한다 하여도, 보소서, 주께서는 거기 계시나이다』(시139:7-8)』 다윗은 자신이 지옥에 떨어지더라도 그곳에도 주의 영이 계셔서 진노와 심판으로 권능을 나타내심을 믿었다. 성령님은 무소부재하시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성품을 갖고 계신다.



성령님은 전능하시다



  성령님은 전능하시다. 누가복음 1:35에서 성령님은 능력으로 마리아에게 임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케 하셨다. 『하나님의 영은 물들의 표면에서 거니시더라』(창1:2). 『그는 그의 영(하나님의 영)으로 하늘들을 단장하셨고...』(욥26:13). 우주, 성단, 은하, 이 모든 것은 성령님에 의해 창조되었다. 이는 하나님의 성품을 지닌 누군가의 작품이다. 결코 흔히 말하는 조물주나 잡신이나 마귀에 의해서가 아니다. 이 점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하늘과 땅을 짓지 아니한 신들은 땅과 이 하늘들 아래로부터 망하리라...』(렘10:11).



성령님은 모든 것을 아신다



  성령님은 모든 것을 아신다. 『...이는 성령께서는 모든 것 심지어 하나님의 깊은 것들까지도 통찰하시기 때문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이 아니면 아무도 모르느니라』(고전 2:10-11). 영원하신 하나님이 무소부재하시고 전지전능하신 것처럼 성령님도 그러하시다. 『그러나 위로자이신 성령을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시리니,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들을 가르치시며...』(요 14:26). 성경에서 말하는 삼위일체에 대한 교리를 통해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며, 영원하시고 모든 것을 아실뿐 아니라 거룩하시다. 성령님도 마찬가지다. ‘성령’, 즉 ‘하나님의 거룩한 영’에서 ‘거룩한’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성품과 관계가 있다. 신약에서 계속 언급되고 있는 거룩한 영은 거룩하지 않은 영들과는 구별된다. 불결한 사람들의 영과는 다른 것이다.



성령님은 진리이시다



  성령님은 진리이시다. 『...성령은 진리이시기 때문이라』(요일5:6). 『주께서는 또 주의 선하신 영을 주사 그들을 가르치시고...』(느 9:20). 성령님은 하나님의 성품들을 갖고 계신다. 이러한 성품들은 아버지 하나님께 기인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으로서 지상에서 사시는 동안은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지 않으셨으며, 무소부재하지 않으셨다. 성령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성품을 갖고 계신다. ㅇ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으로서 사셨을 때는 하나님의 모든 성품을 갖고 계시지 않았다. 삼위일체의 한 분으로서 예수님은 분명 하나님이셨지만 하나님의 신성을 나타내지 않으실 때, 인간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는 고통을 당하셨고, 피를 흘리셨으며, 굶주리셨고, 갈증을 느끼셨다.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과 똑같으셨던 것이다.



성령님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들을 하신다.



  성령님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들을 하신다. 성령님께서는 창조에 참여하셨고 구원을 이루시며 생명을 주시고 거듭나게 하시며 예언하게 하시고 의와 다가올 심판에 대하여 사람들을 책망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세번째 인격이신 분이 하시는 일이다. 창조에 관하여는 욥기 33:4에서 『하나님의 영이 나를 지으셨고...』라고 말씀하신다. 또 시편 104:30에서 다윗은 『주께서 주의 영을 보내시어 그들이 창조되었으니...』라고 말한다. 구원에 관한 성령님의 일은 고린도전서 6:11에서 『...너희가 주 예수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영으로 씻음을 받았고, 거룩하게 되었으며 의롭게 되었느니라.』고 하신다. 성령님께서는 믿는 성도들을 인치신다. 『하나님의 거룩한 영을 슬프게 하지 말라. 너희가 그로 인해 구속의 날까지 인침을 받았느니라』(엡4:30). 『그 분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분 안에서 또한 믿었으니 너희는 약속의 성령으로 인침을 받은 것이니라』(엡1:13).



생명을 주시는 것만으로도 성령님은 하나님이시다



  생명을 주시는 것만으로도 성령님은 하나님이시다. 왜냐하면 생명을 주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전혀 무익하니라...』(요 6:63). 성령님은 물론 새로운 출생을 관장하신다. 『육신으로 난 것은 육이요, 또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요 3:6). 육신으로 태어난 후 성령님께서 거듭나게 하시지 않는다면 결코 거듭날 수 없다. 베드로후서 1:21에 보면 『예언은 예전에 사람의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이 성령으로 감동을 받아 말한 것이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성령님은 영감을 주시고 예언을 하게 할 때 적극적으로 일하셨다. 성령님은 오늘날 사람들을 의에 대하여 죄에 대하여 다가올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신다. 요한복음 16:8-11을 읽어보면 오늘날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한 사람들에게 찔림을 주어, 의로운 사람은 오직 한 사람이며 그 분이 그리스도임을 알려주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셔서 아버지께로 가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상을 심판하실 것에 대해서도 찔림을 주신다. (마귀는 이미 심판 받았고, 이 마귀는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한 자들의 아비이며 그들의 신이기 때문이다.)



성령님께서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하시는 일



  오늘날 성령님께서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 세 가지 일을 하신다. 첫째로 완전한 사람을 거절한 죄에 대하여 찔림을 주신다. 이 사실을 말하면 사람들은 즉시 다른 종교나 그 종교지도자에 대하여 들먹거린다. 이에 관하여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은 그 사람들에게 이 세상에 존재해 왔던 그 어떤 종교지도자도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지 못했음을 깨닫게 하신다. 이것이 바로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어떤 이들은 이 같은 성경적인 설교를 들을 때 편협하고 좁은 소견으로 화를 낼 수도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성령께서는 죽은 자들을 따르는 사람들의 불경스럽고, 추하고, 부패하고, 저주스러운 죄에 대하여 찔림을 주신다는 것이다.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은 유일하게 한 사람만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여 아버지 하나님께 갔다는 사실을 알려주시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분만이 의로우시고 모든 사람들은 불의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신다. 만일 여러분이 아직도 부처나 모하메드 같은 무덤에 있는 사람들을 따르고 있다면 여러분은 의롭지 못한 것이다. 이것은 어느 개인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세 번째 인격이신 성령님께서 깨우쳐 주시는 일이다(요16:8-11). 끝으로 성령님은 죄인들이 심판받을 것과 그들을 위해 준비된 지옥에 대하여 찔림을 주신다. 왜냐하면 그들의 아비 마귀는 이미 심판받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요한복음 8:44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나와서 너희 아비의 정욕을 행하고자 하는 도다.』 마귀는 이 세상의 신이라고 불리며(고후 4:4) 이 세상의 모든 권세가 그에게 주어졌다(마 4:1-8). 그 신을 경배하고 믿는 자들은 마귀 숭배자들이며 이들은 마귀를 하나님 아버지로 간주한다. 이들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는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나서 너희 아비의 정욕을 행하고자 하는 도다.』 『너희 뱀들아, 독사들의 세대야, 어떻게 너희가 지옥의 저주에서 피할 수 있겠느냐?』(마23:33)라고 말씀하셨다. 어떤 설교자가 강단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없으면 지옥으로 간다고 설교할 때, 그리고 길거리 모퉁이에 서서 사람들에게 전도지를 나눠주며 마호메트나 부처와 같은 이 세상의 모든 종교 지도자들은 사람들을 구원할 수 없다고 말할 때, 그렇게 말하는 그 사람은 바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분개한다면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대적하는 것이고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대적하신다. 이것은 어떤 개인의 의견이 아니라 명확한 성경말씀이다(요3:36).



성령님은 “주”이시다.



  성경은 성령님에 대해 여러 곳에서 강조한다. 이사야 6:8에 보면 『또 내가 주의 음성을 들은즉 말씀하시기를 ...』라고 기록되었는데 바울은 이 말씀을 사도행전 28:25에서 『성령께서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우리 조상에게 잘 말씀하셨도다...』라고 인용하여 ‘주’와 성령님을 동일시하였다. 또 사도행전에서 아가보가 예언할 때 그는 구약성경에서 200번 이상 사용된 표현인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이란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성령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이라고 말하였다(행21:11).



성령님은 하나님이시다



  성령님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세 번째 인격이시다. 사도행전 5:3-5에서 성령님은 하나님이라고 불려진다. 베드로는 아나니아와 삽피라에게 『...어찌하여 사탄이 너의 마음을 가득채워 성령께 거짓말하게 하며...』라고 말하고 즉시 『...네가 사람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하였느니라.』고 하였다. 이 사실은 은사주의자들을 대단히 혼란스럽게 만든다. 은사주의자들은 성령님을, 구원받은 후 하나님께서 여분으로 주시는 기분, 느낌, 선물 등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성령님과 무관한 상태에 있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아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이시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은사주의자들이 말하는 영은 다른 신으로부터 오는 거짓 영이라는 것이다. 그 영은 성경에서 말하는 성령이 결코 아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성령은 하나님의 세 번째 인격이시며 성경은 이 사실을 계속하여, 계속하여 반복해서 말씀하고 있다.

  마태복음 28:19의 삼위일체에 대해 살펴보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단수)으로 침례를 주며』라고 기록되었다. 예수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는 것이 아니다. 성령님의 이름은 “예수”가 아니다. 성령님의 이름은 진리의 영, 주의 영, 성령, 위로자이다. “예수”는 아버지의 이름이 아니다. 아버지의 이름은 전능하신 하나님, 주, 주 하나님, 여호와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다. 성경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라고 하셨다. 성경을 뒤죽박죽 섞어놓은 사람들은 이 이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줄 안다. 어떤 혼란도 이보다 더 엉망일 수는 없다. 아버지의 이름은 “주”이다. 아들의 이름도 “주”이며 성령님의 이름도 “주”이다(행28:25 -27). 『이제 그 영은 주시니...』(고후3:17) 하나님 말씀을 믿고 하나님 말씀을 깨달아 믿음에 뿌리내린 성경대로 믿는 거듭난 그리스도인과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또 어디에 있는지 전혀 모르는 은사주의자와의 차이는 이처럼 큰 것이다.

  아버지 하나님은 한 인격이시며 고유한 성품이 있고 고유의 위치와 이름이 있어 그 하시는 고유 역할이 있다. 아들 하나님은 다른 인격이시며 특별한 이름, 위치, 성품, 역할이 있다. 성령님도 또 다른 인격이시며 고유의 이름, 위치, 성품, 역할이 있다. 그렇지만 이 세 인격체는 한 하나님이시며 그 하나님의 이름은 “주”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제가 너희 모두와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고후13:14). 요한복음 14:16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또 내가(아들 하나님) 아버지께(아버지 하나님) 기도하겠고 그 분께서 다른 위로자를(성령 하나님) 너희에게 주시리니』 어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을 때 어떤 영을 받은 것이며 그 후 어느 정도 성장했을 때 성령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이는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것이다. 성령님은 주이시다. 성령님을 영접하지 않고서는 주를 영접할 수 없고 주를 영접하지 않고서는 성령님을 결코 영접할 수 없다. 만일 주를 영접한 후에 또 한 번 ‘성령’을 받았다면 그 사람은 불결한 영을 받은 것이다. 이것이 바울이 고린도후서 11:1-6에서 말한 “다른 영”이다. 다시 말하자면 성령님은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과는 구별되는 분이시다. 성령님을 아버지 하나님의 정신 혹은 아들 하나님의 정신 정도로 생각하고 두 분으로부터 독립된 특별한 인격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은 잘못이다. 누가복음 3:21-22을 보면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실 때 명백히 세 인격이 함께 계셨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네 안에서 내가 기뻐하노라.』고 말씀하셨고, 이때 “아들 하나님”은 침례인 요한에 의해 요단 강에서 침례를 받으셨고 “성령 하나님”께서는 비둘기 같은 형태로 내려오셨다. 이 세 분은 각각 독립된 인격들이시며 시간에 관계없이 변함이 없으시다.

  요한복음 14:16에서 아들 하나님께서 기도하시고 아버지 하나님께서 성도들과 함께 거할 성령님을 보내신다. 성령님은 성도들과 거하기 위해 오신다. 성령님께서 오실 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게 된다. “그 분 안에는 신격의 모든 충만함이 몸의 형태로 거하시나니”(골2:9) 하나님 한 분 안에는 세 분 인격이 계시고 세 분 인격 안에는 한 분 하나님이 계신다. 그 가운데 계신 분이 나를 위해 죽으셨다. 사도행전 2:33에서 아들 하나님이 아버지 하나님의 오른손으로 높임을 받는 것이지 성령님이 높임을 받는 것이 아니다. 보좌에 계시는 분은 아버지 하나님이지 성령님이 아니다. 그리고 아들 하나님이 성령님을 받아 교회에게 주신 것이지 아들 하나님이 교회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성령 하나님은 세 분의 독립된 인격들이시고 각각 고유의 성품들이 있고 서로 관계를 맺으시고 각자를 인식하시며 독특한 하나님의 성품들을 나누시지만 하시는 일은 다르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성령님의 신성이다. 성령님께서는 인격이시고, 삼위의 한 분이시며, 독립된 인격으로 완전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성경구절은 약 100구절이 넘는다. 성령님은 고유의 일을 하시고 고유의 성품을 지니시며 고유의 위치가 있으시다. 과연 그럴까라고 의문이 생긴다면 성경을 펴서 읽어보라.

  『그러나 자연인은 하나님의 영의 일들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일들이 그 사람에게는 어리석게 여겨지기 때문이요, 또 알 수도 없나니 이는 그 일들이 영적으로만이 분별되기 때문이니라』(고전2:14). 어떻게 하나님이 스스로 자신을 세 부분으로 나눠서 동시에 세 가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는가라고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은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아무리 진지하게 신학을 공부하여 하나님 말씀을 통해 향상된 진리를 발견하려 해도, 절대적인 성경적 진리, 즉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을 통해 보여주시는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 한 분 하나님이고, 한 분 주님이라는 사실과 그 하나님께서 자신을 세 가지 모습, 즉 인간으로서의 아들 하나님, 영으로서의 성령 하나님, 혼으로서의 아버지 하나님으로 나타내신다는 진리를 해결하지 못하고서는 결코 그 어떤 하나님의 향상된 진리의 계시를 발견할 수 없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몸과 혼과 영이 있다. 사람이 구원받을 때 “영”은 거듭나게 되고 “몸”에 밀착되었던 “혼”은 성령님의 능력으로 “몸”으로부터 떨어지게 된다. 그리고 성령님께서 구원받은 그 사람을 구속의 날까지 인치신다.




주의(-ism)를 주장하는 것은 편짜기를 말한다. 편짜기란 사람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서나 나타나는 현상이다. 사회주의, 공산주의, 민주주의, 진화론, 불가지론, 무신론, 실존주의, 허무주의, 현대주의, 신정통주의, 자유주의, 시한부 종말론 등... 이런 ‘주의’나 ‘론’에 싫증난 사람들은 ‘파’로 나뉜다. 오순절파, 구원파... 여기서 다시 무슨무슨 ‘운동’이 등장한다. 방언운동, 신유운동, 21세기 운동, 성시화 운동, 성령화 운동 등등... 정당이 정치적 이념을 같이한 사람들이 모여 만든 집단이듯이 무슨 론자, 주의자, 운동가 등도 파를 만드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면 다 될 것 같은 신학에도 구구한 ...주의가 있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한 마디로 성경을 잘못 해석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성경을 잘못 해석하면 거기에 분명히 오류가 있음에도, 그것을 추종하는 세력이 많으면 정당화가 되고, 추종하는 사람들의 수가 많게 되면 이단 교리라도 우세한 것같이 보인다. 경제란 인간의 삶을 운영하는 제도인데 여기에도 불의가 진리를 압도하고 있다. 수단이나 방법에 관계없이 매출고가 늘면(돈만 많이 벌면) 상장기업이 되고 고용을 증대하게 되어, 정당한 방법을 통해 이윤을 적게 남긴 기업이 결국 무시당하게 된다. 그래서 그레샴의 법칙은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反사필귀정을 내놓아 법칙으로 삼고 있다.

  이런 편짜기에 참여한 사람들 중에 칼빈주의자들이 있다. 무조건, 죽어도 칼빈주의를 외치는 그들에게, 막상 ‘칼빈주의가 무엇이냐?’고 질문해 보면 잘 모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이 만일 칼빈주의를 알고 있다면 칼빈주의만 채택하지 극단적 칼빈주의까지 교리로 채택해야 할 이유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칼빈주의자들이란 한번 구원받은 사람은 그 구원을 영원히 잃어버리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이것은 성경적 가르침이다. “누가 그걸 모르겠는가?” 그러나 이렇게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천주교, 감리교, 오순절파, 성결교, 여호와의 증인 등이다. 이들이 말하는 것은, 구원은 받았어도 끝까지 견디지 않으면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을 가리켜 소위 ‘알미니안주의자들’이라 하는데 이들이 잘못 해석한 성경구절이 마태복음 24:13과 히브리서 6:4-6 등이다. 이들의 문제점은 이 구절을 교회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이기에 어떤 구절이든지 무조건 믿고 자신에게 적용하려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책의 제목을 보라. 왜 히브리서인가? 구원받은 히브리인들을 대상으로 기록된 책이기 때문이다. 환란 때의 히브리인들은 교회시대처럼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휴거되어 지상에 없기에 그들이 속할 “그리스도의 몸”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끝까지 견디어 짐승의 표를 받지 말아야 한다. 끝까지 견디지 못하고 그 표를 받으면 구원을 잃어버리게 된다. 대환란은 “야곱의 고난”이며, 이스라엘의 환란을 말한다. 이는 성경이 대환란을 설명할 때 이방인(그리스도인을 포함)을 대상으로 기록되지 않았음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요한 웨슬리는 기도의 사람이요, 유능한 설교자요, 구령자였으나 이 부분을 알지 못했기에 구원받은 사람이 끝까지 견뎌야 한다고 믿었다. 루터는 위대한 개혁가였지만 아기들에게 물뿌리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칼빈은 삼위일체에 대해 자기와 의견이 같지 않다고 해서 자기 동료 세르베투스를 화형 시킨 개혁가이다. 위대한 사람들도 맹점이 있기 마련이다. 인간적 관점에서는 안보일지 몰라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투영시키면 드러나게 된다. 사람들의 믿음도 마찬가지이다. 말씀으로 투영시키면 얼마만큼 굽어 있는지 다 드러나게 되어 있다. 한 가지 오해하지 말 것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 믿음 외에 행위에 의존하는 것은 잘못이지만 구원받고 난 후 그리스도인의 헌신과 봉사를 열성적으로 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다. 오히려 바람직스럽고 권장해야 할 일이다. 이런 열성 있는 성도들이 없다면 지역교회가 활성화될 수가 없을 것이며, 성도가 그리스도의 심판석에 섰을 때 받을 상급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 이들은 모두가 교단(편짜기)에 가입해 있다는 사실이다. 성경적 지역교회는 독립적이요, 자치적인 교회이다. 교단(denomination)이란 성경에 없는 조직이다. 같은 교리를 실행하는 교회들이 모여 있는 교단이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그런 신성한 목표와 이상이라면 나쁠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교단에는 교단 신학교가 있고, 거기서 가르친 교육은 성경이 우선이 아니라 교단 교리가 우선이 되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신학과 교단 교리는 다른 것이다. “같은 것이 아닌 것은 다른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한번 받은 구원을 절대로 잃어버리지 않는다. 굳이 편짜기에 들라면 칼빈주의자가 될 것이다. 알미니안주의 앞에 설 때는 칼빈주의자이나, 극단적 칼빈주의자는 아니다.

  그 이유는 첫째, 사람은 완전히 타락해서 무력하게 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할 능력도 의지도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참으로 인간은 죄를 회개할 기력마저도 없이 하나님의 처분만을 바라봐야 하는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는가? 그것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 많은 인간을 화해시키려고 함이 아니었는가? 인간이 완전히 타락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도 없게 되었다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가?

  둘째, 구원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예지 예정에 의해서 미리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보내시어 인간 대속의 속죄양으로 삼으시고 누구든지 그 분을 믿으면 멸망당하지 않고 영생을 받는다고 하셨기 때문이다(요3:16). 히틀러도 스탈린도 모택동도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지만, 그들이 죽기 직전에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더라면 구원을 받을 수 있었다. 믿을 수 있는 사람과 믿을 수 없는 사람이 미리 정해졌다면, 이들이 왜 선교하고 전도하는지 그 의도를 알 수가 없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어느 특정한 사람에게만 효력 있다면 하나님은 죄인들의 하나님은 되실 수 없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에게 저주를 이미 내려놓으시고 말로만 자기를 믿으라고 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보혈이 제한적이라면 성경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런 성경, 그런 신학, 그런 교리도 있는가?

  넷째, 하나님의 뜻과는 관계없이 어떤 형태로든지 성취한 것에 하나님의 은혜라는 상표를 붙여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의도와 능력을 무시하고 인간의 자의적 의지를 말살시키려는 행위인 것이다. 예를 들어 이웃집 사람을 교회로 인도하는 것은 나무랄 데 없는 일이다. 누구나 교회에 가서 구원의 복음을 듣고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의적 욕구도 없이 친구의 강권에 못 이겨 교회에 나간 그 사람의 경배가 하나님께 무슨 의미가 있으며 또 열납 되는 경배가 될 수 있는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가? 하나님을 모르는 일본 사람들이 이룩한 산업적 성취가 하나님의 은혜겠는가? 만일 그런 사람들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다고 생각할지라도, 기억해야 할 것은 그들이 죽자마자 지옥에 가게 된다는 사실이다. 은혜로 감싸고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지옥에 보내게 된다. 지옥이 어떤 곳인지 아는가? 한눈을 팔고 가다가 맨홀에 빠져 다리가 부러졌으면 그 사람이 부주의해서 생긴 사고이지, 하나님의 은혜로 다리가 부러져 병석에 눕게 되었는가? 그런 신앙도 있는가? 인간의 실수로 야기된 사고도 있고 단순한 사고도 있다. 천재지변으로 인한 사고도 있다. 인간은 한치 앞도 내다 볼 수 있는 능력이 없기에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무엇이 아쉬워서 피조물들의 손으로 이룩한 일들에 하나님의 이름을 붙여 달라하시겠는가? 범사에 감사는 있을 수 있어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는 아니다. 그리스도인도 병들 수 있고, 실패할 수 있고, 죽을 수도 있다. 예수님의 사도들은 가장 잔악한 방법으로 죽임을 당하였는데,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 밖에 있었기에 그렇게 되었는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믿고 그 분의 가르침을 준행하는 사람들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칼빈도 들어있고, 루터도 들어있고, 쯔빙글리도 들어있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특정한 인물을 빼내어 편짜기를 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굳이 어떤 주의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통념이라면 칼빈주의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극단적 칼빈주의자는 아니며, 될 수도 없다.




나를 소성케 하소서(시편 119:25, 37, 40, 107, 154, 156,159)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Preserve my life according to your word.

시편 119:25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시편 119편 가운데 4번째 히브리어 알파벳으로 시작되는, 25절부터 32절까지 4번째 단락을 공부하려고 합니다.
제가 3번째 알파벳을 뛰어 넘은 것을 표시를 잘 해 놓으시면, 제가 언젠가 하려고 합니다.
119편은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대로, 22개의 단락으로, 8절씩 아름답게 나누어져 있습니다.

오늘은 '달레트'로 시작하는 4번째 단락입니다.


옛날 어느 숲 속에 행복한 고추잠자리가 있었습니다. 늘 하늘을 높이 날며 부족한 것 없이 아주 행복하게 살고 있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이 고추잠자리에게 불행이 닥쳐왔습니다. 그의 사랑하는 어머니와 형제, 가족 모두가 날아다니는 새에게 잡혀 먹혔어요. 불행이 다가온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고추잠자리는 너무너무 슬펐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마음이 아파서 더 이상 살아갈 수가 없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이제 죽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숲 속의 요정을 찾아가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요정님, 저는 죽어야겠습니다" 요정이 묻습니다. "왜 죽어야 되니?" 고추잠자리는 자기의 일을 설명했습니다. "내가 이런 상황 가운데서 마음이 아파 도저히 더 살 수 없습니다. 어머니와 형제를 하루아침에 다 잃었습니다. 그런 제가 어떻게 살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때 요정이 얘기를 합니다. "네가 만일 한가지 일을 한다면 내가 네 마음의 상처를 깨끗이 씻어줄 수 있겠다" 고요. "그 한가지가 뭡니까?" "앞으로 일년의 시간을 줄 테니, 네가 일년동안 이 숲 속을 다니면서, 마음에 아픔이 없는 곤충을 아무나 하나 데리고 오면 내가 너의 마음의 상처를 깨끗이 씻어 줄게!"

고추잠자리가 그냥 보기엔 굉장히 쉬워 보이는 일이었어요. 죽는 것보다 훨씬 나아 보였어요. 왜냐하면 자기 눈에 비친 수많은 곤충들 중에, 대부분의 곤충들이 근심이 없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아, 그거야 쉽죠. 제가 해보겠습니다!" 그래서 고추잠자리가 근심 없는 곤충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걱정 없이 노래부르는 베짱이, 한여름 시원한 나무 위에서 독창회를 여는 매미, 그리고 달 밝은 밤에 시를 짓는 여치와 밤의 적막을 아름다운 멜로디로 수놓는 귀뚜라미 등 너무너무 많을 것 같았어요. 자신은 이렇게 아픔이 많고 근심이 많고 고통 가운데 살지만, 저 고통 없는 곤충들이 주위에 널려 있을 것 같아서,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아 아무 곤충이라도 데리고 올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수개월이 지나도 찾을 수가 없는 거예요. 드디어 일년의 시간이 다 지났습니다. 결국 그는 마음에 아픔이 없는 곤충을 한 마리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 고추잠자리는 더 이상 요정을 찾아갈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일년 동안 수많은 곤충들을 만나면서 자신의 아픔이 다 치유되었기 때문입니다.

앞의 이야기는 아주 어린아이에게 들려주는 동화입니다. 그러나 별 뜻 없는 동화는 아닙니다. 누구라서 아픔이 없는 인생이 있겠습니까? 지금 당장 우리에게 아픔이 다가오지 않더라도, 지나간 인생을 돌아보십시오. 한평생 사는 동안에 참으로 마음의 고통과, 남몰래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어찌 우리 가운데 아무도 없겠습니까? 오늘 세상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평화로워 보입니다. 괜찮아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겉모습만을 보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사람도 다가가 대화를 나눠보면 그 마음속에 고통과 아픔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저는 목회하면서 이 동화를 늘 떠올립니다. 겉으로 보기에, '저 집사님은 근심이 없어 보여요. 자녀도 복을 받았고, 사업도 복을 받았고, 얼굴도 환해 보이고,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저 집사님은 걱정이 없겠다, 저 성도는 괜찮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뒤, 가까이 다가가서 그와 마음 문을 열고, 대화를 나누면 그는 아픔의 눈물을 저에게 쏟아냅니다. 남몰래 흘리는 눈물이 있는 것입니다.
아파 보셨나요? 마음이 괴로워 보셨나요? 이것이 인생이라고 성경은 얘기합니다. 인생은 망망한 대해와 같이 잔잔한 바다만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우리에게 폭풍이 다가오고 풍랑이 있는 것이 인생이라고 얘기합니다. 우리 가운데 고난이 있기 때문에 때로는 우리의 마음이 무너져 내립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읽은 이 시편기자 역시 마음의 고통이 대단했던 것 같습니다. 적어도 이 성경에 기록될 만한 시편 119편의 이 긴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사람이라면, 마음의 고통이 없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자신을 그렇게 우리에게 소개하지 않습니다. 오늘 이 네 번째 단락에서 시편기자가 자신의 아픔을 어떻게 소개하는지, 여러분들은 눈여겨보셨나요? 25절을 다시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우리에게 이렇게 얘기합니다.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여기에서 '진토'란 말은 이에요. 하나님께서 창세기 2장에서, 우리인간을 이 진토로 만드셨어요. 흙으로 우리 몸을 만드시고 하나님의 생기를 우리에게 불어넣으시니, 저와 여러분같이 사람이 된 겁니다.

사람이 육체만 있으면 사람인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 있는데,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서 떠나시면 우리는 저 짐승들과 아무런 다를 것이 없어요. 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다는 시편기자가 자기의 마음의 괴로움이 얼마나 심했던지 이렇게 얘기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제가 구원받았고 제 안에 하나님의 영이 계시지만, 제 마음의 고통이 얼마나 심한지, 제 영혼이 없는 사람같이, 제가 지음을 받을 때 제 몸이 지음 받은 그 재료인 흙에 내 영혼이 달라붙어 버렸나요" 영혼이 흙에 달라붙어 버렸어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28절을 보세요.

나의 영혼이 눌림을 인하여 녹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세우소서

원문대로 우리가 번역한다면 "제 마음의 짐이 너무나도 무거워서 곤비하여, 제 마음이 다 녹아버리는 것 같습니다. 제가 짊어지고 가기엔 뼈마디가 녹는 것 같사와, 제 마음의 고통을 견딜 수 없습니다." 말씀에서는 시편기자 자신의 고통을 감추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시편을 쓴, 하나님의 말씀을 쓴 사람의 한때 마음 상태였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마음이 아파서 무너질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김없이 찾아오는 우리 마음속의 고통과 좌절, 낙담, 고난의 일들을 우리는 그 앞에서 어찌 다루어야 합니까?

하나님은 이 시편기자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가 고통받을 때, 마음에 아픔이 폭풍처럼 찾아올 때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를, 몇 가지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첫 번째 방법은, 마음에 아픔이 엄습해올 때 먼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주님의 가르침을 기다려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1. 주님의 가르침을 기다려라

 영어 단어에는 한마디로 표현했어요. 'Teachability' 라고 표현합니다. 이 단어는 가르침을 잘 받아들이는 성품이라는 겁니다. 겸손한 자세죠. 이 자세가, 아픔이 우리에게 찾아올 때 필요하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요즘 세계 각처에서 리더십 세미나가 굉장히 인기입니다. 그런데 그 리더십 세미나에서 반드시 다루는 항목 중의 하나가 Teachability 입니다.

제가 요즘 미국에 있는 신학교에 많은 추천서를 써주고 있습니다. 그 추천서의 항목 가운데 하나가 Teachability 입니다. 그런데 이 항목은 빠진 적이 없어요. "이 사람이 가르침을 받는 자세가 어떠한가를 표시해 주십시오" 라는 항목이 반드시 있어요.

한국 교육의 문제 중의 하나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교육은 사람들을 Teachable 하게 만들지 못하는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주입식 교육만 해서, 굉장히 가르침을 잘 받을 것 같은데 실상은 그렇지 않아요. 우리 나라 사람들은 특별히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게 굉장히 부족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허영과 허세가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허영이 얼마나 많습니까? 얼마나 허세가 많습니까? 그러다가 IMF 만난 것 아닙니까?
가정에서 국가에 이르기까지, 우리 나라 사람들은 굉장히 허영과 허세가 많아요. 왜 허영과 허세가 많다고 생각하세요?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깊은 철학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는 최고만 대접받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최선을 지향하지 않고, 최고만을 지향합니다.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해 보세요. 대접받는 사람은 누굽니까? 반에서 1등,2등, 적어도 5등 안에 들어야 사람 취급받지, 40명중에 38등 하면 그 아이는 짐승처럼 취급받습니다. 집에 와도 그 아이는 자식도 아니에요. 그 아이가 태어날 때부터 IQ 80이면 어떻게 할 겁니까? 그래서 밤12시까지 공부했는데도 40명중에 38등 했어요. 그러면 하나님은 뭐라고 하실까요? 성경에서는 절대 최고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최선(最善)이지 최고(最高)가 아닙니다. 우리 사회에서, 우리 교육에서 평가방법을 바꿔야 합니다. 사람을 평가하는데 상대평가와 절대평가가 있습니다. 성경의 평가방법은 절대평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쓰고 있는 평가방법은 상대평가입니다. 100명중에 몇 등을 했느냐?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평가방법이 아니에요.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한 달란트의 비유를 아시지요? 하나님이 보시는 기준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이 보시는 기준은 최선을 다했는가 입니다. 다섯 달란트를 받았는가, 두 달란트를 받았는가, 한 달란트를 받았는가가 문제되지 않습니다. 열을 남겼는가, 다섯을 남겼는가의, 열매의 많고 적음을 묻지도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보신 것은 최선을 다했는가입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그렇지 않아요. 최고를 추구하며, 최고만을 대우합니다. 그러니까 최고가 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입니다. 거짓말을 하든, 사기를 치든, 남을 죽이든, 밟고 올라가서 무조건 윗자리를 차지해야 하는 거예요. 학교에서 커닝을 해서라도 1등을 해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최고가 되지 않으면 무시당하니까 우리 나라 사람들은 허영과 허세가 느는 겁니다. 도저히 가정형편이 그렇게 안 되는데도 불구하고요. 그리스도인들이 그랜저 탈 능력이 되더라도 소나타 타야 돼요. 그런데 어떻게 합니까? 소나타 타기에도 힘이 바들바들 떨리는데 악착같이 그랜저 타고 다니는 거예요. 왜냐하면 티코 타고 다니면 무시당하기 때문이에요. 제가 미국에서 바로 귀국해서 뭘 탔는지 아십니까? 그 자랑스러운 티코를 타고 다녔습니다. 티코가 얼마나 좋은지 아세요? 티코가 어떻습니까? 내 수준에 맞게 살아야 하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아요. 허영과 허세가 많아요.

명함을 봐도 그렇습니다. 제가 아는 사람 중에 세계를 다니면서 세계의 명함을 모아둔 사람이 있어요. 너무 신기하더라고요. 나라마다 명함이 다 다릅니다. 저에게 각 나라의 명함을 설명해 주었어요. 그분이 떠날 때쯤 되어서 저에게 이런 얘기를 했어요. "목사님, 세계의 명함 중에서 가장 복잡한 명함이 어느 나라 명함인줄 압니까?" "어느 나랍니까?" 호기심이 발동해서 물어봤어요. "한국입니다" 그러면서 몇 장을 보여주는데, 앞뒤로 빽빽한 것도 있어요. 목사님들 가운데도 그런 명함을 가진 분들이 있습니다. 무슨 회장이 그렇게 많은지... 명함은 한 줄이면 되잖아요? 어떤 목사님은 '40일 금식기도 3회 실시' 이런 것도 명함에 넣어 다녀요. 그러니까 앞뒤가 빽빽할 수밖에 없죠. 무슨 이사, 무슨 회장이 그렇게 많은지 몰라요. 제가 그래서 명함을 만들지 않는 겁니다.

