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를 위한 제안


켄트 휴즈(R. Kent Hughes)

미국 일리노이주 휘튼에 있는 대학 교회의 담임 목사였다. 
많은 책의 저자이자 편집자였으며, 여러 매체에 글들을 기고했다. 
탈봇 신학교에서 목회학 석사 학위, 트리니티 신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강의했다. 
엮은 책으로 『PTW 시편1』(부흥과개혁사), 저서로 『그리스도인 가족의 경건 훈련』『성공 신드롬에서 자유로운 목회』(이상 디모데, 공저), 『구별하라』(사랑플러스) 등이 있다.


『성공신드롬에서 자유로운 목회』는 두 저자의 뼈아픈 경험을 통해 목회에 있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성공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러한 진리를 깨닫게 되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성장하지 않는 작은 교회일지라도, 세상이 실패라고 부를 만한 작은 것일지라도 그 속에 숨겨진 성공의 참 의미를 발견하도록 인도하고 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본질적인 성공의 그림을 그리고, 열매를 거두실 하나님께 사역의 결과를 온전히 맡기며, 자신의 삶과 사역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공에 굳건히 뿌리내리도록 이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설교의 특징

1. 로고스
무엇을 말 하느냐?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를 알고 있다.)

2. 에토스
누가 말을 하느냐?

3. 파토스
어떻게 말을 하느냐? 


로고스, 에토스, 파토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에서 제시된 설득의 세 가지 요소로, 각각 논리, 신뢰성, 감정적 호소를 의미합니다.

1. 로고스 (Logos)

  • 2개의 자료

2. 에토스 (Ethos)

  • 2개의 자료

3. 파토스 (Pathos)


이 세 가지 요소는 효과적인 의사소통과 설득의 핵심으로, 서로 보완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로고스는 논리적 근거를 제공하고, 에토스는 신뢰성을 구축하며, 파토스는 감정적 연결을 통해 청중을 설득하는 데 기여합니다. 
이러한 요소들을 적절히 조합하여 사용하면 더욱 강력한 설득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에토스, 파토스, 로고스

그가 《수사학Ars Rhetorica》에서 강조한 설득의 3대 요소는 에토스Ethos(인품·인격), 파토스Pathos(감성), 로고스Logos(이성)다. 

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에토스다. 화자話者 아무리 말을 잘한들 화자가 전하는 메시지의 신뢰성이 떨어지면 아무도 믿지 않는다. 
오히려 거부감이 든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화자의 인격이고 신뢰감이다. 에토스가 ‘윤리학ethics’의 어원이 된 이유이기도 하다. 그다음은 파토스다. 청중의 감정이나 욕구에 호소해 마음을 움직이는 설득 수단이다. 먼저 청중의 심리적 상태나 욕구 등을 고려해 설득해야 한다는 얘기다. 영어로는 ‘페이소pathos’다. 파토스가 오늘에 와서 일시적인 감정적 흥분 외에 무엇에 대한 지속적인 정열과 정념 등의 뜻도 갖게 됐지만, 문자 자체로는 ‘고통’이라는 의미이며 ‘병病’을 나타내는 ‘패스path’의 어원이기도 하다.

에토스와 파토스를 잘 이용한 대표적 인물은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다. 그는 나치 정권의 선전 장관이었던 파울 괴벨스Paul Joseph Goebbels를 등에 업고 독일인의 전폭적인 신뢰를 이끌어냈다. 괴벨스는 예술과 뉴미디어를 통해 독일 대중이 히틀러를 사랑하게 만들었고, 독일 대중이 스스로 나치가 되어 전쟁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게 만들었다. 그는 최후까지 히틀러에게 충성했으며, 히틀러가 자살한 다음 날 총리 관저 대피호에서 부인과 함께 자살했다. 히틀러 스스로도 명연설가였다. 어떤 집회에서나 청중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했다. 본능적으로 이들의 동경과 욕구를 파악해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끌어냈다. 그 결과 청중은 광기에 가까운 충성심을 보인다. “지성은 2류, 기질은 1류”라고 평가받던 4선을 하여 12년간 집권한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Roosevelt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이유 역시 친근감으로 무장한 그의 감성 능력 덕분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에토스와 파토스에 이어 필요한 요소가 로고스다.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설득하는 방법이다. 객관에 바탕을 두고 있어야 한다. 로고스가 ‘논리학logic’과 학문을 의미하는 ‘로지logy’의 어원이 된 것도 그래서다. 병을 연구하는 학문인 ‘병리학pathology’은 병을 의미하는 파토스와 학문을 의미하는 로고스가 합쳐진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로고스가 파토스를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입증된 사실보다 믿고 싶어 하는 사실에 더 이끌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을 설득함에 있어 그 중요성을 에토스 60, 파토스 30, 로고스 10의 비중으로 봤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로 대표되는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의 게티즈버그 연설이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로 유명한 마틴 루서 킹Martin Luther King Jr.목사의 연설이 지금도 회자되는 것은 에토스, 파토스, 로고스를 잘 활용해 청중의 감동을 이끌어내고 뇌리에 남게 했기 때문이다.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설득의 수단으로 3가지를 이야기 하고 있는데 에토스(ethos), 파토스(pathos), 로고스(logos)다

에토스(60%): 진정성,신뢰성,품성이나 품격에서 나오는 인간적 신뢰감→인격

파토스(30%): 공감력,감성적 호소력 →감성

로고스(10%): 메세지,논리적 구속력 →이성

에토스는 화자의 품성에서 풍기는 진정성이나 화자가 전하는 메시지의 신뢰성, 즉 화자의 인격과 품격에 해당하고, 파토스는 청중의 가슴을 파고드는 정서적인 호소와 공감력을 뜻한다. 로고스는 객관적 사실이나 논리적 근거를 갖고 화자의 주장을 뒷받침함으로써 청자로 하여금 믿음을 갖게 만드는 설명력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로고스에 치중하지만 사실 청중으로 하여금 그 메시지를 잘 받아드리게 하는 것은 에토스다. 에토스는 일관되고 지속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어 감정 상태에 따라 수시로 변하는 변덕스러운 파토스와 구분된다. 파토스는 로고스와 상대되는 말로, 정념(情念), 충동, 정열 등으로 이해되며 흔히 감성을 지칭한다. 이에 반해서 로고스는 논리적 근거를 활용해 객관적으로 설명하는 이성을 의미한다

(1)에토스(Ethos)

- 성격·관습(慣習)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비롯된 말

- 예술의 감성적 요소인 파토스(pathos)에 대립되는 개념

- 사람에게 도덕적 감정을 갖게 하는 보편적인 도덕적·이성적 요소, 윤리규범

- 민족·사회집단 속에 널리 침투한 윤리적 분위기

- 개인의 주관적인 도덕의식으로 양심과는 구별되고

- 윤리규범적인 면에서 단순한 사회풍속과도 다른 것임

(2) 파토스 (Pathos)

- 페이소스(Pathos)는 "연민을 자아내는 힘, 측은지심"

- 원래의 그리스어로는 외부로부터의 사물에 의해 수동적으로 흔들리게 된

- 일시적인 쾌고(快苦)의 감정을 수반하는 감정적 흥분·격정을 뜻함.

- 이지적·로고스적이라는 것의 반대의 개념

- 오늘에 와서는 일시적인 감정적 흥분(연민을 자아내는 힘)

- 잔잔한 감동, 무엇인가에 대한 지속적인 정열, 정념, 욕정도 의미

- 고통, 깊은 감정의 뜻에서 유래된 애수 · 애감(哀感)

- 문학에서 이것을 받아들이는 자에게 연민 · 동정 · 슬픔의 정감을 느끼게 하는 것을 일컬음.

- 엄밀히 말하면 비극이 불러일으키는 아픔과 관련된 것이지만

- 흔히 비극적 주인공의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비운에 대한 동정적인 의미로 사용됨

- 이와 같은 감정적 요소에 대해서 도덕적, 이성적 마음가짐이라든지

- 어느 민족 · 사회 · 시대의 정신을 페이소스라고도 함

- 사전적 어의로는 동정과 연민의 감정, 또는 애상감(哀傷感), 비애감의 뜻을 가지는 그리스어

- 특정한 시대 · 지역 · 집단을 지배하는 이념적 원칙이나

- 도덕적 규범을 지칭하는 에토스(ethos)와 대립하는 말이라는 사실을 통해

- 파토스가 가지는 내포는 좀 더 확연하게 드러남

그러나 ‘정서적인 호소력’이라고 규정할 때 이 말이 지니는 예술적 · 문화적 현상과의 관련성이 가장 분명하게 밝혀지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문학 작품이나 문학적 표현에 대해 독자가 ‘페이소스가 있다’, ‘페이소스가 강렬하다’라고 반응하는 것은 그 문학 작품이나 문학적 표현이 정서적 호소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경우이다.

다만 파토스 또는 페이소스를 유발하는 요소가 무엇인지는 한두 마디로 규정하기 어렵다.

빅토리아조의 작가들은 지나칠 정도로 페이소스를 이용하였다고 말하여지며, 찰스 디킨스나 워즈워스가 그 예로 꼽힌다.

브룩스와 워런은 이들의 작품에 나타나는 페이소스적 요소가 고전극의 비극적 자질들과 구별되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즉 페이소스의 효과는 허약한 인물이 고통을 겪는 장면에서 발생하는 반면, 비극적 효과는 고통을 체험하는 사람이 고통을 유발시키는 그의 환경 및 적대 세력과 대항해 맞싸우고 적극적으로 투쟁해 나갈 만한 힘을 갖추고 있는 경우에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에 의하면 페이소스를 불러일으키는 자질들과 비극적인 자질들은 서로 구별된다.

그러나 전혀 다른 견해도 제기된다. 노드롭 프라이는 그가 구분하고 있는 네 개의 산문 장르의 기초적이고 원형적인 주제를 제시하면서 페이소스가 비극 장르의 원형적 주제가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이럴 때의 ‘비극’은 아리스토텔레스적 장르 개념에 의한 비극과 그 의미가 다르다. 《비평의 해부》를 참조하라).

프라이가 제시하는 비극의 전형적인 인물은 대개 여성 인물이다. ‘이 인물들은 어떻게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무력하고 가련한 모습을 보여주는’ 탄원자들이다. 이러한 인물은 애처롭기만 하며, 그리하여 페이소스의 효과를 강하게 유발시킨다.

그 근원이 되고 있는 것은 한 개인의 집단으로부터의 소외이므로, 우리가 느끼고 있는 공포 가운데 가장 심오한 공포를 우리의 마음속에 몰고 온다. 이 공포는 비교적 기분이 좋고 또 서글서글한 지옥의 유령보다 훨씬 더 깊은 공포인 것이다.

탄원자 타입의 등장인물은 ‘연민과 공포의 감정’을 가능한 한도까지 가장 강렬하게 불러일으켜준다. 따라서 탄원자의 요구를 저지함으로써 이와 관계되는 모든 자에게 닥치는 무서운 결과가 그리스 신화의 중심 주제라고 프라이는 말한다.

탄원자 타입의 인물의 예로 제시되는 것은 《햄릿》의 오필리아, 트로이 함락 후의 트로이 여성들, 오이디푸스 왕 등인데 이들은 사랑으로부터 버림받고 죽음에 직면했거나 능욕에 위협당하는 약한 여성이 아니면 높은 위치에서 전락한 신분이라는 운명적 위기의 측면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프라이의 개념에서 페이소스에서는 공포와 위기적 요소라는 성분이 강조되고 있다. 어떤 관점으로 이 용어를 해석하든 간에 가장 중요한 사실은, 작가가 자신의 스토리 내부에서 페이소스적 요소를 표현하고 그 효과를 기대할 때는 그것들이 타당하게 나타나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점이다.

등장인물과 주어진 상황 속에 페이소스를 받쳐줄 만한 합리적 근거가 없을 때에는 그 요소들이 페이소스적 효과를 자아내기보다는 ‘감상적’이 되기 쉽다.

(3) 로고스(logos)

- 논리적 이성

- 판단을 인도하는 기준

- 그리스 철학을 일관하는 중요한 개념

- 헤라클레이토스스토아 철학에서는 이법(理法)이란 뜻으로 쓰였음

’행동(Action)’ ‘공감(Sympathy)’ ‘시간(Time)’

1) ’행동(Action)’- 에토스

커뮤니케이션 대상에게 진정성을 알리기 위해서는 우선 행동이 필요하다. 움직여야 변화하듯 진심을 알리기 위한 실천이 첫번째다. 기업을 예로 들면 ‘소비자가 믿고 사용할 수 있는 제품을 만드는 것’, ‘고객이 감동 할 수 있는 서비스 제공하는 것’, ‘실수나 잘못에 대해 빠르게 인정하고 고치는 것’ 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커뮤니케이션의 총체라 할 수 있는 사랑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진실된 마음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표현하고 나타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법이다. 행동으로 옮겨보자.

2) ‘공감(Sympathy)’- 파토스

행동하고 표현할 때 있어 공감적 교감은 필수다. 모두가 이해하고 감동받을 수 있는 가치일 때 진정성은 받아들여 진다. 기업의 CSR(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 )과 기부활동을 생각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기업이 사회공헌 활동을 하고 제단을 설립하여 수천억원을 기부한다 하더라도 대중들은 그 기업의 진정성을 의심하기 마련이다. 사람들의 마음에 와닿지 않는 행위, 공감가지 않는 행동으로는 진정성을 어필하기 힘들다. 유한킴벌리의 ‘우리강산 푸르게푸르게’ 캠페인이 성공한 CSR의 대표적 사례로 뽑히는 이유가 있다. ‘우리가 훼손한 숲이니 우리가 책임지고 되돌려 놓겠다.’는 공감가고 심플한 메시지 때문이다. 제품을 만들때도 마찬가지다. 제품 구성, 디자인, 가격은 모두 커뮤니케이션이다. 소비자가 원하는 제품이 바로 공감가는 제품이고 이러한 제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여야 한다. 델의 아이디어 스톰을 생각해보면 ‘공감’적 요소를 쉽게 이해 할 수 있다. 하고 싶은 이야기, 멋있는 이야기가 아닌 공감가는 소통을 진심으로 해보자.

3) ‘시간(Time)’

공감가는 행동으로 호감을 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진정성 있는 개체로 인식되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바로 시간적 요소 때문이다. 반쪽의 진심은 허위보다 무섭다는 말이 있다. 한두번의 얕은 진심은 배신감을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 진정성 있는 기업 혹은 사람을 생각해 보면 늘 한결같음을 느낄 수 있다. 진정한 마음에는 신뢰와 믿음이 따른다. 신뢰와 믿음을 얻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며, 그 노력을 증명해 냈을 때 진정성을 인정 받을 수 있다. ‘열 번찍어 안넘어 가는 나무 없다.’ 는 말 이 있다. 진심을 전달하는데 있어 시간적 요소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말이다.


설득의 세가지 요소(에토스, 파토스, 로고스) 차이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연구된 설득의 세가지 요소로 에토스와 파토스 로고스는 각각 이성 감정 카리스마 등의 매력으로 예술적 방법론이다.

설득의 연구 요소

설득 연구의 두가지 접근법으로 질적연구와 양적연구가 있다. 질적연구는 인문학적 연구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에서 시작되었다. 수량화 및 객관화 방식을 거부하고 인문학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이다. 양적연구는 통계 및 SMCRE모델 같은 것이다. 심리학에서 시작하였고 수량화 객관화 방식을 도입하였다. 사회과학적 접근 방식 및 계량 연구.

수사학이란?

고대 그리스 시대 사람들이 자신의 처지를 변론하고 다른 사람들의 동의를 얻기 위해 설득적 기술을 지칭하는 용어. 레토릭 rhetoric.

`코락스: b.c 470년 수사술이라는 저서 발행(수사학의 효시)

`소피스트: 대중들을 상대로 수사학 교육(수사학의 대중화)

`아리스토 텔레스:수사학을 최초로 집대성함 b.c 330년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수사학은 고대 로마시대를 거쳐 중세 근세로 이어짐.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

비예술적 방법은 실제의 증거물이나 법조문을 그대로 제시한 것이고 예술적 방법은 로고스, 파토스, 에토스의 방법이 있다. 

로고스

이성적 호소, 지성에 대한 소구 혹은 인간의 이성적 측면에 대한 호소, 귀납법과 연역법으로 구분.

귀납법과 연역법

귀납법-특정한 사례에서 일반적인 결론을 도출하는 결론.

연역법-이론이나 원칙으로부터 사실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개별적 사례들을 일반화하는 것으로 삼단논법이 대표적. 가추법(귀납법과 연역법 절충)

파토스

감정적 호소, 열정에 대한 소구 혹은 인간의 측면에 대한 호소. 이미지 관련.

감정에 호소하는 8가지 가치 혹은 미덕

1.정의(justice)-법의 준수, 소유권, 절제와 같은 속성

2.신중함(prudence)-충고를 주는 방법, 좋은 판단을 보여주는 방법

3.관대함(generosity)-이타적인 태도

4.용기(courage)-외부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옳은 것을 행함.

5.절제(temperance)-자기 억제, 온건함

6.담대함(magnanimity)-소심하지 않음, 용서하고 잊어버림

7.장엄함(magnificence)-인간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에 관심

8. 지혜(wisdom)-훌륭한 판단.

에토스

전달자의 공신력. 카리스마에 호소. 특성을 통한 호소. 가장 핵심적이면서 중요한 요소이기도 함 수사학에서....

발화자의 인격 혹은 특성을 통한 호소. 발화자의 공신력이나 카리스마를 의미함. 발화자의 외모나 제스처. 정직성. 지식. 경험. 평판 등을 포함하는 다차원적 개념.

에토스의 세가지 속성

1)실천적 지혜-발화자의 뛰어난 지식이나 경험.

2)덕:발화자의 탁월한 도덕성.

3)선의지:발화자의 순수한 의지.











십계명, 주님의 기도, 사도신조


십계명(十誡命)


첫째 계명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들을 섬기지 말라고 했는데 하나님 신은 누구이며 다른 신들은 무엇인가?
신(神)은 말씀이다. 즉 신은 언어이다.
 성경은 비유로 기록되어 있는데 비유를 깨닫지 못하고 비유언어 그대로 믿으면 그것이 곧 하나님이 금하신 다른 신들이 된다.

그러나 비유언어 속에 감추어진 속 뜻으로 풀어낸 말씀은 하나님의 신이 된다.

 

우리는 지금까지 성경의 비유문자 그대로 믿어왔기 때문에 하나님이 금하신

다른 신들을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비유문자 속에 감추어진

본질적 속 뜻의 말씀을 찾아 섬기고자 하고 있기 때문에 높으신 만군의

하나님을 대면하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은 떼 중에 수컷이 있으니 그 수컷을 거룩한 십일조로

바치라고 했다. 이 수컷이 무엇인가? 하늘에는 창조주 하나님 및 천사들로

구성된 신들의 공동체가 있으며 천사들 중에는 범죄한 천사들도 있다.  

이러한 하늘의 신들의 공동체가 수컷들의 떼가 되는데 그 중에서, 즉 수컷들의

떼 중에서 오로지 창조주하나님의 말씀만 거룩한 십일조로 바치라는 뜻이다.

 

만일 범죄한 천사, 즉 루시퍼(뱀.사탄.바울)가 준 선악과 신을 믿으면

그것은 하나님이 금하신 다른 신이 되는 것이다. 다른 신은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이 감추신 본질적 성경의 참 뜻을 몰라서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게 하는 청맹과니 우상신이 된다.

 

기성교단이 다른 신이 준 선악과를 먹고 비진리에 빠져서 허우적 거리고 있다.

또한 뱀의 후손 용이라고 하는 자칭재림주 교단은 어떤가?

자칭 재림주 노릇을 하기 위해 성경의 비유를 풀었다고 큰소리 치지만

그들 역시 사탄이 준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성경을 일괄적 한 논리로

풀지 못하고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발췌하여

자의적 엉터리 해석으로 선무당 사람잡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기성교단이든 자칭재림주 교단이든 지금까지 모든 교단들은

뱀과 뱀의 후손 용이라고 하는 다른 신들(흑암하나님)이 주는 비진리를

믿어왔다. 즉 성경 한 줄 풀어내지 못하고 횡설수설하는 비논리 가운데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믿고 싶은 부분만 문자적으로 믿게 하는

허접한 종교상품을 팔아서 치부해왔다.

 

그러나 이제 다른 신들(흑암하나님)의 전성기는 끝났다.

야곱이 얍복강 나루에서 천사(흑암하나님)와 싸워서 이겼기 때문이다.

야곱은 재림주를 예표하는데 그 야곱이 다른 신, 흑암하나님을 이기고 찾아낸

진리의 새말씀이 여기서 말하는 라고 하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다.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새말씀은 성경문자 속에 6천년 동안 깊이 감추어

있었던 로고스(이성,논리,형이상학,창조원리)이다.

우리는 로고스 하나님만 신으로 섬겨야 하는 것이다.

 

 

 

둘째 계명 /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우상을 만들지도 말고 섬기지도 말라고 했다.

위로 하늘에 있는 우상은 범죄한 천사가 주는 선악과 신이며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우상은 이미 선악과 신을

받은 기독계열 교단의 비진리를 말한다.

 

이렇게 우상을 섬기는 자들은 그 죄가 삼 사대까지 이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천대까지 이르리라 했다.

삼 사대까지의 죄는 영원한 멸망을 뜻하고 천대까지의 은혜는 영원한

생명을 뜻한다.

 

여기서 삼 사대니 천대니 하는 인간의 세대수는 그 본뜻이 인간의

세대수가 아니고 하나님의 제단의 세대수를 뜻하기 때문이다.

먼저 멸망의 삼 사대란?

 

초림주의 기성교단에서부터 시작해서 자칭재림주교단과 그 다음 오늘의

재림주교단 까지가 삼대가 된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천년통치정부까지는

사대가 된다.

이렇게 초림주에서부터 그리스도의 천년통치정부까지는 모두 실상시대로서

실상시대는 3대 혹은 4대까지 되는데 이러한 실상시대 동안에 우상을

섬기는 자들은 영원한 멸망에 들어간다는 뜻이다.

 

은혜의 천대란? 

다시 말하지만 초림주의 기성교단에서부터 오늘의 재림주제단까지는 3대가

되는데, 재림주 제단에서는 진리의 새말씀이 풀어져서 택함받은 자들이

영생에 들어간다. 누가 택함받은 자들이 되는가?

 

즉 누가 재림주의 음성을 듣고 영생을 받게 되는가 이다.

초림주의 기성교단에서부터 말씀에 목말라서 찾고 찾는 자들이

오늘의 재림주의 음성을 알아듣고 영생에 들어가기 때문에 그것을 일컬어

천대까지 은혜를 받는다고 했던 것이다.

(천대는 무한대를 뜻하고 영원함을 뜻하기도 하기 때문에)

 

 

 

셋째 계명 /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의 이름을 혐오스럽게 함부로, 즉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인데 문자 그대로 여호와를 함부로

부르지 말라는 것인가? 절대로 아니다. 하나님 본질의 명성을 더럽히지

말라는 말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첫째 계명에서 상술했듯이 하나님은 말씀이요, 그 말씀은 성경이라는

비유문자 속에 깊이 감추어진 논리의 형이상학이다. 즉 성경은 세상 물질계의

육적 형이하학으로 기록되었으나, 그 기록문자 속의 참 뜻을 파고들면

그 본질은 신령한 영적 형이상학이다.

 

하나님이 우주만물을 창조해 오신 물질계의 창조공정과 인간에게 하나님을

알려주시는 인간심령창조에 대한 창조공정들을 낱낱이 논리정연하게

밝혀 주셨기 때문에, 창조주 하나님은 상천하지의 지존자요,

아주 높으나 높으신 논리와 이성이 로고스(理性) 하나님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어떻게 믿고 있는가? 문자 그대로

마술봉 하나 손에 붙잡고 소리나는 말씀으로 빛 나오라 하면 빛이 나오게 하고,

물고기 나오라 하면 물고기 나오게 하고, 문자 그대로 아담의 갈비뼈로

여자 나오라 하면 여자가 나오게 하는 그런 천박한 마술사 하나님으로 믿고

있다는 사실이다.

 

높으나 높으신 로고스 하나님을 천박한 마술사 하나님으로 믿고 있으니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 된다는 사실이다.

 

 

 

넷째 계명   /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하나님은 6일동안 우리피조물을 창조하시는 일을 하셨고, 우리피조물은

6일동안 창조 받는 일을 해왔다. 창조하시는 일이나 창조를 받는 일이나

모두 고단한 일임에 틀림없으며 고단한 일을 마치면 쉬어야 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7일째 되는 날은 영원한 안식일로 정하여

그 날을 평안히 쉬면서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셨던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안식일을 지킨답시고 안식일이 토요일이니 일요일이니

아옹다옹 쌈박질 하면서 문자 그대로 교회에 나아가서 예배드리는

진풍경을 벌여야 하는가?

 

절대로 아니다. 그것은 창조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안식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성경의 참 뜻도 모르는 다른 신들이 요구하는 사탄의

예배 방식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면 안식일의 참 뜻은 무엇인가?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했다.

진리로 자유케 되는 것, 이것이 첫번째 안식이다.

그리고 진리를 알아서 진리로 자유한 자유인이 되면 영생을 주신다고 하셨다.

진리를 아는 자에게 주어지는 영생!  이것이 궁극적 안식이다.

 

창조주 하나님도 우리도 창조6일 동안은 주야로 죽도록 일을 했다.

낮에는 창조받은 일을 하고, 밤에는 어제의 창조를 깨부수고 다시

새날의 새창조를 받는 일을 해야만 했다.

 

6일6야 동안 그렇게 창조를 받고 다시 새창조를 위하여 깨부수기를

거듭하면서 여섯째날 끝날까지 미래지향적/진화론적 창조를 해오셨고

창조를 받아왔던 것이다.

 

예수님도 그렇게 새창조를 위해 깨부수는 진화론적 창조를 보여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어주셨던 것이며 우리도 각자 그러한 자기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했던 것이다.

 

오늘의 내가 죽어야 내일의 나로 거듭나며 부활하는 것이다.

하나님도 그렇게 새창조를 위해 깨부수는 진화론적 창조를 하신다는 뜻에서

하나님을 일컬어 토기장이 라고 했던 것이다.

 

이렇게 십자가에서 죽고 토기장이가 되어 깨부수는 작업은 모두

진리로 자유케 되는 안식을 위해서이며, 영생을 받아 안식을 누리도록

하기 위한 진화론적 창조 작업이었던 것이다.

 

진리로 자유케 되는 게 곧 안식이다.

영원한 영생을 받는 일이 곧 안식이다.  

 

진리로 자유케 되기 위해서는 성경문자 속에 깊이 감추어진 논리의

로고스 하나님의 말씀으로 옷입어야 한다. 영원한 영생을 받기 위해서도

성경문자 속에 깊이 감추어진 논리의 로고스 하나님의 말씀으로 옷입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안식일을 준수하라는 하나님의 엄명은

로고스 하나님의 말씀을 어서 깨달아서 영생의 안식을 누리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로고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기까지는 창조6일이 소요된다.

즉 로고스 하나님의 말씀은 맨 마지막 창조 여섯째 날에 마침내 주어진다.

따라서 다음날 일곱째 날을 안식일이라고 했던 것 뿐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안식일이니 무슨 날이니 해서 날과 절기를 지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율법적 행위일 뿐이고, 날과 절기에 내재되어 있는 참 뜻을 깨닫는 그 앎이

논리의 로고스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예물이 됨을 알자는 것이다.   

 

 

 

다섯째 계명 /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성경은 비유라고 하는데 왜 비유인가?

성경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기록된 신령한 영으로서 형이상학인데

그 형이상학을 우리 일상생활의 형이하학으로 감추어서 기록했기 때문에

비유라고 하는 것이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다. 물론 문자 그대로 우리의 부모도 공경해야만 한다.

우리 부모를 공경함이 인간이 지켜야할 마땅한 본분이요, 윤리와 도덕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경의 궁극적 본질은 인간의 윤리도덕을 말함에

있지 않다. 다만 땅의 일을 빙자해서 하늘의 일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부모의 본질은 하나님을 뜻하고 있다.

즉 우리의 영적 부모 되시는 하나님을 공경하라는 말씀이 진정한 뜻이 된다.

 

 

 

여섯째 계명 / 살인하지 말찌니라

 

당연히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살인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즉 땅의 육적 살인도 있을 수 없는 극히 사악한 범죄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상술했듯이 성경은 형이상학의 영적 기록이므로 여기서 말하는

살인도 그 본질은 영적 살인을 말하고 있다.

그러면 무엇이 영적 살인이 되는가?

목회자들이 교단에서 신도들에게 비진리를 먹이는 것이 영적 살인이 된다.

 

저 이천년 전에 초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

그분은 인류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 말씀을 가지고 오셨으나, 그 말씀이

비유였다. 비유이기 때문에 흑암의 말씀이 된다.

흑암의 말씀으로는 사람이 영생할 수 없다.

 

그런데 그 비유를 우리가 풀 수만 있었다면 빛의 말씀이 되기 때문에

빛의 말씀으로는 영생할 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초림 예수님은 빛과 흑암으로 오신 분이다.

 

이렇게 빛과 흑암으로 오신 예수님에게서 사람들은 빛을 택했는가?

아니면 흑암을 택했는가? 사람들은 흑암을 택했다.

즉 사람들은 예수님이 주신 비유문자(흑암) 그대로 믿어버린 것이기 때문에

이날까지 영생을 받지 못하고 아무리 잘 믿는 신자일지라도 불신자와 동일하게

지금까지 죽어왔던 것이다.

 

목회자들은 강도상을 치며 영생의 말씀이라고 설교를 하지만 그 설교는

성경문자 그대로 전하는 흑암이기 때문에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고

살인을 해온 것이 된다.

 

 

 

일곱째 계명 / 간음하지 말찌니라

 

간음이란 정당한 자기 배우자가 아닌 다른 이성과의 성관계를 말한다.

이러한 간음은 사회질서를 문란케 하고 자기영혼을 혼탁케 하는 일이므로

마땅히 금기시 되어야 한다.

 

하지만 성경은 그 본질이 세상 이야기가 아닌 하늘의 이야기가 되기 때문에

육적 간음이 아니라 영적 간음을 뜻한다.

그러면 무엇이 영적 간음인가?

 

하늘의 하나님을 남편이라고 하고 땅의 백성을 아내라고 하는데,

우리의 본 남편되는 논리의 로고스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과 짝해서

연애행각에 빠져 있다면 그것이 곧 간음인 것이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다른 신과 짝하여 놀아나고 있었기 때문에

간음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여덟째 계명 / 도적질하지 말찌니라

이 땅의 세상에서도 육적으로 도적질해서는 마땅히 안되는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도적질 또한 영적 도적질을 말하고 있다. 
그러면 무엇이 영적 도적질이 되는가? 
하나님은 떼 가운데 수컷이 있으니 그 수컷으로 십일조를 바치라고 했다. 
떼 가운데 수컷은 우리의 본 남편되시는 하나님을 뜻하고 그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받은 사람을 일컬어 십일조라고 했던 것이다.

