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교단의 구원론





“인공지능”을 영어로 표현하는 방법

  1. Artificial Intelligence (인공지능)
  2. AI (약어) 

1. Artificial Intelligence

“Artificial Intelligence”는 인간의 사고, 학습, 문제 해결 능력을 컴퓨터 프로그램이나 시스템이 수행하도록 하는 기술이나 연구 분야를 설명합니다. 
이 분야는 기계 학습, 자연어 처리, 로봇 공학 등 다양한 하위 분야를 포함합니다.

  • “Artificial intelligence is transforming industries by automating tasks.” 
    (인공지능은 작업 자동화를 통해 산업을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 “Many companies are investing in artificial intelligence to improve efficiency.” 
    (많은 기업들이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인공지능에 투자하고 있습니다.)

2. AI

“AI”는 “Artificial Intelligence”의 약어로, 기술적인 대화나 문맥에서 자주 사용됩니다.

  • “AI is used in virtual assistants like Siri and Alexa.” (AI는 Siri와 Alexa와 같은 가상 비서에서 사용됩니다.)
  • “The development of AI has raised ethical concerns.” (AI의 발전은 윤리적 문제를 야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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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인공지능)의 대답 

한국의 주요 개신교 교단은 크게 장로교와 감리교로 나뉘며, 각 교단은 예정론과 중생, 은혜, 믿음 등 성경의 여러 요소들을 강조하는 방식에서 차이를 보입니다. 

장로교는 하나님의 주권과 예정론을 강조하며,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로 이루어진다고 봅니다. 

감리교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책임적인 응답을 강조하며, 구원받는 과정에서 중생과 성화를 중요시합니다. 

침례교는 침례를 성화의 상징으로 보고 신자의 침례를 강조하며, 각 교단은 구원의 과정과 성격에 대한 다양한 강조점을 가집니다. 

1. 장로교 (개혁주의 전통)
  • 핵심 강조점 : 하나님의 절대 주권, 예정론, 믿음을 통한 구원 
  • 구원론의 특징 :
    • 하나님의 주권 : 인간의 모든 행동과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의해 결정된다고 믿습니다.
    • 예정론 :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사람을 미리 정해 놓으셨다고 믿으며, 이를 받아들입니다. 
    • 믿음과 은혜 : 인간의 믿음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에 대한 반응으로 이해됩니다.
    • 종파의 다양성 : 장로교는 한국에서 가장 많은 교단 수를 차지할 정도로 다양하며, 각 교단마다 강조점은 조금씩 다를 수 있습니다. 
2. 감리교 (웨슬레 전통)
  • 핵심 강조점 : 
    인간의 자유 의지와 책임, 중생과 성화, 은혜와 성결한 삶
  • 구원론의 특징 :
    • 자유의지 강조 : 인간에게는 하나님께 반응할 수 있는 자유 의지가 있으며, 구원을 위한 노력을 할 수 있다고 봅니다.
    • 중생과 성화 :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거듭나는 중생 경험과 함께, 점진적인 성결의 삶(성화)을 중요시합니다.
    • 모든 사람을 위한 은혜 :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으며, 인간의 응답을 통해 구원이 실현됩니다.
3. 침례교 
  • 핵심 강조점 : 신자(믿음으로)의 침례, 구원과 성화를 위한 헌신
  • 구원론의 특징 :
    • 신자 침례 : 유아 세례를 부정하고, 신앙고백을 한 성인 신자만이 침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구원과 헌신의 상징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 성경 중심 : 성경을 권위의 최고 원천으로 삼고, 구원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따릅니다.
4. 기타 교단 
  • 루터교 :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 즉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 성결교 : 
    성결의 은혜와 성령 충만을 강조하며, 성화된 삶을 통해 구원의 확신을 얻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강조합니다.

  • 순복음교회 (기하성, 기하성): 
    성령의 은사, 성령 충만, 기적적인 치유 등을 강조하며, 신앙 체험을 중요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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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론에 대한 각 교파별 입장

"이순신 장군은 천국에 갔는가?"

이순신 장군(1545-1598)이 살았던 16세기는 한국에 기독교가 전래되기 이전 시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접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이에 대해 개신교 각 교단은 서로 다른 신학적 입장을 보입니다. 

예장 합동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의 입장

명확한 부정적 입장 : "천국에 가지 못했다"

1. 신학적 근거

이신칭의(以信稱義) - 오직 믿음

개신교에서 주로 사용하는 신학적 용어로 죄인이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고 칭함을 받으며,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죄를 없애기 위해 이 땅에 메시아로 오셨고, 그 죄 사함의 사건을 믿는 자가 그 '믿음'만으로 은혜를 받아 구원된다

칼빈주의 5대 교리 (TULIP)

하나님의 절대주권으로 선택하심은 항상 유효하고 불가항력적 은혜이며, 예정된 성도에게만 주시는 불가항력적인 구원의 은혜를 체계화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장로교회의 신앙고백서가 완성되었으며, 칭의-성화-영화의 구원관을 신조로 하고 있다

2. 성경적 근거

로마서 3:28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요한복음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사도행전 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3. 교리적 입장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

성부 하나님의 계시, 성자 하나님의 구속, 성령 하나님을 통한 거듭남이 가장 큰 골자

복음주의 핵심

"바울은 믿음에 율법준수를 더함으로 완전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오직 주 예수와 그의 구원사역을 믿음으로만 완전한 구원을 받는다"

행위구원론 거부

개신교에서는 이신칭의론에 따라 별도의 행위 없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사람들을 위해 못박혀 죽음을 믿음으로서 모든 죄가 용서되었으며, 어떠한 형태로든 드러나는 행위는 구원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고 가르친다

4. 이순신 장군에 대한 적용

  1. 복음에 대한 무지 : 16세기는 한국에 복음이 전해지기 전이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알 기회가 없었음
  2. 믿음의 부재 :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개인적 믿음과 신앙고백이 없었음
  3. 도덕적 행위의 한계 : 아무리 뛰어난 도덕성과 애국심도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음
  4. 예정론 :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택함받은 자가 아니었다면 구원받을 수 없음

5. 예장 합동의 공식 입장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이 예장 합동의 확고한 교리적 입장입니다. 
따라서 이순신 장군의 도덕적 탁월함에도 불구하고 천국에 가지 못했다고 봅니다. 

침례교 (Baptist)

엄격한 부정적 입장

  • 핵심 : 성인의 명확한 신앙고백과 침례를 중시
  • 특징 : 개인의 자발적 믿음을 강조하므로 예장 합동보다도 더욱 엄격
  • 결론 : 이순신의 구원을 부정

순복음교회 (오순절교)

부정적이지만 성령의 역사 강조

  • 핵심 : 성령의 초자연적 역사를 중시
  • 특징 : 성령의 특별한 역사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음
  • 결론 : 원칙적으로는 부정적이나 성령의 신비한 역사에 대해서는 유보적

루터교 (Lutheran)

상대적으로 유연한 입장

  • 핵심 : 루터파는 성서의 권위를 가장 높이 보지만 성서와 충돌하지 않는 이상 전통을 일부 인정한다
  • 특징 :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대해 상대적으로 열린 자세
  • 결론 : 명확히 부정하지는 않으나 회의적

감리교 (Methodist)

상대적으로 긍정적 입장

  • 핵심 : 선행 은총(先行 恩寵)이란 믿음보다 앞서서 타락한 인간에게 임하여 있는 하나님의 은총을 의미한다
  • 특징 : 하나님의 보편적 은혜를 강조
  • 결론 : 선행 은총을 통한 구원 가능성을 열어둠

성결교 (Holiness)

중간적 입장

  • 핵심 : 감리교에서 파생된 성결 운동의 영향
  • 특징 : 성화를 강조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복음주의 입장
  • 결론 : 원칙적으로는 부정적이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는 유보적

성공회(Anglican)

중도적 입장

  • 핵심 : 가톨릭과 개신교의 중간적 위치
  • 특징 : 세례성사를 죄의 용서와 구원에 필요한 성사로 보고 있다
  • 결론 : 하나님의 은혜의 다양한 방식을 인정하는 경향

개신교 교단별 입장 요약표

교단 이순신 구원 가능성 엄격도 핵심 근거
예장 합동 확실히 불가능 ⭐⭐⭐⭐⭐ 칼빈주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침례교 확실히 불가능 ⭐⭐⭐⭐⭐ 성인 침례, 개인 신앙고백
순복음교 🔺 원칙적 불가능 ⭐⭐⭐⭐ 성령의 초자연적 역사
성결교 🔺 원칙적 불가능 ⭐⭐⭐ 복음주의 + 성화 강조
루터교 🔺 회의적 ⭐⭐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
성공회 🔺 유보적 ⭐⭐ 중도적 입장
감리교 가능성 있음 선행 은총, 보편적 은혜


예장 합동 입장의 신학적 일관성

1. 종교개혁 정신의 계승

로마서 1장 17절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의가 믿음을 통해 성도들에게 아무런 공로 없이 주어졌다는 성경의 진리

2. 성경의 권위

성경의 진리성, 회심의 중요성, 그리스도의 십자가, 선교의 절박성을 핵심으로 하는 복음주의 신앙

3. 교회의 사명

이순신 같은 위인도 복음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했다는 것은 오히려 복음 전파의 시급성과 중요성을 강조하는 근거가 됨

결론

예장 합동을 중심으로 한 보수적 개신교의 입장은 명확합니다:

"이순신 장군은 아무리 뛰어난 도덕성과 애국심을 가졌어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했다"

이는 감정적 판단이 아닌 성경적 원칙에 기반한 신학적 결론이며, 동시에 모든 사람에게 복음이 전해져야 하는 이유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른 개신교 교단들도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대부분 이와 유사한 입장을 취하며, 오직 감리교만이 선행 은총 교리를 통해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예외적 입장을 보입니다.

참고 자료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 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
  • 개신교 구원론 관련 신학서적
  • 각 교단 공식 교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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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와 개신교의 구원관

기독교의 핵심은 구원관 또는 구원론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함이니라(눅 19:10)”고 말씀했다. 
기독교 역사에서는 구원론이 성경의 가르침으로부터 떠남으로서 교회는 타락의 길을 가게 되었다. 
타락이 극에 달했던 16세기 초에 종교개혁이라는 역사적 대사건이 발생하게 된 것도 신약성경적인 구원론의 회복을 위함이었다. 
당시 종교개혁의 기치는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이었는데, 이것이 바로 로마 가톨릭교회의 비성경적이고 탈성경적인 구원론에 대한 도전이었다(<한국 침례교의 신학적 특성>, 침례신학대학교, 107쪽).

신약성경에서 교회란 말은 영적으로 거듭난 구원받은 성도들을 지칭하는 것이지, 교회 건물이나 구원받지 못한 가짜 교인들의 집단을 가리키지 않는다. 
기독교의 핵심은 구원관이므로 여기서는 천주교의 구원관과 국내 주요 개신교파의 구원관 그리고 성경적인 구원관에 대해 알아 보자.

먼저 신약성경에 나오는 성경적인 구원관에 대해 살펴 보자. 신약성경적인 용어로 ‘구원받는 것’은 죄와 죽음과 지옥에서 의와 영생과 천국으로 구원받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도 친히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고 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것이 영원한 멸망인 지옥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인 영생을 얻는 구원받는 방법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교만하여,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예수님을 믿어야만 된다는 생각을 거절하기 일쑤다. 때문에 그들은 이 단순한 구원의 길 대신 다른 많은 대용품을 만들어냈으며 이 대용물들은 수많은 사람들을 영원한 파멸로 이끌어갔다. 구원에 관한 이와 같은 잘못된 생각들에 대해 성경은 다음과 같이 논박한다.

(1) 자기가 선택하는 어떤 종교를 진실히 믿고 실천한다 해서 결코 구원받을 수 없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게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 4:12)”.

(2) 하나님의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받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을 온전히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0)”.

(3) 선행을 한다고 해서 구원받을 수는 없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 3:5)”.

(4) 세례나 침례가 구원의 수단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침례)를 주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니(고전 1:17)”. 복음은 기쁜 소식이며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세례(침례)에 의해서가 아니라 복음을 믿는 것에 의해서이다. 십자가에 달린 강도는 세례(침례)를 받지 않았지만 구원받았다(눅 23:42,43).

(5)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모두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구원받지 않았으면서도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

이상의 사항들 외에도 세상에는 구원에 관한 잘못된 개념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그것들 모두가 상기의 사항들처럼 구원을 얻는 것을 돕는다는 생각에, 인간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행위에 불과한 것들이다(<성경은 해답을 가지고 있다>, 헨리 M. 모리스, 전도출판사, 95~97쪽).

상술한 것처럼 성경적인 구원관에 대해 살펴 보았다. 이제 천주교의 구원관에 대해 알아 보자. 천주교인들에게 있어 구원이란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영접함으로 오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구원이란 영세(세례)로부터 시작해서 계속적으로 유지해야 하는 교회와의 관계에 의존하는 길고 긴 과정인 것이다. 그들의 구원은 성례들, 고해성사, 선행, 연옥에 들어가서 자신의 죄들과 다른 사람들의 죄들로 인하여 받은 고난들, 연옥에서의 고통을 감해 주는 면죄부 그리고 거의 끝도 없는 미사들, 심지어는 자신이 죽은 후에도 드려야 하는 묵주 기도에 참여하는 것이 곧 구원인 것이다(<짐승 위에 탄 여자>, Dave Hunt, 도서출판 누가, 19쪽).

지난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로마 가톨릭교회가 구원을 주는 복음이 아니라 가짜 복음이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구원받지 못하고 상실된 사람들이란 것을 깨달은 가톨릭 사제들이었다. 통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는 관계를 갖지 못하고 교회에 속박되어 버리는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교회의 규정을 잘 따르면, 결국 교회가 천국으로 이끌어 줄 것만 기대했다.

가톨릭 교리에 의하면, 구원이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게되는 기정 사실이 아니라 교회에 복종하여 선행을 계속하고 의식을 계속 지킴으로 얻어지는 한 과정이다. 당시 성경적 복음을 믿게 된 개혁자들은 자신이 구원받은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 사실을 기뻐하였으며, 그들은 구원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행 20:24)을 전파하였다. 그 결과 그들은 파문과 핍박을 당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순교를 당했다(앞의 책, 269쪽).

한편, 가톨릭에서는 신약성경 야고보서에 나오는 말씀인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17)”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약 2:24)” 등을 인용하면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며 반쪽 믿음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얼핏 일리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 나오는 행함은 구원의 조건이나 방법이 아니라, 구원의 결과로 나타나는 행함이다.

다시 말해 신자가 진실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으면 다른 사람에게 그 사실을 입증할 선행이 따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디도서 3장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 3:7)” 그리고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딛 3:8)”에 해당하는 것이다(<이렇게 구분된다>, 윌리암 맥도날드, 전도출판사, 17~18쪽).

신약성경에는 약 150문단이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받는다’고 말하고 있다. 이 ‘구원’은 서두에 언급한 대로 신약성경적인 용어로, 사람의 영혼이 지옥에서 천국으로 영생을 얻는 구원을 의미한다. 그리고 신약성경에 많이 나오는 ‘구원’이란 단어가 항상 ‘영혼 구원’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구원이 ‘구출, 안전, 온전함’ 등을 의미하는 일반적인 용어인 경우도 적지 않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 20장 37절에 “바울이 백부장과 군인들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라고 쓰여 있다. 이 구절에 나오는 구원이란 단어는 바울과 그 일행들이 지중해의 바닷물에 빠져 죽는데서 건짐 받는 것을 표현하는데, ‘구원’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이 구절은 앞뒤 문맥을 보지 않더라도 ‘영혼의 구원’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물에서 건짐 받는 구출’임을 바로 알 수 있다.

하지만 전후 문맥이나 상황을 살피지 않을 경우, 구원이란 단어가 영혼의 구원인지 아닌지 쉽게 분간하기가 어려운 구절도 있다. 예컨대 빌립보서 1장 19절에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라고 쓰여 있다. 여기서 바울은 ‘구원’이란 단어를 자신이 갇혀있는 로마 감옥에서의 석방과 관련하여 사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 나오는 ‘구원’은 바울 자신의 ‘영혼의 구원’을 말한 것이 아니고 감옥으로부터의 ‘석방’을 말한다.