왜 그렇게 허세가 많나요? 교육을 시켜도 그렇습니다. 가정교육을 보면, 사실 오늘날 애들하고 저와 여러분들이 자랄 때를 비교하면, 누가 공부를 많이 합니까? 솔직히 말씀드리면 요즘 애들이 많이 합니다. 제가 기억하기로, 초등학교 때 학교 갔다 오면 공부를 합니까? 학교 갔다 오면 방에 들어갈 시간도 없어요. 그래서 5미터 밖에서 가방을 그냥 방으로 던지고 그대로 집을 나가 놀았어요. 해가 져서 어머니께서 부르셔서 밥을 주시면 먹었어요. 밥 먹고 나면 졸리니깐 코피 터져 가면서 잤어요. 솔직히 우리는 그렇게 컸잖아요? 자녀들 앞에서 이렇게 얘기할 수 있어야 해요. "아버지는 너처럼 공부 잘하지 못했어. 너처럼 공부 많이 안 했다. 아버지는 매일 놀았다" 그렇게 한번 얘기해 보세요. 애들이 기가 살아서 공부를 잘 할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성적표에는 양,가, 양,가, 양가집에서 자란 분이, 아들이 어쩌다 우, 미를 받아오면 머리를 쥐어박으면서 "아빠는 말이야 옛날에..." 요즘 아버지 치고 공부 못하는 아버지가 어디 있습니까? 다 공부 잘했어요. 다 수재였어요.

그리고 무슨 뼈 얘기를 그렇게 하는지요. "우리 조상들은..., 네 할아버지가..., 증조할아버지가 뭐였는데...." 얘길 들어 보면 평범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 양반이에요. 다 멸치집안이에요. 저희 외할아버지께서도 통뼈였다고 합니다. 힘이 굉장했는데, 아침마다 집 앞에 있는 바윗돌을 가지고 몸을 푸셨다고 해요. 그래서 제가 할아버지가 계시던 집에 가서 그 바위를 보러 갔어요. 보니까, 기중기로 들 바위인데 그걸 사람이 들었다고 하는 거예요. 우리 주위에 이런 일들이 얼마나 많아요? 바로 허영과 허세입니다. 우리 안에 최고가 되어야겠다는 허영과 허세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굉장한 영향을 줍니다. 우리가 Teachable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작은 참새 한 마리에게서도 예수님은 배우시고, 우리를 가르치셨는데, 우리는 배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서정주 시인은 풀 한 포기를 보고, 배우며 시를 짓곤 했는데, 우리는 배우려고 하지 않아요. 내 마음에 고통이 오면 남을 원망하기 바쁘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이 고통을 왜 나에게 주셨습니까? 왜 이런 일이 제게 있습니까?" 하며, 하나님 앞에 문을 열고 가르침 받으려고 하는 사람이, 오늘날 한국 교회 안에 너무나 적다는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왜 우리에게 아픔을 주십니까? 저와 여러분을 미워하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우리 마음에 고통이 심하면 심할수록, 마음에 아픔이 심하면 심할수록, 마음에 비수가 꽂히면 꽂힐수록 하나님은 그 아픔을 통해, 우리에게 무언가를 가르치시는 줄 믿습니다.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마음에 못이 박혀 있습니까? 누구에게도 얘기할 수 없는 마음의 상처가 있습니까? 아픔이 있나요? 그렇다면 그 아픔에 좌절하지 마시고, 그 아픔에 무릎꿇지 마시고, 여러분 마음이 아플 때,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열어보시기 바랍니다.

내 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내가 나의 행위를 고하매 주께서 내게 응답하셨으니 주의 율례를 내게 가르치소서
나로 주의 법도의 길을 깨닫게 하소서 말씀대로 나를 세우소서(25-28)

"나를 소생시키십시오. 나를 가르치십시오. 나로 깨닫게 해 주십시오. 나의 길을 인도해 주시고 굳건히 세워 주옵소서" 고통이 찾아오고 마음에 아픔이 있을 때, 이 시편기자는 기도로 하나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주님! 무엇을 말씀하시려 합니까? 나를 가르치시옵소서!"
우리 마음에 아픔이 찾아올 때, 주님 앞에 나아가 주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는 귀한 성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성경을 읽어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쓰임 받은 사람들은 다 하나님 앞에 언제가 한번은 가르침을 받았던 사람들이었어요. 다윗은 그의 아들이 반역을 일으켜 쫓겨다니고 있을 때, 자신이 왕이었을 때는 아부를 하던 시므이라는 사람이 길을 가는데 다윗에게 저주합니다. 그 때 다윗의 신하인 아비새가 너무나 화가 나서 "내가 당장 가서 그의 목을 칠까요?" 그때 다윗은 "두어라! 내 몸에서 난 내 아들도 나를 반역하는데, 저의 저주를 통해 하나님이 나를 저주하심인 줄 어찌 아느냐!" 시므이의 저주를 통해 하나님이 자신을 가르치시는지 어찌 아느냐고, 그러니 그냥 두라고 했습니다.

억울하게 비난을 받고 계십니까? 억울하게 손해를 보고 계십니까? 억울하게 핍박 받았나요? 그 사람들을 원망하기 전에 그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무엇을 가르치시는지 먼저 여쭈어 보시기 바랍니다. 모세가 그랬습니다. 모세는 왕자였어요. 40년을 왕궁에서 부족함 없이 살았어요. 그러나 하루아침에 쫓겨나서 저 광야에서 양을 치는 목동이 되었습니다. 그 마음의 고통이 어떠했을까요? 그러나 모세는 원망하지 않고 40년 동안이나 "주여! 나를 가르치시옵소서!" 하고 기도했습니다. 그가 가르침 받은 이후에 하나님이 이렇게 모세를 평했습니다. 혈기로 사람을 죽였던 모세였는데, "온 세계에서 모세의 온유함이 가장 승(勝)하도다!" 그는 광야에서 고통을 통해 가르침을 받았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경험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내 마음에 고통이 찾아올 때, 믿지 않는 사람들과 똑같이 원망하고, 실망하고 낙담한다면 우리의 믿음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고통을 심어 주실 때, 우리 마음이 아파 올 때, 내 창자가 끊어질 때, 내 영혼이 진토에 눌릴 때, 앞으로는 이렇게 기도합시다. "주여, 제 마음을 열겠습니다. 이 고통을 통해 제게 주실 말씀을 나로 깨닫게 하옵소서!"
고통이 찾아올 때 먼저 주님의 가르침을 기다려야 합니다. 두 번째로 필요한 것은 자신의 삶을 정결케 해야 합니다.

2. 자기의 삶을 정결케 하라(29절) 

거짓 행위를 내게서 떠나게 하시고 주의 법을 내게 은혜로이 베푸소서

도대체 내 마음에서 고통과 거짓행위가 떠난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고통과 거짓행위는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얼마 있으면 우리 나라에도 태풍이 찾아올 겁니다. 미국에서는 '토네이도'라고 하죠. 회오리바람인데 굉장합니다. 저는 텍사스에 살아서 그것을 자주 보았어요. 소가 깃털 날아가듯 가볍게 날아갑니다. 자동차도 그대로 날아갑니다. 차 타고 공중을 날고 싶은 분은 저에게 안내를 받으세요. '토네이도'가 올 때쯤 고속도로에 서 있으면 공중으로 그대로 날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왜 그런 태풍에 보내셔서 우리를 괴롭힐까?'하고 생각할지 몰라도, 자연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태풍은 우리 생활에 꼭 필요한 것이라고 합니다. 태풍이 없으면 이 세상은 오염이 더욱 심해져서 살 수가 없습니다. 태풍이 이 세상을 청소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어떤 과학자를 만났는데, 아주 재미있는 얘기를 해 주었어요. "목사님, 과학자들은 태풍을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창조 과학회에서 "태풍은 하나님의 대청소 작업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깨끗하게 대청소하고 계시다는 겁니다. 저와 여러분의 마음에, 고통이 이러한 일을 하고 있음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왜 고통을 주시는가? 우리 안에 있는 무엇인가를 청소하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을 향한 욕심, 잘못된 가치관, 과거에 지은 죄악, 현재에 끊지 못한 나쁜 습관들을 하나님께서 우리를 정결케 하시기 위해, 때로 고난과 고통을 허락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야곱을 기억하십니까? 야곱이 언제 철저히 자기를 깨끗케 했습니까? 저는 아브라함보다 야곱이 좋습니다. 저와 좀 비슷한 것 같아서요. 거짓말도 좀 하고, 머리도 좀 쓰고, 우리와 비슷하잖아요? 그런데 야곱은 말년에 굉장히 그의 믿음이 성숙되잖아요.
야곱이 언제 철저히 자기를 깨끗케 하고 하나님 앞에 순종했습니까? 얍복강에서 그렇게 했습니까? 아닙니다. 야곱이 자기를 가장 깨끗하게 한 것이 창세기 34장에 나오는데, 그것은 야곱이 가장 고통스러운 때였어요. 야곱의 마음이 면도날로 찢어질 대로 찢어져 버린 그 상황에서, 비로소 자기를 깨끗케 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야곱의 딸이 이방인에게 강간당했어요. 야곱의 딸 디나가 여행 중에 밖으로 놀러 나갔는데, 한 남자에게 강간을 당해버립니다. 그 일로 분노한 야곱의 아들들이 하나님의 율법인 할례를 거짓말로 속여서, 그 동네의 남자들을 다 죽여버립니다. 딸은 강간당하고 아들들은 하루 아침에 살인자가 되어 버렸어요.
이 사건을 여러분의 일로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 설악산에 휴가 갔어요. 아들 셋과 예쁜 딸을 데리고 갔어요. 그곳의 한 남자가 딸을 겁탈하고 강간했어요. 거기에 분노한 여러분의 아들 세 명이 그 가족을 몰살해 버렸어요. 그래서 그들은 감옥에 가게 되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부모의 입장에서 그 마음의 고통을 이해하십니까?

그 고통 속에서 야곱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창세기 35장 2- 3절을 보세요.

야곱이 이에 자기 집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의 이방 신
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
을 쌓으려 하노라

이전에 하나님이 야곱에게 벧엘로 올라가라고 하셨는데, 야곱이 순종하지 않았어요. 다른 땅에서 살아왔어요. 그런데 야곱이 "얘들아! 우리가 우상을 버리고, 우리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깨끗케 하고,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돌아가자!" 어떤 사건 다음에 이 일이 일어났습니까? 평안하고 축복 받은 때입니까? 아닙니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고통이 엄습해 올 때, 그의 마음이 가장 많이 찢어졌을 때, 비로소 야곱은 하나님께 돌아갔다고 성경은 전해 줍니다.

아프십니까? 고난 중에 계십니까? 고난 앞에 무릎꿇지 마시고, 다른 사람을 원망하지 마시고, 조용히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 자신을 정결케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게 나쁜 습관이 있습니다. 내가 아직 버리지 못한 그 무엇이 있습니까? 하나님 나를 깨끗케 해 주세요! 정결케 해 주세요!" 이것이 저와 여러분의 기도가 되도록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3. 우리의 마음을 넓히자(32절)

주께서 내 마음을 넓히시오면 내가 주의 계명의 길로 달려가리이다

우리의 마음을 넓혀야 합니다. 남자들은 근육을 갖기를 원합니다. 어제 바디 빌딩하는 걸 보았는데 여자들도 그렇게 합디다. 저 근육을 가지고 남편 목조르기 한번 하면 꼼짝도 못하겠다는 생각을 해보았어요. 근육이 성장하려면 어떻게 합니까? 체육학을 전공한 사람들은 근육이 커지려면, 근육이 찢어져야 된다고 표현합니다. 여러분이 운동을 안 하다가 등산을 하고 나면, 종아리가 아프고 몸살이 납니다. 근육이 찢어졌기 때문에 아프고 몸살이 난다고 합니다. 근육을 확장하고 늘이려면 근육의 찢어짐이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이 광안리 앞바다 같이 넓어지기를 바랍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마음을 찢으셔야 합니다. 다른 방법이 없어요. 하나님은 고통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넓히십니다. '마음'을 어떤 번역에는 'Understanding'으로 표현하고 있어요. 이해를 넓힌다는 겁니다. 고통이 찾아오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어요. 평온할 때는 몰랐는데 고통이 찾아오니까 하나님의 놀라우심을 이해하게 됩니다. 항상 건강을 통해서만 축복하시는 하나님인 줄 알았는데, 병을 통해 고통을 당해보니까 '그 병을 통해서도 우리를 축복하시는구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구나!'라는 사실을 깨닫는 거예요.

안수 집사님 한 분이 치질수술을 하셨어요. 치질수술은 감춘다고 합니다. 부산에서 제일 유명한 허 무량 장로님이 운영하는 병원에 입원했어요. 그런데 그 장로님이 저를 보시고 하는 얘기가, 영안 교회에 저한테 치질수술 받은 사람이 굉장히 많은데, 기분 나쁜 것은 사람들이 선전을 안 해준다는 겁니다. 누가 수술 받았는지 다 말해줘서 제가 다 알아요. 감춰도 소용없어요. 그분이 하시는 말씀이, 치질수술 받고 나니까 배설이 잘 안되잖아요. 사흘이 되니까 너무 괴로웠답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배변을 했어요. 그 중의 한 집사님이 "목사님, 먹는 것만 은혜인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어요. 화장실에 앉아서도 꼭 감사기도 해야 되겠어요"라고 했어요. 고통을 당해보니 우리의 이해가 넓어지는 겁니다. 숨쉬는 것, 화장실에 잘 가는 것, 모든 것이 은혜이고 감사한 겁니다.

고통이 찾아오면 하나님에 대한 이해만 넓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에 대해서도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사람을 대할 때 마음이 넓어져요. 마음이 넓은 사람들을 보면 대개 과거에 고통을 많이 겪은 사람입니다. 고난을 많이 겪고 마음이 아파 본 자들은 사람을 함부로 정죄할 수 없습니다. 함부로 비판하지 않습니다. 그의 모든 것을 이해해 주려고 하는 겁니다. 그러나 고난이 없는 사람은 항상 흑백논리를 적용합니다. 저것은 옳고, 저 사람은 나쁘다고 생각합니다. 그에게는 나쁜 사람이 그렇게 많아요. 왜냐하면 고난을 당해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픔이 찾아옵니까? 마음이 아플 때가 바로 기회입니다. 근육이 찢어져서 자라듯, 고통이 찾아올 때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 마음을 넓히시기 바랍니다.
시편기자는 기도합니다. "주여! 내 마음을 넓혀 주시옵소서!" 이것이 저와 여러분의 기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바다를 잘 압니다. 제가 부산에 사는 가장 큰 이유는 바다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회가 좋아서입니다. 저 넓은 바다를 보면, 내 마음에 분노와 낙심과 괴로움이 있을 때, 산 위에 올라가서 바다를 몇 시간 바라보고 있으면, 내 마음이 깨끗이 씻어집니다. 경험해 보셨지요? 그 바다로 수많은 강물이 흘러갑니다. 그 강물은 맑은 물도 있지만, 온갖 흙탕물도 바다로 흘러갑니다. 폭우가 쏟아지면 산이나 길에 있던 온갖 쓰레기들이 강을 거쳐서 바다로 스며듭니다. 그래도 바다는 그것을 거절하지 않습니다. 다 수용하고 나서 여전히 파랗게 자기의 상태를 유지하는 겁니다. 그것이 바다의 포용성입니다. 우리가 바다를 바라보고 좋아하는 것이 바로 포용성 때문일 겁니다.

진주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아시지요? 조개에 이물질이 들어옵니다. 조개가 처음엔 그 이물질을 거부하다가, 나중에는 그것을 내 몸의 일부로 삼기 위해 어떤 물질을 쏟아냅니다. 그 물질과 이물질이 합쳐져서 아름다운 진주를 빚어내는 겁니다. 아픔은 우리 삶의 일부입니다. 우리의 적(敵)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성숙시키기 위해 때로 아픔을 허락하십니다. 고통을 허락할 수 있습니다. 그 아픔이 찾아올 때, 시편기자와 같이 우리 모두 올바로 반응했으면 좋겠습니다. 마음이 아플 때 "오, 하나님! 내 마음 문을 엽니다. 내가 무엇을 배워야 되겠습니까? 나를 가르치시옵소서! 내 안의 무엇을 깨끗케 하면 좋겠습니까? 이 고통을 통해 내 마음을 넓혀 주시옵소서!" 이것이 우리의 기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시편 119:37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고 주의 도에 나를 소성케 하소서.

시편 119: 40
내가 주의 법도를 사모하였사오니 주의 의에 나를 소성케 하소서

시편 119:107
나의 고난이 막심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시편 119:154
주는 나의 원한을 펴시고 나를 구속하사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시편 119:156
여호와여 주의 긍휼이 크오니 주의 규례를 따라 나를 소성케 하소서

시편 119:159
내가 주의 법도 사랑함을 보옵소서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신 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시인의 기도는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라고 하였다.
인간에게 주시는 복도 주의 말씀에 근거하여 주시고,
징계도 말씀에 근거하여 내리신다는 것을 여러 곳에서 증언하였다.
그리고 기도도 주의 말씀에 의거하여 하고 있다.

오늘 말씀은 시인이 매우 위급한 지경에서 나온 것이다.
지금은 표현력이 과격해져서 막심하다는 정도의 말은 별로 크게 주목하지 않지만,
다윗시대는 진정으로 심할 때 막심하다고 하였다.
그만큼 언어를 진실하게 사용하였다고 본다.

시인이 위급한 상황에서 여호와의 말씀을 의지한 것은
이미 전에 그러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렇지 않을지라도 여호와의 말씀을 의지할 사람이지만
시인은 다른 어떤 도움보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소성케 해 주시기를 바라고 있다.

이와 같이 말씀에서 힘을 얻고 말씀을 의지해서 방향을 잡는 삶은 크리스천의 마땅한 바이다.
그러나 이것이 말씀을 듣는 것에만 그치는 이유는

첫째, 믿음이 연약하여 말씀에 확신이 없는 까닭이다.
둘째, 하나님을 의지하는 방법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믿음이 연약한 문제는 근본적인 문제라서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방법을 잃어버린 것은 되찾을 수가 있다.

오늘 말씀이 그 방법을 제시한다.
바로 여호와의 말씀을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가까이 하는 것이다.
많이 읽다보면 깊이 있게 묵상도 하게 되고,
묵상을 통하여 그 말씀이 내 몸에 녹아든다.
즉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영과 육이 되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규칙이 된다.

이 귀한 성경을 우리는 손쉽게 접할 수 있지만 아직도 지구상에는 여러 가지 사정(경제적, 정치적)으로 성경을 구할 수 없는 곳이 많다.

성서주일은 성경 보급을 돕기 위해 제정된 주일인데 한국교회는 1899년부터 지켜오고 있다.  
오늘은 하나님의 말씀을 귀중히 여기던 성도가 지은 시편 119편의 한 부분을 살펴보려 한다.  

시편 119편은 성경에서 가장 긴 장인데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에 따라 지어진 독특한 시다.
히브리 알파벳 22자를 각기 8절씩 구성하여 지었기에 176절로 작성되었다.

본문은 4번째 순서인 달렏( ㄱ)으로 시작되는 문장인데 말씀을 통해서 얻는 유익을 노래하고 있다.

첫째,  소성케 하는 말씀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진토에 붙은 영혼은 밑바닥으로 추락한 인생을 의미한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는 소설 제목처럼 한때 잘 나가던 자들이 급작스럽게 추락하는 경우가 있다.
영적인 상황도 마찬가지다.
열정을 가지고 뜨겁게 신앙생활하던 자들이 하루 아침에 곤두박질쳐서 엘리야처럼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나약한 모습을 보일 때가 있다.

비록 진토로 추락한 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영감을 얻게 되면 소성할 수 있다.

"나의 영혼이 눌림을 인하여 녹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세우소서"

현대인들 중에는 특히 물질 문제로 영혼이 짓눌려 평안 없이 사는 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8-10)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문제로 영혼이 눌려 평안을 누리지 못할 때가 많은데 그때마다 이 시인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 받기 위해 기도해야 할 것이다.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주의 말씀대로 나를 세우소서"

"거짓 행위를 내게서 떠나게 하시고 주의 법을 내게 은혜로이 베푸소서"

둘째, 말씀을 깨닫기 원함

성경이 진리요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주는 말씀이지만 그것은 감추어진 보화와 같아 아무나 깨달을 수 없다(욥 28장).
눈이 있어도 볼 수 없고 귀가 있어도 들을 수 없는 것이 말씀 속에 감추인 진리다.

하나님은 지혜롭다고 자처하는 자들에게는 이 진리를 숨기시고 어린아이와 같이 미련한 자들에게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신다(마11:25-27).

말씀 앞에서 좀더 솔직해져야 한다. 우리의 부족을 낱낱이 아뢰면서 주의 도움을 구해야 한다.

"내가 내 행위를 고하매 주께서 내게 응답하셨으니 주의 율례를 내게 가르치소서 나로 주의 법도의 길을 깨닫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기사를 묵상하리이다"

성경 보급은 포화상태가 되었지만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고 그 속에 감추인 진리를 깨닫기 원하는 간절함을 가지고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에디오피아의 국고를 맡은 큰 권세가 있는 내시는 병거를 타고 가면서 성경을 읽었다. 이해되지 않았지만 간절히 사모하며 읽었기에 성령께서 빌립을 그에게 보내어 성경을 가르치게 하셨고 내시는 말씀을 통해 깨달음을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곧바로 세례를 받았다.

셋째, 말씀을 깨달은 자들의 삶

성경말씀의 가르침을 받아 진리를 깨닫고 그 영혼이 소성케 되면 그 말씀에 대한 열정이 살아나 뜨겁게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

1. 말씀을 기준으로 삼음 : "내가 성실한 길을 택하고 주의 규례를 내 앞에 두었나이다"

내 생각과 감정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아 바른 길을 선택한다.

2. 말씀을 고수한다 : "내가 주의 증거에 밀접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로 수치를 당케 마소서"

주의 증거에 밀접했다는 말씀은 곧 성경 말씀을 고수(준수)했다는 의미다.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아는 자들은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그 말씀을 따라 생명까지도 헌신한다.

3. 열심히 실천한다 : '주께서 내 마음을 넓히시오면 내가 주의 계명의 길로 달려가리이다"

  마음을 넓히신다는 것을 굳게 닫혀 있던 마음의 문을 열어 말씀을 받아들이게 하신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행 16:14)

  마음을 열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들이게 되면 신앙적 순종과 열정이 일어나게 된다.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행 16:15)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맟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눅 5:5)

* 마음이 짓눌려 기쁨 없이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인가?
겸손히 말씀을 받아들임으로 영혼이 소성함을 입고 열정을 가지고 계명의 길로 달려가자. 


 









































교회력 / 대강절. 사순절(四旬節)과 부활절(復活節) 고난(苦難)



대강절(待降節)


대강절에 대한 바른 의미는 무엇인가?

 

교회에서 지키는 절기에는 주현절(Epiphany), 사순절(Lent), 오순절(Pentecost), 대강절(Advent) 등이 있거니와, 그 중 개신교회에서 가장 중요시되고 있는 절기는 대강절(또는 ‘대림절’, ‘강림절’로도 불림)이다. 그런데 이 대강절에 대한 정확한 의미와 그에 따른 바른 이해에 대한 약간의 논란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성탄절을 4 주간 앞두고 시작해서 지키는 ‘대강절’(待降節)은 문자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라는 뜻인데, 그 ‘오심’(降)이 무엇을 뜻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즉 그 논란은 그리스도의 성탄 즉 첫 번째 오심(성육신)을 기다리는 절기냐, 아니면 역사의 마지막에 오실 재림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지키는 절기냐 하는 것이다.

오늘날 대다수의 교회에서는 첫째의 의미 즉 예수께서 2000년 전에 이 땅에 나신, 곧 성육신 임마누엘의 역사적 사실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날로만 생각하고 지키는 것이 사실이다. 예배에 관한 많은 책이 그렇게 쓰고 있고, 많은 목회자들이 그렇게 설교를 하고 있다. 그리고 기독교 역사상으로도 약 1000년 동안은 그러한 뜻으로만 지켜 왔다. 그러나 그 후 12세기부터는 그것이 더 넓은 뜻으로 해석 적용되어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절기로까지 의미가 확대된 것이다. 따라서 로마 가톨릭교회의 라틴어 전례용어(典禮用語)에서는 그리스도의 초림(성탄)과 재림 두 사실을 모두 지키는 절기로 되어 있다. 즉 그리스도의 성탄으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시작된 것과, 앞으로 세상의 종말에 심판주로 재림하심을 기다리는 절기로 지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의 의미가 부여된 것으로는 그리스도께서 지상사역 마지막에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성령(보혜사)의 임재를 뜻하기도 하는 것이다. 즉 성령이 그리스도인들의 마음 속에 은혜로 임재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이러한 의미로까지 확대하면, 대강절은 과거의 역사로는 그리스도의 탄생(성육신)으로 오셨음을, 미래의 사실로는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오실 것을, 현재의 사실로는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이 그리스도인들의 마음 속에 계속적으로 임재하시는 것을 다 포괄하는 것이 되기도 한다. 이 대강절은 성탄절과 그 시기를 같이하는 것이, 마치 부활절을 전후하여 사순절과 오순절이 있는 것처럼, 성탄절의 의미를 더 깊게 해 주는 절기인 점에서 유사점을 가진다.

‘대강절’에 대한 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그 어원적인 고찰을 하는 것이 한 가지 참고가 될 수 있다. 대강절에 해당되는 영어의 Advent 는 라틴어 ad(to) 와 ventire(come) 의 합성어로서, 라틴어의 이 ventire (오다)가 역시 그리스도의 두 오심(ventire) 중에서 어느 하나를 가리키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다를 수밖에 없으나, 다만 현재로서는 앞에서 언급한 대로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에 다 관련된 것으로, 또 하나 더한다면 성령의 임재까지 확대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영어의 표기상의 차이로 보면, ‘the Advent’ 로 쓰면 그리스도의 초림을 나타내고, ‘Advent’로 쓰면 그리스도의 재림을 나타내는데 라틴어로는 후자에 해당된다.

끝으로 오늘날 우리가 대강절을 지키는 실제를 두고 생각할 때에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일은 그를 맞을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인데, 이러한 점에서는 재림에 더 무게가 실리고, 오심의 사실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점에서는 그리스도의 초림에 무게가 실릴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무엇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일은 과거에 일어난 사실에 대한 것으로서 미래의 사실에는 해당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사순절(四旬節) Lent

사순 시기(四旬時期) 

헬라어 Σαρακοστή(사라코페) 
라틴어 Quadragesima(콰드라제시마)
영어 Lent(렌트)

기독교에서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념하는 교회력 절기를 말한다.
즉 부활절을 경건히 준비하는 절기이다.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부활절 일자를 확정하며 확인한 절기이다.

사순절의 이름은 그리스어로 40을 의미하는 '테사라코스티'(Τεσσαρακοστή)의 번역 단어이다.
재를 머리에 얹거나 이마에 바르며 죄를 통찰하는 재의 수요일로 시작된다.

사순절 주간별 주제

예수님의 고난과 이를 대하는 성도의 참회를 뚜렷하게 하는 것들로 채워집니다.
각각의 단어는 라틴어 초입송의 첫 단어를 가리킨다.

독일 교회력에 따르면 여섯 번의 사순절 주일은 각각의 이름이 다음과 같이 전통적으로 불렀다(라틴어 명칭).


첫째 주일은 인보카비트(Invokavit)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시편 91:15)라는 뜻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첫째 주 -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유혹을 생각합니다.

인보카비트(Invokavit)인데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시 91:15)라는 라틴어의 처음 말이다.
즉 사순절은 주님께 기도하는 거룩한 절기이다



둘째 주일은 레미니스제레(Reminiszere)
“기억하옵소서.”(시편 25:6)라는 뜻

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있었사오니 주여 이것을 기억하옵소서.

둘째 주 -  죄를 물리치라는 명령을 생각합니다.

레미니스제레(Reminiszere)인데 “기억하옵소서.”(시 25:6)라는 뜻이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주님의 희생과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주신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기억해야 한다.



셋째 주일은 오쿨리(Okuli)
“나의 눈이 늘 주께 향하나이다.”(시편 25:15)라는 뜻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앙망함은 내 발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임이로다.

셋째 주 -  회개로의 요청을 생각합니다.

오쿨리(Okuli)인데 “나의 눈이 늘 주께 향하나이다.”(시 25:15)라는 뜻이다.
사순절에 우리의 눈은 항상 주님과 주님의 십자가를 향해 있어야 한다.


넷째 주일은 라에타레(Laetare)
“너희는 예루살렘과 함께 즐거워하라.”(이사야 66:10)는 뜻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여 다 그와 함께 기뻐하라 다 그와 함께 즐거워하라 그를 위하여 슬퍼하는 자여 다 그의 기쁨을 인하여 그와 함께 기뻐하라.

라에타레(Laetere)인데 “너희는 예루살렘과 함께 즐거워하라”(사 6:10)라는 뜻이다.
사순절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절제하면서 하늘의 기쁨을 맛보는 절기이다.


다섯째 주일은 유디카(Judika)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시편 43:1)라는 뜻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 경건치 아니한 나라에 향하여 내 송사를 변호하시며 간사하고 불의한 자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다섯째 주 - ‘장미 주일(Rose Sunday)’이라 불리기도 하며, 주일의 강조점이 죄인의 회개에서 그리스도의 치유 능력으로 바뀌기 때문입니다.

다섯째 주 - 치유와 회심을 생각합니다.

유디카(Judika)인데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시 43:1)에서 온 말이다.
우리는 언젠가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하는데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 부끄럽지 않도록 준비하는 기간이 사순절이다.




여섯째 주일은 종려주일(palmam sunday. 팔맘 선데이), 또는 고난 주일(Dominica Passionis. 도미니카 파시오니스)이다.

마태복음 21: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마가복음 11:10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요한복음 12:13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 경건치 아니한 나라에 향하여 내 송사를 변호하시며 간사하고 불의한 자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여섯째 주일 - 종려주일로 부활절을 미리 맛보는 주일입니다.

종려주일(Palmarum) 혹은 고난주일로서 이 주간은 모진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더욱 깊이 묵상하는 사순절의 절정이다. 우리는 사순절기간 동안 절제를 통한 경건의 훈련과 자신을 다 주신 주님의 베풂을 본받은 나눔의 실천으로 사순절을 뜻있게 보내야겠다.  




사순절은 이렇게
사순절의 의미
사순절을 뜻하는 영어 렌트 Lent는 고대 앵글로 색슨어 Lang에서 유래된 말로, 독일어의 Lenz와 함께 ‘봄’이란 뜻을 갖는 명칭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40일간의 기념일’이라는 뜻의 희랍어인 ‘테살코스테’를 따라 사순절로 번역합니다. 이는 부활 주일을 기점으로 역산하여 도중에 들어있는 주일을 뺀 40일간 주의 고난과 부활을 기념하고 묵상하며 경건히 보내고자 하는 절기입니다. 한편 40이란 수는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광야에서 시험받으신 일, 모세가 40일간 시내산에서 금식한 일,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까지의 40일 등과 같이 성경에 여러 번 고난과 갱신의 상징적 기간으로 등장합니다. 이에 고난 주간을 포함하여 그리스도께서 죄인 된 우리의 구속을 위해 수난을 당하신 사건에 담긴 구속사적 의의를 살펴보며 자신의 신앙을 재 각성하고자 40일간의 절제 기간을 갖는 것이 바로 사순절입니다.
 
사순절의 유래
사순절은 초대 교회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찢기신 살과 흘리신 피를 기념하던 성찬식과 주님의 수난에 동참하고자 행하던 금식으로부터 그 유래를 찾을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을 준비하기 위해서 금식을 행했는데, 초대 교회 성도들도 신앙의 성장과 회개라는 차원에서 구약의 유월절 만찬을 새롭게 해석하여 성찬식에 앞서 금식을 행하였습니다. 또한, 사순절이 끝나는 부활절에는 새로 영접되는 성도의 성례식을 행하였습니다.
 
사순절의 행사
사순절 행사로서의 금식은 수세기 동안 매우 엄격하게 지켜져왔습니다. 사순절의 식사로는 저녁 전에 한 끼 식사만이 허용되었으며, 물고기와 고기 등의 육류는 물론 우유와 달걀로 만든 음식까지도 금지되었습니다. 그러나 8세기 이후로 이 규정은 완화되기 시작하여 14세기에는 금식기도 대신에 절식 기도가 행해졌습니다. 그리고 15세기에 와서는 정오에 식사하는 것이 일반적인 종교 습관이 되었고, 저녁 시간에도 간단한 식사인 콜레이션 collation이 허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순절 기간 동안에 연극, 무용, 연애 소설 읽는 것과 같은 오락행위는 금지되었으며, 화려한 옷을 입거나 좋은 음식을 먹는 것 등의 호화 생활은 자제 되었습니다. 대신에 자선과 예배 참석, 기도 등이 권장되어졌습니다. 이후 1517년,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형식적이며 지나치게 많은 교회의 의식 절차는 폐지되었고, 이 과정에서 사순절과 관계된 많은 의식들도 간소화 내지, 폐지되어졌습니다. 그러나 이 기간을 회개의 시기로 지켰던 중세 교회의 사상은 여전히 받아들여져서 기념되고 있습니다.
 
 
금식 기도
금식은 사순절의 가장 중요한 관습이었습니다. 시기와 장소에 따라 금식의 기간과 엄격성의 정도에 차이는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구속 사역을 기념하는 하나의 관습이었습니다. 금식은 하늘나라의 백성됨을 감사하며 그 백성된 자로서의 삶을 돌이키게 하는 행위로써 초대교회 때부터 행해졌습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행해지는 이 금식 기도는 엄격했던 초기의 형태에서 많은 변화를 겪어 절식節食기도의 형태로 변모되어졌습니다.
 
구제와 선행
사순절에는 범죄한 인류를 위해 고난 받으신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의미에서 불우한 이웃을 구제했습니다. 특히 사순절에 행해지는 금식 기도를 통하여 불우한 이웃의 배고픔과 가난을 생각하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의 실천에 있음을 기억할 때,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사랑을 따라 이를 실천함은 성도의 마땅한 행위 중 하나라 말할 수 있습니다.
 