즉 로고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받은 사람이 십일조이므로 십일조는 물질 십일조가 아니고 사람십일조였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님이 명하신 수컷으로 십일조를 바치지 못하고

즉 사람십일조를 바치지 못하고, 육적인 소득의 십일조를 바쳤던 것이다.

영적 말씀을 받은 영적 사람십일조가 하나님이 받으시는 하나님의 것으로서

하나님께 바쳐야 하는데   

사람들은 지금까지 사람십일조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문자 그대로

물질의 십일조, 혹은 돈의 십일조를 바쳤던 것이다.

 

사람십일조는 택한자 144000으로서 하나님의 소유이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람십일조를 바치지 않고 떼어 먹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아홉째 계명 /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찌니라

세상에서 거짓말 하는 것 물론 아주 나쁜 일인데, 이 역시 하늘의 일이기 때문에 영적 거짓말을 뜻하고 있다. 영적 거짓말을 뜻하기 때문에 사망의 비진리를 영생받을 진리라고 거짓말로 속이지 말라는 말씀이 된다.

열째 계명 /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찌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찌니라.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고 했는데, 이 역시 하늘의 이야기이므로 영적 이웃의 것이 된다. 
그런데 하나님이 말씀을 주시는 대상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때문에 네 이웃의 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것이 아닌, 다른 신의 백성의 것이 된다.
다른 신의 백성의 것은, 즉 다른 신의 백성의 소유는 비진리가 된다.
비진리는 논리가 아니고, 앞뒤 말이 맞지 않는 횡설수설이다. 
기껏해야 사람들을 미혹하기 위해 신비체험 같은 속살거리는 소리이다. 
무당 굿풀이 같은 혐오스런 몸짓과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뜻모를 통곡소리로 인하여, 그런 교단의 인근 부동산 값마저 추락시키고 있다. 
논리의 하나님을 섬기는 차원 높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어찌 그렇게도 천박한 다른 신을 믿는 백성의 것을 탐내리요!!




주기도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마태복음 6:5-8)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육체를 입고 오감(감각)을 갖고 땅에서 사는 아주 (극히) 제한적인(연약한) 존재이고, 시간과 공간의 세계에 갇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만져지지도 않습니다. 들리지도 않습니다. 손을 휘저어 봐도, 보이는 것도, 잡히는 것도, 들리는 음성도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집중적으로, 간절히 기도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기도가 이렇게 어렵다 보니,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대신에, 차라리 눈에 잘 보이는, 해나 달이나 별이나, 큰 나무나, 바위나, 높은 산이나 바다나, 불상과 같은 우상에 대고 손이 닳도록 비비며, 삼천배씩 절을 하고, 갖은 고행(수행)을 하는 등, 잘못된 기도를 하는 일들이 참으로 많이 발생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보시기에, 그들이 기도는 멋 떨어지게, 청산유수로, 잘 하기는 하는데, 주님이 원하시는 바른 기도를 전혀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방금 우리가 읽은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서 “왜 유대인들이 잘못된 기도를 하고 있는가?”를 지적
하시고,“무엇이 참된 기도인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있습니다. 무엇이 잘못된 기도입니까?

  1. 첫째로, 외식하는 기도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 5절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 (the hypocrites)와 같이 (기도)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to be seen by men)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 (댓가)을 이미 받았느니라!” “외식하는 자”의 헬라 원어를 보면“가면을 쓰고 연기(연극)하다! 가식적(위선적)으로 행동하다’(pretender)란 뜻입니다. 예를 들어, 거룩하지도 않으면서 거룩한 척, 경건하지도 않으면서 경건한척, 성경도 많이 모르면서 많이 아는 척, 기도도 하지 않으면서 많이 하는 척, 믿음이 하나도 없으면서 대단히 잘 믿는 척 합니다.

  유대인들이 드리는 외식적인(위선적인)기도가 어떤 면에서 잘못 되었습니까?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것이 크게 두 가지 있습니다. 우선 첫째로, 유대인들은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린다고 하면서 실상은 사람에게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사람에게 기도를 하느냐?”라고 물으실지 모르지만 유대인들은, 사람들에게 보이기(자랑하기) 위해서, 하루에 3번씩 (오전 9시, 정오 12시, 그리고 오후 3시) 만 되면 습관적으로 기도합니다. 특히 오후기도 시간에는 사람들이 가장 붐비는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자기가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기는, 대단히 경건한 사람이라는 것을 과시(자랑)하려고 큰소리로 기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늘 본문 5절 (하반절에)“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이들은 이미 사람들에게 칭찬, 부러움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받을 상(축복)이 전혀 없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는 받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 곧 이런 외식하는 기도를 드리는 자를 잠언 28장 9절에 보면“사람이 귀를 돌려 하나님 말씀(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위선)하니라!”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5장 8절에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즉,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입술로는 무척이나 기도를 잘하는 것처럼 보이고, 사람들 앞에서는 의로운 척
하지만 실제로, 그들의 삶 속에서 말과 행동은 교만하고, 기도한 내용 대로는 전혀 살지 않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8장 12절에 바리새인들이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간혹 어떤 목사나 장로(권사, 집사)들과 대화하다보면“저는요, 금식기도를 대단히 많이 했고요, 40일 기도를 여러 번이나 했습니다!” 물론, 간증을 하는 도중에“나는 이렇게 기도 했는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응답하셨습니다!”이런 것은 괜찮을지 몰라도“내가 40일 기도를 몇 번해서 이렇게 유명한(신령한) 목사(장로, 권사)가 되었으니 나를 좀 알아주고, 인정 해 주길 바랍니다!”이런 의도로 자랑하는 것이 바로 영적인 교만이며 주님이 싫어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주님 보시기에 합당한 기도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모든 외식을 버리고 하나님께 진실 된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입니다
2. 둘째로, 골방의 기도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은밀한 중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6절“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골방(closet, inner room)이란? 평소에 잘 사용하지 않은 아주 어둡고 작은 방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골방은 어떤 장소적인 개념보다는, 다른 것에 방해 받지 않고, 하나님과 일대일로 만나는 조용한(한적한) 곳이 바로 골방입니다. 그러므로 골방은 자동차 안이 될 수 있고, 화장실도 될 수 있고, 아무도 보지 않는 뒷마당의 벤치(의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골방을 좋아하실까요? 왜 하나님은 하필이면 골방에서 기다리시고, 우리를 만나고 싶어 하실까요? 여기에 깊은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에 빠진 연인들은 사람이 없는 조용하고 한적한 데만 찾아다닙니다. 단둘이 앉아서 아무도 방해 받지 않고 마음과 마음을 열고, 서로에게만 집중할 수 있으며, 서로를 더 이해하고 더 가까워 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부사이라도 특별히 사이가 좋은 잉꼬 부부 같은 경우는 단둘이 앉아서 조용한 시간을 보내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부부 가운데서도 별로 애정이 없는 부부는 남편이 어쩌다 “여보, 나하고 조용한 데 가서 둘이서만 이야기 하자!”고 말하면 부인은 화를 내면서 “아니, 이 나이에 무슨 청승맞게 그렇게 으슥한 데 가서 이야기 하자고 그러느냐?”핀잔을 줄 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골방에서 만난다는 것은 대단한 애정(사랑)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 아가서에는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이 기록 되어 있는데 (아가서 2:3에)“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신부)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또한 마가복음 1장 35절에 보면“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새벽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예수님 또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과 따로 떨어 져, 한적한 곳, 즉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나님과 교제(기도) 할 때에는, 세상(세속)의 문을 닫아야 합니다. 사람을 의식하는 체면(위선, 외식)의 문을 닫아야 합니다. 분주함의 문을 닫아야 합니다. 속된 잡념들을 닫아야 합니다. 욕심들을 닫아야 합니다.

  3. 셋째로,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아야합니다

  본문 7절“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중언부언의 의미는 “쓸데없는 말을 반복 하다! 아무 의미 없는 말을 지껄이다!”
마음에도 없는 말을 많이 하다! 즉 무의미한 말로 시간만 때우는 기도를 말합니다.

  대부분의 타 종교 사람들은 주문을 외우듯이 기도를 합니다. 이방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자기네들의 신이 들을 줄로 생각해서 같은 말을 계속해서 주술을 외우듯이 반복합니다. <남묘호랑게교>에서는 ‘남묘호랑게교! 남묘호랑게교! 남묘호랑게교!”만, 계속 수백, 수 천번씩 반복해서 중얼거립니다.

  열왕기상 18장에 나오는, 갈멜산에서 바알 제사장들의 기도가 대표적인 중언부언의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종(선지자) 엘리야의 기도와, 바알과 아세라 우상신을 숭배하는 자들의 기도가 얼마나 달랐습니까? 바알 제사장들은 아침부터 정오 때까지 열심히 “바알이여! 응답하소서! 응답하소서! 응답하소서!”라고 계속 반복적으로 외쳤습니다. 뛰어다니면서도 춤을 추면서도 기도했습니다. 아무 응답이 없자, 나중에는 칼과 창으로 자기들의 몸을 자해하면서까지 목이 터져라, 우상에게 외쳤지만 죽은 우상은 아무 반응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 엘리야의 기도는“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 알게 하옵소서!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엘리야의 기도는 ①살아계신 하나님께 향한 기도요, ②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기도요, ③기도의 이유와 목적과 대상이 분명한 기도”였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살아계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 불로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믿은 지 얼마 안 되서, 기도에 대해서 훈련이 잘 안되어서, 기도할 내용이 잘 생각도 안 나고, 기도를 서툴게 해서, 어린아이처럼 또박 또박, 천천히, 띄엄띄엄 하는 기도는 중언부언이 아닙니다. 엘리야도 7번까지 다시 가서 기도했음을 볼 수 있으며, 바울사도도 자기의 가시를 없애 달라고 3번이나 기도했습니다.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마태복음 26:44) “또 제자들을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성경에는 3번 밖에 반복이 안 나왔지만 우리가 볼 때에 그렇게 긴 시간 3번만 반복해서 기도했다고 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엎드려서 하나님 앞에 수십번 수백번, 똑같이 반복하셨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기도할 때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경배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믿음 주소서! 나의 이런 질병을 고쳐 주소서! 나의 이런 나쁜 습관을 고쳐 주소서! 아무개의 영혼을 구해 주소서!”
이런 말을 반복하는 것은 잘못된 (중언부언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다만 (야고보서 4: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아들이 공부도 안하는 데) “서울대, 하바드대 붙게 하여 주옵소서!” “(솔직히 양심적으로 말해서 장사가 잘 되면 바쁘다는 핑계로 교회도 잘 안나오고 신앙생활을 소홀히 할 거면서)”장사 잘되게 해 주시옵소서! 주시옵소서!”하나님은 주시길 원치 않는데, 정욕으로 쓰려고 계속 달라고 보체는 기도가 잘못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할 때, 또 제목을 놓고 작정 기도를 할 때, 마음에 평강과 기쁨과 확신(믿음)이 올때까지 기도를 해야 하며, 마귀와 싸울 때에는 마귀가 나갈 때까지 기도를 해야 합니다

  7절 (후반절에)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 하느니라!” 바리새인들은 마치 오늘날 모슬램들이 아무리 바빠도, 행실이 엉망이어도 시간만 되면 일하다가도 도중에 기도처에 가서 어제 했던 기도 똑같이 반복 하듯이 시간을 때우기 위해 기도를 하였습니다

  전도서 5장 2절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말을 적게 하라!” 는 것을, “기도를 길게 하지 말라!”는 말로 오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마치 하나님을 설득시키려는 마음으로“자세히 시시꼴꼴 (자초지종)을 설명하면서 기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6장 12절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예수님은 밤이 새도록 기도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처럼 오래 (몇 시간씩) 기도를 하려면 정말 수많은 훈련(연습)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기도는 시간보다 내용입니다. 누가복음 18장 13절에 보면“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바리새인처럼 화려하고 자랑할 것이 없었지만 세리의 기도는 마음을 쏟아 놓는 대단히 내용이 휼륭한 기도였습니다. 시간보다, 많은 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시편 51:17)“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요엘2:13)“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께로 돌아올찌어다!” 겸손한 마음으로 마음을 쏟아 놓는 기도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8절 “그러므로 저희(바리새인들)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부모는 자녀들의 마음을, 자녀들의 필요를 다른 사람보다는 더 잘 듯이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모든 것을 아시며, 나의 소원을, 나의 심정을, 나의 고민을 다 아십니다

  그래서 시편 139편에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 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하나님께서는 구하기도 전에 모든 내용(우리의 마음)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왜 기도해야 합니까? (로마서 9: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게 하시기 위하여...기도하라고 하십니다

  마가복음 10장에 소경 바디매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51절에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소경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 하나이다!”예수님이 몰라서 묻는 것 아니라, 그 입으로 구(기도)하게 하고, (마음으로) 시인(믿게)하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루 24시간, 일주일, 365일 내내, 성질이 급하고 사나운 사람만 상대하고 산다고 가정해 봅시다. 숨이 막혀, 답답해서 못 살 겁니다. 마음에 상처 때문에 견디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보다도 억만배나 더 위대한, 사랑과 위로와 소망의 주님을 만나야 됩니다.

  (시편 5편 1절 이하에)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내가 아침에 주께 기도 하나이다! (히 12:2)“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평생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대화를 했던 에녹처럼, 진정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께 나의 모든 사정을 아뢰며 주님과 아름다운 기도로 동행하시며 우리의 남은 인생을 행복하게 사시기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태복음 6:9-13)

Hallowed be Thy name

 

이 세상의 모든 만물에는 각각 그 이름이 다 있기 때문에 그 이름을 보면, 그것이 무슨 나무인지,
무슨 꽃인지, 무슨 풀인지, 무슨 동물인지, 무슨 벌레인지 그 본질(속성, identity)들을 금방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만은 모두 다 자기 이름을 갖고 있어도 그 이름대로 살지를 못하는 경우가 참으로 많지요.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크게 성공하라고 ‘대성(大成)’이라고 이름을 지었지만 이름대로 살지 못하고 실패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바른길을 걸으라고 ‘정도(正道)’라고 이름을 짓지만 그 이름과 인격이 일치하지 못하고 비뚤어지게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바로 그분의 인격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은 위대한 여러 가지 이름을 가지고 계시며 그 모든(각각의) 이름에는 반드시 의미가 있으며
때에 따라서 그 이름대로 100%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에게 기도할 때 맨 먼저 “하나님! 당신의 이름이 거룩하게 여김을 받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1.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의 다양한 이름들을 접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에 관한 이름은 수십 개가 있으며, 어떤 학자는 수백 개가 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많은 이름들은 제각기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계시하는 방법(상징적)으로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왜 이렇게 많습니까?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와 부(prosperity)가 너무나 크셔서, 우리 인간의 말이나 생각이나 지식으로, 도저히 설명하거나 이해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기록한 저자들은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이름들을 통해서 그분의 성품이나 생각 또는 하나님의 참 하나님 되심을 우리에게 설명합니다. 예를 들면 구약 성경에서 무려 2,570번이나 사용된 엘로힘(Elohim)이란 이름은
‘천지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무한하신 권능과 힘’ 을 계시(상징)합니다.

  또한 우리 성도님들에게 익숙한 이름 가운데 하나인 여호와(Jehovah)라는 이름은 성경에 무려 6,823번이나 등장하는데 여호와(Jehovah) 이름의 뜻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 혹은 스스로 존재케 하시는 분’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이름에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그 존재와 본질, 속성과 성품 그리고 하나님의 깊은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모세가 이집트 왕의 눈을 피해 광야로 도망쳐 양치는 목동으로 지낸 지 40년의 세월이 흘렀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찾아 오십니다. 그리고 “모세야! 너를 애굽의 바로 왕에게 보내어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해 내야겠다!”라고 말씀하시자, 모세가 하나님께 질문을 합니다. (출애굽기 3:13)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라고 말 하면 그들(이스라엘 백성)이 내게 묻기를 “그(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이냐?”라고 물으면“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대답 하리이까?”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I am that I am!)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모세)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이렇게 말하라!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을 묻자 하나님께서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영어로는 ‘I am that I am!, “나는 나다! 나는 있으니까 있다! 나는 나 스스로 존재한다!”등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 뜻은 우리 인간은 그 어느 누구도, 이처럼 신비로운 하나님의 이름과 존재를 규명(설명, 증명)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자신만이 스스로를 규명할 수 있다는 뜻이며, 우리 인간은 그 어느 누구라도 감히 하나님의 이름을 지을수도, 만들 수도 없고, “하나님에 대하여 이러쿵 저러쿵 왈가왈부 할 수 없다!”는 말도 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완전하시고, 무한하시고, 절대적이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부를 때 가장 자주 사용되었던 히브리어 명칭은 4 개의 자음 יהוה 만으로 “야훼, 영어로는 Yahweh!”입니다. (출애굽기 20:7)“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유대인(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호칭을 너무 두렵고 황송해서 그 이름을 감히 부를 수가 없기 때문에 성경을 읽을 때 이 단어를 발음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을 베껴 쓰던 학자(서기관)들은 이 단어(Yahweh)를 읽을 때 ‘주님’이란 뜻의 ‘아도나이(Adonai)’라고 대신해서 읽었습니다. 이“주님”(Master, Lord)이란 뜻은? 하나님은 모든 창조물들을 소유하신 분, 이 우주 만물을 주관하시는 주인 되시는 분, 모든 역사의 주인이시며,
내 삶(인생)의 주인이시며, 내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나의 주인임을 나타내는 분이십니다.

  그 이유는 (사무엘상 2:6) “여호와는 (우리 인간을) 죽이시기도 하고 살리시기도 하시며 스올(지옥)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건지시기도 하시는도다!”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는 자는 반드시 죽이라는 레위기 24장 16절 말씀을 따라 무의식중이라도 그런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다가 세월이 2,000년이나 흐르면서 이 단어를 어떻게 발음하는지 조차 잊어버리게 버렸지요. 정확한 하나님의 이름을 모른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성스러운 이름을 부르는 것을 두려워했고, 조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 서기관들이 성경을 손으로 필사(복사)할 때에 그들은 깨끗이 목욕한 뒤 새 옷을 입고 기도한 후 경건한 마음으로 성경 필사를 했는데 하나님 이름이 나올 때마다 다시 몸을 씻고, 새 옷, 새 잉크, 새 붓으로 바꾸고 기도하며 떨리는 마음으로 썼습니다. 그것에 비하면 오늘날 우리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시여!”이렇게 마음대로 부르며 기도할 수 있으니,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케(가깝게, 다정하게, 친근하게) 만들어 주신 예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큽니까? 이 여호와(Jehovah)라는 이름을 몇 가지 단어와 합쳐서 하나님의 속성과 활동을 나타냅니다.

  ▣ 여호와 이래 (Jehovah Jireh): 공급자 하나님! 모든 것을 준비(제공,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The Lord is my provider)(창 22:14)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 여호와 라파(Jehovah Rapha) : 치료자 하나님!(The Lord our Healer)“너희가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출애굽기 15:26)
▣ 여호와 닛시 (Jehovah Nissi) : 우리의 깃발이시며 승리의 깃발이신 하나님(The Lord, my Banner) “이에 모세가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였으니...”(출애굽기 17:15).
▣ 여호와 삼마 (Jehovah Shammah) : 상황과 현실 속에서 계시는 하나님 현존하시는 주님(The Lord who is present) (에스겔 48:35) “그 사면의 도합이 일만 팔천척이라 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 삼마라 하리라!”
▣ 여호와 샬롬 (Jehovah Shalom): 평강의 하나님 “주님은 평화이시다(The Lord is Peace)란 의미의 여호와 살롬(Shalom)이 있습니다 (사사기 6:24)“기드온이 여호와를 위하여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것을 여호와 살롬이라 하였더라!”
▣ 여호와 로히(Rohi; Raah): 주님은 나의 목자(The Lord my Shepherd) (시편 23:1)
▣ 여호와 티드케누(Tsidkenu) : 주님은 우리의 의(The Lord our Righteousness) (렘 23:6)

  이런 이름 위에 또 하나의 위대한 이름, 지극히 뛰어난 이름이 있으니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마태복음 1장 21절)을 보면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예수그리스도는 이름대로 ‘구원자’ 그래서 정말로 십자가에 돌아가셔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2.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 할 때 ‘거룩하다’는 것은 세속(더러운, 부정한 것과) 구별되다(set apart from secular) 깨끗하다! 순결하다! 성결하다! 정결하다!”

  우리 인간의 조상(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은 죄로 오염되고, 심지어 모든 만물까지 공해로 오염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염된 피조물과는 완전히 구별되신 거룩하신 존재, 하나님의 신성불가침인 거룩한 속성은 이 세상의 죄악들과, 이 세상의 불완전함과, 온갖 부정과 오염들,
이런 불결한 것들과는 완전히 다르신 100%! perfect God! perfect good! purest! He is holiest!”라고 말합니다.

  (이사야 6:3)“거룩하시다(holy)! 거룩하시다(holy)! 거룩하시다(holy)!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바로 이사야가 하나님의 이름 (성품)을 거룩으로 설명하면서 3번씩이나 “거룩하시다!”를 반복합니다. 성경에서 같은 말이 3번 반복해서 나오면 최상급입 (최고)입니다.

  (로마서 3:16)“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느니라! 우리 인간이 아무리 거룩하다고 해도 우리는
죄 때문에 결코 거룩(깨끗)하지 못합니다. 우리 인간은 그저 하나님의 그 거룩함을 닮아갈 뿐이지, 결코 하나님처럼 거룩할 수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 한분만이 완전하시고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베드로전서 1:16에)“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 할지어다!”(베드로후서 1:4)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 (거룩한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왜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할까요?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첫째, 거룩해야 하나님과 교통(communication)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2:14에 이것(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without holiness no one will see the Lord. (마태복음 5:8)“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가 하나님을 볼것이요!”

  (이사야 59장 1절이하에)“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하나님의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거룩하지 아니하면 하나님과 가까이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느 성도님의 경험담입니다. 그 성도님의 어린 꼬마 아이가 뛰어 놀다가 어느 날 그만 더러운 오물통(하수구)에 빠졌습니다. 죽음의 위험에서 간신히 건져냈습니다. 하지만 더러운 오물을 온몸에 뒤집어쓴 그대로는 너무도 냄새가 고약해서, 도저히 그 아이를 품에 안을 수가 없었더랍니다. 그래서 물로 여러 번 씻은 후에야 자기 아기를 부둥켜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 간증 했습니다. 바로 이처럼 우리 인간은 모두가, 죄로 인해 너무 고약한 냄새가 나기 때문에, 우리가 늘 찬양과 말씀과 기도로, 예수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의 영혼을 깨끗케 해야, 하나님 곁에 가까이 갈 수 하는 이유입니다.

  둘째로, 거룩해야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능력을 힘입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 3장 5절에“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스스로 성결(거룩)케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 기사(기적과 이적)를 행하시리라!”하나님은 거룩한(회개한) 사람에게, 병을 고치시고, 기적을 베풀어 주시고, 능력을 베풀어 주십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믿고, 인정하고, 모셔드린다는 말입니다. (로마서 1장 21절) “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요사이의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하지도 아니하고, 감사치도 않는 다고 말입니다. 썩어질 돈과 명예만 있으면 얼마든지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을 하고, 하나님을 (교회를) 배반합니다

  (신명기 5:11 십계명 5번째 계명) “너의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
(이사야 42:8에) “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레위기 21:6) 너희는 내 거룩한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지니 오직 나는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서 거룩하게 될 것이니라. 주님은 그 누구라도 거룩한 주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특히 자신의 자녀들, 자신의 백성들이 주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 욕되게 하는 것을 매우 싫어하십니다.

  (에스겔 36:20) “20. 그들이 이른바 그 여러 나라에서 내 거룩한 이름이 그들로 말미암아 더러워졌나니 곧 사람들이 그들을 가리켜 이르기를 이들은 여호와의 백성이라도 여호와의 땅에서 떠난 자라 하였음이라 21.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이 들어간 그 여러 나라에서 더럽힌 내 거룩한 이름을 내가 아꼈노라 22.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여러 나라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 23.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더럽혀진 이름 곧 너희가 그들 가운데에서 더럽힌 나의 큰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할지라!

그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성호)이 하나님의 백성들에 의해서 더럽혀지곤 했습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오늘도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이름이 얼마나 심하게 조롱 받고 있는지, (인터넷에 악풀 malicious comments을 보면, 기독교를 개독교라 그러고, 목사를 먹사라 그러고, 성도를 예수쟁이라 그러고...)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이 얼마나 심하게 훼손되고 있는지 불신자나 타 종교인들이 하나님을 모욕하는 글이 넘쳐납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이 사람들의 비난과 조롱을 받고 있는 것을 보면, 정말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잘못이, 하나님의 백성의 거룩하지 못함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고,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힙니다. 가장 거룩하게 대접받아야 할, 모든 존귀와 영광과 찬양을 받아야 할 하나님의 이름이 멸시되고, 비난과 조롱거리가 될 때 하나님은 “너희가 더럽힌 내 거룩한 이름”을 위해서 일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자식이 잘못하면“저놈! 누구자식이여?” 이렇게 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합니다. 교회가 잘못하고, 목사 장로(권사, 집사)가 잘못하면 하나님이 욕을 먹습니다“하나님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하나님! 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을 하지 않게 살겠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결코 더럽혀지지 않도록 믿음으로 살겠나이다!”이렇게 기도 할수록, 나의 영적 삶 역시 거룩해지고 경건해지고 의로워 집니다.

  세상 사람들은 오직 자신의 이름(명예)을 높이기 위해 발버둥 치지만, 그래서 세상 사람들에게는 인정을 받고, 그 이름이 땅에 기록되는 것이 전부지만, 이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높이고, 거룩히 구별하면 하늘에 우리의 이름이 기록됩니다. (마태복음 5:16)“저희로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의 예배를 통하여, 찬양을 통하여, 우리의 기도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 받기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나라가 임 하옵시며 (마태복음 6:9-13)

Thy Kingdom Come

우리가 지난 수요일에 공부했던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의 첫 번째 기도 제목은? ①“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 옵소서!”가장 먼저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경배, 찬양) 드리는 기도(Hollowed be Your Name!) 를 하라!”였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우리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두 번째의 기도 제목을 공부하겠습니다. 두번째 청원(기도제목)은? “②(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임하시옵소서” (Your Kingdom Come!)”라고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가장 누리고 싶어 하는 것이 바로 진짜행복(하나님의 나라)이고, 가장 갖고 싶어 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 (천국과 같은) 행복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나의 심령 속에 임하여서, 심령천국 (행복한 인생), 우리 가정 안에 임하면 가정 천국, (행복한 가정), 우리 교회 안에 교회천국 (행복한 교회), 이 나라 미국에 임하면 나라 천국 (행복한 나라)얼마나 좋겠습니까? 이런 천국과 같은 삶이 되게 해 달라고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왜 주님은 이토록 우리가 “하나님 나라(하나님의 통치, 지배)가 우리에게 임하게 하는 기도를 하라!”고 말씀하실까요? 우리 인간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통치 (보호권)에서 벗어나 죄에 노출되는 순간, 자신을 통제할 수 없는 죄인의 상태에 빠져 불행 해 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세상을 향하여 선포하신 첫 번째 말씀이 “회개하라. 천국(하나님 나라)이 가까웠느니라!”
(마4:17)입니다. “회개하면 심령에 하나님나라(기쁨, 소망, 평강, 감사)가 임하여 행복해진다!”

  그리고 마지막 설교 역시 천국에 관한 메시지 였습니다. (사도행전 1장 3절에도)“사십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 일을 말씀하시니라!”그래서 (마태복음 6장 33절에)“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하나님 나라) 와 그의 의(하나님을 믿는 믿음)를 구하라(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가 내 심령 속에 임하게(오게) 해달라고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오직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선포 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나타난 주기도문의 2번째 기도제목 역시 “하나님 나라(기쁨, 평강, 감사, 소망)가 임하도록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 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장소 (우리가 보통 상식적으로 알고 믿고 있는 하늘에 있는 나라, 우리가 죽어서 가는 그 천국)의 개념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가 죽으면 당연히 천국(하나님나라)에 가지요) 그러나 오늘의 주기도문의 구절에 담긴 하나님 나라의 또 다른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오늘 주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 하옵소서!”라는 기도의 의미는? 하늘에 있는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내려온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국가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국민과 백성과 통치자(왕, 대통령, 다스리는 자)이 있어야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나라가 성립되기 위해서도
① 하나님의 통치권과 ② 하나님의 백성과 ③ 하나님 나라의 영토(장소, 위치)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도, 이 세 가지 요소들이 다 있지만, 가장 중요한 요소는 하나님의 통치(다스리심)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통치 아래만 있으면 그 어디든지 하나님나라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영어로 나라를 ‘kingdom!’ 이라고 합니다. ‘kingdom’ 왕국입니다. 왜 그 나라를 ‘kingdom’ 이라고 부릅니까? 그 나라에 왕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kingdom에는 누가
그 나라의 왕이십니까? 물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의미는 하나님의 왕권아래서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스림(sovereignty)을 받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은 우리가 예수를 나의 왕으로 모셔드리고, 믿고 인정하고, 세례를 받고 나면 비록 내 육신은 이 땅에서 살지만, 나는 천국의 시민이 되고,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새로운 영적인 삶이 시작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세상의 삶은 얼마나 불편합니까? 집 떠나 여행을 하면 얼마나 고생입니까? 그래서 “잠시 이 땅을 지나가는 나그네 인생”이라 그러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이 땅은 영원한 내집이 아니기 때문에 불편합니다. 고생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내안에 계시기 때문에, 육신은 고달퍼도 마음속이 천국 인것입니다.

  한국에 있는 미국대사는 몸은 한국에 있지만 신분은 미국시민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가 그의 백성(우리그리스도인의) 심령(가정과 교회) 가운데 들어와 (내 삶에 하나님 나라가) 실현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지도에서 찾으려고 한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일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임하시고) 또는 통치하시는 곳이면 그곳이 어디든 지간에 그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 나라에선 법을 어기면 감옥갑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뜻(말씀)이 핵심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나중에 죽어서 감옥갑니다. 그러면 그럼 좀 더 자세히 하나님나라에 대해 공부해 봅시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소서 무슨 뜻일까요?
1. 하나님의 다스리심 (주권)이 내 삶에 드러나소서!

  하나님의 나라(통치)가 (내 심령과 내 삶)속에 임하도록 기도합니다(The kingdom of God is within me!) 예수를 믿는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보면 모두 ‘이중국적자’입니다. 즉,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 속한 나라(미국)의 국적을 가지고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미국시민으로 살고 있지만, 예수 믿고 세례를 받는 순간 천국시민권을 발급받기 때문에 하늘나라의 국적(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이중국적의 사람입니다.