그리고 빌립보서 2장 12절에는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쓰여 있다. 여기에 나오는 구원은 빌립보 교회에서 발생한 분쟁에 관한 문제의 해결을 의미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두렵고 떨림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나오는 구원도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영혼의 구원’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빌립보 교회에서 발생한 분쟁에 대한 ‘문제의 해결’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에 나오는 ‘구원’이란 단어의 의미는, 주로 문맥이 그 의미를 결정한다고 볼 수 있다. 때문에 신약성경에 ‘구원’이란 단어가 나올 때는 그 구절과 관련된 이웃하는 문맥과 나아가 더 넓은 문맥을 신중히 비교해서 올바른 해석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잘못된 해석으로 인하여 성경과 하나님이 모순되는 것처럼 착각할 수도 하고, 또 자의적인 해석과 억지 해석을 주장함으로써 큰 오류에 빠져 기독교 이단이나 사이비로 변질되는 경우도 발생하는 것이다(성경은 해답을 가지고 있다, 106쪽).

상술한 바와 같이 천주교의 구원관은 오직 가톨릭교회를 통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으며, 또 신자들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선행을 실천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 외에도 구원받기 위해서는 세례를 비롯한 각종 성사를 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천주교는 은혜에 의한 믿음으로 얻는 구원이 아닌 행위에 의한 다른 복음을 전하는 거짓 교회이다. 사도 베드로는 다른 복음인 거짓 교리를 전하는 거짓 교사들을 이단이라고 말했다(벧후 2:1). 그러므로 천주교회의 평신도들은 정신을 차리고 다른 복음을 전하는 거짓 교사인 천주교 사제들에게 더 이상 속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제 국내 주요 개신교파인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순복음교의 구원론에 대해 알아 보고자 한다. 거기에 앞서 구원과 관련하여 국내 개신교계의 현황에 대해 살펴 보자. 예나 지금이나 국내 주요 개신교파나 교단 내에서는 구원받지 않은 가짜 신자들이 부지기수다. 생명의 말씀사 대표이며 장로교단의 목사인 김창영 교수는 자신의 저서에서 언급하기를 “국내 교회에는 짝퉁 구원이 판을 치고 있다. 교회에 다니고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짝퉁으로 믿는 교인들이 많으며 한국교회에는 구원이 사라지고 있다”고 말했다(<구원 받음>, 김창영, 생명의 말씀사, 20~21쪽). 이처럼 국내 개신교에는 구원받지 않은 신자들로 이루어진 비성경적인 가짜 교회들이 부지기수다.

더욱이 국내 주요 개신 교파와 교단 내에서는 구원도 받지 않고 목회를 하는 목사들도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 주요 교파의 16명 목사와 신학대 교수들이 집필한 저서에서도 언급하기를 “국내에 자신의 개인의 구원에 대한 확신도 없는 목사들이 의외로 많은 것을 보게 된다. 이들은 신학교를 졸업한 뒤 마치 운전 면허증을 취득하듯이 강도사 고시, 목사 고시를 보고, 그 다음 절차에 의해 목사 안수를 받는데 안타깝게도 자신은 구원의 확신도 없는 경우가 많다. 이런 자들이 목회를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먼저 구원의 확신부터 점검해야 한다”고 말했다(<교회 개척>, 목회와 신학 편집부, 두란노 아카데미, 105쪽). 이처럼 이런 가짜 목사들이 존재하는 교회도 바로 가짜 교회인 것이다.

국내뿐만 아니라 서구의 개신교회도 구원받지 못한 수많은 목사들이 목회를 하고 있다. 교회 개척 분야의 탁월한 이론가이며 강연가인 대린 패트릭은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기를 “오늘날 안타깝게도 개인적으로 구원도 못받은 자들이 목회를 하려고 애쓰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 목사와 교회 개척자가 무조건 다 그리스도인일 것이라는 생각은 위험하다. 구원받지 않고도 예언하고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기적을 행할 수도 있다(마7:21~23). 거듭나지 못한 목사의 말로도 슬퍼지만 그를 따르는 교인들의 말로는 훨씬 심각하다”고 했다(<교회 개척자>, 대린 패드릭, 복있는 사람, 35~39쪽).

그리고 19세기의 세계적인 복음전도자로 널리 알려진 찰스 스펄전은 그의 유명한 저서인 ‘목회자 후보생들에게’라는 책에서 여러 번 반복해서 목사들에게 경고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목사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무엇보다 먼저, 자신이 구원의 확신을 가진 ‘거듭난 자’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설교자 가운데 가짜 목사들이 많은데 그들은 교인들에게 지옥을 피하라고 소리쳐 놓고 자신은 지금 지옥에 있다”고 했다(<목회자 후보생들에게>, 찰스 스펄전, 생명의 말씀사, 21쪽). 이처럼 스펄전은 설교하는 목사들 가운데 거듭난 체험이 없는 가짜 목사들이 많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국내 주요 개신교파의 구원관에 대해 알아 보자. 개신교는 천주교와는 달리 교파마다 교리와 신조 등에 차이가 많다. 구원론에 있어서도 그러한데, 예컨대 감리교는 구원론에 있어 칼빈주의를 따르지 않고 알미니안주의를 따른다. 여기서 칼빈주의란 하나님이 믿을 자들을 택한다는 주의이며, 알미니안주의란 사람이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택한다는 주의이다. 이에 따라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의 여러 교파들은 구원론에 당면하여 장로교회와 개혁교회 등은 칼빈주의를 따르고 감리교회와 성결교회, 순복음교회 등은 알미니안주의를 따르고 침례교회는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를 절충한 구원론을 가지고 있다.

그럼 먼저 국내 개신교인의 약 70%를 차지하고 있는 국내 최대의 교파인 장로교의 구원관에 대해 살펴 보자. 국내의 장로교는 구원론에 있어 칼빈의 예정론을 따른다. 칼빈의 예정론이란 “하나님께서 창세 이전에 구원받을 자들 미리 택해 놓았다”는 교리이다. 그래서 장로교회에 다니는 모태교인이나 일반 교인들은 하나님이 자신을 구원받을 자로 미리 택했다고 믿고, 또한 택함을 받았기 때문에 장로교회에 다닌다고 믿고 있다.

물론 ‘예정론’도 성경적이며 틀린 말은 아니다. 하나님의 ‘예정하심’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이며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이다. 그렇지만 인간의 편에서는 하나님의 예정하심도 있어야 하고, 또한 영적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각 개인 스스로의 의지적 결단에 의해 복음을 받아들이는 ‘믿음’도 요구된다.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나서 믿은 뒤 거듭나게 되면, 나중에서야 비로소 이 두 가지, 곧 은혜와 믿음이 함께 역사했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구원받음, 86쪽).

이러한 ‘은혜와 믿음’의 두 가지 역사에 대한 가장 부합되는 성경말씀은 에베소서 2장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여기에서 은혜는 하나님의 주권이자 소관이며, 믿음은 인간의 주권이며 소관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성경은 하나님의 예정하심과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른 믿음을 모두 언급하고 있으므로, 한쪽만 옳다고 지나치게 주장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장로교는 불신자를 위한 복음집회를 따로 갖지 않는다. 하지만 성경에는 불신자를 위한 복음집회가 분명히 언급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행13:42~49, 살전1:8). 장로교 외에 다른 교파인 침례교나 감리교 그리고 초교파적인 세계적인 복음전도자들은 복음집회를 통해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해왔다. 예컨대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나 침례교 계통의 찰스 스펄전과 빌리 그레이엄 그리고 초교파적인 디엘 무디 등의 복음전도자들은 교회 내에서뿐만 아니라 야외에서나 큰 광장이나 체육관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복음집회를 통해 복음을 전했다.

그러나 장로교는 초창기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교회 안팎으로 ‘복음전도집회’라는 것이 없었다. 장로교에 있어서 ‘전도’라는 의미는, 일반적으로 목사들이 교인들에게 믿지 않는 사람들을 교회당에 데리고 오라는 뜻으로 통하고 있다.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위 ‘총동원전도주일’이라는 것도 교인들로 하여금 사람들을 강권하여서라도 자기네 교회당으로 데리고 오라는 의미인 것이다.

리하여 총동원전도주일에 불신자들이 교인들을 따라 교회에 나갔을 때, 목사들은 설교를 통해 ‘영혼 구원에 관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으면 복을 받고 병 고침을 받고 사업이 잘된다는 기복 신앙을 대개 전한다. 그리고 총동원전도주일이 아닌 평상시에도 장로교 목사들은 예배, 즉 설교시간에 전하는 말씀내용이 주로 자기네 교인들을 대상으로 하여 교훈적인 말씀을 전한다.

이러한 경우, 자기네 교인들은 목사의 설교 내용이 자신들을 위한 가르침인 것을 알지만, 처음 교회에 참석한 거듭난 체험이 없는 사람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설교 내용을 알게 모르게 자신들에게 적용하게 된다. 그리하여 시간이 지나다 보면 중생이나 구원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 교회의 교인이 되어 기독교 신자인양 착각하면서 교회생활을 해 나가는 것이다.

한편, 장로교 헌법에는 교인의 정의를 “교인은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믿는 자들인데 그리스도인이라 부른다”라고 쓰여 있다(<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헌법>, 173쪽, 한국장로교 출판사). 거듭난 신자들의 입장에서 이러한 장로교 교인의 정의를 살펴 볼 때 여기에 나타난 심각한 오류를 보면서 경악을 금할 수가 없다. 상술한 것처럼 장로교는 ‘삼위일체를 믿는 자들을 교인’이라고 정의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가톨릭 신자들도 삼위일체를 확실히 믿고 있고, 기독교 이단 종파들 중에서도 일부는 삼위일체를 믿고 있다. 그렇다면 장로교인이나 가톨릭교인나 그런 기독교 이단 종파나 무엇이 다를 바가 있는가.

장로교 헌법을 만든 사람들은 현직목사 외에도 장로교 목사자격증을 가진 교수나 신학박사들이 대부분이다. 이런 사람들이 ‘교인의 정의’를 단지 삼위일체를 믿는 자들이라고 정의를 내렸으니 정말 기가 찰 일이며, 이들이 과연 신학교수나 신학박사가 맞는지 그 자격이 의심스러울 정도다. 명색이 장로교의 최고 연구진들이 이 모양이니 한국 장로교도 문제가 삼각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람들 역시 중생이 의심되는 지도자들이며, 교인들 또한 그런 자들에게 배우고 있느니 ‘중생’과는 거리가 멀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대부분의 장로교인들의 ‘중생 체험의 실종’과 함께, 왜 장로교에 ‘복음집회’가 존재하지 않고 또한 교인들 가운데 ‘중생의 체험’에 관한 질문에 대해서는 대부분 입을 열지 않거나, 또는 엉뚱한 답변을 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는 것이다. 대체로 장로교인들은 교회 집회에 빠지지 않고 잘 다니고 봉사도 하며 십일조도 잘 내고 직분도 잘 감당하면서 교회생활을 잘 하면 죽어서 천국에 가지 않겠느냐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이 거듭난 체험이 있는지 없는지, 즉 “영적 출생의 여부”에 따라 천국과 지옥이 결정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국내의 장로교인들은 장로교 헌법에 나타나 있는대로 삼위일체를 믿기만 하면 장로교인이 되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장로교 헌법에 따라 비성경적인 교리를 전하는 영적으로 소경된 인도자인 목사의 말을 믿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리고 올바른 복음의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는 성경에서 직접 해답을 찾거나, 아니면 구원의 진리를 제대로 전하는 성경적인 교회를 찾아야만 올바른 복음을 깨닫고 거듭나서 천국에 들어 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장로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장로교 헌법에 나타나 있는 장로교인이 되기를 거부하고, 성경에 나타나 있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감리교의 구원관에 대해 살펴 보자. 감리교는 18세기 초에 영국의 존 웨슬리와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영국 국교회의 개혁 운동으로 시작되었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는 거듭나는 체험을 통하여 구원의 확신을 가진 뒤 수많은 사람들에게 ‘중생의 복음’을 전했다. 감리교 초창기에 웨슬리와 그의 추종자들은 ‘개인 영혼구원’을 우선시하고 그 다음으로 ‘삶의 실천’을 내세웠다. 그러나 그의 사후에는 그 순서가 점점 뒤바뀌어 오늘날에는 영혼구원보다 타 종파와의 에큐메니칼 운동이나 사회구원에 더욱 무게가 실리고 있는 실정이다.

국내의 감리교회도 상기와 같이 개인의 영혼 구원보다는 사회 구원쪽으로 흐르고 있는 실정이다. 국내 기독교 대한 감리회의 ‘교리와 장정’ 책에는 구원과 그리고 선행에 대하여 서술해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이 책에는 “구원은 개인의 구원뿐만 아니라 역사와 사회를 성화시키는 데까지 이르러야 한다”고 적혀 있다(<교리와 장정>, 기독교대한감리회, 33쪽). 이 문구에서 구원을 사회 성화와 연관시킨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믿음을 증명하는 선행은 성화의 과정 안에서 구원의 완성을 위해 작용한다”고 쓰여 있다(앞의 책, 33쪽). 여기서도 선행과 구원을 연관시킨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문구의 내용은 불신자나 초신자뿐만 아니라 교인들이 읽더라도, 도대체 구원의 진리가 무엇인지 쉽게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야 말로 비성경적인 문구이며 애매모호하기 짝이 없는 것을 알 수 있다.

존 웨슬리는 구원의 확신을 가진 뒤 영국을 비롯하여 독일 아일랜드 등 수많은 나라를 직접 순회하면서 수십 년간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러나 오늘날 감리교는 변질되어 존 웨슬리가 깨달은 복음의 진리를 감리교 교인들은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거듭나지 못한 가짜 목사들에게 속아 종교생활을 하고 있다. 이러한 거짓 지도자들은 그들의 헌법과 교리에 따라 교인들에게 내세에 대한 막연한 기대보다는 현세에서의 적극적인 삶과 사회구원을 강조하며 엉터리 복음을 전하고 있다. 국내 감리교의 평신도들은 더 이상 가짜 복음에 속지 말고 존 웨슬리가 믿고 전한 올바른 구원의 복음으로 되돌아 가야 할 것이다.

다음, 성결교의 구원관에 대해 살펴 보자. 성결교는 19세기 말에 미국에서,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의 완전주의적 입장과 성결운동을 강조하며 생겨난 교파이다. 국내의 성결교는 구원론에 있어 감리교와 순복음교회처럼 알미니안주의적인 입장을 취하고, 신학에 있어서는 초창기부터 늘 보수적, 수구적, 배타적인 입장을 견지해 왔다.

전통적으로 국내 성결교의 신학적 정체성에 나타난 사상으로는 ‘사중복음’을 들 수 있다. 그것은 곧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네 가지이다. 이 사중복음은 원래 19세기 말에 미국의 심슨이나 다른 부흥사들이 사회복음 운동에 반대하여 일어난 미국교회의 일종의 쇄신운동이며 미국 성결운동에서 강조했던 내용이었다. 이것이 한국 성결교에서도 창립 당시부터 줄곧 강조되어 오면서 성결교회의 신학적 정체성이 되어 왔다(<한국개신교 주요교파 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29쪽).

성결교에서는 다른 교파와 달리 사중복음인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네 가지를 중요시 하며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사중복음은 비성경적이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오직 한 가지, ‘구원의 복음’에 대해서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에베소서 1장 13절에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라고 적혀 있다. 이와 같이 누구나 구원의 복음을 깨닫고 믿어 천국가는 것이며, 복음은 몇 가지 종류가 아닌, 이 ‘구원의 복음’ 한 가지 밖에 없다. 그 외에는 모두 가짜요 거짓 복음인 것이다. 따라서 성결교회에서 강조하는 ‘사중복음’은 비성경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갈라디아서 1장에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갈1:7)”고 씌어 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교회의 신자들에게 다른 복음, 즉 가짜복음에 현혹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 구원의 복음은 “구원받고 천국가느냐, 구원 못받고 지옥가느냐”와 관련이 있다. 그러나 성결교의 사중복음 가운데 ‘성결· 신유· 재림’은 천국 지옥과는 무관하며, 그것은 일종의 기독교 교리 가운데 일부에 해당하는 것이지 구원의 복음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따라서 사중복음은 비성경적인 용어일 뿐만 아니라 가짜복음인 것이다.

다음, 침례교의 구원관에 대해 살펴 보자. 침례교의 기원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유럽의 재침례파와 17세기 영국의 회중교회의 분파인 청교도주의로부터 침례교가 시작된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한국에는 1889년 캐나다 선교사 말콤 펜윅에 의해 침례교가 전래되었다. 현재 한국에는 기독교한국침례회, 대한기독교침례회, 한국성서침례회, 대한선교침례회연합회 등 4개의 교단이 있다. 이 가운데 기독교한국침례회의 교단이 가장 규모가 크다.