사순절은 이렇게
 
사순절은 자기 근신과 금식의 기간 즉, 영적 훈련의 기간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고난과 죽음으로 향해가는 순례의 여정으로, 자기 부인의 시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순절을 통해 자기 부인과 자신이 죽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 새벽기도에 잘 참여하겠습니다.
― 저녁예배에 성실히 참여하여 하나님을 예배하겠습니다.
― 성경말씀을 매일 읽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겠습니다.
― 하루 1끼 금식하며 기도하겠습니다.
― 가정예배를 드리겠습니다.
― 무절제한 소비를 하지 않겠습니다.
― 남을 속이거나 해하지 않겠습니다.
― 일상 속에서 절제하겠습니다. (금주, 금연 등)
― 이웃에게 사랑과 구제, 도움의 손길을 주겠습니다.
― 이웃과 다투며 분쟁하지 않겠습니다.
 
이 항목은 사순절 기간동안 하나님 앞에 드리는 믿음의 서약이 됩니다. 내가 지킬 수 있는 항목에 ∨표 해봅시다.
 
새벽기도에 잘 참여하겠습니다.
저녁예배에 성실히 참여하여 하나님을 예배하겠습니다.
성경말씀을 매일 1장 이상 읽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겠습니다.
주 1회 이상 금식하며 기도하겠습니다.
가정예배를 드리겠습니다.
무절제한 소비를 하지 않겠습니다.
남을 속이거나 해하지 않겠습니다.
일상 속에서 절제하겠습니다. (금주, 금연 등)
이웃에게 사랑과 구제, 도움의 손길을 주겠습니다.
이웃과 다투며 분쟁하지 않겠습니다.


사순절이 시작되면서 주현절은 마감한다. 그러기에 주현절의 길이는 최대 9주일부터 최소 4주일까지로 사순절의 출발점에 따라 일정치 않다. 주현절은 고정절기로 1월 6일부터 그 시작이 늘 일정하지만, 사순절은 해마다 달라지는 이동절기인 부활주일 날짜 확정에 따라 들쑥날쑥하기 때문이다. 사순절은 재의 수요일부터 부활절 전날까지로, 그 기간 중 6회의 주일을 뺀 40일 동안이다. 주일을 빼는 까닭은 예배의 전통에 따라 주일은 금식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부활절 계산법은 325년 니케아 회의에서 확정되었다. 동·서교회가 다른 날로 지키는 성탄절과 달리 부활주일은 세계교회가 일치하여 지키고 있다. 부활절기는 부활주일부터 성경강림주일 전날까지이다. 성령강림주일을 흔히 오순절이라고 하는 까닭은 부활주일부터 성령강림주일까지 날 수로 50일이기 때문이다.

사순절은 말 그대로 40일간을 뜻한다. 40일은 대략 1년 365일의 십일조에 해당하는 날 수로 6세기 그레고리우스 대제는 1년의 십분의 1을 하나님께 바치라고 가르쳤다. 사순절 기간은 처음에는 무덤에 머물던 40시간으로부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성경에서 40이란 숫자는 매우 중요한 의미로 사용된다. 예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40일(마4:2) 동안 광야에서 금식하시며 시험받으셨다. 우상의 권력과 맞서 싸우던 엘리야가 하나님과의 만남을 준비하는 시간도 40일(왕상19:8)동안 이었다. 요나가 니느웨성을 향해 선포한 40일(욘3:4)이란 기간은 하나님의 집행유예시간이었다. 또 노아가 겪은 40일(창7:17)간의 홍수는 인류에게는 심판의 깊은 밤이었으나 그에게는 구원의 새벽이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생활 역시 꼭 40년(신2:7)간이었다. 이 기간은 내내 고통스러웠으나 새 세상을 향한 해방의 행진기간이었다.

사순절을 수요일에 시작하는 까닭은 수요일은 예로부터 금요일과 함께 기독교의 금식일로 지켜왔기 때문이다. 이날부터 교회에서는 참회와 경건의 뜻하는 보라색으로 강단색을 장식한다. 재의 수요일에는 전 해의 종려주일에 흔들었던 나뭇가지를 태워 재로 만들었다가 머리에 뿌렸다고 전해진다. 초대 교회에서는 회개를 의미하는 표시로 재로 이마에 십자가를 긋고, 회개의 날을 선포하였다. 재는 다양한 뜻을 담고 있다. 먼저 재는 회개를 뜻한다. “굵은 베 옷을 입고 재 위에 앉으니라(시90:3).” 또한 재는 인생의 무상함을 상징한다.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시 90:3)”. 한편 재는 겸비함을 의미한다.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막기 위해 사정할 때에 자신을 겸손히 낮추었다.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 나라도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창 18:27)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희생을 기억하고 하루하루 대속의 은총에 감사하며 지내는 40일 간은 믿음의 순례기간이다.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은 이 날부터 부활절까지 욕망을 절제하고 일상생활 속에서 경건을 회복하는 신앙의 수련기간을 갖는다. 기독교 경건주의 전통은 영국의 청교도, 프랑스의 칼빈파인 위그노처럼 엄격한 금욕과 청빈을 강요하였다. 보기를 들어 하나님의 이름을 불경하게 부르는 일은 물론 안식일을 범하는 일, 댄스, 발레, 연극, 고리대금, 어음거래, 환금업, 연회와 술 취하는 일, 주사위 놀음, 호화롭게 옷 입는 일 따위를 금지하였다. 성경에서는 명확하게 지적하고 있지 않으나 신앙생활의 금지규칙으로 정하는 것을 ‘아디아포리즘’ 또는 ‘프레찌시스무스’라고 한다.

사순절의 경건생활은 일상의 쾌락과 관련하여 그 경건의 모습이 더욱 돋보인다. 그것은 일상의 습관을 ‘포기’하는 실천을 의미한다. 유럽과 남미의 세계적 축제인 카니발은 사순절의 전통과 관련 있다. 카니발은 해마다 11월 11일 11분에 시작한다. 한겨울 내내 축제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던 카니발은 재의 수요일을 이틀 앞두고 최절정에 이르게 된다. 로젠 윌요일에 최대의 성황을 이루는 카니발은 이날을 고비로 막을 내리면서 이튿날 화요일에는 사순절의 밤을 맞이한다. 가장 소란하고, 흥청대는 카니발과 가장 조용하고 경건한 재의 수요일은 이렇게 극적으로 대비되기 때문에 사순절의 의미를 더 구체적으로 실감시켜준다. 카니발은 이름 그대로 집에 저장해둔 고기를 먹어 치우는 전통 절기이다. 우리말로 사육제라고 번역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원래는 로마의 농업신 사투르누스의 축제였는데 나중에 기독교에서 받아들인 것이다.

사순절 기간의 경건생활 캠페인을 독일 개신교에서는 ‘일곱 주간의 포기’라고 부른다. ‘일용품-생명을 위한 수단’이란 주제로 벌이는 사순절 경건생활운동은 술은 물론 초콜릿 등 달콤한 군것질 금지, 육류 소비 축소, 텔레비전 오락 프로그램 시청 절제 그리고 과도한 취미생활과 고질적인 습관 중단 및 고치기에 힘쓰는 일이다. 독일 교회력에 따르면 여섯 번의 사순절 주일은 각각의 이름이 있다. 첫째 주일은 인보카비트(Invokavit)로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시편 91:5)라는 뜻이며, 둘째 주일은 레미니스제레(Reminiszere)로 “기억하옵소서.”(시편 25:6)라는 뜻이고, 셋째 주일은 오쿨리(Okuli)라고 하는데 “나의 눈이 늘 주께 향하나이다.”(시편 25;15)라는 뜻이다. 넷째 주일은 라에타레(Laetare)로 “너희는 예루살렘과 함께 즐거워하라.”(시편 66:10)는 뜻이며, 다섯째 주일은 유디카(Judika)로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시편 43:1)라는 뜻이다. 각각의 단어는 라틴어 초입송의 첫 단어를 가리킨다. 여섯째 주일은 종려주일, 또는 고난 주일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사순절(四旬節. Lent)의 뜻 

‘사순절’ 기간은 부활주일 전 일부터 소급하여 40일 간의 기간으로 산정한 것인데, 속죄일로 명명된 재(灰)의 수요일(Ash Wednesday)을 첫째날로 시작된다.

사순절(四旬節. Lent)의 개념은 교회사적으로 오랜 기간의 변천 과정을 거쳐 확정된 것인데, 예수님의 40일 간의 광야의 금식과 시험을 받던 수난을 기억하고 그 정신에 동참하기 위하여 제정된 것이 직접적인 배경이었고, 모세의 시내산 40일 간 금식과 엘리야의 40일 간의 금식, 이스라엘 사람들의 40년 간의 광야생활 등이 간접적인 배경이 되어 부활절 전에 행해지는 40일 간의 금식과 기도하는 기간으로 일명 제기(齊期)라고도 하는 기간을 말한다.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사순절은 3세기까지 부활절을 예비하기 위한 금식기간은 대체로 2~3일을 초과하지 않았으나 40일 간을 가리키는 용어 ‘테사라코스테’라는 말의 최초 언급이 니케아 교회법(A.D 325. 교회법 5조)에 언급된 것에서 그 기간을 주목할 수 있는데, 본래는 실제 금식기간을 6주로 하여 주일을 제외하고 36일이었으나 여기에 4일을 추가하여 40일(四旬)이 되었고 ‘그레고리우스’ 교황 때부터 재(灰)의 수요일을 사순절의 시작 일로 잡아 엄격히 지켜왔다.

‘사순절’은 기독교 개혁 이전의 가톨릭 교회를 중심한 교회사적 절기로 볼 수 있는데 이 절기를 물리적인 답습(踏襲)으로 고행주의나 또는 금욕주의적인 발상에서 형식적인 재현을 위한 관점에서라면 하나님의 구속사와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와 은혜언약의 통전성(通典性)에서 볼 때 옳지 않다.

사순절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되새겨 동참하며 경건한 신앙생활을 위한 것이라면 물리적 상황적으로 지킬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대속적 고난의 참 정신을 실천적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해야 하고 이웃과 공동체에서 그 정신을 구현해야 한다.

기독인들의 전 삶이 사순절의 참 정신을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옳을 것인 바 특별히 절기화하여 그 정신을 재확인하고 영성을 가다듬을 수 있는 계기를 가진다는 의미는 큰 것이다.

그러나 형식주의에 입각하여 날수의 채움이나 고난을 형상화하여 프로그램화에 중점을 두고 절기의 내재적 정신을 찾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가해한 자를 원망 없이 용서하고, 인류의 사랑을 저버리지 않고, 고통을 참으시고 하나님의 뜻을 완성하신 십자가의 참 정신을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내 이웃에게 실천하는 것이 주님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순절은 십자가 정신에 참예하고 실천하는 영성을 일깨우는 은혜의 기회가 되기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부활절 후 40일  / 예수님의 승천일

부활절 후 40일째 되는 날은 "예수님의 승천일" 입니다.
이 날이 예수님의 승천일이 되는 이유는 아래의 말씀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 1-3절 "1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2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3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서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이 말씀에서와 같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과 함께 40일 동안 계셨다는 말씀으로 인해 오늘날까지 부활절 후 40일을 계수하여 그 날을 "예수 승천일"로 기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 9-11절의 말씀을 보면,

"9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10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 보고 있는데 흰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11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 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 올라가실 때 곧 승천하실 때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 주고 있는데요, 승천하신 것이 끝이 아니라 하늘로 올리우신 그대로 '다시 내려오실 것이다(=재림)'라는 약속 또한 우리에게 해주시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하늘로 올리우신(=승천하신) 예수님은 어디에 계시고 어떤 일을 하고 계실까요? 성경은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3장 22절 "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

히브리서 12장 2절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로마서 8장 34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 하시는 자시니라."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현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시고, 우리를 위하여 기도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참고 견딜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항상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해 주고 계십니다.

누가복음 22장 31-32절 "31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32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항상 우리를 위하여 기도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담대히 믿음으로 자신과 형제들을 굳게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뒤로 물러가지 말아야 할 것은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곧 다시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오셔서 우리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먼저 죽은 자들과 함께 공중으로 끌어 올려 예수님을 영접하게 하시고 그리고 항상 예수님과 함께 있게 하실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17절 "16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이 말씀이 "소망없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큰 소망이 됩니다. 예수님의 강림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던 날에 흰옷 입은 두 사람을 통해서 이미 말씀하셨던 내용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약속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이,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예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 끝까지 참고 견딜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생각에는 지금의 삶이 오래갈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모든 육체를 풀의 꽃으로 비유하셨습니다(벧전1:24-25).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조금만 참고 견디면 예수님께서 약속대로 반드시 강림하여 우리를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3장 11-13절 "11...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우리는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베드로전서 1장 7-9절 "7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8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9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023년 사순절 7주간 기도학교

제1주 / 왜 기도하는가?

1)왜 기도하는가?
요일 5:14-15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기도는 신앙 생활의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요소입니다. 기도 생활에 승리하는 사람은 신앙
생활과 나아가서 인생을 승리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기도를 실패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응답받는 기도를 할 수 있을까요? 마음 문을 열고 다음의 말씀들을 살펴
보고 먼저 왜 기도해야 하는지를 알아 봅시다.

1. 기도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요 14:13-14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2. 하나님께서 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시 65:2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
3. 성도에게 영적 만족을 주기 때문입니다.
고후 3:5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
4. 성도의 영혼을 지켜 주기 때문입니다.
마 26: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5.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살전 5:16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
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제2주 / 무엇을 기도하는가?


약 4:2a-3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기도하는 시간은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입니다. 세상에서 사람을 만나 이야기할 때도 예의를 지켜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과 대화를 나눌 때에도 지켜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하나님과 대화할 때 어떤 것을 화제로 삼아야 할 것인가, 즉 무엇을 기도 할 것인가를 살펴봅시다. 하나님은 자녀의 바람직한 기도 제목에 기뻐 응답하십니다.

1.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마 6:9-10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2. 죄의 용서를 기도합니다.
죄를 고백하며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에서 실패한 일이 있으면 그 회복을 기도합니다.
마 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마 6:14-15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벧전 3:7
남편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3. 일용할 양식을 기도합니다.
이기적이거나 필요 이상의 것을 바라는 기도가 아니라 말 그대로 "일용할 양식"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기도입니다.
마 6:11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4. 성령 충만하심을 간구합니다.
하나님 뜻에 맞는 기도를 합니다.
요일 5:14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제3주 / 어떻게 기도하는가?


고전 14:40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

당신은 기도할 때 어떻게 기도하십니까?
기도할 때 우리는 몇 가지 절차를 꼭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절차를 기억하면 중언부언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에 너무 의지하면 자칫 형식적인 기도가 될 수도 있습니다.
"마음 없이 말로만 하는 기도보다 말은 없어도 마음을 드리는 기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1. 도의 순서 - ACTS
Adoration (찬양, 경배) -+
Confession (고백, 회개) +- 나 하나님
Thanksgiving (감사) -+
Supplication (간구) - 하나님 나
2. 하나님을 경배 (Adoration)
대상 29:11-12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3. 하나님께 죄를 고백 (Confession)
시 66:18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4. 하나님께 감사 (Thanksgiving)
빌 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5. 간구 (Supplication)
약 5:16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막 11: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외식하지 말라(마6:5) 열심히 간구하라(약5:16)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라(요일5:14-15) 쉬지말고(살전5:17)


제4주 / 누구에게 기도하는가?


마 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기도는 누구에게 하는가? 당연한 질문 같지만 하나님께 드려지지 않는 기도가 분명히 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먼저 확실하고 분명하게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듣고 계신다는 확실하고도 생생한 의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 기도할 때 하나님을 잊어 버리고 있다면 안타깝게도 그것은 이미 우리의 독백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1.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히 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2.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기도합니다.
엡 5 :20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히 4:14-16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딤전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3. 성령의 도우심으로 기도합니다.
롬 8:26-27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엡 6:18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유 1:20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제5주 / 언제 기도하는가?

언제 기도하는가?
시 5:3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그리스도인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하므로 생명의 양식을 얻을 수 있다.
날마다 일정한 시간을 경건의 시간으로 마련하여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를 계속해 나가야 한다.
당신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하여 일정하게 마련할 수 있는 시간은 언제인가? 아침인가? 낮인가? 혹은 저녁인가?

1. 일정한 시간을 정합니다.
각자의 사정에 따라 다를 수 있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날마다 일정한"시간을 정하는 것입니다.
사 40:30-31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 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2. 새벽 시간에 기도합니다.
막 1:35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시 46:5
하나님이 그 성중에 거하시매 성이 요동치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잠 3:9-10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3. 바쁜 시간을 피합니다.
요 4: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4. 계속적으로 기도합니다.
살전 5: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행 1:13
들어가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 베드로,요한,야고보, 안드레와 빌립,도마와 바돌로매,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셀롯인 시몬,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제6주 / 어디서 기도하는가?


마 6: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공부할 때 어디서 하면 효과가 좋습니까? 혼자서 하는 것이 좋습니까? 아니면 여럿이 함께 모여 하는 것이 좋습니까? 기도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과 은밀하게 만날 수 있는 곳을 찾으십시요. 거기서 하나님을 나 홀로 만날 수도 있고, 여럿이 함께 만날 수도 있습니다.
단, 다른 사람은 필요없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과 기도하는 사람만 있어야 합니다.

1. 홀로 기도할 수 있는 곳
행 16:25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행 10:9
이튿날 저희가 행하여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시간은 제 육시더라
단 6:10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2. 함께 기도할 수 있는 곳
행 1:13-14
들어가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 베드로,요한,야고보, 안드레와 빌립,도마와 바돌로매,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셀롯인 시몬,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행 21:5
이 여러 날을 지난 후 우리가 떠나갈새 저희가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거늘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눅 9:28
이 말씀을 하신 후 팔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3. 결론은


제7주 /  기도 응답의 확신
 
요 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1. 우리의 기도가 응답받는 이유
롬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2. 응답받는 기도의 조건
요일 3:22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롬 12:1-2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
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
별하도록 하라
마 18:19-20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마 15:27-28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3. 응답되지 않는 기도의 원인
잠 28:9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
약 4: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시 66:18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고난주간 일정
고난주간 묵상자료

(십자가의 길)

고난 주간은 “영적으로 성숙한 신앙생활”에 중점을 두고 맞이한 절기이기에 그 어느 해 보다도 의미가 있고 뜻이 있다고 봅니다. 이번 고난 주간에는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 고난 받으시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먼저 자신의 죄를 참회해야 하고, 하나님의 섭리에 감사하며, 영적으로 성숙한 삶을 살고자 하는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이 자료는 교우들이 고난의 한 주간을 살아가시면서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 행하신 한주간의 사역을 묵상하면서 의미 있게 보내고자 정성껏 준비된 자료입니다. 요일별로 자료를 읽고 묵상하시면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주님의 그 큰 은혜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제 1 일 (고난(종려)주일)
예루살렘 입성
(마21: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마21:1-11, 막11:1-11, 눅 19:28-40, 요12:12-19)

갈릴리와 베뢰아에서 전도 사역을 마치신 예수님은 유월절 행사에 참여키 위해, 그리고 구약 시대의 예언자인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슥9:9)대로 수난과 죽임을 당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향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평화와 겸손을 상징하는 나귀를 타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공공연히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지만 눈에 보이는 메시아 왕국을 세우실 것이라는 그릇된 기대를 갖고 있던 수많은 사람들은 주님의 뜻과는 다른 의미의 호산나(지금 곳 구원하소서)를 외치며 환호하였습니다.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신 예수님은 성전으로 가셔서 모든 것을 둘러보시면서 웅장하고 아름답게 장식된 성전 속에서 인간의 위선, 탐욕, 가증스러움, 이기주의의 죄악이 가득 차 있음을 보시게 됩니다. 예수님 앞에 보여진 가증스러움은 다음날 채찍을 드심으로 동안의 결과가 나타나게 됩니다.


1. 수난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음을 아시면서도 공공연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예수님의 믿음과 용기를 보면서 나의 믿음을 돌아 봅시다.
2. 오늘 주님께서 나와 나의 가정, 우리 교회에 찾아 오셔서 보신다면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


제 2 일 (월요일)
성전을 청결케 하심

(마21:12)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고”
(마21:12-17, 막11:15-19, 눅19:45-48, 요2:13-22)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도중에 길가에 잎사귀가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열매를 따먹고자 하였으나 얻지 못하시고 그 나무를 저주 하셨습니다. 이는 무화과로 상징되던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심판을 예고하는 행위였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는 명절 때 희생 제물에 필요한 짐승, 새, 포도주, 소금, 기름 등이 매매되고 있었고, 지역 화폐를 성전 화폐로 교환하여 주는 환전 행위도 성행하였습니다. 그래서 성전은 완전히 시장과 같은 장소가 되어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시장화 되어 버린 성전을 다시 기도와 예배의 경건한 장소로 바꾸시기 위해 매매하는 자들을 모두 내어 쫓으시며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 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막11:17)”라고 하셨습니다. 이 사건은 성령이 거하시는 전인 우리 자신과 주의 몸된 교회, 그리고 구원의 역사를 이루실 이 세상을 성결케 하시려는 주님의 계획 이셨습니다.



1. 나의 신앙은 잎만 무성하고 열매 없는 무화과 나무와 같지는 않습니까?
2. 하나님의 전을 참으로 기도하는 전으로 만들기 위해 나는 어떤 신앙의 태도를 가져야 할까요?


제 3 일 (화요일)
과부의 두 렙돈 교훈

(막12:43)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 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막12:41-44, 눅21:1-4)
서기관이 예수님을 찾아와 “계명 중에 첫째 되는 계명이 어떤 것이냐?”는 물음에 주님은 “첫째,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연보 궤를 대하여 앉으셔서 그들이 헌금하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때가 마침 유월절이라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또한 많이 헌금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때 두 렙돈(가장 작은 히브리 화폐단위)을 헌금하는 과부를 보시고는 제자들에게 이르시기를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 궤에 헌금한 모든 사람보다 많이 헌금 하였다”라고 칭찬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다른 사람들은 많이 있는 가운데서 일부를 하였지만 과부는 없는 가운데서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드렸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과부의 적은 헌금을 높이 평가함으로서 신앙의 핵심은 화려한 외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실한 중심과 순수한 본질에 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1.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헌금은 어떤 것일까요?
2. 다음 말씀을 다시금 묵상하여 보십시오
“많은 사람들은 물질로만 바쳤지만 그녀는 마음으로부터 바쳤습니다. 이는 습관을 좇아 드리는 것과 사랑으로 드리는 것의 차이입니다.”


제 4 일 (수요일)
한 여인의 헌신

(막14:8)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마26:6-13, 막14:3-9, 요11:45-53)

오늘은 베다니의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어 드린 사건이 있는 날입니다. 마리아는 자기가 하는 행동에 대해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걱정과 수치심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담하게 향유 한 병 모두를 예수님의 발에 부어 드렸습니다.(향유 한 병은 300데나리온의 값어치가 있는 것으로 노동자 한사람이 1년 동안 노동하여야 얻을 수 있는 금액) 그리고는 자기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렸습니다.
우리는 이 여인에게서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사랑의 충동을 보게 됩니다. 제자들의 불평과 비난 속에서도 예수님께 향한 마리아의 사랑은 그칠 줄 몰랐습니다. 이일을 주님은 칭찬하시며 복음이 증거 되는 곳마다 이일도 증거하라 하셨습니다.
우리도 마리아처럼 교만과 허울의 옷을 벗어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을 향한 믿음의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1. 내가 귀히 여기는 것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며 주님을 위하는데 헌신하는 마음으로 드릴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2.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하고 자신의 체면을 생각하여 주님의 일을 하는데 주저한 적은 없으시나요?
3. 마리아가 만일 향유값(1년 품삯)을 생각하고 망설였다면 주님의 장례를 준비하는 영광을 얻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나의 욕심 때문에 주님께 대한 봉사의 기회를 잃 어버린 적은 없나요?


제 5 일 (세족 목요일)
최후의 만찬

(막14:22-24) “··· 받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마26:17-30, 막14:22-25, 눅22:7-20, 요13:26-30)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 가룟 유다로부터 배반당하시던 날 밤에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식사를 나누고자 하였습니다. 이때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떠와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수건으로 닦아주었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행동은 종으로서 봉사하는 모습을 본으로 보여주심과 더불어 오늘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도 그같이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드셨습니다. 이때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 주심으로 십자가 위에서 자기 몸을 희생하여 온 인류의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 되실 것을 말씀으로만 아니라 실물 교육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잡히시기 직전 슬픔과 심한 고민에 빠진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면서 제자들에게 “깨어 함께 기도하자”고 몇 번이고 부탁하였지만 제자들은 잠만 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교회의 지체인 우리들 모두가 예수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며 깨어 있어 당신을 본받고 증언할 것을 원하십니다.



1. 나는 예수님과 함께 살겠노라 하면서 실제로는 제자들처럼 잠만 자고 있지는 않습니까?
2. 오늘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봉사 할 수 있는 길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구한 예수님의 기도와 나의 기도를 비교하여 보십시오.


제 6 일 (성 금요일)
십자가에 달리시고 운명하시다

(눅23:46)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
(마27:45-56, 막15:16-41, 눅23:44-49, 요19:28-30)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남김없이 자기를 바치는 사건이자 인류를 위한 대속의 사명을 온전히 이루는 사건이었습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말씀 일곱 가지를 명상함으로서 하나님의 섭리와 지극하신 사랑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1. (눅23:34)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십자가에 못을 박고 침밷고 창으로 찌른 자도, 능욕하고 저주하고 비웃던 자도, 우리 주님은 용서하셨습니다.
2. (눅23:43)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회개하는 죄인에게 하나님은 새로운 희망을 주십니다.
3. (요19:26-27)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
인간 사이에 있어야 할 돌봄과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4. (마27:46)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우리의 구원과 영생을 위한 예수님의 거룩한 절규입니다.
5. (요19:28) 내가 목마르다.
인간들의 사랑과 헌신과 충성을 요청하시는 갈증입니다.
6. (요19:30) 다 이루었다. 거룩한 희생으로 모든 죄를 속하였다는 하나님 어린양의 승리의 외침입니다.
7. (눅23:46)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며 살아오신 예수님의 삶의 결론입니다.


1. 용서함 받은 우리도 남을 용서하며 살아야 합니다.
2. 예수님의 제자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가야 하는 것을 아시나요?


제 7 일 (성 토요일)
무덤 속의 예수

(막15:46) “요셉이 세마포를 사고 예수를 내려다가 이것으로 싸서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어 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으매”
(마27:57-61, 막15:42-47, 눅23:50-56, 요19:38-42)

유대인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사람이자 산헤드린의 회원인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지금껏 주님을 향한 자신의 신앙을 노출시키지 않았으나 예수님의 죽음을 통하여 예언이 성취된 것과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이 바로 메시아라는 사실을 재차 확인하고는 자신의 높은 지위와 명예에 치명적인 손실이 가해질지도 모르는 행동을 담대히 행하였습니다.
즉 요셉은 모든 눈총을 무릅쓰고 자신을 예수와 가까운 자로 자처하며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인도 받아 자기를 위해 만들어 놓은 무덤에 장사지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덤에 계셨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가 다시 살아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처럼 죽었고 그리고 무덤속에 있었습니다.
예수님게서는 죽음을 이기시고 악을 물리치시기 위해 무덤에 묻히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덤의 어두움을 제거 하셨으며, 그 공포를 영원히 쫓아 버리셨습니다. 죽음이 그 쏘는 살로 그리스도를 상하게 했지만 부활하심으로 이제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죽음이 그 위력을 끼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1. 나는 남들이 주님을 외면할 때도 아리마대 요셉과 같이 용기 있게 주님을 찾고 따를 수 있나요?
2. 죽음이 있었기에 부활이 있었습니다. 무덤속에 장사 지내야 할 내 죄의 목록을 생각해 보세요.


제 8 일 (부활주일)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삶

(마28:5-6)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마28:1-7, 막16:1-13, 눅 24:25-35)

오늘은 우리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이자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신 가장 기쁜 날입니다. 금요일에 장사지낸바 되셨던 예수님은 3일 만에 다시 살아 나셨습니니다.
우리 교우들은 금년도 부활절을 맞이하여 하나의 절기로 지나쳐 보내지 마시고 부활을 자신이 새롭게 체험하며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삶을 살아가시기 원합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삶은;

1. 새 힘과 용기를 얻어 사는 삶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목격하고 절망과 실의에 빠져서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들은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 새로운 용기를 얻어 복음의 일군이 되었습니다.

2. 과거를 씻고 새 출발을 하는 삶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초대 교회 교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지금까지 숨고, 무서워하고, 절망에 빠졌던 과거를 떨쳐 버리고 새로운 각오로 출발하였습니다.

3. 참 생명을 발견한 삶을 살았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주검을 향하여 갔으나 생명을 발견하였습니다. 곧 시체를 향하여 올라갔으나 시체는 발견하지 못하고 빈 무덤과 생명이 가득찬 부활의 주님을 발견하였습니다.
4. 가치관의 전환이 일어났습니다.

삶에 있어서의 우선순위, 관심사가 내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바뀐 삶을 살아가는 삶을 말합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체험은 제자들이 지금껏 느껴 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열어 주었습니다. 부활절을 맞이한 우리 교우들은 한사람도 빠짐없이 부활의 주님을 만남으로 새로운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골로새서 3:1-2)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을 향하여

다가오는 이번 사순절은 우리에게 축복이 될까요?

- 요한 에른스트 폰 홀스트

The Crucified Is My Love: Morning and Evening Devotions for the Holy Season of Lent,
요한 에른스트 폰 홀스트,  무료 영문 전자책을 내려받으실 수 있습니다.

재의 수요일 아침

하나님의 어린 양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 1:29

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창세기 22:7-8) 선지자 이사야는 잃어버린 세상을 위한 희생제물로 주 하나님께서 준비하실 어린 양에 대해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53:6-9>)

세례 요한은 지금 비옥한 요단 골짜기에 서 있습니다. 그의 눈은 형형히 빛나고, 그의 가르침은 번개가 치듯 날카롭습니다. 각계각층의 사람들로 뒤섞인 무리들은 제자들에게 둘러싸인 요한의 설교를 듣고 있습니다.

요한은 갑자기 입을 다뭅니다.  당시에는 사람들에게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나사렛 예수가 군중들의 시야 앞으로 걸어옵니다. 요한은 그를 바라봅니다. 하나님의 영이 그 위에 임하셨고, 요한은 순전한 그 방랑자가 수천 년 동안 사모하며 기다리던 약속된 여호와의 종이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구세주임을 알아챘습니다.

이러한 인식에 압도된 요한은 다가오는 그 사람을 가리키며 중대한 말을 외칩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이 선포를 통해 요한은 가장 위대한 선지자로 일컬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심오한 말입니까! 요한은 예수님의 신성한 사명과 그분의 가장 깊은 본성, 또 그분의 뜻과 사역을 파악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천국이 활짝 열린 것을 알아보았습니다. 허나 인류의 죄악으로 인한 저주도 보았습니다.  요한은 그 저주가 이 한 사람의 어깨에 지워진 것을 보았습니다.  이분은 대속의 죽음으로 그 짐을 인류에게서 걷어 가셔서 몸소 지시고, 잃어버린 세상에 자유를 주시고 변화된 새 세상을 찾게 해 줄 분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예수님이 순전한 어린양이었습니다.  아무도 그를 어떤 죄명으로도 고발할 수 없으며,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친히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증언하셨습니다 (마태복음 3:17). 그는 또한 죽기까지 인내하는 어린양이셨으니, 곧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는 피를 흘리며 십자가에 달려 있는 동안 하나님께 자기의 원수들을 용서해 주시기를 기도하신 순한 어린양이셨습니다.   범사에 그는 하나님의 어린양, 거룩한 희생양이시니 그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온전해 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은 영원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시고 대속하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는게 마땅하지 않습니까? 감사하며 신실하게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그분의 고통과 죽음을 되새기며 기념하는 시간이 시작됩니다. 다가오는 이번 사순절은 우리에게 축복이 될까요? 이미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순절을 겪었고 또 얼마나 쉽고 가볍게 그것을 지나쳤습니까! 다가오는 이번 사순절이 우리가 맞이할 마지막 사순절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어린양 없이 죽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보호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옛 본성에서 나오는 모든 저항을 제압하시고 우리의 영원한 구원을 위해 이 사순절을 축복해 주시기를 빕니다.

재의 수요일 저녁

누가 세상의 죄를 없애는가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 1:29

요한의 이 증언은 복음 전체의 핵심이자 정점입니다. 복음의 심장이요 별입니다.  피비린내 나는 죽임에 의해 요한의 입은 폐쇄당했지만, 사도들은 더 더욱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이 사도들 또한 죽었으나 복음은 모든 세기에 걸쳐 울려 퍼지며 사도들을 거룩하게 합니다. 그리고 오늘날 주님의 교회가 성만찬으로 모일 때, 교회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을 바라보며 한 목소리로 노래합니다. "세상 죄를 짊어 지신 하나님의 어린양이여,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우리에게 평화를 내리소서!"

우리는 종종 우리 자신의 일과 근심, 고통때문에 짓눌릴 때가 있는데 만약 우리의 죄와 그로 인한 책임의 무게를 우리 스스로가 전적으로 감당해야 한다면 영원한 암흑에 처박히고 말 것입니다.  주님께서 찢기고 피나는 어깨로 골고다 언덕까지 지고 가신 십자가 나무는 심히 무거웠으나 저주받은 그 나무에 얹힌 보이지 않는 짐은 무엇과도 비할 수 없는 무게였습니다. 하나님의 어린양 위에 놓여진 것은 한 사람의 죄가 아니라 모든 인류의 죄, 곧 온 세상의 죄와 그 책임, 사형선고였습니다. 사순절은 우리에게 이 어린양을 바라보라고 권면하며, 요한의 “보라”는 간곡한 외침은 우리를 일깨웁니다. 

한때 광야에 있던 이스라엘 자손이 사나운 뱀에게 물렸을 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놋뱀을 올려다봤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짐을 지고 대속하신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을 바라볼 것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 더 충만하고 깊고 감사한 믿음으로 그분을 바라볼 것입니다. 그러자면 새롭고 순수한 눈이 필요합니다. 우리 마음의 중심, 가장 깊숙한 곳에서 구세주의 고통을 깨달아 이해하길 원한다면 이 새롭고 순수한 눈을 주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그런 눈과 영혼으로 고난당하시는 구세주를 바라보십시오. 어두운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죽음과 사투를 벌이며 핏방울을 쏟으시는 그분을 보십시오. 잔혹한 사형 집행인의 채찍질과 침 뱉음과 가시관을 침묵으로 견디며 재판장에 서신 주님을 보십시오.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 아래에 서십시오. 그리고 죽어가는 그분이 하시는 마지막 일곱 마디 말씀을 들으십시오. 상처받아 피로 얼룩진 머리, 극심한 고통으로 떨리는 팔다리, 눈물로 가득 찬 그분의 눈을 마주 하십시오.