  이런 면에서 조국 (한국)땅을 떠나 살고 있는 여러분이나 저는 누구보다도 더욱 이런 두 나라의 국적을 가진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와서 아무리 미국 시민권을 소유한다 할지라도, 늘 모국(한국)의 동향과 정세(뉴스)에 늘 관심을 갖고 민감하여 기뻐하고 때로 안타까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찬가지로 오늘의 기도“나라가 임하옵시며!”이 말의 직설적인 의미는 “나는 하나님 나라의 국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나는 영원한 내 조국(내 나라) 천국을 사모하며 삽니다! 장차 내가 돌아갈 영원한 내 고향 천국을 내 마음 속에 하나님 나라 시민의 자부심을 간직하고 살게 하소서!”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천국’하면 ‘꼭 죽어야만 가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전도할 때도“우리 예수 믿고 함께 천국 가십시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정말 죽어서만 가는 곳입니까? 만일 하나님의 나라를 사후 세계로만 인정하면, 우리가 “나라가 임하시오며”라고 주기도문을 할 때마다,“하나님 빨리 죽고 싶습니다! 지금 당장 죽어서 천국가고 싶습니다!”라는 기도가 되고 맙니다. 과연(정말) 주님의 기도가 그런 의미(뜻)입니까?

  이 기도를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내 삶에 완전하게 드러나게 하소서! 하나님의 말씀(뜻)대로 사는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소서! 비록 몸은 이 땅에 살지만 천국시민이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말게 하소서!”라는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고 내 삶을 다스리고 계시는데, 내가 이것을 깨닫고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내 안에 완전하게 드러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믿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당연히 구원받고 천국에 가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예비하신 영원한 그 나라, 눈물도 없고 죽음도 없으며 질병과 아픔이나 죄악이 전혀 없는 아름다운 그 나라에 들어가기를 정말로 소망하며 살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나라에 들어가기를 사모하는 우리 성도들에게 지금 이 땅의 삶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예를 든다면 이 땅은 천국의 예비학교(훈련소)와 같은 곳입니다. 우리가 군대를 가면 본부대에 들어가기 전에 잠시 1-3개월의 훈련소 과정을 거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잠시 훈련소와 같은 곳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서 그 답을 찾아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임하소서!”라고 기도하라 하신 말씀은 비록 우리의 몸은 이 땅에 발을 딛고 살고 있지만, 하나님의 통치의 지배를 받고 살라! 미국의 대사는 한국에 가서 살아도 미국 대통령의 명령을 받고 삽니다.

  그럼 그 나라가 언제 임하게 될까요?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임합니까?” 라고 묻는 바리새인들에게 누가복음 17장 21절에서“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너희 안에 있느니라!” 고 대답하셨습니다. 죄의 노예가 되고 세상의 다스림에 속아 하나님의 나라를 모르고 어두움에 사는 사람들 속으로 임하여 오시는 하나님의 다스리심, 즉 하나님의 왕권입니다. 그래서 그 나라는 눈에 보이게 임하거나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는 것이니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순복하는 사람들 속에서 벌써 하나님 나라가 시작된 나라입니다.

  예수님을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눅11:20)“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쫒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각종 귀신들을 쫒아내실 때 하나님의 왕권은 이미 세상에 임하였습니다.

  (마태복음 5:3 & 누가복음 6:20)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너희 것임이요 하나님의 주권이 이나 통치의 다스림을 받는 곳은 그곳이 어디든 지간에 하나님의 나라! 즉 하나님이 다스리는 곳이면 어디든지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애창하는 찬송가 495장에 그 답이 있습니다. ♬내 영혼이 은총입어 중한 죄짐 벗고 보니 슬픔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그렇기에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 가는 곳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생각과도 다르고, 이 세상의 나라와도 분명히 다릅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를 사모한다고 말하며 그 나라에 들어가기를 기도하지만 여전히 땅의 삶에 묶여 이 땅에 낙원을 건설하고 여기서 영원히 살고파 합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사는 동안 나에게 힘이 되어 주고 울타리가 되어 줄 것들을 많이 쌓아두고 묻어놓으며 든든히 채워넣기만 하다가 어느 날 하나님이 불러 가시면 홀연히 인생을 마칩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있기는 있는데 희미하거나 아니면 아예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영의 눈을 뜨고 영원한 그 나라를 바라보며 이 땅에 사는날 동안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복종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할 사명이 제자들에게 있었고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곳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바로 우리 안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님(예수님이) 내안에 임하시는(거하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14장 17절에)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For the kingdom of God is not a matter of eating and drinking, but of righteousness, peace and joy in the Holy Spirit. 의와 평강과 희락이 충만한 하나님의 나라가 내 안에 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인생에는 왜 평화가 임하지 않습니까? 왜 여전히 걱정과 두려움, 근심과 상처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까? 그러데 어떤 사람은 왜 자꾸 짜증이 나고, 기쁨이 없고, 삶은 무기력하기만 합니까? 그 분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신비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보다 먹고 마시는 것에 더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보다 내 욕망을 이루는 일에 더 관심을 쏟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았던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50에서 이같이 증언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그래 가지고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주는 의와 평강과 희락을 맛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해야 내가 변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야 임해야 행복해집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해야 내 삶에 기쁨이 충만합니다. 한번 뿐인 인생인데, 천국처럼 살다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단 한번 뿐인 소중한 삶인데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2. 하나님의 나라가 내 가정에 임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우리 가정에 천국이 임하도록 해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의 가정이 언제 천국을 경험했습니까? 하나님이 그들을 다스리실 때 그들은 천국을 경험했습니다. 부부가 서로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라’고 사랑하며 존경하고 하나님과 더불어 사귀던 그때 그들은 천국을 경험했습니다. 가정에서 부부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면 가정에도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가정에 의와 평강과 희락이 넘칠 수가 있습니다. 이런 가정천국을 우리 온 성도들의 가정에서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우리 교회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해 다랄고 기도해야 합니다.

  세 번째로 교회에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나님이 아버지이십니다. 우리 모두는 형제요 자매들입니다. 한 가족입니다. 가정에는 서로 믿고 도와주고 허물을 덮어주고 어려운 가족을 책임지고 돌봐주고 격려하는 사랑이, 포근함이 있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마음의 천국이나 가정의 천국이나 교회천국은 겨자씨처럼, 누룩처럼 계속해서 퍼져 나가고 커가고 성장하는 것이지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의 나라가 내 마음에 임하게 하시고, 우리 가정에 임하게 하시고, 우리 교회에 임하게 하시고, 우리 자녀에게 임하게 하시고, 우리의 우리 목사님에게 임하게 하시고, 우리 집사님에게 임하게 하시고, 이렇게 기도하면 한 시간 동안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살아가는 우리들이지마는 하나님 나라를 다 경험하고 살다가 마지막으로 하나님 나라에 넉넉하게 들어 갈 수 있기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태복음 6:9-13) 
Your will be done on earth as it is in heaven!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의 세 번째 간구 (청원, 제목, petition)은 하나님의 뜻을 구(asking)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오늘날 대부분의 우리 인간은 오로지 자기의 뜻을 이 땅(세상)에 세우고 자기의 뜻을 이루기 위해 죽을 때까지 몸부림을 치며 살다가 죽습니다. 제자는 스승의 뜻을 알아야 공부를 잘할 수 있고, 자녀는 부모의 뜻을 알아야 효자가 될 수 있고, 직장인은 사장(경영주)의 뜻을 알아야 칭찬(인정)을 받고 승진을 할 수 있듯이, 성도는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뜻을 잘 알아야,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으며 하늘나라에 갈 수 있는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너무도 이기적인 존재 (죄인)이다보니, 자신도 모르는 가운데, 기도 역시 자신의 뜻만을 구하는 이기적인 기도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래서 자신의 뜻(생각, 이익)만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기도는 결국 바리새인의 기도처럼 하나마나한 것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올바른 기도는 자신의 뜻을 관철(고집)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뜻을 맞추는 것이지요. 주기도문은 이것을 우리에게 보여(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뜻을 맞추는 것을 ‘영적인 조율’(spiritual tuning)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연주회에서 연주를 시작하기 전에 각종 악기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고 있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악장의 악기(standard)에다가 각자 자신들 악기의 소리(음)를 맞추고 있는 것이지요. 이것을 ‘조율(tuning)’이라고 합니다. 아무리 뛰어난 연주자라 할지라도, 조율되지 않은 악기로는 결코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연주전에 반드시 조율을 하는 것입니다. 연주자들이 연주를 할 때마다 정확한(정직한) 음을 낼 수 있도록 악기를 조율하듯, 우리도 매일매일 하나님의 뜻(찬양, 말씀, 기도)에 내 뜻, 우리의 뜻을 맞추는 영적인 조율을 해야만 합니다.(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그래야 우리의 영적인 삶은 물론 우리 인생이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는 일차적으로 내 뜻을 죽여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내 육체의 소원과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2장 1절 이하에“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요한일서 2장 17절에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 하느니라!”이 세상도 가고 세상의 정욕도 다 지나가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은 영생 할(영원히 살) 것입니다. 그러므로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는 “주님, 내 뜻을 꺾어 주십시오! 내 뜻을 죽여주십시오! 내 자존심을 내려놓게 하옵소서! 내 교만을 없애 주옵소서!”라는 기도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 힘으로 안 됩니다. 그래서“내 힘으로 할 수 없으니 성령님,
도와주십시오!”이것이 바로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신의 뜻을 포기하는 가장 정확한 기도의 모범(example)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잡히시기 전날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여기서 ‘원(want)’은 ‘뜻(will)’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뜻을 꺾고 하나님의 뜻을 수용(accept)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십자가 지는 삶의 모범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요일 5:14) “그(하나님)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용기있는) 것(행동)이 이것이니 그(하나님)의 뜻대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들으심이라!”무엇이든지 우리가 하나님의 뜻(말씀)을 따라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리라는 것을 우리는 확신합니다. (요 15:7)“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오늘도 주님은 살아계셔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말씀)을 알려주시고 하늘(하나님) 뜻에 순종하는 기도를 하면 이루어주십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는 하나님의 뜻을 받아(순종하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난 존재들이며, 그 (하나님의) 뜻(말씀)을 성취(순종)하는 삶을 살 때에 가장 행복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7장 21절에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태복음 12장 50절에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사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하나님 아버지의 뜻(말씀)대로 행하는 자가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원하심은 무엇일까요?

    1.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여기에 ‘하늘’과 ‘땅’이 대조적으로 언급되고 있는데,‘하늘’은 ‘하나님의 영역’으로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실현(성취, 완성)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하늘나라는 하나님의 뜻(계획)이 완전히 이루어 진 곳이기 때문에 완전한 (죄 없는) 곳입니다. 그러나 이 땅은 아직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성취되지(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보다는 인간의 욕심, 세상의 유혹, 사탄의 음모가 뒤엉켜 나타난 불완전한(죄 많은) 곳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이 하늘나라에서 이루어 진 것처럼, 이 땅에서도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뜻은“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때에 하나님이 이루신다!”는 것이지요. 우리 인간이 노력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뜻을 “우리를 통해서 이루신다! 펼치신다! 행하신다! 우리를 통해서 역사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1장 17절에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하늘나라)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 내려오다니 그는(하나님은)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우리 인생을 새롭게 하는 진정한 행복과 충만과 풍요는 이 땅이 아니라 위로(하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새롭게 하는 성령의 바람도 이 땅에서 부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불어오는 것입니다. 생명도, 구원도, 진리도, 은혜도 결코 이 땅에서부터 올 수 없으며, 이 모든 것들은 오직 하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말씀)을 알아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 수 있고, 하나님의 뜻(말씀)대로 행해야(살아야, 순종해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 온전히 이루어지는 날은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때입니다.
지난 수요일에 공부 했던“(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오며...”와 오늘 지금 공부하고 있는 “이 땅에서 하늘나라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은 큰 맥락에서 본다면 결국 같은 뜻입니다. 아무튼 하나님의 뜻이
이 땅(세상)에서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며 (나라와 백성과 정치인들과, 지도자들을 위해서) 기도해야겠지만 먼저 우리와 우리 가정과 자녀와 교회에서부터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하나님의 나라가 임(Your kingdom come!)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가 완성 되도록(Your will be done)’중보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2.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하늘이 먼저이고‘땅’은 그다음입니다. 하늘은 영이신 하나님의 완전한 의의(죄 없는) 세계입니다. 그러므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의 목적과 의(진리, 정의)가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어야 할 장소는 무엇보다도 이 땅입니다. 하나님은 땅(세상)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어떻게 보면 주일 하루보다 평일 6일이 중요합니다. 교회라는 공간도 중요하지만 세상이라는 더 넓은 공간도 중요합니다. 신앙인들이 세상이라는 넓은 땅을 포기하고 교회라는 좁은 공간에만 안주하려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에게로 가라!”(마28:19,20)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만이 아니라 온 세상과 만물의 머리입니다. 하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하는 곳 중 가장 중요한 곳은 바로 우리 인생이라는 땅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이 땅에 태어날 때 하나님의 뜻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이 뜻을 소명(사명) 곧 부르심(calling) 이라고 합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가 해야 될 일이 있고 겪어야 될 운명이 있습니다. 자기를 향하신 이 하늘의 뜻을 발견한 (실천하는, 순종하는) 사람은 올바른 길을 가고 있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늘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뜻이, 이 작은 나의 삶을 통해서, 나의 심령에서, 우리 가정에서,
우리 교회에서 이루어져 간다면 그보다 값지고 영광스러운 인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내주 예수 모신 그 곳, 바로 나의 심령이 천국이 되고, 나의 가정이 천국이 되고, 교회가 천국이 되고...하나님의 plan(게획, 섭리)대로 하나하나 그 계획들이 이 역사 위에 이루어져 마침내는 하나님의 최종 plan인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뜻을 실현하는(이루는) 것을 자기의 양식으로 삼으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4:34) 예수님은 짧은 생애를 살고 십자가라는 고난의 길을 가셨지만 그것이 자기가 짊어져야 될 하늘의 뜻이었기에 행복하셨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하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라는 이유는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입니다. 어떤 기계를 만들 때는 그 기계를 만드는 목적이 있습니다. 기계는 그 목적에 맞게 살 때 가장 적합하고 제대로 활용될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살면 행복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늘 뜻을 맞추어 살 때 우리 인생은 행복하고 가장 풍성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삽니다.

  이런 하나님의 뜻은 아무나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돈이 있고, 힘이 있고, 원함이 있고, 능력이 열심이 있다고 이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자신의 삶 속에서 예수를 만나 과정을 거쳐 하나님의 뜻이 자신에게 이루어진 자들, 즉 하늘이 된 자들만이 땅에 속한 이웃에게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이렇듯 하늘의 뜻을 따라 살면 즐겁고 행복하고, 하늘의 뜻을 따라 살면 열매를 많이 맺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 고전에도 “순천자는(하늘에 순종하는) 흥하고 역천자(반역하는 자)는 망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곧 하늘의 뜻을 따르는 자는 흥하고 하늘의 뜻을 거스리는 자는 망한다는 뜻입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뜻은 세상의 구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4장 34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주님의 양식은 주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고, 또한 그것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6:38절 이하에)“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니라! 그러면 주님을 보내신 이의 뜻, 곧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요한복음 6: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에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자신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기 위함인줄을 정확하게 아셨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였습니다. 아버지의 뜻은 모든 민족이 다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고통스럽게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외치는 아들의 고통스런 외침에 귀를 막으셨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뜻은 성도의 성화(sanctification)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거룩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3절에서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성화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가 점차 죄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 성결케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모든 성도가 다 예수님을 닮아 예수님처럼 거룩해 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의도대로 거룩하게 살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특별한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의 뜻은?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에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은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쉬몰크(B. Schmolck)목사님은 심방을 다녀오는데 사택에 검은 연기가 솟아오르고 화재가 난 것을 발견하고 급하게 달려와서 어린 두 아들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이미 그들은 검은 잿더미로 죽어있었습니다. 그는 몇날 며칠 동안 침식을 폐하고 괴로워하면서 주님께 회개 기도하며, 원망 기도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주님의 모습이 보이고, 주님의 기도가 내 기도되게 해달라고 간구하면서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 14:36) 이렇게 계속 기도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습니다. 바로 그때(1704년)에 작사한 찬송이 431장입니다.

  1.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온 몸과 영혼을 다 주께 드리니, 이 세상 고락간 주 인도 하시고 날 주관 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2.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큰 근심 중에도 낙심케 마소서,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날 주관 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3.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내 모든 일들을 다 주께 맡기고, 저 천성 향하여 고요히 가리니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은 다윗의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자’라고 칭찬을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 뜻을 받들어 기도하고 섬기는 철든 성숙한 신자가 되십시다.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을 우리도 좋아하고,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을 우리도 싫어하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을 우리도 사랑하고, 이렇게 우리 마음과 가정과 교회에서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 지셔서 우리를 통하여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되시길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마태복음 6:9-13)
Give us today our daily bread!


오늘은 주기도문의 네 번째 간구입니다. 세 번째 간구까지는 ①하나님의 영광(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과 ② 하나님 나라(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옵시며)와 ③ 하나님의 뜻(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길 기도하나이다)을 위한 간구였습니다. 이제 우리 자신들을 위한 첫 번째 간구를 할 수 있게 되었지만 ④“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시고”
라는 이 기도를 드리기에는, 우리가 너무 가진 게 많기 때문에, 상당히 부담이 되는 기도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개구리 올챙이 적 시절 모른다!”는 말처럼 우리가 언제부터 음식타령을 했습니까? 한국에서 전쟁이후 우리는 얼마나 못 먹고 못 입고 살았습니까? 얼마나 못 먹었으면 만나는 사람마다 “식사하셨습니까? 진지 잡수셨습니까? 밥 먹었습니까?” 가 인사말이 되었습니까? 검정고무신에 셔츠 한 벌로 몇 달씩 입었던 기억이 납니다. 또한 유일한 간식거리는 옥수수(강냉이)와 고구마 몇 개가 전부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지난날에 비하면, 지금 우리의 모습은 굉장한 부자임에 분명합니다. 최소한 우리는 오늘 당장 먹을 양식 때문에는 걱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우리의 문제는 먹을 양식이 없어서 부족해서 문제가 아니라, 너무 많이, 너무 잘(많이) 먹어서 비만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요즘 거의 대부분 성인병의 원인은 영양부족이 아니라, 영양과다이고, 먹는 것에 비해 운동량이 적은 이유입니다.

  그래서 식사와 다이어트 약을 겸하여 먹는 웃지 못 할 non sense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솔직히 이 기도는 우리에겐 전혀 맞지 않는, 소위 한물 건너간 옛날 기도 아닙니까? 당연히 이 대목을 기도할 때, 별로 마음에 와 닿지도 않고, 간절한(절실한) 마음도 없지 않습니까? 얼마든지 좋은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이 시대에 무슨 맥 빠진 기도입니까?

  그동안 우리는“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며”라는 기도문을 “너무 먹을 것에 욕심 부리고 살면 안 된다!”라는 의미에 초점을 맞추어 받아들였습니다. ‘양식’은 문자 그대로의 먹을 것(food)을 의미합니다. 지금도 아프리카나 북한 또는 난민등등 전 세계의 70% 이상이 물과 식량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북한에는 고난의 행군 때에, 배가 고파서 죽어 간, 수백만의 우리 동포들이 있고, 워싱톤 수도권에도 수만명의 homeless가 있지 않습니까? 그 사람들에게는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는 의미가 정말 절실하기 때문에, 지금 이 시간에도 지구촌 어디선가는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이 기도가 절실한 곳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1. 먼저, ‘일용할 양식’이란 무엇입니까?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에서 ‘오늘날’ 이라는 뜻은 잘못하면 ‘요즈음(these days)’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오늘날’이 아니고 바로 ‘오늘 한 날 (today)’입니다.
가장 자연스럽고 보편적인 해석은 “오늘 하루 동안에만 필요한 양식을 주옵시고”(our daily bread or material(물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최근에 나온 한글 개역성경은 “우리에게 일용할 오늘의 양식을 주시옵고”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일용할 양식’은 꼭 필요한 하루분의 양식을 말합니다.

  다시 번역하면 “오늘 하루 우리에게 필요한 하루분의 식량을 주시옵소서!”라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이런 기도를 할 자격이 있을까요? 우리는 지금 냉장고에 (냉동실에) 몇 달 동안 먹을 수 있는 너무 많은 식량(음식)을 잔뜩 쌓아두고 있지 않습니까? 미국에서 버리는 음식물 쓰레기로 가난한 몇나라 식량문제를 해결 할 수 있답니다. 이 기도가 마치 “일용할(하루에 필요할, 하루 동안 사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는 청원의 기도가 아니라 “지나치게 과욕을 부리지 말고, 과식을 하지 말고, 일용할 양식으로 (하루분의 양식으로) 만족하게 (근검절약하며) 낭비하비 말고(과소비하지 말고) 살게 하옵소서!”하는 절제의 기도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주기도문에서 말씀하신 일용할 양식의 의미는, 매일 매일 먹을 필요할 양식뿐만 아니라, 매일 매일 사용할 양식을 얻기 위하여 필요한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다시 말하면 식구들의 먹고 살아야 할 양식을 얻기(사기) 위해 노동을 하야만 하는 가장(bread winner)의 건강도 필요하며, 한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잠27:1)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주님 오늘 하루도 무사히 우리 가정을 지켜주시고, 우리 남편 직장에서 lay off 당하지 않게 하시고, 우리의 생명과 건강과 재산을 지켜 주옵소서!”이런 소원이 포함되어 있는, 우리의 의식주 문제, 사업 문제, 건강 문제, 자녀 교육 문제 등 모든 것이 다 일용할 양식 안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매일 매일 (하루 하루를)을 주님을 의지하며 살 수 있도록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 기도의 의미를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본문은 출애굽 당시의 만나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한 후 광야(사막)에서 무려 40년이라는 긴 세월을 보냈습니다. 광야(사막)에는 그 많은(장년 70만 총 200만명) 이스라엘 사람들이 먹고 살기에 먹을거리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기적을(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리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먹이셨습니다.

  만나는 아침마다 이슬처럼 내리는 작고 둥근 떡가루 같은 것으로 희고 꿀 섞은 과자 같은 맛을 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나를 내리시는데 각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딱 하루 분량치만 내려 주십니다. (출16:17-18)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기 식량대로 거두었더라!”그런데 어떤 사람이 그것을 다음 날 아침까지 남겨두었더니 썩어(상해)냄새가 나고 벌레가 나서 먹지 못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한꺼번에 만나를 주실 수도 있었는데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매일의 만나를 주심으로 하나님은 세 가지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하나는 음식이 없는 광야에서 매일 매일 하늘만을 바라보고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간절한(갈급한)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이스라엘 백성들을 훈련하신 것입니다.

  2. 일용할 양식에 대한 예수님의 영적인 의미는? 우리가 하나님 말씀으로 사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신명기에서는 하나님께서 매일의 만나로 먹이신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신명기 8:3)“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호세아 13장 6절에 보면 “그들이 먹여 준 대로 배가 불렀고 배가 부르니 그들의 마음이 교만하여 이로 말미암아 나를(하나님을) 잊었느니라!”

  그래서 마태복음 4장 4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요한복음 4장 32-34절 “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한 대,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이 말씀을 자세히 읽어보고 묵상해 보면 우리 주님께서 구하라는 ‘일용할 양식’이 단지 ‘먹는 문제’에만 국한 되지 않음을, 그래서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의 진의(본심, 뜻)를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인간은 떡(물질)에 매여 살기 쉬운 존재들입니다. 물질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물질의 논리에 굴복하기 쉬운 것이 우리들입니다. 먹는 문제 정말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먹을 것에 관심이 없는 분이 아닙니다. 오늘 분명히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문제는 물질을 얻는(취하는) 방식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살면서 하나님 보다는 우상에게 절해야 풍요로울 수 있으며, 비록 노예처럼 살지만 애굽에 살면, 육신적으로 배불리 먹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 하면 당시 유대인 들이 살던 지역은 소돔과 고모라 땅처럼, 애굽에서 가장 기후와 토양이 좋은 고센지방 (나일강 삼각주지역)이였기 때문이지요. 오늘날도 자본주의 논리를 좇아 서로 속이고, 남과 악착같이 경쟁해서 이기고 딛고 올라가야 물질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세상의 방식을 좇아가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 때 우리가 풍요로울 수 있음을 만나 사건을 통해서 보여주십니다.

  물론 우리가 물질(우상)을 좇아 살면 더 많은 물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물질(욕심)을 쫏을 수록 (야고보서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야고보서 4:2)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결국은 물질의 노예가 그래서 더 많은 물질을 끊임없이 탐하거나, 없으며 불안해하고, 있으면 교만해지고 맙니다.

  그러나 이제 이 세상은 점점 아모스 선지자의 예언처럼 (아모스 8:11이하)“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영적인) 기근을 이 땅에 보내리니 (사람들이) 양식이 없어 굶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 “아, 이 일용한 양식이 단지 육체적인 (물질적인) 음식만을 구하는 기도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3. 일용할 양식으로만 만족하는 삶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인생의 문제는 너무 많이 쌓아두는 데 있습니다. 자기에게 불필요한데 자꾸 쌓아둡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아프리카에는 수천만명이 굶어 죽는데 미국은 음식물 쓰레기가 차고 넘치기 때문에 쌓아두기 때문에 한쪽은 굶고 다른 한쪽은 다이어트(살을 빼느라)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문제는 (호13:6)“그들이 배가 부르니 마음이 교만하여 나를(하나님을) 잊었느니라!”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물질을 의지하는 삶을 산다는 점입니다. 곡간에 곡식이 가득하면 안심이고 그렇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물질 의존적 (황금만능주의; 돈이면 뭣이든 다 된다!) 오늘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돈 때문에 부모와 자식, 형제들간에, 친구지간에 원수가 됩니까?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재물을 의지하려 함으로, 마음이 요동하며 근심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평생 먹을 양식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지 않으시고 일용할 양식으로 한정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일용할 양식으로 한정하신 이유가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 우리는 물질에 있는 함정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읍니다.

  첫째, 욕심이 지나쳐서 물질을 쌓아 놓기만 하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 진정한 안식(평안)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은, 변전하는 자연계 안에 살고 있고, 내일을 알 수 없기 때문에, 또 죽음의 문제 앞에서 모두가 다 불안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의지할 대상을 찾게 됩니다.

  (누가복음 12:16-21)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평생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쓸 것을 쌓아 놓고, 그 것을 의지하며 안심하고 살기를 원합니다. 재물이 많으면 더 든든한줄 알고 되도록 이면 많은 재물을 얻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포도주와 곡식과 기름을 넘치도록 쌓아 놓아도 불안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런 life style에 있는 함정은 불안이 지워지지 않는다는데 있읍니다. 평안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재물로서는 안식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둘째로, 하나님 보다 물질을 의지하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진정한 만족이(행복이) 없습니다. 부자는 항상 돈 계산하기에 바쁩니다. 남보다 일을 더 많이 해야 하고 신경 쓸 일이 몇 곱절이나 많습니다
(마태복음 6:31이하)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예수님은 무엇을 먹을가 무엇을 입을가 염려하는 것은, 이방인의 삶의 스타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살면서 모든 만날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다 예비해 놓으시고, 우리를 부르셨읍니다. 우리가 이 믿음을 가지고 있을 때 우리는 믿음으로 안식합니다. 믿음으로 온전한 안식이 이루어지면, 삶의 짐으로 부터 해방되어, 거기서 부터 새로운 힘이 옵니다. 그럴 뿐만 아니라 믿음으로 인하여 어떤 상황이라도 헤쳐 나갈 수 있는 능력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땅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나라 시민권자의 삶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먹을가 무엇을 입을가 염려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의 스타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너의 필요를 다 예비하고 계십니다. 이것을 믿을 때 염려 근심으로 부터 우리는 해방됩니다. 에수님은 우리가 이런 믿음으로 살 것을 강하게 명하십니다.

  셋째로, 사람은 연약하여 하나님 보다 자꾸만 물질을 의지하려 하고, 그것에서 행복을 찾으려는 함정(착각)에 빠지기 쉽기 때문에, 하나님은 일상적인 필요에서 부터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게 하기 위해 일용할 양식으로 한정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전도서 5:18 이하) “사람이 하나님의 주신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기쁨, 행복)을 누리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이것이 그의 분복(축복)이로다!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그런 즐거움은 하나님으로 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잠언 30장 7절 이하에 보면 아굴이라는 사람은 다음과 같이 기도합니다)“하나님이여!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왜 이런 기도를 드렸을까요? (빌립보서 4장 11절이하에)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자기가 소유한 것을 의지하려는 마음을 버리고, 모든 필요를 하나님을 의지하려 하는 사람은 어떤 형편에서든지 자족할 수 있는 이런 비결을 배운 사람은 어떤 환경에서도 만족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하루하루를 감사하십시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시고!” (마태복음 6:12)

예수님이 가르쳐주신‘주기도문’ 가운데 오늘 우리가 공부할 내용은‘죄 용서를 위한 기도’인데 9절부터 13절까지 주기도문이 끝나고 14-15절에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렇게 주님께서 용서에 대해서만 추가로(따로) 언급한 것을 볼 때, 오늘 기도의 내용이 대단히 중요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이 주기도문을 하기를 무척 꺼려했습니다. 
바로“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구절 때문이었습니다. 
자기가 정말 미워(싫어)하는 사람이, 한 사람 있는데 이 사람을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주기도문을 할 때마다 자꾸만 이 구절이 마음에 걸렸던 것입니다.
그래도 이 사람은 상당히 순수한(솔직한)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 23절에)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사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고 미움을 품은 채로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배를 드리고 주기도문을 반복합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도 않으면서 자신의 죄만 용서해 달라고 주기도문을 반복한다면 그것은 마치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여 주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지 마옵소서!”라고 간구하는 것과 같다는 말이지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여 준 것같이” 

이웃을(형제를) 향한 나의용서

우리의 죄를 사(용서)하여 달라고 기도하면서 한 가지 조건이 붙어 있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되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들을 용서하여 준 것과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Forgive us our debts, as we also have forgiven our debtors!)라고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묵상해 보겠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에서, 왜‘죄(sin)’이라 그러지 않고 ‘빚’(debt)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을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의 죄가 마치 빚처럼, 상대방에게 손해를 주고 큰 부담을 준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죄가 상대방,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또한 ‘사람의 관계’에서 반드시 갚아야 할 빚처럼, 부담을 주고, 아픔을 주고 때때로 고통(멍애)를 주니까, 
“그냥 용서를 해버리면 그 문제가 속 시원히 해결 되버린다!”
바로 빚(debt)진자를 용서(forgive)하듯이, 우리의 죄(sin)도 그렇게 하여 주옵소서!” 는 뜻이지요

마태복음 18:23-35에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왕(하나님)에게 10,000 달란트를 빚진 부하가 있었습니다. 
1달란트가 금 34Kg 200만불(20억)정도입니다. 
2,000,000,000 x 10,000 =?
어떻게 하다 이렇게 많은 빚을 졌는지 모르지만, 상식적으로 일만 달란트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액수입니다. 
(우리의 죄 값이 사망이라고 그랬으니까 얼마나 죄 값이 비쌉니까?) 
그런데 왕이 네 처자와 모든 소유를 다 팔아 이것을 갚으라고 그랬습니다. 
그러니 이 사람이 임금 앞에 얼마나 간절히 엎드려 간청합니다.