침례교는 구원론에 있어서, 초창기에는 알미니안주의를 지지하는 일반침례교와 극단적 칼빈주의를 따르는 특수침례교로 양분되었다. 그러다가 18세기 말에 온건한 칼빈주의를 토대로 한, 복음주의 침례교 교리가 나타나 일반침례교와 특수침례교가 통합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침례교는 일반적으로 다른 교파보다는 확실한 구원관을 갖고 있으며, 중생에 대해서도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컨대 침례교는 지역교회마다 ‘회원권 제도’라는 것이 있다. 회원권이란 교회의 회원이 되는 자격으로서 반드시 갖추어야 할 조건이다. 그 첫째 조건이 중생인데, 즉 “오직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한 증거를 주는 자만이” 회원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것은 침례교가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 ‘구원’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침례교는 각 나라나 지역이나 심지어 개교회의 목사마다 구원관이 다른 경우도 많다. 마찬가지로 국내의 침례교도 개교회의 목사의 구원관이나 복음에 대한 교리가 비성경적일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므로 영적 분별력이 약한 교인들은 그릇된 목사를 따라 사망의 길로 갈 수도 있는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으므로 이런 목사를 믿지 말고 성경을 믿어야 할 것이다.

다음, 순복음교의 구원관에 대해 살펴 보자. 한국의 순복음교회는 오순절교회의 한 교파로 1928년 미국 선교사 럼지에 의해 시작되었는데, 그녀는 1933년에 한국에 최초의 오순절교회를 설립하였다. 그 후 1953년 서울에서 교단이 창립되면서 순복음 신학교가 처음 설립되고, 1960년대에는 여러 오순절 계통의 교단들이 한국에서 활동하였다. 국내 오순절 계통의 최대 교단인 ‘기독교대한하나님의 성회’는 1981년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의 ‘이단 시비문제’로 인해 총회측과 순복음측으로 분열되었다.

당시 조용기는 “조상숭배 문제, 성령세례 문제, 환상과 방언, 축복과 구원 등”과 관련하여 예장통합으로부터 ‘이단 시비문제’가 발생했다. 그 때 순복음측은 사태가 여의치 않자 조용기를 중심으로 하여 ‘예수교대한하나님의 성회’라는 새로운 교단을 만들었다. 이렇게 두 교단으로 분리되었다가 1991년 ‘기독교대한하나님의 성회’라는 명칭으로 다시 통합되었다(한국 개신교 주요교파 연구, 247쪽).

구원론에 있어서 오순절교는 감리교와 성결교처럼 알미니안주의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나 오순절교의 구원의 교리는 ‘회심과 성령세례’를 별도로 구분시켜 회심 후에 성령세례를 따로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복음주의자들은 회심과 성령세례를 동일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순절교와 큰 차이가 있다. 또한 오순절교는 침례교나 장로교와는 달리, 구원을 영혼의 구원뿐만 아니라 전인적인 구원이라 하여 질병의 치유까지 포함시켜 놓아, 복음적인 기독교 교리와는 동떨어진 비성경적인 구원관을 갖고 있다(앞의 책, 233쪽) .

그리고 오순절계통의 교인들은 사도시대의 ‘방언 등 표적의 은사’가 모든 시대에도 계속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초기 교회시대 이후, 속사도들이나 그리고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나 20세기 이전의 세계적인 전도자들은, “방언이나 기타 표적은 초기 기독교의 표적이며 일시적인 현상이었으며, 표적의 은사는 성경의 정경이 완성되기 전에 이미 활동이 멈추었다”고 말하고 있다(분파주의, 엔드류 스텐하우스, 전도출판사, 106쪽). 그러므로 순복음교인들은 교회사와 성경적인 구원론을 제대로 파악하여 방언이나 병고침이나 성령세례 등을 구원받은 증거인 것처럼 주장하는 거짓 교사들에게 속지 말아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천주교와 개신교와 성경적인 구원관에 대해 살펴 보았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신자들에게 “가톨릭교회에 소속되어 있지 않으면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다(가톨릭교회교리서 846조)”고 겁을 주며 위협하고 있다. 이처럼 가톨릭은 자기네 교회 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비성경적인 구원론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적인 구원은 가톨릭교회에 소속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는 관계를 맺는 것이다. 천주교 평신도들은 더 이상 가톨릭의 비성경적인 구원 교리에 속지 말아야 할 것이다.

상술한 것처럼 국내의 여러 개신교파와 교단들도 각기 저마다의 구원론을 갖고 있다. 그리하여 신학적으로 또는 지식적으로 자기네 교단의 구원론만이 올바른 교리인 것처럼 주장한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교파들이 율법이나 계명이나 자기네 교단 교리를 지킬 것을 강조하면서, 열심히 교회생활을 하면 천국에 갈 수 있고, 또한 십일조와 각종 헌금을 바치면 하나님께 축복을 받는다는 기복신앙의 비성경적인 말만 되풀이 하고 있다. 이제 국내의 개신교인들도 더 이상 이런 거짓 목자들의 말에 속지 말고, 성경적인 올바른 구원관을 갖고 이런 거짓 목자들을 척결하고 대적해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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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론 - 교회와신앙


3-6절 구원론

구원론에서 정통 개신교회는 내 죄를 대속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이신칭의(以信稱義), 이신득구(以信得救), 이신득의(以信得義) 사상을 전제로 한다.
 

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사역

인간의 구원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으로 말미암는다. 타락한 인간을 향한 구원 계획은 성부 하나님에 의하여 세워졌다. 이에 따라 성부는 성자 하나님을 이 땅에 보내셨다. 그리고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신인(神人)으로서 구속 사역을 이루셨다. 그러한 구속 사역의 효과를 인간들에게 직접적으로 적용하는 이가 성령 하나님이시다.
 

나. 구원의 성격

우리가 얻는 구원의 성격은 사람이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의가 주입되어 그 존재가 순식간에 완벽해지는 개념이 아니다. 사람은 여전히 죄인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인정받아 구원에 이르는 것이다.
 

한편 칭의를 말할 때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 경우도 의가 주입되는 개념은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의(그분의 십자가의 희생과 순종으로 이룬 의)가 믿는 사람에게 그대로 전해짐으로 인해, 죄인인 여부나 어떤 공로와 상관없이 누구든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칭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에서 사람은 결코 자랑할 것이 없고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에 감사해야 할 따름이다. 물론 구원받은 성도는 영적으로 구원받은 상태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이 세상에서 성화의 길을 걸어가게 되며,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는 부활의 몸을 입고 완전한 구원에 이르게 될 것이다.
 

다. 구원의 서정에 대한 각 교단의 견해

구원의 서정을 말할 때 용어에 대한 확실한 이해가 필요하다.

소명: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으로의 부르시는 사건

회심(신앙): 하나님을 믿지 않던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이켜 참 신앙을 가지는 것

회개: 회심과 관련한 회개는 단회적이다. 구원받은 성도는 생활의 회개가 반복적으로 요구된다.

중생: 죄인의 영혼이 성령을 통해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사건

칭의: 죄인이었던 사람이 죄 사함 받고 의롭다 칭하심을 받는 것

양자: 죄인이었던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로 여김을 받는 것

성화: 성도가 실생활에서 거룩함을 점차적으로 이뤄가는 것

견인: 구원받은 성도의 구원이 유지되는 것

영화: 궁극적 구원의 상태, 구원의 완성
 

1) 로마가톨릭교회

로마가톨릭의 구원관은 성례전과 관련되어 있다. 첫째는 영혼이 거듭나는 세례, 둘째는 세례받은 사람이 성령의 은사를 받는 견진, 셋째는 그 안에서 성찬의 떡을 뗌을 통해 그리스도의 살과 피 자체를 나누는 성만찬, 넷째는 그것에 의해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혜택이 세례받은 후 정도를 벗어난 사람들에게 시여되는 회개, 마지막은 죽음을 앞둔 사람을 준비시키고 그의 남은 죄를 깨끗하게 하는 종유식이다.
 

로마가톨릭 교회의 구원의 서정은 3단계 혹은 4단계로 요약 가능하다.

① 3단계: 구원의 준비단계--> 칭의--> 선행에 의한 공로 만족

② 4단계: 충족은혜--> 주입은혜--> 협력은혜--> 연옥 혹은 천국
 

충족은혜는 교회 밖에서 들어온 신자가 세례를 받기에 흡족한 은혜가 되게 하는 초보적인 은혜를 의미한다. 주입은혜는 하나님의 은혜로 과거의 죄를 사함 받고 양자로 칭함 받는 은혜를 의미한다. 이 주입은혜는 성례와 고백성사를 통해 점차적으로 채워진다. 협력은혜란 하나님의 은혜로 양자 된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와 협력하여 선행을 쌓아가야 한다. 선행이 없는 대죄는 주입은혜를 상실할 수 있다. 연옥은 이 세상에서 사함 받지 못한 죄를 마저 처벌받는 곳이다. 이 곳에서 죄를 해결하고 천국으로 올라간다.

이는 한마디로 행위 구원관이다. 정통 개신교회는 위와 같은 로마가톨릭교회의 구원관에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2) 루터파

신앙이 구원의 순서에 있어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리고 회심이 중생보다 앞서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사람의 응답에 강조점을 둔 것이다. 루터파의 경우도 알미니우스주의처럼 인간의 구원이 상실될 가능성을 인정한다. 루터파 구원의 서정 중 또 다른 특징은 성화가 따로 없다는 것이다. 성화는 칭의에 포함된 개념으로 본다.

소명-> 조명-> 회심-> 중생-> 신앙-> 칭의-> 신비적 연합-> 갱신-> 보존-> 영화
 

3) 칼빈주의

칼빈주의는 절대 예정, 제한 속죄, 견인을 전제로 구원의 서정을 전개한다. 그러나 그 보수성의 차이에 따라 학자마다 순서에 약간씩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회심이나 신앙보다 중생을 앞에 두는 공통점이 있다. 이는 절대 예정과 무조건적 선택에 기초하여 믿음도 하나님이 믿도록 해주셔야 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 일반적 견해: 소명-> 중생-> 회심(회개와 신앙)-> 칭의(양자)-> 성화(견인)-> 영화

* 하지(A. Hodge)의 견해: 소명-> 중생-> 신앙-> 그리스도와의 연합-> 회개 -> 칭의-> 양자-> 성화-> 성도의 견인

* 벌콥(Louis Berkhof)의 견해: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 외적 소명-> 중생과 유효적 소명-> 회심-> 신앙-> 칭의-> 성화-> 성도의 견인

* 아브라함 카이퍼의 견해(A. Kuyper): 중생-> 소명-> 칭의-> 신앙-> 성화

* 박형룡의 견해: 소명-> 중생-> 회심-> 신앙-> 칭의-> 양자-> 성화-> 견인-> 영화
 

4) 웨슬리-알미니우스주의

예지예정(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의 신앙과 순종을 미리 예견하심을 통해 이뤄진다고 보는 견해)과 보편속죄(하나님의 선행 은혜에 대해 응답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얻음. 그런데 인간의 태도 여하에 따라 구원이 변할 가능성도 인정함)를 전제로 한 구원의 서정이다. 웨슬리-알미니우스주의 신학에서 구원의 서정은 다음과 같다.

선행 은총의 역사-> 회개를 포함한 믿음-> 칭의-> 신생(중생)-> 성화-> 완전 성화-> 영화
 

라. 칼빈주의 구원관

1) 칼빈주의 5대 강령

칼빈주의 5대 강령에 의하면 칼빈주의의 구원관을 대략 짐작할 수 있다.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강조하여 구원관도 절대 예정을 전제로 전개된다.

①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여 자기 능력으로는 구원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②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의 의지와 관계없이 된다. 하나님은 당신의 의지대로 신자들을 무조건 선택하신다.

③ 제한 속죄(Limited Atonement): 그리스도는 영원 전부터 선택된 사람들만을 위해 죽으셨다.

④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able Grace): 구원으로 선택된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항거할 수 없이 그 은혜를 입게 된다.

⑤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Saints): 하나님이 한번 선택하신 사람은 궁극적 구원에 이르기까지 이끌어 주신다.
 

2) 회심보다 앞서는 중생
 

칼빈주의는 구원의 서정에서 중생이 회심 앞에 온다고 본다. 예정으로 선택받은 택자에게 성령이 임하셔서 그를 중생시키시고, 믿고 회개하게 하시고, 구원으로 이끄신다는 것이다. 이처럼 중생이 회심보다 앞에 놓이는 이유는 구원이 사람의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주권에 의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반면 대부분의 비 칼빈파 교단들은 회심을 중생 앞에 둔다.
 

3) 인간의 선택과 유기

절대 예정을 전제로 구원받을 자에 대하여 하나님은 무조건적으로 선택(Election)하신다. 이는 미리 구원받을 자와 구원받지 못할 자를 정하신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도 이 선택받은 사람들만을 위함으로 제한적이다. 그리고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은 유기(Reprobation)되었다. 유기된 자들은 결코 구원받을 수 없다. 이 이론은 ‘이중예정’이라고도 한다.
 

4) 칼빈주의 구원관의 변화

칼빈주의 5대 강령에 기초한 교리들은 많은 반론을 낳았으며 후대에 이르러서는 칼빈주의의 변화로까지 이어졌다. 특별히 미국의 대각성운동을 전후하여 ‘제한 속죄’를 완화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등장하였다. 곧 누구든지 믿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 이런 흐름의 대표적인 실례가 미국 북장로교단이 1903년에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개정판>을 발표한 모습에서 드러난다. 개정의 내용은 선택과 유기의 이중예정의 문구를 매우 부드럽게 완화하고, 성령의 사역과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구원을 원하심(선교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조항을 추가하였다. 이와 같이 칼빈주의의 완화된 경향을 일컬어 ‘온건 칼빈주의(Sober Calvinism)’, ‘수정 칼빈주의’라고 부른다. 오늘날 세계의 대다수 장로교회와 칼빈주의 신학을 받아들이는 일부 침례교회 등 여러 교단들이 이런 온건한 경향을 수용하고 있다. <pp. 참조> 한국 장로교단 중에는 통합, 백석, 고신 등이 이 문서를 채택한다. 수정하지 않은 1647년의 초판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을 그대로 지지하는 교단은 합동, 합신 등이다. 특정 교단의 색채를 따지지 않더라도 칼빈주의 교단이라고 하면서 선교나 교회에서의 봉헌과 섬김, 성화의 삶을 강조한다면 온건 칼빈주의적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알미니우스주의이면서도 전적인 타락이나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다면 개혁적 알미니우스주의(Reformed Arminianism)라고 할 수 있다.
 

마. 오늘날의 알미니우스주의
 

17세기의 초창기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은 대륙의 칼빈주의자들에 의해 탄압을 받았다. 그래서 많이 위축된 상태로 있어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미니우스주의를 표방한 침례교회들이 세워지기도 했다. 그러던 중 18세기에 이르러 알미니우스의 사상은 영국의 웨슬리에 의해 받아들여지며 큰 발전을 이루게 된다. 그렇다고 웨슬리가 알미니우스의 사상을 그대로 차용한 것은 아니다. 알미니우스주의의 예지예정과 보편구원의 개념을 받아들이고 칼빈주의의 제한 속죄를 거부하지만, 그렇다고 전면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 타락 등 일정 부분을 수용하기도 한다. 그래서 웨슬리의 신학을 알미니우스주의라 하지 않고 웨슬리-알미니우스주의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웨슬리의 구원관은 알미니우스주의와 칼빈주의의 중간에 서 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오늘날 알미니우스주의를 표방하는 교회는 미국 등 서구의 침례교회와 회중교회, 오순절 계통 교회에서 많은 데, 그렇다고 17세기의 구(舊)알미니우스주의를 고집하는 곳은 거의 없다. 대부분 타교파의 좋은 점을 편견 없이 받아들이기를 꾀한다. 그래서 웨슬리주의는 물론 칼빈주의까지 폭넓게 흡수한 면모를 보이고 있다. 알미니우스주의가 배척을 받던 시절 그들은 결국 율법주의로 흘러가고 말 것이라는 부정적 시각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알미니우스주의에는 그런 면모는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건전한 복음주의적 경향이 두드러진다. 물론 일부는 자유주의로 흘러간 경우도 있고, 또 한편 너무 세속화한 모습도 있다.
 