더 깊이 들여다보십시오. 예수님의 마음, 아버지께 대한 그분의 순종,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연민. 그분의 마음은 산산이 부서져 숨을 거두시고 고개를 떨구셨습니다. 당신의 마음도 고통과 사랑으로 깨지고, 감사의 눈물이 넘칠 때까지 주님을 바라 보십시오. 이렇게 영혼으로 주님을 바라보고 마음에 품는 모든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큰 교회를 이 땅에 세우게 되며 그 교회는 장차 영광의 날에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이 어린양을 영광스럽고 영원한 교회의 왕으로 다시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런 후 교회는 새 언약의 예언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계 7:17)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최근에 사순절을 비롯한 교회력의 절기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고 있는 것은 20세기 후반에 일어나기 시작한 예배갱신운동과 교회력 복원과 관련되어 있다. 특히 가톨릭의 “예배복고운동”에서 시작된 예배갱신운동은 초대교회의 예배회복이라는 과제를 통해 개신교에도 많은 자극을 주었다. 문제는 문화적 흐름에 맞추려는 이 예배갱신운동을 계기로 중세로부터 내려오는 교회력에 따른 절기와 행사나 축제를 복원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는데 있다. 이 뿐만 아니라 절기나 행사에 상징적으로 사용되는 색의 선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교회 전통을 되살리려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이런 움직임은 특히 에큐메니칼(Ecumenical) 운동에 참여하는 교단의 실천신학자들 사이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들은 종교개혁이 교회력과 축일을 폐지한 것을 마치 어린아이를 목욕물과 함께 내어다 버린 것인 양 비유하기도 한다. 이들은 종교개혁이 중세의 예전과 교회력과 예배의식을 버린 것이 예배의 통전성을 훼손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런 ‘예배복고 운동가’들의 주도하에 중세의 전통을 다시 도입하여 예배를 활성화시키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는 것이다. 이 흐름에 따라 교회에서도 예배가 변화하면서 여러 가지 혼란을 불러왔기에, 지도자들은 이에 대한 분명한 목회적 지침과 방향 제시가 필요하다.

 

사순절에 대한 관심은 교회력과 절기의 전통을 되살리려는 보다 큰 움직임의 일환이다. 예배를 비롯해 기독교가 문화의 흐름에 대해 무관심하고 도외시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지나치게 문화에 적응하려는 경향도 마찬가지 위험이 있다. 이러한 극단을 오가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 예배에 관한 성경적이며 신학적 원리를 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 다음 글은 개혁주의 입장에서 보는 사순절에 대해 칼빈의 기독교강요, 개혁주의 신앙고백, 그리고 청교도 신학과 더불어 다수의 출판물과 인터넷 기사들을 참조하여 작성한 것이다.

 

1. 고대 교회의 교육중심의 사순절


고대 교회의 사순절은 세례식과 연관되어 있다. 세례를 받을 사람은 일정 기간 동안 기독교 신앙의 내용을 배운 후에 부활절 전날 저녁에 세례를 받았다. 그들은 3년 정도의 교육을 받은 후에 세례를 받고서 교회에 가입하였다. 그런데 그들은 세례를 받기 전에 금식하고 기도하면서 준비하였으며, 세례 받을 사람뿐 아니라 그들을 맞이할 교우들이 함께 금식하기도 하였다. 어떤 교회는 세례를 받기 전에 40시간 동안 금식하도록 하였다. 여기에서 사순절(quadragesima, ‘40번째’라는 뜻으로 ‘40시간’ 혹은 ‘40일’을 가리킴)이라는 말이 나왔다. 또 어떤 교회에서는 두 주간 동안 부분적인 금식과 기도로 준비하도록 하였다. 이들이 세례를 위한 교육을 받는데 있어 기간이나 방식이 달랐다는 것은 그에 대한 사도적인 전통이 부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양한 교육들이 있었지만, 부활절 때에 시행될 성례를 위하여 수제자들을 교육하고 금식과 기도로 준비함으로 그들은 사순절을 실행하였다.

 

이런 사순절이 고대 교회에서 정착된 것은 콘스탄티누스 황제(Flavius Constantinus, 재위 306-337)가 기독교를 공인한 313년 밀라노 칙령 이후의 일이다. 4세기의 교회들은 부활절 전의 일곱 주간 동안 매일 3시간의 세례를 위한 교육을 시켰는데, 기독교가 공인된 후에, 이런 시행은 제국의 전 지역으로 전파되었다. 325년에 열린 니케아 종교 회의에서는 사순절을 40일로 정하고 부활절에 있을 성례를 준비하도록 결정하였다. 이런 상황에 대해 모든 교회가 40일을 지킨 것은 아니고, 40일을 정하는 방식이 매우 다양했다. 어느 교회에서는 수난일 6주일 전부터 계산하기도 하였고, 또 어떤 교회는 8주일 전부터 금식을 하되, 토요일과 주일은 제외하고 일주일에 5일씩 금식이나 절식을 하였다. 또 다른 교회에서는 7주일 전부터 금식의 날로 정하고 그 사이에 있는 여섯 주일을 제외하여 40일을 맞추어서 시행하기도 하였다.

 

로마 교회의 '재의 수요일'로부터 시작되는 사순절

니케야 종교 이후로 정해진 사순절이 형식을 갖추고 모든 지역에서 실행된 것은 서로마 제국이 476년에 멸망하고 로마 교회가 교회와 세속의 모든 권리를 장악한 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로마 교회의 정치적인 기초를 놓았던 레오 대교황(Pope Leo I, 재위기간: 440-461)은 로마의 전통을 따라 주일을 제외한 6주일을 금식의 날로 정하여 36일을 지켰고, 7세기에 다른 교황이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the first day of Lent))부터 토요일의 4일을 더하여서 40일로 확정하였다. 동방 교회에서는 일곱째 주일 월요일부터 부활절 9일 전 금요일까지를 사순절로 지켰다. 동방 교회가 서방 교회보다 2일 먼저 시작하고 8일 먼저 끝났다. 동방 교회는 주일을 제외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방식으로 40일의 금욕 기간을 지킴으로 동서방교회가 공식적으로 사순절을 유지했다고 할 수 있다.

중세의 카니발 축제로서의 사순절

중세에서는 사순절이 게르만 족의 축제와 결합하면서 더 변질되기 시작했다. 해가 길어지는 시기에 그들은 3일 동안 사육제(謝肉祭, Carnival, ‘고기를 금한다’의 뜻)의 축제를 하고서 40일 동안 금욕하였다. 금욕의 방법도 지역마다 달랐다. 육류와 달걀은 금하고 빵만 먹는 지역이 있었고, 거기에 더하여 생선까지 허용하는 곳도 있었다. 또 다른 지역에서는 우유를 포함한 낙농제품의 모든 음식까지 금하기도 하였다. 또한 엄격한 금식을 행하기도 했지만, 낮에 한 끼만 먹고 절식하면서 기도하는 곳도 있었다. 이런 관습에 대해 사회학자들은 이러한 것이 춘궁기(春窮期)를 이기는 방식이었음을 설명한다. 사육제에서 큰 잔치를 하고 봄 농사를 준비하는데 처음 수확할 때까지는 먹을 것이 부족하기 때문에 절식을 하였고, 여기에다 종교적인 의미를 붙인 것이라는 것이다.

중세의 사순절은 고대 교회의 사순절에 비하여 매우 변질된 내용을 가졌다. 중세에서는 성례가 약해지면서 사회적 성격을 지닌 정교한 예식으로 발전하였고 따라서 이런 축제의 후에 있을 로마 가톨릭의 금식의 전통인 사순절 이후에는 사회적 범죄가 훨씬 더 기승을 부렸다. 개인이 하고 싶은 대로 범죄를 저지르다가 축제가 끝날 무렵 마지막 ‘재의 수요일(참회의 수요일)’에 이르러 성체성사(미사 중에 봉헌된 빵과 포도주가 축성 기도와 성찬 재정 말씀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몸과 피로 변화되는 거룩한 변화)를 통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죄책을 지울 절호의 기회를 갖는 시간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중세에서는 사순절이 시작하는 ‘재의 수요일’에 사람들은 이마에 재로 십자가를 그리면서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성당 앞에 나무 십자가를 세우고 자기의 죄를 써서 거기에 못 박기도 하였다. 수난의 금요일에 그 십자가를 짊어지고 행진하고 거기에 달려서 고통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 기간 동안에 수난극을 상연하였는데, 특히 예수님의 수난을 주제로 하는 연극을 상연하였다. 그들은 이런 행사들을 통해서 자기들이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기 공로를 가미한 미신적인 전통으로 자리를 굳힌 것이다. 사순절에 주님의 고난을 준비하고 참여한다고 하지만, 그들은 주님에게 초점이 맞추어진 것이 아니라 사람의 행위와 감정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주님의 수난을 기념하려고 금식한다고 하였지만, 사실은 자기들이 행하는 금식 자체가 강조되고, 수난극 자체가 강조되었다. 이것은 사람의 선행을 강조하려는 로마 교회의 신학과 직결되어 행위 구원까지 연관되어 진다고 할 수 있다.

종교개혁자들의 사순절 비판

1. 미신적 풍습에 대한 칼빈(Jean Calvin, 1509-1564)의 비판

사람의 전통이 아니라 오직 말씀만을 높였던 개혁자들은 사순절이 미신적이며 이방 풍속이 가미된 비신앙적인 실행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리스도를 따라서 고난에 동참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결코 주님의 고난에 동참함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람의 선행이 강조되었음을 칼빈은 지적하였다. 물론 고대 교회에서도 사순절을 ‘미신적으로 지키는 풍습’이 있어 왔다. 그들이 이렇게 해 왔던 것은 그들이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 특별히 봉사를 한다고 생각하였고, 그리스도를 거룩하게 모방하는 것이라고 하여. 지도자들이 이것을 권장하였기 때문이다. 칼빈이 성경대로 말하는 것처럼, 성경에 그리스도께서 금식하신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이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복음 선포를 시작하심으로써, 복음은 사람의 교훈이 아니고 하나님 나라에서 내려온 것임을 증명하시려는 것이었다(마 4:2, 기독교강요, 4권 12장 20절). 당시에 그리스도의 40일 금식을 모방하려는 것은 사람의 행위를 의지하는 일이기 때문에, 칼빈은 사순절 기간에 행하여지는 모든 것이 ‘미신적으로 지키는 풍습’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이런 실행이 하나님께서 주신 교훈을 믿지 않고, 사람의 행위를 의지함으로 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미신적이라고 평가했다. 칼빈은 다수의 고대 교부들을 인용하면서, 사순절에 대한 고대교회의 약점과 특별히 로마 교회의 그릇된 사순절 시행을 지적하였다. 그것은 사순절의 관행이 복음을 가리기 때문에, 그는 강력한 어조로 사순절 시행을 비판한 것이다.

2. 미사와 비슷한 실행에 대한 비판

중세 교회는 사순절 동안에 수난극을 상연하였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수난을 연극으로 재현한다는 것은 로마 교회의 미사와 맥락을 같이하는 전통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수난을 재현했다는 점에서 미사와 동일한 우상숭배이며 미신이라고 할 수 있었다. 로마 교회에서는 성찬의 떡과 잔이 사제가 축성(祝聖, consecratio)하는 순간에 실제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화체설(化體說, transubstantiation)을 가르쳤다. 그러나 개혁주의자인 칼빈은 로마 가톨릭의 화체설을 강력하게 비판하면서 “그들은 그리스도를 떡 속에 가둔다. 우리는 그와 반대로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끌어내리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신비는 천상적인 것이며, 그리스도와 우리가 연합되기 위해서 그를 지상에 끌어내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기독교강요, 4권 17장 31절). 로마 가톨릭에서 이야기하는 사순절은 그리스도를 떡 속에 가두고 기념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고, 성경적인 근거가 전혀 없다. 칼빈의 표현을 빌리면, 로마 교회의 사순절은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끌어내리는 신성모독의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에서 천주교에서 사순절을 미신적으로 지켜 나가는 것의 폐해를 지적한다. 그는 모든 종교적인 행위를 오직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해서 해야 하는데, 성경에는 사순절을 지키라는 규정이 없으므로, 이를 지키는 것은 성경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만든 미신적인 규례를 따르는 것이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그는 양심의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서 성경 가운데서 규정한 것만을 따라가야 한다는 양심의 자유를 분명하게 밝힌다.

3. 사순절 금식에 대한 비판으로 개혁의 기치를 든 츠빙글리(Huldrych Zwingli, 1484-1531)

1522년 3월 9일 츠빙글리는 당시의 취리히 시의 출판업자들과 함께 있었는데, 그들은 사순절 금식 전례를 깨고 소시지를 먹었다. 하루 종일 일해야 했기에, 그 벅찬 일을 감당하느라 스위스 소시지를 충분히 먹었다. 취리히 사제였던 츠빙글리는 그들의 행동을 묵과해 주었다. 사순절이나 금식 같은 인위적 절기 전통은 성경적인 타당성이 전혀 없기 때문이었다. 또한 성경이 신앙과 행습 문제에 있어 최종 권위이기에, 성경적인 바탕이 없는 사순절과 그 준수는 간과해 넘길 수 있는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한 달 후 츠빙글리는 [선택의 자유와 음식 고르기의 자유]에 관하여 설교했다. “...나는 사람들이 영원한 의에 도달하려 하기보다 더 악해져 가고 더 부패해져가는 시대의 위험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평민들은 사순절에만 참회를 하고 금식을 준수하고, 성찬을 하기만 하면, 일 년 내내 범사가 괜찮다고들 생각할 터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언제나 인식해야 하고, 우리의 삶은 경건해야 합니다. 우리가 금식철인 사순절 때에만 신경을 쓰면 충분하다고 생각할 때, 그것은 역행을 하는 셈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것에 대해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순절의 금식에 대하여 츠빙글리 중심의 취리히와 콘스탄츠의 가톨릭 주교단(Prince-Bishopric of Constance, 585년부터 1821년까지 존재함) 사이에 논쟁의 내용이 있다. 1522년 4월 7-9일 사흘간, (스위스-독일 국경도시인) 콘스탄츠의 주교가 보낸 대표단이 취리히에 도착하여 취리히의 사순절 금식 불이행 건을 놓고 시의 성직자들과 토론을 벌였다. 1522년 사순절 기간 중 츠빙글리는 사순절 육식금지 전통이 성경에 아무 근거가 없음을 보여 주는 설교를 했고, 이에 따라 그와 함께 했던 몇몇 형제들이 실제로 자유롭게 행동했다. 이것이 당국과의 갈등을 불러왔다. 콘스탄츠 주교는 강력한 대표단을 보내어 전통적인 금식을 준수할 것을 촉구했다. 츠빙글리 일동과 주교대표단은 취리히에서 만나 해당 이슈를 갖고 토론을 벌였다. 4월 9일, 행정관은 사순절 금식 준수 위반에 대한 금지 선언을 했고, 위반자는 처벌하겠다고 위협했다. 이에 대하여 츠빙글리는 4월 16일 자유로운 육식에 관한 논고로서 자기 방어를 했다. '선택과 음식의 자유'라는 이 논고는 그의 첫 저서이다. 그는 기본적으로, 이런 중립적 사안에 관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자유가 있고, 교회당국은 이 자유를 금할 어떤 권한도 없다는 사도바울의 입장을 취했다(고전 8:8; 10:25; 골 2:16; 딤전 4:1; 롬 14:1-3; 15:1-2),

이에 대하여 콘스탄츠 주교는 신성한 교회 규정을 방어해 달라고 권면하는 내용의 칙령을 5월 24일자로 취리히 시정부에 발부했으며, 이단적인 교리들의 확산을 막으라고 경고했다. 츠빙글리는 위기에 빠졌고, 거듭 암살협박을 받았지만, 용기를 잃지 않고 궁극적인 승리를 확신했다. 그러므로 사순절에 대한 논쟁이 츠빙글리의 취리히 개혁의 발단이 된 셈이다. 그는 성경을 붙들었고 콘스탄츠 주교는 전통의 우월성을 주장한 것이었다.

개혁교회의 절기에 대해 언급한 고백서들

초대 교회에서는 ‘주일’이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갖는 유일한 ‘날’의 개념이었으며, 구약의 절기와 같은 절기 예배는 없었다.
초대 기독교회에 주의 날에 예배를 제외하고는 특별한 공적 예배가 없었다.
주의 날에 예배와 아울러 주의 만찬(성찬)에 대한 절기적 기념이 있었지만, 다른 절기들은 없었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당시의 교회가 초대 교회와 멀어졌을 때, 그들은 주의 날에 있었던 많은 절기들을 폐지하려 했다.
1520년에 루터는 "주의 날이 유일한 절기의 날이어야 할 것인데"하고 애석해 했다.
칼빈이 1536년에 제네바에 도착했을 때, 그는 '주의 날이 유일한 절기의 날'이라는 것을 개혁의 초기부터 강조하였다.
네덜란드에서 1574년에 개최된 총회는 "성도들은 오직 주의 날만으로 만족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제2 스위스 신앙고백서(The Second Helvetic Confession, 1566) 

24장 거룩한 날들과 금식들과 음식들의 선택에 관하여

미신 : 우리는 유대인들의 종교적 관습과 미신을 인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느 한 날이 다른 날보다 더 거룩하다고 믿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생각에는 나머지 날들도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날들이기 때문이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가 지키는 것은 유대교의 안식일이 아니라 주일인 것이다.

그리스도와 성자(聖者)들의 절기들 : 만약 교회들이 기독교적 자유 안에서 주님의 탄생과 할례와 고난과 부활과 그 승천과 그의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 주신 일을 기억함으로 축하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인정하고도 남음이 있다.

즉 교리의 바른 내용을 이해하고 깨닫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절기로 표현하거나 또는 사람들과 성자들을 숭상하기 위한 절기들은 인정하지 않는다.
거룩한 날들은 십계명의 첫 번째 돌 판에 관계된 것으로 오직 하나님을 위한 날들인 것이다.
결국 절기와 성자들을 위해서 제정된 날들을 우리는 이미 없애버렸는바 이날들은 모순투성이요, 아무 쓸데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도저히 용인할 수 없다. 한편 우리는 적당한 시간과 장소에서 설교를 통하여 성자(선조들)의 회상을 사람들에게 권하는 것이 유익하고, 이 성자들의 모범된 삶을 모든 사람에게 권하는 것이 좋다고 고백한다.

금식 : 그리스도의 교회는 포식과 술 취함과 모든 종류의 탐욕과 무절제를 심하게 정죄하느니만큼 기독교적 금식을 우리 믿는 자들에게 강하게 권유한다.
그도 그럴 것이 금식이란 경건한 신앙인들의 금욕과 절제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요, 우리 육신의 돌봄과 징벌로서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꼭 필요한 일이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지며 육체는 그 연료를 빼앗기므로 더 자발적이고도 쉽게 성령께 순종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일에 관심하지 않는 사람들은 금식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은 하루에 한 번 정도 위장을 채우고 일정한 시간에 음식을 멀리하는 것으로 금식한다고 생각하고 이로써 하나님을 기쁘게 하며 선한 일을 성취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믿는 성도들은 금식함으로 기도를 더 잘 할 수 있고 덕목을 잘 실천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선지서들에서 우리가 읽을 수 있듯이 음식은 멀리하나 악행을 멀리하지 않았던 유대인들의 금식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공적인 금식과 개인적인 금식 : 금식에는 공적인 것이 있고 사적인 것이 있다.
교회가 박해와 환난과 역경 속에 있었던 고대 기독교 역사에는 공적인 금식들이 있었다. 이들은 함께 모여 새벽부터 저녁까지 금식하되 이 시간동안에 기도에 몰두하며, 하나님을 예배하고 회개에 힘쓴다. 이것은 애통함이나 다름없다. 이에 관하여 선지자들, 특히 요엘(2장)이 자주 언급하곤 하였다. 이와 같은 금식은 교회가 곤궁에 처할 경우, 오늘날에도 행해져야 한다. 한편 우리 각자는 성령으로부터 거리가 멀어졌다고 느껴질 때마다 개인적인 금식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렇게 할 때 우리 각자는 육체로부터 그 연료를 제거시키기 때문이다. 모든 금식은 자유롭고 자원하는 마음에서 행해져야 하고 겸허한 마음으로 행해져야 한다. 사람들의 칭찬과 호의를 얻기 위해서 금식이 행해져서는 안 되고, 금식함으로 의를 세우려는 의도는 더더욱 금물이다. 육체로부터 연료를 제거함으로 보다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고 기도에 전념하려는 것이 금식의 목적이어야 한다.

사순절(四旬節) : 사순절 때의 금식에 관하여는 고대 교부들의 글들이 증언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금식을 성도들에게 강요할 필요가 없고 그럴 수도 없다. 이미 초기에도 변질된 금식의 여러 형태와 관습이 있었다. 이 때문에 초기 교부인 이레니우스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어떤 이는 하루만 금식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어떤 이들은 이틀을, 어떤 이는 그 이상 혹은 40일간을 금식하라고 말한다. 금식에 대한 이러한 다양성은 우리 시대에 생긴 것이 아니라 벌써 우리 시대 이전에 생겼다. 내(이레니우스) 추측으로는 이것이(사순절 금식) 사도시대로부터 전승된 것(금식)을 무시하고 또한 소홀히 여기거나 무식함 때문에 다른 습관에 빠진 사람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그의 단편집 3,Ⅰ].

2. 츠빙글리 67개 신조(The 67 Articles, 1522)

음식을 금함에 대하여(Prohibition of Foods) : 24조: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명하시지 않은 것을 행할 의무가 없다. 그들은 아무 때나 어떤 음식이든 먹을 수 있다. 그러므로 치즈와 빵에 대한 로마 교황의 교서는 로마주의자들의 협잡(fraud)임을 배운다.

축제와 순례에 대하여(Of Festivals and Pilgrimages): 25조 : 절기와 장소가 그리스도에게 묶여 있는 것이지, 그리스도인들이 그것들에 속박된 것이 아니다. 이러한 점으로 부터, 그리스도인들을 절기와 장소에 속박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서 합법적인 자유를 강탈하는 것임을 우리는 배운다.

웨스트민스터 정치모범(Westminster, the Form of Church Government), "공적 예배의 날과 장소에 대하여"

복음 시대에는 성경이 그리스도인의 안식일인 주일을 제외하고는 어느 날도 거룩하게 지키라고 명령하신 적이 없다. 각종 절기들이라고 말하면서 지키는 행해지는 날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보장이 없으므로 우리는 지킬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당하는 여러 가지 특별한 경우에 그럴 이유와 기회가 백성들에게 주어질 때에 하루나 여러 날을 금식이나 감사 날로 구별하는 것은 합법적이요 필요한 것이다.

장로교회의 절기에 관한 대회와 총회

1556년 에딘버러(Edinburgh) 대회와 1577년 4월에 열린 총회에서는 공식적으로 부활절, 크리스마스 날과 그 이외의 다른 미신적인 절기 때에 성찬을 집례 하는 목회자에게와 강독하는 강독자에게 성직을 박탈하겠다는 조건으로 그러한 것을 시행하지 말 것을 경고하여야 한다고 규정했다.

1638년 글라스고우(Glasgow) 총회(11월 찰스 1세에 반발하여 국민적 저항으로 이어진 스코틀랜드의 총회)에서는, 교회의 다양한 절기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보증되지 않음으로 완전히 폐지되는 것을 좋다고 여겼으며, 그것들을 지키는 목회자들은 관원들에 의해서 징벌을 받는 것이 좋다고 명문화 하였다.

청교도들의 사순절 철폐

킬빈의 입장을 따라 청교도들은 당대의 로마 가톨릭 교회와 성공회에 남아 있던 인간들의 규례를 철폐해 나가는 일에 열심이었다.
그러므로 칼빈의 가르침을 따르고 청교도들을 존중하는 이들은 사순절을 지키며 이 기간 어떤 특정한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분명히 사순절 금식이라는 것은 불행하게도 그 전체가 헛된 거짓 금식에 불과함을 알았다.
교회들이 ‘재의 수요일’에 사순절 참회기간의 시작을 알리고, 금식과 (육식 등의) 절식을 알리며 14살 이상의 사람들은 육식이나 고기로 된 어떤 음식도 삼가게 하고, 18~60세 사람들은 그 날 그 날 의무적으로 금식하는 이런 행위에 대하여, 그들은 단호히 거부한 것이다. 개혁신앙의 근본적인 원칙은 오직 성경이 말하는 것에 근거해서만 교회의 여러 행위를 한다는 원칙이다.

17세기 영국의 청교도들은 명백한 성경적인 기초가 없는 기독교의 절기들을 거절하였다.
사순절의 여러 문제를 지적하고 그리스도인은 항상 십자가와 고난의 빛에서 살아야 한다는 루터의 말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사순절 기간을 지켜가는 루터파, 성공회와 오직 성경이 가르치는 방식에 의지해 예배와 교회의 모든 일을 하려던 청교도적 개혁교회가 이 지점에서 분명한 차이가 있다.

사순절에 대한 예수교 장로회 합동측 총회의 입장

현재에도 다수의 성경적이고 보수적인 교파와 교단들이 사순절을 지키지 않는다.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는 제84회 총회 결의를 통해 사순절 지키지 않기로 결정했다.
1998년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제83회 총회 보고서에는 '사순절을 교회의 절기로 지킬 것인가?' 라며 '사순절을 교회의 절기로 지키는 것은 마땅치 않는 일'이라고 했다.(제 83회 총회 보고서 p.369-420).

이듬해인 1999년 9월에 있었던 예장합동 제84회 총회에서는 로마 가톨릭에서 만들어낸 사순절을 개신 교회에서 절기로 지키지 않기로 결의했다. 제84회 총회보고서에 실린 관련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순절 문제에 대한 예장합동 제84회 총회 보고서

1. 사순절은 부활절 전날 밤까지 40일간 이어지는 로마교회가 정한 행사이다.

이 40일간에 로마교회는 금식을 하고 금식을 권장하고 또 음식을 제한해서 고기를 먹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사육제를 하고 고기를 많이 먹은 후, 고기 양을 점차 줄여가다가 고난 주간과 특히 금요일에는 완전히 고기를 금지하였다.

2. 종교개혁은 사순절을 완전히 폐지하였다.

칼빈은 사순절이 미신적으로 시행되고 공로를 세우며 금식이 하나님께 예배가 된다고 주장하고 실행하였기 때문에 완전히 폐지하였다(칼빈, 기독교강요 IV. 12).

3. 칼빈은 사순절 기간에 금식은 안 하는 것이 오히려 좋다고 하였다.

금식을 열심히 준수하면서 거짓되고 유독한 의견으로 부패시키는 것보다는 오히려 금식을 전혀 하지 않는 것이 훨씬 더 만족스럽다고 제시하였다(강요 IV, 12, 19).
하나님도 마음의 변화 없이 금식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신다고 성경대로 제시하였다.
그러므로 외식적인 금식은 가장 큰 혐오라고 제시하였다. 또 금식을 의무인 것처럼 엄격하게 지킴도 잘못이라고 지적하였다(강요 IV, 12, 20).

​4. 칼빈은 사순절을 미신적으로 지킴이 널리 퍼졌다고 개탄하였다.

 사순절을 지킴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로 착각하였고, 예수의 모본을 따르는 것으로 여겨 연례적으로 행한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주님은 모범을 위해 금식하지 않고 복음 선포의 장비로만 금식하였다고 칼빈은 제시하였다.
그러므로 주님이 반복적으로 금식하지 않았고, 구약에서 모세가 금식하였지만 선지자들이 그 모본을 따라서 금식하지 않았다고 지적하였다(강요IV, 12, 20).

​5. 사순절 기간에 로마교회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최고 예배가 고기를 금하는 것으로 여겨 고기는 금지시키고 다른 단 것들을 사제들과 평신도들이 먹었다.

오히려 더 성대히 고기와 다른 음식을 먹기 위해서 금식하였다고 칼빈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금식이 폐지되었다고는 칼빈이 결코 말하지 않고 재난의 때를 위해 기도할 때에 할 것으로 말하였다(강요 IV, 12, 17).

6. 우리 교회가 이 사순절을 교회의 경절로 채택하여 지키기로 하면, 우리도 로마교회처럼 사순절 기간에 금식을 해야 하고 또 고기를 그 기간에 먹지 않게 되며, 그러면 고기 먹는 것을 위해 사육제를 열 것이다. 그래서 많이 먹고 점점 줄이다가 완전히 금하는 일을 할 것이다.

7. 40일간에 걸쳐서 사순절 금식과 고기 금지 등을 하고 철야를 하게 되면, 신자들이 이런 경절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없게 되므로 양심이 심히 괴로움을 당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행사에 참가하면 정상적인 사업과 생산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어 참으로 많은 문제들이 발생할 것이다.
그러면 자연히 형식이 되고 외식적이 되어 로마교회처럼 절기를 지키는 일을 하게 될 것이다.

8. 사순절을 교회의 경절로 받아들여 지키게 되면, 로마교회가 지키는 많은 다른 교회 경절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대강절, 주의 현현절, 삼위일체 주간 등등 참으로 많은 절기들을 지키지 않을 수 없게 된다.

9. 사순절과 다른 절기들을 로마교회의 습관대로 지키게 되면, 많은 신자들이 혼란을 겪게 되고, 마침내 이럴 바에는 이 모든 것의 원형이며 모(母)교회인 로마교회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제103회 총회에서는 제84회 총회결의를 재확인하여 이 용어의 사용을 금하고 찬송가 교독문의 사순절 교독문은 사순절을 제하고 사용하도록 결의 하였다.

종교개혁이 폐지한 사순절을 우리 한국교회가 로마교회로부터 받아서 부활시키고 지킬 필요가 전혀 없다.
사순절은 한국교회가 교회 경절로 받아서 될 일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고난주간을 오래도록 지킴으로 주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을 은혜롭게 시행해 왔다.

오늘의 교회와 사순절 절기

사순절을 절기로 지키는 예전을 중요시하는 교단도 있고, 특정 기독교 미디어도 공공연히 이 절기를 지킨다.
재의 수요일에 죄 목록을 작성하고 태운 후, 그 재로 이마에 십자가를 긋는다.
이것은 제 2계명에도 이탈된다.
사순절은 결국 로마 가톨릭의 길을 걷는 것이다.
이 기간에 선한 뜻에서 자신을 절제의 시간에 머물고자 하는 진정한 기독교회들도 많다.
또 그런 분들과 여전히 우정을 같이 하지만, 개혁신학을 추구한다면 사순절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근래에 많은 교회들이 로마 가톨릭 교회를 본받아 고난 주간과 더불어 사순절을 지키고 있다.
기독교 서점가에서 봄철 베스트셀러는 ‘사순절에 대한 묵상’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이야기하되 사순절 기간에 사람의 감성에 호소하는 책들이 기독교 서점에서 가장 잘 팔리고 있다.
수난 주간에 상영되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Passion of Christ)”는 중세의 수난극 전통을 할리우드식으로 각색한 영화이다.
감독인 멜 깁슨(Mel Gibson)은 보수적인 로마 교회 신자로 마리아의 시각에서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신 마지막 12시간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고 그는 그 영화로 막대한 돈을 벌었다.

어떤 교회는 교회에서 단체로 그 영화 전체를 관람하는 것으로 수난 주간 집회를 하기도 한다.
이것은 개혁교회가 무엇인지 구별하지 못하는 이들의 모습이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는 것처럼 죽으신 날을 기념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주님께서는 성찬을 행하여서 주님의 수난을 기념하라고 하셨으므로 우리는 성찬에서 주님의 수난을 기념해야 하고, 또한 주님께서 죽으신 그 주간과 금요일을 경건하게 지내는 것이 좋다.

그러나 그것에서 더 지나쳐 수난의 40일을 지키려는 것은 성경적인 근거나 이에 유추하여 믿음으로 시행해왔던 교회사적인 근거도 없다.

주님께서는 생명의 말씀의 교훈으로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시려고 하는데, 사순절을 자신의 의를 위해 사용한다는 것은 복음의 근본을 허무는 매우 비성경적인 행위이다.

한국교회가 전통적으로 지켜온 고난주간을 그대로 지키는 것이 유익하다고 할 수 있다.
20세기 후반 가톨릭의 영향으로 일어난 “예배갱신운동”의 영향이 지금까지도 크게 작용하는 상황이다.
그들이 강조하는 사순절을 비롯하여 교회의 절기를 규정한 교회력은 성경적 근거가 약하다.
역사적으로 볼 때에 4세기 이후에 비로소 제정되어 중세를 거쳐 체계화되었다.
교회력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일 년 주기로 재연하는 예배와 축제적 관습을 통해 신앙을 강화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다양한 문화와 종교와 뒤섞이면서 이교화되고 미신화되는 폐단이 계속 싹터왔다.
종교개혁자들이 사순절 뿐 아니라 교회력 자체를 철폐한 것은 그것이 비성경적이며, 이교적 요소와 미신화로 인한 폐단을 지속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을 경계하며 우리는 성경과 성경의 올바른 이해와 적용으로 돌아가야 한다.

사순절에 대한 성경적인 입장

교회가 사순절을 지키는 것은 성경적인 믿음의 실행이 아니다.
잘못된 전통으로 내려온 사순절을 지정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며 이를 좇는다는 것 자체가 사람의 생각의 발상이며, 이는 하나님의 일과는 무관한 사람의 일에 불과하다.