그저 할 수 있는 말이 조금만 참아달라고 어떻게 해서든지 갚아 보겠다고 애원을 합니다. 그런데 왕(하나님) 이 사람(우리)의 모습을 보고 불쌍한 마음이 들어서 탕감해 줍니다. 이 사람의 기쁨이 얼마나 크겠어요. 하늘을 나는 것 같지 않겠어요. 그 임금에게 얼마나 감사 하겠어요... 그런 이 사람이 감옥에서 나가면서 마침 자신에게 빚진 어떤 사람을 길에서 만납니다. 그 사람은 이 사람에게 100 데나리온 (100일의 일당) 의 빚을 진 사람입니다. 백 데나리온은 $ 6,000 정도의 액수입니다.

  이 사람은 방금 전에, 왕(하나님)으로부터 10,000 달란트의 엄청난 빚이 탕감되었습니다. 그런데
고작 100 데나리온 때문에 그 사람의 멱살을 잡고 빚을 당장 갚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참아달라고 애원하는 그를 감옥에 가두어 버립니다. 이 일이 왕에게 들려졌습니다. 이윽고 왕이 이 사람을 불러다가 뭐라고 했습니까? 이 대목이 중요합니다.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형제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마18:32-33) 기가 막힌 말씀입니다. 그리고 왕은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감옥에 다시 가두어버립니다. 그런데 이 비유의 가장 중요한 말씀은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이 하시고자 했던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이렇게 가르친 주기도문이 마태복음 6장 13절에서 끝나고 계속해서 마태복음 6장 14-15절에 “이처럼(왕의 신하처럼) 너희가 사람(형제)의 과실(잘못, 허물, 죄)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하나님)
께서도 너희의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과실을 용서치 아니하시리라!”사람의 과실(실수)을 용서하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아무리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 해 봤자, 우리의 죄가 용서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앞에 내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수없이 기도하는 우리들에게 이 말씀은 실로 부담이 되는(양심을 찌르는)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동안 우리가 얼마나 남을 용서도 하지 않은 체로, 그냥 기도하고 살았는지를 깨닫게 해주는 말씀입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에서 보듯이 우리는 하나님께 엄청난 빚을 탕감(면제), 받은 사람들입니다.
나에게 죄를 지은 자의 빚이 나에겐 크다고 생각할지는 모르나 하나님께 용서받은 것에 비하면 너무나 작은 것에 불과합니다. 책망 받은 종이 탕감에 인색했던 것은 자신이 임금으로부터 탕감받은 것에 대한 고마움과 그 사랑을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서 살아나온데 대한 감사와 감격)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용서하라!”(골3:13) 그러므로 이제 우리 서로의 죄(빚)를 사(용서)하여 주는 것 즉 서로의 빚을 탕감하여 주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7:3절에“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누가복음 6:37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마태복음 18:21-)“그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마태복음 5장 44절 이하에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원수를 사랑 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우리 인간들은 내가 상대방으로부터 상처를 받았을 때 어떻게 보복할 것인가를 항상 먼저 생각합니다.
“저 사람이 왜 나한테 이럴까? 왜 나를 괴롭힐까?” 그 사람이 나에게 상처를 준 데에는 반드시
그럴만한 원인이(이유가) 있습니다. 그 사람의 마음의 상처 때문에 그럽니다.

  그래서 우리가 상대방을 완전히 이해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사람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접 그 사람의 처지가 되어 살아 보아야 하고, 그 사람의 마음 속의 상처,
아니 꿈속에까지 들어가 보아야 할 겁니다. 그렇지만, 엄밀히 말하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는
늘 상대방의 자존심을 건드리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누군가로부터 상처를 받으며 살아갑니다.

  용서(사랑)는 우리 신앙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영원히 멸망의 길로 갈 수 밖에 없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해서 몸소 지고 가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그렇기에 그것은 나의 선택이나 권면이 아닙니다. 바로 용서는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이고 또한 남에 대해 우리에게 그렇게 하시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진정한 용서는 어쩌다가 남을 한번 용서하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계속 용서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용서하는 기도를 듣고 한 강도가 변화된 것처럼, 스데반의 용서의 기도가 바울을 변화시킨 것처럼, 내가 먼저 용서하면 그 사람도 변화가 되는 것입니다. 용서하면 용서와 축복의 열매를 내가 받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용서하는 사람이었기에 자손만대에 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요셉도 용서의 사람이었기에 끝까지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미국 문필가 마크 트웨인은 “용서는 자기를 짓밟는 사람에게 향수를 뿌려주는 풀꽃 향기와 같다”고 했습니다. 그처럼 용서는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행복하게 해주는 지름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손을 내밀어서 남을 진심으로 용서해 줄때, 그것이 바로 우리를 위해 대신 지고 가신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실천하는 길입니다.

용서 한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랑은 용서하는 것입니다. 나를 해롭게 하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만큼 위대한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용서는 사랑의 완성입니다. 그러므로 끊임없는 용서의 실천을 통해 우리도 예수님처럼 점점 완전해 질 것입니다

    2.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용서

  우리가 진심으로 예수를 믿고 신앙을 고백하는(거듭나는) 순간이미 모든 죄를 용서받은 자녀가 왜 날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함을 받아야 하는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기도 할 때마다“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고 기도해야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주기도문에서 요구하는 죄 사함의 기도는,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미 용서받고, 구원받은 근본적인 원죄를 위해 기도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우리 성도들이 이 세상을 살면서 어쩔 수 없이 예수를 믿은 후에도 계속 짓는 죄들 (자범죄, 자기스스로 범한 후천적인 죄들, 때로는 알면서도 믿음이 약해서, 때로는 나도 모르게 죄를 짓는 수가 많습니다) 그때그때, 죄 사죄함을 받기 위한 기도입니다.

  주님은 이것을 제자들에게 목욕과 발을 씻는 비유로 설명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3:10(전반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유대(이스라엘) 사람들은 중동사막(물이 귀한) 지방이기 때문에 환경적으로 목욕을 자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길에 너무 먼지가 많아서 발만은 자주 씻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이치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용서(구원, 영접)를 체험한 사람은, 즉 그리스도인은 이미 목욕한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가지 말아야 할 곳을 갔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했고, 만지지 말아야 할 것을 만졌기 때문에, 우리의 삶 속에서 더러워진 자신의, 손과 발을 씻는 것과도 같음입니다.

  원죄가(예수를 믿지 않았던 죄) 예수를 영접함으로 예수의 보혈로 용서함을 받았어도, 마치 우리가 숨을 쉬면 먼지가 우리의 코 속으로 들어오듯이, 타락한 이 세상의 죄가 손을 씻어도 더러운 것을 만지면 다시 손이 더러워지듯이, 이 세상이 온통 죄로 오염이 되어 있어서 날마다 죄를 짓지 않고는 살 수가 없는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세수를 하고 샤워를 하고 목욕을 하고 음식을 먹기 전이나 화장실에서 일을
본 다음에 손을 씻듯이 기도 할 때마다 그날 지었던 죄를 씻고 다시 죄를 돌아보면서 죄를 짓지 않고 바르게 살려고 노력을 해야 하고 우리의 지은 죄들을 하나님께 고하고 용서를 받고 다시는 그런 죄에 빠지지 않도록 믿음으로 무장 해야 합니다. 그것이 주기도문에서 죄를 사하여 달라고 기도하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주 기도를 다른 말로 ‘하나님의 자녀가 드리는 기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미 아버지 안에서 용서받은 자녀가 날마다 자신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 앞에서 영적으로,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날마다 나의 죄를 십자가에 못 박는” 날마다 새로워지는 기도인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우리는 자신의 연약함을 가지고 날마다 하나님 앞으로 한 걸음씩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실 필요가 전혀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냥, 노아 홍수 때처럼, 소돔과 고모라처럼 정죄해서, 우리 인류를 심판하신다고 해도 우리가 아무런 변명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죄로 말마 암아 죽을 수 밖에 없는 나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한 나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3. 용서의 축복

  1) 용서는 기쁨을 회복시킵니다! 죄는 우리 마음에 기쁨 말살합니다. 죄를 짓고 나면 기쁨이 사라지고 남의 죄를 용서하지 않고 품고 있어도 기쁨이 사라집니다. 마음에 기쁨이 없다는 증거는 아직 증오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을 용서할 때 내 마음에 기쁨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2) 용서는 교제(관계)를 회복시킵니다! 용서는 용서 받은 사람과 교제를 회복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서로 용서할 때 하나님과의 더 친밀한 교제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3) 용서는 사탄의 궤계를 파합니다! 사탄은 서로 용서하지 못하게 하여 사람들과의 평화를 파괴하고 하나님과의 평화를 파괴하려고 합니다. 용서를 하는 것은 이런 사탄의 계략을 파괴하는 일이 됩니다.
용서를 할 때 사탄이 틈을 타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서로의 죄를 용서해 주고 탕감해 줌으로서 참된 자유와 평화와 축복을 누리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For thine is For thine is the kingdom, and the power, and t

주기도문의 7가지의 기도 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②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③ 아버지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옵시며 ④ 아버지의 뜻이 하늘나라에서 이루어 진 것처럼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옵시고 ⑥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해 준 것처럼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옵시고 ⑦ 우리를 시험에 들에 하지 마옵시고 다만(모든) 악에서 구하옵소서를 마치면,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이렇게 마지막 마무리로 주님을 향한 경배와 찬양(adoration & praise)이 터져 (우러) 나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배울 이 송영(마지막 노래)은 간구(기도)가 아니라 하나님께 찬양의 고백을 드리는 것이 송영(대영광송)입니다.

  그런데 한글 주기도문에 보면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로 되어
있는데, 오늘 마태복음 본문에 없는 단어 ‘대개’가 더 들어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주기도문을 낭송하면서도 ‘대개’라는 뜻이 뭔지도 모르고 반복할 경우가 많습니다. ‘대개’ 란 말은 헬라어 원문으로는 ‘호티’인데 그 뜻은 “왜냐하면?”이라는 논리적 이유를 설명하는 접속사입니다. 영어에서는 for로 번역하고 있습니다.‘대개’는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 이유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만 영원히 있기 때문 이나이다!”라는 뜻입니다. 이는 첫째로, “모든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오직 주님의 것입니다!”라는 소유권을 인정하는 고백이며, 둘째로, “주님은 마땅히 우리의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받으실 자격이 있나이다!” 권위(왕권, kingship)를 인정하는 고백입니다.

  1. 이 송영 부분에서 제일 먼저 “나라가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고 찬양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하나님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그 나라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거룩한 나라(Kingdom of God)가 영원히 아버지의 것(소유)임을 인정하는 찬양입니다. “나라가 영원히 하나님의 것”이라는 송영은 다시 한 번 “내가 어디에 속한 것인지?”를 확인하는 고백입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왕도, 그 어떤 것도 나의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이 나를 다스리시고 나를 인도해 주시는 나의 왕, 나의 주인으로 고백하며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나라는 영원히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고 찬양하는 순간, 우리는 “지금까지 내가 잘못 붙잡고 있었던 나라들을 포기하겠나이다! 나를 다스리고 있는 잘못된 것들(우상)들을 포기하고, 내가 그동안 주인 삼고 있었던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이제 이후로는 오직 영원하신 하나님 한 분만 붙들겠나이다!” 라는 고백입니다. 하나님나라는 모든 어둠과 악의 세력들이 물러가고, 100% 거룩과 사랑과 정의(공의, 공평)와 평화와 축복만이 가득한 나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나라에는 눈물이 없고, 슬픔과 고통과 한숨과 절망과 탄식과 이별과 가난과 질병과 아픔과 시기 질투도 없고 오직 사랑하며 참된 평화(행복)를 누리는 완전한 나라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이 세상에서 편안함을 추구하고 인생의 만족을 누린다고 해도 누구나 인생의 쓴맛, 아픔과, 고난을 경험하게 됩니다. 때론 그것이 너무도 힘이 들어서 삶을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고, 서로 더 많은 물질(이권)을 차지하기 위해 싸우고 나라끼리 전쟁을 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야, 이 지긋지긋한 세상 빨리 죽고 싶구나!”라고 탄식 할 정도로 불행과 고난과 아픔(슬픔)만이 있을 수도 있는 것이 바로 이 세상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축복의 사람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내 나그네의 인생길이 130년이나 험악한 세월을 살았나이다!”강건하여 조금 더 건강히 사는 자나, 조금 약하게 사는 자나, 좀 잘 먹고 잘사는 자나, 좀 덜 먹고 못사는 자나, 지나고 나면, 다 그저 그렇고, 역시 인생은 험한 나그네 인생길일 뿐 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구속받은 성도들이 영원한 자유와 기쁨과 평화와 안식과 사랑과 자비와 인자와 긍휼을 누리는 완전한 나라입니다. 그래서 시편 145편 13절에“주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니 주의 통치는 대대에 이르리이다!”하나님의 나라는 과거와 현제와 미래 속에, 영원히 존재합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우리의 예배가운데, 우리의 심령 속에 임하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생각과 말과 행동은 이 세상 사람들과는 차원이 달라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안개와 같고 이슬과 같은 이 세상에서 무얼 먹을까? 무얼 마실까? 무얼 입을까? 전전긍긍 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갈망하고 소유하는 믿음으로 눈앞에 보이는 작은(사소한) 일에 시기질투하고 분노(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갑니다♬ 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크고 강한 믿음으로 지혜롭고 강하고 담대하게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게 임합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믿음의 고백을 통해 성령으로 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과 통치를 믿음으로 고백할 때,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8장 20절에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두세 사람은 아주 작은 수입니다. 그러나 그 적은 수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며 은혜로운 찬양과 능력 있는 말씀과 성령이 임재 하는 뜨거운 기도로 예배를 드린다면, 그곳에 예수님이 함께 하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그곳이 광야이든 산꼭대기이든 도심한복판이든, 찬송가 438장 3절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주님에 대한 찬양과 말씀과 기도와 사랑의 고백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지금 이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해 있는 것입니다. 그 나라는 우리만 누리는 나라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고 세상 사람들이 우리와 같은 믿음으로 성령님을 인정하고 모셔드릴 때에,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고, 하나님의 용서와 화해와 사랑이 임할 때,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만일 베드로와 바울이 복음을 전파하지 않고 그냥 교회 안에만 머물렀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그들이 모여 있던 예루살렘으로 제한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바울을 비롯해 수많은 전도자들이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도 확장되어 가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2장 2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자를 고쳐주신 후에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누가복음 17장 21절 이하에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 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라는 말은 하나님의 나라는 장소적인 문제가 아니라‘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 심령에서, 가정에서, 교회에서 이루어, 내 삶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아야 하는 것이지요.

  2. 두 번째 송영은 “권세가 아버지께 영원히 있습니다!”입니다.

  하나님의 권세 즉 능력은 almighty 전지전능입니다. 권세는 두나미스(Dunamis)‘파워(power)’
입니다. 영어의 “다이나마이트”(dynamite) 라는 말이 이 단어에서 파생되었습니다.“힘 power, 의지적인 능력, ability, authority, 성령님의 권능, 강력 strength, 놀라운 일, 폭발적인 기적”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천둥 번개와 지진처럼 우주를 다스리는 하나님의 권세(권능)입니다. 지금 이 시간도 하나님은 당신의 전능하신 능력(천둥, 번개, 지진)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온 우주를 통치하시고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래서 모든 권세와 능력이 영원히 하나님께만 있다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권세는 사람을 억누르고 짖밟고 결국 따지고 보면 자신의 명예와 이익만을 위해 사용하지만 예수그리스도의 권세는 마귀를 멸하고, 우리를 사랑하시고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권세입니다.
이 세상의 권세 (능력, 힘)은 자기보다 더 힘센 사람이 오면 무너질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의 권세, 성령의 권능은 아무리 자기보다 힘이 더 강한 자라도 그 권세 앞에는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습니다. 빌립보서 2장에 기록한 예수님의 권세를 보십시오. (빌립보서 2장 9절이하)“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이 세상에는 3가지 종류의 인생들이 삽니다. 첫째는, 사단의 힘을 빌어 인생을 사는 사람(무당, 점쟁이, 우상숭배자, 이단 숭배자, 범죄자들)이 있습니다. 둘째, 자신의 힘을 빌어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무신론자, 불신자)이 있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능력을 힙 입어, 주안에서 주님과 함께 사는 사람(우리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6:18)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주시며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요한복음 15:5)“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고 기도하면 큰일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4장 13절에“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 이하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8장 18절 이하에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사도행전 1:8)“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린도전서 4장 20절에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예수님은 누가복음 10장 19절에“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코 없으리라!”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삶의 능력은 바로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우리의 삶에 나타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권능이 터져 나오는 은혜를 경험합니다. 그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우리의 삶과 공동체(가정 & 교회)에서 일어나는 그때에 비로소 회복과 치유가 일어납니다. 지난주에 ⑦ 우리를 시험에 들에 하지 마옵시고 다만(모든) 악에서 구하옵소서
우리가 시험에서 이겨낼 수 있는 비결은 시험 자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왜냐하면 삶의 문제 속에서, 도무지 앞을 볼 수 없는 답답한 상황 속에서, 어찌할 수 없는 유혹과 시험 속에서 우리가 눈을 돌려 하나님을 바라볼 때에, 이 하나님의 권능이 우리를 붙잡아 주고, 회복시키고, 치유해 줍니다. 이것이 회복의 유일한 방법입니다. 하나님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권세는 영원히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것을 기도하는 동안 우리는 하나님의 권능이 내 삶에 능력으로 나타나서, 그 안에 있는 기쁨과 회복을 경험하기를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3. 송영의 세번째 주제는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라고 찬양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에 영광이 가득하게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우리 하나님은 그 이름이 영원히 높임을 받고 영원히 경배와 영광을 받으실 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의 나타남이며, 그리스도의 이적과 그의 인격, 그의 생애는 하나님의 영광의 결정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만 속해 있습니다. (이사야 42:8)“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은 결코 자신의 영광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지 않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하나님의 것!”이라는 송영은 위대한 찬양인 동시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를 한 가지만 꼽으라고 한다면 그것은 이사야서 43장 21절“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고린도전서 10:31“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는 것이 인간을 창조하신 유일한 목적입니다. 주기도문의 마지막 송영은 이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모든 영광은 영원히 주님의 것입니다!” 나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가겠다고 결단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순간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보통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삽니다. (1) 죽지 못해 살거나, (2) 가족의 생계를 위하여 산다고 합니다. 요즘 많은 학생들의 관심이 돈, 권력, 그리고 인기 등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은 사회에 기여하기 위해서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일신의 영달과 돈과 명예와 권력이 생기기 때문에 공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드셨고, 이 땅에 살게 하셨는데, 정작 사람들은 자기들이 왜 사는지 그 이유를 모르고 살아갑니다. 그처럼 사람들이 자기의 고집과 마음대로만 살아가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는커녕 대항하는 결과가 되고 맙니다. 부모가 자식을 낳아서 길렀는데, 자식이 부모의 사정이나 생각도 모르고 자기 멋대로만 살아간다면 불효자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벧전1:24-25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모든 이 세상 영광은 마치 들의 풀과 같고 풀의 꽃과 같은 영광에 지나지 아니하는 것이다. “무화는 십일홍”이라는 말과 같이 아무리 화려한 꽃이라 할지라도 열흘 정도면 모두 시들어버리고 떨어져 버리는 것이 바로 우리의 인생이며, 이 세상의 영광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삽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자 하는 삶의 목적을 잃어버린다면 망망대해에서 나침반 없이 항해하는 배와 다르지 않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육신적인 삶으로 향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성도님들의 결코 빈부귀천이 없습니다. 모든 직업이, 모든 일들이, 다 목사의 성직처럼 동일한 가치가 있고 거룩하고 소중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할지 잘 모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5:8에 우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일차적으로 우리 내면의 성령의 열매이고, 이후에 다른 사람을 향한 구원과 전도의 열매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피아노를 만들기 위해서 설계를 했다고 합시다. “도 자리는 여기, 레 자리는 여기, 미 자리는 여기!” 라고 다 맞추어서 공장에 맡겼는데, 다 만들어지고 나서 건반을 두들겨 보니
음이 전혀 맞지 않고 제멋대로라고 한다면 그 피아노는 처음 설계한 사람의 영광은 말할 것도 없고 나머지 모든 것을 망쳐 놓은 것입니다. 피아노는 설계한 사람의 뜻에 맞는 소리를 내야 합니다.

  우리는 송영에서 마지막으로 이렇게 기도합니다. “영광은 영원히 하나님의 것입니다!” 주기도문을 마치면서 이 당연한 기도를 우리는 생각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영광은 하나도 나의 것이 아닙니다. 모든 영광은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우리 삶의 모든 목적과 가치와 존귀와 찬송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나는 없어지고 하나님만 보이는 것입니다. 나는 낮아지고 하나님만 높아지는 것입니다! 나는 쇠하고 하나님만 흥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도, 우리가 살아가는 삶도 하나님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의 남은 인생, 이 땅이 아니라 하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음을 고백하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And le (And lead us not into temptation, but deliver us

내 영혼이 .. | 블로그
9~11분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문에서 내 자신을 위한 기도 가운데에, 마지막으로 가르쳐 주신 것이 오늘 본문인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입니다. 우리 자신들을 위한 기도에서 예수님은 첫째로, 우리 영혼의 양식(말씀)과 육신을 위해서 일용할 양식(daily bread)을 구하라고 하셨고, 둘째로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는 용서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우리들이 악한 이 세상에서 천국에 갈 때까지 악에 물들지(빠지지) 않도록 영혼의 순결(거룩)을 위해 두 가지를 기도하라고 말씀하시는데 그것이 바로 ① 시험에 들게 하지 말라는 기도와 ② 악에서 구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우리의 크고 강한 믿음을 지키는 (보호, 유지)하는 기도입니다.

  1. 그러면 첫 번째 내용인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lead us not into temptation)”
는 무슨 뜻일까요?

  이 부분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두 가지 종류의 시험이 있음을 구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크게 두 가지 종류의 시험이 나와 있는데 ① 하나는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test & trails)과 또 하나는 ② 마귀 (사단)이 주는 시험(temptation)입니다. 야고보서 1장 2절에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tests & trails)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고 말씀하실 때 이 믿음의 시련은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test & trails)을 뜻합니다. 즉 우리에 인내심을 키워 믿음을 더 크게 만들어 주려는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에서 주시는 시험입니다

  반면, 마귀(devil, demon) 사단(Satan)이 주는 시험(temptation)도 있습니다. 마귀 사단은 우리를 끊임없이 유혹하고 시험에 빠지게 해서 넘어지게 합니다. 전자는 선한 목적에서 주신 하나님의 시험(test & trails)이므로 이런 시험을 만나면 비록 힘들지라도 이겨내기만 하면 우리 믿음이 커지므로 오히려 기뻐(감사)하라고 가르쳤는데 반면 후자인 마귀 사단의 시험(temptation)은 우리를 넘어뜨리고 죽이려는 악한 목적에서 주는 시험(유혹)이므로 (찬양과 말씀과 기도로) 항상 영적으로 무장하고 깨어있어서 넘어지지(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첫째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온갖 시험의(유혹, Temptation) 지뢰밭(mine field)입니다. 누가복음 22장 40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서 기도하실 때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Pray that you will not fall into temptation)”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은 마치 공중에 떠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먼지처럼 상상할 수 없는 온갖 종류의 유혹들이 떠돌아다니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영안이 활짝 열려서 그(죄악, 더러움)것을 다 볼 수 있다면 정말 우리는 놀라 몸서리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험(test)도 주시고 시련(trails)을 주시고 고난(suffering)과 역경(difficulties)도 주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test)하시는데 우리가 시험(temptation)에 들게 하지 말라고 기도한다면 모순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그래서 이 기도와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관계가 되어 있는지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2-3을 보십시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test & trails)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믿음을 위한 시련’이라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둘째, 시험(trails, 연단, 훈련)없이 자란 신앙은 마치 훈련 받지 않는 군인이 전쟁터에 나가는 것처럼 위태(연약)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시험(trial)이란 죄에 빠지게 하는 유혹(temptation)이 아니라 믿음을 키우기 위한 연단(disciple, practise, exercise, drill)이요 시련(trails)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련이(고난의 훈련)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온실에서 자란 꽃이 아니라 모든 풍상(비바람)을 겪고 자라난 소나무와 같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시련들은 그것이 환경적으로 오는 것이든, 어떤 사람은 병을 통해서, 어떤 사람은 사업의 부도를 통해서, 또는 상상할 수 없는 환경적인 어려움을 통해서, 인간관계를 통해서 시련(spiritual depression)을 받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시련을 허락하셨는데, 마귀에게 “그의 생명만 건드리지 말고 모든 시련을 그에게 주어 보아라! 그래도 내 종 욥은 나를 배반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시며 제한적인 시련을 욥에게 허락하셨던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1장 12절에 시험(trails)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trails)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시련 없이 자란 신앙은 연약합니다. 때로는 우리가 잘했건 잘못했건, 원하던 원하지 않던, 여러 가지 관계 속에서 시련(trails)과 고통(sufferings, difficulties)을 통과하게 됩니다.

셋째, 학생은(성도, 제자) 반드시 시험(test)을 쳐서 합격 해야만합니다. FDA마크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물건을 살 때 FDA(Food and Drug Administration)마크가 있으면 안심하고 삽니다. 그것은 국가가 인정한 기관에서 그 상품의 품질을 보증하는 표시입니다. 그러나 FDA마크를 얻기 위해서는 실제로 시험(test)을 거쳐야 하고 그 후에 합격이 되면 비로소 FDA마크를 붙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모리야 산에서 독자 이삭을 바치는 시험을(test) 치게 하셔서 믿음의 조상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시험을 받게 한 후 보증(인정, 인증)을 주신 것입니다. 이 시험은 우리에게 유익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시험(test)을 만날 때 기뻐하라고 했고 시련(trails) 속에 있을 때 감사하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시련을 통해 우리의 신앙을 성장시켜 주고 그것을 통해 더욱 천국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시험에 들지(빠지지) 말게 하옵소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이끌어 주소서”(And lead us not into temptation),라는 기도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믿음을 연단(upgrade)시켜 주는 시련(trials)이나 시험(test)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유혹(temptation)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1:13에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유혹)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유혹)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유혹)하지 아니하시느니라! When tempted, no one should say, “God is tempting me!” For God cannot be tempted by evil, nor does he tempt anyone;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더욱 크고 강하게 연단(훈련, upgrade)시키기 위하여 시험(test)을 하시고 시련(trial)을 주시지만, 우리를 골탕 먹이기 위하여 죄에 빠지도록 유혹(temptation)의 덫을 놓는 분은 아니십니다. 그러면 사람이 죄에 빠지는 유혹을 받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야고보서 1장 14절 이하에“오직 각 사람이 시험(유혹)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우리가 시험에 빠지는 가장 중요한 근거(이유)는 순전히 자기 자신의 욕심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인간을 지배하고 있는 탐욕, 욕심 때문에 모든 범죄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시험(temptation)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고 기도하라 말씀하신 그 참뜻(그 이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죄에 빠지게 될 사단의 모든 유혹에서 벗어나게 해달라는 기도이고, 한걸음 더 나아가 유혹의 근원인 욕심에서 해방되게 (떨쳐버리게) 해달라는 기도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지나친 욕심(과욕)에서 벗어나, 자기 분수껏 지혜롭게 산다면 얼마나 정직하고 깨끗하고 자유롭게 감사함으로 자족(만족하며) 이 세상을 행복하게 살 수 있겠습니까?

왜 부부싸움을 합니까? 그것은 남편이나 아내가 어떤 욕심(이기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남편을 자기 욕심(욕망, 욕구)을 채워주는 대상으로 보거나, 아내를 자신의 기분이나 맞춰주는 도구(종)로 보기 때문입니다. 왜 자녀들과의 관계가 복잡할까요? 그것은 자녀를 한 인격체로 대하는 사랑(존경, 사랑)의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왜 교회에서 말이 많을까요? 그것은 봉사나 헌신이 없어서가 아니고 자신이 인정받고, 박수 받고, 존경 받고, 칭찬 받고 싶어 하는 사심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 주님만 바라보고, 예수이름으로 믿음으로 봉사하는 사람에게는 잘되어도 문제가 없고 못되어도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하나도 없는데, 사심과 욕심으로만 가득 차게 되면 잘되어도 (교만) 문제가 되고 못 되어도 (불만) 문제가 됩니다. 그러므로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는 뜻은 “나의 욕심을 갖지 않게 해주시고, 나의 사심을 제거해 주시고, 나의 의견이나 생각만을 내세우지 않게 해주시고”라는 말로 바꾸어 말할 수도 있습니다.“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에서 하나 더 생각해 보면 그 기도는 “주여! 내가 감당할 만한 시련을 주시옵소서!”라는 기도인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13에 보면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사람들이 잘 받는 유혹(temptation)은 무엇입니까? 세 가지가 있는데 ①육신의 정욕, ②안목의 정욕 ③이생의 자랑입니다 (요일 2:16)“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For all that is in the world, the lust of the flesh, and the lust of the eyes, and the pride of life, is not of the Father, but is of the world.

  첫째는 the lust of the flesh (육신의 정욕입니다)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육신의 문제로 오는 유혹입니다. 사라들이 남보다 더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기 위해 또한 육신의 쾌락을 위해 범죄를 저지릅니다 이 문제에 대해 예수님은 마태복음 6:33에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입히시고 먹이신다는 확신(믿음)이 없을 때 우리는 세상 물질의 유혹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the lust of the eyes (안목의 정욕입니다)이것은 정신적으로 오는 유혹인데 우리의 눈을 만족시켜 주는 모든 것들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별것도 아닌데 스스로 자기 눈을 높여, 무엇으로도 그 수준을 만족시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셋째는 and the pride of life (이생의 자랑입니다) 이것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하는, 교만과 명예욕 그리고 자기 자랑입니다. 즉 자기만이 최고이고 자기 판단만이 옳다고 하는 생각(교만)에 빠지는 유혹입니다.

2. 두 번째 간구는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but deliver us from the evil)입니다.