칼빈주의 입장에서 알미니우스주의는 천주교와 다를 바 없는 행위구원론 주장자들로 매도된다. 반면 알미니우스주의와 비칼빈파 입장에서 칼빈주의는 하나님을 무자비한 폭군으로 여기도록 하는 결정론적 이론이며, 전도와 선교마저도 필요 없도록 한다고 매도된다. 두 진영은 그런 비난들에 대해 여러 가지 논리로 방어하는 입장이지만, 상대방은 그 논리를 잘 수긍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는 서로 간 신학적 견해 자로 인함일 뿐 양자간의 신앙이 달라서는 결코 아니라고 할 것이다. 칼빈주의도 신앙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고백하며 전도와 선교의 필요성을 부르짖는다. 알미니우스주의도 신앙으로는 인간의 한계를 절감하며 하나님의 주권을 깊이 고백한다. 결국 각자 주장하는 강조점은 달라도 믿음 안에서는 이미 한목소리를 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서로 간 장점들을 바라보며 좋은 점을 존중하고 인정함이 바람직하다고 할 것이다. 서로 간 약점만 바라보면 반목과 분쟁만 있을 뿐이다. 오늘날 두 진영은 도르트회의 때의 갈등을 뒤로하고, 시대의 변화에 따라 상호 포용과 관용의 길로 나아가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기도 하다.
 

바. 웨슬리-알미니우스주의 (Wesleyan Arminianism) 구원관
 

1) 구원을 위한 예비 은총으로서의 ‘선행 은총(先行恩寵, Prevenient Grace)’
 

웨슬리는 ‘이신칭의’와 ‘만인구원(Salvation for All)’, 곧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 원하신다(딤전 2:4)는 말씀을 기본 전제로 구원론을 전개한다. 그러면서 선행은총을 말한다. 선행은총이란 먼저 주어지는 은총(grace that goes before)을 뜻한다. 즉, 우리가 구원받기 전 죄인일 때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는 하나님의 은총이다(롬 5:8). 이는 모든 사람에게 값없이 골고루 주시는 만인을 위한 은총(Universal Grace)이다. 타락한 사람은 선을 행할 능력이 없지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구원에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을 허락하시는데, 이 선행은총에 응답할 때 성령을 통해 구원으로 인도받는다.
 

2) 자유의지와 신인 협동
 

칼빈에게 하나님의 은혜는 제한적이고 특수한 데 비해, 웨슬리는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이지만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선행은총에 의해 부분적으로나마 회복된 자유의지(혹은 생래적 양심: 양심이 선행은총으로 구원의 부름에 응답할 수 있을 만큼 회복된 상태)를 가지게 되었기에 구원의 부름에 응답할 능력이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칼빈주의에서는 구원이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주어지므로 인간에게는 구원의 책임이 없으나, 웨슬리 신학에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거나 거역하는 것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지게 된다. 이는 곧 하나님의 은총과 자유의지 사이의 조화를 말하는 것으로서 '복음적 신인 협동설'(Evangelical Synergism)이라 부른다.
 

일각에서는 신인 협동이라는 단어를 하나님과 사람이 절반씩 나누어 협력한다거나, 하나님 100%, 사람 100% 등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웨슬리의 관점은 구원의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으되 사람은 그에 응답하는 구조이므로 하나님의 은혜가 전적으로 강조된다. 곧 인간의 의지가 성령의 역사에 수동적으로 협동함으로써, 하나님의 주도적인 은혜의 역사에 전적으로 이의 없이 협동하는 것을 말함이다. 웨슬리에 의하면 구원은 결국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다. 다만 인간 편에서는 하나님의 그 큰 은혜를 받아들이는 믿음의 응답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은 물에 빠진 사람이 구조해 주는 사람의 손을 꽉 잡는 것에 비유될 수 있다.
 

3) 칭의 이전의 회개를 포함한 믿음
 

웨슬리에 의하면 ‘믿음은 구원의 문(door) 이요, 회개는 구원의 현관(porch)이요, 성결(성화)은 구원의 안방’이다. 칭의의 유일한 조건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믿는 믿음이다. 그런데 이 믿음은 반드시 회개를 포함하는 것이어야만 한다. 이 교리는 회심의 체험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합당한 믿음을 소유한 사람은 칭의를 얻는데, 칭의는 또한 새로운 탄생(신생, 중생)을 동반한다.
 

4) 신생(중생)
 

웨슬리는 설교에서 중생(regeneration)이란 단어보다 새로운 출생이란 의미인 ‘신생(the new born)’이나 ‘다시 태어남(be born again)’을 즐겨 사용하였다. '칭의'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적인 변화라면 ‘신생’은 인간 전인의 실제적인 변화이다.
 

웨슬리는 중생의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첫째 죄악에서 벗어나 깨끗하고 경건한 삶인 성결을 위해서는 먼저 거듭나야만 한다. 둘째 거듭나지 않고는 하나님과 교류할 수 없기 때문에 진정한 구원을 위해 필요하다. 셋째 중생은 천국에서는 물론 이 세상에서도 사랑과 기쁨이 충만한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하다.
 

또 한편 웨슬리는 중생의 표적을 세 가지로 봤는데 그것은 믿음, 소망, 사랑이다. 중생한 사람의 삶에는 믿음, 소망, 사랑의 열매가 맺힌다.
 

5) 성화(Sanctification)와 그리스도인의 완전(Christian Perpection)
 

중생(신생)이 다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한다면 성화는 실제적인 삶의 성장이라는 것에 의미가 있다. 중생한 신자는 어린아이 모습에 머무르지 않고 성장해야 마땅하다. 이 성화는 개인의 노력으로 되지 않고, 오직 성령의 도우심과 공급하시는 능력을 통해 가능한 것이다. 성령과 동행할 때 성화는 점차적으로 이뤄지며, 경우에 따라서는 순간적으로 완전에 이르기도 한다. 그러므로 웨슬리는 모든 신자가 완전 성화를 신앙생활의 목표요 이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완전 성화에 이르러야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아니다. 신자는 이미 칭의의 단계에서 구원받았기 때문이다. 칭의를 받은 신자는 자기의 삶 속에서 구원의 행복을 누리는 성화의 길(구원의 안방에서의 삶), 즉 실제적인 구원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성화에는 단계와 정도 차가 있기는 하다.
 

웨슬리는 소수의 사람에게 해당하는 일이지만 신자가 성령의 인도를 따라 성화의 삶을 살 때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는 완전 성화에 이를 수도 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이것은 신적 거룩이나 천사의 거룩 같은 것이 결코 아니다. 인간의 연약함을 전제로 한 제한된 완전이다. 완전 성화에 이른 신자는 하나님을 향한 마음과 행동에 온전히 순수함을 가지며,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을 그리스도를 모방함으로 되찾아 죄를 극복하고, 사랑을 실천하며,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고 영광 돌리는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사. 구원의 수단에 대한 견해들
 

구원의 수단이 무엇이냐에 대한 견해에 따라 그 교단이 추구하는 구원관이 명확히 드러나기도 한다.

① 로마가톨릭: 믿음 외에 수단만으로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본다. 곧 교회가 제공하는 세례와 성찬 그리고 여러 성사를 수납함을 통해서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② 루터교회: 믿음을 통한 수단을 말한다. 곧 믿음을 고백하는 신자가 세례와 성찬을 수납함을 통해 구원 얻는다고 한다.

③ 칼빈주의: 수단이 없는 믿음을 전제로 한다. 유효한 은혜(구원에 이르게 하는 특별한 은혜)에 의해 구원 얻는다.

④ 웨슬리-알미니우스주의: 수단이 없는 믿음을 전제로 한다. 일반적 은혜(선행 은총)를 받아들임으로 구원을 얻는다.
 

아. 구원론 이단들

① 펠라기우스: 사람은 믿음만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고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는다. 그리스도는 하나의 모범일 뿐이다.

② 안식교: 토요일 안식일 준수와 여러 가지 율법적 조항을 지켜야만 한다고 가르친다.

③ 여호와의 증인: 공로 사상이 강하다. 행위의 비중에 따라 내세의 위상이 결정된다.

④ 류광수: 그리스도의 속죄는 죽어야만 할 인간을 대신한 죽음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이 사탄에게 속전을 치르는 행위(사탄 배상설)로 이해한다.

⑤ 예정론을 전면 부정하는 경우: 정통 개신교회는 예정론에 대한 견해차가 있을 뿐 예정론을 거부하지는 않는다. 칼빈주의는 절대 예정을 지지하며, 비 칼빈주의 진영에서는 예지 예정을 지지한다.

⑥ 기타: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통한 구원을 부인하는 자들, 성령의 구원 사역을 부인하는 자들, 자기나 특정 단체를 일컬어 믿거나 가입하여야만 구원받는다고 하는 자들, 공로 구원을 강조하며 금전을 내게 하거나 억지로 헌신을 강요하는 자들은 모두 이단이다.
 

자. 구원론 이단의 특징들
 

① 이신칭의 사상을 거부하거나 제한한다.

② 지나친 방종이나 지나친 율법주의 경향이 있다.

③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거부하거나 왜곡, 혹은 제한한다.

   * 그리스도께서 죄인인 나를 위해 대신 죽으셨다는 형벌 대속 사상을 거부 혹은 제한한다.

   *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을 거부 혹은 제한한다.

   * 기성교회의 방법은 구원에 이르기에 부족하며 자기들에게만 구원이 있다고 주장한다.

   * 특별한 지식을 가져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

   * 특별한 구호나 내용을 입으로 말해야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

   * 구원을 위한 의가 사람에게 주입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 사탄 배상설을 주장한다.

④ 특정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부족한 구원 사역을 완수하는 자라고 말하기도 한다.

⑤ 세속적 구원에만 치중하든지 내세적 구원에만 치중하든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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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장로교 신학자들의 학파별 구원론 비교연구



2015년 5월 30일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에서 한국복음주의조직신학회(회장 한상화 박사) 제30차 정기논문발표회가 개최됐다. 이날 조봉근 박사(광신대)는 ‘칼빈과 한국장로교회의 학파별 구원론에 관한 비교연구’라는 제목의 발제를 했다. 본 기사는 크리스천투데이 이대웅 기자가 정리한 내용이다. < 편집자 >

먼저 조봉근 박사는 발제 취지를 이렇게 밝혔다. “오늘 한국장로교회는 칭의(稱義) 교리만 지나치게 일방적으로 강조하고, 초기 부흥사들에 의해 깊은 논의와 여과 없이 값싼 구원의 은혜가 성도들에게 단순하게 전달되어 ‘성화(聖化) 없는 칭의(稱義)’가 당연시되어 왔다. 또한 칭의와 성화에 대한 이원론적(二元論的) 해석으로 ‘복음과 율법’ ‘믿음과 행위’를 분리(分離)하는 현상을 유발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므로 오늘날 한국교회 성도들 신앙생활에서 발생하는 이 같은 여러 병리적 현상들은 교회가 성경대로 기독교의 구원교리(救援敎理)를  바로 가르치지 못한데도 원인이 있음을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조 박사는 장로교 뿌리인 칼빈의 구원론 핵심에 대해 ‘그리스도와의 연합이요 이로 말미암아 동시적으로 주어지는 이중(二重) 은혜가 바로 칭의와 성화’라며 “우리는 칭의와 성화의 불가분리(不可分離的)의 유기성(有機性)과 성령 사역의 동시 발생 현상을 함께 이해하고, 칼케돈 신조의 ‘칭의와 성화는 반드시 서로 구별돼야 하지만 서로 혼동되거나 분리되어는 안 된다.’는 원칙에 준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조 박사는 “존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 제3권에서 칭의와 성화의 관계에 대해 당시 ‘칭의와 성화’ 이 둘을 동일시(同一視)한 오시안더(Andreas Osiander, 1498-1552, 독일, 루터란)의 주장을 비판하면서 ‘둘은 분리되지 않지만 구별되어야 한다.’고 말했다.”며 “죄의 흔적들이 의인들 속에도 항상 남아 있다는 것이 경험에 의해 아주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의인들의 칭의는 삶의 새로움(성화)을 향한 개혁과는 전적으로 구별돼야 한다는 것이다.”라고 했다. “칼빈은 ‘이중적 은총’은 인정하지만(칭의와  성화 구별) ‘이중적 의’(칭의와 성화 동일시)는 허용하지 않았다.”고도 했다.

 이렇게 서론을 전개한 후 한국 장로교회 신학자들의 학파별 ‘구원론’을 차례로 짚어 나갔다. 조 박사는 “장로교 보수교단의 박형룡, 박윤선, 김영한 학파는 주로 칼빈과 개혁주의 구원론을 따르고 있지만, 진보 교단의 이종성, 김재준 학파는 주로 칼 바르트와 자유주의자들의 구원론을 옹호하고, 한철하 학파의 경우 칼빈과 웨슬리의 구원론을 모두 수용하고 있다.”고 요약했다.

 1. 박형룡, 박윤선의 구원론

– 칭의와 성화는 구별되나 서로 혼동되거나 분리될 수 없다. –

(1) 박형룡(朴亨龍, 1897-1978)

구체적으로는 먼저 죽산 박형룡에 대해 “교의신학과 성경주석의 상호 비교를 통해 구원의 서정으로서 ‘소명-중생-회심-신앙-칭의-수양-성화-견인-영화’의 9가지 순서로 논하는 것이 합당하고, 칭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기초로 죄인에 관한 율법의 주장이 만족된 것을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재판 행위’라 정의했다.”고 소개했다.

성화에 대해서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핫지, 벌코프의 정의를 인용해 “성령께서 의롭다 함으로 죄인을 죄의 더러움에서 구출하시고, 그의 온 성질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갱신하시며, 그로 하여금 선한 일을 행할 만하게 하시는 은혜롭고 계속적인 공작이다.”라고 했다.

조 박사는 “죽산 박형룡은 ‘성화는 칭의와 나눌 수 없이 연결되고 둘이 결코 분리(分離)되지 않지만 반드시 구별(區別)되어야 하며, 성화를 칭의와 혼동(混同)하는 것은 성경을 생각 없이 읽는 사람들이 자주 범하는 과오’라는 칼빈의 입장을 취했다.”며 조 박사 자신을 비롯해 김길성, 권호덕, 강웅산, 유태화, 유창형 등 죽산 학파들은 모두 칼빈과 개혁신학자들의 구원론을 주장하고 있다고 했다.

(2) 박윤선(朴允善, 1905-1988)

정암 박윤선의 구원론은 “칭의는 법정 용어로 범죄자가 법적 선언에 의해 옳게 여김 받는 것을 의미한다.”고 정의하면서 이 경우 정암은 “그 죄인이 옳게 여김을 받는 것은 자신에게 의(義)가 전혀 없어도 성립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나님이 그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의(義)에 참여한 자라고 법적으로 선언하신다.”고 주장했다. 성화에 대해서는 “성령께서 신자로 하여금 점차 거룩해지도록 하는 역사이고 단번에 이뤄질 사건이 아니라 계속 성취해 나아가는 과정이다.”고 했다.

또 칭의와 성화의 관계에 대해서는 “칭의는 성화보다 논리적으로 우선(于先)하며 칭의는 객관적으로 죄인 밖에서 실현되지만 성화는 주관적으로 그의 실생활에 성취된다. 칭의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는 믿음과 함께 느껴지는 사죄 받은 평안함이고, 성화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거룩해지려는 소원과 행동(行動)의 계속’이다.”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정암은 “칼 바르트가 ‘칭의와 성화는 서로 독립된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이뤄지는 한 화해운동(和解運動)의 양면(兩面)이다.’라고 한 것은 잘못된 성화론 이라며 강하게 비판했다.”고 했다. 조 박사는 신복윤, 안명준, 김재성, 이승구, 김병훈, 변종길, 유해무, 박영돈, 이신열 등 정암 학파 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칼빈과 개혁주의 구원론을 주장한다고 했다.

2. 김재준, 이종성의 구원론

 조 박사는 춘계 이종성의 특징을 ‘통전적 신학’, 장공 김재준의 특징을 ‘보편 구원론’이라고 하고 김균진 구원론에 대해서는 ‘보다 포괄적인 통전적신학’(Holistic Theology)이라고 요약했다.

(1) 이종성(李鍾聲, 1922-2011)

조 박사는 “춘계(春溪)는 칭의를 의인(義認, 의롭다고 인정함)이라 번역했고, ‘의인 교리가 인간의 측면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한 루터의 말을 인용했다.”며 “의인 교리는 루터로 시작해 모든 개혁자들에 의해 강조됐으며 종교개혁의 불변의 유산으로 보수되고 있다.”고 했다.