사순절을 지키면서 과연 성도들이 성경의 의도를 따라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려는 진정한 마음이 있을까?
성도들이 하루를 금식함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을 경험하는 것보다, 금식 후에 또 배고픈 배를 채우기 위해서 먹고 즐기는 것에 무슨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교회가 사순절에 따라 그때만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게 하며 여기에 참여하게 하려는 것에 대하여, 특별히 지도자들은 그 비성경적인 그릇됨을 말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바른 가르침이 있어야 한다.
개혁주의자들은 그 어디에도 교회가 절기 속에 있어야 할 것을 말하지 않았으며, 반대로 교회가 절기를 지키는 행위에 대하여 심각한 우려를 표하며 금하여 왔었다.
왜냐하면 개혁신앙 선배들은 이 사순절 시행이 ‘그리스도에 반(反)’하는 것으로 얼마나 불신앙인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것은 사순절에 그리스도가 받은 고난을 재현하며 이를 통해서 경험해 보려고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난은 자기 백성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죄인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신 것이었다. 그리스도가 받으신 이 고난은 누가 함께 받아보고자 해서 받을 수 있는 고난이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께서만 받으실 수 있는 고난이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난을 우리도 받아보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인이 받는 고난이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제자라는 이유로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비난을 받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의를 보여주셨지만, 그러나 죄로 가득 찬 사람들은 하나님의 의를 거부하고 배척하였고, 이것이 예수님을 십자가의 죽음에까지 가게 하였다. 우리는 사순절 행사로 우리의 경건의 의를 세우고 증명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의로 오심으로 세상으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고 미움을 받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고로 그리스도를 미워하는 세상으로부터 그들도 함께 미움을 받는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받는 고난이다.

그리스도인은 주되신 그리스도께서 주신 십자가의 복음과 부활의 복음을 전하는 자이다.
이는 그리스도인은 오직 그리스도만을 말하여 드러낼 자라는 것이다.

골로새서 1:24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일꾼으로서 교회를 위해서 겪는 복음 전파의 사역과 관련하여, 그리스도인들도 바울처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해 겪게 되는 고난이 따름을 말씀했다.
그리스도인이면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한 하나님의 후사로서 그리스도가 받은 영광을 받기 위하여 그와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것은 사순절과 같은 인위적인 행사를 만들고 그 행사에 참여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나무 십자가를 만들어 등에 져보고 나무에 묶여 보기도 하고, 못에 박혀 보기도 한다고 해서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다.
사순절이란 이런 특정한 기간에 그리스도의 고난을 느껴보고 체험해 보고자 할 것이 아니라, 날마다 하나님께서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신 일을 말하여 우리의 주가 되신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온 세상에 믿는 자들의 생명의 주가 되심이 선포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다.
우리는 매일 매순간 오직 우리의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도록 권면 받고 있다(히브리서 12:5).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사는 삶은 사순절의 행사로서가 아니라, 우리의 매일의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골로새서 3:16-19
“그러므로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아무도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를 이유로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 그가 그 본 것에 의지하여 그 육신의 생각에 따라 헛되이 과정하고,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

사순절은 ‘절기’로 ‘꾸며낸 겸손’과 ‘과장’의 내용을 가지고 있다.
사순절을 지키지 않는다고 아무 것도 하지 말자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일정한 기도 기간을 만들어서 날마다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기 위해 새벽기도를 체질화 하기, 인터넷이나 컴퓨터 게임이나 TV 시청하는 시간을 없애기, 회개 운동, 소외된 이웃 돌보기 등에 더욱 역점을 두는 기회로 활용할 수 있다.
나아가 복음을 전하고 세상의 구원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와 빛이 될 수 있는 기회로 활용한다면 더욱 보람 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오늘을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끝까지 사랑하되, 잘못된 가치관과 인생관에 좌우되지 말고, 십자가 사랑의 신앙 회복, 경건과 기도의 생활화, 나눔 운동의 확산, 사랑을 기반으로 한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기회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모든 우리의 시간을 항상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은혜 안에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고난을 생각하며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속되었다는 감사와 감격의 마음으로 살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며, 동시에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이 약동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마땅한 삶이다.

이것은 어떤 정해진 특별한 절기에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 믿고 거듭난 이후 우리는 항상 그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 나라 시민의 삶이다. 이것이 성경적인 신앙, 곧 개혁신앙을 가진 믿음의 선배들이 강조하며 주장한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삶 가운데, 십자가와 부활의 은혜 안에서 매일 살아가기 때문에 어떤 특별한 절기를 지킬 이유가 없는 것이다.

사순절 뿐 아니라, 신앙생활 방식 중 성경에 명확한 근거가 없는 것들은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개발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항상 명확한 성경적 근거가 있고, 믿음의 유추에 따라 집약되는 것들과 교회사의 올바른 이해와 성경적인 교리에 합당한 도리를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력이 넘치는 풍성한 신앙생활을 하는 신앙생활만이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이다.


부활절(復活節)

부활절은 예수께서 십자가형을 선고받고 나무 십자가에 못 박힌 날로부터 3일째 되는 일요일에 부활한 것을 기념하는 기독교의 최대 축일이자 서구권 국가들의 연중 최대 명절이다.



고난(苦難)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태 16:24, 마가 8:34, 누가 9:23)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태 10:38)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누가 14:27)

2022년 고난주일을 맞이하며(4월 10일) 고난주간을 시작합니다(4월 11일-16일).
고난이란 의미를 생각합니다.
신앙생활은 고난을 즐길 줄 아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태 16:24, 마가 8:34, 누가 9:23)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태 10:38)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누가 14:27)

그럼에도불구하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을 싫어합니다.
고난은 특별한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누에고치에서 나오는 나방은 아주 작은 구멍을 비집고 나온다.
그 구멍의 지금은 2mm가 채 안 된다고 한다.
작은 구멍으로 나온 나방은 불과 몇 시간 뒤에 어른 나방으로 되고, 또 며칠이 지나지 않아 알을 낳는다.
생물학자 한 사람은 이 사실을 매우 눈여겨보았다.
작은 구멍으로 나오는 나방이 딱하기도 하고 또한 신기하기도 해서 나방에 대한 새로운 실험을 시도했다.
학자는 특별히 제작한 가위로 구멍의 크기를 3mm, 4mm, 5mm, 6mm 정도 되도록 넓혀 주었다.
그리고 각각의 구멍으로 나오는 나방에 대해 유심히 관찰하고, 그 내용을 기록하였다.
학자의 예상대로 더 큰 구멍을 통해 나온 나방들의 크기가 더 컸다.
하지만, 몇 일이 지나자 놀랄 만한 결과가 나왔다.
더 큰 구멍에서 나온 나방들은 작은 구멍에서 나온 나방보다 성장속도가 더디었으며, 날지도 못했고, 심지어는 알도 낳지 못하는 것이었다.
결국, 더 큰 구멍에서 나온 나방은 덩치만 큰 쓸모 없는 나방이 되어버린 것이다.
학자는 보고서를 통해 작은 구멍으로 나온 나방은 그 고통과 인내의 과정을 통해 건강해 지며 이러한 과정을 거쳐야만 보다 성숙해질 수 있다고 결론 내었다.
그리고,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행위는 결국 크고 쓸모 없는 나방을 만들었다고 기록했다.

사람들은 역경을 피해 편한 길로 가려 하거나 변화를 피해 현실에 안주하려 한다.
역경과 변화는 인간의 본성에 있어 힘든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에고치의 사례처럼 역경과 고통 없이는 훌륭한 나방이 될 수 없듯이, 우리들 삶에 있어 역경과 고통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기 위한 하나의 꼭 필요한 과정인 것이다.
이러한 역경과 고통은 우리를 보다 강하게 만들어 또 하나의 도약을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역경이 두려운가?
변화를 거부하는가?
당신에게 다가온 역경과 변화를 훌륭한 성장의 과정으로 보는 것이 중요하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는 말이 있다.
당신에게 다가온 역경을 슬기롭게 극복하는 것, 당신의 성공에 한 발짝 더 다가설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우리의 삶은 시련과 고통 속에서 생활하고 있다.
행복하기만 한 사람은 결코 없다.
자연의 순리에 적응하며 고통 속에서 삶의 가치를 찾아야 한다.

 

어떤 여인의 책상 위에 여러 개의 누에고치가 놓여있었다.
그 누에고치 가운데 이미 누에나방이 나온 고치도 있고 그렇지 않은 고치도 있었다.
그런데 이 누에고치들을 보고 있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은 누에나방이 나온 고치에는 신기할 정도로 작은 구멍이 뚫어져 있었다는 점이다.
이 여인은 그 작은 고치의 구멍을 보면서 '어떻게 이렇게 작은 구멍으로 저런 큰 누에나방이 나올 수 있을까?' 하고 호기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무리 봐도 그 작은 구멍으로는 도저히 누에나방이 나올 수가 없어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한 마리의 누에나방이 작은 구멍을 만들어 나오고 있었다.
구멍이 너무 작아 도저히 나올 것 같지 않은데 누에나방은 긴 시간을 통해 갖은 몸부림을 치며 용케도 나오고 있었다.
여인은 누에나방이 작은 구멍을 통해 세상에 첫발을 내딛는 것을 지켜보다가 왠지 가엾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른 누에나방이 세상에 편하게 나오도록 도와주기 위해 가위로 누에고치의 구멍을 크게 만들어 주었다.
그러자, 다른 누에나방은 날개가 찢기는 등 갖은 고통을 당하며 누에고치에서 겨우 빠져나오는데 반해, 가위로 크게 구멍을 내준 고치에서 나온 나방은 아무런 상처 없이 쉽게 나와 아름다운 날개를 펄럭였다.
이를 보고 여인은 자기가 한 일을 스스로 잘 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잠시 뒤에 벌어진 상황은 전혀 다른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작은 구멍을 통해 힘들게 비집고 겨우 세상으로 나온 나방은 한 마리 한 마리씩 날개를 치며 공중으로 훨훨 날아오르는데, 가위로 구멍을 뚫어준 고치에서 쉽게 나온 나방은 날개를 푸드득 거리다가 날지 못하고 그만 비실비실 책상위를 돌더니 지쳐서 잠잠해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이 과정을 끝까지 지켜본 여인은 누에나방은 작은 구멍으로 나오며 애쓰는 동안 힘이 길러지고 물기가 알맞게 마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날게 되지만, 그 과정을 겪지 않고 나온 나방은 순간적으로 편하게 나오긴 했지만 나를 수가 없다는 이치를 크게 깨달았다고 한다. 이 내용은 '카프만' 부인이 쓴 "광야의 샘"이라는 책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우리들 사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온갖 고통과 산전수전을 겪은 사람은 어떠한 험한 세상에서도, 어떠한 역경과 어떠한 고난이 닥치더라도 이에 굴하지 않고 꿋꿋이 잘 이겨나가고 즐겁게 살아가지만, 그렇지 않고 온실 속에서 자란 화초같이 어려움이 없이, 크게 부족함이 없이 살아온 사람은 작은 시련에도 쉽게 좌절하고 쉽게 무너지고 쉽게 포기해 버리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이 살아가는데 겪게 되는 각종 고통과 좌절, 역경과 온갖 슬픔들이 오히려 연단이 되고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한 반석이 됨을 잊지말고 시련을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아 잘 대처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야고보서 1:1


자기 부인(Self Denial)과 자기 십자가(Self Cross)

마태복음 16:13-24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질문했다.
“세상의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질문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질문이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다” 라고 고백했다.
베드로의 고백을 듣고 예수님은 베드로를 칭찬한 후, 처음으로 자신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내가 예루살렘에 가서 장로들과 제사장들과 서기관에게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 날 것이라”(21절)
베드로는 ‘주여 그리 마옵소서’ 재빨리 대답했다.
주님은 그를 ‘사탄’이라 부르며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라고 말씀 하시고(23절),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라고 하셨다(24절).

‘자기부인’과 ‘자기십자가’는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용어이지만 너무 익숙해서 깊이 생각하지 않고 막연히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누군가 ”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가 무슨 뜻입니까?” 라고 물으면 구체적으로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하나님의 생각’을 하지 않고 ‘사람의 생각’을 한다고 책망하셨다.
그렇다면 ‘자기부인과 자기 십자가’는 ‘사람의 생각’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기 부인 (Self Denial)

자기부인은 ‘자기 생각과 뜻’의 부인이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을 핏방울 같이 흘리시며 기도하셨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이어서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셨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마 26:39)
우리가 주를 따르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생각과 뜻’을 포기해야 한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인데 선택의 기준은 내가 아닌 주님이다.
한번은 예수님의 제자 시몬 베드로가 밤새도록 바다에서 그 물질을 했으나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명하시기를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셨다.
베드로는 자기를 부인하는 고백을 한다.
“선생님, 우리가 밤이 맞도록 수고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리이다.”(눅 5장)
베드로는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았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이사야 55:8-9)

자기 부인을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육의 사람을 부인하고 영의 사람이 되라!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롬 8:5-6)

육의 사람은 삶의 목적과 동기가 세상이 되어, 세상적인 방법으로 세상의 것을 위해서는 사는 사람이다.
영의 사람은 하늘의 것을 위하여 하늘의 방법대로 사는 사람을 말한다.
“자기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자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갈 6:8)

(예화) 워치만니를 찾아와서 계단식 논의 맨 위쪽 주인인 그리스도인의 갈등에 대한 답변

둘째, 겉사람을 부인하고 속사람을 다듬어라!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겉사람이란 죽어 흙으로 살아질 수밖에 없는 육의 사람을 말하고, 속사람이란 예수를 믿음으로 중생한 영의 사람을 말한다. 보이는 겉사람은 계속 낡아지나 보이지 않은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

(예화) 육체의 질병에 시달려야 했던 어느 여인의 고백

셋째, 옛사람을 부인하고 새사람이 되라!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2-24)

바울은 우리의 거듭난 상태를 의복과 비유를 하여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사람을 입으라고 했다. 냄새 나는 옛 옷을 입은 상태에서 새 옷을 입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예화) 어느 설교자의 고민

자기 십자가
(Self Cross)

자기 십자가는 자기 부인으로 인한 십자가이다.

‘No Cross, No Crown’이라는 말이 있다.
십자가 없이는 부활의 영광도 없다는 뜻이다.

우리는 부활의 영광만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십자가의 고난을 간과할 때가 많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다.
부활이란 다시 사는 것인데, 다시 살기 위해서는 먼저 죽어야 하지 않겠는가!
죽지 않고 살려니까 그것이 문제이다.
또한 자기 잘못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나 어려움을 ‘자기 십자가’라고 해서는 안 된다.
믿음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나 어려움이 바로 자기 십자가 이다.

베드로는 이를 ‘믿음의 시련’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벧전 1:6-7)

영국의 신학자 사무엘 루터포드 (Samuel Rutherford)는 “새에게서 그 날개는 무거운 것이나 그것 때문에 날아가고, 배는 그 돛이 무거우나 그것 때문에 간다.” 했다.

유태인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유태인을 지키는 것고 한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요, 구원을 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다.(고전 1:18)

자기 십자가를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고난 (Passion)의 십자가

십자가는 고난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습관적으로 십자가와 연관 짓는다.
자식이 사고를 치면 ‘자기 십자가’, 남편이 바람을 피워도 ‘자기 십자가’, 사업이 망해도 ‘자기 십자가’, 시험이 떨어져도 ‘자기 십자가’라고 한다.
자신의 잘못이나 무지로 인한 고난을 ‘자기 십자가’라고 착각해서는 안된다.
십자가는 믿음과 연관된 고난이다.
자신의 죄 때문에 받는 고난은 ‘회개’해야 할 일이지, ‘자기 십자가’라고 합리화해서는 안된다.

“너희 믿음의 시련은 불로 연단하여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벧전 1:7)

믿음의 시련이란?
믿음대로 살다가 받는 고난이고, 믿음을 지키려다 받는 고난이며, 믿음을 전파하다 받는 고난이 ‘자기 십자가’이다.

(예화) 주일 성수를 위하여 주일 날 가게 문을 닫아야 헀던 상인의 고백

(예화) 이비인후과 의사의 고민

둘째, 사랑 (Love)의 십자가

십자가는 사랑을 의미한다.
예수께서는 ‘고난의 십자가’를 ‘사랑의 십자가’로 승화시켰다.

구약에는 613가지의 계명이 있다.
하지 말라는 것 365개, 하라는 것 248개이다.
하지 말라는 것을 하면 ‘적극적인 죄’ (Commission)이고, 하라는 것을 하지 않으면 ‘소극적인 죄’ (Omission)이다.
이것을 요약한 것이 10계명이고, 10계명의 요약은 마태복음 22:36-40절의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다.
위로는 ‘하나님 사랑’, 옆으로는 ‘이웃 사람’이다.
‘사랑’이 ‘지상최대의 계명’ (The Great Commandment)이다.
사랑의 척도는 희생에 있다.

사랑에는 4 종류가 있다.
남녀의 사랑인 에로스,
친구의 사랑인 펠레오,
부모의 사랑인 스톨케
하나님의 사랑인 아가페

아가페 사랑은 절대적이며 무조건적인 자기희생의 사랑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다.

(예화) 배우자를 찾는 젊은이 '믿음만 좋으면...'

셋째, 사명 (Mission)의 십자가

십자가는 사명을 의미한다.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이제 다 이루었다’(It is finished)라고 하셨다.
아버지께서 주신 사명을 다 이루신 것이다.
예수께서 3일 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 부탁하신 말씀이 마태복음 28장 18-20절이다.
이를 ‘지상최대의 위임’(The Great Commission)이라고 한다.
보통 ‘The Great Commission’을 ‘지상최대의 명령’이라고 번역하지만, 정확한 뜻은 ‘위임이고 위탁’이다. Com+mission은 ‘함께'(Com)와 ‘사명’ (Mission)의 합성어이다.

‘Mission’에는 ‘사명과 선교’라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곧 선교이다.
주께서 우리에게 사명을 맡기시면서,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니라’(마 28:20) 이것이 ‘Commission’의 진정한 의미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선교의 사명을 위임 받았다.
따라서 교회는 ‘선교공동체’로 거듭나야 한다.
교회가 선교적이 아니면, 선교의 적이 될 수 있다.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다.
자기 부인에 대해서 3가지를 말씀 드렸고, 자기 십자가에 대해서 3가지를 말씀 드렸다.
오늘의 말씀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사는 것이 그리스도’ (빌 1:21)라고 했다.

지금은 교회력으로 사순절 기간을 지나고 있다. 사순절 (Lent)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묵상하며,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자기 자신이 죽는 것을 배우는 절기이다. ‘사순’ (四旬)이란 40일을 뜻하는 말로 근신과 금식으로 자기 절제를 하는 기간이다. 사순절은 ‘재의 수요일’ (Ash Wednesday)에 시작하여 부활절까지 주일을 뺀 40일간이다.
재의 수요일 전날을 불어로 ‘마디그라’ (Mardi Gras)라 부르며, 이는 ‘뚱뚱한 화요일’ (Fat Tuesday)이란 뜻으로 ‘영양보충’하는 날이다. 안타깝게도 호주에서는 ‘마디그라’가 ‘퀴어 (Queer) 축제’로 의미가 변질되었다.
사순절 기간에 철저한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지는 영성으로 충만하여 영광스러운 부활의 아침을 맞이할 수 있기를 바란다.

영혼의 닻과 돛

히브리서는 히브리인들, 즉 유대인에게 보낸 서신이다. 신약성경 중에 유일하게 저자가 누구인지 모른다. 저자에 대하여 여러 사람이 언급되고 있지만 정확한 근거가 없다. 당시 기독교는 정치적으로는 로마의 박해를 받았고, 종교적으로는 유대교의 박해를 받고 있었다. 히브리서는 박해를 받고 있는 유대인인 신자들에게 인내하며 믿음을 지킬 것을 권면하고 있다. 히브리서 내용은 초대교회 당시 기독교 유대인들을 향한 복음의 메시지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옛 언약의 모형들을 열거하면서 새 언약의 주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완성한 분이시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히브리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의미를 가장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성경에 종종 ‘반차 (班次)’란 용어가 등장한다. 아론의 반차, 멜기세덱의 반차가 그것이다. 개역개정판에는 반차라는 단어는 히브리서에만 5번 등장한다. (히 5:6,10, 6:20, 7:11,17) 사전을 찾아보면 반차 (班次)의 동의어는 계열 (系列)이다. 멜기세덱은 창세기 14장에 처음 등장한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과 가족들을 구하기 위하여 318명의 군사를 이끌고 가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주고 아브라함은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친다. 히브리 기자는 멜기세덱이 ‘하나님의 아들을 닮아 항상 제사장으로 있고’ (히 7:3), ‘예수님이 멜기세덱의 계열을 따른 제사장 (히 5:6, 7:17)’이라고 기록했다.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는 ‘멜기세섹의 반차’의 의미는 육신의 혈통이 아닌 영적 혈통이란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셔서 십자가의 제단 위에, 제물이 되시고, 제사장이 되셔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여 주셨다.

로댕은 단테의 신곡을 읽고 감동을 받아 ‘생각하는 사람’을 만들었다. 원래는 지옥의 문 윗부분에서 지옥문을 통과하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고뇌하는 작은 형상이었다. 그것을 1888년에 독립된 작품으로 크게 만들어, 1904년 살롱에 출품하고부터 유명해졌다. 전신 근육의 긴장에 의하여 격렬하게 고뇌하는 마음의 움직임을 응결시켰다. 단테의 신곡에 지옥문에는 이런 글이 쓰여 있다. “여기에 들어오는 자, 일체의 희망을 버려라”. 지옥이란 더 이상의 희망을 품을 수 없는 곳이다.

시편 107편에는 인생을 항해로 비유하는 구절이 나온다. 세상의 바다는 순풍에 돛단 것 같이 순조롭지가 않다. 높은 파도, 강한 바람, 예측할 수 없는 날씨 등으로 곳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목적지가 없는 배는 표류하지만, 목적지가 있는 배는 항해한다. 우리의 배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시인은 그곳을 ‘소원의 항구’ (시 107:30)라고 표현하고 있다. 우리는 ‘소원의 항구’를 향하여 낮에는 돛을 높이 올려 전진하고, 밤에는 닻을 깊이 내려 휴식한다. 닻과 돛은 항해의 필수품이다.

나는 1979년 4월 17일에 입대했다. 군 생활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그때쯤 큰형님에게서 편지가 왔다. 그는 해병대 장교 출신이다. 자신의 군 생활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어느 추운 겨울에 출항하기 위해 닻을 올리던 중 줄이 풀리면서 닻이 바다 속으로 떨어졌다. 모두가 난감해 하고 있을 때, 부대원 중 한명이 차가운 겨울 바다로 뛰어 들어 줄을 연결한 후, 닻을 올리고 출항할 수 있었다.

히브리서 기자는 소망을 ‘영혼의 닻’이라고 했다. 닻의 기능은 배를 정박하게 한다. 파도가 치고 물결이 출렁일 때, 닻을 깊이 내린 배는 흔들릴 수는 있지만 파도에 쓸려가지 않는다. 쉼 없는 거센 물결과 바람 앞에서 단단히 뿌리내리는 균형과 절제와 안정의 추이다. 항구에 돛을 내린 배는 안전하지만, 배는 정박하기 위해서 만들지 않았다. 배는 돛을 올리고 출항해야 한다. 순풍에 돛을 올리면 빠르게 앞으로 나갈 수 있지만, 역풍에도 삼각돛은 전후의 압력 차이로 전진할 수 있다. 밤이 되면 닻을 내려 정박해야 하고, 낮이 되면 돛을 올려 항해해야 한다. 세상의 바다에서 소망이 ‘영혼의 닻’이 되고, 소망이 ‘영혼의 돛’이 되어, ‘소망의 항구’를 향하여 오늘도 믿음으로 항해하자.

종교개혁과 3명의 사람

종교개혁 당시 독일에 루터가 있었다면, 스위스에는 ‘츠빙글리’가 있었다. 츠빙글리는 루터의 95개 조문과 비슷한 67개 개혁안을 내놓고, 취리히 시는 그의 주장을 받아들여 개혁이 시작되었다. 그는 루터보다 더 근본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연합을 위해 두 사람이 독일에서 만난 적이 있다. 대부분의 의견은 일치하였으나, 성찬에 관한 이견(異見)으로 서로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된다. 가톨릭의 화체설 (Transubstantiation)애 반대는 했지만 루터는 ‘공재설’ (Consubstantiation)을 주장하고, 츠빙글리는 ‘기념설’ (Memorialism)를 주장했다. 연합을 상징하는 성찬식이 개신교 최초의 분열의 원인이 되었다. 개혁의 2세대인 칼빈은 두 사람의 의견을 절충하여 ‘영적 임재설’ (Spiritual Presence)을 내놓았다.

첫째, 마르틴 루터 (Martin Luther, 1483~1546)

루터는 독일 아이스레벤에서 태어났다. 그는 법률가가 되라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1505년 5월부터 법학 공부를 시작했다. 하지만 약 2달 뒤, 고향인 만스펠트에서 에르푸르트로 돌아오는 길에 그의 옆으로 천둥번개가 떨어졌다. 루터는 번개가 떨어지자 큰 두려움에 떨며 “성 안나여, 나를 살려주소서. 내가 수도사가 되겠나이다”라고 서원했다. 이후 아버지와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어거스틴 수도원에서 신학을 공부하게 된다.

훗날 루터는 비텐베르크 대학교의 교수로서 종교개혁을 일으킨 역사적인 인물이 되었다. 루터는 로마 가톨릭교회에 부패와 잘못된 교황의 권위에 항거하여,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리를 논박하고, 성서가 지니고 있는 기독교 신앙에서의 최고의 권위와 그리스도에 대한 오직 믿음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통한 구원을 강조하였다.

루터는 16살 아래인 카타리나 폰 보라와 결혼했다. 루터가 개혁이 너무 힘들어 절망하고 있을 때이다. 카타리나가 소복을 입고 루터에게 갔다. 누가 죽었냐고 물으니 하나님이 죽었다고 했다. “어떻게 하나님이 죽을 수 있냐”고 화를 내자, “당신이 풀 죽어 있는 모습을 보니 분명 하나님은 죽으신 것이 분명하다”고 했다. 이후 루터는 ‘살아계신 하나님’ (living God)이란 표현을 의도적으로 많이 사용했다.

둘째, 울리히 츠빙글리 (Ulrich Zwingli, 1484~1531)

츠빙글리는 스위스의 종교개혁자이다. 그는 루터와 더불어서 종교 개혁의 양대산맥이다. 츠빙글리의 신학의 핵심은 성경이다. 그 권위는 어떠한 종교회의나 교부들의 주장보다도 더 높다고 했다. 1506년 로마 가톨릭교회의 사제로 서품을 받았으며, 글라루스의 성직자가 되어 부임하였다. 10년 동안 사목 활동을 하면서 헬라어를 공부, 희랍과 고대 로마의 철학자, 시인, 웅변가, 저술가에 대해 배웠다. 이 기간에 인문학자이자 성직자인 에라스무스와 서신을 교환하며 우정을 쌓았으며,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1519년, 츠빙글리는 취리히에 있는 그로스뮌스터 교회로 사역지를 옮겼다. 그로스뮌스터 교회에서 목회사역을 하던 츠빙글리는 어거스틴과 바울 신학을 독학했고, 종교개혁의 길을 걸어갔다. 1522년, 츠빙글리는 그의 사상이 함축적으로 요약된 ‘67개 신조’를 작성했고, 다음해인 1523년 1월 29일 취리히에서 공개토론을 개최하여 ‘67개 신조’를 중심으로 로마 교회의 부정과 부패를 비판했다. 그는 두 차례나 군종 사제로 이탈리아에 갔다. 전쟁의 비인간적인 모습을 체험을 바탕으로 용병제도를 반대했다.

츠빙글리는 성서주의 영향 때문에 그가 주도했던 종교개혁은 보다 급진적인 것이었다. 루터가 개인의 신앙 양심에 근거했다면, 츠빙글리는 사회제도의 개혁을 추진하였다. 특별히 그는 용병제도를 반대하였다. 스위스 용병은 용감하기로 정평이 났었다. 아직도 바티칸 근위병은 스위스에서 책임을 지고 있다. 그는 인문주의자요, 성서학자이며, 프로테스탄트요, 진보주의자였으며, 애국자였다. 츠빙글리는 인생의 황금기인 47세에 전사하고 개혁의 바통을 다음세대에게 넘겼다.

셋째, 존 칼빈 (Jean Calvin, 1509~1564)

칼빈은 프랑스 ‘피카르디’에서 태어났다. 칼빈의 호칭을 ‘존 칼빈’ 혹은 ‘장 칼뱅’ 등으로 부른다. 영어로 ‘존 칼빈’이고 불어로 ‘장 칼뱅’이다. 루터나 츠빙글리보다는 한 세대 후배이다. 그의 아버지는 칼뱅이 로마 가톨릭 교회 신부가 되기를 원했으나, 로마 가톨릭 교회와의 갈등 속에서 아들에게 법학으로 진로를 바꾸길 권했다. 그는 파리에서 문학과 고전을 공부했고 신학공부도 마쳤다. 1532년에는 부르주에서 법학 박사 학위도 받았다.

그가 쓴 ‘기독교 강요’는 종교 개혁에 큰 사상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개신교의 영원한 고전으로 남아 있다. ‘기독교 강요’는 1535년에 완성됐고, 칼빈은 프랑스의 국왕 프랑수아 1세에게 헌정했다. 이 작품으로 인해 칼빈은 종교개혁의 주도적인 신학자가 됐다. 기독교 강요는 단순히 기독교의 핵심 진리를 요약하고 교리화하기 위해 쓴 것이 아니다. 그의 저작 동기 속에서는 사람들이 성경을 바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함이었다.

그는 프랑스를 떠나 제네바에 머물게 된다. 파렐은 칼빈에게 제네바의 종교개혁에 동참하자고 부탁했다. 칼빈은 조용히 공부를 하고 싶다고 했지만 ‘파렐’은 칼빈을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오히려 그렇게 도망치면 하나님의 저주가 임할 것이라고 압박했다. 결국 칼빈은 제네바에 남아 종교개혁을 돕게 된다. 칼빈은 프랑스 출신이지만 스위스 제네바의 종교개혁자가 되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Lent originally was established for new Christians, those who experienced a call. They were to spend 40 days and 40 nights preparing for their baptism. If at the end they still wanted to follow Jesus, then on Easter Eve they would be baptized as the sun was rising in the east, signaling the new day, the new era, inaugurated because of the Resurrection.

사순절은 원래 부르심을 경험한 새로운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세워진 절기였다. 그들은 그들의 세례식을 위해서 40일 주야를 보내는 것이었다. 만약 그들이 그 40일의 기간 끝에 여전히 예수님을 따르기로 헌신한다면, 부활절 저녁에 그들은 세례를 받을 수가 있었다. 마치 해가 동쪽에서 뜨듯 새로운 날, 새로운 시대를 상징하며 부활로 인해 새 시작을 선언하듯 말이다.



I am sure it had a powerful significance for them, to have prepared for their vocation as Christians the same way Jesus prepared for His vocation as the Messiah: 40 days of introspection and self-examination.

저는 이러한 사순절이 새 그리스도인들에게 자기성찰과 자기점검의 40일을 이겨내신 메시야 예수님과 같이 동일한 방법으로 분명한 소명을 준비할 수 있게 한 중대한 의미였을 것을 확신합니다.



Later the church used the 40 days as a time of renewal for those who were already Christians, because at a certain point everyone in the empire...was baptized as infants. So the time of Lent was used as a time of renewal and recommitment to the Christian life, examining our lives in light of the One we are supposed to follow.

훗날 교회는 그 40일의 새로운 날의 시간을 새 그리스도인이 아닌 기존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사용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시점의 로마황제 시대 모든 사람들은 유아기때에 세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순절의 기간은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따라야 할 빛 가운데서의 삶인지를 점검하는 새로움과 재헌신의 시간으로 사용되어진 것입니다.

(Mark Trotter, Collected Sermons)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교회력의 연속성과 불연속성

이 글은 한국교회와 역사 (제4호: 2010 여름호), 한국교회와 역사연구소 (소장: 이상규), pp. 52-89에 발표되었습니다. .-코닷-



 

▲ 이기업 목사고신대학교 신학과(B.A.)
고신대학교 신학대학원(M.Div.)
보스톤 대학교 대학원 예배학(S.T.M.)
고든-콘웰 신학대학원 구약학(Th.M.)
시카고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대학원
구약학 박사과정 (Ph.D.) 코스웤 전, 미국 시카고 개혁교회(CRC교단) 담임목사
현, 한국동남성경연구원
현, 대학교회 담임목사

들어가면서

교회가 교회력/예배력 (the Church Calendar)[1]을 지킨다고 할 때, 그것은 절기들을 지킨다는 의미와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교회는 무슨 (what) 절기들을 지켜야 하는가? 언제 (when) 그 절기들을 지켜야 하는가? 각각의 절기는 얼마 동안 (how long) 지켜져야 하는가? 그리고 교회력 안에 있는 이 절기들은 상호 어떤 관계 (what relationship)가 있는가 아니면 별개의 것인가? 이런 질문들은 교회력에 대한 신학적 이해 또는 예배학적 이해와 예배학적 실천의 문제를 결정하는 방향타 (a rudder)와 같은 것이다.

본고는 예배학의 원리와 배경에 대한 이해가 약한 현대교회에 적절한 기여가 되었으면 하는 목적으로 쓴다. 왜냐하면 한국 교회가 교회력을 지킨다고 해야 할지, 교회력을 지키지 않는다고 해야 할 지 그 행태가 매우 모호하기 때문이다. 어떤 절기는 지키고 있으나 어떤 절기는 명칭조차 들어본 적이 없는 문외한적 태도를 보인다. 한국교회가 지키는 절기는 매우 “선택적” (selective)이라고 말할 수 있다.[2] 거기에는 신학적 이유나 원리 또는 예배학적 근거에 의한 ‘선택적 지킴’ (selective observance)이 아니라, 예배학적 지식에 대한 무지를 바탕으로 몇 가지 절기들을, ‘불완전하게’ 형성된 어떤 전통을 따라서, 선택하여 지킨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각 절기들과의 상관관계는 있는지, 있다면 어떤 방식 안에서 교회력 안에 있는 절기들이 상호 연관되어 있는지 알고 있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각 절기는 얼마 기간 동안 지켜야 하는 지 전혀 모르는 것 같다.