  여기서 ‘다만(but)’이란 말이 참 생소합니다. 이것은 헬라어로 ‘알라’ 즉 ‘그러나, 도리어, 뿐만아니라(not only but also), 오히려(rather than)’라는 뜻입니다. 즉 앞의 내용과 연결해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실 뿐만 아니라, 도리어(오히려) 우리를 악에서 구하옵소서!”이것은 우리를 악에서, 즉 사단의 공격에서 보호하고 지켜주시고, 혹시 빠졌더라도 deliver 건져달라는 간구입니다. 시험에 들게 하지 말라는 기도가 소극적인 기도라고 한다면 이 기도는 본질적으로 더 적극적인 기도입니다. 여기서 악이라고 말할 때는 두 가지 의미로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악한 사단(영적 싸움)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달라는 뜻이고, 또 하나는 악한 사단의 영향력과 지배를 받고 있는 악한 거짓말하고 속이는 무리들로부터 우리를 구해 달라고 하는 뜻입니다. 이 지상에는 공중권세 잡은 사단이 우는 사자처럼 택한 자일지라도 집어 삼키려고 합니다. 사단은 십자가에서 영원한 패배를 하였으나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마지막 발악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운명은 저주와 심판입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마귀의 궤궤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했습니다. 사단은 예수 이름으로 대적하고 물리쳐야 합니다. 우리 주위에는 하나님의 백성을 유혹하여 죄를 짓게 하는 온갖 더러운 것들과 악한 자(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을 갖도록 유혹하며, 주일날 교회에 못가도록 골프나 다른 모임으로 유혹하기도 합니다. 또한 가정에 들어와 부부지간 부자지간에 부정(불신)으로 가정을 파괴 하고 신앙(교회, 목사)을 비판적(부정적)으로 말함으로써 성도들 끼리, 목사와 성도를 갈라놓고 교회를 떠나게 하고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부정적인 말만 함으로써 신앙에서 떠나도록 유혹합니다. 그러나 사단은 너무도 교묘하고,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기 때문에, 사단에게서 벗어나는 것, 또 악한 친구들, 악한 세력, 악한 조직에서 벗어나는 것은 우리의 힘으로는 안됩니다. 깡패 조직에서 살다가 빠져 나온 사람들의 간증을 들어 보면 얼마나 무서운 대가를 치루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손을, 또는 발을 잘리기도 하고, 눈을 하나 잃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빠져 나오는 것은 자유로이 안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닭 키워 보셨습니까? 닭에게 왜 모이를 줍니까? 그것은 알을 먹거나 잡아먹기 위함입니다. 돼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습니다. 악한 세력 역시 우리에게 돈도 주고, 성공도 주고, 명예도 주지만 그 목적은 잡아먹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들의 영혼을 파괴하고 우리들을 지옥 자식으로 만들려고 늪으로 늪으로 계속 끌고 가는 것입니다. 악에서 헤어나는 것은 자기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러한 악한 사단 속으로 빠지지 않기 위하여 날마다 기도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악한 사단과 악한 자들에 대해서 시편 기자는 얼마나 강력하게 하나님께 기도하고 호소하는지 모릅니다.

(시 3:1)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시 3:7)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시 35:1) 여호와여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고 나와 싸우는 자와 싸우소서 (시 35:7-8) 그들이 까닭 없이 나를 잡으려고 그들의 그물을 웅덩이에 숨기며 까닭 없이 내 생명을 해하려고 함정을 팠사오니 멸망이 순식간에 그에게 닥치게 하시며 그가 숨긴 그물에 자기가 잡히게 하시며 멸망 중에 떨어지게 하소서! 영적으로 깊은 믿음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이 말씀이 얼마나 실제적이고 심각한 기도인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일용할 양식으로 늘 하나님께 감사합니까? 형제를 용서함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감격 속에서 기뻐하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악한 세상에서 도피하지 말고 그 속에서 살기 위하여 시험에 들지 않도록 날마다 기도해야만 합니다. 만약 우리 주위에 정말로 악한 친구가 있거든 둘 중에 하나를 택하십시오. 그 친구를 적극적으로 전도하든지, 잠깐 떨어져 있든지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붙어 있는 동안에는 우리는 악에게 말려들어 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시험에 들지 않고 악에서 구원받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시험에 들지 않고 악에게 이기는 방법을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구나!”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또 마가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귀신을 쫓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귀신이 들려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드는 어떤 어린아이를 위해 제자들이 열심히 귀신을 쫓는데 안 나갑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그 귀신을 쫓아 주셨는데 그때 제자들이 자기들은 왜 안되냐고 묻습니다. (마가복음 9:29)“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말씀과 능력은 기도가 뒷받침이 되어야 효력이 나타납니다. 사단은 아무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연약한 성도일지라도 그가 무릎 꿇고 기도할 때 제일 두려워하고 무서워합니다. 기도 외에는 길이 없습니다.

두번째로 시험에 빠지지 않고 악으로부터 승리하는 비결은 무엇보다도 깨끗한(성결, 거룩, 회개) 삶입니다. 죄가 없다면 결코 두려움이나 정죄함이 없습니다. 성경을 읽고 기도를 아무리 해도 그 생활이 깨끗하지 못하면 사단은 공격해 옵니다. 사단은 우리의 약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주위 사람들은 몰라도 사단은 다 알고 있습니다. 이유는 자기가 죄짓게 했기 때문입니다. 실제적인 문제로는 특별히 시험에 빠질 환경을 피해야 합니다. 시편 1편에 보면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유혹받을 장소에 가서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은 미련한 짓입니다. 또 유혹받을 사람을 만나지 마십시오. 인간은 별 수 없이 약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어디서든 자신이 예수님을 생각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합니다.

세번째로 악에게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분명한 목표(소망)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시험은 목표가 분명하지 않을 때 찾아옵니다. 푯대가 분명하지 않은 사람은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아무리 선한 척 해도 의인은 없나니...죄인이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십시오! 인간은 믿을 만한 존재가 못됩니다. 변치 않는 하나님밖에는 믿을 분이 없습니다. 인간은 은혜 받았다가도 나가면 또 딴 짓을 합니다. 일주일 후에 어떤 모습으로 돌아올지 모릅니다. (디모데후서 4장 8절에)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오직 예수만 바라보고 우리의 남은 인생 부디 영적싸움에서 승리하셔서 끝까지 믿음을 지키시고 부디 승리하시길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영혼의 치유자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의 신학적 의미

문제제기

존 윔버(John Wimber)케빈 스프링거(Kevin Springer)는 그들의 책{능력 치유}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는 기적과 치유를 그리스도인의 일상적인 삶의 일부로 받아들어 야한다.
그러한 선물들은 놀라운 것임에 틀림없으나 그것들을 받기 위 해서는 특별한 어떤 것이 필요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말은 오늘날 교회의 치유사역에 비록 많은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치유는 목회의 사역에 있어서,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삶과 교회의 공동체 속에서 당연히 있어야 함을 강조해 주는 말이라 할 수 있다.

현대인들에게 건강의 관심사외에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별로 많지 않다. 
건강을 위하여 여러 가지 방식으로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한다. 
사람들은 생명을 연장하고 보다 건강하게 살아가는데 온갖 관심을 기울이는 것처럼 현세의 건강한 삶을 갖기 위해 온갖 관심과 노력을 기울인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지상생활에서 하나님의 사랑, 즉 구속의 사랑과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가장 중요하게 역설하며 가르쳤지만, 그에 못지않게 인간의 질병치유의 구속에도 많은 중점과 비중을 두었음을 성서의 기록에서 살필 수 있고, 사도들 역시도 그 중요함을 인식하고 여러 질병치유의 사건들을 기록했으며 그 치유의 사건 또한 구속에 따랐던 중대한 사건으로 인식해 그들 또한 그러한 능력 행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날 보통의 정통적 기독교 성직자들은 질병치유를 동반할 수 있는 구속엔 그리 관심을 나타내지 않는다.

이처럼 오늘날에도 질병치유를 동반한 구속사역에 대한 관심은 양분되어왔다. 
어떤 관점이 생명력 있는 기독교의 핵심에 더 가까운 것일까? 
분명한 것은 복음서에는 예수께서 사람들의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며, 죽은 자를 살리신 질병치유의 부분이 비중 있게 다뤄지고 있다. 
그러므로 만일 복음서 안에서 질병치유의 기사를 제외한다면, 누구도 예수의 행위와 메시지에 대한 복음서들의 주제를 완성할 수 없을 것이다.

본 연구에서는 기독교 신앙의 절대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그의 말씀을 통한 인간이해, 특히 구속에 한 부분인 치유를 동반한 구속에 대해 연구하고자 한다.

예수의 질병 치유에 대한 이해

질병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신체의 온갖 장애로 인한 온갖 병의 일컬음" "병이란 몸의 일부 또는 몸 전체에 새기는 질병 증상을 말한다."질병은 장차 다가올 죽음의 표시이다. 모든 질병은 그 안에 죽음의 싹을 내포하고 있다.질병이란 평온 상태가 아니라 무질서한 상태이다. 질병이란 편안하지 않은 것이다."건강이란 신체적, 정신적 또는 사회적으로 완전히 좋은 상태를 말하는 것이며 그 반대되는 상태를 질병이라고 한다.

J.W.Provansha는 그의 논문에서 "의학에 가장 큰 공헌을 한 분은 히포크라테스가 아니라 바로 겸손한 갈릴리 사람 예수가 역사상의 실전 인물보다도 더 많이 의술에 그 본질적 의미와 정신을 남겨주었다.-- 의사들에게 그의 정신이 없으면 의학은 비인간적인 방법으로 타락하고 그 원리적 규범은 단순한 법적 체계가 되고 만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좋다. 예수는 방법들과 규범들에 사랑이라는 조정약을 준다. 만약 사랑이라는 조정약이 없다면 참된 치료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정신적인 의학의 아버지는 코스 섬의 히포크라테스가 아니라 나사렛 성읍의 예수였다."라고 주장한다.

현대인의 기본적 견해와 의식 체계 속에서 나사렛 예수보다 더 많은 영향을 끼친 종교 지도자는 없다. 예수는 사람들의 육체 및 정신 건강에 대해 여하한 다른 종교 지도자란 종교 체계가 기울인 것보다도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으며 이를 의심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1)질병 치유의 기록(신약)

치유의 일반적인 정의는 "치료에 의하여 병이 나음"이다.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사역은 세 가지 특성을 가지는 사역, 즉 전도와 가르침, 그리고 질병치유의 사역으로 묘사된다.

첫째로, 예수는 '복음'을 삶들이 들어갈 수 있게 된 하늘나라의 현재적 실재를 선포하였다.

둘째로, 그는 듣는 자들에게 그들의 삶을 하나님 및 그의 나라와 어떻게 연관시켜야 하는가를 가르쳤다. 그의 가르침은 예배와 사고와 행동의 여러 국면들이 사람들의 삶과 역사속에 새로운 방법으로 뚫고 들어오는 하나님과 어떠한 연관성이 있는가를 보여 주었다.

세볁로, 그는 질병치유를 하였다. 그는 몸과 마음이 병든 자들, 즉 육체적 고통에 시달리거나 귀신에게 시달리는 자들에게 육체 및 정신의 건강을 가져다 주었다.

신약에 기록된 예수의 질병치유 사역은 그가 그의 가르침들에서 이웃에 대한 동정과 돌봄을 끊임없이 강조한 것과 막을 같이하는 것이 확실하다. 그것은 "아가페"의 가르침과 일맥상통하며, 그의 가르침에 있어 매우 기본적인 국면이었다. 그러므로 예수가 사랑을 표현하는 가장 구체적인 방법들 중의 하나는, 다른 사람의 육체 및 정신의 병든 상태에 관심을 기울이고 고통스러운 질환들, 즉 육체적 장애들이나 정신적 혹은 정서적 질병들을 치유해 주는 것이다.

예수는 질병과 귀신들림은 세계가 악하다는 주된 증거로 생각하였으며, 하나님의 대행자인 "메시아"로서 그것들을 다룸으로 질병에 대한 하나님의 관점을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게 하였다. 이러한 치유행위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직접적 증거로 일컬어졌다. 그의 질병치유들은 감옥에서 괴로운 생활을 하고 있는 요한이 예수가 정말로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분이라는 것을 믿는데 있어 필요로 하였던 표적이었다.

그리스도의생애 가운데 얼마나 많은 부분이 사람들의 육체 및 정신의 질병을 고치는데 바쳐졌으며, 그의 제자들이 동일한 기본적 사역을 계속 감당하기를 그가 얼마나 기대했는가를 깨닫게 된다. 사도행전은 제자들이 이 기본적인 사역에 임무를 얼마나 훌륭하게 수행했는가를 기록하고 있다.

2)질병 치유의 기록(구약)

성경은 선악과를 따먹은 인류 최초의 죄악이 질병을 가져왔다고 말하며, 도한 부끄러워 떨고 있는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이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것이 최초의 자유라고 말하고 있다.

구약성경에 나타나 있는 수많은 질병들을 일목요연하게 분류한다는 갓은 쉬운 일이 아니다 육체적 질병은 전염병.피부병.신체적 기형과 불구. 소아과 질병 임신 및 출산관게 질병,치명적 중병과 노쇠로 인한 질병,나병 등으로 분류할 수가 있으며, 또한 정신적 질병은 미친 경우 등으로 분류해 볼 수가 있다.

3)질병치유 이해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말씀하신다. 성경을 보면 크게 여섯 가지 방법으로 말씀하시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다. 즉 잠언적으로 말씀하시고 하나의 이야기로서 말씀하시며 설교로서 비유로 말씀하시며,예수의 행위 그 자체로서 말씀하시고 그리고 이적을 통하여 말씀하신다. 이 여섯 가지의 말씀 중 병고침에 해당되는 말씀이 바로 이적을 통한 말씀이다

이적 자체가 목적이라기 보다는 그 이적을 통하여 주시는 말씀에 그 목적이 있다.신약성경에 예수가 행한 이적 서른다섯 가지 정도 중 자연에 관계되는 일곱 가지 이적을 제외한 나머지 80퍼센트 정도는 전부 병을 고친 이적이기 때문에 이적의 정의를 살펴보는 것도 대단히 중요하다 하겠다.

예수는 인간 속에 무엇이 있는가를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도덕적이거나 정신적이거나 육체적인 질병에 걸린 사람들에게 그가 보일 수 있는 태도는 동정의 태도였다. 그는 질병과 고통의 원인들이 인간의 통제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었기 때문에, 특유의 능력으로 즉시 병자들에게 반응할 수 있었다.

예수는 치료에 들어가기 앞서 병자의 죄를 행위를 물었다는 암시는 복음서 어떤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즉각적으로 그들의 필요에 부응했다. 예수는 사람들이 영혼 혹은 실체의 정신 속에서 만나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들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가졌다. 악한 영들이 실재를 알았다. 어떻게 하나님의 실재가 개인을 감동시켜서 그러한 영을 쫓아낼 뿐아니라, 그 자리에 무엇인가 다른 것을 들어 앉힐 수 있는지도 알았다.

예수는 사람들의 지배할 수 있는 악한 실체들을 격퇴해서 그것들이 다시는 사람들을 따라다니지 못하게 하는 것을 그가 갖는 주된 임무중의 하나로 알고 있었다. 예수에게 어떤 한가지 사명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적이고 사랑에 찬 영의 치유 능력을 그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도덕적, 정신적 및 육체의 질병들에 집중시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예수는 새로운 능력으로 인간을 좌절과 죄의 구렁텅이에서 빠져 나오게 하는 방법을 드러내 보였다.

예수는 또한 당시의 유대 및 그리스 문화의 거의 전부에 반대하면서 그의 견해의 진실성을 증명하였다. 그는 병을 고치거나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기회가 생겼을 때, 외적 관행에 대한 율법들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적인가를 보여 주기 위해 그의 치유들 가운데 적어도 6회를 안식일에 행했다.

이상으로 예수의 치유 행위들이 인간의 본성에 대한 그의 심층적 인식과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그의 체험으로부터 생겨났으며, 인간에 대해 가진 그의 이해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의 치유 사역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어렵고, 또한 그가 주변 사람들과 나눈 교제의 성격과 그가 내린 명령들을 이해하는 것도 어렵게 됨을 주장한다.

치유질병의 종류

1. 귀신들림(Demon Possesion)

예수께서 치유해 주셨던 가장 보편적인 질병은"귀신들림"이라는 <정신질환>이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들이 의지하고 지향해 나갈 수 있는 삶의 기반과 의미를 상실하였다. 
그들은 그들에게 부딪쳐 오는 불확실하고 복잡한 상황들에 대처해 나갈 수 없었으며, 따라서 그들은 심층적으로 붕괴되어 갔고 그로 인해 많은 정신질 환자를 야기시켰다.

예수께서 치유해 주셨던 정신 질환 중에는 간질도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 질병도 역시 귀신들림으로 간주되었다. 
마가복음 9장 17절-27절에 따르면, 이 질병에 걸렸던 사람은 작은 소년으로서 예수의 제자들은 그 아이의 질병을 치유해 줄 수 없었다.

또한 성서에는 예수께서 치유해 주셨던 다른 육체적 질병들도 귀신들림으로 간주되어 있는데, 그것은 그 질병들이 육체적 원인으로 인한 것들이기 보다는 심리적인 원인으로 생각됐기 때문일 것이라 사료된다.

2. 눈멂

이 병은 무서운 질병이자 저주였다.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큰 비극들 중에 하나였던 점을 고려해 볼 때 성서에 이 질병의 치유에 관한 예들이 많이 제시되어 있는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3. 중풍병자

파라루티코스( 
paralüti- kŏs ) παραλυτικός, ἡ, όν 스트롱번호 3885

1. 중풍 걸린.  2. 중풍 맞은.  3. 마 4:24 
발음 [ paralüti- kŏs ]

어원 / 3886의 파생어에서 유래
  • 1.  중풍 걸린, 중풍 맞은, 마4:24, 막2:3, 눅5:24.
  • 관련 성경  /  마비된, 중풍병자(마 4:24, 9:6, 막 2:10), 중풍병(마 8:6).


* 3886  παραλύω  

1. 망하게 하다.  2. 약하게 하다.  3. 불구자로 만들다
발음 [ paralüō ]
어원 /  완료수동태 분사 παραλελυμένος, 3844와 3089에서 유래
  • 1. 망하게 하다, 약하게 하다, 불구자로 만들다, 눅 5:18, 행 9:33, 히 12:12.

  • 관련 성경 /  기력을 빼앗다, 약하게 하다(히12:12), 중풍에 걸리다(행 9:33), 
                       [명] 중풍병자(눅 5:18, 24, 행 8:7). 

마태복음 4:24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

마태복음 8:6 
가로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와하나이다. 

마태복음 9:2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마태복음 9:6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마가복음 2:3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쌔.

마가복음 2:4 
무리를 인하여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

마가복음 2:5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마가복음 2:9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마가복음 2: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누가복음 5:18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누가복음 5:24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사도행전 8:7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나으니.

사도행전 9:33
거기서 애니아라 하는 사람을 만나매 그가 중풍병으로 상 위에 누운지 팔년이라.

4. 문둥병

문둥병은 매우 무서운 질병이었으며 그 발명 초기엔 다른 질병으로 오인되기 쉬웠다.따라서 이 병의 치유는 매우 중대한 사건으로 간주된다.

5. 죽은자를 살리심

예수께서 죽은자를 살리신 것에 관한 세 기사들은 다소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첫째 기사는 마태복음 9장18절 이하와 마가복음 5장 22절, 누가복음 8장 41절 이하에 기록된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기사이다. 두 번째 기사는 요한복음 11장의 나사로를 살리신 것이고(예루살렘 입성하시기 전 베푸셨던 가장 큰 기적), 세째로는 누가복음 7장 11-15절에 기록된 나인의 과부 아들을 살리신 것의 기사이다.

6. 여러 질병들을 고치심

예수께서는 이외에도 여러 질병들을 고치셨다. 18년 동안 귀신들린 자(눅13:10-11), 12년동안 혈루병 앓은 여인(마 9:20-22, 막 5:25-29, 눅 8:43-44), 베드로 장모의 열병, 안식일에 고창병, 말고의 떨어진 귀(눅 22:5-51) 등 여러 가지의 병을, 그리고 병명이 명시되지 않은 여러 병을 고치셨다.

예수의 치유에 관한 특별한 서술들은 예수께서 모든 종류의 질병들을 치유해 주셨다는 사실을 나타내 줄뿐만 아니라, 이러한 예수의 질병치유가 오늘날에 있어서도 그러하듯이, 그 당시에 있어서도 일반적인 의학지식이나 종교적 치유 관습에 특별히 상반된 유형의 것이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때飁로 비교적 쉽게 치료될 수 있었던 기능적인 장애들에 대하여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이 서술은 오늘날 정신적 질환들로 알고 있는 질병들의 치유에 강조점을 두고 있으며, 예수의 치유를 목격했던 사람들이 매우 놀랐다는 사실을 거듭하여 언급하고 이다.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질병치유의 기사들은 공통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명백한 사실은 예수께서 모든 종류의 질병들을 치유해 주셨다는 점과 그의 질병치유가 단순한 질병의 증상들을 완화시킨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완전한 질병치유였다는 점을 강조하며, 대상자의 치료엔 환자와 주변 인물의 믿음이 절대적으로 결부되어 있었음을 주장한다.

질병치유의 방법

예수께서 병자를 고치실 때, 여러 행동을 취하셨다. 치유해 주셨던 질병의 종류가 많은 만큼, 치유 방법이 매우 다양했다.

(1)안수

치유방법은 말을 거시는 것과, 그들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이었다. 손을 댄다는 것은 안수를 칭한다. (막 6:5, 눅 22:51)

(2)침과 진흙 사용

예수의 질병치유 기사 중에는 예수께서 침을 사용하시거나 침에 진흙을 섞어서 사용하셨던 것에 관한 3가지 기사들을 찾아볼 수 있다.예수께서는 침을 그 자신의 인격과 권능의 매개체로 사용하였다. 마가복음에는귀먹고 어눌한 사람에 대해 혀에 침을 발라 예수의 치유 기사가 기록("에바다"),그리고 마가복음 8장 23절에도 거의 동일한 모습으로 소경을 치유하신 내용이 기록되어 있고, 요한복음 9장 6-7절에서는 침을 진흙에 섞어서 그 진흙을 소경의 눈에 문지르시고 그 소경에게 실로암 못에 가서 눈을 씻으라고 말씀하셨다.

(3)말씀과 명령

나사로를 살리셨을 때(요 11;43)와 10명의 문둥병자를 치유해 주셨을 때(눅17:14), 거라사의 귀신들린 사람을 치유해 주셨을 때(막 5:8), 왕의 신하의 아들을 치유(요 4:50),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혈기 마른 사람을 치유(요 5:8)해 주셨을 때처럼 병자들을 치유해 주심에 있어서 오직 말씀을 통해서만 이러한 기적을 행하셨다.

(4)옷을 만짐

예수의 치료는 飁때로 병자들이 예수의 몸에 손을 대거나 그의 옷을 만졌을 때에 일어나기도 했다. (12해 혈루병 막 5;25-34)

(5)기름 사용

기름을 사용하셨던 것으로 언급되어 있지는 않지만 기름을 사용하셨을 것이다.마가는 제자들이 예수로부터 보냄을 받았을 때, 기름을 사용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자들에게 기름을 사용하여서 그들을 고쳐 주었다.(막 6:13)

(6)기도

나사로에게 무덤에서 나오라고 명하시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다.(요11:41-44) 반대로 가나안 여인의 딸에 대한 예수의 치유는 바로 그 여인 자신의 간절한 기도를 통한 것이었다.(마15:25-28)

(7)죄에 대한 용서

죄에 대한 용서는 질병치유와 관련하여 두번 언급되어 있다.(막2:5의 중풍병자 기사, 요5:14의 베데스다 못가의 혈기 마른 자를 고치신 기사)

(8)불쌍히 여김

예수께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병자들을 치유해 주셨던 사실이 3차례 언급 되어 있다. 마태복음 14장 14절에 많은 사람들을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사 치유해 주셨다. 나인성 과부가 그녀의 죽은 아들 옆에서 우는 것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고쳐주셨다. 예루살렘 길가의 두 소경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고치셨다.(마 20:34)

(9)당사자의 믿음

예수의 치유에 있어서 당사자의 믿음이 유력한 요소로 작용하였던 실례들을 찾아볼수 있다. 하나의 예를 들면 간질병에 걸린 소년의 아버지에게 질병치유에 있어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셨고, 이에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라고 부르짖어 응답 받았다. 이외에도 혈루병 여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막 5:34), 두명의 소경에게도(마 9:29) "네 믿음대로 되리라"로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질병 치유에 방해되는 것들을 제거하시기 위하여, 병자 자신과 그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믿음을 요구하셨으며, 더불어 예수 자신의 동정심과 치유의 권능을 사용하셨다. 하나님의 권능은 예수의 행위와 사람들의 믿음을 통하여 각 개인들에게 효율적으로 나타났다. 예수께서 그의 고향인 나사렛을 방문할 때와 같이 사람들이 그를 전적으로 믿지 않거나, 그에 대한 믿음이 결여되어 있을 경우 엔 질병치유의 역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예수의 치유 목회의 본질은 의학적이거나 물리적으로 효과가 있는 방법을 거의 사용하지 않으셨다. 예수께서는 침과 진흙을 사용하셨으나 그것들을 물리적인 치유력을 지닌 것으로 사용하진 않으셨다. 다시말해 예수는 실제적이며 외적인 도구나 수단들의 사용없이 질병 치유를 행하셨다.

예수께서는 의사가 되려는 의도를 지니지 않으셨으며, 그의 제자들에게 의학적인 치유에 관여할 것을 명령하려는 의도도 지니지 않으셨다. 하지만 적대감을 가지 신것은 아니셨다. 예수는 많은 시간을 요하는 최면이나 정신 요법을 사용하지 않으셨다. 그가 병자와 만나는 시간은 매우 짧았으며, 대부분은 즉각적으로 이루어졌다. 더불어 질병을 치유 받은 병자들은 예수와 함께 동행하도록 요청 받지 않고, 대부분 그들 자신의 집으로 돌아갈 것을 명령받았다.

예수께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권능을 사람들의 전 인격 속에 개입해 들어감으로써, 그들을 정상적인 상태로 회복시키도록 여러가지 방법을 통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믿음의 관계를 맺게 하셨다. 그런 후에야 비로소 그는 그들에게 진리를 가르치셨다.

예수께서 병자들을 치유해 주셨던 이유로는 ①동정심, ②질병에 대한 적대심, ③율법의 올바른 적용을 위해, ④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냄, ⑤사람들의 믿음 때문에, ⑤죄를 회개하는 것을 도우시기 위하여, ⑥의심에 대한 분노 등의 이유이다.

치유와 구원과의 관계

성경은 한결같은 인간은 죄 때문에 구원에 구원을 필요로 하게 되었으며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음을 당하셨다고 가르치고 있다.

"구원하다" 구원을 뜻하는 헬라어 소조( ) 소테리아( )는 본래 "구출" "보전"' 안녕' 그리고 '속사람의 안녕' 등을 의미하거나 이모든 것을 포함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생명의 위험이나 재판의 유죄 판결,또는 질병으로부터의 구출을 의미하기도 하였고 생존을 계속 보전하거나 어떤 것을 보호, 유지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또 건강의 유지, 부 ,평화, 곡식의 생육 등 모든 일이 잘되는것, 곧 복락의 의미와 동일하게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인간존재 그 자체의 보존,즉 인간의 본질을 잃지 않는 일을 말하기도 하였다.

구약에 있어서 '구원'이라는 의미는 

1. 전쟁에 있어서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백성, 곧 이스라엘의 구출을 의미(출 13:30, 15:1-2). 
2.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의 계속적 보호자, 구원자로 계시는 것을 말하는 경우(사 26:1-2, 6:18, 9:6-7) 
3. 구체적 구원의 곤경보다도 죄악 일반에서의 구출을 의미하는 경우(겔 36:28) 
4. 종말적 구원으로 인식되며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로 구원鑁힘을 말하고 있다.

이처럼 '구원'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죄에서 구출 받은 것을 의미한다.위에서 살펴 보았듯이 구약성경에서 구원은 대표적으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그 적들로부터 어떻게 구원하시는가를 보여주는 데 사용하였어며신약성경에서의 구원은 사람들의 사람의 세력 ,즉 사탄과 그의 올무에서 자유케하시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말하는데 사용하였다.가장 위대한 구원의 결정은 죄인이 흑암과 사망의 권세로부터 건짐을 받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성취된다.복음이 구원의 선포라면 치유는 그 구원의 일부이다. 그리스도는 사역에 있어서 설교와 가르침과 치유는 하나였고 각각은 구원의 선포에 있어서 빠뜨릴수 없는 요소이다.

구약종교에 있어서는 질병과 아픔은 모든 행운 및 생활 환경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편에서 오는 것이라고 했다.그러나 하나님은 또한 그 병의 치료자이시다. 이 문제는 시편에도 자주 나타나며 또 성전예배의 기초가 되었다.

신약성경에서도 역시 구약성경과 마찬가지로 구원이라는 말과 병을 고친다는 말은 서로 뒤섞이어 사용되었다.신약성경 안에서는 병고치는 이적이 종종 하나님 나라에 대한 표적으로 나타난다.예수님에게 있는 벼고치는 능력은 생명 전체를 소생시키는 신적 능력의 현현이다.이리하여 치명적 고통에서 구원을 받겠다는 자연적 요구는 생의 의미가 무엇인가 알게 하는 질문으로 바꾸어지며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찾으려고 하는 탐구로 바꾸어진다.예수의 치유 사역 중 예수께서 선포한'구원'의 개념을 살펴보면, 구원이란 치유를 중심으로 하여 지탱,이해,화해 등 목회의 전영역에 속한 개념임을 알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구원이 치유이긴 하지만 전인적인 개념이라는 것이다.결국 성경에서 구원이란 전인적인 것이요,육체,정신,영 모두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

4. 바람직한 치유를 위한 제언

치유목회라고 할 때 자칫하면 목회의 대상을 질병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실제에 있어서는 질병 자체가 아니라 질병을 앓고 있는 인간이 목회의 대상이 된다. 
아돌프 메이어(Adolf meyer)는 "치료받아야 할 것은 환자가 아니라 질병이기 때문에 환자를 효과적으로 치료하려면 그의 유전적, 환경적, 육체적, 성경적 또는 경제적 측면들이 전인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고했다.

심리치료자들과 상담 전문가 및 기독교 사상가들 사이에서는 우리가 바라는 인간의 발달목표가 전인성(Wholeness)이라는 것에 폭 넓은 일치를 보이고 있다.
그러므로 질병 그 자체만을 문제 삼아서 질병과 인간을 분리하려 한다면 그것은 참다운 의미의 치유목회라고 할수 없을 것이다.