이종성이 성화에 대해서는 “믿음을 가진 신자들 생활의 종합적 과정이고 신(神) 자신이 성령을 통해 죄인인 사람과 하나가 되어 그 죄인이 그 자리에서 신처럼 거룩하게 되고 그 거룩함을 통해 그가 있는 현실 자체를 거룩하게 하는 사건을 뜻한다.”고 했다.

조 박사는 “춘계는 신앙의 성립이 ‘의인과 성화’를 동시에 체험할 때 가능하다고 했고, ‘칭의와 성화가 유리(遊離 따로 떨어짐) 된다면 신앙이 성립할 수 없다’고 하면서 바르트가 ‘직설법과 명령법이 하나를 이루고 있다’고 한 말에 대해 ‘바로 이 점을 지적해서 하는 말인 것 같다.’고 했다”며 “다시 말해 춘계는 칼빈보다 바르트의 논법을 따르고 그의 구원론은 바르트의 선택론이 핵심을 이루며, 개혁신학자들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중심 교리가 크게 부각되지 않았고 다원주의 양상을 띠면서 뚜렷한 자기신학의 색깔이 없는 ‘백과사전적 종합신학’, ‘백화점식 나열신학’, ‘집대성신학’이라 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조 박사는 “김명용, 윤철호, 현요한 등 춘계학파는 대부분 이 통전적 신학의 경향을 따르고 있으나, 최윤배의 구원론은 분명 칼빈과 마르틴 부처의 구원론을 설명하고, 황승룡은 찰스 핫지와 안토니 후크마, 존 머리 등 여러 개혁신학자들의 구원론을 인용해 그의 구원론을 전개하고 있다.”고 했다.

(2) 김재준(金在俊, 1901-1987)

장공(長空) 김재준의 구원론과 관련해서는 “초기에는 기독교의 구원론을 일단 수용했으나 후기에 가서 완전히 ‘보편 구원론’에 빠졌고, 제자들 역시 칼빈의 구원론에 관한 논문이나 책을 별로 쓰지 않았다.”며 “오늘날에도 김재준 학파의 후예들은 대부분 비교종교학의 상대주의 입장에 서 있고, 특히 종교보편주의 이론을 전개 중인 김경재뿐 아니라 오영석, 김균진의 경우도 한국적 민중신학의 범주 안에 안주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3) 김균진(金均珍, 1944- )

조 박사는 “특이하게도 연세대에서 오랫동안 조직신학을 가르쳤던 김균진은 ‘기독교 조직신학’ 제3권에서 놀랍게도 약 230면이나 할애하여 ‘신앙, 칭의, 성화, 하나님의 은혜’를 비교적 세밀하게 논술했고, 전통적 개혁신학자들처럼 ‘칭의와 성화의 관계’를 깊이 다루고 있다”며 “그는 칭의와 성화의 관계에 대해 ‘하나님의 구원 사건이 가진 두 가지 다른 차원으로 하나님의 낮추심이 칭의라면 이로 말미암은 인간의 높임은 성화’이고, ‘둘은 결코 나뉠 수 없으며 칭의의 진실성 여부는 성화의 열매에서 증명되고, 성화의 열매는 궁극적으로 사랑의 행위에 있다.’며 전통적 바르트주의 입장을 뛰어넘어 오히려 칼빈에게 접근하고 있는데 이는 보수적 한국장로교회의 토양에 크게 영향을 입은 결과일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김균진의 뿌리가 되는 바르트 신학에 대해 그는 “외형적으로 칼빈의 성화론과 유사해 보이지만 본질적으로 다르다.”며 “바르트는 칭의와 성화를 하나로 본 것이며 칭의 속에서 성화를 보고 성화 속에서 칭의를 보고 있어 사실상 둘을 구별할 수 없다.”고 밝혔다.

(4) 한철하, 김영한

 한철하(韓哲河, 1924-2018)는 구원론에 있어 죄 사함과 회개를 강조하고 칼빈처럼 신앙을 조리 있게 설명하면서 도표를 통해 ‘죄 사함 → 칭의 → 화목’과 ‘회개 → 중생 → 성화’를 균형 있게 해설했으며, 그의 학파인 한상화는 칼빈과 웨슬리의 성화를 비교하면서 웨슬리가 말한 완전성화의 의미를 변증하고 있다.

김영한(金英漢, 1946-  )은 루터의 의인(칭의)론은 칼빈보다 부각됐고 칼빈의 성화론은 루터보다 더 개진됐음을 말하면서 “바르트의 구원론은 보편구원론의 위험성을 갖고 있다.”고 규명하고 있다고 논증했다.

결론

조 박사는 “루터의 이신칭의 교리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공로주의(功勞主義) 구원관을 비판하면서 주창(主唱) 된 구원론 기초 교리로서 이 대원칙에 벗어나는 듯 보이는 야고보서를 복음적 서신이 못 된다고 생각하기도 했다.”며 “그러나 칼빈은 ‘그리스도와의 연합교리’에서 칭의와 더불어 성화교리의 근간(根幹)을 재발견하여 루터보다 더 철저한 성경관을 토대로 칭의와 성화를 동시에 강조했다.”고 했다.

 조 박사는 “후대의 칼 바르트도 루터의 입장에서 완전히 탈피하지 못해 영감론과 성령론을 깊이 인식하지 못했고 오직 포괄적인 기독론적 해석으로 일관할 뿐 아니라 양태론적 유니테리안 입장으로 나갔다.”며 “더욱이 그의 기독론(화해론)은 일반 역사에서의 기독론과 전혀 다른 실존적 역사 이해와 해석으로 말미암아 결국 WCC의 발기자(發起者)가 됐으며 칭의와 성화를 바르게 구별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독립문 / 대한민국의 역사를 알아야 대한민국 국민이 될 자격이 있다. 박광수(경남매일 주필) / 박정희 이병철 정주영



독립문 건립의 의미와 역사적 배경 살펴보기

독립문은 조선이 외세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주독립을 상징하기 위해 건립된 기념비적인 건축물입니다.

당시 조선은 청나라와의 종속 관계에서 벗어나 독립된 국가로 나아가고자 하는 열망이 강했습니다. 청일전쟁 이후 체결된 시모노세키 조약은 조선의 독립을 공식화했지만, 실질적인 독립을 위해 내부의 자주적인 의식과 개혁이 필요했습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독립문은 단순한 기념물이 아니라, 자주와 독립을 향한 국민적 의지를 상징하는 상징물로 자리 잡았습니다.


독립문 설계와 건축 과정

독립문은 프랑스 개선문을 본뜬 구조로 설계되어, 조선의 자주독립 의지를 건축적으로 표현한 것이 특징입니다.

이 건축물은 1897년 독립협회의 주도로 건립이 시작되었으며, 독립협회와 국민들의 기부로 자금을 마련했습니다. 석조 아치 형태의 독립문은 당시의 기술력과 민족적 열망이 담긴 대표적인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특히, 건립 과정에서 조선 국민들의 자발적 참여는 독립문이 단순한 구조물을 넘어선 의미를 지니게 했습니다.

독립문과 독립협회의 역할

독립문 건립은 독립협회의 활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독립협회는 조선의 자주독립과 개혁을 목표로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으며, 독립문 건립은 그들의 주요 성과 중 하나였습니다. 독립협회는 독립문을 통해 국민들에게 자주독립의 중요성을 알리고, 근대 국가로 나아가기 위한 의식을 고취시키고자 했습니다. 독립문은 이러한 독립협회의 정신을 상징하는 중요한 유산으로 남아 있습니다.

아래 표는 독립문 건립과 관련된 주요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항목 내용 비고
건립 배경 조선의 자주독립 의식 고취 청나라 종속 관계 탈피
건축 과정 독립협회 주도, 국민 참여 기부금으로 자금 조달
의미 조선의 근대화와 자주독립 상징 민족적 자부심 표현

독립문의 상징성과 의미

독립문은 조선이 외세에 종속되지 않는 독립된 국가로 자리매김하고자 하는 의지를 상징합니다.

또한, 이는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국민적 열망과 참여를 통해 만들어진 결과물로서, 근대 사회로의 전환점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독립문은 현재에도 자주와 독립을 상징하는 유산으로 남아,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는 장소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독립문의 현대적 가치

독립문은 오늘날에도 그 상징성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독립운동의 시작점과 국민적 열망의 결과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기념물로, 현대 한국의 역사적 뿌리를 상징합니다. 또한, 독립문 주변은 문화적, 교육적 공간으로 활용되어 국민들에게 역사를 알리고, 자주독립 정신을 계승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결론

독립문은 조선의 자주독립 의지를 담은 상징적 건축물로, 조선 후기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국민적 열망과 참여로 건립된 독립문은 근대화와 자주독립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며, 오늘날에도 중요한 역사적 유산으로 남아 있습니다. 독립문은 우리 모두가 기억하고 계승해야 할 소중한 문화유산입니다.

독립문(獨立門. Dongnimmun Arch) 

서울 독립문(서울 獨立門, 영어: Dongnimmun Arch, Seoul)은 조선대한제국의 독립을 기념하기 위해 1896년부터 1898년 사이에 영은문 주초 부근에 서재필독립협회의 주도로 세워진 뒤, 1963년대한민국의 사적 제32호로 지정된 건축물이다. 현재의 위치는 1979년 성산대로 공사 과정에서 영은문 주초와 함께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독립근린공원 내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2]

개화파의 지식인 서재필청일전쟁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에 따라 조선청나라로부터 벗어나 완전한 자주독립국이 되었음에도 그 사실을 외국인들은 물론 조선 국민들조차도 널리 인식하지 못하는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과거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철거한 자리에 독립의 상징으로서 독립문과 독립공원을 세운다는 계획을 세우고 이를 이행할 단체로서 독립협회를 창립하였다.[2] 이러한 서재필의 제안은 당시 내외의 압력에 직면하고 있던 조선 정부의 이해관계에도 부합하는 것이었으며, 이에 따라 조선 정부 및 뒤이은 대한제국 정부는 독립문의 건축에 많은 후원을 하게 되었다.[3]

독립문에 관한 서재필의 논설

서재필은 그가 발행한 독립신문1896년 6월 20일자 국문본 논설에서 독립문 창건의 취지를 처음 본격적으로 제안하였는데,[2] 그 내용은 주로 청나라로부터의 독립과 연관지어 설명되고 있으므로,[4] 독립문의 취지는 일본제국이 아닌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5]

조선 인민이 독립이라 하는 것을 모르는 까닭에 외국 사람들이 조선을 업신 여겨도 분한 줄을 모르고 조선대군주 폐하께서 청국 임금에게 해마다 사신을 보내서 책력을 타 오시며 공문에 청국 연호를 쓰고 조선 인민은 청국에 속한 사람들로 알면서도 몇 백 년을 원수 갚을 생각은 아니 하고 속국인 체 하고 있었으니 그 약한 마음을 생각 하면 어찌 불쌍한 인생들이 아니리요 백성이 높아지려면 나라가 높아져야 하는 법이요 나라와 백성이 높으려면 그 나라임금이 남의 나라 임금과 동등이 되서야 하는데 조선 신민들은 말로 임금께 충성이 있어야 한다고 하되 실상은 임금과 나라 사랑 하는 마음이 자기의 몸 사랑하는 것만 못한 까닭에 몇 백 년을 조선대군주 폐하께서 청국 임금 보다 나진 위에 계셨으되 그 밑에서 벼슬하든 신하들과 백성들이 한 번도 그것을 분히 여기는 생각이 없어 조선대군주 폐하를 청국과 타국 임금과 동등이 되시게 한 번을 못하여 보고 삼년 전 까지 끄어러 오다가 하나님이 조선을 불쌍히 여기셔서 일본과 청국이 싸움이 된 까닭에 조선이 독립국이 되어 지금은 조선 대군주 폐하께서 세계 각국 제왕들과 동등이 되시고 그런 까닭에 조선 인민도 세계 각국 인민들과 동등이 되었는지라 이 일을 비교 하여 볼진대 남의 종이 되었다가 종 문서를 물은 셈이니 이것을 생각하거드면 개국 한지 오백여 년에 제일 되는 경사라 … 근일에 들으니 모화관에 이왕 연주문 있던 자리에다가 새로 문을 세우되 그문 이름은 독립문이라 하고 새로 문을 그 자리에다 세우는 뜻은 세계 만국에 조선이 아주 독립국이라 표를 보이자는 뜻이요 이왕에 거기 섰던 연주문은 조선 사기에 제일 수치 되는 일인즉 그 수치를 씻으라면 다만 그문만 헐어 버릴 뿐이 아니라 그문 섰던 자리에 독립문을 세우는 것이 다만 이왕 수치를 씻을 뿐이 아니라 새로 독립하는 주추를 세우는 것이니 우리가 듣기에 이렇게 기쁘고 경사로운 마음이 있을 때에야 하물며 조선 신민들이야 오직 즐거우리요 남의 나라에서들은 승전을 한다든지 국가에 큰 경사가 있다든지 하면 그 자리에 높은 문을 짓는다든지 비를 세우는 풍속이라 그문과 그 비를 보고 인민이 자기 나라에 권리와 명예와 영광과 위엄을 생각 하고 더 튼튼히 길러 후생들이 이것을 잊어 버리지 않게 하자는 뜻이요 또 외국 사람들에게도 그 나라 인민의 애국 하는 마음을 보이자는 표라 …
— 독립신문 국문본 1896년 6월 20일자 1면 1단 논설 번역문[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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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역사를 알아야 대한민국 국민이 될 자격이 있다.

중국과 일본은 한국에게 어떤 나라인가?

 조선시대 부터  중국과 일본과 우리나라와의 

1. 지배기간 비율이 
중국 503년 : 일본 36년이다.

우리에게 일본이 더 큰 원수국가인가? 
중국이 더 큰 원수국가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두말 할 것도 없이  
중국 503년 : 일본 36년으로 중국이 훨씬 더 큰 원수다. 

2. 중국은 한국에겐 천년 원수다.

3. 일본은 한국에 부스러기라도 남겼지만, (부스러기가 아니라 근대산업화 기반과 기술, 재산을 남겼다)
      
암튼 일본은 부스러기라도 남겼지만, 중국은 침탈만 해갔다!! 

■ 일본에 위안부가 있었다면 중국은 50만에 이르는 '환향녀'가 있다!

환향녀 뿐인가?
병자호란이 끝나면서 당시 조선 인구의 10%를 청으로 끌고 갔다.

걸핏하면 우리의 처녀들을 중국놈들이 공물로 데려가지 않았는가?

중국은 사실상 1392년 이성계의 조선건국에서 부터 1895년 시모노세끼 조약때까지 503년간 조선을 중국의 속국으로 지배했던 것이 사실이다. 

조선왕조는, 이성계가 나라이름도 명나라에 조선과 회령 중에서 정해달라고 요청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성계의 쿠데타는 잘못된 것이고 망국적 치적이므로, 
최영 장군의 명나라 정벌계획이 맞았는지도 모른다.

1407년 태종은 중국을 숭모한다는 모화루(모화관)을 세우고, 
영은문의 전신 홍살문도 세워 중국 사신을 영접해 오다가, 
중국의 요구로 1539년 중종 때 

■ 중국의 은혜를 영접한다는 '영은문'으로 이름까지 바꿔 세운 것이다. 

■ 시진핑이 트럼프에게, 
 "한반도는 중국의 일부였다"고 말해 우리를 분노케 했지만,  

사실 그들은 500년이상 그렇게 생각해왔다. 
조선은 무력을 사실상 포기하고 중국 밑으로 스스로 기어들어간 나라였다. 

치욕적이게도 중국 황제가 승인해야 왕이 될 수 있었다.  
매년 바쳐야 하는 온갖 공물에 백성들의 진이 빠졌다. 

■ 심지어 중국 사신의 서열이 조선 왕보다 높았다. 
 사신이 한 번 뜨면 조선의 산천초목이 벌벌 떨었다. 

중국 조정에 뇌물을 바치고, 사신에 임명된 者들이 조선에 와 본전의 몇 배를 뽑았다. 
중국 사신이 오면 조선 왕이 나가 영접하던 곳이 영은문이었다. 

중국 황제의 은혜를 맞이 한다는 것이다.

■ 1894년 발발한 일본과 청 전쟁에서 패한 중국이 1895년 4월 17일 일본 시모노세끼에서  
일본 이등박문과 중국(청) 이홍장 간의 조약으로 

"청국은 조선이 완전한 자주 독립국임을 인정한다" 라고 선언함으로써

■ 조선은 중국의 503년 지배에서 독립할 수가 있었기에 일본에게 오히려 고맙다고 해야될 것이다.