이러한 이유는 한국교회에서 예배학을 공부한 분들이 많지 않다는 것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한국보수교단의 신학교 안에서 설교학 교수들은 많으나 예배학 교수는 찾아보기가 매우 힘들다. 자연히 목회자 후보생들이 실천신학의 분과 안에서 목회행위의 핵심 행위들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설교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과 더불어, 설교학은 그러한 보편적 인식 안에서 중요한 것으로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예배학에 대한 관심과 인식은 매우 약한 것이 현실이다. 설사 개인적이고 부분적인 관심이 있다고 하더라도 배움의 환경이 되지 못하고 있다. 누구나 예배 (liturgy)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으면서 예배학 (liturgics)에 대한 인식과 환경은 따라주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모습들이 한국에서 예배학에 대한 인식과 이해가 약한 현상적인 이유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더 깊은 이유는 역사적인 이유에서 찾아보아야 한다. 종교개혁은 예배의 개혁이라는 말이 기억난다. 카톨릭의 예배의 ‘신비’를 걷어내는 과정에서 ‘오직 성경’ (sola scriptura)이라는 구호 아래서 예배 안에서 말씀 (설교)에 대한 위치는 ‘비대한’ 반면, 예배학 (예전, liturgy)에 대한 관심은 빈약하기 짝이 없다. 어린 아이의 기저귀를 갈 때, 사용한 기저귀만 버리면 되는데, 기저귀를 차고 있는 아이까지 버린 격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양태는 교회당의 건축구조 안에서도 잘 반영되어 있다. 소위 ‘큰 (대) 강대상’ 과 ‘작은 (소) 강대상’ 이라는 명칭이다. 소위 우리가 부르는 큰 강대상은 설교를 위한 가구이고 작은 강대상은 성찬을 위한 가구의 명칭이다. 그 위치도 상하 종속관계를 보여주는 구조 안에 위치되어 있었고 크기도 차이가 있었던 적이 있었다.

따라서 본고에서 필자는 예배학에 바탕을 둔 교회력 (예배력)에 대한 이해 증진을 위해 지면이 허락하는 한, 교회력의 역사적 기원과 발전 과정에 대한 이슈를 다루고자 한다. 특히 예배력의 연속성과 불연속성 (the Church Calendar in Continuity and Discontinuity)의 관점에서 그것을 논하고자 한다.

I. 교회력의 기초 (The Foundational Event of the Church Calendar)

교회와 기독교 신앙의 기초는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다. 주님의 교회는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신앙 고백 위에 세워져 있다. 특히 부활 사건은 기독교 신학과 신앙의 주된 이슈 일뿐만 아니라, 예배력의 형성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진원지 역할을 역사적으로 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어떤 방식 안에서 역사적으로 교회력에 영향을 주었고, 그 교회력이 어떻게 발전해왔는지 살피는 것은 교회력의 기원과 발전에 관한 역사를 살피는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연대기적으로 신약 성경에서부터 초대교회까지의 초기 문헌들을 중심으로 그 발전과정을 역사적으로 먼저 고찰하고자 한다.

1. 첫 번째 부활 사건 (The First Easter Event)[3]

그리스도께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고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그의 제자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신 때가 “안식 후 첫 날”[4] (“the first day of the week,” 마 28:1; 막 16:9; 눅 24:1; 요 20:1)이었다. 바로 “그 날” (evn auvth/| th/| h`me,ra| 눅 24:13)에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은 자신을 나타내셔서 성경을 풀어 주시고,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셨다 (요 24:13-35).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은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요 20:19) 제자들의 모임에 나타나셨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요 20:21)는 파송의 말씀을 주셨다. 부활하신 주님은 보냄을 받은 제자들이, 주께서 맡기신 사역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도록 하기 위해 “성령을 받으라” (요 20:22)는 말씀을 주셨다. 그로부터 “여드레를 지나서”[5] (meqV h`me,raj ovktw. 요 20:26) 도마가 함께 있을 때, 그 제자들의 모임에 다시 나타나셨다. 여기서 도마에게 ‘영광스런’ 십자가의 상처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면서,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요 20:27)는 말씀을 통해서 도마는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요 20:28)는 신앙고백을 하게 됨으로 도마의 의심을 믿음으로 바꾸어 주셨다.

반복적으로 ‘안식 후 첫 날’에 제자들의 모임에 부활의 주님은 자신을 드러내셨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 제자들의 모임의 시간이 ‘믿는 자들의 모임일’ 즉 교회의 회집의 날이 될 것을 암시적으로 보여주셨다 (결과적으로 볼 때). ‘안식 후 첫 날 저녁에’ (요 20:19) 보이셨던 모습과 ‘여드레를 지나서’ (요 20:26), 다시 보이신 장면에서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은 별 차이가 없다. 그러나 여드레 후에 도마가 있는 가운데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셨을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2가지 포인트를 보여주셨다.[6] 첫째는 크리스천 의식 공동체 (the Christian ritual assembly)의 중심에 있는 ‘십자가’를 그의 영광스런 상처를 통해 보여주신 것이며, 둘째는 도마로부터 믿음을 요청함으로 예수님은 이 제자들, 곧 믿음의 공동체가 모이는 집회 (assembly)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암시적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동시에 이 날은 시간의 경과와 함께 믿음의 공동체가 모이는 회집의 날 (assembling day)이 되게 된다.

사도들은 ‘안식 후 첫 날’에 부활의 주님이 제자 공동체에 임재해 주신 그 반복적 행위를 통해, 점차 ‘그 주간의 첫째 날’ (the first day of the week)에 대한 중요성을 포착해간다. 이 날은 결국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과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제자들의 기억과 부활하신 주님의 임재가 연결되었다.”[7] 즉 이 날은 부활하신 주님의 임재와 믿음의 공동체와의 결합이다.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 후, 약 55-57년경에 쓴 고린도전서에서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를 위한 연보를 ‘매주 첫날’ 모임, 즉 매주의 첫날에 반복적인 모임 (the weekly reunion)과 연결하고 있다 (고전 16:2). 이어서 부활 후 61-63년경에 쓴 사도행전에서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행 20:7)라고 기록함으로 매주의 첫 날에 집회가 상례화 (conventionalization) 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거기에는 떡을 떼는 것 (the breaking bread)과 말씀의 강론 (a lengthy sermon)이 있었다.

물론 ‘안식 후 첫 날’ (the first day of the week)이라는 표현은 유대식 날의 계수 방식 (the Jewish method of counting)이었다. 이 개념은 당시의 교회들에서 유일한 개념이었다. 이 날에 대한 새로운 개념이 부활 후, 95년경에 쓰여진 요한계시록에서 등장한다. 그것은 ‘주의 날’ (evn th/| kuriakh/| h`me,ra ¡°On the Lord's Day¡±)이라는 개념이다 (계 1:10).[8]

유대인의 안식일 (Sabbath)과 그리스도인의 일요일 (Sunday)의 개념과 신학은 많은 점에서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있다.[9] Sunday와 Sabbath에 대한 이해와 실천의 방식은 지역과 교회구성원 (이방인과 유대인)의 성분에 따라서 종교문화적으로 구분 또는 혼용이 병행되어오다가 1세기 말까지 Sunday와 Sabbath의 구분이 완결되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그 증거를 Ignatius of Antioch (ca. 107)로부터 찾아 볼 수 있다. 그는 Sunday의 준수를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표식 (sign)으로 이해했다:

Those who used to live according to the old order of things have attained to a new hope and they observe no longer the Sabbath but Sunday, the day on which Christ and his death raised up our life.[10]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들의 Sabbath와는 다른 날과 다른 방식으로 차별화하여 Sunday를 지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총독 플리니 (Pliny the Younger, 61 AD~ca.112 AD)가 트라얀 황제에게 보내는 한 편지 (112년)에서 그가 체포한 그리스도인들이 일요일을 어떤 방식으로 지켰는지에 대한 비교적 상세한 정보를 간접적으로 전달해주고 있다:

Pliny the Younger, then governor of Bithynia, says that the Christians he had arrested claimed that their entire fault or error was to have gathered regularly before dawn on a set day in order to join in singing a hymn to the Christ as to a god.[11]

여기서 Pliny가 언급한 ¡°on a set day¡±는 Sunday를 의미했다. 우리는 또한 Pliny의 언급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집회는 일요일 새벽 전에 발생했고 거기에서 그들은 ‘한 신’ (a god)으로서 그리스도께 찬송을 불렀다는 것을 전한다.

플리니의 간접적인 증언으로부터 약 50년 후에, 저스틴 (Justin)은 Sunday 집회에 대한 최초의 직접적 묘사 (165)를 비교적 자세하게 증언하고 있다:

On the day named after the sun, all who live in city or countryside assemble in the same place, and the memoirs of the apostles or the writings of the prophets are read¡¦. The reason why we all assemble on Sunday is that it is the first day: the day on which God transformed darkness and matter and created the world, and the day on which Jesus Christ our Savior rose from the dead.[12]

저스틴의 글에서 우리는 당시 도시나 시골의 그리스도인의 집회에 같이 모인 사람들은 모두 사도들의 가르침에 대한 기억과 선지자들의 글들을 읽었다는 것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일요일 집회의 주된 한 내용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었다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들이 일요일에 모인 이유를 하나님이 어둠과 물질을 변형시켰고 세계를 창조하셨으며, 그 날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난 날이기 때문이라고 저스틴은 설명한다.

그리스도인들의 Sunday 집회가 시간적 측면에서 규칙적으로, 그리고 내용적 측면에서 성찬, 찬송, 말씀과 함께 내실 있는 모습으로 발전되어 가는 과정에 있었을지라도 그들의 Sunday 집회는 아직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Sunday가 아직 공휴일이 아니었던 시절에 조차도 모든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그 날에 모였었다. 우리는 3세기 중반의 Teaching of the Apostles 로부터 그러한 사실을 찾아 볼 수 있다:

Make not your worldly affairs of more account than the word of God; but on the Lord’s day leave everything and run eagerly to your Church; for she is your glory. Otherwise, what excuse have they before God who do not assemble on the Lord’s day to hear the word of life and be nourished with the divine food which abides for ever?[13]

여기서 주의 날에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두고 다른 세속적인 일을 하지 말며, 주의 날에 모든 일을 제쳐두고 교회에 갈 것을 권고한다.[14] 그리고 주의 날에 영생하도록 하는 신적 양식인 생명의 말씀을 듣는 것을 최고의 것으로 여겼다는 사실을 증거한다.

아직 당시에는 일요일이 공휴일이 아니었기에 주의 날에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일을 제쳐두고 회집을 한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는 것임에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의 신실한 행위는 마침내 순교자를 발생하게 만들었다. 당시로서는 그것이 불법집회이었기 때문이다. 304년 2월 12일, 아누리누스 총독 앞에 불법집회에 참가한 31명의 남자들과 18명의 여자들이 잡혀오게 되었다. 이들에 대한 공적인 고소는 로마제국의 칙령에 불복종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공적인 고소가 이루어졌을 때, 사투르니누스 (Saturninus) 라는 성직자는 “우리는 주의 날을 기념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를 위한 법입니다”라고 증거했다. 자기 집에서 그리스도인의 집회를 가졌던 에메리투스 (Emeritus)라는 사람은 이와 유사한 것을 말했다: “예 우리가 주의 날을 바로 나의 집 안에서 기념했었습니다. 우리는 주의 날을 기념하는 것 없이 살 수가 없습니다” (“Sine dominico non possumus”)라고 증언했다. 그리고 빅토리아 라는 한 소녀는 “저는 그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라고 자랑스럽게 선언했다. 이 사건이 바로 “일요일을 위한 순교자들” (martyrs for Sunday)로 불리어지는 아비티나의 순교자들 (the martyrs of Abitina; near Medjez el-Bab in Tunisia)의 증언이다.[15]

이 사건은 아직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공인되기 이전의 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기록한 “아비티나의 순교자들의 문서” (The Acts of the Martyrs of Abitina)는 박해의 시기가 끝나가고 있을 즈음, 교회는 이미 “일요일에 대한 성례전적 실체” (the sacramental reality of Sunday)를 인식했다. 즉 그리스도인들에게 일요일은 종교문화적으로 거룩한 삶의 초점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심각한 고난에서조차도 이 날을 큰 기쁨을 누리는 날로 인식하며, 파악했다는 것을 보여준다.[16]

이러한 시대가 지나서 콘스탄틴이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 (313)한 이후에 다가온 평화의 도래는 로마 제국의 법들이 일요일에 대한 경의를 표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콘스탄틴의 혼합주의 (Constantine’s syncretism)적 행태가 나타난다. 그는 태양에 대한 제의 (cult)와 그리스도에 대한 예배를 동시에 강화시키는 것에 모두 충실했다. 그는 태양신과 그리스도를 위해 일요일을 공휴일로 제정함으로써 둘 다를 영화롭게 했다. 그에게 일요일은 ‘태양의 날’ (the day of the sun)이었고 동시에 ‘그리스도의 날’ (the day of Kyrios Christ)이었다.[17]

321년 3월에 제정된 일요일에 관한 당시의 한 법에 따르면, ‘태양을 위한 이 존엄한 날’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아야 했으며, 관리나 모든 시민들 그리고 모든 장인들도 쉬어야 했다: “All judges and the people of the towns and all craftsmen are to remain at rest on the venerable day of the sun.”[18]

그리고 321년 7월에 부가적으로 제정된 또 다른 한 법에 따르면, 태양신을 위한 경배의 날로 알려진 태양의 날 (the day of the sun)에 재판과 논쟁과 같은 것들로 채워지는 것은 적합한 행위가 아닌 것으로 여겼다. 대신에 이 날에 노예를 석방하고 해방시키는 적합한 날로 여겼다:

[J]ust as it was unbecoming to fill the day of the sun, ‘renowned for the worship paid to him,’ with trials and disputes, so on the contrary it was fitting to make this a day for manumitting and emancipating slaves.[19]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지나오면서, 니케아 공의회 (the Council of Nicaea)의 전날에 비로소 그리스도인의 일요일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성례전’이 집례 되는 집회의 날로 공적으로 확정되었다.[20] 이 날은 매일의 업무를 제쳐두는 방식 안에서 축제의 날로 지켜졌다. 그리고 이어지는 세기들의 공의회들 (the councils)에서 일요일의 안식에 관한 법을 통과시켰으며, 그리고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집회에 참여할 의무를 상기시키게 되었다.[21] 이어지는 공의회들은 그리스도인의 일요일의 본질적 특징인 ¡°빛의 날, 기쁨의 날, 죽은 자로부터 부활의 날¡°[22]에 다른 어떤 것을 부가시키지 않았다. 그리고 ¡°이 날은 사람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 살아난 자들에게 속한 날이었다.¡° [23] 즉 부활이 이 날의 핵심 키워드이다.

2. 주간 예배력의 확장: 수요일과 금요일 (Wednesday and Friday in Extension of Weekly Cycle)

부활 사건 (the first Easter event)은 ‘주의 날’ (the Lord’s day)라는 매주 규칙적인 주간 예배의 날 (weekly worship cycle)을 형성했을 뿐만 아니라, 최초의 부활 사건 직전의 1주간 안에 일어났던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의 역사적 행위들에 대한 것도 함께 서서히 기념하는 방식으로 확장되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의 전통을 따라서 그 주간에 이틀을 금식의 날로 구별하였다. 유대인들은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을 했다 (Did. 8:1; Tertullian, de Orat. 19; de Fejun. 2).

3세기 중반까지, 역사적 이유로 인해 매주 이틀을 특별한 날로 제정하게 되었다. 그 날들은 수요일과 금요일이었다. 이것은 바리새인 (the hypocrites)의 위선적인 금식일인 월요일과 목요일과 의도적으로 차별화하기 위한 것으로 보여진다.[24] 다음 세기에 Shepherd of Hermas, Clement of Alexandria, 그리고 Tertullian은 수요일과 금요일을 ¡°stational [days]¡±로 불렀고 ¡°days of fasting and penitential prayer¡±로 여겼다.[25] 동방에서 2세기에 부활절 시즌 (the great fifty days) 이외의 모든 수요일과 금요일에 금식을 했으며, 서방에는 ‘stations’으로 알려진다.[26] 수요일과 금요일의 기도 모임은 점차 개인적 성격에서 공동체적 성격으로 바뀌게 되었다. 하지만 지역에 따라 모임의 성격이 조금씩 차이가 난다. Alexandria에서 5세기 중반에 ‘무 (無) 성찬집회’ (an aliturgical assembly)가 있었는데, 성찬 (Eucharist)이 없는 모임이었으며, 대신 성경본문들이 읽혀졌고 교사들이 그 본문들을 해석했으며, 이 모임에는 헌물 (offering)이 없이 진행되었다. 역사가 Socrates of Constantinople (c. 380~?)의 Historia Ecclesiastica에 따르면, 는 Origen이 썼던 많은 주석들이 수요일과 금요일 집회들을 위해 사용되었다고 증언한다.[27] 그러나 예루살렘과 갑바도기아 (Cappadocia) 교회들과 같은 아프리카 교회들은 수요일과 금요일에 성찬을 집례했다.

수요일이 주간 집회일로 제정된 것은, 이 날이 제자들이 주님을 배신한 날이며, 금요일은 주님의 십자가에 죽으신 날이기 때문이다 (Didascalia 21). 그러므로 주일 뿐만 아니라 수요일과 금요일 모임도 그리스도중심적 날들 (Christological days)로 모였고, 그리스도 중심의 주간 예배 모임 (Christological, weekly worship cycle)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것에 대해 Epiphanius (413)가 3세기의 Didascalis Apostolorum (Teaching of the Apostles)를 재언급한다:

¡°Wednesday and Friday are spent fasting until the ninth hour, because when Wednesday was beginning the Lord was arrested, and on Friday he was crucified.¡±[28]

Sub-conclusion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교회력과 공적인 예배모임의 시작을 위한 예배학적 효시가 된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이었다.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은 그리스도인의 말씀의 예배와 성찬의 예배를 내용으로 하는 그리스도인의 예배의 날이 되었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Sabbath와 연속성과 차별성을 드러내면서 그리스도인의 고유의 예배의 날이 되는 전통을 형성하게 되었다. 아울러 그 주간의 수요일과 금요일의 예배 모임으로까지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로서 한주간의 예배사이클 (the weekly worship cycle)이 완성되게 되었다. 부활의 날 (Easter)은 결국 주간 예배 모임 (weekly worship cycle)을 완성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주일 중심의 예배력을 생성했다. 더 나아가 이것은 자연스럽게 1년 후의 부활의 날을 기념하는 연간 예배 모임 (annual worship cycle)을 형성하게 된다. 매 주일은 작은 부활절 (a little Easter)이며, 부활절 (Easter)은 큰 주일 (the great Sunday)이다. 부활절을 중심으로 뒤로 회고하면서 사순절의 절기가 형성된다. 부활절을 중심으로, 앞으로 성령강림절이 이어진다. 사순절-부활절-성령강림절이라는 예배력의 큰 사이클 (부활절 사이클)을 형성하게 된다. 이 부활절 사이클은, 대강절-성탄절-주현절로 이어지는 교회력의 또 다른 사이클이 성탄절 사이클과 불연속성을 가진다. 그러면서 동시에 2개의 사이클은 연속성 안에서 대강절-성탄절-주현절-사순절-부활절-성령강림절로 이어지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중심으로 형성된 그리스도 중심의 6대 교회력의 절기를 형성한다. 이들 그리스도 중심의 6대 절기는 교회력 안에 있는 각각의 절기들이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연결된 연속성을 보여준다.[29]

II. 교회력의 필요성: 왜 교회력을 지켜야 하는가?

왜 교회력을 예배를 통해 지켜야 하는가? 이것에 대한 논의를 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구약에서의 절기를 제정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구약성경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구원역사에 대한 그 사건들 (the salvific events)을 시간과 공간이라는 역사세계 안에서 행하셨다.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행하신 일과 그 행하심을 통해 그 분의 성품을 계시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행동 계시와 말씀 계시를 통해 그분의 구원역사의 드라마를 보여주셨다. 이 드라마의 한 장면마다 그 분께서 행하신 일들을 잊어버리지 말고 기억하도록 하셨다. 그들 자신만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후손들에게 영원히 가르치고 교훈하여 ‘영원한 규례’로 삼게 하셨다 (예: 출 12:14).

기억한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적으로 알고 있고 생각하고 있다는 소극적인 기억이 아니다. 그것은 과거 구원역사를 현재적으로 재현하면서 기억하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적으로 과거 사건을 기억 할 뿐만 아니라, 미래적 구원의 소망을 품도록 하여 언약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시공간이 변하더라도 계속된다는 것을 보여주시고자 한 것이 그분의 절기 제정에 대한 중요한 한 가지 의도이다. 이러한 현재적 기억은 과거에 역사하신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임재의 재현이며, 미래에 있을 동일한 그 하나님의 임재를 현재로 소급하여 소망하고 확신하는 믿음 행위이다. 이것은 변화무쌍한 세계에 살아가며, 신실함이 없는 인생에게는 무한한 유익이다. 이런 기억이 바로 하나님께서 언약백성에게 제정해주신 절기들이다. 이 절기들은 모두가 경건과 제사 (예배) 그리고 축제와 나눔을 포함한다. 언약 백성들의 경건한 삶과 드림과 헌신의 예배 그리고 축제의 누림은 과거만의 단회적 사건이 아니라, 세대를 걸쳐서, 현재적 재현을 통해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임재의 현재성을 확인하고 미래에도 현재적 소망과 확신으로 소급하는 믿음의 기억행위이다. 이런 점에서 이 기억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기억상실증’에 쉽게 걸리는 인간에게 ‘영적인 트라마’ (spiritual trauma)와 같이 잊지 말고 영원히 기억해야 할 하나님의 의미 있는 ‘충격요법’과 같다.

이 기억행위가 절기로 표현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제정해주신 절기들은 다음과 같다.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오순절, 나팔절, 속죄일, 그리고 초막절 (장막절, 수장절)이다. 절기는 ‘성회’를 의미한다. 이 가운데 유월절/무교절 (étACM;h; gx;ä), “맥추절” (^yf,ê[]m; yrEäWKBi ‘ryciQ'h; gx;Û), 수장절 (‘@sia'h'( gx;Û)은 이스라엘 3대 절기이다 (출 23:14-19). 3대 절기의 시작인 유월절/무교절은 구원에 대한 감사의 절기이며, “맥추절” (밭의 첫 열매)과 수장절(연말 밭의 추수)은 수확의 열매에 대한 소출로 드리는 감사절기이다. 그래서 이 3대 절기들은 감사의 축제의 절기이다.

구약의 절기가 구약 백성들에게 과거에 행하신 하나님의 구원 역사 대해서 현재 기억을 통해서 감사의 응답의 표시를 매년 규칙적으로 지켰듯이 신약의 백성인 교회도 그리스도의 과거 구속 역사를 ‘기억과 기대’를 통해서 현재 규칙적으로 신약의 절기들을 지켜야 한다. 이것이 교회력이며, 예배력이다. 교회력은 그리스도의 구속 역사에 대한 현재적 재현을 예배를 통해 표현하는 예배 월력 체계이다. ‘기억과 기대’에 대한 더 정확한 신약적 이해를 위해 아남네시스와 프로렢시스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1. 아남네시스 (anamnesis)와 프로렢시스 (prolepsis)[30]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는 인간이 시간 개념을 아주 잘 설명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시간은 직선적이지만 과거에 대한 회고와 미래에 대한 기대를 현재 안에서 소급적으로 통합함으로 시간은 ‘능동적’ 현재가 될 수 있다. 특히 과거와 미래의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특별히 우리의 예배 안에서 현재화 된다.

과거는 “능동적 행위로서” ‘기억’ (아남네시스)하는 방식 안에서 현재가 된다. 예배에서 기억한다 (remember; remembrance)는 것은 단순히 정신적 과정 (a mental process)가 아니라, 의식적 과정 (a ritual process)을 의미한다. 성례전 (the Eucharist)에서 우리가 예수님을 기억한다고 할 때, 그것은 그 분에 대해 잠잠히 생각하는 것 (thinking)으로 기억함이 아니라, 그 분께서 하신 것을 행함 (doing)으로 기억하는 것이다. 즉 떡과 잔을 취하는 것 (Taking bread and the cup), 축사하는 것 (Giving thanks over them), 떡을 떼는 것 (Breaking the bread), 그리고 분배하는 것 (Giving the bread and cup). 이런 기억하는 행위는 명상 (cogitation)을 통한 기억함이 아니라, 행위 (doing)를 통한 기억이다. 이런 종류의 기억행위가 헬라어로 ‘아남네시스’ (anamnesis)이다. 그래서 성례전을 통한 과거 사건에 대한 기억은 여기서 ‘먹고 마시는’ 행위를 통해서 현재화하는 것이다.

또한 미래가 현재화된다. 헬라어 ‘프로렢시스’ (prolepsis)는 ‘미리 앞당겨 취하는 것’ (to take beforehand)을 의미한다. 이것의 통상적 동의어는 ‘기대하는 행위’ (anticipate)이다. 이것은 미래에 실제로 일어날 행위나 사건이 미리 현재 여기서 우리의 경험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의미한다. 프로렢시스는 하나님의 미래 행위를 우리의 현재 안으로 가져오는 행위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통해서 만들어진 성령 하나님의 선물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히 시간적으로 그리고 예수님께만 한정된 의미로서 과거사건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의 미래라는 시간과 사건이 우리에게 현재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의 부활하심으로 나도 부활한 자가 되었다. 그러나 종국적 성취는 미래에 부활의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를 따라서 교회인 우리도 영화로운 부활의 몸으로 변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부활은 미래의 현재화를 위한 기억행위 또는 기대행위이다 (The Resurrection is a proleptic event).

이런 기억 및 기대 행위와 교회력과 관련하여 말할 때, 교회의 절기들, 특히 그리스도 중심의 절기들 (성탄절 사이클과 부활절 사이클 안에 있는 여섯 절기들)은 과거에 일어났던 것 또는 미래에 일어날 것이라고 결연하게 믿는 것을 현재적 경험 안에서 축하하고 즐기는 “기억하는” (아남네시스) 그리고 “기대하는” (프로렢시스) 예배학적 절기들이다. 예배학적 생생한 행위적 ‘기억과 기대’ (아남네시스와 프로렢시스)는 하나님의 구속행위에 대해 언약백성의 영적인 “치매현상” (dementia) 또는 “기억상실” (amnesia)을 예방할 수 있다. 예배적 기억과 기대 행위는 과거에 대한 단순한 회상이나 미래에 대한 막연한 바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격과 사역에 대한 언약백성의 믿음 행위이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한 “재방송”이 아니라 새로운 공간과 시간과 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사랑에 대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언약 공동체가 행하는 ‘창의적 기억/기대 행위’ 이다.

요컨데, 그리스도의 과거 구속 사역을 ‘기억과 기대’를 통해 현재적으로 재현 또는 구현하는 것이 아남네시스와 프로펲시스의 개념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구속 행위는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낮아지심과 높아지심으로 표현되었다.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은 성탄절 사이클의 3절기인 대강절, 성탄절, 주현절이라면, 그리스도의 높아지심은 부활절 사이클의 3절기인 (사순절), 부활절, 성령강림절에서 표현되었다. 그리스도의 낮아지심과 높아지심은 그리스도 중심의 6대 절기의 예배에서뿐만 아니라, 모든 예배에서 내려오는 요소와 올라가는 요소인 예배 순서와 형식을 형성하게 된다. 이것이 예배에서 하나님과 언약 백성 상이의 커뮤니케이션이다.

2. 카타바시스 (catabasis)와 아나바시스 (anabasis)[31]

예배의 본질은 독백 (monologue)이 아니라, 쌍방의 대화 (dialogue)이다. 즉 예배에 참여하는 두 인격체의 “대화적 행위”를 의미한다. 예배 인격체는 예배를 받으시는 삼위하나님과 예배를 드리는 그의 백성인 사람이다. 이 두 인격체 사이에서 예배 가운데 일어나는 일체의 의미 있는 인간행위 (actus humanus)들은 모두가 예배적 행위이다.

예배에 있어서 이 두 측면에서 일어나는 행위를 “카타바시스와 아나바시스”라고 부른다. 카타바시스 (Catabasis: God’s Decent to Man)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내려오심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행위를 의미한다. 이 구원은 하나님의 계시 행위로 구현되었다.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시 행위는 말씀과 행위로 나타났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구속하시기 위해 말씀 계시를 주시고 그리고 실제 행동으로 성취하셨다. 한마디로, 카타바시스는 하나님의 ‘아래를 향한’ (downward) 행위이며, 구원론적 행위 (divines salvific action)이다.

반대로 아나바시스 (Anabasis: Man’s Ascent to God)는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응답행위를 의미한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행위를 받아들임으로 인간 내적 행위인 믿음과 외적 응답 행위인 예배 행위가 발생한다. 즉 아나바시스는 인간의 ‘위를 향한’ (upward) 행위이며, 예배적 행위 (human liturgical action)를 의미한다.

카타바시스와 아나바시스는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이 둘은 하나의 통일체이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구원론적 통일체’ (salvific unity)이며, ‘예배학적 통일체’ (liturgical unity)이다. 물론 이 말은 신적인 행위가 부족하여 인간의 행위로 완성되고 보충되어야 된다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행위는 그 자체로 충분하다. 어떤 인간의 어떤 행위로도 하나님의 존재를 규정할 수는 없다. 우리가 예배적 영광 (human liturgical doxa)을 돌리지 않더라도 그 분은 스스로 신적 존재론적 영광 (divine ontological doxa)을 가지고 계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예배자로 부르셔서 교회를 삼으셨다. 이 구원론적이고 예배학적 통일체가 된 교회 공동체의 예배 안에서 의미 있는 다양한 방법과 상징과 언어와 표현들로 구현된다. 이런 점에서 예배는 매우 신학적이라고 할 수 있다. 공예배는 바로 이러한 신학적 미학을 담고 있다.

결국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존재하는, 하향의 카타바시스와 상향의 아나바시스의 커뮤니케이션은 예배의 정의가 무엇인지, 우리가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할지 많은 아이디어를 제공해준다. 그리고 이것은 예배의 두 방향과 요소를 결정하고 규정한다.[32]

Sub-conclusion

아남네시스와 프로렢시스가 예배력을 지키는 이유에 대한 개념이라면, 카타바시스와 아나바시스는 하나님의 구속행위에 대한 언약백성의 응답행위의 개념이다. 예배력을 왜 지켜야 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과거 구속행위를 기억 (anamnesis)하고 미래 구속행위를 기대 (prolepsis)하는 현재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응답행위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행위는 자기 백성을 향한 내려오심과 올라가심의 사역으로 표현되었다. 예배도 결국 내려오심 (Catabasis)과 올려드림 (Anabasis) 사이의 신인 쌍방의 행위 (divine-human reciprocal action)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기억과 기대 안에서, 그리고 아래를 향한 신적 행위와 위를 향한 인간적 행위가 예배 안에서 표현되되, 특히 일정한 예배력 안에서 구현되어야 한다. 주님의 교회는 어떤 절기들을 지켜야 하며, 그 절기에 합당한 예배를 어떤 방식 안에서 교회력을 지켜야 하는가?

III. 교회력의 구성: 무슨 교회력을 지켜야 하는가?

현대교회가 지키고 있는 절기들을 여기서 개괄적으로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현대 교회가 지키는 교회력 또는 예배력의 구성은 크게 3가지 (3Cs)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는 기독론적 절기 (Christological Feast)요, 둘째는 시민 기념일 (Civil Holiday)이며, 그리고 셋째는 교회 기념/강조일 (Church Emphatic Day)이다. 기독론적 절기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 (사역)을 기초로 해서 지키는 절기로서 전통적 의미에서 지키는 교회력의 예배절기이다. 시민 기념일은 국가공휴일이나 국가적 차원에서 기념하는 사건이나 그러한 기념일에 교회가 예배를 드리며 지키는 것을 가리킨다. 그 예로써, 신년예배, 독립기념일 (광복절), 어린이 주일, 어버이 주일 등이다. 그리고 교회 기념/강조일은 교회가 특별한 날을 기념하고 신학적 의미나 정신 그리고 헌신과 헌금을 강조하여 현재의 삶에서 구현하기를 원하여 지키는 날이다. 예컨데, 선교주일, 교회설립기념일, 종교개혁주일, 교단창설기념주일, 추수감사주일, 교육주일, 장애인주일 등이다.

은밀한 의미에서 교회가 지키는 절기를 예배를 통해 누리는 월력 (calendar) 시스템을 교회력/예배력이라고 할 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을 기억하고 기념하며, 축하하는 것을 통해, 그 구속사역의 신학적 의미와 신앙적 의미를 현재적 교회적 삶에 적용하고자 하는 그리스도 중심절기들 (Christo-centered Worship Seasons)을 의미한다.

그리스도 중심의 예배력 (교회력)에는 두 개의 사이클이 있다. 성탄절 사이클과 부활절 사이클이다. 성탄절 사이클은 대강절 (Advent)로 시작하여 성탄절 (Christmas)과 주현절(Epiphany)로 이어지는 3개의 절기들이다. 그리고 부활절 사이클은 사순절 (Lent)로 시작하여 부활절 (Easter)과 성령강림절 (Pentecost)로 이어지는 3개의 절기이다. 각 사이클은 한 개의 준비의 절기와 두 개의 축제의 절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성탄절 사이클에서 시작의 절기인 대강절과 부활절 사이클에서 시작의 절기인 사순절은 각 사이클의 축제의 절기들을 지키기 위한 준비의 절기이다. 그래서 대강절과 사순절은 이어지는 축제의 절기들을 위한 ‘준비의 절기’ (A Preparatory Season)라고 부르며, 각 사이클에서 준비의 절기에 이어지는 두 개의 절기들은 ‘축제의 절기’ (Festival Season)라고 부른다. 즉 성탄절 사이클에서 준비의 절기인 대강절이 지나면, 이어지는 성탄절과 주현절은 성탄절 사이클의 축제의 절기들이다. 그리고 부활절 사이클의 준비의 절기인 사순절이 지나면, 이어지는 부활절과 성령강림절은 부활절 사이클에서 축제의 절기들이다. 그러므로 교회력은 ‘준비와 누림 (축제)’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준비와 누림의 반복적인 그리스도 중심의 6대 절기를 연속적으로 표현하면, 대강절à성탄절à주현절à사순절à부활절à성령강림절로 이어진다.[33]

지금까지 우리는 위에서 성탄절 사이클과 부활절 사이클로 구성되어 있는 그리스도 중심의 6대 절기를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 이제 여기서 우리는 이 절기들과 두 사이클이 어떤 역사적 과정 안에 생성했는지, 즉 그 역사적 기원 및 발전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성탄절 사이클 (Christmas Cycle)

성탄절 사이클은 준비의 절기인 대강절에 시작되어 축제의 절기인 성탄절과 주현절로 이어진다.