한 인간이 육체적인 부분이 병들면 다른 부분(영적인 면,정신적인 면,)도 따라서 병들게 되며, 한 인간이 병들면 그 주위의 세계(가정,교회,직장,---)도 영향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치유목회는 병든 인간을 전인적인 치유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며, 나아가서는 개인 뿐만 아니라 그 주변의 세계,공동체의 치유에도 함께 관심을 가지고 연관된 모든 사람들과 팀을 이루어 치유활동을 전개하여야 한다.

오성춘 교수는 그의 논문에서 전인적 인간이해에 기초한 전인교육모델을 제시하는데 바로 이것은 치유목회가 추구하는 목표와 깊은 연관이 있다고 본다.
그는 인간존재의 근본을 관계성에 두고 창조주와의 관계,인간과의 관계,다른 피조물과의 관계의 3단계의 차원에서 회복과 치유가 이루어져야 하며 이러한 전인성을 향한 교육과 목회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였다.

힐트너는 치유목회를 다음의 세 가지 단계로 설명하고 있다.

첫째, 치유목회는 환자의 병을 시인하고 수용하고 이해함과 동시에 환자의 감정에 동화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둘째, 치유목회는 전인적인 회복에 초점을 두어 육체의 치유와 더불어서 생의 재발견, 인격의 재체계화,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를 지향해야 하며, 목회자는 전인적인 관심하에서 목회한다.
셋째, 치유목회는 종교적 깊이의 차원에서 시작하여 종교적인 회복으로 종결되는 목회이다.

투르나이젠은 치유목회는 병과 그리스도와의 만남, 치료와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문제 삼아야 한다고 하였다.

 앞의 예수의 치유 모델을 통하여 살펴 본 바와 같이 온전한 치유는 인간의 문제를 해결할 뿐만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고 그의 전존재를 수용하고 인정하시는 하나님의 치유의 손길을 체험함과 동시에 그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와의 계속적인 교제를 통하여 풍성한 삶을 지속하는 데로 나아가게하여야 한다. 따라서 온전한 전인으로서의 치유는 마틴로이드존스(D.Martion Lloyd-jones)가 밝힌 대로 기독교 바같에서는 찾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치유목회가 추구하는 목표는 질병의 회복만으로 끝나는 단순한 치유가 아니라,그가 이전에 경험한 적이 없는 보다 높은 영적인 차원을 목표로 하여야한다..그것은 질병의 고통속에서 발견한 하나님의 참사랑과 그 사랑 앞에 바쳐져야 할 인간의 남은 삶에 대한 자각이다.이와 더불어 한국교회는 전인적인 치료에 대한 보다 깊은 성찰을 통하여,개인 뿐만 아니라 그 개인을 병들게 하고 있는 공동체의 치유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나아가야 할것이다.

교회가 바람직한 치유목회를 위해서 노력하고 실천해야 할 몇가지 제언을 덧붙이고자 한다.

첫째, 치유사역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목회자든,평신도든 지혜롭게 치유사역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치유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적절한 지적, 신학적인 체계가 필요하다.

둘째, 치유와 관련된 주제들 및 제기된 문제에 대해 논의할 수 있는 기회와 장소를 제공해 주어야 하며, 교회 안에서 치유의 사역을 실제로 진행해 나갈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

셋째, 교회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치유에 대한 관심을 가질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하고,성령의 치유가 일어날수 있는 영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가는 것이 필요하다.

넷째, 상담과 영적 지도의 목회를 해야 한다. 목회자는 상담을 통해 또 다른 방식으로 영적, 심리적, 또는 신체적 문제를 지닌 개인들에게 치유를 가져다 주도록 도울 수 있다.

목회자는 치유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과 확신을 가지고 꾸준히 치유의 말씀을 선포하고 말씀을 가르치고 치유를 위해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치유사역에 동참할 때 치유를 통한 성령의 능력과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리라 본다.

5. 결론

20세기에 와서 주요 교리 가운데 치유를 주장하는 이단들과 분파는 다음과 같다.
오순절파(Pentecostals) 
크리스천 사이언스파(Christian Scientists) 
기독교 통일교파(Unity school df Christianity) 
신사도운동파(New Thought movement) 
성령파(Spiritists) 
기타 수많은 분파를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을 보아서 우리들에게 치유가 교회의 기본적인 과제의 하나라는 점을 일깨워 준다.

루터와 칼빈이 치유의 은사가 사도시대에 국한되어 있다고 주장했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종교개혁자들은 구원을 주로 법정 용어인 칭의로 정의하고 칭의는 믿음 만으로만 얻을 수 있는 용서의 선언이라고 규정했다.
이들은 구원이 인간의 상처와 고통의 치유도 포함한다는 진리에 진지하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은 신약의 치유의 기적을 이성적으로 설명하여 합리화시킴으로서 개신교내의 치유사역 상실을 초래시켰다.

예수께서 병자들을 치유하실 때 사용하셨던 방법들은 다음의 두 가지 작용을 하였다. 
즉 예수께서는 병자들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일깨워지기를 기다리는 영을 깨워 주셨으며, 
이와 동시에 그는 말과 행위와 태도로써 모든 실체들의 창조적인 힘인 하나님의 영과 재창조된 인간들이 교제를 맺게 하셨다.

그리스도의 치유사역은 단순히 영혼의 구원만을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아니었다.(헬라적 2분법 사고) 
그의 구속의 관심 속에는 인간의 몸을 비롯한 인간 전체가 포함되었다.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질병과 죄에 대한 날카로운 구분, 즉 전자는 몸에 속한 것이고 후자는 영혼에 속한 것이라는 구분이었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질병이라는 것은 유기체의 병리학이나 혼란한 생리의 과정에서 나타남 이외에도 혼란된 인간 관계, 즉 죄책감과 사랑의 결핍이라는 관점에서도 나타남을 주장해 본다.

엘롬교수는 "치유는 언제나 육체적인 동시에 영적이다"고 주장한다. 
그는 진정한 치유란 단지 질병의 회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질병이 회복이후 계속적이 삶의 자세까지 연관시켜서 하나님 앞에서 헌신자의 삶을 사는 것을 완전한 치유로 보고 있다. 
"회복된 건강을 어떻게 활용할 것이냐 하는 것은 건강 그 자체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S. HILTNER 도 치유란 단지 육체적 질병에서 치유되는 것으로는 온전한 치유라고 할 수 없으며, 어떤 수단에 의하여 육체의 질병을 치유하든지 간에 전인적 회복, 즉 구원에의 관심 하에서 행해져야 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치유란 온전하게 만드는 일, 다시 회복하는 일을 말한다.

결국 치유란 육체적, 정신적, 영적차원 중 어느 부분의 결함에 대한 치료행위이다. 아래의 도표에서 이를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 결함 + 육체적 | 정신적  질 병 + 질 병  +  사회적 결함

신약성서에 나타난 예수의 치유는 몸의 치유만으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의 구속과 회복, 사탄의 박멸이라는 구속적인 관점에서 전인 치유, 지.정.의가 완전히 조화된 모, 정신, 영혼을 함께 치료하는 온전한 구속의 행위였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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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컨콜디아사,1984)

Harper,Michael,The Healing Of Jesus,고재봉역,{예수의 치유},

서울:요단출판사,1988.







칼 융(Carl Jing) - 영혼의 치유자

악에서 많은 선이 나와서 나에게 왔다. 
나는 고요를 유지하고 아무것도 억누르지 않고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으며 내가 바라는 모습이 아닌 현재 모습과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모든 것을 행했다. 
그러자 비상한 지식과, 이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비상한 힘이 나에게로 왔다.

나는 항상 무언가를 받아들이면 그것이 우리를 어떠한 방법으로든 압도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을 전혀 사실이 아니었다. 
오히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야만 그것에 어떠한 자세를 취할 수 있다. 
따라서 나는 이제 영원히 교차하는 선과 악, 빛과 그림자 중 무엇이 오든 그것을 수용할 수 있는 인생이라는 경기에 임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내 본성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모두 받아들일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모든 것이 활기차 보인다. 
내가 얼마나 바보 같았던지! 
그동안 나는 모든 곳을 내가 생각하는 방향대로 억지로 움직이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모른다.

Carl Jung의 고백 : 나는 노자와 석가의 제자다!










만데 전래동화집 이야기




0. 시작 – 만데 전래동화집

어렸을 때부터 동화와 신화를 좋아했다. 붉은 양장에 금색 글씨로 세계 곳곳의 이름이 새겨진 동화집이 집에 있었는데, 지금 떠올려봐도 아주 떨린다. 그 시절 가장 좋아하는 책들이었다. 침을 꼴깍 삼켜가며 다음 장을 넘기던 기억이 날만큼. 북유럽에서 독일과 프랑스, 그리고 인도와 일본까지 모두 아주 다른 나라 이야기 같으면서도, 동시에 모두 비슷한 이야기 같기도 했다. 숲 속의 호수에는 밤마다 요정들이 장난을 치고, 욕심 많은 왕은 도깨비에게 혼쭐이 나고, 아주 갖은 고생 끝에 자유의 몸이 되는 소녀의 이야기도 있었다. 동화책에서 발견한 마법의 세계는 분명 지금 내가 사는 세상과 달랐지만, 그렇다고 아주 거짓말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지금 내 눈엔 보이지 않지만, 어디선가 꼭 펼쳐지고 있을 것 같은 이야기들이었다.

지금까지 꽤 많은 나라의 동화들을 만났지만, 아프리카 동화는 참 드물었다. 이 동화집을 시작하게 된건 내가 먼저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2년 동안 서아프리카 만딩고 춤에 대해 공부하면서, 춤만큼 다양한 노래들을 알게 되었다. 오래된 노래들의 특징일까, 또는 사람 사는 건 어디든 비슷한 걸까. 불볕 같은 태양 아래 모래가 흩날리는 사막에서 ‘어디선가 꼭 있을법한’ 마법의 세계들, 용기와 사랑, 믿음과 우정을 불러일으키는 지혜로운 이야기들이 가득 펼쳐진다.

이 만데 동화집에서 주로 살피려고 하는 건 ‘젤리’ 또는 ‘그리오’라 불리는 이들이 만든 노래와 이야기다. 이들의 음악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고, 특별하게 여겨졌다. 당시의 나라, ‘만데(Mand?)’에서는 자연의 불가사의한 힘을 ‘냐마(Nyama)’라 불렀다. ‘냐마’는 모든 것을 파괴할 힘과, 또 다시 새롭게 탄생시키는 힘을 갖고 있다고 여겨졌다. 이 힘을 이해하고, 인간 세상에 필요한 것으로 변형시킬 수 있는 이들을 ‘냐마칼라(Nyamakala)’라고 불렀다. 여기엔 대장장이 ‘누무(Numu)’, 가죽장인 ‘가랑케(Garanke)’, 언어와 음악을 다루는 장인 ‘젤리(Jeli)’, 이슬람 경전 꾸란을 설파하는 연설자 ‘피네(Fune)’가 속했다. 젤리의 ‘음악’은 자연의 힘을 다뤄 만든 창조물이었다. 그리고 그 음악에는 인간과 세상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무궁무진한 힘이 있다고 여겼다.


이 나라에는 계급이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왕과 농민이 속한 자유민 계급의 ‘오롱(Horon)’, 그리고 장인계급의 ‘냐마칼라’로 나뉘었다. 전통적으로 ‘젤리’는 냐마칼라로서 왕을 위해 음악을 연주하거나 노래하고, 옛 선조들의 역사를 그에게 전하거나, 왕의 메시지를 백성들에게 퍼뜨리는 역할을 했다. 왕은 그가 먹을 수 있는 음식과 옷, 집을 주었는데, 그렇다고 왕이 위에 있고, 젤리가 아래에 있는 위계의 관계는 아니었다. 한 쪽이 없으면 다른 쪽이 존재하지 않는, 젤리가 없으면 왕 또한 힘을 잃는 그런 관계였다. 그래서 젤리의 음악에 ‘대가를 바치는 것’이지, ‘지불하는 것’이라 표현하지 않는다.

젤리는 왕 뿐만 아니라 ‘오롱’에 속하는 모든 보통 사람들의 잔치에서도 노래를 부르고, 음악을 연주하고, 역사를 이야기했다. 성년식, 결혼식, 그리고 장례식은 인간이 태어나 겪는 가장 중요한 날들이었다. 길을 걷다가도 우연히 마주치면, 젤리는 대뜸 경이로운 칭찬을 하기도 한다. 이 모든 말들과 이야기와 노래는 어떻게 탄생했을까? 젤리들이 발견한 신비로운 세계, 현실과 자연 사이의 균형적인 관계는 무엇일까? 그들은 이 음악과 이야기로 사람들에게 무엇을 전하려고 했을까?

젤리가 불러온 가장 오래되고 여전히 살아있는 노래들, 노래와 이야기를 오가는, 사랑과 용기와 믿음에 대한 이야기들을 앞으로 들려드리려 한다. 이번 호의 제목은 ‘만데 전래동화집’인데, 앞서 만딩고 춤 안내서에도 밝혔지만, 여기 문화를 지칭하는 말은 지역에 따라 아주 다양하다. 만데, 만뎅, 만딩고, 말링케, 만딩카 모두 맞는 말이다. 오직 한 가지만 옳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 그들의 문화라고 말한 댄서가 떠오른다. 세상은 당신이 아는 것보다 훨씬 다양하고, 그 다양함 자체가 진실이라고. 이 동화집에 가장 어울리는 말은 바로 젤리의 노래가 시작된 나라의 이름, 가장 오래된 이름인 ‘만데(Mand?)’일 것이다.

다음호에 이어지는 이야기는 바로 ‘얼굴과 입이 아주 큰 사나이’에 대한 이야기다. 얼굴이 아주 커서 불의에 고개 숙이지 않고, 입이 아주 커서 진실을 말하기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의 이야기, 기대해주시라!






1화. 머리와 입이 큰 사나이, 파콜리 – 만데전래동화집

옛날 옛적에, 키는 아주 작고 머리와 입이 아주 큰 사나이가 살고 있었어. 머리가 아주 커서 자랑스러웠고, 입이 아주 커서 그가 뱉은 말은 바람에도 사라지지 않았지. 이 남자의 이름은 파콜리(Fakoli). 사람들은 그를 파콜리다바, 파콜리쿤바, 잠잠콜리란 이름으로 불렀어. 


파콜리는 용감하고 힘도 세고 재치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마술을 부릴 수 있는 힘이 있었어. 하루는 모자에 서른 세 개의 독수리 머리뼈를, 어깨엔 서른 세 개의 사자 가죽을 메고 나타났지. 보통 사람이 아니었던 거야. 그도 그럴것이, 이 남자의 삼촌은 철의 나라 소쏘 왕국의 왕이었는데, 삼촌도 강력한 마법을 부리는 자였어. 파콜리는 삼촌을 도와 소쏘 왕국이 저 바다까지 땅을 넓히는 데 큰 힘이 될 거란 운명을 갖고 태어났지. 


파콜리의 삼촌, 소쏘의 왕, 수마오로 칸테(Soumaoro Kante)는 단순한 돌멩이를 아주 단단한 철로 바꾸어 내는 비법을 알고 있었어. 철의 나라 소쏘는 점점 더 힘을 갖게 되었지. 삼촌은 지금에 만족하지 않고, 이웃 왕국들을 공격하기 시작했어. 나라를 키우는 데 위협이 되는 사람들은 모두 없애려고 했지. 무려 아홉 개의 왕국들이 무너졌어. 단단한 철로 무장한 데다 마법까지 부리는 그의 군대를 누가 당해낼 수 있었겠어.


수마오로에게 나라를 빼앗긴 이들은 이제 하나 남은 유일한 희망, 만데 민족의 둘째 왕자, 순디아타 케이타(Soundiata Keita)를 찾아갔어. 순디아타는 원래 왕이 돼야 했는데, 형에게 왕 자리를 뺏기고, 어머니와 도망쳐 나와 여기저기를 떠돌고 있었지. 순디아타는 이웃 작은 왕국들과 힘을 합쳐 그와의 싸움을 준비하기 시작했어. 


순디아타는 수마오로보다 마법의 힘은 없었지만, 그의 옆에는 아주 특별한 존재가 있었어. 어려운 일이 있을 때 현명한 말을 해주고, 용기를 내야 할 때 두려움을 이길 수 있도록 노래를 부르는 자였지.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을 만데 왕국에선 ‘젤리(Jeli)’라고 불렀어. 그리고 젤리는 만데 왕국에만 있었지. 수마오로에겐 없고, 순디아타에게 있는 건 바로 젤리, 순디아타의 젤리, 지혜로운 조언자, 발라 파세케 쿠야테(Bala Faseke Kouyate)였어.


그날은 순디아타와 수마오로가 네 번째 전투를 준비하는 어느 밤이었어. 이미 순디아타는 세 번의 싸움에 모두 지고, 소중한 동료들을 여럿 잃은 상황이었어. 작전을 짜는 천막 안은 두려움에 고요해졌지. 순디아타의 젤리, 발라 파세케는 순디아타를 위해 노래 ‘장조(Janjon)’를 부르기 시작했어. 장조는 전투 앞에서 모두가 겪을 두려움, 그리고 그 두려움을 이겨낸 승리에 대한 노래지. 아무에게나 부르지 않고, 아주 큰 두려움을 이겨내고 큰 승리를 이끌어낸 사람에게만 부르는 매우 특별한 노래였어. 


적 앞에서 웃음을, 
하지만 싸움을 끝내지 마십시오
적을 즐겁게 하라, 
하지만 적의를 거두지 마십시오
나는 당신에게 인사를 하네, 오, 거대한 두려움이여 
이 싸움의 밤 앞에서 
순디아타가 장조를 춤추네 
돌진하는 적들 앞에서 
만데의 땅 위에서 
나는 당신에게 인사를 하네, 오 승리자여 
이 싸움의 밤 앞에서 


그런데 갑자기, 노래를 끊고 한 남자가 천막 안으로 불쑥 들어왔어. 바로 파콜리였어. 문에 머리가 닿을까 고개를 숙이자, 사람들이 웃었어. 

“오, 키가 작은 이방인이군.” 
하고 발라 파세케가 말했어. 

“만데에서 가장 키가 큰 남자도 고개 숙이지 않고 여기 들어올 수 있지.” 
더 이야기하려는 발라 파세케의 말을 끊고, 순디아타는 파콜리에게 물었어.

“파콜리쿤바, 파콜리다바, 여기에 온 당신의 뜻은 이해했소. 하지만, 우리가 당신을 받아들이기 전에 이 질문을 꼭 해야겠소. 왜 당신의 삼촌을 저버리고, 우리에게 온 것이요?”

“다 알면서 왜 묻는 것이요?” 
하고 파콜리는 갑자기 천막 밖으로 나갔다가, 처음 온 사람처럼 다시 들어왔어. 

순디아타는 파콜리가 스스로 여기에 왔다는 사실에 놀라 일어서며, 성의를 다해 자신의 경솔한 말을 사과했어. 그리고 무엇을 원하는지 물었지. 

파콜리는 왜 그 무시무시한 힘을 가지고 승승장구하는 삼촌 곁에 있지 않고, 싸움에 연달아 지고 있는 순디아타를 제 발로 찾아온 걸까? 파콜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새로운 왕의 자리를 탐낸 걸까? 놀랍게도 그가 요구한 것은 바로 젤리의 노래 ‘장조’였어. 발라 파세케가 순디아타를 위해 부르는 노래를 오직 자신을 위해서만 불러 달라고, 자신이 원하는 건 오직 그것뿐이라 말했어. 

“만데에서 이 노래는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이 한 위대한 일에 대해 바치는 노래이지요. 우리의 관습을 당신을 위해 깰 수는 없는 법이지요.” 하고 발라 파세케가 답했지.

그러자 머리와 입이 아주 큰 이 사나이가 천장이 흔들릴 만큼 크게 웃었어. 
“항상 위대한 일들, 언제나 위대한 일들..”
그는 빈정거리며 이 말을 되뇌였어. 


그리곤 발라 파세케는 파콜리가 들어오며 끊겼던 음악을 계속 연주하기 시작했지. 고니의 현을 뜯는 소리가 점점 거세졌고, 천막 안의 모든 이들은 그들이 겪은 전쟁의 순간들을 눈앞에서 보는 것만 같았지. 후끈한 열기가 차오르며, 한둘씩 땀을 흘리거나, 머리에 손을 대며, 눈물을 흘리는 이도 있었어. 순디아타는 동생의 눈물을 보자, 노래를 멈추길 부탁했지. 침묵이 무겁게 내려앉았어. 한 사람이 침묵을 깨고, 지금까지 세 번의 전투를 치르며 우리가 얼마나 함께 단결하게 되었는지, 하지만 얼마나 많은 희생이 있었는지, 수망오로의 오른팔과 같은 장군이 한 번에 40명의 목숨을 앗아갔다는 이야기를 했어. 갑자기 어둠 속에서 웃음 하나가 터져 나왔고, 불타는 눈을 한 이가 순디아타를 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지.

“그자는 악마지!”하고 파콜리는 웃음을 멈추지 않으며 말했어. 

“나, 잠잠콜리, 캉쿠바 칸테의 아들은 내일 전투에서 그자를 처치하겠소.”하고 순디아타 앞에서 약속을 해. 또다시 천막은 침묵에 잠기며, 그의 말을 믿을 수 있을 것인가 사람들은 고민했어. 

“파콜리, 말은 물과 같지요. 한번 쏟으면, 다시 담을 수 없지요. 이방인 당신을 위해 우리는 만데의 관습을 깨고, 당신의 말을 받아들이겠소.” 하고 순디아타는 그의 앞에서 말했어.

그리고 다음 날, 파콜리는 그가 한 말을 지켰고, 약속을 받기 위해 순디아타의 천막으로 왔어. 이제 장조 노래가 자신의 것이라 외치며 웃는 파콜리를 보며, 순디아타의 젤리는 그를 칭송하며 이렇게 말했어. 

“머리와 입이 아주 큰 사나이시여, 파콜리쿤바, 파콜리다바, 캉쿠바 칸테의 아들이시여, 당신의 승리를 축하합니다. 만데에서는 좋은 일엔 항상 행운이 함께 한다고 하지요.” 하며 의미심장하게 파콜리를 노려보았어. 

파콜리는 머리를 크게 흔들어대며 악마처럼 크게 웃었고, 별안간 천막 안으로 화살이 날아와 순디아타 옆에 꽂혔어. 순디아타는 다른 장군의 이름을 대며, 그를 꼭 처치해달라고 부탁하지. 

그리고 다음날, 파콜리는 순디아타가 말한 이를 잡아 와 그의 앞에 데려놓았어. 

“젤리 발라 파세케, 만데의 법을 가장 잘 아는 이여, 이제 이 노래는 나의 것인가?” 하고 젤리에게 물었지. 

“하나의 업적은 아무런 영향이 없습니다. 두 개의 업적은 생각해볼 만 하지요. 하지만 세 개는 되어야 과연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라고 발라 파세케가 답했어. 

그러자 파콜리는 문 쪽으로 걸어가 자신의 작달막한 몸을 거인처럼 쑥쑥 키우기 시작했어. 몸은 점점 커져서 큰 머리로 천장을 천천히 들어 올려 천막을 아주 뒤로 발라당 무너뜨리게 되었지.    

그제서야 순디아타는 세 가지 업적이 모두 완성되었다고 젤리에게 말하고, 파콜리가 다시 원래의 몸으로 돌아가는 동안 젤리 발라 파세케 쿠야테는 탄식하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어. 


적 앞에서 웃음을, 
지만 싸움을 끝내지 마십시오
적을 즐겁게 하라, 
하지만 적의를 거두지 마십시오
나는 당신에게 인사를 하네, 오, 거대한 두려움이여 
이 싸움의 밤 앞에서 
파콜리가 장조를 춤추네 
돌진하는 적들 앞에서 
만데의 땅 위에서 
나는 당신에게 인사를 하네, 오 승리자여 
이 싸움의 밤 앞에서 


2화. 부자 상인 마사니 시쎄 – 만데 전래동화집



옛날 옛적에, 마사니 시쎄라는 부자 상인이 살고 있었어. 그의 집은 황금으로 가득 찰 만큼 부자였지. 사람들이 필요한 걸 모두 갖고 있었고, 자신이 필요한 건 황금으로 모두 구할 수 있었지. 불가능한 게 없었던 그는 세상 무서운 게 없었어.

어느 날, 마사니는 강가에서 어느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게 돼. 마사니는 지금까지 숱한 청혼을 받았지만, 그가 원하는 여인을 찾지 못했지. 그는 그 여인에게 청혼했지만, 안타깝게도 여인에겐 이미 오래전에 약혼을 한 남자가 있었어.

마사니는 바로 황금을 마차에 싣고 그녀의 부모님을 찾아갔어. 그때는 부모가 자식의 결혼을 정하는 시대였어. 딸의 약혼자는 가난한 어부였기에, 마사니의 황금 앞에서 그만 결혼 상대를 바꾸고 말아. 오래된 약속도 황금 앞에서 힘을 잃고 말았지. 원하는 건 모두 가질 수 있었던 마사니는 세상 무서운 게 없었어.

드디어 결혼 날이 밝았어. 결혼식을 보기 위해 손님들이 구름같이 몰려왔어. 마사니의 집 마당엔 푸짐한 음식 냄새로 가득 찼지. 코라 연주가 부드럽게 흐르는 사이로 사람들은 환하게 웃고 춤췄어. 결혼식을 기다리는 마사니의 입에도 미소가 계속 걸려있었지. 미소 지으며 신부의 무릎에 잠시 기댄 마사니는 다시 일어나지 못했어. 결혼식을 올리기도 전에 그는 갑자기 숨을 잃었지. 너무나 갑작스런 죽음에 손님들이 고함을 지르기 시작하자, 코라를 연주하던 젤리가 오래된 멜로디에 새롭게 가사를 붙여 이렇게 노래를 불렀지.

라이라라 라이라라
라이라라 마사니 시쎄~

인생은 그런 거야,
인생이 어떻게 흘러갈지 아무도 모르지.

아무리 부자라고 해도, 죽음을 피할 수 없지
아무리 황금이 많더라도, 죽음을 막을 수 없지
아무리 불쌍한 사람이라도, 죽음을 피할 수 없지
아무리 모든 힘을 가졌다 해도, 죽음을 막을 수 없

라이라라 라이라라
라이라라 마사니 시쎄~

 

모든 것을 가지고, 모든 힘을 가진 사람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노래는 마사니 시쎄라는 이름과 함께 널리 퍼지며, 많은 이들이 사랑하는 노래가 되었어. 또, ‘세상’이란 뜻의 ‘두니야(Dounya)’란 제목으로도 불렸지. 마사니 시쎄가 이루고 싶어 했던 여인과의 결혼은 다른 노래에선 아이로 변하기도 했어. 모든 것을 가져도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사람도 있고, 돈은 없지만 아이가 많은 사람도 있다고 말이야. 그렇게 젤리들은 계속 노래했어. 우리 모두는 다른 운명을 타고났고, 서로를 부러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이야. 

다음 이야기는 ‘사랑을 잃은 하마의 이야기 – 말리 사조’로 이어집니다.


3화. 사랑을 잃은 하마, 말리 사조 – 만데 전래동화집

옛날 옛적에, 검은 강과 하얀 강이 함께 흐르는 마을이 있었어. 두 강이 함께 만나 흰색과 검은색이 섞인 물결은 크고 거칠었지. 마을의 여인들은 빨래하거나 물을 뜨러 가기 위해 이 강에 꼭 가야 했는데, 악어나 무서운 동물들 때문에 그 강에 가길 무서워했어.

어느 날, 아이를 가져 배가 부른 여자가 물을 뜨기 위해 강으로 갔어. 그때, 갑자기 물가에서 하마 한 마리가 나타난 거야. 근데 다른 하마와 조금 다르게 생긴 하마였지. 몸은 회색인데, 발은 하얬어. 얼굴엔 하얀 점이 있고, 눈은 태양처럼 황금색이었지. 여자는 하마를 보고 무서워 떨었지만, 하마는 여자에게 괜찮다고 말하며 안심시켰어. 그리고 하마는 오늘부터 여자와 마을을 지킬 것이라고 말했어. 그 나라 말로 하마는 ‘말리’라고 부르는데, 마을 사람들은 그때부터 그 하마를 ‘말리(Mali)’라고 부르며 고마워했어.

몇 달 후 여자는 딸을 낳았고, ‘순수’라는 뜻을 가진 ‘사조(Sadio)’란 이름을 지어 주었어. 사조는 점점 자라나며, 하마 말리와 점점 가까워졌어. 사조는 매일 말리의 등에서 물속으로 뛰어내리고 수영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어.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의 우정은 점점 사랑으로 변해갔지.

어느 날이었어. 젊은 사냥꾼이 마을에 왔다가 사조를 보곤 첫눈에 반한 거야. 하지만 마을의 모든 사람들은 그녀의 마음이 말리에게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 사냥꾼은 그 사실을 믿지 않았고, 사조와 말리가 함께 있는 걸 볼 때마다 분노가 차올라 어쩔 줄을 몰랐지.

화가 머리끝까지 난 그는 어느 날 말리를 없애버려야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결국 말리는 사냥꾼의 손에 목숨을 잃고 말아. 마을을 지켜오던 하마 말리가 사라지자, 다시 마을엔 위험한 일들이 찾아왔지. 사조 또한 평생 혼자로 살았어. 오늘날, 검은 강과 하얀 강이 만나는 바풀라베 마을엔 말리와 사조를 기억하기 위해 하마 동상이 마을 앞을 지키고 있지. 

”아, 말리 사조.
두 강이 만나는 마을의 하마
말리 사조, 어떻게 목숨을 잃었나.

물에 사는 동물들,
뭍에 사는 동물들,
모두 사랑이 뭔지 알지
인간들도 사랑이 뭔지 알아야해
우리 모두 서로 사랑하고 친구가 될 수 있지

말리 하마가 사조의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지
남자아기든 여자아기든 당신의 아이와 친구가 되겠다고“


아, 전설이 아닌 실제 이야기도 있단다. 바풀라베 마을에 식민지 관리로 왔던 유럽 남자는 매일 밤 꽥꽥 울어대는 하마의 목소리를 싫어했었대. 그 소리가 들리기만 하면 언제나 죽이고 싶도록 화가 났었다는군. 그런데 마을 사람들은 하마를 친구처럼 좋아했어. 옛날부터 마을에 위험한 일이 생기면 하마가 마을로 내려와 울었다고 해. 검은 강과 하얀 강이 섞인 강물처럼 회색 몸과 하얀 발을 가진 하마는 어쩌면 그 마을의 수호신 같은 존재였는지도 몰라. 바풀라베 마을은 지금도 말리 사조의 마을이란 별명을 아직 갖고 있어.