■ 그리하여 서대문 모화관을 독립관으로 바꾸고

■ 영은문 자리에 중국으로 부터의 독립을 기념하기 위해 독립문을 세운 것이다. 

독립이라 하면 일본으로 부터 독립만 아는데, 
서대문에 있는 독립관과 독립문은 36년간 지배해온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503년 동안 지배받던 중국의 압제에서 벗어나게 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1897년 서재필 박사가 주축이 돼 만든 것이다.

그런데 중국 공산당을 존경하고, 
반일을 내세우는 주사파 운동권이 권력을 잡으면서 중국이 우리에게 준 막대한 피해는 묻히고 잊혀졌다. 

1950년 6·25 남침을 김일성과 모의하고 적극지원하여 우리국민 수십만명을 살상한 

■ 마오쩌둥을 존경한다는 정신나간 전직 대통령까지 등장했다.

■독립문에 대한 무식과 오해가 희극이 돼버린 사례가

■ 문재인의 2018년 3·1절 기념식이다.

대통령이 3·1절 기념행사를 마치고 독립문 앞에서 만세를 불렀다니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없다.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우리 국민들의 비극이다.
대통령이란 자가 독립문이 일본 독립문으로 알고있으니 개가 웃을 일이다.

■ 우리를 중국으로부터 
독립시킨 것은 일본이고, 

■ 우리를 일본으로부터 
독립시킨 것은 미국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에겐 8.15 광복절뿐 아니라 

1895년 4월 17일도 광복절임으로 둘 다 기념해야 될 것이다. 

■ 중국과의 관계는 오래된 역사이니 잊자고 한다면, 

■ 일본도 이젠 잊고, 극일을 위한 발판으로 삼아야 한다. 

과거 좌파 정권의 자칭 지도자라 했던 자들의 경우, 
무식하면 용감은 하겠지만,
 
국민과 국가를 이끌 지도자 될 자격이 훨씬 뒤떨어졌던 것이 이제 확실하게 증명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은 우리 역사 이래 침략하고, 빼앗아 가기만 했다!

무식하고, 사악하고,
멍청하고, 찌질한, 바보들!

그래서
공산 사회주의 선전선동에
현혹되어 동조하고 부화뇌동하는 
일부 좌경세력들!

한국이 중국으로부터 
해방된 것은 일본이 시켜주었고,

일본으로 부터의 해방은 미국이 시켜주었음을 알고

우리 나라 현재의 안전과 후손들의 안녕을 위하여 이런 점들을 잘 분별해야 할 것으로 봅니다.

박 광 수 (경남매일 주필)

♡ 글이 너무 좋아 1200 여명의 톡친들에게 뿌리오니 무한 퍼날라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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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세 英雄]

우리나라 무역흑자가 일본을 훌쩍 넘었다.

우리의 기억 속에서 일본은 감히 넘보지 못할 무역흑자 대국이었다.

금융위기 후의 특수한 사정 탓이겠지만, 식민지였던 우리가 이 흑자대국을 한 번이라도 앞서는 일은 우리 생애에 보지 못할 줄 알았다.

런던에서 팔리는 전자제품의 30%가 삼성전자 제품이고, 지금 미국에서 가장 성장하는 자동차 회사는 현대자동차다.

모두 일본 회사들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다.

대영제국의 저 콧대 높은 수도와 세계자동차 산업의 메카에서 우리가 일본을 위협하게 된 이 일들을 기적이라는 말 외에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한국이 일본보다 앞서 G20 정상회의의 의장국이 된 정도의 기적은 이제 기적 축에 끼기도 어려울 정도다.

개인적으로 너무나 궁금한 것은 우리의 무엇이 이런 기적을 일으켰느냐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임진왜란 이후
300년간 퇴락을 거듭했었다.

무려 300년간 지리멸렬하다가 망했다면, 집안이든, 사회든, 나라든, 회생의 불씨가 완전히 꺼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만 유일하게 정말 쓰레기통에서 장미꽃 피듯이 일어났다.

우리 어딘가에서 소중한 불씨가 꺼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 답 외의
다른 답 하나가 있다면, 

🐝이 땅에서 1910년 바로 그해 2월 12일에 '이병철'이 태어난 것이다

이 아이가 장차 세계적인 전자 왕국을 만들어 어마어마한 국부(國富)를 창출하게 될지 누구도 알지 못했다.

나라가 망한 해에 앞으로 나라를 먹여 살릴 인물이 태어났다는 것은 우리 민족의 미래에 대한 예언과도 같았다.

그로부터 5년 뒤,

🐝1915년 11월 25일 '정주영'이 태어났다.

머슴 같은 아이가 장차 조선(造船) 대국, 자동차대국의 꿈을 이루고, 우리 후손들이 영원히 얘기할 성공 신화를 만들 줄 안 사람은 없었다

두 사람은 장성하기까지 서로 얼굴도, 이름도 몰랐으나 꿈과 의지만은 똑같았다.

📚 필자는 '이병철', '정주영' 두 사람의 업적은'광개토대왕'에 필적한다고 믿는다.

우리 역사에서 위대한 장군들은 거의 전부가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지킨 사람들이다.

밖을 공격해 영토를 넓힌 사람은 '광개토대왕'같은 몇 사람뿐이다.

지금의 세계에서 영토는 시장(市場)이다.

⚘️'이병철'과 ⚘️'정주영'은 지구 땅 끝까지 찾아가 상륙했다.

피를 흘리며 교두보를 확보하고 거기서 적을 치면서 전진해, 우리의 영토로 만들었다.

그렇게 얻은 영토가 5대양과 6대주에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대영제국에 해가 지지 않았던 것과 조금도 다를 것 없이, 지금 대한민국 영토에는 해가 지지 않는다.

얼마 전 만난 한 대기업 회장은 유명하지만,

✔️그는 " '이병철'과 '정주영'의 발톱 새 때만도 못한 수준"이라고 했다.

두말할 필요도 없는 얘기다.

⚘️"광개토대왕"과 같은 영웅은 수백 년에 한 명씩 태어나는 법이다.

✔️"정주영"과 "이병철"은 5년 사이에 태어났다.

이것만도 기적과 같은 역사의 행운이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행운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정주영"이 태어난 지 다시 2년 만인 1917년 11월 14일 

🐝'박정희'가 태어났다.

작고 못생겼던 이 아이가 패배의식에 찌든 나라를 부국강병의 길로 몰아갈 줄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박정희"의 수출주도 성장전략,
중화학공업 육성전략, 외자도입 전략은 결국 모두 성공하고 우리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놓았다.

⚘️"박정희"가 있었기에 ⚘️'이병철'과 ⚘️'정주영'이 있었고,

⚘️"이병철"과 ⚘️"정주영"이 있었기에 ⚘️'박정희'가 위대할 수 있었다.

몇 백 년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영웅들이 한꺼번에 태어나, 절망적 무(無)에서
찬란한 유(有)를 창조했다.

한반도 천지개벽의 이 순간을 살면서,
우리 민족에게 세 사람을 한꺼번에 주신 천지신명께 감사하고 또 감사할 따름이다.

식민지 시절,
'박정희'가 일본군에 들어갔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다

"박정희"가 쌓은 토대 위에서 우리나라는 지금 곳곳에서 일본을 제치고 있다.

이 이상의
극일(克日)이 있는가?

일본과 가장 잘 싸운 사람이 누군가?

⚘️"이병철"과 ⚘️"정주영"의 과오에 대해서도 말들이 있지만, 그들의 업적에 비하면 지엽 말단도 되지 않을 일들이다

📚 이제!
이 세 거인과 함께했던 우리의 위대한 역사에 대해 본격적인 평가가 일어났으면 한다.

⚘️"박정희"는 국립묘지에 묻혔으나, '이병철'과 '정주영'은 그러지 못했다

두 사람은 국민들 마음속의
국립묘지에 묻혀 있다고 생각한다.


24년 1/4분기 국민소득 이 일본을 추월했습니다

이렇게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었더니 국민들을 잘살게 하기는커녕 맨날 반대 데모만 하던 무리들이 국개의원이 되어서는 당파싸움이나 하고ᆢ
국민들은 썩어 빠진 정치인들만 싹 없어지면 더욱 부강한 모습이 보일 텐데 하고 말이다. 








본향(本鄕)



본향(本鄕)


127. 본향( ) 

אֲדָמָה 스트롱번호127
1.

2.

3.

들판

발음 [ ’ădâmâh ]
어원
119에서 유래
구약 성경
225회 사용
  • 1.
    명사, 여성
    • a.
      명사, 여성 흙[통곡하는 사람이 자기 머리에 먼지를 뿌릴 때 사용됨], 삼상4:12.
    • b.
      명사, 여성 들판[경작되는 곳], 창47:19, 시105:35, 사28:24.
    • c.
      명사, 여성 지역, 지방, 창28:15, 사14:2.
    • d.
      명사, 여성 세상, 창4:11.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땅(창1:25, 신4:40, 대하6:25), 흙(창2:7, 왕상7:46, 욥5:6), 토지(창47:18, 19,22,23, 잠 12:11), 세상(신4:10, 삼하14:7), 티끌(삼상4: 12, 느9 :1), 밭(대상27:26), 고향(왕하17:23), 지면(시104:30), 진흙(사45:9), 본향(렘 42:12), 본국(단 11:9), 고국(겔 37:21, 욘4:2).



πατρίς  1. 본향

πατρίς, ίδος, ἡ 스트롱번호3968
1.

조국

2.

고향

발음 [ patris ]
어원
3962에서 유래
  • 1.
    조국, 고국, 요4:44, 히11:14.
  • 2.
    고향, 마13:54, 막6:1, 눅4:23.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고향(마13:54, 눅4:23, 요4:44), 본향(히11:14).




1. [민수기 22:5]
그가 사자를 브올의 아들 발람의 본향 강변 브돌에 보내어 발람을 부르게 하여 가로되 보라 한 민족이 애굽에서 나왔는데 그들이 지면에 덮여서 우리 맞은편에 거하였고

2. [사사기 11:9]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데리고 본향으로 돌아가서 암몬 자손과 싸우게 할 때에 만일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게 붙이시면 내가 과연 너희 머리가 되겠느냐

3. [열왕기상 22:36]
해가 질 즈음에 군중에서 외치는 소리 있어 가로되 각기 성읍으로, 각기 본향으로 하더라

4. [잠언 27:8]
본향을 떠나 유리하는 사람은 보금자리를 떠나 떠도는 새와 같으니라

5. [이사야 13:14]
그들이 쫓긴 노루나 모으는 자 없는 양 같이 각기 동족에게로 돌아가며 본향으로 도망할 것이나

6. [예레미야 42:12]
내가 너희를 긍휼히 여기리니 그로도 너희를 긍휼히 여기게 하여 너희를 너희 본향으로 돌려보내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 너희 본향으로 돌려 보내게 하리라 - 혹자는 본절을 포로 귀환에 관한 약속으로 확대 해석하고자 본서 원문이 포로 기간중에 편집되었음을 암시하는 내용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미 어떤 사람들은 고국을 떠나 망명 생활을 하고 있고 또 이곳의 무리가 애굽으로 도망하려는 시점에 있었기 때문에, 이것은 여호와께서 현재 베들레헴에있는 이들이 그들의 고향으로 평화롭게 돌아가게 하실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편이더 나을 것이다. 아무튼 예레미야는 이스마엘 한 사람으로 인한 죄로 자신들이 처벌받게 되리라고 염려하는 것이 불필요하다는 점을 선언하였다. 여호와께서 느부갓네살의 권세에서 그들을 구원하시고 건지실 것이다. 실제로 느부갓네살이 총독 암살사건으로 인해 보복을 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단지 그는 B.C.582년에 포로를 더 잡아갔을 뿐이다(52:30). 그것이 총독 살해 사건의 보복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다면, 그것은 시기적으로 너무나 늦은 보복이었다. 아마 그것은 다른 소요 사태로 기인될 것일 가능성이 높다(Thompson).


7. [히브리서 11:14]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8. [히브리서 11:15]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9. [히브리서 11:16]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예수를 잘 믿으세요!



한경직목사 / 



예수를 잘 믿는다는 것은?

예수 : 저희 백성을 죄에서 구원 할 자 

-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 것

잘 :  1.  부사  옳고 바르게.
        2.  부사  좋고 훌륭하게.
        3.  부사 익숙하고 능란하게. 

- 예수를 옳고 바르게 믿는 것

믿는다 : 


믿-음
발음

명사
  • 1.
    어떤 사실이나 사람을 믿는 마음.

    믿음을 저버리다.




  • 2.
    종교 일반 초자연적인 절대자, 창조자 및 종교 대상에 대한 신자 자신의 태도로서, 두려워하고 경건히 여기며, 자비ㆍ사랑ㆍ의뢰심을 갖는 일.



  • 믿다 ( 믿는다
    1.  동사 어떤 사실이나 말을 꼭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그렇다고 여기다.
    2. 동사  어떤 사람이나 대상에 의지하며 그것이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여기다. 
    3.동사 절대자나 종교적 이념 따위를 받들고 따르다.

    유의어  / 간주하다. 생각핟. 신뢰하다 


    외줄타기 곡예사에 업혀 나이아가라 건넌 이 남자의 정체

    1824년 프랑스에서 태어난 줄타기 곡예사 찰스 블론딘(Charles Blondin, 1829∼1897)

    그는 까마득히 높은 곳에서 장대 하나에만 의지한 채 밧줄 위에 서서 온갖 위험한 동작들을 해냄으로써 유럽과 미국의 수많은 사람으로부터 열광적인 인기를 얻었다. 
    1859년 6월 30일. 
    그는 나이아가라폭포 위에 로프를 설치하고 또 한 번 세상을 놀라게 한다. 
    높이는 무려 48m. 
    특별 열차를 타고 블론딘의 곡예를 보러 온 수많은 사람들은 40파운드의 막대기로 균형을 잡은 채 한 발 한 발 나이아가라폭포를 건너는 그를 바라보며 숨을 죽인다. 
    드디어 맞은 편에 블론딘이 도착하자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열광하는 관중들의 성원에 보답이라도 하듯 뒤로 걸어서 건너기, 안대를 하고 건너기, 자전거를 타고 건너기 등 다양한 방법으로 나이아가라폭포를 자유자재로 왔다 갔다 한다.

    모든 곡예가 끝날 때쯤 되자 블론딘은 모여 있는 관중들을 향해 소리친다.
     “당신들은 내가 사람을 등에 업고 이 폭포를 건너갈 수 있다고 믿습니까?” 
    그러자 관중들은 “그럼요! 우리는 당신이 사람을 업고도 충분히 건너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라고 외쳤다. 
    그러자 블론딘은 “그럼 내 등에 업혀서 나와 같이 이 폭포를 건너갈 사람 한 분만 앞으로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외친다. 
    하지만 관중들은 이내 침묵 속에 잠겼고 자발적으로 자신의 등에 업힐 사람을 찾던 블론딘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고 만다. 
    아무도 없다고 판단한 블론딘은 관중 가운데 서있는 한 남자에게 “당신은 날 믿습니까?”라고 묻는다. 
    그 남자는 조금도 주저 없이 “난 당신을 믿습니다. 기꺼이 당신 등에 업히겠습니다”라고 말하며 블론딘의 등에 몸을 맡긴다.

    남자를 등에 업은 블론딘은 이제까지보다 훨씬 더 신중하게 로프에 올라가 한 발 한 발 내딛기 시작한다. 
    마치 자신의 등에 업힌 남자가 스스로의 생명을 바쳐 자기를 신뢰했다는 사실을 군중들에게 알려주듯이 그의 얼굴에서는 강 건너편에 반드시 도착하고야 말겠다는 강한 의지가 선명했다. 
    마침내 블론딘은 나이아가라폭포를 건너는 데 성공했고 이를 숨죽이고 지켜보던 관중들은 환호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이들이 몰랐던 것은 블론딘의 등에 업혀 폭포를 건넌 사람은 해리 콜코드(Harry Colcord)였고 그는 블론딘의 매니저였다는 사실이다.

    찰스 블론딘과 그의 등에 업힌 콜코드/출처 런던 박물관 공식 블로그

    블론딘의 스토리에는 ‘신뢰의 본질이 무엇인가?’란 질문에 대한 답이 숨겨져 있다. 
    관중들은 그의 묘기를 봤고 그가 얼마나 줄타기를 잘하는지 두 눈으로 확인했다. 
    그리고 블론딘을 믿는다고 소리쳤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의 등에 업혀 나이아가라폭포를 건너려 하지는 않았다.