(1) 대강절 (Advent)

대강절의 기원은 전적으로 서방교회의 전통이다. 대강절의 첫째 주일은 서방교회에서 그해의 교회력의 시작으로 고려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항상, 모든 지역에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34] 가울 (Gaul)에서 Hilary of Poiters (d. c. 367)의 증거와 스페인 (Spain)에서 the Councils of Saragossa (380)에 따르면, 대강절은 주현절을 위한 3주간의 준비의 과정이었다. 5세기와 6세기에 이 3주간의 대강절 기간은 성탄절이 되기 이전의 40일까지 길어지게 되었다. Bede는 ‘ante natale Dei’ (“before God’s birth”)에 Egbert와 Cuthbert가 40일 동안 금식했다고 기록한다 (HE 3.27, 4.30). 원래 로마에서 성탄절 하루 전 1일만 금식했다 (Filastrius of Brescia, Div. Haer. 149; CSEL 38. Cf. Augustine, Ep. 65). The Orthodox Church 의 대강절은 11월 15일에 시작하며, 성탄절을 위한 준비의 금식 절기로 지킨다. 그 기간은 약간의 변천을 겪으면서 Gregory the Great가 4주간으로 확정했다.[35] 대강절이 서방교회에서 동방교회로 발전되었으나, 성탄절의 축제의 절기를 위한 준비의 절기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2) 성탄절 (Christmas)

성탄절이 처음으로 언급된 것은 “Chronography of 354”[36] 에 의해서이다. 성탄절과 주현절은 기원과 발전의 역사[37] 안에서 상호 중첩되어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이 정도로 언급하고 다음 항목인 주현절에 대한 언급에서 계속할 것이다.

 (3) 주현절 (Epiphany)

대강절이 서방교회의 전통인 반면, 주현절은 동방교회의 기원을 갖는다. 성탄절과 주현절은 부분적으로 동지점 (the winter solstice)과 연결된 이방인의 축제의 컨텍스트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방인의 축제를 대체하기 위한 시도들이 있어왔다. 그리스도인이 로마에서 성탄절을 지켰다는 첫 번째 증거가 나타나기 80년 전인 274년에, 12월 25일은 ‘태양의 생일’ (Natalis solis invicti)을 지키는 날로 확정되었었다 (in the Chronograph of 354).[38] 그리고 이집트와 아라비아에서 1월 6일은 태양신인 Aion과 그리스신화에서 포도주의 신인 Dionysus (Epiphanius AH 51.2; GCS 31.284)의 동정녀 탄생 (the virgin-birth of Aion/Dionysus)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신들이 사람들에게 자신을 나타내는 전설과 관련되어 있다.  Pliny the Elder는 Dionysus에 말하기를 물로 포도주로 바꿈으로 그 날에 그의 임재를 드러냈다고 언급한다 (Natural History 2.106, 31.13).[39]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12월 25일과 1월 6일은 모두 Julian calendar에서 Nisan 14일에 주님의 수난 (the Lord’s Passion)에 대한 실제 날짜로 고정하기 위한 시도로부터 계산된 날들이다. 서방에서 Hippolytus와 Tertullian에 의해 받아들여진 날은 3월 25일이며, the older Asian recension of the calendar는 4월 6일이었다.[40]

그것들의 기원이 무엇이든지, 성탄절과 주현절은 4세기에 폭넓게 지켜졌는데, 이것은 의심 없이 당대의 기독론적 논쟁들과 Arianism에 대한 논쟁의 필요성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41] 주현절은 그리스도의 출생 사건 (Christ’ nativity)에 대한 축하와 그리스도의 세례와 가나에서 첫 번째 기적을 기념하는 절기였다 (John Cassian, Conferences 10.2; PL 49.821).[42]

Epiphany라는 이름이 헬라어 기원을 가리킨다고 할지라도, 그것에 대한 명백한 언급은 c. 361에 Gaul에서 지킨 것이다 (Ammianus Marcellinus’s History 21.1).[43] 여기서 지킨 것에 대한 내용은 거의 확실하게 예수님의 출생 사건 (the nativity)이었다. Egeria[44]의 증언도, 예루살렘에서 주된 내용은 예수님의 출생에 제한된 것이었고, 예수님의 세례와 가나에서 기적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25.6-12)고 전한다. 그러나 동방에서 45년을 보냈고 이 45년 기간 가운데 베들레헴에서 24년을 보냈던 Jerome (d. 420)은 예수님의 세례가 주된 내용이었다고 증언한다 (Comm. In Ezek. 1.1; PL 25.17). 그러나 그의 죽음의 때까지 서방의 기원을 갖는 성탄절은 동방으로 소개되었다. 386년까지는 Antioch (Chrysostom, in diem natalem, PG 49.351)으로, 370년까지 Cappadocia (Gregory of Nyssa, in diem luminum, ed. Jaeger, 9.221)로, 그리고 380년까지 Constantinople (Gregory Naz., Orat. 38)로 성탄절이 전래되었다.[45] 이 사실은 동방의 주현절과 서방의 성탄절이 상호 교류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 인해 다소 복잡한 양상으로 발전된다.

서방의 성탄절에 대한 최초의 언급이 354년이고 동방의 주현절이 360년까지는 Gaul에서 이미 형성된 전통이었다면, 즉 거의 동시적 기원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주현절이 성탄절보다 일찍 시작된 것으로 본다면, 어떤 경우이건 그것은 니케아 공의회 (325)보다 이전일 수는 없다.[46]

주현절의 동방 기원과 달리, 성탄절은 서방에서 기원되었는데, 로마라기 보다는 북아프리카에서 일 것이다. Donatists는 그밖에 모든 사람과 달리 Epiphany의 절기를 추가하지 않았다 (Serm. 202; PL 38.1033)고 어거스틴은 412년에 호소한다.[47] 이 사실은 성탄절이 Donatists schism의 년도인 311년 전에 북아프리카에서 폭넓게 기념되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당시 주현절은 최근에 더해졌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비록 주현절이 Leo의 시기까지 잘 확립되었을지라도, 로마에서 5세기 초까지는 기념되어오지 않았던 것 같다 (Coeburgh, R. Ben, 1965, pp. 304ff). Gaul과 Spain에서 그리고 심지어 north Italy에서 그것은 더 일찍 알려졌다.  거기서 그것은 동방박사의 경배 사건 (the adoration of the Magi), 예수님의 세례 사건 (our Lord’s baptism), 그리고 가나 혼인 잔치의 기적 사건 (the miracle at Cana)에 대한 3중적인 기념이었다. (Paulinus of Nola, Poema 27; PL 61,649), 반면 로마에서 동방박사 (the Magi)는 주현절의 유일한 주제가 되어온 것 같다.[48]

원래 기원과 그 내용에 있어서 주현절과 성탄절의 ‘결합적인 축제’ (unitive festival)이었던 것이 동방과 서방에서 다른 방식으로 나누어진 것 같다: 서방의 성탄절은 예수님의 출생의 축일인데, 동방의 성탄절은 여기에다 동방박사의 경배 사건 (the adoration of the Magi)을 추가했다; 동방의 주현절은 동방에서 주님의 세례에 대한 기념이고 서방에서 주현절은 동방박사의 방문 사건 (the visit of the Magi)이 기념된다.[49] 그리고 나서, 다른 두 개의 주제가 주현절과 결합되었다. 즉 주님의 세례와 가나 혼인잔치가 서방에서 주현절 이후의 Sundays에 기념된다. 비잔틴 예배 (The Byzantine liturgy)에는 가나에 대한 언급이 없다. 혼인 이미지 (nuptial imagery)는 세례에 대해 사용된다.[50] 여기서 우리는 요한복음 2장의 가나혼인잔치의 주제가 주현절에 포함되었다는 것이 매우 흥미롭고 의아하다. 가나혼인잔치의 주제가 주현절에 포함된 것은 주현절과 동일한 날인 1월 6일에 대한 발생한 이방종교의 절기의 종교문화적인 현상에 대해 변증적으로 대체하려는 의미인 것 같다. 앞서 언급한대로 이집트와 아라비아에서 주현절의 날인 1월 6일은 Aion/Dionysus와 연결되어 있었다. Pliny the Elder의 증언에 따르면, Dionysus가 물을 포도주로 바꾼 이 날에 자신의 임재를 드러냈다고 말한다. 이것이 가나혼인잔치의 장면과 일치한다. 그래서 이방종교의 종교문화 안에 있는 물을 포도주로 바꾼 사건과 신의 임재 사건, 이 두 사건들이 관련된 1월 6일에 주현절이라는 절기로 기독교화 (Christianization)하면서 가나혼인잔치의 주제가 주현절에 들어오지 않았다 생각된다.

동방에서, 갑바도기아 교부들은 일찍이 주현절을 세례를 위한 표준일로 삼았다. 반면 서방에서는 비록 Leo가 성탄절에 그 주제에 관해 설교했을지라도, 적어도 Leo의 시기까지는 세례가 결코 그 때 집례되지 않았다. 그러나 동방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Gaul에서 성탄절/주현절은 세례의 시즌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Gaul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그것에 대한 준비의 40일 기간에 대한 언급을 듣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51]

2. 부활절 사이클 (Easter Cycle)

부활절 사이클은 준비의 절기인 사순절을 포함한다. 그리고 이 준비의 절기를 이어서 2개의 축제의 절기인 부활절과 성령강림절이 이어진다.

초대교회는 한 개의 절기만을 가졌다: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에 기초한 주간과 연간의 유월절 (the weekly and annual Pesach)이다. 4세기에 이르러서 주님의 오심에 대한 절기가 생성된다.[52]

2세기 전까지 부활절 (Easter)의 날을 계산하는 2가지 방법이 있었다. 소아시아 교회들 (The Churches of Asia Minor)은 Nisan, 14일의 유대인의 유월절 (the Jewish Passover)의 날을 기독교화 (Christianizing) 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날에 그들의 금식을 멈추었다. 다른 지역의 교회들은 부활절을 Nisan, 14일 다음 일요일 (the “first day of the week”)에 지켰다. 로마교회 (The Roman Church)는 후자를 따랐다. 3세기 시작부터는 이것이 모두를 위한 하나의 표준 전통이 되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Nisan월의 음력 14일이 양력의 어느 날에 떨어지는 지를 계산하는 데는 차이점들이 있었다. 니케아 공의회 (the Council of Nicaea, 325)에서 모든 교회들은 Alexandrian 계산법을 따를 것을 촉구했다. 그래서 이후부터는 부활절은 춘분점 (the spring equinox: 3월22일과 4월 25일 사이) 이후 첫 번째 보름달 (the first full moon) 직후의 일요일에 지켜졌다.

적어도 3세기 시작부터, 부활절의 축제는 50일 (Pentekoste)의 기간 동안에 계속 지켜졌다. 그러나 특별한 지킴으로 특징지어지는 50일째 그 자체였다는 것은 단지 4세기부터이다. 이 동일한 기간에 “the sacred triduum (the Great Three Days; 성 [聖] 목, 금, 토요일)이 출현했고 얼마 후에 전체로서 Holy Week (수난주간, the passion week)가 시작되었다.

부활절 축제는 초기부터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기억하는 날들에 금식으로 준비되었다. 이 금식은 비교적 빨리 사순절 (Lent)의 40일 전 기간 동안까지 확장되었다. 그래서 사순절은 부활절을 위한 준비의 시간이 되었다.

(1) 사순절 (Lent)

사순절 (Lent)은 라틴어로 Quadragesima이며, 헬라어로는 Tessarakoste라고 불리어진다. 이 절기는 기본적으로 금식과 세례를 위한 준비 기간으로 지켜졌다. 사순절의 ‘40일’의 수 (number)는 광야에서 예수님의 금식의 길이에 의해 결정되었다.[53]

사순절의 길이는 어떻게 40일의 기간을 계산하는지에 따라서 매우 다양하다.[54] 예를 들면 Sunday가 제외되든지, 아니면 Saturday와 Sunday가 제외되든지, 아니면 Good Friday와 Holy Saturday 또는 Holy Week 전체가 제외되든지 했다. 그 시작과 마침 그리고 기간에 있어서도 다양한 변화과정의 역사를 갖는다. 1세기의 사순절은 40시간 동안 그리스도 무덤 속에 있었다고 믿어지는 기간을 의미했다. 그 후에 40시간이 연장되어 6일 (Holy Week)이 되었다. 6일은 다시 6주간으로 늘어났다. Athanasius는 월요일에 시작하여 Holy Week (the Great Week)[55]를 포함하는 6주를 주장했다. 반면 50년 후에 Egeria는 예루살렘에서 사순절은 the Great Week를 포함했고 8주간 계속되었다. 왜냐하면 토요일과 일요일이 금식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27:1).[56]

서방전통에서 40일의 사순절은 Ash Wednesday로부터 계산되어 Holy Week를 포함하며, 일요일은 제외된다. 반면 동방전통에서 사순절은 (재의 수요일) 직전 월요일에 시작하여 종려주일 (Palm Sunday) 직전 금요일까지로 나아가며, Holy Week을 제외하고 그 사이의 모든 일요일들을 포함한다. 그리고 마지막 한 주간은 “Cheesefare Week”[57]라고 불리는 부분 금식주간이 이어진다. 서방에서처럼, 사순절 (Lent, the Great Fast)은 준비의 금식절기 (a pre-Lenten season)라는 공통점은 있지만 실제로 그 기간은 5주간이다.

니케아공의회 (325)에서 사순절의 기간은 40일 (6주)로 확정되었다. 그 시작 시점은 ‘재의 수요일’ (Ash Wednesday)이다. 재의 수요일은 부활절로부터 역산하여 산출할 수 있다. 이 날로부터 일요일을 제외한 부활주일 직전 토요일까지 40일간이다. 일요일은 금식일에서 제외하기 때문이다.  일요일은 작은 부활절이기 때문에 서방 전통은 금식일에서 제외했고 반면 동방은 포함시켰다. 동방과 서방에서 사순절의 절기는 모두가 공히 금식으로 부활절을 준비하는 준비의 절기라는 것에는 일치한다.

(2) 부활절 (Easter)

사도시대부터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부활을 매주 일요일에 기념했다. 연간 축제 (the annual celebration)로서 부활절은 유대인의 유월절 (Jewish Passover)이 그러한 것과 같았다. 부활절은 그리스도인의 유월절 (Christian Pascha)이었다. 부활절은 크게 The Easter Vigil (부활절 전야제), The Easter Triduum (부활절 직전 3일), Easter Day/Season (부활절)으로 구성된다. 여기서 우리는 The Easter Vigil과 The Easter Triduum만 논할 것이다. 부활절 자체에 대한 것은 이미 앞에서 충분히 논의되어 왔기 때문이다.

초기 문헌들은 부활절 기념은 하루, 이틀, 또는 그 이상의 엄격한 금식의 형태를 본질적으로 취한다. 그리고 이것은 성찬으로 마무리되는 기도를 위한 야간 집회 (a nocturnal assembly for prayer)로 이어진다. 3세기의 Teaching of the Apostles[58]에 따르면, 부활절 기념에 대한 초기의 묘사를 발견할 수 있다:

On the Friday and on the Sabbath fast wholly, and taste nothing. You shall come together and watch and keep vigil all the night with prayers and intercessions and with reading of the Prophets, and with the Gospel and with Psalms…until the third hour in the night after the Sabbath; and then break your fasts…. And then offer your oblations; and thereafter eat and make good cheer, and rejoice and be glad, because the earnest of our resurrection, Christ, is risen. And this shall be a law to your for ever, unto the end of the world.[59]

여기서 우리는 the Easter Vigil의 기본적 요소들은 금식, 믿음의 공동체의 회집, 심야기도 (prayer vigil), 구약과 신약성경의 읽기, 봉헌, 식탁의 교제, 부활의 기쁨 안에서 누린다.[60]

그리고 The “Easter Triduum” (or “paschal triduum”)이 부활절을 지키는 또 다른 한 축으로 여겨왔다. 4세기 말에 Ambrose는  “sacred triduum” (triduum sacrum)이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가 “suffered and rested and rose” (et passus est, et requievit, et resurrexit)[61]의 행위를 가리킨다. 후에 어거스틴은 “the most holy triduum of the crucified, buried., and risen Lord” (sacratissimum triduum crucifixi, sepulti et ressuscitati)으로 불렀다.[62] The Easter triduum은 예루살렘 교회의 예배에서 그 기원을 갖는다. 그 증거를 우리는 Egeria의 증언에서 찾는다. Egeria[63]가 381-384년에 예루살렘으로 순례자로 참여한 후, 남긴 Egeria’s Travels 후기에 기록되어 있다. Holy Thursday, Good Friday, Holy Saturday, 그리고 나서 50일간의 the Great Fifty (부활절 시즌)가 the “great Sunday”로 불려지는 부활주일에 시작된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승천일 (Ascension)에 대한 부분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승천 사건은 부활 사건과 성령강림 사건 사이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활절 절기는 7주간 동안의 축제 기간이다. 부활절 여섯째 주일이 포함된 그 주간의 목요일이 그리스도의 승천일 (the Day of Ascension of the Lord)이다. 승천하신 목요일이 부활주일로부터 40일째 되는 날이다 승천절에 대한 교회사적인 최초의 언급은 닛사의 그레고리 (Gregory of Nyssa)가 388년에 한, 설교에서 나타난다 (Jean Danielou). 그리고 ca. 420-430년에 예루살렘에 그것이 받아들여졌다.[64]

우리는 승천의 날인 목요일에 주로 예배가 없기 때문에, 그 다음 이어지는 부활절 일곱째 주일을 승천주일 (Sunday of Ascension)로 지킨다. 또한 부활절 마지막 일곱번째 주간으로서, 승천 주일이 있는 그 한 주간 전체를 승천절 (Season of Ascension)로 지킬 수 있다. 승천절은 마침은 곧 부활절의 절기의 마침을 의미한다.

 (3) 성령강림절 (Pentecost)

50일간의 부활절은 교회력 가운데 가장 오래된 절기이다. 이것은 무교병 절기 (the Feast of Unleavened Bread)로부터 초실절/맥추절 (the Feast of First Fruits)까지의 7주간의 유대인의 오순절 (the Jewish feast of Pentecost)에 상응하는 절기이다. 50일간의 부활절에 기간의 일요일들에 대해, Athanasius의 서신들은 실제로 그것을 “magna dominica” (the great Sunday)라고 부른다. 이 날에는 금식이나 무릎을 꿇는 행위도 이 기간 허용되지 않았다 (Tertullian, de Cor. 3.4; Egeria, 41; Nicaea, Can. 20).[65] 성령강림절은 바로 이러한 부활절의 연장선상에 있는 축제의 절기로 지켜졌다.

사실 성령강림절은 일종의 “요약적인 시기” (a summarizing occasion)이지, 새로운 시작의 시기 (an inaugural occasion)는 아니다. 이 말의 의미하는 바는 예수님의 고난 (사순절), 부활 (부활절), 승천 (승천일) 그리고 약속의 성령님을 보내주신 사건을 일련의 부활절의 사이클의 연속적인 절기를 마무리하는 ‘날’ (day)의 개념이지, 새로운 ‘절기’ (season)의 개념이 담긴 날은 아니다.[66]

그리스도의 승천일 10일 후인, 이어지는 주일이 바로 성령강림주일 (the Day of Pentecost)이다. 성령강림주일은 부활주일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이다. 승천절기가 부활절 절기 (Season)의 마침이라면, 성령강림주일은 부활절 사이클 자체를 닫는 축제의 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 중심의 6대 연속절기는 대강절-성탄절-주현절-사순절-부활절-성령강림절의 절기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서 승천절이 왜 없는가? 승천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교회력에서 누락 또는 약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승천절을 지키지 말아야 하는지 덜 강조된 것은 아닌지 의구심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리는 대강절-성탄절-주현절의 세 절기를 일컬어 ‘성탄절 사이클의 절기들’이라고 불러왔다. 그리고 사순절-부활절-성령강림절의 세 절기를 ‘부활절 사이클의 절기들’이라고 불러왔다. 각 사이클의 명칭은 그 사이클에서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핵심 사건인 성탄하심과 부활하심을 근거로 하여 교회력의 사이클의 명칭을 형성한다. 즉 성탄절 사이클과 부활절 사이클로 대표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부활사건과 승천사건은 각각 독립된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임에는 틀림없으나, 이 사건을 연속적인 사건으로 보면서 승천은 부활에 대한 광의의 신학적 개념에 포함시키는 것이 교회력의 신학적 의도인 것 같다. 이 신학적 의도가 교회력의 두 사이클에서 신학적으로 체계화 된 것이 절기 명칭에 대한 예배력 또는 예배신학의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승천 사건을 기념하는 승천절의 명칭이 그리스도 중심의 6대 연속적 절기의 이름 안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하여서 승천절을 지키지 말아야 한다거나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승천절은 부활절의 여섯째 주일이 포함된 그 주간의 목요일이 부활 후 40일째 되는 날이기에 승천절을 부활절 절기가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부활절 일곱째 주일을 승천주일로 교회력은 명칭을 부여하여 지켜오고 있다.

요셉 웨버 (Joseph Weber)는 “부활과 승천은 일종의 두 단계의 로케트이다”고 말한 적이 있다.[67] 이 의미는 부활은 예수님의 몸이 땅으로부터 로케트가 분출되는 것이며, 이어지는 승천은 로케트가 대기 바깥으로 발진하여 나가는 것으로 보았다. 즉 이 비유는 연속성이 강조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가지신 생명과 몸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부활생명/몸과 승천생명/몸은 동일한 영화로운 생명/몸이다. 그리고 구속 사역의 측면에서 볼 때, 부활은 승천이 의미하는 왕으로서 영광 안에서 승귀를 통한 통치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왜냐하면 부활은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승리하신 왕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승천 사건 자체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 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이것이 교회력에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중심의 두 사이클인 성탄절 사이클과 부활절 사이클 안에 있는 6대 교회력 절기 안에 승천절이 명시적으로 포함되지 않는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실천적으로 그리고 실제적으로, 우리는 부활절의 사이클 안에서 부활절의 축제의 정서와 신학 안에서 승천절을 지킴이 옳다고 할 수 있다.

3. 평상절; 성장절; 녹색절 (Ordinary Time of Growth)[68]

“평상절”에는 7개의 축제가 기념된다. 그 가운데 3개는 대부분의 전통들에서 공통적인 것들이다 (the Universal Feasts): the Transfiguration of the Lord, the Triumph of the Cross, and the Feast of Dedication. 그리고 나머지 4개는 서방교회에 해당된다 (the Western Feasts): the Trinity, Corpus Christi, the Sacred Heart of Jesus, and Christ the King.[69]

그러나 평상절은 절기의 개념은 아니다.[70] 서론에서 언급한 대로 교회력의 절기의 개념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부활절 사이클과 성탄절 사이클 안에 있는 6개 절기를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평상절은 절기의 개념이 아니다. 하지만 이 시기는 6대 절기들을 통한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과 인격을 기초로 해서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성장을 도모하는 것을 강조하는 적절한 시즌이다.

Sub-conclusion

교회력은 2개의 사이클인, 부활절 사이클과 성탄절 사이클 안에 그리스도 구속 사역 중심의 6대 절기를 포함한다. 그것은 대강절, 성탄절, 주현절, 사순절, 부활절, 성령강림절로 구성진다. 이 6개의 절기의 발생과 성장과정의 역사는 지역과 전통과 시기에 따라 매우 다른 모습과 복잡한 양상으로 발전되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사이클은 한 개의 준비의 절기와 두 개의 축제의 절기들을 가진 교회력 시스템으로 귀착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나오면서

전통은 만들어져 왔고 전통은 또한 만들어져 가야 한다. 교회력의 영역도 예외가 아니다. 현대 한국교회는 교회력에 대한 전통이 제대로 형성되어 있지 않다. 특히 한국보수교단의 교회는 불완전하게 형성된 교회력의 전통 안에서 절기들을 “선택적으로” 지켜오고 있다. 그러나 교회력은 그 성격상 선택적 지킴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연속적 누림의 체계이다.

이런 점에서 예배학에 대한 신학적 훈련과 연구가 강화될 필요가 있다. 이것이 선행될 때, 건강한 예배학의 전통이 세워질 수 있다. 이 전통을 세우기 위한 연구 자료들이 개신교에, 특히 보수 교단의 개신교에 예배학적 유산이 빈약하다.  타 전통들 안에 쌓여 있는 1, 2차 자료들을 발굴하고 개혁 신학에 입각한 자료비평을 거쳐 예배력에 대한 진일보된 전통을 세워나가야 할 것이다. 그것을 위한 중요한 원리가 있다면, 교회력의 기초가 된 부활 사건을 바탕으로 한 주일 (the first day of the week) 중심의 신학[71]과 그리스도 중심의 구속 사역[72]에 바탕을 둔 예배력에 대한 전통을 세워나가야 할 것이다.

[1] 교회력 또는 예배력에 대한 영어 명칭은 다양하게 사용해오고 있다: the Christian Year/Calendar, the Church Year/Calendar, the Liturgical Year/Calendar 등이다.

[2] 한국교회가 지키는 절기들이 ‘선택적’이라고 본고에서 필자가 언급할 때, 그 이유는 (1)성탄절>(2)부활절>(3)성령강림절>(4)사순절>(5)대강절>(6)주현절이라는 ‘우선 순위도’ 안에서 절기들이 주로 지켜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1)번 방향 쪽으로 갈수록 익숙해져 있고 (6)번 방향 쪽으로 갈수록 낯선 절기일 것이다. 적게는 앞의 (1)번과 (2)번 절기만을 선택적으로 지킬 수도 있고, 많이 지킨다면 (1)번~(4)번까지의 절기가 선택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3] 이 섹션의 내용 전개에 있어서 필자는 A. G. Martimort의 The Liturgy and Time, The Church at Prayer vol. IV, eds. by Aimé Georges Martimort et als. (Collegeville, Minnesota: The Liturgical Press, 1983), 11-16에 있는 제1장 “Sunday and the Week”의 History of Sunday의 내용을 요약적으로 설명함으로, 그에게 빚지고 있다. 그러나 많은 부분에서 본고의 논지 전개를 위해 필요한 필자의 논평과 아이디어가 반영되어 있다.

[4] 마태복음 28:1절의 헬라어 본문은 각각 한 개의 시간의 종속절과 주절로 구성되어 있는데, 여기사용된 종속절의 헬라어 본문은 VOye. de. sabba,twn( th/| evpifwskou,sh| eivj mi,an sabba,twn h=lqen로 묘사했는데, 한글 개역개정판 성경은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 날이 되려는 새벽에’로 번역했다. 특히 ‘안식 후 첫 날’ (eivj mi,an sabba,twn)에 해당되는 부분을 대부분의 영어성경은 ‘the first day of the week’ 으로 번역했다 (KJV, NASB, NIV etc.). ‘the first day of the week’에 해당되는 헬라어를 마가복음 16:9절에는 prw,th| sabba,tou 으로 사용했다. 누가복음 24:1절과 요한복음 20:1절에서는 mia/| tw/n sabba,twn 을 사용했다. ‘안식 후 첫날’과 ‘그 주간의 첫날’로 번역되는 것은 헬라어 sa,bbaton 이 ‘안식일’ (Sabbath)과 ‘주간’ (week)이라는 2가지 의미를 모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즉 안식일한 주간의 촛점으로 보는 유대인들에게는 2가지 의미가 모두 가능했다.

[5] meqV h`me,raj ovktw. (lit., ¡°after eight days¡±)을 NIV는 “a week later” 으로 번역했다. 일요일에 대한 또 다른 명칭들 가운데 하나가 ‘the eighth day’라는 표현이 있는데, 하지만 여기서 ‘여드레 후’가 시간적으로 일요일을 가리키는지는 분명치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활의 주님이 ‘일주일 후’에 제자공동체에 다시 나타나셨다는 뉘앙스를 전달하고 있다.

[6] A. G. Martimort, I. H. Dalmais, and P. Jounel, The Liturgy and Time, The Church at Prayer vol. IV (Collegeville, Minnesota: The Liturgical Press, 1983, 12-13.

[7] Ibid., 13. 그리고 부활에 대한 기념 (commemoration) 위에 서서히 다른 구속 사건들이 예배학적 기념 절기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즉 승귀 (높아지심)의 구속 사역적 테마 (the salvific theme)에 포함된 부활, 승천, 성령강림 같은 사역들과 낮아지심의 구속 사역적 테마 안에 있는 성육신, 고난, 죽으심이 절기화된다.

[8] ‘주의 날’에 대한 명칭은 헬라어를 사용하는 교회들에서 두루 사용되었다. 그리고 이것의 라틴어 형태의 명칭으로서 (Vul: in dominica die), 서방교회에서는 “dominicus dies” 라고 일컬어져 사용되었다. 그리고 이 명사는 곧 사라져버렸고 형용사만 남게 되었다. 이 형용사가 다시 명사가 되어 사용되었다 (dominica). 그래서 이 단어가 라틴계의 언어들에서 dimanche, domenica, domingo (“Sunday”) 라는 말들을 생성하게 만들었다.

[9] 본고는 안식일과 일요일 (주일)의 관계에 대한 페이퍼가 아니기에 본고의 목적과 지면의 한계 때문에 여기서는 언급을 생략한다.

[10] Ignatius of Antioch, Ad Magnesios 9, ed. P. Th. Camelot (SC 10; 2nd ed., Paris: Cerf. 1951), 102-103, recited from The Liturgy and Time, 14, n., 5.

[11] Pliny the Younger, Epistolarum lib. 10, 96; cited in W. Rordorf, Sabbat et Dimanche 79; cited in The Liturgy and Time, 14 (italics mine).

[12] Justin, Apologia I 67, 3 and 7, ed. L. Pautigny (Textes et Documents; Paris: Picard, 1904), 143, cited in Liturgy and Time, 14, n., 8.

[13] Didascalia Apostolorum 23, trans. R. Hugh Connolly, Didascalia Apostolorum (Oxford; Clarendon Press, 1929), 124, cited from The Liturgy and Time, 15, n., 9.

[14] 주의 날에 다른 세속적인 일을 중단하는 안식의 행위는, 이 날을 지키는 실천적 측면에서, 유대인들의 Sabbath와 그리스도인들의 Sunday 사이의 어떤 연속성 (continuity)을 암시한다. 비록 서로 다른 날로, 다른 방식으로 지키는 불연속성 (discontinuity) 또는 단절성 (disconnection)이 있을지라도, Sabbath의 정신 (mentality)이 Sunday에 반영되어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구약 율법과 신약의 복음과의 관계 안에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날의 지킴에 대한 이러한 실천의 방식 (연속성과 불연속성)은 후에 (325년) 로마에서 이방 종교의 태양숭배일과 그리스도인의 일요일 사이에서도 발견된다 (본고의 각주 17번을 참고하라).

[15] Bibliographia hagiographica Latiana, no. 7492; text cited in Rordorf, Sabbat et Dimanche, 109; recited from The Liturgy and Time, 15, n., 10.

[16] Didascalia Apostolorum cited from The Liturgy and Time, 15, n., 11.

[17] Constantine’s syncretism에 관하여, H. Stern, Le calendrier de 354 (Institut Francais de Beyrouth, Bibliotheque archeologique et historique 55; Paris: Geuther, 1953), cited from The Liturgy and Time, 15, n., 12를 보라.

[18] Codex Jusinianus lib. 3, tit. 12, 2; ed. Kruger (Berlin: Weidmann, 1877[1926]), 127; Eusebius, Vita Constantini 4, 18 (PG 20:1165), cited in Rordorf, ibid., 111-113; recited from The Liturgy and Time, 15, n., 13.

[19] J. Gaudemet, “La législation religieuse de Constantin,“ in Revue d’histoire de l’Eglise en France 33 (1947), 43-47; cited The Liturgy and Time, 16, n., 14

[20] The Liturgy and Time, 16.

[21] 예컨데, the Councils of Agade (506), can. 47, ed. C. Munier (CCL 148:212), and Orleans (511), can. 26, ed. C. de Clercq (CCL 148A:11): cited from The Liturgy and Time, 16, n., 15.

[22] Abu’l Barakat, La lampe des tenebres, in W. Riedel, Die Kirchenrechtsquellen des Patriarchats Alexandrien (Leipzig : A. Deichert, 1900), 44; cited from The Liturgy and Time, 16, n., 16.

[23] St. Athanasius, De sabbato et circumcision 5 (PG 28:140), cited from The Liturgy and Time 16, n., 17.

[24] Didache 8:1, 2 in Huub van de Sandt and David Flusser, The Didache: Its Jewish Sources and its Place in Early Judaism and Christianity (Fortress, Minneapolis, 2002), 12.

[25] A. G. Martimort, The Liturgy and Time, 26.

[26] Dom Gregory Dix, The Shape of the Liturgy (Norfolk: Biddles Ltd., 2007), 342.

[27] Socrates, Historia Ecclesiastica 5, 22 (PG 67: 636-637), cited from The Liturgy and Time, 26.

[28] St. Epiphanius, De fide 22, ed. K. Holl (GCS 37), 522; see A. Jaubert, La date de la cène (Etudes bibliques; Paris: Gabalda, 1957), 88, recited from The Liturgy and Time, 26, n., 47.

[29] 우리는 이 6대 절기들에 대해서는 본고의 마지막 섹션인 “III. 교회력의 구성”에서 다룰 것이다.

[30] Laurence Hull Stookey, Calendar: Christ’s Time for the Church (Nashville: Abingdon Press, 1996), 29-33을 보라.

[31] Michael Kunzler, The Church’s Liturgy (New York: Continuum, 2001), 1-166를 보라.

[32] 현대교회는 예배의 순서를 지나치게 편의성과 작위적으로 만들고 있다. 우리는 카타바시스와 아나바시스의 관점으로 예배순서와 예배 요소를 점검하고 인식함으로 우리의 예배가 더욱 의미 있는 예배형태가 되기를 소망한다.

[33] 그리스도 중심의 두 개의 사이클 안에 있는 6개 절기가 끝나면, Ordinary Time of Growth이 이어진다. 이 시즌은 “평상절” 또는 “성장절”로 부를 수 있다. 그리고 이 시기의 교회력의 사용 색깔은 녹색 (Green)이기 “녹색절”이라고도 부를 수 있다. 그러나 평상절은 교회력의 명칭은 아니다.

[34] 종종 예배력 (the church calendar)과 일반력 (the civil calendar)이 일치했기에, 희랍 정교회에서는 9월 1일이 한 해의 시작이었으며, 1751년 이전에 잉글랜드에서는 3월 25일이 한 해의 시작이었다. 왜냐하면 이 날이 수태고지 (the Annunciation)의 날이며, 이 날이 예수님이 잉태된 날로 보았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서 12월 25일이 예배력의 시작의 날이 되었었다. 그러나 현대 교회력은 일반력의 시작과 달리 대강절을 한 해의 교회력의 시작 시점으로 고려한다: Laurence Hull Stookey, Calendar: Christ’s Time for the Church (Nashville: Abingdon Press, 1996), 180, n., 1을 보라. 그리고 대표적으로, The Revised Common Lectionary (1992)은 대강절의 교회력의 시작이라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35] The Study of Liturgy, 468을 보라.