세상엔 항상 세 가지 진실이 있다고 하지. 만약 사냥꾼과 사자가 만나 벌어진 사건일 때, 사냥꾼의 진실, 사자의 진실, 그리고 있는 그대로 일어난 사실 이렇게 세 가지가 있대. 오늘 들려준 말리 사조의 이야기는 사자의 진실과 같단다. 사냥꾼 버전의 전설엔 말리는 수치스러운 짓을 해 하마로 변한 남자로, 결국 사랑하는 여자의 배신으로 유럽인의 손에 죽게 되지. 세상엔 이 두 가지의 말리 사조 전설이 함께 떠돌고 있단다. 너는 어떤 이야기를 믿니?


4화. 왕과 씨앗, 바니데(Banide) – 만데 전래동화집

4화. 왕과 씨앗, 바니데(Banide)

옛날 옛적에, 자식이 없어 나라를 물려주지 못하는 왕이 살고 있었어. 고민에 고민이 꼬리를 물다, 결국 왕은 지금까지 나라를 지켜온 전사들 중에서 자신의 시험을 통과하는 사람을 다음 왕으로 삼기로 결심했어. 그는 모두에게 하나의 씨앗을 주었지.  그리고 이 씨앗을 잘 보살펴라고 말해. 일년 후 얼만큼 잘 자랐는지를 보겠다고 하면서 말이야. 

자와라는 그 씨앗을 가지고 집에 돌아와 아내와 함께 매일 물을 주고 씨앗을 심은 화분을 들여다보며 정성껏 보살피기 시작했어. 그런데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연두색 작은 새싹 하나 볼 수 없었지. 다른 사람들은 얼마나 씨앗이 잘 자라고 있는지 보란듯 자랑하고 있는데도 말이야. 누군가의 씨앗은 나무가 되기도 했고, 꽃을 피우기도 했어. 자와라의 씨앗 빼고는 모든 씨앗은 눈부시게 자라고 있는 듯 보였어. 

그렇게 1년이 지나고 왕과 약속한 날이 밝았어. 왕은 그때의 씨앗을 지금까지 얼마나 잘 키웠는지 보고싶다고 모두에게 말했지. 자와라는 아무것도 나지 않은 화분을 가져가기를 망설였지만, 그의 아내가 그대로 가져가도록 권했어. 왕은 한 자리에 모인 모든 화분들, 나무가 되고 꽃이 된 화분들을 둘러보았어. 그리곤 제일 끝에 서 있는 자와라의 텅 빈 화분도 보게 되었지. 

왕은 모든 전사들을 불러모아, 다음 왕은 자와라가 될 것이라고 말했어. 그리곤 자와라 한 사람만이 정직하게 약속을 지켰다고 말해. 왕이 준 씨앗은 뜨거운 물로 한번 삶은 씨앗이라, 절대로 자랄 수 없는 씨앗이었던 거야. 정직함을 지킬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 오직 자와라만이 왕이 될 수 있었지. 

“아니라고 말해요. 

아니라고 말해요. 

당신이 아니라고 말할 때, 약속을 지키는 자가 되죠. 

변하지 않아요. 

변하지 않아요. 

황금을 준대도, 세상 모든 좋은 것을 줘도 

나는 변하지 않아요. 

그건 약속을 지키는 자가 아니죠. 

모든 것을 잃는 대도 

그것이 내 약속을 깨진 못하죠. 

당신의 비밀을 거짓말을 하는 사람에게 말하지 마세요. 

세상에 모든 일이 벌어져도 배신자가 되지 마세요.

좋은 때가 있고 어려운 때가 있고 

나는 항상 여기 있을 거예요

나를 배신하지 않을거예요.” 

– 노래 ‘바니데(Bannide)’ 중에서 

말리와 니제르 사이엔 ‘바니’라 불리는 강이 있대. 그 강엔 전설이 하나 있는데, 사람이 죽어 저승으로 가는 강을 건널 때, 그 강의 중간에 어느 뱃사공이 기다리고 있대. 그가 돌아가 생전에 지은 악행의 빚을 갚지 못하면, 그 강을 통과할 수 없도록 지키고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더군.  바니데 노래는 누구에게나 항상 진실을 말하겠다는 결심으로 유명한 왕 ‘사누그 김바(Sanougue Gimba)’에게 바쳐진 노래라고 해. 힘들더라도 선한 방향을 택하고, 악한 선택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지. 세상에 태어나 우리가 한 일은 그림자처럼 우릴 따라다닐 거라고. 우리의 무덤까지 말이야! 

이 ‘왕과 씨앗’ 이야기는 노래 ‘바니데’가 담고 있는 내용 그 자체는 아니고, 메시지가 비슷한 이야기를 골라 함께 썼다.

5화. 공주와 상처 – 만데 전래동화집

  

옛날 옛적에 어느 공주의 이야기야. 공주는 결혼할 상대를 찾고 있었는데, 단 하나의 조건만 따졌어. 그건 몸에 상처가 하나도 없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었지. 수많은 왕자들이 공주와 결혼하기 위해 온갖 보물을 이고 궁궐을 찾았어. 그때마다 공주의 동생은 파리로 변신해 옷 속으로 들어가 크고 작은 상처들을 찾아냈지. 모두가 영문도 모른 채 헛수고로 돌아가고 말았어. 공주에 대한 소문은 아주 멀리까지 퍼졌어. 계속해서 많은 이들이 금은보화를 이고 찾아왔지만, 모두들 아무 이유도 모른 채 돌아가고 말았지.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 새하얀 옷을 입은 한 남자가 공주를 찾아왔어. 공주가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동생은 재빨리 파리로 변신해 몸 구석구석을 살펴보았지. 놀랍게도 그의 몸은 상처 하나 없이 아주 깨끗했어. 동생은 흥분된 목소리로 찾았다 하고 공주의 귓가에 대고 말했지. 드디어 결혼 상대를 찾은 공주는 다음 날, 하얀 옷을 입은 남자와 동생과 함께 궁궐을 떠났어.

그들은 계속 서쪽으로 걸어갔어. 마을 시가지를 벗어난 지 꽤 되었는데도, 계속 계속 걸었어. 공주와 동생은 도대체 집에 언제 도착하느냐고 물었어. 그럴 때마다 남자는 지금 집으로 가고 있다고 자길 믿고 따라오라고 했어. 마침내 도착한 곳은 서쪽 끝자락에 있는 아주 커다란 숲이었어. 깊숙이 숲으로 들어가 어느 큰 나무 아래에서 남자는 여기가 자신의 집이라 말했어. 그리고 그들은 거기에서 함께 살기 시작했어.

몇 날 며칠이 지나도 공주와 동생은 남자의 가족도 친구도 어느 누구도 만날 수 없었어. 그리고 남자는 매일 밤만 되면 잠자는 공주 몰래 집을 나가는 거야. 수상하게 생각한 동생은 어느 날 밤, 파리로 변신해 남자의 뒤를 쫓았지. 남자는 집 밖을 잠깐 걸어가더니, 입고 있는 옷을 덤불에 숨기고는 아주 커다랗고 눈부시게 하얀 뱀으로 변신했어. 그는 밤이 될 때마다 숲속에서 뱀이 되어 생활하다, 해가 뜨면 벗어놓은 옷을 걸치고 인간의 몸으로 공주에게 다시 돌아왔지. 남자가 낮잠을 자는 사이를 틈타, 공주와 동생은 재빨리 원래 살던 궁궐로 도망가기 시작해.

숲을 헤치고 나와 마구 뛰어가던 그들의 눈앞에 아주 큰 강물이 나타났어. 뒤를 돌아보는데 저 멀리 덤불에서 하얀 옷을 입은 남자가 뛰어오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는 거야. 공주와 동생은 강 위를 날고 있는 검은 새에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어.

티게 티게 바알라 코노니 핑 캉갈라마장
미씨 벵 페소 바알라 코노니 핑 캉갈라마장
네보 디마 바알라 코노니 핑 캉갈라마장
사가벵 페소 바알라 코노니 핑 캉갈라마장

강을 건너게 해줘요 / 목이 긴 검은 새여
나는 소 한 마리가 있어 / 목이 긴 검은 새여
강을 건너면 당신에게 주겠어요 / 목이 긴 검은 새여
나는 양 한 마리가 있어 / 목이 긴 검은 새여

그러자 강 위를 날고 있던 목이 긴 검정 새가 날아와 둘을 물고 강 건너편으로 데려가 주었어. 그런데 강 건너편에서 남자의 노랫소리가 들렸어. 남자도 공주와 동생이 부른 노래를 부르고 있었지. 목이 긴 검정 새는 남자가 있는 쪽으로 날아가 그를 물어 강을 건너기 시작했어. 공주와 동생은 검정 새를 향해 다시 크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어.

카나 티게 바알라 코노니 핑 캉갈라마장
미씨 타 페소 바알라 코노니 핑 캉갈라마장
사주구 레무 바알라 코노니 핑 캉갈라마장
사주구 벨레벨레 바알라 코노니 핑 캉갈라마장

강을 건너지 마요 / 목이 긴 검은 새여
그는 소가 없어요 / 목이 긴 검은 새여
무서운 뱀이에요 / 목이 긴 검은 새여
무서운 큰 뱀이에요 / 목이 긴 검은 새여

검정 새는 남자를 강 중간에서 떨어뜨렸고, 이후로 남자는 그 강에 사는 뱀이 되었지. 

자, 여기서 이야기는 끝이란다. 검정 새와의 약속을 지킨다면, 그들은 다시 하얀 뱀을 만나진 않을 거야. 그런데 말이야. 몸에 상처가 없는 사람을 찾던 공주에게는 상처가 하나도 없었을까?  

 

*
이 만데 전래동화집은 그리오의 노래에 담긴 이야기로 시작했는데, 역사적으로 그들이 남긴 노래엔 전쟁에서 이긴 왕과 전사들을 칭송하는 노래들이 많았습니다. 이미 ‘파콜리’와 ‘순디아타 케이타’ 왕을 통해, 충분히 용기있는 이야기는 전한 것 같아, 이번 화부터 그리오의 노래를 떠나 부르키나파소에서 오랫동안 구전된 이야기 중 지금의 어린이들에게 계속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골라 들려드리려 합니다. 다음 이야기도 기다려주세요! 


6화. 숲으로 간 고아 – 만데 전래동화집

오늘은 죵메네 축제의 마지막 날이야. 죵메네는 이슬람의 타바스키 축제가 끝나고 한달 정도 뒤에 시작하는 보보 민족의 축제야. 이날엔 1년 동안 마을에서 나쁜 짓을 한 사람들 집에 찾아가, 그 사람이 한 나쁜 짓들을 노래로 만들어 부르지. 그래서 오늘 이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해. 

옛날 옛적에 어느 여자아이가 태어났어. 그런데 슬프게도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돌아가시고 말았지. 태어나자마자 고아가 된 아이는 아버지의 남동생이 대신 키우겠다고 데려갔어. 그는 형의 아이를 제 자식처럼 아꼈지만, 그의 아내는 반대였어. 아내의 마음엔 불길이 있었지. 솟구치는 불길을 고아에게 뿜어내고, 또 뿜어냈어. 

시간은 흘러 흘러, 고아는 자라 열몇 살의 소녀가 되었어. 그러던 어느 날, 죵메네 축제 날이 온 거야. 숙모의 구박을 받으며 자란 고아는 머리가 덕지덕지 뭉쳐져 있고, 옷은 더러운 넝마 같았지. 축제 날, 모든 집의 엄마와 딸들은 머리를 예쁘게 꾸미기 위해 함께 장터에 나갔어. 고아는 혼자 밖으로 나가 어떤 길이든 발 닿는 대로 걷기 시작했어. 모두가 어디로 갈지 알았지만, 그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지. 머리할 돈도 없고, 머리해줄 사람도 없고, 그냥 어디든 걸어가자는 마음으로 걷고 또 걸었어. 그러다 두 갈래 길이 나왔고, 고아는 하나의 길을 택했어. 깊은 숲속으로 들어가는 길이었어. 

숲속에 이르자, 넓은 팅이 나왔어. 팅은 마을 사람들이 모여 곡식의 껍질을 까는 큰 터인데, 거기엔 풀이 자라지 않지. 그러다 그녀는 빈터에 아주 커다란 뭔가가 누워 있는 걸 발견했어. 아주 아주 커다란 뱀이었어! 고아는 너무 놀라, 난 길을 잃은 것뿐이에요! 여기 오려고 한 건 아닌데 하고 외쳤어. 그러자 뱀이 말했어. 너는 길을 잃지 않았어. 이리 와. 

뱀은 무엇을 찾고 있는지 물었고, 고아는 자신의 머리를 가리키며, 축제날에 더러운 머리를 한 사람은 자신밖에 없을 거라며 머리를 만들어줄 사람을 찾고 있었다고 말했어. 그리고 정처 없이 걷다 여기에 도착했고, 당신을 만나 너무 놀랐다고 말했어. 

커다란 뱀은 빈터에 놓인 기다란 콰레 의자에 앉으라고 했어. 고아는 이 의자는 너무 금처럼 반짝여요, 앉을 수 없어요라고 손사래를 쳤지. 그러자 뱀은 맞아, 이건 금으로 만들었어, 여기 앉으라고 다시 권했어. 그리고 뱀은 의자에 앉은 고아에게 이렇게 말했어. 내가 너에게 길을 잃지 않았다고 했지? 내가 너의 머리를 만들어줄게. 

고아의 심장은 무서워서 아주 쿵쾅거리기 시작했어. 커다란 뱀은 네레 나뭇가지를 꺾어, 그녀의 머리 가장자리를 툭툭 치듯이 쓰다듬었지. 그랬더니, 놀랍게도 아주 아름다운 머리로 변하는 거야.  모든 치장이 끝나자, 뱀은 고아에게 자신이 머리를 만들어준 걸 비밀로 하라고 해. 약속을 어긴다면, 내가 널 삼켜버릴 거야 라고 말하며. 고아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약속을 지키겠다고 말했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고아의 머리를 보는 사람마다 모두 탄성을 내질렀어. 거리의 젊은 남자들은 모두 고아에게 사랑의 화살을 쏘고 싶다고 구애했지. 아, 소녀여, 도대체 누가 당신의 머리를 이토록 아름답게 만들었나요? 하고 한 남자가 물었어. 고아는 대답 대신 이렇게 노래를 불렀지. 

죠냐냐냐베 콩오, 코 죠냐냐냐베 콩오
콩오 티길레 콩고 람바 죠냐냐냐베 콩오

숲에는 숲을 지키는 신이 있어요
숲을 지키는 신은 우리도 지켜주지요 

집으로 걸어가는데,  또 다른 남자가 물었어. 그러자 고아는 아, 젊은이여, 당신은 이런 질문을 하기엔 너무 잘생겼어요라고 답하며 또 이렇게 노래를 불렀지. 

 죠냐냐냐베 콩오, 코 죠냐냐냐베 콩오
콩오 티길레 콩고 람바 죠냐냐냐베 콩오

숲에는 숲을 지키는 신이 있어요
숲을 지키는 신은 우리도 지켜주지요 

집으로 돌아온 고아의 머리를 보고, 숙모는 누구든 당장 죽일 것 같은 얼굴로 우리 집에 없어진 돈이 있는지 봐야겠어라고 말했어. 숙모는 마치 누구에게든 나쁜 짓을 할 수 있는 처노베야(나쁜 주술사) 같았지. 너가 돈이 어디 있어서 그 머리를 만든 거야? 엉덩이에 숨겨놨니? 니가 내 돈을 훔친 거니? 누구한테 빌린 거니? 숙모의 불길 같은 호통이 이어지자, 고아는 다시 이렇게 노래를 불렀어. 

 죠냐냐냐베 콩오, 코 죠냐냐냐베 콩오
콩오 티길레 콩고 람바 죠냐냐냐베 콩오

숲에는 숲을 지키는 신이 있어요
숲을 지키는 신은 우리도 지켜주지요

숙모는 고아가 하는 말을 하나도 듣지도 않고, 믿지도 않았어. 그러자 갑자기 숙모의 딸이 일어나 집 밖으로 나갔어. 숙모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으며 자라온 딸은 고아의 머리를 보자마자 마음에 불길이 일었지. 그 불길은 그녀의 발걸음을 숲으로 향하게 했어. 두 갈래의 길이 나오자, 하나의 길을 택했고, 그대로 걸어가 숙모의 딸도 아주 커다란 뱀을 만났어. 커다란 뱀은 똑같이 그녀의 머리를 아름답게 만들어줬어. 숙모의 딸은 머리 값이 얼마냐고 물었고, 뱀은 돈 낼 필요가 없다고 했지. 다만 비밀을 지키지 않는다면, 내가 너를 삼켜버릴 거라고 말했어. 

그녀의 머리는 고아의 머리보다 훨씬 예쁘게 만들어졌어. 길거리의 남자들은 모두들 사랑의 화살을 쏘고 싶다고 외쳐댔지. 숙모의 딸은 당신은 이런 질문을 하기엔 너무 잘생겼어요라고 말하며, 고아와 같은 노래를 불렀어. 

 죠냐냐냐베 콩오, 코 죠냐냐냐베 콩오
콩오 티길레 콩고 람바 죠냐냐냐베 콩오

숲에는 숲을 지키는 신이 있어요
숲을 지키는 신은 우리도 지켜주지요

그리곤 신이 나서, 이 머리는 큰 뱀이 만들어줬지!라고 덧붙이고 말았지. 그런데 기억나니? 뱀이 비밀을 지키지 않으면 삼켜버리겠다고 한 말을. 

그녀가 집에 들어서자마자, 숙모가 머리를 보고 또 화들짝 놀라고 말았지. 너도 내 돈을 가져갔니? 누가 너 머리를 만든 거니? 하고 소리쳤어. 그러자 딸은 고아와 똑같이 이 노래를 불렀어.

 죠냐냐냐베 콩오, 코 죠냐냐냐베 콩오
콩오 티길레 콩고 람바 죠냐냐냐베 콩오

숲에는 숲을 지키는 신이 있어요
숲을 지키는 신은 우리도 지켜주지요
 

아, 엄마, 엄마는 이 질문을 하기엔 너무 아름다워요. 숲속의 큰 뱀이 만들어줬죠. 그리고 뱀은 이걸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했어요. 숙모의 딸은 신이 나서 이렇게 말했어. 숙모는 자신의 돈을 훔치지 않은 걸 알고, 딸과 함께 집 밖으로 나갔어. 길을 걷던 중, 아주 잘생긴 남자가 두 모녀에게 다가왔어. 그리고 사랑의 화살을 쏘고 싶다고 말하며, 누가 너의 머리를 만들어줬는지 물었어. 그러자 딸은 노래를 부르며, 당신은 이 질문을 하기엔 너무 잘생겼어요라고 답하며 큰 뱀이 머릴 만들어줬다고 말했어. 잘생긴 남자는 묻지 않고 지나갈 수 없었어요라고 답하며, 당신과 함께 걷고 싶다고 말했어. 숙모의 딸은 남자와 단둘이 길을 걷기 시작했어.  

마을을 벗어나 두 갈래의 길이 나왔어. 남자가 숲으로 가는 길을 택하자, 숙모의 딸은 당신은 숲속에서 사나요하고 물었어. 남자는 숲에 친구가 있다고, 같이 만나러 가자고 말했어. 그들은 계속 걸어갔어. 걸어가다 남자가 잠깐 오줌을 누고 오겠다며 자신을 기다려달라고 말해. 거의 다 왔다고 말하면서. 그녀는 남자를 기다리다, 갑자기 고개를 들었어. 커다란 뱀이 자신을 아주 크게 둘러싸고 있는 걸 보았지. 그녀는 깜짝 놀라 나는 나쁜 짓은 하나도 하지 않았어요하고 외쳤어. 그러자 커다란 뱀은 아니야, 내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랬지 하며, 뱃속을 갈라 내장을 꺼내 그녀의 머리를 만들어줬어.


이 이야기는 부르키나파소 보보민족에서 내려오는 전래동화입니다. 부르키나파소 보보디울라소에서 조금 떨어진 작은 도시 ‘바마(Bama)’에서 라디오로 옛 이야기를 들려주는 바마 체체레, 본명은 조엘 사누 님이 들려주었어요. 실제로 이야기를 들려준 때가 죵메네 축제날이었지요. 죽은 이들을 1년에 한 번씩 기리는 축제이면서, 또 나쁜 짓을 저지른 마을사람들을 찾아가 그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해요. 아내 몰래 바람을 피운 남편도 있고, 이웃의 물건을 훔친 사람도 있죠. 세상에 비밀은 없다지요. 어떤 이는 노래를 듣고 울며 반성하기도 하고, 나쁜 짓을 많이 해 이미 마을 사람들이 자신을 찾아올 걸 아는 사람은 그날 밤 도망을 치기도 하지요. 이 축제날에 부른 노래는 그날 이후로 부르지 않아요. 그렇게 다시 새로운 1년을 맞이하지요. 우리가 기억하기 위해 축제를 해도, 사람들은 여전히 약속을 잊곤 하죠.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내년 축제날에도 집 앞이 아주 시끄러울 거예요. 


7화. 코끼리와 고슴도치 – 만데 전래동화집

옛날 옛적에, 모래가 휭휭 날리는 바싹 마른 땅에 여러 동물들이 살고 있었어. 아주 아주 옛날이라 동물밖에 없을 때였지. 아, 꼭 그렇진 않구나. 숲에 사는 요정도 있고, 거인 요정과 난쟁이 요정들 역시 같이 살고 있었단다. 인간은 아직 이 땅에 나타나지 않았을 만큼 아주 먼 옛날이였어.

그때는 말이야. 강이 하나밖에 없었단다. 아주 멀리멀리 있었지. 작고 짠맛이 나는 강이었어. 그 강의 주인은 바로 작은 고슴도치. 아주 아주 작은 사람처럼 생긴 땅의 요정 워크로니가 고슴도치에게 이렇게 말하며 주었단다. 

“고슴도치야, 이 강의 주인은 바로 너란다. 만약 누군가 너의 허락을 구하지 않고 강물을 마신다면, 이 강은 마르게 될 거야. 그리고 네가 물을 마시고 싶은 누군가의 요청을 거절해도, 이 강은 마르게 될 거란다.”

사실 고슴도치는 성질이 고약하지 않았어. 가시 돋친 외모 때문에 그런 분위기를 풍겼을 뿐이지. 물을 마시러 온 다른 동물들은 딱 한 마디만 하면 됐어. “작은 고슴도치야, 나는 너무 목이 말라. 너의 강물에서 물을 마실 수 있을까?” 그러면 고슴도치는 언제나 그렇다고 말했어. 누구든 실컷 물을 마실 수 있었지.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 어떤 파리가 물었는진 모르지만 벌겋게 물린 자국이 있는 코끼리가 일어나 이렇게 말했어.

“동물 중에 가장 크고, 가장 세고, 가장 강한 내가 그 보잘것없는 고슴도치에게 매번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나는 다신 그러지 않겠어. 오늘부터 나는 고슴도치의 허락 없이 물을 마시겠어.”

작은 고슴도치는 그 자리에 없었어. 고슴도치를 기다리던 다른 동물들이 코끼리에게 말했어.

“코끼리여, 그러지 마세요. 아무것도 줄 것 없이 허락만 구하면 돼요. 고슴도치는 한 번도 거절한 적이 없어요.”

하지만 코끼리는 다른 동물들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어. 바로 일어나 강으로 들어갔지. 하지만 코끼리가 물을 마시려고 하기도 전에, 강물은 마르고 말았어. 코끼리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부리나케 강을 떠났어.

그때 바로 고슴도치가 도착했어. 짠맛이 나는 작은 강이 말라버린 걸 발견하곤, 그는 작은 앞발을 들고 서서 이렇게 말했어.

“나의 작은 강물을 누가 다 마셨습니까?”

“코끼리예요.” 다른 동물들이 목소리를 합쳐 대답했어. “우리는 그러지 말라고 말을 했다구요.”

그러자 작은 고슴도치는 작은 발을 들고, 화난 목소리로 이렇게 노래하기 시작했어.

“나의 작은 강물,
코끼리가 모두 비워버렸네.
내가 만약 코끼리를 보기라도 한다면
내가 만약 코끼리를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나는 그와 싸울 것이다.
나의 강물을 코끼리로부터 돌려받겠다.
이렇게 고슴도치의 말을 마친다.”

그리곤 고슴도치는 곧장 코끼리를 찾으러 떠났어. 그는 덤불숲을 종종 걸으며 코끼리를 찾아다녔어. 때때로 작은 두 발을 세워 서기도 하고, 나무에 오르기도 하며 샅샅이 코끼리를 찾아다녔어.

고슴도치는 정말 화가 나 있었어. 하지만 고슴도치가 어떻게 코끼리를 이길 수 있어?

“물론이지! 나는 이길 거야.” 하고 동물들에게 고슴도치는 대답했어.

작은 고슴도치는 아주 오랫동안 걸었어. 코끼리를 발견한 건 거의 새벽이었지. 커다랗고 피부가 두꺼운 이 동물은 마구마구 쌓여있는 음식을 싹쓸이하고 난 후였어. 그리고 해가 지는 모습을 보며 쉬다가 잠이 들었어.

작은 고슴도치는 커다란 코끼리에게 곧장 걸어갔어. 그리고 발로 한 번 차고, 두 번 차고, 계속 찼어. 코끼리는 눈을 번쩍 떴어.

“너로구나, 네가 내 작은 강물을 모두 마셨구나. 그렇지?”하고 화가 난 고슴도치가 물었어.

“그래, 나다. 나야 나. 그래서 넌 뭘 원해?” 코끼리가 투덜댔어.

“너와 싸우겠다!”

“아! 하하하! “ 코끼리는 배를 잡고 큰 소리로 웃었어. 나와 싸우겠다고? 미친 것 아니니?

고슴도치는 그 답으로 코끼리를 때리기 시작했어. 그러자 코끼리도 화가 났어. 코끼리는 가만히 선 채, 코를 높-이 올리더니 고슴도치 쪽으로 홱하고 뻗었어. 코끼리는 절대로 해선 안 되는 일을 하고 말았지. 고슴도치는 자신의 모든 가시를 활짝 펼친 채 코끼리의 콧속으로 돌진했어. 코끼리는 너무 아파서 소리 질렀고, 다른 동물들에게 도와달라고 외쳤어. 동물들은 고슴도치에게 다가가 제발 코끼리 콧속에서 가시를 빼달라고 빌었지.

작은 고슴도치는 가시로 둘러싸여 있었지만, 고약한 동물은 아니었어. 코끼리를 도와달라고 동물들이 부탁하자, 고슴도치는 관대하게도 그 자리에서 바로 가시를 빼주었어. 그날 이후로 코끼리는, 여전히 가장 힘이 센 동물이지만, 자신보다 작은 동물들을 절대로 공격하지 않았다고 해.

고슴도치가 작은 발을 들고 동물들 앞에서 크게 부른 노래를 나는 계속 상상하고 있어. 노래를 부를 때의 단단한 눈빛도, 종종 걸으며 코끼리를 샅샅이 찾아다니는 자세도, 마침내 코끼리에게 당당히 걸어가 외치는 목소리도. 고슴도치는 코끼리 발톱보다도 작은 몸이었지만 그랬기에 코끼리의 콧속으로 돌진 할 수도 있었어. 겉보기에 고약해 보여도 약속을 지킬 줄 아는 동물이었지. 그래서 워크로니는 고슴도치에게 강을 맡겼는지도 몰라. 살면서 땅의 요정 워크로니를 보기란 정말 드문 일이야. 만약 너보다 아주 아주 작은 사람을 보게 된다면, 그때 이 이야기를 떠올리렴. 우리는 가끔 코끼리가 되기도 하니까 말이야.

8화. 막무가내 사냥꾼과 이구아나


옛날 옛적에, 마리코라는 사냥꾼이 있었어. 세상에 이런 놈이 있다니. 그는 동물들을 마구마구 죽이는 사냥꾼이었어. 마치 동물들이 원래부터 생명이 없었던 것처럼 말이야. 매일매일 수십 마리를 잡고선, 머리와 꼬리를 트로피처럼 집에 걸어 놓았어. 

어느 날, 사냥꾼의 잔혹한 학살을 더 이상 눈 뜨고 볼 수 없던 아내가 말했어.

“제발, 마리코. 지금처럼 동물을 죽이는 것 이제 제발 그만둬. 그러면 안 돼. 동물들도 생명이 있어.”

하지만 마리코는 코웃음을 쳤지. 다음날도 마리코는 수십 마리의 꼬리를 끌고 집으로 돌아왔어. 

다음 날, 마을의 어른들이 그를 불러 말했어. 

“마리코, 지금처럼 동물을 죽이는 것은 이제 그만하게. 자네보다 먼저 이 땅에서 사냥을 했던 사람들이 자네처럼 사냥했다면, 마리코 자네는 사냥꾼이 될 수 없었을 걸세. 남아있는 동물들이 없었을 거니까 말이야.” 

마리코는 또 코웃음을 쳤어. 그리고 다음 날,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은 꼬리를 끌고 마을로 돌아왔어. 

어느 날, 마리코는 하루 종일 초원을 누볐는데도 아무 동물도 만나지 못했어. 아주 작은 다람쥐조차 볼 수 없었지. 저녁이 되었고, 빈손인 마리코는 투덜거리며 마을로 돌아가는 중이었어. 그러다 강가에 이르렀어. 거기엔 사람만큼 커다란 이구아나가 있었지. 이구아나는 저무는 해의 마지막 빛을 쬐며 쉬고 있었어. 마리코는 너무 기뻐서 눈을 번뜩였어. 빈 손으로 돌아가면 분명 마을 사람들이 놀려댈 게 뻔했거든. 마리코는 이구아나에게 조용히 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려는 찰나, 이구아나가 갑자기 사람처럼 벌떡 일어서서는 노래를 하지 뭐야. 

날 죽이지 마요, 마리코. 죽이지 말아요.
나는 다른 도마뱀과 달라요. 내가 보이나요?
동서남북의 상인들이 여기를 오고 가죠.
나를 여기서 보죠. 매일매일.
그들은 알고 있죠. 날 죽이지 않죠.
그들은 알고 있죠. 내가 다른 도마뱀과 다르다는걸!

마리코는 이구아나의 말에 배를 잡고 웃는 걸로 답했어. 

“도마뱀 선생님, 준비한 노래를 모두 불러도, 당신을 죽일 겁니다.” 

그리곤 빵! 

쓰러진 이구아나의 몸을 들어 어깨에 올린 후, 마리코는 마을로 돌아왔어. 집으로 막 들어가려는데, 죽은 이구아나가 등 뒤에서 다시 노래를 불렀어. 

“마리코, 날 죽이지 마요. 나는 다른 도마뱀과 달라요…”

“노래 계속 부르라지! 난 지금 널 구워 먹을 거니까. 뱃속에서도 계속 노래를 부르는지 한번 두고 보자구!”

마리코는 이구아나를 아내 앞에 던지며 말했어. “여보, 이걸로 저녁 준비해줘. 배고파 죽을 지경이야.” 