    신뢰의 본질은 말이 아니라 행동에 있다. 

    상대방을 믿는다고 이야기하는 것과 부정적인 결과가 발생할 수 있음에도 상대방을 믿고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른 과정이다. 
    말로만 블론딘을 믿는다고 소리쳤던 군중들과 48m 높이의 밧줄 위에서 자신의 목숨을 블론딘에게 맡겼던 콜코드 사이에는 근본적인 믿음에 차이가 있었다. 

    신뢰란 무엇인가?

    신뢰의 사전적인 의미는 ‘굳게 믿고 의지함’이다. 
    여기서 심리적인 갈등이 발생한다. 
    왜냐하면 누군가를 (리더를) 믿는다고 말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쉽지만 이것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은 그 사람의 진정성, 태도, 역량, 경험 등 다양한 요소를 고려해야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누구를 신뢰한다는 행위는 이 사람과의 관계로 인해 나 스스로를 취약한(vulnerable) 상황으로 몰아 넣는다는 사실을 내포한다. 
    내가 신뢰하는 사람이라면 상황이나 의사결정에 대해 내가 100% 통제권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나의 이해관계(혹은 내가 속한 단체의 이해관계)를 증진시킬 수 있는 방향으로 행동하고 결정할 것이라는 믿음이 담겨 있다.

    마찬가지로 부하가 리더를 신뢰한다는 것은 리더에게 모든 걸 맡기고 스스로를 취약한 상태로 만들어도 그 리더가 나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기회주의적인 행동을 통해 개인의 이익을 취하려 하지 않으리라는 기대가 담겨 있다. 
    그래서 ‘신뢰란 리더십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이다’라고 많은 리더십 학자들이 단언한다. 
    결국 신뢰란 효과적인 리더십의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이자 가장 중요한 결과라고 이야기해도 과언이 아니다.  

    좋은 조직은 리더에 대한 신뢰를 기반으로 한다.

    부하의 자발적 추종을 불러일으키는 데 가장 중요한 개념인 신뢰는 리더십에서 지난 수십 년간 가장 활발히 연구됐던 대상이기도 하다. 
    수년 전에 진행된 연구에 따르면 리더가 아무리 멋진 비전을 이야기해도 리더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가 없으면 부하들은 리더의 비전에 몰입하지 않게 된다는 결과가 있다.

    그리고 부하들이 리더에 대한 신뢰가 없으면 조직의 성공을 위해 남을 돕는 행동을 하거나 자신을 희생하는 일을 하지 않게 된다는 결과도 있다. 
    수백 명의 리더와 수천 명의 부하들을 인터뷰한 리더십의 석학인 쿠제스(James Kouzes)포스너(Barry Posner) <리더십 챌린지(Leadership Challenge)>란 책에서 리더십의 가장 중요한 다섯 가지 법칙

    1. 모델을 제시하라
    2. 공통의 비전을 고취시켜라
    3. 틀에 박힌 과정에 도전하라
    4. 사람들이 행동하게 하라
    5. 사기를 높여주라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가능케 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으로 부하들의 리더에 대한 신뢰(credibility)를 강조한다. 
    다시 말하면 리더가 아무리 미래에 대한 방향을 잘 제시하고 공통의 비전을 고취시키려 해도 부하들의 믿음이 없다면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일하기 좋은 기업(Great Place to Work)>을 <포천>과 함께 선정해온 미국의 GPTW Institute도 일하기 좋은 기업의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직원들이 가지고 있는 조직의 리더들에 대한 신뢰다’라고 결론 내린다.


               -     - - iStock

    독일 뤼벡 교회의 낡은 벽에 새겨진 시

    독일 뤼벡교회의 아주 낡은 벽에 있는 돌 판에는 작자 미상의 시(詩) 한 수가 새겨져 있다.

    ‘주는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라는 제목의 그 시는 다음과 같다.

    ‘너희는 나를 주라 부르면서 따르지 않고,

    너희는 나를 빛이라 부르면서 우러러 보지 않고,

    너희는 나를 길이라 부르면서 따라 걷지 않고,

    너희는 나를 삶이라 부르면서 의지하지 않고,

    너희는 나를 슬기라 부르면서 배우지 않고,

    너희는 나를 깨끗하다 부르면서 사랑하지 않고,

    너희는 나를 부하다 부르면서 내게 구하지 않고,

    너희는 나를 어질다고 부르면서 오지 않고,

    너희는 나를 존귀하다 부르면서 섬기지 않고,

    너희는 나를 강하다 부르면서 존경하지 않고,

    너희는 나를 의롭다 하면서 두려워 하지 않으니,

    그런즉 너희를 꾸짖을 때에 나를 탓하지 말라’





    첫째, 예수를 잘 믿는다는 것

    신앙고백의 내용에 따라
    1.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2.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3. 다시 살아나셔서
    4.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다
    5.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신다.

    둘째, 세상에서 이기는 것 

    크리스천은 ‘교인’이 아니라 ‘이기는 자’가 돼야 한다. 
    요한계시록 2-3장에 나오는 ‘예수님이 교회들에게 쓴 편지’를 보면, 교인들을 이기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로 구분돼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오직 이기는 자들에게만 지옥 형벌을 피하고 천국을 상속으로 받을 수 있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이긴다’는 것은 세상을 이기는 것, 즉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이기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말로 하면 죄를 이기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크리스천이 죄를 이기고 ‘이기는 자’가 될 수 있을까.

    요한일서 5:4-5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평생 거룩을 강조했던 위대한 설교자 찰스 피니는 ‘성결의 비밀’이라는 책에서 “그리스도인이 성결하기 위해서는 믿음밖에 없다는 대답 이외의 모든 대답은 율법적인 것이다. 

    가장 중요하고도 근본적인 믿음의 비밀을 깨닫지 못한 사람이라면 아무리 의롭게 살려고 수고하고 애씀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순종을 하려고 해도 그것은 불가능하며 아주 잘못되고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성경이 요구하는 믿음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많은 설교자들이 주일마다 믿으라고 설교하지만 정작 ‘믿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모른다는 것. 

    그럼 진짜로 믿는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주 예수를 믿으라
    예수님이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시고, 우리 모든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뒤 사흘 만에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셨고, 하늘로 올라가셨는데 마지막 날 다시 오실 것이란 것을 믿는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모두 성경이 요구하는 참 믿음을 갖고 있는 것일까. 
    믿음이 여기에서 멈추면 야고보가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고 경고한 바로 그 믿음이 된다. 
    그런 믿음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강조한다.

    그러면 대체 어떻게 믿으라는 것일까. 
    어떻게 믿는 것이 성경이 요구하는 참 믿음일까. 

    에스겔 36:37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요한복음 4:1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약속의 주제로 삼으시는 것은 반드시 성도들의 기도의 주제가 되어야 한다’는 조나단 에드워드의 주장처럼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새 언약”이라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지식이 아니다. 더 큰 믿음이다. 로이드 존즈는 ‘회심이란 여러분이 전심으로, 그리고 믿는 마음으로 기대하고 그것을 위해 기도할 때에만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간절히 기도할 뿐 아니라 믿음으로 기도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로마서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하나님을 믿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믿는 것은 가장 단순하고 쉬운 일”이라며 “만약 우리에게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인 마귀의 말을 믿으라고 했다면 믿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다. 또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의 말을 믿으라고 했어도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말씀을 믿으라고 하신다”고 덧붙였다.

    삼중사역(마태복음 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1.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2.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3.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세 가지 사역을 말한다. 


    ‘종교와 믿음’에 대한 사전적 정의(定義) 

    “종교란 신이나 절대적인 힘을 통하여 인간의 고민을 해결하고 삶의 근본 목적을 찾는 문화 체계이다.”

    “믿음이란 초자연적인 절대자, 창조자 및 종교 대상에 대한 신자 자신의 태도로서, 두려워하고 경건히 여기며, 자비·사랑·의뢰심을 갖는 일이다(국어사전).”

    이런 정의들은 기독교의 ‘예수 신앙’과 공유되는 점이 별로 없다. 
    만일 이런 사전적 의미의 종교 관념으로 기독교에 접근했다면 실망하고 돌아갈 것이다.

    ◈ 파산자에게만 유효한 예수 신앙

    ‘예수 신앙’은 현재적 삶을 긍정하는 기반위에서 ‘뭔가의 상승’을 도모해 주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제로 베이스(zero base)로 파산시킨 후 구원에로 이끈다. 
    말하자면 먼저 무너뜨리고 그 다음에 세운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중생(regeneration, 重生)’이라 하며, ‘현재에 기반한 개량(improvement, 改良)’을 지향하는 일반 종교와의 근본적인 차이점이다.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 율법(갈 3:24)’의 기능도 바로 그것이다. 
    죄인의 선(善), 가능성을 무(無)로 만들 뿐더러 그의 존재기반을 싹쓸이 부정한다.

    ‘예수 신앙’은 사실 ‘죽음의 직면’이다. 
    구체적으로 한 번 해부해 보자. “범죄한 그 영혼은 죽으리라(겔 18:20)”고 한 율법에 의해 인간은 한 번 죽음을 선고받고, 그 후 “죄삯 사망(롬 6:23)”을 지불하지 못해 또 한 번 ‘사망(저주)’를 선고받는다(롬 3:19). 
    그리고 심판에서 벗어나기 위해 ‘또 하나의 죽음’인 ‘예수 죽음’을 받아들인다.

    이로 보건대, ‘예수 신앙’은 한 마디로 ‘죽음에서 시작하여 죽음으로 귀결되는’ 죽음 일색(一色)이다. 
    ‘소망’과 ‘생명’을 시사하는 그것의 겉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예수 신앙’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것이 다음 구절이 아닌가 싶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요 6:54)”이다. 
    죄로 죽은 자가 ‘예수 죽음’을 받아들여 생명을 얻는다는 뜻이다.

    반면 자기가 죄로 죽었음을 인정하지 않고 기왕의 자기 삶을 긍정하는 기반 하에서 ‘자력갱생(自力更生)하려는 자’가 있다. 
    이런 사람을 성경은 ‘율법 아래 있는 자(갈 4:21)’혹은, ‘율법주의자’라고 하며, 그에게는 ‘예수 죽음’이 불필요하고 나아가 구원도 없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0).”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 5:4).”

    ‘예수 믿으면 구원 받는다’는 말은 차력사(借力士)가 타력(他力)을 빌어 괴력을 행사하듯, 죄인이 ‘예수의 전능’을 빌어 자기의 구원을 도모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의 정의(定義)는 ‘죄로 죽은 자가 예수 죽음과 연합해 구원 얻는다’는 뜻이다.

    ‘소망’이라는 말도 오해가 없어야겠다. 
    그것은 자기에게 약간의 가능성이 남아있다고 생각하는 ‘어정쩡한 절망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율법의 정죄로 완전히 사망선고를 받은 자들을 위한 것이다. 
    소망이신 예수는 자기에 대해 완전히 절망한 자 곧, 파산자(bankrupt)의 눈에만 들어온다(갈 4:23).

    ◈삼위일체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예수 신앙

    죄로 죽은 자가 ‘예수 신앙’으로 구원받으면 ‘삼위일체 하나님’이 보인다. 
    ‘구원’으로 감겼던 영안이 열리기 때문이다. 
    실제로 성경은 ‘구원’을 ‘하나님 아는 것’, ‘심판’을 ‘하나님을 모르는 것’과 동일시 했다.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21)”.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살후 1:8).”

    ‘예수 신앙’은 단지 예수 신앙으로 그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성자(聖子) 예수는 ‘사람 되어 오신 하나님(요 1:14)’이시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는 하나님으로 오신 것(골 1:15)’이다.

    따라서 성자에게로 가면 그에게로 간 것으로 그치지 않고 일체(一體)이신 성부(聖父)에게로도 간 것이다. 그리고 일체이신 ‘성자’와 ‘성부’께로 가면, 두 위(位)로부터 나오시는 ‘성령(聖靈)’께로도 가게 되니 결과적으로 삼위일체(trinitas)께로 간 것이다.

    그리고 ‘삼위(三位)의 현현(顯現)’의 시작과 중심엔 언제나 ‘성자’가 계신다. 이는 ‘삼위일체’께선 ‘성자’를 통해서만 우리에게 현현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자’가 있는 곳에 ‘삼위일체’도 계시고, ‘성자’가 없는 곳엔 ‘삼위일체’도 없다. 성자를 부인하는 유대교도들(Judeas)이나 단일신론자들(monarchians)에게 ‘기독교적 의미의 하나님’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성자’가 계신 곳엔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출(procession, 發出)하신 ‘성령’도 계시고, 그가(성령이) ‘성자’와 ‘성부’를 연합시키시고 ‘신자(信者)’에게 두 위(位)를 일체적으로 계시하신다.

    이렇게 ‘성부·성자로부터 나오시는 성령’은 ‘성자’가 부정될 때 그것(성령)의 발출 기반이 없어지니 당연히 성령도 부정된다.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는 자유주의자들(liberal theology)이 일컫는 ‘성령’은 단지 ‘기괴한 악령(惡靈)’일 뿐 ‘삼위일체 성령’이 아니시다. 
    성령(?)을 부르는 그들의 의식이 초혼제(招魂祭)나 강신술(降神術)과 방불한 것은 당연하다.

    성령은 그들처럼 특별한 제의(祭儀)나 의식(儀式)을 통해 현현하는 것이 아니라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곳에 현현하신다.

    그리고 우리의 ‘예수(성자) 신앙’역시 삼위일체적(三位一體的)이다. 
    우리가 ‘성자 신앙’, ‘성부 신앙’, ‘성령 신앙’을 따로 갖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예컨대, ‘성자 신앙’은 ‘성부와 일체이신 성자를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부 신앙’은 ‘성자와 일체이신 성부를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령 신앙’은 ‘성령과 일체이신 성부와 성자로 말미암아’ 믿는 ‘삼위일체적인 신앙’이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는 말씀 역시 이런 맥락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성자(예수) 신앙’과 ‘하나님 신앙’을 따로 가지라는 말이 아닌 ‘성부와 일체이신 성자를 성령으로 말미암아 믿으라’는 뜻이다.

    이제까지의 진술을 요약하면, ‘자기에게 절망하지 않는 자는 예수신앙을 가질 수 없고, 예수신앙을 못 가지면 삼위일체 신앙도 못 갖는다’이다.

    이는 높고 위대한 삼위일체께서 가장 낮고 비천한 자에게 현현하신다는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한다.

    “지존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 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사 57:15).”

    예수님 당시 많은 유대인들이 ‘삼위일체’ 신앙을 가지지 못한 이유 역시 오직 한 가지 때문이다. 자신들의 가능성에 도취되어 스스로에게 절망하지 않아서이다.



















    설교를 위한 제안


    켄트 휴즈(R. Kent Hughes)

    미국 일리노이주 휘튼에 있는 대학 교회의 담임 목사였다. 
    많은 책의 저자이자 편집자였으며, 여러 매체에 글들을 기고했다. 
    탈봇 신학교에서 목회학 석사 학위, 트리니티 신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강의했다. 
    엮은 책으로 『PTW 시편1』(부흥과개혁사), 저서로 『그리스도인 가족의 경건 훈련』『성공 신드롬에서 자유로운 목회』(이상 디모데, 공저), 『구별하라』(사랑플러스) 등이 있다.


    『성공신드롬에서 자유로운 목회』는 두 저자의 뼈아픈 경험을 통해 목회에 있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성공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러한 진리를 깨닫게 되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성장하지 않는 작은 교회일지라도, 세상이 실패라고 부를 만한 작은 것일지라도 그 속에 숨겨진 성공의 참 의미를 발견하도록 인도하고 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본질적인 성공의 그림을 그리고, 열매를 거두실 하나님께 사역의 결과를 온전히 맡기며, 자신의 삶과 사역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공에 굳건히 뿌리내리도록 이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설교의 특징

    1. 로고스
    무엇을 말 하느냐?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를 알고 있다.)

    2. 에토스
    누가 말을 하느냐?

    3. 파토스
    어떻게 말을 하느냐? 


    로고스, 에토스, 파토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에서 제시된 설득의 세 가지 요소로, 각각 논리, 신뢰성, 감정적 호소를 의미합니다.