[36] ‘Chronography of 354’는 ‘Calendar of 354’로도 불리어지는 이 사본은 Valentius라는 부유한 한 로마 그리스도인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http://en.wikipedia.org/wiki/Chronography_of_354 (retrieved on 6-25-2010).

[37] 성탄절과 주현절의 상관관계에 대한 역사에 관하여 Michael Kunzler, The Church’s Liturgy (New York: Continuum, 2001), 418-421을 보라.

[38] Thomas J. Talley, The Origins of the Liturgical Year (Collegeville, Minnesota: The Liturgical Press, 1986), 88; The Study of Liturgy, 466; The Liturgy and Time, 78.

[39] Peter G. Cobb, “I The History of the Christian Year,” in The Study of Liturgy, 446-448.

[40] Ibid.

[41] Ibid.

[42] Ibid.

[43] The Liturgy and Time, 79.

[44] Egeria 또는 Aetheria 는 Gallaeci/Gallic 여인으로서, 그녀는 약 381-384년에 예루살렘을 순례자로 방문하여 당시 예루살렘의 예배적 상황과 문화에 대한 기록을 남겼고 오늘까지 전한다.

[45] Peter G. Cobb, “I The History of the Christian Year” in The Study of Liturgy, 466-468을 보라.

[46] The Liturgy and Time, 79.

[47] Peter G. Cobb, “I The History of the Christian Year” in The Study of Liturgy, 467.

[48] Ibid.

[49] Ibid.

[50] Ibid.

[51] Ibid.

[52] The Liturgy and Time, 78

[53] Coptic sources in fact suggest the fast was originally related, not to the Pascha but to Epiphany. See T. J. Talley, Origins, 189ff.

[54] Peter G. Cobb, 465를 보라.

[55] Holy Week (Latin: Hebdomas Sancta or Hebdomas Maior, “Greater Week”; Greek: Megale Hebdomas)은 사순절 마지막 한주간과 부활절 직전 한 주간을 의미한다. 이 한 주간의 매일은 각각의 명칭이 있다. 그들은 Palm Sunday (종려주일), Holy Monday, Holy Tuesday, Holy Wednesday, Holy Thursday (또는 Maundy Thursday), Good Friday, Holy Saturday이다. 특히, Maundy Thursday, Good Friday, Holy Saturday를 포함하는 3일을 “Easter Triduum” (또는 “paschal triduum,” “sacred triduum,” “holy triduum”)이라 부른다.

[56] Peter G. Cobb, 465.

[57] ‘Cheesefare Week’ 또는 Maslenitsa (Russian: Ма́сленица, Ukrainian: Ма́сляниця, Belarusian: Ма́сьленіца)는 Butter Week, Pancake week, or Cheesefare Week로도 알려져 있다. 이 주간은 사순절 (the Great Fast)의 일곱 번째 주간인 마지막 한 주간을 의미한다. Maslenitsa 는 서방교회의 Carnival에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http://en.wikipedia.org/wiki/Cheesefare_Week (retrieved on 6-26-2010).

[58] Didascalia Apostolorum (“Teaching of the Apostles”)는 예루살렘 공의회 (행 15:1-29)에서 사도들에 의해 작성된 것으로 주장하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것이 실제로는 3세기의 작품이라는 것에 동의한다.

[59] Ch. 21. The Text in Didascalia et Constitutiones Apostolorum, ed. F. X. Funk, I (Paderborn: Schöningh, 1905), 288; trans. R. Hugh Connolly, Didascalia Apostolorum (Oxford: Clarendon Press, 1929), 189, recited from The Liturgy and Time, 36, n., 7.

[60] The Liturgy and Time, 36.

[61] St. Ambrose, Ep. 23, 13 (PL 16:1030), recited from The Liturgy and Time, 47, n., 29.

[62] St. Ambrose, Ep, 54, 14 (PL 33: 215). Cited in Cantalamessa, ibid. 192; recited from The Liturgy and Time, 47, n., 30.

[63] Egeria’s Travels, trans. John Wilkinson (London: SPCK, 1971), 125ff. and passim. Cited by Cantalamessa, ibid., 170-177; cited from The Liturgy and Time, 47, n. 32.

[64] The Liturgy and Time, 60.

[65] Peter G. Cobb, “I. The History of the Christian Year,” 463.

[66] 한 때에는 이 날을 새로운 절기 (season)의 시작으로 보아서 “성령 강림절 주간 (“Whitsuntide”; 성령강림주일부터 1주일 또는 그 주간의 처음 3일) 또는 “성령강림절” (“the Season of Pentecost”)로 이해된 적이 있으나, 지금은 성령강림일 (the Day of Pentecost;) 또는 성령강림주일(Whitsunday)로 지킨다. 이러한 이해는 초기 교회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그 해의 부활절 축제의 절기를 닫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이 용어를 “성령강림절”로 부르는 것에 더 익숙해져 있다. 아마 대강절, 성탄절, 주현절, 부활절, 사순절 등 교회의 절기가 “~절” (節)로 부르는 것에 익숙해져 이 날에 대해 습관적으로 교회력의 명칭으로 사용해온 것 같다. 성령강림절이라고 부르기보다 성령강림일 또는 성령강림주일로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한 명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언어가 사회적 습관 (언어의 사회성)에 따라 용어의 전환이 일어난다고 고려한다면, 그것은 일반명사화 된 표현으로서 성령강림절이라고 부를지라도 그 의미하는 바가 성령님이 강림하신 주일로서 날의 개념으로 이해하면 무방할 것이다.

[67] Laurence Hull Stookey, Calendar: Christ’s Time for the Church, 67.

[68] 본고의 각주 33번을 참고하라.

[69] A. G. Martimort, The Liturgy and Time, 97-107를 보라.

[70] 이점에서 ‘삼위일체주일’ (Trinity Sunday)도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행위와 무관한 절기이다. 이것은 조직신학적인 개념에 기초한 삼위일체론적 신론을 강조하는 신학이 반영된 ‘절기’이다. 다시 말해서 ‘구속 사건’ (the salvific event)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구속자의 인격’ (the triune divine person)에 바탕을 둔 것이라는 점에서 차별성이 있다.

[71] 예를 들면, 승천일 (Ascension)이 목요일이지만, 이어지는 다음 주일이 부활절 일곱 번째 주일로서 승천기념주일로 지키는 것이 주일 중심의 예배력이라고 할 수 있다.

[72] 예를 들면, 이미 언급한대로 ‘삼위일체 주일’은 교리적 강조의 의미 안에서 형성된 것이며, 그리스도의 사역에 바탕을 둔 것은 아니다. 굳이 이 날을 지킨다면 지킬 수도 있겠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교회력은 아니다 (참고: 본고의 각주 70번을 보라). 그리고 “평상절” (Ordinary Time of Growth)도 그리스도 중심의 구속 사역에 바탕을 둔 절기는 아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위기는 위험한 기회


"위기(危機)"는 "위험한 기회(機會)"일까?

위기(危機/ 위캐할 위, 클 기) = 위험(危險. 위태할 위, 험할 험) + 기회(機會. 틀 기, 모일 회)


위기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위기라는 단어는 그리스어 동사 “크리노(krino)“에서 파생되었는데, “나는 판단하고 선택한다”를 의미한다.
이 개념은 서로 다른 관점과 기회를 마주해야 하는 선택이나 순간을 암시한다(오니스, 1900).
위기는 사람과 환경 사이의 자연적인 항상성 과정으로 간주할 수 있다.
“저울의 무게를 바꾸거나” 또는 틀을 다시 연결하여 균형을 이룬다.

κρίνω 스트롱번호 2919

1. 나누다.  2. 판단하다. 3. 결정하다
발음 [ krinō ]
관련 성경  /  고발하다(마5:40, 고전6:6), 비판하다(마7:1), 심판하다(마19:28, 눅19:22, 요3:17, 계18:8), 정죄받다(눅6:37), 판단하다(요8:16, 롬2:1), 다스리다(눅22:30), 심판받다(요3:18, 벧전4:6, 계20:12), 재판하다(요18:31), 결의하다(행3:13, 21:25), 작정하다(행20:16, 고전2:2, 딛3:12), 심문받다(행23:6, 24:21, 25:20), 판단받다(롬3:4, 고전11:32), 정죄하다(롬14:22), 결심하다(고후2:1).

위기는 기회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위기는 자신에게 새로운 형태의 적응과 변화를 만들어 낼 가능성을 제공할 수 있다.

사람이나 가족의 기능을 구별하는 것은 위기가 없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대처해 왔는가 하는 점이다.
또한, 이러한 위기가 어떻게 개인과 가족의 성장과 발전에 기여했는지 살펴볼 수 있다.
또한, 본성 때문에 위기 발생 시 자신에게 너무 과하게 작용하여 해를 끼칠 수 있는 사건들도 있다.

인간 위기의 유형

자신의 삶 전반에 걸쳐, 각각의 사람은 자신이 다른 방식으로 분류할 수 있는 일련의 비판적인 순간에 직면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이런 중요한 순간을 두 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 규범적 (예측): 정상적인 생활주기(life cycle)와 예측(결혼, 직업이나 집을 구하는 것, 은퇴 등)
  • 비규범적 (비예측): 하나 이상의 사건에 의해 야기되는 상황, 예측할 수 없는, 우발적인, 예기치 못한 위기를 말한다. 이런 사건은 갑자기 발생하기 때문에 즉각적인 대응이 필요하다.

그래서, 사람이나 가족의 위기는 예측할 수도, 예측할 수 없을 수도 있지만 모두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들이 일으킨 문제는 해결하기는 매우 어렵다.

정신건강에 관한 한, 어떤 위기의 결과는 같지만, 개인적인 경험은 다양하다.

무엇이 위기를 결정하는가?

우리는 자신만의 세계 속에서 개인적인 위기를 겪는 고립된 사람이 아니다. 이러한 위기의 진화를 결정하는 요소를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 위기를 촉발한 사건의 심각성
  • 가족 자원: 유연한 역할, 사회경제 및 기능적 특성, 보살핌, 정서적 지원…
  • 사회적 지지: 가족, 친구, 공동체 또는 어떤 해로운 영향을 최소화하도록 도울 수 있는 다른 사람.

이러한 위기를 다른 초점을 사용하여 설명하려는 다양한 이론이 있다. 이 이론에는 생명 사건 이론, 인지이론, 수습기제(Coping Mechanisms)의 이론 그리고 과거 사건 재활성화 이론이 있다.

노박(1978, 슬라이케 인용, 1996)은 위기를 초래할 수 있는 사건의 확률은 여러 가지 요인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시사했다. 여기에는 위기가 발생하는 순간, 강도, 지속시간 그리고 개인의 발전을 방해하는 정도가 포함된다.

인간: 회복력 있는 종

인간은 태초부터 끊임없이 계속되는 전쟁과 거대한 위기, 재난 및 폭력으로부터 끊임없이 회복하려고 노력해왔다. 위기는 흔적을 남기고 대대로 전해진다.

위기는 우리의 마음과 감정에 지속해서 영향을 미친다.

왜 몇몇 사람은 위기에 심각한 영향을 받지 않고 어떤 사람은 위기를 경험할까? 그 이유는 정신 건강에서 가장 큰 문제 중 하나인 만성과 관련이 있다. 즉, 누군가의 삶에서 가장 중대한 사건의 반복은 물론, 사건을 다룰 말한 자원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모든 위기는 삶의 교훈이다

위기를 경험 한 모든 사람은 자신의 삶에 대한 교훈을 얻는다. 교훈은 의식적으로 처리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사람의 ‘각본’에 일부가 된다.

카플란은 위기 발생 후 처음 3일 동안에 관하여 글로 썼다. 카플란은 위기에 대한 설명과 함께 어떻게 조합되는지와 위기가 인지적 기능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조사했다. 다이레그로브도 이 주제에 대해 글을 썼다. 그는 이러한 요소의 조합이 다른 사람의 적응기제 변화를 설명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우리는 이러한 결정적인 순간의 인상을 어떻게 흡수하는지가 마침내 미래의 삶의 “각본”에 투영된다. 우리가 느끼는 것과 사건이 의미하는 것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나중에 새롭고 더 긍정적인 교훈으로 인상을 바꿀 수 있다.

이러한 위기 이후에 사람의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되는 여러 가지 방법은 일반화된 부정적 각본을 만드는 것을 어렵게 한다. 어떤 주어진 위기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판단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누군가 위기에 처했을 때, 우리는 그들을 희생자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위기의 ‘희생자’는 사건을 처리하고 그들의 삶을 계속 이어가야 한다. 희생자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는 위대한 생존자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위기"란 예기치 않은 상황에서 발생하는 어려움과 불안정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위기는 개인, 사회, 국가의 모든 수준에서 언제든지 닥칠 수 있으며, 인간은 이를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흔히 “위기는 위험한 기회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위기가 단지 위험하고 부정적인 상황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새로운 기회가 숨겨져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오늘은 위기의 본질과 그 속에 숨겨진 기회의 의미를 살펴보고, 이를 어떻게 극복하고 기회로 전환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한다.

첫째, 위기는 기존의 방식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중요한 순간이 될 수 있다.

위기 상황에 처했을 때, 우리는 평소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예를 들어, 경제적 위기가 닥쳤을 때 사람들은 자신들의 소비 습관이나 재정 관리 방식을 재고하게 된다.
이는 단지 손실을 줄이는 것을 넘어 새로운 전략을 수립하고 더 나은 방법을 모색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는 더 성숙한 사고를 하게 되고, 앞으로의 선택에 있어서 더 현명해질 수 있다.

둘째, 위기는 변화의 촉매제가 된다.

많은 혁신과 발전은 위기 속에서 이루어진다. 기술 발전의 역사만 보더라도, 전쟁이나 경제적 불황과 같은 위기 상황에서 새로운 기술과 아이디어가 탄생한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2차 세계대전 동안 급격히 발전한 항공기 기술과 컴퓨터 과학은 평화 시기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와 마찬가지로, 위기는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며, 이는 개인적이든 사회적이든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

셋째, 위기는 인내와 용기를 시험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위기 상황에서는 쉽게 좌절하거나 포기하기 쉽다. 하지만 이를 극복해 내는 과정에서 우리는 더욱 강인해지고, 그로 인해 더 큰 성취를 이루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성공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에서 큰 위기를 맞닥뜨렸을 때 이를 어떻게 극복했느냐가 성공의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말한다.

위기 속에서 자신을 되돌아보고, 새로운 도전을 받아들여 나아가는 용기는 결국 그 사람을 더 나은 곳으로 이끌게 된다.

물론, 위기가 언제나 기회로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기 위해서는 적절한 대처 능력과 긍정적인 사고방식이 필요하다. 무작정 위기를 지나치게 낙관적으로만 바라본다면 오히려 더 큰 실패를 초래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위기를 냉철하게 분석하고, 그 상황 속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위기는 위험한 기회다”라는 말은 단순한 위로의 말이 아니라 현실적인 조언이라는 것이다. 위기는 언제나 위험과 기회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위험을 어떻게 다루고, 그 속에서 기회를 발견하느냐이다.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은 결국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으며, 이를 통해 우리는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나에게 닥쳐오고 있는 위기를 어떻게 관리하고 대처해 나아갈 것인가 고민해 보자.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10가지 방법


기회는 ‘위기의 탈’을 쓰고 찾아오고, 위기도 ‘기회의 탈’을 쓰고 찾아온다. 기회와 위기는 손등과 손바닥 차이다. 언제든 기회가 위기가 될 수 있고, 위기가 기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성공은 수없이 반복되고 쌓여온 시행착오의 산물이다.
인생은 긴 여행이다. 가다보면 비도 만나도 눈도 만나고 벼락이 내리치는 길을 아슬아슬하게 걸어가기도 한다.
수많은 위기와 맞닥트리고 극복하며 나아가야 한다. 이렇게 드라마틱한 순간이 있어야 인생에 묘미가 있다. 너무 평탄하면 무미건조하고 재미가 없다. 당시에는 힘들어도 지나고나면 내 삶에 피가 되고 살이 된다.
지금 힘들고 고통스럽더라도 잘 견디고 이겨내면 분명 좋은 날이 온다. 그러니 힘들더라도 절대 포기하지 말고, 희망을 잃지 말고 용기를 내자. 위기는 얼마든지 기회로 바꿀 수 있다. 짧은 인생, 후회없이 화끈하게 살아보자!

1.누구든 원망하지 마라
사람들은 회피 본능이 있다. 일이 잘못된 탓을 다른 사람에게 돌린다. 그러면서 미워하고 원망한다. 그전에 했던 말 한 마디, 행동 하나하나까지 끄집어 낸다. 한 번 원망하기 시작한면 끝이 없다. 다른 사람을 탓하고 원망한다고 해서 손해가 만회되는 것도 아니다. 문제의 근원이 당사자인 나한테 있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더 현명하다.

2.자책에 빠져있지 마라
인간은 시련 앞에 맥없이 무너지는 약한 존재다. 살다보면 내 뜻대로 안 될 때가 있다. 위기는 또 다른 기회이고, 실수는 큰 자산이다. 후회와 반성은 뼈져리게 하되 짧은 것이 좋다. 그래야 다시 시작할 수 있고, 다시 일어설 수 있다. 자책을 오래하면 깊은 절망의 수렁에 빠지고, 영영 나오지 못할 수도 있다.


3.문제의 원인을 분석하라
원인없는 결과는 없다. 실패한 이유와 원인을 철저하게 따지고 분석해야 한다. 그래야만 어디서 잘못됐는지 찾아낼 수 있다. 대강대강 대충대충 넘기면 같은 문제가 반복될 수 있다.

4.현실을 냉정하게 받아들여라
지금 닥친 상황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다. 자꾸 과거로 돌아가서 생각한다고 현실이 바뀌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현실을 냉정하게 인정하고 다음을 준비하는 것이다.

5.죽겠다는 소리를 내지 마라
위기 상황이 되면 모든 게 어렵고 힘들다. 이럴 때 한숨만 쉬고 죽는 소리만 하면 상황은 더 나빠지게 된다. 처지를 비관하고 한탄만 하다가는 더 많은 것을 잃는다.
일시적인 동정은 받을 수 있어도 사람들의 믿음과 신뢰가 깨진다. 상황은 나쁠지언정 그것을 밖으로 자꾸 표출하지 말고 의연하게 대처하자.



6.조급하면 실수한다는 걸 알아라
마음이 급하면 실수하기 마련이다. 한가지 일에 집중하기 어렵고 이 일을 하다가도 저 일이 생각나고 걱정된다. 생각이 방황하면서 이 일과 저 일로 옮겨다닌다. 그러면 어떤 일도 제대로 할 수 없다.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되기는 커녕 오히려 집중을 방해하고 계획을 세우기가 힘들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을 새겨보자.

7.내가 처한 상황을 파악하라
같은 상황이 반복되지 않으려면 자신을 바로 알아야 한다. 내가 이루고 싶은 목표는 무엇인가? 그것을 위해 나는 무엇을 했는가? 그 과정에서 실수나 문제는 없었는가? 또 내 능력은 어느 정도인가? 등등. 스스로에게 ‘나는 누구인가?’ 질문을 던지고 대답해 보자. 그냥 생각만 하지 말고 메모를 하면 지금 내 위치 파악을 하는데 도움이 된다.

8.포기하지 말고 용기를 내라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감을 잃으면 안 된다. 그것마저 없으면 앞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한 번 포기하면 절대 일어설 수 없다. 힘들 때일수록 더 용기를 내야 한다. 인생이란 용기에 따라서 펴질 수도 움츠려 들 수도 있다. 용기만 있다면 아무리 거센 폭풍이 밀려와도 헤쳐나갈 수 있다. 그러니 절대 포기하지 말고 희망을 잃지 말 것이며 더 용기를 내자.


9.책 속에서 성공사례를 찾아라
뻘 속에 진주가 묻혀 있다면, 책 속에는 길이 있다. 먼저 실패를 극복하고 성공한 사례를 찾아보자. 성공사례만 봐서는 큰 도움이 안 된다. 나와는 환경도 다르고 모든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실패를 연구하는게 더 건설적이다. 실패는 하나의 과정일 뿐 실패가 아니기 때문이다. 실패를 연구해야 나에게서 부족한 점을 미리 찾아 보완할 수도 있다.

10.성공한 모습을 상상하고 행동하라
모든 계획의 최종 목표는 ‘성공’이다. 물론 성공을 위해서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시련과 고난이 닥치면 의연하게 헤쳐나가야 한다. 그러면 어느 순간 목표에 다가서게 되고 그토록 원하던 꿈도 이루어지게 된다. 그 모습만 생각해도 저절로 힘이 날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목표를 바로 앞에 두고 포기한다. 꿈을 이루는 길은 오직 하나 그것이 ‘현실’이 되는 것임을 명심하자.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위기를 기회로, 실패를 성공으로 만드는 4가지 비결

과거에 겪고 보지 못한 위기이다. 팬데믹(세계적 유행병)은 언제 끝날 줄 모르고 경제는 침체(recession)를 넘어 공황(depression)으로 갈 것이라는 암담한 소식이 들린다. 더 큰 문제는 이런 글로벌 위기가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전염병과 잘 싸우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소비가 죽은 탓에 장사가 하나도 되지 않고 있다. 매출이 반토막 난 자영업자들이 즐비하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코로나로 인해 글로벌 공급망이 마비되면서 대기업 수출길이 막히고 더불어 대기업에 납품하는 기업들은 고사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기업이 무너지면 직장이 사라진다. 

   1

그 어느 때보다 ‘위기’와 ‘실패’라는 단어가 글 안에, 입 속에 넘쳐나고 있다. 이럴 때 개인은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까? 사람마다 상황이 다르고 맥락이 다르기에 정답은 없다. 그렇다고 당황한 채 아무런 계획 없이 멍하니 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 위기를 기회로, 실패를 성공으로 바꿀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나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위기 때마다 책에서 답을 찾으려고 노력해 왔다. 모두에게 적용된다고 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나에게는 매우 큰 도움이 되었다. 위기와 실패 속에서 꼭 읽었으면 하는 책 한 권을 소개하고자 한다. 바로 도리스 컨스 굿윈의 <혼돈의 시대 리더의 탄생>이다.

   2

<혼돈의 시대 리더의 탄생>는 미국의 4명의 위대한 대통령(링컨, 시어도어 루스벨트, 프랭클린 루스벨트, 린든 존슨) 이야기가 나온다. 퓰리처상과 링컨상 등을 수상한 도리스 컨스 굿윈 전 하버드 대학교수의 작품 <혼돈의 시대 리더의 탄생>은 리더십을 50년 가까이 연구한 대가의 책답게 4명의 대통령의 삶이 놀라운 통찰과 더불어 서사스럽게 펼쳐진다. 

<혼돈의 시대 리더의 탄생>은 3부로 되어 있는데 1부는 4명의 대통령의 야망과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어떻게 준비했는지, 3부는 대통령 재임 시 역사적 사건을 어떠한 리더십으로 해결했는지가 나온다. 

지금 소개할 내용은 2부이다. 2부는 4명의 대통령의 위기, 실패, 역경, 고난 등을 어떻게 극복했는지가 진지하게 서술되어 있다. 최악의 상황을 최선으로 바꾸는 4명의 대통령의 모습을 통해 현재의 위기와 실패를 기회와 성공으로 바꿀 수 있는 힌트를 얻었으면 좋겠다.


 1. 자살 직전까지 간 링컨

   3

미친 듯한 자기계발로 극복하다.

링컨은 대통령이 되기 전 자신의 정치 생명을 걸어 추진한 일리노이주 공공사업이 급작한 불황으로 완전히 망해버리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한다. 더불어 결혼 직전까지 간 연인과 파혼까지 하게 된다. 자신의 꿈과 삶이 거의 동시에 무너지자 링컨은 심한 우울증에 시달린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숨이 붙어 있는 가장 불행한 사람입니다. 지금 내 마음이 모든 인간 가족에게 균등하게 분배된다면 이 땅에서 유쾌한 표정을 지을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겁니다. 내가 앞으로 지금보다 더 나아질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영원히 낫지 못할 거라는 불길한 예감마저 듭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계속 사는 건 불가능합니다. 죽지 않으면 낫겠지요.” - <혼돈의 시대 리더의 탄생> p. 185~186

링컨의 친구들은 링컨이 자살할까 봐 걱정해 링컨의 방에서 칼과 면도칼 심지어 가위까지 없앴다고 한다.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대통령 1위를 자랑하는 그가 자살을 생각했다니. 그만큼 당시의 위기는 링컨에게 절체절명이었다. 링컨은 이 상황을 어떻게 극복했을까?

링컨은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자기 자신을 0에서부터 다시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5년 동안 미친 듯한 자기계발을 수행한다. 독서하고 공부하고 경험하기를 쉬지 않았다. 그는 40에 가까운 나이였지만 온 집중을 다해 학습했고 다시 시작한 변호사의 일도 예전보다 더 열정적으로 수행했다.

“순회 재판을 통해 일반적인 변호사 업무와 한계를 넘어서는 학문을 공부할 기회를 얻은 것이다. 그는 철학과 천문학, 자연과학과 정치경제, 역사와 문학, 사학과 연극을 공부했다. 수학적 정리와 증명을 학습하는 데도 힘썼다. 그는 피곤해 죽을 지경까지 수학을 파고들었고 마침내 유클리드 기아학을 거의 완전히 익혔다고 자랑스레 주장할 수 있는 수준까지 올라왔다.” - <혼돈의 시대 리더의 탄생> p. 196~197

자실 직전까지 갔던 링컨은 자신의 온 열정을 다한 자기계발을 통해 우울증을 극복할 수 있었고 변호사로서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떠났던 정계에 다시 진출할 수 있었다. 그의 자기계발 습관은 그가 명성이 높아지고 대통령이 됐을 때조차 지속되어 결국 노예제도를 폐지하는 역사적 위업을 달성하는 초석이 되었다. 

    195page<혼돈의 시대 리더의 탄생> 195page

2. 하루에 어머니와 아내를 동시에 잃은 시어도어 루스벨트

   5

끊임없는 새로운 도전으로 재도약의 길을 열다.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그날의 아픔을 제대로 이해하는 이가 있을까? 49세이던 어머니가 장티푸스로 세상을 떠나고 그로부터 12시간이 지나지 않아 사랑하는 아내마저 세상을 떠났다. 하루에 어머니와 아내가 동시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시어도어는 그날 일기에 “빛이 내 삶에서 사라졌다. 이제부터 내 삶에는 기쁨도 슬픔도 없다.”라고 썼다고 한다.

사악한 운명으로 극심한 충격을 받은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어떻게 이 위기를 극복하였을까? 그는 일단 장소를 옮겼다. 어려서부터 병약해 육체적인 활동보다 독서에 치중했던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엘리트 출신의 동부의 교양인이었다. 하지만 그는 서부의 카우보이가 되었다. 목장에서 말을 몰고 사냥을 하고 거친 카우보이들과 동료애를 나누었다. 그는 인생 최악의 상황을 새로운 도전으로 극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심지가 잘린 초도 아니었고, 정치를 완전히 포기하지도 않았다. 서부로 멀찌감치 물러나 자연 세계에서 부드러운 향유를 탐닉한 것이 아니라 불굴의 도전을 감행하며 자신을 시험하고 있었다. 그런 시험을 통해 그는 상심한 마음과 두려움을 마주하며 자신에 대한 확신을 되찾고 진정한 빛과 인도자와 리더가 되는 미래에 대한 자신감을 어떻게든 되살려낼 수 있었다.” - <혼돈의 시대 리더의 탄생> p. 234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훗날 끊임없이 새로운 도전을 했던 당시를 ‘교육적으로 가장 중요한 자산’이라고 말했다. 절망적인 위기가 그에게 결국 인생의 자산이 된 것이다. 2년 동안의 생활은 루스벨트를 교양있는 동부인과 불굴의 서부인이 결합된 존재로 부각시켜 주었고 이후 그는 그 이미지에 맞게 전쟁에서는 불굴의 용기로 앞장선 장군의 모습으로 영웅이 되었고 통치에서는 여러 이해관계를 잘 융합시킨 위대한 대통령이 되었다.

    234page<혼돈의 시대 리더의 탄생> 234page

3. 갑자기 하반신 마비가 온 프랭클린 루스벨트

   7

팀빌딩에 올인하다.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썰매타기, 스케이팅, 낚시 등을 즐기는 건장한 청년이었다. 하지만 그는 척수성 소아마비 증세로 갑자기 하반신 마비가 걸리게 된다. 지금도 그렇지만 우리가 바라는 리더의 모습은 무엇인가? 올곧은 자세로 강인하고 정력적인 모습이 아니던가. 하지만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평생 휠체어에 앉아 다른 사람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정치 생명은 끝난 듯했다.

하지만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하반신이 마비되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특유의 낙천적인 기질로 자신의 위기를 기회로 바꾸기로 했다. 타인에게 의지해야 한다면 진짜 의지할 수 있는 정치적 팀을 결성한 것이다. 

“프랭클린은 요양하며 회복하던 7년 동안 충성스런 개인적인 팀을 조직했다. 엘리너 루스벨트, 루이스 하우, 마거리트 미시 르핸드가 포함된 미정통적인 팀은 부분의 합을 넘어, 루스벨트 몸의 일부가 됐다. 그들은 루스벨트의 마비로 인한 위축을 최소화하는 역할을 해냈다. 에이브러험 링컨과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중대한 시련을 겪은 후에 어떻게 기운을 되찾고 다른 사람으로 태어났는지에 대해 이미 앞에서 보았다. 스스로 시련을 이겨낸 그들과 달리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척수성 소아마비라는 너무도 심각한 상황에 처했던 까닭에 체력과 정신력을 회복하려고 싸우면서도 타인에게 전적으로 의존해야 했다.” - <혼돈의 시대 리더의 탄생> p. 294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자신의 멤버들이 자신들의 목적을 이룰 수 있도록 자신의 온 힘을 다했다. 동시에 그들은 혼자 설 수 없었던 루스벨트를 일으켜 세워 역사상 처음으로 휠체어에 탄 대통령이 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이렇게 다른 사람의 도움을 잘 받는 능력이 있었던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당시 미국 최악의 위기였던 대공황에서도 잘 발휘도 초당파적인 협력을 이끌어 내어 결국 공황을 벗어날 수 있었다. 

    310page<혼돈의 시대 리더의 탄생> 310page

4. 심장마비로 모든 것을 잃은 린든 존슨

   9

철저한 자기반성으로 재기에 성공하다.

린든 존슨은 어떤 정치인들보다도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최고 수준의 근면성, 조직을 이해하는 능력, 목적 지향적인 태도, 식을 줄 모르는 야망은 린든 존슨을 어디에서나 성공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그에게도 시련이 닥쳐온다. 

46세 나이로 미국 상원 역사상 최연소 다수당 대표 등극해 정점을 달리고 있는 그때에 심장마비로 쓰러지게 된다. 그리고 모든 것을 잃을 처지에 놓이게 된다.

“존슨은 깊은 우울증에 빠졌고 심지어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며 한탄하는 듯했다. 자신이 올랐던 언덕에서 너무도 급격히 떨어진 탓에 낙담의 깊이가 더한 것은 당연했다. 그가 소중히 여기던 모든 것, 예컨대 현재의 성취와 미래의 야망이 모두 위태로워졌다. 존슨의 상태는 심장마비 이후에 흔히 나타나는 우울증의 정도와 확연히 달랐다. 조지리디의 표현을 빌리면 ‘그는 그냥 누워 있을 뿐이었다. 전혀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우리 곁에 존슨을 대신한 것이 있지만 그저 기계 덩어리인 것 같았다.” - <혼돈의 시대 리더의 탄생> p. 353

하지만 린든 존슨은 자신을 여전히 기다리는 시민들의 열렬한 반응을 본 후 생각을 고쳐 먹기 시작한다. 병상에 있으면서 그는 자신의 과거를 철저히 반성하기 시작했다. 린든 존슨에게는 2가지 큰 문제가 있었다. 첫째는 자신의 몸을 너무 혹사했다. 휴식은 없었고 술과 커피를 달고 살았다. 갑자기 주어진 휴식으로 릴랙스 할 수 있었고 식습관을 변화시켰다. 그리고 자신을 너무 몰아세우지 않기로 한다. 둘째는 너무 목표지향적이다 보니 주변인들을 다치게 했다. 사람보다 목표가 먼저였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떨어져 나갔다. 린든 존슨 이런 자신의 비인격적인 모습을 철저히 반성하게 된다.

철저한 자기반성으로 환골탈태한 린든 존슨은 그 후 매우 진보적인 의제를 주도했으며 결국 시민권을 신장하는 역사적 대업을 이루게 된다.

    355page<혼돈의 시대 리더의 탄생> 355page

퓰리쳐상 수상 작가의 책이라 원서는 너무나 좋은 영어공부 자료

위기와 실패가 우리를 엄습해 올 때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4명의 대통령은 결국 위기를 기회로, 실패를 성공으로 만들었다.

우울증에 자살까지 생각했던 링컨은 자신의 암흑기를 미친듯한 자기계발로 이겨냈다. 하루에 어머니와 아내를 잃은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끊임없는 새로운 도전으로 두려움을 이겨내고 불굴의 용기를 얻게 되었다. 갑자기 하반신 마비로 홀로 걸을 수조차 없게 된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다른 사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불리한 상황을 역이용해 비전을 함께 품을 팀을 결성했다. 함께 할 때 강해지는 법이다. 심장 마비로 모든 것을 잃을 뻔했던 린든 존슨은 위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하였고 뼈저린 반성으로 환골탈태해 그저 잘 나가는 리더에서 위대한 리더로 올라설 수 있었다.

나는 <혼돈의 시대 리더의 탄생>의 2부를 읽으면서 니체의 명언이 떠올랐다.

나를 죽이지 못한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

부디 당신의 위기가 기회가 되고 당신의 실패가 성공이 되기를 간절기 기원한다. 4명의 대통령의 삶이 당신의 역경 극복을 도와줄 것이다.

http://www.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ejkGb=KOR&mallGb=KOR&barcode=9791135459757&orderClick=LEa&Kc=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