“나? 준비는 무슨, 나는 그 도마뱀을 먹지도 않을 거야. 우리 아이들도 마찬가지고. 알겠어, 마리코?” 아내는 그에게 되물었어.

“맘대로 해. 내가 직접 할 거야.”

그러고는 마리코는 이구아나의 껍질을 벗기고, 동강동강 잘라 화덕에 넣었어. 그런데 동강 잘린 토막들이 불 속에서 점점 익어가며 노래를 하기 시작하는 거야.

“마리코, 날 죽이지 마요. 나는 다른 도마뱀과 달라요…”

“무슨 소릴! 준비됐나? 이제 이 튼튼한 이빨로 널 뜯어먹을 것이야.” 하고 마리코가 말했어. “그래도 계속 노래를 할지 두고 보자고.”

고기가 모두 익고, 마리코는 우걱우걱 먹기 시작했어. 아내를 불렀지만, 아내는 거절했어. 아이들을 불렀지만, 아이들 모두 거절했어. 그는 혼자서 그 커다란 이구아나를 전부 먹었어. 식사를 마치고 일어서려는데, 마리코는 갑자기 목구멍이 타는 것 같았어. 너무 목이 말랐지. 아내에게 소리치며 말했어.

“물 좀 줘. 목말라 죽겠어. 목이 말라 죽겠다고!”

아내가 준 물 한 잔을 벌컥 마셨어. 하지만 목마름은 가시질 않았어. 이제 아이들에게 소리치며 말했어. 

“물 좀 가져와, 목말라 죽겠다, 죽겠다고!”

아이들이 한 명씩 커다란 물병을 가져왔어. 마리코는 병째 단숨에 들이켰지. 하지만 목마름은 점점 커져갔어. 그는 부엌으로 들어가 커다란 항아리에 가득 차 있는 물을 꿀꺽꿀꺽 다 마셨어. 목구멍엔 불길이 치솟았어.

마리코는 문을 박차고, 마을 밖으로 뛰기 시작했어. 전속력을 다해 강가로 뛰어갔지. 이구아나를 죽였던 바로 그 강으로. 그는 강물에 아예 코를 박은 채 쭉쭉 강물을 들이키기 시작했어. 마시면 마실수록 목마름은 더욱 불타올랐어. 마리코는 있는 힘껏 쭈욱쭈욱 양손으로 벌컥벌컥 강물을 퍼마시고 들이부었어. 마리코의 배는 불룩하게 점점 불어오르더니 풍선처럼 아주 빵빵해졌어. 

그리곤 빵! 

마리코의 배는 터지고 말았지. 그러자 뱃속에서 이구아나 토막들이 슬금슬금 기어 나오더니, 하나로 붙기 시작하는 거야. 그리곤 갑자기 사람처럼 똑바로 서서는, 배가 터져 죽은 마리코 앞에서 이렇게 말했어. 

“마리코, 내가 뭐라고 했어. 꼭 대가를 치러야 배울 수 있겠니.”

그날 이후론 아무도 동물들을 이유 없이 마구 사냥하지 않았다고 해.  

만데 문화에서 사냥꾼은 특별한 힘을 가진 존재로 여겨져. 그 힘은 바로 숲과 강, 식물과 동물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능력이었어. 사냥꾼은 인간 세계와 자연 세계 사이의 비밀을 알고, 그 둘을 잇고 있는 존재였지. 여기저기를 다니며 사람보다 훨씬 크고 사나운 동물들을 잡고 마을로 돌아오면, 사냥감의 피와 살, 뼈와 가죽 등은 모두 마을에 나누어졌어. 귀중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었지. 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사냥꾼은 모두 알아야 했어. 당신이 다른 존재들보다 더 뛰어나서 특별한 힘을 갖게 된 게 아니라는 걸. 막무가내로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힘은 결국 자신을 죽게 만든다는 것을.  






9화. 사냥꾼 반타와 노래하는 거북 – 만데 전래동화집

옛날 옛적에 아주 무지막지한 사냥꾼 반타가 살고 있었어. 어떤 동물이든 반타의 눈에만 띄면 불에 굽히거나 가죽이 벗겨지거나 모두 죽을 운명이었지. 반타가 얼만큼 무지막지했냐면, 새끼를 배었거나 데리고 있는 어미를 죽이면 그 자신도 자손 없이 죽을 거란 오래된 믿음도 무시했단다. 반타는 소중한 자식을 세 명이나 둔 아버지인데도 말이야.

매일 저녁 반타는 사냥감을 메고 집으로 돌아왔어. 목에는 여우와 다람쥐를, 허리 주머니엔 비둘기와 토끼를, 때로는 영양이나 얼룩말을 바닥에 끌며 돌아왔지. 반타는 가족들이 다 먹지도 못할 만큼 많은 동물들을 사냥했어. 그저 엄청나게 도살을 저지르는 데에 빠져있었지. 더군다나 반타는 뽐내기를 좋아했고, 그가 사냥감 이야기를 시작하면 아무도 말리지 못할 정도였어.

그리고 오늘, 이 망고나무 아래에 숲속의 동물들이 모두 모여 회의를 열었어. 그의 창에 맞거나, 올가미에 빠져 죽기 전에 이제 그만 반타를 멈춰야 했지, 하지만 도대체 누가 반타에게 맞설 수 있단 말이야? 사자는 갑자기 고개를 숙이며, 앞발 사이를 지나가는 개미들을 열심히 관찰하기 시작했어. 코뿔소는 마침 다른 일이 있다며 일어났고, 코끼리는 몸을 으슬으슬 떨었어. 코끼리만 아픈 건 아니었어. 나도 감기에 걸린 것 같아 하고 뱀이 말했어. 하이에나도 마찬가지였어. 썩은 고기만 먹다가 너무 신선한 음식을 먹었나 봐.

그러니까 반타에게 맞설 미친놈은 아무도 없었다 이거야. 떼죽음은 계속 이어지겠지. 이 초원에서 피가 마를 날은 이제 없을 거야. 그런데 갑자기 작은 거북이 빼꼼 손을 들었어. 그리고 거북이는 다른 모든 동물들에게 내일 모두 꽁꽁 숨어 있어야 한다고 부탁했어. 아무도 자신의 굴에서 나와서는 안 된다고 말이야.

다음 날, 반타는 막대기로 수풀을 때려도 보고, 돌들을 하나하나 뒤집어도 보고, 머리를 뒤로 돌려도 보며 텅 빈 하늘을 노려보았어. 초원은 적막하기만 했지. 모래와 먼지 속에서 발자국을 찾아보았지만, 말짱 헛수고였어. 숨소리 하나, 날갯짓 하나도 들리지 않았어. 늪에 악어 한 마리조차 없었어. 저녁이 되었고, 빈손으로 처음 집으로 돌아가게 된 반타는 가슴 속이 분노와 쓰라림으로 가득 찼어.

아니 그런데 이건 꿈인 걸까? 저 높이 솟은 풀숲 사이로 코라의 청명한 음이 띠리링 들리더니, 그다음엔 노래가 흘러나오는 거야. 무슨 일일까 궁금해하며 반타는 조심조심 다가갔어. 거기엔 아주 작은 거북이가 코라를 연주하며 흥겹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어. 저놈을 보면 내 아이들이 아주 좋아하겠군 반타는 생각했어. 오늘 내가 사냥을 실패한 걸 까먹을 만큼 말이야. 그리곤 덥석 거북이를 잡아 가방에 넣었어.

– 오늘은 아무 사냥감을 갖고 오지 않았어요? 아이들이 물었어.

– 더 좋은 걸 가져왔지. 반타가 말했어. 특별히 솜씨를 부려 노래하는 거북이를 잡았단다. 자, 들어봐.

거북이는 가족과 이웃들이 모인 앞에서 고분고분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불렀어. 반타는 마치 자신이 잘한 것 마냥 사람들의 박수를 받았어. 이 거북이는 왕에게 잘 보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야 하고 반타는 생각했어.

다음날, 반타는 왕궁으로 찾아갔어.

– 위대한 왕이시여, 당신을 위해 이 작은 거북이가 노래하도록 제가 훈련시켰습니다.

– 오늘 밤 오너라. 궁중에서 거북이는 노래할 것이다.

그리고 여기는 궁궐의 중앙 정원. 반타의 손엔 경이로운 거북이가 놓여 있지. 반타는 세상을 다 가진 듯 미소를 띠며 작은 의자 위에 거북이와 그의 악기 코라를 놓았어.

– 자, 시작해봐 거북아.

하지만 거북이는 꿈쩍도 안 했지.

– 자, 노래해봐.

하지만 거북이는 아무 말도 없었지.

– 노래해봐, 어서!!!

하지만 거북이는 슬며시 고개를 넣더니, 다리까지 껍질 안으로 쏙 넣고 말았어. “반타, 내 얼굴에 먹칠을 하다니!” 웃음거리가 되고 싶지 않았던 왕은 불같이 호통치며 당장 이 허풍쟁이를 처단하라고 명령했어. 교수대는 단숨에 세워졌어.

여기 반타가 목이 대롱대롱 걸려있구나. 숨 막히고, 괴로워하며, 마침내 그도 죽음을 맞이하겠지. 반타의 배배 꼬인 몸이 마지막 숨을 뱉으려 마구 떨렸어. 그런데 갑자기 코라의 아주 맑은 멜로디가 울려 퍼지는 게 아니겠어. 그리고 반타가 마지막 숨을 뱉는 순간, 작은 노랫소리가 시작되었지. 묘하게 기운찬 노래가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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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여덟 소녀와 먹보 하이에나 – 만데 전래동화집

여덟 소녀와 먹보 하이에나 

옛날 옛적 어느 마을에, 숲속에서 노는 걸 좋아하는 여덟 명의 소녀가 있었어. 어느 날 숲에서 놀던 아이들이 꽃을 꺾자,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어. 비를 피하다 어느 동굴로 들어갔는데, 알고 보니 먹보 중에 먹보 ‘수루쿠바’ 하이에나의 굴이지 뭐야. 얼마 후, 하이에나가 따그닥 따그닥 굴로 돌아오는 길이었어. 동굴 근처에 도착하자, 걸음을 멈추고 이렇게 소리쳤어.

“흠, 어린 여자아이의 냄새가 나는걸!”

그리곤 동굴 입구 앞에서 안쪽을 보며 외쳤어.

“얘들아, 너희 몇이나 있니?”

아이들은 하나의 목소리로 노래하며 답했어.

“우리는 여덟 명의 아이들이죠! 하이에나 배를 채우는, 우리는 여덟 소녀들!”

하이에나는 너무 신이 나서 이리 팔짝 저리 팔짝 뛰었어. 그리고 다른 하이에나에게 자랑하고 싶었지. 지금 쟤들을 몽땅 먹어버리면, 누가 믿겠냐 말이야. 하이에나는 증인을 찾아야 했어. 아이들의 노래를 따라 부르며 폴짝폴짝 뛰어갔어.

“하이에나 배를 채우는, 우리는 여덟 소녀들!”

친구를 발견한 하이에나는 자신의 동굴에 무엇이 있는지 보러 오라며 꾀었어. 글쎄 우리 집에 말이야, 통통한 여자아이들이 여덟이나 있다구! 하지만 하이에나가 도착하기 전에, 여덟 명 중 두 명이 동굴을 빠져나와 마을로 돌아갔어. 남은 여섯이 한목소리로 노래했어.

“맞아, 우리는 진짜 여덟! 여덟 마리 하이에나 송곳니를 즐겁게 할, 우리는 여덟소녀들!”

두 하이에나는 신이 나서 폴짝폴짝 뛰어갔어. 그런데 말이야. 세 번째 하이에나를 찾아야 했을까? 네 번째도? 그럼 다섯 번째도? 음… 진짜 여덟 명의 소녀들이 있다면 말이야!

다시 동굴로 돌아온 하이에나가 물었어.

“너희 몇이라구 얘들아?”

물음에 답하는 목소리는 하나밖에 없었어. 깜짝 놀란 하이에나들은 재빨리 동굴로 들어갔어. 바닥엔 작은 반지 하나가 있었지. 여덟 소녀들중 가장 맏언니가 놔두고 간 반지가 대답한 거였어.

화가 머리끝까지 난 하이에나들은 소녀들을 따그닥 따그닥 쫓아가기 시작했어. 마을 입구에 도착하자, 가장 마지막에 도망친 맏언니가 울타리를 기어오르고 있는 걸 보았어. 하이에나가 소녀의 종아리를 덥썩 붙잡았지.

“요 녀석 잡았다! 이제 널 잡아먹고 말 테다!”

그러자, 소녀는 으하하하 크게 웃으며 답했어.

“하하하 이 멍청이 하이에나! 니가 지금 잡은 건 내가 아니라 울타리야!”

하이에나는 소녀의 종아리를 털썩 놓고는 울타리를 덥썩 잡아버렸어. 소녀는 잽싸게 마을로 달려가 사냥꾼들을 불렀단다.

만데 전래동화에서 하이에나는 꽤 자주 등장하는 동물이야. 만데 사람들은 하이에나를 ‘수루쿠바’라는 별명으로 불러, ‘수루쿠’는 만데어로 ‘많이 먹는 사람’이란 뜻인데, ‘수루쿠바’는 먹보 중의 먹보란 말이지. 먹고 또 먹어도 계속 먹으려고 하는, 욕심 많고 어리석은 이들이 주로 ‘수루쿠바’ 하이에나로 비유되곤 해. 어리석은 하이에나와 여덟 소녀의 재치들이 대비되며 나는 더 재밌게 읽었어. 마지막에 다리를 잡혔는데도 울타리라고 말한 소녀의 말은 너무 천연덕스러워 읽고 또 읽었지 뭐야. 나도 어디선가 제 발로 호랑이 소굴에 들어간다면, 여덟 소녀의 노래를 한번 떠올려 보려고. 으하하하 웃으며 아주 큰 목소리로 기세 좋게 불렀을 이들의 노랫소리를.   


11화 욕심쟁이 하이에나와 할머니

옛날 옛적에, 염소를 아주 많이 키우는 할머니가 살고 있었어. 모두 토실토실 살찌고 잘 자란 염소들이었지. 염소들은 하루도 조용할 새 없이 지붕 위에 올라가 폴짝폴짝 뜀뛰고 소리쳐서 이웃들은 매우 성가셔했어. 그러자 할머니는 염소들 사이에서 혼자 살 수 있게 외딴곳으로 갔어.

한편, 호시탐탐 할머니 염소를 노리던 ‘수루쿠바’ 하이에나에겐 절호의 기회였지. 하지만 하이에나가 먹고 싶다고 해서, 하고 싶은 대로 할 순 없었어. 동물의 왕 사자가 가만두지 않을 거거든!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 ‘수루쿠바’ 하이에나는 좋은 수가 없을까 하며 초원을 어슬렁거리고 있었지. 염소를 당당하게 먹을 수 있는 속셈 말이야.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든 순간, 하이에나는 새 한 마리를 발견했어. 바로 이거야! 뛰어올라 냉큼 잡았지. 이 새를 할머니에게 주는 거야. 그리고 할머니가 새를 먹으면, 내 아름다운 이빨로 염소들을 와그작와그작 먹기 좋은 이유가 되겠지. 하이에나는 그길로 곧장 할머니에게 달려갔어.

“안녕하세요. 할머니. 할머니처럼 나이가 들어 약해지면 젊은이가 어른을 보살피는 게 당연해요. 할머니 드시라고 제가 새를 잡아 왔어요. 몸에 좋을 거예요.”

할머니는 새를 받았어. 하지만 할머니는 어리석지 않았지. 지붕 아래 새를 몰래 숨겨 두었어.

바로 다음 날, 하이에나는 얼마나 신이 났는지 콩콩거리며 할머니를 찾아갔어. 내가 준 새를 먹었을 테니, 이젠 내가 할머니 염소를 먹을 차례다!

“안녕하세요. 할머니, 나의 새야, 잘 있니?”

“너의 새라니?” 

할머니는 짐짓 놀란 척을 하며, “그 새는 네가 나에게 준 거라고 생각했는데.” 라고 말했어.

“무슨 소리예요! 안 돼요, 안 돼! 그건 제 새라고요. 저는 할머니에게 단지 맡겼을 뿐이에요. 만약 먹어버렸다면, 할머니는 염소로 되갚아야 할 거예요!

“하하하, 아니야, 수루쿠바. 난 너의 새를 먹지 않았어. 저기, 지붕 아래에 있단다. 데려가렴.

“하하하, 역시 할머니들이란 아무것도 이해 못 한단 말이지! 되갚으라고 한 건 다 농담이에요. 얼른 새를 드세요. 그건 할머니 거예요. 하이에나를 믿으세요!”

하지만 할머니는 절대로 새를 먹지 않았어. 그리고 매일 아침, 하이에나는 할머니를 찾아왔어.

“안녕 할머니, 안녕 나의 새야.”

할머니가 그만 새를 데려가라고 할 때마다, 하이에나는 거절하고 돌아갔어. 이 둘의 돌고 도는 대화는 아주 오랫동안 이어졌지.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가 장작거리를 찾으러 집을 잠깐 비운 사이, 할머니 손녀가 옆 마을에서 할머니를 보러 잠깐 들린 거야. 그리고 지붕 밑의 새를 보고는 바로 먹어 버렸어. 누가 ‘수루쿠바’ 하이에나에게 이 소식을 전했는진 아무도 몰라. 하지만 ‘수루쿠바’ 하이에나는 내일을 기다리고 싶지 않았어. 그날 오후, 하이에나는 아주 행복한 마음으로 할머니 집에 도착했지.

“안녕 할머니, 안녕 나의 새야.”

할머니는 부들부들 떨면서 말했어.

“너의 새는 내 손녀가 먹어버렸어!”

“아, 그래요? 할머니의 작은 소녀가 내 새를 먹어 버렸으니, 나도 할머니 염소를 데려가 내 가족들과 함께 먹어야겠어요!”하고 하이에나는 염소 두 마리를 데리고 떠났어.

다음날이 되었고, 하이에나는 또 할머니 앞에 나타났어.

“안녕 할머니, 안녕 나의 새야!”

“말했잖아, 너의 새는 손녀가 먹어버렸다고.”

“오, 그렇다면 나는 염소 세 마리를 먹겠어요!”

하이에나는 염소 세 마리를 데려가 가족과 함께 먹었어. 이렇게 꽤 오랜 날들이 지나고, 결국 할머니에게 남은 건 염소 한 마리뿐이었어. 한편, 사자는 길을 걷다가 울고 있는 할머니를 보았어. 그래서 물어보았지.

“무슨 일 있나요, 할머니?”

할머니는 하이에나가 자신에게 준 새를 손녀가 먹어버린 이야기를 했어.

“그리고 그다음 날부터 매일매일, 허구한 날 하이에나가 찾아와서는 내 염소들을 몽땅 데려갔어. 마지막 한 마리까지 없어지면, 이제 다음 먹이는 나야!”

그러자 사자는 마지막 염소를 다른 곳에 숨기고, 자기가 염소 우리에 들어가 숨어 있겠다고 했어.

“하이에나가 오면, 날 찾아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우리는 알게 될 거예요!” 웃으며 사자는 말했어.

그날, ‘수루쿠바’ 하이에나는 아침이 오는 걸 기다리지도 않았어. 새벽바람에 냉큼 할머니 집으로 달려왔지. 그런데 어쩌니. 어두컴컴한 새벽엔 하이에나 눈도 어두컴컴했어.

“안녕 할머니, 안녕 나의 새야!”

“그놈의 새! 내가 만 번은 말한 것 같다. 너의 새는 내 손녀딸이 먹었다고!”

“흥, 그렇다면, 난 염소를 먹어야 하겠는걸.”

“그래, 이제 한 마리밖에 없어. 데려가!”

“후후, 그럼요. 그걸 데려가려고 내가 왔지.”

그리곤 하이에나는 ‘염소라고 생각한 것’의 목줄을 풀고, 집으로 달려가기 시작했어.

그러다 갑자기, 달리다 말고 ‘염소라고 생각한 것’의 앞에 멈춰 섰어.

“세상에, 무슨 일이지. 다른 염소들이 걸을 땐, 관절들이 ‘쿠마타 쿠마타’ 거리는 소리를 못 들었는데, 이 염소는 꼭 고양이 같은걸. 진짜 염소 맞나?

사자는 앞발 관절을 부러뜨렸어. 더 이상 소리가 나지 않자, 하이에나는 안심하고 다시 길을 갔어.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멈춰 섰어.

“세상에, 세상에. 정말 무슨 일이지. 이 아름다운 이빨로 와그작와그작하며 배를 채웠던, 내 가족들과 아내와 아이들과 배불리 먹었던 그 염소들은 한 번은 ‘음메에에’하고 울었는데 말이지. 이 염소는 어찌 된 일인지 한 번도 울지를 않네. 진짜 염소 맞아?

사자는 ‘음메에에’ 소리를 내려고 노력했지만, ‘음메에에’ 대신 ‘으르렁!!!’ 하고 커다란 호통이 튀어나왔어.

하이에나는 꽁무니가 빠지도록 달렸어. 하지만 사자는 그렇게 놔두지 않았지. 뒤를 바짝 쫓아가선 하이에나 뒷다리에 커다란 앞발을 콱 찍어 버렸어. 하이에나가 계속 달려도, 커다란 앞발을 절대 빼지 않았지. 그래서 ‘수루쿠바’ 하이에나는 항상 뒷다리를 낮게 깔고 있단다. 지금도 여전히 말이야.


서구권에선 하이에나를 주로 어리석은 겁쟁이로 표현하는 데 비해, 아프리카권에선 탐욕으로 어리석지만, 위험한 존재로 표현해. 실제로 자기보다 훨씬 큰 하마나 코끼리를 사냥하기도 하고, 사자와도 힘이 엇비슷해서 하이에나는 사람들에게도 위협적인 동물이었어. 다른 동물이 먹다 남긴 뼈까지도 먹어 치우는 하이에나를 보며, 많이 먹는 사람을 일컫는 밤바라어 ‘수루쿠’ 중의 왕이란 ‘수루쿠바’ 별명을 붙여준 것 아니겠어? ‘수루쿠바’ 하이에나가 상징하는 끝없는 허기와 탐욕스러움은 물 한 방울 귀한 사하라 사막 지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장 위험한 것이 아니었을까. 항상 경계해야 할 마음과 행동에 친근한 별명을 붙이고, 이야기 주인공으로 계속 가까이 불러두는 건 옛사람들의 지혜일 거야.  


12화. 불행은 결코 혼자 오는 법이 없지 – 만데 전래동화집

지금 들려주는 이야기는 아주 먼 옛날이야기인데, 오늘까지 살아있는 이야기란다.  

옛날 옛적에 어느 오두막에 할머니와 뱀, 그리고 새가 함께 살고 있었어. 그런데 새가 알을 낳을 때마다, 뱀이 매번 날름 먹어버리는 거야. 새는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할머니를 찾아가 말했어. 

“할머니. 불행은 혼자 오지 않고, 오직 평화만이 우릴 지켜줍니다. 뱀이 내 알들을 그만 먹게 해주세요.”

할머니가 답했어. 

“사람이 왜 뱀과 새의 싸움에 끼어들어야 하니?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야. 다른 이를 찾아 부탁해.”

새는 생쥐를 찾아갔어. 생쥐는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오똑 섰어. 새가 말했어. 

“안녕 생쥐야. 나는 네가 우리 집 노파를 찾아가 뱀이 계속 내 알을 먹지 못하도록 말해주길 부탁해. 알을 낳을 때마다, 뱀이 계속 먹어 치워.”

생쥐가 답했어

“내가 할머니 오두막 지붕 구멍에 살고 있다는 걸 잘 알잖아. 그 노파가 날 발견하기라도 하면, 그 자리에서 날 죽이고 말 거야. 그러니 어떻게 내가 말할 수 있겠니? 다른 이를 찾아가 봐.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야.”

새가 답했어. 

“아, 그렇단 말이지, 불행은 절대 혼자 오는 법이 없지.” 

새는 거미를 찾아가 말했어. 

“부탁이야. 할머니를 찾아가 뱀이 내 알을 먹지 못하게 말 좀 해줘. 내가 알을 낳을 때마다 뱀이 먹어버려.” 

거미가 답했어. 

“내가 말이야, 밤마다 거미줄을 쳐놓으면, 아침에 할머니가 눈뜨자마자 모두 없애 버려. 나는 할머니에게 한마디도 할 수 없어. 다른 이를 찾아가 봐.”

새는 개를 찾아가 말했어. 

“개야, 우리는 항상 같이 집에 있었잖니. 할머니에게 뱀이 내 알을 먹지 못하도록 말 좀 해줘. 불행은 혼자 오는 법이 없잖니.”

개는 답했어. 

“나는 매일 밤 할머니 집을 지키지. 그런데 내 밥은 항상 애들이 먹다 남긴 것들이야. 이 일은 나랑 상관없어. 가봐!”

새는 말했어. 

“그럼 난 당나귀를 보러 가겠어.”

“당나귀야, 할머니에게 뱀이 내 알을 먹지 못하게 네가 말 좀 해주면 좋겠어. 넌 알잖아, 불행은 혼자 오는 법이 없다는걸. 평화만이 우릴 지켜주는 거라고.” 

당나귀가 답했어. 

“너도 알잖니. 할머니가 내 등에 무거운 짐을 지우고, 막대기로 내 궁둥이를 마구 때리는걸. 그리고 새와 뱀의 싸움에 도대체 내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야? 다른 데로 가봐. 게다가 할머니는 날 좋아하지도 않아. 나는 아무 말도 안 할 거야. 할머니는 오히려 나의 적이라고!”

새는 수탉을 찾아갔고, 수탉은 답했어.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말이야, 매일 아침 내 노래로 할머니를 깨우는데, 그 할망구는 손님이 오기만 하면 내 목을 베라고 한단 말이야. 할머니야말로 나의 적이야. 네 싸움을 말리기 위해 할머니에게 갈 수 없어. 나랑 아무 관계 없어. 다른 사람을 만나봐.”

새는 말했어. 

“그래, 좋아. 나는 양을 만나러 가야겠어.” 

새는 양에게 말했어. 

“양, 나는 네가 뱀에 대해 할머니에게 말 좀 해주면 좋겠어. 내가 알을 낳을 때마다, 뱀이 삼켜버려. 낳으면 먹고. 낳으면 먹고. 너도 알잖아. 불행은 혼자 오는 법이 없다는걸!”

양이 답했어. 

“할머니는 내가 살이 토실토실 오를 때까지 날 돌봤어. 내가 다 클 때까지 자기 마당에서 키워주었지만, 타바스키 축제가 오면 날 잡아 죽이라고 명령해. 사람과 뱀, 새 사이의 싸움은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야. 다른 곳으로 가봐.” 

새가 말했어.

“하하, 그렇단 말이지?”

양이 답했다.

“응”

그러자 새는

“그래 좋아!”

새는 성냥을 찾으러 떠났어. 성냥을 발견하고, 새는 말했어. 

“누굴 찾아가는 것도 이제 너무 지쳤어. 모두가 내 부탁을 거절했지. 이제는 이렇게 할 수 밖에 없어.” 

새는 성냥을 켜고, 오두막에 불을 질렀어. 

할머니와 뱀, 거미, 쥐, 양, 개 모두가 불에 타 죽었어. 당나귀는 도움을 청하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불에 타 죽었지. 불에 탄 양은 오두막의 불을 끄러 온 사람들의 한 끼 식사가 되었어. 새는 모두를 불러 모으고 말했어. 

“나는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뱀이 내 알을 그만 먹게 하라고 모두에게 말했던 거였어. 하지만 모두들 뱀과 새 사이의 싸움은 자신과 상관없다고 말했지. 이제 그 결과를 알겠니? 서로를 잘 이해하는 것만이 우리를 지켜주지. 불행은 결코 혼자 오지 않는다고!” 

그리고 이 이야기는 바다로 흘러갔고, 이 이야기의 향을 맡은 이는 누구나 천국으로 갈 것이라 전해져.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며 눈과 귀를 닫았던 타인의 불행은 결국엔 모두의 평화를 삼켜버리는 재난이 되어 버렸습니다. 같은 집에 살면서 나와 상관없는 일이란 아마도 없을 겁니다. 집주인부터 그를 피해 다녀야 하는 처지까지 우리 모두의 몸뚱아리는 ‘이 집’에 존재하고 있으니까요. 우리가 살아가며 행하는 모든 것들은 이 물리적 환경을 떠나지 않기 때문이지요. 집은 점점 작아지고 있지만, 우리의 이웃은 도시과 국가를 넘어 이제 지구라는 공간까지 넓어진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나와는 관계없어 보이는 세상의 크고 작은 싸움들은 결국 나를 향해 있습니다. 아주 먼 옛날 세네갈의 어느 오두막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대서양을 타고 태평양을 넘어 여기까지 그 이야기의 향이 날아왔어요. 혹독한 바람을 맞으면서도 꿋꿋이 ‘지금 여기’를 함께 살고 있는 이들에게 외치는 목소리에서 여러분들은 이 향을 맡을 수 있나요? 불행은 혼자 오는 법이 없다고, 오직 누군가를 이해하는 마음이 우리의 평화를 지켜준다고요.

이 이야기는 1998년 ‘Clair de lune’ 콜렉션, 다카르에서 출판된 이야기 ‘Wolof tales or the dream life’에서 발췌했습니다.





















국가 기념일 노래 및 악보


국경일 / 기념일


애국가



  Aegukga National Anthem of South Korea - KPOPRUN



미국국가



The Project Gutenberg eBook of Arbor Day Leaves by NH Egleston

  • 3.1절 (3월 1일)

    국권회복을 위해 민족자존의 기치를 드높였던 선열들의 위업을 기리고 3·1 독립정신을 계승·발전시켜 민족의 단결과 애국심을 고취할 수 있는 날입니다.

  • 제헌절 (7월 17일)

    자유민주주의를 기본이념으로 한 대한민국 헌법의 제정을 축하하고 그 이념수호를 다짐하며 준법정신을 앙양할 수 있는 날입니다.

  • 광복절 (8월 15일)

    잃었던 국권의 회복과 대한민국의 정부 수립을 경축하고 독립정신의 계승을 통한 국가 발전을 다짐하는 계기가 되는 날입니다.

  • 개천절 (10월 3일)

    홍익인간의 개국이념을 계승하고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지닌 문화민족으로서의 자긍심을 고취하고 통일의 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리며 자손만대의 무궁한 번영을 기원하는 날입니다.

  • 한글날 (10월 9일)

    우리 민족사에 가장 빛나는 문화유산인 한글을 반포하신 세종대왕의 위업을 선양하고, 한글의 우수성과 독창성을 대내외에 널리 알려 문화민족으로서 국민의 자긍심을 일깨우는 날입니다.





삼일절 노래


31



어머니의 날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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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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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날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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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찬가

  518