    1. 로고스 (Logos)

    • 2개의 자료

    2. 에토스 (Ethos)

    • 2개의 자료

    3. 파토스 (Pathos)


    이 세 가지 요소는 효과적인 의사소통과 설득의 핵심으로, 서로 보완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로고스는 논리적 근거를 제공하고, 에토스는 신뢰성을 구축하며, 파토스는 감정적 연결을 통해 청중을 설득하는 데 기여합니다. 
    이러한 요소들을 적절히 조합하여 사용하면 더욱 강력한 설득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에토스, 파토스, 로고스

    그가 《수사학Ars Rhetorica》에서 강조한 설득의 3대 요소는 에토스Ethos(인품·인격), 파토스Pathos(감성), 로고스Logos(이성)다. 

    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에토스다. 화자話者 아무리 말을 잘한들 화자가 전하는 메시지의 신뢰성이 떨어지면 아무도 믿지 않는다. 
    오히려 거부감이 든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화자의 인격이고 신뢰감이다. 에토스가 ‘윤리학ethics’의 어원이 된 이유이기도 하다. 그다음은 파토스다. 청중의 감정이나 욕구에 호소해 마음을 움직이는 설득 수단이다. 먼저 청중의 심리적 상태나 욕구 등을 고려해 설득해야 한다는 얘기다. 영어로는 ‘페이소pathos’다. 파토스가 오늘에 와서 일시적인 감정적 흥분 외에 무엇에 대한 지속적인 정열과 정념 등의 뜻도 갖게 됐지만, 문자 자체로는 ‘고통’이라는 의미이며 ‘병病’을 나타내는 ‘패스path’의 어원이기도 하다.

    에토스와 파토스를 잘 이용한 대표적 인물은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다. 그는 나치 정권의 선전 장관이었던 파울 괴벨스Paul Joseph Goebbels를 등에 업고 독일인의 전폭적인 신뢰를 이끌어냈다. 괴벨스는 예술과 뉴미디어를 통해 독일 대중이 히틀러를 사랑하게 만들었고, 독일 대중이 스스로 나치가 되어 전쟁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게 만들었다. 그는 최후까지 히틀러에게 충성했으며, 히틀러가 자살한 다음 날 총리 관저 대피호에서 부인과 함께 자살했다. 히틀러 스스로도 명연설가였다. 어떤 집회에서나 청중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했다. 본능적으로 이들의 동경과 욕구를 파악해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끌어냈다. 그 결과 청중은 광기에 가까운 충성심을 보인다. “지성은 2류, 기질은 1류”라고 평가받던 4선을 하여 12년간 집권한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Roosevelt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이유 역시 친근감으로 무장한 그의 감성 능력 덕분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에토스와 파토스에 이어 필요한 요소가 로고스다.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설득하는 방법이다. 객관에 바탕을 두고 있어야 한다. 로고스가 ‘논리학logic’과 학문을 의미하는 ‘로지logy’의 어원이 된 것도 그래서다. 병을 연구하는 학문인 ‘병리학pathology’은 병을 의미하는 파토스와 학문을 의미하는 로고스가 합쳐진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로고스가 파토스를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입증된 사실보다 믿고 싶어 하는 사실에 더 이끌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을 설득함에 있어 그 중요성을 에토스 60, 파토스 30, 로고스 10의 비중으로 봤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로 대표되는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의 게티즈버그 연설이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로 유명한 마틴 루서 킹Martin Luther King Jr.목사의 연설이 지금도 회자되는 것은 에토스, 파토스, 로고스를 잘 활용해 청중의 감동을 이끌어내고 뇌리에 남게 했기 때문이다.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설득의 수단으로 3가지를 이야기 하고 있는데 에토스(ethos), 파토스(pathos), 로고스(logos)다

    에토스(60%): 진정성,신뢰성,품성이나 품격에서 나오는 인간적 신뢰감→인격

    파토스(30%): 공감력,감성적 호소력 →감성

    로고스(10%): 메세지,논리적 구속력 →이성

    에토스는 화자의 품성에서 풍기는 진정성이나 화자가 전하는 메시지의 신뢰성, 즉 화자의 인격과 품격에 해당하고, 파토스는 청중의 가슴을 파고드는 정서적인 호소와 공감력을 뜻한다. 로고스는 객관적 사실이나 논리적 근거를 갖고 화자의 주장을 뒷받침함으로써 청자로 하여금 믿음을 갖게 만드는 설명력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로고스에 치중하지만 사실 청중으로 하여금 그 메시지를 잘 받아드리게 하는 것은 에토스다. 에토스는 일관되고 지속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어 감정 상태에 따라 수시로 변하는 변덕스러운 파토스와 구분된다. 파토스는 로고스와 상대되는 말로, 정념(情念), 충동, 정열 등으로 이해되며 흔히 감성을 지칭한다. 이에 반해서 로고스는 논리적 근거를 활용해 객관적으로 설명하는 이성을 의미한다

    (1)에토스(Ethos)

    - 성격·관습(慣習)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비롯된 말

    - 예술의 감성적 요소인 파토스(pathos)에 대립되는 개념

    - 사람에게 도덕적 감정을 갖게 하는 보편적인 도덕적·이성적 요소, 윤리규범

    - 민족·사회집단 속에 널리 침투한 윤리적 분위기

    - 개인의 주관적인 도덕의식으로 양심과는 구별되고

    - 윤리규범적인 면에서 단순한 사회풍속과도 다른 것임

    (2) 파토스 (Pathos)

    - 페이소스(Pathos)는 "연민을 자아내는 힘, 측은지심"

    - 원래의 그리스어로는 외부로부터의 사물에 의해 수동적으로 흔들리게 된

    - 일시적인 쾌고(快苦)의 감정을 수반하는 감정적 흥분·격정을 뜻함.

    - 이지적·로고스적이라는 것의 반대의 개념

    - 오늘에 와서는 일시적인 감정적 흥분(연민을 자아내는 힘)

    - 잔잔한 감동, 무엇인가에 대한 지속적인 정열, 정념, 욕정도 의미

    - 고통, 깊은 감정의 뜻에서 유래된 애수 · 애감(哀感)

    - 문학에서 이것을 받아들이는 자에게 연민 · 동정 · 슬픔의 정감을 느끼게 하는 것을 일컬음.

    - 엄밀히 말하면 비극이 불러일으키는 아픔과 관련된 것이지만

    - 흔히 비극적 주인공의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비운에 대한 동정적인 의미로 사용됨

    - 이와 같은 감정적 요소에 대해서 도덕적, 이성적 마음가짐이라든지

    - 어느 민족 · 사회 · 시대의 정신을 페이소스라고도 함

    - 사전적 어의로는 동정과 연민의 감정, 또는 애상감(哀傷感), 비애감의 뜻을 가지는 그리스어

    - 특정한 시대 · 지역 · 집단을 지배하는 이념적 원칙이나

    - 도덕적 규범을 지칭하는 에토스(ethos)와 대립하는 말이라는 사실을 통해

    - 파토스가 가지는 내포는 좀 더 확연하게 드러남

    그러나 ‘정서적인 호소력’이라고 규정할 때 이 말이 지니는 예술적 · 문화적 현상과의 관련성이 가장 분명하게 밝혀지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문학 작품이나 문학적 표현에 대해 독자가 ‘페이소스가 있다’, ‘페이소스가 강렬하다’라고 반응하는 것은 그 문학 작품이나 문학적 표현이 정서적 호소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경우이다.

    다만 파토스 또는 페이소스를 유발하는 요소가 무엇인지는 한두 마디로 규정하기 어렵다.

    빅토리아조의 작가들은 지나칠 정도로 페이소스를 이용하였다고 말하여지며, 찰스 디킨스나 워즈워스가 그 예로 꼽힌다.

    브룩스와 워런은 이들의 작품에 나타나는 페이소스적 요소가 고전극의 비극적 자질들과 구별되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즉 페이소스의 효과는 허약한 인물이 고통을 겪는 장면에서 발생하는 반면, 비극적 효과는 고통을 체험하는 사람이 고통을 유발시키는 그의 환경 및 적대 세력과 대항해 맞싸우고 적극적으로 투쟁해 나갈 만한 힘을 갖추고 있는 경우에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에 의하면 페이소스를 불러일으키는 자질들과 비극적인 자질들은 서로 구별된다.

    그러나 전혀 다른 견해도 제기된다. 노드롭 프라이는 그가 구분하고 있는 네 개의 산문 장르의 기초적이고 원형적인 주제를 제시하면서 페이소스가 비극 장르의 원형적 주제가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이럴 때의 ‘비극’은 아리스토텔레스적 장르 개념에 의한 비극과 그 의미가 다르다. 《비평의 해부》를 참조하라).

    프라이가 제시하는 비극의 전형적인 인물은 대개 여성 인물이다. ‘이 인물들은 어떻게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무력하고 가련한 모습을 보여주는’ 탄원자들이다. 이러한 인물은 애처롭기만 하며, 그리하여 페이소스의 효과를 강하게 유발시킨다.

    그 근원이 되고 있는 것은 한 개인의 집단으로부터의 소외이므로, 우리가 느끼고 있는 공포 가운데 가장 심오한 공포를 우리의 마음속에 몰고 온다. 이 공포는 비교적 기분이 좋고 또 서글서글한 지옥의 유령보다 훨씬 더 깊은 공포인 것이다.

    탄원자 타입의 등장인물은 ‘연민과 공포의 감정’을 가능한 한도까지 가장 강렬하게 불러일으켜준다. 따라서 탄원자의 요구를 저지함으로써 이와 관계되는 모든 자에게 닥치는 무서운 결과가 그리스 신화의 중심 주제라고 프라이는 말한다.

    탄원자 타입의 인물의 예로 제시되는 것은 《햄릿》의 오필리아, 트로이 함락 후의 트로이 여성들, 오이디푸스 왕 등인데 이들은 사랑으로부터 버림받고 죽음에 직면했거나 능욕에 위협당하는 약한 여성이 아니면 높은 위치에서 전락한 신분이라는 운명적 위기의 측면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프라이의 개념에서 페이소스에서는 공포와 위기적 요소라는 성분이 강조되고 있다. 어떤 관점으로 이 용어를 해석하든 간에 가장 중요한 사실은, 작가가 자신의 스토리 내부에서 페이소스적 요소를 표현하고 그 효과를 기대할 때는 그것들이 타당하게 나타나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점이다.

    등장인물과 주어진 상황 속에 페이소스를 받쳐줄 만한 합리적 근거가 없을 때에는 그 요소들이 페이소스적 효과를 자아내기보다는 ‘감상적’이 되기 쉽다.

    (3) 로고스(logos)

    - 논리적 이성

    - 판단을 인도하는 기준

    - 그리스 철학을 일관하는 중요한 개념

    - 헤라클레이토스스토아 철학에서는 이법(理法)이란 뜻으로 쓰였음

    ’행동(Action)’ ‘공감(Sympathy)’ ‘시간(Time)’

    1) ’행동(Action)’- 에토스

    커뮤니케이션 대상에게 진정성을 알리기 위해서는 우선 행동이 필요하다. 움직여야 변화하듯 진심을 알리기 위한 실천이 첫번째다. 기업을 예로 들면 ‘소비자가 믿고 사용할 수 있는 제품을 만드는 것’, ‘고객이 감동 할 수 있는 서비스 제공하는 것’, ‘실수나 잘못에 대해 빠르게 인정하고 고치는 것’ 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커뮤니케이션의 총체라 할 수 있는 사랑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진실된 마음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표현하고 나타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법이다. 행동으로 옮겨보자.

    2) ‘공감(Sympathy)’- 파토스

    행동하고 표현할 때 있어 공감적 교감은 필수다. 모두가 이해하고 감동받을 수 있는 가치일 때 진정성은 받아들여 진다. 기업의 CSR(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 )과 기부활동을 생각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기업이 사회공헌 활동을 하고 제단을 설립하여 수천억원을 기부한다 하더라도 대중들은 그 기업의 진정성을 의심하기 마련이다. 사람들의 마음에 와닿지 않는 행위, 공감가지 않는 행동으로는 진정성을 어필하기 힘들다. 유한킴벌리의 ‘우리강산 푸르게푸르게’ 캠페인이 성공한 CSR의 대표적 사례로 뽑히는 이유가 있다. ‘우리가 훼손한 숲이니 우리가 책임지고 되돌려 놓겠다.’는 공감가고 심플한 메시지 때문이다. 제품을 만들때도 마찬가지다. 제품 구성, 디자인, 가격은 모두 커뮤니케이션이다. 소비자가 원하는 제품이 바로 공감가는 제품이고 이러한 제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여야 한다. 델의 아이디어 스톰을 생각해보면 ‘공감’적 요소를 쉽게 이해 할 수 있다. 하고 싶은 이야기, 멋있는 이야기가 아닌 공감가는 소통을 진심으로 해보자.

    3) ‘시간(Time)’

    공감가는 행동으로 호감을 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진정성 있는 개체로 인식되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바로 시간적 요소 때문이다. 반쪽의 진심은 허위보다 무섭다는 말이 있다. 한두번의 얕은 진심은 배신감을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 진정성 있는 기업 혹은 사람을 생각해 보면 늘 한결같음을 느낄 수 있다. 진정한 마음에는 신뢰와 믿음이 따른다. 신뢰와 믿음을 얻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며, 그 노력을 증명해 냈을 때 진정성을 인정 받을 수 있다. ‘열 번찍어 안넘어 가는 나무 없다.’ 는 말 이 있다. 진심을 전달하는데 있어 시간적 요소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말이다.


    설득의 세가지 요소(에토스, 파토스, 로고스) 차이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연구된 설득의 세가지 요소로 에토스와 파토스 로고스는 각각 이성 감정 카리스마 등의 매력으로 예술적 방법론이다.

    설득의 연구 요소

    설득 연구의 두가지 접근법으로 질적연구와 양적연구가 있다. 질적연구는 인문학적 연구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에서 시작되었다. 수량화 및 객관화 방식을 거부하고 인문학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이다. 양적연구는 통계 및 SMCRE모델 같은 것이다. 심리학에서 시작하였고 수량화 객관화 방식을 도입하였다. 사회과학적 접근 방식 및 계량 연구.

    수사학이란?

    고대 그리스 시대 사람들이 자신의 처지를 변론하고 다른 사람들의 동의를 얻기 위해 설득적 기술을 지칭하는 용어. 레토릭 rhetoric.

    `코락스: b.c 470년 수사술이라는 저서 발행(수사학의 효시)

    `소피스트: 대중들을 상대로 수사학 교육(수사학의 대중화)

    `아리스토 텔레스:수사학을 최초로 집대성함 b.c 330년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수사학은 고대 로마시대를 거쳐 중세 근세로 이어짐.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

    비예술적 방법은 실제의 증거물이나 법조문을 그대로 제시한 것이고 예술적 방법은 로고스, 파토스, 에토스의 방법이 있다. 

    로고스

    이성적 호소, 지성에 대한 소구 혹은 인간의 이성적 측면에 대한 호소, 귀납법과 연역법으로 구분.

    귀납법과 연역법

    귀납법-특정한 사례에서 일반적인 결론을 도출하는 결론.

    연역법-이론이나 원칙으로부터 사실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개별적 사례들을 일반화하는 것으로 삼단논법이 대표적. 가추법(귀납법과 연역법 절충)

    파토스

    감정적 호소, 열정에 대한 소구 혹은 인간의 측면에 대한 호소. 이미지 관련.

    감정에 호소하는 8가지 가치 혹은 미덕

    1.정의(justice)-법의 준수, 소유권, 절제와 같은 속성

    2.신중함(prudence)-충고를 주는 방법, 좋은 판단을 보여주는 방법

    3.관대함(generosity)-이타적인 태도

    4.용기(courage)-외부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옳은 것을 행함.

    5.절제(temperance)-자기 억제, 온건함

    6.담대함(magnanimity)-소심하지 않음, 용서하고 잊어버림

    7.장엄함(magnificence)-인간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에 관심

    8. 지혜(wisdom)-훌륭한 판단.

    에토스

    전달자의 공신력. 카리스마에 호소. 특성을 통한 호소. 가장 핵심적이면서 중요한 요소이기도 함 수사학에서....

    발화자의 인격 혹은 특성을 통한 호소. 발화자의 공신력이나 카리스마를 의미함. 발화자의 외모나 제스처. 정직성. 지식. 경험. 평판 등을 포함하는 다차원적 개념.

    에토스의 세가지 속성

    1)실천적 지혜-발화자의 뛰어난 지식이나 경험.

    2)덕:발화자의 탁월한 도덕성.

    3)선의지:발화자의 순수한 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